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 6. 격발 (6/9)

“안녕하세요!”

대경 ENT 로비에 들어선 박지형이 갑자기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크게 외쳐 인사했다. 생각에 잠겨 아래만 보고 걷고 있던 해윤도 고개를 들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사위가 어두워 누군지 몰라 봤다. 자세히 보니 태미다. 안 그래도 저 자식과 만나서 할 얘기가 있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두 사람을 발견하고 흠칫 놀란 태미가 고개를 홱 돌려, 모르는 척 성큼성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태미 씨. 잠깐 얘기 좀 해요.”

해윤도 발걸음을 빨리 해 그의 뒤를 쫓았다. 마침 태미를 태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에 재빨리 발을 뻗어 문 사이에 끼웠다. 닫히려던 문이 다시 열렸다.

박지형과 함께 해윤은 안에 올라탔다. 태미가 흠칫하며 엘리베이터 구석에 착 달라붙었다.

“얘기 좀 하자니까 왜 그냥 갑니까?”

“둘 다 선글라스 끼고 험악하게 왜 이래? 혀, 협박하려고?”

“협박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제가 왜 태미 씨를 협박합니까? 그래 봤자 득 될 게 뭐 있다고요.”

관계자들이 해윤이나 박지형을 알아보고 귀찮게 달라붙거나 수군댈까 봐 이 사이좋게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온 것이었다.

“그나저나 당신이 여긴 왜 와? 이제 올 일 없지 않아?”

“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해윤은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순수하게 되물었다.

“아니 그러니까 여기 올 이유가 없지 않냐고. 주주들이 난리가 나서 당장 한 전무 해임하고 쫓아내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다는데. 이번엔 회장도 어떻게 손 쓸 방도가 없을걸? 한 전무뿐만 아니라 그쪽 라인은 다 좆 된 거 확정 아닌가? 당신, 데뷔고 뭐고 다 물 건너간 거 아니야?”

그럴지도. 태미가 하는 말을 듣고 보니 그렇다.

회사 시스템이 뭐가 뭔지는 모르지만 해외 출장길에서까지 마약 사건에 연루된 임원을 사측에서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아무리 회장 아들이라고 해도 너무 심하게 막 나갔다. 봐줄 만큼 봐준 거다.

한지율의 부친이 본가에서 난동을 피웠다던 사건 때, 회장이 노발대발하며 망나니 아들놈을 미국으로 축출한다고 하더니.

‘내가 자식 농사를 잘못 지었다지만 어쩌겠나. 몹쓸 놈이지만 내 피가 섞인 자식인데.’

진시은 여사의 집에서 들었던 한 회장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놈이지만 자기 자식이니 어쩔 수 없다 이거다.

“한 회장 집안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은 것 같던데. 얼마 전에 한 회장이랑 재혼한 여자가 데려온 딸, 한재나였던가? 그 여자도 귀국했다면서? 듣기로는 누가 한 이사한테 살인 누명 씌워서 축출하려는 걸 수도 있다고 하더라. 한 회장이 몇 년 전에 쓰러져서 심장 쪽 수술을 크게 했어. 겉보기엔 건강해 보여도 어느 순간 훅 갈지 모르는 사람이라는데. 회장이 만에 하나 잘못되기라도 해 봐. 한 이사가 경영권 다툼에 걸리적거리잖아.”

“그런가요? 처음 알았네요.”

“당신 대체 아는 게 뭐야?”

“남의 집안 사정을 다 알아야 합니까?”

“아니, 내가 아는 걸 왜 당신이 모르는데?”

태미가 인상을 팍 썼다.

“태미 씨. 지금 많이 바쁘세요?”

해윤이 뜬금없이 묻자 태미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즉각 대답했다.

“응. 존나 바빠.”

“그런데 태미 씨. 전 태미 씨한테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 주는데 왜 말을 놓습니까?”

해윤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지껄이자 태미가 움찔하더니 얼른 말을 높였다.

“바, 바빠요. 데뷔 일정이 정해져서 좆 빠지게 바빠요. 나 당신처럼 한가한 사람 아니에요.”

“태미 씨. 절 고소하신다면서요?”

“그거야 당신이 먼저 날 때렸잖아요.”

“그래서 고소하시려고요? 그리고 내가 태미 씨한테 더 많이 맞았잖습니까. 태미 씨, 이렇게 더럽게 치사한 분이었어요?”

“고소 안 했잖아요. 그래서!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나도 고소할 마음 없었다고. 그런데 당신 눈빛 되게 이상한 거 알아요? 미국 있을 때 당신 같은 눈빛 한 약쟁이들 수도 없이 봤어. 약쟁이 새끼 세컨드질 하더니 너도 약 빨고 미쳤어요?”

해윤의 입에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자의는 아니었어도 약 빤 건 사실이고 살짝 미친 것도 사실이었다.

“시간 좀 내주시죠.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바쁘다니까!”

마침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서 문이 열렸다. 조용히 두 사람이 하는 얘기를 듣고만 있던 박지형이 밖으로 나가려는 태미의 어깨를 움켜잡아 다시 태웠다.

“태미 씨. 우리 해윤 형이랑 오붓하게 커피 한잔하시며 얘기 나누세요.”

“오붓? 오붓하게에? 내가 왜?”

박지형이 싱긋 웃으며 곰발바닥 같은 커다란 손으로 태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러곤 한 손으로 닫힘 버튼과 1층 버튼을 동시에 눌렀다.

“태미 씨는 정말 아는 게 많으신 것 같아요. 제가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그렇습니다. 정보 좀 부탁드릴게요.”

해윤이 공손하게 살살 치켜세워 주자 툴툴거리던 태미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한 시간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하면서 목에 힘을 줬다. 하여튼 단순한 놈이었다.

1층 로비에도 카페가 있었지만 보는 눈, 듣는 귀가 워낙 많아서 세 사람은 바깥으로 나갔다. 일전에 한지율이 해윤을 데리고 갔던 그 카페로 이동해 자리를 잡았다. 박지형이 눈치 빠르게 법인 카드를 척 내밀었다.

“곡물 라떼로 부탁할게.”

해윤은 전에 한지율의 잔소리를 듣다 못해 억지로 주문했던 음료 이름을 말했다. 태미가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딴 걸 무슨 맛으로 먹어? 카페에 와서 왜 그딴 걸 마시는데?”

“제법 맛있습니다. 고소하고 영양가도 있어서 속이 든든하더라고요. 바쁠수록 영양가 있는 걸 챙겨 먹어야죠. 이 바닥은 체력 싸움 아닙니까.”

한지율이 줄줄 늘어놓았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그럼 나도 곡물 라떼!”

태미는 단순한데다 귀까지 얇아 당당히 해윤과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녀석은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아 다리를 꼬고 앉았다. 원래 타고난 외모가 출중한 녀석이었지만 데뷔를 앞두고 공들여 가꾼 덕분에 얼굴에서 빛이 났다.

맞은편 자리의 여자들이 흘긋거리며 보자 녀석은 거만하게 목에 힘을 줬다. 벌써 유명 연예인이라도 된 듯 굴었다. 라라송 밴드 활동을 할 때도 겸손함이라고는 모르고 살던 놈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일광산업이라고, 대경만큼 대기업은 아니라도 엄청 잘나가는 중소기업 회장이시거든.”

“대단하시네요. 아버지도 훌륭하시고 태미 씨도 엄청난 음악적 재능을 타고나시고. 굉장하네요.”

해윤은 진심으로 받아쳐 반응했다. 80프로 이상은 진심이었다. 태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졌다. 한껏 띄워 주니 붕 떠서 실실 웃는 단순함이 제법 귀엽다.

“그러니 뭐든 물어보셔. 대경이 아버지 회사 주 거래처이기도 하고, 아버지가 한 회장님의 골프 멤버이기도 해서 대경 내부 상황은 대충 다 꿰고 있어.”

“회장님이 많이 아프신가요?”

박지형이 주문한 음료를 가져다주었다. 제 몫의 음료를 홀짝이며 태미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3년 전.

한승조 회장이 갑자기 쓰러져 긴급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수술 후 무사히 깨어났지만 한 회장은 마음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세 자녀가 하나같이 무능력해 회사 일을 믿고 떠맡길 수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유약한 신체를 타고난 장남 한기준은 칠순을 앞둔 아비보다 더 비실비실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되는 골치 아픈 난치병을 앓고 있다고 했다.

차남 한기우는 걸어 다니는 트러블 메이커다. 임원 자리에 앉혀 두었으나 회사 일보다는 연예인 스폰서 짓이나 하고 마약 파티나 즐기는 게 더 적성에 맞는 듯했다.

막내딸 한예민은 애초에 회사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못 박았으며, 실제로 스물 중반의 나이에 결혼해 캐나다로 이주해 조용히 살고 있었다.

하나같이 시원찮은 자식 놈들이었다. 한 회장은 언제 또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몸속에 품고서 회사 일에 매진했다. 그런 와중에도 한 회장은 몇 년째 별거 중이던 본처와 이혼하고 은밀히 만남을 지속해 오던 여성과 공식적으로 재혼했다.

회장이 재혼한 여성에게는 이재나라는 30대 중반의 딸이 하나 있었다. 이재나가 한 회장의 핏줄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한 회장과 재혼한 여성이 오래전부터 회장의 두 번째 부인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한승조 회장은 자식 복도 없었지만 형제 복도 없었다. 하나뿐인 남동생은 부친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탕진하고, 도박에 미쳐 빚더미에 올라앉아 시도 때도 없이 형에게 찾아와 손을 벌렸다.

남동생이란 놈은 인간 말종이지만 놈의 자식새끼 하나만큼은 아주 훌륭했다. 어릴 때부터 똑똑하더니 커 갈수록 더욱 유능해졌다. 한지율은 한 회장의 자식 중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엘리트 코스를 착착 밟았다. 한 기업의 대표 자리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완벽한 인재였다.

‘지율이, 저 녀석이 내 자식이었어야 했는데. 저 녀석이 내 아들이었어야 했어.’

한 회장은 수도 없이 탄식했다. 어린 조카를 집으로 데려와 제 자식처럼 교육시켜 키웠다. 남동생 놈 밑에 두면 저 좋은 원석이 썩어 버릴 것 같아서. 어린 조카는 주면 주는 대로 감사히 받아먹고 쑥쑥 성장했다. 그럼에도 녀석은 제 주제를 확실히 알았다.

자신은 한 회장의 아들이 아니란 것을 확실히 인지하고 선을 넘지 않았다.

한지율은 회장이 시키는 대로 하며, 주제넘게 욕심도 부리지 않았다. 철없이 날뛰는 둘째 아들을 제어 좀 해 달라고 옆에 붙여 주었더니 군말 없이 그렇게 했다. 한 회장의 노모, 한지율의 할머니인 진 여사까지 묵묵히 챙겼다.

한기우가 난동을 피워 폭력 사건을 일으켰을 때에도, 한지율에게 네가 희생 좀 해 줘야겠다, 시키니 그렇게 했다. 한기우 대신 체포되어 유치장에 갇히고 폭력 전과가 생겼다. 한기우는 이후에도 수도 없는 자잘한 사건 사고를 일으켰고 뒤처리는 늘 한지율의 몫이었다.

‘네가 내 자식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마다 회장은 한지율의 노고를 치하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한 회장 나름의 보상은 확실히 했다. 한지율을 데려다 키워 주고 교육시켜 주고, 형수에게 생활비도 확실히 지원해 주었다.

형이 생활비 명목으로 보내 주는 돈을 빼앗아서 도박장으로 뛰어가, 거하게 말아먹고 거지꼴이 되어 실실 웃으며 기어들어 와 당당히 돈을 요구하는 남동생의 뻔뻔함도 참아 줬다.

어쩌면 저런 새끼 밑에서 저토록 훌륭한 자식이 생겨났을까 싶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콩밭에 산삼이 날 수도 있는 거였다. 가끔은.

하지만 아무리 산삼 급 인재라 해도 한지율은 회장의 자식이 아니었다. 그건 아무리 한탄하고 탄식한다 한들 변하지 않을 진실이었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둘째 놈이 제 핏줄 섞인 아들놈이란 사실 또한 변하지 않을 현실이었고.

‘요새 계속 몸이 삐걱거리는 걸 느껴. 이러다 어느 순간 쓰러져서 영영 못 일어날 게 분명해. 변변찮은 첫째와 둘째 놈 생각을 하면 편히 눈을 못 감을 것 같지만 어쩌겠어. 죽을 운명을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거고. 그나마 재나, 그 애가 참 유능해. 지율이? 그 녀석도 고생 많이 했지. 지금까지 고생한 보상을 충분히 해 줄 거야. 정말 아쉬워. 지율이 그 애가 내 자식이었으면. 그랬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회사를 지율이한테 맡기고 어느 지중해 섬 같은 데 처박혀서 살다 죽고 싶은데 말이지.’

몇 달 전 가을 즈음, 한 회장이 골프 모임에서 했다는 말이었다.

불과 며칠 전이었다. 한 회장이 한지율에게 사람이 제 주제를 알아야 오래 사는 법이라며 지껄였던 게.

한승조 회장 본인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라, 회장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주위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멋대로 각색된 이야기였다. 회장의 본심은 아무도 모른다. 회장의 자식들, 살 맞대고 사는 부인, 한지율조차도 한 회장의 속내가 무엇인지 모를 것이었다.

태미가 늘어놓은 긴 얘기의 핵심은 간단했다.

회장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고 회장 일가 내부가 술렁이고 있다. 겉보기엔 하나같이 무능력한 것들이라도 그들에게도 야망과 욕심이란 게 존재한다. 가진 것을 필사적으로 지켜야 하고, 더 많이 가져야만 한다.

“아마 한 회장 막내딸도 남편 사업이 휘청거려서 돈이 필요할걸?”

태미가 덧붙여 말했다.

외국 어딘가에 처박혀 살던 셋째 딸의 사정도 그렇다고 한다. 회장의 핏줄을 이어받은 로열패밀리들은 숨죽여 눈을 번뜩이고 있을 것이다.

그들도 결국 제 아버지, 한승조 회장의 재산이라는 거대한 고깃덩어리를 노리는 피라냐였다.

물밑으로 한 놈이라도 떨어뜨려야 제가 가질 몫이 많아지고 늘어난다. 정신적으로 불안한 등신 같은 약쟁이 한기우가 가장 만만하다. 한지율은 가장 골치 아픈 걸림돌이다. 한기우와는 달리 똑똑하고 유능하다. 회장의 전적인 신임을 받고 있다.

하지만 한지율에게는 엄청난 약점 하나가 있다.

그는 한 회장의 핏줄이 아니란 것. 한 회장도 누누이 자기 자식이었으면 좋겠다고 탄식하면서도, 선을 딱 그어 놓았다지 않나.

그런데 한 회장이 골프 모임에서 그랬다고 한다. 지금까지 지율이가 고생이 많았으니 그 애에게도 보상을 충분히 해 줄 것이라고.

“전 잘 모르겠습니다. 형제고 친척인데 왜 그렇게 살벌하게들 구는 건지. 부모의 재산이지 자기 것이 아니잖습니까. 그냥 사이좋게 나눠 가지면 안 되는 걸까요.”

“당신이 가진 게 많아 봐요. 원래 있는 것들이 더 가지려고 발악하는 법이야. 우리 집은 대경 같은 대기업도 아니고 중소기업인데도 만만치가 않아. 내가 그래서 미국으로 튄 거야.”

해윤이 중얼거리는 말을 태미가 코웃음을 치며 받아쳤다. 해윤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상한 조합의 번호였다.

“외국에서 온 전화 같은데?”

태미가 액정화면을 흘긋 보더니 지껄였다. 해윤은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 몸 함부로 굴렸다간 다 죽는다고 했지? 해윤아?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한기우의 목소리였다.

놀랄 것도 없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해윤은 여유롭게 앞에 놓인 컵을 들어 음료를 마셨다.

“전무님. 괜찮으세요?”

해윤은 건조한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음료를 마시던 태미도,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박지형도 흠칫하며 해윤을 바라봤다.

- 너, 내가 분명 뭐라고 했어? 내 말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데? 내가 몸 함부로 굴리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전무님은 지금 대체 뭐 때문에 화가 나신 겁니까?”

- 그걸 몰라서 물어!

수화기 너머에서 쾅!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해윤은 피식 웃고 말았다.

- 왜 웃어?

“웃겨서요.”

정말 그랬다. 하도 웃겨서 웃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신미라 씨도 죽였고, 태민 형도 죽였으니, 이제 이재나 씨도 죽이고, 박 대표도 죽이고, 한지율 씨도 죽이고 하세요.”

- 너 미쳤어? 너 왜 이래? 왜 나한테 이래!

“전무님 말씀대로 미쳐서 그렇습니다.”

- 너 내가 오냐오냐해 주니까 이제 무서운 게 없어? 네가 나한테 이러고도 멀쩡할 거 같아?

“그럼 죽이세요, 저도. 내키는 대로 다 죽이세요.”

기가 차서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수화기에서 새 나왔다.

- 해윤아. 넌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전무님이야말로 사람한테 이러시면 안 되죠.”

- 역시 내가 널 너무 봐줬어. 어째 이것들은 자기 주제를 모르고 하나같이 다 기어오르지? 한지율, 그 새끼가 널 망쳤어.

“아뇨. 전 원래 이랬습니다. 살아 있는 생물은 뭐든지 밟으면 살려고 꿈틀해요. 밟혀도 찍소리 못하고 피 토하고 죽는 게 아니라.”

- 해윤아. 내 인내심을 실험하지 마.

“전무님이 언제 인내하신 적이 있나요? 지금껏 살아오시면서 참아 본 적이 있긴 한가요? 줄곧 내키는 대로 내지르고 휘두르며 살지 않으셨어요? 참 한심한 인생입니다. 전무님 인생도.”

- 기어오르지 마! 네깟 게 어떻게 감히 나한테 기어올라! 죽고 싶어?

“죽이시라니까요? 죽이세요!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해윤은 악을 쓰고는 전화를 끊었다.

“씨발, 진짜 거지 같다.”

허공에 숨을 길게 내뿜으며 욕을 갈겼다. 태미와 박지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해윤을 바라봤다.

“와. 형, 진짜 간 크다. 한 전무, 저 미친 새끼가 눈 돌아가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태미가 놀라워하며 말했다. 지금까지 건방지게 반말 찍찍 갈기더니 이젠 형이란다.

해윤도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처음엔 주는 거 감사히 받아먹었다. 반항할 엄두도 못 내고 설설 기었다.

한지율이 널 망쳤다는 한기우의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찌 됐건 한지율과 얽힌 덕분에 꿈틀하게 됐으니까.

“무슨 짓이든 하라고 하세요. 무섭지 않습니다.”

해윤의 말에 가볍게 웃음 치며 태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한 전무가 미국 유학 생활할 때 사귀던 애인이 있었다면서요? 무슨 일인지 몰라도 그 여자는 자살했고.”

“사정 다 알면서 모르는 척 떠보지 마시죠.”

“웃기네. 떠본다고 나올 거라도 있나? 듣기론 그 여자 기일이 이맘때 즈음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습니까?”

“웃겨. 형은 아는 게 뭐야, 진짜. 하긴 아는 거 하나 없기는 한 전무 그 새끼도 똑같지.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이 어떤지 알기나 하는 건가. 애인한테 전화할 여유도 다 있고.”

코웃음 치던 태미가 음료 컵을 입에 갖다 댔다. 그새 다 마신 모양인지 탈탈 털어도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한 잔 더 마실래요?”

“은근히 입에 착 붙고 맛있네. 요새 식단 관리 한다고 제대로 못 먹었더니 죽겠어요. 매니저가 이거 보면 날 죽이려고 들 텐데.”

“마실 거 한 잔은 괜찮아요. 안 먹고 어떻게 살아요.”

해윤이 음료 좀 사다 달라고 말하기도 전에 박지형이 벌떡 일어섰다.

“한 전무, 그 변태 새끼 할 때 묶지? 때리고, 가두고, 협박하고?”

박지형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태미가 상큼한 얼굴로 상큼하게 지껄였다. 평화로운 오후에 카페에 앉아 할 얘기는 아니었다. 아니라고 할 순 없어서 해윤은 웃고 말았다.

“유명한가 봅니다.”

“아주 유명하지. 한 전무 와이프가 왜 이혼 선언을 했겠어요.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대기업 사모님으로 입성했는데 웬만하면 눌러앉았겠지. 평소엔 진짜 상냥하대. 다정하고. 그런데 한 번씩 미쳐 날뛸 땐 장난 아니라는 거야. 상대방이 견디다 못해 발악하면 내가 널 그렇게 사랑해 줬는데 나한테 왜 이래? 이러면 안 되잖아? 이러는 거지.”

“왜 그런 미친 짓을 참고 견디는 걸까요.”

“진짜 몰라서 묻는 거 아니지? 그걸 견디면 엄청난 대가를 받잖아. 원하는 건 다 해 주고 아낌없이 퍼 주고. 빛 볼 일 없던 신인 연예인도 한 전무를 거치면 탑급이 돼. 그럼 버틸 만한 거지. 형도 그래서 결국 참고 견뎠던 거 아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해윤은 음료 컵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달싹였다.

“그렇죠. 내가 선택한 길이죠. 그러니 결국은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인 거고.”

“난 도무지 형이 이해가 되지 않네. 나 같으면 아무리 좆같아도 어떻게든 한 전무한테 비빌 텐데. 한 전무가 회사에서 쫓겨난다 해도 회장 아들이란 사실은 변함없잖아.”

“묶이고 맞고 갇히고 협박당해도요?”

“견디면 돈을 던져 주잖아.”

“자유도 없이 갇혀 있는데 돈이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배부른 소리 지껄인다. 쥐뿔도 없는 주제에.”

태미가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그건 그렇네. 쥐뿔도 없는 놈이 온갖 일을 다 겪게 되네요. 재벌 2세와 엮여 보기도 하고. 멀리서 한 명의 팬으로서 지켜보기만 했던 태미 씨한테 주먹질도 해 보고, 이렇게 차 마시며 얘기도 나누게 되고요.”

“형. 딱 이거 하나만 물을게요.”

해윤이 고개를 들어 태미를 봤다.

“형, 이제 어떻게 할 건데요?”

“생각 중입니다. 어떻게 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머릿속은 멍했다.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했더니 한지율은 그랬다. 그래서 어떻게 해결할 거냐고. 그러게. 어떻게 해야 하지? 멍청하게 눈만 깜빡이는 사이, 품속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니 한지율의 번호가 떠 있다.

“네.”

태미를 의식하며 평소와는 다르게 전화를 받았다.

- 전 지금 부산입니다.

밑도 끝도 없이 자긴 지금 부산이란다. 무슨 소리야, 이게?

