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니 목이 부어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이틀 전, 한지율이 집까지 바래다준 때부터 온몸이 쑤시고 저리더니 열이 펄펄 끓었다. 평소엔 감기에 걸렸어도 푹 쉬면 금방 나았던 터라 방심한 게 화근이었다.
“목이 엄청 부었는데요. 시간 괜찮으시면 수액 한 대 맞고 가세요. 한결 나아지실 겁니다.”
의사의 말대로 침상에 누워 1시간가량 링거를 맞았다. 손등에 주삿바늘을 꽂고 기절하듯 자고 일어나니 몸이 좀 가뿐해진 것 같기도 했다.
“해윤 씨!”
약속 장소였던 대경 ENT 건물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송 비서가 해윤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감기 걸렸어요?”
송 비서는 얼굴만 보고도 해윤의 상태를 바로 알아챘다. 송 비서에게 대충 둘러댔다.
“어제 밤늦도록 공원에 나가 있었더니 이렇게 됐네요.”
“날씨도 추운데 왜 공원엘 나가셨어요?”
“노래 연습을 하려고요.”
“집에서 하시지.”
“지금 사는 곳이 다가구 주택이라 노래 연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웃 분들에게 민폐이기도 하고요.”
“하긴 그렇죠. 저도 아파트에 사는데 밤에는 TV도 크게 못 틀어요. 요샌 유료 연습실도 많은데 연습실로 가셨어도 될 걸.”
“몇 시간 정도는 밖에 있어도 괜찮을 줄 알았죠, 뭐. 제 체력을 너무 과신한 거죠.”
“빨리 이사하셔야겠다. 전무님이 해윤 씨 사시는 곳이 지하 움막 같다고 아주 치를 떠시던데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춥고 어두운 데서 살 수 있냐고 놀라워하시더라고요. 공사가 끝나기 전까지 전무님 댁에 가 계시지 그러셨어요. 전무님 댁에 쌔고 쌘 게 빈방인데.”
해윤은 대답 없이 웃고 말았다.
“병원은 다녀오셨고요?”
“네. 수액을 맞고 왔는데 한결 낫습니다. 콜록콜록.”
한결 낫다고 말하기가 무섭게 기침이 터져 나왔다. 해윤이 등에 둘러멘 기타 케이스도 덩달아 흔들렸다.
“저런. 오늘 같은 중요한 날에, 하필.”
송 비서가 말끝을 흐리며 해윤을 흘긋 보았다. 왜 하필 이런 날 감기에 걸렸느냐고 탓하는 듯한 어조였다.
“죄송합니다. 컨디션 관리를 잘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누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가요. 걱정돼서 하는 소리지. 그나저나 그 상태로 오늘 일정 소화하실 수 있겠어요? 지금이라도 일정을 미룰까요?”
“아닙니다. 어떻게 갑작스럽게 일정을 미룹니까.”
“안 될 건 뭐 있어요. 어차피 전무님이 이번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인데. 그런데 전무님도 몸 상태가 안 좋다고 하시던데, 해윤 씨는 아세요? 전무님, 어디가 아프신지?”
“저처럼 감기에 걸리신 게 아닐까요.”
해윤은 속이 뜨끔했지만 대충 둘러대고 말았다.
“하긴. 요새 계속 신경 쓰실 일이 많았으니까요. 그럼 전무님께 문자로 말씀드리고 일정을 미루도록 하죠. 나중에 해윤 씨 컨디션 좋을 때 다시 일정 잡는 걸로 해요.”
송 비서가 아무렇지 않게 지껄이며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당황한 해윤이 재빨리 말렸다.
“그러지 마세요. 오늘 오실 그분들도 다 바쁘신 분들일 텐데요. 전무님도 바쁘실 거고요.”
“어찌 됐건 해윤 씨가 이 프로젝트의 주인공이에요. 해윤 씨 상태가 제일 중요해요. 해윤 씨 몸도 안 좋은데 무리하게 일 시켰다고 제가 나중에 전무님한테 혼나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송 비서님. 지금도 충분히, 차고 넘치도록 배려받고 있는데 더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해윤은 다시 한 번 간곡한 어조로 송 비서를 설득했다.
“정말 괜찮겠어요?”
“네. 괜찮아요. 할 수 있습니다.”
해윤은 목소리에 힘을 실어 눈을 부릅떴다. 사실 온몸에 힘이 없어 쓰러질 것 같았지만 죽는 한이 있어도 버틸 생각이었다. 이게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오디션이 아니라 단순한 능력 평가일 뿐이니까요. 어차피 해윤 씨의 데뷔는 정해진 거니까 크게 부담 갖지 마세요.”
송 비서는 아무렇지 않게 사람의 자존심을 후벼 팠다. 이젠 무뎌질 만도 한데 새삼 아프다.
“안녕하십니까!”
복도를 걷는 두 사람 앞으로 갑자기 웬 덩치 커다란 남자가 달려들었다. 남자가 꾸벅 허리를 숙여 외쳤다.
“박지형이라고 합니다! 석해윤 씨. 반갑습니다!”
남자의 목청이 어찌나 큰지 온 복도가 쩌렁쩌렁 울렸다.
“아, 네. 박지형 씨. 그런데 누구십니까?”
“해윤 씨의 매니저예요.”
대답은 송 비서의 입에서 나왔다. 남자가 잘 부탁드립니다! 하며 다시 한 번 해윤의 앞에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박지형 씨.”
남자가 악수를 청하기에 해윤도 엉겁결에 손을 맞잡고 인사해 보였다.
“지형이가 해윤 씨보다 어리니까 말 놓으세요.”
“네. 편하게 지형이라고 부르십시오! 아, 그거 저한테 주세요. 제가 들어 드리겠습니다!”
송 비서의 말에 박지형이 또 목청껏 외치며 해윤에게서 기타 케이스를 받아 들었다. 됐다고 거절하기도 전에 박지형은 기타 케이스를 가져가 어깨에 둘러멨다.
“지형아. 목소리 좀 낮추지 않을래? 고막 터지겠다.”
“죄, 죄송합니다. 송 비서님!”
“목소리 좀 낮추라니까?”
“네. 송 비서니임.”
송 비서가 짜증을 내자 박지형이 금세 주눅이 들었다.
“지형이 얘가 체대 졸업생이라 이래요. 군대 갔다 와서 복학도 하지 않고 바로 중퇴하고 이 일에 뛰어들었대요. 비싼 등록금 들여 가면서 졸업해 봤자 비전이 없다나 뭐라나.”
“등록금이 다 빚이잖아요. 대학 졸업해도 비전도 없는 학과고. 요즘 같은 때 체대 나와서 뭘 하겠어요. 하루라도 빨리 돈 버는 게 낫다 싶었어요.”
“그래도 대학 졸업장 한 장 있는 것과 없는 게 얼마나 다른데. 우리나라에선 아직 학벌 없으면 제대로 인정 못 받아. 우리 회사도 원래 대졸 아니면 안 뽑아. 민오 씨 추천이 없었으면 우리 회사에 이력서도 못 내밀었어, 너.”
