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3)

11.

서재를 정리해야 한다는 핑계로 선우는 태화의 방으로 옮겨졌다. 수갑을 풀어 보려고 어찌나 노력했던지 손목 살갗이 돌아가면서 전부 벗겨져 있었다. 그 덕에 선우는 수갑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대신 발목에 족쇄가 채워졌다. 어디서 맞춰 오기라도 했는지 선우의 발목에 꼭 맞는 사이즈라 아무리 버둥거려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선우가 태화의 방에 갇히자 별수 없이 방 주인인 태화는 선우의 방에서 자야 했다.

선우가 밥을 먹지 않은 지도 벌써 엿새째였다. 일부러 단식 투쟁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음식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렸다. 그런 상태이니 입 안으로 뭘 넣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렇게 많던 식탐이 다 어디로 갔는지 선우는 그저 버쩍 마르는 목만 축여 가며 겨우겨우 살아 냈다. 선우의 상태를 잘 알면서도 태화는 꼬박꼬박 식사를 들였다. 처음에는 몇 번 쟁반을 엎던 선우도 사흘째 되었을 때부터는 식사가 들어와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용변은 태화가 하루에 세 번 방문을 열어 줬을 때만 해결 가능했다. 씻는 것도 혼자 씻을 수 없었다. 태화가 보는 앞에서 씻어야 했다. 가축이나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선우는 오늘도 밥을 먹지 않았다. 태화가 점심에 잠깐 들러 넣어 주고 간 식사는 그대로 저녁까지 남아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돌아온 태화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선우가 있는 방문부터 열었다. 발치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쟁반을 봤다. 점심에 들러 놓았을 때와 비교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대로였다.

“씨발.”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쟁반을 치워 왔던 태화는 무슨 일인지 대뜸 욕을 갈겼다. 답답한 듯 넥타이를 풀어 바닥으로 던지더니 쟁반을 들고 선우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앉았다. 말라비틀어져서는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선우를 억지로 일으켜 앉혔다. 워낙 힘이 빠져 선우가 이리저리 휘청대자 어깨를 단단히 잡아 고정했다.

“먹어.”

말했으나 선우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아니, 들 힘이 없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말랐는데 며칠 굶었더니 지금은 난리 통에 피죽도 못 얻어먹은 피난민 꼴이었다. 어깨뼈가 유난히 더 도드라져 보였다. 태화는 숨을 낮게 뿜어내더니 선우의 턱을 잡아 올렸다.

“먹어.”

시선을 한번 맞춰 줄 만도 한데 선우는 끝까지 태화를 외면했다. 멍한 시선은 오른쪽 허공 그 어디를 보고 있는 듯했다. 태화는 선우가 사람 속을 썩이려 일부러 시위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오히려 선우의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선우는 차마 태화를 쳐다볼 수 없었다. 쳐다보지 않는 게 아니라 쳐다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눈이 마주치면, 저를 걱정하는 듯한 눈빛을 찰나라도 마주한다면 헛된 희망을 품을까 봐 겁났다.

이렇듯 다정한 사람인데 그럴 리가 없다고, 고약하고 못된 장난을 치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할까 봐 두려웠다. 부모를 죽인 원수라는 걸 까맣게 잊고 또다시 반해 버릴까 봐, 일부러 힘이 죄 빠진 얼굴로 시선을 흩트렸다.

“최선우.”

부른다고 선우가 반응하는 일은 없었다. 태화는 결국 짧게 혀를 차고 선우의 뺨을 우악스레 틀어쥐었다. 한 손으로 뭉그러뜨리듯 잡자 어쩔 수 없이 입이 벌어졌다. 밥 한 숟가락을 떠 벌어진 입술 사이로 억지로 밀어 넣었다. 그제야 선우는 눈을 힘주어 떴다. 커다랗게 뜬 눈을 황망하게 움직이다가 인상을 콱 찌푸렸다.

여전히 시선은 내리깐 채 태화를 밀어 냈다. 조금 전까지는 곧 죽을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더니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밀어 내는 힘이 꽤 강했다. 발악하듯 두 팔을 버둥거리고 발로 쟁반을 툭 차 버리자 차려 놓은 밥상이 엎어졌다. 그런데도 태화는 멈추지 않았다. 아직 그릇에 남아 있는 것들을 떠 와 꾸역꾸역 먹였다.

“네 스스로, 이 지옥에, 굴러들어 왔으면, 끝까지, 끝까지 살아야지.”

말을 꾹꾹 뱉을 때마다 밥이며 반찬이며 작은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참다못한 선우는 욱 소리를 내며 입 안에 있는 걸 전부 뱉어 냈다. 넣으면 뱉고, 넣으면 뱉고, 하는 게 반복되자 태화도 수저를 내려놓고 손으로 제육볶음을 집어 억지로 쑤셔 넣었다. 다시 뱉어 내려고 하는 걸 이번에는 턱을 꽉 밀어 올려 입을 벌리지 못하도록 했다.

“여기서 나랑 같이 살아 줘야지.”

그 말을 하는 순간 선우는 한 번 더 욱 소리를 냈다. 이번에도 잔꾀를 부린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토악질했다. 살짝 벌어진 틈으로 음식물이 나오더니 입이 완전히 열리자 지금까지 밀어 넣었던 게 전부 와르르 쏟아졌다. 씹지 않아 형태가 그대로 유지된 것들이 모조리 나와 바닥이며 쟁반, 태화의 정장은 물론이요, 선우의 옷도 더럽혔다. 먹은 게 없으니 음식물과 섞여 나오는 건 누런 위액이 전부였다.

“우욱! 욱……. 끅!”

선우는 아예 작정한 것처럼 계속 욕지기질했다. 일부러 더 그러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들어간 게 없는 위에서 올라온 액이 목을 다 상하게 만들었다. 목구멍이 타는 듯이 뜨거운 감각에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며칠 동안 깎지 않은 손톱으로 긁자 금세 피부가 벗겨졌다. 벌건 줄이 죽죽 그어지는 동안 태화는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뜨고 선우의 손목을 잡아챘다. 족쇄를 풀어 주고 그대로 안아 들어 욕조로 가 내려놨다.

“씻어.”

그때까지도 선우는 구역질 소리를 멈추지 못했다. 입술은 그새 퉁퉁 불어 번들거렸고, 턱 밑으로 덜 떨어진 밥알이 붙어 있었다. 정말 메스꺼운 듯이 가슴까지 쾅쾅 쳤다. 씻을 생각이 별로 없어 보였다. 아니, 생각이 아니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사이 태화는 더러워진 옷을 툭툭 벗어 던졌다. 드로어즈 하나만 걸친 채 선우를 내려다봤다.

“내가 씻겨?”

그 말을 듣고서야 선우는 주섬주섬 움직였다. 샤워기 하나 드는 데에도 팔이 후들거려 고생했으나 태화가 다가오기 전에 먼저 움직였다.

당신 손이 내 몸에 닿는 게 싫어. 끔찍해……. 지독할 정도로 싫어.

되지도 않는 주문을 외우면서 물을 틀었다. 처음에는 옷을 벗어야 하는 것도 잊고 옷 위로 샤워기 물을 끼얹다가 한참 만에야 살짝 돌아온 정신으로 옷을 벗었다. 그렇다고 정상처럼 굴지는 않았다. 뜨거운 김이 펄펄 나는 물을 맞으면서도 뜨겁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얀 살결이 벌겋게 익는 동안에도 선우는 맹하게 몸을 슥슥 문질렀다. 보다 못한 태화가 다가왔다.

“제대로 된 시위를 하고 싶으면 네 몸을 상하게 할 게 아니라 날 아프게 해야지. 저번처럼 물어뜯기라도 하든가.”

적절한 온도를 맞춰 주며 짜증스레 말했다. 선우는 태화의 팔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난번에 씹어 놨던 곳에는 잇자국을 따라 아직도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흉터가 남을 것만 같았다.

“이쪽이 더 효과적일 거 같아서 그래요.”

나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주 오랜만에 나온 선우의 목소리였다.

“맞죠?”

선우는 태화를 올려다봤다. 팔뚝을 깨문다든지, 주먹이나 발로 때린다든지 하는 걸로 태화가 아파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더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다.

서태화가 저만큼이나 아파할 또 다른 방법.

골몰하다 나온 결론은 하나였다.

서태화는 본인보다 내가 아픈 게 더 싫은 사람이다.

그걸 떠올리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인정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태화에게 그런 인간적인 감정이 남아 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서태화는 그냥 그 자체로 인간이 아니어야만 했고, 괴물이어야 했다. 이 세상에 감정 있는 괴물이 어디 있는가.

선우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고개를 숙였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발끝으로 찰박찰박 물장구를 쳤다. 욕조 물이 차오르길 기다렸다. 차오르고 차오르고 차오르다가 이대로 잠겨 죽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왕이면 태화와 함께 죽었으면 했다. 그러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제가 먼저 죽고, 남은 서태화가 몇 날 며칠이고 괴로워하다가 죽는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만 같았다.

예전 같으면 괴로워하기는커녕 귀찮은 거 잘 뒈졌네, 하고 홀가분한 얼굴을 했겠지만, 지금의 태화는 적어도 가슴이 뜨끔 질리기는 할 것 같았다.

그때 담배 냄새가 느껴졌다. 슬쩍 쳐다보니 태화는 어느새 세면대에 기대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담배 냄새에 익숙지 못하다는 걸 알고 제 앞에서는 태우지 않았는데 이젠 그런 배려 따위 해 줄 마음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별로 서운하지 않았다. 다만 쉬지 않고 태우다 보니 좁은 욕실 안이 순식간에 연기로 가득 찼다. 선우는 별수 없이 기침했다. 연신 콜록대자 옆에서 쯧,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가지가지 하네.”

태화는 못된 말을 하고, 담배도 끄지 않았다. 어쩐지 너무 냉정하게만 들렸다. 선우는 찰나 몸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컥 올라오는 감정에 휘둘렸다.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고작 이깟 일에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뱃속에 고여 있던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훅 하고 올라왔다. 명치끝에 매달려 있던 것이 드러난 것도 같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아주 오래된 과거에서부터 거슬러 올라온 것임이 분명했다.

이 순간 선우는 꽃다방의 쪽방으로 돌아갔다. 혼자서만 태화를 좋아하고 그는 선우를 알지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빌어먹게도 그랬다.

서태화는 여전히 날 모르는데, 난 여전히 서태화가 좋으니까.

서태화를 아프게 하고 싶다는 마음과는 별개로 선우는 아직도 그에게 마음이 매달려 있었다. 불공평했다.

“아저씨가, 끔찍해요. 끔찍하게 싫어요…….”

갈잎처럼 버썩하게 마른 목소리가 연기 사이를 부유했다.

“끔찍하고 지독해.”

평생 벙어리로 살아왔다가 처음으로 말문이 트인 것처럼 말하는 게 영 어색했다. 목을 울리고, 혀를 굴리고, 입술을 달싹이는 일련의 과정이 생경했다. 낯설고 불편했다. 불쾌하기까지 했다.

그렇더라도 선우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말로 해야만 했다. 싫다고 입 밖으로 꺼내야만 태화가 정말 싫은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데도 싫어하는 게 힘들어 그저 미울 뿐이었다. 분하고, 억울했다.

“아저씨가 싫어.”

한 번 더 곱씹듯 말했다. 습기와 연기와 열기로 가득한 욕실 안에서 선우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마음껏 싫어해.”

태화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치 오늘의 운세 점수는 65점이라고, 감정 없이 읊는 듯한 어투였다. 태화의 말 뒤로 담배가 사그라드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선우는 점점 더 자욱해지는 연기 속에서 무릎을 잔뜩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울지 않으려고 독하게 입술을 깨물고 버텼다.

악에 받친 얼굴로 꿋꿋이 몸을 씻었다. 어딘가로 팔려 가는 제물이 된 심경으로 살갗이 벗겨질 정도로 벅벅 문질러 닦았다. 태화의 몸에서 나는 것과 같은 향기가 나는 바디 워시를 듬뿍 짜 몸을 문질렀다. 문득 선우는 태화가 악신이 됐다고 생각했다. 신이 악신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또, 태화가 영원히 불행만 가져다주는 악신이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정말 마음껏 증오할 수 있도록.

* * *

선우는 오랫동안 밥 먹는 것으로 태화와 씨름했다. 억지로 먹이면 토했고, 그렇다고 가만히 놔두면 먹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가는 선우 모습에 태화는 이러다간 정말 최선우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졌다.

스스로 혀를 깨물고, 목을 매달고, 손목을 그을 용기는 없으니 이런 식으로 죽으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태화는 선우를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죽게 놔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선우를 기절시켜 놓고 고 박사를 불러와 영양제를 맞췄고, 잠든 사이에 몸을 깨끗이 씻겼다.

“내가 죽지 않길 바라요? 오래도록 날 가지고 놀려고 그러는 거죠?”

건조한 목소리로 묻는 말에 태화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제발 오래오래 살아 나를 좀 즐겁게 해 달라고. 최선우 가슴에 대못을 박아 대는 일이 잦아졌다.

감금된 지 한 달 정도 지날 무렵부터는 선우도 무언가 체념한 듯했다. 30일 만에 처음으로 스스로 밥숟가락을 들었다. 근육이 빠져 힘이 부족해진지라 몇 번이고 숟가락을 놓치기는 했으나 혼자서 밥을 먹었다. 물론 태화가 퍼 준 것의 반의반 공기도 먹지 않았지만 한술 뜨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발전이었다. 태화도 더는 먹는 것 가지고 뭐라고 하지 않았다.

오늘도 선우는 참새가 모이를 쪼아 먹은 수준으로 먹어 놓고 다 먹었다며 수저를 내려놨다. 태화는 한 수저만 더 먹으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모르는 척 쟁반을 들고 나왔다. 지난번에 억지로 한 숟가락 더 먹였다가 그전에 먹은 것들까지 전부 게워 낸 적이 있던 까닭이었다. 태화는 선우가 남긴 밥을 먹었다. 평소 먹는 양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지만, 이상하게 배가 고프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런 상태라면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지 않을 것만 같았다.

먹은 걸 설거지하는 동안에는 하는 수 없이 여러 상념이 몰려들었다. 이대로 1년이고 2년이고 버티면 최선우도 지칠 게 분명했다. 이렇게 사는 게 지겨워서라도 예전처럼 방싯방싯 웃고 안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날을 잡고 제 뒤통수를 후려갈기든 제 뱃가죽에 칼을 꽂아 넣든 그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최선우가 이런 생활에 지치고 지쳐 스스로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는 게 중요했다. 복수를 위해 연기하는 것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태화는 그날이 올 거란 믿음을 굳건히 가졌다.

지금까지 제 뜻대로 되지 않은 적이 없지 않던가. 최선우 그게 애를 좀 먹이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 제 손아귀 안에 있었다. 모든 게 평화로웠다. 그렇게 믿으면 그렇게 되었다. 마지막 그릇까지 깨끗하게 헹군 뒤 선우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봤다. 역시 최선우는 자고 있었다. 요즘 최선우는 자고, 일어나서 먹고, 멍하니 있다가 자고, 다시 일어나서 먹는 것만 반복했다. 깨어 있을 때는 항상 어딘가가 결핍된 낯을 하는데 잠들었을 때만큼은 세상 편해 보였다.

어쩌면 죽는 연습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럼 태화는 늘 선우에게 다가가 코 밑에 손을 대 보고, 손목의 맥을 짚어 보고, 가슴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었다. 선우가 살아 있음을 느낀 뒤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나왔다.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렇게 선우의 살결을 느끼고 나오면 언제나 자지가 벌떡 선다는 것이었다.

“뭘 했다고, 씨발.”

태화는 비식거리는 낯으로 아랫도리를 주물럭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한 달 동안 이래저래 놀게 된 자지는 이제 최선우의 숨소리만 들어도 발기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제멋대로 흥분한 자지가 짜증 나면서도 우스웠다.

급히 옷을 벗고, 샤워기 아래까지도 가지 못한 채 세면대를 붙들고 섰다. 대충 물을 틀어 놓고 좆을 쥐었다. 몇 번 문지르지 않았는데도 좆물이 뚝뚝 흘렀다. 세면대 안으로 소용돌이치는 물결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프리컴을 보며 손을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역시 딸감은 최선우였다.

“후, 씹…….”

가느다랗고 하얀 손으로 제 자지를 쥐던 선우를 떠올렸다. 손도 조그마해서는 한 손에 다 감싸 쥐지도 못하고 눈치를 보던 얼굴이 생생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저를 느끼게 할까, 짱구를 굴리며 쳐다보는 시선을 떠올린 태화는 고개를 푹 숙였다. 뭐 좋은 거라고 말간 혀를 내어 핥으면서 웃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무리하지 말라니까 괜히 무리해서 목구멍까지 처넣고 잘했다고 칭찬해 주길 바라며 시선을 올리던 것, 결국 못 참고 눈물을 질질 짜내면서도 힘들다는 말 한번 안 하던 것, 정액 범벅이 된 낯짝으로 생긋 웃던 거나, 부끄러워하면서도 스스로 다리를 벌리고 저를 기다리던 음란함이 전부 기억났다. 아저씨, 아저씨……! 하고 우는 목소리로 부르면 조루도 아닌데 금방 쌀 것 같아서 곤란하길 여러 날이었다.

