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3권) (7/13)

7.

차 안으로 신음이 난무했다. 한동열은 속으로 씨발을 몇 번이나 외쳤는지 몰랐다. 최선우의 기둥서방이 서태화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태화가 대문 앞에 나타났을 때 다소 놀라기도 했고, 약간 기대하기도 했다. 저 새끼가 최선우를 납치한 놈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눈을 부릅뜨며 태화의 동태를 살폈다.

문제는 최선우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서태화는 납치범도 뭣도 아니었다. 최선우가 매일 보고 싶다고 웅얼거리던 그 애인 나부랭이였다. 혹시나 면도방 손님이 아닐까 했는데 선우가 서태화에게 하는 짓을 보면 비단 남창과 손님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최선우가 서태화를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서태화도 최선우를 만만찮게 생각했다. 겉으로는 안 그렇게 보여도 다친 곳부터 챙기는 걸 보면 그 마음이 다 느껴졌다.

두 사람은 섹스를 존나게 했다. 진짜 좆 빠지게 많이 했다. 서태화는 정육점이나 하는 놈이 체력이 뭐 그렇게 좋은지, 지치지 않았고, 최선우도 그 얄따란 몸뚱어리로 서태화를 다 받아 냈다. 환장하는 연인이었다. 이제 좀 끝이려나 했더니 또 어떤 부분에서 불이 붙었는지 아직도 하는 중이었다. 요즘 시대의 기계는 쓸데없이 성능이 좋았다. 서태화와 최선우의 신음뿐만 아니라 몸끼리 부딪쳐 나는 젖은 소리까지 적나라하게 들렸다.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남이 씹 뜨는 소리까지 듣냐. 인제 그만 좀 듣자.”

탁성모가 한 소리 했다. 한동열은 탁성모를 스윽 쳐다보고 고개를 저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지금까지 남이 씹 뜨는 소리를 들으며 알게 모르게 자지를 만져 댔으면서 아닌 척은 오지게 했다.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데 티가 안 날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병신 같았다.

버릇처럼 또 아랫도리를 건드리던 탁성모는 한동열이 경멸 어린 눈빛으로 쏘아보자 멋쩍은 듯 큼큼 소리를 냈다. 그때 도청 장치에서 ‘아으……!’ 하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성모가 혀끝을 쯧 차고 볼륨을 낮추려는데 무슨 일인지 동열이 다급히 막았다.

“잠깐만! 잠깐만요!”

“뭐? 왜? 이거 들으면서 딸이라도 치게?”

탁성모가 저질스러운 농담을 던졌지만, 한동열은 들은 체도 안 했다. 고통과 쾌감이 반반 섞인 신음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한동열은 꽤 진지한 표정으로 선우가 내는 신음을 감상했다. 집중하느라 눈살이 찌푸려지기까지 했다.

- 아!

한 번 더 단말마 같은 탄성을 들은 한동열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미친놈처럼 수첩을 넘기더니 어느 부분에서 뚝 멈췄다.

[아!

남자 목소리…….

대학 후배?? 수상함]

언젠가 남겨 뒀던 메모였다. 그 위에 있는 글씨까지 본 동열은 눈을 번뜩 떴다. 펼쳐 놓은 곳 가장 위에는 ‘태화 정육 2차 방문’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날 창고 문 안쪽에서 났던 소리가 떠올랐다. 서태화는 놀러 온 후배가 낸 소리라고 했지만, 아니었다. 그건 분명 최선우의 목소리였다. 사실 제대로 들은 것도 아니고, 워낙 작고 짧은 탄식이었기에 무엇도 확신할 수 없지만, 동열의 머릿속에서 그때 들은 소리는 이미 최선우의 목소리라고 기정사실화됐다.

“허…….”

헛웃음이 터졌다. 그때는 최선우가 한창 실종됐을 당시였다. 최선우도 감금을 3개월 정도 당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만약 당시 태화 정육에 선우가 있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문제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 아으, 아저씨……. 나 힘들어, 흐……. 너무 느껴서 이상해요, 아!

동열은 도청 장치를 거의 노려보는 식으로 빤히 응시했다. 차 안에는 최선우가 좋아 죽는 소리가 쉼 없이 울려 퍼졌다.

태화는 눈을 천천히 떴다. 시계를 봤다. 새벽 3시를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겨우 50분 정도 눈을 붙인 것이었다. 피곤할 만도 한데 태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생기가 넘쳤다.

옆에서 무언가 꿈지럭거리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최선우가 품에 더 안겨 보겠다고 자면서도 굼벵이처럼 꾸물꾸물 파고드는 중이었다. 태화는 쩝 입맛을 다시며 선우 쪽으로 돌아누웠다. 마른 몸을 품 안 가득 욱여넣고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분명 싸구려 샴푸를 썼을 텐데 좋은 향이 솔솔 났다.

“고장이라도 났나?”

아랫도리가 욱신거리는 느낌에 이제는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린 놈을 잡아먹고 영생을 누린다는, 뭐 그런 요괴에 대한 전설이 각국에 많은 이유가 다 있다고 생각했다. 최선우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입 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섹스하고 난 뒤 늘 최선우는 이렇게 늘어져 있고 저 혼자만 쌩쌩한 걸 보면 제가 이놈의 정기를 빼먹는 게 아닌가 싶었다.

별 시답잖은 생각을 잠깐 하던 태화는 픽 웃다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예쁜 놈은 자는 모습도 예뻤다. 쿨쿨 자는 모습을 보니 또라이 기질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여름철 말랑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뺨이나 가지런히 늘어진 속눈썹, 내내 우느라 발갛게 상기된 콧잔등, 오밀조밀하니 도톰한 입술과 전체적으로 동그스름한 인상은 누가 봐도 순둥이 그 자체였다.

그냥 평생 재워 버릴까.

박제를 해 둬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힘들다며 찔찔 짜면서도 제게 바짝 안겨 오는, 살아 있는 최선우를 보는 게 꽤 재밌는 까닭이었다.

“어쩌다 이런 놈한테 코 꿰어서는.”

태화는 선우의 아랫입술을 꾹꾹 누르며 장난쳤다. 한번 콕 찌를 때마다 뿅뿅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평소에도 도톰한 입술은 제가 물고 빨아 더 통통해져 있었다. 이 입술이 어찌나 보고 싶던지, 태화는 선우가 제 발로 기어들어 오길 기다리다, 기다리다 참지 못하고 먼저 찾아 나선 일을 떠올렸다. 그건 별로, 저답지 않은 짓이었다.

우선 장 선생에게 선우의 인적 사항을 넘기며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장 선생은 오래전 태화에게 큰 도움을 받은 사람이었다. 고 박사도 마찬가지였다. 태화가 무슨 일이든 믿고 부탁할 수 있는 사람 중에 그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고 박사가 의사 커리어를 걸고 거짓 목격담을 말한 것과 같이 장 선생 역시 태화 일이라면 뭐든 할 사람이었다.

‘최선우라고 남자애 좀 찾아 줘요.’

‘최선우?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이다?’

‘……멀리는 못 갔을 겁니다.’

태화는 장 선생이 ‘어디서 들어 봤지?’ 하고 중얼거리는 걸 무시하고 제 할 말만 했다.

‘서울 안에 있을 거예요. 스물한 살에…….’

선우에 대해 말하던 태화는 잠깐 말문이 막혔더랬다. 최선우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어도 너무 없었다.

‘6월까지 우림동 꽃다방에서 일했고, 열흘 전에 용지서에서 경찰 조사 받았어요. 아마 받고 나와서 딴 데로 샌 걸 겁니다.’

‘다른 특징 같은 건 없어?’

‘예뻐요. 딱 보면 헛웃음만 나올 만큼.’

태화의 말에 장 선생은 뭔 개소리냐는 듯 침묵을 지켰지만 달리 최선우를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최선우의 가장 큰 특징은 미인이라는 것이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사진이라도 한 장 저장해 놓을걸.

아쉬워하던 태화에게 반나절도 안 되어서 장 선생의 연락이 왔다. 아침에 부탁했더니 저녁 8시도 되지 않아 찾았다고 했다. 역시 장 선생은 장 선생이었다. 태화는 선우가 머문다는 집 주소를 받고 허허롭게 웃었다.

낙현동.

우림동만큼이나 후진 동네였다. 일이 끝나자마자 찾아오라니까 왜 구태여 이딴 동네에 처박혀 있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가게 마감을 두 시간 앞당겨 마무리하고 집으로 찾아갔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쪼끄만 놈이 그새 또 어디로 갔나, 아니면 혼자 발발거리며 돌아다니나 싶어 짜증도 났었다. 끊으려던 담배는 최선우 때문에 또다시 입에 댔고, 최선우가 라면과 즉석 밥을 달랑달랑 들고 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거의 반 갑을 피웠다.

“이런 거 뭐 예쁘다고.”

태화는 그렇게 말하면서 선우의 이마에 입술을 지그시 맞댔다. 그 바람에 깼는지 선우가 낮은 신음을 냈다. 동그란 머리통이 천천히 움직였다. 선우는 부스스 눈을 뜨고 태화를 올려다봤다. 겨우 뜬 눈에는 잠기운이 그득했다. 많이 울어서 그런지 아직도 눈가가 불그스름하니 부어올라 있었다.

태화는 눈물이 눈곱처럼 말라붙은 걸 살살 비벼서 떼 줬다. 잘 안 떼지는 건 혀로 핥아 가며 뗐다. 선우는 눈을 몇 번 끔뻑끔뻑 뜨더니 자연스럽게 입술을 쭉 내밀었다. 이딴 건 또 어디서 배웠는지, 태화는 그저 기가 찼다.

“뽀뽀.”

태화가 가만히 있자 선우는 한 번 더 재촉했다. 그는 마지못한 듯 동그랗게 모인 입술에 쪽 소리를 냈다. 그제야 선우는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눈웃음 지었다. 태화는 그 모습을 멀거니 내려다봤다.

“왜 그렇게 봐요?”

“더 하고 싶어서.”

곧바로 나온 대답에 선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많이 놀랐는지 잠이 다 달아난 눈이었다. 태화가 장난스레 아랫도리를 비비적거리자 선우는 아예 사색이 돼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경계선을 만들 듯 이불을 둘둘 말아 사이에 세웠다.

“더는 못 해요……! 저 진짜, 허리 나갈 거 같아요.”

“알아. 더 안 해.”

태화는 키들거리며 웃었다. 저렇게 나오면 더 건드리고 싶어진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도 오늘은 이쯤 해 둘까 싶었다. 오랜만에 만났다는 핑계로 죽도록 하기는 했으니 조금은 쉬게 해 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싱긋 웃으면서 눈가를 쓰다듬자 선우가 눈치를 살살 봤다. 아무래도 바짝 선 태화의 아랫도리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대신 손으로 해 드릴까요……?”

선우는 눈동자를 바짝 올려 쳐다보며 말했다. 이게 선우가 생각한 최선의 절충안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입으로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이미 태화의 것을 입으로 몇 번이고 받아 내서 목구멍이 아렸다. 입가도 살짝 찢어진 것 같고, 입 안은 아직도 미끈거렸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손이었다. 물론 손으로도 힘들 것 같지만 힘내 보기로 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쳐다보는데 태화는 말이 없었다. 약간 시큰둥한 얼굴을 하다가 선우의 손을 끌어 고간에 붙였다.

“손으로 시작하면 손으로 끝날 수 있을 거 같아?”

낮은 목소리로 묻자 선우는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그저 말뿐인데도 등허리로 힘이 들어갔다. 선우는 고개를 팔랑팔랑 저었다. 손을 떼려고 하는데 태화가 좀 더 당겨 왔다. 이대로라면 진짜 한 번 더 할 판이라 선우는 몸을 슬금슬금 뒤로 뺐다. 손만 잡혀 있고 엉덩이는 쭉 뺀 자세가 되자 태화는 그제야 푸스스 웃었다. 아랫도리에서 손을 떼고 선우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줬다.

태화는 선우를 품에 다시 한번 꼬옥 안아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선우에게 이불을 제대로 덮어 주고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벗어 뒀던 팬티는 아직도 축축했다. 최선우를 만나자마자 질질 흘려서 그랬다. 찝찝했지만 별수 없이 팬티를 주워 입고 옷까지 입자 선우도 몸을 일으켜 앉았다.

“벌써 가요?”

“오늘 마장동 가는 날.”

“그래도 오랜만에 봤는데…….”

선우가 아쉽다는 듯이 입을 삐쭉 내밀자 상의까지 챙겨 입은 태화가 다가와 쪽 입을 맞췄다.

“그동안 밥은 잘 챙겨 먹었어?”

“네.”

선우는 씩씩하게 대답했는데 태화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돈이 어디 있어서? 너 돈 없잖아.”

그 말에 태화가 왜 저런 얼굴을 하는지 이해되었다. 선우는 아, 소리를 내고 설명을 덧붙였다.

“한동열이라고 형사님이 계시는데. 아, 이 집 내주신 분이에요.”

한동열이 누군지는 두 사람 모두 알았으나 선우는 태화가 모른다는 전제를 두고 말했다. 도청기 때문이었다.

“뭐? 한동열?”

“아저씨도 한 형사님 알아요?”