박지형이 완전히 기가 죽어 어깨가 축 늘어졌다. 가만히 듣고 있던 해윤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지형 씨. 괜찮습니다. 저도 가방끈 짧아요. 저 중졸이에요. 사정이 있어서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 못 했습니다. 저보다 학벌 좋으시면 됐죠.”
박지형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하게 펴졌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에요. 해윤 씨.”
송 비서가 겸연쩍게 웃으며 변명을 했다.
“네, 압니다. 괜찮아요. 전 신경 안 써요.”
해윤도 웃으며 맞받아쳤다. 자신의 형편없는 학벌이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건 사실 거짓말이었다. 송 비서의 말대로다. 학벌 없으면 사람 취급도 못 받는 세상이었다. 해윤도 그랬다. 학벌이 이 모양이라서 제대로 된 직장 하나 못 구했지 않나.
“근데 정말 고등학교도 졸업 못 했어요? 와아. 진짜 대단하시다. 인간 승리다, 정말. 존경합니다. 형님.”
박지형이 과한 칭찬을 늘어놓으며 해윤의 옆에 착 달라붙었다. 그의 태도가 부담스러워도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살다 보니 남한테 이런 말도 들어 보는구나 싶었다.
“형님이 뭐야. 형님이. 지형이 넌 덩치도 크고 인상이 험악해서 형님, 형님, 하면 조폭 같아서 무섭다.”
송 비서가 픽 웃으며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문자가 날아온 모양이었다. 그가 열심히 손가락을 놀려 문자를 보내는 사이, 해윤이 옆에 붙어선 박지형에게 말을 걸었다.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부르세요. 지형 씨.”
“네. 해윤 형. 형도 지형이라고 부르세요. 말 놓으시고요. 제가 아직 신입이지만 열정만은 남부럽지 않습니다. 앞으로 형과 함께하며 단물, 쓴 물, 다 감사히 받아먹으며 영혼을 활활 불사르며 일하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진 없어.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영혼을 불사르면 안 되지.”
해윤은 말을 하다 말고 잔기침을 터뜨렸다.
“어어. 형, 괜찮으세요? 어쩌지. 가수는 목이 생명인데. 물이라도 사 올까요?”
박지형이 과하게 부산을 떨기에 해윤은 손을 들어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입을 연 순간 더 큰 기침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잠깐 기다리세요! 말릴 새도 없이 박지형이 자판기를 향해 뛰어갔다. 운동했던 놈답게 박지형은 순식간에 생수를 사 들고 달려와 뚜껑까지 열어 해윤에게 건네주었다.
“일 잘하네. 지형이. 앞으로 계속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해윤 씨를 보살펴 드려야 한다?”
“네! 저만 믿고 맡기세요. 송 비서님. 제가 딸린 동생들만 줄줄이 세 명이라 남 보살피는 거 하나는 죽여주게 잘해요.”
부담된다고 끼어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해윤은 더 이상 지껄이지 말고 목을 아끼자 싶어 물만 홀짝였다.
일행이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서자 젊은 여성 두 명이 옆에 다가와 섰다.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이 넘쳐 나는 연예 기획사 건물 안에서도 눈에 띄게 우월한 미모를 지닌 여성들이었다. 그러나 송 비서는 그녀들에게 관심도 없었다. 해윤과 박지형만 사람이 저렇게 예쁠 수도 있구나 싶어 넋이 나가 여자들을 흘긋거렸다.
“송 비서님. 안녕하세요.”
여자 한 명이 송 비서를 알아보고 알은체를 해 왔다. 엘리베이터 숫자 계기판만 올려다보고 있던 송 비서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아, 홍미수 씨?”
“홍미서예요.”
“아, 맞다. 미서 씨. 제가 사람 이름을 잘 기억 못해요. 오랜만이네요. 미서 씨. 더 예뻐지셨네요.”
“송 비서님. 저, 곧 데뷔할 거 같아요. 얘가 우리 그룹 막내예요.”
“안녕하세요. 이라미입니다.”
옆에 있던 볼살 통통한 여자가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엘리베이터가 드디어 1층에 내려왔다.
“잘됐네요. 정말 축하해요. 제가 다 기쁘네요.”
송 비서가 영혼 없는 어투로 지껄이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올라탔다. 해윤과 박지형, 여자들도 뒤따라 올라탔다.
“몇 층 눌러요?”
송 비서가 6층 버튼을 누르며 홍미서에게 물었다.
“저희도 6층에 가요.”
홍미서가 중얼거리다가 아, 그런데, 하며 말을 돌렸다.
“한 전무님은 잘 지내고 계시죠? 리나가 워낙 대형 사고를 쳐 놔서 요새 엄청 심란하실 텐데.”
“잘 지내고 계십니다. 그런 일로 흔들릴 분이 아니니까요.”
“그렇죠. 한 전무님이 어떤 분이신데요. 근데 리나 걔가 원래 골 빈 애이긴 해요. 막내로 자라서 어리광 심하고 배려도 없고. 제가 럭키참에서 탈퇴한 것도 사실 리나가 절 왕따 시켜서 쫓아낸 거나 다름없었잖아요. 송 비서님도 아시겠지만.”
“아, 그랬어요? 전 몰랐던 사실이네요.”
송 비서가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홍미서의 옆에 서 있던 해윤은 그녀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전 언젠가 리나, 걔가 대형사고 칠 거라고 예상했었어요. 걔도 참 애가 생각이 없어도 그렇게 없을 수가 있나 싶어요. 어떻게 감히 한 전무님을 엮어서 그런 짓을 벌일 생각을 할까요.”
“미서 씨. 그 얘긴 그만해요. 가뜩이나 그 일로 골치 아픈데 더 듣고 싶지가 않네요.”
“죄송해요. 전 그냥 전무님이 걱정돼서 그랬어요. 한 전무님, 되게 좋은 분이신데 어쩌다 그런 애랑 엮이셔서. 그런데 저도 어디서 들은 소리인데요. 한 전무님이 이번에 대박 신인 하나 발굴해서 키우신다는 소문이 있더라고요.”
“그 소리는 어디에서 들었어요?”
송 비서가 홍미서를 흘긋 보며 물었다.
“사실 소문이 자자해요. 태미 오빠가 그러는데 그 신인이 자기처럼 인디 밴드 활동하던 사람 같다면서 기대가 크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러고 보니 송 비서님. 태미 오빠는 아세요?”
“알죠. 태미 씨가 그랬다고요? 기대가 크다고?”
“네. 근데 그 신인, 우리 회사 연습생은 아니죠? 부러워요. 얼마나 실력 좋은 신인인가 궁금하기도 하고요.”
홍미서는 자기 옆에 선 해윤에게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쉼 없이 조잘거렸다. 한기우 전무가 키우겠다고 나선 대박 신인이 제 옆에 선 사내놈인 줄도 모르고.
마침 엘리베이터가 6층에 멈춰 섰다.
“미서 씨. 안 내리세요?”
“아뇨. 사실 송 비서님을 오랜만에 뵈니까 너무 반가워서 좀 더 떠들고 싶었어요. 저희는 다시 연습실에 가 봐야 돼요. 데뷔 무대가 얼마 안 남아서 요새 하루 열두 시간 이상을 연습만 하거든요.”