녹진하게 풀린 내벽을 처음 쑤시고 들어갔던 게 저라는 사실과 지금도 그 구멍 사정을 아는 건 저뿐이라는 것에서는 짙은 정복감을 느꼈다.

“윽, 아…….”

좆물이 길게 늘어져 하나의 길을 만들었다. 태화는 그것들을 모아 다시 손에 치덕치덕 묻히며 뿌리까지 뽑아내듯 쭉쭉 흔들었다. 저를 보기만 하면 뽀르르 달려와 와락 안기던 선우를 떠올리는 순간 세상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정액이 우르르 쏟아졌다.

평소와는 달리 양이 별로 많지 않았다. 좆 안으로 여전히 찌꺼기들이 고여 있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어딘가 둔한 감각에 억세게 문질러 봤지만, 사정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살갗만 퉁퉁 부어올라 따가웠다. 마지막으로 벌름거리는 좆구멍을 검지로 꾹 찍어 누른 태화는 두 손으로 세면대를 부여잡았다. 아직 완전히 가지 못한 좆이 펄떡거리는 게 거울 속에 그대로 비췄다.

“분위기도 못 맞추는 새끼.”

괜히 좆을 툭 치고 돌아서려는데 선우의 노란색 칫솔이 눈에 들어왔다. 칫솔모 사이로 정액이 몇 방울 성글게 맺혀 있었다. 바꿔 줄까 하다가 말았다. 정액 찌꺼기도 단백질인데, 선우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샤워하는 내내 발기가 풀리지 않았다. 자지를 몇 번 더 찰싹찰싹 때리다가 이게 다 뭐 하는 짓인가 싶어 피식 웃었다. 다 씻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쿵쿵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우가 있는 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또 뭔 지랄이냐, 우선아.”

혼잣말할 때면 으레 ‘우선’이라고 부르는 습관이 또 나왔다. 가만히 문을 쳐다봤다.

쿵, 쿵, 쿵.

같은 소리가 또 들렸다. 난리 치는 소리는 아니었고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마치 이리로 좀 와 보라는 신호 같았다. 태화는 바지만 챙겨 입고 문 앞으로 향했다. 쿵, 쿵……. 세 번째 노크 소리가 이어지기 전에 문을 열었다.

“자위했죠?”

문을 열자마자 대뜸 튀어나온 말이었다. 태화는 미간을 찡긋 구기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선우는 문 바로 앞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어앉아 있었다.

“자라.”

다시 문을 닫으려는데 선우가 문틈으로 팔을 불쑥 내밀었다. 태화는 본능적으로 문을 빠르게 열었다. 하마터면 선우의 팔이 문틈에 끼었을 뻔한 상황이었다. 순간 짜증이 확 올라온 태화가 신경질적으로 쳐다보자 선우가 얼른 손을 붙들었다.

“혼자 하는 걸로는 이제 만족 안 되죠? 제대로 못 싼 거 알아요.”

“자라고.”

“이제 나 아니면 싸지도 못하잖아요.”

선우는 계속 제 할 말만 했다. 태화는 선우를 내려다보며 아예 인상을 험하게 구겼다. 최선우가 지금 뭘 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같잖지도 않은 유혹이었다. 어떤 의도로 하는 건지 속내가 빤하게 보였고, 유혹이랍시고 하는 행동들이나 언어들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이런 것에 넘어가는 놈이 있다면 그건 병신이었다. 그리고, 그런 병신이 여기 있었다.

“그래, 이젠 너 아니면 못 싸겠다. 씨팔.”

태화는 방 안으로 성큼 발을 들였다. 선우의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휙 젖혔다. 허리를 깊게 숙여 입을 맞췄다. 자기가 먼저 꼬셔 놓고서는 반발심 때문인지 선우는 쉽사리 입술을 열지 않았다. 태화는 익숙한 듯 선우의 아랫입술을 깨물었고, 결국 피를 봤다. 오랜만에 느끼는 선뜻한 흥분감에 세기 조절을 못 했는지 피가 꽤 많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선우는 아프다는 소리 한번 하지 않고 입을 열어 태화를 받아들였다.

태화는 어쩐지 목구멍이 꽈악 막힌 기분이 들었다.

결국 이렇게 되었지. 너와 나는 이게 가장 잘 어울리지. 개처럼 붙어먹는 사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개새끼가 사람 흉내를 내려니 탈이 났던 거지. 씨발, 개 같은 시간.

태화가 선우를 번쩍 안아 들었고, 선우는 그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어딘가에서 사카린 냄새가 났다. 누구에게서 기인한 냄새인지 알 수 없었다. 달큼한 향기 속에서 태화도 선우도 눈을 감았다. 누구는 상대를 죽일 생각을 했고, 누구는 상대보다 먼저 죽을 생각을 했다.

바닥으로 족쇄 두 개가 덩그러니 나뒹굴었다. 근처로 태화와 선우의 옷가지가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흐, 으…….”

선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부들부들 떨었다. 태화 위에 올라탄 자세였다. 먼저 도발하고, 꿋꿋이 먼저 올라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막상 뒤로 뜨거운 기둥이 닿자 긴장되는 건 별수 없었다. 몇 번 문지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팽팽하게 부풀어 좆물을 흘려 내는 좆은 언제 봐도 버거웠다.

더군다나 몸을 섞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된 일이라 더 그랬다. 봉사를 할 거면 제대로 하라는 말에 태화의 자지를 빨고, 스스로 구멍을 넓혀 이제 겨우 삽입하려는데 아무리 독한 마음을 먹었다고 해도 두려움이 남았다.

태화의 것은 컸다. 커도 너무할 정도로 컸다. 숱한 정사를 통해 그 크기를 잘 알기 때문에 겁이 났다. 아플까 봐 겁이 나는 게 아니라, 이게 안을 넓히고 들어오면 얼마나 기분 좋은지 아니까. 더는 태화 앞에서 무너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자지가 들어오면 의지와는 상관없이 뇌가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몸이 절로 반응했다. 그걸 알기에 벌써부터 허리가 달달 떨렸다.

“고사 지내?”

선우는 고개를 팩 들었다. 태화는 한참 전부터 계속 이죽거렸다. 펠라티오 할 땐 먼저 꼬셨으면서 성의가 없다고 지랄했고, 굳이 입 안에 사정하며 네가 좋아하는 거니까 모조리 삼키라며 비식거렸다. 면도방을 찾은 손님처럼 행동했다. 선우는 그 모든 수모를 굳건히 견뎠다. 이번에도 칭얼대는 대신 아랫입술을 독하게 앙다물고 태화의 자지를 쥐었다. 좆물로 젖은 요도구를 뒷구멍에 비벼 촉촉하게 만들고 천천히 내려앉았다.

“흣…….”

가랑이 사이로 손을 뻗어 좆을 더듬거리며 얼마나 들어왔는지 가늠했다. 고작 귀두 정도 들어온 깊이였다. 그런데도 선우는 내벽이 꽉 들어찬 기분이 들었다. 더 들어오면 안 될 것 같았다. 기분 좋은 곳이 얼마 남지 않은 게 느껴져서 차마 더 내려가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 태화가 엉덩이를 철썩 차지게 때렸다.

“읏……!”

“이 정도밖에 못 해?”

“흣, 흐으…….”

“자꾸 내숭 떨래? 먼저 하자고 꼬셔 놓고서 지금 뭔 지랄이야?”

한 번 더 매질이 떨어졌다. 살성이 약해 엉덩이에 손바닥 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태화는 구태여 벌겋게 질린 살덩이를 우악스레 쥐고 흔들었다.

“너 원래 잘 받잖아. 낑낑거리면서도 내 거 잘만 삼키잖아. 어린 게 발랑 까져서 섹스만 하면 좋다고 울었으면서 왜 이제 와서 내숭이야?”

‘내숭’이라는 단어가 두 번 연속으로 나오자 선우는 눈을 흘겼다. 오기가 생겼다. 태화 역시 자극에 취약하다는 걸 알았다. 저만큼이나 잘 느끼고, 저만큼이나 이 관계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문제는 인내심의 차이였다. 선우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조금 더 깊숙이 앉아 봤으나 귀두 갓이 은밀한 부분을 비벼 올리자마자 젖은 숨을 내뱉었다.

“하으……!”

저릿한 감각이 아랫배부터 시작해 사지로 번졌다. 재차 자극받았을 땐 아예 허리가 위로 퉁 튀어 올랐다. 다시 귀두 끝만 간당간당하게 물고서 밭은 숨을 내쉬자 태화가 한숨을 픽 내쉬었다. 연신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이 마른 허리를 억세게 틀어쥐었다.

“제대로 조여.”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화는 선우를 억지로 콱 내려 앉혔다. 덕분에 자지가 모습도 없이 내벽 안으로 쑥 밀려들어 갔다. 예민한 부분뿐만 아니라 온갖 데가 단단한 살덩이로 문질러지자 선우는 고개를 홱 젖혀 입을 벌렸다.

“악! 어, 허억, 흑……!”

“씨발.”

태화 역시 인상을 구겼다. 말로는 제대로 조이라고 했으나 뿌리 끝까지 넣자마자 좆이 끊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고통과 쾌감 사이 어디쯤을 달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더운 숨을 훅훅 쏟아 내며 슬쩍 선우를 올려다봤다. 선우는 아예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본인이 침을 흘리는 줄도 모르고 입을 아 벌린 채 신음했다.

“아, 아으! 잠, 아, 깊, 어…….”

선우는 그만 뒤로 휘청 넘어갈 뻔하다가 겨우 중심을 잡았다. 턱을 타고 흐르는 침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허겁지겁 태화의 복근 위로 손을 짚고 버텼다. 이 정도는 숱하게 겪어 왔다고, 이보다 더한 것도 하지 않았느냐고. 어떻게든 버텨 보려 했으나 태화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발끝이 곱아들고, 앙앙 우는 소리만 나왔다.

조금 전부터 탱탱하게 발기한 자지는 움직일 때마다 꺼떡이며 태화의 복근 위로 대가리를 처박아 댔다. 비어져 나온 좆물 때문에 태화의 배는 온통 번들거렸다.

“누구 좋으라고 하는 건지, 씹, 모르겠네.”

태화는 작정한 듯 계속 못된 말만 골라 해 댔으나 다행인지 선우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쾌감이 너무 크기도 하거니와 이미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쾌락이면 쾌락이었고, 다른 무언가라면 또 다른 무언가였다.

“아흐윽!”

태화가 자지를 깊게 치대는 순간 선우는 큰 신음을 내지르고 풀썩 쓰러졌다. 땀과 좆물로 절은 몸뚱이를 비벼 가며 태화를 담뿍 끌어안았다.

“하, 으응……. 아, 아읏……!”

흐느끼는 듯이 예쁜 신음을 흘렸다. 태화의 귓가에 머무르며 연신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냈다. 붉게 달아오른 귓불을 살살 핥고, 앓는 소리를 밀어 넣기도 했다. 온갖 느끼는 신음을 쏟아 내면서도 두 손은 착실하게 움직였다. 시트를 움켜쥐는 척 더듬더듬 움직여 베개 밑으로 손을 쑤욱 집어넣었다. 손끝으로 무언가가 만져졌다. 태화가 씻는 동안 협탁에서 꺼내 숨겨 놨던 볼펜이었다.

태화는 선우를 이 방에 가둔 날 방 안에 있던 가위와 칼, 온갖 뾰족한 것들은 다 치웠다. 죽고 싶게 만들어 놓고서는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게 했다. 물론 선우 역시 죽을 생각은 없었다. 한때는 죽고 싶기도 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다만 손에 집히는 펜을 만지작거렸다. 다른 건 다 치웠으면서 볼펜은 놔둔 게 웃겼다. 이런 걸로는 죽지 못할 거라 생각했을 게 분명했다.

죽진 못해도 죽일 수는 있지 않나? 바보 같은 사람.

선우는 지난날 태화가 알려 줬던 걸 상기했다.

‘여기. 여기 찌르면 금방 죽을 거야.’

그때 태화는 제 손에 들린 칼끝을 본인의 목젖 옆에 직접 겨눈 채 죽이는 법을 가르쳐 줬었다.

차라리 그때 죽였어야 했나?

생각하던 선우는 아래를 뭉근히 가르고 들어오는 열기에 숨을 삼켰다.

“흐, 으응…….”

신음을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정말 태화가 자지를 박아 넣을 때마다 저절로 신음이 나왔다. 원수의 자지에 쑤셔 박혀 가며 달뜬 소리를 내는 동시에 볼펜을 꾹 말아 쥐었다. 목젖 옆. 한 번 더 상기하는데 갑자기 태화가 등허리를 꼬옥 껴안았다.

“하…….”

짙은 숨소리까지 내며 선우의 어깨로 눈두덩이를 묻었다. 몸이 틈도 없이 맞붙자 팔딱팔딱 잘도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그 마음 씀씀이가, 빌어먹게도 그게, 여실히 느껴졌다.

아픈 듯 달달 떠는 허벅지를 토닥여 주고, 이전보다 더 느릿한 속도와 부드러워진 허리 짓까지 느껴 버린 선우는 순간 바짝 얼어붙었다. 착각이라는 걸 아는데, 태화는 아무 의미 없이 하는 행동이라는 걸 아는데……. 선우는 자꾸만 태화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했다. 몇 날 며칠 혼자 침대 위에서 덩그러니 밤을 보내야 했기에, 익숙한 온기를 넘어서 열기가 느껴지자 목구멍이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분노를 닮은 화기가 눈시울까지 번졌다.

“흑…….”

결국 울음소리가 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 앞에서 선우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다가 금세 고개를 저었다. 온몸을 기껍게 안아 주는 게 싫어 밀어 내듯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쥐고 있던 볼펜이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선우의 울음보다도 볼펜이 통통 나뒹구는 소리가 더 컸다. 선우는 눈물진 눈으로 태화를 쏘아보며 다짜고짜 두 손으로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죽어. 흐윽, 죽어, 개새끼야…….”

독한 말이 나갔다. 말만큼 행동도 독해야 하는데 우습게도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목을 쥐긴 쥐었는데 조르는 시늉만 할 뿐 도저히 강하게 찍어 누를 수가 없었다. 아랫구멍이 한없이 벌어져 집중하지 못하는 탓이라고 핑계를 대 봐도 비단 그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건 스스로가 더 잘 알았다. 선우는 우는 소리 없이 울었다. 숨죽여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다. 뺨을 적시고, 턱 끝에 맺혔다가 똑똑 떨어지는 눈물은 또다시 태화의 뺨을 적셨다.

“너, 날 죽이고 싶기는 해? 내가 밉긴 한 거야?”

여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숨구멍을 틀어쥐고 있는데도 태화는 전혀 괴롭지 않은 얼굴이었다. 안일하고 마음 약한 선우 덕분에 자유롭게 호흡할 수 있었다.

“네 인생을 망친 내가, 진짜 밉긴 해?”

그런데도 태화는 고마워하기는커녕 선우의 심장을 파고드는 말만 지껄였다. 잘 벼려진 칼날처럼 서슬 퍼런 게 날아와 선우의 가슴에 콱 박혔다.

나는 이 사람이 정말 밉나?

선우가 눈을 크게 뜨는 순간 태화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바람에 뒤로 발라당 넘어간 선우는 한순간 태화 밑에 깔리게 되었다.

“윽! 저리, 흣, 비켜!”

순간적으로 정신이 돌아온 선우가 발악해 봤지만, 태화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 짓을 더욱 빠르고 세게 했다. 퍽퍽, 강한 소리를 내며 좆이 끝도 없이 드나들었다. 선우는 악 소리를 내면서도 발버둥 치고 주먹으로 태화의 가슴을 때렸다. 빠르게 박아 대는 것만으로는 선우가 얌전해지지 않자 태화는 다시 속도를 늦췄다.

“비켜, 흐윽, 비키라고……. 비, 아! 아읏, 아, 거기, 안 돼, 흑……. 싫어……. 아아!”

대신 선우가 좋아하고 자지러지는 지점을 긁듯이 비벼 대자 재깍 반응이 왔다. 선우는 도리질을 치면서도 좆을 착실하게 세웠다. 머리가 온통 쾌감으로 가득 들어찼다. 싫은데, 느끼고 싶지 않은데, 태화는 제 몸을 너무 잘 알았다. 여자보다도 더 높은 교성을 지르며 달달 떠는데 갑자기 목구멍이 턱 막혔다.

“컥, 끄윽…….”

태화가 목을 억세게 틀어쥔 것이었다. 선우가 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두 손을 다 쓰고도 숨구멍 하나 제대로 막지 못한 선우와는 달리 태화는 한 손으로 쥐는데도 압박감이 상당했다.

“끅, 윽, 흐읏…….”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입 안에 고인 공기는 목구멍을 지나가지 못하고 되돌아 나가기 일쑤였다. 조금이라도 들이마셔 보려 용을 쓰면 쓸수록 태화의 악력은 더 강해졌다. 허리 짓도 멈추지 않았다. 일부러 귀두 끄트머리까지 느릿하게 빼냈다가 고환이 뭉그러질 만큼 깊게 박아 넣길 반복했다.

선우의 낯은 점점 벌겋게 질려 갔다. 숨이 부족했다. 폐포가 쪼그라드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온몸의 장기가 펄떡거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벽도 확 좁아졌다. 태화의 자지를 물어뜯을 듯이 옥죄고 비틀었다. 안 그래도 좁아터진 게 작정하고 조여 대자 태화도 낮은 신음을 흘리며 미간을 구겼다. 볼록 올라온 돌기를 쳐올리는 몸짓에 맞춰 선우가 펄떡 뛰었다.

