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후 선우는 두 번 더 참고인 조사로 용지서에 불려 갔다. 그때마다 장 선생이 등판했고, 태화는 밖에서 기다렸다. 오늘이 세 번째로 불려 간 날이었는데, 용지서에서 나오는 선우와 장 선생을 발견하고 태화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장 선생은 늘 그렇듯 태화와 눈인사만 주고받은 뒤에 차로 갔고, 그를 발견한 선우는 어쩐지 주춤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뗐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태화의 눈에는 다 보였다.
비단 걸음뿐만이 아니더라도 선우는 좀 이상했다. 신기하리만치 해맑던 애가 지금은 그늘에 있는 것처럼 어둑했다.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얼굴빛도 심상치 않았다. 남이 보면 잘만 웃는다고 할 낯이었지만 태화는 한눈에 알아봤다. 지금 선우의 낯에 걸린 미소는 진짜 미소가 아니었다. 태화는 날 선 눈을 뜨고 황새걸음으로 선우에게 다가갔다.
“표정이 왜 그래?”
“제 표정이요? 표정이 왜요?”
“되지도 않는 연기 그만하시고. 무슨 일 있었어?”
선우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최대한 아무 일도 없는 척하는 게 티가 났다. 태화는 씹, 하는 소리가 턱 끝까지 올라왔으나 겨우 눌러 참았다. 언젠가부터 선우에게 욕하는 게 어려웠다. 손을 올리지 않은 지는 오래였고, 그저 예뻐해 주길 여러 날이었다. 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사람이 이렇게나 물러졌다.
한숨을 짙게 내쉰 태화는 선우를 끌고 장 선생의 차로 갔다. 운전석 창문을 똑똑 두드리자 바로 내려갔다. 장 선생은 안전벨트를 하려다 말고 태화를 올려다봤다.
“안에서 무슨 일 있었습니까.”
“일? 무슨 일?”
“애 표정이 안 좋아서.”
장 선생은 뒤에 선 선우를 슥 훑었다.
“별다른 건 없었는데?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대부분 대답은 내가 했고.”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생각해 봐요.”
“음…….”
생각하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곰곰이 생각하던 장 선생은 곧 고개를 저었다.
“진짜 별일 없었어. 한동열이 선우 커피 안 좋아하는 거 알고 탄산음료 사다 주고, 선우는 그거 마시다가 중간에 화장실 한번 다녀오고. 그게 다야.”
태화는 짧게 인상을 구겼다. 최선우가 커피를 싫어한다는 걸 한동열 그 자식이 아는 게 짜증 났다. 거기에 더해 직접 탄산음료까지 사다 줬다는 말을 들으니 열이 확 올랐다. 이를 으득 물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걸로 에너지를 소비할 때가 아니었다. 태화는 고개를 짧게 까딱이며 인사하고 장 선생을 보냈다.
잠깐 다른 데로 새려던 생각을 끌어와 다시 선우를 쳐다봤다. 문득 선우가 화장실에 다녀왔다는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일이 있었다면 그사이에 벌어졌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게 대체 뭘까 생각하며 선우의 귀밑머리를 뒤로 세심하게 넘겨 줬다. 간질간질한 느낌에 선우가 생긋 웃었으나 태화 눈에는 영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마치 꽃다방에서 살던 때처럼 영혼 따위 어딘가에 팔아먹은 놈 같았다.
빤히 내려다보던 태화는 별말 없이 선우를 차에 태웠다. 시동을 걸지도 않고 선우 쪽으로 몸을 틀어 앉았다. 선우의 납작한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네 인생에 나쁜 건 나 하나로도 충분하다는 말, 기억해?”
선우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잊을 수 없었다. 부친에게 살해당하는 악몽을 꿨던 날, 태화가 해 준 말이었다. 잠결에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이렇듯 태화가 다시 언급하는 걸 보니 진심이었던 모양이었다. 선우는 태화의 손을 끌어와 거친 손바닥에 뺨을 대고 기댔다.
“너한테 있어서 최악은 나여야만 해. 다른 건 내 자리를 차지할 수 없고.”
좋은 말인가……?
헷갈렸다. 선우는 또 한번 제 머리가 나쁜 걸 아쉬워했다. 태화가 하는 말은 뭐든 이해하고 싶은데 가끔씩 어려울 때가 있었다.
“그러니까 최악의 일이 벌어질 거 같으면 나한테 말해. 차악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태화가 말을 마저 이었으나 선우는 대답 대신 커다랗게 뜬 눈만 끔뻑였다. 태화가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
“알아들었어?”
“……조금 어려워요.”
태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두 손으로 선우의 뺨을 뭉개듯 감싸 쥐었다.
“요는,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나한테 다 말하라고.”
이번에도 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태화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가 펴졌다.
하여튼 고집은 더럽게 세지.
“쯧.”
태화는 혀를 차고 선우의 낯을 더욱 짓뭉갰다. 그 바람에 붕어처럼 볼록 올라온 입술을 쫍쫍 빨아 먹었다. 원하는 대답은 듣지 못했으나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어차피 제 뜻대로 될 텐데.
하루라도 섹스를 안 하면 죽을 것처럼 굴던 두 사람이었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쉬기로 했다. 취조실 분위기에 아직도 적응하지 못한 선우가 돌아오자마자 근육통을 호소했기 때문이었다. 둘은 섹스하지 않더라도 평소처럼 한 침대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잤다. 아침잠이 더 많은 선우에 비해 태화는 밤잠이 더 많아서 금세 잠들었다.
태화의 숨이 거칠어지고, 가슴이 크게 씨근대기 시작했다. 선우는 그 품에 안겨 태화의 숨소리에 집중했다.
절대로 멈추지 않는 소리. 제 것과는 달리 힘차고 싱그럽게 뛰는 소리. 살아 있음을 알리는 소리.
선우는 가만히 태화의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박동을 느꼈다. 이게 뛰고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태화가 살아 있기에 제가 살아 있는 거라고, 선우는 제법 거창한 생각까지 했다. 그러니 선우는 태화를 지킬 의무가 있었다. 한참 태화의 심장 소리를 듣던 선우는 돌연 두 눈을 번뜩 떴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태화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침대 옆에 오도카니 서서 태화를 내려다봤다. 뻗은 손을 태화의 눈앞에서 휘휘 저었다. 반응이 없었다. 팔뚝을 꾹 찔러 보기도 했다. 거친 숨소리는 그대로였다. 잠에서 깨지 않았다는 게 확실시되자 선우는 살금살금 방을 나섰다. 방문부터 닫고 옷방으로 향했다. 도둑놈처럼 까치발을 들고 움직였다. 하얀색 패딩까지 챙겨 입자마자 서둘러 현관으로 갔다. 집을 나서기 전에 서재에 들렀다 나오며 태화가 자고 있는 방을 한 번 더 쳐다봤다.
“할 수 있어.”
언젠가 컨테이너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다짐을 작게 읊조리고 집을 나섰다. 아무리 좋은 패딩을 입어도 한겨울은 추웠다. 선우는 덜덜 떨면서도 종종걸음을 떼며 골목을 누볐다. 새벽의 거리는 한산했다. 차도 뜨문뜨문 다녔고, 사람은 아예 없었다. 이 동네는 특히나 밤에 사람이 없었다. 한참을 걷다가 지나가는 택시가 있어 얼른 잡아탔다. 택시 기사가 말을 걸기도 전에 손에 쥐고 있던 쪽지를 건넸다.
“여기로 바로 가지 말고, 10분 정도 걸을 수 있는 곳에 내려 주세요.”
기사는 선우를 힐끔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새벽에 목적지를 쪽지로 주는 데다가, 곧장 가지 말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내려 달라는 요구는 확실히 이상하기는 했다. 잠시 고민하던 기사는 무슨 일이야 나겠냐는 생각으로 차를 출발했다. 선우는 쪽지를 다시 돌려받았다. 쪽지에 적힌 건 선우의 글씨체가 아니었다. 태화의 것은 더욱 아니었다. 선우는 쪽지를 아무렇게나 구겨 버리고 창밖을 내다봤다.
도착한 곳은 부영 시장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공원이었다. 요구대로 택시 기사는 목적지보다 좀 덜 가서 차를 멈췄다. 선우는 나오기 전에 챙겨 온 돈을 내밀고 거스름돈도 착실히 받았다. 거스름돈을 받는 순간부터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태화는 쓰고 싶을 때 눈치 보지 말고 쓰라며 카드는 물론이고 현금까지 두둑이 챙겨 줬다. 하지만 선우는 늘 뭔가를 사기 전에 태화에게 말했다. 허락받는다기보다는 이걸 사겠다고 통보하는 셈이었으나 항상 그랬다.
태화에게 말하지 않고 돈을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선우는 떨리는 손을 애써 잠재우며 거스름돈을 잘 정리해 주머니에 넣었다. 반대쪽 주머니에는 잔뜩 구겨진 쪽지가 있었다. 더 구기기 힘들 만큼 오그라든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걸었다. 어지간한 공원은 새벽에도 사람이 있는데 선우가 걷는 곳은 정말 한산했다. 택시에서 내려 걷는 동안 사람을 단 한 명도 마주치지 못했다. 겨울이라 더 그런 것 같았다. 어쩐지 분위기가 스산했다.
“이런 데는 어떻게 찾은 거지……?”
선우는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 괜스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10분 정도 걷다 보니 공터에 덩그러니 정차된 차 한 대가 보였다. 처음 보는 차였으나 선우는 망설이지 않고 다가갔다. 운전석을 똑똑 두드리자 창문이 곧바로 슥 내려갔다.
“선우, 하이.”
익숙한 인사가 흘러나왔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사람은 탁성모였다. 선우는 성모를 보고 낮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선우, 화장실 가?’
너무 긴장했는지 탄산음료 한 캔에 요의가 느껴져 화장실로 향하는 중에 탁성모가 아는 체를 해 왔었다. 앞을 막아선 성모는 뭐 좋은 일이 있는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선우는 꾸뻑 고개 숙여 인사하고 화장실로 가려 했으나 성모가 굳이 따라와서 다시 앞을 막아섰다. 그제야 선우는 고개를 들어 탁성모를 쳐다봤다.
‘선우야, 내가 재밌는 걸 알아냈는데 말이야.’
선우는 마음이 급했다. 이러다가는 복도에서 오줌을 지릴 판이었다. 얼른 말을 끝냈으면 하는데 성모가 어깨를 툭 부여잡았다.
‘실종 사건 범인.’
귓가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넘어왔다.
‘서태화지?’
탁성모의 입에서 태화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선우는 눈을 번쩍 떴다. 너무 놀라 하마터면 오줌을 지릴 뻔했다. 단전에 힘을 꽉 준 선우는 놀란 신음이 나가려는 걸 막기 위해 이도 꽉 깨물었다. 잇몸이 뭉그러질 만큼 강한 힘이었다. 애써 놀라지 않은 척했다.
‘연기하기는.’
하지만 성모의 눈에는 다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런 것도 경찰이라고, 감 하나는 좋았다. 성모는 선우의 뺨을 가볍게 툭 치고 한 걸음 물러났다.
‘더 자세한 이야기 듣고 싶으면 오늘 새벽 2시까지 여기로 와.’
그렇게 건네받은 쪽지가 지금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선우는 주머니 속에 있는 쪽지를 손톱으로 짓이기며 탁성모를 쳐다봤다. 탁성모는 조금 전부터 계속 웃고 있었다. 돼지 같은 놈이 웃으니 역겹기만 했다.
“타.”
짧은 한마디에 선우는 이를 으득 물고 조수석으로 올라탔다. 차 안에는 히터가 틀어져 있었다. 분명 따뜻한 공기였는데 어쩐지 선우는 몸에 한기가 들었다. 성모가 들입다 뺨부터 만지려고 해서 뒤로 휙 물러났다. 그랬더니 포기하지 않고 허벅지를 주물렀다.
“반신반의했는데. 진짜 온 거 보면 서태화가 범인이 맞긴 한가 봐?”
선우는 입을 반쯤 벌렸다.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오지 않았다면 탁성모가 의심을 거뒀을까?
선택하지 않은 결과라 알 수 없었다. 계속 의심했을 수도 있고,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른 데로 눈을 돌렸을 수도 있었다. 확률은 반반이었지만 선우는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걸 이제야 알았다. 좀 더 현명하게 대처했어야 했다.
난 왜 이렇게 멍청한 걸까?
자책이 들었지만 금방 고개를 저었다. 마냥 불쌍한 척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선우는 주머니 속에 든 손을 움찔거렸다.
“아니에요. 저는 그냥 오해 풀려고 온 거예요.”
“그래?”
선우가 영 성의 없이 하는 변명에도 어째 탁성모는 더 캐묻지 않았다. 오히려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을 거두지 못한 선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쳐다보자 탁성모는 귀엽다는 듯이 피식 웃다가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냈다. 은색의 자그마한 물건은 녹음기였다. 달칵, 누르는 소리에 맞춰 누군가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 지금 저랑 한 대화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 응? 어떤 거 말씀이신지?
- 옆집 정육점, 작년 연말에 문 닫은 적 있다고 하셨잖아요.
- 아. 어, 예. 그때 크리스마스이브랑 크리스마스 당일 둘 다 쉰다고 해서 제가 대목인데 왜 이때 쉬냐고 물어봤었지요. 내 기억으로는 그때 아버지한테 간다고 그랬던 거 같은데…….
녹음기 속 인물은 성모와 태화 정육 옆 떡집 양 사장이었다. 선우는 좋아하는 바람떡을 사러 떡집에 종종 간 적이 있어 양 사장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알았다. 성모와 양 사장이 언제 이런 대화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문제는 대화 내용이었다. 선우는 작년 크리스마스가 무슨 날이었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작년 크리스마스이브는, 지영환이 죽은 날이었다.
- 그리고 올해는 또 언제 쉬었다고요?
- 7월 달에 한 번. 정확한 날짜는 기억 안 나는데 7월 중순이었던 거 같아요. 그때도 아버지 뵈러 간다 했고.
7월 중순?
선우는 기억을 더듬어 봤다. 곧바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태화가 외박 후 캐리어를 무겁게 들고 왔던 날. 그날 역시 선우에게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멀쩡한 믹서기를 버리고, 창고에 있던 연육기의 존재를 알게 된 날인 까닭이었다.
달칵.
탁성모는 거기서 음성 파일을 멈췄다.
“작년 12월 24일은 지영환이 사라졌다고 추정되는 날이고, 올 7월 중순에는 여주 쪽에서 비슷한 양상의 실종 사건이 일어났었어. 선우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이 두 사건이 연관이 있을 거 같아?”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물론 우연일 수 있지.”
선우가 대답했지만, 성모는 남의 말은 듣지도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근데 우연이라기에는 실종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네가 하필이면 서태화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야. 나는 이렇게 생각해. 서태화가 실종 사건의 범인이고 네가 그 일에 가담했다고. 어떠니, 내 추리력?”
추리력은 무슨.
선우는 점점 사타구니 사이로 들어오는 탁성모의 손을 밀어 내며 도리질 쳤다.
“엉터리예요.”
“엉터리? 엉터리……. 너 말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가령 우리 용지서장이라든지, 검찰 쪽이라든지, 언론이라든지.”
“원하는 게 뭐예요?”
선우는 제 허벅지를 주물럭거리는 손을 억지로 떼 저쪽으로 밀쳤다. 표정은 단단했고, 눈빛은 반들거렸다. 처음 보는 모습에 성모는 놀랍다는 식으로 눈썹을 들썩였지만, 곧 비식거리며 웃었다. 네가 그렇게 발악해도 어차피 내 손바닥 안이라는 듯한 시건방진 눈빛이었다. 성모는 다시금 선우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내가 너한테 원하는 게 뭐 있겠냐.”
