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택의 주인
리무진을 타고 서울에서 한 시간여를 꼬박 달려와 도착한 교외의 저택은 울창한 나무에 빼곡하게 에워싸여 있었다. 깊숙한 산 중턱을 가파르게 깎아지른 땅은 인적을 찾아볼 수 없어, 일반적인 마을보다는 중세 귀족의 영지에 가깝게 느껴졌다.
늠름하고 고아한 저택의 위엄에 주눅이 들어, 대문에서 현관까지 제법 되는 거리를 말없이 거슬러 올랐다. 초여름 특유의 싱그러운 햇살이 푸르른 녹음 위로 폭력적으로 내리쬐었다. 길목에는 무성하게 우거진 수풀이 덩굴처럼 짙게 드리웠고, 과육이 흥건하게 여물어 흐드러진 살구 향기가 흠뻑 퍼졌다.
달큼함이 지나쳐 코를 지독하게 찌르는 향기에 여원이 인상을 크게 찌푸렸다. 차를 타고 굽이진 길을 오르는 동안 내내 편치 않았던 속이 다시금 울렁거렸다. 선준에게 어영부영 끌려오기는 했지만, 여원은 이 순간 그를 둘러싼 모든 일에 대해 제대로 된 확신이 없었다.
이제 선준의 나이는 고작 스무 살, 여원은 그보다 겨우 두 살 많을 뿐이었다. 선준의 형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선준의 양육을 도맡았다고 했다. 그런 사람에게 임신 사실을 밝히는 일이 못내 껄끄러웠다. 충분한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데도 아이를 낳겠다고 주장하는 모습이 무책임하게 비칠까 봐 걱정되었다.
“흐읍…….”
“왜 그래? 괜찮아?”
“아니 나 갑자기 속이 더부룩해서…….”
느닷없이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에 여원이 손바닥으로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사실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선준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여원은 늘 소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저기, 선준아…….”
후끈한 열기가 시야에 엷게 퍼지고,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조륵 흘러내렸다. 그러나 여원보다 딱 반 발짝 앞서 걷는 선준은 그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 왜?”
콧노래를 얕게 흥얼거리는 선준은 근심 걱정 하나 없는 것처럼 의욕적인 얼굴이었다. 때로는 아둔하게 비칠 정도로 굼뜨던 몸동작이 오늘만은 유달리 산뜻하고 가벼웠다.
“너 지금 너무 빨리 걷고 있어.”
“…….”
“조금만 천천히…….”
일순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여원은 그 모든 것이 몹시 거슬렸다. 뚝, 발걸음을 돌연 멈춘 여원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아, 미안.”
“하…….”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
어리둥절 뒤를 돌아본 선준이 버거워하는 여원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여원의 몸 상태에 지극히 무관심했으면서도, 도리어 여원을 타박했다. 선준의 나태한 태도에 마음이 상해 여원은 아랫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너 어차피 내 말 맨날 제대로 듣지도 않잖아.”
선준과의 결혼이 과연 잘 한 결정일까. 나아가야 할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했고, 마음은 자욱한 안개로 뒤덮인 것처럼 착잡했다.
“알았으니까 그만 꿍얼거리고 빨리 와. 이러다가 늦겠어.”
“하……. 알았어.”
빳빳한 셔츠 깃 위로 여원의 목덜미가 깨끗하게 드러났다. 끝마디가 하얗게 질린 손가락이 야트막한 아랫배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아직 거의 부풀지 않은 배는 육안상으로는 임신 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집이 무슨 이 정도로 커서…… 들어가는 것부터 이렇게 버겁지.”
텁텁한 이물감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도망치기란 불가능했다. 끼기긱, 묵직한 금속 현관문이 삐걱대며 벌어지자 여원은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집 안으로 들어선 여원이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희미하게 번지는 화학 약품 냄새였다. 위험의 전조에 신경이 곤두섰지만, 정작 눈을 떠 확인한 실내의 풍경은 일상적이고 무미건조했다. 연식이 제법 오래되어 보이는 고풍스러운 저택은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하선준.”
