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태범석을 만나게 된 건 입양처에서 만난 형제들의 시샘으로 파양이 결정된 어느 겨울이었다. 그를 몇 살 때 만났다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여덟 살인 것도 같고 아홉 살인 것도 같다. 기억해야 할 태범석이나 안호연은 그때 어렸고 그걸 기억하는 어른도 없어 정확한 날짜를 알려 줄 사람이 없기에 영영 알 수 없으나 정확한 건 둘이 만난 곳이 보육원이라는 사실이다.
아이들이 바글바글했던 그곳에서도 텃세가 존재했다. 먹는 것만으로도 눈치를 봐야 했던 시기, 얍삽한 안호연은 태범석을 따라다녔다. 한눈에 그가 이 아이들 무리에서 실세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태범석도 그걸 별로 싫어하지 않는 눈치라 지금까지 따라다녔다. 때로는 친구처럼 연인처럼 형제처럼 숱한 밤을 보냈는데도 그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은 가질 수 있을 것처럼 가깝다가도 어느 날은 멀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태범석을 수백 번도 넘게 접으려 마음먹었으나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돌아 태범석의 옆으로 돌아오곤 했다. 자신을 이용해 돈을 버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다 됐어요?”
“조금만 더 기다리셔야 해요.”
태범석이 스윗한 미소를 날리며 마사지사에게 물었다. 그 소리에 손 관리를 받고 있던 안호연도 과거 속을 유영하다가 현실로 돌아왔다. 갑작스러운 질문과 함께 태범석이 들어서자 여자의 볼이 붉어지더니 안호연에게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
“고객님은 좋은 연인을 두셔서 좋으시겠어요. 이렇게 손 관리 받는 걸 기다려 주는 남자는 드물거든요.”
마치 비밀을 알려 주듯이 작게 속삭이는 여자를 보며 안호연은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그의 미소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오해하기에 충분했다. 달콤했고, 자신을 향해 반짝이는 눈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과 비슷했다. 자신도 얼마 전까지는 저 눈빛에 수차례 흔들렸었다. 홀로 가슴 뛰고 홀로 좋아하다가 마지막엔 홀딱 속아 넘어갔다는 걸 깨닫곤 했다.
“정말 다정해요.”
“애인 아니에요. 형이에요. 관심 있으면 따로 번호 따 가도 돼요.”
즐기기엔 태범석만큼 적격인 사람도 없었다. 그만큼 연애만 하기엔 태범석만 한 남자도 없으나 여자가 번호를 물으면 가만히 있을 것도 아니면서 안호연은 심술궂은 대답을 내놓았다.
“아뇨, 괜찮아요. 그래도 다정하네요. 관리숍에 데려와 주시고요. 관리 끝났습니다.”
태범석이 일부러 돈을 들여 안호연을 이곳에 데려오는 건 몸이 자산이기 때문이다. 모양 좋은 떡은 흥정하기도 쉽고 값을 올리기도 좋아 투자했다.
며칠간 헤어숍에서 관리를 받아 윤이 나는 머릿결을 무심코 만지며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엔 딴사람이 된 안호연이 심술 맞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갈하게 잘린 머리와 차분하게 내려앉은 검은 머리. 관리가 잘돼 광이 도는 피부는 그를 한층 어려 보이게 했다.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머리에 왜 신경질이야?”
“나 같지가 않아서.”
“예쁘면 그만이지. 그 노란 머리보단 이게 어울려.”
“그 머리가 더 좋았어.”
“나중에 일 끝나면 해. 안 말려.”
싱긋 웃은 태범석은 어디 볼까, 소리를 내며 안호연의 두 팔목을 잡고 꼼꼼히 살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살펴보곤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넌 돈 들이는 맛이 나. 조금만 신경 쓰면 예뻐지잖아.”
“됐어.”
안호연은 가깝게 붙은 태범석을 어깨로 밀어내고 바깥으로 나갔다. 하늘이 꾸물거렸다. 꼭 비가 올 것처럼. 계단 밖으로 발을 내리자 비가 쏟아졌다. 재수 없는 하루였다. 대충 손바닥으로 머리를 가리려고 고개를 들었다. 제일 먼저 보인 건 진청색의 재킷이었다. 아까까지 태범석이 입고 있었던 재킷이 안호연의 머리 위로 펼쳐졌다.
“뭐야.”
“난 젖어도 괜찮지만 넌 젖으면 안 돼. 오늘 이렇게 예쁜데.”
가끔 이렇게 그가 마음을 흘릴 때면 큰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래도 태범석에게 안호연이 그나마 특별하다는 착각. 눈가를 찡긋한 그는 근처 숙소로 뛰어갔다. 관리숍과 숙소까지 별로 멀지 않아 젖지 않고 도착했다. 안호연이 머리에 썼던 재킷을 벗어 세탁 바구니에 던지자 태범석도 입고 있던 젖은 셔츠를 벗고 굴러다니던 옷을 상체에 걸쳤다.
조그마한 원룸에 들어서자마자 안호연은 침대에 누웠다. 손을 뻗어 벽에 붙은 A4용지에 정리된 사항을 줄줄 읽었다. 그건 자신에 대한 새로운 정보였다. 학력을 위조한 증명서와 해외 봉사 증명서, 자격증을 읽어 내렸다. 희망 보육원 출신 오메가가 이렇게 다채로운 학력과 경력을 가진 오메가로 탈바꿈하는 건 간단했다. 안호연은 침대 밖으로 나간 다리를 까닥거리며 새롭게 위조된 신분을 외웠다.
“그렇게 많이 바뀐 건 없어. 안호연 신분에 학력하고 경력만 위조했어. 조실부모하고 먼 친척인 형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유학과 해외 봉사를 전전하고 다니다가 좋은 혼처를 구하려고 결혼정보회사에 등록한 거로 꾸몄어. 만남은 내일. J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 잡았어.”
“먼 친척 형은 누군데?”
“나. 옆에서 도와는 줘야 하고 드나들려면 필요한 거 같아서.”
태범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겠네.”
“우리가 지낼 집은 이 근처 아파트로 급하게 마련했어. 결혼하고 쉬고 싶으면 거길 써도 좋아.”
“여긴?”
“여긴 임시 거처잖아. 곧 없앨 거야.”
“좁은 곳이 좋은데.”
“왜?”
“아무 이유 없이 같은 방에서 같은 침대에서 잘 수 있잖아.”
“언제 옆에서 안 재운 적 있나?”
“외로워.”
오랜만에 투정을 부렸다. 몇 년간 잘 참았던 감정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능글맞게 웃던 그의 눈가가 딱딱해졌다.
“우리가 제대로 사귀었던 적이 있냐? 어리광 부리지 말라고 했잖아.”
“그랬지.”
“네가 선을 넘지 않아야 우리 관계가 유지될 수 있어. 사기꾼에게 연애는 사치잖아.”
“알아.”
“분명 독신주의에 애인은 안 키운다고 말했는데도 좋다고 한 건 너였어. 욕심 안 부리겠다고 옆에만 있게 해 주면 선 지킨다고 했잖아.”
“…….”
“지금에서야 이러는 거 진짜 없어 보여, 호연아. 설마 너 나 아직도 사랑해? 형제애 말고 목숨까지 내주는 드라마틱한 사랑을 하냐고 묻는 거야.”
그런 말을 하는 그가 우스워서 안호연은 웃었다. 이미 자신의 마음을 알고 이용할 대로 이용했다. 그래 놓고 사랑하냐고 묻는 건 반칙이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안호연은 그에게 고백했던 적이 있었다. 두근두근 뛰는 마음을 안고 고백을 했을 때, 그는 재미난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배를 잡고 뒹굴었다.
“사랑하지 마. 내가 너한테 엄청 못되게 굴었는데도 나 사랑하면 그거 진짜 구질구질한 거야. 나 너하고 결혼한다니까? 근데 그거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 아냐. 넌 내 거니까 편해서 하는 거지. 내가 사업 때문에 다른 사람 만나도 이해해 줄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사랑 때문에 결혼하고 싶은 거면 깔끔하게 버려.”
“나한테 사랑한다고 했던 말도 단순 형제애야?”
“그건 일종의 서비스.”
그가 안호연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리고 파들파들 떨고 있는 입술에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이 키스도 비즈니스, 섹스도 비즈니스. 나같이 계산적인 놈 사랑하려면 그런 감정 들키지 마. 그러면 계속 널 갖고 장사해 먹을 생각만 들어. 이렇게 경고하는 건 널 조금이라도 아끼기 때문이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손해는 네가 하는 거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안타까워. 계속 내 옆에 있으려면 그런 감정 가지지 말고 즐겨.”
“나쁜 새끼. 더러워서라도 안 사랑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호연이 쿨한 건 잘 아니까 걱정은 안 해. 이제 투정 부리지 말고 그거 내일까지 완벽하게 외워 놔.”
“만약 내가 그만하자고 하면 어떨 거 같아?”
“안호연 네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넌 내 거잖아.”
“네 건데 왜 사랑을 안 해?”
“원래 잡힌 물고기에겐 먹이를 주지 않는다잖아. 그런 불필요한 짓을 왜 해, 시간 아깝게. 사랑한다는 말 할 시간에 섹스 한 번 더 하는 게 낫지.”
힘이 들어가 종이가 안호연의 손안에서 구겨졌다. 그 손가락을 하나씩 편 태범석은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협탁을 더듬던 그는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 하나를 꺼냈다. 입에 담배를 물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끝에 불이 붙자 그걸 안호연에게 내밀었다.
“내일부터는 못 피우니까 오늘까지 피워. 그쪽에서 담배 같은 건 일절 모르는 며느리를 원한대. 욕심이 과해.”
그걸 안호연은 말없이 받아 입술에 물었다. 쓴 담배 연기가 폐로 들어갔다가 입술 밖으로 나왔다.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안호연은 구겨진 종이만큼이나 구겨진 얼굴을 자료에 박았다.
* * *
늦은 새벽까지 자료를 뒤적거리다가 잠든 안호연은 알람을 듣고 눈을 떴다. 시간을 확인한 그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시곤 욕실로 자리를 옮겼다. 간단하게 씻고 나와 어제 준비해 놓은 옷을 챙겨 입었다. 좁은 공간에서 우당탕 소리를 내며 준비하자 안대를 쓰고 잠을 자던 태범석이 쭉 뻗은 손가락으로 안대를 아래로 내렸다.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는 안호연과 눈이 마주치자 손가락으로 눈을 비비곤 다시 눈을 감았다. 드라이어 전원을 끄고 고개를 돌렸다.
“늦었어.”
“늦으면 어때. 코리안타임이라는 말도 있잖아. 천천히 준비하자고. 어차피 그쪽도 늦을 거야.”
“헛소리 마. 미리 나가서 기다려야지. 이러다 결혼 무산되면 나한테 뒤집어씌우려는 거지?”
태평한 말을 하며 눈가를 손등으로 덮는 그를 보던 안호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에 늘어진 그를 일으켜 세워 욕실로 밀어 넣었다. 그러곤 어제 준비해 둔 옷을 침대에 펼쳐 놓았다. 둘의 짐이 섞여 거대한 쓰레기통 같은 공간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건 꽤 힘들었으나 그 속에서 그가 슈트를 입을 때마다 착용하는 커프스까지 찾아 침대 위에 두었다. 화장실 밖으로 나온 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어깨에 수건을 두르고 나왔다. 그러곤 대충 몸을 닦고 침대에 준비된 옷을 입었다.
