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은 여사의 집은 산비탈에 위치하고 있어 황금 볕이 집 전체를 감쌌다. 동네 자체가 워낙 한산했다. 복잡한 도심을 지나 이곳에 들어서니 마치 모든 게 꿈같았다. 그저 즐겁고 기쁘기만 한 마음으로 할머니를 찾아뵙는 어린 손자가 된 기분이었다.
“오리야! 잘 왔어. 잘 왔어!”
어르신은 늘 그랬듯 격하게 기뻐하며 해윤을 맞아 주었다. 일전에 보았던 가사도우미 여사님도 환하게 웃으며 해윤을 반갑게 맞이했다. 현관문까지 마중 나온 어르신은 해윤의 손을 다잡아 쥐고 재잘재잘, 신이 나서 떠들었다.
“나 오리가 너무 보고 싶었는데. 오리 본 지 너무 오래됐어. 너도 나 보고 싶었지?”
불과 얼마 전에 미술관에서 보았으면서. 해윤은 애써 웃어 보였다. 정신 잃고 날뛰던 한기우를 말 몇 마디로 꼼짝 못하게 하던 나이든 여장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저 시꺼먼 놈은 누구야?”
그제야 노파가 뒤따라 들어온 박지형의 존재를 알아채고는 물었다. 녀석이 꾸벅 인사하며 제 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여사님. 해윤 형 매니저인 박지형이라고 합니다.”
“너 참 밥 잘 먹게 생겼다.”
박지형을 처음 본 노파의 소감은 그랬다. 지형이 녀석이 넉살 좋게 씨익 웃어 보였다.
진시은 여사가 머무는 이 집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견고한 요새였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파의 공간에 아무도 섣불리 발을 들이지 못한다. 세상 무서운 것 없이 광기를 휘두르는 한기우조차.
신세 지기 싫다며 한사코 거부했는데 또 이곳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
“나 간식 먹어. 오리도 같이 먹자.”
노파는 해윤을 거실로 데려가 소파에 앉혔다. 가사도우미가 해윤에게 뭘 좋아하시냐고 물었다.
“전 뭐든 잘 먹습니다.”
“저도 주시는 대로 뭐든지 잘 먹습니다!”
박지형이 쾌활하게 외쳤다. 사교성 하나는 끝내주는 녀석이었다. 도우미 여사님이 소리 내 웃으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노파가 해윤에게 먹기 좋게 작게 자른 떡 조각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받아먹어야 하나 싶어서 빤히 보자 노파가 해윤의 입에 떡을 넣어 주었다.
“어때? 맛있지?”
해윤이 떡을 오물오물 씹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노파가 환하게 웃었다.
“뒀다가 지율이가 놀러 오면 줘야지. 지율이가 이 떡을 참 좋아해.”
그러며 노파가 떡이 남은 그릇을 옆에 치워 뒀다. 곧 도우미 여사가 주방에서 해윤과 박지형 몫의 다과상을 내왔다. 노파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도우미 여사에게 물었다.
“걔는 어디 갔어? 저 녀석이랑 비슷하게 곰같이 덩치 큰 놈.”
“최 실장이요? 여사님이 집 안에 덩치 큰 사내들 있는 게 감시당하는 거 같아 싫으시다면서 내보내셨잖아요.”
씹어 넘긴 떡이 목구멍에 딱 걸린 것 같아 해윤은 얼른 수정과를 들이마셨다.
“그래? 그럼 기우는? 걔는 왜 안 와?”
“전무님은 병원에 계세요. 아파서.”
“내 새끼가 어디가 아픈데?”
“전무님이 정신 쪽이 아주 많이 안 좋으셔서 회장님이 병원에 입원시키셨잖아요. 제대로 치료받고 건강해진 모습으로 여사님한테 찾아오실 거예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도우미 여사님 나름대로 알아듣기 쉽게 풀어 설명한 거였다. 하지만 한기우가 건강해진 모습으로 돌아오기는 글렀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서 하는 말일 터였다. 그녀는 여사님 좋아하시는 오리 총각이 놀러 왔으니 즐겁게 얘기 나누시라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노파는 해윤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아이처럼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특별히 해 드린 것도 없는데 저를 이렇게 좋아해 주시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살아온 환경이나 현재의 신분이 어떻든, 노파는 부산의 어머니와 이모나, 전에 살던 곳의 이웃집 어르신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정 많고 인자하고 얘기할 상대가 필요한 외로운 노인일 뿐이었다.
노파와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쓸데없는 고민은 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해윤은 억지로라도 웃고 떠들며 자꾸만 머릿속 한구석에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들을 애써 지웠다.
박지형도 워낙 사교성이 좋아 금세 노파와 친해졌다. 녀석은 쉴 새 없는 노파의 얘기에 반응해 주며 귤도 까 드리고, 사과도 먹여 드리고 했다.
한층 더 흥이 올라 조잘조잘 떠들던 노파가 갑자기 드라마를 봐야 한다며 TV를 틀었다.
“저도 저 드라마 되게 재밌게 보고 있어요!”
박지형이 반갑게 외쳤다. 요새 한창 인기인 주말 드라마인 모양이었다. 무심코 TV를 보던 해윤은 놀랐다. 화면 가득 민지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드라마고 예능이고 TV를 보지 않아 민지유가 드라마에 나오는 것도 몰랐다.
“민지유 씨가 드라마에 나오네.”
“몰랐어요? 민지유가 조연인 악녀로 나오는데 요새 주연보다 더 인기예요. 이번에 제대로 인생 캐릭터 만났더라고요. 기획사에서 그렇게 팍팍 밀어줬는데도 최근에 찍은 영화고 드라마고 싹 다 말아먹었잖아요. 주연 배우진 빵빵하고 시나리오도 훌륭해서 투자 제대로 받고 야심 차게 찍은 것들이었는데도 이상하게 흥행이 안 되더라고요.”
“이번 드라마라도 떠서 다행이네.”
“그렇죠. 저도 민지유 팬인데 잘 됐죠. 듣기론 민지유가 이번에 Tnd에서 대경 ENT로 이적하는 것 같더라고요. 리나 사건이 있기 전부터 Tnd 장 대표가 소속 연예인들 쥐어짜기로 유명했나 봐요. <천적>인가? 이번에 대경에서 투자하는 대작 영화가 있는데 민지유가 그 영화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단 말도 있고.”
“조용히 해. 소리가 안 들리잖아.”
노파가 나불대는 박지형과 해윤에게 주의를 주었다. 둘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해윤은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드라마 속 악녀 캐릭터인 민지유가 여주인공에게 악담을 퍼붓는 장면이었다. 인생 캐릭터라는 박지형의 말대로 민지유의 표독스러운 표정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한쪽 입술을 비틀어 피식 비웃으니,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양 볼의 보조개가 움푹 패며 섬뜩한 분위기를 덧그렸다. 워낙 연기력 하나만큼은 최고인 여배우였다.
민지유가 신인이었던 시절, 오디션에 합격해 찍게 된 영화가 대박이 터졌다. 그녀는 그 영화로 그해, 영화제 신인 여자 조연상까지 거머쥐고 순식간에 스타 반열에 올랐다. 해윤도 그 영화로 민지유의 팬이 됐다.
동경하던 여배우를 성 상납 하러 간 대기업 임원의 집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골 때린다, 쟤.’
해윤이 팬이라며 사인을 해 달라고 하자 크게 비웃던 민지유의 얼굴이 떠올랐다. TV 속에 나오는 악녀 캐릭터의 저 표정 그대로였다. 그리고 한지율의 사무실에 찾아와 따지던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도 함께 떠올랐다.
‘그거 분명 제 영화 아니었어요?’
그때 그녀가 주연 배우 역할은 자기 거 아니었냐고 떠들던 그 영화가 <천적>이라는 영화였다. 한지율은 그때 분명 주연 배우는 정해졌다고 말하며 민지유를 내보냈다. 민지유가 먼저 말을 꺼냈던, 대경 ENT 이적 건에도 한지율은 그 건은 Tnd 장 대표와 상의하라고 했다.
한기우가 결국 처리해 준 걸까. 해윤을 만나면서도 계속 민지유가 한기우의 집에 드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해윤은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한기우가 민지유나 다른 여자들과 만남을 지속했건 말건,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어유! 저 계집애, 저거 말하는 싸가지 좀 봐! 쟤는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았는지 어른을 보고 눈 까뒤집고 대거리를 하네!”
“저 여자가 어릴 때부터 부잣집에서 부족한 거 없이 막 휘두르면서 살았잖아요. 그렇게 컸으니 위아래도 없고 싸가지도 없고 개념도 없고. 순 사이코패스예요, 사이코패스.”
노파와 박지형이 죽이 척척 맞아 드라마 속 악녀를 마구 씹고 뜯었다. 박지형의 설명대로라면 저 악녀 캐릭터는 한기우와 꼭 닮은 캐릭터다.
거리낌 없이 사람을 해치고, 죄책감은커녕 오히려 죽을 새끼였잖아, 하면서 씩 웃던 한기우. 그리고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한기우의 목을 조르던 한지율. 직원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한지율은 기어이 한기우의 목을 졸라 죽였을까?
그럼 어때. 죽을 짓을 했잖아. 죽어도 싸지.
병실 안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때에도, 지금도, 해윤의 가슴속은 싸늘했다.
때마침 해윤의 핸드폰이 울렸다. 한지율의 번호가 떴기에, 해윤은 조용히 일어나서 거실을 벗어났다.