“어, 형!”
“약속 시각보다 늦었구나.”
응접실의 시곗바늘은 정각에서 5분만큼을 지나 있었다. 좌측 가장자리 암체어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저택의 주인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차분한 태도로 선준의 무례를 지적했다.
“에이, 기껏해야 5분 늦은 걸 가지고 형은…….”
응접실로 들어서는 선준이 바닥에 발을 둔탁하게 쿵쿵 굴렀다. 제헌을 보는 둥 마는 둥 건너편 소파에 풀썩 주저앉고는 얕게 씨근거렸다. 불만을 능숙하게 숨기지 못하는 불퉁한 얼굴에서 미성숙한 성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예의를 지켜야지.”
동생을 나무라는 제헌의 얼굴에는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선준이 이죽거리자 잔뜩 긴장한 여원과는 다르게, 제헌은 선준의 불손한 태도를 개의치 않아 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여원은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제헌이 권유하자 쭈뼛거리며 선준의 옆자리에 앉았다. 빳빳하게 길이 든 가죽 소파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번졌다.
“흐음…….”
제헌은 냉담한 얼굴로 여원을 훑어내렸다. 동생이 저택에 데려온 오메가를 낱낱이 관찰하는 눈동자가 새까맣게 침잠했다.
“아, 안녕하세요.”
압도적으로 서늘한 시선에 긴장한 여원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어린 만큼 어리숙한 선준과는 다르게, 제헌은 말 한마디 없이도 상대를 효과적으로 제압하는 방법을 알았다.
“네, 안녕하세요.”
군더더기 없는 짧은 답변에 여원은 괜스레 주눅 들었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배우자의 형님, 그러니 분명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 맞는데…….
그럼에도 불편하고 막막하기만 했다. 꺼끌꺼끌한 침묵 사이로 기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제헌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여원이 한데 모은 손을 꼬물거렸다.
“하제헌입니다. 선준이 형 되는 사람입니다.”
“아, 네!”
불쑥 내뱉어진 인사에 여원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눈앞의 제헌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상냥한 태도였지만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졌다.
“강여원……이라고 합니다.”
여원은 정신을 바짝 다잡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눈을 먼저 피하면 혹여라도 불손해 보일까, 파들거리면서도 제헌을 겨우겨우 응시했다.
그러느라 우아한 손등이 제게로 내밀어진 것을 한발 늦게 알아차렸다. 숨을 짧게 들이켜고 그를 맞잡자 우성 알파 페로몬이 훅 밀려왔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에요……. 리무진까지 보내주셔서, 덕분에 저는 편하게 왔습니다.”
우성 알파시구나. 짧은 순간 손이 맞닿았을 뿐인데도 강렬한 감각이 전해졌다. 제헌은 자신의 페로몬을 과시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애써 갈무리하지도 않았다. 맞물렸던 손이 느릿하게 떨어지자 입술 끝이 느슨하게 벌어졌다.
“아…….”
여원은 홀린 듯이 제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제헌이 의아하다는 듯 턱 끝을 까딱였다.
“무슨 문제라도?”
선준은 나이 터울이 많이 나는 형이 답답하고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다고 버릇처럼 불평해 왔다. 그 탓에, 여원은 제헌이 고루한 중년일 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수려한 외모의 미남자는 여원의 생각보다 훨씬 젊었으며, 오만해 보일 만큼 여유가 흘러넘쳤다.
“아뇨……. 그냥, 제가 생각했던 거랑 너무 다르셔서…….”
의도와는 다르게 오해를 살 만한 발언이었다. 속내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듯해 여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나 제헌은 여원에게 따져 묻는 대신 날렵한 눈을 담백하게 휘어 보였다.
“아무튼, 형.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두 사람은 결혼할 생각이야. 여원이가 임신했거든.”
“…….”
“그렇게 알았으면 좋겠고…… 그래도 일단 형한테 얼굴은 보이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오늘 온 거야.”
