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31년 만에 폭설이 찾아왔다. 올해 겨울은 겨울치곤 따듯해 눈을 보기 어려웠었다.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도 며칠 전 비가 내릴 정도라 눈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추워져 눈이 내렸다. 폭설에 둘은 고립되었다. 내려가는 길이 언덕이라 차가 내려가지 못해 일로 바빴던 강중영은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낮잠을 잤다. 사람을 불러 눈을 처리하면 되는 일인데 강중영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걸 핑계 삼아 파업했다. 로봇 같아도 그도 사람이었다.
안호연은 창에 서서 눈을 구경했다. 하얀 눈이 정원과 다른 집을 짓누르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눈 사이를 헤집고 차 한 대가 느리게 들어서더니 집 앞에 차를 댔다. 은색 승용차를 본 안호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집을 찾아온 남자 중 반갑지 않은 사람이 떠올랐다. 차에 탄 남자가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자 불안감이 한계치까지 증폭되었다. 안호연의 입에서 색색 나오는 숨으로 인해 창문에 습기가 찼다.
침을 삼킨 안호연은 밖을 예의 주시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슈트를 입은 남자였고 강중영의 형 강유정이었다. 갑자기 맥이 빠졌다. 이 집에 있으면 안전했고 태범석도 함부로 끌어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먼저 겁을 집어먹곤 했다. 무언가를 들고 집 쪽으로 걸어오던 남자는 이내 대문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별로 친해 보이지 않던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 의문이었다.
딩동.
초인종이 울리자 안호연은 얼른 침대로 달려갔다. 그를 깨우기 위해 이불을 잡고 흔들었으나 이불 속의 남자는 눈을 뜨지 않았다. 다만 입술을 뗐다.
“강유정이에요. 좋은 와인이 있다고 주러 오겠다는 말을 얼핏 들은 것도 같었거든요.”
귀찮은 목소리였다.
“무시하면 알아서 갈 거니까 내버려 둬요.”
그래도 문을 열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어렵게 찾아온 형제를 문 앞에 세워 놓는 건 아닌 것 같아 그의 옷을 잡고 흔들었다.
“누굴 내 집에 들여. 족쇄도 차지 않은 데다 그런 시커먼 새끼에게 족쇄를 채우고 싶지도 않아요.”
그제야 정확하게 이해가 갔다. 강유정은 남자에게 허용 밖의 사람이었다. 그래도 나가야 할 텐데. 걱정하는 건 안호연이었고 그는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다. 연달아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초조할 때 벨이 시끄럽게 울렸다. 그가 손을 뻗어 휴대 전화 통화 버튼을 눌렀다.
[강중영 너 이 새끼 문 안 여냐? 형님이 찾아왔는데 문 안 열고 뭐 하는데! 추워 뒈지겠으니까…….]
아, 잘못 눌렀네요,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손을 더듬어 종료 버튼을 누르고 휴대 전화를 베개 아래에 묻었다. 실로 잔인한 처사였다. 초인종 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이내 멈췄다. 손님이 왔는데 이래도 될까. 괜히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가슴이 두근거려 미치겠는데 그는 태연히 눈을 감았다. 안호연은 다시 창으로 달려갔다. 금방 습기가 찬 유리를 손바닥으로 문댔다. 밖에 주차되었던 차가 사라지고 없었다.
대문 앞에서 툴툴대다가 갔을 강유정을 생각하니 불쌍하단 생각이 들었다. 남에게 정말 가차 없는 사람이다 싶었다. 안호연은 네발로 침대에 엉금엉금 기어갔다. 이불을 들추고 어깨부터 몸을 밀어 넣었다. 그가 갑자기 팔로 안호연의 목을 감싸 끌어당겼다. 갑자기 몸이 빨려 들어가자 그가 잠에서 깨지 않은 눈을 떴다. 초점이 잡히지 않는 남자의 눈에 안호연의 얼굴이 어렸다.
“몇 시예요?”
“3시. 더 자.”
목에 감겨 있던 손이 아래로 내려왔다. 안호연의 허리에 팔을 두른 그가 다시 눈을 감았다.
“제 페로몬이 당신을 괴롭게 해요?”
“뭐…….”
딱히 부정은 하지 않았으나 강중영의 경우 굉장히 신사적인 알파라 페로몬을 어느 정도 제어하고 다녔다. 일상생활에서 크게 불편하지 않았고 잠자리 중에서도 행위로 인한 쾌감에 잊혀 그의 페로몬이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다만 안타까운 건 그의 러트를 함께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가 페로몬을 아무리 방출해도 다른 알파를 각인한 오메가는 히트사이클이 오지 않았다. 알파도 러트 상태에선 이성이 거의 없고 본능만 남은 상태라 보통 오메가가 알파의 러트를 같이 보내면 강제로 히트사이클이 오곤 했다. 둘 다 발정기에 돌입해 페로몬을 최대치로 방출하게 되는데 오직 연인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으로, 그 기간이 지나면 결실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러트 때 내가 옆에 있어 줄게.”
“정신이 제대로 박힌 상태에서 러트가 온 알파를 상대하는 건 힘들어요.”
그가 바로 문제점을 짚었다.
“괜찮아요, 정관 수술을 하면 페로몬이 줄어들겠죠.”
이미 결단을 내렸다는 듯 그가 속삭이자 안호연의 눈이 커졌다.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표정으로 강중영을 응시했다. 잘못 들었나 싶어 손바닥으로 귀를 매만졌다. 자신을 위해 서슴없이 정관 수술을 하겠다는 남자에게 화가 나 입술을 깨물었다. 정신을 차리라고 호통을 치고 싶은 마음을 꼭 내리눌렀다.