- 아까 하려던 얘기가 뭐였습니까?
“전무님의 병실에 있던 사내 중 하나를 본 적이 있습니다.”
- 어디서요? 둘 중 누구였습니까?
“박영민 대표의 호출을 받고 사무실로 올라가던 중에요. 아까 전무님 병실 안에 있던 사내들 중,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린 남자가 있었잖아요.”
- 아, 기억나는군요. 그 사내를 박영민의 사무실에서 봤던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니고 우린 박 대표님의 사무실이 있는 층에 내렸고, 그 사내가 엘리베이터 안에 타면서 절 흘겨봤었어요. 인상이 워낙 험악해서 연예 기획사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구나 싶었거든요.”
- 누가 한기우의 외부 연락책이었는지 알겠군요. 할 얘기는 그게 다예요?
이 이상 할 얘기는 없다. 이게 다였다. 하지만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한지율 씨, 아까 병실에서 했던 그 얘기, 진심입니까? 그 소리가 목구멍 언저리에 걸려 간질거렸지만 쉽게 입 밖에 내지 못했다.
- 잔소리 안 합니까?
해윤이 머뭇대는 사이, 그의 입에서 뜬금없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무슨 잔소리요?”
해윤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쳤다.
- 아까 한기우에게 제가 한 짓 말입니다. 가볍게 위협을 한 겁니다.
“변명하지 않으셔도 돼요. 한지율 씨답게 아주 신사적으로 처신 잘하셨는데요.”
이번엔 수화기 너머에서 한지율이 웃었다.
- 전 사건 뒤처리를 하느라 한 며칠 바쁠 것 같습니다.
“고생 많으시네요.”
- 한기우가 사고 치면 뒷수습하던 게 원래 제 일이었으니 고생이랄 것도 없습니다. 한기우를 확실히 잡아넣을 증거들을 차곡차곡 확보하고 있으니….
“믿어요. 걱정도 안 할 거고, 쓸데없는 짓도 하지 않고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해윤은 한지율의 말을 뚝 잘라먹고 말을 읊었다. 그가 늘어놓을 소리야 뻔했다. 한지율이야말로 입만 열면 잔소리였다.
- 내가 친인척 등에 칼 꽂는 비열한 짓을 할 건데 그래도 날 믿어 줄 겁니까?
“한지율 씨가 아무리 비열해도 전무님만 하실까요? 전무님은 친인척한테 살인 누명까지 씌웠는데.”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또 터졌다.
“조심하세요.”
해윤은 잠시 뒤 한마디 덧붙였다. 한지율의 길게 내쉬는 숨소리가 수화기 사이로 새어 나왔다. 웃음을 흘린 건지 한숨을 쉰 건지 모를 젖은 소리였다.
- 석해윤 씨. 아까 날 좋아한다던 말, 진심입니까?
해윤은 목구멍까지 치민 질문을 할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건만 그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직구로 내던졌다.
“나와 연애할 거라던 말도 진심이었어요?”
답을 질문으로 받아쳤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짧게 침묵했고 곧 얕은 웃음을 흘렸다.
- 할머니께 이번 사건 얘기는 말씀드리지 마십시오. 정신 돌아오시면 자연스럽게 알아채실 테니까.
“네.”
- 기다려요. 일 처리하고 가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속삭이던 한지율의 낮은 목소리가 해윤의 귓속에 녹아들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노파가 애타게 오리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해윤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는 몸을 틀어 거실로 향했다.
***
무의미한 시간이 물처럼 흘러갔다. 진시은 여사의 집에 머문 지 벌써 사흘째였다. 그동안 해윤이 한 일이라고는 노파에게 노래를 불러 주거나, 마사지를 해 주며 얘기 상대가 되어 주고 같이 드라마를 보는 일 정도가 전부였다.
도우미 여사는 여기에 머무시는 동안엔 제집처럼 편안하게 계시라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대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노파를 비롯해 이 집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지만 뭘 해도 마음이 불편해서 집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하지만 박지형은 정말로 제집처럼 편하게 눌러앉았다. 편해도 너무 편하게 늘어졌다. 녀석은 그새 노파뿐만 아니라 이 집의 고용인들과도 친해져서 집 안 어디에서든 녀석의 우렁찬 웃음소리가 들렸다.
해윤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마음이 영 심란해서 밤잠을 설치는데 박지형은 노파와 드라마를 보며 같이 욕을 하고, 여사님들과 간식을 까먹으며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킬킬거렸다. 녀석의 엄청난 친화력과 해맑은 태평함이 부러울 정도였다.
한지율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한기우는 어떻게 되었는지, 집 안에만 있는 해윤은 알 수가 없었다. 핸드폰을 만지작대며 인터넷을 뒤졌지만 최 실장의 죽음에 관련한 기사는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송 비서가 외부 소식을 전해 줄 법도 한데 핸드폰은 이틀째 조용했다. 한지율에게서도 연락 한 번 없었다. 먼저 연락을 해 보려 했지만 믿고 얌전히 기다리겠다는 말을 뱉어 놓은 게 있어, 계속 망설이다 어젯밤에 문자를 보내 봤다.
「날씨가 많이 추운데 감기 조심하세요.」
한참을 망설이다 날려 보낸 문자가 이 모양이었다. 그거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망설임 끝에 용기를 낸 보람이 있는지 한지율에게 곧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 뭐 합니까?
귓속으로 그의 나른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귤 먹고 있었어요.”
해윤은 있는 그대로 말했다. 막 껍질을 깐 귤을 입에 넣어 씹으며 노트북으로 관련 기사 한 줄이라도 뜬 게 없나 들여다보고 있던 참이었다.
- 귀엽기는.
한지율이 작게 웃으며 말을 뱉었다. 씹던 귤이 목구멍에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귀엽다는 말을 듣는 게 처음도 아닌데 이상하게 가슴이 설렜다.
- 더 귀엽게 굴어 봐요. 스트레스 좀 풀리게.
“차라리 욕해 달라고 하시죠.”
그가 소리 내 웃더니 입을 닫았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진다 싶더니 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깨고 해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신 거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길게 내쉬는 그의 숨소리가 해윤의 귀를 적셨다.
- 한기우를 병원에서 퇴원시켰습니다.
생략된 주어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이재나 사장. 그녀가 아니면 누굴까.
“이재나 사장님이요?”
- 아뇨. 제가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해윤은 미간을 좁혔다. 대체 왜? 그 소리가 튀어나오려 했지만 해윤은 입을 닫고 심호흡을 했다. 곧 마음이 차분해지며 미간 사이의 주름도 펴졌다.
“왜냐고 묻지 않겠습니다.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를 분이 아니니까.”
- 이 소리를 들으려고 당신에게 전화했나 봅니다. 당신 목소리를 들으니 좋네요.
“술 취하셨어요?”
- 위스키를 두 잔 정도 마셨습니다. 오랜만이라 취하는군요.
취한 게 아니라고 둘러댈 수도 있을 텐데. 고지식하게 사실 그대로 내뱉는 건 해윤이나, 한지율이나 똑같았다.
- 왜 대경 ENT와의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했습니까? 한기우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이유 말고 다른 이유를 말해 봐요.
“신미라의 껍데기를 벗고 싶었어요. 신미라를 닮은 얼굴로 얻은 기회였으니까. 신미라를 벗고 석해윤으로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한지율 씨한테.”
- 난 석해윤 씨에게 끌린 겁니다. 처음부터 당신은 석해윤 씨였지, 난 당신에게서 신미라를 본 적 없습니다.
높낮이 없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사람 가슴을 흔드는 말을 잘도 늘어놓는다.
“진작 놨어야 했어요. 노래 부르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 붙잡고 있던 건 제 욕심이었죠. 이래도 되나? 싶었을 때 깔끔하게 놨어야 했는데, 손에 쥔 기회가 너무 달콤해서 놓지를 못했죠. 그냥 눈 딱 감고 가지기에는 양심이 찔렸고, 놓기에는 아깝고. 제가 덮어 놓고 이기적인 놈이었으면 속 편했을 텐데 어설픈 개새끼라 괴로운 상태였어요.”
- 석해윤 씨가 덮어 놓고 이기적인 새끼였으면 내가 댁한테 이렇게 끌리지도 않았겠죠.
두 번이나 같은 표현이 반복되니 이제야 깨달았다. 이 남자는 지금 ‘너에게 끌린다’고 말하고 있다. 삼류 양아치처럼 입만 열면 ‘꼴린다’는 저속한 소리를 내뱉더니. 한 끗 차이인데도 이렇게 느낌이 다르다.
-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전처럼 일하면서 노래 불러야죠. 어디서든 제가 노래를 하면 들어 주세요.”
한지율의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이가 없을 때 비어져 나오는 헛웃음이었다.
- 내일이나 모레 즈음, 그리로 가겠습니다. 쉬어요.
“네. 한지율 씨도 술 너무 많이 드시지 마시고 쉬십시오.”
어젯밤에 했던 한지율과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얘기를 나눈 덕분에 해윤은 이 집에 온 이후 처음으로 푹 잘 수 있었다.
개운하게 자고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고 2층 방에 올라와 노트북으로 새로 갱신된 오늘 자 인터넷 기사들을 훑고 있던 때였다. 마찬가지로 관련 기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래층에서 오리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해윤이 방에서 나와 1층으로 내려가자 안방에서 간병인이 노파의 휠체어를 끌고 나왔다.
“정원에 나가. 햇볕 쬐러. 오리도 같이 나가자.”
