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안호연은 태범석에게 돌아갔다. 평생 사기꾼으로 살았던 안호연이 돌아갈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밖에 없었다. 태범석은 아가리를 벌리고 안호연이 스스로 오길 기다렸고 안호연은 그 아가리로 들어갔다.
히트사이클 주기가 찾아오면 태범석은 아무리 바빠도 그날을 꽉 채워 집에 머물렀다. 이번엔 그의 러트가 겹치는 바람에 집요하고 오래도록 집에 잡혀 있어야 했다. 마지막까지 엉덩이 사이에 깊게 넣고 사정한 그가 투덜댔다.
관계는 힘들었으나 참을 만했다. 그에게서 희미하게 강중영의 냄새가 났다. 그때 강중영의 집에서 썼던 샴푸라든가, 강중영이 즐겨 사용하는 남성용 향수를 태범석도 사용했다. 그가 안호연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태범석은 안호연의 취향대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나름의 복수였다.
“왜, 임신이 안 돼? 혹시 피임약 먹고 있는 건 아니지?”
태범석은 종종 물었고 그때마다 안호연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가 피임약을 먹었다는 의심을 하고 있으나 사실 안호연은 피임약은 먹지 않았다. 첫 아이를 낳고 난 후로 아기집이 약해져 임신이 어렵다는 의사 소견이 있었고 그건 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태범석은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잘 알기 때문에 안호연도 따로 피임하지 않았다. 절반은 포기였고 절반은 죄책감이었다.
“이 주일 뒤에 병원 가서 검사받고 임신이면 바로 전화해.”
“내가 도망갈 것도 아닌데 왜?”
“안 가는 게 아니라 다솜이 때문에 못 가는 거지. 넌 다솜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면 당장 박차고 나갈 거잖아. 네 음흉하고 검은 속을 모를 줄 알아? 쉽게 알아서도 안 되고 다솜이한테 낯짝을 비쳐선 안 되지.”
“이제 알려 줘도 되잖아. 지금까지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잖아.”
“네가 알 자격이 있다고? 그 아이한테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 그 불쌍하고 작은 아이를 배 속에 넣고 죽인 거나 다름없어. 제대로 먹지도 않고 시름시름 앓더니 결국 내 새끼를 그렇게 만들어 놨잖아.”
입을 다물었다. 모두 제 잘못이라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3년이 지나도 그 일은 두고두고 안호연에게 상처였다. 그리고 아물지 않을 영원한 상처였다. 태범석은 그날을 잊지 말라는 듯이 상처를 헤집었다.
“다솜이는 내 첫 아이였어. 네가 내 아이를 그렇게 만들었을 때 속이 뒤집어졌단 말이야.”
짐짓 슬픈 얼굴로 태범석이 속삭이자 안호연은 두 손바닥으로 귀를 막았다.
“그만해.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남자 새끼에 정신이 팔려서 자식 잡아먹는 줄도 몰랐던 거지.”
“그만해!”
안호연은 눈을 감고 울먹였다.
“다솜이 있는 곳은 둘째가 생기면 말해 줄게. 알고 싶으면 둘째부터 가져. 내가 보는 앞에서 튼튼한 아이를 낳아 주면 말해 줄 테니까. 너도 그 애를 안아 보고 싶을 거 아냐. 아이를 낳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싸움의 끝은 항상 제자리였다. 늘 아이에서 시작해 아이로 끝났다. 아이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처럼 그는 아이를 원했다. 그때마다 조금씩 지쳐 갔다.
태범석은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 슈트를 챙겨 입었다. 요즘 태범석은 바빴다. 결혼정보회사에서 빠져나온 그는 웨딩 업체를 운영 중이다. 그의 선택은 옳았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성사되는 커플을 상대로 했던 사업은 입소문이 나 승승장구 중이었다. 이젠 사기꾼의 탈을 벗고 사업가가 되었으나 안호연에게 여전히 그는 사기꾼이었고, 그걸 태범석도 숨기지 않았다.
태범석이 사라진 걸 깨달은 안호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협탁을 열었다. 깊숙이 숨겨 두었던 링을 물끄러미 보다가 찼다. 아마 태범석이 알면 난리를 쳤겠지만, 이미 그는 밖에 나갔고 안호연은 이걸 차지 않으면 불안했다. 남자가 일깨워 준 감각은 사그라지지 않고 몸에 남아 있었다. 벌벌 떨며 다리를 모은 안호연은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 * *
“이번에도 아니네요.”
의사가 입술을 떼자 안호연은 안도했다. 진료실에서 결과를 듣고 나온 안호연은 태범석에게 전화를 걸어 결과를 통보했다. 체중이 많이 줄어들어서 애가 안 붙는 거라며 그가 기분 나쁜 내색을 했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그와 달리 안호연은 다행이라 여겼다. 앞으로 히트사이클은 석 달 후였다. 이미 임신 확률이 낮아질 대로 낮아져 그 기간이 아니고서는 임신이 되지 않았다. 석 달 후까지는 안전했다.
태범석은 바쁘다며 전화를 단칼에 끊었다. 그가 바빠서 좋은 이유는 개인 시간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안호연은 제임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종종 제임스를 도와 돈을 벌곤 했다. 알파나 베타들이 맞선 상대로 오메가를 원해 비율을 맞추기 어려웠다. 그래서 늘 오메가 수가 부족해 정기적인 만남을 주선해야 하는 결혼정보회사에선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안호연은 한 번씩 그 부족한 자리를 메꿔 주고 돈을 받곤 했다.
[어, 호연아.]
“오늘은 부족한 자리 없어?”
[일 도와줘서 고마운데 태범석이 알면 죽일지도 몰라. 꼬리가 길면 잡히잖아.]
“차 한 잔 마시고 오는 거잖아. 태범석이 뭐라고 하면 내가 말할게.”
[아, 곤란하다. 둘이 약혼한 사이잖아. 자꾸 너 내돌리는 거 알면 나 죽어. 너 많이 아팠을 때 이후로 일도 안 시키잖아.]
“돈이 많이 필요해. 다솜이가 어디 있는지 찾고 싶어.”
그가 입술을 다물더니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안호연이 빈털터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프란츠 쪽에서 안호연을 사기죄로 고소해 피해 금액을 전부 토해 냈다. 안호연이 박연이었다는 걸 걸린 이유는 내부 고발자가 있다는 소리다. 태범석, 제임스 두 사람 중 태범석에게 무게가 실렸다.
[너희 파혼할 생각 없냐?]
“다솜이가 있는 곳을 알아야 파혼하지. 파혼하려면 돈도 많이 필요해. 필요 없으면 말아. 다른 일이라도 하면 돼.”
[알았어, 알았어. 태범석한텐 말하지 마. 지금 급한 곳 두 군데 있어. S호텔 1층 커피숍에서 민영훈이라는 남자를 찾으면 돼. VIP이니까 특별히 신경 써.]
“그러다 들러붙으면?”
[애프터 거절하면 칼같이 돌아설 거야. 괜히 VIP냐. 변호사에 집도 빵빵해. 돈은 현금으로 받으러 와.]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이곤 전화를 끊었다. 메시지로 전송받은 장소로 택시를 타고 움직였다. S호텔 1층 커피숍은 주선 자리에 자주 쓰이는 장소였다. 예약 이름을 대자 서버가 푸른 정장을 입은 남자 쪽으로 안내해 주었다.
“혹시 민영훈 씨세요?”
“네.”
단정하게 생긴 알파였다. 은은한 남성용 향수가 코로 밀려들어 왔다. 그는 안호연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안호연은 그 손을 바로 잡지 않았다. 조금 시간을 두고 내민 손을 잡고 적당히 흔들었다.
“안호연이에요.
“민영훈이에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엄청 어려 보여요.”
“스물아홉이요.”
“저는 서른넷인데. 그러니까 호연 씨보단 형이네요.”
“네.”
그 뒤로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안호연은 적극적으로 상황을 주도하는 편이 아니었고 남자도 숫기가 없어 다음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답답해 안호연이 먼저 메뉴판을 열며 뭘 마실지 물어봤다. 그가 커피 중 아무거나 좋다고 대답하자 안호연은 정말 성의 없이 커피를 골라 주문했다. 그는 안호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메뉴판을 보려고 고개를 숙일 땐 안호연의 목에 시선이 멈췄고 손가락이 움직일 땐 손가락을 따라다녔다. 집요한 시선을 발견한 안호연이 눈살을 찌푸리자 그가 얼른 두 손바닥을 모았다.
“굉장히 미인이어서 저도 모르게.”
옛날에 비해 지금의 안호연이 예쁜 건 아니다. 볼품없어졌다. 살이 많이 빠졌고 낯빛이 좋지 않아 병약해 보였다. 그 병약함이 어떤 타인에겐 은밀한 매력으로 어필되는 듯했다. 종종 이런 땜빵 자리에 나올 때마다 안호연에게 호감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종종 지켜 주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때마다 안호연은 지키긴 누굴 지키냐며 속으로 비웃기 바빴다.
“기분 나빴다면 죄송해요.”
“괜찮아요. 근데 그렇게 뚫어지게 보시면 부담스러워요. 민영훈 씨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가 머리에 쌓이기도 하고요.”
“정말 미안해요.”
그는 서둘러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정말 미안한 얼굴이었다. 이 자리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안호연에게 그가 서둘러 다른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러나 그 이야기마저 하품이 나올 정도로 따분한 이야기라 안호연은 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 꼬리를 물고 무는 자동차를 보다가 앞에 놓인 커피를 마셨다. 커피가 식자 안호연은 시계를 보았다.
“지루하세요?”
“아뇨.”
안호연은 거짓말을 했다. 굉장히 지루했고 따분했다. 원래 선이 목적이 아닌 단순한 땜빵이었기 때문에 그의 직업과 준수한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혹시 저녁 먹으러 가실래요? 밥 사 주고 싶은데.”
“아뇨. 다음에 기회가 되면 먹을게요.”
“애프터 받아 주시게요?”
“아뇨.”
계속 철벽을 세우는데도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안호연은 그런 그를 본체만체하며 눈을 내리깔고 각설탕을 집어 먹었다. 달콤한 설탕이 입에서 녹아내렸다.
“단 거 좋아하세요?”
“아뇨.”
“근데 왜 그걸 집어 먹어요?”
“심심해서요.”
당황한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굉장히 무례했다는 걸 안호연도 알지만 멈추지 않았다. 다시 볼 사람도 아니었고 슬슬 엉덩이를 뗄 시간이었다.
“슬슬 일어나야 할 시간이네요.”
안호연이 시계를 보며 말하자 민영훈이 갑자기 일어나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죄송해요.”
다짜고짜 죄송하다는 말에 안호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첫눈에 반해서 그런데 전화 좀 주시면 안 될까요?”
남자가 갑자기 두 손을 뻗은 안호연 앞에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
“저도 죄송해요. 낸 회비가 있어서 아까워서 나온 건데, 제 스타일이 아닌 것 같아요.”
“한 번만 보고 어떻게 알아요?”
“사람의 첫인상이 평생 이미지를 좌우하잖아요.”
안호연은 끈덕지게 달라붙는 남자를 매몰차게 떼어 내곤 고개를 숙여 작별 인사를 했다. 에스코트해 주겠다며 따라오는 남자에게 안호연은 고개를 저었다. 얼른 호텔 입구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다른 약속 장소로 옮겼다. 그렇게 한 사람씩 2시간씩 티타임을 두 탕 뛴 안호연은 제임스의 회사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는 수고비를 주면서 안호연의 얼굴을 살폈다. 한 건당 오만 원씩 총 십만 원이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금액이었다.
“어디에 쓸 건데? 또 심부름센터에 돈 부으려고 하지?”
“그럼 안 돼?”
“그렇게 돈을 부었는데 심부름센터에서 애 하나 못 찾는 거면 찾을 의지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보다 태범석은 너한테 왜 그러냐. 왜 애를 숨긴 거야. 마지막 부탁인데 태범석하고 끝내.”
“애를 찾아야 끝내지.”
“그렇지. 그래도 밥은 챙겨 먹고 다녀. 몸이 자꾸 마르는 거 같다.”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이곤 사무실에서 나왔다. 1층 은행에 들러 오늘 일당을 심부름센터에 입금했다. 여전히 그들은 아이의 행방에 갈피를 잡지 못했으나 이미 많이 진행된 상태여서 덜컥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어려웠다.
안호연은 맥이 빠진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가 밖을 보았다. 이젠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방치되고 풀어진 삶을 살 때면 자꾸 누군가가 떠올랐다. 이미 얼굴은 희미해졌는데 족쇄를 채우는 감각이라든가 소변을 누게 해 주던 남자의 손길이 떠올랐다. 멍하니 하늘을 보던 안호연은 손가락으로 코를 문대고 집으로 향했다. 가끔 누군가가 자신을 이끌어 주던 때가 그립고 오래도록 방치돼 외로웠다.
* * *
민영훈은 대형 로펌에 근무했다. 수임료가 높은 유능한 변호사나 좀 허당 같은 면이 있었고 연애 고자로 소문이 났다. 얼마나 연애에 무능하냐면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액의 결혼정보회사에 대뜸 등록했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그가 원하는 이성이나 오메가를 만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민영훈은 결혼정보회사에 등록한 데에 만족하고 있었다. 거기서 만난 오메가가 머리에 콕 박혔기 때문이다.
눈을 감아도 떠도 안호연의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 그는 가늘고 목이 길었다. 눈두덩에 작은 점이 있었고 입술에 핏기가 없었다. 눈 밑은 약간 검었고 잠을 못 잔 듯 핏줄이 서 있었다. 굉장히 피곤하고 아파 보였는데 예뻤다. 대충 민영훈이 상상하는 그의 얼굴은 그랬다.
고개를 저어 안호연의 얼굴을 떨쳐 낸 민영훈은 손가락을 두드려 결혼정보회사 나눔 채팅방에 접속했다. 안호연이라는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마침 채팅방에 라이언이 접속해 있었다. 라이언은 결혼정보회사에서 5년을 구른, 뼈대가 굵은 남자로, 결혼이 소원인 남자였다. 신앙심이 깊고 말씨도 고운 그가 어째서 결혼에 성공하지 못했는지 민영훈은 늘 의문이었다.
백곰 : [안녕하세요, 라이언 님.]
라이언 : [안녕하세요, 백곰 님. 이번에 주선 성공하셨어요?]
백곰 : [실패했는데 운명의 짝을 만난 거 같아요.]
라이언 : [정말요? 축하드려요. 혹시 그분이 누구세요?]
백곰 : [여기다 그분의 존함을 쓰기엔.]
라이언 : [괜찮아요, 저밖에 없잖아요.]
백곰 : [그럼, 살짝 말할게요. 꼭 라이언 씨만 알고 계세요. 안호연 씨예요.]
라이언 : [헐, 저도 아는 사람이에요. 오메가 맞죠? 그분이면 어려울 텐데, 그분 여기 결혼정보회사 회원님 사이에서 유명해요. 넘어가지 않는다고요. 완전 철벽이래요. 얼마 전 여기 회사에서 인기가 높은 회원분 중 한 분이 추파를 날렸는데 거들떠보지도 않았대요. 여자분한테도 인기가 많아서 지금 핫 해요.]
백곰: [그 정도예요?]
라이언 : [네, 네. 그래도 다행이라면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는다는 거네요. 우리의 결혼을 위해 기도해요. 정 안 되면 괜찮은 기도원 알려 드릴게요.]
백곰: [네, 기도할게요.]
막 키보드로 마침표를 누를 때 사무실 문이 열렸다.
“이제 퇴근인데 술 마시러 갈래?”
대학 동기인 강유정이 손으로 커피를 흔들며 들고 왔다. 민영훈은 우울한 얼굴로 라이언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고 채팅방 종료를 눌렀다.
“아니,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아. 기도드리러 갈 거야.”
“뭔 기도야. 헛소리 말고 일어나.”
“나, 운명의 사람을 만난 것 같아.”
“헛소리한다.”
“진짜라니까. 결혼정보회사에서.”
“내가 당장 그 회사에 가서 환불받으라고 했지. 거기 사기야. 사기라고.”
결혼정보회사에 등록했다는 걸 안 이후부터 강유정은 유난스럽게 반응했다. 그는 휴대 전화를 쥐여 주기까지 했다.
“왜?”
“내 동생 거기서 소개받았다가 병신 된 거 봤냐, 못 봤냐?”
“네 동생 원래 좀 이상했잖아.”
“야, 우리 중영이가 이상하긴 해도……. 누구 동생 보고 이상하다는 거야? 그러는 넌 멀쩡하냐?”
“그 이야기가 왜 나와. 내가 만족한다는데.”
“거기서 가끔 이상한 사람 보내고 그래. 수많은 사람 중에 사기꾼이 섞여 있을 수 있다니까. 거기서 소개받은 애랑 임신해서 살림 차리고 살았는데, 알고 보니까 사기였어. 알고 보니까 연인도 있었고, 애도 다른 사람 애였어. 그 새끼 얼굴 보면 뺨이라도 때리고 싶어. 난 그것도 모르고 둘이 잘해 보라고 비싼 와인도 선물로 주었거든.”
그 이야기는 민영훈도 귀가 닳도록 들은 이야기였다.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는 척하면서 책상을 정리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가슴 아픈 일이었으나 자주 들으니 지겨운 이야기가 되었다.
