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율. 너라고 다를 거 같냐? 너도 결국 나랑 똑같은 개새끼야.”
죄수복을 입은 한기우는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중얼거렸다. 지옥 같은 금단 증상에 시달리느라 그는 중병을 앓는 환자처럼 퀭했다. 생기가 쪽 빠져 살 껍데기만 남은 것 같다. 움푹 팬 눈두덩 사이로 번들거리는 두 눈이 정상이 아니다. 입 끝에 걸린 뒤틀린 웃음도 비릿하다.
어지간히 버티기 힘든 모양이다. 한기우는 세 번째 자살 시도를 했다. 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를 날카로운 유리 파편으로 손목을 그었다고 한다.
지율은 마약에 손대 보지 않아 금단 증상이 어떤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악몽, 누적되는 피로, 심신이 갉아 먹히는 일상이 어떤 것인지는 경험해 봐서 잘 안다.
지율은 매일같이 그렇게 살았다. 괴로울 거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지율은 살아남기 위해 괴로워도 버텼다. 한기우도 살기 위해선 버텨야 할 거다. 버틸 수 없다면 별수 있나. 죽는 수밖에.
살아남기 위해 이 악물고 버티는 것, 죽는 것. 놈에겐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지 않나.
“내가 형과 똑같다고?”
지율은 한기우를 찾아와 마주 앉은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해? 나와 형은 처지가 다르지. 형과 나 사이를 가로막은 유리 막이 뭐라고 생각해?”
지율은 상반신을 앞으로 기울여 손을 뻗었다. 한기우와 자신 사이에 놓인 유리 벽을 보란 듯이 손으로 쓸었다. 두껍고 견고한 유리 벽을 경계로 두 세계가 정확히 나뉘어져 있다. 저 너머는 죄인의 세상, 이쪽은 평범한 자유의 세상.
그런데도 놈은 벽 반대편의 자유로운 세상 속 인간에게 너도 똑같은 놈이라고 지껄인다.
“한지율. 날 이긴 것 같지?”
“그런 소리, 이제 지겹지 않아?”
유리 막 너머에서 늘어져 앉은 한기우가 힘없이 웃었다.
“하긴 그렇다. 지겨울 만도 하겠어. 나도 슬슬 지겨워.”
한기우는 평소 같지 않게 쉽게 체념했다. 가시를 세워 쏘아붙일 기운도 없는 모양이었다. 며칠 전, 한기우의 자살 시도 소식을 들은 큰어머니는 큰아버지를 붙잡고서 또 한바탕 눈물 쇼를 펼쳤다.
‘당신, 진짜 너무해요. 피도 눈물도 없는 양반인 줄은 알았지만 어떻게 자기 자식이 죽어 가는데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아요? 이러다 진짜 애 잡겠어요. 정말 그 거지 같은 곳에 불쌍한 애를 계속 놔두실 거예요? 애 꼴이 말이 아니란 말이에요.’
당신의 그 불쌍한 둘째 아들이 사람을 둘이나 죽인 범죄자란 사실은 생각지도 않는 듯했다. 큰아버지가 들은 체도 하지 않자 그녀는 목에 핏대를 세워 악을 썼다.
‘당신의 그 매정함이 우리 기우를 그렇게 만든 거예요! 기우를 저렇게 망친 건 당신이야!’
뒤돌아 앉아 침묵을 고수하는 큰아버지의 어깨가 그날따라 축 처져 보였다. 자신 때문에 매일같이 전쟁이 벌어지는 집안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기우는 멍하게 눈을 끔뻑이며 입을 열었다.
“아직 좀 춥긴 한데 그래도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어. 봄이 오나 봐. 곧 꽃이 피겠네.”
아직은 겨울 점퍼를 입어야 할 정도로 쌀쌀했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였다. 한기가 드는지 그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또 넋이 나갔다. 초점 풀린 눈으로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던 한기우가 눈을 들어 지율을 보았다.
“우리 해윤이는 잘 있어?”
날 선 불쾌함이 지율의 귓속을 긁었다. 불쾌했다. 굉장히. 입 안에 고인 불쾌함이 쓰디 써 혀끝이 아렸다. 그래서 지율도 평소 같지 않게 예민하게 받아쳤다.
“그렇게 부르지 마. 우리 해윤이, 하는 거. 듣기 싫어.”
“너 되게 유치해졌다. 한지율. 진짜 그 남창 새끼한테 단단히 미쳤구나?”
한기우가 이를 드러내 킬킬 웃었다. 속에서 불이 치밀었다. 놈에게 자신이 조롱당하는 건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저 더러운 입으로 그 사람을 저딴 식으로 모욕하는 소리는 도저히 못 들어 주겠다.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기분이 엉망진창으로 더러워졌다. 한편으론 우습기도 했다. 추레한 죄수복을 입고 저 안에 갇힌 놈이 지껄이는 소리에 발끈할 이유가 뭐 있다고.
“실컷 발악해. 어차피 형은 거기서 평생 못 나올 테니까.”
“하긴 우리 해윤이가 씹질을 잘하긴 해. 잘 빨고 잘 받고. 구멍이 쫀쫀하게 잘 씹고. 엄청나게 예쁘지는 않은데 몸 선이 나긋나긋하고 잘 감겨.”
“닥쳐, 좀. 다 죽어 간다더니 개소리 지껄일 기운은 있나 보네.”
“키스하거나 만져 주면 자기도 모르게 엉덩이를 흔들면서 앵앵대잖아. 흥분하면 자기도 모르게 신음하며 허리를 흔들면서 유혹하는 게 타고난 요부 같아. 그렇지? 가수라서 그런지 우는 소리도 노래 같아. 그래서 막 울리고 싶어. 큰 눈에 그렁그렁 눈물 매달고 보는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귀엽고, 가련하고, 그러면서도 되게 남자답기도 하고. 참 예뻐. 우리 해윤이….”
그는 되는 대로 지껄이다 말끝을 흐렸다.
“보고 싶다. 해윤이가 보고 싶어. 왜 그 애는 한 번도 날 보러 오지 않는 거야. 내가 해윤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여긴 너무 춥고 외로워.”
그러다 한기우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율은 가만히 앉아 유리 벽 너머의 원맨쇼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급기야 감정이 격해진 한기우는 눈을 감고 눈물을 주르륵 쏟았다.
“보고 싶어. 해윤아. 해윤이가 불러 주는 노래 듣고 싶어.”
몇 초간, 짧게 자기 연민에 흠뻑 젖어 눈물 흘리던 한기우가 갑자기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한지율. 너랑 난 똑같은 부류라 해윤이를 괴롭게 하기만 해. 너 때문에 결국 해윤이는 죽고 말 거야. 미라가 나 때문에 죽은 것처럼. 해윤이는 널 감당하지 못해서 못 견디고 도망칠 거야. 그러니까 옷을 벗겨서 손을 꽁꽁 묶어. 언제든지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을 게 분명해. 알몸으로 묶어서 가둬야 못 도망치지.”
한기우의 입에서 쉼 없이 썩은 오물 같은 말이 쏟아져 나왔다.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려 했으나, 뺨이 씰룩이며 뒤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교도관이 접견실에 들어와 접견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며 한기우를 일으켜 세웠다. 팔을 붙잡혀 안으로 끌려 들어가면서도 놈은 멈추지 않고 지껄였다.
“알았지?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래야 못 도망쳐. 그리고 해윤이한테 내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 줘.”
개새끼. 지율은 이를 갈았다. 놈이 쏟아 낸 말의 오물에 푹 젖어 악취를 풍기는 채로 교도소 밖을 나섰다. 씨불이는 놈의 입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 싶었다. 유리 벽이 없었다면 진짜로 놈에게 달려들어 목을 졸라 흔들었을 게 분명했다.
살의와 분노가 끓어 넘쳐 휘청거리며 햇볕 아래를 비척비척 걸어 차에 올라탔다.
내가 너와 똑같다고? 내가 너와 똑같은 인종이라 그 사람을 괴롭힐 뿐이라고? 그 사람이 날 감당하지 못해서 도망치고 말 거라고? 웃기지 마. 난 너와는 달라. 미친 새끼야. 난 너 같은 새끼와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야.
지율은 차 안, 룸미러에 비친 제 얼굴을 보았다. 살의에 가득 차 일그러진 얼굴. 안경알 안쪽의 두 동공이 벌겋다. 얼굴뿐 아니라 목까지 시뻘겠다. 당장에라도 누구 하나 찔러 죽일 듯한 악귀 같은 얼굴이다. 보기 흉했다. 조금도 아름답지 않았다. 석해윤, 그 사람이 가끔 넋이 나가 흘긋거리던 지율의 얼굴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지금 지율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얼굴을 할까. 어떤 표정을 지어 보일까.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 외면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살인 누명을 썼을 때에도 자신을 믿어 주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자신은 그토록 차갑고 모질게 그 사람을 후려쳤는데, 그는 자신을 믿어 줬다.
지율은 꽤 오래도록 차 안에서 그러고 앉아 있었다. 뱃속을 뒤집던 맹렬한 분노가 잦아들고 평온이 찾아왔을 무렵, 그리움이 바람처럼 밀려들었다.
석해윤이 보고 싶었다. 그의 순한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둥글고 유순하고 여리고 가냘파 보이는 얼굴. 여성스러운 구석은 없지만 남자답게 선이 굵은 것도 아니라, 밋밋해 보이는 외모. 하지만 자세히 뜯어 보면 오밀조밀하게 정돈된 이목구비였다. 반듯한 이마에 형태가 유려한 눈썹, 다소 긴 속눈썹과 큰 눈. 쭉 뻗은 콧날. 붉고 도톰한 입술. 평소엔 기가 죽어 비굴하게 내리깔려 있지만 한 번씩 강하게 빛을 뿜으며 빛나곤 하는 두 눈.
그 두 눈으로 자신을 보는 시선이 그리웠다. 그 입술로 한지율 씨,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듣고 싶었다. 제 이름을 부르며 달싹이는 그의 붉은 입술을 깨물고, 핥고, 그의 마른 몸을 으스러지게 끌어안고 싶었다. 그리움과 더운 욕망이 동시에 치밀어 분노와 살의를 뭉갠다. 석해윤이라는 사람을 떠올리면 늘 뜨거운 성욕이 함께 들끓는다.
지율은 당장 핸드폰을 들어 석해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해윤 씨. 출장 다녀왔습니다. 우리, 만나죠. 언제가 괜찮겠어요?”
사실 외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건 어젯밤이었다. 해윤의 목소리에 반가움과 기쁨이 묻어났다. 노래하듯이 감미로운 목소리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아래가 뜨끈하게 열이 올라 묵직해진다.
이제 저 목소리는 자신만이 들을 수 있었다. 한기우가 아무리 해윤을 데려오지 않으면 죽겠다 발광을 해도, 그를 이곳에 데려오는 일은 없을 터였다.
***
실수했다. 그에게 메뉴판을 보여 주는 게 아니었는데. 뒤늦게 한지율은 후회했다.
석해윤은 엄청나게 중요한 기밀 서류를 보듯이 메뉴판을 들여다봤다. 미간을 좁히고 단 두 장뿐인 메뉴판을 들척이며 보고 또 본다. 벌써 몇 분째 저러고 있다.
“왜요? 마음에 드는 메뉴가 없습니까?”
“아뇨. 그건 아닌데.”
석해윤은 말끝을 흐리며 다시 메뉴판을 노려보았다. 그가 왜 저러는지 잘 안다. 메뉴 뒤에 붙은 가격을 보고 저러는 게 틀림없다.
“그럼 제가 알아서 주문할까요? 배고픈데요.”
“아, 죄송합니다. 저녁 식사 시간이라 배고프실 텐데요. 그럼 전 이걸로 할게요.”
그러며 그가 손으로 가리키는 건 애피타이저인 수프다.
“이건 수프인데요. 이것만 드셔서 되겠어요?”
“배가 고프지 않아서요.”
한지율은 속으로 픽 웃고 말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일이 바빠서 점심도 굶었다며, 배고파서 눈 돌아가겠다고 하던 사람이.
지율은 손을 들어 서버를 부르곤 디너 코스를 주문했다. 단품으로 이것저것 시키는 것보다는 디저트까지 나오는 풀코스 메뉴가 나을 것이다. 가게를 예약하며 진작 코스 요리로 주문해 둘 것을 그랬다.
“디너 코스 되게 비싸던데. 식사 한 끼에 너무 많은 돈을 쓰시는 거 아닌가요? 힘들게 버시는 돈인데.”
