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뭐만 하면 아파요, 힘들어요, 무서워요. 안 징징거리겠다는 말을 믿은 내가 머저리지.”
선우는 태화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어처구니가 없기는 했다. 두 번째라 더 잘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태화의 것은 여전히 거대했고, 체력은 로봇이나 다름없었으며, 테크닉도 좋았다. 온몸에 물이 죄다 빠져나가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태화의 방에서 하다가 선우가 실금이라도 한 것처럼 너무 많이 싸서 씻고 나선 선우의 방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선우는 아직도 축축이 젖어 있을 시트와 이불을 생각하며 내일 그가 일하러 나간 사이 이불 빨래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눈치를 보며 태화의 품을 파고들었다. 밀어 낼 줄 알았더니 그는 의외로 허리를 감싸 안아 줬다. 다만, 조금 전까지 혹사당한 허리가 너무 아파서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뭔 유리 몸도 아니고.”
태화가 자꾸만 뭐라고 하자 선우도 이제 살짝 억울했다. 할 땐 좋다고 뽀뽀도 해 주고, 여기저기 쓰다듬으며 예뻐해 주더니 다 끝나고 나니 타박이 이어졌다.
“근데 진짜로 아파요……. 아저씨는 아저씨 걸로 박히면 안 아프겠어요?”
“내가 내 걸로 어떻게 박혀.”
“말이 그렇다는 거죠.”
선우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탄탄한 가슴팍에 이마를 꿍 맞대고 눈을 살풋 가늘게 떴다.
태화는 평생 이 고통을 모를 터였다. 손목보다도 굵은 걸로 쑤셔 대는데 안 아플 수가 없었다. 엉덩이에서 아직도 불이 나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확실히 좋기는 좋았다. 삽입 자체도 좋았지만, 삽입 전에 해 주는 애무와 다 끝나고 몸을 씻겨 주는 손길 하나하나가 전부 좋았다. 가만 보면 서태화는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말로는 만사 귀찮아하는 것 같은데 정작 행동은 다정했다.
선우는 눈을 크게 떴다. 태화의 다정에 심장이 팔딱팔딱 뛰는 게 느껴졌다. 배시시 웃음 짓다가도 문득 이런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도 해 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선 이렇게 능숙할 수 없었다. 또 생각이 그쪽으로 흘러갔다. 선우는 고개를 바짝 들어 태화를 바라봤다.
“원래는 얼마나 자주 해요?”
“뭘.”
“섹스요.”
창밖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 때문인지, 묻는 얼굴이 말갛게 빛났다. 태화는 선우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구겼다. 커다란 눈을 느릿하게 끔뻑이며 쳐다보는 모습은 영락없이 애였다.
“넌 뭐 부끄러운, 뭐 그런 감정을 일절 못 느끼냐?”
짜증이 살짝 섞인 말투였으나 선우는 물러나지 않았다. 어서 대답하라는 듯 빤하게 쳐다봤다.
“얼마나 자주 했는데요?”
“존나 자주 했을 거라고 단정 짓고 묻는 것 같다, 어째.”
“콘돔도 여기저기 있고, 젤도 마찬가지고……. 또, 잘하잖아요.”
선우는 결국 속에 있던 말을 꺼내 놨다. 정황상 태화는 섹스를 아주 많이 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태화 집 곳곳에 있는 콘돔과 젤은 면도방 한편에 수북이 쌓여 있던 것들과 비교해도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다. 또, 말 그대로 태화는 엄청나게 잘했다. 남자랑 해 본 게 처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선우가 대답을 기다리며 계속 쳐다보자 태화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마가 간지러웠다.
“세상에 너처럼 단순한 놈만 있으면 꽤 평화로울 거야.”
“왜요?”
“난 자위할 때도 콘돔 끼고 해. 주변 더러워지는 거 싫어서. 젤은 콘돔 끼고 하다 보면 뻑뻑해서 가끔 쓰는 거고.”
선우는 눈을 더 크게 떴다. 새카만 눈동자가 불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말간 얼굴 위로 웃음이 피어났다.
“그럼 자주 안 한다는 거네요? 저랑 한 게 오랜만에 한 거였어요? 언제가 마지막이었어요?”
질문이 다다다 쏟아졌다. 선우는 본인이 첫사랑이라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들뜬 얼굴을 했다. 너무도 투명한 반응에 태화는 또 한번 픽 웃었다. 애는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는 창놈이라더니 지금은 또 좋아 죽네.”
“그건……. 오해해서.”
“보여?”
태화가 이불을 끌어 내렸다. 근육으로 잘 짜인 몸이 드러났다. 선우는 침을 꼴깍 삼키며 태화의 몸을 감상했다.
“한 번 더 할 거 아니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말고. 여기, 이거 보이냐고.”
섹스하며 계속 봤던 몸인데 새삼스럽게 뭘 보라는 건지 모르겠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태화가 손가락으로 어깨 쪽을 가리켰다. 순간 선우는 아……. 소리를 내며 시선을 돌렸다. 어깨에는 잇자국이 여태 선명하게 나 있었다. 주위로 시퍼런 멍까지 든 모습이었다. 며칠 전, 서재에서 처음 몸을 섞으며 선우가 콱 물어뜯은 자리였다.
선우는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태화에게 더욱 바짝 안겼다. 태화가 헛웃음을 쳤다.
“애교로 넘기려고?”
“아저씨도 제 몸 씹어 놨잖아요.”
“뭐?”
선우도 지지 않았다. 이불을 더 아래로 끌어 내려 제 몸을 내보였다. 허연 나신 위로 울긋불긋한 자국이 만연했다. 거짓말 좀 보태서 울혈이 없는 곳이 없었다. 특히 뼈마디가 도드라진 곳은 더 심했다. 손목과 발목, 골반은 잇자국이 빼곡했고, 굳이 다리를 들어 보여 주는 허벅지 안쪽은 꽃물이라도 든 것처럼 벌건 도장이 쾅 박혀 있었다. 가장 심한 건 아랫입술이었다.
섹스 중에 태화는 선우의 아랫입술에 꿀이라도 발라 놓은 것처럼 쭙쭙 빨아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얼마나 빨았으면 안 그래도 도톰한 입술이 모기라도 물린 것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그 모든 자국을 눈에 담은 태화는 쩝 입맛을 다셨다.
“쌤쌤.”
“네. 쌤쌤.”
선우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개라도 된 것처럼 태화의 팔뚝에 뺨을 비비다가 다시 그를 올려다봤다.
“근데, 처음은 아니었죠?”
“뭐, 너는 나한테 아다 바쳤는데, 나는 닳고 닳은 놈 같아서 억울해?”
“억울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거짓말은 못 하네. 아니, 일부러 안 하는 건가? 귀여워 보이려고.”
태화의 말에 선우는 숨을 가볍게 삼켰다. 민망해지라고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의 얼굴이 꽤 진지했다. 정말 저를 귀엽게 여기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귀 끝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가끔 태화가 이렇게 훅 들어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연애는 해 봤어요?”
괜히 다른 데로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선우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해 봤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태화는 그저 무료한 표정만 지었다. 선우는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허리가 우지끈 끊어지는 느낌에 아픈 소리를 내자 태화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쯧쯧 혀를 찼다. 그런데도 선우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내려다봤다. 지금 다른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연애는 안 하고 섹스만 해 본 거예요? 그럼 아저씨도 업소, 이런 데 다녔어요?”
“오늘따라 왜 이러지. 물음표 좀 그만 달아.”
“직업 특성상 애인은 안 만들었을 거 같아서요. 근데 또 연애를 안 해 봤다기엔 너무 잘나 보여서…….”
선우의 말에 태화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같잖지도 않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선우는 정말 태화의 연애 이력이 궁금했다. 손님으로 왔던 남자들을 보면 대충 연애 한번 못 해 봤겠거니, 아니면 개나 소나 다 후리고 다녔겠거니, 견적이 딱 나왔는데 태화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게 업이니 연애는 당연히 못 해 봤을 것 같으면서도, 또 이런 몸에 이런 얼굴을 가진 남자를 주변에서 가만히 놔뒀을까 싶었다.
맹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자 태화는 천장을 보고 누웠다. 마지막으로 한 연애에 대해 생각해 봤다. 우습지만 연애랄 것도 없었다. 태화는 살면서 연애 한번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구태여 다른 이에게 종속되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았고, 연애할 시간도 없다는 게 마땅한 이유였다. 생각해 보니 저도 참 재미없는 인생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해 본 적 없어.”
태화는 별스럽지 않게 대답했는데 듣는 선우가 놀란 토끼 눈을 떴다. 선우는 아예 입을 반쯤 벌리고 태화를 내려다봤다.
“그럼 저랑 하기 전 마지막 섹스는 언제였는데요?”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요.”
태화는 뭐 그런 것까지 묻냐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다시 생각에 잠겼다.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최선우와 하기 전이라…….
바로 떠오르지 않을 만큼 오래된 일이었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다 보니 어느새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있었다. 그러니까, 잘만 몸담고 있던 곳에서 빠져나온 이후로 아랫도리를 쓰지 않은 것이었다. 6년이라니, 태화도 이렇게 오래되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스물일곱 때부터 자지만 달린 고자로 살아온 셈이었다. 한창때의 6년은 60년과 마찬가지였다. 새삼 6년을 어떻게 참았나 싶었다.
태화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치다가 선우를 바라봤다. 말갛게 뜨인 눈이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어서 빨리 대답해 달라고. 꼬리만 없지, 개처럼 보채는 것 같았다.
“스물일곱 살 때.”
“스물일곱이요?”
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다는 듯이 쳐다보면서도 대답해 줄 건 다 해 줬다. 선우는 속으로 연수를 차곡차곡 세어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6년 만에 저랑 했다는 거네요?”
목소리에는 약간의 흥분감이 깃들어 있었다. 반들반들 빛나는 눈동자로 태화를 내려다봤다. 선우는 본인의 첫 경험을 태화가 가져간 반면 그의 첫 경험을 가지지 못한 건 전혀 억울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마지막까지 저랑만 하면 됐다.
“앞으로는 나랑만 해요.”
“싫어.”
“왜요? 저 별로였어요?”
“어.”
“거짓말. 처음 했을 때도 그렇고, 오늘도 세 번이나 했으면서. 잘한다고 칭찬도 해 주고…….”
선우는 웅얼거리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별로라는 건 그냥 해 본 말일 게 분명했다. 태화 성격상 별로인 놈과 두 번이나 할 것 같지는 않았다.
태화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한 번 더 빨아 줄까요?”
“네 그 잘하지도 못하는 입 빌리느니 혼자 딸 치는 게 나아.”
태화는 웃는 얼굴로 잘도 그런 말을 했다. 손으로는 여태 아랫도리를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선우는 미간을 찡그렸다. 조금만 예쁘게 말해 주는 게 뭐 어렵다고 자꾸 저런 식으로 말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뚱한 얼굴로 아랫입술마저 불퉁하게 내밀고 쳐다보자 태화의 낯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약간 구겨진 눈이 선우를 위아래로 느리게 훑었다.
“나가.”
낮은 목소리에도 선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말을 듣지 않으면 맞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지만 나가고 싶지 않았다.
“안 나가?”
역시 태화의 표정이 험하게 굳어졌다. 선우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느끼면서도 요지부동이었다. 입을 꾸욱 눌러 다물고 태화를 바라보기만 했다. 두 손으로 이불을 어찌나 꽉 쥐었던지 뼈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콧잔등이 찡했다. 맞을까 봐 겁도 나고, 왠지 모르게 서러워서 울음이 목구멍까지 왈칵 차올랐다. 이런 일로 울고 싶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참아 보는데 시야가 점점 뿌예졌다. 앞에서 한숨이 툭 터져 나왔다. 태화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험악한 인상은 지워졌다.
“뭔 말만 하면 우니까 말을 못 하겠다, 씨발.”
“안 울어요…….”
“눈에서 눈물이나 닦고 말하세요.”
선우는 서둘러 눈두덩이를 벅벅 문질러 닦았다. 정말 눈물이 찔끔 나오긴 한 모양이었다. 손등이 축축해졌다. 얼추 눈물을 다 닦고 다시 태화를 봤다. 코까지 킁 먹었더니 그가 한숨을 깊게 쉬며 팔을 벌렸다.
“이리 와.”
짜증과 다정이 묘하게 섞인 목소리였다. 선우는 냉큼 태화에게 가서 폴싹 안겼다. 굵다란 팔뚝을 베고 누워 두꺼운 흉통을 끌어안았다. 태화는 뒤집힌 이불을 끌어와 선우의 어깨 위까지 꼼꼼하게 덮어 줬다. 한여름에 에어컨을 틀어 놓고 맨몸에 얇은 이불만 덮고 있는 건 생각보다도 더 기분 좋았다. 어쩌면 태화에게 안겨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선우는 눈물이 덜 가신 눈을 샐쭉 접어 웃으며 생각했다.
등허리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일정한 박자 때문인지, 격한 운동을 한 뒤라서 그런지 잠이 솔솔 쏟아졌다.
“최우……. 최선우.”
깜빡 잠이 들 뻔했던 선우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몸을 파드득 떨었다. 눈을 뜨고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위를 올려다봤다. 태화가 삐딱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침이라도 흘렸나 싶어 입가를 닦아 보는데 다행히 묻어나오는 건 없었다.
또 이름을 잘못 불렀던 거 같은데…….
살풋 잠들기 직전이라 잘못 들었을 수 있어서 구태여 따지진 않았다. 잠이 덜 가신 눈을 끔뻑이며 빤히 쳐다보자 태화가 픽 웃었다.
“넌 내가 왜 좋냐?”
“네? 아, 어…….”
“다시 물어봐도 되니까 앞으로 눈치 보지 마.”
선우는 잠결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태화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을 수 있었다. 저리 가라거나, 꺼지라거나, 나가라는 것만 빼면.