“그러기만 해 봐. 가만 안 둬.”
“며칠간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이게 제일 좋은 방법 같네요. 솔직히 별것도 아니고 나름 편할 것 같다고 생각해요.”
알파가 아닌 부분적인 베타로 살겠다고 말했다. 오메가이지만, 그들이 자신이 알파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사업가인 사람이 알파라는 건 매우 매력적이었고, 냄새를 못 맡는 베타라도 호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 부수적인 혜택을 모두 포기하겠다는 거다.
“내가 하면 되잖아. 그런 걸 왜 네가 해? 그거까지 포기하면 난 어떡해?”
“아기집을 떼어 내야 하는데 그건 제가 반대해요. 어떻게 아이 하나만으로 만족해요? 사기꾼을 연인으로 둬서 불안해요. 셋은 돼야 조금 마음이 놓일 것도 같네요. 나중에 시기를 정하고 복구 수술 하면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자녀 계획을 제대로 세워서 낳아 보죠. 오히려 호연 씨에겐 더 좋을지도 몰라요. 이러다간 집에 아이가 넘칠지도 모르잖아요.”
“네 냄새가 좋으니까 하지 마.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찾다 보면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거야. 네가 나 때문에 왜 상처를 내야 하는데? 싫어.”
“러트가 갑자기 찾아오면 호연 씨에게 상처를 낼지도 모르잖습니까. 이건 내 선택이고 호연 씨가 강요한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안호연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커다란 손이 배에 머물더니 둥그렇게 움직였다. 쓸고 문대고를 반복하자 금세 마찰열이 생겼다.
“호연 씨는 대단한 사람이에요.”
“왜?”
“날 파괴할 수 있다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고 또 신기해서요.”
“파괴? 그런 단어 말고 다른 걸 써. 너도 날 많이 바꿨잖아. 너에게 채운 족쇄도 좋고, 이 링도 좋아. 새로운 걸 알게 해 준 거야. 나도 널 파괴한 게 아니라 사실 네가 사랑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 준 거야. 파괴된 게 아니라 더 나은 사람이 된 거야.”
“그러네요.”
그는 여전히 안호연의 배를 쓸어내렸다. 그는 절대로 아이가 태범석의 아이일 거라는 뉘앙스를 풍기지 않았다. 그는 늘 자신의 아이라는 가정하에 말했으나 배 속의 아이가 누구 아이일까 안호연은 궁금했다. 그러다가도 태평한 그의 태세를 보면 누구여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리를 감싼 그가 다시 잠을 청하며 속삭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 크리스마스이브였나. 요즘 날짜에 신경을 쓰지 않아 안호연은 멍한 얼굴을 했다. 눈을 꼭 감고 속삭이던 강중영의 부드러운 축복에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눈가에 입술을 댔다.
“메리 크리스마스.”
올해 크리스마스를 강중영과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인생의 큰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이 자신이 지낼 집이었다. 밖이 춥고 눈이 내리니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자꾸 잠이 왔다. 안호연은 무겁게 내려오려는 눈꺼풀을 내렸다. 어쩌면 안호연은 긴 잠을 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봄이 왔다고 알려 줄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 * *
긴 잠을 자던 안호연은 눈을 떴다.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달콤한 냄새가 났다. 그가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평범한 하루였다. 평범하나 어제가 크리스마스이브였으니 오늘은 크리스마스라는 것 정도. 긴 하품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오색찬란한 전구들이 정신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일어났어요?”
그가 앞치마를 맨 채로 묻자 안호연은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쉬고 있어요.”
짧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 없이 반짝이는 트리를 보던 안호연은 양말을 보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양말 뒤꿈치가 툭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다. 트리 앞에 쭈그리고 앉은 안호연은 양말을 벌렸다. 그 속에 작은 상자가 있었다. 양말을 뒤집자 그것이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눈을 깜박이던 안호연은 상자를 열었다. 청혼할 때 쓰는 흔하디흔한 반지였다. 과하지도 않은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였다.
순간 말을 잃은 안호연은 반지를 뚫어지게 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딱히 멋있지도 않고 특별한 청혼도 아니었는데 눈물이 났다. 손가락으로 눈을 꼭 누른 안호연은 강중영에게 달려갔다. 그러곤 규칙도 까맣게 잊고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누가 멋대가리 없이 반지를 양말에 넣냐. 설마 혼자서 반지를 끼라는 건 아니지?
그를 노려보자 강중영은 웃으며 손바닥에 있는 반지를 집었다. 엄지와 검지로 반지를 잡고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이거 끼워 주면서 좀 변태 같은 생각을 했어요.”
“뭐?”
“반지가 안호연 씨 거기고 호연 씨 손가락이 내 페니스 같다는 생각이요. 반지가 들어가는 과정이 섹스처럼 느껴져요. 진짜 반지 끼는 것도 야해. 임산부가 이렇게 야해도 되나. 꼴리네요.”
“변태.”
그가 소리 없이 입술만 끌어 올려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다른 사람이 반지를 끼워 준대도 끼지 말아요. 내가 끼워 주는 것만 차요. 알았죠?”
안호연이 고개를 끄덕일 때 반지가 끝 마디에 걸렸다.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적립된 게 세븐 아웃이에요. 딸기 그 자식 나오면 그것부터 해결하고 결혼해요.”
“내가 센 건 두 개밖에 없는데.”
“가슴에 손을 올리고 떠올려 보면 엄청 많을 텐데요.”
