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오후가 지나는 동안 분노와 모욕감이 여원을 한차례 크게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나 여원의 내면에 휘몰아치는 폭풍과는 다르게, 저택에 찾아온 밤은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버석거리는 소리가 은밀한 적막을 틈타 선명하게 울렸다.
제헌은 선준에게 치명적인 약점이자 두려움의 근원이었다. 그런 제헌을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함으로써, 여원은 선준을 비참함의 끝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아니, 사실 그 모든 건 변명이었다. 선준을 향한 복수심은 단순한 계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더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여원은 제헌을 욕망했다.
스스로를 억누르는 데 익숙한 여원에게 인생에서 처음으로 원하고, 탐하고 싶은 사람이 생겨났다. 한번 자각한 강렬한 욕망은 걷잡을 수 없도록 솟구쳤다. 잘못된 걸 알면서도 갈망하게 되었고, 가지고 싶어졌다.
여원은 삐걱대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나선형 계단을 타고 3층으로 비틀비틀 올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생생하고 강렬한 욕망을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은 야릇한 전율을 동반했다.
“제헌 씨.”
늦은 시각이었지만 제헌은 여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3층 거실을 지켰다. 웅장한 암체어에 등을 기대고 있던 제헌이 제 발로 자신을 찾아온 여원을 향해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야릇한 결연함이 깃든 여원의 얼굴을 집요한 시선이 빤히 훑어내렸다.
“네, 여원 씨.”
조도가 낮은 불빛 아래로 날렵하게 뻗은 제헌의 얼굴선이 드러났다. 잔뜩 숨죽인 채, 여원은 살짝 좁아진 제헌의 미간과 날카로운 코끝, 단호한 턱선을 끈끈하게 응시했다. 제헌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더니, 흐트러짐 없는 얼굴에 비틀린 충족감이 스몄다.
“제헌 씨, 저 지금 히트 사이클 아니에요.”
“…….”
“제정신이에요.”
달뜬 숨을 몰아쉰 여원이 암체어에 앉은 제헌에게 다가가 몸을 숙였다. 촉, 소리와 함께 까슬한 입술에 짧게 입맞춤했다.
“하아…….”
미지근한 온기가 닿자 눈이 절로 감겼다. 여원은 일부러 입술을 느릿하게 떼어냈다. 탄탄한 가슴팍을 아슬아슬하게 어루만지던 손바닥이 떨어지자, 제헌의 숨소리가 한층 거칠어졌다.
여원의 촘촘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뒤로 물러선 여원이 제헌의 처분을 순종적으로 기다렸다.
“한번 시작하면 쉽게 놓아줄 생각 없습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낮게 내리깔린 제헌의 중저음이 공기를 묵직하게 가로질렀다. 어두워진 주변을 틈타고 형형한 안광이 번뜩였다. 제 소유의 것을 포착하는 육식동물 같은 시선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네, 후회 안 해요.”
거짓말이었다. 분명 언젠가,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내린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 것을 여원은 잘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남들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만을 위한 결정을 한 번쯤은 내려보고 싶었다. 다짐을 굳힌 여원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옷 전부 다 벗고 이리로 기어와요.”
그늘진 욕망으로 점철된 시선이 여원을 빈틈없이 옭아맸다. 고압적인 명령에 반사적으로 몸이 움찔 떨렸지만, 지금 이 순간 저만큼 그 역시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에 미약한 거부감은 금세 지워졌다. 여원은 홀린 듯이 옷을 벗어 내렸다.
맨살에 닿는 써늘한 공기에 유두가 뾰족하게 곤두섰다. 제헌은 오만한 시선으로 수치심으로 붉어진 여원의 가슴팍을 훑어 내렸다. 여원을 자발적으로 굴종시키는 데 성공한 지배자의 얼굴에 나른한 포만감이 번졌다.
“흐, 읏…….”
금방이라도 통째로 집어삼켜질 것만 같은, 오싹한 위기감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여원이 제헌에게 기어갔다. 코앞까지 다가온 섹스에 대한 두려움과 야릇한 기대감으로 아랫배가 저릿했다.
“하아…….”
나직한 한숨을 뱉어낸 제헌이 지퍼를 열어 성기를 꺼냈다. 반쯤 발기해 빳빳하게 일어선 기둥이 여원의 얼굴 근처에서 툭, 길게 퉁겨졌다. 음탕하게 젖은 향이 코끝에 비릿하게 퍼졌다. 거대한 성기에는 굵은 핏줄이 우둘투둘하게 불거져 있었다.
“빨아요.”
흉포한 성기가 눈앞에 드밀어지자 고개가 절로 뒤로 젖혀졌다. 제헌은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듯 여원에게 지시했다. 나신으로 무릎 꿇은 여원은 이제 꼼짝없이 제헌의 성기를 빨아야 했다.
“네, 흑, 네에…….”
충분히 각오하고 왔는데도 쉽사리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맥없이 입술만을 달싹이자 여원에게 드리운 제헌의 시선이 한층 짙어졌다. 여원은 덜덜 떨리는 손을 제헌의 다리 사이로 뻗으려 했다.
“손 쓰지 말고.”
제헌이 여원의 뒷덜미를 단단하게 잡아챘다. 눈매가 빠듯하게 가늘어지자 여원을 내려다보는 제헌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비틀렸다. 제헌은 스스로의 욕망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본격적으로 여원을 길들일 준비를 이미 마쳤다.
“왜요. 내가 여원 씨 나쁜 짓 시키는 것 같습니까?”
“흐윽…….”
압도적으로 몰아치는 긴장감에 여원은 눈물이 절로 고였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제헌이 멈출까, 비틀어진 질문에는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도리질했다.
“아니, 아니요…….”
여원이 젖은 목소리로 달싹였다. 정말 아닌가? 더듬더듬 대답하면서도 실은 확신하지 못했다. 제헌은 다정하지만 위험하고, 배려심 넘치지만 음험했다. 어느 쪽이 진짜 모습인지 좀처럼 가늠되지 않았다.
“흣, 응, 우응…….”
그러나 처음부터 모든 게 제헌이 놓은 덫이라고 할지라도 여원은 기꺼이 사로잡히고 싶어졌다. 색이 짙은 입술을 동그랗게 벌린 여원이 제헌의 귀두 끄트머리를 입에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