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 좋죠. 제가 아무한테나 명함 뿌리고 그러는 사람 아닙니다. 해윤이는 원석이에요. 그런 애를 갈고 닦아 키울 생각에 벌써부터 신납니다. 실력도 실력인데 애가 그렇게 착하고 성실할 수가 없어요. 오랜만에 훌륭한 신인 하나 잡았어요.”
로지엠 뮤직 김 대표가 흐뭇하게 웃었다. 석해윤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라 했을 과한 칭찬이었다.
“다행이군요.”
한지율은 커피를 마시며 웃음을 흘렸다. 맞은편에 앉은 김 대표도 음료를 마시며 한지율을 흘긋 보았다.
“혹시 해윤이의 대경 ENT 계약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라면….”
한지율이 건넨 명함을 받아 보곤, 대경 ENT 쪽 일로 만나자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그쪽과의 계약은 확실히 해지되었습니다. 비즈니스 미팅이 아니라 사적으로 확인할 게 있어 만나 뵙자고 한 거였습니다.”
“사적으로 확인할 거라는 게 무슨?”
저자가 믿을 인간인지, 김태민 같은 놈인지 아닌지, 하는 것들. 로지엠 김 대표를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눠 본 소감은 괜찮다, 였다. 송 비서의 말대로 믿을 만한 인간이었다.
“친구이다 보니 해윤이가 걱정이 되어서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해윤이가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그 친구가 워낙 사람을 잘 믿는 성격이라 사기꾼한테 속아 넘어가 큰일을 당할 뻔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제가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생긴 게 이래서 의심스러울 만도 하죠.”
김 대표가 사람 좋게 소리 내 웃었다. 웃으니 산적 같은 야성미 넘치는 얼굴이 온화하게 풀어졌다. 한지율도 웃어 보였다.
“그리고 해윤이에게 절 만났다는 얘기는 비밀로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았어요. 해윤이가 참 좋은 친구 뒀네.”
김 대표는 웃음 띤 얼굴로 잔을 들어 남은 음료를 홀짝였다. 김 대표와 짧게 몇 마디 더 나누고 헤어져 회사로 복귀하는 길에, 송 비서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뉴질랜드 오클랜드 행 비행기 티켓 두 장을 예약해 두었다는 소식을 알렸다.
- 그런데 해윤 씨는 휴가 계획 잡힌 거 알고 계세요?
“이제 말해야죠.”
지율은 전화를 끊고 바로 석해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수화기 너머에서 네, 지율 씨! 하는 씩씩한 해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저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어요. 긴장 돼서. 비행기 타고 외국 나가는 거 처음이거든요. 열 시간 이상을 비행기 타고 가야 한다면서요. 멀미는 안 하려나. 멀미약 가져오긴 했는데.”
공항으로 가는 내내 해윤은 소풍 가는 어린애처럼 재잘거렸다. 자중하려고 해도 계속 말이 나왔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해윤은 간밤에 정말 한숨도 못 잤다. 괜히 설레고 두근거려 잠이 오질 않아 말똥말똥,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우리 뉴질랜드에 가죠?’
얼마 전, 한지율이 뜬금없이 그 소리를 꺼냈을 땐 농담인 줄 알았다.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자는 식의 빈말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웃으며 언젠가 가자고 맞받아쳤더니 벌써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두었다는 거다. 이미 계획을 다 세워 두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게 분명했다.
‘저도 일정이란 게 있습니다.’
살짝 불쾌함이 치밀어 쏘아붙이자 한지율이 말했다.
‘올해엔 휴가 갈 여유가 생겨 급하게 일정을 잡은 겁니다. 애인과 좋은 곳으로 가서 편히 좀 쉬고 싶어서요. 해윤 씨도 휴식이 필요한 것 같아 보였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제가 성급했군요. 죄송합니다. 싫으시다면 취소하겠습니다.’
애인이란 소리에 약한 걸 알면서 저런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싫다고 할 수도 없었다. 또 둘이 여행 가자는 한지율의 제안에 설렜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이후, 여행 당일 전까지 계속 이 상태였다. 계속 마음이 붕 떠서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해윤 씨. 진정 좀 해요. 여행 떠나기도 전에 지쳐 쓰러지겠네. 그렇게 좋아요? 신나서 방방 뛰는 강아지 같아요.”
차를 운전하며 송 비서가 물었다. 리무진 버스 타고 가도 된다고 했는데 기어이 송 비서가 공항까지 배웅해 주겠다고 나섰다.
“네. 좋아요. 해외여행 가는 게 처음이라서.”
해윤은 물을 마시며 하도 떠들어 바짝 마른 입을 축였다.
옆자리에 앉은 한지율은 평소 같은 말끔한 슈트 차림이 아닌 편한 캐주얼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의 옷차림을 보자 여행을 간다는 사실이 더더욱 실감이 났다. 자신이 이 여행을 얼마나 기대했는지 송 비서는 모를 것이다.
“뉴질랜드는 나도 한 번도 안 가 봤네. 가서 <반지의 제왕> 투어는 꼭 하라더라고요. 이사님. 전 다른 건 필요 없고 마누카 꿀이나 사다 주시면 돼요.”
“뻔뻔하게 요구하시네요.”
