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3)

9.

태화가 가게 마감을 하고 들어왔는데도 선우는 나가 보지 않았다. 매일 좋다고 현관문까지 쪼르르 뛰쳐나갔으면서 오늘은 침대 가장자리에 오도카니 걸터앉아 있었다. 낯에는 불만이 그득그득 매달린 채였다. 못나게 불퉁해진 얼굴로 슬쩍 발치를 내려다봤다. 캐리어가 펼쳐져 있었다. 어느새 방까지 들어온 태화 역시 바닥에 널브러진 캐리어부터 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짐 안 싸?”

“안 싸요.”

선우는 태화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아주 온몸으로 나 불만 있소, 하고 시위하는 꼴이었다.

“빨리 내려와서 짐 싸.”

태화가 한 번 더 재촉했지만, 선우는 묵묵부답이었다. 오늘 아침부터 잔뜩 골이 난 상태였다. 태화 때문이었다. 마주 앉아 아침밥을 먹던 중에 태화는 갑자기 며칠만 장 선생 집에 가 있으라고 했다. 너무 뜬금없는 말에 선우는 덜컥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태화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란 것쯤은 알았다. 모르겠다고 하는 건 스스로에 대한 기만이었고, 진짜 모른다면 그건 멍청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태화에게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이었는데 아무리 물어봐도 도통 말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단식 투쟁을 한답시고 점심을 굶었더니 저녁이 돼서야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동열을 처리하려고 하는데 자칫 너까지 위험해질까 봐 그런다고.

그 말을 들은 선우는 가장 먼저 아무 일도 없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렸고, 그다음으로는 태화를 째려봤다. 그만큼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태화는 또 선우를 저리로 치워 버리려고 했다.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

선우는 괜스레 발끝으로 캐리어를 툭 걷어찼다. 그 모습에 태화가 허, 소리를 내더니 앞으로 다가와 섰다. 거대한 몸이 앞에 지키고 서 있자 선우는 별수 없이 긴장했다. 요즘 태화는 손을 올리지 않았지만 맞았던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지고 싶지 않아 침을 꼴깍 삼키고 고개를 팩 들었다.

“내가 귀찮아요? 왜 자꾸 보내려고 해요?”

“이번이 처음이야. 뭘 자꾸 보내려고 했대.”

“옛날에도 따라오지 말라고 하고, 그냥 가라고 하고. 지금도 그렇고.”

“그때는…….”

“저도 아저씨 돕겠다고 했잖아요.”

선우는 태화의 말을 뚝 끊었다. 퍽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짓이었다. 선우 스스로도 본인이 이렇게나 대범해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서 어깨를 움칠 떨었다. 혼자 기어오르고, 혼자 놀라고, 다 했다. 괜히 태화의 눈치를 봤다.

“안 도와도 되니까 돕지 말라는 거야.”

태화는 시답잖은 소리 좀 그만하라는 투로 말했다.

“아직도 나 못 믿어요?”

“믿어.”

“근데 왜…….”

“믿는데. 이런 일에 널 이용하지는 않을 거야.”

“이용이 아니라 돕는 거라고요.”

“너는, 씹……!”

순간 태화는 욕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혀끝까지 굴러 나온 욕을 겨우 다시 저 아래로 삼켰다. 숨을 한번 크게 쉬며 짜증을 가라앉혔다.

“네가 한동열을 모텔로 불러내겠다는 게 돕는 거야?”

태화는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어? 그래?”

한 번 더 물음표를 매달자 선우는 그제야 기가 조금 죽어서 시선을 살포시 내리깔았다.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한동열 그 새끼 과거가 어땠는지 다 알고도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

“나는 아저씨 믿으니까요. 아저씨가 구하러 올 거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위를 쳐다봤다. 은근슬쩍 태화의 손을 잡았다. 태화의 입에서 이전보다도 짙은 한숨이 딸려 나왔다.

“그래, 네가 불러낸다고 치자. 그럼 뭐라고 하면서 불러낼 건데?”

“무섭다고, 도와 달라고……. 당장 와 달라고.”

선우는 계획했던 말을 줄줄 내뱉었다. 느릿하고도 가느다란 어투였다. 정말 구해 주고 싶을 만치 연약한 모습이었다. 태화의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최선우는 제가 어떻게 하면 남을 녹여 먹을지 아주 잘 알았다. 도와 달라면서 속눈썹을 착 내리까는 건 어디서 배워 먹은 짓인지 몰랐다. 아니, 배웠더라도 이렇게 잘 써먹는 건 재주였다.

비단 이 예쁜 얼굴을 보여 주지 않고 전화 통화만으로 구해 달라고 한다 해도 그것 역시 문제였다. 목소리만 들어도 서게 생겼는데 저 목소리로 한동열을 꾀어낸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피가 들들 끓었다. 태화는 뻑적지근해진 아랫도리를 느끼며 쯧 혀를 찼다. 선우의 턱을 아무렇게나 쥐어 올렸다. 늘 촉촉하게 젖어 있는 눈을 들여다봤다.

“그렇게 예쁘게 말할 거라고?”

“예뻐요?”

“말 돌리지 말고.”

“……이렇게 해야 잘 먹힌다는 거, 경험해 봐서 알아요.”

“무슨 경험?”

순간 태화의 인상이 사나워졌다. 선우는 대답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모로 돌렸으나 태화에게 잡혀 다시 돌아왔다.

“묻잖아. 무슨 경험?”

낮은 목소리가 선우를 을렀다. 마치 폭발하기 직전의 고요 같았다. 선우는 마른침을 삼키고 태화를 똑바로 바라봤다.

“1년 하고도 반년을 더 창놈으로 살았…….”

“최선우.”

태화는 정작 선우가 입을 열자 중간을 뚝 잘라 냈다. 선우의 입에서 창놈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턱을 쥔 손에 힘이 더해졌다. 억세게 잡아 쥔 탓에 주변 살이 벌겋게 질렸다. 그런데도 선우는 아프다는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아프다며 찡찡거렸을 텐데 아무 말 없이 태화를 주욱 쳐다봤다. 독하게도 그랬다. 그게 태화의 속을 뒤집어 놨다. 최선우는 제 속을 쥐고 흔드는 방법을 잘 아는 듯했다.

“네가 창놈이야?”

묻자 선우가 입술을 움찔거렸다.

“아저씨도 저한테 창놈이라고 했었어요.”

한참 만에 나온 말은 어쩐지 축축했다. 한겨울에 여름 장마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내가 나한테 하는 창놈 소리보다, 아저씨가 나한테 했던 창놈 소리가 더 비참했고요.”

선우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원망하는 건 아니었다. 사실이었으니까. 자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어쨌거나 사람들이 말하는 창놈의 범주에 들어갈 만한 짓을 하며 살았고, 돈 갚을 능력이 없어 몸을 판 건 사실이었다.

창놈이 창놈 소리 좀 듣는다고 뭐 그리 서러울까.

꽃다방에 살면서 하루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듣던 소리라 새로울 것도 없었다. 그랬는데, 태화가 제게 했던 창놈 소리는 마치 어제 들었던 것처럼 아직도 생생했다. 하도 많이 되뇌었더니 무뎌졌는데, 무뎌졌다고 해서 아프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었다. 비참하기가 이를 데 없어, 아주 찰나로나마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아마 태화와 평생 행복하게 잘 산다고 해도, 그때 그가 했던 ‘창놈’이라는 말은 절대 잊히지 않을 터였다.

“난 아저씨를 위해서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할 거예요.”

비록 저를 비참하게 했더라도, 앞으로도 제 삶을 무너뜨리더라도. 그렇더라도 선우는 서태화였다. 또박또박 말을 전하자 태화의 눈이 설핏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턱을 쥐던 손이 스륵 내려갔다.

“어쨌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아저씨가 허락 안 해 줘도 나 혼자서…….”

“너 진짜……!”

태화가 언성을 높이자 선우는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그 모습에 태화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이 예쁜 거 윽박지를 게 뭐 있다고, 제가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화는 쯧 혀를 차며 뒷짐을 졌다. 선우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뜬금없이 왜 저러나 몰랐다. 뒷짐을 지고 선 모습이 마치 이제 곧 제대 직전의 말년 병장 같았다. 군기 잡히기는 싫은데 위에서 시키니까 하는 수 없이 맞춰 주는, 딱 그런 모습이었다.

“……지금 뭐 해요?”

“뒷짐 지잖아.”

“그건 알죠. 뜬금없이 왜 그러냐고요.”

태화는 시선을 넌지시 내리깔아 선우를 봤다.

“너 때릴까 봐.”

별안간 그런 대답이 나왔다. 선우는 더욱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반대쪽으로 갸우뚱 넘겼다.

“네?”

“나도 모르게 너한테 손 올릴까 봐. 알잖아. 성격이 개차반이라 마음에 안 들면 손부터 나가는 거. 너 때릴까 봐, 이렇게라도 쿠션 까는 거야.”

태화의 말을 듣고도 선우는 여전히 이해를 못 했다. 맹하게 멀뚱거리던 눈으로 빛이 든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선우는 말끔한 얼굴로 태화를 훑어 내렸다.

“아무튼 넌 잠깐 장 선생님네 가 있어. 일 다 끝나면 데리러 갈 테니까 밥 잘 먹고 있고. 살 빠져 있기만 해 봐, 쯧. 가기 전에 휴대폰도 하나 장만…….”

태화가 뭐라 뭐라 계속 말했으나 선우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른쪽 귀로 들어온 게 그대로 왼쪽 귀로 흘러 나갔다. 선우는 그저 두 눈을 반들반들하게 뜨고 태화를 바라봤다. 저를 때리지 않기 위해 뒷짐을 지고 있는 사람을 쳐다봤다.

귀찮을 정도로 물어봐서 겨우 알아낸 키는 193센티미터. 몸무게는 80킬로그램 후반과 90킬로그램 초반을 맴돌고, 낮에는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썰며 가끔은 다른 것도 써는 사람. 가진 게 많아 별다른 것에 감흥이 없고, 일을 취미로 한다는.

그런 사람이 지금 선우 앞에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 참고 있었다. 떡 벌어진 가슴팍이 천천히 오르내리는 걸 가만히 보던 선우는 순간 침을 꼴깍 삼켰다. 손끝이 찌릿하고, 발끝이 빠르게 곱아들었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감각이었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태화의 매정이 다정으로 변했던 무수한 순간들이 떠올랐다.

좋아할 수밖에 없게끔 행동하는 사람. 무책임하게 사람을 홀려 놓는 못된 사람.

선우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 태화에게 다가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무작정 입술부터 비볐다. 태화에게 닿고 싶어서 몸이 달았다. 정말 제가 창놈이긴 한 모양이었다. 설렌다고 느끼자마자 태화에게 안기고 싶어 안달이 났다.

“뭔…….”

당황해서 반쯤 벌어진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고 조급하게 움직였다. 따끈따끈한 혓바닥을 입술 사이에 가두고 펠라티오 하듯 쪽쪽 빨았다. 젖은 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어디까지 하나 가만 보고 있던 태화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더욱 깊이 입을 맞췄다. 도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발정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 입장에서 나쁠 건 없었다.

태화는 선우의 허리를 껴안으려고 손을 뻗었으나 금세 제자리로 돌아갔다. 선우가 두 손을 뚝뚝 잡아떼고 등 뒤로 돌려보낸 탓이었다.

“하아, 왜.”

태화가 입술을 떼고 묻자 선우가 배시시 웃었다.

“투명 수갑.”

젖어 번들거리는 입술로 그렇게 말했다.

“아저씨도 수갑 찬 거예요.”

장난기 가득한 눈빛이었다. 선우는 손목끼리 잘 붙어 있나 더듬어 확인했다. 지난번 일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다. 그러고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눈웃음까지 옅게 지었다. 태화는 이깟 말도 안 되는 거 그냥 떨어뜨려 버릴까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저렇게 좋아하니 장단 좀 맞춰 줄까 싶었다. 이제 뭘 하려나 했더니 선우는 다짜고짜 태화의 옷을 들쳤다.

“물어요.”

끌어 올린 옷자락으로 입술을 톡 쳤다. 꽤 당돌한 요구에 태화는 픽 웃다가 옷자락을 지그시 물었다. 모른 척 손가락까지 콱 물자 선우가 아! 소리를 내며 파드득 떨었다. 선우는 깨물린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벌써 잇자국이 나 있었다. 앞에서 키들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태화를 향해 눈을 흘겼다.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그런 게 티가 났다. 연신 킥킥대며 웃는 태화를 째려보다가 까치발을 들어 그의 뺨을 아프게 깨물었다.

“윽!”

옷자락을 물고 있는 탓에 억눌린 신음만 나왔다. 선우는 턱을 한껏 치들고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었다. 뺨에 난 잇자국이 제법 보기 좋았다. 그래도 너무 심했나 싶어서 손끝으로 콕콕 찔러 봤다. 피는 안 나니 이 정도면 괜찮지, 싶었다. 태화는 인상을 구겼지만, 화도, 짜증도 나지 않았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이번에는 반대쪽 뺨에 쪽 입을 맞췄다. 쪽쪽, 간지러운 소리가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힘줄이 바짝 올라선 목덜미와 어깨, 쇄골까지 가볍게 입 맞춰 내려오다가 젖꼭지에도 입술 도장을 찍었다.

“읏.”

잘 짜인 가슴 근육이 짧게 움직였다. 선우는 한 번 더 쪽 소리를 내고 태화를 올려다봤다. 태화의 미간 주름이 더 깊어진 게 보였다. 이번에는 혀로 젖꼭지를 살살 핥으며 시선을 올렸다. 옷자락을 물고 있어 입 밖으로 욕은 못 했지만 속으로 씨발씨발거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선우는 푸스스 웃으며 태화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젖 한번 제대로 못 먹고 자란 애처럼 태화에게 찰싹 달라붙어 젖꼭지를 쭙쭙 빨았다. 반대쪽은 손으로 동글동글 둥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십…….”

태화는 짙은 숨을 내쉬었다.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아 씹, 하나도 뭉그러져 나왔다. 그 바람에 선우는 유두에 입술을 댄 채 작게 웃었다. 남자는 유두로 느끼기 힘들다던데 의외로 태화는 잘 느꼈다. 하기야 저 역시 태화가 만지면 만지는 대로, 빨면 빠는 족족 신음했으니 남자가 유두로 잘 못 느낀다는 건 마냥 속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혀를 빳빳하게 세워 젖꼭지를 쿡쿡 누르고, 입을 크게 벌려 유륜을 한껏 머금은 채 세게 빨아들였다. 손톱을 세워 젖꼭지를 긁기도 하고, 제법 세게 잡아 비틀기도 했다. 전부 태화에게서 배운 것들이었다.

애무가 점점 짙어질수록 태화가 앓는 소리도 커졌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탄탄한 근육들이 크게 울렁거렸고, 거친 숨이 이어졌다. 태화가 참지 못하고 한 발자국 다가가 허리를 치대자 선우는 단호하게 뒤로 물러났다. 태화를 바라봤다. 태화는 어느새 낯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흥분했다는 게 고스란히 드러났다.

“좋아요?”

묻자 태화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는 괜스레 뭐라도 된 기분에 활짝 웃으며 스르르 무릎을 꿇었다. 시야 가득 태화의 앞섶이 들어왔다. 묵직한 부피감이 느껴졌다. 많이 흥분했는지 바지 속에 갇힌 좆이 벌써 벌떡벌떡 움직였다. 마치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선우는 입 안 가득 고인 침을 꼴딱 삼키고 바지 위를 살살 문질렀다.

“흡!”

태화가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더 애를 태우면 안 될 것 같아서 드로어즈와 바지를 동시에 내리자 거대한 기둥이 퉁 튀어 올라왔다. 마치 스프링이라도 달린 것처럼 몇 번 꺼떡이다가 배꼽을 향해 착 달라붙었다. 드로어즈가 축축해서 이미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도 더 많은 물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한 번 사정한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질척하게 젖은 좆이 움칠 떨렸다. 핏줄 하나하나가 위협적일 만치 팽팽해져 있었다. 그때까지도 태화는 뒷짐 진 손목을 붙인 채 잘 버텼다.

선우는 말 잘 듣는 어린이에게 상을 주듯 자지 끄트머리에 쪽 입을 맞췄다. 은실처럼 길게 늘어난 좆물이 선우의 입술에 매달렸다.

“살아 있는 거 같아.”

선우는 그렇게 말하고 두 손으로 자지를 덥석 잡았다. 좆기둥이 꿀렁이는 게 느껴졌다. 정말 자아라도 가지고 있는 양 선단 끝이 뻐끔거리며 무어라 말하는 것도 같았다. 몇 번 부드럽게 문지르자 질질 샌다는 말이 들어맞을 만큼 프리컴이 왈칵 넘쳐흘렀다. 혀끝으로 프리컴을 살살 핥아 먹다가 애가 탈 정도로 느리게 자지를 집어삼켰다. 귀두만 물어도 버거울 정도로 입 안이 꽉 찼다. 묘한 포만감이 느껴졌다.

선우는 제 아랫배를 슬쩍 문질러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입에 전부 담기지 않는 부분은 손으로 문질러 가며 자극했다.

“아으, 윽…….”

위에서 젖은 신음이 쏟아졌다. 선우는 슬쩍 눈동자를 올려 태화를 바라봤다. 침이라도 흘렸는지 입에 물고 있는 옷자락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태화가 느끼는 모습을 보자니 선우는 어쩐지 제 몸이 더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태화의 자지를 쥔 손은 댈 듯 뜨거웠고, 입 안은 이미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쉼 없이 움직이는 핏줄 하나하나를 찾아 핥고, 입술을 힘 있게 오므려 압박했다. 마셔도 마셔도 좆물은 끊임없이 나왔다.

목구멍을 꼴깍꼴깍 조여 가며 고개를 깊숙이 묻자 태화가 턱을 쳐들며 온몸을 떨었다. 고환이 바짝 올라붙는 게 보였다. 사정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선우는 습관처럼 무리해서 목구멍을 열고 태화를 삼켰다. 뒷구멍으로 받는 것도 버거운 크기가 목구멍 안쪽을 사방으로 꽉 메웠다. 구역질이 올라오려는 걸 참고 조금 더 삼켜 보려는데 태화가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목구멍 상한다니까.”

말하는 바람에 내내 물고 있던 옷자락이 툭 떨어져 선우의 머리통을 덮었다. 선우는 커튼처럼 내려앉은 옷 속에서 꾸물꾸물 다시 태화의 자지를 물었다. 목구멍이 상하더라도 태화만 기분 좋다면 괜찮았다. 입술 새로 흐른 침을 씁 빨아 당기고 혀를 넓게 펴 자지를 감쌌다. 다시 목구멍 깊숙이 찔러 넣으려는 순간 머리채가 잡혀 고개가 위로 젖혀졌다.

“후으…….”

어느새 멋대로 손목을 뗀 태화는 선우의 머리채를 잡은 채 다른 손으로 자지를 쥐고 흔들었다. 뱀의 대가리라도 잡듯 억세게 틀어쥐고 자위했다. 선우는 제 눈앞에서 벌름거리는 좆구멍을 보다가 입을 아 벌렸다. 허벅지를 한껏 끌어안고 정액을 받아 마실 준비 했다. 프리컴이 점점 탁해지기 시작했다. 태화의 손도 빨라졌다.