송 비서의 말에 홍미서가 귀엽게 웃으며 종알거렸다.
“그래요? 연습 잘하세요. 미서 씨는 워낙 실력이 좋으니 금방 인정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간의 노력이 보답받길 바랍니다. 전무님께도 미서 씨의 데뷔 소식을 알려 드릴게요. 전무님도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송미서와 이라미가 동시에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여 인사했다. 송 비서가 웃으며 인사하곤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아까 쟤가 럭키참 멤버였어요? 왜 난 처음 보지?”
뒤따라 내린 박지형이 송 비서에게 물었다.
“럭키참이 데뷔하기 전에 탈퇴한 멤버였어. 리나가 들어오면서 팀 내 맏언니인 미서를 쫓아낸 것이나 다름없지. 사정이야 어찌 됐건 이번에 데뷔하게 됐다니 다행이네. 애가 끼도 많고 실력이 좋아서 아깝다 싶었는데.”
“그렇구나. 리나 걔가 소문대로 진짜 싸가지가 없나 보네요. 근데 아까 걔들 예쁘긴 진짜 예쁘더라고요. 특히 홍미서, 걔 완전 여신이던데. 얼굴 작고 다리 길고. 근데 눈은 엄청 크고. 걔가 럭키참에 남아서 그대로 데뷔했으면 당연히 센터 자리 먹었을 거 같던데요? 리나보다 더 예쁘고 몸매 좋던데. 아, 그래서 리나가 쫓아냈나? 자기가 센터 하려고?”
송 비서가 끊임없이 나불거리는 박지형을 보며 인상을 썼다.
“지형아. 입에 지퍼 좀 채워. 이 바닥에서 오래 버티려면 입이 무거워야 해. 행동도 각별히 조심하고. 리나 매니저, 걔가 어떻게 됐는지 너도 알지? 걔도 처음엔 성실하고 겸손하고, 애가 참 괜찮았어. 그런데 리나가 갑자기 빵 뜨니까 그 자식도 덩달아서 목에 힘이 들어가서 으스대다 그 꼴이 난 거지.”
“네. 조심할게요.”
송 비서의 말에 박지형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지형과 송 비서가 하는 소리는 해윤에게 들리지도 않았다. 어느 걸그룹의 비화, 그룹 멤버들 간의 불화, 그런 것들엔 관심도 없었다. 그들이 떠벌리는 연예계 가십이고 뭐고, 지금의 해윤에게는 시끄러운 소음일 뿐이었다. 또 기침이 터져 나오려 하기에 해윤은 물을 들이마셨다. 그때 송 비서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이사님.”
그의 입에서 나온 호칭에 해윤의 가슴이 철렁했다.
“해윤 씨요? 네. 지금 저랑 같이 있어요. 오늘 테스트 있는 날이잖아요. 감기에 걸리셨더라고요. 상태가 그리 나빠 보이진 않고요. 알겠습니다. 전무님은 좀 괜찮으시고요? 아아, 그렇구나. 제가 찾아뵙지 않아도 되겠어요?”
송 비서는 한지율과 몇 마디 더 나누고는 전화를 끊었다.
“한 전무님은 괜찮다고 하시던가요?”
해윤은 송 비서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무리해서 몸살이 나신 거 같다고 하시네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번엔 송 비서가 해윤을 흘금 보았다. 넌 뭔가 알고 있지 않느냐고 떠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저기, 얼른 들어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좀 늦은 것 같은데.”
박지형이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끼어들었다.
“아, 진짜 그렇네!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지! 서두르죠.”
그제야 송 비서도 깜짝 놀라며 해윤을 잡아끌었다. 세 사람은 동시에 복도를 내달렸다.
“죄송합니다. 좀 늦었습니다!”
박지형이 문을 열고 들어서며 우렁차게 사과 인사를 했다. 송 비서와 해윤도 뒤따라 들어가며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담았다. 박영민과 천 팀장, 그리고 낯선 사내 한 명이 심사 위원처럼 일렬로 늘어서 앉아 있었다.
“대스타 납셨네. 데뷔도 안 한 지망생이 스타병부터 거하게 걸리셨어.”
천 팀장이 대놓고 빈정거렸다. 옆에 있던 직원이 천 팀장의 팔을 쿡 찔렀다.
“왜? 내가 뭐 이상한 소리 했나? 아무리 빽이 좋아도 이건 아니잖아요. 벌써부터 이러면 앞으로 얼마나 더한 짓을 할지 뻔하지!”
자기 부하가 언성을 높여 떠드는데도 박영민 대표는 웃는 얼굴로 물만 마셨다. 다른 사람들도 아무 말 없이 곱지 않은 시선을 던졌다. 박지형은 어찌할 바를 몰라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송 비서가 입을 열려는 순간.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해윤이 먼저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박영민이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에이. 천 팀장. 겨우 5분 늦은 걸로 분위기 험악하게 왜 이래. 리나는 매번 늦었는데. 걔는 제시간에 온 적이 없었잖아. 전에는 CF 촬영장 스태프들 다섯 시간이나 기다리게 해 놓고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었다며?”
“리나랑 저 사람이랑 같아요?”
“천 팀장이 해윤 씨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건 아는데 그만해.”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누가 들으면 제가 애먼 사람 트집 잡아 괴롭히는 줄 알겠어요.”
천 팀장의 빈정거림을 무시하고 박영민이 쾌활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다들 바쁜 분들이니 할 일이나 합시다. 기타, 그거 해윤 씨 건가?”
“네. 제 기타를 집에서 가져 왔… 콜록콜록.”
“해윤 씨, 감기 걸렸어?”
“죄송합니다.”
죄송하단 말이 입에 뱄다. 입만 열면 미안하다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가지가지 하네! 천 팀장이 코웃음 치는 소리가 해윤의 귓전을 긁었다. 박영민이 눈을 흘겨 눈치를 줘도 천 팀장은 입을 비죽 내밀고 구시렁거렸다.
“해윤 씨. 괜찮겠어?”
“네.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가볍게 한 곡 불러 봐. 준비해 온 곡 있지?”
박영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똑똑똑,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 사내 한 명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박 대표님. 저 들어가도 될까요?”
사내가 열린 문 앞에 서서 박 대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해윤은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봤다. 태미였다. 라라송 밴드 태미. 그는 여전했다. 한창 인디 밴드 활동을 하던 때와 달라진 것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여전히 훤칠했고 웃음 띤 서글서글한 인상도 변함없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젊어진 것 같기도 했다.
“태미, 넌 왜 왔어?”
“오늘 테스트 받는다는 분이 어떤 분인가 궁금해서요. 조용히 앉아서 보기만 할게요.”
“그래. 들어와서 앉아.”
죄송합니다아. 태미가 웃는 얼굴로 인사하며 들어와 책상 맨 끝, 빈자리에 앉았다. 그는 기타를 꺼내들고 앉은 해윤에게도 고개를 까딱여 인사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태미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석해윤입니다.”
