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오일장을 마치고 돌아온 태화는 피곤할 만도 할 텐데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선우를 안았다.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선우의 몸을 핥고, 빨았다. 선우는 일단 씻자고 했지만, 태화는 막무가내였다. 장례식 동안 못 한 건 사실이었으나 이 정도로 조급하게 굴 건 없지 않나 싶었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오랜 시간 표류라도 했던 양 태화는 선우의 입술을 물어뜯고 숨을 받아 마셨다. 매번 선우의 숨통을 트여 주더니 이번에는 왠지 선우의 숨을 허겁지겁 들이켜며 호흡했다. 처음에는 당황하며 두 팔을 버둥거리던 선우도 자신을 더 안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온몸을 더듬거리는 태화의 손길을 느끼며 그를 바투 끌어안았다.
“나, 흣, 어디 안 가. 여기 있어요, 아저씨.”
달랜다고 한 말이었지만 어쩐지 태화는 더 갈급하다는 듯 굴었다. 도화선에 불을 붙인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벽이며 식탁이며 이리저리 쿵쿵 부딪혀 침실까지 들어간 둘은 침대에 올라가자마자 서로의 아랫도리에 제 자지를 붙이고 비볐다. 옷 벗을 시간도 아깝다는 듯 태화는 선우의 바지만 벗기고 본인은 바지 버클만 끌어 내렸다. 흉흉하게 솟아오른 게 좁아터진 앞섶을 가르고 튀어나왔다.
거대한 그림자가 선우의 아랫배를 적시자마자 태화는 다급히 콘돔을 찾았다. 이런 상황에도 선우를 생각해 콘돔을 찾는 손이 분주했다. 이미 가랑이를 활짝 벌린 채로 태화의 자지를 문지르던 선우는 그의 손을 끌어와 제 뺨을 쥐게 했다.
“그냥 해요. 괜찮아, 응, 그냥.”
“하아……. 건들지 마. 너 그러다 진짜 죽어.”
“아저씨한테 죽는 거면 좋아요.”
하늘하늘한 목소리가 태화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태화는 윽 숨을 삼키고 선우를 내려다봤다. 좋기는 뭐가 좋다는 건지, 겁먹은 눈을 하고도 입꼬리는 말아 올려 웃는 선우 때문에 머리가 더 어찔해졌다. 태화가 다시 콘돔을 찾으려 하자 선우는 이번엔 아예 두 다리로 태화의 허리를 꽉 옭아맸다. 프리컴을 질척하게 내뿜는 자지가 아랫구멍에 꾹 닿았다.
“씹…….”
“안에 싸 줘요…….”
“최선우.”
“여기. 여기에 아저씨 좆물로 가득 채워 줘요.”
선우는 티셔츠 사이로 하얗게 드러난 뱃가죽을 문질렀다. 사람 하나 죽이려고 작정한 듯했다. 태화는 잇몸이 으깨질 정도로 이를 세게 물다가 선우의 골반을 단단히 잡았다.
“아! 아흑!”
흉기 못지않은 좆이 단번에 구멍을 꿰뚫었다. 선우는 입을 크게 벌리며 파르르 떨었다. 흐르는 침을 닦을 생각조차 못 했다. 제대로 풀지도 않고 넣은 건 처음이었다. 조르고 졸라 겨우 했던 첫 관계에서도 태화는 리밍부터 시작해 손가락으로 구멍을 정성스레 만져 줬고, 등을 쓰다듬으며 긴장을 풀어 줬다. 이렇듯 오직 삽입만이 중점이 된 관계는 처음이었다.
“윽, 힘 좀, 풀어.”
“하으, 아……!”
추삽질도 빠르게 이어졌다. 길고 굵은 게 끊임없이 안을 두드렸다. 태화가 거칠게 몸을 맞댈 때마다 선우의 가랑이 사이가 점점 벌겋게 질려 갔다. 어찌나 세게 처박던지 허벅지 안쪽이 경련으로 달달 떨릴 정도였다.
태화는 선우보다 1.5배는 무거운 몸을 내리 짓누르며 좀 더 깊게 들어갔다. 육중한 몸이 무게를 한껏 실어 기대 오자 선우는 숨이 턱 막혔다. 태화가 입술을 비벼 오는 탓에 천장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천장에서 내려 봐도 선우의 달랑거리는 다리와 버둥거리는 팔만 보일 뿐 나머지는 태화의 덩치에 가려 무엇도 보이지 않을 터였다.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에 선우는 흡 숨을 삼키면서도 태화의 등허리를 꼬옥 껴안았다.
“아아……! 아흐, 아저씨……. 흐, 아, 아!”
깊다는 투정도, 천천히 해 달라는 애원도 하지 않았다. 선우는 그저 신음만 높게 내지르며 태화의 몸짓에 맞춰 흔들렸다. 내벽의 사위가 한껏 벌어져 점막을 짓쳐 올리는 느낌에 배 속에 맴돌던 쾌감이 사지로 뻗어 나갔다.
순간 바짝 열 오른 귀두가 어느 부분을 가르고 들어왔다. 선우는 눈을 번쩍 떴다. 언젠가 느껴 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들어오면 안 될 곳, 곧게 펴진 곳을 지나 구불텅하게 꺾인 곳까지 꾸역꾸역 대가리를 들이미는 느낌에 선우는 고개를 위로 홱 쳐들었다.
“아아, 아……. 하…….”
절정과 고통이 반씩 섞인 게 온몸을 관통했다. 몸이 반으로 쩍 갈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내내 참아 보던 눈물이 툭 터졌다.
“아저씨, 윽, 아, 아저씨…….”
더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데 말이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울음도 목구멍에 꽈악 들어차 짠맛이 났다. 선우는 끅끅 소리를 내며 태화에게 매달려 단단한 어깨에 눈두덩이를 묻었다. 태화가 왜 이렇게 거칠게 구는지 몰랐다.
다만, 지난 5일간 지켜본 태화는 많이 지쳐 보였고, 더해서 나락까지 찍고 돌아온 사람 같았다. 화가 난 것도 같았으며 어쩐지 허탈해 보이기도 했다. 위로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위로해 본 적이 없어서, 머리가 나쁜 탓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저 태화를 위해 이 몸뚱이라도 내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최선우, 너, 윽……. 씨팔.”
“응……. 아저씨, 흑…….”
“너…….”
태화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싶다가 이내 입을 다물고 허리 짓에 집중했다. 무언가를 잊으려는 듯 자못 필사적인 몸짓이었다. 처음으로 태화에게서 다른 종류의 조급함을 느낀 선우는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화는 선우를 내려다봤다. 눈물이 방울방울 흐르는 눈을 보고, 연신 아저씨, 아저씨, 불러 대는 입술을 봤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마냥 제가 좋아 죽겠다는 얼굴을 내려다보던 낯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태화는 한 번 더 사정했다. 이미 넘치는 정액으로 엉망이 된 접합부에서 점액질이 뭉그러지는 소리가 들릴 만치 몸을 깊게 묻었다. 몇 번째 싸는 건지 몰랐다. 태화도 어느 순간부터는 정신을 놓고 되는대로 좆을 쑤셔 박았다. 수차례 사정했음에도 정액은 끊임없이 나왔다. 울컥울컥 뿜어지며 선우의 바람대로 마른 배를 좆물로 가득 채웠다. 채 담기지 못한 정액은 자지가 끼워진 뒷구멍 틈에서 삐질 새어 나왔다. 태화는 한 번 더 안을 콱 치받아 모든 걸 쏟아 냈다.
“아으…….”
선우는 다 쉰 목소리로 낮게 신음했다 이제 아래쪽은 감각도 없었다. 그런 줄만 알았는데 태화가 자지를 쥐고 흔들어 대자 몸이 파드득 떨렸다. 탁탁탁, 가볍게 몇 번 치대는 걸로 선우는 금방 사정했다. 태화와 달리 멀건 물 같은 액체만 주룩 흘러나왔다.
“하……. 흐, 하아…….”
“윽…….”
태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랫구멍에서 빠져나온 좆을 선우의 것과 겹쳐 쥐어흔들었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섹스를 못 하는 사람처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몸을 맞대고 사정을 유도했다. 선우는 거친 목소리로 힉 소리를 내며 부들부들 떨었다. 사정 직후에 만져지는 건 참기 힘들었다. 자지러지듯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돌연 태화의 어깨를 꾹 말아 쥐었다.
평소라면 제발 그만해 달라고 애원할 타이밍이었는데 꿋꿋이 참았다. 정신이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태화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방금 사정한 두 자지는 서로에게 몸뚱이를 비벼 가며 젖은 소리를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화와 선우는 동시에 한 번 더 파정했다. 태화가 힘 있게 쏘아 올린 뒤로 선우는 요도구만 빠끔 열어 물을 쪼록 흘려 냈다. 정액인지 오줌인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저 몇 방울의 물만 똑똑 떨어졌다.
“후으…….”
발정기가 온 짐승처럼 선우를 몰아붙이던 태화는 한참 숨을 고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선우에게로 쓰러지듯 몸을 뉘었다. 맞닿은 가슴팍으로 쿵쿵쿵 세차게 뛰는 박동이 만났다. 여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심장은 상대의 문을 두드리듯 요란하게 진동했다.
태화는 더운 숨을 후욱 내뱉으며 선우의 귓불을 우물거렸다. 혀를 세워 귓구멍을 파고드는데 문득 짠맛이 느껴졌다. 마친 듯이 했으니 땀이 나는 것도 당연했다. 이대로 두면 한기가 들 것 같아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욕실로 데려가 씻길 생각으로 선우를 내려다본 태화는 인상을 되는대로 짙게 구겼다.
“뭔…….”
선우의 몸이 엉망이었다. 온몸 가득 잇자국이 없는 곳이 없었고, 억세게 잡았던 손자국이며 울혈이 가득했다. 벌써 골반과 발목은 멍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울음소리를 참으려 애썼던 건지, 선우의 아랫입술은 찢어져 너덜너덜했다. 피멍이 들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데도 선우는 여전히 입을 꾸욱 닫고 울음을 삼켰다.
“넌……!”
태화는 언성을 높이려다 참았다. 잘못한 건 저인데 선우를 나무라는 건 안 될 일이었다. 눈을 감은 채로 몇 번 심호흡하다가 다시 선우를 봤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평소에는 잘만 찡찡거리더니 왜 지금은 아무 말도 안 해? 뭐 한다고 참아, 참길.”
“하으……. 하, 하나도 안 힘들었는데…….”
“뭐?”
“아저씨가 나 안아 줘서, 하나도 안 힘들었어요.”
태화는 멍한 눈을 떴다. 선우는 정말 괜찮다는 듯이 생긋 웃어 보였다. 너무 지친 나머지 입꼬리가 잘 올라가지 않아서 경련이 얕게 일었다. 선우는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문질러 근육을 풀고 다시 웃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눈웃음까지 지었다.
못난 얼굴이었는데 태화에게는 마냥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이다지도 예쁜 애한테 심하게 굴었다는 생각에 한숨이 튀어나왔다. 제 감정만 앞세워 선우를 아프게 한 게 마음에 걸렸다. 걸리다 못해 명치가 콱 틀어막혀 답답했다. 나이는 열둘이나 많다는 놈이 어른스럽지 못한 짓을 저질렀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몰아붙였…….”
정중히 사과하려는데 선우가 불쑥 팔을 뻗어 태화를 끌어안았다. 태화는 얼결에 다시금 선우에게로 엎어졌다. 무게로 짓누르는 모양새가 돼서 서둘러 일어나려니 선우는 팔에 더욱 힘을 주고 너른 등을 슥슥 쓸어내렸다.
“이번에도 용서해 줄게요. 대신 뽀뽀해 주세요.”
장난스레 말했다.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였으나 웃음기가 가득했다. 지난번에 태화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쯧, 혀를 차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저를 보며 샐쭉 웃는 눈두덩이에 입을 맞추고 눈물길을 따라 내려와 찢어진 아랫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 아프지 않게끔 살살 핥아 주자 선우가 잔잔하게 웃었다. 살짝 벌어진 잇새를 파고들어 갔다.
입 안 무른 살도 연신 짓씹었던지 퉁퉁 부어 있었다. 태화는 미간을 엷게 구기며 여린 살갗을 부드럽게 문질러 핥았다. 선우가 웃을 때마다 간지러운 소리가 입 안으로 들어찼다. 그것까지 모조리 삼킨 태화는 선우를 바짝 끌어안고 울긋불긋한 자국이 가득 남은 어깨에 눈두덩이를 비볐다. 끙 소리를 내며 자책하다가 옆으로 털퍼덕 누웠다. 지쳐 늘어진 선우를 당겨 와 품에 가둬 안았다.
“좋다.”
선우는 나직이 말하고 태화의 품 안으로 꾸물꾸물 기어 들어갔다. 태화는 픽 웃었다. 땀에 잔뜩 절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제게 안겨 천천히 호흡하는 마른 몸을 느꼈다. 선우는 태화가 무슨 짓을 해도 전부 좋다고 했다. 그게 과연 어디까지 허용될지, 태화는 짙은 눈을 뜨며 허공을 응시했다.
하필이면 이 좋은 순간에 재화가 한 말이 떠올랐다.
최선우가 누군지 아냐고, 그런데도 끼고 사느냐고.
또라이 새끼라며 크게 비웃던 것까지 떠올린 태화는 눈을 가볍게 감고 선우의 정수리로 입을 맞댔다.
끝 간데없다 싶을 만큼 맹목적인 최선우의 애정이 과연 어느 선까지 이어질는지. 최선우는 어느 순간까지 날 보며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태화는 묻지 못할 질문을 입 안으로 맴맴 굴렸다.
“한동안 좀 바빠질 거 같아.”
대신 다른 주제를 끄집어냈다. 선우가 고개를 바짝 들어 쳐다봤다.
“가게 일 때문에요?”
“아니. 회사 일 때문에.”
“회사?”
“아버지 회사.”
선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창하게 회사라고는 하는데 그냥 깡패 집단이야.”
“그럼 이제 아저씨가 조폭 두목 되는 거예요?”
“조폭 두목?”
순수한 질문 앞에서 태화는 허허롭게 웃었다. 선우가 말한 대로 태화는 조폭 두목이 되려 했다. 정확히 맞는 말이었는데 어쩐지 좀 유치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렇다고 회장이니 나발이니 하는 그럴싸한 단어로 포장하고 싶지도 않았다. 깡패는 깡패일 뿐이었다.
“어. 조폭 두목 해 보려고.”
씨익 웃으며 말하자 선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침통해진 얼굴로 고개를 살포시 숙였다.
“왜. 싫어? 하지 말까?”
태화는 네가 싫다면 앞뒤 재지 않고 모든 걸 그만둘 용의가 있다는 듯 말했다. 선우는 서둘러 도리질 쳤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남쪽으로 이사는 못 가겠네요.”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선우는 기운이 죄 빠진 모습으로 입술을 우물거렸다. 사실 태화가 남쪽에 가서 살자고 말한 뒤부터 어디로 가면 좋을지 찾아보던 중이었다. 봄쯤이면 갈 여건이 될 것 같다고 했으니 봄꽃이 예쁜 곳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정보를 모았더랬다.
늘 도심에서만 살았으니 아예 시골로 들어가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고, 5일장이나 10일장이 아닌 상시 시장이 열리는 동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다. 태화 몰래 문구점에서 산 노트에 손수 하나하나 적어 가며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가 조폭 두목이 되면 다 물거품이 될 터였다. 선우는 시선을 내리깐 채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했다.
“왜 못 가.”
위에서 짧은 한마디가 떨어졌다. 그 말에 선우는 고개를 빼꼼 들어 올렸다. 태화는 웃고 있었다. 빙긋이 웃는 얼굴로 바라보며 선우의 뺨을 살포시 쥐었다.
“원래 윗대가리는 하는 일이 제일 없는 거야. 네 말대로 조폭 두목 되면 아래 애들한테 다 맡기고 나는 너랑 남쪽 가서 살면 되지.”
“정말요?”
“목포 가서 살까?”
