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사람이 얼마 없는 레스토랑에 남자 둘이 식사 중이다. 주문해 놓은 음식이 줄줄이 나와 두 사람에게 포만감을 주었다. 배가 불러 잠들 것 같은 포만감이 두 사람을 감쌀 때 태범석은 앞에 앉아 있는 남자 오메가를 응시했다. 오메가를 보고 있으나 머릿속엔 온통 안호연 생각으로 가득했다.
태범석은 처음부터 안호연을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강중영의 시야를 가리기 위해 우선 안호연을 던져 주긴 했지만 앞으로 안호연이 벌어다 줄 돈이 상상을 초월했다. 더구나 안호연은 제가 소유한 유일한 오메가였다. 고작 강중영이 준 1억을 벌고자 안호연을 버릴 생각은 없는데, 안호연에게서 여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원룸에 놓아두었던 카드와 캐리어가 사라진 걸 확인했는데도 연락이 없었다.
애를 낳고 나서 연락하려는 건가. 그래도 한 번쯤은 연락이 올 법도 한데 안호연에게서 감감무소식이다. 그가 찾아오지 않으리란 예시는 남자의 머릿속에 없다. 각인한 오메가가 도망갈 수는 없다. 각인한 알파의 송곳니를 뽑지 않는 한 도망갈 수가 없었다.
흐음. 소리를 내자 앞에서 밥을 먹고 있던 오메가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얼마 전 테이크 아웃 커피점에 갔는데 저 오메가가 태범석의 등을 두드렸다. 수줍은 얼굴로 태범석의 번호를 물었던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니 안호연이 생각나 전화번호를 주었다.
그러다 며칠 전 둘 사이가 연인 관계로 진행됐다. 그가 연인을 둔 건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섹파는 두어도 연인을 두지 않는 게 그의 모토인데, 요즘 짜증스러운 일이 늘어 홧김에 앞에 앉은 오메가와 사귀게 되었다. 그래도 주은성은 잠자리에서 앙큼하게 굴었고, 무엇보다 그는 태범석의 과거를 모른다. 그저 번지르르한 겉모습, 괜찮은 집, 괜찮은 차를 타고 다니는 사업가로 인식하고 있었다. 자신의 바닥을 모르는 근사한 모습만 기억하는 그가 괜찮기도 했다.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비추지 않아 편했다. 안호연과 있으면 자신의 더러운 부분이 투영되었다.
“슬슬 결혼이나 할까?”
“저랑요? 저 아직 학생이라 대학교 졸업하려면 2년 더 남았어요.”
누가 너 같은 놈이랑 결혼한다고. 너랑 할 거면 차라리 안호연과 하는 게 낫지. 아니, 이런 류의 오메가와 결혼해도 괜찮을 거 같긴 했다. 순종적이고 맹했으므로 따로 안호연을 만나도 모를 거 같았다. 태범석은 죽을 때까지 안호연을 데리고 갈 생각이다. 안호연은 태범석이 처음으로 소유한 오메가였다.
태범석은 기회주의자이긴 해도 독신주의는 아니었다. 괜찮은 오메가나 여성을 만나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게 그의 최종 꿈이었다. 아름답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데 미안하게도 안호연은 제격이 아니었다. 그와 가정을 꾸리면 지저분하고 오물이 섞인 가정이 될 뿐이었다. 그래서 독신주의라며 그에게 벽을 치긴 했으나 안호연이 아이를 낳고 싶다면 하나 정도는 줄 생각이었다.
안호연을 생각하니 조금 이가 갈렸다. 그렇게 자기 아이를 가지겠다고 노래를 불렀으면서 덜컥 다른 알파의 애나 배다니. 그렇게 다른 알파와 잠자리를 가질 때 조심하라고 일렀는데 멍청하게 임신할 때까지 아무 조치도 안 하다니. 이러니 안호연이 제격이 아니라는 거였다.
엉덩이가 가볍고 더럽게 운이 없으니까. 씨발, 그 배 속에 있는 게 자신의 아이였다면 이렇게 기분이 더럽진 않을 텐데. 싫다고 해도 제 아이를 임신한 안호연을. 떠올리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의 배며 가슴에 자신의 페로몬을 묻히는 상상을 하니 아랫배가 아팠다. 기분 좋은 상상이었다.
만약 안호연이 안 돌아오면? 그 새끼와 애새끼 낳고 살면? 그 새끼 애 뱄다고 도망간 거라면?
절대 그럴 일은 없었다. 과거의 안호연이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이럴 때면 안호연을 꾀어 각인한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짜증스레 포크를 내려놓는 태범석을 보며, 앞에 앉아 있던 주은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범석 씨, 화났어요?”
“됐어. 먼저 밥 먹어. 어디 갔다 올 테니까.”
태범석은 옆 의자에 걸어 두었던 재킷을 낚아채 밖으로 나갔다. 뒤로 주은성이 따라왔다. 태범석이 갑자기 돌아섰다.
“나 그만 따라다니고 그만 가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슨 말이긴, 헤어지잔 말이지. 생각해 보니까 너 내 섹파 닮아서 사귀었는데 걔보다 별로야.”
“뭐라고요? 야, 이 미친 새끼야!”
“그니까 사람 번드르르한 모습만 보고 사귀지 말았어야지. 인생 경험 했다고 생각해.”
“노팅도 못 하는 씨 없는 수박 새끼가! 내가 좋다고 따라다니면 고마워해야지.”
그건 태범석의 치부였다. 노팅을 못 하는 알파만큼 치욕스러운 건 없었다. 화가 나 씩씩대는 주은성을 두고 태범석은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잠시 차에 앉은 태범석은 핸들을 주먹으로 내리치더니, 흥분해 근처의 비뇨기과로 갔다. 무슨 일로 왔냐고 묻는 간호사에게 태범석은 바로 걸어갔다.
“예전에 정관 수술을 했는데 복구하려고 왔어요.”
“젊은 나이인데 하셨어요?”
“그때 연인이 어렸거든요. 이제는 2세 생각도 할 나이라서 다시 복구하려고요.”
“아, 그렇죠. 정말 잘 오셨어요. 오랫동안 유지하시면 불임이 되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혹시 알파분이세요?”
“네.”
“아, 그러면 정액 검사부터 하셔야 할 거 같아요. 종종 알파 중에 묶어 놓았던 정관이 개통되는 일이 종종 일어나거든요.”
간호사가 빙긋 웃으며 무언가를 작성했다. 우선 필요한 검사 먼저 할게요. 방긋 웃던 간호사가 어디론가 안내하더니 작은 통을 건네주었다.
“여기에 정액을 담아서 건네주시면 돼요.”
웃음이 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비싼 밥을 먹고 있던 주은성이라도 데려올걸. 허탈한 웃음을 지은 태범석은 컵을 들고 검사실로 들어갔다. 대충 바지를 내리고 드로어즈까지 내린 그는 페니스를 잡았다. 그러나 페니스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축축 처졌다.
땅에 떨어진 자갈처럼 주변에 섹파가 많았기 때문에 한 번도 자위를 해 본 적이 없었다. 혼자서 하는 방법은 아나 흥분이 되지 않았다. 페니스를 잡고 흔들어도 별 느낌이 없었다. 멍하니 천장을 보던 태범석은 누군가를 떠올렸다. 눈을 감자 작은 방이 나타났다.
항상 침대 옆을 데워 주던 몸. 이불을 열면 작은 몸이 드러났다. 안호연은 항상 허리를 구부리고 모로 잤다.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는 게 아이 같아서 태범석은 자주 새끼손가락을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그러면 그는 젖병을 빨 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손가락을 무는 게 간지럽고 전립선이 짜릿해, 자는 안호연의 뺨을 두드리곤 했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깊은 잠에 잠식된 눈이 나타났다. 초점이 흐린 눈은 신비로웠다.
‘왜애?’
‘하자, 존나 하고 싶어.’
잠이 덜 깬 안호연은 손등으로 눈을 비비더니 느릿느릿 모로 누운 몸을 옆으로 돌렸다. 태범석은 거북이 같은 안호연에게 키스를 퍼부으며 준비가 덜 된 몸을 열고 페니스를 꽂아 넣었다. 작게 신음을 흘린 안호연이 못됐다며 고양이처럼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울며 자신의 등을 긁어 댔다. 힘 있게 페니스를 밀어 넣고 안을 휘저었다.
과거를 상상하던 태범석의 성기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더니 몇 번 손을 움직이지 않았는데 분수처럼 정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빌어먹을. 고작 상상만으로 가 버렸다. 작게 욕을 한 태범석은 컵에 정액을 긁어 넣었다. 안호연을 떠올리며 자위를 했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는 언제나 먹기 쉬운 불량 식품이었다. 싸서 쉽게 먹을 수 있었고. 그런데 입맛에 지나치게 맞아 중독성이 있었다. 옷을 정리하고 일어선 태범석은 간호사에게 하얀 정액이 담긴 컵을 내밀었다.
“검사 결과는 금방 나와요. 결과와 함께 수술 여부는 원장님과 함께 상담하시면 될 거에요.”
팔짱을 낀 태범석은 자리에 앉았다. 짜증스레 머리를 넘기며 또 휴대 전화를 보았다. 예전엔 별로 생각나지 않던 안호연이 자꾸 떠올랐다. 떠올라서 짜증이 났고, 방금 또 떠올라서 짜증이 났다. 매일 자기 생각으로 산다던 안호연이 이토록 연락하지 않는 이유가 뭔지 고민했다.
“태범석 씨,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태범석은 진료실로 들어갔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의사가 안경 너머로 태범석을 보고 있었다.
“정관 수술 복구하러 오셨다고요.”
“뭐, 그렇죠.”
“좋은 결정이시네요. 특히 알파가 정관 수술을 하는 건 아까운 일이죠.”
그가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모니터를 응시하며 마우스를 누르던 의사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근데 딱히 필요 없어 보이는데요. 이미 개통되었거든요. 정자 수도 일반인 남성보다 많은 편이고요.”
“네? 그럴 리가요. 복구 수술을 받은 적이 없는데요.”
“아, 종종 이런 일이 생깁니다. 주기적으로 밤을 보내는 상대가 있다거나 뭐, 흔치 않지만 각인한 오메가가 있다면 이런 일이 흔하죠. 알파들이 자손을 남기려는 성질이 우수하잖습니까.”
“노팅도 되지 않는데요?”
“시도하지 않으신 거겠죠.”
그의 말대로 태범석은 한 번도 노팅을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
“제게 페로몬도 나오지 않아요.”
“아니요, 희미하게 나는데요. 정관 수술을 하면 냄새로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의 페로몬이 나오는데, 태범석 씨 페로몬이 제게 느껴질 정도면 원활히 활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자각하지 못하셔서 본인이 일부러 누르는 걸 수도 있고요. 사람들이 언제부터 페로몬이 느껴진다고 하던가요?”
너한테 냄새가 희미하게 나기 시작했어. 오랜만이다, 네 냄새.
언젠가 안호연이 그런 말을 하며 웃었다. 그게 2년 전이었다. 태범석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2년 전?”
