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3)

6.

처음 컨테이너를 접한 이후 태화와 선우는 매일 그곳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선우는 늘 그랬던 것처럼 몸을 숙였고, 태화는 운전보다도 선우의 등이며 목덜미, 뺨을 쓰다듬는 데에 집중했다. 컨테이너에서는 잡담을 많이 했고, 가끔 키스도 했다. 섹스는 차 안에서만 했다.

선우의 앞머리가 눈을 찌를 정도라 태화가 잘라 줬다. 미용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사람의 솜씨는 형편없었다. 태화가 거울을 보여 줬을 때 선우는 솔직히 울고만 싶었다. 그래도 꾹 참고 고맙다고 말했는데 정작 태화는 맹추 같아 보인다며 큭큭 웃었다. 그 바람에 선우는 정말 눈물을 찔끔 흘렸다.

선우가 담배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태화가 가르쳤지만, 매번 한 모금 빨고 죽을 것처럼 기침해서 실패했다. 태화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선우가 빨다 만 담배를 피우는 건 태화의 몫이었다. 그래서 태화는 근 3년 동안 잘 이어 왔던 금연 생활을 끝낼 뻔했는데 선우가 같이 피우지 말자고 하는 말에 그러자고 약속했다. 선우의 성화를 못 이긴 태화는 유치원생들처럼 약속 도장에 사인과 복사, 코팅까지 야무지게 해야 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일주일과 보름을 지나 한 달이 되는 동안 컨테이너를 매일 방문했고, 다 스러져 가는 전등 밑에서 둘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서른한 번째 밤에 두 사람은 서로를 만지지도 곁에 앉지도 않았다. 그저 멀찍이 떨어져 앉아 시답잖은 농담만 툭툭 던졌다. 그러다 동이 트기 직전, 태화는 선우에게 안대를 채웠다. 선우가 바이브레이터를 주문할 때 함께 주문했던 것이었다. 등 뒤로 손을 두고 수갑까지 채운 태화는 선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뒤에 서서 선우를 만지지도 못하고 마른 등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뼈가 불룩 올라온 목덜미에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다가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한참 선우의 솜털과 체향을 느끼다가 물러났다. 그리고 선우를 남긴 채 혼자 차를 타고 돌아갔다.

선우는 처음으로 태화와 떨어져 혼자 컨테이너에 남았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사라지자 그를 배웅하느라 끌어 올려 놨던 입꼬리가 빠르게 내려갔다.

“할 수 있어.”

무섭다는 말 대신 할 수 있다고 중얼거렸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두려운 마음이 커질수록 같은 말을 반복했다. 마음의 평안을 되찾는 주문이라도 외는 것처럼 그랬다. 꼭, 꽃다방의 쪽방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외롭고, 그리웠다. 벌써 서태화가 보고 싶었다.

* * *

해가 뜬 게 안대 밑으로 슬쩍 보였다. 선우는 본인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고 컨테이너를 나섰다. 맨발이었다. 차림새도 추레하기 그지없었다. 목 부분이 다 늘어난 티셔츠에 흙먼지가 잔뜩 묻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10월이라는 날씨에는 적절하지 않은 차림이었다. 태화는 선우가 직접 꾸며 놓은 꼴을 보고 욕을 짓씹었으나 선우 본인은 제법 만족했다.

돌이 가득한 흙바닥을 밟으며 터덜터덜 앞으로 나아갔다. 천천히 걸어 나가며 손 갓을 만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역시 가을 하늘은 높았다. 쨍쨍하게 내리쬐는 가을볕을 슬그머니 바라보던 선우는 대로로 나오자마자 풀썩 쓰러졌다. 누가 건전지를 뺀 로봇처럼 미동도 없이 널브러졌다.

워낙 인적이 드문 곳이라 사람이 쉽사리 모이진 않았다. 하지만 지나던 차 한 대가 선우를 발견하고 급히 멈춰 섰고, 도와 달라는 운전자의 외침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시끄러운 와중에 기절한 척하는 건 퍽 곤욕이었다.

선우는 곧바로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 중간에 구급차 안에서 잠깐 깨어난 척하며 난동을 부렸더니 구급대원이 안정제를 놔 버렸다. 덕분에 정말 잠에 빠져들어 병원까지 이송됐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병원 침대 위였다. 안대도 벗겨져 있었다. 선우는 실눈을 뜨고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저기 의료진들의 다급한 음성이 들리고, 시끄러운 기계음이 난무하는 걸 보면 응급실인 듯했다.

문득 왼쪽 손목으로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슬쩍 손을 움직여 보자 쩔그럭 소리가 났다. 수갑이었다. 태화가 채워 줬던 것과는 다른 질감과 무게였다. 아무래도 차고 있던 것은 끊고 누군가가 새것을 채운 모양이었다.

“아, 예. 감사합니다.”

근처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낯선 목소리였다. 누군가 싶어서 살짝 쳐다본 선우는 하마터면 놀란 신음을 낼 뻔했다. 커튼 사이로 동열이 서 있었다. 영 낯설다 싶었던 음성의 주인이 한동열이라 선우는 좀 당황했다. 아무리 그래도 대화까지 나눠 본 사람 목소리를 이렇게 새카맣게 잊을 수 있나 싶었다. 동열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상대는 선우를 처음 발견한 차의 운전자인 듯했다.

“혹시 나중에라도 저희 쪽에서 연락이 갈 수 있습니다.”

“연락이요?”

“아, 뭐 별건 아니고, 간단한 진술 같은 게 필요하면 전화드릴 겁니다. 이거, 제 명함.”

동열은 남자에게 명함을 건넸다. 남자가 고개를 꾸뻑 숙이며 받아 들었다. 그 덕에 커튼 사이로 남자의 낯이 살짝 보였다가 사라졌다. 그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선우는 돌연 놀란 눈을 떴다. 남자는 선우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지난번 집에 와서 루미놀을 놓고 갔던 남자, 고 박사였다. 선우는 자신이 잘못 봤나 싶어 옆으로 돌아눕는 척 커튼 밖이 조금 더 잘 보이는 각도로 움직였다. 한동열의 얼굴이 안 보이는 대신 남자가 보였다.

정말 고 박사였다. 아까 쓰러졌을 때는 안대를 하고 있느라 못 봤는데, 고 박사가 대체 여기 왜 있는지 몰랐다. 마침 한동열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동열이 전화받느라 잠깐 멀어진 사이 고 박사는 커튼 틈으로 선우를 봤다. 당황스러워하는 선우를 향해 눈썹을 들썩이다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참 인상 하나는 좋은 남자였다.

고 박사가 커튼 사이로 무언가를 툭 던졌다. 선우가 덮고 있는 이불 위에 떨어진 건 쪽지로 보이는 종이였다. 선우는 누가 볼 새라 허겁지겁 쪽지를 가져와 펼쳐 봤다.

[무슨 일 있으면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나한테 올 것]

쪽지의 내용은 간결했다. ‘나’가 누구인지 적혀 있진 않았으나 선우는 단번에 누군지 알았다. 서태화였다. 선우는 쪽지를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생긴 것처럼 반듯한 필체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글씨를 감상하고 있는데 통화를 마친 한동열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선우는 끔쩍 놀라며 쪽지를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고 말았다. 쪽지를 우적우적 씹다가 억지로 목구멍 뒤로 삼키고서야 아차 싶었다. 태화가 처음 써 준 편지인데 보관이라도 해 둘걸,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쪽지는 제 배에 들어가고 없었다. 선우가 시무룩해하자 지켜보던 고 박사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곧 동열이 돌아왔고, 고 박사는 언제 웃었냐는 듯이 경찰 앞에서 기죽은 사람을 연기했다. 인사 끝에 고 박사는 돌아갔다. 한동열이 커튼을 열고 침대 쪽으로 들어왔다. 선우는 곧바로 눈을 감았다. 옆으로 누워 있었는데, 다행히 등 뒤로 한동열이 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선우는 눈을 슬그머니 떴다. 병원 이름이 잔뜩 적힌 커튼을 멀거니 쳐다보며 시간을 죽였다.

대충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판단하에 몸을 움찔 움직였다. 뒤에서 벌떡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막 깨어난 사람처럼 멍한 얼굴을 하고 뒤를 돌아보자 한동열이 구겨진 낯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정신이 듭니까?”

“여기, 어디…….”

“병원입니다.”

선우는 아직 정신없는 척 눈을 느리게 끔뻑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미 조금 전에 다 눈에 담아 놨던 광경이라 별다를 건 없었다. 그래도 처음 보는 척, 잠에서 덜 깬 척을 무진 하며 필사적으로 연기했다. 어딘가에서 삐삐삐 울려 대는 기계음이 시끄럽다는 듯 귀를 감싸다가 돌연 두 눈을 크게 뜨며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꼭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겁먹은 표정을 했다.

“그 사람은요? 잡혔어요?”

“최선우 씨.”

“제가 여기 온 거 아나요?”

“최선우 씨?”

“들키면 안 되는데, 나 죽이려…….”

부르는 걸 깡그리 무시하고 제 할 말만 하자 한동열이 선우의 어깨를 붙들었다. 선우는 그러고도 한동안 정신 나간 놈처럼 벌벌 떨었다. 불안에 찌든 얼굴로 도망가야 돼, 도망가야 돼……. 하고 중얼거렸다. 동열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최선우 씨!”

결국 한동열은 언성을 높였다. 주변 사람들이 전부 입을 다물 만큼 큰 음성이었다. 선우도 숨을 헙!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어깨를 덜덜 떨다가 딸꾹질을 했다. 이건 연기가 아니었다. 한동열이 이렇게 크게 호통칠 줄 몰라서 정말 놀란 마음에 딸꾹질이 절로 나왔다. 연신 끅끅거리며 눈을 똥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한동열은 그제야 잡았던 어깨를 놨다.

“저랑 있으면 괜찮습니다.”

“어, 어어……. 하아…….”

“이제 조금 진정이 됩니까?”

동열의 물음에 선우는 맹한 얼굴로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열은 선우의 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간 듯 보였다. 상대가 경찰이라 연기인 걸 들키면 어떡하나, 걱정을 많이 했던 선우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꽃다방에서 손님을 받았던 경험이 다 불필요했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물론 개좆같은 기억일 뿐이었지만, 그때 역겨워도 참고, 비참해도 티 내지 않던 경험이 바탕이 돼 연기가 수월했다.

아닌가……?

선우는 동열을 가만히 쳐다봤다. 어쩌면 한동열이라는 인간이 속이기 쉬운 부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우는 반나절도 지나지 않고, 응급실을 나와 용지서로 이동했다. 몰랐는데 병원에 탁성모도 와 있었다. 동열은 의사 소견대로 선우를 하루 더 입원시켜야 한다고 말했지만, 탁성모의 압박으로 일찍 퇴원한 것이었다. 용지서로 가는 동안 탁성모와 한동열은 서로에게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서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루는 더 입원해야 한다는 사람을 굳이 이렇게 끌고 옵니까?”

“네가 그랬잖아. 빨리 수사해야 한다고. 그래서 빨리 수사하는 건데, 뭐?”

“아무리 그래도……!”

동열은 뭐라고 더 말하려다가 참았다. 여기서 말이 길어지면 언성도 똑같이 높아질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대신 심문은 제가 합니다.”

“뭐? 네가 왜? 당연히 내가 해야…….”

“반장님은 최선우랑 아는 사이잖습니까.”

한동열의 말에 탁성모는 그제야 한풀 꺾였다. 여태껏 사사건건 동열에게 태클을 걸더니 지금은 입을 싹 다물었다. 아무래도 불법 퇴폐업에 종사하는 놈과 친분이 있다는 게 찔리는 모양이었다. 하긴, 강력 팀 팀장이라는 사람이 면도방 단골이라는 게 밝혀지면 곤란할 터였다. 성모가 더는 아무 말 하지 않자 한동열은 한숨을 푹 쉬고 안으로 들어갔다. 탁성모도 뒤따라 들어왔다.

이미 동열의 책상 앞에 선우가 앉아 있었다. 선우는 동열이 들어오자 어깨를 좀 더 움츠렸다. 사실 탁성모나 한동열이나 음성이 워낙 커서 밖에서 하는 이야기가 다 들렸다. 뭐 저런 걸로 싸우나…… 생각하며 빨리 끝내고 태화에게 가기만을 고대하던 선우는 다시 연기를 시작했다. 한동열은 들고 온 믹스커피를 선우 앞에 놔 주고 맞은편에 앉았다.

“마셔요.”

동열의 말에도 선우는 가만히 있었다.

“블랙 좋아해요?”

“아뇨. 그냥 커피를 안 좋아합니다.”

선우가 말하자 동열은 잠깐 생각하나 싶더니 밖으로 다시 나갔다. 돌아왔을 때는 손에 탄산음료가 들려 있었다. 앞에 있는 자판기에서 막 뽑아 온 듯했다. 음료수 캔을 재차 선우 앞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옆에 앉아 있던 탁성모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선우는 그 음료수도 마시지 않았다.

“우선, 컨테이너에서 어떻게 나온 겁니까?”

“문이 열려 있어서…….”

“그럼 그동안은 왜 안 나오고 있었던 거예요?”

“문이……. 잠겨 있어서요.”

선우는 뭘 당연한 걸 묻냐는 식으로 동열을 쳐다봤다. 그 눈빛에 동열은 아, 소리를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계속 거기에 갇혀 있던 겁니까?”

“네.”

“얼마나 갇혀 있었어요?”

“잡혀가자마자 어딘가에 갇혔었어요. 중간에 한 번 장소를 옮겼고, 거기가 오늘 탈출했던 컨테이너였고요. 계속 눈이 가려져 있어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처음 갇혔을 때가 7월이었으니까……. 오늘이 며칠인가요?”

선우의 물음에 동열은 제 쪽으로 보이던 탁상 달력을 뒤로 돌렸다. 선우에게 잘 보이게끔 놔 주며 오늘 날짜를 탁탁 쳤다.

“10월 12일이요. 그럼 대략 3개월은 갇혀 있었다는 거네요.”