“거긴 왜 가셨어요?”

- 석해윤 씨 어머니와 이모님을 만나 뵈러 가는 중입니다.

“대체 왜요!”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이 사람이 다짜고짜 뭐라는 건가. 왜 당신이 내 어머니와 이모를 만나?

- 석해윤 씨도 곧장 이리로 오시는 게 좋을 겁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데요? 설명 좀 해 주세요.”

- 부산에서 만나 뵙죠.

자세한 설명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해윤은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쏘아보았다. 뒤이어 곧바로 문자 하나가 날아왔다. 이모가 보낸 문자였다.

「해윤아. 이상한 문자가 왔어. 이게 뭐니?」

이모가 보낸 문자엔 동영상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여의도 한강 공원’이라는 파일명이 붙은. 제목만 봐도 어떤 동영상인지 알겠다. 해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단체 손님이 테이크아웃을 해 가서 음료가 지금에야 나왔어요.”

해윤은 마침 음료를 들고 테이블로 다가오던 박지형에게 손을 척 내밀었다.

“지형아. 차 키 좀 줄래? 내가 지금 급하게 가 봐야 할 데가 있어.”

“안 그래도 한 이사님한테 문자 받았어요. 부산에 가셔야 하죠? 제가 운전할게요. 형 지금 상태로 운전하다가는 사고 나요. 태미 씨. 이거 드시고 천천히 가세요. 저흰 가 볼게요.”

박지형이 들고 온 음료 컵을 태미 앞에 내려놓고 해윤의 등을 떠밀었다.

두 사람은 엔터테인먼트 사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다시 들어가 차에 올라탔다. 차가 건물에서 벗어나서야 해윤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 화면을 다시 밝혔다. 그러곤 떨리는 손으로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모. 저예요.”

조심스럽게 이모를 불러 보았지만 답이 없었다.

“제가 지금 부산에 내려가고 있어요. 가서 얘기해요. 설마 엄마한테도 문자가 갔어요?”

이번에도 수화기 너머는 묵묵부답이었다. 욕을 하거나 흐느끼는 소리보다 더 무서운 침묵이었다.

“이모. 아무 말씀이라도 해 주세요. 제발요.”

- 나나 네 엄마는 다 알고 있었어. 해윤아.

이모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뭘요?”

- 네가 다른 남자애들이랑 달리 여자애랑 사귈 수 없다는 거.

해윤의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가 들어찬 듯했다.

“죄송해요.”

- 해윤아. 널 나무라는 게 아냐. 네 잘못이 아니야. 부끄러워할 것 없어. 네 사생활이야, 그건. 우리가 걱정하는 건 우리에게 네 사생활을 폭로한 사람의 악의야. 우리에게 문자를 보낸 사람은 너를 해치고 싶어 하고, 괴롭히고, 고립시키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너같이 착하고 성실한 애가 대체 무슨 일로 이런 악랄한 사람에게 원한을 샀을까. 이런 비열한 사람은 사람을 크게 해쳐. 이모도 이런 유의 사람을 겪어 봐서 잘 알아.

이모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침착했다.

- 네가 혹시 네 엄마의 병원비 때문에 이런 악의에 엮인 게 아닐까 싶어서 너무 미안해. 걱정도 되고.

해윤은 목이 꽉 메어 말 한마디 뱉을 수가 없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수화기에서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바뀌었다.

- 해윤아. 이리로 오는 중이라고?

어머니였다.

- 먼 길 조심해서 오렴. 지금 오는 중이면 같이 저녁 먹을 수 있겠다. 너 좋아하는 순두부찌개 끓여 놓을게.

“엄마….”

- 아들. 난 우리 아들을 믿어.

눈이 불에 덴 듯이 뜨거워졌다. 인사 한마디 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서도 한참 동안 해윤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박지형은 묵묵히 운전을 하며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한기우가 분명했다. 어머니와 이모에게 한지율과 뒤엉켰던 ‘여의도 한강 공원’ 영상을 보낸 건.

겪어 왔던 것 이상으로 유치하고 야비하고 비열한 새끼였다. 놈은 나이만 처먹은 애새끼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가지고 태어난 귀족이시다.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자랐을 테고,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가질 수 있고, 원하는 게 있으면 손만 뻗으면 제 손으로 굴러들어 왔을 것이다.

물건도, 사람도, 애정도, 사랑도, 전부 돈으로 살 수 있었겠지.

한기우는 알기나 할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가 없는 무한한 신뢰가 어떤 것인지. 누구 말마따나 쥐뿔도 없는 자식새끼를 이렇게 무조건 믿어 주고, 사랑해 주고, 끌어안아 토닥여 주는 부모가 있다는 것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와 이모, 해윤은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울타리를 만들었다. 약하고, 보잘것없고, 여린 세 사람이 모진 세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서로를 꽉 끌어안고 버텼다. 우리 세 가족이 어떤 가족인데. 어떻게 버티고 살아온 식구인데.

한기우. 아무리 눈이 홱 돌아갔어도 내 가족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해.

터질 듯 쿵쿵 뛰던 해윤의 심장 박동이 평화롭게 잦아들었다. 시끄럽게 웅성거리던 머릿속이 고요해졌다.

해윤은 고개를 들고 머리를 시트에 기댔다. 그러곤 손을 뻗어 라디오를 틀었다. 발랄한 걸 그룹 노래가 스피커에서 새어 나왔다.

부산에 도착한 해윤과 박지형은 곧장 이모와 어머니가 하는 식당으로 향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지율은 뻔뻔하게 식당 의자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가게 문 앞에는 <임대 문의> 종이가 나붙어 있었다.

“어유. 우리 해윤이 왔어?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다. 우리 조카.”

이모가 호들갑스레 해윤을 맞아 주며 자리로 데려가 앉혔다.

“안녕하십니까. 해윤 형 매니저인 박지형이라고 합니다.”

“어머. 매니저라고?”

뒤따라 들어온 박지형이 꾸벅 인사하자 이모가 눈을 빛냈다. 매니저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느낌에 기분이 조금 좋아진 듯했다. 해윤도 매니저라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괜히 가슴이 설레고 그랬다.

“앉아요, 앉아. 저녁 먹을 시간이라 배고프죠? 매니저님은 뭘 좋아하시나?”

“네. 배가 등에 달라붙을 것 같습니다! 전 가리는 거 없이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수육 좋아해요?”

“없어서 못 먹습니다!”

녀석이 해윤의 옆자리에 앉으며 넉살 좋게 외쳤다. 이미 한지율은 식사를 마친 건지 상 위의 음식은 죄 빈 그릇이었다.

“두 분 다 오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한지율은 마치 자기가 여기 주인인 것처럼 말했다. 가정식 백반집의 허름한 외관이며 상 위에 놓인 음식들도 그렇고, 가게의 분위기 자체가 양복 차림을 한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사님은 뭘 드셨어요?”

“된장찌개요. 근래 먹어 본 된장찌개 중에 제일 맛있었습니다.”

박지형의 질문에 한지율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공깃밥을 세 그릇이나 드셨어. 이런 음식이 입맛에 맞으실까 걱정했는데 어찌나 맛있게, 복스럽게 잘 드시는지.”

주방에서 이모가 수육을 내오며 싱글싱글 웃었다. 수육 그릇이 상 위에 놓이자 박지형이 잘 먹겠습니다, 외치고는 젓가락을 놀렸다. 오다가 휴게소에 들러 이것저것 사 먹고서도 저런다.

“으, 어어. 대박. 죽여준다. 고기가 살살 녹아요.”

녀석이 고깃점을 입 안에 쓸어 넣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해윤도 젓가락을 들어 수육을 맛봤다. 이모가 워낙 음식 솜씨가 좋아 뭐든 맛있지만 돼지고기 수육은 정말 최고다.

“어유. 천천히 먹어요. 체하겠다.”

녀석은 이모가 따라 주는 물도 단숨에 마시고, 고기도 입 안에 쓸어 넣으면서 연신 탄성했다. 한지율도 젓가락을 들고 합류했다.

“밥을 세 그릇이나 드셨다면서요?”

“맛만 보는 겁니다.”

그렇게 먹고도 또 먹을 게 속에 들어가나 싶어 한 말이었다. 한지율의 뻔뻔한 대답에 해윤은 웃고 말았다.

“얘는 왜 먹는 걸로 구박을 하고 그러니. 잘 드시니 얼마나 보기 좋아.”

이모도 웃으며 해윤의 팔을 가볍게 쳤다.

“고기 더 갖다 줘요? 순두부찌개 끓여 줄까요? 밥이랑 같이 먹게.”

“네! 이모님! 진짜 대박 맛있어요!”

박지형이 양 볼이 미어지도록 고기를 씹으며 히죽 웃었다. 해윤은 부스스 일어나 이모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모가 솥 안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깃덩이를 꺼내 도마 위에 놓고 써는 동안, 해윤은 그릇에 반찬을 담았다.

“엄마는 집에 계세요?”

“응. 으슬으슬 춥고 온몸이 아프다고 하더니 약 먹고 자더라. 너 때문은 아냐. 요새 계속 온몸이 다 아프다고 했던 거니까. 너야말로 얼굴이 왜 이래? 혼자 산다고 밥도 안 챙겨 먹고 그러는 거 아냐?”

“에이. 아니에요. 제가 요새 얼마나 잘 먹고 사는데요.”

애써 웃어 보였지만 이모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해윤을 바라보기만 했다.

“저 양복 입은 사람. 무슨 대기업에서 일하는 높은 사람이라고 하더라.”

이모가 무슨 비밀 얘기라도 하듯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모는 한지율이 동영상 속 주인공인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모와 어머니에게 첨부된 동영상은 쉽고 빠르게 파일을 보낼 수 있도록 짧게 편집된 영상이었다. 영상 속 인물들의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남자와 남자가 붙어 있고, 두 남자가 키스하고 손으로 서로를 만지며 은밀한 짓을 하고 있다. 이 정도만 짐작할 수 있는 영상이었다. 해윤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영상의 실루엣만 봐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일 테고.

“저 사람이 두 분은 아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석해윤 씨 일은 믿고 맡기시라고, 회사 이름을 걸고 석해윤 씨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회사 측에서 알아서 처리할 거라고 하더라.”

“저 사람이 그렇게 말했어요?”

“응.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게 돼서 죄송하다며 한우 세트에 백화점 상품권도 가져왔어. 한우가 어마어마해. 돈깨나 줬겠더라. 그렇게 크고 좋은 한우 선물 세트는 처음 받아 봤네. 상품권도 오십만 원짜리 네 장이나 들었더라고.”

해윤은 주방의 쪽창 너머로 홀을 내다봤다. 박지형이 주로 웃고 떠들고 있고 한지율은 조용히 음료수를 홀짝이며 녀석의 얘기를 들어 주고 있었다.

“그 이상한 문자 받고 사실 심장이 쿵쿵대고 손이 덜덜 떨려서 청심환을 먹었거든. 그런데 대기업 높은 사람이 저렇게 직접 찾아와서 알아서 처리해 주겠다고 하니 좀 안심이 되네. 한지율, 저 사람이 그랬어. 다 괜찮을 거라고. 지금은 좀 혼란스럽지만 금방 다 좋아질 거라고. 그 말 믿어도 되겠지? 응?”

“그럼요. 믿으셔도 돼요.”

“누군지 몰라도 정말 나쁜 사람이야. 사람이 얼마나 비열하고 악의에 가득 차 있으면 부모한테 그런 문자를 보낼 수 있어. 해윤이, 너 혹시 네가 남들하고 좀 다르다고 해서 회사에서 막 왕따 당하고 괴롭힘 당하고 그러는 거니?”

“그런 거 아니에요.”

“기죽지 마. 해윤아. 우린 괜찮아. 나랑 네 엄마는 널 믿어. 그러니까 당당해야 된다. 어깨 쫙 펴. 알았지?”

이모가 해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네.”

해윤이 웃어 보이자 이모도 웃으며 찌개 재료가 든 뚝배기를 불판 위에 올리고 가스레인지 불을 켰다.

“그런데 해윤아. 너 서울 사장님하고는 어떻게 된 거야? 서울 사장님 회사에서 일하는 거 아니었어?”

“아, 태민 형의 회사가 대기업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인수 합병돼서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그렇구나. 서울 사장님은 잘 계시지? 그분도 참 성격 좋아 보이시던데.”

“네. 태민 형이야 잘 있죠.”

해윤은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 성격 좋아 보이는 양반이 해윤을 진창에 밀어 넣고, 결국 주제 모르고 나대다가 죽고 말았단 사실을 알게 되면 이모는 쓰러질 거다.

“그럼 됐지, 뭐. 다들 잘 살면 되는 거야. 그래도 이렇게 우리 조카도 보고, 네 회사 사람들도 이렇게 찾아와 주고 참 좋다.”

이모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찌개를 끓여 내는 이모의 얼굴에 온화한 웃음이 번졌다. 더없이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세월의 거친 풍파에 깎이고 깎여 둥글어진 어른의 얼굴이다.

“해윤아. 네 사생활을 엿본 것 같아서 이모가 미안해.”

이모의 미소 띤 입에서 낮은 웅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우리가 서로 미안해하고 그래야 돼요.”

“하긴 그래. 그래도 우리가 네 힘이 되어 주지는 못할망정, 저런 못된 마음 품은 나쁜 사람한테 약점이 되는 것 같아서 너무 미안해.”

“사과하지 마시라니까요. 이모가 자꾸 그러시면 저도 당장 무릎 꿇고 울면서 사과할 거예요. 우리, 앞으로 서로한테 미안하다는 말하지 말아요.”

“그래. 알았어. 그러자, 우리. 그렇게 하자. 알았으니까 나가서 밥 먹어.”

찌개가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보글보글 끓었다. 이모가 불을 끄고 집게로 뚝배기를 들고 나갔다. 해윤도 고기가 든 그릇과 밥공기와 반찬 접시를 들고 홀로 나왔다.

박지형이 신이 나서 수육 접시에 젓가락을 들이댔다. 이모가 어서 밥 먹으라며 해윤의 손에 수저를 쥐여 주었다. 해윤은 숟가락으로 찌개를 떠서 맛봤다.

“역시 맛있다.”

찌개 맛은 익히 알던 그 맛이었다. 해윤이 제일 좋아하는 맛. 이모가 푸근하게 웃었다. 밥과 찌개를 퍼서 입에 욱여넣던 해윤은 가게 구석에 놓인 기타 케이스를 발견했다.

“기타가 왜 저기 있어요?”

“창고에 처박혀 있기에 꺼내 놨지. 가게를 내놓아서 얼마 전에 대청소를 했거든.”

누가 쓰던 걸 받아왔던가, 누가 줬던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제 돈 주고 산 물건은 아니었다.

“술 한잔하실래요?”

이모는 창고에서 꺼낸 낡은 기타에는 금세 관심을 잃고 한지율의 옆에 앉아 넌지시 물었다.

“아뇨. 운전해야 해서요.”

“주무시고 가시지. 해윤이가 쓰던 방에서 같이 주무셔도 되고.”

“일이 많아서 서울로 올라가 봐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모님! 전 술 주세요! 전 오늘 자고 가겠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박지형이 목청 크게 외쳤다.

한지율은 정말 식사를 마치고 가 봐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웅해 드리고 올게요.”

해윤도 따라 일어섰다. 일어나려고 보니 또 구석의 기타 케이스에 시선이 가, 기타 가방을 짊어졌다. 박지형은 이모와 앉아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어느새 취한 모양이었다.

“이사니이임. 조심해서 가세요오오. 서울에서 뵈어여어어.”

녀석이 혀 꼬인 소리로 손을 붕붕 휘저었다.

“커피 한잔하죠?”

가게 밖으로 나서자 한지율이 하얀 입김을 뿜으며 말했다.

“가게 안에도 커피가 있었는데 그거 드시지 그러셨어요.”

“둘이서 커피 마시며 얘기 좀 나누자는 소리입니다.”

아, 그런 소리였구나. 해윤은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

“근처에 광안리 해수욕장이 있는데 그리로 갈까요? 해변 앞에 카페가 많아요. 차로 이동해도 되고요.”

“산책 겸 걸어서 가죠. 걸어갈 만한 거리입니까?”

“꽤 한참 가야 하지만 그렇다고 못 갈 거리도 아니에요.”

“그럼 가죠. 노래 연습이라도 하시려고 합니까?”

해윤이 둘러맨 기타 케이스를 보고 묻는 소리일 터였다.

“그러려고요. 속이 답답해서 해변에서 몇 곡 부르다 들어가려고요. 집에선 시끄러워서 노래를 부를 수가 없어서요.”

해윤과 한지율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광안리 해변을 향해 걸었다. 따뜻한 곳에 있다가 금방 나왔을 땐 몰랐는데 바람이 제법 매섭다. 머플러라도 두르고 나올 것을. 해윤은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깨를 움츠려 부르르 떨었다.

곧 보드라운 머플러가 훤히 드러난 해윤의 목에 감겼다. 한지율이 목에 두르고 있던 제 머플러를 풀어 목에 감아 준 것이었다.

“춥지 않으세요?”

“춥죠.”

뭐가 춥냐고 허세라도 떨 것이지, 그는 솔직하게 말하며 어깨를 떨었다. 그다웠다. 호의를 거절하면 잔소리를 늘어놓을 게 분명한 사람이라, 해윤은 머플러를 목에 둘둘 감았다.

“한기우가 하는 짓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지율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누가 전무님의 미친 짓을 막을 수 있겠어요. 설마 이런 짓까지 하겠어? 싶었는데 진짜 할 줄은.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유치하고 비열할 수가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한지율이 한 박자 늦게 사과했다.

“왜 사과하세요? 한지율 씨답지 않게.”

“제가 다 해결하겠다고 큰소리 쳐 놓고 이렇게 돼서 할 말 없습니다.”

해윤은 한지율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한지율이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해윤을 보았다.

“왜 그렇게 봅니까?”

“그냥 신기해서요. 언제 우리가 이런 대화를 스스럼없이 나눌 정도로 가까워졌나 싶기도 하고.”

“이게 가까워진 겁니까?”

“네. 가까워졌죠. 처음 우리가 전무님 댁에서 만난 때를 생각해 보세요. 한지율 씨는 절 욕하기 바빴고, 전 한지율 씨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죠.”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 하셨잖습니까.”

“그거야 영문도 모르고 욕 들어 먹는 게 억울했으니까요. 그때만 해도 신미라라는 여자가 누군지도 몰랐어요, 정말로.”

“그건 그렇군요. 석해윤 씨와 저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진 건 맞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부터 종알거리는 당신 입술을 보면 조건반사처럼 아래가 뻐근하게 땅기니까요. 당신이 그 발갛게 부은 입술로 내 아래를 빨아 주던 감촉이 떠올라서 그런 걸 테죠.”

이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밤길을 걸으면서 저런 소리를 참 뻔뻔하게도 지껄인다. 장담한다. 저 사람은 법정에서도 저런 소리를 고저 없는 우아한 목소리로 지껄일 수 있을 거다.

“어떻게 이런 데서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사람한테는 누구한테나 섹스 판타지 같은 게 있지 않습니까. 가령, 밤바다가 보이는 모래사장에서 야외 섹스를 하고 싶다는 판타지 같은.”

“전 아닌데요. 똑같은 급으로 취급하지 마시죠. 한지율 씨는 보기와는 달리 굉장히 변태 같은 면이 있으십니다.”

“저럴 땐 진짜 귀엽다니까.”

한지율이 픽 웃었다. 말의 내용과는 달리 웃는 얼굴이 어째 굉장히 조롱조다.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다른 얘기하죠?”

“그럼 석해윤 씨가 뭐든 말해 보세요.”

얘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해변이었다. 탁 트인 바닷가 풍경이 훤히 펼쳐졌다. 광안대교와 건물들이 뿜어내는 빛이 출렁이는 수면 위에 반사돼 빛 물결이 반짝였다. 날씨가 제법 추운데도 해변에 제법 사람들이 많았다.

이모와 어머니가 부산에 자리 잡고 살 즈음엔, 해윤도 서울에서 정착해 해윤 나름의 삶을 살고 있었다. 날 때부터 서울에서 산 해윤이었다. 하지만 이젠 소중한 가족 두 분이 계시는 부산이 제2의 고향이 되었다.

두 분이 전셋집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이 근방에서 가게를 얻어 살게 된 게 얼마 안 됐다. 두 분이 하는 식당 근방에 있는 광안리 해변에 와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밤바다의 고요한 풍경, 반복적인 파도 소리가 사람을 참 감성적으로 만든다. 해윤은 빛이 반짝이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잘못된 선택을 했으니 벌을 받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람이 한 번 큰 잘못을 하면 원래대로 되돌리기가 쉬운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싶기도 해요. 진창 속에 너무 깊게 빠져 버린 것 같아요. 빠져나온다 해도 오물투성이가 돼서 내가 살던 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고. 인생에도 리셋 기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더러운 파일을 싹 지우고 클린하게 포맷할 수 있다면.”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석해윤 씨는 돌아올 곳이 확실히 있지 않습니까. 당신에겐 언제 어떤 모습으로 돌아와도 반갑게 맞아 줄 사람들이 있죠. 한기우나 나에게는 없지만요. 길 건너죠. 카페들이 보이는데.”

그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틀었다. 해윤도 고개를 돌려 길 건너편을 바라봤다. 카페는 남부럽지 않게 많아서 아무 데나 들어가면 될 듯했다.

횡단보도 앞으로 다가가 해윤은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자 갑자기 한지율이 해윤의 팔을 쥐어 휙 잡아당겼다.

그 순간, 배달 스쿠터 한 대가 빠른 속도로 해윤의 앞을 쌩하게 스쳐 지나갔다. 무심코 건넜다간 스쿠터에 치이거나, 피하느라 넘어지거나 했을 터였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널 땐 주위를 잘 돌아보고 건너셔야죠.”

한지율이 애한테 할 법한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붙잡은 해윤의 팔을 놨다.

밤바다의 차가운 습기를 머금은 그의 얼굴에선 습윤한 광택이 흘렀다. 반짝이는 안경알도, 그 안의 두 눈도, 매끈한 피부도, 머리칼도, 촉촉이 젖었다.

그는 제 입으로 자신은 비열한 인간이라 했다. 하지만 해윤의 눈에 비치는 저 남자는 언제나 깨끗했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저 남자는 더러워진 적이 없었다.

해윤은 인생에 리셋 버튼이 있다면, 이 남자와 함께하는 깨끗한 새 인생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지율은 두어 걸음 앞서 걸었다. 해윤도 발걸음을 빨리해 금세 그를 따라잡았다.

“어쨌든 이제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말죠? 우리? 피해자들끼리 미안하다는 말을 주고받아 봤자 뭐하겠어요.”