“아윽……!”

태화는 그대로 사정했다. 변기 중앙에 조준하듯 자지 끝을 정확히 선우의 입 안으로 조준해 허연 것들을 푹푹 싸질렀다. 파편처럼 뜨문뜨문 쏟아지던 정액은 마지막으로 길게 뿜어졌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린 사정이 끝나고 태화는 습관처럼 좆을 툭툭 털었다. 마치 소변보고 난 뒤에 하는 행동 같았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톡 털어 낸 자지를 쥐고 선우의 말랑한 뺨에 문질렀다.

선우는 입 안에 든 걸 꼴깍 삼켰다. 뽀송했던 뺨이 질척하게 젖는 게 느껴졌다. 한참 후희에 젖어 있던 태화는 선우가 입을 벌려 찌꺼기까지 전부 삼킨 걸 보여 주자 그제야 눈살을 구겼다.

“맛도 없는 거 뭐 한다고 매번 삼켜.”

“맛있어요.”

선우는 그렇게 말하며 발간 혀를 내밀어 입술 끝에 묻은 것까지 남김없이 핥아 먹었다.

“맛있어?”

“응, 맛있어.”

이럴 때만 반말이 튀어나왔다. 태화는 허허롭게 웃다가 선우의 입술 안으로 엄지를 불쑥 집어넣었다. 미끈거리는 입 안을 거칠게 헤집자 선우는 두 손으로 태화의 손목을 잡고 엄지마저도 맛있다는 듯이 쪽쪽 빨았다. 그러다 문득 손을 빼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왜.”

“나 수갑 풀어 준 적 없는데.”

“아.”

태화는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지금까지 흉흉하게 서 있는 좆을 슬금슬금 문지르며 씨익 웃었다.

“힘이 좋아서 끊었어.”

장난스러운 표정과는 달리 흥분감에 절절 끓는 목소리였다.

언젠가부터 태화의 애무가 길어졌다. 평소에도 선우가 엄살을 잘 부린다는 핑계를 대며 정성 들여 앞을 만져 주고, 뒤를 풀어 줬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너무하다 싶을 만큼 온갖 데를 물고 빨았다. 온몸이 태화의 침으로 범벅이 되고 나서야 선우는 뒷구멍으로 자지를 받았다. 그때부터는 본인이 싸지르는 체액으로 몸이 젖기 시작했다.

삽입하는 것만도 긴 시간이 걸리니 태화가 한번 사정하고 나면 선우는 녹초가 된 듯 사지를 늘어뜨리고 움직이지 못했다. 좋다고 엉엉 울며 태화를 자극한 게 후회될 정도로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태화는 지루였다. 정말 병원이라도 가서 진료받아 봐야 할 것 같았다.

이번에도 선우는 엎드린 채 엉덩이만 파들파들 떨었다. 콘돔 없이 해도 된다고 했더니 태화는 아주 오줌처럼 정액을 싸질러 놨다. 벌어져서 뻐끔거리는 구멍 사이로 정액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힘을 한번 줄 때마다 덩어리째로 왈칵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선우는 질질 흐르는 침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이불에 고개를 파묻은 채 낑낑거렸다. 그사이 주방에서 물병을 가지고 들어온 태화가 물병 끝으로 선우의 엉덩이를 톡 쳤다.

“아, 차가……!”

무방비한 상태에서 차가운 게 닿자 선우는 흠칫 떨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으면 손자국이 고스란히 남은 엉덩이가 움찔거렸다. 마른 몸에 유일하게 살집이 포동포동 있는 엉덩이가 옅게 경련하자 태화는 씩 웃으며 볼기짝을 가볍게 찰싹 때렸다.

“한 번 더 하자.”

“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말할 틈도 없이 선우는 태화에게 발목이 잡혀 주욱 끌려갔다.

“아으, 더는 못 해요……!”

말해 봤자 태화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침대 가장자리까지 선우를 쭉 끌어와 허리를 들어 올렸다. 졸지에 엉덩이만 산처럼 봉긋 솟은 자세가 된 선우는 겨우 고개를 꺾어 뒤를 돌아봤다. 태화는 침대 아래에 서서 자지 끝을 매만지고 있었다.

태화의 자지는 몇 발을 빼고도 여태 검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워낙 흉흉한 크기에 색도 짙고, 핏줄과 힘줄로 울퉁불퉁하다 보니 흉기처럼 보였다. 선우의 안을 마구 짓이기느라 퉁퉁 불어 터진 좆을 쥐고 문지르던 태화는 귀두 끝으로 선우의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제 정액을 그러모아 뒷구멍에 치덕치덕 발랐다.

“벌써 몇 번, 읏, 몇 번째예요……!”

“몰라. 세 번?”

“네 번째잖아요!”

“잘 아네. 알면서 뭘 물어.”

태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고 선우의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시작부터 세 개였다. 태화의 자지를 잘도 받아먹던 구멍이라 손가락 세 개도 무리 없이 들어갔다.

하지만 역시나 저 안쪽은 쉽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마디가 보이지 않을 만큼 깊숙이 처박고 잔뜩 성이 나 부풀어 오른 곳을 들쑤시자 선우가 헉! 소리를 내더니 부들부들 떨었다. 예민한 곳을 사정없이 찔러 대는 건 언제나 자극적이었다. 분명 더 나올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힘없이 덜렁거리던 자지가 꼿꼿해지는 게 느껴졌다. 선우는 침대 시트를 이로 물어뜯으며 숨을 삼켰다.

지속되는 쾌락은 사람을 미치게 했다. 온몸이 뜨겁게 들끓었고, 또 흐물흐물하게 힘이 빠지기도 했다. 무너지듯 허리가 내려앉자 태화는 씁, 하고 엄한 입소리를 내며 허리를 받쳐 세웠다. 내벽 주름 사이사이를 정액으로 적시고 손가락을 뺐다. 협탁을 열어 콘돔을 꺼내자 선우가 태화의 손목을 슬며시 잡았다.

“그, 그냥.”

선우는 이불에 고개를 반쯤 파묻은 채 웅얼거렸다. 콘돔 없이 하고 싶었다. 태화의 말마따나 요즘 콘돔은 질이 좋아서 안 낀 것이나 다름없다고 해도 그냥 하는 게 좋았다. 태화의 생좆이 배 속을 드나드는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매번 선우는 콘돔을 쓰지 말자고 했고, 그런데도 태화는 매번 콘돔을 꺼냈다. 보통 이런 건 삽입하는 쪽에서 그냥 없이 하자고 제안하는 경우가 많은데 왜 이렇게 꼬박꼬박 챙기나 몰랐다.

바른 생활 사나이도 아니면서…….

선우는 발그레하게 상기된 눈으로 태화를 올려다봤다. 태화는 여전히 콘돔을 들고 있었다.

“그냥, 뭐.”

태화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선우의 입술이 씰룩였다. 태화의 속이 빤히 보였다. 다 알면서도 모른 척 시침을 뚝 떼는 것이었다.

제 입에서 나오는 노골적인 말이 듣고 싶어서.

“그냥 뭐, 말을 해야 알지.”

“…….”

“어?”

태화는 잔뜩 성이 난 기둥을 선우의 골 사이에 슬슬 비비며 물었다. 꼭 쑤셔 박으면 어디까지 들어가나 가늠하는 것처럼 꾹 치댔다. 꼬리뼈를 한참 지나 등허리를 올라와 척추뼈를 툭툭 건드리는 감각에도 선우는 입을 꾸욱 다물었다. 맨날 제 애를 태워 대는 태화가 얄미웠다. 저 역시 태화의 애간장을 한 번쯤은 녹여 보고 싶었다.

선우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눈을 찡긋거리다가 아무 말 없이 이불에 낯을 폭 파묻었다. 시위하듯 시트를 꾹 쥐고 버티자 뒤에서 씨발,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선우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아! 아윽, 흣……!”

굵다란 게 배 속을 가르고 단번에 뿌리 끝까지 박혔다. 선우는 고개를 홱 치들고 높은 교성을 내질렀다. 뒷구멍이 한없이 벌어진 게 느껴졌다. 배 속이 빠듯하게 들어차고, 온갖 데가 뜨거웠다. 깊숙한 곳까지 뿌득뿌득 대가리를 디미는 감각이 선연하게 다가왔다.

예고도 없는 삽입에 선우는 숨을 뜨문뜨문 나눠 쉬어 가며 뒤로 손을 뻗어 태화를 밀어 냈다. 그러면 그럴수록 태화는 허리에 힘을 실어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고환이 찌그러질 만큼 억센 힘이었다. 젖어 가닥 진 음모가 쩍쩍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아흐, 응……. 아저씨, 조금만……. 흐…….”

“아파?”

“아니, 그게, 아……!”

“그럼, 힘들어?”

선우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내벽이 짓이겨지는 건 좀 둔하게 아픈 듯했으나 참을 만했다. 힘들지 않다면 그것도 거짓말이겠지만 괜찮았다. 그런데도 선우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그럼, 왜. 어? 왜 그래, 선우야.”

태화는 낮게 선우의 이름을 부르며 허리를 콱 치댔다.

“헉!”

선우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바로 이런 것 때문이었다. 입은 다정하면서 허리는 무자비한 것 때문에 머리가 빙빙 돌았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고 그저 허벅지를 파들파들 떨며 태화에게 뒤를 내줬다. 자극이 그치지 않고 쏟아졌고, 내벽을 파고드는 좆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이러다간 입 밖으로 태화의 것이 덜렁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안쪽을 마구 침범해 대는 탓에 선우는 침을 질질 흘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저씨, 응, 나 안 돼……. 너무 느껴서, 아……! 이상, 이상해…….”

“좋다는 말이네.”

“아니, 흐윽, 이상해요. 아, 아! 거기, 아!”

선우는 제 옆에 있는 태화의 손목을 붙들고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굵다란 귀두 갓이 내벽을 긁듯이 들어오고 나가길 반복했다. 안쪽에 고여 있던 정액과 좆대가리가 만나 질퍽이는 소리까지 울려 댔다.

태화가 같은 곳만 찔러 대자 선우는 깜빡 눈앞이 새카매지는 걸 느꼈다. 이대로 있다가는 쾌락에 절어 죽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턱 끝까지 겁이 차올라 선우는 벌벌 떨면서 앞으로 손을 뻗었다. 도망이라도 가려는 듯 엉금엉금 앞으로 기어가는데 태화가 쉽게 놔줄 리 없었다. 자지를 틈도 없이 박아 넣더니 선우의 등 위로 몸을 겹쳐 무게를 실었다.

“자꾸 어딜 가.”

묵직하게 찍어 눌러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어 놓고 선우의 두 손을 가져왔다. 손목을 각각 잡고 얼굴 양옆에 고정한 채 귓불을 빨아 씹었다.

“어? 어디 가, 선우야.”

“하, 너무 깊어서……. 조금만 빼려고, 응…….”

“이렇게?”

태화는 선우의 말을 들어주는 양 둔부를 뒤로 빼 자지를 끄트머리만 물렸다. 그대로 얕게 쳐올리자 선우는 그것만으로도 우는 소리를 냈다. 귀두가 구멍을 살살 스칠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너무 넓게 벌어져서 다시는 안 닫힐 것만 같았다.

“아, 그거, 흑……. 나 구멍 안 다물려, 그럼, 아아……!”

“안 다물리기는, 잘만 조여 물면서. 후…….”

말이 끝나자마자 태화는 철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허리를 치받았다. 선우는 잔뜩 찡그려져 있던 눈을 번뜩 뜨더니 꺽꺽 소리를 냈다. 이건 너무했다. 너무할 정도로 깊게 쳐들어왔다. 아랫배가 불룩 솟아 침대를 압박했다. 어딘가 고장 난 느낌에 선우는 눈물만 줄줄 흘리며 제 손목을 억세게 쥔 태화의 손에 뺨을 비볐다.

“씹……. 진짜 타고났지.”

뜻을 알 수 없는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선우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알지도 못하면서 태화의 말이 무조건 맞다는 듯 굴었다. 태화는 한 번 더 욕을 뇌까리며 허리를 깊게 묻었다. 선우의 위로 무겁게 올라탄 자세 그대로 둔부만 꾹꾹 쥐어짜 내 안쪽을 쑤셔 댔다.

“흐으, 하…….”

“윽…….”

후덥지근하게 젖은 숨소리가 난무했다. 선우가 이불에 낯을 처박은 채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부들부들 떨자 태화가 턱을 쥐어 올렸다. 선우는 고개가 한껏 꺾여 위에 있는 태화를 바라봤다. 쾌락에 취해 설뜨인 눈으로 물기가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태화 역시 선우를 뚫어져라 내려다봤다.

얼굴을 파묻고 있어서 그런가, 숨을 못 쉬어서 그런가. 아니면 그냥 자두를 닮은 건가.

선우는 뺨이 온통 새빨개져서는 눈물을 도록도록 흘려 냈다. 살짝 벌어진 입으로 흘러나오는 숨이 새큼했다. 역시 자두를 닮은 놈인가 보았다. 태화는 잘 익은 선우의 뺨을 쭙쭙 빨아 보다가 잇자국도 내고 아예 입술을 거칠게 핥기도 했다. 뭣도 모르고 제 숨을 꼴딱꼴딱 받아 마시는 선우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이미 끝없이 쑤셔 박았는데 더 깊숙한 곳을 들쑤시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태화는 선우의 입술을 빨며 손을 끌어와 아랫배를 만지게 했다. 꾹꾹 박아 넣을 때마다 아랫배가 울룩불룩 요동쳤다. 선우의 손을 겹쳐 쥐고 그 부분을 강하게 압박하자 마른 몸이 감전이라도 된 듯 벌벌 떨렸다.

“아! 하, 잠, 아으……. 아……!”

태화의 입 안으로 선우의 신음이 꽉 들어찼다. 한 번 더 아랫배를 꾸욱 누르자 선우는 악! 소리를 내며 정액을 와르르 싸질렀다. 벌써 몇 번째 사정인지 몰랐다. 여러 차례 사정한 만큼 탁한 물처럼 희뿌옇고 멀건 것만 잔뜩 흘러나와 태화의 손이며 침대를 적셨다.

“잘 싸네.”

“아으, 아저씨가, 흑, 배를……. 아읏……!”

선우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태화가 빠르게 안을 쳐올렸다. 사정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안쪽으로 저릿한 쾌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이젠 정말 혼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안 된다고, 방금 쌌다고, 조금만 쉬자고…….

애원하듯 말해 봐도 태화는 듣지 않았다. 울면서 태화의 손목을 콱 깨물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추삽질이 점점 더 빠르고 깊어졌다. 선우의 눈앞이 하얗게 바래졌다.

문득 이전과는 다른 감각이 툭 치고 올라왔다. 자지 끝이 파르르 떨리고, 좆기둥이 울컥울컥 움직였다. 또다시 사정하려나 싶었지만,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어쩐지 요의와 비슷했다. 이대로라면 오줌을 지릴 것 같아서 선우는 다급히 태화의 팔뚝을 잡았다.

“오줌, 아, 오줌 나와요……! 안 돼!”

“드디어, 읏, 싸는 거 보겠네.”

“아니, 진짜 나와……. 흑, 화장실 가고 싶어, 아으…….”

선우는 뺨을 벌겋게 붉히고 연신 도리질 쳤다. 이미 태화 앞에서 오줌 지리는 걸 보여 준 적은 있었으나 좆을 조여 문 채 싸는 건 또 다른 얘기였다. 쏟아져 나오려는 걸 참아 보려 아랫배에 힘을 주자 태화가 성난 짐승처럼 낮게 그르렁거렸다. 선우는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푹 숙였다. 순간 몸이 붕 떠올랐다.

“아아……!”

태화가 갑자기 선우를 안아 올렸다. 오금 아래로 손을 끼워 넣어 단단히 받친 채로 쿵쿵 걸음을 뗐다. 선우는 허겁지겁 태화의 팔뚝을 잡아 붙들었다. 너무 놀라서 파드득 떨자 안에 들어찬 자지가 더욱 깊이 들어왔다. 가만히 있겠다고 해서 괜찮은 것도 아니었다. 태화가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예민한 부위가 뭉근하게 짓이겨졌다. 선우는 결국 힉힉 떨면서 눈물을 후두두 떨어뜨렸다.

꼿꼿이 선 자지를 꺼떡이며 도착한 곳은 욕실이었다. 태화는 선우를 데리고 세면대 앞에 섰다.

“하아……. 자, 쉬. 쉬 하자.”

신음과 웃음이 섞인 목소리를 들은 선우는 구슬 같은 눈물만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수치스러웠다. 변기도 아니고 세면대 앞에서 이러는 건 너무했다. 게다가 거울 속에 저들의 모습이 훤히 비치니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눈을 질끈 감고 버티자 태화가 오금을 단단히 받치던 손을 아래로 훅 내렸다.

“아!”

몸이 아래로 고꾸라질 것 같은 느낌에 선우는 사지를 버둥거리며 놀란 소리를 냈다. 다행히 태화가 다시 받쳤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거울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싸라니까.”

“흐으…….”

그런데도 선우가 버티자 태화는 몇 번 더 같은 짓을 반복했다. 마치 롤러코스터라도 타는 양 선우는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떨어질까 봐 겁을 먹고 다리를 동동 구르다가 태화의 자지가 어느 곳을 꾸욱 비벼 대자 아으! 소리를 내며 고개를 휙 젖혔다. 아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했다. 발끝을 한껏 곱아 놓은 선우가 침까지 줄줄 흘리는 모습에 태화가 픽 웃었다.

“여기야?”

“거기, 안 돼……. 흑, 진짜 나올 것 같단, 읏, 말야.”

“싸라고 자리까지, 하아……. 마련해 줬잖아.”

“부끄러워, 흑, 오줌 싸는 거 보여 주면, 아으……. 부끄러우니까, 아아……!”

“우리 사이에 뭐가 부끄러워.”

태화는 ‘우리 사이’를 강조해서 말했다. 앵두처럼 익은 선우의 귀 끝을 질근대며 느른한 숨을 불어 넣었다. 목숨 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제 팔뚝만 붙잡은 선우의 손을 들어 제 목덜미를 감싸 안게 하고 같은 지점을 얕게 방아 찧듯 쳐올렸다. 살짝살짝 움직이자 쿨쩍이는 소리를 내며 안에 고여 있던 정액이 비어져 나왔다.

“흣, 아……. 흐아……!”

선우는 자지러지듯 발을 버둥거렸다. 좆기둥 가득 들어찬 무언가가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 참아 보려고 해도 더는 안 되었다. 태화가 안쪽을 거칠게 파고드는 순간 선우는 고개를 한껏 젖혀 그의 어깨에 기댔다.

“아! 아, 아……! 아으, 흐…….”

멀건 물이 푹 솟아올랐다. 마치 파편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정액인가 했으나 전혀 탁하지 않았고, 그럼 정말 오줌인가 했지만 누렇지도 않고 투명한 물이 물총처럼 푹푹 튀어 올랐다. 정신없이 물을 싸지르던 선우는 이게 뭔지도 모르고 작게 흐느꼈다.

“나, 흑, 오줌…….”