“끄, 읏! 하읏, 아……!”

예상치도 못한 순간 사정이 이어졌다. 선우는 정액을 오줌처럼 쫄쫄 쏟아 내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 상태로 몇 번 더 추삽질하자 분수처럼 이리저리 튀기도 했다.

“이런 게 취향이었나 봐. 진즉에 말을 하지.”

말끝에 키들키들 웃는 소리가 매달렸다. 선우는 눈을 부릅뜨고 태화를 노려봤다. 손톱을 세워 태화의 손이며 팔이며 벅벅 긁어 댔다. 살점이 푹 파이고 피가 났으나 태화는 아픈 척도 하지 않았다.

“너, 너도, 읏……. 다른 새끼들이랑, 똑같아…….”

숨이 막히는 상황에서도 살려 달라고 말하는 대신 악에 받친 목소리를 냈다. 잔뜩 충혈된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었다. 표독스럽게 노려보는 눈빛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몸부림치느라 눈물 한 방울이 도록 흐르자 태화는 다정을 가장해 눈물을 훔쳐 줬다.

“그럼.”

목을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인간 백정 새끼가 다른 놈들이랑 다르면 뭐 다르려고.”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웃음기인지 울음기인지 모를 게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았다.

“흑…….”

선우가 끝까지 살려 달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자 결국 태화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쯧 혀를 차고 손을 풀었다. 순간적으로 공기를 빠르게 들이켠 선우는 사레라도 들린 것처럼 크게 기침했다. 내내 조여 있던 목을 잡고 옆으로 고개를 틀어 캑캑거렸다.

이제야 살 것 같았다. 정말 조금만 늦었어도 죽을 뻔한 상황이었다. 깜빡 지옥문 앞에 서 있다가 돌아와서는 연신 거친 숨소리를 터뜨렸다. 이 정신 없는 와중에 오른쪽 다리가 덜렁 들리는 게 느껴졌다. 뭔가 싶어 겨우 시선을 올려다보자 제 다리를 어깨에 걸친 태화가 씩 웃고 있었다.

“사람 한참 잘못 봤어요, 최선우 씨.”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허리 짓이 이어졌다. 자세가 바뀌자 자극받는 곳도 달라져서 이전과는 또 다른 쾌감이 흘렀다. 아예 서로의 회음부를 문지르듯 끝까지 처넣고 뭉근히 비벼 댈 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아흑!”

배 속이 곧게 펴지는 감각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선우는 파르르 떨면서도 태화를 쏘아봤다. 눈을 흘기기는 하는데 눈물에 젖은 시야는 뿌옇기만 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시야가 밝아지기도 하고, 다시 흐려지기도 했다. 어른어른 태화의 낯이 불분명하게 보였다. 흐릿했다. 당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감도 안 잡혔다.

웃고 있는지, 화가 났는지. 그것도 아니면 울고 있을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한번 고삐가 풀린 두 사람은 죽을 듯이 붙어먹었다. 태화도 선우도 빼지 않았다. 태화는 회사도 나가지 않았고, 선우도 그와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죽는 것처럼 몸을 맞붙였다.

문제는 선우의 체력이었다. 안 그래도 잘 먹지도 못한 상태에서 스트레스까지 쌓여 있는데 갑작스럽게 태화를 받아들이고, 커다란 걸로 아래가 들쑤셔지자 체력적으로 감당하기 힘들었다. 결국 선우는 새벽부터 시작된 정사를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오전 오후가 지나 저녁이 되었을 즈음에 정신을 놓아 버렸다.

태화는 그러고도 뭔가 조급한 사람처럼 선우를 붙들었다. 기절해서 미동도 없는 몸을 끌어안고 안을 끝없이 파고들었다. 선우가 정신을 잃고 나서야 선우야, 선우야, 불러 가며 뺨에 입술을 묻었다. 선우는 제 이름을 부르는 태화가 꿈결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달이 떴을 때는 태화도 지쳐 늘어져 선우 옆에 누웠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체액으로 범벅이 된 몸을 당겨 와 품에 가둬 안고 눈을 감았다. 새큼한 땀 냄새와 농익은 정액 냄새가 진동했다.

먼저 눈을 뜬 건 선우였다. 창밖이 어두웠다. 가로등이 켜진 걸 보면 자정은 넘긴 시간 같았다. 얼마나 잤는지 몰랐다. 잠깐 자다 일어난 건지, 하루가 꼬빡 지난 건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자다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죽은 듯이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이었다. 몸이 무겁게 짓눌리는 게 느껴졌다. 눈을 계속 깜빡이며 눈에 뿌옇게 낀 막을 거둬 내자 거대한 형체가 보였다. 태화였다.

태화에게 꼼짝없이 안긴 상태라는 걸 자각한 선우는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빠져나오기 위해 낑낑거리는데 아주 살짝 움직인 것뿐인데도 허리가 우지끈 끊어지는 통증이 올라왔다. 허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다 아팠다. 태화가 자꾸만 깍지를 껴 오던 손가락 마디마디도 아팠고, 느끼느라 곱아들던 발가락도 아팠다.

몸을 얼마나 물고 빨고 씹어 댔는지 움직일 때마다 살갗이 아렸다. 우느라 짓무른 눈가는 따가웠고, 입술에는 피딱지가 앉은 게 느껴졌다. 섹스가 아니라 한바탕 전쟁을 치른 것 같았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번 정사는 정말 전쟁과도 같았다.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눈을 뜨고 서로를 탐하기 바빴다. 누가 누가 더 상대의 마음에 비수를 꽂나 내기하는 것처럼 아픈 말만 지껄였고, 늘 더 상처받는 건 선우 쪽이었다. 적어도 선우 생각에는 그랬다.

상대를 죽이겠다고 목까지 졸랐으면서, 이렇게 붙어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우는 아픈 신음을 참아 가며 몸을 옭아매고 있는 태화의 팔과 다리를 치웠다. 태화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든 듯 보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태화를 내려다봤다. 미간 주름이 져 있었다. 한동안은 안 그러더니 또다시 버릇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선우는 손끝을 움찔거리며 펴 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말았다. 한숨을 푹 쉬는데 불현듯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뭘까? 뭐가 홀가분해진 걸까?

가만 생각해 보는데 침대 밑에 떨어진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첫 번째로는 태화를 죽이려 챙겨 놨던 볼펜이었고, 두 번째로는 무겁게 널려 있는 족쇄였다.

“어……?”

선우는 제 두 다리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다시 족쇄를 봤다. 번갈아 보길 몇 번 반복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족쇄가 풀려 있었다. 멍하니 방문을 쳐다봤다. 방문 역시 열려 있었다. 순식간에 잠이 전부 달아난 눈을 끔뻑이다가 아래를 빼꼼 내려다봤다. 태화는 아직 한밤중이었다.

지금이라면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지금밖에 기회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선우는 벌써 침대 밑으로 내려와 서 있었다. 태화의 낯 앞에 손을 휘휘 저어 한 번 더 잠든 걸 확인하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발소리는 물론 숨소리도 들리지 않게 살금살금 나와 옷방으로 들어갔다. 허연 체액이 말라붙은 몸을 닦을 겨를도 없었다. 우선 아무 옷이나 챙겨 입고 눈에 보이는 가방을 들어 손에 집히는 대로 옷을 쑤셔 넣었다. 돈도 챙겨야 하나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태화에게서 탈출하는 데에 있어 그의 돈을 들고 가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옷만 챙기자 생각하며 부리나케 손을 움직이고 있는데 또 다른 데로 생각이 튀었다.

지금 내가 하는 게 정말 탈출인가? 누구로부터……? 무엇으로부터? 아니, 아니지……. 그게 아니지…….

지금 걱정할 건 그게 아니었다. 선우는 아랫입술을 꾹 눌러 다물고 울음을 겨우 삼켰다.

“이대로 가면 정말 끝인 거야.”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방을 싸던 손이 멈췄다. 맹한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봤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하얀 달빛이 동그랗게 번졌다.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 순간 스스로 뺨을 찰싹 때렸다. 주먹으로 머리도 쥐어박고, 허벅지도 꼬집었다. 이런 안일한 생각으로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서태화는 내 부모님을 죽였어……. 정신 차려.”

부러 소리 내어 말하고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무슨 계절인지도 잊은 채 서랍을 열어 눈에 보이는 아무거나 꺼내 가방으로 욱여넣었다. 무질서하게 들어찬 옷 때문에 가방은 금세 빵빵해졌다.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어깨에 멨다. 침을 꿀꺽 삼키고 방을 나섰다. 이제 신발만 신고 나가면 되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빠른 걸음을 떼 현관으로 향하는데 현관 앞에 검은 물체가 보였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지라 저게 뭘까 싶었다.

검고 커다란 것, 서태화였다. 신발장 바로 앞에 우두커니 기대어 앉아 있는 건 분명 태화였다. 태화인 걸 알아본 순간 선우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희뜩 떨더니 그만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엉덩방아를 크게 찧었는데 놀란 마음이 더 커서 아픈 줄도 몰랐다. 침실에서 현관까지 가려면 선우가 있던 옷방 앞을 지나쳐야 했다. 짐 싸느라 정신이 팔려서 그랬는지 태화가 지나간 것도 몰랐었다.

“언제 나오나 했네.”

무릎 위에 걸친 두 손을 탁탁 마주치며 앉아 놀던 태화는 한숨을 푹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린 동작이었다. 선우와는 달리 한껏 여유를 부리며 다가왔다.

“왜 울어, 선우야.”

선우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내가 울고 있었나……?

의심할 겨를도 없이 눈물이 죽 흘러내렸다. 급하게 뺨을 문질러 보는데 한 방울인 줄 알았던 눈물은 수없이 흘러넘쳐 온 낯을 적시고 있었다. 손바닥이 흥건하게 젖을 정도였다.

“이렇게나 슬픈데 도망은 어떻게 치려고.”

어느새 태화는 눈앞에 와 있었다. 눈높이를 맞추느라 쪼그려 앉은 태화가 앞에서 빙긋이 웃는 중이었다. 선우는 서둘러 뺨을 닦고 뒤로 물러났으나 금방 태화에게 잡혔다. 뒷덜미를 단단히 틀어쥔 태화는 선우의 뺨에 남은 눈물을 문질러 닦아 줬다. 턱 끝에 매달린 것도 훔쳐 주고, 머리카락도 귀 뒤로 세심하게 넘겨 줬다. 세상 다정한 손길이라 선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러지 말라고, 이렇게 잘해 주지 말라고…….

입술을 꾹 말아 물고서 고개를 젓는데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선우는 순간 축축이 젖은 눈을 번쩍 떴다.

“아악!”

별안간 그런 소리를 내더니 오른쪽 발목을 부여잡았다. 발목이 기괴하게 꺾여 있었다. 자연적으로는 전혀 꺾일 수 없는 방향과 각도였다. 살갗이 부어오르는 게 눈에 보일 만큼 순식간에 탱탱해졌다.

“어, 어흐……. 어어…….”

선우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발목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만지다가 더 자지러지듯 소리쳤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제대로 걸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너무 아파서 발목을 만지지도 못하고 손을 쥐락펴락하다가 고개를 들어 태화를 봤다. 방금 발목 하나를 꺾어 버린 사람 같지 않게 너무도 태연한 표정이었다. 태화는 웃는 얼굴 그대로 선우를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왼쪽 발목을 끌어왔다.

“어으, 안 돼……. 안 돼, 아파, 흐윽……. 제발…….”

“사람을 병신으로 보고 도망갈 생각까지 했으면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아윽!”

우두둑, 그런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사람 몸에서 들리면 안 되는 소리였다. 왼쪽 발목마저도 기괴한 모양으로 변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태화는 반대쪽으로 한 번 더 꺾더니 선우가 꺽꺽거리며 울부짖자 다짜고짜 뺨을 후려갈겼다. 둔기로 때린 것과 같은 타격음 뒤로 선우의 몸이 쿵 넘어갔다. 옆으로 쓰러진 선우는 일순간 입을 다물었다. 울음소리도,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기절한 것이었다.

태화는 선우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기절했는데도 고통은 느껴지는지 온몸을 파르르 떨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꼭 날개 하나 찢어진 잠자리 같았다.

* * *

눈이 쉽게 떠지지 않았다. 누군가 풀칠이라도 해 둔 것처럼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한참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눈꺼풀에 억지로 힘을 주고서야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었다. 눈을 떴는데도 앞이 너무 뿌예서 선우는 잠시간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다행히 시야가 점점 밝아지면서 앞이 보였다. 익숙한 천장이었다. 태화의 방이라는 걸 알아채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머리가 띵하니 무지근하게 아팠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찬찬히 기억을 더듬었다.

태화의 목을 조르고도 정작 죽을힘을 다하지는 않았던 것, 태화의 품이 그리웠던 동시에 너무 끔찍했던 것, 오랜만에 함께 잠들고 깼던 것……. 그래, 족쇄가 풀려 있었지……. 그래서 도망가려고 했었지……. 이대로 도망가면 다 끝이라는 걸 알면서도 짐을 싸고, 방을 나서고, 그 앞에서 지키고 있던 태화를 보고 혼비백산하고.

거기까지 기억해 내는 중에 돌연 발목 통증이 느껴졌다.

“아으…….”

“일어났어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태화의 것은 아니었다. 누구인가 싶어 옆을 돌아보니 고 박사가 보였다. 고 박사는 선우에게 짧게 웃어 주곤 다시 무언가에 집중했다. 뭘 하나 봤더니 수액 조절을 하고 있었다. 선우의 팔뚝에 꽂힌 수액이었다. 선우는 좀 혼란스러웠다. 이게 다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그때 다시 발목에서 통증이 올라왔고 무심결에 아래를 내려다봤다가 놀란 눈을 떴다. 두 발목이 모두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본능적으로 발목에 힘을 줘 보는데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

그저 아프기만 할 뿐이었다. 한 번 더 힘을 줘 봐도 움칠거리는 게 전부였다. 그제야 선우는 정신을 잃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기억났다. 태화가 제 발목을 부러뜨렸다. 그것도 두 쪽 모두. 그때의 고통까지 생생하게 기억나 버린 선우는 크게 뜬 눈을 콱 찌푸리더니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발목뿐만 아니라 온몸이 아프다고 아우성을 쳤지만 듣지 않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팔에 꽂힌 수액을 빼려고 움직였다.

“어어, 그거 막 그렇게 빼면 안 되는데!”

옆에서 수액에 몸에 좋다는 건 다 섞고 있던 고 박사는 선우가 하는 짓을 보고 놀라 다가왔다.

“잠깐. 잠깐, 잠깐. 잠깐만요!”

“놔요……!”

“안 된다니까 그러네!”

아무리 말려도 선우는 듣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은 듯이 누워 있었으면서 지금은 고 박사쯤은 가뿐히 밀어 냈다. 결국 원하는 대로 주삿바늘을 빼내자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굵은 혈관을 잡아 둔 거라 이불이며 바닥은 금세 피로 흥건해졌다. 그런데도 선우는 더 뽑지 못해 안달인 것처럼 팔뚝을 긁어 댔다. 못 말리겠다는 듯 고 박사가 한숨을 푹 쉬는 사이 아예 이불을 치우고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발목이 아파 죽겠는데도 침대 밑으로 두 발을 디뎠다.

“아으윽!”

일어서려고 힘을 주자마자 아픈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를 악물고 한 번 더 힘을 줬을 때는 아예 앞으로 고꾸라져 바닥을 뒹굴었다.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던 고 박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슬슬 저었다.

“이제 힘 다 썼어요?”

얄밉게 말하며 다가왔다. 팔에 묻은 피부터 닦고 지혈 밴드를 붙였다. 다음으로는 반대 팔을 가져와 능숙하게 혈관을 찾았다. 다시 주사를 놓으려니 선우는 또 발악했다. 돌팔이여도 의사는 의사라 이건지, 난동 부리는 환자를 앞에 두고도 고 박사는 혈관을 잘도 찾았다.

“요즘 밥도 잘 안 먹는다면서요. 이거라도 맞아야지 힘이 나죠.”

“이런 거 필요 없…….”

“힘이 나야 도망을 가지.”

선우는 순간 멈칫했다.

도망? 도망.

어쩐지 도망이라는 단어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쫓겨 달아나는 걸 흔히 도망이라고 하는데 과연 나는 뭐에 쫓겨 달아나려 했을까……?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지독한 살인마에게서 달아나려 했었다면 처음부터 이 집에 발을 들이면 안 되었다. 제 부모를 죽인 원수를 피해 달아나려 했었다면 그 품을 원하면 안 되었다.

도대체 나는 무엇으로부터 도망가려 했던 거지?

한참 생각하던 선우는 끝내 고개를 떨궜다. 지독했다. 지독하게도, 제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려 했다는 걸 깨달았다. 굳이 깨달을 필요도 없었다. 알고도 인정하기 싫어 모른 척해 왔던 것뿐이니까.

“자, 다시 올라갑시다.”

선우가 한풀 꺾인 틈을 타 고 박사는 선우를 챙겼다. 축축 늘어지는 몸을 부축해 침대 위로 올리고 이불을 다시 덮어 줬다. 피범벅이 된 이불이었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 자식이 선우 씨 사랑하는 걸 다행이라고 여겨요.”