“네, 그때부터 개통된 것 같네요. 페로몬과 호르몬 치료를 병행하면 페로몬도 금방 정상적으로 흘러나올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저도 누군가를 임신시킬 수 있단 말이네요?”
“네, 뭐, 그렇죠. 이 정도면, 뭐.”
“그럼 그 새끼가 밴 애도 내 애일 수도 있다는 건데?”
“그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태범석은 갑자기 입술 끝이 뒤틀리더니 진료실 밖으로 박차고 나갔다. 그러곤 제임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 친구. 무슨 일이야?]
“제임스, 일 똑바로 안 해? 지금까지 안호연에게 연락이 없으면 네가 회수를 해 와야지.”
[우리 호연이 잘 지내고 있던데. 이선영 여사님이 거듭 고맙다고 선물까지 보냈지 뭐야. 딸기를 그렇게 좋아하는 걸 보면 귀여운 딸일 거라면서 그 집에서 엄청 좋아하더라.]
“챙길 거 다 챙겼으면 그만 접어. 어차피 그 집에서 뱉어 낸 금액이 총 20억이 넘어.”
[왜? 호연이가 거기에 정착하면 좋겠던데. 우리 호연이가 너 만나서 그렇지 어디 가서 사랑 못 받을 애는 아니잖아. 3개월이 넘도록 연락도 안 되길래 조사해 봤는데 둘이 금실이 좋다고 소문이 파다해. 그쪽 가족하고 교류도 잘하는 편이고 아이까지 생겼잖아. 그 집에 정착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데 너도 그 생각으로 호연이 보낸 거 아니었어?]
“내가 걔를 어떻게 보내? 걔 내 거라는 거 잊었어?”
[사람에게 누가 소유권을 주장해. 호연이는 호연이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웃기지 말고 데려와. 안호연은 내 거였어. 지금 그 새끼한테 뺏겨서 죽겠는데, 내 애까지 뺏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그게 어떻게 네 애야?]
“내가 사기꾼이어도 내 거 네 거 구분 하나는 잘하거든?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뺏길 순 없어. 네가 회수 안 하면 내가 데려올 거야.”
[정관 수술 했는데 뭔 소리냐?]
“씨발, 2년 전부터 개통됐다더라. 생각해 봐. 안호연 배 속에 있는 게 하룻밤 잔 놈 애겠어, 히트사이클 기간도 가득 채워서 나랑 보냈던 내 애겠어?”
[……무슨 소리냐?]
“그건 내가 하고 싶은 소리야. 나더러 내 새끼가 다른 새끼 손에 키워지는 걸 보라고? 그것도 변태 새끼 손에? 네가 날 잘 모르나 본데 내가 개새끼여도 내 새끼까지 버릴 놈은 아니야. 내가 적어도 내 걸 뺏길 놈은 아니잖아.”
조금 질투가 났다. 낯선 감정이긴 해도 그걸 명명하려면 그것밖에 없다.
[야아, 이건 내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다. 우선 호연이가 알아야 할 거 같은데.]
“그니까 안호연 내 앞에 데려오라고. 네가 그쪽에서 받은 10억 토해 내.”
[이미 그 금액 강중영이 중간에서 채 갔는데 토해 낼 게 어디 있다고.]
“안호연 돌아오면 그것보다 더 벌 수 있다니까.”
[난 모르겠다. 이제 네가 진행하는 일에서 손 떼고 싶어. 곧 고객하고 면담 있으니까 일단 끊고 나중에 이야기하자.]
전화가 끊기자 태범석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갑자기 몰아친 폭풍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정신없는 와중에도 한 가지 목표는 뚜렷했다. 어떻게든 자신의 걸 찾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범석은 전화번호부에서 이선영의 연락처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머, 태 사장님.]
“안녕하셨죠?”
[그럼요. 우리 호연이 임신했다는 거 알죠?]
“그럼요.”
[얼마 전 호연이가 왔다 갔어요.]
태범석의 입술에 미소가 맺혔다. 강중영은 안호연이 왜 접근하게 된 건지 집안에 전혀 알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이 쉬워졌다. 이런 집안일수록 일을 덮으려고 할 테니까. 태범석은 잃을 게 없었다. 이미 강중영이 돈을 수거해 간 상태라 자신이 돌려받을 것만 남아 있었다. 안호연.
“저, 할 이야기가 있어요.”
[뭔데요?]
“호연이 이야기죠.”
[그럼 만나죠. 언제가 좋을까요?]
“시간은 여사님 스케줄에 맞추면 돼요. 시간 잡아서 연락 주세요.”
[그러죠.]
전화가 끊기자 태범석의 입가에 맺혔던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 * *
지옥 같았던 입덧 시기가 지나가고 무서운 식욕이 찾아왔다. 꿈에서조차 먹는 꿈을 꿀 정도로 무서운 식욕이었다. 평소보다 대폭 늘어난 양의 음식을 먹고 운동량도 없고 배 속의 아이까지 크니 살이 급격하게 쪘고, 몸무게도 무서울 정도로 늘자 의사의 경고가 따라왔다. 임신 중독증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무턱대고 먹는 것보다 체중 관리를 하며 먹는 게 좋을 거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그 말을 강중영은 무섭게 수용했다,
매일 머리 위에 두고 먹었던 과자들은 모조리 사라졌고 10시 이후에는 금식이었다. 또 그는 저녁에 간단히 산책하자고 설득했으나 12월에 접어들어 밖에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꾀가 많은 안호연이 추운 날씨를 두고 완강히 거부하자 그가 한발 물러섰다. 대신 먹는 양을 줄여 나가고 있는데, 그게 쉽게 되지 않곤 했다. 큰 요인 중 하나는 강중영이었다. 그는 안호연이 살쪄도 예쁘다고 수없이 말했고 시간 때만 맞으면 안호연이 먹고 싶다는 건 곧잘 만들어 주곤 했다.
안호연은 TV를 시청하는 남자 옆에 앉았다. 안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옷을 입지 않는 게 규칙이라 안호연은 나체였다. 맨살에 그의 잠옷이 쓸렸다. 누군가 보면 춥다고 타박할지 모르겠으나 집 안은 조금만 움직여도 더울 정도로 뜨거웠다. 밖과 안의 온도 차이가 상반돼 그 증거로 거실에 있는 유리 벽에 하얀 김이 차곤 했다. 그리고 안호연은 옷을 벗고 있는 게 편했다. 성기에 찬 링 때문에 바지나 드로어즈가 번거로웠다.
“쫄깃쫄깃 오동통통 농심 너구리~.”
TV에서 맛있게 라면을 먹는 아이들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 감탄사를 내던 안호연은 침을 삼켰다. 맛있게 라면을 먹는 아이들을 보니 라면이 먹고 싶어졌다. 뒤돌아 시간을 확인하자 이미 야식 금지령이 내려진 시간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안호연은 고픈 배를 만졌다. 4개월 차로 접어드니 아랫배가 확실히 불러 왔다. 손바닥으로 배를 둥글게 쓰다듬자, 남자가 안호연의 허벅지를 잡아 내렸다. 그러곤 안호연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뚫어지게 배를 보았다.
“이 녀석은 언제 나올까요?”
“딸기라는 이름 두고 녀석이 뭐야?”
안호연이 강중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머리에서 샴푸 냄새가 났다. 강중영은 배에 가만히 귀를 가져다 댔다.
“정말 배 속에 있는 거겠죠?”
“얼마 전에 초음파 사진도 봤잖아.”
“꼼짝도 안 하는 게 신기해서요.”
“곧 움직일걸?”
“그럼 이건 언제 써 볼까요?”
그가 둥그런 에그 진동기를 어디선가 꺼내 와 내밀었다. 오래전에 색다르고 즐거운 섹스를 외치며 구매했던 거였다. 그러나 의사가 건강상의 이유로 얼마간 건전한 섹스를 권해 미뤄 두었던 물건이다.
“아이도 이제 안정기라는데 써 볼까요?”
그가 은근슬쩍 에그의 사용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건 안호연의 물건이라 사용하는 건 강중영이 아니라 안호연이어야 했다.
“싫어.”
“왜요?”
“내가 너한테 쓸 거거든.”
“호연 씨 거니까 좋은 걸 호연 씨한테 써야지 왜 나한테 써요.”
그가 궤변을 늘어놓으며 안호연의 허벅지에 에그를 올려놓았다. 차가운 촉감의 그것이 부르르 떨며 살을 간지럽혔다. 퍽 나쁘지 않은 느낌이라 안호연의 얼굴이 살짝 무너졌다. 그는 쾌락이나 유혹에 약했다.
“그때 말한 것처럼 서로 취향인 옷 입혀 주고 이것도 써 볼까요?”
“딸기가 보고 배울까 싫은데.”
“생각해 봐요. 그 녀석이 태어나면 우리 이런 것도 못 할 거예요. 애 재우고 해야 하는데 눈치 보면서 하느라 제대로 못 할걸요.”
전혀 눈치를 볼 스타일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안호연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했다.
“너처럼 변태가 될지도 모르잖아.”
“할 수 없죠, 유전인걸. 피는 물보다 진하잖아요.”
“날 닮을 수도 있지. 내가 변태가 아닌걸.”
“아뇨. 호연 씨도 충분히 변태 같은데요. 족쇄 차는 것도 좋아하고 링 안 채워 주면 불안해하잖아요. 구속하고 또 구속해 줘야 안정감을 느끼고 좋아하면서.”
“안 그래도 생각해 봤는데…….”
강중영이 고개를 추켜세웠다.
“나 피지배자형인가 봐.”
한참 머뭇거리던 안호연이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그런 유형이었다. 누군가가 구속하고 속박할 때 만족을 느끼는 유형. 도망갈 수 없이 묶인 채로 누군가가 이끌어 줄 때 가장 안정감을 느꼈다.
“알고 있었어요. 그런 건 죽을 때까지 숨겨야 하는 거예요. 특히 저 같은 사람에겐.”
“왜?”
“죽도록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 평생 짝을 찾은 거잖아요.”
“버릴 거란 소리로 들린다?”
“완전히 절 호연 씨 거로 만들려면 목덜미를 내주는 것도 있죠. 족쇄랑 링을 한다고 완벽하게 내 게 되는 게 아니잖아요. 임시지. 나 같은 사람에겐 내 거라는 증거가 필요하고 그게 신뢰가 되기도 하고요. 전 그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호연 씨가 스스로 목덜미를 내어 줄 날이요.”
안호연은 입술을 다물었다. 각인은 속으로 앓는 문제였다. 그는 완전한 지배를 하기 원해 각인을 바라고 있었다. 각인한 오메가는 히트사이클이 오면 딱 한 사람만 찾는다. 각인한 알파를. 각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과도하게 반짝이는 강중영의 눈이 안호연의 불안을 키웠다. 그가 원하는 걸 이미 다른 사람에게 줬으니까.
“싫어. 왜 줘야 해? 됐고, 아까 하던 이야기나 해 보자. 저 에그를 어떻게 쓸 건지.”
