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보행자 전용 도로로 늘어선 노천카페 구석을 차지한 남자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늘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밝은 금발을 가진 남자가 신문을 펼쳤다. 신문은 여기서 한참 떨어진 지방의 신문이었다. 아직 독일어가 익숙하지 않은 그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눈으로 읽었다.
그는 얼마 전 작은 교회에서 열렸던 결혼식에서 사라진 프란츠의 약혼자였다. 정숙해 보이던 프란츠의 약혼자완 전혀 딴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스타일이 달랐다. 이름은 박연이 아닌 안호연이었고, 눈썹을 덮던 검은 머리는 밝은 금발로 바뀌었다.
그가 이런 모습으로 뤼벡에 나타난 건 이틀 전이었다. 그의 직업은 사기꾼이었다. 왜 사기를 치게 되었냐고 그에게 묻는다면 먹고살기 위해서 그랬다고 말할 거다. 배가 고팠고 삶이 구질구질해서 사기를 쳤다. 그리고 앞에 있는 남자가 사기꾼이기 때문에 사기꾼이 되었다. 태범석은 자신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겉면이 금으로 도금된 멋스러운 찻잔에 담긴 차를 마시던 안호연은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하곤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밑줄을 그었다.
“프란츠 빈터가 잃어버린 배우자를 애타게 찾고 있으니 사진과 비슷한 인상착의를 한 동양인을 보신 분은 제보 바랍니다. 가슴 아프네. 이 사람은 아직도 내가 도망간 걸 모르나 봐. 나 같은 거 잊고 좋은 여자랑 결혼하면 좋을 텐데.”
그는 가슴 아프다는 듯이 가슴에 한 손을 올렸다. 그러나 말과 달리 얼굴은 전혀 아프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의 손에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걸려 있었다. 얼마 전 프란츠에게 결혼 예물로 받은 다이아몬드 반지였고, 반지에 시리얼 번호가 있어 현금화가 불가해 안호연은 버리지 않고 손에 끼고 다녔다.
“저쪽에서 멍청하게 나와 준 덕분에 현금화하는 데 어렵지 않았어. 프란츠가 네게 건넨 물건 중 현금화가 가능한 건 28만 마르크. 결혼 성사금으로 받은 금액은 14만 마르크. 총 42만 마르크야. 전에 공사 친 노인보다 수입이 별로야.”
“그래도 프란츠는 착수 기간이 짧았잖아. 그 노인네는 의심이 많고 집요한 구석도 많아서 짜증 나. 아직도 추적하고 다닌다면서? 그 이름을 추적해 봐야 흔적조차 나오지 않을 텐데 진짜 질기다 질겨.”
“눈앞에서 백만 유로를 날렸으니까. 나 같아도 이를 갈며 쫓아다녔을걸.”
“돈도 많으면서 고작 백만 유로로 쪼잔하게 굴어. 그러니까 이혼이나 당하는 거지.”
다리를 꼰 채로 앉아 있던 태범석이 통장과 여권을 내밀었다. 긴 손가락을 뻗은 안호연은 여권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통장을 집어 펼쳤다. 통장에 찍힌 액수를 확인한 그는 미소를 띠며 큰소리로 공의 개수를 세었다. 하나, 정확하게 일억이란 숫자가 입금된 걸 확인하고는 주머니에 통장을 쑤셔 박았다.
“쏘다니지 마. 출국할 때까지 얌전히 호텔에 박혀 있어. 프란츠가 널 찾겠다고 흥신소에 의뢰했다는 소문이 파다해. 회사도 몇 번 오갔다는데 제임스도 모르겠다고 잡아뗐나 봐.”
“결혼 중에 튀는 건 제임스 책임이 아니잖아. 곧 히트사이클이라 호텔에만 박혀 있을 예정이긴 한데 정 불안하면 나랑 몇 탕 뛸래?”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 바빠. 정 나랑 자고 싶으면 돈을 내.”
태범석이 눈을 찡긋거렸다.
“얼만데?”
“몸값 올라서 비싸.”
“그 주머니 불려 준 게 누군데 내 앞에서 가격을 흥정하고 있냐, 싸가지 없게.”
“돈 내기 싫으면 억제제 먹으면서 기다려. 일 끝나면 으스러지게 안아 줄 테니까.”
“아, 싫어. 왜 억제제를 쓰면서 욕구를 참아야 하는데? 그거 잔인한 거야. 신께서 히트사이클을 왜 주셨는데. 그 기간에 참지 말라고 준 거잖아. 신이 준 기회를 저버리는 게 인간의 도리는 아니지.”
“그 도리를 하고 싶으면 돈을 내라는 말이잖아. 싫으면 기다리든가.”
싫긴. 짜증스럽게 비명을 지른 안호연은 주머니를 뒤져 그의 앞에 1유로를 내밀었다.
“싸다. 너한테 내 가치가 이 정도밖에 안 돼? 우리 호연이 정도면 적어도 만 마르크는 낼 줄 알았는데.”
“범석아, 너 많이 컸다. 몸값으로 만 마르크도 아무렇지 않게 부르고.”
“좆도 아닌 건 너였지. 맨날 맞고 다닌 주제에.”
“그래, 그렇다고 치고 오늘 형이 홍콩 보내 줄게 가자.”
“네가 끝내주는 건 아는데, 오늘은 불량 식품 먹기 싫어. 그냥 몇 푼 쥐여 주고 알파 대여 서비스나 받아.”
“불량 식품은 뭐야?”
“내가 쉽게 먹을 수 있으니까 불량 식품이지.”
“나 아무나 쉽게 먹을 수 있는 사람 아냐.”
그가 담백하게 쏟아 낸 말은 지금까지 안호연이 살아온 날을 돌아보면 사실에 가까웠다. 그의 말대로 태범석에게 안호연은 가벼웠다.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짜증이 나는 건 그가 사실을 직시하는 단어 선택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섹시하다고 말하면 될 걸 일부러 안호연의 속을 긁었다.