선우는 그렇게 묻고는 입 모양으로 ‘도청기’라고 말했다. 다행히 태화는 선우의 말을 알아들었다. 이럴 때 보면 최선우가 마냥 맹추는 아닌 것 같았다.

“어쩌다 알게 됐어.”

태화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근데 그 사람이 집을 내줘?”

“네. 당분간 쓸 돈도 주셨고요.”

“넌 그걸 그냥 넙죽 받았고?”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화의 낯에서 감정이 죄 빠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정했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선우는 자신이 뭘 잘못했나 싶어 긴장했다. 태화는 화를 내고 있었다. 화내는 서태화는 오랜만이라 선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이불을 움켜쥐었다. 태화는 선우 앞에 삐뚜름하게 섰다.

“뒤라도 대 줬어?”

“아니요. 그런 의미로 준 거 아…….”

“너는 경계심이랄 게 없냐? 준다고 다 받아?”

태화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감정 하나 섞이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선우는 그래서 더 무서웠다. 겉으로 표출되지 않는 화가 얼마나 짙은지, 익히 경험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선우는 잔뜩 겁먹은 눈으로 태화를 올려다봤다. 태화의 손을 가져와 조물조물 만졌다.

“화, 났어요……?”

“어.”

“화 안 내면 안 돼요?”

묻자 태화의 미간이 구깃하게 좁아졌다.

“무서워서…….”

선우는 무섭다면서 할 말은 다 했다. 오물오물 움직이는 입술을 멀거니 내려다보던 태화는 곧 한숨을 툭 뱉었다.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커다란 가슴 근육을 팽창시키고 또다시 쥐어짜 내며 호흡하다가 불현듯 눈을 번쩍 떴다. 또 무슨 생각이 났는지 눈동자로 빛이 스몄다.

“그 새끼가 얼마 줬어?”

“20만 원이요.”

“씨발, 돈이 남아도나. 뭔 20만 원씩이나 줘.”

태화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조금 더 커졌다.

“다 썼어?”

“그걸 어떻게 다 써요.”

“남은 건 어딨는데?”

선우는 서랍을 가리켰다. 태화가 팬티를 찾겠다고 뒤적이던 바로 그 서랍이었다. 그러고 보니 서랍에서 언뜻 돈을 본 것도 같았다. 태화는 서랍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열어 봤다. 14만 원 하고도 천 원짜리 몇 장과 동전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이게 한동열 돈이라는 것도 짜증 나는데, 열흘 동안 썼다는 게 고작 5만 원 남짓이라는 게 더 짜증 났다. 짜증을 넘어서서 화가 났다. 저 미련한 놈은 쓰라고 준 돈을 마음껏 쓰지도 못했다.

태화는 욕을 짧게 짓씹다가 안에 든 지폐를 모두 모아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찢었다. 태화를 가만히 보고 있던 선우는 돈이 조각조각 나기 시작하자 놀란 눈을 뜨고 다가갔다.

“돈을 왜 찢어요! 아니, 돈을 왜……! 잠깐, 잠깐만!”

선우는 태화의 팔을 붙들고 말렸다. 하지만 태화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옆으로 툭 밀치는 힘에 풀썩 쓰러졌다가 찢어진 지폐가 후두두 떨어지는 걸 보고 다시 기어갔다. 이번에는 태화의 손목을 잡고 매달렸다. 천 원짜리 몇 장이면 선우도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만 원권과 만 원짜리가 찢어지는 모습에 선우는 제 심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돈은 목숨보다도 소중했다. 돈 때문에 목숨도 내놓고 살던 선우에게 있어 돈은 저 자신보다도 소중한 것이었다. 다시 이어 붙이지도 못할 만큼 갈기갈기 찢어 대는 탓에 선우는 하지 말라고 떼를 쓰며 연신 태화를 말렸다. 손가락을 잡아 쥐자 태화가 움직임을 뚝 멈추고 눈길을 슥 던졌다.

“놔.”

선우는 다급히 도리질 쳤다.

“안 놔?”

“돈을 찢으니까…….”

“앞으로 내 돈 말고 남의 돈은 안 쓰는 거야.”

“…….”

“대답 안 해?”

선우는 입을 꾸욱 다물었다. 이젠 화가 나기까지 했다. 가슴이 너무 답답하면 울음이 나오는 것처럼 선우도 목구멍 가득 짠맛이 들어찼다.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고,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매달렸다. 뺨까지 새붉히고서 화났다는 걸 온몸으로 알렸다. 최대한 매섭게 쳐다봤지만, 태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가시다는 표정을 할 뿐이었다. 선우는 아랫입술로 윗입술을 꾹꾹 눌러 가며 울음을 참았다.

“대체 뭐가 문제야.”

“……아저씨는 돈이 많으니까 이런 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지만, 나는 아니라고요. 누구한테 받았든 저한테 돈은 소중해요. 이렇게 박박 찢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네가 더 소중해.”

선우가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는 중간에 태화가 불쑥 끼어들었다. 뒷말을 이으려던 선우는 말을 멈추고 입을 반쯤 벌렸다. 힘이 잔뜩 들어갔던 눈이 스륵 풀려 순하게 변했다. 평소처럼 약간 맹한 얼굴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별 같잖지도 않은 놈한테 받은 이 돈보다 네가 더 중하다고.”

태화가 한 번 더 말하자 선우는 결국 눈물을 툭 떨어뜨렸다. 맺혀 있던 것들이 도록도록 흘러넘쳤다. 소리도 못 내고 끅끅거리다가 태화가 입술을 톡 치자 그제야 서럽게 흐느껴 울었다.

스스로도 자신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는 아니라고 해 줬다. 이깟 돈보다도 네가 더 소중하다고 말해 줬다. 진짜냐고 구태여 묻지 않아도 빈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태화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서, 아주 중한 걸 바라보는 눈빛이라서 선우는 정말 그에게 자신이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다.

선우는 엉엉 울어 가며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집 떠나겠다는 배우자를 붙잡는 모양새였다. 어찌나 애처롭게 울던지 누가 보면 ‘너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라는 막말이라도 들은 줄 알 것 같았다.

태화는 제 다리를 부둥켜안고 울어 젖히는 선우를 내려다보다가 그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허벅지에 고개를 파묻은 선우의 이마를 툭 밀쳤다. 선우는 고개를 뒤로 발라당 넘기다가 다시 돌아와 또 울었다. 결국 태화가 직접 떼어 내야 했다. 태화는 선우 앞에 쪼그려 앉아 눈을 맞췄다.

“울 정신 있으면 앞으로 남의 돈은 쓰지 않겠습니다, 다짐이나 해.”

선우는 끅끅 소리를 내 가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태화가 시킨 문장을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끅! 소리가 나서 다시 다물었다. 말하고 싶은데 자꾸만 목이 멨다. 코까지 꽉 막혀서 훌쩍거리는 소리까지 내자 태화는 한심하다는 듯 미간을 구기며 쳐다봤다. 새빨개진 콧잔등을 톡 쳤다. 간신히 매달려 있던 멀건 콧물이 찔끔 나와 대롱대롱 매달렸다.

“이건 뭐, 동네 바보도 아니고.”

태화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짧게 혀를 찼다. 커다란 손으로 선우의 코를 슥슥 닦아 줬다. 콧물도 눈물만큼이나 많이 흘려서 태화의 손바닥이며 손등이 전부 끈적하게 젖었다.

나중에는 감당이 안 돼 결국 입고 있던 옷자락을 들어 올려 닦아 줘야 했다. 그 바람에 태화의 검은색 옷이 콧물로 젖어 아예 새까맣게 짙어졌다. 선우는 매일 단정하게 입고 다니는 태화가 저 때문에 더럽혀진 것 같아서 인상을 찌푸렸다. 울먹이는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불을 끌어와 코를 팽 풀었다. 그 모습에 태화는 웃음과 한숨을 함께 내쉬었다.

“다짐 안 해?”

괜스레 엄하게 다그치자 선우는 침을 꼴딱 삼키고 태화를 바라봤다.

“앞으로 남의 돈은 쓰지 않겠습니다…….”

“크게.”

“앞으로! 남의 돈은……! 쓰지 않겠습니다!”

선우는 군기가 바짝 들어 크게 외쳤다. 태화는 그만 큭큭대며 웃었다. 그럴 만도 했다. 아직도 뺨은 눈물로 젖어서 번들거리고, 눈가는 새붉혀 놓고, 코가 막혀 맹맹한 목소리에, 나체로 앉아 작은 젖꼭지를 발딱 세워 놓은 채 저런 다짐이나 하니 웃길 수밖에 없었다. 태화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다가 선우의 눈가를 부드럽게 문질러 닦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오자마자 섹스하느라 제대로 보지 못한 집 안을 찬찬히 훑었다.

이게 사람이 살 만한 집인가 싶었다. 있는 거라고는 냉장고와 식탁뿐이었다. 가스레인지도 없이 라면 포트만 덩그러니 있는 걸 보니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화장실은 또 어떤가. 구석에는 곰팡이가 끼어 있었고, 거울에도 물때가 가득했다. 다시 주방으로 넘어온 태화는 찬장을 열어 보고 낮게 탄식했다. 라면과 즉석 밥이 전부였다. 젓가락도 없어서 편의점에서 얻어 온 것으로 보이는 나무젓가락만 있었다.

이 상태로 열흘을 지냈다니, 다시 한번 최선우의 미련함 때문에 짜증이 났다. 그때 옷을 챙겨 입은 선우가 다가왔다.

“넌 좀 더 자다가 짐 싸 들고 와. 아니, 뭐 짐도 없잖아. 그냥 맨몸으로 나와서 우리 집으로 와.”

태화는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기가 죽을 법도 한데 선우는 불현듯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려 웃었다. ‘우리 집’이라는 말이 너무 좋았다. ‘내 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 태화는 우리 집이라고 했다. 우리라는 범주에 자신과 태화가 함께 묶인 게 못내 좋아서 선우는 그를 답삭 껴안았다.

“응.”

설렘에 취해 짤막하게 대답하자 태화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선우를 내려다봤다.

“응?”

“응.”

“으응?”

태화가 계속 되풀이하는데도 선우는 그저 헤실헤실 웃기만 했다. 태화는 선우를 말없이 들여다보다가 고개 숙였다. 당연히 입맞춤이 이어질 줄 알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던 선우는 돌연 악! 하고 소리쳤다. 태화가 아랫입술을 깨문 탓이었다. 꼭 어젯밤에 깨문 그 자리라 더 아팠다.

선우가 입술을 문지르며 앓는 소리를 낼 동안 태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선우를 지나쳐 현관으로 갔다. 어제 너무 급하게 들어와서 신발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이만큼이나 여유가 없었나 싶어 태화는 픽 웃다가 신발을 챙겨 신었다.

“간다.”

“잠깐만요.”

“또 뭐…….”

뒤돌아보자마자 선우가 쪽 입을 맞췄다. 키 차이가 꽤 나서 어깨를 잡고 까치발을 든 채였다. 한 번 더 쪽 소리를 냈을 땐 태화의 귀 끝이 움찔거렸다.

“오늘도 내 생각 많이 해요.”

말하는 목소리가 제법 씩씩했다. 도청기로 전부 들어갈 정도였다. 그래서 태화는 헷갈렸다. 한동열이 들으라고 하는 연기인지, 아니면 최선우의 진심인지.

탱탱볼 같은 놈을 상대하려니 머리가 아팠다. 뒷덜미가 찌릿했고, 속이 메스꺼웠다. 묘한 기분이었다. 태화는 제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선우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없이 집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이따 봬요! 하는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태화는 괜스레 턱을 긁적이며 대문을 나섰다. 겨울로 들어서는 때라 아직 컴컴한 새벽녘이었다.

나오자마자 담배를 찾아 물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동안 눈동자를 추켜올려 흰색 세단을 응시했다. 어제 있던 그 자리 그대로 차가 서 있었다. 선팅이 강하게 들어가 있어서 내부가 보이진 않았지만, 태화는 저 안에 한동열이 앉아 있다는 걸 알았다. 느긋이 담배를 피우며 차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 대를 피우고 두 대를 전부 피울 때까지 멀거니 쳐다보다가 담배꽁초를 퉁기고 걸음을 옮겼다.

반대쪽이 아닌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태화는 운전석 문을 똑똑 두드렸다. 반응이 없었다. 무신경한 얼굴로 새카만 창문을 내려다보다가 주먹 쥔 손으로 세게 때렸다. 쾅쾅, 몇 번만 더 하면 창문이 빠개질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네 번째로 치려는데 그제야 창문이 슥 내려갔다. 역시 운전석에 한동열이 앉아 있었다. 태화는 동열이 고개를 내밀기도 전에 지갑에서 수표 몇 장을 꺼내 차 안으로 툭 던져 넣었다. 순간 한동열과 눈이 마주쳤다.

“감사했습니다.”

간단히 말하고 돌아섰다. 한동열은 멀어지는 태화를 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허벅지와 발치에 수표가 무더기로 떨어져 있었다. 전부 10만 원권이었고, 도합 여덟 장이었다. 한동열은 빳빳한 모습으로 제 허벅지 사이에 끼어 있던 수표를 손에 쥐자마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 씨발 새끼가!”

