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1권) (1/13)

1.

“자, 잠깐만요……!”

“하…….”

태화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알록달록한 멍과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두통이 느껴졌다. 눈도 약간 침침해지는 것 같았고, 여하간에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다리를 한 번 더 털어 봤지만, 놈이 힘주어 안고 있는 탓에 떨어뜨리기 쉽지 않았다.

말 안 듣는 놈에게는 매가 약이었다. 태화는 쯧 혀를 차고 놈에게로 손을 뻗었다.

“왜 자꾸 이러……. 어…….”

뺨이라도 후리기 위해 머리채를 잡으려는데 일순간 눈앞이 어찔하게 질렸다. 어깨 위로 무언가가 무겁게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크게 휘청이는 몸을 간신히 세워 문기둥에 어깨를 기댔다.

이게 뭔…….

낯설고도 익숙한 감각에 잠깐 당황하던 태화는 이윽고 입을 반쯤 벌리다가 다시 꾸욱 다물었다. 이게 무슨 감각인지 기억났다. 난데없이 졸음이 몰려왔다. 최근에는 밤을 새운 적도 없고, 못해도 하루에 다섯 시간은 잤다. 졸릴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빠르게 흐릿해져 가는 시야 속에서 태화는 미간을 엷게 구겼다. 점점 그림자가 지는 눈앞으로 놈이 보였다. 저들이 뭐 대단한 사이라고, 걱정이 한가득한 얼굴이었다.

“아……. 씨발.”

낮은 욕지거리를 툭 내뱉은 커다란 몸이 앞으로 쿵 넘어갔다. 방향을 잘못 타고 넘어져서 아래로 놈이 깔렸다. 밑에 깔린 마른 몸에서 바싹 마른 천 기저귀 냄새가 났다. 어쩌면 이 냄새가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마지막 생각을 끝으로 태화는 깊은 잠에 빠졌다.

빌어먹을, 14년 만에 도진 기면증이었다.

* * *

“맞다. 잡채 할 것도 좀 사야겠네.”

들고 있던 성경책의 찬송가 부분을 뒤적이던 중년 여성이 짝 손뼉을 쳤다. 태화는 국거리용 소고기를 써는 중이었다. 원래 썰어 둔 건 크기가 너무 잘다며 좀 더 크게 썬 건 없냐고 물어서 귀찮은 작업을 해야 했다.

턱턱, 연식이 얼마나 됐는지 날이 홀쭉해진 칼이 도마 위에 엉겨 붙은 고기를 규칙적으로 내리쳤다. 어찌나 고기 상태가 좋던지, 벌건 육질에서 찰기가 느껴졌다. 진열된 소고기를 다시 들여다보는 여자를 힐긋 쳐다봤다.

“잡채용도 소고기로 드려요?”

“아, 응. 우리 딸이 입만 고급이라 소고기밖에 안 먹잖아. 200그램만 줘요.”

“국거리도 사시더니, 따님 생일인가 봐요.”

“어머, 어떻게 알았대? 하여간에 우리 태화 총각은 센스도 좋아.”

여자는 말끝마다 손뼉을 치는 게 습관인 모양이었다. 태화와 여자 사이에 매대가 없었다면 아마 그녀는 그의 팔뚝을 찰싹찰싹 때렸을 터였다. 태화는 잡채용도 따로 잘라 드릴까요, 물으려다가 한 마디를 하면 열 마디가 돌아온다는 걸 알고 입을 다물었다. 그저 알아서 고기를 뚝 떼 씹을 맛이 있게끔 도톰하게 썰었다.

“여자 친구는? 있지? 있겠지, 이렇게 훤칠한데.”

간과한 사실이었다. 여자는 이쪽에서 먼저 말을 걸지 않아도 알아서 떠드는 타입이었다. 태화는 쯧 혀를 차려다 말고 싱긋 웃었다.

“아직은 없네요.”

“왜 없지? 내가 미스 시절로 돌아갔어 봐. 당장 태화 총각한테 들이댔지. 키도 커, 인물도 좋아, 그뿐이야? 몸도, 어우…….”

여자는 돋보기안경 속에 든 눈알을 빠르게 움직여 가며 태화를 위아래로 훑었다. 매대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하체는 굳이 옆으로 걸음을 옮겨 눈에 담았다.

태화가 ‘부영 시장’에 터를 잡은 지도 이제 3년째였다. 제 이름을 내걸고 시작한 ‘태화 정육’은 의외로 수완이 좋았다. 맨 노인들만 가득한 시장 안에서 스물아홉 먹은 건실한 청년이 나타나 정육점을 차린 것부터 시선을 끌었는데, 매대에 서서 고기를 서걱서걱 써는 모습에 이 동네 어지간한 주부들은 전부 여기서 고기를 떼다 먹었다.

여자의 감탄대로 태화의 외형 덕이었다. 190센티미터가 훌쩍 넘는 거구면서 둔해 보이지 않는 역삼각형의 상체, 주부들이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것처럼 어깨는 태평양인 데다가 비율이 좋아 다리도 쭉쭉 잘 뻗은 몸이었다. 그뿐일까, 늘 입는 추레한 체크 셔츠에 가려졌어도 그 안에 꽉꽉 들어찬 옹골진 근육은 통 숨겨지지 않았다.

몸만 좋았으면 말이 없지, 무심함이 착 내리깔린 얼굴에 웃음기라도 걸리면 열에 열은 주책맞게 앓는 소리를 냈다. 정작 태화 본인은 본인의 외형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는지 일하는 동안은 영 꾸미질 않았다.

날마다 색만 바뀌고 어제도 체크, 오늘도 체크. 애착 체크 셔츠에 하나 풀어 낸 단추 사이로 달랑 걸려 있는 얇은 은색 테 안경.

태화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잘생긴 얼굴 썩히지 말고 멋진 옷도 사 입고 그래요. 내가 다 아깝네, 정말.”

“그렇게 말씀하셔도 서비스 없어요.”

“어디 내가 서비스 받으려고 이래요? 근데 진짜 왜 여자 친구가 없대. 내가 중매 한번 서 줘? 올해로 몇 살이라 그랬지?”

“서른둘이요.”

“딱 좋다. 안 그래도 이번에 옆 동네 초등학교로 새로 부임한 아가씨 하나가…….”

여자가 혼잣말을 와다다다 뱉어 낼 동안 태화는 잘라 둔 잡채용 소고기를 깔끔하게 포장해 국거리용 소고기를 미리 넣어 둔 하얀 비닐봉지에 같이 넣었다. ‘태화 정육’이라는 고딕체 글씨가 정직하게 새겨진 비닐이었다. 요즘엔 사람들이 검정 비닐봉지는 성의 없게 느낀다는 말에 두 달 전부터 새로 바꾼 것이었다.

아가씨 나이가 몇이고, 형제가 있느니 없느니,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여자의 말은 태화의 왼쪽 귀로 흘러 들어와 오른쪽 귀로 그대로 나갔다. 매대에서 다른 고기 한 덩이를 꺼내 다시 슥슥 썰며 시계를 봤다.

“얼른 가서 따님 미역국 끓여 주세요. 벌써 6시 다 돼 가는데.”

“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여자는 또 손뼉을 짝 치며 시계를 확인했다. 다행히 맞선 이야기는 거기서 끊겼다.

“다 해서 얼마예요?”

“이만 구천칠백 원인데, 이만 팔천 원만 주세요.”

태화는 포스 기계를 슬쩍 보고 대답했다.

“장사할 줄 알아, 진짜.”

고작 천칠백 원이 깎인 건데도 여자는 콧소리까지 내며 좋아했다. 태화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차진 고기를 뭉텅뭉텅 썰어 네모난 스티로폼 용기에 가지런히 담았다.

- 띵동-! 배달의 제왕에서 배달 주문이 들어왔어요!

갑자기 경쾌한 여자 목소리가 가게 내에 울렸다. 고기에만 머무르던 태화의 눈동자가 돌연 번뜩이며 소리가 난 쪽으로 향했다. 고개는 들지 않고 시선만 옮긴지라 사뭇 날 선 눈빛이었다.

소리는 포스기 옆에 있는 노트북에서 흘러나왔다. 흔히 볼 수 있는 초원이 담긴 바탕화면 위로 자그마한 쪽지 창 하나가 띄워져 있었다. 가방에서 지갑을 찾던 여자는 예상치 못한 소리에 깜짝 놀라다가 배달 주문이라는 걸 깨닫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은 정육점도 배달을 해요?”

약간 멀리 있어 잘 보이지 않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노트북을 보던 태화는 여자의 물음에 곧바로 시선을 뗐다. 자못 엷게 구겨져 있던 미간을 펴고 고개를 들어 여자를 봤다. 그는 손님들이 말하는 ‘인상 좋은 태화 총각’의 모습으로 돌아와 작게 미소 지었다.

“아, 종종 찾으시는 분들이 계시네요.”

“우리 집도 배달되려나?”

“배달비만 오천 원인데 가까이 사시면 직접 오세요. 그래야 이런 것도 챙겨 드리죠.”

태화는 조금 전에 뭉텅이로 썬 고기를 봉투에 담으며 말했다. 여자가 산 것들이 전부 든 봉투를 야무지게 묶어 내밀고 대신 카드를 받았다.

“지난번에 아저씨가 육회 좋아하신다고 했던 기억이 있어서 뭉티기 몇 점 썰어 넣었어요. 오늘 마장동에서 데리고 온 소라 신선할 거예요.”

“어머, 진짜?”

카드를 긁으며 말하자 여자가 반색하며 봉투 안을 살짝 들여다봤다. 안에는 태화의 말처럼 국거리용, 잡채용 소고기에 뭉티기라고 불리는 육회 한 접시가 더 들어 있었다. 여자가 오늘 저녁은 이걸로 잔치 벌여도 되겠다며 웃는 사이 계산을 끝마친 태화는 카드에 영수증까지 꼼꼼히 챙겨 건넸다.

“카드 받으시고요.”

“잘 먹을게, 태화 총각. 내가 여기 소문 많이 내고 다닌다!”

“들어가세요.”

여자가 나가자 가게 안은 더없이 고요해졌다. 태화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말이 많은 사람과 있으면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오래간만에 돌아온 정적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태화는 벌건 핏물이 밴 도마를 깨끗이 닦고, 끼고 있던 비닐장갑과 목장갑을 벗었다. 앞치마까지 풀고 피곤한 듯 눈두덩이를 슥 비볐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다갈색 눈동자로 안광이 깃들었다.

셔츠에 걸어 둔 안경을 쓰고 노트북 앞에 앉아 쪽지 창을 들여다봤다. 여자와 있을 때는 잘만 웃더니 노트북을 보는 얼굴은 무감하기 그지없었다.

“지영환. 34세. 마감 기한 40일……. 빠듯하네.”