“오늘 진짜 많이 튕기네. 알았어. 아, 이럴 줄 알았으면 프란츠 새끼랑 자 보는 건데, 아까워. 오랜만에 껍데기가 근사해서 사귀는 맛이 났는데 그 새끼가 가톨릭 신자에 순결 서약만 안 했어도 수절은 안 했을 텐데.”
“순결 서약을 깰 만큼 네가 매력이 없었나 보지.”
아쉬움을 담아 주먹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안호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켓에 넣었던 선글라스 다리를 펴 귀에 걸치고 씩 웃었다. 허리를 숙여 1유로 위에 1유로를 겹쳤다.
“매력이 사라졌는지 아닌지는 한번 자 보고 판단해. 그만 튕기고. 어디 가서 나 맞고 오면 다음 공사 치는 데 좀 오래 걸리지 않나. 사람 관리는 해야지.”
태범석은 2유로를 무심한 시선으로 보았다.
“내가 이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네가 내 첫 알파잖아. 네가 누구랑 자도 마음만은 내 거라며. 히트사이클 때 너 아니면 나 만족 못 하는 거 알잖아.”
“뭐, 좋아. 오랜만이기도 하고 네 냄새가 좋은 걸 보면 히트사이클이 맞긴 한가 봐. 요 며칠 계속 네가 떠올랐거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안호연은 두 팔을 하늘로 뻗었다. 태범석이 신문을 말아 손에 쥐는 사이 안호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로로 나섰다. 자정까지 차량 진입이 통제돼 한산한 도로 위를 두 남자가 걸었다. 호텔 앞에 도착하자 도어맨이 호텔 문을 열어 주었다. 태범석이 도어맨에게 팁을 챙겨 주었다. 그 팁은 아까 안호연이 준 2유로였다.
“썩을 새끼. 난 네가 줬던 건 다 안 버리고 있는데.”
투덜대는 안호연의 머리를 팔로 끌어당긴 태범석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억울해 죽겠으면 버리든가. 버릴 수는 있냐. 안호연이 내가 준 걸 어떻게 버려?”
“개새끼.”
“틀린 말은 아니라서 화가 안 난다.”
가볍게 투덜대는 사이 둘은 머무르던 방에 도착했다. 문이 닫히자 안호연은 몸에 두르고 있던 옷을 벗었다. 티를 던지고 바지를 벗으려다 그가 멈췄다. 눈알을 굴려 힐끔 태범석의 눈치를 살폈다.
“좀 굶어 보여서 매력 없었지?”
“숨기는 건 네 매력이 아니잖아. 섹시해.”
“좋으면서 왜 튕겼던 거야?”
“조금 시샘이 났던 것도 같아. 공사 치는 중에는 나랑 안 잤잖아. 많이 굶주렸었다고.”
“그럼 사귈까?”
안호연이 밥 먹었냐고 물어보듯이 무심하게 툭 말을 뱉자, 잘근잘근 안호연의 목덜미를 깨물던 태범석은 픽 소리 내어 웃었다.
“호연아, 내가 말했잖아. 난 독신주의자이고 애인은 옆에 두지 않는다고. 만약 누군가에게 정착하게 된다면 너한테 한다니까. 지금은 아냐.”
그의 대답에 안호연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문댔다.
“말만. 사실 내가 좋지?”
“뭐, 좋긴 좋지. 너처럼 속궁합이 좋은 사람을 어디서 찾겠어. 내 첫 잠자리 상대라 이미 이 아래도 나한테 딱 맞게 길들었는데.”
“속궁합 때문에 내가 좋다는 말로 들리는데?”
“반은 사실이니까.”
발끈한 안호연은 태범석에게 달려들었다. 그를 침대로 쓰러뜨리고 고양이처럼 올라타 버클을 풀어 허리띠를 빼냈다. 손가락으로 지퍼를 내렸다. 찌익, 맞물렸던 지퍼가 열리는 소리가 짜릿한 긴장감을 당겼다. 바지를 내려 심지가 딱딱한 성기를 주무르다 드로어즈를 혀로 핥았다. 침으로 축축하게 젖어 색이 짙어진 드로어즈를 벗겨 단단하게 살이 오르고 딱딱해진 성기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탱탱하게 익은 성기가 굽힐 줄 모르고 하늘을 향해 솟았다.
침대 옆 협탁에서 콘돔을 꺼낸 안호연은 이로 콘돔 껍질을 까 태범석의 성기에 씌웠다.
“그냥 해. 정관 수술 해서 씨도 없는데 뭔 콘돔이야? 그냥 싸는 게 좋아.”
“두세 번 하려고 씌우는 거니까 입 닫아. 처음부터 안에 싸면 미끄덩거려서 별로 안 느껴지잖아.”
익숙하게 다리를 벌려 침대 위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남자의 위에 올라탔다. 엉덩이를 들어 성기에 맞춰 내리자 성기가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안호연은 자기의 포인트가 어딘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엉덩이를 비벼 가며 포인트를 찔러 드라이 오르가슴을 느꼈다.
“흣, 다음 공사 상대는 누구야?”
“은행장 아들인데 성격이 별나서 부모님조차 내놓았어. 집착이 심하고 변태적인 잠자리를 선호해서 오메가들이 많이 도망간 모양이야. 그래도 결혼은 시키고 싶었는지 결혼정보회사에 몰래 의뢰를 넣었더라고.”
“미친, 하앗, 그런 새낀 싫어.”
“외모가 괜찮아. 성격은 안 봐도 얼굴은 보잖아.”