두 사람이 서로를 빤히 응시하는 동안, 선준이 삐딱하게 용건을 전했다. 제헌의 얼굴이 무표정으로 가라앉았다.
“하선준. 일의 순서가 한참은 잘못됐는데?”
제헌이 심기가 불편하다는 기색을 드러내자, 여원은 소동물처럼 눈치를 봤다. 불쑥 제헌에게 통보한 선준 역시 실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였다.
“강여원 씨.”
“네?”
“선준이와 같은 학교에 다닌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스물두 살?”
“네, 맞습니다.”
선준에게서 시선을 거두어들인 제헌이 곧바로 여원에게 질문했다. 묵직한 저음이 써늘한 공기 중에 낮게 내리깔렸다. 여원은 뾰족한 긴장의 끈을 바투 붙잡았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이라고 들었는데, 여원 씨도 결혼하면 많은 걸 포기해야겠군요.”
“…….”
“임신 중절을 고려해 본 적은 없습니까?”
여원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러니까…… 방금 나에게 왜 낙태를 안 했냐고 물어본 건가?
정제된 언어에 감싸인 직설적인 질문에 여원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런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역시 당황스러웠다.
“아, 그러니까 저는…….”
어버버, 말끝을 더듬은 여원이 도움을 청하려 선준을 돌아보았다. 선준은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어깨를 성기게 으쓱해 보였다.
“우리라고 고민을 왜 안 했겠어, 형. 그렇다고 해서 이미 생겨난 아이를 지워, 그럼?”
“흐음.”
“저희가…… 그, 피임을 철저히 하기는 했는데, 어쩌다 보니 임신을 하게 된 것이어서요.”
“네.”
“그래도 역시…… 아이를 낳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준의 투박한 설명에 이어 여원이 우물쭈물 말을 이어나갔다. 애인의 가족 앞에서 피임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못내 수치스러웠다. 제헌의 건조한 시선이 물건의 값어치를 가늠하듯 여원을 훑어 내렸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이라서요?”
“…….”
“…….”
“……네.”
“…….”
“맞습니다.”
목구멍에 껄끄럽게 뭉치는 뜨끈한 망설임 덩어리. 그것을 가까스로 삼켜낸 여원이 반쯤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재미있군요.”
여원을 살펴보는 제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선준은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상황을 여전히 방관했다. 그와는 다르게, 여원은 선준의 형인 이 남자 앞에서는 무엇이 되었든 숨길 수 없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래요, 여원 씨.”
최악의 상황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의 여원이 재벌 가문과 결혼하게 되면서 맞닥뜨릴 반발. 통속 드라마에서 흔히 접할 만한 갈등이 뒤따른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궁금한 점 몇 가지 묻겠습니다.”
“네, 편히 말씀 주세요.”
“여원 씨는 임신 기간에는 휴학할 생각입니까?”
“아, 네…….”
그러나 제헌은 두 사람의 미래 계획에 대해 궁금해할 뿐, 결혼 자체에 대해서는 가타부타하지 않았다.
“제가 이제 3학년 2학기기는 한데…… 그동안 너무 달려오기도 했고. 취업을 할지, 대학원에 갈지도 고민이 좀 있는 시기여서요.”
“네.”
“……이렇게 된 김에, 잠깐 쉬어 가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천천히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여원은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이렇게 된 김에’ 휴학과 결혼을 결정했다는 게, 여원 자신부터가 스스로의 미래를 딱 그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던 것 같아서.
우발적인 임신으로 인해 결정된 결혼. 선준과 이야기할 때는 몰랐는데, 제삼자 앞에서 그에 대한 결심을 털어놓자니 더없이 초라해졌다.
“잠깐 쉬어 간다라…….”
제헌의 눈에 그런 자신은 대책 없는 어린 오메가일 것 같았다. 한심하게 본다고 해도 달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고압적인 제헌의 태도에 희미하게 품었던 반발심이 금세 수그러졌다. 감히 그런 불만을 품을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다행히 제헌은 여원에게 도피성으로 결혼을 선택한 것이냐 묻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원은 제헌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기만 했다. 임신으로 인한 결정일 뿐, 애초에 선준과의 결혼을 원했던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양육 계획은요.”