누군가의 이름과 나이, D-40이라고 적힌 문장을 더블 클릭하자 사진과 자세한 인적 사항이 나왔다. 아무래도 사진 속 남자가 지영환인 듯했다. 사진 속의 지영환은 날티 나는 꽃무늬 셔츠에 은갈치 색 정장을 입고 목과 손목에 각각 금덩이를 두르고 있었다. 벨트는 요즘 명품으로 쳐 주지도 않는다는 브랜드 로고가 박힌 것이었고, 손목시계는 가품이었다.

태화는 사진만으로 영환의 시계가 가품이라는 걸 알아보고 혀를 쯧 찼다. 이런 놈의 직업은 빤했다. 돈 놓고 돈 먹는 사채업자거나 남의 몸 팔아 제 배를 불리는 포주거나.

“또 누구한테 원한을 사셨을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사진 속 남자를 좀 더 들여다봤다.

영환은 덩치가 꽤 있는 편이었다. 키는 그다지 큰 것 같지는 않은데 귀가 만두 귀인 것을 보면 필시 운동한 놈이었다. 살이 쪄서 목덜미가 접쳤으나 마냥 물렁살은 아닌 게 한눈에 보였다. 태화의 눈살이 살짝 구겨졌다가 펴졌다. 이런 놈은 꽤나 성가셨다. 힘으로 누군가와 겨뤄서 질 걱정은 없었지만, 이왕이면 운동선수보다야 말라비틀어진 쪽이 더 수월한 건 사실이었다.

뭐, 그래도 저런 놈이 재미는 좀 있지.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 적힌 주소를 봤다.

“우림동?”

거주지란에는 ‘우림동’이라고 적혀 있었다.

우림동은 꽤나 유명한 동네였다. 밤만 되면 정육점 못지않은 새빨간 불이 켜지는 구역, 집창촌이 득시글거리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재개발이다, 인권이다, 뭐다 해서 서울 내에 집창촌 골목은 대부분 사라지거나, 있어 봤자 한 골목 정도로 대폭 축소되었는데 유일하게 거대한 집창촌 골목을 이루고 있는 데가 바로 우림동이었다. 게다가 이곳 부영 시장에서 차로 고작 15분밖에 걸리지 않는 지역이라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멀었다.

바로 옆집 그린 청과 정 영감도 주기적으로 물을 빼기 위해 우림동을 찾는다고 했다. 지난번에 좋은 구경을 시켜 주겠다며 같이 가자는 걸 마다하느라 귀찮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림동…….”

정 영감의 안내 없이도 태화는 그곳을 한 번 간 적이 있었다. 물 빼러 간 건 아니었고, 다른 이유에서였다.

“안 내키는데.”

거리가 가깝기도 가깝거니와 그냥 본능적으로 영 하고 싶지 않았다. 안 좋은 쪽으로는 타율이 기가 막히게 높은 촉이 이번 의뢰는 맡지 말라며 난리였다.

“하아……. 그냥 쨀까?”

태화는 마우스 위에 얹어진 검지를 까딱이며 톡톡톡톡 소리를 냈다. 이내 화면을 내려 가장 마지막 문장을 봤다.

[꼭 좀 죽여 주세요.]

짧은 문장은 굵은 글씨로 강조돼 있었다. 안경 너머에 있는 눈이 찡긋 구겨졌다.

보통은 의뢰할 때 마지막으로 하고픈 말을 적으라고 하면 구구절절 이놈을 죽여야 할 이유나 본인의 지난한 삶을 적기 마련이었다. 할 말이 많은 의뢰인들은 다루기 쉬웠다. 여건이 안 돼 못 하겠다는 메시지와 함께 계약금의 두 배를 물어 주면 대부분 욕 한번 찍 갈기고 돈을 챙겨 갔다.

하지만 이렇듯 한 문장으로 마지막 말을 장식하는 놈들은 퍽 까다로웠다. 돈이고 뭐고 사진 속 인물이 죽는 걸 꼭 봐야만 하는 족속들이었다.

톡톡톡톡-.

습관처럼 검지로 책상을 치던 태화는 작게 있는 ‘수락’ 버튼을 클릭했다. ‘정육점 청년 사장’에서 ‘청년 살인 청부업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 * *

지영환. 직업이랄 것도 없이, 하는 일은 사채. 동시에 우림동 집창촌 골목 중 한 군데를 관리하는 포주.

오전 10시 기상, 11시 사채 사무실 출근. 점심은 주로 사무실에서 시켜 먹고, 오후 5시에 사무실을 나와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난 뒤에는 관리하는 성매매 업소 순회. 이후에는 바로 집으로 가지만 화요일과 금요일은 골목 끝에 있는 ‘꽃다방’에 들러 한 시간 정도 소요하고 나옴. 그렇게 되면 보통 자정에 귀가.

“더럽게 규칙적으로 사네.”

태화는 머릿속에 든 정보를 입 안으로 중얼중얼 읊다가 고개를 슬슬 저었다. 지난 근 한 달 동안 틈틈이 가게를 비우고 나와 지영환을 따라다니며 알아낸 것들이었다. 껄렁이는 차림새만 보고 예상한 대로 지영환은 사채업자에다 성매매 업소 포주였다. 그러니 누군가 죽여 달라고 돈까지 가져다 바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태화는 대시 보드에 딸린 시계를 힐긋 내려다봤다. 오후 10시 30분을 막 지나는 중이었다. 화요일이었고, 지영환은 지금 꽃다방에 들어앉아 있었다. 10분 전에 들어갔으니 적어도 40~50분은 더 있어야 나올 터였다.

평소 가게와 마장동을 오가며 쓰는 하얀색 트럭 대신 일할 때 쓰는 검정 승합차를 끌고 나온 태화는 근 한 시간 전부터 골목 끝자락에 주차해 두고 꽃다방을 주시했다.

어차피 집창촌에서 검은색 승합차는 흔했다. 업소 한 군데에 얽매이지 않고 여기저기 메뚜기처럼 보도 뛰는 아가씨들을 옮길 때 흔하게 쓰이는 차종이라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좋았다. 특히나 이 시간은 주차 단속도 없었고, 혹여나 훤한 대낮이더라도 경찰들이 이 골목까지는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말해 범죄자들이 살기 좋은 우범 지역이라는 뜻이었다.

순간 다방 건물 입구에서 한 무리가 나왔다. 태화는 쓰고 있는 야구 모자의 챙을 쥐고 고개를 숙였다.

“언니, 오늘 강남 갈까?”

“야, 오늘 화요일밖에 안 됐어.”

“아, 그러니까. 가서 빵댕이라도 좀 흔들어야 남은 한 주를 버티지.”

“지랄도 병이다, 진짜.”

“갈 거지? 응? 갈 거지, 언니?”

차창 밖으로 들려오는 여자들의 목소리에 태화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꽃다방 마담과 레지들이었다. 다시 시계를 봤다. 11시가 조금 안 된 시간, 이 시간쯤 다방 여자들은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제는 목적이 닭발이더니 오늘은 강남 클럽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얼굴도 몸도 다들 어느 정도 받쳐 주는 인간들이라 쫓겨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싸구려 근성만 좀 버리면 될 텐데.

이 추운 날씨에도 엉덩이만 겨우 가리는 치마를 입고 나온 여자들을 보며 시답잖은 생각을 하는 사이 건물 2층 불이 꺼지고 창문 하나에서만 힘없는 빛이 새 나왔다. 보고 있는 건물의 2층 전체가 꽃다방이었고, 여자들이 나가면 항상 저 창문에만 빛이 들었다. 아마 지영환이 저기 있으리라.

이쯤 되면 30분 동안은 건물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아서 태화는 운전석 의자에 몸을 깊게 묻고 반쯤 뜬 눈으로 네모난 빛이 새는 창문만 올려다봤다.

11시 정각이 되자 도착했을 때부터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 인천 상미동에서 렌터카 지점을 운영하는 마흔여덟 살 문 모 씨가 사라졌습니다. 평범한 사업가인 줄 알았던 문 모 씨는 알고 보니 불법 도박장, 이른바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었는데요. 실종 55일째인 현재, 경찰 당국은 불법 도박장과 관련된 인물을 중점적으로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습…….

여자 아나운서의 음성을 배경 음악 삼아 태화는 정체 모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음, 음음-.”

약간 음치 티가 나기는 했지만 어쩐지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메웠다. 꽃다방 창가로 검은 그림자가 살짝 지더니 곧바로 사라졌다. 그림자 크기로 봐서는 영환은 아닌 것 같았고, 아무래도 그놈인 듯싶었다.

하얗고, 마르고, 늘 우중충한 얼굴만 하는 놈.

뼈마디가 툭 불거진 팔꿈치가 우습게도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고, 낡아 빠진 스니커즈 위로 올라온 복숭아뼈도 마찬가지였다. 세상 시름은 저 혼자 다 짊어진 듯 웃는 법 한 번이 없으면서 늘 뺨은 발그레하게 상기돼 있어 신기하게 눈이 가는 놈이 하나 있었다. 영환을 보러 올 때마다 놈을 만났고, 아마 오늘도 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음, 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데 입구에서 또 사람이 나왔다. 시계를 확인했다.

11시 36분.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새끼야, 어깨도 좀 펴고, 인사도 좀 웃으면서 해라.”

역시 지영환은 시간 맞춰 나왔다. 방탕한 인생을 산 주제에 일과 하나는 규칙적인 놈이었다. 뒤로는 늘 그렇듯 희멀건 사내놈이 하나 따라붙어 나와 지영환을 향해 꾸뻑 고개를 숙였다.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참 곱게도 인사하는 놈의 이름은 최선우였다.

알아본 바로는 꽃다방에 딸린 종업원이라는데 영환이 놈에게 하는 꼴을 보면 조금 묘했다. 뭔 발 뭔 발을 찾으며 욕을 하긴 해도 곧잘 만질 것도 없는 엉덩이를 주물렀고, 가끔 주머니에 돈도 꽂아 줬다. 뺨을 툭툭 치다가 귓불을 끈적하게 만지기도 하는 게 꼭……. 숨겨 둔 어린 애인을 대하는 태도였다.

지영환이 호모였나?

하기야 영환의 성적 취향은 이번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굳이 호모가 아니더라도 최선우는 누구나 한 번쯤은 뒤돌아볼 만한 미인이기도 했고.

이번에도 선우의 눈 밑 붉은 살결을 넌지시 보던 태화는 순간 선우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아서 다급히 몸을 아래로 쑥 내렸다. 다시 봤을 때 선우는 그저 지영환만 보고 있었다. 태화는 아랫입술을 축이며 인상을 구겼다. 선팅을 최대치로 해 놔서 어차피 밖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텐데 괜히 찔려서 지레 놀란 게 자존심이 상했다.

“금요일에 또 올 테니까 그때까지 웃는 연습 좀 해 놔라.”

“네…….”

“좀 잘 처먹고.”

영환의 음성은 골목을 쩌렁쩌렁 울리는 반면 선우의 음성은 개미만큼 작았다. 마지막에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지영환은 그게 마음에 안 든 눈치였지만 더 성질을 부리지 않고 돌아섰다. 태화는 고개를 살짝 숙여 눈을 치뜬 채 영환을 쫓았다. 영환은 태화의 승합차를 바로 옆으로 지나치는데도 누군가가 저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항상 지정된 곳에 주차하고 오는 터라 조금 있으면 영환의 차가 옆을 지나칠 것이었다.