선우는 제가 싼 게 오줌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뜨끈한 게 자지를 타고 흐르는 느낌에 애처럼 엉엉 울어 가며 고개를 젓다가 넌지시 눈을 떴다. 숨이 턱 막혔다. 거울 속에 든 태화가 아득한 눈으로 선우의 좆 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 사위가 전부 드러난 모습이었다. 선우도 태화의 시선을 따라 제 것을 내려다봤다. 아직도 말간 물이 퐁퐁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거, 뭐, 아으…….”

“이젠 하다 하다 분수까지 싸?”

태화가 말했지만, 선우는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뭘 싸……?

맹한 눈을 하는데 뒤로 좆이 틈도 없이 처박혔다. 선우는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뭣 때문에 흥분했는지 태화의 추삽질이 거칠어졌다. 살끼리 끈덕지게 맞붙는 소리가 날 때마다 선우의 좆구멍에서 맑고 투명한 물이 쉼 없이 쏟아져 나왔다.

거대한 게 안을 긁으며 들어왔다가 아쉽다는 듯이 천천히 빠져나가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다시 한번 들어오는 순간 귀두가 예민한 부위를 강하게 찔러 대자 선우는 절로 앓는 소리를 냈다. 질질 새던 분수가 멈추고 이제는 익숙한 감각이 느껴졌다.

분수 바로 뒤로 이어지는 사정감은 사람을 극으로 밀어 넣었다. 선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벽 주름 하나하나가 태화의 자지에 쫀득하게 달라붙어 함께 갈 것을 요구했다. 태화는 윽, 낮은 숨을 내쉬다가 선우의 귀를 아프게 물어뜯었다.

“씹, 팔……! 윽!”

태화가 크게 신음하는 순간 선우도 정액을 토해 냈다. 내벽 속에 든 좆기둥이 부르르 떨리는 느낌이 생생했다. 울컥울컥 정액을 쏟아 낸 자지는 지치지도 않는지 슬금슬금 내벽을 문질렀다. 선우는 더 소리칠 힘도 없었다. 정말 온몸의 진이 다 빠졌다. 태화의 목덜미를 끌어안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선우가 앞으로 끔뻑 몸이 기울자 태화가 서둘러 가슴을 받쳐 당겨 왔다. 선우의 몸이 잘게 떨렸다. 훌쩍이는 소리가 점점 커지다가 나중에는 흐느끼는 소리로 바뀌었다. 애가 서럽다는 듯이 울어 버리자 이성이 설핏 돌아온 태화는 눈을 찡긋거리다가 선우에게 입을 맞췄다.

자신이 물어뜯어 핏물이 약간 배어 나오는 귀와 잇자국이 남은 뺨, 울혈이 가득한 목덜미에 쪽쪽 소리를 내다가 입술에도 도장을 찍으려는데 선우가 고개를 슬쩍 반대쪽으로 돌렸다. 명백한 거부 의사였다. 모른 척 반대쪽으로 따라갔더니 마찬가지로 또 외면했다.

“왜.”

짧은 물음에 선우는 코를 킁 들이마셨다.

“나만 맨날, 흐윽, 부끄럽고. 아저씨는 맨날 여유롭고……. 짜증 나…….”

선우는 어물어물 말하더니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태화에게 짓씹혀 엉망으로 부어오른 입술은 오동통했다. 태화는 헛웃음을 삼키고 선우의 턱을 끌어와 억지로 뽀뽀를 쪽 했다. 새삼 최선우가 많이 어려 보였다. 이제 스물하나였으니 어린 나이가 맞긴 하지만 그래도 성인은 성인이었다. 그런데도 태화 눈에는 여태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어린애 같았다.

선우가 시선을 옆으로 굴리자 태화는 한 번 더 쪽 소리를 내다가 거울을 봤다. 선우의 턱을 가볍게 쥐어 마찬가지로 거울을 보게 했다.

“제대로 봐.”

선우는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거울을 마주 봤다. 투정 부리느라 불퉁해졌던 낯으로 빛이 들었다.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더 정확하게는 거울 속 태화의 낯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흥분에 잡아먹힌 얼굴이었다. 능청스러운 어투와 달리 태화는 여유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너만큼이나 나도 엉망이야. 너랑 할 때마다 발정 난 개새끼가 돼. 어떻게 하면 더 깊게 쑤셔 박을까, 어떻게 하면 널 살살 달래서 또 하자고 할까, 어떻게 하면 널 뼈 마디마디 발라 먹을까. 그 궁리만 하는 짐승 새끼가 돼 버린다고.”

상냥한 어투였지만 표정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선우는 침을 꼴깍 삼키고 태화의 몸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제 잇자국이 선명하게 난 어깨와 피멍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짙은 울혈이 남은 목덜미, 팔뚝에 난 손톱자국과 땀이 도록 흘러내리는 옆구리를 봤다. 마지막으로 아직도 제 뒷구멍 안에서 팔딱팔딱 맥동하는 자지와 자꾸만 비어져 나오는 허연 정액 덩어리까지 눈에 담은 선우는 다시 눈동자를 스륵 올렸다. 태화와 시선이 마주쳤다.

“지금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우리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아무 생각도 안 하고 하루 종일 너랑 붙어먹고 싶다는 생각 중이야. 내 자지를 네 구멍에 박아 놓고 살고 싶어. 그런데 그렇게 못 하니까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태화는 정말 입술이 마른다는 듯 혀를 내어 가볍게 훑었다. 촉촉해진 입술로 선우의 눈가에 입맞춤했다. 하도 울어서 짓무른 눈가를 부드럽게 핥다가 거울이 아닌 선우의 진짜 눈을 마주 봤다.

“여유가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라고, 선우야.”

나직한 한마디였다. 그 한마디에 선우는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부르는 건 반칙이었다. 나긋한 목소리로 부르는 제 이름을 들으면 태화를 위해 뭐든 하고 싶었다. 하잘것없는 몸뚱이라도 내주고 싶어 참기 힘들었다. 선우는 늘어져 있던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힘이 빠져 파들파들 떨면서도 태화의 팔뚝을 굳게 붙들었다.

“흐, 한 번, 딱 한 번만 더 해요.”

숨소리가 잔뜩 섞인 말에 태화의 눈이 반짝 빛났다.

“나, 하고 싶어.”

“…….”

“아저씨랑 또 하고 싶어.”

태화는 선우를 빤하게 쳐다봤다. 아랫구멍을 오물오물 조여 가며 안아 달라고 재촉하는 놈을 가만 바라봤다. 어쩌려고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진짜 내 멋대로 박아 대면 엉엉 울 거면서. 빨고 싶을 만큼 빨고, 만지고 싶을 만큼 만지면 밉게 입술을 삐쭉거릴 거면서. 허리를 잡아 붙들어 내벽을 마구 후비고, 더는 들어갈 자리도 없을 만큼 질펀하게 싸지르고, 정액으로 울렁출렁 들어찬 곳에 기어코 다시 좆대가리를 디밀면 겁먹고 딸꾹질이나 할 거면서.

“너 뭘 믿고 이래.”

태화가 물었고, 선우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을 접어 웃었다. 희미한 웃음으로 태화를 맞이했다. 그저 아저씨라면 다 좋다는 듯, 대책도 없이 사람을 휘둘렀다. 이러니 태화는 정신을 빼놓을 수밖에 없었다. 최선우 앞에서는 이성이랄 게 죄 날아갔다.

선우는 숨을 쌕쌕 내쉬었다. 왜 객기를 부렸나 몰랐다. 하여튼 분위기에 휩쓸리는 성격이 문제였다. 아니, 더 큰 문제는 태화의 정력이었다. 앞으로는 정력에 안 좋은 음식들을 찾아봐 끼니마다 먹여야 할 성싶었다.

근데 정력에 안 좋은 음식이 있기는 한가?

생각하는데 태화가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태화가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입가에 뭉근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분명 다정한 표정이었는데 선우는 어쩐지 얄미워서 태화의 팔뚝을 앙 깨물었다. 그러다가 또 쭙쭙 빨기도 했다. 태화가 푸스스 웃었다. 언젠가부터 태화는 잘 웃었다. 선우는 저를 보며 웃는 태화가 좋았다. 예쁨받는 기분이었다.

“배고파.”

불현듯 그런 말이 나왔다. 생각하기도 전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선우의 한마디에 태화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졸지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선우는 눈을 크게 뜨며 문밖을 내다봤다. 주방 쪽에서 뚝딱뚝딱 소리가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기 굽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나기 시작하자 선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자극이 들어오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진동했다. 시위한답시고 점심과 저녁을 굶어 버려서 정말 배가 고팠다.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침대 밑으로 내려오자마자 선우는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어……?”

맹한 소리 끝에 제 다리를 내려다봤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섹스를 아무리 많이 했기로서니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겨우 무릎을 세워 앉자 안에 고여 있던 정액이 죽 흘러나왔다. 분명 태화가 씻겨 주며 뒷물까지 꼼꼼하게 해 줘서 다 빼냈다고 생각했는데 워낙 꾸역꾸역 싸질렀다 보니 아직도 남은 게 있던 모양이었다. 가랑이 사이에서 내밀려 나온 덩어리가 바닥을 적신 게 민망해 서둘러 손으로 훔치는데 앞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뭐 하냐?”

큰 소리에 다급히 방으로 들어온 태화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웃지도 못했다. 온몸이 울긋불긋해져서는 바닥에 주저앉아 아랫구멍에서 나온 정액이나 닦고 있는 선우를 보자니 다시 군침이 돌았다.

“자꾸 귀염 떨래?”

태화가 앞치마 안으로 손을 넣어 아랫도리를 주무르며 말하자 선우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상의는 입지도 않고 바지만 입은 채 앞치마를 맨 게 참 변태 같아 보이는데 또 변태 짓을 당할 생각을 하니 벌써 정신이 아뜩해졌다. 선우가 울먹거리는 눈을 하자 태화는 한숨을 픽 쉬며 다가왔다. 움찔, 뒤로 물러나는 선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더는 못 하는데……!”

선우는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여기서 더 해 버리면 일주일은 못 걸을 것 같았다. 잔뜩 긴장해서 몸을 웅크리는데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슬며시 눈을 뜨자 앞치마에 제 손을 닦아 주는 태화가 보였다. 손가락 사이사이 질척하게 묻은 정액을 꼼꼼하게 닦은 태화는 선우를 번쩍 안아 들더니 주방으로 갔다. 식탁 의자 두 개 중 하나에 도톰한 방석이 깔려 있었다.

태화는 선우를 그 위에 앉혀 놓고 티셔츠를 가져다줬다. 선우는 ‘팬티는요?’ 하고 물으려다가 태화가 바빠 보여 티셔츠만 주섬주섬 입었다. 제 것인 줄 알았는데 태화의 옷이었다. 태화는 집에 있을 때면 매번 선우에게 제 옷을 입혔다. 이럴 거면 잠옷은 왜 사 줬나 몰랐다.

“먹어.”

방금 구워져 잘 익은 고기가 식탁 위에 놓였다.

“아저씨는요?”

“너나 많이 드세요.”

선우는 고기를 보자마자 입 안 가득 고인 침을 꼴딱 삼키고 서둘러 숟가락을 들었다. 배가 정말 고팠어서 다 맛있었다. 원래도 반찬 투정을 별로 안 했지만, 지금은 전부 꿀맛이었다.

밥 한 숟가락에 잘 익은 소고기를 두 점씩 올려 먹었다. 굽기도 딱 좋았고, 최상급 소고기인지 입에 넣자마자 살살 녹았다. 걸신이라도 들린 듯 볼이 빵빵하게 들어찰 정도로 허겁지겁 먹자 태화가 천천히 먹으라며 물을 따라 내밀었다. 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고기를 세 개나 넣고 싼 쌈을 입에 넣었다. 그러다 사레가 들려 가슴을 턱턱 치는 바람에 태화가 또 한숨을 내쉬었다.

“수저 이리 내.”

태화는 달라고 해 놓고 선우가 주기도 전에 먼저 가져갔다. 별안간 수저를 빼앗긴 선우는 입 안 가득 든 걸 우물우물 씹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부터 태화는 선우에게 직접 밥을 먹였다. 밥 한 숟가락에 두툼한 고기를 두 점씩 올리며 천천히 속도를 조절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선우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해져서는 입을 쪽쪽 벌려 받아먹었다. 요구하는 것도 많았다. 깻잎쌈을 싸 달라고 했고, 무쌈에 말아 달라고도 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젓가락을 쏙 가져온 선우는 상추쌈을 크게 싸서 태화에게 내밀었다.

“나 먹으라고?”

묻는 말에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화는 시큰둥한 얼굴을 하다가 입을 벌려 선우가 싸 준 쌈을 먹었다. 선우의 눈이 반짝였다. 맛있다는 말을 기대하고 팔랑팔랑 눈을 깜빡여 가며 보는데 태화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맛없어요?”

“맛있어.”

“그런데 왜…….”

선우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맛있다는 말을 강요하는 건 좀 아니지, 싶었다.

그래도 쌈을 싸 주면 맛있다고 하는 게 규칙인데.

선우는 말은 못 하고 시무룩해져서는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선우 줄 고기를 무쌈에 말아 싸던 태화는 선우를 힐긋 봤다. 저 뾰로통한 놈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 보였다. 웃음이 비어져 나왔지만, 아닌 척 꾹 참고 예쁘게 싼 고기무쌈을 선우에게 내밀었다. 선우는 힘없는 표정을 하면서도 입을 아 벌려 잘만 받아먹었다. 태화가 볼을 톡 쳤다.

“맛있는 거 나 주지 말고 너나 먹어. 네가 싸 준 거 너무 맛있어서 내가 계속 싸 달라고 하면 너 뭐 먹으려고.”

무심한 듯 다정하게 말하자 선우는 금세 환한 얼굴을 했다. 태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정도로 마음을 못 숨기는 건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투명하기가 맑은 물 같았다.

거의 한 근을 구웠는데 전부 선우의 배 속으로 들어갔다. 정말 배가 많이 고팠어서 밥도 두 그릇이나 먹었다. 계속 받아먹는 게 민망했던지, 아니면 이제 배가 어느 정도 찬 건지, 선우는 태화에게서 젓가락을 가져와 스스로 먹기 시작했다. 태화는 비스듬히 턱을 괸 채 냠냠 맛있게도 먹는 선우를 지긋이 쳐다봤다.

“그때 창놈이라고 했던 거, 미안하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래도 꼭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했다. 선우는 숟가락으로 밥을 예쁘게 뜨다 말고 고개를 슥 들었다.

“용서해 줄게요.”

“그래, 고맙…….”

“대신 저 보내지 말아요. 제가 아저씨 돕는 거 허락해 주세요.”

웬일로 쉽게 쉽게 간다고 했더니만 전부 속내가 있는 것이었다. 태화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선우는 너무 안일했다. 지금 제가 하려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영 모르는 것 같았다. 선우는 태화를 너무 믿었고, 그게 언젠가 본인에게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듯했다. 그건 아주 큰 문제였다.

“저한테 녹음 파일이 있어요.”

선우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한숨을 쉬던 태화의 입에서 이번에는 너털웃음이 튀어나왔다. 마냥 대책 없는 듯한 최선우가 정작 중요한 순간에 제 몫을 해내는 것도 태화에게는 문제였다. 인간은 믿을 게 못 된다는 인생의 모토를 선우가 자근자근 짓밟는 중이었다.

태화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으면서도 가늘게 뜬 눈으로 선우를 주시했다. 유약을 잘 발라서 만든 도자기처럼 윤이 나는 얼굴에서 눈이 떼어지지 않았다. 언젠가 서로를 잘못 판단했다고 여길 때가 올 수 있겠다는 예감이 짙게 들었다. 그래 봤자 아직 그런 때는 오지 않았고, 태화는 그저 선우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언젠가 이 순간을 후회할 걸 알면서도.

* * *

진동이 끊임없이 울렸다. 징징, 울려 대는 소리가 지겨워 동열은 휴대 전화를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뚝 끊긴 줄만 알았던 진동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저 지랄이었다. 이게 다 서태화 때문이었다. 동열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숨도 자지 못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봤다.

“하, 씨이발…….”

저절로 욕이 터져 나왔다. 노트북 화면에는 굵은 글씨로 적힌 머리기사가 쭉 나열돼 있었다.

[현직 경찰, 성매매 업소와 유착 관계였다는 사실 밝혀져…….]

[룸살롱 관계자 曰 ‘서울 모 경찰서 경사에게 접대하고 단속 기간 안내받았다’]

[남성 성매매 종사자에게까지 접대받았다는 남경, 감찰 착수]

누구라고 이름이 특정되지 않은 기사를 읽고도 동열은 저게 누구인지 아주 잘 알았다. 바로 저 자신이었다. 용지서장에게 비리 파일이 도착한 이후 한동안 잠잠하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새벽 나절부터 갑작스레 이런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느 경찰서인지, 누구인지, 기사 속에서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인터넷상에서 그 인물이 용지서에서 근무 중인 한동열 경사라는 정보가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덕분에 해가 뜨기 시작할 무렵부터 휴대 전화가 불탔다. 동료 경찰들은 물론 용지서장에게서도 스무 통이 넘는 전화가 왔고, 심지어는 모르는 번호로도 자꾸 왔다. 한 번은 뭣도 모르고 받았다가 어느 언론사 기자라고 밝히는 말에 휴대폰을 내던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전화는 끊이지 않았다.

이제는 아예 전원을 꺼 버리려고 다시 휴대 전화를 주운 한동열은 징징 울려 대는 소리를 듣자 순간적으로 열이 확 올라 전화를 받았다. 누가 되었든지 욕이나 한바탕 거하게 퍼부을 작정이었다.

“씨발, 할 말 없……!”

- 한 형사님!

하지만 휴대 전화를 통해 넘어온 건 뜻밖의 목소리였다. 익숙한 목소리에 동열의 고개가 옆으로 넘어갔다. 잔뜩 찌푸렸던 얼굴을 펴고 휴대 전화를 고쳐 잡았다.

- 형사님, 저, 저 빨리 이리로 와 주세요.

“……최선우 씨?”

- 생각나는 사람이 한 형사님밖에 없어서…….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라고, 흑…….

대뜸 전화한 것도 당황스러운데 선우는 갑자기 울기까지 했다. 축축이 젖은 소리가 한동열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선우가 말을 잇지 못하고 우는 소리만 내자 한동열은 갸웃 기울였던 고개를 똑바로 세웠다.

“무슨 일입니까? 뭐, 서태화가 때리기라도 했어요? 예?”

- 빨리요, 빨리. 빨리 와 주세요……!

“거기 어딘데요?”

- 여기…….

선우가 말해 준 곳은 우림동의 어느 모텔이었다. 선우는 계속해서 빨리 와 달라고 재촉하더니 돌연 비명을 꽥 질렀다. 전화는 거기서 뚝 끊겼다. 동열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가 비명이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겉옷 챙기는 것도 잊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선우가 말한 모텔은 동열에게도 익숙했다. 모텔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거의 여인숙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워낙 외진 곳에 있기도 하고, 주변이나 모텔 내부나 제대로 된 CCTV도 하나 없어 청소년 범죄와 더불어 크고 작은 사건들이 종종 일어나는 곳이었다.