노파가 해윤을 보고 웃어 보였다. 해윤도 겉옷을 대충 꿰어 입고 두 사람을 따라나섰다. 볕이 좋은 오후였다. 바람은 차가워도 공기가 쨍하게 맑은 기분 좋은 날씨였다.
언제 나온 건지 박지형이 정원 한쪽에 마련된 야외 테이블을 손보는 고용인과 노닥거리고 있었다.
노파가 휠체어를 끄는 간병인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간병인은 눈치 빠르게 조용히 물러나 옆에 붙어선 해윤에게 휠체어를 넘겼다. 해윤은 아무렇지 않게 노파의 휠체어를 밀며 정원을 거닐었다.
“해윤아.”
노파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해윤이 이곳에 머문 지 이틀 만에 처음으로 노파가 제 이름을 불러 줬다.
“기우가 최 실장을 해쳤다면서?”
“네.”
아니라고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노파는 야윈 어깨를 크게 들썩여 긴 한숨을 뱉었다.
“내가 정신이 이 모양이라 답답하구나. 갈수록 망각의 터널이 길어져.”
그녀는 옆에 붙어 따라오는 간병인에게 핸드폰을 달라고 했다. 간병인이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노파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율아. 나다. 자금은 걱정하지 말고 제대로 처리해.”
처리의 대상이 한기우라는 것은 확실했다.
“승조는 제 아들이랍시고 어떻게든 이 일을 묻으려 들 거다. 너도 알다시피 못난 자식이라 욕해도 제 새끼는 끔찍이 생각하는 놈이야. 그러니 여기저기서 제대로 싹싹 긁어모아서 한꺼번에 터뜨려. 어떤 수를 써도 빠져나갈 수 없게. 최 실장이 결혼은 했던가? 동거하던 애인이 있었다고? 보상 확실히 해 주거라. 최 실장, 그놈이 기록하는 거 잘하던 놈이라 털어 보면 유용한 정보가 나올 게다.”
노파는 전화를 끊고 또 다른 곳에 전화를 돌렸다.
“박 변호사. 우리 둘째 손자 놈이 또 대형 사고를 친 거 같은데. 그놈이 결국 사람을 죽였어. 둘이나.”
섬뜩할 수도 있는 소리를 듣고도 옆에 붙어선 간병인의 표정은 태연했다.
“이제 그놈 좀 잡아넣어야 하지 않겠어? 지금까지 봐줘도 너무 많이 봐줬다고 생각하지 않아? 심신 미약, 주취감경, 어쩌고 갖은 이유 다 갖다 붙이면서 허튼짓하려 하지 말고. 그놈은 인간 되기는 글렀어. 진작 그놈 사람 만드는 거 포기하고 집어넣었어야 했어.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더니 결국 그놈이 사람까지 해쳤잖아. 승조? 그놈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박 변호사은 내 말대로 해.”
말을 많이 해서 목이 칼칼한지 노파가 기침을 했다. 간병인이 손수건을 꺼내 노파에게 내밀었다. 손수건으로 젖은 입가를 문지르던 노파가 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지금 이리로 좀 와 줘. 재산 증여에 관해서 긴히 할 얘기가 있어. 내가 언제까지 이 정신을 유지할지 알 수 없으니까 되도록 빨리 오도록 해.”
두 번째로 통화한 상대와 전화를 끊으며 노파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평화롭게 그림 그리다 죽기는 글렀지. 이봐. 내 생일 파티는 회사 창립 기념 파티와 함께 연다고 전해.”
노파의 말을 전해 받은 간병인이 넌지시 물었다.
“그럼 여사님 생신 파티가 열흘이나 빨라지는 것인데요?”
“상관없어. 다 늙어서 생일 파티가 무슨 소용인가. 어디 그게 날 위한 잔치인가? 자식새끼들이나 손자 놈들이나, 평소엔 한 번도 찾아오지 않던 놈들이 나한테 떡고물 하나라도 받아가려고 재롱 피우기 위한 잔치지.”
간병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해윤아. 파티 때 초청 가수로 와 주겠니?”
노파가 고개를 틀어 해윤을 바라보았다. 박지형이 했던 소리가 생각났다. 이재나 사장이 저를 창립 기념 파티 초청 가수로 불렀다고. 이재나의 청은 거절할 수 있어도 노파의 부탁까지 거절할 순 없었다. 해윤은 그러겠다고 했다.
“해윤이 네 노래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 마음이 편안해져. 넌 가수로 성공할 거야.”
“실력 좋은 가수가 얼마나 많은데요.”
“내가 네 노래가 좋다잖아. 그러니 네 실력도 충분히 좋은 거야.”
칭찬을 들으니 기분은 좋았다. 바람이 차서 그런지 노파가 기침을 했다. 해윤은 겉옷을 벗어 노파의 어깨 위에 덮어 주었다.
“그래서 음반은 언제 나오나? 얼른 만들어서 나 하나 줘. 매일 듣게.”
“이따 들어가서 노래 녹음해 드릴게요. 그걸 들으시면 돼요.”
“해윤아. 나중에라도 종종 찾아와서 노래 불러 줘. 늙으니 외로움이 제일 큰 적이야.”
노파가 정원 너머를 바라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노파가 자꾸 마른기침을 하는 바람에 정원 산책은 짧게 끝났다. 곧 박 변호사라는 사내가 찾아왔고, 다행히 그때까지 노파의 정신은 멀쩡히 붙어 있었다.
오후에 변호사와 안방에 틀어박혀 몇 시간을 얘기하던 노파는 저녁 식사를 하자마자 곤히 잠들었다. 변호사와 대화하는 내내 정신을 붙잡아 두기 위해 진을 다 빼 버린 모양이었다. 해윤과 박지형도 일찌감치 2층으로 올라와 방에 틀어박혔다.
“형은 그럼 어쩌실 거예요? 부산으로 내려가실 거예요?”
박지형이 침대에 길게 누워 핸드폰 게임을 하며 종알거렸다.
“그럴까 생각 중이야. 서울 집값이 워낙 비싸서 버티기가 힘들어.”
“통장에 남은 돈이랑 집은 그냥 받아 버려요. 어차피 돌려준다고 받지도 않을 것 같은데.”
해윤은 웃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해도 박지형은 해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박지형이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해윤을 보았다.
“근데 형. 전에는 너무 무섭고, 형도 원망스럽고, 왜 내가 사서 고생을 하나 싶어서 화도 나고 그랬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평온해요. 신기할 정도로 아무 생각 안 들어요. 최 실장이 죽은 것도 그게 뭐? 싶고. 저 이상하죠?”
“방어기제인 걸 수도 있어.”
“뭔데요? 그게?”
“사람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거나 했을 때, 크게 상처 입지 않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막 같은 게 생기는 거지. 네가 이상한 게 아냐. 사람은 대부분 비슷해.”
“와. 형은 학력은 형편없는데 되게 똑똑해요. 번듯한 직장 하나 없이 아마추어 밴드 활동이나 하며 살았다면서 아는 게 뭐 이렇게 많아요?”
녀석 딴에는 순수하게 감탄하고 칭찬하는 소리일 것이다. 사족이 길어서 그렇지. 해윤은 픽 웃으며 보던 책을 내려놓았다. 한기우가 쓰던 방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이었다. 이런 좋은 책들을 읽었으면서도 사람이 왜 그렇게 비틀린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형. 근데 형이 약쟁이한테 받은 걸 다 돌려주시는 거면….”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
“너한테 준 선물은 내 손에서 떠난 거야. 너한테 준 시계는 네 거니까 안 돌려줘도 돼.”
해윤의 말에 박지형이 히죽 웃었다.
“전 방으로 갈게요. 근데 형. 나 여기가 너무 좋아요. 계속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다. 이 집 입주 가정부로 써 달라고 할까요? 밥 너무 먹는다고 싫어하시려나?”
“방에 가서 쉬어. 오늘도 수고 많았어.”
수고한 것 하나 없는데도 말은 그렇게 해 봤다. 박지형이 형도 쉬시라며 문을 닫고 나갔다. 읽다가 만 책이나 마저 읽다 자려고 책장을 펼친 때.
해윤의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낯선 번호였다. 받지 않으니 계속 진동하다가 알아서 끊어졌다. 잠시 잠잠하다가 곧이어 그 번호로 또 한 번 전화가 걸려 왔다.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는데도 끈질기게 울리고 있다.
집요하다. 한기우의 병적인 집요함이 느껴졌다. 해윤은 손을 액정 화면에 갖다 대 수신 거부를 했다. 그러자 곧바로 문자 알림음이 울린다.
「해윤아. 날 왜 이렇게 힘들게 해?」
해윤의 입에서 저절로 실소가 비어져 나왔다.
「전화 받아 줘. 부탁이야. 목소리 듣고 싶어.」
핸드폰 화면이 확 밝아지며 전화기 몸체가 부드럽게 진동했다. 화면 위에 뜬 번호가 해윤의 동공으로 날아들었다. 해윤은 손을 뻗어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 미안해.
사과의 말을 툭 뱉는다. 고민의 흔적도 없이. 해윤은 비어져 나오는 실소를 참았다. 조롱의 웃음이라도 반응해 주기가 싫었다.
- 내가 다 잘못했어. 미안해. 용서해 줘. 너한테 내무 너무 심하게 굴었던 것 같아.
