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12)

03

족쇄를 차고 있으면 부족함이 없었다. 아침이면 그는 안호연이 입을 옷을 골랐다. 그 옷을 입고 나가 강중영이 차려 놓은 음식을 먹으면 됐다. 모두 정성을 들인 음식이라 입맛에 딱 맞았다. 그걸 말없이 먹고 햇빛이 잘 드는 카우치 소파에 누워 잠이 들곤 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면 남자가 말없이 옆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평화로워 말을 못 하는 것을 빼곤 불편하지 않았다. 그는 밤이면 손수 안호연을 씻겨 침대에서 재웠다. 계속 이 생활이 반복되었다.

눈을 뜨고 잠들 때까지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건 생소했다. 그는 정말 완벽할 정도로 자신만을 위해 하루를 사용했고, 안호연은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부지런한 편이었다. 방을 정리하고 청소했으며 정원을 가꾸었다. 무료한 그의 일상을 훔쳐보는 게 안호연의 일상이 되었다.

그래도 나름 만족하는 편이다. 매일 밤 옆을 채워 주는 온기, 다정하게 머리칼을 정리해 주는 손끝이 지겹다가도 좋았다. 집에 안호연이 입을 옷들이 쌓이고, 자연스럽게 안호연의 물건이 강중영의 것과 섞였다. 두 개씩 놓인 칫솔이라든지, 짝을 맞춘 컵. 집기들이 꽤 생겼다.

누군가가 맞춰 놓은 알람 소리에 안호연은 일어났다. 비틀대며 일어난 안호연은 족쇄와 이어진 긴 줄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족쇄에 줄이 달려 있어 발아래를 조심해야 하는데 아직도 조심성이 생기지 않았다. 대충 줄을 넘어서 화장실로 직행한 안호연은 세면대 앞에 서서 세수를 했다.

두 손으로 야무지게 세수를 하고 습관적으로 손을 뒤로 뻗었던 안호연은 수건이 잡히지 않자 몸을 돌렸다. 매일 바꿔 걸어 놓던 수건이 오늘은 없었다. 수건이 어디에 있더라. 빙글 몸을 돌려 화장실을 확인한 그는 바깥으로 나갔다. 수건은 한 번도 제 손으로 꺼낸 적이 없어 수건을 놓는 자리를 알 수가 없었다. 서랍을 열어 방을 뒤적거리던 안호연은 집주인인 강중영에게로 갔다.

그를 찾는 건 쉬웠다. 족쇄에 달린 끈의 끝에 항상 그가 있기 때문이다. 땅으로 늘어진 줄을 따라 걸었다. 그러곤 부엌에서 먹을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그의 옆에 서서 소매를 잡아당겼다.

“무슨 일이에요?”

그가 물었다. 안호연이 손가락으로 얼굴을 가리키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던 그가 자신의 턱을 가리켰다. 알아듣지 못하는 강중영이 답답해 안호연은 손가락으로 턱을 가리켰다. 무언가 깨달은 듯 아! 탄성을 낸 그가 안호연의 턱에 입술을 댔다. 아침 인사 같은 가벼운 키스를 했다. 강중영의 입술에 물이 묻어 번들거렸다.

‘수건 달라고.’

짜증스러운 얼굴을 한 안호연은 말은 하지 않고 입술을 벙긋거렸다. 말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입술을 벙긋하란 말은 없었으니까. 편법을 사용하는데도 그는 관대하게 웃으며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 있어요.”

모르는 척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손을 올려 한 대 때리려다가 참았다. 그가 말한 규칙 중에 때리지 말라는 규칙은 없었기 때문이다. 허공에 손을 올리고 고민하는 안호연을 물끄러미 보았다.

“때리게요? 때려도 좋은데 뒷감당은 그쪽이 할 거죠?”

안호연은 고개를 흔들고 의자에 앉았다. 때렸다간 오늘 내내 괴롭힘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저렇게 웃고 있어도 강중영은 성격이 매우 좋지 않았다. 괘씸하고 짜증이 난 안호연은 그의 등에 얼굴을 묻어 물기를 닦았다. 그러곤 혀를 내밀었다.

그때 그가 갑자기 등을 돌렸다. 얼른 혀를 집어넣으려고 했으나 놀라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가 한 손에 칼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갈린 갈이 섬뜩한 빛을 내고 있었다.

혀를 내민 안호연을 물끄러미 보던 강중영은 갑자기 손을 뻗어 혀를 잡아 꼭 쥐었다. 막 오이를 만지고 있었는지 그의 손에서 오이 맛이 났다. 손톱을 세워 혓바닥을 꽉 눌러 입 속으로 밀어 주었다.

“혀 내밀어서 유혹하지 말고 얌전히 앉아 있어요. 그쪽이 섹시해서 안 그래도 아침마다 고생하고 있으니까.”

지금 메롱을 유혹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남자의 정신 상태에 놀라 입을 벌렸다. 그가 의자에 앉으라고 눈치를 주었다. 안호연은 그를 기다리다가 먼저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먹었다. 달걀말이와 오징어채를 소리 내어 먹었다. 그는 별말 없이 안호연 앞에 밥을 놓았다. 일부러 소리 나게 젓가락을 놓자 그가 안호연의 옆자리에 앉더니 안호연의 코를 엄지와 검지로 잡고 흔들었다.

“아침에 수건을 안 걸어 놨다고 심술이나 부리고. 못됐어요.”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수건을 달라고 했을 때 주었더라면 심술을 부릴 일도 없었으니까.

“아무리 수건을 안 줘도 그렇지, 손까지 올린 건 너무하지 않나.”

말을 못 하니 답답해 손이 올라가는 걸 어쩌란 건지. 안호연은 속으로 말대꾸를 하며 밥에 숟가락을 꽂았다. 그걸 보던 강중영이 안호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점점 할 수 있는 말을 늘려 줄게요. 하루에 하나씩. 어때요?”

성질을 내며 밥을 먹던 안호연의 귀로 좋은 제안이 꽂아 들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그는 이렇게 답답해하는 안호연의 숨통을 트이게 해 주었다.

“무슨 말을 제일 먼저 하고 싶어요? 말해 봐요.”

“쪼잔한 새끼.”

“없던 일로 하죠.”

그가 정색하며 안호연의 밥그릇에 멸치볶음을 놓았다. 전혀 아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도 그럴 게 그는 정말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었고 아쉬운 사람은 자신이었다. 안호연은 얼른 옆에 앉은 그의 옷을 잡고 흔들며 고개를 흔들었다. 한 번만 봐 달라는 뜻이다.

“그럼 키스해 봐요.”

조건이 하나 더 늘어났다. 절로 구겨지는 안호연의 얼굴을 보며 강중영은 빙긋 웃었다. 얄밉게 손가락으로 입술을 툭툭 쳤다. 강중영과 수없이 입을 맞추었으나 한 번도 먼저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도 자신의 권리는 찾아야 했기에 느릿느릿하게 얼굴을 가져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을 가져다 대도 반응이 없는 입술에 안호연은 혀를 밀어 넣어 보았다. 느긋하게 상대방의 이를 열고 들어가 죽어 있는 남자의 혀를 건드렸다. 빳빳한 혀를 쓸어 낼 때까지도 반응이 없었다. 이쯤이면 되지 않을까 슬쩍 눈치를 보던 안호연은 혀를 빼내려다가 목을 잡혔다. 오도 가도 못하게 길을 차단한 남자가 입술을 씹어 먹을 정도로 게걸스럽게 핥아 댔다. 그가 혓바닥을 마구 문대며 지나간 흔적을 새겼다. 그가 지난 곳에 흔적이 남을 만큼 거친 키스였다. 입술을 고양이처럼 핥아 대던 그가 몸을 더 낮췄다. 목께에 입술을 대고 핥았다. 그는 정확히 각인 부분을 알고 있었다.