“난 여기가 좋아. 만족해. 어제 만남에서 이상형도 만났어.”
“이상형 같은 소리 하네. 그래서 번호는 받았고?”
“애프터도 안 받아 주긴 했는데 회사에 문의해 보려고.”
“얼마나 등신같이 굴었으면 안 받아 줘.”
“등신처럼 안 굴었어. 원래 그렇대. 이 사람이 나와도 철벽이고 저 사람이 나와도 철벽이래.”
“다 꿍꿍이가 있어서 철벽 치는 거야.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으니까 그날 나도 데려가. 멀리서라도 괜찮은 사람인지 확인해 줄게.”
“오, 강유정.”
“십 년 우정이 어디 가냐? 너도 장가가야지.”
민영훈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극도로 빨개진 그의 귀에 강유정이 얼른 차가운 커피를 가져다 댔다.
“오늘부터 전화해.”
커피에 빨대를 꽂아 마시려던 민영훈이 뜬금없는 말에 코를 벌렁거렸다.
“어디에?”
“결혼정보회사. 오늘부터 애프터 안 받았단 사람 만나게 해 달라고 지금부터 문의 넣어서 귀찮게 해야지. 한 사흘 정도 하면 저쪽에서 백기 들 거다.”
“그런가?”
“그렇지.”
달콤한 커피를 마시던 민영훈은 강중영이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같은 대학교라 오래전엔 몇 번 대화를 섞었던 게 기억났다.
“그건 그렇고 중영이는 요즘 뭐 해?”
“집에 있겠지.”
“요즘 잘나가지 않냐? 요즘 인기 있는 외식업 CEO로 자주 언급되던데.”
“그것만으로 유명한 건 아니잖아.”
“아아, 그 아이돌? 루머 아냐. 무슨 이상한 업소에도 출입한다는 말도 있던데.”
“루먼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그 자식이냐고. 둘이 스캔들 터지니까 우리 중영이까지 끼어서 흠집 나잖아. 정정 기사 내고 악플 단 몇 놈 잡아다가 고소하긴 했는데 영 가라앉질 않아.”
“걔 베타잖아. 중영이는 오메가하고만 연애해야 한다지 않았어?”
“그때 이후로 연애를 안 하겠다는데 어쩌냐. 걔가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말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잖아. 속상하다.”
강유정은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민영훈은 강유정과 전혀 닮지 않은 그의 남동생을 떠올렸다. 키는 저보다 컸고 얼굴은 더럽게 잘생겼었다.
“그래도 부럽다.”
“뭐가?”
“잘생겼잖아.”
음울한 목소리로 속삭이던 민영훈이 서류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오늘따라 술이 술술 넘어갈 것 같은 예감이다.
* * *
가을인데도 불구하고 날이 더웠다. 이미 햇볕에 바랜 낙엽이 바람이 불 때마다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후끈했다. 이상한 날씨가 반복돼 안호연은 여름인지 가을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안호연이 사는 집 앞에 작은 나무가 있었는데 하필 은행나무였다. 노랗게 익은 은행을 따려고 사람들이 장대를 휘두르곤 했다. 그때마다 역한 냄새가 올라와 창문을 닫았다. 창문을 닫고 몸을 둥글게 만 상태로 TV를 보던 안호연에게 제임스가 전화했다.
[큰일이다, 호연아. 그 사람이 널 또 보고 싶다고 난리야. 사흘 전부터 직원을 달달 볶나 봐.]
“누가?”
눈이 따끔거려 손가락으로 눈을 비비자 시야가 흐려졌다.
[누구긴. 민영훈이라고, 걔가 은근히 압박 넣네. 이 사람 좀 큰 손님이라 다른 회사로 넘어가면 아까운데 네가 도와주라.]
“대신 두 배로 주는 거다.”
[알았어. 그건 걱정하지 마. 빚을 내서라도 줄게.]
제임스가 고작 십만 원에 빚을 낼 리가 없다. 그건 안호연도 알고 제임스도 알고 있었다.
“언제면 돼?”
[오늘이나 내일? 너 좋을 대로 해. 지금 당장 만나게 해 달라고 애원한단다. 이번엔 매몰차게 거절해 줘. 알았지?]
“내가 안 나가서 고객 떨어지는 거랑 내가 매몰차게 거절했다가 고객 떨어지는 거랑 뭐가 달라?”
[다르지. 너한테 차인 고객한테 더 근사한 오메가를 소개해 줄 거야.]
“어련하실까.”
안호연은 느릿하게 하품을 했다.
[시간은 언제로 잡을까?]
“오늘 저녁 어때?”
[알아서 시간 장소 골라서 문자로 넣을게.]
“응.”
눈을 내리감았다가 떴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을 떠올렸다가 흘려보냈다. 역시 우울했다. 우울한 마음에 안호연은 초콜릿을 뜯어 입에 넣으며 수신된 문자를 확인했다.
[8시 S호텔 민영훈.]
S호텔이 떠오르자 수더분했던 알파 남자가 떠올랐다. 오늘은 매몰차게 그를 거부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느릿하게 하품을 한 안호연은 7시에 알람을 맞춰 놓고 짧은 낮잠을 잤다.
Rrrrr.
시끄럽게 알람이 울리자 소파에서 꾸물꾸물 기어 나온 안호연은 성의 없이 준비했다. 집 앞 편의점 가는 복장으로 바깥으로 나간 안호연은 운 좋게 집 근처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약속 장소로 갔다. 안호연이 민영훈을 찾자 서버가 어색한 미소를 띠며 어딘가로 안내했다. 감색 슈트를 입은 민영훈이 안호연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이자, 안호연도 고개를 숙였다. 오늘 기필코 이 사람이 정을 떨칠 수 있게 만들어야겠다며 다짐했을 때 머리 위로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더러운 오메가 새끼가!”
더럽다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불쾌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을 때 안호연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강유정이 씩씩거리며 서 있었다. 한국에 있다면 언젠가 강중영이나 그의 가족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세상은 좁았으니까.
그들이 이렇게 적의를 드러낼 것은 예상 밖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노선을 바꿔 탄 안호연에게 고마워해야 했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강중영 옆에 계속 머물렀을 수도 있었다. 강중영 옆에 머물며 이런 비난을 받았다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으나 지금 안호연에게 날카롭게 쏟아지는 비난은 부당했다.
“이런 새끼를 이상형이라고 하다니 너 제정신이야! 사람 보는 눈이 없어도 그렇지 이건 최악이잖아. 아니, 사기꾼이 작정하고 속이려고 했으면 못 알아봤겠지.”
민영훈은 일어나 무섭도록 화를 내는 강유정을 잡았다. 갑자기 성난 개처럼 달려들어 안호연을 향해 짖어 대니 당황스러웠다. 둘을 번갈아 보며 성난 강유정의 어깨를 몸으로 막아섰다. 그사이 안호연은 냅킨으로 젖은 머리를 정리했다.
“유정아, 진정해. 너 왜 그래? 내가 좋아하는 오메가가 어떤 사람인지 봐 주러 온다고 했으면 얌전히 있어야지. 너 안호연 씨한테 굉장히 무례하게 굴고 있어.”
“무례? 이 새끼가 내 동생 인생 망친 건 안 무례하고? 중영이를 우습게 만든 거 그거 하나만 잘못했으면 이렇게까지 안 나와. 중영이하고 헤어지면서 어머니에게 돈을 요구해? 미친 새끼, 벼락 맞을 새끼!”
그녀가 내민 고마움의 표시였다. 그리고 안호연도 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안호연은 그렇게 정의로운 사람도 아니었고, 정의, 사랑, 자존심이란 단어는 안호연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우선 살아야 했고, 혼자가 아닌 둘이라 현실적인 행동이었다. 완벽했던 남자의 그늘, 강중영을 벗어나는 데 이만한 보상은 받아야 했다. 아니 부족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악역을 자처해 그를 상처 내지도 않았을 테니까. 억울하고 쓰린 마음을 보상받기엔 그 돈도 적은 금액이었다. 그 시간 동안 고통받고 잃어버린 걸 꼽아 보면 안호연이 더 손해였다. 그게 손가락질 받을 일이라면 안호연은 손가락질하는 사람에게 침을 뱉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강유정은 강중영의 형제였기 때문에 화를 꾹 참았다. 냅킨으로 머리를 정리하고 어깨까지 닦아 낸 안호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걸로 제임스의 목적은 확실히 달성되었다. 적어도 민영훈이란 남자는 떨어질 테니까.
“말이 심해, 얼른 사과해.”
“이 새끼가 내 동생 애 임신했다고 들러붙었던 앤데 내가 왜 사과해. 네가 좋다고 따라다니는 안호연이 그 사기꾼이라고. 너나 정신 차려.”
숨을 적당히 몰아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현실성이 없었다. 흥분한 강유정도, 멍청한 표정으로 사태를 파악하려는 민영훈도.
“제가 이런 사람이라서 있던 관심도 사라졌을 테니 이만 가 볼게요. 원래 저도 그쪽에게 관심 없었어요.”
“저, 안호연 씨.”
그의 부름에도 안호연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지나가려 했다.
“자식한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직도 사기 치고 다니냐? 너도 이젠 정신 차려.”
강유정의 그 한마디만 아니었다면 바로 나갔겠지만, 이미 날이 선 말이 안호연의 귀로 날아들었다. 우뚝 걸음을 멈췄다. 순간 눈앞이 까매졌다. 안호연은 그에게 달려가 뺨을 때렸다. 매서운 말을 내뱉으며 분개하던 강유정이 일시에 멈췄다.
“그런 식의 비난은 하지 말고 나만 비난해요. 아이까지 비난하지 말고요. 내가 쓰레기란 건 인정하는데, 그 쓰레기만 욕하면 되지 아이까지 끌어들일 필욘 없잖아요.”
안호연은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내뱉고는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에게 다솜은 유난히도 아픈 손가락이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안쓰러워서 마음대로 떠올리지도 못한다. 정말 보고 싶을 때 조심히 떠올려 보곤 했는데 그런 아이를 마음대로 입에 올리고 자신의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욕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안호연이 입술을 깨물자 강유정은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곤 어색함을 떨쳐 버리려는 듯 어깨를 털어 냈다. 안호연은 그에게 대충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어, 어, 안호연 씨! 저를 부르는 소리에도 안호연은 앞만 향해 갔다. 기어코 안호연의 뒤를 바짝 따라온 민영훈이 소심하게 안호연의 옷깃을 잡았다.
“뭡니까?”
“괜찮아요.”
“뭐가요?”
“그런 사람이어도 괜찮다고요.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어도 괜찮으니까 호연 씨를 알고 싶어요. 연락해요. 꼭 연락해 줘요.”
그는 대뜸 명함을 내밀어 안호연의 손에 쥐여 주었다. 광이 나는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호텔 택시에 올라탔다. 차 문을 닫자 바깥 소음이 차단됐다. 눈을 감고 손바닥으로 머리를 쓸어 올려도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안호연은 먼저 제임스에게 문자를 보냈다.
[민영훈, 강유정과 아는 사이야. 강유정은 강중영 형. 게임 세트.]
지금 상황을 짧게 정리해 그에게 전송하고 눈을 감았다. 휴대 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보지 않아도 제임스의 전화였다. 지금은 어떤 상황도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감정이 좀 더 정리되면 이야기하고 싶었다.
택시가 익숙한 동네 어귀에서 멈췄다.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린 안호연은 빌라 주차장에 선 까만 차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도 저조한 날에 태범석이 집에 있었다. 자주 안호연의 집에 찾아오지 않는데, 오늘은 이례적이다. 빌라 현관에 주저앉아 가로등 빛에 물든 은행나무를 보았다. 은행이 썩으면서 나는 좋지 않은 냄새가 코를 찔러 왔다. 한참 여름 모기에게 피를 헌혈해 준 안호연은 짧은 한숨을 내쉬곤 2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자 그가 태우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일찍 왔네.”
“어디 갔다 와?”
“제임스 보고 왔어.”
“걔는 왜?”
“답답해서. 친구 만나는 일도 일일이 너에게 보고해야 해?”
태범석이 안호연에게 다가왔다. 코로 밀려들어 오는 담배 냄새에 눈을 내리감았다. 그의 냄새에 눈살을 찌푸렸다. 비흡연가가 된 이후로 담배 냄새가 역겨웠다.
“밤에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있어.”
그가 안호연의 어깨를 짚었다.
“밖에 비 와?”
“어쩌다 물에 맞은 거야. 신경 쓰지 마.”
괜스레 손을 들어 어깨를 털었다. 이미 물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는데도 태범석은 그 미세한 변화를 알아챘다. 남자는 눈썰미가 좋았다. 태범석은 안호연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더니 이내 다시 소파에 가서 앉았다.
“제임스 냄새는 아닌 것 같고. 누굴 만났는지 숨김없이 말해.”
“그냥 주변에서 묻었겠지. 주변에 사람 있잖아. 그게 싫으면 제임스와 호텔에서 둘이 만나라?”
그가 다리를 꼬았다. 여전히 둘은 연인이라고 말하기 애매한 부분이 존재했다. 예전과 다른 부분이 별로 없었다. 달라진 거라면 이제 누군가와 쉽게 잠자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태범석이 안호연에게 아이를 원했다. 옛날이었다면 펄쩍 뛰고 기뻐했을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아니다. 태범석은 한번 걸리면 빠져나오기 힘든 늪이자 함정이었다. 결혼하게 돼 아이까지 생기면 진짜 늪이었다.
“할 말 있어. 앉아 봐.”
안호연이 소파에 앉았다.
“나 결혼할 거야.”
아직 안호연은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싫어.”
“다행이네, 너랑 할 거 아니거든. 사업을 늘리려면 돈이 필요해.”
“그럼 이 생활 끝내. 어차피 서로 사랑하지도 않잖아.”
그에게서 결혼한다는 말이 튀어나오자 안호연은 안도했다.
“그럴 필요 없어. 그쪽에서 너는 터치 안 하기로 합의 봤어. 아이를 낳으면 당연히 내 호적에 올릴 거야.”
“나 그렇게는 안 살아.”
“안 살면?”
안호연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안 살면 어쩔 건데? 나갈래? 그럼 나가든가.”
태범석이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못 나가잖아. 못 나가겠으면 어떻게 해? 그냥 살아.”
은근한 말을 속삭이며 그가 일어섰다. 그가 차 키를 들고 일어나더니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우리 이런 거로 힘 빼지 말자. 나 너 좋아하고 아껴. 다음엔 근사한 곳에 가서 밥 먹자.”
“너나 먹어.”
“나 가는데 키스 같은 거 없어?”
그가 잘난 낯짝을 들이밀며 입꼬리를 올렸다. 입술을 깨물고 앉은 안호연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이마를 가리는 머리칼을 들어 올려 그가 짧게 키스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네가 내 첫아이를 낳아 줬잖아. 둘째도 분발해 줘. 참고로 다솜이 닮은 딸로. 그건 너도 동의하잖아. 너와 나 사이 아니면 그 애를 닮은 애가 나올 수 없어. 내가 왜 그 부분에 대해서 모질게 구는지 알잖아. 밤에 외로우면 알파 대여 서비스를 이용해도 좋아. 돈이 부족하면 내 카드 긁어.”
재킷을 팔에 걸고 나가는 그를 응시했다. 그가 구두를 신고 손을 흔들 때 안호연은 주먹을 꽉 쥐었다. 문이 닫히자 짧은 한숨이 안호연의 입술 밖으로 튀어나왔다. 진짜 이럴 때마다 죽고 싶은 심정이나 삶을 비관하고 싶진 않았다. 이 결과물이 다 안호연의 선택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좀 더 잘 가꾸고 싶었다. 적어도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볼 때 반짝반짝 빛나 보였으면 했다. 그 누군가의 눈에 비참해 보여서 동정하지 않게.
복합적인 이유로 태범석에게 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자신은 누군가가 필요했다. 배 속 아이의 성장이 더뎠고 의사는 아이의 심장과 장기 쪽에 문제가 있어 앞으로 많은 돈이 필요할 거라고 조언했다. 그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결혼 사기를 쳤던 프란츠에게 소송이 걸렸다. 돈 문제가 끊이지 않는 그 순간에 안호연은 태범석을 선택했다. 아이가 건강해지면 도망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고 지금까지 태범석의 옆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태범석이 다솜을 숨기고 그걸 구실로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안호연은 지끈지끈 아픈 머리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타이레놀을 꺼내 입 속에 넣었다. 정수기 앞까지 가는 동안 쓴 알약이 혀 위에서 녹았다. 작은 컵에 물을 떠 마시곤, 알약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잠시간 약효가 나타나길 기다려도 약에 내성이 생겼는지 두통이 내려앉지 않았다.
안호연은 벗어 두었던 얇은 외투를 몸에 걸치곤 다시 현관 앞에 섰다. 술이라도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길가로 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안호연이 자주 가는 바가 있었다. 택시가 멈춰 서자 지갑을 열어 택시비를 계산했다.
지끈지끈 두통이 떠나지 않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안호연은 바로 들어갔다. 2층에 자리 잡은 바에 들어가자마자 바텐더가 고개를 숙이며 아는 체를 했다. 안호연은 바로 바텐더에게 달려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칵테일 하나씩 돌리고 싶은데 한 잔씩 나눠 줘요.”