해윤이 침묵하니 한기우의 입에서 말이 줄줄 나왔다. 1g의 진심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였다. 이것과 비슷한 영혼 없는 사과를 들어 본 적이 있다. 예전에 머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했던 해윤을 찾아와 했던 한지율의 사과. 한기우의 강요에 마지못해 했던, 책을 읽듯 건성으로 줄줄 읊던 그 소리와 비슷하다.
- 무슨 말이라도 해. 내가 사과하잖아. 날 무시하지 마. 아무 말이라도 해 보라고!
한기우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한기우는 혼자 들끓어 뜨거워지는데 해윤은 싸늘해졌다. 해윤은 창가로 다가가 블라인드를 올리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이 온다. 조용히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 미안해. 미안해, 정말.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날 주체할 수가 없어. 너무 춥고 아프고 괴로워. 몸이 벌벌 떨리고 눈앞이 시뻘게지다가 앞이 깜깜해지곤 해. 소리를 지르면서 도와 달라고 해도 내 주위엔 아무도 없어. 무서워. 세상이 지옥 같아. 무섭고 외롭고 아프다고. 무슨 말이라도 해 줘. 목소리 좀 들려줘. 나 좀 안아 주면 안 될까? 그때처럼 나 좀 껴안아 줘.
웅얼거리는 한기우의 목소리가 흐느낌에 가까워졌다. 그가 자기 연민에 흠뻑 젖어 갈수록 해윤의 가슴은 더욱 차갑게 굳어 갔다.
- 내가 어떻게 해야 해? 내가 어떻게 해야 날 용서해 줄 거야?
“자수하세요.”
해윤은 입을 열어 말을 흘렸다.
“경찰서에 가서 자수하시고 죗값을 받으세요.”
- 그러면 날 용서해 줄 거야? 약도 끊고, 경찰에 가서 자수하면 내 옆에 있어 줄 거야?
“아뇨.”
- 왜…? 내가 자수하고 약도 끊겠다고 하잖아. 내가 왜 그렇게 싫어? 뭐가 그렇게 싫어서 날 자꾸 밀어내?
“신미라 씨는 죽었습니다. 전무님. 전 석해윤이예요. 전 석해윤의 인생을 살 테니 전무님은 신미라의 망령을 껴안고 계속 지옥에서 사세요. 혼자서 쭉 견디세요.”
떨리는 한숨 소리가 수화기를 적셨다. 이윽고 뭔가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아악! 한기우가 악을 쓰는 소리가 고막을 후벼 팠다. 눈 내리는 풍경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굵은 눈송이가 유려하게 팔랑거렸다.
정원 너머, 대문 앞쪽에 불빛이 깜빡이는 게 보였다. 차 헤드라이트 불빛 같았다. 차 형체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해윤은 저게 한지율의 차일 것이라고 직감했다. 싸늘하게 얼어붙었던 해윤의 가슴이 두근, 뛰었다.
- 한지율이지? 왜 그 새끼야? 왜 그 새끼는 되고 나는 안 되는 거야? 내가 이렇게 헌신적으로 퍼 줘도 너희들은 왜 매번 날 배신해? 돈만 주면 벌리는 남창 새끼 주제에, 네깟 게 뭐라고 날 무시해. 날 왜 거부해!
한기우가 폭발해서 쏟아 내는 레퍼토리는 언제나 같다. 새겨들을 가치도 없는 쓰레기 같은 소리다.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
해윤은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문을 열고 아래로 달려 내려가 정원 밖으로 나갔다. 굵은 눈발이 해윤의 눈앞을 휙휙 스쳤다. 한지율이 대문을 열고 들어와 돌계단을 올라 정원에 들어서고 있었다. 단추를 여미지 않아 깃이 벌어진 사내의 코트 자락이 펄럭였다. 하얀 눈발 사이로 그의 얼굴이 뽀얗게 도드라졌다.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입김조차 하얬다.
한지율이 고개를 들었다. 해윤을 발견하고는 굳은 얼굴을 펴 웃었다. 해윤도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왜 나와 있어요? 이렇게 얇게 입고.”
“2층 방에서 한지율 씨 차가 보여서요.”
“누가 날 이렇게 마중 나오는 거, 기분이 아주 괜찮네요. 이런 맛에 사람들이 개를 키우나.”
로맨틱이라고는 약에 쓰려 해도 없는 남자다. 아무리 그래도 개가 뭐야. 해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한지율이 손을 뻗어 해윤의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 주었다. 어깨에 쌓인 눈까지 털어 주던 그는 해윤의 발끝을 보고는 실소했다. 해윤도 그제야 양말만 신은 맨발이란 것을 깨달았다. 급하게 나오느라 슬리퍼를 신고 나오는 걸 깜빡한 모양이었다.
“사람이 뭐 이렇게 애틋하고 귀엽지?”
그의 입에서 낮게 속삭이는 소리와 함께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눈앞에서 자꾸 당신 얼굴이 아른거려. 미치도록.”
“사람을 좋아하면 원래 그래요.”
자꾸 생각나고, 보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고, 얼굴을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좋고, 그 사람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입김마저 애틋하고. 그래서다. 그래서 이 사람이다. 왜 한지율이냐는 질문의 답은 심장의 떨림이다. 이 사람에게는 가슴이 반응한다.
하얀 눈발 사이로 시선과 시선이 스쳤다. 서로를 탐하듯이 둘의 시선이 질척하게 엉켰다.
빤히 보는 한지율의 머리에, 어깨에, 얼굴에도 눈이 내려앉았다. 그의 안경알에도 눈발이 스쳐 촉촉한 물기가 생겼다. 그는 코트를 벗어 해윤의 몸 위에 덮어 주고는 어깨를 감싸 집 쪽으로 이끌었다.
“어? 이사님 오셨어요? 형은 왜 나가 있어요? 눈도 오는데.”
2층 테라스에서 박지형이 반갑게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맥주를 들고 눈 내리는 광경을 보며 술 한잔하러 나온 모양이었다.
“나 없는 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박지형 씨.”
한지율이 2층을 올려다보며 말을 건넸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머쓱해져서 해윤은 한지율에게서 슬며시 몸을 떼, 집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양말이 눈에 젖어 발이 시렸다. 현관 앞에 서서 눈을 털고 있으려니 현관 앞 복도에 불이 들어왔다. 방에 들어가 있던 도우미 여사가 나와 봤다.
“어머. 이사님 오셨네. 여사님은 주무세요. 밖에 눈이 많이 오나 봐요?”
“네. 눈이 좀 오네요. 할머니는 주무시게 두세요. 내일 날이 밝으면 인사드리겠습니다.”
뒤따라 들어온 한지율의 목소리가 해윤의 등 뒤에서 울렸다.
“식사는 하셨어요? 간단히 요기라도 하시게 따뜻한 면 요리라도 만들어 드릴까요?”
“전 신경 쓰지 마시고 들어가서 쉬세요. 석해윤 씨와 나가서 한잔할 생각입니다.”
해윤이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가 나가서 한잔할 계획을 했던가?
“눈도 오는데 안에서 드시지.”
“저희끼리 나가서 할 얘기도 있어서 그런 거니 정말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세요, 그럼.”
도우미 여사가 웃어 보이며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눈이 쌓인 머리칼을 털며 한지율이 해윤을 보며 뻔뻔하게 명령했다.
“올라가서 옷 입고 내려와요. 나갑시다.”
“꼭 나가야 합니까?”
“전처럼 한기우의 방에서 뒤엉키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그동안 강제 금욕을 해서 많이 쌓였거든.”
만져 봐요, 하면서 그가 해윤의 손을 잡아 제 다리 사이에 갖다 댔다. 당장에라도 뚫고 나올 듯 그의 아래가 단단해져 있었다. 해윤은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 냈다. 누가 이 꼴을 봤을까 싶어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어떻게 제 할머니 집에서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옷 입고 나와요. 괴로우니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낮게 침잠됐다. 더 한 짓을 벌이기 전에 여기를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해윤은 그가 몸 위에 걸쳐 준 코트를 돌려주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나가서 술 한잔하신다면서요? 저도 가요. 저도 술 마시고 싶어요.”
박지형이 눈치 없이 끼어들려 했다. 해윤은 다음에 하자, 다음에 꼭 같이 마시자, 애써 녀석을 달래고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싹 갈아입었다. 도우미 여사님이 깨끗이 빨아 건네준 남성복이다.
아래에 입은 트레이닝복을 끌어내리자 브리프 앞섶이 젖어 있는 게 보였다. 어느새 해윤의 아래에도 열이 올라 속옷이 축축해졌다. 브리프를 내리니 음란한 기대감에 푹 젖어 번들거리는 성기가 퉁 튕겨 나왔다. 해윤도 괴로웠다. 속옷 하나 갈아입는 게 힘들었다.
해윤은 달콤하게 달궈진 숨을 뱉으며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봤다. 얼굴이 온통 발갛게 상기되었다. 한기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방에서, 한기우가 입던 옷을 입고, 그가 제 모습을 비춰 보았을 거울 앞에 서서 이러고 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해윤의 것이었다. 이 얼굴은 신미라의 것이 아니다. 1층에서 저를 기다리는 한지율과 난잡하게 붙어먹으려는 기대감에 잔뜩 부푼 남자의 얼굴이다.
해윤은 옷장 문을 닫았다. 거울에 비치던 제 얼빠진 모습도 사라졌다. 점퍼를 꿰어 입고 돌아서자, 테이블 위의 핸드폰이 위이잉 위이잉 울렸다. 해윤은 한기우의 번호가 선명하게 찍힌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방의 불을 끄고 나왔다.