해윤은 중얼거리며 슬쩍 한지율의 눈치를 살폈다. 메뉴판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선뜻 시킬 만한 가격대의 음식이 없었다. 샐러드 하나도 몇 만 원이었다.
한지율은 해윤에게 그냥 좀 드세요, 하는 소리를 툭 뱉으려다 눌러 참았다. 안 그래도 오후에 송 비서에게 말 좀 곱게 쓰라고 한마디 들었던 참이다.
‘이사님은 다 좋은데 말이 너무 거칠어요. 함부로 툭툭 뱉는 말투 좀 고치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해윤 씨가 은근히 마음 여린 분이라 알게 모르게 상처받으실 거라고요. 우리 해윤 씨, 엄청 좋은 분인데 상처 주지 마세요. 이사님도 아시잖아요. 해윤 씨가 진짜 진국이란 거. 좋은 친구 잃고 후회하지 마시고 말버릇 좀 고치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해윤의 마음이 여린 건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눈치가 빠르고 남 눈치를 잘 보는 성격인 건 사실이다.
“제가 해윤 씨에게 비싸고 좋은 음식 사 드리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절 애인한테 이 정도 음식도 못 사 주는 능력 없는 남자로 만들지 마세요.”
한지율은 한껏 목소리를 누그러뜨려 말을 흘렸다. 해윤이 그래도, 하며 입을 달싹였다.
“치킨에 맥주도 좋지만 가끔 이렇게 분위기 좋은 곳에서 데이트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까.”
“분위기 있게 데이트… 좋죠. 다음엔 제가 꼭 사 드릴게요.”
“네. 다음엔 꼭 해윤 씨한테 얻어먹겠습니다.”
해윤이 그제야 배시시 웃었다. 귀여웠다. 한때는 짜증을 치밀게 하던 저 성격이 이젠 귀엽게 보인다.
이 주일 만의 만남이었다. 정신없이 일에 치여 살다 보니 보름이 훌쩍 지나갔다. 해윤 씨, 그동안 나 안 보고 싶었어요? 하고 묻는다면 저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지율은 생각에 그치지 않고 망설임 없이 그 소리를 입 밖으로 뱉었다.
“그야 당연히 보고 싶었죠.”
해윤이 짐짓 당황해 하며 대답했다.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해윤 씨 얼굴 보고 얘기하니까 좋군요.”
해윤의 뺨이 붉어졌다. 저 사람은 이런 상황을 못 견디게 부끄러워한다. 순진한 사춘기 소년처럼. 민망해서 도저히 못 견디겠는지 해윤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일은 잘 끝내셨어요?”
“일단 급한 불은 껐습니다.”
“다행이네요.”
한지율이 지난 보름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웅얼거렸다. 애피타이저로 수프가 먼저 나왔다. 해윤이 아까 단품으로 주문하려 했던 오늘의 수프였다.
“와. 수프가 되게 작구나.”
해윤의 입에서 작은 탄성 섞인 중얼거림이 새 나왔다. 저 조그만 게 만 원이 넘는단 말이지, 하는 궁상떠는 소리가 생략된 소리였다. 스푼으로 떠서 한입 맛보니 맛은 기가 막히다. 갑자기 참았던 허기가 확 몰려들어 해윤은 정신없이 수프를 떠먹었다.
저렇게 맛있을까. 어지간히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지율은 수프를 먹는 해윤의 말간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안색이 많이 좋아졌다. 움푹 패어 있던 눈가며 뺨에 살이 붙고 피부에 윤기가 돈다. 한때 얼굴 전체에 드리워졌던 그늘이 싹 걷혔다. 건강한 반짝임과 생기가 가득하다. 보기 좋았다. 진심으로.
“제가 너무 게걸스럽게 먹었죠?”
바라보는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해윤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물었다. 사사건건 눈치를 살피는 저 버릇은 고쳐 주었으면 좋겠는데. 생각만 하고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오늘은 말조심하려고 노력 중이니까.
그는 사소한 것 하나도 조심스럽게 지율의 눈치를 보았다. 지율이 그렇게 만들었다. 엇나가고 뒤틀린 첫 만남 이후, 계속 저 사람을 모진 말로 후려치며 저렇게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하지만 저 남자는 저러다가도 어느 순간 참지 못하고 발끈해서 눈을 부릅뜨고 짜증을 낸다. 남 눈치만 보며 꾹꾹 눌러 참아 속으로 삭이는 성격이었다면, 저 사람도 못 견디고 죽어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신미라가 그랬듯이.
갑자기 속이 싸했다. 신미라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한기우의 불쾌한 낯짝도 함께 떠오른다.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자꾸 그렇게 눈치 보시면 저도 굉장히 불편합니다.”
말을 뱉고 아차 싶었다. 또 뱉는 말에 뾰족하게 날이 섰다. 하루아침에 이 몹쓸 말버릇이 고쳐질까. 지율은 스푼을 내려놓고 물을 마셔 불편한 속을 가라앉혔다.
“해윤 씨는 먹는 모습도 귀여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맘껏 드시라는 소리입니다.”
“오늘 왜 이러세요? 낮술이라도 드셨어요?”
해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이없어했다. 지율은 실소를 터뜨렸다. 기어이 웃게 만든다.
저녁 식사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음식 맛은 최상이었다. 석해윤도 나오는 음식마다 감탄을 하며 맛있게 싹싹 비웠다. 사 주는 보람이 있는 사람이었다.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니 기분이 좋은지 해윤은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라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노래 부르듯 흥얼거리는 감미로운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았다. 모처럼 즐거운 식사 시간이었다. 속을 뒤집히게 하던 불쾌함도 싹 가셨다.
“야. 한지율. 올 거면 진작 나한테 연락하고 오지 그랬냐.”
식사 후 디저트를 먹는 사이, 한 남자가 테이블에 불쑥 다가왔다. 고교 동창인 황민식이었다. 지율은 적잖이 놀랐다. 이곳에서 그와 마주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한 탓이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내가 못 올 데 왔냐? 여기 우리 형이 하는 식당이잖아.”
“그거야 알지. 그게 아니라 네가 외국 어디에 있다고 들어서.”
“미국 있다 들어왔어. 들어온 지 일주일도 채 안 됐다. 이제 미국 생활 정리하고 한국에 체류하려고. 안 그래도 귀국 기념으로 친구들을 불러 모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만나네. 아, 안녕하세요. 지율이 친구분이세요? 황민식이라고 합니다. 지율이랑은 고교 동창이에요.”
황민식이 넉살 좋게 웃으며 해윤에게 인사했다. 해윤을 본 황민식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안녕하세요. 석해윤입니다.”
해윤도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저…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어요? 왜 이렇게 낯익지? 누구랑 엄청 닮은 것 같은데.”
황민식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아! 하며 손뼉을 쳤다.
“아. 맞다. 신미라! 누굴 닮았나 했네. 해윤 씨, 혹시 신미라라고 알아요? 혹시 가족이나 친척 중에 신미라라고 있어요? 신기하네. 진짜 기가 막히게 닮았다.”
“식사 다했으니 일어나죠. 민식아, 우린 나중에 만나서 얘기하자.”
지율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서며 황민식의 말을 잘랐다. 저놈이 불쑥 나타났을 때부터 진작 자리를 박차고 나갔어야 했다. 제 코트와 해윤이 벗어 둔 겉옷을 들며 서둘러 해윤을 일으켜 세웠다.
황민식이 입을 달싹여 뭐라 지껄였지만 지율은 듣지 않고 빠르게 돌아섰다. 조용히 뒤따라오는 해윤의 표정이 좋지 않다. 신이 난 아이처럼 쉼 없이 재잘대며 웃던 사람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계산을 끝내고 나가 지율은 손에 든 점퍼를 해윤에게 입혀 주었다. 낡은 점퍼다. 산 지 몇 년은 되었을, 너무 오래되어 숨이 죽은 패딩 점퍼. 과연 저 옷이 따뜻할까, 입으나 마나 하지 않을까 싶은 낡은 옷. 예전에 맞춤옷을 몇 벌이나 떠안겨 줬는데도 그는 늘 이런 옷을 입고 다닌다. 낡은 옷에 감싸인 마른 몸이 어째 평소보다 더 가냘파 보였다.
“왜 더 말랐어요? 일하느라 식사도 제대로 안 챙겨 먹었습니까?”
“마르다뇨. 오히려 살쪘어요. 그리고 아시잖아요. 어디 제가 굶을 놈인가요.”
지율은 그의 팔을 손에 움켜쥐어 흔들었다.
“팔이 가늘어서 부러질 것 같은데.”
그가 피식 웃으며 입을 달싹였다.
“오늘 저녁 잘 먹었어요.”
억지로 웃음 짓고 있다는 게 빤히 보였다. 억지웃음 짓는 두 눈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한데. 다시금 지율의 속이 싸해졌다. 배 속이 뒤틀렸다. 저 남자를 향한 동정과 연민, 저 가련한 남자를 아직 불안에 떨게 하는 자에게 향한 분노와 살의. 상반된 감정이 격렬하게 충돌하며 속을 어지럽혔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가요. 해윤 씨.”
지율은 맹렬히 뒤집히는 감정을 눌러 삭이며 나직한 목소리로 유혹의 말을 던졌다. 해윤은 대답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미소 띤 붉고 도톰한 입술이 숨 막히게 예뻐서 당장 키스하고 물어뜯어 맛보고 싶었다. 저 마른 몸을 단단히 끌어안아 제 품속에 가두고 싶었다. 저 두 눈이 더 이상 불안함에 흔들리지 않도록.
저 남자는 석해윤이다. 처음부터 그랬다. 저 남자는 신미라를 닮은 누군가가 아니라 석해윤이었다. 지율의 관점으로 보자면 저 남자가 신미라를 닮은 게 아니라, 신미라가 저 남자를 닮은 거였다.
한기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평생 신미라라는 존재를 모르고 살았을 남자다. 오래전에 죽은 여자가 질기기도 하다. 한기우뿐만 아니라 저를 닮은 죄밖에 없는 남자까지 운명의 끈으로 친친 감아 풀어 주질 않는다.
“신경 쓰지 말아요.”
지율은 석해윤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겼다. 어울리지 않게 다정하게 굴어 보았다. 술 한 방울 마시지 않았지만, 평소 같지 않은 분위기에 흠뻑 취해 상냥하게 굴고픈 밤이었다. 사실은 다 핑계다. 이 남자의 마른 몸을 끌어안고 싶었을 뿐. 해윤의 어깨가 움칫하더니 이내 부드럽게 풀어졌다.
“뭐가요?”
“아까 식당에서 있던 일 말입니다.”
“신경 안 써요. 다 지난 일인걸요, 뭐. 전 괜찮아요.”
가로등 불빛에 비쳐 반들거리는 해윤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키스하고 싶습니다.”
해윤이 깜짝 놀라 눈을 들어 지율을 보았다. 그는 당황하면서도 여기서는 좀…, 하며 뺨이며 눈가를 붉혔다. 저를 올려다보는 그의 붉어진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다. 불안함이 일렁이던 갈색 동공이 지율의 모습을 가득 담고서 빛났다.
저를 보는 남자의 두 눈이 예뻤다. 키스하고 싶다는 욕망이 더 강렬해진다. 와락 끌어안고 싶었다. 익히 맛본 저 도톰한 입술을 물어뜯고, 감겨 드는 저 몸속으로 파고들고 싶었다. 낡은 점퍼에 감싸인 저 몸이 어떤 형태를 지녔고, 어떤 체향을 지녔는지 잘 알기에 불쑥 치미는 충동을 참기가 괴롭다. 이 남자 앞에선 늘 단순하고 유치해진다. 아무 때나 불끈 발기하는 10대 소년처럼 예고도 없이 성욕이 불쑥 치밀곤 했다.
더는 저 사람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다. 제 짐승 같은 본능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이미 충분히 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후려쳐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무작정 참아 누르기에는 이 충동이 못 견디게 격하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푹 빠져 미쳤던 때가 있었던가. 처음이었다. 30대에 들어서서 처음 겪는 첫 감정이었고, 그렇기에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술에 취해 어깨동무를 하는 친구처럼, 지율은 해윤의 어깨를 감싸고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타 꼼지락대며 안전벨트를 매는 해윤의 뺨에, 지율은 불쑥 제 입술을 갖다 댔다. 그가 흠칫하며 얼굴을 뒤로 뺐다.