“아, 형. 그게 말이야.”
“…….”
“어…… 얘네 집 엄청 가난하거든. 그래서 그쪽으로는 딱히 뭐 기대할 게 전혀 없어.”
“…….”
“내가 다 알아서 해야 하기는 하는데…… 형도 알다시피, 대학교 졸업하기 전까지는 내가 유산을 못 받잖아.”
선준은 맡겨놓은 것을 찾아가듯 툴툴거렸다. 그러나 사실상 큰소리치며 떵떵거릴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아직 대학생인 두 사람은 아이를 낳기 위해 제헌의 경제적 원조가 필요했다.
“나에게 두 사람 모두를 떠맡아달라는 얘기인가?”
“어어, 뭐…… 그런 이야기로 들렸나?”
“…….”
“그보다는, 이렇게 된 김에 형이 나한테 유산을 먼저 물려주고, 우리를 독립시켜 줘도 되는 거고…….”
제헌의 신랄한 지적에 여원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여원의 임신 소식에 선준은 결혼만 한다면 모든 문제가 수월하게 해결될 것처럼 큰소리쳤다. 그러나 정작 저택에 온 선준은 제 몫의 책임을 다른 알파에게 모조리 떠넘겨버렸다.
“저기, 그……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이 집에 폐가 되는 것 같아서…….”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
“여원 씨 부모님은 이번 결정에 대해 뭐라고 하시고요?”
여원이 수치심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제헌이 무심한 시선을 흘긋 던졌다.
“아, 네…….”
피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끝끝내 집안 얘기가 나오자 명치께가 얼얼하게 뭉쳤다.
“제가 열성 오메가이기도 하고 해서…… 아직 어린 나이이긴 하지만, 부모님은 가능하다면 결혼을 빨리 하라고 하세요.”
“…….”
“다만…… 선준이가 말한 것처럼,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시기는 어려운 상황이기는 합니다…….”
대학 등록금을 부담하기도 어려운 형편의 집안이었다. 부모님은 밑에 딸린 동생들을 들먹이며, 여원이 빨리 적당한 혼처를 찾길 바랐다. 다른 사람에게 가장 숨기고 싶었던 내밀한 치부가 발가벗겨졌다.
“거봐, 내가 말했잖아.”
제헌의 냉담한 시선 앞에서 여원은 무방비하게 도려내졌다. 그런 여원은 본체만체, 선준은 반항적으로 제헌에게 눈을 부라렸다.
“두 사람 다 경제적 능력도 없고,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없고. 그런데도 결혼을 하겠다고?”
“아, 형!”
“하선준. 목소리 낮춰.”
“아니, 형은 왜 또 그딴 식으로 말해?”
“뭐라고?”
“아니, 지금 내가 능력 좆도 없는 애새끼라고 얘기한 거잖아.”
“…….”
“생각해 보면 형은 맨날 이런 식이었어. 저만 혼자 잘나서, 나를 한심한 인간 취급하고…….”
그러나 제헌의 예리한 칼날이 여원이 아닌 자신을 향하자, 선준은 격앙된 음성을 빽 내질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헌이 자신을 우습게 여긴다 확신하고 과민 반응했다.
“난 형이랑은 다르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어. 그러니 이 사람이랑 결혼해서 평생 행복하게 살 거야.”
“…….”
“솔직히, 형도 사랑에 대해서 아는 거 별로 없잖아? 그런 형이 내 일에 왈가왈부하는 거 난 좀 아닌 것 같아.”
“하…….”
“내 아이고, 내 오메가란 말이야! 형이 나서서 동생 앞길에 재 뿌릴 생각 아니라면, 우리를 받아주는 게 당연하지 않아?”
선준이 우악스럽게 억지를 부렸다. 임신한 오메가를 저택에 데려온 것만으로도, 자신이 원하는 걸 당연하게 얻어야 하는 것처럼 막무가내였다.