“그 이야기를 하다가 다른 곳으로 샜네요. 어디까지 했더라. 아, 취향인 옷을 서로에게 입혀 주고 난 다음에 에그를 쓰는 건 어떠냐고 물었죠. 호연 씨 취향인 옷은 뭐예요?”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 그 속엔 슈트. 겨울이니까 슈트는 짙은 색이었으면 좋겠어.”
“그리고요?”
“바지는 딱 붙는 건 아닌데 어느 정도 달라붙은 거.”
“액세서리는?”
“시계 하나. 네 취향은?”
그가 손가락으로 안호연의 턱을 찍었다.
“형한테 또 너, 너 거리고, 못됐어요.”
“형이라 불러 줘?”
“그럼 좋죠.”
“싫어, 기분 좋을 때 불러 줄래.”
“언제요?”
“네가 사정할 때?”
“어떤 사정이요? 섹스해 달라고 제가 두 손 모으고 호연 씨에게 사정할 때를 말하는 건지 호연 씨 안에다가 사정할 때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당근 네가 안에다 사정할 때지.”
“미래의 강중영은 좋겠네요. 어서 자고 시간을 보내면 호연 씨한테 사정할 수도 있고 형 소리도 듣는 거예요?”
안호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안호연의 허벅지에 볼을 비볐다. 한껏 기대되는지 그의 얼굴이 상기됐다. 각인에서 다른 화젯거리로 옮겨 가자 안호연은 조금 안심되었다. 강중영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문득 TV를 보았다.
“곧 크리스마스네.”
캐롤이 흘러나오는 TV를 보던 안호연이 속삭였다.
“그렇죠.”
“어렸을 때 소원이 내 방에 트리를 놓는 거였어. 보육원에 있었는데 그건 내 게 아니었어. 내 나무에 별도 달고 양말도 달아 놓고 산타클로스가 오길 기다리고 싶은데 보육원엔 아이들이 많아서 양말을 못 걸게 했어. 아이들을 위한 게 아니라 보육원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용이었던 거야.”
“누구에게요?”
“후원자나 자원봉사자 같은 사람들.”
안호연의 눈앞에 보육원에 있었던 큰 트리가 어른거렸다.
“난 정말 내 양말을 걸 곳이 필요했어. 내 양말 한 짝도 걸 수 없는 그곳이 내 집은 아니잖아.”
그가 말없이 안호연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파고 들어온 그의 손가락이 따스했다.
“이제야 양말 걸 곳을 찾은 것도 같아.”
안호연의 눈이 아래로 향했다. 그가 손을 뻗어 안호연의 양 뺨을 잡고 짧게 키스했다.
“트리를 사야겠네요. 원 없이 양말을 걸려면. 이제 말은 그만. 자러 가요. 자고 좋은 꿈만 꿔요. 여긴 보육원도 아니고 우리 집이니까. 내 집에선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도 말고 나쁜 생각도 하지 마요.”
말은 그만.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안호연은 입을 다물고 침대로 갔다. 맨살에 부드럽게 닿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자 그도 옆에 누웠다. 자연스럽게 팔베개를 해 주는 남자에게 기댄 안호연이 눈을 감았다.
그렇게 곱게 잠들었으면 아름다운 동화가 됐을 텐데 안타깝게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서운 식욕은 잠까지 쫓아냈다. 라면을 먹고 싶었다. 광고에서 흘러나왔던 CM송을 들은 이후로 머릿속에서 라면이 잊히지 않았다. 조용히 어둠 속에서 눈을 깜박이던 안호연은 침만 삼켰다.
침을 삼키고 또 삼키던 안호연은 남자가 깰까 조심조심 침대 밖으로 나갔다. 뒤꿈치를 들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간 그는 부엌 불을 켰다. 불이 켜지자 안호연은 빠른 손놀림으로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곳저곳 뒤지던 안호연은 구석에 박힌 라면 하나를 찾아냈다.
먹고 싶던 브랜드는 아니지만 라면은 라면이었다. 조심스레 냄비를 꺼내 헹군 안호연은 물을 받아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보글보글 물이 끓자 안호연은 그제야 라면 봉지를 터 수프를 붓고 그 위에 면을 넣었다. 젓가락으로 면발을 흐트러뜨리곤 익기를 기다렸다.
라면이 보글보글 끓자 안호연은 젓가락을 들어 면발을 집어 먹었다. 점점 양이 줄어들더니 이내 사라졌다. 아쉬움에 숟가락으로 국물을 몇 번 떠먹은 안호연은 깨끗이 그릇을 씻어 엎어 놓았다.
코로 흘러들어 오는 라면 냄새가 진했다. 좌우로 고개를 돌리던 안호연의 눈에 환풍기가 들어왔다. 손을 뻗어 환기구를 틀곤 소파에 앉아 냄새가 빠지길 기다리는데 자꾸 하품이 나왔다.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눈으로 시계를 확인하자 새벽 3시였다.
안호연은 잠시 머리를 소파에 가져다 댔다. 윙윙 돌아가는 소리를 듣던 그의 눈꺼풀이 점차 가라앉았다. 멀리서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소음이 사라졌다.
* * *
안호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올라갔다. 시야가 흐릿한데 거기다 시야각이 작아 어딘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눈을 깜박거릴수록 작았던 시야각이 점차 넓어져 방 전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제야 안호연은 자신이 누운 곳이 어딘지 깨달았다. 침실이었다. 어제 소파에서 잠들었는데 방이라 의아했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던 안호연은 벌떡 일어났다. 이불을 옆으로 치우고 좌우로 돌아보았다.
몽유병이 있는 게 아니라 안호연 혼자 방으로 오진 않았을 테고 강중영이 방으로 옮겼을 테다. 켜 놓은 환풍기와 불을 켜 놓은 부엌을 떠올리자 아찔한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밤중에 몰래 라면을 끓여 먹은 걸 알면 원 아웃이다. 강중영은 그런 쪽으로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규칙에 대해선 엄한 편이었다. 현재 안호연이 적립해 놓은 아웃은 두 개였고 하나만 더 걸리면 스리 아웃이었다. 스리 아웃이면 그날처럼 또 쫓아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안호연의 머릿속에 스치자 몸에 잔떨림이 일었다.
“잘 잤어요?”
흐익. 안호연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드레스룸에서 남자가 나왔다. 오랜만에 그는 잠옷을 가지고 나왔다. 잠옷을 본 안호연은 오늘 강중영이 오래 외출하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외출 시간이 길 때면 꼭 잠옷을 입혀 놓고 나갔다.
그는 아직 잠이 덜 깬 안호연의 팔에 들어 잠옷을 꿰어 넣었다. 팔 하나만 꿰어 놓은 그는 손바닥으로 안호연의 배를 눌러 보더니 소변이 마렵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가 물어보기 전까진 아무렇지 않았는데 방광을 짓누르니 소변이 마려운 느낌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소변도 자주 싸러 다니는데 출산 때까지만이라도 링을 빼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안호연은 고개를 저었다. 링은 잃고 싶지 않은 것 중에 하나였다. 링을 차고 있어야 그가 외출해서라도 자신을 더 생각할 테니까. 혹시 소변을 누지 못할까 일하는 도중에 안절부절못하는 강중영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일부러 문자도 전화도 받지 말까. 엉큼한 안호연의 생각도 모르고 그는 화장실로 데려가 소변을 누게 해 주었다.
“조금 걱정되네요. 오늘은 좀 오랫동안 외출하거든요. 혼자 링 뺄 수 있죠? 링 빼기 전에 제가 바로 답변 못 해도 참지 말고 가요.”
그는 오늘 지방으로 내려갈 예정이었다. 사업을 확장하면서 강중영도 눈에 띄게 바빠졌다. 그래도 고마운 건 그 바쁜 시간 속에서도 안호연을 소홀히 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눈을 깜박거리던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보다 어제 라면을 먹은 걸 들켰는지 궁금했다. 무슨 말이 나올까 기다리는데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정리를 귀신같이 하는 그가 어제 라면을 먹고 정리하지 않은 식탁을 보곤 눈치챘을 텐데. 이쯤 되면 타박이 따라와야 하는데 아무 말도 없었다.
“왜 뚱한 표정을 짓고 있어요?”
그가 손으로 안호연의 배를 문댔다. 손가락 하나가 가슴을 꼬집었다. 조금 살이 오른 가슴은 요즘 자주 뭉쳐 아팠다. 그는 뭉친 가슴을 주물러 풀어냈다. 젖을 물릴 수 없는 몸이나 임신 중에 간혹 남성 오메가들은 가슴에 살이 조금 오르곤 했다. 그 때문에 가슴이 뭉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강중영은 아침마다 안호연의 뭉친 가슴을 풀어 주곤 했다. 속이 엉큼한 안호연은 일반적인 마사지에도 아래가 반응하곤 했다. 팽팽하게 부어오른 페니스를 링이 조여 만족스러웠다.
“이만 밥 먹으러 가요.”
엉금엉금 기어서 침대에서 내려온 안호연은 그가 차려 놓은 밥을 먹었다. 밥을 먹는 동안 그는 앞에 앉아서 안호연이 먹을 반찬을 손수 골랐다. 임신 중에 매운 걸 먹지 못하는 안호연을 위해 손수 김치까지 물에 씻어서 주곤 했다. 반찬 시중까지 완벽하게 들던 그가 갑자기 카드를 내밀었다.
“임산부에게 수영이 좋대요.”
그걸 왜 하냐고 반항하듯 안호연은 고개를 저었다. 집을 나가는 게 싫었다. 그에겐 이곳이 방공호였다. 이 집에서 얌전히 족쇄를 차고 있는 게 평안했다.
“근처에 수영 센터가 있어요. 걸어서 10분 거린데 거기에 호연 씨 이름으로 등록했어요. 가고 안 가고는 호연 씨 마음이지만 조금은 밖에 나가 보는 것도 좋아요. 사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이걸로 다 긁어요. 어차피 내역서가 휴대 전화로 날아오니까 따로 보고할 필요는 없고요.”
수영장 등록은 안호연의 건강을 염려하는 마음 때문에 생긴 일이고 산책을 거절하자 생긴 연장선이기도 했다. 강중영은 누누이 안호연에게 지배자는 맞지만, 그건 족쇄를 찼을 때의 단편적인 시간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스스로를 집에 가두는 안호연을 늘 염려했고 족쇄 밖 세상에도 조금씩 나가 생활하길 원했다.
“뭐, 이것도 싫으면 어쩔 수 없죠. 제가 밤마다 열심히 섹스 해야죠. 호연 씨 체중 관리 때문에 섹스를 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이쪽은 브레이크가 없어요. 매일 밤 세 시간은 기본적으로 할 거예요.”
딱딱하게 굳어 있던 안호연의 얼굴에 그제야 미소가 걸렸다. 두 손을 올려 만세 포즈를 취하자 못 말리겠다는 듯이 그가 안호연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그래도 집 안에만 있는 건 반대예요. 조금씩 외출해요. 제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목줄을 차고 집에만 있는 개가 아니라 밖에서 즐길 걸 즐기고 스스로 집으로 돌아와 목줄을 차는 개예요.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일단 안호연은 개가 아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예시가 적절해 그가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깨달았다. 그러나 그도 알아야 했다. 동물이 아닌 사람을 길들이다 보면 무수한 변수가 생긴다는 걸. 안호연도 그 변수 중 하나였다.