안호연은 태범석의 어깨를 잡고 빠르게 엉덩이를 들썩이며 오르가슴을 느꼈다. 실린더 안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피스톤처럼 허리를 움직이던 안호연은 갑자기 멈췄다. 사정감이 밀려와 더운 숨을 몰아쉬며 그의 배에 실금하듯 사정했다. 그러곤 힘에 부쳐 땀이 밴 이마를 태범석의 어깨에 댔다.
“더구나 한국인이야.”
“본진은 싫어.”
“걱정 마. 이번엔 이혼 위자료로 돈을 챙길 생각이니까 피임 잘해. 너 나중에 내 애 낳고 싶다고 했잖아. 내가 처음이 아니면 확 버려 버릴 거야.”
“결혼은 싫다니까.”
“이젠 더 가져다 쓸 호적도 없어.”
태범석은 숨을 몰아쉬는 안호연의 뺨에 키스하며 달랬다. 아직 사정을 못 한 그는 쉬고 있는 안호연을 뒤로 밀어 침대로 쓰러뜨리곤 안호연의 위로 올라갔다. 익숙하게 안호연의 다리를 젖혀 타액이 묻어 번들거리는 성기를 밀어 넣자, 방금까지 성기를 담고 있던 내벽이 무리 없이 그걸 삼켰다.
“하읏, 진짜 결혼은 싫다니까.”
“돈이 많아. 외조부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어마어마해. 그리고 어렸을 때 증여받은 신탁에 주식은 말할 수 없을 정돈데, 장난처럼 시작한 외식 사업이 성공해서 돈을 긁어모았어. 이런 남자 옆자리로 들어가는 게 쉽겠어?”
“법적으로 흔적이 남잖아.”
“이번 일 끝나면 결혼도 생각해 볼게.”
“정말?”
“그럼.”
“진짜 생각해 보기다?”
“당연하지, 내가 누구랑 자든 마음은 네 거라니까.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누구에게 정착하게 되면 너에게 한다니까. 네가 잘 따라와서 돈 많이 벌게 해 주면 정착할 마음이 없다가도 생기지. 이번에 결혼이 성사되면 저쪽에서 우리 결혼정보회사에 준다는 돈이 자그마치 10억이야. 지금까지 셋이서 돈을 나누느라 배도 안 찼어. 그리고 넌 이혼 위자료를 챙기면 되고. 딱 눈감고 2년만 참아 줘. 그러면 내가 진짜 잘할게.”
태범석은 안호연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공사에 참여하면 나한테 나쁜 말 하지 마.”
“어떤 말?”
“싸구려라는 말.”
“그 말 때문에 호연이가 기분 나빴나 보네. 죽을죄를 지었었네.”
그가 안호연의 입술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며 귀로 듣기 좋은 말을 속삭였다.
“한 번 더 고생해 줘. 이번에 위자료를 많이 받으면 너도 이 생활을 청산할 수 있을 거야.”
“응, 대신 버리지 마. 더럽다는 말도, 엉덩이가 가볍단 말도 하지 마.”
“알았어. 착하다, 우리 호연이.”
“너한테 안 착했던 적이 있냐? 박으려면 세게 박아.”
안호연이 타박하자 살살 허리를 움직이던 그의 허리가 구부러지는 각도가 커졌다. 얕게 들어오던 성기가 깊게 들어오자 만족감을 느낀 안호연은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태범석의 머리를 꽉 껴안았다. 태범석과의 섹스는 언제나 만족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허전했다. 꼭 혼자 사랑하고 혼자 섹스 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태범석은 안호연과 연인이면서도 연인이 아닌 이상한 관계였다. 그래서 허전했다. 더, 더, 더 많이 사랑받고 관심받고 싶은데 태범석은 그러지 않으니까.
* * *
오랜만에 한국 땅을 밟는데도 안호연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공항을 나오면 흔한 풍경처럼 그를 맞이해 줄 사람도 없었고 무엇보다 돌아갈 집도 없으니 유럽이나 여기나 그에겐 비슷했다. 여기엔 태범석도 없었고 같은 맑은 하늘일 텐데 유럽 하늘보다 한국 하늘은 누리끼리했고 콧속 점막을 찌르는 매연이 비강을 통해 폐로 흘러 들어가 폐가 아팠다. 헤비스모커인 그가 매연에 괴로워한다는 걸 알면 지나가는 개가 웃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안호연은 하나하나에 시비를 걸 정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국에 가면 너도 기분이 좋아질 거야. 한국이 제일 좋으니까 매일 정착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거잖아.’
태범석은 한국으로 가기 전, 안호연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건 그만의 생각이다. 누가 들으면 돌을 던지며 비난할지도 모르지만,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은 그에게 없었고 딱히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저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이 특별할 뿐, 만약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그 나라를 특별하게 여겼을 테다. 딱 그뿐이었다.
안호연은 느릿하게 하품을 했다. 하품하는 안호연의 손목에 값비싼 시계가 매달려 있었다. 얼마 전 명품 매장에서 구입한 시계였고 그동안 태범석을 따라다니며 작업을 친 덕분에 안호연의 통장에는 돈이 많이 쌓였다. 4년 동안 공사 친 알파는 3명, 베타 2명. 그들에게 받아 낸 결혼 성사금과 예물 등으로 벌어들인 수익이 10억에 달했다. 빈 몸으로 떠나 이 정도 벌었으면 성공에 가까우나 안호연은 돈이 좋아 그만둘 수 없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건 돈이니까. 공항에서 빈손으로 나온 안호연은 공항 택시를 탔다. 갈색 선글라스를 낀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안호연을 봤다.
“어디로 모셔다 드려요?”
택시 기사가 무성의한 말투로 물었다. 안호연은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종이를 펼쳐 보여 주었다. 태범석이 마련한 거취는 삼성동에 있었다. 대충 주소를 본 택시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힐끔 안호연을 샅샅이 훑었다. 노란 머리에 외제 옷을 입은 그를 보곤 오렌지족으로 착각했는지 택시 기사의 볼에 심술이 붙었다. 심술이 붙은 택시 기사의 입에서 좋은 말이 흘러나올 리가 없다. 안호연의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마지막으로 본 그가 입술을 뗐다.