“누구 때문에 제가 위가 다 상했는데요. 이사님은 저한테 꿀 한 통이 아니라 한 박스를 사다 주셔야 돼요. 그나저나 진짜 좋겠다. 저도 캐리어에 넣어가 주세요. 지금 같아선 휴가고 뭐고 다 필요 없고 한 일주일, 늘어져서 잤으면 소원이 없겠네요.”
괜히 미안해져서 해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송 비서님. 올 때 선물 사 올게요. 마누카 꿀도 꼭 사 올게요.”
“나 생각해 주는 건 해윤 씨밖에 없다, 진짜.”
재잘거리며 떠들다 보니 어느새 공항이었다. 송 비서는 해윤과 지율을 내려 주고는 바로 떠났다. 한지율이 먼저 캐리어를 끌고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됐다고 했는데도 그는 제 짐과 해윤의 캐리어까지, 두 개의 짐을 양손에 하나씩 끌었다. 해윤도 그 모습을 보며 기타를 둘러메고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문득 일전에, 최 실장과 함께 공항에 왔던 기억이 떠오르며 발걸음이 멈췄다. 반강제로 한기우가 있던 곳으로 끌려갈 뻔했던 때의 기억.
잔잔한 수면에 무거운 돌덩이를 던진 듯, 해윤의 마음속에 파동이 일었다. 입가에 내내 걸려 있던 웃음기가 싹 지워졌다. 애써 상자 속에 묻어 두었던 추한 기억들이 한 번씩 예고도 없이 불쑥 튀어나온다. 그럴 때마다 몸이 굳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주위에 얇은 막이 감싸여 고립되는 기분이었다.
“석해윤 씨.”
이름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어깨를 쳤다. 한지율의 손이 해윤에게 닿은 순간, 주위를 감싼 막이 소리 없이 깨졌다.
“넋 놓고 있지 말아요.”
한지율이 해윤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당겼다. 이렇듯 일시적인 공황 증세가 찾아오면 어느 때건 불쑥 그의 손이 뻗어 온다.
네, 일부러 소리 내 대답하며 해윤은 굳어 있던 몸을 움직였다.
첫 해외여행이라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일어나진 않을까 걱정했으나 별일 없었다.
순식간에 출국 수속을 마치고 탑승동 안으로 들어섰다. 휴가철도 아니고 평일 오후인데도 안에는 사람들이 넘쳐 났다. 면세점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다양한 국적을 지닌 사람들이 분주히 오갔다.
여성용 화장품 매장이 보여 해윤은 곧장 그리로 향했다. 어머니와 이모 생각이 나서였다.
“뭐 살 거 있습니까?”
“어머니랑 이모한테 립스틱 사 드리게요. 선물 같은 거 사 오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래도 뭐든 사 드리고 싶어요.”
한지율과 둘이서 매장 진열대를 둘러보자 점원이 이것저것 추천해 주었다. 립스틱 두 개를 골라 계산하려 하자 한지율이 먼저 신용 카드를 내밀었다.
“제 카드로 계산해야 할인이 됩니다.”
그러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냥 사 주면 해윤이 부담스러워하는 걸 알고서 저러는 거였다. 점원에게서 영수증과 함께 카드를 받아 드는 한지율을 바라봤다.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한마디라도 했다간 명품 숍으로 끌고 가서 손목에 시계를 채워 줄 겁니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돈 있어요.”
저도 모르게 해윤의 입 밖으로 튀어 나가는 어투가 딱딱해졌다. 이번엔 한지율이 해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한마디 쏘아붙이는 소리가 나올 텐데 그는 해윤을 조용히 보기만 했다.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 입술에 뭐 발랐어요?”
한지율의 입에서 뜬금없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립밤이요. 입술이 자꾸 터서.”
“예쁘네.”
기어이 해윤은 실소를 터뜨렸다. 이런 식으로 대화의 방향이 엉뚱한 쪽으로 튀는 게 하루 이틀 일인가, 어디.
“입술만 반들거리는 게 제법 귀여운데. 립스틱 하나 사 드릴 테니 발라 볼래요?”
“낮술 드셨나 보구나.”
저 남자의 저런 점이 이젠 적응이 돼서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한지율도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그가 먼저 가죠, 하며 발걸음을 뗐다. 해윤도 두 다리를 움직여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들과 함께 앞으로 걸어갔다. 공항 구경, 사람 구경도 하며 여유롭게 걸어 공항 라운지에 들어가 쉰 뒤, 출발 시간에 맞춰 탑승 게이트로 향했다.
“그쪽 아닙니다. 우린 이쪽입니다.”
해윤이 자연스럽게 줄지어 선 사람들 뒤에 가 서려 하자 한지율이 손짓을 해 불렀다.
그가 선 곳은 비즈니스, 퍼스트 클래스 탑승구 방향이었다. 여유롭게 그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으나 해윤은 촌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비행기 좌석은 두 다리 쭉 뻗고 누워도 될 만큼 넓고 쾌적했다. 저 자리에 누워 있다 보면 열 시간이 넘는 비행시간도 금방 지나갈 것 같았다. 돈으로 산 공간이었다. 돈 냄새가 여기저기서 풀풀 풍기는 듯했다. 신기한 것투성이라 괜히 들떠서 이것저것 만져 보고 뒤져 보고 구경했다. 그러다 주변을 돌아보니 한지율을 비롯한 주위 승객들은 느긋하게 기대앉아 짐을 정리하거나 신문을 펼쳐 보고 있었다. 너무 설쳐 댔나 싶어서 해윤은 그제야 얌전히 의자에 기대앉았다.