“이리 앉아 봐.”
“왜?”
셔츠 단추를 채우던 그가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머리 말려 줄게.”
“됐어, 드라이어 내놔.”
“오라면 와.”
서랍에서 드라이어를 꺼내던 안호연이 짜증을 내자 그가 의자에 앉았다. 머리가 낮아져 만지기 편한 위치에 있는 태범석의 머리를 안호연은 손으로 비벼 말렸다. 뜨거운 바람을 타고 좋은 샴푸 냄새가 코를 찔렀다. 희미하게 나는 그의 페로몬이 좋아서 눈이 살짝 감겼다. 과하지 않은 그의 페로몬은 심적인 안정을 주었다. 마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농도가 적당했다.
완벽하게 머리를 말린 안호연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단추를 잘못 끼운 탓에 셔츠가 뒤틀려 있었다. 쯧쯧 혀를 찬 안호연은 단추를 하나씩 빼내고 다시 단추를 정성스레 끼웠다. 주름 하나 없는 셔츠의 소매를 잡아 커프스까지 완벽하게 채우곤 몸을 숙여 재킷을 들었다. 태범석은 익숙하게 재킷에 팔을 꿰어 넣고 돌아섰다. 안호연은 그의 재킷 포켓에 행커치프를 꽂았다. 아까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던 20대 중반의 남자가 단숨에 사업가로 변모했다.
“역시 안호연.”
그가 답례로 안호연의 입술에 짧게 키스하고는 차 키를 들었다. 그 뒤를 따라 안호연도 발을 옮겼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머리를 흔들었다. 차분히 도로에서 그를 기다리자, 검은색 세단이 앞에 섰다. 문을 열고 보조석에 타자 그가 익숙하게 안전벨트를 채워 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가면 책잡히는 짓 하지 마.”
“그거야 뭐.”
“곤란한 말엔 그냥 웃고.”
“알았어.”
“꼬박꼬박 존댓말하고 말대답은 길게 하지 마.”
“걱정하지 마. 연기 잘하잖아.”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빠르게 도로를 달리던 차가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약속 시간보다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예약한 룸에 들어가기 전 따로 준비된 파우더룸으로 들어가 거울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자꾸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초조해서 머리를 매만지는 안호연을 물끄러미 보던 그는 입꼬리를 올리곤 긴장해 있는 안호연의 턱을 잡았다. 그러곤 마른 입술 위에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혀가 위 통로를 향해 밀고 들어왔다가 장난치듯 톡톡 혀를 건드리곤 빠져나갔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눈으로 신호를 주며 그를 밀었다. 순순히 뒤로 밀려난 태범석이 귀에 작게 속삭였다.
“나머지는 집에 가서 하자. 공사 끝나면 근사한 곳으로 여행 가자.”
“프랑스는 싫어.”
“그 노인네를 꼴도 보기 싫은 거겠지.”
태범석이 안호연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일이 시작됐다는 신호였다.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이곤 그를 따라서 들어갔다. 미닫이문이 열리자 제일 먼저 보인 건 인상이 고운 중년 여자였다. 그녀는 안호연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안호연은 잔뜩 얼어붙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관리를 받아 탱글탱글한 머리칼이 귀밑으로 미끄러졌다.
“안녕하세요, 안호연이에요.”
“태 사장님 사촌이라고요?”
“네, 오랫동안 타지에서 생활하다가 이제야 좋은 혼처를 구한다고 입국했어요.”
태범석도 빙긋 웃으며 옷을 서버에게 건넸다. 서버는 옷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태범석이 안호연의 의자를 빼 주었다. 안호연은 얼른 의자에 앉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어리긴 해도 영특하고 자제분과 나이도 비슷하죠. 분명 좋은 짝이 되어 줄 거예요. 그런데 자제분은요?”
중년 여자의 얼굴이 잠시간 굳었다.
“미안해요. 우리 애가 좀 공사가 바빠서 늦는 것 같아요. 금방 올 테니 앉아 기다리고 있어요. 그동안 이야기 좀 하죠. 이름이 안호연 씨라고 했나요?”
“네.”
“참하게 생겼네요. 내 이름은 이선영이라고 해요. 앞으로 자주 볼 것 같네요. 외국에서 미술을 공부했다는데 정말인가요?”
눈썹이 꿈틀거렸다. 안호연은 그림의 ‘그’ 자도 모르는 무식쟁이였다. 명화를 두고도 어디가 감상 포인트인지도 모르고, 어째서 그림 하나가 그렇게 비싼지 모르는 그였다. 그런 그가 고상하고 어려운 학문을 전공하는 것으로 위장하게 된 건 이선영과 공통 관심사를 만들기 위함이다.
죽어도 미술은 안 된다고 학을 떼도 태범석은 불도저처럼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였다. 태범석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게 보였다. 무릎에 있던 손이 소리 없이 그의 허벅지를 가격했다.
“호연이가 외국어를 오래 전공하다가 미술을 공부한 지 오래되진 않았어요. 여사님의 식견을 따라가기엔 무리가 있죠. 많이 가르쳐 주세요.”
“그래요, 함께 미술관에 놀러 가요.”
손바닥에 고이는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이 자리가 계속 불편했다. 보통 첫 만남에서 부모님과 함께 만나는 경우가 없었다. 둘이 만나는 자리가 익숙했고 나이가 많은 어른과 지내 본 적이 없어 안호연은 긴장했다. 안호연이 말없이 찻잔만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미동도 없던 미닫이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먼저 보인 건 평범해 보이는 운동화였다. 선을 보러 오는 자리에 입을 법한 옷이 아니었다. 찢어진 청바지에 깔끔한 흰 티에 모자까지 눌러쓰고 왔다. 바보가 아니라면 그가 선을 보기 위해 나온 사람이라는 걸 쉬이 알아챌 수 있었다.
“중영아!”
노성이 섞인 목소리가 여자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왔다. 껄렁하게 고개를 숙인 그는 목이 말랐는지 성큼성큼 테이블 쪽에 걸어와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아, 덥다.”
버릇없고 무례한 남자였다. 모자를 벗어 옆에 놓는 남자를 물끄러미 보던 안호연은 눈을 깜박거렸다. 좆 됐다. 하마터면 욕이 육성으로 나올 뻔했다. 욕이 뚫고 나오려는 입술을 손바닥으로 눌러 막곤 고개를 숙였다. 알파 대여 서비스에서 만난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안호연은 옆으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 여사님, 이 사람이 저하고 결혼할 사람이에요?”
“그래, 근데 꼴이 이게 뭐니?”
“분명 참한 오메가로 고른다고 하지 않았었나?”
“얼마나 참한데.”
“그래요?”
이선영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으며 강중영을 잡아당겼다. 그녀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강중영의 등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얼마 전에 오메가 하나를 만났는데 아주 예뻤지 뭐예요. 그래서 더 만나고 싶었는데 도망을 갔어요. 그날 내가 좋다는 오메가는 처음이라 안에다가 잔뜩 싸 놨는데 임신했을지도 모르는데.”
“중영아!”
안호연의 얼굴이 하얘졌다. 보통 서비스로 이용되는 알파들은 태범석처럼 영구 피임하기 때문에 이후론 신경 쓰지 않았다. 질린 얼굴로 배를 보던 안호연은 아찔해지는 정신에 손가락으로 태범석의 허벅지를 눌렀다. 아무래도 이번 공사는 공친 것 같다는 무서운 예감이 전신을 뒤흔들었다.
태범석이 안호연을 응시했다. 눈으로 왜 그러냐고 물었으나 시선이 많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안호연은 대답 대신 나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뭐, 임신이 됐든 안 됐든 내 눈앞에 있는 오메가가 잘 키우겠죠. 마음에 들어요.”
강중영이 씩 웃으며 안호연을 바라봤다.
“그쪽은 저 마음에 들어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 안호연은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그러자 강중영이 집요하게 몸을 틀어 안호연과 시선을 맞추었다.
“마음에 드냐고 물었잖아요.”
안호연은 어색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보지 못한 걸까?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원나잇을 하는 오메가에 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었고 특히 연애가 아닌 결혼 상대라면 더더욱 엄중한 잣대를 들이댈 수도 있었다. 결혼이 성사되는 건 강중영의 의지와 직결되므로 그가 안호연이 마음에 안 든다고 잡아떼면 결혼은 물 건너갔다. 안호연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가 자신을 못 알아봤기를 바랐다. 희망을 품은 안호연은 무수히 많은 변명을 끄집어냈다.
강중영을 만났던 건 2주 전이었고 그땐 어두웠고 안호연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때 입었던 옷과 머리 스타일도 지금과는 다르고 심지어 그때 사용한 이름도 박연이었다. 마지막으로 안호연을 알아봤다면 “너 그때 걔지?”라는 반응이 나와야 하는데, 그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어쩌면 결혼하기 싫어서 꺼낸 말일지도 모른다.
“호연 씨에게 무슨 짓이니?”
“미안해요.”
그가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자꾸 얼굴을 들이미는 남자가 부담스러워 안호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계속 물을 마셨다. 계속 물을 마시는 안호연을 발견한 태범석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곤 무슨 일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는지 안호연을 지그시 보았다.
“저희가 이 여사님 댁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집안인 건 맞지만, 저런 막말을 듣게 하려고 호연이를 보내는 게 아닙니다.”
태범석이 갑자기 정색하며 동생을 아끼는 형 연기를 시작했다.
“얘가 결혼하기 싫어서 막말하는 거지 따로 여자 문제를 벌인 적은 없어요. 태 사장님도 결혼정보회사에서 자료를 다 받아 보셨잖습니까.”
“그렇죠.”
“연애에 관심이 없어요. 일밖에 몰라요.”
연애에 관심이 없다는 사람이 알파 대행 서비스를 한다는 것도 우스웠고 이미 저쪽이 여러 문제로 결혼이 파투 났다는 이야기를 태범석을 통해 들었기 때문에 그녀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안호연은 알고 있었다. 이쪽도 할 말이 많지만, 안호연은 입을 벙긋대는 대신 태범석의 허벅지를 움켜쥐고 밖으로 나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태범석은 그 신호를 무시하고 차를 마셨다.
“강중영 씨, 저희 호연이 알아요? 꼭 아는 사람을 보는 눈치라서요.”
“아뇨, 오늘 처음 봤어요. 이 여사님이 고른 오메가는 어떤가 했는데 결혼할 사람으로 적당한 거 같네요. 여사님 말대로 착한 거 같고 예쁘고 말수도 별로 없고요.”
강중영은 빙긋 웃으며 안호연을 주시했다. 입술을 뗄 때마다 무슨 말이 나올까 불안했는데, 의외로 그의 입에선 모른다는 말이 나왔다. 그제야 안호연은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호연 씨가 말이 없네요. 숫기가 없는가 봐요.”
“네, 호연이가 알파하고 어울려 본 적이 없어서 그럴 겁니다. 외국에 있을 때도 베타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생활했어요.”
“그런가 봐요. 태 사장님이 동생분을 참 잘 키웠어요. 중영이 너도 호연 씨가 마음에 들지?”
“어머님이 데리고 왔던 오메가 중에 제일 마음에 드네요.”
“얘도 참. 태 사장님, 이제 애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하고 이만 빠지죠. 넌 호연 씨와 남아서 맛있는 점심 먹고 와.”
