3. 생존 본능
달력을 보고 나서야 오늘이 목요일 저녁이구나 알았다. 학교에 다닐 때야 요일의 구분이 무척 중요했지만, 저택에 들어온 뒤로는 무의미해졌다. 어차피 매일매일의 일상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여원이 밥을 제대로 먹지 않은 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아, 어지러워.”
이제 몸에도 슬슬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피가 제대로 돌지 않아 사지가 저릿저릿하고, 뇌가 침수된 것처럼 머릿속이 먹먹했다.
집 안에 진동하는 낯설고 불온한 냄새가 심해질 때면 여원은 속에 든 것을 모조리 게워내고 싶어졌다. 안이 텅 비어 있어 욕지기가 치밀지 않는 것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대로 계속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억지로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해도, 음식물을 입가에 가져가기만 하면 속이 메스꺼웠다.
여원은 여전히 홀쭉하기만 한 아랫배를 흘끔 내려다보았다. 욱신거리는 죄책감과 미약한 뿌듯함을 동시에 느꼈다.
“밥맛이 없나 봐요?”
그러느라 가까이 다가온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직한 목소리가 내리깔리자 깜짝 놀란 여원이 고개를 반짝 들었다.
“힉!”
눈앞의 얼굴을 확인한 여원이 소스라쳤다. 제헌이었다.
“아,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같은 집에 살고 있으면서도 지금껏 제헌을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3층에 거주하는 제헌이 선준과 여원의 공간인 2층에 내려온 것은 처음이었다.
“흣…….”
제헌이 식탁을 향해 비스듬히 몸을 기울이자, 여원은 미약한 탄성을 내뱉었다. 빈속에 쇠약해진 몸은 훅 밀려드는 우성 알파 페로몬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냈다.
“흐음…….”
탐탁지 않은 얼굴이 가득 찬 밥그릇과 여원의 얼굴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여원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둠처럼 색이 짙은 제헌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며칠째 밥을 안 먹고 있다면서요.”
“그,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평소 자신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어 보이던 제헌이 건넨 질문에 여원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집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내가 모르는 일이 있겠습니까?”
바람 새듯 가벼운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기다란 눈매가 희미하게 휘어지자, 서늘한 인상에 웃음기가 더해졌다.
“그치만…….”
평소라면 별일 아닌 듯이 넘어갈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제법 오랜 기간 제대로 된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한 여원은 신경이 날카로웠다. 으스스한 그림자처럼 피부에 들러붙는 저택의 냄새 역시 여원의 판단력을 흐리게끔 했다.
“…….”
저택에 갇혀 있다시피 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감시까지 당하고 있는 건가? 숨 막힌다는 기분에 반발감이 목 끝까지 울컥 치밀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쪽이 신경 쓰실 일은 아니잖아요.”
포획당하기 직전의 소동물처럼, 여원이 제헌을 반항적으로 올려다봤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튀어나왔는지 여원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만용이라고 해야 할까. 한곳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더니 조금쯤 미쳐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쪽이라.”
그쪽이라는 단어에 제헌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심기가 불편해진 기색에 여원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
이대로 순순히 꼬리를 내리고 싶지 않았지만, 오기를 부려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눈가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여원이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그런 여원의 반응이 흥미롭다는 듯, 제헌은 면밀한 시선으로 여원을 훑어 내렸다.
“여원 씨의 생활이 내 소관 밖입니까?”
“…….”
“여원 씨가 살고 있는 곳은 내 집이고, 내가 두 사람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고 있는데 말이에요.”
우아한 지적이 여원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무참하게 찔렀다. 제헌은 이 저택 꼭대기에 사는 권력자였고, 군식구인 여원은 그에게 그다지 대들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아…….”
그렇게까지 대놓고 말하자 여원은 오히려 할 말이 없어졌다. 제헌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맞는 말이네요.”
“…….”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미쳤었나 봐요.”
털을 바짝 곤두세운 고양이 같았던 여원은 금세 기가 꺾였다. 희미한 반항기가 스며 있던 눈이 아래로 바싹 내리깔리고, 가느다란 눈썹이 시무룩하게 처졌다. 그러자 제헌의 입꼬리가 아주 희미하게 올라갔다.
“여원 씨.”
“네, 네?”
“아이를 가지게 된 게 싫나요?”
제헌이 평이한 어조로 본질을 꿰뚫자 여원은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식사 얘기를 하다 갑자기 아이로 옮겨간 제헌의 질문은 얼핏 맥락에 어긋나 보였지만 실제로는 여원을 가장 정확히 간파했다.
“…….”
“…….”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꼭꼭 뭉쳐두고 애써 들여다보지 않으려 했던 감정이었다. 여원은 선준의 아이를 임신한 제 몸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제가 그렇게 알기 쉬운 사람이었나. 아니면 제헌은 상대가 누구이든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게 통찰하는 걸까.
“흐, 으…….”
아니라고 말해야 했다. 어쨌든 그는 선준의 형이고, 이 저택의 주인이다. 여원이 속내를 드러내서 좋을 일이 하나 없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오랜만에 사람다운 대화를 하고 있어서일까. 여원의 마음은 불온한 충동으로 뻐근해졌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갇혀 있는 내내, 사실은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주었으면 간절히 바랐다.
“네, ……싫어요.”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사람을 정말이지 이상하게 몰아간다. 반쯤 이성이 느슨해진 여원이 툭, 가장 날것의 본심을 입으로 꺼내었다.
그러고는 자기가 뱉은 말에 지레 놀라버렸다. ……정말 미쳤나 봐.
“흠…….”
제헌과 대화할 때 삐딱하게 구는 것과 선준의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전자가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여원이 선준과 결혼하게 된 동기 자체를 의심받을 수도 있었다.
“아, 그러니까, 그게…….”
덜컥 겁이 난 여원이 바들거리며 제헌의 눈치를 살폈다. 깎아지른 듯한 이목구비에는 표정이 싹 사라져 있어, 좀처럼 제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이유는?”
식탁 가장자리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제헌이 무덤덤하게 물었다. 아까부터 내내 같은 자리에 있는데도, 여원은 자꾸만 제헌과의 거리가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더는 달아날 곳이 없도록, 제헌이 저를 바짝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이가 있으니까, 이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서요.”
어설프게 거짓을 더해 봐야 속이 뻔히 읽힐 것 같았다. 반쯤 자포자기한 여원이 솔직하게 고백했다.
“음.”
오랫동안 혼자서만 곪아가던 설움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기도 했다. 설령 상대가 속내를 털어놓기에 부적절한 사람일지라도.
“그렇지. 차가 없으면 돌아다니기 쉽지 않은 동네이니까.”
제헌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뜻밖이라는 생각에 여원이 고개를 반짝 들어 올렸다.
투명인간 같았던, 혹은 끈 떨어진 부표처럼.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고, 아무도 구제해 주지 않을 삶. 제헌은 저택 내에서 고요히 침몰하고 있던 여원을 최초로 들여다봤다.
“아, 맞아요. 그래서 제가…….”
여원은 조금이나마 밝아진 얼굴로 제헌을 올려다봤다. 혹시 제헌이 자신을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본능적인 기대감이 뒤따랐다.
“그럼 내가 차를 사줘야 할까요?”
그러나 시리도록 냉담하게 굳어 있는 제헌의 얼굴을 보고는 그대로 움찔 얼어붙었다. 제헌에게는 여원을 딱한 처지에서 구제해 줄 의지가 딱히 없어 보였다.
“…….”
맥이 탁 풀렸다. 희망에 마비되어 있던 제정신이 느릿하게 돌아오자, 방금 전 자신이 바보 같았다는 생각에 허탈해졌다. 대체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건지.
‘형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몰라.’
제헌을 처음 보았던 날 선준이 건넸던 경고가 떠올랐다. 선준이 하는 모든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제헌이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하아…….”
조심해서 나쁠 일은 없었다. 게다가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말은 제헌이 아닌 자신의 배우자인 선준에게 해야 했다. 다음에 선준과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긴다면…… 조금 더 강하게 표현해야겠다.
“여원 씨.”
“네, 네?”
그러나 여원은 쉽게 자리에서 물러나지도 못했다. 여전히 제헌이 여원을 유심히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끈덕진 시선이 음산하게 들러붙자,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빼곡하게 조여들었다.
“생각보다 아둔하게 구는군요.”
“제, 제가요?”
“식사는 배 속의 아이가 아니라, 여원 씨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
“스스로 챙기지 않으면, 이곳에는 당신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눈앞의 우성 알파는 인생의 정점에 오른 자 특유의 여유를 갖추고 있었다. 매력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는 여원 자신과는 전혀 달랐다. 여원은 그런 제헌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것만 같은 박탈감을 느꼈다.
“아…….”
그와 오래도록 눈을 마주치고 있었더니 여원은 기분이 점점 이상해졌다. 더 이상 제헌과 이야기를 이어나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네, 알겠습니다.”
“…….”
“앞으로는 끼니 잘 챙겨 먹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여원은 시선을 바짝 내리깔았다. 반항의 의사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이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헌은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하는 여원의 속내를 금세 알아차렸다.
“강여원 씨.”
예고 없이, 제헌이 의자에 앉아 있는 여원에게 몸을 훅 기울여 왔다. 강렬하게 매혹적인 페로몬이, 저택 특유의 화학 물질 향과 뒤섞여 어지럽게 넘실거렸다.
“아, 잠깐……. 잠깐만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매일같이 자신을 괴롭히던 낯설고 이상한 냄새.
그때 여원은 처음으로 저택을 잠식한 불온한 향의 근원이 제헌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렇게까지 겁낼 필요는 없는데요.”
머리가 급격하게 어지러워지고, 속이 아슬아슬하게 울렁거렸다. 제헌이 제발 저를 혼자 내버려두었으면 했다. 그러나 불쑥 가까이 다가온 제헌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이대로 혼자 두면 안 먹을 것 아닙니까?”
“아…….”
농담인지 아닌지 모를 말이 비스듬히 건네졌다. 여원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제헌을 올려다봤다. 혼란스러웠다. 분명 방금 전까지 이 저택에서는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여원을 나무랐으면서…….
“그치만…….”
그러나 제헌의 단호한 태도에 여원은 무어라 반박하지도 못했다. 말갛게 개어 있는 소고기죽 위로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몽글몽글 올라왔다.
바싹 말라 있는 입 안은 여전히 텁텁했다. 게다가 제헌의 시선이 끈질기게 붙어오고 있어서 빈속이지만 금방이라도 체할 것만 같았다.
“먹어요.”
제헌은 이대로 여원이 식사를 마치지 않으면 자리를 떠나지 않을 작정인 듯했다.
“네……. 그럴게요.”
한숨을 폭 내쉰 여원이 미적미적 수저를 들어 올렸다. 불편한 상황을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싶었다. 엄격한 얼굴을 한 제헌이 바로 앞에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와아…….”
여원은 미적지근한 얼굴로 소고기죽을 한 숟갈 입에 밀어 넣었다. 잇새로 나지막한 탄성이 터졌다. 오래 굶어서인지 음식은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다.
그간 억눌러오던 허기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동시에 어떻게든 발버둥 치고, 그럼으로써 살아남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게 솟구쳤다. 제헌은 그동안 여원이 애써 외면해 오던 생존본능을 생생하게 일깨웠다.
그다음부터는, 바로 눈앞에 있는 제헌의 존재감마저 잊은 채 식사에 몰두했다. 그동안의 무기력이 무색하게도 입맛이 생생하게 돌아서,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소고기죽을 싹싹 맛있게 먹는 여원의 볼이 다람쥐처럼 부풀었다.