“요즘 배낭여행 붐인가 봅니다. 부모 돈 다 털어서 배낭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늘었죠.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인데.”
사람들은 조금 어려 보이는 남자가 명품을 입으면 부모 돈을 파먹고 사는 줄 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제일 불쾌한 건 안호연이다. 부모란 존재를 가져 본 적이 없어 부모에게 발을 비빌 생각을 한 적이 없으니까. 팔짱을 낀 그는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엠에프 때 서민들이 금이고 뭐고 다 가져다 냈는데 금괴는 안 나왔대요. 그 말인즉슨 부자들은 금을 안 풀었다는 이야기지. 그 돈으로 해외여행 가고 골프 치러 다니고 명품 가방 사고 그랬다는 거지. 청년은 돈깨나 있는 거 같은데 나중에 그러지 말아요.”
필요 없는 말을 읊조리는 남자를 안호연은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하품을 하곤 눈을 감았다. 그가 한참 눈을 감고 있자 혼자 시끄럽게 떠들던 택시 기사가 잠잠해졌다.
안호연은 택시가 멈춰 서야 눈을 떴다. 미터기에 박힌 금액보다 만 원을 더 올려 택시 기사에게 내밀었다. 팁 문화에 익숙한 외국에서 4년간 살다 보니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딱 미터기에 나온 돈만 줘요. 어린 사람에게 더 받을 생각 없으니까. 택시 운전한다고 비웃는 거야, 뭐야.”
퉤 하고 침을 뱉은 택시 기사가 차를 몰고 가 버리자 안호연의 입술 사이로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뭔 동정을 했다는 거야. 습관인데. 짜증이 담긴 손으로 만 원을 주머니에 넣은 안호연은 종이에 적힌 호수를 찾아 발을 옮겼다. 평범한 건물 3층에 있는 2호가 그가 지낼 집이었다. 촘촘하게 붙은 현관을 훑어 2호를 찾은 안호연은 어깨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얼마 전까지 누가 사용했는지 방이 엉망이었다.
널려 있는 옷들, 바닥에 흩어진 남자 구두. 그 속에 발을 들인 안호연은 옷을 벗곤 드로어즈 하나만 입은 채로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새 이불에 담배 냄새가 배어 있었다. 이불에 밴 담배는 그가 피우는 브랜드와 같았다. 그제야 이곳이 누가 머물던 곳인지 합리적인 의심이 갔고 금방 결론이 났다. 태범석이다. 그가 즐겨 입는 브랜드의 옷이 늘어져 있었고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는 꼭 안호연의 숙소를 자신의 숙소에 두었다. 그 말은 공사를 칠 때를 제외하고 둘이 동거를 했다는 뜻이다. 동거하고 같이 잠을 자는데도 둘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이번에 공사 성공시키면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볼게.’
지독히 독신주의에 애인은 두지 않는 태범석이, 혹시나 아이가 생길까 스무 살에 정관 수술을 할 정도로 치밀한 그가 결혼이라는 말을 꺼낸 건 기적에 가까웠다. 사귀자는 말에도 결혼하자는 말에도 유하게 웃으며 받아쳐 온 남자였다. 태범석이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으면 한국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다.
‘그와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나?’
누군가 그리 물으면 안호연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 그의 감정은 쉽게 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분명한 건 누군가와 잠자리를 할 때마다 태범석이 떠올랐고 그와 있으면 좋았다는 것이다. 가난해 억제제를 살 수 없던 시절 안호연은 억제제를 먹는 대신 그에게 안겼다. 처음으로 그에게 섹스를 배우고 담배를 배우고 사기를 배우고 지금까지 인생이 그로 시작해 그로 끝났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그가 함께이길 바라는 건지도.
첫 결혼도 그였으면 좋겠고 첫 아이도 그의 아이였으면 좋겠는데, 첫 결혼이 이름도 모를 남자에게 날아가게 생겨 안호연의 기분은 내내 저조했다. 침대 옆 협탁에 굴러다니는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를 뽑아 물고 가스레인지 앞으로 갔다. 레버를 돌려 점화한 안호연은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가 몇 번 연기를 뿜어 낸 것만으로 방에 담배 연기가 찼다.
따르릉.
요즘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유선 전화가 갑자기 울렸다. 안호연은 무심코 전화를 받았다.
“안호연?”
여보세요라고 운을 떼기도 전에 상대방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호연이란 이름이 그의 귀에 부드럽게 달라붙었다.
“뭐 태범석.”
“금방 갈 거니까 얌전히 있어.”
“어딘데?”
“잠깐 지방에 내려왔어.”
“한국이야?”
“어. 어제 들어왔어. 혹시 밖에 나가고 싶어도 적당히 참아. 저쪽에서 결혼할 사람에 대해 까다롭게 제시해서 널 손볼 데가 많아. 대졸에 정숙하고 관계가 깨끗한 남자 오메가. 연애 경험이 없었으면 좋겠대.”
“그쪽 아들 변태라며, 욕심이 과하네.”
안호연은 전화선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그런 타입인 거지. 내 아들은 더러워도 들어올 오메가는 그러면 안 된다는 타입. 많이 겪어 봤잖아. 사실 더러운 데엔 걸레가 제일 어울리는 법인데. 그래도 나쁘지 않아. 이런 타입일수록 떨구는 건 쉬워.”
“무슨 수로?”
“금방 이혼할 수 있을 거야. 공사 기간은 약 2년 정도로 예상하고 있어. 손이 귀한 집이라 애가 안 생기면 그쪽에서 자연스레 포기할 거야. 네 이름으로 불임 진단서를 만들 거야. 그러면 저쪽에서 위자료 주고 내보내겠지.”
