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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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박연우는 소문난 파티걸이다. 그녀는 성공한 여자였으며 태어나 지금까지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 왔다. 여자가 권력이 있고 재력이 있어야 한다는 부친의 뜻 아래 자라 온 그녀는 삼십 대 초반인데도 완벽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사교성이 좋고 인기인인 그녀의 흠이라면 베타라는 점이다. 그러나 알파에게 유한 사회에서도 그녀는 살아남았다. 그녀를 우연히 만나게 된 건 태범석 인생에 가장 큰 행운이었다. 남자를 액세서리로 여기는지 몰라도 그녀는 알파 남편을 들이고 싶어 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결혼으로 오는 간섭을 받고 싶지 않아 했으며 딩크족이었다. 그래서 자신보다 잘나지 않고 뒷배 없는 남자를 골랐는데 그게 태범석이었다.

그녀는 변덕처럼 갑자기 호텔 한 층을 빌려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갑자기 결혼한다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자, 그녀가 신중히 골랐다는 남편감을 궁금해했다. 태범석을 보고 수군거렸고 언제나처럼 뜻 모를 미소를 짓는 상류층 사이에서도 태범석은 의연하게 서 있었다.

그는 이 상류층에 휩쓸리고 융화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자신의 위치와 분수를 알고 있었다. 여기 있는 귀한 신분과 달리 보육원 출신이라 아무리 신분을 속이려고 해도 금방 들통나기 일쑤였다. 지금처럼.

“실례지만 어느 집 자제분이십니까?”

깔끔하게 포마드 머리를 한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옆엔 눈부시게 빛나는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보통 이름을 묻는 게 예의죠. 태범석입니다. 그쪽 이름은요?”

태범석이 손을 내밀었다.

“한태익입니다. 여기선 그렇게 묻는 게 빨라서요. 태범석이면 연우 신랑 될 분이시네요. 그 녀석이 갑자기 결혼할 줄 꿈에도 몰랐어요. 태 씨면 윤양건설 자제분이신가.”

“아뇨. 부모님이 없고 혼자 작은 웨딩 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아, 미안해요. 그래서 말을 안 한 건지도 모르고.”

옆에 있던 여자가 툭 한태익을 쳤다. 여자라고 하기엔 선이 조금 굵었다. 태범석은 그가 남자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여장 남자다. 몸에 꼭 맞는 드레스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그를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보았다.

“옆에 있는 분은 제 약혼자예요. 윤동아예요. 보다시피 코스프레 중이라 말을 안 해요. 말을 하면 남자가 돼서요.”

남자가 작게 웃으며 옆에 있는 윤동아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연우 어디가 좋아요?”

그가 테이블에 있는 샴페인을 집어 건네며 물었다. 첫째로 돈이 많아 좋았고 둘째는 그녀가 아이를 원하지 않아 좋았고 셋째로 결혼에 대한 개념이 일반인과 많이 다르다는 점에서 좋았다. 태범석은 속마음을 숨기고 능숙하게 거짓말을 했다.

“한눈에 반했죠.”

“돈에요?”

직구로 날아온 말에 태범석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굳이 바꿀 생각 없어요. 이미 그런 결론을 내린 사람 생각을 무슨 수로 바꿔요.”

이미 한태익이란 사람 머릿속에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결론을 내렸는지 뻔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으므로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서로 힘을 빼는 일이기 때문이다.

“농담인데 죽자고 달려드네요. 그러지 않아도 돼요. 힘 빼고 파티를 즐겨요.”

그들은 자신과 같은 부류를 낮게 평가했다. 그런 사람들 틈에서 두 손바닥을 비비며 비위를 맞추기보단 적당히 분위기를 보다가 빠져 주는 게 차악의 선택이었다. 태범석은 샴페인을 내려놓고 자리를 옮겼다. 파티에 불러낸 박연우가 보이지 않았다.

슬슬 태범석을 눈여겨보던 사람들이 그가 이방인이라는 걸 알아채고 갑자기 영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테스트였다. 박연우가 고른 남자가 얼마나 쓸모 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외국에서 오래 생활한 남자는 유창하게 4개 국어를 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듯했다. 태범석이 별 반응을 하지 않자 둥그렇게 모인 남자들이 태범석이 그녀가 고른 완벽하게 ‘별로인 남자’라는 걸 확인하곤 비웃었으나 그는 따로 모션을 취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서 튈 필요도 없었으며, 어울릴 이유도 없었다. 태범석을 박연우의 남편으로 기억할 사람들에게 말이다.

그녀가 돌아온 건 조금 늦은 새벽이었다. 소란스럽게 파티 홀에서 놀던 그녀는 갑자기 들어와 태범석의 손을 잡아챘다. 드레스를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정장을 입은 여자는 따분한 얼굴로 들어왔다. 어디서 술을 마시다 왔는지 그녀에게서 와인 냄새가 났다.

“이야기 좀 해.”

그녀가 작은 침대가 놓인 방으로 태범석을 끌고 갔다.

“걔 만나 보고 싶어졌어.”

“누구?”

“네 애인, 이름이 뭐였더라. 호연?”

“그건 계약 밖의 이야기잖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래도 내 남편 될 사람 연인인데 얼굴은 봐야지. 친해지고 싶어.”

잠시 고민했다.

“계약에서 빗나가.”

“내가 조금 억울한 계약이긴 하잖아. 난 딩크이고 넌 아니고. 내가 죽으면 네 아이가 돈을 다 가져갈 수도 있잖아. 좀 친하게 지내면 어때? 아님 유산이고 뭐고 사회에 환원할까? 그럼 경제도 잘 돌아가고, 재벌들의 귀감이 되어 원성이 자자하겠네.”

“넌 아무 의심도 없겠지만, 걘 아니야. 끊임없이 의심할걸.”

“왜 소개를 못 해 주겠다는 건데. 내가 잡아먹기라도 해?”

“말조심해.”

그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대자 그녀가 웃었다.

“어차피 한 번은 만나야 하잖아. 계속 이렇게 내외할 거야? 그 오메가가 애를 낳아도 보여 주지 않을 거고?”

“그래.”

“그럼 계약서 엎어. 결혼도 없던 걸로 해. 나 좋자고 결혼하는 건데 눈에 거슬리는 게 있는 결혼을 해선 안 되잖아.”

하마터면 손이 튀어 나갈 뻔했다. 그러나 속을 살살 달래며 눈앞에 있는 박연우를 응시했다. 제멋대로인 여자였고 누가 우위에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결혼이 깨지면 누가 손해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잘 이용했다.

“어떡할래?”

“마음대로 해.”

싱긋 웃은 그녀가 태범석의 어깨를 툭 쳤다.

“이제 태범석을 보내 줘야지. 그 오메가가 보고 싶어 하겠다.”

“고맙다고 해야 해?”

“됐어.”

그녀가 손을 훠이훠이 저으며 얼른 가라고 손짓했다. 태범석은 마다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고작 만 하루 동안 일과 파티를 병행하느라 몸이 닳을 지경이었다. 침대에 누워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던 그녀를 힐끔 보곤 복도로 나갔다. 그러곤 복도를 지나 나가려는데,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 서늘한 감각에 태범석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선가 맡아 본 적이 있는 낯선 남자의 향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기분 나쁜 중압감이 느껴졌다. 뼈대가 큰 남자가 파티장으로 향하는 걸 물끄러미 보던 태범석은 다시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걸 알림음이 알려 주었다. 엘리베이터로 발을 들이던 태범석은 다시 고개를 틀었다. 그 냄새를 어디서 맡았는지 기억났다. 얼마 전 희미하게 안호연에게서 나던 냄새였다. 알파 대여 서비스를 이용했는지, 어제 안호연에게서 미세하게 다른 알파의 페로몬 냄새가 났다. 그제야 태범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파티에 돈이 많은 오메가들이 대여 서비스를 부르곤 했고, 태범석의 옆을 스쳐 지나간 남자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안호연에게서 났던 냄새가 저 남자에게서 나는 건지, 의문이 떠오른 동시에 답이 나왔다. 씨가 없는 걸 드러내고 싶지 않은 알파들이 페로몬 향수를 쓰는데, 태범석도 그 페로몬이 그들이 쓰는 향수 중 하나라고 일반화했다. 피곤함에 목을 좌우로 기울이던 태범석이 전화기를 들어 문자를 확인했다.

[오늘 왔다가 갔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2천 말해 놨습니다.]

돈을 벌겠다고 부지런히 움직일 안호연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기도 하고 마음이 가라앉기도 했다. 처음으로 얻은 아이를 생각하면 안호연을 죽이고 싶은 감정이 들었다가도 안아 주고 싶었다. 교차하는 양가감정 속에서 태범석은 손바닥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안호연은 돈이 필요할 때면 태범석의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죽기보다 싫은 얼굴로 돈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리고 오늘 50만 원 내고 갔습니다.]

마지막 문자까지 상세히 읽은 그가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안호연은 늘 빈털터리였고 태범석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안쓰럽고 가엾고 사랑스러워 태범석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고작 하루 떨어졌을 뿐인데 안호연이 그리웠다. 현관문을 열자 오메가의 체향이 반겼다. 그 부드러운 향에 태범석은 파티에서 얻은 짜증을 잊었다. 문이 열리자 방문에서 발가락이 보이더니 얼굴색이 죽은 안호연이 나왔다.

요즘 안호연은 머리를 잘 정리하고 멀끔한 옷을 입고 다녔다. 며칠 전엔 그런 것에 관심 없는 사람처럼 늘 똑같은 머리에 밋밋한 옷을 입고 다녔는데, 요즘 옷 색도 다채롭고 머리도 잘랐는지 깔끔했다. 마치 스무 살 초반의 안호연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갑자기 심경에 변화가 생겼나. 그렇지 않으면 잘 보일 만한 사람이 생겼나. 묘하게 생기가 도는 안호연을 태범석은 슥 핥듯이 훑어보았다.

“며칠 있다가 온다며.”

“아아, 뭐. 너한테 물어볼 말도 있고 전할 말도 있어서.”

평범한 인사를 하면서도 안호연은 고민이 있는 얼굴로 태범석을 보았다.

“할 말 있어?”

“왜?”

그가 침을 넘기는 소리가 태범석의 귀에 다 들렸다.

“할 말 있는 사람처럼 내 뒤만 따라다니잖아.”

“혹시 내 통장에 돈 남았어?”

안호연의 통장은 태범석이 관리했다. 그가 생전에 벌어 놓은 돈은 이미 마이너스를 찍고 있었다. 그가 빈털터리가 되는 과정은 쉬웠다. 그리고 그가 돈이 왜 필요한지도 알고 있었다. 안호연의 머릿속은 열어 보지 않아도 뻔했다. 뻔하게 흘러가게 태범석이 설계했고 그 설계에 안호연이 잘 녹아들었으니까. 안호연은 이천만 원이 필요했다. 제임스의 회사에서 땜빵을 메우는 일로 해결되지 않을 금액이었으나 무슨 수를 쓰더라도 채울 예정이다. 그리고 그걸 이용해 태범석은 어떻게든 안호연과 잠자리를 이어 나갈 생각이었다. 조금 조급했다.

“돈 다 털렸어. 소송비에다 이런저런 잡다한 비용에다 이 집 구매하는 데 다 썼잖아. 그러니까 내가 집 사 준다고 했을 때 받았어야지.”

“지금 줘.”

그가 대뜸 손을 내밀었다.

“이미 지났어.”

