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12)

04

섹스의 여파로 며칠간 근육통을 앓는 안호연에게 의사는 따끔한 충고를 했다. 임산부와 태아를 위해 무리한 성관계는 맺지 말라는 따끔한 말이었으나 강중영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대답이 없는 그의 반응에도 의사는 별말 없이 넘어가긴 했으나 강중영이 대답하지 않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안호연은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안호연을 보면서 방긋 웃었다. 그 웃음이 유난히 짙다고 느낄 때 안호연은 눈을 떴다.

눈앞이 어두웠다. 꿈이었다. 짐승 새끼, 꿈까지 찾아와서. 작게 중얼거리며 자는 강중영을 주먹으로 때렸다. 배를 맞고도 그는 반응 없이 잠만 잤다. 안호연은 손가락으로 성대를 매만졌다. 밤새 물 한 방울 없이 마른 목을 축이려 부엌으로 갔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기갈로 뻑뻑한 목을 축인 안호연은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시계를 보았다. 새벽 4시. 사람이 일어나 활동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새벽마다 부엌 앞에 있어야 할 강중영이 침대에서 자고 있다는 사실이 생소했다. 보통은 그가 새벽을 열고 안호연은 침대에서 잤다. 강중영의 첫 알람이 울릴 때가 5시였고, 알람이 울리면 그는 일어나 알람을 껐다. 희미한 알람에 안호연이 칭얼거리면 그는 더 자도 된다며 잠을 부추겼다. 안호연이 완전히 눈을 감는 걸 확인하면 강중영은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칼이 도마에 부딪히는 소리, 그릇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얕은 수면에 빠지곤 했다.

다시 시계를 보던 안호연은 머뭇거리다가 소매를 걷어 올려 앞치마까지 입곤 싱크대 앞에 서서 손을 씻었다. 도마를 조리대 위에 놓고 냉장고 문을 연 안호연은 음, 하고 운을 뗐다. 자신 있게 아침상을 차려 주리라 마음먹었으나 할 줄 아는 음식이 거의 없었다.

김치볶음밥, 달걀프라이, 간장밥, 라면, 김치찌개가 전부였다. 야채 칸을 만지작거리던 안호연은 대충 달걀을 뽑았다. 오래전 보육원 동기 중 요리에 소질이 있었던 아이가 달걀말이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줬던 게 기억났다. 식당에 있던 달걀을 훔쳐 달걀말이를 했다가 선생님에게 혼이 났었다. 아이가 많아 예산이 달리는 보육원에서 식료품을 훔친다는 건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나고 그날 저녁에 달걀국을 먹었었다. 과거의 기억은 정말 보잘것없었다.

안호연은 기억을 더듬어 야채 칸에서 양파와 쪽파를 꺼냈다. 대충 양파를 헹구고 파를 다듬어 도마에 올려놨다. 칼집에 꽂힌 식칼을 꺼내 둥그런 양파에 칼날을 가져다 댔다. 표면이 미끄러운 양파 때문에 칼이 옆으로 미끄러졌다. 위험하게 칼질을 시작한 안호연은 자꾸 미끄러지는 칼을 뒤집었다. 날이 무딘가? 날을 뒤집어서 확인한 그는 다시 어설프게 양파를 썰기 시작했다.

큼직했던 양파는 칼날이 닿을수록 점점 작아졌다. 작아진 양파를 미리 꺼내 놓은 그릇에 담았다. 양파 썰기가 끝나자 이번에는 다듬어 놓은 쪽파를 썰기 시작했다. 양파와 달리 미끄러지지 않아 썰기가 편했다. 자신감이 붙어 마구 쪽파를 써는데 순간적으로 사고가 일어났다. 날이 손가락 살 위로 지나가면서 벌어진 살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안호연은 당황하지 않고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휴지로 꽉 눌러 지혈했다. 처음 베였을 때는 통증이 없었는데, 차차 통증이 느껴졌다. 썰다가 만 파를 보던 안호연은 몸을 돌렸다. 적어도 이 상태로 음식을 할 수가 없어 벌어진 상처를 막아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부엌을 두리번거리던 안호연의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스쳤다. 구급함이 떠올라 황급히 거실로 가 구급함을 꺼냈다. 그 안에 잡다한 비상약들이 정리되어 들어 있었다. 대일밴드를 꺼내 대충 다친 손에 붙이고 마저 음식을 했다.

서툰 손으로 달걀을 풀고 그 속에 소금, 파, 양파를 넣고 비볐다. 팬에 부었다. 노릇노릇 익은 그것을 돌려 가며 부치다가 뜨거운 팬에 팔이 닿았다. 아씨. 이번엔 안호연의 입에서 욕이 나왔다. 뜨거움에 뒤집개를 던지고 물에 팔을 집어넣었다. 뜨거웠던 팔이 식자 통증도 가라앉았다. 화상을 당한 피부가 금방 부어올랐다. 금세 물집이 생길 것 같아 이번에는 걷어 올렸던 소매를 내렸다. 안호연은 접시에 달걀말이를 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요리가 이렇게 위험한 건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았을 거다.

메뉴를 고르는 것부터 과정까지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안호연은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4시 50분이다. 10분 후면 남자가 일어날 시간이었다. 밥솥에서 밥을 푸고 어제 먹고 남은 찌개에 불을 붙였다. 그러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올려 두었다. 막 국을 떠 식탁으로 옮길 때 알람이 울렸다. 방 안에서 기척이 나자 안호연은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남자의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안호연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뿌듯했고 그가 좋아할 걸 떠올리자 가슴이 부풀 정도로 기대됐다. 모습을 나타낸 강중영은 얼떨떨한 얼굴로 식탁을 보았다. 그러곤 앞치마를 맨 안호연과 식탁을 번갈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어서 먹으라고 안호연이 손가락으로 식탁을 가리키자 그가 식탁 의자를 빼내 앉았다.

“이걸 혼자 했어요?”

혼자 만든 건 달걀말이 하나였다. 저걸 만들자고 50분을 쏟았는데 그의 목소리가 은근히 들떠 있었다. 톤이 높고 입가에 미소도 맺혀 있었다.

“누군가 날 위해 밥을 해 준 건 처음이에요.”

나머지는 강중영이 만들어 놓은 걸 꺼내 데워 놓기만 했기에 완벽히 그를 위해 만든 건 아니었다. 그래도 예쁜 자태를 뽐내며 접시에 누운 달걀말이가 뿌듯해 얼른 먹어 보라고 그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안호연의 성화에 그가 젓가락을 집어 달걀말이를 입에 넣었다. 그러곤 몇 번 맛을 보더니 빙긋 웃었다.

“일본식 달걀말이 같네요.”

무슨 뜻인지 몰라 안호연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달아요.”

안호연이 젓가락을 뻗어 달걀말이를 집었다. 입에 넣고 달걀말이를 씹자 달콤함이 느껴졌다. 달걀에 소금을 넣어 먹는 게 익숙한 안호연에게 굉장히 이상한 맛이었다. 소금을 넣는다는 게 실수로 설탕을 넣은 듯했다.

“썩 맛있네요.”

썩과 맛있네요가 잘 어울리는 단어가 아닌데도 그는 썩 맛있네요라고 말했다. 강중영은 달걀말이를 집어 밥그릇에 올려놓고 푸짐하게 밥을 떠 입에 밀어 넣었다. 다른 음식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달걀말이에다 밥만 먹었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뜻을 이제야 깨달았다. 잘 먹는 강중영을 안호연은 턱을 괴고 구경했다.

“근데 손에 붙인 그건 뭐예요?”

금세 밥 한 공기를 다 비운 그가 묻자 안호연은 자랑스럽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안호연은 자랑하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로 칼을 써는 시늉을 하다가 손가락도 툭툭 건드렸다. 이상한 몸짓을 용케 알아챈 강중영의 눈썹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대견하다는 칭찬을 바라는 안호연에게 그는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칭찬을 바라고 머리를 가까이에 가져다 대자 강중영이 딱밤을 때렸다. 그의 무서운 손이 지나간 이마에서 열이 났다. 아악. 아파서 두 손바닥으로 이마를 마구 문대며 열이 올라 붉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다음부터 이런 짓 하지 말아요.”

‘왜?’

입술을 벙긋거렸다.

“왜긴요. 이렇게 다칠 거면 안 하는 게 좋아요. 당신이 잘하는 걸 해요.”

도대체 자신이 잘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 화가 나서 식탁을 손바닥으로 텅텅 내리쳤다.

“잘만 먹어 주면 돼요. 내가 괜히 부자예요? 연인이 부자면 그걸 이용해야지 왜 아침부터 요리해요. 그냥 요리사를 불러서 해 주면 되잖아요.”

요리사가 해 준 것과 안호연이 직접 만든 음식은 다르다. 심통이 나 입술을 부풀리고 앉은 안호연을 보더니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먼저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데 호연 씨 생각을 못 했네요.”

그래, 네가 나빴어. 안호연은 새침하게 달걀말이를 내려다보았다.

“나 때문에 음식을 하다가 다쳤다니까 화가 났어요. 내가 해 주면 다치지 않아도 되는 건데 나 때문에 다쳤다니까. 음식에 소질이 없는데 뭐 하러 해. 음식은 내가 할 테니까 그쪽은 먹기나 해요. 또 다치면 가만 안 둬. 규칙 하나를 더 추가하죠. 이 집에서 절대 다치면 안 돼요. 다치면 쫓아낼 거니까 알아서 행동해요.”

그는 부드럽다가도 한 번씩 무서워지곤 했다. 또 잊을 뻔했다. 누가 뭐래도 족쇄를 찬 순간 자신은 강중영 거였다.