“언제쯤 물 수 있을까요?”

그 물음에 안호연의 등이 서늘해졌다. 이미 목을 문 사람이 있었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뜨며 숨을 멈췄다. 파르르 떨리는 진동을 그가 느낄까 겁이 났다. 만약 각인 상대가 있다는 걸 그가 안다면 안호연을 버릴지도 모른다. 집 밖으로 나가야 한다니 겁이 났다.

“각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요.”

눈을 깜박거리던 안호연은 그의 가슴을 밀어 거리를 벌렸다. 오메가가 각인했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이건 각인당한 오메가와 각인한 알파만 알기 때문에 자신이 영원히 입을 열지 않는 한 영원히 모를 테다. 안호연은 이곳에서 안락함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게 생소한 경험이지만, 눈을 뜨면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누군가 자신을 위해 음식을 만든다는 것도 싫진 않았으니까.

“강제로 물 생각은 없어요. 그건 범죄니까. 순순히 목을 내줄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그러니까 오래 걸리게 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잘 골라요.”

“…….”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요?”

평소 어떤 말을 제일 하고 싶은지 고민하던 안호연은 짧은 생각 끝에 입술을 벌렸다. 한 번씩 속이 터질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꽥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참을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속으로 누른 말을 입 밖에 꺼냈다.

“야.”

“야요?”

안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내키진 않은데 좋아요. 써요.”

허락이 떨어지자 밥을 떠먹던 안호연이 짜증스럽게 그를 보았다.

“야.”

“왜요?”

단어를 하나 획득한 안호연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엄지로 목을 찍 긋는 시늉을 했다. 더 짜증 나면 죽여 버리겠다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잠자리에서 죽여주겠다고요?”

또 못 알아듣는 척 건넨 말에 안호연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강중영은 늘 자기 좋을 대로 뜻을 해석하니 답답했다. 그제야 그가 왜 말을 못 하게 했는지 이해가 갔다.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그가 작게 웃었다. 능구렁이 같은 작자였다. 짧은 한숨을 내쉬며 밥을 먹고 배를 문댔다. 배가 부르니 머리가 멍했다.

“오늘 외출하죠.”

‘어디로?’

입술을 벙긋거리며 대화를 시도하려고 하자 그가 손가락으로 안호연의 코를 튕겼다.

“사기꾼이라 그런지 아까부터 편법을 쓰네요. 말하지 말라니까 자꾸 입술을 벙긋대기나 하고.”

“야.”

“누가 야예요. 내가 너보다 네 살이나 많은데, 매일 존대해 주니까 형으로도 안 보여요? 호연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나쁘네.”

“야아.”

그게 아니잖아. 반말이 아니라 쓸 수 있는 말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런 건 줄 알면서도 강중영은 계속 안호연을 놀렸다.

“야 말고 형이라고 불러요.”

오늘 어렵게 키스로 얻어 낸 말이 막혀 버렸다. 씩씩대며 밥을 먹는 안호연을 보며 그가 빙긋 웃었다.

“밖으로 나갈래요?”

숟가락이 멈췄다. 잠시 귀가 잘못된 건지 의심이 들어 그를 멍하니 보았다.

“오랜만에 족쇄도 벗어야죠. 답답하잖아요. 나가서 마음대로 해요. 마저 밥 먹고 있어요. 나갈 때 입을 옷 좀 고르고 있을게요.”

그가 일어나자 의자가 뒤로 밀렸다. 강중영이 드레스룸으로 사라지는 걸 보던 안호연은 소리 없이 주먹을 쥐고 속으로 나이스를 외쳤다. 이 집에 온 이후로 첫 외출이었다. 밖에 나가는 게 귀찮았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외출이 선물로 바뀌었다.

그가 고른 옷으로 강중영의 취향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튀지 않는 옷이었다. 평범한 대학생이 입는 옷처럼 수수했다. 평소 화려하고 명품을 즐겨 입는 안호연의 취향과는 정반대라 그가 골라 준 옷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상을 썼다.

겉보기에 문제가 없는 옷이지만 이건 취향의 문제였다. 그가 골라 준 옷을 입으면 나이가 어려 보였다. 그러지 않아도 어려 보이는 얼굴이 더 어려 보여 무시당하기 십상이었다. 어렸을 적 받았던 냉대와 무시 때문에 남에게 어필하는 옷차림을 선호했고 어떤 이유로든 무시당하는 건 사양이었다. 강중영이 신발을 신자 안호연은 족쇄를 풀자마자 속에 담긴 말을 뱉었다. 규칙이 적용되는 건 족쇄를 차고 있을 때라 지금은 자유였다. 날아갈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껑충껑충 뛰었다.

“옷 진짜 못 고른다. 이게 뭐야, 초딩처럼 입혀 놨잖아. 이런 옷 입힐 거면 그냥 벗겨. 스트립쇼 하는 게 낫겠다. 그리고 진짜 반찬 가짓수 좀 줄여. 둘밖에 없는데 반찬을 많이 만드는 이유는 뭔데? 설거지감도 많고 음식이 다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도 짜증 나. 맛있는 냄새는 나고 배도 고픈데, 음식 만드는 데 오래 걸려, 말은 못 하지. 그러니까 발을 동동대면서 기다려야 하잖아. 그리고 달걀 프라이는 완숙으로 먹으니까 반숙으로 내놓지 말고 화장실에 있을 때는 족쇄 줄 좀 잡아당기지 마.”

다다다다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쏟아내자 그게 웃겼던지 강중영이 가슴을 잡고 웃으며 유의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옷도 머리도 마음에 안 들어.”

“이대로도 충분히 예뻐서 일부러 그렇게 입혀 놨어요. 호연 씨가 다른 사람 눈에 안 띄었으면 좋겠어요. 평범하고 또 평범했으면 좋겠는데 얼굴까지 예쁘니까 뭘 입혀 놔도 눈에 띄잖아요.”

그가 어서 나오라고 고갯짓을 하자 안호연은 얼른 신발에 발을 밀어 넣어 대충 구겨 신고 나갔다. 운동화를 대충 신다가 신발 끈을 밟고 안호연의 몸이 비틀거렸다. 순간 몸이 비틀리자 멀리 서 있던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달려와 얼른 안호연의 어깨를 낚아챘다. 무게 중심을 못 잡는 안호연을 똑바로 세워 준 강중영은 그 자리에서 몸을 숙였다. 그러곤 대충 구겨 신은 운동화를 똑바로 신겨 주었다. 풀린 신발 끈까지 묶어 주려는 그를 밀어내려고 했으나 그는 쉬이 밀리지 않고 꿋꿋이 신발 끈을 묶어 주었다. 예쁜 리본 모양이라 안호연의 눈살이 구겨졌다.

“덜렁대지 마요. 족쇄를 차지 않은 사람한텐 관심 없어요. 도와주는 건 이번 한 번뿐이에요.”