“원하는 게 없으면 진즉 수사 진행했겠죠. 탁 팀장님, 출세하고 싶어 하셨잖아요.”
선우는 성모를 똑바로 바라봤다. 동그란 눈에 반짝 빛이 들었다. 자동차 조명까지 전부 꺼 놔서 어두컴컴한데도 선우의 눈만큼은 확실하게 빛났다. 어쩐지 어떠한 힘이 깃든 눈으로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실실 웃던 탁성모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쯧, 혀를 차더니 선우 쪽으로 몸을 완전히 돌려 앉았다.
“아, 그래! 말이 이렇게 빨리 통할 줄 몰랐다, 어! 아, 그냥 한번 대 주라고.”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선우는 미간을 엷게 좁혔다. 어느 정도 예상하던 요구 사항이었으나 막상 실제로 들으니 기분이 더러웠다. 사람을 앞에 두고 대 주느니 마느니 하는 말을 하는 게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은 이제 창놈이 아니었다. 꽃다방에서 남의 자지나 빨아 주는 창놈이 아니라, 태화 정육에서 성실히 제 몫의 일을 해내는 일꾼이었다. 그런데도 성모 눈에는 자신이 아직도 면도방 남창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야, 너 온갖 비싼 척은 다 하면서 아랫구멍은 절대 안 쓰는 것처럼 굴더니, 그날 보니까 서태화랑 존나 하더라?”
“언제요……?”
시침을 뚝 떼고 묻자 탁성모는 살짝 당황한 낯빛을 했다.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성모는 곧 여유를 되찾고 비식거렸다.
“아, 한동열이 네가 살던 집에 도청기 설치했었거든. 그걸로 다 들었어, 인마. 아주, 서태화 그 새끼가 박아 주니까 좋아 죽더만. 나랑 한동열이랑 네 신음 들으면서 같이 딸 쳤다, 야.”
성모는 없는 말까지 지어내며 장황하게 입을 놀렸다. 실상 선우의 신음을 들으며 자지를 만지작거린 건 저 하나였지만 사실대로 말하기에는 영 자존심이 상해서 거짓말을 조금 보탰다. 동열이 없기에 망정이지 만약 탁성모의 말을 들었더라면 선배고 뭐고 당장이라도 아구창을 날렸을 게 분명했다. 탁성모는 멀쩡한 턱을 괜히 슥슥 문질렀다.
도청기까지 설치한 사실을 밝히고도 당당한 모습에 선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다 알고 있던 사실인데도 몰랐던 척,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말이 안 나온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대신 녹음 파일 먼저 주세요.”
선우가 녹음기를 가져가려 팔을 쭈욱 뻗자 탁성모가 빠르게 몸을 틀었다.
“에이, 그건 안 되지. 이거 받고 그냥 토끼려고?”
“제가 갈 데가 어딨어요.”
“그래도 안 돼. 씹 뜨는 게 먼저야.”
성모는 단호했다. 얼추 예상한 일이라 선우는 별수 없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 패딩부터 벗고.”
선우는 순순히 성모의 말을 따랐다. 패딩을 벗자마자 탁성모는 녹음기를 센터 콘솔에 쏙 집어넣고 선우에게 다가갔다. 뭐가 그리 급한지 무작정 주둥이부터 들이댔다. 다급하게 옷 속을 파헤쳐 들어오는 손길에 선우는 윽 소리를 내며 탁성모를 밀어 냈다. 처음에는 밀리지 않던 탁성모였으나 선우가 온 힘을 다해 밀쳐 내자 마지못해 뒤로 물러났다.
“아, 왜!”
“입으로 먼저요.”
“응?”
“먼저 입으로 해 드릴게요. 제대로 안 세우면 힘들어요.”
“응, 어, 그래. 입으로 먼저.”
그제야 성모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다급히 끄덕였다. 혼자 기대감에 가득 차서는 벌써 오두방정을 떨었다.
선우는 아랫입술을 꾹 눌러 다물며 성모에게로 다가갔다. 탁성모는 창문에 등을 대고 편히 기대앉았고, 선우는 천천히 성모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연기가 아니었다. 정말 떨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수전증이라도 온 것처럼 지퍼 하나 잡는 것도 힘들었다. 잔뜩 긴장한 듯 어깨를 오므린 채 파르르 떨자 위에서 낄낄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선우는 할 수만 있다면 뺨이라도 한 대 치고 싶었다. 성모의 뺨은 물론이고 제 뺨도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갈기고 싶었다.
최선우, 정신 똑바로 차려.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제발.
속으로 주문을 외듯 자신에게 말을 걸어 가며 심호흡했다.
“정신 차려.”
“응?”
성모가 물었지만, 선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눈앞의 상황에만 집중했다. 긴장감에 가물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여기서 실수하면 저는 물론이요, 태화에게까지 문제가 생겼다.
나만 잘하면 돼…….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나만 할 수 있어. 나만, 나만 아저씨를 도울 수 있어.
입 안으로 같은 말을 연신 굴렸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할 수 있다’라는 외침을 꿀꺽 삼켰다. 덩어리진 게 식도를 타고 내려가 배꼽 저 아래에 들어차는 게 느껴졌다. 순간 선우는 안광이 스민 눈을 뜨며 주먹으로 냅다 탁성모의 앞섶을 갈겼다.
“악!”
단말마와도 같은 소리가 나왔다. 선우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 번 더 옹골찬 주먹질을 했다. 낭심을 콱 쥐어박자 차 안으로 성모의 비명이 왁왁 떠다녔다.
“아, 억……. 야, 너, 씹……!”
성모는 본능적으로 몸을 둥글게 말며 바들바들 떨었다. 선우는 성모를 구경할 새도 없이 녹음기와 패딩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녹음기는 주머니에 넣고 패딩은 둘둘 말아 옆구리에 꼈다. 태화가 백화점에서 사 준 것이었다. 무슨 옷 하나에 100만 원을 호가하냐며 선우가 놀라는데도 태화는 다른 색으로 무려 두 벌이나 더 사 줬다. 녹음기도 녹음기였으나 태화가 사 준 패딩도 놓고 올 수 없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어느 방향인지도 모른 채 그저 태화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달리기 시작했다.
“야, 최선우! 씹빨, 어윽…….”
뒤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선우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런 순간을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운동화를 신고 나온 스스로가 대견했다.
제대로 길이 닦인 곳이 아니어서 바닥에 돌멩이가 넘쳐 났다.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던 선우는 발밑에 뭐가 있는지 보지도 못하고 뛰다가 결국 돌부리에 걸려 풀썩 엎어졌다. 손바닥이며 무릎이며 다 갈린 게 느껴졌지만 아파할 틈도 없었다. 선우는 다시 벌떡 일어나 달렸다. 그때 뒤에서 성모가 소리치는 게 들렸다.
“야! 내가 그거 복제 파일 하나 안 만들어 놨을 거 같냐!”
악에 받친 외침을 들은 선우는 순간 끼익 소리가 날 정도로 우뚝 멈춰 섰다. 차오르는 숨을 고르지도 못하고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뜨문뜨문 끊기는 움직임으로 겨우 돌아보자 저 멀리서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는 탁성모가 보였다. 성모는 꼬리뼈를 툭툭 치면서도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거리가 점점 좁혀질수록 선우의 어깨가 심하게 떨렸다.
저 말이 진짜일까, 아닐까……?
알 수 없었다. 사실이 아니라면 다행이겠으나 그것만 믿고 다시 도망가기에는 위험이 너무 컸다. 만약 탁성모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든 복제 파일까지 손에 넣어야 했다. 선우가 갈팡질팡하는 사이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온 성모는 씨팔, 욕을 내뱉더니 기다렸다는 듯 선우의 머리채를 틀어쥐었다. 중심을 잃은 선우의 손에서 패딩이 툭 떨어졌다.
“윽……!”
선우는 머리채가 잡힌 순간에도 패딩이 더러워질까 봐 얼른 주우려고 했으나 불가능했다. 발치에 나뒹굴던 패딩이 성모의 발에 짓밟혔다.
“안 돼, 아!”
“씨팔년아! 씨발, 네가 날, 내 자지를, 씹!”
성모는 늘 그랬던 것처럼 선우의 뺨을 내리쳤다. 평소보다도 더 힘이 실린 매질이었다. 자지를 빨 때 이를 세우거나, 헛구역질할 때마다 할 맛 떨어진다면서 때리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다섯 대 정도 맞았을 땐 정신이 어찔해졌다. 귀싸대기를 정확히 얻어맞자 선우는 삐이이- 하는 이명을 들었다. 이대로 귀머거리가 되나 싶었다. 그래 봤자 병신이었다.
지금도 병신인데 귀 하나 머는 것쯤 크게 상관있을까…….
선우는 턱을 타고 흐르는 피를 스윽 닦고 탁성모를 노려봤다.
“너한테는, 윽, 죽어도 다리 못 벌려.”
침과 피가 고여 끓는 발음으로도 끝까지 말했다. 그 말이 탁성모를 더 열받게 했는지 이번에는 주먹이 날아왔다.
“씨발년이, 진짜!”
탁성모가 때리는 동안 선우도 가만히 맞고만 있지는 않았다. 아무렇게나 주먹을 휘두르고 발로 걷어찼다. 세 번 주먹질하면 한 번 맞을까 말까 할 정도로 형편없는 실력이었으나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꽃다방에서 살던 시절이었다면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다. 어째 맞으면서도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통쾌한 마음에 피가래를 뱉어 가면서도 끝까지 발악했다. 그 바람에 더 맞았다.
“어차피 이놈 저놈 좆이나 빨고 살았으면서 인제 와서 왜 고상한 척하고 지랄이야, 이년아! 씨발, 네가 뒷구멍을 안 쓰면 또 몰라. 서태화 그 흉악한 범죄자 새끼하고는 몇 번을 붙어먹어 놓고 나는 왜 안 되는데, 왜!”
“서태화랑 나는, 서로 사…….”
“지랄을 해라, 아주! 씨발, 너 오늘 잘 걸렸다. 무릎 꿇고 싹싹 빌 때까지 존나게 따먹어 줄……. 억!”
무언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뺨에 닿았던 성모의 주먹이 툭 떨어졌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두 팔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던 선우는 손끝에 닿는 게 없어지자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순간 헉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성모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건 태화였다.
태화의 손에는 검은색 헬멧이 들려 있었다. 둥그런 것에서 무언가 끈적이는 게 뚝뚝 떨어지는 것도 같았다. 선우는 이게 전부 무슨 일인가 싶어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바닥에 처박혀 있는 탁성모가 보였다. 성모는 머리를 싸맨 채 뒹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태화를 본 선우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털퍼덕 주저앉았다.
“아저씨…….”
나직이 불러 봤지만, 태화의 시선은 선우에게 있지 않았다. 태화는 제 앞에 쓰러진 성모만 멀거니 내려다봤다. 무감하게 뜨인 눈에서 살기가 읽혔다. 순간 뻑! 소리가 났다. 같은 소리는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계속해서 반복됐다. 눈앞으로 피가 튀었다. 선우는 제 눈두덩이에서 나는 피인 줄 알고 슥슥 비벼 봤으나 그건 분명 태화의 발치에서 흩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태화는 손에 쥔 헬멧으로 탁성모의 대가리를 뻑뻑 내리치는 중이었다. 살점이 뭉그러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계속 났다. 피가 튀는 축축한 소리도 섞였다. 탁성모는 이미 한참 전에 정신을 잃었는데도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후…….”
거친 숨소리 사이로 사람의 몸에서 나면 안 되는 소리가 난무했다. 선우는 눈앞에서 탁성모를 곤죽으로 만드는 태화를 뻔히 보고만 있었다. 마지막으로 질퍽이는 소리 끝에 태화는 허리를 펴고 곧게 섰다. 들고 있던 헬멧을 툭 내려놓고 선우를 슥 쳐다봤다.
선우는 급하게 숨을 집어삼켰다. 조금 전까지 사람을 죽도록 팬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초연한 눈빛이었다. 큰 숨을 씨근덕거리는 걸 보면 그저 거친 운동을 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선우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태화의 말을 무시했으니까.
태화는 무슨 일이 있건 말하라고 했으나 선우는 말 한 마디 없이 탁성모를 만나러 왔다. 그래 놓고서는 일을 있는 대로 망쳐 버렸다. 태화가 자신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매질을 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긴장한 건 아니었다. 맞는 거야 익숙했다. 아프기는 하겠지만 잘못을 했으니 맞는 게 당연했다.
다만, 선우는 태화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그것만은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 저를 내려다보는 태화의 눈빛이 너무 싸늘해서, 선우는 울고만 싶어졌다. 침인지 피인지, 입술 밖으로 질질 흐르는 걸 닦는 척하며 얼른 눈두덩이도 세게 문질렀다. 따갑고 아팠지만, 볼썽사납게 우는 꼴을 보이는 것보다야 나았다.
그때까지도 가만히 선우를 보고 있던 태화가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선우가 낯을 아무렇게나 벅벅 닦는 걸 보더니, 손목을 홱 잡아챘다. 선우는 때리는 줄 알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
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해서 입을 꾸욱 다물고 있는데 돌연 몸이 붕 떴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자 선우는 눈을 번쩍 떴다. 졸지에 태화에게 코알라처럼 매달리게 됐다. 태화는 선우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엉덩이를 받쳐 안았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눈높이가 바뀌었다. 어느새 태화보다 한 뼘 위에 있게 된 선우는 침을 꼴깍 삼키며 그를 내려다봤다.
“꽉 잡아.”
선우는 서둘러 태화의 목덜미를 바짝 끌어안았다. 다리에도 힘을 줘서 두꺼운 허리를 감쌌다.
이렇게 껴안고 때리려나?
맹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태화가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풀었다. 정말 때리려는 모양이었다. 미움받을 바에는 차라리 맞겠다고 다짐한 게 불과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무서웠다. 몸이 바짝 굳었다. 저 손이 얼마나 매운지 경험으로 알고 있는지라 더 그랬다. 콧잔등이 찌그러질 만큼 눈을 세게 감고 손이 날아들길 기다리고 있는데 뺨으로 보드라운 게 닿았다.
이게 뭔가 싶어 천천히 눈을 떴다. 태화는 소매 끝으로 선우의 낯을 닦아 주고 있었다. 선우가 좋아하는 보들보들한 감촉의 목 폴라 티셔츠였다. 옷이 아깝지도 않은지 태화는 선우의 뺨과 눈두덩이에 묻은 피를 부드럽게 문질러 닦았다. 입술에 엉겨 붙은 피는 직접 손끝으로 닦아 줬다. 맞아서 퉁퉁 부은 입술을 눈에 담던 태화는 참아 왔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실망했을까…….
선우가 걱정하는 사이 태화가 시선을 진득이 맞춰 왔다.
“잘했어.”
한 마디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마디가 태화의 입에서 나왔다. 선우는 자신이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머리를 너무 많이 맞아서 잘못됐나? 아니면 귀가 망가졌나?
생각하며 태화를 바라보는데 그가 싱긋 웃고 있었다. 제대로 들은 게 맞는가 보았다. 예상치도 못한 칭찬이었다. 정말 상상도 못 한 말이라 선우는 입술을 벙긋거리며 당황하다가 곧 눈물을 글썽였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 게 줄줄 흐르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태화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 너무, 흐윽……. 너무 무서웠어요……. 그래도 아저씨 지키려고, 나 진짜 노력, 끅, 했어.”