선우는 짭짭 입맛을 다시다가 겨우 정신 차리고 눈을 맑게 떴다. 태화가 검지로 선우의 아랫입술을 톡 쳤다.
“그래서 내가 왜 좋냐고.”
태화는 이 질문이 참 웃긴다고 생각했다. 나이 서른셋 먹고 이런 걸 물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게다가 그 상대가 띠동갑이나 어린 놈일 거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 병아리콩 같은 놈 때문에 제가 자꾸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것이었다.
“내가 좋다고 쳐. 그래도 사람 죽이는 거까지 봤으면 무서워하는 게 맞는데 왜 안 무서워해?”
“무서운데요…….”
“무섭다고? 내가?”
“네……. 아저씨한테 맞으면 진짜 죽을 거 같아서 무서워요.”
“하…….”
태화는 헛숨을 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살인 행위가 무서운 게 아니라 자신이 맞으면 죽을 것 같아서 무섭다고 하는 놈을 어쩔까 싶었다.
태화는 선우를 빤하게 쳐다봤다. 한입 거리도 안 되게 생긴 놈이었다. 아랫입술을 연신 톡톡 치다가 엄지로 뭉그러뜨리듯 짙게 눌렀다. 도톰한 아랫입술이 좀 더 붉어졌다.
“무서운데 맨날천날 기어올라?”
“안 기어올랐어요.”
“지금 이러는 게 기어오르는 거야.”
태화의 말에 선우는 눈을 흘겼다. 나름 불만을 표출하는 눈빛이었는데 태화는 그저 비식거리며 웃기만 했다. 조금 더 붙으라는 듯이 팔을 벌렸다. 선우는 꾸물거리며 태화의 품을 더욱 파고들었다. 둘은 한 몸이라도 된 양 서로 부둥켜안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선우는 태화가 숨을 내쉴 때마다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는 걸 느꼈다. 간지러웠다. 살짝 웃으며 태화의 가슴팍에 쪽 입을 맞췄다. 등을 쓸어내리던 손이 잠깐 멈칫했으나 곧 다시 길게 쓰다듬어 줬다.
“맨 처음에는 너무 잘생겨서 좋아졌거든요.”
선우는 아까 못 다한 말을 시작했다. 나긋나긋한 음성이 가슴팍 안으로 웅웅 울렸다.
“진짜 살면서 아저씨처럼 잘생긴 사람을 처음 봐서.”
“그 정도는 아닌데.”
“아니에요. 완전 그 정도예요.”
정수리 위에서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근데?”
“근데 지금은 그냥 좋아요. 아저씨가 지영환 죽여 줬을 때부터는 그냥 좋았어요.”
“왜.”
선우는 잠이 달아난 눈을 깜빡깜빡 감았다 떴다. 까만 눈동자는 초점이 흐렸다.
“아저씨가 안 죽였으면 내가 죽였거나, 아니면 내가 죽었거나 했을 거거든요. 그러니까 아저씨가 날 구한 거예요. 날 살린 거예요, 아저씨가.”
말을 끝으로 고개를 들어 태화를 바라봤다. 내내 해 주고 싶은 말이었다.
당신이 날 구했다고. 내가 당신 덕분에 살았다고. 당신만이 내 구원이라고.
선우는 한편에 보관해 뒀던 마음을 비로소 내보였다.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짓자 태화 역시 멀건 얼굴로 시선을 맞췄다.
“발랑 까졌네.”
태화는 그렇게 말하더니 선우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선우는 아! 소리를 내며 이마를 문질렀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놀란 것도 있었으나 일단 너무 아팠다. 태화 딴에는 별로 힘을 준 것 같지는 않은데 맞는 선우 입장에서는 골이 띵하게 울릴 정도였다.
선우는 눈을 모나게 뜨고 태화를 째려봤다. 평소와 달리 짙은 눈빛을 보내길래 뭔가 근사한 말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이마를 슥슥 문지르며 아파하자 태화는 낄낄 웃더니 고개 숙여 다가왔다. 이마 위로 폭신한 입술이 닿았다. 선우는 그제야 못된 눈빛을 지웠다.
“근데 제가 발랑 까졌다고요?”
“은혜를 몸으로 갚는 놈인데 당연히 발랑 까진 거지. 너 때문에 뒷구멍에 박는 맛도 처음 알았는데.”
이마에 입술을 대고 웅얼거리는 말을 듣던 선우가 고개를 팍 들어 올렸다. 그 탓에 태화는 선우의 턱에 입술을 부딪쳐 작게 앓았다. 태화가 입술을 문지르는데도 선우는 눈을 반짝거릴 뿐이었다.
“내가 처음이에요?”
“또 이상한 거에 꽂혔지.”
“진짜 내가 첫 남자였어요?”
선우는 ‘첫 남자’에 힘을 실어 발음했다. 마치 첫사랑인지 묻는 어린애 같았다. 태화는 입술을 좀 더 문지르며 선우를 바라봤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스물한 살 먹은 천둥벌거숭이처럼 보였다. 이대로 좀 더 골려 줘 볼까, 고민하다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아니라고 하면 저 큰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게 분명했다.
“어.”
“진짜?”
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주체하지 못하고 환하게 미소 짓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선우는 아예 감정을 숨길 생각이 없는 것만 같았다. 광대를 봉긋하게 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예쁘게 눈웃음 진 채 태화를 바라보다가 품 안으로 고개를 푹 파묻었다. 어리광 부리듯 다 감기지도 않는 두꺼운 몸을 꼬옥 껴안았다.
태화도 마찬가지로 선우를 꽉 끌어안아 줬다. 선우는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티 내지 않았다. 이대로 숨 막혀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죽는 게 싫어서 면도방에서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악착같이 살아왔는데, 처음으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했다.
“그럼 아저씨는 나 좋아해요?”
한참 태화의 체향을 느끼다가 나직이 물었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못 들었나 싶어서 고개를 빼꼼히 올려다봤다. 선우는 입을 반쯤 벌리다가 이내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태화는 그새 잠들어 있었다.
“좋아했으면 좋겠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대신해 중얼거렸다. 아니라고 할 확률이 더 높다는 건 선우도 알았다. 그래도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대답도 못 들었는데 어떤 대답을 예상하든, 그건 제 자유였다. 선우는 은은한 미소를 띤 채 태화의 턱에 쪽 입을 맞추고 똑같이 눈을 감았다.
몸에서 좋은 향기가 느껴졌다.
* * *
선우는 거실 소파에 무료하게 드러누워 있었다. 배 위에는 태화가 지난번에 추천한 책이 엎어져 있었지만 읽진 않았다. 겨우 열다섯 장 읽고 더는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냥 책 읽는 시늉만 하며 빈둥거렸다.
창문을 통해 햇빛이 포근하게 들어왔다. 거실 바닥을 중앙까지 적시는 빛을 멀거니 구경하다가 벽시계를 올려다봤다. 이제 겨우 1시 30분이었다. 태화가 점심을 먹고 내려간 지 겨우 30분 지난 시간이었다. 태화가 저녁 먹으러 올라오는 6시까지 뭘 하며 이 지루함을 달래야 하나 생각하는 중에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우는 눈을 반짝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 쪽으로 뽀르르 나갔다.
“뭐 두고 간 거 있어요?”
“아니.”
“그럼 책 가지러 왔어요?”
태화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표정이 영 안 좋았다. 선우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밥 먹고 내려갈 때까지만 해도 평소와 다름없었는데 그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었다.
태화는 선우를 지나쳐 바로 옷방으로 들어갔다. 문 옆에 있는 빨래 바구니에 입고 있던 옷을 툭툭 벗어 넣고, 새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정장이었다. 문밖에서 안을 빼꼼 들여다보던 선우는 눈을 크게 뜨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디 가요?”
“어.”
“어디요?”
이번에는 고갯짓조차 하지 않았다. 태화는 선우를 힐긋 보며 셔츠 단추만 채웠다. 조끼를 입을까 말까 고민하는가 싶더니 그냥 재킷만 걸쳤다. 차콜 색 정장을 갖춰 입은 태화는 선우를 지나쳐 옷방을 나가려고 했다. 선우가 그 앞을 막아섰다.
“나도 데려가요……!”
문 앞에 서서 외치자 태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두통이 느껴지는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선우를 내려다봤다. 선우는 침을 꼴깍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저도 데려가 주세요.”
“넌 뭘 자꾸 데려가 달래. 얌전히 집에 있어.”
“너무 답답하단 말이에요.”
“네 발로 들어온 거야.”
“그래도…….”
선우가 말끝을 흐리는 사이 태화는 선우를 옆으로 휙 밀쳤다. 선우는 가벼운 힘에도 휘청이며 밀려났다. 그 틈에 태화는 방을 나서 본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협탁 서랍을 열어 트럭 키를 챙겼다. 밖으로 나가자 현관 앞에 웅크리고 앉은 선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콩알만 한 놈이 저기 처박혀서 또 뭘 하고 있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현관으로 간 태화는 쯧 혀를 찼다. 선우는 구두를 닦고 있었다. 무광인 구두에 광 좀 내 보겠다고 소매로 슥슥 닦는 중이었다. 아주 청승이란 청승은 다 떨었다.
“최선우.”
태화가 부르자 선우는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태화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말간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끙 앓았다.
“1분 안에 옷 갈아입고 나와.”
그 말에 선우는 벌떡 일어나 옷방으로 와다다다 뛰어 들어갔다. 그 와중에도 구두는 가지런하게 놓은 게 웃겼다.
태화는 옷방 안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픽 웃었다. 그러다 다시 미간을 구겼다. 가만 보면 저게 뭘 알고 저러는 것 같았다. 저렇게 깜찍하게 굴면 넘어가 줄 거라는 걸 알고 하는 짓거리 같아서 자존심이 상했다.
얼마 뒤 선우는 다시 급하게 뛰어나왔다. 태화는 선우를 슥 훑었다. 옷을 갈아입긴 했는데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어차피 전부 제 옷이라 선우에게는 많이 컸다. 조만간 옷을 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1분하고 34초 지났다.”
거짓말이었다. 시간은 재지도 않고 있어서 정말 1분이 지났는지, 아니면 1분 안에 왔는지 태화도 몰랐다. 그런데도 선우는 태화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말했던 1분이 지나서 안 데리고 가면 어떡하나 그 걱정뿐이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을 우물거리기만 하자 앞에서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태화는 선우의 아랫입술을 톡톡 두드리더니 선우를 지나쳐 다시 옷방으로 들어갔다. 밖으로 나왔을 땐 손에 검은 야구 모자가 들려 있었다. 선우에게로 다가오려다가 이번에는 방으로 들어갔다. 또 뭘 들고 나올까 지켜보던 선우는 태화의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자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는 선우의 앞으로 와 모자를 씌워 줬다. 머리통이 얼마나 작은지 그냥 씌우려니 훌렁훌렁해서 다시 사이즈를 줄여 씌웠다. 그제야 잘 맞았다.
“밖에 나가면 말 잘 들을 거야?”
묻는 말에 선우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태화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먼저 구두를 신었다. 선우가 닦아 놓은 구두였다.
선우에게도 신발을 줘야 하는데, 당연히 선우의 발에 맞는 신발이 없었다. 심지어 선우가 비를 뚫고 왔던 날 신었던 슬리퍼는 한쪽이 떨어져서 버린 지 오래였다. 태화는 잠깐 고민하다 하는 수 없이 제 슬리퍼를 내줬다. 선우는 그것도 좋다고 신고 따라나섰다.
“차 가지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태화는 후문 앞에서 선우에게 말하고 먼저 나갔다. 졸지에 창고에 혼자 남게 된 선우는 멍하니 문만 바라보며 서 있었다. 금방 올 것같이 말해 놓고서는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기다리기 지루해진 선우는 주변을 둘러봤다.
매일 보는 풍경이라 별다를 게 없었다. 다만 한쪽 구석에 서 있는 연육기 두 대는 볼 때마다 좀 을씨년스러웠다. 둘 중 뭐가 진짜 고기를 다질 때 쓰는 건지 몰랐다. 너무 추웠던 냉동 창고 속의 기억을 회상하다가 불현듯 눈을 크게 떴다. 태화가 이대로 자신을 두고 그냥 가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치사하게 굴었을까 싶다가도, 차를 가지고 온다던 사람이 깜깜무소식이니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선우는 후문을 열어 볼까 말까 무진 고민했다.
“말 잘 듣겠다고 했는데…….”
연신 문고리를 잡았다 놓길 반복했다.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불안이 더 커지는데 순간 밖에서 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소음에 선우는 몸을 크게 떨며 놀란 얼굴을 했다. 한 번 더 빵! 하고 경적이 울렸다.
“나오라는 건가?”
선우는 문고리를 잡아 돌리려다 말았다. 태화는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다. 함부로 나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밖에선 경적이 몇 번 더 울렸다. 그럴 때마다 선우는 어깨를 흠칫흠칫 떨면서도 밖으로 나가진 않았다.
얼마 뒤 후문이 벌컥 열렸다. 앞에 바짝 붙어 서 있던 선우는 몸을 쿵 부딪치고 뒤로 밀려났다. 그 바람에 모자가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선우는 잽싸게 모자를 주워 후후 입바람으로 먼지를 털어 내고 다시 썼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태화였다. 목 끝까지 차올랐던 불안이 단숨에 가셨다.
“왜 안 나와?”
“여기서 기다리라고 해서.”
선우의 말에 태화가 씩 웃었다. 표정 하나 없던 얼굴로 미소가 들어찼다. 커다란 손으로 선우의 뺨을 살짝 쥐었다가 놨다.
“잘했어.”
마치 키우는 개를 칭찬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래도 선우는 마냥 좋았다. 태화가 자신을 두고 가 버리지 않아서 좋았고, 칭찬해 줘서 좋았다. 뺨도 만져 줬다. 기다리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태화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당연히 하얀 트럭이 나올 줄 알았는데, 선우의 눈앞에 등장한 건 검은색 세단이었다. 그것도 누구나 한 번쯤은 뒤를 돌아본다는 이름난 외제 차.