“그런가 봐요.”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한동열은 컨테이너에 갇혀 있을 때의 생활을 물었다. 밥은 어떻게 먹었냐느니, 씻는 건 어떻게 했냐느니, 용변은 또 어떻게 해결했냐느니. 아주 원초적인 것 하나까지도 빼놓지 않고 전부 질문했다. 질문을 던지면 선우는 곧잘 대답했다. 물론 당시 일을 기억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듯 뜨문뜨문 앓는 소리를 냈고, 작은 소리에도 흠칫 떨었다. 하지만 시간을 주면 차분하게 말했다.

“그때 지영환 씨에 대해 물었더니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잖아요.”

“언제, 요……?”

“올 1월에요. 저랑 탁 팀장님이 꽃다방에 갔을 때.”

“아…….”

“아직도 아무것도 모릅니까?”

선우는 돌연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동열은 이번에도 선우가 말하길 기다렸다. 하지만 1분이 지나고, 5분, 10분이 지날 때까지도 선우는 입을 꾸욱 다문 채 손톱 소리만 틱틱 냈다. 한동열도 인내심이 슬슬 바닥을 보이는 참이었다.

“말 안 할 거예요?”

동열이 한 번 더 재촉하자 선우는 어깨를 움칠 떨었다. 괜스레 앞에 있던 캔 음료를 두 손으로 쥐고 만지작거렸다. 결로로 인해 생긴 물이 테이블 위로 툭툭 떨어졌다. 선우의 손도 젖었다. 선우는 손끝으로 물방울들을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말하면 죽을 거 같아서…….”

“그렇다고 말을 안 해!”

가만히 보고만 있던 탁성모가 처음으로 버럭 소리쳤다. 철제 책상을 세게 내리치기도 했다. 선우는 희뜩 몸을 떨었다. 주눅이 잔뜩 든 표정으로 탁성모와 한동열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너 때문에……!”

“잠깐만요, 팀장님.”

성모가 한 번 더 윽박지르려는 순간 한동열이 말을 끊었다. 동열은 씩씩거리는 성모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다시 선우에게 집중했다.

“방금 말하면 죽을 거 같다고 그랬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제가.”

선우는 뜸을 들였다. 이걸 말해도 되나……? 하는 얼굴로 한참을 망설이자 옆에서 가슴을 턱턱 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여튼 성모는 참을성이 부족했다. 반면 한동열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선우가 스스로 입을 열 수 있도록 재촉하지 않았다. 가만히 바라보며 기다렸다. 선우는 제 손끝을 바라보며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 지 사장님이 납치당하는 걸 봤거든요.”

그 한마디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각자 다른 일을 하던 경찰들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선우를 쳐다봤다. 동열 역시 놀란 얼굴을 하며 몸을 선우 쪽으로 좀 더 기울였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봐요.”

“지 사장님이 매주 화요일, 금요일마다 저 만나러 오셨거든요. 그때가 크리스마스이브 전날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날도 기다리고 있다가 지 사장님이 오셔서 평소처럼 준비했었어요.”

“뭘 준비합니까?”

동열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선우보다도 성모가 더 먼저 반응했다. 탁성모는 쯧 혀를 차다가 선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빨아 줄, 준비요…….”

선우가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동열은 그제야 고개를 바로 세웠다. 판판했던 미간이 무섭게 찌그러졌다. 선우가 꽃다방에서 하던 일이 뭐였는지 잠깐 잊고 있다가 막 떠오른 탓이었다.

면도방에 대해서는 성모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전화방, 키스방만 들어 봤지, 면도방은 생전 처음 들어 보는지라 성모에게 들었을 때 헛웃음만 나왔던 기억이 있었다. 게다가 지난번 봤던 닭장 같은 방 안에 최선우가 들어앉아 남자들의 욕구를 채워 준다는 상상까지 해 버린 동열은 잠깐 이를 악물었다.

최선우는 이제 갓 스물한 살이었다. 작년에는 스무 살이었고. 그 어린 걸 데리고 뭘 하겠다는 건지, 기분이 더러워졌다. 경찰 생활을 하며 성매매 업소에 종사하는 인간들은 숱하게 만나 봤지만 이만큼이나 감정이 동요된 적은 없었다. 이게 전부 최선우가 너무 어리기 때문이라고, 동열은 구태여 붙이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덧붙이며 속으로 화를 삭였다.

“계속 말해 봐요.”

“그……. 준비를 하고 있는데 지 사장님이 어디서 손바닥을 긁혔다고 대일밴드 있으면 좀 가지고 오라고 하셔서 그거 가지러 방에 들어갔었거든요. 한참 찾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큰 소리가 나더라고요. 욕하는 소리도 들리고. 예전에 다방에 도둑이 든 적 있거든요. 뭣 모르고 잡으려다가 된통 맞고 기절한 적이 있어서, 그때 생각에 무서우니까 가만히 있다가 잠잠해진 틈에 문만 열고……. 아, 제 방 기억나시죠? 아무튼 문 열고 내다보니까 누가 지 사장님을 끌고 가고 있었어요.”

“끌고 가요? 그때 지영환 씨는 살아 있었습니까?”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는지, 아니면 무슨 약이라도 먹었는지, 몸에 힘이 없긴 했는데 벗어나려고 버둥거리긴 했어요.”

동열은 선우의 말을 빠짐없이 노트북에 옮겼다.

“근데 제가 얼굴을 봤다고 생각했나 봐요. 그 일 있고 6개월 정도 흘렀나……. 여름이요. 누나들 다 나가고 혼자 가게 정리하고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려서 나갔더니 그 사람이었어요. 지 사장님 납치했던.”

“얼굴은요? 봤습니까?”

“아뇨, 못 봤습니다.”

“어떻게 얼굴을 못 봐!”

선우가 고개를 젓자 탁성모는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파일이나 집어 들더니 선우를 향해 휘둘렀다. 다행히 동열이 먼저 일어나 막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선우는 꼼짝없이 머리통을 얻어맞을 뻔했다.

“이러다 폭력 경찰이라고 뉴스 나갑니다……!”

한동열의 말을 듣고서야 탁성모는 진정할 수 있었다. 한바탕 어수선한 분위기가 지나가고 한동열은 여태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떠는 선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쪽도 그만 좀 긴장하고요.”

동열이 말했지만, 선우는 쉽사리 안정을 찾지 못했다. 결국 15분 정도 휴식하기로 했다. 탁성모와 한동열은 함께 나가 담배를 피우면서도 서로 얼굴을 붉혔다. 물론 탁성모가 한풀 꺾기는 했다. 구구절절 한동열이 맞는 말만 하기 때문이었다. 15분 뒤 다시 돌아왔을 때 선우는 동열이 준 탄산음료 대신 누가 떠다 줬는지 물을 마시고 있었다.

“다시 시작합시다.”

갑자기 말을 걸자 작게 몸을 떨던 선우는 앞에 한동열이 앉는 걸 보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조금은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못 봤다고 했는데. 납치까지 된 마당에 얼굴을 어떻게 못 봅니까?”

“……문 열자마자 천으로 얼굴이 가려졌거든요.”

선우는 그때 당시를 떠올리기라도 하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겁먹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하지만 동열은 아직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얼굴을 못 봤는데 어떻게 지영환 씨를 납치한 인물과 동일인이라고 확신하십니까?”

“목소리가 똑같았어요. 낮고, 거칠고.”

선우는 무언가 회상하듯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한동열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납치된 곳에서도 놈 얼굴을 못 봤어요?”

“계속 눈을 가려 놔서 얼굴은 못 봤는데…….”

선우는 뒷말을 끌며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에 잠긴 듯해 보였다. 한참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다가 아! 하며 고개를 퍼뜩 들었다.

“다리를 절었습니다. 지 사장님 끌고 갈 때도 절뚝이는 게 보였고, 걸음 소리도 이상했거든요.”

다리를 절어?

한동열은 타자를 치다 말고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매일 가지고 다니는 건지 가죽 표지로 된 수첩인데도 많이 해져 있었다. 무언가가 이미 적혀 있는 면을 펼치더니 빈 곳에 곧바로 ‘절름발이’라고 적고 그 옆에 물음표를 세 개나 달았다. 선우는 슬쩍 한동열의 수첩을 보려고 허리를 곧추세웠다가 수첩이 턱 덮이자 다시 호다닥 뒤로 물러났다.

“다른 건 뭐 기억나는 거 없어요?”

“몸이요.”

“예?”

갑자기 몸 타령을 하는 선우 때문에 동열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오늘만 해도 여러 번 나왔다.

“가끔 절 껴안고 잤거든요.”

선우가 뒤이어 내뱉은 말에 이번에는 인상을 험하게 찌푸렸다.

“강간을 당했다는 말입니까?”

한동열이 묻자 선우는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아뇨. 그냥 안기만 했어요.”

“넌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어!”

“팀장님!”

또다시 성모가 끼어들었다. 이번에도 탁성모와 한동열은 충돌했다.

“야, 생각을 해 봐. 너 같으면 얘 안고만 있을 수 있겠어? 얘 구라 치는 거라니까?”

“사람들이 전부 팀장님 같지는 않습니다.”

“뭐? 너 말에 뼈가 있다? 나 같은 게 뭔데? 어? 뭐냐고!”

급기야 성모는 동열의 가슴을 툭툭 쳤다. 한동열이 앉아 있는 의자가 뒤로 밀릴 정도의 힘이었다. 처음 한두 번은 참아 주던 한동열도 더는 못 참겠는지 탁성모의 손목을 잡아 꺾었다. 어찌나 동작이 재바르던지, 성모는 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제압됐다.

“야! 너 이거 상명하복이야! 어디 팀장 손을, 아아……! 야!”

성모는 손목이 꺾인 상황에서도 입을 나불거리다가 결국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계속 상명하복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상명하복은 무슨. 여기가 군대인 줄 아나.

한동열은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뒤로 삼키고 성모의 손을 놨다. 탁성모가 다시 달려들려고 할 땐 주변을 둘러보며 크게 소리쳤다.

“보고만 있을 거야? 빨리 팀장님 데리고 나가!”

씩씩대는 탁성모를 앞에 두고 언성을 높였다. 동열은 후배들이 굼뜨게 움직이자 한 번 더 사납게 말했다. 그제야 후배들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성모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탁성모 하나 없다고 경찰서 내부가 확실히 조용해졌다. 성모가 나간 문을 한참 노려보던 한동열은 숨을 크게 두 번 쉬고 다시 선우에게 집중했다.

“미안합니다. 못 볼 꼴을 보였네요.”

“아니에요. 탁 팀장님 원래 조금 다혈질이시잖아요.”

“아, 예.”

동열은 대충 대답했다. 그때 선우는 탄산음료를 집어 들었다. 캔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청아하게 났다. 지금까지 모시고만 있던 걸 처음으로 마셨다. 꼴딱꼴딱 맛있는 소리까지 냈다. 선우는 한참 만에 캔을 내려놓고 목구멍이 톡톡 튀는 느낌에 목을 슬며시 문질렀다. 그리고 한마디 작게 읊조렸다.

“한 형사님은 좋은 분이시고요.”

그 한마디에 동열은 인상을 썼다. 맹랑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하는 선우를 가만히 쳐다봤다. 단물이 남은 입술을 혓바닥으로 훑는 것까지 눈에 담다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몸을 보면 그놈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다는 겁니까?”

“네. 만지면 더 정확하고요.”

“만지는 건 안 됩니다. 최선우 씨가 위험해요.”

한동열은 단호했다. 선우는 동열의 말에 그저 눈을 끔뻑였다. 이후 두 사람 사이로 몇 가지 질문이 더 오갔다. 지영환 외에도 실종된 호스트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고, 주변에 원한 살 만한 사람이 있는지도 물었다. 가끔 선우는 실종 당시 상황에 있는 것처럼 두려움에 떨었다. 동열은 그런 선우를 안심시키기 바빴다.

“혹시라도 몸에 놈 유전자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 샘플 채취하는 데에 협조하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십시오.”

한동열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우는 고개를 들어 한동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다. 동열은 샘플 채취 도구를 가지러 가려다 말고 선우를 봤다.

“저 이대로 나가면 죽어요.”

“놈이 접근하지 못하게 저희가…….”

“아니, 납치범한테 죽는다는 말이 아니라, 지 사장님 밑에 있던 직원들이 저 찾아와서 죽일 거예요.”

선우는 고개를 살포시 숙였다.

“빚이, 있거든요.”

“빚이요?”

“네. 지난번에 찾아와서 때리기도 했습니다. 다음에 또 만나면 그때는 장기를 떼 가겠다고 협박도 했고요.”

동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수사 초기에는 선우에게 빚이 있다는 이유로 실종이 아닌 단순 가출로 분류되기도 했으니 동열이 모를 수가 없었다. 다만 잠깐 잊고 있던 참이었다. 한동열은 곰곰이 생각했다. 이대로 내보낸다면 선우의 말대로 빚쟁이들이 찾아와 해코지할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고 달리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동열은 생각 끝에 한숨을 크게 쉬었다.

“일단은 원래 지내던 곳으로 가요. 보호 신청 해 보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보호 신청 승인이 떨어질 리 없다는 걸 알았다. 빚쟁이 하나 지키겠다고 경찰 인력이 투입된다면 전국 각지에 있는 다른 빚쟁이들이 들고일어날 게 분명했다. 한동열은 선우를 내려다봤다. 선우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믿는다는 듯이 두 눈을 반짝이기만 했다. 선우가 스물한 살이라는 걸 다시금 상기한 동열은 쯧 혀를 차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성모가 자판기 커피를 들고 서 있었다. 조금 전보다는 많이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손목은 괜찮으십니까?”

“어? 아, 어, 뭐. 그런 걸로 어떻게 될 거 같으면 대한민국 경찰이 아니지.”

“……죄송합니다.”

동열은 먼저 고개 숙였다. 어차피 계속 함께 일을 해야 하는 파트너인데, 이런 일을 길게 끌어 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알았다. 성모도 같은 생각인지 괜찮다며 한동열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직 앙금이 남은 눈빛이었으나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둘 다 상대가 좋아서 푸는 게 아니라 상황 때문에 별수 없이 그냥 넘긴다는 게 티가 났다.