“한지율 씨, 오늘 좀 이상하시네요. 무슨 일 있으셨죠?”
“제가 평소에는 어떤데요?”
정말로 궁금해서 물었다. 저 남자가 보는 평소의 자신은 어떤 형태일까 궁금했다.
“이렇게 다정하진 않으신데. 말로는 빈정거려도 행동은 다정하긴 하셨지만요. 생각해 보면 평소에도 말투나 어조가 좀 세긴 해도 말하는 내용은 은근 부드럽긴 했는데… 애정 섞인 조언이라 해도 사람 속을 후벼 파는 싸가지 없는 말버릇이…. 아니, 그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라.”
말을 늘어놓을수록 이게 아니다 싶은지, 해윤은 인상을 쓰며 입을 닫았다. 곤혹스러워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다 지껄이고 보는 게 그다웠다.
“결국 제가 재수 없고 싸가지 없다, 이 말이군요.”
“좀 그렇죠.”
그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받아쳤다. 지율은 픽 웃었다. 그러고는 허벅지 위에 공손하게 놓인 해윤의 손을 붙잡았다. 거칠고 투박한 그 손을 입가로 가져가 입술을 댔다. 트고 갈라지고 못이 박인 데다 반창고가 감긴 손가락이 움찔 경련했다.
“이젠 안 그럴게요. 고쳐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율은 제 안에 존재하지 않는 달콤함을 쥐어짜 보았다.
“한지율 씨, 오늘 진짜 이상해요.”
그는 어이없는 듯 중얼거리면서도 붙잡힌 손을 떨쳐 내지 않았다. 그의 손끝에서 옅은 피비린내가 났다. 반창고에 감긴 손가락이 갈라지고 터져 피가 배어난 것이리라.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내는 손끝이다. 이 거친 손가락이 기타 줄을 튕기면 감미로운 음악이 울려 퍼진다. 그의 손이 주는 거친 촉감이 아쉬웠지만, 지율은 그의 손을 놓아주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저 손의 거친 촉감이 그리워지면 언제든 손을 뻗어 붙잡으면 될 테니까.
***
해윤은 떨리는 손으로 셔츠 단추를 풀었다. 낯선 곳에 내동댕이쳐진 아이처럼 잔뜩 긴장했다. 한지율의 집에 찾아온 게 처음이 아닌데도. 그와 관계하는 것도 익숙해질 만한데 왜 매번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셔츠를 벗어 내렸다. 살짝 한기가 들어 드러난 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박지형의 말에 따르면, 내다 버려도 아무도 안 주워 갈 낡은 옷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뱀이 허물을 벗은 것처럼 벗은 옷가지가 발아래에 똬리를 틀었다. 해윤은 속옷 하나만 걸친 채 몸을 숙여 옷가지를 주워 들어 곱게 개켰다. 먼지 한 톨 없는 깨끗한 집이라 더럽히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뭐 합니까?”
욕실에서 젖은 머리칼을 닦으며 나온 한지율이 말을 건넸다. 잠깐 들어갔다 나온 사이 아예 씻고 나온 건지, 그는 바스 가운 차림이었다. 그에게서 청량한 비누 향기가 풍겼다.
“옷 정리해서 놓아두려고요.”
“옷 줘 봐요.”
그가 손을 내밀어 해윤이 개켜 둔 옷을 가져갔다. 한지율은 벗어 둔 그의 슈트도 함께 들어 옷장 문을 열었다. 이제 보니 평범한 옷장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TV 광고에서 본 적 있는 가전제품이다. 어머니와 이모가 저거 꼭 사고 싶다며 노래를 부르던 제품 같다. 해윤은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 안을 들여다봤다.
“와. 광고에서만 봤지 실제로는 처음 봐요. 신기하다. 이거 그거죠? 안에 옷을 걸어 두면 냄새도 싹 빠지고 보송보송하다면서요?”
해윤은 그러며 기계 내부며 안에 걸린 옷을 만지작거려 봤다. 안에 옷을 걸던 한지율이 픽 웃었다.
“좋아 보입니까?”
“어머니랑 이모가 되게 갖고 싶어 하시더라고요. 요샌 이게 3대 혼수용품 중 하나래요. 이런 데 제 옷을 넣는 게 되게 황송하고 그렇네요.”
“기분은 괜찮아졌어요?”
한지율이 재잘대는 해윤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목소리며 시선이 달콤하기만 하다. 오늘 그는 꿀같이 달아서 낯설다. 안경을 벗은 미끈한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바라보니 마주 보기가 민망하다.
“괜찮죠. 괜찮지 않을 게 뭐 있어요. 전혀 기분 상하지 않았어요. 아까 그분, 한지율 씨와 고등학교 동창이라면 영진 외고 출신이죠?”
“그 얘긴 그만합시다. 지금 해윤 씨 기분,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겁니다.”
당사자는 괜찮다는데 왜 저 사람이 괜찮지 않을 거라 단정하지? 의문이 떠오른 순간 명치끝이 아렸다. 맛있게 먹은 저녁 식사가 얹힌 것 같았다. 한지율의 말대로 괜찮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듣는 신미라의 이름. 그 이름을 듣자 한 남자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한 전무님이… 제가 면회하러 와 줬으면 한다고 들었어요.”
“누가 그러던가요?”
“비서실장이라는 분한테서 몇 번이나 전화가 왔어요. 전무님이 많이 힘들어하신다면서. 자살 시도를 하셨다면서요.”
한지율이 기계의 문을 탁, 소리 나게 닫았다.
“갈 필요 없어요. 해윤 씨가 거기엘 왜 갑니까? 그 새끼가 무슨 염치로 당신을 찾아. 내가 안 보내. 미쳤다고 당신을 또 살인자 새끼 앞에 들이밀어?”
해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지율의 격앙된 목소리를 들으니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사실은 해윤도 그랬다. 죽어도 싫었다. 그 댁 사모님이 직접 찾아와서 우리 기우 좀 만나 봐 달라고 매달려서 빈다 해도 싫다고 할 생각이었다. 한기우의 얼굴을 두 번 다시 보기 싫었다.
“석해윤 씨.”
이름을 부르는 나직한 소리에 해윤은 네, 하며 그를 보았다.
“해윤 씨 눈앞에 있는 게 누굽니까?”
“한지율 씨죠.”
“네. 접니다. 그러니 절 보세요. 나만 봐요. 날 보면서 그 새끼 얘기는 하지 말아요.”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부끄럽고 민망해서 해윤은 웃고 말았다. 역시 오늘 그는 이상하다. 보름간의 출장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하지만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오늘따라 왜 이럴까, 걱정하고 의심하는 시간에 평소 같지 않은 그의 다정함에 푹 빠져 허우적대는 게 더 효율적일 터다.
지율은 손을 뻗어 귀엽게 쫑긋거리는 해윤의 귀를 감쌌다. 손에 감싸 만지작대니 간지러운지, 해윤이 약간 목을 움츠리며 웃었다. 얼굴을 가까이 해 웃음 띤 그의 도톰한 입술에 키스했다. 말캉한 입술 살점이 온기에 맞닿아 보드랍게 녹았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녹아 버릴 듯한 숨이 새어 나왔다.
달다. 그의 젖은 숨결이며 혀끝에 닿는 타액의 맛까지. 혀를 밀어 넣어 입 안을 헤집자, 목 안 깊숙한 곳에서 그르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헐떡인다. 벗은 몸이 바르르 떨리는 게 귀여웠다.
지율은 약하게 떨리는 해윤의 어깨를 둥글게 쓰다듬으며 팔뚝을 쓸었다. 보송보송 말라 있는 매끄러운 피부가, 지율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렸다. 손바닥에 착 감기는 살갗이 매끄럽고 보드랍다. 쾌감에 약해 조금만 만져 줘도 움칫하며 떨리는 유연한 몸이 예쁘다. 피부색, 늘씬한 몸의 형태, 실팍한 근육이 올라붙은 유륜 위에 도드라진 갈색 유두까지. 귀엽고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다. 지율은 제 아래가 한껏 발기해 팽창하는 것을 느꼈다.
가슴을 쓰다듬던 손으로 도드라진 유두를 살짝 건드리자 해윤은 흠칫 놀라 반사적으로 엉덩이를 튕겼다. 자극에 못 이겨 저도 모르게 허리며 엉덩이를 움찔대며 흔들고 있다는 걸 본인도 알까.
한기우가 지껄인 개소리가 불현듯 떠오르며 기분이 내동댕이쳐졌다. 석해윤의 알몸이 눈앞에 있는 듯, 혼몽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나른하게 지껄이던 한기우의 목소리. 놈은 이 몸을 안다. 이 몸에 손을 댔고, 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자신이 만지는 이 매끈한 살갗을, 놈도 만졌다.
뱃속이 들끓었다. 시뻘건 불꽃이 온몸을 덮친 듯하다. 지율은 헐떡임을 내뱉는 그의 입술을 깨물며 다시 혀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혀끝으로 입 안을 헤집고 쑤셨다. 해윤도 어설프게나마 혀를 내밀고, 입을 벌려 지율의 키스를 맞아들였다. 혀와 혀가 난잡하게 얽히고 타액이 섞여 온 입 안이 흠뻑 젖었다.
음란하게 꿈틀대는 옆구리를 쓸다가 그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어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발정이 난 수컷 짐승처럼, 지율은 발기한 제 아래를 그의 다리 사이에 문질렀다. 어느새 바스 가운 자락이 풀어져 발기한 성기가 튕겨 나와 그의 하얀 허벅지를 적셨다.
숨이 차는지 그가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지율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맞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지며 얽혀 있던 혀가 빠져나왔다. 떨어지는 것이 아쉬워 지율은 혀끝으로 그의 입꼬리를 핥았다. 해윤의 벌어진 입에서 긴 숨결이 새어 나왔다.
“저, 저도 씻어야 되는데요.”
“상관없어요.”
진심이었다. 상관없었다. 콧속에 파고드는 해윤의 체향이 더없이 좋았다. 이 달콤한 체향이 비누 향기에 묻혀 사라지는 게 더 싫다. 지율은 그래도…, 하며 달싹이는 그의 입술을 제 입술로 찍어누르고는 얼굴을 떼어 냈다. 도톰하게 부어 번들거리는 입술을 벌리고 멍하게 선 그의 팔을 잡아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해윤은 잡아끄는 대로 얌전히 끌려와서 매트리스 위에 걸터앉았다. 정신이 없는지 그는 발갛게 익어서 넋이 나가 있었다.
지율은 그의 앞에 서서 바스 가운의 매듭을 풀었다. 어차피 온통 풀어 헤쳐져 입으나 마나 한 옷가지였다. 그는 앉아 있고 지율은 서 있는 상태라, 드러난 성기가 그의 얼굴 앞으로 튀어나왔다. 벌어진 저 작은 입 안에 제 성기를 쑤셔 넣고 싶은 욕망이 문득 치밀었다. 저 축축한 입 안이 얼마나 따뜻하고 음란한지 알기에 아래가 못 견디게 뻐근해졌다.
하지만 저 작은 입에 비해 제 성기가 상대적으로 굵고 길어, 입에 쑤셔 넣으면 여린 입술이 찢어지고 만다. 어설프게 혀를 놀려 빨고 핥고 입이 찢어지는 듯한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성기를 입에 물고서 물기 젖은 눈으로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 그는 지율의 안에 숨은 어두운 욕구를 건드리곤 했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제 안의 가학적인 습성. 눈앞의 저 남자를 더 울리고 싶고, 괴롭히고 싶고, 손에 넣어 자근자근 밟아 부서뜨리고 싶다는 말도 안 되게 잔인하고 저열한 심리.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이런 습성을 인지한 적이 없었다. 처음이었다. 모든 게. 이렇듯 감정에 휘둘리는 것도, 제 안의 잔인한 본능과 그래선 안 된다는 합리적 이성 사이에서 씨름하는 것도. 모든 게 처음이니 첫사랑이라 부를 수도 있겠으나 풋풋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래에서 내려다보이는 그의 동그란 정수리가 귀여워 손을 댔다. 머리칼이 결이 좋아 손가락 사이에 보드랍게 엉킨다. 그가 고개를 들어 지율과 눈을 마주쳤다.
“빨아… 드릴까요?”
그가 말을 얼버무리며 조건반사적으로 제 얼굴 앞에 늘어진 지율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아뇨. 하지 마세요.”