“사색이 돼서 달려온 주제에.”

“누가 호연 씨가 걱정돼서 그래요? 배 속에 있는 게 걱정돼서 그런 거죠. 족쇄를 풀었어도 그건 내 거잖아요.”

그가 힐끔 배를 내려다보곤 차로 갔다. 조수석에 올라탄 안호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 가고 싶어요?”

“몰라.”

“나오니까 좋아요?”

“응, 좋지. 근데 막상 나오니까 할 게 없어.”

“가끔 나와야겠네요. 그리고 나가고 싶으면 말해요. 나가는 거에 대해선 터치하지 않을게요.”

“그래도 돼?”

“제가 관리하고 싶은 건 족쇄를 찼을 때지 지금은 아니에요. 굳이 싫다는 사람을 관리하고 싶진 않아요.”

남자의 목소리가 묘하게 찼다. 말 어떤 부분에서 심기가 나빠진 건지 알 수 없어 눈치를 보게 되었다. 밖에 나왔다고 그런 거라면 그의 질이 나쁘다. 밖에 나오자고 먼저 제안한 사람은 그였으니까. 물끄러미 강중영을 보며 답을 찾으려다가 입술을 뗐다.

“화났어?”

“아뇨. 화를 내고 말 것도 없죠. 무의미하니까.”

“왜?”

“족쇄를 안 찼잖아요. 화를 낼 필요가 없죠.”

화가 난 게 아니라 그에게 안호연은 관심 밖의 사람이었다. 강중영은 안호연에게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니라 족쇄를 찬 안호연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걸 깨닫는 순간 허탈한 웃음이 밀려왔다.

“뭐 먹고 싶은 건 없어요?”

“아이스크림.”

“이 추운 날에요?”

“응, 치킨도 먹고 싶어. 피자, 햄버거, 샌드위치, 떡볶이, 순대, 다 먹고 싶어.”

그동안 먹고 싶었던 음식을 죄 나열했다. 하나씩 나열하던 음식을 듣던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알았어요.”

대답을 마지막으로 말이 없어졌다. 긴 침묵이 이어지자 조금 무서워 계속 그의 눈치를 봤다. 집에서 다정했던 그가 표정 하나 없는 얼굴을 하니 안호연은 의기소침해졌다. 밖에 나왔다고 들떴던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봤다. 실망하거나 그런 건 없었다. 그는 충분히 설명했고 빠져나갈 기회도 줬다.

“넌 족쇄 찰 사람이 필요한 거야?”

“아직은요. 아직까지 스스로 찬 사람은 호연 씨밖에 없었어요.”

“내가 이 집을 박차고 나가도 안 잡을 거지?”

“의지가 없는 사람은 잡지 않아요.”

“왜 전의 오메가들이 도망갔는지 알 거 같아.”

“왜요?”

그가 뻣뻣한 목소리로 물었다.

“감정도 없는, 한 번 도망갔다고 잡으러 오지 않을 사람에게 자신을 관리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거지. 그건 인형이잖아,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인형이 되길 자처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 사람에게 욕심부리지 않아서 그래요. 내가 좋다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짓을 강요할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에요. 감정은 포기했고 스스로 족쇄를 차는 사람에게 만족하자고 오래전에 결론을 내렸어요. 저 같은 알파가 있다면 지배받길 원하는 오메가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만 오길 기다렸어요. 그러니까 언제든 이 상황이 싫으면 말해요. 아이 때문에 옆에 있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아이로 협박하지 않을 테고 아이를 키우고 싶다면 양육비를 보내 줄 거고 아이를 키우는 게 어렵다면 제가 키우면 돼요.”

그는 자꾸 안호연을 시험했다. 가도 좋다고 누차 말하며, 좋은 말로 살살 꼬드길수록 기분이 나빴다. 자신은 그에게서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서운하기까지 했다.

“그럼 부탁 하나만 하자.”

“어떤 부탁이요?”

“내가 도망가면 한 번은 잡으러 오는 시늉이라도 해 줘.”

“왜요?”

“그래도 네 마음이 진심이었다는 오해라도 하고 살게. 두 번이나 날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람과 살았다면 그건 비극이잖아.”

“호연 씨도 날 사랑해서 내 옆에 있는 거 아니잖아요.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서 있는 거잖아요.”

“부정할 수가 없어서 슬프네.”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내렸다. 그 침묵이 어색해 안호연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참 빠르게 지나가는 나무와 건물을 의미 없는 시선으로 보던 안호연의 귀에 말이 꽂혔다.

“……그래도 노력은 해 볼게요. 조금씩 욕심부려 보죠. 그쪽이 허락했으니까.”

안호연은 그를 보았다. 이상하게 심장이 요동쳤다. 태범석이 의미 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을 때와 달리 가슴이 뜨거워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힐끔 우로 움직인 강중영의 눈과 마주치자 안호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피했다. 옆에 앉은 그가 의식돼 얼른 차가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차가 빠르게 익숙한 동네로 향해 갔다. 처음 숙소로 지냈던 빌라가 있는 곳이다. 빌라 앞에 차가 멈췄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가지고 와요.”

안호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지 않아도 캐리어에 담아 놓은 물건이 걱정되었다. 수중에 들어온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습관이 있어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물건들을 트렁크에 넣고 끌고 다녔었다.

“진짜 가져가도 돼?”

“네.”

눈을 반짝이며 묻는 안호연에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다녀올게.”

급한 마음에 차에서 내려 숙소로 지냈던 방으로 달려갔다. 안호연은 어지러운 방 한쪽에 놓인 트렁크를 보곤 안도했다. 잃어버렸을까, 누군가 처분해 버렸을까 수없이 상상하며 포기했던 것들을 찾을 수 있으니 너무 좋았다. 헤어진 연인을 끌어안듯 캐리어에 뺨을 비볐다. 막 그것을 들고 나가려고 했을 때였다. 캐리어 손잡이에 뭔가가 꽂혀 있는 걸 발견했다. 눈을 깜박이던 안호연은 도로 앉아 그걸 빼 들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림이 그려진 카드였다. ‘친애하는 호연에게.’ 낯익은 필체가 적힌 카드를 펼치자 안에 휴대 전화 번호가 적혀 있었다. 처음 보는 번호의 주인은 태범석의 것이었다. 버리고 간 줄 알았던 그가 연락처를 남겨 놓았다는 건 돌아오라는 신호였다. 소리 없는 비명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또 태범석은 자신을 시험하듯 마지막까지 미련을 자극하는 물건을 흘리고 다녔다.

‘그래도 너한테는 연락 안 해.’

또 버리고 이용할 거 아니까. 적어도 강중영은 자신을 버리지도 이용하지도 않았다. 이미 결론이 났는데도 안호연은 카드를 버릴 수가 없었다. 카드를 다시 펴 보려는데 누군가 좁은 원룸으로 들어왔다. 놀란 안호연은 다급하게 카드를 주머니에 밀어 넣고 뒤를 돌아보았다.

밖에서 기다린다던 강중영이 거침없이 들어와 종이가 어지러이 널린 침대에 앉았다. 손바닥으로 침대를 쓸어 보고는 널린 물건들을 훑어봤다. 그가 자신의 사생활을 파헤칠 때면 안호연은 초조해졌다.

“정리는 하나도 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뒹굴며 서로 담배를 나눠 피웠겠네요.”