목포?
선우는 커다랗게 뜬 눈을 끔뻑였다.
목포면 전라도지?
전라도는 아직 여수와 전주밖에 알아보지 못했었다. 이참에 목포부터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알기로 목포는 갈치가 유명했다. 매일은 못 먹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갈치조림을 먹어도 좋겠다 싶었다.
조금 전까지도 한껏 시무룩해져 있던 선우는 금세 밝은 얼굴로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렸다. 갈치조림을 생각했더니 허기가 졌다. 집에 와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계속 그 짓만 해 댔으니 배가 고픈 것도 당연했다. 저녁으로 뭘 먹자고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태화가 갑자기 몸을 바짝 끌어안더니 숨이 막힐 만큼 힘을 꽈악 줬다.
“너는 내 허락 없이 죽지 마.”
별안간 그런 말이 나왔다. 선우는 겨우겨우 고개를 들어 태화를 봤다.
“네.”
갑작스러운 말에도 선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유 따위 묻지 않고 그러겠노라, 다짐했다.
“아저씨도 제 허락 없이 죽지 마요.”
두 눈을 힘주어 뜨고 같은 말을 했다.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태화나 선우나 평생 저와 함께 살자는 말을 참 살벌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
태화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상대의 생을 제 손아귀에 꾸욱 말아 쥐었다. 어쩐지 사랑 고백을 받은 듯한 기분에 선우는 배시시 웃으며 태화의 가슴팍에 눈두덩이를 마구 비볐다. 기다랗게 늘어진 속눈썹이 살갗을 간질이자 태화 역시 낮게 웃었다. 한참 서로에게 떨어지기 싫다는 듯 꼭 붙어 장난치던 중에 선우가 태화를 바라봤다. 눈이 반짝였다.
“근데요.”
내내 궁금했던 게 기억났다. 집에 오면 물어봐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태화가 들입다 덮치는 바람에 잠시 잊고 있었다.
“장 선생님한테 물어봤던 건데요. 장 선생님은 아저씨한테 직접 물어보라고 해서.”
태화는 얼른 말해 보라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아저씨는 부모님이랑 사이가 안 좋았어요?”
장 선생에게 물었던 걸 똑같이 물었다. 제 질문이라면 태화가 뭐든 답해 줄 거라던 장 선생의 말에 용기를 얻고 물은 것이었다. 태화는 말똥말똥 눈을 뜨며 대답을 기다리는 선우의 모습에 쩝 소리를 냈다.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사이가 안 좋은 건가? 친아비도 아닌 놈은 친자식도 아닌 아들에게 집착하고, 아들이라는 새끼는 양자로 들려 키워 준 은혜도 모르는 채 아비가 최대한 비참하게 죽길 바라고. 어미라는 작자는…….
거기까지 생각하던 태화는 느른한 숨을 뱉으며 선우의 이마로 뭉근히 입을 맞췄다.
“나 입양아야.”
입술을 떼지 않고 말하는데 선우가 파드득 떠는 바람에 이마에 입술이 찍혔다.
“입양아요?”
태화가 아파서 입술을 문지르는 와중에도 선우는 놀란 토끼 같은 얼굴만 했다. 몇 번 입술을 문지르던 태화는 찢어진 곳이 없나 꾹꾹 만져 보다가 이내 선우의 입술을 톡 쳤다.
“왜. 사람이 달라 보여? 불쌍해 보이려나?”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다행이다 싶어서요.”
“다행? 뭐가 다행인데?”
“혼자 컸으면 많이 외로웠을 테니까. 그래도 입양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놀란 얼굴을 할 땐 언제고, 선우는 제법 의젓한 표정으로 도톰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답에 도리어 태화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예 핀트가 나간 놈인 줄 알았더니 이럴 때는 또 사람 속을 잘도 간질였다.
외로운 걸로 치면 모친 없이 자라다가 부친에게 뒤통수 맞고 시궁창으로 굴러떨어진 본인도 못지않게 외로웠을 텐데, 선우는 마냥 태화의 외로움만 걱정했고, 또 안도했다.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늘 저만이 일 순위라는 게 퍽 신기해서, 태화는 빙긋이 웃었다.
“장례식장 분위기 봤지? 평범한 집안은 아니었고, 아버지가 깡패였어.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또라이이기도 했고. 아, 너 만나고서는 또라이 순위가 바뀌긴 했다. 네가 1등.”
선우는 저 말이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 헷갈렸다. 1등이라니 좋은 것 같기는 한데, 또 또라이 중에 1등이라니 영 애매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서 골몰하는 얼굴을 하자 태화가 푸스스 웃었다. 뒤로 동화를 들려주듯 태화의 과거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아이.
이름도 없이 생년월일만 띡 적힌 종이 한 장과 함께 보육원 앞에 버려졌던 아이가 태화라는 말에 선우는 벌써부터 울먹였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당사자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데 듣는 이가 울어 버리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태화는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고 했다. 보육원에서 살던 시절 남다르게 애들을 괴롭혔고, 남다른 방식으로 제 것을 지켰다고 했다. 남이 때리거나 욕하는 건 참아도 제 몫의 장난감을 빼앗기면 발작과도 같은 발악을 해 대서 보육원 선생님들의 주의 대상 1호였다. 한 번은 저보다 덩치 큰 아이에게 빼앗겼던 장난감을 아예 망가뜨린 일도 있었다.
내가 가질 수 없으면 아무도 가질 수 없다고.
고작 아홉 살 먹은 애가 하기에는 서슬 퍼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거기서 그치면 좋았으련만 태화는 망가진 장난감의 날카로운 부분으로 제 것을 빼앗아 간 아이의 배를 찔렀었다. 그 바람에 며칠간 어두운 독방에 갇혀 혼자 자고, 혼자 놀고, 혼자 밥을 먹어야 했지만 잘못했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혼자 지내는 게 나쁘지만도 않았다. 말로만 그런 게 아니라 정말 태화는 혼자 있는 게 더 나았다. 외로움이랄지, 그런 진한 감정은 아예 배우지 못한 것처럼 잘 지냈다. 별난 성격 때문에 시설을 세 번이나 옮겼고, 어디서든 꼭 한 번씩은 사고를 쳤다. 입양은 바라지도 않았다. 태화 본인 역시 저 같은 걸 주워 갈 인간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나타난 게 바로 서원식이었다. 보통 한 살이라도 어린아이를 입양하려고 하는데 원식은 태화를 보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선택했다. 태화 나이 열한 살 때였다.
“입양되고 1년 동안은 교양이라고, 뭐 예의범절 이런 걸 배웠어. 딱히 크게 도움이 된 거 같지는 않지만.”
선우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태화는 아예 싹수가 없는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크게 예의범절을 따르는 것도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남에게는 수더분하게 굴면서 선우에게는 가끔 못되게 굴었다. 예전보다야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조금은 얄미운 구석이 남아 있었다. 선택적으로 예의를 차리는 사람이라, 선우는 태화가 예의범절을 썩 잘 배웠다는 느낌은 못 받았다.
“아!”
선우는 황급히 이마를 문질렀다. 태화가 딱밤을 툭 날린 탓이었다. 딴에는 살살 친다고 친 것 같은데 워낙 힘이 좋은 사람이다 보니 딱! 소리까지 났다.
“갑자기 왜 때려요……!”
“너 속으로 내가 예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잖아.”
족집게가 따로 없었다. 속마음을 들켜 버린 선우는 더 억울해하지도 못하고 입술만 삐쭉 내밀었다. 맞은 이마가 너무 아파서 연신 문지르자 태화가 픽 웃더니 이마에 바람을 호 불어 줬다. 발간 자국이 동그랗게 남은 곳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고작 그 입맞춤 한 번으로 선우는 마음이 풀려 숨을 길게 내쉬었다.
“계속 말해 줘요.”
“음……. 그러고 열두 살 되자마자 칼 쥐는 방법부터 배웠어.”
갑자기 장르가 드라마에서 스릴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원식은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태화를 입양한 듯했다. 원식은 번식 능력이 없었다. 흔히 말해 고자였다. 해서 대신 아들을 입양했고, 입양한 아들에게 후계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이것저것 말도 안 되는 걸 가르쳤다. 그러니 태화가 원식을 두고 변태 영감이라고 하는 것도 당연했다.
“처음에는 돼지나 소, 사슴, 이런 것들을 죽였거든. 처음 사슴을 죽였을 때 갑자기 머리가 핑 돌더니, 처음으로 사람 죽는 걸 봤을 때는 아예 정신을 잃었어. 그렇게 기면증 진단을 받은 것도 열두 살 때.”
태화는 본인이 말하고 본인이 혀를 찼다. 그때만 생각하면 기분이 더러워졌다. 힘없이 픽 쓰러지는 저를 내려다보던 원식의 표정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참 좆같았다는 건 확실했다. 한번 발병한 기면증은 어떤 치료도 들지 않았다. 짐승을 하나하나 죽일 때마다 태화는 쓰러지듯 잠에 빠져들었다.
“기면증이 고쳐진 게 열여덟 때였거든.”
“어떻게 고쳤어요?”
“사람 죽여서.”
태화의 얘기를 집중해서 듣던 선우는 숨을 옅게 들이켰다. 약간은 놀란 듯한 반응에 태화는 작게 웃으며 선우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상주석에서 내 옆에 서 있던 놈, 기억나지?”
“네. 지난번에 봤던 사람이잖아요. 친형 아니라고 했던.”
역시 선우는 재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맹하게 생겼어도 희한한 데에서 명석한 티를 냈다.
“걔도 나처럼 입양돼서 내 형이 된 거야. 나 열여덟, 걔 스물일 때 아버지가 창고로 부르더라고. 가 보니까 여자 두 명이 묶여 있었어. 나랑 서재화한테……. 아, 서재화는 내 형 이름. 무튼 나랑 서재화한테 알아서 골라잡아 한 명씩 죽이라고 하더라고. 아버지란 사람이 말이야. 그때 여자 하나를 죽였는데, 희한하게 안 쓰러지더라. 자연 치유된 셈이지.”
태화는 거기까지 말을 마쳤다. 남들이 들으면 기구하다 못해 믿기 힘들 만큼 지난했던 삶이었으나 정작 태화는 별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었으니 비정상적인 삶을 살았어도 큰 감흥이 있지는 않았다. 다만, 처음 사람을 죽였던 날은 유난히 뇌리에 콱 박혀 있었다.
빨간 매니큐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잔상에 태화는 버릇처럼 미간을 구겼다. 짜증스레 앓는 소리를 내는데 선우가 팔뚝을 톡톡 두드리는 게 느껴졌다. 시선을 내려 보자 선우가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그때 둘 중에 누굴 죽였어요?”
순간 태화는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언뜻 숨소리마저 멈춘 듯했다.
내가 그때 누굴 죽였더라?
한순간 무중력 상태에 빠진 사람처럼 태화는 멍하니 선우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입꼬리를 엷게 말아 올렸다. 미간은 더없이 구겨졌다. 웃는지 우는지 헷갈리는 얼굴이었다.
“잘 들어 봐.”
선우는 태화의 말에 집중했다.
“둘 다 술집 여자였는데, 한 명은 도박하는 남편 때문에 빚 다 떠안았는데도 자식 뒷바라지하겠다고 몸 판 돈 착실하게 모으는 여자였고, 다른 한 명은 유명한 뽕쟁이라 자식이고 나발이고 몸 팔아서 약 사는 여자였어. 너라면 이 중에 누굴 죽일래?”
선우는 태화가 말한 두 여자를 상상해 봤다. 한 명은 순하게 생긴 얼굴이었고, 한 명은 너저분한 모습이었다. 누가 들어도 후자로 소개된 여자를 죽이는 게 마땅했다. 하지만 선우는 오랜 시간 고민했다.
너무 단편적인 정보였고, 그런 것들로 사람 목숨의 경중을 따질 수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둘 중 하나만 죽이고 살리는 건 너무 가혹했다. 저라면 죽어야 하는 한 사람에게 너무 미안해서 차라리 둘 다 죽일 것 같았다. 도무지 결론이 나지를 않아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못 고르겠어요.”
태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비로소 진짜 웃는 얼굴이었다. 너무 어려운 문제라는 듯이 미간을 좁게 찌푸리고 쳐다보는 선우를 꼭 끌어안았다. 정수리에 뺨을 비비며 아기 분내를 느꼈다.
“아저씨는 그래서 누굴 죽였는데요?”
품 안에서 선우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여자.”
너무도 당연한 대답이었다.
“빨간 매니큐어 칠한 여자.”
태화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모호한 대답에 선우는 더 묻고 싶었으나 참았다. 제 허리를 감싸 안은 태화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저 똑같이 태화를 담뿍 끌어안고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줬다. 나쁜 기억은 더 나쁜 기억으로 잊으라던 태화의 말이 떠올랐다. 선우는 태화에게 더 나쁜 기억을 심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
어떻게 하면 태화의 기분이 풀릴지 고민했다.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뇌에 과부하가 걸리는 느낌이었다. 밥도 먹지 않은 채 죽을 듯이 배를 맞춘 뒤라 더 그랬다. 결국 선우는 컴퓨터 전원이 훅 꺼지는 것처럼 금세 잠들었다. 쌔근대는 숨소리가 퍼지기 시작하자 태화는 그제야 눈을 슬며시 떴다. 16년 전, 제 손에 죽어 갔던 여자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뱃가죽이 뚫리는 순간에도 아픈 줄도 모르고 낄낄 웃던 여자.
여자는 선우만큼이나 미인이었다.
* * *
태화는 정말 많이 바쁜 듯했다. 바쁜 와중에도 선우와 설날은 함께 났다. 시장 상인들이 나눠 준 떡이며 반찬, 과일로 풍성한 설날이었다. 세뱃돈 안 받을 거냐는 태화의 장난에 선우는 망설이지도 않고 끔뻑 절을 했고, 먼저 말을 꺼낸 태화는 도리어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통 크게 백만 원을 줬다.
선우는 살면서 세뱃돈으로 만 원 이상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는 친척과 왕래도 없어서 부친에게 세배하고 받는 만 원이 전부였다. 남들은 명절 때 받은 돈을 저금해 대학 등록금에 보탠다는데 선우에게는 먼 나라 얘기였다. 그런데 올해는 세뱃돈으로 받은 돈이 십만 원도 아니고 백만 원이었다. 그것도 현찰로.
선우는 빨간 날이 끝나자마자 태화가 준 돈을 들고 은행에 가서 통장을 만들었다. 22년 평생 처음으로 만들어 본, 제 이름으로 된 통장이었다. 출근하기 전 선우와 함께 은행에 갔던 태화는 사람이 많아서 방방 뛰지는 못하고 그저 실물 통장에 입술을 깊게 묻는 선우를 보며 싱긋 웃었다. 사람답게 사는 게 선우에게는 선물인 듯했다.
어디에 쓸 거냐고 물었을 때, 선우는 비밀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태화는 안 봐도 뻔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제게 전부 쏟아부을 터였다. 선우가 저 백만 원을 모조리 태화에게 쓰면 그는 천만 원을 선우에게 썼다. 이래서는 영 밑지는 장사였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선우가 웃는 걸 보며 그깟 돈이 대수인가 싶었다.
서재화에게 했던 선전 포고처럼 태화는 원식의 회사를 물려받았다. 이 나이에 회장이라는 직함은 무척 어색했으나 일단은 즐기기로 했다. 이런 소리를 듣는 날도, 회사가 번듯하게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까닭이었다. 태화는 회사로 출근하는 게 퍽 즐거워 보였다. 선우의 눈에는 좀 신기했다. 어찌 보면 경멸하는 부친이 남긴 회사라 싫을 만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렇게 태화가 즐겁게 회사 일을 보는 동안 태화 정육은 장기 휴업에 들어갔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휴업이었다. 마찬가지로 선우도 별수 없이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심심하면 시장 구경을 나가고, 근처 공원을 산책했지만, 태화가 없으니 뭐든 즐겁지 않았다.