“그러니까 잘했다고.”
“아저씨가 나 미워할까 봐, 흑……. 그것도 걱정, 흐으…….”
“씨발, 너는 지금까지 나랑 살면서 뭘 본 거야? 내가 너 미워할 수 있을 거 같아? 너 머저리야?”
다소 거친 말이었으나 선우는 그것마저도 좋았다. 태화가 말하고 있었다.
나는 너를 미워할 수 없다고. 그것도 모르는 머저리냐고.
울음소리가 점점 더 짙어졌다. 누가 보면 태화가 때렸다고 오해할 정도였다. 머저리라서 이러는 모양이라고, 선우는 엉엉 울며 태화의 뺨으로 제 뺨을 비볐다. 문득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패딩이 보였다. 하얀색 패딩은 이제 하얀색이 아니었다. 흙이 여기저기 묻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도 보기 싫게 튀어 있었다. 태화가 제게 사 준 옷인데 쓰레기처럼 뒹굴고 있는 걸 보자니 더 서러워져서 애처럼 목 놓아 울었다.
“저거, 흑, 패딩, 끅…….”
“패딩?”
태화는 선우의 시선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봤다. 지저분해진 패딩을 보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이놈은 이런 순간에도 패딩 타령이나 하니 우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선우는 얇은 니트만 입고 있었다. 겁도 없이 이런 데를 오면서 옷 하나도 따뜻하게 챙겨 입지 않은 꼴을 보자니 순간 열이 확 올랐다. 그렇다고 애한테 화를 낼 순 없었다. 태화는 한숨 비스름한 웃음을 뱉으며 선우를 조심스레 내려놨다.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선우에게 입혔다. 선우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저씨도, 추울 건데, 흐으…….”
“지랄하지 말고 입으세요.”
태화가 약하게 갈기는 딱밤을 맞고서야 선우는 꾸물꾸물 움직이며 점퍼를 입었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시원하고, 포근한 향기. 태화의 온기마저도 느껴져서 얼었던 몸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몸 안에 돌던 한기가 천천히 가셨다.
고 박사와 장 선생이 왔다. 새벽인데도 태화가 전화하자 두 사람은 한달음에 달려왔다. 태화는 선우를 장 선생 차에 태워 놓고 두 사람과 함께 뒷정리했다. 혹시 선우의 피가 남아 있을 법한 반경의 흙을 다 파내 포대에 담았고, 탁성모 역시 다른 포대에 욱여넣었다. 매번 캐리어만 쓰다가 오랜만에 포대를 쓰려니 영 귀찮았다.
문득 처음 포대를 쓴 날이 떠올랐다. 별로,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언제 적 일이었지?
태화는 주변을 정리하며 생각에 잠겼다. 어릴 때부터 사냥을 배웠다. 특이한 건 사냥의 목표물이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양부인 원식의 좆같은 취향 덕이었다. 총 다루는 법을 처음 배운 것도 어릴 적이었고, 그때 칼 쓰는 법도 함께 배웠다. 피도 안 섞인 형 서재화는 총을 좋아했고, 태화는 칼을 더 많이 쥐었다. 한국 땅에서 쓰지도 못할 거, 좋다고 총만 만지작거리던 서재화가 멍청해 보이기도 했다.
“이 새끼는 바로 처리할까?”
고 박사가 자루에 든 성모를 가리키며 물었다. 명색이 의사라는 놈이 사람을 처리하느니 마느니 잘도 말했다.
“죽이지 말고. 거기, 거기다 갖다 놔.”
불분명한 말임에도 고 박사는 제대로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화는 차 트렁크에 실리는 성모를 멀거니 쳐다봤다. 사람을 처음 죽인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원식은 사람이, 사람이 아닌 고기로 보이도록 두 아들을 교육했다. 서원식이 사람을 죽이는 걸 목격하는 동안 서재화는 좋다고 시시덕거렸고, 태화는 잠들었다. 기면증을 앓은 것이었다. 기면증이 사라진 게 바로 열여덟 살 때였다.
처음으로 직접 사람을 죽였을 때.
“아저씨……!”
저쪽에서 차랑차랑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태화는 포대에서 눈을 떼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 선생의 차 안에서 선우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이유 없이 그냥 불러 봤는지 별다른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태화도 별말 없이 선우를 바라봤다. 사라졌던 기면증이 다시 도졌던 날이 떠올랐다.
작년 12월.
최선우를 만난 날이었다.
“씹.”
태화는 욕을 작게 뇌까리며 피식 웃었다. 거리가 있어 선우에게는 욕이 들리지 않을 터였다. 선우는 뭣도 모르면서 좋다고 태화를 따라 웃었다. 역시 최선우 저게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빌어먹을 기면증이 좆같아도 별수 없지. 최선우가 곁에 없는 것보다는 병신처럼 픽 쓰러지는 게 나으니까.
탁성모는 고 박사가 싣고 갔고, 태화는 타고 왔던 하야부사를 몰고 돌아갔다. 선우는 장 선생의 차로 이동했다. 태화와 같은 차를 타고 가면 좋으련만 따로 가는 게 낫다는 그의 판단에 떨어지게 됐다. 잠깐 떨어진 사이에도 보고 싶어서 시선이 자꾸 창밖으로 향했다.
“태화가 그렇게 좋아요?”
다 터져서 엉망이 된 입 안 무른 살을 혀로 꾹꾹 눌러 가며 밖을 보고 있는데 뜬금없는 질문이 날아왔다. 선우는 고개를 돌려 장 선생을 봤다.
장 선생은 차갑게 생긴 인상과는 달리 푸근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취조실에서 처음 봤을 때는 속엣말로 너무 악당처럼 생겨서 걱정했는데 선우에게 잘해 줬다. 다만, 경찰들에게는 어림없었다. 말도 안 되는 걸 물고 늘어지면 조목조목 따져서 반박했고, 선우에게 유도 신문이라도 해 오면 불법이라며 딱 잘라 냈다. 때문에 동열은 골머리를 썩였으나 덕분에 선우는 세 번의 참고인 조사를 모두 편하게 마칠 수 있었다.
“응? 태화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장 선생이 한 번 더 물었다. 잠깐 장 선생의 인상에 대해 생각하던 선우는 아, 소리 내며 정신을 끌어왔다.
“제가 아저씨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태화한테 아저씨라고 불러요? 그 자식 속 좀 끓겠네.”
장 선생이 키들거리며 웃었다. 선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저씨한테 아저씨라고 부르는 게 이상한 일인가 싶었다.
“제가 아저씨 좋아하는 거 티 많이 나요?”
“티가 많이 나냐고요?”
“네.”
“티가 나는 게 아니라 그냥 온몸으로 티를 내던데.”
“제가요?”
“예. 최선우 씨가요.”
선우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골몰했다.
그렇게 티가 많이 났나?
평소 태화에게 하던 행동들을 되짚어 봤으나 크게 마음을 드러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게다가 장 선생은 용지서에서만 만나서 저들의 일상은 알지 못했다. 대체 어떤 걸 보고 티가 난다고 하는지 감이 안 잡혔다. 딱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지난번에 조사가 끝난 후 용지서에서 나와 태화를 보고 아저씨! 하고 반갑게 불렀던 기억이 전부였다.
“태화도 최선우 씨 많이 좋아하는 거 같던데.”
“아저씨가요? 아닐걸요. 아, 좋아하기는 하는데 좀 다르게 좋아하는 걸 거예요.”
“다르게? 어떻게요?”
“아저씨는 저를 개라고 생각해요.”
그 말을 하자마자 장 선생이 크게 폭소했다. 어찌나 크게 웃던지 선우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한참 껄껄 웃던 장 선생은 웃느라 맺힌 눈물을 닦으면서도 작은 웃음소리를 계속 냈다.
“이래서 서태화가 또라이라고 했구나.”
장 선생은 혼잣말인 양 중얼거린다는 게 선우의 귀에 다 들렸다. 선우는 눈을 설떴다. 맨날 제게 또라이 타령을 하더니 남에게도 저를 두고 또라이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자기도 엄청난 또라이면서…….
선우는 입술을 비죽이 내밀다가 찢어진 입가가 아파 윽 소리를 냈다. 이후로 선우와 장 선생 사이로 가벼운 대화가 오갔다. 태화 성격에 아무리 좋아하는 개라도 집에 그렇게 오래 들일 놈은 아니라는 말을 들었을 땐 선우의 입이 귀에 걸렸다. 상처 부위가 아프고, 피가 찔끔 새어 나와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선우는 가게까지 태워다 준 장 선생에게 씩씩하게 인사했다. 집으로 올라갔는데 아무도 없었다. 창고 문이 열려 있길래 태화가 먼저 도착했나 싶었으나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나갈 때와는 달리 집 안 불이 훤히 켜져 있었고, 침대 위 이불은 아무렇게나 어질러져 있었다. 태화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불 정리 하나는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었는데 무슨 일인가 몰랐다.
나갈 때보다 좀 더 어수선해진 집을 스윽 둘러보고 있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우는 눈을 반짝이며 얼른 현관문으로 다다다 뛰어갔다. 문이 열리자마자 앞뒤 재지 않고 곧장 몸을 날렸다. 태화의 품 안으로 정확히 안착했다.
워낙 와락 안기는 바람에 태화는 두어 걸음 물러나다가 하마터면 계단에서 다 같이 구를 뻔했다. 다행히 중심을 잡아 서자 선우는 태화를 더욱 꼬옥 껴안았다. 온몸이 얼음장 같았다. 만지는 곳마다 냉기가 느껴져서 선우는 서둘러 태화의 뺨을 감싸 쥐었다. 11월에 헬멧도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오느라 뺨도 벌겋게 상기돼 있었다.
“안 추웠어요?”
선우는 묻자마자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멍청이 같은 질문이었다. 추워서 얼어붙은 사람에게 안 추웠냐니,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고. 선우는 스스로를 질책했다. 태화는 선우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곤죽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얻어터져 놓고서는 제 눈치를 살살 보는 걸 말없이 쳐다보다가 오른쪽 뺨에 쪽 입을 맞췄다. 그나마 덜 부어오른 곳이었다.
“존나 추웠어.”
태화는 그렇게 말하며 선우에게 몸을 더욱 밀착했다. 저보다 한 뼘 이상 작은 놈의 품을 파고들 듯 등을 둥글게 말았다. 마른 어깨에 뺨을 묻고 잠깐 숨을 고르자 등허리를 토닥토닥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고작 그 손길 몇 번에 얼음처럼 굳었던 몸으로 비로소 따끈따끈한 열이 올랐다.
“일단 씻자.”
두 사람은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몸에 물이 닿자마자 선우가 아……! 소리 냈고, 태화는 욕을 짓씹었다. 욕조에 나란히 기대앉아 몸을 닦으면서도 태화는 욕지거리를 감추지 못했다. 왜 성모를 찾아갔으며, 무슨 말을 들었는지, 탁성모가 어떤 요구를 해 왔는지. 자초지종을 다 털어놓자 태화는 욕도 아깝다는 듯이 숨을 깊게 골랐다.
“애가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낯짝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거야?”
그 말을 시작으로 너는 어떻게 다 터졌는데도 예쁘냐는 낯간지러운 말까지 나왔다. 선우는 제 상처들을 감히 만지지도 못하고 씨팔, 씨팔, 욕을 뇌까리는 태화를 빤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푸스스 웃었다. 태화가 저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던 장 선생의 말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또 연인으로서 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욕조에 둥둥 떠 있는 거품처럼 가슴께가 몽글몽글 차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태화가 손을 한번 톡 댈 때마다 마음속 거품이 톡 터져서 온몸이 간지러웠다.
“뭐 좋다고 실실 웃어.”
태화가 입술을 톡 쳤다. 그 바람에 아픈 소리가 튀어 나갔으나 선우는 그래도 좋다고 헤실헤실거렸다.
평소보다도 더 긴 목욕 시간을 가지고 나와서는 상대방만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태화는 선우의 머리카락을 꼼꼼히 말려 줬고, 그동안 선우는 태화의 몸을 뽀송하게 닦아 줬다. 선우 역시 태화의 머리를 말려 주려고 했지만, 그가 훌쩍 방을 나가 버렸다. 얼마 뒤 들어왔을 때는 이미 옷을 전부 챙겨 입은 모습이었다. 손에는 구급상자가 들려 있었다.
“이리로 와.”
태화는 침대 위에 앉아 제 앞자리를 툭툭 쳤다. 선우가 옷을 입으려고 하자 씁 소리를 냈다.
“그냥 와.”
엄한 목소리에 선우는 우물쭈물하다가 나체로 태화 앞에 앉았다. 태화는 옷을 다 입고 있는데 저만 벗고 있는 게 부끄러웠다. 다행히 손으로 슬며시 앞섶을 가리는 건 뭐라고 하지 않았다. 태화는 구급상자에서 약을 꺼내 선우의 낯에 바르기 시작했다. 이건 뭐, 온갖 데가 멍 들고 터져서 그냥 마구 문질러 줘도 될 판이었다. 태화는 쯧 혀를 차면서도 손에 최대한 힘을 풀고 살살 발랐다.
선우는 움찔움찔 움직이는 입꼬리를 잡아 내리느라 용을 썼다. 아파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거인처럼 커다란 사람이 혹여 제가 아플까 봐 조심조심 약 바르는 모습이 웃겼다.
“아……!”
선우는 괜스레 아픈 척 소리를 냈다. 인상을 꾹 찡그리기까지 했는데 태화는 속지 않았다.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태화는 고개를 삐뚜름히 기울인 채 선우를 쳐다보다가 찢어진 입술을 예고도 없이 꾸욱 눌렀다. 이번에는 정말 있는 힘껏 세게 누른 탓에 선우가 펄쩍 뛰었다.
“아! 진짜 아파요, 아아……!”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었다. 선우는 정말 아프다는 듯이 눈살을 콱 찌푸렸다.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태화를 밀어 내느라 아랫도리가 덜렁거리는 것도 신경 쓰지 못했다. 그 틈에 태화가 선우의 좆 끝을 검지로 톡 튕겼다. 아기 딸랑이처럼 잔뜩 풀이 죽은 게 덜렁 솟아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선우는 다시 앞섶을 가렸다.
아주 가지가지 하는 모습에 태화는 픽 웃으며 제가 뭉그러뜨렸던 선우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아플까 봐 세게 빨지도 못하고 부드럽게 뽀뽀만 하고 물러났다.
선우는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며 태화를 봤다. 태화의 입술이 약으로 번들거렸다. 어쩐지 입맞춤한 티를 내는 입술이 보기 좋았다. 선우는 아직도 입술이며 온 낯짝이 아팠지만 침을 꼴깍 삼키고 태화에게 다가갔다. 태화의 뺨을 찰싹 부여잡고 입술을 쫍쫍 빨았다. 보기 싫게 찢어진 입술이 아파도 참았다. 처음에는 뒤로 주춤 물러나던 태화도 어느새 선우의 뒷덜미를 가볍게 감싸 당겨 왔다.
“으응…….”
선우가 낮게 앓는 소리를 내자 태화는 미간을 엷게 구겼다.
얘는 분명 뭘 알고 이러는 것이다.
입술을 맞댄 순간에 이런 소리를 흘리면 상대가 미칠 거라는 걸 알고 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요부처럼 굴 수 없었다. 문제는 아직도 키스가 서툴다는 것이었다. 그저 태화가 쑤시면 쑤시는 대로, 얽으면 얽는 대로, 선우는 낑낑 앓는 소리만 내며 혀를 내주었다.
이런 놈이 요부일 수 있나?