“그럼 아기 돼지 님, 오늘 하고 싶은 말은 뭐예요?”
“미워.”
“하긴, 오늘 미운 말만 늘어놓았네요. 미움받아도 싸요. 돌아올 땐 미움받지 않게 예쁘게 하고 올게요. 집에서 잘 놀고 있어요.”
그가 안호연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쓰다듬곤 드레스룸으로 갔다. 안호연은 그의 뒤를 따라가 옷을 입는 과정을 구경했다. 그는 오늘 어두운 빛깔의 음울해 보이는 정장을 입고 그 위에 코트를 입었다. 가만히 보고 있던 안호연은 성질이 났다. 생각해 보니 어제 말한 자신이 좋아하는 옷 스타일이었다. 은밀한 잠자리에서 혼자 보고 싶은 모습으로 강중영이 나간다는 게 거슬렸다.
“왜요?”
심통 난 얼굴을 한 안호연을 보던 그가 묻자 안호연은 대답도 하지 않고 거실로 달려갔다. 어제 보았던 핑크색 에그 진동기를 바구니에서 꺼내 다시 드레스룸으로 달려갔다. 에그 진동기를 든 안호연은 드물게 그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말을 하고 싶다는 신호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도 좋아요.”
“바지 벗어.”
“왜요?”
“누구 좋으라고 그 모습으로 나가는데.”
“아아.”
안호연은 에그 진동기를 그의 브리프 안에 밀어 넣었다. 그러곤 고환 옆에 붙이고 대뜸 스위치를 켰다. 부르르 떨리자 그의 얼굴이 망가졌다.
“뭐 해요?”
“난 여기서 링 차고 기다리는데 그렇게 예쁜 모습으로 가면 내가 억울하잖아.”
“그래서 이걸 차고 일하라고요? 제가 오늘 어디 가는지 압니까. 대전에 가요. 공사 현장 둘러보고 오면 적어도 7시간은 걸려요.”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이곤 드레스룸에 걸린 테이프를 떼어 냈다. 그러곤 보지도 않고 감으로 테이프로 고환에 에그 진동기를 고정했다. 여전히 진동이 잘되고 있었고 조금만 조용해도 작은 진동 소리가 났다.
“잘 다녀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안호연은 그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너도 내 생각 많이 하고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자위도 하지 마.”
하, 웃음을 뱉은 남자는 아랫도리와 안호연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쿨 하게 안호연의 심술을 받아들였다. 강중영은 안호연의 손을 잡아끌어 진동기가 있는 지점에 댔다. 벌써 그의 페니스가 발기하고 있었다.
“나 들어올 때 맞춰서 옷 벗고 기다리고 있어요. 7시간 동안 참은 정액을 넣어 줄 테니까.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먹어 줘요. 진짜 진할 거야.”
요사스러운 얼굴로 윙크를 하는 강중영이 야했다. 안호연은 침을 삼켰다. 페니스가 고개를 쳐드는지도 모르고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안호연의 볼에 진하게 키스하더니 돌아섰다.
허우대 멀쩡한 근사한 남자의 코트 속에 가려진 몸 안에 연인이 심어 준 에그 진동기가 있을 거라는 걸 아무도 모를 테다. 안호연밖에는. 희열이 느껴져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은 안호연은 마당까지 나가 그를 배웅했다.
대문 손잡이를 잡은 남자를 보자 좋았던 기분이 다운됐다. 강중영은 힘없는 안호연을 보곤 아쉬웠는지 다시 뛰어왔다. 그러곤 안호연을 꼭 끌어안더니 다시 밖으로 나갔다. 멀어지는 차 소리가 들리자 온몸에 힘이 빠졌다. 무기력했다. 안호연은 집으로 돌아가 소파에 누워 TV를 켰다.
생기가 돌던 안호연과 또 다른 모습이다. TV를 봐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안호연은 침대 위 이불 속으로 찾아갔다. 익숙한 냄새가 코로 들어오자 기분이 나아졌다. 강중영 냄새. 그 냄새를 맡는 동안 안호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안호연을 움직이게 만든 건 초인종 소리다. 소리를 내거나 반응하지 않으면 문 앞에 있는 사람이 갈 거란 걸 알기에 안호연은 느릿느릿 침대에서 일어났다. 기다려도 초인종 소리는 끊기지 않았다. 창밖으로 나가 대문을 확인하자 대문 아래로 남자 신발이 보였다.
백 프로 택배였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은 그들밖에 없었다. 안호연은 다시 소파에 누웠다. 문 앞을 얼쩡거리던 남자는 안에서 사람이 나오지 않자 대문을 주먹으로 쳤다. 쇠문이 요란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저렇게 집요하게 사람을 부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안호연은 참지 못하고 현관에 굴러다니는 슬리퍼에 발을 욱여넣고 밖으로 나갔다. 홧김에 밖에 나왔지만, 어차피 정원 중앙까지밖에 가지 못했다. 그걸 잘 알면서도 안호연은 앞을 향해 뛰었다. 분명 정원 중앙까지 닿아야 할 끈이 계속 늘어났다.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그가 문고리에 걸어 두었던 끈이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이참에 잘됐다 싶은 마음에 안호연은 그만 두드리라고 주먹으로 쾅쾅 찧었다.
순간 밖이 조용해졌다. 안도의 숨을 내쉰 안호연은 몸을 돌리려 했다. 그때 대문 아래서 손이 튀어나와 안호연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안호연의 발목을 잡은 손은 남자 손이었다. 동공이 커진 안호연은 겁먹은 눈으로 그 손을 바라보았다.
발을 움켜쥔 손힘이 셌다. 아마 발이 아니라 손가락이었다면 부러졌을지도 모를 악력이었다. 겁이 났으나 안호연은 스스로를 달랬다. 그래 봐야 그는 닫힌 대문 뒤에 있는 사람이었고 안호연은 대문으로 나뉜 다른 공간 안에 있었다. 손을 떼어 내기 위해 다른 발로 손을 마구 짓밟았다. 그러나 대문 아래에서 튀어나온 손은 포기하지 않고 안호연의 양발을 꽉 움켜쥐었다. 그 힘이 대단해 조금이라도 힘을 빼면 넘어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안호연의 눈에 장대가 들어왔다. 여차하면 그걸로 두드려 패야겠다는 생각에 안호연은 손을 옆으로 뻗어 빗자루를 움켜쥐었다.
“문 열어.”
문밖에서 들린 목소리에 안호연은 숨을 멈췄다. 정말 오랫동안 듣고 따랐던 그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었다. 흡 숨을 들이켰다. 중국으로 떴다던 남자가 대문 밖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돈과 자존심까지 깡그리 챙겨 놓고 어째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안호연으로선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호연아, 왜 말을 안 해?”
대문 밖의 남자는 태범석이었다. 그날 매몰차게 자신을 버렸던 남자가 밖에 서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무슨 염치로 여기에 온 건지 모르겠다.
“왜 왔어?”
뾰족한 말이 안호연의 입술 밖으로 흘러 나갔다.
“네가 안 오니까 데리러 왔지.”
이번엔 헛웃음이 나왔다. 항상 기다리는 건 자신이었고 돌아오는 것도 자신의 몫이었다. 그런데 태범석이 손수 버려 놓고 다시 안호연을 찾아왔다.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이다. 그러나 지금은 안락한 삶에 빠져 있었다. 어렵게 쌓은 평정이었다. 그걸 흔들고 있는 그가 무서웠다.
“돌아가.”
“무슨 소리야, 호연아. 이번 공사는 여기서 끝이야. 조용히 너만 나오면 끝나. 이제 집에 돌아갈 때도 됐잖아. 강중영이 하도 밀어붙이니까 널 버린 척했던 거지, 정말로 버린 것도 아냐. 그것 때문에 못 돌아오고 있었던 거야?”
“두 번 말 안 해. 돌아가.”
“문 열기 전엔 이거 놓을 생각 없는데?”
언제 끈을 끌고 갔는지 그가 끈을 잡아당겼다. 대문 밖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줄 때문에 대문 지척까지 몸이 끌려갔다.
“하, 씨발, 그 개새끼가 널 이렇게 묶어 둬?”
“내가 원한 거였어!”
“네가 이런 변태 플레이를 원했다는 말을 믿으라고? 하, 안호연, 우리가 몇 년을 알고 지냈는데 네가 좋아하는 걸 모르냐?”
“내가 좋아하는 게 뭔데?”
태범석은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안호연은 그 공백을 비웃었다. 그는 안호연이 어떤 잠자리를 선호하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그는 본인의 만족이 우선이었고 맞추는 건 안호연이었다. 다시 그 생활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문 열어.”
“네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멍청이가 아니라고. 나 여기 있을 거야. 여기가 좋아. 그러니까 그만 꺼져. 아, 그리고 가기 전에 내 돈 내놔. 그거 내가 어떻게 번 돈인지 알지?”
“돈 때문에 화난 거냐? 그건 다른 안전한 계좌에 옮겨 뒀어. 가져갈 마음 없었고 너 돌아오면 주려고 했었어.”
안호연의 동공이 좌우로 떨렸다.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웠고, 그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콤하게 유혹했다. 유혹에 약한 안호연은 다리를 꽉 죄는 족쇄를 바라봤다. 족쇄는 자신이 여기에 있어야 할 이유를 알려 주었다. 강중영은 절대 변하지 않을 테고, 자신을 위해 오늘 기꺼이 에그 진동기를 착용하고 나간 남자를 위해서라도 그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싫어.”
“그 새끼와 몸 좀 맞았더니 마음도 가?”
사랑인지 모른다. 그건 강중영도 똑같은 마음일 테다. 마음이 자유롭게 흐르도록 놔두니까 처음 강중영을 봤을 때와 지금 마음가짐이 다르다는 건 분명했다. 지금은 행복해 단잠을 자는 느낌이었고 될 수 있으면 영영 깨어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여기 있을 거니까 그만 가.”
“안호연, 지랄 마. 네가 그 집에서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
문밖의 남자가 경고했다.
“그 애, 내 애일 수도 있는데 퍽이나 행복할까? 나 정관 풀렸었어, 호연아. 네가 그토록 원하던 내 애라고, 그 아이. 한국 가기 전 너 히트사이클 왔을 때 나랑 보냈잖아. 솔직히 하룻밤에 애가 뚝딱 생긴다는 게 말이 돼? 남성 오메가가 히트사이클 아닌 기간에 임신할 확률이 몇 프로라고 생각하는데? 고작 2%야. 노팅을 해도 5%.”
“…….”
“상식적인 잣대로 들이밀어도 그게 누구 애라고 생각해?”