태화는 정 심심하면 책이라도 읽으라고 했으나 역시 독서는 선우에게 졸음만 선사했다. 대신 취미를 붙인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영화였다. 의외로 영화 한 편을 진득하게 집중해서 볼 줄 아는 터라 태화는 선우를 위해 서재를 개조해 홈 시어터를 만들어 줬다.
선우는 저만의 작은 영화관이 만들어진 순간부터 거의 하루 종일 그 안에 들어앉아 지냈다. 오늘의 영화는 <파이란>이었다. 사람을 죽이고 죽는 스릴러보다는 이런 정통 멜로가 선우의 취향이었다.
푸른 바다로 시작해 흑백 장면으로 넘어가는 첫 장면부터 빠져들어 보다가 중반 이후부터는 저절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지금은 아마도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콧물을 킁 먹으며 집중해서 보고 있는데 휴대 전화 진동이 울렸다. 제게 전화를 걸 사람은 태화밖에 없어서 선우는 서둘러 휴대 전화를 들여다봤다.
“어?”
우느라 벌겋게 질린 눈이 단번에 커졌다. 태화에게서 영상 통화 요청이 오고 있었다. 먼저 전화한 적은 종종 있어도 이렇듯 먼저 영상 통화를 걸어 온 적은 처음이라 선우는 놀란 눈으로 휴대 전화를 한참 들여다봤다. 그러다 이대로 전화가 끊길까 봐 얼른 통화 버튼을 끌었다.
“아저씨!”
너무 반가운 나머지 소파 위에 무릎까지 꿇어앉아 휴대 전화를 신줏단지 모시듯 들고 받았다. 태화는 사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듯했다. 태화의 셔츠 차림은 언제 봐도 근사했다.
- 밥은 먹었……. 어……? 너 눈이 왜 그래? 울었어?
“네?”
선우는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그 바람에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이 똑 흘러내렸다. 영화에 감정 이입을 깊게 한 탓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었다. 한 방울 도록 흘러내린 게 턱을 타고 떨어지자 태화의 인상이 험하게 구겨졌다.
- 씨발, 또 무슨 일인데. 누구야?
“뭐가요?”
- 너 울린 새끼. 누구냐고.
태화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 앞에서 선우는 멀뚱거리다가 휴대 전화 화면을 돌려 영화가 나오고 있는 스크린을 비췄다. 마침 남자 주인공이 담배를 피우려다가 오열하는 장면이었다. 절규와도 같은 울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선우는 한참 영상을 보여 주다가 다시 휴대 전화를 마주 봤다. 태화는 여전히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 영화 때문에 운 거야?
선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대 전화에서 짙은 한숨이 넘어왔다. 태화는 눈을 질끈 감고 한 손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많이 걱정했는데 쓸데없는 이유라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선우가 혼자 괜히 눈치를 보고 있는 동안 태화의 어깨가 옅게 들썩였다. 이어 클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관자놀이를 몇 번 더 꾹 누르다가 손을 내린 태화는 어느새 웃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다행히 짜증은 모두 가신 얼굴이라 선우는 한시름 덜었다.
“오늘은 언제 와요?”
- 저녁 먹기 전에는 들어갈 거야.
“시장 사장님들이 아저씨 어디 갔냐고, 왜 가게 문 안 여냐고 물어봐요.”
- 결혼 준비하느라 바쁘다고 해.
“네?”
선우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뿅 피어올랐다. 뜬금없이 웬 결혼 준비인지 모를 일이었다.
“우리 결혼해요?”
- 누가 너랑 한대?
순간 선우의 눈이 커졌다.
“그럼 누구랑 해요?”
선우는 왕방울만 해진 눈으로 휴대 전화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정말 뚫어 버릴 것처럼 강렬한 눈빛이었다.
“뭐, 회사 사업 차원에서 거래처 사람이랑 결혼하고 그래야 돼요?”
짧은 시간 끝에 도출된 상상이었다. 선우의 생각으로는 태화가 너무 잘난 사람이라 다들 눈독 들일 수 있겠다 싶었다. 키도 어지간히 크다는 사람들보다 10센티미터는 더 크고, 몸도 부담스럽지 않게 탄탄하니 예쁜 근육이었다. 다른 걸 다 차치해도 태화는 굉장한 미남이었다.
무표정일 때야 조금 무섭게 생겼지만, 남들 앞에서는 인상 좋은 얼굴을 잘 연기하는 터라 서글서글하니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할 만한 외모였다. 거기에 더해서 돈도 많았다. 성격은……. 아주 조금, 아주아주 조금 모났으나 본래 성격을 워낙 잘 숨겨서 흠잡힐 일도 없을 터였다.
결론적으로, 남들 눈에는 태화가 1등 신랑감으로 보일 게 틀림없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밤일까지 잘하는데…….
선우는 지난밤 제 발등에 입 맞추며 다정하게 웃어 주던 태화를 떠올리고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너도나도 데려가겠다고 줄을 서는 게 당연했다. 혼자 오만 가지 생각을 한 탓에 한껏 풀이 죽었다가 이내 또 눈을 똥그랗게 떴다. 다시 생각해 보니 좀 억울했다. 남이랑 결혼할 거면 왜 저랑 하나 싶었다.
나는 뭐 엔조이 그런 거야?
불쑥 못된 마음이 떠올라서 눈을 힘주어 뜨고 태화를 쏘아봤다.
“저는요? 저는 어떡해요, 그럼?”
- 최선우.
“아저씨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면 나는 그냥 숨어 살아야 돼요?”
- 최선우?
“네?”
- 너 이제 영화 그만 봐.
선우는 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화를 그만 보라니, 지금 이 상황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몰랐다. 남은 엄청 심각해 죽겠는데 태화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어떤 영화를 보면 상상력이 그렇게나 풍부해지는 거야? 무슨 농담을 못 하겠네.
“……장난친 거예요?”
- 그럼 장난이지.
그 말에 선우는 발끈할 뻔했다. 어떻게 그런 걸로 장난칠 생각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잔뜩 퉁퉁해진 얼굴로 태화에게 너무하다고 말하려는데 그가 조금 더 빨랐다.
- 내가 너 말고 누구랑 결혼을 해. 이참에 유럽으로 이민 가서 너랑 혼인 신고 해 버릴까, 그 고민 중인데.
선우는 삐쭉 내밀고 있던 입을 벙벙하게 벌렸다. 태화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선우에게 있어서 방금 들은 말은 너무 직진이었다. 직진도 그냥 직진이 아니라 풀 액셀을 밟고 달려드는 속도였다. 경고음 하나 없이 달려오는 기차에 치이기라도 한 것처럼 명치께로 지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아니, 통증이 아니라 울렁증이었다.
- 왜. 너무 좋아서 그래?
태화는 굳이 확인 사살을 하더니 그제야 씩 웃었다. 예전에는 선우가 더 많은 표현을 했는데 요즘은 태화를 따라갈 수 없었다.
선우는 어쩐지 뱃멀미하는 기분에 침을 꼴딱꼴딱 삼켰다. 아무것도 없는데 괜스레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입매로 예쁜 호선을 그리며 웃는 태화를 마주 보기 힘들어서 그랬다. 제멋대로 쿵쾅거리기 시작한 심장이 잘못하다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심장 단속을 하듯이 입을 꾸욱 다물고 관심에도 없는 책을 하나하나 들여다봤다. 재미없을 것 같은 책 제목을 죽 읽어 나가다가 겨우 진정됐을 때 다시 휴대 전화를 쳐다봤다.
“저 영화 계속 봐야 돼요.”
괜히 퉁명스레 말했다.
- 그래서? 끊자고?
“계속……. 할까요?”
그래 놓고서는 이대로 끊기 아까워 물고 늘어졌다. 저쪽에서 푸스스 웃는 웃음이 넘어왔다. 태화는 못 말리겠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다가 곧 눈웃음까지 지었다.
- 됐어. 끊어. 빨리 갈게.
“네.”
끊자는 말 뒤로도 둘은 한참을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또랑또랑 뜬 눈으로 쳐다보는 선우 때문에 태화는 한 번 더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결국 먼저 전화를 끊었다. 고작 3분 남짓했던 통화였다.
태화가 사라지고 배경 화면이 나왔는데도 선우는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계속 휴대 전화만 쳐다봤다. 아쉬운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냥 계속하자고 할걸, 후회됐다. 태화는 일하라고 하고 저는 그냥 그가 일하는 걸 지켜보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귀찮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더 하자는 말을 못 한 게 계속 마음에 남았다. 다음에는 태화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하루 종일 통화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휴대 전화가 연인이라도 되듯 끈덕지게 쳐다보다가 입을 쪽 맞췄다. 다리가 저린 느낌에 그제야 자세를 고쳤다. 얼마나 오래 그러고 있었는지 벌써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저릿한 다리를 콩콩 두드리며 다음으로는 뭘 볼까 고민하는데 다시금 휴대 전화가 징징 울렸다.
선우는 종아리를 주무르다 말고 얼른 휴대 전화를 집었다. 그새 제가 또 보고 싶어 태화에게서 온 전화인가 싶었다. 잔뜩 기대하며 화면을 내려다봤지만 처음 보는 번호였다. 태화가 아니라는 실망감에 바람 빠지듯 어깨가 축 늘어졌다.
“여보세요.”
바라는 사람이 아니어서 영 힘없는 목소리가 나갔다. 저쪽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장난 전화인가 싶어 끊으려는데 이상한 소리가 넘어왔다. 귀를 바짝 대고 자세히 들어 보니 못마땅하게 혀를 차는 소리 같기도 하고, 콧바람 소리 같기도 한 게 들렸다.
변태인가? 요즘도 이런 걸로 장난치는 변태가 있나?
- 거.
그냥 끊으려는 순간 저쪽에서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네.”
- 최민수 씨, 아드님 되십니까?
인제 보니 기저에 깔린 이상한 소리는 키들거리는 웃음소리였다.
선우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태화가 개인적으로 쓰는 컴퓨터였다. 평소 선우는 태화가 사 준 노트북을 써 왔던지라 그의 컴퓨터를 만질 이유가 없었지만, 지금은 어쩐 일인지 눈에 불을 켜고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아니야……. 아닐 거야.”
벌건 눈을 뜨고는 있는데 손을 너무 떨어서 클릭 하나도 제대로 안 되었다. 찾으려는 것 말고 자꾸 다른 걸 눌러서 몇 번을 껐는지 몰랐다. 선우는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우스를 책상 위로 쾅쾅 내리치고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래도 제대로 되지 않아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잡아 떨림을 겨우 다스렸다. 입으로는 연신 ‘아닐 거야, 아닐 거라고…….’ 하는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기절할 준비 되셨어요? 서태화가 누군지 알면 놀라 자빠질 텐데.’
낯선 목소리가 귀에 왕왕 울렸다. 웃음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는 기분 나쁘기 그지없었다. 킬킬 웃어 대는 소리가 계속 귓가를 맴돌자 선우는 급기야 뺨을 때리듯 두 귀를 퍽퍽 때렸다. 귀는 물론이고 그 주변까지 벌게질 정도의 힘이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소리 지르며 귀를 세게 때리고 재차 마우스를 쥐었다. 불과 1초 전까지도 흥분한 낯이더니 마우스를 쥐자마자 표정이 싹 가셨다. 선우는 인형이나 다름없는 얼굴로 바탕 화면에 딱 하나 있는 폴더를 클릭했다. 폴더 속에는 또 다른 폴더가 무수히 많이 들어 있었다. 남자의 말대로였다.
갑자기 전화를 걸어 왔던 정체불명의 남자는 난데없이 태화의 기록 벽과 정리 벽에 관해 설명했다. 태화는 어릴 적부터 서재 정리하는 데에 열정을 쏟고, 무슨 책을 읽었는지 전부 기록해 왔다고.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본인이 저질러 왔던 모든 살인을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하고 정리해 뒀을 거라고 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하고 생각했으나 지금의 선우는 남자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러니까 거기 들어가서 한번 확인해 봐요.’
또 남자의 목소리를 떠올려 버린 선우는 표정 없는 얼굴로 스스로 뺨을 철썩 때렸다. 꽤 강한 힘이었음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컴퓨터 화면에 집중하며 클릭을 거듭했다. ‘의뢰’라는 폴더에 들어가 보니 월별로 정리된 폴더가 또다시 주르륵 나왔다. 태화는 보통 6개월에 한 번씩 의뢰를 받았다. 그 말처럼 ‘의뢰’ 폴더 안에 모여 있는 또 다른 폴더들은 각각 6개월 간격을 둔 날짜를 제목으로 달고 있었다. 그중 익숙한 날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20211223]
지영환이 죽은 날이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폴더를 클릭했다. 예상대로 ‘지영환’이라는 폴더 하나가 덩그러니 떴다. 선우는 망설이지 않고 한 번 더 마우스를 조작했다. 폴더 안에는 사진만 하나 덩그러니 있었는데, 굵다란 금반지가 찍힌 사진이었다. 선우는 단번에 저게 뭔지 알아봤다. 지영환이 매일 끼고 다니며 순금이라고 거들먹거리던 금반지였다.
한 번은 꽃다방에서 잃어버려서 선우가 범인으로 몰려 죽도록 맞았던 기억이 있었다. 물론 선우는 훔치지 않았고, 사라졌던 금반지는 면도방 트롤리 안에서 발견됐었다. 너무 강렬한 기억이기에 영환의 금반지는 뇌리에 콱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20220724’ 폴더를 열어 봤다. 낯선 사람의 이름을 클릭해 들어가자 지갑 사진이 나왔다. 이것 역시 익숙했다. 지난여름 태화 대신 캐리어에 든 시체를 처리할 당시 시체 사이에 함께 들어 있던 지갑이었다.
탁성모를 죽였던 날짜에 들어가 보니 협박 용도로 쓰였던 은색 녹음기 사진이 있었다. 선우는 순간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쫙 돋는 걸 느꼈다. 태화는 이런 식으로 본인의 살인을 기록하고 있었다. 전시를 위한 건지, 과시를 위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 선우의 목표는 이것들이 아니었다. 다시 표류하듯 수많은 폴더를 훑어 내려갔다. 문득 눈에 걸리는 날짜 하나가 있었다.
“20년 11월 17일…….”
선우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다시 입을 꾸욱 다물었다. 몇 번 눈을 끔뻑이며 해당 날짜의 폴더를 클릭했다.
“하아…….”
짙은 숨이 터져 나왔다. 내내 참고 참던 걸 토하듯 뱉어 낸 숨이었다. 폴더 안에는 ‘최민수’라고 적힌 폴더가 하나 들어 있었다. 열어도 열어도 무언가 끊임없이 나오는 마트료시카처럼 계속 이어져 오던 게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최민수.”
선우는 폴더 이름을 나직이 발음해 봤다. 익숙하고도 낯선, 부친의 이름이었다. 멀건 얼굴로 부친의 이름이 적힌 곳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최민수라는 이름이 좀 흔해? 연예인 중에도 같은 이름이 있을 정도인데. 정신 차려야지, 최선우.”
무언가에 씐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언뜻 주문을 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선우는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을 더욱 줬다. 이제 선택은 선우에게 달려 있었다.
이 폴더를 열어 보든지, 아니면 여기서 멈춘 채 컴퓨터를 끄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가든지.
두 가지 중 뭘 선택해도 끝은 좋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이런 건 좀 틀려도 되는데, 안 좋은 예감은 좀처럼 틀린 적이 없던 인생이었다. 그렇기에 선우는 별스럽지 않았다. 뭐가 됐든 둘 다 좆같다는 걸 알았다.
달칵. 컴퓨터 전원을 꺼 버리는 소리와 비슷한 마우스 클릭음이 울렸다. 무감했던 얼굴로 한순간 그늘이 드리웠다. 모니터 가득 누군가의 주민 등록증 사진이 떴다.
최민수.
선우 부친의 것이었다.
‘최민수 씨를, 서태화가 죽인 거는 알고 붙어먹고 계신 거예요?’
또다시 환청이 들렸다. 목덜미가 서늘하게 질렸다.
‘최민수 씨를, 서태화가 죽인 거는 알고 붙어먹고 계신 거예요?’