태화는 운전석에 자연스레 올라탔다. 선우가 멀뚱멀뚱 서 있자 조수석 창문을 내렸다.
“안 탈 거야?”
“이거 아저씨 차예요?”
“어.”
“트럭은요?”
“그것도 내 차.”
선우는 그래도 선뜻 차에 타지 않다가 태화가 인상을 설핏 구기자 그제야 서둘러 조수석에 올랐다. 차는 미로 같은 골목을 잘도 달렸다. 이런 후진 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였다. 안 그래도 외제 차가 드문 동네라 태화의 차는 더 눈에 띄었다.
“아저씨 부자예요?”
선우는 차 내부를 구경하다가 태화를 보며 물었다. 태화가 힐끗 쳐다봤다.
“어.”
별스럽지 않은 어투였다. 하지만 듣는 선우는 놀란 눈을 떴다. 두 눈을 토끼처럼 똥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태화가 작게 웃었다.
“왜. 잘 물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건 아니고…….”
“말 나온 김에 너 옷이랑 신발 좀 사자. 백화점엔 못 가니까……. 인터넷으로 사야겠네. 오늘 집에 돌아가면 당장 사.”
선우는 괜스레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태화가 왜 그런 얼굴이냐는 듯 쳐다봤다.
“싫어?”
“아뇨. 좋아요.”
“근데 왜.”
“매번 받기만 하니까…….”
“아.”
태화는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뻗어 선우가 자꾸만 지근대는 아랫입술을 쓰다듬었다.
“넌 재롱 좀 떨어 주면 돼. 내가 워낙 애견인이라.”
말하고 씩 웃었다.
선우는 태화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하다가 이내 무슨 뜻인지 깨닫곤 눈살을 찌푸렸다. 아랫입술을 만지작대는 태화의 손을 콱 깨물었다. 태화가 아! 소리를 내며 선우를 쳐다봤다. 욕이라도 한번 해 주려는데 쳐다보는 꼴이 꼭 심통 난 개새끼 같아서 헛웃음만 나왔다. 이런 식으로 바로 재롱을 떨어 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골목골목을 지나 겨우 대로로 나왔다. 선우는 자신이 깨물어 댔던 태화의 손을 꼭 쥐고 차창 밖을 내다봤다. 얼마 만에 밖으로 나온 건지 몰랐다. 밖이 덥긴 더운지 사람들은 저마다 손부채질 하고, 땀을 닦았다. 선우는 좋은 차 안에서 쾌적하게 에어컨 바람을 쐬는 제 상황이 마냥 신기하고 좋았다.
그때 태화가 갑자기 뒤통수를 아래로 확 찍어 눌렀다.
“지금부터 내가 고개 들라고 할 때까지 계속 그러고 있어.”
선우는 깜짝 놀라, 말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왜 이러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군데군데 배치된 CCTV 때문일 것 같았다. 부영 시장 뒷골목에는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CCTV가 없었다. 하지만 대로로 나오자마자 여기저기 천지였다. 선우는 혹여나 태화에게 피해라도 갈까 봐 몸을 거의 반으로 접다시피 해서 웅크리고 바닥만 봤다. 얼마 뒤 태화가 턱을 쥐어 살짝 올렸다.
“너무 그럴 필요까진 없고.”
“그래도 저 찍히면 안 되잖아요.”
“아예 생각이 없는 건 아니네.”
태화는 킬킬 웃는 소리를 냈다. 선우는 고개를 살짝 틀어 그를 밉지 않게 쏘아봤다. 다시 태화의 손을 쥐고 주무르며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차는 한 시간여를 달려 인천의 어느 병원 앞에 도착했다. 지난번에 서원식이 입원했던 그 병원이었다. 병원 지하 주차장에서도 CCTV 사각지대에 차를 세운 태화는 선우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이제 일어나도 돼.”
선우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았다. 한 시간 동안 구부리고 있었더니 허리가 뻐근했다. 허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몸을 풀자 태화가 픽 웃었다. 그러나 금방 얼굴로 그늘이 졌다.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처럼 태화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아서 선우는 그의 손을 연신 조몰락거렸다. 그는 무감한 표정으로 선우의 볼을 가볍게 잡아 늘이더니 씨익 웃어 줬다.
“나오지 말고 차에 있어.”
“네.”
“금방 올게.”
태화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선우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점심을 많이도 먹은 것 같은데 배가 홀쭉했다. 그 많은 음식이 다 어디로 갔나 모를 일이었다. 손을 뻗어 마른 배를 슥슥 쓸어 보다 쩝 입맛을 다셨다.
“배 안 고파?”
“고파요.”
선우가 곧바로 대답했다. 참 먹성 하나는 좋은 놈이었다. 희한한 건 그렇게 먹고도 살이 안 찐다는 점이었다.
“기다려.”
태화는 한 마디를 남기고 차에서 내렸다. 혼자 차에 남게 된 선우는 차에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뒤 한번 돌아보지 않는 게 좀 서운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따라올 수 있어서 마냥 신이 났다. 태화가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서야 눈을 뗐다.
선우는 태화가 쓰다듬어 주던 배를 두 손으로 똑같이 쓰다듬었다. 밥 먹은 지 이제 겨우 두 시간 남짓 지났는데 정말 배가 고팠다. 배 속에 거지라도 든 모양이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 멀뚱거리며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태화가 다시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한 손에는 갈색 봉투가 들려 있었다.
“벌써 볼일을 다 본 건가?”
선우는 태화의 걸음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운전석 문이 열리고 태화가 상체만 들이밀었다.
“먹고 있어.”
봉투 안에 든 건 햄버거 세트였다. 선우가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자 태화는 품에 안기듯이 놓고 뒤로 물러났다. 글로브 박스를 열어 폴더 폰 하나를 꺼내 선우의 손에 쥐여 줬다.
“무슨 일 있으면 통화 버튼만 눌러. 바로 나올 테니까.”
“바빠서 전화 온 줄 모르면 어떡해요?”
“알아. 네가 거는 전화는 무조건 알아.”
태화는 짧게 대답하고 문을 닫았다. 다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선우는 품에 안긴 봉투와 폴더 폰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봉투부터 열어 햄버거를 꺼냈다. 야채보다 고기를 더 좋아하는 선우의 취향에 맞게 사이드는 감자튀김 대신 치킨 두 조각이었다. 버거도 하나로는 모자랄 거라 생각했는지 두 개였다. 하나는 불고기버거, 다른 하나는 새우버거였다.
작게 웃으며 콜라부터 마셨다. 두 개의 버거 중 새우버거를 먼저 들었다. 아직 안 먹었는데도 벌써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순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선우는 푸스스 웃으며 새우버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병원으로 들어온 태화는 그제야 뒤를 한번 힐긋거렸다. 최선우가 보이지는 않았다. 걸음도 느려졌다. 또라이 새끼를 차에 혼자 두려니 영 마음에 걸렸다. 물가에 내놓은 애 같았다.
“그냥 저번처럼 기절시켜 놓을 걸 그랬나.”
중얼거리다 픽 웃었다. 그랬다간 우는 소리를 또 얼마나 들을까 싶었다. 그래도 말은 잘 듣겠다 약속했으니 믿기로 했다. 실제로 오는 동안 말을 잘 듣기도 했다. 사실 후문 앞에서 경적을 그렇게나 울렸는데도 안 나와서 짜증이 났었다. 이 새끼는 꼭 모시러 가야 하나 싶어 씨근대며 갔는데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렸다는 말을 들으니 기가 차서 웃음만 나왔다. 하여간 꼴통은 꼴통이었다.
태화는 선우 생각에 픽픽 웃어 가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하지만 VIP 병실이 있는 층에 가까워질수록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땐 완전히 딴사람처럼 표정이 서늘했다. 스테이션을 지키던 간호사들은 태화를 단번에 알아봤다. 잊기 힘든 얼굴이긴 했다. 누구에게 왔다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문을 열어 줬다.
복도로 들어서자 지난번처럼 검은색 정장을 입은 떡대들이 우글우글했다. 마치 장례식장 같았다. 태화가 입은 차콜 색 정장이 튀어 보일 정도였다.
“이번에는 또 뭐랍니까?”
태화는 지난번에 대화를 나눴던 남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남자는 반갑게 인사하려고 손을 올렸다가 태화의 표정이 안 좋은 걸 읽고 머쓱한 표정으로 내렸다.
“뭐냐고요.”
“지난번에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계속 허리가 안 좋으셨나 봐. 집 2층에서 1층으로 계단 내려가다 주저앉으셨다네.”
“정신은요?”
“말짱하시고.”
“다 죽어 간다면서요.”
태화는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안광이 설핏 서렸다. 남자는 큼큼 헛기침하며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태화가 씹, 하고 욕을 짓이겼다.
“뺑끼 친 겁니까?”
“야, 아무리 그래도 뺑끼가 뭐냐, 뺑끼가. 나 이래 봬도 전무다. 존중 좀 해 주라.”
“구라, 치셨냐고요.”
일부러 저급한 말을 골라 했다. 남자는 발끈하려다 태화의 표정을 보고 마른침만 삼켰다.
“회장님이 너 보고 싶다고 하셔서 그랬어, 인마. 넌 회장님 위중하다는 소리 들어야 오잖아.”
태화는 쯧 혀를 찼다. 뒈진 것도 아니고, 정신도 멀쩡한 양반 보려고 여기까지 온 시간이 아까웠다. 게다가 영감이 정말 죽었으면 어떡하나 걱정한 것도 짜증 났다.
“갑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려고?”
“다음부터 저 속이지 마세요.”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 돌아섰다.
“안에 재화 들어가 있는데, 안 보고 그냥 가?”
그대로 복도를 나가려던 태화가 멈칫했다.
서재화가 여기 와 있다고?
다시 뒤를 돌아보는데 병실 문이 드륵 열렸다.
“이제 나왔으니까 보고 가면 되죠.”
서재화였다.
결국 태화는 원식을 만나지 않고 아래로 내려왔다. 옆에는 재화가 따라붙었다. 잘 지냈니, 애인은 생겼니, 자꾸 시답잖은 걸로 말을 걸어서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껄렁껄렁한 몸짓은 그대로였고, 멋을 이상하게 부리는 것도 그대로였다. 재화는 새하얀 백 정장을 입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쯤 쳐다볼 정도로 강렬한 패션이었다. 태화는 일부러 재화와 두 발자국 떨어져 걷는데 재화가 자꾸만 옆으로 바짝 붙어 따라왔다.
지하 주차장으로 나온 두 사람은 동시에 차 키를 눌렀다. 삑삑, 소리와 함께 차 두 대에 불이 들어왔다. 태화는 씁 소리를 내며 미간을 구겼다. 제 차 바로 옆에 서재화의 차가 나란히 주차돼 있었다. 하필이면 우연이 이럴 때 튀어나왔다. 재화는 실실 웃으며 태화의 차 타이어를 툭 찼다.
“네 거냐? 차 좋다.”
태화는 혀끝에 매달린 욕을 겨우 삼켰다. 씨발놈이 왜 남의 차를 발로 차는지 몰랐다. 대신 인상을 험하게 구기며 쳐다보자 서재화는 겁먹은 척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다시 씨익 웃었다. 재화는 담배를 한 대 꺼내 물더니 태화에게 담뱃갑을 들이댔다.
“끊었어.”
“하여간 지 몸은 드럽게 챙겨요.”
“그리고 여기 금연 구역이오.”
그제야 재화도 아, 소리를 내며 물고 있던 담배를 집어넣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버렸을 걸 다시 담뱃갑 안으로 넣는 걸 본 태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돈이 궁하기는 궁한 모양이었다.
“저건, 형 차야?”
태화는 옆에 있는 차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새파란 색의 스포츠카였다. 담배는 아끼면서 꼴에 차는 또 좋은 걸 탔다. 서재화는 제 차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어깨를 으쓱이기도 했다.
“새로 하나 뽑았다.”
“뭔 돈이 있다고.”
“야, 나도 돈 있어. 학교 가기 전에는 그래도 내 밑으로 100명은 있었다.”
재화가 뻐기듯 말하자 태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옛날의 영광에 젖어 사는 건 알겠는데 과장이 좀 심했다.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에도 재화가 거느리는 놈이 100명까지 되지는 않았다. 태화가 알기로 70명 남짓이었다.
“근데 쟤는 누구냐?”
재화가 옆을 바라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태화는 그 시선을 따라갔다가 미간을 구겼다. 재화는 조수석에 탄 선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콜라를 쪽 빨던 선우는 둘이 동시에 쳐다보자 두 눈을 몇 번 끔뻑이다가 곧 고개를 휙 숙였다. 어찌나 요란하게 움직이던지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지고, 글로브 박스에 이마를 부딪치고 난리였다.
“생긴 걸로 봐선 고기도 제대로 못 썰게 생겼는데?”
재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는 뒤통수만 빼꼼 드러난 선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태화는 한숨을 쉬려다 말고 대신 피식 웃었다. 고기도 제대로 못 썰게 생겼다는 서재화의 감상이 웃겼다.
못 썰기는. 토막 난 시체를 보고도 놀라기는커녕 믹서기로 갈아 치운 놈인데.
태화도 선우를 바라봤다. 마른 어깨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겁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참 많은 놈이었다.
“어어.”
옆에서 웃음기 섞인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딱 보니까 견적 나오네. 쟤, 네 이거지?”
태화는 재화를 돌아보고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재화는 새끼손가락을 딸랑딸랑 흔들고 있었다. 저건 생각이 없는 건지, 편견이 없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근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개소리 작작하…….”
“아! 와! 와, 진짜 대박……!”
무슨 일인지, 재화는 언성을 높이며 놀란 얼굴을 했다. 과장된 표정과 몸짓으로 놀랐다는 걸 마구 표현했다. 선우의 낯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조수석으로 걸어가다가 태화에게 붙들렸다. 내내 짜증만 내던 태화는 처음으로 서늘한 시선을 보냈다. 재화는 자신을 쳐다보는 살기 어린 눈빛 앞에서도 기 한번 죽지 않았다. 오히려 빙글거리며 웃었다. 알았다는 듯이 제 팔뚝을 붙든 태화의 손을 뗐다.