지율은 그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부드럽게 뒤로 넘어뜨렸다. 무슨 짓을 하나 싶어 매트리스 위로 쓰러지는 해윤의 몸이 뻣뻣하게 경직됐다. 한없이 풀어져 흐물흐물 무르녹던 몸이, 어느 순간 움칫하며 몸을 굳힌다. 지율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것 또한 한기우가 그의 몸에 새긴 조건반사적인 습관이라 생각하면 분노로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매트리스 위에 누운 해윤의 배 위에, 지율은 다리를 벌려 올라탔다. 긴장되어 움찔거리는 그의 하반신이 눈에 들어왔다. 불룩하게 솟은 속옷 앞섶이 흥건히 젖어 달라붙어 있다. 발기한 형태며 질척한 열기가 얇은 드로어즈 위로 여실히 드러났다. 지율은 매듭이 풀어져 벌어진 바스 가운을 벗어 던지며 말했다.
“속옷 벗어요.”
그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누운 채, 아래만 꾸물꾸물 움직여 속옷을 끌어내렸다. 속옷에 갇혀 있던 성기가 퉁 튕겨 나와 꺼떡거렸다. 복부에 닿을 듯 우뚝 선 성기 끝에서 맑은 체액이 방울져 뚝뚝 흘러 체모를 적셨다. 음모 부분만 새까맣고 풍성해서 음란하다. 그의 성기를 손끝에 감아쥐자, 그가 예민하게 허리를 튕기며 꿈틀댄다.
“앗… 저, 저기….”
“네. 말해요.”
말하라고 하면서 지율은 상반신을 숙여 그에게 키스했다. 퉁퉁 부어 열기를 띤 입술을 씹어 빨며 손안에 쥔 남자의 성기를 문질렀다. 흐으으, 흐느끼는 듯한 신음이 지율의 입 안에서 흩어졌다. 발기해 끈적이는 그의 성기 기둥을 손바닥에 감싸 훑으며 손끝으로 쿠퍼액이 찔끔 흐르는 귀두를 비볐다. 짜릿한 쾌감에 그의 복부와 허벅지가 튀고, 성기 끝부분까지 움찔거리는 게 손안에서 여실히 느껴졌다.
그의 전신이 뜨겁다. 땀이 촉촉하게 배어 나와 젖은 살갗이 착 감겨 왔다. 알맞게 농익은 피부를 맛보고 싶어 지율은 입술을 미끄러뜨려 그의 턱을 핥고 목덜미에 입을 묻었다. 축축하고 뜨거운 목덜미 안쪽에선, 그의 짙은 체향이 풍겼다. 연한 살점을 빨며 그 체향을 흠뻑 들이마셨다. 그의 목울대가 오르락내리락하고 흐느끼는 소리가 새 나온다. 미치게 하는 소리였다. 성대 깊숙한 곳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이 노랫소리 같다. 한기우가 말한 대로.
“흐앗!”
그의 목덜미를 힘을 주어 깨물자 기분 좋은 비명이 튄다. 연약한 살점을 잘근잘근 씹어 맛봤다. 소리를 뱉으며 꿈틀대고 지율의 머리를 밀어내려는 손길이 애처롭다. 아프고 싫다면 좀 더 세게 밀어내도 될 텐데. 짓궂은 심리가 발동돼 씹어 문 살점을 혀로 핥고 다시 씹기를 반복했다.
목덜미 살점을 맛보며 가슴을 쓰다듬자 그는 또 흐느낀다. 손끝에 유두가 스치는 것만으로도 이런다. 툭 불거진 작은 가슴 돌기를 손가락 사이에 넣어 비벼 대니 반응이 더욱 격해진다. 손안에 감긴 성기도 정직하게 움찔움찔 튀었다. 앙증맞은 젖꼭지도 신체 일부분이라고 붉게 부푸는 게 귀엽고도 우습다. 만지면 만지는 대로 반응하는 민감한 몸이 사랑스럽다.
“흐, 아앗, 아파요. 흐아아.”
귓속에 녹아드는 그의 굵은 신음을 듣는 것만으로도 쌀 것 같았다. 터질 것처럼 팽창한 성기를 그의 벌어진 다리 사이에 짓눌렀다. 바들바들 떨리는 그의 다리를 한껏 벌리고, 그사이에 무자비하게 처박고 싶어 성기 끝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지율은 애써 참았다. 그러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 몸이 자신이 주는 자극에 완전히 무르녹아 흐물흐물 풀어질 때까지 참을 것이다. 이 사람과 섹스를 하려 하는 것이지, 저 혼자 일방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한 행위가 아니란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지율은 목덜미에 닿아 있던 입술을 이동시켜 그의 가슴을 길게 핥았다. 헐떡이며 씰룩이는 가슴의 움직임이 입술 위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의 유두와 성기를 애무하는 손을 쉬지 않고 움직이며 입술로 젖은 피부를 빨아 줬다. 하도 만져 뜨겁게 부푼 유두를 손톱으로 긁자 그의 입에서 소리가 튀고 허리가 격하게 튕겼다. 그의 아래를 쥔 손을 움직여 조금 힘을 주어 귀두를 비비면 아래가 또 색다른 각도로 튄다. 그의 온몸이 크게 들썩거려 매트리스가 출렁였다.
혀로 가슴을 핥아내려 손으로 지분대던 유두를 입에 머금어 봤다. 돌기에 혀끝이 닿는 것만으로도 그는 자지러졌다.
“흐악! 아, 아파…!”
“아파요? 어디가?”
“가, 가슴… 흐앗! 따, 따갑고 뜯겨 나갈 것 같아요. 아래도 너무 세게 문지르면, 너무… 으아아.”
아픈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유두를 입술에 머금어 힘을 주어 빨며 귀두를 뭉갰다. 손안을 적신 그의 체액이 뚝뚝 흘러 시트를 적셨다. 지율은 그의 성기를 다소 빠르게 훑었다. 손바닥에 차지게 달라붙은 성기 기둥이 찌걱거리며 거칠게 마찰됐다.
“으, 으웃, 손. 손 떼요. 손 떼 줘요. 쌀 거 같아….”
“싸도 돼요.”
혀 끝으로 굴리던 유두를 이로 깨물며 속삭였다. 그의 몸이 크게 출렁였다. 고개를 뒤로 크게 젖혀 으으윽, 입술을 씹어 짓눌린 소리를 내다가 절정에 다다라 가는지 다리를 헤프게 확 벌린다. 온몸의 근육에 힘이 잔뜩 들어가 바들바들 떨리나 싶더니, 손안에서 그의 성기가 팍 터졌다. 뿜어져 나온 체액의 양이 상당해 그의 복부며 허벅지가 죄 젖고, 침대 시트까지 온통 더러워졌다.
“제, 제가 그래서 손 떼라고…. 시트… 제가 빨게요.”
해윤은 사정 후의 여운에 헐떡이며 울먹거렸다. 침대 시트가 더러워진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지율은 픽 웃으며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 위에서 티슈를 뽑아 젖은 손을 닦았다. 휴지를 뭉쳐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서랍에서 젤과 콘돔을 꺼내려 하자, 그가 부스스 상반신을 일으켰다.
“저 씻을게요.”
“상관없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씻을래요. 오늘 일을 많이 해서 더러워요. 지율 씨는 깨끗한데 저만 이래서…. 씻고 나올게요.”
고집이 여간 센 게 아니다. 그는 기어이 몸을 일으켜서는 지율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럼 욕실에서 마저 할까요?”
팔을 붙잡고 물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며 좀 더 힘을 주어 지율을 밀어내고는 침대 밖으로 빠져나갔다. 알몸으로 도망치듯이 욕실로 후다닥 뛰어가는 뒤태가 종종거리며 뛰어가는 새끼 오리 같다. 사람이 뭐 저리 하는 짓마다 귀엽지.
‘우리 오리가 엉덩이가 봉긋해서 뒤뚱거리며 뛰어가는 거 보면 새끼 오리 같아. 귀여워 죽겠어.’
할머님이 하시던 말씀이 떠오르며 입에 웃음이 번졌다. 욕실에서 쏴아아, 세찬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사정 직후의 예민한 몸으로 물줄기를 맞으며 발갛게 달아오른 온몸을 씻어내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아래가 땅겼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딴딴하게 곧추서서 액을 줄줄 흘리고 있다. 지율은 벌떡 일어서서 욕실로 향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는 온몸에 비누 거품을 묻히고서 손으로 아래를 문질러 닦던 참이었다. 엉덩이 사이에 손가락을 파묻어 안을 씻어 내는 중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화들짝 놀라 제 뒤에 파묻었던 손가락을 황급히 빼냈다. 몹쓸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그는 저, 저기, 이게… 말을 더듬거리며 온몸을 새빨갛게 물들었다.
“왜 혼자 하고 있습니까. 넣어 달라면 제가 얼마든지 넣어 줄 텐데.”
“아니, 전 그냥 안을 씻으려고.”
“씻겨 줄게요.”
지율은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서며 수도꼭지 옆 선반에 비치된 보디 워시 펌프를 눌러 손에 짰다. 손을 비비자 거품이 나며 보디 워시 향기가 사방에 퍼졌다.
“제가 할게요. 잠깐 나가 계시면 씻고 나갈게요.”
“제가 그렇게 느긋하지가 않습니다. 보이죠? 벽에 손 짚고 돌아서 봐요.”
그가 지율의 아래를 슥 훑다가 마지못해 쭈뼛거리며 돌아서서 취조당하는 죄인처럼 벽에 손을 대고 섰다. 꼬리뼈 부근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그의 하얀 엉덩이가 자동적으로 치켜 올라갔다. 말캉말캉한 엉덩이를 주무르다 살점을 잡아 벌렸다. 살점 안쪽이 축축하다. 비누 거품에 젖은 작은 구멍이 빠끔거리는 게 보였다. 그가 스스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자극한 탓에 입구가 발갛게 부었다. 거품 묻힌 손가락으로 거품을 구멍 입구에 펴 바르다 안으로 밀어 넣었더니, 무리 없이 씹어 삼킨다.
흐으읏, 으으, 신음과 함께 그의 유려한 등허리가 잘게 떨리며 하얀 엉덩이가 유혹적으로 흔들렸다. 탐욕스러운 입구가 손가락을 꽉 깨물어 맛있게도 씹어 먹는다. 더 달라며 아우성을 치듯이 미친 듯이 구멍이 벌름거린다. 지율이 밀어 넣은 중지를 더욱 깊게 밀어 넣어 푹 쑤시자 그는 전기에 감전된 듯이 파르륵 떨며 온몸을 튕겼다. 구멍이 확 조여들며 지율의 손가락을 끊어질 듯 조여 댔다. 이 부분이 쾌락점인 모양이었다. 손가락을 빙글 돌려 각도를 바꾸어 쑤셨다. 그의 입에서 더 격한 신음이 튀고 사지가 요란하게 펄떡거렸다.
그가 느끼는 전율이 제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뒤를 자극당하는 건 그인데 지율도 배 속이 근질근질해졌다. 아니, 뜨겁다.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이 배 속에 쏟아진 기분. 불에 달군 쇳덩이가 배 속을 헤집는 듯한 소름 끼치는 작열감.
“이상해요. 이상해… 기분이… 흐윽. 안에서 팍팍 튀고… 미칠 거 같…. 흐아아!”
고작 손가락 하나 쑤셔 넣었다고 이리도 게걸스럽게 야물야물 씹어 물고, 미칠 것 같다고 한다. 뭐가 그리 미칠 것 같다는 건지. 아직 넣지도 않았는데. 터질 것같이 탱탱하게 곧추선 제 좆을 구멍 근처에 갖다 대지도 않았는데. 그가 직설적으로 입을 벌려 터뜨리는 소리에 지율이야말로 미칠 것 같았다.
“미쳐요. 괜찮아.”
지율은 손가락을 더 밀어 넣어 오물거리는 구멍을 잡아 늘리며 안을 푹푹 쑤시고 헤집었다. 해윤은 숫제 울었다. 등허리를 마구 꿈틀대며, 엉덩이를 마구 들썩거리면서. 성기도 다시 발딱 서서 발칙하게 꺼떡거렸다. 뒤를 쑤셔 주는 것만으로도 착실하게 흥분한다. 그의 몸은 지나치게 민감하다. 순진하고 유약한 얼굴을 하고서 이런 야한 몸뚱이를 지니고 있다. 하얀 엉덩이가 지율의 눈앞에서 요란하게 흔들리며 거침없이 유혹했다. 들썩거리는 엉덩이가 지율의 성기를 때렸다.