“……아, 맛있다.”
내내 신경이 예민하고 곤두섰던 것이, 우습게도 사실은 배가 고파서였던 모양이다. 주린 배에 먹을 게 조금이나마 들어가자 여원의 얼굴도 포실포실하게 누그러졌다. 동글동글한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잘 먹네.”
닷새 동안 제대로 먹은 것 없이, 내내 토하느라 기력이 싹 빠졌던 여원의 몸이 부드럽게 이완되었다. 제헌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그런 여원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아…… 저, 그게…….”
그런 제헌의 시선을 의식한 여원은 잔뜩 부끄러워졌다. 그의 앞에서 괜한 고집을 부렸던 것이 멋쩍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제헌의 얼굴은 여전히 냉랭했지만, 여원은 선준의 앞에서처럼 모멸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모든 게 불편하고 어색하던 저택이었다. 그중에서도 저택의 주인인 제헌이 여원에게는 가장 껄끄러운 상대여야 했다. 그러나 여원은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 진한 안도를 느꼈다.
“보기 좋아서 한 말입니다.”
다채롭게 변하는 여원의 표정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제헌이 툭, 짧게 던졌다. 분명 별 뜻 없는 말이었을 텐데도 여원은 온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저도 몰랐는데, 제가 사실 배가 고팠었나 봐요.”
“…….”
“그, 죄송합니다. 아까는 괜한 마음에 고집을 부려서…….”
딱딱하게 질려 있다 피가 다시 돌기 시작한 손끝이 따끔거렸다. 여원이 노글노글해진 얼굴로 제헌을 올려다봤다. 관심에 굶주려 있던 여원은 제헌의 사소한 친절을 지나치게 황송하게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
여전히 긴장되기는 했지만 제헌을 향해 여원이 바짝 세우던 경계는 서서히 누그러졌다. 몽글몽글한 감사 인사가 공기 중에 느리게 번졌다. 한동안 두 사람은 별다른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럼 됐습니다.”
제헌은 여원이 먹고 있던 죽그릇이 거의 바닥을 드러낸 것을 확인했다. 식탁에 느슨하게 기대고 있던 몸을 가뿐하게 일으켰다. 딱 그 정도만이 원래부터 제 볼일이었다는 듯, 미련 없이 깔끔한 태도였다.
“저기요…….”
마음이 조급해져, 여원은 제헌을 붙잡아보았다.
“흠.”
무슨 일이냐는 듯 돌아보는 제헌은 심기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저기요’라는 여원의 호칭이 불만인 듯싶었다.
“힉.”
작게 딸꾹질한 여원은 희부옇게 흐려진 제헌과의 첫 만남을 더듬어보았다. 그가 일러주었던 호칭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랫배가 괜히 간질거렸다.
“제헌 씨…….”
그 날 이후 처음 불러보는 이름이었다. 꼭 그때처럼, 단순히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혀끝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주변의 공기가 2도쯤 올라간 것처럼, 여원의 목덜미가 온통 화끈거렸다. 느슨하게 고개를 기울인 제헌이 여원이 발음한 자신의 이름을 곱씹고 있었다.
“네.”
이어지는 대답은 간결했다. 여원은 서둘러 입을 여는 대신, 세 발짝쯤 떨어져 있는 제헌을 말간 얼굴로 응시했다.
또 한 번, 불온한 충동이 불쑥 치밀었다. 제헌이라면 자신을 이해해 줄지도 몰랐다.
“저기, 이 집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본래 신중한 편인 여원은 다른 사람과 있을 때 스스로를 잘 가다듬었다. 그래서 말실수 비슷한 것을 하는 일이 극히 적었다.
“…….”
그런데도 이 짧은 시간에 제헌에게 대체 몇 번씩이나 부적절한 말을 거듭 꺼내놓게 되는 건지.
여원은 고개를 바짝 내리깐 채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물었다. 일단 뱉고 나니, 저택의 주인인 제헌에게는 충분히 무례할 법한 말이었다.
“어떤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요?”
빙긋이 웃어 보인 제헌이 온유한 태도로 여원에게 다시금 가까워졌다. 깎아지른 듯 빈틈없는 생김새처럼 엄격한 남자이면서도, 제헌은 가끔씩 묘하게 관대한 분위기를 풍겼다. 바로 지금처럼.
“화학 약품 같은 냄새가 나요. 알코올 같기도 하고, 화약 같기도 하고요, 가끔은 석유 냄새 같기도 한.”
“…….”
제헌의 태도가 한층 누그러지자, 여원은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주절거리게 되었다.
“그래서 너무 이상해요. 폭발할 것 같기도 하고, 이 집에 있으면 자꾸만 위험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
여원은 오랫동안 혼자서만 곱씹던 두려운 직감을 쏟아냈다. 금방이라도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그렇군요.”
제헌은 모호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원의 말에 귀 기울이느라 제헌의 짙은 오른쪽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제헌의 표정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여원이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죄송해요. 제가 괜한 소리를 했어요. 선준이도 저한테 이런 쓸데없는 얘기 좀 하지 말라고 했는데.”
“맞습니다.”
“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내가 화학 물질을 다루는 회사를 경영하니까요.”
“아, 그래서…….”
“이곳은 내 저택이니까, 나를 닮은 냄새가 묻어날 수 있겠죠.”
제헌은 도망치듯 뒤로 물러나려는 여원을 붙들었다. 단순히 여원의 말을 수긍하는 데 이어, 평소답지 않게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아, 그렇군요. 화학 회사에서 일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죄송해요.”
이유 모를 긴장에 조급해진 여원이 잽싸게 사과를 주워섬겼다. 제헌이 나긋하게 웃었다. 기다란 눈매가 가늘게 휘어지는 모양새가 어쩐지 야릇하게 느껴졌다. 꼭 무슨 죄라도 짓고 있는 것처럼, 두근, 심장이 반사적으로 꽉 조여들었다.
“여원 씨가 죄송할 일은 아니고요.”
저택에 흥건하게 배어 있는 위험하고 불온한 향기, 눈앞의 알파는 그를 관장하는 사람이었다.
“아…… 하하.”
이대로 잠시만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도,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든 대화를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까맣게 내려앉은 제헌의 시선은 여원에게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여원 씨는 향에 예민한 편인가 봅니다.”
“…….”
선준은 저택에서 냄새가 날 리가 없다고, 여원의 말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고 예민하다 타박했다. 그러나 냄새는 분명히 실재했다. 다만 선준이 이 집에서 나고 자랐으면서도 수십 년간 조금의 위화감조차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거든요.”
“…….”
제헌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여원의 후각이 다른 사람보다 예민하다는 사실을 짚어냈다. 기뻐해야 할지 경계해야 할지 모르겠는 모호한 기분으로 여원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향 공부를 했어요. 그러니까, 제가 결혼하기 전에요.”
“…….”
어렸을 때부터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탓에, 자라나며 자연스럽게 조향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물거품이 되어버린 꿈을 이야기하는 여원의 심장이 빠듯하게 두근거렸다. 제헌 역시 자신처럼 후각이 뛰어난 사람인 걸까? 막연한 궁금증과 함께, 공통된 감각을 느끼는 남자에 대한 희미한 동질감이 솟아났다.
“……뭐, 이제는 다 옛날 이야기이지만요.”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나른한 낯빛을 한 제헌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끌려 올라갔다. 여원은 자신을 향한 제헌의 태도가 묘하게 호의적으로 변했다고 느꼈다.
“위험과 향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
“향기에 주의를 기울이면, 불의의 사고를 가장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죠.”
알 듯 모를 듯한 말에 여원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혈색이 연하게 도는 입술이 나슨하게 벌어졌다.
제헌의 말은 일종의 경고 같기도, 동시에 전조 같기도 했다. 문득 여원은 제헌을 조심해야 한다던 선준의 말을 떠올렸다. 물론 선준이 믿을 만한 남자는 아니었지만……. 실제로 눈앞의 제헌은 매력적인 만큼 위험하게 느껴져서, 여원은 덜컥 불안해졌다.
“저기, 이제 밥도 다 먹었는데…….”
“…….”
“많이 바쁘시죠? 시간도 벌써 이렇게 되었네요.”
여원은 슬쩍 제헌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여원을 빤히 바라보던 제헌이 짧게 혀끝을 찼다.
“그래요, 여원 씨. 밤이 늦었는데 푹 쉬고요.”
“네, 감사합니다.”
“…….”
“……제헌 씨.”
제헌은 산뜻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원이 어설프게 위를 올려다보며 우물쭈물 웃는 동안, 서늘한 인상은 여원에게 조금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멀어졌다. 여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제게서 완전히 돌아선 너른 등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제헌은 꼭 사냥감이 겁에 질리지 않도록 주위를 유유히 돌면서 천천히 적응시키는 포식자를 닮아 있었다.
제헌이 물러난 후에도 그를 닮은 향기는 여원의 반경에 흠뻑 배어 사라지지 않았다.
“하아…….”
같이 있을 때는 제헌이 빨리 눈앞에서 없어졌으면 했다. 야릇한 긴장감에 숨이 막히고, 그대로 그에게 홀려버려서 자꾸만 부적절한 말을 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제헌이 떠나자 여원은 덜컥 아쉬워졌다. 사실은 그가 떠나지 않고 조금만 더 저를 들여다봐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일렁거렸다.
“위험을 닮아 있는 냄새.”
여원은 다이닝 룸 안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제헌의 페로몬을 들이마셨다. 그를 닮은 서늘한 향기가 몸속을 휘감아 내리자, 몽롱한 기분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여원은 휘적휘적 복도를 걸어 나와 유일한 은신처인 제 방으로 파고들었다.
일부러 반쯤 열어둔 높다란 창으로 푸르스름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오늘 역시 선준은 새벽녘이 되도록 귀가하지 않았다. 부쩍 써늘해진 공기 탓인지 몸이 으슬으슬했다. 여원은 얇은 이불을 목 끝까지 푹 끌어올리고 겨울잠 자는 다람쥐처럼 몸을 작게 웅크렸다.
저녁을 먹는 동안 제헌의 페로몬을 고스란히 받아낸 여원은 주욱 기분이 야트막하게 고양되어 있었다. 처연하게 번지는 새벽빛 아래에서 몸을 뒤척이며, 괜스레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남자는 자신과 동류다. 위험을 예민하게 감지해 낸다. 차이가 있다면 자신은 위험을 피하고 남자는 위험을 다룬다는 것이다.’
마주하고 있을 때는 외면하고만 싶었지만, 정작 무사히 멀어진 후에는 계속해서 되새기게 되는 강렬한 존재감을 가진 남자.
‘원한다면 언제든 사람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위력적인 남자임이 틀림없다.’
돌연 압박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여원은 하느작거리는 입술 사이로 밭은 숨을 내뱉었다.
* * *
[조별 과제 때문에 친구 집에서 밤샘ㅜ]
[무임 승차러들 다 조져 버리고 싶다. 개극혐ㅋㅋ 그 새끼들 때문에 계절 학기에 졸라 피똥 싸고 이게 뭐냐.]
새벽녘, 덜덜거리는 진동으로 여원을 깨운 것은 선준의 메시지였다. 여원은 입술을 꼭 앙다물었다. 눈매가 절로 가늘게 찌푸려졌다.
“차라리 못 들어와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지.”
선준은 제가 직접 조별 과제를 무임 승차하면 했지, 누군가가 외면한 과제를 책임감 있게 수행할 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조원을 비난하는 선준의 메시지는 상당히 작위적이었다. 여원은 잠이 덜 깬 와중에도 비시식 실소를 터뜨렸다.