들어오자마자 안호연은 칵테일을 사람들에게 돌리곤 화장실로 향했다. 오는 내내 느꼈던 소변감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화장실에 예민해 보통 밖에서 소변을 누지 않지만, 이렇게 급할 때는 어쩔 수 없다. 안호연은 화장실로 가 지퍼를 내렸다. 그러다 페니스에 꽂힌 링을 보곤 난처한 얼굴로 다시 지퍼를 올렸다. 링을 찬 안호연을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누가 봤을까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딱히 낌새를 알아챈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안호연은 소변기에서 몸을 돌려 칸막이 화장실로 들어가 소변을 누었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은 안호연은 테이블에 앉았다. 다가온 서버에게 보드카를 주문하자 서버가 빠르게 잔을 건네주었다. 잔에 술을 따르고 입술을 대자 독한 알코올이 여린 피부를 공격했다. 손등으로 따가운 입술을 문대는 와중에 누군가가 안호연의 어깨를 감쌌다.
“고마워.”
안호연은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를 건네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칵테일 잘 마셨어. 오늘 기분 더러웠는데 기분 좋아졌어.”
“별로. 내 돈도 아냐.”
카드는 태범석 거였다. 고마워하려면 그에게 하는 게 맞다.
“누구 돈인데?”
“태범석.”
“그럼 그 사람한테 고맙다고 전해 줘. 옆에 앉아도 돼?”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옆에 앉았다. 슬쩍 그를 보았다. 솜털도 벗지 않은 것처럼 보송한 남자였다. 안호연보다 한참 어린 얼굴로 반말을 하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결혼했어?”
그가 안호연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 물었다. 안호연은 엄지로 반지를 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반지는 태범석이 어느 날 사 와 끼워 주었다. 빼면 싸우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에 계속 끼고 다녔고 이젠 무뎌져 반지가 있는지도 몰랐다.
“결혼했어야 해?”
“예쁜 데다 오메가잖아. 오메가들은 인기가 많아서 결혼을 빨리 하니까.”
“오메가인 걸 어떻게 알았어?”
남자에게서 동류의 냄새나 알파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베타였다.
“쟤가 말해 줬어.”
그가 뒤에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일행인지 남자가 칵테일을 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남자도 칵테일 잔을 하늘 높이 올렸다. 안호연은 시력이 좋지 않아 남자의 외양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근데 왜 울적한 얼굴을 하고 있어?”
“그런 표정 한 적 없어.”
흠 소리를 내던 남자가 옆에서 칵테일을 홀짝거렸다. 안호연은 그사이 반병을 비웠다. 오늘따라 술이 술술 들어갔고 급하게 마신 술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휴 숨을 몰아쉰 안호연이 잠시 뺨을 테이블에 붙였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굉장히 우울한 얼굴인걸. 좋은 데 데려다줄까?”
늘 우울했다. 아니, 우울하기보단 그저 그런 하루를 힘겹게 보내고 있다고 해야 옳다. 특별하지도 않은 재미없는 하루. 그런 하루를 사는데 웃음이 나올 리가 없다. 다 포기하고 싶은데 그중에서 제일 힘든 건 자신을 잡아 줄 사람이 없다는 거다.
“조금 비밀스러운 곳이야.”
“됐어.”
손으로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오메가에게 은근히 비밀스러운 곳으로 가자는 남자의 목적이 뻔했다. 한번 어떻게 해 보려는 속셈이다.
“나 다 봤어. 페니스에 있는 링. 주인님이 누구야?”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용히 해.”
안호연은 그를 밀어냈다. 아까 급하게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옆에 있던 남자였나 보다. 아무도 남이 소변보는 거에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변수였다. 자신을 이상한 남자로 오해하는 건 사양이다.
“D/S파트너가 누구냐고 묻는 거잖아? 누군데 소변 싸는 것까지 관리해? 그 사람이 일상까지 관리하는 거야? 그 반지를 끼워 준 사람이야? 슬레이브는 아닌 거 같은데.”
안호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모르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쏟아졌다.
“아니면 주인 없는 강아지야?”
그가 자꾸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안호연은 그를 빤히 보다가 일어섰다. 그러자 그가 손을 잡았다.
“설마 처음?”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난 너 같은 애들을 잘 알아. 혼자는 버거워. 그렇지? 누군가가 예뻐해 주고 사랑해 주는 걸 넘어서 내게서 눈을 떼게 하고 싶지 않잖아. 내 모든 걸 알고 지켜봐 주고 도망가지 못하게 꽉 잡아 줬으면 좋겠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데 실제론 그러지 못하잖아. 네가 어떤 성향인지조차 이해 못 하고 방치당하고 있다면 아깝고 슬퍼. 결혼할 사람이 있는 거면 일플이라도 해 봐. 네 성향을 금방 알게 될걸.”
“나 맞는 거 싫어해.”
“맞는 건 싫어해도 피지배자형이잖아. 지배받고 싶지 않아?”
안호연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안호연의 성향을 정확히 짚어 냈다. 강중영이 파헤쳐 낸 그 성향이 노출되었다.
“나 지금 심본 기분이야. 그렇지 않아도 너한테 어울리는 애가 있어. 걔도 S는 아니야. 심지어 섹스도 안 해. 완전 이상한 놈이라 변바인가 했는데 또 그건 아니야. 얼굴이 잘생겨서 인기 많아. 걔가 지금 슬레이브를 구하는데, 그 슬레이브가 문제를 일으켜서 계약이 깨졌나 봐. 분명 만족할 거야. 요즘 웃을 일도 없었잖아. 잠깐의 일탈이라고 생각해.”
웃기는 소리. 안호연은 소리 내어 웃었다.
“걘 먹는 거 자는 거 배출하는 생리적인 욕구를 제 손으로 시켜. 진짜 완벽한 주인님이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도 소변도 인간이 참을 수 없는 생리 현상까지 다 관리해서 자기 거로 만들고 싶다던 강중영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안호연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그가 안호연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따라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긴 했으나 안호연은 막상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게 옳은 건지 잘못된 건지 몰라 잠시 고민했다. 그래도 작은 일탈을 하고 싶었다. 삼 년 전 자신의 발에 족쇄를 채워 주던 그 느낌을 잠시라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안 따라오고 뭐 해?”
안호연은 따라오라고 재촉하는 남자에게로 갔다. 바깥엔 사람들이 터질 듯이 많았고 네온사인에서 나오는 불빛으로 낮처럼 훤했다. 사람들 어깨에 치인 안호연은 갑자기 멈췄다. 따라오라던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는 안호연에게로 익숙한 얼굴이 다시 나타나더니 안호연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정신없이 가던 남자는 조금 인적이 드문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좀 음침해 보여도 괜찮아. 여긴 대체로 매너가 좋아. 여기서 플레이 안 하고 보통 파트너를 구하러 와. 정말 괜찮은 애라서 소개해 주는 거야. 너 나중에 나한테 절하러 올걸?”
안호연은 계단을 밟고 아래로 내려갔다. 겉은 평범한 바였고 지나치게 활기찬 곳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달려 있었다.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면 특정 사람들이 야광 팔찌를 차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안호연의 손목에도 야광 팔찌를 채워 주었다.
“이건 파트너가 없다는 표시야.”
안호연이 팔찌에 한눈을 판 사이 남자가 열심히 걷더니 갑자기 멈춰 섰다. 싸구려 야광 팔찌를 찬 사람들이 많았다.
“얘가 내가 소개해 주고 싶다는 사람이야!”
안호연은 고개를 돌렸다.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시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머릿속에 잠깐의 침묵이 돌았다. 그러나 눈은 사진을 찍듯 의자에 앉은 남자를 수만 번 새기고 있었다. 3년 전 이별했던 남자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심한 두통이 머리를 휩쓸었다.
“환영해요.”
흘긋 안호연을 본 남자가 속삭였다.
“환영한다는 말은 처음 본 사람에게 하는 인사야.”
솜털이 벗겨지지 않은 남자가 옆에서 룰을 설명해 주었다.
“처음이 아니니까 환영한다는 인사는 오번가.”
“둘이 아는 사이야?”
솜털이 보송하게 난 남자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내가 처음으로 족쇄를 채웠던 녀석이야.”
강중영은 마치 책을 읽듯이 말했다. 미친, 늦게야 욕이 터져 나왔다. 생리적인 현상까지 조절하고 싶다는 남자가 있다고 했을 때 왜 강중영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한숨이 나왔다. 안호연은 여기서 도망가야겠단 생각에 초조했다. 그런 안호연과 달리 그는 태평하게 바텐더에게 칵테일 하나를 주문해 안호연 앞에 내밀었다. 바 조명에 쉽게 녹아 오묘한 파란빛이 났다.
“앉아서 이야기해요.”
오늘 만난 그의 형은 안호연에게 소리 지르고 욕을 했다. 그런데 그는 낮고 조곤조곤한 말투로 말했다. 너랑 나랑 무슨 이야길? 되묻고 싶었다. 헤어진 연인에게, 그것도 좋게 헤어지지 않았던 그와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나고 보면 행동 자체가 구질구질해 보일 테니까. 그래도 시간이 꽤 지나면 어색하게라도 잘 사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이런 곳에서 만나니 당황스러웠다.
“헤어진 연인에게 무슨 할 말이 있어서.”
가시를 세우고 달려드는 안호연에게 그는 어이없단 미소를 지었다.
“과거 이야기를 하자는 건 아닌데요. 내가 그쪽에게 미련이 남은 것도 아닌데.”
그의 손가락에서 반지가 반짝였다. 연인? 연인이 있던 걸까. 안호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가끔 연애와 D/S를 구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도 그중 하나인 걸까.
“파트너를 구하고 있는데 그쪽이 적격인 거 같아요. 여기까지 따라왔다면 안호연 씨도 파트너를 구하고 있단 소리잖아요.”
그의 목소리에 고저가 없었다. 안호연에게 전혀 감정 없는 목소리였다.
“플만 할 파트너였으면 좋겠는데, 플이 끝나고 소소한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깔끔한 관계요. 그만큼 제격인 사람도 없다고 보는데 어때요? 저는 그쪽에게 티끌만 한 감정도 안 생길 거 같거든요.”
뾰족한 말이 심장을 꿰뚫었다. 아무 감정이 없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다행이다. 다행이었다. 속으로 그 말을 반복했다가도 가슴 깊은 곳이 찌르르 아팠다.
“여기 입문하려는 거면 나로도 나쁘지 않을 텐데요. 난 섹스나 자질구레한 플레이는 안 해요.”
역시 안 되겠다. 안호연은 돌아서려고 했다. 그는 사소한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안호연은 그에게 사소한 감정이 생겼다. 벌써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이상했다. 아까부터 심장이 뛰지 않았다. 죽은 척 잠들어 있었다.
“싫으면 말아요. 네가 할래, 윤동아?”
따분한 목소리로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질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 태익이한테 죽고 싶냐. 태익이도 걸리지만, 네 플레이는 지루하고 재미없어. 아무튼 둘이 잘 해결해. 나 갈게.”
크게 손을 흔든 남자는 입구 쪽으로 나갔다. 안호연도 나가려 했다.
“이거만 마시고 가요.”
입도 대지 않은 칵테일 잔을 안호연에게 내밀었다. 미련. 쓰레기 같은 미련이 안호연의 발을 붙잡았다. 안호연은 얌전히 스탠딩체어에 앉았다.
“아이는요? 딸이에요, 아들이에요?”
“딸.”
“예전엔 그 아이가 내 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진짜 내 아이요. 그래서 아이를 빌미로 호연 씨를 데려오고 싶었어요.”
“태범석을 꼭 닮았어. 네 아이는 절대 아니지.”
안호연은 강중영의 아이가 아니라고 돌려 말했다. 아이는 태범석의 아이가 확실했다. 눈매라든가 입매가 그를 똑 닮았었다.
“뭐, 압니다. 제 쪽에서 그런 확인도 안 했을까요.”
입술에 잔을 댔다. 조금 쓴맛이 났다. 지금 상황과 잘 어울리는 맛이었다.
“호연 씨에 대한 마음 접었어요. 당신 충고대로 족쇄를 찰 다른 사람도 구해 봤는데 의외로 이곳엔 족쇄를 차겠다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그래도 호연 씨에게 고마운 건 족쇄를 찬 사람에게 마음을 준다는 게 멍청한 짓인지 알게 해 줬다는 거예요. 내 상황을 깨닫게 해 줘서 고마워요.”
그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뒤에서 누군가가 강중영을 알아보고 인사를 하듯 그의 목에 팔을 감아 왔다. 짧게 볼에 키스하고 떨어진 여자는 다른 테이블로 옮겨 갔다. 강중영은 이곳에서 인기가 많아 보았다. 주변 사람들이 이쪽을 흘긋거리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안 그런 척 그를 자꾸 감시했다. 감시하고 또 감시하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지긋지긋한 미련이었다.
“그걸 다 마실 때까지 기회는 있어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떻게 할래요, 호연 씨?”
그는 안호연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유혹에 약한 자신을 달랬다. 칵테일이 점점 줄어드는 게 아까울 정도였다. 마지막 한 모금의 칵테일이 남자 초조했다. 그때 오른쪽에서 손이 튀어나왔다. 안호연의 어깨가 흠칫거려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곤 집게손가락으로 먼지를 떼어 냈다.
“감정만 없으면 못 할 것도 없잖아. 설마 구질구질하게 옛날 감정에 사로잡힌 건 아니죠?”
“지배당하는 게 싫어.”
“웃기지 마요. 그때 당신이 피지배자형이라고 나한테 말했잖아요. 그걸 모르면 몰랐을까 한번 지배당한 적이 있는 당신은 이 맛을 잊지 못하죠. 내가 싫으면 다른 사람 소개해 줘요?”
그는 아무렇지 않게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안호연은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강중영은 안호연에게 한 톨만큼의 마음도 없었다.
“오늘 매너 좋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데 나랑 해요. 맛만 봐요.”
안호연은 그를 흘긋 보았다. 잔을 좌우로 흔드는 그를 보곤 침을 삼켰다. 손가락이 떨렸다. 어쩌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
“정말 감정 같은 게 없어?”
“내가 왜요? 내가 뭐가 부족해서 안호연 씨에게 미련이 남아요. 거기다 애까지 딸린 사람한테. 원한다면 플 외엔 아는 척도 안 할게요. 내 공간을 벗어나면 우린 남이 되는 거예요. 그 공간 안에서만 계약된 파트너인 거예요. 연인과 파트너는 다르고 혼동하면 안 되죠. 내겐 보다시피 연인도 있고요.”
그가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반지를 보자 숨이 막혔다. 그 연인이란 사람과 각인했을까. 각인해서 그는 평온한 걸까.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잖아요. 연인이 충족시켜 줄 수 없는 욕망을 파트너로 푸는 거죠. 여긴 그런 사람도 흔하고 잘못된 것도 아니에요. 사랑과 욕망을 구분해 놓고 본능을 푸는 거죠. 호연 씨 욕망은 어때요? 나에게 지배당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내가 첫 지배잔데.”
삼키고 또 삼키다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우리같이 이어질 수 없는 관계에선 이런 파트너가 좋잖아요. 그리고 서로의 연인에게도요.”
이어질 수 없는 관계. 자신과 남자의 관계는 그걸로 설명됐다. 안호연은 이번에도 또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요.”
허락을 받은 강중영은 바텐더에게 계약서를 달라고 요구했다. 잔은 닦던 바텐더는 고개를 숙이더니 두 장의 계약서와 펜을 내어 주었다. 그는 한 장을 안호연 앞에 내밀었다.
“규칙을 말해 줄게요. 당신이 갑, 내가 을이에요. 갑과 을이지만 수평적인 관계라는 걸 잊지 마요. 처음 갑은 을의 말에 복종한다. 을은 갑의 행위나 명령 중 견디지 못하겠다고 느끼면 안전어를 말한다. 안전어는 총 3단계예요. 첫 단계는 불쾌하지만 할 수 있는 정도. 두 번째는 그만이란 뜻, 세 번째는 아웃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을은 갑에게 상처를 입히면 안 돼요.”
안호연은 계약서를 꼼꼼하게 읽었다. 여기도 여기 나름의 룰이 존재했다.
“안전어는 뭐로 할래요?”
“마티니.”
“좋아요. 플레이 시간은요?”
“한 시간?”
“고작?”
남자는 고작이라고 했지만, 안호연은 한 시간도 벅찼다. 아마 더 했다간 심장이 터져 죽을지도 몰랐다.
“좋아요. 어차피 맛만 보는 거니까. 오늘부터 할까요?”
안호연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일어났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도망가고 싶으면 가도 돼요.”
술을 마셔 비틀거리는 안호연과 달리 그는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대리 기사가 나오자 그는 키를 꺼내고 뒷좌석에 탔다. 뒷좌석에 앉은 그가 옆좌석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타요.”
안호연이 좌석에 올라탔다. 차가 움직이는 사이 강중영은 다리를 꼬고 두 손을 모아 무릎에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자신은 이렇게 떨리고 죽을 것 같은데 그는 태평했다. 그게 억울하긴 했지만, 한편으론 그가 이 마음을 모르길 바랐다.
차는 익숙한 길로 가고 있었다. 3년 전 그 집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그 집으로 갈 땐 유난히 이름 모를 가로수가 즐비했다. 듬성듬성 있는 가로등까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대리 기사는 늘 차가 서던 앞 주차장에 주차했다. 차 시동이 꺼지자 남자가 내렸다. 그가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 동안 남자는 말이 없었다.