욕을 크게 내지르며 핸들을 쾅! 내리쳤다. 차에서 멀어지는 태화에게까지 전부 들릴 만큼 큰 소리였다. 태화는 세상 여유로운 걸음을 떼며 걸었다. 뒤에서 씨발씨발거리는 소리가 다 들렸다. 씩 웃는 웃음이 지어졌다. 점심에 뭘 먹을지 벌써 고민했다. 애가 그새 많이 말라 있던 게 떠올랐다. 원래도 한 품에 안기던 놈이었는데 다시 안아 보니 품이 남기까지 했다. 우선 고기를 좀 먹여야 할 성싶었다. 마침 마장동에 가는 날이니 질 좋은 고기로 떼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쯤 콧물 범벅인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 자고 있을 최선우가 눈에 선했다. 두 눈에 잠이 그득 묻어나서 더 자고 나오라고 했는데, 차라리 같이 데리고 나와 차에서 좀 재우는 게 나았을 것 같았다. 혼자 두면 불안한 게 최선우였다. 하여튼 뭘 키우는 건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사람을 무뎌지게 만들었다. 태화에게 있어 그건 조금 위험한 일이었다.

* * *

몸만 챙겨 오랬더니 선우는 남은 라면과 즉석 밥, 나무젓가락 하나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다시 태화 정육으로 돌아왔다. 가게 문 앞에 서서 방긋 웃는 선우 때문에 태화는 헛웃음도 짓지 못했다. 며칠 밖을 나돌아 다녔다고 말도 못 하게 꼬질꼬질했다. 분명 혼자 지낼 때도 잘만 씻고 살았을 텐데, 태화가 보기에는 그저 흙탕물에서 한바탕 신나게 놀고 온 똥강아지였다.

돌아온 첫날, 태화는 선우와 함께 씻다 말고 섹스했다. 욕조 안에서도 하고, 세면대를 잡고서도 하고, 방으로 가는 그 짧은 시간이 아까워 선우의 구멍에 자지를 박아 둔 채 애를 번쩍 안아 들고 들어갔다. 쾌락에 젖은 신음이 나오던 선우의 입에서 ‘그만, 그만……!’ 하는 외침이 나올 때까지 하고 또 했다. 이틀을 꼬빡 침대 위에서 보낸 탓에 개업 후 개인 사정으로 한 번도 쉬어 본 적 없는 태화 정육은 문을 하루 닫아야 했다.

끝으로는, 지쳐서 기절하듯 잠든 선우를 깨워 특등급 한우 꽃등심을 구워 먹였다. 식탁까지 갈 힘도 없다는 선우의 투정에 태화는 직접 구운 고기를 접시에 덜어 침대까지 대령해야 했다. 눈은 감고 있으면서 고기를 후후 불어 입술에 대 주면 쪽쪽 받아먹는 게 여간 깜찍할 수 없었다. 그러다 돌연 이게 지금 다 뭐 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다 씹었다며 입을 아 벌리는 선우의 모습에 태화는 빙긋이 웃으며 고기를 입 안으로 쏙 넣어 줬다.

태화는 가게 마감을 빠르게 마치고 집으로 올라왔다. 원래라면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순간부터 저 안쪽에서 달려 나오는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이상하게 잠잠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도 마찬가지였다. 집 안이 고요했다. 생명체 따위는 무엇도 없는 것처럼 공기가 적막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천천히 신발을 벗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태화는 불현듯 눈을 크게 뜨며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곧장 제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고서야 비로소 숨을 크게 내쉬었다. 선우가 제 침대 위에서 자고 있었다. 워낙 사고를 많이 치는 놈이라 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걱정했는데, 자는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놓였다. 긴장이 풀렸는지 선우는 최근 잠이 늘었다.

“무슨 애새끼도 아니고.”

선우는 태화 대용인 양 그가 사용하는 베개를 배 위에 올려 둔 채였다. 선우가 돌아온 날부터 둘은 태화의 방에서 함께 생활했다. 함께 잠들고, 함께 일어났다. 이러니까 꼭 신혼부부 같다고 말해 놓고 도리어 본인이 낯부끄럽다는 듯이 웃던 선우의 낯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신혼부부면 내숭이라도 좀 떨 것이지, 선우는 저한테 맞지도 않는 태화의 티셔츠에 하얀 면 팬티만 입고 있었다.

자는 동안 생리적인 현상으로 작게 텐트 친 앞섶을 보던 태화는 픽 웃고 선우 곁으로 다가갔다. 최선우는 조금 묘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두말할 것 없이 미인상인데 전체적으로는 잘생긴 낯이었고, 또 눈웃음이라도 지으면 참 예뻤다. 주변에 이상한 놈들이 득시글거리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됐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까지는 아니고, 예쁘장한 왕자 정도는 되는 인물이었다.

“하…….”

태화는 개처럼 킁킁거리며 선우의 냄새를 맡았다. 오늘은 갓 씻고 나온 말랑한 살결 냄새를 풍겼다. 달큼하니 중독성이 있었다. 몇 번 더 숨을 깊게 들이마셔 가며 선우의 살냄새를 느꼈다. 손끝으로 발갛게 익은 뺨을 쿡 찔렀다. 깊게 잠들었는지 쿡쿡 두 번을 더 찔러도 몰랐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자는데도 추접스럽기는커녕 마냥 귀여웠다.

귀여운데 씨발, 존나 꼴렸다.

태화는 결국 참지 못하고 선우의 가슴 위로 올라탔다. 무게를 주지 않고, 선우가 배 위에 올려 둔 베개에 살짝 걸터앉은 채 바지 지퍼를 내렸다. 조금 전부터 아프도록 서 있던 좆이 퉁 튀어 올라 모습을 드러냈다. 자면서 침을 질질 흘리는 선우처럼 태화의 자지도 멀건 물을 울컥울컥 쏟아 내고 있었다. 태화는 잔뜩 성이 난 자지를 쥐고 천천히 문질렀다.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깔아 선우를 담았다.

“얜 뭐 온몸이 다 과일처럼 생겼어.”

말 그대로였다. 선우는 닮은 것도 많았다. 헤실헤실 웃는 걸 보면 개를 닮았다가도 매초롬한 얼굴을 하면 고양이상이었고, 맹하게 굴면 톡 튕기고 싶게 생긴 완두콩을 닮아 있었다. 오늘처럼 달큼한 냄새를 풍기는 날은 온갖 과일이 떠올랐다.

혈액 순환이 잘되어서 붉고 도톰한 입술은 앵두를, 늘 새붉혀 있는 뺨은 사과를, 불그스름한 눈가는 딸기를 연상케 했다. 한 손 가득 들어오는 작은 엉덩이는 한여름의 말랑한 복숭아와 똑같았고, 음모가 별로 없이 맨송맨송한 자지는 잘 익은 자두와 판박이였다. 태화는 선우의 몸 하나하나를 과일에 비유하는 동안 잔뜩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하얀 살결을 빨면 단물이 쭉 나올 게 분명했다. 입 안 가득 단맛이 환상처럼 느껴졌다. 자꾸 침을 삼키며 손을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프리컴으로 젖어 든 탓에 찌걱이는 소리가 났다. 마찰열로 인해 투명하던 프리컴이 허연 실타래처럼 좆기둥 위에 여기저기 엉겨 붙었다.

“씹…….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아……!”

사정이라도 하듯 프리컴이 흘러넘쳤다. 아예 뽑아낼 것처럼 아귀힘을 세게 주고 턱턱 문지르자 물이 뚝뚝 떨어졌다. 은실처럼 길게 이어져 내려간 좆물은 그대로 선우의 입술 위에 고였다. 태화는 제 좆에서 나온 물로 선우의 입술이 번들번들 젖어 가는 걸 가만히 관찰했다. 자는 놈을 반찬 삼아 딸 치는 취미는 없을 줄 알았는데 여느 때보다도 더 흥분되었다.

“후…….”

더운 숨 사이사이로 신음도 내뱉어 가며 자위에 열중했다. 질 좋은 침대가 울렁출렁일 정도였다. 순간 귀두 끝으로 말캉한 게 닿았다. 태화의 눈이 번뜩 뜨였다. 선우가 혀를 빼꼼 내밀어 좆구멍을 핥고 있었다. 태화는 별안간 허허롭게 웃었다.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것과는 달리 선우는 아직 꿈나라인 듯했다. 그저 입술이 축축하고 뭔가 짭짤한 맛이 나서 잠결에 되새김질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응…….”

낮게 앓는 소리까지 내는 걸 보니 정말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태화는 선우가 무슨 꿈을 꾸고 있을지 상상해 봤다.

작은 햄스터가 되어 급수기를 빨아 먹는 꿈을 꿀지, 아니면 더운 여름에 뚝뚝 녹아 흐르는 막대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는 꿈을 꿀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제 자지를 핥고 빠는 꿈을 꿀지. 전혀 예상이 안 되었다. 뭐가 됐든 선우는 꿈에서 뭔가를 참 맛있게 먹는 중이었다. 쩝쩝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시다가 다시 혀를 내밀고 태화의 좆 끝을 핥았다. 혀끝으로 좆구멍 사이를 갈라 할짝대는 느낌에 태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윽!”

사정감이 느껴지는데 사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는 중이라 그런지 유난히 더 뜨끈하고 미끈한 혓바닥을 조금 더 느끼고 싶었다. 복근이 성날 만큼 힘을 주고 사정을 참았다. 빠르게 움직이던 손도 느릿한 박자로 바꿔 뭉근하게 문질렀다. 젖은 소리가 더 적나라하게 났다. 찔걱이는 소리를 내며 한창 자위하고 있는데 불현듯 눈을 얇게 뜬 선우와 시선이 마주쳤다. 당황할 법도 한데 태화는 별스럽지 않다는 듯 눈썹만 살짝 들썩였다.

선우는 제 눈앞에서 꺼떡이는 좆과 그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태화를 번갈아 쳐다봤다. 똑, 좆물이 또 한 방울 떨어졌다. 선우는 본능적으로 입을 아 벌려 프리컴을 받아먹고 다시 두 눈을 끔뻑끔뻑 떴다.

“꿈인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꿈도 있나……?”

한 번 더 웅얼거렸다. 방금 막 자다 깨서 뚱한 얼굴이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도 구분하지 못하고 혼자 갸우뚱거리는 모습에 태화가 씩 웃는 동안 선우는 지금 상황을 꿈이라고 단정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일 수밖에 없었다. 태화는 깨워서 섹스하면 섹스했지 자는 사람 앞에서 자지를 훤히 내놓고 자위할 사람은 아니었다. 매번 제게 수치심이랄 게 없냐고 하던 사람인데, 이런 남사스러운 짓을 할 리 없었다. 선우는 그렇게 혼자 판단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꿈이니까 더 좋은 것도 할 수 있나?

선우는 다시금 입술에 떨어진 좆물을 핥아 먹으며 생각했다. 좋은 거라니, 태화의 자지를 빠는 것만큼 좋은 게 또 있을까 싶었다. 선우는 입을 벌려 그의 좆을 덥석 물어 삼켰다.

“하…….”

태화는 짙은 눈으로 선우를 내려다봤다. 최선우는 여전히 자신만의 꿈나라인 듯했다. 비몽사몽 하니, 졸음이 가득한 눈을 겨우 뜨고 좆을 빠는 모습 때문에 단전부터 명치까지 열이 확 올랐다. 당장이라도 목구멍 안으로 처넣고 싶은 걸 겨우겨우 참았다. 좆물이 맛있다는 듯이 입맛까지 다시는 걸 본 태화는 씩 웃었다.

“맛있어?”

선우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따뜻하고, 짭짤해. 맛있어.”

“말이 점점 짧아져.”

태화가 뺨을 가볍게 톡 치자 선우는 잠깐 못된 눈을 하다가 곧 배시시 웃었다.

태화는 가볍게 말려 올라간 선우의 입꼬리에 자지 끝을 문지르고는 다시금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방금 자다 깬 놈의 입 안은 마치 뒷구멍처럼 녹진녹진했다. 평소보다 침도 조금 더 끈적이는 것 같았고, 입천장에서 뛰는 맥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물론 제 좆에서 뛰는 맥인지 선우의 입 안 점막에서 뛰는 맥인지 구분은 안 되었다. 그저 입에 물린 것만으로 온통 자극이라 태화는 참지 못하고 허리를 짧게 퉁겼다.

“욱……!”

순간 선우가 힘겨운 소리를 냈다. 뭉툭한 끝으로 목구멍을 몇 번 더 툭툭 찌르자 선우는 아예 인상을 찌푸렸다. 밉다는 듯 자지를 콱 깨물다가 태화가 괜스레 아! 소리를 내며 엄살을 부리자 다시 부드럽게 핥았다.

문득 선우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꿈인데 목구멍이 이렇게 뻐근할 수 있나 싶었다. 불에 덴 느낌도 나는 게, 생생해도 너무 생생했다. 손으로 더듬더듬 태화의 허벅지를 만져 올라가 꿈인지 아닌지 확인이라도 하듯 탄탄한 복근을 쓰다듬고, 볼록 올라온 젖꼭지까지 매만졌다.

“하아…….”

태화의 숨소리가 짙어졌다. 마지막으로 태화의 엉덩이까지 만져 보던 선우는 그가 그만 더듬으라는 듯 두 손을 깍지 끼워 주자 눈을 크게 떴다. 꾸물꾸물 위로 올라가 겨우 좆을 입에서 빼냈다. 태화가 아쉽다는 듯이 좆을 쥐고 뺨에 문질렀더니 기울어져 있던 선우의 고개가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기울었다.