“맞는 말이군요. 피해자 포지션이네요. 당신이나 나나.”

한지율은 저 포지션이란 말을 어지간히 좋아하는 듯하다.

둘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건널목 바로 앞에 보이는 카페로 향했다. 걸어오느라 온몸이 꽁꽁 얼어 한시라도 빨리 따스한 데로 들어가고 싶어서였다.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서 그가 뭘 마실 거냐고 물었다. 그제야 해윤은 돈 한 푼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커피 정도는 제가 사야 하는데.”

“됐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은 이제 하지 말자면서요?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주문하겠습니다. 앉아 있어요.”

어차피 해윤이 산다고 해도 순순히 얻어먹을 사람도 아니었다. 해윤은 꽁꽁 언 손을 비벼 녹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다가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가 비었기에 얼른 가서 자리를 잡았다.

창가 자리엔 대부분 커플들이 사이좋게 앉아 밖을 내다보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촛불이 일렁였다. 생각해 보니 이건 데이트 코스의 정석 아닌가, 싶었다.

“데이트하기에 좋은 곳 같군요.”

주문한 커피를 가져온 한지율이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마침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라 해윤은 반갑게 웃었다.

“왜 웃습니까?”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요샌 잘 웃네요?”

그는 컵을 들어 커피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비꼬는 소리가 아니라 보이는 그대로, 별생각 없이 던진 말 같았다.

“웃는 얼굴이 보기 좋습니다.”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이번에도 의미 없이 던진 말일 텐데 괜히 부끄럽다. 해윤은 커피 컵을 양손에 쥐고 따뜻한 음료를 입 안에 머금었다.

“귀가 또 빨개졌는데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면 될 일을 굳이 지적을 한다.

“추운 데 있다가 들어와서 그런 겁니다.”

해윤은 태연한 척 받아치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낮에 전무님한테 전화가 왔었어요.”

“뭐라고 했습니까?”

“다 죽여 버린다고 협박을 하시기에 아, 네, 그러세요. 그럼 다 죽이시고 저도 죽이세요, 기다릴게요, 했죠.”

“은근히 배짱 좋다니까.”

한지율이 제법 크게 소리 내 웃었다.

“그런데 전무님이 문자 보낸 건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한기우가 석해윤 씨 부모님께만 그 짓을 했을 것 같습니까?”

“한지율 씨 부모님은 괜찮으세요?”

“아버지는 격리 병동에 갇혀 있는 상황이라 핸드폰이 없고 어머니는 전화해서 딱 한마디 질문하시더군요. 괜찮은 거지? 하고요. 괜찮아요, 대답을 했으니 그걸로 된 겁니다. 이번 일로 살인범 누명을 쓰는 바람에 그나마 있던 명예나 이미지도 진창에 내동댕이쳐졌고.”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커피를 마셨다.

“아직 남아 있는 명예라는 게 있다면 기꺼이 내던져 버릴 생각입니다.”

뭐라 해 줄 말이 없었다. 뭐라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해윤은 문득 그에게 인사치레 한마디 하지 않았단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인사가 늦었는데 이렇게 직접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모랑 어머니가 많이 불안하셨을 텐데 안심시켜 주셔서요.”

“할 일을 한 거죠. 한기우가 저지른 짓의 뒤처리를 하는 게 제 일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제가 다 해결하겠다고 큰소리 쳐 놓고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에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고.”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커피를 마셨다. 그러고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제 몸이 그냥 움직였습니다.”

“신경이 쓰여서요?”

“네. 신경 쓰여서요.”

평소와 다름없는 대답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왜 그런 소리를 하세요? 하고 물으면 이 남자는 언제나 그랬다. 신경이 쓰여서, 라고.

잠시 다물렸던 한지율의 입이 다시 달싹이며 움직였다.

“할 말이 무수히 많은데 머릿속에서 정리가 잘되질 않는군요. 요새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과 생각이 엉망으로 뒤섞입니다.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엉망진창으로 뒤엉켜서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이니 그럴 때도 있죠. 사람이 어떻게 컴퓨터처럼 체계적으로 정리된 생각만 하고 살겠어요. 그럴 땐 단순하게,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해 보시는 것도 괜찮아요. 자고 싶다거나, 울고 싶다거나, 먹고 싶다거나.”

한지율이 커피를 마시며 중얼거리는 해윤을 바라보며 말을 흘렸다.

“섹스하고 싶다거나?”

너무도 노골적이고 직관적인 소리라 민망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웃는 얼굴이 보기 좋다는 소리가 오히려 더 부끄러웠다.

“한지율 씨. 왜 자꾸 그런 쪽으로만 얘기를 끌어갑니까?”

“글쎄요. 발정이 났나 봅니다.”

해윤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빈틈없는 양복 차림에 코트까지 멋스럽게 차려입은 외양을 하고서 저런 소리를 하다니.

“몸정이 든 건가 싶기도 하고요.”

그가 나직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마시던 커피를 뿜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한지율은 다리를 꼬고 앉아 고개를 틀어 창밖을 내다봤다. 저속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던 입술을 커피로 적시며 우아하게 풍경을 감상했다.

“정말 좋은 곳입니다. 평화롭고 아름답군요.”

어느새 그는 밤바다 풍경에 흠뻑 도취 되어 중얼거렸다. 해윤도 자연 배경과 인공적인 배경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에 넋이 나갔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홀려서 보게 되는 풍경이다.

“어머니와 이모님 두 분에게 걱정하지 마시라고 거듭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석해윤 씨도요. 한기우가 해임된다 해도 석해윤 씨는 대경 ENT와 계약이 된 사람입니다. 한기우가 손을 떼도 제가 책임지고 석해윤 씨를 데뷔시킬 겁니다.”

한지율이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입만 열어 지껄였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노래 부르고 싶으시다면서요? 석해윤 씨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하셨고, 전 분명 그러시라고 했으니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 드릴 겁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무척 듣기 좋아서 마음이 평온했다. 무대 위에서 빛나게 해 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한기우의 말을 들을 때는 늘 가슴이 묵직했는데.

“석해윤 씨.”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해윤은 뒤에 이어질 소리를 예감했다.

“내가 어떻게 해 줄까요?”

해윤이 예상했던 그대로의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밭처럼 해윤의 마음속이 고요하게 일렁였다.

“한지율 씨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걸 하세요.”

해윤은 커피를 마시며 대답했다. 한지율이 창밖을 내다보던 시선을 돌려 해윤을 응시했다. 해윤도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저를 보는 맞은편의 시선과 마주했다.

“전 가진 게 쥐뿔도 없으면서 하고 싶은 건 하고 살았어요. 고등학교 밴드부 활동할 때에도 그렇고, 아마추어 밴드 활동도 실컷 했어요. 8년간 착실하게 무명 밴드였지만. 실력은 형편없었을지 몰라도 정말 즐거웠어요. 그래도 정말 즐거웠어요. 한지율 씨는 인생을 즐겨 본 적이 있어요?”

“굉장히 무례한 말을 하시네요.”

“남에게 허락 구할 것 없이 더는 못 참겠으면 참지 마시고요. 이제 한지율 씨 인생을 사세요. 제가 남에게 주제넘게 이런 말할 처지는 못 되지만.”

“주제넘은 말인 줄 알면 애초에 꺼내질 마시죠.”

“제가 도와 달라고, 제발 좀 전무님을 처리해 달라고 한지율 씨한테 매달리길 바라세요? 그럼 그렇게 해 주실 겁니까? 그럼 제 자존심은 뭐가 될까요?”

한지율이 해윤을 바라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자기 인생을 살라니. 자기계발서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몇 번 연이어 핏, 피식 웃음 치던 그가 커피 컵을 들어 마저 마셨다. 그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틀었다.

“웃긴 게 한 번씩 댁의 그 같잖은 소리에 속이 흔들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를 보며 그는 또 픽 웃었다.

나도 당신이 한 번씩 해 주는 소리에 심장이 흠칫해. 당신이 무심하게 뱉어 내는 소리에 내 마음속도 마구 흔들렸어.

해윤은 그 소리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신 목구멍까지 치민 소리를 커피를 마셔 속으로 흘려 넣었다.

잠시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창밖을 보았다. 창가 자리에 드문드문 앉은 손님들이 하나둘 일어나고, 어느새 주위에 두 사람만 남았다.

무심코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해윤의 손 위에 갑자기 따뜻한 무언가가 덮였다. 흠칫하며 돌아보자 한지율의 손이었다. 손등 위에 놓여 있던 한지율의 하얀 손이 이윽고 해윤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갑자기 이 사람이 또 왜 이러나 싶었다. 당혹스러웠으나 하얀 손의 보드라운 촉감이 좋았다. 누가 볼까 봐 신경 쓰였지만 붙잡힌 손을 빼내고 싶지 않았다.

잠깐은 이러고 있어도 되겠지. 해윤도 손을 움직여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이 손의 감촉이 이상하게 좋아. 울퉁불퉁하고 거칠기만 한데.”

“제 손이라 그런 거 아닙니까?”

해윤이 무안해서 던진 농담에 한지율은 진지하게 반응했다.

“그런가 봅니다.”

반응이 이러니 더 무안해졌다. 누군가 곁을 지나치는 기척이 느껴졌다. 해윤은 움칫해서 얼른 맞잡은 손을 뺐다. 점원이 두 사람 뒤를 스쳐 지나가 빈 테이블을 정리했다.

“일어날까요?”

그러며 한지율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해윤도 주섬주섬 기타를 챙겨 따라 일어섰다. 카페 밖으로 나오자 칼바람이 불었다. 서울보다는 따뜻하다 해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셨는데 모래사장은 한 번 밟고 가셔야죠?”

해윤이 말하자 한지율도 그러자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길을 건넜다. 그는 차가 오나, 안 오나, 주위를 돌아보며 신중하게 건널목을 건넜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해변은 고요했다. 따뜻한 곳에 늘어져 있다 나와서인지 해윤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쨍하게 차가운 바닷바람이 오히려 상쾌했다.

발끝에 모래가 사각대며 밟히는 느낌도 좋았다.

“석해윤 씨. 노래 불러 보세요.”

하얀 입김과 함께 뿜어내는 한지율의 목소리가 해윤의 귓전을 스쳤다.

“여기서요?”

“네. 어차피 노래 연습하시려고 기타 들고 나오신 거 아닙니까. 그동안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봅시다.”

“그래도 많이 늘었어요.”

“당연히 늘어야죠. 석해윤 씨 트레이닝에 들어간 돈이 얼마인데. 그래도 전에 할머니께 노래 불러 드린 목소리를 들어 보니 그리 나쁘진 않았는데 내 앞에서도 한 번 불러 봐요. 들어나 보죠.”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서 거만하게 명령을 한다. 꼭 고등학교 시절, 강당에서 표정 없는 싸늘한 얼굴로 무대 위의 해윤을 올려다보며 해 보든가, 하던 때처럼.

하라면 못할 줄 알고. 해윤은 멈춰 서서 기타 케이스를 풀어 기타를 꺼내 줄을 목에 걸었다. 어차피 앰프나 마이크 같은 음향 장비 같은 것도 없어서 어디서든 서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면 그만이었다.

굳은 손가락을 움직여 관절을 유연하게 해 주고, 낮게 목 울림소리를 내 목을 풀어 준 뒤 기타 피크를 손에 끼웠다. 기타 소리를 듣고 지나던 사람들이 멈춰 서서 구경했다.

지금까지 해 봤던 공연 중, 가장 초라한 무대였다. 관객도 없고 음향 장비도 없다. 러버덕 활동을 할 때도 버스킹을 해 봤지만 이렇게 아무 준비 없이 노래를 부른 건 처음이었다.

창고에 처박혀 전혀 관리되지 않은 기타는 자꾸 소리를 튕겼다. 소리가 맑지가 않았다. 마이크도 없이 까칠한 목구멍을 뚫고 나오는 목소리도 탁했다.

그래도 해윤은 즐거웠다. 기타 줄을 튕기기 시작한 때부터 해윤의 얼굴에 미소가 함빡 퍼졌다. 첫 소절을 부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제 목소리에 흠뻑 도취되었다. 이 노래를 부를 때면 늘 그렇다.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해윤의 노래니까.

시선 끝에 반짝이는 광안 대교의 광경. 빛 무리가 일렁이는 수평선. 낮게 깔리는 파도 소리. 바다 냄새. 물비린내.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갈매기들.

그리고 그 모든 배경을 등지고 선 한지율.

차가운 밤바람만큼이나 싸늘한 그의 얼굴이 해윤을 보았다. 해윤도 그를 보며 목에서 목소리를 터뜨렸다. 신나게 기타를 튕겼다.

고등학교 때에는 해윤은 무대 위에 있었고 한지율은 아래에 있었다.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단 한 번도, 한지율과 눈높이가 같았던 적이 없었다. 언제나 한지율과는 보는 눈높이가 어긋났다.

하지만 지금은 평행선 위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를 두고 마주 서서 한 남자는 듣고, 한 남자는 노래를 부른다.

노래가 끝났다. 짧은 공연은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참을성 있게 노래를 들어 주던 서너 명의 관객들이 작게나마 박수를 쳐줬다.

가장 까다로운 관객인 한지율이 입술을 비틀어 소감을 말했다.

“형편없어. 그런 실력으로 어떻게 데뷔하려고 합니까?”

해윤의 입에서 욕 대신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

‘온 김에 푹 쉬다 와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시고,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그냥 쉬어요.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한지율의 말대로 해윤은 벌써 사흘째 부산에 머물러 있었다. 무시하는 것처럼 들리는 소리였지만 맞는 말이었다.

한기우에 관련된 사측의 복잡한 일처리, 한 회장 일가 내부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 그 어느 것도 해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관여하지도 못할 일이었고, 그래서도 안 될 일이었다.

해윤이 부산에 머무는 동안 박지형도 부산을 떠나지 않았다. 말로는 부산에 있는 친척 집에 일이 생겨 머문다 했지만,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짐작은 갔지만 자세히 캐묻지 않았다. 녀석에게 시계를 떠안긴 이후, 갑자기 부쩍 친근하게 다가들긴 했다.

‘내가 처리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실수가 있을 수 있으니 믿어 달란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일주일 전, 늦은 밤. 한지율은 차에 올라타며 그렇게 말했다.

‘믿어요.’

해윤은 차창 너머에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말해 주었다. 핸들 위에 놓여 있던 한지율의 손이 차창 밖으로 뻗어 나와 해윤의 귀를 만졌다. 겨울 찬바람에 차갑게 언 귀를 만지작대던 손이 해윤의 머리를 쥐어 안으로 끌어당겨 키스했다.

닿기만 하고 떨어진 가벼운 입술의 접촉이었다. 그의 손이 해윤의 뺨을 가볍게 스치고 떨어졌다. 그러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다시 차 안으로 가져가 핸들 위에 올려 두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푹 쉬어요.’

‘한지율 씨. 전화해도 됩니까?’

‘하세요.’

‘문자 보내도….’

‘보내세요. 언제든지.’

그는 가볍게 웃으며 차창을 닫았다. 조심히 가라는 마지막 인사를 하고 해윤은 차에서 떨어졌다. 그는 그렇게 서울로 올라갔다.

그러고 이틀이란 시간이 순식간에 지났다.

“그러지 말고 집에 가서 쉬라니까?”

식당에 한 무리의 단체 손님이 왔다 간 뒤였다. 해윤이 엉망이 된 테이블을 치우고 있으려니,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던 이모가 그랬다.

“아니에요. 집에 가서 할 것도 없는데요.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좀 쑤셔서 죽을 것 같아서 그래요.”

해윤은 능숙한 솜씨로 엉망이 된 테이블을 싹 정리했다. 손님들이 차고 넘치던 대박 난 고기 집에서 일하던 경험이 있어, 이 정도 정리는 일도 아니었다.

“설거지도 제가 할게요. 이모나 좀 쉬세요.”

아예 주방으로 들어가 개수대 앞에 선 이모한테서 고무장갑까지 뺏으려 했다. 이모는 제발 이러지 말라며 조카를 밖으로 내보냈다. 가게 문이 열리며 종이 딸랑딸랑 울렸다. 손님인 줄 알고 해윤은 얼른 문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선 건 어머니였다.

“왜 나오셨어요? 주무시는 거 보고 나왔는데.”

“집에만 있어도 답답해. 의사 선생님이 햇빛을 보고 걸어야 몸에 면역력도 생기고 좋다더라.”

“그래도 바람이 제법 차서 감기 걸리기 쉬울 날씨인데.”

해윤은 둘둘 싸매고 나온 어머니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몇 년 전에 산 지 모를 낡은 패딩 점퍼에 보풀이 잔뜩 일어난 털모자, 머플러. 어머니가 몸에 걸친 모든 게 다 낡았다. 풍성했던 머리칼도 투병하느라 죄 빠지고, 살이 빠져 눈만 퀭하다.

엄마랑 이모한테 밍크코트 사 드리겠다고 큰소리 탕탕 쳤던 주제에. 해윤은 속이 쓰렸다. 엄마와 이모를 생각하면 지금 저가 하는 고민이 사치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해윤아. 네가 행복해야 나나 이모도 행복한 거야. 네가 잘못되면 우린 못 살아. 알지?”

어머니가 의자에 앉으며 밝게 웃었다. 아들의 눈에 설핏 어린 우울한 기색을 읽은 모양이었다. 해윤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틀 동안 한 번도 울리지 않던 핸드폰이었다. 혹시 싶은 기대감에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봤다. 하지만 수신인은 박지형이었다.

- 형. 지금 이모님이랑 같이 계세요?

“응. 식당에 있어.”

- 그럼 형. 나와서 전화 주실래요?

해윤은 전화를 끊고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옷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밖으로 나와 길을 걸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 형. 이재나 사장님이 형을 회사 창립 기념 파티 초청 가수로 부르고 싶으시대요.

“그래. 알았어.”

- 그리고 전무님이 오늘, 비밀리에 한국으로 돌아오실 거 같아요.

놀라울 것 없는 일이었다. 예상했던 일이었고.

해윤의 시선 끝에 갓길에 세워 둔 차에서 사람 하나가 내려서는 게 보였다. 새까만 광택이 도는 세단에서 내린 까만 옷을 입은 사내다.

최 실장이었다.

멀리서 보니 사내의 덩치가 엄청나다. 그는 행인들이 한 번씩 흘금대며 돌아볼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며 해윤에게 다가왔다.

- 형. 저 지금 그쪽으로 가는 중이니까 광안리 해변 쪽에서 만나요. 금방 갈게요.

“지형아. 서울에서 보자.”

- 네? 형. 무슨 소리예요?

당혹스러운 박지형의 목소리를 들으며 해윤은 전화를 끊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선 최 실장이 가죽 장갑 낀 손을 뻗어 해윤의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채려 했다.

“핸드폰을 뺏으면 소리 지를 겁니다.”

해윤의 같잖은 협박에 최 실장이 짙은 눈썹을 꿈틀대며 피식 웃었다. 같잖아도 제법 유효한 협박일 터였다. 소란을 피워 봤자 득 될 게 없는 상황인 건 저쪽일 테니.

“두 분께 인사드리고 나올게요.”

“그러시죠.”

최 실장은 생각 외로 순순히 그러라고 했다. 해윤은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저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바로 서울로 올라가 봐야 돼요.”

“응? 이렇게 갑자기? 오늘은 자고 가지!”

설거지를 하던 이모까지 고무장갑을 낀 채로 주방에서 나와 봤다.

“엄청 급한 일이라서 그래요. 저 가 볼게요.”

어머니가 인사 대신 해윤을 꽉 껴안았다.

“괜찮은 거지?”

“네. 당연히 괜찮죠. 괜찮지 않을 일이 뭐 있겠어요.”

한지율에겐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고, 해윤에게는 해윤이 해결해야만 할 일이 있었다.

“일 해결하고 다시 올게요.”

해윤은 활짝 웃었다. 어머니와 이모를 안심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웃음이 아닌, 확신에 찬 웃음이었다.

“해윤아. 잠깐만 기다려. 반찬 좀 가지고 가.”

됐다고 말할 새도 없이 이모가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도 같이 들어가 부산스럽게 냉장고를 여닫으며 반찬을 챙겼다. 곧 두 분이 밀폐 용기 몇 개를 들고 나왔다.

“뭘 이렇게 많이 넣으셨어요?”

“오이소박이랑 멸치볶음, 콩자반에 오늘 아침에 무친 겉절이 김치도 넣었고. 낙지 젓갈이랑 양념게장도 넣었어. 밥 굶지 말고 제대로 챙겨 먹어야 돼. 힘들면 전화하고. 알았지?”

두 분은 기어이 식당 앞까지 마중 나왔다. 해윤이 최 실장의 차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는 사이, 누가 차창을 퉁퉁 두들겼다. 어머니가 결국 차 앞까지 쫓아와 있었다. 차창을 열자 어머니가 웃으며 최 실장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늘은 처음 뵙는 분이시네. 우리 해윤이 잘 좀 부탁드려요. 직접 만든 강정이랑 식혜인데 가면서 드세요.”

그러며 비닐봉투에 담긴 강정과 식혜를 안으로 들이밀었다. 주는 것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는지 최 실장은 비닐봉투를 받아 들었다.

“우리 해윤이가 성품은 착하고 바른 아이인데 처세술이랄까, 융통성 같은 게 부족해서 실수도 많이 하고 그럴 거예요. 제 아버지를 닮아 좀 고지식하고 고집 센 면도 있어서 어떤 분들이 보면 밉게 보일 수도 있고요. 아직 모자란 게 많은 아이라 그러니 실수를 해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고 잘 부탁드릴게요.”

어머니는 최 실장에게 나긋나긋, 자상한 어조로 공손하게 부탁했다.

“네. 그러겠습니다.”

최 실장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차가 움직여 골목길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았다. 낡은 패딩 점퍼를 껴입은 왜소한 몸으로 팔짱을 끼고서, 아들이 가는 모습을 마지막까지 눈에 새겨 넣는다. 해윤은 눈이 아렸다. 뭐 그리 대단한 아들이라고.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하러 간다고.

차가 골목에서 벗어나 백미러에 붙박여 있던 어머니의 모습이 사라졌을 때에야 해윤은 아까부터 불이 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박지형에게 전화를 걸자 녀석이 형, 형! 혀어엉! 애타게 외쳤다.

“최 실장이 찾아왔어. 어머니랑 이모한테 인사드리고 나왔으니까 두 분, 걱정하시지 않게 식당으로 가지 말고 너도 곧장 서울로 와.”

사무적인 말투로 용건만 간단히 전했고 박지형도 군말 없이 그러겠다고 했다.

곧 한지율에게 문자가 날아왔다. 박지형에게 소식을 전해 듣고 바로 연락해 온 모양이었다.