1층으로 내려가 한지율과 다시 만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눈 내리는 정원을 가로질러 나갈 때까지. 해윤의 주머니 속 핸드폰은 끊임없이 울렸다. 맞닿은 그의 온기에 걷기 괴로울 정도로 해윤의 아래가 단단하게 섰다.
“하, 한지율 씨. 잠깐….”
한지율은 순식간에 짐승으로 돌변했다. 노파의 집에서 나와 차를 타고 눈발 날리는 도심의 도로를 질주해 어느 고층 아파트로 왔다. 프라이빗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갈 때까지 한지율은 품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지나 집 안에 들어설 때까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한지율은 해윤을 덮쳤다. 예고도 없이 불쑥 달려들어 해윤의 입술을 정신없이 탐했다. 해윤은 달려드는 그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휘청이며 입술을 물어뜯겼다.
지금까지 평정심을 유지한 게 신기할 정도로 그는 급했다. 저돌적으로 온몸을 해윤에게 날려 게걸스럽게 해윤의 입술을 핥고, 빨고, 씹고 혀를 밀어 넣어 입 안을 마구 헤집었다. 혀뿌리가 빠질 것 같아 해윤은 입을 벌려 윽윽 댔다. 맞붙은 입에서 질척하게 빠는 소리가 음란하게 울렸다.
신발도 제대로 벗지 않은 채로 해윤은 그와 한 덩어리가 되어 주춤주춤 뒤로 밀려났다. 다리 사이로 그의 다리가 급하게 밀려 들어왔다. 몸이 뒤로 홱 넘어갈 것 같은데, 한지율이 허리를 단단히 껴안고 있어 간신히 버텼다. 발 한쪽이 붕 뜨며 발끝에서 벗다 만 구두가 툭 떨어졌다. 한지율의 집에 처음 찾아온 것인데 첫 방문이 이 모양이다.
“자, 잠깐만요. 좀 천천히….”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해윤은 한지율의 가슴을 필사적으로 밀어냈다.
“왜? 나랑 하기 싫습니까?”
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해윤을 보며 속삭였다. 붉게 젖은 입술이 위험하게 유혹적이었다.
“천천히 해요. 급할 것 없잖습니까.”
“급해. 난.”
붉게 부푼 그의 입술이 다시 다가들어 해윤의 화끈거리는 입술을 빨았다.
“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밀어내지 마요. 싸게 해 줘요.”
평소의 우아함과 품위는 어디에 갔는지, 그는 성욕이 흘러넘치는 청소년처럼 사정했다. 해윤이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못하게 입술을 씹으며 점퍼 지퍼를 끌어내려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다리 사이에 얽히는 그의 아래가 절절 끓었다. 발기한 아래를 해윤의 허벅지에 음란하게 비벼 댔다. 옷을 입고 있는데도 살갗이 델 것 같았다. 해윤의 아래도 한껏 부풀어 옷이 스치는 것조차 괴로웠다.
옷이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속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도 속옷 천이 발기한 성기에 달라붙어 숨 쉬는 것도 괴로웠다. 뜨겁다 못해 아래가 숫제 펄펄 들끓었다.
키스는 끊임없이 계속됐다. 그의 입술은 떨어질 틈 없이 달라붙어 해윤의 입술 살점을 빨며 옷을 급하게 벗겨 냈다.
해윤은 첫 경험을 하는 것처럼 손이 떨려 그의 옷에 손끝조차 대지 못했다. 술에 취한 것 같기도 했고, 한기우가 제 혈관에 주삿바늘을 꽂아 넣었던 때처럼 마약 기운이 퍼진 것 같기도 했다. 과하게 몸이 뜨거워져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옷을 벗기는 그의 서늘한 손끝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온몸이 움찔움찔 경련했다.
셔츠 깃이 거칠게 벌어지며 그 안으로 한지율의 손이 들어와 맨가슴을 넓게 쓸었다. 손을 대지 않아도 한껏 예민해져 따끔거리던 젖꼭지에 그의 손이 닿았다.
“하앗!”
해윤의 짧은 신음이 터지며 몸이 크게 들썩였다. 그의 손은 다시 빠르게 움직여 거침없이 아래를 헤집었다. 바지춤이 벌어지고 바지와 속옷이 한꺼번에 쑤욱 끌려 내려갔다.
축축하게 젖어 드로어즈에 달라붙어 있던 성기가 투웅 튕겨 나왔다. 아직 한지율은 옷을 입은 채인데 저만 치부를 드러내 헐떡이고 있다. 묽은 액이 뚝뚝 떨어지는 성기에 그의 손이 감겼다. 비명 같은 신음이 터지는 해윤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틀어막혔다.
그는 한 손으로 급하게 제 바지춤을 풀었다. 튕겨 나온 그의 성기에서 풍기는 짙은 정액 냄새에 눈이 시렸다. 흉기처럼 치솟은 제 성기를, 그는 해윤의 복부며 다리 사이에 야하게 문질렀다. 뜨겁게 젖은 그의 성기가 해윤의 다리 사이를 미끄러져 지나갔다.
그는 손에 쥔 해윤의 성기를 빠르게 훑었다. 급하게 불이 붙어서인지 사정도 빨랐다. 몇 번 훑지도 않았는데 해윤은 몸을 바르르 떨며 정액을 뿜어냈다. 한지율도 마찬가지다. 해윤의 다리 사이에 대고 문지르는 것만으로 첫 번째 사정을 했다. 둘은 사정 후의 여운을 서로 음미하며 잠시 헐떡였다.
사정했는데도 개운하지가 않고 허리께가 찌르르 쑤셨다. 한지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해윤에게 향한 그의 눈은 오히려 더 위험해졌다. 일단 급하게 붙은 불을 달래 놨을 뿐이었다.
“방으로 가죠.”
한지율이 낮은 속삭임을 흘렸다. 한 발 빼 놔서인지 그의 목소리며 표정이 한결 점잖아졌다. 해윤은 나른하게 눈을 끔뻑이며 그를 보았다.
말끔한 정장 차림을 하고서 바지춤이 풀려 성기만 드러낸 그의 꼴이 우스워야 하는데 엄청나게 야했다.
한지율이 제 팔을 잡아끄는 손길이 느껴졌다. 붙잡힌 손목이 타는 듯 뜨거웠다. 해윤은 몽롱하게 열이 오른 채로 잡아끄는 대로 이끌려 갔다. 그가 뿜어놓은 정액이 주르륵 흘러내려 다리를 온통 적시는 감각이 선뜩했다.
침실로 들어선 그는 그제야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코트, 양복, 셔츠, 값비싼 의복을 급하게 벗어 내던지고는 그는 정장 바지마저 벗었다.
거침없이 바지와 속옷까지 한 번에 주욱 끌어내렸다. 그가 가장 마지막에 벗은 것은 안경이었다. 옷은 아무렇게나 벗어 내던져 놓고는 안경은 얌전히 벗어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 위에 얹어둔다. 침실 옆의 할로겐 스탠드 조명이 미끈한 그의 몸을 은은히 비췄다. 흠잡을 데 없이 알맞게 잘 짜인 몸이 유려하고 아름답다. 단정한 얼굴과 매끄러운 몸 선을 지녔으나 곧추선 성기는 다분히 위협적이다.
“뭐 해요? 옷 벗어요.”
그가 안경까지 벗은 알몸으로 서서 해윤을 바라보았다. 새삼 부끄러웠다. 저런 사람 앞에서 볼품없는 제 몸을 보이기 부끄러워 주눅이 든다고 말하면, 아마 저 남자는 크게 비웃을 거다. 이미 보일 거 다 보이고 할 짓, 못할 짓 다 한 사이면서 새삼스럽게.
해윤은 떨리는 손으로 이미 벌어져 펄럭거리는 셔츠를 벗고 바지를 끌어내렸다. 한지율은 거만하게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옷을 벗는 해윤을 바라보았다. 노골적인 시선으로 해윤의 알몸을 샅샅이 훑었다.
“이리 와요.”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섬뜩하게 귓가에 감겼다. 침대로 다가가는 도중에도 해윤의 몸을 훑는 그의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가 해윤의 허리를 감싸 안아 확 당겼다. 넓은 침대 위로 몸이 쓰러졌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합니까? 맨정신이라 적응이 안 되나?”
한지율이 몸 위에 올라타며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안경을 벗은 맨눈이 예쁘다. 맑은 동공이 예쁘게도 젖었다.
“당신은 젖꼭지까지 빨개지네.”
그가 손으로 해윤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붉게 부어 있을 유두에 입술을 갖다 댔다. 자극당해 화끈거리던 돌기를 입에 넣고 빤다. 가슴 전체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해윤은 앓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바르작댔다.
“젖꼭지 빨아 주는 게 좋아요?”
그가 해윤의 가슴에 달라붙은 채로 입술을 달싹거려 물었다.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어느새 해윤의 성기가 다시 발딱 서서 액을 질질 흘리고 있으니까.
“그만 좀 빨아요. 아파… 흐아앗!”
그가 짓궂게도 이로 유두를 살짝 깨물었다. 해윤의 목울대에서 새된 신음이 튀며 허리와 엉덩이가 크게 튕겼다. 성기가 꺼떡이며 액이 사방에 튀었다. 집요하게 혀끝으로 유두를 살살 돌려 핥던 그의 입술이 미끄러져 내려와 해윤의 복부를 핥았다. 배꼽 주위를 둥글게 핥더니 이내 해윤의 성기 끝을 입에 머금었다.