PC방에서 밤새워서 게임 했으려나. 아니면 친구 집에서 술을 진탕 퍼마셨을 수도 있겠다. 그도 아니라면, 클럽에 가서 유흥을 즐기거나.
어느 쪽이든 선준이 조별 과제를 도맡은 것보다는 그럴듯한 시나리오였다. 딱히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더는 선준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여원은 부러 잠에 빠져들었다.
쿵쿵.
그대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묵직한 노크 소리가 다시금 여원을 깨웠다. 선준이 벌써 집에 돌아왔나 보다. 대체 지금 몇 시 정도 된 거지…….
쿵, 쿵쿵.
선준이 꼴도 보기 싫어, 일부러 못 들은 척 다시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려 했지만, 노크 소리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둔탁하게 커졌다. 아니, 왜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두지를 않는 거야.
“우웅…….”
잠이 덜 깬 여원이 퉁퉁 부어 있는 눈두덩이를 슥슥 문질렀다. 여전히 한쪽 눈은 제대로 뜨지 못한 얼굴이 부루퉁했다.
“하선준, 톡 봤으니까 왔으면 그냥 너 방에 가서 좀 자.”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대꾸한 여원이 몸을 뒤척였다. 그러나 문 너머에서는 별다른 기척이 없었다.
“선준아?”
하선준이었다면 지금쯤 무작정 방문을 밀고 쳐들어와서 여원을 들들 볶아댔을 것이다. 그제야 여원은 상황이 어딘가 이상하게 흐르는 것을 알아차렸다. 꿀꺽, 마른 목구멍으로 침을 한 번 크게 삼켰다. 단박에 잠이 달아났다.
“여원 씨.”
울림이 좋은 중저음이 문틈을 파고들었다. 목덜미의 솜털이 뾰족하게 곤두섰다. 문밖의 알파는 선준이 아니라 제헌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여전히 몸을 웅크리고 있는 여원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잠깐 밖으로 나와 봐요.”
평소 여원의 방에 얼씬도 하지 않던 남자가 태연하게 요구했다.
“네, 네!”
허겁지겁 침대에서 내려오다 딱딱한 침대 다리에 종아리를 쿵 부딪치고 말았다. 아릿한 통각에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그렇지만 바로 너머에 제헌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절뚝이면서도 일어서 우당탕 달려 나왔다.
“잠시만요, 이제 거의 다…….”
힐끔, 그대로 문을 열어젖히기 전 여원은 제 꼴을 내려다보았다. 누가 봐도 방금까지 자고 있던 것처럼 얇고 하늘하늘한 파자마 차림이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나 짧게 생각했지만, 때마침 문밖에서 큼큼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나가요오.”
여원은 에라 모르겠다, 문고리를 답삭 부여잡았다. 문이 활짝 열리자 어둑하고 눅눅한 방 안으로 화사한 빛과 은은한 향기, 그리고 특유의 페로몬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어, 제헌 씨…….”
희붐한 빛줄기 사이로 제헌의 수려한 얼굴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자리에 우뚝 멈춰 선 여원은, 한눈에도 우월한 알파를 향해 입을 헤벌렸다.
“풋.”
힐긋, 여원을 위아래로 가벼이 훑어 내린 제헌이 얕게 웃음을 터뜨렸다. 금세 불그죽죽하게 달아오른 여원의 얼굴과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분명 제헌의 눈에는 지금 제 꼴이 엄청나게 우스울 터였다.
외출할 채비를 말끔하게 마친 제헌은 완벽한 스리피스 슈트 차림이었다. 잘생긴 이마를 드러낸 포마드 머리는 결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넥타이의 매무새 역시 흠잡을 데 없이 단정했다.
“출근하는 길이신가 봐요.”
선준과는 전혀 다른, 자신감이 넘치는 완연한 성인 남자. 여원은 자연히 그에게 압도되었다. 여원은 머뭇거리며 꼼꼼히 잠겨져 있는 파자마 셔츠의 단추 윤곽을 매만졌다. 괜스레 옷을 주섬주섬 여몄다.
“아침에 원래 얼굴이 잘 붓습니까?”
속눈썹을 깜빡이는 여원에게 제헌이 가볍게 눈짓했다. 여원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통통하게 부푼 왼쪽 뺨을 감쌌다. 타박한다기보다는, 꼭 저를 귀여워하기라도 하는 것만 같은 말투였다.
“아……. 제가 잠이 아직 덜 깨서요.”
더욱 쑥스러워져 여원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벽에 걸린 시계를 흘긋 쳐다보니 7시 남짓이었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대체 나에게 무슨 일로.
“어제 잠을 설쳤나 봅니다?”
간밤에 잠들기 직전까지 제헌의 페로몬에 흠뻑 젖어든 채 야릇한 감각으로 몸을 뒤척였다. 꼭 제헌이 그런 자신을 꿰뚫어 보고 있을 것만 같아서, 심장이 콕콕 찔리는 듯했다.
“네…….”
미적지근하게 손을 아래로 내리자, 제헌의 눈길이 여원의 판판한 가슴 부근에 아주 잠깐 머물렀다. 속살이 슬쩍슬쩍 비치는 얇은 파자마 재질을 떠올린 여원의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나가던 길에, 일러줄 게 있어서 잠깐 들렀습니다.”
“저에게요?”
“집이 넓어서 즐길 거리도 제법 있는데 여원 씨가 잘 모르는 것 같더군요.”
불쑥 내밀어진 뜻밖의 호의가 기쁘다기보다는 얼떨떨했다. 그러나 답답하고 숨 막히는 일상에 하루하루 시들어가던 여원은 그를 쉽게 거절할 수 없었다.
“짧게 소개해 드리죠.”
“아…… 제헌 씨가요?”
여전히 두 사람의 거리는 적당히 유지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안전해, 여원은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알 듯 모를 듯한 얼굴로 제헌이 턱 끝을 느리게 까닥였다.
“그럼 여기 다른 사람 있습니까.”
“그렇다기보다는…… 제가 괜히 신경 쓰이게 해드린 걸까 봐서요.”
“…….”
“……그래도 정말 감사합니다.”
여원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스르륵 등을 돌린 제헌이 군더더기 없는 걸음걸이로 먼저 복도로 나섰다. 방금 침대 다리에 부딪혀 얼얼한 발목을 옮기며 여원은 그를 따라 걸었다.
어젯밤, 집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말했을 때 묘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제헌을 기억했다. 절도 있게 움직이는 제헌의 뒷모습은 우아했고, 은은한 페로몬이 발자취처럼 번졌다. 여원은 지금의 친절이 저택에 밴 냄새를 알아차린 데 대한 보답일까 궁금해했다.
언제나 저택에 자리했지만 그동안 여원이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공간은 실로 방대하기만 했다.
“여원 씨가 사는 곳은 2층이지만, 꼭 거기에만 머무를 필요는 없습니다.”
“아, 네…….”
“혼자서 밖을 돌아다니기는 쉽지 않지만, 그래서 집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도록 갖추어두었고요.”
제헌을 따라 1층 곳곳을 둘러보았다. 운동 시설부터 시작해서, 소형 극장, 갤러리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여원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공간들이 방대했다.
“집에 이런 곳들이 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요.”
지금까지는 자신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제헌이 문을 열어주면서부터 여원은 새로운 공간에 자유롭게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선준이가 여원 씨에게 말해 주지 않았습니까?”
“아, 네.”
“흠…….”
제헌의 질문이 부부 관계를 아슬아슬 비껴갔다. 여원을 느긋하게 훑어내리는 시선이 집요해졌다. 짧게 숨을 들이마신 여원이 제헌의 눈치를 바짝 살폈다.
“그런데 아마 제가 선준이에게 먼저 물어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그런 걸 거예요.”
“흠.”
더는 몰아붙이지 않고, 제헌은 바로 다음 방으로 넘어갔다. 키가 훌쩍 큰 제헌이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자, 여원이 열심히 그를 쫓았다. 다음번으로 들어간 방 한복판에는 표면에 매끄러운 윤기가 흐르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이 밖에도 필요한 게 있다면 여원 씨가 먼저 물어보면 됩니다.”
“아…….”
“그러라고 사용인들이 여기에 있는 거니까요.”
안내를 마친 제헌의 얼굴에는 자신의 지배하에 완전무결하게 가꾸어지는 저택에 대한 자부심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러나 사실 여원은 모든 것을 갖춘 저택 자체가 아닌, 그 주인인 제헌에게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 제헌 씨.”
“네.”
“저기…… 오늘 이렇게 시간 내주시고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 써주셔서’라는 말에 제헌의 눈동자 색이 조금 짙어졌다. 그를 알아차린 여원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딱히 엄청난 친절도 아니었는데, 역시 자의식 과잉이었던 걸까.
“그래도 덕분에 저택이 훨씬 편하게 느껴져요.”
“…….”
“이렇게 많은 것들을 보여주셔서…… 한동안은 집 밖에 못 나가도 저 정말 괜찮을 것 같아요.”
그를 어떻게든 제 옆에 붙잡아두고 싶다는 생각에, 여원은 불필요한 말을 자꾸만 주절주절 덧붙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완벽하게 정돈된 차림새를 한 제헌에게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나 근사하고 세련된 남자인데. 남편인 선준과는 다르게 저택에 덩그러니 남겨진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는 것이 못내 감사했다. 뺨이 발그레 달아올라 여원은 고개를 살그머니 숙였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
“여원 씨도 이제 스스로를 무책임하게 내버려두는 일은 그만두도록 해요.”
감정을 불필요하게 드러내지 않는 제헌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냉담했다. 그동안의 소극적인 자기학대에 대한 나무람인지, 아니면 집안에만 틀어박힌 여원을 가엾게 여긴 조언인 건지.
“나는 여원 씨가 앞으로 영리하게 행동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우리 가족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요.”
“네, 네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제헌의 말투는 온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싸늘했다. 가족이라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지금 여원을 도와주는 것 역시 저택의 평화를 위해서 같았다.
“…….”
“…….”
그리고 제헌은 곧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자신에게서 떠나갈 것이다. 여원은 마음이 괜스레 철렁거렸다. 무의식적으로 여원은 제헌에게 지금 이상의 친절을, 어쩌면 그보다 더한 관심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제헌 앞에서 여원은 평소답지 않게 자주 충동적으로 굴게 되었다.
“그렇지만…… 3층은 올라가면 안 되는 거죠?”
“하하.”
낮은 웃음소리가 바람 새듯 흘렀다. 여원의 도발을 낚아채는 제헌의 눈동자가 모호한 흥미로 날카롭게 번뜩였다.
“원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뭐, 뭐라고요?”
“내가 방금 허락하지 않았습니까? 문이 열려 있는 곳은 마음껏 돌아다녀도 됩니다.”
“아, 그래도, 3층은 제헌 씨가 사용하는…….”
“괜한 걱정 할 것 없습니다. 여원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사적인 공간은 아니니까.”
발칙한 질문으로 제헌을 붙들었지만, 이런 대답을 바라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여원은 제헌이 저를 되바라진 어린애처럼 보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처음부터 제헌의 사적인 공간을 침해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을뿐더러…….
“제가, 뭔가 오해할 만한 말씀을 드린 것 같은데…….”
혹여라도 자신이 제헌에게 사적인 관심을 품고 있다는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아닙니다.”
“…….”
“바라는 게 있다면 이렇게 나한테 이야기하면 됩니다.”