승무원이 다가와 웰컴 드링크 소리를 하기에 술을 달라고 했다. 승무원이 내온 건 샴페인이었다. 탄산이 톡톡 터지는 달콤한 술을 단숨에 비우니, 절로 몸이 축 늘어졌다.
“해윤 씨. 피곤하면 주무세요.”
“아뇨. 괜찮아요. 전 이동 수단 안에서는 잘 못 자요.”
해윤은 자꾸만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창밖을 바라봤다. 이런 좋은 환경에서 자다니. 그런 아까운 짓을. 어떻게든 눈을 뜨고 버틸 생각이었다. 남은 승객들이 전부 탑승한 뒤 얼마 안 있어 비행기가 이륙했다. 해윤은 잔뜩 흥분해서 창밖 풍경을 구경하다가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눈이 스르르 감긴다 싶은 순간 잠에 푹 빠져들어 입 벌리고 잘도 잤다.
***
비행기에 타면 사육된다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을 거라는 박지형의 말 대로였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동안, 먹고 자고, 또 먹고 자다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국제선 청사에서 국내선 청사로 바로 이동해 국내선 여객기를 타고 또 비행.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기까지 지독히도 긴 여정이었다. 지칠 대로 지쳐 여행의 설렘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사히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맥이 탁 풀려 해윤은 침대 위로 쓰러져 죽은 듯이 잠들었다.
“해윤 씨. 일어나 봐요.”
얼마나 잤을까. 한지율이 깨우는 소리에 해윤은 겨우 눈을 뜨고 부스스 일어났다. 언제 씻고 옷을 갈아입은 건지 그에게선 향긋한 비누 향기가 났다.
“식사는 하고 자도록 해요.”
그가 눈만 끔뻑이는 해윤을 다정하게 일으켜 세웠다. 숙소에 도착한 게 오후였는데 어느새 창밖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식탁에는 2인용 그릇이 세팅되어 있었고 주방에서 맛있는 음식 냄새가 폴폴 풍겼다.
“앉아서 기다려요. 스테이크 구워 줄 테니까.”
“언제 장을 봐 오신 거예요? 피곤한 건 한지율 씨도 마찬가지일 텐데.”
“해윤 씨가 자는 사이에 시내 구경도 할 겸 나갔다 왔습니다. 신경 쓰지 말아요. 나간 김에 사 온 거니까.”
“죄송해요.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음식 만드시는 동안 잠깐 씻고 나올게요.”
욕실로 들어가 샤워하고 나니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자는 동안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들어 배 속이 뒤틀렸다. 식탁 앞에 앉아 차려진 음식을 보자 꼬르륵 소리가 여과 없이 새어 나오기도 했다.
한지율이 그 소리를 듣고 픽 웃었다. 잘 구워진 스테이크가 해윤의 앞에 놓였다.
“자는 내내 계속 배에서 꼬르륵대는 소리가 나던데. 그렇게 배가 고파서 어떻게 잤습니까?”
“자는 동안에는 배고픈 것도 모르죠. 한지율 씨는 안 피곤해요? 어떻게 이렇게 멀쩡하지?”
“해윤 씨가 허약한 겁니다. 체력 키우라고 했죠? 연예계는 체력 싸움이라고.”
그는 잔소리를 줄줄 늘어놓으면서도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잘라 줬다. 해윤은 고기 한 점을 얼른 입에 넣어 봤다. 입에서 고기 살점이 사르르 녹는 듯해 절로 눈이 크게 뜨였다.
“맛있나 보네요. 다행입니다.”
해윤의 표정을 보며 한지율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진짜 맛있어요. 고기가 뭐 이리 맛있지? 고기에 무슨 약이라도 뿌렸나?”
“해윤 씨는 기내식 먹을 때도 똑같은 말한 거 압니까?”
맛있었으니까. 지금까지 먹은 음식은 하나같이 다 맛있었다. 워낙 배가 고파서 더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한지율이 구워 준 스테이크는 최고였다. 해윤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정신없이 고기를 먹어 치웠다.
“맛있게 잘 먹어 주니 만든 보람이 있네요. 더 먹어요.”
한지율이 자기 몫의 스테이크를 반을 잘라 해윤의 그릇에 척 얹어 놔 주었다.
“한지율 씨도 배고프실 텐데 됐습니다. 저도 슬슬 배불러요.”
사실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지만 양심상 말은 그렇게 해 봤다.
“내일 또 사다가 구워 먹으면 되죠. 여기는 소고기가 쌉니다. 여기에 하루 이틀 있을 것도 아니니 양껏 먹어요. 밤에 배고프다고 하지 말고.”
네에, 하며 해윤은 제 앞에 놓인 고기 점을 큼직하게 썰어 입 안에 욱여넣었다. 테이블 위에 놓아둔 한지율의 핸드폰이 드르륵 울렸다. 그는 입에 넣은 음식을 우물거리며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개새끼. 내가 휴가 간 걸 빤히 알면서도 이런 문자를 보내나.”