모텔 주인에게 공갈 말고 제발 진짜 CCTV를 달라고 말했지만 들어 처먹지를 않아서 골머리 썩히는 곳 중 하나였다. 우범 지대나 다름없는 곳에 선우가 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다행히 기자가 아파트 앞까지 들이닥치지는 않은 상태였다. 한동열은 서둘러 주차해 둔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서태화, 이 씹새끼. 내가 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는다, 이 개새끼야.”

한동열의 눈이 번들거렸다. 꼭 무슨 일이라도 치를 사람의 모습이었다. 선우의 입에서 서태화라는 이름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지만, 한동열은 이게 전부 그 간악한 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언론에 제 과거를 흘릴 놈도 서태화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걸 다 따져 보면 그 새끼를 만나고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정작 진짜 시작은 최선우였다는 걸 몰랐다. 동열에게는 그저 서태화만 죽일 놈이었다.

동열의 집에서 모텔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동열은 차에서 내려 ‘오렌지-힐’이라고 적힌 간판을 올려다봤다. ‘ㄹ’을 밝히는 네온사인은 다 망가져 있었고, 건물 외벽의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보기 안 좋았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허름한 모텔이었다. 저 안에 최선우가 있었다. 그리고 최선우는 생각나는 사람이 저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동열은 어떠한 사명감을 가진 것처럼 잔뜩 힘을 주고 건물 안에 들어갔다. 몇 개월 전부터 무인 모텔로 바뀐 곳이라 카운터는 텅 비어 있었다. 곧바로 선우가 알려 준 호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도 없어서 4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했다. 벽에 ‘F층’이라고 적힌 글자를 보고 반 계단을 더 올라가자 긴 복도가 펼쳐졌다. 그중 가장 끝 방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최선우 씨, 저 한동열입니다.”

쿵쿵, 몇 번이고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묵묵부답이었다. 호수를 잘못 봤나 싶어 다시 뒤로 물러나 숫자를 봤으나 선우에게 들었던 호수와 정확히 일치했다.

“최선우 씨!”

아무리 불러 봐도 마찬가지로 고요했다.

벌써 무슨 일이 벌어졌나?

한동열은 침을 꿀꺽 삼키고 문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아무리 집중해도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동열은 더 기다리지 못하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돌아갔다. 잠기지 않은 문이 스르르 열렸다.

“최선우 씨?”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누군가가 있거나, 있었다는 뜻이었다.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들어가 봤지만,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인기척마저도 전혀 없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몰랐다. 의아한 표정으로 텅 빈 객실을 휙 둘러보는데 진동이 징 울렸다.

선우에게 온 연락인가 싶어 들여다보니 이번에는 전화가 아니라 메시지였다. 동열의 표정이 싸해졌다. ‘발신 번호 표시 제한’으로 온 메시지였다. 동열은 긴장한 탓에 마른침을 삼키며 메시지를 열어 봤다. 아무 언질 없이 무슨 파일 하나만 덩그러니 와 있었다. 녹음 파일이었다. 누를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파일을 재생했다.

- 아, 그래! 말이 이렇게 빨리 통할 줄 몰랐다, 어! 아, 그냥 한번 대 주라고.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열은 눈을 크게 떴다. 탁성모의 목소리였다.

- 야, 너 온갖 비싼 척은 다 하면서 아랫구멍은 절대 안 쓰는 것처럼 굴더니, 그날 보니까 ***랑 존나 하더라?

- 언제요……?

- 아, 한동열이 네가 살던 집에 도청기 설치했었거든. 그걸로 다 들었어, 인마. 아주, *** 그 새끼가 박아 주니까 좋아 죽더만. 나랑 한동열이랑 네 신음 들으면서 같이 딸 쳤다, 야.

녹음 속 성모는 늘 그랬던 것처럼 추잡했다. 별다르지도 않은 태도였으나 동열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탁성모 목소리 사이에 끼어 있던 최선우의 목소리와 성모 입에서 나온 제 이름 때문이었다. 죽은 사람을 두고 험한 말을 하고 싶진 않았으나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미친 새끼가 있지도 않은 일을 사실인 양 떠들어 대고 있었다. 성모가 선우의 신음을 들으며 아랫도리를 주무른 건 맞았지만 저는 그런 적이 없었다. 게다가 녹음 속에서 서태화의 이름으로 추측되는 부분은 깔끔하게 잘려져 있었다.

너무도 완벽한 녹음이었다. 한동열이 아닌 서태화에게.

동열이 헛숨을 툭툭 내쉬고 있는데 한 번 더 진동이 짧게 울렸다. 발신 번호 표시 제한으로 또다시 메시지가 왔다. 한동열은 입을 반쯤 벌리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강력 팀 형사, 한 명은 성 상납 종용에 또 다른 한 명은 불법 도청하며 유사 성행위까지…….]

방금 막 게시된 것으로 보이는 인터넷 기사였다. 한동열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손에 힘이 풀려 휴대 전화를 놓쳤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좆 된 순간이었다. 그때 뒤에서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 *

아침부터 태화는 정신이 없었다. 평소에는 저보다도 늦게 일어나더니 오늘의 선우는 새벽 4시부터 깨서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 마장동 가는 날이 아니기에 두 시간 정도 더 자다 일어난 태화는 자연스레 선우를 품에 안으려고 하다가 곁에 없는 걸 깨닫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밖에서 큰 소리가 났다. 또 뭔 저지레를 하고 있는지 몰랐다. 얼른 밖으로 나가 봤더니 선우는 제 몸보다도 더 큰 트리를 옮기는 중이었다.

“이 시간에 뭐 해?”

낑낑대며 현관을 나서던 선우가 뒤를 돌아봤다. 태화가 까치집 지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하품하자 선우가 푸스스 웃었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메리 크리스마스.”

였다. 태화는 제 앞에서 생글생글 웃는 선우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참 웃기지도 않은 놈이었다. 1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리스마스이브부터 들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건 여전했다.

“크리스마스는 내일이잖아.”

“그래도요. 오늘부터 기분 내면 좋잖아요.”

선우는 그렇게 말하며 커다란 트리를 다시 움켜쥐고 현관을 나섰다. 보다 못한 태화가 나서서 트리를 1층으로 옮겼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캐럴이 은은하게 들렸다.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가게로 들어간 태화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게 안은 이미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선우가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는 크리스마스이브라고 아침부터 캐럴을 틀어 줬다. 구석마다 초록색 이파리 같은 장식이 매달려 있었고, 그 중간중간 반짝이는 볼과 별이 꽂혀 있었다.

가게 바깥에서 잘 보일 수 있도록 유리에는 ‘Merry X-mas’ 스티커도 붙은 상태였다. 할인 품목을 적어 놓은 화이트보드에서는 선우가 그린 걸로 추측되는 눈사람 그림이 눈에 띄었다.

태화는 선우가 지정한 자리에 크리스마스트리를 놓고 가게를 한 바퀴 휙 둘러봤다. 이걸 준비하려고 새벽 4시부터 이리저리 뛰어다닌 모양이었다. 애도 아니고 이게 다 뭔가, 생각하다가도 좋다고 싱글거리는 선우를 보자니 애가 맞긴 맞다 싶었다. 태화는 준비해 온 별을 트리 끝에 달기 위해 까치발을 들고 선 선우를 뒤에서 가만히 바라봤다.

“누가 가게 이렇게 어지럽히래.”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별을 똑 달던 선우가 뒤를 슬며시 돌아봤다. 이런 반응일 줄 몰랐다는 눈빛이었다. 태화는 고개를 삐뚜름히 기울인 채 눈썹을 들썩였다. 무감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선우가 쪼르르 다가왔다.

“별로예요?”

“어.”

“그럼 다시 뗄까요……?”

선우는 한껏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일주일 전부터 인터넷으로 좋아 보이는 장식을 사고, 오늘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했는데 태화의 반응이 싸늘하니 속상했다. 딴에는 열심히 한다고 한 게 태화 마음에는 안 드는가 보았다. 처음으로 같이 맞는 크리스마스라 한껏 들떠 있던 마음이 꿍 내려갔다. 선우는 맞잡은 손끝을 꾸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다시 뗄게요…….”

“안 떼도 돼.”

선우는 곧바로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태화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몰랐다. 떼라는 건지, 진짜 안 떼도 되는 건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라 멀뚱멀뚱 쳐다보는데 태화가 본인의 뺨을 톡톡 쳤다.

“대신 뽀뽀나 좀 해 주든지.”

그렇게 말하며 오른쪽 뺨을 내밀었다. 선우는 허리까지 굽혀 다가오는 태화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이내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 활짝 웃었다. 까치발을 들어 태화의 목덜미를 와락 껴안았다.

“좀 말고, 많이 해 줄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뺨으로 입술을 뭉개듯이 맞댔다. 한번 시작된 쪽쪽 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개라도 된 것처럼 온 얼굴에 뽀뽀를 갈기는 선우 때문에 태화는 눈을 세게 감았다가 돌연 선우를 번쩍 안아 올렸다. 순식간에 태화를 위에서 내려다보게 된 선우는 마지막인 양 잘생긴 이마로 짙은 입맞춤을 찍었다. 그때 라디오에서 6시를 알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각마다 하는 뉴스가 시작되었다. 앵커가 뉴스를 전하는 중에도 둘은 서로만 바라봤다.

- 성매매 업소에 성 상납을 요구한 사실이 밝혀진 서울 모 경찰서 A 경찰관이 극단적 선택을 해 경찰이 수사에 들어갔습니다.

익숙한 내용의 뉴스가 이어졌다. 두 사람 모두 저 뉴스 속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았다. 태화가 라디오 쪽으로 걸어갔다.

- A 씨는 지난 새벽 서울 우림동의 한 모텔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A 씨는 지난주 이미 근신 처분을 받은 상태였는데요. 어제 아침 본인의 비리 사실이 밝혀지면서 큰 압박을 받…….

선우가 채널을 바꾸자 다시 캐럴이 흘렀다. 하나뿐인 크리스마스 소원이 ‘당신이 나만의 사람이길 바란다’라는 내용의 사랑스러운 가사를 가진 노래였다.

* * *

한 번 더 해가 넘어갔다. 태화는 서른넷이었고, 선우는 스물둘이 됐다. 선우는 아침부터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작년에는 써늘한 골방에 들어앉아 혼자 신정을 보냈는데 불과 1년 만에 따뜻한 집에서 태화와 함께 새해를 맞았다. 새해 카운트다운을 못 한 게 좀 아쉽기는 했다. 원래는 함께 시상식을 보며 카운트다운을 하려고 했는데 맥주가 문제였다. 태화는 선우가 술 마시는 걸 단속하는 편이었으나 12월의 마지막 날이라는 이유로 풀어 줬다가 과음을 해 버렸다.

선우의 주사는 3단계였다. 1단계는 웃음이 많아졌고, 2단계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3단계가 태화의 말로 골 때리는 주사였다. 술이 거나하게 오르면 선우는 스킨십이 많아졌다. 태화 입장에서는 아주 좋은 주사였으나 혹시나 딴 놈 앞에서도 이럴까 봐 걱정되는 건 별수 없었다. 그래서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도록 길을 들이는 중이었는데 어젯밤에는 깜빡 3단계까지 취하고 말았다.

그 바람에 카운트다운은커녕 두 사람은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침대에서 뒹구느라 정신이 없었다. 새해부터 거하게 배를 맞추고 늦잠을 자 버린 것이었다. 선우는 해가 중천이 돼서야 일어났는데 밖에서는 벌써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겼다. 끝장나게 좋았던 밤일과 더불어 외롭지 않은 새해 아침 덕분에 기분이 한껏 좋아져서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주제에 입꼬리만 배슬배슬 끌어 올리며 밖으로 나갔다.

“아저씨…….”

주방에 서 있는 태화를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계란 지단을 썰던 태화는 한숨을 쉬더니 뒤를 돌아봤다. 선우는 아직도 눈을 감고 있었다. 떠야 하는데 잘 안 떠졌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지난밤 태화에게 안기며 너무 느껴서 이상하다고, 엉엉 운 탓이었다. 눈두덩이가 통통하게 부어 아직도 발그스름했다.

태화는 칼을 내려놓고 선우의 뺨을 뭉개듯 쥐었다. 태화가 눈곱을 살살 떼 주고서야 선우는 겨우 눈을 떴다. 눈이 부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쌍꺼풀이 더 짙게 졌다. 자못 개구리 왕눈이 같은 눈을 끔뻑이며 태화를 올려다봤다. 태화가 습관처럼 입술부터 들이밀길래 두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왜.”

입술을 막아서 그런지 뭉그러진 발음이었다. 선우는 대신 태화의 입을 막은 제 손등 위로 쪽 입을 맞추고 물러났다.

“양치질하고 올게요.”

그렇게 말하고 태화가 잡을 새도 없이 뽀르르 욕실로 들어갔다. 양치질한다던 선우는 샤워까지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맛있는 냄새가 한층 더 짙어졌다. 팬티 차림에 대충 태화의 상의만 주워 입고 주방으로 가자 그가 자리에 앉으라는 듯이 눈짓했다. 뭐 도울 게 없나 기웃거리다가 결국 떠밀리다시피 해서 식탁 앞에 앉았다. 곧이어 식탁 위로 갖가지 음식들이 놓였다. 각종 전부터 시작해서 잡채도 있었고, 후식으로 먹기 좋은 송편도 자리했다.

“꿀송편으로 사 왔어.”

선우의 표정이 더 환해졌다. 안 그래도 콩송편이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는데 꿀송편이라니 얼른 먹어 보고 싶었다. 그래도 이 많은 음식 중 단연 선우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떡국이었다. 다른 건 전부 선우가 자는 동안 태화가 시장에서 사 왔지만, 떡국만큼은 그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계란 지단까지 예쁘게 올라간 떡국을 본 선우는 얼른 숟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먹지는 않았다. 태화가 먼저 먹기만을 기다렸다.

이런 데에 있어서는 예의가 참 바른 터라 태화는 픽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태화가 떡국 국물을 한 술 떠먹자마자 선우도 먹기 시작했다. 떡과 계란 지단을 올리고 국물까지 적셔 야무지게 한 입 먹은 선우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너무 맛있었다. 떡이야 옆집에서 사 왔을 테니 중간 이상 가는 게 당연했는데 다른 것보다도 국물이 진국이었다. 고기 맛이 은은하게 밴 게 딱 선우의 취향이었다. 게다가 간도 맞아서 한 입으로 시작한 게 어느새 술술 들어갔다.

“맛있어?”

태화가 묻는 말에 선우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태화도 빙긋이 웃었다. 제 떡국에 있는 소고기 고명을 모아 선우에게 놔 줬다. 선우는 제 앞에 수북이 쌓인 고기를 내려다보고는 눈치를 보다가 태화에게 절반을 되돌려 줬다.

“너나 많이 드세요.”

그럼 태화는 저 말을 하며 고기를 더 퍼 줬다. 선우도 더는 빼지 않고 고기 반 떡 반인 떡국을 맛있게도 먹었다.

일어나자마자 떡국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둘은 마주 앉아 꿀송편을 나눠 먹었다. 옆집 양 사장네 떡은 시장에서 파는 떡 중 가장 맛있었다. 너무 싼 맛이 나지도 않았고, 안에 고명도 듬뿍 들어 있어 달콤했다. 하나씩 입에 쏙쏙 넣어 가며 먹고 있는데 태화가 갑자기 서재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손에 작은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태화는 쇼핑백을 선우 앞에 놓고 다시 맞은편에 앉았다.

“이게 뭐예요?”

“한 살 더 먹은 기념 선물.”

선물이라는 말에 선우의 눈이 반짝였다. 선우는 잔뜩 기대하는 마음으로 쇼핑백을 들여다봤다. 반짝이던 눈이 이번에는 커다래졌다. 안에는 휴대 전화 상자가 들어 있었다. 그것도 최신형인 데다가 태화가 쓰는 것과 같은 모델이었다. 전자 기기 쪽으로 큰 관심이 없어 다른 종류는 잘 모르지만 태화가 뭘 쓰는지는 정확하게 알았다. 선우는 서둘러 상자를 꺼내려다가 태화를 쳐다봤다. 열어 봐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는 모양새에 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는 곧바로 상자를 꺼내 열었다. 태화는 검은색이었는데 선우의 것은 하얀색이었다.

“전화해 봐도 돼요?”

“네 건데 왜 나한테 물어?”

선우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태화는 선물을 사 주고도 생색내지 않았다. 원래 당연히 네 것이라는 듯이 굴었다. 그게 무진 좋아서 작게 웃다가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태화의 전화번호였다. 자다가도 누가 물어보면 바로 대답할 수 있을 만큼 머리에 새기고 또 새겨 놓은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거는데 화면에 단어 하나가 떴다.

“동거인?”

화면에는 ‘동거인’이라는 단어가 떠 있었다. 아무래도 태화가 미리 본인의 전화번호를 저장해 둔 모양이었다. ‘서태화’라는 이름도, 하다못해 ‘아저씨’도 아니고 ‘동거인’이라니. 참 태화답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부터 식탁 위에 놓여 있던 태화의 휴대 전화가 징징 울어 댔다. 태화는 모르는 척 능청스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그런지 선우의 휴대 전화 속에서 태화의 목소리가 왕왕 울렸다. 선우는 그만 푸스스 웃음소리를 냈다.

“여보세요?”

태화가 한 번 더 시침을 떼며 말하자 선우도 휴대 전화를 귀에 가져다 댔다.

“아저씨.”

“어.”

“고맙습니다.”

선우는 휴대 전화를 귀에 댄 채 꾸뻑 고개 숙였다. 다시 마주 본 두 사람은 잠깐 멀뚱거리더니 이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빤히 앞에 있는데 뭐 하는 짓인지 몰랐다. 바보들의 행진이 따로 없었다.

“아저씨는 저 뭐라고 저장했어요?”

“똑같이 동거인.”

“그게 뭐예요. 이리 줘 봐요.”

선우는 태화가 주기도 전에 그의 휴대 전화를 가져왔다. 통화 내역을 보니 정말 ‘동거인’이라고 똑같이 저장돼 있었다. 짧은 틈에 선우는 나머지 통화 내역도 슬쩍 훑어봤다. 전부 ‘고 박사’ 아니면 ‘장 선생님’이었다. 다른 사람과 통화한 내역은 없는 걸 보고 슬쩍 웃으며 제 전화번호를 다른 이름으로 저장했다.

태화에게 돌려주고 다시 전화를 걸어 봤다. 태화의 휴대 전화 화면에는 ‘우리 선우’라는 문구가 떴다. 태화는 그 두 어절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하트를 안 붙인 게 어디인가 싶었다.

* * *

선우는 휴대 전화가 생기자마자 매일 태화에게 전화했다. 한집에 살고, 같은 가게에서 일하면서도 하루를 빼놓지 않았다. 괜스레 반찬 사러 나갔다가 뭘 살지 물어보는 핑계로 전화했고, 가끔은 영상 통화도 걸었다. 처음 선우에게서 영상 통화가 왔을 때 태화는 답지 않게 살짝 당황했다. 누군가와 영상 통화 하는 게 평생 처음인 까닭이었다. 화면 가득 뽀얀 얼굴이 들어찬 걸 봤을 때는 그저 웃음만 나왔다.

시장통이라 서로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데도 두 사람은 그저 서로를 보며 좋다고 웃었다. 사소한 일로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는 탓에 태화는 아주 잠깐 선우에게 휴대 전화를 괜히 사 줬나 생각했지만 ‘아저씨!’하고 맹랑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면 그런 생각은 눈 녹듯 사라졌다.