여원은 급격히 혼란스러워졌다. 바늘 하나 찌를 틈 없이 엄격해 보이던 남자가 지금만큼은 여원이 말만 한다면 무엇이든 들어줄 것처럼 굴었다.
“다만, 복도 가장 끝 서재에는 출입하지 마세요.”
“복도 끝 서재요?”
“네.”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자신에게 허락된 것보다는 금지된 것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직전의 부드러운 태도를 말끔히 지워낸 제헌이 단호하게 금기를 이야기하자, 여원은 도리어 3층 서재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강여원 씨.”
“네?”
“내가 알려주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아…….”
제헌의 얼굴에 비뚜름한 웃음이 걸렸다. 정해진 선을 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여원은 제헌을 말가니 올려다보았다. 뜨끈한 덩어리가 명치께에 뭉쳤다.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이제는 정말 가봐야겠습니다.”
고개를 가벼이 돌린 제헌이 손목에 걸린 메탈 시계를 확인했다. 일정이 지체라도 된 것인지 미간을 가늘게 찌푸렸다. 여원은 제헌의 표정 변화 하나하나를 숨죽인 채 살폈다.
“……가버렸네.”
집주인은 그대로 인사도 없이 휑하게 자리를 떴다. 혼자 남겨진 여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촘촘한 속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팔랑거렸다.
“3층 서재에 들어가면 안 된다라…….”
오래된 저택의 계단은 경사가 유난히 가팔랐다. 적나라한 골조를 드러내는 나선형 계단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금기를 제외하면 모든 것이 허락되는 저택. 뿌옇게 흐무러지던 시야가 다시금 또렷이 선명해졌다. 여원은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것만 같은 3층을 길게 올려다봤다.
* * *
제헌과의 짧은 교류 이후 여원의 일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채색으로 가라앉아 있던 주변에 희미하게나마 색채가 덧입혀졌다. 너른 창을 타고 화사한 햇살이 실내로 쏟아지면 살그머니 달아오른 기분 좋은 따끈함이 일렁거렸다.
이른 아침 제헌과 함께 방문했던 것과 꼭 같은 순서대로, 여원은 저택 1층을 차례차례 돌아보기 시작했다.
사부작사부작. 고요한 저택에서는 여원이 지나치는 자리마다 소란한 소요가 생겨났다. 저택은 흐르지 못하고 한자리에 고여든 물처럼 정적이었다. 관성적으로 쓸고 닦는 손길을 제외하면 누구의 흔적도 닿지 않았다. 그곳을 부지런하게 돌아다니며 여원은 낙인 같은 발자국을 하나둘 남겼다.
가지런히 정렬된 아령을 들었다가, 배열을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미니 극장에서 스트리밍 앱을 틀고 드라마 에피소드 몇 개를 틀어봤지만, 오래 집중하지는 못했다. 갤러리 안 꽃이 화려하게 피어난 그림은 색채가 유난히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거친 붓 자국을 손끝으로 쓸어보며 여원은 그림이 제헌의 취향인 걸까 궁금해했다.
여원은 한 방에서 10분 남짓한 시간만을 머무르고 다음 방으로 이동했다. 사용인들의 눈에는 지나치게 산만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원은 애초에 한 곳에만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대신,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냄새를 수집했다.
‘야, 집에서 냄새가 나기는 무슨…… 너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그래, 어?’
불온한 향기는 위화감의 근원이었지만, 여원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선준이 여원을 예민하다 타박했을 때는, 저택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자신의 감각이 왜곡된 건 아닌지 덜컥 두려워지기도 했다.
‘위험과 향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
‘향기에 주의를 기울이면, 불의의 사고를 가장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죠.’
반면 저택의 주인인 제헌은 다른 사람보다 기민한 여원의 감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내내 저택에서 이방인으로만 머물렀던 여원이 처음으로 저택 일부로 편입되는 순간이었다.
“빛이 많이 드는 자리에는 냄새도 바싹바싹 말라 있는 것만 같아.”
제헌이 회사에서 묻혀온, 화학 약품 냄새라고 했지. 출렁거리는 냄새는 저택 곳곳에 희미하고 은은하게 깔려 있었다. 빛의 세기, 공간의 이음새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향을 파악하고 인식하는 동안 시간은 훌쩍 빠르게 흘렀다.
맥없이 저택을 표류하던 여원은 아주 오랜만에 목적을 가지고 저택을 돌아다녔다. 창 너머로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주홍빛 해를 말가니 응시하며 여원은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오후 내내 감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우고 있어서인지, 나른한 기운이 전신을 타고 뭉글뭉글 흘렀다. 여원의 눈썹이 축 늘어지고, 팔다리도 아래로 푹 처졌다. 여원은 저벅저벅 계단을 타고 2층으로 돌아왔다. 낮잠을 잘까 생각할 때였다.
“아…….”
이대로 계단을 한 번만 더 올라가면 제헌의 공간이다. 지금까지 특별히 관심을 가진 적도 없는 3층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은 당연하게 올라가서는 안 된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3층으로의 관문은 이제 여원을 향해 너르게 트여 있었다. 앙상한 골조를 드러낸 나선형 계단이 여원에게 유혹적인 손길을 유유히 드리웠다.
궁금하다.
이대로 여원이 3층에 올라간다면, 제헌 역시 머지않아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저택 안에서 벌어지는 일 중 그가 모르는 것은 단 하나도 없으니까.
분명 나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막상 발걸음을 내딛으려니 꺼림칙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아니, 지금까지만 해도 이미 아슬아슬했다. 더 이상 위험하게 엮여서는 안 된다는 직감과 동시에…….
“3층에는 올라가도 된다고 말했잖아.”
듣는 사람 하나 없었지만, 여원은 부러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저택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3층 역시 여원에게 허락된 공간이었다. 복도 가장 끝에 자리한 서재, 단 한 곳만 제외한다면.
괜찮을 거야.
다시 한번 되뇌며, 여원이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어지러운 나선을 따라 빙그르르 돌면서 위로, 또 위로 올라갔다. 살금살금 계단을 오르는 동안 삐죽삐죽 솟는 호기심을 꼭꼭 억눌렀다.
“에이, 뭐야. 올라와 보니 별것도 없는데…….”
막상 제헌의 공간에 발을 디딘 여원은 조금 허탈해졌다. 두근두근 겁을 냈던 게 무색하게도, 3층에는 별달리 특이할 만한 점이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모든 공간은 휑뎅그렁했다.
무채색으로 가라앉은 실내는 무채색으로 가라앉아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우아한 품위가 은은하게 흐르는 공간에는 사적인 취향이나 흔적을 짐작할 수 있을 만한 물건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뭐 이렇게 인간미가 없지.”
표면만 보아서는 좀처럼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제헌을 닮은 공간이었다.
불그죽죽하게 물들어가는 해 질 녘의 하늘이 거실의 전면 유리로 투과되었다. 복도에 빼곡하게 늘어진 방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죄 문이 열려 있어서, 탁 트인 안팎으로 바람이 선들선들 흘러왔다.
끝내 3층까지 올라온 다음에도, 아른거리는 호기심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근데 뭐, 어차피 진짜 들어갈 것도 아니니까.”
또 한 번, 여원은 듣는 이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좁은 복도를 거슬러 올라, 가장 안쪽 구석 서재를 향했다. 굳건하게 닫힌 문 앞에 다다른 것만으로도 묵직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한층 짙어진 불온한 냄새가 코끝을 날카롭게 찔렀다. 그와 동시에 음산한 기운이 피부에 바짝 밀착했다. 빠진 데 없이 정결하게 관리되는 저택의 다른 공간과는 다르게, 낡은 철제 문고리는 살짝 녹이 슬어 있었다.
“분명히 잠겨 있겠지?”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금기를 대담하게 어길 용기 역시 없었다.
여원은 가물가물한 눈을 얌전히 내리깔았다. 난폭하게 출렁이는 향을 안으로 깊숙이 빨아들였다. 머릿속이 가물어지는 감각에 여원이 휘청거렸다.
“무서운 냄새가 나…….”
차갑고 폭력적이면서도 서늘한 향기. 저택을 감돌던 특유의 냄새는 서재 앞에서 코를 찌를 듯 지독하게 진동했다. 마치 여원에게 경고라도 하는 것처럼.
제헌은 화학물 냄새라고 일축했지만, 음산한 냄새의 근원은 서재인 것이 분명했다. 여원의 예민한 감각이 뿌리 깊은 위험을 일깨웠다. 제헌은 이곳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아, 흐읏…….”
짧은 상상만으로 손끝이 얼얼할 정도로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여원의 다리는 엉망으로 후들거리고 있었다. 자리에 푹 주저앉은 여원은 본능적으로 아랫배를 감쌌다.
“아냐,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여원은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툭툭, 먼지를 털어내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림자처럼 꾸물꾸물 달라붙는 호기심 역시 탈탈 떨쳐 내려 애썼다.
여전히 서재의 나무문은 비밀을 간직한 채 고아하게 닫혀 있었다.
‘앞으로는 직접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가기를 바란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알려주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의구심은 떨쳐지지 않았다. 제헌의 말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고, 믿고 싶으면서도 의심스러웠다. 지극히 합리적인 표면 아래에 담긴 내용은 한 꺼풀만 벗겨내도 명백하게 상충했다.
무수한 추측에도 불구하고 여원은 제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단 하나 확실한 사실이 있다면.
‘스스로 챙기지 않으면, 이곳에는 당신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앞으로 무슨 상황에서든 여원은 절대 아둔하게 굴지 말고, 영리하게 행동해야 한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결국 믿을 건 자기 자신뿐이다. 이 저택에서 여원을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 명의 알파 모두 서로 다른 이유로 께름칙했다. 여원은 피가 잔뜩 몰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결연한 표정으로 서재에서 돌아섰다. 더는 미련을 가지지 않으려 애쓰며 타박타박 복도를 걸어 나왔다.
“여원 씨.”
그대로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던 찰나였다. 계단 앞에 그늘처럼 드리워진 인영을 맞닥뜨린 여원이 기겁했다. 뻣뻣하게 굳은 온몸의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으악!”
냅다 소리를 질렀지만 제헌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여유롭고 우아한 낯빛으로 희게 질린 여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제, 제헌 씨.”
놀란 마음에 절로 억울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따지자면 3층을 침입한 사람은 제헌이 아닌 여원이었다. 눈썹을 축 늘어뜨린 여원이 펄떡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그렇게까지 놀랄 일입니까?”
“귀, 귀신인 줄 알았어요.”
간신히 대답하는 여원의 목소리가 퍼들퍼들 떨렸다. 여원에게 귀신 취급을 당한 서늘한 미남자가 얼굴을 무심하게 일그러뜨렸다.
“죄송해요. 생각해 보니 저보다 제헌 씨가 더 많이 놀라셨을 것 같아요.”
“알긴 아나 봅니다.”
자신이 제헌이라도, 원래 사는 공간에 들어섰을 뿐인데 귀신 취급을 받으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다. 빠르게 수긍한 여원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잘게 끄덕거렸다. 제헌은 방금까지 여원이 돌아다니던 복도를 유유히 건너다봤다.
“그새 3층까지 올라왔습니까?”
“네. 온 지 진짜 얼마 안 되기는 했는데…….”
여원이 우물우물 대답했다. 집요한 시선에 목덜미가 따끔거리는 듯해 고개를 피했다. 딱히 찔릴 만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닌데도 제헌의 날카로운 눈빛을 앞에 두자 자꾸만 주눅 들었다.
“생각보다 행동이 빠릅니다.”