「돈으로 움직이는 흐름은 돈으로 비틀 수 있습니다.」

의미가 바로 파악되지 않는 난해한 문장이었다. 돈으로 움직이는 흐름….

해윤은 최 실장을 흘긋 보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차 운전만 했다.

「돈으로 불가능한 건 없습니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뒤이은 문자가 날아왔지만 말 속에 숨은 의중을 파악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해윤은 한지율의 문자가 찍힌 핸드폰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최 실장이 운전하는 차는 조용히, 착실하게 서울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답 문자를 보내 줘야 할 텐데.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말은 많은데 손가락 끝에서 생성되는 텍스트는 전혀 뜬금없는 헛소리였다.

「한지율 씨. 낙지 젓갈이랑 양념게장 좋아하세요?」

몇 초 후 답 문자가 왔다.

「전 간장게장 파입니다.」

해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뜬금없는 질문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으로 받아쳤다.

“휴게소가 나오면 잠시 들르겠습니다.”

최 실장이 차에 탄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해윤은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 앞을 보았다.

“대만이 마약 범죄 처벌이 강력한 나라라고 하던데 전무님은 어떻게 들어오신 겁니까?”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최 실장님이 태민 형을 죽인 게 맞죠? 전무님이 그러라고 시키셨죠? 태민 형을 죽이고 한 이사님께 죄를 뒤집어씌우라고?”

최 실장은 침묵했다. 백미러에 매달린 방향제가 신경 거슬리게 달랑달랑 흔들렸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얼마를 받고 이 일을 하세요? 최 실장님 같은 일을 하는 깡패 새끼들은 얼마를 줘야 사람도 죽여 주고 그럽니까?”

일부러 욕을 섞어 말했다.

“닥쳐. 죽여서 묻어 버리기 전에.”

이번엔 반응이 왔다. 최 실장의 입에서 말이 나왔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제법 위협적이었다.

“태민 형이 부산 어머니 댁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부산으로 내려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민머리를 한 사람이 부산역에 마중 나왔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절 해운대 근방 호텔로 데려갔는데 거기에 태민 형이 감금돼 있었고요. 남자 한 명이 더 있었고, 그 사람들은 제가 보는 앞에서 태민 형을 폭행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한동안 어머니와 이모 주위를 맴돌며 두 분을 감시하는 것 같더니, 어느 날 갑자기 보이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 내려와 보니 사라진 게 맞더군요. 제가 눈치채지 못한 건지 몰라도.”

“너 진짜 더럽게 사람 말 안 듣는다. 닥치라고 했어.”

“그 사람들도 최 실장님 같은 사람이죠? 그 사람들 어디 있어요?”

“닥쳐. 닥치라고 좀!”

최 실장이 욕을 갈기며 핸들을 주먹으로 쾅쾅 내리쳤다.

“돈이라도 두둑하게 챙겨 줘야 이 짓을 할 거 아냐! 뽕쟁이 새끼가 이제 하다 하다 지가 사람 죽인 걸 나한테 뒤집어씌우려고? 내가 왜 이 짓까지 해야 돼! 씨발!”

해윤은 깜짝 놀라 최 실장에게 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김태민을 죽인 건 나 아니야. 한기우가 죽였어. 나 아니라고!”

차창 앞에 휴게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해윤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최 실장은 알아서 핸들을 틀어 휴게소 쪽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휴게소 식당 안에 앉아 최 실장은 국수를 먹었다. 배가 고팠던 모양인지 국수 한 그릇을 단숨에 먹어 치운 최 실장이 티슈로 입가를 닦으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녹음해.”

“네? 녹음은 왜?”

“핸드폰에 녹음 기능 있잖아. 녹음해 두라고. 내가 용기를 내서 말하려는데 넌 멍청하게 듣고만 있을 거야? 녹음하고 기록하는 건 기본이고 상식이다.”

이런 게 상식이라니. 해윤은 전혀 모르고 살던 상식이었다. 그래도 해윤은 시키는 대로 핸드폰을 꺼내 녹음 기능을 작동시켰다.

최 실장이 입을 열어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김태민이 죽은 지난 밤.

최 실장은 한 전무에게 해윤과 한지율이 이재나 사장을 만난 건을 보고했고, 얼마 안 있어 한 전무가 왔다고 한다. 해윤과 한지율, 두 사람이 식사를 끝내고 지하 주차장으로 오는 것, 김태민이 절뚝거리며 나타나서 시비 걸다 한지율에게 얻어터지는 것을 차 안에서 한기우와 함께 다 지켜봤다고도 했다.

두 사람이 뻗어 누운 김태민을 놔두고 차를 타고 나가고 난 뒤. 최 실장은 기절한 김태민을 끌고 와서 차에 태워서 건물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도중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급차를 마주쳤다.

주차장 바닥에 고인 피와 피 묻은 목발 같은 증거 물품을 최 실장이 싹 치웠으므로, 출동한 구급차는 그냥 돌아갔을 거라고도 했다.

한기우의 명령대로 최 실장은 차를 운전해 인근 야산으로 향했고 그사이 김태민이 깨어났다. 머리를 맞고 정신이 홱 돌아 버렸는지 김태민이 한기우의 성질을 마구 긁었단다.

약에 전 무능력한 패배자라느니, 넌 영원한 이인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느니, 어차피 넌 내쳐져서 도태될 거라느니…. 한기우는 눈이 홱 돌아가서 트렁크에 있는 골프채를 꺼내더니 김태민에게 휘둘렀다. 최 실장이 말릴 새도 없이. 이미 죽은 김태민을 다진 고기로 만들어 놓을 기세라 간신히 뜯어말렸다는 소리도 덧붙였다.

최 실장은 곤혹스러워하며 한기우에게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그가 히죽 웃으면서 그러더란다.

‘어쩌긴 뭘 어째? 이 새끼, 이거 한지율이 죽인 거야. 그렇지?’

최 실장이 긴 얘기를 하느라 목이 따끔했는지 잔기침을 하며 차에서 가지고 나온 식혜를 컵에 따랐다.

“한 이사가 한 짓으로 몰고 가자 이 소리였지. 죽은 김태민을 다시 차에 쑤셔 넣고 그 호텔로 다시 돌아갔어. 그 이후의 일은 네가 겪은 상황 그대로이고. CCTV 영상 같은 건 조작하면 그만이고. 한 이사가 호텔 지하 주차장에서 김태민을 폭행한 영상은 조작이 아닌 팩트니까.”

해윤도 컵에 식혜를 따라 마시며 최 실장에게 질문했다.

“뭐가 그렇게 어설프죠? 언제라도 들켰을 것 같은데.”

“그 자식이 생각이랄 게 있었겠어? 약에 찌들어서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지금까지 생각 없이 내키는 대로 되는대로 산 놈이야. 사고 쳐도 늘 누군가 조용히 놈의 뒤를 닦아 줬지. 그게 주로 한 이사였고. 이번엔 내가 그 새끼 뒤를 닦아 주게 됐고.”

서슴없이 욕을 갈기고 속내를 토로하는 최 실장은 평소의 석상 같은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지금까지 얼굴에 가면을 쓰고 뻔뻔하게 굴던 남자가 갑자기 돌변해 이러니 이상하고 수상했다.

“왜 갑자기 마음이 변했습니까?”

“내가 그 새끼가 한 짓을 뒤집어쓰게 생겼으니까. 어째 낌새가 그래. 살인죄까지 뒤집어써 줘야 할 한 이사가 난 이제 더러워 못 해 먹겠다며 반항 중이니, 날 대신 처넣고 한기우 그 새끼는 쏙 빠질 게 분명해.”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다. 해윤의 생각도 그랬다.

“혹시 지금 하신 말씀을 법정에 증인으로 참석해서 증언해 주시거나 하실 수 있습니까?”

해윤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 봤다. 최 실장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왜? 세상에 공짜는 없어.”

“그럼 돈을 드리면 해 주실 수 있어요?”

“얼마 줄 수 있는데?”

“제가 마련할 수 있는 돈이 3….”

최 실장의 입에서 아까보다 더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삼천? 삼천 받고 그 짓을 하라고? 아주 날로 먹으려 드네. 너같이 멍청하고 물러터진 놈이 어떻게 그 정신 나간 새끼랑 엮였는지 모를 일이다.”

사실 삼백이라고 말하려 했는데 그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최 실장은 식혜를 홀짝이며 비닐봉투에서 강정 하나를 꺼내 바삭 깨물었다.

“그딴 추잡한 영상 문자를 보낸 게 누군지 알고 나한테 이런 걸 먹이나. 그 양반들은. 네 엄마가 그 문자를 받고 답 문자를 보냈어. 이런 걸 보내는 저의가 뭐냐, 이게 무슨 범죄라도 되느냐. 얼마를 원하냐, 내 새끼 건드리면 가만 안 두겠다면서 협박을 하더라.”

식혜를 마시던 해윤의 목이 꽉 막혔다. 그런 분이었다. 워낙 강한 분이었다. 여리고 여린 귀한 댁 사모님이 하루아침에 남편 잃고, 차디찬 세상에 내동댕이쳐졌다. 철없는 10대 아들자식까지 매달고서.

강해져야 했을 것이고 억척스러워져야만 했을 것이다. 해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어머니는 혹독하게 이를 악물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해윤의 끈질긴 생명력은 어머니의 근성을 빼닮은 것일지도 몰랐다.

“시골 어머니가 해 주시던 강정 맛이 난다. 끈적끈적하게 이에 붙어서 강정을 싫어했는데 어머니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 이게 참 맛있어.”

최 실장은 그러며 강정 하나를 다 먹고 또 하나를 꺼내 물었다. 강정을 씹으며 그는 손을 뻗어 해윤의 핸드폰 화면을 만져 녹음 기능을 껐다. 정작 해윤은 녹음 기능을 켜 두었는지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명심해. 지금부터 한기우와 대화하고 전화 통화할 땐 무조건 녹음해서 차곡차곡 증거를 만들어. 정신 똑바로 차려. 그냥 정신 나간 약쟁이가 아니라 사람 죽인 새끼야. 원래 뽕 맞은 새끼들이 제일 다루기 어려워. 뽕에 취해서 무슨 짓을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으니까. 난 널 데려다주고 남은 돈 마저 받아 내서 손 털고 빠질 거다. 뒤처리는 알아서들 해.”

“최 실장님. 녹음하고 기록하는 게 최 실장님에겐 상식입니까? 그럼 혹시 전무님이 태민 형에게 골프채를 휘두르던 영상을 찍어 두셨어요?”

최 실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혜가 든 페트병을 흔들어 바닥에 가라앉은 쌀 건더기를 섞어 컵에 따라 마셨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

그는 아까 했던 말을 나직하게 반복해 뇌까렸다. 돈으로 움직이는 흐름은 돈으로 비틀 수 있다던 한지율의 문자 내용이, 해윤의 머릿속에 슬며시 떠올랐다.

“멍청한 새끼가 돈과 권력을 가지면 딱 한기우 같은 부류가 돼. 아니지. 돈과 권력이 사람을 멍청하게 만드는 거지. 난 한기우 같은 놈들을 숱하게 봐 왔어. 그런 것들은 날 때부터 다 가져서 야망이란 게 없어. 그러니 인생이 지독히 무료해지는 거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약에 손을 대. 나같이 가진 게 없는 놈들은 인생이 매일같이 전쟁인데. 그래서 가정 교육이 중요한 법인데 한기우 같은 놈들은 떡잎 때부터 오냐오냐 다 봐주면서 키우니까 문제가 되는 거야. 어릴 때부터 바른 도덕관념을 확실히 심어 줬어야지.”

최 실장은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돈 받고 이 짓 하는 깡패 새끼가 말은 잘한다. 그러는 너도 가정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이렇게 됐냐는 말이 치밀었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너도 빚 때문에 이 더러운 바닥에 얽혔다며? 어쩌자고 멍청하게 이 지경까지 깊게 엉켜 버렸냐. 받을 거 받아 내고 빨리 손 털고 빠졌어야지.”

“네. 그래서 뼈저리게 후회 중입니다. 바보같이 버티다 빠져나올 타이밍을 놓친 거죠.”

이젠 확실히 인정하기로 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건 변명일 뿐이라는 것을. 한지율이 제시한 몇 번의 기회가 있었다. 그 기회를 반발심에 내친 건 해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 하나만 참으면 되니 버텨 보자? 벗어나려 해 봤자 한기우가 날 가만 놔두겠어? 다 변명이다.

“왜 나일까, 왜 하필 내가 그 여자를 닮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나도 신미라, 그 여자 영상을 봤어. 너랑 기가 막히게 닮긴 했더라. 하지만 그놈들이 너 아니었어도 얼추 그 여자랑 골격이 비슷한 사람 하나 데려다 성형을 시켜서라도 한기우 앞에 들이밀지 않았겠냐? 없으면 만들어 냈을 놈들이야. 너같이 몸 파는 남창 새끼 주제에 대가리 쳐들고 대드는 놈 말고, 고분고분 다리 벌려 주고 베갯머리송사 살살 주절거리며 구워삶았을 그런 것들.”

“기분 나쁜 소리를 하시는군요.”

“기분 나빠도 닥치고 잘 들어. 빈정거리는 게 아니라 칭찬하는 거니까. 네가 보기와는 달리 말 잘 듣고 순해 빠진 놈이 아니라서 일이 아주 재밌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어쨌든 그것들은 한기우를 축출해서 도려내자고 계획했으니 무슨 짓이든 할 것들이야. 한기우를 죽여서라도 도려낼 거고. 약물 과용으로 인한 사망. 딱 좋잖아? 원래 뽕쟁이었던 놈이니 약 처먹고 죽어도 다들 그런가 보다 할 테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할까요? 한 식구인데.”

“물러터진 새끼.”

최 실장이 크게 헛웃음을 치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왜 너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겠지?”

“전무님의 살인죄를 뒤집어쓰게 생겨서?”

최 실장은 헛웃음을 치다 못해 기가 차서 탄식을 했다.

“너 지금 당장 나한테 얼마 줄 수 있어?”

갑작스러운 소리에 해윤은 당황하며 아까 입 밖에 냈던 3이라는 숫자를 다시 꺼냈다.

“3… 정도는.”

“삼천? 지금 당장 이 계좌로 바로 넣어.”

“아뇨. 삼백이요. 삼천까지는 없습니다. 그리고 핸드폰에 공인인증서가 깔려 있지 않아서 바로는 불가능합니다.”

“삼백? 가난뱅이 새끼가 뭐라 지껄이는 거야? 한기우한테 받은 돈 다 뭐 했냐? 그 새끼한테 한 몇 억 당겨 받았을 텐데?”

“전무님에게 받은 돈은 그대로 제 계좌에 입금시켜 뒀습니다. 전무님이 제 빚과 어머니 병원비까지 다 갚아 주셨는데, 그 이상의 돈을 더 받는 게 꺼림칙하고 싫어서요.  그 돈은 전무님에게 돌려 드릴 거라 쓸 수가 없는 돈이에요.”

“쓸데없이 정의로운 새끼일세. 가정 교육 한 번 더럽게 잘 받았다, 아주. 전에 한기우가 너한테 줬던 시계, 그거라도 내놔.”

“그 시계는 지형이에게 줘서.”

“뭣도 없는 새끼가 베푸는 마음 하나는 재벌 2세 급이야! 그럼 삼백은 언제까지 줄 수 있어?”

“영업시간 내에 은행에 가면 오늘 안으로 바로 드릴 수 있습니다.”

최 실장이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3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라 오늘 안으로는 아무래도 무리일 듯했다. 띵동, 최 실장의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하는 동시에 알림음을 울렸다. 핸드폰을 확인한 최 실장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졌다.

“그래도 한 이사님은 비즈니스가 뭔지 아는 양반이야.”

최 실장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일어섰다. 해윤도 따라 일어섰다. 두 사람은 다시 차에 올라탔다.

“모 기업 재벌 2세 A씨가 자택에서 약물과용으로 사망. A씨와 함께 B씨가 숨져 있는 것을, 아침에 자택으로 찾아간 비서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 두 사람은 허용치 이상의 과도한 양의 약을 복용하고 숨진 것으로 보인다. 사인이 확실하므로 유족들은 부검을 하지 않고 장례를 치르기로 합의한다.”

차에 시동을 걸며 최 실장이 늘어놓는 말에 해윤은 미간을 좁혔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김태민과 그쪽 무리가 세운 초기 시나리오. A씨는 한기우, B씨는 석해윤. 이 설계의 끝은 그래. 한기우도 너도, 둘 다 죽는 시나리오야.”

해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나리오는 무수히 퇴고를 거쳐. 무수히 많은 변수가 생기고. 초기 극본을 같이 짠 김태민은 사망한 인물 C씨가 되어 퇴장했지. 그리고 나 역시 죽어서 사라질 D씨가 될 거다. 말이 좋아 손 털고 빠진다, 이거지. 그 전에 한기우가 날 후려칠지, 이재나 무리가 날 죽여서 퇴장시킬지 모르는 일이야.”

최 실장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하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고 계속 말을 쏟아 냈다.

“내가 너한테 이런 소리를 하는 이유는 간단해. 초기 극본에 확실히 죽는 인물 B였던 넌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 거 같거든. 신기할 정도로 야망도 없고, 욕심도 없고. 사람이란 게 손에 쥔 걸 잃고 싶지 않아 발악하고, 더 가지려고 발악하는데 그렇지도 않고, 무서운 것도 없고, 비굴한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도 않아. 아주 종잡을 수가 없는 인물이야. 아무도 예측 못 한 캐릭터야, 넌. 너한테 받기로 한 삼백만 원어치 얘기는 다 해 줬다. 잊지 말고 입금해.”

잠시 끊겼던 핸드폰 벨 소리가 다시 울렸다. 최 실장은 이번엔 전화를 받아 블루투스 이어폰에 대고 상대에게 말했다.

“가는 중입니다. 차가 막히지 않아 2, 3시간 내로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사무적인 말투로 상황을 보고하는 최 실장은, 해윤이 평소에 알던 돌덩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서울에 도착해 곧바로 일전에 방문한 미술관으로 향했다. 갤러리 오픈 시간이 지나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한기우는 중앙 홀 정면의 그림 앞에 서서 그림을 감상 중이었다. 늘씬하게 잘 빠진 외양이 흠잡을 데 없이 말끔하다. 일련의 일로 골치 깨나 썩었을 텐데 외양만 보자면 무사히 출장을 다녀온 젊은 사업가의 모습이다.

해윤이 가까이 다가서자 한기우가 웃으며 포옹하려 했다. 해윤은 몸을 뒤로 빼 거부했다.

“화가 많이 났나 보네.”

한기우의 다정한 목소리가 선뜩하게 귀에 감겼다.

“전무님. 굉장히 야비한 짓을 하신 겁니다.”

“아, 그 영상을 네 식구들에게 보낸 거? 그건 네가 이해해 줘. 너도 알다시피 내가 궁지에 몰려서 제정신이 아니었잖아. 가벼운 화풀이였어.”

그는 가볍게 웃었다. 가벼운 화풀이? 별거 아닌 걸로 왜 까다롭게 구느냐는 듯한 어조에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전무님은 사람 죽여 놓고도 시체에 대고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이해하라고 할 분이시네요.”

한기우의 웃음 띤 시선이 미술관 구석에 선 최 실장에게 향했다. 최 실장의 표정 없이 굳은 얼굴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왜 다들 날 배신할까?”

“전무님은 사람을 믿어 본 적이나 있으십니까?”

최 실장에게 향해 있던 한기우의 시선이 천천히 해윤에게 다가들었다. 한기우의 시선이며 얼굴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정적이 깔린 미술관 안의 분위기처럼. 하지만 해윤은 날이 잔뜩 섰다. 온몸의 신경이 잔뜩 곧추섰다.

“돈으로 신뢰를 살 순 있습니다. 하지만 돈으로 사람의 인격까지 뭉개 버리려 하시니까 다들 못 참고 전무님한테서 등을 돌리는 거죠.”

“귀여워라.”

한기우가 손을 들어 해윤의 뺨을 탁탁 쳤다.

“참 건방지고 귀여워. 진짜.”

그러다가 손에 힘을 주어 강하게 후려쳤다. 짜악, 하는 차진 소리와 함께 해윤의 뺨에서 불이 일었다. 갑자기 맞은 거라 정신이 멍했다. 충격이 강해 고막에 무리가 갔던지 귀에서 이명이 다 울렸다.

해윤의 입에서 웃음이 피식 새 나왔다.

“내가 우스워?”

한기우가 손으로 해윤의 턱을 움켜쥐어 거세게 흔들었다. 그러고는 또 한 대 후려친다. 이번엔 해윤의 반대쪽 뺨이 홱 돌아갔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혀 보지 않았을 귀하신 인간일 텐데 손아귀 힘이 제법 거셌다.

“내가 우습냐고!”

한기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미술관 안에 쨍하게 울렸다. 미술관이라는 정적이고 우아한 곳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깨부숴 뭉개는 외침이었다. 지금까지는 용케도 잘 참았구나 싶었다. 묶고, 협박하고, 2층에서 밀어 떨어뜨리고, 감금했으니 이젠 때릴 차례긴 했다.

“네. 우습습니다. 전무님 하는 짓이 참 야비하고 비열하고 유치해서 우스워요.”

해윤은 손등으로 피가 배어 나온 입가를 닦으며 지껄였다. 한기우가 눈을 시뻘겋게 치뜨고 달려들었다.

“네가 나한테 이래도 돼? 네깟 게 감히 날 비웃어? 날 우습게 봐? 네깟 게!”

주먹이 날아들었고 발길질이 날아왔다.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였다. 이성이 나가 사람 하나 쳐 죽일 기세였다. 해윤은 때리는 대로 얌전히 맞았다. 맞는 게 속 편했다. 차라리 고상한 척하는 역겨운 모습보다, 삼류 건달같이 폭력을 휘두르는 한기우의 저속한 본모습이 반가웠다.

“미안하다고 해. 미안하다고 빌어! 당장! 당장 울면서 빌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만두지 못해!”

한기우의 내갈긴 소리와 동시에 불같은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불이 꺼진 미술관 입구 쪽에서 전동 휠체어가 위이잉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몹쓸 새끼가 이젠 사람까지 쳐! 그것도 내 미술관에서!”

진시은 여사가 깡마른 몸에서 나오는 소리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우렁찬 소리를 뱉으며 나타났다. 뒤이어 한지율이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섰다.

“할머니. 발작을 크게 하셨다더니 기운 좋으시네요? 우리 할머니 앞으로 100년은 더 사시겠다.”

한기우도 전혀 놀라지 않고 노파를 보며 싱글싱글 웃었다.