해윤도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갑자기 껴들어서 죄송해요. 해윤 씨가 저랑 같은 인디 밴드 출신이란 소리를 듣고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요. 근데 8년이나 밴드 활동하셨다면서요. 대단하시다. 러버덕이란 밴드를 들어 본 적은 없지만… 아, 제가 기억력이 별로라서 사람 이름도 잘 기억 못해요.”
“태미야. 그만 떠들어. 조용히 보기만 한다며. 해윤 씨. 시작해요.”
박영민이 수다스럽게 나불대는 태미의 입을 막았다. 태미의 등장으로 흐트러졌던 마음을 다잡고 해윤은 기타 리드줄에 손을 갖다 댔다.
“직접 작곡한 노래를 준비해 왔습니다.”
“자작곡이요? 와아. 해윤 씨, 작곡도 할 줄 아세요? 대단하다! 작곡 공부 따로 했어요? 저도 작곡 좀 하는데!”
태미가 또 호들갑을 떨었다. 태미야. 박영민이 또 한 번 이름을 부르며 눈치를 주자 그제야 태미는 입을 다물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해윤은 진지하게 말한 뒤, 기타 줄을 튕기며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러버덕 공연 당시 제법 반응이 좋았던 곡이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연습을 해 와서 손이 기억하고 목소리가 기억하는, 해윤이 제일 자신 있게 부를 수 있는 곡 중에 하나였다.
“잠깐 멈춰 보세요.”
그런데 느닷없이 목소리 하나가 날아들어 해윤의 노래를 중단시켰다. 태미였다. 해윤은 눈을 끔뻑이며 그를 보았다. 박영민을 비롯한 다른 사내들도 그 상황에 어이가 없는 건 마찬가지인지 얼빠진 얼굴로 태미를 바라보기만 했다.
“다른 곡, 준비해 온 건 없어요?”
“아, 네. 있긴 합니다.”
해윤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준비해 온 두 번째 곡을 연주했다. 후렴구까지 불렀을 때, 또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만하세요.”
이번에도 태미였다. 두 번째도 멋대로 노래를 중단시킨 그가 코웃음을 치더니 박영민을 바라보았다.
“대표님. 대박 신인이라면서요? 대박 신인이 아니라 대박 폭탄이잖아, 이거.”
“태미, 너 예의 없게 왜 이래?”
“저 사람의 어디가 대박 신인인데요? 밴드 활동 8년 했다는 것도 거짓말 아니에요? 어떻게 8년이나 활동한 사람 실력이 저 정도밖에 안 될 수 있어요? 기본도 안 되어 있잖아.”
박영민에게 따지듯이 쏘아붙이는 태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해윤의 얼굴이 시뻘겋게 익었다. 기타를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자작곡이라더니 무슨 애들 동요 같은 걸 노래랍시고 부르질 않나. 아니, 작곡이 애들 장난인 줄 알아요? 아무리 빽으로 밀어붙인다 해도 어느 정도 실력이 돼야 뭘 어떻게 해 볼 거 아니에요. 저런 기본도 안 된 사람을 나하고 팀으로 엮어서 데뷔시킬 생각이었어요? 날 대체 뭐로 보고.”
“태미 씨. 말이 지나치십니다. 해윤 씨가 오늘 감기에 걸려서 실력 발휘가 안 된 거예요.”
듣다 못한 송 비서가 나섰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도와주는 일이었을 텐데. 해윤의 고개가 한층 더 깊게 꺾였다. 못 견디게 치욕스러워서 고개조차 들 수가 없었다.
“컨디션 관리 제대로 못해서 감기에 걸린 게 자랑이에요? 실력이 없으면 노력이라도 해야지. 이건 뭐, 별 같지도 않은 게. 같은 인디 밴드 출신이란 게 부끄러울 정도네.”
태미 씨! 송 비서의 언성이 높아졌다. 천 팀장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어 얄밉게 입을 놀렸다.
“송 비서님. 흥분 가라앉히시고. 입에 발린 칭찬만 들으려고 테스트 받게 한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태미가 틀린 말한 것도 아닌데요? 솔직히 너무 형편없잖아요. 어느 정도 실력이 뒷받침이 돼야 뭘 해도 하는 거지, 이건 뭐. 저런 애를 어떻게 반 년 안에 데뷔시켜요? 맨땅에 헤딩하라는 격이잖아. 노 선생님. 쟤, 지금부터 트레이닝 시킨다고 될까요?”
“다들 나쁘게만 보시는데 전 긍정적으로 봅니다. 기본 목소리 자체가 나쁘지 않아요. 감기에 걸린 걸 감안하고서라도 목소리가 맑고 깨끗해요. 다듬어지지 않아 음정이 튀는 게 오히려 개성적이기도 하고요. 전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노 선생이란 사내의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그나마 해윤을 위로해 주었다.
“해 볼 만하긴 뭘 해 볼 만해요. 제가 왜 초보자 레벨에 맞춰야 하는데요? 전 싫어요.”
“싫으면 혼자 데뷔해야지. 별 수 있나.”
태미의 투정에 박영민이 차분한 어조로 대꾸했다.
“대표님도 들으셨잖아요. 저게 갈고 닦는다고 나아질 실력이에요? 우리 동네 공원에서 거리 공연하는 애들도 저것보단 낫겠어. 짜증 나 미치겠네. 이게 뭐야, 진짜!”
“나가라. 태미야. 시끄럽다.”
“대표님! 이건 진짜 아니잖아요!”
“나가라고.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박영민의 목소리가 한층 더 진지해졌다. 박영민뿐 아니라 아무도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자 태미가 씩씩대며 문을 쾅 닫고 나갔다.
“건방진 새끼. 애가 외모, 실력, 끼 다 있는데 인성은 없어요.”
“왜요. 빽이랑 돈도 있죠.”
박영민이 한숨을 푹 쉬며 내뱉은 말을 천 팀장이 실실 웃으며 받아쳤다.
“인성 더러운 애들이 제일 골치 아파요. 실력이 그저 그래도 착하고 성실한 애들은 어떻게든 갈고 닦아 키우면 되는데 실력이 있어도 인성 바닥인 애들은 나중에 꼭 대형 사고를 터뜨리거든. 리나 같이.”
“거기서 리나가 왜 나오나요. 걔가 그렇게 인성이 바닥은 아니었어요. 애가 어려서 철이 없던 거였지.”
밉살스럽게 나불대던 천 팀장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해윤 씨, 하고 부르는 소리에 해윤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부른 노 선생이란 자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목소리만큼이나 인상 좋은 사내였다.
“일단 푹 쉬어요. 목 상태 괜찮아지면 다시 한 번 보컬 체크업해서 트레이닝 일정 잡죠. 해윤 씨가 쉬시면서 할 수 있는 발성 호흡 법 같은 걸 핸드폰 문자로 보내 드릴게요.”
“노 선생님. 석해윤 씨한테 사적인 연락 같은 거 하시면 한 이사님한테 혼납니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갑작스러운 박영민의 말에 노 선생이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한 이사님한테 허락 받고 해윤 씨한테 연락해야 하는 거잖아. 그렇지?”
박영민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빈정거렸다. 당황한 해윤이 격하게 정색하며 말을 둘러댔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언제든지 연락하셔도 됩니다.”