그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침대 머리맡에 달린 창문 밖으로 그의 차가 보였다. 그는 이 공간 속에서도 침착한 얼굴이었다.

“여기저기 태범석의 페로몬이 묻어 있어요.”

그가 방긋 웃었다.

“나가자.”

“왜요, 좋은데?”

그가 웃더니 침대에서 정리되지 않은 종이를 집었다. 잔뜩 구겨진 날조된 신상을 눈으로 읽어 내려가더니, 강중영은 숨을 들이마시고 안호연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곤 무릎을 굽혀 앉았다. 카드를 들킬까 겁이 났다. 심장이 떨려 계속 손바닥에 땀이 나고 입술은 바짝 말랐다.

“다신 여긴 오기 싫어. 짜증 나. 좋지 않은 기억만 떠올라.”

“그럼 나가죠.”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그가 매섭게 돌아섰다. 그의 등을 보자 속이 울렁거렸다. 아까부터 불안했던 이유, 그건 태범석 때문이 아니라 강중영의 태도 때문이었다.

“아니다, 여기서 할래? 여기 그 새끼 집이잖아. 언제 올지도 모르니까 네 페로몬을 싹 뿌리고 가는 거야.”

“당신 복수극에 왜 동참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굳이 보여 주지 않아도 그쪽은 내 건데.”

“왜냐면…….”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불안했다. 태범석이 물어 각인한 목이 화끈거렸다.

“네가 너무 차가워서 무서워. 집에 가서 족쇄 차자. 그래야겠어. 밖에 있으니까 잡생각만 들잖아. 얌전히 족쇄를 찰 테니까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게 안아 줘. 여긴 무서워. 자꾸 무서운 생각만 떠올라.”

“무슨 무서운 생각이요?”

“네가 나를 버릴까 겁이 나.”

“호연 씨가 떠나지 않는다면 그럴 일이 없어요. 저도 슬슬 감정이 생기려 하니까. 태범석의 집에 무질서하게 뒤섞인 그쪽 물건과 하나뿐인 침대를 보고 화가 난다는 건 그런 의미겠죠. 호연 씨 말에 휩쓸려 이곳에서 그쪽 가랑이 사이에 내 좆을 비빌 뻔했어요. 이 집으로 돌아올지도 모르는 그를 위해 내 페로몬을 잔뜩 발라서 놀려 주고 싶어요.”

어금니를 꽉 깨물어 억누른 소리가 났다.

“가요.”

남자가 손을 내밀자 안호연은 그 손을 맞잡았다.

“근데 이런 곳에선 널 안을 순 없잖아. 추잡하고 더럽고 다른 알파 냄새가 폴폴 나는 곳에다 네 냄새를 남기고 싶지 않아. 여기에 세워 두는 것도 짜증 나서 미쳐 버릴 거 같으니까 나가자고요.”

그가 안호연의 캐리어를 다른 손에 움켜쥐고 밖으로 나갔다. 남자의 차에 타기 무섭게, 차가 집을 향해 달려갔다. 무거운 침묵이 내린 차 안은 사념이 생기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주머니 속에 있는 카드가 자꾸 신경 쓰였다. 적어도 태범석에게 돌아가면 어떨지 뻔했다. 그에 비해 강중영은 따뜻한 집에서 재워 주고 아이까지 잘 키울 사람이었다. 당장 두 남자를 놓고 봐도 곧 아이를 낳을 안호연에게는 강중영이 제격이었다.

차가 멈추자마자 안호연은 급하게 집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고 옷을 벗어 던졌다. 잘 말아 정리해 놓은 족쇄를 집어 발에 고정하고 강중영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급한 안호연과 달리 그는 느긋했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설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안호연은 참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리다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얼른 태범석이 본인 거라고 찍어 놓은 각인된 몸에 비웃듯 강중영을 새기고 싶었다.

“신발이 많이 헝클어졌네.”

그의 시선이 팔 아래로 빗겨 갔다. 깔끔한 성격의 그는 이런 꼴을 볼 수 없다는 듯이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신발을 정리하는 그를 보다가 참다못한 안호연은 그의 뒤에서 목을 끌어안았다. 침대로 가자고 사정을 하는데도 그는 전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야.”

그의 눈동자가 옆으로 움직였다.

“분명 내가 형이라고 했는데 여전히 그렇게 부르네요. 왜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가 빙긋 웃으며 마저 신발을 정리했다. 왜 제 속을 모르냐는 뜻으로 안호연은 주먹으로 가슴을 텅텅 쳤다. 답답하다는 제스처에도 그는 눈길을 주지 않고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그는 외투를 벗어 드레스룸에 넣곤 욕실로 들어가 세면대 앞에 섰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손을 넣어 씻으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안호연을 거울을 통해 응시했다.

“뭐가 조급해요?”

아까 집으로 돌아갈 때 박고 싶다고 말했잖아. 꽥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참다가 그의 손목을 잡아 침대로 끌었다. 힘주어 침대로 그를 밀어 버리고 그 위에 올라탔다. 뻔히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그를 패 버리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얼마나 초조한지도 모르면서 해맑게 웃으며 자신을 놀렸다. 얄미워서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싶었다.

“히트사이클도 아닌데 발정 났어요?”

손가락으로 그의 옷에 달린 단추까지 하나하나 풀어헤치고 그곳에 머리를 박았다. 코에 닿는 부드러운 살결에 남자의 시그니처 같은 페로몬이 남아 있었다. 페로몬 때문에 목덜미가 따끔했다. 이 알파가 아니라고 목덜미에서 격렬하게 반항했다. 이런 반응 때문에 안호연은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곤 페로몬이 거의 없는 남자나 영구 피임한 알파와 밤을 보냈다. 턱턱 숨이 막혀 오는데도 안호연은 바지까지 벗기고 그에게 올라탔다. 안쪽 허벅지로 그의 골반을 누르며 내려다봤다.

“내 위로 누가 다른 사람 생각하며 올라타라고 했어요? 태범석과 함께 지내던 집에서부터 불안한 눈과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는데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누굴 생각하고 있는지 뻔하지. 그런 얼굴로 올라타면 좋다고 호연 씨 다리 사이에 넣을 줄 알았어요? 난 발정 난 개가 아니라 생각도 할 수 있고, 감정도 있는데. 날 그 남자를 지우는 지우개로 쓰려는 거 같은데 어림없어.”

차가운 목소리에 머릿속이 얼어붙었으나 안호연은 얼른 그의 페니스를 품고 싶었다. 그의 페니스를 품다 보면 어지러웠던 사념이 다 떠내려가고 쾌락만 남으니까. 일어서 회음을 치는 페니스를 잡아 뒤로 밀었다. 회음을 스친 남자의 페니스가 입구에 멈춰 섰다. 그대로 앉으려고 힘을 주자 강중영이 골반을 잡아 저지했다.

“이거 나쁜 거야.”

‘안아 줘.’

입술을 벙긋거리며 안호연은 골반을 힘주어 내렸다. 입구에 맞춰진 성기가 내벽을 벌리며 반쯤 들어갔을 때 그가 안호연을 옆으로 밀었다. 어마어마한 힘에 밀렸을 때다. 열이 받았는지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손가락에 의해 공중으로 떴던 머리칼이 다시 아래로 내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호연아.”