제헌이 나긋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처음 3층에 올라가던 순간부터, 여원도 제헌이 자신이 이곳에 들른 것을 알게 되리라 생각했다. 다만 이렇게 빠르게, 또 이렇게 직접적인 방식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때요, 막상 올라와 보니 별거 없죠?”
제헌이 담담하게 질문했다. 날렵한 눈매가 여원을 향해 은근하게 휘어졌다. 여상한 질문이었지만 여원은 그것이 꼭 저의 속내를 파헤치려는 것만 같았다.
“아…… 네, 저도 모르게 궁금해져서.”
계단참에 있던 제헌이 한 발짝 앞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자연스럽게 좁아졌다. 힉, 여원이 숨을 짧게 들이켰다. 표정 관리를 하기 위해 안간힘 썼다.
“그런데 저 서재에는 들어가지 않았어요.”
잔뜩 긴장한 여원은 헛말을 내뱉고 말았다. 떳떳하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도리어 켕기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딱 좋은 말이었다.
“…….”
서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제헌의 얼굴이 곧바로 냉랭하게 굳었다. 유난한 반응에 여원은 제헌이 서재에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그래요, 저택은 제대로 잘 둘러봤어요?”
제헌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이며 대화의 주제를 자연스레 전환했다. 여전히 두 사람은 숨결의 온도가 고스란히 느껴질 것 같은 거리였다. 제헌의 먹색 눈동자는 평소보다 색이 짙어져 있었다. 이대로 저를 남김없이 꿰뚫어버린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누가 머물렀는지나, 어떤 물건이 있는지에 따라서……. 방마다 냄새가 조금씩 다를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
“모든 향에는 계승되는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요. 향기를 잘 맡아보면…… 그곳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군요.”
두 사람은 남들보다 월등하게 예민한 감각을 타고난 자들이었다. 제헌은 미래에 다가올 위험에 대해 경고했지만, 곳곳에 묻어 있는 냄새를 훑어내리는 여원은 저택에 숨겨진 이야기에 대해 궁금해했다.
“재미있었겠어요?”
“네, 좋았어요.”
저택에 들어온 뒤로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길게 말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특별한 감각을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여원은 제헌에게 희미한 유대감을 품게 되었다. 어느새 살짝 상기된 동그란 뺨 위로 제헌의 시선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잘됐네요. 산모가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아이에게도 좋은 영향이 가니까.”
제헌은 유심히 여원을 뜯어보더니 뜬금없이 여원의 아랫배를 향해 턱 끝을 까닥였다.
“아…… 그렇겠죠.”
“…….”
“아이가 가장 중요하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여원은 선준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사실이 다시금 일깨워지자, 속이 삽시간에 더부룩해졌다. 여원은 투명하게 말간 낯으로 제헌을 올려다봤다. 바로 앞에 선 알파의 의중은 여전히 불투명하기만 했다.
“…….”
“…….”
“있잖아요.”
“네.”
여원의 순종적인 태도는 가혹한 집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이었다. 얻어맞지 않으려 스스로의 몫을 묵묵히 속으로 삼키는 데 익숙해진 여원이었지만, 제헌 앞에서만큼은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눈을 반짝이게 됐다.
“말씀하셔서 말인데, 임신 말이에요.”
여원은 제헌을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자그맣고 하얀 얼굴이 위태로운 색채로 물들어갔다.
“저는 처음부터 아이를 원했던 적이 없었어요. 단 한 번도.”
“그랬군요.”
“이상한 일이에요. 저랑 선준이는 항상 피임을 철저히 했거든요.”
성적인 뉘앙스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섹스를 연상시킬 만한 이야기였다.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팽팽하게 올라붙었다.
“흐음.”
제헌의 날렵한 눈매가 아주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위태롭게 제헌을 올려다보는 여원의 얼굴에서 희미한 기대감이 묻어났다.
“부주의한다고 나무라지는 않겠습니다.”
“…….”
“인생 전체를 결정지을 만한 일이란 대체로 우연한 계기로 생기는 법이니까요.”
딱딱하고 건조한 목소리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제헌의 말은 여원의 귓가를 두드려왔다. 은밀하면서도 매혹적인 알파. 위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원은 자꾸만 그의 시선을 받고 관심을 끌고 싶어졌다.
“어쨌든, 선준이가 여원 씨의 의사에 반하는 일을 한 것은 아닌 거죠?”
“…….”
“두 사람 합의하에 관계를 맺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직은 부피감이 거의 없는 복부에 날카로운 시선이 내리꽂혔다. 떨떠름해진 여원은 또 한 번 방어적으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원래는 선준이랑 섹…… 그러니까, 관계를 할 생각이 없었어요.”
섹스, 라는 단어를 제헌 앞에서 발음할 뻔했던 여원이 지레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진짜 미친 거 아닌가. 포획 직전의 소동물처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빠듯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부실한 변명을 이어나가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런데요.”
“선준이가…… 하도 끈질기게 졸라대니까. 저도 선준이가 엄청 싫은 건 아니었고, 어쨌든 우리는 당시에 사귀는 사이였으니까요.”
난처할 지경으로 여원을 졸라대던 선준에게 엉겁결에 휘말렸지만, 결과적으로는 제헌의 지적대로 합의하에 맺은 관계였다. 그러니 여원 스스로도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흠…….”
그렇지만 제헌 앞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흠결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여원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변명을 주워섬겼다. 당연하게도 제헌에게는 여원보다 동생인 선준이 훨씬 소중할 테고, 그런 동생을 탓하는 말이 좋게 들릴 리 없는데도.
“그런데 여원 씨.”
그러나 동생을 소극적으로 비난하는 말을 듣고도 제헌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냉담한 얼굴에는 오싹하리만치 표정 변화가 없었다. 여원은 대답 대신 뻑뻑해진 고개를 힘주어 끄덕거렸다.
“여원 씨는 상대방이 간절하게 부탁하면 어떤 일이든 들어주나요?”
그렇게, 꼭 여원이 선준에게 헤프게 벌려주기라도 한 것처럼.
“아.”
얕은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갑작스레 확 열이 몰린 아랫도리가 살짝 간질거렸다. 제헌을 향하는 전신의 감각은 더욱 예민하게 곤두서고 있었다.
“……그렇지만, 선준이 고집이 어지간히 센 거, 그래서 늘 사람 난처하게 만드는 거 제헌 씨도 아시잖아요.”
“…….”
“싫다고 거절해도, 절대 그걸로 끝나지가 않으니까. 자기를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매정하고 나쁜 사람인 것처럼 몰아가잖아요.”
여원의 얼굴이 톡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새빨갰다. 가공 하나 없는 사실이었으나 제헌에게는 변명처럼 들릴 게 뻔했다. 선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보다는 제헌이 저를 어떻게 볼지가 더욱 의식되었다.
“…….”
“…….”
비틀린 흥미를 머금은 그늘진 시선이 여원에게 드리웠다. 언제나처럼 무심한 얼굴이 오늘따라 더더욱 의뭉스럽게 보였다. 조마조마한 마음에 여원은 공연히 입술을 잘근거렸다.
“여원 씨 말에도 틀린 구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잔뜩 긴장해 있던 여원은 울먹울먹한 얼굴로 제헌을 올려다보았다. 태연한 낯으로 여원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던 제헌은 여원이 굴러떨어지기 직전 건져 주었다.
“버릇이 잘못 든 탓에, 선준이는 확실히 상대방의 죄책감을 자극하며 제가 원하는 걸 얻어내려 들더군요.”
제헌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꼭 여원이 선준을 지적했다는 사실을 묘하게 흡족해하는 사람 같았다. 그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며 동생의 성격적 결함을 가차 없이 도려냈다.
“아, 제헌 씨…… 그게.”
이거 혹시 시험인가? 적나라한 표현에 여원이 일순 얼어붙었다. 여원도 선준이 싫은 구석이 많았지만, 제헌이 그를 파헤치자 저라도 선준을 보호해 줘야 하나 싶었다. 그러나 어설프게 변호하기에 제헌의 평가는 적확했다.
“그러면, 여원 씨는 이 집에 들어오게 된 것이 무척 후회가 되겠어요?”
여원이 입술을 나슨하게 벌리고 낮은 탄성을 터뜨렸다. 단순히 의향을 물을 뿐인 간단한 질문이 이상하리만치 은밀하게 느껴졌다.
“아…….”
희고 탄탄한 피부 위로 은은하게 넘실거리는 페로몬. 제헌을 보고 있을 때면 여원은 언제나 그에게 속수무책으로 홀렸다. 그대로 그에게 손을 뻗어보고 싶어졌다. 스스로의 생각에 깜짝 놀란 여원이 힉, 짧은 숨을 들이켰다.
“이제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정신을 바짝 다잡으려 애써보았지만 몽롱한 기분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자, 시야가 빠르게 어두워졌다가 다시금 스르르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잘 모르겠다라.”
제헌은 여원의 말을 나직이 되풀이했다. 슬쩍 비틀린 입꼬리가 스르르 끌려 올라갔다. 여원은 분명 선준과 결혼하게 된 것을 후회스럽게 여겼다. 지난 며칠간은 그 때문에 몹시 괴롭기도 했었지만.
“…….”
“…….”
그럼에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는, 그래서는 안 되는 말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제헌과 여원 사이에 스며드는 공감대는 오묘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공기를 가득 메우는 긴장감이 마냥 불편하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식사는 했고요?”
제헌이 불쑥 여원에게 밥은 먹었는지 물었다. 시선도, 신경도, 향기도, 제헌 앞에서는 차마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한곳에 고여 응고하던 감각이 단박에 환기되었다.
“아? 네, 아직요. 오늘 정신이 좀 없어서.”
“저랑 같이 내려가죠.”
그대로 감싸 안듯이, 제헌의 커다란 손이 가볍게 여원의 어깨를 쥐었다. 언제나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되던 신중한 거리가 조금의 예고도 없이 훅 좁아졌다.
“네, 알겠습니다…….”
여원이 긴장으로 잔뜩 움츠러들자, 우아하게 뻗은 손가락이 천연덕스럽게 어깨에서 떨어져 나갔다. 여원은 빠듯하게 출렁이는 심장을 겨우 부여잡았다. 혹시라도 두근거리는 소리가 제헌에게 들리면 어떡하지? 말도 안 되는 고민을 진지하게 했다.
“이쪽으로.”
마냥 차가우리라고 생각했던 제헌의 손은 생각 외로 적당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딱딱한 손바닥이 아주 잠시 닿았다가 떨어진 어깻죽지가 불에 덴 것처럼 뭉근했다. 그의 집요한 시선이 닿기라도 하는지 동그란 정수리가 따끔거렸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제헌은 내내 여원의 곁에 나란히 붙어 있었다. 숨소리의 결마저 알알이 만져질 것처럼 가까운 거리였다.
“…….”
“…….”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대놓고 올려다볼 수는 없었다. 혹시나 잘못하면 단단한 가슴팍에 몸이 닿을까, 제헌과 아슬아슬하게 붙어선 여원의 등줄기에 힘이 뻑뻑하게 들어갔다.
“야, 강여원!”
빙글빙글 회전하는 나선형 계단을 중간쯤 타고 내려갔을 때였다. 아래층에서 오만상을 쓴 선준이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여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으악!”
놀란 여원이 그대로 계단에서 발을 헛디딜 뻔했다. 제헌은 크게 휘청거리는 여원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아…… 제헌 씨.”
간신히 볼썽사납게 고꾸라지지는 않았다. 부드러운 등줄기와 단단한 가슴팍이 얼결에 맞닿자 제헌의 페로몬이 여과 없이 밀려왔다. 강렬하게 몰아치는 감각에 다리가 온통 후들거렸다.