안호연은 바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확률적으로 아이가 태범석의 아이일 확률이 높아 강중영의 아이가 아닐 확률이 낮아질 뿐이지, 백 프로 제외되는 건 아니었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고 강중영은 아이 아빠가 누군지 연연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아직 사태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이게 둘이 풀어 갈 문제는 아니잖아. 그 사람 가족들까지 어떻게 속일 거야? 너뿐만 아니라 아이까지 매도당하겠지. 난 그게 싫어, 호연아. 우리 아이가 왜 그런 취급을 당해야 해? 호연아, 난 말이야, 그게 강중영 애여도 크게 신경 안 써. 그런데 저쪽 식구는 다르겠지. 알잖아, 고상한 양반들이 어떤 사상을 갖고 사는지. 네가 사기꾼에다 사실 고졸에 오랫동안 동거했던 연인이 있는 걸 알면 뭐라고 하려나.”
속이 얹힌 것처럼 답답해 안호연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지금 당장 앞만 보지 말고 미래를 보란 말이야, 안호연. 문 열래, 안 열래? 지금 이 문을 열면 그런 거 겪지 않아도 돼. 그런데 네가 버티면 스스로 나오게 만들 거야. 다 폭로할 생각인데 어때?”
“…….”
“열 센다.”
열, 아홉, 여덟, 일곱, 여섯…….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때마다 입술이 탔다. 대문을 빤히 보던 안호연은 뒤로 발을 물리려고 했다.
“셋, 둘, 하나. 하나 반, 하나 반의반. 반의반의 반.”
그는 숨을 줄이며 일 초에서 영 초로 도달하는 시간을 쪼개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침을 삼키고 대문을 응시했다. 따듯하게 조이는 족쇄가 무거웠고 머릿속으로 나쁜 환영만이 가득 찼다. 다정했던 사람들이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걸 생각하자 숨이 가빠졌다.
“안호연, 정신 차려! 그 사람하고 연애할 생각이었어? 너 여기에 사기 치러 온 거였어. 나한테 각인한 거 강중영이 알긴 해?”
“……그만, 그만 말하라고.”
안호연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속삭였다. 다 아는 사실을 굳이 상기시켜 주지 않아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럼 열어. 영 외치기 전에. 영 외치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거든.”
안호연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문을 통과하며 안호연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태양을 등진 태범석이 서 있었다. 눈이 부셔 눈을 가늘게 뜨자 빛 속에서 손이 뻗어 와 안호연의 손목을 잡았다. 그는 눈으로 안호연을 살펴보았다. 위에서 아래부터 보더니 약간 튀어나온 배를 보곤 화로 일그러졌던 눈이 살살 펴졌다. 부드러워진 눈을 한 그가 손을 뻗자 안호연은 뒤로 물러났다. 그의 얼굴이 종이처럼 마구 주름이 가더니 안호연이 물러선 만큼 따라붙었다.
“가자.”
그가 가자고 안호연에게 팔을 내밀었다.
“안 가, 새끼야.”
“뭐?”
“이 집에서 나가도 너랑 안 가. 내 돈이나 돌려줘.”
한 번쯤은 눈앞에 있는 남자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아무 희망도 품을 수 없게 죽어 버렸으면 하고 바랐던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그가 그냥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 아닌, 행복했던 현실을 깨트린 그에게 분노해서 우러나온 감정이었다. 진심으로 그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입술을 꾹 깨물고 선 안호연을 보던 그의 입술이 뒤틀렸다. 그가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툭, 소리가 나자 안호연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만 나가라고.”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키자 그가 손바닥으로 안호연의 손을 감쌌다.
“말 좀 예쁘게 해. 왜 날을 세우는 건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소리 지르는데?”
“잘못? 네가 내 앞에서 잘못을 운운할 자격이 있냐? 쓰레기라도 사람은 그렇게 안 버려.”
“그때 옆에 강중영이 있어서 그랬어. 그래서 연락처까지 남겼잖아. 연락 안 한 게 누군데? 그걸 핑계 삼아서 날 버린 건 너 아냐?”
그런가? 그런 건지도 모른다. 그는 연락할 루트를 남겼고 안호연은 그걸 보고도 연락하지 않았었다. 이미 그때부터 안호연은 강중영을 선택했었다.
“난 너 기다렸어. 오면 결혼하려고 정관 복구 수술 하러 갔다가 풀렸다는 말 듣고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런 식으로 날 매도하면 화가 나잖아.”
“…….”
“내가 아니면 갈 곳도 없잖아. 잔말 말고 따라와. 아니면 그대로 이 여사님을 만나서 폭로할 거야. 어차피 돈도 다 토해 냈어. 여기서 맞아 뒈지기 싫으면 따라와.”
그는 무작정 안호연을 끌어내려고 했다. 호흡을 멈추고 눈을 꼭 감았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했다. 태범석이 하는 대로 놔두면 사람들은 그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일이 잦았다. 그는 유능한 사기꾼이었고 이런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았다. 다정하게 자신의 손을 잡아 주던 이선영의 일그러진 얼굴이 떠오르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누가 공사가 끝났대?”
“안호연.”
“여기 돈이 얼마나 많은지 아냐? 돈이 분수처럼 쏟아져. 애 하나 키우려면 돈도 많이 드는데 지금 많이 벌어 둬야지. 무턱대고 찾아오지 좀 마. 이러다 걸리면 너도 나도 끝인 거 몰라? 강중영 그 새끼가 얼마나 집요한데.”
갑자기 바뀐 안호연의 분위기에 태범석의 눈꺼풀이 떨렸다. 무엇이 진실인지 가늠하려는 듯 안호연의 눈을 응시했다.
“여기서 나가면 어쩔 건데? 돈이라도 물어줄 거야? 정 불안하면 위약금이라도 물지 않게 혼인 신고 올리고 빠지자. 돈이 먼저잖아. 지금까지 내가 강중영한테 몸을 얼마나 내줬는데 억울해서 어떻게 나가냐?”
“너, 진심이냐?”
“진심이지 가짜냐? 돈 많이 가져가야 결혼해 준다고 해서 열심히 강중영 비위 맞추고 있었는데, 네가 이렇게 사랑스럽게 굴면 내가 조급해지잖아. 그러니까 우선 가 있어. 여기까지 쫓아오지 말고.”
안호연은 태범석의 어깨를 털어 주었다. 미심쩍은 눈초리가 안호연을 따라다녔다.
“혼인 신고 하면?”
“그대로 토껴야지. 그럼 적어도 후에 추가로 받기로 했던 성사금을 받을 수 있잖아. 10억이 개집 이름이야?”
태범석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갑자기 팔을 벌렸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자 가슴이 답답했다.
“오랜만에 봤는데도 안 안아 줘?”
“설마.”
안호연은 그를 꽉 안았다. 코로 그의 페로몬이 들어왔다. 목덜미에서 미약한 열이 일었다. 그가 안호연을 두 팔로 안아 깊숙이 혀를 넣어 키스했다. 그러곤 뺨을 비벼 키스가 남긴 여운을 느꼈다.
“아기는?”
그가 손바닥으로 배를 만졌다. 강중영이 열심히 살찌우고 불린 배를 그가 서슴없이 만지며 자기 아이인 양 굴었다.
“곧 나오겠네. 태명은 뭐야?”
“딸기.”
“딸기를 귀신이 들린 것처럼 먹어서?”
태범석이 눈을 휘고 웃었다. 은밀히 가족끼리 알고 있는 내용을 그가 알고 있었다.
“이선영 여사가 내게도 가끔 전화하거든. 잊은 거 아니지? 내가 네 사촌 형으로 소개된 거.”
안호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딸기를 만나고 싶어.”
“나오려면 멀었어.”
“오랜만이라 섹스 하고 싶다는 말이야. 우리 호연인 돌려 말하면 모르더라?”
“여기 걔 집이야.”
“밖에서 하면 되지. 야외 섹스가 처음은 아니잖아. 내가 섹스 하자면 네가 내뺄 때가 있었나. 예전엔 스릴 있다고 결혼식장에서도 했잖아. 식장이나 여기나 뭐가 다른데?”
안호연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펴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곤 그의 손을 잡고 정원 뒤로 갔다.
“대신 안에다가 싸지 마.”
태범석에게 주의를 준 안호연은 바지를 내렸다. 그러자 그가 피식 웃으며 안호연의 페니스를 뚫어지게 보더니 손을 뻗었다. 그가 풀이 죽은 성기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 변태 새끼가 이런 것도 시키냐?”
“빼지 마!”
그가 링을 빼려고 하자 안호연은 그의 손목을 잡아 던졌다. 과민하게 반응하는 안호연에 태범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뺄 때 아프니까 내버려 둬. 빼면 강중영이 귀신같이 알아채니까.”
“더러운 새끼.”
그가 맹렬히 강중영을 비난하며 벨트를 푸는 사이 안호연은 돌아섰다. 오늘따라 날씨가 좋았다.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사이 딱딱한 무언가가 엉덩이 사이를 스쳤다. 손가락이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안을 휘저었다.
“그새 헐렁해졌어. 그 새끼가 얼마나 박아 댔는지 말해 봐.”
한 번도 다른 남자와의 잠자리에 대해 묻지 않던 그가 물었다. 안호연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태범석은 손가락을 뽑아내곤 손가락이 열어 놓은 구멍에 얼른 페니스를 꽂았다. 흐윽. 안호연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안호연은 얼른 손바닥으로 입술을 막았다.
“호연아, 그 새낀 잘해? 잘해서 좋다고 울었어? 그 새끼 허리에 다리 감고 좋다고 울었어? 그래서 꽉 조여 줬어?”
안호연은 고개를 저었다.
“좋을 리가 없겠지. 네 몸은 내 거잖아. 그러니까 꽉 조여.”
그가 허리를 추어올리며 안호연의 목덜미를 질겅질겅 씹어 댔다. 살이 올라 말랑한 곳을 마구 이로 물고 송곳니와 어금니로 마구 자국을 냈다. 아무 신음도 내지 않는 안호연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는 느리게 움직이던 허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살과 살이 부딪치는 원색적인 소리가 정원에 울렸다. 지긋지긋한 몸은 각인한 상대가 몸을 열고 들어오자 페로몬을 개방했다. 페로몬이 흘러 나간 그 자리로 태범석의 페로몬이 치고 들어왔다. 홍수처럼 밀고 들어오는 그 페로몬에 몸에 열이 올랐다. 식은땀이 났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싸 버렸네.”
그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벽을 꼭 잡고 몸을 부들부들 떠는 안호연의 귓바퀴를 쓸어 냈다.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하얀 정액이 소름 돋았다.
“오랜만에 얼굴 보면서 하고 싶다. 누워 봐.”
안호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왜?”
“안에다 쌌잖아. 이거 냄새 없애려면 오래 걸려.”
“이미 싼 거 두 번 싼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세 번 싸든 네 번 싸든 똑같으니까 누워.”
“좀만 더 하면 히트사이클이 올지도 몰라.”
“그거 재밌겠네.”