그가 우아한 얼굴로 기품 있게 욕을 뱉었다. 문자를 보낸 개새끼가 누구인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저 사람에게 개새끼라 불릴 인간이 어디 한둘인가. 속으로 피식 웃으며 해윤은 남은 고깃점을 마저 입 안에 넣었다. 한지율은 아예 핸드폰 전원을 꺼 버리고 다시 내려놓았다.
“소화도 시킬 겸 나가서 시내 구경할까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해윤에게 물었다.
“네. 좋죠!”
“옷 단단히 챙겨입어요. 밖은 춥습니다.”
식탁은 나중에 치우기로 하고 두 사람은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
바깥 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한지율의 말을 듣고 바람막이 점퍼를 챙겨 입고 나오길 잘했다 싶었다. 꽤 두꺼운 점퍼인데도 한기가 들어서 해윤은 지퍼를 목까지 끌어 올렸다.
몇십 분 걸어 다니다 보면 끝나는 작고 아담한 번화가 거리를 지나 공원으로 올라가 호숫가로 접어들었다. 번화가엔 그래도 사람들이 넘쳐나더니 호숫가로 접어들자 인적이 뚝 끊겼다. 사방이 고요했다. 사람 사는 곳이 어쩌면 이렇게 조용할까 싶을 정도였다.
밤인데도 달이 워낙 밝아 호수 주위를 감싼 주변 산세가 훤히 보였다. 달빛이 마치 형광등 불빛 같았다. 산 정상의 만년설이 무서울 정도로 희게 빛났다.
찰싹찰싹, 물결치는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호수인데도 물결이 치는 게 신기했지만 듣다 보니 곧 적응이 됐다. 쨍하게 얼어붙은 신선하고 차가운 바람이 해윤의 머리칼 사이사이를 스쳤다. 들리는 소리라곤 물소리가 전부인 밤길.
“늦은 밤도 아닌데 너무 조용하네요. 좀 무섭기도 해요.”
“우리 둘이 함께 있는데 무섭긴 뭐가 무섭습니까?”
“하긴. 성인 남자 둘이 있는데 무서울 게 뭐 있을까요.”
해윤은 입 끝을 올려 배시시 웃었다. ‘함께’ ‘우리’라는 소리에 아직도 이렇게 가슴이 간질거린다. 언제쯤이나 되어야 이런 소리에 적응이 될까. 아마 이런 소리에 익숙해지는 날이 와도, 옆에 붙어선 한지율의 조각 같은 옆모습을 보며 또 새롭게 설레고 그럴 거다. 지금처럼 나란히 걷다가 손끝이 슬쩍 닿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질 거고.
그런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한지율이 해윤의 손끝을 살짝 감싸 쥐었다.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요?”
“한지율 씨는 손도 굉장히 차가울 것 같은데 따뜻해요.”
“해윤 씨가 지나치게 차가운 겁니다.”
그러며 그는 감싸 쥔 해윤의 손을 더 강하게 쥐었다. 주위 눈치를 살필 이유가 없었다. 여기엔 둘밖에 없으니까.
두 사람은 잠시 호숫가 앞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해윤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환하게 빛나는 달, 쏟아질 듯 빽빽이 들어찬 별들. 탄성이 절로 나오는 광경이었다. 이곳의 풍경은 하나같이 다 경이로웠다.
한지율도 해윤처럼 벤치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봤다.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앉아 손을 맞잡은 채로 두 사람은 잠시 밤하늘을 구경했다.
“어르신의 그림 속에 나온 풍경이랑 똑같아요, 정말. 어르신의 그림을 보면서 저런 곳이 진짜 있긴 할까 싶었는데. 어머니랑 이모한테도 이 풍경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돈 많이 벌어서 셋이서 퍼스트 클래스 타고 와야지. 이번에 타 보니 돈의 맛이 좋긴 하더라고요.”
“제집 안방처럼 발 뻗고 잘도 주무시더군요. 잠꼬대도 하신 거 압니까?”
“제가 진짜 그랬어요? 어쩐지 승무원들이 날 보고 웃더라.”
한지율이 허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두 분 모시고 또 오세요. 언제 다시 와도 여기는 변함없을 겁니다. 세상이 다 변해도 여기만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 같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예전과 똑같은지 놀라울 정도예요.”
“한지율 씨한테는 여기가 고향 같은 곳이겠어요.”
“고향이라기엔 좋은 추억이랄 게 없는 곳입니다. 늘 이곳에 올 때마다 그랬어요. 한기우에게 시달리거나, 큰아버지 식구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쉬질 못한다거나. 이렇게 느긋하게 이곳 경치를 즐길 여유가 없었어요.”
“이번엔 좋은 추억 많이 만들면 되죠.”
한지율이 짧게 웃고는 긴 숨을 허공에 내뿜었다. 맞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장난을 치듯이 해윤의 거칠고 투박한 손을 만지작거렸다. 어지간히도 이 손의 감촉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기타 가지고 나올 걸 그랬어요. 노래 부르고 싶다.”
“그냥 부르세요. 들어줄 테니까.”
해윤은 가볍게 웃고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밤하늘을 향해 노랫소리를 뿜어냈다. 주위 모든 게 관객이었다. 밤하늘의 별, 달, 호수,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무, 만년설이 빛나는 산. 그리고 한지율. 그의 말대로 언제, 어느 때건 이곳의 풍경은 변함없을 거다. 한지율도 변함없이 제 옆에 있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노래 한 곡이 끝났는데도 한지율은 아무 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한마디 빈정거릴 법도 한데,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본 채로 침묵했다. 눈에 보이는 장엄한 풍경에 넋을 잃은 듯도 보였고 생각에 잠긴 듯 보이기도 했다. 그는 편안해 보였다. 몸의 힘을 쭉 빼고 늘어져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었다.