“안 도망가네요.”
“도망이 아니라 이별이겠지. 이건 그냥 플레이잖아. 도망갈 이유가 없잖아.”
“그렇죠. 플레이엔 계약 종료만 있죠.”
그는 방으로 들어갔고 안호연은 현관 앞에서 기다렸다. 족쇄 없이 그가 집으로 들이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거실 불을 켠 그는 테이블에 정리된 족쇄를 꺼냈다. 그러곤 안호연 쪽으로 족쇄를 던졌다. 그런데 족쇄 쪽이 아니라 족쇄에 연결된 긴 줄 끝에 달린 손잡이 쪽이었다.
“사용 방법은 잘 알고 있겠네요. 족쇄를 차면 난 호연 씨 주인님이에요. 벗어날 수 있는 건 안전어를 사용해서예요.”
“족쇄는?”
“쉽게 족쇄를 찰 순 없어요. 손잡이는 현관 문고리에 걸어요.”
안호연은 그의 말대로 현관 문고리에 손잡이를 걸었다. 손잡이를 걸자 그가 뒤로 물러나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사람 배꼽에 올 정도로 줄이 떠 있었다.
“이걸 가랑이에 끼고 여기까지 와요.”
안호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싫으면 안전어를 말하고 나가요. 저는 말을 안 듣는 파트너는 필요 없어요.”
남자는 전혀 아쉬운 게 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런 건 줄 몰랐어.”
“제1 항 갑은 을에게 복종한다. 제가 뭘 시켜도 저항하면 그건 D/S가 아니죠.”
안호연은 이를 악물고 다리를 올렸다. 가느다란 줄이 허벅지 안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고환 사이를 지나 회음에 박혔다.
한 걸음 떼자 찌르르 전기가 통했다. 발가락까지 퍼지는 전기에 몸이 떨렸다. 두 걸음 뗐을 때 다리에 힘이 풀렸고 세 걸음 뗐을 땐 줄에 쓸린 고환에 열이 났다. 결국 네 걸음에 안호연은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강중영이 있는 곳까지 가기엔 거리가 꽤 됐다.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기다리기 지루한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안호연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발을 움직일 때마다 어딘가가 젖어들어 얇은 속옷을 적셨다.
뜨거운 숨을 내쉬며 강중영 앞까지 가자 그가 줄을 치켜들었다. 자극된 고환을 줄이 마구 짓눌렀다. 뭉개지는 느낌과 함께 곧 터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 감정 외에 기분이 좋았다. 만져지지 않은 어딘가가 자꾸 쑤셔지는 기분이다.
“왜 이렇게 굼떠요? 굼벵이인 줄 알았잖아요. 그래도 처음치곤 잘했어요. 내 집에 들어올 때면 이렇게 들어와요. 줄에 당신 페로몬을 잔뜩 묻혀요.”
그는 안호연의 턱을 쓸며 줄을 내렸다. 압박하던 줄이 사라지자 달뜬 신음도 식어 갔다. 강중영은 무언가를 기다리듯 안호연을 응시했다. 도대체 무얼 기다리는지 몰라 침을 삼켰다. 족쇄를 차기 전에 어떤 행동을 했더라. 머릿속에서 과거를 헤집던 안호연의 머리에 무언가 스쳤다. 셔츠를 잡자 그의 눈가가 풀어졌다.
안호연은 느리게 옷을 벗었다. 누군가가 보는 앞에서 옷을 벗는 건 실로 오랜만이다. 부끄러운데도 그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몸을 뚫을 정도로 강렬한 강중영의 시선이 자신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먼저 상체를 가리던 웃옷을 벗고 바지를 벗었다. 그러던 안호연은 잠시 망설였다. 드로어즈 안에 낡은 링을 낀 페니스가 숨겨져 있었다. 침을 삼키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싫으면 안전어를 말해요.”
깐깐한 그는 안호연을 파트너로서의 역량을 테스트했다. 눈을 꼭 감고 드로어즈를 벗자 그가 입술 끝을 올리고 비웃었다.
“주인이 있었어요?”
그가 페니스를 잡고 물었다. 안호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근데 그건 왜 차.”
감흥 없는 대답 뒤로 그는 잠시 링을 빼 갔다. 페니스가 허전했다. 그는 그제야 무릎을 꿇고 안호연의 발목에 족쇄를 채워 주었다. 놀랍도록 안정감이 느꼈다. 그 전까진 정처 없이 하늘을 떠다니는 풍선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끝없이 올라가다가 높은 기압에 터져 버릴 순간 누군가의 손에 잡혀 끌려 내려간 심정이다. 안정적이고 포근했다.
“예쁘네요.”
족쇄를 찬 발목에 그가 입술을 댔다.
“당신은 연애 놀이를 하고 싶은 것 같은데 오늘은 연인처럼 대해 주죠.”
아까 냉담하던 남자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화사하게 웃으며 족쇄에 달린 긴 줄을 풀어 주었다. 그가 안호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작은 배를 혀로 쓸어내리곤 까만 수풀이 우거진 거웃을 손가락으로 뒤적거렸다. 거웃에 숨은 고환을 끌어낸 그가 배를 쓰다듬던 입술을 내려 한쪽 고환을 물었다. 그가 이를 세워 깨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조용히 그의 머리칼을 잡고 넘어지지 않도록 유지했다. 사탕을 빨 듯이 한쪽 고환을 다정스레 핥았다. 그가 고환을 도로 뱉었다.
“호연아.”
다정스레 부르는 소리에 안호연의 숨이 거칠어졌다. 열심히 사용된 그의 입술이 유난히 붉었다. 자꾸 신음이 나올 것 같아 안호연은 얼른 손바닥으로 입술을 막았다. 입을 막은 손바닥에 습기가 찼다. 안호연의 입술을 보던 그가 페니스를 물었다. 혀의 굴곡과 입천장에서 느껴지는 울퉁불퉁한 부분에 잡혀 불편했다. 안호연은 짧게 울먹였다. 한 번도 여자와 잠자리를 해 보지 않았던 안호연에게는 이 감각이 생소했다. 불쾌한데 기분이 좋았다. 허리질을 하려고 하자 그가 얼른 물었던 페니스를 뱉었다.
“왜 링을 찼어요?”
“더 빨아 줘.”
“대답 먼저요.”
“허전해서.”
“언제부터?”
“네가 채워 줬을 때부터.”
“쭉?”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없이 몰아붙이는 질문에 솔직히 말했다. 지금은 플레이였고 무슨 말을 해도 플레이의 일부분이었다. 거짓인지 진실인지 아는 건 안호연 하나뿐이다. 그는 이번엔 비웃지 않았다.
대신 안호연의 성기를 잡고 한 번 더 흡입했을 뿐이다. 그는 소리 없이 안호연의 성기를 정성스레 핥았다. 성기의 앞, 그리고 뒤까지 샅샅이 핥았다. 무언가 성기로 차오르는 게 느껴져 안호연은 발가락에 힘을 주며 참았다. 사실 그의 입 안이 습해 실금하듯 사정했는지도 모르겠으나 안호연은 무작정 참으려고 애썼다. 지금은 눕고 싶었다. 누워서 몸을 잔뜩 오그리고 싶었으나 이런 안호연의 사정을 그가 알 리 없었다.
그는 입 속에서 성기를 빼고 이번엔 회음을 핥았다. 그가 타액으로 중요 부위를 적실 때 안호연 혼자서 뒤를 적셨다. 이상한 액체가 흘러 아래 전부가 끈적거렸다. 눕고 싶어 하는 안호연을 남자는 기어이 일으켜 세우곤 안호연의 페니스를 허벅지 사이에 넣어 압박했다. 그가 안호연의 성기를 허벅지 사이에 가둬 놓고 비빌 때마다 그의 근육이 끊어질 듯 페니스를 잘근잘근 씹었다. 안호연이 신음하며 허리를 움직이려고 하자 그가 안호연의 엉덩이를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온몸이 근질근질해 몸이 점점 무너져 갈 때 그가 손가락으로 안호연의 엉덩이 사이를 만지작거렸다. 이미 뻐끔대는 그곳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하나가 들어왔을 때 손가락이 들어온 줄 몰랐는데 두 개가 밀려들어 오자 그제야 그의 손가락이 들어왔다는 걸 인지했다.
“섹스는, 섹스는 안 한다며.”
“섹스만 안 하죠. 유사 섹스는 해요.”
그가 손가락을 늘려 세 개까지 밀어 넣곤 내벽 속에서 둥글게 돌렸다. 페니스와 엉덩이 사이 모든 게 비벼졌다. 힘없이 쓰러지려는 몸을 그가 밀어 벽에 붙였다. 벽과 남자 사이에 끼어 오도 가도 못하는 안호연은 드라이 오르가슴과 함께 밀려오는 사정감에 미칠 것 같아 허리를 흔들었다.
“며칠 만에 섹스 하는 거예요?”
“이 주. 이 주일.”
이번 달은 히트사이클 기간 외에 태범석이 바빠 따로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었다.
“뒤에 거미줄을 쳤겠네요.”
시큰둥한 소리를 할 때 안호연은 참지 못하고 그의 다리 사이에 사정했다. 꽤 오래 싸지 않아 진한 정액이 벽에 튀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가슴이 미친 듯이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그런데도 뒤에 파고든 손은 멈출 줄 몰랐다. 탈탈 떨리는 몸이 심하게 움직이는데도 그는 더 빠르고 집요하게 움직였다. 뇌가 마비될 정도였다. 살려 달라며 그의 손을 잡아도 소용없었다.
“살려 줄 테니 키스해 봐요.”
그가 속삭였고 안호연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고개를 틀어 미친 듯이 그의 입술을 핥았다. 그가 얄밉게 고개를 틀자 안호연은 살기 위해 그의 입술을 찾아 움직여야 했다. 키스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랐다. 안호연은 자꾸 도망가는 그의 목을 잡았다. 그리고 입술이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구멍에 냅다 혀를 밀어 넣었다. 혀가 섞였다. 달콤해 안호연은 몸을 돌려 그에게 무게를 실었다. 정신없이 키스하다가 그제야 손이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사랑해요.”
그의 손이 빠진 지 오래되었는데, 그 말에 안호연은 또 사정하다 멈추고 말았다. 그 말이 달콤해서. 사정하면서 안호연은 그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췄다. 그러곤 사정의 여운을 잃기도 전에 그가 시계를 올려다보더니 족쇄를 풀었다.
“시간 끝났어요.”
합의했던 시간이 끝났다. 플레이 내내 뜨거운 연인이었던 그는 안호연을 밀어내고 소파에 앉았다. 그의 다리 사이엔 안호연이 뱉어 낸 정액이 튀어 있었다. 그가 손바닥으로 정액을 털어 내곤 안호연을 지나쳐 티브이를 켰다.
“이만 나가요.”
아직 오르가슴에 도달한 몸이 들썩거렸다. 부족했다. 섹스 하고 싶었다.
“더 원해요?”
안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플만 하기만 했잖아요. 다음에 더 하고 싶으면 그 바로 찾아와요. 계약 없인 안 해요.”
그에게 이건 욕망을 풀기 위한 놀이였다. 그걸 깨닫자 머릿속이 개운하게 트였다. 불안했던 속에서 확신이 섰다. 이 만남으로 그가 상처받지도 않고 감정도 생기지 않을 거란 확신이. 그리고 이 만남을 더 이어 가도 괜찮을 거란 확신이 말이다.
분명 감정 조절을 못 하는 쪽은 안호연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플레이를 통해서 아쉬웠던, 제대로 쏟아 내지 못했던 감정의 조각을 모조리 쏟아 내고 싶었다. 어차피 플레이 중엔 어떤 말을 해도 진실 여부를 알 수 없으니까. 지금부터 감정을 잘 조절하면 됐다.
“알았어. 다음에 해.”
“데려다주진 못해요. 술을 마셔서.”
“괜찮아.”
안호연은 옷을 챙겨 입었다. 바깥에 나가 택시를 탈 때까지 달아오른 몸의 열기가 식지 않았다. 집으로 향한 안호연은 여전히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침대에 비볐다. 달아오른 몸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단단하게 뭉쳐 이제는 통증까지 오는 배를 손바닥으로 비벼 풀어냈다.
* * *
아침부터 아랫배가 뭉근했다. 어제 모두 풀지 못한 욕구가 쌓여 안호연의 기분은 저기압이었다. 페니스에 링이라도 끼운다면 조금 참아 낼 수 있을 텐데, 링은 강중영 집에 있었다. 그에게 돌려 달라고 말하거나 새로 하나를 구입해야 했다.
시리얼에 대충 우유를 부은 안호연은 여전히 몸에 남은 따끈한 열기가 떠나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 찬 공기를 유입시키고 있던 안호연에게로 문자가 날아들었다. 문자가 온 소리에 안호연은 느릿하게 휴대 전화를 집어 확인했다. 시의 한 구절을 캡처 해 보내며 친구가 되고 싶다고 민영훈이 문자를 보냈다. 이런 사람을 볼 때면 그 친절과 호의는 동정해서 나오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또 문자 하나가 날아들자 대충 휴대 전화를 던졌다가 다시 휴대 전화를 잡아 민영훈의 번호를 차단했다. 이런 관심은 고맙지 않았다.
짧은 한숨과 함께 대충 다 못 먹은 시리얼을 먹었다. 먹으면서도 그는 분주했다. 먹다가 중간에 일어나 TV를 켰다가 밥을 먹다 중간에 침실로 가 이불을 개는 둥 그는 오늘따라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맹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일이 자꾸 맴돌았다. 엉덩이 사이를 파고들었던 손가락의 느낌은 쉬이 떠나지 않고 현실을 망쳤다. 눈에 띄게 정신없어 보이지만, 묘하게 안호연에게서 생기가 돌았다. 쇼핑에 관심도 없던 그가 오랜만에 백화점에서 바지런히 돌아다녔다. 유행에 조금 뒤떨어지는 옷이나 속옷이 마음에 걸렸다. 예전에 그가 좋아하던 스타일의 옷을 샀고 새로운 속옷도 샀다. 줄줄이 태범석 카드로 긁으며 백화점을 돌아다니다 1층 로비 벤치에 앉았다. 그때 마침 전화가 날아들었다.
[웬 쇼핑이야?]
“기분 전환 하려고.”
[오늘 집에 갈까?]
안호연은 침을 삼켰다. 화를 낼 줄 알았던 그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결혼 준비해야지.”
[요즘 신경 못 썼잖아.]
태범석은 아침부터 백화점에서 쇼핑하고 다니는 게 그에게 보여 주려고 한 행동으로 오해했다. 안호연은 초조해 다리를 흔들었다. 오늘 밤에 그 바에 갈 생각이었다. 강중영을 만나서 계약서를 쓰고 다리가 녹아내리는 플레이를 하고 싶었다.
“너 바쁘잖아. 오늘 대여 서비스 이용할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지금껏 한 번도 이용 안 하다가? 우리 호연이 심통 난 게 맞네.]
“젊고 파릇하고 너보다 더 잘생긴 놈으로 고를 거니까 방해하지 마.”
[호연아, 알파보단 베타로.]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야 있지. 다른 새끼 앤지 내 앤지 구별되지 않으면 번거롭잖아. 거세했다는 알파여도 믿을 수가 없어. 날 봐. 영구 피임하고도 개통됐잖아.]
“…….”
[아무튼 여기 대구니까 새벽쯤에 도착할 거야.]
태범석은 굉장히 합리적이고 공평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섹스를 즐기는 편이라 안호연의 섹스에 대해서 침묵했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떨 때는 다솜을 핑계로, 어떨 때는 자신이 오메가라는 핑계로 자신을 옆에 두었다.
안호연은 쇼핑백을 챙겨 집으로 돌아갔다. 그것들을 옷장에 몰아넣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 틈을 활보하고 다녀도 여전히 몸의 열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색색 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불운했고 이기적이다. 얼마나 이기적이냐면 이런 마음인데도 강중영을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어차피 놀이였고 놀이가 끝나면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회성인 관계였다.
그에게 플레이를 제안하고 싶었다. 낯간지럽고 뜨거운 플레이가 머릿속에 휙휙 지나갔다. 역시 제일 해 보고 싶은 건 그의 옆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는 일상적인 생활이었다. 안호연은 시계를 보았다. 태범석이 새벽쯤 온다고 했으니 11시 안에 돌아오면 됐다. 그런데 문제라면 보통 바는 7시 이후에 열린다는 점이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는 시간은 9시였다.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안호연은 3년 전 남자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갔다. 따르릉 소리를 내며 간 신호가 끊겼다.
[강중영입니다.]
안호연은 속으로 환호했다.
“나, 나야.”
[나가 누군데요?]
“안호연이라고.”
[아.]
그는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잠시만요. 주변 사람에게 동의를 구하는 듯하더니, 조용한 곳으로 옮겨 가는 듯했다. 그가 통화하기 좋은 곳으로 갈 동안 안호연은 기다렸다.
[왜 전화했어요?]
“플을 하고 싶어서 전화했어.”
[그랬나요? 근데 미안하게도 일플 할 생각은 없어요.]
“왜?”
[길들이는 게 목적인데 하루하루 연명할 수 없잖아요. 하우스슬레이브나 슬레이브를 구해요.]
“슬레이브?”