그동안 태화는 라디오를 끄고 안전벨트를 매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습관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잭나이프를 쥐었다. 옆을 돌아보자 마른 몸이 조수석 차창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최선우였다.

“뭐야, 저건?”

최선우는 고개를 숙여 안을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그래 봤자 이 야밤에 선팅이 이렇게나 들어간 차의 내부가 보일 리는 만무했다. 태화는 창문에 낯짝을 대고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선우를 잠깐 쳐다봤다.

죽일까?

그 생각부터 들었다.

근데 아무 계획 없이 죽이면 귀찮아지잖아. 그냥 어디 한 군데를 잘라 겁만 주고 말까? 손가락 한 마디만 잘라도 엉엉 울며 알아서 입 다물 거 같은데……. 어디 보자.

어딜 썰어도 저 연한 살덩이는 숭덩숭덩 잘만 썰릴 것 같았다. 저놈보다는 불과 세 시간 전까지만 해도 지겹도록 썰고 온 돼지비계가 더 질기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선우가 다시 똑똑 창문을 두드렸다. 주머니 안에서 잭나이프를 만지작거리던 태화는 한참 만에 손을 빼고 조수석 창문을 내렸다.

징-. 창문이 내려가자 선우는 도리어 끔쩍 놀라 뒤로 살짝 물러나며 두리번거렸다.

“뭡니까?”

태화는 창문 밖에 선 선우에게 시선을 맞추기 위해 상체를 살짝 숙여 쳐다봤다. 그가 말까지 걸자 눈을 동그랗게 뜨기까지 했다. 가까이서 본 선우는 생각보다도 더 유약해 보였다. 핏줄이 바짝 선 태화의 손으로 목덜미를 틀어쥐면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처럼 생긴 얼굴이었다. 손으로 괜스레 기어를 세게 움켜쥔 태화는 모자의 챙을 조금 들어 올려 조수석 쪽으로 몸을 쭈욱 뺐다. 가까워진 만큼 선우가 뒷걸음질 쳤다.

뭔 지랄이야?

태화는 잔뜩 긴장해서 옹송그려진 마른 어깨를 감상하다가 다시 선우의 낯을 살폈다.

“뭔데 남의 차 문을 두드리냐고요.”

“……여기 주차하시면 안 돼요.”

포도알처럼 새까만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다가 한다는 말이 고작 저거였다. 태화의 눈살이 엷게 구겨졌다.

“예?”

“여기다 주차하시면 안 되는데…….”

같은 말을 두 번 듣고서야 태화는 아, 소리를 냈다. 제가 들은 게 정말 주차 얘기였나 싶었는데 진짜였다. 난데없이 다가와 잔뜩 졸아든 낯으로 한다는 말이 주차하면 안 된다는 거라니, 맥이 탁 풀렸다. 태화는 표정을 풀고 선우를 다시금 위아래로 훑었다. 정정해야 했다. 최선우는 그냥 여기서 소리만 왁 질러도 겁을 먹고 바들바들 떨 정도로 심약한 놈이었다.

태화의 눈은 어느새 습관처럼 약간 가늘게 뜨였다. 저 멀리서부터 비춰 오는 집창촌의 뻘건 불빛이 선우의 오른쪽 뺨을 어른어른 물들였다. 상대적으로 그늘진 왼뺨은 창백할 만치 허옇게 빛났다. 길고 촘촘하게 늘어진 속눈썹 끝은 호롱불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고, 시답잖은 말이나 지껄이는 입술은 붉고 도톰했다. 불안한지 아랫입술을 자근대는 것까지 본 태화는 제 아랫입술을 혀로 축이고 제자리로 돌아와 핸들을 잡았다.

“잠깐 세워 둔 겁니다. 지금 갈 거고요.”

선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시동을 걸었다. 영환의 차는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어차피 이다음 코스가 바로 집이라는 걸 알기에 오늘은 이쯤 해서 그냥 가도 될 성싶었다. 조수석 창문을 올리자 선우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좋은 냄새…….”

창문이 닫히기 직전, 매가리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뭐?”

조수석 쪽을 바라봤으나 창문은 이미 닫혔고, 선우도 어느새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좋은 냄새?

태화는 조금 전에 들은 말을 떠올렸다.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그건 최선우의 목소리였다. 주차하면 안 된다고 말할 때와 마찬가지로 힘없이 축축 처지는 목소리. 창문을 다시 내렸다. 분명 창문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릴 텐데 선우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또라인가?”

태화는 목소리 크기를 구태여 죽이지 않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선우의 뒷모습을 쫓았다. 12월 밤이 주는 추위에도 얇게 입고 나온 선우는 꼭 저를 닮아 우중충한 회색 카디건을 조금 더 여몄다. 품이 한참 큰 카디건이었는데도 등 위로 불룩 솟은 날개 뼈가 선명하게 보였다. 선우는 겨울옷이 저것밖에 없는지 태화가 올 때마다 저 차림이었다. 쯧, 혀를 찬 태화는 액셀을 밟아 차를 출발했다.

어느 정도 굴러가다 사이드 미러를 힐끔 보는데 안으로 들어간 줄 알았던 선우가 건물 입구에 오도카니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상또라이네, 저거.”

물음표가 빠진 말은 확신으로 가득했다.

태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방을 주시하다가 다시 룸 미러를 통해 최선우를 봤다. 눈알이 뭐 저렇게 큰지, 거리가 제법 떨어졌는데도 까만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르는 게 보였다. 제 시력이 과하게 좋다는 걸 생각도 못 하고 태화는 그저 선우의 눈알 탓을 했다. 마치 태화가 보이기라도 하는 양 이쪽을 빤히 쳐다보던 선우는 작달막한 머리통을 절레절레 젓더니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갔다.

태화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여기저기 창부들이 정육점 고기처럼 진열된 골목을 지나는 동안 양쪽 창문을 엄지손톱만큼 열어 뒀다. 불그스름한 빛이 태화의 광대를 적셨다.

* * *

선우는 꽃다방 쪽방에 딸린 작은 창문을 내려다봤다.

또 왔다. 지난 화요일에는 검은색 승합차를 끌고 오더니, 오늘은 스즈키 하야부사였다. 남자는 보름 전에 한 번, 일주일 전에 한 번, 오늘이 세 번째로 바이크를 타고 왔다.

바이크에 문외한인 선우가 저 멀리 있는 게 2020년 형이라는 것까지 알게 된 데에는 그만한 노력이 뒤따랐다. 휴대 전화도 없어서 머릿속에 생김새와 바디에 그려진 한자를 집어넣어 개발새발 그림을 그렸더랬다. 다방에 자주 오는 바이크 가게 사장에게 그림을 보여 주며 물어보자 처음에는 뭐 이런 게 다 있냐고 하다가 나중에서야 ‘아, 하야부사?’ 하는 말이 나왔다.

두 번째 봤을 때 좀 더 상세히 그려서 보여 줬더니 아마도 2020년 형일 거라고 했다. 오늘 남자는 2020년 형 스즈키 하야부사를 타고 골목 코너에 머물렀다. 벌써 한 달 하고도 하루째였다.

3일 전 남자와 처음 대화를 나눴을 때가 떠올랐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몰랐다. 자신이 아닌, 지영환을 쫓는 시선을 제게로 붙들어 두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그때는 간이 조금 부었었다. 대화랄 것도 없이 멍청한 말만 했으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남자에게선 좋은 냄새가 났다. 향수는 아닌 것 같았고, 샴푸 냄새 같았다.

약간 묵직한 머스크 향.

“또 맡고 싶다.”

선우는 창가 옆에 가져다 놓은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문을 반 뼘 정도 열어 두고 겨우 들어오는 시야로 남자를 봤다. 의자는 남자가 저곳에 찾아온 지 열흘 만에 다방 권 마담에게 부탁해 얻은 것이었다. 숨어서 남자를 감상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태화.”

남자의 이름이 태화라는 걸 알기라도 하듯 선우는 자연스럽게 혀를 굴려 발음했다. 태화의 성은 몰랐다. 그냥 이름만 태화라는 걸 알았다. 아니, 이름이 태화라는 것도 사실 확실하진 않았다. 하지만 선우는 남자의 이름이 태화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발음하기에도, 그저 떠올리기에도 예쁜 이름이었다.

‘花(꽃 화)’ 자를 쓰려나……. ‘火(불 화)’ 자를 써도 멋있겠다.

태화의 이름이 무슨 한자로 쓰일까 생각하던 선우는 문득 아는 한자가 죄다 너무 쉬운 것들뿐인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공부 좀 더 할걸…….

후회되었으나 그건 선우 탓이 아니었다.

거액의 빚을 지고 사라졌다가 시체가 되어 돌아온 부친을 대신해 지영환에게 끌려온 지도 어언 1년이 다 돼 갔다. 스물,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어 놓고 막상 학교 문턱도 못 넘고 1월에 머리채가 잡혀 끌려왔다. 사실 성적이 안 좋아서 집 가까운 곳에 쓴 전문 대학이었지만 어쨌든 대학에 다녔다면 지금보다는 덜 멍청할 것 같았다.

‘아니, 도련님. 사장님이 돈을 빌렸는데 못 갚고 뒈졌어. 한강 물에 띵띵 불어서 떼 갈 만한 멀쩡한 장기도 없어. 그럼 누가 갚아야겠어? 우리 도련님이 대신 갚아야 하지 않겠어?’

영환은 예나 지금이나 상스러웠다. 그래도 처음 봤을 때는 살이 조금 덜 붙었을 때라 영 못 봐줄 얼굴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역겨웠지만.

‘너 운동은 좀 하냐?’

‘…….’

‘어쭈, 대답 안 하지?’

‘아, 아니요…….’

‘그래, 딱 봐도 못 할 거처럼 생겼어. 어디 새우잡이 배에 태우기는 글렀고……. 담배 안 피우지? 장애 등급 없는 거 보니까 눈깔도 멀쩡하신 거 같고, 어린 놈이 술도 안 할 거고. 이제 보니 통나무 장사하기 딱이네.’

뭐가 우스운지 지영환은 껄껄 웃어 가며 겨우 스무 살 먹은 어린애를 협박했다. 키들거리는 낯짝을 보며 선우는 마주 웃을 수 없었다. 정말 겁이 났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영환은 누구의 장기를 떼다 팔고 그럴 만한 깜냥이 없는 놈이었으나 당시 너무 어렸던 선우는 그런 걸 파악할 정신머리가 없었다. 하루아침에 제 몸에 가죽만 남을까 봐 오들오들 떨 뿐이었다.

‘한 번만 봐주세요! 뭐든, 뭐든 할게요……! 어떻게든 돈 갚을게요. 죽을 때까지 못 갚으면 자식들한테라도 갚으라고 할게요!’

‘지랄한다. 네가 죽으면 나는 안 죽겠냐? 그리고 꼴에 자식새끼 낳을 생각은 하나 보다?’