그는 누우려고 하지 않는 안호연을 밀쳐 넘어뜨렸다. 등에 미세한 통증이 느껴져 미약한 신음을 내자 태범석은 그 벌어지지 않는 다리를 열기 위해, 안호연의 다리 한 짝을 어깨에 올리고 금방 살이 찐 퉁퉁한 성기를 밀어 넣었다.
“강중영에게 안겨도 내가 생각나겠지. 나만 찾아 꺼이꺼이 울겠지. 내가 불을 지피고 그쪽이 끄면 억울하진 않을 거 같아서. 걸릴까 무서워?”
무서웠다. 분명 이 사실을 안다면 강중영이 자신을 버릴지도 몰랐다.
“무서운 건 너겠지. 내가 아냐. 받은 돈 그대로 토해 내면 그만인데 뭐가 무섭다고. 지배자 성향인 알파가 뼛속까지 남의 것인 널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해?”
“범석아, 범석아, 이거 아니야, 이거 아니야, 아니라고.”
“돈이 아깝다며. 똑바로 정신 차려. 여기서 정신 잃으면 네가 좋아하는 돈도 뭣도 다 잃어. 뭐, 걸려서 쫓겨나면 내가 주워 가면 그만이니까.”
안호연은 겁먹은 눈으로 그를 보며 사정했다. 코로 훅 밀고 들어오는 무서운 양의 페로몬에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미처 도망갈 수 없었다. 자신을 찍어 누르고 있는 몸과 그와 하나로 이어 준 페니스 때문에 작살에 꽂힌 물고기처럼 팔딱댔다.
“그만!”
안호연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 짜내며 소리쳤다.
“그만두게 하려면 나한테 매일 전화하겠다고 약속해. 원래 우리가 공사 진행했듯이. 일주일에 한 번 만나러 오는 것도 잊지 마.”
“알았어. 알았다고.”
안호연이 울먹이며 그의 가슴을 두드리자 그가 페니스를 뽑았다. 그의 성기에서 하얀 정액이 튀어나와 배에 묻었다. 정액이 묻은 배가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가 다시 땅으로 꺼졌다.
“연락이 오래 두절된 널 신뢰할 수 없어. 일할 거였다면 처음부터 제대로 했어야지.”
그는 안호연의 잠옷에 정액이 묻은 성기를 문대곤 아랫도리를 정리했다.
“네 처지도 모르고 연애할 생각 하지 말고.”
그는 누워 있는 안호연의 손을 뒤집었다. 안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입으로 뚜껑을 뽑은 그가 손등에 무언가를 썼다.
“내 전화번호야. 잊지 말고 전화해.”
그가 멍하니 누워 눈을 깜박이는 안호연을 세웠다. 등에 묻은 흙을 털어 낸 그가 입술을 안호연의 귀에 가까이 댔다.
“마지막으로 충고하는데 호연아, 거짓말을 할 때는 사람 눈 피하지 마. 시간이 필요한 거 같으니까 시간은 줄게. 오래 기다리겐 하지 마. 답이야 뻔하잖아. 내가 버렸다는 생각에 의지할 곳 없어서 강중영에게 의지했겠지. 근데 생각해 봐. 그 남자가 널 평생 데리고 살 거 같아? 절대 아니야. 넌 흠집이 많아. 그러는 넌 평생 그 사람 옆에 있을 수 있어? 아니, 넌 언제고 내 옆으로 돌아올 거야. 왜냐고? 익숙하니까. 그건 내가 널 버리지 못하는 이유와 일맥상통해. 넌 내 밑바닥을 봤고, 날 세세하게 알기 때에 내 밑바닥을 드러내도 되는 사람이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난 네 밑바닥을 봤어. 얼마나 추악하고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전부 알아. 쓸데없이 새로운 길 파지 말고 안정된 길을 골라 가. 나 너 안 버린다. 그건 맹세할 수 있으니까 스스로 돌아와.”
태범석은 옷을 정리하고 닫힌 대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남기고 간 흔적이 두 허벅지 사이로 흘러내렸다. 안호연은 잠옷으로 그가 남긴 흔적을 닦고 집으로 들어갔다. 각인한 알파가 페로몬을 뿌리고 간 여파는 실로 대단했다. 몸살을 앓는 것처럼 머리가 어지럽고 구역질이 났다. 몸에 잔떨림은 여전했고 페니스에 단단하게 살이 차올랐다. 안호연은 손가락으로 간지러운 부위를 긁으려다가 참았다. 어떤 사고도 어떤 행동도 강중영의 허락 없이 할 수 없다. 안호연은 숨을 몰아쉬며 태범석에 의해 깨진 패턴을 다시 복구하려 했다. 부은 페니스를 조이는 링을 볼 때마다 강중영을 떠올리려 애썼다.
불안정한 숨을 몰아쉰 안호연은 손등을 보았다. 각인처럼 새겨진 열한 자리 전화번호를 외우기 위해 중얼거렸다. 적어도 아이가 누구 아이인지 확인할 때까지 강중영과 있고 싶었다. 만약 아이가 강중영 아이라면 그 핑계를 대서라도 옆에 있을 수 있었고 태범석의 협박도 반은 무효가 됐다. 그리고 만약 태범석 아이라면……. 머리에 묵직한 통증이 따라왔다. 그 이상은 사고를 원하지 않는다는 듯이 머릿속에서 에러를 일으켰다.
안호연은 고개를 흔들고 따듯한 욕조에 몸을 담가 태범석이 싼 정액을 긁어냈다. 숨도 멈추고 그 작업에 몰두했다. 이미 흥분한 몸은 손가락 하나에도 흥분했다. 자꾸 힘이 풀리는 다리를 곧추세우며 뭉친 정액을 모조리 빼냈다. 이마로 땀이 흘러내렸다.
한참 욕조에 몸을 기대고 느린 숨을 내쉬던 안호연은 느리게 움직여 샤워기를 들었다. 오랫동안 욕조 속에 몸을 담갔다가 빼기를 반복했다. 몸이 탱탱 불도록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왔을 땐 기진맥진했다. 물로 헹궈 낸 코를 자신의 피부에 댔다. 2시간에 걸쳐 몸을 씻어 태범석의 페로몬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안호연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로 잠옷을 처리하기 위해 화장실로 가 손빨래를 하곤 세탁기에 넣었다.
문득 손등을 보았다. 그가 적어 준 번호가 말끔히 사라졌다. 목 뒤의 각인도 사라졌으면 좋을 텐데, 안호연은 아쉬운 숨을 몰아쉬었다. 과거에 했던 모든 행동이 후회로 다가왔다.
서늘한 침대에 올라갔다. 이불 속에 파고들었다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서러웠다. 태범석이 자신을 서럽게 만든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에 서러울 일도 없건만 오늘은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어디선가 벨소리가 났다. 힘없이 앉아 있던 안호연은 휴대 전화를 놓아 둔 곳으로 달려갔다. 화면에 강중영이란 이름이 떴다. 울어 잠겼을 목을 가다듬었다.
[호연 씨?]
부드럽고 따듯한 소리가 들리자 서러움에 목이 꽉 잠겼다. 보이지 않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귀에 휴대 전화를 더 가깝게 붙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태범석이 찾아왔고 강중영의 아이라고 믿었던 아이는 어쩌면 태범석의 아이일 수도 있다. 제일 무서웠던 건 태범석이 아니라 무표정한 강중영이었다. 모든 걸 털어놓는 순간 강중영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안호연을 덮쳤다. 아무리 아이가 누구 아이여도 상관없다고 말했으나 그 말을 신용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필요한 순간에 하얀 거짓말을 하니까. 더구나 이미 다른 알파와 각인을 한 자신은 그에게 허용 밖의 사람일지도 모른다. 다정해 보이나 그는 굉장히 규칙에 얽매인 사람이었고, 지배자 타입인 그에게 중요한 건 누군가를 완벽하게 소유할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말해도 좋으니까 대답해요, 왜 전화 늦게 받았어요?]
“자느라.”
[목소리가 좋지 않네요.]
“어디야?”
[아직도 대전이에요. 미팅이 끝나려면 2시간 정도 남았어요. 가는 데까지 4시간 정도 남았네요.]
그의 목소리에 열감이 있었다.
[근데 뜨거워요.]
안호연은 눈을 내렸다. 자신의 눈과 가슴도 뜨거웠다.
[벌써 여섯 시간이 지났는데 진동이 멈추지 않아요. 웅웅 소리를 내며 계속 돌고 있어서 매우 곤란해요.]
“빨리 오면 되잖아.”
그가 웃었다.
[그래서 미팅 중에도 호연 씨가 생각나요.]
“나도 네 생각만 했어.”
[그럼 폰섹 할래요?]
“폰섹? 그게 뭐야?”
[별거 아니에요. 그냥 이렇게 전화하면서 자위하는 거죠. 근데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통화하면서 하는 거니까 섹스죠.]
안호연은 눈물을 머금고 “응.” 소리를 냈다.
[잠옷 벗어요. 그리고 다리 벌리고 거길 만져 봐요. 아, 하기 전에 링은 빼 놔요. 링 때문에 성기가 다칠지도 모르니까.]
그가 지시하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부은 페니스에서 링을 빼고 다리를 벌렸다.
“거기가 어디야?”
[페니스요, 그걸 손바닥으로 둥글게 감싸고 문대는 거예요. 위에서 아래로 흔들어 줘요.]
안호연은 성기를 잡고 흔들었다. 이미 낮에 한 번 열이 올랐었던 몸은 금세 타올랐다. 조금만 잡고 만져 주는 것만으로도 성기가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더니 급격히 사정감이 몰려왔다.
“흐읏, 쌀 거 같아.”
[조루도 아니고 벌써 싸면 안 되죠.]
“중영아, 나…….”
[싸지 말고 기다려요.]
안호연은 또 보는 이 없는 곳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엎어져서 엉덩이 들어요. 그리고 거기에 손가락을 넣어 봐요. 이젠 어디냐고 묻지 말고요. 매일 밤 내가 들어가는 통로예요.]
손가락으로 엉덩이 사이를 더듬었다. 보이지 않고 느낌만으로 넣으려는 건 두려웠다. 이곳이 진심 입구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움푹해요. 손가락을 밀어 넣으면 늪처럼 빨려 들어가는 곳이 있어요. 끝도 없이 전부 다 삼키는 곳이요. 찾기 어렵지 않아요.]
“흐읏.”
눈을 감고 의심이 가는 부위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의 말대로 손가락이 별 무리 없이 빨려 들어갔다. 빡빡한 그곳은 이미 그로 인해 젖어 있었다. 손가락이 축축한 느낌이 느껴졌다.
“넣었어.”
[그럼 안을 풀어 줘야죠. 좌우로 흔들어서 넓혀요.]
안호연은 손가락을 넣으려 상체가 침대에 붙였다. 상체를 숙이자 손가락이 몸속 깊숙이 들어갔다. 몸이 뜨거워 온몸에서 괴상한 기분이 들었다. 눈을 감고 느끼면 그 손가락이 강중영 같았다. 멀리서 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밖이 아니라 수화기 안에서 나는 소리였다.
[손가락 빼요.]