“그러겠지, 간단하네.”
그는 의외로 촉이 좋아 구실을 쉽게 만들었다.
“근데 나 심심해. 이 원룸에 아무것도 없어. 심지어 티브이조차 없다는 게 말이 되냐? 나 아무것도 안 입고 자고 있을 테니까 지금 와.”
“내일 저녁쯤에 갈 거야. 급하면 집으로 알파 서비스 불러. 꼭 피임하고.”
“넌 내가 아무하고 자도 아무렇지 않냐?”
“단속하고 싶어도 난 아무하고 자면서 네가 누구랑 붙어먹는지까지 관여하면 내가 나쁜 놈이잖아. 더구나 우린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널 단속할 의무가 없지. 누구랑 자든 네 자유야.”
“태범석.”
“사랑해. 이만 끊어.”
사랑하지도 않고 사귀는 사이도 아니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그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안호연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 태범석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무심한 말들로 안호연의 마음을 들었다가 놓고는 했다. 짜증스레 바닥을 보던 그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내 머릿속에 그 생각만 있는 줄 아나.
충동은 보통 반항심에서 비롯된다. 전화를 받지 않았더라면 안호연은 그대로 침대에 누워 아침까지 잤을 테다. 그런데 태범석이 전화를 걸어 안호연의 마음을 갉작갉작 긁어 대 속에서 열불이 났다. 침대에 웅크린 자세로 누워 있던 안호연은 부드러운 이불의 질감을 느낄 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물처럼 벗어 두었던 옷을 주워 입었다. 지겨운 말이 그의 머릿속을 빙빙 떠돌았기 때문이다.
기분이 더러워진 안호연은 집에서 해결하라는 태범석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갔다. 안호연은 거울을 통해 얼굴을 확인하고 포켓에 걸어 놓은 선글라스를 끼고 문밖으로 나갔다. 가을이 성큼 다가와 대리석에서 느껴지는 찬기에 등골이 시렸다. 복도의 맨 끝에 달린 창으로 밤하늘이 보였다. 분명 공항에서 거처로 올 때까지 낮이었는데 금세 해가 저물었다.
밖으로 나온 안호연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통 새로운 나라에 가면 알파 대여 서비스를 이용했다. 대여 서비스는 오메가에 제공되는 호스트였다. 외국에서 시작된 서비스로 피임이 완벽한 알파들이 히트사이클을 겪는 자연주의 오메가를 돕기 위해 생겨난 제도로 억제제를 사용하지 않는 안호연이 자주 이용하는 서비스 중 하나였다. 그는 잠자리보다 다른 걸 파악하기 위해 서비스를 애용했다. 이들을 데리고 도시를 떠돌며 언어와 문화를 익혔다.
보수적인 성향인 한국에 이런 서비스가 있을까 의문이었지만 안호연은 기세 좋게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 114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안내원이 전화를 받았다.
“알파 대여 서비스가 있으면 연결 부탁드립니다.”
“네, 대표 번호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짤막한 멘트 후 번호가 나왔다. 안호연은 그 번호를 대충 외우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네, 대여 서비스입니다. 원하는 외향을 말씀해 주시면 비슷한 사람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머리가 검고 키 좀 크고 재수 없게 생긴 알파로 보내 주세요.”
머리가 검고 키가 큰 재수 없는 알파는 딱 태범석이었다.
“어디로 보내 드릴까요?”
안호연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디저트 가게가 눈에 띄었다. 외관이 고급스러운 초콜릿 포장지 느낌과 비슷했다.
“강남역 근처 디저트 가게로요.”
“네.”
전화를 끊은 안호연은 디저트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대충 케이크 몇 개를 포장해 알파가 오길 기다렸다.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안호연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가 돌아가길 반복했다. 윙윙 짧게 진동하는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았다. 배터리가 거의 다 되어 힘이 없는 휴대 전화로 문자가 수신되었다.
[2분 내로 도착합니다.]
안호연은 테이블에 놓인 디저트 포장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다리를 꼬고 앉아 문을 응시했다. 2분쯤 지나자 누군가가 들어왔다. 싸한 바람 냄새에 실린 페로몬을 맡은 그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사람을 찾고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는 알파를 먼저 발견한 안호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비스로 대여받은 알파는 안호연의 심미안을 자극했다. 키가 컸고 외모는 근사했다. 물론 태범석과는 다른 까칠한 미인형 얼굴로, 사랑받고 자란 티가 묻어나는 얼굴이긴 했다. 같은 남자로서 재수 없게 느낄 얼굴이었다. 그가 원했던 건 태범석과 비슷한 얼굴이었으나 저런 얼굴도 나쁘지 않았다. 안호연은 대뜸 문 앞에 선 알파에게 상자를 넘겨주었다. 그가 의문스러운 눈으로 안호연을 보았다.
“이걸 왜……?”
“너 먹으라고 주는 거지. 여기 케이크가 맛있는지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 보면 맛있겠지.”
안호연은 손바닥으로 그의 등을 치며 밖으로 나갔다. 따라오라는 제스처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그는 여전히 디저트 가게 안에 있었다. 안호연은 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알파에게 짜증스러운 시선을 보내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그의 팔목을 잡고 끌고 나왔다.
“안 따라와? 일하러 왔으면 일을 해야 하잖아.”
“옳은 말이긴 하지만, 전 일을…….”
“근처의 술을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좀 가자. 나 돈도 많아서 비싼 것도 괜찮아.”
“괜찮은 바를 알긴 압니다만.”
“알면 앞장서야지 왜 바보같이 서 있어? 오래 데리고 있지 않을 거야. 술 한 잔만 먹으려는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앞장서. 안 잡아먹을 거니까.”