“그러죠.”
가지 말라는 무언의 신호를 태범석에게 보내자 그는 손으로 안호연의 어깨를 두어 번 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은밀하게 휴대 전화를 두드렸다. 전화하라는 신호였다.
“어쩌면 가족이 될지도 모르는데 악수 한번 하죠.”
태범석의 말에 강중영이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둘은 가볍게 악수를 하더니 서로 명함을 주고받았다. 명함을 챙겨 지갑에 밀어 넣은 태범석이 이선영을 에스코트하며 나갔다. 태범석의 명함을 응시하던 강중영은 그걸 구겨 바닥에 던지곤 안호연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목이 타 뜨거운 차를 밀어 버리고 주스를 마시기 위해 빨대를 물었다. 급하게 쪽 빨면서 그를 훔쳐보았다.
“그때도 내 거 진짜 잘 빨았는데.”
풉. 입에서 주스가 뿜어져 나왔다. 주스로 엉망이 된 테이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안호연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이에요?”
“그때 그쪽 아닌가.”
“누구랑 헷갈리는지 모르겠는데 기분 나빠요.”
“내가 누구랑 헷갈린다고 장담하는 이유가 있잖아요. 찔리면 그만 연기해요. 아니면 그쪽 장단에 내가 놀아 줘야 하는 건가?”
“강중영 씨가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에 안 들면 이 결혼, 무르도록 하죠. 형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얀 옷에 묻은 주스를 냅킨으로 닦은 안호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련 없이 돌아서려는 그때 그가 안호연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꽉 쥐고 있어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할게요. 제가 잘못 봤나 봅니다. 하긴, 그때 그 사람 이름은 박연이었지 안호연은 아니었죠. 정중히 사과할게요. 앉아요. 이 여사님이 비싼 밥을 준비했다니까 먹어요.”
다 안다는 듯이 그가 음흉한 미소를 띠며 주스로 목을 축였다. 안호연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더러워도 일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하다 보면 이보다 더한 상황을 숱하게 겪었기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이가 어떻게 돼요?”
“스물여섯이요.”
“어리네요. 결혼하기 아까운 나이고요. 결혼하기에 예쁘고 안타까운 나이네요.”
“나이가 어리면 결혼정보회사에 등록하면 안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결혼하죠.”
“뭐?”
“한눈에 반했어요.”
그가 입술을 좌우로 늘리며 웃었다. 밥을 먹자는 말처럼 결혼하자는 말을 하는 강중영 때문에 안호연은 어안이 벙벙했다. 보통 결혼까지 걸리는 시간은 6개월에서 길면 1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강중영은 얼굴을 보자마자 결혼하자는 말이 나오기까지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말에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가 디저트로 나온 빵을 포크로 집어 안호연의 입술 근처로 가져갔다. 안호연은 반사적으로 입술을 벌렸다.
“날짜는 제가 잡을게요. 혼수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지금 사는 집은 둘이 살기에 충분하고 생활하는 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 갖춰져 있어요. 딱 호연 씨만 들어오면 좋을 거 같은데.”
입 속으로 부드러운 빵이 들어왔다. 그걸 반사적으로 씹으며 안호연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시간이 단축돼 좋았으나 그와 별개로 찝찝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
“얼른 정착하고 싶은데, 호연 씨 생각은 어때요?”
“그게…….”
“싫어요?”
그의 또렷한 눈을 마주하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이상한 환상에 사로잡혔다. 안호연은 침을 꼴깍 삼켰다. 외모도 나쁘지 않아 좋은 작업 상대였기 때문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했어요?”
“네.”
“허락한 겁니다?”
그는 다시 한 번 물어보며 빵가루가 묻은 안호연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댔다. 강도가 세 입술 전체가 아팠다.
“이젠 다른 알파 새끼 냄새 묻혀 오면 죽어요. 나 화나면 엄청 무섭거든요.”
섬뜩한 말이 안호연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미친놈.’
안호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결혼을 목적으로 만났다고 해도 소유권을 과격하게 주장하는 건 옳지 않다. 또 처음 본 사람에게 소유욕을 드러내는 사람도 드물었다. 드문 미친놈이라고 결론을 내린 안호연은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알파도 만나 본 적이 없는걸요. 연애해 본 적 없어요.”
안호연은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아마 이 이야기를 6년 넘게 안호연과 몸을 섞었던 태범석이 들었다면 배를 잡고 굴렀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을 불량 식품 운운할 정도로 싸구려로 여기고 있었으니까.
“그래요.”
그가 시큰둥하게 반응하는 사이 서버가 노크하고 들어와 음식을 세팅했다. 예쁘게 플레이팅 된 음식을 포크로 찍었다. 예쁜 음식은 금세 흐트러져 안호연의 배 속으로 사라졌다. 밥을 먹는 동안 그는 안호연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맛있는 음식을 계속 옮겼다. 과한 관심에 체할 것 같은데도 안호연은 티를 내지 않았다. 관심 없는 척 고개를 숙이며 남자의 앞에 그릇을 밀었다.
“중영 씨도 드세요.”
강중영은 물끄러미 음식을 보더니 그제야 포크를 들었다.
“매일 주기만 했는데, 이렇게 받는 것도 기분이 좋네요.”
“당연히 좋죠.”
“안호연 씨는 누굴 사귀어 본 적이 없으면 섹스 같은 것도 해 본 적 없어요?”
안호연은 아까 주스처럼 씹고 있던 음식을 뿜을까 얼른 손바닥으로 입술을 막았다. 자꾸 이상한 걸 물어 오는 그 때문에 신경이 거슬렸다.
“여자 경험은요? 남자하곤 있어요?”
“과거는 묻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거 알아서 뭐 하게요. 오히려 기분만 나쁘잖아요.”
“그럼 약속해요. 지금부터 마지막까지 나여야 한다고.”
“당연하죠.”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할 사항이 아닌데. 무덤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여야 한다고요. 앞이든 뒤든.”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게 이상하네요. 부부가 되면 당연하지 않나. 저 못 믿겠어요?”
강중영이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못 믿죠. 내가 안호연 씨를 어떻게 믿어요?”
“그럼 왜 결혼하자고 했어요?”
“한눈에 반했다고 말했잖아요.”
“그럼 믿어요. 믿음이 있어야 결혼을 하는 거죠.”
“믿으면 뭐로 보답해 줄 건대요?”
남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메가들이 줄줄이 도망갔다는 말이 순간 이해가 되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안호연은 휴대 전화를 집으며 대답을 피했다.
“잠깐 전화하고 올게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로 옮겨 간 안호연은 신경질이 묻어나는 손가락으로 태범석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짧은 신호음이 가고 그가 전화를 받자마자 안호연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저 새끼 제정신 아니야. 좀 대화해 보니까 똘끼가 장난 아니잖아.”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런 집안이 결혼정보회사로 흘러들어 온 거겠지.”
“그걸 태평하게 말해? 공사 착수하기 전에 말했어야지. 너 나한테 더 말 안 한 거 있지? 전에 오메가들은 왜 도망간 건데? 솔직히 말해.”
“알파 고질병이 고착된 놈이야.”
“그게 뭔데?”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한데 자기 거라고 생각하는 걸 심하게 통제하려 해. 그러면서 만족감을 느끼는 유형이야.”
안호연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나왔다. 알파 중 지도자 타입으로 분류되는 유형으로 오메가들이 지양하는 타입의 알파였다.
“이런 새끼를 고른 이유가 뭐야? 나 엿 먹이려고?”
“돈 때문이지. 선수금이 10억이야. 오메가 하나 구해 주면 10억을 덜컥 주겠다고 했어. 그것뿐인가. 결혼 성사되면 10억을 더 내놓겠대. 너도 그 자료 모아서 이혼 소송하면 위자료로 받으면 서로 좋잖아. 1년 착수해서 1억, 2억 벌어서 언제 부자가 될 건데?”
“야, 태범석.”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머리로 셈만 하자.”
안호연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정 싫으면 접어. 너 아니어도 대신할 오메가는 많아. 중국의 서른두 살짜리 베타가 죽기 전에 오메가와 결혼하고 싶어 하던데 거기로 가든지.”
“넌?”
“당분간 한국에 있을 거야. 강중영 건 철수해, 말아?”
“됐고, 사후피임약이나 구해 놔.”
“그건 왜?”
“이 새끼, 그 새끼야. 대여 서비스로 만난 알파. 그때 안에다 싼 거 같아.”
“그래서 아까 그런 말을 했었나 보네.”
“지금 내가 발뺌하고 있긴 한데 의심하고 있는 거 같아.”
“알았어. 약 구해 놓을게.”
깨끗한 대답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통화 시간이 길어졌다. 안호연은 손을 씻고 일부러 물을 닦지 않은 채 룸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의자를 뒤집어 앉은, 테이블과 등진 남자와 문을 열자마자 마주쳤다.
“그대로 도망가는 줄 알았어요, 누구처럼.”
그가 빙긋 웃었다.
“도망 안 가요.”
“통화 시간이 길어요. 통화 시간은 5분을 넘기지 말았으면 해요. 제가 참을성이 많이 없거든요. 오래 통화하고 싶으면 내 눈앞에서 해요.”
“사생활은 터치하지 말죠.”
“뭐, 아직은 내가 조바심 내지 않고 참을게요.”
강아지를 부르듯 그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 손짓이 닿는 곳으로 안호연은 가 앉았다.
“밥 좀 먹고 데이트 가요.”
서늘한 시선이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안호연이 고개를 들자 그가 꿀처럼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섬뜩한 시선 속에서도 자신을 향한 올곧은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이중적인 그 시선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던 안호연은 포크로 음식을 찍어 입에 넣었다.
지배자 타입의 알파는 종종 잘못된 관계를 오메가에게 강요해 불행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옛날엔 지배자 타입의 알파가 시대에 가려져 도드라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오메가들이 의식이 높아져, 오메가 인권에 접촉돼 범법자가 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강중영의 문제를 잘 이해해 그걸 발설하지 않을 오메가를 필요로 했다. 결혼 선수금은 일종의 입막음 비용이다.
강중영은 안호연의 접시를 가져가 스테이크를 썰어 주었다. 안호연은 플레이팅으로 올라온 완두콩을 옆으로 밀어 냈다.
“그건 안 먹어요?”
“콩 별로 안 좋아해요. 맛없어요.”
“그거 말고 또 안 좋아하는 거 있어요?”
“당근이요.”
“왜요?”
“당근이 싫어요.”
고개를 끄덕이던 그도 콩을 정리했다.
“은근히 까다롭네요. 오늘부터 저도 콩과 당근을 안 먹도록 하죠.”
“어째서요?”
“그야 안호연 씨가 먹지 않으니까. 저도 먹지 않을 겁니다. 콩까지는 참을 수 있겠는데 당근은 너무했어요. 저 당근 엄청 좋아하니까 이제라도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해 봐요.”
내가 왜? 황당함이 스민 눈으로 안호연은 그를 보았다. 먹지 말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굳이 자신의 기피 음식을 먹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냥 먹어요.”
“그럴 순 없죠. 이번엔 살살 다뤄서 도망가게 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정말 마음에 들었거든요.”
더 먹어요. 그가 접시를 밀며 말했고 안호연은 얼른 이 식사를 끝내고 싶어 마다하지 않고 스테이크를 입에 밀어 넣었다.