‘갚을 수 있어요……!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선우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고 싹싹 빌어 봤다. 비굴하게 땅에 이마를 대고 정수리 위로 두 손을 모아 열심히 빌었다. 영환은 선우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알겠다고 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다가 슬쩍 고개를 든 선우의 시야 속에는 의뭉스럽게 웃는 지영환이 가득했다.

이후 선우는 한 달 반 정도 지영환의 사무실에 머물다가 다른 곳으로 끌려갔다. 우림동 집창촌 골목 초입에 있는 꽃다방이었다. 처음에는 집창촌 골목으로 가길래 이제는 호스트를 시키려나 보다 했는데 아니었다.

선우는 줄곧 꽃다방 안쪽에 딸린 쪽방에서 살았다. 꽃다방에서 살며 가게 청소도 했고, 가끔 일손이 부족하면 서빙도 했다. 꽃다방 한쪽에는 ‘면도방’이라고 이발소 의자 하나가 들어앉은 작은 방이 네 개 있었는데, 거기서 손님들 면도도 해 줬다. 물론, 면도 말고 다른 것도 하긴 했다. 불과 30분 전에도 면도 손님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미간을 폭 찌푸리던 선우는 순간 몸을 옆으로 홱 숨겼다.

“하, 하아…….”

창문 옆 벽에 기대 숨을 고르다가 슬그머니 창문 밖을 내다봤다. 한쪽 눈알만 빼꼼 내밀어 보고는 다시 몸을 숨겼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헬멧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태화의 낯이 창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헬멧에 가려져 태화의 시선은 보이지 않았지만 마치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몰래 지켜본 걸 들킨 것 때문인지, 단지 시선이 마주쳤다는 이유 때문인지 불분명했다.

마냥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뭡니까?’

‘뭔데 남의 차 문을 두드리냐고요.’

태화가 짜증스레 말하던 게 떠올랐다. 그는 목소리도 좋았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좋고 나쁨을 딱히 가려 본 적은 없으나 선우는 태화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귀가 간지러웠다. 애연가인지는 모르지만 약간 까슬하고 낮은 목소리는 바닥을 기어 다니는 뱀 같았고, 그게 온 바닥을 배회하다가 제 발목을 서늘하게 감싸는 게 느껴지면 왠지 모르게 뺨으로 열이 몰렸다.

‘또라인가?’

뒤통수에 대고 툭 내뱉던 말까지 떠올린 선우는 상체를 앞으로 푹 숙였다.

“하아아…….”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수리가 땅에 닿을락 말락 할 때까지 머리를 숙이고 제 종아리를 감싸 안았다. 또라이라는 건 욕이었는데 태화에게서 들으니 비단 욕처럼 들리지 않았다.

“하긴, 내가 진짜 또라이일지도 모르지…….”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채로 반으로 완전히 접힌 몸에 힘을 줘 찌뿌드드한 근육을 풀었다. 머리를 아래로 처박고 있어 목구멍으로 넘어가야 할 침이 콧구멍 쪽으로 스멀스멀 내려왔다. 비릿한 정액 냄새가 느껴졌다.

한순간 고개를 홱 들어 방 안을 스윽 둘러봤다.

겨우 2평 남짓한 방, 쿰쿰한 냄새가 나는 이불과 겨우내 입는 회색 카디건, 낡아 빠진 라디오 하나.

이런 곳에서 근 1년을 살았는데 정상인 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고. 선우는 대상 없는 변명을 속으로 웅얼거렸다.

* * *

밤 10시, 가게를 마감하고 나온 태화는 손에 든 종이를 가게 유리문에 가져다 댔다. 손등에 미리 붙여 놓은 투명 테이프 네 조각을 종이 각 귀퉁이에 붙여 문에 고정했다.

[1224 ~ 1225

개인 사정으로 이틀간 쉽니다

1226부터 정상 영업 합니다

죄송합니다

- 태화 정육 -]

마지막 테이프가 울었으나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티가 안 나서 그냥 가만두기로 했다. 이어 문 옆에 놔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가게 앞을 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또 어디 가려고? 크리스마스는 대목이라 문 닫으면 타격이 클 텐데.”

마침 똑같이 마감하고 나온 바로 옆 떡집 양 사장이 알은체했다. 태화는 양 사장을 향해 꾸뻑 인사하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가 잠깐 집에 좀 들렀다 가라고 하셔서요.”

“효자네, 효자야.”

양 사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올해 육십 줄에 들었다는 양 사장은 딸만 둘이었는데, 자기 딸도 태화처럼만 부모한테 잘하면 얼마나 좋냐며 혼자 툴툴댔다. 말은 저렇게 해도 매일 가게 앞에 앉아 딸들과 통화하는 얼굴에 웃음이 한가득한 걸 보면 여간 팔불출이 아니었다. 괜히 태화에게 딸 흉을 몇 번 더 보던 양 사장은 그가 싱긋 웃으며 쳐다보자 멋쩍은 듯 입을 쩝 다셨다.

“아, 서 사장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댔나? 어머니 얘기하는 건 통 못 들어 본 거 같아서.”

양 사장의 질문에 태화는 눈웃음을 조금 더 짙게 지었다.

“저 열여덟 살에 돌아가셨어요.”

“아이고……. 번듯한 아들 두고 먼저 갈라니 마음이 편치 않으셨을 텐데.”

“그땐 한창 말썽만 부리던 시절이라 속 많이 썩였었습니다.”

“그럼 더더욱 지금 이렇게 장성한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겠어.”

“조금 그렇기는 하네요.”

힘없이 말하자 양 사장은 좀 더 안쓰러운 얼굴을 하다가 징징 울리는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더니 금방 웃음기를 머금었다. 안 봐도 두 딸 중의 하나인 듯싶었다. 어어, 하며 전화를 받은 양 사장이 들어가 보겠다며 손을 흔들었고, 태화는 마주 고개 숙여 인사했다.

시장이라 대부분은 10시 전에 문을 닫아서 주변으로 불이 켜진 집은 태화 정육이 유일했다. 태화는 텅 빈 거리에서 혼자 비질을 하며 슥슥 소리를 냈다. 양 사장을 보며 짓던 미소가 사라진 지는 오래였다.

태화의 모친은 양 사장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가 열여덟 살일 때 죽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살해당했다. 14년 전의 일이었다.

서슬 퍼렇게 벼려진 날붙이에 뱃가죽이 뚫려 죽어 가던 어머니. 어머니는 죽는 순간 아들을 혼자 두고 가는 것에 대해 걱정했을까?

태화는 절대 아닐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태화의 모친은 동네에서 유명한 창녀였다.

“좆같네.”

낮게 읊조린 태화는 비질하느라 굽히고 있던 허리를 곧게 폈다. 재수가 없으려니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그 여자 얼굴이 다 떠오르고 지랄이었다. 대충 모아 둔 쓰레기를 쓰레받기에 처박고 빗자루와 함께 문 옆에 툭 던져뒀다.

태화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앞문을 잠갔다. 체크 셔츠를 벗고 검은색 목 폴라 티셔츠 위에 블루종만 걸치고 미리 준비해 둔 캐리어를 들었다. 빠뜨린 게 없나 잠깐 돌아보다가 필요한 건 다 챙겼다는 생각에 뒷문으로 나왔다.

손님이 오가는 시장 거리는 길이 잘 닦인 반면 가게 뒤쪽으로는 구불구불 미로 같은 길이 펼쳐졌다. 재개발할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낡고 허름한 동네가 가진 특유의 골목이었다. 캐리어가 드르륵 끌리는 소리도 내기 싫어 아무것도 든 게 없는 걸 달랑 들고 골목을 누비며 걷던 걸음이 돌연 우뚝 멈춰 섰다. 검은색 승합차 앞이었다.

트렁크에 캐리어를 실은 태화는 운전석에 올라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0시 19분. 가만히 몸을 풀다가 19분에서 20분으로 시간이 넘어가는 순간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아직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날이 추워서 그런지 빨리 끝내고 돌아와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습관처럼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는 크리스마스에 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DJ와 게스트 모두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기대된다며 입을 모았다. 그런데 방송 끝에 나오는 노래는 뜬금없이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였다.

“음, 음음-.”

음이 하나도 맞지 않는 콧노래가 차 안 가득 울려 퍼졌다.

* * *

- 이미 알고 있어, 흔들리는 너의 눈에 담긴 두려움-. 우린 오늘 아무 일도 없겠지만 그대가 원한다면 언젠가 이 세상의 모든 아침을 나와 함께해 줘-.

선우는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를 들으며 가지런하게 모은 발끝을 파닥거렸다. 제목을 모르는 노래였지만 꽤 듣기 좋았다. 언제나처럼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좁게 열어 둔 창밖을 내다봤다. 선우의 시선이 향한 곳은 텅 비어 있었다.

태화가 오지 않은 지도 일주일째였다. 다방 카운터에 올려져 있던 달력을 방으로 몰래 가져와 빨간색 사인펜으로 동그라미까지 그려 가며 셌으니 정확했다. 이전까지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만 되면 왔으면서, 이젠 영환에게 흥미가 떨어졌나 싶었다. 태화가 다시 오지 않는 건 슬픈 일이었으나 그의 관심이 영환에게서 멀어졌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

선우는 태화가 지영환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보름 만에 알아챘다. 그 관심이 어떤 종류인지는 몰랐지만, 처음으로 지영환이 부러워진 순간이었다.

나는 왜 지영환이 아니지?

골머리를 썩이며 생각하길 몇 날 며칠이었다. 이제는 그런 열등감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다. 알지도 못하는 노래의 멜로디를 콧소리로 곧잘 따라 부르며 발가락을 오밀조밀 움직이던 선우는 불현듯 눈을 크게 떴다.

만약 지영환에게서 멀어진 관심이 다른 이에게 간 거면 어떡하지?

알 수 없는,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누군가에게 질투가 났다.

“선우야, 지 사장님 오셨어!”

밖에서 권 마담의 음성이 들렸다. 크게 뜨였던 선우의 눈이 누그러졌다. 이전처럼 힘없는 눈을 뜬 선우는 좀 더 늦장을 부리다가 라디오를 끄고 밖으로 나갔다.

선우가 지내는 쪽방에서 홀까지 나가려면 네 개 있는 면도방을 지나쳐야 했다.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데 면도방 문 하나가 벌컥 열리더니 남자가 나왔다. 태화의 바이크가 하야부사라는 걸 알려 준 바이크 가게 박 사장이었다.

박 사장은 바지춤을 추스르며 나오다가 선우를 발견하고 크흠 헛기침을 했다.

“선우, 잘 지냈지?”

“네. 안녕하세요.”

“어, 아저씨는 간다.”

선우는 고개를 작게 숙여 인사했다. 박 사장이 서둘러 가고 뒤이어 방 안에서 백 양이 나왔다. 입술을 얼마나 벅벅 문질렀으면 립스틱이 다 지워져 색소가 옅은 입술만 드러난 채였다. 들고 있던 종이컵에 침을 찍 갈기던 백 양은 선우를 보고 인상을 구겼다.