그가 의자를 빼내곤 안호연을 앉혔다. 그러곤 펜과 종이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건 왜?”
“아웃 수를 줄이고 싶으면 반성문 써서 제출해요. 읽어 보고 마음에 들면 깎아 줄게요.”
안호연은 고개를 숙이곤 깊은 고민에 빠졌다. 반성문을 왜 써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손해는 이쪽이었다.
“잘 생각해 봐요, 누구 손핸지. 고작 반성문으로 아웃 하나를 깎아 준다는 건 제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일이에요. 호연 씨를 아웃 시키기도 싫어서 반성문으로 대체하겠다는 거죠.”
그게 왜 손해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안호연은 입술을 다물고 펜을 움켜쥐었다. 반지를 받아 기분이 좋았으니까. 봐줬다, 강중영. 입술을 웅얼거린 안호연은 눈을 깜박이며 반성문을 쓰기 시작했으나 문제가 생겼다. 뭘 잘못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잘못을 알아야 반성도 할 수 있는데 모든 것을 잊은 안호연은 반성할 수가 없었다. 안호연은 눈을 가늘게 떠 초점을 흐리게 만들었다. 아무리 뇌 속을 헤집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반성해서 아웃 수를 줄이고 싶은데 아무것도 쓸 수 없어 답답한 노릇이다. 종이엔 쓰다 지운 글만이 가득했다.
[머리가 좋지 않아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 쓰래서 쓰고 있긴 한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스리 아웃 당하면 정말 아웃이라 초조하고 무서운데 쫓겨나기는 싫으니까 강중영이 봐줬으면 좋겠다.]
쓱쓱 글을 쓰는 안호연을 보더니 강중영이 다른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설마 그걸 반성문이라고 낼 건 아니죠?”
안호연은 어디가 문제인지 종이를 뚫어지게 보았다. 강중영은 늘 솔직하라고 했고 이 반성문도 진실을 근거로 썼다. 문제라면 기억 회로가 약한 머리에 있었다.
슬쩍 강중영의 눈치를 본 안호연은 쓰던 글을 접고 새 종이에 펜을 댔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안호연을 도와주기 위해 강중영이 옆에 앉았다.
“최근에 잘못한 걸 떠올려 봐요. 바로 20분 전에도 했잖아. 허락도 없이 말한 거. 왜 제가 당신을 용서해야 하는지 설득해 봐요.”
너무한다는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양말에서 반지를 꺼내고 허락도 없이 먼저 말을 꺼낸 걸 짚어 주었다. 아침에 감동해 흘렸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화로 부들거리는 손가락을 애써 다잡으며 글씨를 꾹꾹 눌러썼다. 자신을 사랑해도 강중영은 지배자형 알파였다. 깐깐한 그는 기쁜 순간에도 카운트하고 있었다.
[양말에서 반지를 꺼내고 기분이 좋았고 결혼하자는 말도 없이 덜렁 반지만 줬는데도 행복했음. 강중영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듣고 싶기도 했고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는 로망도 있어 강중영에게 달려가서 말함. 많이 흥분한 상태여서 허락도 못 구해서 미안함. 매우 많이 미안해서 반성 중임.]
절대 반성하지 않는 얼굴로 안호연은 글씨를 날려 쓰곤 그걸 강중영에게 내밀었다. 그걸 읽어 본 강중영은 음, 하고 운을 뗐다.
“많이 좋았어요?”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요?”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었다. 슬쩍 눈을 내리깔고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얼마만큼 좋았냐고 묻잖아요.”
말을 하는 걸 허락하는 건지 아닌 건지 안호연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술을 뗐다.
“응, 반지를 받고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잖아. 근데 그 반지를 네가 줘서 좋았고 또 그 반지를 끼워 주면서 섹스 같다며 시답잖은 농담을 해도 좋은 거 보면 내가 미친 거지?”
“또 아웃.”
이 새끼가. 안호연은 작게 투덜대며 입술을 내밀었다.
“말해도 좋다고 허락 안 했잖아요. 은근 멍청해. 근데 그게 호연 씨 매력이지. 반성문 8장 써서 제출해요.”
7장에서 어느덧 8장으로 늘었다. 글이라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일기를 써 본 게 전부였던 안호연은 눈앞이 까마득했다. 안호연은 얼른 쓰고 있던 반성문을 내밀었다.
“그걸 반성문이라고 낼 거 아니죠? 누가 반성문을 이렇게 성의 없는 문체로 써요. 정성 들여서 제대로 써요. 우선 밥부터 먹고 써요. 아직 딸기가 나오려면 시간도 많이 남았으니 천천히 받아도 되니까.”
그는 안호연의 반성문을 곱게 접어 옆으로 밀어내고 밥과 국을 놓았다. 오늘따라 음식이 당기지 않았다. 먹고 힘내서 반성문을 쓰라는 의미여서 그런가 안호연은 대충 국에 밥을 말아 먹었다. 힘없이 국을 뜨는 안호연을 보며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제가 얄미워 죽겠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지. 안호연은 밥을 떠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사랑스럽죠?”
그것도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라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반성문 써서 제출해요.”
끝까지 반성문을 못 잃겠다는 그의 말에 안호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섹스로 까 주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금상첨화일 텐데. 속으로 쯧쯧 혀를 찬 안호연은 그를 흘끔거렸다.
“섹스는 안 돼요. 안호연 씨가 좋아하는 거로 하면 벌이 아니라 상이죠. 그 엉큼한 머리를 달고 있으면 매일 규칙을 지키지 않겠죠.”
그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머릿속으로만 한 말인데 그가 어떻게 안 건지 의문이었다.