지율은 손가락을 쑥 잡아 뺐다. 아쉬운 듯이 빠끔거리는 구멍 입구에 성기 끝을 가져갔다. 맛을 보듯, 벌름대는 구멍에 귀두를 살짝 넣었다 빼며 입구를 문질렀다. 그의 등이 바르르 떨렸다. 구멍이 제 성기 끝을 집어삼켰다 뱉으며 벌름거리는 게 아주 볼 만했다. 콘돔과 젤을 침대 위에 놔두고 왔다는 걸 지금에야 깨달았으나 그걸 가지러 나갈 생각은 없었다.
“죄송합니다. 넣겠습니다. 못 참겠어.”
허락의 말이 떨어지길 기다릴 새도 없었다. 입구에 걸쳐 놓은 성기 끝부분을 힘을 주어 쑤욱 밀어 넣었다. 구멍이 빠듯하게 벌어지며 힘겹게 지율의 성기를 집어삼켰다. 손끝으로 충분히 맛보았던 뜨거운 내벽이 성기 기둥에 뜨겁게 감겨 왔다. 아래가 끊어질 듯한 압박감에 지율은 후우우, 굵은 숨을 토해 냈다. 그도 괴로운지 안쓰럽게 파들파들 경련했다.
“힘 빼요. 힘을 주면 다쳐요. 옳지. 좋아요. 지금….”
해윤이 길게 숨을 내쉬며 몸의 긴장을 푼 사이를 놓치지 않고 지율은 반쯤 박아 넣은 성기를 뿌리 끝까지 처박았다. 그는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푸드덕댔다. 벽을 짚은 손이 미끄러져 허우적대는 그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고 새빨개진 귀에 입을 맞췄다.
지율은 잠시 그의 안에 처박은 대로 숨을 몰아쉬었다. 움칫움칫하며 떨리는 엉덩이 살점을 확 잡아 벌려 제 좆을 머금은 탐욕스러운 구멍을 내려다보기도 했다. 성기 밑동까지 그의 몸속에 박혀 하나로 이어져 있다. 한계치까지 늘어나 지율의 성기를 씹어 문 구멍이 애처롭게 와들와들 떨렸다. 남은 이성을 단번에 날아가 버리게 하는 광경이었다.
“으, 으으윽, 아, 아파요. 너무 커. 찢어질 것 같아.”
그가 흐느낌에 맞춰 떨리는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안 찢어졌어요. 제대로 씹고 있으니 안심해요.”
지율은 접합부를 손으로 둥글리며 구멍 주위를 간질였다. 그가 격렬한 신음을 토해 내며 애원했다.
“으 그, 그거 하지 마…. 아파요. 제발 하지 마, 흐그윽, 으앗.”
지율은 허리를 움직여 천천히, 아주 느리게 제 성기를 빼냈다. 절절 끓는 내벽이 성기 기둥에 달라붙어 달려 나오는 듯, 성기 전체가 화상을 입은 듯이 화끈거렸다. 끝까지 빼내지 않고 귀두 끝을 입구에 살짝 걸쳤다가 다시 콱 처박았다. 손가락으로 실컷 자극해 놓은 전립선이 찔렸는지 그의 사지가 투웅 튀어 올랐다. 그대로 각도만 조금씩 바꾸어 몇 번 반복해 연속으로 콱콱 쑤셨다.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가 울음으로 변했다. 숨도 못 쉬고 떠는 그가 애처롭게 안쓰러웠다. 미안했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흐아악, 하, 하지 마… 하지 마아, 으아앗. 흐아아.”
“빼 줄까? 빼 줘요? 어떻게 해 줄까?”
그의 뒷목을 깨물면서 좆을 박아 넣은 상태로 허리를 돌려 그의 안을 휘저었다. 자극에 흐물흐물 녹아 버린 내벽이 샅샅이 휘저어지는 쾌감이 끔찍할 것이다. 그는 자지러졌다. 제발, 제발 그거 하지 마아아, 울면서 손을 뒤로 뻗어 지율의 아래를 밀어내려 했다. 엉덩이를 앞쪽으로 잡아 빼 집요하게 터지는 열락의 지옥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지율은 놔주지 않았다. 엉덩이와 골반을 힘주어 움켜쥐고서 꼼짝 못하게 고정시켰다. 점도 높게 제 좆에 감겨드는 내벽에서 빠져나갈 생각이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이 뜨겁고 좁은 몸속에 제 아래를 쑤셔 넣어 휘젓고 싶었다.
저도 모르게 좆이 드나드는 속도가 빨라졌다. 다물릴 틈도 없이 쑤셔 박히는 그의 구멍에서 찌걱대는 소리가 났다. 불알이 그의 꼬리뼈 아래에 처덕대며 부딪혔다. 그럴 수 있다면 불알까지 구멍 안에 쑤셔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빨라. 좀 천천히, 천천히 해 줘요. 아파. 흐악, 아파아. 으, 흐아아. 제발 천천히 좀!”
그는 지율이 치대는 대로 맥없이 흔들리며 흐느끼고, 울고, 애원했다. 지율의 입에서도 뜨거운 숨이 쉼 없이 터져 나왔다. 주체할 수가 없었다. 눈앞이 하얬다. 도저히 제어가 되지 않았다. 성욕 왕성한 10대 때에도 이렇지 않았는데.
순식간에 성기가 한계치까지 부풀고 갑자기 빠르게 절정에 다다랐다. 미처 빼낼 새도 없이 그의 안에서 정액이 터졌다. 내벽 안에서 쏟아진 정액과 함께 성기가 미끄러져 나왔다. 빠져나온 성기가 체액에 온통 젖어 엉망이다. 빠끔 열린 구멍에서 제가 쏟아 낸 체액이 주르륵 흘러 나오는 걸 홀린 듯이 바라봤다.
“으으으….”
그가 숨을 헐떡일 때마다 뻐끔거리는 구멍에서 점도 높은 흰 정액이 왈칵왈칵 흐른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는 아찔하도록 음란한 광경이었다. 한 번 사정하고도 성기가 수그러들지 않고 우뚝 서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저 구멍을 고작 한 번 맛본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죄송합니다.”
지율이 숨을 몰아쉬며 사과하는 소리가, 해윤의 귀에는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화를 낼 힘도 없었다. 지쳤다. 몸이 천근만근 축축 늘어졌다. 뒤는 화끈거리고 온몸이 쓰렸다. 숨을 쉴 때마다 아래가 벌름대며 한지율이 안에 싸 갈긴 체액이 찔끔거리며 흐르는 감각이 제일 기분 나빴다.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는 것도 고역이라 해윤은 한 손으로 벽을 짚고 간신히 섰다. 손을 뻗어 수도꼭지를 잡아 돌리려 하자, 지율이 대신 물을 틀어 주었다. 어느새 바닥에 떨어진 샤워기가 물줄기를 뿜으며 요동쳤다.
“제가 성급했어요. 죄송합니다, 정말.”
등 뒤에 선 그가 다시 사과했다. 그가 샤워기를 집어 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온 따스한 물줄기가 해윤의 등을 적셨다. 뒤에서 뻗어 나온 한지율의 손이 해윤의 몸에 말라붙은 거품을 정성껏 닦아 주었다. 손을 뿌리치기도 귀찮아 해윤은 벽을 보고 선 채 가만히 있었다.
“안에 하는 거… 싫어요.”
“네.”
뭐가 네, 라는 건지. 어깨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입술이 닿았던 부위를 손으로 쓰다듬다가 앞쪽으로 미끄러뜨려 해윤의 턱을 감싸 뒤로 돌렸다. 입술과 입술이 맞부딪쳤다. 부드럽게 입술을 빨며 달고 질척한 키스를 해 온다. 남의 엉덩이를 제 성기로 쿡쿡 찌르면서. 한 번 싸고도 전혀 기죽지 않고 우뚝 서서 찔러 댄다.
그가 해윤의 입술을 진하게 빨며 엉덩이 살점을 벌렸다. 엉덩이 사이에 따뜻한 물줄기가 쏟아졌다. 움찔대는 구멍에 그가 손을 넣어 안을 긁었다. 안에 쏟아 낸 그의 체액을 싹싹 닦아내기라도 하듯.
흐으으. 해윤의 입에서 새 나오는 신음이 지율의 입 안으로 흘러들었다. 배 속이 다시금 찌릿찌릿하며 허벅지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던 물줄기가 끊어졌다. 한지율이 수도꼭지를 잠근 모양이었다. 그가 선반에서 타월을 꺼내 해윤의 몸을 대충 닦아 주고는 욕실 밖으로 끌어당겼다.
해윤은 정신이 멍했다. 잡아당기는 대로 이끌려 나가고, 침대 위에 눕히는 대로 드러누웠다. 멍한 눈으로 한지율이 제 앞에 무릎을 대고 앉아 발기한 성기에 콘돔을 씌우는 것을 바라봤다. 또 할 건가. 피곤한데, 하는 생각을 한 순간 차가운 젤이 다리 사이에 주르륵 쏟아져 복부가 흠칫 떨렸다. 안쪽에 젤을 펴 바르는 그의 손길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그는 해윤의 다리를 찢을 듯이 잡아 벌려 위로 쳐들리게 하더니, 예고도 없이 쑤시고 들어왔다. 삽입의 각도가 더 깊어져 숨이 턱 막혔다. 몸속 내부가 어떻게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안이 흐물흐물 풀어지다 못해 심각하게 농익어 온통 붉은 물이 들어 질척하게 젖은 듯한 기분. 푹 익어 흐무러진 내벽을 쑤시고 들어와 배 속까지 밀려들었다. 삽입된 불기둥에 안이 온통 화상을 입은 것 같았다. 배 속이 울렁거렸다.
그가 허리를 놀려 뿌리 끝까지 쑤신 성기를 안에서 무자비하게 휘젓더니, 빠르게 쑤욱 잡아 빼고는 다시 처박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숫자를 세다가 관뒀다. 한 번씩 불기둥이 빠져나갔다 처박힐 때면 소름 끼치는 전율에 사지가 떨렸다. 전립선이란 게 탱탱 부을 수 있는 부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붉게 부어서 터질 것만 같았다. 그의 것을 받아 내는 구멍이며 내벽이 온통 헐어 버리는 듯하다.
“하, 하지 마요. 싫, 흐아, 앗, 아아악.”
“하지 말라면서, 흣, 왜 자꾸 조여… 이렇게 맛있게 씹으면서.”
그가 간헐적으로 뜨거운 숨을 흘리며 퍼억퍼억 처박았다. 조금의 자비도 없었다. 아까까지는 한없이 다정하더니 순식간에 사람이 변한 것 같다. 처박히는 속도가 엄청나 몸이 자꾸만 위로 쓸려 올라갔다. 시트를 움켜쥐며 버티다 팔을 허우적대고, 지율의 목을 끌어안아 보기도 했다. 하지만 땀이 배어난 그의 피부가 미끄러워 손이 툭 떨어졌다.
쉴 새 없이 안에서 불꽃 같은 것이 펑펑 터졌다.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벌어진 입에선 흐느끼는 소리만 새 나왔다. 그의 성기가 빠져나간 사이, 해윤은 울면서 몸을 휙 비틀었다. 빠져나가려 시도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손이 쑥 뻗어 나와 해윤의 허리를 잡아 아예 엎드려 눕히고는, 뒤에서 푹 찔렀다. 배 속까지 그의 성기가 쑤시고 들어오는 듯했다.
“미칠 것 같아. 죽을 거 같, 으아아.”
“나도 미칠 것 같아.”
그의 어조에서 여유로움이 싹 걷혔다. 온 힘을 다해 달리는 사람처럼 지율은 과하게 헐떡였다. 해윤도 시트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 섞인 숨을 격하게 토해 냈다. 누가 어떤 체위가 가장 싫으냐고 묻는다면 지금같이 엎드려 엉덩이만 쳐들린 채, 박히는 체위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삽입의 각도가 가장 깊다. 뜨겁게 달군 쇠기둥 같은 성기가 몸속 자극 지점을 잔인하게 후벼 팠다.
한계선을 넘어선 쾌감은 고문과도 같았다. 고통스러운데도 전립선을 찔러 대니 성기가 빳빳하게 일어서 액을 줄줄 흘린다. 열띤 쾌감을 동반한 고통이라 더 참기 힘들었다. 펑펑 울어 짓무른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섹스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의 격렬한 움직임에 엎드린 몸이 시트에 쓸려 따가웠다. 젖꼭지가 시트에 비비고 쓸려 떨어져 나갈 것 같고, 짓눌린 성기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해윤은 길게 울음을 흘리고 덜덜 떨면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사, 살려 줘요. 제발 천천히 좀…. 제발….”