“뭘 봐, 씨발아.”

백 양은 고운 얼굴로 욕을 잘도 했다. 평소에는 선우에게 이것도 좀 먹어 보라며 잘 챙기던 백 양은 면도방만 들어갔다 나오면 세상 까칠해졌다. 선우는 제게 눈알을 부라리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백 양이 멀어지고 나서야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열린 문을 지나칠 땐 방 안에서 익숙한 비린내가 훅 끼쳤다. 조금 있으면 선우 역시도 저런 냄새를 맡아야 했다.

숨을 후욱 내쉬며 테이블이 있는 쪽으로 나가자 홀 중앙에 크게 세워져 있는 크리스마스트리가 가장 먼저 보였다. 영환이 의자 하나를 빼 놓고 담배를 문 채 껄렁하게 트리를 감상하고 있었다. 영환은 스스로 본인을 사장님이라고 칭했으나 이 골목 그 누구도 영환을 사장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선우 눈에도 영환은 건달도 못 된 양아치 나부랭이일 뿐이었다.

“오셨어요?”

박 사장을 배웅하는 백 양의 엉덩이를 감상하던 지영환은 선우의 음성에 뒤를 돌아봤다. 선우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어깨까지 들어 올렸다. 선우는 맞을 줄 알고 움찔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영환은 쯧 혀를 차고 선우의 귓불을 잡아당기기만 했다.

“아아……!”

선우는 아픈 소리를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뺨을 맞는 거나 귓불을 꼬집히는 거나 똑같이 아팠다. 여린 귓불을 쥐고 한참 이리저리 흔들던 영환은 선우의 뺨으로 담배를 위협하듯 들이밀다가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래도 이 뽀얀 얼굴에 담배빵을 만들 수야 없다는 생각이었다. 귓불을 신경질적으로 놓자 선우가 크게 휘청였다.

“병신.”

선우는 자신을 향한 욕을 못 들은 척하며 제대로 섰다. 태화에게서 또라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땐 묘한 쾌감이 있었는데 지영환이 하는 욕은 그저 불쾌하기만 했다.

“너는 새끼야, 거북이냐? 다리라도 부러졌어? 뭐 한다고 이렇게 느리게 나와?”

“죄송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왔으면 반가운 척이라도 좀 해라. 어떻게 매번 올 때마다 그렇게 죽상이냐? 내가 그렇게 싫어? 내가 네 돈줄이야, 인마.”

지영환은 말끝마다 ‘씨발’을 덧붙였다. 여간 상스러운 게 아니어서 선우는 알게 모르게 눈살을 찡긋 구겼다가 누가 볼 새라 빠르게 무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돈줄이라며 소개한 영환은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한 귀퉁이에 촌스러운 장미꽃이 그려진 테이블 위로 툭 던졌다. 오늘 선우 몫의 용돈이자 앞으로 있을 노동의 대가였다. 다른 손님을 받으며 번 돈은 죄다 가져가면서 뭐 한다고 올 때마다 돈을 주는지 몰랐다. 돈 빼먹는 귀신이 겨우 용돈 좀 쥐여 준다고 해서 인간이 되는 건 아니었다.

안 챙기고 뭐 하냐는 식으로 영환이 눈알을 부라리자 선우는 마지못해 오만 원을 꾸깃꾸깃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면도, 하실 거죠?”

“쯧, 내가 면도만 할 거 같으면 혼자 하지, 씨발.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면도 한 번에 오만 원이나 내러 오겠냐, 쯧.”

선우는 벌써부터 조금 전 면도방을 지나치며 맡은 비린내가 코끝을 맴도는 것 같았다. 영환이 신경질적으로 벗은 은갈치 색 정장 재킷을 선우가 받아 들었다.

“얼른 준비할게요.”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면도방 쪽으로 걸어갔다. 한참 카운터에서 오늘 번 돈을 세던 권 마담은 선우와 눈이 마주치자 찡긋 윙크를 날렸다. 빨간색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씰룩 올라가며 미소를 만들었다. 선우는 마주 웃는 대신 고개만 숙이고 지나쳤다. 뒤에서 돈통이 텅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주방 쪽에서 담배를 태우며 노가리를 까던 아가씨들도 하나둘씩 밖으로 나왔다.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우리 선우, 오늘도 고생해.”

“저번처럼 또 때리면 그냥 좆을 콱 물어뜯어 버려.”

“으, 정액 맛도 좆같은데 피 맛은 더 좆같겠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얘는.”

아가씨들은 선우를 지나쳐 가며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개중에는 선우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며 지나가는 여자도 있었다. 여기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여자들의 서슴없는 스킨십에 매번 흠칫흠칫 떨었는데, 이젠 선우도 익숙한 듯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선우야, 우리 먼저 퇴근. 지 사장님 가시면 문 잠그고 자. 여기 이상한 놈들 천지라 너 잡아간다.”

뒤를 돌아보자 권 마담과 다른 아가씨들이 이쪽을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선우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 면도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밖에서 여자들과 지영환이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한 놈들 천지라더니, 선우 입장에서는 저 밖에 있는 사람들이 제 인생에서 가장 이상했다.

지영환의 재킷을 벽에 걸고 구석에 있던 트롤리를 끌고 와 면도 준비를 했다. 깨끗한 수건 위에 면도에 필요한 도구를 하나씩 챙기는데 이쪽으로 걸어오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건들건들, 누가 들어도 영환의 발걸음 소리였다. 선우의 쪽방만큼이나 작은 면도방 안으로 영환이 들어섰다. 지영환은 각도를 편안하게 맞춘 의자에 눕듯이 앉아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선우는 서둘러 보자기를 지영환의 목에 두르고 야무지게 고정했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초상났냐. 네가 노래를 부르든, 노래를 틀든, 무슨 소리라도 만들어라.”

“네.”

선우는 작게 대답하고 얼른 라디오를 틀었다. 지영환에게 노래를 불러 주는 건 너무 싫었다. 마침 지영환이 즐겨 듣는 트로트가 흘러나왔다. 영환이 트로트를 따라 부르는 동안 선우는 따듯한 물에 미리 담가 뒀던 쉐이빙 브러시로 거품부터 만들었다. 사각사각, 거품이 저들끼리 부풀었다 꺼지는 소리가 났다. 얼추 쫀쫀하게 올라온 거품 그릇을 옆에 내려놓고 스팀 타월로 영환의 낯짝을 조심스럽게 닦았다.

“음…….”

만족스러운 신음이 나왔다. 영환의 볼이 어느 정도 촉촉한 훈기를 머금은 게 보이자 선우는 거품을 그 위에 치덕치덕 올렸다. 노래가 끝나고 짧은 광고 뒤에 11시 뉴스가 시작되었다.

- 두 달 전 인천 상미동에서 실종된 문 모 씨에 대해 경찰은 아직도 이렇다 할 실마리를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

“씨발, 세상 말세다, 말세야. 여기저기서 죄다 실종되지. 저게 다 죄를 지어서 그래요, 죄를. 응? 선우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

“하, 씨발년. 말은 지지리도 없어요. 누가 보면 너 벙어리인 줄 알겠다.”

영환은 보자기 밖으로 팔을 뻗어 옆에 선 선우의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아!”

배려 없이 우그려 쥐는 힘에 선우는 아픈 소리를 냈다.

“꼭 이래야만 소리를 내지. 빨리 면도나 해라. 자지 근지럽다.”

“네…….”

이후로도 지영환은 선우의 엉덩이에서 손을 떼지 않고 주물렀다. 아예 터지게끔 아프게 쥘 때도 있었고, 살살 달래듯 비비기도 했다. 선우는 불쾌한 티도 못 내고 가만히 엉덩이를 내주며 면도에만 집중했다. 거품을 다 바르고 이제 면도칼을 손에 쥐었다. 허연 전등 불빛에 면도 칼날이 반짝, 하고 빛났다. 순간 선우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영환은 지금 아무것도 모른 채 경계심 없이 눈을 감고 있고, 선우의 손에는 칼날이 쥐어져 있었다. 죽일 거라면 기회는 이때뿐이었다.

죽이자. 죽여 버리자. 그리고 도망가자.

거기까지 생각한 선우는 영환의 목젖 옆으로 면도칼을 스윽 들이밀었다. 잘은 모르겠으나 여길 그으면 죽을 것 같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피를 분수처럼 쏟으며 곧바로 죽던데, 영환도 그렇게 쉽게 죽을지도 몰랐다. 꼴깍, 침을 한 번 더 삼켰다. 면도칼을 쥔 손에 힘을 꽈악 주고 이를 악물었다.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죽…….

“빨랑 안 하고 뭐 하는데?”

쿵, 선우는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붙들었다. 지영환이 눈을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하려고요.”

손에 힘이 풀렸다. 면도칼은 지영환의 목을 긋는 대신 거품 사이를 파헤쳐 들어가 수염만 사각사각 깎았다. 이 방에서 영환을 보며, 선우는 놈을 죽이는 상상을 몇십 번이나 했다. 하지만 늘 상상에 그쳤다. 그럴 깜냥도 안 되었고, 피도 무서웠다. 결정적으로는 갈 곳이 없었다. 영환을 죽이면 도망쳐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늘 영환은 선우의 머릿속에서만 피를 쏟고 죽었다.

그렇게 죽인 게 벌써 마흔한 번이었다.

“오늘 손님 몇 명 받았냐?”

“세 명이요.”

“놀고먹었네?”

“열심히 했어요…….”

작은 목소리로 그래도 할 말은 하는 선우를 보며 지영환은 피식 웃었다. 아직도 엉덩이에 머물렀던 손이 허벅지를 쓸다가 앞으로 와 선우의 마른 배를 만졌다.

“한번 대 달라던 놈은 없디?”

“네. 없었어요.”

“이미 여럿한테 대 주고 거짓말하는 건 아니고?”

“아니에요.”

“아니야?”

영환은 갑자기 선우의 고간을 콱 움켜쥐었다.

“아!”

선우가 아닌 지영환이 소리를 질렀다. 너무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선우가 꿈쩍 놀라다가 실수로 볼에 상처를 낸 것이었다. 면도칼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로 피가 찔끔 새 나왔다.

“죄, 죄송해요.”

“피 나지? 어? 피 나지, 지금?”

“조금……. 악!”

선우는 지영환에게 머리채가 잡혀 휘청였다. 의자 등받이에서 상체를 뗀 영환은 씩씩거리며 선우의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아예 목을 긋지 그러냐, 썅년아. 나 죽이고 싶은 거 어떻게 참냐?”

“그런 거, 윽, 아니에요. 실수예요, 진짜예요.”

“실수는, 씨발. 됐고, 와서 빨기나 해.”