결혼이 성사되면 태범석은 이 집을 처분하고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회사와 가깝고 보안이 좋은 집으로 옮겨 점심시간이나 짬짬이 안호연의 집에서 생활할 생각이었다. 돈 이야기를 꺼내자 그가 미웠다. 도대체 다솜을 찾으면 무얼 하고 싶은지 궁금했다. 자신에게서 도망가려는 건지, 아니면 정말 아이가 보고 싶은 걸까. 수많은 물음이 떠올랐다.

코로 불쾌한 향이 났다. 안호연에게서 나는 냄새였다. 성큼성큼 걸어 안호연의 곁으로 간 태범석이 코를 들이밀었다. 벌렁거리는 코로 아까 복도에서 마주했던 대여 서비스로 나온 알파와 비슷한 향이 난다는 걸 깨달았다. 매우 유사한 편이었다. 냄새를 맡는 걸 깨달은 안호연이 발작처럼 태범석을 떠밀었다. 뭔가를 숨기듯 눈을 내리까는 모습이 기분 나빴다.

기분 좋게 오늘은 한 침대에 누워 잘 생각이었다. 넥타이를 아래로 끄집어 내리려던 태범석은 관심 없는 척 물었다.

“요즘 기분 좋은 일 있어? 연애해?”

태범석이 안호연에게 물었다.

“아니.”

“거슬리는 페로몬 냄새가 나서. 나 없는 동안 또 대여 서비스 이용했어? 요즘 옷도 그렇고 머리도 꾸미고 다니잖아.”

“나, 난 하면 안 돼?”

“적어도 누군지는 말해 줘야지.”

“대여 서비스야.”

“궁했어? 삼 년 동안 엉덩이 안 놀리고 집에만 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태범석은 굉장히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걸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편이었다. 자신도 연애하면 안호연도 그게 가능해야 했다. 그래서 종종 장난치듯 서비스를 이용하라고 다그치긴 했는데, 정말 이용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 때문이었나. 며칠 전 잠자리에서 적극적이던 안호연을 떠올렸다. 더 만져 달라고 가슴을 내민다거나 다리를 감고 신음을 흘리는 등 평소에는 없던 행동이었다. 그날 안호연이 다시 좋았던 관계를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걸로 받아들였는데, 그게 대여 서비스를 이용하고 온 효과였다는 걸 예상하지 못했다.

좋다 말았다. 딱 그게 태범석의 심정이었다. 분명 알파 대여 서비스를 이용하는 일회용적인 재미였을 뿐일 텐데 기분이 조금 더러웠다. 그래서 태범석은 이유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가 답을 찾았다. 자신의 아이가 담길 곳에 다른 남자의 좆이 드나들었단 생각에 기분이 더러웠다. 그 이유가 아니고선 답이 나오지 않았다.

잘 생각해 보면 합리적이지 않다. 그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 결론은 안호연을 먹여 살리기 위함이었고, 자식을 위해서 한 일인데 그 돈으로 안호연이 대여 서비스를 이용하는 건 공평하지 않았다.

“걔랑 잔 적 없어.”

“그럼 뭘 했는데?”

“네가 해 주지 않는 거.”

안호연은 입을 다물었다. 본인이 해 주지 않는 거라. 태범석은 다솜과 관련된 일을 제외하면 웬만해선 안호연이 원하는 것들을 해 주었다. 그제야 태범석의 머리로 번개처럼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안호연이 집착하던 페니스 링이다. 한때 이상한 링을 꺼내 성기에 끼는 걸 빼서 던진 적이 있었다. 그걸 안 차면 불안하고 미칠 것 같다면서 벌벌 떨던 안호연을 향해 태범석은 더럽다고 일갈하며 다시 저걸 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경고했었다. 그건 강중영이 안호연에게 남긴 흔적이었다. 안호연에게 그런 흔적이 남는 게 끔찍했다.

태범석이 손으로 안호연의 앞섶을 쥐었다. 길쭉한 것에 링 같은 게 만져지자 태범석은 헛웃음을 지었다. 눈이 뒤집어질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씨발, 이거 하지 말라고 했었잖아.”

어금니를 꽉 깨물고 속삭이던 안호연은 그의 손을 밀어냈다.

“왜? 내 취향이야. 강중영이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 그냥 불안해서 그래. 누가 옆에서 봐 주고 먹여 주고 그러는 게 좋아. 그걸 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서비스를 이용하는 게 나빠?”

“차라리 떡을 쳐, 씨발. 더러워. 변태 새끼가 남긴 흔적을 왜 되새기는데. 그 새끼가 그렇게 좋았어? 하긴, 그랬겠지. 그래서 돌아올 생각도 안 하고 거기서 뭉그적거렸겠지. 애새끼가 죽어 가는지도 모르고 이상한 변태 행위까지 하면서?”

안호연의 눈이 붉어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에 힘을 준 그가 손가락으로 눈가를 닦았다. 그가 하나도 불쌍하지 않았다. 안호연이 조금 더 죄책감을 가졌으면 했다. 그래야 안호연을 조종하기 쉬웠다. 태범석이 쥔 안호연의 약점은 그의 아이였고 태범석은 그걸 잘 이용했다. 죽은 아이에 대한 애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아이는 그저 안호연을 묶어 놓는 구실에 불과했다. 아이가 생기면 안호연은 태범석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강중영을 버리고 자신에게 돌아왔듯이. 태범석이 안호연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놔.”

“정말 놔도 돼?”

태범석이 안호연에게 물었다.

“네가 가고 싶어 하던 곳에 데려갈 거니까 잔말 말고 내려가.”

“네가 싫다는 거 강요할 생각 없다고 했잖아.”

발가락 끝으로 버티고 선 안호연을 내려다보던 태범석은 안호연을 허리째 끌어안아 어깨에 걸치곤 밖으로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에도 몸을 심하게 흔드는 안호연에게 소리를 꽥 질렀다.

“안호연!”

“뭐!”

“네가 다솜이 뒤 캐는 거 모를 줄 알아? 왜, 다솜이 찾으면 도망가려고?”

순간 뒤에서 터져 나오던 안호연의 숨이 조용해졌다. 그 침묵이 긍정으로 느껴져 태범석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안호연은 태범석의 것이었다. 자신의 오메가였고 자신이 소유한 제일 값진 것 중 하나였다.

“그래서? 알면 안 돼? 나도 알 권리가 있잖아.”

안호연이 도망가려는 낌새가 보일 때마다 태범석은 눈에서 열이 났다.

“없다고 누누이 말했잖아. 그 아이가 널 좋아하겠어? 원망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등 뒤에 있던 안호연이 조용해졌다. 울먹이는 소리가 귀를 쟁쟁하게 울렸으나 불쌍하지 않았다. 불쌍한 건 아이였다. 태범석은 차에 안호연을 태웠다. 무릎을 가슴 바짝 끌어들이곤 소리도 내지 않고 우는 안호연을 태우고 어디론가 갔다.

그곳은 다솜이 있는 곳이었다. 도시를 지나 와 근교의 작은 도시로 빠져나갔다. 8차선이었던 길이 4차선이 되고 2차선이 되었을 때가 돼서야 화가 났던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난폭하게 속도를 올려 차를 몰던 태범석이 차를 멈췄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다솜이가 있는 곳이야.”

그제야 안호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중간중간 가로등이 서 있었으나 주변이 깜깜했다. 이곳이 어딘지 구별하려고 용을 쓰는 듯 주변을 둘러보는 꼴에 화가 났다.

“어딘데? 어느 방향인데?”

“근데 지금은 아니야. 네가 다솜이를 만나러 가기 전에 뭘 해야 하는지 잊지 않았지?”

안호연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그 아인 지금도 몸 없이 이 세상을 떠돌고 있는데 너란 새끼는.”

안호연은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떨리는 안호연의 눈을 볼 때마다 짜릿했다.

“숨을 쉬고 산 날이 열 손가락에 꼽혀. 그런 애에게 우리가 부모라면 몸 하나쯤은 만들어 줄 수 있잖아. 너와 내가 만든 아이여야 하잖아. 나도 다솜이 아니었으면, 다솜이를 그렇게 만든 너 버렸어. 다솜이 아니었으면 너 같은 새끼와 이어 보려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래도 다솜이 봐서, 네가 다솜이를 낳은 사람이니까 어떻게든 노력하는데 넌 왜 노력 따위 안 하는데? 너도 나도 아이 앞에선 똑같은 죄인인데 왜 나만 노력하고 있는 것 같으냐고! 살아 있는 다솜이가 보고 싶어. 따듯하고 심장이 뛰는 우리 아이. 그 아이가 어떻게 클지 궁금하잖아.”

안호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범석은 안호연의 귀에 입술을 댔다.

“그럼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알겠어? 내가 큰 걸 바라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잖아.”

안호연은 그제야 마구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아서 보닛을 두 손으로 짚었다. 태범석은 안호연의 바지를 내리곤 모은 다리를 벌렸다. 뜨거운 보닛 위에 안호연이 상체를 짚게 하곤 페니스를 엉덩이 사이에 바로 집어넣었다. 뜨겁게 조여 오는 안호연의 내부가 자신의 성기를 감싸자, 성기가 점점 단단해져 열이 올랐다. 태범석은 두 손으로 안호연을 보닛에 밀어트렸다.

“나는 너한테만 아이를 주고 싶어. 너도 원하는 거였잖아.”

울음이 섞인 신음을 들으며 태범석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가 사라졌다. 안호연의 속을 성기로 깊게 꿰뚫으며 자신을 새겼다. 안호연은 태범석의 것이다. 그건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 *

언덕이 없는 뻥 뚫린 길가에 홀로 세워진 차 속은 히터를 틀었음에도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색색 숨이 모자란 환자처럼 가슴에 손을 올리고 부족한 숨을 채우던 안호연은 그제야 머리가 맑아졌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안호연의 머리로 뭔가가 스쳤다. 지금 본 걸 모두 적어야 했다. 주머니를 뒤져 휴대 전화를 꺼내 메모장을 켰다. 돌아오면서 보았던 표지판과 지역명, 생각나던 주위 풍경까지 다 적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몸이 굉장히 끈적거려 씻고 싶었으나 여전히 차 속이라 움직일 수 없었다.

태범석은 핸들에 두 팔을 올리고 그 속에 얼굴을 묻은 채로 있었다. 침을 삼킨 안호연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미친 듯이 아이의 위치를 유추해 내려는데도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잠이 든 걸까. 아니다. 그가 잠들지 않고 있다는 걸 숨소리로 알 수 있었다. 고른 숨소리가 아니었다. 불규칙한 숨이 이어졌다.

그제야 그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어차피 장소는 또 옮기면 그만인 것이다. 안호연이 다솜이 있는 장소를 알아내면 다른 곳으로 옮기면 그만이고 또 알아내면 옮기면 됐다.

안호연이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는데도 태범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응이 없는 태범석은 무서웠다.

“알려 줘도 안 떠나. 그러니까 데려다줘.”

“알려 주면 떠날 거잖아. 너도 사기꾼이고 나도 사기꾼이야.”

남자가 핸들에 얼굴을 묻은 채로 속삭였다.

“우리 다솜이 봐야지. 오늘부터 내가 잘할게. 밥도 잘 먹고, 그래, 그러자. 그러니까…….”