“그거 소리 내서 말했어요, 호연 씨. 이제 아웃 9개네요. 손과 머리가 분발해야겠어요.”
툭. 안호연은 숟가락을 놓았다. 놓을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늘어나는 반성문 장수에 입맛이 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테이블 건너에 있는 강중영이 오늘따라 악마로 보였다. 그런데도 그가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건 눈이 잘못됐거나 마음이 고장 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말 쓰기 싫다. 평소에도 안 쓰는 글을 왜 써야 하는지. 속으로 투덜대던 안호연의 머리로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라 갑자기 일어나 먹던 밥그릇을 싱크대에 놓았다.
“더 안 먹어요? 왜요?”
풀이 죽은 얼굴을 하고 손가락을 내밀어 반성문을 가리켰다. 기가 죽은 자신을 보면 마음 약한 그가 반성문을 쓰지 말라고 하지 않을까 낸 꾀였다. 침을 삼키고 얼른 그가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럼 어쩔 수 없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전 설거지를 할 테니 호연 씨는 반성문 마저 써서 내요.”
하, 안호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깔끔하게 비운 밥그릇을 보다가 울적한 얼굴로 돌아섰다. 펜을 든 안호연은 테이블 앞에 앉았다. 차가운 유리에 뺨을 문댔다. 검은 것은 글씨이고 하얀 것은 종이인데 강중영은 검은 글씨 중에서도 만족하는 게 따로 있다고 하니 한숨이 나왔다. 솔직히 안호연은 그가 만족하는 반성문을 쓸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없었다.
“못 쓰겠어요?”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랑문은 어때요? 나에 대해서 써 봐요. 멋지다든지, 섹시하다든지, 내가 왜 좋은지, 내 어디가 좋은지 머릿속에 있는 걸 써 봐요. 마음에 들면 깎아 줄게요.”
마음에 들면 깎아 준다는 말은 애초에 비난은 받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안호연은 의심이 들어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 반성문보단 그게 목적이 아닌지 알고 싶었다. 의심이 섞인 눈으로 그를 보자 그가 ‘싫으면 말고요.’라고 뱉었다. 안호연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반성문보다는 사랑문이 나았다.
“글 쓰고 있어요. 귤 까서 줄게요.”
그가 부엌에서 바구니를 가져왔다. 대나무 바구니 속에 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동글동글하고 예쁜 귤을 그가 소리 없이 까기 시작했다. 향긋한 과일 냄새에 안호연은 얼른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중영은 잘생겼다. 나보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데다 몸매도 좋다. 빼빼 마른 멸치가 아니라 잔근육이 있다. 움직일 때마다 근육과 힘줄이 튀어나올 때 좋고 특히 페니스도 크고 잘생겨서 좋다.]
딱 거기까지 쓰고 안호연은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너무 속물적으로 느껴졌다. 펜으로 막 그 문장을 그으려고 할 때였다.
“정관 수술 받으면서 축소 수술도 할까요?”
안호연은 그으려다가 말았다. 속물적이어도 큰 게 좋았다. 안이 꽉 차서 좋으니까.
[조금 흠이라면 지나치게 섹스를 오래 한다는 점이다.]
딱 거기까지 썼을 때 입 속으로 귤이 들어왔다.
“그게 흠이면 시간을 줄여야겠네요.”
안호연은 그 문장을 지우고 새로 써 넣었다.
[섹스를 오래 할 정도로 강철 체력을 가진 연인을 둬서 행복하다.]
계속 사랑문을 보고 있는 강중영을 피해 다른 곳으로 움직이면 강중영도 바구니를 들고 따라왔다.
[외면적으로 완벽한 강중영은 내면적으로도 완벽하다. 착하고 부드럽고,]
딱 거기까지 쓰던 안호연은 자신이 왜 이걸 써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입술 꼬리를 좌우로 늘리며 웃는 그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세뇌하기 위해 이런 글을 쓰라고 시킨 건 아닐까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다. 무엇보다 손이 오글거렸고 속도 울렁거렸다. 평생 이런 간지러운 말을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써도 나눠서 쓸 단어를 모아서 보자 속이 좋지 않았다.
“왜 쓰다 말아요?”
그의 타박에 안호연은 손을 움직였다.
[강하다. 이런 강중영한테 반하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잖아. 강중영 사랑해.]
안호연은 의미 없이 글을 썼다. 온갖 좋은 말을 다 갖다 붙여놓아 글을 완성했다. 그걸 슥 내밀었다. 개인적으로 안호연이 진심을 담아 썼던 반성문보다 못한 글이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사실이에요?”
글을 쓰는 동안 기가 빨려 눈 밑이 무거웠다. 안호연은 약간 거뭇해진 애교살을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중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문을 쭉 읽어 보더니 마음에 든 듯 그걸 냉장고에 붙여 놓았다. 안호연이 기겁하며 달려가자 그가 큰 소리를 내며 읽기 시작했다.
“강중영은 잘생겼다. 나보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데다 몸매도 좋다. 빼빼 마른 멸치가 아니라 잔근육이 있다. 움직일 때마다 근육과 힘줄이 튀어나올 때 좋고 특히 페니스도 크고 잘생겨서 좋다. 섹스를 오래 할 정도로 강철 체력을 가진 연인을 둬서 행복하다. 외면적으로 완벽한 강중영은 내면적으로도 완벽하다. 착하고 부드럽고, 강하다. 이런 강중영한테 반하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잖아. 강중영 사랑해.”