그는 상자와 안호연을 번갈아 보더니 어깨를 손으로 툭툭 털곤 어깨에 놓인 안호연의 손을 잡았다. 안호연은 잡힌 손을 뻔히 보더니 눈을 깜박거렸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손을 꽉 쥐는데도 눈만을 깜박였다.
“왜 안 뿌리쳐요?”
“뿌리칠 이유가 없잖아.”
갑자기 그의 입가에 미세한 웃음이 걸렸다.
“바빠도 금발의 미인과 술 한잔 마실 시간은 있긴 해요. 뭐, 확인해 볼 것도 있으니까 잡아먹어도 좋습니다. 이왕이면 게걸스럽게 먹어 주시면 더 좋고요. 이렇게 노골적으로 제게 작업을 걸고 뭘 사 주는 오메가는 오랜만이라 기분이 좋네요.”
“감동하지 마. 오메가가 선물 같은 거 할 수도 있지.”
빙긋 미소를 지은 그가 자연스레 안호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을 느낀 안호연은 고개를 돌렸다. 주먹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얼굴이 마주했다. 뜨거운 숨결 때문에 선글라스에 습기가 찼다.
“가다가 도망가지 말고 잘 따라와요.”
“술이 고프니까 앞장서기나 해.”
어깨를 튕겨 남자의 팔을 제 몸에서 떨군 안호연은 얼른 맛있는 술집으로 안내하라고 고갯짓을 했다. 입술 하나를 올리고 웃던 그가 앞장서서 걸어갔다.
“제가 자주 가는 펍입니다.”
“흑맥주 먹을 거야.”
“근데 왜 자꾸 너, 너 하고 불러요, 기분 좋게?”
“아니꼬우면 너도 놔.”
“꼽진 않은데 그럴 때마다 이상한 곳이 반응해서요.”
안호연의 머릿속에 얘도 제정신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도 잠자리 상대가 아닌 이야기 상대로 남자를 불렀기 때문에 남자를 따라갔다. 남자가 향한 곳은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로, 먼 곳이 아니었다. 일반 펍처럼 적당히 어두웠고 무엇보다 쾌적해 안호연의 마음에 쏙 들었다. 안호연은 맥주를 시켰다. 맥주가 도착하자마자 쭉 들이켰다.
“이름이 뭐야?”
“강중영, 그러면 그쪽은?”
“안…… 아니, 박연.”
“연? 외자네요.”
남자의 시선이 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는 안호연을 힐끔 위아래로 훔쳐보더니 씩 입꼬리를 올렸다.
“보통 그런 반지는 결혼반지 아닌가.”
그가 손가락으로 안호연의 반지를 두드렸다. 그도 그럴 것이 반지는 예물용 반지였다. 어두운 조명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박지를 낀 남자 오메가는 드물어 남자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임자 있는 오메간가 본데, 그 사람만으로 부족하죠? 사랑받고 싶고, 그 사람이 온전히 내 생각만 했으면 좋겠고요.”
그가 허점을 노리고 찔렀다.
“임자가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하루만 만나고 말 건데.”
“맞는 말이긴 하네요. 예쁘면 뭐든 용서가 되는 법이죠. 임자가 있으면 뺏으면 되니 별문제는 아니죠.”
“나 예쁜 건 온 세상 사람이 다 알아. 새삼스러우니까 말하지 마.”
안호연은 휘휘 손을 흔들곤 새롭게 리필 된 맥주를 마셨다. 확실히 그의 입맛엔 독일 맥주보단 한국 맥주가 잘 맞았다.
“하긴, 모르는 것도 웃기죠. 선글라스 좀 벗어 봐요. 눈이 얼마나 예쁜지 보고 싶어요.”
“싫어. 내 얼굴 알아서 뭐 하게.”
보여 달라면 더 보여 주기 싫다. 안호연은 손가락으로 선글라스를 꽉 쥐고 고개를 저었다.
“아쉽네요.”
“아쉬우면 짠 하든가. 마시다 보면 보여 줄지도 모르잖아.”
“그럼 좋은 술을 꺼내 오라고 해야겠네요.”
“좋은 술 좋지.”
남자가 주위를 맴도는 서버에게 무언가 귀띔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급스러운 병에 담긴 술이 나왔다. 독한 냄새를 풍기는 그것은 양주였다. 한 방에 보내겠다는 의지가 담긴 술이라 웃음이 났다. 남자가 귀여워 대충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쪽이 낸다고 해서 이 가게에서 제일 비싼 술을 골라 봤는데 괜찮아요?”
“응.”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술값이 얼마가 나오든 계산할 의향이 있었다. 앞에 앉아 있는 상대가 비위를 잘 맞춰 주어 안호연의 기분이 좋았다. 익숙하게 잔에 얼음을 담아 양주를 따른 강중영은 안호연의 앞으로 술잔을 밀었다. 매너가 몸에 밴 사람인지, 안주까지 안호연 앞으로 밀어 주는 배려가 마음에 들었다.
“볼이 빨간데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술에 취한 거 같은데.”
“좀 오래 금주를 해서 그런가.”
안호연은 빨갛게 열이 오른 뺨을 두 손바닥으로 감쌌다. 독일에 있는 동안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더니 그사이 주량이 약해졌다. 안호연은 무심코 양주를 입에 가져다 댔다. 연거푸 술을 마시자 달콤한 음식이 당겨 손가락으로 케이크 상자를 가리켰다.
“그거 안주로 먹자.”
“좋아요.”
그가 상자에서 케이크를 꺼냈다. 안주를 찍어 먹던 포크로 케이크를 분해해 먹던 안호연은 입가에 미소가 생겼다. 술과 혀를 마비시키는 독한 술, 그리고 마비시킨 혀를 달래는 케이크의 조합은 환상이었다.
“너.”
“왜 불러요?”
“고마워.”
“고마우면 위로 올라가는 건 어때요?”