나 때문에 죽었단 말은 하지 마. 가슴이 너무 아파서 죽어 버릴 거 같으니까. 안호연은 입술을 꽉 깨물며 마지막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가 날카롭게 말로 찌르지 않아도 잘 아는 부분이었다. 건강하게 낳지 못해서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살아가는 안호연은 상처를 끄집어낼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핸들에 얼굴을 묻었던 태범석이 울고 있는 안호연의 눈가를 문댔다.

“이번에 건강하게 낳으면 되잖아. 그렇지?”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 웃음이 괴상하기 짝이 없었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넌 그것만 생각해. 네가 아프게 했던 다솜이도 괜찮은 거잖아. 그렇지?”

냉랭했던 그가 고개를 올리곤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다 안 아프잖아. 너도 나도 다솜이도.”

자신을 설득할 때마다 구원을 받는 느낌이다. 그는 지친 안호연에게 가시밭길 같은 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안호연은 그의 입술을 멍하니 보다가 끄덕였다. 그래, 아이만 낳으면 되는 일이었다. 다솜은 다시 살아 돌아오고 그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받을 일도 없었다. 다시 가슴이 후벼 파이는 일도 없었다. 그 아이를 보며 죄책감을 느낄 일도 미안할 일도. 돌아온 아이를 원 없이 사랑해 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가슴이 텅 비고 답답했다. 그가 손을 뻗어 안호연의 턱을 눌렀다. 그리고 벌어진 입술에 혀를 밀어 넣었다. 바보같이 숨도 쉬지 않는 안호연에게 숨을 밀어 주자 비로소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부족한 숨을 몰아쉬는 동안 태범석은 차에 시동을 넣었다. 안호연은 고개를 돌리고 차창 밖을 응시했다. 차창에 언제 생겼는지 모를 습기가 차 흘러내렸다. 마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창에 긴 눈물 자국이 생겼다.

태범석이 멍청하게 앉아 있는 안호연을 밀었다. 그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깜박여도 어딘지 가늠이 되지 않아 멍하니 둘러보다가 그제야 집 앞이라는 걸 깨달았다.

“먼저 가 있어,”

내리라는 말이 떨어지자 안호연은 차에서 내려 돌아보지도 않고 집으로 달려 들어갔다. 안호연은 빠르게 침대로 올라갔다. 씻지도 않고 올라가 이불을 둘러쓰고 눈을 감았다. 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없이 떠오르는 많은 감정을 감당하기에 안호연은 약했다. 팔로 눈을 가린 안호연은 얼른 눈을 감고 잠이 오길 기다렸다. 한참 침대에서 뒤척이던 안호연에게서 움직임이 사라졌다. 이제야 잠든 것이다.

집에 틀어박힌 안호연은 무섭게 잠을 잤다. 모든 에너지를 최소화하고 자가 보호하는 사람처럼 거의 움직임이 없었다. 태범석이 몰아치듯 궁지에 몰아넣을 때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잠을 잤다. 무너진 정신을 복원하는 시간이자 회복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아무도 건들지 않았다. 태범석도 그 시간엔 안호연을 건들지 않았다. 커튼을 치고 죽은 듯이 잠든 걸 확인하곤 한참 앉아 있다 가곤 했다. 그렇게 사흘을 잠을 자면 안호연은 일어나 밥을 먹고 TV를 보며 깔깔 웃었다. 미친 듯이 웃기를 반복하던 안호연은 두 손을 하늘로 쭉 올렸다. 움츠리고 자느라 결렸던 어깨의 근육이 풀어졌다. 사람의 복원력은 실로 대단했다. 바닥까지 끌려가 상처가 파헤쳐져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어쩌면 복원력이 아니라 가슴 어딘가에 또 하나의 구덩이가 생긴 건지 모른다. 감당이 되지 않아 모든 걸 구덩이에 밀어 넣어 덮고 외면하는 상태라는 게 안호연의 지금 상태에 어울렸다. 안호연은 배가 부풀 정도로 밥을 먹고 베개 아래에 깔고 잤던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에 태범석이 있었다. 그리고 문자가 다섯 통 날아들어 왔다. 두 통은 스팸이었다. 대출 문자와 도박 권유 문자였고 나머지 세 통은 강중영이었다. 피하고 싶었던 사람의 문자와 마주하니 속이 복잡해졌다.

[왜 연락이 안 돼요?]

[무슨 일이 있으면 말해야죠. 그게 파트너에 대한 예의잖아요.]

[오늘 자정에 건너와요.]

마지막 문자는 오늘 날아든 문자였다. 안호연은 긴 한숨을 내쉬고 답장을 쓰려고 했다. 그때 태범석에게 문자가 날아들었다.

[나랑 결혼할 여자가 널 보고 싶어 해. 어쩔래?]

[괜찮아.]

딱히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해 동의했다. 괜히 문제를 만들 이유도 없었다. 안호연은 휴대 전화를 놓으려다가 아까 못다 쓴 답장을 작성했다. 조금 오래도록 시간을 끌 생각이었다. 아직 강중영을 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태범석하고 여행 중이야. 오늘 못 가. 기다리지 마.]

안호연은 전송 버튼을 눌렀다. 비겁한 도피지만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호연은 심부름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손님, 오랜만입니다. 어쩐 일로 전화하셨어요?]

“태범석이요.”

[네, 네.]

“알더라고요. 내가 추적했다는 거.”

[그때도 말씀드렸잖아요. 귀신같이 알아채고 아이를 다른 납골당으로 옮겼다고요. 3년을 추적했는데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알고도 모른 척해 왔던 거 같아요. 그쪽에서 알고 있다면 저희가 움직이기 좋죠. 굳이 숨지 않고 알아내도 되잖습니까.]

“대충 어딘지 알아요. 그곳 주변에 있는 곳을 다 뒤져서라도 다솜이가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문자로 넣을게요.”

[네, 네.]

안호연은 전화를 끊음과 동시에 메모장을 열어 그날 적어 두었던 걸 복사해 메시지로 전송했다. 태범석이 장소를 옮기기 전에 보고 싶었다. 안호연은 다솜을 숨기는 이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솜이 있는 곳을 알면 도망간다는 건 그의 노파심이다. 안호연은 절대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

안호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지런히 집 청소를 하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멈칫했다. 1층 창문에서 누군가 창밖으로 손을 내밀고 이쪽을 보고 걸 확인한 순간 자신이 얼마나 경솔하고 멍청한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아까 집에 없는 척 문자를 보냈었다는 게 생각났고, 그게 거짓말이 되었다는 걸 깨닫자 안호연은 갈증이 났다.

그는 안호연을 응시했다. 비난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담백한 눈이었다. 맞닿은 시선을 먼저 피한 건 안호연이었다. 고개를 비틀자 이 동네에선 흔히 볼 수 없는 외제 차가 눈에 들어왔다. 강중영이나 그의 차나 이 동네와 어울리지 않았고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디선가 벨이 울렸다. 안호연은 테이블에 놓은 휴대 전화를 응시하다가 다시 강중영을 보았다. 그가 휴대 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고 안호연의 벨이 울리고 있었다. 전화를 거는 사람이 누군지 예상됐다. 그가 지켜보고 있어 그 전화를 피할 수가 없었다.

[나 말할 거 있어요.]

“뭐?”

[거짓말 작작 해요.]

현행범인 안호연은 이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가끔 말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어. 혼자 있고 싶었어.”

[그럼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요. 그렇게 거짓말하면 저는 오해해요. 변덕처럼 내가 싫어진 건지 계약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지기도 하고요.]

“미안해.”

[그 말은 넣어 둬요. 호연 씨가 미안할 일 아니니까. 내가 건너갈까요, 그쪽이 건너올래요?]

“내가 갈게.”

괜히 집에 그를 들여 냄새에 민감한 태범석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싸우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안호연은 머리를 매만져 정리했다. 그런데 오래도록 씻지 않아 머리가 떡 졌다. 뭉텅이로 뭉쳐 이리저리 흔들렸다. 보지 않아도 얼마나 흉할지 자연스레 떠올랐다. 무겁게 가라앉은 머리를 자꾸 매만지며 현관 앞에 섰다. 문을 열기 전에 먼저 문이 열렸다. 그는 문밖에 선 안호연을 꼼꼼히 살펴보고 표정이 굳더니 들어오라고 강요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안호연은 작게 숨을 쉬었다. 가만히 보다가 달려가 그의 허리를 꼭 안았다. 그에게서 퍼져 오는 냄새가 좋았다. 오래 씻지 않아 냄새가 날 텐데도 피하지 않고 안호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으면 안 되죠?”

“응.”

“그럼 위로는요?”

“해 줘도 돼.”

그는 안호연의 목과 허리를 꽉 조였다. 허리를 조여 번쩍 든 그가 안호연을 집 안에 들였다. 신발을 벗으려 손을 뒤로 뻗기도 전에 그가 안호연을 내려놓았다. 손바닥으로 눈물 자국이 남은 안호연의 뺨을 쓸었다. 지나치게 깔끔한 남자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쓸어내렸다.

가끔 안호연은 그런 상상을 한다. 그날 이기적인 마음으로 강중영을 떠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잠시 그와 함께했던 미래를 꿈꿨다가 그의 손가락에서 빛나는 반지를 보곤 마음을 접었다. 이렇게 그가 편안해 보인다는 건 그가 어딘가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돌려보내야 했다.

“널 보면 해 주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

안호연은 힘겹게 입술을 뗐다. 이제 좀 해야 할 게 생각났다. 조금 웃음이 났다. 씻고 좀 더 깔끔한 옷을 골라 입고 나올 걸 후회됐다. 가슴속에 묵혀 두었던 마음을 꺼내는 건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만큼 참 어려운 일이다. 안호연은 말소리를 내려다가 그만두었다.

“……좋아해.”

말을 꺼내는 게 어렵지, 한번 터지면 그 뒤는 어렵지 않다. 좋아한다는 말에도 강중영은 무덤덤했다.

“알아요.”

모르는 게 이상했다. 강중영은 바보가 아니었고 안호연은 바보 같지 않은 사람에게 티를 냈다. 그런데도 그는 모른 척 플레이 했다.

“여전히 사랑했어. 내가 이기적이라 그 마음을 숨기고 만나 보려고 했는데 흔들려. 이제 내 삶을 그만 흔들었으면 좋겠어. 모든 게 엉망진창이야.”

“흔든 적 없어요.”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흔들려서 그만둬야 할 거 같아.”

눈을 내리감았다. 언젠가 해야 했던 말이다. 개인의 욕심을 채우려는 마음은 이제 끝내야 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야 했다.

“여전히 좋아하는데 왜 그만둬요. 잡고 쟁취하면 되잖아요.”

그만두는 이유. 그건 처음 그를 만나게 된 것과 똑같다. 미련이 남아서 만남을 유지하려 했고 미련이 남아서 만남을 그만두었다.

“내가 싫다면요?”

그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똑같은 어둠이라도 그 깊이가 다르듯 그의 눈도 여러 색으로 빛났다. 그의 눈에 자신의 얼굴이 얼핏 보였다.

“전 좋은 파트너를 잃을 생각이 없어요. 호연 씨가 사랑하면 더 좋고요.”

“왜?”

“똑같은 이유라서요. 호연 씨를 많이 좋아해요.”

그의 입술 사이로 나온 말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이 폐를 쥐고 사방에서 압박했다. 손가락으로 가슴을 잡았다. 손가락이 살을 파고들수록 가슴에 통증을 남겼다.

“왜?”

그에게 또 물었다. 어째서 좋아하는 거냐고.

“이미 다른 오메가와 각인도 했잖아.”