태화는 여우 같으면서도 곰 같은 최선우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마로 핏줄이 바짝 서고, 관자놀이가 뜨끔뜨끔 질리는 게 느껴졌다. 선우를 번쩍 안아 들어 허벅지 위에 앉혔다. 방금 씻고 나와서 더 말랑하고 따끈한 살결을 주물럭거리며 목덜미를 빨았다.
“아……!”
선우의 신음을 들으며 태화도 이를 악물었다. 각진 어깨에 이마를 맞댄 채 숨을 골랐다. 아랫도리가 둔하게 뻐근했다.
이대로 한번 할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저 작은 엉덩이를 손에 꽉 쥐어 보고 선우의 어깨선을 따라 쪽쪽 입을 맞춰 올라갔다. 목덜미를 지나 입술까지 도장을 찍고 고개를 들어 선우를 봤다. 뭘 했다고 말간 얼굴로 열기가 홧홧하게 드러나 있었다. 영 정신이 없어 보였다. 광대에 시퍼렇게 든 멍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두드렸다.
“얼굴에 자신 있는 거 알겠는데, 그만 좀 다쳐 와.”
“나는 아저씨 얼굴이 엉망이 됐으면 좋겠는데.”
“뭐?”
선우는 반쯤 풀린 눈을 하고서 태화를 내려다봤다.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 보기 싫은 흉터가 가득해서 사람들이 아저씨를 징그러워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더니 손끝으로 태화의 낯을 하나하나 더듬거렸다. 이마부터 시작해서 턱 끝까지, 귓불도 빼놓지 않고 매만졌다. 태화는 가만히 선우에게 얼굴을 내주고 손길을 느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지나는 자리마다 옅은 전기가 올랐다.
“이 세상에서 아저씨를 사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나 혼자였으면 좋겠어…….”
선우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들릴 듯 말 듯 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그 매가리 없는 목소리가 태화에게는 우레처럼 크게 들렸다. 태화는 웃지도, 인상을 구기지도 않았다. 그저 짙은 눈으로 선우를 멀거니 올려다봤다. 제 뺨을 간질이는 손을 덥석 잡아채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최선우의 향을 느꼈다. 평생 맡아 본 적도 없는, 젖무덤의 단내가 났다. 그제야 비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넌 어떻게 나랑 똑같은 생각만 하는지. 네가 예뻐서 좋지만 동시에 네가 추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 스스로 거울 보기가 겁날 만큼 추해져서 방구석에 처박혀 오들오들 떨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럼 난 네 앞에 가서 못난이라고 놀릴 텐데. 서러워서 엉엉 우는 널 끌어안고 웃을 텐데.
“빌어먹게.”
예고 없이 튀어나온 거친 단어에 선우가 움찔 떨었다. 태화는 손바닥에서 입술을 떼며 감았던 눈을 떴다. 시야 가득 최선우가 들어찼다. 싱긋 웃자 언제나처럼 선우도 따라 웃었다. 화사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빌어먹게, 넌 왜 이다지도 예뻐서는.
*** ㄹㅂㅌㄹ 공금임 ***
한동열은 오늘도 혼자 심각했다. 최근 들어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실종 사건에 관한 생각만 했다. 더 정확하게는 최선우를 서태화에게서 어떻게 안전히 구해 내느냐 하는 생각과 서태화를 보기 좋게 물 먹일 생각이 온 머릿속을 지배했다. 잠도 안 자고 사건만 들여다볼 때도 많아서 꼬빡 24시간을 서태화와 최선우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다.
“아무 예고도 없이 대뜸 변호사부터 선임한다.”
조금 전부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중얼거리기 바빴다. 이번에는 참고인 조사 시 매번 선우와 함께 들어오던 변호사에 관한 의문이었다. 뒷조사해 보니 그 사람은 정말 변호사가 맞았다. 명함까지 받고도 의심스러워서 뒤를 캐낸 게 헛수고였다.
이상한 건 서태화가 선우에게 변호사를 붙였다는 점이었다. 일반인이라면 선뜻 하지 못할 발상이었다. 용의자 신분으로 조사받는 거면 몰라도 참고인 조사에서 변호사를 쓰는 사람은 드물었다. 생각해 보면 변호사도 좀 이상했고, 입을 꾸욱 다물고 있는 최선우도 이상했다. 선우는 정말 한 마디도 안 해서 속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제 더는 참고인 조사를 핑계로 선우를 불러낼 수도 없었다.
“선배님은 뭘로 드실 거예요?”
“응?”
골몰하느라 후배의 말을 듣지 못한 한동열은 뒤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아니, 짜장 짬뽕 중에 뭐 드실 거냐고요.”
“아, 난 짜장.”
“예.”
“곱빼기로.”
후배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다른 이에게도 똑같이 메뉴를 물어보려 다녔다. 동열은 생각을 계속 이어 갔다. 꽃다방 직원들에게 물어본 바로 그들은 서태화가 누군지 모른다고 했다.
그럼 서태화와 최선우는 어떻게 만난 걸까?
최선우가 가끔 짐꾼 역할로 다방 아가씨들을 따라 커피 배달 간다는 말은 들었으나 그 짧은 사이에 눈 맞고 배까지 맞는 게 가능한가 싶었다.
“저번에 거기서 시켜?”
“아, 거기 쿠폰 만 오천 원당 한 장이에요. 너무 짜.”
“그럼?”
“새로 찾아봐요. 요즘에는 배달 어플로 많이 시키잖아요. 리뷰 남기면 뭐, 서비스 주는 데도 많다던데.”
“배달이 다 거기서 거기지.”
점심 하나를 두고 후배들끼리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소리가 한창이었다. 동열은 아무 생각 없이 후배들을 쳐다보다가 불현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동열에게로 꽂혔다.
“그래, 배달 주문.”
지난번에 배달 주문 소리가 울렸는데도 영 시큰둥하던 서태화가 떠올랐다. 한동열은 휴대 전화를 들고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후배에게 다가갔다.
“야, 배달 어플 중에 제일 유명한 데가 어디야?”
“예?”
“배달 어플 중에 뭐가 제일 유명하냐고!”
다급한 마음에 고함이 터졌다. 이제야 무언가 실마리가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일의 물꼬가 트이는 기분에 동열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문득 탁성모 자리를 쳐다봤다. 아직도 비어 있었다. 어제부터 출근을 안 하더니 오늘마저도 결근이었다. 전화를 해 봤다. 역시나 받지 않았다. 이 양반은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몰랐다.
또 어디서 농땡이 까고 있는 거 아니야?
한심한 인간의 표본 격이라 동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러다 모가지나 콱 날아가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 * *
태화는 담배를 한 대 더 태웠다. 벌써 창고 안은 연기로 자욱했다. 태화 정육 뒤에 있는 창고가 아니었다. 그곳보다는 훨씬 넓고, 훨씬 습한 지하 창고였다. 태화가 서원식 밑에 있을 때부터 요긴하게 사용해 온 곳이었다. 태화는 창고 한쪽에 있는 테이블 옆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재떨이가 있었는데, 담배를 얼마나 태워 댔는지 꽁초가 이쑤시개처럼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그런데도 태화는 흡연을 멈출 기미가 없었다.
“흐……. 윽…….”
안개처럼 희뿌옇게 낀 담배 연기 너머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화는 긴 숨을 내뱉으며 저쪽을 내다봤다. 뭉게뭉게 피어난 연기가 걷히니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탁성모였다. 성모는 창고 정중앙에 있는 철제 의자에 사지가 묶인 채 앉아 있었다. 눈에는 안대가 씌워진 상태였다. 얼마나 맞았는지 몰골은 산 사람의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였다.
비단 맞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살점이 포처럼 얇게 뜨인 부분도 있었고, 마디가 잘려 나간 손가락도 있었다. 그중 가장 상처가 심각한 부위는 다름 아닌 고간이었다. 어떻게 짓이겨 놨는지 뭔가 있던 게 맞나 싶을 만큼 뭉개져 있었다.
주변은 더 가관이었다. 얼마나 오줌을 지리고, 똥을 싸 놨으면 바닥에 대충 받쳐 놓은 빨간 대야가 오물로 가득했다. 심지어 옆으로 다 튀어서 바닥이 흥건했다. 담배 연기가 이렇게나 잔뜩 끼어 있는데 그 사이를 뚫고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태화는 아무렇지 않게 줄담배만 태웠다. 성모를 우두커니 쳐다봤다. 겁에 질린 명상 위로 다른 놈이 어른거렸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었다.
여자와 여자.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여자와 술인지 약인지 모를 것에 취해 깔깔 웃는 또 다른 여자가 번갈아 가며 탁성모 낯짝 위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순간 허연 연기 틈 사이로 더 하얀 손이 불쑥 다가왔다. 태화의 미간이 가볍게 구겨졌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벌벌 떨고 있는 탁성모뿐이었다. 또다시 빨간 매니큐어의 잔상을 본 태화는 쯧 혀를 찼다.
“좆같네.”
혼잣말을 읊조리는데 성모는 그 소리에도 놀라서 힉 떨었다. 멧돼지같이 생긴 놈이 놀라는 소리는 참 하찮았다.
“사, 살려 주십쇼……! 저, 진짜 살려만 주시면 아무한테도 말 안 하겠습니다……. 예? 살려 주십쇼, 흑…….”
이제 멈췄나 했더니 성모는 또다시 목숨을 구걸하고 나섰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 계속됐던 애원이었다. 시끄럽다고 어금니 몇 개를 뽑았더니 잠깐 잠잠하다가 지금 또 지랄하는 것이었다. 저건 대가리가 장식인지 배움이 참 느렸다. 최선우는 멍청해도 예쁘기라도 하지, 저건 뭘 믿고 병신 짓을 하나 몰랐다. 한 번 더 짧게 혀를 차던 태화는 불현듯 또 선우를 떠올렸다는 걸 깨닫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요즘 들어 자꾸 이랬다. 무슨 생각을 하든 꼭 최선우 그게 끼어들었다. 빠져도 단단히 빠진 모양이었다. 못 본 지 이제 고작 여덟 시간밖에 안 지났는데 보고 싶고 만지고 싶었다. 심장께가 근지러워 죽을 것 같았다. 그때 탁성모가 다시 오줌을 지렸다. 자지를 완전히 으깨 놓은 것 같은데 어디로 싸지르는지 잘도 쌌다. 선우 생각에 빙긋이 웃던 태화는 의자 밑으로 툭툭 떨어지는 오줌 줄기를 보고 금세 무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 꼴을 하고 산다고 해서 제대로 살겠습니까.”
“그래도, 살고 싶습니다. 흐윽, 살려 주세요, 제발…….”
울며 비는 것도 이제 지겨워서 혀를 잘라 버릴까 고민하는 중에 창고 문이 덜컹 열렸다. 꽤 육중한 문이라 열리는 소리도 무거웠다. 장 선생이 먼저 들어왔다. 여기까진 웬일이냐고 물으려는데 뒤따라 들어오는 선우가 보였다. 멀겋기만 하던 태화의 낯이 한순간에 구겨졌다.
“뭐야. 쟤는 왜 달고 들어와요?”
“너 없다고, 어디 갔냐고 전화를 40통이 넘게 해 대는데 그럼 어떡하냐?”
대답한 사람은 선우 뒤로 들어온 고 박사였다. 저 말이 사실인지 장 선생을 쳐다보자 장 선생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는 20통 했어.”
태화는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비상 연락망 개념으로 고 박사와 장 선생의 번호를 알려 준 게 잘못이었다. 한숨을 쉬며 선우를 봤다.
선우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평범한 사람은 평생 가도 이런 곳에 들어올 일이 없었다. 선우가 평범한 놈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이런 일을 경험할 정도로 비범한 놈도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탁성모의 꼴은 고 박사도, 장 선생도 버거워했다. 특히 고 박사가 심했다. 창고를 부유하는 역한 냄새에 진저리 치며 코를 막았다.
“야, 뭘 어떻게 해 놨길래 냄새가 이래? 우욱, 욱…….”
고 박사는 심지어 헛구역질까지 했다. 의대 실습 중에 시체도 숱하게 봤을 놈이 가장 엄살이었다.
“성가시게 하지 말고 애 데리고 나가.”
“그래, 우리 나가…….”
“안 나갈래요.”
아직도 계단을 내려오지 못하고 중간에 주춤 서 있던 선우가 고 박사의 대답을 가로챘다. 제법 명료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다름 아닌 성모였다.
“서, 선우야! 선우야……! 나 좀, 어? 제발, 나…….”
“그냥 혀를 확 뽑아 버릴까.”
태화가 혼잣말인 양 중얼거리자 곧바로 조용해졌다. 성모는 이미 혀라도 뽑힌 사람처럼 입을 꾸욱 다물고 벌벌 떨었다. 태화는 피우던 담배를 꽁초 더미에 비벼 껐다. 한 대를 더 피우려는데 돛대였다. 짜증스레 눈살을 구기다가 선우를 넌지시 쳐다봤다.
“나가.”
“아저씨랑 같이 있고 싶어요.”
선우의 목소리가 창고 안을 가득 메웠다. 어찌나 낭랑하던지 메아리라도 치듯 웅웅 울리며 태화에게 가 닿았다. 구역질하는 고 박사와 슬쩍 코를 막은 장 선생 사이에 선 선우는 말간 얼굴을 하고 태화를 응시했다. 이 지독한 악취 속에서도 우욱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비리비리하게 생겨서는 가장 잘 버텼다.
처음에 겁먹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마치 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선 모습에 태화는 옅은 숨을 쉬다가 나머지 두 사람에게 나가 보라며 턱짓했다. 고 박사와 장 선생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덜컹, 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선우는 몸을 움찔 떨었다. 이제 퇴로가 없다는 걸 직감한 것처럼 침을 꼴깍 삼키고 성모를 제대로 봤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더욱 커다랗게 뜨였다. 소리를 지르진 않았다. 그저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탁성모는 신음만 내지 않았다면 죽었다고 착각할 정도로 산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온몸이 피범벅이었지만 특히 사타구니 사이는 원래 있어야 할 것의 형체는 보이지 않고 핏덩이만이 고여 있었다.
아랫도리가 완벽하게 짓이겨져 있는 걸 본 선우는 숨을 흡 삼켰다. 그렇다고 걸음을 멈추진 않았다. 타박타박, 걷는 걸음으로 성모 앞에 섰다.
기분이 이상했다. 마냥 통쾌해야 할 순간이건만, 선우는 아랫입술을 움찔거리며 주먹만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이렇게나 무력한 사람에게 그동안 빌빌 기어 왔다니…….
억울했다. 억울하고, 화가 났다. 탁성모가 아니라 저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한 겹 벗겨 보면 나약하기 짝이 없는 놈에게 착취당하고, 고개 숙이고, 두려움에 떨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치미는 순간 저쪽에서 탁탁,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여전히 테이블 옆에 앉아 있는 태화가 보였다. 일순간 선우의 눈으로 빛이 들었다. 태화의 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 언젠가 꿈에서 본 것과 비슷하게 생긴 회칼이었다.
“내가 죽일까.”
태화는 손잡이가 아닌 칼날을 가볍게 쥐고 있었다. 처음에는 태화의 명치 끝을 향하고 있던 칼 손잡이가 천천히 포물선을 그리며 선우에게로 향했다.
“네가 죽일래?”
선우는 저를 향해 꼿꼿이 서 있는 칼자루를 빤히 쳐다봤다. 칼날과는 달리 뭉툭한 나무 손잡이건만 선우에게는 칼날보다도 더 서슬 퍼렇게 느껴졌다.
어서 잡으라고. 잡고 찌르라고. 탁성모를 죽여 버리라고.