해윤은 온몸을 흠칫 떨었다. 한지율이 제 성기를 입에 물다니. 쾌감과는 종류가 다른 충격에 해윤은 급하게 상반신을 일으켜 그를 밀어내려 했다.
“하, 하지 마세요. 더러워요.”
“얌전히 즐겨요. 당신 좆이라서 빨아 주는 거니까.”
그가 낮게 속살거리며 해윤의 성기 전체를 입 안 깊숙이 머금어 힘을 주어 빨았다. 해윤의 입에서 짓눌린 한숨이 튀어나오며 목이 크게 뒤로 젖혀졌다. 손으로 만져 주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흡입력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순간적으로 치닫는 쾌감이 엄청나 신음도 나오지 않고 숨통이 막히며 몸이 떨리기만 했다.
그의 머리를 밀어내려 갖다 댔던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가는 머리칼이 차지게 감겼다. 남자 좆을 빨아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 입에 머금어 빨기만 하는 어설픈 펠라였다. 그런데도 해윤의 아래는 착실하게 커졌다. 저절로 허리가 음란하게 움직이며 다리가 천박하게 벌어져 움찔거렸다.
불알이 딴딴하게 부풀어 괴로운 사정감이 몰려들어 해윤은 있는 힘껏 그의 머리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해윤의 성기를 뿌리 끝까지 머금었다. 같은 남자니까 사정 직전의 현상이 어떤 것인지 잘 알 텐데. 게다가 그는 이를 약간 세워 사정에 다다라 단단해질 대로 단단해진 성기 기둥을 긁으며 입에서 빼냈다. 이건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해윤은 참지 못하고 그의 머리칼을 꽉 움켜쥐며 정액을 토해 냈다. 해윤이 사정 후의 탈력감에 사지에 힘이 빠져 늘어져 있는 사이, 한지율은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로 손을 뻗었다.
해윤은 멍한 얼굴로 그가 티슈를 뽑아 제 얼굴을 닦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뒤늦게 민망함과 당혹감이 밀려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 얼굴에 쏟아 내는 건 참았어야 했는데. 해윤은 부스스 몸을 일으켜 한지율의 다리 사이로 손을 뻗었다.
“저도 빨아 드릴게요.”
대신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그가 펠라를 해 줬으니 그의 것도 빨아 줘야겠다고 단순히 생각했다. 그의 성기에 손을 대려 하자 한지율이 해윤의 어깨를 붙잡아 저지했다.
“잘하겠다고 약속했으니 노력 중입니다.”
언제 그런 약속을 했던가. 기억을 떠올려보려 해도 머리가 멍해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가 손을 뻗어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인 서랍에서 뭔가를 꺼냈다. 콘돔과 젤이었다.
“이런 걸 침대 옆에 상비해 두고 계시네요.”
말하고 보니 멍청한 소리를 한 것 같았다. 성인 남자의 침실에 이런 게 있는 게 뭐 어때서. 그는 진지한 연애를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경험이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 경험이 없을 남자도 아니고.
“누구 때문에 사 놨을 것 같습니까?”
그가 중얼거리며 콘돔 포장을 찢어 얇은 고무막을 꺼내 제 성기에 씌웠다. 단단히 곧추선 그의 성기에 고무막이 감싸이는 것을, 해윤은 멍하게 보았다. 바닐라 향기가 나는 고무막에 감싸인 성기는 그냥 볼 때보다 더 크게 보였다. 새삼스럽게 그의 성기 크기를 실감했다. 저 큰 게 제 아래를 비집고 들어간다 생각하니 절로 엉덩이가 뒤로 빠졌다.
한지율이 그런 해윤의 주저함을 읽기라도 한 듯했다. 그는 해윤의 어깨를 붙잡아 돌려 침대에 눕혔다. 해윤의 얼굴이 침대 시트에 파묻히며 엎드려 누운 상태가 됐다.
“엉덩이 들어 봐요.”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해윤은 천천히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흉물스러운 둔부가 그의 눈앞에 훤히 드러났을 것이다. 부끄러워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열이 올라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보이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엉덩이 위로 차가운 젤이 주륵 쏟아졌다. 해윤의 엉덩이가 움찔했다. 젤이 묻어 미끈거리는 한지율의 손이 안으로 파고들어 구멍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읏, 흐윽.”
적응이 되지 않는 이물감에 해윤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서 신음했다. 젤이 엉덩이 골 사이를 타고 내려와 구멍 주위를 흠뻑 적셨다. 안으로 밀려든 그의 손가락이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쳐들린 해윤의 엉덩이가 절로 튕겼다. 그의 손가락이 하나 더 파고들어 와 능숙하게 구멍 안을 쑤셨다. 한지율의 하얗고 긴, 우아한 손가락이 움찔거리는 제 구멍 안을 드나드는 광경을 상상하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지나치게 민감해진 구멍이 과민하게 벌름거리며 그의 손가락을 탐욕스럽게 씹어 물었다.
“그렇게 좋아요? 엉덩이를 심하게 흔드는데.”
그가 속삭이는 소리에 부끄러워할 새도 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안에서 벌어지며 해윤의 입에서 격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두 개인지, 세 개인지 모를 손가락이 해윤의 안을 헤집었다. 그의 손가락이 드나들 때마다 찌그덕거리는 민망한 마찰음이 울렸다. 아래를 움직이고 있다는 인식도 없이 허리와 엉덩이가 마구 흔들렸다. 해윤의 성기가 두 번이나 쥐어 짜이고도 또 머리를 쳐들었다. 지나치게 건강한 건지 성욕이 미쳐 날뛰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안을 후벼 파 넓히던 그의 손가락이 쑥 빠져나갔다. 애널이 채 닫히지 않고 빠끔거리며 아쉬워했다. 벌겋게 부어 벌름거리는 구멍을 전부 그에게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어느새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안을 자극당한 쾌감의 여운이 고스란히 남아 쳐들린 해윤의 엉덩이가 간헐적으로 튕기고 흔들렸다.
“빨리 넣어 달라고 조르는 겁니까?”
그가 손으로 해윤의 엉덩이 살점을 쓰다듬으며 웃음 띤 어조로 속삭였다. 땀이 배어난 엉덩이 살점이 그의 손에 차지게 감겼다. 그의 손이 해윤의 엉덩이 살점을 잡아 벌리곤 노출된 구멍에 제 성기를 갖다 대 느긋하게 문질렀다. 고무막에 감싸인 굵은 성기 기둥이 감질 맛 나게 구멍 위를 스쳤다. 애널이 기대감에 차 게걸스럽게 입을 빠끔거렸다.
“어떻게 할까요?”
그가 속삭였다. 이런 때 저런 소리를 속삭이다니 교활하다. 엉덩이 골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던 그의 성기 끝이 빠끔거리는 구멍 입구에 걸렸다.
“넣어 줄까?”
“묻지 말고 넣어… 넣어 줘….”
해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오자 구멍 끝에 걸쳐져 있던 그의 성기가 단번에 안을 쑤시고 들어왔다.
짐승처럼 뒤에서 처박힌 탓에 뿌리 끝까지 박히는 감각이 전보다 더 생생했다. 안을 빠듯하게 채운 압박감에 놀라 신음도 나오지 않았다. 숨이 콱 막히고 근육이 바짝 오므라들어 덜덜 떨렸다. 괴로운 건 한지율도 마찬가지인지 넣은 채로 움직이지 않고 굵은 숨을 토해 냈다.
“숨 쉬어요. 힘 빼고.”
그는 살살 달래듯이 속삭이면서 긴장으로 쪼그라든 해윤의 성기를 만졌다. 그의 손이 주눅 든 기둥을 훑고 불알을 손으로 비벼 주자 복부가 잘게 떨리며 긴 숨이 비어져 나왔다. 아래가 약간이나마 이완됐다.
그사이 아래에 꽉 씹어 물려 있던 그의 성기가 천천히 빠져나갔다. 그의 성기 크기대로 벌어져 다물리지 않는 구멍 위로 차가운 젤이 또 한 번 쏟아졌다. 그의 성기 끝이 밀려들며 젤도 함께 내벽 안으로 흘러들었다. 손으로 젤을 펴 바르듯, 제 성기 끝으로 구멍에 펴 바르고는 다시 퍽 박는다.
“흐윽!”
간신히 들어 올렸던 해윤의 얼굴이 베개에 다시 파묻혔다. 눈에서 불꽃이 번쩍 일었다. 고통과는 다른 아찔한 쾌감에 배 속이 뜨거워졌다. 해윤의 떨림이 그에게는 고스란히 느껴질 터였다. 해윤의 등허리가 고통이 아닌 쾌감에 젖어 떨리고 있다는 것도.
그가 뿌리 끝까지 처넣은 채로 제 골반을 움직여 안에서 휘저었다. 해윤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숫제 흐느꼈다. 그러다 반쯤 빼냈다 다시 쑥 쑤셨다. 눈앞이 번쩍였다. 배 속 깊은 곳에서 뭔가 팍 터진 듯했다.
그의 것이 빠져나갔다 처박히기를 반복했다. 퍽, 퍼억대며 무자비하게 쳐올렸다. 그의 것이 자극점을 숨 쉴 틈도 없이 찔러댔다. 쪼그라들었던 해윤의 성기가 어느새 바짝 서서 물을 사방에 뿌리고 있었다.
“흐아! 윽, 하으으, 천천히… 천천히 좀…. 하아앗!”
눈에서 불꽃이 일다 못해 숫제 눈물이 터졌다. 입에서는 애원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굵은 숨을 쏟아 내며 이성을 잃고 허리를 놀렸다.