한동열은 샘플 채취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 다시 돌아갔다. 아직도 문 앞에 서서 커피를 후룩후룩 마시고 있던 탁성모가 옆으로 따라붙었다.

“아랫구멍도 해?”

성모의 물음에 동열은 자칫 인상을 구길 뻔했다. 슬그머니 올라오는 짜증을 겨우 누르고 고개를 저었다.

“하면 뭐 하게요. 뭐가 나오겠습니까?”

“하긴.”

흥미가 떨어진 성모가 돌아가고, 한동열은 선우의 입 안 점막을 비롯해 여기저기 유전자 샘플을 채취했다. 별로 예감이 좋지 않았다. 잡아야 하는 상대는 증거 하나 남기지 않고 성인 남성 세 명을 납치한 놈이었다. 선우를 아무리 털어 보고, 몸에서 샘플을 채취해도 놈에 대한 정보는 조금도 나오지 않을 거란 빌어먹을 예감이 들었다.

선우는 마시다 남은 캔 음료를 들고 경찰서를 나왔다. 진이 다 빠진다는 얼굴로 터덜터덜 걷다가 경찰서 철문을 벗어나자마자 걸음을 빨리했다. 마침 쓰레기통이 있어서 들고 있던 캔을 던져 넣었다. 경찰을 상대하는 건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탁성모 때문에 몇 번 덜컹덜컹 브레이크가 걸리긴 했지만 희한하게 그럴 때마다 동열이 나서서 다시 액셀을 밟아 줬다.

선우는 태화와 이 일을 기획했던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준비를 했다. 동열이 던지는 질문 대부분은 태화가 짜 놓은 예상 질문에 있던 것이었고, 간혹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 나오더라도 남이 듣기에 그럴듯한 대답을 하는 게 퍽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사실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날아들면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선우는 절대 티 내지 않았다. 마음의 동요가 일어날 땐 늘 태화를 떠올렸다. 문득, 헤어지기 전에 태화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무섭고, 힘들면 그만하겠다고 말해. 서태화를 데려와 달라고 해.’

병원에서 삼켰던 쪽지의 내용도 다시금 기억났다.

[무슨 일 있으면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나한테 올 것]

선우는 배를 문질렀다. 의학적 지식은 별로 없으나 쪽지를 삼키고 시간이 꽤 흘렀으니 지금쯤 위를 지나 장에 가 있을 것 같았다. 쪽지가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부분을 살살 문지르며 배슬배슬 웃었다. 어제부터 먹은 게 탄산음료 몇 모금과 물이 전부인데도 이상하게 배가 고프지 않았다.

“지금 뭐 하고 있을까……?”

태화를 떠올렸다. 경찰서에서 나오기 전에 봤던 시계가 저녁 6시를 가리키던 게 기억났다. 이 시간이면 태화가 밥 먹으러 집으로 올라올 시간이었다. 태화는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편이라 식사 시간에 1분도 늦지 않고, 1분도 빠르게 오지 않았다. 선우는 그걸 알면서도 항상 5시 30분부터 식탁 앞에서 태화를 기다렸다. 오늘은 내가 보고 싶어서 조금 빨리 올라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가 매번 6시에 딱 맞춰 올라오는 태화 때문에 실망하기도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제가 차린 밥상을 태화가 맛있게 먹어 주는 것만으로 선우는 보상 받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계란프라이를 제외하면 모두 시장표 반찬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태화가 가장 잘 먹는 건 계란프라이였다.

“밥은 잘 챙겨 먹었을까?”

선우는 본인이 지금 당장 굶고 있으면서 태화가 끼니를 잘 챙기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그는 지금 제 걱정을 하고 있을 테니, 똑같이 해 주는 것이었다. 선우는 태화가 제 걱정을 할 거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그래, 믿음.

선우는 태화를 믿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태화에 대한 믿음만큼은 굳건했다. 혹시 심문 도중 말실수를 하더라도 그가 전부 해결해 주리라는 믿음이 컸기에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태화 역시 저를 믿어 줬으면 했다. 태화는 선우가 이 연극을 못해도 상관없다는 듯 굴었다. 네 도움이 없어도 혼자 해결할 수 있으니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선우는 그렇기에 더 잘하고 싶었다.

자신이 없어도 잘 살아갈 태화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잘했으니까 칭찬해 주겠지?”

어떤 식으로 벌주는지는 익히 경험해 봤으니 상은 어떻게 줄지 상상했다. 발걸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선우는 할 수만 있다면 동열과 나눴던 대화를 녹음해서 태화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내가 이만큼이나 잘했다고, 아저씨가 시킨 대로 전부 해냈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거짓과 진실을 교묘하게 섞어 말하는 건 선우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꽃다방을 찾은 손님들이 배우자나 연인에게 전화해서 하는 말을 듣고 체득한 기술이었다. 아마 태화가 봤으면 머리를 쓰다듬어 줬으리라. 선우는 대신 스스로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러다 돌연 싱긋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점점 내려왔다. 걸음도 점점 느려졌다.

일은 계획했던 대로 잘 끝났지만, 문제가 있었다. 태화에게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경찰 조사가 끝나자마자 태화에게 가면 당연히 그를 의심할 터였다. 이건 태화도 예상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끝나자마자 태화 정육으로 오라고 했지만, 선우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태화에게 위험이 될 만한 일은 무엇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뒤였다. 그렇다면 이제 갈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꽃다방.

“가기 싫어.”

꽃다방을 떠올리자마자 앓는 소리가 나왔다. 싸구려 향수 냄새가 벌써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달리 갈 곳도 없어서 선우는 힘없이 걸음을 뗐다. 그곳에 가면 또 그 짓거리를 해야 할 것이고, 지영환 사무실 놈들도 찾아올 것이고, 이제 곧 겨울인데 쪽방에서 덜덜 떨며 지내야 할 것이고……. 구구절절 꽃다방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만 떠오르는데 갑자기 몸이 뒤로 확 끌렸다.

“악!”

선우는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를 빽 질렀다.

“접니다. 한동열이요.”

익숙한 음성에 고개를 든 선우 앞에는 동열이 서 있었다. 경찰서부터 뛰어오기라도 했는지 숨이 약간 거칠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길래 사람이 불러도 몰라요?”

“아…….”

선우는 시선을 살짝 내리깔았다. 태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안’ 했다. 한동열 같은 사람에게 태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로 갑니까?”

“네?”

“갈 데 있냐고요.”

“아, 꽃다방이요.”

“꽃다방…….”

동열은 선우의 말을 되뇌며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선우의 손목을 잡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선우는 곧바로 팔을 비틀어 빼냈다. 왜 남의 몸을 함부로 만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것도 경찰이라는 사람이.

선우가 팔을 빼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기까지 하자 한동열은 아, 하고 당황한 소리를 냈다.

“미안합니다. 저는 그냥…….”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선우는 동열의 말을 끊고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꽃다방은 안 될 거 같아서요. 지영환 씨 부하라는 놈들이 진짜 찾아올 거 같기도 하고.”

말을 들은 뒤에도 선우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이 쳐다보자 한동열은 짧게 한숨을 쉬다가 따라오라고 했다. 선우는 먼저 걸어가는 한동열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언젠가 태화가 이상한 사람이 따라오라고 하면 ‘안 돼요, 싫어요!’ 크게 외치라고, 놀리는 식으로 말했던 게 기억난 까닭이었다.

“안 돼요, 싫어요.”

선우는 한동열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조금 웃었다. 제게 그런 말을 가르친 태화가 가장 이상한 사람이었다.

“안 오고 뭐 합니까?”

동열이 뒤를 돌아보고 다시 한번 말하자 선우는 그제야 주춤주춤 걸음을 뗐다. 선우는 얼결에 동열의 차에 타게 됐다. 조수석에 타는 것도, 뒷좌석에 타는 것도 모두 불편했으나 동열이 조수석에 앉으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올라탔다.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지영환 아랫놈들한테 잡히면 장기 떼인다면서요. 일단 우림동 말고 지금 가는 곳에서 잠깐 머물러요.”

“제가 왜요?”

곧장 튀어나온 말에 한동열은 선우를 바라봤다. 어떤 악의도 섞이지 않은 말간 눈이, 이번에도 맹랑하게 느껴졌다.

“위험하니까요.”

한동열은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사실 동열 본인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왜 최선우를 이렇게까지 돕고 있는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별로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는지 선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다시 묻진 않았다.

도로를 달려 도착한 곳은 우림동 바로 옆에 있는 동네였다. 우림동을 포함해서 이 일대는 워낙 개발이 덜 된 곳이라 아파트보다도 다세대 주택이 더 많았다. 동열은 차로 골목골목을 들어가더니 어느 곳에서 멈췄다. 차를 주차하면 오가는 차량이 사이드 미러를 접고 지나가야 할 정도로 좁은 골목이었다.

“내려요.”

선우는 동열의 말을 듣고 얼른 내렸다. 주차한 차 맞은편에 2층짜리 다세대 주택이 하나 있었다. 벽돌색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한동열의 뒤를 따랐다. 반지하에 1세대, 1층에 1세대, 2층에 2세대. 이렇게 총 네 세대가 있는 주택이었는데 한동열은 그중 1층에 있는 문을 가리키며 선우에게 당분간 여기서 머물라고 했다. 부동산 일을 하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얻어 낸 집이었다.

“아니에요. 저 그냥 꽃다방 가…….”

“그러다 진짜 지영환 쪽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면요? 보호 신청 해 보겠다고는 했는데 아마 안 될 겁니다.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경찰은 최선우 씨를 지켜 줄 수 없어요.”

경찰은 지켜 줄 수 없다는 말에 선우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자 때문에 불어난 빚으로 지영환에게 잡혀갔을 때도, 경찰에 호소해 봤지만 들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명은 동정했고, 몇 명은 멍청이라고 욕했으며, 대부분은 무관심했다. 아무도, 그 누구도 선우에게 어른 노릇을 하지 않았다. 이래서 태화가 필요했다. 저를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은 태화가 유일했다.

“누구 있을지도 모르니까 먼저 들어가 보고 올게요.”

선우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동열은 제 할 말만 했다. 둘러보겠다며 집에 들어가더니 꽤 오랜 시간 나오지 않았다. 한 5분쯤 지났을까. 그제야 동열이 집에서 나왔다.

“들어와요.”

선우는 동열에게 고개를 꾸뻑 숙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보던 것만큼 낡은 집이었다.

“공실이었던 곳이라 뭐가 없습니다.”

한동열의 말대로 집 안은 휑했다. 주방에는 그 흔한 전자레인지 하나 없이 냉장고만 덜렁 있었다. 심지어 가스레인지도 없었다. 웃긴 건 식탁은 또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1층을 통째로 쓰는 거라 내부가 넓긴 했다. 거실과 방, 주방과 화장실이 각각 분리되어 있었다. 그래 봤자 태화의 집에 비하면 코딱지만 했지만. 선우는 대충 집을 둘러보고 한동열을 봤다. 한동열이 기다렸다는 듯 돈을 내밀었다. 오만 원권 지폐 네 장이었다.

“일단 이걸로 필요한 거 사고, 모자란다 싶으면 말…….”

“어, 이건 진짜 아니에요. 돈까지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 오늘 굶을 거예요?”

동열이 묻는 말에 선우는 말문이 막혔다. 공복이 길었던지라 사실 배가 고프던 참이었다. 태화에게서 느낀 애정으로 포만감을 느낀다고는 했지만, 생리적인 허기는 별수 없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이 타이밍에 꼬르륵 소리까지 나 버려서 선우는 뺨을 벌겋게 물들였다.

“그럼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수백 수천 번을 고민하다가 끝내 한동열이 건넨 돈을 받아 들었다. 태화를 다시 만나기 위함이었다. 태화를 만나려면 살아 있어야 했고, 살아 있으려면 뭐라도 먹어야 했다.

“밥 잘 챙겨 먹어요.”

동열의 말에 선우는 알게 모르게 눈살을 찡긋거렸다. 친절을 가장한 간섭이 거슬렸다. 사실 이 돈도 받고 싶지 않았으나 너무 배가 고파서 별수 없이 받는 것이었다. 선우는 허기가 병적일 정도로 싫었다. 이것도 다 지영환 때문이었다.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으면 굶길 때도 많아서 5일을 꼬빡 굶어 본 적도 있었다.

꽃다방에서도 잘 먹고 산 건 아니었다. 매일 마담과 아가씨들이 먹다 남긴 찌개에 누런 밥을 먹고 살았다. 밥다운 밥을 다시 먹게 된 건 태화의 집에 갔던 첫날이었다. 근 1년 6개월 만에 먹는 하얀 쌀밥은 눈물 날 정도로 맛있었다. 정말 눈물을 찍 흘리기도 해서 태화가 이상하게 쳐다보기도 했다. 태화와 살며 이것저것 양껏 잘 먹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이젠 굶는 게 힘들어졌다. 또 똑같은 청승을 부리는 게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일단 오늘은 갈게요. 무슨 일 있으면……. 아, 휴대폰 없다고 했지.”

한동열은 혼자 말하고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갑니다.”

그 말을 끝으로 동열은 집을 나갔다. 선우는 구태여 동열을 배웅하지는 않았다. 닫힌 문을 걸어 잠그고 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동열이 준 20만 원을 내려다봤다. 동열의 친절은 불필요할 만큼 과했다. 눈치 없는 선우가 느낄 정도면 말 다 한 것이었다. 선우는 한동열 같은 놈을 아주 잘 알았다. 꽃다방 손님 중에도 저런 부류는 더러 있었다.

처음에는 순수한 호의인 척 온갖 친절을 베풀면서, 정작 나중에는 얼굴색을 바꾸고 한 번만 대 달라고 하는 놈들. 아가씨들 한번 먹어 보겠다고 없던 순정도 끌어다 쓰던 놈들과 동열은 참 많이 닮아 있었다. 게다가 동열은 자신의 그런 더러운 욕망을 모르는 듯했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거나. 어찌 됐든 역겨운 족속이었다.

선우는 곧바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돈을 대충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세수부터 했다. 찬물로 몇 번 끼얹고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에 든 제 모습과 눈이 마주쳤다. 닦지 않은 물기가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역겨워…….”