손때 묻은 손잡이가 제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선우는 갑자기 오른쪽 귀를 한 대 퍽 때렸다. 탁성모에게 맞아서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반대쪽도 퍽! 소리 나게 때리자 태화가 한숨을 푹 쉬었다.
칼을 거두려는 걸 알고 선우가 천천히 다가갔다. 주춤주춤 떼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선우는 흥분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걸음으로 태화 앞에 섰다. 여태 저를 향해 있는 칼자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바들바들 떨면서도 기어코 손잡이를 잡았다. 순간 태화가 선우의 손 위를 포개듯 감싸 쥐고 당겨 왔다. 칼끝이 태화의 목젖 옆을 지그시 눌렀다.
“안 돼……! 아!”
선우가 당황해서 뒤로 물러나려 할수록 태화는 선우의 손을 더욱 단단하게 잡았다. 선우가 허둥거리는 바람에 칼날이 태화의 피부를 살짝 가르고 들어갔다. 조금 벌어진 살갗 사이로 피가 점점이 스며 나왔다.
“제대로 잘 봐.”
“윽, 안 돼, 싫어요……. 피, 아저씨 피 나……!”
선우가 도리질 치는데도 태화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별스럽지 않은 얼굴로 선우를 곧게 올려다봤다.
“여기. 여기 찌르면 금방 죽을 거야. 피는 좀 많이 날 거고.”
태화는 선우에게 살인을 가르치고 있었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살갗이 더 벌어지자 선우는 누가 ‘얼음!’ 하고 외치기라도 한 것처럼 바짝 굳었다. 태화에게 집중했다. 태화는 그제야 픽 웃고는 칼을 뒤로 물렸다. 다행히 깊게 찔린 상처는 아니었다. 피가 많이 나지도 않아서 손등으로 대충 슥 닦고 다시 선우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손잡이는 제대로 잡아야지. 안 그러면 네 손만 다친다.”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닥파닥 소리가 날 정도로 세차게 끄덕이자 얇은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태화는 선우의 머리를 쓰다듬고, 귀 뒤로 예쁘게 넘겨 준 뒤 엉덩이를 톡톡 쳤다. 가서 해 보라는 듯이 턱짓했다.
선우는 한 번 더 침을 꼴깍 삼키고 뒤를 돌아섰다. 탁성모에게로 다가갔다. 떠듬떠듬, 뚝뚝 끊기는 걸음이었다. 태화가 알려 준 대로 칼자루를 꽉 쥔 손에서 땀이 삐질삐질 배어 나왔다. 손잡이 끝으로 땀이 주룩 흘러내릴 정도라 바지에 뽀득뽀득 문질러 닦고 다시 고쳐 잡았다. 고작 일곱 걸음이면 되는 거리를 거의 3분이 걸려 성모 앞에 도착했다. 이전보다도 떨림이 더 심해졌다.
덜덜 떠는 오른손을 달래기 위해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잡았더니 두 손이 다 떨렸다. 그런데도 선우는 멈추지 않았다. 목젖 옆. 칼끝으로 태화가 알려 준 부위를 콕 찔렀다.
“힉!”
혀가 잘려 나갈까 봐 내내 입을 꾸욱 다물고 있던 탁성모가 펄쩍 뛰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날이 어찌나 좋은지 성모가 파드득 떠는 것만으로 벌써 칼날이 살점을 파고들었다.
“선우야, 선우야. 나 진짜 다신 너 안 찾아갈게. 어? 그러니까 제발 살려 주라. 나 지금까지 있었던 일…….”
“닥쳐.”
선우는 성모의 말을 뚝 끊었다. 처음이었다.
“너도 지영환이랑 똑같아. 아니, 다들 똑같아, 다.”
처음으로 탁성모의 말을 끊고 제 할 말을 했다.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간지럽기만 하던 숨이 쌕쌕 소리를 내며 길게 내뿜어졌다. 판판한 가슴이 크게 오르내리고, 이를 억세게 꽉 깨문 탓에 관자놀이가 불룩 올라왔다. 이가 부득부득 갈리는 소리도 간간이 터져 나왔다.
선우는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물며 성모를 내려다봤다. 두려움에 발발 떨며 제게 목숨을 구걸하는 탁성모를 보고 인상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렸다. 분명 기다렸던 순간인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오히려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너 같은 인간들 때문에 나는, 난……. 그런데도 나는, 당신들을, 윽…….”
손 떨림이 점점 더 심해졌다. 좆같았다. 그냥 칼만 푹 꽂아 넣으면 끝인데 왜 망설이는지 몰랐다. 인제 와서 뭐가 무섭다고 망설이는지, 선우는 제 마음 하나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냥 찌르기만 하면 되는데. 이제는 돌아갈 곳도 있는데. 나한테는 서태화가 있는데, 왜……. 그래, 서태화…….
머릿속 가득 서태화라는 이름이 들어찬 순간 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도 더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는데 옆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향기가 훅 다가왔다.
꾸욱 감았던 눈을 뜨기도 전에 돼지 멱 따는 소리가 나고, 뺨으로 뜨거운 무언가가 후두두 들러붙었다. 숨넘어가는 소리가 뜨문뜨문 이어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뚝 끊겼다. 선우는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무슨 상황인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거칠게 호흡했다. 뺨에 찰싹 붙어 있던 액체가 죽 흐르는 게 느껴졌다. 굳은살이 박인 손이 뺨을 살살 문질러 주는 것도 느껴졌다. 뺨과 턱을 닦아 주는 손길을 느끼던 선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하아, 아……. 어……. 아…….”
제대로 된 말이 나가지 않았다. 탁성모가 죽어 있었다. 목덜미로 도끼가 콱 박혀서는 두 눈을 까뒤집은 채 죽어 있었다. 선우는 뒤로 주춤 물러나며 쥐고 있던 칼을 툭 떨어뜨렸다. 거친 손이 눈가를 지분거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올려다봤다. 다정하게 웃고 있는 서태화가 보였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
최악이,
“이제까지 박복하게 살아왔으니까, 이제부터 넌 좋은 것만 하고 살아.”
차악이 된 순간이었다.
“좋은 것만 보여 줄 순 없어도, 좋은 것만 하게는 해 줄게.”
최선우만의 최악이 눈앞에 있었다. 선우는 제 최악에게로 손을 뻗었다. 뺨을 감싸 쥐려고 했지만, 덜덜 떨리던 손은 힘을 잃고 툭 떨어졌다. 동시에 선우도 무너져 내렸다. 추락하는 새처럼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은 선우는 손끝을 적시는 피를 쳐다봤다. 탁성모의 피가 둥글게, 둥글게 퍼지고 있었다.
“어, 어으. 흐…….”
선우는 손가락 사이로 질척하게 파고드는 핏물을 내려다보다가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사타구니 사이가 뜨끈해지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숙이자 누런 오줌이 질질 새고 있었다. 참지 못하고 결국 실수한 것이었다. 탁성모를 중심으로 너르게 퍼져 나가는 피처럼, 오줌도 선우를 중심으로 느리게 번졌다.
소변이 질질 흐르자 선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수치심도 들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들어 태화를 봤다. 태화는 시선을 삐뚤게 기울인 채 선우를 보고 있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히지 않았다. 늘 어려웠다. 선우에게 있어 서태화는 난제나 마찬가지였다. 멍청한 저에겐 난제를 풀 능력이 없었다.
“내가.”
여느 때보다도 깊게 침잠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우는 귀를 쫑긋 세우며 태화에게 집중했다.
“네 죄까지 다 떠안아 줄게.”
느른하게 흘러나온 뒷말까지 전부 들었을 땐 귀뿐만 아니라 눈도 반짝 뜨였다.
고백이다.
선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방금 한 말은, 서태화가 제게 한 고백이라고.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것만 같았다.
“네.”
선우는 영발하게 빛나는 눈을 뜨며 대답했다. 앞에서 픽 웃는 소리가 퍼졌다. 짧게 웃던 태화는 테이블로 돌아가 마지막 남은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이려는데 라이터가 말썽이었다. 아무리 틱틱 소리를 내도 스파크만 튈 뿐 좀처럼 불길이 일지 않았다. 라이터를 몇 번 털고 다시 휠을 튕기려는 순간 선우가 서둘러 다가왔다. 일어서서 걷지도 못하고 개처럼 네발로 기어 와 태화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태화의 손에 들린 라이터를 조심스레 가져와 대신 불을 붙였다.
틱, 틱, 틱. 세 번 만에 라이터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여기요, 불.”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퍽 궁상맞은 모습이었으나 선우는 꿋꿋이 태화를 향해 라이터를 높이 추켜올렸다. 선우의 새카만 눈동자 속으로 벌건 불길이 일렁였다. 그 너머에는 태화가 있었다.
나의 구원자. 나의 생이자 사. 악의 얼굴을 한 나의 신.
눈앞의 불길을 닮아 선우의 온몸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닦아 놓은 듯 윤이 나는 눈동자로 불길 너머의 태화를 봤다.
태화 역시 선우를 내려다봤다. 한껏 가라앉은 눈으로 빤하게 응시하며 고개 숙여 담배 끝을 가져다 댔다. 태화와 선우의 시선이 불꽃 끝에서 콱 부딪혔다. 누구도 먼저 눈동자를 돌리지 않았다. 담배 연기가 사이를 갈라놓더라도 두 사람은 쉬지 않고 상대를 쳐다봤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먼저 움직인 건 태화였다.
“오줌은 나랑 떡 칠 때나 싸라고 했잖아.”
태화는 발끝으로 선우의 가랑이 사이를 툭 찼다. 맺혀 있던 오줌이 빗방울처럼 후두두 떨어졌다. 선우도 서둘러 아래를 내려다봤다. 누가 봐도 실례를 한 사람처럼 앞섶은 물론 바짓단까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하필이면 베이지색 코르덴 바지였다. 태화가 겨울인데 따뜻하게 좀 입고 다니라며 사 준 것이었다. 베이지색이 갈색처럼 짙어진 걸 보고 선우는 어쩔 줄 모른 채 허둥지둥거렸다. 바지를 툭툭 털다가 태화의 말을 상기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죄, 죄송해요.”
무릎걸음을 걸어 태화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조금 전까지 오줌을 털어 내던 손으로 태화의 바지춤을 잡았다. 단추를 풀고 지퍼까지 내리려고 하자 태화가 선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뭐 하는데.”
“오줌은 떡 칠 때, 싸, 싸라고…….”
“그래서.”
선우는 바지 위로 우람하게 존재감을 과시하는 태화의 아랫도리를 손바닥으로 슥슥 문질렀다. 보다 못한 태화는 수갑이라도 채우듯 손목을 한데 모아 위로 쭈욱 들어 올렸다. 건어물 가게에 매달린 생선처럼 선우는 태화의 손끝에 달랑달랑 매달린 모양이 되었다.
“지금 떡 치자고? 네가 오줌 쌌으니까, 떡 치자 이거야?”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또 옆으로 갸우뚱 넘어갔다. 태화의 표정이 짜증스레 구겨진 게 이해되지 않았다.
뭘 또 잘못한 걸까?
선우가 눈치를 살살 보자 태화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담배를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비벼 껐다. 선우의 턱을 잡아 올려 그대로 입을 맞췄다. 당황해서 살짝 벌어진 틈을 파고들어 갔다.
잡고 있던 두 손은 제 목덜미를 감싸 안게 했다. 키스를 퍼붓듯 숨을 불어넣었다. 제정신이 아닌 놈의 입천장을 두드리고 혀를 간질이며 이따금 뜨끈한 숨결을 나눴다. 고개를 비틀어 더욱 깊게 침범해 들어가자 선우는 그제야 제대로 된 숨을 후욱 내쉬며 태화에게 매달렸다. 비로소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진동하는 오물 냄새도 느껴졌고, 태화의 체향도 느껴졌다.
“숨, 흐……. 숨…….”
“하……. 숨 막혀?”
“아니, 숨이……. 너무 잘 쉬어져서.”
선우는 태화에게 매달리다시피 해서 그의 숨을 허겁지겁 삼켰다. 남의 숨을 빼앗아 먹고 살아야 할 정도로 머저리였으나, 태화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귀밑 아가미가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창고를 나서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 박사와 장 선생이 돌아봤다. 두 사람 모두 놀란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화나 선우나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한겨울인데도 태화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목에는 작지만 찢어진 자국이 선명했다. 선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누구의 피인지도 모를 게 허연 뺨 위에 군데군데 번져 있는 데다가 가랑이 사이까지 진하게 젖은 채 태화에게 찰싹 달라붙어 안겨 있으니 밖에 있던 두 사람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끝났어?”
“정리할까?”
고 박사와 장 선생이 차례차례 묻는 말에 태화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그들을 지나쳤다. 선우는 그새 또 울었는지 태화의 어깨에 뺨을 뭉개듯 기댄 채 연신 코를 훌쩍였다. 태화는 더럽지도 않은지 선우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손바닥 가득 축축한 게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차 조수석에 태우려니 선우가 내려 달라는 듯 다리를 달랑거렸다.
“내려 줘?”
묻자 선우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태화는 조수석 앞에 선우를 내려 주고 문까지 직접 열어 줬다. 하지만 선우는 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타.”
태화가 말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선우는 그저 앞으로 모은 손을 꿈지럭거리며 고개만 푹 숙였다. 애가 또 왜 이러나 생각하던 태화는 무언가 짐작 가는 게 떠올랐는지 쩝 입맛을 다셨다. 조수석 문을 닫고 선우를 끌어 운전석으로 갔다. 먼저 차에 올라탄 태화는 선우를 잡아끌어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선우가 기겁하고 다시 내리려고 하자 아예 문을 닫아 버렸다. 당황해서 버둥거리는 몸을 꼬옥 끌어안았다.
“저 오줌 쌌는데…….”
선우는 이제야 부끄러운 얼굴을 했다.
“알아.”
“안 더러워요?”
“더러워.”
“그런데 왜…….”
“내가 더 더러운 놈이라서.”
태화는 짧게 대답했다. 선우가 뭐라고 더 말하기도 전에 입술에 쪽 도장을 찍고 마른 어깨로 고개를 묻었다. 피곤했다. 바짝 긴장한 어깨에 어리광이라도 부리듯 뺨을 뭉근히 비볐다.
“계속 나랑 살면 앞으로 이런 걸 수없이 봐야 할 수도 있어.”
작게 읊조렸다.
“어쩌면 우림동에서 살 때가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 수도 있고.”
“그럴 일 없어요. 절대로 그럴 일 없…….”
“내가 네 불행이 될 수 있다는 말이야.”
태화는 제가 말하고도 제 말이 웃겨 피식 웃었다. 너무 늦은 경고였다. 이미 최선우 앞에서 볼꼴 못 볼 꼴 다 보였는데 인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몇 번 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다가 고개를 들었다.
선우는 커다란 눈을 느리게 끔뻑이고 있었다. 끔뻑끔뻑, 감았다 뜨이는 눈이 제법 영리해 보이기도 하고, 또 영 맹추 같아 보이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빤히 들여다보고 있자 선우는 입술을 씰룩이더니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이미 나한테 최악이잖아요.”
선우는 별안간 그렇게 말했다.
당신은 이미 최악이라고.
산뜻한 표정을 짓는 선우 앞에서 태화는 입을 반쯤 벌렸다. 놀란 얼굴로 미소가 슬며시 깃들었다. 태화는 입꼬리를 엷게 말아 올렸다.
“똑똑하네.”