“근데 그쪽이 앞치마를 매고 싱크대에 서 있으니까 여기가 당기긴 했어요.”

그가 젓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나중에 앞치마만 입고 해 보죠. 아, 물론 의사가 말한 그 빌어먹을 자제 기간이 지나면 말이에요. 방긋 웃는 그에게 안호연도 웃어 주었다. 싫은데. 속으로 대꾸하며 맛없는 달걀말이를 그의 밥그릇에 넣어 주었다. 눈썹이 꿈틀거리던 그는 단 달걀말이를 입에 밀어 넣어 깨끗이 먹어 치웠다.

식사를 마친 강중영은 그릇을 치웠다. 고작 달걀말이 하나를 조리했을 뿐인데 조리대며 싱크대 홀이 지저분했다. 설거지감이 잔뜩 쌓여 있어 무질서한 거실을 쭉 훑어보던 강중영은 신속하게 정리를 시작했다. 딱히 할 일도 없었던 안호연은 강중영 옆에 붙어 치우는 걸 구경했다. 물이 튀어 배 부위가 젖었다. 옷이 젖는 게 안타까워 앞치마라도 걸어 주려고 그의 앞을 얼쩡거렸다.

“설거지하려고요?”

안호연은 절대로 설거지할 마음이 없었다. 무엇보다 손가락이 아팠고 손가락이 정말 아파서 구경만 할 생각이었다. 유일한 변명을 속으로 무수히 대며 안호연은 겉으로 설거지하기 싫다는 티를 냈다.

“손 다쳤잖아요.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앉아요.”

안호연과 강중영은 오늘 처음 의견이 일치했다. 안호연은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꺼내 그의 목에 걸었다. 끈을 리본 모양으로 묶고 방긋 웃자 그의 눈이 좌우로 흔들렸다. 커다란 눈이 감동으로 물드는 걸 보며 안호연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었다.

“얼른 의자에 앉아요.”

설거지도 안 하는데 말동무쯤이야 어려운 게 아니었다. 어차피 일방적으로 떠드는 건 상대방이었고 안호연은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됐다. 물소리와 그릇이 서로 부딪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이어지자 심심해졌다. 안호연은 휴지를 뜯어 그걸 반으로 접었다. 접고 또 접어 가던 안호연은 지루함에 하품을 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참 이상했다. 남과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는데 어색하지 않았고, 싫증도 나지 않았다.

안호연은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오늘 어떤 말을 늘리고 싶어요?”

아침마다 그에게 키스를 해 주고 한마디를 뱉으면 그 말은 집 안에서 쓸 수 있는 말이 됐다. 사실 편법을 사용하고 있는 안호연은 말을 늘리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어제는 ‘싫어.’였고 그제는 ‘짜증 나.’였다.

안호연은 설거지를 하는 강중영의 뒷모습을 모았다. 키가 커 등을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설거지를 하는 그를 보다가 안호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의 허리를 안았다.

“몰라?”

그 말을 허락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쉽게 허락을 해 주던 강중영이 오늘따라 뜸을 들였다. 잠시 설거지하던 손이 멎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호연 씨가 한없이 예쁘다가도 미워요. 좀 예쁜 말을 해요. 매일 부정적인 말만 허락해 달라고 하면 제 기분도 그렇죠. 좀 더 긍정적인 말은 안 돼요?”

좀 심했나. 잠시 고민에 빠졌던 안호연은 그를 슬쩍 보았다. 맛없는 달걀말이를 먹었으니 상을 줄 생각이다. 좋은 말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번뜩 무언가가 머릿속을 스쳤다.

“네가 많이 좋아지고 있는 거 같아. 이거 한 마디 아니라서 모른다고 한 건데.”

안호연의 속삭임에 강중영의 거품 묻은 손이 물에 잠겼다. 숨을 멈춘 그가 고개를 돌리더니 안호연을 뚫어지게 보았다. 숨을 멈추고 있던 그가 갑자기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마치 산타클로스에게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그의 눈이 다채롭게 빛났다.

“이리 와요.”

그가 손짓했다. 안호연이 그에게 바짝 서자 강중영이 짧게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조금 반성해야겠네요. 호연 씨가 날 이렇게까지 생각할 줄 몰랐어요. 더 분발할게요.”

안호연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그냥 내뱉은 말에 감동했는지 그의 떨리는 손끝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강중영을 보기도 전에 그가 안호연의 얼굴에 마구 키스를 했다. 얼굴 전체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이 딱히 기분 나쁘지 않았다.

“손에 물이 묻은 걸 감사히 여겨요. 마른 손이었으면 호연 씨는 오늘 부엌 밖으로 못 나가.”

 으스스 몸에 소름이 돋아 안호연은 민망하게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진정하라는 의미로 두 손을 올려 항복 자세를 취했다. 손에 비눗물이 묻어 싱크대에 묶인 강중영은 뒤로 물러난 안호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당장 뛰어와 허리를 낚아챌 강렬한 시선이었다.

‘설거지나 해.’

입술을 움직여 중얼거리곤 다시 의자에 앉았다. 강중영은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둘이 연애를 한다지만 서로 감정이 섞여 있는 건 아니라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건 서로의 이해관계로 만들어진 이상한 관계였다. 그 관계를 이해한다면 안호연이 뱉은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그는 우둔한 사람처럼 안호연의 말을 믿었다.

“오늘 외출해요. 강동구에 디저트 가게를 오픈하는데 거기에 가야 하거든요. 만나 볼 사람도 있고요. 오늘 집에 혼자 있을 수 있겠어요?”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생기면 문자 해요. 그리고 내일은 어머님 만나러 갈 거란 것도 미리 알아 둬요.”

잠시 귀를 의심했다. 누굴 만나러 가? 선 자리에서 보았던 깐깐해 보이던 여자가 떠올랐다.

“임신했다니까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때 호연 씨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얼굴만 보여 주고 오게요. 질이 나쁜 걸로 따지면 내 쪽이 나쁘거든요.”

설거지를 마친 그가 수건에 손을 문댔다. 물기를 다 제거한 그가 안호연의 귀에 속삭였다.

“그리고 오늘 허락할 말은 ‘좋아요.’로 할게요.”

강중영이 안호연의 어깨를 툭 쳤다.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입에서 신물이 나도록 입을 닫고 있었다. 쓸 수 있는 단어가 생겨도 부정어가 많아 쓸 수가 없었다. 신물이나 빼자고 강중영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앵무새처럼 좋아한다고 외쳤다.

“귀여워.”

그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안호연을 끌어안았다.

“귀여워서 일 가기가 싫어졌어.”

아니야, 어서 가. 안호연은 입술을 꾹 다물고 그를 돌려세우곤 어깨를 밀어 욕실에 넣었다. 이내 작은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물소리가 났다. 따분한 그 소리를 들으며 입술을 벌린 안호연은 우유를 꺼내 마셨다. 아침 일찍 일어났더니 몽롱한 상태였다. 잠이 들 듯 말 듯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자꾸 쓰러지는 고개를 받치기 위해 턱을 괴고 있다가 손톱이 길어 살을 파고들었다. 손바닥을 쫙 펼쳤다. 그사이 손톱이 꽤 많이 길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있었다. 손톱을 깎아야겠단 생각이 스치자 안호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저기 둘러봐도 손톱깎이를 찾을 수가 없었다.

“뭐 해요?”

막 씻고 나온 남자가 물기 어린 몸으로 나와 물었다. 코끝에서 느껴지는 보디 샴푸 냄새에 안호연은 고개를 들곤 손가락을 쫙 펼쳤다.

“손톱 깎아야겠네.”

고개를 주억거리던 남자가 멀지 않은 곳에서 은색의 손톱깎이를 가지고 왔다. 아래에 신문지를 펼쳤다. 안호연은 그 앞에 앉아 손톱깎이를 달라고 손을 뻗자, 강중영이 맨손을 내밀었다.

“손 주세요.”

‘네가 깎게?’

“그럼 누가 깎게요? 호연 씨가 족쇄를 찬 그때부터 내 거라는 거 잊었어요?”

잊지야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덜컥 손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금 두려워 고개를 젓자 그가 얼른 손을 채 갔다. 강중영의 손에서 위험하게 빛나는 손톱깎이를 보며 안호연은 땀을 뻘뻘 흘렸다. 그는 자신의 무릎으로 안호연의 손바닥을 받치고 손톱을 잘라 냈다. 똑똑 소리가 날 때마다 안호연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야.”

“쉿. 자꾸 말 시키면 살 잘려 나가요.”

그걸 우려해 싫다고 한 거라 안호연은 불퉁하지 못하고 입술을 꼭 다물었다. 손가락을 인질로 잡혀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꽤 진지한 얼굴로 손톱을 잘라 가던 그는 오른손을 내려놓고 왼손을 잡아 갔다. 그제야 무사히 다치지 않고 살아 돌아온 손가락을 보았다. 전문가가 잘랐다고 할 정도로 손톱이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빠르게 왼손을 깎은 그가 안호연의 무릎을 쳤다.

“발도 줘요.”

“싫어.”

그가 발목을 꽉 움켜쥐었다. 알파는 알파다. 평범한 성인 남자를 쉽게 제압하고 발을 채 갔다. 손가락보다 발가락이 더 무서웠다. 뻣뻣해지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봤다. 이건 신종 고문이었다. 눈을 껌벅대는데 그가 안호연의 무릎을 쳤다.

“호연아.”