식사하는 동안 강중영의 눈이 안호연을 몇 번 훑고 갔으나 안호연은 밥을 먹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안호연이 억지로 포크질을 하자, 갑자기 강중영이 일어났다.
“더 먹기 싫은 거 같은데 그만 일어나죠.”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안호연은 포크를 놓았다. 조금의 망설임 없는 저를 보고 그가 웃으며 벗어 두었던 외투를 걸쳤다.
“나가죠.”
삐그덕 소리를 내며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밀렸다. 앞서 걷던 강중영은 걷다가 다시 돌아와 안호연을 옆에 세웠다. 마치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사람처럼 안호연 옆에 섰다. 땀을 삐질삐질 흘린 안호연이 그를 따라 로비를 지나 입구로 나가자 주차원이 강중영의 차를 가져왔다. 그가 차에 올라타면서 얼른 타라고 손짓을 하자, 안호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차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맸다. 그만 보내 주면 좋을 텐데 강중영은 살뜰히 어떤 영화를 보고 싶으냐고 물었다. 앞으로 이어질 데이트가 끔찍할 거라는 걱정이 들었다.
“이만 가고 싶은데.”
“제가 마음에 안 들어요?”
“아뇨. 그건 아니죠. 오늘 옷이 불편해서 그래요. 더 편한 복장일 때 갔으면 좋겠어요.”
남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차가 차선을 바꿨다.
“여기서 내려 줘도 돼요.”
“집까지 데려줄게요. 집이 어디예요?”
안호연은 한숨과 함께 주소를 읊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남자가 갑자기 안전벨트를 풀었다.
“내비게이션에 주소 좀 입력하고 있어요. 잠깐 약국에 좀 다녀올게요.”
“네.”
그가 차에서 내리자 안호연은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했다. 막 길찾기를 누를 때 약국에 갔던 강중영이 돌아왔다. 그는 안전벨트를 다시 매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운전했다. 차량이 많지 않아 금세 집에 도착하자 강중영은 안호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살아요?”
원룸 건물을 훑어본 강중영이 안호연에게 물었다.
“잠시 머무르고 있어요.”
차에서 내린 강중영은 안호연 쪽으로 손을 뻗었다. 뻗은 손의 의미를 몰라 안호연은 눈을 깜박였다.
“선물이에요.”
“뭔데요?”
“풀어 보면 뭔지 알겠죠.”
목걸이가 들어갈 법한 길쭉한 상자였다. 어두워 상자에 적힌 상표가 잘 보이지 않았다. 안호연은 손가락을 움직여 상자를 열었다. 그걸 머리부터 끄집어내자 상자에 있던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메가 전용 임신 테스트기였다.
“내일까지 거기에 소변 묻혀 와요. 다른 사람 소변을 묻힐 생각 말고요. 냄새로 누구 건지 다 아니까.”
그가 빙긋 웃으며 안호연의 옷을 정리했다.
“임신했을지도 모르니까 겸사겸사 확인하는 겁니다.”
옷 정리를 마친 강중영은 안호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쪽이 아니라고 하지만 전 그때 박연이 당신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지워지지 않거든요. 노팅도 했으니까 혹시 몰라서 하는 겁니다.”
“그때 그 사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믿을 건데요. 이런 거 필요 없으니까 가져가요.”
“발뺌하고 싶으면 내일 가지고 오는 게 좋을 겁니다. 한 줄 나오면 그 사람이 아니라는 걸 믿어 줄게요. 꼭 내일 묻혀서 와요. 그때 그 박연이 아니면 안 할 이유가 없잖아요.”
미친. 속에서 우러나오는 욕을 내리누르며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흔들어 배웅하는 그를 등진 안호연은 느린 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리자 안호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가 쫓기는 사람처럼 숙소 현관까지 뛰어가 주먹으로 현관을 치자 태범석이 문을 열어 주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지, 그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였다.
씨발. 욕이 터져 나오는 걸 꾸역꾸역 참으며 옷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통화하던 태범석이 분위기가 심상찮음을 깨닫곤 고개를 옆으로 틀더니 전화를 급하게 끊었다.
“왜 그래?”
“큰일 났어.”
“무슨 큰일?”
태범석의 물음에 안호연은 임신 테스트기를 내밀었다.
“그건 왜 사 가지고 왔어?”
“그 새끼가 테스트해서 가져오래. 그 새끼랑 섹스 한 게 이 주 전이야. 2주면 테스트기가 반응할 거야. 진짜 임신이면 빼도 박도 못해.”
불안한 얼굴로 테스트기를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는 안호연을 보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일 있냐. 남성 오메가가 히트사이클 기간도 아닐 때 임신할 확률은 5프로야. 만약 임신했으면 무르면 그만이고.”
태범석은 안호연의 팔을 잡고 화장실로 끌고 가려 했다. 안 가겠다고 버티는 안호연의 허리를 안아 기어코 화장실에 세웠다.
“씨발 놔, 안 해. 안 할 거라고. 이걸 내가 왜 해?”
“나보고 네 배 불러 오는 꼴을 보라는 거야?”
그가 안호연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따끔한 시선에 안호연의 몸이 얼었다. 그사이 태범석은 빠르게 바지 지퍼를 내리고 드로어즈를 밀어 성기를 꺼냈다. 그러곤 테스트기를 성기 앞에 가져다 댔다.
“싸.”
“싫어.”
“싸라고.”
성기 선단에 물방울이 맺혔으나 테스트기에 묻힐 양이 아니었다.
“만약 임신이면 어떡해?”
“이 일에서 손 떼고 병원에 가서 애 지워. 그거 티 안 나. 지금 네 상황에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해? 사기꾼 주제에?”
아무런 고민도 없이 낙태라는 말을 꺼내는 태범석이 얼마나 쓰레기인지 알 수 있었으나 현실적이었다.
“애를 꼭 지워야 해?”
“그 새끼랑 진짜 살림 차리려고? 너 나 없으면 안 되잖아. 씨발, 다른 새끼 애 싸질러 놓고 내 옆에 있을 거 아니지? 나 그 꼴 못 봐.”
“내가 키울 거야. 그래도 되잖아. 아이를 키우고 말고는 내 소관이잖아.”
“너 나랑 안 살 거야? 결혼 안 해? 씨발, 딴 새끼 애새끼도 낳고 내 애도 낳겠다는 거야? 더럽게.”
“네 책임도 있어. 그때 알파 서비스를 이용하라고 헛소리만 안 했으면 그날 숙소에서 잠만 잤을 거잖아.”
순간의 정적이 흘렀다.
“하, 씨발. 돈 벌어서 오라고 했더니 딴 새끼 애새끼나 배고.”
태범석은 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짜증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좋아. 그렇게 해. 너 데리고 다닐 때부터 조카가 주렁주렁 생기겠단 생각은 했어. 지금까지 안 생긴 게 용한 거지. 근데 씨발, 이제 나랑 결혼한단 소리 하기만 해 봐. 진짜 가만 안 둬.”
그 말이 떨어지자 찔끔 소변이 흘러나왔다. 테스트기가 젖자, 그는 얼른 손을 떼고 페니스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한번 봇물이 터진 소변이 끝없이 밀고 나와 변기로 떨어졌다.
“정관 수술도 그 이유였는데 넌 왜 생각이 없는 거야? 노팅까지 알파에게 허락하는 멍청한 오메가가 어디 있어?”
“네가 안 해 주잖아.”
“뭐?”
“네가 노팅을 안 하잖아.”
“정관 수술을 하면 노팅을 할 수가 없잖아.”
“내가 임신할까 무서워서 한 거잖아. 나 때문에 정관 수술 했다는 너 때문에 기가 막혀서 나 때문에 노팅하고 싶다는 새끼한테 노팅하게 했다, 개새끼야.”
“변명하지 마.”
“내가 네 아이 갖고 싶다니까 그날 정관 수술 하고 온 거 모를 줄 알았냐?”
“그게 왜 그거로 이어져? 네가 잘못한 지금 상황에서 왜 내 탓을 하는데?”
그 말도 옳다. 모든 잘못은 안호연에게 있지만, 자신이 이런 위험한 섹스를 즐기게 된 건 그 때문이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그와 섹스를 할 때마다 마음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늘 부족해서 허덕이게 된다.
“네가 그따위 수술 안 했으면 내 첫아이는 네 아이였어.”
“여유 되면 아이 갖겠다고 약속했는데도 밥상 걷어찬 건 너잖아. 누가 평생 영구 피임한 채로 산대? 그 조금도 못 기다린 건 너야.”
“결혼도 여유가 되면 하겠다, 아이도 여유가 되면 주겠다. 그 여유가 언제 찾아오는데?”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랬지, 안호연. 그렇게 싫으면 나가. 그냥 여기서 나가면 되겠네.”
미련 없다는 듯이 태범석이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안호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가 딱딱한 얼굴로 안호연을 보았고, 그는 상처 입은 얼굴로 물끄러미 태범석을 보았다. 태범석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테스트기 들어서 결과 읊어.”
안호연은 세면대에 놓인 테스트기를 들었다.
“한 줄이야.”
“거봐, 임신할 일 없는데 아무것도 아닌 거로 우리가 싸운 거야.”
태범석은 머리를 흔들며 안호연을 끌어안았다.
“이리 와. 안아 줄게. 나한테 노팅당하고 싶고 내 아기도 가지고 싶었던 거였는데 내가 화냈다. 내가 정말 못됐어. 우리 호연이가 달라면 다 줄 수 있는데도 자꾸 내가 모자라서, 너 걱정될까 봐 밀어냈던 거야. 알지? 내가 너 버리고 어딜 가. 조금만 안정 찾으면 너랑 애 낳고 알콩달콩 살 거라니까. 내 머릿속엔 이런 생각밖에 없어.”
따듯한 품, 익숙한 냄새.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처음이 나이듯이 내 처음도 넌데 내가 널 어떻게 버려.”
귀로 달콤한 말이 스며들어 왔다. 안호연은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안아 줘.”
“이미 안고 있는데 어떻게 더 안아?”
“섹스 하자고. 깊숙이 넣고 내가 좋아하는 부분을 비벼 줘. 목덜미도 세게 깨물어 줘. 그건 너만 할 수 있잖아.”
“그건 그렇지.”
“버린단 말 또 하면 널 죽이고 나도 죽을 거야. 각인해 놓고 그런 말 하는 건 나보고 죽으란 말이잖아.”
구질구질하게 태범석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안호연이 각인한 알파였기 때문이다. 자꾸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돌아도 제자리인 이유가.
* * *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격렬한 관계 뒤 찾아오는 무기력함에 침대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뜨겁게 살을 비비고 정을 나누던 상대가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온전히 자신에게 관심을 쏟고 제 몸에 뜨겁게 반응하던 상대가 식은 걸 확인하게 되면 어제의 일은 환상이 되곤 했다. 매번 새로운 이별을 맞는 느낌이다. 뜨겁던 상대가 자신을 싸구려라 여기는 뉘앙스의 말을 하면 더더욱.
“어젯밤 죽여줬어.”
“난 널 죽이고 싶다.”
몸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이불의 무게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몸이 무거웠다. 그런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휴대 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휴대 전화를 안호연에게 던져 주었다. 모르는 번호라 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 벨이 울리는 휴대 전화를 모른 척했다. 필요하면 또 전화할 거란 안일한 생각을 하며 안호연은 손등으로 눈가를 가렸다.
“강중영이야, 받아 둬.”