선준이 아래에서 두 사람을 쏘아보건 말건, 제헌은 개의치 않았다. 여전히 여원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여원이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제헌이 딱딱한 손끝으로 등허리를 슥 훑었다.
“흣.”
페로몬에 잔뜩 절인 오메가가 연약한 비음을 흘렸다. 꼭 붙어 있던 두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선준이 인상을 험악하게 찌푸렸다.
“여원이 네가 왜 거기서 내려와?”
발을 쿵쿵 구르며 선준이 계단 근처로 다가왔다. 분노로 거친 콧김을 뿜으면서 여원을 닦달했다. 제헌의 손끝은 이미 여원에게서 산뜻하게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그러나 선준의 불만 가득한 시선은 제헌의 손이 닿았던 여원의 허리께에 집요하게 머물렀다.
“아, 그게…….”
제헌의 곁에 선 여원의 얼굴이 발그레했다. 깊이 스며든 우성 알파 페로몬의 여파로 해롱거렸다. 선준은 여전히 여원을 잡아먹기라도 할 기세로 눈을 부라려, 형제 사이에 낀 여원은 난처하기만 했다.
“사람이 전화하는데 재깍재깍 받지도 않고, 어?”
제헌을 본체만체, 선준은 또 한 번 여원에게 고성을 내질렀다. 그 의도가 빤했지만, 반사적으로 불안이 치밀어올라 심장이 쿵쿵거렸다. 하지만 지금 선준은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여원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왜,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나도 전화 온 줄 몰랐단 말이야.”
여원의 눈초리가 새초롬하게 좁아졌다. 매일같이 여원의 전화를 무시하던 건 다름 아닌 선준이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여원을 찾는 입장이 되자 당연한 권리를 박탈당한 것처럼 구는 것이 못내 괘씸했다.
“내가 다섯 통이나 걸었는데 그걸 몰라? 너는 어떻게 된 애가 정신을 그 정도로 빼놓고 다니냐?”
여원이 제게 대든다고 생각했는지, 선준의 두 눈빛이 더욱 형형해졌다. 원래대로라면 그런 선준한테 화가 나야 하겠지만…… 그보다 여원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창피했다.
“정신을 빼놓고 다니냐니. 너 지금 말이 너무 심하잖아.”
선준이 저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여원도 반쯤 체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둘만 있을 때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도 이 정도로 무턱대고 막대할 줄은 몰랐다. 여원은 수치심으로 불그스름해진 이마와 눈가를 슬쩍 감싸 쥐었다.
“아니 진짜 그렇다는 게 아니고. 어쨌든, 연락 안 되니까 나도 걱정했단 말야.”
“핸드폰 진동으로 해놔서 몰랐다고.”
한편 제헌은 대화에 열을 올리는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한발 늦게 제헌의 기색을 살핀 선준 역시도 그제야 아차 싶었던 모양이다. 어정쩡하게 웃어 보인 선준이 짐짓 다감한 말투로 여원을 걱정했다.
“진짜 다섯 번이나 했네.”
한숨을 푹 내쉰 여원이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 선준의 말대로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이나 찍혀 있었다. 방금 전 제헌과의 대화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었는지, 핸드폰 진동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원 씨에게 3층에 올라와도 좋다고 말한 건 나다.”
여원이 난처한 기색으로 우물거리자, 부부 사이에 개입한 제헌은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아…… 형이 그런 거야?”
“…….”
제헌의 위압감에 눌린 선준이 비굴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지금의 상황이 불만족스러운지, 얕게 씨근거렸다. 대체 왜 제헌과 여원이 3층에서 같이 내려오는지 형에게 따져 묻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여원이 너는 왜 3층까지 기웃거리고 그래.”
결국 원망의 화살은 제헌이 아닌 그보다 훨씬 만만한 여원을 향했다. 선준은 제헌을 힐끔힐끔 흘겨보면서, 소극적으로 여원을 타박했다. 제헌의 옆에서 눈을 깜빡이기만 하는 여원이 못마땅한지 얼굴을 찌푸렸다.
“전에도 말했잖아. 나도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다고.”
선준이 말도 안 되는 생떼를 쓰는 것 자체가 너무 피곤해서, 평소라면 적당히 받아주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원은 더 이상 제헌 앞에서 망신당하고 싶지 않았다. 밖에 나가고 싶다 이야기한 것만도 이미 여러 번인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이는 선준이 황당했다.
“집이 이렇게나 넓은데, 너는 답답할 게 뭐 있냐, 어?”
“야, 하선준.”
“알았어, 정 그러면 앞으로는 나한테 얘기하고 가.”
선준은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3층에 올라간 것이 무슨 대수라고, 선준은 여원이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그래서 손이 많이 가는 오메가인 것처럼 말했다.
“하…….”
여원은 결혼 이후 내내 저택에 틀어박혀 있다시피 했다. 그런데 선준은 고작 3층에 올라가는 것조차 제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너 완전 짜증 나.”
평소에는 유순하게 굴던 여원이 뾰로통하게 입술을 앙다물었다. 여원을 대하는 선준의 태도는 명백하게 부당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서러움으로 눈물이 핑그르르했다.
“아, 됐고. 너 빨리 이리 오기나 해.”
선준이 계단 위에 제헌과 나란히 선 여원의 팔을 무작정 잡아끌었다. 마치 여원이 형에게만은 절대 뺏기고 싶지 않은, 값나가는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제헌과는 정반대로 무례한 태도에 여원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알겠으니까 팔 좀 살살 잡아.”
계단 위에서 제헌이 여원의 어깨를 감싸 안던 걸 본 이후, 선준은 계속해서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마치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선준의 경계는 동물적이기도 했다. 제헌의 옆에 있는 여원은 지금껏 선준에게는 보여준 적 없는 달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진짜 좀…….”
여원이 어깨를 강하게 뒤채어 저를 아프게 잡아채는 선준의 손을 떨쳐 냈다. 불안한 기색으로 흘긋 제헌을 돌아보았다. 여원의 동공이 엉망으로 흔들렸다. 제헌의 서늘한 무표정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으, 흐읏.”
바로 그때,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공기를 묵직하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압박감을 느끼는 것은 여원만은 아닌 듯했다. 주변을 완벽하게 장악한 우성 알파 페로몬이 묘하게 위협적으로 돌변해 있었다.
“하선준.”
“혀, 형…….”
경고하듯 선준의 이름을 부르는 제헌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려 있었다. 우월한 알파가 저를 대놓고 찍어 누르자 선준은 딱딱하게 굳었다. 더 이상 여원을 잡아끌지도 못하고, 제헌의 눈치를 슬그머니 살폈다.
“나는 지금부터 여원 씨랑 같이 식사를 할 건데.”
“…….”
“원한다면 따라와도 좋다.”
“두 사람이 같이……?”
제헌은 대답 대신 턱 끝을 까딱였다. 눈을 휘둥그레 뜬 선준의 뺨이 불퉁해졌다. 불만을 토로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치만…….”
“…….”
“……알았어. 나도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야.”
그러나 결정을 통보하는 제헌은 선준에게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았다. 선준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나란히 식당으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선준은 내내 제헌과 여원 사이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훑어보았다.
식사하기엔 이미 너무 늦은 시각이기도 했다. 형제 사이에 끼인 여원은 음식이 제대로 입에 들어가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먹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 어설프게 쥔 숟가락을 허공에 깨작거렸다.
“여원아, 왜, 맛이 없는 것 같아?”
“아니야, 그런 거.”
오늘 선준은 평소답지 않게 여원에게 관심이 충만했다. 여원의 미적임을 금세 눈치챈 선준이 시답잖은 말을 걸었다. 여원은 가뜩이나 더부룩했던 속이 더욱 불편해졌다. 정말이지 가시방석이 따로 없네.
“나 되게 잘 먹고 있는데?”
여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재빨리 건너편에 앉은 제헌의 안색을 살폈다. 선준의 과도한 관심보다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제헌의 침묵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자리까지 불러낸 것인지, 제헌은 나란히 앉은 두 사람에게 이따금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묵묵히 식사했다.
“아냐, 거의 못 먹고 있잖아. 그러지 말고, 이거 새우 먹어봐.”
“어, 어?”
“엄청 싱싱하고, 페스토 소스 곁들여져서 맛있어.”
몸을 바짝 가까이 붙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선준은 여원의 여린 옆구리 살을 콕콕 찔러댔다. 여원이 흠칫 놀라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껍질이 완전히 벗겨진 생새우는 불그스름한 빛이 연하게 감돌았다. 선준의 얼굴에 반들반들한 기대감이 물씬 어렸다.
“지금 나 먹으라고?”
“그럼, 여기서 너 아니고 누가 먹어.”
“아, 하하…….”
“아, 해봐, 여원아.”
못내 소극적인 여원의 반응이 못마땅했는지, 선준은 꼭 다물려 있는 입술 앞에 새우를 꾸역꾸역 들이밀었다. 오늘따라 얘가 진짜 왜 이러는 거야. 눈썹을 축 늘어뜨린 여원이 난처하게 웃었다.
“…….”
그러자 제헌이 젓가락을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이내 연한 흥미를 머금은 시선으로 두 사람을 빤히 응시했다. 그제야 여원은 결혼 이후로 같이 식사한 횟수가 손에 꼽았던 선준이 오늘따라 제게 유난히 치대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냥, 내가 알아서 잘 먹을게.”
“…….”
“그래도…… 으음, 고마워.”
형을 자극하려고 나를 이용하는 건가. 선준이 지나치게 속 보이게 행동한다는 생각에 여원은 더욱 불쾌해지기만 했다.
“너는 참, 새우 하나 먹는 게 뭐가 어렵다고 사람 무안하게 하냐.”
“하아, 선준아…….”
여원이 완곡하게 거절하자, 그게 또 서운했는지 선준은 볼을 부루퉁 부풀렸다. 선준은 참 일관적으로 매사에 저밖에는 몰랐다. 여원이 난처함에 작게 한숨을 쉬자, 제헌의 눈썹이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갔다.
“흐음.”
스산하게 내리꽂히는 시선이 저를 향하자 여원은 자세를 단정히 가다듬었다. 투명인간처럼 방치당하는 것이 서럽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혼자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선준아.”
“어, 형?”
묵직한 목소리가 선준의 이름을 부르자 주변이 환기되었다. 제헌은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시키는 법을 잘 아는 알파였다. 여원을 가만 내버려두지 못하던 선준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두 사람 쓸 수 있도록 차를 한 대 선물해 줄까.”
차라고? 느닷없는 이야기에 여원의 귀가 쫑긋해졌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제헌이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이 내심 기뻤다.
“갑자기 차는 왜?”
반면 선준은 끝이 날카롭게 솟은 질문을 내던졌다.
“여원 씨도 집에만 있는 것보다는, 밖으로 나갈 수 있어야지.”
“…….”
“산모가 적당히 움직여주는 편이 배 속 아이에게도 더 나을 거다.”
별다른 수확이 없었던 몇 차례의 고단한 외출 이후 여원은 좀처럼 혼자서 저택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차가 생긴다면 원할 때는 자유롭게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여원의 삶은 한층 나아질 것이다.
“흠,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
“근데 형, 갑자기 여원이 얘기를 형이 하니까 좀 이상하네?”
선준이 눈을 번뜩 빛냈다. 그는 제헌의 말에 꼬투리를 잡게 될 순간만을 내내 기다려왔다. 비실비실 웃어 보이는 선준의 얼굴에 모호한 광기가 번졌다. 팽팽해지는 분위기에 여원의 심장이 바짝 졸아들었다.