그가 안호연을 부르며 갑자기 기어 왔다. 수건으로 아랫도리만 가린 남자가 기어 오는 건 조금 색정적이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들어와 부드럽게 안호연의 목덜미를 잡았다. 키스하는 줄 알고 안호연은 눈을 꼭 감았으나 뭉툭한 무언가가 이마에 닿았다. 남자의 이마다.

“다 깎았으니까 겁먹지 마.”

그러곤 코를 물었다. 코에서 싸한 치약 향기가 나 안호연은 손가락으로 문댔다.

“오늘 집 잘 지키고 있어. 나쁜 사람이 와도 문 열어 주지 말고.”

애도 아닌데. 소리 없이 투덜대는 안호연의 코를 잡고 비틀었다.

“욕심내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나도 조금은 진심이 된 거 같아. 너무 예쁘잖아.”

알 수 없는 말을 한 강중영은 목에 걸린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곤 드레스룸으로 옮겨 갔다. 옷을 고르는 그를 보니 그제야 집에 혼자 남겨진다는 게 실감 났다. 기분이 울적해진 안호연은 아직도 온기가 남은 코를 괜스레 문대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혼자가 되었다. 혼자인 게 처음이 아닌데 근래에 강중영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 이제는 이 시간이 어색하기만 했다. 그가 없는 시간 동안 말이라도 많이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아아, 하고 목을 가다듬은 안호연은 입술을 벌렸다. 그런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죽으로 된 족쇄가 걸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규칙에 얽매인 상태에서 말을 하지 말자고 이성이 말하고 있었다. 그건 강중영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버림받기도 싫었고,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적어도 족쇄를 차고 있는 동안 그는 안호연을 사랑할 테니까 강중영이 자신을 계속 사랑하게 두고 싶었다.

얌전한 고양이처럼 느른한 걸음으로 햇빛이 잘 드는 소파로 갔다. 몸을 둥글게 말고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건 오랜만이다. 언제였지? 조금 빛바랜 기억 속에 안호연은 태범석을 오래 기다렸었다. 그때가 각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같이 살고 있던 태범석이 각인 후 들어오지 않았다. 같이 살기도 하고 서로 각인해 안호연 혼자 태범석을 연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태범석이 돌아오지 않아 걱정됐다.

꺼진 태범석의 휴대 전화에 전화하고 그를 찾으러 갈 법한 술집을 오가다 집에 틀어박혔다. 혹시라도 길이 엇갈려 그를 못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외출이 열흘로 접어든 날, 그날 늦은 새벽이 돼서야 태범석이 돌아왔다. 술에 취한 그는 안호연을 보자마자 기분 나쁘게 키득키득 웃었다. 밉긴 해도 어디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왔단 사실에 안도하며 잔소리했다.

‘연락도 안 되고. 어디 있다가 온 거야?’

‘왜 네가 내 오메가라도 되는 양 굴어?’

‘우리 각인했잖아. 각인하면 책임지겠다고 했잖아.’

‘아아, 책임과 사귀는 건 별개라니까. 아직도 그걸 모르냐. 한번 몸 맞췄다고 내 오메가라도 되는 듯 굴지 마. 형이 시술받아서 힘드니까 넌 좀 자라.’

‘뭔 시술? 너 다쳤었어? 그동안 병원에 있었던 거야?’

시술이란 단어에 놀란 안호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치긴, 여길 묶고 왔지.’

태범석이 입술을 삐죽 올리며 아래를 툭툭 쳤다.

‘각인하면 더럽게 임신이 잘된다며. 그걸 알았으면 각인이고 나발이고 안 했을 텐데.’

‘태범석.’

‘그래, 내가 태범석이지. 네 친구 태범석. 넌 내 거. 내가 싫다고 해도 강아지처럼 따라다니는 넌 안호연.’

‘들어가서 자라. 너 많이 취했다.’

낄낄대던 그가 우습다며 목을 틀며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꺼냈다. 비틀거리는 몸으로 맥주를 마시는 그를 보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항상 기다림은 나쁜 기억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래서 기다리지 말자고 다짐해 놓고 미련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기다리는 게 반복되었다. 각인의 영향이었는지,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이 태범석 하나라고 여겨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각인한 상대에 대한 사랑이었는지도. 사랑이란 감정이 퇴색해 집착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 집착이란 감정도 사람이 독기가 있어야 할 수 있는데 지금은 지쳤다. 어쩌면 늘 꿈꾸고 있던 건지도 모르겠다. 지긋지긋한 태범석에게서 벗어날 기회를.

앉아 있던 안호연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룸으로 달려갔다. 그날 차마 버리지 못하고 주머니에 박아 놓았던 카드를 찾기 위해 옷 주머니를 모두 뒤졌다. 바지 전부를 뒤지다가 그제야 카키색 외투에서 카드를 찾았다.

안호연은 그걸 꺼내 갈기갈기 찢었다.

안녕이다, 태범석.

그동안 너에게 우롱당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열이 받고 화가 나. 이제는 가벼운 상념으로도 미련으로도 만나지 않기를 바라며 카드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젠 불확실한 미래를 좇기보단 확실한 미래를 좇아야 했다. 좋은 사람과 좋은 삶을 살고 싶었다. 안호연은 현관으로 바로 뛰어갈 수 있는 소파에 앉아 현관을 응시했다.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났다. 강중영은 절대 벨을 누르지 않는다. 그는 열쇠로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누군가가 찾아온 건 처음이다. 누구냐고 묻고 싶었으나 족쇄 때문에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창가를 두리번거리던 안호연은 인터폰을 눌렀다.

“택배입니다. 누구 없어요?”

인터폰에 불이 켜진지 모르는 택배 기사가 문을 흔들었다. 그 앞에 놓고 가라고 말하고 싶을 때였다.

“아무튼 대문 앞에 밀어 놓고 갑니다.”

갑자기 초인종이 눌리는 소리가 사라졌고 허무하게 끝났다. 안호연은 다시 소파에 앉았다.

[오늘은 뭐 먹고 싶어요?]

갑자기 테이블에 놓인 휴대 전화가 떨리더니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달려간 안호연은 얼른 문자를 썼다.

[그때 못 먹은 떡볶이.]

[제가 얼른 가서 만들어 줄게요. 또 뭐가 먹고 싶은데요?]

[딸기.]

[가기 전에 장을 봐야겠네요.]

[아니, 아무것도 안 먹고 싶어. 빨리 오기나 해.]

[보고 싶어요?]

[응, 보고 싶어.]

[저도 호연 씨 생각밖에 없어요. 오늘 일이 생각보다 많아요.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까 내 허락 없어도 미리 점심 챙겨 먹고 있어요.]

[빨리 와.]

[네.]

상냥한 그의 문자가 간간이 왔다. 안호연은 그 문자에 답장을 해 주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났고, 늘 자던 낮잠까지 건너뛰었더니 깊은 수마가 안호연을 덮쳤다. 눈을 감고 소파에 반쯤 기대어 잠들었던 안호연은 밤 12시가 돼서야 눈을 떴다. 사방이 검었다. 불을 켜기 위해 바깥으로 발을 뻗었다가 끈에 걸려 중심을 잃었다. 몸이 기울더니 이마에 불이 튀었다. 눈앞이 빙빙 돌았고 따끔한 아픔이 일었다. 이마를 손가락으로 감싸고 벽까지 걸어간 안호연은 불을 켰다.

밤 12시가 넘어가도록 강중영에게서 소식이 없었다. 전화해도 감감무소식이었고 드물게 휴대 전화까지 꺼진 상태였다. 무슨 일이지? 아픈 이마를 잊고 안호연은 멍하니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외출할 때 문고리에 족쇄의 끝을 걸어 놓는다. 그러면 끈의 길이가 딱 정원 중앙까지 닿았다.

불안했다. 안호연은 정원을 빙글빙글 돌며 대문을 뚫어지게 보았다. 자꾸 좋지 않은 기억이 오버랩 됐다. 늦도록 오지 않던 태범석, 사랑하지 말라고 다그치던 목소리가 귓속에서 쳇바퀴질 했다. 안호연은 비명을 지르며 손바닥으로 귀를 막았다.

멀리서 차 소리가 날 때마다 안호연은 눈이 대문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러다 차가 멈추는 소리가 났다. 안도보단 화가 머리끝까지 나 대문이 열리자마자 안호연은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런데 정원 중간까지 닿는 줄 때문에 걸려 넘어졌다. 무릎이 징검다리처럼 땅에 박힌 돌에 쓸렸다.

“호연 씨!”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와 안호연의 어깨를 잡았다. 안호연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마구 찧었다.

왜 늦었어! 왜 늦었냐고!

화가 난 안호연은 발에 찬 족쇄를 벗어 던지고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무게 중심을 잃은 그가 뒤로 쓰러졌다.

“너도 버리려고 했지?”

“왜 그래요? 흥분했어요.”

“빨리 말해.”

“누가 족쇄 벗으래요?”

“족쇄 차면 말할 수 없어서 벗었다! 왜! 그러면 안 돼? 너도 버릴 거야? 버릴 거냐고?”

“누가 버린다고 그래요.”

한참 안호연에게 두드려 맞으며 강중영은 안호연의 발목에 다시 족쇄를 채웠다. 그러곤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입 다물어요. 누가 보면 정말 버린 줄 알겠네. 중간에 일이 터져서 수습하느라 늦어 버렸어요. 중간에 배터리도 나가서 연락 못 했어요. 함부로 또 족쇄를 버리면 그땐 국물도 없을 줄 알아요. 네가 누구 건데 흙바닥에서 구르고 흠집을 내.”

안호연은 입술을 꼭 깨물고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버릇없게 굴지 말아요. 왜 심통이 났는지 차근차근 말해요.”