기억력이 좋은 태범석은 강중영의 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다. 한 이불을 덮고 있던 태범석은 돌아누운 안호연의 허리를 단단한 팔로 안으며 휴대 전화를 귀에 가져다 댔다. 그러곤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안호연의 귀를 만지작거리더니, 부스스 흐트러진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여보세요? 상대방의 목소리가 작은 휴대 전화의 몸체를 통해 들렸다.
“지금 집 앞인데 나올래요?”
“이 아침에요?”
“아침 아닌데 저녁인데. 지금까지 잤어요?”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돼서요.”
“큰일이네. 그럼 내가 조금 더 기다릴게요. 자다가 나와요.”
전화가 끊기자 옆에서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태범석이 씩 웃더니 안호연의 모은 허벅지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맞붙은 허벅지를 벌려 엉덩이 사이에 귀두를 밀어 넣었다. 부은 그곳에 단단한 성기가 파고들자, 안호연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내내 발기해 있던 페니스를 달래던 태범석이 창밖을 흘긋거렸다.
“짜릿하긴 해.”
“뭐가?”
“강중영은 우리가 이런 사이인지 모르잖아. 앞에 두고 이런 짓 하는 거 기분 좋아. 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에게서 빼앗는 재미가 쏠쏠해. 소리 들리게 해 볼까?”
안호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따져 물으려는 순간 거친 손이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 빼내려고 등으로 위로 기어 올라갔으나 도망칠 곳은 애초에 없었다. 딱딱한 침대 헤드가 머리가 닿았다. 태범석은 내벽에 들어 있던 페니스를 귀두까지 빼 놓곤 강하게 찍어 내렸다. 안호연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렀다.
“이 신음이 누구 건지 걔가 어떻게 알겠어, 그렇지? 호연아, 넌 내 거지?”
싫다고 엉덩이를 빼는 안호연의 허리를 잡고, 페니스를 밀대 삼아 거칠게 피스톤 질을 했다. 성기가 꿰이고 허리가 잡혀 도망가지 못하게 된 안호연은 태범석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의 페니스를 받아내야 했다.
“하읏, 미친 새끼야. 읏, 안에다가는 하지 마.”
본능적으로 태범석의 사정을 느낀 안호연이 부탁했다. 그러나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는 안에 사정했다. 하얀 정액이 허벅지 사이를 타고 흘러나왔다. 안호연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태범석의 등을 내리쳤다.
“강중영한테 가서 임신했다고 해.”
“하지도 않았는데 걸리면?”
“걸리면 테스트기 오류라고 하면 되잖아.”
태범석이 안호연의 손에 두 줄이 된 임신테스트기를 건넸다. 어제 봤던 것과 비슷했는데, 한 줄이었던 줄이 두 개로 변해 있었다. 그걸 뒤집어 가며 구경하던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살이 오른 눈두덩을 신기하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다가 유두를 톡 치더니 마른 가슴살을 움켜쥐곤 방긋 웃었다.
“그런 거짓말을 왜 해?”
“경제권을 네가 빨리 쥘 수 있잖아. 그 집에 있으면 네게 떨어질 게 많아.”
“불임으로 이혼하게 해 준다며.”
“강중영이 지배자 타입의 알파라는 걸 모르고 결혼했다는 걸 이혼 사유로 내도 되잖아. 이혼 사유는 많고 넌 그중 아무거나 가져다 쓰면 돼. 언제고 나한테 돌아올 거지? 안호연은 나한테 돌아올 거잖아.”
“당연하잖아.”
그가 힘주어 유두를 빨았다. 발가락이 부챗살처럼 벌어지더니 그가 입술을 떼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손가락에 몸이 뜨거웠다.
“신혼 놀이에 빠져서 나 뒷방으로 밀어내지 말고.”
“그럴 일 없다는 거 알잖아.”
“모르지, 그 새끼 얼굴 하나는 잘생겼잖아. 그래서 두렵다. 너 돌아오면 정관 복구 수술 할 거야.”
안호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내 생각했는데 내가 너한테 못되게 군 거 같아. 그러니까 내게 장가들려면 돈 많이 벌어 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 새끼 야무지게 빨아먹으라고. 알았지?”
“진짜야?”
“진짜 결혼하자는 소리야.”
“진짜?”
자꾸 되묻게 되었다. 남자의 말은 이변과도 같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개새끼여도 넌 책임져야겠다고 생각했어. 그것도 모르고 보채고 귀찮게 하고. 하여튼 안호연은 사서 일을 만든다니까.”
멍했다. 어떤 프러포즈를 받은 사람보다 더 감동받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눈물을 머금은 안호연의 코를 비틀며 그가 반짝 웃었다. 씻으라는 듯이 엉덩이를 두드리면서 마지막에 사랑한다며 입맞춤을 하자 딱딱하게 굳어 있던 심장이 반응하고 말았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볼의 굴곡을 타고 흘러내렸다. 울지 않으려 참으려 해도 가슴이 뜨거워져 울음이 났다. 그간의 설움을 씻어내려는 듯이 끊임없이 흘러내려 안호연은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렸다. 우는 자신이 꼴사나웠기 때문이다.
“사랑해, 호연아.”
나도. 나도 그래, 줄곧 그런 마음이었어.
오래도록 꺼내지 못했던 그 말을 안호연은 오늘 처음으로 뱉었다. 늘 벽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던 태범석이 오늘에서야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빨리 나가. 그 새끼 기다리겠다.”
울어 부은 눈으로 대충 고개를 끄덕인 안호연은 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씻고 나왔다. 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고 여전히 물기가 어린 몸으로 원룸을 나섰다. 어제 보았던 차가 건물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운전대에 턱을 대고 엎드려 있던 그가 안호연을 보고 차에서 내렸다. 그러곤 고갤 옆으로 기울였다.
“울었어요?”
“많이 잤더니 부었어요.”
눈가를 비비며 변명하는 안호연에게 그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무언가를 달라는 의미였다. 안호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주머니에 있던 임신테스트기를 꺼내 건넸다. 선명한 두 줄이 새겨진 테스트기를 보던 그가 입술을 올렸다.
“누구 애예요?”
“너잖아.”
더 숨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지금 쓰고 있는 탈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짜증스러운 말투에도 불구하고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때의 박연 씨가 안호연 씨 맞아요?”
“그쪽도 나한테 뭐라고 할 수 없잖아. 알파 대행 서비스로 왔던 주제에.”
“내가요?”
그가 황당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전 그날 제 가게에 들렀던 것뿐인데요. 그 디저트 가게가 제 거거든요. 웬 오메가 하나가 뛰어와 제게 선물을 주었거든요. 흥미로웠죠.”
그제야 왜 그가 알파 대여 서비스임에도 불구하고 피임이 안 됐었는지 안호연은 깨달았다. 그럼 그때 서비스로 왔어야 할 알파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의문이 들었다. 의문으로 가득 찬 머리와 다르게 얼빠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는데 그가 잠시 멈춰 서더니 갑자기 두 팔을 벌렸다. 안기라는 듯이 그가 팔을 살짝 흔들었다. 그래도 안호연이 움직이지 않자 그가 안호연을 안았다. 그러곤 허리를 잡고 빙글 한 바퀴 돌더니 바닥에 내려놓았다.
“뭐, 뭐 하는 거야?”
“아빠가 되면 보통 이렇게 하더라고요. 물론 그 애가 내 애인지 다른 사람 애인지 확인할 필요는 있겠죠. 안호연 씨가 박연 씨라면 평소 원나잇을 즐긴 건 사실이잖아요. 차에 타요.”
그가 싱긋 웃으며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안호연은 차를 타기 전 고개를 들어 창을 확인했다. 창엔 창틀에 팔을 올려놓고 담배를 피우는 태범석이 있었다. 그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안호연은 그 차가운 손에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태범석이 창문에서 사라지는 걸 확인한 안호연은 조수석에 올라탔다.
고백의 여운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결혼이란 단어에 혼이 반쯤 빠진 안호연의 눈은 차창 밖으로 향해 있었다. 오래전부터 듣고 싶었던 꿈의 단어를 들었기 때문일까. 꿈속을 걷는 것처럼 주위가 말랑거렸고 조금은 헛웃음이 나기도 했다.
“아이를 가진 게 그렇게 좋아요?”
맥락 없는 웃음을 짓는 안호연을 응시하던 강중영이 물었다. 안호연의 웃음에 그도 기분이 좋은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솔직히 그날 대여 서비스에서 온 알파인 줄 알았어. 서비스를 받는 알파들은 거의 영구 피임이라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그가 운전대를 꽉 쥐었다.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닌데요. 아이를 가져서 좋냐, 안 좋냐를 물었는데 왜 대답에 사족을 붙여요.”
싫다는 거잖아. 속에서 목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며 안호연은 웃었다. 힐끔 강중영의 눈치를 살폈다. 말려 올라간 입술, 내려간 눈꼬리는 그의 기분이 좋다는 걸 알려 주었다. 어차피 배 속에 있지도 않은 아이라 어떤 거짓말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좋아요, 싫어요?”
“좋아.”
“다시 말해 봐요.”
“좋다고.”
근데…… 하고 갑자기 강중영이 운을 뗐다. 무슨 말을 하려고 운을 떼는지 몰라 안호연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 아이, 제 아이가 맞긴 해요?”
“맞다니까.”
의심을 반복하는 그 때문에 말투에서 짜증이 묻어났다. 강중영의 사고는 굉장히 합리적이나 안호연에게 그 사고는 억울했다. 최근 강중영과 태범석을 제외하고 관계를 가진 적이 없고, 심지어 태범석은 영구 피임을 한 상태였다. 아이가 생겼다면 백 프로 강중영의 아이였다.
“나 이후로 몇 명이나 그 속을 들락거렸는데요? 증명할 수 있어요?”
“뭐?”
누가 어디를 들락날락했냐고 묻는지 몰라 안호연은 되물었다.
“집?”
“바본가. 집을 들락거리는 거 말고 당신 거기에 나 말고 몇 명이 드나들었냐고.”
그가 갓길에 차를 세웠다. 안호연은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한적한 2차선 도로엔 차가 거의 다니지 않았다. 갑자기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뾰족한 송곳니가 유난히 날카롭게 느껴져 목덜미가 서늘했다. 안호연은 반사적으로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꾹 눌렀다. 페로몬을 잔뜩 내뿜는 알파 옆에 있으면 태범석의 각인이 새겨진 목덜미에 통증이 일었다. 목덜미에서 찾아오는 뭉근한 고통이 피를 타고 살로 퍼져 나갔다.
이렇듯 각인은 오메가에게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기 때문에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각인하는 경우가 더러 있을 뿐 요즘 들어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알파는 어떤 영향도 받지 않으나 오메가만 이런 통증에 시달리는 건 불공평하니까.
“그런 걸 왜 물어?”
“바지 내려 봐요.”
“뭐?”
“다 알아들었잖아요. 솔직히 말해 그 아이가 내 아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굉장히 불쾌해요.”
“아깐 좋아했잖아.”
“아깐 좋아했으니 이제 의심을 해야죠. 몸에서 알파 냄새를 풀풀 풍기고 다니면서 아인 내 아이라고 하는 건 어이가 없잖아요.”
“몸에 페로몬이 묻은 건 형님과 같이 살아서…….”
그가 입술 끝을 올렸다.