“어, 선우 왔어?”

단골 반찬 가게 사장님이 웃으며 선우를 반겼다. 선우는 꾸뻑 인사하고 반찬들을 살폈다. 이미 가게에서 나오기 전에 태화와 오늘은 무슨 반찬을 살지 정했으나 습관처럼 또 그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에 태화가 나타났다.

- 어, 왜.

태화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늘 이랬다. 한 번쯤은 반가워해 줄 만도 한데 항상 시큰둥하게 받았다. 선우는 화면 속 태화를 빤히 들여다봤다. 조금 전에 보고 나온 얼굴인데 작은 화면을 통해 보니 색달랐다. 초록 바탕에 하얀색과 검은색으로 체크 패턴이 들어간 셔츠 위에 검은색 앞치마를 맨 모습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일할 때면 패션 감각이 영 꽝인 것 같은데 워낙 잘난 얼굴이라 그저 멋져 보였다.

- 감상하려고 전화한 거면 그만 끊고.

퉁명스러운 말투에 선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살갑게 굴면 좀 좋아?

괜히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미소는 감추지 못했다.

“오늘 메추리알장조림 할인한대요. 장조림 사 갈까요?”

- 너 먹고 싶으면 사 와.

“아저씨는요?”

- 난 너 먹고 싶은 거면 다 괜찮아.

태화는 이런 말을 할 때조차도 아무렇지 않았다. 표정 변화 없이 툭 내뱉는 말에 반응하는 건 선우였다. 낯간지러운 말로 사람 속을 간질여 놓고 정작 태화는 멀건 얼굴이었다. 선우는 어쩐지 손끝이 간지러워져서 바짓단에 손을 슥슥 문질렀다.

“그럼 장조림이랑 코다리강…….”

- 어서 오세요.

손님이 들어왔는지 태화는 손에서 휴대 전화를 놓고 벌떡 일어났다. 휴대 전화 화면으로 하얀 천장만 보였다. 선우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태화 쪽에서도 끊기지 않았다. 손님이 왔으면 끊어도 될 텐데 통화는 계속됐다. 이것저것 고기를 주문하는 손님과 태화의 대화가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듣기 좋은 음악이라도 틀어 놓은 것처럼 선우는 휴대 전화 소리에 집중했다. 몇 분이 지나고 화면이 어지럽게 움직이더니 다시 태화가 잡혔다.

- 아무거나 사서 빨리 와.

그다지 다정한 어투는 아니었지만, 선우는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게 다 티 났다. 선우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전화를 끊었다. 반찬을 이것저것 고르는 손이 분주했다. 태화 말대로 아무거나 고르지는 않았다. 할인 품목인 메추리알장조림과 제가 좋아하는 코다리강정, 태화가 좋아하는 낙지젓갈을 골라 계산했다.

“선우 예뻐 가지고 이거 하나 더 넣어 줄게.”

반찬 가게 사장은 인심 좋은 얼굴로 반찬이 담긴 봉투에 진미채볶음을 하나 더 담아 줬다. 선우는 눈을 반짝이며 얼른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이게 웬 횡재인지 몰랐다. 사실 진미채볶음을 살까 말까 고민했는데, 고민했던 걸 서비스로 받으니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많이 파세요……!”

낯가림이 심해 평소에는 고개만 깊게 숙여 인사했는데 오늘만큼은 덕담도 한마디 얹고 나왔다. 선우는 싱글벙글 미소가 가득한 낯으로 콧노래까지 불렀다. 시장에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시장 사람들은 대부분 선우에게 호의적이었다. 선우는 태화를 제외하고 다른 이에게 살갑게 굴지는 않았지만, 인사성 하나는 발랐다. 시장 아주머니들 말을 빌려, 훤칠하게 잘생긴 애가 꾸뻑꾸뻑 잘도 인사하니 다들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한 시장에서 일하는 걸 아는지라 상인들은 선우를 보면 먼저 인사했고, 선우도 연신 고개를 숙이며 다녔다.

아직도 캐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선우는 아는 캐럴을 연신 흥얼거리며 걷다가 갑자기 몸을 홱 돌렸다. 살 것도 없으면서 옷 가게 앞에 서서 주춤거렸다. 곁눈질해 옆을 슬쩍 쳐다봤다. 중년의 남자 한 명이 걸어오고 있었는데, 아는 얼굴이었다. 꽃다방에 있을 시절 종종 선우를 찾아오던 남자였다.

“그냥 지나가라. 그냥 지나가라.”

선우는 주문을 외듯 혼자 중얼거렸다. 옷 가게 주인이 나와서 뭐 찾는 게 있냐고 묻는 것도 듣지 못하고 눈을 꼬옥 감은 채 중얼중얼 읊조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만에야 눈을 뜬 선우는 남자가 걸어온 길 반대편을 힐끔 봤다. 다행히 남자는 선우를 알아보지 못하고 등을 보이며 멀어지고 있었다. 선우는 짙은 숨을 내쉬며 제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싫어…….”

속에 든 말이 토하듯 쏟아졌다. 선우는 부영 시장이 참 좋았다. 태화가 터를 잡은 곳이었고, 다들 선우를 반겼다. 부영 시장이 너무 좋았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지긋지긋하기도 했다. 서울은 좁았고, 부영 시장은 우림동과 너무 가까웠다. 게다가 우림동은 유명하기까지 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꽃다방 손님으로 오던 남자들을 마주쳤다. 물론 그네들은 선우를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 정도로 생각해서 기억하지 못했으나 선우는 똑똑히 기억했다.

그게 문제였다. 걸레짝이던 최선우가 기억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저녁은 선우가 사 온 반찬에 태화가 만든 계란말이를 곁들여 먹었다. 시장표 반찬도, 태화가 만든 계란말이도 모두 맛있었으나 어쩐지 선우는 수저질이 느렸다. 대충 봐도 입맛 없는 게 티 났다. 숟가락으로 푹푹 퍼먹던 밥을 젓가락으로 깨작거리는 중이었다.

“또 뭐. 뭔 일인데.”

태화는 보다 못해 물었다.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지만, 애가 잘 못 먹는 걸 보니 도저히 안 되겠어서 운을 뗀 것이었다. 선우는 멍하던 눈에 빛을 들이며 퍼뜩 고개를 들었다.

“네?”

“뭔 일이냐고.”

선우는 입을 우물거렸다. 말할까 말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으나 마찬가지로 영 힘이 없었다. 앞에서 태화의 시선이 느껴졌다. 슬쩍 눈동자를 올려 보니 태화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태화는 더 다그치지 않았으나 선우는 괜스레 마음이 콕콕 찔렸다.

“……아저씨는 서울에서 몇 년이나 살았어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이제 7년 됐네. 근데 그건 왜?”

“그냥.”

질문을 던져 놓고 또 입을 다물었다. 하고픈 말이 있어 입술은 달싹이는데 정작 말이 나가지 않았다. 목 끝까지 차올랐던 말이 이젠 입 안을 맴맴 돌았다. 태화가 발을 툭 찼다. 그 덕에 선우는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다른 데 가서 살고 싶어?”

선우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괜스레 전자레인지만 쳐다보며 젓가락으로 밥을 쿡쿡 찔렀다. 어떻게 사람 마음을 이리도 잘 꿰뚫는지 모를 일이었다. 태화는 선우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아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손에 쥐고 있는 게 찰떡인 걸 알아챘다.

“나는 돌대가리라 말을 안 하면 몰라.”

“아저씨 돌대가리 아니에요.”

작게 꾸물대던 선우는 태화가 스스로 돌대가리라고 칭하자 그제야 크게 반응했다. 돌대가리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선우가 아는 한 태화는 누구보다 똑똑하고 야무진 사람이었다. 태화가 말했기에 망정이지 남이 그를 두고 돌대가리라고 했으면 모른 척 발을 밟아 버렸을 터였다.

“그러니까 말하라고.”

“……서울 말고 다른 데에서 살고 싶어요.”

결국 마음에 담아 뒀던 말이 나왔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느닷없는 말이라는 걸 알아서 선우는 태화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여기서 터 잘 잡아서 잘만 먹고사는 사람에게 대뜸 다른 곳에서 살고 싶다고 하다니, 뻔뻔하기 그지없는 요구였다. 선우는 괜히 말했나 싶어서 땅굴을 파고들어 가는데 태화가 손을 잡아끌더니 가볍게 깍지를 꼈다.

고개 좀 들어 보라는 듯 엄지로 손바닥을 간질였다. 퍽 곰살맞은 손길이었다. 선우는 알게 모르게 용기를 얻어 태화를 똑바로 바라봤다.

“어디로.”

“아무 데나.”

“아무 데나, 어디?”

“남쪽?”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딱히 어디가 좋을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막연히 서울만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고, 이왕이면 따뜻한 곳이 더 좋겠다 싶었다. 그냥 되는대로 말한 건데 태화는 꽤 골몰하다가 아, 소리를 냈다.

“너 추위 많이 타지.”

“네.”

“그래. 가자.”

“네?”

“가자고, 남쪽.”

“정말요?”

선우는 태화의 손을 바짝 붙잡았다. 이렇게 쉽게 가자고 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좀 더 생각해 보자거나, 그보다도 먼저 서울이 싫은 이유를 물을 줄 알았는데 태화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7년이나 살았다면서 서울에 미련 따위는 조금도 없는 사람 같았다.

“대신 바로는 못 가고. 나도 다른 데는 연고가 없으니까 집도 알아보고, 뭐 하고, 뭐 하고 하면 봄은 돼야 하겠네.”

태화는 떠나자고 제안한 선우보다도 더 구체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선우는 눈만큼이나 입도 크게 벌렸다. 놀란 얼굴을 하다 이내 활짝 웃었다. 이유를 묻지 않아 주는 태화가 좋았다. 자신을 위해 앞뒤 재지 않고 바로 떠나겠다고 말하는 태화가 무진 고마웠다.

“그럼 겨울 지나면 우리도 남쪽으로 가요. 가장 먼저 봄꽃이 피는 곳으로 가요.”

선우는 이미 남쪽에 도착한 사람처럼 뺨을 새붉혔다. 한껏 들뜬 얼굴로 눈을 살짝 접어 웃음 지었다.

“그래.”

태화도 마주 싱긋 웃어 줬다. 태화와 남쪽 어딘가에 가서 살날이 벌써부터 기대됐다.

봄이 오면 봄꽃을 보러 가야지.

선우는 속으로 다짐했다. 다짐할 일이 아닌데도 몇 번이고 꼭꼭 다짐하게 됐다. 금세 기분이 좋아져 입맛이 돌았다. 태화와 오른손을 맞잡고 있던 선우는 몇 번 망설이다가 왼손으로 숟가락을 쥐었다. 그 모습에 태화는 그만 참지 못하고 푸스스 웃었다.

“얼른 먹어.”

태화가 오른손을 놔주고 대신 왼손을 깍지 껴 잡았다. 덕분에 선우는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있게 되었으나 태화는 오른손이 잡혀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선우가 괜찮다는 듯이 손을 빼려고 하자 더욱 꼬옥 붙들었다. 태화는 남는 손으로 턱을 괴고 선우를 빤히 쳐다봤다.

어서 먹으라며 눈썹을 까딱이자 선우는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오물오물 잘도 먹는 모습을 감상하며 태화는 머릿속으로 지도를 펼쳤다. 남쪽이라면 어디가 좋을까 생각했다. 제주도를 가장 먼저 생각했다가 너무 남쪽인가 싶어 부산을 떠올렸다.

그러다, 눈을 좋아하는 놈인데 부산에서 눈 구경을 마음껏 못 하면 시무룩해할 게 눈에 선해 조금 더 위쪽을 생각했다. 대구는 너무 더울 것 같았고, 울산이나 포항도 좋겠다 싶었다. 먹는 걸 좋아하니 전라도 쪽도 괜찮지 않을까. 여수나 목포, 아예 전주 쪽도 괜찮겠다. 꽃, 하면 그래도 진해 군항제가 가장 유명하긴 할 텐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 틈에서 잠깐 빠져나온 태화는 계란말이를 케첩에 푹 찍어 먹는 선우를 보며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어쩌다 사람이 이다지도 물러졌는지 몰랐다. 최선우 말 한마디면 껌뻑 엎드려 다 들어주게 됐다. 서울에서 살기 싫다는 한마디에 곧바로 부동산에 찾아갈 생각부터 하니 이건 뭐 팔푼이가 따로 없었다.

“너, 나 책임져라.”

음식물이 들어 불룩 올라온 선우의 뺨을 톡 건드리며 말했다. 선우는 갑자기 무슨 말이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맹한 눈빛에 태화는 좀 더 짙게 웃다가 선우의 손을 끌어와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인간으로 태어나 짐승으로 살아왔는데, 사람답게 사는 게 뭔지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사람답게 산다는 건, 미래가 있는 삶이었다. 함께하고 싶은 놈이 있는 미래였다. 반면 짐승의 삶은, 방심하면 천적의 아가리가 꽁무니로 따라붙는 것이었다.

* * *

새해라고 이것저것 챙겨 먹다 보니 태화나 선우나 둘 다 몸무게가 늘었다. 신기한 건 태화는 근육만 차올랐고, 선우는 볼살로 살이 전부 들어찼다. 하루가 다르게 낯이 뽀얗게 좋아지는 선우를 보며 태화는 키울 맛이 난다는 듯 뺨을 콕콕 찌르는 게 습관이 되었다. 잘 먹는 만큼 잠도 잘 잤다. 선우는 자면서 이리저리 마구 뒤척이는 타입이었는데 태화가 품에 가두고 못 움직이게 옭아매면 잠든 자세 그대로 아침에 눈을 떴다.

지금도 선우는 태화의 품에 안겨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서로 비슷한 숨소리를 내며 두 사람이 숙면을 취하고 있는데 돌연 휴대 전화 진동이 울렸다. 선우가 먼저 몸을 움찔거렸고, 그 덕에 태화까지 깼다. 습관처럼 선우의 엉덩이를 토닥거린 태화는 눈을 감은 채 협탁을 더듬었다. 휴대 전화를 쥐자마자 눈을 슬쩍 떠 확인했다. 고 박사에게서 온 전화였다.

“뭐야…….”

이 새벽에 무슨 일인가 싶어 미간을 구기던 태화는 불현듯 눈을 크게 떴다. 잠이 전부 달아난 낯이었다. 명료해진 눈빛으로 휴대 전화를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어.”

잠결에 제 품을 파고드는 선우를 바투 끌어안았다. 고 박사는 전화를 걸어 놓고 한참 아무 말이 없었다. 태화도 구태여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시간이 꽤 지난 후에야 고 박사는 입을 열었다. 짧고 명료한 한 마디였다.

“다시 말해 봐.”

태화는 눈을 번뜩이며 휴대 전화를 고쳐 쥐었다. 예상했던 말이 나왔음에도 다시 확인해야만 했다. 한 번 더 같은 말이 나왔고, 태화의 입에서도 한숨이 짙게 딸려 나왔다.

“알았어.”

통화는 짧게 끊겼다. 태화는 휴대 전화를 협탁 위로 아무렇게나 던지려다가 혹여 시끄러운 소리에 선우가 깰까 봐 꾹 참고 조심스레 올려 뒀다. 선잠을 자느라 자꾸만 꾸물거리는 몸을 꽈악 가둬 안았다. 동그란 정수리로 코를 묻었다.

보슬보슬한 머리카락 사이로 은은한 머스크 향이 올라왔다. 잠들기 직전에 함께 씻어서 태화의 몸에서도 선우의 것과 같은 향이 났다. 이런 향을 맡을 때면 항상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는데 지금은 왜인지 좀처럼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잠이 달아난 지는 오래였다. 태화는 선우의 머리통에 가볍게 입을 맞추면서도 눈을 가늘게 떴다.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동자로 안광이 스몄다.

‘회장님, 돌아가셨다.’

고 박사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선우는 습관처럼 옆을 더듬었다. 태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늘 태화가 먼저 일어났기 때문에 선우는 아무도 없는 옆자리를 몇 번 더 더듬다가 눈을 떴다. 어쩐지 오늘은 평소보다 잠을 더 잘 잔 느낌이었다. 실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좀 힘들었는데 지금은 눈이 가뿐히 떠졌다. 뭉그적거리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었고, 지난밤 태화에게 시달리느라 뻐근했던 몸도 가볍게 느껴졌다. 뭐랄까, 오랜만에 늦잠을 잔 기분이었다.

“아저씨…….”

꽉 잠긴 목소리로 불러 봤으나 대답이 없었다. 보통 눈을 뜨면 주방에서 또닥또닥하는 소리가 들리거나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 들어왔는데 지금은 소리도 나지 않고, 냄새도 없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작게 기지개를 켜던 선우는 불현듯 눈을 크게 떴다. 벽에 걸린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벌써 오전 11시를 넘기고 있었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벼 봤으나 여전히 11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가게 문은 10시에 여니 지각을 한 셈이었다.

“왜 안 깨웠지?”

중얼거리며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왔다.

너무 피곤해 보여서 그냥 놔둔 건가?

생각해 봤지만 오늘보다 더 피곤했던 날도 많았다. 탁성모와 한강에서 일이 있었을 때도 태화는 다음 날 아침에 밥 먹고 더 자라며 깨웠더랬다. 그만큼 끼니를 중시하는 사람인데, 말도 없이 안 깨우는 건 좀 이상했다.

얼른 속옷만 입고 밖으로 나간 선우는 놀란 눈을 뜨고 거실 쪽을 쳐다봤다. 태화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콜라를 마시며 TV를 보는 중이었다. 쉬는 날도 아닌데 가게에 안 나가고 집에 있는 태화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아저씨?”

의아한 목소리로 부르자 태화가 이쪽을 쳐다봤다.

“일어났어?”

“네. 근데 오늘 가게 문 안 열어요?”

“어.”

선우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가게 문을 열지 않는다니,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가만 보니 얼굴빛도 안 좋아 보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데 태화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 차려 줄게. 씻고 나와.”

그렇게 말하더니 곧장 주방으로 갔다. 선우를 지나칠 때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우는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서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다가 태화의 말을 듣고 우선 씻고 나왔다. 머리까지 말리고 오자 식탁 위에는 이미 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선우는 태화와 마주 보고 앉자마자 물었다.

“무슨 일?”

“아침부터 얼굴빛이 너무 안 좋아서…….”

“지금이 아침은 아니지.”

태화는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픽 웃었다. 웃기는 웃는데 진짜 웃는 건 아니었다. 선우는 그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평소 같으면 배고픔에 숟가락부터 들었을 텐데, 지금은 음식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태화가 걱정되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아주 안 좋은 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빤한 눈으로 쳐다보기만 하자 태화도 들었던 젓가락을 다시 내려놨다. 이걸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얼굴을 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선우는 무슨 말인지 곧장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끔뻑였다. 너무 여상하게 나온 말이라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누가 뭐 어쨌다고?

다시 태화의 말을 곱씹어 보더니 기다렸다는 듯 숨을 크게 집어삼켰다.

“네?”

“내 아버지가 죽었다고.”

“아버지가 계셨어요?”