그 말을 하는 순간 정말 속이 울렁였다. 결국 우욱 소리를 내며 멀건 물을 왈칵 쏟아 냈다. 먹은 게 없으니 나오는 것도 없었다. 물만 죽죽 게워 내던 선우는 물도 더 안 나올 즈음에야 입을 헹구고 다시 거울을 봤다.

거울 속에는 단 하루 만에 초라해진 사람이 서 있었다.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머리는 산발에다가, 방금 막 토악질한 탓에 눈가는 시뻘겋게 물든. 아무리 역겨운 돈이라도 거절하지 못하고 주머니 속으로 쑤셔 넣은. 딱 3개월 전, 꽃다방에서 살던 최선우가 서 있었다. 태화와 떨어진 지 이제 겨우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선우는 일찌감치 망가지고 있었다.

*** ㄹㅂㅌㄹ 공금임  ***

한동열은 탁성모와 함께 인천으로 향했다. 컨테이너를 오갔던 걸로 추정되는 승합차의 행적을 그대로 되짚는 중이었다. 컨테이너 근처에는 CCTV가 없었다. 심지어 그 근처에 있는 편의점 문 앞에 달린 것도 공갈이었다. 편의점 안에 있는 것만 진짜라고 해서 받은 영상을 날밤까지 새 가며 뚫어져라 쳐다봤으나 수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매일 새벽에만 그 방향으로 들어서던 승합차가 확인되어 추적하는 중이었다. 승합차는 성동구 쪽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였지만 더 자세한 출발 장소는 특정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세 사람을 납치한 놈에 대한 그럴싸한 단서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남은 건 맨땅에 헤딩뿐이라, 동열과 성모는 탐문 수사를 위해 인천으로 갔다. 승합차가 지나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던 중에 한동열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같은 팀 후배였다.

“어.”

- CCTV에 찍힌 그거, 대포 차량이랍니다.

“하……. 알았어. 일단 끊어.”

한동열은 전화를 끊자마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미 예상했던 말이었으나 그래도 직접 대포차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뭐래?”

옆에서 감자칩을 요란스레 먹던 탁성모가 물었다.

“대포차요.”

“쯧, 그럴 줄 알았다.”

“예.”

동열은 생각 같아서는 탁성모에게서 과자를 뺏고 싶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게 말이야, 뭐야.

속으로 불만을 누르고 액셀을 밟았다.

빠르게 달려 도착한 곳은 컨테이너 앞이었다. 바닷가라 제법 매서운 바람에 성모가 내리기 싫어서 꾸물거리는 사이 이미 차에서 내린 한동열은 컨테이너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겉만 봐도 사람이 살 수 없는 공간이라는 게 티가 났다. 이런 곳에 최선우는 한 달이나 갇혀 있었다. 동열은 인상을 구깃하게 접고 주변을 둘러봤다. 뭐가 없어도 참 없는 곳이었다. 일단 되는대로 주변에 있는 편의점과 식당에 들어가 이것저것 물었으나 역시 도움 되는 말은 전혀 없었다.

“사람이 3개월을 갇혀 있었는데 어떻게 아무도 모르냐.”

매운탕집을 나서며 성모가 불평했다.

“이거 최선우가 이빨 까는 거라니까. 내 촉이 그래.”

“새벽에만 움직였겠죠. 낮에 드나들면 보는 눈 많은 거 아니까 몸 사렸을 거고요. 같이 CCTV도 보셨잖아요.”

“그럼 목격자를 어떻게 찾아? 주변 가게들 싹 다 물어봐도 못 봤다는데. 아, 몰라. 몰라, 몰라!”

탁성모는 대뜸 짜증을 내고는 좀 쉬겠다며 차에 홀라당 올라탔다. 한동열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옆에서 사사건건 트집 잡고 방해하는 인물이 사라지자 홀가분했다. 좀 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목격자.”

동열은 성모의 말을 곱씹었다. 역시 그게 문제였다. 워낙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보니 유동 인구라고 할 것도 없었다. 실례로, 동열이 여기 도착해서 본 사람이 열 명도 채 안 되었다. 낮에도 이런데 밤에는 오죽할까 싶었다. 물적 증거가 하나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필요한 건 목격자의 진술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쉬며 바다를 봤다. 밀물 때라 그런지 바닷물이 울렁출렁 차 있었다. 그래 봤자 서해 바다였다.

바닷물은 바닷물이 아닌 흙탕물처럼 보였다. 이런 곳에서도 손맛 좀 보겠다고 나선 낚시꾼들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많은 숫자도 아니었다. 겨우 세 명이 전부였다. 여기서 낚시하느니 차라리 돈 내고 낚시터를 가겠다며 고개를 젓던 한동열은 돌연 눈을 크게 떴다. 낚시꾼도 목격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다. 다들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있는 모습에 원래 이곳에 있던 조형물처럼 보인 탓이었다. 한동열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낚시꾼에게 냉큼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말씀 좀 묻겠습니다.”

다짜고짜 말을 걸자 낚시꾼은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동열은 서둘러 경찰증부터 제시했다. 그제야 남자의 눈빛이 좀 누그러졌다. 사건과 관련해 이것저것 물어봤으나 역시 남자도 아는 게 그다지 없었다. 자주 오는 곳도 아니라고 했다. 또 허탕인가 싶었다.

“여기 새벽에도 낚시 많이 합니까?”

“새벽 낚시는 굳이 이런 데에서 안 하죠. 으슥하기도 하고, 사실 여기 낚시 포인트가 아니거든요. 그냥 낮에는 경치가 좋으니까 하는 거지.”

“아, 예.”

도대체 무슨 경치가 좋다는 건지, 한동열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굳이 티 내지는 않았다.

“근데 저기 저분은 한 달……. 쫌 넘었나? 무튼 그쯤부터 보이더니 올 때마다 계세요. 몇 시에 와도 저분은 계셔.”

남자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남자의 손끝이 향한 곳을 보자 또 다른 사람이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동열은 남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매일 나와 있다던 낚시꾼에게로 향했다. 남자는 세월을 낚는다는 말이 딱 들어맞을 만큼 한가로워 보였다. 찌를 던져 놓긴 했는데 별로 잡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냥 세월아 네월아 의자에 앉아 책만 읽고 있었다. 동열은 남자에게로 점점 다가가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인지 낯이 익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자 저쪽에서 한동열을 쳐다봤다. 그제야 동열은 남자를 정확히 알아봤다. 지난번 도로가에 쓰러진 선우를 발견하고 신고까지 한 사람이었다. 이후 몇 번 전화 통화로 선우를 발견했을 당시 모습에 관해 물어보긴 했으나 이렇게 다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남자의 명함을 받았던 기억은 있는데 다급히 주머니를 뒤져 봐도 나오지 않았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고 박사’라고 부르라던 말은 기억났다.

“잘 지내셨어요?”

“누구? 어? 그때 그 경찰……?”

“예, 맞습니다.”

“뭐, 또 물어보실 거 있으세요? 그럼 연락을 하시지. 어, 근데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아, 여기 계시는 거 모르고 왔는데 이렇게 또 만나네요. 그럼 몇 가지만 간단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고 박사는 흔쾌히 승낙했다. 여기에 낚시하러 얼마나 자주 왔는지, 언제 처음 왔는지, 왜 여기로 오는지……. 동열은 몇몇 질문을 던졌고, 고 박사는 착실히 대답했다.

“그날도 낚시하러 오신 건가요?”

“그날이라면…….”

“그, 길에서 쓰러진 분 발견하고 신고하셨을 때요.”

“아, 그날. 사실 제가 여기 올 일이 낚시밖에 없거든요.”

한동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여기는 낚시 말고는 할 게 없었다. 유명한 관광 명소도 아니었고, 맛집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낚시하기 좋은 곳 같지도 않았다. 누군가를 납치 감금 할 일이 아니면 아무도 오지 않을 것만 같은 곳이었다.

“새벽에도 낚시해 본 적 있으십니까?”

“가끔? 잠 안 올 거 같은 날 있잖아요. 그런 날엔 나왔다가 아예 안 돌아가죠.”

“새벽에도 하긴 하신다는 거죠?”

한동열은 수첩에 ‘새벽 낚시’라고 적으며 되물었다. 고 박사가 그렇다고 하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 브이 표시를 쳤다.

“그럼, 저기 저 컨테이너에 불 들어온 거 본 적 있으십니까?”

동열은 저 멀리 덩그러니 서 있는 컨테이너를 가리켰다. 고 박사는 나이에 맞지 않게 노안인지, 쓰고 있던 안경을 살짝 내리며 컨테이너를 쳐다봤다.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맨날 들어와 있던데? 아, 맞아. 근데 희한한 건 자정까지도 안 켜다가 새벽에 불이 들어오더라고요.”

“오가는 사람도 봤고요?”

“어……. 어, 예! 봤어요.”

순간 한동열의 눈이 커졌다. 눈동자 속으로 빛이 들었다. 드디어 목격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한동열은 수첩을 좀 더 세게 쥐고 고 박사에게 바투 붙었다.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남자요. 멀리서만 본 거라서 나이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분명 남자였습니다. 지금은 망해서 쉬고 있지만……. 제가 의사라 골격만 보면 딱 알거든요.”

“의사세요?”

놀라 되묻는 말에 고 박사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명함에서 의사라고 적혀 있던 걸 본 것도 같았다.

“혹시 키가 얼마 정도 되는지 아세요?”

“그거까지는……. 덩치는 좋은데 몸이 불편한 사람인지 엄청 구부리고 다녔거든요. 그래서 키는 잘 모르겠네요.”

덩치는 좋은데 몸은 구부리고 다녔다?

동열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꼽추, 뭐 그런 건가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고. 뭐, 딱 그 직전 정도? 아마 그 정도로 자세가 안 좋은 거면 병원에도 다녔을 거예요. 아,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의사라.”

고 박사가 가볍게 웃었다.

“아! 다리를 절었어요. 절뚝절뚝 걷는 게 눈에 띌 정도였으니까.”

고 박사는 직접 얼마나 절뚝였는지까지 몸소 보여 줬다. 한동열은 곧장 펼쳐 둔 수첩의 앞 장을 봤다.

[절름발이???]

이틀 전 남겼던 메모를 다시 눈에 담았다. 그 위에 동그라미를 쳤다. 선우의 진술과 일치하는 부분이었다. 고 박사는 납치범을 본 게 확실했다. 하지만 더 끌어낼 정보가 없었다. 여기서 납치 감금이 일어났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고 박사는 놈을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고 했다.

한동열은 고 박사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차로 돌아갔다. 탁성모는 그새 자고 있었다. 동열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며 수첩을 다시 찬찬히 훑었다. 여러 메모 중에 단연 눈에 들어오는 건 ‘절름발이’였다.

“절름발이.”

굳이 입으로 발음하며 생각을 이어 갔다.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병원 진료를 봐야 할 정도로 자세가 안 좋고, 한쪽 다리까지 저는 놈이 사람을 납치한다?

최선우 하나만 납치했다면 이해했겠지만, 놈은 지영환과 또 다른 남자 한 명까지 납치했다. 알아본 바로 지영환은 청소년 시절 유도를 전문적으로 배웠던 전적도 있었다. 키가 작아서 그렇지, 사진으로만 봐도 다부진 체격이라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지영환을 절름발이가 납치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범죄자들에게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숱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체형을 보완하기 위해 평소 운동을 죽도록 하던 놈이라면 지영환을 제압하는 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이렇게 해도 말이 되고, 저렇게 해도 말이 되는 와중에 전부 말이 안 되기도 해서 답답했다. 한동열은 한숨을 푹 쉬다가 옆에 적힌 이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서태화]

그 옆에 똑같이 물음표를 달다가 곧 X표를 쳤다. 정보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서태화는 이번 사건과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것만 더욱 확고해졌다. 그렇다고 한동열이 서태화를 완전히 놓은 건 아니었다. 이 사건과 연관이 없다 뿐이지 다른 미제 사건들과의 연관성이 있을 수도 있었다. 아직 검토해 보지 않았으니 가능성은 충분했다.

* * *

가을비가 내렸다. 빗줄기를 타고 가을 냄새가 흘러내렸다. 비 오는 날이면 확실히 손님이 줄었다. 태화는 카운터 앞에 앉아 한가로이 책을 읽는 중이었다. 일전에 선우에게 추천했던 책이었다. 이미 이전에 두 번이나 완독했지만 최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재차 꺼내 든 지 벌써 엿새째였다.

보통 하루에 책 한 권은 쉽게 읽던 태화였으나 어쩐지 이번 독서는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생각 없이 줄줄 읽어 나가다 보면 앞선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고, 뒷장을 넘기다가 다시 앞 장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그저 눈으로 활자를 보고만 있었다.

“최선우.”

나직한 목소리로 불러 봤다. 생각 없이 툭 뱉어진 이름에 태화는 기다렸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이게 전부 최선우, 그 완두콩처럼 생긴 놈 때문이었다. 잘만 읽어 나가던 책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도, 정신머리를 놓고 자꾸 놈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전부 최선우가 문제였다.

어제는 손님에게 줄 고기를 썰다가 고기 대신 손을 썰기도 했다. 제법 피가 많이 나서 ‘또 최선우가 호들갑 떨겠네’ 하고 생각하던 태화는 제집이 텅 비어 있다는 걸 깨닫고 욕을 읊조렸더랬다. 생긴 건 비리비리해서 다 말라비틀어진 초록색 콩처럼 생긴 놈이 생각나기는 오지게 생각났다.

“바로 오랬더니. 하여간에 말은 지지리도 안 듣지.”

그날 그렇게 헤어지고 선우가 집을 찾아오지 않은 지 딱 6일이 됐다. 쯧, 혀를 찬 태화는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저녁 식사 시간이 돼 ‘자리 비움’ 팻말을 걸고 집으로 올라갔다. 문밖도 조용하더니, 집 안은 적막강산이 따로 없었다. 서투른 솜씨로 밥을 차려 놓고 기다리던 최선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6시 정각에야 제가 올라온다는 걸 알면서도 최선우는 매번 그 전부터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기다렸다. 굳이 보지 않더라도, 현관문 소리가 들리자마자 쪼르르 달려 나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사실 거실에 설치해 둔 펫캠으로 가끔 보기도 했고. 최선우는 둔하기가 남들 저리 가라여서 TV장 위에 펫캠을 떡하니 설치해 놔도 몰랐다. 가만 보면 최선우의 모든 감각은 제게만 열려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때도 있었다.