거짓말 좀 하지 마. 안호연은 들개처럼 으르렁댔다. 자신의 마음 좀 그만 흔들어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그러면 어때요? 호연 씨도 다른 사람에게 각인하고도 절 사랑하는데 각인 따위가 무슨 상관이에요. 각인과 사랑은 별개잖아요. 호연 씨도 마음을 간직했는데 저라고 못 할 이유도 없고요. 이미 호연 씨 자체가 족쇄라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더라고요.”

“각인한 사람도 있잖아. 가!”

안호연은 그를 밀었다. 그의 가슴을 밀치고 또 밀어내려다가 멈춰 섰다. 자신이 나가면 되는 일이었다. 병신 같은 새끼. 왜 아직도 좋아해? 남자가 배알도 없어? 그렇게 버리고 갔으면 보란 듯이 다른 사람하고 잘 살아야지. 멍청하게 버린 사람에게 돌아오는 건 뭔데? 안호연은 작게 욕을 읊조리곤 밖으로 나갔다.

“정말 그 오메가에게 가요?”

등으로 강중영의 고함이 쏟아졌다.

“가! 그 오메가한테 가 버려!”

“후회 안 하죠?”

“후회? 그건 너 만났을 때 했고 그 후로도 여러 번 했으니까 그만…….”

강중영은 갑자기 안호연의 허리를 낚아챘다. 굵은 팔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자 안호연은 주먹으로 그의 머리를 마구 내려쳤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놔!”

“각인한 오메가에게 가라면서요. 갔잖아요. 내 안식처가 여긴데 자꾸 어디로 가라는 건데요? 내가 가야 할 곳이 여긴데, 어디로 가라고요.”

“각인한 오메가에게 가랬는데 왜 나한테 오는데?”

“제가 호연 씨에게 각인했으니까.”

순간 미친 사람처럼 펄쩍펄쩍 날뛰던 안호연이 우뚝 멈췄다.

뭐라고……?

귀가 잘못된 건가 싶어 안호연은 손바닥으로 귀를 쳤다. 자신이 그렇게 질투했던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가슴에 멍이 들었다. 일방 각인을 한 알파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미쳤어?”

“호연 씨가 없는데, 호연 씨는 아이까지 낳고 살고 있는데 어떻게 제정신일 수가 있어요? 질투로 머리가 들끓고 수많은 후회가 머리 안에서 몰아치는데 내가 놓아줘야 할 이유가 있어요? 행복해서 간 줄 알았는데 하나도 행복하지 않은 얼굴로 있으면 놓아주겠냐고요!”

“…….”

“그렇게 도망갔으면 따라올 것도 예상했어야죠. 이렇게 또 사랑한다고 나를 홀려 놓고 또 도망가겠다고요? 누구 마음대로?”

낮은 목소리를 귀에서 지우기 위해 안호연은 소리를 질렀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이대로 숨이 막혀 죽어 버릴 것 같았다. 그가 손바닥으로 안호연의 입술을 막았다. 입술을 뚫고 이 사이에 끼인 그의 손가락 때문에 물지도 못하고 눈살을 찡그렸다. 그는 그 커다란 손으로 안호연을 현관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너 바보야? 바보냐고!”

“치아 하나가 아려서 죽겠어요. 자는 날에도 아려서 깨어나서 그게 잘 있나 확인해 보곤 해요. 길을 걷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그게 그렇게 신경 쓰여요.”

고단한 목소리였다.

“어느 날은 그게 너무 아파서 제가 소리 내어 울었어요. 데굴데굴 울면서 구르다가 그때 그 치아 하나 때문에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호연 씨를 보니까 아팠던 게 씻은 듯 사라졌어요. 말이 돼요? 옆에 있는 것만으로 아프지 않다고요. 사랑하면 나 좀 살려 줘요.”

제발. 애통한 남자의 물음에 안호연은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온몸으로 사랑한다며 부딪쳐 오는 그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가 너무 가여워서 그를 선택하면 안호연은 다솜을 포기해야 했다.

그건 안호연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가 뱉어 낸 숨이 공기와 섞여 안호연의 코로 밀려들어 왔다. 숨에 섞인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박힐 때마다 속에서 욕이 배어 나왔다. 자신이 무식해 그 감정을 욕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게 화가 났다. 하나도 믿을 수 없었고 강중영의 말은 거짓말이어야 했다.

교육을 잘 받은 알파와 오메가라면 각인이 얼마나 괴로운 장치인지 교육받는다. 자유로운 연애와 실패가 있는 결혼이 통용되는 사회에서 각인은 불필요했다. 그래서 법이 개정되며 알파가 오메가를 강압적으로 각인하는 건 강간보다 무겁게 처벌했다. 그래서 알파를 둔 부모는 각인할 것을 예방하기 위해 알파의 영구치가 모두 자라면 치아에 특수 코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치아에 특수 코팅을 한다는 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각인은 보통 사각지대에 놓인 알파와 오메가가 하는 경우가 높았다. 그런 그가 언제, 어떻게 각인을 했다는 건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안호연은 숨을 내쉬었다.

다 거짓말이다. 그가 차고 있는 반지를 나눠 낀 적도 없었다.

“정말 네가 각인했다고? 웃기지 마. 그게 가능해? 너 보육원 출신도 아니잖아. 이렇게 번듯하게 잘사는데 코팅을 안 했다는 게 말이 돼?”

“어머니는 누군가에게 각인하길 원하셨어요. 그래서 따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고요.”

“언제 각인했는데?”

“그걸 알려 줘야 해요?”

“무슨 이유로?”

“노코멘트 할게요.”

“바보야? 또라이야?”

“왜 비난해요?”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내가 사랑하겠다는데, 내가 각인하겠다는데 왜 호연 씨가 비난하는데요. 사랑도 누구 허락을 맡고 해야 해요? 내 감정인데 왜 그쪽이 내 감정으로 뭐라고 하냐고요.”

“내가, 내가 어떤 이유로 떠났는데 멍청한 짓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잖아!”

“무슨 이유로 떠났는데? 사랑해서 떠났다는 말을 하려고요? 웃겨. 그게 무슨 사랑이야. 과정이야 어떻든 떠난 건 호연 씨니까 절 비난할 자격 없어요. 안 된다는 소리 말고 그냥 받아. 잔소리 말고 내가 사랑하면 그냥 다 받으라고요. 이렇게 가끔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더 욕심 안 내요. 그냥 옆에만 있어요.”

안호연은 입술을 다물었다. 그가 행복하길 바라서 놓는데, 그는 안호연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서로 사랑하는데 왜 헤어져요?”

그는 서로가 사랑하기 때문에 이별할 수 없다고 했다. 그건 그때 한 번으로 족하다는 그가 버거웠다. 안호연이 직면한 문제는 대단했다. 버리고 갔던 알파가 일방 각인을 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걸 삼 년씩이나 품고 인내했다는 것도.

“아프잖아.”

“그 치아가 아리고 아픈 게 당신 고통은 아니잖아요.”

“네가 아프면 나도 괴로워.”

“호연 씨가 옆에 있으면 되잖아요.”

쉽게 말을 뱉을 수 있어도 행동으론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 돼.”

안호연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왜요? 태범석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당신만 돌아서면 끝나는 일이에요. 둘 사이에 아이가 없다는 것도 확인했는데 제가 호연 씨를 포기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아이를 낳기로 약속했어. 우리 다솜이를 만나기로 했다고.”

“아이요? 아이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제가 줄 수도 있잖아요. 마음이 좀 더 건강해지고 몸이 건강해지면 그때 생각해요. 지금은 아니에요.”

“아니, 태범석의 아이여야 해.”

말하면서도 안호연의 얼굴이 굳었다. 잘못되었단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안호연에게 죄책감으로부터 도망갈 출구가 없었다.

“왜요?”

“그래야 다솜이를 만날 수 있으니까.”

“미쳤어요? 누가 제정신이 아닌데. 날 비난할 게 아니라 호연 씨나 똑바로 봐요.”

가끔 안호연은 정상인 사람을 통해 자신이 비정상인 걸 깨닫곤 한다. 이상한 눈이 스칠 때면 자신이 미쳐 있다는 걸 확인한다. 자신이 비정상적이라는 걸 확인할 때마다 겁이 났다. 속죄할 방법이 하나라고 여겨 온 안호연에게 속죄할 기회조차 없다는 거니까. 머릿속에서 강한 충동이 일었다.

“그 아인 죽었어요.”

그걸 되새겨 주는 남자에게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태범석의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그건 다솜이가 아니에요.”

“맞는다고 했잖아.”

“뭐가 맞아요. 죽은 아이가 어떻게 돌아와요?”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 안호연은 강중영의 뺨을 내리치고 말았다. 손바닥 전체에 그 충격이 전해져 심장을 꿰뚫었다.

“죽었다고요.”

안호연은 화가 나 그의 뺨을 또 세게 내리쳤다.

“호연 씨가 그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충분히 애도하고 보내 주는 거예요.”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왜 몰라요. 나도 그 아이 아빠였는데.”

벼락처럼 그가 소리쳤다.

“아니, 아니지. 네 아이가 아니었잖아. 피도 안 섞인 아인데 나나 태범석의 마음과 같겠어? 넌 우리 마음을 몰라. 하나도 이해할 수 없어. 그래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나 태범석은 다솜이가 보고 싶어.”

“그런 식으로 제 마음을 평가하지 말아요.”

“너야말로 내 사상을 평가하지 마. 넌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것마저 해 주지 않으면 아이에게 해 줄 게 없어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안호연은 몸을 웅크렸다. 눈을 감으면 그날이 떠올라 오한이 들었다. 두 팔로 온몸을 감싸고 오들오들 떠는 안호연에게 화를 내고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남자가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는 안호연의 상태를 보더니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곤 달려와 안호연의 손을 꼭 잡았다.

“미안해요.”

“…….”

“정말 미안해요.”

미안하다고 그가 수차례 중얼거렸다. 왜 네가 미안해하는 거냐고 그에게 묻고 싶었으나 지금은 가슴이 아팠다.

“내가 호연 씨 상처를 생각하지 못했어요. 근데 그거 호연 씨 잘못 아닌데 끙끙 앓는 당신을 보면서 미련해 보이고, 그 미련함에 아파서 그랬어요. 그때도 지금도 호연 씨는 충분히 노력했어요.”

누군가가 안호연 탓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아파서 소리 내어 울지도 못했던 날들 속에서, 아이를 위해 울 자격도 없다는 비난 속에서 아이를 꺼내 보는 것조차 미안해 타인의 눈치를 봐야 했다. 살인자라고 몰아세우던 비난이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어서 괴롭고 절망스러운 날이 많았다. 다음 아이를 건강하게 낳아 죽은 아이가 머물 수 있는 몸을 주면 된다는 말만이 안호연이 들은 유일한 위로였다. 그래서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말이 생경했다.

“내가 죽였는데 어떻게 내 탓이 아니야?”

“아이가 아픈 건 호연 씨 탓이 아니에요. 어떻게 그게 호연 씨 탓이에요?”

“다 내 탓 같아서.”

다 내 탓이어서, 다.

안호연이 똑같은 말만을 반복하자 단단한 팔이 온몸을 압박했다.

“호연아, 많이 아팠구나.”

안호연은 빳빳하게 들고 있던 고개를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아프지 마.”

그가 ‘호연아.’라고 부르면 안호연은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시야가 좁아져 한 사람만 가득 차고 청각도 한 사람의 말소리에 초점이 맞춰진다. 오직 그 말만 들려서, 오직 그 말만 들어야 해서 마법처럼 아릿했던 가슴이 아무런 감각이 없어졌다.