정말 사랑과는 전혀 상관없는 단어였다.
[일상까지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요.]
안호연이 눈을 깜박였다.
“그게 뭔데?”
[일상생활에서도 플을 하는 거예요. 제가 그쪽 일상까지도 주무를 수 있는 관계요. 근데 안호연 씨는 그게 안 되잖아. 남편 눈치 봐야 하잖아. 애까지 있고. 뭐, 그런데도 괜찮다면 안호연씨 의지를 높게 사죠. 그 상황에서도 날 선택하고 따른다는 건 마스터로서 기쁜 일이니까.]
“나는…….”
안호연은 침을 삼켰다. 그는 안호연이 결혼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딱히 그걸 바로잡지 않았다. 자신의 상황을 일부러 노출 시킬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일상까지 침해한다는 그의 말이 더 유혹적으로 들렸다. 그러면 더 오래 있을 수 있으니까.
[아직 처음이라 선택 못 하겠죠. 나중에 그럴 마음이 되면 전화해요. 지금 일하는 중이니까.]
“나는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저쪽에서 짧게 웃었다.
[그럼 시기는요?]
안호연은 잠시 뜸을 들였다.
“임신할 때까지.”
보통 이 말은 상대방이 매우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도 이 말을 꺼내 본 건 마지막 문을 건너기 전에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에게 안호연이 어떤 상황인지 인지시키고 철저하게 플레이 파트너로만 대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플레이 파트너로만 생각한다면 이 말은 전혀 기분 나쁜 게 아니었다.
[하긴, 그래야겠네요. 임신하면 태교를 위해서 아무래도 플레이는 어렵죠. 그래도 현명하게 파트너를 골랐네요. 전 파트너하고 섹스는 안 하니까. 적어도 임신하면 누구 아이인지 헷갈릴 일은 없어요.]
“응, 네가 제격이야.”
[제격이라 다행이네요. 좋아요. 계약서 쓰러 제 집으로 와요. 1분도 늦지 말아요. 늦는 건 질색이니까.]
정말 제격이다.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처음으로 자신을 길들였던 남자였고, 성향을 알아본 남자였다. 심지어 그는 제게 마음이 없었고 과거의 상처로 자신에게 어떤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만약 그가 이런 플레이를 즐기지 않았다면, 먼저 파트너를 하자고 권유하지 않았으면 아마 다가가지도 못하고 몰래 좋아했을 테다. 안호연에게 이 상황은 행운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 물어보고 싶은데, 안호연 씨는 저에게 마음 같은 거 없죠?]
“응.”
[다행이네요. 가끔 이런 플레이를 하다 보면 플레이 외에도 저에게 의존하는 사람이 많이 생기거든요. 놀이는 놀이일 뿐인데.]
“걱정하지 마.”
[5시까지 잊지 말고 오세요.]
달칵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안호연은 그의 목소리가 머물렀던 전화기를 꼭 안고 숨을 내쉬었다. 플레이가 끝나도 이 열병을 앓는 것 같은 뜨거운 마음은 식지 않을 테다.
1분도 늦지 말라던 남자는 정말 칼같이 5시에 도착했다.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호연은 그의 차가 멈추자 그에게로 갔다. 강중영은 옆에 타라고 손짓했다. 안호연이 조수석에 올라타자 그가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때와 똑같아요. 이름 쓰고 서명하면 돼요. 안전어는 그때와 똑같이 하고요. 아, 넣고 싶은 조항이 있으면 써도 돼요.”
안호연은 계약서를 허벅지에 올려놓고 빈칸을 작성하는 도중 자꾸 9조항이 눈에 들어왔다.
[스킨십, 더 나아가 섹스를 할 수도 있다.]
분명 섹스를 안 한다고 하지 않았나. 안호연은 강중영을 물끄러미 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저 표준 계약서일 뿐일 테다.
“너는? 넣고 싶은 거 없어?”
“하나 있긴 해요. 일상생활을 즐기다가도 제가 ‘호연아.’라고 부르면 그 순간 슬레이브가 되는 겁니다. 언제 어디에 있든. 또 일주일에 1번은 안호연 씨가 원하는 플레이를 할 수가 있어요.”
“불가능할 땐 안전어를 말할게.”
안호연은 20개의 조항 아래에 새로 하나를 추가했다.
“안호연 씨는 추가하고 싶은 게 없나요?”
“플레이가 종료되면 플레이 때 있었던 일들을 모조리 잊는다. 말 그대로 플레이는 플레이잖아.”
“좋아요, 어려운 것도 아니고 깔끔해서 좋네요. 질척일 일도 없네요.”
안호연은 22항을 적었다. 삐뚤빼뚤 못생긴 글씨로 적어 넣었다.
[22항 플레이가 끝나면 플레이에서 했던 말, 약속, 모든 걸 잊는다.]
잊는다. 그 말을 쓰는 순간까지도 안호연은 거짓말을 했다. 안호연은 느릿하게 손을 움직여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아마 이 플레이가 끝나면 안호연은 이 순간을 잊지 못할 테다.
그래도 안호연에게 손해는 아니었다. 그 기간까지 뜨겁게 사랑하고 뜨겁게 즐기다가 식을 생각이었다.
계약서를 두 장 작성하고 둘이 한 장씩 나눠 가졌다. 차에서 내려 정원을 밟는 순간부터 안호연은 안정이 느껴졌다. 이제야 집에 돌아온 느낌이다. 잠을 설쳐 생긴 피곤이 녹아내렸다. 입술을 벌리고 긴 하품을 했다. 잠이 눈가에 스몄다. 얼마 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집의 구조가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3년 전과 마찬가지로 집의 구조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잔디가 잘 깎인 정원이나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창도 그렇다. 심지어 그 큰 창을 가리던 블라인드도 그대로였다. 유독 손잡이만 반들거리는 현관문을 잡아당겼다. 그가 먼저 구두를 벗고 들어서서 족쇄를 집어 들었다. 집 전체에 남자의 체향이 가득했다.
“졸려요?”
그가 물었고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안호연의 발목에 가죽으로 된 족쇄를 채우고 안으로 끌어들였다. 어제처럼 가랑이 사이에 줄을 끼고 오라는 말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안호연은 느긋하게 옷을 벗었다.
“속옷도 새로 샀어요?”
그가 안호연의 드로어즈를 잡고 물었다. 특히 ‘속옷도’라는 말이 걸렸다. 마치 새 옷을 샀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아니거든?”
“새 냄새 나는데.”
그가 쪼그려 앉아 안호연의 드로어즈에 코를 박았다. 고환 사이에 코가 파고들자 뒤로 물러났다. 귀 끝과 양 볼이 뜨겁게 익어 가고 있었다.
“옷이 유난히 새거 같아서 설마 했는데 속옷도 새로 샀네요. 나한테 잘 보이고 싶었어요?”
“아니라니까!”
“아니면 말고요.”
그가 작게 비웃으며 일어났다. 옷을 전부 벗자 그는 빙긋 웃으며 방으로 끌고 갔다. 그러곤 대뜸 안호연을 침대에 눕혔다. 대뜸 침대에 자신을 눕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죠.”
“플레이는?”
“파트너 상태가 이래선 플레이가 불가능해요.”
그는 연신 하품을 하던 안호연의 상태를 금방 알아봤다. 두꺼운 이불을 가슴까지 덮어 준 그가 창가로 가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래도 수면 등 때문에 사물이 분간되었다. 강중영은 옷을 벗더니 이불 안으로 들어왔다. 맨몸에 그의 피부가 닿았다. 예전에 해 준 것처럼 그가 목 뒤로 팔을 넣었다.
“자요.”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는 안호연의 눈을 손으로 덮었다. 그러자 모든 빛이 차단되었다.
* * *
오랜만에 꿈도 꾸지 않고 자 몸이 개운했다. 눈을 게슴츠레 떴을 때 자기 전과 같은 풍경이 보였다. 어두운 방에 수면 등만 켜져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옆자리를 봤다. 옆에 누워 자던 남자가 없었다. 밖에서 달칵거리는 소리가 났다. 강중영은 밖에 있는 듯했다. 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그는 늘 일찍 일어나 자신을 위해 밥을 지었다.
멍하니 그 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던 안호연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체감상 시간이 많이 흐른 느낌이었다. 안호연은 상황 파악이 안 돼 눈을 끔뻑거렸다가 파닥거리며 침대에서 뛰어나갔다. 새벽에 온다던 태범석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에게 아무런 의심도 사고 싶지 않았다. 안호연은 바깥으로 뛰어나가 시간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10시였다.
“새벽 1시쯤 도착한대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부엌에 있던 남자가 셔츠 하나만 입고 국을 뜨고 있었다. 섹시했다. 하얀 셔츠 아래로 나온 탄탄한 허벅지가 눈에 들어오자 목 뒤로 침이 넘어갔다.
“오해할까 미리 말하는데 보고 싶어서 본 거 아니에요. 우연히 테이블 정리하다 봤어요. 화면에 메시지 내용이 그대로 뜨더라고요.”
안호연은 그제야 까만 화면의 휴대 전화를 들어 올렸다. 홈 키를 누르자 태범석에게서 도착한 메시지가 그대로 노출되었다. 숨길 메시지가 없어 알림으로 메시지가 뜰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좀 늦을 거 같아. 1시쯤 도착할 거야. 그때 너도 일 끝내고 들어와 있어. 자고 가는 건 오랜만이잖아.]
안호연은 안도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지금 나가야 할 줄 알았는데,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같이 안 사나 봐요.”
“신경 쓰지 마.”
“신경 쓰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물었어요. 와서 밥 먹죠.”
“나중에 먹을래.”
“호연아, 너 족쇄 찼다는 거 자꾸 잊는 거 같아.”
그가 기분 나쁜 심기를 드러내며 웃었다. 입술이 벌어지면서 드러난 고른 치아를 보며 안호연은 침을 삼켰다. 잠시 이곳에선 안호연이 아니라 플레이 파트너라는 걸 망각했다. 또 남자가 ‘호연아.’라고 부르면 안호연은 당연히 그의 앞에서 노예가 되어야 했다. 오직 강중영만 생각하고 강중영만 따르는 충실한 개.
“내가 아무리 다정하게 굴어도 그렇지, 왜 계속 망각해?”
“미안.”
안호연은 손을 모았다. 여전히 그가 자신을 시험할 수 있다는 위치에 있다는 걸 잊었다. 감정적인 약자는 안호연이었다. 여기서 그가 계약을 파기하자고 하면 자신은 끝이었다. 살살 그의 눈치를 보며 의자에 앉았다.
“밥 먹어요.”
“어떤 플레이를 할 건데?”
“오늘은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대화나 하죠. 우린 서로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이 많아요. 내일 할 플레이나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요.”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어 안호연은 그를 보았다. 여전히 배 속이 뭉근해 얼른 이 불이 꺼졌으면 했다.
“저한테 궁금한 거 없어요?”
강중영에 대해서 궁금한 건 하나였다. 안호연은 슬쩍 그의 손가락을 보았다. 강중영의 왼손 4번째 손가락에서 은색 반지가 반짝거렸다. 남자가 저런 예물용 반지를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낀다는 건 결혼할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와 똑같은 반지를 낀 사람은 얼마나 예쁜 사람일지 떠올렸다.
“애인 있어?”
“뭐.”
그는 대충 대답을 얼버무리며 안호연 옆에 앉았다. 밥 먹을 사람은 두 사람인데 그는 밥을 딱 한 공기만 퍼 왔다. 앞에 놓인 수저도 한 벌이었다. 혼자 먹으려는 속셈인 건가 싶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호연은 배가 고파 손가락을 위 부근에 댔다.
“각인은?”
“각인했어요. 그 사람을 포기하는 게 무서워서요.”
안호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반지의 주인은 그 각인한 사람인 듯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영역을 누군가가 해 준 거 같아 다행이었다. 그래서 강중영이 안호연에게 미련을 가지지 않았던 이유도 자연스레 설명되었다. 그는 시간이 지나 무뎌진 게 아니라 어딘가에 안착해 안정을 얻은 것이다.
“그 사람이 있는데 왜 이런 거 해?”
이런 거가 뭐냐는 듯 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디에스.”
“안호연 씨와 같은 이유겠죠. 안호연 씨도 각인한 상대가 있어도 욕망을 풀기 위해 파트너를 구했잖아요. 이런 성향이 맞지 않은 사람에게 이러한 내 성향을 강요하는 건 고문이나 마찬가지죠.”
“그 사람은 네가 이러는 거 알아?”
“알고 있어요.”
“굉장히 열린 사람이네.”
“알고도 뭐라 할 수 없거든요. 겁이 많아요. 내가 도망갈까 말을 아끼는 건지도 모르죠.”
“어떤 사람인데?”
“여리기도 하고 욕심도 많고 이기적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절 많이 사랑해요. 새침데기라 가끔 제게 관심 없는 척해도 다 티 나기 마련이죠. 그래도 예쁘니까 봐주고 있어요. 무척 작고 깨지기 쉬운 사람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을 말할 때마다 강중영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따스한 그 미소를 안호연은 멍하니 바라봤다.
“예뻐?”
“네, 무척.”
“다행이다. 나보다 별로면 조금 자존심 상할 뻔했어. 근데 각인한다는 건 어떤 느낌이야?”
“내가 해야 할 일을 똑바로 알게 되죠. 호연 씨는 그 사람과 어때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안호연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태범석과는 무덤덤했다. 의례적으로 그와 잠자리를 갖고 그도 의례적으로 자신을 챙겼다. 특별하지도 않았다.
“좋아.”
입술에서 말이 떨어져 나오자 그가 “그래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각인까지 했는데 왜 결혼 안 해?”
“저야 하고 싶은데 그쪽이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나중에 진지하게 말해 봐야죠.”
그가 숟가락으로 밥을 떠 국에 담갔다. 된장을 풀어 만든 시래깃국이었다. 그러곤 호 바람을 불어 식혀 안호연의 입술 앞에 가져다 댔다.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다.”
다행이라고 또 다행이라고 속으로 되뇌며 입술을 열었다. 따듯한 밥이 입 속으로 들어왔다. 그걸 무의식적으로 꼭꼭 씹어 삼켰다. 그가 끓인 국은 언제나 맛있었다.
“왜 호연 씨가 행복해 보이지 않을까요?”
작은 목소리였다. 살짝 고개를 들어 올리면 시선이 맞닿을 곳에서 남자가 물었다. 그의 눈과 마주하기 무서웠다.
“왜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요? 호연 씨 입은 행복하고 좋다고 말하는데.”
그가 물을 때 펄떡대며 뛰던 심장이 죽었다. 그 물음에 어떠한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그와 눈을 마주했다. 표정 없는 그의 눈에서 감정을 읽어 내기 힘들었다.
“원래 오래 알다 보면 무뎌지잖아. 태범석하곤 오래 알았던 사이라서 특별한 날이 없어. 사이는 더할 나위 없이 좋고 관계도 소홀하지 않아.”
“전 오래 지나도 매일 특별한 날로 만들어 주고 싶어요. 그 사람이 만약 당신처럼 죽은 표정으로 있다면 광대라도 될 거예요.”
“모든 사람이 다 너 같지 않아. 나처럼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아.”
“불행하겠네요.”
“아니, 이게 더 좋아.”
“그럼 저를 찾아올 때마다 특별한 날로 만들어 줄게요. 내가 특별한 사람이니까.”
“그럼 광대를 자처하는 사람이잖아.”
“아뇨, 당신 주인이죠.”
그는 꿋꿋이 안호연의 입에 밥과 함께 반찬을 넣어 주었다. 꼭꼭 씹어 먹었다. 주인이라는 말이 달콤하게 귀에 박혔다가 떨어졌다. 은근한 소유욕 같기도 한 그 달콤한 단어를 안호연은 조용히 음미했다.
“나 탐나요?”
“이미 각인한 상대가 있는 알파잖아. 별로.”
“각인이 풀리는 방법이 있잖아요. 혹시 알아요, 몇 번째 치아라고 알려 줄지?”
안호연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각인은 불법이고 각인하는 알파나 오메가들이 많이 없기 때문에 그런 정보가 부족했다.
“알파가 혼자 각인했을 때 목덜미에 처음 닿았던 그 치아를 뽑으면 되잖아요. 하긴,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죠. 각인이 거의 사라졌으니까. 발정기 동안 한 사람만 찾아다닌다는 게 웃기잖아요.”
“정말?”
“낭설이긴 해도 영 아니진 않나요. 불법으로 오메가를 억지로 각인시킨 알파들이 치과에 끌려가는 거 보면 낭설이 아닌지도 모르죠. 그리고 각인하니 알겠더라고요. 모를 리가 없죠. 오메가의 목덜미를 문 치아는 다른 치아와 달리 좀 더 예민하거든요.”
그가 싱긋 웃으며 안호연의 입가에 묻은 고춧가루를 닦아 주었다.
“확실하지도 않잖아.”
“그렇긴 하죠. 근데 그런 희망도 없다면 삶이 재미없잖아요.”
그는 마지막 밥까지 다 떠먹이곤 직접 끓인 보리차를 따라 입가에 댔다. 안호연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으나 눈을 꼭 감았다.
“플레이는 플레이야. 사적인 이야기는 그만해.”