“안 죽여요. 후우욱, 뜨거워. 좁고 뜨겁고… 왜 이렇게 안이 야해. 이러다 내가 죽을 것 같은데.”
그가 잠시 제 성기를 해윤의 몸속 깊숙이 처박은 채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내벽을 꽉 채운 원망스러운 좆 기둥이 바르르 떨리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그 상태 그대로 한지율이 몸을 움직였다. 뒤에서 꿰인 채로 해윤은 와들와들 떨 뿐이었다. 곧 찌이익, 소리가 나더니 접합부에 차가운 젤이 떨어졌다. 후끈하게 데워진 체액 냄새에 섞여 인공적인 젤 향기가 물씬 풍겼다. 그가 손으로 접합부에 젤을 펴 바르는 게 느껴졌다. 소름 끼치는 감각에 해윤은 파르륵 경련했다. 찢어질 듯이 빠듯하게 벌어져 그의 것을 받아 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찬 구멍인데. 이어진 부분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니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게, 미칠 것 같았다.
“하지 말라고, 그거. 기분 이상하고 아파, 으으, 빼 줘. 빼 줘요, 좀.”
“알았어요.”
그가 뜨겁게 속살거리며 제 아래를 구멍 안 깊숙이 쑤셔 넣었다. 뭐가 알았어, 야. 속에서 욕이 절로 치솟았다.
“흐으으, 이거 싫어요. 너무 깊어서… 이 자세, 너무 힘들어.”
“힘들어? 어떻게 해 줄까? 해윤 씨가 내 위에 올라탈래요?”
해윤은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빼. 빼라고. 그만 좀 해, 빼 줘. 울음 섞인 소리로 애원을 흘렸다. 되는 대로 지껄였다. 그가 미안하다는 소리를 두어 번 뱉었던 것 같다. 미안해요, 못 참겠어서 그래. 이런 소리를 웅얼거리기도 한 것 같다. 미안하단 소리를 하면서 그는 재차 허리를 움직였다.
그가 몇 마디 더 중얼거렸지만 해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대꾸할 수도, 쏘아붙이고 원망의 말을 던질 기운도 없었다. 도망치고 싶어도 그가 골반을 꽉 움켜쥐고 있어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벌어진 입에선 우는 소리만 터져 나왔다.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짧은 소리가 목울대에서 꿀렁이며 쏟아졌다. 그가 움직이는 대로 아래로 늘어진 성기와 불알이 음란하게 흔들렸다.
해윤은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 꺽꺽대며 울었다. 아파서, 고통스러워서, 뜨거워서, 좋아서. 죽을 것 같은데 그만큼 좋다. 숨넘어갈 듯한 고통마저 쾌감으로 변해 온몸에 열이 펄펄 끓었다. 감당 못할 쾌감에 머릿속까지 어떻게 되어 버린 게 틀림없었다.
숨 쉴 틈도 없이 안을 짓찧던 그의 성기가 크게 부푸는 게 느껴졌다. 곧 그의 것이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이번엔 빠르게 쑥 잡아 뺐다.
등 뒤에서 한지율이 굵은 신음을 토해 내며 와들와들 떨리는 해윤의 엉덩이에 싸 갈겼다. 곧추선 해윤의 성기에서도 정액이 터졌다. 그도, 해윤도 두 번째 맞이하는 절정이었다. 죽을 것만 같은데 겨우 두 번 싸다니.
해윤은 맥없이 침대 시트 위에 툭 엎어졌다. 두 번째 사정으로 남은 힘이 죄 소진된 기분이었다. 숨 쉴 기운도 없이 죽은 듯이 엎드려 누워 숨만 헐떡였다. 하지만 한지율은 아직 쌩쌩하다는 게 문제다.
“해윤 씨.”
그가 지율의 등을 쓰다듬으며 이름을 불렀다.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내려와 엉덩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한지율의 하얗고 예쁜 손. 해윤이 넋 놓고 바라보곤 했던 그의 예쁜 손이 체액이며 젤이 뒤섞여 엉망이 됐을 항문을 더듬었다. 손가락 두어 개 정도는 아무 느낌 없이 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그만할 겁니까? 구멍이 딱 알맞게 흐물흐물해졌는데.”
몹시 아쉬운 듯이 중얼거리며 그가 손가락을 화끈거리는 내벽을 헤집고 후벼 팠다. 제발. 제발 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해윤은 입만 빠끔거렸다. 저절로 눈이 스르륵 감기더니 감당 못할 수마가 찾아 들며 의식이 뚝 끊겼다.
너무 괴롭힌 건가.
지율은 배터리 끊긴 전동 인형처럼 갑자기 잠이 든 해윤을 보며 생각했다. 그는 침대 위에 알몸으로 엎드려 누운 채로 잠이 들었다. 봉긋 솟은 그의 하얀 엉덩이에 자신이 쏟아 낸 정액이 말라붙어 있는 게 보였다.
너무 몰아붙인 건 아닌가 싶었다. 상냥하게 굴어야지, 그를 아프게 하지 말아야지, 결심했는데. 이성이 성욕에 졌다. 중간에 이성이 날아가 버려 미친 듯이 그의 몸을 탐하고 말았다. 그가 울며 사정해도 봐주지 않고 정신없이 쑤셔 박았다. 성기를 씹어 무는 그의 쫀득한 구멍이 미칠 듯이 맛있어서.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그의 신음, 울음소리가 듣기 좋아서.
섹스를 한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자신을 미치게 하는 상대는 없었다. 늘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게 살았고, 섹스도 이성적이고 정상적으로 해 왔다. 몸뿐만 아니라 머릿속까지 시뻘겋게 펄펄 끓는, 미칠 듯한 성욕을 느낀 것은 석해윤이 처음이었다. 그는 야하다. 몸 곳곳, 야하지 않은 구석이 없다. 만지면 만지는 대로 붉은 열꽃이 일고, 펄떡이며 신음을 토해 내고, 지나치게 민감해 조금만 쓰다듬어 줘도 미끈한 몸을 바르르 떨며, 아래를 발딱 세워 질질 싼다. 온몸이 다 야한데 제 것을 탐욕스럽게 씹어 삼키는 구멍이 그중에서 제일 야하다. 저 음란한 구멍이 성기를 꼭꼭 씹어 무는데 어떻게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두 번이나 사정했는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성기가 우뚝 서 있다. 해윤의 하얀 엉덩이를 잡아 벌려 쑤셔 박고만 싶어 탐욕스럽게 꺼덕거렸다.
해도 해도 모자라다. 하면 더 하고 싶다. 그가 아무리 괴로워해도 밀어붙여 몸속의 것을 죄 쏟아 내고 싶다. 지율은 자신이 이렇게 욕심이 많고, 성욕이 강한 인간인지 처음 알았다.
쌔액쌔액,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그의 미끈한 알몸을 보고 있자니, 몹쓸 짓을 할 것 같아 지율은 욕실로 향했다.
대충 씻고 거울을 보니 낯선 사내가 거울 속에 있다. 주체 못할 성욕에 무장해제 되어 흐물흐물해진 얼굴. 뺨과 눈가가 붉고 입은 벌어져 있다. 이런 얼굴을 하고서 그 사람을 안았던가. 하지만 오히려 살결과 눈에는 기름진 생기가 돈다.
무척 건강해 보였고 인간처럼 보였다. 평소였다면 누구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싫어 표정을 싹 지웠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석해윤, 그 사람 앞에선.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뒤집어썼던 무표정한 가면을 벗어도 된다.
지율은 타월을 적셔 가지고 욕실에서 나와, 침대 위에 늘어진 해윤의 몸을 닦아 주었다. 몸 여기저기를 닦아 주는데도 깨지 않고 잘 잔다. 으으음, 잠꼬대를 하며 돌아누웠을 뿐이다. 지율은 픽 웃으며 그의 몸을 바로 눕히고는 이불을 끌어와 덮어 줬다. 이불 속에 폭 파묻혀 쌕쌕대며 자는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실내용 옷으로 갈아입고 침실 밖으로 나가 서재로 들어갔다. 해윤과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미뤄 뒀던 업무를 대충 처리해 놔야 내일 일이 편할 것이다.
일에 열중하다 갈증이 일어 잠시 일어나 주방으로 향하던 때였다.
침실 쪽에서 가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우는 듯한 소리였다. 지율은 얼른 침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석해윤이 여전히 이불 속에 파묻힌 채로 끙끙 앓고 있었다.
“으으, 하지 마. 오지 마. 으으으.”
악몽을 꾸는 건가. 온 얼굴을 괴롭게 일그러뜨리고는 길게 앓다가 으아아! 소리를 지르며 갑자기 발작을 하듯 크게 경련했다. 가만 놔두면 안 될 것 같아 지율은 그를 흔들어 깨웠다. 어딘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어 겁이 덜컥 났다.
“해윤 씨. 괜찮습니까? 해윤 씨. 일어나 봐요.”
하지만 해윤은 쉽게 깨어나지 못하고 괴롭게 팔을 허우적거렸다.
“오지 마. 저리 가요. 오지 마요! 살려 줘요!”
“석해윤!”
지율은 언성을 높여 그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더 거세게 어깨를 흔들어 보기도 했다. 그가 사지를 푸드덕 떨더니,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부릅뜬 두 눈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괜찮아요?”
“으… 한지율….”
“그래. 나야.”
지율은 그의 흠뻑 젖은 이마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해윤이 지율을 보며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눈앞의 상대가 제가 아는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듯이. 바짝 긴장해 떨리던 그의 눈매가 풀어졌다. 경직된 얼굴이 부드러워지며 미소가 번졌다.
“다행이다….”
그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악몽 꿨습니까?”
“네.”
“얼마나 끔찍한 악몽을 꿨기에 이렇게 흠뻑 젖었습니까.”
“늘 꾸던 악몽인데… 자주 이래요. 별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가 말끝을 얼버무리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웃음 띤 그의 얼굴이 느슨하게 풀렸다. 쏟아지는 잠을 이겨 낼 수 없는 듯했다. 지율은 그의 뺨을 쓰다듬어 주고는 이불을 덮어 줬다.
“더 자요.”
네…. 그는 작게 웅얼거리더니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악몽에 시달리며 괴롭게 일그러졌던 표정은 싹 사라졌다. 하지만 지율은 쉽게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의 옆에 걸터앉아 한참을 잠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 사람을 괴롭히는 악몽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는 무엇에 이렇게 쫓기는 것일까. 그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악몽 속 악귀의 정체는 한기우일 것이라 확신한다. 숨도 못 쉴 정도로 괴로워 허우적대면서도 오히려 자긴 괜찮다고, 별거 아니라고 웃으면서 상대를 안심시킨다.
지율의 가슴 속에 덩어리가 들어찬 것 같았다. 모르겠다. 이 덩어리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죄책감인지, 분노인지, 연민인지, 무엇인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가슴 속, 이 덩어리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다.
지율은 이불을 들치고 들어가 해윤의 옆에 누웠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해윤이 빙글 몸을 돌려 지율의 품에 폭 안겼다. 무의식적으로 베개를 끌어안듯이 지율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따뜻하다. 자신에게 치대 오던 사람의 온기는 귀찮은 것이었지만 이 온기는 싫지 않다. 저를 믿고 의지해 스스럼없이 안겨드는 이 몸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포근하고 따스하다. 덩어리가 꽉 막힌 가슴이 간질간질하다. 말랑말랑 풀어지더니 울렁거렸다. 울음이 터져 나올 듯이.
“미안합니다.”
지율은 고개를 돌려 그의 이마에 입술을 대 속삭였다. 그가 눈을 뜨고 있었다면 눈을 반짝 들어 올려 뭐가요? 하고 물었을 거다. 아니면 낮은 목소리로 우리끼리 미안하단 말은 하지 말죠, 이랬겠지.
하지만 미안한 게 아주 많다. 수백, 수천 번 사과해도 용서받지 못할 미안한 것들. 미안한 마음에 뒤따르는 수많은 후회들. 그러지 말 것을, 하는 후회.