“버린 줄 알았어.”

“갔다가 온다고 했잖아요. 온다는데 어떻게 버릴 수가 있어요.”

“오늘 네게 완벽하게 정착했는데 네가 오지 않으니까 무서웠어.”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웃었다.

“그거 버렸어요?”

“뭘 버려?”

“그때 그쪽이 숨겨 둔 카드 말이에요. 태범석 번호가 적힌 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안호연의 눈이 커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요? 호연 씨가 들러야 했던 곳이니까 폭탄이 있나 확인차 사전에 들렀을 때 봤죠.”

“왜 안 치운 건데?”

“글쎄요. 그쪽이 도망가길 바란 것도 있겠죠.”

“거봐, 날 버리려고 했던 거야. 마음에 안 들면 내쫓으려고 속으로 각 잡고 있었던 거잖아.”

“당신을 통제하기가 버거워지고 있어서요. 하나씩 눈감아 주는 게 늘어나고 있고 이상하게 당신에게 조심스러워져요.”

“네 거라고 했잖아. 막 다뤄.”

“먹는 거 숨 쉬는 거 소변보는 거 전부 통제하고 싶은데요. 그랬으면 당신은 진즉에 도망갔겠죠. 내가 인내하니까 이 정도인 거야. 나도 무서워. 네가 가 버릴까. 그런데 내 습성을 깨뜨리는 네가 무섭기도 해.”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 우울하게 빛났다.

“하나는 약속할게요. 호연 씨가 도망가지 않으면 나도 버리지 않아요.”

그는 늘 비슷한 다짐을 안호연에게 말해 주곤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더 깊고 강렬한 무언가로 자신을 잡아 주기를 바랐다. 그는 자신이 도망가길 바랐었다고 속내를 내비쳤고 그가 바란 대로 안호연이 도망가면 잡으러 오지 않을 테니까. 솜털처럼 가벼운 그의 집착이 안호연의 불안을 부추겼다. 자신은 언제 어디로 도망갈지 모르는 상습자였다. 각인한 태범석도 버렸고 또 누군가가 나타나면 불안정한 그를 버릴지 모른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미래는 불투명했고, 그도 불투명했고, 그 미래의 도망가고 싶은 순간마다 그가 잡아 주길 바랐다.

“네 습성을 깨려는 내가 무섭다며. 안 깨면 되잖아.”

“감당할 수 있겠어요?”

“어.”

“호연 씨는 감당 못 해요.”

입술이 바짝 말랐다. 자신은 하지 못할 거라고 그가 못을 박을수록 골이 깊어졌다.

“해 보지도 않고?”

“못 하니까.”

“왜?”

“못 해요.”

“그럼 너는 족쇄를 찬 누군가가 널 만족시키면 날 버리겠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네가 사랑하는 범위는 족쇄잖아.”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었잖아요. 알고 찼으면서 그런 헛소리는 하지 말죠.”

“그래서 더 사랑해 달라는 건데 왜 못 하겠다는 건데? 마구 집착해. 마구 집착하고 도망가지 못하게 해 줘. 해 달라고 애원하는데도 네가 싫다면 난 어떡해, 항상 불안해야 해?”

갑자기 부드럽던 그가 안호연의 팔을 거칠게 잡았다. 살이 그의 손에서 찌부러질 정도였다. 팔이 꽉 잡혔는데도 안호연의 시선은 남자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일어서.”

안호연은 벼락같은 호통을 기다렸는데, 그가 화를 내지 않자 무릎을 세워 일어섰다. 갑자기 일어서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몇 초간 서서 어지럼증이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그의 뒤를 따라갔다. 집에 들어선 강중영은 손에 들고 왔던 봉지와 택배를 던졌다. 내쳐진 봉지에서 딸기가 튀어나와 흉하게 일그러졌다. 딸기를 보자 마음이 선연해졌다. 강중영은 지나가듯 딸기가 먹고 싶다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바란 건 당신이니까 후회하지 마요. 난 호연 씨가 도망가길 바라면서도 도망가지 않았으면 했어요. 양가감정 중 우위에 있던 건 당신이 도망가지 않았으면 했던 거였는데 그게 당신의 불안을 부추겼다면 제 식대로 다룰게요. 당신에겐 지배자가 아닌 연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거 같아요. 그래서 당신이 말없이 입을 벙긋댔을 때도 눈감은 건데 그걸 깨트린 건 당신이야.”

사람은 본연의 습성을 깨트리면서 살 수 없었다. 태범석은 철저한 독신주의자이고 기회주의자였다. 안호연이 그걸 깨고자 할 때마다 돌아온 건 비난과 냉대였다. 그래서 안호연은 그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고 오롯이 그의 습성 안에서 적응하고 싶었다. 차라리 그와 각인이라도 했다면 이런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테다. 다른 알파를 각인하고 또 다른 알파와 산다는 건 불안의 연속이었다.

강중영이 손가락으로 안호연의 가슴을 찔렀다. 호흡에 정지가 왔다. 드디어 그가 무얼 할지 알기에 기대로 안호연의 폐가 부풀었다. 자신을 얼마나 압박할지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옷 벗어요.”

낮고 간결한, 그러나 힘 있는 목소리에 안호연은 옷을 벗었다. 이틀간 입고 뒹군 잠옷은 벗기 쉬웠다. 옷을 벗고 서자 그가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택배 가지고 와요.”

안호연은 딸기가 든 봉지 옆에 있는 상자를 집어 들고 그에게 넘겼다. 그가 느릿하게 상자를 깠다. 까고 또 까던 그는 택배 상자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고무로 만든 링이었다. 그는 그걸 들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페니스를 잡아 그걸 채웠다. 발기도 되지 않은 쪼그라든 페니스가 조금 불편했다.

“사정도 소변도 발기도 모두 허락 맡아요. 아, 아침 발기는 이해해 주죠. 그런데 한껏 발기해서 그 고무링이 뜯어지면 정말 가만 안 둬.”

그가 안호연의 엉덩이를 꽉 잡았다가 놓았다.

“침대에 가서 누워.”

안호연은 그의 말대로 침대에 누웠다.

“내가 이불 덮으라고 했어요?”

안호연은 이불을 내렸다. 그는 구급함을 챙겨 오더니 침대 옆에 앉았다. 그의 무게만큼 매트리스가 내려앉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안호연의 이마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말해 봐요. 여긴 왜 그래요?”

“넘어졌어.”

“어쩌다가?”

“어두워서.”

“잠들기 전에 수면 등 꼭 켜요.”

그가 이마를 매만졌다. 이마로 혹 같은 이물감과 함께 통증이 느껴져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파도 마음은 평온했다. 손가락으로 그가 끼워 둔 링을 만져 보고 싶었다. 족쇄 이후로 자신에게 남겨진 물건이 안호연의 마음에 들었다. 만져 보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하나? 갑자기 든 의문에 안호연은 그를 보았다.

“왜요?”

“만져 보고 싶어.”

“거기를요?”

고개를 끄덕이자 강중영의 입에서 허락이 나왔다. 안호연은 냉큼 손가락으로 링을 만졌다. 성기를 조여 주는 그게 불편하면서도 좋았다. 만지니 소변감이 몰려오는 것도 같았다. 흘긋 그를 보았으나 강중영은 딴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는 무릎에 소독약을 바르고 있었다. 따끔한 아픔이 올라왔다.

“흙바닥에 구르고 싶으면 혼자 뒹굴지 말고 나한테 말해요, 내가 굴려 줄 테니까.”

그가 작게 으름장을 놓고 안호연의 몸에 이불을 덮어 주었다. 맨살을 타고 올라오는 이불이 자극돼 옆구리가 아팠다. 아니 조금 더 아래가. 다리를 꼬고 그의 소매를 꼭 잡았다.

“화장실 가고 싶어.”

“쉬가 마려워요? 정확히 말해요.”

“소변.”

부끄러웠다. 얼굴에 열이 오르자 그가 이불을 걷어 냈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아이를 챙겨 화장실에 데리고 가는 어른처럼 그는 안호연을 데리고 화장실로 갔다. 그러곤 변기통 앞에 안호연을 세우고 고무링을 빼 주었다. 누군가가 보는 앞에서 소변을 보는 건 부끄러웠다. 나가라고 강중영을 빤히 보자, 그는 오히려 잘 싸라는 듯 페니스 아래를 긁었다.

안호연은 소변을 참으려고 했으나 한번 몰려온 소변감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밀려오고 밀려오다가 소변이 터져 나왔다. 수치심에 안호연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그는 그게 더럽지도 않은지 한참 흘러나오던 소변이 방울이 되어 떨어지자 휴지로 페니스 선단을 정리하곤 다시 링을 채워 주었다.

“잘 쌌어요.”

그가 안호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변을 싸곤 꼭 손을 씻어요.”

그는 안호연을 세면대 앞에 세워 두고 손을 씻겨 주었다. 네 개의 손, 총 스무 개의 손가락이 엉켜 들었다. 누구의 손인지 구별되지 않는 네 손이 물에 젖었다가 거품이 났다가 물에 씻겨 내려갔다. 보송한 수건으로 물기가 어린 손을 닦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닦곤 그가 어깨를 툭 쳤다. 침대로 뛰어간 안호연은 부끄러움에 이불 속으로 얼굴을 숨겼다. 뒤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귀여워. 그 소리를 들으며 안호연은 베개 아래로 얼굴을 완벽히 숨겼다. 쥐구멍이 있다면 그곳에 머리라도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화 안 내?”