“입 닫아. 뭘 잘했다고 실실 웃어? 외국까지 가서 그딴 짓을 벌이고도 정신 못 차리고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야?”

“주제 모르고 기어오르는 놈, 교육 좀 시키고 있었습니다. 사소한 다툼이니 할머니는 신경 쓰실 것 없어요.”

“네깟 놈이 뭐라고 사람을 교육하니 마니 해? 네가 그럴 주제나 되는 놈이냐? 머저리 같은 놈아!”

한기우의 웃는 얼굴이 움찔 경련했다.

“해윤아. 괜찮으냐?”

노파가 건네는 소리에 해윤은 괜찮다며 작게 대답했다.

“회사에 그토록 막대한 손실을 입혀 놓고 돌아오자마자 이런 천박한 짓이라니. 금수 새끼도 아니고 어쩌면 이렇게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뛸 수가 있을까. 네가 그러고도 사람 새끼냐? 하다못해 반성하는 기색이라도 내비쳐야 하는 것 아니냐?”

“제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반성을 합니까?”

“이놈이! 뭘 잘했다고 누구 앞에서 감히 눈을 부릅뜨고 반항을 해? 외국에 일하러 가서까지 썩어빠진 버릇 못 참고 약 먹은 게 자랑이더냐? 하라는 일은 제대로 안 하고 술 퍼마시고 약까지 처먹고 해롱거리다 잡혀간 게 자랑이야?”

노파의 마른 목에 핏대가 올랐다.

“제가 먹은 게 아닙니다. 누가 계획적으로 약을 준비해서 술에 넣은 겁니다!”

한기우가 굉장히 억울하다는 듯 고함을 내질렀다.

“됐다. 듣기 싫다! 네놈이 약에 손댄 게 어디 이번이 처음이냐? 네 나이가 몇이야?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그 나이를 먹어서까지 그딴 식으로 사는 거면 영 글러 먹었다는 소리지. 당장 싹 다 벗겨서 내쫓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줄 알아라.”

“고작 약 좀 손댔다고 무슨 사람을 천하에 둘도 없는 악당으로 몰고 가십니까? 사람 죽인 살인범은 저렇게 싸고도시면서?”

한기우는 분노의 화살을 한지율에게 날렸다.

“사람을 죽여? 누가?”

“누구겠어요? 할머니 뒤에 있는 저 새끼지!”

노파가 고개를 돌려 한지율을 보며 물었다.

“지율아. 너 사람 죽였니?”

“아뇨.”

한지율이 표정 없는 굳은 얼굴로 즉각 대답했다.

“지율이가 아니라잖아.”

“너 대체 할머니를 어떻게 구워삶았어? 저 자식 아직 조사 중입니다. 무혐의로 확정된 거 아닙니다! 증거도 확실하고, 목격자도 있어요. 할머니는 속고 계시는 겁니다!”

한기우가 억울해 죽겠다는 듯 제 가슴을 쾅쾅 치며 외쳤다. 대단한 연기력이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억울해서 가슴이 미어터지는 사람을 연기해 보였다.

“기우야. 넌 어릴 때부터 사고 치고 거짓말할 때 왼쪽 눈을 깜빡거린다.”

하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한기우의 미세한 흔들림을, 노파는 바로 알아챈 모양이었다.

“네가 언제까지 그렇게 뻔뻔하게 굴 수 있나 두고 보자.”

“할머니!”

“꼴 보기 싫으니 누가 저 자식 좀 데리고 나가!”

건장한 사내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와 한기우에게 다가갔다. 한기우는 제 팔을 붙잡으려는 한 사내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욕을 갈겼다. 얼굴을 맞고도 사내는 다시 한기우의 팔을 움켜쥐었다. 사내의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한기우의 미끈한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얌전히 굴어. 기우 형. 할머니 하시는 말씀 잘 듣고 좀 고분고분해져. 뭘 믿고 이렇게 설쳐?”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섰던 한지율의 입에서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한기우가 입 끝을 비틀어 코웃음 쳤다.

“너야말로 건방지게 기어오르다가 뭉개진다. 이거 놔. 새끼야. 죽고 싶어?”

그러며 한기우는 있는 힘껏 버둥거려 제 팔을 붙잡은 사내의 손을 떼어 냈다. 구김이 간 코트를 탁탁 털어 주름을 펴며 노파에게 인사했다.

“본가에서 뵈어요. 할머니. 나랑 나가서 천천히 얘기 좀 하자, 해윤아.”

그러고는 해윤을 보며 웃었다. 해윤이 멀뚱히 서 있자 한기우가 짜증을 내며 재촉했다.

“뭐 하고 섰어? 나가자니까?”

“해윤이는 여기 있어.”

휠체어에 앉아 아까 한기우가 보고 있던 그림을 멍하게 올려다보고 있던 노파가 입을 열었다.

“할머니. 저 친구와 둘이서 할 얘기가 있다니까요.”

“해윤이는 나랑 갈 거야. 기우, 넌 본가로 가. 식구들이 다 모여서 너만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넌 당장 지율이 아비가 들어간 병원에 들어가.”

“거긴 정신병원이잖습니까. 제가 작은아버지 같은 정신병자예요?”

“넌 정신병자 수준이 아니라 광견병 걸린 미친 개새끼지.”

노파가 태연하고도 평화롭게 욕을 갈겼다. 주위에 모여선 사람들이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한기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노망나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늙은이 주제에!”

급기야 한기우가 완전히 이성의 끈을 놨다. 저 미친놈도 제 할머니 앞에선 캥캥대는 하룻강아지였다.

“노망이 나도 난 네놈처럼 미쳐 날뛰며 사람은 안 물고 다닌다, 이놈아.”

손자의 정신 나간 패륜 발언에도 노파는 평온하게 지껄이며 그림을 응시했다. 서서히 정신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듯 노파의 얼굴이 힘없이 풀어졌다.

한기우가 시뻘게진 얼굴로 씩씩대며 해윤에게 다가와 해윤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나와!”

누군가 갑자기 한기우의 어깨를 붙잡아 돌려 주먹을 휘둘렀다. 불식간에 얻어맞은 한기우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한지율이 갑작스러운 공격에 얼이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한기우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기우 형. 내가 분명 후회할 짓 하지 말라고 경고했지? 가만 안 둔다고.”

“사람 죽인 새끼라 그런지 협박하는 솜씨가 제법이다. 한지율?”

한기우가 씩 웃으며 이죽거렸다.

“너무 멍청해서 상대할 마음도 안 든다, 한기우.”

“뭐?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돼? 대체 얼마나 멍청한 거야? 형은 지금 할머니한테 울면서 매달려야 할 상황이야. 정말 모르겠어?”

한기우가 인상을 쓰고 제 멱살을 틀어쥔 한지율의 손을 떼어 내려 꿈틀거렸다.

“너 좆 됐다고. 한기우.”

한지율이 낮게 뇌까리며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한기우의 면상을 한 대 더 후려쳤다. 한기우도 맞고만 있지 않았다.

악에 받쳐 눈을 부릅뜨고 한지율에게 달려들었다. 한지율의 콧대에 걸려 있던 안경이 벗겨져 떨어졌다. 아까 노파의 부름을 받고 들어선 두 명의 사내가 끼어들어 날뛰는 한기우의 양팔을 붙잡아 문 쪽으로 끌고 나갔다.

“놔. 놓으라고! 새끼들아! 다 죽고 싶어? 다 죽고 싶냐고!”

한기우는 그야말로 발악을 하며 끌려 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버둥댄다 한들 덩치 큰 사내 두 명의 힘을 당해 낼 순 없었다.

한지율은 그 자리에 서서 떨어진 안경을 주워 들었다. 안경을 쓰는 그와 해윤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해윤을 응시하는 그의 눈가가 약간 일그러졌다. 그의 입매가 욕을 내뱉듯이 뒤틀렸다. 해윤에게 향한 것이 아닌, 해윤의 얼굴을 이 지경으로 만든 한기우에게 향한 욕설일 터였다.

“할머니. 본가에서 뵙겠습니다.”

한지율은 눈으로는 해윤을 응시하며 노파에게 말을 건넸다.

“손봐 주는 건 적당히 해. 제 아비한테 얻어터질 구석은 남겨 둬야 할 거 아니냐. 승조가 기우 녀석 손을 뭉개 버린다고 벼르고 있던데.”

“그러겠습니다.”

“지율아. 네가 어쩔 생각인지 묻지 않으마. 네가 현명하게 잘 해결할 거라 믿는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그림에 붙박여 있던 노파의 시선이 천천히 최 실장 쪽으로 향했다.

“최 실장이라고 했던가?”

“네. 여사님.”

미술관 한구석을 지키고 섰던 최 실장이 바로 대답했다.

“낮에 지율이가 최 실장 계좌로 돈을 좀 넣어 줬지? 그건 일부 계약금이야. 최 실장이 워낙 믿음직스럽게 일을 잘한다고 해서 의뢰비를 아주 넉넉하게 줄 생각이거든. 원하는 금액은 얼마든지 말해. 기우에게 받기로 한 의뢰비 잔금도 내가 지불할 거고.”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최 실장.”

“네. 알겠습니다.”

최 실장은 순식간에 손바닥 뒤집듯 노선을 갈아탔다. 더 큰 돈다발을 흔드는 큰손 앞에서 줏대도 없이 허리를 굽실댔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석해윤 씨.”

한지율은 해윤에게 인사하고는 최 실장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미술관 안에는 노파와 해윤, 둘만 남았다.

“해윤아. 이리 와 봐.”

노파가 손짓을 해 해윤을 불렀다. 해윤이 가까이 다가가자 노파가 해윤의 손을 잡아 쓰다듬어 주었다. 고생했다며 다독거리는 어머니의 손길 같았다.

“많이 아프지?”

“좀 아픕니다. 맞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말하고 보니 웃겼다. 맞는 게 익숙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누구나 맞으면 아픈 걸 텐데.

“미안하구나. 네가 이런 더러운 꼴을 보게 해서.”

차라리 이렇게 얻어터져서 속 편하다는 소리를 하면 노파는 이해할 수 있을까. 한기우에게 남아 있던 아주 약간의 죄책감이 일시에 날아갔다. 해윤은 옅게 웃고만 말았다.

“어쩌다가 기우가 이 지경까지 망가졌는지 알 수가 없구나. 귀한 자식이라 한없이 곱게 키웠더니 겉만 예쁜 악마가 되고 말았어.”

노파의 음성이 자상하고 부드러웠다. 해윤의 거친 손을 쓰다듬는 노인의 손이 한없이 따스했다.

얻어맞은 얼굴이며 몸이 욱신대며 아팠다. 입 안이 터진 것인지 혀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먼지 한 톨 없는 미술관 바닥에 점점이 튄 제 피. 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공간에 무자비하고 그악스러운 폭력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크게 호통을 쳤지만 다 커서 황소같이 기운 넘치는 놈을 무슨 수로 얌전히 잡아 두겠어. 미쳐서 설치고 다니던 놈이 한순간에 얌전해지지도 않을 테고.”

노파는 아무 감정이 묻어있지 않은 평평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저 그림 속 풍경이 뉴질랜드 퀸즈타운이란 곳이야.”

노파는 짧은 한숨과 함께 덧붙여 말하며 해윤의 손을 힘주어 쥐었다. 입 안이 따가워 말하기가 싫어 해윤은 눈앞의 그림을 찬찬히 응시했다.

햇빛에 반짝이는 파란 호수. 보트가 늘어선 작은 항구. 호수를 병풍처럼 에워싼 만년설이 뒤덮인 산. 한적한 시골 풍경 그림이었다. 전에 이 미술관에서 보았던 <그리움>이란 제목의 그림처럼. 그림 속 저곳은 한없이 평화롭다.

“기우가 중학교 때였던가, 식구들끼리 갔던 휴양지였어. 저 호수에서 기우랑 애들이 수영하며 놀았지. 그때도 지율이는 잔디밭에 앉아서 책을 읽더라. 자기도 수영하고 놀고 싶었을 텐데. 먹으라고 준 빵도 갈매기에게 전부 던져 주고. 제 큰아버지에게 철없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랬겠지. 애가 철없이 뛰어놀면 좀 어때서.”

노파가 하는 소리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해윤은 그림 속, 항구 앞의 푸른 잔디밭을 보았다. 그림 속 풍경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잔디밭에 앉아 책을 보는 소년이 보이는 듯했다.

어릴 때 해윤도 그런 적이 있었다. 저를 바라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선을 의식하며 제목부터 난해한 두꺼운 책을 끼고 앉아 억지로 읽었다. 두 분이 책을 읽는 저를 보며 두런대는 소리에 쫑긋 귀를 세우면서.

‘해윤이가 요새 독서에 푹 빠졌어요.’

‘책을 많이 읽는 건 좋은 거지.’

두 분이 나누는 대화 소리를 들으며 어린 해윤은 흐뭇하게 웃었더랬다. 어린 한지율도 그때의 해윤과 똑같은 심정이었겠지 싶다.

“차라리 기우 저 녀석이 저러다가 어디 가서 조용히 죽어 줬으면 좋겠어. 이 꼴 저 꼴 더러워서 보기 싫으면 내가 먼저 죽는 게 더 빠르겠지.”

노파가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잦아들었다. 그래도 한기우가 한동안은 집안 식구들 눈치를 보며 죽어지내지 않으려나 싶었는데, 오늘 날뛰는 꼴을 보니 글러 먹었다. 어디 가서 조용히 죽어 주지도 않을 거 같다.

“해윤아. 지율이랑 고등학교 동창이라며? 지율이가 외고를 다녔는데.”

“영진 외고요. 네. 같은 학교였습니다. 전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중퇴했지만요.”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 그리고 대학엘 가. 네 나이가 아직 한창때인데 중졸 학력으로는 아무것도 못 해 먹고살아.”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어서요.”

“나중에라도 꼭 그렇게 해. 배우는 게 남는 거야.”

언젠가 그럴 여력이 된다면 해윤도 그러고 싶었다. 지금의 이 상황에서 벗어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될 언젠가. 언제 올지 모를 그때가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지율이한테 공부를 봐 달라고 해도 되고. 지율이가 막내 손녀 공부를 가르쳐서 명문대에 보냈어. 지율이가 워낙 똑똑한 애라 가르치기도 제법 잘 가르쳐.”

한지율에게 과외를 받으라니. 상상도 하기 싫다. 문제 하나만 틀려도 형편없다느니, 구제 불능이라느니 온갖 소리를 다 지껄일 텐데.

“해윤아.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보렴.”

노파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딱히 없습니다.”

“내가 정신이 말짱할 때 말해. 사양하지 말고. 네가 지금껏 기우의 만행을 참고 버틴 대가라고 생각하고.”

“과정이야 어떻든 전무님이 저와 제 어머니의 은인이신 건 사실이에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전무님께 큰 신세를 졌습니다. 빚에 시달리는 절 전무님이 구제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더는 싫습니다. 돈 때문에 이 꼴이 되었는데 또 돈에 얽히긴 싫습니다. 돈, 좋죠. 돈이 필요하긴 합니다. 하지만 제가 벌어서 살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 오물투성이 진창에서 벗어나고만 싶다. 이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돈이 최고다. 돈으로 불가능한 건 없다. 하지만 그래서 끔찍하다. 돈 때문에 빌빌댔고 돈이 제 인생을 구원했고, 돈으로 얽혀 이 꼴이 됐다. 더는 싫다. 돈이라면 지긋지긋하다.

태미나 최 실장이 이 소리를 들으면 쥐뿔도 없는 게 좀 살만해지니 배부른 소리 지껄인다고 비웃겠지만.

“정말 원하는 게 없어? 후회할지도 몰라.”

“제 어머니는 가진 게 없어도 언제나 바르게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 한순간이나마 바르지 못한 길을 선택한 걸 뼈저리게 후회하며 이를 악물고 버텼습니다. 더 이상 후회하는 인생을 살긴 싫습니다.”

노파가 한숨을 내쉬며 해윤의 손이며 팔을 토닥거렸다.

“나중에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거나 하면 언제든지 말하도록 해. 내 정신이 멀쩡할 때를 봐서.”

“네.”

“그리고 이 그림은 너에게 줄게.”

그녀는 그러며 한 손으로 제 앞의 그림을 가리켜 보였다.

“아뇨.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받아. 고작 그림 하나야. 이거라도 너에게 줘야겠어. 계속 미완성이었던 그림이었는데 해윤이 널 만나고 나서 완성을 했어. 너에게 주려고 열심히 그린 거니까 받아 줘. 아직 제목은 정하지 않았으니 그림 제목은 네가 정하도록 해.”

인자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노파의 눈에서 아주 천천히 초점이 풀려 갔다. 정신이 쓸려 나가는 것이리라.

“앞으로 해윤이 넌 이 일에서 빠져. 너 같은 애가 뒹굴 진창이 아니야. 그래서도 안 되고. 지금까지는 물러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을 테지만 이젠 자유롭게 발 빼게 해 줄게. 아무 걱정하지 말고 물러나렴.”

전에 한지율이 해윤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노파에게 옮기고 싶었다.

이미 진하게 얽혔는데 어떻게 발을 빼느냐던 말.

노파가 생각이 짧아서 그러는 게 아닐 터다. 단지 제 손자를 잠식한 뿌리 깊은 광기의 근본이 무언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핏줄이 섞인 친인척 사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제가 낳아 키운 자식도 그렇고, 형제나 부모도 그렇다.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사람 안에 어떤 덩어리가 들어차 있는지는 본인만 안다. 심지어 본인도 미처 모르는 덩어리도 더러 있다.

해윤은 그림에서 시선을 떼 미술관 주위를 돌아보았다. 불이 꺼진 2층 쪽으로 저절로 시선이 갔다. 전에 한기우가 해윤을 밀어 떨어뜨린 2층 난간. 이렇게 보니 제법 높아 섬뜩하다. 아래에 안전 그물망이 없었으면 어디 한군데 부러지거나 크게 다쳤을 게 분명했다.

‘내가 널 어떻게 해야 할까? 해윤아.’

저 2층 난간 앞에 서서 중얼거리던 한기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한기우의 얼굴은 오후의 볕에 비쳐 고아하게 반짝였다. 제 할머니가 그린 그림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그 얼굴이 미끈했다.

그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얼굴로 시꺼멓게 썩어 악취를 풍기는 속을 해윤의 앞에 가감 없이 내비쳤다.

그리고 오늘 또 한 번 이곳에서 한기우는 악마가 되었다. 고상한 귀족 흉내는 집어치우고 마음껏 고함치고 날뛰던 그는 뒷골목 건달처럼 상스럽고 무작스러웠다.

그때도 평소와는 다른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풍기더니 오늘도 여지없이 폭발해 처음으로 해윤에게 손찌검했다. 그때처럼 이 미술관에서.

이젠 확실히 알겠다. 한기우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이게 무슨 사랑인가. 거지 같은 소유욕이지. 한기우는 제 안의 뒤틀린 소유욕을 사랑이라 포장해 휘두르는 거다.

그랬기에 신미라는 기우의 사랑이 부담이 된다며 밀어냈을 것이다. 무섭고 두려웠을 게다. 해윤도 그랬으니까. 밀어낸다고 한기우가 순순히 신미라에게서 물러섰을까? 해윤에게 하던 것처럼 그녀에게 무섭게 집착했을 게 분명하다.

이게 끝이 아닐 것이었다. 한기우가 이대로 나가떨어질 리 없다. 한기우 안의 광기의 덩어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곧 한계치에 다다라 거하게 터질 것이다. 기어이 어느 한쪽이 부서져 저 밑바닥까지 떨어져 나뒹굴어야 끝나는 시나리오다.

신미라의 기일이 이즈음이라고 태미가 그랬다.

‘하루라도 빨리 해윤이의 꿈을 이뤄 주고 싶어. 시간이 많지 않아.’

엔터테인먼트 쪽 관계자들과 첫 미팅을 하던 날, 한기우가 했던 소리다.

시간이 많지 않다, 라니. 신미라의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였을까.

널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그때 한기우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때 해윤은 한기우에게 그랬다.

‘그럼 전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살아야겠다. 신미라처럼 죽지 않겠다. 어느 한쪽이 뭉개져야 끝날 이야기라면, 뭉개지는 쪽은 한기우여야 했다.

컴컴한 2층 난간에 누군가 기대 이쪽을 바라보는 듯한 착각이 들어 해윤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어르신. 부탁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뭐든 말해 봐.”

부르는 소리에 노파가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제 어머니와 이모의 안전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래. 알았다.”

“그리고 지금처럼 쭉 한 이사님을 믿고 힘을 보내 주세요.”

“착한 녀석. 그건 걱정하지 말거라.”

노파가 목에 걸린 가방에서 녹음기를 꺼내 버튼을 딸칵 눌렀다.

“내가 정신이 하도 오락가락해서 정신 멀쩡할 때 한 얘기는 다 기록해 둬야 해.”

그러며 노파는 인자하게 웃었다. 웃음 띤 노인의 입매가 온화하면서도 믿음직스럽게 단단했다.

***

오랜만에 송 비서가 식사 자리에 합류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박지형과 대경 ENT 건물 근처 단골 식당으로 가 겨우 자리를 잡은 참이었다. 가격도 적당하고 맛도 제법 괜찮은 식당이라 점심시간만 되면 근방 회사 직장인들이 모여들어 앉을 자리가 없었다.

송 비서도 오늘 회의에 참석하기로 했다며, 어디냐고 묻기에 밥 먹는 중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송 비서는 자기도 밥을 먹어야 한다며 냉큼 달려와 자리를 비집고 앉았다.

“여기 전에는 순대국밥 집이었는데 업종 바꾸고 손님 엄청 많아졌네.”

송 비서가 종알거리며 손님들로 꽉 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장님. 돼지고기 김치찜 세 개로 통일해 주세요. 형님들도 괜찮죠?”

주문하러 온 점원에게 박지형이 음식을 주문했다. 해윤과 송 비서도 군말 없이 그러라고 했다. 해윤이 조용히 컵에 물을 따라 앞에 놔주었다. 박지형이 그런 건 막내인 자기가 해야 하는 건데, 중얼거리면서 수저를 놨다.

“송 비서님. 살이 많이 빠지셨어요.”

“내가 사는 게 아니다. 죽겠다, 아주. 그런데 해윤 씨는 그 집에 계시는 거죠?”

한숨을 푹푹 쉬던 송 비서가 물을 마시며 해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집이란 게 한기우가 마련해 준 그 아파트를 말하는 것일 게다. 해윤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곧 집을 얻어 나갈 생각입니다. 그때까지만 머물려고요.”

“그 집에서 버티시라고 더는 말씀 못 드리겠네요. 죄송해요. 해윤 씨.”

“우리끼리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말죠? 피해자끼리 보듬어 안고 서로 미안하다고 해 봤자 뭐 하겠어요.”