‘최민수 씨를, 서태화가 죽인 거는 알고 붙어먹고 계신 거예요?’
‘최민수 씨를, 서태화가 죽인 거는 알고 붙어먹고 계신 거예요?’
‘최민수 씨를, 서태화가 죽인 거는 알고 붙어먹고 계신 거예요?’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누가 버튼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자동으로, 또 반복적으로 재생되었다. 머리가 망가진 게 분명했다. 선우는 이대로 미쳐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미치광이가 되는 게 두려운 게 아니었다. 미치광이가 되면 태화가 자신을 버릴까 봐, 그게 무서웠다. 버려도 내가 버리고, 지켜도 내가 지켜. 내가 창조한 신인데, 그 정도는 내가 해도 되잖아. 선우는 이를 악물어 가며 머리를 퍽퍽 때렸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같은 말을 하며 남자의 목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 스스로에게 주먹질했다. 얼굴이라도 때리면 태화가 알아볼까 봐 머리통만 으깨져라 쳤다. 혹이 여기저기 드득드득 날 정도로 때리다가 또 움직임을 뚝 멈췄다. 누가 배터리를 빼 버린 것처럼 뻣뻣하게 앉아 모니터만 들여다봤다. 한참 전에 찍어 둔 사진으로 된 주민 등록증이라 부친의 낯은 선우가 마지막으로 본 것보다 훨씬 젊었다. 사진을 즐겨 찍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사진 속 부친은 많이 어색해 보였다.
오랜만에 부친의 낯을 마주하게 된 선우는 눈도 제대로 깜빡이지 않고 뭐에 홀린 사람처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때 진동 소리가 났다. 짧은 걸 보니 메시지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멍한 눈동자에 빛을 탁 켠 선우는 후욱 심호흡했다. 통나무처럼 굳었던 몸도 금세 시들거렸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책상 위에 있던 휴대 전화를 쥐었다.
[갈 때 뭐 사 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메시지 남겨 놔]
‘아저씨♥’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선우가 ‘동거인’에서 ‘아저씨♥’로 바꿔 둔 태화의 번호였다. 오래도록 표정 없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덤이었다. 흑,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태화가 보낸 메시지 위로 이마를 맞댄 채 덜덜덜 떨었다. 온몸에 힘을 바짝 주고 부들거리다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다른 메시지도 하나 더 와 있었다.
[나 만나고 싶지 않아요?]
간결한 문장이었다. 선우는 그 짧은 문장을 읽고, 읽고, 또 읽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요란한 소리였지만 선우는 듣지 못했다. 물속에 잠긴 듯 귀가 먹먹했다. 꼬르륵꼬르륵, 귓구멍으로 물이 자꾸 흘러들어 오는 소리만 들렸다. 맞은편에 있는 스크린에서는 또 다른 영화가 나오고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구나. 저 사람들은 왜 웃지? 밥은 또 왜 먹을까? 멍한 생각만 하며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그때 서재 문이 벌컥 열렸다.
“얼마나 재밌으면 사람이 와도 몰라?”
일을 마치고 돌아온 태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까지도 누군가에게 정신을 도둑맞은 선우는 태화가 어깨를 툭 치고서야 똑같이 제 정신머리를 훔쳐 왔다.
“아, 왔어요?”
“답장이 없어서 그냥 떡볶이 사 왔어. 네가 좋아하는 시장 입구 떡볶이집.”
“아…….”
태화의 손에는 까만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멋들어진 정장을 입고 들기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태화는 선우를 먹이겠다고 검정 봉지를 털레털레 들고 왔다. 이젠 낯간지러운 짓을 익숙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데 무슨 일이 있어요.”
선우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하며 태화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가져왔다.
“맛있겠다.”
비닐봉지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들여다보는 척 고개를 푹 숙인 채 낯을 일그러뜨렸다. 남자의 말이 아직도 공기 중을 둥둥 떠다녔다. 컴퓨터에서 봤던 부친의 주민 등록증 사진은 머릿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아주 총체적으로 모든 것들이 선우를 괴롭혔다.
그렇다고 티를 낼 순 없었다. 아랫입술을 질끈 물고 버텼다. 순간 태화의 손이 턱 밑으로 쑥 들어왔다. 턱을 가볍게 쥐어 올리는 힘에 선우는 서둘러 표정을 풀었다. 태화는 말없이 선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한 눈빛에 선우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와 다름없이 멍청한 표정으로 태화를 봤다.
“허튼 생각 하지 마.”
태화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선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들켰나……?
불안증이 올라왔으나 금방 마음을 다잡았다. 들킬 리가 없었다. 평소에도 태화는 이상한 생각 좀 하지 말라며 타박하지 않았던가. 선우는 남몰래 침을 삼켰다.
“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커다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기도 했다. 맹한 얼굴로 태화를 바라봤다. 태화는 반들반들한 눈을 뜨고 시선을 내리꽂았다. 시선에 힘이 있다면 이미 선우의 낯짝은 걸레짝이 됐을 만큼 날 선 눈빛이었다. 검은 물 밑을 들여다보듯 움직임조차 없던 눈동자가 곧 감춰졌다. 태화가 눈웃음을 지은 것이었다.
“나와. 떡볶이 먹어.”
태화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서재를 나섰다. 태화가 완전히 나가고 혼자 남은 선우는 숨도 쉬지 못했다. 목덜미가 올가미에 콱 걸린 기분이었다.
그날 밤에도 태화와 선우는 몸을 섞었다. 하지만 선우는 집중하지 못했다. 아래를 가르고 들어오는 정염보다도 머릿속에 고인 생각들이 더 뜨거웠다. 신음할 타이밍에 하지 못하고, 좋아할 타이밍에 멍한 눈을 한 탓에 태화는 선우를 더 거칠게 몰아붙였다. 그제야 선우는 눈을 번쩍 떴고, 아프다고 애걸복걸했다. 숨넘어가듯 꺽꺽거리다가 돌연 태화의 어깨를 아프게 물어뜯기도 했다. 정말 물어뜯었다.
애교로 깨문 게 아니라 인정사정없이 짓씹어 기어코 피를 봤다. 살점이 벌어져 너덜거리는 걸 보고서는 또 화들짝 놀랐다. 선우는 피가 스며 나오는 태화의 어깨를 보며 참아 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하다는 말이 줄줄 이어졌다. 눈물 콧물 다 짜내 가며 우는 통에 격렬했던 정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씻고 나온 선우는 구급상자부터 찾았다. 하얀 상자를 들고 뽀르르 와 태화의 팔뚝을 콕콕 찔렀다.
“왜.”
“어깨요. 약 발라 줄게요.”
“됐어. 놔둬.”
“흉터 남으면 어떡해요.”
“네가 남긴 거면 좋지.”
퍽 다정한 말이었다. 그 바람에 선우는 입 안 무른 살을 콱 깨물었다. 다른 때 같으면 그저 웃음만 나왔을 말이었는데 지금은 쉬이 웃을 수가 없었다. 입을 꾸욱 다문 선우는 옷을 입으려는 태화를 말리고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정말 있는 힘껏 깨물어 놔서 살갗이 보기 싫게 찢어져 있었다. 그 위로 소독약을 얹자 어깨가 움칠 떨렸다.
“죄송해요.”
태화는 별말이 없었다. 가만히 어깨를 내주며 선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제게 닿은 시선이 느껴져, 선우는 시선을 좀 더 내리깔았다.
“내일도……. 늦어요?”
“늦길 바라는 눈치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물어보는 거예…….”
선우가 말을 전부 마치기도 전에 태화가 낯을 잡아챘다. 한 손으로 두 뺨을 뭉그러뜨리듯 잡은 탓에 선우의 입술이 뾰로통하게 튀어나왔다. 태화는 그 위로 쪽 간지러운 소리를 냈다. 하지만 선우는 내리깐 시선을 올리지 않았다.
“너 나 좋아하지?”
“갑자기요?”
“동경하고. 또 사랑하고.”
그제야 선우의 시선이 도로록 올라왔다. 새카만 눈동자가 태화를 똑바로 바라봤다. 가슴이 뜨끔뜨끔하게 질리고, 속이 메스꺼운데도 태화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한 만큼 더 눈을 힘주어 떴다. 체한 듯 명치가 꽉 막힌 기분이었다.
“날 사랑해?”
“…….”
“이제는 아니야?”
“나만 맨날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억울해요.”
선우는 기지를 발휘했다. 차마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평소처럼 칭얼거렸다. 이 순간에도 혼란스러운 까닭이었다. 이따금 목구멍 끝까지 사랑한다는 말이 울컥 치미는데 지금은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문득 귀와 목 사이가 간질거렸다. 뻐끔, 하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태화 덕분에 사라진 아가미가, 태화 때문에 다시금 아가리를 벌리며 나타났다. 역시 물 밖은 호흡하기 어려웠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입 안으로 숨은커녕 다른 것이 맴맴 돌았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당신이 내 아버지를 죽였냐는 물음이. 서로 뒤엉켜 악취를 풍겼다.
“사랑해.”
악취 때문에 숨을 참던 선우는 순간 긴 숨을 내쉬었다.
“나는 너 사랑해, 선우야.”
처음 듣는 고백이었다. 좋아한다는 말은 이따금 들었어도 사랑한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왜 하필, 왜 이런 때에…….
선우는 미간을 찌푸리지도, 울지도 못하고 숨만 길게 내쉬었다. 태화가 내뱉은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이마시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날숨만 했다.
저 사랑 덩어리가 몸에 들어오면 내장을 갉아 먹고 상처를 내다가 결국엔 절 죽일 게 틀림없어서.
“저도요.”
그래서 선우는 사랑을 삼키는 대신 내뱉었다. 진심이었다. 저도 그렇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다만, 사랑이라는 단어는 죽어도 소리 낼 수 없었다. 토해 내듯 말하고선 참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리자 멀거니 쳐다보던 태화가 픽 웃었다. 한 번 더 선우에게 입을 맞추고 먼저 누웠다. 끌어당기는 힘에 선우도 태화의 품으로 안겼다. 여전히 건강하게 뛰는 박동 소리가 들렸다.
내내 입 안을 맴돌다 결국 하지 못한 말을 그 박자에 맞춰 으득으득 씹었다.
사랑한다고. 너무 사랑한다고. 너무 사랑해서 당신이 내 아버지를 죽였대도 상관없다고 느낄까 봐 두렵다고. 그러니, 잠깐만 사랑하길 멈추겠다고.
태화를 따라 팔딱팔딱 뛰던 심장이 일순간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
*** ㄹㅂㅌㄹ 공금임 ***
태화가 회사로 출근한 사이 선우도 나갈 준비를 했다. 시장 구경이나 산책하러 가는 게 아니었다. 남이 알아볼까 봐 모자도 쓰고, 선글라스도 챙겼다. 한겨울에 선글라스를 쓰는 게 더 이상해 보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손에 꾸욱 말아 쥐었다. 나갈 준비를 다 한 선우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연신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11시, 12시…….
건너뛰면 죽는 줄 아는 끼니도 거르고 전전긍긍하다가 12시 40분이 됐을 때 집을 나섰다. 후문으로 나가 뒷골목을 걸었다. 선우가 멈춰 선 곳은 집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카페였다. 우선 밖에서 안을 들여다봤다.
수상쩍게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와서 상대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싶었다. 선우는 숨을 크게 들이켜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녹차라테 한 잔을 시켜 놓고 기다렸다. 좋아하는 녹차라테를 앞에 두고도 선우는 한 입도 마시지 않았다. 그저 두 손으로 컵만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기다려도 상대는 오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1시 30분이었다. 40분이나 지난 탓에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녹차라테는 이미 다 식어서 미지근해져 있었다. 선우는 아침에 받았던 메시지를 다시 봤다. 분명 1시에 만나자고 했는데 왜 안 오는지 몰랐다.
[가장 잘생긴 사람 보이면 그게 접니다ㅋㅋㅋ]
마지막으로 온 메시지는 볼 때마다 기분이 나빴다. 남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저는 좋다고 웃는 게 보기 싫었다. 선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메시지 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만나면 뭐부터 물어봐야 할까? 정말 아저씨 짓이냐고 물어볼까? 물어보면 바로 대답해 주기는 할까? 사람 가지고 놀지 말라고 화부터 낼까? 그렇게 기선 제압을 하고 나면 대화가 더 쉽게 풀리지는 않을까……? 아니, 근데 누구길래 이 모든 걸 알고 있지?
생각하는 중에 앞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앞에 털썩 앉았다. 멍하니 휴대 전화를 보고 있던 선우는 앞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고 바짝 긴장했다.
“많이 기다렸어?”
메시지로는 존댓말을 하던 남자가 현실에서는 대뜸 반말을 던졌다. 선우는 침을 꼴깍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완전히 남자를 마주 봤을 때는 동그란 머리가 옆으로 갸우뚱 넘어갔다.
“어……?”
저절로 그런 소리가 나왔다.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씨익 웃고는 선우의 선글라스를 제멋대로 벗겼다. 서재화였다.
“길 잘 찾아왔네?”
사태의 심각성 따위는 전혀 모르는 듯한 얼굴이었다. 선우는 미간을 구긴 채 제 선글라스를 빼앗듯 되찾아 왔다. 길을 잘 찾는 것은 당연했다.
여기가 우리 동네인데…….
그렇게 생각하다가 콧잔등까지 찡긋거렸다. ‘우리’ 속에는 저와 태화가 포함돼 있었다. 태화 없이는 완성되지 못하는 인생이 된 듯했다.
“나 누군지 알아?”
일관된 반말이 나왔다.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장례식장에서 봤으니까 누군지 알겠지. 내가 태화 형이야. 이름은 서재화.”
“친형 아니잖아요.”
똑 부러지게 말하자 재화는 놀란 듯 눈을 조금 더 크게 떴다.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장례식장에서 봤을 때는 겁먹은 개새끼처럼 마냥 파들파들 떨기만 해서 심약한 놈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커다랗게 뜬 눈으로 선우를 보던 서재화는 이내 빙글 웃었다.
“서태화가 그것도 말해 줬어?”
“아저씨는 나한테 뭐든 다 말해 줘요.”
“아.”
재화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더니 선우 몫의 녹차라테를 묻지도 않고 가져와 한 모금 들이켰다. 안하무인이 따로 없었다.
“네 애비 죽인 것만 말 안 해 준 거구나.”
왜 남의 걸 함부로 마시냐고 뭐라 하려던 선우는 입을 벌린 채로 굳었다. 재화의 목소리는 여상했다. 미적지근하게 식은 녹차라테가 영 마뜩잖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할 말은 아니었다. 선우는 그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짜고짜 저 말이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기선 제압은커녕 선우는 서재화에게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봐? 너도 봤을 거 아니야. 그 컴퓨터 속에 있는 폴더.”
“죽였다는 증거는 없었어요. 그냥……. 아버지 민증 사진만 있었지.”
겨우 이성적인 척 말해 봤지만 재화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 뭐, 그래서 태화가 안 죽였을 수도 있다?”
“네.”
“근데 너, 태화가 죽였다고 생각해서 나 만나러 온 거잖아. 증거 얻으려고.”
“아니에요……!”
선우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아니기는. 태화 믿었으면 애초에 여기까지 안 왔겠지.”
“아니라고!”
“이게 어디서 언성을 높여. 남의 자지나 빨던 새끼가.”
순간 선우는 입을 텁 다물었다. 서재화가 어떻게 제 과거를 아는지 몰랐다. 뒷조사라도 한 건가 싶었다. 하긴 태화의 형제라면 그와 마찬가지로 서재화 역시 조폭일 터였다. 우림동에 살면서 이런저런 인간들을 전부 경험해 본 선우는 그쪽 세계 사람들에게 남의 뒷조사쯤은 별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머리로 아는 것과는 별개로 마음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사람이 헤실헤실 잘 웃고, 착하게 생겼다고 해서 성격 좋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나도 내 인상이 존나게 좋은 건 알거든? 근데 나 성격 별로 안 좋아. 그러니까 괜히 건드리고 그러지 마. 너 낯짝에 멍 들어서 가면 서태화가 존나 걱정할 거 아니야.”