아파 찡그려졌던 선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영환은 벌써 다리를 너르게 벌리고 있었다. 꽃다방이 운영하는 면도방은 다른 곳에서의 전화방이나 키스방과 엇비슷했다. 면도 한 번에 오만 원, 거기에는 면도뿐만 아니라 손님의 자지를 빠는 서비스까지 포함되었다. 그래서 조금 전에 박 사장과 백 양이 나온 방에서도 정액 냄새가 진동했고, 백 양이 까칠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쿰쿰한 냄새가 나는 좆을 빨고 나온 길이라서.

선우도 마찬가지로 면도방에서 손님을 받았고, 찾는 사람도 꽤 있었다. 그중 가장 단골은 단연 지영환이었다. 보통은 면도가 다 끝난 후에 펠라티오를 시키곤 했는데 오늘은 많이 일렀다. 아마 피를 보고 흥분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변태 새끼.

생각나는 대로 욕을 갈길 수는 없어 선우는 눈알을 도록도록 굴리며 눈치만 봤다.

“벌써 해요?”

“어쭈? 이젠 말대답까지 하네? 네가 요즘 덜 맞았지?”

영환이 손을 올려 선우의 뺨을 내리쳤다.

“아으……!”

하얀 살결 위로 뻘건 손자국이 남았다. 순식간에 뺨이 부어올랐다. 아무리 맞아도 폭력은 익숙해지지 않아서 선우는 덜덜 떨며 맞은 뺨을 감싸 쥐었다. 멍하게 있다가 결국 두 대를 더 맞고서야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지영환의 사타구니 사이로 알아서 몸을 구겨 넣었다.

“제대로 빨아라.”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선우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기 위해 애써 들리지 않는 척 연기하며 지영환이 하고 있는 보자기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분홍색 보자기가 커튼처럼 사방을 가렸다. 바지 지퍼를 열고 팬티와 함께 내리자 덜렁 늘어진 자지가 보였다.

영환의 자지는 평범했다. 면도방에 찾아오는 사람들과 비교해 봐도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크기였다. 다만 냄새가 고약했고, 발기 부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느리게 섰으며, 싸기는 조루처럼 빨리 쌌다. 이걸 세우는 데에는 애를 먹었으나 한 번 세우고 나면 거의 1분 만에 사정하곤 해서 처음만 좀 고생하면 됐다. 선우는 억지로 침을 모아 입 안을 축축하게 만들고 축 처진 살덩이를 입에 담았다. 평소에 샤워는 하는 건가 싶었다. 지린내가 났다.

“하아……. 씨발.”

바로 뜨거운 한숨이 나왔다. 선우가 아직 뭘 하지도 않았는데 지영환은 보자기 위로 둥그스름 올라온 선우의 정수리를 살살 비벼 쓰다듬으며 떨었다. 선우는 지영환에게 표정이 보이지 않게 되자 미간을 있는 대로 구겨 놓고 좆을 빨았다. 물컹한 게 입 안 이리저리로 굴러다녔다. 자지를 콱 물어뜯어 버리라던 아가씨의 말이 떠올랐다.

만약 정말 있는 힘껏 씹어 버린다면 지영환은 평생 고자로 살아가야 하겠지.

하지만 선우는 생각만으로 그쳤다. 영환이 고자가 된다면 자신은 병신이 될 터였다. 반신불수가 될 때까지 맞고 맞고 또 맞다가 비로소 장기가 떼일지도 몰랐다. 단지 상상일 뿐이었는데 뒷덜미가 섬찟해져서 선우는 작게 도리질을 치다가 펠라티오에 집중했다.

“후우……. 어, 거기 긁듯이, 어.”

한참 혀를 굴리자 영환의 자지가 점점 단단해졌다. 뿌리까지 집어삼켜도 목구멍에 닿지 않는 크기였다. 냄새는 빠질 줄을 몰랐고, 요도구에서 나오는 미끈한 액체는 비렸다.

선우는 바닥을 짚은 오른손을 꾸욱 말아 쥐었다. 영환의 자지를 빨 때면 알게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이제 좀 만성이 될 만도 한데 같은 사내새끼의 자지를 빠는 제 처지를 생각하면 늘 서러웠다. 눈가가 뜨끈해지는 걸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앞뒤로 열심히 움직였다. 뺨을 타고 무언가가 흐르는 것 같았지만 보자기 속이 너무 더워서 흘리는 땀일 뿐이라고 치부했다.

이럴 때면 조금 죽고 싶어졌는데, 정작 선우는 죽을 결심을 하지도, 죽지도 않았다. 이대로 죽는다 생각하면 억울했다.

“하아, 썅년……. 처음 잡혀 왔을 때만 해도 존나 못하더니 이젠 입보지 하나는 쓸 만해졌다니까. 후…….”

“웁, 흐읍…….”

“목구멍 열고. 어, 그렇지.”

영환은 선우의 정수리를 연신 만져 가며 낮게 앓았다. 숨이 점점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다. 보자기 속 공기가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공기가 부족해진 선우가 잠깐 뒤로 물러났으나 곧바로 지영환에게 머리통이 붙잡혀 끌려왔다.

“좀 더 못 삼키냐.”

좀 더 삼킬 것도 없는데 지랄이었다. 선우는 코로 짧게 호흡하며 시키는 대로 입 안 가득 좆을 욱여넣었다.

더운 숨소리,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DJ와 게스트의 웃음소리, 입 안에서 새 나오는 질척한 소리.

그 사이로 불현듯 낯선 걸음 소리가 들렸다. 뭔가를 놓고 간 마담이나 아가씨인가 싶어 집중해서 들어 보는데 하이힐 소리는 아니었고, 비닐봉지라도 신고 있는지 뭔가 슥슥 끌리는 소리였다.

누구지……?

선우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뒤로 빼 보자기 밖을 쳐다봤다. 선우가 앉은 자리에서는 훤히 열린 문틀밖에 보이지 않았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누가 멋대로 입에서 좆 빼래?”

대충 손으로 자지를 문지르며 밖의 동태를 살피는데 지영환이 대뜸 머리를 툭 치고 머리채를 잡아 샅으로 당겨 왔다. 지영환은 제 고환까지 쥐어 선우의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리 별 볼 일 없는 자지라도 고환까지 한꺼번에 물려니 입이 한계로 벌어졌다.

“우욱……!”

“씨발년아, 제대로 안 해?”

영환은 보자기를 풀어 내팽개치고 선우를 내려다봤다. 아직 면도 거품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은 욕정으로 번들거렸다.

찰싹-!

선우의 싸대기를 한 번 더 갈기고 작은 머리통을 제 쪽으로 콱 당겨 왔다.

“우읍, 으……!”

선우는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무성한 음모 사이로 코끝이 처박히자 더러운 냄새가 더 짙게 느껴졌다. 저녁으로 먹은 짬뽕이 올라올 것만 같아 지영환의 허벅지를 마구 밀어 냈다. 안간힘을 쓰자 지영환은 그제야 선우를 놔줬다. 선우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듯 물러나 목을 쥐고 콜록거렸다.

“잘 좀 하자.”

선심 쓰는 척 영환이 뺨을 툭 쳤고, 선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혼자 알아서 영환의 자지를 물었다. 이전보다 속도가 빨라졌다. 빨리 끝내지 않으면 정말 토악질이라도 할 것 같아서 최선을 다했다. 숨 쉬기 힘들 때는 한 손으로 쥐어도 남는 걸 쥐고 살살 흔들었다.

슥슥.

걸음 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선우는 문 쪽을 봤다가 하마터면 놀라서 소리를 꽥 지를 뻔했다. 문틀 가운데로 거구의 남자가 서 있었다.

태화였다.

“끅!”

선우는 너무 놀라서 딸꾹질 소리를 내다가 태화라는 걸 알아보고는 반대로 숨을 흡 삼켰다. 다행히 영환은 아무것도 모르고 눈을 감은 채 신음만 흘리는 중이었다. 영환의 손길에 따라 좆을 입에 가득 물고서 태화를 자세히 살폈다. 태화는 검은색 두꺼운 우비를 입고 모자까지 야무지게 쓰고 있었다. 비닐을 신고 걷는 소리가 난다 했더니 정말 두 발에는 신발 위로 비닐 재질의 덧신이 씌워진 채였다.

선우를 가만히 쳐다보던 태화는 검지를 입술 위에 대고 입 모양으로 쉿 하고 벙긋거렸다. 선우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하아……. 깊게 물어라.”

선우는 영환의 자지를 깊숙이 삼키고서도 줄곧 태화만 바라봤다.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아니, 거리로는 차에 앉아 있던 태화와 말했을 때가 더 가까웠지만, 그가 서 있는 걸 가까이서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태화는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도 더 너른 어깨를 가지고 있었다. 쳐다보는 눈은 날카로웠으나 무섭지는 않았고, 굵다란 목젖이 눈에 띄었다. 우비를 입고 있어 안에 든 몸이 잘 보이지 않는 게 아쉬웠다. 분명 멋진 근육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커다란 눈으로 태화를 감상하고 있는데 돌연 지영환이 뺨을 철썩 때렸다.

“웁……!”

“빠는 속도 느려졌다. 좀 더 빨리 못 하냐.”

벌써 몇 번째 뺨을 맞는지 몰랐다. 선우는 이제 뺨이 부어오르다 못해 입술까지 터져서 피가 맺혔다. 영환이 쯧 혀를 차는 동안 선우는 서둘러 입술을 벅벅 문질러 닦고 다시 좆을 빨았다. 영환의 시선을 제게 붙들어 두기 위해 전에 없이 열심히 했다.

당장 일을 치를 것처럼 등장한 태화는 멈춰 선 채 둘을 지긋하게 내려다봤다. 정확하게는 별 좆 같지도 않은 좆을 물고 용을 쓰는 선우를 봤다. 지난 한 달간 관찰한 결과 어차피 이 시간 이후로는 아무도 다방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상또라이가 곧 죽을 놈의 좆을 빠는 것도 꽤나 신기한 일이니 잠깐 구경이나 좀 해 볼까 싶었다. 태화는 문틀에 어깨를 기댄 채로 팔짱을 끼고 선우의 펠라티오 실력을 감상했다.

“후우……. 선우야, 너 그냥 나랑 살래?”

“우으, 읍……. 흐…….”

“응? 빚 있는 거 다 까 줄 테니까 나랑 살자.”

지영환이 헛소리하는 사이 선우는 마찬가지로 저를 감상하는 태화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금방 사정할 듯 꿀렁이는 좆을 일부러 꽉 쥐어 사정을 한 번 막고, 혀를 길게 내어 뿌리부터 선단 끝까지 죽 핥아 올렸다. 영환이 좋아 죽는 동안 태화는 선우를 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어디 좀 더 해 보라는 듯이 시건방진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선우는 수치심이라고는 어딘가에 죄 버리고 온 것처럼 냄새나는 요도구에 입을 맞추고 고환을 쭙쭙 빨았다.

태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선우는 그 눈빛을 보다가 시선을 내려 그의 중심부를 확인했다.

발기했을까……?

우비가 커서 보이지 않았다. 다만 선우는 제 자지가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손님들과 지영환의 것을 빨던 그 숱한 순간에도 한 번을 반응하지 않던 자지였다. 자위도 거의 안 하다가 최근에 태화를 생각하며 다시 시작했다.