“아, 선준아…….”
임신 이후 신경이 예민해진 여원이 큰 소리에 화들짝 소스라쳤다. 얘가 원래 이렇게 화가 많았나? 여원은 처음 보는 선준의 모습에 급속도로 불안해졌다. 열성 알파이지만, 그래도 선준은 심성은 착하고, 강압적인 구석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
“…….”
팽팽한 정적을 깨진 유리 조각의 날카로운 단면이 긁어내리는 것만 같았다. 묵직한 중압감을 견디기 어려워, 여원은 당장에라도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만 싶었다.
하지만 겨우 집에서 도망쳐서 이곳까지 왔는데, 그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하선준.”
제헌이 나직하게 동생에게 경고했다. 씩씩거리던 선준이 제헌의 눈치를 살피고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제헌은 다소 귀찮은 기색으로 여원을 건너다보았다.
“네가 어떤 오메가를 데려와 결혼하든,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형!”
“그런데 지금도, 내 돈으로 학교에 다니고 생활을 하는 네가 형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서는 안 되지.”
“그치만, 나도, 나도 유산만 물려받으면…….”
“그만. 거기까지.”
제헌이 선준의 말을 딱 끊었다. 강력한 우성 알파 페로몬이 돌연 서늘하게 벼려졌다. 오만하게 고개를 들어 올린 제헌이 냉담한 눈으로 여원을 직시했다.
“이렇게 하시죠.”
“…….”
“두 사람 결혼을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제 선준이도 성인이고, 어떤 결정을 내리든 본인 인생이니까요.”
“…….”
“하지만 졸업 전까지는 내 집으로 들어와서 살도록 하세요.”
“아, 형!”
제헌의 저택에서 부부가 머물러야 한다니, 당혹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제헌의 태도는 그 어떤 반박도 받지 않겠다는 듯 단호했다.
“저희 두 사람 모두……요?”
“네.”
선준은 분명 결혼만 하면 나가 살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는데……. 어쩐지 무서워 보이는, 선준의 형과 결혼해서 함께 살아야 한다니 여원은 막막해졌다.
“그치만, 형, 이건 좀 아니잖아. 나는…….”
“하선준.”
“아, 왜.”
“지금 네 의견 묻고 있는 것 아니다.”
거슬린다는 듯, 제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형형한 페로몬이 주변을 위압적으로 찍어 눌렀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던 선준은 제헌의 말 한마디에 기세가 푹 꺾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
“형이 정 그렇게 원한다면, 그런 걸로 해.”
시선을 바짝 내리깐 선준이 툴툴거리며, 형의 부당한 요구를 자신이 마음이 넓어서 들어주는 양 굴었다.
“…….”
선준을 내려다보는 제헌의 눈매가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오랜 세월 동생을 보살펴온 형의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냉혹한 시선이었다.
“결정 끝났으니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 보세요.”
제헌은 미련 없이 대화를 갈무리했다. 더 이상의 시간 낭비는 사양이라는 듯 깔끔한 태도였다. 명백한 이물질 취급에, 여원은 목구멍에 뜨끈하게 뭉치는 덩어리를 꾹 삼켜냈다.
“아이씨…….”
“…….”
“가자, 여원아.”
선준이 보란 듯이 여원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나 방금까지만 해도 책임을 회피하던 선준이 갑작스레 친근하게 구는 것이 여원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어어…….”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여원이 선준에게 거칠게 끌려갔다. 제헌은 두 사람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남아 있지 않아 보였다. 그렇지만, 어찌 되었건 계속 얼굴을 봐야 할 사람인데…….
“저기…… 아주버님.”
선준에게 어깨가 감싸인 여원이 반쯤 몸을 틀어서 제헌을 불러보았다.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던 제헌이 의아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
이 호칭이 맞긴 맞는 건지……. 사실은 말하는 여원조차도 충분한 확신이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여원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제헌이 피식 웃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남자가 처음으로 유쾌함을 내비친 순간이었다.
“호칭이 다소 멋쩍네요.”