고 박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선우는 눈을 치뜰 수밖에 없었다. 모난 눈을 하고 고 박사를 노려봤다.

“아저씨는 나 안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안 사랑해요.”

“안 사랑했으면 발목을 꺾는 대신 아킬레스건을 끊었겠죠.”

고 박사의 목소리는 산뜻했다. 화가 잔뜩 난 선우와는 달리 평온한 표정이었다. 선우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선우도 어렴풋이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다. 치밀하기가 이를 데 없는 서태화라면 사람 발목을 꺾는 대신 자르는 게 더 어울렸다.

그래도 인정하기는 싫었다. 이건 그냥 태화가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이었다. 애들이 잠자리를 가지고 놀 때 날개를 전부 뜯지 않고 하나만 찢어 놓듯, 그래서 빌빌 기어 다니는 걸 구경하듯. 그저 그런 악랄한 장난일 뿐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리고 이 집 창문, 별로 안 튼튼합니다. 여기도 뭐, 2층밖에 안 되고.”

난데없는 창문 이야기에 선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쳐다봤지만 고 박사는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고 박사는 쉬라는 말을 남기고 의료 도구를 챙겨 방을 나갔다. 혼자 남게 된 선우는 피가 번진 이불을 슬며시 쥐었다. 고개를 들어 벽에 난 커다란 창문을 올려다봤다. 어느새 봄이 왔는지, 방범창 하나 없는 창문으로 봄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밖으로 나온 고 박사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거실에는 태화가 있었다. 태화는 선우가 저렇게 된 후 회사로 출근하는 대신 일거리를 집으로 가져와 처리했다. 지금도 소파에 앉아 업무 서류를 검토하는 중이었다. 꽤 바쁜지 고 박사가 나온 걸 아는데도 눈길 한번 주지 못했다. 테이블 위로 어지럽게 펼쳐진 서류 더미를 본 고 박사는 진저리 치듯 몸을 떨다가 주방 식탁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 펼쳐 놨던 의료 가방을 다시 정리해 손에 들었다.

“간다.”

“어.”

“안에 이불 피범벅 됐어.”

태화는 쳐다보지도 않고 대충 손을 휘휘 저었다. 고 박사도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돌아섰다.

“아 참.”

현관으로 향하다 말고 다시 뒤를 돌아봤다.

“족쇄는 채우지 마라.”

그제야 태화는 고개를 들었다. 고 박사를 쳐다보는 눈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왜.”

“여기서 발목 더 망가지면 진짜 평생 다리 절고 살아야 해.”

“그 정도로 심하게 안 했어.”

“네가 의사냐? 내가 의사야, 인마.”

맞는 말이었다. 의사 말에 토를 달 순 없어서 태화는 쯧 혀를 찼다.

“언제까지 채우면 안 되는데?”

“적어도 보름.”

“씹.”

보름이면 너무 길었다. 하루만 풀어 줘도 그 난리를 쳤는데 보름 동안이나 풀어 두라니, 말도 안 되었다. 그렇다고 선우를 평생 절름발이로 살게 만들 수는 없었다.

애초에 발목을 망가뜨릴 생각이었으면 다리를 잘랐을 터였다. 제가 온 줄도 모르고 옷방에서 짐 싸는 뒷모습을 봤을 때만 해도 그냥 다리를 잘라 버리고 데리고 살까, 하는 충동이 들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가기 싫다는 눈빛으로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제 앞에 선 선우를 보자마자 마음이 녹았다. 애가 독한 척은 하는데 마음을 영 야무지게 먹지 못했다. 그렇다고 가만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발목을 좀 꺾어 놓기는 했다. 정말 살짝이었다. 제 감이 맞는다면 그냥 며칠 케어만 해 주면 말끔히 나을 정도의 힘이었다. 그런데 고 박사는 왜 저렇게 빡빡하게 구는지 몰랐다.

“내 말 들어라.”

고 박사가 한 번 더 주의 주듯 말했으나 태화는 귀찮다는 얼굴로 손만 휘휘 내저었다. 빨리 꺼지라는 식이었다. 구시렁거리는 소리 끝에 고 박사가 나가고, 혼자 남은 태화는 들고 있던 서류를 다시 들여다봤다. 잠시 집중하나 싶더니 돌연 던지듯 내팽개치고 소파에 몸을 깊게 묻었다.

피곤했다. 왜 이렇게 피곤한지 몰랐다. 거의 파묻히듯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별수 없이 또 그 장면이 떠올랐다. 선우가 새벽에 옷방에서 짐을 싸던 모습. 저를 떠나려고 했던, 저에게서 도망치려고 했던 선우가 자꾸만 떠올랐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천천히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언제나 제게 달려오기만 하던 애가 이젠 잡아도 잡아도 손 틈으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전혀 잡히지 않았다.

* * *

태화는 이후로도 며칠 동안 집에서만 업무를 봤다. 선우를 감시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러는 동안 굳이 선우를 안아 들고 나와 식탁에 앉혀 마주 본 채 밥을 먹었고, 선우는 체념한 듯싶다가도 종종 먹다 말고 구역질해 댔다. 걸을 수가 없어 화장실까지 가지도 못하고 앉은 자리에서 게워 내면 태화는 인상을 구겼다. 밥맛 떨어지게 하는 법도 가지가지라며 면박을 주면서도 정작 선우가 쏟아 낸 것들을 꿋꿋이 치웠다. 더러워진 선우를 씻기는 것도 태화의 몫이었다.

항상 함께 욕조로 들어가 씻었다. 씻고 나면 탄력 붕대도 태화가 직접 새로 감아 줬다. 탈출 실패 이후 선우는 죽은 사람처럼 태화 품에 안겨 눈만 바르작거리는 게 일상이었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모습이었다.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부터는 태화도 다시 회사에 나갔다. 어차피 문을 잠가 뒀으면서 일 끝나고 돌아오는 걸음이 조급했다. 선우가 과연 그 자리 그대로 있을까,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와 방문부터 열어 보면 선우는 침대 위에 곤히 누워 잠들어 있었다. 하루하루가 불안했고, 매일 선우는 그대로였다.

딱 일주일 동안만.

회사로 출근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 선우가 사라졌다. 꼭 그 일주일 동안 애 좀 타 보라고 일부러 기다렸다가 사라진 것 같았다. 성치도 않은 발목으로 혼자 침대를 벗어날 정도면 집 안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게 아니라 집 밖으로 나갔을 게 뻔했다. 그걸 증명하듯 태화의 눈앞에서 새하얀 커튼이 펄럭였다. 원래 있던 암막 커튼을 치우고, 선우의 취향으로 새로 달아 놓은 것이었다. 살랑살랑. 커튼이 바람결에 나부꼈다. 침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갔구나.”

누군가에게 하는 건지 모를 말을 읊조렸다. 곧게 서 있던 고개가 옆으로 삐뚜름히 기울어졌다. 최선우가 진짜 가 버렸다.

*** ㄹㅂㅌㄹ 공금임  ***

선우는 계속 달렸다. 걸을 수 있게 된 건 사흘 전이었다. 그전부터 태화가 안 보는 동안 무진 연습한 결과 생각보다 빠르게 걸을 수 있었다. 물론 걸을 수 있다 뿐이지 정상적으로 걷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게다가 2층 창문에서 뛰어내리느라 안 그래도 안 좋았던 발목이 또 삐끗해 버렸다. 정말 절름발이라도 된 듯 선우는 절뚝절뚝 걸으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문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갈 곳이 없었다.

태화에게서 벗어났다고 해서 제가 갈 곳이 생기는 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앞만 보고 무작정 걷듯 뛰기는 하는데 도대체 지금 어딜 가는 건지, 어디로 향하는 건지, 선우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동안 난 어떻게 살아온 거지?

이제 저도 어엿한 성인인데 혼자 알아서 하는 게 무엇도 없었다. 타의로 집창촌에 끌려와 억지로 입을 벌리고, 마지못해 돈을 가져다 바쳤다. 살아오며 스스로 했던 선택은 딱 두 가지였다.

태화의 집으로 들어간 것. 태화의 집에서 나온 것.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흐윽…….”

선우는 울음을 참아 가며 걸었다. 뜨문뜨문 걸음을 떼며 뒤를 돌아봤다. 미련이라도 남은 모습이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게 아니라 다리가 아파서 그러는 거라고, 억지로 그런 생각을 했다.

“아프잖아. 아파서 그런 거잖아…….”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왔던 길을 되돌아가 태화에게 안길 것만 같았다.

아니라고, 아파서 그런 거라고…….

주문 같은 말을 외며 연신 도리질 쳤다. 얼마나 걸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체감상으로는 꽤 오래 걸은 것 같은데 아직도 부영 시작 뒷골목의 미로 속이었다. 진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정신은 가물거리고 눈알은 핑 돌았다. 절뚝이는 걸음으로도 꿋꿋이 걷다가 결국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졸린 건지, 정신이 나가고 있는 건지 구분이 안 되었다. 눈앞이 캄캄하게 질려 가는데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갈 데가 없으니까, 이대로 여기서 죽어 버리는 것도 괜찮겠다고…….

선우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선우를 자극한 건 고소한 냄새였다. 무언가를 참기름으로 달달 볶는 냄새가 코끝을 톡 건드렸다. 콧잔등을 움칠거리며 정신을 차린 선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또 탈출에 실패한 건가 했는데 눈에 보이는 공간은 영 낯설었다. 천장만 봐도 태화의 방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길에서 쓰러졌다는 것까지 기억나자 덜컥 겁이 났다. 어느 못된 인간이 자신을 끌고 온 게 아닐까 싶었다. 경계심 가득한 눈을 뜨고 겨우 상체를 일으키는데 마침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앞치마를 맨 여자였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라 선우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아, 일어났어요?”

여자는 선우를 아는 눈치였다.

어디서 봤더라……?

선우는 다시 한번 여자를 기억해 보려 했지만, 도무지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여자는 아기자기하게 귀여운 외모에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어디 봐 봐요. 나 보여요?”

스스럼없이 다가온 여자는 선우 옆에 걸터앉았다.

“이거 몇 개예요?”

여자는 손가락을 네 개만 펼쳐 선우 앞에 흔들어 보였다.

다리가 다친 거지, 눈이 다친 게 아닌데…….

선우는 속으로만 웅얼댔다. 그것보다는 이곳이 어딘지가 더 궁금했다. 멍하니 주변만 둘러보자 여자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몇 개인지 모르겠어요?”

“……누구세요?”

“네?”

“그리고 여기 어디예요?”

질문이 연달아 이어지자 여자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시름 놓았다는 눈빛이었다.

“걱정하지 마요. 여긴 안전해요.”

“여기가 어딘데요?”

“우리 집입니다. 그 사람은 내 와이프고요.”

선우의 질문에 대답한 건 다른 사람이었다. 선우는 문 앞에 선 사람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느닷없이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고 박사였다.

“일단 뭐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합시다.”

고 박사도 그의 아내도 평온한데 선우만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선우는 고 박사의 부축을 받아 식탁 앞에 앉았다. 맞은편에는 부부가 나란히 자리했다. 식탁에는 갖가지 음식이 많이 차려져 있었는데, 선우의 몫은 전복죽이었다. 아무래도 깨어나자마자 진동했던 고소한 냄새의 정체는 죽 끓이는 냄새였던 모양이었다.

“어서 들어요. 지금 선우 씨 보면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니까.”

고 박사가 말하자 옆에 있던 아내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선우는 눈치를 보다가 숟가락을 들었다. 죽은 맛있었다. 아내의 음식 솜씨가 엄청나게 좋은 듯싶었다. 하지만 맛있는 것과는 별개로 목구멍 아래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모래알이라도 잔뜩 낀 듯 목이 꺼끌꺼끌했다.

문득 지난번에 탁성모에게 맞아 입 안이 잔뜩 터졌던 날 태화가 끓여 줬던 죽이 떠올랐다. 살면서 먹어 본 죽 중에 가장 맛이 없었었다. 뭐든 다 잘하는 줄 알았던 태화가 죽 하나만큼은 못 끓인다는 걸 알고 키득키득 웃었던 기억도 났다. 그때 태화는 자기가 먹어 봐도 맛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기껏 애써 만들어 놓은 걸 전부 버리고 시장에 나가 전복죽을 사 왔었다.

왜 인제 와서야 그때 남긴 태화의 죽이 생각나는지, 목이 더욱 막혔다. 태화에게서 벗어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태화 생각뿐이었다. 선우는 이래선 안 된다며 도리질을 치다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고 박사를 봤다. 아내가 만들어 준 장조림을 맛있게도 먹고 있었다. 고 박사는 태화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내가 있다는 걸 그 사람에게 벌써 알렸으려나……? 그 사람이 여기로 오고 있는 건가?

“아저씨한테 연락했어요……?”

선우가 묻자 고 박사는 입 안에 든 걸 우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다 씹어 넘긴 뒤에야 대답이 나왔다. 의외였다.

왜 연락을 안 했을까……?

이번에는 또 그게 의문이었다.

“그럼 날 아저씨한테 넘길 거예요?”

“그것도, 아니요.”

“그런데 왜 데리고 왔어요?”

“그대로 있었으면 험한 꼴 당했을 테니까요. 저는 인정이 아주 많은 사람이랍니다.”

고 박사는 스스로를 칭찬하며 싱긋 웃었다. 인제 보니 아내와 인상이 참 많이 닮아 있었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둘 다 인상이 좋았다. 그럼 저도 태화와 인상이 닮았나, 생각해 보던 선우는 코끝을 찡긋거렸다. 틈만 나면 서태화 생각이었다.

“진짜……. 아저씨한테 연락 안 할 거예요?”

“하길 바라요?”

“아니요. 절대 아니요. 전……. 도망치는 중이었어요.”

“압니다.”

선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었다.

“서태화한테 넘길 것도 아니면서 왜 도와주냐는 듯한 얼굴이네요.”

아무리 헐렁해 보여도 사람 보는 눈이 있는지, 고 박사는 선우의 속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선우 역시 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 보여도 내 직업이 의사잖습니까. 사람은 살리고 봐야죠.”

되게 와닿지 않는 말이었으나 더 묻지 않았다. 고 박사는 자꾸만 중요한 말을 피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라면 뭘 물어도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 어려울 것이었다. 선우는 궁금증이 전혀 해소되지 않은 채로 그저 전복죽을 휘저었다. 언젠가 먹었던, 끝장나게 맛없는 야채죽이 먹고 싶었다.

* * *

선우는 며칠 고 박사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고 박사는 정말 태화에게 알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알렸다면 그 성격에 곧바로 찾아왔을 텐데 태화는 끝까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고 박사 역시 선우가 이곳에 있음을 알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선우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이상하게 비틀렸다. 가슴이 답답하고, 명치끝이 저렸다. 왜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더군다나 안전하기 그지없는 고 박사 집에 있으면서도 처음 야생에 나온 강아지처럼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새벽에 누군가 화장실 가는 걸음 소리만 들려도 잠에서 팔딱 깼다. 한 번은 노크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온 고 박사의 아내 때문에 놀라서 비명을 지른 적도 있었다. 덩달아 놀랐던 아내는 이후 잊지 않고 매번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 중의 한 명인 서태화와 함께 지냈을 땐 경계는커녕 뇌든 간이든 밖에 빼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칠렐레팔렐레 살았는데 인제 와서 왜 이러나 몰랐다. 그래도 의사와 함께 살다 보니 하루가 지날수록 선우의 몸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고 박사 집에서 지낸 지 보름이 지나 붕대도 풀었다.

“이제 시원하죠? 그동안 엄청 간지러웠을 텐데.”

근 한 달 만에 붕대를 완전히 푼 선우는 시원한 공기가 발목에 닿자 움칠 떨었다. 시험 삼아 이리저리 돌려 봤다. 잘 돌아갔다. 가동성도 이전과 똑같이 나오는 것 같았다. 아직 조금 시큰거리기는 했으나 이만하면 거의 다 나았다고 볼 수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고 박사의 아내는 본인이 다 나은 것처럼 잘됐다며 손뼉까지 쳤다.

“이제 며칠만 더 걷는 연습 하면 되겠어요!”

“네.”

그동안 이 불편한 걸 어떻게 참았냐는 말을 선두로 아내는 선우에게 와다다다 말을 퍼부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고 박사의 아내는 알아주는 수다쟁이였다. 선우와 아내가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고 박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난번에 선우에게 했던 말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서태화가 선우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선우는 정말 아킬레스건 두 개가 모두 끊어졌을 게 분명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원규의 지원을 받아 공부해 왔던 고 박사는 태화와는 형제처럼 지냈다. 호적상 형제인 서재화보다도 더 태화와 형제처럼 보일 만큼 친하게 자란 사이였다. 태화에게 너무 붙는다는 생각에 위기감을 느낀 서원식이 고 박사를 죽이라고 보낸 놈들의 팔을 잘라 원식에게 되돌려 준 것도 태화였다.

어릴 때부터 태화가 저지른 모든 짓을 봐 왔기에 고 박사는 그의 악의를 아주 잘 알았다. 태화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상대 조직 놈들의 목젖을 땄고, 조직의 대가리는 목젖 대신 아킬레스건과 손목 힘줄을 땄었다. 다 죽어 가는 걸 구태여 병원에 처넣어 살려 두기까지 했다.