“사랑해서 여기가 아파.”

그가 손가락으로 가슴을 툭 쳤다. 심장병을 앓는 사람처럼 눈살을 찌푸리고 꽉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답답해 죽겠어. 네가 아프다고 할 때마다 마음이 지옥 불에 던져졌다가 차가운 얼음 속에 담기는 기분이야.”

그 기분이 뭔지 모르겠으나 아프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호연은 그의 가슴에 손바닥을 올렸다. 뜨거웠고 손바닥 아래의 살이 펄떡 뛰었다. 그의 심장이 튀어나올 듯 빠르게 뛰었다.

“너도 아프지 마. 내 옆에 있으면 아프니까 그만 가. 이제 가 줘.”

“……계속.”

그가 입술을 뗐다.

“이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니까 마음이 담금질됐나. 흩어졌던 마음이 뜨거운 불에 녹아 하나로 뭉쳐졌다가, 차가운 곳에 던져지기를 반복하다 보니까 마음의 밀도가 점점 높아졌어요. 어떡해요, 호연 씨. 나 정말 당신 못 놔. 미안해요. 호연 씨를 두고 갈 수 있었으면 살려 달란 말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정말 죽을 거 같아서 호연 씨에게 매달리고 애원하는 거예요.”

정말 죽을 거 같으니까.

안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잘났다는 남자가 왜 보잘것없는 사람 앞에서 빌고 애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모습이 못나서 소리치고 화를 내고 싶다가도 한편으론 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가엾고 사랑스러워서 안호연은 그를 외면할 수 없었다.

“다른 건 안 바라요. 옆에만 있어요.”

“내가 너를 어쩌면 좋을까…….”

정말 모르겠어.

“호연 씨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다 할게요. 그동안 내가 미련했고 멍청했어요.”

아니야, 안호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파서 요란스레 뛰는 그의 심장을 꽉 쥐려다가 손가락에 힘을 빼자 그가 미끄러지는 손을 그러쥐어 다시 심장에 고정했다. 점점 사그라지는 심장 박동과 달리 그들 주위를 맴도는 감정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오래도록 그들은 꼭 붙은 채로 있었다. 시간은 유독 둘에게 자비가 없었다. 강중영과 함께 있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흘러가는 시간만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다시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렇다면 절대 강중영을 포기하지 않았을 텐데.

Rrrrr.

어두운 공간으로 사각형의 무언가에 빛이 들어왔다. 벨소리와 불빛으로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휴대 전화 때문에 안호연은 눈을 떴다. 잠을 자고 있던 게 아니었다. 그냥 따뜻함에 기대어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에 몸을 맡겼다. 시간이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안호연의 몸이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안호연이 움직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깔개로 이용 중인 강중영이 숨 쉬는 대로 안호연의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무게를 덜어 주려고 안호연은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세웠다. 어둠 속에서도 남자의 눈이 형형색색 빛나더니, 떨어지지 못하게 안호연의 등을 꾹 눌렀다. 다시 그의 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안호연은 바닥을 더듬어 휴대 전화를 뒤집었다. 화면에 선명하게 떠오른 이름에 좋았던 분위기가 깨졌다.

“받아요.”

머뭇거리는 안호연을 두고 강중영이 말하자 전화기를 들었다. 어디야? 수화기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깐 겁에 질린 안호연은 턱을 강중영의 가슴에 댔다. 부드러운 손이 안호연의 허리를 안았다.

[어디냐고 물었잖아, 안호연.]

“밖이야.”

[밖이라고? 이 시간에?]

안호연은 시계를 보았다. 8시였다. 저녁 8시면 밖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가 비난할 이유도 없었고,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의 짜증 섞인 목소리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왜?”

[이 시간에 일어나서 부지런 떨 성격도 아니잖아. 설마 외박?]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안호연은 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PM이 아니라 AM이었다. 놀라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단단하게 조인 팔 때문에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지금 어딘데?]

“여기가.”

[어디서 뒹굴고 있는 건데. 잠시 대여 서비스는 이용하지 않기로 한 거 아니었어? 우리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 네가 잘하겠다고 했잖아. 하긴, 넌 입만 열면 거짓말이지. 오늘은 이랬다가 내일은 저랬다가.]

“아니야!”

[아니긴.]

이 순간에 귀로 태범석의 말보다 강중영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강중영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의 입술이 올라가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태범석을 비웃고 있었다.

[어디야? 데리러 갈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 어디 갈 데 있으니까 다른 알파 냄새는 최대한 지우고 집으로 와.]

귀에 있던 휴대 전화를 강중영이 채 갔다. 강중영의 손에 있던 휴대 전화가 벽을 맞고 튕겨 나갔다. 배터리가 분리되어 떨어진 휴대 전화를 멍하니 바라봤다. 휴대 전화가 꺼져 또 주위가 어두워졌다. 그가 안호연의 등을 달래듯 부드럽게 만졌다.

“왜 그랬어?”

왜 휴대 전화를 던졌냐고 물었다.

“개소리만 지껄이잖아요. 짖는 게 시끄러워서 던졌는데, 그게 호연 씨 휴대 전화였네요. 미안해요. 하나 사 줄게요.”

“그래도 휴대 전화를…….”

“어차피 없앨 필요도 있죠. 괜히 휴대 전화를 뒤져 보면 난감한 건 안호연 씨잖아요. 저 휴대 전화 걱정보다 먼저 결론을 내려 주실 게 있어요.”

“뭐?”

“저 어떻게 할 거예요?”

망가진 휴대 전화 때문에 발끈했던 안호연은 그의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게, 널 어떻게 해야 할까. 수많은 질문을 속으로 던지며 안호연은 눈을 내리깔았다. 진짜 어쩌자고 각인을 해 버린 걸까. 아무리 어금니를 뽑으면 각인이 풀린다는 낭설이 있긴 하지만, 낭설은 낭설에 불과했다.

“모르겠어.”

“그럼 생각하지 말아요.”

어둠을 틈타 안호연의 목덜미로 손이 쓱 들어왔다. 아무리 눈을 깜박여도 감은 것처럼 어두웠다. 그의 입술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안호연의 입술을 찾듯 주변을 맴돌다가 움푹 파인 곳에 혀를 집어넣었다. 만난 혀가 부드럽게 요동쳤다. 장난치듯 툭툭 건드렸다가 혀가 사라지고 서로 맞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이제 가야죠.”

안호연은 손등으로 입술을 문댔다.

“씻어도 돼?”

“아뇨, 그냥 가도 돼요. 그 새끼 코가 둔해서 호연 씨한테 묻은 냄새가 내 냄샌지 못 알아볼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알아?”

“파티장에서 스쳐 지나갔는데 못 알아보더라고요.”

“파티?”

안호연은 아, 하고 탄식을 냈다. 얼마 전 태범석이 결혼식을 위한 파티를 열었다는 말을 들었었다. 하긴, 그가 못 갈 이유가 없었다. 태범석이 고른 사람이라면 그만큼 괜찮은 사람이라는 거였고 강중영도 꽤 영향력을 지녔다. 안호연은 몸을 돌려 그에게서 멀어졌다.

“또 연락해도 되죠?”

그가 물었고 안호연은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선택사항도 없다. 안호연은 강중영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지배자형 알파에게 각인이 어떤 의미인지 아니까 긍정도 부정도 할 수가 없었다.

밖으로 뛰어나간 안호연은 이대로 강중영을 두고 갈 수 없어 두 건물 사이에서 몸을 돌렸다. 조그마하게 열린 창문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넘실거렸다. 강중영이 어둠에 숨어 끝까지 자신을 지켜보는 게 아팠다. 안호연은 가다 말고 강중영에게로 달려갔다. 창을 힘주어 열자 어둠에 가려졌던 강중영의 얼굴이 나타나 그의 멱살을 잡고 창문 밖으로 끌어냈다. 하루 사이에 수염이 길어 까칠한 뺨에 키스했다. 자신이 아프다는 이유로 강중영을 더 외면할 수가 없었다.

“옆에 있어 줄게. 조금만 기다려. 내가 아프게 해도 기다려.”

안호연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또 기다리라는 말을 하는 내가 이기적일까. 이기적이고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면 그만둬도 좋아. 비난해도 좋고, 화가 났다면 한 대 때려도 좋아.”

그 때문에 옆에 있고 싶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실상은 안호연 자신 때문에 그의 옆에 있고 싶었다.

“아뇨. 좋은 신호로 생각해요. 내가 괜찮은데, 내가 호연 씨를 탓하지 않겠다는데 뭐가 문제예요. 설령 누군가가 호연 씨나 나를 비난하면 그 새끼들 입 구멍에 제가 돌을 쑤셔 넣으면 그만이죠. 호연 씨는 불순한 생각도, 오류도 범해도 돼요.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내가 다 할 수 있게 해 줄게. 호연 씨 마음대로 살아요. 우선 다녀와요.”

그가 창문을 닫자, 안호연은 집을 향해 걸어갔다. 계단을 오르고 2층까지 가는 그 순간이 지옥 같았다. 현관을 열자마자 태범석이 보였다. 그가 시계를 확인했다. 화가 난 눈치였지만, 생각보다 안호연이 빨리 도착해 잔소리하지 않았다.

“아까 떨어지는 소리가 나던데 휴대 전화는?”

“통화하다 떨쳤어. 고장 났어.”

그를 보다가 화장실로 향했을 때다.

“또 그 냄새네. 여태 대여 서비스 받다가 온 거야?”

그가 달려와 안호연의 바지를 잡아채 앞섶을 손으로 더듬었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자 그가 바지를 놓았다.

“이번엔 뭐 했어?”

“대화할 사람이 필요해서 이야기했어.”

그는 안호연에게서 나는 냄새를 대여 서비스에서 만난 알파로 구분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다가 욕실 문고리를 잡았다.

“어디 가려고?”

“어제 말했잖아. 박연우가.”

그가 말을 하다 말고 중간에 끊었다.

“아, 그 여자 이름이 박연우야. 박연우가 같이 점심 먹고 싶대. 다른 때는 시간 안 된다잖아. 순 자기 마음대로야.”

“왜 날 만나고 싶다는 거야?”

“모르지.”

안호연은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옷을 벗어 바구니에 넣고 몸을 욕조에 밀어 넣었다. 뜨거운 물줄기가 강중영의 페로몬을 지웠다.

안호연은 그녀를 배려해 주기로 했다. 두 사람이 사랑 없는 결혼을 한다 해도 결혼할 남자의 애인을 환영할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옷을 입었다. 차려입은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상대방을 무시할 만큼 대충 입었다고도 할 수 없는 어중간한 옷을 입었다.

그녀의 집으로 가는 내내 태범석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차에 탈 때부터 물건을 소리 나게 잡았다가 놓곤 했다.

“왜 화내?”

신호에 걸려 차가 움직이지 못하는 동안 주먹으로 핸들을 내리치는 태범석에게 안호연이 물었다.

“둘이 만나지 않으면 되잖아. 굳이 갈 필요가 있나?”

“왜?”

“꼭 알고 지낼 필요가 있나?”

“이미 그쪽은 준비까지 다 했다면서 안 가는 것도 실례잖아.”

“어차피 이혼하면 끝인 사람이야.”

“그 여자에게도 사기 칠 생각이었어?”