“……아.”
“서로 지나치게 어렵게 대할 필요는 없죠.”
“그럼…….”
“앞으로는 제헌 씨라고 불러도 됩니다.”
입술이 살짝 벌어진 채로, 여원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아주버님이라는 푸근한 호칭으로 부르기에 제헌은 확실히 너무 젊고, 무섭고, 또 위험해 보이는 알파였다.
그래도 윗사람인데, 이름으로 불러도 되는 건가? 아무래도 역시 어색하다는 생각에, 여원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제헌의 말은 권유가 아닌 지시에 가까웠다.
“네, ……제헌 씨. 그럼, 안녕히 계세요.”
망설인 끝에 제헌의 이름을 발음해 보자, 그것만으로도 혀끝이 찌릿하게 따끔거렸다. 괜한 민망함으로, 제헌에게서 몸을 완전히 돌린 여원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원 씨도 살펴 가고요.”
여원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등 뒤로 들리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정체 모를 은근함이 묻어났다.
“……하아.”
제헌은 설명하기 어려운 은밀함을 머금은 남자였다. 왜 하필 이런 사람이 선준의 형인 것인지. 여원은 대상이 불분명한 원망을 꽁꽁 뭉쳤다가, 이내 흐트러뜨렸다.
“아, 왜 갑자기 소나기는 내리고 지랄이야.”
방금까지만 해도, 뙤약볕이 따갑게 내리꽂히던 날씨였다. 그러나 삽시간에 먹구름으로 가득 어두워진 하늘에서는 소나기가 매섭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가 너무…… 무섭게 내린다.”
“오늘은 진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에 나뭇잎에서 빗물이 후드득 낙하했다. 선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짜증스러운 말투로 투덜거렸다.
“선준아, 우리 빨리 안에 가서 우산 가져오자.”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어?”
“어차피 저 앞까지만 가면 되는데, 차라리 그냥 빨리 뛰어가자.”
여원은 정말이지 비를 맞고 싶지 않았다. 현관까지만 들어가면 우산을 챙겨올 수 있을 텐데……. 하지만 형이 차지한 저택이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선준은 여원의 팔목을 강하게 틀어쥐었다.
“아, 차가워…….”
“이러다 옷 다 젖겠어, 빨리 가자!”
선준이 여원을 다짜고짜 빗속으로 이끌었다. 짧은 거리였지만, 대문 앞 리무진에 다다랐을 때 두 사람은 쫄딱 젖어 있었다. 다급하게 차 안으로 들어서자, 써늘한 에어컨 바람에 목덜미가 오싹하게 곤두섰다. 빗물에 질척하게 젖은 옷가지가 피부에 쩍쩍 들러붙었다.
“콜록.”
입을 틀어막은 여원이 작게 기침했다. 스멀스멀 으슬으슬한 기운이 올라와 몸을 잔뜩 움츠렸다.
“에이, 비 좀 맞았다고 그렇게 죽상을 쓰냐?”
“아니, 너무 춥잖아, 축축하고…….”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면 되지. 기사님, 여기 에어컨 좀 꺼 주세요!”
그악스러운 선준의 태도에 여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선준의 가족을 만나느라 심란해진 마음까지 다독여주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래도 임산부인데 비를 맞으면 안 된다는, 상식적인 배려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모든 일의 근원이었던 임신. 아직 판판하기만 한 아랫배를 내려다본 여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우리 진짜 결혼하는 거네.”
비 오는 날의 거리는 어둡게 일렁이는 색으로 물들어갔다. 여원의 마음 역시 창밖 풍경처럼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생기 없는 얼굴로 밖을 내다보던 여원이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뭐 언제는 가짜 결혼이었어?”
여원의 말이 퍽 재미있다는 듯, 선준이 눈을 짓궂게 휘어 보였다. 제헌과의 만남을 통해 선준과의 결혼은,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는 현실이 되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면?”
“모르겠어, 정작 너희 형님 뵙고 나니까 기분도 좀 이상하고.”