선우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놀람의 포인트가 영 이상한 곳에 꽂혀 있었다. 아버지가 ‘죽었다’라는 것보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질문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발상에 태화는 작게 웃었다. 이번에는 진짜 웃음이었다. 여하간 또라이 최선우 덕분에 웃을 일이 생겼다.

“그럼 나는 뭐 학이 물어다 준 줄 알았어?”

태화가 키득거리며 묻자 선우는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태화 입장에서는 실수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무례했던 건 사실이었다. 선우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평소에 부모님 얘기는 한 번도 안 해 줬으니까.”

“궁금해?”

선우는 도리질 치던 고개를 이번에는 위아래로 크게 흔들었다. 정말 태화의 가정사가 궁금했다. 사실 가정사뿐만 아니라 태화의 모든 걸 알고 싶었다. 지금이야 같이 사니까 어떤 사람인지 알지만, 과거에는 어떤 성격이었고, 어떤 취미를 가졌으며, 어떤 아이였을지 많이 궁금했다.

선우는 간간이 본인의 옛날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으나 태화는 과거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버지가 있었냐고 묻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선우는 너무 무례했던 게 아닌가 걱정하다 말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쥐여 줬다. 어서 말해 달라는 듯 말똥말똥하게 뜬 눈으로 태화를 바라봤다. 밥 먹는 것도 잊고 가만 쳐다보기만 하자 똑같이 빤하게 응시하던 태화가 픽 웃었다.

“얼른 먹고 준비해. 같이 장례식장 가자. 아들인데, 가서 상주 노릇은 해야지.”

태화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젓가락을 들었다.

“넌 안주인 노릇 하고.”

또 이렇게 지나가나 싶어 입술을 비죽이 내밀려던 선우는 이어진 뒷말을 듣고 도리어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안주인……?

태화가 했던 말을 되뇌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네가 내 안주인 노릇 해야 한다고.”

제대로 들었으면서 괜스레 한 번 더 묻자 태화는 똑같은 말을 그대로 해 줬다. 별스럽지 않다는 투였다. 선우는 입을 반쯤 벌리며 놀란 얼굴을 하더니 곧 고개를 푹 숙였다. 이마가 밥그릇에 닿을 만큼 몸을 웅크리고 입술을 옴칠거렸다.

태화는 낯간지러운 말을 잘도 했다. 수치심이라고는 전혀 없나 싶었다. 되레 선우만 부끄러워져서 귀 끝까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선우가 슬그머니 귓불을 문지르자 앞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샐쭉 들어 보니 태화가 웃고 있었다.

하여튼 남 놀리는 데에는 선수인 사람이었다. 참 얄미운 낯이었지만 선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두둥실 떠올랐다. 태화의 입에서 나온 ‘안주인’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 좋아한다는 말은 어쩌다 한 번씩 잊을 만하면 해 주고, 사랑한다는 말은 아직 듣지도 못했는데 선우는 벌써 태화의 안주인이 돼 있었다.

태화는 선우가 밝은 옷을 입는 걸 좋아했지만 오늘만큼은 선우도 어두운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검정 목 폴라 티셔츠에 검정 슬랙스를 입고 겉에는 코트를 걸쳤다. 확실히 비싼 게 좋기는 좋았다. 태화와 백화점에 가서 산 코트는 부드럽고 따뜻한데 가볍기까지 했다.

하지만 태화는 선우에게 패딩을 하나 더 입혔다. 1월의 추운 날씨 때문이라는 걸 알지만 선우는 코트 위에 패딩까지 입어야 해서 조금 갑갑했다. 더불어 목도리까지 칭칭 감아야 했다. 멋과는 멀어진 모습이었다.

반면 태화 본인은 스리피스 정장에 코트만 걸쳤다. 검은색 정장이었지만 넥타이가 조금 튀었다. 짙은 녹색에 은은한 금색 모란이 그려진 것이었다. 어째 장례식장 가는 차림치고는 너무 화려한 느낌이었다.

“아저씨도 패딩 입어요.”

선우가 말했지만, 태화는 못 들은 척 서둘러 차 키를 챙겨 방을 나섰다. 선우도 그 뒤를 쫄래쫄래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일이 아닌 정말 개인 사정으로 휴점일 안내문을 붙이고 후문으로 나와 차에 올라탔다. 차는 금세 서울을 벗어났다. 근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인천에 있는 절이었다. 규모가 꽤 커서 절의 초입부터 차로 또 몇 분 올라가야 건물이 나왔다.

차가 여러 대 줄지어 주차된 곳에 도착한 둘은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 차에서 내렸다. 분명 절인데 승복을 입은 스님들보다도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더 많았다. 영 낯선 분위기 속에서 태화 옆에 딱 달라붙어 걷던 선우는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사람을 발견했다. 고 박사와 장 선생이었다.

두 사람도 태화와 선우를 봤는지 마주 보고 서 있던 몸을 이쪽으로 돌렸다. 선우가 먼저 고개를 꾸뻑 숙이자 고 박사는 반갑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고, 장 선생은 빙긋이 웃었다. 둘 다 웃고 있었으나 장소가 장소인지라 평소보다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잡혔다면서요.”

태화는 인사도 생략하고 장 선생에게 물었다. 명확한 주어가 빠진 문장이었으나 장 선생은 알아들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는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나머지 세 사람은 아주 잘 아는 눈치였다.

“그래.”

“빨리 잡혔네.”

“자수했대.”

“뭐래요. 진짜 사고 맞대요?”

“뺑소니친 놈 말로는 깜빡 졸음운전 했다고는 하는데…….”

장 선생은 말을 끌었다. 표정이 안 좋았다.

“아니야. 작업 들어온 거 같아.”

태화는 쯧 혀를 찼다. 예상한 일이었지만 막상 실제로 들으니 기분이 잡쳤다. 원식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4차로를 지나는 중에 뜬금없이 옆에서 덤프트럭이 나타나 그대로 밀어 버렸다는 소식이었다. 하필이면 덤프트럭이 들이받은 곳이 서원식이 타고 있던 뒷좌석의 오른쪽이었고, 하필이면 목격자도 없는 새벽 시간이었으며, 하필이면 뺑소니였다. 지난번과 같은 수법이었다.

대충 생각하면 누구나 당할 수 있는 평범한 사고였지만 원식이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라는 게 문제였다. 수면 시간만큼은 철저하게 지키는 양반이 그 새벽에 무슨 연락을 받고, 어디로 향하는 길이었는지도 의문이었다. 동행했던 운전기사에게 물어보면 답이 나오는 일이었지만 운전기사마저 덤프트럭 앞바퀴에 깔려 죽었다고 했다. 늙은 영감 하나 때문에 애먼 목숨만 축난 셈이었다. 굳이 진상을 밝히지 않아도 누군가 작업 친 게 분명했다.

그 누군가는 예상대로 그 새끼일 테고.

태화는 쩝 입맛을 다셨다.

“그 새끼 형량 최대한 적게 받게 해 줘요. 집행 유예로 떨어지면 가장 좋고.”

장 선생은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왜? 무겁게 때려야 하는 거 아니야?”

“빨리 나와야 빨리 죽이지.”

태화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먼저 걸음을 뗐다. 그 뒤로 세 사람이 우르르 따라붙었다. 몇 걸음 걸어가던 태화는 옆에서 쫑쫑 따라오는 선우를 힐긋 내려다봤다.

“이제 패딩 벗어.”

선우는 태화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섬주섬 패딩을 벗었다. 기다렸다는 듯 고 박사가 패딩을 받아 들었다. 어쩐지 고 박사가 아랫사람이 된 것 같아서 선우는 자신이 들겠다고 했으나 태화가 막았다.

“목도리도 풀어요?”

선우는 태화가 멋없게 둘둘 말아 준 목도리 끝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태화는 그 모습을 잠깐 내려다봤다. 차에서 내린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선우의 코끝이 붉게 질려 있었다. 마찬가지로 추위에 얼어붙은 것처럼 뺨도 귀도 붉었다. 잘 익은 사과가 따로 없었다.

“지금은 하고 있고, 안에 들어가면 목도리 바로 풀어서 고 박사한테 줘.”

그렇게 말하며 목도리를 더욱 꼼꼼하게 여며 줬다. 워낙 큰 사찰이라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는 법당까지도 꽤 거리가 있었다. 가는 길마다 시커먼 외제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중간중간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여기저기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때문에 선우는 작게 기침했다. 절에서 흡연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태화가 지나갈 때면 주변 시선들이 전부 이쪽으로 꽂혔다. 저들끼리 시시덕거리던 남자들도 태화를 보자마자 놀란 얼굴을 했다. 선우는 저들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낯설어 태화에게 더욱 바짝 붙었다. 손을 잡아도 되는지 몰라서 손등을 톡톡 두드리자 태화는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잡아 줬다. 그 덕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온통 우중충한 색의 차들 사이에 눈에 띄는 차 한 대가 보였다. 새가 앉으려다 미끄러질 만큼 반짝반짝 광이 나는 파란색 스포츠카였다. 선우는 고개를 작게 기울였다. 왠지 낯이 익었다. 분명 어딘가에서 본 적 있는 차였다.

어디서 봤더라…….

기억을 더듬느라 가늘어졌던 눈이 일순 크게 뜨였다. 태화를 따라 인천에 있는 병원에 갔을 때, 지하 주차장에서 봤던 차였다. 태화가 형이라고 부르던 사람의 차라는 것까지 기억해 냈다. 고개가 좀 더 갸우뚱 넘어갔다.

친형은 아니라고 했었는데. 뭐지?

친형도 아닌 사람의 차가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했다.

장례식이 한창인 법당 안은 문상하러 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임금이 뒈진 것도 아닌데 뭐 이렇게 많이 와.”

재화는 절을 하기 위해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빈정댔다. 새벽부터 이게 무슨 고생인지 몰랐다. 이미 죽은 노인네한테 뭐 잘 보일 거 있다고 다들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오는 건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냥 바로 묻어 버릴 걸 그랬나?

시시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방금 분향을 마친 문상객이 다가왔다. 진화 건설에서 보내온 사람이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건설 회사지 실상 저쪽도 깡패 집단이었다. 깡패 집단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서울에서 꽤 큰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으나 재화 입장에서는 다 거기서 거기였다.

물론 그런 데에 있어서는 이쪽도 그다지 할 말은 없었다. 원식이 만든 조직인 근원파 역시 ‘근원 섬유’라는 회사를 내세워 돈세탁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평소 안면이 있는 사이여서 서재화는 하품을 길게 갈기다 말고 얼른 맞절했다.

“재화 네가 고생이 많다.”

“맞아. 존나 고생입니다, 진짜.”

남자 딴에는 겉치레의 말을 건넨 건데 서재화는 빼지 않았다. 안 그래도 계속 절하느라 허리가 뻐근하다는 둥, 지겨워 죽겠다는 둥 푸념을 늘어놨다.

“남들 다 삼일장 하는 거 저 양반 뭐 특별하다고 오일장씩이나 하는지, 원.”

명색이 상주라고 서 있으면서도 꿍얼대길 멈추지 않았다. 뻔뻔한 태도에 도리어 문상하러 온 사람만 민망해졌다. 남자는 위로도 더 건네지 못하고 큼큼 헛기침하며 얼른 자리를 떴다. 이후로도 서재화는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문상객들을 맞았다. 저는 이렇게 재미없어 죽겠는데 주변에서는 이야기꽃이 피어났다. 여기저기서 간간이 재화를 힐끔거리며 속닥였다. 안 봐도 뻔했다. 조직 승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일 터였다.

“대가리 암만 굴려 보세요, 병신들아.”

서재화는 혼자 중얼거리고, 혼자 빙글빙글 웃었다. 본인이 장수할 거라 생각했는지 원식은 별다른 유언장도 작성하지 않고 죽었다. 재화로서는 땡큐였다. 그 늙은이가 유언장을 남겼다면 제 이름이 등장하지 않을 확률이 99.9퍼센트라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차라리 이렇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뒈져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눈 한번 뜨지 않고 바로 비명횡사해 줘서 더 좋고.

서재화는 참지 못하고 킥킥 웃는 소리를 냈다. 장소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조직에서 덩치가 좀 크다 하는 양반들은 하나같이 늙어서 겁이 많았고, 젊은 간부들은 영 매가리가 없었다. 힘이 없기는 재화도 마찬가지였지만 재화에게는 딱 하나, 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무기가 있었다. 바로 서원식의 장자라는 점이었다.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관공서 어디서든 서류를 떼면 서재화는 서원식의 아들이라고 나왔다. 그것만큼 강력한 무기가 없었다.

피 빨아먹으려고 대기 중인 양반들의 뒤통수를 후리기 딱 좋아서 재화는 미소를 감추기 힘들었다. 실실 웃는 얼굴로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렸다. 걸리는 게 하나 있었으나 뭐,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저와 마찬가지로 서원식 밑으로 들어가 있는 태화쯤이야 가볍게 바를 수 있었다. 애초에 조직에 관심이 없다며 제 발로 걸어 나간 놈이었고, 혹여 마음이 바뀌었다고 해도 서재화에게는 또 다른 방법이 있었다.

예쁘장한 얼굴을 떠올리며 눈웃음까지 치고 있는데 돌연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고요하게 부유하던 공기가 갑자기 이리저리 쏘다녔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커졌다. 멀리서부터 요란스레 수군대던 게 점점 가까워졌다.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예민하게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왔나 보네.”

다들 동요하는 가운데에 유일하게 서재화만 그대로였다. 재화는 온종일 구부렸다 펴느라 근육이 뭉친 허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입구 쪽을 바라봤다. 역시나 서태화였다.

검은색 롱 코트를 입고 온 태화는 멀리서 봐도 거대함이 느껴졌다. 한밤중에 산에서 마주친다면 짐승이라고 오해할 정도의 덩치였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저승사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 덩치에 제대로 깔리면 멀쩡하던 사람도 10분 안에 압사하지 않을까 싶었다.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낄낄 웃던 서재화는 뒤로 함께 들어온 사람을 보고 허, 숨을 내뱉었다.

뒤에는 9년 전 조직에서 팽당한 고규성과 12년 전 명령 불복종으로 조직에게 쫓기다가 행방이 묘연해졌던 장호찬이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고 박사와 장 선생이었다. 절로 입이 반쯤 벌어졌다. 두 사람 모두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게 종적을 감췄다더니 태화를 필두로 버젓이 살아 돌아왔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그 옆에는 또 다른 놈이 서 있었다.

“저건 또 뭐야?”

가랑이 사이에 뭐가 달렸는지 의심될 정도로 예쁘장한 놈. 최선우였다.

이런 분위기가 영 낯선지 기가 잔뜩 죽은 얼굴로 서태화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모습에 재화의 눈동자 속으로 묘한 빛이 자글자글하게 꼈다. 태화가 귓속말로 뭐라 뭐라 말했더니 선우는 약간 굽어 있던 어깨를 쫙 폈다. 서태화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조직 내에서 세상 인상 더럽다고 소문난 새끼가 잘도 웃어 댔다. 태화가 주변을 슥 둘러봤고, 그 바람에 재화와 눈이 마주쳤다.

“저 미친 새끼가.”

재화의 입에서 저절로 그런 말이 나왔다. 거리가 멀어 들렸을 리 없는데도 태화는 다 알아들었다는 듯이 서재화를 보며 조금 더 활짝 웃었다. 재화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쉬운 줄 알았던 일이 꽤 어려워질 것만 같았다.

재화가 상주석을 지키는 사이 태화는 상주실로 들어와 코트를 벗었다.

“넥타이는 다른 걸로 하는 게 낫지 않겠어?”

따라 들어온 장 선생이 코트를 받아 들며 물었다. 태화는 제 넥타이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씨익 웃었다.

“일부러 이거 하고 온 겁니다. 뭐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고 예의 차립니까.”

태화의 말에 장 선생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 선생은 태화가 상주 완장 차는 걸 도왔다. 고 박사는 어디 갔는지 조금 전부터 보이지 않았고, 때문에 선우는 밖에 혼자 서 있어야 했다. 태화는 제 시야에 보이는 곳에서 혼자 다소곳이 서 있는 선우를 힐긋 봤다.

어디 가지 말고 눈에 보이는 데에서 가만히 서 있으라고 했더니 말도 잘 들었다. 예전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탱탱볼 같던 놈이었는데 요즘은 그래도 시키는 건 곧잘 했다. 그래도 혼자 있는 게 좀 불편한지 연신 손끝을 꾸물거리는 모습이었다.

저와 단둘이 있으면 자못 시끄러울 만큼 조잘조잘 떠들고, 본인도 모르는 애교를 부리느라 정신없으면서 저렇게 혼자 남겨지면 긴장한 탓에 항상 어깨가 오그라들었다. 언뜻 보기에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태화는 어쩐지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꽤 좋은 편이었다.

내 말만 듣고, 내 품에서만 안정을 찾는 똥개.

그렇게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픽 소리를 내며 웃는데 시야 안으로 누군가가 불쑥 들어왔다. 난데없는 등장에 선우가 가려지자 태화는 언제 웃었냐는 듯이 인상을 구기며 앞에 선 사람을 봤다. 상무 이사라는 사람이었다.

“야, 이게 누구야? 장호찬 아니야?”

남자는 태화가 아닌 장 선생에게 더 관심 있어 보였다. 말없이 태화의 상주 완장을 채우던 장 선생은 주름까지 완벽하게 펴 주고서야 남자를 봤다.

“잘 지내셨어요?”

“아이, 우리 장 선생 없으니까 우리 회사가 맨날 휘청휘청해.”

남자는 되지도 않는 너스레를 떨었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로펌을 끼고 있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괜히 장 선생을 추켜세웠다.

“근데 어떻게 살아 있어?”

역시 마냥 인사하러 온 건 아니었다. 남자는 곧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장 선생을 위아래로 훑더니 사지가 멀쩡한 걸 보고 놀라는 시늉을 했다. 별로 놀랍지도 않은 반응이어서 장 선생은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어떻게 살아 있긴요. 목숨이 붙어 있으니 살아 있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장 선생 스스로도 제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건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아, 그러니까 목숨이 어떻게 붙어 있냐고.”

“제가 붙여 놨습니다.”

기적을 일으킨 장본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태화가 말하자 남자는 장 선생에게 꽂혀 있던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어느새 상주의 모습을 완벽하게 갖춘 태화가 빙긋이 웃었다.

“고규성도 네가 다시 붙여 놨냐?”

이번에는 고 박사 타령이었다. 남의 목숨이 떨어졌든 붙었든, 다들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지 몰랐다.

“왜요? 나중에 형님 목숨도 떨어지면 붙여 드릴까요?”

“새끼, 너는 말을 해도, 쯧. 뭘 그렇게 살벌하게 하냐?”

남자는 정말 목숨이 떨어졌다 붙은 것처럼 두툼하게 접히는 목을 슥슥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쟤는 누구냐?”

“누구요.”

“쟤. 밖에 서 있는 비리비리한 놈.”

남자의 시선이 밖을 향했다. 덩달아 따라 쳐다본 곳에는 선우가 있었다. 말끔하게 입혀 놨는데도 애가 워낙 순하게 생겼다 보니 쭈글쭈글해 보였다. 실제로는 순하지도, 마냥 쭈글쭈글하지도 않다는 걸 아는 태화는 짧게 웃다가 남자가 툭 치는 바람에 금세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쟤는 우리 조직 애 아니었던 거 같은데. 저렇게 물러 터지게 생긴 놈은 내가 본 기억이 없어서.”