안호연이 정색하자 그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전 플레이 중인데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는 건 그쪽 같은데요. 전 그런 변수가 있다 해도 지금 각인한 사람과 각인을 풀 생각이 없거든요. 그런데 이 집에 당신이 들어온 순간부터 플이 시작됐어요. 플레이 중엔 당신을 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게 내 역할이라 역할을 해내고 있는데 안호연 씨는 그렇지 않나 보네요. 플레이 중에 한 말에 흔들리지 말고 똑바로 중심을 잡아요. 사사로운 감정이 생겨 흔들리면 그땐 아웃이니까. 알았지, 호연아? 내일은 네가 하고 싶은 플을 짜 와. 그걸 할 테니까.”
그는 흘러내린 안호연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곤 짧게 키스했다.
“늦겠다, 벌써 11시야.”
그가 안호연을 일으켜 세우더니 이마에 키스했다.
“내일 올 수 있으면 연락해요.”
그는 안호연의 발에서 족쇄를 풀어 주었다. 플레이가 끝났다. 그가 말없이 식탁을 정리하자 안호연은 잘 개어진 옷을 챙겨 입었다. 손목시계까지 차며 그를 흘긋 보았다. 남자는 이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갈게.”
현관에 서서 손을 흔들자 그가 잠시 안호연을 응시했다가 등을 돌렸다. 집까지 가는 길 내내 그가 남긴 여운을 맛보았다. 마지막까지 밖에서 남자의 페로몬을 느낀 안호연이 버스에서 내렸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안호연은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욕실로 향한 안호연은 강중영의 페로몬을 씻어 내고 소파에 앉아 TV를 시청했다. 화면에 어린 형상을 눈이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달칵 현관에서 소리가 나자 안호연은 소파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추켜세웠다.
“일찍 왔네.”
12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 그가 오겠다던 시간은 1시였다.
“보고 싶어서 속도 좀 냈어.”
“그러다 사고 나.”
“사실 내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잖아.”
그는 피곤한 얼굴로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안호연 뒤에서 목을 끌어안고 키스했다. 조금 굶주린 듯 빠르게 입술을 흡입하며 태범석은 익숙하게 잠옷 바지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안호연은 잠옷을 벗기는 손을 피하지 않고 다리를 벌렸다.
이틀 내내 참았던 뭉근한 열기에 지치기도 했고, 눈을 감고 그를 강중영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흥분됐다. 안호연은 그를 소파로 끌어들여 눕히고 그의 바지를 내려 페니스를 꺼내 오랄을 해 주었다.
정성스럽게 그의 성기를 침으로 적시고 태범석 위로 올라탔다. 살이 부딪칠 때마다 눈가를 찡그리던 태범석은 자세가 불편했는지 안호연을 밀어냈다. 밀려 자세가 흐트러진 안호연을 일으켜 세워 소파 등받이를 잡고 무릎을 꿇게 하는 자세를 취하게 하곤 한번 침범했던 곳으로 성기를 밀어 넣어 섹스 했다. 무자비하게 침범하는 그에게 안호연은 묻고 싶었다.
자신의 목덜미를 깨물었을 때 처음 닿았던 이가 뭐냐고.
* * *
태범석은 다음 날까지 안호연을 놓지 않았다. 그는 종일 안호연을 물고 빨았다. 거실에서 두 번, 안방에서 두 번, 화장실에 끌려가서 또 섹스 했다. 홀린 듯 잠을 자는 안호연을 깨워 섹스를 두 번 더 했다. 안호연이 드물게 잠자리에서 적극적으로 굴었던 게 도화선이었다. 한참 안호연을 짓눌렀던 남자가 사라지자 멀리서 물소리가 들렸다. 안호연이 무거운 눈을 떴을 때 침대에 턱을 두고 누운 태범석이 안호연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왜 어젯밤에 적극적이었어?”
며칠간 몸이 달아올라 있었고 그걸 풀어 줄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강중영은 섹스를 안 한다고 했으니까. 잠깐 눈을 감으면 체형이 비슷해 그를 강중영이라고 착각할 수 있었다. 그를 강중영 삼아 섹스 했다는 걸 안다면 뭐라 말할까, 안호연은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다. 그가 조금 가엾다고 느낄 만도 한데 안호연은 그런 감정도 없었고 죄책감도 없었다. 지금까지 그가 안호연을 이용한 걸 생각하면 인과응보였다.
“좀 흥분해서.”
“왜, 내가 결혼해서 화났어?
“그랬나 봐.”
귀찮다는 얼굴로 안호연은 대충 대답했다.
“나 원망해?”
그가 묻자 안호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원망의 무게를 누구에게도 나눠 줄 수가 없었다. 촘촘하게 안호연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결과였다. 태범석은 부수적인 문제일 뿐이다. 그는 대답이 없는 안호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불안해하지 마. 다 네 거야. 너에게 다시 돌아갈게.”
“돌아오지 않아도 돼. 그 사람하고 살아.”
“삐치기도 하고 귀엽네, 안호연. 그럼 내가 안 놓고 있으면 되지?”
그가 안호연의 손가락을 끌어다 키스했다. 그래. 안호연이 도망가지 않고 순응한 건 여러 이유였다.
“좀 더 누워 있어. 급한 일 있으면 전화하고.”
“언제 올 거야?”
“내일은 못 와. 그래도 공평하게 그 여자 집에 가야지. 결혼 전에 거대하게 파티를 열고 싶은가 봐. 적어도 이틀간 그 파티에 참석해야 해.”
그는 머리칼이 흐트러진 안호연의 이마에 키스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점 발소리가 멀어졌다. 타일에 구두가 쓸리는 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가 완전히 나간 걸 인지한 안호연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없이 약을 모아 놓은 바구니를 뒤져 입 속에 사후피임약을 집어넣었다.
조금 더 오래 강중영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게 이기심이어도 괜찮았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화장실로 들어간 안호연은 욕조에 앉았다. 오늘따라 강중영이 보고 싶었다. 오늘 플을 짜서 오라고 했는데 그가 내 준 숙제도 하지 못했고 이미 밤이었다. 더구나 이 꼴로는 갈 수가 없다. 온몸에 도장을 찍듯 태범석이 흔적을 남겨 놨다.
한참 욕조에 몸을 담근 안호연은 밖으로 나갔다. 모르는 번호로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스팸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려던 안호연이 갑자기 멈췄다. 강중영의 번호였다. 심호흡하고 부재중 전화번호를 눌러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전화했어?”
[오늘 만남 여부 정도는 말해 줘야 기다리지 않죠.]
“기다렸어?”
소파에 앉아 두 다리를 가슴 가까이 끌어당겼다. 무릎에 뺨을 댄 채로 벽을 응시했다.
[네, 기다렸어요. 어떤 플을 준비했을지 기대도 했고요. 솔직히 이틀 내내 플을 쉬어서 굶주렸어요.]
“미안. 사정이 있었어.”
[사정이요? 무슨 사정?]
“몰라도 돼.”
[호연아, 똑바로 말해. 무슨 사정?]
안호연은 침을 삼켰다. 그가 그렇게 말하면 모든 걸 실토해야 했다.
[지금까지 뭐 했는데? 밤 아홉 시가 되도록 연락을 못 한 이유가 뭔데?]
“태범석과 함께 있었어.”
[같이 뭘 했는데? 섹스? 지금까지?]
남자의 목소리가 낮았다. 엄청 낮아서 화가 났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안호연은 침을 삼켰다.
“응.”
[그가 몇 번 사정했는데요?]
안호연은 머릿속으로 그의 사정 횟수를 세었다. 세다가 중간에 까먹어 다시 세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도 남자는 차분히 기다렸다.
“일곱 번.”
[넌?]
“모르겠어.”
[많이 흥분했었어?]
누구도 훔쳐보지 않았으면 하는 정사를 누군가에게 까발리고 싶지 않았다. 특히 강중영에겐. 마티니를 외칠까 고민하던 안호연은 입술을 다물었다.
[섹스 하면서 단 한 번이라도 내 생각 했어요?]
섹스 하는 내내 강중영만 떠올렸다. 태범석에게서 희미하게 강중영의 냄새가 나 눈을 감고 있으면 그 같았다.
[했어?]
“했어.”
[얼마나?]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안호연이 속삭이자 수화기 너머에서 잘했다는 칭찬이 흘러나왔다.
[그걸로 기분 나쁘지 않으니까 자주 둘 관계를 이야기해 줘요. 그 남자가 수없이 당신 몸을 드나들어도 내가 그쪽 주인님이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아래로 내려와요.]
“아래?”
[네, 아래요.]
안호연은 고개를 내리자 발만이 보였다.
“웬 아래?”
안호연이 다시 묻자 그가 웃었다.
[아무래도 가까운 곳에 지낼 곳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마침 호연 씨 옆 빌라에 빈집이 있더라고요.]
“네가 우리 집을 어떻게 아는데?”
[계약서에 그쪽이 주소 적었잖아요. 얼른 내려오기나 해요.]
안호연은 빈칸을 채우기 위해 주소를 썼던 걸 떠올렸다. 그가 그걸 이런 식으로 남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근방 빌라는 건물이 지어진 지 꽤 돼 방음이 잘되지 않았다. 층간 소음도 심했다. 이런 곳에 예민한 그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거 엄연한 개인 정보 침해야.”
[미안한데 계약서에는 그런 조항이 없는데요.]
“없어도 법전엔 있잖아.”
[그럼 고소해요.]
안호연은 어금니를 꽉 깨물곤 맨몸에 옷을 주워 입었다. 잠옷 위에 얇은 점퍼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솔직히 내가 와서 좋지 않아요?]
“뭐가 좋아. 장난해?”
[싫으면 다시 갈까요?]
그가 날린 말에 안호연은 멈춰 섰다.
“버리려고?”
[말은 똑바로 해야죠. 가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 호연 씨, 저 다시 갈까요?]
“싫어!”
그가 안호연의 개인 정보를 이용해 이곳에 집을 산 것보다 그가 다시 가는 게 더 싫었다. 그럼 빨리 나와요, 수화기 속 남자가 속삭이자 안호연은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마음이 급해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 내려간 안호연은 옆 건물 입구에서 서 있는 거대한 그림자를 보았다.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 거예요? 오는 것도 싫다, 가는 것도 싫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네요.]
“가지 마.”
[그럼 가지 못하게 와서 안아 줘요.]
그가 휴대 전화를 잡지 않은 한쪽 팔을 벌렸다. 어서 안아 달라는 듯이 그가 팔을 흔들었다. 차가운 밤공기를 헤집고 정신없이 달려간 안호연이 그를 꼭 안았다. 두 팔로 끊임없이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이고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좋다, 정말 좋았다. 강중영이 정말 좋았다.
“집으로 들어가요.”
그가 안호연의 어깨에 팔을 올리곤 안으로 이끌었다.
“안이 좀 엉망이에요. 물건도 다 도착하지 않았어요.”
안호연을 슥 훑어본 남자가 문을 활짝 열었다. 새 가구와 새 전자제품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안이 엉망이라는 말과 달리 침대에 새 이불이 깔려 있었다.
“이제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우리 집?”
“우선은요. 플을 일 분이라도 더 하려면 가까운 곳에 있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까 호연 씨가 버릇없어지는 것도 같아서 가까이에서 하나하나 가르쳐 주려고요.”
그는 집으로 들어서더니 현관에 안호연을 세워 놓곤 갑자기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갑자기 안호연의 고무줄 바지를 끌어 내리곤 드로어즈를 뒤집었다. 페니스가 밖으로 퉁겨져 나왔다.
“뭐, 뭐 하는 거야?”
화들짝 놀란 안호연이 다시 바지를 입으려 하자 그가 손을 밀어냈다. 그러곤 안호연의 성기를 꺼내 손으로 주물럭거리며, 다른 손으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금속성의 둥그런 링이었다. 그걸 반지를 끼우듯 느리게 꽂았다. 살덩이가 반지에 들어가는 느낌이 좋았다. 허전했던 곳을 꽉 채우는 느낌. 마치 청혼하는 사람처럼 안호연의 페니스에 키스했다. 빨아들이듯 살을 한입 베어 문 남자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호연 씨, 이제 아무한테나 싸지 마세요.”
“그럼 누구 앞에서 싸?”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호연 씨가 알아야지. 누구 앞에서 싸야 할까요?”
“너, 내 주인님.”
만족스러운 대답이라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자로 뻗어 있던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안호연의 마른 허리를 안았다. 그가 잠깐 콧등을 찌푸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안호연의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 강중영은 안호연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버석하게 죽어 올라온 입술의 각질이 그의 손가락 아래에서 뭉개졌다. 강중영은 마른 안호연의 손목을 만졌다. 말라 살이 밀리지 않고 엄지에 매끄럽게 쓸리는 손등을 쳐다보았다. 살살 엄지로 살을 쓸어 보곤 고개를 들었다.
“많이 말랐어요. 그땐 통통했는데.”
그러게. 대답을 대충 얼버무린 안호연은 그를 피했다. 그는 어디론가 피하려는 안호연을 안으로 끌어당겨 의자에 앉혔다. 그는 막 연기가 나는 죽을 떠 안호연의 그릇에 담았다. 마치 자신이 올 줄 알았다는 듯이 죽까지 준비해 놓은 그의 철저함에 놀랐다. 언제 올 줄 알고.
“언제 올지 몰라서 계속 끓이고 있었어요.”
이 앞에서 계속 서성였을 남자를 생각하니 가슴이 짠했다.
“전복죽이에요.”
그가 내놓은 죽은 더할 나위 없이 입에 딱 맞았다. 내내 굶었던 안호연은 허겁지겁 죽을 먹어 치웠다. 한 그릇을 비우고 두 그릇을 비울 때까지 남자는 시선을 피해 주었다. 죽을 모조리 먹자 그는 새 칫솔의 포장을 뜯어 쥐여 주곤 화장실로 이끌었다. 세면대엔 또 다른 칫솔이 걸려 있었다. 물기가 묻어 있지 않은 걸로 보아 사용 전인 듯했다. 안호연은 칫솔에 물을 묻히고 남자에게 내밀었다. 그가 새 치약을 터 안호연의 칫솔에 짜 주었다. 하얀 치약이 묻은 칫솔을 입 속에 밀어 넣었다.
“사가처러 서 이찌 마.”
사감처럼 서 있지 말라고 안호연이 말했다. 양치질하는 것까지 지키고 서 있는 남자가 거슬렸다. 무엇보다 말하면서 거울에 하얀 거품이 튀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팔짱을 낀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거울을 통해 그를 노려보자 그가 작게 웃었다. 웃음으로 인해 긴장이 풀렸다. 안호연은 양치질을 마치고 헹군 칫솔을 빈 칫솔걸이에 걸 때까지 강중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란히 걸린 두 개의 칫솔을 보자 가슴이 간질거렸다.
“숙제는 해 왔어요?”
그가 숙제를 잡고 늘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양심이 있다면 적어도 하루는 봐줘야 하지 않나. 안호연은 시계를 보며 침을 삼켰다.
“오늘까지라며.”
“오늘까지죠. 정확히 2시간 10분 남았네요. 무슨 플이 하고 싶은지 차근차근 써 볼래요?”
남자가 안주머니에서 펜과 수첩을 건넸다. 이런 것들을 갖고 다니는 그가 신기했다. 테이블 앞에 앉았다.
“나 이런 거 처음이라 몰라.”
플이라는 것도 뭐부터 짜야 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저 같은 경우는 솔직히 플레이라고 해도 가볍게 합니다. 섹스도 때리는 가학 행위를 즐기지 않거든요. 그 안에서 하고 싶은 플레이는 무엇이라도 좋아요. 어려우면 서로 그때 입을 옷, 장소, 도구를 생각해 봐요.”
입을 옷이라. 안호연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했다. 밖은 밤치고 추웠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그가 따듯한 옷을 입길 바랐다. 안호연은 그가 즐겨 입는 슈트를 썼다. 꼭 재킷까지 입었으면 했다.
“다음은요? 호연 씨는 뭐를 입고 싶은데요?”
“이 옷.”
손가락으로 옷을 가리켰다.
“어디에서?”
“작은 술집. 좀 허름하고 사람이 많이 없는 그런 공간에서.”
“야해. 거기서 뭘 하고 싶은데요?”
“너와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하고 싶어. 아무도 우리 이야기를 들을 사람이 없잖아.”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그가 안호연의 손을 뚫어지게 보았다. 침을 꼴깍 삼켰다. 자꾸 과거의 한 부분이 현재와 겹쳤다. 사랑문을 적어 달라던 그때가 자꾸 오버랩 되어 그날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거라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 분위기가 어색했다. 이렇게 부드럽고 달콤한 느낌은 온몸을 간지럽게 했다. 두 손으로 팔을 쓰다듬자 남자의 시선이 자꾸 따라붙었다.
“왜요?”
“오랜만이라서.”
“어떤 점이요?”
태범석과 있을 때는 이런 게 없다. 그는 집에 들어오면 조금의 대화 후에 안호연의 몸에 올라타곤 했다. 애무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저 자신의 욕구와 목적만을 달성했다. 어떤 걸 좋아하는지, 무얼 원하는지 묻지도 않았다.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꾹 다물었다.
“좋아서.”
숨을 내뱉었다.
“뭐가요?”
“이렇게 누군가와 사소한 이야기를 하는 게 오랜만이라서. 누구와 밥을 먹는다거나 누가 내가 양치질하는 걸 구경해 주듯 하나부터 열까지 누군가와 함께하는 게 신기하고 좋아. 내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도, 누군가가 내가 좋아했던 걸 기억해 주는 것도.”