강중영은 외출했다가 안호연의 손에 무진장 맞았다. 늦게 들어온 건 잘못된 거였지만, 그도 변명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끝없는 변명으로 자신을 몰아세우는 대신 안호연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내가 좋아서 더 속박해 달란 사람에게 왜 화를 내요. 상을 줘도 모자라는데.”

안호연은 손을 내려 링을 만지작거렸다. 정말 이상하다. 더 억압해 달라고 소리쳤는데 사정 방지 링만 생겼다. 더 억압해도 되는데. 더, 더 힘들게 해도 되는데. 아쉬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김빠진 숨을 내쉬었다.

“그만 만지고 자요. 사념이 많을 땐 머리를 쉬게 해 줘야 해요.”

그가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들린 이불로 건강한 몸과 함께 바람이 스며들었다. 베개에서 얼굴을 빼낸 안호연이 그의 옆구리로 파고들자, 강중영은 기꺼이 안호연에게 팔을 내주었다. 그의 팔을 베고 눈을 감았다.

* * *

아침부터 전쟁이다. 아침에 일어난 강중영은 안호연을 씻기느라 분주했다. 밥을 챙기고 옷까지 챙겨 입히곤 족쇄를 풀어 주었다. 오늘은 강중영 집에 가는 날이라 걱정이 밀려왔다. 낯선 타인, 그것도 어른을 만난다는 건 거북했다.

그래서인지 이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저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괜히 발에 걸리는 소파를 발로 차다 헐거워진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안호연은 허리를 숙여 허전한 발목을 매만졌다. 역시 족쇄를 차야 마음이 놓였다. 막 상체를 세우려 할 때 단단한 무언가가 엉덩이를 찧었다가 떨어졌다. 힘에 밀린 안호연의 몸이 앞으로 쏟아졌다.

“누가 족쇄에 신경 쓰래. 또 다른 족쇄가 있잖아요.”

넘어진 안호연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그러곤 손가락으로 앞섶을 누르곤 빙긋 웃었다. 그제야 아래가 신경이 쓰였다. 페니스에 곱게 끼워 둔 링. 안호연은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말해도 되는데 왜 우물쭈물해요.”

“허락 맡아야 하는 줄 알았지.”

“언제부터 허락을 맡았다고.”

그가 손가락으로 코를 쥐고 흔들었다. 정신없는 틈에 공격받은 코 때문에 얼른 손바닥으로 가렸다.

“나가요.”

그는 안호연이 입을 외투를 챙겨 밖으로 먼저 나갔다. 어미 개를 따르는 강아지처럼 안호연은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안호연이 조수석에 올라타자 강중영이 외투를 건넸다. 털이 달린 모자가 있는 야상이었다. 그걸로 배를 덮었다.

“차는 얼마나 타고 가야 해?”

“한 시간 정도요.”

“왜 가족과 안 살고 떨어져 살아?”

“내 공간을 가지고 싶었고, 무엇보다 이 꼴을 어떻게 보여 줘요?”

하긴, 가족에게 보여 주기엔 무리가 있는 생활이었다. 족쇄도 그렇고 모든 게 전부. 분명 가족 중 연세가 많은 분이 있다면 이 광경을 보고 뒤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가족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외롭지 않았어?”

“전 정신 감정을 받은 이후로 문제아였어요. 가족이어도 가족 속에 잘 어울리지 못했어요. 그쪽에선 저를 숨기고 싶어 했거든요. 그래서 첫 독립을 했을 때 행복했죠.”

“그때 처음으로?”

“네.”

“그다음엔?”

“호연 씨를 만난 이후로 조금씩 행복해지고 재밌어져요.”

“뭐가 재밌는데?”

“누가 내 옆에서 입을 벌리고 침 흘리고 자는 것도, 코를 고는 것도.”

“야, 내가 언제 코를 골았다고?”

안호연은 주먹을 들었다. 그러자 그가 힐끔 안호연을 보곤 핸들을 꽉 쥐었다.

“운전 중이니까 때리려면 도착해서 때려요.”

얄미운 소리를 했다.

“나 코 안 골았어.”

“아무리 제가 나쁜 놈이어도 거짓말은 안 해요. 그쪽이 코 골아서 요즘 알람도 필요 없어요. 호연 씨 요즘 살쪘나.”

침, 코골이, 살 3콤보가 안호연의 속을 후벼 팠다. 안호연은 눈을 아래로 굴렸다. 활동량은 줄었는데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다 보니 살이 오른 것도 같다. 아니, 확실히 살이 쪘다. 손바닥으로 배를 만지니 약간의 살이 잡혔다. 차창에 비친 얼굴을 보자, 턱 선이 사라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 턱에 살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는데. 약간 자괴감이 느껴졌다.

심지어 혼자 먹는 것도 아니고 같이 먹는데 강중영의 턱은 날카로웠다. 억울함이 들어 안호연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 밥 안 먹어.”

투정 섞인 목소리로 안호연이 말하자 그가 작게 웃었다.

“왜요? 임산부는 살찌는 게 당연한데.”

“당연한데 왜 놀리냐고. 살찌는 게 내 탓이야? 임신시킨 것도 너고 밥을 해다 바친 것도 너잖아.”

“임신은 그쪽도 동의했어요. 깊게 넣고 찔러 줘. 노팅해 줘. 호연 씨가 그렇게 말했다는데 왜 안 믿어요?”

“술에 취해 있었잖아.”

“그때 저도 취해 있었는데요. 전 다 기억하는데 왜 그쪽은 기억 안 해.”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야.”

팔짱을 낀 안호연은 다시 창을 내다보았다. 시비를 거는 강중영 때문에 화병으로 곧 앓아누울 예정이다. 자신보다 네 살이 많은 강중영은 결코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고 했다.

“너 그거 알아?”

“뭐가요?”

“너 나보다 형이야.”

치졸하다는 걸 알지만 안호연은 나이를 들먹였다.

“사람들은 꼭 불리해지면 나이를 들먹이죠. 식상해. 그렇다고 형 대접을 해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날 형으로 여겼다면 어제 그렇게 패지 않았죠. 어제 호연 씨한테 맞은 곳이 아파요.”

좀 심하게 때렸나? 안호연의 손은 매운 편이었다. 잠시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많이 아팠어?”

“네, 호 해 줘요.”

“호?”

“그럼 안 아플 거 같아서요.”

사실 어제 그가 맞을 이유는 없었다. 차분하게 정리된 머리에선 혼자 오해하고 발광한 안호연의 잘못이었다. 어제 자신에게 맞을 것도 모르고 제게 먹일 딸기와 떡볶이 재료를 사러 다녔을 그를 떠올리니 가슴 한쪽이 무겁게 걸렸다.

“어디가 아픈데?”

죄책감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강중영은 손가락으로 가슴을 가리켰다. 어제 세게 내리쳤던 곳이다. 고개를 숙인 안호연은 ‘호’ 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바람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려는데, 그때 강중영이 손가락으로 안호연의 턱을 채 갔다. 타의로 인해 턱을 바짝 치켜들자 안호연의 입술 위로 남자의 입술이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눈 깜빡한 사이에 기습 뽀뽀를 당했다.

“이제 안 아프네요. 싹 나았어. 호연 씨의 ‘호’가 만병통치네요.”

멍한 얼굴을 하던 안호연은 표정을 바꿔 그를 노려보았다.

“저 운전하는 거 잊지 마요. 때려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노려보는 것도 안 돼요.”

멍한 눈을 다른 시선으로 오해했는지 혹시 때릴까 그가 운전한다는 걸 강조했다. 문득 그가 귀엽다는 생각이 안호연의 머릿속에 스며들어 웃음이 맺혔다.

“차 세워 봐.”

“왜요?”

“얼른.”

“화장실 급해요?”

안호연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강중영이 갓길에 차를 댔다. 차가 깜빡이를 켜고 서자 안호연은 그의 목에 제 팔을 걸었다. 그러곤 더운 숨을 들이마시며 그의 입술에 입술을 묻었다. 키스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다가 입술을 뗐다.

“제대로 호 해야지.”

“어떡하지.”

갑자기 강중영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왜?”

“가기 전에 한 판 하고 가요.”

무슨 한 판? 그를 불러 세우기도 전에 갓길에 깜빡이를 켜고 서 있던 차가 움직이더니 U턴을 시도했다. 빠르고 급하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으나 깜빡이를 끄지 않은 상태로 집으로 향했다. 매섭게 깜빡이를 켜고 달리는 강중영의 차를 보고 길을 막고 있던 차들이 길을 터 주었다. 차를 멋대로 세운 그가 안호연 쪽으로 달려왔다. 느릿느릿 안전벨트를 푸는 게 답답했는지 그가 빠르게 풀곤 손목을 잡고 달렸다.

“집엔 왜 온 건데?”

“밤까지 참아 보려고 했는데 사랑스러워서 안 되겠어요. 그걸 어떻게 참아.”

사랑스럽다는 말에 안호연의 입술이 벌어졌다. 좋아한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아닌데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강준영의 입에서 ‘사랑’이란 단어가 처음 나왔다. 얼떨떨한 상태에서 대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현관문을 열기도 전에, 족쇄를 차지도 않은 상태에서 안호연의 옷을 벗겨 냈다. 정원 한가운데에 바지가 떨어졌다. 자꾸 티를 벗겨 내려는 손을 밀어 낸 안호연은 차분하게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강중영의 거친 손에 잡혀 티가 벗겨졌다. 그걸 발로 걷어 낸 안호연은 달려가 얼른 족쇄를 차고 두 팔을 벌렸다.