이미 충분히 꼭 껴안은 몸을 더욱 바짝 끌어안고, 선우의 흐트러진 머리를 세심하게 정리했다. 선우는 작은 짐승처럼 태화에게 몸을 내맡겼다. 앞머리를 만지면 만지는 대로, 옆머리를 넘겨 주면 넘겨 주는 대로. 간간이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태화의 손길을 느꼈다. 손을 탄다는 말이 뭔지, 태화는 선우를 통해 새삼 이해했다. 못나게 삐쭉 올라온 잔머리를 하나하나 눕혀 가며 선우를 보듬었다.
“내가 최악이 아니라 불행으로 느껴지는 날이 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가.”
“싫어요.”
“가.”
선우가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태화가 한 번 더 가라니까, 하고 말했으나 마찬가지였다. 떼쓰는 아이처럼 도리질만 치고 태화에게 폭 안겼다. 둥지 속에 들어온 참새 새끼처럼 태화의 너른 품 안에 몸을 구깃구깃하게 접어 넣고 기댔다. 여기서 더 말해 봤자 들을 놈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태화도 그저 선우를 감싸 안았다.
“그래, 조금만 이러고 있자.”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기댄 채 눈을 감았다. 태화는 커다란 손으로 연신 선우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선우 대신 탁성모를 죽인 건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최선우가 선택한 기회를 빼앗은 건 미안한 일이지만 그뿐이었다. 태화는 선우가 죄책감을 끌어안고 살지 않길 바랐다. 또라이 중의 또라이더라도 최선우는 심약하기 그지없는 놈이었다. 이런 놈이 사람을 죽이고 잘 살 수 있을 리 없었다.
나 같은 쓰레기도 좆같은 잔상에 얽매여 사는데, 이 나약한 놈이 견딜 수 있을 리 없지.
태화는 느른한 숨을 내쉬며 선우에게 잔뜩 치댔다. 또다시 정신이 가물거리는 게 느껴졌다. 피곤해서 그런가, 태화는 금세 잠들었다. 고요하던 숨이 살짝 거칠어지자 선우는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잠든 태화를 들여다보고 눈두덩이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태화의 팔뚝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속으로 자장가를 불러 줬다.
* * *
“흐아……!”
선우는 놀란 얼굴로 잠에서 깼다. 또 사이렌 소리였다.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곧 익숙한 소리인 걸 깨닫고 다시 태화의 품으로 풀썩 몸을 뉘었다. 마찬가지로 잠에서 깬 태화는 쯧 혀를 차면서도 선우의 엉덩이를 쥐고 흔들었다. 아저씨 같은 짓이었다. 매번 아저씨, 아저씨, 하는 소리를 들어서 그런가. 하는 짓이 점점 더 늙은이 같아졌다.
태화는 찌뿌드드한 몸을 풀 겸 선우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가슴팍에 얼굴을 묻게 한 탓에 선우는 숨이 막혀 태화의 등허리를 퍽퍽 쳐 댔다. 잠깐 키들거리던 태화는 계속해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별수 없이 서재로 향했다.
앞으로 소리를 좀 바꿔야 할 듯싶었다. 선우의 목소리를 녹음해 틀어 놔도 괜찮을 것 같았다. 지난번에 보니 노래를 곧잘 부르던데, 이참에 맛깔난 트로트를 녹음해 둘까 싶었다. 그러다 문득 제 밑에 깔려 우는 신음이어도 괜찮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혼자 클클 웃으며 서재로 들어갔다. 시끄러운 소리부터 끄고 화면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또 한동열이었다.
“저 새끼는 잠도 안 자나.”
태화는 방으로 돌아와 대충 옷을 주워 입었다. 티셔츠가 어디 갔나 한참 찾다가 선우가 입고 있는 걸 깨닫고는 다른 걸로 꺼내 입었다. 그새를 참지 못하고 선우의 이마에 버드 키스를 날렸다. 이제 나가려는데 선우가 손을 잡아챘다. 돌아보자 선우는 손을 더욱 꼬옥 말아 쥐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나도 같이 갈래요.”
머리로 까치집을 잔뜩 지은 채 웅얼거리는 모습에 태화는 헛웃음밖에 안 나왔다. 자신과 떨어지면 죽는 줄 아는 것처럼 선우는 어디든 함께 가려고 했다. 심지어 새벽에 화장실 가는 것도 따라가겠다고 난리여서 유치원생이라도 된 것처럼 둘은 손을 꼬옥 맞잡고 화장실로 가야 했다.
지금도 선우는 손을 놓지 않을 기세라 태화는 한숨 비스름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반짝 뜬 선우가 서둘러 일어나 그냥 나가려는 걸 뒷덜미를 잡고 다시 데려와 바지를 입혔다. 정말 다리 하나하나 꿰어 가며 바지를 입히고 엉덩이까지 팡팡 두드려 주고서야 둘은 나란히 아래로 내려갔다.
“여기 있어.”
태화는 선우에게 카운터 안에 있으라고 한 번 더 말했다. 선우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서야 불을 켜고 가게 문을 열었다. 괜스레 남의 가게 앞 바닥을 툭툭 차고 있던 한동열이 돌아봤다. 먼저 태화를 바라보던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카운터 안에 있는 선우를 발견한 동열은 눈썹을 까딱였다. 태화는 옆으로 걸음을 옮겨 한동열의 시야를 막아섰다.
“이 새벽에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두 분 다 내려오실 줄은 몰랐는데요.”
“용건만 간단히 해 주시죠.”
한동열은 태화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픽 웃었다.
네가 그렇게 여유 부리는 것도 이제 끝이다, 새끼야.
속으로 혼자 생각하고 조금 더 짙게 웃었다. 한 달 만에 다시 찾은 태화 정육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왔을 리가 없었다. 역시나 수확이 있었다. 가장 규모가 큰 배달 어플 세 곳 중 한 군데도 태화 정육이 등록돼 있지 않았다. 즉, 지난번에 들었던 배달 주문 소리는 비단 배달 주문이 아니었을 확률이 크다는 것이었다.
걸리는 게 하나 더 있었다. 성모가 사라진 지 열흘째였다. 며칠 소식이 없을 때는 또 어디 룸살롱에 짱박혀 있겠지 했는데 닷새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자 탁성모가 사라진 건 사건이 되었다. 사라진 건지 죽은 건지도 확실치 않았다. 아직 무엇도 나온 건 없지만 분명 서태화와 연관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서태화가 아니라면 최선우일지도.
한동열은 고개를 옆으로 슬며시 내밀어 뒤에 멀뚱히 서 있는 선우를 바라봤다. 선우는 동열과 시선이 마주치자 두 눈을 빠르게 끔뻑이더니 괜스레 벽에 걸린 메뉴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열은 다시 태화를 보며 씨익 웃었다. 이번에 덜미가 잡히면 그간 있었던 일들을 싹 다 엮어서 처넣을 생각이었다.
“배달 어플 뭐 쓰십니까?”
“예?”
“지난번에 배달 주문 들어온 소리를 들었었는데 배달 어플 회사에 태화 정육이 등록돼 있는지 확인해 보니 없더라고요. 듣자 하니 그때 배달의 제왕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어플은 아예 없던데요?”
태화는 동열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고개를 작게 끄덕여 가며 경청하는 척하다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휴대폰 좀 줘 보실래요?”
느닷없이 휴대 전화 타령이었다. 동열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자 태화가 한숨을 쉬며 손을 조금 더 들이밀었다. 동열은 별수 없이 태화에게 휴대 전화를 건넸다. 태화는 동열의 휴대 전화를 받아 들고 이리저리 누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려줬다. 한동열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화면을 보라며 눈짓했다. 화면에는 새로운 어플 하나가 설치돼 있었다. 깜찍한 돼지 아이콘 아래에 적힌 어플 이름을 본 순간 동열은 미간을 콱 찌푸렸다.
“아는 친구한테 부탁해서 만든 어플입니다. 고기 필요하실 때 많이 이용해 주세요.”
어플 이름은 ‘태화정육(부영시장)’이었다. 동열은 휴대 전화 화면과 태화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허위 어플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아이콘을 터치하자 위치 정보를 잡는 문구 다음으로 정말 여느 쇼핑몰 어플처럼 태화 정육에서 파는 고기와 가격이 주르륵 떴다. 공갈이 아니라 진짜 존재하는 어플이었다.
“근데 왜 주문 알림은 배달의 제왕이라고…….”
“제가 허세가 좀 있어서요. 태화 정육이라고 뜨면 별로 없어 보이잖습니까. 그래서 멘트만 살짝 바꿔 놓은 겁니다.”
“씹.”
동열은 참지 못하고 욕을 입 밖으로 냈다. 교묘하다, 교묘하다 했더니 또 이딴 식으로 빠져나가는 게 마뜩잖았다. 아니, 마뜩잖은 걸 넘어서서 열불이 났다.
미꾸라지 같은 새끼.
다행히 이 생각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죠. 하던 거 마저 해야 해서요.”
태화는 그렇게 말하며 뒤에 있는 선우를 은근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선우는 빙긋이 웃는 태화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뭘 하지도 않고 그냥 끌어안고 쿨쿨 잠만 잤으면서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반면 한동열은 태화의 여유 앞에서 속으로 씨발, 씨발, 욕을 짓이기다가 그를 지나쳐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일부러 태화의 어깨를 거칠게 치며 들어가서는 선우 앞에 섰다.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명함이었다. 지난번에도 줬으면서 뭐 한다고 또 주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요. 위험한 놈이 치근덕거려도 연락하고.”
한동열은 뻔히 태화를 두고 그렇게 말했다. 누가 봐도 태화가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선우는 제 앞에서 씩씩거리고 서 있는 한동열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알았다는 대답을 하지도 않았다. 그 바람에 더 열받은 동열은 이를 으득 물고 가게를 나갔다. 나가는 동안에도 태화의 어깨를 치는 건 잊지 않았다. 하여튼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태화는 쩝 입맛을 다시고 가게 문을 잠갔다. 뒤를 돌아보는데 선우가 명함을 아무렇게나 접어 쓰레기통에 툭 던져 넣는 중이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동작에 태화는 픽 웃으며 선우에게로 다가갔다.
“왜 버려? 가지고 있지. 한동열 말마따나 위험한 놈이 치근덕거리면 연락해야 할 거 아니야.”
“아저씨 옆에 있으면 안전해요.”
선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덕분에 묘하게 기분이 좋아진 태화는 씩 웃는 얼굴로 선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올라가자.”
선우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태화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동열은 마주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수채화 물감이라도 칠해 놓은 것처럼 뺨을 새붉혀 놓고 고개를 바짝 들어 태화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침실로 들어가자마자 다시 옷을 벗었다. 이번에는 속옷만 입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선우가 태화 위에 거북이처럼 올라탄 자세였다. 태화는 선우의 삼각팬티 속으로 손을 넣어 봉긋한 엉덩이를 연신 주물럭거리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목 울림 소리를 낮게 냈다. 선우는 여전히 제 팬티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가만히 태화에게 안겨 그의 쇄골을 쫍쫍 빨며 놀았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태화를 올려다봤다.
“한동열은 이제 어떻게 해요?”
눈을 말똥거리며 묻자 태화가 선우의 뒤통수를 꾹 눌렀다. 선우는 별수 없이 다시 태화의 가슴에 뺨을 뭉개야 했다. 하지만 금방 다시 고개를 들었다. 태화가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넌 이제 신경 꺼.”
“무턱대고 죽이면, 이번에는 진짜 큰일 날 거 같아서…….”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태화는 시답잖다는 투로 대충 대답했다. 그렇다고 선우의 걱정이 덜어지지는 않았다. 선우는 양 볼 가득 걱정을 덕지덕지 매단 채로 태화를 바라봤다.
“나는 이제 아저씨 없이는 못 살잖아요.”
엎드려 있어서 그런지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낮았다. 선우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던 태화의 손이 뚝 멈췄다.
“아저씨가 잘못되면, 교도소에 가거나 더해서는…….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나도, 나도 따라 죽을 거예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화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바람에 선우는 숨을 크게 삼키며 버둥거렸다. 뒤로 휙 넘어가려는 걸 태화가 등허리를 단단히 받쳐 지탱했다.
“최선우.”
선우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태화가 저렇게 부르면 저절로 긴장되었다. 평소에도 엄청나게 살갑게 부르는 편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좀 더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입술을 우물거리며 시선을 내리깔자 턱 밑으로 손이 들어왔다. 태화가 턱을 부드럽게 잡아 올리는 힘에 선우는 못 이기는 척 눈동자를 도록 올렸다. 촘촘하게 늘어진 속눈썹이 사락 말려 올라갔다. 태화가 지긋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넌 내 허락 없이는 못 죽어.”
“…….”
“알아들어? 넌 내가 죽으랄 때 죽고, 살라고 하면 사는 거야.”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 든 말은 제법 강압적이었다. 선우는 태화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비죽이 돌렸다. 아주 불만이 만만한 표정이었다.
“왜 나만 아저씨 말 들어야 돼요?”
“오늘 진짜 왜 이러지?”
“나만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하고, 아저씨는 내 말 하나도 안 듣고.”
“최선우.”
“아저씨도 내 말 좀 들어줘요. 나도 아저씨 돕고 싶어요.”
선우는 온몸으로 불만이 가득하다는 걸 표출했다. 아랫입술까지 삐쭉 내밀자 앞에서 짙은 한숨이 쏟아졌다. 선우는 힐끔 태화를 보다가 다시 옆에 있는 책장만 응시했다.
“지난번에 도와줬잖아. 그걸로 충분하다고. 아니, 넘쳐.”
태화는 진심이었다. 최선우는 지금까지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 왔다.
살면서 타인이 죽인 시체를 처리해 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또, 타인을 위해 경찰에 거짓 진술을 할 사람은 몇이나 되고?
그간 잘해 왔다는 듯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자 그제야 다시 고개를 바로 돌려놨다.
“한동열은 날 좋아해요.”
또 무슨 말을 할까 했더니 이번에는 한동열을 들먹였다. 선우를 다정하게 바라보던 태화는 일순간 미간을 찡긋거리며 쯧 혀를 찼다.
“그건 나도 알아. 그 새끼 눈깔이 좀 노골적이어야지.”
“날 좋아하는데 자기가 의심하는 사람 옆에 놔두고 싶겠어요? 한동열은 무슨 짓을 해서든 아저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낼 놈이에요. 나 때문에 아저씨가 위험에 처하게 생겼는데, 나 혼자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싫어요.”
선우는 답지 않게 똑 부러지게 말했다. 어느 때보다도 눈을 또랑또랑하게 떴다.
“도울 수 있게 해 주세요. 허락해 주세요.”
선우의 입에서 ‘허락’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태화는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것처럼 피식피식 웃었다. 이미 본인 마음대로 할 생각만 만발해서는 허락을 운운하는 게 깜찍했다. 연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자 선우는 태화의 목덜미를 조금 더 꽉 끌어안았다. 어서 대답해 달라고 보채는 모양새였다.
“너 진짜 끝장나게 말 안 듣는다. 예전에 교육한 게 다 헛수고였어.”
태화가 씩 웃자 선우는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교육을 말하는지 몰랐다. 딱 하나 생각나는 건 투명 수갑을 찼던 날이었다.
교육이라 봤자 바이브레이터로 쑤신 것밖에 더 있나?
생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잘난 얼굴이 더 잘나게 웃는 모습에 생각이 다른 데로 샜다. 미인계에 넘어갈 순 없었다.
“네? 제가 한동열 떼어 낼 수 있어요. 아니, 우리가 같이 할 수 있어요.”