재화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말마따나 남이 보면 인상 한번 참 좋다고 할 낯짝이었지만 선우의 눈에는 세상 누구보다 악랄하게 보였다.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잘 알아본다고 했다. 그렇기에 선우는 태화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아봤고, 지금도 재화가 만만찮은 또라이라는 걸 알아봤다. 더불어 본능이 말해 줬다.
서재화는 악질 중의 악질이라고.
싱글싱글 웃는 얼굴 뒤로 가려진 악의가 여실히 느껴졌다. 서재화도 본인의 악의를 딱히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선우는 긴장한 몸에 힘을 바짝 줬다.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증거, 있어요……?”
“응.”
“보여 줘요.”
“맨입으로?”
역시 원하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선우는 미간을 찡긋거리며 옅은 숨을 내쉬었다.
“네가 원하는 걸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너도 내가 원하는 걸 가져와.”
“저 돈 없어요. 다 아저씨 돈으로 쓰고 살아요…….”
“아저씨? 와, 너 서태화한테 아저씨라고 해?”
재화는 놀라는 척했다. 실제로 조금은 놀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들 왜 아저씨라는 호칭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저씨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게 뭐 대수라고.
“근데 아저씨 소리 들으면서 박으면 할 맛 나긴 하겠다. 존나게 새롭네.”
선우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급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도 재주였다.
“돈, 없어요.”
“네 눈에는 내가 돈이 필요해 보여?”
재화가 물었고, 선우는 재화를 찬찬히 살폈다. 돈이 아예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많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태화와 살면서 선우도 비싼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눈이 조금은 생겼다. 태화의 옷방은 두 종류로 분류돼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비싼 것과 시장통에서 산 것처럼 보이지만 역시나 비싼 것.
평소 태화 정육에서 일하거나 선우와 산책하러 나갈 때 입는 건 후자였고, 요즘처럼 회사 일로 나갈 때는 항상 전자의 옷을 입고 나갔다. 시계도 뭐 그렇게 비싼지, 언젠가 태화에게 선물해 주고 싶어 이런 건 얼마 주면 살 수 있냐고 물었다가 가격을 듣고 놀라 나자빠질 뻔한 적도 있었다. 반면 서재화가 걸치고 있는 건 겉만 번지르르한 것들이었다. 아예 싸구려는 아니어도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닌 게 선우의 눈에는 다 보였다.
그다지 부자처럼 보이지는 않아서 입을 꾸욱 다물고 있자 서재화가 킥킥 웃었다.
“내 동생 태화가 지금 나한테 화가 많이 나 있어. 이거 보이지?”
재화는 다짜고짜 선우의 눈앞으로 양손 중지를 추켜올렸다. 갑자기 왜 욕을 하나 싶어 살짝 당황하던 선우는 곧 눈을 크게 떴다. 서재화가 왼손 중지를 톡톡 치는데 사람의 살덩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말캉했다. 뒤로 휙 젖혀지기까지 했다. 중지 두 개가 모두 의지(義指)였다.
“만져 볼래?”
서재화가 손을 내밀었다. 보통은 아니라고 말할 텐데 선우는 침을 꼴깍 삼키더니 조심스레 손끝으로 톡 건드려 봤다. 말랑말랑하니 역시나 사람의 살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만큼 감쪽같은 솜씨여서 만져 보지 않는 이상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이것도 서태화 그 자식 작품이거든? 내가 뭐 걔 복수를 망쳤다느니, 뭐라느니……. 아, 너 두고 추잡스러운 말도 조금 했고. 여튼 우리 동생께서 열이 많이 올라 있어. 그래서 내 회사를 망하게 만들려고 작업 치는 거 같거든.”
재화가 줄줄 말했으나 선우는 무슨 소리인지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그나마 뇌리에 박힌 건 저를 두고 추잡스러운 말을 했다는 것뿐이었다.
“이해 안 되지?”
이해하지 못하는 게 겉으로도 티가 난 모양이었다. 선우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솔직해서 마음에 든다. 그럼 다 필요 없고, 네가 느이 애비 파일 훔쳐봤던 거랑 똑같이만 하면 돼. 서태화가 회사 비리에 대해 모아 놓은 파일이 있을 거야. 싹 다 가져와. 그럼 나도 확실한 증거를 보여 줄게.”
“도둑질을 하라고요?”
“응.”
재화는 빼지 않았다. 선우만큼이나 솔직했다.
“너 느이 애비가 어떻게 죽었는지, 정말 서태화가 죽인 게 맞는지. 진실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증거 안 보고 그냥 지내면 너 평생 태화 의심할 텐데, 그러고 살 수 있겠어?”
의심.
그래, 의심이 문제였다. 선우는 지금까지 제가 왜 혼란스러웠는지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했는데 서재화의 한 마디로 모든 게 정리되었다. 의심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태화가 아니길 바라다가도 혹시나 맞으면 어떡하나 하는 의심, 이대로 묻어 두고 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 수 있을까 하는 의심.
머릿속에 뒤죽박죽 엉켜 있던 생각들이 정리되자 선우는 어느 때보다도 차분한 눈빛을 했다. 서재화는 선우의 변화가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며 남은 녹차라테를 꿀떡꿀떡 마셨다.
“알겠습니다. 가져올게요.”
“잘 생각했…….”
“약속은 지켜요.”
선우는 재화의 말허리를 자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하는 건 잊지 않았다. 꾸뻑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다시금 선글라스를 끼고 돌아섰다. 선우가 멀어지자 서재화는 허허로운 웃음소리를 냈다.
“하, 저 싸가지 없는 년. 서태화가 아주 오냐오냐 길을 잘못 들였어.”
장난스럽게 하는 말과는 달리 선우를 쳐다보는 눈빛에는 살기가 형형했다. 제가 아무리 무너졌기로서니 저딴 걸레 새끼에게까지 무시당해야 하나 싶었다. 이상한 데에서 열이 확 피어오른 서재화는 화가 나는 만큼 더 짙게 웃었다.
저 씹년을 어떻게 조질까?
잠깐 생각하다가 불현듯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났는지 씩 웃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선우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제 막 카페를 나서려고 하는 선우를 잡아챘다. 팔뚝을 잡아 끌어당기자 선우가 본능적으로 재화의 손을 탁, 쳐 냈다. 소름 끼친다는 반응이었다. 재화는 한 번 더 입꼬리를 바짝 올렸다.
“야, 내가 뭐 벌레야?”
“……또 왜요?”
“네가 너무 예뻐서 한 가지 더 말해 줄게.”
서재화는 더없이 활짝 웃었으나 선우는 그 낯짝을 보고 주춤 뒤로 물러났다. 들으면 안 되는 말이라는 게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서재화가 한 발자국 더 도탑게 다가와 섰다.
“느이 애미는 누가 어떻게 죽였을지. 내가 시킨 거 잘만 가져오면 그때 그것도 알려 줄게.”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키들키들 웃는 소리까지 들은 선우는 온몸이 바짝 굳어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뻣뻣하게 굳은 몸을 겨우겨우 움직여 재화를 봤다. 기름칠이 덜 된 깡통 로봇처럼 몸에서 끼긱끼긱 소리가 나는 듯했다. 곁눈질로 본 재화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우리 엄마도 죽었다고요……?”
“응. 아주 오래전에. 나머지는 나중에 더 듣자고.”
재화는 그렇게만 말하고 선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먼저 카페를 나섰다. 딸랑거리는 카페 문소리가 거의 다 꺼져 갈 때까지 선우는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문을 막은 모양새가 되어 버려서 나가려던 사람 몇이 이상하게 쳐다봤으나 좀처럼 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한 남자 한 명이 선우를 툭 밀치고 나갔다.
그 바람에 바닥으로 풀썩 쓰러진 선우는 쥐어지지도 않는 대리석 바닥을 쥐려고 손톱을 바득바득 세웠다. 마침 점원이 다가와 괜찮냐고 물었다. 그제야 선우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비척비척 일어났다. 몇십 년 만에 다시 걷는 사람처럼 삐거덕거리는 걸음으로 카페를 나섰다.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몸이 다시 무너져 내리듯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태화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태화는 여자를 죽였다고 했다.
‘빨간 매니큐어 칠한 여자.’
그 말까지 떠올려 버린 선우는 끅 소리를 내며 몸을 크게 떨었다.
어릴 적 가난이 싫어 집을 나갔던 모친.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색이 빨간색이었다는 게 기억났다. 길거리 한복판에 쓰러진 선우를 모두가 힐끔 쳐다보기만 하고 제 갈 길 가는 동안, 선우는 홀로 멍하니 모친의 낯을 떠올렸다. 이젠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다만, 떠나기 전날 밤까지도 배탈이 많이 나던 제 배를 살살 문질러 줬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먹은 게 다 어디로 가냐면서 배를 슥슥 문지르던 태화의 손길도 기억났다.
선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배를 문질렀다. 스스로 배를 문지르는 이 순간이, 사무치도록 외로웠다.
* * *
‘서태화가 회사 비리에 대해 모아 놓은 파일이 있을 거야. 싹 다 가져와. 그럼 나도 확실한 증거를 보여 줄게.’
선우는 한시도 서재화의 제안을 잊지 않았다. 태화에게 티도 내지 않았다. 이제는 연기가 제법 늘어 태화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태화가 집에 있는 동안에는 그가 좋아하는, 그를 좋아하는 최선우로 지내다가 그가 출근하고 나면 선우는 180도 달라졌다. 눈을 바꿔 뜨고 기민하게 움직였다. 재화에게 건넬 자료를 찾기 위해 태화의 컴퓨터를 뒤졌고, 그렇게 자료를 USB에 옮기면 마지막으로는 부친의 주민 등록증 사진을 한번 눈에 담고서야 전원을 껐다.
주민 등록증 사진은 몇 번을 봐도 현실감이 없었다. 꿈을 꾸는 것도 같았고, 세상이 저 하나를 속이려고 연기하는 것도 같았다. 며칠 전에 봤던 <트루먼 쇼>가 떠올랐다.
그래, 이게 전부 하나의 프로그램일지도 몰라. 사람들이 날 속이려고, 아저씨를 향한 내 마음을 시험하려고 이런 일을 꾸민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기대에 부풀었던 가슴은 전원이 꺼지고 컴컴해진 모니터 화면 속에 담긴 제 모습을 보면 원래대로 텅 비게 됐다. 이건 장난도 뭣도 아닌 현실이었다.
지옥보다도 더한 현실.
오늘도 재화의 말대로 파일을 긁어모았다. 재화는 회사 비리에 대해 모아 놓은 파일들을 가져오라고 했지만, 선우의 눈으로 이게 비리인지 아닌지 구분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저 회사와 관련된 것처럼 보이면 모조리 USB로 넣었다. 메일로 보내면 되지 않느냐는 말에 서재화는 꼬리 잡힐 일은 만들지 말자며 웃었다. 그런 데에는 아날로그 방식이 최고라고, 그것도 모르냐면서 웃는 얼굴로 핀잔을 줬었다.
매주 화요일, 재화와 만났다. 접선 장소는 처음 만난 그 카페였다. 문제는 파일을 가져다줄 때마다 본인이 원하는 건 이게 아니라는 둥 왜 이딴 걸 가져오냐는 둥 하는 말로 번번이 퇴짜를 놓는다는 것이었다. 한 번만 가져다 바치면 될 줄 알았는데 이렇듯 매번 딱지를 맞으니 선우는 지금까지 태화가 제 부친을 죽였다는 증거는커녕 그 어떤 나부랭이도 보지 못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야, 넌 뭐 제대로 알아 오는 게 없냐? 맨날 쓰잘데기없는 것만 가져와, 어떻게?”
재화는 노트북에서 USB를 빼내 던지며 짜증 냈다. 이번에도 퇴짜였다. 오늘로써 벌써 세 번째였다. 처음 두 번은 참는다고 쳐도 세 번 연속으로 이러니 선우도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증거 줘요.”
“제대로 된 걸 가져와야 주든 말든 하지. 이딴 허섭스레기 같은 자료…….”
“증거 달라고!”
선우는 다짜고짜 소리를 빽 질렀다. 어찌나 목청이 높았던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선우와 재화를 쳐다봤다.
“나 이용하는 거지? 열심히 자료 찾아다 주면 맨날 아니라고 퇴짜 놓고. 그거 핑계로 증거 못 주겠다고 하고.”
사람들의 시선이 제게 꽂혔는데도 선우는 멈추지 않았다. 남은 이 일에 사활을 걸다시피 했는데 재화는 혼자 천하태평이었다. 기껏 태화에게 들킬 각오를 하고서 자료를 찾아다 바치는데도 재화는 그런 고충 따위는 모르는 표정이었다.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도 유분수였다. 선우는 더 당하지만은 않으리라 생각하고 서재화를 노려봤다. 주먹을 꽉 쥐고 이까지 악무는데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서재화가 뜬금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선우는 그때까지도 고개를 쳐들고 벌건 눈을 떴다.
“내가 언제까지 당신 장단에 맞……. 윽!”
매질이 떨어졌다. 재화에게 뺨을 맞은 선우는 아픈 소리를 내며 맞은 자리를 감싸 쥐었다. 무방비 상태로 맞아서 혀를 씹은 탓에 입 안에서 피 맛도 돌았다.
“야, 이 쌍년아. 정보 교환은 가치가 비등비등한 것들끼리 하는 거야. 맨날 이딴 쥐 좆 같은 정보 끌어와서 사람 속 뒤집어…….”
“나 이용하는 거잖아!”
선우는 지지 않았다. 씩씩거리며 한 번 더 소리치자 주변이 일순간 고요해졌다. 그 고요를 깬 건 서재화였다. 서재화 역시 한 번 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선우를 후려갈겼다. 이전과 소리의 질이 달랐다. 살점이 찢기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마자 선우는 크게 휘청이다가 그만 의자와 함께 옆으로 쿵 나뒹굴었다. 맞은 뺨에 불이 붙은 것만 같았다. 따갑거나 아픈 게 아니라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뜨거웠다. 유난히 폭력에 취약한 선우는 금세 벌벌 떨며 몸을 웅크렸다.
괜히 조폭이 아니었다. 헤실헤실 잘만 웃어도 재화는 조폭이었다. 남을 때려죽이는 게 업인 사람이라 이대로 계속 맞다가는 정말 죽을지도 몰랐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파들거리며 올려다보자 숨을 후욱 뱉는 서재화와 눈이 마주쳤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재화는 손목을 털다 말고 주변을 둘러봤다.
“어어, 별일 아닙니다. 각자 일행분들이랑 좋은 시간 보내세요. 괜히 사진 같은 거 찍고 똑같이 처맞지 마시고.”
웃으며 말했지만 장난이 아니라는 것쯤은 모두가 알았다. 선우와 재화를 번갈아 보던 사람들은 이내 일행끼리 모여 목소리를 낮춘 채 쑥덕거렸다. 만족한 재화는 선우에게 다가와 발끝으로 다리를 툭 건드렸다. 그 바람에 선우는 힉! 소리를 내며 등을 더욱 둥글게 말았다. 기가 찬다는 웃음이 툭 떨어졌다.
“야, 이년아. 어른 공경 모르냐? 어디서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말을 끊고, 쯧. 아,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난 너 아니어도 정보 빼낼 방법 쌔고 쌨으니까. 씨발, 기껏 생각해 주니까 고마운 걸 모르고 지랄이야, 지랄이.”
재화는 있는 짜증 없는 짜증을 다 냈다. 이번에도 선우가 주문한 녹차라테를 쭉 들이켜더니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내려놨다.
“됐어. 하지 마. 나도 너한테 시키는 거 이제 성가시다. 제대로 알아 오지도 못하고 맨날천날 빠락빠락. 와꾸 믿고 대드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야, 난 남자 안 좋아해. 그리고 남자 때리는 게 취미인 사람이고.”