“꿈……. 아니에요?”

“꿈?”

“응. 꿈.”

태화는 선우를 보며 싱긋 웃었다. 눈가에 말라붙은 눈곱을 털어 주고, 뺨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꿈이었으면 좋겠어?”

“아니요. 꿈 아니었으면 좋겠어. 아저씨 좆 빠는 거 좋아요.”

언제나 그렇듯 선우의 단어 선택은 노골적이었다. 그게 태화의 낯에서 더 짙은 웃음을 끌어냈다.

“그래. 꿈 아니야.”

태화는 눈까지 접어 웃어 가며 선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우는 그제야 잠에서 완전히 깬 눈빛을 했다. 말긋말긋한 눈을 뜨고 태화를 바라봤다. 다시 입을 열어 좆을 물자 그도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살살 움직였다. 선우가 헛구역질하지 않게끔 깊이를 조절해 가며 허리 짓 했다. 축축하게 젖은 귀두가 음습한 곳으로 들어갔다 나오며 젖은 소리를 냈다. 자세가 자세인지라 밀어 넣을 때마다 선우의 이가 닿았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선우는 아직 송곳니 두 개가 덜 갈려서 뾰족했다. 그게 자꾸 태화의 좆기둥을 긁었다. 몸에서 가장 예민한 살갗이 이에 계속 긁히는데도 태화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거친 숨을 쏟아 내며 속도를 점점 올렸다.

선우는 자신을 위해 얕게만 움직이는 태화의 배려를 알았다. 대신 두 손으로 채 입 안에 들어오지 못한 부분을 감싸고 쭉쭉 문질렀다. 태화는 침대 헤드를 잡고 이를 악물었다. 태화가 참지 못한 신음을 토해 낼 때마다 선우는 이마가 간지러웠다.

“윽, 씹!”

침대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날 정도로 열중하던 행위는 태화의 사정으로 끝났다. 정액이 분출될 때마다 좆기둥도 같이 꿈틀거렸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랬다. 선우는 제 손바닥 아래에서 팔딱거리는 강한 생명력을 느끼고 샐쭉 웃었다. 입 안으로 미끈거리는 게 가득 들어찼다. 불과 어젯밤만 해도 콘돔을 세 개나 썼으면서 어떻게 또 이만큼이나 싸는지 몰랐다.

고환이 탱탱하니 힘이 좋아 그런가……?

선우는 괜스레 태화의 고환을 쓰다듬었다. 그 바람에 태화는 윽 소리를 내며 마지막으로 왈칵 정액을 토해 내다가 뒤로 물러났다.

“먹지 마. 뱉어.”

얼른 선우의 턱 밑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지난번에 선우의 것을 먹어 보고 존나 맛없던 게 기억난 탓이었다. 선우가 멀뚱거리며 쳐다보기만 하자 태화는 통통해진 입술을 톡 치고 다시 손을 받쳤다.

“맛도 없는 거 먹지 말고 뱉으라고.”

선우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태화의 손에 정액을 뱉었다. 뭐 이렇게 많이 쌌는지 손안에 다 고이지 못하고 침대 위로 주룩 흘러내렸다. 태화는 자신이 싼 정액을 보며 쯧 혀를 차다가 티슈를 뽑아 닦았다. 한 장으로는 어림도 없어서 다섯 장이나 써야 했다. 이래서 자위할 때도 콘돔을 써야 한다고,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며 잠깐 숨을 고른 태화는 선우에게서 떨어져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한 번 빼고도 죽지 않고 여전히 달아오른 좆을 대충 닦았다.

워낙 물을 많이 흘린 데다가 선우가 빨아 주기까지 해서 질척한 좆기둥 위로 티슈가 뜨문뜨문 붙었다. 얇게 착 달라붙은 걸 일일이 떼는 것도 일이었다. 몸을 부스스 일으킨 선우가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단단한 등짝 위로 말캉한 뺨을 대고 마구 비볐다.

“깨우지. 잘 때 건드리는 게 어디 있어요.”

“너도 나 잘 때 따먹었잖아.”

“제가요? 언제…….”

태화의 어깨 위로 턱을 걸치고 그를 보던 선우는 아, 소리를 냈다. 그가 기면으로 쓰러졌을 때 펠라티오 해 줬던 게 떠올랐다.

“쌤쌤.”

선우는 지난번 태화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그는 같잖지도 않다는 식으로 픽 웃다가 선우의 턱을 끌어와 쪽 입을 맞췄다. 쪽쪽, 간지러운 소리로 시작된 입맞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찐득해졌다. 태화는 아직도 선우의 입 안에 남은 제 정액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고 고개까지 꺾어 가며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직 티슈를 다 떼지 못한 좆을 슥슥 문질러 가며 선우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무게를 실어 다가가는 순간 위잉- 하며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오랜만에 듣는 소리에 선우는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태화의 혓바닥을 콰득 씹었다. 태화는 아픈 소리를 내다가도 놀라서 바들바들 떠는 선우를 살살 쓰다듬어 달랬다. 엉덩이를 토닥거려 주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또 어떤 새끼야.”

욕을 짓씹으며 서재로 갔다.

입 안으로 피 맛이 느껴졌다. 찬찬히 혀를 굴려 보니 끄트머리가 살짝 패여 있었다. 옛날 같았으면 짜증 냈을 텐데, 선우가 파드득 놀라던 모습이 떠올라 픽 웃기만 했다.

다만, 좋은 시간을 방해한 새끼의 낯짝을 좀 보자 싶었다. 선우의 안으로 쳐들어갈 기대감에 잔뜩 텐션이 올라 바지 속에서 꿈틀거리는 자지를 주물럭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 우선 경고음부터 끄고 CCTV 화면을 봤다. 또 한동열이었으면 욕이 먼저 나왔을 텐데 태화는 그저 고개를 삐뚜름히 기울였다.

“뭐야?”

화면 속 남자는 총 세 명이었다. 화질이 가장 좋은 걸로 비싼 값에 달아 놓은 CCTV라 남자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다 보였지만 영 아는 놈들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처음 보는 것처럼 아예 낯설지도 않았다. 분명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서 기억을 더듬어 보는데 뒤에서 털퍼덕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선우가 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떨고 있었다. 태화는 왜 저러나 생각하기도 전에 선우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웠다.

어깨를 쥐고 들어 올리는데 다리에 힘이 풀린 모양인지 제대로 서지를 못했다. 결국 태화는 선우를 쌀 포대처럼 어깨에 둘러멨다.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데도 선우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너 왜 이래?”

“지, 지영환…….”

“갑자기 뒈진 놈 얘기는 왜…….”

태화는 말을 하다 말고 뭔가 깨달은 표정으로 다시 CCTV 화면을 봤다. 멀쩡했던 얼굴이 엷게 구겨졌다. 갑자기 지영환 이름이 왜 나오나 했더니, 남자들은 지영환의 따까리들이었다. 지난번 꽃다방 앞 거리에서 선우가 개처럼 맞던 장면이 스치듯 떠올랐다. 그때 선우를 때리던 놈들이 바로 화면 속 저놈들이었다.

이래서 낯이 익었구나.

태화의 눈썹이 느리게 꿈틀거렸다. 그때 선우가 태화의 허리춤을 와락 끌어안았다. 깍지까지 껴서 세게 끌어안았는데 손끝이 아직도 파르르 떨렸다. 태화는 한숨을 작게 쉬었다. 시체를 보고도 멀쩡한 놈이 저런 새끼들은 뭐가 무섭다고 이렇게나 바들바들 떠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어깨에 걸쳐진 선우의 엉덩이를 찹! 소리 나도록 가볍게 때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선우를 침대 위로 곱게 내려놨다.

“여기 있어.”

타이르듯 말했으나 역시나 선우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한 번을 그냥 ‘네’ 하는 법이 없었다. 말도 지지로 안 듣는 놈이 뭐 예쁘다고, 태화는 짜증도 내지 못하고 그저 선우의 뺨을 쓰다듬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말 좀 들어라.”

“아저씨도 가지 마요.”

“안 나가면? 저런 것들은 하루가 멀다고 찾아올 새끼들이야. 당해 봐서 더 잘 알잖아.”

태화는 최대한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안심이 좀 되려나 싶었지만, 선우는 여전히 불안한 눈치였다. 태화의 손을 꼬옥 잡고 놔주지를 않았다. 태화는 숨을 옅게 쉬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선우 앞에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커다란 손으로 뺨을 부여잡았다. 작은 얼굴이 폭 쌓였다.

“최선우. 나 믿어, 못 믿어?”

“……믿어.”

“그럼 내 말 들어야겠어, 안 들어야겠어.”

“들어야겠어…….”

“그래.”

태화는 잘 대답했다는 듯 선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직도 안정이 덜된 애의 뺨으로 쪽 입술 도장을 찍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번 더 기다리라고 말한 뒤 방을 나섰다. 몇 걸음 가다가 다시 돌아와 방 문틈으로 얼굴만 쑥 들이밀었다. 초조한 듯 발끝을 꼼지락거리고 있던 선우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싱긋 웃었다.

“반말은 좀 줄이고.”

일부러 시답잖은 농담을 툭 던지고 나왔다. 안 그래도 눈이 커다란 놈이 겁먹으니 어찌나 왕방울만 해지던지, ‘나 무서워요’라고 대놓고 광고하는 통에 마음이 쓰였다.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마음이 쓰였다. 태화는 제 마음 씀씀이를 선우의 곁에 두고서 계단을 내려갔다. 창고 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서자 유리문 앞에 삼삼오오 모여 서 있는 남자들이 보였다.

“왜 남의 가게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지랄이야.”

태화는 시시덕거리며 담배 타임을 갖는 남자들을 보고 쯧 혀를 찼다. 여기는 어떻게 찾았는지 궁금했다. 딱 봐도 등신 집단 같은데 그래도 빚쟁이 짬밥이 괜히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최선우가 혼자 지내는 동안 찾아냈다면 놈들은 선우를 또 때렸을 터였다. 그 여린 게 저항 한번 제대로 못 하고 맞아서는 얼굴에 시푸르뎅뎅한 멍을 달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단순히 생각일 뿐인데도 열이 뻗쳤다.

그러니 자신과 함께 있을 때 저놈들이 찾아온 건 아주 다행인 일이었다. 태화는 남자 한 명 한 명을 천천히 뜯어보다가 한참 만에 가게 불을 켰다. 불이 켜지자 저들끼리 저급한 농담을 주고받던 남자들이 일제히 가게 안을 들여다봤다. 태화는 문을 열고 나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가게는 이미 마감했는데요.”

태화가 묻자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가 그를 잠깐 위아래로 훑었다. 이내 물고 있던 담배를 아무렇게나 퉁기고 태화 앞에 섰다.

“아아, 우리가 여기 고기 떼러 온 건 아니고요. 여기 최선우가 산다고 들었는데…….”

“선우는 왜요?”

태화는 선우를 친근하게 불렀다. 매번 선우에게는 딱딱하게 ‘최선우’라고 부르더니 남들에게는 곧잘 성을 빼고 말했다.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니어도 친한 사이처럼 느껴지는 호칭에 남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비실비실 웃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늘 등장하는, 으레 나쁜 놈들의 웃음이었다.

“여기 있는 거 맞나 보네. 최선우가 우리한테 빚이 조금……. 이 아니라 꽤 많아요.”

“그런데요?”

“근데 빚은 안 갚고 갑자기 사라져서 수소문하다가 여기까지 와 버렸네요.”

태화는 웃음이 나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이런 건 뭐 어디서 단체로 교육이라도 받나 싶었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건들건들한 게, 양아치 티가 났다. 깡패도, 건달도 못 되는 양아치 나부랭이.

지영환이 살아생전에 이런 걸 가르쳤나?

생각하다가 살짝 고개를 젓고 옆으로 물러섰다.

“일단 들어와서 이야기하시죠.”

남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 명이 동시에 우르르 들어오려고 하자 태화가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한 분만요. 거기, 그쪽이 들어오시죠.”

태화는 굳이 한 명을 콕 집어 말했다. 그것도 앞에 선 남자가 아니라 맨 뒤에서 아직도 담배를 뻑뻑 피우던 남자였다. 남자는 자신을 지목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눈을 멀뚱거리다가 이내 담배를 껐다. 태화의 시선이 줄곧 이어지자 어깨를 으쓱이며 혼자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두 명은 버릇처럼 다시 담배를 물고 서로에게 불을 붙여 줘 가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태화는 남자들이 보지 못하는 사이 가게 문을 잠그고 안으로 들어왔다. 진열대를 사이에 두고 남자와 태화가 마주 보고 섰다.

“선우 빚이 얼마입니까.”

“들으면 아마 깜짝 놀라실 텐데.”

“뜸 들이지 말고 말씀하시죠.”

남자는 거들먹거리길 실패하자 큼큼 헛기침했다. 그러더니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30억?”

태화의 말에 남자는 끔쩍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니, 3억이요, 3억. 더 정확하게는 3억 하고도 천.”

3억 1천?

남자가 말한 금액을 머릿속으로 한 번 더 상기한 태화는 참고 참던 헛웃음을 이제야 터뜨렸다.

“3억 천…….”