그가 소리 내 사랑문을 완독할 때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앞으론 호연 씨가 쓴 글들을 여기다가 붙여 놓을게요. 행복한 크리스마스네요.”
반 눈치를 줘서 얻어 낸 글로 행복한 크리스마스는 무슨. 침울한 표정을 한 안호연이 입술을 벌리고 한숨을 내쉬자 얄미운 표정을 한 그가 벌어진 입술 안으로 귤을 밀어 넣었다. 안호연은 반사적으로 귤을 씹으며 냉장고에 붙은 사랑문을 보았다. 그가 사랑문이라고 명명했으나 사실은 창피한 글이었다. 쉽다고 덜컥 물었는데 결국은 벌이었다.
* * *
수치스러운 사랑문이 냉장고에 3장이 붙었다. 안호연은 새로 붙은 사랑문을 볼 때마다 수치스러워 죽을 지경이라 냉장고를 피해 다녔고 웬만해선 사랑문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때마다 강중영은 앨범이라도 만들어야겠다며 웃었다. 손발이 오그라들어 숨도 쉴 수 없는 상태라 안호연은 틈만 나면 냉장고에 붙은 사랑문을 뜯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얼른 출근하라고 등을 떠밀어도 나가지 않던 그가 3일의 긴 휴식 끝에 출근했다. 그가 현관에서 사라지자마자 안호연은 이때다 싶은 마음에 냉장고로 달려갔다. 이미 사랑문은 작성돼 아웃 개수가 줄어들었으니 얼른 없애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막 그걸 떼려고 할 때 사랑문 위에 보지 못했던 조그만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중영 형아 정말 사랑해.]라고 끝나는 종이 옆에 [나도.]라는 포스트잇이 [중영 형아 결혼하자.]라고 끝나는 종이 옆엔 [당연하지.]라는 포스트잇이 한 몸처럼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호연은 가만히 뒤로 물러섰다. 저렇게 예쁜 답변을 써 놓은 사랑문을 떼어 버릴 수가 없었다. 어휴, 작은 한숨을 내쉬던 그는 멀찍이 떨어져 냉장고를 봤다. 종이가 여러 장 붙어 있으면 지저분해 보일 텐데 그의 손이 닿아 정렬되어 있었다. 멍청하게 그걸 보던 안호연은 볼을 붉혔다. 그러곤 작게 헛기침을 하곤 뒤돌아섰다. 강중영은 지독하게 머리가 좋았고 안호연은 그걸 잊어버리곤 했다. 막 소파에 앉아 강중영이 챙겨 놓은 귤을 까 먹던 안호연은 어디선가 들리는 벨소리에 걸음을 옮겼다. 보통 강중영은 문자로 연락했다. 그런데 벨이 울리니 낯설었다.
침실 협탁 위에서 엎어져 우는 휴대 전화를 뒤집자 ‘어머니’라는 문구가 떴다. 예전에 강중영 집에 인사드리러 갔을 때 받은 번호였다. 안호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허락 없이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 게 예의는 아니었다. 예의라곤 쥐뿔만큼도 없지만, 강중영의 어머니이니 예의는 지키고 싶었다.
“여보세요.”
[안호연 씨, 저 이선영이에요.]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생각보다 잘 지냈어요. 호연 씨는요?]
“부족함 없이 지내고 있어요.”
[근방에 왔다가 호연 씨 보고 싶은데, 오늘 만날 수 있을까요?]
조금 경직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늘 다정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낮자 조금 걱정이 되었다.
[집은 안 될 것 같고 바깥에서 만나면 좋겠어요. 그 근처 사거리 은행 옆에 카페가 있는데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갑자기 그녀가 제안한 만남에 아, 소리를 낸 안호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중영 씨에게 말하고 나갈게요.”
[아뇨, 중영이에겐 말하지 말고 혼자 나와요. 부탁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안호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속 안에서 내적 갈등이 일었다. 몰래 나갔다 오는 건 그를 속이는 일이었고, 그렇다고 강중영에게 알리면 이선영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일이다. 잠시 속에서 갈등하던 안호연은 강중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호연에게는 그의 어머니보다 강중영이 먼저였다. 긴 신호음이 이어져도 상대방은 응답하지 않았다.
[회의 중.]
[도착했어요.]
강중영과 이선영에게서 동시에 날아든 문자를 보던 안호연은 한숨을 내쉬고 드레스룸으로 갔다. 그는 외출하길 원했고 마냥 강중영의 대답을 기다릴 수 없어 먼저 외출할 생각이었다. 급작스럽게 늘어난 배 때문에 맞는 옷이 없어 한참 드레스룸을 뒤적거렸다. 한참 뒤적거리던 안호연은 최근에 강중영이 구입한 옷을 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오랜만에 하는 외출이라 바깥의 찬바람을 그대로 맞는 게 어색했다. 올해 겨울은 따듯하다더니 다 거짓말이었다. 몸을 강타하는 바람에 뺨과 코가 시렸다. 유난히도 시린 배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두 손으로 배를 받치니 딸기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여느 평범한 부모처럼 아이에 대해 애정을 드러내는 건 아니지만, 점점 아이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다
바깥으로 나간 안호연은 언 길에 미끄러지지 않게 발끝에 힘을 주고 걸었다. 느릿느릿 언덕을 내려간 안호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거리로 나왔다. 은행 옆 카페를 눈으로 확인한 그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사람이 얼마 없는 카페에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어머니!”
안호연은 어색한 그 말을 혀로 굴리며 뛰어갔다. 반가웠고 강중영만큼 좋은 사람이었다.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이자 그녀도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얼른 앉으라는 듯이 손짓했다.