그가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떴다. 마주쳐 오는 그의 시선에서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무서워서 떠는 게 아니었다. 안호연은 시선을 내려 손을 보았다. 테이블에 놓인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손에 시선이 닿은 걸 알아차린 남자가 손을 내렸다.
“그런 것도 안 해 줘요? 대화가 어려운 것도 아닌데?”
“…….”
“별것도 아닌 것에 감동하지 마요.”
시선에 온도가 있다면 뜨거웠을 테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 않은데 그는 크게 화를 냈다. 잠시 화를 식히기 위해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안호연은 그가 왜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화내?”
“기분이 나쁘니까.”
“왜?”
“잘 살라고 보내 준 호연 씨가 그런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걸 알게 돼서요. 기어코 나를 버리고 그 사람이 좋다고 갔으면 사랑받고 행복해야지 이 꼴이 뭐예요?”
“사생활이잖아. 네가 화낼 필요 없어. 꼴좋다고 비웃어.”
“내가!”
그가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내가 안호연 씨에게 고작 그런 사람이에요? 타인의 불행을 비웃을 만큼 엉망인 사람이냐고요.”
“너 지금 감정적이야. 이러면 우리 관계 끝이라고 했잖아.”
안호연의 경고에 그가 눈을 내리깔더니 숨을 내쉬었다.
“그러네요. 내가 잘못했네요. 연민에 사로잡혀서 잠시 기분이 나빴어요. 그쪽은 내 족쇄를 처음 찬 사람이라 제게 또 다른 의미가 있거든요. 이렇게 관계는 멀어졌어도 사랑받고 살길 바랐어요.”
“충분히 사랑받고 있어.”
“한 번 더 주제넘을게요. 몸으로? 이게 아니면 어디서 사랑을 받고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손가락이 뻗어 와 안호연의 목을 꾹 눌렀다. 어제, 오늘 태범석이 남긴 자국이었다.
“몸으로 받는 게 무슨 사랑이야. 호연 씨도 자신을 돌아봐요. 우물 안 개구리 같아. 사랑한다면 빼빼 마른 당신의 다리를 벌리고 섹스를 할 게 아니라 밥을 먹였어야지. 콘돔은 사용했고요? 이렇게 냄새가 진동하는데 사용은커녕 생각도 안 했겠죠. 당신 건강 상태도 고려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사정하는 새끼가 사랑을 운운하면 그 주둥이를 때려요. 아끼려면 제대로 아껴 달라고 말하라고요. 이건 마지막 충고고 앞으로 이런 충고는 하지 않을게요. 주제넘게 이런 말 해서 미안해요.”
그는 안호연이 쓰다 만 종이를 찢었다. 그는 종이를 보고 안호연을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너는, 그 오메가랑 몸으로 안 해?”
“안 해요. 아끼고 또 아끼느라 섹스 같은 거 안 해요. 오래도록 신혼을 즐기다가 늘그막에 애를 낳을 거예요.”
“왜 안 해! 가서 해! 가서 그 오메가와 섹스 하고 애새끼도 낳아!”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쉭쉭 그가 불편한 숨을 내쉬며 안호연에게로 다가와 두 팔을 꽉 쥐었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물었잖아요. 당신이 그러지 않아도 할 거예요. 섹스도 할 거고 애도 낳을 거야. 그쪽이 다그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거라고요. 근데 그걸 왜 당신이 강요해요?”
“너는? 넌 강요 안 했어?”
안호연은 입술을 꼭 깨물고 어깨에 맞닿은 그의 손을 밀어냈다. 바보처럼 선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됐어. 나도 한번 주제넘어 봤어. 둘 다 한 번씩 주고받았으니까 없었던 일로 해.”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손가락을 머리칼 안에 밀어 넣고 비볐다.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아직도 몸속에서 날뛰었다. 화가 나 발을 굴렸다. 쿵쾅대며 이리저리 걸어 다녀도 가슴에 맺힌 감정이 떨어지지 않았다. 화를 내고 그를 다그쳤던 그 순간에도 안호연은 그와 반지를 나눠 낀 오메가가 부러웠다. 그 마음이 너무 창피했다. 대롱대롱 매달려 심기를 더욱 나쁘게 했다.
“그 꼴로 갈래요?”
“어딜?”
화가 가라앉지 않아 안호연의 입에서 퉁명스럽게 말이 튀어나왔다.
“실내포차요. 가려면 위에 점퍼라도 걸쳐요.”
그는 안호연의 잠옷 위에 점퍼를 걸쳐 주었다.
“그 남자는 언제쯤 와요?”
“이틀이나 삼 일 뒤.”
“그동안 우리 집에 있어요. 호연 씨가 오늘 원하는 플은 술친구예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퉁치자는 안호연의 말을 잘 이행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말에 화가 묻어 있는데도. 그는 안호연이 정해 준 대로 재킷까지 챙겨 입었다. 여전히 뚱한 얼굴로 서 있는 안호연을 보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화 풀렸으면 안아 줘요.”
그가 손을 벌렸다.
“어서요.”
아이가 서로 싸우면 어른들이 서로 화해시키듯 그가 팔을 벌렸다. 안호연은 선뜻 안기지 못하고 쭈뼛댔다.
“그럼 못 나가요.”
“왜?”
“그 상태로 치고받고 싸우는 건 가능해도 술은 못 먹으러 가요. 둘 중 하나 골라요. 기분 나쁘게 더 싸우든가 기분 좋게 술 마시러 가든가. 골라요.”
그는 답을 고를 수 있는 보기를 두 가지 주었다.
“답이 뻔하잖아.”
안호연은 툴툴거리면서도 그의 품으로 달려가 안겼다. 그의 허리를 꼭 안고, 그의 가슴에 코를 비볐다. 강중영은 안호연이 도망가지 못하게 두 손으로 허리를 막았다. 남자는 꽉 한 번 안호연을 깊게 끌어들여 안았다. 더 들어갈 곳도 없는데 더, 더 깊숙이 안호연을 밀어 넣었다. 강중영과 맞닿은 흉곽이 터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가 안호연을 놓아주었다.
“가요.”
여기에 정착한 지 오래되었는데 자주 가는 바는 있었으나 그 바를 제외하곤 다른 곳에 가 본 적이 없었다. 어느 술집이 맛있는 곳인지 모른다. 인생을 헛살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강중영이 앞을 향해 걸었다. 어둠이 내린 골목길을 남자와 걷는 게 이상해 안호연은 고개를 틀었다. 꼭 연애하는 기분이 들었다.
길을 모르는 안호연을 대신해 강중영이 택시를 잡았다. 택시에 먼저 안호연을 밀어 넣고 올라탄 강중영은 익숙하게 행선지를 말했다. 외식 업계에서 일하는 그는 모르는 음식점이 별로 없었다. 그가 말한 곳은 안호연의 주문대로 사람들이 없는 곳이었다. 외관이 허름한 가게엔 요즘엔 잘 보이지 않는 옛날식 선풍기가 벽에 걸려 있었다. 벽은 사람들이 남긴 낙서로 가득했고 테이블엔 언제 묻은 건지 모를 고춧가루가 하나 묻어 있었다. 의자는 오천 원이면 살 수 있는 플라스틱 의자였다. 정말 옛날 포차 느낌이 나는 곳이었고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올 만한 곳이 아니었다.
막 문을 닫으려던 늙은 남자가 손님이 오자 간판 불을 그대로 두곤 물컵과 물수건을 내왔다. 그러곤 주문을 기다리는지 옆에 서 있었다.
“뭐 먹을래요?”
안호연은 메뉴판을 둘러보다가 손가락으로 알탕을 가리켰다.
“알탕 하나, 소주 두 병 가져다주세요.”
주문하자 옆에 있던 늙은 남자가 주방으로 갔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기본 안주와 소주를 옆에 놓았다. 남자는 메뉴판을 다른 의자에 올려놓았다. 좀 더운지 재킷을 벗곤 안호연을 응시했다.
“호연 씨.”
“왜?”
“주사 있어요?”
“없어.”
안호연은 안호연이다. 술 두 병은 거뜬했다. 술에 취해 본 적도 없었다. 술을 꽤 마신다는 제임스도 안호연 앞에서는 새끼 강아지였다. 자신 있게 고개를 흔들자 그가 웃었다.
“있는데.”
“뭐가 있는데?”
“호연 씨 주사 있다고요. 봤어요, 그때.”
안호연은 그제야 딱 한 번 취했던 날을 떠올렸다. 술에 취해 블랙아웃 되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과거였다.
“뭔데?”
“안 알려 줄래요.”
“왜?”
“저 혼자만 아는 거 같고, 오래돼서 잘 기억도 안 나고.”
“거짓말.”
“오늘 취해서 주사 부리면 보고 말해 줄게요.”
놀리는 것도 아니고. 안호연은 장난스럽게 웃는 남자의 옆구리를 찌르고 술잔에 소주를 따랐다.
“너나 취하지 마.”
“안 취해요.”
안호연은 그의 술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서로 술을 나눠 마시며 누가 먼저 쓰러지는지 내기했다.
“이기면 뭐 해 줄 건데요?”
“이기면?”
“네.”
“서로 소원 하나씩 들어주자.”
“좋아요.”
한쪽 입술 끝이 올라간 남자가 기세 좋게 소주 두 병을 더 주문했다. 테이블에 올라간 술병을 본 안호연은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그가 술잔을 비우면 안호연은 술잔을 채우기 바빴다. 메인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둘은 기 싸움을 하느라 술을 빠르게 마셨다. 술병이 발치에 한 병, 두 병 늘어나는데도 둘 다 흔들림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적수였다.
“기 싸움은 그만해요. 내가 죽나 그쪽이 죽나 내기하러 온 것도 아닌데.”
그제야 여기에 온 이유를 떠올렸다.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러 온 거지 누가 누가 술을 잘 마시나 시합하러 온 게 아니었다. 안호연은 그제야 쥐었던 병을 내려놓았다.
“그때 왜 그랬어?”
“뭘 그랬냐고 물어야 원하는 대답을 할 수 있어요.”
“우리 처음 만난 날 그때 호텔에서 왜 옷을 벗겨 놨…….”
막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메인 안주를 들고 나왔다. 안호연은 입을 다물었다. 남 앞에서 호텔이나 옷을 벗긴 이야기를 하는 건 실례였다. 듣기 불편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고, 그런 이야기를 떠벌리는 건 자신과 강중영을 깎아내리는 일이었다. 버너에 깊이가 얕은 냄비를 올리고 불을 붙인 남자는 맛있게 먹으라는 의례적인 말과 함께 또 주방으로 사라졌다. 콧속 점막을 자극하는 빨간 양념에서 나는 매운 냄새가 좋았다.
“하던 말 마저 해요.”
뚝 끊겼던 흐름을 그가 다시 이으려 했다. 그는 앞 접시를 안호연 옆에 두고 국자로 양념을 풀었다. 약간 맑았던 국물이 혼탁해지면서 점점 빨갛게 물들었다.
“그때 호텔에서 옷을 왜 벗겼었냐고.”
“호텔 세탁실에 옷을 맡겼었어요. 나와 같이 밤을 보낸 사람이 구겨진 옷을 입고 나가서 무시당하는 게 싫었고 예의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술도 과하게 마셔서 오후까지 있을 줄 알았는데 제 생각 미스였죠. 도망갈 줄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어요.”
우연히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만약 그때 납치였다면 자신을 집으로 데려가지 허술하게 호텔에 두지 않았을 테다.
“납치범인 줄 알았어.”
“말은 똑바로 해요. 가게 앞에서 날 채 간 게 누군데. 침대에 끌고 가서 올라탄 게 누군데요? 엉엉 울면서 납치범에게 강간당했다고 울어야 하는 건 저라고요.”
“내가 언제 올라타?”
분명 기분 좋게 술도 먹고 씻었던 상황까지 기억난다. 그때까지 강중영은 웃고 있었다.
“너도 좋아했잖아.”
“파렴치한 사람들이 꼭 그런 표현을 쓰더라고요.”
하? 안호연은 어이가 없고 피해자인 척 술잔을 보며 서글픈 시선을 보내는 강중영 때문에 열이 났다. 손바닥을 흔들어 부채질했다.
“전 그때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순결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노팅을 해?”
“본능이죠. 오메가가 자꾸 노팅해 달라고 애원하는데 알파로서 해 주지 않을 수도 없잖아요. 내 위에 올라탄 사람이 호연 씨이고.”
자꾸 첫날 밤을 자신의 탓으로 돌려 안호연은 얼굴이 붉어졌다. 뜨거운 열기를 식히려 술을 들이켰다. 차가운 술이 목구멍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것으로 진정이 되지 않아 잔에 소주를 따라 쭉 마셨다.
“거짓말, 가증스러워.”
“억울하면 그때를 떠올리든가. 아무 기억도 못 하면서 왜 억울해해요?”
안호연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다 기억나. 네가 좋다고 했어. 얼른 침대에 누우라고 꼬셔서 내 위에 올라탔잖아.”
“그럼 안호연 씨가 먼저 다리 벌리고 넣어 달라고 한 건 기억나겠네요?”
“아니지, 안 넣으려고 했는데 네가 마구잡이로 넣었잖아.”
“그때 결혼하겠다고 청혼하고 난리 쳤던 거 기억나요? 결혼 안 해 주면 콱 머리 박고 죽어 버린다고 엉엉 울었잖아.”
이야기할수록 술이 고팠다. 기억이 나지 않으니 뭐가 진실이고 뭐가 거짓인지 모르겠다. 만약 강중영의 말이 사실이라면 쥐구멍에라도 머리를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언제? 내가 처음 본, 그것도 대여 서비스로 온 남자에게 청혼했다고?”
“그만큼 제가 좋았나 보죠. 그때 호연 씨가 저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했어요.”
거짓말, 안호연은 속으로 꿍얼거리며 술을 마셨다. 물론 지금은 그를 좋아하지만 그때는 맹세코 강중영을 좋아하지 않았다.
“네가 날 좋아했잖아.”
“아니죠. 순결을 잃어서 따라다닌 거예요.”
“보수적이어서 임테기까지 주고?”
“노팅도 하고 그래서 아이가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당연한 행동이죠.”
하나부터 열까지 그는 지지 않았다. 오히려 속만 부글거렸다. 잔에 술을 따른 안호연은 입 속에 소주를 부었다. 쉴 새 없이 들어간 소주의 양이 두 병을 넘어갔다.
“호연 씨, 이거 내기인 거 잊었어요? 왜 이렇게 술을 마셔요.”
순간 안호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기를 잠시 잊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얄밉게 올라갔다.
“너, 노린 거지?”
“설마요, 그깟 소원 하나 노리려고 과거 이야기를 막 지어 냈을까요.”
지어 냈잖아. 그 말을 듣자 더 확신이 갔다. 너!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난 안호연의 몸이 좌우로 흔들리더니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졌다. 빠르게 마신 술이 몸을 감싸고, 뇌를 마비시켰다. 속이 조금 울렁거려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휘청거리는 안호연을 잡아 그가 도로 의자에 앉혔다.
“취했어요?”
물어보는 강중영이 얄미워 안호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나 안 취했어.”
“그럼요. 혀도 안 꼬였는걸요.”
“그래, 맞아.”
혀가 이상했다. 둔해져 자꾸 말리는 느낌이다. 그가 안호연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그러곤 한 손바닥으로 턱을 괴곤 안호연에게 내밀었다.
“나 안 취했어.”
“그럼 서로 한 잔씩 마셔요.”
의심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본 안호연은 보글보글 끓는 알탕에 시선을 돌렸다. 왠지 모르게 알탕을 먹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각을 잃어 알탕 맛을 못 느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눈을 좌우로 굴리던 안호연은 술잔을 밀어내고 입을 벌렸다.
“안주.”
“알 줄까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픽 소리 내어 웃었다. 숟가락으로 붉은 국을 떠 입에 넣어 주자 안호연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부들부들한 곤이와 쑥갓이 만들어 낸 맛에 턱턱 막혔던 가슴이 풀렸다. 알코올을 씻어 내는 얼큰함에 캬 소리를 낸 안호연이 숟가락을 들고 국을 후루룩 떠먹었다. 매운 국물이 혀를 자극했다.
“맛있어.”
“그래요?”
“진짜 맛있다. 여기 어떻게 알았어?”
“저희 아버님이 좋아하는 곳이에요. 나중에 사장님께 여기서 알탕 끓이는 걸 배워야겠네요.”
“왜?”
“당신한테 끓여 주게요.”
가슴이 뭉클했다. 안호연은 술을 혼자 따라 마셨다. 혼자 부엌에서 죽을 끓이고 여기서 알탕을 끓이는 법을 배울 강중영을 생각하니 눈이 뻑뻑했다.
“그러지 마.”
“이게 좋아요. 가끔 내가 알탕을 끓여 줄 테니까 집에서도 둘이 술 한잔 해요. 이런저런 시시한 이야기도 좋고 누가 호연 씨를 화나게 한 일이나 짜증 나게 했던 이야기도 좋고 누가 호연 씨를 기분 좋게 했던 이야기도 좋으니까 다 말해요. 그러고 보니까 호연 씨에게 미안해요. 미안, 이렇게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족쇄를 차고 있는 동안 말을 못 하게 해서.”