한 번 더 읊조렸다. 손가락 세 개를 펼치기에 30억이라고 생각했던 게 우스울 정도로 값이 확 낮아졌다. 하다못해 13억도 아니고 3억 천이라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좋은 의미의 웃음은 아니었다. 사람이 너무 어처구니없고, 화가 나면 절로 나오는 웃음이었다.

30억도 아니고 겨우 3억 때문에 꽃다방인지 뭔지 하는 곳에서 최선우가 수모를 당하며 살았다고 생각하니 발끝부터 열기가 슬슬 차올랐다. 게다가 뜯어 낼 돈이 3억이면 실제로 빌린 돈은 1억 언저리도 안 될 확률이 높았다. 사채라는 게 겉만 번지르르하지 정작 원금보다도 더 큰 이자를 뽑아 먹는 사기나 다름없으니까. 이자가 이자를 낳아 지금의 3억이라는 숫자가 나왔을 게 분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낱 3억에 애를 그렇게나 때리나.

태화는 남자들이 길거리에서 선우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명치를 걷어차고, 발목을 부러뜨릴 듯 짓밟던 게 다시금 떠올랐다. 물론 3억이 큰돈이라는 건 태화도 알았다. 누군가는 평생 만져 보지도 못하는 돈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스무 살 그 어린 놈이 빛도 잘 들지 않는 골방에 들어앉아 구질구질하게 살아도 될 정도의 큰돈인가?

생각하면, 그것 역시 아니었다. 더한 건 그 3억이라는 돈은 최선우의 부친이 진 빚이었다. 그래 놓고 무책임하게 죽어 버려서 최선우에게 넘겨진 돈이었다. 최선우가 만져 보지도 못한 돈이라는 뜻이었다.

최선우 그 미련한 건 그 돈 때문에 늙은이들의 냄새나는 사타구니 사이로 몇 번을 기어들어 갔던가.

태화는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3억 1천만 원을 곱씹으며 피식피식 웃었다. 그러다 돌연 얼굴빛을 싹 바꿨다.

“계좌 불러요.”

“예?”

“돈 안 받을 겁니까? 계좌 부르라고.”

이렇게나 간단하게 일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는지, 남자는 멍청한 표정을 짓다가 곧 헐레벌떡 주머니를 뒤졌다. 한참 이리저리 뒤적인 끝에 나온 건 명함이었다.

태화는 남자가 건넨 명함을 받아 들고 작게 웃었다. ‘Y.H. Capital’이라니, 남의 등골 빼먹고 사는 놈들인 주제에 상호 하나는 그럴싸했다. ‘Y.H.’는 영환의 이니셜일 게 분명했다. 같잖지도 않은 작명 센스에 태화는 몇 번 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휴대 전화를 툭툭 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남자는 휴대 전화를 꺼내 봤다. 입금 문자였다. 돈이 맞게 잘 들어왔나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남자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4억이 들어왔는데요? 너무 많이 넣어 주셨는데?”

“제대로 들어간 겁니다.”

“아니, 3억 1천이라니까.”

“네 손 병신 만드는 값 9천 더해서 넣은 거야.”

“무슨 소리…….”

남자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태화가 먼저 움직였다.

“아악!”

순식간에 남자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남자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진열대 위에 얹어 둔 남자의 손등으로 칼이 콱 박혀 있었다. 근육이 너무 놀라면 피가 나오지 않는다는데, 정말인지 칼이 꽂혀 찢어진 가죽 틈으로 피가 쫄쫄 한 줄기로 흐르기만 했다. 이내 태화가 칼을 90도로 돌리자 그제야 피가 철철 흘러넘쳤다.

“으아악!”

남자의 비명이 더 커졌다. 태화는 서둘러 창고 문부터 닫았다.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들도 비명을 들었는지 문 쪽으로 다가와 가게 안을 기웃기웃 들여다봤다. 그러다 제 동료의 손등으로 칼이 꽂혀 있는 걸 보고는 씨발! 외치며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하지만 문이 잠겨 있어 덜컹덜컹 소리만 났다.

태화는 안으로 들어오려고 지랄발광을 하는 놈들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젓다가 다시 앞에 선 남자에게 집중했다. 애초부터 이럴 생각으로 이 남자를 들인 것이었다. 태화에게 선택받은 남자는 선우의 명치만 죽어라 걷어찼던 놈이었다.

“야, 이 씨발, 너 씹, 너 뭐야!”

“최선우 기둥서방이다, 왜.”

“씨발, 이거, 이거 빼! 이것부터 빼!”

남자는 마치 피 칠갑이라도 한 것처럼 낯이 불그죽죽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태화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빼 달라니 빼 줘야지.

생각하며 칼 손잡이를 잡았다. 물론 남자가 원하는 대로 순순히 빼 주지는 않았다. 마치 쇠심줄을 제거하듯 칼을 힘 있게 잡고 그대로 앞으로 죽 당겨 왔다.

“으어, 으……. 으악!”

순식간에 남자의 검지와 중지 사이가 벌어졌다. 칼날이 어찌나 예리한지, 모난 곳 없이 깔끔하게 잘려 피부 가죽뿐만 아니라 근육까지 전부 드러났다. 피가 걷잡을 수 없이 많이 쏟아졌다. 진열장은 물론 바닥까지 피로 흥건하게 젖었다.

밖에서는 문을 열려고 용쓰지, 남자는 죽겠다고 소리 지르지, 온 사방이 피범벅이지……. 아주 개판이 따로 없었다. 선우가 엉엉 우는소리를 제외하고, 태화에게 있어 시끄러운 소리는 쥐약이라 짜증스레 귓불을 문지르다가 남자의 멱살을 잡아 왔다. 목젖 옆으로 칼날을 겨눴다. 칼끝에서는 아직도 남자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억울하면 가서 신고해. 불법 추심하려다가 사이코 잘못 만나서 손이 너덜너덜해졌습니다. 경찰관 나리, 저 좀 도와주십시오. 고기 파는 백정 놈이 고기는 안 썰고 사람 손을 썹니다. 가서 말하라고.”

“어흑, 어……. 허으…….”

“내가 경찰서에 소환되잖아? 그럼 나는 너희들이 그동안 불법 이자율로 뽑아 먹은 돈에 대해 탈탈 털 거야. 너희 같은 놈들은 세금 신고하기 싫어서 이중장부 쓰잖아. 세금 그거 얼마 한다고, 쯧. 그동안 안 냈던 세금, 저질렀던 불법 행위들 다 까발려지면 네 손등 좀 그은 내가 더 불리하겠냐, 아니면 좆같이 살아온 너희가 더 불리하겠냐.”

태화가 물었지만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는 비명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이상한 신음만 줄줄 내뱉었다. 아예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이런 놈을 붙들고 더 설명해 봤자 제대로 들을 것 같지도 않아서 이쯤 해 둘까 싶었다. 남자의 멱살을 놓고 대신 넥타이를 당겨 와 칼날에 묻은 피를 슥슥 닦았다.

“내가 돈이 넘쳐 나는 건 알 거고. 이 정도 재력이면 너 같은 놈들 매장하는 거 일도 아닌 건 더 잘 알 거고. 어때? 생각 잘해야겠지?”

남자의 뺨을 툭툭 쳤다. 남자는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가볍게 뺨을 치다가 마지막으로 세게 후려갈겼다. 철썩-! 소리가 나고 남자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든 남자는 태화가 카운터 앞에서 나와 천천히 다가오자 서둘러 뒷걸음질 쳤다. 태화는 남자의 발목을 꾹 밟으며 가랑이 사이로 칼을 툭 던졌다. 옆에서는 밖에 있는 놈들이 유리를 발로 차고, 욕을 하고, 난리였다.

“다시는 최선우 앞에 나타나지 마. 남은 손으로 딸이라도 치면서 살고 싶으면.”

크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밖에 있는 놈들이 깽판 치는 소리 사이를 갈라 정확하게 남자에게 꽂혔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멍하니 끄덕이다가 나중에는 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목이 떨어져 나가라 흔들었다.

“알아들었으면 꺼져, 병신아.”

태화는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설핏 구겼다. 밟고 있던 발목을 놔주자 남자는 찢어진 손을 부여잡고 후다닥 일어나 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잠긴 걸 모르고 돌진했다가 텅! 소리를 내고 뒤로 나자빠졌다. 그 바람에 벽으로도 피가 튀어서 태화는 미간 주름을 더욱 깊게 팼다.

“그냥 죽일까…….”

마음에 든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남자는 더 겁을 먹어서는 허둥대며 일어나 문을 열려고 안간힘 썼다. 키도 개좆만 해서 까치발을 들고서야 겨우 잠금을 풀고 나갈 수 있었다. 밖에 있던 놈들이 쳐들어오려고 했으나 남자가 막았다. 그래도 아예 생각이 없는 놈은 아닌 모양이었다. 손이 두 동강 난 남자를 필두로 나머지도 전부 돌아가고, 태화는 가게 한가운데에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아, 이거 언제 다 치우냐.”

졸지에 대청소하게 생긴 터라 태화는 한숨부터 깊게 내쉬었다. 우선 피가 가장 많이 묻은 진열장부터 닦고, 창고에서 대걸레를 가져와 바닥과 벽도 닦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칼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 써서 날이 많이 닳은 칼이었다.

“4년 된 건데.”

칼을 주워 들었다. 아까웠다. TV에 나오는 달인들처럼 언젠가 먼 미래에 ‘정육점 장인이 20년간 사용한 칼’이라는 제목을 달아 액자에 넣어 놓을까, 잠깐 생각했었는데 이젠 불가능해졌다. 내일 당장 다른 걸로 하나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피가 진득이 묻은 칼을 신문지에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넣었다.

피 냄새도 빼야 해서 가게 문을 열어 놓고 근 한 시간 동안 죽어라 걸레질만 했다. 남의 피를 만지는 건 역시나 기분이 더러워지는 일이었다. 피범벅이 된 행주와 대걸레를 들고 집으로 올라갔다. 문 앞까지 나와 있을 줄 알았던 선우는 보이지 않았다. 용케 잘 참고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특한 마음에 씩 웃고, 우선 들고 있는 것들을 화장실로 전부 던져 넣었다.

내일 아침에 좀 더 일찍 일어나 치우기로 마음먹고 곧장 침실로 들어갔다. 손이라도 씻어야 하는데 선우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했다. 방에 들어가자 조금 전 그 자리 그대로 다소곳이 앉아 있는 최선우가 보였다. 일어나고 싶은 마음과 기다리자는 마음이 충돌하는지 엉덩이가 씰룩거리는 중이었다. 여간 깜찍한 게 아니어서 피식 웃자 발끝만 바라보고 있던 선우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걱정 반 반가움 반 섞인 목소리였다. 선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아차 하고 다시 제자리에 풀썩 앉았다. 일어나라고 한 적 없으니 기다려야 했다. 정말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똥개 같은 모습이었다. 어서 빨리 명령을 내려 달라는 듯 애처롭게 쳐다보자 태화가 눈썹을 까딱 움직였다. 일어나도 된다는 무언의 허락이었다. 선우는 서둘러 일어나 태화에게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마음 졸이며 기다린 만큼 강한 힘으로 태화를 끌어안았다.

선우는 여기서 기다리라는 태화의 말을 듣고 정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서재로 가서 CCTV 화면을 보고 싶은 마음도 꾹 참고 기다렸다. 따뜻하고 너른 품을 끌어안자 기다리는 동안 녹아들던 심장이 또 다른 의미로 녹았다. 늘 그렇듯 태화의 가슴팍에 뺨을 비비며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데 불현듯 이상한 감각이 쑥 올라왔다. 냄새가 났다. 피비린내. 선우는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태화를 올려다봤다.

“아까 밑에서 비명 같은 거 들렸는데, 아저씨 괜찮아요? 어디 다친 거 아니죠?”

선우는 질문을 던져 놓고 정작 대답을 기다리지 못했다. 태화의 몸 여기저기를 훑어봤다. 검정 티셔츠라 피가 묻어도 티가 나지 않는 옷이었다. 참지 못하고 옷자락을 들쳐 안까지 확인했다. 다행히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탄탄한 가슴 근육과 예쁘게 갈라진 복근만 선우를 반겼다. 선우는 이 상황에서도 침을 꼴깍 삼키다가 문득 태화의 손을 보고 놀란 토끼처럼 두 눈을 똥그랗게 떴다.

“다쳤어요?”

커다란 손바닥에 말라붙은 핏물이 뜨문뜨문 붙어 있었다. 손을 앞으로 보고, 뒤로 보고, 옆으로 보고, 뒤집어 보기까지 했다. 아무리 봐도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럼 이건 누구 피일까……?

선우는 뭐가 됐든 태화의 피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워낙 가까이 붙어 있어 고개를 한껏 꺾어야 태화와 시선을 맞출 수 있었다.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태화는 방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빤한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순간 굵다란 검지로 선우의 이마를 툭 밀쳤다. 밀면 미는 대로 뒤로 고개가 휙 넘어갔다가 돌아오는 선우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려 웃었다.

“너 이제 나한테 빚 갚아야 해.”

“네……?”

“내가 네 빚 샀거든. 그것도 9천이나 더 얹어서.”

선우는 태화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표정이 심각하지 않아서 단순히 나쁜 일은 없었구나 짐작할 뿐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다가 태화가 눈웃음까지 짙게 그리는 걸 보고서야 뭔가 깨달은 눈빛을 했다.