자신이 가게로 내려가면 최선우는 시간 대부분을 소파에 누워 빈둥거리며 보냈다. 추천해 준 책은 선우에게 책이 아닌 수면제로 쓰이는 듯했다. 온종일 빈둥빈둥 누워 있다가 식사 시간 한 시간 전에 부리나케 일어나 밥을 차렸고, 30분 전부터 식탁 의자 끄트머리에 위험하게 앉아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놀았다.

손님을 상대하며 가끔 곁눈질로 펫캠 카메라를 들여다보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다 선우의 입에서 ‘아저씨 보고 싶어…….’ 하는 탄식이라도 나오면 그날은 고기를 먹는 날이었다. 물론 거의 매일 같은 말을 해서 매일 고기를 먹었다. 최선우 그건 살을 좀 찌울 필요가 있었다.

“드디어 돌았나.”

생각이 이리저리 튀었다. 워낙 또라이 같은 놈과 함께 지내다 보니 저마저도 또라이가 된 모양이었다. 태화는 냉장고에 있던 반찬 통을 그대로 꺼내 대충 식사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그에게 식사 시간은 매우 중요했다. 워낙 어릴 때부터 식탐이 많고, 맛있는 음식 먹는 걸 좋아해서 식사 시간에는 항상 그럴듯하게 차려 먹었었다.

최선우가 오면서부터는 그놈이 식사 준비를 했는데, 서툰 손길로도 나름 잘 차렸다. 그릇 하나하나 세심하게 골라 가며 반찬을 예쁘게 담고, 수저도 반듯하게 놨다. 옷을 사라고 준 카드로는 난데없이 테이블 매트와 소주잔을 샀다. 파란빛과 초록빛이 예쁘게 섞인 청록색 매트와 도자기로 만들어진 아기자기한 잔이었다. 쪼끄만 게 하여튼 저 닮은 건 귀신같이 알고 샀다.

물론 태화는 선우에게 술을 허락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미친놈이 술을 마셨다간 감당 못 할 만큼 더 미쳐 버릴까 봐 금주령을 내렸다. 술잔을 생각하다 보니 술 생각이 떠오른 태화는 숟가락을 들다 말고 냉장고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캔 맥주 딱 한 캔만 할까?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혼자 갖는 식사 시간은 고요했다. 수저가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원래라면 가게에서 뭐 했냐며 쫑알쫑알 묻는 말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조용하기만 했다. 정육점에서 고기 팔지 뭘 했겠냐고 퉁명스레 대답해도 선우는 다음 날 또 같은 걸 물었다.

“씹.”

태화는 결국 밥을 먹다 말고 TV를 켜 놓고 돌아왔다. 딱히 보는 채널이 없어서 그냥 틀어만 놨더니 골프 웨어를 소개하는 홈 쇼핑 방송이 나왔다. 그제야 적막하기만 했던 집 안으로 소음이 들어찼다. 오늘따라 유난히 밥알이 껄끄러웠다. 매일 먹던 즉석 밥이라 다를 것도 없을 텐데 그렇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제 입 안이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이 새끼는 잘 처먹고 있겠나.”

다 큰 놈 끼니 걱정을 하는 것만큼 웃긴 일도 없었으나 태화는 선우가 밥은 먹었는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워낙에 손이 많이 가는 놈이라 이래저래 걱정됐다. 어디 가서 처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일전에 선우에게서 탁성모라는 놈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강력 팀 팀장씩이나 된다는 새끼가 선우의 단골이었다는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본능적으로 몇 번이나 빨아 줬냐는 질문이 나갔고, 그걸 또 고민하며 하나하나 세고 있는 최선우 때문에 기분이 잡쳤던 기억이 났다.

문제는 그 탁성모라는 새끼가 손버릇도 꽤 나쁘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못 한다고 뺨 맞은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땐 당장이라도 놈의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최선우를 때릴 수 있는 건 저뿐이어야만 했다. 저도 요즘엔 어지간한 일로는 안 때리는데, 혹시 이번에 경찰 조사를 받으러 갔다가 탁성모에게 맞았다는 소리라도 들으면 못 참을 것 같았다.

“존나게 맛없네.”

태화는 결국 밥 한 공기를 다 비우지 못하고 숟가락을 내려놨다. 맨밥에 간장만 있어도 잘 먹었었는데 요즘 따라 왜 입맛이 없는지 몰랐다. 대충 설거지를 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양치질하려니 마침 치약이 똑 떨어진 상태였다.

“최선우, 치약 가져와.”

태화는 아무 생각 없이 선우를 찾았다.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최선우?”

이게 또 뭔 시위를 하나 싶어 다시 한번 불러 보던 태화는 집에 선우가 없다는 걸 깨닫고 낮게 탄식했다.

“병신 다 됐네.”

쩝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별수 없이 스스로 치약을 가져와야 했다. 가게로 내려갔더니 마침 앞에서 서성거리던 손님이 있었다. 구이용 소고기 안창살을 팔고 다시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쳤다. 읽던 곳까지 넘어가던 중에 한쪽 귀퉁이가 접힌 페이지가 나왔다. 최선우의 흔적이었다. 꼭 다 읽어 보겠다고 말하며 가져가더니 접힌 부분은 고작 26페이지였다. 당최 그 많은 시간을 보내며 뭘 읽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가게 마감을 마치고 돌아온 집은 역시나 휑했다. 새삼 집이 참 넓어 보였다. 씻고 나온 태화는 제 방을 스윽 훑어보다가 걸음을 돌려 선우의 방으로 갔다. 선우가 누워 자던 침대 위에 몸을 뉘고 남는 베개를 끌어안았다. 최선우가 쓰던 베개였다. 숨을 크게 들이켜자 별스럽지 않은 향이 느껴졌다. 방금 막 씻고 나온 제 몸에서 나는 것과 똑같았다.

그리고 그 뒤로 다른 향이 은은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사타구니 사이로 힘이 바짝 들어갔다. 이 냄새는 뭐라 딱 집어 말하기 어려웠다. 어떤 때는 애기 분내 같기도 했고, 어떤 때는 막 삶은 천 기저귀의 냄새 같기도 했다. 쨍쨍한 햇볕에 바싹 말린 수건 냄새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오늘은 아기 침 냄새였다. 최선우는 희한하게 그런 냄새들을 잘도 달고 살았다.

아랫도리가 슬슬 대가리를 쳐드는 게 느껴졌지만, 태화는 그저 베개에 낯을 묻고 심호흡했다. 같이 산 시간이 고작 3개월 남짓인데 우습게도 최선우를 만지고 싶었다.

“이래서 뭘 키우면 안 된다고.”

키우던 개가 사라져도 사람 마음이 허한 법이었다. 하물며 사람을 키웠으니 최선우가 어른거리는 건 당연했다.

“좆같네.”

태화는 선우의 베개를 콱 움켜쥐었다. 이런 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런 감정은 썩 괜찮은 인성을 가진 인간들이나 느껴야 할 것들이었다. 저처럼 개차반 같은 새끼들은 별로, 오히려 이런 감정들이 독만 된다는 걸 알았다.

좆같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좆같은 예감.

최선우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 때마다 그 예감은 점점 커졌다.

“더듬이를 자르든가 해야지. 쓸데없이 촉만 좋아서 지랄이지.”

푸념과도 같은 말을 읊조리며 슬그머니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좆같은 상황에서도 잘만 서는 좆을 쥐었다. 오늘의 딸감은 최선우에 대한 걱정이었다. 남을 걱정하는 것으로도 자위할 수 있는 변태가 있나 했는데, 그게 바로 저였다. 태화는 우선 선우가 밥을 챙겨 먹었을지부터 걱정했다.

돌아오면 단백질 좀 먹여야지.

소고기도 좋고, 제 허연 좆물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선우는 오늘도 라면 한 개에 즉석 밥을 넣고 끓인 라면죽으로 세 끼를 해결했다. 허기가 죽도록 싫다면서 배불리 먹지도 않았다. 태화와 있으면 배가 고프다고 어리광이라도 부렸을 텐데, 그가 없으니 그저 주린 배를 끌어안고 잠만 잤다.

무서운 건, 잠을 자도, 잠에서 깨도 온통 태화 생각밖에 나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느새 삶 전체가 서태화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다 서태화밖에 모르는 바보가 될까 봐 두려웠지만, 그 두려움 속에서 빠져나올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바보인데 조금 더 심한 바보가 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벌써 일주일째…….”

언제쯤 태화에게 가도 좋을지 생각해 봤다. 최소한 한 달 정도가 지나야지만 안전할 것 같았는데 문제는 시간이 너무 안 간다는 것이었다. 아직도 태화를 못 본 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앞으로 3주는 또 어떻게 버틸지 벌써 한숨만 나왔다.

한여름, 아스팔트 위에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처럼 늘어지게 누워 있던 선우는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정직하게 울려 대는 배꼽시계에 맞춰 일어났다. 주방으로 비척비척 걸어 나오는데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엎어지고 말았다. 하필이면 식탁 바로 옆에서 넘어져서 식탁 다리에 정강이가 콱 찍혔다.

“아…….”

다행히 찢어지지는 않았지만 딱 봐도 멍이 심하게 들 것 같았다.

3주면 멍이 전부 빠지겠지?

선우는 그것부터 생각했다. 태화에게 멍 든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벌겋게 부어오른 정강이를 살살 문지르다가 다시 일어서려는데 문득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선우는 몸을 조금 더 웅크린 채 고개만 들어 식탁 밑을 올려다봤다. 식탁 다리가 있는 한 귀퉁이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달라붙어 있었다.

“이게…….”

생각 없이 손을 뻗던 선우는 불현듯 눈을 크게 떴다. 거의 만질 뻔한 순간 손을 다시 가져왔다. 단지 눈으로만 빤히 쳐다봤다. 엄지손톱보다 조금 더 큰 직육면체의 물건은 까만색이었다. 온통 새카만 가운데에 점처럼 작은 빨간 불빛이 들어왔다 나가길 반복했다. 선우는 본능적으로 저게 뭔지 알아봤다. 꽃다방 마담과 아가씨들이 즐겨 보던 주말 드라마에서 종종 본 적 있었다. 도청기였다.

빨간 불이 깜빡이는 건 지금도 작동되고 있다는 뜻일 게 분명했다. 남들은 놀라 나자빠질 상황이었으나 선우는 그저 말간 눈을 뜨고 고개만 갸우뚱 기울였다. 반쯤 열어 뒀던 입을 천천히 다물었다. 숨소리라도 들어갈까 싶어 숨도 잔잔하게 죽였다. 굼벵이처럼 식탁 아래로 기어 들어가 도청기 앞에 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았다.

깜빡깜빡.

빨간 불빛을 내내 응시했다.

선우는 온종일 식탁 아래에 들어앉아 도청기만 쳐다봤다. 무언가에 몰두해서 그런지 배고픔도 잊었고,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목이 아프지도 않아서 고개를 떨구는 법도 없었다. 가끔 머리만 갸웃갸웃 기울여 가며 깜빡이는 불빛을 봤다. 도청기를 설치할 사람은 한동열밖에 없었다. 성모는 그럴 머리가 안 되었고, 일단 이곳을 소개해 준 사람이 동열이었기 때문에 의심은 동열에게로 향했다.

그러면 대체 언제였을까……?

선우는 찬찬히 생각해 봤다.

라면을 사러 나가는 사이에 몰래 들어왔나? 아니면 자는 사이?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을 벌일 만큼 치밀한 사람인데 그런 무모한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불현듯 이 집에 처음 왔던 날 동열이 먼저 집을 둘러보고 나왔던 게 기억났다. 그래, 100평짜리 집도 아니고, 이만한 집을 둘러보는 데에 왜 그렇게 오래 걸렸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흠…….”

최대한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저걸 설치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봐야 했다. 지금 선우가 떠올릴 수 있는 마땅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한동열이 남의 생활 소음을 듣고 발기하는 변태거나. 아니면, 자신을 의심하고 있거나.

곰곰이 생각해 봤을 때 후자가 좀 더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됐지만 어쨌든 전자를 완전히 배제할 순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저를 의심하는 변태 경찰이라니, 생각만 해도 소름 돋았다. 선우는 잠깐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도 도청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동안 제 입에서 나온 말을 되짚어 봤다.

혹시 태화의 이름을 불렀을까?

잠깐 걱정했으나 곧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이름을 부르면 더 보고 싶어질 것 같아서 감히 부르지도 못했었다. 그렇다고 이번 일에 대한 진상을 나불거리지도 않았고, 정말 선우는 일주일 동안 어지간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가끔 ‘보고 싶다…….’ 하고 읊조린 적은 있지만 주어가 빠진 문장이라 한동열이 들어도 별 상관없을 터였다. 다행히 태화에게 해가 되는 짓은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보고 싶어.”

도청기에 대고 말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말하면 더 크게 들리나?

선우는 잘 몰랐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하등 상관없었다. 자칫 망부석이라도 된 양 도청기를 가만 쳐다보기만 하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벌떡 일어났다.

“아으……!”

식탁 아래라는 걸 까먹고 곧바로 일어난 탓에 정수리를 세게 부딪쳤다. 눈만 떼면 구르고 있다던 태화의 말이 딱 들어맞았다. 선우는 머리를 벅벅 문지르다가 엉금엉금 기어 나와 제대로 일어섰다. 까치집처럼 뜬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곧장 밖으로 나왔다. 기이한 소리를 내는 대문을 열고 나가는 동안 슬쩍 왼쪽을 곁눈질했다.