그가 다정하게 안호연을 불렀다.

“안기고 싶을 땐 오로지 내 생각만 해.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건데 내가 싫다고 말하는데도 달려드는 건 강간이야. 적어도 강간하려면 딴 남자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해야 내가 덜 비참하지.”

그제야 자신이 남자에게 무엇을 강요했는지 깨달았다. 짧은 깨달음은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낳아 안호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침대 밖으로 몸을 내밀곤 안호연이 헝클어뜨린 옷을 정리했다. 풀린 단추를 다시 채우고 흘러내린 바지까지 전부 정리하곤 드레스룸으로 사라졌다.

“입어.”

그는 미동 없이 침대에 앉아 있는 안호연에게 부드러운 소재의 잠옷을 던졌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말하지 말고 입고 나와요.”

미안하다고 입술을 벙긋대는 안호연에게 그는 정리가 끝나면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부드러운 소재의 옷을 느릿느릿 입고 밖으로 나가자 그가 소파에 앉아 무언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배달 광고 책자였다. 옆으로 오라고 강중영이 신호를 주자 안호연은 그 옆에 앉았다.

“아까 치킨 먹고 싶다면서요. 치킨 먹는 건 어때요?”

아까의 음울함을 잊고 눈을 반짝이는 안호연에게 그가 책자를 내밀었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내가 시켜 줄 테니까.”

안호연은 책자를 뒤적거렸다. 제일 먼저 프라이드치킨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외국 생활을 오래하면서 치킨을 먹어 보지 못했다. 입 속에 침이 고인 채로 프라이드치킨과 콜라를 찍었다. 강중영이 안호연이 고르는 대로 주문을 하는 동안 책장을 넘겨 보쌈도 고르고 또 책장을 넘겨 떡볶이까지 골랐다.

“돼지.”

그가 작게 타박을 하면서도 안호연이 고른 걸 하나도 빠짐없이 주문해 주었다. 음식을 시키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고맙다는 표현을 하고 싶은데 말을 할 수 없으니까 그의 손바닥을 가져다가 뺨을 비볐다. 점점 강아지가 된다는 생각이 안호연의 머릿속을 스쳤으나 나쁘지 않았다.

“임신하면 뭘 먹고 싶을 텐데 내가 신경을 못 썼어요.”

딱히 그동안 뭘 먹으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나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먹고 싶은 게 생기면 저 칠판에 크게 써 놔요. 다 사 줄게요. 그날 외출을 하고 싶을 때도 저기에 써 놔도 좋고요. 요구하고 싶은 게 있으면 써 놔요.”

안호연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강중영은 지배자 타입의 알파치곤 굉장히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무엇도 강요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책자를 넘기며 음식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TV를 켰다.

“오늘은 요리하지 않아서 힘이 빠져요. 음식을 해 주는 게 행복한데.”

안호연은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쪽이 이런 게 좋다면 제가 요리를 접어야죠.”

음식을 시켜 놓고 죄책감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얼이 빠진 얼굴로 그를 보자 그는 등을 뒤로 젖히고 다리를 꼬곤 TV에 빠져들었다. 안호연도 그의 옆에서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며 게임을 하다가 문득 눈을 깜박거렸다. 이상했다. 침대에서부터 지금까지 태범석이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고, 초조하지도 않았다.

멍한 얼굴로 그를 볼 때 초인종 소리가 났다. TV를 시청하던 남자가 지갑을 들고 밖으로 나가더니 한 손에 무언가를 들고 왔다. 치킨이었다. 그는 테이블에 치킨을 펼쳐 주었다. 그러는 동안 또 초인종이 울렸다. 강중영은 또 지갑을 들고 바깥으로 나가더니 이번엔 족발을 들고 왔다.

“꽉 찼네요.”

테이블이 빼곡하게 찼다. 두 사람이 먹기에 치킨 하나여도 충분했다. 앞으로 배달 올 것까지 생각하면 확실히 돈 낭비였다.

‘미안.’

“뭐가 미안해요. 내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쯤 아무것도 아니죠. 저 돈 많으니까 사치해도 괜찮아요. 그리고 아까부터 편법 쓰는데 혼나요.”

그가 코를 튕기고 먹으라는 시늉을 하자 소파에서 먹기 불편해 바닥으로 내려갔다. 안호연은 컵에 콜라를 가득 따르고 젓가락으로 치킨 다리를 집었다. 한입 베어 물자 튀김이 입 속으로 들어왔다. 턱을 움직이자 적절한 온도로 식은 기름이 밴 닭고기가 들어왔다. 오랜만에 먹는 치킨과 콜라의 조합은 환상적이었다.

“맛있어요?”

안 맛있겠냐? 속으로 웅얼거렸다. 일주일 내내 한식만 먹었으니 배달 음식이 혀에 착착 감겼다. 먹다가 젓가락까지 내 버리고 손으로 치킨을 먹어 치웠다. 열심히 먹는데, 그는 음식에 입을 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안 먹냐는 듯 닭다리를 뜯다가 그를 보자 흠칫 놀랐다. 그가 빤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먹으라고 그에게 닭다리 하나를 내밀자, 강중영은 안호연의 손목을 잡아 그쪽으로 끌었다. 그러곤 닭고기가 아니라 기름이 번들거리는 손가락을 핥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혀로 핥다가 점점 내려가더니 손등을 핥았다.

“짠데요?”

그가 중얼거리더니 멍한 얼굴을 한 안호연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그러곤 부드럽게 혀로 기름이 묻은 안호연의 입술을 핥았다.

“맛있네요. 그것만 열심히 먹지 말고 내 것도 먹어 줘요.”

볼에 열이 올랐다. 아까는 싫다면서 왜 지금에서야 하자는 건지 알 수가 없었으나 그가 스치고 지나간 피부에서 열이 올라 안호연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거기 아래로. 아래 입으로 내 것도 먹어 줘요. 섹스는 서로가 불이 붙었을 때 하는 거예요. 상대가 불이 붙지 않으면 이렇게 부드럽게 스킨십을 하며 불을 붙이고 준비가 되었는지 물어야죠. 굳이 대답이 아니어도 알잖아요. 허락하는지 아닌지. 한 명이 원하는 일방적인 섹스가 아니라 서로가 좋아서, 하나가 되고 싶어서 상대방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싶어서 하는 게 섹스야. 쾌락을 좇기 위해서, 뭔가를 지우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고요. 넌 섹스를 잘못 배웠어.”

“…….”

“아무것도 모르는 호연 씨를 배려해서 물을게요. 해도 돼요?”

그가 시선을 물리지 않는 적당한 거리에서 물었다. 치킨을 먹다 들은 자극적이면서 유혹적인 소리에 놀랄 만도 한데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중영이라는 사람이 궁금했다. 어떤 식으로 애무하고 어떤 식으로 제 속으로 파고들어 어떤 교감을 나눌지 기대되고 알고 싶었다.

“이게 섹스의 시작이에요. 상대에 대한 호기심.”

그가 소리도 내지 않고 내려와 시선을 마주쳤다. 눈을 감을 때를 제외하고 남자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상대방의 숨이 얼굴에 내려앉을 정도로 둘 사이는 가까웠다. 섹스를 스포츠로 여기는 태범석의 가치관이 그대로 전염되어 엉망진창인 섹스관을 가진 안호연에게 지금 이 상황은 새로웠다. 그가 다가와 숨을 쉬는 것도 신기했고, 반짝이는 눈으로 보는 것도 신기했다. 몸을 나누는 게 아니라 감정을 교류하는 느낌이었다.