“너무 감동하고 그러지는…….”

태화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선우는 들입다 뽀뽀를 갈겨 버렸다. 두 손으로 태화의 뺨을 감싸 쥐고 온 낯에 입을 맞췄다. 태화가 뒤로 물러나려고 하자 까치발까지 들어 따라갔다. 온갖 데에 쪽쪽 소리를 남겼다. 잘생긴 이마와 깎아 만든 듯한 코, 짙은 눈, 입꼬리가 예쁘게 말려 올라간 입술과 선이 굵은 턱까지. 선우의 입술이 지나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마무리하듯 얄따란 입술을 쪽 빨고 까치발을 내렸다.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태화를 바라봤다.

선우는 어느새 두 눈을 그렁그렁하게 적시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툭 흘릴 것처럼 생긴 얼굴로 활짝 웃었다. 세상 행복한 사람처럼 환한 미소였다.

“평생 갚을게요. 제가 진짜 잘할게요, 아저씨.”

눈웃음까지 짓자 맺혀 있던 눈물이 한 방울 도록 흘렀다. 그게 전부였다. 눈물은 더 쏟아지지 않았다. 선우가 씩씩하게 눈두덩이를 비벼 닦은 덕이었다. 마구 비빈 탓에 붉어진 눈으로 연신 생글생글 웃음 지었다. 태화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쪽 소리가 나는 순간, 마찬가지로 은은하게 미소 짓던 태화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무슨 일인지 뻣뻣하게 굳어진 것에서 그치지 않고 미간까지 옅게 구겼다.

태화는 아무것도 모르고 제 어깨에 뺨을 비비는 선우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속으로 앓는 소리를 삼켰다. 드디어 태화에게도 약점이 생긴 순간이었다. 그게 얼마나 좆같은 일인지, 감히 상상도 안 되었다.

* * *

태화 정육은 때아닌 호황을 맞았다. 원래도 태화를 보러 오는 손님들이 많았는데 이젠 선우를 보러 오는 손님들도 제법 생겼다.

더는 숨어 살지 않아도 되는지라 선우는 며칠 전부터 태화를 따라서 가게 일을 도왔다. 아침잠이 많은 주제에 마장동에 갈 때도 꼬박꼬박 따라나섰다. 그래 놓고선 트럭 조수석에 앉아 가는 내내 졸았다. 태화는 이럴 거면 뭐 하러 따라나서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선우가 깰까 봐 평소보다도 더 조심스럽게 운전했다. 가끔은 일부러 방지 턱을 거칠게 넘어 선우가 흐아아! 소리 내며 깨는 걸 구경하기도 했다.

선우는 역시 요리에는 영 재능이 없어서 고기 써는 것 하나도 잘하지 못했는데 대신 인사 하나는 잘했다. 물론 낯가림이 심한 편이라 큰 목소리로 외치는 건 무리였지만 그래도 손님들에게 잊지 않고 꼬박꼬박 인사를 건넸다. 꽃다방에서 사는 동안에는 이 정도로 우중충할 수 있나 싶을 만큼 그늘이 많던 애가 태화와 살면서 점점 밝아졌다.

손님이 없는 동안에는 책 읽는 태화를 관찰했고, 그의 손을 가져와 주물럭거리며 놀았다. 태화가 고기를 썰어 내밀면 위생 장갑을 낀 선우가 포장을 마무리했다.

선우가 과일을 좋아하는 걸 아는 태화는 아침마다 과일 살 돈을 쥐여 줬고, 그럼 선우는 옆집 청과물 가게로 쪼르르 달려가 하루 동안 먹을 과일을 골라 사 왔다. 우림동 단골인 청과물 사장은 선우를 아는 눈치였으나 그 수더분하던 태화의 싸늘한 눈빛을 한번 받고는 아는 척을 일절 하지 못했다. 그렇게 과일을 주렁주렁 사 오면 깎는 건 선우의 몫이었다. 고기는 못 썰면서 과일 하나는 또 기가 막히게 잘 깎았다. 지금도 선우는 오늘 사 온 사과를 예쁘게 깎고 있었다.

“토끼, 그거 만들지 마.”

태화는 책을 읽다 말고 뜬금없이 말했다. 그런데도 선우는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태화는 선우가 과일을 잘 깎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잘 깎게 된 이유 때문이었다. 하루는 어떻게 과일은 잘 깎냐고 물었다가 기분만 잡쳤던 기억이 있었다.

선우는 과일 깎는 걸 꽃다방에서 배웠다. 손님에게 내줄 과일을 깎는 건 전적으로 선우의 일이었는데, 자주 깎다 보니 절로 실력이 늘었다. 선우가 사과로 토끼를 처음 만들어 줬을 때 태화는 인상을 구기면서도 헛웃음을 지었다. 좋지도 않은 곳에서 배워 온 기술이라 짜증이 나면서도, 막상 선우가 만들어 놓은 사과 토끼를 보면 귀여웠다.

“어서 오세요.”

선우의 인사로 태화도 책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손님은 젊은 여성이었다. 끽해 봤자 20대 후반 정도 될까 하는 나이로 보였다. 잘생긴 태화 옆에 예쁘장한 선우가 서 있으니 가게 매출은 올라갔고, 손님 연령층은 더 다양해졌다. 여자는 구워 먹을 삼겹살을 한 근 달래 놓고, 계산하는 동안 선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워낙 노골적인 눈길이라 선우가 눈치를 볼 정도였다. 오늘은 아무래도 선우의 몸에 태화의 흔적이 많이 남을 성싶었다.

그건 일종의 규칙이자, 놀이였다. 누가 정해 놓지도 않았는데 그날그날 태화나 선우에게 관심 있어 보이는 손님이 오면 두 사람 모두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가 밤에 돌변했다. 상대 몸에 본인의 흔적을 남기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지금만 해도 태화의 목젖 옆으로 채 지워지지 않은 잇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 오늘은 선우가 태화에게 물어뜯길 차례였다.

여자가 돌아가고 두 사람은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태화는 책을 읽었고, 선우는 그에게 사과를 한 입씩 먹여 줬다. 가끔 그가 책에는 시선도 떼지 않고 입에 문 사과를 선우 쪽으로 쭈욱 내밀면 선우는 배시시 웃으며 다가가 반절을 와삭 베어 물었다. 제법 죽이 잘 맞았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평화를 만끽하던 중에 문이 딸랑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우가 곧바로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선우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먼저 말하면 태화가 한 번 더 크게 말했다. 이번에는 중년 여성이었다. 문제는 그 뒤로 들어온 사람이었다.

“선우, 하이.”

성모였다. 되지도 않는 영어를 쓰며 인사하는 탁성모 옆에는 동열도 있었다. 두 사람의 등장에 선우는 바짝 긴장해서 태화에게 붙어 서는데 정작 그는 별스럽지 않다는 듯 쩝 입맛을 다셨다.

“어머니, 오늘은 뭐 드릴까요?”

오히려 둘을 무시하고 먼저 들어온 손님에게 집중했다. 그 바람에 동열과 성모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옆에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혼자 긴장한 선우가 멀뚱거리고 있자 태화는 얼른 이걸 포장하라며 여자가 주문한 고기를 내밀었다. 선우는 정신 차리고 고기를 포장했다. 긴장한 상태에서도 꽤 야무진 손길이었다. 계산까지 마친 여자가 나가고, 태화는 그제야 두 형사를 봤다. 선우를 제 옆에 바짝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주 오시네요.”

빙긋이 웃으며 한동열에게 인사 아닌 인사를 건넸다.

“이제 겨우 세 번 왔습니다.”

“아, 전 두 번 이상 오신 분들은 다 단골이라고 생각해서요.”

태화는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동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짧게 주억거렸다. 그러곤 주머니를 뒤져 수표를 꺼내 진열대 위에 올려놨다. 그때 태화가 감사 인사를 건네며 차 안으로 던져 놓고 간 수표였다.

“이건 애 챙겨 준 게 감사해서 드린 건데요. 20만 원이나 빌려주셨다고 들어서요.”

“어차피 그 돈 다 쓰지도 않았잖아요.”

동열은 말하다 아차 싶었다. 돈을 전부 쓰지 않은 사실을 안다는 건 줄곧 감시했다는 뜻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물론 도청까지는 생각하지 못할 거라고 예단했다.

최선우가 진즉 찾아낸 것도 모르고.

“오늘도 집 안 수색하려고 오셨습니까.”

“오늘은 뒤져도 나올 게 없을 거 같네요. 지난번에는 있었을 거 같은데.”

“대학 후배 왔을 때 말씀이시죠?”

태화가 웃으며 하는 말에 한동열은 미간을 찡긋 찌푸렸다.

대학 후배는 개뿔.

한동열은 아직도 그때 창고에서 들렸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선우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다시 태화 정육을 찾은 것이기도 했다.

태화와 동열이 기 싸움 하는 사이 선우와 성모는 끼지 못하고 두 사람만 번갈아 쳐다봤다. 그나마 선우는 둘의 대화에 집중하기라도 하지, 탁성모는 빨리 끝내고 가서 술이나 마실 생각만 가득했다. 결국 탁성모는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근처를 탐문해 보겠다는 핑계로 먼저 나갔다. 나가기 전 선우에게 윙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느끼한 몸짓에 선우는 방금 먹은 사과가 떼굴떼굴 굴러 입 밖으로 나올 것만 같았다. 속이 메슥거렸다. 참지 못하고 아주 작게 우욱, 소리를 내는데 동열이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오늘은 최선우 씨 때문에 왔습니다.”

태화에게 꽂혀 있던 한동열의 시선이 천천히 선우에게로 옮겨 갔다. 뜬금없이 제 이름이 나오자 선우는 화들짝 놀랐다.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그랬다. 하여튼 연기 하나는 더럽게 못한다고 생각하며, 태화는 선우의 손을 잡았다. 깍지까지 껴서 단단히 잡고 제 뒤로 살짝 감추듯이 당겨 왔다.

“선우가 왜요?”

나긋한 목소리에 한동열보다도 먼저 반응한 건 선우였다. 선우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안 그래도 놀라서 커져 있던 두 눈이 더 커다래졌다.

태화가 타인에게 제 이름을 ‘선우’라고만 다정하게 말하는 걸 처음 듣는 순간이었다. 마치 제 사람이라는 걸 알리는 것처럼, 단호하고도 부드러운 어투였다. 하필이면 목소리도 좋아서 선우는 귓바퀴가 간지러워졌다. 자글자글한 전기가 오르는 듯한 느낌에 귀를 슬쩍 문질렀다. 덕분에 놀란 마음이 점점 안정됐다.

마음이 안정됐다고 일이 해결된 건 아니었다. 한동열은 태화와 선우를 번갈아 쳐다보며 쯧 혀를 찼다.

“최선우 씨가 납치됐던 건 아시죠?”

“예. 압니다.”

“그런데 실종 신고를 안 하셨더라고요?”

태화는 당황하지도 않고 그저 아, 하고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꽃다방에서 일하던 때라 그렇게 사는 게 싫어서 떠난 줄로만 알았습니다.”

“예전에는 꽃다방도 모른다고 하시더니.”

한동열은 건수를 하나 잡은 것처럼 씩 웃었다. 과거 태화 정육에 찾아와 지영환과 최선우의 사진을 들이밀었던 당시 서태화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꽃다방은커녕 최선우의 사진을 보고도 처음 본다고 했던 기억이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때 최선우 씨 사진 보고도 모른다고 하셨는데……. 기억 안 나십니까?”

이제 어쩔 거냐는 듯이 비식거리며 쳐다보는데 서태화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미소가 좀 더 짙어진 낯이었다.

“제가……. 그랬었나요?”

“예?”

“다른 분이랑 착각하신 거 같은데요. 선우 사진을 봤으면 제가 바로 알아봤겠죠.”

“그게 뭔…….”

“야, 너 여기 혼자 온 적도 있어?”

말문이 막힌 한동열이 입술을 달싹이는 사이 옆에 있던 탁성모가 옆구리를 툭 치며 말을 얹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한동열은 아차 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단독 수사가 문제였다. 당시에는 서태화에게 집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독단적으로 수사를 하던 시절이었다. 2인 1조의 원칙을 깨고, 제대로 된 수사권도 없이 마구잡이로 서태화를 들쑤시던 때라 한동열의 말을 뒷받침해 줄 동료도, 증거도 없었다. 동열은 잔뜩 찌그러진 얼굴로 이까지 악물었다.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분명 무언가가 있다는 심증에 힘이 더 실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거짓말할 이유가 없었다.

“워낙 바쁘니까 착각하실 수도 있죠. 이해합니다.”

태화가 빙긋이 웃으며 하는 말에 한동열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놨다. 지금 설전을 펼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건 무엇도 없다는 걸 알았다. 낮게 심호흡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쨌든, 애인이 사라졌는데 안 찾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애인분한테 관심이 너무 없는 거 아니에요?”

“저희가 연인 사이인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건 말씀드린 적 없는 거 같은데.”

태화는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경찰이라는 양반이 머리는 참 안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대놓고 감시하고, 도청했다는 티를 내고 있었다. 동열도 적잖이 당황했는지 잠깐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씨익 웃었다.