“위? 위는 왜?”
“확인해 볼 것도 있고, 자러요. 위에 올라가면 당신이 원하는 걸 해 줄게요.”
“내가 원하는 게 뭔데?”
“당신만 사랑해 주는 거. 당신만 아껴 주는 거. 그 사람이 해 주지 못한 것들이요.”
안호연은 눈을 깜박였다. 어떤 말보다 유혹적인 말이다. 누군가 자신만 사랑하고 아껴 준다니, 이토록 매력적인 말은 처음이었다.
“도망가지 못하게 발목을 묶고 억압해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게 할게요.”
“플레이야, 뭐야? 난 일반 알파를 대여받았는데.”
“일종의 서비스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바쁜 사람을 여기까지 끌고 왔으면 성의는 보여야죠. 올라가서 와인도 마시고 좋은 시간 보내죠. 와인은 제가 살게요.”
“음, 좋아. 가자.”
고작 하룻밤뿐인데. 안호연은 씩 웃으며 몸을 세웠다. 앉아 있을 땐 몰랐던 취기가 몸을 세우자 전신을 휘감았다. 몸이 흔들리자 안호연은 손가락으로 술이 오른 머리를 두드렸다.
“취했어요?”
“조금.”
“그러면 부축 좀 해 줄게요.”
“아니, 혼자 갈 수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안호연은 몇 걸음 걸었다. 생각보다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속도로 걸어 강중영도 더 도와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뜻 모를 시선으로 안호연을 보곤 했다.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펍 위에 자리 잡은 호텔로 자리를 옮겼다. 주문한 와인이 도착할 동안 강중영이 목욕을 할 걸 권해 안호연도 사양하지 않고 욕실로 갔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그 속에 몸을 담그자 갑자기 취기가 올라와 잠이 왔다. 그렇지 않아도 비행기 내에서 잠을 자지 못해 몸이 피곤했다. 몇 번 눈을 비비던 안호연은 욕실로 들어오는 남자를 보곤 힘없이 웃었다. 그가 욕조에 누운 안호연의 벗은 어깨를 매만졌다. 깨끗하게 손을 씻은 남자가 안호연의 노곤한 어깨에 손을 올렸다. 뭉친 근육을 풀 듯 살살 주물렀다. 아, 좋다. 근육이 이완된 기본 좋아진 안호연에게 그가 속삭였다.
“족쇄 같은 거 좋아해요?”
“그건 왜?”
“누군가 당신에게 족쇄를 채워 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 거 같아요?”
족쇄라. 안호연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좋지 않을까. 적어도 매일 밥 주러 와야 하잖아. 밖에서도 내 걱정을 계속할 테고.”
“그리고요?”
“적어도 족쇄를 채워 줬다는 건 날 엄청 좋아해서 가두고 싶다는 뜻이잖아.”
일반적인 사람과 조금 다른 대답을 내놓자 강중영의 입가에 그윽한 미소가 따라붙었으나 뒤돌아선 안호연은 그 미소를 보지 못했다.
“나 조금 취한 거 같아. 욕실이 자꾸 흔들려.”
“술이 조금 과했던 거 같아요. 욕조에서 그만 나올래요? 제가 마사지해 줄게요.”
안호연은 욕조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가 큰 수건으로 안호연의 몸을 감싸더니 온몸에 묻은 물을 닦아 주었다. 손가락 사이까지 꼼꼼히 닦아 준 그가 안호연을 화장대로 이끌어 스툴에 앉히더니 머리까지 정성스럽게 말려 주었다.
“다정하네.”
“다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왜?”
“오래도록 찾던 사람이 나타났으니까요.”
“그게 뭐야?”
“그런 의미에서 족쇄를 채워도 될까요?”
“여기에 족쇄가 어디 있어?”
그가 재킷에서 손수건을 꺼내 무릎을 굽히고 앉더니 안호연의 발목에 손수건을 감았다. 발목에 착 감기는 손수건의 느낌이 좋았다. 손수건을 족쇄라 우기는 남자가 귀엽기도 해 안호연이 괜히 발을 흔들자 그가 싱긋 웃으며 발등을 혀로 핥았다. 짜릿한 전기가 발등에서 배로 모여들었다.
“이젠 안아도 되죠? 족쇄를 찬 순간만큼은 내 거니까.”
“응.”
안호연의 허락이 떨어지자 발등에서 그의 웃음이 묻어났다. 부드럽고 달콤한 웃음이라 취기가 오른 안호연도 따라 웃었다. 발등에서 안호연의 피부를 따라 온몸을 핥으며 페로몬을 묻히며 올라오던 남자가 결국 귀에 도달하자 작게 속삭였다. 피지배자 성향 오메가죠? 멀리서 들려오는 그 말을 들으며 안호연은 피지배자 성향의 오메가가 뭐냐고 되묻고 싶었으나 눈이 무거워 내리감았다.
* * *
햇빛이 창을 통해 들어와 침대에서 자고 있던 안호연을 덮쳤다. 이불 밖으로 나온 목이 붉었다. 마치 누군가가 씹어 놓은 것처럼 잇자국이 남아 있었다. 미동 없이 자던 안호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더니 얼마 후 초점 없는 눈이 눈꺼풀 사이에서 드러났다.
그가 눈을 뜨자마자 먼저 본 건 천장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아 주변을 더 둘러보았다. 천장에 매달린 조명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안호연은 이곳이 어제 남자를 따라 들어왔던 호텔이라는 걸 깨달았다. 멍한 눈으로 주변을 보던 그는 묵직한 통증이 올라오는 아래 상태에 한숨을 쉬었다. 몸 상태로 보아 갈 데까지 간 듯했다.
안호연은 가만히 이불 속으로 손을 넣고 아래를 더듬었다. 아래는 물기 하나 묻어나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뒤처리고 뭐고 완벽한 남자였다. 괜찮은 서비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족스러운 밤이었다.