해윤은 언젠가 이모와 한지율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들이 일어나고 금방 서너 명의 남자들이 빈자리를 메꿨다. 남자들도 오늘의 추천 메뉴라는 김치 찜을 주문하고는 왁자하게 입들을 놀렸다.

“그 인간 한국에 돌아왔다며?”

“그 인간이라니 누구? 우리 회사 연예인 누가 외국에서 귀국했나?”

“아니, 한 전무.”

물을 마시던 해윤뿐만이 아니라 송 비서도 박지형도 움칫했다. 옆자리 손님들이 대경 ENT 쪽 직원들인 모양이었다.

“내가 그랬잖아. 결국 이번에도 조용히 한국에 들어올 거라고. 전에 마약 파티 사건도 결국 묻힌 거 봐라. 그래도 임원직에선 쫓겨났다던데.”

“쫓아내야 정상이지. 솔직히 한 전무가 경영 능력이 뛰어나길 해, 직원들 신임이 두터워, 한 전무 비서 팀 직원들도 다들 치를 떨던데. 한 전무가 하는 일이 대체 뭐가 있어? 실적이며 성과는커녕 회사 이미지 말아먹고 분란만 일으키는 주역인데. 당장 쫓아내서 파묻어 버려야지 그걸 가만 내버려 둬?”

“한 전무가 이사회에 참석했는데 어디서 얻어터지고 왔는지 부어터진 꼴을 하고 왔다더라.”

“회장이 한때 직원들 얼차려 시켜 놓고 빳다 치던 솜씨 좀 발휘했나 보지.”

“연예계 좆 관문 역할은 이제 못해 먹고살겠네.”

“빨아먹을 꿀이 떨어졌는데 누가 그런 약쟁이한테 붙어 있겠냐. 빨아먹을 거 다 빨아먹다가 더 빨아먹을 거 없으면 다 나가떨어지지. 붙어먹고 뒹굴다 보니 몸정이 쌓여 미운 정이나마 붙은 거라면 모를까.”

“마누라도 못 견디고 도망간 정신병자인데 미운 정은 무슨. 듣기론 약 빨다가 수틀리면 때리고, 목 조르고 지랄을 한다며. 다들 그러더라. 그러고도 지금까지 사람 하나 안 죽어 나간 게 다행이라고.”

“미쳤네.”

“한 전무가 정신병자라는 소문이 들린 게 하루 이틀 일인가?”

해윤의 일행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옆자리 남자들이 하던 말을 멈추고 흘금 시선을 던졌다. 단순히 음식이 맛있어 보여서 보는 것일 텐데 해윤은 괜히 위축이 돼 고개를 수그렸다. 남자들이 금세 다시 입을 열어 조잘대기 시작했다.

“그럼 한 이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아직 조사 중이지?”

“한 이사 살인 혐의에 관련해서는 이런저런 소문이 많더라. 한 이사를 아는 사람들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하고. 누명을 쓴 거란 말도 있고.”

“무혐의 확정이 날 때까지는 뭐라 말하기가 그렇지. 하지만 내 생각도 그래. 뭔가 굉장히 수상쩍어. 다른 걸 다 떠나서 오히려 경영 능력이나 신임도, 회사 기여도는 한 전무보다 한 이사가 더 낫지 않아?”

“그걸 말이라고 하나? 한 이사를 그딴 약쟁이 새끼와 비교하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되지.”

“누명을 쓴 거라고 치면 그럼 누가 죽인 거야? 죽은 사람이 라인맥스라고 소형 엔터테인먼트 대표라며. 난 들어 본 적도 없는 업체야. 거기 소속 연예인 중에 활동하는 애가 있긴 해?”

“아직 아무도 데뷔 못 시켰어. 걸 그룹 하나 키우는 중이었고 연습생 하나가 얼마 전에 우리 쪽으로 이적한 것 같던데.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겠어.”

라인맥스와 밀접하게 관련된 해윤을 옆에 두고서도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늘어놓았다.

“어쨌든 한 이사가 연예 엔터테인먼트 대표를 해칠 이유나 명분이 없다 이거야. 접점이 전혀 없잖아, 접점이. 한 전무와 연예계, 하면 딱 떠오르는 그림이 있는데.”

“그렇긴 해. 그럼 한 전무는 회사 일에서 강제로 손 떼겠고. 그럼 장남에 막내딸, 그리고 이번에 회장이 재혼한 상대가 데려온 딸만 남는 거네. 경영권 승계는 순혈주의로 한다 치면 한재나 사장이 그나마 부회장 자리에 제일 잘 어울리겠어. 회장의 장남이 부회장 자리에 앉는 게 모양새가 제일 낫긴 한데, 영 시원찮잖아.”

“그만하자. 우리가 이렇게 앉아서 떠들어 봤자 뭐하겠어. 자기들끼리 치고받다가 누가 죽고 누군 살고, 다 그들만의 세상이지. 밥이나 먹자.”

마침 옆자리에도 음식이 나왔다. 사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수저를 들고 밥덩어리를 입 안에 욱여넣었다. 맞는 말이었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일이라 해도 어차피 남 일이었다. 오너 일가의 경영권 승계 싸움이고 뭐고, 저들은 점심시간 안에 배를 채우는 게 더 중요했다.

그건 해윤도 마찬가지였다.

오너 일가 내부의 경영권 다툼 그런 건 다 필요 없고, 주위 모든 상황이 한기우가 극한까지 몰려 고립된 상태라는 게 중요했다.

“해윤 씨는 늘 볼 때마다 만신창이인 것 같아요.”

식사를 하고 나와 회사로 향하며 송 비서가 걱정 가득한 어조로 말을 붙였다.

“그래도 꽤 튼튼해서 죽지 않고 잘 버팁니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해윤의 입에서 말이 툭 튀어나왔다.

“그런 무서운 농담 하지 마세요. 이젠 그냥 농담처럼 안 들려요. 저 솔직히 전무님이 너무 무서워요. 지긋지긋하면서도 무서워 죽을 것 같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김 대표님 죽인 거, 전무님 같아요. 맞죠? 한 이사님이 그러신 거 아니죠?”

“네. 맞습니다. 전무님이 태민 형을 죽였습니다.”

송 비서와 박지형이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화, 확실해요? 해윤 씨, 혹시 봤어요? 아니면 증거가 확실히 있나? 그런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시면 안 되는데.”

당황한 송 비서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곧 정확히 밝혀질 거예요. 그 이상은 말씀 못 드리니 묻지 마시고요.”

최 실장이 진시은 여사가 흔드는 돈에 넘어갔다. 그는 증거든 뭐든, 한지율에게 넘겼을 것이다. 그 증거가 영상일지, 음성 기록일지 알 수 없지만. 한 회장이 아들을 살리기 위해 한지율에게 협상을 제시하거나, 제발 아들 좀 살려 달라며 매달리거나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알 거 없다. 진시은 여사의 말대로 그것까지는 해윤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었다. 한지율이 알아서 할 일이다.

해윤은 옆에서 걷는 송 비서에게 말을 걸었다.

“이젠 회사 관두고 다른 데로 이직하실 수 있겠네요.”

송 비서가 엷게 웃었다.

“한동안은 한 이사님 밑에서 일하며 해윤 씨 관련 업무를 처리할 겁니다. 한 이사님은 계속 일해 주길 바라셨지만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작은 회사라도 제 맘이 편한 데로 옮길 거예요. 지긋지긋해서요.”

그 마음,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그럼 송 비서님. 전무님은 회장님 본가에 계시는 거죠?”

“그렇지 않을까요? 아니면 전문 병원에 격리시켰거나.”

“연락도 안 되고요?”

“그렇죠. 아예 외부와 차단을 시켜 둔 것 같아요. 하긴 그래야 마약에 손을 못 대죠. 마약이 끊기가 쉽나요, 어디. 마약 못 하게 손을 뭉개도 발가락으로라도 약을 한다고 하잖아요. 회장님한테 얻어맞은 것도 그렇고, 회사에서 쫓겨난 게 충격이었던 모양인지 기가 죽어 조용히 죽어지낸다고 듣긴 했어요. 그런데 왜요? 설마 전무님 그렇게 되고 해윤 씨도 내쳐질까 걱정돼서 그래요? 걱정하지 말아요.”

뒤따라오던 박지형이 불쑥 끼어들어 말을 보탰다.

“에이, 형. 한 이사님이 계시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다 알아서 해결해 주실 거예요.”

송 비서와 박지형이 해윤을 위로하는 모양새가 만들어졌다. 해윤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기도 피곤했다.

“근데 이사님은 많이 바쁘신가 봐요? 요샌 도통 뵐 수가 없네요.”

“정신없으셔. 계속 일 때문에 사무실을 비우셔서 나도 그분 얼굴 보기 힘들어. 한 이사님이 회사에서 제일 바쁜 것 같아.”

박지형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말에 송 비서가 받아쳤다.

“그런데 해윤 씨. 지형이랑 얼마 전에 부산에 다녀왔죠? 별일 없었죠?”

송 비서가 대수롭지 않게 해윤에게 물었다.

“별일 없죠. 어머니도 많이 건강해지셨고.”

해윤은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덕분에 부산에서 잘 놀다 왔다며 박지형도 웃고 넘겼다. 송 비서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두 사람을 슥 훑어보더니 곧 말을 돌렸다.

“일 관두고 한 달 정도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 오려고요. 대학생 때 한 번 갔다 온 적이 있는데 너무 좋았거든요.”

자연스럽게 유럽 여행 얘기로 화제가 전환됐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소리가 한 귀로 흘러들었다 한 귀로 술술 빠져나갔다.

미술관에서 그 일이 있던 날 밤. 노파는 성북동 집으로 가자고 했지만 혼자 쉬고 싶다며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기우가 마련해 준 집은 쓸데없이 크고 지나치게 방음 시설이 잘되어 있었다. 집이 너무도 크고 적막했다. 전처럼 한기우가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불쑥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한기우가 찾아오면 끝장을 보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적막이 못 견디게 깊어 해윤은 TV를 켰다. 밤이 깊을수록 한기우에게 맞은 부분이 욱신거리고 쑤셨다. 심한 몸살감기에 걸린 것처럼 온몸이 다 아팠다. 걱정 가득한 눈으로 혼자서 괜찮겠냐 묻던 노파에게 괜찮다며 웃어 보인 게 무색할 정도로 삭신이 쑤셨다.

해윤은 진통제를 삼키고 거실 소파에 웅크려 누웠다. 멍한 눈으로 TV 화면을 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결에 머리맡에 놓아둔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핸드폰 화면에는 한지율의 이름이 떠 있었다. 전화를 받아야 하는데, 생각만 하다가 다시 의식을 툭 놓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꿈을 꾸었다. 엄마 무릎 위에 머리를 베고 어리광을 피우는 꿈. 어렸을 때였다. 어머니는 감기에 걸려 콜록대던 해윤을 무릎 위에 눕히고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어머니의 손끝은 서늘하고 보드라워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엄마 무릎베개가 너무 좋아서 해윤은 기침을 더 쏟아 내며 엄살을 피웠다.

계속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서늘한 손끝이 해윤의 이마를 쓰다듬고 있었다. 가만가만 식은땀이 배어 나왔을 이마를 어루만지고, 머리칼을 쓸어 넘겨줬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따스하고 다정했다. 해윤은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배시시 웃으며 슬며시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엄마의 얼굴이 아니라 안경을 낀 젊은 남자의 얼굴이었다. 한지율이다. 언제 와서 이러고 있는 걸까.

“왜 여기 계세요?”

해윤은 자는 동안 계속 앓아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석해윤 씨야말로 왜 여기서 이러고 있습니까? 할머니와 함께 성북동 집으로 가시지 않고.”

“더 이상 어르신께 신세 지기 싫어서요.”

한지율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세 진다는 건 남에게 도움을 받았을 때나 하는 말입니다.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건 한기우이니, 놈의 식구로서 당신을 책임지고 보살피는 게 당연한 거고요.”

“그 집은 싫습니다. 답답해요.”

“그래도 혼자 이러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텐데요. 원래 맞을 때보다 맞은 후가 더 아픕니다.”

“곱게 자라서 맞아 봤어야 알죠.”

그가 픽 웃으며 해윤의 뺨에 손을 갖다 댔다. 손이 차가워서 기분이 좋다. 화상을 입은 듯이 화끈거리던 부분이었는데.

“부어서 열이 나는 것 같은데. 안 아픕니까?”

“아파서 죽을지도 모르겠어요. 어디 크게 부러졌나.”

아픈 부위를 살살 만져 주는 한지율의 손끝이 엄마의 손길과 비슷해서 해윤은 엄살을 피워 봤다. 웅얼대며 뒤척이는 해윤을 내려다보는 한지율의 얼굴이 굳었다. 해윤의 뺨을 만져 주던 손끝도 굳었다. 엄살이었는데. 그의 진지한 반응에 해윤은 괜히 무안해졌다.

“농담이었어요. 아프긴 하지만 못 견디게 힘들진 않습니다. 감기몸살 정도예요. 뼈가 부러지거나 했으면 이러고 못 있죠.”

해윤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몸이 다 삐걱거렸다. 소파 앞 테이블 위에 약국 비닐봉지와 일식집 봉투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한지율이 사 들고 온 것이리라. 갑자기 허기가 져 해윤은 일식집 봉투로 손을 뻗었다. 몸을 움직이자 갈비뼈 부근이 욱신대며 앓는 소리가 새 나왔다.

“가만히 있어요. 움직이지 말고.”

한지율이 해윤 대신 봉투를 열어 포장해 온 음식을 꺼냈다. 초밥과 튀김이며 전복죽까지 종류별로 많이도 포장해 왔다. 저걸 다 누가 먹는다고.

“아무거나 잘 드시는 것 같아서 이것저것 사 왔습니다. 뭐부터 드시겠습니까? 속이 안 좋을 테니 죽 먼저 드시는 게 나을 텐데. 속을 채우고 약을 드시는 게 낫습니다.”

그는 그릇 뚜껑을 열고 숟가락과 젓가락까지 친절하게 챙겨 주었다.

“한지율 씨. 아픈 사람한테는 되게 자상하시네요. 아플 만하네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분위기를 전환한답시고 지껄인 소리에 한지율이 인상을 팍 썼다.

해윤은 숟가락으로 전복죽을 떠서 맛보았다. 꼬들꼬들한 전복 살이 감칠맛 나게 씹혔다. 굉장히 맛있었다. 찢어진 입 안이 아픈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먹어 치울 정도로.

“뭘 그리 급하게 먹어요? 체합니다. 천천히 드세요.”

한지율이 목을 축이면서 먹으라고 미소 장국을 챙겨 줬다. 초밥을 찍어 먹기 좋게 일회용 간장 봉지를 찢어 장국 뚜껑에 쏟았다. 회 초밥도 너무 맛있고 곁들여 먹는 염교며 생강 초절임까지 입에 착착 감겼다.

한지율은 음식엔 손도 대지 않고 며칠 굶은 거지처럼 음식을 퍼먹는 해윤을 바라봤다. 해윤은 정신없이 음식을 퍼먹다가 문득 시선을 느껴 한지율에게 말이나 해 봤다.

“한지율 씨는 안 드세요?”

“전 됐습니다. 늘 느끼던 건데 참 잘 드십니다. 음식을 안 사 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낮부터 먹은 게 없어서요.”

그러며 해윤은 새우튀김을 집어 우물우물 씹었다. 어쩌면 이렇게 하나같이 맛있을까. 정말이지 감탄스러웠다.

“그래도 잘 드시는 걸 보니 괜찮은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한지율은 담담하게 중얼거리며 약국 봉투에서 약 상자를 꺼냈다. 친절하게 직접 상자에서 알약 몇 개를 꺼내 해윤에게 물과 함께 내밀었다. 오늘 그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다정했다. 평소의 냉랭한 독기가 쏙 빠지고 다정함만 남았다. 해윤이 알던 한지율이 아닌 것 같았다. 미술관에서 한기우를 무섭게 후려치던 모습과는 또 달랐다.

왜 이렇게 다정하냐고 물으면 또 그 소리를 할 게 분명했다. 당신이 신경 쓰이니까, 라는 말.

그가 손에 연고를 짜 욱신대는 해윤의 뺨에 펴 발라 주었다. 해윤이 바르작대자 여지없이 한소리 한다.

“가만히 있어요.”

다정한 태도만큼이나 연고를 펴 발라 주는 그의 손끝도 보드라웠다. 그의 손가락이 닿는 얼굴도 간질간질하고 가슴께도 간질거렸다. 연고 발린 손이 해윤의 터진 입술에도 닿았다. 그의 손가락 끝에 피가 약간 묻어났다. 음식을 먹느라 입술을 움직여서인지 터진 부분이 또 갈라진 모양이었다.

“개새끼.”

한지율이 한숨과 함께 욕을 내뱉었다.

“그 개새끼가 기어이 이 얼굴에….”

그는 말을 맺지 못하고 끝을 얼버무렸다. 해윤의 입술에 닿은 그의 손끝이 떨렸다. 그의 얼굴도 약하게 경련했다. 맞은 사람보다 어째 그가 더 괴로워 보였다.

그의 하얀 손등에 붉은 생채기가 난 게 보였다. 한기우를 맨주먹으로 후려치며 생긴 흔적이리라.

한기우, 죽였어요? 이 소리를 하면 범죄 영화 좀 그만 보라는 소리가 나올 게 분명했다. 전 괜찮아요, 이 소리를 뱉으면 저 얼굴이 더 일그러질 것 같아서 관뒀다.

해윤의 입술에 닿아 있던 손이 떨어졌다. 연고 묻은 손을 티슈에 닦으며 묻는다.

“그 새끼가 얼굴 말고 또 어디를 때렸습니까? 아픈 데가 있으면 말해요.”

해윤은 얼굴을 들이밀어 한지율의 미끈한 뺨에 입술을 댔다. 불쑥 치민 충동을 참지 않았다. 그러곤 한지율이 움찔하는 사이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혹시 술 마셨습니까?”

당황하며 한다는 소리가 이렇다. 그다운 소리였다.

“그냥 하고 싶어서요.”

변명하듯 웅얼거리는 해윤의 얼굴로 한지율의 얼굴이 다가들었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입술을 포갰다. 입술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닿았다 떨어진 온기가 아쉬워 저도 모르게 오물거리는 해윤의 입술 위에 다시 말랑한 입술이 눌렸다. 절로 벌어진 해윤의 입에서 하아, 달착지근한 숨이 새 나왔다. 연고를 발라 놓은 해윤의 입술이 터질까 봐, 그의 키스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오늘은 키스조차 상냥하다. 맞닿은 입술의 온기마저 포근했다. 버릇처럼 해윤의 귀를 감싸 만지작대는 손길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느 한군데 말랑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귀를 쓰다듬던 그의 손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와 해윤의 목덜미를 감쌌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한숨이 서로의 입 안에서 흩어졌다. 벌어진 입 안으로 그의 혀가 밀려 들어와 해윤의 입 안 점막을 훑으며 숨을 빨아들였다.

얼굴에 살짝 닿는 안경테의 감촉마저 좋아 해윤은 눈을 내리깔았다. 기분 좋은 호흡 곤란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진통제 기운이 퍼지는 탓인지도 몰랐지만.

달다. 숨결이 너무 다디달아 혀가 마비될 듯했다. 달콤한 꿀을 빨듯이 해윤은 할딱이며 그의 혀를 빨고 입술을 씹었다. 오한이 나던 몸이 데워져 살갗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농도 짙게 포개져 서로의 숨결을 탐하던 입술이 떨어졌다. 한지율의 맑은 동공이 젖어서 반짝였다. 해윤의 목을 쓰다듬고 턱선을 지분대는 손에도 물기가 배어났다. 그에게서 더운 열기가 풍겼다. 그의 젖은 눈이 천천히 깜빡이며 해윤의 얼굴을 시선으로 핥았다.

해윤도 그의 반듯한 얼굴을 마음껏 바라봤다. 지금은 그래도 되니까. 훔쳐보듯이 흘긋거리지 않아도 된다. 그의 붉게 젖은 입술이 달싹였다.

“이 얼굴이 굉장히 단단하단 말이죠. 약하고 여릴 것 같은데.”

장난삼아 만지듯 그의 손이 해윤의 얼굴을 만지고 쓰다듬고 간질였다.

“약하지 않아요. 피부가 의외로 두껍고 건강합니다.”

피부결 얘기를 하는 게 아닌 걸 알면서도 엉뚱한 소리를 지껄였다. 한지율의 붉은 입매가 모양 좋게 비틀리며 실소가 비어져 나왔다.

“그래요. 당신 정말 두껍고 단단해. 여리고 말랑한 건 오히려 나일지 모르겠어요.”

그는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짧은 숨을 뱉으며 손을 뗐다. 얼굴을 감쌌던 따뜻함이 아쉬워 해윤은 제게서 떨어져 나간 하얀 손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그의 손이 다시 연고 튜브를 쥐었다.

“그 새끼가 얼굴 말고 또 어디를 때렸어요? 어디가 아픕니까?”

“옆구리랑 배요.”

“옷 올려 봐요.”

옷자락을 들어 올려 보이자 그가 미간을 좁히며 해윤의 드러난 복부며 옆구리 쪽을 손으로 훑었다. 해윤은 움찔했다. 욱신대는 부분에 손이 닿자 꽤 아팠다. 그는 꼼꼼히 연고를 펴 발라 주고 파스까지 붙여 준 뒤에야 손을 뗐다.

“방에 가서 쉬어요.”

“한지율 씨는 집에 돌아가시려고요?”

“오늘은 안 갑니다. 한기우는 큰아버지 댁에 처박아 뒀으니 죽이든지 살리든지 큰아버지가 알아서 하실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소리는 당신이 걱정돼서 혼자 놔두고 갈 수 없다는 말로 들렸다. 도가 지나치게 다정해서 적응이 안 된다.

문득 엉망으로 더럽혀진 테이블이 해윤의 눈에 들어왔다. 다 먹었으니 치워야 할 텐데.

“먹을 걸 사 와 주셨으니 치우는 건 제가 치울게요.”

해윤은 얼른 일어나서 지저분한 테이블을 치우려 했다.

“됐으니까 쉬어요. 제발.”

하지만 한지율이 정색을 하며 만류했다. 해윤은 무안해서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다시 소파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았다.

“가서 쉬라는 말 못 들으셨습니까?”

“밥 금방 먹고 누우면 소화 안 돼요.”

한지율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부산스럽게 움직여 테이블을 정리했다.

“한지율 씨는 결혼하면 좋은 남편이 될 것 같아요.”