물러 터지기는.

태화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최선우는 확실히 얼굴 덕을 크게 봤다. 여기 모인 사람들을 또라이력으로 1등부터 줄을 주욱 세워 놓으면 못해도 5등 안에는 들 놈이 바로 최선우였다. 미친놈이 분명한데 뽀얗고 앳된 외모 덕에 정상인처럼, 더해서는 순둥이처럼 보이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제 애인입니다.”

“엉?”

상무는 놀라는 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그건 옆에 서 있던 장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장 선생은 답지 않게 놀란 얼굴을 하고 태화를 봤다. 태화는 어깨를 으쓱였다.

“제 애인이라고요.”

“쟤 사내놈 아니야?”

“맞습니다.”

“어, 어……. 근데 애인? 어어. 그래, 너, 어, 그쪽이었구나?”

남자는 적잖이 당황한 낯을 하면서도 쿨한 척 태화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태화는 픽 웃었다. 오랜만에 나타난 태화에게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은지 남자는 떠날 줄을 몰랐다. 남자와 태화가 이야기 나누는 사이 장 선생은 밖에 서 있는 선우를 가만히 응시했다. 태화가 구태여 여기까지 최선우를 데리고 온 것부터 시작해서 가장 입이 싸기로 유명한 상무에게 선우의 존재를 말한 건 의외의 일이었다. 태화의 성격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처사이기도 했다.

책잡힐 일은 만들지 않는 깔끔한 성격인 데다가 선우를 알려 봤자 득보다는 실이 더 많다는 걸 태화도 알 텐데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속셈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장 선생은 한참 만에야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이제 승계가 시작되면 여기저기서 작업 들어올 게 뻔했다.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라 태화도 슬슬 준비하는 듯했다. 그렇게 되면 알리기 싫어도 태화와 선우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수면 위로 드러날 터였다.

그러니 더러운 꼴을 보고 밝혀지기 전에 먼저 밝히는 것이었다. 일종의 선전 포고인 셈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최선우가 제 것임을 알리고, 동시에 건드리면 재미난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알려 주려고. 그게 태화가 원하는 바일 게 틀림없었다. 장 선생은 벌써부터 한숨을 옅게 쉬었다. 선우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알리는 게 목적이라면, 비단 오늘 이 자리가 그냥 잔잔하게 지나가진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어떻게 될지 본보기가 필요할 테니까.

장 선생이 거기까지 간파한 사이 이야기를 다 마쳤는지 상무가 상주실을 나갔다. 비로소 말 많은 인간에게서 벗어난 태화는 곧바로 장 선생을 불렀다.

“가서 선우랑 같이 있어 줘요. 이런 데 낯설어서 스트레스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장 선생님은 곧잘 따르니까. 부탁 좀 할게요.”

“응. 알았다.”

“고맙습니다.”

태화는 깍듯하게 인사했다. 장 선생이 선우에게 가서 아는 체하는 걸 지켜봤다. 그래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고 선우는 장 선생이 말을 걸자마자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잔뜩 올라가 있던 어깨도 좀 가라앉고, 어지럽게 움직이던 눈동자도 밝아졌다. 한결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덩달아 마음을 놓은 태화는 그제야 상주실을 나와 상주석으로 향했다. 여전히 문상객을 받고 있던 서재화는 태화가 옆에 와서 서자 다짜고짜 옆구리를 툭 쳤다.

“늦었다? 영감 뒈진 건 새벽에 연락 갔을 텐데.”

“알아볼 게 있어서.”

“뭐?”

“영감님 뺑소니친 새끼가 어떤 놈인지.”

태화는 숨기지 않았다. 애써 숨길 생각도 없고, 필요도 없었다. 뻔뻔스러운 태도에 재화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별로 진득한 인사말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어서 태화는 금방 입을 다물었다. 서재화가 지치지도 않고 뭐라 뭐라 말을 걸었으나 상종하지 않았다.

혼자 입을 나불거리던 재화도 쯧 혀를 차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제 뒤에 서 있는 아랫놈과 수다를 떨었다. 전생에 말 못 해 죽은 귀신이 씌기라도 했는지 재화는 말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시끄러운 소리는 질색이라, 태화는 재화에게서 한 발자국 더 떨어졌다.

조문객은 쉴 틈 없이 이어졌다. 전국 각지에서 한가락 한다는 조직의 간부들이 총출동한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몇몇 유명 기업에서도 문상을 왔다. 서원식의 아들로서 상주석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연신 맞절이며 인사며 하느라 바빴다.

“씨발 것들이 왜 자꾸 너한테 먼저 가지?”

서재화는 한참 잘만 인사하다가 갑자기 짜증을 팍 냈다. 문상객들이 태화에게 먼저 인사하는 게 거슬리는 탓이었다. 속을 전부 꺼내 보였던 태화와 마찬가지로 서재화 역시 숨기지 않고 감정을 드러냈다. 문상객 열 명 중 여덟은 전부 태화를 먼저 찾았다. 마치 이후 누가 조직을 이어받을지 다 아는 것처럼 그랬다. 그 바람에 열이 확 오른 서재화는 씨불씨불거리며 험한 말을 아끼지 않았고, 태화는 별말 없이 묵묵히 조문객들에게 인사만 건넸다.

별말이 없다고 해서 짜증이 나지 않았다는 건 아니었다. 태화도 이 자리가 썩 즐겁지 않았다. 옆에서는 서재화가 왁왁거리지, 뒤에서는 저들을 두고 수군대지, 앞에서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목탁 소리까지. 소음 천지였다.

태화는 슬쩍 귓불을 문지르며 서원식의 영정 사진을 올려다봤다. 10년 전에 미리 맞춰 놨다더니 사진 속 원식은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과는 달리 짱짱해 보였다. 그렇게 대단하던 인간이 덤프트럭에 치여 갈비뼈가 으스러져 죽었다고 했다. 제법 멋없는 끝이었다.

“더 멋없게 갔어야 했는데.”

“응?”

태화가 중얼거리는 말에 서재화가 옆으로 바짝 붙어 왔다. 얼굴까지 불쑥 내밀어서 태화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미간을 구기며 재화의 낯짝을 밀어 냈다. 하여간에 상황에 맞지 않게 해맑은 건 여전했다. 곧 제 처지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서재화는 빙글빙글 웃으며 태화를 툭툭 건드렸다.

어느덧 해가 졌다. 여전히 오가는 사람들은 많았으나 그래도 낮보다는 적어졌다. 서재화는 마치 국회 의원 선거라도 나온 사람처럼 문상객과 웃으며 인사하다가도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힘들어 뒈지겠다는 둥, 이 짓을 5일이나 해야 하냐는 둥 구구절절 타령해 댔다. 정말 한시도 입이 쉬질 않아서 태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잠시 피신하듯 자리를 떴다.

저녁 시간이라 선우가 밥은 제대로 먹었을지 궁금했다. 말로는 안주인 노릇을 하라고 데려와 놓고는 막상 와서는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저부터 안주인 대접을 톡톡히 해 줘야 남들이 무시하지 못하는 법이었다. 식사가 준비되는 건물로 넘어가자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장 선생이 보였다. 맞은편에는 선우가 밥을 먹고 있었다. 이제 긴장이 완전히 풀렸는지 괜히 두리번거리지도 않았고, 장 선생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육개장을 맛있게 먹는 중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태화가 옆에 와서 앉자 선우는 편육을 베어 물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입술 주름 사이로 기름기가 도는 게 편육을 꽤 많이 먹은 모양이었다. 태화는 씩 웃으며 엄지로 선우의 입술을 훔쳐 줬다. 생각 같아서는 핥아 주고 싶은데 선우의 체면을 봐서 무진 참은 것이었다.

“네 흉보고 있었다, 왜.”

눈꼴신 연인 앞에 앉아 있던 장 선생이 못 참고서 한 마디 툭 던졌다.

“내 흉볼 게 있어요?”

“그럼, 엄청 많지. 그쵸, 선우 씨?”

장 선생이 물었지만, 선우는 눈을 멀뚱멀뚱 뜨다가 곧 고개를 작게 저었다. 장 선생의 입장을 생각해서 차마 아니라고 강력하게 말하지는 못하고 눈치만 살살 봤다. 그 바람에 태화는 웃었고, 장 선생은 입을 벌리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짝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나는 담배나 피우러 가련다.”

장 선생이 눈치 있게 빠져 주고, 태화와 선우는 둘만 남게 되자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태화는 선우의 머리카락을 잘 정리해 귀 뒤로 꼼꼼히 넘겨 줬다. 다들 쳐다보는데도 그랬다.

오히려 더 보라는 듯 뺨을 쓸어 매만졌다가 손끝으로 톡 치고, 엄지로 입술을 살살 문질러 보기도 했다. 선우와 심상치 않은 사이라는 걸 대놓고 광고했다. 처음에는 보는 눈이 많아 힐끔힐끔 눈동자를 굴리던 선우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마냥 태화에게만 집중했다. 어리광을 부리듯 태화의 손을 끌어와 주물럭거리고, 또 예쁘게 웃었다.

“밥 맛없지 않아? 장 선생님이랑 나가서 먹고 올래?”

“아뇨. 괜찮아요. 아저씨랑 같이 있을래요.”

“같이 있겠다고 해 봤자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데. 심심하면 집에 가도 되고.”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잘 기다릴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려는지 허리를 곧게 펴고 씩씩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 봤자 소동물처럼 보여서 태화는 픽 웃으며 선우의 입술을 톡 쳤다. 선우의 손을 쥐어 제 뺨에 비볐다. 유난히 체온이 높은 놈이라 손바닥도 따끈따끈했다. 하루 종일 쌓인 피로가 노곤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태화는 잠깐 선우의 온기를 느끼다가 싱긋 웃었다.

“그럼 이따 또 올게.”

말해 놓고 이대로 가기가 아쉬워 선우의 뺨을 주욱 늘였다 놓는 장난을 몇 번 더 쳤다. 결국 주변 눈치에 못 이긴 선우가 빨리 가라고 등 떠밀고서야 태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면서는 도우미에게 선우가 있는 테이블을 가리키며 편육 좀 많이 가져다주라고 일렀다. 장 선생과 눈인사를 주고받고 다시 상주석으로 돌아가자 서재화가 또 옆구리를 쿡 찔렀다.

망할 놈의 손가락.

태화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쩝 입맛을 다셨다. 찌를 수 있을 때 마음껏 찌르게 놔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애기는 잘 있디?”

“애기?”

“다 알면서.”

재화는 음흉한 표정으로 실실 쪼갰다. 태화가 누굴 만나고 왔는지 다 아는 눈치였다. 또다시 무시할 줄 알았던 태화는 웬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나가서 얘기 좀 하자.”

“상주가 자리를 비우면 쓰나.”

“오랜만에 맞담배나 좀 태우자고.”

맞담배 얘기에 재화는 눈을 크게 떴다.

“담배 끊었다며?”

“그게 말처럼 쉽나.”

태화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하며 먼저 밖으로 나갔다. 재화도 바로 앞에 온 문상객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아랫놈에게 자리 좀 지키고 있으라고 한 뒤 태화를 따랐다. 태화는 벌써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아, 같이 가!”

재화는 잰걸음을 뗐다. 분명 태화보다 두 살이나 더 많은데도 하는 짓을 보면 아직도 철이 덜 든 동생 같았다. 남들 눈에는 오히려 태화가 더 형처럼 보였다. 겨우 태화를 따라잡은 서재화는 옆에 나란히 서서 이번에는 어깨를 툭 쳤다. 왜 자꾸 사람을 건드리나 몰랐다.

“그냥 저 앞에서 피우면 되지.”

“여기 온 인간들 전부 우리 두 사람 보고 수군거리기 바쁜데, 굳이 그 한가운데에서 피우고 싶수?”

태화의 말에 재화는 그건 또 그렇네, 하며 금세 수긍했다.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가다 보니 뒤안길까지 가게 됐다.

“근데 최선우는 왜 달고 왔냐?”

“네가 걔 이름을 어떻게 알아?”

태화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재화를 쳐다봤다. 서재화는 어깨를 으쓱였다.

“네 뒷조사 좀 했지. 나도 쥐고 있는 패가 있어야 되잖냐.”

“내 뒷조사할 시간에 교양이나 좀 더 쌓아요.”

“나 존나게 교양 있는 사람이다? 이번 달만 해도 영화 두 개나 봤어.”

서재화는 빙긋 웃었다. 철없이 낄낄대는 웃음이 아니었다. 마치 문화생활을 즐기는 교양인을 연기하는 듯했다. 꽤 잘난 얼굴이라 남이 보면 그럴듯해 보이겠으나 태화 눈에는 그것마저도 영 철없어 보였다. 태화가 짧게 고개를 젓자 서재화는 으레 원래 얼굴로 돌아와 익살스럽게 웃었다. 멈춰 있는 태화를 두고 먼저 걸음을 떼 걸어갔다.

“최선우 그거, 잘 무냐? 잘 조여?”

따라서 걸음을 떼려던 태화는 다시금 주춤 멈춰 섰다. 저급한 말들 사이로 선우를 들먹이는 서재화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뭐, 네가 달고 다니는 거 보면 보통 명기는 아니겠지. 아, 자지만 안 달렸으면 나도 한번 먹는 건데. 왜 그런 말 있잖냐. 구멍 동서. 어차피 너랑 나랑 피도 안 섞였는데 한 년 나눠 먹는다고 누가…….”

천박한 말을 줄줄 내뱉던 입에서 억!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재화는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뒤통수가 얼얼한 느낌에 만져 보자 축축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손을 가져와 보니 피였다.

“윽…….”

재화는 땅에 처박힌 낯을 겨우 돌려 위를 올려다봤다. 태화가 우두커니 서서 쳐다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바위라고 해도 손색없을 만큼 커다란 돌덩이를 든 채였다. 재화는 웃고 싶었으나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씹, 새끼야……. 존나게 아프잖…….”

“함부로 지껄이는 주둥이에 좆 박는 대신 대가리 깬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태화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한 번 더 돌덩이로 서재화의 뒤통수를 후렸다. 콱! 소리 끝에 서재화는 그만 정신을 잃었다. 태화는 들고 있던 돌덩이를 대충 발치에 던지고 숨을 후 내뱉었다. 허공을 향해 손을 까딱이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곳에서 남자 넷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그 뒤로 고 박사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빨리빨리 옮깁시다. 예.”

태화 대신 고 박사가 남자들에게 지시했다. 네 명의 남자들은 각각 서재화의 팔과 다리를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재화는 그렇게 남자들에게 덜렁 매달린 채 뒤에 있는 야산으로 끌려 올라갔다. 제자리에 남은 태화는 흐트러진 앞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옆에 있던 고 박사가 불을 붙여 줬다.

“힘이 넘치는 건 알겠는데 다음에는 좀 살살 쳐라. 저러다 진짜 죽어.”

“저 새끼 쉽게 안 뒈져.”

“인간은 원래 쉽게 안 죽어. 근데 너한테 맞으면 누구라도 쉽게 죽어.”

고 박사가 잔소리를 늘어놓는데도 태화는 반성하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더 후리지 못해 후회될 지경이었다. 최선우를 두고 난잡한 말들을 지껄이던 주둥이를 찢어 놓을까 하다가 참은 것이었다.

구멍 동서?

서재화가 했던 말이 재차 떠올랐다. 구멍 동서는 씨발, 만약 서재화가 선우를 건드린다면 자지를 으깨 놓을 터였다. 물론 최선우 성격이면 그 전에 서재화 자지를 물어뜯어 놓겠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태화는 그나마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빛이 들지 않는 뒷길이라 태화가 만든 그늘이 유난히 더 짙었다.

해가 전부 진 시간의 야산은 생각보다도 더 어두웠다. 칠흑 같은 어둠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진 것 같았다. 바로 앞에 사람이 있어도 잘 안 보일 정도였다. 저 밑에 절이 있는 곳은 연등도 달려 있고, 건물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어 반짝반짝 빛나는데 태화가 선 자리는 암흑 그 자체였다.

그때 고 박사가 휴대 전화 손전등을 켰다. 다른 남자들도 고 박사를 따라 저마다 손전등을 켜 가운데를 비췄다. 가운데에는 재화가 손과 발이 묶인 채 널브러져 있었다. 피를 꽤 많이 흘렸는지 머리 주변으로 벌건 핏물이 흥건했다. 고 박사는 서재화에게 다가가 여기저기 만져 보더니 태화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깨워.”

태화의 한마디에 남자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서재화의 뺨을 툭툭 쳐 보기도 하고,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기도 했다. 그래도 깨지 않자 누군가가 챙겨 온 생수를 낯짝에 들이부었다. 처음에는 움찔거리기만 하던 서재화는 한 병을 더 열어 코 부위에만 집중적으로 퍼붓자 그제야 콜록거리며 살이 있는 소리를 냈다.

“끄으…….”

서재화는 가래 끓는 소리를 내더니 곧 눈을 반쯤 떴다. 얼굴을 직격으로 비추는 휴대 전화 불빛에 저절로 눈살이 찌그러졌다. 그런데도 남자들은 빛을 치우지 않았다. 결국 서재화는 눈이 멀 것 같은 환경에서 겨우겨우 태화를 봤다.

“또라이 새끼……. 언제 뒤통수 까나 했다.”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서재화는 입을 가만두지 못했다. 진짜 입에 좆이라도 박아 줘야 그때 가서 죄송합니다, 하고 엎드릴 모양이었다. 그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걸 알았지만 동시에 절대 안 될 말이었다. 태화는 미간을 짧게 구겼다. 차라리 저 주둥이를 찢고 말지 재화에게 제 자지를 물리는 건 끔찍했다.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러고 보면 사내놈 입에 좆을 박는 건 별로 달갑지 않았다. 최선우를 제외하고는 그랬다. 그러니 최선우가 요물이라는 것이었다. 잠깐 안 봤다고 또 최선우 생각이었다. 태화는 쯧 소리를 내고 재화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턱주가리를 걷어찼다.

“커헉!”

“입 좀 가만히 놔두면 안 되겠냐.”

“왜. 뭐, 씨이발. 내 입 가지고 내가 말도 못 하냐……!”

태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재화도 정상은 아니어서 처맞는데도 주둥이가 살아 있었다. 믿을 구석도 없는데 계속 나대는 걸 보면 그저 병신 같았다.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자 서재화가 펄떡였다.

“나 죽이면 회사가 네 거 될 거 같냐? 어? 잘못 짚었어. 너 같은 놈은 회사에 빌붙어 사는 능구렁이 새끼들 감당 못…….”

“너야말로 잘못 짚었어.”

태화는 재화의 말을 끊고 그 앞에 가 무릎을 굽혀 앉았다. 옆에 있던 남자들이 알아서 재화를 일으켜 앉혔다. 발악하는 걸 억지로 무릎까지 꿇려 태화와 눈높이를 맞췄다. 재화는 태화 앞에서 무릎 꿇었다는 사실이 굴욕적인지 이를 으득 물고 눈을 형형하게 떴다. 제 처지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꼴이었다.

“난 너 안 죽여. 굳이 내 손에 피 묻힐 만큼 가치 있는 목숨 아니잖아, 너. 별로, 너한테 그렇게나 끈덕진 감정도 없고.”