역시 있었다. 처음 이곳에 오고 이틀 동안에는 없더니, 그 이후부터 대문 맞은편 벽에 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지금까지는 별 신경 쓰지 않았으나 도청기가 있다는 걸 알고 나니 저 차도 새롭게 보였다. 선우는 왜인지 저 안에 한동열이 타고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살 게 있는 척 편의점에 들렀다 오는 길에도 차를 한번 힐끔 쳐다보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오늘만 해도 벌써 새로 알게 된 사실이 두 개나 있었다.

하나, 집에 도청기가 설치되어 있다.

둘, 한동열이 날 감시하고 있다.

밖에 감시 차량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돌아온 선우는 또다시 식탁 밑으로 들어가 도청기를 관찰했다. 어느새 해가 지고 밖이 어두워졌다. 선우는 그때까지도 무언가 생각하는 듯 가만히 있다가 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 순간 돌연 눈을 반짝였다. 이번에는 식탁 아래에서 제대로 기어 나와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긴 시간 동안 같은 자세로 있던 터라 다리에 쥐가 나서 또다시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무릎을 부딪쳤지만 아픈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저 부딪힌 곳을 몇 번 문지르고 다시 발딱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이대로 자려는 건지, 선우는 이불을 펴고 그 안에 들어가 누운 채 눈을 감았다. 입 모양으로만 ‘하나, 둘, 셋’을 셌다. ‘셋’ 하는 순간 두 눈을 번쩍 떴다.

“아악! 아! 으어, 윽……!”

들입다 소리를 질렀다.

* * *

납치범에 대해 이렇다 할 새로운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컨테이너 주변을 탐문해도 못 봤다, 모르겠다, 하는 소리만 들었다. 개새끼가 어찌나 철저한지 그 흔한 담배꽁초 하나가 없었다.

CCTV를 뒤져도 수상한 놈의 머리카락 한 올 찾을 수 없었고, 차가 발견된 성동구와 납치 피해자들이 살던 우림동에서 범죄 이력을 가진 사람들을 조사해 봤으나 허탕이었다. 납치됐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은 있는데, 정작 선우에게서는 유의미한 정보를 얻지도 못했다. 유일하게 알고 있는 건 납치범이 남자이고, 자세가 안 좋으며, 절름발이라는 사실뿐이었다.

모호한 정보를 제외하고는 알아낸 게 없는 상황에서 한동열은 며칠 전부터 선우를 감시했다. 최선우가 의심된다는 성모의 말이 있기도 했지만, 한동열 역시 이 사건의 열쇠는 선우가 쥐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집을 소개해 주던 날 도청기를 설치한 것도 그 이유였다.

2인 1조로 움직여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탁성모도 감시에 가담했다. 물론 탁성모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농땡이를 부렸다. 지금만 해도 목욕탕에 다녀오겠다고 나갔으면서 벌써 네 시간째 깜깜무소식이었다. 때를 벗기는 게 아니라 피부 가죽을 벗기는 모양이었다.

- 보고 싶어.

도청 장치에서 선우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동열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뒤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한동열은 도청 장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도대체 누가 보고 싶다는 거야?”

작게 읊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최선우는 간간이 보고 싶다는 말을 혼잣말처럼 했다. 애인 생각이라도 하는가 싶었지만, 주변 사람 말로 애인 같은 건 없었다고 했다. 문득 달력에 동그라미까지 쳐 가며 좋아하던 손님을 기다리던 선우가 떠올랐다.

“그놈인가?”

생각하고 있는데 크게 쿠당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또 넘어진 모양이었다. 선우는 참 많이도 넘어졌다. 무릎이 남아나는 날이 없었다. 동열은 미간을 좀 더 짙게 팼다. 약이라도 사지, 최선우가 사는 건 라면과 즉석 밥이 전부였다. 돈을 쓰라고 줬더니 하루에 오천 원도 쓰지 않았다.

저렇게 먹으니까 마르지.

쯧, 혀를 차고 있는데 대문이 열리고 선우가 나왔다. 동열은 습관처럼 몸을 확 내려 앉았다. 다행히 들키진 않은 것 같았다. 편의점 방향으로 갔던 최선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털레털레 돌아왔다. 역시 라면과 즉석 밥이었다. 편의점을 가는 것을 제외하고 최선우는 밖에 나오지 않았다. 소리를 들어 보면 집 안에서도 별다른 걸 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저렇게 재미없게 사는 것도 재주라고 생각했다.

목욕을 장장 여섯 시간 동안 하고 돌아온 성모는 오자마자 잘 테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깨우라고 했다. 한동열은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깨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선우가 생활하는 소리보다도 성모의 코골이 소리가 더 컸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큰 코골이 소리 속에서도 한동열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는데, 저녁도 제대로 못 먹었다는 생각에 편의점만 빠르게 다녀왔다. 성모 몫의 주전부리 몇 가지와 본인이 먹을 컵라면을 사 왔다.

- 아악! 아! 으어, 윽……!

갑자기 비명이 쏟아졌다. 한동열은 면을 입에 넣지도 못하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뭐야?”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 으아악!

“뭐, 뭐야? 뭐야!”

- 흐……. 저리 가! 싫어!

탁성모가 놀라 깨서 소리치는 소리와 도청 장치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섞여서 차 안이 시끄러워졌다. 아직 잠이 덜 깬 성모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머저리처럼 구는 동안, 한 번 더 비명이 울려 퍼지자 동열은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곧바로 선우가 있는 집으로 향했다. 현관에 가까워지자 차 안에서 들었던 비명과 같은 소리가 안에서부터 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동열은 서둘러 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았다. 언제든지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나 더 마련해 둔 스페어 키였다.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열쇠 구멍이 잘 찾아지지 않았다. 그동안 비명은 더 커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가늠조차 안 되었다. 분명 대문으로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선우는 저 안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괴한이 침입했다면 어디로 침입했을지 머리를 굴려 봤다. 1층이니 방 쪽 창문으로 침입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동안 다행히 열쇠가 제대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신발도 벗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연 동열은 잠시 주춤했다.

“무슨……!”

저도 모르게 안면이 일그러졌다. 방 안에는 최선우 혼자였다. 최선우는 이불을 쥐어뜯어 가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걸 보니 악몽을 꾸는 모양이었다. 동열은 한달음에 다가가 선우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최선우 씨! 무슨 일이에요? 네?”

“윽, 아윽! 아……!”

“최선우 씨!”

동열은 선우를 계속 불렀다. 그래도 선우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러 댔다. 하는 수 없이 최선우를 와락 껴안았다. 발버둥 치던 선우의 무릎으로 사타구니 사이를 맞았지만 아파할 겨를도 없었다. 윽, 소리만 내고 최선우의 등을 두드렸다.

“흑……. 나 때리지 말아요. 나, 때리지 마……. 잘할게……. 도망 안 갈 테니까, 흑…….”

미친 사람처럼 중얼대는 말이 나왔다. 우는 소리도 들렸다. 한참 어르고 달래자 몇 번 더 발악하던 최선우가 천천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이제 됐나 싶어 내려다봤다. 선우는 정신이 설핏 돌아온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 꿈입니다.”

“꿈……?”

“예, 꿈이요.”

다시금 말해 주자 최선우는 커다란 눈을 끔뻑이더니 주변을 둘러봤다. 현실이라는 걸 인식한 눈동자로 불안이 서서히 걷혔다. 동열은 제 품에 안겨 두리번거리는 최선우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뒤로 물러났다.

“어……? 한 형사님…….”

“예, 저 한동열입니다. 악몽 꾼 거예요, 최선우 씨.”

“아, 어……. 네…….”

선우는 이제야 안심이 되는지 숨을 크게 터 놓았다. 몇 번 심호흡하다가 고개를 들어 한동열을 봤다.

“근데 형사님은 제가 악몽 꾸는 거 어떻게 알고 들어오셨어요?”

“예?”

“문도 분명 잠가 뒀었는데.”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동열은 자신을 쳐다보는 또랑또랑한 눈 앞에서 잠깐 당황했다. 무슨 핑계를 대야 하나, 머리를 굴렸다.

“어……. 혹시나 싶어서 주변 순찰 중이었는데 비명이 들려서 들어와 봤어요. 문은, 안 잠겨 있던데요?”

“아, 네…….”

“여기 밤에는 인적이 드물어서 문단속 잘해야 합니다.”

동열은 필요치 않은 말까지 덧붙였다. 다행히 선우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좀 괜찮습니까?”

“네. 형사님 덕분에 많이 진정됐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최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걸, 동열은 괜찮다고 말하며 집을 나섰다. 차에 타자 탁성모가 제 컵라면을 먹고 있는 게 보였다. 동열은 짜증스레 얼굴을 찡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대신 도청 장치의 볼륨만 좀 더 높였다.

- 보고 싶어요…….

또 똑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열의 낯이 한층 더 짜증으로 뒤덮였다. 애인이 있다면, 그 애인이라는 놈은 최선우를 두고 도대체 뭐 하고 앉아 있나 싶었다.

선우는 혼자가 되자마자 주방으로 나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소리를 지르느라 목이 얼마나 칼칼한지 몰랐다. 물을 한 모금 더 마시고 목덜미를 살살 쓰다듬었다. 이 정도면 연기에 소질이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눈 딱 감고 소리 좀 질렀더니 한동열이 헐레벌떡 뛰어들어 왔다. 인제 보니 도청기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문제였다. 한동열은 이 집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변…….”

뭐라 말하려던 선우는 화들짝 놀라며 입을 막았다. 하마터면 속마음을 들킬 뻔했다. 대신 도청기가 있는 부분을 바라보며 입 모양으로 ‘변태 새끼’라고 했다. 도청기에다가 여분의 열쇠까지, 어떤 이유에서건 동열도 정상은 아니었다.

게다가 변명이랍시고 한다는 말도 우스웠다. 순찰 중에 비명을 듣고, 문이 열려 있길래 들어왔다니. 골목에서 들릴 만큼 크게 소리치지 않았을뿐더러, 문은 아주 잘 잠가 두고 있었다. 문단속을 잘하라는 말에는 팔뚝을 콱 꼬집고 싶은 걸 참았다. 이로써 선우는 세 가지나 알아낼 수 있었다.

도청기는 한동열이 설치한 게 맞다는 것. 동열이 집 앞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것. 동열에게는 이 집 열쇠가 있다는 것.

아니, 선우는 한 가지 더 알 것 같았다.

동열이 제게 관심 있다는 것.

선우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정말 자기 위해 누웠다. 남는 베개를 끌어안고 두 눈을 감았다. 누가 제게 관심이 있건 없건, 선우의 머릿속은 그저 서태화로 가득했다.

* * *

선우는 편의점을 나왔다. 손에 들린 건 변함없이 라면과 즉석 밥이었다. 소시지 쪽으로 눈이 조금 가긴 했으나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남의 돈을 멋대로 쓰면 언젠가 배로 갚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하물며 그게 변태 경찰의 돈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더불어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태화를 다시 만났을 때 너무 잘 먹고 잘 잔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잘 먹고 잘 자더라도 워낙 박복하게 생긴 얼굴이라 별로 티도 안 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최대한 잘 못 지낸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아저씨가 없으면 나는 이렇게 산다고, 어리광을 부릴 생각만 가득했다.

“서태화…….”

집에서는 부르지 못했던 이름을 나직이 발음했다. 도청기가 있다는 걸 안 뒤로 선우는 혼잣말도 잘 안 하게 됐다. 다만 편의점을 오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못 했던 말을 했다. 어느 때는 탁성모와 한동열을 욕했고, 어느 때는 먹고 싶은 음식들을 줄줄이 나열하기도 했다. 대부분은 태화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도 어미 잃은 새처럼 ‘서태화, 서태화…….’ 중얼거리며 걸었다.

집에 가까워지자 동열이 탄 차가 가장 먼저 보였다. 명색이 경찰이라는 사람이 감시 하나는 더럽게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당신이 타고 있는 걸 안다는 식으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싶었으나 참았다. 불필요한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았다. 그저 한숨만 푹 쉬고 대문으로 가는데 무언가 우두커니 있었다. 가로등도 없는 골목이라 밤눈이 어두운 선우는 정체불명의 물건을 한참 들여다봤다. 누가 소파라도 내놓은 줄 알았는데 그건 소파가 아니었다.

“어?”

익숙한 어깨선이었다.

“아저씨……?”

반짝 켜지는 가로등처럼 선우의 목소리로 빛이 들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정체불명의 남자는 쭈그려 앉아 있던 몸을 서서히 일으켜 세웠다. 서태화였다.

선우는 제 앞에 있는 게 정말 태화인지 믿기지 않아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서태화는 그대로 있었다. 이번에는 눈두덩이를 마구 비볐다. 역시나 그대로였다. 혹시나 꿈인가 싶어서 볼을 꼬집으려는데 대문 앞에 서 있던 태화가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잡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고개 숙여 입술을 깨물었다.

“아아!”

예고 없이 입술을 깨물린 선우는 뒷걸음질 쳤다. 깨물린 입술이 너무 아팠다. 핥아 보니 피도 나는 것 같았다. 눈물이 쏙 빠질 것처럼 아파서 한 발자국 더 물러나자 태화가 몸을 당겨 품에 안았다. 그제야 선우는 아픈 입술에 집중되었던 정신을 앞에 선 태화에게로 옮겼다.

“아저씨…….”

한 번 더 나직이 부르는 소리에 태화는 선우에게 입을 맞췄다. 본인이 찢어 놓은 입술을 소중하다는 듯 핥고, 느릿하게 안을 침범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태화는 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급한 건 선우 쪽이었다.

선우는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툭 놓고 태화를 부둥켜안았다. 한 품에 안기에도 벅찬 몸통을 껴안고 더듬었다. 못 본 사이 살은 조금 빠진 것 같은데 그 사이로 근육을 더 채워 넣었는지 만지는 곳마다 단단하다 못해 딴딴했다. 이 몸에 짓눌리는 감각을 기억해 낸 선우는 까치발까지 들어 입을 더욱 꼬옥 맞췄다.