“귀한 댁 아가씨 인생 망칠 일 있습니까. 무엇보다 전 성별을 떠나서 사람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인지 타인에게 애틋한 감정 같은 것을 가질 수가 없어요. 타인과 말랑한 감정을 교류할 여유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고요.”

“사람이 사람에게 향하는 감정에까지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요. 한지율 씨.”

빈 초밥 상자와 죽 그릇을 봉투에 쓸어 담던 한지율이 고개를 틀어 해윤을 봤다.

“그건 범죄가 아니잖습니까. 한지율 씨와 제가 한강 공원 같은 공공장소에 차를 대놓고 음란 행위를 벌인 게 죄가 아니듯이요. 물론 공공장소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건 안 좋지만… 그래도 감정에는 죄가 없어요.”

그건 한지율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고 저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했다. 맞은 곳은 배와 옆구리인데 가슴께가 따끔했다. 제가 뱉은 말에 정곡이 찔린 기분이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향하는 감정엔 죄가 없다. 한지율에에게 향하는 제 감정은 잘못된 게 아니었다. 그건 범죄가 아니다.

한지율은 잠시 해윤의 얼굴을 응시하더니 이내 웃음을 흘렸다.

“석해윤 씨. 당신에게 다가선 게 내 인생 최악의 실수 같습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얼음송곳이 되어 해윤의 가슴을 찔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해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당신과 호텔에서 그런 짓을 벌이지 않았으면 제가 지금 이 꼴이 될 일도 없었을 겁니다.”

“저와 잔 걸 후회해요?”

해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전 후회 안 합니다. 무작정 선을 타 넘은 건 후회해도.”

그가 나른하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해윤의 굳어 있던 눈매가 사르르 풀어졌다. 이러는 저가 우스운 한편 애틋했다. 좋아하는 사람 말이나 행동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풋풋한 소년이 된 것 같아서.

“실수죠. 한기우에게 향한 유치한 적개심에 눈이 돌아가 아무런 준비 작업 없이 당신에게 불쑥 다가선 게. 이렇게 댁이 내 속을 속수무책으로 휘저을 줄 알았으면 섣불리 다가서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말끝을 흐리며 잠시 가슴을 크게 들썩여 숨을 내쉬었다.

“댁을 만나고 감정적인 인간으로 변했어요. 당신 자체가 전형적인 패턴에서 벗어나 이리 튀고, 저리 튀는 사람이라 그런가.”

피로한 것인지 그의 목소리가 끝으로 가면 갈수록 낮아졌다.

“감정이 있으니까 사람이죠.”

해윤은 어쭙잖은 말발로 반박하고 싶었다. 감정적인 인간이 뭐가 어때서, 사람이라면 감정이 있는 게 당연한 거라고 말하려 했다.

“그래서 충동적인 감정에 휩쓸려 실수를 많이 하죠. 한기우나 내 아버지처럼.”

하지만 그는 싸늘히 받아쳤다.

“내 감정이 옳은가, 내 감정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이 감정에 휩쓸려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옳은가. 평소였다면 이런 단계를 거쳐 행동했을 겁니다. 그런데 석해윤 씨한테는 내 안을 들끓게 하고 충동질하는 그런 게 있어요. 나조차도 예측할 수 없는 충동을 야기하죠.”

“말이 어려워서 이해가 안 되는데요. 우아한 화법도 좋지만 알아듣기 쉽게 직관적으로 풀어 말씀해 주시지 않을래요?”

“좆이 꼴린다고요. 석해윤 씨한테.”

쉽게 풀어 말해 달라고 했더니 너무 직설적으로 풀어 놨다.

“그러니 제발 방으로 들어가서 문 잠그고 자요. 당신을 덮치고 싶어서 미치겠으니까. 아무리 발정이 나도 아픈 사람한테 그러긴 싫습니다.”

한지율은 그러며 자리에서 일어서서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주방에서 뭘 하는지 쏴아아,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해윤도 부스스 일어나서 잠시 주위를 돌아보았다.

소파 위에 놓인 한지율의 코트. 노트북 가방. 휑한 집 안에 들어찬 타인의 흔적. 저 사람이 할 일이 없어서 여길 찾아온 것일까. 혼자 있을 해윤이 신경 쓰여서, 걱정이 돼서 온 거였다. 해윤이 이렇게 된 데 책임감을 느껴서.

해윤은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침실 밖에서 TV 소리가 들렸다. 이 늦은 밤에 누구와 통화를 하는 것인지 한지율의 말소리도 들렸다. 이 휑한 집에 혼자가 아니란 사실에 안도하며 이불 속에 푹 파묻혀 잠을 청했다.

꿀 같은 잠에 빠져 갈증이 나 깨어났을 땐 새벽녘이었다. 침실 문을 열고 나가자 한지율이 거실 소파에 앉은 채로 잠이 들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은 켜진 상태였다. 노트북 주위엔 서류 더미가 흩어져 있었다.

해윤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이불장에서 담요를 꺼내 나와 잠든 그에게 다가갔다. 조심조심, 소파에 기댄 그를 눕히고 담요를 덮어 주었다. 해윤은 슬며시 그의 옆에 앉아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든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적요한 밤이었다. 거실 창밖에 펼쳐진 한강 풍경도 숨죽여 잠이 들었다.

한지율의 고른 숨소리만이 낮게 깔리던 그 고요하던 밤.

해윤은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 진통제 기운이 떨어져 여기저기 욱신대는 통증이 오히려 머리를 맑게 해 줬다.

해가 떠오를 때까지 생각에 잠겼다. 창밖 너머 하늘이 서서히 밝아지고 해가 비쳐 들었을 즈음. 이른 아침, 동틀 녘 햇살이 거실을 물들였다. 해윤의 얼굴에도, 해윤의 곁에서 잠든 한지율의 얼굴에도. 햇살에 물든 한지율의 얼굴이 너무도 깨끗하고 정결해, 해윤은 살며시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한지율이 좋다. 감정이 찰찰 흘러넘쳐 새삼스럽게 해윤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살아야겠다. 살 것이다. 하나의 사람으로서, 하나의 사람에 불과한 이 남자와 함께. 평행선 위에 나란히 서서 이 남자와 어깨를 맞대고 살아가고 싶었다.

신미라라는 여자의 닮은꼴이 아닌 석해윤의 존재로.

신미라를 씻고 석해윤의 모습으로 한지율의 옆에 당당히 서고 싶었다.

그날 아침, 해윤의 안이 단단하게 굳었다. 밤새 해윤의 머릿속에 떠다니던 생각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었다.

***

품속에서 울리는 핸드폰 알림음에, 해윤은 짧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새 건물 안에 들어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한지율 특유의 딱딱하고 사무적인 문자였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다. 때마침 자기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알고 문자를 보낸 건지.

「괜찮습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날려 보내는 해윤의 답 문자도 딱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행이군요. 점심은 드셨습니까?」

「네. 송 비서님과 지형이랑 돼지고기 김치찜을 먹었습니다.」

「맛있었겠군요.」

한지율과 이런 딱딱한 문자를 주고받다 보니 왠지 웃겼다.

남들 다 쓰는 이모티콘 하나 없다. 비즈니스 상대와 업무 관련 문자를 주고받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 같아, 해윤은 짧은 고민 끝에 문자에 이모티콘을 붙여 봤다.

「맛있었어요. ^^」

“와. 꼭 우리 아버지랑 문자 주고받는 거 같다. 아직 젊은 분들이 문자 내용이 왜 그래요?”

박지형이 워낙 키가 커서 해윤의 핸드폰 화면이 내려다보인 모양이었다. 녀석이 해윤의 핸드폰 화면에 뜬 문자창을 보고는 혀를 찼다.

“보지 마.”

해윤은 핸드폰을 들고 녀석에게서 돌아섰다.

“보려고 한 게 아니라 보인 거라고요, 뭐.”

녀석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귀엽게 툴툴거렸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한지율에게 답 문자가 날아왔다.

「다음에 저도 함께 먹으러 갑시다. ^^」

해윤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해윤이 이모티콘을 붙여 보내니까 자기도 따라 한 거다. 그가 먼저 말을 걸어온 김에, 얘기를 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해윤은 열심히 손가락을 놀렸다.

「제가 오늘 일정 회의 시간에 일을 좀 칠 것 같아요.」

「작정하고 박영민과 천 팀장 얼굴을 후려칠 겁니까?」

어째 꼭 이런 방향으로 생각이 튈까.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석해윤 씨가 생각하신 대로 하세요. 언제는 남에게 허락받고 일을 벌이셨습니까? 후회할 짓만 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뒤이어 그에게서 문자가 왔고, 엘리베이터가 회의실이 있는 층에 도착했다.

“힘내요. 형. 어깨 펴세요. 약쟁이 새끼한테 벗어날 기회니 오히려 잘된 거잖아요.”

박지형이 위로한답시고 해윤의 등을 퍽 두들겼다. 해윤이 윽, 얕은 신음을 흘리며 크게 휘청거렸다.

“해윤 씨는 말라서 큰일이에요.”

그걸 본 송 비서가 걱정 가득한 혀를 찼다. 저 곰 발바닥 같은 손에 맞으면 누구나 휘청거릴 텐데. 한기우한테 맞아서 멍든 부분을 때려서 더 아프다는 소리는 못하고, 해윤은 욱신대는 등을 어루만졌다.

“좀 빨리빨리 다닙시다. 초 단위로 움직이는 사람이에요, 나. 신인이 회의 시간보다 30분은 빨리 와서 대기하고 있어야지 딱 정각에 오나?”

회의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천 팀장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각도 아니었다. 오히려 약속 시간보다 5분 더 빨리 들어왔는데도 저런다. 뭐든 트집 잡아 빈정거리고 싶어서 저러는구나 싶었다.

“얼래? 해윤이 넌 또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싸웠어? 지망생 신분에 막 싸우고 다니고 그러면 되겠어? 하여튼 글러 먹었어.”

천 팀장이 대놓고 빈정거리며 시비를 걸었다. 찡그린 얼굴에 불만과 짜증이 가득했다.

“그나저나 박 대표님은 안 오세요?”

송 비서가 얼른 끼어들어 화제를 전환했다. 천 팀장이 코웃음을 쳤다.

“그분이 그렇게 한가한 분인 줄 아시나. 대표님이 고작 지망생 일정 회의하는 델 왜 와요? 그쪽이 뭐 그리 대단하신 분이라고. 전무님 빽도 없는데. 아, 이젠 전무도 아니지.”

한순간에 찬밥 신세가 됐다. 하루아침에 밑바닥으로 떨어진 건 한기우뿐만이 아니었다. 한기우 라인은 다 좆 됐다던 태미의 말 그대로였다. 송 비서는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전무님이 일선에서 물러나셨다 해도 석해윤 씨는 이 회사에 계약된 사람이죠. 그러니 빈정대지 마시고요. 전무님이 해윤 씨를 반년 안에 데뷔시키라고 하셨는데 왜 아직 아무 계획이 없습니까? 일단 오늘은 디지털 싱글 녹음 일정부터 잡도록 하죠.”

“반년 안에 데뷔, 그거 전무님이 약에 취해서 환각 상태로 헛소리하신 거 아니었나?”

하지만 천 팀장도 지지 않았다.

“천 팀장님. 전무님이 물러나셨다 해도 말을 너무 막 하시네요.”

“그래도 다들 뽕쟁이라 하는데 전 전무님이라고 꼬박꼬박 존대해 드리고 있구만. 반년 안에 데뷔? 진짜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8년 밴드 활동한 경력을 쳐 주려고 해도 이건 뭐 실력이 받쳐 줘야지. 그래. 많이 좋아지긴 했어요. 보기보다 해윤이도 굉장히 열심히 연습에 임하고. 곡이 워낙 괜찮고 해윤이 목소리에 잘 어우러져서 제법 쓸 만해. 근데 대체 콘셉트를 어떻게 정하냐고. 색채가 필요한데. 퓨어? 클린? 언더 무대에서 8년 동안 실력을 갈고닦은 숨은 실력파? 데뷔는 어떻게든 하지. 싱글 앨범 내고 뮤직비디오 대충 찍고, 음방에 데뷔 무대 끼워 넣고. 그런데 전무님은 쟤를 리나 같은 스타급으로 띄워 놓으라던 거 아니었냐고요. 아무리 물량 공세하고 노출 시켜 띄운다 해도 한계가 있어요. 스타는 괜히 스타가 아냐. 돈 많다고, 빽 좋다고 다 스타 돼요? 리나를 두둔하려는 게 아니라, 걔는 원래부터 끼가 충만했으니까 좀 띄워 주니 훨훨 날아오른 거고. 그리고 요즘 같은 시장에서 콘셉트 하나 없이 기타 하나 덜렁 둘러매고 노래 부르는 싱어송 라이터 스타일이 먹히기나 한대? 우리라고 될 대로 되라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천 팀장이 속이 타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네. 그건 잘 알죠. 저도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말이 격해진 점, 사과드려요. 이제 전무님의 개입이 없을 테니 큰 욕심을 버리고 데뷔하는 것부터 차근차근 일정을 정합시다. 이사님께서 석해윤 씨 앨범 녹음 일정이라도 확정해서 오라며 절 보내신 거예요.”

그러며 송 비서가 품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펼쳤다.

“쟤는 스타 욕심을 못 버린 것 같은데?”

천 팀장의 시선이 조용히 침묵하며 두 사람의 설전을 듣고 있던 해윤에게 향했다. 송 비서도 해윤을 보며 말을 던졌다.

“해윤 씨. 말해 봐요. 뭘 어떻게 하고 싶은지.”

해윤은 눈을 천천히 끔뻑이며 입을 열었다.

“데뷔하지 않겠습니다. 녹음 일정은 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천 팀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코웃음을 쳤다. 송 비서의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졌다. 해윤의 옆에 앉아 있던 박지형의 어깨가 들썩였다.

“네? 저기, 잠깐만요. 해윤 씨. 뭐라고요?”

“데뷔하지 않을 거고 대경 ENT와의 계약도 취소하고 싶습니다.”

해윤은 다시 한 번 묵직한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송 비서도 마구 헛웃음을 쳤다.

“아니, 대체 왜요? 왜 갑자기 이러세요? 갑자기 이러시면 곤란하죠.”

“애초에 제 실력으로 기회를 얻은 게 아니었으니까요.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전부 없던 일로 리셋하고 제 능력으로 기회를 잡고 싶습니다.”

천 팀장이 고개를 젖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 자식, 저거 진짜 골 때리네. 생긴 건 어리바리 순하게 생겨서는 약아빠졌어, 새끼가. 이런 식으로 난 못 하겠다 강짜 부리면서 지 유리한 쪽으로 뭘 얻어 내려고 저러는 거 봐.”

“얻어 내고 싶은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습니다.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천 팀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 실력으로 데뷔라니 말도 안 되죠. 제가 많이 부족한 것도 맞습니다. 제가 누리고 있는 특혜가 제 실력으로 따낸 게 아니라, 남이 준 것도 사실이고요. 실력은 없는데 워낙 빽만 대단한 대박 신인이라 불리며 조롱당해도 할 말 없습니다. 저에게 기회를 주신 건 전무님이셨죠. 전무님이 그렇게 되셨으니 저도 나가는 게 맞다고 봅니다. 제가 언변이 달려 조리 있게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정말 감사했습니다.”

해윤은 일어서서 천 팀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돌아도 단단히 돌았군. 그걸 왜 너 혼자 정해? 계약이 장난이야? 더는 못 해 먹겠다, 나는 나간다, 이러면 끝인 줄 알아? 계약서가 왜 있는데? 너한테 들어간 초기 투자금, 그건 어쩔 거야?”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에게 들어간 투자금이 아직은 크게 없지 않나요? 제가 지급받은 활동비나 숙소 비용, 그런 건 지금까지 전부 전무님이 사비로 제공해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매니저 박지형 씨를 고용한 것도 전무님이셨고요.”

해윤이 또박또박 따지자 천 팀장이 눈을 부릅뜨고 해윤을 쏘아보았다.

“야. 현실 파악 제대로 해. 널 밀어주던 빽은 이제 없어. 이 정도로 대우해 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한 줄 알아. 너 같은 거 음반 찍어 주고 데뷔 무대까지 서게 해 주겠다는데 그 이상 뭘 더 원해? 너보다 실력 좋고 용모 되고, 팔팔한 애들, 당장 우리 회사 지하 연습실에만 가도 수두룩해.”

“그래서 나가겠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 같은 거한테 더 이상 비용 쓰지 마시라고요. 저 데뷔시키느라 쓸 비용 아껴서 실력 좋은 연습생 하나라도 더 데뷔시켜 주십시오.”

해윤은 천 팀장에게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죄송하다고 인사하고 회의실에서 나왔다. 한발 늦게 뒤따라 나온 송 비서와 박지형이 해윤을 불러 세웠다.

“해윤 씨. 이거 한 이사님과는 협의가 된 결정이에요?”

“지긋지긋하다고 입으로만 말하면서 붙잡고 있던 건 제 욕심 때문이었죠.”

해윤은 송 비서를 보며 웃어 보였다. 송 비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죄송합니다. 우리끼린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말자고 제 입으로 말했는데 이번엔 제가 잘못을 했으니 사과할게요. 송 비서님에겐 피해 가지 않도록 할게요. 지형이, 너도 다른 일을 할 수 있도록 알아봐 줄게.”

박지형이 얼굴을 구기고 말을 웅얼거렸다.

“해윤 형. 노래하는 거 좋아하잖아요. 노래할 때면 세상 즐거워 보이시던데.”

“노래야 어디서든 부를 수 있으니까.”

해윤의 품속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수신인은 한지율이었다.

- 일을 칠지도 모른단 말이 이런 의미였습니까?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천 팀장에게 바로 연락을 받은 모양이었다.

- 대체 왜요? 노래 부르고 싶다면서? 데뷔를 안 하겠다고요? 왜?

“신미라를 벗고 석해윤으로 살고 싶어서요.”

- 후회할 짓 하지 말라고 경고했더니 제일 후회할 결정을 하셨군요. 어쨌든, 저녁에 봐요. 한기우에게 받은 돈을 돌려준답시고 한기우에게 연락하거나 하지 마시고. 그 짓만은 절대로 하지 마세요. 그 새끼를 자극하지 말아요.

귀신같이 해윤의 속내를 알아채고 정곡을 찌른다. 한기우에게 연락할 생각이었는데. 전화가 끊겼다.

해윤은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는 송 비서에게 말을 걸었다.

“잠깐 시간 괜찮으시겠어요? 얘기 좀 하죠.”

이미 물은 엎질렀으니 뒤처리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

해윤은 자문해 보았다.

진작 이러지 못했던 이유가 뭐였나? 지긋지긋해서 더 이상은 싫다고, 진저리를 치면서 이것만은 놓지 못했던 이유.

한기우가 무서워서? 초심자의 운. 얻어걸린 기회. 그 기회가 너무도 숨 막히게 달콤해서 놓기 싫었던 건 아니고?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핑계다. 노래는 어디서든 부를 수 있다. 홍대 공연장이든, 광안리 해변이든, 한강이든, 근처 공원, 어디에서든. 착실하게 8년 내내 무명이었던 그 시절, 해윤은 행복했다. 광안리 해변에서 기타 하나 둘러메고 한지율 앞에서 노래를 불렀던 때가 최근 들어 가장 즐겁고 재밌던 때였다.

손에 쥔 기회가 제 실력으로 얻은 기회였나? 아니다. 이 얼굴로 얻은 거다. 석해윤이 아닌 신미라를 닮은 이 껍데기로 얻은 기회였다. 신미라를 닮은 이 얼굴로 얼마나 많은 것을 얻고, 혜택을 봤느냐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컷 조롱당해도 할 말 없었다.

한기우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가 던져 준 기회 또한 놔 버리는 게 옳았다.

해윤은 어느 카페에서 송 비서를 앞에 앉혀 두고 한기우의 계좌를 물었다.

“전무님께 받은 돈을 돌려 드리고 싶어요. 빚을 갚고 남은 돈, 매달 받은 활동비 전부 통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빚을 갚는 데 쓴 돈은 받은 게 아니라 빌린 것으로 하고, 꼭 갚겠습니다.”

송 비서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라고 말렸다. 한기우가 그 돈을 받으려고 하지 않을 거라고도 했다.

“그래도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래야 제 마음도 편하고, 깔끔하게 끝맺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윤 씨. 약쟁이랑 헤어지시게요?”

송 비서의 말에 해윤은 엷게 웃었다. 한기우와 저가 헤어지고 자시고 할 관계였나? 일방적인 갑을 관계였고 돈에 얽힌 주종 관계였으며, 계약 관계였다. 한기우는 사랑이라 지껄였지만 당하는 입장에선 못 견디게 끔찍한 집착이었다.

“약쟁이가 해윤 씨의 이별 선언을 순순히 받아들이겠어요? 걱정이 돼서 그래요. 그 약쟁이가 품위 있는 이별을 할 인간인가요, 어디?”

그건 해윤도 충분히 납득 가능한 걱정이었다.

“중독 센터나 병원에 격리시키든, 감옥에 처박아 두든, 회장님이 알아서 처리하시겠죠.”

해윤은 낮게 읊조렸다. 그래야만 했다. 그래 줘야만 했다. 한기우는 범죄자니까. 한기우가 지금까지 행한 온갖 악행은 차치하고라도, 사람 죽인 죄까지 덮어 준다면 한승조 회장도 한기우와 똑같은 쓰레기다.

“전무님이 김 대표님을 죽인 게 확실한 거예요?”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도 송 비서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해윤 형. 속 시원히 말 좀 해 봐요.”

박지형이 답답한지 제 가슴을 쿵쿵 쳤다. 해윤의 점퍼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나 좀 살려 줘라. D씨가 되어 처리 당하게 생겼다.」

화면에 짧은 텍스트가 들어찼다. 문자 상단에 찍힌 번호가 낯설었지만, 수신인이 누군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최 실장이 분명했다.

곧이어 최 실장에게서 문자 하나가 더 날아왔다.

「전화할 생각하지 마.」

급하게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해윤의 손이 멈칫했다.

「너 지금 누구랑 있어?」

「송 비서님과 지형이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해윤이 얼른 답 문자를 날려 보냈고 즉각 답이 돌아왔다.

「조용히 일어나.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화장실이나 어디 혼자 있는 곳으로 가서 문자 보내. 시간 없어. 얼른.」

해윤은 그의 말대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에요? 설마 약쟁이한테 문자 왔어요?”

송 비서가 해윤의 표정을 살피며 걱정스레 물었다.

“아뇨. 부모님께 온 문자예요.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송 비서와 박지형의 걱정 가득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이 카페의 화장실은 문을 열고 나가야 있었다. 차라리 잘됐다. 가게 유리문을 열고 나가며 해윤은 최 실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러자 곧바로 최 실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대체 무슨 말입니까? 지금 어디세요? 한 이사님 옆에 계신 거 아니에요?”