해윤은 그런 그를 흘긋 보고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입을 벌려 다시 노래를 불렀다. 저 철썩이는 물소리에 맞춰 밤새도록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름답네요.”
두 번째 곡이 끝났을 때, 한지율이 입을 달싹였다. 해윤은 여전히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한지율을 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군요. 여기가.”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해윤으로선 알 수 없었다. 지금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하지만 아름답다는 그의 감정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아름다웠다.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 뺨을 스치는 바람, 물소리, 한지율.
빤히 보는 해윤의 시선을 느꼈는지 한지율이 고개를 틀었다. 안경알 속, 그의 두 눈이 해윤을 보고 미소 지었다. 주위 풍경이 달라져서인지 그의 미소가 낯설어 보였다.
“그렇게 웃을 수도 있는 분이었네요.”
“이상합니까?”
“아뇨. 보기 좋아요.”
해윤은 솔직하게 소감을 말했다. 그의 모양 좋은 입술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러자 평소의 비웃음 가득한 얼굴이 됐다.
그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곧 보드라운 입술이 닿았다. 서늘한 그의 입술 살점이 해윤의 입술 위에 사르르 녹아 따스하게 감겨들었다. 그 온기가 너무도 상냥하고 달콤해 해윤의 입에서 다디단 숨이 새 나왔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밀려 들어와, 해윤의 입 안에 남은 한숨까지 긁어 갔다.
그의 손이 뺨을 매만지는 손길이 간질간질했다. 피부에 닿는 그의 보드라운 손의 느낌이 이젠 익숙했다. 눈을 감아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있어도 이 손의 촉감, 이 입술의 감촉은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 같았다.
입 안 점막을 훑던 그의 혀가 빠져나가며 입술이 떨어졌다. 따스한 접촉의 여운에 젖어 벌어진 입술 끝을, 그의 손끝이 더듬었다.
그의 눈에 열기가 번들거렸다.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결도 뜨겁고 질척했다. 해윤의 입술 끝이며, 볼을 매만지는 그의 손에도 물기가 가득했다. 그의 숨결이 닿는 해윤의 입술도 덩달아 촉촉해졌다.
“들어갈까요?”
그의 달착지근한 목소리가 차지게 귀에 감겼다. 해윤은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그의 눈이며, 입술을 핥듯이 바라보는 시선이 흠뻑 뜨거워진 건 해윤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손을 맞잡고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숙소로 들어가 열쇠로 문을 여는 동안에도, 한지율은 해윤의 손을 놓지 않았다. 한 손으로 문을 밀어 열며, 그는 해윤을 안으로 끌어 들였다.
안에 들어선 순간, 그는 성급하게 해윤의 허리를 끌어안아 입술을 밀어붙였다. 밖에서 아주 잠깐 닿았던 서로의 입술과 입술이 차지게 뭉개졌다. 델 것 같았다. 맞닿은 입술이,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그의 혀가 너무도 뜨거워 닿는 부위마다 화상을 입을 듯했다.
해윤도 어설프게나마 입을 벌려 헐떡이며 그의 입술을 빨았다. 얽혀 오는 혀를 깊게 빨아들이며 한지율의 몸을 더듬었다. 그도 해윤의 허리며 등을 더듬고, 어루만지고 급하게 옷가지를 벗겨 냈다.
둘이 맞붙어 하나의 덩어리가 된 채로 문이 훤히 열린 침실로 이동했다. 그리곤 캐리어에서 꺼낸 옷가지가 널린 매트리스 위에 쓰러졌다.
“옷이 구겨질 것 같은데요.”
등에 깔린 옷이 한지율의 옷이라 신경이 쓰여 꿈틀대자, 그가 상관없다고 속삭이며 안경을 벗어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급하게 해윤의 바지 버클을 풀어 헤쳐 손을 밀어 넣었다. 그가 손끝으로 불룩 선 해윤의 브리프 앞섶을 매만지며 키스했다.
“젖었어요. 아래가 흥건한데.”
입술을 맞붙인 채로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입술 위에서 느껴지는 젖은 음색의 진동이 야했다.
“한지율 씨가 계속 만지니까… 흐으읏.”
이미 한껏 성이 난 성기에 그의 손끝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허리께가 파르르 떨렸다. 몸이 꿈틀대자 등 뒤에 깔린 한지율의 옷이 사정없이 구겨지는 게 느껴졌다. 못 견디게 신경 쓰였다. 해윤은 몸을 틀어 형편없이 구겨진 한지율의 옷을 손에 쥐었다. 그러자 그의 손이 뻗어 나와 해윤이 손에 쥔 옷가지를 낚아채, 뒤로 휙 내던졌다.
“나중에 치워요. 이런 데 신경 쓸 여유 없어요.”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착 깔렸다. 뿜어져 나오는 숨결이 거칠었다. 그의 손이 해윤의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쑥 끌어내리곤, 그것도 바닥에 내던졌다. 휑하게 노출된 다리가 벌어지며 그의 몸이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리곤 그는 해윤의 다리를 들어 제 어깨에 걸쳤다.