“더 화사해지신 것 같아요.”
어색한 분위기를 띄우려 안호연은 부러 아부의 말을 늘어놨다. 그녀는 안호연을 빤히 보더니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호연 씨도 더 보기 좋아졌네요. 요즘 중영이는 점점 말라 가던데.”
그녀가 차가운 물을 마셨다. 그녀의 분위기나 말투로 보아 좋은 이야기가 오가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처음으로 느낀 이상한 찬기에 안호연은 숨조차도 조심스레 쉬었다.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중영이 엄마니까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이제부터 호연 씨한테 듣기 나쁜 말과 어쩌면 강압적으로 느낄 수도 있는 말을 할 거예요.”
혼잣말 같은 말을 그녀가 속삭였다.
“더 길게 말 안 할게요. 떠나 줘요. 호연 씨가 처음에 어떤 의도로 접근했는지 다 알아요. 아이도 어쩌면 중영이 애가 아닐 수 있다는 것도요. 태범석 씨에게 다 들었고 중영이에게 돈을 돌려준 것도 들었어요. 처음에는 그럴 의도로 접근했지만, 지금은 진심인 것도 알아요. 근데요.”
이선영은 잠시 뜸을 들였다.
“과거가 어떻든 중영이가 좋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데 다른 알파와 각인한 오메가는 제 집에 들일 수가 없어요.”
안호연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 부분까지 태범석이 이선영에게 말했을 줄은 몰랐다.
“중영이가 지배자형 알파라는 선고를 받았을 때, 앞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할 거란 말을 들었을 때, 아이가 아무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할 거라고 했을 때 거리를 유지하려고 눈물이 날 정도로 노력했어요. 부담스럽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려고, 혼자 이해하려고 애썼죠. 왜 그런지 알 거예요. 중영이에겐 허용 밖의 사람은 다 똑같은 사람이잖아요.”
“…….”
“그런 지배자형 알파들이 숨 쉴 수 있는 곳이 어딘지 알아요? 바로 각인한 오메가예요. 그들은 각인한 오메가에게 안정감을 느껴요. 호연 씨와 함께 있으면 중영이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해요. 이만 놓아줘요. 더 좋은 사람을 찾아갈 수 있게. 부탁해요.”
부탁한다며 그녀는 안호연의 손을 꽉 쥐었다. 지배자형 알파라는 건 생소했고 어떤 건지 몰랐다. 안호연에게 그는 지배자가 아닌 그냥 평범한 남자였다. 강중영. 그냥 강중영이었다.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으려는 중영이가 가엾잖아요, 호연 씨. 돈이라면 원하는 만큼 다 드릴게요. 아이요, 그게 누구 아이여도 내가 책임질게요. 정말 미안해요. 미안해요, 호연 씨. 근데 중영이를 좋아하면 이런 이기심 부리면 안 되잖아요.”
손을 꽉 잡은 채로 애원하는 그녀가 무서웠다. 무섭게 소리치고 머리채라도 잡았다면 이를 악물고 안 된다며 버티기라도 할 텐데 온전히 강중영을 위해서 말하는 그녀를 보니 속이 아렸다.
“부탁할게요, 중영이를 위해서 생각해 줘요.”
조금은 허탈했다. 헤어져 달라고 강요를 받은 건 안호연인데 그녀가 눈물을 글썽였다. 잘못된 풍경이었다.
“어머니.”
“알아요. 알아요. 내가 엄청난 사람이라는 거. 염치없는 거. 근데 호연 씨와 함께하면 중영이는 평생 외로워야 하잖아요.”
“…….”
강중영이 안호연에게 그토록 각인을 원했던 이유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또 그가 안호연을 선택하면서 포기했던 것들도. 어떤 마음으로, 어떤 심정으로 모든 걸 내려놓았는지 알게 되었다. 자신을 위해 서슴없이 정관 수술을 하겠다던 그를 떠올리니 안호연의 단단한 입매가 무너졌다. 그는 안호연에게 좋은 집이 되어 줄 수 있었으나 정작 자신은 그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안호연의 눈이 테이블로 향했다.
“내가 중영이를 사랑하는 만큼 호연 씨도 중영이를 사랑한다면 똑같은 결론이 날 거예요.”
똑같은 결론. 이기적이지 않은 마음. 그건 강중영을 떠나 달라는 말이었다.
“지금 호연 씨가 족쇄에 묶여 있어서 중영이가 버리지 못하는 거지 스스로 족쇄를 박차고 나가면 찾지 않을 거예요. 장담해요. 꼭 그 자리에 호연 씨가 있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고요. 중영이가 걱정돼서 떠나지 못하겠단 변명은 하지 않았으면 해요. 그건 호연 씨도 알겠죠. 이건 호연 씨를 위한 일이라고도 생각해요. 평생 중영이가 호연 씨 옆에서 방황하길 바라진 않겠죠?”
그녀는 유하고 마음이 여렸으나 한쪽으론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단단했다. 수많은 가설을 생각해 보고 안호연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벽을 세웠다.
“모쪼록 좋은 결론이 나길 바랄게요.”
좋은 결론, 똑같은 결론. 결론, 결론, 그 단어가 머릿속을 뱅뱅 떠돌았다. 그녀가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안호연도 따라 일어나자 이선영은 더 앉아 있다고 나오라고 말했다. 멍하니 이선영이 마시던 물컵을 바라보다 그는 한숨 같은 웃음을 내뱉었다. 머리를 비우려고 했다. 어차피 모든 건 강중영과 합의된 일이었다. 서로 마음도 확인했다. 물론 그의 부모님이 알면 이런 반응이 나올 거란 것도 알아 놀랍지도 않았다.