그건 일종의 경고이자 낙인이었다. 이번 일을 잊지 말라고, 잊지 말고 네 자손에게까지 새겨 두라고, 다시는 이쪽을 넘볼 생각조차 하지 말고 평생 두려움에 떨며 살라는 뜻이었다. 그 정도로 일 처리가 확실한 놈인데 선우의 아킬레스건을 자르는 대신 발목을 꺾은 거라면 굉장히 많이 봐준 셈이었다.

“곧 있으면 달릴 수도 있겠는데요?”

“그럴까요?”

선우는 고 박사의 아내를 보며 멋쩍다는 듯이 웃었다. 고 박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발목을 부러뜨린 것도 아니고 단순히 꺾어 놓은 건, 봐준 것을 넘어서서 아예 도망가라고 판을 깔아 준 거나 다름없었다.

정확히 이틀 뒤, 선우는 사라졌다. 고 박사의 예상과 똑 맞아떨어지는 일이었다. 이럴까 봐 고 박사는 일부러 선우의 침대 옆 협탁에 지폐가 두둑이 든 지갑까지 놔뒀으나 지갑은 그대로 있었다. 대신 그 옆에 그동안 감사했다는 쪽지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고 박사는 생긴 것처럼 귀여운 선우의 글씨체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쪽지를 곱게 접어 지갑에 넣었다. 태화에게 가져다줄 요량이었다.

“서태화 애 좀 먹겠네.”

귀신보다도 더한 서태화를 잡아먹는 놈이 있다는 게 퍽 신기해 웃음이 나왔다.

* * *

태화는 평소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나 러닝을 하고 돌아왔다. 성인이 된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했던 걸 선우와 함께 사는 동안에는 하지 않았다. 뛰면서 얻는 쾌감보다도 말랑한 몸을 안고 애기 젖비린내를 맡으며 자는 시간이 더 좋아서 그랬다. 하지만 이제 제 품에 안길 말랑한 몸도 없고, 집 안에는 애기 젖비린내 대신 담배 냄새만 진동했다.

그래서 다시 뛰기 시작했고, 오늘도 한 시간을 달리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던 태화는 아주 찰나 멈칫했다. 하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안으로 들어갔다. 낯선 신발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걸 빤히 내려다보다가 신발을 벗지도 않고 신발장을 열어 안쪽 깊이 숨겨 둔 칼을 꺼냈다. 칼을 손에 쥐자마자 성큼성큼 걸어 거실로 가는데 소파에 앉아 있던 놈이 태화를 보더니 펄쩍 뛰어올랐다.

“아, 야! 너처럼 생긴 놈이 칼 들고 다가오면 없는 애도 떨어져요!”

고 박사였다. 익숙한 낯짝에 태화도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찡긋 구겼다.

“연락은 좀 하고 와라.”

“했어. 했는데 안 받았잖아, 네가.”

태화는 하긴 뭘 했냐고 한 소리 하려다 말고 아……. 소리를 냈다. 러닝을 나갈 때는 귀찮아서 휴대 전화를 집에 두고 나가는 편이었다. 시계도 걸리적거려서 그냥 맨몸으로 나갔다 오는 게 습관이었는데 그새 전화했던 모양이었다. 칼을 내려놓고 휴대 전화를 보니 정말 고 박사에게서 전화가 몇 통 와 있었다.

“무슨 일인데 이 새벽부터 와.”

태화는 땀에 전 티셔츠를 벗어 빨래 통에 던져 놓고 담배부터 찾았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시작하자 하루에 피우는 양이 이전보다 많아졌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 대 물었고, 운동 후에도 자연스럽게 담배를 태우게 되었다. 담뱃불을 붙이자 고 박사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본인도 흡연자면서 왜 저러나 몰랐다.

태화는 연기를 천천히 빨아 마시며 슬쩍 현관문을 쳐다봤다. 닫힌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선우가 다시 저 문을 열고 들어올 일은 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자꾸 힐긋대게 됐다.

“자.”

“뭔데?”

“받아, 새끼야.”

고 박사가 대뜸 건넨 건 누군가 남긴 쪽지였다. 태화는 그게 선우의 글씨체라는 걸 단번에 알아봤다. 태화 정육 화이트보드에 할인 품목을 적어 두는 담당이 최선우였으니까. 선우가 가끔 반찬 사러 나간 동안 태화는 화이트보드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일이 잦았다. 보면서 글씨체도 오밀조밀한 게 꼭 저처럼 쓴다고 생각했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쪽지 내용은 별거 없었다. 감사했다는 인사말이 전부였다. 하지만 태화는 그 문장을 보자마자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그건 깊은 분노 같기도 했고, 얕은 짜증인 것도 같았다. 허탈감과 배신감을 닮았기도 했다. 온갖 감정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중 가장 마지막에 모든 걸 헤집고 고개를 쳐드는 건 따로 있었다. 그게 뭔지 알았으나 굳이 아는 척하지는 않았다. 덩어리져 올라온 감정을 애써 외면한 채 다시금 쪽지를 내려다봤다. 눈썹이 느리게 일그러졌다.

재차 짜증이 올라왔다.

고맙다는 말을 왜 고 박사에게 하고 앉아 있나? 내게 해야 하는 말이 아닌가. 아니, 아니지. 내게는 사랑한다고 말했어야지.

낮게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끝내 그 감정을 명명해 버린 탓에 기분이 잡쳤다. 또, 끝내 제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가 버린 선우가 괘씸했다. 괘씸하기가 그지없어 제 손에 들어오기만 한다면 또다시 발목을 부러뜨릴 참이었다.

“그러니까 잡히지 말라고.”

누군가에게 하는 건지 모를 말을 혼자 중얼거리던 태화는 쪽지를 아무렇게나 구겨 테이블 위로 내던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간 거지?”

“뭐? 아, 네가 먼저 발견했던 거?”

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모르고 갔어. 너한테 말할 거냐고 의심까지 하더라.”

고 박사를 의심의 눈초리로 째려봤을 선우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안 봐도 예쁜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쳐다보며 저 사람이 왜 저한테 잘해 주나……. 잔뜩 경계했을 터였다. 태화는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사실 길바닥에 쓰러진 선우를 가장 먼저 발견한 건 태화였다. 펄럭이는 창문 커튼을 보고 멍하니 서 있길 10초. 딱 10초가 지난 뒤 태화는 뭐에 씐 사람처럼 미친 듯이 계단을 내려가 집을 나섰다. 허벅지 근육이 터질 만큼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뛰어다닌다고 최선우를 찾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무작정 뛰었다.

원래 성격이라면 장 선생에게 먼저 연락한 뒤 느긋하게 상황 보고를 받았을 텐데 그땐 이상하게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최선우가 사라졌다. 진짜 가 버렸다.

이 두 문장만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찾아서 뺨을 때리든, 배를 걷어차든, 정말 다신 못 걷게 만들든. 아니면 미안하다고 무릎 꿇은 채 신처럼 받들어 아주 예뻐만 해 주든……. 뭐가 됐든 찾아야 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 최선우를 발견한 건 찾기 시작한 지 고작 30분 지났을 무렵이었다.

‘저 머저리가.’

선우는 가로등도 없는 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부영 시장 뒷골목도 채 빠져나가지 못하고 비 맞은 개새끼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화가 나면서도 동시에 안심했다. 최선우를 보는 순간 턱 끝까지 차올랐던 숨이 겨우 사그라들었다.

혹시라도 못 찾으면 어쩌나. 그 몸 상태로 나갔으면 분명 어딘가에 쓰러져 있을 텐데, 혹시라도 나쁜 새끼한테 걸려 또 험한 꼴을 당하면 어쩌나. 물론 최선우 입장에서는 내가 제일가는 개새끼이겠지만 그렇다고 나랑 다른 놈들이랑 같나? 그러게, 누가 그렇게 꼴리게 생기랬나. 하여간에 가지가지로 문제인 놈.

뒤죽박죽 혼재되어 있던 감정을 추스르고 선우에게 다가갔다. 걷는 걸음마다 안도의 한숨을 푹푹 내쉬었던 것도 같았다.

‘집으로 가자.’

듣지도 못하는 놈에게 그렇게 말하며 마른 몸을 안아 들었다. 문제는 그다음으로 이어진 말이었다.

‘싫어……. 아저씨가 싫어…….’

선우는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무언가를 느낀다는 듯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저씨가 싫다는 말은 몇 번이고 더 이어졌다. 태화는 다 부르튼 입술을 오물거려 가며 말하는 선우를 빤히 쳐다봤다. 최선우는 뭣도 모르면서 제가 싫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선우를 차마 ‘집’으로 데리고 갈 수 없었다. 한때는 선우 스스로 ‘우리 집’이라고 칭하던 곳은 이제 선우에게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이 되어 있었다.

선우를 바짝 끌어안은 태화는 한참 가느다란 목덜미로 입술을 묻고 숨을 쉬었다. 앞으로 쉬어야 할 숨을 미리 적립해 두는 것처럼 연신 심호흡했다. 그렇게 해서 선우를 데리고 간 곳은 고 박사네였다.

“어때 보였는지 안 물어봐?”

“어때 보였는데?”

“다 죽어 가더라.”

태화는 미간을 섧게 찌푸렸다. 좋은 말을 해 줄 것도 아니면서 뭣 하러 물어보라고 했는지 몰랐다.

“너 하나 없다고 계절 잘못 타고 태어난 꽃처럼 시들시들한 게, 영 보기 안 좋았어.”

“나 없이도 잘 살 놈이다.”

“너 없으면 1년도 안 돼 말라 죽을걸?”

재수 없는 소리였다. 무슨 그딴 소리를 하냐는 듯 고 박사를 흘겼다. 그래도 내심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돈은?”

“가져가라고 일부러 협탁 위에 지갑까지 놔뒀는데 그대로 두고 가데?”

“멍청한 건 어디 안 간다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걱정되는 건 별수 없었다. 지난번에는 탈출 가방을 야무지게 챙기더니 이번에는 입을 옷은커녕 신발 한 짝 없이 맨몸으로 나갔으니 걱정됐다. 이제 봄이라지만 아직 꽃샘추위도 남았고,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한 날씨였다. 추위도 많이 타면서 참 대책이 없었다. 뻔히 가져가라고 일부러 둔 게 눈에 보이면 눈 딱 감고 가져갈 것이지 뭐 한다고 끝까지 양심을 챙기는지 모를 일이었다. 태화는 쯧 혀를 차다가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네가 알려 준 거지?”

“뭘?”

“창문.”

고 박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개를 젓지도 않았다. 무언은 곧 긍정이었다. 태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에 별스럽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 살다가는 너희 둘 다 미칠 게 분명해서 그랬어. 안 그래도 미친놈들인데 더 미치면 나 진짜 감당 안 된다. 이참에 걔가 어떻게 나올지 볼 기회도 되고.”

태화도 고 박사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했다. 그대로 계속 있었다간 최선우는 미쳤을 게 분명했다. 평소에 또라이냐느니, 미쳤냐느니, 면박을 주기는 했지만 다 장난이었지 진심은 아니었다. 최선우 같은 놈은 미친 게 아니라 남들과는 생각하는 관점이 다른 것이었다. 남이 들으면 그게 미쳤다는 것과 똑같은 말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태화에게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었다. 미친놈은 최선우가 아니라 저였다. 태생부터가 글러 먹은 놈이었다, 저는.

“그래서, 어디로 갈 거 같냐?”

“내가 어떻게 알아.”

“너도 모르는 게 있냐?”

고 박사는 괜스레 태화를 툭 치며 웃었다.

“너희는 어떻게 꼬여도 그렇게 꼬였냐? 아니, 그냥 확 다 까발리지, 뭐 한다고 너 혼자 나쁜 새끼 역할을 다해? 네가 직접 말하는 게 어려우면 내가 대신 말해…….”

“고 박사.”

태화는 고 박사의 말을 끊으며 담배를 한 대 더 물었다. 연기를 길게 내뱉는 동시에 고 박사를 넌지시 쳐다봤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짧고 간단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뜻은 결코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고 박사가 선우에게 탈출에 필요한 힌트를 준 일에 대해 문책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잘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고 박사였기에 망정이지 다른 이가 그런 짓을 했다면 지금쯤 무슨 일을 벌였을지 몰랐다. 만약 길가에 쓰러진 선우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상대가 고 박사일지라도 태화는 참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니 고 박사는 멀리 도망가지 못한 선우에게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아, 알았다, 알았어! 걱정을 해 줘도 지랄이야.”

“징그럽게 내 걱정 좀 그만해.”

이제 와 고 박사를 잡는다고 해서 선우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니 태화 역시 이쯤 해 두기로 했다. 게다가 지금은 이런 곳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걔랑 나, 조만간 다시 만날 거야.”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땐 각오해야 할 거다.”

“안다.”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몇 번 더 주고받다가 고 박사는 돌아갔다. 태화는 그러고도 한참 동안 줄담배를 태웠다. 문득 소파 테이블 위에 나뒹구는 쪽지 덩어리가 신경 쓰였다. 소파로 가 털썩 몸을 묻은 태화는 담배를 잇새에 끼우고 쪽지를 다시 펴 봤다.

“글씨도 더럽게 못 쓰네.”

담배를 물고 있어 뭉그러진 발음이 나왔다. 더럽게 못 썼다고는 했으나 사실은 정말 예쁜 글씨였다. 너무 예뻐서 몸에 새기고 싶을 정도였다. 새기지 못하니 대신 곱게 접어 손안에 꽉 쥐었다. 멀거니 창밖을 쳐다봤다. 날이 밝았다. 선우가 남쪽으로 가자던 봄이 다 지나가는 중이었다.

* * *

선우가 태화에게 연락한 건 고 박사네를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밤이었다. 선우는 불안한 눈빛으로 휴대 전화를 꼭 쥐었다. 모습은 엉망이었다. 이미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는지 몸 구석구석 멍이 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나마 낯은 덜했다.

그렇다고 말끔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입가며 눈가며 찢어져서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몸에 난 상처가 워낙 심해서 낯이 괜찮아 보인다 뿐이지, 전체적으로 아주 엉망이었다. 그런데도 선우는 아픈 것도 모르고 휴대 전화에 집중했다.

신호음은 길게 이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초조해졌다. 이대로 안 받으면 어쩌나 싶다가도 차라리 아주 안 받길 바라는 마음도 들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안내 음성이 튀어나오겠다 싶을 즈음 달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저쪽에서 익숙한 숨소리가 넘어왔다. 꿈에서도 잊어 본 적 없던 숨결이었다. 왜 받았냐고 윽박지르려다가 말았다. 다만 침을 꼴깍 삼켰다. 손에 흥건히 스며 나온 땀을 바지에 벅벅 문질러 닦고, 휴대 전화를 반대쪽 귀로 옮겼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잔뜩 떨려 나왔다. 저쪽에서는 잠깐 정적이 이어졌다. 숨소리마저도 멈춘 듯했다. 다시금 숨이 이어졌을 때는 선우가 먼저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하지만 선우보다도 재화가 더 빨랐다. 앞에 앉아 있던 서재화는 선우가 끊기 전에 먼저 휴대 전화를 낚아채 갔다.

- 최우선?

태화는 한참 만에야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들은 건 선우가 아니라 서재화였다.

최우선?

재화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식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선우를 봤다.

“야, 네 이름 최선우 아니야?”

“……맞아요. 최선우예요.”

재화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받았다.

“얀마, 최선우라잖아. 넌 애가 좇질 하고 살던 놈 이름도 제대로 모르냐?”

- 걔 뭐.

선우 목소리 뒤로 대뜸 서재화의 목소리가 들리면 놀랄 법도 한데 태화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찮다는 듯한 어투였다. 서재화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역시 서태화는 서태화였다.

“네가 안 오면 얘 조질 거야. 빨랑 와.”

- 조져.

“뭐?”

- 네 새끼 마음대로 하라고.

재화는 눈을 크게 뜨다가 짜증스레 일그러뜨렸다. 무슨 배짱인지 모를 일이었다. 제 성질머리가 어떤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서태화는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내가 최선우한테 뭔 짓을 할 줄 알고?

가만 보면 서태화는 배짱이 두둑해도 심하게 두둑했다. 객기를 부리는 것과도 같았다.

“얘 면상에 칼빵 그을 거라니까?”

- 그으라니까.

“야, 넌 뭐 얘랑 떡정 같은 것도 없냐?”

- 넌 술집 계집애들이랑 떡정이 생기디? 창놈 새끼 하나 두고 뭔 지랄이야.

“허…….”

잘못 짚었나?

재화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갸웃거리며 선우를 봤다. 선우는 여느 때보다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매번 죽상이던 놈이 이런 얼굴도 할 줄 아나 싶을 만큼 낯설었다. 언제는 서태화 뒤통수를 처갈기더니 지금은 서태화만 기다리는 똥개 같았다.

- 끊는다.

전화는 뚝 끊겼다. 선우와 달리 태화는 별다른 감정이 없어 보였다. 재화는 전화가 끊겼음에도 한참 휴대 전화를 귀에 대고 있다가 흠……. 소리를 냈다.

“그냥 너 조지라는데?”

휴대 전화를 아랫놈에게 넘기며 말했다. 저를 향한 목소리에 선우는 어깨를 움칠 떨었다.

“서태화가 진짜 너 뭐 눈물겹게 생각하고 그러는 거 맞아? 너 혼자만의 망상이라든가, 착각, 뭐 그런 거 아니야?”