“하……. 흐으…….”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때까지 태화에게 매달리다가 겨우 입술을 뗐다. 너무 그리웠던 순간이라 선우는 참지 못하고 태화의 아랫입술을 한 번 더 빨았다. 그러면 태화는 윗입술, 아랫입술 모두 쫍쫍 소리를 내며 빨아 줬다. 뽀뽀까지 몇 번 하고서야 두 사람은 떨어졌다. 선우는 키스하는 내내 꼬옥 감고 있던 두 눈을 슬며시 떴다. 태화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꿈도, 환상도, 뭣도 아니라는 게 확실해지자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몸에 힘도 풀려서 살짝 비틀거리는데 태화가 매몰차게 뒤로 물러났다. 그 바람에 선우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느닷없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태화를 올려다봤다. 태화는 짝다리를 짚고 서서 미간을 설핏 구기고 있었다. 누가 봐도 짜증 섞인 얼굴이었다.

“왜 그렇게 봐요? 무섭게…….”

“내가 무섭긴 해?”

“네…….”

태화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선우는 태화를 빤히 쳐다봤다. 화가 난 표정은 아니었다. 일단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불현듯 오른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아차 싶었다. 태화를 만났다는 기쁨에 동열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여기서 실수하기 전에 그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엉덩방아 찧은 궁둥이가 아팠으나 씩씩하게 일어났다. 태화는 기다렸다는 듯 선우를 잡아당겨 엉덩이부터 확인했다. 커다란 손이 작은 엉덩이를 연신 주물렀다.

이렇게 걱정할 거 쓰러지기 전에 잡아 주면 오죽 좋았을까.

잠깐 다른 생각을 하던 선우는 서둘러 태화의 뺨을 감싸 쥐었다. 태화가 눈살을 찡긋 구겼다.

“너 내가 곧장 오라고 했어, 안 했어? 전화라도 해야…….”

“나도 보고 싶었어요, 아저씨.”

“뭔…….”

다급히 말을 끊고 속삭이자 태화의 낯이 조금 더 일그러졌다. 태화가 뺨에 닿은 손을 떼어 내려는 걸, 선우는 힘주어 버텼다.

“뭔 지랄이야, 또.”

“지금 저 감시당하고 있어요. 크게 말하면 들릴지도 몰라요.”

“감시?”

태화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무슨 신호라도 주듯 선우가 자꾸만 옆을 곁눈질했다. 태화는 미간에 주던 힘을 슬쩍 풀고 선우의 시선을 따라 옆을 봤다. 조금 전부터 가만히 서 있던 흰색 차가 보였다.

“한동열이 저기 타고 있어요.”

선우는 거의 들릴락 말락 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우의 입에서 나온 한동열이라는 이름에 태화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해졌다. 이대로 있다간 일을 치를 것 같았다. 선우는 서둘러 태화의 목덜미를 와락 껴안았다.

“저 진짜 무서웠던 거 알아요? 이상한 사람한테 끌려가서 진짜 무서웠단 말이에요.”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를 드높였다. 물론 거리도 있는 데다가 차 안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들릴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크게 말했다. 귓가에 대고 목청껏 말하는 바람에 태화는 씹, 욕을 뇌까리며 선우를 몸에서 떼어 냈다. 들킬까 봐 걱정이 한가득 든 낯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태화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허롭게 웃었다.

“너 연기 진짜 못한다. 이딴 실력인데 믿으라고 큰소리쳤던 거야?”

태화가 헛웃음을 섞어 가며 속삭였다. 선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정도면 완벽한 연기라고 생각했는데 뭐가 문제인지 모를 일이었다.

내 연기에 속은 사람이 몇 명인데…….

선우는 괜스레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말없이 태화를 이끌어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땅에 떨어진 비닐봉지를 줍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태화는 선우를 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여 세웠다. 그 바람에 비닐봉지가 또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이번에는 봉투 밖으로 라면과 즉석 밥이 튀어나와 여기저기 흩어지기까지 했다. 선우가 바닥을 내려다보자 태화는 턱을 쥐어 제 낯을 바라보게 했다.

“내가 제때제때 연락…….”

또 한번 태화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선우가 입을 텁 막아 버린 탓이었다. 선우는 이게 뭔 지랄인가, 하는 얼굴로 쳐다보는 태화를 향해 고개를 슬슬 저었다. 태화는 가만히 숨을 골랐다. 마음만 먹으면 이깟 손가락쯤은 부러뜨려 놓을 수 있을 텐데도 참고 기다려 줬다. 선우는 그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디 변명이라도 해 보라는 듯 태화가 눈썹을 들썩였다. 선우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 입을 막던 손을 내렸다. 대신 태화의 손을 가져와 너른 손바닥 위에 검지로 글씨를 썼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그리고 있는데 태화는 영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마지막 글자까지 적어 내린 선우는 고개를 들어 태화를 봤다. 역시나 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답답해 미칠 지경이라 한숨을 폭 쉬고 다시 처음부터 적으려는데 태화가 갑자기 손을 감싸 쥐더니 깍지까지 꼈다. 순간 그가 몸을 바짝 붙여 왔다.

“도청당하고 있다고.”

귓가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뿐만 아니었다. 아예 귓구멍에 입술을 대고 속삭인 탓에 뜨끈한 숨결도 구멍 속으로 훅 흘러 들어왔다.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꼭 오줌이라도 지린 사람처럼 그랬다. 뭘 했다고, 옅은 신음까지 터뜨리자 여전히 귓구멍에 입술을 붙인 태화가 키들키들 웃었다. 다 알아들었으면서 장난친 것이었다.

선우는 태화를 살짝 밀어 냈다.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고 눈을 흘기자 태화가 픽 웃는 소리를 냈다. 볼록 튀어나온 아랫입술을 톡 건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무 얄미운 모습에 선우는 눈을 가늘게 뜨다가 무슨 생각인지 돌연 배시시 웃었다.

“나 그동안 많이 무서웠는데……. 나 좀 안아 주면 안 돼요?”

“…….”

“나 아저씨 진짜 많이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선우는 다시금 연기를 시작했다. 딴에는 놀리고 싶어서 그런 건데 어째 태화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태화는 느른하게 떴던 눈을 꾸욱 감았다. 다시 떴을 때는 눈알이 반들거렸다. 무언가 가득 들어찬 눈빛과 달리 무표정한 얼굴로 쩝 입맛을 다시더니 다짜고짜 선우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끌려간 건 간 거고. 가서 아무한테나 대 준 거 아니야?”

너무 자연스레 나온 말에 선우는 도리어 놀란 얼굴을 했다. 태화는 선우의 불그스름한 눈가를 지분거리며 씩 웃었다. 먼저 시작한 연기에 장단 좀 맞춰 줬더니 바로 당황해서는, 어버버거리는 게 퍽 깜찍했다. 역시 개새끼는 주인 앞에 있어야 사랑스러워졌다. 태화가 큭큭 웃는 사이 선우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침을 꼴깍 삼켰다. 자꾸 몸을 밀착시키는 탓에 아랫배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고 보면 열흘 동안 못 했었다. 태화와 함께 살면서 하루도 섹스를 안 한 적이 없는데 못 한 지 벌써 열흘째였다. 그동안 성욕 따위 없는 것처럼 살던 선우는 태화의 뜨끈한 체온을 느끼자마자 몸이 달았다.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진짜 무서웠는데…….”

“쑤셔 보면 알겠지.”

“안아 줄 거예요?”

선우는 기대감에 잔뜩 부푼 얼굴을 했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태화를 올려다보며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였다. 어처구니가 없는지 헛웃음 치는 그에게 바짝 매달렸다.

“저 안아 줄 거죠, 오늘?”

“아니, 쑤셔 줄 건데.”

“그건 무서운데…….”

“안아 줘?”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해 달라고 빌 때까지 안아 줄게.”

“그만하라고 안 해요.”

선우의 되바라진 말을 신호로 둘은 거칠게 뒤엉켰다. 발정기에 들어간 짐승처럼 두 사람 모두 바지부터 벗기 급급했다. 서로의 입술을 물어뜯어 가며 키스하고, 상대의 바지를 벗기느라 정신없었다. 너무 급한 나머지 걸음이 꼬인 선우가 바닥으로 넘어지려는 순간 태화가 몸을 홱 잡아끌었다.

커다란 소리가 나고 태화도 선우도 거실 바닥으로 넘어졌다. 아니, 선우는 태화의 몸 위에 올라탄 상태였다. 그 바람에 태화만 모든 충격을 받았다. 태화가 끙 앓는 소리를 내자 선우가 놀라서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등허리를 감싸 안는 강한 힘에 다시 단단한 몸 위로 털퍼덕 엎어질 수밖에 없었다. 태화는 한참 뒤통수를 쓰다듬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누구 마음대로 다치래?”

태화의 시선은 선우의 정강이에 닿아 있었다. 지난번 식탁 다리에 부딪힌 딱 그 자리였다. 멍도 멍이었으나 아직도 부기가 빠지지 않아 볼록 올라온 모습이었다. 선우가 괜스레 멍 든 자국이 안 보이게 다리를 움직이자 태화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약은?”

묻는 말에 선우는 다리로 태화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태화의 한숨이 쏟아졌다. 당장 약부터 찾아 바를 기세라, 선우는 태화를 꼭 끌어안고 뺨에 뺨을 비볐다.

“약은 나중에 발라 주고, 지금은 다른 데 만져 주면 안 돼요?”

“뭐?”

“나 진짜 오래 참았단 말이에요.”

선우는 본인이 말하면서도 부끄러워서 말끝을 흐렸다. 또다시 헛웃음 칠 줄 알았던 태화는 갑자기 씨발, 하고 욕을 짓씹더니 선우의 목덜미를 아프게 물었다. 선우가 아! 소리를 내자 또 부드럽게 빨아 줬다. 선우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거친 손이 더듬더듬 내려와 골 사이를 지분거리는 게 느껴졌다. 익숙하고도 낯선 감각이었다. 긴장한 탓에 발랑거리는 뒷구멍으로 손가락이 닿았다.

손가락을 넣어 보려는데 잘 안 되는지 몇 번 입구를 쿡쿡 쑤시던 손이 다시 떨어졌다. 귓가에서 젖은 소리가 들렸다. 선우는 고개를 슬쩍 들어 태화를 봤다. 그는 스스로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구멍을 만진 손인데 더럽지도 않은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빨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태화가 눈썹을 들썩였다.

“왜.”

“더러운데.”

“그 더러운 데에다가 내 자지를 박을 거야. 근데 그냥 박으면 너 또 울 거잖아. 젤 안 가지고 왔으니까 침이라도 써야지.”

태화는 선우의 구멍이 구태여 깨끗하다고 말하진 않았다. 선우는 오히려 그게 더 좋았다. 마냥 깨끗하지 않고 더럽더라도 자신을 피하지 않는 태화가 좋았다.

기다란 손가락을 핥는 혓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 태화의 손가락을 같이 빨았다. 굵고 긴 손가락을 무아지경으로 핥다가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태화의 혀를 빨고 있었다. 끊는다고 했으면서 또 담배를 피웠는지 쌉싸래한 맛이 났다. 그러고 보면 대문 앞에 서 있던 태화 발치로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던 게 기억났다. 선우는 씁쓸한 입 안을 핥으며 제 숨결로 채워 나갔다.

“흣!”

뒤로 손가락이 하나 들어온 게 느껴졌다. 천천히 안쪽을 문지르던 손가락은 하나에서 두 개로 늘어났다. 너무 오랜만에 하는 거라 그런지 고작 손가락 두 개에도 구멍이 찢어질 듯 아팠다.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 없는 통증에 선우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태화에게 기댔다. 아픈데, 이 과정을 지나면 느껴질 쾌감이 잔뜩 기대됐다.

“손가락 잘리겠다. 힘 좀 풀어 봐.”

“흣, 이제 알겠죠, 응? 나 진짜로 다리 안 벌렸어……. 읏……!”

“어. 알겠어. 예쁘다.”

태화는 건성으로 대답하면서도 선우에게 쪽 입을 맞췄다. 남자에게 처음 안기는 것처럼 파들파들 떠는 몸을 어르고 달래 가며 천천히 구멍을 넓혀 나갔다. 낯선 고통에 시무룩해져 있던 선우의 자지가 점점 힘을 받아 일어났다. 태화가 손가락을 깊숙이 찔러 넣어 안을 꾹꾹 눌러 대자 얇은 허리가 들썩였다. 선우는 태화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끙끙 앓았다. 안에서 가위질하듯 손가락을 벌리고 녹진한 내벽을 뭉근히 쓰다듬는 손길이 여실히 느껴졌다.

“으응, 흐…….”

앞을 만지지도 않았는데 벌써 쌀 것 같았다. 쪽 찢어진 선단 끝이 혼자 뻐끔대며 멀건 물을 쭉쭉 뱉어 냈다. 은실처럼 늘어진 프리컴은 정확히 태화의 배꼽에 떨어져 맺혔다. 손가락으로 쑤시다 좀 메마르다 싶을 때마다 태화는 손을 게걸스레 빨고 다시 집어넣었다. 그래도 모자란 감이 있으면 선우의 프리컴을 모아 와 쑤시기도 했다. 물기 가득한 손가락으로 넣다 빼길 반복하자 애액이라도 쏟아져 나오듯 찔걱이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났다.

선우는 제 뒷구멍에서 나는 소리에 흥분하며 태화의 목덜미를 자근자근 씹었다. 어느 정도 풀렸다 싶었는지 태화는 손을 빼고 제 자지를 쥐었다. 최선우를 안고 있다는 것만으로 검붉게 달아오른 기둥을 두어 번 탁탁 치대고 구멍을 찾았다. 꼭 한번 사정이라도 한 것처럼 번들거리는 귀두 끝으로 구멍을 천천히 가르고 들어가자 선우가 고개를 홱 쳐들었다. 장기가 곧게 펴지는 기분이었다.

“아, 아저씨 거 너무, 흐읏, 너무 커……! 안 돼…….”

“후…….”

“그만 들어와, 응……. 너무 깊어, 이상해져요…….”

“그럼 뺄까?”

“아니, 빼진 말고, 아……! 흑, 조금만 덜 깊게…….”

이 자세는 처음이라 더 겁이 났다. 선우는 저들끼리 찰싹 달라붙은 내벽을 무식하게 가르고 들어오는 좆을 느끼며 발발 떨었다.