아래에 그의 뜨거운 하반신이 밀착됐다. 그는 그 상태로 상반신을 앞으로 숙여 해윤에게 키스하며, 한 손으론 제 바지 버클을 풀어 내렸다. 툭 튕겨져 나온 그의 성기가 허벅지를 두들겼다. 그는 혀를 얽어 오며 음란하게 제 아래를 비벼 댔다. 뭉툭한 귀두가 노골적으로 해윤의 아래에 비벼졌다.
귀두로 문지르는 것만으로도 구멍이 기대감에 부풀어 뻐끔거렸다. 빠끔대는 구멍을 비집고 들어올 듯, 말 듯, 입구를 문댈 때마다 전율 같은 쾌감이 튀어 해윤의 엉덩이며 허리께가 움찔거렸다.
키스는 한없이 달콤했으나 밀착된 아래는 뜨거워서 타들어 갈 듯했다.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음란한 구멍이 애가 탈대로 타서, 당장이라도 그의 성기를 집어삼킬 듯이 벌름거렸다. 그렇게 애를 태우다 그는 천천히 해윤의 아래를 비집어 열고 안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구멍이 빠듯하게 벌어지며 그의 것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였다. 찌릿한 쾌감에 허벅지 안쪽에 바짝 힘이 들어가며 발가락이 곱아 들어갔다. 해윤은 흐으읏, 숨을 집어삼켰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시트자락을 감아쥐었다.
“아픕니까?”
그가 끝부분만을 살짝 삽입한 채 낮게 속삭였다. 해윤은 입술을 잘근 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프면 말해요.”
“괜찮…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 하아앗!”
갑자기 그의 성기가 빠르게 푹 꽂혔다. 해윤은 참지 못하고 목을 홱 젖히며 신음을 터뜨렸다. 저절로 허리가 퉁 튀어 몸이 아치형으로 휘어졌다. 뿌리 끝까지 꽂혔다가 내벽의 점막을 샅샅이 훑으며 쑥 빠져나갔다. 그의 크기대로 벌어진 구멍이 닫히기도 전에 다시 굵은 성기가 끝까지 꽂혀 들어왔다. 푹, 하고 무자비하게 찌르고 쳐올렸다.
아프지 않다는 대답을 듣고는 애써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상냥함을 벗어 던지고 빠르게 움직이며 해윤의 안을 사정없이 헤집었다. 덕분에 해윤의 이성도 한순간에 날아갔다. 그는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움직이며 해윤의 넋을 빼놨다.
“흐읏, 읏! 하아아! 아앗!”
해윤의 목에서 새된 신음이 터졌다. 퍽, 퍼억 쳐올리는 강도가 갈수록 세져 터져 나오는 신음에 울음이 섞여 갔다. 쉴 새 없이 들락거리며 내부의 자극점을 쉴 새 없이 찔러 대는 통에, 손도 대지 않았는데 성기가 발딱 서서 묽은 액을 질질 흘렸다. 그가 찔러 올 때마다 성기가 꺼덕거리며 액을 사방에 뿌렸다.
접합 부위에서 나는 젖은 마찰음. 울음 섞인 신음. 그의 움직임에 맞춰 매트리스가 요란하게 삐걱거리는 소리. 갖가지 음란한 소음이 또 하나의 자극이 되어 해윤을 괴롭혔다. 눈에서 불꽃이 펑펑 튀는 듯했다. 그의 것을 받아내는 아래가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하아, 좀 처, 천천히, 천천히 좀….”
해윤이 애원하며 옆으로 몸을 비틀자, 그의 성기가 쑥 빠져나갔다. 하지만 곧 다시 쑤셔 박혔다. 몸의 각도가 틀어져 삽입의 각도가 더욱 깊어졌을 뿐이었다. 아까와는 다른 부위가 자극당해 오히려 미칠 지경이었다. 해윤은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틀어 시트에 얼굴을 파묻었다.
“날 봐요. 해윤 씨.”
그러자 그가 성기를 찔러 넣은 채로 손을 뻗어 해윤의 턱을 쥐어 돌려 자신을 보게 했다. 땀에 번들거리는 그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의 두 눈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해윤 씨. 좋아합니다.”
그의 도톰한 입술 새로 꿀같이 다디단 고백이 흘러나왔다. 아…. 반칙이다, 이런 건. 해윤의 몸이 바르르 떨리며 아래가 꽉 조여들며 그의 성기를 씹어 물었다. 그가 낮고 굵은 신음을 삼키며 꿈틀했다.
“좋아해요.”
그가 다시 한 번 달게 속삭이며 상반신을 앞으로 숙였다. 입술과 입술이 뜨겁게 닿았다. 그는 해윤의 입술을 진하게 빨며 다시 움직였다. 좋아한다는 고백에 답하듯이, 해윤의 아래가 열렬하게 그를 받아들였다. 퍽, 찔러 올리는 감각이 한층 더 짜릿해졌다. 자극점이 기꺼이 펑펑 터졌다.
“저도, 흐으읏. 좋아합니다. 한지율 씨. 좋아해요.”
해윤은 정신없이 흔들리며 열에 들뜬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혀를 내밀어 그의 입술을 핥고,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어느 순간 안에서 그의 성기가 갑자기 크게 팽창하는가 싶더니, 급하게 빠져나가며 뜨거운 체액을 뿜었다. 거의 동시에 해윤도 몸을 크게 떨며 절정을 맞이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고 황홀한 절정이었다.