“어차피 웬만한 건 이 집 안에 다 있잖아. 그 뭐야, 문진? 그런 거 받을 때 밖에 나가기도 하고.”
“…….”
“안 그래, 강여원?”
선준이 뻔뻔한 얼굴로 여원에게 동의를 구했다. 여원이 낡은 저택 안에서 외롭고 답답해하는 것을 잘 알면서도. 여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꼭 처음부터 의도하고 여원을 저택에 감금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비틀린 의심마저 들었다.
“아니다, 그러지 말고 여원아. 네가 직접 말해봐.”
“어, 어?”
“너 정말 차가 필요해?”
선준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화살을 돌렸다. 여원은 고스란히 위축되고 말았다. 저택 안에서 모든 걸 가질 수 있더라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차를 가장 원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못내 부담스러웠다. 덜컥 값비싼 차를 사달라 하면 제가 속물처럼 보일까 신경이 쓰였다.
“아…….”
대답을 망설이자 제헌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여원을 응시했다. 나긋하게 휘어지는 눈매는 꼭 원하는 것을 그대로 말해도 된다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찰박거리는 눈동자가 불안을 머금고 제헌을 올려다봤다.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나 끝내 여원은 솔직한 욕망을 털어놓지는 못했다. 제헌의 미간이 좁아지자, 곧바로 뻐근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여원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물론 여원의 돈이고, 여원의 집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조심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에, 여원은 매사에 선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차마 선준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내세울 수 없었다.
“거봐, 얘가 괜찮다잖아. 형은 바쁘다는 사람이 참 오지랖도 넓다, 넓어.”
“아…….”
“그리고 여원이는 내가 이미 알아서 잘 챙기고 있으니까…….”
선준은 말끝을 흐렸지만, 그다음에 이어질 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여원이는 내 오메가니까, 형은 건드리지도 말고 신경 쓰지도 마.’
“알아서 잘 챙기고 있다라.”
그러나 선준이 투박한 소유욕을 휘둘러도 제헌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길게 휘어지는 서늘한 눈매에 동생을 향한 노골적인 비웃음이 어렸다.
“하선준.”
“…….”
“너는 결혼 전과 조금도 나아진 점이 없구나.”
딸깍, 은빛이 감도는 수저가 대리석 식탁 위에 놓였다. 건너편으로 시선을 흘긋 던진 여원은 제헌 역시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원이 멍하게 눈을 깜빡이는 동안 제헌은 선준을 엄격하게 타일렀다.
“결혼을 했고, 네 말대로 네 가정이 생겼어. 이제 더는 네 삶도 너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건 잘 알 텐데.”
“아, 형…….”
“그런데 하선준. 너는 네 입으로 공언한 책임의 반도 지지 않고 있지. 내 말이 틀렸나?”
여원은 지금껏 제헌이 선준을 양육했다는 말을 좀처럼 실감하지 못했다. 열두 살 터울이라는 게, 크다면 큰 나이 차이이지만 세대를 가르는 수준은 아니기도 했다. 아무리 형이라지만 부모님처럼 엄격하게 가르쳤을까 싶었다.
“형! 왜 하필 강여원 보는 앞에서…….”
“이럴 거면 왜 낙태 비용 대준다는 걸 거절하고, 굳이 집안 이름에 먹칠하며 결혼했지? 지금 네 모습, 아주 비겁하고 실망스러워.”
그러나 냉정한 얼굴로 동생을 훈육하는 제헌을 보자, 그동안 선준이 성장해 온 집안 분위기가 곧바로 이해되었다. 긴장이 빠듯하게 차올라, 여원이 따끔거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
여원은 이제 두 사람 사이 일에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시선을 회피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이대로 상황을 모른 척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혹시 강여원이 형한테 무슨 얘기라도 했어?”
선준이 여원을 홱 돌아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 여원은 난처한 얼굴로 어깻죽지를 흠칫 떨었다.
“선준아, 나는 그런 게 아니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선준이 거친 숨을 씩씩 뿜어냈다. 여원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에도, 두 알파 사이를 오가는 대화의 언성은 더욱 높아졌다.
“정확히 어떤 모습이 실망스럽다는 건지,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는데.”
“하선준.”
“아니, 그렇잖아. 형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두 사람은 충분히 잘 지내고 있거든.”
“…….”
“솔직히 우리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다면 딱 하나지. 형이 고집부린 탓에, 형 집에서 살고 있다는 거. 난 형이 우리 부부 일에 간섭하는 거 정말이지 진절머리나.”
그러나 오랜 기간 여원의 불만을 철저히 모른 척해온 선준은 이번에도 잘못을 형에게 돌렸다. 그러나 여원은 선준의 형형함이 두렵다기보다도, 허탈하기만 했다.
내가 가지기는 싫고, 남이 눈독 들이는 건 더 싫고. 나는 하선준한테 뭐 계륵 정도 되는 존재인 건가?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이혼당한 사람에게 결혼에 대한 훈계를 듣고 싶지도 않고 말야.”
“아…….”
이혼을 했다고? 눈을 휘둥그레 뜬 여원이 제헌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하긴, 저렇게나 잘생기고, 돈도 많은 우성 알파인데 결혼한 적이 있는 게 당연하기는 했다. 다만 그런 제헌이 무슨 이유로 이혼을 당한 것인지 절로 궁금해졌다.
“앞으로 내 집에서 그 일 입에 올리는 일, 없도록 하라고 했을 텐데.”
얕은 실소가 선이 뚜렷한 입술 사이로 흘러내렸다. 선준의 발악을 가당찮은 소리로 치부하는 제헌의 얼굴이 서늘했다.
“아니, 왜? 솔직히 내가 못 할 말 한 것도 아니잖아. 예전에 형수도…….”
“하선준.”
“…….”
“그래, 뒷일 감당할 자신이 있다면야 마음껏 지껄이도록 해.”
우성 알파가 내뿜는 우아하고 서슬 퍼런 살기에 여원이 몸을 잔뜩 움츠렸다. 단호한 제압에 고삐 풀린 말처럼 분별없이 굴던 선준이 금세 깨갱거렸다.
“이, 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씨근거리는 선준이 이내 입을 앙다물었다. 형의 이혼에 대해 무엇이든 말하고 싶어 안달을 내면서도, 제헌의 위력에 눌려 끝내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잘못했어, 형.”
“…….”
“그러니까, 나도…… 아까는 내가 말실수를 했어.”
선준은 당장이라도 음식이 그득한 식탁을 엎어도 이상하지 않을 기세로 난폭하게 굴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헌에게 갑작스럽게 꼬리를 내렸다. 선준이 비굴하게 웃어 보이자, 여원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단순히 이번 한 번의 말 때문은 아닐 것 같다. 분명히 선준이 제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모종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 말 들어야지.”
순간 여원은 제헌에게 자신이 심한 일을 당했다는 뉘앙스로 이야기하던 언젠가의 선준을 떠올렸다. 그리고 제헌은 3층 서재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 여원에게 단단히 경고했다. 닫힌 서재 문 앞에서 유달리 짙게 느껴졌던, 위험과 폭력을 암시하는 불온한 향기.
혹시 그곳에서 선준이 제헌에게 학대당한 적이 있는 걸까? 그래서 그렇게 여원이 3층에 올라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선준이 불안해하고, 어쩌면 그 때문에 형수와 제헌도 이혼하게 된 것은 아닐지…….
“식사 마저 하시죠.”
고아하고 위엄 있으면서도, 동시에 음산하고 불온한 기운을 풍기던 저택. 여원은 오늘 하루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냄새와 얽힌 이야기를 상상해 봤다. 그래서인지, 머릿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가는 이야기에 스스로 놀랐다. 그렇지만 여전히 냄새는 감각으로 남아 위험을 예지하고 있었다.
“힉.”
직선적으로 와닿는 제헌의 시선이 내밀한 속살을 성큼 베어낼 듯 날카로웠다. 제헌의 얼굴은 오래 굶은 육식동물처럼 불만족스러웠다. 이대로 그가 자신에게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더 이상 이 남자와 엮여서는 안 돼. 여원은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다짐을 다시금 다잡았다.
질깃한 고무나, 혹은 꺼끌꺼끌한 모래주머니를 씹는 것만 같은 정적이었다. 식탁에 자리한 모두는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지금 상황이 껄끄러웠다. 폭발을 애써 억누르며 무의미한 숟가락질을 이어가는 동안, 감정의 골은 깊어만 갔다.
“식사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보고도 못 본 듯이, 듣고도 못 들은 듯이. 무미건조한 낯빛의 사용인들은 침묵이 미덕인 양 굴었다. 여원은 지금에서야 눈에 띄는 행동을 꺼리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저택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이곳에 사는 형제의 갈등에 섞이지 않고 싶다는 극도의 경계심이었다. 오랜 기간 뿌리 깊게 도사려온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먼저 일어나죠.”
언제나처럼 고아한 태도로 제헌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려한 얼굴선과 깎아지른 듯한 이목구비에 냉담한 기운이 묻어났다. 다소 피로하다는 기색으로 제헌은 미련 없이 식탁을 떠났다.
“우리도 이만 일어날까.”
제헌이 떠난 후에도 그를 닮은 스산한 기운이 한동안 자리를 맴돌았다. 그 탓인지, 남아 있는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위축되었다. 고개를 짧게 내저은 여원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뭐. 그래.”
심기 불편한 티를 팍팍 내는 선준을 짐짓 모른 척 여원이 앞을 향해 걸어갔다. 어깻죽지에 힘이 뻑뻑하게 들어갔다. 다이닝 룸의 입구에 멈춰 선 여원이, 체할 것 같은 기분을 꾹 내리누르고 선준을 향해 억지로 웃어 보였다.
“…….”
“…….”
“아, 선준아.”
평소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수다스러웠던 선준이었지만, 지금은 말을 잔뜩 아꼈다.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여원을 훑어 내렸다. 이제부터 선준이 사사건건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트집을 잡겠구나 하는 직감에 여원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자박자박. 2층 복도를 걸어가는 발걸음 소리가 유달리 선명하게 울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분위기가 더욱 어색해져 신경이 쭈뼛 곤두섰다. 아무렇지 않은 척, 여원은 일상적인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아, 맞다. 선준아, 너 그때 나한테 종강 언제라고 했지?”
“아아…… 2주 정도 남았어.”
“그렇구나.”
“왜, 내가 영원히 종강 안 했으면 좋겠어?”
“어? 뭐라고?”
“그러면 너는 맨날 집에서 형이랑 온종일 시시덕거리고 좋겠네.”
선준이 노골적으로 빈정거렸다. 여원이 황당한 기색으로 선준을 올려다봤다. 직접적으로 여원이 제헌과 교류한 것이 불만이었다고 한다면, 납득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턱대고 말꼬리를 잡아 비꼬자 여원도 기분이 나빠졌다.
“선준아, 너 나한테 화난 거라도 있어?”
“흐음, 내가 딱히 화를 낼 만한 이유가 있었던가?”
“하…….”
“그러는 여원이 너야말로 어디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나 봐?”
선준이 부정한 배우자를 추궁하듯 굴자 여원은 숨이 꽉 막혔다. 자신을 도와주려 했던 제헌의 행동에는 악의가 없었는데도,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긁어 부스럼으로 선준을 자극하기만 했다.
“하…….”
여원의 명치께에 뻐근한 열이 올랐다. 아릿하게 뭉치는 화를 선준에게 와르르 쏟아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여기서 화를 내면 선준은 오해를 부풀리고, 상황은 더욱 악화할 것이다. 자존심을 꾹꾹 내리누르며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지극히 유순한 얼굴로 선준을 올려다봤다.