“사긴 아니지. 계약 결혼이잖아. 다만 그 계약의 끝은 내가 낼 생각이야. 필요 없어지면 버리는 거지. 어차피 오래 유지할 생각 없었어.”

태범석은 아무렇지 않게 속삭였다. 안호연은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태범석은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한 아파트에 차를 세운 그가 익숙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한 현관 앞에 섰다. 도어락 비밀번호까지 누르는 태범석을 봐도 안호연은 아무렇지 않았다. 문소리가 들리자 안에서 “누구세요?”라고 외치며 여자가 뛰어나왔다. 빵가루를 뺨에 묻힌 여자가 화사하게 웃으며 태범석보다 먼저 안호연에게로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호연 씨죠? 저 박연우예요.”

상상과 달리 여자는 밝았고 사교성이 좋았다. 밀가루로 범벅이 된 손을 내미는데, 그 손을 잡지 않을 수가 없어 뻗으려 했다. 그러나 태범석이 안호연의 손을 쥐어 아래로 내렸다.

“더럽잖아.”

“아, 그러네. 미안. 미안해요. 제가 호연 씨를 봐서 너무 기뻐서 실례했어요.”

여자는 꽃같이 웃으며 앞치마에 손을 문대곤 얼른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딱 봐도 좋은 여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긍정적인 에너지가 옮겨 와 주변 사람까지 기분 좋게 해 주는 사람이었다. 긴장이 탁 풀렸다.

“생선구이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어서요. 달걀 물을 입혀서 구우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요. 계속 프라이팬에 눌어붙어요.”

안호연은 태범석을 보았다.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모를 줄 알았는데, 뭘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는 게 의외였다.

“생각보다 일찍 왔어요. 아직 12시가 되려면 30분이나 남았는데.”

예쁘게 콧잔등을 찌푸린 여자가 소파를 가리켰다.

“그럼 손님은 앉아서 기다리고 태범석 씨는 안에 들어와서 보조나 해.”

태범석이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태범석이 꼼짝 못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그들이 부엌에 있는 동안 안호연은 집을 둘러보았다. 집은 깨끗했고 색이 모두 밝았다. 집에 은은한 생선구이 냄새가 떠돌았다. 보통 냄새가 벽지에 배어 생선이나 고기를 굽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그녀는 자신을 위해 생선을 구웠다.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정말 강중영과 아는 사람일까. 안호연은 다른 호기심에 찼다. 최근 태범석이 파티에 들른 건, 결혼식 때문에 연 파티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파티에 강중영이 참석했다는 건 그녀와 연관이 있다는 말이었다.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궁금했다. 타인이 기억하는 강중영과 자신이 기억하는 강중영이 어떤지 궁금했다.

“호연 씨, 배고프죠?”

불쑥 여자가 나오더니 무언가를 내밀었다. 쿠키였다.

“이거 제가 며칠 전에 친구 집에서 같이 구운 거예요.”

“네.”

“한번 먹어 봐요. 곧 밥 먹어야 하니까 많이 먹지는 말고요.”

그녀가 초콜릿 칩이 가득 박힌 쿠키를 내밀었다. 그녀의 얼굴은 밀가루로 엉망이었다. 얼마나 전투적으로 요리했는지 알려 주는 지표였다. 그 지표는 안호연을 환영해 주고 싶은 그녀의 마음을 대변해 주기에 고마웠다.

“고마워요. 생선 냄새 많이 나는데.”

“냄새 배면 벽지를 바꾸면 돼요. 그런 건 걱정하지 마요. 제가 호연 씨에게 근사한 요리는 아니더라도 맛있는 요리를 많이 먹이고 싶었어요. 제가 볼 때 범석 씨가 잘 챙기지 않을 사람이라서 많이 걱정됐어요.”

그녀는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살갑게 말을 붙여 왔다. 잠시 혼란이 올 정도였다.

“그런 걱정을 왜 해요?”

“뭐, 일단 가족이 될 관계라 걱정됐다고 해 두죠. 사실 전 호연 씨한테 관심이 많아요. 아주 오래전부터요.”

그녀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녀는 안호연이 심심할까 손에 리모컨을 쥐여 주었다. 고맙습니다. 짧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그녀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물러섰다.

“고맙긴 뭐가 고마워요. 호연 씨는 제게 행운이에요. 심심하면 노래를 들어도 되고 노트북으로 게임을 해도 좋아요.”

환하게 웃은 그녀는 다시 부엌 쪽으로 사라졌다. 행운이라. 말이 이상했다. 자신이 그녀에게 행운이 될 일은 전혀 없었다. 짧게 웃곤 그녀가 만든 쿠키를 반으로 조각내 먹었다. 달고 맛있어서 딱 하나만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뒤집었다.

“곧 밥 먹을 건데 그런 건 왜 먹어?”

베란다 쪽으로 가려던 태범석이 자꾸 무언갈 먹는 안호연을 흘깃 보곤 잔소리했다. 안호연은 쿠키로 더러워진 손을 티슈로 닦았다.

“밥 먹기 전에 쿠키 같은 거 먹으면 어떡해.”

그가 지나가면서 안호연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애도 아니고.”

“먹으면 안 돼?”

“조금만 먹어.”

한참 옆에서 수다를 떨던 태범석은 입술에 물었던 담배를 빼곤 안호연의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러곤 쿠키 부스러기가 묻은 입술을 훔쳤다. 스치듯 한 키스에도 안호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하는 거야?”

“뭐가?”

“연우 씨 있잖아.”

“걔가 우리가 이러는 거 모르는 줄 알아? 침대에서 뒹굴고 별짓 다 하는 거 알고도 결혼하기로 했어. 그러니 키스로 호들갑 떨지 마.”

“아무리 알고 있다고 해도 적어도 이건 아니잖아. 장소는 가려.”

안호연이 부엌 쪽 눈치를 봤다.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거기에 링이나 차고 다녔던 주제에. 그가 안호연의 어깨를 밀고 입술을 비틀었다. 오늘은 꼭 상처를 주고 싶은 사람처럼 그의 말끝이 뾰족했다. 베란다 쪽으로 나갔다. 태범석은 기분이 저조했고 그걸 안호연에게 풀고 있었다. 그가 베란다 밖에서 담배를 피울 동안 안호연은 소파에 앉아서 화를 식혔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혼자 즐기는 성적 취향을 변태라고 매도하는 사람과 싸워 봐야 남는 게 없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밥 먹고 집에 가자.”

담배를 연이어 두 개비를 피운 태범석은 베란다에서 나오며 안호연을 밀었다. 그의 말에서 짜증이 묻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그녀가 부엌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호연 씨, 빨리 와요. 나 이거 만들려고 새벽에 일어났어요. 맛없어도 맛있게 먹어 줘요.”

태범석은 손을 씻고 의자에 앉았다. 안호연도 의자에 앉았다. 접시에 놓인 음식들의 행색이 초라했지만,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었다. 생선구이를 제외하고도 안호연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신기한 건 콩이나 당근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보통 색을 내기 위해 요리할 때 당근은 거의 필수적으로 들어가는데, 수많은 음식 중에서 당근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안호연이 두 종류의 야채를 가리는 걸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고 태범석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의 음식 취향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안호연이 그녀를 보았다.

“호연 씨 취향이죠?”

“네.”

“맛있게 먹어요.”

그녀가 강중영과 연관이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됐다. 그녀가 자신과 강중영의 관계를 알고 자신이 선호하는 음식을 물었을 리가 없다. 안호연은 침을 삼키곤 음식을 먹다가 눈을 떴다. 오랜만에 자신의 입에 딱 맞는 음식을 먹었다. 음식 하나하나를 맛본 안호연은 이게 강중영이 만들어 주던 음식과 유사하다는 걸 깨달았다.

“입이 짧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 먹네요?”

“맛있어요.”

“그렇죠. 이거 배우려고 엄청 노력했어요. 제 친구 중에 음식을 잘하는 사람이 있는데, 배우겠다니까 하나하나 잘 알려 주더라고요. 일일이 정성스럽게 수기로 레시피를 작성해서 줬어요. 귀한 손님이 와서 제가 손수 상을 차리고 싶다니까 반찬도 같이 골라 줬어요.”

안호연은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누군지 아니까.

“아무튼 많이 먹어요.”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이곤 밥을 먹었다. 금세 밥 한 그릇을 뚝딱 다 비우고 한 그릇 또 먹는 안호연에게로 태범석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표정이었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그가 툭 말을 던졌다.

“나랑 밥 먹을 땐 잘 먹지도 않았잖아.”

“꼬워?”

“아니, 좋다고.”

둘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박연우가 갑자기 무언가를 내밀었다. 자그마한 종이였다. 하얀 표면에 금박이 둘러 있는 카드는 청첩장이다.

“청첩장이에요. 이런 거 줘서 미안한데 결혼식에 와 줬으면 좋겠어요.”

안호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임스 씨와 아는 사이라고 들었어요. 두 분이 오셨으면 해요.”

“싫어요.”

“제가 싫어요?”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런 곳에 저희 둘이 있으면 웃기잖아요.

안호연은 대답 대신 침을 삼키는 걸로 대신했다.

“전 호연 씨가 좋아요. 축하해 주었으면 하고요. 전 정말 호연 씨도 좋아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축하받고 싶은 게 제 이기심인가요? 혹시 태범석 씨를 뺏겼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청첩장을 챙겼다. 모든 사람의 생각이 일정할 순 없다. 자신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녀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솔직히 안호연은 그들의 결혼식에 무감각했다. 심지어 이게 계약 결혼이 아니라 둘이 사랑해서 결혼했대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괜찮았다. 안호연은 청첩장을 옆에 밀어 두었다.

“꼭 와 줘요.”

웃는 그녀 옆에서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태범석의 시선이 따라왔다. 뭔가 불편한 시선이었다. 그 시선을 이해하지 못해 그를 올려다보자 입술을 뒤튼 그가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었다. 그녀는 이것저것 하고 싶다고 말했다. 쇼핑이나 영화를 보러 가자며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 오는 여자를 보던 태범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담배 좀 피우고 올 테니까 이야기하고 있어.”

그가 사라지자 식탁 위로 침묵이 흘렀다. 안호연은 침을 삼키고 그녀를 쳐다봤다.

“강중영 알아요?”

“오랜 친구죠.”

“그럼 저도 알고 있어요?”

“알아서 호연 씨가 뭘 좋아하냐고 물어봤죠.”

“왜요?”

“그쪽이 현명하다면 지금이 기회라는 걸 알 테니까.”

“연우 씨가 태범석과 결혼하려는 건 강중영의 계획인가요?”

“더 말하지 않을게요.”

박연우는 웃으며 안호연 앞에 반찬을 밀었다. 그제야 안호연은 입을 다물고 젓가락으로 밥을 끼적댔다. 멀리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태범석이 돌아왔다. 그에게서 담배 냄새가 물씬 났다. 내내 불편한 심기를 보이던 그가 안호연의 밥그릇을 확인했다.

“약속대로 밥 먹었으니까 이제 양보해.”

“아, 그래야겠네. 내 생각만 했어.”

그녀가 턱을 괸 채 고개를 끄덕였다. 태범석은 안호연을 잡아당겨 자신 앞에 세워 현관 쪽으로 몰아세웠다. 그는 신발을 신으라고 안호연에게 무언의 압박을 주었다. 하릴없이 신발을 신자 태범석은 떠밀 듯 안호연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그를 주시했다.

“다 괜찮지?”

“뭐가?”