“알겠어요. 나중에 문자 보내 드릴게요. 전 보컬 트레이너 노경진이라고 해요.”
“네. 노 선생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해요.”
노 선생의 웃음 띤 눈매가 모양 좋게 휘어졌다.
“전 해윤 씨가 진흙 속의 진주라고 생각해요. 제가 이끄는 대로 성실하게 잘 따라와 주시면 진주가 되게 해 드릴게요. 8년의 밴드 활동 경력은 잊으세요. 신인의 마음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까 홍미서와 이라미가 그랬던 것처럼 해윤도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잘해 봅시다. 노력은 어떤 식으로든 결실을 맺습니다. 해윤 씨는 왠지 느낌이 좋아요. 해윤 씨랑 함께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노 선생이 웃으며 해윤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의 다정한 위로에 해윤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어깨를 두들기는 그의 손은 크고 따뜻했다. 해윤도 이 남자와 함께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송 비서가 한지율에게 보고할 것이 있다며 가는 길에 그의 사무실에 잠깐 들렀다. 한지율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안 계시네. 어디 나가셨나 보다. 해윤 씨. 잠깐 지형이랑 박 대표님 만나 뵙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줘요. 몸도 안 좋으신데 앉아서 쉬고 계세요.”
송 비서는 그렇게 말하며 해윤을 빈 사무실에 남겨 두고 나갔다. 주인 없는 사무실 소파에 앉아 있다 보니 어느새 저도 모르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어느새 송 비서와 박지형이 돌아왔는지 두 사람의 수군거림이 아득한 곳에서 들리는 이명처럼 울렸다.
해윤 씨, 많이 피곤하신가 보다. 그새 깊게 잠드셨네. 송 비서의 목소리가 울렸고 박지형이 해윤을 깨우는 소리가 이어졌다. 해윤 형, 형, 일어나 봐요. 송 비서가 박지형을 말렸다. 깨우지 마. 눈 좀 붙이게 놔둬. 나가자.
이어지는 발소리.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그리고 정적. 머리맡에서 울리던 두 사람의 수군거림이 사라졌다. 해윤은 더 깊게 수마의 늪 속에 빠져들었다.
‘미안하다. 해윤아.’
늪의 수면 위로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났다. 초췌한 몰골을 한 그가 침통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내가 너나 네 엄마를 볼 면목이 없다.’
아버지의 붉게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아버지가 울고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버티던 사람이.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아버지.’
해윤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해윤이, 네가 그토록 좋아하던 노래나 실컷 부르게 해 줬으면 좋았을 것을.’
‘지금부터라도 부르면 되죠.’
‘그래. 지금부터라도 실컷 불러라.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
‘그럴 거예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 거예요. 아버지가 그러셨죠? 너 같은 게 어떻게 가수가 되고, 어떻게 그 힘든 바닥에서 버티겠냐고. 근데 봐요. 아버지. 저 잘 버티며 살았어요. 지금까지도 잘 살아왔으니 그 힘든 바닥에서도 잘 버틸 거예요.’
‘그래. 내 아들. 기특하다. 장하다.’
아버지가 웃었다. 그의 얼굴에 번진 자상한 미소를 보며 해윤은 이것이 꿈이란 걸 확실히 절감했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당신의 하나뿐인 자식을 칭찬한 적이 없었다. 해윤은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늘 모자라는 아들이었다.
꿈속이니까 그 차갑고 단단하던 아버지가 울고, 웃고, 아들을 칭찬한다. 이젠 꿈속에서나마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네 엄마를 잘 부탁한다. 너도 부디 잘 살아라. 이 아비처럼은 되지 마라.’
‘아버지는 엄마랑 제가 눈에 밟혀서 어떻게 눈감으셨어요.’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여 눈물만 흘렸다. 꿈속이니 해윤도 용기를 냈다. 먼저 손을 뻗어 아버지의 어깨를 감싸 안고 굽은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도 아버지. 고마웠고 사랑했어요. 엄마는 제가 보살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이제 그만 편히 쉬세요.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아버지의 눈물이 해윤의 어깨를 흠뻑 적셨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한 번이라도 이럴 것을. 아버지를 껴안고 수고하셨다고 위로 한마디 해 드릴 것을. 해윤의 눈에서도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어머. 정말 자고 있네.”
날아든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수마의 웅덩이 속에 빠져 있던 해윤의 의식을 확 끌어당겼다. 갑자기 눈이 반짝 뜨였다. 잠에서 깨어났는데도 정신을 차릴 수 없어 해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천장만 바라봤다.
잠시 자리를 비운 한지율의 사무실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감기약을 먹은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약 기운에 취해 자기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의 사무실 소파에 드러누워 단잠을 자다니.
“누군데 지율 씨 사무실에서 자고 있어요? 어째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하고.”
“조용히 하세요. 깨겠습니다. 아파서 잠든 것 같으니 놔두세요.”
젊은 여자의 목소리에 이어 한지율의 목소리가 해윤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어째 일어나는 게 오히려 곤란한 상황 같아 해윤은 다시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아, 기억났다. 쟤 그때 걔구나. 전에 기우 씨 집에 찾아왔던 멍청한 애. 대뜸 나한테 팬이라고 사인해 달라고 하던 애였다.”
여자가 손뼉을 탁 치며 조잘거렸다. 민지유일 것이다. 한기우의 집에서 마주쳤던 여자라면.
“애라뇨. 서른 넘었습니다, 저 사람.”
“그렇게 나이 많아요? 당연히 나보다 어릴 줄 알았는데. 근데 이 사람도 배우 지망생이래요? 라인, 뭐였는데 라이언스타? 들어본 적도 없는 이상한 기획사였는데.”
“라인맥스겠죠.”
한지율이 코웃음을 치며 민지유의 말을 받아쳤다.
“맞다. 라인맥스. 그 기획사에도 참 인물 없나 보네. 보내려면 좀 젊고 괜찮은 애를 보내든가. 기우 씨 취향이 얼마나 까다로운데. 이 사람도 그래. 나이 서른 넘어서 몸 로비하고 그러는 거 쪽팔리지도 않나. 그것도 남자가 남자한테.”
“목소리 좀 낮추세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뭐 어때요. 누가 우리 얘기를 엿듣는다고. 지율 씨는 지나치게 조심성이 많아서 세상 살기 참 피곤하시겠다.”
“이 안에는 보는 눈도 많고 듣는 귀도 많아요. 대낮부터 할 소린 아니지 않습니까. 나가서 얘기합시다.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시지 갑자기 들이닥치시면 어쩝니까.”
“나도 스케줄 빡빡해요. 짧게 용건만 얘기하고 나갈게요. 제 소속사 이적 문제, 어떻게 됐어요? 내가 분명 대경 ENT로 옮기고 싶다고 말했는데.”
“TnD와의 계약기간이 아직 남았지 않습니까.”
“무슨 상관이야. TnD는 리나 그 계집애 하나 때문에 망하기 일보 직전인데. 럭키참이 대박 터뜨려서 망해 가던 기획사 살린 건 맞지만, 썩은 부분은 도려내고 남아 있는 연예인들한테 잘해야지. 그딴 짓을 했는데도 리나를 끌어안고 가려는 거 보니 정 떨어져요.”