“너 쟤 누군지나 알고 끼고 사는 거야?”
느닷없는 말이 나왔다. 태화는 눈에 든 빛을 끄고 서재화를 삐뚜름하게 쳐다봤다.
“누군데.”
“몰라?”
“묻잖아, 누구냐고.”
태화가 물었지만 재화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선우와 태화를 몇 번이고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닌가 봐.”
재화는 선우를 빤히 보며 중얼거렸다.
“말을 하려면 똑바로 해.”
“아니. 착각, 착각. 그냥 닮은 사람.”
“그러니까 누구랑 닮았냐고.”
태화는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뭔 짓인지 몰랐다. 이래서 재화가 싫었다. 음흉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누구냐니까.”
“옛날에 나랑 붙어먹던 애. 내 좆 존나게 잘 빨던 애 있어.”
“너 호모질도 했었냐?”
“지는.”
재화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태화는 뭐라고 더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서재화의 말마따나 저 역시도 호모질을 하는 중이라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별말 못 하고 쯧 혀를 차자 서재화가 키들댔다. 서재화는 선우에게 흥미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태화만 쳐다봤다.
“영감님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안 궁금하냐?”
“뭐라고 했는데.”
“궁금한 척해 주기는, 좆도 안 궁금하면서.”
재화는 습관처럼 담뱃갑을 꺼내다가 아차 하고 다시 집어넣었다.
“나한테 미안하다더라. 난 뭐 다시 조직으로 들어와라, 한자리 내주겠다. 이런 거 예상했는데 그냥 미안하다고 말하더니 땡. 씨발, 노친네 끝까지 코미디지, 아주.”
“아직도 영감님 밑에서 일하고 싶소?”
“내가 영감 밑에서 일하고 싶은 거겠냐. 영감님 뒈지면 그 자리 꿰차고 싶은 거지.”
서재화는 의중을 숨기지 않았다. 대놓고 부친의 자리를 탐냈다. 태화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5년 동안 갇혀 있다 나왔으니 성격이 좀 죽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서재화는 예전보다도 더한 후레자식이 돼 있었다.
태화는 한참 고개를 끄덕이다가 재화를 똑바로 바라봤다.
“형이 한 짓이지?”
재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영감님.”
“영감님, 뭐?”
“영감님 뒈질 뻔한 거 형 짓이냐고.”
“뭔 소리인지 모르겠네.”
서재화는 거드름을 피웠으나 태화는 동요하지 않았다. 미간도 구기지 않았고, 짜증도 내지 않았다. 무감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감정이 죄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다시는 영감님 건들지 마.”
“키워 줬다고 꼴에 피 한 방울 안 섞인 애비 편을 드냐?”
“너랑 나는 피가 섞였냐?”
태화의 말에 서재화는 쩝 소리를 냈다. 태화의 말대로 둘 역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였다. 운 나쁘게 서원식에게 입양돼 형제 노릇을 하는 것뿐이었다.
“영감님이 끝까지 형한테 기대조차 안 해서, 그거 때문에 복수하고 싶어서 이래?”
“뭐, 이 씨발놈아?”
서재화가 처음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언성이 높아지기까지 했다. 반면 태화는 여전히 무던한 표정이었다.
“그런 거면 번지수 잘못 짚었어.”
“아까부터 뭔 개소리야, 씨발.”
“병신.”
바람 섞인 목소리로 욕을 뱉자 서재화는 아예 눈알을 부라렸다.
“영감님은 죽는 것보다 늙는 게 더 두려운 사람이야.”
태화는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재화를 가만히 응시했다.
“혼자 뒈질 용기는 좆도 없으면서 주름 자글자글한 낯짝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건 또 지옥인 양반이라고.”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주욱 이어졌다.
“복수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너처럼 대가리 안 쓰고 감정만 앞서서 일 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돼.”
거기까지 말하고 서재화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가자 거칠게 뿜어지는 서재화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태화는 재화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무감했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죽이는 게 능사가 아닌 일도 있는 거야, 등신아.”
“개새끼가!”
“그리고.”
재화가 발끈하자 태화는 어깨를 꾹 말아 쥐었다. 강한 힘으로 찍어 누르자 재화도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웃는 얼굴 그대로 재화의 귓가로 좀 더 바짝 다가갔다.
“영감님 목숨은 내 거야. 건들지 마.”
조용히 읊조렸다. 말을 마친 태화는 뒤로 성큼 물러나 재화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서재화는 붉어진 낯짝 그대로 헛웃음 쳤다. 저를 지나쳐 운전석에 오르는 태화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빵! 경적이 울렸다. 그 바람에 깜짝 놀란 서재화는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다 별수 없이 옆으로 비켜섰다. 태화의 차가 유유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재화는 태화의 차가 사라질 때까지 쳐다봤다.
“저거 변태 새끼 아니야?”
중얼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하여튼 서태화의 성깔은 알아줘야 했다. 멀끔한 척하고 다녀도 서태화는 개새끼였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서재화는 태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싸이코 새끼가 평범한 인간처럼 돌아다니는 꼴이 우스웠다.
“힘은 더럽게 세지.”
태화가 찍어 눌렀던 어깨가 아직도 아팠다. 재화는 어깨를 빙빙 돌리며 차에 탔다. 중고로 산 차라 시트가 벌건 색인 게 마음에 안 들었다. 태화의 차에 비해 급이 한참 떨어지는 것도 마뜩잖았다. 쯧 혀를 차던 서재화는 무슨 일인지 갑자기 큭큭거리며 웃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놈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돌겠네.”
희멀건 낯짝이 떠올랐다. 웃음소리가 점점 짙어졌다.
태화는 룸 미러로 서재화를 쳐다봤다. 안 보일 때까지 계속 응시했다.
서재화는 최선우를 정말 아는 눈치였다. 옛날에 붙어먹던 놈이라는 말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지만 같잖지도 않은 말이라는 걸 알았다. 재화는 호모 짓을 할 새끼가 아니었다. 수절했으면 했지, 사내놈 후장에 자지를 박아 넣을 정신은 못 되는 놈이었다.
“어디서 뺑끼를 쳐.”
쯧, 혀를 찼다. 저 또라이 같은 새끼 머릿속에 또 무슨 생각이 들어찼는지 몰랐다. 태화는 좀 더 생각을 이어 갔다. 서재화는 필요에 의해선 뭐든 하는 새끼였다. 워낙 답도 없는 변태 새끼라 사람을 고문하다가 죽였다. 물론 살인을 업으로 삼는 제가 할 말은 없었으나 그래도 재화는 정도가 좀 심했다.
만약 최선우를 고문하다 죽인다면?
“씨발 새끼가.”
아직 일어난 일도 아닌데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왜인지 상상만으로 기분이 더러워졌다. 몇 번 더 씨발, 씨발 욕을 갈기던 태화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재화가 선우를 건드리는 건 불가능했다. 태화는 확신했다. 제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할 거니까.
“개새끼가 누구 걸 건드려.”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툭 내뱉는데 옆에서 힉 소리가 들렸다. 태화는 무심코 옆을 돌아봤다가 헛숨을 터뜨렸다. 선우가 아직도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이마가 아예 무릎 위에 딱 달라붙은 상태였다. 손에는 동글동글 뭉쳐진 햄버거 포장이 꼭 쥐어져 있었다. 햄버거도 치킨도 야무지게 다 먹은 모양이었다. 태화는 미련하기 짝이 없는 선우를 넌지시 쳐다보다가 손등으로 뺨을 쓰다듬었다. 선우가 한 번 더 힉! 소리를 냈다. 참 좆밥 같은 소리였다.
“왜 계속 그러고 있어?”
“화 다 냈어요……?”
“뭐?”
잠깐 신호에 걸린 사이 내려다보자 선우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선우는 기가 죽은 얼굴로 태화의 눈치를 봤다.
태화는 차 앞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더니 차에 타서는 아예 화가 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자신이 여기 있는데도 전혀 모르고 혼잣말하는 모습에 선우는 가만히 몸 사리기를 선택했다. 지금은 좀 괜찮아졌나 싶어서 슬쩍 올려다보는데 태화가 픽 웃었다. 비웃음처럼 느껴졌지만, 일단은 안심되었다. 적어도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화난 거 같아서 그러고 찌그러져 있던 거야?”
“네.”
“나 지금까지 너한테 화낸 적 없는데.”
태화의 말에 선우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가 CCTV 생각에 다시 확 숙였다. 그 바람에 또다시 차에 이마를 부딪쳤다. 태화가 킬킬 웃으며 이마를 쓰다듬어 줬다. 선우는 태화의 손길을 가만히 느끼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화낸 적이 없다니. 그럼 뺨을 때리고, 배를 걷어차고, 손가락뼈를 어긋나게 하고, 기절까지 시킨 건 다 재미로 한 일인가 싶었다.
그 모든 일이 화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거라면, 화를 낼 땐 진짜 죽이려나 겁나기도 했다. 절로 오그라든 어깨를 파르르 떨자 태화의 웃음소리가 더 짙어졌다. 지금 죽이지는 않을 것 같아서 겨우 안심됐다.
“안 심심했어?”
“아저씨 기다리는 건 별로 안 심심해요. 햄버거도 엄청 맛있었고.”
“너.”
태화는 반쯤 접어 뜬 눈으로 선우를 내려다봤다.
“애교는 좀 줄여야겠다.”
뒤이어 나온 말은 조금 뜬금없었다. 선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교 부린 적이 없는데 갑자기 애교를 줄이라니, 무슨 뜻인지 몰랐다.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태화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불현듯 무언가 생각났는지 휴대폰을 꺼냈다.
“너 얘 알아?”
선우의 눈앞에 들이밀어진 건 누군가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이었다. 치킨집에서 회식이라도 하다가 찍은 사진인지 테이블에는 먹다 남은 치킨과 맥주잔이 가득했다. 그 가운데에서 한 남자가 맥주를 들고 있었다. 사진 찍히는 게 익숙한지 씨익 웃는 얼굴이 자연스러웠다. 선우는 사진 속 남자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어? 하는 소리를 냈다.
“방금 전에 차 앞에서 아저씨랑 얘기하던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얘 아냐고.”
“아니요. 처음 봐요.”
선우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태화가 옆으로 밀어 다른 사진도 보여 줬지만, 마찬가지로 낯선 얼굴이었다. 혹시나 손님으로 온 적이 있나 싶어 기억을 더듬어 봐도 남자는 없었다. 모르겠다는 식으로 한 번 더 도리질 치며 태화를 봤다.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거짓말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것 같았다. 선우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끔뻑이며 마주 보자 태화는 인상을 구겼다.
“씨발놈이, 날 속여?”
또다시 혼잣말하며 액셀을 좀 더 밟았다. 짜증이 나면 속도를 즐기는 타입인 듯했다. 선우는 괜스레 시트를 꾹 말아 쥐었다.
“이 사람이 누군데요?”
“형.”
“친형?”
“미쳤어? 저딴 얼굴이랑 내가 한 핏줄이게?”
“이 사람도 잘생겼는데.”
선우가 아무 생각 없이 말하자 태화가 홱 쳐다봤다. 미간 주름이 더없이 깊어졌다. 선우에게 보여 주던 휴대폰 화면을 끄고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는 소리에 선우만 어깨를 움칠거렸다.
“안전벨트나 매.”
태화의 말에 선우는 얼른 안전벨트를 채우고 다시 웅크렸다. 슬쩍 시선을 올려 그를 쳐다봤다. 어째 기분이 저기압인 것처럼 보였다.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은데 미간 주름으로 짜증이 났음을 알 수 있었다.
선우는 태화가 왜 갑자기 짜증을 내는지 몰랐다. 묻는 말에 착실히 대답했고, 지금까지 말도 잘 들었는데 뜬금없이 이러니 좀 난감했다.
형이라는 사람이랑 사이가 안 좋은가……? 그런데 친형이라고 물어봐서 짜증 났나? 닮진 않았어도 두 사람 다 잘생기긴 했는데……. 뭐, 그래도 아저씨가 훨씬 더 잘생겼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던 선우는 커다란 눈으로 눈치를 살살 보다가 기어 위에 얹어진 태화의 손을 냅다 가져왔다. 손을 조몰락거리자 옆에서 헛헛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곧 딱밤이 이어졌다.
“아!”
소리치며 쳐다보자 태화는 그제야 좀 웃었다. 선우는 벌게진 이마를 문지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뇌가 흔들릴 정도로 아팠지만, 이걸로 태화의 짜증이 가셨다면 이 정도 고통쯤은 참을 수 있었다. 다시 손을 잡자 태화는 숨을 짧게 내쉬더니 더는 때리지도, 욕을 하지도 않았다. 집에 갈 때까지 선우는 태화의 손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 * *
선우는 어두운 골목을 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밤이어도 이 정도로 어두울 수 있나 싶을 만큼 앞이 캄캄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서 팔을 휘적이며 앞에 장애물이 있나 없나 확인해야 할 정도였다. 얼마나 뛰었는지 헉헉대는 숨소리가 컸다. 문제는 선우의 숨소리보다 뒤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더 크다는 점이었다.
선우는 뒤를 휙 돌아봤다.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주 잠깐 무언가가 번뜩였다. 빛도 없는 곳에서 혼자 빛을 발하는 그건 분명 칼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식칼도 아니고 잘 벼려진 회칼이었다. 선우는 칼을 쥔 사람의 낯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저 사람에게 잡히면 죽는다는 것이었다.
‘무서워, 싫어. 살고 싶어. 살 거야.’