이 사람을 오해하고 모질게 몰아붙였던 것, 온갖 모진 말로 채찍질했던 것, 한기우에게서 이 사람을 떼어 놓지 못했던 것. 한기우, 그 미친 새끼를 죽여서라도 한시라도 더 빨리 이 사람을 지옥에서 끌어내 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
이 사람도 똑같은 줄 알았다. 한기우에게 달라붙던 각다귀 떼와 다를 바 없는 부류라 생각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처음부터 계속 신경 쓰였다. 어느 날 밤, 한기우의 집에 찾아갔던 때. 한기우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석해윤을 본 순간부터. 발갛게 물든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했던 때부터. 신미라를 닮은 그 기묘한 얼굴을 마주한 때부터, 저를 바라보던 그 젖은 시선이 계속 머릿속에 달라붙어 떠나질 않았다.
어쩌면 그 순간부터 이 사람에게 반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밴드부를 지나쳤던 때부터. 밴드부원들과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웃는 석해윤의 모습을 봤던 때부터.
학교 강당에서 했던 공연 뒤에도 해윤이 계속 학교에 다녔다면 어떻게 됐을까. 계속 그가 제 눈앞에 알짱거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영진 스타즈의 강당 공연 사건 이후, 사사건건 부딪치며 다투다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그와 가까워지지 않았을까.
어디까지나 가정이고 짐작이다.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오래 전에 지나간 과거 일을 곱씹어 생각해 봤자. 이러지 말 것을, 뒤늦게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과거는 흘려보내고 현실에 충실해야 할 때다. 지금은 제 품에 안긴 해윤의 따스한 몸을 끌어안고 행복감에 취해도 될 때다. 과거에 얽매여 후회만 하고 있기엔 지금의 이 시간이 너무도 소중하다. 일 분 일 초가 아깝다. 앞으로 잘하면 된다. 후회할 짓은 더 이상 안 하면 된다. 앞으로의 인생길을 이 사람과 함께 걸으면 된다.
지율은 눈을 감았다. 제 품에 안긴 해윤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기분 좋은 잠에 빠져들었다.
***
한지율은 완벽해야 했다. 완벽하고 이성적이고 똑똑한 녀석이어야 했다. 조금의 흠도 있어서는 안 됐다. 그래야만 계속 큰아버지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테니까. 아버지가 있는 재산을 홀랑 다 털어먹고 거액의 빚을 졌던 때, 큰아버지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온 식구가 거리에 나앉았을 터였다. 마음 여린 어머니는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죽고 말았을 거다.
완벽함을 유지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물 위에 우아하게 떠 있는 백조처럼. 우아하고 완벽한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수면 아래 두 다리를 미친 듯이 움직였다. 다행히 그때까지는 완벽함을 유지해 왔다. 뭘 해도 일류였고, 학교에선 늘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딱 한 번. 2등으로 밀려났던 때가 있었다. 학교 게시판에 나붙은 성적표를 보고 아이들은 수군거렸다. 그 속에서 한지율은 늘 자신이 차지하고 있던 1등 자리에 다른 이름이 적힌 것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매번 자신의 이름 아래에 있던 만년 2등짜리 놈의 이름이었다. 주위를 에워싼 친구들이 위로의 말을 한마디씩 건넸지만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친구도 아니었다. 겉으로는 둘도 없는 친구인 양 붙어 다니지만 뒤돌아서면 음흉하게 자신의 욕을 해 대는 놈들임을, 잘 알고 있었다.
주위가 온통 하얘졌다. 쓰러질 것만 같았다. 주위 모든 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세상이 샛노래졌다. 지율은 누가 제 이름을 부르며 붙잡는데도 휙 뿌리치고 돌아섰다. 다리에 힘이 풀려 힘겹게 걸었다.
완벽하지 않은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지? 완벽하지 않은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완벽함에서 벗어난 인생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큰아버지에게 완벽하게 똑똑한 조카로 인정받는 것, 그게 인생의 목표였다. 딱 한 번 1등 자리에서 밀려난 것이었지만, 지율은 한순간에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끔찍한 절망감을 느꼈다.
발아래 놓여 있던 발판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율은 갑자기 숨이 턱 막혀 멈춰 섰다. 그때 그 소리가 들려왔다. 음악 소리. 노랫소리. 형편없는 기타 소리, 그보다 더 형편없는 노래. 뒤이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율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밴드부 연습실이었다. 여러 명의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웃고 떠들었다. 그러다 한 녀석이 노래를 불렀다.
영진 스타즈라는 촌스러운 이름을 걸고 밴드 활동을 한다는 놈들인 모양이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저 녀석이 밴드의 리드보컬인 듯했고. 솔직히 형편없었다.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저런 실력으로 경연 대회에 나갈 생각을 하다니. 하나도 멋있지 않다.
그런데 저 녀석은 뭐가 저렇게 즐겁지? 형편없으면서. 어설프면서. 멋있지도 않으면서. 그런데 뭐가 저렇게 즐겁고 행복해 보이지? 저렇게 형편없는 실력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더없이 환하게 웃는다. 웃음 띤 녀석의 얼굴에는 근심, 걱정 하나 없었다. 노래를 부른다는 것 자체가 못 견디게 즐겁고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듯했다.
완벽하지 않은 지율의 인생은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저 녀석은 완벽하지 않은데도 빛나고 있었다. 녀석은 너 지금 행복해? 하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일 것 같았다.
부러웠다. 질투가 났다. 큰아버지라는 훌륭한 아버지를 두고도 행복한 줄을 모르고 사고만 치는 한기우에게 향했던 질투, 부러움. 그런 감정들은 지율에겐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가슴이 쥐어 짜이며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저 형편없는 노랫소리가 지율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 파고 흔들었다.
한 번이라도 난 즐거웠던 적이 있던가? 저렇게 웃어 본 적이 있었던가? 내가 정말 좋아하는 뭔가를 해 본 적이 있었나? 내가 좋아하는 게 뭐였지? 난 뭘 좋아하지? 뭘 하고 싶지? 뭘 하면 난 즐겁지?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져 보았지만 대답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 보컬의 노랫소리가 끊겼다. 녀석이 노래를 끝내자 밴드부 아이들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역시 우리 보컬이다. 끝내줘. 목소리 너무 좋아. 경연 대회 나가면 1등은 무조건 우리 거다.’
애들의 과한 칭찬에 녀석이 손으로 기타 줄을 튕기면서 씩 웃었다.
‘요새 하루하루가 너무 재밌어. 그치?’
허세에 찌든 저 바보 같은 말에 애들도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재밌어, 밴드부에 가입하기를 잘한 것 같아, 저마다 입을 열어 재잘거렸다.
지율은 휙 뒤돌아섰다. 뛰었다. 도망쳤다. 자신은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던 인생의 즐거움을 떠벌리는 것들에게서. 완벽하지도 않고, 형편없는 주제에 행복하다는 놈들에게서.
그래서 지율은 며칠 뒤, 강당에서 공연을 벌인 놈들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줬다. 오만한 얼굴로 단상 위, 놈들을 올려다보면서. 형편없는 공연을 보여 준 것들에게 향한 혐오를 가득 담아 말을 뱉었다. 저에게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낯선 감정을 느끼게 해 준 데 대한 복수였다.
‘형편없지 않나? 내 귀가 이상한 건가?’
환하게 웃던 보컬 놈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토록 빛나던 얼굴이 일그러져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더니 씨발 새끼야! 욕을 갈기며 발악했다. 타인에게 그런 쌍욕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천박하기는. 그것 봐. 넌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야. 넌 형편없어. 형편없으면서 행복해하지 마. 즐겁게 웃지 마. 넌 절대로 완벽해지지 못해. 정신 차려. 지율은 속으로 실컷 비웃고 조롱했다. 같잖은 우월감에 젖었다.
어렸던 거다. 똑똑하고, 어른스럽고, 실수 하나 없이 완벽했지만 그래 봤자 10대 애였다. 겉은 완벽할지언정 속은 덜 익어 풋내 풀풀 풍기던 때였다. 치졸한 질투로 한 사람을 깔아뭉개며 꼴같잖은 우월감을 느끼던, 그런 한심한 애새끼였다.
그 사건 이후, 지율은 다시 1등 자리를 차지했다. 씨발 새끼라 욕하며 길길이 날뛰던 밴드부 보컬은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영진 스타즈는 해산됐다. 시간이 물처럼 흘렀다. 지율은 늘 1등이었고, 겉모습만은 완벽한 인생을 살았다. 물처럼 흐르는 시간을 살아가느라 과거의 일은 잊었다. 밴드부 보컬의 얼굴도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지금. 여전히 지율의 속은 덜 익었다. 하지만 이제는 완벽함을 버리는 법을 깨쳤다. 이젠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인생을 안다. 즐거움이 뭔지, 행복이 뭔지, 알게 됐다.
책상 위에 놓아둔 핸드폰이 울렸다. 지율은 짧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언제가 시간 괜찮으십니까? 제가 저녁 사겠습니다. 알려드릴 소식도 있습니다.」
해윤이 보낸 문자였다. 지율은 픽 웃었다. 거래처에서 온 문자도 이것처럼 사무적이진 않을 거다. 지율도 손가락을 움직여 문자를 날려 보냈다.
「좋은 소식입니까? 나쁜 소식입니까?」
「좋은 소식입니다.」
대체 무슨 소식이기에. 그에게 언제 만나자고 문자를 보낸 직후, 송 비서가 노크를 하고 사무실 안에 들어섰다. 그가 서류를 내밀며 지율에게 말을 건넸다.
“이사님도 들으셨죠?”
“뭘 말입니까?”
“해윤 씨, 스카우트 됐대요. 로지엠 뮤직이란 데서 해윤 씨 노래를 듣고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나 봐요.”
그가 말하던 좋은 소식이란 게 그거였구나 싶었다.
“거긴 괜찮은 곳입니까?”
“네. 알아봤더니 인디밴드 전문 기획사더라고요. 소속 가수들을 보니 제법 괜찮고요. 규모는 작아도 내실 있고 탄탄한 회사 같았어요. 대표도 믿을 만한 거 같고.”
“다행이네요. 정말 잘됐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해윤은 서울에 올라와서도 일을 하며 계속 공원이나 거리에서 야외 공연을 했다. 지율이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뭘 해 준다 한들, 받을 사람도 아니었다. 워낙 자존심이 센 사람이라, 거리 공연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음향 장비를 마련해 주었는데도 받지 않았다.
대단하다, 정말. 기타 하나 둘러매고 추운 거리에서 손가락이 터지도록 기타를 치고,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로지 해윤의 실력만으로 얻은 기회였다.
“해윤 씨는 정말 대단해요. 되게 존경스럽고 그래요. 내가 다 기쁘네.”
송 비서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네. 대단한 사람이죠.”
지율도 한 치의 사심 없이 송 비서의 말을 받아쳤다.
“얼른 해윤 씨, 음반도 나오고 데뷔도 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해윤 씨 같은 사람이 잘되어야 해요. 나, 해윤 씨 1호 팬이라고요. 저 정말 해윤 씨가 좋아요.”
“해윤 씨는 잘될 겁니다.”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잘하라고 응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은 잘 될 거다.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스스로 빛나는 법을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지율은 송 비서가 나간 뒤, 해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어, 왜 전화하셨어요?
당혹감에 찬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해윤 씨한테 전화하면 안 됩니까?”
- 아뇨. 그게 아니라 한창 일하느라 바쁘실 시간이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애인한테 전화할 시간은 있습니다.”
애인…, 해윤이 그 소리를 곱씹으며 좋아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런 소리를 할 때면 매번 수줍어한다.
“축하합니다. 스카우트 됐다면서요.”
- 어떻게 아셨어요? 아, 송 비서님한테 들으셨나 보구나.
“잘됐습니다. 정말. 이제야 진짜로 가수 데뷔하실 수 있겠네요.”
- 아직 몰라요. 스카우트 제의만 받고 아직 계약서도 안 썼는데요.
“계약서 쓰러 갈 때 꼭 절 불러요. 함께 갑시다.”
- 에이. 제가 애도 아닌데 그건 좀 그렇죠.
애는 아닌데 이상한 데서 어리숙한 면이 있는 사람이라 이런다. 김태민과 말도 안 되는 계약을 한 것만 봐도 그렇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해도, 김태민이 해윤에게 들이민 계약서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쓰레기였다. 해윤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한 기획사 대표가 김태민 같은 사기꾼일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건 나중의 일이니 그때 다시 얘기하도록 하고, 오늘 저녁에 만나죠?”