그 말을 증명하듯 서재화는 선우의 엉덩이를 힘껏 걷어찼다. 배나 머리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선우는 앓는 소리를 냈다. 구둣발 끝으로 차인 터라 엉덩이가 더 아팠다.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엉덩이를 비비며 낑낑거리자 재화가 쯧 혀를 찼다.
“간다. 혼자 처알아보시든지요.”
재화는 마지막으로 제 몫으로 주문한 아이스바닐라라테의 얼음을 입으로 왕창 털어 넣었다. 그제야 속이 조금 풀린다는 얼굴로 얼음을 으적으적 씹으며 걸음을 돌렸다. 내내 바닥에 처박혀 부들부들 떨던 선우는 점점 멀어지는 서재화의 발소리를 듣다가 눈을 번쩍 떴다.
서재화가 아니면 사건의 진상은 영원히 알 수 없었다. 실상 태화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정확하고 빠르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도저히 물어볼 수 없었다.
태화라면 거짓말 따위는 하지 않을 것 같아서, 저들의 관계를 지킨답시고 거짓말 같은 걸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선우는 감히 태화에게 물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니 선우에게는 재화가 필요했다.
“가, 가져다줄게요……!”
다급히 몸을 일으키며 목소리를 크게 질렀다. 재화가 우뚝 멈춰 섰다. 그 틈을 타 무릎으로 기어 재화에게 다가갔다. 죽을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서재화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가져다줄게요. 네?”
“됐다니까?”
“다음에……. 아무리 별로인 자료라도 다음에는 증거 조금만 보여 주세요……. 그거면 돼요.”
“하…….”
재화는 한숨을 짙게 내쉬었다. 영 성가시다는 표정이었다. 이대로 정말 그냥 가 버릴까 봐, 선우는 전전긍긍한 낯으로 재화를 올려다봤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두 손을 맞붙여 싹싹 빌었다.
“잘못했어요. 그냥 저는 알고 싶어서, 그뿐이에요……!”
“알았어. 다음에 자료 가져오면 그때 증거 보여 줄게.”
재화는 선심 쓰는 척 말하고 먼저 나가 버렸다. 선우는 큰 숨을 몰아쉬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이용만 당하고 뺨까지 맞아 놓고서는 그저 가슴을 쓸어내렸다. 선우도 마냥 머저리는 아니었다. 재화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아는데도 멈출 수 없었다. 이미 시작한 거, 끝장을 봐야 했다.
한참 숨을 고르고서야 주변에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선우는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나 도망치듯 카페를 나섰다. 그렇게 도망쳐서 온 곳은 태화 정육이었고, 태화와 함께 사는 집이었다. 이대로 태화로부터 훌쩍 사라져 버릴까 하다가도 정작 발걸음이 닿는 곳은 이 집이었다. 갈 곳이 없었다. 선우가 돌아올 곳은 여기뿐이었다.
* * *
태화는 점점 귀가 시간이 늦어졌다. 서재화의 말대로 회사를 말아먹는 데에 꽤 열심인 모양이었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재에 들어앉아 영화를 틀어 놓은 채 멍하니 정신을 빼놓고 있던 선우는 퍼뜩 눈에 빛을 들였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황망하게 움직이다가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곧장 소파로 몸을 뉘었다. 낯을 한껏 파묻고 자는 척했다. 낮에 재화에게 맞은 뺨이 아직도 퉁퉁 부어 있는 탓이었다.
맞을 때는 그냥 뜨겁기만 했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핏줄 하나가 터져 퍼렇게 번져 있었다. 태화가 보면 분명 무슨 상처냐고, 누구 짓이냐고 물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정해 두지 못했다. 정신머리를 빼놓은 결과였다. 선우는 되는대로 얼굴을 묻고 부러 숨을 쌕쌕 쉬었다. 태화의 걸음이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서재 문이 벌컥 열렸다. 선우는 어깨를 움칠 떨다가 아무 일도 없는 척 다시 고롱고롱 소리를 냈다.
바로 깨울 줄 알았는데 주변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는 줄 알고 그냥 나간 건가?
한참 동안 정적이 이어지길래 선우는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실눈을 뜬 채 옆을 곁눈질하는데 태화가 지척에 있었다.
“흐아아……!”
선우는 그만 그런 소리를 내고 말았다. 눈 바로 앞에 있는 태화를 보자마자 몸이 파드득 떨렸다. 태화는 아예 허리를 90도로 굽혀 선우를 빤히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헉헉거리는 걸 빤하게 보다가 멍 든 뺨을 쿡 찔렀다.
“그러고 있는다고 안 보여?”
태화는 굽혔던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이미 다 들켜 버려서 선우도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허벅지 위에 두 손을 곱게 올려놓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태화의 발치만 내려다봤다.
“봤어요……?”
“내가 장님도 아니고, 쯧.”
태화가 턱을 쥐길래 선우는 알아서 고개를 들었다.
“왜 이렇게 된 건데?”
“……샤워하다가 미끄러져서 넘어졌어요.”
되지도 않는 말이었다. 선우도 그걸 알았다. 고작 생각해 낸 게 샤워하다가 넘어진 거라니, 누가 봐도 넘어져서 난 상처가 아닌데도 생각나는 핑계가 그것밖에 없었다. 이대로 태화가 추궁해 오더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제발 그냥 넘어가 주길 바라고 있는데 커다란 손이 아픈 뺨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안 아팠어?”
태화는 제대로 말하라고, 누가 이랬냐고 묻는 대신 뺨을 쓰다듬었다. 짜증도 내지 않았다. 평소와 영 다른 분위기였다.
“괜찮아요.”
“이상하네.”
역시 들킨 건가?
선우는 가슴이 쿵덕쿵덕 뛰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 졸였다. 평소와 다른가 했더니 다 알아 버린 건가 싶었다.
“뭐가요……?”
그래도 모른 척 시침을 떼자 태화가 흠……. 하고 숨을 짧게 내쉬었다.
“너 원래 엄살 엄청 부리잖아. 조금만 부딪쳐도 아프다고, 봐 달라고 치대잖아. 근데 왜 갑자기 철이 들었지?”
“저 이제 스물두 살이에요.”
선우는 한시름 놓으며 대꾸했다. 별달리 이상한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투정 부리지 않는 저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엄살 부릴 나이는 지났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태화는 그제야 픽 웃었다.
“아. 스물두 살이라 철이 들었어?”
“네.”
“장하네.”
태화는 구태여 허리까지 숙여 가며 선우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 어린애 대하듯 하는 모습이었다. 오늘도 선우를 위해 먹을 걸 사 왔는지 태화는 본인이 씻는 동안 먼저 주방으로 가서 먹고 있으라고 했다.
씻겠다는 말을 끝으로 태화가 서재를 나서고 혼자가 된 선우는 허벅지 위에 있던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이제 다음 주 화요일이 되면 모든 게 밝혀졌다. 서재화가 약속을 지킬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주먹을 억세게 쥔 탓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갔다. 그런데도 선우는 아픈 줄도 몰랐다.
* * *
드디어 화요일이었다. 지난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정신을 차려 보니 벌써 서재화를 만나기로 한 날이 돌아왔다. 태화는 늘 그렇듯 아침 일찍 집을 나갔고, 선우는 점심도 거르고 서재로 들어갔다.
책장 앞에 서서 <이방인>이라는 책을 뽑아 들었다. 읽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 뒤에 감춰 놓은 USB를 꺼내기 위함이었다. 어제까지 태화의 컴퓨터 속에 있는 자료 전부를 집어넣어 놨다. 이번에도 서재화가 퇴짜를 놓는다면 이제 더는 방법이 없었다. 최선을 다했으니 재화 마음에 들길 바랄 뿐이었다.
책 한 권이 빠진 책장 저 안쪽에 처박혀 있는 USB를 꺼냈다. 빨간색 USB는 그대로 주머니에 들어갔다. 서재화를 만나러 갈 때마다 늘 챙기는 선글라스를 집어 들고 신발까지 챙겨 신었다.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 선 선우는 심호흡을 세 번 했다. 오늘 서재화에게서 증거를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진 생각했더랬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딱 떨어지는 답은 나오지 않았다.
만약 아저씨가 정말 우리 부모님을 죽였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 아무것도 몰랐다. 재화가 실은 증거 따위 좆도 없으면서 저를 가지고 논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재화가 가진 증거가 태화가 아니라는 증거일 수도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으나 선우는 자꾸만 그런 쪽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든 태화가 아니라는 쪽으로만 생각했다. 너무도 자명하게 태화가 제 부모를 죽인 사람일 거 같아서, 생각만이라도 그렇게 해야 했다.
한 번 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도어 록을 눌렀다. 경쾌한 소리를 들으며 문고리를 돌렸다.
“어?”
문고리가 헛돌았다. 아무리 돌려도 그대로였다. 너무 생각을 많이 해서 착각하는 건가 싶어 반대쪽으로도 돌려 봤으나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도어 록이 다시 경쾌한 소리를 내며 잠겼다. 선우는 한 번 더 도어 록을 누르고 문고리를 돌려 봤다. 철컥철컥, 소리가 날 정도로 격하게 돌려 봐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배터리가 나갔나?”
소리가 나는 걸 보면 도어 록은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지만 혹시 몰라 건전지도 전부 다 교체해 봤다. 그런데도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참다못해 어깨로 문을 쿵쿵 치면서까지 열어 보려고 하는데 밖에서 절그럭절그럭 소리만 들렸다. 몇 번 몸을 부딪치던 선우는 불현듯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문고리를 잡아 돌려 봤다. 밖에서 또다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안쪽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밖의 문제였다. 밖에서 문이 또 다른 잠금장치로 잠겨 있는 것이었다. 선우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소리를 환청처럼 들었다.
“왜, 문을…….”
허망한 듯 중얼거렸지만, 문을 잠글 이유가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서태화가 모든 걸 알아 버렸다.
그 문장이 눈앞에 둥둥 뜨자마자 선우는 귀신이라도 본 양 사색이 된 낯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마비라도 된 듯 사지가 뻣뻣하게 굳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문밖에서 익숙한 걸음 소리가 들렸다. 선우는 멍하니 바닥만 보던 고개를 들어 올려 문을 쳐다봤다. 쿵쿵. 익숙한 발걸음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심장이 멎을 만큼 공포스러웠다. 정신을 빼놓는 동안 해가 져서, 불을 켜 놓지 않은 집 안은 어두컴컴했다. 선우는 그 가운데에 우두커니 주저앉아 있었다. 침을 꼴깍 삼켰다. 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저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사람이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이 맞을지, 혹시 죄 많은 저를 데리러 온 염라는 아닐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괴물일지.
셋 중 무엇이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이 세계는 사실성이 없었다.
현관문 바로 앞에서 발걸음 소리가 멈추고, 곧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밖에서 잠금장치가 돼 있던가 보았다.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 뒤로 경쾌한 잠금 해제 소리가 들리고 문이 벌컥 열렸다. 천천히 열리는 문틈을 주욱 올려다봤다. 문을 통해 가장 먼저 들어온 건 희뿌연 연기였다.
정말 염라대왕이라도 온 건가?
스산한 기운 끝에 하얀 연기가 걷히고 드러난 건 역시나 염라의 모습을 한 서태화였다. 태화는 담배를 물고 있었다. 한 모금 더 깊게 빨고 뱉는 동안 태화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로 이마를 긁적였다.
“여기 나와서 그러고 있을 만큼 많이 보고 싶었어?”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마찬가지로 태화는 웃는 얼굴이었다. 입꼬리가 싱긋 올라가 근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선우는 두려움에 집어삼켜졌다. 눈웃음 짓느라 한껏 이지러진 눈매 사이에 낀 눈동자가 저승의 그것처럼 어두웠다. 그 앞에 작은 미물이 된 선우는 본능적으로 뒤로 꾸물대며 물러났다. 가까이 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엉덩이 걸음으로 도망쳐 보는데 태화가 구둣발 그대로 집 안에 들어섰다. 한 발 한 발, 걸음을 찍으며 다가왔다.
선우는 더 빠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순간 헉! 소리를 냈다. 등 뒤로 벽이 닿았다.
“자꾸 어딜 가.”
어느새 바로 앞까지 온 태화는 무릎을 굽혀 앉았다. 눈높이를 맞춘 채로 담배를 천천히 태웠다. 깊게 들이켜고, 깊게 내쉬고. 선우의 낯을 앞에 두고 연기를 길게 흩트렸다. 답지 않게 필터까지 바짝 태우더니 짧아진 담배를 들어 선우에게로 뻗었다.
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영환의 사무실에서 담배빵당하던 때와 비슷한 두려움이었다. 뜨거운 것에 살갗이 지져지는 고통이 뭔지 알아서 더 무서웠다. 앙다문 입술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휙휙 내젓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슬며시 눈을 떠 보자 태화가 픽 웃는 소리를 냈다. 담배꽁초는 바닥에 비벼져 이미 불씨가 꺼져 있었다. 가느다란 연기만 피어오르는 걸 내려다보던 선우는 참아 왔던 숨을 툭 터뜨렸다.
“왜 겁을 먹고 그래? 뭐 잘못한 거 있는 사람처럼.”
“아, 아저씨…….”
“아, 잘못한 게 있기는 하지?”
태화는 선우의 눈앞으로 손을 펼쳐 보였다. 갑자기 때리는 줄 알고 또 움칠 떨던 선우는 제 앞에서 달랑거리는 걸 보고 놀란 듯 입을 반쯤 벌렸다. 태화의 중지에 줄이 걸려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건 USB였다.
빨간색 USB.
선우는 서둘러 주머니를 뒤졌다. 태화의 손에 들린 것과 똑같은 게 주머니에서 나왔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봐도 두 개의 USB는 똑같았다. 선우는 숨을 흡 삼켰다. 둘 중 뭐가 진짜인지 확인할 순 없지만, 태화 손에 있는 게 진짜일 것 같았다. 책 뒤에 숨겨 뒀다는 것까지 안다는 게 밝혀진 순간이었다.
아니, 비단 그것만 아는 걸까?
“하는 짓이 귀여워서 계속 봐줬더니 선을 넘네.”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어투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선우는 부들부들 떨었다. 오한이 들었다. 집은 겨울인 게 무색할 정도로 따뜻한데도 한기가 느껴졌다.
정보를 빼돌리고 있었다는 걸 안다면 왜 빼내는지도 알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태화라면 모르는 게 없을 터였다. 한겨울 서리라도 맞은 양 파들파들 떨던 선우는 두 손으로 태화의 손목을 잡았다.
그럼 이게 기회가 아닐까……?
태화에게 물어볼 기회였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물어보고 오해를 풀 기회가 이렇듯 주어졌다.
역시 신은 날 버리지 않았어…….
애써 그렇게 생각해 봤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을 해야 하는데 괜한 눈물만 차올랐다.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말들은 대신 눈물로 고여 뚝뚝 떨어졌다. 소리를 참으려고 윽윽거리며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자 태화는 한숨을 푹 쉬었다. 지겹다는 눈빛이었다. 평소 선우를 보며 다정하게 웃던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넌 경계심을 좀 가질 필요가 있어.”
“흐으…….”
“어떻게 뒤를 그렇게나 밟는데도 몰라.”
태화는 미행까지 붙였던 모양이었다. 선우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하기야 태화 성격상 이 모든 일을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머리가 어지럽다 보니 가장 기본적인 것도 잊고 있었다.
서태화는 제 머리 꼭대기에 있다는 것.
선우는 그 사실을 간과한 스스로가 참 머저리처럼 느껴졌다.
손끝에 떨림이 더 심해졌다. 수전증이라도 온 것처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손목을 몇 번이고 쥐었다 펴자 태화는 남는 손으로 선우의 뺨을 쓰다듬었다. 쉼 없이 넘쳐흐르는 눈물도 닦아 주고, 평소처럼 콧물도 슥 훔쳐 줬다. 여전히 따뜻한 손길이었다. 선우는 제 처지를 인지하지도 못하고 습관처럼 태화의 손에 기댔다. 어리광을 부리듯 뺨을 문지르며 비로소 우는 소리를 냈다. 이 온기가 어찌나 그리웠던지, 개라도 된 것처럼 마구 비비자 태화가 빙긋이 웃었다.