오랜만에 태범석이 생각나지 않았다. 태범석이란 이름이 떠오르니 오늘 돌아오겠다던 태범석이 떠올랐다. 시간에 맞춰 돌아가지 않으면 잔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안호연은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머리가 차가워졌다. 잔뜩 얼어 버린 눈으로 급하게 바닥을 훑어보았다. 어제 입었던 옷이 없었다. 옷만이 아니라 속옷도 없었다.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 올린 안호연은 차분하게 호텔에 비치된 전화기를 찾았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세탁 서비스에 옷을 맡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안내 책자를 펼치고 전화기를 들었다. 마치 전화선을 뽑아 놓은 것처럼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다이얼을 누르던 그는 협탁을 밀었다. 그러자 잘린 전화선이 보였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안호연은 휴대 전화를 찾으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밖에서 알파 대여 서비스를 신청할 때만 해도 있었던 휴대 전화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안호연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오른 안호연의 시야로 무언가가 들어왔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요, 달링. 갑자기 일이 생겼는데 금방 해결하고 돌아올게요.]
황당함에 욕이 그의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 쪽지를 남긴 사람은 강중영이 분명했다. 근데 그가 남긴 달링이란 단어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여 서비스 기간은 보통 하루였고 더 관계를 이어 나가려면 두 사람이 동의해야 이뤄졌다. 안호연 자신이 어떤 동의도 하지 않았는데 강중영은 과도한 애칭을 사용하고 있었고 이 룸에 있던 옷과 통신 기기를 모두 빼 간 것도 그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갑은 그대로 두고 갔다는 점이다.
알몸이라 여기서 벗어날 수 없어 시트로 몸을 두르고 룸 주위를 오가던 안호연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매만졌다. 납친가. 살아생전 처음 당해 본 일이라 황당했다. 오메가 수가 월등히 모자라 가끔 알파가 오메가를 보쌈해 가는 일이 종종 있다는 말은 들었어도 알파 대여 서비스에서 만난 알파에게 이런 일을 당할 줄은 몰랐다. 한숨과 함께 힘없이 소파에 걸터앉은 안호연은 발을 동동 굴렀다. 이름도 모르고 고작 하루 만난 알파에게 묶여 살 걸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대로 가다간 태범석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 이름이 스치자 손가락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걸 경험했다. 식은땀이 등으로 흘러내렸다. 그는 하얗게 질린 낯빛을 하고 유일하게 남은 수단인 문으로 달려갔다.
“사람 살려요!”
소리를 지르며 현관으로 뛰어나간 안호연은 무섭게 맨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밖에 누구 없어요? 여기 사람이 있어요! 도와주세요!”
누군가가 도와주길 바라며 목청이 터질 정도로 외쳤다.
“사람 살려 달라고요!”
주먹으로 문을 쾅쾅 정신없이 때리던 그때였다. 무슨 일인데요? 바깥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나이가 지긋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손님, 무슨 일이세요?”
“안에 갇혔어요.”
“네? 손님께서 그냥 열고 나오시면 되는데요.”
“옷이 없어서 못 나가요. 옷이 있으면 가져다주실 수 있을까요?”
“네, 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옷을 가져다주었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가운이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한 그는 가운을 몸에 걸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어제 왔던 길을 떠올리며 숙소를 찾기 위해 기웃거렸다. 대낮에 가운 하나를 입고 달리는 안호연을 보고 사람들이 수군거렸지만, 납치당하는 것보다 한낮의 웃음거리가 되는 게 나았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에 눈을 감고 자는 태범석을 보자 안호연은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숨이 점점 가빠진 안호연은 달려가 자는 태범석의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때려도, 때려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눈물이 날 뻔했다. 자다가 봉변을 당한 태범석은 실눈을 떴다.
“낮부터 무슨 일이야?”
“넌 태평하게 잠이 오냐?”
“태평하게 놀다가 온 건 넌데 왜 아침부터 신경질이야.”
“나 납치당할 뻔했어. 잡혀갈 뻔했다고.”
“널?”
그가 콧방귀를 뀌더니 갑자기 배를 잡고 웃었다.
“야, 너 잡아가도 시중들다가 며칠 후엔 집으로 돌려보낼걸. 시답잖은 말 그만하고 이리 와. 꿈꿨나 보네.”
태범석이 안호연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단단한 손에 이끌려 안호연의 몸이 그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아직도 오들오들 떨고 있는 그를 달래듯, 그가 등을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 네가 안 돌아왔으면 내가 금방 찾으러 갈 건데 왜 이런 모습으로 달려와.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지.”
“웃기는 소리 마. 귀찮은 놈 치워 버렸다고 좋아했겠지.”
“살아 있는 것 중에 유일한 내 건데 어떻게 버려? 내가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너뿐이잖아.”
“범석아.”
“왜?”
“너 진짜 나쁜 새낀 거 알아?”
“알지.”
콘돔 값이 아까워서 정관을 묶고 오는 수술을 하고 왔다는 말을 했을 때도 다른 오메가와 자고 왔을 때도 그는 얄미운 얼굴을 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아무런 마음도 없으면서 상대방을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거짓말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독이 되었다.
“진짜 이번에 공사 완벽하게 끝내면 결혼 생각해 볼 거야? 거짓말하지 말고.”
“응. 그럼 내가 누구하고 결혼하는데?”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거지? 그런 생각도 안 하고 그런 말 하는 거면 내가 너 버릴 거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자자. 잠 와.”
그는 안호연이 움직이지 못하게 팔과 다리로 고정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좋은 냄새를 맡으며 눈을 감았다. 습관은 무섭다. 이 품속에서 놀랐던 마음이 금세 진정됐다. 태범석이 밉다가도 용서가 되고, 떠나고 싶다가도 다시 돌아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