태화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선우는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최대한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태화는 그 낯을 보고도 뚱한 얼굴을 했다. 얘가 뭘 많이 알고 이러는 게 눈에 다 보였다. 이런 수작질에 넘어가는 건 영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얼굴만 믿고 뭐든 다 해 달라고 보채는 것 역시 제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걸 다 알면서도 태화는 선우의 꾐에 넘어가 줄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덜 예뻤어도 지랄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런 얼굴이라면 충분히 넘어가 줄 만했다. 태화는 선우를 끈지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두 엉덩이를 우악스럽게 잡아 쥐었다. 한 손에 폭 쌓이는 엉덩이를 한 쪽씩 잡고 마구 주물럭거렸다. 변태 영감이라도 된 것처럼 엉덩이가 터질 듯이 주무르며 골 사이로 제 고간을 슥슥 문질렀다. 한번 문지를 때마다 티 날 정도로 앞섶이 두둑해졌다.
“좆 빨아 주면.”
장난스레 말하고 씩 웃었다. 졸지에 또 분위기가 이렇게 흘렀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태화의 어깨를 꾹 말아 쥐던 선우는 입꼬리를 곱게 말아 올린 그를 내려다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온종일 빨아 줄게요.”
그렇게 말하더니 태화의 양쪽 입꼬리에 입맞춤을 얹었다. 쪽쪽 소리까지 냈다. 제법 간지러운 소리에 태화는 낮게 웃었다.
“턱 빠졌다고 울지나 말고.”
“아저씨 좆 빨다가 빠지는 건 괜찮아요.”
“너는…….”
태화는 혀를 쯧 차면서도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작달막한 엉덩이를 쥐어 샅에 뭉근히 문지르다가 곧바로 자세를 바꿨다. 순식간에 태화 아래에 깔린 선우는 혀를 빼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요부가 따로 없었다.
동이 텄다. 좆을 빨아 달라더니 태화는 오히려 선우의 온몸을 녹여 먹었다. 아직도 남에게 받는 펠라티오가 낯선 선우는 강한 흡입력을 이기지 못하고 버둥거리다가 태화의 관자놀이를 뻑 차 버렸다. 그 대가로 젖꼭지까지 내줘야 했다.
태화는 본인이 하도 빨아서 통통하게 부어오른 젖꼭지를 둥글리며 선우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췄다. 선우가 그만 좀 만지라고 했으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선우는 말리길 포기하고 옅은 신음을 흘리며 태화가 하는 대로 놔뒀다. 태화는 이제 선우의 귓불을 매만졌다. 아무 자국도 없이 매끄러운 살결이었다.
“귀 안 뚫었네.”
“아저씨도 안 뚫었잖아요.”
“나 때는 남자가 귀 뚫으면 이상하게 봤어.”
선우는 도리어 지금의 태화를 이상하게 봤다. 저렇게 말하니까 나이 차이가 엄청나게 많이 나는 것 같았다. 실상 겨우 열두 살 차이밖에 안 나면서 태화는 어르신 흉내를 냈다.
“너 때는 귀 뚫는 거 유행 아니었어?”
“뚫고 싶었는데 아플까 봐, 무서워서 못 뚫었어요.”
참 겁도 많지.
태화는 픽 웃다가 돌연 가라앉은 눈빛을 했다. 귀 뚫는 것 하나도 무서워하는 놈이 탁성모의 부름에는 겁도 없이 잘도 갔다.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맞을 각오를 하고서도 간 건 순전히 저 때문일 터였다.
“내가 너 때렸을 때, 많이 아팠어?”
태화가 물었고, 선우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쳐다볼 뿐이었다. 언뜻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는 듯한 질책이 섞인 것도 같았다. 태화가 재촉하듯 눈썹을 들썩이자 선우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죽을 만큼 아팠어요. 아저씨한테 맞은 게, 살면서 맞은 것 중에 가장 아팠어요.”
“근데 왜 나 안 미워해.”
“저 아저씨 미워해요.”
“어?”
“싫어하지 못하는 것뿐이지. 엄청 미워해요, 엄청.”
선우는 멀끔한 얼굴로 말했다. 한 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순백의 표정이었다. 그 앞에서 태화는 잠깐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선우의 입술을 지분거렸다.
“왜 못 싫어하는데.”
“……믿는 신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붉게 잘 익은 입술이 오밀조밀 움직였다. 최선우는 한결같았다. 태화가 영환을 죽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를 자신만의 신으로 모셨다. 오동통하게 튀어나온 입술로 버젓이 살아 있는 사람을 두고 신이라고 말했다. 태화는 빙긋이 웃었다. 눈웃음까지 씩 지어 주니 거울을 보고 따라 하는 것처럼 선우도 해맑게 웃었다. 마치 한 마리의 새 같았다.
뾰족 튀어나온 부리로 모이를 쫑쫑 쪼아 먹는 새. 손아귀에서 놔주면 언제든지, 어디로든지 훨훨 날아갈 것 같은. 그런 새.
밥보다는 잠을 더 좋아하는 선우 때문에 태화도 아침을 걸렀다. 품에 안겨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잘도 자는 선우를 내려다봤다. 애 같다, 애 같다, 했더니 자는 모습이 정말 앳돼 보였다. 태화는 선우의 어깨로 이불을 더욱 꼼꼼히 여며 주고 곧장 장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 않고 저쪽에서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 자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장 선생은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한동열이라고 알죠? 용지서에서 근무하는 새끼. 걔 뒤 좀 캐 줘요.”
조용히 말하며 선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애가 깰까 싶어 아주 약한 손길이었다.
“어디서 태어났고, 어느 학교를 나왔고, 성적은 얼마나 좋았으며, 왜 경찰이 되려고 했는지. 경찰 학교에 다녔다면 몇 등으로 졸업했는지까지. 식성, 여자 취향……. 아니, 남자 취향 하나까지 전부 다 알아봐 주세요.”
어느새 잠이 다 깬 장 선생은 언제까지 알아봐야 하냐고 물었다. 태화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답했다. 장 선생이 태화가 했던 말을 확인차 다시 읊는 동안 그는 선우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줄줄 이어지는 말을 다 듣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부탁합니다.”
전화는 간단히 끊겼다. 휴대 전화를 대충 침대 구석에 내던진 태화는 선우를 당겨 와 품에 한껏 끌어안았다. 선우가 잠결에 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사소한 신음 하나에도 태화는 속이 빠듯하게 들어차는 걸 느꼈다. 예전에는 아랫도리가 먼저 반응했던 게, 지금은 가슴께가 먼저 알아서 지랄해 댔다. 스스로도 이렇게나 변할 줄은 몰랐어서 헛헛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이불에 폭 쌓인 선우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다가 한 번 더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자신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던 맹랑한 말이 떠올랐다. 최선우는 알까 싶었다. 저 역시 최선우 없이 사는 미래를 생각하면, 비록 상상일 뿐인데도 숨이 턱 막힌다는 걸. 이 멍청한 놈이 알기는 할는지, 자꾸만 헛웃음이 나왔다. 생에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한 낯선 감정에 잠 못 드는 날이 늘었다.
* * *
탁성모는 사라진 지 13일 만에 사체로 발견되었다. 한강에서, 또 용지서 근처 야산에서. 토막 난 채 발견된 것이었다. 수사 팀이 찾은 건 팔과 다리였고, 나머지 몸통과 머리는 아직 찾지 못했다.
겨울이었지만 강에 버려진 부분은 부패 정도가 심해 사망 추정 시기를 알 수 없었다. 일부러 썩게 만들어 놓고 버린 것 같았다. 산에서 발견된 것도 마찬가지였다. 사체에 꿀을 발라 놓은 엽기적인 행각 때문에 벌레와 짐승이 꼬여 훼손 정도가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심했다. 사체로 알 수 있는 건 이 고깃덩어리가 한때는 탁성모였다는 것과 죽기 직전까지 고문당했을 것이라는 게 전부였다.
“씨발!”
한동열은 핸들을 세게 내리쳤다. 야산에서 탁성모의 다리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태화 정육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탁성모의 죽음은 의외로 크게 다가왔다. 개차반 같은 사람이었더라도 파트너였고, 그 이전에 경찰이었다. 대한민국 경찰이 토막 난 시체로 발견됐는데, 그 사람의 파트너로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동열은 마음속에 있던 무언가가 폭발하는 걸 느꼈다. 눈이 뒤집히고, 머리가 빙빙 돌자 생각나는 인간은 하나뿐이었다. 한동열은 지금까지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전부 한 사람을 향해 간다고 생각했다. 바로 서태화였다.
“서태화, 이 씨발 새끼.”
서태화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무엇도 없었지만, 정황은 너무도 뚜렷하게 그 새끼가 범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정황은 바로 한동열 본인의 촉이었다. 그 촉 하나를 믿고 얼마나 고생했던가. 동열은 분을 못 이겨 악 소리를 내지르고 액셀을 더욱더 세게 밟았다. 한창 저녁 장을 볼 시간이라 부영 시장에는 사람이 많았다. 동열은 입구에 차를 마구잡이로 세워 둔 뒤 뛰다시피 해서 태화 정육을 찾아갔다.
“서태화!”
성난 목소리로 부르며 들어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손님은 물론이고 주인장 자리도 공석이었다. 무언가 가지러 갔는지 창고 문만 덜렁 열려 있었다. 그때 카운터 쪽에서 경쾌한 알림음이 튀어나왔다.
- 띵동-!
그 소리에 동열의 눈이 번뜩 뜨였다.
- 배달의 제왕에서 배달 주문이 들어왔어요!
뒤이어 흐르는 여자의 목소리까지 들은 한동열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들었던 소리와 같았다. 서태화는 직접 만든 어플이다 뭐다 잘도 둘러댔으나 동열은 아직도 저 소리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가게 안에는 동열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동열은 가게 밖과 창고 안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갔다. 노트북 모니터에는 지난번에 봤던 것과 똑같은 창이 떠 있었다.
“부영로 65 해원 빌라 302호. 12월 18일?”
알림 창에는 주소와 날짜가 적혀 있었다. 부영로 65면 이 근처였다. 이상한 건 주소가 아니라 날짜 쪽이었다. 오늘이 12월 11일이었으니 정확히 일주일 뒤 날짜였다. 고기 배달에 예약 시간이 있는 건 이해해도 예약 날짜가 있는 건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것도 일주일이나 먼 시간의 예약이라니,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순간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인기척에 동열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태화를 보러 왔으면서 만나지도 않고 가게를 나섰다. 속으로는 계속 주소와 날짜를 중얼거렸다.
*** ㄹㅂㅌㄹ 공금임 ***
12월 18일.
동열은 차 안에서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을 샅샅이 살폈다. 해원 빌라 앞이었다. 탁성모가 죽고 새로 파트너가 된 후배 놈은 우리끼리 독단적으로 이래도 되냐며 쫑알댔지만, 동열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그저 서태화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지금으로서는 서태화가 나타나도, 나타나지 않더라도 전부 괜찮았다. 나타나서 일을 저지를 기미를 보인다면 당장 손목에 쇠고랑을 채울 것이고, 나타나지 않는다면 추궁할 건더기가 생기는 것이었다. 마침 하늘에서 비도 내렸다. 날씨도 을씨년스러운 게, 이런 날은 사건이 일어나기 딱 좋았다. 어느새 동열은 태화가 제 앞에서 살인이라도 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어젯밤 11시부터 오늘 오후가 될 때까지 한숨 눈도 붙이지 않고 계속 창밖만 주시했다. 어느덧 어스름이 깔리고 밤이 됐다. 하늘에 빛 한 점 없는 시간, 저 멀리서 누군가 걸어왔다. 커다란 체구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다름 아닌 서태화였다. 비가 와서 검정 우비를 입은 데다가 우비에 딸린 모자까지 쓰고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한동열은 한눈에 서태화라는 걸 알아봤다.
태화는 한 손에 검은색 비닐봉지까지 들고 있었다. 해원 빌라 앞에 도착한 태화는 입구에 달린 빌라 이름을 슥 확인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한동열은 곧장 차에서 내렸다.
“선배님, 선배님!”
“정신 사납게 부르지 말고, 넌 여기 있다가 내가 무전 주면 곧장 올라와.”
동열은 그 말만 남기고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태화가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동열은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2층, 3층, 4층……. 4층에서 5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중간까지 가다가 다급히 몸을 뒤로 숨겼다.
태화가 5층의 어느 집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키도, 덩치도 큰 새끼가 가만히 서 있자 뒷모습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태화는 한참 만에야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소리가 맑게 울려 퍼지는 순간 한동열이 계단을 빠르게 올라갔다.
“서태화!”
크게 소리쳤다. 1층까지 다 들릴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동열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권총을 꺼내 태화에게 겨눴다. 태화는 뒤를 스윽 돌아보더니 놀라지도 않고 한동열을 멀거니 쳐다봤다. 첫발은 공포탄이라는 걸 알고 여유 부리는 것 같았다. 동열은 총구를 하늘로 쳐들고 다짜고짜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 끝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다시 태화를 향해 겨눴다. 이제부터는 진짜 탄환이었다. 그런데도 태화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월요일에 회사로 출근한 직장인 같은 무료한 표정으로 옅은 숨을 내쉬기만 했다.
그때 초인종을 눌렀던 집 문이 벌컥 열렸다. 동열은 다급히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집에서는 전업주부로 보이는 여자가 나왔다. 태화를 보고 손을 내밀던 여자는 그 옆에 총을 들고 선 동열을 보고는 기함했다. 놀라서 뒤로 주춤 물러나기까지 했다.
“무슨, 뭐…….”
여자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사이 태화는 별스럽지 않다는 듯 비닐봉지를 여자에게 스윽 내밀었다.
“비닐에 손대지 마세요!”
동열이 한 번 더 소리치자 여자는 비닐봉지를 받아 들려다 말고 흠칫 떨었다. 그 바람에 봉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뒤로 물러나, 개새끼야.”
한동열은 더 이상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분노를 있는 그대로 노출하며 태화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태화는 동열의 말을 따라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여자와 태화 사이에 선 동열은 태화에게로 향한 총구를 거두지 않고 천천히 비닐봉지를 주워 들었다. 묵직했다.
살인 도구라도 들었나 싶어 들여다보는데,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한동열은 한눈에 봐도 당황한 표정으로 비닐봉지 속 내용물과 태화를 번갈아 쳐다봤다. 검정 봉지 속에는 진짜 고기가 들어 있었다. 각종 부위의 소고기와 돼지고기 통삼겹살이었다.
“이렇게 총까지 겨눌 만큼 뭐, 제 고기에 문제라도 있습니까?”
태화가 말했지만, 한동열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비닐봉지만 뚫어져라 내려다봤다. 심지어 총까지 거두고 두 손으로 봉지 안을 파헤쳤다. 아무리 들쑤셔 봐도 고기와 파무침, 쌈장밖에 없었다. 정말 고기 배달을 온 것처럼 완벽한 내용물이었다.
“원산지를 속인 적도 없는데.”
웃음기가 은은하게 섞인 목소리였다. 동열은 옆을 쏘아봤다. 무슨 일이 있나 의심될 정도로 무표정이던 태화의 낯짝 위로 어느샌가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너, 이 씨발……!”
한동열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태화에게 달려들었다. 멱살을 틀어쥐고 당장이라도 주먹을 꽂아 넣으려는 듯이 추켜올렸다. 찰나 무전기에서 신호 잡히는 소리가 울렸다.
- 탁성모 사체 발견.
무전기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한동열은 주먹질하지도 못하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 다시 한번 말한다. 우림동에서 탁성모 사체 발견.