어젯밤에도 제 자위 반찬이었던 사람이 눈앞에 서 있어서 그런가, 선우는 아랫도리가 묵직해지는 걸 느끼며 몸을 옅게 떨었다. 본능적으로 손을 아래로 내려 사타구니 사이를 주물렀더니 태화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한숨 같은 소리도 같이 딸려 나와서 영환이 들으면 어쩌나 선우 혼자 걱정하고 있는데, 정작 지영환은 선우를 내려다보며 불만 있는 얼굴을 할 뿐이었다.

“자꾸 집중을 못 하네.”

선우는 결국 영환에게 또다시 머리채가 잡혔다. 영환은 발갛게 부어오른 선우의 뺨을 톡톡 두드리다가 점점 손에 힘을 실었다. 턱턱 소리가 찰싹찰싹으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짝짝! 이 되었다.

“아으, 윽……!”

눈물이 쏙 빠질 만큼 아팠으나 선우는 더는 벌벌 떨지 않았다. 눈물이 줄줄 흐르는 낯으로 고개를 들어 위를 봤다. 거대한 체구가 전등을 가려 선우의 이마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 선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야, 제대로 빨라고. 응? 너 지금 어디 보고 실실 쪼개…….”

그제야 낯선 인기척을 느낀 지영환이 선우의 시선을 따라 뒤를 휙 돌아봤다. 순간 검은색 케이블 타이가 영환의 목으로 휙 감겼다.

“헉!”

영환은 급히 목과 케이블 타이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공간을 만들었다. 태화의 눈썹이 잠깐 구겨졌다. 만두 귀를 가졌다 했더니, 순발력이 빌어먹게 좋았다. 그래 봤자 태화 앞에서는 죽은 목숨이었다.

“끄으, 끅……! 씹, 빨……. 너, 끅, 너 누구……. 윽……!”

“지영환. 34세. 직업, 사채업자 겸 포주. 너 맞지?”

“윽……. 아, 아니, 나 아……. 끅…….”

“맞는 거 다 알고 왔어, 병신아.”

태화는 의뢰인이 알려 준 정보를 줄줄 읊으며 예의상 신원 확인을 했다.

제가 아니라고 도리질 치는 얼굴이 점점 시뻘겋게 변해 갔다. 지영환은 여태 의자에 앉은 채 팔딱거리며 발버둥 쳤다. 그러면 그럴수록 태화는 손에 더 힘을 줘 기어이 케이블 타이를 한 바퀴 더 돌려 감았다. 컥컥거리는 소리가 작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갑작스러운 태화의 공격에 영환에게서 벗어난 선우는 엉덩이 걸음으로 어느 정도 물러나 앞에 펼쳐진 광경을 눈에 담았다.

영환이 죽어 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도 죽이고 싶었던, 죽일 기회가 그렇게 많았던, 그런데도 면도칼까지 쥐어 놓고서 결국 죽이지 못했던 영환이 지금 눈앞에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해 가며 죽어 가고 있었다.

“컥, 서, 선우……. 이거, 커헉……!”

선우는 자신을 향해 손을 뻗어 가며 도움을 청하는 영환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입가에는 감추지 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목이 졸려 시야가 가물거리는지 지영환은 선우의 미소가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연신 손을 허우적거리며 도와 달라고 난리였다. 선우는 납작한 가슴을 크게 씨근대며 지영환이 죽어 가는 걸 구경만 했다.

손에 한껏 힘을 주던 태화는 선우를 쳐다보고는 허,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숨을 내뱉었다. 여태 눈물은 질질 흘리면서 눈을 반짝이며 보고 있는 게 영 제정신 같지 않았다. 저 역시 정상은 아니어서 할 말은 없었으나 지금 선우는 어마어마한 또라이 같았다. 약간 올라간 입꼬리까지 봤을 때는 기가 차서 피식 웃었다. 이상한 놈을 목격자로 세우게 됐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왼손이 욱신거렸다.

“씹.”

낮에 고기 썰다 베인 손가락이 말썽이었다. 힘을 주면 줄수록 통증이 심해졌다. 이제 좀 죽어 줬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운동했던 가락이 있어서 영환은 오래도 버텼다. 미끄러지지 말라고 낀 목장갑 사이로 언뜻 피가 번지는 게 보였다.

결국 태화는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케이블 타이를 놓쳤다. 순식간에 지옥 문턱을 찍고 돌아온 영환은 목을 쥐고 몇 번 컥컥거리다가 돌연 눈을 크게 뜨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바지를 올려 좆을 감추고, 입 밖으로 흘러나온 침과 허연 면도 거품을 거칠게 닦으며 태화를 마주 보고 섰다.

“후욱, 후……. 너, 너 뭐야, 씨발 새끼야!”

“아, 하지 말 걸 그랬네.”

여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태화는 의뢰를 덜컥 받은 과거의 자신을 향해 욕을 짓이기다 장갑을 벗어 손가락을 확인했다. 기껏 붙여 놨던 반창고는 저들끼리 뭉쳐 바닥으로 툭 떨어졌고, 손가락 살점이 벌어진 게 보였다. 따가운 듯 씁 소리를 내다가 다시 목장갑을 꼈다. 앞에서는 지영환이 쉽게 다가오지도 못하는 주제에 씩씩거리고 있었다.

“너 사람 잘못 봤어. 내가 왕년에 유도 좀 했거든? 씨발, 덤벼!”

“거참 말 많네. 곧 뒈질 놈이.”

“뭐? 썅놈이, 진짜!”

지영환은 크게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커다란 음성이나 과장된 몸짓이나, 겁이 나는 걸 감추려는 게 빤히 보였다. 태화는 영환이 다가오기만을 가만 기다리며 케이블 타이를 꽉 쥐었다.

집에 가면 라면 끓여 먹고 자야지.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달려오던 지영환이 브레이크가 걸린 것처럼 끽 멈춰 섰다.

“뭐야, 뭐……?”

당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영환은 제 허리를 꽉 감싸 붙든 마른 팔을 내려다봤다. 뒤에서 선우가 영환이 못 움직이게 끌어안고 있었다.

“야! 이거 안 놔?”

“윽……!”

선우는 지영환에게 팔꿈치로 머리를 쿵쿵 맞아 가면서도 절대 놓지 않았다. 도리어 깍지까지 껴서 더욱 옭아맸다. 아무리 말랐어도 남자는 남자다 이건지 안간힘을 주고 버티니 영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몇 번 더 버둥거리던 영환은 앞에 선 태화의 눈치를 한번 살피다가 다시 선우를 봤다.

“야, 씨발년아, 저거 네가 부른 새끼야? 어?”

저거?

태화는 자신을 지칭하는 무례한 단어를 듣고 미간을 엷게 구겼다. 생긴 것처럼 예의는 밥 말아 처먹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뒤에 선 선우가 시야에 들어왔다. 제 몸의 두 배는 족히 되는 놈을 막겠다고 낑낑대며 용쓰는 게 참 볼만했다. 선우와 눈이 마주쳤다. 저번에 봤을 때도 참 짙다고 생각했는데, 선우의 눈동자는 지금 보니 더 검어 보였다. 태화는 고개를 따라 상체까지 옆으로 기울여 가며 선우와 눈높이를 맞췄다.

“뭐 하냐?”

“빠, 빨리 죽여요……! 빨리요!”

“진짜 또라이였네.”

선우를 보며 또라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몰랐다. 확실히 선우는 또라이였다.

병신도, 미친놈도, 정신병자도 아닌, 그냥 상또라이.

태화는 이거 놓으라며 두 연놈을 다 죽이겠다고 발악하는 지영환을 무시하고 여태 안간힘을 쓰는 선우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쟨 대체 날 뭘 믿고 저러는 거야?

선뜻 선우가 이해되지 않았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선우의 앞섶이 두툼하게 솟았다는 것이었다. 이젠 하다 하다 변태이기까지 한 놈 때문에 픽 헛웃음이 나왔다. 지난번에는 갑자기 냄새가 좋다고 지랄이더니 지금은 살인마를 앞에 두고 좆이나 세우고 있었다.

선우는 태화를 더 재촉하지 않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묵묵히 영환을 끌어안은 팔에 힘만 바짝 줬다. 머리 위에서는 지영환이 연신 씨팔, 좆팔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앞에서 태화가 웃는 소리도 들렸다.

비웃음인가……?

구별이 안 됐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상하게 몸은 달아오르는데 머리는 맑아졌다. 선우는 이제야 자신이 지금 지영환을 죽이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지영환이 선우의 발을 콱 밟더니 팔꿈치로 있는 힘껏 옆통수를 갈겼다. 선우는 머리가 핑 돌았다. 너무 강한 힘에 잠깐 비틀거리더니 깍지 낀 손을 놓치고 뒤로 주춤 물러났다.

“씨발, 일로 와!”

“악……!”

지영환은 옳다구나 선우의 머리끄덩이를 잡아챘다. 손가락에 몇 번 빙빙 돌려 잡아 고정하고 귀싸대기 대신 주먹으로 광대를 내리쳤다. 뻑 소리가 나자 선우는 다리마저 힘이 풀려 영환에게 머리채가 잡힌 채로 목각 인형처럼 대롱대롱 매달렸다.

지영환의 주먹은 몇 번 더 선우에게 가 꽂혔다. 감히 별 볼 일 없는 남창 새끼가 자신을 죽이려 들었다고 있는 성질 없는 성질 죄다 내며 씩씩댔다. 선우는 이미 퉁퉁 붓기 시작한 오른쪽 눈을 힘겹게 떠 앞을 봤다. 그때까지도 가만히 구경만 하던 태화는 선우와 눈이 마주치자 짧게 한숨을 쉬더니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선우는 입에서 피를 주룩 흘리면서도 생긋 웃었다.

“썅년아! 씨발, 너는 뒈졌……. 억……!”

“지영환 씨, 집중해야지. 상대는 쟤가 아니라 나잖아.”

“끅! 크으, 윽……!”

선우에게 집중하던 지영환은 다시 케이블 타이에 목이 칭칭 감겼다. 이번에는 태화가 더 빨라서 손가락을 쑤셔 넣지도 못하고 목주름 사이로 케이블 타이가 단단히 말려들어 갔다. 이전과는 달리 순식간에 지영환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영환은 선우의 머리채를 툭 놓고 목을 벅벅 긁기 시작했다.

풀썩 바닥에 주저앉은 선우는 고개를 쳐들었다. 시야가 불분명해서 핏물이 밴 눈두덩이를 벅벅 문질러 닦고 앞을 봤다. 지영환이 죽어 가고 있었다. 영환은 꺽꺽거리고 난리가 났는데 뒤에 선 태화는 별 감흥 없는 얼굴로 케이블 타이만 좀 더 세게 잡았다.

“유도했던 새끼라 그런지 존나게 안 죽네, 진짜.”