한지율이 짜증 섞인 어조로 민지유에게 쏘아붙였다.
“그러니까 그런 문제는 TnD 대표와 상의하시란 말입니다.”
“그 인간이랑은 말 섞기도 싫어요. 내가 최근에 찍은 영화나 드라마가 좀 안 풀리긴 했어. 그렇다고 나를 그런 취급 하면 안 되잖아. 그렇죠?”
한지율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손으로 미간을 누르며 짜증을 억누르는 그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저한테 이러실 게 아니라 기우 형과 얘기하세요.”
“기우 씨가 제 연락을 받지 않으니까 찾아온 거예요. 대경 ENT에서 영화 하나 준비한다고 어제인가 오디션 공고 떴던데. 주 조연 여배우와 남자 배우를 오디션으로 뽑는다고. 주연 여배우는 아직 확정 안 된 거죠?”
“<천적>, 그 영화 건이라면 오디션 보세요. 주연 여배우는 확정됐습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안 그래요? 그거 분명 제 영화 아니었어요?”
민지유가 날카롭게 외쳤다.
“누가 그럽니까? 그 영화 민지유 씨 거라고.”
한지율이 차갑게 반문했다. 민지유의 목소리가 한층 더 거칠어졌다.
“기우 씨가 그랬어요. 영화 준비해 보라고 그랬다고요. 준비하고 있는 대작 영화 하나 있다면서. 지율 씨. 기우 씨한테 전화 좀 걸어 줘요. 당장 기우 씨와 통화해야겠어. 어서요!”
“소란 피우지 말고 나가시죠.”
“기우 씨 대체 어디에 있어요? 어제 집으로 찾아갔는데도 아무도 없던데. 기우 씨, 또 외국으로 도피했어요?”
똑똑똑.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무실이 떠나가라 악을 쓰던 민지유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차를 늦게 내 드려 죄송합니다.”
곧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며 커피 잔이 부딪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아까 해윤에게도 따뜻한 차를 가져다주었던 김 비서라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고마워요, 김 비서. 한지율이 차를 내 온 비서에게 인사하며 민지유에게도 차를 권했다.
“앉아서 커피나 한잔하시죠.”
“됐어요. 제가 한가하게 커피나 마시려고 온 줄 알아요? 갈게요. 나중에 얘기해요.”
민지유가 매섭게 쏘아붙이곤 문을 쾅 닫고 나갔다.
“김 비서. 고마워요. 딱 좋은 타이밍에 들어와 주셨네요.”
“이사님이 곤란하신 것 같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왔어요.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습니까. 잘하셨어요. 김 비서님 덕분에 요새 일하기가 한결 수월해요.”
“감사합니다. 나가 볼게요.”
민지유에 이어 김 비서도 조용히 물러났다. 한지율이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 안에 울려 퍼졌다.
“깨어 있는 거 아니까 일어나시죠.”
해윤에게 건네는 말일 것이었다. 해윤은 그제야 부스스 일어났다. 몸 위에 덮여 있던 담요가 소파 아래로 떨어졌다.
“피라냐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리나나, 민지유나, 당신이나. 당신 같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한기우에게 달려들어 뜯어먹으려고만 하지. 돈의 향기가 아주 기가 막히죠?”
저 남자는 대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걸까. 해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남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대답이 어떤 건지도 모르겠고, 그의 비위를 맞춰 줘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해윤이 침묵하자 한지율도 말없이 커피를 홀짝였다.
“어때요? 몸은 좀 괜찮습니까?”
웬일로 그의 어조가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네. 멀쩡합니다. 감기에 걸리긴 했어도. 감기 정도야 금방 나으니까요.”
“그러게요. 의외로 멀쩡해서 놀랍군요. 마약 부작용이 꽤 심했을 텐데.”
“제가 보기보다 꽤 튼튼해서요.”
“가진 게 쥐뿔도 없으니 몸이라도 튼튼해야죠.”
한지율이 앞에 놓인 커피 잔을 들어 올리며 빈정거렸다. 어쩐지 웬일로 다정하게 구나 싶었다. 해윤은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들어 탁탁 먼지를 털었다.
“이 담요 누구 건가요?”
“제 겁니다. 거기 놔두세요.”
해윤은 미간을 좁혔다. 이 앙증맞은 곰 캐릭터가 그려진 담요가 한지율의 것이라니. 김 비서의 것이라면 납득이 갈 텐데. 곰 캐릭터 담요를 뒤집어쓰고 일하는 한지율의 모습을 상상해 보다가 관뒀다.
“한지율 씨가 담요를 덮어 주신 겁니까?”
“추운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주무시는데 불쌍해서 그냥 두고 볼 수가 있어야죠. 어째 당신은 잘 때조차 그렇게 불쌍합니까.”
호의는 고맙지만 순수하게 고마워할 수가 없다. 저놈의 밉살스러운 입 때문에.
“어쨌든 고맙습니다. 죄송하기도 하고. 감기약이 독했는지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네요. 그런데 담요가 참 귀여워요. 폭신하고 따뜻하고.”
“눈독 들이지 마시죠. 제가 제일 아끼는 겁니다. 유명한 해외 디자이너가 100장만 만들어 판 한정판 담요입니다, 그거. 러시아 그리즐리 베어 털로 만들었다고 하죠.”
한지율이 커피를 마시며 거만하게 지껄였다. 해윤이 깜짝 놀라 개어 놓았던 담요를 다시 펴들었다.
“정말요? 어쩐지 촉감이 뻣뻣하긴 하네요. 곰 털로 담요도 만드나 보네요.”
“농담입니다. 김 비서가 화장품 사고 사은품으로 받았다며 준 겁니다. 곰 털로 어떻게 담요를 만듭니까?”
신기해서 담요를 이리저리 살피던 해윤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한지율 씨. 오늘따라 굉장히 유치하게 구시네요.”
“이런 유치한 농담에 말려드는 석해윤 씨 수준도 알만 합니다.”
해윤의 반응이 아주 만족스러운지 그는 의자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 커피를 마셨다. 그제야 담요 끝에 붙은 메이드 인 차이나 라벨이 해윤의 눈에 들어왔다. 더 이상 상대하기도 귀찮아 해윤은 펼쳐 들었던 담요를 다시 곱게 개어 소파 위에 올려 두었다. 김 비서가 민지유의 몫으로 가져온 커피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목이 칼칼해 해윤은 커피 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한 전무님은….”
“그 인간이라면 멀쩡합니다. 그 인간 얘기는 하지 말죠. 오늘 테스트는 어땠습니까?”
해윤이 어렵게 입에 올린 말을 한지율은 단칼에 잘랐다.
“제 노래 실력이 형편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기본도 안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그걸 지금 아셨습니까? 석해윤 씨 노래, 형편없습니다. 제가 그랬죠. 석해윤 씨한테는 가수로서의 재능이 1g도 없다고.”
한지율은 가뜩이나 형편없이 뭉개진 해윤의 자존심을 자근자근 짓밟았다. 저 남자에게 형편없다는 소리를 들은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새삼 아프다.