- 내가 그 새끼 옆에 왜 붙어 있어? 그 새끼, 결국 나한테 다 뒤집어씌우고 해치울 거라고.

최 실장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해윤은 무슨 소리인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사님이 최 실장님을 왜 해칩니까?”

- 한지율 새끼, 회장한테 계열사 사장 자리 하나 받기로 하고 이번 사건 묻어 버리기로 합의 본 거 같아. 내가 그 사건의 목격자잖아. 나한테 전부 뒤집어씌우고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 버리면 두 놈 다 무혐의로 손 씻을 수 있는 거야. 한지율? 한기우? 이재나? 모르겠어. 씨발. 모르겠다고. 내가 어느 쪽을 믿고 가야 하냐?

“어디세요? 일단 제가 있는 쪽으로 오세요.”

그나마 제 곁이 가장 안전할 것 같아서 외친 말이었다.

- 내가 널 어떻게 믿고?

“절 못 믿으시면서 왜 저한테 살려 달라고 하셨습니까? 그리고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한 이사님이나 진시은 여사님 쪽이 그나마 안전할 겁니다.”

- 물러터진 새끼. 믿을 놈 아무도 없어.

“이미 사람 하나 죽인 약물 중독자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그나마 한 이사님을 믿으시니 저한테 연락하신 거 아닙니까.”

최 실장이 피식 웃었다.

- 너 황 부장 아니냐?

해윤의 말에 어이가 없어 웃은 게 아니라 제게 다가든 누군가에게 던진 웃음이었던 모양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최 실장이 허탈하게 웃음 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디선가 한기가 몰려들어 해윤의 몸이 싸늘하게 굳었다. 마치 제가 최 실장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 민철아. 너 이 짓 하기로 하고 얼마 받았냐?

곧 퍼억, 하는 큰 타격음이 들렸다. 소름 끼치는 그 소리에 해윤은 흠칫 떨었다. 핸드폰이 떨어지며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이어 최 실장의 굵은 신음이 깔렸다. 신음하며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또 한 번 퍽! 소리가 터졌다.

“최 실장님!”

해윤의 목구멍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갔다. 그 순간 전화가 뚝 끊겼다. 해윤은 잠시 얼이 빠져 통화 끊긴 핸드폰을 멍하게 바라봤다.

“해윤 형. 형!”

누가 해윤의 어깨를 흔들며 이름을 불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박지형이었다. 불길한 예감을 감지하고 해윤을 따라 나온 모양이었다.

“최 실장이죠?”

묻는 소리에 해윤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였다.

“지형아. 최 실장… 위험해. 누가 최 실장을…. 이 사람한테 가 봐야 할 것 같아.”

말이 비어져 나가는 입술이 떨렸고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사람을 때리고 신체 일부분을 부수는 끔찍한 소리가 귀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진정해요. 해윤 형이 왜 그 인간한테 가요? 가도 뭘 어떻게 하시려고요?”

박지형의 핸드폰이 울렸다.

“한 이사님이 본사로 오시래요. 당장이요.”

용건만 간단히 주고받은 짧은 통화 후 박지형이 해윤의 어깨를 힘주어 감싸 쥐었다.

대경 본사로 차를 타고 달려와 곧장 한지율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일전에 보았던 비서가 두 사람을 사무실 안으로 안내했다.

“이사님은 지금 사무실로 복귀하는 중이시라고 합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사무실 소파에 앉은 지 얼마 안 돼서 비서가 커피를 내 왔다. 비서가 나가고 나서야 해윤은 찻잔에 손을 뻗었다. 따뜻한 차를 마시자 메슥거리는 속이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최 실장 죽었을까요?”

옆에서 박지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제발 최악의 사태만은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얼마 안 있어 문이 벌컥 열리며 한지율이 들어왔다. 그는 코트도 벗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그의 얼굴이 자못 진지했다.

“최 실장과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최 실장의 집으로 가 보라고 했지만 아무도 없었다고 하고요. 최 실장이 해윤 씨에게 전화해서 뭐라고 하던가요?”

“살려 달라고 했습니다. 목소리가 다급해서 우선 제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했는데 갑자기 때리는 소리가 나면서… 전화가 끊겼어요.”

한지율이 허공에 대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서가 다시 노크를 하고 들어와 한지율 몫의 차를 가져왔다.

“전화가 걸려 오면 외근 업무 중이라고 해 줘요.”

한지율의 말에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돌아 나갔다. 그는 찻잔을 쥐어 차를 두어 모금 마신 뒤에야 다시 말문을 열었다.

“한지율이 계열사 사장 자리 하나 받기로 하고 이번 사건을 묻으려 한다고 했죠? 최 실장이?”

해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입니다. 계열사 하나 받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큰아버지의 사적인 스캔들을 묻어 두기 위한 협상이지 이것과는 별개의 문제죠.”

사무적이고도 차가운 말투였다. 그는 찻잔을 입에 대 차를 머금고는 그리고, 하며 말을 이어 붙였다.

“최 실장이 넘긴 영상은 증거물로 제출할 수가 없어요. 품질이 조악해서. 주위가 너무 어두워서 영상 속 주인공이 한기우인지, 누구인지 도무지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어요. 말소리도 뭉개져 있고. 최 실장은 그딴 걸 손에 쥐고 흔들면서 나나 할머니뿐만 아니라, 큰아버지와 이재나에게도 돈을 요구했습니다.”

한지율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웅얼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최 실장의 야비함이건, 뭐건,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최 실장님은 살아 있습니까?”

해윤의 질문에 한지율은 대답 대신 입 안에 차를 머금었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도.”

이윽고 그의 입에서 솔직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문득 해윤의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황 부장. 황민철. 최 실장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

“황민철이란 사내가 최 실장에게 찾아온 모양이었어요. 원래 알던 사이였던 것 같고.”

황민철? 한지율이 미간을 좁히고 짧게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핸드폰을 들고 화면을 손으로 휙휙 넘겼다.

“이름까지는 모르겠고 이 남자를 황 부장이라고 부르는 것 같더군요. 석해윤 씨도 누군지 알 겁니다.”

한지율이 화면에 사진 하나를 띄워 해윤에게 보여 주었다. 남자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험악한 얼굴을 한 민머리 사내. 일전에 부산역으로 해윤을 마중 나오고, 김태민을 손봐 줬던 그 남자였다.

왜 최 실장이 두 번이나 저를 해하려 찾아온 인물의 이름을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기우겠군요.”

해윤의 마음속 생각이 한지율의 입을 통해 나왔다. 황 부장이란 이 사내는 최 실장처럼 한기우가 고용했던 인물이었다.

“전무님은 어디 계시는데요?”

“중독 치료 센터에 처박아 뒀습니다. 외부와 연락을 차단해 놓았을 텐데. 하긴 한기우가 멀쩡한 이상, 차단이란 게 의미 없겠어요. 오늘 석해윤 씨가 계약 해지를 하겠다고 한 소식도 이미 한기우 귀에 들어갔을 테고.”

그는 말끝을 흐리며 차를 마저 마셨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한지율은 차를 홀짝이며 생각에 빠졌다. 해윤은 잦아들지 않는 불안함에 입 안 점막을 잘근대며 씹었다.

최 실장이 살아 있었으면 했다. 한기우는 대체 어디까지 망가질 건가. 최 실장까지 잘못된다면, 이번이 두 번째다. 두 번의 살인이다. 살인 교사라 해도 최 실장에게 향한 살의는 한기우의 것이다.

한기우를 짧게나마 동정했던 때로 돌아갔으면 했다. 그때는 그래도 한기우가 사람 같았다. 상처 많고 사연이 많이 비뚤어진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 같지가 않다. 인두겁을 뒤집어쓴 괴물 같다.

다 죽여 버리겠다고 이를 가는 한기우의 꼴이 우스웠다. 대체 왜 저렇게 인간이 철이 덜 들고 뒤틀렸을까 이해도 되지 않고 한심했다.

‘넌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해윤아.’

한기우는 그랬다. 무척 서운한 듯이. 네가 어쩌면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피해자라도 된 듯이. 해윤이 무조건 저를 다 받아 주고 품어 주고 이해해 주기를 바랐던 걸까?

모르겠다. 정신 나간 약물 중독자의 뒤틀리고 왜곡되어 짓뭉개진 속내를 어찌 알겠나.

한지율의 핸드폰이 울렸고, 문자를 본 그의 얼굴은 심각했다. 그의 굳은 표정을 보고 해윤은 수화기 너머에서 날아들 소식이 무엇인지 대충 알아차렸다.

“최 실장이 애인의 11층 아파트에서 투신했다고 합니다.”

전화를 끊은 그가 담담한 어조로 소식을 알렸다. 그래도 살아 있지 않을까, 하던 기대가 산산이 부서졌다. 해윤의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몸의 떨림을 진정해 보려 해도 제어가 되지 않았다. 사지가 심하게 떨리고 온 얼굴이 뒤틀리며 동공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기어이. 결국. 또 한 사람이 죽었다. 왜 죽였어요? 하고 묻는다면 한기우는 또 나른하게 웃으며 그럴 것이다. 죽을 새끼였잖아? 하고. 한기우 나름의 살해 이유가 존재한다. 김태민은 건방졌고 최 실장은 감히 한기우를 배신했다. 둘 다 죽을 짓을 했으니 죽은 거다.

“해윤 형. 괜찮아요?”

박지형이 해윤의 떨리는 어깨를 어루만졌다.

“박지형 씨. 잠깐 나가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한지율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이명처럼 울렸다. 박지형이 조용히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문이 탁, 닫히는 소리와 함께 해윤의 허벅지 위로 손이 덮였다. 한지율의 하얀 손이었다. 그의 손은 안마하듯이 긴장해서 단단히 굳은 해윤의 허벅지를 주물렀다.

“제 탓일까요? 제가 전무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고 반항해서? 제가 묶이든, 맞든, 갇히든, 군말 없이 당해 주고만 있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요? 제가 다 잘못한 걸까요? 제가 문제입니까?”

해윤은 넋이 나가 두서없이 횡설수설 주절거렸다. 한지율의 손이 해윤의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

“석해윤 씨. 날 봐요.”

“대체 왜 그 새끼는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원래 이랬습니까? 신미라를 잃고 미친 겁니까? 아니면 원래 이런 인간이었습니까? 마약에 절어서 머리까지 녹아 버린 거예요? 다 죽여 버리고 뭉개 버리겠다고 하더니 정말 하나씩 다 죽이고 있어. 미친 새끼가. 사람 목숨이 무슨 파리 목숨도 아니고. 최 실장이, 그 사람이 살려 달라고 했는데….”

동공이 흠뻑 젖어 눈물 한 방울이 눈가에 흘렀다. 해윤은 씨발, 욕을 뱉으며 얼른 손으로 젖은 눈가를 닦았다. 그 순간, 예고도 없이 한지율의 얼굴이 불쑥 다가들었다.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커피 향기가 나는 한지율의 입술이 해윤의 입술 위에 뭉개졌다. 오늘의 그는 자상하지 않았다. 허겁지겁 해윤의 입술을 빨고 혀를 밀어 넣었다. 허벅지 위에 닿아 있던 손이 해윤의 성기를 눌렀다. 해윤은 흠칫 놀라 그를 밀어 냈다.

미쳤다. 여기서 이러다니.

“당신 탓이 아냐.”

그는 입술을 떼 속삭였다.

“처음엔 당신을 욕하고 탓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래. 누구의 잘못도 아냐. 당신이나, 나나 모두가 피해자야. 도려내야 할 악의 축은 한기우지.”

한지율의 눈이 습하게 젖어 음산하게 빛났다.

그의 손끝이 해윤의 젖은 눈가를 매만졌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겨도 이렇게 가련하게 울어 주면 좋겠는데.”

해윤은 진심으로 발끈했다. 이 인간이 이런 상황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죠. 말이 씨가 됩니다.”

해윤은 짜증을 내며 한지율의 몸을 휙 밀어냈다. 한지율도 얕게 웃으며 해윤에게서 몸을 뗐다.

“박지형 씨와 성북동 할머니 댁에 가 계세요. 거기가 제일 안전합니다. 싫어도 가 있어요. 일이 해결될 동안 거기 머물러요. 제발 부탁할 테니까.”

그는 중얼거리며 일어나서 구겨진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어떻게 해결하시려고요?”

“어쩔까요? 죽일까요? 한기우가 주로 쓰는 방법대로 깡패 하나 써서 쑤셔 버릴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최선책 아닌가?”

그가 높낮이 없는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 그거 좋네. 언젠가 한기우가 김태민을 죽여 줄까? 했을 때도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나가죠.”

한지율은 어깨를 들썩여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해윤도 조용히 일어서서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먼저 나간 그는 박지형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해윤 씨와 함께 성북동으로 가 주세요. 전 한기우에게 가 보겠습니다.”

“아닙니다. 맡겨만 주세요.”

박지형이 저만 믿으라며 제 두툼한 가슴팍을 탕탕 쳤다. 한지율이 녀석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박지형 씨는 언제나 믿음직스럽군요. 부탁 좀 하겠습니다.”

존경하던 이사님이 칭찬을 해 주자 녀석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한지율을 뒤따라 나오며 짧은 생각에 잠겼던 해윤은 빠르게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

“저도 전무님께 함께 가겠습니다.”

그리고 해윤은 결론을 내자마자 당장 입 밖으로 뱉었다.

***

마약 중독 격리 센터라기보다는 요양 시설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숲과 호수에 감싸여 있어 풍경 좋고, 공기가 좋아 요양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볕을 받아 반짝이는 서양풍의 하얀 건물에 울타리에 에워싸인 외관부터가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줬다. TV에서나 보던 정신 병원 폐쇄병동의 광경을 생각했던 해윤은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이 사람들은 사는 세계가 다르구나, 라는 걸.

차에서 내려서자 미리 연락을 받은 직원이 해윤 일행을 병실로 안내했다.

“환자 분이 금단 증상이 유난히 심하셔서 직원들이 고생을 하고 있어요. 환자 분이 중독에서 벗어나려는 의지 자체가 희박하기도 하고, 워낙 중증 중독자라 약을 끊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난동을 피우면 결박하라고 했잖습니까.”

직원이 하는 말에 한지율이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요.”

직원이 하는 소리가 어떻게 대경 그룹 차남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느냐는 소리로 들렸다.

“환자가 외부와 연락할 방법이 있습니까?”

“아뇨. 그런 일은 없어요. 센터에 입소할 때 핸드폰이나 태블릿, 노트북 같은 전자기기는 전부 압수합니다. 외부와의 접촉은 철저하게 막아 두고 있고요. 미리 등록된 보호자가 아니면 환자를 면회할 수가 없는 시스템이에요.”

“사람이 하는 일이니 오류가 생길 수 있는 시스템이기도 하고요.”

“저희를 믿지 못하시면 곤란하죠.”

한지율이 쏘아붙이자 직원은 애써 웃어 보이며 3층 안쪽 병실 앞에 멈춰 섰다.

직원이 문 앞 센서에 카드키를 갖다 대자 병실 문이 열렸다. 외부 출입을 철저히 막아두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문 바로 앞에 건장한 사내 두 명이 버티고 서 있었다.

병실 안은 웬만한 집과 같은 구조였다. 넓은 거실에 침실, 욕실까지 구비된 호화 격리실이었다. 볕이 워낙 잘 드는 위치라 병실 내부엔 오후의 황금빛 햇살이 가득했다. 거실 창문 너머로 호수의 정경이 내다보였다.

“해윤아!”

안으로 들어서자 한기우가 달려 나와 해윤을 반갑게 맞이했다. 병실이라고 하지만 그는 환자복을 입지 않은 평상복 차림이었다. 한지율에게 얻어터지고, 회장한테도 얻어맞았다더니 그의 얼굴엔 채 가시지 않은 폭행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거기다 극심한 금단 증상 탓에 얼굴이 영락없는 중병 환자 꼴이다. 한기가 드는 것인지 옷을 제법 두껍게 입고 있는데도 그는 사지를 떨고 있었다.

“사실 한 번은 찾아오지 않을까 싶어서 계속 기다렸는데. 찾아와 줘서 고마워. 해윤아.”

그가 핏기 가신 입술을 비틀어 힘겹게 웃어 보이며 해윤을 껴안으려 했다. 하지만 한지율이 그의 몸을 밀쳤다. 한지율을 쏘아보는 그의 두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최 실장이 투신했어. 형이 그랬지?”

한지율은 싸늘한 어조로 직구를 던졌다. 한기우가 해윤을 보며 씩 웃었다.

“죽을 새끼잖아. 안 그래? 감히 날 배신한 새끼를 살려 둬야 해?”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해윤이 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이었다. 속이 역했다. 어쩌면 그럴 수 있냐고 욕하며 소리치는 것도 지쳤다. 지금 제 눈앞에서 싱글거리며 웃는 저 남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저 남자는 한결같이 사람이 아니었다.

“해윤이 너도 천 팀장에게 계약 해지 하겠다고 했다면서? 너도 내가 이 꼴이 되니 빨아먹을 게 없어서 떨어져 나가려고? 한지율이 새 물주가 됐어? 저 새끼한테 벌려 주고 이제 저 새끼 등에 빨대 꽂아 빨아먹으려고? 한지율 저 새끼가 나보다 잘난 게 뭐야, 대체! 저 새끼도 어차피 널 이용하는 거야. 나한테 엿 먹이려고 널 갖고 노는 거야. 정신 차려!”

“석해윤 씨와 첫 연애를 해 볼 생각이니 그 점은 걱정하지 마. 형 인생이나 신경 써.”

한기우의 충혈된 눈이 한지율에게 향했다. 해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당신 입에서 언젠가 그 소리가 나올 줄 알았다고 하면 한지율은 비웃겠지. 그는 끊임없이 그랬다. 당신이 신경 쓰여서, 라고. 그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당신이 좋아서, 그 의미로 들렸다. 해윤이 말하는 당신이 신경 쓰인단 말은 좋아한다는 말과 같은 표현이었으니까.

“저도 한지율 씨 좋아합니다. 전무님.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때 절 무시하던 한지율 씨에게 이를 갈며 인정받고 싶었는데, 그게 첫사랑이었던 것 같아요.”

해윤도 담담하게 제 속마음을 털어놨다. 한기우를 사이에 두고 무미건조하게 고백을 주고받았다. 한지율의 얼굴을 보면서는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툭 튀어나왔다. 뱉고 나니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왜? 왜 나한테 이래? 왜 한지율이야? 왜 저 새끼야?”

“사람이 사람에게 끌리는 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전무님한테서 벗어나려고 계약 해지를 요청했습니다. 그래야 깨끗하게 손 털고 돌아설 수 있으니까요.”

“누구 마음대로?”

“제 마음이죠.”

“누가 그렇게 하도록 놔둔대? 너까지 나한테 왜 이래?”

“전무님은 사람을 둘이나 죽인 살인자예요. 범죄자입니다. 끔찍하고 혐오스러워요. 전무님은 절 벌레 취급하셨는데 제 눈에는 지금 전무님이 벌레로 보입니다.”

“씨발! 죽고 싶어? 다 죽고 싶냐고! 이렇게 된 거 다 죽는 거야. 다 가만 안 둬! 다 터뜨려 버릴 거야!”

“사람 되긴 그르셨네요. 그러니 신미라 씨도 못 버티고 죽죠.”

한기우가 눈을 치뜨고 악을 쓰며 해윤의 목을 조르려 달려들었다. 아까처럼 이번에도 한지율이 앞을 막아섰다. 금단 증상 탓에 그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저번보다 제압이 쉬웠다. 한지율은 수월하게 그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문 앞에 버티고 섰던 사내들이 달려왔다.

“댁들 돈은 누가 줄 건지 잘 생각하고 끼어들어.”

한지율의 말에 사내들이 멈칫했다. 한지율의 밑에 깔린 한기우가 압정 꽂힌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내 밑에 깔려 보니 기분이 어때? 한기우.”

아악아아악! 한기우가 악을 썼다. 한지율이 태연하게 하얀 손으로 한기우의 목을 졸랐다.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힘이 들어가는 것인지 그의 손등에 굵은 핏줄이 도드라졌다.

“미, 미쳤어? 새끼야? 이거 안 놔? 네깟 게 나한테 이래도 무사할 거 같아? 무사할 거 같냐고!”

목이 졸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도 한기우는 기세 좋게 떠벌렸다. 한지율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더 힘을 주어 한기우의 목을 눌렀다.

솔직히 꼴좋았다. 사람을 손끝으로 부리며 멋대로 휘두르다가 벌레처럼 눌러 죽이더니, 제가 저런 꼴을 당해 보니 기분이 어떤가 묻고 싶었다.

컥컥대던 한기우의 몸에서 어느새 힘이 풀어졌다. 꿈틀대던 사지가 축 늘어졌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사내들도, 해윤도 가만히 서서 그 꼴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대로 한기우가 목 졸려 죽는다 해도 누구 하나 슬퍼하지 않을 것 같았다.

“뭐 하시는 겁니까!”

직원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형이 발작을 너무 심하게 해서 진정시키고 있던 겁니다.”

한지율이 그제야 한기우의 목에서 손을 떼며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이었다. 직원이 달려와 늘어진 한기우의 상태를 살폈다. 직원이 뺨을 탁탁 치고 한기우 씨, 한기우 씨, 하고 부르자 그가 신음을 흘렸다.

한지율이 직원에게 다가가 지갑을 꺼내 수표를 꺼내 그의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제가 오늘 형의 상태를 직접 봤더니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저러다가 형이 자해하거나 하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결박시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발작이 심하긴 해요. 보호자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뭐….”

직원이 한지율을 보지도 않고 영혼 없이 지껄였다. 정신을 잃은 한기우를 놔두고 한지율과 해윤은 문 쪽으로 향했다. 해윤은 문 앞을 지키던 사내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중 유난히 까맣게 그을린 얼굴을 한 사내가 흘긋 해윤을 흘겨보았다. 그 얼굴이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이상하다 싶어 해윤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한 번 더 확인했다. 저 얼굴을 어디서 봤더라.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다가 주차장에 나왔을 때에야 머릿속에 떠올랐다.

일전에 박영민의 사무실로 찾아갔던 때, 엘리베이터 안에 올라탔던 사내였다. 해윤과 박지형이 박영민의 사무실이 있는 해당 층에 도착해 내렸고, 저 까만 얼굴을 한 사내가 안에 타며 저렇게 해윤을 흘겨보았었다.

“저, 한지율 씨.”

“박지형 씨와 성북동으로 가세요.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말을 걸려 하자 한지율은 급하게 자기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가 버렸다. 뒤에서 빵빵, 박지형이 차 클랙슨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유난히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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