“감이요. 어지간한 남자들은 그렇게……. 손을 깍지 껴 잡고 있진 않죠.”

한동열의 시선이 둘이 맞잡은 손에 닿았다. 선우가 얼른 빼내려는데 오히려 태화가 더 꼭 잡았다.

“아, 감. 감 좋으시네요.”

그렇게 말하며 엄지로 선우의 손등을 살살 문질렀다. 선우는 태화를 빤히 바라보다가 똑같이 손을 힘주어 잡았다. 한동열에게 보여 주려는 연기인지, 너무 떨지 말라는 배려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을 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태화의 입에서 나온 ‘연인’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태화는 저들 사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인이라고 명명하기까지 했다. 그 말을 듣자니 왜인지 용기가 생겼다. 어깨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고 자세가 바르게 바뀌었다.

혼자 용지서에서 동열과 마주 앉았을 때만 해도 씩씩한 척 스스로를 속이기는 했으나 실은 많이 떨렸었다. 실수하면 어떡할는지, 제대로 하고 있는 건 맞는지, 저 같은 게 잘할 순 있는 건지. 온갖 상념이 선우를 괴롭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어떠한 힘이 발휘되는지, 동열이 앞에 있는데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게 설령 불행과 싸우는 일이라도, 연인과 함께라면 거뜬히 이겨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당당하게 한동열을 쳐다보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띵동-! 하는 소리가 울렸다.

- 배달의 제왕에서 배달 주문이 들어왔어요!

경쾌한 여자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노트북으로 꽂혔다. 작은 알림 창 하나가 떠 있었다. 동열이 좀 더 목을 빼고 내용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순간 태화가 빠르게 창을 내렸다. 분명 배달 주문이 들어왔다던 멘트였는데 주소 확인도 하지 않고 창을 내려 버리자 동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 수상했다.

“배달도 하시나 봐요?”

“요즘 세상에 배달 안 하면 못 벌어먹고 살잖습니까.”

“그래도 정육점이 배달하는 건 또 처음 봐서.”

태화와 동열은 시시껄렁한 듯 말을 주고받았으나 그 안에는 뼈가 들어 있었다.

“그나저나 용건이 뭐라고 하셨죠?”

“아, 최선우 씨가 다시 서에 좀 와 주셔야겠습니다.”

“제가요……?”

선우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내내 두 사람의 기 싸움을 보고만 있던 선우는 더 이상 태화 뒤에 숨지 않고 앞으로 한 발자국 나왔다. 여전히 태화의 손은 맞잡은 채였다.

“더 여쭤볼 게 있어서요.”

“그때 많이 물어보셨는데.”

“새로 알아낸 게 있어서.”

동열은 말하며 작게 웃었다. 거짓말이었다. 새로 알아내기는커녕 이전에 알아낸 것들이 전부 무용지물이 된 상황이었다. 수사에 영 진척이 없자 용지서장은 언제까지 별거 아닌 일만 붙들고 늘어질 거냐며 압박했고, 팀원들 분위기도 전체적으로 많이 가라앉았다. 그래도 동열은 아무 문제 없는 척, 더해서 수사가 착착 진행되고 있는 척 능청을 떨었다.

“어때, 시간 괜찮으시면 지금 같이 가실래요?”

의사를 묻는 듯했으나 눈빛은 강요와 다름없었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 앞에서 선우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가도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 입만 벙긋거리며 당황하는 사이 태화가 나섰다.

“제가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배달 주문 들어오셨잖아요. 배달 가셔야죠.”

“아시다시피 저희가 연인이라서요. 제 사람 혼자 그런 데에 보내고 싶지 않네요.”

태화는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딱 잘라 말했다.

“선우는 저랑 제 차로 가겠습니다.”

동열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말을 더 얹었다. 동열은 인상을 찡그리다가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가게를 나갔다. 드디어 둘만 남게 되자 태화와 선우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마주 보는 시선 속에서 별다른 말은 오가지 않았다. 손을 바로 놓을 줄만 알았던 태화도, 당장 와락 안길 줄만 알았던 선우도. 그저 맞잡은 손에 힘을 주고 상대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거울처럼, 제 모습이 비쳤다.

태화와 선우는 옷부터 갈아입었다. 선우는 그냥 가려고 했지만, 태화가 좀 더 단정한 스타일로 갈아입혔다. 마치 아이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처럼 티셔츠에 머리를 끼워 주고 팔을 빼내기 쉽게 들어 줬다. 태화도 맨날 입는 체크 셔츠를 벗고 검은색 니트를 입었다.

차도 트럭이나 승합차가 아닌 외제 차를 선택했다. 몇 번 타 봤다고, 선우는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올라탔다. 이젠 종이 접듯 허리를 숙이지 않아도 되어서 의자에 편히 기댔다. 너무 편했다. 놀라울 정도로 편해서 괜히 등받이에 몸을 몇 번 더 팡팡 두드리자 태화가 픽 웃었다. 태화는 습관처럼 선우의 벨트를 매 줬고, 그 덕에 선우는 긴장감이 스륵 풀렸다.

“기죽지 말고,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아무 말도 하지 마. 아니, 서태화를 불러 달라고 해.”

태화는 지난번이나 지금이나 같은 말을 했다. 반면 선우는 지난번엔 고개를 잘만 끄덕이더니 지금은 아무 말이 없었다. 별생각 없이 차를 출발시킨 태화는 옆에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선우를 힐긋 쳐다봤다. 뺨이 조금 붉어진 듯했다.

“아저씨.”

“어, 왜.”

선우는 불러 놓고 또 별말이 없었다. 뭣 때문에 뜸을 들이는가 싶었다. 태화는 전방을 주시해 가며 선우를 슬쩍슬쩍 쳐다봤다. 긴장해서 그런지 뺨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약간 상기된 듯한 모습이었다. 열이라도 나나 싶어 손을 뻗어 이마를 짚어 봤다. 태화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뜨끈뜨끈한 것 같은데 워낙에 몸이 뜨거운 놈이라 이게 열이 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체온인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이마를 꾹 누르다가 뺨도 쓸어 보고, 손등으로 목도 더듬더듬 만져 봤다. 계속 만지자 태화의 손도 점점 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만질수록 더 모르겠어서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데, 가만히 손길을 받던 선우가 태화의 손을 꾸욱 쥐고 손바닥에 쪽쪽 뽀뽀했다. 그러더니 한다는 말이 가관이었다.

“우리 연인 사이예요?”

너무도 천연한 질문에 태화의 눈썹이 들썩였다. 선우를 돌아봤다.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눈을 어찌나 반짝반짝하게 떴던지 대낮에 뜬 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눈을 느리게 끔뻑이는 모습에 태화는 그제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혼자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하나 했더니 또 별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네? 우리 연인이에요?”

“아니.”

태화의 대답은 빠르고 간결했다. 군더더기 없는 부정어에 선우는 금세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연신 뽀뽀를 날리던 태화의 손을 아래로 툭 내렸다.

“아까 한동열한테는 연인이라고 했으면서.”

뽀로통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면서도 손을 놓진 않았다.

“그럼 우리는 무슨 사이인데요?”

선우는 태화의 손가락 끝을 하나하나 아프지 않게 꼬집어 가며 물었다. 태화가 선뜻 입을 열지 않자 손금을 따라 그리며 대답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고 선우의 애간장이 전부 녹을 즈음에야 그는 옆을 힐긋 쳐다봤다.

“주종 관계지. 내가 주, 네가 종.”

명료한 대답이었다. 그래도 로맨틱한 말을 한 번쯤은 해 주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하던 선우는 태화의 대답을 듣고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고개를 홱 돌려 차창 밖을 쳐다봤다. 삐쳐도 단단히 삐친 모양새였다.

동그란 뒤통수만 봐도 서운함이 뚝뚝 떨어지는 게 다 보였다. 그래 놓고서는 끝까지 손은 놓지 않는 바람에 태화는 그만 참지 못하고 푸스스 웃었다. 애가 어떻게 날이 갈수록 애교만 느는지 몰랐다. 마침 빨간 신호를 받아 차가 잠깐 멈췄다. 선우는 여전히 뒤통수만 보여 주는 중이었다.

“최선우.”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귀 끝은 움칠 떨리는데 돌아보지는 않았다.

“선우야.”

성을 빼고 부르자 재깍 반응이 왔다. 토끼라도 되는 것처럼 귀가 쫑긋 서더니 영 돌아설 것 같지 않던 고개가 천천히 이쪽을 향했다. 어느새 태화를 마주 본 선우는 뺨부터 귀 끝까지 발그레하게 열이 올라 있었다. 아까 가게에서도 그러더니, 이름만 불러 주는 게 퍽 좋은가 보았다.

태화는 이다지도 단순한 최선우 때문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웃음을 참지 못하는 낯으로 선우의 턱을 끌어와 쪽 입을 맞췄다. 금방 신호가 바뀐 탓에 뒤차가 경적을 울렸지만, 윗입술 아랫입술 한 번씩 가볍게 빨아 주고 뒤로 물러났다.

“종놈님, 뽀뽀는 입에 맞으셨어요?”

괜스레 장난치듯 말하자 선우는 그게 뭐냐면서도 좋아하는 티를 숨기지 못했다. 세상 단순한 놈이었다.

“세상 인간들이 다 너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태화가 푸념하듯 말했다. 선우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눈을 크게 뜨자 짙게 진 쌍꺼풀이 더 도드라졌다. 태화는 선우의 눈가를 쓸어 매만지며 피식 웃었다.

용지서에 도착하자 다들 태화와 선우가 탄 차를 한 번씩 힐끔거렸다. 선우는 왜 사람들이 쳐다보는지 모르다가 태화의 차가 비싼 것이라는 걸 상기하고 어깨를 쫙 폈다. 본인 차도 아니면서 괜히 힘을 줬다.

차를 주차하고 용지서 안으로 들어가자 탁성모와 한동열이 기다렸다는 듯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성모의 눈빛이 좀 이상했다. 어째 평소보다도 더 징그럽게 웃는 얼굴로 태화와 선우를 번갈아 쳐다봤다. 가게에서 마냥 지루해하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특히 수상쩍을 만큼 선우를 빤히 쳐다보며 자꾸 실실 웃었다. 영 기분 나쁜 시선에 선우는 본능적으로 태화 뒤로 반쯤 몸을 숨겼다. 지난번에는 동열의 책상에서 질문하더니 오늘은 취조실까지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들어가죠.”

한동열이 길을 안내하듯 옆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선우는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했다. 취조실은 생각도 못 했던 탓이었다. 그건 태화도 마찬가지였다. 여기까지 와서 못 들어가겠다고 하는 것도 이상했고, 그렇다고 선우를 선뜻 취조실 안으로 들여보낼 수도 없었다. 여러모로 속이 시끄러웠다. 보다 못한 한동열이 불쑥 선우의 팔을 잡았다.

“들어가자니까요.”

선우를 끌어당기려는 때에 태화가 동열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애 몸에 손은 대지 말죠.”

한동열은 이제 태화를 봤다. 항상 그렇듯 웃는 얼굴은 한 대 갈겨 주고 싶을 만큼 여유로웠다. 분명 존댓말이었는데 왜 기분이 나쁜가 했더니 태화의 말은 명령조였다. 늘 이랬다. 묘하게 상대를 낮잡아 보는 듯한 느낌을 풍기는 화법이었다. 짜증이 있는 대로 오른 한동열은 태화의 말을 무시하고 선우를 잡아당겼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태화에게 잡힌 손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동열 딴에는 힘주어 당기고 있는데 제자리 그대로였다. 뭔 놈의 악력이 이렇게나 강한지, 인간이 맞긴 하는가 싶을 정도였다. 더 짜증 나는 건, 남은 죽어라 힘을 주고 있는데 정작 태화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라는 점이었다. 참다, 참다 손에 피가 안 통하는 것 같자 한동열은 결국 선우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동열의 손목에 시뻘건 손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화는 선우를 제 쪽으로 끌어와 귓가에 가까이 다가갔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대답에 자신 있는 질문이 나와도 입 다물고 있어.”

남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귓속말하고 물러났다. 선우가 고개를 바짝 쳐들어 쳐다봤다.

“그래도 돼요?”

“어. 넌 그래도 돼. 말 잘 들으면 끝나고 맛있는 거 사 줄게.”

태화는 애라도 달래듯 선우의 뺨을 톡 쳤다. 선우의 말간 얼굴 위로 웃음이 천천히 피어올랐다.

내가 이 낯짝을 보려고 맛있는 거 타령을 했나?

생각하던 태화는 이제는 정말 들어가야 한다는 동열의 말에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하지만 선우가 손을 놓지 않았다. 아무리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도 불안한 모양이었다.

하긴, 남들은 평생 한 번 방문할까 말까 한 경찰서에 두 번이나 온 데다가 오늘은 취조실까지 경험하게 생겼으니 떨리는 게 당연했다. 선우는 주춤주춤 걸음을 떼면서도 시선이나 손끝이나 태화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태화는 제게서 멀어지는 선우를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거리가 계속 멀어지다가 맞잡은 손이 툭 끊기듯 떨어졌다.

선우는 그 후로도 동열을 따라가며 몇 번이고 태화를 돌아봤고, 그는 괜찮다는 위로나, 기다리겠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선우의 열기가 머물렀던 손끝만 매만질 뿐이었다.