***
호수와 맞닿은 이 마을 중앙엔 작은 부두가 하나 있었다. 사람들은 부두 앞에 앉아 햇볕을 쬐며 점심을 먹거나 휴식을 즐겼다.
두 사람도 그날 점심 식사로 버거를 포장해 부두 앞, 호숫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버거 포장을 까 한입 맛본 순간, 해윤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 마을 최고의 버거 가게라 소문난 곳이라 줄 서서 사 온 것이었는데. 기다려서 사 온 보람이 있는 맛이었다.
“와. 진짜 맛있어요.”
해윤의 입에서 탄성이 끊길 날이 없었다. 여기선 보이는 것, 듣는 것, 맛보는 것 하나하나가 다 놀라웠다.
“한국 가서도 계속 생각날 거 같아요. 여기서 사는 사람은 정말 좋겠어요. 이런 경치를 보고 이렇게 맛있는 것도 매일 먹고. 이런 데서 살면 어떤 기분일까요?”
“막상 살아 보면 아무 감흥이 없어질 겁니다. 사람은 적응의 생물이라 어딜 가서든 금세 적응해 익숙해지니까요.”
하여튼 흥 깨는 데는 도사였다. 대충 받아쳐 주면 될 것을. 해윤은 속으로 웃으며 버거를 크게 베어 물었다.
볕이 내리쬐는 한낮인데도 바람이 매섭다. 이렇게 추운데도, 아이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호수 중간에 둥둥 뜬 부표 위에 옹기종기 모여서 있는 게 보였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녀석들은 괴성을 지르며 호수로 뛰어들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추웠다.
“쟤들은 춥지 않을까요?”
“춥죠. 예전엔 여름에 왔던 것 같은데 그때도 물이 굉장히 차가웠습니다.”
안 그래도 호기롭게 물에 뛰어들었던 아이들이 허우적대며 부표 위로 기어올랐다. 애들은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면서도 저들끼리 킬킬댔다.
“한지율 씨도 어렸을 때 여기 와서 저렇게 수영했었어요?”
“여기 이 자리에 앉아서 책을 보며 한기우나 친척들이 노는 걸 봤죠. 어른인 척 점잔 떨면서. 사실 저도 수영하며 놀고 싶었어요. 책은 폼이었죠.”
한지율이 잠시 말을 멈추고 픽 웃고는, 남은 버거를 입 안에 넣었다.
“이번엔 눈치 보실 거 없어요. 수영하고 싶으면 수영하세요.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가야죠.”
“이런 날씨에 물속에 들어갔다간 얼어 죽습니다. 추억 만들기 하다가 죽는 수가 있어요.”
한지율다운 지극히 현실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새 몇 마리가 뒤뚱거리며 해윤 일행에게 다가왔다. 해윤이 손을 내밀자 먹을 것을 주는지 알고 다가왔다가 아무것도 없는 걸 깨닫고는 푸드득, 신경질적으로 날갯짓을 하며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호수 위를 가로지르던 증기 유람선이 뿌우우, 증기를 뿜어내는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호수를 둘러싼 산. 바다처럼 파도치는 호수 표면. 콧속이 쨍할 정도로 맑은 공기. 살갗을 스치는 선선한 바람.
꿈속에서나 나올 법한 그림 같은 풍경을 앞에 두고 해윤은 새삼 절감했다. 온몸으로 느꼈다. 살아 있다는 것의 기쁨을. 살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정말. 혼자가 아니어서, 한지율이 옆에 있어서.
“열심히 살아야겠어요.”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다간 뼈 부서집니다.”
해윤이 감상에 젖어 웅얼거린 말을 그가 받아쳤다.
“지금도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으니 무리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는 바로 변명하듯이 한마디 덧붙였다. 변명하듯이. 해윤은 음료 컵을 들어 쭉 빨아 마셨다. 콜라는 탄산이 죄 빠져 달고 밋밋했다. 한지율도 음료를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전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인간입니다. 타고난 성격이나 말투가 이 모양이에요.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그래도 후회하기 싫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걸 공부하는 기분으로 계속 꾸준히 노력 중이에요.”
해윤은 고개를 틀어 그의 옆얼굴을 보았다. 장난기가 발동해 해윤은 아이를 칭찬하듯이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기특해요. 기특해. 잘하고 있어요.”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해윤을 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요새 잘 웃고 잘 떠든다. 차갑고 서걱거리던 덩어리가 많이 유해지고 부드러워졌다. 해윤의 앞에서만 그런 것인지, 주위 사람들에게도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은 변화였다.
그리고 해윤도 웃음이 많아졌다. 많이 밝아졌다. 전에는 어둠만 보였다면 이젠 빛이 보였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빛의 세상에 발을 내디뎠다. 사방에 찬란한 빛이 가득하니, 속에 남은 어두운 찌꺼기도 싹 사라질 거라고 믿었다.
“전 사실 아직 악몽을 꿔요.”
“네.”
그는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어젯밤에도 해윤은 악몽에 시달렸다. 검푸른 물속 같은 악몽에 빠져 허우적대다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저를 괴롭히던 악몽 속, 악귀의 모습이 아니라 한지율의 얼굴이었다. 어둠 속에서 도드라진 그의 하얗고 미끈한 얼굴.