허리춤에 꽂혀 있던 무전기에서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탁성모 사체가 발견됐다는 말이 연거푸 네 번 나올 동안 한동열은 고개를 슥 들어 태화를 똑바로 바라봤다. 서태화는 여태 싱긋 웃고 있었다. 여느 사람들이 보면 열에 아홉은 반할 만큼 끝장나게 잘난 얼굴이었으나 한동열 눈에는 악마처럼 보였다.
웃고 있는 악마.
한동열은 ‘씨발!’ 하고 한 번 더 크게 소리쳤다. 당해도 단단히 당한 것이었다. 모든 일이 서태화가 짜 놓은 판 그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동열은 그 판 위에서 뭣도 모르고 날뛰는 말이 된 셈이었다. 한동열은 태화를 향해 휘두르려던 주먹을 부들부들 떨다가 결국 제대로 한 방 날리지도 못하고 멱살을 놨다. 한 번 더 탁성모 사체와 관련된 무전이 왔고, 한동열은 씨근대는 숨을 쉬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한동열이 사라진 빌라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태화는 잡혔던 멱살을 대충 툭툭 털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비닐봉지를 주웠다.
“고마워요, 제수씨.”
문 앞에 선 여자에게 봉지를 건넸다. 여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에 벌벌 떨더니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한 표정으로 봉지를 건네받았다. 심지어 사람 좋게 웃기까지 했다. 고 박사의 아내였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고기 먹고 갈래요? 이이도 곧 들어올 때 됐는데.”
“다음에요. 집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선우 씨요?”
태화는 가볍게 눈인사하고 돌아서려다가 다시 고 박사의 아내를 쳐다봤다.
“제수씨가 선우를 어떻게 알아요?”
의아하다는 듯 물어 놓고 이내 아, 소리를 냈다.
“고 박사가 말해 줬겠구나.”
“그이 말로는 태화 씨가 아주 푹 빠져 산다던데요?”
“푹 빠져 살기는요. 고 박사 허풍 심한 거 알잖아요. 그 정도 아닙니다.”
태화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여튼 고 박사 그건 아내에게 쓸데없는 얘기까지 다 해서 문제였다.
“그래도 태화 씨가 누군가랑 같이 산다는 거 자체가 특별한 일이잖아요. 원래 사람 전혀 안 들이시면서.”
고 박사의 아내가 하는 말에 태화는 별다른 말 없이 뭉근히 웃기만 했다.
“맛있게 먹고, 더 필요하면 전화 줘요. 고 박사랑 영 못 살겠다 싶어도 전화 주고. 다른 좋은 신랑 알아봐 드릴게.”
친한 사이인 듯 농담까지 주고받고서야 돌아섰다. 빌라 밖을 나오자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새벽까지 올 거라더니 기상청도 믿을 게 못 되었다. 거추장스러운 우비를 벗고 근처 하야부사를 주차해 둔 곳으로 향했다.
내가 누군가랑 같이 사는 게 그렇게 특별한 일이던가?
태화는 문득 고 박사의 아내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하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고 박사나 그 아내나 태화를 오랫동안 봐 온 사람들이었다. 그동안 연애 한번 변변찮게 해 본 적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터였다.
연애는커녕 누군가에게 호감이 있어 본 적도 없었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어릴 때부터 미쳐 있었는데 연애가 가당키나 했을까. 크게 관심도 없었다. 그랬었는데 언젠가부터 병아리콩 같은 놈이 신경 쓰이더니 지금은 태화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선우에게 잡혀 살다시피 했다.
최선우가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겠지만 태화는 스스로를 잘 알았다. 누군가를 먹이겠다고 고기를 굽고, 밥을 차리는 건 영 낯선 일이었다. 다른 이가 옆에 붙어 있으면 제대로 자지도 못했는데 지금은 최선우가 없으면 잠이 안 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듯 하나하나 따져 보니 완전 병신이 다 돼 있었다. 병신 중에서도 상병신이었다.
태화는 픽 웃으며 하야부사에 올라탔다. 곧장 가게로 가려다가 중간에 급선회해 한식집을 경유했다. 지난번에 선우가 맛있게 잘 먹던 코스 요리 집이었다. 원래 장어만 따로 판매가 안 되는 곳이었는데 태화와 안면이 있다 보니 서비스 차원에서 해 줬다. 심지어 라스트 오더였다. 태화는 양손 가득 장어만 여덟 마리를 들고 식당을 나섰다. 묵직한 무게감에 또다시 바람 빠지는 웃음이 나왔다.
“이래서야 원.”
팔불출이 따로 없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지 않더라도 체감하는 사실이었다.
최선우 그건 만질 맛도 없이 말라서는 먹기는 오지게 잘 먹었다. 그래서 장어 여덟 마리 중 과연 몇 마리나 먹을 수 있을까 짐작해 보기도 했다. 적어도 여섯 마리는 혼자 다 먹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저 역시 식탐만 두고 보자면 남 못지않았으나 이젠 제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야 최선우 입으로 들어가는 게 더 만족스러웠다. 상대가 먹는 걸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벌써 10시가 넘은 시간이라 시장은 이미 불이 전부 꺼져 있었다. 가게 앞에 도착한 태화는 헛숨을 내쉬었다. 불도 다 꺼진 어두컴컴한 시장 바닥에 선우만 혼자 가게 앞에 나와 오도카니 쪼그려 앉아 있었다. 깜빡 졸고 있는지 아직 태화가 온 건 모르는 것 같았다.
태화는 하야부사에서 내려 장어부터 챙겼다. 선우에게로 다가가 앞에 섰다. 미동도 없이 쌕쌕 숨소리만 내는 걸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똑같이 무릎을 굽혀 앉았다. 선우는 무릎에 뺨을 댄 채 불편한 자세로도 잘만 잤다. 궁상도 이런 궁상이 없었다.
저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했을 선우 생각에 태화는 씩 웃으며 발그레한 뺨을 톡 쳤다. 꾸깃꾸깃하게 접혀 있는 몸이 움칠 떨렸다. 이번에는 입술을 꾹 누르자 낑 소리가 나더니 선우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태화를 보고도 커다란 눈을 몇 번 더 끔뻑였다. 영 현실감이 없는 눈빛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길래 태화는 키들거리는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왜 여기서 자고 있어.”
태화가 웃음기를 잔뜩 매달며 묻자 선우는 그제야 맑게 갠 낯을 했다. 잠에서 완전히 깬 표정으로 태화를 슥 훑더니 습관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저씨!”
선우가 와락 달려드는 바람에 태화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뒤로 벌렁 넘어가려는 걸 코어 힘으로 겨우 버티고 선우를 마주 끌어안았다. 똥개 같다고 염불을 외우니 아주 똥개 같은 짓을 찾아가면서 했다.
태화는 선우의 등을 길게 쓸어내리다가 뒤로 슬쩍 물러나 시선을 맞췄다. 선우는 뽀뽀해 달라는 듯이 도톰한 입술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병아리콩을 닮은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그냥 병아리였다. 우중충하기 그지없던 애가 한순간에 환해진 낯으로 애교를 부리자 태화는 못 이기는 척 입술에 쪽 소리를 내 주고 뒤로 물러났다. 선우는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 작게 웃었다.
“근데 이건 뭐예요?”
선우는 옆에 떨어져 있는 종이 백을 들여다봤다.
“어? 장어……!”
익숙한 상호를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저녁을 굶은 것도 아닌데 절로 입에 침이 고였다. 참지 못하고 나무 상자를 한번 들춰 봤다가 그 안에 장어가 빽빽이 들어 있자 활짝 웃으며 태화를 봤다.
“어째 나보다도 더 좋아하는 거 같네.”
“아저씨가 제 생각 하면서 사 온 거잖아요.”
“누가 네 생각 했대?”
태화는 괜스레 한번 튕겼다가 선우의 입꼬리가 스륵 내려가는 걸 보고 피식 웃었다. 손끝으로 뺨을 톡 치며 지난번에 네가 잘 먹던 게 생각나서 사 왔다고 말을 덧붙였다. 예전 같았으면 혼자 속 끓이는 걸 보는 게 재밌어 그냥 모른 척했을 텐데, 지금은 시무룩한 것보다 웃는 걸 보는 게 더 재밌었다.
“근데 진짜 왜 나와 있었어.”
장어 때문인지, 이걸 사 온 정성 때문인지 싱글벙글 웃던 선우가 아, 소리를 냈다.
“그냥, 걱정돼서.”
태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할 짓은 제가 더 많이 하면서 뭐 한다고 자꾸 남의 걱정을 하는지 몰랐다. 그래도 그 마음이 기특해 선우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로 들어가자 선우는 양손 가득 장어가 든 종이 백을 들고 태화를 따랐다.
“남한테 할 걱정 있으면 네 걱정이나 해.”
“아저씨는 남 아니잖아요.”
“그럼?”
태화는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면서 뒤를 힐긋 돌아봤다. 선우는 아직 한 칸 낮은 계단에 서 있었다. 잠금이 해제된 경쾌한 소리가 났다. 태화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이요.”
태화는 순간 멈칫했다. 집에 발을 들이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집 안에서 쏟아져 나온 빛이 선우의 낯을 밝혔다. 선우는 제법 진지한 표정이었다. 너무 진지해서 태화는 웃지도 못했다.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라 진심이 툭 튀어나온 듯했다. 태화는 선우를 지긋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주종관계라기엔 너무 멀리 오지 않았나.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네가 주인이고 내가 개 같은데. 이제는 네 눈짓 한 번이면 개새끼처럼 길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과연 내가 네 주인인가, 아니면 네가 내 주인인가?
더는 알 수 없어졌다.
* * *
탁성모의 머리와 몸통은 우림동 어느 골목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발견됐다. 부검의들이 입을 모아 경악스럽다고 한 건 목에 도끼날이 꽂혔던 자국도, 군데군데 남아 있는 고문의 흔적도 아니었다. 바로 생식기의 훼손이었다. 절단한 게 아니라, 망치인지 뭔지 모를 것으로 짓이겨 놨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라고 했다. 경찰로서 수치스러운 말로였다.
한동열은 몸통까지 찾아 비로소 온전한 형태가 된 성모의 시신을 봤다. 어지간한 사이코가 아니고서는 사람을 이 지경까지 만들 수 없을 거란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러니 서태화가 어마어마한 사이코라는 것이었다. 한동열은 여전히 타깃을 태화로 두고 수사를 진행했다. 파도, 파도 나오는 건 없었고, 오히려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열심히 하면 언젠가 빛을 발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줄만 알았다.
용지서장의 호출이 있기 전까지는.
한동열은 서장이 왜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지 몰랐다. 짐작도 되지 않았다. 서장이 아랫사람을 호출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포상하기 위해, 힐난하기 위해.
대부분은 후자였다. 동열 역시 영 예감이 안 좋았다. 밉보일 짓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일일까 싶었다. 동열은 서장실 앞에 서서 똑똑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누구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동열 경사입니다.”
이번에는 묵묵부답이었다. 들어오라는 말이 없었다. 동열은 이대로 들어가도 되나 잠깐 고민하다가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문을 열었다. 발을 들이려다가 순간적으로 몸을 옆으로 홱 피했다. 옆에서 와장창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려다보니 명패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용지서장’이라는 직위와 함께 서장 이름이 적힌 자개 명패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앞을 보자 잔뜩 흥분해서 얼굴까지 벌겋게 붉힌 서장이 씩씩대며 서 있었다.
“어디 한번 해명해 봐! 어!”
서장은 앞에 있는 테이블로 또 다른 무언가를 던졌다. 이번에는 서류 뭉치였다. 한동열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테이블 위에 흐트러진 것들을 주워 들었다. 뭔가 하고 살펴보던 한동열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 갔다. 한동열은 크게 뜬 눈으로 서류 더미를 빠르게 넘기며 읽었다.
“이게…….”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서장이 던진 서류는, 동열의 치부들이었다. 한동열의 치부는 학창 시절부터 시작됐다. 고등학생 때 학교 폭력에 가담해 강제 전학을 갔던 내용부터 시작해서 처음으로 발령받았던 경찰서에서 룸살롱 단속 일을 알려 주는 대가로 뒷돈을 받았던 것, 용지서로 오기 직전에 있던 곳 관할 룸살롱에서 접대받았던 일까지…….
비리가 터질 것 같자 한 1년만 용지서에서 조용히 근무하다가 돌아오라며, 당시 함께 뒷돈을 챙겼던 경찰서장과의 대화 내용도 토씨 하나 빠짐없이 낱낱이 기록돼 있었다. 기록만 있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문제는 서류 틈에 끼어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 속 동열은 룸살롱에서 여자를 끼고 노는 중이었다. 더한 건, 남자 접대부에게 펠라티오 받는 사진까지 있다는 점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천천히 넘겨 보던 한동열은 마지막에 적힌 메모를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서장 다음은 언론’이라는 문구였다.
“해명하라고!”
서장은 사무실은 물론 복도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릴 만큼 크게 소리쳤다. 본인이 관할하는 곳에 근무하는 놈이 이딴 짓을 저질렀다는 게 용서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동열은 인상을 찡긋 구기다가 감았던 눈을 떴다. 고개를 저었다.
“이런 사실 없습니다. 전부 조작된 겁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너 지금 나 병신으로 보냐? 사진이 버젓이 있잖아! 그리고 내가 저거 받고 확인도 안 해 봤을 거 같아!”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애초에 통할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예, 다 제가 한 짓입니다, 하고 곧장 인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동열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저 아랫입술을 아프게 물며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자 이번에는 전화기가 날아왔다. 정확히 명치를 강타당한 한동열은 윽 소리도 내지 못하고 몸을 주춤거리다가 다시 곧게 섰다.
“너 여기 와서도 저딴 짓거리 했어, 안 했어?”
“안 했습니다. 맹세코 용지서로 발령받은 뒤로는 이런 일 없었습니다.”
“씨발!”
서장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대뜸 욕을 갈겼다. 몇 번 더 포효하듯 욕지거리를 내뱉다가 이내 겨우 숨을 골랐다.
“너 그 말 진짜여야 될 거야. 만약 이거 그대로 언론에 퍼졌는데 너 여기 와서도 개짓거리 한 거 하나라도 나오잖아? 그럼 아랫사람 제대로 관리 못 한 내 모가지도 간당간당이야. 너 그 말 책임져.”
“예. 절대 아닙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한동열은 한 번 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 말만은 진실이었다. 피신하듯 용지서로 온 건데 여기 와서도 그런 짓을 했다면 그건 진짜 병신임을 인증하는 꼴이었다. 한동열은 이를 아득 물었다. 저는 병신이 아니었다. 용지서로 부임한 이후로 비리를 저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3개월 근신해.”
내내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한동열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서장님?”
“서장님은, 씨발! 나가!”
뭐라 항변하기도 전에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말해 보려던 동열은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서장 앞에서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인상만 짙게 찌푸리고 고개 숙여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서장실을 나오자마자 닫힌 문 너머로 컵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사무실 살림을 다 깨부숴야 속이 시원해질 모양이었다. 동열은 서장실 앞에서 가만히 서 있다가 한참 만에야 걸음을 뗐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르니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누구 짓인지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서태화 작품일 게 뻔했다.
“좆같은 새끼가, 이 씹.”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갈 정도로 주먹을 억세게 쥐었다. 당장이라도 서태화를 찾아가 아구창을 갈기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게 바로 서태화가 원하는 일일 터였다. 그래도 생각할 머리가 있는데 머저리처럼 무턱대고 찾아갈 순 없었다. 지금까지 매번 당해 오지 않았던가. 대책 없이 갔다가는 또 당할 게 분명했다. 동열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가 3개월간 근신하라던 서장의 말을 떠올리고 씨발……! 욕을 읊조렸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