“그간 좀 안 맞았다. 그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화는 뺨을 쥐던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선우는 몸을 옹송그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를 악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턱뼈가 부들부들 떨릴 만큼 억세게 힘을 주는데 곧바로 떨어질 줄 알았던 매타작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빠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던 선우는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바로 앞에 있던 태화가 사라져 있었다. 단단한 두 다리만 보였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일어선 태화가 멀거니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아저……. 아윽!”
때리지 않으리라 방심하는 찰나 태화가 다짜고짜 머리채를 잡았다. 전혀 봐주지 않는 힘이었다. 태화에게 머리채가 붙들린 선우는 벗어나 보려고 아웅다웅했으나 그의 힘을 이기기란 불가능했다. 태화의 손목을 쥐어뜯고, 손가락을 꺾을 듯이 쥐어 봐도 소용없었다. 태화는 한숨을 푹 쉬더니 그대로 선우를 이끌고 서재로 들어갔다.
“아저씨, 아저씨……! 아윽, 아파……!”
아무리 불러 봐도 태화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책상 서랍을 칸칸이 뒤지다 맨 아래 서랍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물건을 꺼내 들었다. 수갑이었다. 가상의 체벌 수갑이 아니라 진짜 수갑.
지난번에 바이브레이터 이후로 선우가 호기심에 샀던 수갑이 왜 여기에 있는지 몰랐다. 그때는 새로운 경험을 해 보자며 태화와 신나게 사용했었는데 오늘날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태화는 익숙한 동작으로 선우의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수갑을 채웠다.
순식간에 손이 묶여 버린 선우는 수갑을 벗겨 보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엄지가 잘려 나가지 않는 이상 뺄 수 없을 만큼 단단히 조여져 있었다.
“왜 그랬어?”
앞에서 여상한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선우는 순간 어깨를 파드득 떨었다. 느릿한 시선으로 위를 올려다봤다. 태화는 높은 곳에서 선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늘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춰 주거나 선우를 번쩍 들어 올려 밑에서 떠받들던 사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뭘요?”
선우는 우선 발뺌해 보기로 했다. 물론 가당치도 않은 짓이었다. 태화가 한 발 더 바짝 다가왔다. 그 바람에 선우는 고개가 꺾여라 쳐들고 태화를 바라봐야 했다.
“왜 내 정보를 서재화한테 팔았느냐고.”
“…….”
“이번에는 진짜 때릴 거 같아서 그래. 그러니까 빨리 말해.”
반협박이나 다름없는 말을 듣고도 선우는 입을 꾸욱 눌러 다물었다. 언뜻 고집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 꼴을 빤히 내려다보던 태화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눈빛을 하다가 선우의 손을 쥐어 올렸다. 가늘고 긴 오른손 손가락을 하나하나 매만졌다. 언젠가 선우의 손가락을 꺾어 버렸을 때처럼 어느 손가락이 꺾기 좋을지 가늠하는 듯했다. 이번에는 검지를 못 쓰게 만들까 하고 검지만 살살 문지르자 선우는 금방 튀어 올랐다.
“아저씨가……!”
겁먹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저씨가, 윽……. 우리 엄마도, 아빠도 다 죽였다고 해서. 진짜인지 알고 싶어서…….”
내내 붙들고 있던 말이었다. 진짜로 묻기에는 두렵고, 그렇다고 이대로 묻어 두기에는 더 괴로운 말을 이제야 내뱉었다.
“누가 그래? 서재화가 그래?”
태화가 묻는 말에 선우는 또 한번 입을 다물었다. 이것까지 말해도 되나 눈치 보는 얼굴이었다.
“내가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하는 건 알 테고. 진짜 맞고 싶어서 용쓰는 거 아니면 한 번 물을 때 제대로 대답해.”
태화는 조금 전 점찍어 놓은 검지를 콱 잡아 쥐었다. 선우의 낯으로 공포가 어렸다.
“누구한테 들었어.”
“……서재화한테.”
결국 말해 버리고 말았다. 선우의 입에서 서재화라는 이름이 흘러나오자마자 태화는 눈을 짙게 감았다 떴다. 짜증이 가득 담긴 숨을 내쉬며 선우의 손을 내려놨다.
“아, 그 새끼. 말하지 말라니까는, 쯧.”
태화의 어투에는 놀라움 따위 전혀 섞이지 않은 채 그저 성가신 듯한 한숨만 섞여 있었다. 선우는 눈을 크게 떴다. 무릎을 쿵쿵 찧으며 태화에게 붙어 섰다.
“사실이에요……? 아니죠? 아저씨가 그런 거 아니죠?”
모든 게 밝혀졌으니 이제는 확실한 대답을 들어야 했다. 저 입에서 아니라는 말을 들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라고 해.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서재화가 거짓말한 거라고 해.
속으로 몇 번이고 외쳤다. 태화의 입에서 나오는 아니라는 한마디를 듣고 싶어서 귀를 열고, 온몸의 감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웠다.
“이미 사실이라고 믿고 일 저지를 거 다 저지른 거 아니야?”
“아니에요. 아저씨 말이 듣고 싶었는데, 물어보기 무서워서……. 사실 아니죠……?”
선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태화가 그렇게 오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재화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아니, 선우 본인조차도 자신의 마음이 그런 줄 알았다. 서태화가 본인의 부모를 죽였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며 내내 서재화의 하수인 노릇을 해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이 되자 깨달았다. 실은 태화에게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니라는 걸 아는데, 믿고 있는데, 혹여나 태화의 입에서 맞는다는 말이 나올…….
“맞아.”
“……네?”
“사실 맞다고.”
이어 가던 생각을 뚝 잘라 낸 대답은 영 현실감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이 현실 세계가 아니라 영화 속의 한 장면 같다고, 선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태화와 저 사이에는 하얀 스크린이 한 겹 처져 있었다. 저는 지금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을 보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되었다.
서태화가 내 엄마 아빠를 죽였다니.
“왜……?”
“글쎄?”
태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어깨를 으쓱이기까지 했다. 선우는 말문이 틀어막혀 입술만 벙긋거렸다.
글쎄, 라고?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지?
속으로 들어차는 말은 많은데 혀가 숭덩 잘려 나간 사람처럼 좀체 말이 안 나왔다. 곧 죽어 가는 금붕어를 흉내 내며 뻐끔거리기만 하자 태화가 짙은 숨을 내쉬더니 담배를 한 대 더 물었다. 선우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만큼 태화가 든 담배도 점점 사그라들었다. 기어코 한 대를 다 피우고서야 선우 앞에 무릎 굽혀 앉았다.
“나나 서재화 같은 쓰레기 새끼들은 본능적으로 알아봐. 아, 저 새끼 가지고 놀다 보면 지 혼자 알아서 무너지겠다. 워낙 좆같은 인생을 살아와서 내가 지금 손에 쥐여 주는 게 애정인지 개좆인지도 모르고 머저리처럼 굴겠다.”
갑자기 튀어나온 말은 조금 뜬금없었다. 이미 정신 줄을 반쯤 놓친 선우는 멍한 얼굴만 했다. 무슨 말을 들어도 알아듣지 못할 것 같은 모습 앞에서도 태화는 말하길 멈추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말, 다정한 양 쓰다듬는 손길 한 번이면 개처럼 달려와 꼬리 열심히 돌리고 있다가 한번 뒤돌면 죽자 살자 낑낑대고, 그래도 뒤 한번 안 돌아보면 알아서 식음 전폐하고 굶어 죽겠구나. 다 알아본다고. 그리고 그 꼴 보는 걸 퍽 재밌어해. 왜? 나도 몰라. 그냥 태생이 그래. 인간으로 태어나면 안 되는 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런가 보지, 뭐.”
태화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선우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너, 서재화한테 잘못 걸린 거야. 그 새끼는 네가 살아 보겠다고 발악하다가 결국엔 죽는 꼴 보고 싶어 환장한 놈이라고. 나라고 뭐 다를까. 똑같아. 난 이제 구경할 일만 남은 거지. 뭣 모르고 나한테 달려오는 거, 꼬리 치는 거, 살 비비는 거. 다 봤으니까 이제 죽는 거까지 보겠다고.”
긴말을 내뱉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마지막까지 나 좀 즐겁게 해 주라, 선우야.”
선우야.
그 이름이 흘러나온 순간 선우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한 번은 두 번이 되고, 두 번은 세 번이 됐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양 눈을 빠르게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이게 전부 꿈이라는 걸 알아서. 눈앞에서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는 서태화도, 그 앞에서 머저리처럼 꿇어앉아 있는 저도, 꿈이 아니라면 이렇게 극적일 수가 없었다.
선우는 눈을 연신 깜빡이며 시야가 밝아질 때마다 빙글거리며 웃는 태화가 사라졌길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도 서태화는 그대로였고, 대신 제 부모를 죽였다는 그의 목소리만 커질 뿐이었다.
내 앞에 나의 부모를 죽인 살인마가 있다.
그 전제가 머릿속에 콱 박힌 순간 얼굴이 무섭도록 일그러졌다. 저만의 신인 줄 알았던 게, 악신이 된 순간이었다.
“왜! 왜 나야, 왜!”
선우는 대뜸 소리치기 시작했다.
“왜 하필 나야, 왜……! 왜, 왜……. 왜 하필 아저씨야, 흐윽…….”
덩달아 눈물도 흘렀다. 웬일로 잘 참는다고 했더니 악을 쓰는 만큼 울음도 크게 터져 나왔다. 선우는 소리를 지르다 말고 묶인 손으로 태화를 마구 때렸고, 꿇어앉은 무릎을 풀어 발길질도 했다.
태화는 묵묵히 다 맞아 줬다. 얄밉게 피하기라도 하면 덜 서러울 것 같은데 일부러 더 좆같으라고 가만있는 듯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선우는 악에 받쳐 주먹에 더욱 힘을 실었다. 있는 힘껏 태화의 가슴을 때리고 배를 걷어찼다. 그 와중에도 차마 얼굴은 때리지 못했다. 실상 저를 보고 씨익 웃는 저 낯짝이 가장 꼴 보기 싫은데도 애먼 몸뚱이만 때렸다.
왜 죽였냐고, 이유가 뭐냐고, 왜 하필 내 부모냐고, 왜 하필이면 나냐고…….
줄줄 이어지는 책망의 끝은 어쩔 수 없이 이것이었다.
왜 하필이면 아저씨냐고…….
같은 말을 반복하며 발악하던 목소리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작아졌다.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 탓에 금세 쉰 목소리가 나왔다. 가슴을 때리는 손이 점점 약해지고, 발버둥도 잦아들었다. 이제 나올 눈물마저 없을 정도가 되자, 그때까지도 가만히 있던 태화가 그제야 선우의 손목을 잡아챘다.
“소리 다 질렀어?”
“흐…….”
“그럼 이제 말 안 듣고 날뛰는 개새끼는 가둬 놔야겠지?”
태화는 끝까지 웃는 얼굴을 지우지 않았다. 씩 미소 지으며 선우의 주머니를 뒤져 휴대 전화를 꺼냈다. 제 앞에서 달랑거리는 휴대 전화를 멍하니 보던 선우가 돌연 되찾아 오려고 손을 뻗는 순간 뒤로 손을 휙 뺐다. 그 바람에 선우는 중심을 잃고 옆으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다시 한번 일어나려는데 태화가 픽 웃으며 뺨을 톡 쳤다.
“밥은 제때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문이 덜컥 닫혔다. 발악하느라 진이 다 빠진 선우가 겨우겨우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지만,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밖에서 철컥, 하며 문 잠그는 소리가 났다. 혹시 몰라 문고리를 돌려 봤으나 역시나 열리지 않았다.
“열어! 이거 열란 말야!”
선우는 방문을 쿵쿵 쳤다. 당장 열라고 소리쳤지만, 저쪽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넘어오지 않았다. 태화를 때리고 발로 찼던 것처럼 그대로 방문을 부술 듯이 쿵쿵거려 봐도 소용없었다. 힘이 남아도는 상태에서 문을 부수는 것도 불가능한데 이미 힘이 전부 빠진 지금은 더욱 말도 안 되었다.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문 앞에 주저앉아 눈물만 뚝뚝 흘렸다.
“맞더라도, 흐윽, 아니라고 해야지…….”
태화를 보고는 하지 못한 말이 뒤늦게서야 나왔다.
“아니라고 했어야지……. 그런 거 아니라고, 내가 그런 거 아니라고……! 그냥 나만 믿으라고 했어야지!”
중얼거림은 점점 커져 다시 큰 소리로 바뀌었다. 선우는 이마를 바닥으로 쿵쿵 찧으며 악을 썼다.
“나쁜, 흐으, 나쁜 새끼야! 우리 엄마 아빠 왜 죽여! 왜!”
쿵! 쿵!
이마에 핏줄이 터지고, 순식간에 멍이 들고, 살점이 뭉그러질 때까지 바닥으로 가져다 박았다. 태화의 낯은 조금도 건드리지 못하면서 스스로는 얼굴이 찢어져라 함부로 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짓이겨진 살 틈으로 나온 피가 바닥을 적셨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쿵쿵쿵 소리를 내던 선우는 곧 대자로 뻗었다.
“왜…….”
그렇게나 울었는데도 다시금 눈물이 죽 흘러내렸다. 관자놀이를 타고 내려간 눈물이 귓바퀴에 고였다가 똑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믿고 싶지 않았더랬다. 믿지 않을 각오도 돼 있었다. 설령 태화가 죽인 게 맞더라도 그가 아니라고 하면 그렇지? 역시 아니지? 내 말이 맞지? 하는 심정으로 믿을 참이었다.
선우에게는 그게 있었다.
태화를 향한 무조건적인 믿음.
그렇기에 거짓말이라는 걸 알더라도 믿을 생각이었는데 태화는 맞다고 했다. 남은 이렇듯 후레자식이 될 각오를 하는 중이었는데 정작 태화는 자신이 죽인 게 맞다고 했다. 노력할 생각을 해 본 적조차 없다는 게 티 날 정도로 단호한 대답이었다.
사랑한다고 했으면서…….
선우는 우느라 끅끅 소리를 내며 몸까지 들썩였다. 사랑한다더니, 증오받을 걸 알고도 어떻게 맞다고 하느냔 말이었다.
“사랑은, 흑…….”
씨발이라는 말이 혀끝에 매달렸지만, 이 순간에도 참았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마로 핏물은 주룩주룩 흐르지, 눈은 퉁퉁 부어 떴는지 감았는지 구분도 안 되지, 악다구니를 퍼붓느라 잔뜩 쉬어 버린 목에서는 쌕쌕거리는 기분 나쁜 숨소리만 나오고, 죄인처럼 두 손은 수갑에 매여 있었다. 진짜 흉악 범죄자는 저 밖에 있는데 정작 선우의 꼴이 벌받는 죄인의 모습이었다.
하도 울어서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무심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선우는 흑……. 하고 한 번 더 우는 소리를 냈다. 흐린 시선 끝에 태화가 제게 추천해 준 책이 걸렸다. 역시 저는 이 집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되었던 모양이었다.
그 후로도 서재에서는 발악하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태화는 거실 소파에 가만히 앉아 그 소리를 전부 들었다. 선우는 가끔 ‘아저씨, 아저씨……!’ 하며 애처롭게 부르기도 했고, 당장 부친과 모친을 살려 내라며 엉엉 울기도 했다. 나지막이 ‘이 문 좀 열어 주세요…….’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땐 소름이 돋기도 했다. 전설로만 내려오는, 사람을 홀리는 목소리가 바로 저것인가 싶었다.
그렇다고 태화가 그 목소리에 홀린 것도 아니었다. 목소리로 사람을 홀리는 괴물이 있으면 그 괴물을 죽이는 영웅도 존재했다. 태화는 본인이 영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최선우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존재라는 건 인정했다.