해윤은 그의 옷깃을 움켜쥐고 매달렸다.
‘한지율 씨….’
‘네. 나예요.’
그러자 그가 상냥하게 대답해 주었다. 예쁜 얼굴로 부드럽게 속삭이며 해윤을 끌어안아 줬다.
‘괜찮습니다. 괜찮을 겁니다.’
꼭 끌어안아 머리칼이며 등을 쓰다듬어 주고 귀와 뺨에 키스해 주었다. 물에 빠진 것처럼 턱 틀어막혔던 숨통이 트이며 땀에 흠뻑 젖은 몸이 늘어졌다. 잠기운에 칭얼거리는 애처럼 해윤은 그의 품속에 파고들었다. 그러자 단단한 팔이 더 강하게 해윤을 끌어안았다.
‘안심하고 자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그는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주고는 해윤이 다시 잠이 들 때까지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정수리를 적시는 그의 숨결이 따스했다. 피부색은 하얬지만 해윤을 끌어안은 팔은 단단하고 억셌다. 이 단단한 팔에 안겨 있으면 아무리 거친 비바람이 불어도 끄떡없을 것 같았다.
해윤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다시 잠이 들었다. 그가 아낌없이 나눠 주는 온기에 취해 더 이상 검푸른 물속에 잠기지 않고 푹 잠들었다.
“제가 또 악몽을 꾸면 깨워 주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대답하는 그의 보드라운 저음이 철썩이는 물소리에 섞여 살랑였다. 해윤은 모래사장 위에 놓인 한지율의 손을 바라봤다. 언제 보아도 기분 좋은 예쁜 손. 해윤은 장난치듯 손가락 끝으로 그의 하얀 손등을 툭툭 두들기고 긁었다.
한지율은 진지한 얼굴로 제게 장난을 거는 해윤의 몹쓸 손을 내려다봤다.
“키스해도 됩니까?”
“하지 마세요.”
해윤은 정색하며 거절했다.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 앞에서 게이 커플인 걸 광고할 일 있나 싶었다.
“해윤 씨는 남 시선을 너무 의식합니다.”
“남 시선을 의식해야만 하는 상황이죠.”
그가 또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기 전에 해윤은 말을 자르고 벌떡 일어섰다. 한지율도 따라 일어서며 몸에 붙은 모래를 탈탈 털어 냈다.
“숙소로 돌아가죠?”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숙소에 돌아가겠다는 건지. 의도가 뭐겠나. 해윤은 기타 가방을 둘러매고 모래사장 위, 산책로로 서둘러 올라갔다.
한지율도 따라 일어서는가 싶더니, 불쑥 얼굴을 들이밀어 해윤의 볼에 가볍게 키스하고 입술을 뗐다. 해윤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차피 우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어떻습니까? 두 번 볼 사람들도 아니고.”
그러며 그는 태연하게 몸에 붙은 모래를 탈탈 털어 냈다.
“아니, 그래도 공공장소에서 이러는 건….”
“숙소로 돌아갈까요?”
그는 해윤의 말을 자르고 진지하게 바라봤다.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숙소로 돌아가겠다는 건지. 의도가 뭐겠나.
“아뇨. 산책할 겁니다.”
그가 또 엉뚱한 짓을 할지 몰라, 해윤은 얼른 기타 가방을 둘러매고 모래사장 위, 산책로로 올라갔다. 한지율도 곧 어슬렁어슬렁 뒤따라 왔다.
라티노 몇 명이 계단참에 앉아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흥겹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보였다. 경쾌한 음색에 맞춰 아이들 몇 명이 방방 뛰고 소리를 지르며 신나 했다. 주위 관광객들도 노랫소리에 맞춰 어깨를 들썩였다. 인종도, 피부색도 다른 타인들이 하나가 되어 분위기를 즐겼다.
즉흥 연주를 하던 그들이 구경하고 선 해윤을 발견하곤 손짓을 해 보였다. 해윤이 등에 둘러맨 기타 가방을 본 모양이었다. 그들이 하는 소리는 영어가 아니라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뮤지션이냐고 묻는 겁니다. 함께 공연하자고 하네요. 해 봐요. 노래 부르려고 그 무거운 걸 들고 온 거 아닙니까.”
한지율이 그러며 해윤의 등을 떠밀었다. 등 떠밀린 해윤이 쭈뼛거리며 다가가자 그들이 열렬하게 환영했다. 그들과 계단참에 나란히 앉아 유명 밴드의 유명 곡을 연주하기로 하고 합을 맞췄다. 그들은 능숙하게 다소 어설픈 해윤의 연주와 노랫소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어느새 오랫동안 합을 맞춰 온 밴드 멤버들처럼 하나가 되어 노래를 이어 갔다. 신기하고도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성대가 기꺼이 탁 트여 최상의 음색을 뿜어냈다. 어느새 어색함은 사라지고 못 견디게 즐거워졌다.
관객들 사이에 한지율이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한지율만 보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앞으로도 해윤의 눈에는 저 사람만 보일 거였다. 그리고 저 사람도 늘 저렇게 저 자리에 우뚝 서서 해윤을 지켜봐 줄 거고.
해윤은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한지율도 입 끝을 올려 웃어 주었다. 쏟아지는 빛처럼 환하고 찬란하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