“그런 거 진짜 아니야, 선준아.”
“…….”
“나 너희 형…… 그 사람 솔직히 잘 몰라. 같이 있으면 무섭고, 불편하고. 제대로 된 얘기도 오늘에서야 처음 했어.”
선준을 어르고 달래는 동안 여원은 씁쓸해졌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제게 가혹하게 구는 것은 분명 선준이었지만, 이해를 구하는 것은 결국 여원이었다. 선준의 성격을 뻔히 알면서도 그에게 빌미를 제공한 제헌이 불쑥 원망스러워졌다.
“너 어제 잠 많이 못 자서 기분 안 좋은가 보다.”
“흐음.”
“나 먼저 방에 갈게. 너도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가고.”
크게 한 번 심호흡한 여원이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 출발부터 불합리했던 결혼이기에, 선준과의 사이에서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 역시 여원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괴로워지는 것은 여원이었다. 사귈 때야 이대로 선준과 헤어진다는 선택지라도 있었지만, 아이를 가지고 선준과 결혼했으니 이제는 그것도 불가능했다.
“맨날 눈치만 보다 나 이대로 말라 죽는 거 아닌가.”
방문을 닫자마자 불을 껐다. 여원은 어둠이 깃든 방 안을 가만히 응시했다. 막막한 어둠에 먹히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간만에 생기를 되찾고 활기차게, 산뜻하게 보내던 하루였다. 그랬기 때문에 저녁 식사 이후 겪게 된 낙폭이 오히려 더 적나라했다.
이 저택에서는 여원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저택의 주인인 제헌은 배우자인 선준보다 확연히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더 위험하고 알 수 없는 남자였다. 그런 그에게 온당치 못한 기대를 품었던 탓에 상황이 더욱 나빠져 버렸다.
역시, 잘못된 판단이었어. 여원이 침대에 힘없이 몸을 늘어뜨렸다. 뭉글뭉글한 한숨을 토해내고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려던 때였다.
쿵.
“헉, 깜짝이야.”
둔탁한 소음과 함께 갑자기 방 안이 확 밝아졌다. 소스라치듯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문을 거칠게 밀어젖힌 선준이 벌려진 틈새에 서 있었다. 빛을 등지고 선 그늘진 얼굴에 그림자가 음산하게 내려앉았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남편이 들어오는데.”
“……아, 선준이구나.”
“왜, 못 볼 거라도 봤어?”
선준이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렸다. 비틀린 말투의 질문에서 은연중에 비열한 속내가 드러났다. 여전히 저녁 식사의 앙금이 풀리지 않은 듯했다.
“그게 아니고. 네가 노크도 안 하고 해서…….”
“흠.”
여원은 허리께로 흐른 이불을 바짝 끌어당겨 몸에 감쌌다. 저벅, 저벅. 버스럭거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선준이 여원에게 가까워졌다. 선준은 제헌보다는 체구가 작고 몸이 말랐지만 한참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부부 사이에 방에 들어오는데, 노크까지 해야 해?”
“아, 그렇다기보다는…….”
어물어물하면서 조금씩 뒤로 물러나보려 했지만, 등 뒤에 턱 벽이 닿았다. 그늘진 선준의 얼굴은 코 윗부분으로는 윤곽만 흐릿하게 보여 표정을 좀처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냥…… 내가 요즘에 신경이 너무 예민했나 봐.”
“…….”
“너도 알잖아, 나 아직 임신 초기라서…….”
목 끝까지 차오르는 밭은 숨을 겨우 삼켜냈다. 여원은 애써 태연한 척 최대한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엉망으로 쿵쾅대는 심장이 자꾸만 벌렁거려, 말을 제대로 끝맺을 수 없었다. 선준은 고집스레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헉!”
그때, 선준이 들짐승처럼 여원을 덮쳤다. 갑작스러운 돌진으로 매트리스가 풀썩 가라앉았다. 선준의 몸이 묵직한 무게감으로 여원을 짓눌렀다. 여원은 지나치게 놀라 차마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다.
“우리 섹스 안 한 지 오래됐잖아.”
선준이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려 빙그르르 웃어 보였다. 희번덕거리는 동공이 음험한 정욕으로 들끓었다. 습습한 시선이 파자마 셔츠 위로 드러난 여원의 흰 목덜미를 노골적으로 훑어내렸다.
“아…… 잠깐만!”
선준이 불그죽죽한 혀를 길게 뺐다. 핏줄이 연하게 돋아난 여원의 목덜미를 핥아 올리려 했다. 스멀거리는 뱀이 몸 위를 기어가는 것처럼 불쾌하게 느껴지는 동작이었다.
“흐읏!”
여원은 선준의 어깨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그를 간신히 제지했다. 어쨌든 선준과는 호감을 느끼고 사귀던 사이고, 한때는 관계를 맺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여원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제게 몸을 문대오는 선준이 거북스러웠다.
“왜?”
“아니, 그게…….”
선준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홍채가 조여든 눈동자가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밤바다처럼 유난히 검게 번들거렸다. 그 안에서 여원은 겁에 잔뜩 질려 있는 자신의 얼굴을 발견했다.
“어. 말해.”
“말했잖아. 임신 초기라서, 아직은…… 하면 안 돼.”
눈을 크게 감았다가 뜨고, 잔뜩 가쁜 호흡을 겨우 가라앉혔다. 명확하게, 여원은 지금 선준과 섹스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그럴듯하게 여겨질 만한 핑계를 대었다.
“아이한테 위험할 수도 있잖아.”
순간 여원은 임신이 싫을지라도 식사는 거르면 안 된다 저를 타이르던 제헌을 떠올렸다. 왜 하필 이런 상황에서 제헌의 얼굴이 스치는 것인지……. 당혹으로 여원의 귓바퀴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끼익. 끼기긱.
때마침 창문 틈새로 써늘한 바람 불어오며 삐걱대는 소리가 소란했다. 유지보수가 제때 이루어지며 정갈하게 관리되는 저택이지만, 이렇게 연식이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종종 있었다.
“흐음…….”
나직한 한숨 소리가 스멀스멀 퍼졌다. 못내 의심스럽다는 듯, 선준이 가늘어진 눈으로 여원의 얼굴과 목덜미를 훑어 내렸다. 수상한 흔적을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례하고 집요했다. 다행히 함부로 손을 뻗어 여원을 이리저리 매만지지는 않았다.
“읏, 흐읏.”
열성 알파 페로몬이 여원에게 스멀스멀 드리웠다. 제헌보다는 한층 옅었지만 여원에게 위기감을 불어넣기에는 충분했다. 때때로 짐승 새끼처럼 동물적인 감각을 발휘하는 선준은 얕게나마 여원의 부정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럼 언제까지 섹스 못 하는데?”
하나 여원이 품었던 미약한 죄책감은 금세 흐무러졌다. 처음에 여원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안이 벙벙해져서 선준을 쳐다보았다.
“하…….”
선준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을 보니, 여원이 정확하게 들은 모양이었다. 맡겨놓은 것을 찾는 것처럼 구는 선준이 상황에 맞지 않게 당당한 태도를 내세웠다.
“나…… 나도 아직 몰라.”
“왜 몰라?”
“몰라. 다음번에 병원 다녀와 봐야 알아.”
선준은 꼭 버릇이 잘못 든 심술투성이 어린애 같았다. 뭉뚱그려진 변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지, 선준이 옅게 흐트러진 여원의 페로몬을 킁킁거렸다. 그대로 여원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아쉽게 되었다는 듯 쩝 입맛을 크게 다셨다.
“그러면 너 허벅지에다가 해도 돼?”
“아니…… 싫어.”
“…….”
“그, ……그러다 보면 흥분해서, 하고 싶어질 수도 있잖아.”
“그건 그렇긴 하네.”
선준이 미적지근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원하지 않는 섹스였다. 그를 피하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구질구질하게 변명해야 하나 싶어서, 여원은 비참해졌다. 그러나 선준의 끈끈한 시선이 끈질기게 머물렀기에, 싫은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니까, 우리 나중에…… 다음번에 하자.”
여원은 소극적이나마 선준과의 스킨십을 거부하는 태도를 거두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선준은 여전히 여원이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제발 좀 이대로 가주었으면 좋겠다, 간절히 바랐지만 대신 선준은 여원의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원아. 사람이라는 게, 겉모습만 봐서는 절대로 모르는 거거든.”
“어?”
선준이 어둠 사이로 형형한 눈을 빛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였지만 제헌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난 우리 형수가 정말 불쌍한 것 같아.”
“…….”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들을수록 불편해지는 이야기였다. 일부러 선준의 말을 못 들은 척, 여원은 슬그머니 내리깐 눈을 데루룩 굴렸다.
“난 너 믿어, 여원아. 형이 너한테 먼저 접근했지?”
“접근이라니. 그런 거 아니야.”
“그랬을 거야. 이 집에서 살기 힘들지 않냐고, 밥은 잘 먹고 있냐고 관심을 줬겠지.”
뜨끔 놀란 여원이 고개를 반짝 들어 올렸다. 제헌의 행동을 담담히 짚어내는 선준의 얼굴에 체념하는 기색이 어렸다.
여원은 제헌이 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접근했던 건 아닌가 순간적으로 의심했다. 다정하게만 느껴졌던 행동 너머에 어떠한 꿍꿍이가 있었던 건 아닐까 해서…….
“형 되게 어른 같지? 겉은 차가워 보여도 속 깊고 인간미 있을 것 같고. 그런데 너도 봤잖아.”
“선준아…….”
“난…… 형이 화내면 무서워.”
선준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렸다.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큰소리를 치던 것은 어쩌면 자기보호였을까. 한 꺼풀 벗겨진 선준은 호되게 혼이 난 어린아이처럼 유약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준아. 그게, 무슨 말이야?”
역시 제헌이 선준에게 트라우마로 남을 만큼 학대했던 걸까. 당연하고 익숙하게 선준을 찍어누르던 제헌을 떠올린 여원이 조바심으로 입술을 잘근거렸다. 밉기만 하던 선준이 안쓰럽게 느껴지는 한편, 자신 역시 제헌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미리 알고 싶었다.
“조심해, 여원아. 처신 똑바로 하라고.”
“…….”
“두 사람 같이 있는 거 보고 놀랐어. 이 집에 발 들인 이상 너도 예외는 아니구나 해서.”
나직한 경고를 전하는 선준의 얼굴은 기이하리만큼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망설이며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주변을 슥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더 이상은 말해 줄 수 없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여원아, 우리 아이만 태어나면……. 그러면, 형에게서 같이 독립하자.”
“…….”
“지금은 나도 형에게 맞설 만한 힘이 없지만, 그래도 유산만 상속받을 수 있다면, 모든 게 더 나아질 거야.”
섬뜩한 상상이 빠른 속도로 머릿속을 장악했다. 마구잡이로 뻗어나가는 생각들 사이에서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무시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그동안은 너도 그 인간이랑 최대한 엮이지 마.”
“……어, 알았어.”
여원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제야 선준은 최초에 여원의 방을 찾아온 소임을 다했다는 듯 돌아섰다. 아스라한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며, 여원은 얇은 여름 이불을 어깨 위로 어설프게 끌어올렸다.
끼기긱. 방 안에 어둠을 들이며 나무문이 닫혔다. 덫에 걸린 짐승이 구슬프게 우는 것만 같은 소리를 내며.
모두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저택에는 새로운 비밀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