선우는 겁에 질린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뒤에서 쫓아오는 걸음 소리가 빨라졌다. 선우도 덩달아 속도를 높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입 밖으로 줄줄 흐르는 침을 닦을 겨를도 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딴에는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있는데 어쩐지 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탁탁탁, 뒤따라오는 소리는 공포로 다가왔다. 선우는 정체불명인 괴한의 발소리에 맞춰 심장이 쿵덕거리는 걸 느꼈다. 이러다가는 잡히기 전에 심장이 먼저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체력 좀 길러 놓을걸……!
선우는 과거의 자신을 책망하며 눈물을 흘렸다. 콧물마저 주룩 흘러나왔다. 눈물이며 콧물이며 땀이며 온갖 걸 줄줄 흘리며 뛰었다.
잡히면 죽는다. 잡히면 죽는다. 잡히면 죽는다.
잡히면 죽는다. 잡히면 죽는다!
순간 목덜미가 잡혀 몸이 뒤로 휙 끌려갔다.
‘아저씨! 아저씨……!’
선우는 자신을 죽이려 드는 살인마 앞에서 또 다른 살인마를 부르며 버둥거렸다. 태화가 아무리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선우에게는 제 삶을 지켜 준 사람이었다.
‘아저씨……! 도와줘요! 흐윽…….’
계속 태화를 불렀다. 제게 칼을 들이미는 괴한에게 저항하며 목이 터져라 아저씨! 하고 외쳤다.
‘최우선?’
멀지 않은 곳에서 태화의 음성이 들렸다. 이번에도 이름을 틀렸지만 상관없었다. 선우는 태화가 곁에 있다는 안도감에 눈물을 더 쏟아 냈다. 여기 있다고, 구하러 와 달라고, 빼액 소리치자 저쪽에서 익숙한 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태화가 구하러 와 주고 있었다. 이제 다 해결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눈앞으로 섬광이 스쳤다.
‘헉!’
선우는 허겁지겁 숨을 들이마시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가슴에 회칼이 푹 꽂혀 있었다. 너무 아프면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선우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꺽꺽거리기만 했다.
피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분수처럼 쏟아지는 드라마나 영화와는 달랐다. 저쪽에서는 여전히 태화의 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런 꼴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젓던 선우는 돌연 눈을 크게 떴다. 목구멍에 고여 있던 숨이 툭 터져 나갔다.
칼을 쥔 사람은 다름 아닌 선우의 부친이었다.
“으아악!”
선우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본능적으로 가슴부터 더듬어 봤다. 손안으로 축축한 게 만져져서 기겁하며 내려다봤으나 피가 아닌 땀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담뿍 젖어 있었다. 베개도 눈물이며 침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선우는 꿈에서 빠져나왔음에도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살갗을 찢고 들어오던 칼날의 감각이 아직도 선명했다. 주변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공포감과 태화를 만나지 못한 허탈감도 계속 이어졌다.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죽은 부친을 본 게 가장 충격적이었다.
“아빠가……. 날 죽이려고 했어.”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죽였어…….”
꽉 잠긴 목소리를 겨우 짜내 말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이런 꿈을 꾼 건지 알 수 없었다. 오늘은 꽤 좋은 하루였는데 꿈 때문에 최악의 하루로 기억될 터였다. 한 달 만에 외출도 하고, 태화의 외제 차를 타 보기도 하고, 그가 햄버거도 사 준 아주 완벽한 날이었다. 그런데 악몽이 모든 걸 망쳐 버렸다.
선우는 코를 훌쩍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터덜터덜 걸어 태화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선우는 침대로 올라갔다.
“아저씨……. 흑, 아저씨…….”
태화를 보자 눈물이 더 쏟아졌다. 잘 때 건드렸다고 태화에게 맞을 각오까지 하며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꾸물거리며 팔을 가져와 베자 그가 움찔댔다.
“아저씨…….”
“어…….”
비몽사몽으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우는 그 목소리에 안심이 돼 긴 숨을 내쉬었다. 콧물이 죽 흐르는 게 느껴졌다. 훌쩍거리며 코를 먹자 태화가 설핏 눈을 떴다. 아직 잠에 취해 있는 눈이 선우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선우는 숨죽여 울며 태화와 시선을 맞췄다. 태화는 한참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더니 곧 미간을 구겼다.
“뭐야. 왜 울어?”
“꿈……. 나쁜 꿈 꿔서.”
“씹.”
태화는 버릇처럼 욕을 짓이기고 팔을 너르게 벌렸다.
“더 들어와.”
선우는 태화에게 더욱 몸을 치댔다. 너른 품에 안겨 흐느껴 울었다. 태화의 손이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다가 갑자기 목덜미를 만졌다. 뺨도 만지고 팔도 더듬거리더니 느닷없이 옷 속으로 손이 쑤욱 들어왔다. 선우가 흠칫 떠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 만졌다.
“미친, 땀 좀 봐라. 씻겨 줄까?”
어느새 잠이 완전히 깬 태화가 뒤로 슬쩍 물러나며 물었다.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냥 안아 줘요.”
태화의 가슴팍에 이마를 대고 중얼거렸다. 태화는 별수 없다는 듯 한숨을 짧게 쉬고 선우를 꽉 끌어안았다.
“깨우지 그랬어.”
“그래서 깨웠잖아요…….”
“아. 그러네.”
태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우의 정수리에 입술을 맞댔다. 머리카락마저도 축축이 젖어 있었다. 한 번 더 씻자고 말했지만, 선우는 완강했다. 태화와 떨어지면 죽는 줄 아는 것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안심이 되어서 그런지 선우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울음소리를 참아 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훌쩍이자 태화가 이마에 쪽 입을 맞춰 줬다. 선우는 발갛게 질린 눈으로 태화를 올려다봤다. 태화의 표정은 무감했다. 미간을 찌푸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웃지도 않았다.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은 얼굴로 가만히 쳐다봤다.
선우는 그 모습에서 묘하게 다정을 느꼈다. 이상했다. 전혀 다정하지 않은 얼굴이었는데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게 퍽 서러워서 선우는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울음을 엉엉 토해 냈다.
“이제 괜찮아. 또 나쁜 꿈 오면 내가 갈아 줄게.”
“흐…….”
“눈 감고.”
선우가 말을 안 듣자 태화는 선우의 두 눈두덩이 위로도 입을 맞췄다. 다시 눈을 뜨려 할 땐 아예 혀로 핥았다. 눈을 뜨면 뽑아 먹겠다는 듯이 쫍쫍 소리를 내며 빨아 대는 탓에 선우는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부들부들 떨어 가며 눈을 힘주어 감은 모습에 태화는 픽 웃었다.
“네 인생에 나쁜 건 나 하나로도 충분해.”
나직한 음성이 웅웅 울렸다. 선우는 태화의 옷자락을 꾸욱 말아 쥐었다. 두려움에 빠르게 뛰던 심장이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일어난 게 불과 몇 분 전인데, 선우는 악몽 따위는 생각하지 못했다. 제 몸을 쓰다듬는 뜨거운 온기나, 이마에 맞닿은 폭신한 입술, 쿵쿵 세차게 뛰는 상대의 심장 소리. 온 감각이 태화를 향해 있었다. 저만의 작은 성벽 같았다.
* * *
최선우가 사라진 지도 한 달이 넘었다. 동열은 또다시 부영 시장으로 향했다. 아직도 선우는 실종자 명단이 아닌 가출자 명단에 올라 있었으나 한동열은 선우 역시 어떠한 사건에 휘말렸다고 여겼다. 설령 가출일지라도 단순 가출은 아닐 거라는 예감이었다.
물론 이런 한동열의 의견은 경찰서 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왜 일만 더 만들어 오냐는 동료들의 질타가 쏟아졌고, 탁성모는 집착 좀 그만하라며 혀를 찼다. 강력 팀 팀장이라는 새끼가 그랬다.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동열 역시 다른 사건에 더 집중하려 노력해 봤으나 자꾸 부영 시장이 떠올랐다.
“부영 시장.”
한동열은 차에서 내려 시장 입구에 크게 걸린 ‘부영 시장’이라는 간판을 올려다봤다. 최근까지도 CCTV를 전부 확인했으나 최선우가 시장 밖을 나온 영상은 찾지 못했다. 시장 안을 오가는 차 트렁크에 들었을 수 있었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건 정말 범죄에 연루된 것이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한동열은 부영 시장으로 다시 발을 들였다. 걷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전에는 여기저기 들러 말을 묻더니 오늘은 갈 곳이 정해진 것처럼 앞만 보고 걸었다. 시장 중앙에 있는 태화 정육으로 가는 길이었다. 최선우도 최선우였으나 서태화도 궁금했다. 최선우의 실종과 관련이 있다는 것까진 연관 지을 수 없어도 어쨌든 수상한 놈인 게 분명했다.
오늘은 별일이 없는지 태화 정육이라고 적힌 간판에 불이 반짝 들어와 있었다. 가게 밖에 서서 잠깐 안을 들여다봤다. 안에서는 태화가 고기를 턱턱 써는 중이었다.
“훤칠하네.”
한동열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태화를 관찰했다. 지난번과는 좀 다른 분위기였다. 검은 티셔츠만 입고 나왔을 땐 어느 조직에 속한 깡패 새끼처럼 보이더니 체크 셔츠를 걸치고 있는 걸 보니 영락없이 수더분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동열은 여전히 태화의 인상이 그다지 좋다고 느끼진 않았다. 키도 거의 2미터를 찍을 법한 거구라 멀리서 봐도 위압감이 상당했다. 짧은 감상을 마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니 문 앞에 뭔가 놓인 게 보였다.
“뭐야, 이건?”
택배 상자였다.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망설임 없이 집어 들었다. 동열은 택배 송장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범죄에 쓰일 법한 살벌한 물건이라도 들지 않았을까 하는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송장에 적힌 건 성인용품점 이름이었다. 요즘은 받는 사람이 민망하지 않게 다른 건전한 업체명과 물품명으로 위장도 해 준다던데 상자에는 버젓이 ‘4단 조절 바이브레이터’라고 적혀 있었다.
“얼마나 싸구려인 데에서 산 거야?”
피식 웃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태화는 반사적으로 인사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동열이 인사하자 태화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을 때는 얼굴에 짜증이 살짝 깃들었다. 하지만 태화는 곧 빙긋이 웃었다.
동열은 헛숨이 터져 나오려는 걸 속으로 삼켰다. 쳐다보자마자 짜증스레 인상을 구기다 다시금 미소를 띤 건 표정을 숨기지 못한 게 아니었다. 일부러 그런 것이라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적개심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 태화를 보며 한동열은 작게 혀를 찼다. 대한민국 형사를 가지고 놀려는 꼴이 마뜩잖았다.
“저 기억하시죠?”
“예. 용지서에서 나왔던 한동열 경사님이요.”
“제 이름까지 외우셨네요?”
“기억력이 워낙 좋아서요.”
“그러시겠죠.”
동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로 묘한 기류가 흘렀다. 둘 다 웃는 얼굴로 상대를 보기는 했지만 진짜 웃는 건 아니었다.
“오늘도 불 꺼져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장사하고 계셨네요.”
“무슨 일로 다시 오셨습니까.”
“별건 아니고 그냥 이번에도 탐문이요. 아, 맞다. 이거.”
한동열이 택배 상자를 내밀었다.
“가게 앞에 택배가 와 있어서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태화는 한쪽 장갑을 벗어 두고 한동열이 건넨 상자를 받아 들었다. 송장을 살피던 낯이 짜증스레 구겨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태화는 쯧, 혀를 차고 상자를 카운터 옆 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던졌다. 다시 한동열을 마주할 땐 평소와 같이 말끔한 얼굴이었다.
“감사합니다.”
“애인분이랑 쓰실 건가 봐요.”
“부끄럽네요.”
부끄럽다고 말하는 태화는 전혀 부끄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애인과 쓴다는 말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혼자 오셨네요. 파트너분은 또 옆집에 가 계십니까?”
“오늘은 저 혼자 왔습니다.”
“정식 수사는 아닌가 봅니다.”
“예, 그냥 제가 개인적으로 수사하는 겁니다.”
“아.”
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 들고 있던 칼을 도마 위로 내려놓으며 나머지 장갑도 마저 벗었다.
“혹시 우림동에 꽃다방이라고 아십니까?”
“우림동이면…….”
익숙지 않은 동네를 떠올리듯 태화가 뒷말을 끌었다.
“그……. 유명한 동네 아닙니까?”
“예. 집창촌으로 유명한 동네 맞습니다.”
한동열은 굳이 ‘집창촌’이라는 단어에 힘을 줬다. 태화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아 소리를 냈다.
“한 번도 안 가 봐서요. 꽃다방이라는 곳도 처음 듣고요. 그쪽은 아마 옆집 청과물 사장님이 더 잘 알 텐데. 저번에 저한테 한번 같이 가자고 하셨거든요. 전 그런데 영 관심이 없어서 안 가기는 했지만.”
“그럼 이분들도 모르시겠네요.”
“누구?”
한동열은 주머니에서 사진 두 장을 꺼냈다. 고기가 든 진열장 위에 사진을 올려놨다. 지영환과 최선우의 사진이었다. 영환은 어느 건물 앞에서 호쾌하고 웃는 사진이었으나 최선우는 증명사진이었다.
아무리 주변 사람들을 쑤셔도 선우의 평소 사진 한 장이 나오지 않았다. 동열은 별수 없이 선우의 주민 등록 사진을 인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제 겨우 성인이 된 놈이라 주민 등록 사진과 지난번에 봤던 선우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라면 사진 속 최선우는 실제보다 더 밝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한동열은 사진 속 밝게 웃는 선우를 감상하며 피식 웃다가 태화를 봤다. 그는 무감한 표정으로 두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동열은 어느 쪽으로 시선이 더 오래 머무나, 세심하게 관찰했으나 번갈아 쳐다보는 시간은 거의 비슷했다. 서늘한 인상을 주는 눈을 몇 번 끔뻑이던 태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둘 다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아, 예.”
“이분들이 실종된 분들이십니까?”