제 성기를 완전히 빼내고는 다시 쑥 처박아 안에서 흔든다. 연달아 자극당한 내벽이며 전립선이 빠듯하게 샅샅이 휘저어졌다. 미칠 지경이었다. 돌아 버릴 정도로 괴로운데 몸을 움찔거릴 때마다 엉덩이가 튀고, 만족할 줄을 모르는 구멍은 벌름거리면서 그의 성기를 쫀득하게 씹어 댔다.
그가 넣은 채로 해윤의 엉덩이 살점을 벌려 한계치까지 늘어난 구멍 주위를 손으로 건드렸다.
“흐아아. 하, 하지 마, 그거… 싫어!”
소름 끼치는 감각에 해윤은 격한 반응을 보이며 펄떡였다.
“질질 싸면서 뭐가 싫다고.”
그가 짧게 웃으며 약간 빼냈다 다시 처박아 전립선을 확 찔렀다. 해윤의 바짝 일어선 성기가 맥없이 흔들렸다. 그의 말대로 실금이라도 하듯 질질 싸며 침대를 적시고 있었다. 괴로웠다. 성기를 자극해 얻는 쾌감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아뜩한 쾌감이다. 지칠 줄 모르고 발딱 서서 질질 흘리는 성기와 한지율의 것이 처박힌 구멍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쾌감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리며 흐느끼고 버둥거릴 뿐이었다.
퍽퍽 쳐올리던 그의 성기가 해윤의 안에서 크게 부풀었다. 내벽이 찢어질 듯이 늘어나더니, 곧 안에 들어찬 그의 것이 경련하듯이 바르르 떨리다 안에서 스르르 빠져나갔다.
하나로 이어져 지탱하고 있던 것이 빠져나가자 해윤의 하반신도 아래로 툭 떨어졌다.
후우우. 한지율이 굵고 길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해윤도 침대 위에 쭉 뻗어 숨을 헐떡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피로감이 전신을 덮쳤다. 안이 지나치게 자극당해 배 속이 쑤셨고, 벌름대는 구멍이 화상을 입은 듯이 화끈거렸다. 이대로 기절이라도 하고 싶은데 몸을 잠식했던 쾌감이 고스란히 남아 온몸이 찌릿찌릿 쑤시고 따끔거렸다.
사지가 흠뻑 젖어 흐물흐물하다. 그나마 한지율이 콘돔을 써서 안에 싸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한지율이 몸을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가 정액이 쏟아져 축 늘어진 콘돔을 묶어 쓰레기통에 버리는 게 보였다. 서랍에서 콘돔을 더 꺼내는 것도.
“더는 못 해요.”
통하지 않을 말이란 걸 알면서도 지껄였다.
“난 더 해야겠는데.”
예상했던 그대로의 답이 돌아왔다. 그가 손을 뻗어 해윤의 등줄기를 쓸었다. 하아아, 나른한 숨이 해윤의 입에서 샜다. 등을 쓰다듬던 손은 여지없이 엉덩이 살점을 잡아 벌렸다. 벌겋게 부어 있을 구멍이 그의 앞에 훤히 노출됐다. 또 그랬다. 새삼스럽게 민망했다. 젤에 흠뻑 젖은 데다 빨갛게 부어 흉한 부분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 마요. 뭘 그렇게 뚫어지게… 하으으.”
숨만 쉬어도 화끈거리는 구멍을 그의 손가락이 쑤셨다. 아래가 완전히 흐물흐물해져 손가락 정도는 무리 없이 드나들었다.
“내 크기대로 벌어진 것 같은데. 벌써 늘어나면 어떻게 합니까. 꽉 씹어 물어요.”
그러며 그가 움찔대는 구멍 주위 주름을 손끝으로 문지르다 손가락을 갈고리 모양으로 꺾어 내벽을 긁었다. 엉덩이가 흠칫대며 저절로 위로 치켜 올라갔다. 뒤에서 또 처박힌다면 진짜 허리가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라 해윤은 몸을 바르작댔다.
“싫습니까?”
아래를 지분대는 손을 떼지 않으면서 묻는다.
“이 상태로는… 허리가 너무 아파서.”
“얼굴 보면서 하고 싶어요?”
그게 그나마 나을 것 같아 해윤은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집요하게 해윤의 아래를 더듬던 손을 빼냈다. 그러곤 해윤을 일으켜 앉혀 침대 헤드 쪽으로 몰았다. 해윤의 벌어진 다리 사이로 한지율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언제 새 콘돔을 씌운 건지 그의 성기엔 불투명한 고무 막이 감싸여 당당히 곧추서 있었다.
얼굴을 보고 하자는 게 이런 상태로 하자는 거였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워 오히려 더 민망했다. 매번 그런 것 같지만 한지율은 어느 때나, 어떤 꼴을 하고 있어도 당당한데 부끄러워서 시뻘게지는 건 늘 해윤의 몫이었다.
“다리 벌려 봐요.”
그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어 해윤에게 키스하며 속삭였다. 그의 몸이 밀착되니 자연스럽게 다리가 한껏 벌어졌다. 그의 손이 해윤의 다리를 잡아 무릎을 세우게 했다. 해윤의 땀에 젖은 목을 쓰다듬던 손이 미끄러져 내려와 젖꼭지를 지분거렸다. 그의 입술에 틀어막힌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 나왔다.
무릎을 세워 드러난 해윤의 아래에 그가 제 하반신을 비볐다. 방금 전에 사정하고도 기세를 잃지 않고 꼿꼿이 선 성기가 아래에 비벼지다,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푹 익어 흐물거리는 구멍이 그의 성기를 쫀득하게 빨아들였다.
그가 퍽 쑤시자 해윤의 몸이 침대 헤드에 퉁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아까와는 삽입의 각도가 달라져 더 괴롭다. 정면에서 바로 꽂히는 통에 배 속까지 꽂혀 드는 것 같아 해윤은 몸서리를 쳤다. 그가 안을 쿡 쑤시며 해윤의 허벅지를 한껏 잡아 벌렸다. 너무 벌어져 허벅지 안쪽에 경련이 일었다.
“보여? 당신과 내가 하나로 이어져 있는 거.”
그가 짓궂게 속삭이며 아주 느리게 성기를 반쯤 빼냈다. 뿌옇게 젖은 눈을 내리자 그의 말대로 하나로 이어진 부위가 내려다보였다. 단단히 팽창한 불알 아래로 콘돔에 감싸여 번들거리는 성기가 해윤의 엉덩이 안에 반쯤 꽂혀 있는 게 보였다. 그의 손이 이어진 부위를 죽 긁으며 구멍을 긁었다.
“하지 마. 싫다고, 그거. 기분 이상해서 싫다고요.”
“안 할 테니 엉덩이 흔들어 봐요. 아까처럼.”
그가 해윤의 새빨개진 귀를 질척하게 빨며 젖꼭지를 꼬집었다. 그러자 해윤의 아래가 강하게 수축하며 그의 것을 격하게 깨물었다. 껍질이 벗겨졌는지 참지 못할 정도로 유두가 아리고 화끈거렸다. 해윤이 그의 손을 떼어 내려 하자 또 달게 속삭였다. 흔들어 봐요, 하면서 성기를 끝까지 퍽 쑤셔 넣었다. 이런 각도로 삽입된 채 가만히 있으니 오히려 괴로웠다. 구멍이 벌름거릴 때마다 민감해진 내벽이 그의 것을 씹어 물며 움찔움찔 떨렸다.
더 강하고 아찔한 자극의 맛을 알고 있기에 조바심이 나서 이런다. 하려고 마음먹지 않아도 저절로 해윤의 엉덩이가 흔들렸다. 그의 성기를 뻐근하게 씹어 문 애널이 못 견디게 근질거려 스스로 엉덩이를 흔들어 구멍을 자극했다. 딜도를 구멍에 쑤셔 박고서 스스로 흔들어 대고 있는 기분이었다.
누가 만져 주지 않아도 항문의 자극만으로도 해윤의 성기가 발딱 서서 흔들렸다. 끝에서 얼마나 줄줄 흘려 댔는지 귀두며, 성기 기둥, 불알까지 흠뻑 젖었다. 이러는 지금의 제 모습이 얼마나 천박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지율은 꽤 만족스러운지 목 안에서 굵은 숨소리를 토해 냈다.
“당신 진짜 사람 미치게 하는 재주가 있어….”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나른하게 웃었다. 이 자세로 하니 이거 하나는 좋았다. 그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보인다는 거. 고운 미간이 접히며 관능적으로 일그러지는 표정 변화 하나 하나를 전부 볼 수 있었다. 땀에 젖어 일그러진 그의 매끈한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혀를 내밀어 해윤의 입술을 핥았다. 입술을 맞붙여 해윤의 입술 살점을 잘근 씹으며 그는 제 아래를 퍽 쳐올렸다. 연이어 허리를 튕겨 안을 찔러 댔다. 해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은 맞닿은 그의 입 안으로 흘러들었다. 그가 쳐올릴 때마다 허리가 들썩여 해윤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버텨야 했다.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벨 소리가 쾌감에 흠뻑 젖어 몽롱한 의식을 날카롭게 긁었다. 한지율이 낮게 욕을 갈기며 해윤의 안에 깊숙이 박혀 있던 성기를 잡아 빼고는 일어섰다. 해윤은 그사이 숨을 헐떡이며 침대 아래로 내려서는 그에게 부탁했다.