못된 새끼, 태범석 이 개새끼. 태범석에게 욕을 퍼부어 대던 안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잠시 스쳐 지나가는 고약한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안호연은 달달 떨리는 손가락으로 눈가를 눌렀다. 불안한 마음에 집으로 돌아가려고 마음먹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익숙한 대문 앞에 선 안호연은 쉽게 그 문을 열지 못했다. 잠시 문을 잡고 고민하던 안호연은 그대로 뒤돌아섰다. 사람이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지 깨달았기 때문에 강중영의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자신은 그의 집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다. 자신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강중영은 모든 걸 희생해야 했다. 본인의 것을 가지지 못한 채 고독해야 했고 또 자신을 위해 피임 수술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그의 삶이 안호연에 의해 파헤쳐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안호연은 강중영을 고려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아이가 누구 아이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강중영에게 매달렸다. 그는 안호연을 버리려고 일차적으로 마음을 먹었었고, 안호연이 족쇄를 떠나 주기 바랐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런 강중영의 말을 무시하고 안호연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자신의 감정은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선택이었을까. 사랑을 하는 건 강중영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하면서 모든 책임을 떠맡은 사람도 강중영이었다. 자신이 와 인생이 파괴되었다던 남자가 눈에 어른거려 안호연은 힘주어 눈을 감았다.
안호연이 족쇄를 벗고 떠난다면 이선영의 말대로 강중영은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다. 더 좋은 사람과 더 나은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각인한 오메가의 품에 정착해 그가 꿈꿔 왔던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으로 모든 게 해결될 거라는 우스운 말은 믿지 않으면서도 그에게 매달린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서 쓰레기 냄새가 풀풀 풍겼다. 안호연은 그대로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정신없이 걷다 보니 점점 시야가 어두워졌다. 사람이 없던 거리에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매서운 바람이 안호연의 몸을 마구 강타할 때 비로소 걸음을 멈출 수가 있었다. 오랜만에 술을 마시고 싶었다.
그는 고민도 없이 근처 술집으로 들어가 뜨거운 국과 소주를 주문했다. 잔에 소주를 따라 놓고 보기만 했다. 국이 버너 위에서 졸아도 안호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따라 놓은 소주에 먼지가 쌓이고 안호연의 감정에도 먼지가 쌓여 갔다. 주머니 속 휴대 전화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배터리가 다 닳아 꺼질 때까지 휴대 전화는 쉴 새 없이 울어 댔다. 그러나 안호연은 미처 그것을 꺼낼 수 없었다.
외로웠다던 강중영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온전한 자신의 걸 가지고 싶었다는 남자를 떠올리니 술이 더욱 간절해졌다. 안호연은 그가 청혼했을 때 준 반지를 매만지다가 먼지가 쌓인 술을 다른 그릇에 따라 내고 다시 잔을 채웠다.
“버너 좀 꺼요.”
매캐한 연기가 오르는 냄비를 보곤 점원이 달려왔다. 국이 졸아 양념이 타고 있었다. 그는 주의를 주며 버너를 껐다. 그제야 무념에 빠져 있던 안호연은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갑을 열자 돈이 하나도 꽂혀 있지 않았고 카드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강중영의 카드로 계산하곤 밖으로 나갔다. 긴 한숨을 내쉬자 입술 밖으로 한숨과 함께 입김이 새어 나왔다. 하얀 입김이 흩어져 자취를 감추자 안호연은 그대로 쭈그려 앉았다. 갈 곳이 없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그런데 원래 안호연에게는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딱히 슬플 일도 아닐 텐데 서글펐다.
“안호연!”
머리 위로 분노가 실린 고함이 쏟아졌다. 고개를 위로 올리자 그곳에 강중영이 있었다.
“여기 있는 거 다 알아요. 멍청하게 내 카드로 긁고 다니면서 티를 내고 다니면 모를 줄 알았어요?”
“도망가려던 거 아냐. 술을 마시고 싶었어.”
“임산부가 무슨 술이에요.”
“먹지 않았어. 기분만 내려고 했어.”
그는 화를 참으려는 듯 숨을 골랐다. 그러곤 주저앉아 있는 안호연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알아요, 압니다. 이제 가요.”
“네가 알긴 뭘 알아!”
도대체 네가 뭘 아냐고 묻고 싶었다. 자신이 느꼈던 감정과 자괴감은 그가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안호연이란 사람이 되지 않고선 모를 감정이었다. 자신이 살아왔던 환경과 사고방식이 아니라면 모른다. 아무런 확신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겁이 날 뿐이었다. 사랑으로 이겨 낼 수 없는 게 많았고 꼭 사랑이라고 모두 이뤄지고 함께 살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짧다면 짧고 길면 긴 인생을 살아 놓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냥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면 끝나는 일이었다. 이렇게 가볍고 간단한 일을 어째서 주저하는지 모르겠다.
“우선 집에 가서 이야기해요. 여긴 사람들이 많고 우릴 아주 이상한 사람으로 보니까. 당신을 구경거리로 만들기 싫어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호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억울하고 짜증이 나 입을 닫았다. 그는 안호연의 팔을 낚아채 차로 발을 옮겼다. 조수석에 안호연을 태우고 도망가지 못하게 안전벨트를 채웠다. 문을 닫은 그가 운전석에 올라타 핸들을 잡았다.
“갑자기 태범석이 보고 싶어.”