“아뇨, 정관 수술을 한 알파는 페로몬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데요. 아닌데도 안호연 씨에게서 다른 알파의 역겨운 냄새가 폴폴 난단 말입니다. 아니라면 증명해 봐요. 증명 못 하겠으면 차에서 내리던가요.”
“하면 되잖아. 그 증명이란 걸 어떻게 하면 되는데?”
불쑥 바지를 내리라는 말에 안호연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팔을 잡았다. 이대로 착수한 공사가 무너져 돌아가게 되면 태범석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됐다. 아까까지 결혼하자던 그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깨닫자 뒷골이 시렸다.
“할 수 있어.”
안호연은 얼른 바지를 벗으려고 했으나 시트가 앞으로 당겨져 있어서 불편했다. 그걸 눈치챘는지, 아니면 매너인지 강중영은 시트를 뒤로 밀었다. 공간이 넓어지자 움직임이 편해졌다.
“네가 오해하고 있는데 알파 대여 서비스를 이용해도 아무나 하고 원나잇은 하지 않아.”
바지를 내렸다. 발목에 바지가 걸렸다. 드로어즈까지 내리자 그가 몸을 숙였다. 그러곤 손가락으로 물기가 하나도 없는 회음을 눌렀다.
“잔말이 많아요. 몸으로 확인해 보면 되는데. 입술은 거짓말과 진실을 혼용해 사용해도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엉덩이 들어.”
“으읏.”
회음을 두드리며 아래로 내려간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로 갔다. 안호연은 다리에 힘을 주어 엉덩이를 들었다. 찔릴 것 같아 불안한 마음에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손가락 중 하나인 중지가 예고도 없이 파고들었다. 애무가 전혀 없는 상태여서 안은 가뭄이었다. 뻣뻣해 손가락 하나가 들어갔을 뿐인데, 하나를 받기도 힘들었다.
“몇 명이나 여길 들락거렸어요?”
“몰라.”
그가 손가락을 뒤로 뺐다가 다시 넣었다.
“여길 한 번 들어왔던 상대가 몇이에요?”
“하나, 너.”
“저 말고도 무수히 많은 알파들이 있겠죠. 기억 못 할 만하네요. 그럼 여길 두 번 들락날락한 상대는요?”
안을 파고든 손가락이 다시 뒤로 빠졌다가 들어갔다. 안호연의 머릿속에 두 번 이상 잠자리를 한 사람의 얼굴이 몇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는 결혼하기로 했던 베타 남성이었고, 또 한 번은 태범석에게 반항하기 위해 사귀었던 알파였다. 수차례 머릿속에 남자가 휙휙 지나갔으나 숫자를 세지 않았다. 그에게 동요해 과거를 까발릴 생각은 없었다.
“아직도 많나 보네요. 그럼 다섯 번 드나들었던 상대는요. 몇인데요?”
느리게 한 번씩 움직이던 손가락의 속도가 빨라지더니 정확히 다섯 번을 드나들었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뻣뻣했던 안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오늘 안쪽 깊숙이 사정해 놓은 태범석의 정액인지, 아니면 몸에서 나온 타액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른다고.”
“아직도 많나 보네요. 그럼 스무 번을 드나들었던 상대는요?”
안호연은 눈을 아래로 내렸다. 가랑이로 파고든 남자의 손이 스무 번 움직인 걸 알고는 그의 팔목을 꼭 잡았다.
“손가락이 싫으면 다른 거로 찔러 줘요?”
고개를 저었다.
“말해 봐요. 여길 스무 번 넘게 드나든 상대는 몇이에요?”
하나, 태범석. 그만큼 관계를 가졌던 사람은 단 하나였다.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눈을 보며 안호연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 목이 탔다.
“몇이냐고요.”
“그런 걸 왜 묻는 거야? 과거가 뭐가 중요해?”
조금 감정적인 말이 앞서 나가자 그가 안을 휘젓던 손가락을 빼냈다. 그의 손가락에 진득한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엄지와 검지로 하얀 타액을 문질러 보더니 끈적하게 늘어지는 그것에 코를 가져갔다. 냄새를 맡던 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가에 있던 미소를 지웠다.
“당신을 비난하려고 묻는 게 아니라 내 앞에선 그게 무엇이든 숨기지 말라는 뜻이에요. 조금 전까지 다른 알파와 있었죠? 난잡한 생활을 뭐라고 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제게 다 말해요. 누구와 잘 건지, 누구와 키스할 건지, 오늘은 누구에게 눈길이 갔는지 말이에요. 제가 허락하는 내에서 움직여요. 이제 다시 묻죠. 어젯밤엔, 아니 방금까지 누구와 잤어요?”
그가 차가운 손으로 안호연의 다리에 걸려 있던 드로어즈를 끌어 올렸다.
“집에 누구와 있었냐고 묻잖아요.”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아까 허겁지겁 벗었던 안호연의 옷을 다시 입혀 주었다. 그는 누구보다 꼼꼼했다. 완벽하게 후크를 채우고 바지 지퍼를 올려 줄 정도로 말이다.
“그걸 다 말해야 결혼할 수 있어요. 그럴 용기도 없으면 당신은 나 감당 못 해. 시간을 주죠. 차가 다시 멈출 때까지 대답을 생각해요.”
차가 서울 근교의 주택가에서 멈출 때까지 안호연의 머릿속은 깨끗했다. 시동이 꺼지자 그는 운전대에 팔을 얹고 그 위에 턱을 댔다. 잠시 산 뒤로 넘어가는 태양을 보더니 갑자기 싱긋 웃었다.
“생각해 봤어요? 당신과 20번 넘게 잤던 사람이 몇 명인지?”
그런 사람은 단 한 명이다. 숱한 밤, 숱한 아침을 같이 맞이했던 사람.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걸 곧이곧대로 말해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이 관계 자체는 일회성이었다. 돈을 노린 사기극이므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안호연은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는 넌?”
“없어요. 제 집에 데려온 사람도 그쪽이 처음이에요.”
가벼운 드라이브를 나온 줄 알았더니 차 뒤에 있는 집이 남자의 집이었다. 강중영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몇 명이에요?”
“없어.”
질기다고 할 정도로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자 결국, 안호연은 아무 대답이나 내놓았다.
“정말요?”
침을 삼키며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빙긋 웃었다.
“그쪽 아직 자기 상황을 모르는구나. 임테기 두 줄인 거 가져왔을 때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네요.”
그가 허리를 숙여 갑자기 글러브 박스를 열더니 작은 상자를 꺼냈다. 길쭉한 손가락 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작은 상자였다. 상자는 반지 케이스와 비슷했다. 그가 안호연에게 케이스를 내밀었다.
“열어 봐요.”
안호연은 케이스를 열었다. 케이스 속에서 드러난 건 백금이었고, 익숙한 형태의 반지가 놓여 있었다. 슬쩍 시선을 내렸다. 손가락에 있어야 할 반지가 없었다.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를 정도로 안호연의 관심 밖에 있던 반지였다. 프란츠에게 예물로 받은 반지가 어째서 남자에게 있는지 알 길이 없어 그를 보았다.
“이걸 네가 어떻게…….”
“호텔에서 챙겼었는데 당신이 사라져서 그 반지를 조회해 봤죠. 그런데 이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줄은 몰랐죠. 구매자는 독일의 프란츠 빈터였는데 그 사람이 사라진 신부를 찾고 있더라고요. 신문 공고에 올렸던 얼굴이 당신과 똑같아서 그의 약혼자가 안호연 씨라는 걸 알았어요. 조금 더 수소문해 보니 주위 사람들은 그가 사기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많고요. 물론 빈터 씨는 약혼자가 납치를 당한 거라고 주장하고 있지만요. 그 박연이란 사람이 지금은 안호연이란 이름으로 내 앞에 나타났어요. 빈터 씨와 똑같은 경로로요. 그래서 어제 태범석이란 사람에게 물었죠. 절 상대로 사기를 치는 거냐고.”
손가락 끝이 얼어 버릴 정도로 찼다.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그걸 안전벨트가 가로막았다. 벨트를 풀고 차 밖으로 뛰어나가려 했으나 강중영에 의해 가볍게 저지당했다.
“끝까지 들어요. 사람이 말을 하면 끝까지 듣는 게 예의잖아. 태범석이 내게 묻더라고요. 뭘 원하느냐고. 그래서 내가 안호연 씨를 원한다고 말했죠. 그러니까 내 애도 가졌고, 안호연 씨가 애도 지울 생각이 없는 거 같으니까 데려가라더군요.”
“……그래서?”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쪽 이제 돌아갈 곳 없어요. 밖으로 나온 순간까지 나를 우습게 보고 떡까지 쳤으나 내게 보낸 순간 버려진 건 확실하죠. 저보고 그쪽을 어떻게 해도 좋대요, 구워 먹든 삶아 먹든 제 자유라는데, 사람을 그렇게 다룰 수는 없죠.”
“…….”
“가는 길 편하라고 돈도 넉넉히 챙겨 줬으니 조만간 한국을 뜨겠죠.”
갑자기 눈앞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세상에 떠 있던 모든 것들이, 그 모든 것들이 무너졌다. 밤새 몸을 감던 손가락과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입, 돌아오면 결혼해 주겠다던 청혼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톡톡.
남자가 긴 손가락으로 안호연의 머리를 두드렸다.
“정신 차려요.”
“말이 안 되잖아.”
이게 말이 돼? 태범석과 함께한 세월이 길었다. 파양당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밤을 보냈다. 태범석은 자신을 버리면 안 됐다. 자신은 태범석 거였으니까. 절대 자신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했으면서 이러면 안 됐다. 더구나 자신을 버리면 저도 죽고 태범석도 죽이겠다는 엄포를 놓은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이게 말이 돼?”
차 문을 연 안호연은 안전벨트를 풀고 밖으로 나갔다. 가벼운 현기증과 함께 토악질이 나는 상황에서도 주머니에 있던 휴대 전화를 놓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안호연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긴 통화 연결음이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통화 연결음이 계속 울려도 끝내 상대는 받지 않았다. 안호연의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호연 씨.”
그가 다정하게 웃는데 막막했다. 도망가도 갈 곳이 없었다. 아는 사람도, 갈 집도 없었다. 안호연은 다시 태범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통화 연결음 끝에 태범석이 받았다.
[어, 호연아.]
태평한 목소리가 수화기로 흘러나왔다.
“어디야?”
[공항이야.]
“왜?”
[어쩔 수 없잖아. 네가 임신만 안 했어도 데리고 가려고 했어. 솔직히 나 너 포기하는 거 어려웠어. 근데 나도 꿈이라는 게 있어. 다른 사람의 애를 가진 사람과 어떻게 살림을 차려? 이 기회에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도 좋잖아.]
“임신이라니?”
[몰랐어? 밤에 소변 보러 화장실에 가 보니까 임테기에 두 줄이 새겨졌더라. 결과가 좀 늦게 떴나 봐.]
“그게 말이 돼?”
[이야기 길어진다. 우선 나 먼저 철수할게. 나중에 볼 수 있으면 봐. 물론 오늘 했던 말은 유효해. 이혼해서 돌아올 수 있으면 결혼해 준다는 말. 근데 걔 장난 아니더라. 걔 따돌리려면 고생 좀 해야 할 거야.]
안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태범석은 사람을 가지고 매사 장난을 치고 이용했다. 중요한 순간에 버리고 또 필요하면 주우러 왔다. 지긋지긋한 삶이었다.