숨을 몰아쉬면서 손가락을 빼냈다. 손가락이 빠져나가는 게 아쉬워 안호연은 다시 밀어 넣었다. 신음을 죽이며 침대 위로 엎어졌다. 몇 번 더 안을 쑤시다가 눈을 감았다.
“보고 싶어.”
바람을 담은 말이 입술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마음에서 부는 바람에 추웠고 외로웠다.
[그럼 문 열어요.]
갑자기 문을 열어 달라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안호연은 그대로 현관으로 갔다. 석양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자 손등으로 눈을 비비곤 문을 열어 주었다. 휑한 다리로 바람이 지나갔다. 안호연 스타일대로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목을 감싸던 머플러를 풀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곤 고개를 숙여 구두를 벗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남자가 현실감이 없어 안호연은 그를 감상했다. 신발을 벗은 남자가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안호연에게 돌진했다. 바깥에서 차갑게 식은 몸으로 남자는 안호연의 허리를 잡아채 소파로 돌진했다. 그러곤 안호연의 다리를 벌리고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한 번의 폰섹스로 불을 지핀 몸은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그가 넥타이를 내리며 웃었다.
“약속대로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어요. 내가 미팅 중에도 호연 씨 생각하느라 눈앞에서 사업 하나 날렸어요. 손실 금액이 많은데 하나도 아깝단 생각이 안 들고 여기까지 달려왔어요.”
배에 묵직한 성기가 닿았다. 지퍼를 내린 그가 바지 안에서 에그를 뽑아냈다. 그러곤 엄지로 페니스 선단을 막은 채 안호연 안에 밀어 넣었다. 한도까진 커진 페니스가 밀고 들어오는 건 괴로웠다. 아팠고 내벽을 죄 긁으며 들어오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그가 페니스를 밀어 넣으며 안에 사정했다. 오랫동안 참았던 사정을 안호연의 안에다 했다. 그는 사정감에 빠져 안호연을 들어 허벅지 위에 앉히고 꽉 안았다. 배와 가슴이 밀착됐다. 안호연은 조금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이를 세워 안호연의 유두를 짓궂게 물었다.
“집에서 뭐 하고 있었어요?”
그걸 묻자 긴장감에 온몸이 굳었다.
“안이 말랑한데 나 몰래 자위했던 건 아니죠?”
혀가 마비되어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호연은 어금니를 꼭 깨물고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만약…….”
“네.”
“만약에…….”
“말해 봐요.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안호연은 혀로 마른 입술을 핥았다.
“만약에 내가 죽을 때까지 각인을 허락하지 않으면 어쩔래?”
“글쎄요. 생각해 보지 않은 그림이라서. 곧 호연 씨가 목덜미를 내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강중영은 여유롭게 웃으며 혀로 안호연의 목덜미를 핥았다. 목덜미부터 핥아 오던 그가 쪼그라든 성기를 뽑았다. 쯔억. 표현하기 힘든 소리가 살과 살이 붙었던 이음새에서 났다. 그가 안호연을 머리맡에 앉히고 빙긋 웃었다. 그가 볼을 핥았다. 볼이며 목이며 정신없이 빨고 뼈가 튀어나온 쇄골을 핥았다. 한번 태범석의 페로몬이 들어왔던 모공이 수축하며 그를 거절했다. 따끔한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안호연은 주먹을 꽉 쥐고 참았다. 그가 고개를 숙여 안호연의 성기를 물었다. 페니스가 따듯한 점막이 성기를 감싸자 안호연은 어쩔 줄 몰라 고개를 돌렸다. 굉장히 낯선 느낌이다. 허리를 흔들고 싶었다.
“만약 아이가 네 아이가 아니면 어떡하지? 그럴 수도 있잖아. 태범석의 아이일 수도 있잖아.”
그가 입에서 안호연의 성기를 뱉었다.
“그걸 왜 생각해요. 당신이 내 거면 그 아이도 내 건데.”
그의 심기를 거슬린 듯 목소리가 낮아졌고 악센트가 생겼다.
“소유한다는 게 어떤 의민데?”
“몸도 마음도 내 거인 상태겠죠.”
“마음만으로도 평생 살 수 있잖아.”
“호연 씨, 사람의 마음은 무궁무진해요. 또 변덕도 심하죠. 오늘은 뜨겁게 끓었다가 내일은 식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안전하게 다 갖고 싶은데 욕심인가요?”
“응.”
“졸려요?”
“좀 졸리네.”
“좀 자고 있어요.”
“그럴까?”
“네.”
안호연은 부러 하품하곤 방으로 갔다. 그러곤 침대 위로 네발로 기어 올라가 자는 척 눈을 감았다. 몸도 마음도 가지는 건 불가능했다. 그제야 그가 불가능한 걸 안호연에게 원한다는 걸 깨달았다. 안호연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어딘가에 물이 고이고 있었다. 빠져나갈 곳 없는 거대한 항아리에 물이 고여서 버거웠다. 낙원이라고 믿었던 곳이 사실은 모래성이었음을 깨닫자 심장이 멈췄다.
한참 눈을 감고 있던 안호연은 잡음에 눈을 떴다. 계속 거실 쪽이 시끄러워 침대 밖으로 나갔다. 막 문지방 앞에 섰을 때 누군가가 안호연의 눈에 들어왔다. 강중영이 거실에서 트리를 조립하고 있었다. 심각한 얼굴로 나무의 뼈대를 세우더니 별과 산타 인형 같은 장식을 달기 시작했다. 불규칙하게 배열된 방울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강중영은 콧잔등을 찌푸리며 방울을 정렬했다. 안호연은 일어났다는 내색도 하지 않고 그를 구경했다. 멍하니 앉아서 그를 보다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 행복이 언제까지 갈지 불안했다. 내외부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여전히 머릿속에선 계산 중이라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태범석을 따라가 예전 삶을 살면 된다. 적어도 태범석은 어떤 형태로든 안호연을 끝까지 책임질 테니까. 그런데 강중영이란 사람이 아쉬웠다. 지금까지 공사를 쳤던 남자처럼 버리면 되는데 미련은 겨울날 처마에 달리는 고드름처럼 자라났다.
“호연 씨.”
그가 안호연을 발견하곤 손을 흔들자 안호연은 강중영에게 다가갔다.
“선물이에요.”
강중영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빨갛고 노랗고 파란 색의 양말이었다. 연민이 자라나는 이유는 이렇다. 그는 늘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줬다. 누구에게도 받아 보지 못한 따스한 선물을.
“이젠 트리에 원 없이 달아요.”
어제까지 이곳이 자신이 양말을 달 집이라고 생각했으나 이젠 양말을 달 수 없었다. 그는 머뭇거리는 안호연을 대신해 양말 하나를 트리에 달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전구 사이에 걸린 양말을 보자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왜 트리가 갖고 싶었을까 생각해 봤는데 호연 씨는 호연 씨 거가 필요했던 거예요. 남의 게 아닌 내 거. 한 번도 나만의 것을 가져 본 적이 없다는 건데 그 부분이 나와 닮았어요. 나도 무언가를 내 거로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스쳐 지나가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때마다 혼자 외딴섬에 고립된 기분이었어요. 춥고 배고프고 외롭다가 마지막엔 외로움에 통달한 척 굴었죠. 그러다 나와 닮은 호연 씨에게 끌렸던 건지도…….”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아직 그도 안호연에 대해 정의를 내리지 못한 듯했다. 안호연은 허리를 숙여 양말을 걸다가 그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가 물었고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요.”
“사랑해.”
짧은 그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수없이 질문하고 정의 내리지 못한 이 감정을 어쩌면 사랑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안호연은 그에게 어떤 상처를 내기 싫다는 걸 깨달았다. 버림당하는 것보다 자신에게 실망한 기색이 섞인 눈과 마주하는 게 죽는 것보다 싫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자 그의 눈이 흔들렸다. 지그시 바라보던 그가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흔들었다.
“널 보면 이 말을 해 주고 싶었어.”
“내 감정이 명확하지 못해서 아무 말도 해 줄 수 없다는 게 미안해요. 나라는 사람은 일반 사람의 시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을 거예요. 이상하고 괴이한 내게 감정으로 다가오면 설레기도 하고 무서워요. 그리고 난 족쇄를 차는 사람에겐 유한 편이에요. 그래서 지금 이 감정이 족쇄를 찬 당신이 사랑스러운 건지, 안호연이 사랑스러운 건지 의문스러워요. 확실하지도 않은데 진심을 담아 말하는 호연 씨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실례인 거 같아요.”
안호연은 눈을 내리감았다.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달랐다. 그는 족쇄를 차고 순순히 목덜미를 내줄 어떤 사람이라도 사랑할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 누구든 준비가 된 사람이라면 안호연의 자리를 채울 수 있었다.
“양말 열어 봐요.”
트리에 달린 양말을 열었다. 그 속에 몰래 먹었던 라면이 들어 있었다.
“집에 물건이 몇 개 남았는지 매일 확인하는데 모를 수가 있나요? 내가 야박한 사람도 아닌데 왜 몰래 먹어요?”
“혼날까 봐.”
“다음부터 말하고 먹어요. 딸기가 배가 고프다면 먹어야지.”
그가 싱긋 웃더니 안호연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안호연은 라면을 멍하니 보았다. 따듯했지만 언젠가는 깨질 행복이라 불안정했다. 얇은 유리 같은 행복은 마지막에 다다르자 더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안호연은 양말을 옆으로 밀고 그의 손을 잡았다.
입술이 바짝 탔다. 그리고 지금껏 숨겨 왔던 걸 그에게 드러냈다.
“미안해, 사실 다른 사람에게 각인했어.”
그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손가락으로 귀를 파는 시늉을 했다.
“제가 잘못 들은 것 같네요. 뭐라고요?”
“제대로 들었어.”
“누구? 태범석?”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매우 낮아져 곁에 앉지 않은 사람이라면 듣지 못할 정도였다.
“응.”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도 태범석 아이일지도 몰라.”
“하나도 내 게 없네? 불확실할지도 모르는 그쪽 마음밖에는.”
“너한테 숨기지 말랬잖아.”
“지금 나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당장 아웃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거로 들려.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 거예요?”
“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그냥 네 선택을 기다리고 있어. 가라면 가고 있으라면 있을게.”
안호연은 인형처럼 눈을 깜박였다. 강중영은 손바닥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결론을 보았으나 안호연은 모른 척했다.
“제게 시간을 줘요.”
강중영이 손가락으로 머리를 짚었다. 안호연이 그에게 손을 뻗자 그가 흠칫거리며 손을 밀어내더니 고개를 저었다.
“생각에 방해되니까 만지지 말아요. 말하기 어려웠을 텐데 솔직히 말해 줘서 고마워요.”
강중영이 일어나더니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트리에 외롭게 달려 대롱대롱 흔들리는 양말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안호연은 조용히 입술만을 깨물었다. 이럴 줄 알았다. 이 반응을 예상했기에 안호연은 말하기 꺼렸다. 그는 언제든 자신이 아닌 대용품을 가질 수 있으니까.