“흐음…….”
“이제 저 집에 들어가서 계속 같이 산다고 생각하니까, 그것도 좀…….”
선준은 꼭 놀이공원을 찾은 어린아이처럼 천진했다. 여원의 임신도, 두 사람의 결혼도 별다른 걱정 없이 즐겁게만 느꼈다. 반면 제헌까지 만나고 나자 여원은 마음이 한층 무거워졌다.
집안 꼴이 개판이라서, 조향 공부를 계속해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현실에 빠르게 순응하는 편이 차라리 현명했다. 그럼에도 한때 꿈꾸었던 일들의 가능성이 완전히 닫히는 것을 깨닫는 순간은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야, 여원아.”
여원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자, 선준이 딱딱한 어깨를 바짝 붙이며 치대왔다.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담뿍 묻어났다.
“아…….”
비를 맞아 뜨끈하게 달아오른 몸에 축축한 어깨가 닿자 여원이 소스라쳤다. 여원은 날카롭게 눈을 흘기며 선준을 경계했다.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꼬박꼬박 형형 하면서 저를 따르던 선준이 최근 묘하게 말을 놓기 시작한 것이 여원은 불만이었다. 그동안은 어영부영 넘어갔지만, 오늘따라 그런 선준이 유난히 거슬렸다.
“너도 참, 우리 이제 결혼하는데. 형은 무슨 형이야.”
“결혼하면, 더는 형이 형이 아니게 돼?”
“그래도. 이제 넌 내 오메가잖아.”
‘내 오메가.’ 조금의 악의도 찾아볼 수 없는, 그 무신경한 명칭에 여원은 목 끝까지 숨이 턱 막혔다. 제헌 앞에서도 선준은 여원이 제 오메가라며 우쭐거렸다. 누가 봐도 예쁜 외모를 가진 여원이 자신의 트로피라도 되는 것처럼.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얼굴을 잔뜩 찡그린 여원이 드물게 언성을 높였다. 저에게는 어렵고 조심스러웠던 일들이, 선준에게는 쉽고 흔쾌하기만 했다. 임신도, 휴학도, 결혼도, 그 모든 것이…….
“왜, 여원이 이제 내 거 된 거 싫어?”
“됐어, 아니야……. 그런 거.”
철없는 어린아이 같은 대꾸에, 진지한 대화를 해보려던 의욕도 금세 사그라졌다. 부잣집 알파에게 팔려 가는 가난한 오메가가 된 것 같은 기분. 아니, 기분이 아니라 현실이 그랬다.
“근데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아냐, 나 진짜 괜찮아.”
그렇지만 나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던가? 결국 여원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씁쓸한 기분을 선준 앞에서 티 내지 않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너희 형님 되게 젊으시더라.”
꿉꿉한 화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원은 스치듯이 제헌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갑자기 형은 왜?”
저택을 나서면서부터 내내 기분이 좋아 보이던 선준이 금세 눈을 날카롭게 치떴다. 자신과는 다르게 완연하게 무르익은 알파인 형을 노골적으로 경계했다.
“아니 그냥, 네가 나한테 그런 얘기 별로 한 적 없는 것 같아서.”
“무슨 얘기?”
생각 이상으로 곤두선 반응에 여원이 퍽 당황했다. 날도 날인데,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음, 나는 왠지 너희 형이 배 나온 아저씨일 줄 알았나 봐. 막 회사 부장님 같은 느낌?”
예민해진 선준을 적당히 다독거린 여원이 어설프게 웃었다.
“사람은 원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거라서.”
그러나 선준은 여전히 날 선 기색으로 질문 끝을 득달같이 받아쳤다. 내심 제헌의 외모가 매력적이라 생각했던 여원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아…… 그렇기야 하지.”
대체로 무던한 선준이 드러내는 극렬한 감정에 여원은 위화감을 느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선준은 제헌에게 뿌리 깊은 앙심을 품고 있었다.
“난, 그 인간만 생각하면 매 순간 치가 떨려.”
“…….”