“예. 한 명은 실종된 지 벌써 8개월 가까이 되고, 이쪽은 이제 한 달 좀 넘습니다.”
“일이 많으시겠어요.”
태화는 웃으며 말했지만, 전혀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게 한동열의 심기를 건드렸다. 저 미소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기 싸움이라면 한동열도 자신 있었으나 태화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서태화는 기 싸움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여유가 흘러넘쳤다. 별수 없이 자존심이 상했다. 동열은 불편한 마음을 감추고 똑같이 미소 지었다.
“이번에도 실례가 안 된다면 집을 좀 둘러볼 수 있을까요?”
“오늘도 또…….”
그때 어딘가에서 큰 소리가 났다. 무언가가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아! 하는 사람 목소리도 들렸다. 동열은 곧바로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태화의 뒤에 있는 창고 안에서 난 소리였다. 분명했다.
“안에 누가 있나 봐요.”
한동열이 창고 문을 쳐다보며 묻자 태화가 그 사이를 막아섰다.
“대학 후배 놈이 놀러 와서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아……. 대학 후배.”
한동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믿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근데 사장님은 나와서 일하고 계시고.”
“후배가 아마 지금 일어났을 겁니다. 오랜만에 만나서 어젯밤에 진탕 마셨었거든요. 저는 가게 열어야 하니까 일찍 일어났지만, 저놈은 이제야 일어나서 기어 나온 걸 거예요. 나오다 넘어지기라도 했나 봐요. 경사님도 지난번에 봐서 아시잖아요. 저희 집 계단이 꽤 가파른 거.”
“그러시구나. 그럼 집 안 좀 둘러봐…….”
“그건 어렵겠는데요.”
태화가 동열의 말을 뚝 끊었다.
“영장 있으세요?”
“예?”
“아, 개인적인 수사라고 하셨죠. 영장은 당연히 없겠네요.”
웃음기가 은은하게 섞인 어투였다. 한동열은 그만 참지 못하고 감정을 드러냈다. 인상이 험악해졌다. 짜증을 숨기지 못하고 미간을 구긴 채 쳐다보자 태화는 입꼬리를 조금 더 끌어 올렸다.
“이런 식으로 계속 의심하고 영장도 없이 집 안 수색하면 저도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거든요.”
한동열이 뭐라고 하려는 찰나 딸랑, 하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태화는 으레 손님에게 인사했다. 어째 조금 전보다 음성이 더 밝아진 것 같았다. 여자는 단골인지 들어오자마자 화이트보드에 적힌 세일 목록부터 익숙하게 훑었다. 그사이 태화가 진열장 위에 있는 사진 두 장을 동열 앞으로 밀었다.
“이만 돌아가시죠.”
태화는 끝까지 사람 좋은 얼굴을 했다. 서글서글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바라봤다. 반면 한동열은 이를 악물어 관자놀이가 불룩 올라온 게 다 보였다. 동열은 태화를 한참 바라보다가 사진을 챙겨 돌아섰다. 가게를 나가려다 말고 뒤를 슬쩍 쳐다봤다. 창고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삼겹살로 한 근이요? 어머니, 오늘은 오겹살이랑 삼겹살이랑 100그램당 이백 원 차이밖에 안 나는데, 오겹살 안 하시고 삼겹살로 드려요?”
전형적인 장사꾼 멘트가 흘러나왔다. 동열은 마지막으로 태화를 눈에 담고 가게를 나섰다. 원래는 태화 정육에 들러 먼저 이야기를 나눠 보고 다른 가게도 둘러보려고 했지만, 더 볼 필요도 없었다. 동열의 마음속에서 태화는 이미 범죄자였다.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진 모르지만 질이 안 좋은 놈이라는 건 확실했다.
형사의 촉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예전에 탁성모가 그렇게 ‘형사의 촉’을 들먹일 땐 병신 같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제 얘기가 되니 신빙성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개새끼가 경찰 상대로 간을 봐?”
동열은 씩씩거리며 걷다가 다시금 뒤를 돌아봤다. 손님으로 왔던 중년 여성이 가게를 나오는 게 보였다. 망할 놈의 감언이설에 홀리기라도 했는지 두 손 가득 묵직한 봉투를 들고 있었다.
동열은 입 안으로 욕을 굴렸다. 영장을 운운하더라도 무작정 밀고 들어갈걸, 후회되었다. 실실 웃는 얼굴로 사람 속을 어찌나 살살 긁던지 아직도 짜증이 치밀었다. 세상 여유로웠던 낯짝이 잊히지 않았다.
“내가 너 꼭 턴다.”
한 글자 한 글자 짓씹듯 말하고 돌아섰다. 부영 시장을 빠져나왔을 땐 헛웃음이 나왔다. 서태화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좆 될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 * *
6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선우는 1분에 한 번씩 시계를 보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왜 거기서 넘어져서는…….”
조금 전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평소처럼 문틈으로 태화를 관찰하고 있는데, 가게 문이 열렸다. 선우는 반사적으로 문을 닫고 뒤늦게 놀란 얼굴을 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온 건 분명 한동열이었다. 한동열이 형사라는 걸 기억하자마자 심장이 두방망이질 쳐 댔다.
어찌나 크고 빠르게 뛰던지, 심장 소리가 밖으로 다 들리는 것 같았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겨우겨우 안정을 되찾고 문에 귀를 바짝 갖다 댔다. 무진과 동열은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진 않았다. 간간이 택배라든지, 애인이라든지, 단편적인 단어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러다 우림동이라는 단어를 들은 선우는 숨을 흡 삼켰다.
아예 귀가 문에 달라붙을 만큼 찰싹 붙어 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집 안을 둘러봐도 되겠냐는 한동열의 말을 들었을 땐 너무 놀라 뒤로 나자빠질 뻔했었다. 다행히 중심을 잡았지만, 이번에도 칫솔을 가지러 허겁지겁 올라가려다 삐끗해 결국 계단에서 굴렀다. 낮은 곳에서 넘어졌기에 망정이지 좀만 더 높았더라면 골로 갈 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구르다 계단 모서리에 찍힌 무릎이 너무 아파서 악 소리를 내고 만 것이었다. 밖에서도 제 목소리가 들렸을 게 분명했다.
“참았어야지…….”
선우는 스스로를 질타했다.
이후 한동열은 금방 돌아간 것 같았지만 선우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태화가 곧바로 들어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아직도 가게에서 올라오지 않았다. 그래서 떨렸다. 곧 있으면 6시, 태화가 저녁을 먹으러 올라올 시간이었다.
“또 때리겠지.”
이번에는 어딜 때릴까 싶어 겁이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때릴 곳이 없는데 태화는 잘도 찾아 때렸다. 기실 아무 데나 손 닿는 곳은 다 때렸던 기억이 났다. 그래도 같이 사는 동안에는 안 맞았는데, 오늘이야말로 맞는 날이지 않을까 싶었다.
멍 든 무릎을 내려다봤다. 멍만 들면 다행이지, 모서리에 찍혀 살점이 짓이겨지듯 벌어져 있었다. 약을 발라야 하는데 여기 와서 다친 적이 없어 구급상자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거실과 서재, 제가 쓰는 방도 다 찾아봤지만 못 찾았다. 벌건 피가 엉겨 붙고, 곰팡이가 핀 것처럼 시커멓게 멍이 든 무릎을 한참 쳐다보고 있는데 계단을 오르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현관문이 열렸다.
선우는 식탁 의자에서 일어났다. 식탁을 덮고 있던 보자기를 걷었다. 맞을 때 맞더라도 태화가 밥은 챙겨 먹었으면 해서 저녁상을 차려 놓은 참이었다. 저쪽에서 쿵쿵 무거운 발걸음이 다가왔다. 모습을 드러낸 태화는 무감한 표정이었다. 선우는 그게 더 무서웠다.
“아저씨…….”
조심스레 부르는데 발치로 상자 하나가 툭 떨어졌다.
“뭔지 설명해.”
태화의 말에 선우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들어오자마자 뺨부터 올려붙일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상자가 등장했다. 선우는 상자를 주웠다. 이게 뭔가 싶어 송장을 들여다봤다.
곧 입이 반쯤 벌어졌다. ‘4단 조절 바이브레이터’라는 글자가 너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다른 사이트보다 가격이 저렴하길래 생각 없이 주문한 물건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어떤 걸 시켰는지 택배원이 알지 못하도록 잘 포장돼 온다고 했는데, 정작 주문한 곳은 아니었나 보았다. 주의 문구를 제대로 읽지 않은 게 잘못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적나라하게 적혀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보기에도 민망한 단어에 선우가 눈알을 도록도록 굴리자 태화가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설명하라고 했어.”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우는 바짝 긴장한 상태로 태화를 올려다봤다. 눈치를 보며 입을 꾸욱 다무는 모습에 태화가 손을 올렸다. 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이브레이터!”
“뭐라고.”
“바이브레이터요…….”
속삭이듯 말하며 눈을 뜨자 조금 더 가깝게 다가온 태화가 보였다. 다행히 어깨까지 올라갔던 손은 다시 내려와 있었다. 태화는 뭐 마려운 개처럼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선우의 턱을 쥐어 올렸다.
선우는 차마 태화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괜스레 옆을 쳐다보자 턱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턱뼈가 부러지다 못해 뜯어져 나갈 것만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하는 수 없이 태화를 바라봐야만 했다. 다행히 힘은 금방 풀렸다.
“내가 옷 사라고 했지, 네 구멍에 쑤실 거 사라고 했어?”
“그냥 궁금해서.”
“저런 걸로 쑤시면 어떨까 궁금해서? 내 자지는 이제 재미없고?”
태화가 아랫도리를 주물럭거리며 말했다. 선우는 곧바로 도리질 쳤다. 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닌데 왜 저딴 걸 사서 남한테 오해받게 만드냐고.”
“무슨 일 있었어요?”
선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화의 눈썹이 짜증스레 일그러졌다. 정말 무슨 일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무슨 일인지 짐작이 안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말똥말똥 뜨며 쳐다보자 태화는 욕까지 짧게 짓씹었다.
“넌 말 잘 듣는 법을 좀 배워야겠다.”
태화는 고간을 좀 더 거칠게 주무르다가 선우를 잡아끌었다. 선우는 뭣도 모르고 쫄래쫄래 따라갔다. 잡힌 손목이 아프다는 생각만 했다. 태화가 끌고 간 곳은 침실이었다. 손목을 거칠게 놓는 바람에 선우는 휘청이다가 그만 바닥으로 풀썩 주저앉았다.
“아!”
하필이면 찢어진 무릎을 쿵 박아서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피가 말라붙은 곳은 만지지 못하고 둘레만 비비며 아파하자 위에서 비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봤을 때 태화는 웃고 있지 않았다. 어쩐지 다른 때보다도 더 밝아 보이는 눈동자가 선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벗어.”
태화는 딱 한 마디만 했다. 선우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옷을 다 벗기고 때릴 생각인 게 분명했다. 나체로 처맞을 거라 생각하니 절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차라리 옷 입은 채로 때리지…….
선우는 속엣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태화는 조금만 더 건드리면 폭발할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홀딱 벗겨진 채 맞고 싶진 않아서 망설이는데 태화가 먼저 상의를 벗었다.
“찢어발기기 전에 벗어.”
흥분감이 섞인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때릴 생각을 하며 살짝 흥분한 모양이었다. 지난번에 저를 때리며 발기하던 태화를 떠올린 선우는 침을 꼴깍 삼키고 천천히 일어섰다. 태화처럼 선우도 상의만 벗었다가 그가 쯧 혀 차는 소리에 서둘러 위아래를 다 벗었다. 태화가 급한 대로 시장에서 사다 준 하얀색 삼각 면 팬티만 선우의 몸에 남았다.
“찢어?”
“아뇨, 아니요……!”
“그럼 빨리 벗어.”
그 말에 선우는 팬티마저 후다닥 벗어 내렸다. 대신 좆은 가리고 섰다. 태화는 완전히 나체가 된 선우를 잠깐 바라봤다. 머리부터 시작된 시선이 발끝까지 천천히 내려갔다. 특히 뽈그레하게 물든 젖꼭지와 두 손에 다 가려지지 못한 음모에 눈길이 좀 더 오래 머물렀다. 그렇게 슥 내려가던 시선은 다친 무릎에 아예 콕 박혔다.
선우는 태화가 쳐다보는 것뿐인데도 이상하게 만져지는 것만 같은 감각이 느껴져 몸을 흠칫 떨었다. 무릎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 때문에 그나마 괜찮던 상처가 갑자기 쿡쿡 쑤셨다. 다친 다리를 뒤로 살짝 물리자 태화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손 내밀어.”
선우가 머뭇거리자 태화가 재촉하듯 턱짓했다. 정말 때리기라도 하려는 걸까. 선우는 무서웠지만, 더 지체했다가는 태화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천천히 왼손을 들었다.
“두 손 다.”
태화는 오른손까지 달라고 했다. 선우는 여전히 고간을 가리던 오른손마저 앞으로 슥 내밀었다. 좆이 드러났다. 축 처져 있어야 할 게 살짝 딴딴해져 있었다.
“허…….”
태화는 선우의 자지를 보고 헛웃음처럼 숨을 내뱉었다. 뭘 했다고 저 상태인지 모를 일이었다. 민망해진 선우가 다시 앞을 가리려고 하자 태화가 씁 소리를 냈다. 태화가 두 손목을 덥석 잡았을 때 선우는 어깨를 한껏 움츠렸다.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옆으로 이끌려 다시 슬며시 떴다.
태화는 선우의 손목을 한데 잡은 채 협탁 서랍을 뒤졌다. 마침내 사인펜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잇새로 뚜껑을 열더니 선우의 손목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찍찍, 대충 검은 선을 그었다. 선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그리는 건지 알기 힘들었다. 두껍게 그려진 검은 선은 시계 같아 보이기도 했고, 그냥 팔찌처럼 보이기도 했다.