“그래도 보컬 트레이너가 타고난 목소리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노 선생이라면 누구한테나 그렇게 말씀하시죠.”
하지만 한지율은 또 사정없이 해윤의 자존심을 후려쳤다. 그는 노트북 화면을 보며 해윤에겐 시선도 건네지 않고 중얼거렸다.
해윤은 입을 닫았다. 아무리 입 아프게 떠벌려 봤자 돌아오는 건 비웃음뿐일 것이다. 해윤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또 기침이 터져 해윤은 손으로 입을 막고 콜록거렸다.
“그 목 상태로 오늘 테스트를 본 겁니까?”
“네. 컨디션 관리 제대로 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한지율이 또 트집을 잡아 빈정거리기 전에 해윤은 얼른 말을 자르며 일어섰다. 한지율도 컴퓨터 전원을 끄고 옷을 챙겨 일어섰다.
“같이 나가죠. 저도 외근 일정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자 김 비서도 따라 일어섰다. 그녀는 이미 겉옷까지 챙겨 입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송 비서님이 한지율 씨에게 할 얘기가 있다고 하시던데.”
“송 비서와는 전화 통화했습니다. 해윤 씨는 연락 안 하셔도 됩니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해윤은 눈만 끔뻑거렸다.
“저도 송 비서님한테 연락을 해야 하는 건가요?”
“송 비서가 아니라 해윤 씨 매니저한테 말입니다. 오늘 매니저 만나셨죠? 매니저가 해윤 씨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연락해 주셔야죠.”
“아, 지형이요? 지형이가 왜 저를 기다릴까요. 따로 만날 약속을 한 것도 없는데.”
멍청하게 지껄이는 해윤이 한심하다는 듯, 한지율이 한숨을 내쉬었다.
“박지형 씨는 해윤 씨의 매니저입니다. 매니저의 뜻이 뭔지는 아시죠? 이제부터 한 팀이 되어 일정을 함께해야 하는 파트너란 말입니다. 앞으로 출퇴근 시 이동할 때도 매니저와 함께 차를 타고 움직여야 하는 겁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 되는데요.”
한지율의 눈매가 움찔 떨렸다. 석해윤 씨, 하고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말실수를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왜 저럴까 싶었다. 다행히 그때 해윤 형! 하고 박지형이 외쳐 부르는 소리가 날아왔다. 박지형이 해윤을 발견하고 한달음에 뛰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한지율 이사님이시죠? 박지형이라고 합니다!”
녀석이 온 복도가 떠나가라 목청 크게 외쳤다. 송 비서가 있었다면 한소리 들었을 게 분명했다.
“박지형 씨. 잘 부탁합니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운이 넘쳐서 좋군요.”
“제가 넘치는 힘 빼고는 시체인 놈입니다. 힘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네. 박지형 씨는 힘 빼고는 시체인 사람 같습니다.”
한지율이 무표정한 얼굴로 지껄이는 소리에 박지형이 미간을 좁히고 눈만 깜빡거렸다. 녀석이 해윤을 보며 눈으로 물었다. 저 사람이 무슨 의도로 자기한테 저런 말을 하는 거냐고 묻는 듯했다. 의도는 무슨. 농담을 한 거겠지.
“무슨 운동을 하셨습니까? 체대 나오셨다고 들었는데.”
“유도과였습니다. 근데 졸업은 못했고 중퇴하고 바로 이 일에 뛰어들었는데 운 좋게 대경 같은 대기업에 취직 돼서….”
“박지형 씨. 술 좋아하십니까?”
한지율은 박지형의 말을 뚝 잘라먹고 질문했다.
“술을 좋아하진 않지만 술자리 분위기를 즐기는 편이에요. 제가 사람 많고 시끌벅적한 걸 좋아해서.”
“술 조심하십시오. 여자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한지율이 먼저 내렸다. 김 비서가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그의 뒤를 요령 좋게 따라 갔다.
“이사님은 제가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왜 저렇게 차갑게 구시지?”
“저분은 누구한테나 저래. 신경 쓰지 마.”
“무서운 분이라고 듣긴 했는데 직접 보니 더 무섭네요. 아, 근데 형. 형. 테스트 장에 난입했던 그 건방진 새끼요. 태미? 그 새끼 대체 뭐예요? 거지같은 새끼가 어디서 감히 건방지게 그 지랄이야. 달려가서 엎어치기 해 버리려다 참았네. 형. 그 새끼가 또 형한테 건방지게 굴면 말해요. 내가 찍소리 못하게 손봐 줄게요.”
박지형은 주차장으로 가는 내내 끊임없이 나불거렸다. 녀석이 떠벌리는 소리가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민지유가 지껄이던 소리가 불쾌한 형태를 띠고 해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이 서른 넘어서 몸 로비하고 그러는 거 쪽팔리지도 않나. 그것도 남자가 남자한테.’
누가 누구한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자기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몸을 던졌으면서.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치욕에도, 모욕에도, 저속한 비난에도. 한기우의 집에 찾아가 개처럼 그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을 때부터 자신은 인간다움을 포기했지 않나. 대가 없는 소득은 없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박지형이 잔뜩 신이 난 애처럼 어딘가로 쪼르르 달려갔다. 박지형이 스마트키를 누르자 어디선가 삐빅, 소리가 나며 시동이 켜졌다.
“차 멋지죠? 죽여주지 않아요?”
박지형이 시동이 켜진 차 앞에 서서 자기 차를 자랑하듯이 으스댔다. 한지율이 타고 다니는 것과 같은 브랜드의 검은 외제 차였다. 그것도 카시트 커버도 뜯지 않은 새 차.
“송 비서님이 저한테 키 주셨어요. 이거 형 차래요. 데뷔하기 전까진 이 차로 이동하며 일정 소화하고 데뷔하면 팀 앞으로 차 한 대가 더 나올 거래요.”
“내 차라고?”
“네. 그렇대요. 집에 차를 세워 두고 연습 스케줄 있을 때만 제가 형 집으로 와서 차를 운전할게요. 어떻게 하실래요? 여기서 헤어져서 형 혼자 집으로 가실래요? 아니면 제가 집까지 운전해서 모셔다 드려요?”
광이 번쩍번쩍 나는 차체를 넋 놓고 바라보느라 박지형이 지껄이는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해윤 형, 하고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해윤은 정신이 들어 박지형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하실 건지 말씀해 주셔야죠.”
“어, 어어. 내가 운전해서 갈게. 차 키 줘.”
“아픈 형 혼자 보냈다고 송 비서님한테 한소리 들을 텐데.”
“송 비서님한테는 비밀로 할게. 집으로 가서 쉬어. 첫날이라 잔뜩 긴장해서 피곤할 텐데. 집이 어디야? 집까지 바래다줄까?”
“저도 차 있어요. 사촌형이 준 건데 똥차라도 아주 잘 굴러가요.”