“……아저씨가 저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 맞아요.”

선우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가에는 금세 물기가 어른거렸다. 왜 이런 꼴로 재화에게 이런 해명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게 분하고 답답했다.

“이름도 제대로 모르잖아.”

“맞다고…….”

“씨발, 그냥 진짜 좆집 아니야?”

“맞다니까? 맞다고……! 아저씨 나 좋아한다고!”

“쌍년이, 미쳤나?”

재화는 망설임 없이 선우의 뺨을 후려갈겼다. 선우는 옆으로 풀썩 쓰러지면서도 윽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재화를 둘러싸고 있던 남자들이 달려들어 발길질해 댔으나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제 이 정도 폭력은 우스웠다. 이곳으로 끌려온 이후 죽을 만큼 처맞았다. 끌려오는 과정부터 폭력의 연속이었다.

고 박사의 집에서 몰래 빠져나온 선우는 잠깐 고민했더랬다. 서재화를 찾아갈지, 아니면 이대로 훌쩍 떠나 버릴지. 전자는 서태화에게 복수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후자는 뭘까?

선우는 그것 역시 태화를 향한 복수라고 생각했다. 저는 태화 없는 삶이 지옥이니까, 태화 역시 저 없는 삶이 지옥이길 바랐다. 후자가 더 그럴듯한 복수라는 생각에 선우는 떠나려고 했다. 문제는 선우에게 선택권 따위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하, 저 미친년. 사람 야마 돌게 하네, 자꾸.”

선우는 남자들의 발에 이리저리 차이는 중에도 고개를 들어 서재화를 노려봤다.

선우가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즈음 서재화는 선우를 찾고 있었다. 매번 만나던 화요일에 선우가 나오지 않자 갇혔다는 걸 알았고, 나중에 용케도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모시러 갔지만 그때는 이미 태화가 데리고 간 뒤였다. 이후로도 호시탐탐 선우가 언제쯤 제 발로 죽을 길을 찾아 나오나 기회를 엿보던 재화는 선우가 고 박사네 집을 나서자마자 모셔 왔다. 재화 입장에서는 신사적으로 모셔 온 것이었지만 선우 입장에서는 납치였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악하느라 뺨을 맞았고, 도망치려고 아랫놈의 팔뚝을 깨물자마자 주먹으로 복부를 수도 없이 맞았다. 이곳 창고에 도착해서는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맞았다. 폭력에 오래 노출되면 다루기 쉬울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선우는 버티고 버티고 또 버텼다. 재화가 원하는 게 뭔지 아는 까닭이었다. 서재화는 저를 이용해서 태화를 무너뜨리려는 계획이었다. 선우는 이를 으득 물었다. 서태화는 제 것이었다. 무너뜨려도 제가 무너뜨리고, 세워도 제가 세워야 했다.

“야, 사시미 가져와 봐.”

선우가 독살 맞은 눈을 치우지 않자 열이 있는 대로 오른 서재화는 결국 아랫놈에게 칼을 건네받았다. 선우를 신나게 때리는 남자들을 양옆으로 물리고 다가갔다. 선우는 여전히 눈을 치뜬 모습이었다. 마냥 말랑한 줄로만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재화는 쯧 혀를 차고 선우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억센 악력에 선우는 상체를 일으켜 앉을 수밖에 없었다.

“너 이 반반한 낯짝마저도 없으면 어떻게 살려고 이래. 응?”

선우의 뺨 주변으로 칼날이 위협적으로 맴돌았다. 잘 벼려진 칼날은 뜨문뜨문 있는 형광등 불빛을 받고도 번쩍이는 빛을 냈다. 선우는 겁이 났으나 서재화에게 티 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야무지게 다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금방이라도 뺨을 그을 듯이 칼을 이리저리 휘두르던 서재화는 돌연 씨익 웃었다. 진짜 저 낯짝을 그을까 잠깐 고민하다가 말았다. 그래도 엄연히 교양 있는 문화인인데, 보기 좋은 작품은 보존해 둬야 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예쁘장한 얼굴을 긋는 대신 허벅지를 그었다.

“읍!”

선우는 눈을 번쩍 떴다. 눈앞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이 보였다. 아래를 내려다봤다. 뺨을 그을 줄 알았더니 허벅지가 그어져 있었다. 칼을 깊이 박아 넣은 게 아니라 가볍게 벤 거라 상처가 깊지는 않았지만 벌어진 살점으로 피가 죽죽 새어 나왔다. 선우는 몇 번 더 읍읍거리는 소리를 내며 고통을 참다가 고개를 들어 서재화를 노려봤다. 서재화는 기다렸다는 듯 칼끝으로 선우의 뺨을 톡톡 쳤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애들 좋은 일이나 시켜 줘라.”

칼끝에 있던 핏방울이 선우의 뺨 위로 옮겨 갔다. 하얀 살갗 위로 피가 한 줄기 주룩 흐르는 걸 보고 서재화는 기분 좋게 웃었다.

선우는 정신이 혼미했다. 지금 제가 어디에 있는지,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지……. 심지어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희미했다. 그저 무자비하게 쑤셔 박히는 아래가 너무 아팠고, 손안에 억지로 쥐어진 살덩이는 역겨웠다. 어디에서도 이런 짓을 당한 적은 없었다. 장장 일곱이었다, 일곱. 일곱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선우를 저들 입맛대로 굴렸다. 차라리 꽃다방에서 남의 좆이나 빨고 살던 때가 천국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그런 무시무시한 생각을 할 정도로 괴로웠다.

태화에게 감금당했을 때 날마다 지옥, 지옥, 노래를 부르며 살았는데 그건 지옥이 아니었다. 지옥은 바로 지금 같은 상황에나 어울리는 단어였다. 이미 좆을 물고 있는데 다른 놈이 제 자지도 물려 보자고 난리였다. 찢어진 입가를 억지로 잡아 벌려 처넣으려는 순간 선우는 본능적으로 입 안에 든 자지를 깨물었다.

“아악! 이년 이거 또 깨물었어! 씨빨!”

남자가 씨팔씨팔거리는 와중에도 억세게 깨물고 놔주지 않았다. 결국 머리를 퍽퍽 맞고서야 놔줬다. 옆에 있던 남자들은 고자 되겠다며 킬킬댔고, 선우의 아랫구멍을 선점한 남자는 존나게 조인다며 한 번 더 때려 보라고 미친 소리만 해 댔다. 정작 좆이 떨어져 나갈 뻔한 남자는 길길이 날뛰며 선우의 뺨을 몇 번이고 후려갈겼다.

“어, 윽……! 아윽…….”

선우는 입 안에 모인 핏물을 삼키지도 못하고 줄줄 흘렸다.

“한 번만 더 깨물면 이빨 다 뽑아 버린다, 쌍년아!”

이번에는 손바닥이 아닌 주먹이 날아들었다. 광대를 제대로 맞아 뻑! 소리가 나고 옆으로 휘청 넘어가자 좆을 처박던 남자가 욕을 내뱉으며 허리를 다시 세워 올렸다. 엉덩이에도 매타작이 떨어졌다. 이미 몇 번이고 맞아서 퉁퉁 부은 엉덩이는 피멍이 들어 있었다. 다시 입 안으로 자지가 쑤셔 들어왔고 뒷구멍은 또 다른 놈의 차지가 되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이젠 기억도 나지 않았다. 뇌가 폭력에 절여져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맞고 또 맞았다. 범해지고 또 범해져 몸이 두 동강이 날 것 같았다. 한쪽 귀에서는 계속해서 이명만 들렸고, 다른 쪽 귀에서는 남자들의 흥분하는 숨소리와 낄낄대는 웃음소리, 그것들보다도 더 많은 비속어가 들렸다. 이명이 들리는 귀는 물에 잠긴 듯 줄곧 먹먹하기만 했다. 귓구멍이 찢어진 듯 아팠고, 정액인지 피인지 끈적한 게 흐르는 것도 느껴졌다.

“야, 야. 살살 해, 살살. 죽이지는 말고.”

그 와중에도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서재화였다. 남자 일곱이 선우에게 달려들어 좆을 놀리는 동안 서재화는 아예 저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모바일 게임에만 집중했다. 다 큰 놈이 휴대 전화를 들고 앉아 열심이었다. 간간이 선우를 힐끔 쳐다보며 살살 하라고 말하긴 했지만, 남자들의 욕정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재화도 말만 할 뿐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아, 근데 이 새끼는 왜 입질이 안 와?”

게임 캐릭터가 죽자 서재화는 괜한 데에 짜증을 냈다. 시간을 확인했다. 태화에게 메시지를 보낸 지 이제 겨우 20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지루했다. 서재화는 남자들이 선우를 윤간하기 시작하자마자 10분 동안 동영상을 촬영하고 곧장 태화에게 보냈다. 여기가 어딘지 친절하게 주소까지 찍어 보냈으나 태화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읽지 않았다는 표시는 사라졌으니 분명 동영상을 봤다는 건데 왜 깜깜무소식인지 몰랐다.

“진짜 그냥 갖고 놀던 앤가?”

이젠 점점 확신이 사라졌다. 애먼 놈을 미끼랍시고 붙들고 서태화가 걸려들길 바라는 건가 헷갈렸다. 생각하던 중에 다음 판이 시작돼서 다시 게임에 집중하려는데 저쪽에서 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하고 봤더니 선우가 참지 못하고 토악질을 하고 있었다.

“에이, 씨발.”

“아, 뭐 하냐!”

“씨팔, 그러니까 누가 좆을 무식하게 처넣으래?”

“존나 더러워, 씹.”

선우가 위액과 핏물이 섞인 걸 죽죽 뱉어 내자 남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주춤 물러났다. 재화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깔끔하게 살아 보려고 해도 주변에서 도와주질 않으니 짜증만 났다.

“거 살살 하라니까, 쯧.”

더러운 오물을 쳐다보듯 선우를 봤다. 제가 봐도 꼴이 엉망이었다. 몸에 손자국이 남지 않은 곳이 없었고, 머리카락은 정액 때문에 엉겨 붙어 있었다. 뒷구멍에서도 머금지 못한 정액이 흘러나왔고, 입에서는 피를 줄줄 흘렸다. 아무리 봐도 꼴리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같은 자지 달린 새끼 후장에 쑤시는 게 뭐 그리 좋다고 다들 저 지랄들인지 몰랐다.

“근데 하얗기는 겁나 하얗네.”

중얼거리는데 순간 덜컹 소리가 났다. 뒤이어 낡은 철제문에서 나는 째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재화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열린 문틈 사이로 서태화가 서 있었다.

“왔냐?”

“오라고 고사를 지냈잖아.”

“야, 고사까지는 안 지냈다.”

재화는 태화를 맞이할 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태화의 시선은 다른 곳에 꽂혀 있었다. 태화는 헐벗은 남자들 사이에 웅크려 있는 선우를 보는 중이었다.

“아, 보기가 좀 그렇지?”

재화는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야, 그만해. 아, 그만 좀 해라, 새끼들아. 좆질 못 해 뒈진 총각 귀신이라도 쓰였나. 그만하라고!”

괜히 태화가 들으라는 식으로 크게 소리쳤다. 손까지 휘저으며 말하자 남자들은 아쉽다는 얼굴로 슬금슬금 물러섰다.

“너희들 좆 보기 싫으니까 빨랑 옷 입어.”

서재화의 말에 남자들은 벗어 뒀던 옷을 급히 주워 입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멀끔해진 가운데 유일하게 선우만 나체 그대로 부들거리고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주변이 온통 정액 아니면 침, 그것도 아니면 피였다. 선우의 자지는 발기한 적조차 없는 듯 다 쪼그라들어 있었다. 낯은 볼 것도 없었다. 심지어 왼쪽 귓구멍에서는 피도 흘렀다.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제가 게워 낸 위액에 낯을 처박고 있던 선우는 겨우겨우 눈을 떴다. 맞아서 퉁퉁 부은 시야 안으로 무언가가 흐릿하게 보였다. 커다란 형체일 뿐이었지만 한눈에 알아봤다.

태화였다. 서태화가 저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이런 식으로 만나려던 건 아니었다. 만약 재화에게 잡히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떠났다면 시간이 많이 흐른 어느 날, 아주아주 많이 흐른 어느 날 태화를 다시 찾아가리라 생각했었다. 저 없이 불행하게 살고 있을 서태화를 보며 실컷 비웃어 주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비웃어 주기는커녕 눈물만 줄줄 흘렀다. 미안해서 흐르는 것도, 반가워서 흐르는 것도, 밉고 싫어서 흐르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못 본 며칠 사이에 태화가 너무 불행하게만 보여서, 그게 못내 서러워서 울었다.

“흐, 허으……. 윽…….”

저런 얼굴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고, 선우는 이제야 깨닫고 울음을 토해 냈다. 울음소리가 점점 짙어졌다. 태화는 고개를 삐뚜름히 기울인 채 선우를 멀거니 내려다봤다.

“애 옷은 좀 입히지.”

“어? 어어, 어. 야, 애 옷 좀 입혀 줘라. 회장님께서 보기 거북하시단다.”

남자들은 귀찮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착실하게 움직였다. 이미 넝마가 된 옷을 주워 와 선우 앞에 서자 선우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스스로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제대로 일어서려다가 풀썩 엎어지길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도 꿋꿋이 혼자 힘을 썼다. 남자들이 도우려고 하자 손을 쳐 내기도 했다. 기분이 나빠진 남자 하나가 또 손을 올리려고 할 땐 재화가 씁, 입소리를 내며 막았다. 그리고 흥미가 자글자글한 눈으로 선우를 구경했다.

선우 혼자 옷을 입는 데에 무려 15분이나 걸렸다. 팬티에 다리를 끼우려다가 넘어지고, 팔이 제대로 올라가지 않아 티셔츠를 입는 데만 세월아 네월아였다. 그런데도 재화도 태화도 끝까지 선우를 기다렸다. 마침내 옷을 전부 챙겨 입은 선우가 힘이 빠져 풀썩 쓰러지자 그제야 둘의 시선이 떨어졌다.

“어, 근데 일단 규칙은 좀 알려 줘야 할 거 같다, 야.”

재화는 갑자기 규칙을 운운했다.

“막 야만적으로 쇠고랑 채우고, 묶고 이런 거 내 스타일 아닌 거 알잖냐. 이렇게 하자. 네가 돌발 행동 하면 저년, 최선우 저거 손가락 하나씩 날아가는 거야. 알았지?”

재화는 말도 안 되는 규칙을 정하며 제 중지를 툭툭 쳤다. 실리콘 덩어리인 의지는 두드리는 대로 이리저리 튕겼다. 재화가 손짓하자 남자들은 알아서 선우를 잡아 무릎 꿇렸다.

“손가락 정도로 되겠어?”

태화가 여상하게 말했다.

“응. 손가락 정도면 딱 적당할 것 같다. 누가 갈가리 찢겨 뒈지든, 피부에 포가 뜨이든 아무 상관도 안 할 네가 고작 최선우 돌림빵당하는 영상 하나로 여기까지 자진 출두해 주셨는데. 손가락이 아니라 손톱을 뽑는 것만으로도 너한테는 먹힐 거 같은데?”

태화의 입에서 한숨이 짧게 나왔다. 재화는 쓸데없는 걸 너무 잘 알았다.

“자, 그러면 여기 앉아서 진솔한 대화를 해 볼까?”

재화는 자신이 앉아 있던 철제 의자를 가리켰다. 와서 앉으라는 듯이 눈썹을 찡긋거리자 태화는 스스로 걸어와 철제 의자에 걸터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남자 한 명이 다가와 태화의 몸을 수색했다. 혹시 무기라도 가져왔나 싶어 여기저기 세심하게 만졌다. 선우를 제외하고 같은 사내놈이 몸 만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태화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미간을 구기며 낮게 욕지거리를 뱉자 서재화가 재밌다는 듯이 낄낄댔다.

남자는 착실하게 수색을 마치고 재화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재화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꼼수를 부릴 놈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괜히 서태화 기분 좀 잡치라고 한번 흉내 내 본 것이었다. 남자가 물러서자마자 서재화는 태화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느새 재화의 손에는 조금 전 선우를 위협하던 회칼이 들려 있었다.

“억!”

태화는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재화가 찔러 넣는 칼을 받아 냈다. 정확히 옆구리였다. 미친 새끼가 찔러도 쉽게 죽지는 않고 억 소리 나게 아픈 곳만 후볐다. 태화가 숨을 짧게 삼키고 올려다보자 재화는 씩 웃었다. 그때까지도 선우는 상황을 알지 못했다. 서재화에게 가려져 저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방금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도 같은데…….

보이지는 않으나 무언가 안 좋은 예감이 스친 선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힘을 줬다. 하지만 남자들에게 어깨와 팔이 잡혀 금방 고꾸라졌다. 그때 철제 의자 다리를 타고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툭툭, 떨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하도 맞아서 시야가 불분명해진 선우는 눈을 몇 번 세게 감았다 뜨며 저게 뭔가 보려고 노력했다. 이내 제 눈에 보이는 게 피라는 걸 깨닫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피…….”

그때 서재화가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태화가 온전히 보였다. 하얀 셔츠 위로 번진 벌건 피가 보였고, 혹여 제가 들을까 봐 아픈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것도 보였다. 두 손이 자유로운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서태화가 보였다. 저 때문에 피를 흘리고 있는 태화가, 보였다. 그걸 깨달은 순간 선우는 눈과 입을 천천히 벌렸다.