태화의 말대로 영환은 끈질겼다. 이마로 굵다란 핏줄을 툭 세워 놓고도 몇 분을 더 부득부득 애를 썼다. 선우는 제 앞에서 탭 댄스라도 추는 듯이 펄쩍펄쩍 뛰는 지영환의 마지막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그만큼 영환의 숨은 꺼져 가고 있었다.

끝인 양 한 번 펄떡거리며 몸부림치던 영환은 곧 꺽! 소리를 내다가 고개를 푹 떨궜다. 목을 긁던 팔도 축 늘어졌고, 다리에도 힘이 풀려 제대로 서지 못했다. 태화는 그러고도 한참을 더 케이블 타이를 옥죄다 영환의 입에서 침이 주욱 흐르는 걸 보고서야 손에 힘을 풀었다. 육중한 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꼭 선우의 발치였다.

“후으…….”

태화는 숨을 고르며 약간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손끝이 또 저릿해 장갑을 벗고 손가락을 살피는데 옆에서 우비 자락을 끌어당기는 게 느껴졌다. 순간 빠른 움직임으로 선우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윽…….”

신음을 삼키는 선우를 내려다봤다. 낯짝이 아주 가관이었다. 어떻게 비벼 놨는지 입에서 나온 피가 온 낯에 범벅인 모양에 태화는 쯧 혀를 차며 선우 앞에 쪼그려 앉았다.

“네가 청부했어?”

“아으, 뭐, 뭘요……?”

아직 머리채를 잡고 있어 선우는 고개가 뒤로 한껏 꺾인 채로 힘겹게 말했다. 태화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모르는 척하는 건가 싶어 선우를 가만히 들여다봤지만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하기야 이런 일을 청부할 돈도 없는 놈이지, 참…….

고개를 작게 저으며 생각하는데 선우가 제 머리채를 잡은 태화의 손목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아파, 아파요……. 윽…….”

떼어 내 보려 애를 썼으나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태화는 이쯤 해서 놔줄까 하다가 이번에는 머리채를 당겨 와 낯을 가까이 마주했다.

“너 나 알아?”

선우는 겁먹은 표정으로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나 왜 도왔어?”

연신 앓는 신음을 내던 선우가 갑자기 입을 꾸욱 다물었다. 무턱대고 도운 건 아닌가 보았다. 눈알을 또르르 굴리기에 태화는 머리카락을 좀 더 바투 쥐었다. 대가리 굴리지 말고 어서 말해 보라는 듯 눈썹을 들썩이자 선우는 다 터진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이내 나직이 말했다.

“……나 혼자서는 못 죽였을 테니까.”

“죽이고 싶었어?”

“네.”

“왜?”

“지영환은, 개새끼예요.”

선우는 이때까지 말끝마다 흐리게 대답하더니 처음으로 명료하고 깔끔한 음성을 냈다. 눈에 빛이 반짝 드는 게 보였다. 태화는 영민하게 빛나는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머리채를 놨다. 선우가 두피를 비비는 동안 손끝으로 퉁퉁 부은 얼굴을 따라 내려가며 매끄러운 목덜미까지 가볍게 쓰다듬었다. 선우는 침을 꼴깍 삼켰다. 태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기 힘들었다.

이대로 나도 죽일까……?

곁눈질로 이미 죽어 시체가 된 영환을 힐끔 봤다. 태화는 방금 막 영환을 죽인 사람이었다. 지영환보다 훨씬 가냘프고 약한 새끼 하나쯤은 별 힘들이지 않고 죽일 수 있을 터였다. 바닥에 널린 케이블 타이가 자기 목을 감싸는 상상을 하던 선우는 별로 티도 안 나는 제 목젖을 부드럽게 둥글리는 손길에 움칠 떨었다. 그러면서도 태화의 손길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태화는 둥그스름한 목젖을 매만지며 선우를 찬찬히 살폈다. 엉망이 된 낯짝을 감상하다가 갑자기 목덜미를 콱 움켜쥐었다.

“흡!”

“잘 들어. 난 너에 대해 꽤나 잘 알거든?”

커다란 손안으로 가느다란 목이 전부 잡혀 들어갔다. 선우는 잔뜩 움츠러든 채 들숨도 날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숨이 점점 막혀 왔다.

“이름 최선우. 나이 이제 겨우 스물. 하는 일은 싸구려 다방 종업원. 뭐, 오늘 하는 꼴을 보니 남창 짓도 겸하는 거 같고. 연고 없음, 후견인 없음, 빚은 많음.”

선우는 괴롭게 찡그린 눈을 크게 떴다. 태화가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제법 많았다. 그게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꽉 죄인 숨구멍 때문에 표정이 금세 다시 일그러졌다.

“흑, 흐읍…….”

“그게 무슨 뜻인 줄 알아?”

태화가 물었지만, 선우는 이제 고개를 끄덕일 힘도, 도리질을 칠 정신도 없었다. 태화 역시 답을 듣기 위해 물음표를 매단 것 같지는 않았다. 끅끅거리는 신음을 내며 괴로워하는 선우를 멀거니 보다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줬다.

“네가 없어져 봤자 의심할 사람도, 찾을 사람도 없을 거라는 거. 빚쟁이 남창이 그냥 어디로 도망갔다고 생각하겠지.”

선우는 희한하게 의식이 점점 흐려지는 상황에서도 태화의 음성만은 또렷하게 귀에 꽂혀 들어왔다.

“그러니까 오늘 네가 본 걸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되겠지? 좆같은 인생이라도 명줄대로 살고 싶으면.”

선우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태화가 말하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 그의 말마따나 하치 인생으로 빌빌대며 사는 남창 하나 사라진다고 해서 세상이 뒤집히지는 않았다. 꽃다방 권 마담과 아가씨들이나 며칠 찾는 시늉만 할 테고, 그마저도 얼마 가지 않아 시들시들해질 터였다. 집창촌에서 사람이 한둘쯤 사라지는 건 흔한 일이었다. 대부분은 빚쟁이를 피해 야반도주하는 것이었고, 드물게는 섬이나 새우잡이 배로 팔려 나가는 것이었다.

선우 역시도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구태여 태화가 경고하지 않더라도 선우는 절대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영환을 대신 죽여 줬는데 신고라니, 가당치 않았다.

선우에게 있어 태화는 생명의 은인이었고, 구원자였으며, 신이었다. 물론 지금은 제 목을 틀어쥐고 있는 살인마이기도 했다.

“숨이, 끅……. 수, 숨…….”

“아.”

참다못한 선우가 목을 쥔 손을 아프지 않게 긁으며 말하자 태화는 그제야 작은 탄성을 뱉었다. 깔딱이며 숨이 넘어가기 전에 얼른 손을 뗐다.

“미안. 협박은 목숨 줄 쥐고 할 때가 제일 잘 통해서.”

“흡, 흐으……. 하…….”

선우는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로 기침을 거칠게 해 댔다. 콜록콜록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어찌나 세게 쥐었던지 목구멍이 저들끼리 쩍 들러붙었다가 떨어진 것 같아서 영 숨 쉬기 불편했다. 한참 쌕쌕대는 소리를 내며 크게 호흡하다 겨우 진정하고 고개를 들었다. 앞에서는 태화가 표정 없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은 없는데 위험해 보이진 않았다. 영환을 죽인 사람을 앞에 두고 선우는 꽤 한갓진 생각을 했다.

“진짜 저 안 죽이실 거예요……?”

괜스레 한 번 더 물었다.

죽이지 않겠다는 말이 듣고 싶어서.

“죽고 싶어?”

선우는 겁 없이 물어 놓고 또 금방 눈을 크게 뜨고 도리질을 쳤다. 태화는 선우가 이제는 신기할 지경이었다. 제정신이 아니기로는 저 역시 남 못지않았는데 눈앞에는 저를 뛰어넘는 놈이 있었다.

이런 놈이 홱 돌아 버리면 일 한번 크게 치르는데. 그냥 죽여야 하나?

잠깐 생각하다 숨을 짧게 내쉬었다. 커다란 손으로 그나마 멀쩡한 선우의 오른뺨을 톡톡 쳤다.

“죽이기도 귀찮다. 안 죽여, 너. 그냥 입이나 다물고 살아.”

귀찮다는 듯이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 안 해요. 절대 말 안 할게요. 대신…….”

선우는 태화를 잡았다. 우비를 붙잡았다가 손이 미끄러져 다시 바짓단을 잡아당겼다. 태화는 시체를 여기서 대충 갈무리해 갈까, 아니면 그냥 갈까 고민하다 뒤를 돌아봤다. 무료하기만 하던 얼굴 위로 짜증이 담겼다.

“대신?”

다리를 가볍게 털어 선우를 떼어 냈다. 포기를 모르고 재차 잡으려고 할 땐 아예 바닥을 짚은 손을 꾸욱 밟았다. 무게를 주자 선우가 아픈 소리를 냈다.

“우리 사이에 대신은 없어. 네가 무조건 내 말을 듣는다는 전제만 있지.”

이쯤 하면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하고 손등을 한번 비벼 짓이기다 뒤로 물러났다. 선우는 빨간 자국이 남은 손등이 아픈지 가슴으로 끌어와 문질렀다. 앓는 소리를 내다가 태화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네발로 기며 이번에는 다리를 감싸 안았다.

“자, 잠깐만요……!”

“하아…….”

태화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알록달록 멍과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보자니 어쩐지 두통이 느껴졌다. 눈도 약간 침침해지는 것 같았고, 여하간에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다리를 한 번 더 털어 봤지만, 선우가 힘주어 안고 있는 탓에 떨어뜨리기 쉽지 않았다. 말 안 듣는 놈에게는 매가 약이었다. 태화는 쯧 혀를 차고 선우에게로 손을 뻗었다.

“왜 자꾸 이러……. 어…….”

뺨이라도 후리기 위해 머리채를 잡으려는데 순간 눈앞이 어찔하게 질렸다. 어깨 위로 무언가가 무겁게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크게 휘청이는 몸을 간신히 세워 문기둥에 어깨를 기댔다.

이게 뭔…….

낯설고도 익숙한 감각에 잠깐 당황하던 태화는 이윽고 입을 반쯤 벌리다가 다시 꾸욱 다물었다. 이게 무슨 감각인지 기억났다. 난데없이 졸음이 몰려왔다. 최근에는 밤을 새운 적도 없고, 못해도 하루에 다섯 시간은 잤다. 졸릴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빠르게 흐릿해져 가는 시야 속에서 태화는 미간을 엷게 구겼다. 점점 그림자가 지는 눈앞으로 선우가 보였다. 저들이 뭐 대단한 사이라고, 걱정이 한가득한 얼굴이었다.

“아……. 씨발.”

낮은 욕지거리를 툭 내뱉은 커다란 몸이 앞으로 쿵 넘어갔다. 방향을 잘못 타고 넘어져서 아래로 선우가 깔렸다. 밑에 깔린 마른 몸에서 바싹 마른 천 기저귀 냄새가 났다. 어쩌면 이 냄새가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마지막 생각을 끝으로 태화는 깊은 잠에 빠졌다.

빌어먹을, 14년 만에 도진 기면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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