“아……!”

신음을 내지르며 사타구니 사이를 겨우 내려다봤다. 더 들어올 수 없을 만큼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태화의 자지는 아직 반도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만약 저게 전부 들어온다면 정말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더라도 선우 역시 태화에게 안기는 걸 수없이 그리워했다. 이대로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흑, 좋은데, 무서워……. 아……. 천천히…….”

태화가 허리를 잡아 붙들고 놔주질 않는 탓에 선우는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 든 눈으로 태화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더 들어오면 안 된다고, 배가 뚫릴 것 같다고. 선우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연신 웅얼거렸다. 신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걸 내뱉으며 태화를 꼭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태화는 입 안으로 욕을 굴리다가 쥐고 있던 허리를 놓고 대신 선우를 끌어안은 채 뒤로 벌렁 누웠다.

“아!”

자세가 바뀐 탓에 선우는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태화 위에 엎어진 채 자지가 더 들어오지 못하도록 엉덩이만 봉긋 쳐든 상태였다. 힘이 조금만 풀려도 몽둥이 같은 게 배 속을 마구 짓이기며 쳐들어올 판이라 선우는 허벅지와 엉덩이에 힘을 바짝 줬다. 덩달아 뒷구멍까지 꽉 조여 대자 태화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떨어졌다. 허리를 슬쩍 퉁겨 보는데 선우가 화들짝 놀라 위로 도망가 버렸다. 태화는 다시 선우의 엉덩이를 쥐어 아래로 끌어 내렸다.

“겁나?”

선우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이 같은 반응에 태화는 픽 웃었다. 선우의 눈두덩이 위에 뽀뽀를 가볍게 날리고 말랑말랑한 궁둥이를 연신 주물렀다.

“가만히 있을 테니까 혼자 움직여 봐.”

“혼자, 요……?”

“그럼 그냥 내가 할까?”

태화는 장난식으로 한 번 더 허리를 퉁겼다. 자지가 안을 콱 치받는 느낌에 선우가 파드득 떨며 도리질을 쳤다. 혼자 해 보겠다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고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선우는 태화의 가슴을 지지대 삼아 꼬옥 쥐고 겨우 앉았다. 구멍이 너무 넓게 벌어진 게 느껴졌다. 배 속도 틈 없이 꽈악 들어차 있었고,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정신도 온전치 않아서 이대로 어딘가 꼭 한 군데쯤은 망가질 것 같았다. 선우가 두려워할수록 내벽은 더욱 조붓해졌다.

“후윽…….”

태화의 짙은 숨소리가 들렸다. 혼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눈물만 퐁퐁 쏟아 내며 그를 바라본 선우는 순간 숨을 흡 삼켰다. 한껏 여유로운 목소리를 내던 태화건만 그 역시도 흥분감에 잡아먹힌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색소가 옅어 밝은 눈동자를 번들번들 떠 가며 바라보는 탓에 절로 긴장됐다. 귀 끝은 말할 것도 없고, 뺨과 목덜미, 가슴까지 시뻘겋게 물들여서는 큰 숨을 씨근대는 모습이었다. 제가 뭐라고, 이렇게나 흥분한 태화를 보자니 선우는 괜스레 용기가 마구 샘솟았다. 젖은 눈두덩이를 쓱 닦고 침을 꼴깍 삼켰다.

“제가, 읏, 기분 좋게 해 드릴게요.”

타고난 창부처럼 말했다. 원래 창부였으니 낯설 것도 없었으나 태화는 그 한마디에 입 안으로 욕을 몇 번이고 뭉갰다. 평소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가도, 이럴 때면 꼭 뭔가를 아주 많이 알고 있는 놈 같았다. 입술이 바싹 타들어 가는 기분에 아랫입술을 축이고 선우를 향해 눈썹을 끄떡였다. 선우는 무슨 대단한 각오라도 한 듯 결연한 표정을 하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아으…….”

태화의 자지가 빠져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아랫배가 쿡쿡 쑤셨다. 비록 아직도 겁이 나서 뿌리 끝까지 다 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넣어 보려고 노력했다. 허리를 들어 올려 귀두 갓까지 빼낸 좆을 다시 천천히 앉아 오물오물 머금었다.

점점 깊게 박혀 들어오는 감각에 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찔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문제는 체력이었다. 평소에 운동을 안 하다 보니 혼자 움직이는 게 점점 힘에 부쳤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며 위아래로 움직였다. 언뜻 어느 부분이 스칠 때는 아픈 신음보다도 젖은 신음이 더 크게 흘러나왔다.

“으, 하읏……. 아!”

태화가 움직이지 않자 마치 딜도를 사용하는 기분이었다. 물론 이 정도로 길고, 굵고, 단단한 데다가 따끈따끈한, 핏줄 하나하나가 예쁘게 돋기까지 한, 완벽한 딜도는 없겠지만. 어찌 됐든 기분이 좀 이상했다. 선우는 한참 감고 있던 두 눈을 슬그머니 떴다. 절로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태화의 시선이 접합부에 꽂혀 있었다. 뒷구멍으로 본인의 자지가 드나드는 걸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동자는 빛 한 점 없는 곳에서도 또렷이 보였다. 선우는 발끝을 안으로 곱으며 태화의 뺨을 감싸 쥐었다.

“흐, 좋아요……? 나, 응, 나 잘해요……?”

잘한다는 말이 듣고 싶어서 묻자 태화는 그제야 선우의 낯을 올려다봤다.

“어.”

“더 잘할 수 있…….”

“잘하긴 하는데, 조금만 더 잘해 보자.”

태화는 선우의 말을 끊고 돌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탓에 뒤로 발라당 넘어갈 뻔한 선우를 당겨 와 품에 꼭 끌어안았다. 선우의 눈이 번뜩 뜨였다.

“아! 잠, 아아……!”

“나, 윽, 끌어안아.”

“아으, 아저씨, 흑, 이거 안 돼! 아!”

선우는 뜨문뜨문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했다. 그저 태화의 말대로 그에게 안길 수밖에 없었다. 태화의 자지가 뿌리 끝까지 쳐들어왔다가 선단 끝까지 빠져나가길 반복했다. 태화는 자지를 아예 밖으로 빼냈다가 다시 퍽! 쑤셔 박았다. 뻐끔거리며 열린 구멍이 빠르게 닫히려는 타이밍에 귀두를 걸치고 거친 소리가 날 정도로 치댔다. 고환까지 집어넣고 싶은 걸 참고 얇은 허리를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선우는 깜빡 정신이 날아갈 것 같았다. 커다란 게 끝도 없이 안을 침범하자 숨 쉬기가 힘들었다. 들어오면 안 될 곳까지 기어코 대가리를 들이미는 감각에 꺽꺽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뱃가죽이 울룩불룩 올라오는 게 육안으로 보였고, 어딘가 꺾여 있던 곳이 억지로 곧게 펴지는 것도 느껴졌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픈데, 문제는 느끼는 지점이 쉼 없이 자극당해서 쾌감이 더 크다는 것이었다. 멀건 물만 질질 흘리던 좆 끝에서 탁한 액체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아! 나, 쌀 거, 흑, 싸요, 아!”

“윽, 씹…….”

“아흣!”

선우는 악 소리를 지르며 정액을 푹 쏟아 냈다. 오랜만에 하는 사정이라 그런지 힘 있게 발사된 게 툭 튀어 올라 태화의 입술에 매달렸다. 미끈한 게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느낌에 태화는 손끝으로 쓸어 와 찐득한 정액을 모조리 삼켰다.

“윽…….”

정액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맛이 없었다. 최선우는 이딴 걸 어떻게 매번 꿀떡꿀떡 삼켰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음부터는 먹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던 태화는 미간을 억세게 구겼다. 사정한 탓인지 내벽이 마구 요동치며 좆기둥을 쥐어짜 냈다. 최선우는 제가 힘을 주는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피가 몰려 도톰하게 부어오른 선우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할 틈도 없이 입술을 빨았다. 며칠 만에 맛보는 건지, 고작 입술 한번 빨았을 뿐인데 자지로 피가 쫙 몰리는 게 느껴졌다. 빌어먹게 숨결도 달큼하고 난리였다.

선우는 뭣도 모르고 힉 소리를 내며 태화에게 입술이며 구멍이며 모조리 다 내줬다. 선우의 좆구멍에서는 아직도 정액이 찍찍 뿜어졌다. 선우는 흣, 소리를 내며 아랫배에 힘을 바짝 줬다. 정액을 이렇게 계속 싸는 걸 보면 역시 몸이 고장 난 게 분명했다.

“최선우, 윽…….”

“흐, 그만, 아……! 계속 나와…….”

“작작 좀, 조여, 씨발.”

태화 역시 이젠 한계였다. 좆이 떨어져 나갈 정도의 압박감에 머리가 어찔했다. 울며불며 놔 달라고 소리치는 선우를 꽉 옥죄어 안고 허리를 털었다. 둘 다 온몸이 땀으로 담뿍 젖었다. 가을을 지나 이제 겨울이 오는 계절인데도 주변 공기가 후덥지근하기만 했다. 열이 났고, 너무 더웠다. 마치 열대를 앓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선우도 엉덩이만 들썩일 뿐 사지로는 태화를 꽁꽁 싸매 안았다. 젖은 살끼리 끈덕지게 붙어먹는 소리가 철퍽이며 났다. 태화는 선우의 어깨를 콱 물어뜯으며 한곳을 응시했다. 식탁 아래에서 점멸과 점등을 반복하는 빨간 불빛이었다.

“씹, 최선우. 최선우…….”

누가 들으라는 듯이 연신 선우의 이름을 불러 가며 거칠게 추삽질했다. 선우도 보답하듯 아저씨, 아저씨, 하고 불렀다. 자지가 뻐근하다 싶을 만큼 내벽을 쑤셔 박던 태화는 순간 탁한 신음을 부르짖으며 사정했다. 울컥울컥, 성기가 정액을 뱉어 내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선우와 마찬가지로 태화도 꽤 오랜만에 사정한 것이었다.

선우가 사라지고 처음 이틀 동안은 자지가 퉁퉁 불 정도로 쥐고 흔들길 반복했는데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자위하고 싶은 마음도 싹 사라졌다. 그저 이 녹진한 구멍에 박아 넣을 날만 고대해 왔었다. 오늘이 드디어 그날이라 태화는 참 많이도 쌌다.

선우는 배 속이 울렁출렁 차오르는 듯한 이상한 감각에 흐느껴 울었다. 태화가 자지를 슬며시 넣었다 뺄 때마다 맞닿은 틈에서 주륵, 하고 정액이 비어져 나왔다. 허옇고 찐득한 액체가 기둥을 타고 내려와 고환을 적셨다. 맺히지 못하고 떨어진 건 금세 바닥을 더럽혔다. 선우는 달달 떨어 가며 태화를 바라보려다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왜 또, 왜 움직여……. 흣, 그만 커져요……. 응…….”

“한 번만 더 하자.”

“한 번 아니잖아, 흑…….”

“딱 한 번만.”

“진짜 한 번만요……?”

태화는 대답 대신 귓불에 입을 맞추며 허리를 슬금슬금 움직였다. 선우는 끙끙 앓아 가며 태화의 뺨을 깨물었다. 그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떻게 방금 사정한 자지를 빼지도 않고 내벽 안에서 더 크게 키울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선우도 그다지 할 말은 없었다. 끊임없이 정액을 쏟아 내던 선우의 자지도 통통하게 부어올라 태화의 복근을 꾹꾹 누르는 중이었다. 역시 어딘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태화와 섹스하려니 선우 역시 한 번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몸이 되어 버렸다.

한 번만 더 하자더니, 태화는 선우가 엉엉 울며 나쁜 새끼라고 욕할 때까지 몰아붙였다. 그래 놓고선 ‘그만하라고 안 한다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하고 놀리기나 했다.

선우는 엎어진 채 불가사리처럼 사지를 늘어뜨리고 숨만 바르작바르작 쉬었다. 녹초가 된 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었다. 힘들다고 씻지도 못한 탓에 엉덩이에서는 아직도 태화의 정액이 흘러나왔다. 눈앞에 있는 두루마리 휴지를 뜯어 겨우 골 사이를 훔쳐 보는데 많이도 쌌다 싶을 만큼 정액이 뭉텅이로 묻어 나왔다.

반면 태화는 쌩쌩해도 너무 쌩쌩했다. 괜히 얄미울 정도였다. 선우가 남몰래 눈을 흘기는 사이, 방에 이부자리를 깔아 놓은 태화는 선우를 번쩍 안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가는 동안 선우의 뒷구멍에서 정액이 툭툭 떨어져 태화의 발등을 적셨다. 요 위로 선우를 눕힌 그는 이불까지 곱게 덮어 주고 주방으로 나왔다. 오랜 정사 때문에 후덥지근해진 몸을 식히려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방 안에서 선우가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너도 줘?”

물병을 흔들며 묻자 선우는 도리질 쳤다. 태화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 한 병을 거의 다 비우고서야 방으로 들어왔다. 방을 휙 둘러보다가 서랍장을 열어 봤다. 뭘 찾는 듯이 이리저리 뒤적이더니 선우를 봤다.

“내 사이즈 팬티 없어?”

태화의 물음에 선우는 코끝을 찡긋거렸다.

“당연히 없죠.”

“그럼 뭐 입으라고?”

“음…….”

선우는 잠시간 고민하는가 싶더니 덮고 있던 이불을 홱 걷었다.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입지 말고 그냥 이리 와요.”

샐쭉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 낯을 빤히 쳐다보던 태화가 벌겋게 물들어 축 늘어져 있는 좆을 주물럭거렸다.

“또 하자고?”

근사한 목소리였다. 선우는 하마터면 그 목소리에 속아 고개를 끄덕일 뻔하다가 겨우 정신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이불을 다시 폭 덮어썼다. 하지만 이미 늦은 모양이었다. 태화의 좆대가리가 선우를 향해 슬슬 고개를 쳐들었다. 발갛게 익은 얼굴로 안녕? 또 만나네, 하고 인사하는 것만 같았다. 선우는 윽 소리를 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아직도 배 속이 저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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