“아, 안 돼……. 안 돼, 안 돼!”

커다란 외침이 이어졌다. 태화는 입을 다무는데, 오히려 선우가 악을 썼다. 안 된다고, 연신 외치는 소리에 재화가 뒤를 돌아봤다.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안 돼? 너희 애비 죽인 놈인데 안 돼? 와, 너 되게 후레자식이다.”

서재화는 기다렸다는 듯 선우의 가슴을 후벼 팠다. 선우는 또다시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게 느껴졌다. 서재화의 말이 전부 맞았다. 자신은 후레자식이었다. 그래도, 그렇더라도, 입에서는 안 된다는 말만 튀어나왔다. 본능이었다. 태화가 다친다고 생각하면 제가 다 아팠고, 그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고 있자니 제 몸에서 피가 싸악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필이면 하얀 셔츠라 피가 얼마나 흘러넘치는지 전부 보였다.

“그만, 흐윽……. 잘못했으니까 그만해요.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선우는 무턱대고 잘못했다며 빌었다.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저 더는 태화가 다치지 않길 바라며 두 손 모아 재화를 향해 읍소했다. 그 앞에 선 재화는 선우와 태화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뜬금없이 박수를 짝! 쳤다.

“그래, 그것부터 하자. 너희 둘이 묵은 오해가 좀 있는 거 같더라고. 그래서 친절한 내가 오해 푸는 시간을 좀 마련해 볼까 해. 그럼 이제…….”

“뭔 개소리…….”

“규칙 하나 더 정할게. 내 말 끊으면 최선우 눈깔 파 버릴 거야. 눈이 두 개니까 두 번 끊으면 봉사 되겠네.”

재화는 잔인한 얘기를 실실 쪼개며 하는 재주가 있었다. 한 번 더 뭐라 말하려던 서재화는 회칼을 빙빙 돌리는 재화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최선우 눈이 얼마나 예쁜데 저걸 파 버리겠다니, 절대 안 될 말이었다. 태화가 순순히 침묵을 지키자 재화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씨익 웃으며 선우를 쳐다봤다.

“선우야.”

“…….”

“대답해야지. 선우야?”

정신을 딴 데 놓느라 선우가 제때 대답하지 못하자 재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굴다가 돌연 태화의 옆구리로 주먹을 내리꽂았다. 꼭 칼침을 맞은 바로 그 자리였다. 한 대 더 때리자 피가 울컥 흘러나왔다. 태화는 그때까지도 독하게 신음을 참았다. 대신 반응한 건 선우였다. 피가 줄줄 새는 모습에 선우는 퍼뜩 정신을 끌어와 눈을 크게 떴다.

“그만, 그만해요……!”

“최선우?”

“네, 네. 네.”

“그래, 어른이 부르면 재깍재깍 대답하는 거야.”

“네, 대답해요. 재깍재깍해요.”

선우는 아직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저 미친놈처럼 재화가 하는 말을 반복적으로 따라 했다. 완전히 병신이 다 된 모습에 재화는 킥킥 웃으며 주먹에 묻은 피를 태화의 옷에 대충 문질러 닦았다.

“자, 잘 들어 봐.”

“네, 네.”

“옛날에 어느 창고에 두 여자가 묶여 있었어. 둘 다 우리가 관리하는 술집에서 일하는 년들이었는데, 한 년은 유명한 뽕쟁이었고, 다른 년은 그래도 웬수 같은 남편 대신 아들내미 먹여 살리겠다고 돈 차곡차곡 모으는 년이었어.”

‘어느 창고’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낯을 무섭게 일그러뜨린 태화는 이를 으득 물었다. 반면 선우는 파닥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들어 본 적 있는 이야기라 익숙하기도 했다. 태화가 했던 첫 살인에 관한 얘기였다.

“나랑 내 동생 태화랑 각각 한 년씩 맡아서 죽이기로 했는데 나는 누굴 골랐고, 태화는 누굴 골랐게?”

“…….”

“또 말 씹지?”

선우는 입술을 움찔거렸다. 말이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감히 서태화가 제 모친을 죽였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저 때문에 죽을 자리를 찾아 들어온 태화를 보면 제 부모를 죽인 게 뭐 대수인가 싶다가도 막상 이렇게 인정해야 하는 시간이 오자 속이 비틀렸다. 서태화를 미워해야 하는 의무와 그를 사랑하는 감정이 서로 몸집을 부풀리며 싸웠다.

그때 서재화가 칼을 고쳐 잡았다. 또다시 태화를 찌르려는 기세에 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빠, 빨간 매니큐어 칠한 여자…….”

차마 제 모친을 직접적으로 말할 수는 없어 태화가 했던 말을 빌렸다. 눈을 슬그머니 뜨자 서재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보였다.

“빨간 매니큐어? 아니, 누가 누굴 죽였는지 맞혀 보라니까 뭔 개소리야?”

무슨 뜻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별로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는지 재화는 쩝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빨간 매니큐어고 뭐고 난 뭔 소리인지 잘 모르겠고. 그냥 간단해. 서태화는 뽕쟁이를 찔렀고, 나는 성실한 어머니를 찔렀거든.”

“네, 네…….”

선우는 더는 아무 저항감 없이 서재화가 무슨 말을 하든 고개를 주억거렸다. 또 대답이 늦어졌다고 태화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봐 자동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근데 그거 알아? 서태화가 찔렀던 게 지 애미래.”

“네…….”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던 선우는 순간 움직임을 뚝 그쳤다. 누군가 땡! 하고 외쳐 주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자신이 뱉어 놓은 멀건 위액만 쳐다보다가 한참 만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재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씨익 웃고 있었다.

“네……?”

“서태화가 지 애미를 죽였다고.”

한 번 더 같은 말을 들었으나 잘 이해되지 않았다.

자기 엄마를 죽이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세상에 그런 아들이 어디 있어?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재화 뒤에 있는 태화를 봤다. 태화라면 뭐라고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쳐다봤으나 그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눈 감을 뿐이었다. 답을 줄 사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선우는 결국 혼자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일전에 재화는 서태화가 네 모친을 죽였다고 했었다. 그 생각을 한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아니, 아니었다. 선우는 눈을 황망하게 뜬 채 재화를 올려다봤다.

서재화는 서태화가 나의 어머니를 죽였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 사실이 머릿속에 인지되자마자 한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죽인 그 위대하신 어머니 이름이 박진아라고 하더라고.”

서재화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연신 키들거렸다. 선우는 입을 벙벙하게 벌린 채 재화를 바라봤다. 장난스레 웃는 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아니, 머릿속에서 재화의 웃음소리가 이리저리 쏘다녔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어지럽고, 매스꺼운 상황 속에서도 또렷이 들린 건 ‘박진아’라는 이름이었다.

“그거……. 우리 엄마 이름…….”

“아, 진짜?”

“우리 엄마……. 어, 엄마…….”

서재화는 세상 놀란 눈을 뜨며 몇 번이고 ‘진짜? 진짜 너희 엄마야?’ 묻다가 갑자기 씩 웃었다. 별다른 말은 필요치 않았다. 선우는 그 웃음을 보고 모든 걸 깨달았다.

그날, 그 창고에서, 그딴 짓을 저지른 건……. 그러니까, 선우의 모친을 죽인 건 서태화가 아니라 서재화였다. 그리고 서태화가 죽인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의 모친이었다. 이제야 모든 게 딱딱 맞아떨어졌다. 태화가 양부라는 사람을 왜 그렇게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만큼 경멸했는지, 그날 일을 말해 주던 눈이 왜 그렇게 쓸쓸했는지,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여자를 죽였다고 했을 때 왜 울 것 같은 얼굴이었는지.

태화는 수많은 신호를 보냈지만, 선우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재화의 세 치 혀에 놀아나 태화가 어떤 일을 겪어 왔는지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서재화에게 속은 것도 아니었다. 속인 사람이 없는데 선우는 혼자 속아 넘어가 이 지경까지 왔다. 그 모든 걸, 이제야 깨달아 버렸다.

말도 못 하고 입만 벙긋대고 있는데 앞에서 작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퍼뜩 고개를 들어 보자 태화가 몸을 옅게 들썩이고 있었다. 기침이 한번 터져 나올 때마다 옆구리에서도 딱 그만큼의 피가 죽죽 뿜어졌다.

“아, 아……. 어……. 아…….”

선우는 언어를 잃은 나라의 사람처럼 이상한 소리만 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버버거리다가 돌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죽일 거야! 죽여 버릴 거야, 개새끼야!”

남자들이 어깨를 찍어 누르는 데도 힘을 써 가며 몸부림쳤다. 재화는 놀란 듯 주춤 뒷걸음질 치다가 곧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가볍게 손짓했다. 남자 한 명이 선우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그런데도 발악을 멈추지 않자 아예 복부를 걷어찼다. 강한 힘이 명치에 꽂히자 선우는 헉! 소리를 내며 옆으로 엎어졌다. 서재화가 쯧 혀를 찼다.

“여기서 끝이겠냐고. 야, 서태화가 느이 애비는 왜 죽였는지 알아? 그 이유 알면 너도…….”

“적당히 좀 해, 미친놈아.”

말이 또 한번 끊기자 재화는 순식간에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태화를 돌아봤다. 서재화의 눈이 평소와 달리 번들거렸다. 돌아 있는 눈빛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서재화는 회칼을 콱 움켜쥐더니 그대로 태화의 옆구리를 한 번 더 찔렀다. 같은 부위였다.

“말 끊지 말랬지.”

“씹…….”

“말 끊으면 최선우 눈깔 파 버린다고 했지.”

서재화는 칼을 꽂아 넣은 채 반 바퀴 돌려 비틀었다. 태화의 입에서 살려 달라는 소리가 나오길 바라는 것처럼 되는대로 쑤셔 대고 돌려 댔다. 하지만 태화는 아픈 신음조차도 내지 않았고, 그 바람에 재화는 열이 더 뻗쳤다.

“네 새끼가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그 말을 끝으로 뒤를 돌아 덩그러니 누워 있는 선우를 노려봤다.

“야, 그년 왼쪽 눈깔 파 버……. 아악!”

비명이 울려 퍼졌다. 태화가 아닌 재화였다. 말을 채 다 끝맺지 못한 서재화는 갑자기 오른쪽 눈알을 감싸 쥐며 길길이 날뛰었다.

감싸 쥔 손을 타고 뻘건 피가 흘러내렸다. 재화는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려고 그나마 멀쩡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제 발치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중이었고, 태화의 손에는 옆구리에 박혀 있던 칼이 들려 있었다. 부들부들 떨며 손을 떼 보는데 오른쪽 눈이 떠지지 않았다. 아니, 떴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좌안만 돌아가고 우안은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손끝을 더듬어 만져 보니 눈알 위아래 살이 일자로 쭉 벌어진 게 느껴졌다.

“씨빨! 아윽, 씹!”

재화는 광분했다. 두 발을 퍽퍽 굴려 가며 뛰다가 다시 쪼그려 앉아 눈알을 만졌고, 벌어진 살점에 손이 닿자 비명을 지르길 반복했다. 서재화가 혼자서 생쇼를 하기 시작하자 남자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주춤거렸다. 꽤 거리가 있어서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모양이었다.

몇 명이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서재화의 상태를 살피던 남자는 놀라 기함을 하다가 나머지 남자들도 불렀다. 장정 일곱이 오합지졸처럼 우르르 몰려다니는 동안 선우는 기회를 봐 태화에게로 달려왔다. 이미 남자들은 재화에게 정신이 팔려 선우는 신경 쓰지도 못했다.

“흑, 아저씨, 아저씨…….”

“어, 나 여기 있다.”

“아니, 마, 말하지 말아요……. 흐…….”

“넌 진짜, 윽…….”

선우는 쉬이 울지도 못했다. 눈물을 벅벅 닦아 가며 태화 앞에 무릎 꿇어앉았다. 피가 새어 나오는 옆구리를 만지지도 못하고 그 근처에서 손만 쥐락펴락하는데 태화가 선우의 멱살을 억세게 잡아끌어 왔다. 귓가로 무언가 나직이 말을 전했다. 문제는 피가 줄줄 흐르는 왼쪽 귀라는 점이었다. 먹먹한 귓속으로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 선우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말라고, 알았으니까 그만하라고, 빌 듯 애원했다.

“아으, 씨팔……. 개새끼야!”

한참을 바닥에 처박혀 파르르 떨던 서재화가 느릿하게 일어났다. 더는 시간이 없었다. 태화는 조급해진 마음에 인상을 구기다가 마지막으로 선우의 뺨을 감싸 쥐었다.

“가.”

짧은 한마디였다. 선우는 아직도 귀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만으로 태화의 말을 알아들었다.

“싫어, 싫어요……. 흑…….”

“선우야.”

그때 서재화가 크게 포효하더니 이쪽으로 비척비척 다가왔다. 선우는 싫다며 계속 도리질을 쳐 대는데 태화만 마음이 급했다. 남자들에게 맞느라 다 터져서 퉁퉁 부은 입술을 매만지려다가 말았다. 엄지로 만지는 시늉만 하다가 선우를 툭 밀쳤다.

“가……!”

이전보다 커진 목소리였다. 그 소리만큼은 선우의 귀에 선명하게 꽂혔다.

“싫어, 안 가, 안 갈…….”

“가, 씨발!”

태화는 사나운 눈빛으로 선우를 노려봤다. 말을 들으라고 달래는 대신 무섭게 을렀다. 겁쟁이 최선우는 이렇게 해야만 말을 들었다. 한 번 더 크게 꺼지라고 외치는 순간 선우는 어깨를 파드득 떨더니 뒤로 주춤 물러났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가!”

태화가 마지막으로 외쳤을 때 선우는 뒤를 휙 돌았다. 가 버리라는 태화의 말을 꼭꼭 씹어 먹으며 뛰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도 멈추지 않았다. 선우가 창고 문을 향해 내달리자 재화에게 붙어 있던 남자 한 명이 따라붙으려고 했으나 재화가 손을 휘휘 저었다.

“야, 야. 냅둬, 씨발.”

조금 전보다는 확실히 진정된 모습이었다. 그사이 선우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달려 문 앞에 도착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육중한 문을 열어젖혔다. 한 걸음만 내디디면 밖이었다. 근데 그 한 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울 자격도 없다는 걸 알아서 소리를 죽이며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다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모두가 저를 보고 있었으나 선우의 눈에는 태화만 들어왔다. 그 먼 거리에서도 태화가 ‘가’라고 입을 벙긋거리는 게 보였다.

선우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가겠노라고. 당신의 말을 들어 도망치겠노라고. 그래서 평생을 불행하게 살겠노라고. 죽지 않고 아득바득 살아남아 불행하겠노라고. 이게 당신이 주는 벌이라면 달게 받겠노라고.

태화에게 닿지 않을 약속을 혼자서 끝내고, 마침내 걸음을 뗐다.

“안 잡아도 됩니까?”

“냅두라고, 새끼야. 저 꼴이면 어딜 가든 또 가랑이나 벌리고 살겠지. 그냥 그렇게 살라고 해.”

후, 하고 큰 숨을 내쉰 서재화는 남자가 건네는 손수건을 받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어떻게 그어 놨으면 아직도 피가 줄줄 흘렀다. 아픈 것도 참고 세게 눌러 봐도 좀체 지혈되지 않았다. 하나 남은 멀쩡한 왼쪽 눈으로 태화를 봤다. 저쪽도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옆구리에서 쉼 없이 피가 새어 나왔고, 선우가 사라지자 그제야 아픈 듯 한숨을 푹푹 내뱉었다.

“독한 새끼.”

서재화는 가래침을 툭 뱉고 태화에게로 다가갔다. 몇 걸음 가다가 태화 손에 아직도 칼이 들린 걸 보고 멈칫했다.

“야, 야. 저거 칼 뺏고, 손발 좀 묶어.”

하여간에 겁은 많았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서재화의 아랫놈들도 겁이 많긴 마찬가지였다. 서재화가 시키는 일이니 해야 하긴 하는데 태화에게서 누가 칼을 뺏을 건지 서로 눈치만 보기 바빴다. 가만 지켜보던 태화는 픽 웃으며 스스로 칼을 내던졌다.

그제야 남자들은 태화에게 다가가 손과 발에 각각 수갑과 족쇄를 채우듯 노끈으로 단단하게 묶었다. 재화는 태화가 잘 묶였는지 멀리서 꼼꼼히 확인하고서야 다가갔다. 피가 멈췄나 싶어 손수건을 내리자 칼로 그어진 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태화는 재화를 보며 작게 웃었다. 비웃는 모양새였다.

“웃어?”

서재화는 망설이지 않고 태화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웃어, 씨발놈아?”

“커흑!”

재차 세게 걷어차자 태화의 입에서 아픈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제야 때릴 맛이 났다. 서재화는 몇 번 더 태화를 구타하다가 뒤로 물러났다.

“대가리 안 쓰고 감정만 앞서면 죽도 밥도 안 된다, 태화야.”

언젠가 태화가 서재화에게 했던 말이었다. 서재화는 그 말을 그대로 태화에게 돌려줬다.

“난 너한테 감정이 있어서 죽일 거긴 한데, 좀 가지고 놀다가 죽이려고.”

서재화의 주특기가 나올 차례였다. 서재화는 사람을 쉽게 죽이지 않았다. 몇 시간은커녕 하루고 이틀이고 가지고 놀며 고문하다가 죽이는 게 취미이자 특기였다.