새벽이 될 때까지 서재에서는 온갖 소리가 다 흘러나왔다. 아침 해가 떴을 때 다시 들어간 서재는 온통 난장판이었다. 분을 못 이긴 선우가 모든 살림을 다 때려 부순 상태였다. 그렇게 악을 쓰고서도 힘이 남았던지 책장이 전부 무너져 책이 쏟아져 나와 있었고, 컴퓨터는 뭘로 두드렸는지 모니터가 박살 나 있었다.
의자가 나뒹구는 건 물론이거니와 영화를 마음껏 보라고 설치해 준 스크린도 갈가리 찢긴 모습이었다. 마찬가지로 종이 쪼가리가 되어 있는 책 더미 사이에 선우는 몸을 둥글게 말고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쯧.”
태화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며 안으로 들어갔다. 가까이 다가가는데도 선우는 미동이 없었다. 이 지랄을 떨어 놨으니 지칠 만도 했다.
“최선우.”
불러도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잠든 건지 죽은 건지 구분되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문득 좆같은 생각이 들었다.
최선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생각을 하자마자 태화는 선우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멍 하나 드는 것도 아프다고 찡찡거리던 놈이었다. 칼에 베이기라도 하면 얼른 약을 발라 달라며 어리광을 부렸고, 제 몸에 난 상처를 보고는 ‘많이 아프지 않아요……?’ 물으며 눈물마저 뚝뚝 흘리던 애였다. 그런 애가 스스로 상처를 내는 건 말도 안 되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말도 안 되는 일은 숱하게 겪지 않았던가.
정말 최선우가 혀를 깨물기라도 했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태화는 무작정 선우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끌었다. 본인이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제게 등을 돌리고 누워 있는 선우를 일으켜 앉혔다. 순간 태화는 눈을 크게 떴다.
“윽!”
정신을 잃은 줄만 알았던 선우는 태화를 세게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이 상황을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 본 것처럼 날쌘 몸짓이었다. 태화가 엉덩방아를 찧는 걸 보고 열린 문을 향해 내달렸다. 딱 다섯 발자국, 다섯 발자국이면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섯 발자국이 너무 어려웠다.
“아흑!”
선우는 태화가 던진 의자를 맞고 순식간에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어찌나 세게 던졌던지 바닥으로 떨어진 의자의 한쪽 다리가 덜렁거렸다. 등을 직격으로 맞은 선우는 아프게 앓는 소리를 내며 굴렀다.
이제 두 발자국만 더 가면 되었는데, 바깥이 지척이었는데…….
문틈을 쳐다보다가 순간 숨을 짧게 들이켰다.
“버릇을 영 잘못 들였네.”
이어 뚝, 하는 소리가 났다. 선우는 덜덜 떨며 뒤를 돌아봤다. 태화가 몸을 풀 듯 오른쪽 어깨를 돌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 잡히면 안 될 것 같아서 엉금엉금 기어 문 쪽으로 향하는데 발목이 잡혀 뒤로 주욱 끌려갔다. 문에서 점점 멀어졌다. 또다시 갇히겠구나, 생각하던 선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엉덩이 사이를 지분거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무작정 엎어 놓고 때리는 것보다야 이쪽이 훨씬 더 죽고 싶겠지?”
“읏……!”
바지를 끌어 내리려는 손길에 선우는 몸을 펄떡이며 저항했다. 발로 있는 힘껏 태화를 걷어차고 겨우 일어나 앉아 뒤로 물러났다. 그래 봤자 갈 곳이라곤 태화의 손아귀 안이었다. 태화는 큰 걸음으로 다가와 선우 앞에 앉았다.
“그러니까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얌전히 있어.”
협박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런 말을 태화는 웃으며 했다. 장난스레 입술을 톡 치기도 했다. 불한당이 따로 없었다. 울컥 감정이 치민 선우는 참지 못하고 태화의 팔뚝을 끌어와 덥석 물었다. 되는대로 힘을 실어 이를 박아 넣었다. 뿌리치는 게 당연한데도 태화는 가만히 있었다. 아픈 소리도 내지 않았다.
차라리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머리통을 때리지……. 뭐 한다고 이걸 참아, 참기는…….
선우는 이 순간에도 태화에게 기대하는 스스로가 너무 싫었다. 좋아할 수 없었다. 자신을 싫어하는 만큼 태화의 살점을 물어뜯었다.
어느새 입 안 가득 피 맛이 번졌다. 혀끝으로 너덜너덜하게 벌어진 살점도 느껴졌다. 그런데도 신음 한번 내지 않는 서태화의 지독함 때문에, 태화가 아픈 게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저 그가 너무 지독해서. 선우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애처럼 서러운 소리를 내느라 입이 벌어졌다. 안에 고여 있던 피가 주룩 흘러 세상 못난 얼굴로 울었다.
고개를 숙이자 자신이 물어뜯어 놓은 팔뚝이 눈에 들어왔다. 잇자국이 고스란히 남은 채로 피가 방울져 나오는 살갗이 너무 징그러워서, 선우는 그래서 울었다.
“너 진짜 개 같다.”
피식 웃는 소리와 함께 나온 말이었다. 선우는 이제 태화가 주는 모든 자극에 떨었다. 픽 웃는 소리에도, 낮은 목소리에도, 하다못해 숨소리에도 몸이 움칠거렸다. 태화의 말마따나 비에 젖은 똥개처럼 파들파들 떨기만 하자 그는 한 번 더 웃음소리를 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화가 나갈 때까지 선우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리뿐만 아니라 몸마저도 지배한 듯했다.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고, 슥 쳐다보자 문 앞으로 무언가가 툭 놓였다. 쟁반이었다. 쟁반 위에는 밥과 국, 반찬이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아무리 개새끼라도 굶기면 안 되겠지.”
태화는 그 말만 남기고 방을 나섰다. 문을 닫자마자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와장창하는 소리까지 귀에 박혔다. 안 봐도 쟁반을 엎은 게 분명했다. 다시 밥을 들려 줄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한 끼 안 먹는다고 죽지 않았다. 새벽 내내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안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언제까지 선우에게 매여 있을 수는 없었다. 서재화 그 새끼가 제게 가장 중한 걸 건드렸으니 태화도 재화의 유일한 꿈과 희망을 망가뜨려야 했다. 그래야 계산이 맞았다.
고지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애써 선우의 발악을 무시하고 집을 나섰다. 대로로 나가자 아랫놈 한 명이 차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아랫놈이 뒷문을 열어 주려고 하기에 태화는 먼저 스스로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남에게 받는 극진한 대접은 영 제 취향이 아니었다. 아직도 지랄발광하고 있을 선우를 생각하며 물끄러미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제 이 짓도 곧 끝나 갔다. 모든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해 놓고 최선우와 목포로 내려가서 살 예정이었다. 이미 집도 주택으로 마련해 뒀다. 그때 가서 최선우가 가겠다고 따라나서든, 안 가겠다고 버티든 상관없이 무작정 끌고 갈 생각만 만발이었다. 말을 안 들으면 가둬 둘 계획까지 전부 마친 상태였다. 원래 성격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말을 안 들으면 듣게끔 만들고, 그래도 안 들으면 제 꼴리는 대로 쥐어흔드는 성격.
그러고 보면 최선우와 사는 동안 개차반 같은 성격이 참 많이 죽어 있었다.
“형님, 그거 피 아닙니까?”
“어?”
“손 말입니다. 피 나는 거 같은데요?”
선우를 구슬릴 생각보다 억지로 끌고 갈 생각만 하던 태화는 문득 제 손을 내려다봤다. 손등을 타고 피가 한 줄기 주룩 흐르고 있었다. 소매 안쪽에서부터 시작된 피였다. 이게 뭔가 싶어 재킷을 벗고 셔츠를 걷어 보니 팔뚝 중앙에 찍혀 있는 선명한 잇자국이 드러났다. 최선우가 남긴 흔적이었다. 저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참 야무지게 씹어 놓은 솜씨였다. 그래 놓고서는 또 먼저 엉엉 울어 버리던 낯짝이 떠올랐다.
최선우는 너무 물렀다. 물러 터진 성격 때문에 험한 꼴을 보고 살았으면서도 한 번을 단단해지지 못했다. 먼저 깨문 주제에 정작 힘을 주다가도 제가 아플까 봐 눈물부터 흘리던 미련함이 우스웠다. 우습고도 잔인했다. 최선우는 역시 어떻게 하면 제 마음을 흔들어 놓는지 아는 게 분명했다.
“힘을 쓰려면 밥이라도 제대로 처먹어야지.”
“예?”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대꾸하는 아랫놈에게 휘휘 손을 저어 보이고 손수건을 꺼내 대충 팔을 지혈했다. 선우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걸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집 안 곳곳에 선우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해 둔 카메라가 많았다. 처음에는 감시의 목적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는 용도로 쓰이던 게 최근 들어 다시 본래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지난날, 처음으로 선우에게 먼저 영상 통화를 걸었더랬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퍽 징그러운 짓거리였다. 스스로도 그런 낯간지러운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최선우는 그걸 가능케 했다. 제게서 영상 통화 한번 왔다고 무릎까지 다소곳이 꿇어앉아 눈을 반짝이는 모습은 보기에 꽤 괜찮았다. 통화가 끝나고 너무 빨리 끊은 게 아쉽기까지 했다. 그게 문제였다.
최선우가 조금만 덜 예뻤으면 몰랐을 텐데, 적어도 이런 일이 있다는 걸 알기까지 오래 걸렸을 텐데 하필이면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을 만큼 예쁜 바람에 집 안에서 돌아가고 있는 카메라를 켰다. 화면 속 선우는 저와 통화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뭐가 그리 좋은지 휴대 전화에 뽀뽀까지 쪽 하는 걸 보자니 쌓였던 피로가 확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거기서 만족하고 그만 봤으면 좋았으려나.
태화는 서류를 보는 중에도 선우를 비추는 카메라 화면을 켜 놨다가 모든 걸 봐 버렸다. 선우는 누군가의 전화를 받더니 갑자기 나사 빠진 놈처럼 굴었다. 원래도 나사가 군데군데 빠져 있기는 한데 그날 본 모습은 아예 고장 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더니 컴퓨터 앞으로 가 무언가를 찾았다. 카메라 각도가 애매해 컴퓨터 화면까지 담기지는 않았으나 태화는 선우가 뭘 보고 있는지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때 처음으로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다.
‘그만 좀 때려라. 나도 안 때리는데, 씹.’
그렇다고 계속 전전긍긍한 건 아니었다. 컴퓨터 화면을 보다가 갑자기 스스로 머리를 쿵쿵 때리고 귀싸대기를 갈기는 걸 보고 올라온 짜증이 덜컹거리는 심장을 덮었다. 선우는 연기도 더럽게 못했다. 예전부터 알아보긴 했는데 그래도 이건 정도가 너무 심했다.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는 척 평소처럼 대하는데도 선우는 지레 혼자 눈치 보고, 눈시울을 붉히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나 지금 엄청난 비밀을 알고 있어요.
아주 광고하는 꼴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태화는 선우를 곁에 두고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불면이었다. 기면증도 제멋대로 불러오더니 이제는 불면증까지 최선우 때문에 도졌다. 이후 선우 뒤로 장 선생을 붙이고, 선우의 휴대 전화에 해킹 프로그램을 깔아 도·감청은 물론 메시지도 전부 검열했다. 역시 서재화 그 새끼 짓이었다. 이런 식으로 바로 들이받을 줄은 몰랐는데 하루가 다르게 회사 주가가 뚝뚝 내려가는 걸 보고 똥줄이 타긴 타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내 걸 건드려?
태화는 못마땅한 얼굴로 쯧 혀를 찼다. 팔을 내려다보니 피는 얼추 멈춰 있었다. 그래도 옹골지게 씹어 놔서 흉터는 남을 것 같았다. 최선우가 씹어 남긴 흔적이라니, 마음에 들었다.
생각이 또 다른 데로 튀었다. 하여튼 최선우 때문에 생각 하나도 제대로 하기 힘들었다. 선우의 뒤를 밟던 장 선생의 말에 의하면 둘은 매번 같은 카페에서 만난다고 했다. 사진도 받았다. 둘이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걸 보자니 기분이 더러워졌다. 특히 최선우를 보며 실실 쪼개는 서재화는 면상을 찢어 놓고 싶을 만큼 보기 싫었다. 그 앞에서 잔뜩 기가 죽은 최선우를 볼 땐 기분이 바닥을 쳤고.
최선우는 재화에게 항상 USB를 건넸다. 그 안에 뭐가 들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래도 확인해 볼 겸 컴퓨터를 뒤져 최근 열었던 파일 목록을 보자 역시나 회사 관련 파일이 주르륵 떴다.
‘이렇게나 허술해서야.’
선우가 쓸어 담은 파일 중에는 쓸모 있는 파일도 있고, 아예 별 내용 없는 것도 있었다. 재화가 보면 속이 좀 탈 정도로 일 처리가 깔끔하지 못했다. 그리고 수많은 파일을 보고 가장 마지막에 열어 본 파일의 제목 앞에서 태화는 느른한 숨을 내쉬었다.
[20201117]
태화도 오랜만에 그 파일을 열어 봤다. 주민 등록증 사진은 인제 보니 조금 낯설었다.
사진 속에 담긴 남자의 마지막은 어땠던가?
태화는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원래가 그랬다. 지금까지 죽인 사람이 몇인데, 그걸 하나하나 전부 기억하는 게 더 이상했다. 적어도 태화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이 남자가 최선우의 부친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태화에게는 다 똑같은 타깃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최선우 그 멍청한 건 뭣도 모르고 저를 믿는다고 했다. 아니라고 말해 달라며 고개를 조아리고 호소했다.
태화는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선우의 부친을 죽인 건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이었다. 감출 생각도 없었고, 구태여 변명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죽어 마땅한 새끼였으니까.
만약 아니라고, 죽이지 않았다고 하면 최선우가 믿었을까? 아니지. 믿는 척하며 곁에 붙어살다가 혼자 시름시름 앓다 죽겠지.
그 꼴을 볼 바에는 차라리 최선우의 모든 분노를 받아 내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다만 ‘왜’ 죽였냐는 질문 앞에서만큼은 솔직해질 수 없었다. 선우에게 말했다시피 인간으로 태어나면 안 되는 게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조금이나마 인간인 척은 해야 하지 않나 싶었다. 그게 태화가 선우에게 베풀 수 있는 배려였고, 친절이었으며, 호의였다. 애정이기도 했다. 우습게도 정말 애정이었다. 최선우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지만.
‘우리 엄마 아빠 왜 죽여! 왜!’
째지는 목소리로 소리치던 게 떠올랐다.
최선우의 모친.
그 생각을 빠뜨릴 순 없었다. 선우의 부친이었던 사람의 낯은 기억나지 않아도 모친은 기억났다. 잊을 수 없었다. 또렷한 기억 속 장소를 되새겨 보는데 차가 갑자기 급정거했다. 몸이 덜컹 움직여 앞을 보자 운전하는 놈도 당황한 듯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 숙였다.
“됐어. 가.”
짧게 한마디하고 다시 시선을 차창 밖으로 던졌다. 한번 끊긴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다만 최선우의 희멀건 낯짝만 눈앞에 둥둥 떠다녔다. 미친놈이 되어 가는 중인 모양이었다. 최선우는 정말 미련이 하늘을 찔렀다. 본인의 부친을 죽인 사람이 저라는 걸 확신하지는 못해도 어렴풋이 인정은 했으면서 밤마다 품을 파고들었다. 무서워서 새하얘진 뺨을 자꾸 제게 비비고 응석을 부렸다. 고작 하루 따로 떨어져서 밤을 새웠다고 선우의 뜨끈뜨끈한 살갗이 그리웠다.
그냥 서재에서 빼내 같이 잘까?
생각하다가 픽 웃었다.
“미쳤네.”
태화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다시 휴대 전화를 들여다봤다. 서재에 설치해 둔 카메라 화면이었다. 다행히 선우는 발악을 멈추고 잠잠히 웅크려 앉아 있었다. 원래도 참 작다 싶었는데, 카메라 화면으로 보니 훨씬 자그마하게 느껴졌다. 저 같은 인간 말종을 감당하기에는 연약한 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