“물 좀… 갖다 주실래요.”
그가 일어나서 발기한 아래를 덜렁거리며 침대 아래로 내려서서 벗어 던진 옷가지 속에서 핸드폰을 찾아들었다. 그러곤 방 한구석에 놓인 냉장고로 가 생수병 하나를 들고 다시 침대로 다가왔다. 그 와중에도 날카로운 벨 소리는 계속 울렸다. 병마개를 돌려 따서 해윤에게 내밀며 그는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누구에게 전화가 온 건지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댄 채 아까처럼 해윤을 침대 헤드에 몰아붙이곤 다리를 벌리게 해 그사이에 앉았다.
“누구예요?”
물을 마시던 해윤이 그에게 물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웅얼거리는 소리만 새 나올 뿐이었다. 그가 픽 웃으며 해윤의 손에서 물병을 가져가 남은 물을 모조리 마시고 빈 병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는 해윤의 다리를 벌리며 아까처럼 안으로 파고들었다. 해윤이 전화는 끊고 하라는 소리를 입 밖에 내려 할 때였다.
“한기우. 내가 누구랑 함께 있는지 꼭 알아야겠어? 취했어? 얌전히 근신하랬더니 어딘데 이렇게 시끄러워?”
그제야 한지율이 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말을 건넸다. 해윤은 흠칫했다. 한지율의 눈이 가늘어지며 당혹감이 드러난 해윤의 얼굴을 즐겁게 훑었다.
“진정해. 기우 형. 나와 해윤 씨가 하는 짓이 범죄는 아니잖아.”
그 소리는 해윤에게 하는 소리와 같았다. 그의 눈이 해윤에게도 우리가 지금 하는 짓이 범죄냐고 묻는 듯하다. 아니다. 이런 게 범죄라면 세상 모든 커플은 범죄자여야 한다. 수화기 저쪽에서 한기우가 악을 쓰고 욕을 씨불이는 소리가 새 나왔다.
그 소리를 들으니 어쩐지 해윤의 배가 뜨거워졌다. 왠지 모르게 대담해져 해윤은 그의 성기를 손에 쥐어 제 다리 사이로 끌어들였다.
한지율의 입가에 밴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는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눈매를 더욱 가늘게 접으면서 해윤의 아래에 제 것을 처박았다. 손으로 해윤의 허벅지를 찢어 버릴 듯이 벌리고는 빠르고 거칠게 쑤셔 박았다.
그가 질펀하게 풀어진 안을 쉴 새 없이 찔렀다. 그가 쳐올릴 때마다 침대 헤드가 크게 흔들리며 삐걱거렸다.
“핫, 흐윽! 아으으….”
“울어요. 실컷 울어도 돼요.”
우는 소리를 들려줘. 한기우, 저 새끼한테. 속삭이는 소리가 해윤의 귀에는 그런 소리로 들렸다. 침대 위에 놓인 핸드폰은 아직 통화 상태였다. 한기우가 이 난잡한 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다. 야릇한 배덕감이 둘을 더욱 흥분시켰다. 그의 성기가 해윤의 안에서 미쳐 날뛰었다. 해윤도 기꺼이 그에게 휘둘리며 목이 터져라 신음을 터뜨렸다.
그가 쳐올릴 때마다 펄떡이던 해윤의 성기는 바짝 서서 정액을 쏟아 냈다. 고환이 하도 쥐어 짜여 묽은 액이 찔끔거리며 비어져 나올 뿐이었다. 한지율이 손으로 방금 사정한 해윤의 성기 끝을 문질렀다. 사정 직후 민감해질 대로 민감해진 끝에서 전율 같은 소름 끼치는 감각이 느껴져 해윤은 몸서리를 쳤다.
“흐으윽! 아, 아파. 하지 마. 흐아아, 아앗!”
도저히 견디지 못할 감각이라 해윤은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해윤이 크게 버둥거린 덕분에 한지율의 핸드폰이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아직 한기우가 이 난잡한 소리를 듣고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다. 상관없었다. 그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허리가 주르륵 미끄러져 시트에 등이 닿았다. 그 상태가 되도록 아래는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안에 넣은 채로 잠시 멈춰 그가 제 아래에 깔린 해윤을 내려다보았다.
해윤도 숨을 헐떡이며 눈앞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저 미끈한 얼굴을 몰래 흘긋거리며 훔쳐보지 않아도 된다.
헝클어져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그의 눈이 보였다. 젖어서 빛났다. 안경을 벗은 그의 눈은 뜨겁다. 긴 속눈썹에까지 촉촉한 물기가 맺혀 푹 젖은 눈. 해윤을 보는 그의 시선도, 숨결도, 몸도, 뜨겁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차가운 껍데기를 내던진 그는 그 누구보다도 뜨겁게 끓었다.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해윤은 입을 벌려 혀를 내밀며 그의 입술을 기꺼이 반겼다. 입술이 맞닿으며 달뜬 숨이 흩어졌다. 입술을 겹치는 것만으로도 욱신거리던 아래가 쾌감에 젖었다.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제 몸이 증명하고 있을 것이다. 이토록 간절하게 당신을 원하고 있다고. 해윤은 열에 들떠 갈급증에 안달 난 환자처럼 한지율의 혀와 입술을 게걸스럽게 빨고 씹었다. 안에 빡빡하게 들어찬 그의 성기가 꿈틀대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물흐물해지다 못해 발갛게 농익어 흐무러진 안을 다시금 헤집었다. 해윤은 참지 않고 소리를 냈다. 그에게 매달려 목이 터지도록 신음을 내지르고 흐느꼈다. 그래도 되니까. 한지율이 실컷 울어도 된다고 했으니까.
눈을 뜬 것은 몸이 아파서였다. 기절하듯 잠들었을 땐 몰랐는데 잘 만큼 자서 의식이 깨어나자 통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심한 몸살에 걸린 것처럼 온몸이 두드려 맞은 듯 아파서 이불 속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프고 추웠다. 맨몸으로 이불 속에 파묻혀 있는 터라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해윤은 이불을 끌어 모아 둥글게 몸을 웅크려 말고 덜덜 떨었다. 허리며 엉덩이 쪽이 너무 아파서 앓는 소리가 절로 새 나왔다. 특히 무리하게 혹사당한 엉덩이 안쪽이 끔찍하게 화끈거렸다.
“추워요?”
이불 밖에서 한지율의 목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삐빅, 소리와 함께 위이잉 온풍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 밖 공기가 금세 훈훈해졌다. 그가 슬리퍼를 끄는 발소리가 들렸다. 침대 매트리스가 살짝 내려앉으며 그가 해윤의 옆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이불 밖으로 비어져 나온 해윤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그가 속삭였다. 그의 손길이며 목소리가 너무도 다정해서 간질간질했다. 해윤은 꼼지락대며 덮어쓰고 있던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봤다. 외출했다 돌아온 한지율은 언제나처럼 말끔하고 보송보송하고 좋은 향기가 풍겼다. 간밤에 그렇게 하고도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멀쩡하지. 보통 체력이 아니구나 싶었다.
“죽을 사 왔는데 먹을 수 있겠어요?”
“먼저 좀 씻고….”
입을 열자 목구멍이 따끔거리며 잔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가 해윤을 부축해 일으켜 앉히며 물컵을 손에 쥐여 주었다.
“해윤 씨가 잠든 사이에 몸을 닦아 드렸으니 무리하지 마시죠.”
“그래도….”
“안 씻어도 추하지 않으니 내 말 들어요. 보일 거 다 보였으면서 뭐가 그리 부끄럽습니까? 고집 피우지 말아요.”
매정하게 쏘아붙이는 것 같지만 어투는 부드럽다. 해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물 컵을 손에 쥐고 홀짝였다. 똑바로 앉아 있으니 아래가 아파 몸이 자연스럽게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앉아 있는 상태라 훤히 드러난 해윤의 가슴에 한지율의 시선이 꽂혔다. 그가 불쑥 손을 뻗어 유두를 건드렸다. 해윤은 흠칫 놀라 물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밤새 희롱당한 가슴 양쪽의 돌기가 공기가 닿는 것만으로도 쓰렸는데.
“아픕니까? 새빨갛게 부어 있는데.”
“당연히 아프죠. 이 상태면 한동안 옷을 입는 것도 힘들어요.”
해윤은 짜증을 내며 그의 손을 쳐냈다.
“옷에 스칠 때마다 내 생각이 날 테니 나쁘진 않군요.”
그가 웃으며 베드 트레이를 침대 위에 올려 두고 사들고 온 죽을 꺼냈다. 몸이 이 상태인데도 음식 냄새를 맡으니 속이 요동쳤다.
어디선가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제 핸드폰인 것 같은데.”
해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한지율이 대신 부스스 일어났다. 그러곤 벗어 던진 옷가지 속 어딘가에 있을 해윤의 핸드폰을 찾아서 가져다주었다. 박지형에게 걸려 온 전화였다.
- 형. 지금 어디에 계세요? 이사님이랑 같이 계시는 거예요? 형, 형. 형도 그거 봤어요? 방금 전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뜬 기사요! 얼마 전 마약 파티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대기업 재벌 2세, 이거 한기우인 거죠?
녀석이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마약 파티라니?”
해윤이 영문을 몰라 눈을 끔뻑이는 사이, 한지율이 조용히 태블릿을 베드 트레이 위에 올려놔 주었다. 태블릿 화면에 포털 사이트 기사 하나가 떠 있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또다시 벌어진 충격적인 마약 파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