그 사실을 알면 겁을 먹을 법도 한데 태화는 짧게 끊어지는 숨을 토해 내면서도 킥킥 웃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를 부렸다. 그게 꼴 보기 싫었던 재화는 쯧 혀를 차다가 뒤로 손을 뻗었다. 뒤에 있던 아랫놈이 주머니에서 전지가위를 꺼내 건넸다. 태화가 재화의 손가락을 잘랐을 때 쓴 것과 같은 것이었다. 유치하기가 짝이 없었다.

“자, 손가락 몇 개 자를까?”

재화는 태화의 눈앞에 전지가위를 흔들어 보였다.

“아니다. 난 너처럼 계산 같은 거 잘 못 하는 놈이니까 그냥 다 자를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화의 손을 끌어왔다. 태화는 순순히 손가락을 펼쳤다. 왼손 검지가 뭉텅 잘려 나가기까지 단 3초도 걸리지 않았다. 마디가 아니라 뿌리까지 잘린 살덩어리는 툭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재화와는 달리 태화는 야단법석을 떨지 않고 조용히 인상만 구겼다. 아프긴 오지게 아파서 숨이 턱 막혔다. 부러 가위 끝으로 잘린 단면을 툭툭 치던 서재화는 태화 쪽에서 별 반응이 없자 짧게 욕을 짓씹었다.

“고생하는 사람 생각해서 무슨 반응이라도 좀 보여 봐라.”

짜증 난다는 듯 혀 차는 소리까지 이어졌다. 서재화는 한참 더 불만 섞인 얼굴을 했다. 와중에도 바닥에 떨어진 검지 덩어리를 지그시 밟아 뭉개는 건 잊지 않았다. 받았던 걸 똑같이 되돌려 주는 순간이었다. 이제부터는 덤을 더 얹어 줄 시간이었다. 재화는 다음으로는 어느 손가락을 잘라 볼까, 하고 태화의 손가락을 찬찬히 훑었다. 제법 신중한 눈빛이었다. 그 앞에서 픽 웃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등신 새끼.”

“뭐?”

“가지고 놀 게 아니라 빨리 죽였어야지, 등신아.”

태화는 웃었고, 재화는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손가락이 아니라 그냥 주둥이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충동은 얼마 가지 않아 실천으로 바뀌었다. 서재화는 정말 태화의 입을 찢을 생각으로 다가갔다. 그때 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뭔 소리야?”

한 대가 아니었다. 여러 대가 한꺼번에 울어 댔다. 대로변도 아니고, 인적 드문 곳에 위치한 창고라 여러 대의 차가 지나갈 일이 없었다. 무언가 예감이 안 좋아진 재화가 뒤를 휙 돌아보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창고 문이 그대로 날아갔다. 차 한 대가 문을 들이받으며 안으로 쳐들어온 것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처음 들어온 차를 필두로 뒤로 십여 대가 넘는 차가 줄줄이 들어왔다.

“뭐야, 씨발?”

서재화가 상황 파악을 마치기도 전에 차에서 장정들이 우르르 내렸다. 어림잡아도 수십 명은 되어 보였다. 재화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생각하다가 태화를 휙 돌아봤다. 태화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다 알았다는 듯이 전혀 놀라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제야 재화는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차에서 내린 장정들이 천천히 걸어오자 이쪽에 있던 일곱 명은 쫄린 티를 내면서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꼴에 조폭이라고, 자존심이 남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 자존심도 싸움이 시작되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자들은 싸우기보다는 도망가길 택했고, 그러다 잡혀 처맞았다.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온 차에서 내린 고 박사와 장 선생은 눈앞에 펼쳐진 난장판을 감상하다가 저쪽에 있는 태화를 발견했다. 고 박사는 이 상황에서도 손을 붕붕 저어 밝게 인사했다. 태화 옆구리에 피가 흥건한 걸 보고도 참 해맑았다. 푼수는 푼수였다. 고 박사 덕에 오랜만에 진짜 웃음을 흘리던 태화는 황망하게 서 있는 서재화를 올려다봤다.

“왜 그런 얼굴이야?”

묻는 말에 서재화가 퍼뜩 뒤를 돌아봤다. 분하다는 얼굴이었다. 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도 했다. 뭘 어떻게 발악해도 항상 저보다 모자란 삶을 살아왔으니 화가 날 법도 했다. 게다가 저번에 저 한번 이겨 보겠다고, 아버지 같지도 않은 인간에게 인정 한번 받아 보겠다고 날뛰다가 교도소 구경까지 하고 5년 만에 나와서 맞이하는 마지막이 이런 꼴이니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이해하는 것과 서재화를 용서해 주는 것은 엄연히 다른 얘기였다. 태화는 재화를 봐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건 서재화가 최선우를 건드렸을 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태화의 아랫놈이 그의 손과 발에 묶인 줄을 끊었다. 태화는 제 앞에서 씩씩거리고 있는 서재화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파 뒈질 만큼 찔리고 맞아 줬으니 이제는 배로 갚아 줄 차례였다.

패싸움은 쉽게 끝났다. 말이 패싸움이지 실상 쪽수 차이도 컸고, 실력 차이도 커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가볍게 뭉그러뜨리는 모양새였다. 그 결과 재화의 아랫놈 일곱 명은 물론 재화까지 태화 앞에 무릎 꿇은 채 앉아 있었다.

태화는 조금 전 칼에 찔리고 손가락이 잘려 나갔던 의자에 그대로 앉아 앞에 있는 놈들을 슥 훑어봤다. 저렇게 처맞고도 살아 있는 게 신기하다 싶을 만큼 몰골들이 말이 아니었다. 별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어서 쯧 혀를 차다가 앞에 앉은 서재화의 재킷을 뒤져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멘솔 좀 챙겨 다녀라.”

쯧 혀를 차며 말하자 재화가 눈을 형형하게 뜨고 노려봤다. 그래 봤자 무릎 꿇어앉은 자세였다. 눈을 그딴 식으로 치뜬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무엇도 없었다. 태화는 그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 재화의 멍청함에 감탄하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장 선생이 자연스레 불을 붙여 주려 하자 뒤로 고개를 뺐다.

“괜찮아요. 이런 거 하지 마요.”

격식 차리는 성격이 아닌지라 정중하게 거절했다. 혼자 불을 붙이며 습관처럼 왼손으로 바람 막듯 라이터 앞을 가리는데 뭉툭하게 잘려 나간 검지 밑동이 눈에 보였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담배를 한 모금 빨아 보니 이번에는 옆구리가 문제였다. 어떻게 쑤셔 놨으면 한 모금 들이킬 때마다 옆구리가 당겼다.

연기를 내뱉을 땐 구멍 뚫린 곳에서 같이 내뿜어지는 것처럼 뜨겁기까지 했다. 저 역시 서재화의 손가락을 멋대로 잘랐으니 이딴 칼침 좀 맞고, 손가락 좀 잘린 걸 두고 뭐라 하기에는 조금 그랬으나 그래도 짜증이 나는 건 별수 없었다.

어딜 감히 칼을 들이밀어?

이제야 슬슬 기분이 잡쳐진 태화는 담배를 태우다 말고 반쯤 타들어 간 걸 그대로 비벼 껐다.

“끄악!”

칼에 베여 터진 서재화의 오른쪽 눈알 위로 담배꽁초가 푹 꽂혀 들어갔다. 안 그래도 핏물이 줄줄 흐르는 곳으로 담배가 지져지자 서재화는 발광했다. 발광도 발광도 그런 지랄발광이 없었다.

“씨발 새끼야!”

재화는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태화를 향해 달려들었다. 태화는 기다렸다는 듯 재화의 귀싸대기를 올려붙였다. 어찌나 강한 힘이던지 그 큰 몸이 휘청이더니 옆으로 쿵 쓰러졌다. 골이 띵하게 울리는 느낌에 재화는 더 덤비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태화는 담배를 한 대 더 태우며 재화를 내려다봤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회상했다.

최선우가 고 박사네를 나갔다는 말을 듣고 이제 슬슬 모든 걸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원식이 키우고 재화가 사랑한 회사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마지막으로 재화를 죽여 놓을 세력을 모으고, 장 선생에게 부탁해 선우를 찾고……. 역시 장 선생은 실력이 좋아 최선우를 금방 찾았다. 딱 한 가지 간과한 점은 서재화가 최선우를 볼모로 잡을 거란 생각을 못 했다는 점이었다. 또 한 가지 문제점은 서재화의 급한 성질머리였다.

안 그래도 재화에게서 전화 왔을 때 선우가 어디 있는지 장 선생에게 미리 듣고 찾아가는 중이었다.

“근데 씨발 그새를 못 참고 애를 돌려?”

태화는 남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기어코 한 번 더 재화의 몸에 담배를 비벼 껐다. 이번에는 왼쪽 뺨이었다. 서재화의 비명을 들으며 숨을 천천히 골랐다. 가슴 근육을 크게 오르내려 성질을 어느 정도 가라앉히다가 재화 뒤에 앉아 있는 일곱 명을 스윽 훑었다.

“여기서 최선우 안 건드린 사람?”

난데없는 질문에 남자들은 다들 눈치를 봤다. 선뜻 대답하는 사람 한 명이 없었다. 모두 한 번씩 선우에게 좆을 비벼 본 까닭이었다. 태화 역시 알고 있었으나 부러 질문한 것이었다.

“서재화 빼고, 나머지 새끼들 좆 좀 잘라라.”

남자들을 지키고 서 있는 아랫놈들에게 간단히 지시했다. 마치 어디 나가서 저녁 좀 사 오라는 듯이 일상적인 어투였다. 그 바람에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던 일곱 명은 떡대들이 각자 칼을 들고 다가오고서야 두려움에 찬 소리를 질렀다.

살려 달라는 놈도 있었고, 잘못했다는 놈도 있었다. 한 번만 봐 달라고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비는 놈 천지였다. 하지만 칼을 쥔 남자들은 태화의 입에서 그만하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았다.

그저 명령받은 일을 수행하기 위해 덜덜 떠는 놈들의 가랑이 사이를 파헤쳤다. 마치 고도의 훈련으로 인간처럼 보이는 로봇과도 같은 몸놀림이었다. 태화 역시 그만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끝까지 입을 다물고 남자들의 좆이 하나하나 잘려 나가는 걸 지켜봤다. 물컹한 살덩어리가 툭툭 떨어져 나갈 때마다 사극 영화의 고문 장면에서나 들을 법한 비명이 창고 가득 울려 퍼졌다.

유일하게 선우를 건드리지 않은 재화만이 좆을 지킬 수 있었다. 재화는 남자들의 비명을 들으며 움칠움칠 떨었다. 겁먹은 주제에 하나 남은 눈깔은 또 표독스럽게 떠 태화를 노려봤다.

“씨빨 새끼야, 죽이려면, 윽, 얼른 죽여.”

서재화는 남들처럼 살려 달라고 빌지 않았다. 남자들이 그렇게 빌었는데도 자지가 잘려 나갔는데, 제가 눈물로 호소한다고 해서 태화가 죽일 결심을 바꿀 리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가지고 놀다가 어떻게 죽일는지, 그게 관건이었다. 재화는 최대한 빨리, 단숨에 죽길 바랐다. 물론 태화의 생각은 좀 달랐다.

“너, 손가락이 너무 많아.”

대뜸 이상한 말만 내뱉었다. 별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멀쩡한 손가락을 두고 너무 많다니. 심지어 재화는 남들 다 열 개씩 있는 손가락 중 두 개가 하자라 실상 멀쩡한 건 여덟 개뿐이었다.

“뭔 개소리……. 악! 아악! 너, 이 씹! 아아악!”

발끈하던 서재화는 더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바닥으로 엄지부터 시작해 새끼손가락까지, 재화의 손가락 하나하나가 툭툭 떨어졌다. 태화는 아무 감흥이 없는 얼굴로 재화가 쓰던 전지가위를 주워 주인의 손가락을 차례차례 잘라 나갔다. 기껏 비싼 돈 주고 맞춘 의지도 빼놓지 않았다. 손가락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재화는 악 소리를 지르다가 어느새 거품을 물더니 바르르 떨었다. 가랑이 사이가 짙게 젖어 들고, 밑으로 오줌이 뚝뚝 떨어졌다.

태화는 신기하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아무리 그래도 재화가 이렇게까지 추태를 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오줌에 이어 다른 것도 지렸는지 악취가 풍기기 시작하자 태화는 마지막 새끼손가락 하나까지 남김없이 잘라 내고 뒤로 얼른 물러났다.

“꼴이 말이 아니네.”

그다지 안타깝지도 않으면서 괜히 한 마디 얹었다. 그사이 고 박사는 먼지 구덩이 사이를 뒹굴고 있는 손가락들을 하나하나 챙겨 지퍼 백에 넣었다. 파리하게 질린 덩어리들을 만지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의지까지 포함해 열 개의 손가락을 야무지게 넣고 입구를 닫는데 재화가 제 손가락들을 멍하니 쳐다봤다. 지퍼 백 안에는 사람의 몸에서 떨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현실감 없는 덩어리들이 가득했다. 재화의 등 뒤에서는 아직도 자지가 잘리느라 내뱉는 비명이 난무했고, 주변으로 더러운 냄새가 진동했다.

서재화는 얼빠진 표정으로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이곳은 지옥이었다.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지옥.

마지막으로 태화를 올려다보다가 숨을 헙 삼켰다. 앞에 앉아 있는 건 태화가 아니라 차사였다. 저를 데리러 지옥에서부터 직접 찾아온 괴물이 앉아 있었다. 피가 스멀스멀 빠져나가 안색이 창백해진 덕에 더욱 괴물처럼 보였다.

“반병신으로 만들어서 평생 빌빌 기며 살게 할까……. 무진 고민해 봤는데.”

귀신 목소리라도 들은 듯 재화는 힉 소리를 내며 떨었다. 불과 몇 분 전 태화와 선우 사이에 서서 여유를 부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죽음을 문턱에 두고 겁에 질린 놈만 있을 뿐이었다.

“역시 너는 죽여야겠다.”

태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자 서재화는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오지 말라고, 저리 가라고. 손 같지도 않은 손을 마구 휘저었다. 그 앞에 선 태화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칼을 주워 가볍게 쥐어 봤다. 최근 태화 정육 일을 그만두면서 잡을 일이 없다가 오랜만에 잡은 칼이었다. 꽤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칼 쥐는 모양이 익숙했다. 날이 잘 갈렸는지 신중하게 살피다가 서재화를 내려다봤다.

“근데 누가 죽었는지 몰라야 하니까, 죽이기 전에 이빨부터 좀 뽑을게.”

말을 끝내기 무섭게 재화의 낯짝을 틀어쥐었다. 뺨을 뭉그러뜨리듯 잡아 억지로 입을 벌려 그 사이로 칼 손잡이를 물렸다.

“얘 이빨 좀 뽑아 놔.”

옆에 서 있던 아랫놈에게 지시한 뒤 재화를 지나쳤다.

“다 뽑으면 부르고.”

말하고 터덜터덜 걸어 창고를 나갔다. 고 박사와 장 선생도 태화의 뒤를 따랐다. 등 뒤로는 재화의 비명이 배경 음악처럼 은은하게 깔렸다. 밖으로 나온 태화는 가장 먼저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 창고에 들어설 때만 해도 주변에 뭐가 있는지 전혀 안 보일 만큼 캄캄한 새벽이었는데 어느새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저 끝에서부터 주홍빛이 올라오는 걸 감상하다가 장 선생이 내미는 담배를 받아 태웠다.

“윽.”

한 모금 깊게 들이켜자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아프긴 아픈데 둔한 감각이었다. 아무래도 안이 많이 상한 듯했다. 한 번 더 앓는 소리를 냈더니 고 박사가 툭 쳤다.

“아!”

하필이면 칼에 찔린 딱 그 자리였다.

“아프냐?”

“그럼 칼을 맞았는데 아프지, 안 아프겠냐? 서재화 저거 칼은 또 존나게 잘 써요.”

“말하는 거 보니까 죽지는 않겠네.”

고 박사는 기어이 태화의 옆구리를 한 번 더 쳤다. 억 소리를 낸 태화는 고 박사가 키득거리자 짜증스레 쳐다보다가 곧 똑같이 픽 웃었다. 옆구리가 찔리고, 검지가 잘린 몸이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도 줄담배를 태우며 앞에 난 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선우가 걸어갔을 길이었다. 딴에는 달린다고 달렸겠으나 누구보다 느리게 걸었을 길이었다. 덜렁대는 성격상 발치에 있는 돌부리도 보지 못하고 풀썩 넘어졌을 모습이 눈이 선했다. 울면서 뒤돌아보고, 콧물을 킁 먹으며 또 돌아보고, 그러면서도 한 번을 멈추지 않고 나아갔을 길을 보며 희뿌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이제 다신 만날 일이 없겠지. 마지막인 걸 알았으면 한 번만 웃어 보라고 할걸.

그 예쁜 입술로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못 들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최선우는 날 사랑하지 않았나.

태화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 머릿속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게 웃겼다.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최선우와 하려 했다. 그래서 제대로 못 했다. 전부 제 탓이었다.

잠도 못 자고 밤을 새웠는데도 더는 졸리지 않고 정신이 맑았다. 잠 없이도 또렷한 정신으로 맞는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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