“아무 감정도 안 드냐고. 내가 결혼할 여자 집에 가는데도 무덤덤해 보이고 결혼식장에 오라고 해도 선뜻 알았다고 할 정도로.”

“그럼 가지 마?”

안호연은 그제야 그가 왜 화를 냈는지 깨달았다. 내내 싱거운 안호연의 반응 때문이다. 안호연은 그가 잡은 어깨를 남자의 손에서 치웠다.

“날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가 안호연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사랑이라니. 그런 감정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아주 오래전의 감정을 지금 꺼내 봐야 연민보다 못한 형태였다.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러면 이곳에 오면 저 여자에게 화를 내야 하잖아.”

“왜?”

“왜냐고? 그걸 말이라고 해? 이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부터 아무렇지 않았잖아.”

“박연우 씨를 만난 게 그런 이유야? 네 사업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질투하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아니라고는 말 못 하지.”

“미친 새끼.”

안호연은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감정 때문에 사람을 이용하다니, 확실히 그는 제정신이 아니다.

“내가 왜 미친 새낀데? 네가 왜 비난해? 넌 날 좋아해야 하잖아. 내 밑바닥을 보고도 좋아했으면서 고작 이런 일로 화를 내?”

“그냥 그대로 있어라.”

“…….”

“과거에 널 좋아했던 나조차 싫어질 거 같으니까.”

“지금은 내가 싫어?”

안호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싫으냐고 물었잖아.”

저 물음을 어제 물었더라면 안호연은 아니라고 대답했을 테다.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어 싸움으로 번지는 걸 경계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거 같아 안호연은 느리게 “응.”이라고 말했다. 화를 내고 욕을 할 줄 알았던 태범석이 갑자기 입술을 깨물었다.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정말 내가 싫어?”

“네가 싫어.”

안호연은 또박또박 가슴에 담아 둔 말을 뱉었다. 손바닥으로 느릿하게 얼굴을 쓸어내린 태범석이 싫다는 안호연의 손목을 꽉 잡았다. 둘이 함께 있어 봐야 상처밖에 주지 않는 관계. 그게 둘의 관계인데 태범석도 안호연도 서로를 놓지 않았다.

아직도 그의 마음은 오리무중이다. 그가 갑자기 안호연의 마음을 검증하는 건 변덕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태범석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에 실망할 이유가 없었다. 사랑을 검증하려는 남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같은 공간에 앉아 있는 남자가 껄끄러웠다.

“집을 옮길 생각이야.”

태범석과 안호연은 집을 따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가 집을 옮기든 말든 자신의 구역이 아니었으므로 별 상관 없었다. 안호연은 고개를 숙이며 글러브 박스를 열어 물티슈를 찾았다. 어디서 묻었는지 오른손이 끈적거렸다. 왼손으로만 차 내부를 뒤적이다가 마침내 물티슈를 찾은 안호연이 손가락을 닦았다.

“회사 근처에 사 둔 집이 있어. 그쪽으로 들어와.”

“싫어.”

손을 닦던 안호연이 고개를 들었다.

“왜? 거긴 비좁고 방범도 안 좋아. 건물도 낡았고.”

“거긴 네가 산 집이지만, 여긴 내가 산 집이잖아. 난 내 집이 좋아.”

“안호연, 너 많이 컸다. 돈이 없어서 빌빌대면서 그런 걸 따질 땐가. 좀 풀어놨다고 네가 자유라고 생각하는 거야? 우린 결혼만 안 했지 부부나 마찬가지잖아. 곧 아이도 낳을 거니까 집부터 합치는 게 좋잖아.”

안호연이 눈을 굴렸다. 그의 말엔 수많은 오류가 존재했다.

“누가 부부래?

“안호연.”

“너 결혼은 연우 씨랑 하잖아. 난 그냥 아이만 낳아 주는 사람이잖아. 네 좋을 대로 휘두를 수 있는 사람 아니야?”

말을 뱉기 전까진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걸 뱉어 놓고 보니 허망했다. 정말 그랬으니까. 허탈해서 웃는 안호연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태범석이 갑자기 웃었다. 그러곤 사랑스럽다는 듯 그가 안호연을 꽉 껴안았다.

“질투했냐? 내내 뚱하던 게 그 이유지? 내가 더 잘할게. 곧 돈 많이 벌면 한적한 곳으로 뜨자. 예전에 네가 발리가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 거기 어때? 거기다 그림 같은 집을 짓는 거야.”

“운전이나 해.”

안호연은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쳤다. 그러자 그가 다시 안호연을 지긋이 보며 시동을 걸더니 들뜬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해변에 집을 짓자. 노을이 예쁜 곳에서 우리끼리 사는 거야. 백사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를 생각해 봐.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좋겠다. 너 고생하니까 딱 둘만 낳는 거야.”

“모래사장은 왜? 난 바닷가 싫어. 짠 냄새만 나잖아.”

그의 꿈에 찬물을 붓는 안호연의 말에 태범석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그럼 어디가 좋은데?”

“그게 뭐가 중요해. 네 마음대로 할 거면서.”

“어디가 좋으냐고 물었어. 똑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마.”

“지금 사는 곳이 제일 좋아. 내 돈으로 장만한 집이기도 하고 거기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예쁘기도 하고.”

낡은 빌라 앞에 서 있는 의뭉스러운 강중영의 외제 차를 떠올리자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

“오늘따라 질투도 귀엽게 하네. 근데 그 집은 안 돼. 네가 도망간 집이잖아.”

안호연은 큰 한숨을 내쉬었다. 안호연이 태범석의 집에서 나온 건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집 곳곳에 아이를 기다렸던 흔적이 가득했고, 안호연은 도망치듯 그 집을 구매했다. 그걸 태범석이 콕 집어냈다.

“너한테 감정 없어. 내가 네 옆에 있는 건 내 의지로 선택한 거야. 자꾸 이 선택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입 좀 다물어 줘.”

예전이라면 또 상처를 끄집어내서 긁었을 그가 오늘따라 조용했다. 슥 안호연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한적한 도로를 내달리던 차의 속도가 느려졌다.

“너 이상해.”

“뭐가?”

“평소와 달라.”

“똑같은데.”

“아니, 달라. 말도 늘었고 날 같잖게 보잖아.”

“그냥 깨달았어.”

안호연은 천천히 손가락을 꼽았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꼽아 꽉 주먹을 쥔 안호연이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내가 이상하다는 걸.”

“안호연.”

“죽은 아이가 돌아올 순 없는 거잖아.”

안호연은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했던 걸 내비쳤다. 강중영과 했던 대화를 곱씹을 때마다 그것을 깨닫곤 했다. 자신이 비논리적이라는 걸. 자꾸 그 논점이 흐려지곤 하면 안호연은 강중영과 했던 대화를 다시 되씹어 보곤 했다.

“안호연.”

“나도 깨달은 건데 넌 왜 몰라.”

안호연이 그에게 묻자 그렇지 않아도 최대한 구겨졌던 얼굴이 종잇장처럼 더 구겨졌다. 태범석의 얼굴에서 아까 웃고 있던 표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안호연.”

“너도 알았으면 해서 말해 주는 거야. 만약 너에게 눈곱만큼의 동정심도 없었다면 이런 말 하지도 않았어.”

“그럼 여기에 왜 있는 건데? 날 좋아하지도 않고 다솜이가 살아 돌아온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면서!”

글쎄,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자신이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가기엔 염치가 없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그걸 해결하기 전까지는 태범석을 떠날 수가 없었고 그를 자극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한번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신도 그에게 상처를 내고 싶었다. 조용히 그를 응시했다.

“어디서 쓸모없는 말을 들은 거야. 그렇게 하면 다솜이를 만날 수 있는데 네가 뭘 안다고 개소릴 해? 걔가 영영 못 돌아오길 바라?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자꾸 흐려지려는 눈앞을 똑바로 보려고 했다. 비통한 얼굴로 필사적으로 상처받지 않으려고 벼랑 끝에 선 그에게 안호연이 입술을 뗐다.

“조금도 네 탓은 없지?”

그 말을 꺼내자 태범석이 운전하던 차를 갓길을 세웠다. 안호연이 정확하게 그의 치부를 찌른 셈이다.

“나도 남 탓 안 하고 싶었던 거 아냐. 그게 얼마나 아픈지 아니까 아무 말도 안 했던 거지. 그니까 너도 그만해. 아프잖아.”

태범석이 운전대에서 손을 떼기 무섭게 안호연에게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쇠 같은 주먹이 안호연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놀라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라기 전에 태범석의 주먹이 먼저 닿았다. 관자놀이 부분이 얼얼했다. 아픈 얼굴을 주먹으로 감싸자 머리 위로 폭력이 쏟아졌다.

“다 네 탓이잖아. 살인자 새끼야. 누구한테, 누구한테 뒤집어씌우려는 거야?”

화가 나 붉어진 눈으로 그가 소리쳤다.

“그 변태 같은 새끼하고 네가 죽인 거지. 거기서 내가 왜 나와.”

그가 갑자기 자신의 어깨를 잡고 끌어내려 옷을 벗기려 했다. 안호연은 필사적으로 옷을 꽉 잡았다. 아무리 낮에 사람이 별로 없는 주택가라지만, 간간이 사람이 지나다녔다.

“뭐, 뭐 하는 거야?”

“변태 새끼야,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너희 같은 새끼들 남에게 보여 주는 거 좋아하잖아. 아무렇지 않게 평범한 사람인 척하면 네가 평범한 사람이 될 줄 알았어? 네가 창피해서 다솜이가 죽어 버린 거야. 나 때문이 아니라!”

“그만해!”

그가 안호연의 티를 찢어발기듯 벗기며 소리쳤다.

“말해, 너 때문에 죽은 거라고.”

“너 진짜 미쳤어?”

“말하라고.

기어코 티를 찢어발긴 그가 숨을 몰아쉬었다. 차에서 뛰어내리기 전에 그가 갑자기 곡예 같은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차도에서 미끄러지듯 운전하는 차 때문에 겁에 질린 안호연은 차 시트에 묻혀 있었다.

“미친 새끼야, 이젠 내 탓까지 해? 거기서 내 이름이 왜 나와?”

그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마치 자신의 치부를 덮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큰 소리로 외쳤다.

“죽은 아이가 어떻게 돌아오느냐는 말이 어떻게 네 입에서 나와? 죄책감 따위는 하나도 없지. 아이를 갖겠다고 약속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처음부터 아이를 가질 생각 따위 없었던 거야. 나 모르게 뒤에서 피임약이나 처먹고 있을지 어떻게 알아?”

“나도 가지려고 노력했어! 그땐 정말 다솜이가 돌아올 수도 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근데 아니잖아.”

“웃기지 마!”

차가 무서운 속도로 어딘가에 멈춰 섰다. 태범석의 집이다. 3년 전 그가 손수 장만했던 집이었다. 그가 끌고 가는 대로 안호연은 하릴없이 따라갔다. 현관문이 열리기 무섭게 안으로 안호연을 밀어 넣었다. 그러곤 바닥에 엎어진 안호연의 목덜미를 끌고 어느 방으로 향했다. 미친 듯이 가기 싫다고 항변했으나 그는 그 방과 안호연을 마주하게 했다.

“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호연아.”

이미 찢어져 헐렁거리는 바지를 잡아서 내렸다.

“그게 정말 다솜인지 아닌지 낳아 보고 생각해 보자. 난 정말 이 방에 네가 낳은 아이를 눕혀 보고 싶거든.”