“존나, 씨발. 시건방 떨고 앉아 있네, 씹.”

재화가 침을 뱉으려고 입을 우물거리는 게 보이자 태화는 손으로 재화의 입을 막았다. 말이 좋아 막은 거지, 실상 얼굴뼈를 으스러뜨릴 만큼 억센 힘으로 틀어쥐었다. 정말 턱뼈 어긋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네가 지금 내 앞에 그 꼴로 있는 이유는 두 가지야.”

웁웁거리며 몸부림치는 재화를 똑바로 바라본 채 운을 뗐다.

“첫 번째, 내 복수를 망친 거.”

태화는 그 생각만 하면 피가 차갑게 식었다. 누구도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장례식장에 모인 모두가 알았다. 서원식은 서재화가 죽인 것이었다. 서재화 이건 머리는 나쁘면서 배짱만 좋아서 그 사실을 구태여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 좀 더 창의적인 방법으로 죽였으면 돌대가리 새끼가 이런 짓까지는 못 했을 거라며 의심했을 텐데 서재화는 너무 고전적인 방법을 썼다. 하여간에 머리가 나쁜 것들은 알아줘야 했다.

게다가 재화는 원식의 소원을 들어준 셈이었다. 놔두면 늙는 게 무서워 벌벌 떨며 10년이고, 20년이고 지옥 속에서 살아갈 양반을 친절하게도 죽여 줬다. 노인네를 위한 자원봉사자가 따로 없었다.

영감님 늙어 가는 꼴 보면서 즐거워할 날이 얼마나 많이 남았었는데, 쯧.

태화는 혀를 차고 서재화의 얼굴을 던지듯 놨다.

“말했듯이 별 감정 없으니까 죽이지는 않을게. 대신 망친 벌은 받아야지.”

태화는 옆에 선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태화에게 건넸다. 한 손에 들어오는 크기의 전지가위였다. 날이 잘 드는지 확인하듯이 잘칵잘칵 소리를 내 보다가 재화의 면상 앞으로 들이밀었다.

“손가락 몇 개 잘릴래?”

“씨빨놈아!”

“영감님 나이가 일흔둘. 대한민국 남자 평균 수명이 여든이라고 치면 8년을 덜 산 거니까 3년당 한 개 해서, 손가락 두 개하고 나머지 2년은 손톱으로 대체할게.”

정해진 답이 있었던 듯 태화는 줄줄 말을 이었다. 재화의 눈이 한없이 커졌다. 거의 눈알이 까뒤집혔다는 표현이 들어맞을 만큼 커다랗게 뜨였다. 씨빨씨빨, 하는 욕이 계속 나왔다. 그래 봤자 남자들에게 붙잡힌 신세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손가락 골라.”

태화는 마지막 관용인 양 선택권을 넘겼지만 고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재화는 그저 입을 벙긋거릴 때마다 욕지거리만 쏟아 냈다.

“안 고르면 내 마음대로 한다.”

“너, 이……! 씹, 야, 윽!”

“씹질 하기 불편하라고, 둘 다 중지로 자를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화의 양 팔을 잡고 있던 남자 두 명이 알아서 태화 앞으로 손을 대령했다. 서재화가 손을 펼치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자 남자들은 아예 중지를 꺾어 버렸다.

“아아악!”

재화의 비명이 야산을 웅웅 울렸다. 메아리쳐 돌아온 소리는 재화를 에워쌌다. 꺾인 중지는 주먹을 쥐어도 덜렁거릴 뿐, 제대로 굽어지지 못했다.

“씹빨! 으악!”

태화는 숨넘어갈 듯 꺽꺽거리는 재화를 무시하고 왼쪽 중지부터 잡았다. 안 그래도 꺾여서 팅팅 붓기 시작한 손가락을 쥐자 서재화의 입에서 단말마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시끄러운 소리가 뚝 끊기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번째 마디까지 잘린 중지 덩어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오른손 중지도 빠르게 잘려 나갔고, 이어 오른손 엄지손톱도 잘라 내다시피 뽑았다. 피가 찍찍 새어 나오자 재화의 입에서도 쥐 새끼 같은 소리가 나왔다.

“두 번째.”

태화는 뺨에 튄 피를 대충 문질러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선우 두고 구멍 동서니, 뭐니, 씹…….”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열받는지 태화는 이를 억세게 물었다. 별스럽지 않게 손가락을 숭덩숭덩 잘라 낼 때와는 딴판이었다. 불룩 올라온 관자놀이를 신경질적으로 문지르다가 재화의 턱을 한 번 더 후려 찼다. 남자들이 뒤로 물러나는 타이밍에 턱주가리를 정통으로 맞은 태화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다시금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그딴 추잡스러운 말한 거. 그것도 벌을 받아야겠지.”

태화는 벌레처럼 웅크린 채 벌벌 떠는 서재화를 내려다보며 그나마 화를 추슬렀다. 있는 힘껏 걷어차느라 흐트러진 넥타이를 다시 제대로 올리고, 구겨진 재킷도 툭툭 털어 폈다.

“네가 나에게 소중한 걸 건드렸으니 나도 너에게 소중한 걸 건드려 보려고. 너, 영감네 회사 절대 못 가져. 조직에 발도 못 들일 거야. 네가 그토록 가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조직, 내가 가질 거거든.”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던 재화가 돌연 소리를 죽이고 태화를 올려다봤다.

“조직이니 회사니, 별 관심 없었는데 네 덕분에 없던 관심이 생겼어. 고맙다.”

재화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꼴이 꽤 봐 줄 만했다. 태화는 들고 있던 전지가위를 서재화 앞으로 툭 던졌다.

“내가 회장 직함이라도 달면 네가 최선우 두고 다신 함부로 입 안 털겠지. 형수님이라고 하는 건 안 바라도, 다음에 만나면 제수씨라고 꼬박꼬박 존대는 해야 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떨어진 재화의 손가락을 구두 뒷굽으로 지그시 밟았다. 담배꽁초의 불을 끄듯 비벼 대며 다신 재화 몸에 붙을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다. 뒤에서 보고 있던 고 박사는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아무리 많이 목격했다고 해도 서태화의 저런 철저한 잔인함은 영 적응하기 어려웠다. 누굴 엿 먹이는 데에 있어서는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놈이라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고 박사가 몸을 부르르 떨며 팔을 문지르는 사이 태화는 발을 들어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온전한 모양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엉망으로 짓이겨져 있었다. 그제야 속이 좀 풀린다는 듯이 숨을 후 내뱉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 안에 들어 있는 것 중 수표만 골라 서재화의 몸 위로 후두두 떨어뜨렸다.

“병원 가 봐요. 이 돈으로 모자라면 나한테 치료비 청구하고.”

이제껏 잘만 하대하고, 하대를 넘어서 폭력을 퍼부었으면서 마지막은 정중하게 마무리했다. 피 묻은 뺨에 수표 한 장이 찰싹 달라붙자 서재화는 눈을 번뜩였다. 자존심에 금 가는 소리가 십 리 밖까지 들리는 듯했다. 태화는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손을 탁탁 털고 돌아섰다. 고 박사를 포함해 남자들 역시 뒤를 따랐다. 뒤에서 피가래 끓는 소리가 들렸다.

“너 최선우가, 윽……. 누군지 알아?”

태화의 걸음이 뚝 멈췄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역시 그것까지 알고 있나?

쯧, 혀를 차고 뒤를 돌아봤다. 서재화는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도 아득바득 태화의 성질을 긁었다. 눈에 빤히 보이는 도발에 태화는 짝다리를 짚고 섰다.

“알아.”

“……안다고?”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서재화는 놀란 얼굴을 했다.

“아는데도 끼고 산다고……?”

태화는 더 상종할 가치가 없다는 판단에 대답하지 않고 재화에게 등을 돌렸다. 재화가 픽픽 웃는 소리가 어깨를 타고 넘어왔다. 웃음소리는 점점 더 짙어졌다. 터벅터벅 걷는 걸음 사이사이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까지 들렸다.

“야! 너 씨발 진짜 골 때리는 새끼인 거 아냐!”

태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재화를 향해 중지를 추켜올렸다. 욕의 의미도 있었고, 네 몸에는 이제 없는 게 내게는 있다며 약 올리려는 의도도 있었다. 정확하게 먹혀들어 갔는지 재화가 ‘씨빨!’ 하고 크게 소리쳤다. 온 산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의 소리였다. 태화는 중지를 그대로 가져와 귀를 후볐다. 재화의 입으로 들은 골 때리는 새끼라는 감상은 좀 웃겼다. 등신 새끼가 누구 보고 골 때린다고 하는지 몰랐다. 더구나 머저리보다야 또라이가 났다.

“등신 새끼가 눈썰미 하나는 존나게 좋네, 씨발.”

태화는 혼잣말을 중얼대며 웃었다. 등신보다 나은 게 또라이라고 생각하자마자 생각난 낯짝 때문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우선아.”

괜히 선우의 이름을 장난스레 바꿔 불렀다. 제 이름은 최우선이 아니라 최선우라며 바락거리던 게 기억났다. 하여간에 성질머리는 사나워서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멋대로 대들었다.

그게 최선우의 매력이긴 하지만.

태화는 헛헛하게 웃으며 야산을 내려갔다.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안 봐도 저만 기다리고 있을 최선우를 향해 가는 마음이 급했다.

장 선생은 인기 스타였다. 평생 받을 관심을 원식의 장례식장에서 다 받는 중이었다. 서원식이 이끌던 근원파에 소속된 간부 중 열에 아홉은 장 선생에게 와서 한 마디씩 얹고 갔다. 고 박사까지 함께 있었다며 두 사람 주변으로 사람이 복작거렸을 터였다. 그네들은 열이면 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냐는 눈빛을 보냈다. 실제로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장 선생은 우스갯소리로 살 팔자라 살아 있다는 말로 넘겼으나 실상 태화가 이어 붙여 준 생이었다.

과거 조직을 위해, 서원식을 위해 불법을 합법으로 맞춰 주고, 범죄를 여러 겹으로 감싸 주던 장 선생은 뒤통수를 거하게 맞았더랬다. 근원파를 위해 한 몸 불살랐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장 선생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었다. 그런데 원식은 장 선생에게 아예 죽으라고 했다.

근원파의 돈세탁을 위해 세운 회사인 근원 섬유에서 일이 터지자마자 장 선생에게 모든 걸 짊어지라고 한 것이었다. 뒤를 잘 봐주겠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서원식을 위해 희생하려던 장 선생은 끝내 희생 대신 잠적을 선택했다. 이게 전부 조직 실상을 낱낱이 아는 저를 물갈이하기 위해 서원식이 꾸민 짓이라는 걸 알게 된 까닭이었다.

처음 몇 달은 근원파 조직원들에게 은신처를 걸려 죽을 고비를 몇 번이고 넘겼다. 정말 옆구리에 칼을 맞기도 했고, 강에 뛰어들기도 했으니 살아 있는 게 용했다.

그때 장 선생 앞에 나타난 게 서태화였다. 태화는 본인이 개인적으로 쓰는 별장에 장 선생을 몇 년이고 숨겨 줬다. 물론 태화에게서 받은 호의가 공짜가 아니라는 건 장 선생도 알았다. 그러니 지금 장 선생은 태화에게 제 목숨값을 치르는 중이었다. 아마 평생 가도 전부 갚지 못할 터였다.

“근데 쟤는 누구야?”

장 선생은 앞에서 혼자 떠드는 근원파 간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줄줄 흘리며 다른 생각을 하다가 퍼뜩 정신머리를 끌어왔다. 간부는 근처에 앉아 있는 선우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 이사님 애인입니다.”

장 선생은 태화를 높여 말했다. 선우에 대해서도 숨기지 않았다. 태화가 드러내길 바라니 저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간부는 놀란 얼굴을 했다. 선우가 태화의 애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오는 반응은 두 가지였다. 눈에 띄게 놀라거나, 민망할 정도로 역겨워하거나. 둘을 동시에 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이번 간부도 같은 부류라 놀란 얼굴은 금세 구겨졌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고 그러는 거냐며, 말세도 이런 말세가 없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장 선생은 작게 웃었다. 서태화는 연애하는 것으로도 간부들의 성질을 긁을 줄 아는 놈이었다. 연애 하나도 범상치 않게 하는 태화가 퍽 재미있어 연신 웃으며 선우를 봤다. 선우는 제법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지난번 차 안에서 그랬듯 태화가 보고 싶어 똥줄 타는 애처럼 굴지 않고 얌전히 기다렸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만한데도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

“소주라도 한잔할래요?”

선우의 곁으로 다가간 장 선생은 테이블 위에 있는 소주병을 흔들어 보였다. 선우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대신 소주 옆에 있던 오렌지주스를 가져왔다.

“저는 이거면 돼요.”

장 선생은 수줍은 듯 말하는 선우를 보고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태화와 함께 있으면 생기 넘치던 사람이 서태화 하나 없다고 말라비틀어진 고사리 같았다.

남자에게는 일절 관심 없는 장 선생 눈에도 선우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잘생기고, 예쁘장하고. 시골 어르신들이 보면 곱다고 할 만한 외모였다. 선우는 그런 얼굴을 가지고도 시들시들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러다가도 태화가 나타나면 꽃처럼 활짝 필 모습이 눈에 선했다. 처음에는 신기했는데 지금은 태화를 어지간히 좋아하는가 보다, 하고 이해했다.

“저기.”

태화가 언제 올까 기다리고 있는데 선우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다 마신 주스 캔을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리기에 장 선생은 괜찮으니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말해 봐요.”

“아저씨는 부모님이랑 사이가 별로 안 좋았어요?”

뭐가 궁금할까 했더니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장 선생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래 보여요?”

“네.”

“왜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별로 슬퍼하지 않는 거 같아서요. 저 같으면 엄청 울 거 같거든요.”

실제로 선우는 부친의 시체를 보자마자 울기도 했다. 슬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려웠지만 울었냐고 물으면 오열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진이 빠지도록 울었다. 반면 태화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너무 무덤덤한 게 아닌가 싶었다.

장 선생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터였다. 태화는 원식의 죽음 앞에서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을 놈이었다. 약간의 아쉬움과 커다란 분노에 휩싸였을 게 분명했다. 워낙 화를 밖으로 잘 표출하지 않는 놈이다 보니 선우는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태화가 어릴 적부터 근원파에 몸담고 있던 장 선생은 그와 원식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진 않아도 대략적으로나마 알았다. 물론 서재화가 왜 제 아버지인 서원식을 죽였는지, 서재화와 태화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모든 일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개판’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말해 준다고 해서 선우가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지난한 과거를 일일이 설명해 주기에는 하룻밤을 새워도 모자랐다.

더군다나 제삼자인 입장에서 남의 가정사를 멋대로 말하는 것도 보기 안 좋았다. 잠깐 생각하는 사이, 선우는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얼른 말해 달라고 보채지는 못하고 그저 참고 기다리는 모습에 장 선생은 빙긋이 웃었다.

“나중에 태화한테 직접 물어봐요. 아마 선우 씨한테는 뭐든 말해 줄 겁니다.”

기대감이 차올라 있던 선우는 곧바로 바람 빠진 풍선 인형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장 선생은 모른 척 소주 한 잔을 자작해 마셨다. 태화가 선우에게 뭐든 말해 줄 거라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장 선생이 느낀 바로 태화는 선우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해 줄 놈이었다.

태화는 누군가를 두고 애인이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니, 누굴 만난 적조차 없었다. 그럴 성격이 못 되었다. 누군가를 가지고 놀 수는 있어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데리고 살 정도로 살가운 놈이 아니었다. 가지고 노는 것도 귀찮아서 안 할 놈이었다.

혹시나 애인이 있냐고 물어봐도 코웃음이나 치던 놈인데 선우를 두고는 애인이라고 말했다.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공표까지 했다. 장 선생은 태화가 얼마나 비틀린 놈인지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그런 놈에게 아끼는 존재가 생겼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선우를 찾아 달라던 것도, 변호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도, 탁성모 일도. 전부 서태화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도 신기해서 대체 최선우의 매력이 뭘까 생각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선우가 예쁜 건 인정할 만한 일이었으나 사내자식이 아무리 예뻐 봤자 여자 인물은 따라가지 못했다. 성격도 영, 지금 보면 순한 것 같아도 그동안 태화의 애를 얼마나 먹였는지 알음알음 들어 와서, 장 선생은 본인이라면 선우를 감당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태화는 비단 그런 외적인 걸로 최선우를 아끼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최선우가 왜 좋냐?’

문득 예전에 태화에게 물었던 게 생각났다. 탁성모를 창고에 가두고 나서 먹장어에 소주를 두고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티가 나요?’

‘걔랑 똑같은 소리를 하네.’

장 선생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서태화나 최선우나 똑같았다. 서로 좋아하는 티라는 티는 다 내 놓고 인제 와서 티가 나냐고 묻는 게 어처구니없었다.

‘처음에는 최선우 인생에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게 신기하고 재밌더라고요.’

태화는 빙긋이 웃으며 운을 뗐다. 언뜻 최선우를 그리는 듯한 눈빛이었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이젠 최선우 없이는 안 되겠는 거예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장 선생은 적잖이 놀랐다. 평생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는 말 한번 하지 않던 태화의 입에서 소유욕 짙은 말이 나오자 놀라울 따름이었다.

‘한참 잘못 걸린 거죠.’

태화는 그 말을 마치고 한동안 조용히 웃었다. 잘못 걸렸어도 상관없다는 듯 그랬다. 처음으로 그 나이대의 청년 같은 얼굴이었다. 장 선생은 그때의 태화를 떠올리며 선우를 빤히 쳐다봤다. 말없이 쳐다보며 미소만 짓자 선우는 커다란 눈을 끔뻑였다. 자기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어 손등으로 뺨을 슥슥 쓸다가 갑자기 어딘가를 보고 얼굴을 환하게 폈다. 장 선생도 선우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봤다. 역시 태화가 서 있었다.

이리로 오라는 손짓에 선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태화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장 선생은 눈을 가늘게 떴다. 태화의 상태를 보니 이미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고 오는 길인 듯했다.

빳빳하던 정장은 여기저기 주름져 있었고, 잘 빗어 넘겼던 머리카락도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결정적으로 하얀 셔츠 위로 군데군데 피가 튄 게 보였다. 장 선생 눈에는 이렇게 잘 보이는 게 최선우 눈에는 전혀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니,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선우는 방싯 웃는 얼굴로 태화를 올려다보며 뺨에 묻은 피를 슥슥 문질러 닦아 줬다. 다른 이 같으면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텐데, 겁을 먹거나 다가가기조차 어려워했을 텐데, 선우는 말갛게 웃으며 태화를 대했다. 태화 역시 선우를 만지려다 말고 손에 피가 묻은 걸 깨닫고 근처 테이블 위에 있던 물수건을 가져와 손을 빡빡 닦았다. 그나마 깨끗해진 손으로 선우의 뺨을 꼬집었다.

“이상한 애들끼리 잘 만났네.”

장 선생은 작게 말하며 빙긋이 웃었다. 하지만 마냥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주변에서 태화와 선우를 보며 다들 머리를 팽팽 굴리는 게 보였다. 그러니 저건 조금 위험했다. 물론 장 선생은 태화를 믿었다. 서태화가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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