몇 번 더 선을 긋던 태화는 제 그림을 감상하는 화가처럼 뒤로 고개를 살짝 빼 손목을 내려다봤다. 제법 만족스러운지 쩝 소리를 냈다. 다시 사인펜 뚜껑을 닫고 서랍에 던져 넣었다.
“이제 너 수갑 찬 거야. 손목 떨어질 때마다 한 대씩 맞을 거야. 어딜 때릴지는 내 마음이고.”
태화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더니 선우를 침대로 내동댕이쳤다. 예고 없이 밀쳐져서 선우의 손목이 떨어졌다. 그때 봉긋한 엉덩이로 철썩 소리가 났다.
“아윽!”
선우는 아픈 신음을 흘리며 엉덩이를 쳐다봤다. 유연성이 좋지 않아 잘 보이진 않았지만, 엉덩이 위로 벌건 손자국이 남은 것 같았다. 살갗이 화끈거렸다.
“손목 안 붙여?”
태화가 다시금 말했고, 선우는 그제야 제 손목에 그어진 게 뭔지 깨달았다. 성의 없이 그려진 검은 줄은 그의 말대로 수갑이었다.
고정력은 없으면서 떨어지면 매가 날아드는 체벌 수갑.
“다리 벌리고 앉아.”
선우는 손목을 떼면 또 맞을까 봐 불 난 엉덩이를 만져 보지도 못하고 낑낑거리며 움직였다. 이번에는 엉덩이였으나 다음에는 뺨일지도 몰랐다. 엉덩이만 맞아도 이렇게 아픈데, 다른 데를 맞으면 기절할 수도 있었다.
손목이 떨어지지 않게 무진 신경 쓰며 자세를 잡았다. 워낙 정신없어서 다리를 벌리라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어떻게 다리를 벌리라는 건지 감이 안 잡혔다. 벌겋게 달아오른 엉덩이를 이리저리 씰룩거려 가며 개처럼 엎드려 다리를 너르게 벌렸다. 옆에서 씹……. 하고 욕을 뇌까리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서 다리 M자로 벌리라고. 내가 이렇게까지 하나하나 알려 줘야 해?”
“흑, 죄송, 아니……. 잘할게요…….”
“잘해야지, 그럼.”
태화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선우는 갑자기 감정이 북받쳤다. 처음부터 하나하나 자세히 알려 주면 좋았을 걸 대충 말해 놓곤 뭐라 하는 게 서러웠다. 엉덩이를 맞으며 살짝 붉어졌던 눈시울이 어느새 벌겋게 질려 있었다. 코도 꽉 막힌 느낌에 킁, 하는 소리를 내고 다시 움직였다.
태화가 말한 대로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다리를 M자로 벌렸다. 꼭 맞붙은 손으로 자지를 가리자 태화가 인상을 구겼다. 선우는 눈치를 보다가 울상인 표정으로 두 손을 가슴까지 들어 올렸다. 자지가 훤히 노출됐다.
조금 전과는 달리 좆은 힘없이 축 처져 있었다. 선우의 자지는 연분홍색이었다. 뼈 마디마디도 복숭아처럼 분홍빛이 돌더니 자지도 그랬다. 심지어 꼭 닫힌 구멍마저도 예쁜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태화는 선우의 구멍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어, 어디 가요?”
이대로 자신을 두고 가 버리는 줄 알고 선우가 크게 불렀다. 움직이지도 않고, 손목도 떼지 않은 채 목만 쭈욱 빼고 방 밖을 쳐다봤다. 주방 쪽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태화가 방으로 돌아왔다. 손에는 바이브레이터를 들고 있었다. 침대 위에 걸터앉은 태화는 선우를 쳐다보지도 않고 바이브레이터만 만지작거렸다. 아래에 있는 버튼을 눌렀더니 웅웅 소리가 나며 바이브레이터가 진동했다.
달칵, 달칵, 달칵. 버튼을 누를수록 진동의 세기가 점점 강해지는 게 맨눈으로 보였다. 총 네 번에 걸쳐 강해진 진동은 버튼을 한 번 더 누르자 멈췄다. 태화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랍에서 젤을 꺼냈다.
“뭐……. 하려고요?”
“입 다물어.”
단호한 명령에 선우는 입을 텁 다물었다. 태화는 바이브레이터 위에 젤을 쭈욱 짜더니 본인의 자지를 만지는 것처럼 기둥을 감싸 쥐고 쭉쭉 문질렀다. 청록색 바이브레이터가 번들번들 젖어 갔다. 젤이 묻지 않은 곳이 없게 꼼꼼히 문지르던 태화는 이윽고 선우에게 다가갔다.
선우가 흡! 긴장한 소리를 내자 빤히 쳐다봤다. 한참 쳐다보기만 하다가 도톰한 아랫입술을 톡 쳤다. 웃진 않았으나 그나마 기분이 좀 나아진 것처럼 보였다. 선우는 끈적한 젤이 묻은 아랫입술을 살짝 훑고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쳐다봤지만, 태화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흐아……!”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냈다. 구멍에 차가운 젤이 닿자 절로 나온 소리였다. 태화는 선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뒷구멍에 젤을 치덕치덕 발랐다. 검지를 넣어 안쪽에도 빠짐없이 바르고 곧바로 바이브레이터를 쑤셔 넣었다.
“아! 아흐……!”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푹 쳐들어온 바이브레이터 때문에 선우는 파드득 떨었다. 그 바람에 손목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허벅지로 매가 날아들었다. 짝! 차진 소리 끝에 선우는 허겁지겁 다시 두 손목을 붙였다. 바이브레이터가 끝도 없이 밀려 들어왔다.
“아으, 잠깐……! 아직 안 풀려서 아파요, 흑, 만져 줘…….”
“너 벌받는 거야. 아픈 게 당연한 거라고. 만져 주기는 뭘 만져 줘.”
“벌 싫어. 벌받는 거 싫어요…….”
선우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태화에게 매달렸다. 두 손목을 붙인 채로 태화의 목덜미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미 눈물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맞은 지 한참 된 엉덩이도 아팠고, 이미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허벅지도 아팠다. 뒷구멍을 쑤시는 감각은 고통을 넘어서 두려움이었다. 사실 태화가 젤을 빈틈없이 발라 준 덕에 크게 아프지는 않았다. 태화의 좆과는 또 다른 낯선 이물감이 무서웠고, 아무 감정 없는 얼굴로 빤하게 쳐다보는 그가 무서울 뿐이었다.
선우는 한 번만 봐 달라는 듯이 태화를 바라봤다. 눈물이 성글게 맺힌 속눈썹을 팔랑거려 가며 바라보는데도 그는 별 반응이 없었다.
“흣! 아, 아……!”
순간 선우는 위로 크게 튀어 올랐다. 바이브레이터 끝이 어느 부분을 꾹 짓누르자 몸이 달달 떨렸다. 젖은 신음이 쏟아졌다. 눈앞이 핑핑 도는 기분에 선우는 태화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하으으, 그만……. 거기, 싫어…….”
“여기 좋다고?”
“아니, 싫어. 거기 이상해…….”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느껴졌다. 언뜻 피식 웃은 것도 같아서 고개를 겨우 들어 쳐다봤으나 태화의 시선은 서늘하기만 했다.
선우는 연신 도리질을 치며 애원했다. 이상하다고, 너무 느껴진다고……. 이제 완전히 발기한 좆 끝으로 프리컴을 뚝뚝 흘리며 말했지만, 태화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주머니를 뒤지더니 하얀색 종이 쪼가리 같은 걸 꺼냈다. 선우가 자꾸만 치대자 다시 침대 헤드로 기대 앉혀 놓고 살짝 오므라진 다리를 벌렸다.
“잘 붙겠나…….”
태화는 혼자 중얼거리며 선우의 구멍을 내려다봤다. 주머니에서 꺼낸 건 바이브레이터와 함께 들어 있던 테이프였다. 바이브레이터를 고정할 수 있게끔, 체액은 물론 젤 위에도 강한 접착력을 가진 것이라고 설명서에 적혀 있었다.
“아! 아흣, 흐…….”
태화는 선우의 신음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곳에 바이브레이터를 고정하고 테이프를 붙였다. 선우는 천장을 바라보며 신음하다 아래를 내려다봤다. 바이브레이터가 꽂힌 제 뒷구멍 위로 하얀색 테이프가 X자로 붙어 있었다. 너무 수치스러웠다. 포르노 중에도 싸구려로 분류되는 것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었다. 너무한다고 말하려는데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아, 아아! 흣!”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으, 이거, 아!”
“싸라고 하기 전까지는 안 싸는 거야. 멋대로 싸면 강도 계속 높일 거고.”
“흐읏, 못 해, 아읏!”
선우가 소리쳤지만, 태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밖으로 나갔다. 방에 혼자 남은 선우는 전립선에 딱 붙어 웅웅 울려 대는 진동 때문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좆물이 점점 탁해지기 시작했다. 태화는 멋대로 싸지 말라고 했지만 참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온몸이 달달 떨렸다. 신음이 제멋대로 쏟아졌고,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이내 태화가 돌아왔을 때는 꼭 맞붙인 손을 싹싹 빌어 가며 봐 달라고 했지만, 턱도 없었다. 태화는 선우 옆에 앉아, 들고 온 구급상자를 열어 이것저것 꺼냈다.
“아저씨, 아저씨……! 아, 이거 싫어요……!”
태화는 선우의 외침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다친 무릎만 제 쪽으로 끌어왔다. 자세가 살짝 바뀌자 선우는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다. 그래 봤자 태화는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소독약을 듬뿍 적신 거즈로 무릎에 붙은 피딱지를 살살 닦아 내고 그 위에 연고를 두툼히 발랐다. 원래라면 아파야 정상인데 선우는 쾌감이 너무 커서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태화가 무릎에 방수 밴드를 붙여 준 순간 악! 소리를 질렀다.
“아흐으……. 아…….”
선우의 좆에서 정액이 몇 번이고 솟구쳤다. 화산 폭발이라도 한 것처럼 허연 게 쉼 없이 흘러넘쳤다.
태화는 구급상자를 정리하다 말고 선우의 자지를 내려다봤다. 연분홍색이던 게 지금은 꽃분홍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정 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자극에 자지는 괴로운 듯 꺼떡꺼떡 움직였다. 움찔대는 고환까지 눈에 담은 태화는 손을 뻗었다. 선우는 드디어 바이브레이터를 빼 주는구나 싶어 숨을 툭 내쉬다가 두 눈을 번쩍 떴다.
“하윽!”
진동이 더 강해진 게 여실히 느껴졌다.
“안 돼, 이거 싫어, 흑……. 아, 그만요, 아아……!”
선우는 사지를 파르르 떨며 울었다. 죽을 것만 같았다. 복상사라는 말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이대로 계속 느끼다간 쾌감에 절어 미치다가 숨이 멎을 게 분명했다.
오래오래 살고 싶은 선우는 태화의 팔뚝을 움켜쥐고 안 된다고 소리 질렀다. 하지만 태화는 선우의 손을 툭 쳐 냈다. 손목이 약간 삐끗했으나 선우는 남은 정신을 끌어다 겨우 두 손목을 고정했다. 태화의 입가로 미소가 스치다가 금세 사라졌다. 태화는 구급상자를 치우다 말고 침대 위로 올라섰다. 발치에 채는 약들이 성가신지 침대 밑으로 걷어찼다.
물건들이 후두두 떨어지는 소리에 선우는 희뜩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잠깐 하얗게 바랬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오자 눈앞에 바짝 일어선 자지가 보였다. 태화의 것이었다. 선우는 고개를 들어 태화를 쳐다봤다. 그는 바지를 살짝 내려 드러난 자지를 손에 쥐고 선우의 뺨을 툭툭 쳤다. 자지로 때리는 건데도 차진 소리가 났다. 프리컴이 맺힌 선단 끝으로 눈알까지 찔러 대자 선우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입 벌려.”
태화의 음성도 좀 젖어 있었다. 선우는 덜덜 떨며 입을 벌렸다. 입 안으로 좆기둥이 푹 쳐들어왔다. 순식간에 좆의 반 이상이 모습을 감췄다. 자지를 물고 있는 입에서 끅끅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선우는 탭을 치듯 태화의 허벅지를 빠르게 두드렸다. 곧장 목구멍을 쑤셔 대는 통에 숨이 막혔다. 콧물이 질질 흐르는 것도 느껴졌다. 몇 번이고 허벅지를 쳤으나 태화는 좁다란 목구멍을 꽤 오랫동안 느끼다가 뒤로 물러났다.
“허억……!”
“엄살 부리지 말고, 제대로 하자.”
“자, 잠깐, 우읍……!”
공기가 들어오나 싶더니 자지가 들어왔다. 선우는 컥 소리를 내며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또 한번 사정이 이어졌다. 태화는 아래를 슬쩍 내려다봤다. 발등 위로 선우가 싸지른 정액이 뚝뚝 떨어졌다. 처음보다는 약간 멀건 느낌이었는데 여전히 양은 많았다. 태화는 쯧 혀를 차더니 기어이 바이브레이터 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웅웅, 태화가 듣기에도 진동 소리가 커졌다. 선우는 몸 안에 든 모든 장기가 전부 진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입 안이 단단한 살덩이로 막혀 있어 헛구역질하는 소리만 나갔다. 펠라티오고 뭐고, 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에 선우는 본능적으로 이를 세웠다. 자지를 긁어 대듯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콱 깨물기까지 했다.
“으윽, 후…….”
태화도 고통과 흥분이 절반씩 섞인 소리를 냈다. 좆이 잘려 나갈 것 같은 고통에도 안쪽으로 더 밀어 넣기만 했다.
“씨발……!”
태화의 허리 짓이 빨라졌다. 선우의 목젖 부근이 울룩불룩 올라왔다 내려가길 반복했다. 선우는 점점 정신이 흐릿해져 갔다. 산소가 부족한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러다간 정말 죽을 것만 같아서 내내 잘 붙여 놨던 두 손목을 떼고 태화를 밀어 냈다. 성난 듯 갈라진 복근을 밀어 내다가 꿈쩍도 하지 않자 주먹을 쥐고 허벅지를 마구 때렸다.