“섹스는 처음에 상대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되지만 나아가 약속이기도 하죠. 미래에 대한 약속도 없는 상대와 주야장천 몸으로 대화했으니 그동안 가벼운 운동으로만 대했던 거죠.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행위가 좋아서 했던 거니까 상대가 어떤 사람이라도 괜찮았겠죠. 근데 나는 달라요. 내 상대는 미래를 함께할 사람이니 매번 존중할 거고 아무나와 그런 관계를 할 수 없어요.”

거짓말. 그의 말에는 굉장한 모순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이름도 모르는 자신과 이름도 모르는 호텔에서 하룻밤을 났다. 말만 번드르르한 거짓말쟁이라고 욕하는 도중 강중영이 안호연의 옷을 집었다. 티셔츠의 밑단을 잡아 안호연의 입술에 댔다. 물라는 뜻이다.

안호연이 입술을 벌리자 천이 입 속으로 들어왔다. 티셔츠가 사라진 곳에 두 개의 유두와 배꼽이 드러났다. 강중영이 고개를 숙여 튀어나온 돌기에 혀를 댔다. 장난치듯 가슴 돌기를 혀로 쓰다듬었다가 그걸 중심으로 둥글게 굴렸다. 혀가 가슴을 핥자, 유두에 단단하게 살이 올랐다. 그가 딱딱해진 돌기를 엄지로 눌렀다. 살이 오른 유두는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딱딱해.”

그가 방긋 웃으며 혀를 내밀어 한 번 더 가슴을 핥았다. 분위기 때문인지 몰라도 제대로 애무하지 않았는데 페니스가 바지 안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고작 몇 번 만지고 핥아 준 것만으로도 아래를 세운 게 부끄러워 손가락으로 페니스를 살 속에 묻었다. 허벅지에 꽉 힘을 주자 그가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꽉 잡았다. 그의 손톱이 천을 파고들었다. ‘들켰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눈치가 빠른 그는 금방 몸집을 키우고 있는 안호연의 페니스를 알아차릴 것이다. 어쩌면 벌써 알고 있는지도.

“뭘 숨겨요?”

그가 손톱으로 살 속에 묻은 페니스를 찾아 꽉 쥐었다.

“좋으면 좋은 거지 굳이 숨길 필요 있어요? 내 것도 만져 볼래요?”

안호연의 손이 강중영의 앞섶으로 갔다. 손바닥 아래로 단단하고 열기를 품은 것이 느껴졌다. 굉장히 흉포한 그곳은 지금 이 순간도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봐요, 나도 섰어요. 이건 누가 세웠다고 생각해요?”

그야 분위기에 휩쓸려 커진 걸 거다. 자신이 그랬듯. 안호연은 태평한 얼굴로 강중영을 응시했다.

“너예요, 네 안으로 들어가려고 키우고 있어요.”

그의 입술이 벌어지면서 보이는 혀가 야해 안호연은 점점 몸에 열이 올랐다. 이런 토크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말보다 행동으로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대충 이곳저곳을 만지다가 몸을 겹치는 게 다반사라 지금 이 말들이 어떤 애무보다 더 흥분됐다.

“얼마나 깊숙이 넣어 줄까요? 손가락으로 짚어 봐요.”

안호연은 고민하다가 욕심껏 배꼽 아래를 짚었다. 최대한 그가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주길 원했다.

“더 분발해야겠네요. 거기까지 찌르려면.”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내벽이 움찔거렸다. 만져지지도 않은 곳이 반응하자 그 반응에 못 이겨 다리를 모았다.

강중영의 손이 잠옷 바지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무단 침입에 놀라 입술이 벌어지자, 그가 손바닥으로 안호연의 턱을 닫았다. 그때 물고 있던 천이 힘없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티셔츠가 내려가고 바지 속은 강중영의 손에 침략당했다. 드로어즈를 입지 않아 막힘없이 들어온 남자의 손은 페니스를 잡아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바지가 뒤집히면서 밖으로 나온 페니스를 남자가 거침없이 움켜쥐었다. 강중영은 소변이 나오는 구멍을 엄지로 문댔다. 문대고 또 문댈수록 소변감이 몰려왔다. 자꾸 뭔가가 올라오는 생소한 기분에 안호연은 강중영의 어깨를 짚고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만하길 바라요?”

안호연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는 성기를 엄지로 더 빠르게 문댔다.

“근데 더 만져 달라는 듯이 왜 몸을 앞으로 내미는데요? 그리고 여기가 축축하게 젖기까지 했어요.”

그가 엄지를 들어 반짝이는 걸 확인시켜 주었다. 강중영의 손가락에 물이 묻어 반짝거렸다. 소변이 마려워 죽겠는데 어쩌라는 거야. 수치스러워서 죽고 싶었다. 화장실을 연속해서 떠올리며 안호연은 다짜고짜 그를 밀어냈다. 그런데도 남자는 밀리지 않고 요도 구멍을 매만지던 손가락이 아래로 내려와 페니스를 움켜쥐었다. 따듯한 무언가가 페니스를 움켜쥐자 성적인 쾌감이 극대치가 되었다. 안호연의 의지와 상관없이 엉덩이가 움직이더니 눈앞이 하얘졌다. 신음이 튀어나왔다. 뒤가 아닌 앞쪽으로 무언가가 튀어 나갔다.

“소변감과 사정감도 구별 못 해요?”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졌다.

“애기도 아니고.”

“야.”

그가 얄밉게 웃더니 화가 나 바들바들 떨리는 안호연의 입술로 돌진했다. 그의 입에서 상큼한 치약 맛이 나자 분해 열이 올랐던 머리가 식어 내렸다. 언제 양치질을 했던 걸까. 눈을 내리깔고 고민했다. 이런 키스를 한다는 걸 미리 알았던 걸까. 그것도 모르고 치킨이나 뜯고 있던 자신이 한심스럽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안호연의 머리를 누군가 툭 쳤다. 눈알을 굴려 위를 보자 강중영과 마주쳤다. 갑자기 그의 입술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손바닥으로 안호연의 두 눈을 가리고 그가 혀를 더 깊숙이 집어넣었다. 숨을 쉬는 것도 그의 허락이 필요할 정도로 그는 집요하게 목구멍을 괴롭혔다.

딩동.

혀가 섞여 질척이는 소리만이 울리는 거실에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떡볶이였다. 그런데도 둘은 키스에 열중했다. 감정이 없는 초인종 소리에 짜증이 묻어나도 둘 중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초인종이 조용해지자 이번엔 휴대 전화까지 울렸다. 그제야 그가 빙긋 웃으며 입술을 떼더니 침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닦았다.

“나갔다 올게요. 계산은 해야죠.”

멍한 얼굴을 한 안호연을 밀어낸 그가 지갑을 들었다.

“그때까지 옷 벗고 있어요. 나갔다 오면 바로 섹스 할 테니까. 아래부터 배불리고 위도 채우죠.”