“피도 눈물도 없고, 지독하게 이기적이라 저밖에 모르지. 주변 사람이 하나같이 등을 돌리는 데에도 다 이유가 있어.”
“아…….”
“하, 오죽하면 형수까지 형을 버리고 떠났겠어.”
여원은 형을 향한 선준의 적대심이 못내 의아했다. 제헌에게 길러진 선준은 분명 유복한 가정환경 속에서 원하는 걸 모두 다 얻으며 자랐을 것이다.
“부모님만 살아계셨어도, 나한테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자신이라면 그런 형에게 무척 감사할 텐데……. 하지만 여원이 선준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고작 한둘은 아니었다. 눈을 희번덕거리는 선준에게서 여원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너랑 형이랑은 정확히 뭐가 문제였던 거야?”
“어?”
“혹시 형이 선준이 너한테 심한 짓이라도…….”
미심쩍은 기분에 여원은 선준에게 조심스레 질문했다. 순간 대답을 망설인 선준이 여원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솔직히 나는, 여원이 네가 우리 가족의 과거에 대해서는 몰랐으면 좋겠어.”
“어어…….”
“알아서 기분 좋을 일도 아니고, 어쨌든 한동안은 너도 우리 형 얼굴 보고 살아야 하잖아.”
“뭐, 그거야 그렇지만.”
일리 있는 말이었다. 얼떨결에 선준과 결혼하게 되었지만 여원은 복잡한 가정사에 깊숙이 얽혀들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제헌을 미리 불편해한다면, 앞으로의 결혼 생활이 더 견디기 어려워질 테다.
“형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몰라.”
방금 전까지 내비치던 적대심이 무색하게도, 선준은 돌연 제헌이 두렵다는 듯이 굴었다. 끈적하게 들러붙는 불길한 예감을 떨치기 위해, 여원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어쨌든, 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참으면 우리 집 재산 절반은 내 거니까.”
“으응…….”
“그렇게 되면, 우리도 서울에 제대로 된 집을 얻어서 두 사람이서만 행복하게 살자, 응?”
“…….”
“그동안은 여원이 너도…… 형을 조심하고.”
미래 계획을 청산유수로 늘어놓던 선준이 껄끄러운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제헌에 관한 경고였다.
“응, 알았어.”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 이유가 뭘까 의아했지만,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는 더 이상 궁금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여원은 애써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했다. 여원이 고분고분 대답하자 선준은 흡족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 벌써 서울이네?”
때마침 빗줄기에 반들반들하게 젖은 리무진이 여원의 집 앞에 도착했다. 날씨가 들쑥날쑥해서, 하늘은 언제 그렇게 비가 쏟아졌냐는 듯 또다시 허무하리만큼 맑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위를 올려다본 여원은 말끔하게 사라진 먹구름의 흔적을 더듬어보았다.
차에서 먼저 내린 선준이 여원을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배싯 웃어 보이고는, 여원의 동그란 뺨에 짧게 뽀뽀했다.
“다음에 또 연락할게.”
“어어.”
“오늘 멀리까지 다녀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푹 쉬고.”
“응, 알았어. 고마워.”
여원의 배우자가 될 선준은 마치 오늘 오후의 날씨처럼 변덕스러운 성정의 소유자였다. 지금처럼 제 기분이 좋을 때는 여원에게 퍽 다정하게도 굴었다.
그런 거 보면 천성이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았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제대로 된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해서, 제때 철이 들 기회를 놓쳤을 뿐. 그러니 잘 다독여주면 분명 나아질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정말 괜찮을 거야. 허름한 다세대 주택 단지에는 곳곳에 오래된 불행의 흔적이 굽이굽이 묻어 있었다. 빛바랜 페인트로 덧칠된 낡은 담벼락을 말가니 바라보던 여원은 녹이 잔뜩 슬어 있는 흉측한 철문에 손을 뻗었다.
“…….”
무엇이 되었든 이보다는 더 나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곱씹으며, 여원은 느릿한 발걸음을 옮겨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이곳에서 지내야 하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