“손목.”
태화는 한 마디를 읊조리고 허리를 숙였다. 자지를 입 안으로 쑤시는 동시에 선우의 엉덩이를 철썩 때렸다. 앙칼진 마찰음 끝에 선우는 다시금 태화의 자지를 씹었다.
“윽…….”
“우읍, 읍……! 흡!”
“손목 붙여.”
태화가 재차 말했으나 선우는 정신이 나간 듯 부르르 떨기만 했다. 결국 태화가 선우의 손목을 잡아 작은 머리 위로 고정했다. 추삽질하듯 허리를 털었다. 구멍에서나 날 것 같은 소리가 선우의 입에서 나왔다. 찔걱찔걱, 습한 소리 끝에 태화가 짧게 욕을 뇌까리며 허리를 깊게 묻었다.
엉덩이 근육까지 쥐어짜 내 가며 한참 사정하다가 뒤로 물러나자 선우의 입에서 거품 진 정액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선우의 낯은 엉망이었다. 눈물 콧물은 기본이었고, 턱 밑으로 허연 체액이 길게 늘어져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선우는 턱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한참 콜록댔다. 쌕쌕거리는 숨을 쉬다 뭐가 그리 서러운지 엉엉 울었다.
“나 진짜, 흐윽, 죽을 뻔했어요……. 흐…….”
“엄살은.”
“엄살 아니야……!”
선우는 고개를 쳐들고 바락 성을 냈다. 태화가 픽 웃었다. 입에 다 들어가지도 않는 걸 받아 내느라 더 통통해진 선우의 아랫입술을 쭉 잡아당겨 보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시간을 보니 벌써 7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장장 한 시간을 밥도 못 먹고 이 지랄만 한 탓에 태화는 갑자기 허기가 졌다. 식탁 위에 선우가 차려 놓은 밥상이 생각났다. 10분 만에 먹고 내려갈까 하다 앞에서 찔찔 짜는 선우를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손목을 붙여 놓은 게 꽤 귀여웠다. 그래도 벌은 확실하게 줘야 했다.
“나 올라올 때까지 그대로 있어. 손목도 떼지 말고.”
태화는 그 말만 남기고 홱 나가 버렸다. 이번에는 현관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집 안이 고요해졌다. 일순간 혼자가 된 선우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문밖을 봤다.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순간 선우의 귓가에 들리는 건 제 구멍에 박힌 바이브레이터가 진동하는 소리뿐이었다.
“흐으……. 싫어, 이거 싫어…….”
선우는 진저리 치듯 고개를 저었다. 아래를 내려다봤다. 3단계 진동이 왜 이렇게 강한지 몰랐다. 싸구려면서 성능은 오지게 좋았다. 전립선으로 전해지는 진동 때문에 오금이 오싹하게 저렸다.
태화가 없으니 손목도 떼고 바이브레이터도 뺄 수 있건만 선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문밖과 제 가랑이 사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물만 줄줄 흘렸다. 태화는 다 보고 있을 것 같았다. 여기 어딘가에 카메라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육점에 앉아서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감시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옅은 신음을 흘리며 태화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선우는 정신이 가물거렸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면 좋겠는데 아래에서 올라오는 쾌감에 정신을 잃어가다가도 퍼뜩 깨어났다. 이젠 더 나올 것도 없었다. 몇 번이고 사정하다가 언젠가부터는 사정 없이 절정을 느꼈고, 가끔 실금도 했다. 침대 위가 전부 축축했다.
“흐으…….”
신음할 힘도 없어서 좀 더 짙은 숨만 내쉬며 절정 했다. 선단 끝에서는 멀건 물만 몇 방울 쪼록 나오고, 끝이었다. 손목이 떨어지지 않게 하고 싶은데 자꾸만 몸이 늘어져서 결국 손깍지를 꼈다. 이 정도는 태화가 봐줄 것 같았다.
눕지도 못하고 내내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태화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10시가 된 모양이었다. 익숙한 걸음이 다가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화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선우는 반쯤 가물거리는 눈으로 태화를 발견하고는 울상을 지었다. 너무 미운데, 너무 보고 싶던 얼굴이었다.
“씨발.”
태화는 다짜고짜 욕을 내뱉었다. 선우는 자신이 손목을 떼서 그런 줄 알고 흠칫 떨었다. 다시 두 손목을 맞붙였다. 태화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침대 위로 올라오려다가 시트가 온통 젖은 걸 느끼고는 한 번 더 욕을 뇌까렸다. 몇 번 더 시트를 더듬던 태화는 선우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저, 저, 아흐. 이거 안 뗐, 흑, 안 떼려고 엄청, 엄청 노력했어요…….”
“알아.”
“그러니까 이제 벌 그만 받고 싶어요……. 흑……. 계속 느끼는 거 싫어, 무서워…….”
선우는 손목을 맞붙인 채 태화의 팔뚝을 잡았다. 얼마나 경련을 해 댔으면 가만있는데도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태화는 땀에 전 선우의 이마를 슥 쓸어 보다가 그대로 손을 내려 좆을 툭 쳤다. 선우가 파드득 몸을 떨었다. 가벼운 자극에도 자지에서 물이 주룩 흘렀다.
“오줌도 쌌네?”
“흐윽, 안에서 계속 울리니까, 막…….”
“다음엔 내가 보는 앞에서 싸는 거야.”
“네……?”
“다음엔 내 자지에 박히면서 싸라고.”
태화는 한 번 더 선우의 자지를 건드렸다. 선우의 허리가 크게 휘는 걸 보고 피식 웃었다. 선우는 감전이라도 된 사람처럼 파들파들 떨다가 겨우 진정했다. 태화에게 두 손목을 내밀었다.
“이제 손, 흣, 떼도 돼요……?”
선우가 묻자 태화는 잠깐 뜸을 들였다. 지긋한 시선으로 선우를 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는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손목을 떼고 태화를 와락 끌어안았다. 온몸을 덜덜 떨어 가며 그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손목 떼라고 했지, 안으라고 한 적은 없는데.”
태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선우는 태화의 말을 듣지 못하고 그저 낑낑 앓았다. 자세가 바뀌자 뒤로 바이브레이터가 툭 빠졌다. 테이프의 접착력이 다 된 모양이었다. 침대로 떨어진 바이브레이터는 혼자 진동하며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이리저리 움직였다.
“흐으…….”
선우는 구멍을 벌름거리며 신음했다.
“구멍이……. 흑, 안 닫히는 거 같아요…….”
눈물범벅이 된 낯으로 태화를 봤다. 죽을병에 걸렸다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사람처럼 겁을 잔뜩 집어먹은 상태였다. 엉덩이를 움찔대 가며 말하자 태화는 미간을 콱 구겼다. 선우를 허벅지 위에 앉히고 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몇 번 짤깍짤깍 움직여 보는데 안 닫히기는커녕 너무 잘 닫혀서 문제였다.
“너는, 씨발.”
태화는 욕을 짓이기며 조금 더 깊숙한 곳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뚫려 있었는데도 손가락을 꽈악 조여 무는 느낌에 저절로 욕이 나왔다. 갑자기 몸이 후덥지근하게 달아올랐다. 자지가 굼실거리는 게 느껴졌다.
태화는 이대로 한번 할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계속 바이브레이터에 시달렸던 애를 또 괴롭히기엔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손으로 안을 몇 번 더 쑤셨다. 선우가 엉엉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손가락을 뺐다.
“너는 내가 죽으라고 하면 죽겠다, 아주.”
태화의 말에 선우는 너른 어깨에 파묻었던 고개를 빼꼼히 들었다. 대답 대신 입술만 우물거렸다. 태화가 삐뚜름하게 쳐다봤다.
“대답을 안 하네?”
“진짜 죽진 못하고, 죽는 시늉은 할 수 있어요…….”
“허…….”
선우는 솔직해도 너무 솔직했다. 어지간한 놈들은 이만큼 당했으면 또 당하기 싫어서라도 듣기 좋은 말만 할 텐데 선우는 빈말은 하지 못했다.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화, 풀렸어요?”
선우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태화는 뚱한 얼굴로 선우를 봤다.
“화난 적 없는데.”
“네……?”
선우는 그럼 이제까지 한 짓은 뭐냐고 묻고 싶었으나 말하지 못했다. 태화가 뽀뽀를 쪽 해 온 탓이었다.
화도 안 났으면서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했는지, 벌은 대체 왜 준 건지, 그럼 화를 낼 땐 어떤 무시무시한 짓을 할 건지.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는데 뽀뽀 한 번에 전부 잊혔다. 태화가 뒤로 물러나자 선우는 홀린 듯 따라가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태화가 낮게 웃었다.
“씻으러 가자.”
“네.”
“같이 씻을까?”
선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태화가 번쩍 안아 들었다. 선우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걸으라고 했으면 한 발자국 떼기도 전에 풀썩 주저앉았을 게 분명했다. 그 꼴을 보고 태화가 낄낄 웃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욕실로 가는 동안 선우는 문득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아직 9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 잘못 봤나 싶어 다시 봐도 그대로였다.
“일찍 문 닫은 적 없는데…….”
선우는 작게 웅얼거리다가 태화의 품에 편히 기댔다. 태화는 선우를 욕조 안에 조심히 앉히고, 본인도 옷을 벗고 들어왔다. 따끈한 물이 금세 차올랐다. 선우는 태화의 가슴에 등을 댄 채 안겼다. 거실에 틀어 놓은 에어컨 바람이 어깨를 스치자 물속으로 좀 더 들어갔다.
“한동열이 뭐래요?”
“네가 한동열을 어떻게 알아?”
“전에 꽃다방에서 한번 본 적 있어요.”
어깨를 어루만지던 손길이 뚝 멈췄다. 선우는 뒤를 돌아봤다. 태화의 눈썹이 일그러져 있었다. 누가 봐도 짜증 난 표정이었다. 태화는 선우의 턱을 쥐어 조금 더 확실히 시선을 맞췄다.
“빨아 줬냐?”
묻는 말에 선우는 고개를 크게 저었다.
“아니요. 손님으로 온 게 아니고, 지영환 때문에 왔었어요.”
“아.”
순식간에 태화의 표정이 풀렸다. 고개를 끄덕이다가 선우의 턱을 놓고 다시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사람이 뭐래요?”
“너랑 지영환 사진 보여 주면서 본 적 없냐고.”
“제 사진이요?”
선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진으로 쓸 만한 게 있나 싶었다. 꽃다방에서 사는 동안 사진이라고는 한 장 찍어 본 적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사진을 가져왔을 리는 없고, 곰곰이 생각했더니 주민 등록증에 쓰인 사진이 떠올랐다. 그다지 잘 나온 사진은 아니었다. 뭣도 모르고 동네에서 가장 싼 가게를 찾아가 찍은 거라 보정도 하나 안 들어간 것이었다.
“넌 사진은 영 별로더라. 실물이 더 나아.”
역시 태화 눈에도 별로였나 보다, 하고 시무룩해지던 선우는 곧바로 이어 나온 말에 눈을 반짝 떴다. 이번에는 아예 몸을 돌려 태화를 바라봤다.
“저 잘생겼어요?”
“아니.”
태화는 단호했다. 언제는 실물이 더 낫다더니 또 금방 아니라고 하는 말에 선우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앞에서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올려다보니 태화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뭐가 좋다고 웃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얄미운 마음에 선우가 고개를 돌리려 하자 태화가 뺨을 쥐고 끌어왔다. 물기에 젖은 손으로 입술을 매만지며 씨익 웃었다.
“예뻐.”
나직한 목소리였다.
선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화를 봤다. 어쩐지 귀 끝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정말 새빨개지기라도 했는지 태화가 좀 더 짙게 웃으며 귀를 만지작거렸다. 선우는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그에게 먼저 뽀뽀를 쪽 했다. 뜬금없이 입맞춤을 당한 태화는 당황하지도 않고 멀건 얼굴로 쳐다봤다.
“뭐. 하자고?”
묻는 말에 선우는 끔쩍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뇨……! 저 아직도 엉덩이 아파요.”
“놀라긴.”
태화는 선우의 이마를 가볍게 쳤다. 선우는 괜스레 이마를 문질렀다. 다시 태화의 품에 안겨 몸을 기댔다. 등으로 단단하게 일어선 자지가 느껴졌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여기서 더 하면 정말 뒷구멍이 헐어 버릴 것 같았다. 선우는 아쉬운 마음을 꾹 눌러 참고 찰방찰방 물장구를 쳤다. 태화는 선우의 정수리에 턱을 얹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동열이 날 의심하는 거 같아. 어느 부분을 의심하는진 모르겠는데 어쨌든 내가 그놈 눈에 들긴 들었어.”
“저, 집에서 나가야 돼요?”
선우가 걱정스레 물었다.
“나가고 싶어?”
태화가 묻자 선우는 도리질 쳤다. 태화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다 선우의 정수리에 입술을 묻었다. 제 머리카락에서 나는 것과 똑같은 샴푸 냄새가 났다. 기분이 묘했다.
“그냥 있어. 어떻게든 되겠지.”
“네.”
“아.”
태화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탄성을 뱉었다. 선우가 뒤를 비죽이 돌아봤다.
“한 번만 더 이상한 거 사면 그땐 나가야 하고.”
“안 사요. 절대로요.”
“한 번만 더 멋대로 다쳐도 나가야 하고.”
방수 밴드가 붙은 무릎 위로 태화의 손이 올라왔다. 선우는 약간 저릿한 감각에 어깨를 움칠거렸다. 다행히 아프게 만지진 않았다. 갓 태어난 강아지를 쓰다듬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선우는 제 무릎을 매만지는 태화의 손을 빤히 바라봤다.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안 다칠게요.”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화가 픽 웃었다. 곧이어 귀 끝으로 짧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쪽, 낯간지러운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