그가 밖으로 나가자 안호연의 입에서 욕이 터져 나왔다. 그가 줄 섹스가 기대돼 벌써 페니스가 아플 정도로 아래가 부풀었다. 급하게 남은 옷을 벗었다. 족쇄에 묶인 그 순간부터 남자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멀리서 부스럭거리는 비닐봉지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현관 앞에 강중영이 서서 안호연을 바라보았다. 비싼 그림을 보듯이 샅샅이 보더니 들고 있던 비닐을 바닥에 던지고 걸어오면서 단추를 풀었다. 셔츠를 벗고, 바지를 벗었다. 드로어즈에 부풀어 오른 페니스가 감춰져 있었으나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팽팽하게 당겨진 천으로 알 수 있었다. 그도 흥분하고 있었다.

안호연은 침을 삼켰다.

“소파로 올라가요.”

안호연은 소파로 올라가기 위해 두 손으로 소파를 짚고 엉덩이를 든 순간 누군가가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 안쪽 살을 꽉 틀어잡자, 살이 말려 들어 그 사이로 골이 나타났다. 강중영은 그 골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손가락이 앞뒤로 왕복 운동을 해도 안호연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제대로 안을 채우지도 못했다. 더 크고 뜨거운 게 필요해 안호연은 손을 뒤로 뻗었다.

“뭐 찾아요? 혹시 이거요?”

강중영은 안호연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그건 강중영의 성기였다. 손에 잡히는 크기가 섬뜩해 갑자기 겁이 났다.

“그걸로 뭘 하게요?”

대답 대신 안호연은 다리를 더 벌려 강중영의 성기를 엉덩이 사이로 가져다 댔다. 성기가 들어갈 입구를 찾기 위해 문대고 또 문댔다. 그제야 성기 선단이 무언가에 걸려 미끄러지지 않았다. 드디어 입구에 박힌 것이다. 힘을 빼고 강중영의 성기를 쥔 손을 힘주어 당기자 내벽이 벌어졌다. 다급하게 안으로 밀어 넣으려는 안호연을 강중영이 저지했다.

“느껴요. 들어갈 때 어떤 느낌인지.”

그의 성기가 느리게 내벽을 파고들었다. 성기가 길어 끝도 없이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더 들어왔다간 어딘가가 꿰뚫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한계까지 밀고 들어오는 성기에 걱정이 돼 안호연은 손을 뒤로 뻗어 남은 페니스의 길이를 쟀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울고 싶은 걸 꾹 참으며 더는 안 된다고 고개를 저으려 고개를 뒤로 젖히자 남자의 혀가 섞였다. 그리고 남은 성기를 마저 밀어 넣었다. 악 하는 거친 신음을 강중영은 혀로 단숨에 먹어치웠다.

그는 포식자처럼 끊임없이 먹어 치우면서 페니스로 안호연을 꿰뚫었다.

“그날 기억나요?”

어떤 날인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와 함께했던 날들이 많았다.

“처음으로 우리가 관계를 나눴던 밤. 신비로운 경험이었어요.”

술과 함께 깨끗하게 비워져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날 밤은 온전히 강중영의 몫이었다. 안호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곳은 내 공간도 아니었고 안호연이라는 남자는 족쇄를 차고 있지 않았는데 그날 모르는 사람과 섹스를 하고 싶어졌어요. 어디서 튀어나온 요정은 아닐까 생각도 했어요. 동화라는 건 절대 믿지 않았는데 이상한 변명을 대며 제 규칙을 부수었죠. 손수건을 그쪽 발에 매면서 이게 족쇄라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면서 말이죠. 나한테 정말 끔찍한 일인데 미칠 듯이 좋았어요.”

“으. 으읏.”

그의 페니스가 안에서 왕복 운동을 할 때마다 안호연의 입술 밖으로 신음이 터졌다.

“참 이상한 일이죠.”

거세게 엉덩이에 부딪히며 안을 헤집는 그로 인해 안호연은 제대로 자세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다리가 자꾸 무너졌다. 자세가 무너지면 그는 다시 안호연을 바로 세웠다. 그는 안호연의 다리 한쪽을 소파에 올려놓곤 거칠게 안쪽을 헤집었다. 페니스가 마구잡이로 위로 쳐 대니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하고 있었다. 계속 한 곳만 공격당하니 숨이 거칠어졌다.

그만, 그만하고 사정해!

그에게 톡 쏘아 주고 싶었다. 이미 오르가슴에 다다라 안호연의 어깨가 파들파들 떨리는데도 그는 좀처럼 사정하지 않았다. 몸에서 열기가 일고 모든 관절이 조이는 고통이 왔다. 피부에 전율이 흘러 펄떡펄떡 뛰었다.

성기가 내벽을 더 문지르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안호연의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엉금엉금 앞으로 기어가면서 어떻게든 그의 성기를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집요하게 안호연을 따라다녔다. 꼭 말이 된 기분이었다. 채찍질당하고 있는 말. 강중영의 골반과 치골이 안호연의 엉덩이를 때렸기 때문이다.

그만, 더는 안 돼. 그만하란 말이야.

비명을 지르는 대신 신음이 입술 새로 흘러 나갔다. 깊고 얕게 반복해서 찌르던 강중영은 안호연의 골반을 잡고 안에다가 사정했다. 그의 긴 사정이 끝나자 눈물이 났다. 혹사당한 엉덩이가 아팠으나 온몸이 떨릴 정도로 좋았다. 순식간에 몰아붙여져 잠시 멀리 나갔다가 온 기분이다. 그가 안호연의 몸을 뒤집었다. 한 번의 사정으로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빙긋 웃으며 그의 정액으로 축축해진 안에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한번 벌어졌던 곳은 무리 없이 남자의 것을 삼켰다.

“여기에 사정했던 남자는 몇이나 돼요?”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안호연은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기억나지 않으면 이제 내가 호연 씨의 첫 남자인 거죠?”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이란 단어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번번이 뺏기니 기분이 좋지 않네요.”

눈이 감기려고 했다. 반쯤 감긴 눈에 그가 잘게 키스하며, 축축하게 젖은 내벽을 페니스로 문질렀다. 축축했고 졸린 와중에도 배가 고팠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식은 음식이 눈에 들어왔다.

“배고파요?”

그가 묻자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연 씨는 욕심쟁이야. 아래로 배불리 먹고 위로도 먹어요.”

빼 줘야 먹지. 짜증스레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래가 이렇게 부풀어서 빼지 못해요. 그냥 먹어요.”

안호연은 눈을 아래로 내렸다. 그제야 엉덩이에 달라붙은 그의 살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뒤로 엉덩이를 빼면 그의 골반이 따라왔다. 그사이 강중영이 노팅을 한 것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노팅을 하면 몇 시간 동안 떨어질 수가 없었다.

개새끼, 나쁜 새끼. 임신한 오메가에게 노팅을 하는 알파는 별로 없었다. 안호연은 소리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여 주먹으로 강중영을 쳤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누워 있는 안호연의 상체를 세웠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단단하게 엉덩이를 받치자 그의 페니스가 더 깊숙이 닿았다.

“뭐 먹고 싶어요? 이제 말해도 좋으니까 말해 봐요.”

“다.”

“하나만 골라요.”

“떡볶이 먹을래.”

“그건 좀 멀리 있는데?”

그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현관 옆에 버려진 비닐이 보이자 얼굴이 사색이 된 안호연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저기까지 가다가 쑤셔지는 안쪽 때문에 지칠지도 모른다.

“보쌈 먹자.”