미안해요, 그 말에 안호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곤 다시 고개를 들어 남자의 가슴을 찍었다.
“너 때문에 짜증 났어.”
“왜요?”
“왜 갑자기 나타나서 내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 내가, 내가 너 때문에 비참해지잖아. 이렇게 사는 거 하나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왜 나타났어.”
안호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술이 마구 움직여 떠들어 댔다. 어떻게 제어할 새도 없이 입술은 속에 있는 말을 뱉어 냈다.
“나는, 나는 말이야. 네가 짜증 나.”
자꾸 잠이 왔다. 눈이 감기고 하품이 입술로 슬슬 흘러나왔다. 잠을 깨기 위해 고개를 마구 흔들던 안호연은 초점이 흐려진 시야로 술잔의 위치를 파악하곤 손을 뻗어 잔을 쥐었다.
“여기서 그만해요?”
“아니. 그러지 마.”
안호연은 갑자기 앞에 놓인 그릇을 치웠다. 갑자기 앞을 정리하는 안호연에게 흥미로운 시선이 따라왔다. 그러더니 안호연은 두 팔을 그곳에 두고 머리를 묻으려 했다. 그의 이마가 정확히 뜨거운 냄비 쪽으로 향하고 있어 강중영의 눈이 커졌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뜨거운 버너를 자신 쪽으로 밀었다. 뜨거운 국물이 그의 얇은 셔츠와 바지로 스며들었다.
“안호연 씨.”
“씨잉. 그 소원 내 건데.”
그는 먼저 안호연의 이마와 머리가 무사한지 살피려 그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눈을 꼭 감고 입술을 오물거리는 그를 보며 강중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치면 어쩌려고!”
강중영은 쓰러지지 않게 안호연의 어깨를 꽉 잡고는 물수건으로 대충 바지를 훔쳤다. 소리를 듣고 나온 주인장이 바닥에 뒹구는 버너와 남자를 보곤 달려왔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것보다 죄송합니다. 일행이 이래서 못 치워요. 지저분한 땅에 눕힐 수도 없고 누가 이 사람을 만지는 게 싫거든요. 기분 나쁘지 않으시면 돈으로 수고비를 치러도 될까요?”
“거참, 젊은이가.”
“죄송합니다.”
강중영이 지갑에서 수표 두 장을 꺼내 내밀자, 남자가 돈을 챙겼다. 아기처럼 눈을 감은 안호연을 의자에 앉힌 강중영이 등을 댔다. 안호연의 팔을 목에 감자 자연스레 몸이 떨렸다. 남자가 앉았다가 일어나자, 자세가 바뀐 걸 알아차렸는지 안호연은 실눈을 떴다.
“소원…….”
“그 소원 받아다가 뭐 하려고 했는데요?”
“……너랑 자려고……. 그 대단한 오메가도 못 잤다는 너랑 자려고.”
“그 오메가, 수없이 저랑 잤어요.”
작게 잠투정을 하는 안호연이 떨어지지 않게 그는 단단히 안호연의 엉덩이를 받치고 걸었다.
“……언제?”
“꽤 오래전에요. 어차피 이 말 해 줘도 기억도 못 하겠죠. 다 잊으니까. 호연 씨 주사가 그거야. 다 잊어버리는 거.”
갑자기 긴 침묵이 이어졌다. 남자의 목에 뜨거운 숨이 닿았다. 안호연을 흔들어도 아무 반응이 없자 강중영의 입술이 살포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 * *
하얀 이불 속에서 맨 팔이 튀어나왔다. 팔은 안호연이었고 그는 눈을 감은 채로 가슴을 두드렸다. 속이 울렁거렸다. 뇌를 잡아먹은 알코올 때문에 누워 있는 게 힘들었다. 점점 나이가 듦에 따라 주량이 약해졌는지 어지러웠다. 누워 있지 않고 앉아 있어도 천장이 빙빙 돌아 얼마 가지 못해 안호연은 드러누웠다. 이기지 못할 술을 왜 마셨는지 의문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가 뛰듯이 화장실로 달려갔다. 아직 집 구조를 모르기 때문에 안호연은 문이란 문을 모조리 열어 보고 나서야 하얀 변기통을 붙잡고 속에 있는 걸 게워 냈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 알코올이 혀를 지나쳐 입술로 나오는 과정은 가히 좋지 않았다. 그래도 속에 있는 걸 게워 내니 속이 한결 나았다. 안호연은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올렸다. 거울 속 안호연은 희게 질려 있었다. 깡마른 남자는 정말 볼품없었다.
알싸한 알코올이 코를 찔러 안호연은 콧잔등을 찌푸리다 레버를 올려 물을 틀었다. 손바닥에 물을 받아 입을 헹구던 안호연은 양치질까지 마치고 나왔다. 바깥으로 나왔다가 죽은 듯이 소파에 앉아 있던 안호연은 이상한 걸 느꼈다. 남자가 아직도 자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깨우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살금 이불을 끌어 내리자 잠자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문득 그 얼굴을 보다가 손가락으로 턱을 만졌다. 평화로웠다. 평화롭고 또 평화로워서 소소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한참 옆에 앉아서 그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던 안호연이 잠자는 그를 흔들려 할 때였다. 어디선가 벨이 시끄럽게 울렸다. 소리의 출처는 땅에 던져 둔 외투였다.
안호연은 달려가 휴대 전화를 집으며 남자의 눈치를 봤다.
[태범석.]
그 딱딱한 이름을 보자 그 딱딱함이 손끝으로 옮겨 갔다. 침을 삼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조금도 자신의 일탈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여보세요?”
[왜 늦게 받아?]
태범석이 기분 나쁜 기색을 드러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 음성에 안호연은 침을 삼켰다.
[어젠 잘 쉬었어?]
“응.”
[그날 좋았어. 계속 생각나. 안호연, 무슨 수를 쓴 거야? 종일 네 생각이 떠나지 않잖아.]
“지랄 말고 일해. 그러다 욕먹어.”
[내가 사장인데 누가 나한테 욕해? 그것보다 호연아, 결혼 날짜 정해졌어.]
“언제 결혼하는데.”
[한 달 후. 11월 14일.]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일 하루 전이네.”
[아무 감정 안 들어?]
“외우기 쉬워서 좋다?”
[무심해.]
“다 전했으면 끊어.”
[내일 갈 거니까 외출 준비하고 있어. 사랑해.]
전화를 끊자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그가 눈을 떴다. 투명한 안구로 빛이 스며들어 검은 눈동자를 감싸고 있는 홍채가 유난히 엷었다. 햇볕에 바랜 머리칼이 잡티가 없는 하얀 피부 위로 부스스 흩어진 모습이 꼭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예뻐서 한참 그를 보았다.
“뭘 봐요?”
“예쁘네.”
안호연은 가지지 못할 그림을 보고 중얼거리듯 중얼거렸다.
“왜 함부로 예뻐?”
괜스레 가슴 두근거리게. 안호연은 그에게 가 그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손을 놓는 동시에 강중영의 입에서 작게 앓는 소리가 났다. 조금 떨어진 안호연은 멍하니 그를 보았다. 그 앓는 소리가 기분 좋은 신음이 아니었다. 어색하게 손을 내리는 그를 보다 얼른 손바닥을 뒤집었다. 손바닥에 크고 작은 물집이 나 있었다.
“왜 그래?”
“어제 이렇게 됐나 봐요.”
“조심 좀 하지. 많이 아파?”
자기가 아픈 것보다 더 아파 안호연은 그의 손을 잡고 호들갑을 떨었다. 119를 불러야 한다. 아침부터 응급실에 가야 한다. 정신없이 말하는데 정작 다친 사람은 가만히 있었다.
“일어나. 병원에 가야지. 손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몰랐어? 너 바보야?”
남자는 팔을 끌어당기는 안호연을 도로 잡아당겼다. 반동으로 튕겨 침대로 돌아온 안호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로 안 아파요.”
“하필 다친 손이 오른손이잖아.”
그는 침대 밖으로 발을 뻗어 안호연을 소파로 이끌었다. 괜찮다는 강중영을 안호연은 기어코 앉혀 손을 확인했다. 화상 자국이다. 손바닥 전체에 잡힌 커다란 물집은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고통이 전달됐다.
“어쩌다가 다쳤어?”
“잘 기억이 안 나요.”
“필름 끊겼어?”
“그런 거 같아요. 취해서 잘 기억이 안 나요. 호연 씨는요?”
눈살을 찌푸리던 안호연은 침을 꼴깍 삼켰다. 누가 누가 먼저 취하나 내기가 걸려 있었다.
“나 안 취했었어. 아, 기억난다. 너 취해서 나 막 좋다고 그랬어.”
“설마요.”
“손도 나 한번 안아 보자고 난동 부리다가 그런 거야. 냄비에 덴 거야?”
“제가 형편없이 굴었어요?”
“그래, 인마.”
“최악이네요. 그럼 소원은 호연 씨 거네요?”
“응.”
“적립해 놓죠.”
그가 구급함을 챙겨 왔다. 어제 집을 구입하고 물건을 들였다는 사람 집에 구급함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마치 이곳에 오래 살았던 사람처럼. 그는 식염수로 상처 부위를 헹구고 그 위에 화상 거즈를 덮었다. 대충 붕대로 감아 응급 처치를 한 남자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러면 괜찮아져요.”
“병원은?”
“심하지 않아요. 물집이 내려가면 금방 나아요.”
“그래도 병원 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안호연이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처방전도 보여 줘. 널 어떻게 믿어? 말로만 갔다 왔다고 할지 모르잖아.”
그가 숨을 멈추고 안호연을 응시했다.
“나 걱정돼요? 내가 아프면 호연 씨도 아파요?”
그제야 안호연은 자신이 얼마나 주제넘었는지 알아챘다. 그저 플 상대인 강중영에게 연인처럼 걱정하고 속삭이고 있었다. 혀로 입술을 문댄 안호연은 얼른 시선을 피했다. 담백한 그와 달리 지나치게 감정을 담아 집적댔다. 어디까지가 플이고 어디까지가 플이 아닌지 구별이 가지 않지만,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였다. 주제를 모르고 그에게 감정적으로 심하게 들이댔다.
“같이 술 마시다가 다쳤다는데 걱정하지 않으면 그게 사람이냐? 됐어, 나 갈 거야.”
그래도 변명을 하자면 사람이 다쳐서 그렇다. 또 변명하자면 어제 술을 같이 마신 사람은 자신이었다. 걱정하는 이유라면 충분했으나 마치 좋아하는 사람이 다친 것처럼 유난스럽게 호들갑을 떤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그가 안호연의 마음을 눈치채면 플은 깨진다. 겁이 나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남자가 입술을 떼는 동안 안호연은 침을 삼켰다.
“얼마간 이 집에 있으라고 했는데요.”
다행히 그는 안호연의 감정을 짚어 내지 않았다.
“낮까지 있을 필욘 없잖아. 나도 일이 있어.”
그가 조금 키가 작은 안호연을 내려다보았다.
“호연아.”
지금 그가 이렇게 부르면 어쩔 수 없게 돌아보게 된다. 그건 마법이다. 이름을 부른 후 강중영의 입술에서 튀어나온 말은 거역할 수가 없었다. 안호연은 입술을 꽉 깨물고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가 외투를 주워 현관까지 간 안호연에게 건넸다. 그러곤 마구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곤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그래도 머리 정리는 하고 나가요. 남에게 당신이 헝클어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요. 옷도 단단히 챙겨 입고요.”
그는 잠옷의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워 주었다.
“마지막으로 다음 플을 할 때까지 섹스 금지예요.”
안호연의 눈꺼풀이 위로 솟았다.
“제가 당신 일상까지 관리한다고 말했잖아요. 슬레이브가 되겠다고 허락한 건 당신이에요. 밥 먹는 거, 자는 거, 누군가와 잠자리를 하고 말고도 제가 정해요. 그쪽이 결혼해서 남편이 있대도 진정한 주인은 나라고요. 알아들었어요? 싫으면 마티니를 말하든가.”
안호연은 눈을 깜박였다. 연인인 알파가 있는 오메가의 잠자리를 왜 그가 관리하는지 의문이다. 그건 안호연만이 피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태범석이란 변수가 있었고 그걸 피하려다 의심을 살 수 있었다. 설마 자신과 같은 마음일까. 눈을 일그러뜨리고 그를 보았다. 자신과 같은 마음이 아니고선 플을 하는 파트너라도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왜 자면 안 돼?”
“플을 위해서요. 이 상태로 플을 했다간 제가 사람 하나 죽일 거 같아서요. 잘 먹고 건강해지면 그 사람과 할 수 있도록 할게요. 당분간만 참아요. 플을 위해서 고작 3일 동안 섹스를 못 참는 건 아니죠?”
안호연은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설마 질투해서 그런다고 생각해요?”
그가 웃었다.
“그럴 일은 없으니까 걱정 마요. 어제 화를 냈던 것도 호연 씨가 플을 제대로 소화를 못 할까 더 화가 났던 거예요. 플을 할 수 있는 체력으로 돌아오면 잠자리 따위 어쩌든 상관 안 해요.”
어제 그가 화를 낸 진실을 알자 허무해졌다. 혼자 오해한 것이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갈게.”
그가 손을 흔들었다. 안호연은 손을 들어 같이 흔들어 주다가 돌아섰다. 그가 영원히 자신을 사랑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걸 깨닫고 안도하는 한편으론 가슴이 아팠다.
“조금 아프네.”
가슴을 주먹으로 문댄 안호연은 햇빛이 찬란한 태양 아래 무거운 발을 옮겼다. 집으로 들어간 안호연은 대충 옷을 갈아입었다. 생활비 형식으로 태범석이 두고 간 돈을 챙겨 바깥으로 나갔다.
술병이 난 몸으로 버스 정류장까지 간 안호연은 버스를 탔다. 안호연은 버스가 흔드는 대로 몸을 흔들다 익숙한 장소에서 내렸다.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동네였다. 환경 정리가 되지 않은 재개발 주택 단지로, 사람이 많이 없었다. 고양이가 기웃거리는 동네로 들어간 안호연은 낡은 주택 2층으로 들어갔다.
일반 주택인 그곳을 심부름센터가 사무실로 이용하고 있었다. 보기엔 낡아 보여도 이 심부름센터 사장인 남자는 이곳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정보력도 좋았고 사람을 부릴 줄 알았다.
“어이쿠, 오셨네요.”
안호연이 오자 꽃 셔츠를 입은 남자가 허리를 숙였다. 안호연도 대충 인사하곤 테이블 앞 소파에 앉았다.
“다솜이는요?”
“좋은 소식이 있긴 하죠. 손님이 많이 기다렸던 소식이죠.”
갑자기 안호연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근데 그 소식을 듣기 전에 돈을 내야죠. 제가 먹이는 입이 셋인데, 하나는 손님 일에만 매달려 있잖소.”
안호연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헐거운 돈 봉투의 입구를 열어 금액을 확인한 남자가 쯧 혀를 찼다.
“이번 달 잔금이 백만 원이 밀렸는데 고작 오십이오?”
“나머지는 알아서 나중에 드릴게요.”
“하루 이틀 거래한 것도 아니고 삼 년이나 했으니 믿죠, 뭐. 서울 중랑구 쪽으로 태범석이 자주 들러 그 근방에 있는 곳은 다 뒤져 봤어요. 그 근처에 손님 아이가 있을 만한 곳에 다 전화를 돌렸죠. 안다솜이란 이름은 없고, 태다솜이란 아이가 하나 있더라고요.”
안호연은 눈을 반짝이며 손바닥으로 입술을 막았다.
“태 씨가 흔하지 않은 데다가 출생일이 딱 맞아떨어지더라고요.”
그가 사진 몇 장을 내밀었다. 안호연은 사진을 확인하곤 눈시울을 붉혔다. 다솜이었다. 다솜이 맞았다.
“거기가 어딘데요?”
“근데 이제 거기에 없어요. 거기서 눈치챘는지 다른 쪽으로 빼돌렸더라고요.”
갑자기 안호연의 얼굴이 죽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해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우리가 왜 거짓말을 합니까. 손님도 참.”
“그래도 수고하셨어요.”
“걱정하지 마요, 손님. 실망하기 일러요. 거기 직원이 그날 슈트를 입은 남자가 아이를 어디로 데리고 갔는지 안답니다. 근데 안다면서 어디로 갔는지 통 입을 열지 않는단 말이죠.”
“열게 만들면 되잖아요.”
“사람이 맨입에 입을 엽니까?”
안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쪽에서 두 장을 불러요. 고객 정보라서 자기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답니다.”
“이백?”
“이천이요.”
안호연은 눈을 감았다.
“어떻게 하실래요? 또 저쪽에서 아이가 있는 곳을 옮기기 전에 손님이 사수해야 합니다. 여러 번 옮기면 우리도 찾기 어려워요. 이천 주고 아이가 간 곳을 알아내서 빨리 찾아오는 게 낫죠.”
“알았어요. 돈은 제 쪽에서 준비할게요.”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돈이야 벌면 됐다. 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음 주 수요일 날 뵙죠. 인사를 건네는 그들에게 고개를 숙인 안호연은 이내 낡은 문을 열고 나왔다. 오늘따라 날이 화창한데, 이곳은 어쩐지 우중충해 안호연은 어두운 얼굴로 서 있다가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