- 오늘이요? 오늘은 라이브 카페에서 공연이 있어요. 카페 사장님이 공연을 해 달라고 하셔서.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바쁘실 텐데 무리해서 시간 내실 것 없어요.
“밤새 하는 공연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그리로 가죠. 그리고 무리하는 거 아닙니다. 여유가 없으면 제가 먼저 만나자고 하지도 않죠. 저녁에 봅시다.”
네, 저녁에 봐요. 그도 웃으며 인사했다. 사실은 오늘도 야근을 할 생각이었다. 오늘까지 해야 하는 일은 며칠 전에 이미 처리해 두었다. 야근을 하며 처리할 예정이었던 일은 며칠 뒤까지 처리해 줘야 할 일이었고. 몸에 밴 습관이었다. 지율은 할 일을 쌓아 두는 법이 없었다. 해야 할 일을 미룬다는 건,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늘 일을 미리미리 처리해야 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한기우가 언제 어디서 무슨 사고를 칠지 몰랐으니까. 그 새끼는 예고도 없이 사고를 펑펑 터뜨려서 주위를 온통 발칵 뒤집어 놓곤 했다. 이젠 언제, 어느 방향으로 튀어 오를지 모를 폭탄이 사라졌다.
그러니 이제는 좀 내려놓고 한숨 돌려도 되지 않나 싶었다. 이 업무를 오늘 안에 처리해 두면 좋겠지만, 내일 해도 상관없는 일이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지율은 퇴근 시간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섰다. 코트를 챙겨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자 김 비서가 일어섰다.
“퇴근하겠습니다. 김 비서도 퇴근하세요.”
“벌써 퇴근하시게요?”
“퇴근 시간 아닙니까. 저도 이젠 저녁이 있는 삶을 즐기려고 합니다.”
김 비서가 눈을 끔뻑였다. 연애도 하지 않고, 사적인 취미 하나 없이 일에만 열중해 살던 워커 홀릭 상사가 이런 소리를 하니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아, 그런데 친구한테 축하할 일이 생겼는데 뭘 줘야 할까요?”
“네? 축하할 일이라면 꽃이나 케이크 같은 게 좋지 않을까요? 맛있는 밥을 사 주시든가. 근데 사실 돈이 최고죠.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돈이 좀 그렇다 싶으면 상품권도 좋고요.”
김 비서가 솔직하게 대답하며 웃었다. 지율도 픽 웃으며 대답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돈이나 상품권은 받지 않을 사람이니 꽃이 좋을까. 뭐든 잘 먹는 사람이니 케이크가 나을지도. 결국 지율은 가는 길에 꽃집에 들러 꽃다발을 샀다. 할머니 댁에 잠시 들렀다 가야 했기에 그녀가 좋아하는 장미꽃도 샀다.
오후에 할머니를 돌봐 주는 간병인에게 잠시 들러 달라는 연락을 받았던 터였다. 성북동으로 향해 거실 소파에 앉아 넋이 나가 있던 할머니에게 꽃을 내밀었다.
“오리는 왜 안 와? 오리 보고 싶은데. 오리가 나 보러 오기 싫대?”
장미꽃을 받아 들자 늘 그녀에게 꽃을 안겨 주던 해윤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해윤 씨가 요새 많이 바빠서 그래요. 그리고 곧 해윤 씨를 TV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TV 틀면 오리가 나와? TV 틀어 줘. 얼른.”
“아뇨. 지금은 아니고 곧이요. 곧 그렇게 될 거 같아요.”
아, 그렇구나, 하며 멍하게 눈을 끔뻑이던 그녀가 테이블에 놓인 간식 바구니를 들어 올려 지율에게 내밀었다. 약과며 모나카, 전병, 그런 것들이 든 바구니였다.
“이거 오리 줘. 이거 되게 맛있는 거니까. 이거 먹고 꼭 나 보러 오라고 해 줘. 오리 주려고 그림 많이 그렸는데.”
“할머니. 해윤 씨가 그렇게 좋으세요?”
“응. 좋아.”
그녀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처럼 히죽 웃었다. 참 복 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그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많으니. 좋은 부모 밑에서 따스한 애정을 듬뿍 받고 자란 사람이라 그런가 보다. 올곧은 어른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 사람이 올곧다. 뒤틀림 없이, 기가 차도록 맑고 정직하고 성실하다.
“지율이도 좋아.”
할머니가 지율의 손을 쥐고서 웃어 보였다. 지율도 웃었다. 그녀의 주름진 손이 지율의 손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기특하고 대견하다는 듯이. 할머니의 배웅을 받으면서 지율은 다시 차가운 밖으로 나섰다. 할머니가 쥐여 준 과자 바구니를 달랑달랑 들고서. 현관문을 열고 나와 정원을 가로지르며 잠시 멈춰 서서 뒤돌아보았다.
눈 내리던 지난 밤,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나와 자신을 맞아 주던 석해윤의 모습이 떠올랐다. 꼬리를 마구 흔들며 달려 나오는 강아지 같던 모습.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지, 어쩌면 저렇게 자신의 감정을 온몸으로 내뿜으며 좋아할 수가 있지. 저 사람은 정말 나를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웃었던 기억이 났다.
지율은 그때처럼 웃으며 다시 돌아섰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며칠 전에 해윤을 봤는데도 그 얼굴이 또 보고 싶고, 그 따스한 온기에 닿고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평일 저녁이라 카페 안은 한산했다. 몇 명의 손님들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카페 한구석에 놓인 작은 무대에 그가 있었다. 의자에 앉아 기타 줄을 손보고 있던 해윤이 막 안으로 들어서는 지율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지율은 자리를 잡고 앉아 음료를 이것저것 주문했다.
“더 오실 일행이 있으세요?”
남자 혼자 와서 음료를 여러 잔 시키니 궁금한 모양인지, 점원이 지율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뇨. 제가 시킨 음료를 여기 계신 손님들에게 한 잔씩 돌려 주세요.”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점원이 어이없어하면서도 순순히 물러났다. 가게 매상을 올려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을 터였다. 해윤에게 공연할 무대를 마련해 준 카페다. 할 수만 있다면 며칠 치 매출을 단번에 올려 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해윤이 부담스러워할 게 분명하니 이 정도 선에서 그쳤다. 청명한 기타 소리가 울리며 작은 공연이 시작되었다. 해윤의 손가락이 기타 줄 위에서 떠다녔다. 앞에 놓인 마이크에 얼굴을 갖다 대 입을 벌렸다.
그의 목울대가 떨리며 벌어진 입에서 노래가 쏟아져 나왔다.
소리가 맑다. 탁 트였다. 그의 올곧은 심성처럼. 여전히 완벽하진 않지만 듣기 싫을 정도로 형편없지도 않았다. 노력은 언제나 보상받는다. 노력한 만큼 그의 노래 실력은 확실히 늘었다. 남의 기교를 흉내 내지 않고, 어설프게 멋 부리지 않고, 자신의 장점인 맑고 깨끗한 목소리를 직선적으로 내뿜는다. 그에게 딱 어울리는 창법이었다. 오랜 무명 밴드 시절을 거쳐 이제야 그는 제게 딱 맞는 옷을 입었다.
귓속으로 파고드는 깨끗하고 보드라운 목소리. 조명 아래 비친 그의 웃는 얼굴. 열악한 조명 아래에서도 그는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밴드부 연습실에 비쳐 들던 햇살에 반짝여 반짝이던 때처럼.
예나 지금이나 해윤은 노래를 부를 때가 제일 행복해 보인다. 아름다웠다. 예뻤다. 기꺼운 환희에 가득 차 빛나는 얼굴이. 저 예쁜 입에서 나오는 깨끗한 목소리가. 가사 한 음절, 한 음절이 지율의 가슴을 두드렸다.
노래를 부르는 저 사람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거다. 행복한 얼굴로, 행복하게 노래를 부르는 저 얼굴이 지율에게 향해 있었다. 그의 빛나는 두 눈은, 그의 얼굴은, 오로지 지율에게 붙박여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찬란한지. 어쩌면 저리도 따스한지. 지율은 어느새 그의 노래에 푹 빠졌다. 그의 목소리가 주는 따스함에 주저 없이 몸을 맡겼다. 그냥 노래가 좋았다. 목소리가 듣기 좋다. 그거면 된 거다.
그가 노래를 끝냈다. 가슴을 울리던 노랫소리가 끊기고 박수 소리가 터졌다. 지율도 손을 마주쳐 박수 쳐 주었다. 그는 곧이어 팝송을 몇 곡 더 부르고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짧은 공연을 끝내고 제 쪽으로 다가오는 해윤에게, 지율은 순수하게 칭찬의 말을 건넸다.
“오늘 아주 좋았습니다. 갈수록 실력이 느네요.”
네? 자리에 앉던 해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워했다.
“형편없다고 욕하실 줄 알았는데.”
“많이 늘었으니 늘었다고 하는 겁니다. 전 빈말은 안 하는 거 아시잖습니까.”
해윤이 씩 웃으며 앞에 놓인 차를 마셨다. 지율이 아까 주문하고 노래를 듣느라 손도 대지 않은 음료였다. 지율은 사 들고 온 꽃다발과 할머니에게 받은 과자 바구니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축하의 꽃다발이죠. 축하합니다. 그리고 이건 할머니가 주신 거고요.”
“고맙습니다. 아직 스카우트 제의만 받은 건데 축하받으니 좀 부끄럽네요. 어르신은 잘 계시죠?”
그러며 그가 과자 바구니에서 모나카 하나를 꺼내 껍질을 까 우물우물 씹었다.
“할머니가 해윤 씨를 무척 보고 싶어 하십니다. 맛있습니까?”
“모나카 같은 거 안 좋아하는데, 어르신 댁에 있는 간식은 하나같이 다 맛있다니까요. 비싼 거라 그런가.”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순식간에 하나를 다 먹어치우고 그는 약과를 들어 올렸다. 카페 사장이 공연, 수고했다며 테이블로 다가와 해윤에게 인사를 하며 일당이 든 봉투를 건넸다. 당연한 대가인데도 그는 부담스럽다고 돈 봉투를 돌려주려 했다
“사장님. 제가 좋아서 하겠다고 한 건데요. 이런 거 챙겨 주시면 제가 부담스러워요.”
“에이. 얼마 안 돼. 귀한 공연을 해 줬는데 공연비 챙겨 주는 건 당연한 거지. 유명해져도 우리 카페에 와서 종종 공연해 줘.”
사장이 그러며 해윤의 주머니에 손에 봉투를 꼭 쥐여 주었다. 사장은 마지못해 봉투를 받아든 해윤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기며 웃었다. 해윤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웃고 있다. 카페에서 나와 두 사람은 잠시 길을 걸었다.
“되게 고마운 분들이 많아요. 앞으로 더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야지. 요샌 하루하루가 너무 재미있고 너무 소중해요.”
재잘대는 그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발랄하게 뿜어져 나왔다.
“행복합니까?”
“네. 너무 행복해요.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지율의 질문에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어두침침한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 얼굴이 말갛고 매끈하다. 지율은 웃음을 머금은 그의 입술에 불쑥 키스했다. 아까부터 저 입술에 키스하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움찔 떨리는 그의 입술을 할짝 핥았다.
“단맛이 나네요.”
“단 걸 먹었으니까….”
웅얼거리며 달싹이는 입술의 촉감을 맛보고 지율은 제 입술을 뗐다. 그리곤 기타 줄을 튕겨 예쁜 소리를 만들어 내던 그의 손을 잡았다. 거칠고 울퉁불퉁한 촉감이 손안에 감겨들었다. 거칠지만 따스하다.
둘은 인적 없는 주택가 길을, 손을 잡고 걸었다. 두 개의 긴 그림자가 정답게 달라붙어 따라붙었다. 추운 밤이었다. 차갑고 서늘한 습기가 가득한 밤. 숨을 쉴 때마다 지율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옆에 선 해윤의 입에서도 하얀 입김이 쏟아졌다.
한마디 말이 없는데도 어색하지 않았다. 이제 둘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의 공기도 자연스럽다. 하고 싶은 말, 들려주고 싶은 말, 입 밖으로 내고 싶은 수많은 말들이 있을 테지만 그는 침묵한다. 지율도 침묵했다. 대화 없이, 조용히, 서로의 손을 맞잡고 닿아 있는 이 순간의 정적이 소중했다.
닿았다. 그의 온기에. 지율은 더없이 소중한 그의 온기를 힘을 주어 제 손안에 감아 쥐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