그가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안호연의 입에 가져다 댔다. 그가 주는 걸 말없이 받아먹었다. 텅텅 비었던 배 속으로 음식이 들어가니 그나마 배고픔이 덜했다.

“저는 안 줘요?”

“안 줄래.”

고집스럽게 고개를 흔든 안호연은 이걸 달라 저걸 달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배가 빵빵해지고 그 아래도 빵빵해졌다. 제대로 배출되지 않은 정액이 배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째서 단 한 번의 정사로 임신했는지 이해가 됐다.

“근데 익사하면 어떡해. 안에다 너무 많이 쌌잖아. 더구나 흘러내리지도 못하게 막고…….”

“무슨 말이에요?”

“아이가 걱정된다고.”

안호연은 조용히 속삭였다.

“무식쟁이.”

안호연은 원체 공부는 담을 쌓고 살았고 성교육 따위 받았을 리가 없었다. 그쪽에 관심이 없으니 무지할 수도 있다. 그가 작게 비웃으며 안호연의 뺨에 키스했다.

“아이는 물속에서도 숨을 잘 쉬어요.”

“어디로 쉬는데?”

“탯줄로요. 머리로 사기 칠 생각만 하지 말고 책도 읽어요.”

그가 손바닥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이 녀석이 얼른 나왔으면 좋겠어요.”

“왜?”

“이 녀석을 내보내야 더 진하고 좋은 밤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이걸로는 부족하잖아요.”

소름 돋는 말이다. 힘 빠진 눈을 하고 죽어 가는 안호연과 달리 그는 번지르르한 낯짝으로 웃었다. 전혀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는 강중영을 보자 안호연은 그제야 배 속 아이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적어도 아이가 있는 동안은 기나긴 밤을 섹스로 보내지 않아도 될 것 같으니까.

그는 진한 밤을 이뤄 냈다. 아이가 있어도 막힘없었다. 위로 먹여 주고 아래로 찔러 주는 길고 긴 섹스를 나눴다. 남자가 노팅을 끝내고 페니스를 뽑았을 때, 그 안에서 쏟아진 정액 양에 안호연이 기겁하기도 전에 강중영은 두세 번 더 몸을 겹쳐 왔다. 정확히 26시간 동안 혹사당한 몸이 처음으로 몸살이란 걸 앓았을 때 그가 왜 음식을 시켰는지 깨달았다. 이 정도로 사람을 혹사하려면 먹이면서 해야 가능했다.

잠을 곤히 잤다가 눈을 떴을 때, 손가락과 발이 무거웠다. 움직일 수 없는 몸에 안호연은 눈물을 찔끔 흘렸다. 혹시 잠을 자다가 마비에 걸린 건 아닐까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가 느리게 반응하는 손가락에 안도했다. 온몸이 아파 움직이지 않으려는 안호연을 내려다보던 강중영은 자신의 이마에 손을 댔다.

“열은 없는데. 설마 만진 거로 흥분한 건 아니죠?”

“근육통이야. 지구를 열 바퀴 뛴 것처럼 온몸이 아프다.”

“아아. 체력이 약하네. 자주 하다 보면 익숙해져요.”

자주? 자주라는 말에 안호연의 얼굴에 식은땀이 났다. 그는 자주 자신이 임신했다는 걸 잊는 듯했다.

“나 임신했어.”

“그게 왜요?”

“네가 모르는 거 같아서. 진짜 살살 하자.”

“살살 한 거래도 믿질 않네요. 정말 아이 생각해서 살살 했어요. 그래서 싫어요? 하지 말까요?”

죽어도 섹스를 안 한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욕이 터져 나올 정도로 힘든 걸 제외하면 좋았다. 물끄러미 안호연을 보던 그가 빙긋 웃으며 유두를 손가락으로 누르곤 근육통을 앓는 안호연의 팔을 주물러 주었다. 그는 근육이 뭉친 곳을 정확하게 눌러 풀어 주었다.

“살살 한 건데요. 정말 살살요. 아이가 없었으면 이런저런 다양한 섹스를 했을 거예요.”

“다양한 게 뭔데?”

“음, 다양한 기구 같은 것도 써 보고 호연 씨에게 예쁜 옷도 입혀 보고 싶어요. 섹스는 다채롭고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게 제 섹스관이거든요. 무식하게 몸만 겹치는 거 말고요.”

어제 무식하게 몸을 맞대 오던 그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의 말에 흥미가 돌아 눈을 반짝였다.

“그 옷을 누가 입는데?”

“그쪽이 싫으면 내가 입어도 되고 그쪽이 입어도 되고요.”

“기구는?”

“그건 그쪽이 예쁘게 먹어 줘야죠.”

안호연의 머릿속에 몸에 딱 밀착되어 앞섶이 불룩하게 튀어나온 발레복을 입은 그라든지, 하얀 양말만 신고 있는 그라든지, 몸에 피트 된 양복에 자신의 성기를 문대는 환상이 떠올랐다. 가끔 즐겨 보는 보이프렌드 잡지에서 보았던 사진이 휙휙 지나가다가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같이 고를래요? 딱 하나만 사요.”

근처에 굴러다니는 노트북을 켠 그는 인터넷 마켓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수많은 성인용품이 쭉 늘어서 있는 사진을 보았다. 많은 사진이 늘어섰다. 언젠가 야동 속에서 보았던 용품도 있었다.

“어떤 거 쓰고 싶어요? 전 이게 어떤지 쓰고 싶은데.”

궁금하다는 눈을 빛내던 그가 사정방지링을 손가락으로 콕 짚었다.

“네가 쓰게?”

“뭐, 그래야죠.”

강중영이 음흉하게 웃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안호연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더 오래 찔러 주면 좋죠. 전 이거요.”

안호연은 보기 드물게 눈을 빛냈다. 조그마한 에그 진동기였다. 양껏 수량도 3개로 올려서 장바구니에 담았다. 근사한 강중영에게 슈트를 입히고 유두나 성기에 에그를 달아 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고 벌써 흥분됐다. 자신은 이곳에서 족쇄를 차고 있는데 종종 강중영은 출근을 위해 잠깐씩 외출을 하곤 했는데 좀 억울했다.

“그쪽이 쓰게요?”

“응.”

안호연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결제를 시도하는 그를 보던 안호연은 예상 배송일을 확인하곤 다시 몸을 뉘었다. 일주일 뒤가 기다려졌다. 함박웃음을 짓는 안호연의 어깨를 주물러 주던 그로 인해 몸이 노곤했다. 이 몸 상태라면 다음 섹스에 학을 떼야 하는데, 택배가 오길 기대하는 자신이 웃겨 고개를 저었다. 임신하면 성욕이 왕성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느릿하게 입을 벌려 하품을 하던 안호연은 마사지를 하는 강중영의 손끝을 느꼈다. 남자치곤 섬세한 손길이다.

“우리 사이는 뭐야?”

“지금은 연인이고 얼마 후면 부부죠.”

그 단어가 어색하지 않았다. 태범석과 자신에게 대면 어색했던 단어들이 둘 사이에 적절하게 어울렸다.

연인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서로 요구하고 들어줄 수 있는 거.

섹스 하고도 허탈하지 않은 거.

그가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거.

얼마나 잘못된 관계 속에서 자신이 빙빙 돌았는지 깨달으며 안호연은 눈을 감았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이 고요한 바다에 있는 것처럼 편안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