그 지랄 맞은 이름을 입에 올렸다. 태범석이 보고 싶었다. 보는 순간 그의 뺨을 세차게 내리치고 싶었다. 강렬한 시선이 관자놀이 부근에 닿았다.
“누가 그랬잖아. 알파와 오메가는 고도로 발전한 인류 같아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들만큼 본능적인 사람도 없다잖아. 가끔 혼자 있을 때면 태범석이 보고 싶어.”
“그 입 다물어요.”
그가 쉭쉭 기분 나쁜 숨을 내뱉었다.
“그래서 겁이 났어. 지금이야 괜찮지만 시간이 흐르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흐려지게 되면 후회하지 않을까 겁이 나. 지금 내가 하는 고민이 비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어? 너도 이 시간이 흐르면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그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도 돼요.”
“아니, 지금 생각해! 지금 생각하란 말이야! 그때 가서 구질구질하게 내 탓 하지 말고 지금 생각해!”
“미래를 지금 단정하지 못해요. 불확실한 약속은 안 하는 주의고요. 그래도 하나 약속할 수 있는 건 호연 씨를 책임질 거라는 거예요.”
“책임? 마지못해서 지는 그런 책임?”
“호연 씨, 지금 흥분한 상태예요. 목소리 낮춰요. 운전 중이에요. 제 손에 목숨 세 개가 달렸어요. 자극하지 마요.”
안호연은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강중영은 이성적이려고 노력했다.
“우린 불완전해.”
“입 다물라고 했잖습니까.”
그제야 인정했다. 둘은 불완전했다. 누군가 와서 조금만 흔들어 놓으면 좌우로 마구 흔들리는 관계였다.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안호연은 불완전하다고 속삭였다. 갑자기 차를 세운 강중영은 핸들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감정을 조절하려고 했다. 차에서 내린 그가 안호연에게 내리라고 명령했다. 내리지 않고 버티자 그가 문을 열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리고 안호연을 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당장 족쇄 차요.”
“넌 누구라도 족쇄를 차면 다 사랑할 수 있잖아?”
그게 상처라는 걸 알면서도 안호연은 긁었다.
“지금껏 족쇄를 찬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 사랑한다고 오해하는 거잖아.”
“내 감정을 모욕하지 마세요.”
“족쇄를 차지 않으면 넌 손끝 하나 건들지 않을 거잖아.”
“그렇게 나를 상처 내서 호연 씨에게 남는 게 뭐예요?”
그를 상처 내고 남는 건 상처뿐이다.
“아이도 누구 아이인지 불분명하고.”
“아이는 누구 아이여도 상관없습니다. 그 아이가 누구 아이인지는 논외 밖이라고요.”
“왜?”
“안호연 씨가 낳으면 다 제 아이입니다.”
안호연은 늘 저 말에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그는 자기 아이라고 무작정 우기지 않았다. 안호연이 낳았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라고 말했다. 침을 삼키고 그를 응시했다.
“너, 이 아이가 누구 아이인지 알고 있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을 보고 확신했다.
“내 아이예요.”
“왜 넌 네 아이라서 내 아이라는 말을 안 해. 뭘 알고 있는 거지? 뭘 숨기는 거야. 말해. 말하라고.”
강중영이 음산한 눈으로 안호연의 배를 보았다.
“의사가 4개월 차에 접어드는 아이보다 크다더군요. 마치 5개월 차에 접어든 아이처럼.”
안호연의 아래 눈꺼풀이 펄떡 뛰었다. 정확하게 한국에 오기 전 태범석과 잠자리를 가졌을 때와 맞아떨어졌다. 독일 호텔에서 태범석과 히트사이클을 보낼 때 생긴 아이였다.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갑자기 오한이 들어 온몸이 떨렸다. 배 속의 아이가 태범석의 아이라는 확신이 떨어지자 몸이 비틀거렸다. 염치없고 가슴이 먹먹해 안호연은 두 주먹으로 강중영을 때렸다.
“그걸 왜 지금 말해? 더 일찍 말했어야지!”
“상관없는 일이라서요.”
그가 무릎을 꿇고 앉아 안호연의 발에 족쇄를 채워 주려고 했으나 안호연은 그의 손을 밀어내며 감았던 눈을 떴다.
“채우지 마. 누구 아이인지 확실해졌으니까 더는 못 하겠어.”
“뭘 못 하겠다는 말이에요?”
“아이 핑계로 위자료를 받으려고 여기에 남아 있었어. 거지 같은 족쇄나 채우는 변태를 참아 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사랑? 이따위 거 채우고 사랑 같은 소리 운운하지 마. 사기꾼 말을 덥석덥석 믿어? 우리 같은 사람이 본능을 어떻게 이겨. 널 사랑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안호연.”
“아무리 돈만 밝히는 사기꾼이어도 더는 못 하겠다. 지긋지긋해. 너도 나 잡을 이유 없잖아. 이제 족쇄도 안 차겠다는데 네가 어쩔 건데?”
“사랑한다는 말도 거짓말이었어요?”
강중영이 조용한 목소리로 안호연에게 물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 목소리가 지금 그의 심정을 알려 주었다. 비참하고 화가 나고 어이없겠지.
“사기꾼 말은 믿지 말고 족쇄 찰 다른 사람이나 구해.”
안호연은 은근 그의 질문을 돌리며 돌아섰다. 솔직히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매몰차게 굴지 않으면 그가 돌아와 잡을 것 같아서. 솔직히 상처 내는 말을 수없이 많이 하고 그가 잡아 주길 바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잡으러 오지 않았고 안호연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향해 걸어갔다. 슬프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서로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울지 않았다.
모두 제자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