안호연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깜박이고 또 깜박이던 그가 갑자기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미친 새끼. 차라리 사실대로 네가 임신해서 그만하자고 말했다면 더 쉽게 포기했을 텐데.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이 모든 걸 앗아 갔다. 손가락이 뻣뻣했다. 끊긴 휴대 전화를 보다가 그걸 던져 버렸다. 소리 내어 엉엉 울어 버리면 속에 쌓인 울분이라도 씻겨 내려갈 텐데, 미련스럽게 눈물만 났다. 사랑에 점점 지쳐서 낡은 인형이 된 기분이다.
던진 휴대 전화를 허리를 숙여 주운 남자가 가까이 오더니 고개를 숙였다. 다정한 손가락으로 눈가를 쓸었다.
“갈 곳 없는 사람을 받아 주는 게 제 특기예요. 갈래요?”
안호연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내가 왜 널 따라가?”
“그쪽은 정말 임산부잖아요. 그 아이에 대한 책임은 나한테도 있지 않나?”
“임신 아니니까 꺼져.”
“그럼 갈 데는 있어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기댈 곳이 사라진 안호연은 불안했다. 태범석이 없어도 언제나 자신을 데리고 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그때완 달랐다.
“나 진짜 괜찮은 놈인데, 이제 나로 하면 안 돼요?”
“…….”
“나, 당신 같은 사람 잘 알아요. 춥고 쓸쓸하고 외롭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데 마음을 의지할 데가 없어서 여기저기에서 체온을 채우고 다니는 사람이잖아요. 그날 제게 따라오라고 한 날 당신에게서 부서진 모습을 봤어요. 한없이 가여웠죠. 안호연 씨는 사실 원하고 있잖아요. 그쪽만 바라봐 주고 사랑해 줄 사람이요. 눈을 뜨나 감으나 옆에 있을 변하지 않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면 날 잡는 게 좋아요.”
“…….”
“사랑해 줄게요.”
“…….”
“당신이 놀랄 만큼이요.”
그 얇아진 믿음을 남자가 파고들었다. 그가 약한 부위를 툭툭 건드렸다. 뜸을 들이는 안호연의 대답을 그가 기다리다 못해 손가락을 들었다.
“강요는 하지 않아요. 싫으면 돌아가도 돼.”
“…….”
“배웅은 하지 않아요. 잘 가요.”
“싫어.”
안호연은 그의 소매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
“따라올래요?”
물음에 안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중영이 집으로 발을 뻗었다. 담이 높은 대문을 열고 들어선 그는 푸른 잔디가 깔린 정원을 가로질렀다. 안호연도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사실 따라가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이게 옳은 건지, 옳지 않은지. 그러나 확실한 건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점이다.
“잘했어요. 그대로 나갔으면 안호연 씨는 노숙자 생활을 면치 못했을 거예요. 당신 계좌에 있던 돈을 태범석이 전부 인출해 갔거든요.”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그러라고 했으니까. 돈이 없어야 안호연 씨가 도망가지 못하잖아요.”
그가 갑자기 무언가를 던져 주었다. 가죽으로 된 족쇄였다.
“차요. 정원까지 나갈 수 있도록 제작했어요. 집에 들어오면 무조건 족쇄를 차야 해요.”
“이걸 왜?”
“하나부터 열까지 당신을 관리하고 지켜볼 거니까요. 감시하고 사랑하고 좋아하고 키스하고 섹스 하고 먹는 거 입히는 거 모두 내가 할 수 있도록 해 줘요. 그렇게 평생 아껴 주고 사랑해 줄게요.”
흥분에 들뜬 눈이 안호연에게 닿아 있었다. 꿈을 꾸는 사람처럼 그의 눈이 열에 취해 있었다.
“족쇄를 찬다는 건 일종의 허락이에요. 제가 안호연을 어떻게 해도 좋다는 허락이요. 차를 마시고 싶은데 족쇄를 차지 않은 사람을 집에 들이지 않겠다는 주의라서요. 족쇄를 차는 건 당신 자유니까 들어와도 좋고 나가도 좋아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치를 떨었을 말이 유혹적으로 다가왔다. 안호연은 홀리듯 스스로 제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 오늘은 너무 힘들어서 힘에 부쳤다. 차라리 누군가가 마음이나 삶을 통제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목을 꽉 죄는 가죽 족쇄는 가벼웠다. 가죽 족쇄에 긴 끈이 달려 있었는데, 그 끈의 끝을 남자가 쥐고 있었다. 그는 족쇄를 찬 안호연을 한없이 다정한 눈으로 보았다. 막 태어난 아기를 수건으로 닦 듯 손바닥으로 안호연의 얼굴 전체를 문대더니 이내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짧은 감사의 인사와 함께 그가 방긋 웃으며 무릎을 꿇고 앉아 족쇄의 너비를 조절했다.
“족쇄를 차기 전에 옷을 벗어야 하는데 오늘은 그냥 넘어갈게요.”
안호연은 눈을 깜박거리며 그의 뒤통수를 보았다. 툭 튀어나온 뒤통수가 예뻤다. 그 생각을 하다가 실소했다. 방금까지 버림받았다고 우울해하던 자신에게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찾아왔다는 사실이 웃겼다.
“제가 말해도 좋다고 할 때까지 말해선 안 돼요.”
그는 주의 사항을 읊으며 거실 쪽으로 향했고, 안호연은 그를 따라갔다. 그가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조리대에 서서 티백과 컵을 꺼냈다. 뜨겁게 데워진 물을 컵에 부어 티백을 꽂은 그가 안호연 앞으로 차를 내밀었다.
“현미차예요. 뜨거우니까 식고 난 후에 마셔야 혀가 탈이 안 나요.”
얌전히 찻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안호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족쇄에도 놀라지 않는 걸 보면 저에 대해 들은 게 있나 보네요.”
“별로.”
“허락 없이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세 번 어기면 제가 화낼 거예요.”
안호연은 똑똑하게도 대답하지 않고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저요. 알파 중 지배자형 타입이래요. 그렇게 태어났다고 의사가 못을 박았죠. 마음 약한 어머님은 울고 아버지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죠. 그들이 그렇게 제게 낙인을 찍는 동안 저는 이상한 사람이 된 거죠.”
“슬펐어?”
“말하라고 한 적 없는데요.”
안호연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슬프진 않죠. 하도 이상한 애라고 못을 박아서 그러려니 하더라고요. 그들에겐 제가 구제 불능인 거죠. 저와 거리를 두는 사람들 속에서 언젠가 저만의 사람이 생기길 고대했죠. 알파 중 지배자형이 있다면 오메가 중에서 피지배자형이 있겠죠. 남자, 여자, 알파, 오메가가 있듯이 신은 짝을 만들었으니까. 안호연 씨는 내게 적당한 사람이라 생각해요.”
그는 소리도 내지 않고 차를 마셨다. 적당히 식었는지 그가 턱으로 차를 마시라는 시늉을 했다.
“스스로 집에 들어와서 자기 손으로 족쇄를 찬 사람은 호연 씨가 처음이에요. 제가 찾는 사람에게 제일 근접한 사람인지도 모르죠.”
안호연은 차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따듯한 차가 입술을 적시고 혀를 감았다. 허했던 가슴에 차의 온기가 퍼졌다.
“만약 이 상황이 싫으면 족쇄를 벗으면 돼요. 스스로 족쇄를 벗은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아요. 분명히 말하는데 스스로 족쇄를 차고 제 곁에 평생 있어 준다면 최선을 다해 아껴 줄게요. 당신에 대한 선택권을 모조리 제게 준다면 전 밖에 나가더라도 족쇄를 찬 당신만 생각할 겁니다. 온통 당신이 먹을 거, 사용할 거, 이 모든 걸 고르느라 정신이 없겠죠. 하루 24시간이 당신 생각으로 꽉 찰 겁니다. 제가 그대의 행동을 제약하면 호연씨는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거죠. 결론은 나의 주인이 당신이기도 한 거죠.”
그는 안호연이 차를 마실 동안 기다려 주었다. 그의 궤변은 언제나 유혹적이었다. 항상 자신을 생각하고, 그의 주인은 안호연이란 말이 귀에 와서 감겼다.
“사랑받고 싶으면 스스로 옷을 벗고 따라와요.”
찻잔이 빈 걸 확인한 그가 말했다. 안호연은 일어나 옷을 벗었다. 바지와 티, 속옷을 벗고 고개를 드니 이미 그가 사라지고 없었다. 안호연은 쉽게 남자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었다. 족쇄에 달린 끈의 행방이 남자의 방이었기 때문이다. 안호연은 문을 넘어 방으로 들어갔다. 방과 연결된 드레스룸을 지나 욕실로 향했다. 강중영이 김이 나는 욕조에 걸터앉아 싱긋 웃었다. 턱 끝으로 욕조를 가리켰다.
“물이 차오르면 들어가요.”
왜? 라고 묻고 싶었으나 그가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게 생각나 안호연은 입술을 다물었다.
“내 아이 얼굴에 그 새끼 정액이 묻었다는 생각을 하니까 기분이 나빠요. 지금은 말해도 좋으니까 해도 돼요.”
“이게 네 아이라고 확실할 수 있어?”
“이제 당신이 내 거니까 그 속에 있는 것도 내 거죠. 누구 아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뱄느냐가 중요해요. 그게 태범석의 아이여도 당신이 낳으면 내 아이예요.”
무논리다. 무논리도 그런 무논리가 없었다. 허망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럼에도 그는 손바닥으로 안호연의 배를 살살 문댔다. 그는 뺨으로 납작한 배에 코를 묻고 비볐다. 그에게서 나오는 페로몬에 목이 따끔했다. 안호연은 손바닥으로 목을 덮었다.
“내 아이죠?”
그가 묻자 조금은 심술이 들었다.
“아니.”
“태범석의 아이는 아닐 테고.”
“그걸 어떻게 장담해?”
“진짜 너 그러면 답도 없어. 호연아, 나한테는 거짓말하지 말고 다 말해야 해. 진실을 말하면 용서되지만 거짓말하는 건 안 돼. 누구 애야? 또 원나잇? 이름도 모르는 알파였어?”
“너. 너. 술 취한 사람에게 노팅할 사람이 너 말고 더 있냐? 난 그날 밤 기억도 안 나.”
“그렇게 말하면 서운한데 동의 없이 노팅하진 않아요. 분명 그날 노팅해 달라고 제 허리를 감고 애원한 건 안호연 씨였고 고민하다가 노팅했어요. 그때 속으로 많이 생각하긴 했죠. 처음 본 사람에게 노팅하는 건 제게도 힘든 일이죠.”
그가 손가락으로 배를 툭툭 쳤다.
“근데 진짜 기억 안 나나. 깊숙하게 박고 노팅해 줘. 그쪽이 그렇게 말했는데.”
그가 속삭이며 얄밉게 빙긋 웃었다. 안호연은 일부러 물을 튀기며 욕조 속에 몸을 넣었다.
“왜 나야? 그냥 술 취한 날 무시하고 보냈으면 됐잖아.”
“호연 씨는 누군가가 잡아 주길 바라는 눈으로 날 봤고, 나도 그런 상태였어요. 그쪽도 나도 오래 방치돼서 낡아 가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예감했죠. 어쩌면 매 순간 기다려 온 사람이 당신일지도 모르겠다고.”