* * *
다음 날 강중영은 아무것도 안 했다. 매일 만들던 밥도 하지 않았고 아침마다 안호연에게 안부도 묻지 않았다. 그 낯선 광경과 무너진 규칙 속에서 안호연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똑같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하는 건지 의문이었다. 씻지도 못했고 어제 입은 잠옷을 그대로 걸쳐야 했다. 뭘 먹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으며 화장실에 가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리 현상조차 해결할 수가 없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던 안호연은 아직 발에 족쇄가 있다는 걸 깨닫자 마음이 놓였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인지했다. 족쇄는 이 집에 있을 수 있는 약속이었다. 아침 인사를 건네기 위해 강중영에게 다가섰을 때, 그는 조깅 복장을 하곤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안호연을 밀어냈다.
그가 나가자 집이 또 텅 비어 버렸다. 외출이 잦은 그를 탓할 수가 없었다. 강중영에게 강요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잘 아니까. 그건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 흙투성이 물건을 가지고 사는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라는 걸 알기에 기다렸다.
긴 숨을 몰아쉰 안호연은 하루 만에 어지러워진 집을 정리했다. 청소의 청 자도 모르는 그가 대뜸 걸레를 들고 먼지가 내린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그의 서툰 손놀림에도 집이 정리되었다. 항상 그가 물건을 놓아두는 곳에 물건을 가져다 놓으며 큰 집을 전부 정리했다. 한참 집을 정리했는데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적막한 집에서 안호연은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문만 보았다.
항상 요란하게 울리던 휴대 전화가 오늘따라 잠잠했다. 밥 먹어라, 물 먹어라, 창문을 열어 환기 좀 해라. 하루의 일과를 정해 주는 그의 문자가 오늘은 날아들지 않았다. 안호연은 휴대 전화를 응시하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따르릉.
시끄럽게 우는 건 집에 있는 유일한 유선 전화였다. 망설이다가 전화를 건 사람이 강중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급한 마음에 뛰어가 귀에 수화기를 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고 불렀는데 상대방은 답이 없었다.
“강중영? 너야? 우선 집에 와. 집에 와서 이야기하자. 정말 너한테 숨기기 싫어서 말했던 거야.”
[호연아.]
수화기에서 들린 목소리에 숨이 막혔다. 목소리의 주인은 태범석이었다. 동공이 커진 안호연은 수화기를 무서운 물건을 보듯 보았다. 아까 했던 말들을 되감아 보았다. 영리한 태범석이라면 분명 둘 사이에 무슨 변화가 있다는 걸 깨달았을 테다.
“번호 어떻게 알았어?”
[전화 연결이 잘 안 된다니까 이 여사님이 이 번호를 친절히 알려 주시더라. 그러게 왜 전화를 안 해. 숫자에 밝으면서. 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
오늘 물 한 방울 마시지 않아 목구멍이 따끔했다. 입술도 버석해 숨에서 쇳소리가 났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은데 설마 강중영한테 말한 건 아니지?]
그는 둘 사이의 변화를 금방 알아챘다. 안호연은 느리게 침을 삼켰다. 숨겨 봐야 역효과만 부른다는 걸 깨달았다.
[뭐 때문에 그렇게 강중영을 애타게 부른 건데?]
“그래, 강중영한테 다 말했어. 다 말했으니까 이제 그만해. 이제 선택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강중영이 하는 거야. 걔는 그럴 자격이 있잖아.”
[비겁해. 남에게 인심 좋은 척 선택권을 주었지만, 사실은 강중영이 원망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실이잖아? 선택은 강중영이 했으니까 그에 따른 책임은 그에게 있겠지. 넌 항상 비겁하고 졸렬해.]
누군가가 해머로 머리를 때리는 느낌이었다. 안호연은 순간 네가 뭘 아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졸렬하다고 말하는 넌 졸렬하지 않느냐고 되묻고 싶었으나 혀를 깨물고 참았다.
[그래, 네 심정도 이해해. 버리면 미워라도 할 수 있잖아. 결과가 나오면 알려 줘.]
짧은 웃음이 수화기 안에서 흘렀다. 태범석은 절대로 당혹하지 않았고 여유로웠다. 마치 사냥할 동물을 기다리기 위해 몸을 낮추는 맹수처럼 굴었다. 긴장이 풀리면 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목덜미가 서늘해 안호연은 손바닥으로 쓸어 냈다. 끊긴 전화에 한숨을 길게 쉬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가 별로 무섭지 않았다. 무서운 건 강중영이었다.
긴 한숨 뒤로 안호연은 손끝으로 족쇄를 매만졌다. 눈을 감았다가 두 다리를 가슴으로 끌어당기고 무릎에 이마를 댔다. 어서 강중영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돌아와 꼬질꼬질한 자신을 씻기고 배고픈 자신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그 생각들이 따지고 보면 매우 이기적이라 안호연은 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태범석의 말대로 자신은 굉장히 이기적이고 졸렬한 사람이 맞을지도 모른다.
한참 고개를 숙이고 미동도 없던 안호연은 다리를 꼬았다. 내내 참고 있던 소변이 흘러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리를 꼬고 한참 참던 안호연은 테이블에 있는 휴대 전화 쪽으로 기어갔다.
[화장실 가고 싶어. 어떻게 해야 해?]
언제나 답변을 바로바로 해 주던 그가 오늘은 답변하지 않았다. 실금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꼰 다리에 힘을 주었다. 지금 당장 화장실로 가자는 생각이 번졌다가 허락 없이 화장실에 갔다가 그의 심기를 상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참았다. 입에서 뜨거운 숨과 함께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최대한 자극이 덜 가게 다리를 꼬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자 조금 나아졌다.
그렇게 일 초를 십 분처럼 느끼며 안호연은 강중영이 오기를 기다렸다. 힘없이 누워 있는데 문에 그림자가 졌다. 달그락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지금까지 뛰다 왔는지 강중영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바람에 실려 땀내가 풍겨 왔다. 그는 안호연을 보지도 않고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내 한 병을 모조리 마셨다.
안호연은 얼른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그의 뒤를 불편한 걸음으로 말없이 따라다녔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방광이 자극돼 식은땀이 났다. 먼저 말하길 기다리다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손이 닿자마자 그가 매몰차게 안호연의 팔을 쳐 냈다. 그 충격에 안호연은 몸을 숙였다. 조금이라도 놀라거나 긴장이 풀리면 소변이 나올 것 같았다.
“잡지 마요.”
그는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직도 생각이 끝나지 않았어……. 왜 그래요?”
그는 땀에 푹 젖은 채 달려와 낯빛이 파리한 안호연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안호연이 말없이 다리를 꼬자 강중영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안호연을 화장실로 끌고 갔다. 그가 거칠게 바지를 내리고 페니스를 조이는 링을 빼냈다.
“호연 씨, 바보예요? 이 상황에서도 이걸 왜 차고 있는 건데요, 왜 기다렸던 건데요?”
그가 거칠게 말을 내뱉으며 자신을 비난했으나 안호연도 할 말이 있었다. 족쇄를 풀어 주지 않은 건 강중영이었다. 족쇄는 이 집에서 무언의 약속이자 규칙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맹렬히 비난하는 그에게 화가 났다. 그 순간 참았던 소변이 페니스 끝을 밀고 나왔다. 엄청난 양이었다. 그때 안호연은 다리가 풀릴 것 같은 느낌에 그의 옷을 꽉 쥐고 버텼다. 가득 담고 있을 때는 괴로웠는데, 모든 걸 뱉어 내자 허전했다. 그에게 났던 화까지 모두 씻겨 내려갔다.
“왜 이런 꼴로 있는 거예요?”
그가 여러 번 물었다. 올곧은 눈으로 바라보는 안호연을 보았다. 그걸 묻는 그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이 집에선 당연히 그래야 했다.
“씻긴 했어요? 옷은 왜 안 갈아입었어요?”
안호연이 아무 말도 안 하고 서 있자 그가 입술을 꼭 깨물더니 내려간 바지를 거칠게 올렸다. 그러곤 몸을 숙여 안호연의 족쇄를 풀고 거칠게 밖으로 끌어냈다. 순간 머리를 아찔하게 만드는 두려움이 생겼다. 족쇄를 풀고 밖으로 끌어낼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가지 않겠다고 버티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으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버티는 안호연의 허리를 안고 힘으로 끌어당기자 속절없이 끌려갔다. 그는 집과 멀지 않은 길 한복판에 안호연을 세웠다.
“넌 내 가치관과 내 모든 것들을 해쳐. 네가 있으면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어. 버거워. 네가 무서워 죽겠다고. 더 데리고 있으면 도저히 널 놓을 수 없는 상황까지 갈 것 같아.”
안호연은 눈을 깜박였다. 숨을 쉬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숨도 쉬지 않은 채로 강중영을 응시했다.
“멍청하게 살지 말고 네가 가고 싶은 대로 가. 네 알파한테 돌아가라고.”
그가 매정하게 돌아섰다. 그러나 안호연은 그를 따라갔다. 강중영이 다른 누구도 아닌 네 알파에게 돌아가라고 했으니까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안호연을 길들인 사람은 그였다. 멋대로 줍고 멋대로 먹이를 주고 멋대로 옷을 입혔으니 당연히 그를 떠날 수 없었다. 그의 뒤를 따라가자 그가 벼락같이 화를 내며 막아서더니 안호연의 어깨를 밀치고 대문을 닫았다. 안호연은 대문 밖에 서 있었다. 정말 끝인가. 끝이구나. 조금 휑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후로 어떤 사고도 할 수가 없어서 멍하니 대문을 보고만 있었다. 그때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문이 다시 열렸다. 조금 벌어진 틈에서 팔이 튀어나오더니 안호연을 다시 끌어당겼다.
“왜 가지 않고 서 있는 건데!”
“내 알파에게 왔잖아.”
그가 입술을 꼭 깨물더니 바보처럼 서 있는 안호연을 보고 달려왔다. 한 치의 틈도 없이 안호연을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화내서. 정말 무서웠어요. 분명 당신이 족쇄를 차지 않는 동안 소변을 참았다는 건 기뻐해야 하는 일인데 화가 났어요. 호연 씨가 나 때문에 망가진 것 같아서, 순간 저에게 혐오감을 느꼈어요. 호연 씨는 나를 헤집고 해쳐요. 그런데도 같이 있고 싶어.”
“내가 널 해쳐서 같이 있으면 안 되는 거야?”
“나도 호연 씨를 해치니까.”
“난 이게 좋아. 네가 좋아서 좋아.”
그가 작은 숨을 쉬었다. 안호연은 그 한숨을 들으며 꿈같은 집을 바라보았다. 다시 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저도 호연 씨 사랑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 말곤 이 오류를 설명할 수 없겠죠.”
그가 고백하는 순간 안호연은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 있기엔 날이 너무 좋았고, 눈에 물이 차올랐다. 이 말을 누군가가 해 주기를 평생 기다렸고, 그 말을 해 준 사람이 강중영이라서 다행이었다. 안호연은 대답 대신 그를 꼭 안았다. 말하지 않아도 이 기쁨을 그가 알아줬으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