선우가 취조실로 들어간 지 30분 정도 흘렀을 때, 용지서 주차장 안으로 또 다른 차가 들어왔다. 마침 벤치에 앉아서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던 태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주인이 누군지 아는 눈치였다. 주차된 차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이제 막 차에서 내린 남자는 문 앞에 서서 넥타이를 매다가 태화를 봤다. 반가운 듯 손을 흔들어 가며 인사했다. 장 선생이었다.

“많이 기다렸어?”

“조금요.”

태화는 빈말이라도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정장을 차려입은 장 선생을 위아래로 짧게 훑어봤다. 확실히 정장이 잘 어울리는 양반이었다. 선우가 어디서 지내는지 반나절 만에 알아낸 장 선생의 직업은 당연하게도 흥신소 사장이었다. 사실 직원 하나 없는 1인 사업장이라 사장이자 직원인 셈이었다.

지금이야 흥신소를 운영했으나 장 선생은 한때 잘나가던 변호사였다. 태화 기억으로 이런저런 풍파를 겪고 변호사 일을 그만둔 지 근 12년째였다. 다행히 변호사 자격은 남아 있어서 돌팔이인 고 박사와 마찬가지로 나이롱 변호사인 셈이었다. 그래도 실력은 좋았다.

태화는 장 선생이 다시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번듯하게 일하길 바랐지만, 장 선생은 흥신소 일이 더 재밌다고 했다. 변호사 일이나, 흥신소 일이나 크게 다를 것도 없고, 법을 지키며 사는 것보다야 법을 무시하며 사는 게 더 취향이라 적성에 딱 맞는다는 게 장 선생의 지론이었다.

“걔는 안에 들어가 있고?”

“지금 취조실 안에 있습니다. 일단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해 놓긴 했는데 워낙 또라이라 이미 무슨 말을 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네가 또라이라고 하는 거 보면 엔간한가 보다.”

장 선생은 넥타이핀까지 깔끔하게 착용하고 차에서 서류 가방을 꺼냈다. 별다르게 든 건 없었고, 단순히 기선 제압용이었다.

“전체적인 그림이 뭔지는 대충 알겠는데. 저쪽에서 새로 알아낸 게 있다고 하니, 뭔지 잘 모르겠으면 그냥 데리고 나올게.”

“알아서 해 줘요. 선생님만 한 사람 없으니까. 아, 그리고 새로 알아낸 건 없을 겁니다. 뻥카 들고 있는 거예요.”

태화는 여상히 말했다. 크게 걱정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새로 무언가를 파헤칠 수 있을 만한 여지 같은 건 두지 않았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새로 알아낸 게 있다고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해 대던 동열이 어찌나 같잖고 우습던지, 하마터면 면전에 대고 웃을 뻔했었다.

장 선생이 용지서 안으로 들어가고, 태화는 무심결에 담배를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취조실에서 나오자마자 쪼르르 달려와 제게 뽀뽀부터 갈길 최선우가 눈에 선하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선우가 담배 냄새를 싫어하는 티를 내거나, 눈치를 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애한테 구태여 담배 맛을 보일 필요는 없었다.

“희멀건 놈 하나 때문에 담배 하나도 마음대로 못 태우나.”

태화는 괜스레 푸념 아닌 푸념을 중얼거리며 들고 있던 담뱃갑을 쓰레기통에 툭 던져 넣었다.

장 선생은 용지서에 들어간 지 한 시간쯤 지나서 다시 나왔다. 그 옆에는 선우도 함께였다. 다행히 많이 떨진 않았던지, 선우는 들어가기 전보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얼굴이었다.

태화는 담배 대신 근처 편의점에서 산 껌을 씹으며 둘이 함께 나오는 걸 쳐다봤다. 먼저 장 선생과 눈이 마주쳐 짧게 목례했다. 옆에 있던 선우 역시 태화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발그레한 얼굴 위로 웃음꽃이 피어나는 건 한순간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선우는 태화를 보자마자 뛸 준비부터 했다. 바로 뛰어오려다가 뒤를 돌아 장 선생에게 꾸뻑 인사하고 다시 태화를 향해 달렸다. 좋아서 쪼르르 달려와 놓고는 정작 바로 앞까지 와서는 브레이크를 밟은 것처럼 끽 멈춰 섰다. 그러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끌어안고 싶은데 보는 눈이 많아 손끝 하나 대지 못하는 게 티가 다 났다. 언제부터 내외했다고, 갑자기 주변 눈치를 보는 선우 때문에 태화는 허허롭게 웃었다. 먼저 선우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남은 거리를 확 좁히고 선우를 꽉 끌어안았다. 뽀뽀하는 척 씹던 껌을 쑥 밀어 넣었다. 갑자기 껌이 입 안에 들어오자 선우는 뭣 모르고 꿀떡 삼켰다.

“이거 뭐예요?”

“뭐야? 삼켰어?”

선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태화는 헛웃음을 쳤다. 미련하기가 하늘을 찔렀다. 참지 못하고 말랑한 볼살을 꼬집어 늘이다가 문득 저 멀리 서 있는 한동열과 눈이 마주쳤다. 참 낄 때 안 낄 때 구분 못 하고 시야에 더럽게도 들어왔다. 태화는 성가시다는 생각과는 달리 싱긋 웃으며 동열에게도 눈인사했다. 그리고 바로 선우에게 집중했다.

“저 걱정돼서 변호사까지 불렀어요?”

“네가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니까.”

“걱정한 건 아니고요?”

선우는 듣고 싶은 말을 정해 둔 듯했다. 태화는 한번 골려 줄까, 아니면 그냥 넘어가 줄까 잠깐 고민하다가 숨을 짧게 내쉬었다.

“걱정한 것도 맞고.”

그렇게 대답하자 선우는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먹고 싶은 건 생각해 봤어?”

“저는 아저씨랑 먹는 거면 다 좋아요.”

“그럼 집 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자.”

“그것도 좋고요!”

태화 딴에는 웃자고 한 소리인데 선우는 진심이었다. 정말 뭘 먹든 그와 먹으면 다 맛있었다. 원래도 반찬 투정을 별로 안 하는 편이었으나 태화가 앞에 앉아 있으면 맛없는 것도 맛있게 느껴졌다. 선우가 히히히 웃으며 쳐다보자 그는 습관처럼 미간을 엷게 구기다가 얄따란 손목을 잡아끌었다. 선우는 태화에게 잡혀 팔랑팔랑 걸어가면서도 연신 웃는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한정식집이었다. 선우는 그냥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식 코스 요리집인 줄 알았다가 앞에 놓인 메뉴판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메뉴랄 것도 없었다. 그저 단일 코스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는데, 가장 밑에 적힌 30만 원이라는 숫자에 선우는 눈을 비볐다. 비비고 또 비빈다고 30만 원이 3만 원이 되지는 않았다. 대체 어떤 메뉴가 나오길래 밥 한 끼에 30만 원인지 몰랐다. 금덩이라도 갈아 주나 싶었다.

선우는 기함한 표정으로 메뉴판과 태화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이었다.

“아저씨 부자……. 아니, 부자인 건 아는데 그래도 밥 한 끼에 30만 원은 너무…….”

“있는 돈 쓰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태화는 시답잖은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선우의 손에서 메뉴판을 가져갔다. 선우는 태화를 따라 따끈따끈한 물수건에 손을 닦으면서도 입술을 연신 움직였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엄청난 부자인데 왜 돈 받고 사람을 죽여요?”

선우는 냉큼 궁금했던 걸 물었다. 태화가 부자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내내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태화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뭣 때문에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구나 했더니 저런 이유였다.

“부자는 돈 받고 사람 죽이면 안 돼?”

“저 같으면 얼마 벌고 나서 바로 일 그만두고 해외로 떴을 거 같아서요.”

태화는 말하느라 오물오물 잘도 움직이는 선우의 입술을 빤히 쳐다봤다. 참 빨고 싶게 생긴 입술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선우는 물수건을 돌돌 말며 태화의 대답을 기다렸다.

“적성에 맞는데 재밌기까지 한 일을 굳이 그만둬야 할 이유를 모르겠네.”

“아.”

선우는 탄성 비슷한 소리를 내더니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맞아, 아저씨 또라이였지.’ 하는 뒷말을 삼키느라 그랬다.

“그럼 정육점은요?”

“그건 취미.”

직업은 살인이고, 취미가 정육점 운영인 사람이 아저씨 말고 또 있을까……?

선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문이 열리고 음식이 하나하나 서빙 됐다. 따로 주문하지 않았는데 음식부터 나오는 걸 보고 당황하던 선우는, 코스가 하나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수건을 돌돌 말고, 접어 만든 병아리를 태화 앞에 놔 주자 그는 이게 뭐냐고 하면서도 손 위에 올려 한참 쳐다봤다.

“꼭 지 같은 것만 만드네.”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린 말은 선우에게까지 닿지 못했다.

“네?”

“얼른 먹으라고.”

선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짧은 문장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궁금했지만 일단은 배가 너무 고파서 젓가락부터 들었다. 잔뜩 긴장했던 게 풀려서 그런지 정말 허기가 졌다. 문제는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한식당을 가 본 적이 없는데, 하물며 1인당 30만 원 하는 코스 요리라니. 선우에게는 음식이 아니라 깨야 할 퀘스트처럼 느껴졌다.

이게 대체 뭔가 싶을 만큼 생소하게 생긴 음식들이 많았고, 종업원이 하나하나 설명해 줬지만 전부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많고 많은 음식 사이에서 선우는 쉽사리 젓가락질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화는 한숨 같은 웃음을 짧게 내뱉더니 먼저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선우는 기다렸다는 듯 태화를 따라 젓가락을 옮겼다. 태화가 먹는 순서를 그대로 따라 하며, 심지어는 물 마시는 것까지도 똑같이 했다. 하지만 처음이 어렵다고, 선우는 초반에만 우왕좌왕하다가 점점 익숙해졌는지 태화보다도 더 잘 먹었다.

특히 알맞게 구운 장어가 입에 맞는지, 나오자마자 게 눈 감추듯이 먹어 버려서 태화가 본인의 몫을 더 주기도 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아예 선우 몫의 장어 한 마리를 더 주문했다.

“맛있어?”

“네. 이거랑 이거 진짜 맛있어요.”

선우는 신선로와 장어를 콕콕 가리키며 말했다. 하여튼 비싸고 맛있는 건 귀신같이 알아챘다. 태화는 픽 소리를 내다가도 선우가 잘 먹는 모습을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장어를 좋아하는 건 처음 알았다. 그럴 만도 했다. 선우에게 장어를 사 준 게 처음이었다. 이전까지는 살을 찌운다고 고기만 주야장천 먹였는데, 앞으로는 장어도 종종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기분이 묘해지기도 했다. 명색이 본인이 정육점 사장인데, 같이 산다는 놈이 고기보다도 장어를 더 좋아한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결국 선우는 코스 요리로도 모자라 혼자서 장어덮밥을 하나 더 먹었다. 저렇게나 말랐는데 그 많은 밥이 다 어디로 들어가나 싶었다.

아니, 왜 먹는 만큼 살이 안 쪄.

태화는 고개를 삐뚜름히 기울였다. 아예 선우에게 성큼 다가가 배를 만져 봤다. 옷까지 들쳐 속살을 더듬더듬 문질렀다. 이만큼 먹었으면 빵빵해야 정상일 텐데 배는 조금 봉긋해져 있을 뿐이었다.

“너 뭐, 먹자마자 소화해?”

태화가 물었지만, 선우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일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후식이 나왔다. 태화는 이곳에 오면 후식으로 항상 정산소종과 함께 나오는 비스킷을 먹었는데, 오늘은 과일이 올라간 아이스크림을 선택했다. 아이스크림이 나오자마자 선우 앞으로 밀어 줬다. 선우는 멀뚱멀뚱 뜬 눈으로 아이스크림과 태화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씰룩이는 입술로 웃으며 작은 스푼을 들었다. 선우가 아이스크림까지 야무지게 먹는 사이 태화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어.

상대는 장 선생이었다.

“오늘 어땠나 해서요.”

- 별거 없었어. 네 말대로 그쪽에서 더 알아낸 건 없어 보였고, 그냥 최선우한테 컨테이너에서 벗어난 적 있는지 없는지 그거 물어보더라.

“다른 거는요.”

- 영, 저쪽도 갈피를 못 잡는 느낌.

그때 선우가 스푼으로 망고를 들어 올렸다가 실수로 테이블 위에 툭 떨어뜨렸다. 선우는 눈치를 보듯 태화를 한번 힐끔거리더니 서둘러 망고를 다시 집어 입으로 쏙 넣었다.

- 근데 최선우 걔는, 애인이냐?

장 선생이 물었다. 아무리 콩알만 해도 최선우는 엄연히 좆 달린 남자였다. 그런 놈을 두고 애인이라니, 장 선생도 나이에 비해 꽤 열린 사람이었다. 태화는 떨어진 망고 하나도 아까워서 주워 먹는 선우를 한참 바라봤다.

“예.”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여 가며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맛있게 먹는 선우를 봤다. 잘 먹는 모습이 꽤 보기 좋았다. 아니, 더 좋고 맛있는 걸 사 주고 싶을 만큼 예뻤다. 태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픽 웃으며 선우의 볼을 톡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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