이리 오라는 말을 용케 알아들은 그가 단단한 팔로 안호연의 허리를 감싸 안아 소파로 내던졌다. 바지를 벗은 그가 안호연의 다리를 벌리더니, 안호연의 다리 사이로 그의 몸을 밀어 넣고 섹스 했다. 길고 긴 섹스였다.

* * *

강중영이 유년 시절을 보냈다는 성북동의 단독 주택은 매우 깨끗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단장을 한 건지 몰라도 정원에는 티끌 하나 굴러다니지 않았다. 안호연은 여전히 달아오른 몸에서 그의 페로몬 냄새가 나나 걱정되어 코를 박았다. 예민한 코에 아무런 냄새도 잡히지 않았다. 확실히 뒤처리가 우수했다. 우수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였다.

“분명 점심때 온다고 했는데 어째서 지금 와?”

차 소리를 듣고 앞치마를 맨 이선영이 밖에 나와 있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오는 길에 뽀뽀하다가 눈이 맞아 섹스 하느라 늦었다고는 입이 있어도 말할 수가 없었다. 얼얼한 허벅지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안호연은 어색하게 웃었다.

“벌써 저녁이잖아.”

안호연은 팔꿈치를 세워 강중영을 쳤다.

“오는 길에 엔진이 주저앉았어요.”

“에이, 차 산 지 얼마나 됐다고 엔진이 멈춰. 주차된 거 보니까 그 차던데. 어디 딴 데로 샌 거 아니야?”

“다른 차를 타고 왔거든요. 그건 좀 오래 탔잖아요. 하도 험하게 몰고 다니기도 했고.”

“아? 그 스포츠카?”

안경을 쓴 남자가 열린 현관문 사이로 나오더니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강중영과 비슷한 듯 비슷하지 않은 초면인 남자가 안호연을 보더니 대뜸 손을 내밀었다.

“중영이 형 강유정이에요. 어머니께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그가 손을 내밀었다. 어서 잡아 달라는 듯이 보채는 손에 안호연은 쭈뼛거리며 손을 내밀려 했다. 그때 강중영이 강유정의 손을 쳐 냈다.

“적당히 하죠. 싫어하잖아요.”

“까칠하긴. 나도 내 거 있어.”

억울하다는 듯이 강유정은 강중영을 보더니 코로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리곤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번들번들한 명함에 ‘변호사 강유정’이란 글귀가 적혀 있었다.

“혹시라도 이 새끼와 이혼할 생각 있으면 여기로 연락해요. 성심성의껏 도와드릴게요. 가정 폭력은 불행의 씨앗이잖아요.”

뜬금없이 가정 폭력을 운운하는 그 때문에 안호연이 고개를 기울이자 강유정이 이마를 가리켰다. 안호연은 그 손을 따라 자신의 이마를 만졌다. 그제야 어제 테이블에 부딪쳐 혹이 난 이마가 떠올랐다.

“이건…….”

“내가 다 미안해요. 중영이가 원래 다정한 아이라 사람은 때리지 않았는데……. 내가 미안해요. 다음에 또 그러면 그땐 내가 이혼시킬게요.”

이선영도 죄인이 된 심정으로 두 손을 모았다. 아마 이마의 상처가 폭력으로 생긴 상처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잠결에 끈에 걸려 넘어져 생긴 건데.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대곤 강중영을 보았다.

“얼른 들어와요.”

그녀는 마치 무뢰한을 보듯 강중영을 훑어 내리며 안호연을 그에게서 떼어 냈다. 이선영의 손에 이끌려 들어가자 먼저 맞아 주는 건 하얀 강아지였다. 꼬리를 흔들며 반기던 강아지가 유독 강중영에게 왈왈 짖었다.

“개도 사람을 알아보는 거지.”

쯧쯧 혀를 차는 강유정의 머리를 이선영이 빠르게 가격했다. 그 손이 빨라 안호연은 잘못 봤나 눈을 비볐을 정도였다.

“앉아 있어요.”

호호호 어색한 웃음을 낸 이선영은 얼른 왈왈 짖어 대는 하얀 강아지를 안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자 집을 구경할 시간이 생겼다. 곳곳에 놓아 둔 소품이 없는 걸로 보아 그녀가 굉장히 깔끔한 스타일이라는 걸 알아챘다. 안호연이 소파에 앉자 형제도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강유정은 턱을 괴고 신기하다는 듯이 안호연을 봤다.

“참 신기하네. 오메가라곤 쥐뿔도 만나 보지 못한 강중영이 어떻게 한 방에 임신시켰대요?”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처음 본 사람에게 던지지 못할 말이었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을 보며 안호연은 침을 삼켰다.

“그거 알아요? 우리 중영이 모솔이거든요. 그건 내가 장담해요. 초중고 같이 나오고 거기다 대학교까지 같은 곳을 나왔거든요. 얘 별명이 잘미였어요.”

“잘미요?”

“잘생긴 미친놈이요. 얼굴이 잘생겨서 중영이를 짝사랑하던 애들 몇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중영이가 족쇄를 줬다나. 그래서 여자나 오메가가 치를 떨었거든요. 그래서 여태까지 모솔이었어요. 이제 결혼하니까 모솔은 아닌가.”

“모솔이요?”

“모태솔로요. 예전에 중영이가 컴퓨터나 노트북에 야동 하나 없이 건전한 생활을 해서 갑자기 조카가 생길 줄은 몰랐거든요. 점잖은 개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고 하지만, 중영이가 나보다 먼저 결혼할 줄 몰랐어요.”

처음이라고? 안호연은 미심쩍은 눈으로 강중영을 봤다. 그와의 밤을 생각해 보면 그는 처음이 아니었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마시죠.”

강중영은 딱히 부정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무엇이 진실인지 가늠하고 있을 때 테이블에 접시가 놓였다. 이선영이 과일을 가지고 왔다.

“호연 씨 딸기 좋아하는데 딸기는 없어요?”

눈치 없이 말을 꺼내는 강중영을 보며 안호연의 턱이 빳빳하게 굳었다. 집에서 하지 않던 팔불출 노릇을 여기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으로 아니라고 손을 휘저었다.

“와, 이놈 봐라. 이래서 아들자식 키워 봐야 소용없다는 거구나. 어머니, 아들 헛키웠어요.”

탐스러운 과일 중 하나를 골라 포크로 찍으며 강유정이 속삭였다.

“너도 마찬가지잖아. 얼마 전 화단에 있던 꽃을 다 뽑아다가 윤영이 갔다 준 놈이……. 호연 씨, 딸기 좋아한다고 했지? 내가 가져다줄게.”

뺀질거리며 말하는 강유정을 타박하려던 이선영은 얼른 입술을 다물곤 방긋 웃었다. 이마에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쳐 내곤 다시 부엌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싸우든지 말든지 관심 없다는 듯 강중영은 안절부절못하는 안호연의 입술에 사과를 가져다 댔다. 손등으로 포크를 밀어 내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강유정과 눈이 마주쳤다. 별수 없이 안호연은 입술을 벌려 사과를 먹었다.

“호연 씨 몸에 상처가 많네. 손등은 왜 다쳤어요? 저 자식이 막 다뤄요? 까놓고 말해서 강중영이 지배자 타입 알파인 거 알고 만나는 거죠? 이거 적시하지 않고 만났으면 이혼 사유예요.”

“네, 알아요.”

“그런데도 좋아요?”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임신한 상태에서 이상한 플레이는 하지 말라고 권해요. 그리고 강압적이거나 참기 힘든 폭력이 있을 경우 저와 상담해요. 꽤 능력 있는 변호사니까.”

“능력 있는 변호사는 보통 자신이 능력 있다고 안 하던데.”

“요즘 시대엔 다 자기 능력을 어필하거든?”

“그 망해 가는 변호사 사무실이 형 능력을 대변해 주고 있나 보죠.”

강중영이 불쑥 끼어들었다. 얼굴에 불쾌한 티를 팍팍 내며 안호연의 입에 꾸준히 과일을 가져다줬다.

“그쪽 일이나 잘하고 제 일에 끼어들지 마요. 우리 일이니까.”

“정의감이 불타서 그런다. 내가 널 어떻게 믿냐. 너랑 선 본 애들 중에 울면서 뛰쳐나간 애들이 몇인데. 호연 씨가 착해서 너 같은 놈에게 걸린 거 같아서 마음에 걸려.”

“호연 씨가 착하다고?”

그가 슬쩍 안호연을 보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눈을 봐. 너 진짜 도둑놈이야. 마음 같아선 떼어 놓고 싶은데 애도 있고 호연 씨도 네가 좋다니까 여기까지 하는 거야.”

“호연 씨가 순진하다고?”

그의 입술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강중영은 안호연이 어떤 인간인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사기꾼에다 잔꾀도 많고 문란했던 과거까지.

“복 받은 줄 알아. 천하의 못된 새끼야.”

아무것도 모르는 강유정은 강중영을 자꾸 자극했다. 강중영의 입에서 무슨 말이라도 튀어나올까 침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뗐다.

“제가 좋아서 만나는 거예요. 중영 씨는 싫다고 했는데 제가 좋다고 했어요. 중영 씨에게 너무 뭐라고 하지 말아요.”

핫? 헛웃음을 내뱉으며 강유정이 안호연을 보았다.

“우리 남자니까 톡 까놓고 말해요. 강중영이 좋을 순 있어요. 근데 잠자리는 어때요? 얘가 아무것도 몰라서 거칠 게 다루…… 아니에요.”

그는 순진한 얼굴의 안호연을 보곤 고개를 흔들고는 강중영 쪽으로 몸을 낮췄다.