“이거 강간이야.”

안호연이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며 지금 상황을 침착하게 일러 주었다.

“강간? 웃기지 마. 네가 날 강간하겠지.”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환기조차 시키지 않은 작은 공간으로 그의 페로몬이 갑자기 몰아쳤다. 밀폐된 공간에서 질식할 정도인 알파의 페로몬은 오메가에게 치명적이었다. 더구나 그 상대가 각인한 알파의 페로몬이라면 더더욱.

제일 먼저 반응한 건 몸이다. 극도로 예민해져서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고 몸이 한 사람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했다. 의도치 않게 정신이 흐려졌다.

“내가 널 각인시킨 알파라는 거 잊은 거 아니지? 어떻게 우리 사이에 강간이 있을 수 있어. 넌 오메가고 난 알파잖아.”

이상하게 허벅지 사이로 뭔가가 줄줄 흘러내리자 안호연은 도망가려고 문고리를 잡으려고 뛰어갔으나 그가 문을 막고 섰다.

“호연아.”

그가 안호연을 부드럽게 불렀다.

“내 아이를 갖고 싶다고 아래가 축축하게 젖어 오면서 왜 버텨?”

흐려지려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그를 보았다. 그의 페로몬이 너무 지독했다.

“이리 와.”

안호연의 몸이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뇌 속까지 깊게 침투한 페로몬 때문에 생각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안호연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눈을 뜬 순간 머리가 하얗게 점멸되었다. 눈을 뜨면 자신은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 * *

히트사이클은 원하지 않은 관계로 이끌고 과한 쾌락을 주었다. 그래서 이 히트사이클이란 게 누구를 위해 만들어진 건지 알고 싶었다. 점멸되었던 시야가 점점 돌아왔을 때 누군가가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거친 신음이 귀에 들렸다. 그 신음이 안호연의 것인지 몸을 짓누르는 남자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가 없다. 분명 머릿속이 점멸했을 때 히트사이클이 왔다는 걸 직감했으니 적어도 3, 4일 정도 흘렀다는 걸 예측했다.

움직일 힘조차 없는데도 안호연 스스로 태범석 위에 올라타 허리를 흔들며 그의 사정을 유도했다. 입으로 흘러나오는 신음이 자신의 거였다. 이성과 달리 몸은 그를 원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느끼는 건 오메가에 대한 혐오감이었다. 그가 알파라서 반응하는 몸이, 한 사람만 기억하는 몸이 지겨웠다.

“호연아.”

태범석이 안호연을 불렀다. 그는 안호연의 정신이 돌아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네가 달라진 시점이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같아. 그래서 많이 예민해진 거야.”

결혼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었다. 화는 다음 문제였다. 안호연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기었다. 그러면 그가 안호연의 골반을 잡고 벌어진 거리를 잡아당겼다. 급격하게 밀고 들어오는 성기에 안호연은 숨을 쉬지 못했다. 밀려온 페니스와 함께 발가락이 저릿할 정도의 쾌감이 파도처럼 밀려와 덮쳤다. 신음이 흘러나오는 입술로 그의 입술에 부딪쳤다. 혀끝에 파고든 신음을 그가 모조리 먹어 치우곤 작게 웃었다.

“넌 내가 친구고 연인이고 형이고 부모라서 엄청 특별하다고 했잖아. 그런데 마음이 쉽게 식어? 거짓말도 적당히 해. 화가 났다면 화가 났다고 해야지. 이러면 화만 키우잖아.”

안호연이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다.

“호연아.”

“…….”

“호연아.”

그가 애타게 부를 때마다 안호연은 눈을 깜박일 뿐이다. 쉴 새 없이 자신의 볼에 키스하던 그가 느리게 페니스를 뽑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어 누워 있는 안호연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문댔다. 그가 문대는 그 주변으로 통증이 몰려와 눈가가 찌그러졌다.

“멍들었잖아. 다신 내 말에 대립하지 마.”

그가 안호연의 다리에 흘러내리는 하얀 점액질이 아깝다는 듯이 쓸어서 엉덩이 사이로 집어넣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어느 집?”

목에서 굉장한 소리가 났다. 쇠를 긁는 듯한 소리였다.

“어디긴 우리 집, 여기.”

하늘에 달린 모빌을 멍하니 보았다.

“처음 내가 임신했다고 했을 때 나 버렸잖아.”

“누가 버렸는데? 네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땐 화가 났었어. 백날 내 아이만 임신할 거라더니 덜컥 남의 아이를 뱄잖아. 기분이 더럽고 배신당한 기분이었어. 근데 아이가 내 아이라잖아. 그래서 돌아왔잖아.”

“다솜이는 왜 사랑했어? 네 아이가 아닐 수도 있었잖아.”

“반대로 말하면 내 아이일 수 있고 정말 내 아이였잖아. 정말 이상하잖아. 내 아이를 낳고 싶다던 안호연이, 콧물을 흘리며 따라다니던 놈이, 백날 내 아이를 낳을 거라고 노래를 부르던 놈이 정말로 임신해서 내 아이를 뱄대. 화가 날 줄 알았는데 그날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어. 그날 너도 아이도 미친 듯이 사랑스럽고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이 생겨서 이상했어. 사기만 쳐 오던 놈에게 처음으로 가족이 생긴 거잖아. 다솜이 나올 시기부터 매일 하나씩 생각했어. 여행 갈 곳이나 혹은 입힐 옷 말이야. 하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았고 그 속에 너와 나, 다솜이가 있었어. 잠시라도 날 행복하게 만들어 줬으니까 사랑받을 만하잖아.”

“넌 정말 아이가 돌아올 거라고 믿어?”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는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안호연의 물음에 그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정말 돌아올 거라고 믿어?”

재차 확인하려고 묻는 안호연에게 그는 시선을 피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믿지 않으면 네가 가엾잖아.”

사랑스러운 사람을 보듯 그가 손가락으로 안호연의 뺨을 쓰다듬었다.

“호연아, 가끔 난 네가 미워 죽겠어.”

“…….”

“건강하게 낳아 줄 수 있었잖아.”

“그게 다 내 잘못이야?”

“원망하게 돼. 원망하지 않으면 내가 속이 까맣게 타 죽어 버릴 거 같으니까. 네가 그 새끼랑 모텔에 가서 원나잇을 하지 않았다면 헷갈릴 일이 없었을 거 아냐. 네가 조금만 잘 먹었더라면, 네가 아이에게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수많은 원망이 따라다녀. 난 너한테 그래도 되잖아. 날 사랑하니까 그 원망 정도는 받아 줄 수 있잖아.”

“나도 아파.”

“난 네가 더 아팠으면 좋겠어. 내가 아팠던 만큼 너도 아팠으면 좋겠어. 그런데도 너를 보면 속에서 두 가지 감정이 생겨.”

“…….”

“네가 미우면서도 예뻐. 아이만 생기면 우리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어. 그때 다솜이가 네 배 속에 있었을 때 우리 정말 좋았잖아. 부부처럼 같이 음식도 만들고 같이 아이 가구도 고르고 서툴지만 같이 머리를 맞대고 미래 계획도 세웠잖아. 아이만 생기면 그때로 돌아갈 수 있어, 호연아. 우리가 이렇게 아플 필요도, 싸울 필요도 없어.”

“…….”

“호연아, 나 사랑해?”

“……모르겠다.”

“모르겠으면 사랑부터 다시 시작하자. 미워하지 않도록 노력할게. 그러니까 너도 다시 찾아와.”

“뭘?”

“사랑.”

“아파서 이제 널 사랑 못 하겠어.”

“왜? 너 나 좋아했잖아, 사랑한다며. 근데 사랑하기가 어려워? 처음이 어렵지 두 번 세 번 하는 건 어렵지 않잖아.”

“다시 사랑하지 못할 정도로 상처가 났어. 네가 날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 줘.”

“어떻게? 박연우랑 결혼하지 말까?”

“아니, 얼마 전 네가 말했던 노을이 지는 바다에 다솜이를 뿌려 주자.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순간 태범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보고 사랑하라고 하기 전에 너도 증명해. 난 지금 아파서 겁이 많아. 네가 다솜이로 내 마음을 많이 다치게 했어. 그러니까 네가 다솜이로 협박할 수 없게 바다에 뿌려 주자. 그럼 마음 놓고 사랑할 수 있을 거 같아.”

“그건 둘째를 낳은 후에 생각해 볼게. 지금은 아냐.”

“무서워? 내가 도망갈까 무섭냐고.”

“난 너 안 믿어.”

“믿지도 못하면서 무슨 사랑이야. 태범석, 난 너 평생 사랑 안 할 거야.”

안호연은 그의 가슴을 떠밀었다.

“이건 마지막 기회야.”

“왜 너마저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건데.”

“이젠 끝이야. 이 집 나가면 정말 넌 끝이야. 더 안 봐. 내가 말했지, 널 떠날 수 있는 건 내 자유이고 네 옆에 있는 것도 내 의지라고.”

“씨발.”

그가 욕을 하는 것과 함께 하늘 높이 손을 치켜들었다. 바람 소리를 가르며 내려오는 그의 팔을 안호연은 꽉 잡았다.

“임신할 때까지 집에 박혀 있어 봐야 네가 정신 차리지!”

“낳으면 소송할 거야. 네가 날 가둬서 아이를 낳게 할 순 있어도 평생 못 나가게 할 거란 보장 있어? 밖에 나가면 네가 나도 아이도 손끝도 못 건드리게 할 거야. 그래도 할 수 있으면 해.”

안호연은 그의 손을 밀어냈다.

“그러니까 기회를 줄 때 잡아. 약속만 해 주면 다시 너 사랑할게. 안호연이 태범석을 사랑해 준다니까.”

“…….”

“못 믿겠어, 범석아?”

“그럼 너도 증명해. 나도 확신이 필요하잖아. 네가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날 사랑하던 안호연의 얼굴을 잊어버려서 확신이 서지 않아. 다솜이를 붙들고 있는 게 널 확실히 붙들 수 있는 방법인데 그걸 포기하라는 건 리스크가 크잖아.”

“어떻게 할까?”

“오늘부터 여기로 들어와서 살아. 옛날처럼 나만 사랑해 봐. 다솜이를 포기하면 내게 돌아오는 이득이 뭔지 잘 모르겠어. 난 지금도 나쁘지 않아.”

“그럼 평생 이렇게 살래? 넌 날 원망하고 난 널 미워하고.”

“그럼 보여 줘. 안호연이 한다는 사랑.”

안호연은 태범석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그를 꼭 안아 주었다.

“내가 사랑한다는 건 이런 거야, 범석아.”

차갑게 식은 그의 몸을 침대에 눕히곤 그의 옆에 누운 안호연이 방긋 웃었다. 그러곤 그의 뺨에 작게 키스하자 그의 눈이 커졌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네가 사랑스러워서 갑자기 키스하는 게 어색하지 않은 거. 침대에 눕는 게 섹스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온을 나누며 잠을 자는 행위인 거. 이런 걸 놓치고 살기엔 우리가 아깝잖아. 너나 나나 이렇게 사랑할 수 있잖아.”

“아직은 모르겠어. 난 침대에서 섹스 하는 게 더 좋아. 침대 위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 건 시간 낭비야.”

“차차 알게 될 거야.”

안호연은 그의 가슴을 일정하게 오래도록 두드렸다. 또렷했던 그의 눈이 점점 감겨 완전히 닫히자 안호연은 입가에 달고 있던 미소를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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