쓸데없는 소리다. 안호연은 욕조 안에 쪼그리고 앉았다. 알맞은 온도의 물이 몸에 달라붙었다. 물이 따듯해서 졸음이 쏟아졌다. 어젯밤 내내 태범석이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여 쌓인 피곤이 물속에 스며들었다. 어제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긴 했다. 평소와 달리 격한 섹스를 했다고 느꼈다. 마치 그와 처음에 했던 섹스처럼. 그렇게 달콤한 말을 중얼거렸던 태범석이 뭐라고 했더라. 쫓아올 수 있으면 쫓아오라고 했던가. 돈도 다 뺏어 가고 옆에 이 남자까지 붙여 놓고 찾아오면 결혼해 주겠다고 했던가. 차라리 싫다고 말하지. 아니라고 말하지.
“……개새끼.”
입술 사이로 욕이 튀어나왔다. 따듯한 물로 어깨를 적셔 주던 남자가 안호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생각에 빠져 있던 안호연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내 앞에서 누굴 생각해요?”
“미안.”
“미안이 아니라 누굴 생각했는지 말해야죠. 호연 씨가 원해서 누구랑 자도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단, 내게 말하고 허락받는다면. 내 머릿속은 온통 호연 씨 생각뿐인데 심지어 날 두고 다른 생각을 해요?”
“다른 생각 안 했어.”
“안 했다고요?”
갑자기 그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지더니 안호연의 팔목을 잡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욕조 밖으로 끌어내 족쇄를 풀었다.
“삼진 아웃이에요. 나가.”
그의 말에서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넌 내 족쇄를 찰 자격이 없어.”
그를 물끄러미 보던 안호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방금까지 다정했던 남자가 돌변하자 당황스럽기도 했으나 한편으론 반항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대충 수건으로 몸을 닦은 안호연은 욕실 밖으로 나갔다. 부엌에 벗어 두었던 옷을 다시 입고 현관 앞에 설 때까지 강중영은 나오지 않았다. 현관 앞에 서서 뒤를 보던 안호연은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널찍한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때까지도 그는 잡지 않았다. 하? 입으로 헛바람이 새어 나온 안호연은 짜증스럽게 돌아서 인적이 드문 길로 걸음을 옮겼다.
사생활 보호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모여 사는 동네인지 띄엄띄엄 떨어진 집들의 담이 높았다. 거기다 사람이 드물어 여기가 어딘지 물어볼 수 없어 어디로 가야 큰길가로 나갈 수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방향 감각도 잡히지 않는 상태에다 오늘은 어디로 숙소를 정해야 할지 이정표가 서지 않아 걸음을 멈췄다.
한숨을 내쉬고 주위를 둘러보던 안호연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발이 닿는 대로 정신없이 걷던 안호연은 길가로 나왔다. 드문드문 상가와 4차선 도로로 서행하는 차가 보였다. 길가 끝자락에 선 안호연은 ‘빈 차’에 불이 들어온 택시를 보곤 무작정 손을 흔들었다.
안호연의 손끝에 택시 하나가 걸렸다. 손님을 태우기 위해 길가에 바짝 선 택시에 올라타자 택시 기사가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다. 안호연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오메가 전용 산부인과요. 근처에 있는 곳으로 가 주세요.”
아까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었다. 안호연이 확인했을 때 한 줄이었던 테스트기가 두 줄이 되었다는 건 안호연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었다. 임신이 아니라면 적어도 희망은 있었다. 지금이라도 태범석에게 연락하고 따라가면 그만이다.
“젊은 사람이 눈도 어둡나 보네. 바로 옆이 산부인과잖아요. 내려요.”
차창 밖으로 약국이 보였고 그 위에 산부인과가 보였다. 안호연은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택시에서 내렸다. 낮은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간 안호연은 유리문을 열었다. 바깥만큼 안도 한산해 간호사들이 모여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가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자 그제야 간호사들이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넸다.
“어떤 일로 오셨어요?”
안호연은 바로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임신인지 확인하려고요.”
“남성 오메가용 임신테스트기를 사용하셨나요? 일반 테스트기를 사용하시면 오류로 두 줄이 나올 때가 있어요.”
“네.”
“결과가 양성이라서 오신 거죠?”
안호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무언가를 적던 그녀가 하얀 종이를 내밀었다.
“거기에 표시된 거 써 주시고 저기에 앉아 계시면 돼요.”
종이에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가 적혀 있었다. 칸에 맞춰 하나씩 써 내려가던 안호연은 주소란에서 막혔다. 잠시 고민하던 안호연은 예전에 살았던 보육원 주소를 대충 적어 내밀었다.
“접수해 드릴게요. 앉아 계세요.”
상냥한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소파에 앉았다. 산부인과는 처음이라 어색할 텐데 안호연은 머릿속이 복잡해 어색함을 느낄 수조차 없었다.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떨구고 있던 안호연의 귀로 방울 소리가 들렸다.
방울 소리와 함께 유리문이 열렸다. 부부인 듯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의 배가 상당히 불러 허리를 숙이지 못하자 남자가 기꺼이 쭈그려 앉아 신발을 벗겨 주었다. 그리고 작은 발에 파란색 슬리퍼를 신겼다. 그 예쁜 광경을 물끄러미 보다가 남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안호연은 고개를 틀었다.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스레 마음이 불편했다.
“안호연 씨, 채혈하러 이쪽으로 오세요.”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이 그를 부르자 안호연은 일어나 채혈실로 들어갔다. 둥그런 스툴에 앉아 팔을 내밀자 앞에 앉은 임상병리사가 따끔하다고 주의를 주곤 노란 고무줄로 팔뚝을 묶었다. 피가 원활히 순환되지 못해 손끝이 붉어질 때, 그녀는 관절을 알코올 솜으로 문대곤 주사기를 꽂았다. 피스톤이 밀리는 만큼 붉은 피가 차올랐다. 적정량의 피를 뽑자 그녀는 바늘을 빼고 고무줄을 풀어 주었다. 구멍이 난 피부에 반창고를 붙여 준 그녀는 빙긋 웃으며 30분 후에 검사 결과가 나올 거라고 알려 주었다.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안호연은 밖으로 나갔다.
부부는 여전히 함께였다. 여자가 예쁜 목소리로 미래와 아이 이야기를 꺼내면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종종 그녀가 하는 말에 동조의 뜻으로 맞장구를 쳐 주는데, 다른 나라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자신은 절대 될 수 없는 부류. 누군가와 아이의 미래를 논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누군가와 다정히 산부인과에 올 수도 없었다. 소소한 그들의 모습이 안호연의 외로움을 부추겼다. 추웠다, 딱히 어디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추워 몸이 움츠러들었다. 손바닥으로 팔을 비비며 그들을 보다가 TV를 보았다.
“안호연 씨.”
한참 시간이 흐르자 간호사가 안호연을 호명했다.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진료실로 들어가자 안경을 쓴 의사가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의사는 스툴에 앉기까지 침착하게 기다리며 조용히 안호연을 응시했다.
“임신입니다.”
놀랍지 않았다. 사실 알고는 있었는지 모르겠다. 태범석이 자신을 버릴 이유는 단 하나이니까. 더 쓸모가 없어진 거다. 더구나 아이까지 낳길 원하니 그쪽엔 더더욱 쓸모가 없었다. 아이를 낳은 오메가는 아무래도 여러 제약이 있으니까.
“나이가 어리신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어떻게 하다뇨?”
“그럼 보호자가 있으신가요? 아이를 함께 책임질 알파요.”
“아니요.”
의사가 말을 아꼈다.
“오메가는 원치 않는 임신이 더러 있어 미리 물을게요. 산모 수첩을 만들어 드릴까요? 아니면 말까요?”
“지금 결정을 내려야 해요?”
“아니요, 그건 아니죠. 어떻게 바로 결정을 내릴 수 있어요. 충분히 생각하고 오셔야죠.”
“네, 다음에, 다음에 올게요.”
안호연은 도망치듯 바깥으로 나갔다. 진료비를 수납하고 내려가면서도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달콤한 유혹이었다. 버리면 된다는 말은. 그런데 속에서 이기적이지 못한 구질구질한 마음이 안호연은 잡고 흔들었다.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자신을 베이비박스에 버리고 갔던 그 오메가보다도 더 못한 사람이 되니까. 그 사람은 그래도 안호연을 낳아 베이비박스에 놓고 갔다. 적어도 죽고 살 선택은 자신의 몫으로 남겨 놓았다. 그런데 자신이 뭐라고 이 아이를 죽일 수 있을까. 아무리 하룻밤 쾌락에 생긴 아이라 할지라도, 원치 않아도 이 아이가 죽고 살고는 자신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문제라면 아이를 잘 키울 자신이 없다는 거였다. 당장 잘 곳도 없었고, 의지할 가족도 없었다.
안호연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내려와 멍하니 건물 뒤로 지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외롭고 추웠다. 그래서 웃음이 나고 울음도 났다.
사랑받는 게,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찾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으나 멍하니 석양이 지는 광경을 보다가 다시 온 길로 돌아갔다.
걷고 또 걷다가 익숙한 대문 앞에 멈춰 서 손가락을 뻗어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을 눌러도 안쪽에서 반응이 없었다. 반복해서 초인종을 누르고 나서야 무표정한 강중영과 마주할 수가 있었다.
“네 아이이기도 하잖아.”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책임져. 책임지라고, 새끼야.”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고 휴대 전화로 연락하려고 했어요. 양육비로 필요한 금액 말해요. 이렇게 찾아오지 말고.”
그가 대문을 닫으려고 했으나 안호연은 그 속으로 무작정 밀고 들어갔다. 정원을 가로질러 열린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은 채로 들어가 테이블에 놓인 족쇄를 발에 찼다.
“뭐 하는 거예요?”
“나도 사랑 좀 받아 보자. 족쇄만 차면 다 해 줄 거라면서, 날 위해 살고, 내 생각만 해 줄 거라면서. 나도 그런 사랑 받아 보자.”
남들처럼 자신도 사랑받고 미래를 재잘재잘 떠들고 싶었다. 산부인과도 같이 가고 자신의 부른 배를 걱정하며 신발을 벗겨 주는 그런 자상한 사람이 필요했다. 그의 눈시울이 뜨거웠다. 창피하고 서럽고 열 받고 복합적인 감정이 가슴과 눈과 뇌를 핥았다.
“추하게 왜 울어요?”
그가 설레설레 고개를 젓더니 안호연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엉성하게 맨 족쇄에 손을 대자 안호연은 발작하듯 얼른 손가락으로 막았다.
“싫어.”
“제가 족쇄를 차면 어떻게 하라고 했어요? 절대 말해선 안 된다고 했잖아요. 하나부터 열까지 엉망이야.”
안호연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가 자신에게 이 집의 규칙을 적용하고 있었다. 그 뜻은 족쇄를 채워 주겠다는 뜻이었다. 강중영은 안호연의 손가락을 밀어내고 엉성한 가죽 족쇄를 풀고 다시 묶어 주었다.
“도망갈 기회를 줬는데도 다시 돌아온 건 호연 씨예요. 그래 놓고 나중에 딴말하지 마요. 씨알도 안 먹혀.”
유독 하얀 이를 드러내 놓고 웃는 그를 보자 안호연은 죽을 듯이 불안했던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남부럽지 않게 사랑해 줄게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붉어진 안호연의 눈가를 매만졌다. 눈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손가락이 따듯해 꾹 참고 있던 눈물이 안호연의 뺨으로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