“너 인마, 남자 오메가와 잠자리할 때는 더 공들여서 아래를 풀어 주고 그래야 하는데, 그거 알긴 하지?”

속닥속닥 강중영만 들으라는 듯이 말하는 것 같으나 사실 귀가 예민한 안호연의 귀로 다 들어왔다. 강중영이 아무것도 모르다니. 안호연의 입술 사이에서 웃음이 나왔다. 1시간 전만 해도 몸이 살살 녹을 정도로 치대던 남자였다. 거기다 흔적을 남기는 것까지 좋아해 옷 안으로 붉은 자국들이 수도 없이 찍혀 있었다. 체력도 스킬도 모든 게 뛰어났고 지금까지 연인이 없었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정말 이건 경험 없이 가능한 잠자리가 아니었다.

안호연은 속내를 숨기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웃었다. 순진한 웃음에 속아 넘어간 강유정이 슬픈 표정을 했다.

“내가 중영이 잘 가르칠게요.”

안호연은 손을 저었다.

“어차피 우리 안 해요. 아이도 생겼고 하니까 안 하기로 했어요. 그런 도움 필요 없어요.”

“잘 안 하다뇨?”

안호연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 걸 하려고 결혼한 게 아니라서요. 손만 잡고 자도 좋아요. 몸이 좋아서 결혼한 게 아니라 서로가 좋아서 결혼한 거잖아요.”

안호연은 눈꼬리를 살짝 내리고 천진한 척 웃었다. 굉장히 충격받은 듯 남자가 어버버 입술을 벌렸다.

“유치원 커플도 아니고 손만 잡고 잘 거라뇨. 잠자리가 사랑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데요.”

“그런 거 없어도 괜찮아요. 중영 씨만 있으면 돼요.”

손에 소름이 돋았다. 그럴 때마다 강중영의 눈이 크게 흔들리더니 안호연의 손을 꼭 잡았다. 떨리는 강중영의 눈과 마주치자 안호연도 ‘나 잘했냐는 듯’ 방긋 웃었다. 두 사람이 사람 하나를 가지고 노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었다.

“무슨 이야기 해?”

막 딸기를 내온 이선영이 물었다. 그녀는 살갑게 안호연에게 딸기를 포크로 찍어 건넸고 안호연은 그걸 마다하지 않고 입 속에 넣었다.

“딸일까?”

“네?”

“중영이 안 닮고 호연 씨 닮은 딸이었으면 좋겠어요.”

그건 안호연 쪽에서 사양이었다. 적어도 아이는 아무도 닮지 않기를 바랐다. 안호연이나 강중영이나 둘 다 제정신이 아니니까.

“우리 중영이가 어렸을 때부터 개구쟁이였거든요. 그래서 여린 호연 씨가 많이 놀랄까 걱정돼요. 나야 드세서 버틸 수 있었는데, 우리 호연 씨는 가늘고 여리잖아요.”

그들은 하나같이 안호연을 작고 여린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촌극이 따로 없었다. 만약 안호연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배를 잡고 웃을 상황이었다.

“태명은 정했어요?”

“그게, 아직.”

“아직도요?”

안호연은 눈을 깜박였다.

“뭐라고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몰라서.”

“하긴, 신중해야죠. 우리 중영이 태명은 예쁜이였어요.”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태명이었다. 예쁜이라니.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안호연에게 그녀는 다정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더니 안호연의 손을 잡았다.

“아무튼 호연 씨,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해요. 더구나 배 속에 예쁜 선물까지 데려오고. 감동했어요.”

“네.”

“어머니나 엄마라고 불러도 좋아요.”

뭐랄까. 안호연은 눈을 느리게 깜박거렸다. 조금 감동이었다. 환영한다고 두 손을 벌려서 환영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이제 밥 먹어야죠.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기분이 좋아진 안호연이 도와주겠다고 말하자 과일을 먹던 강중영이 막았다.

“호연 씨가 왜요? 여기에 잡일 시키려고 데려온 거 아닌데, 부엌에서 잡일할 거면 일어나요. 집에 가게.”

아까부터 눈치 없이 구는 강중영 때문에 안호연은 말을 잃었다. 그래도 예의 있게 있어야 하는 곳이었고 나름 눈치를 보기도 해야 하는 곳이었다. 옆에서 과일을 집어 먹던 강유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결혼하더니 팔불출이 되었다며 강중영을 비난했다.

“오늘은 중영이 말 들어요. 아직은 손님으로 온 거니까 앉아 있어요. 부엌에 가면 일손을 도와주는 사람도 있고 하니까 불편하게 생각 말고요.”

이선영이 부엌으로 사라지자 강중영은 뻔뻔하게 딸기 꼭지를 따 안호연의 입에 넣어 주었다.

“순진하고 착한 호연 씨는 여기 앉아 있어요.”

자신을 놀리는 강중영을 흘겨보던 안호연은 팔꿈치로 조용히 그의 명치를 찍었다. 자꾸 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눈빛을 보내자 그가 안호연의 입 속에 딸기를 넣었다. 옆통수가 따가워 고개를 돌렸다. 따가운 시선의 주인은 강유정이었다.

“근데 호연 씨는 중영이 어디가 마음에 들었어요?”

“잘생겼고.”

“근데 인간 말종이잖아요. 성격 안 좋아요. 지금 같이 살면 알 텐데.”

“자상해요. 밥도 손수 하고 머리도 감겨 주고 말려 주고 빗겨 줘요.”

“강중영이 자상하단 소리는 평생 처음 들어요.”

그가 허무하단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축하해요.”

“고마워요.”

강유정은 측은하단 눈으로 계속 안호연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강중영은 빈말로도 자상하지 못한 종자인 건 틀림없다. 그가 정한 규칙은 일반인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간파하지 못한 변수가 하나 있었다. 그건 안호연도 지극히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안호연이 빙긋 웃자 맞은편에 있던 강중영도 따라 웃었다.

정확히 밥 먹을 시간에 맞춰 강중영의 아버지인 강기석이 도착했다. 그가 오자 느릿했던 사람들의 손이 분주해졌다. 이선영은 부엌을 바삐 오갔고 강유정은 옷을 다듬었고 안호연도 허리를 쭉 폈다. 자세를 바꾸는 사람 사이에서 유일하게 강중영만 흐트러짐이 없었다.

새로운 어른의 등장에 긴장돼서 그런지 소변이 마려웠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 느낌이 방광에서 아랫도리로 몰려들었다. 팽팽하게 조이는 링에 당황한 안호연은 강중영을 물끄러미 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차를 마시던 강중영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마시고 있던 차를 내밀었다. 줄까요? 사람 염장을 지르는 게 아니라면 강중영은 정말 눈치가 없었다. 허벅지로 다리를 꽉 조이며 바지를 꽉 잡았다. 손톱으로 바지의 섬유를 마구 긁어냈다.

안호연의 급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중영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차를 마실 뿐이다.

“먼저 앉아 있어요.”

“배고팠는데 잘됐네.”

이선영이 식사를 권하자 사람들이 일어났다. 안호연도 그들 틈에 섞였다. 부엌에선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테이블 위는 진수성찬이다. 상다리가 휘어진다는 말은 지금 보이는 테이블을 두고 쓰는 말이었다. 행장님 오시면 먹게요. 이선영의 말에 안호연은 그제야 아까 늦게서야 집에 도착한 강기석이 떠올랐다.

그가 오기 전에 화장실에 갔다 올 생각에 강중영 옆에 앉았다. 안호연은 얼른 식탁 밑 발로 그의 발등을 마구 밟았다. 발등이 찍혀 아플 텐데도 그는 별 반응이 없었다.

“알았어요. 집에 가서 잔뜩 해 줄 테니까 여기선 좀 참아요, 순진한 호연 씨.”

소리도 거의 내지 않고 그가 말했다. 반은 놀리는 말투였다.

“그게 아니라…….”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하려고 입술을 떼는데 여기서 유일한 여자인 이선영이 소녀같이 두 손을 모으고 식탁에 앉자,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남자가 들어섰다. 강기석이 들어오자 강유정이 인사를 건넸고, 강중영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말을 꺼낼 기회가 사라지자 열 받은 안호연은 뒤꿈치로 그의 발등을 찍었다.

쓱 주위를 보던 강기석은 안호연에게서 멈췄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을 보고 인사를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네가 호연이구나. 고맙다. 내가 복이 많아서 이런 참한 아들을 들이는 날도 있구나.”

대뜸 고맙다고 말하자 안호연은 당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고마워해야 할 상황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놈 데리고 가 줘서 고마워. 내가 평생 잘하마.”

안호연은 머리를 긁적였다.

“꼭 저놈 말고 너 닮은 손주로 안겨 줘라.”

아까도 말했듯이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으라는 건 욕이나 다름없었다.

“뭐 갖고 싶은 건 없고?”

“아니요.”

어색하게 웃으며 강중영을 보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밥그릇에서 무언가를 골라내고 있었다.

“착한데 물욕까지 없어서.”

감동한 강기석이 눈물을 글썽였다. 처음에 무뚝뚝해 보이던 그의 이미지완 반대라 안호연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굉장히 팔불출이었고, 눈물도 많았다. ‘우리 호연이가 착하죠?’로 시작된 이야기가 다른 사람 입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강중영이 갑자기 자기 밥그릇과 안호연의 밥그릇을 바꿔 주었다. 콩이 들어가 약간 보라색을 띠는 밥이었다. 그의 밥그릇에 콩이 수북하게 쌓였다. 콩을 싫어하는 안호연을 위해 손수 콩을 골라냈다.

“우리 호연 씨 콩 못 먹어요. 당근도 못 먹어요.”

정말 강중영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른 앞에서 반찬 투정을 하는 못난 놈으로 만드는 강중영 때문에 볼살이 떨렸다. 그깟 콩이나 당근쯤 오늘은 먹어도 괜찮았다. 죽지만 않으면 참고 먹을 수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어색하게 웃으며 강중영의 팔을 잡았다. 차라리 콩을 고를 시간에 화장실에 보내 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살벌한 웃음을 띤 안호연은 젓가락을 꽉 쥐었다.

“어머, 당근을 못 먹어요? 색 낸다고 다 넣었는데 어떡해요.”

이선영이 울상을 지었다. 잡채며 갖가지 음식에 고루 들어간 당근을 빼내려고 젓가락을 들려 하자 안호연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내가 골라 주면 되니까 괜찮아요.”

안호연이 손을 흔듦과 동시에 강중영이 말했다. 강중영은 음식을 골라 안호연의 숟가락에 올려 주었다. 어서 먹으라는 듯이 손까지 까닥였다. 집에서도 흔히 보는 풍경이지만, 그는 여기에 어른이 있다는 걸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굉장히 무례한 행동인데도 아무도 그걸 지적하지 않고 오히려 이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이 강중영을 없는 사람 취급했다.

짜증스레 그가 집어 준 음식을 먹으며 안호연은 착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계속 사기꾼 기질이 슬그머니 나왔다. 돈이 많은 사람이 착한 사람에게 얼마나 유한지 잘 알고 있었다.

“네, 괜찮아요. 중영 씨도 이렇게 신경 써 주고 어머니도 신경 써 주시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어머니? 여보, 들었어요? 우리 호연이가 나보고 어머니래.”

“얘야, 나는?”

눈을 반짝이는 강기석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아버지’라고 불러 주었다. 아버지라고 부르자 옆에 있던 강유정마저 눈을 빛내며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갑자기 식탁 위로 때아닌 호칭 바람이 불었다. 사이좋게 이름을 불러 주자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처럼 기뻐했다.

물을 마시자 참고 있던 소변감이 몰려와 안호연은 발을 동동 구르며 강중영의 소매를 꽉 잡았다. 왜요? 하고 묻는 강중영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갔다 와. 원래 소리 없이도 잘 다녔으면서.”

“아니, 우리 호연 씨랑요.”

“화장실을 왜 둘이 가?”

“그건 제가 나중에 알려 줄게요. 연인인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우는 이유가 뭐겠어요. 어머니도 눈치 없게, 참.”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이선영에게 강유정이 말했다. 다 안다는 듯 음흉한 미소를 짓는 그에게 그런 거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저 웃음의 의미는 화장실에 가서 이상한 짓을 할 거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사람의 웃음이었기 때문이다.

얄미운 강유정을 한 대 때리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안호연의 머릿속을 스쳤다. 안호연은 지나가면서 기지개를 켜는 척 팔을 들며 강유정의 머리통을 가격했다. 팔꿈치로 가격당한 강유정이 머리를 잡고 비명을 질렀다.

“강중영, 너 이씨.”

범인을 강중영으로 생각했는지, 강유정은 고개를 돌리며 강중영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마주한 건 순한 미소를 짓는 안호연이었다.

“어머, 미안해요. 몸이 찌뿌둥해서.”

최대한 미안한 척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리고 그의 아픈 머리통을 문대 주었다.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하자 강유정은 아픔을 목구멍 뒤로 숨기고 괜찮다고 어서 화장실에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안호연은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리고 빙긋 웃었다. 여전히 아파서 뒤통수를 비비는 강유정을 두고 강중영의 소매를 잡고 따라갔다.

“집에 사기꾼을 들였는지도 모르고.”

강중영이 화장실 문을 열었다. 밖에서 기다리라고 그의 등을 떠밀었으나 그는 얄밉게 고개를 흔들고 기어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화장실이 남자 둘로 찼다.

“나가 있으라니까.”

“싸라고 허락한 적 없는데요.”

“야.”

“저 지금 많이 화났어요.”

내내 밥을 잘 먹던 그가 화가 났다고 시인하자 머리가 아찔했다. 이 집에 와서 잘못한 거라곤 강유정을 때린 것밖에 없었다. 그래도 지은 죄가 있어 안호연은 침을 삼켰다.

“아까 손만 잡고 잘 거라는데 그거 진심이에요?”

“무슨 헛소리야.”

그거야 강유정을 놀리려고 했던 말이었다. 그게 진심이냐고 묻는 그를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안호연이 그 말을 꺼낼 때 강중영의 눈에서 지진이 일어난 이유가 그 때문이었던가. 강중영이 귀여워 깨물어 주고 싶었다.

“애가 생겨서 이젠 섹스 같은 거 안 해도 된다면서요.”

“야, 말 같지도 않은 말 그만하고 싸게 해 줘. 내가 안 한다고 해도 할 거잖아. 나 진짜 터질 거 같아.”

“사람이면 쌀 곳과 싸지 않을 곳은 구별해야죠. 아무 데나 찍 싸면 사람 취급 안 해요.”

“섹스 해. 너랑 원 없이 할 거야. 거기가 닳아 없어져도 할 거니까, 제발.”

“정말요?”

“넌 농담하고 진담도 구별 못 하냐. 얼른!”

안호연은 콩콩 뛰었다. 아까부터 참은 탓에 정말 소변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그는 얼른 안호연의 바지를 벗겼다. 그동안 콱 참느라 링으로 가로막힌 페니스가 통통 부어 잘 벗겨지지 않았다. 그가 빙글 돌리자 여린 그곳에 통증이 몰려왔다. 안호연은 그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링을 벗겨 낸 그가 안호연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문댔다.

“얼른 싸요.”

“싸는 것까지 볼 거야?”

“그럼요.”

“변태.”

“심심찮게 들었던 말이라 감흥이 없네요.”

안호연은 변기에 소변을 갈겼다. 빤히 쳐다보고 있는 시선이 민망하고 부끄러워 속에 담아 두고 있던 말을 꺼냈다.

“너 진짜 연애 안 해 봤어?”

“네.”

돌직구로 날아온 말에 안호연은 할 말을 잃었다. 연애가 처음인지 몰랐다. 저 번지르르한 얼굴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왜?”

“강유정이 이유까지 말해 줬잖아요. 족쇄를 내미니까 줄줄이 도망가더라고요. 저도 족쇄를 차지 않은 사람하고 할 마음이 없어서 연애를 안 했어요. 저도 이렇게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죠.”

“그럼 섹스는? 연애는 안 해도 섹스는 해 봤을 거 아냐.”

“섹스도 안호연 씨가 처음인데요. 구멍이야 하나밖에 없으니까 어려울 것도 없죠.”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쉬웠다는 수능 만점자를 보는 수능 포기자가 된 느낌이었다. 무슨 문제 있나요? 잘난 얼굴로 안호연에게 물어보니 뭔가 억울했다. 동정인 남자의 뒷걸음질 같은 섹스에 자신이 걸려들었단 생각도 들고, 처음인 강중영의 페이스에 말려 신음을 내지르고 울었던 걸 생각하면 가슴이 얹힌 느낌이다. 그래도 경험이라면 안호연 쪽이 많은데 늘 잠자리에서 주도권은 강중영이 가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방긋 웃는 그를 보며 침을 삼켰다.

“근데 왜 잘해?

“전 비교할 사람이 없어서 잘하는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섹스가 기술로 하는 건가요?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거지.”

그가 안호연의 뺨에 제 뺨을 문대며 페니스에 링을 꽂았다.

“얼른 손 씻어요. 밥 먹고 우리 집으로 가게요.”

안호연은 딱 달라붙는 그를 밀어내고 세면대 앞에 섰다. 손을 벅벅 씻으려는데 그가 그런데, 하고 운을 뗐다.

“잘 느끼는 우리 호연 씨 만족 못 시킨 덜떨어진 남자들은 누군지 궁금한데요.”

“그건 왜?”

“가다가 보면 한 대 갈겨 주려고요. 호연 씨는 못 때려도 그 새끼들은 원 없이 때릴 수 있잖아요.”

등에 소름이 돋았다. 한없이 다정하다가도 강중영이 저런 말을 할 때면 강유정이 했던 말이 떠오르곤 했다. 잘미. 잘생긴 미친놈. 괜히 그런 별명이 생긴 게 아니라는 걸 실감하며 식은땀을 닦았다.

“어떻게 생각해요, 귀여운 사기꾼 씨?”

“그게 왜 궁금한지 모르겠는데.”

“나한테는 사기 치지 말고 진실만 말해야 해요. 거짓말하면 거기를 잘라 버릴 테니까.”

사기꾼보다 더 무서운 건 자기가 사기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괜스레 아랫도리가 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가 안호연을 밀어내고 손바닥을 깨끗이 씻었다.

“먼저 나가요.”

그의 말에 안호연은 먼저 나갔다. 식당으로 돌아가자 호기심 어린 세 쌍의 눈이 안호연에게로 쏟아졌다. 무언가 묻고 싶은 눈인데, 묻지 못하겠다는 듯 기침을 했다.

“좋을 때지. 차라리 방으로 가지, 화장실로 가?”

안호연은 놀리는 강유정을 흘겨보았다.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든 거로 보아 강유정이 무슨 말을 했는지 짐작이 갔다. 강중영이 돌아오자 또 어색한 웃음이 맴돌았다. 그렇게 처음으로 강중영의 본가로 갔던 기억은 이렇게 남았다.

낯 뜨거운 하루.

정말 쥐구멍으로 숨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안호연은 꿋꿋하게 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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