박지형이 씩 웃으며 해윤에게 키를 건넸다. 짧게 인사한 후, 두 사람은 그대로 헤어졌다. 박지형이 몸을 홱 돌려 건들거리며 주차장 안쪽으로 걸어갔다. 해윤도 차에 올라탔지만 곧바로 이동하지 않고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평생 자기 소유의 차 한 대 가져 본 적 없는 인생이었는데. 커버도 벗기지 않은 시트에서 고급스러운 가죽 냄새가 향긋하게 풍겼다. 사방에서 풍기는 더없이 달콤한 돈의 향기. 해윤은 안전벨트를 매고 차 키를 꽂아 넣었다. 육중한 엔진 음과 함께 몸 전체에 느껴지는 진동.
감기가 싹 낫는 기분이었다. 몸속에 마약을 강제로 주입당했던 때처럼 해윤은 벅찬 고양감에 휩싸였다.
한지율의 말대로 자신은 피라냐였다. 리나처럼, 민지유처럼. 한기우라는 탐스러운 고깃덩이가 풍기는 향기로운 돈 냄새에 홀려 이빨을 드러내고 환장하고 덤비는 존재.
해윤은 백미러에 비치는 제 모습을 흘긋 보았다. 빛나는 두 눈이 탐욕에 젖어 번들거렸다.
***
수술 후, 별다른 이상이 없이 회복이 빨라 어머니는 하루 만에 중환자실에서 벗어나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이모는 1인실이라 그런지 병원이 집보다 더 편하고, 밥도 맛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 언니가 퇴원하면 새 아파트에 들어가 살 수 있을 거라더라. 해윤아. 난 아직도 꿈같아. 눈을 뜨면 물거품이 돼서 다 사라질 것 같아.
감격에 겨워 이모의 목소리가 떨렸다. 해윤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뜨면 모든 게 다 꿈이었고, 아침부터 사채업자가 들이닥치는 구질구질한 일상이 시작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늘의 아침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차 키도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 해윤이, 너 위험한 일 하는 거 아니지? 처음엔 우리 해윤이가 엄청 출세했구나 싶어서 기쁘기만 했는데 이젠 좀 무섭다, 얘.
“무서울 건 뭐 있어요.”
- 너 괜찮은 거지? 이모가 살아 보니까 그래. 세상에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 언니 수술 끝나니까 쓸데없는 걱정이 밀려드네.
이모의 말이 맞다. 세상에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해윤은 붕대를 감아 놓은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묶인 자국이 사라질 만하면 다시 묶여 살갗이 쓸리고 피멍이 들어, 붕대를 감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보여 줄 수가 없게 된 손목.
“걱정하실 것 없어요. 제가 애도 아니고. 제가 누구예요? 해윤이잖아요. 이모 조카.”
해윤은 애써 쾌활한 목소리를 쥐어짜 내 이모를 안심시켰다.
- 그래.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네가 어떤 애인데.
“이모. 어머니 몸 좀 괜찮아지시면 서울에 와서 같이 사실래요?”
- 식당은 어쩌고.
“식당 일은 하지 마세요. 요새 불경기라 식당에 손님도 없다면서요. 제가 요새 부쩍 외롭고 마음이 허해서 그래요. 어머니가 걱정돼서 일도 손에 안 잡히고.”
- 하긴 그건 그래. 가게 임대비가 더 나가긴 해. 언니 건강 좀 나아지면 생각해 보마. 밥 잘 챙겨 먹고 건강 조심해. 우리가 해윤이 네 덕분에 산다. 요새. 너 없으면 못 살았을 거야.
“저도요. 이모랑 엄마, 두 분 안 계시면 저도 못 살아요.”
- 사랑해. 우리 조카.
이모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갑자기 이모가 미친 듯이 보고 싶었다. 어머니가 한없이 그리워졌다. 이모가 해 주는 밥을 먹고 싶었고 어머니한테 어울리지 않게 애교도 피워 보고 싶었다.
부산 이모나 어머니와 통화하고 나면 꼭 이렇게 상념이 밀려든다. 하지만 구질구질한 자기 연민이고 배부른 투정일 뿐이다. 조카에게 전화해 울며 하소연하던 이모는 웃고 있다. 어머니도 편안한 1인 병실에 누워 계신다. 과거의 불행도, 현재의 행복도 돈이 가져다주었다.
핸드폰 알림 음이 울렸다. 은행 계좌에 돈이 입금되었다는 문자였다.
500만 원. 입금인은 대경 ENT.
「매달 지급되는 기본 활동비예요. 금액이 적어서 죄송해요. 모자라면 언제든 말씀하시고요.」
송 비서의 문자도 함께 날아들었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기본 활동비라고 한다. 쉬는 날도 없이 죽도록 일하던 때에도 벌어 본 적 없던 액수의 월급. 적은 금액이라고 미안해할 돈인가, 이게.
너덜너덜한 손목의 상처는 가리면 그만이다. 몸의 상처는 언젠가 낫는다.
해윤은 일부러 부산을 떨며 움직여 옷을 챙겨 입었다. 박지형은 정확히 10시에 해윤의 집 문을 두드렸다. 마침 해윤도 신발을 신고 나가려던 참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박지형이 안녕하세요, 형, 하며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푹 쉬셨어요? 몸은 좀 괜찮으시고요?”
“응. 이젠 괜찮아졌어.”
2층 주인집 아저씨가 일부러 나와서 아래를 내다봤다. 얼마 전에 해윤이 방을 내놓고 이사 간다고 통보하자 그는 왜 방을 빼느냐, 이사 가는 데가 어디냐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총각, 로또라도 당첨됐어? 이런 데 사는 주제에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비싼 차를 사? 요새 젊은 사람들은 지하 방에 살면서도 차는 좋은 거 몰고 다니지. 한심해. 쯧쯧.’
어제는 집 앞에 주차된 해윤의 차를 보더니 못마땅하다는 듯 해윤을 꼬나보며 잔소리를 늘어놓던 사람이었다.
“저 아저씨 왜 저렇게 우릴 노려봐요?”
박지형이 2층을 흘금 보며 인상을 썼다.
“신경 쓰지 마. 그냥 남의 일에 참견하며 사는 게 인생의 낙인 사람이야.”
“근데 형. 왜 이런 데 사세요?”
녀석은 대뜸 무례한 질문을 던졌다.
“이런 데라니? 여기도 사람 사는 데인데.”
“기분 나빠 하시라고 한 말은 아니고요. 송 비서님이 그러셨거든요. 형이 XX동에 있는 아파트에 사신다고. 그래서 오늘 형네 집 위치 듣고 좀 놀랐어요.”
“곧 그리로 이사 갈 거야.”
“역시 그렇죠? 형 같은 사람이 이런 집에 사실 리가 없죠. 제가 사는 원룸도 이 집보단 나은데.”
해윤은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나불대는 박지형에게 묻고 싶었다. 나 같은 사람이라니.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데? 이죽대며 시비 거는 것도 피곤한 일이라 관뒀다. 골목 구석, 전봇대 아래에 고물 리어카를 세워 두고 파지를 정리하는 할머니가 보였다. 옆집에 사는 할머니였다.
“어디 나가? 좋은 데 가나 봐? 옷 멋있는 거 입었네.”
할머니가 해윤을 알아보고 굽은 등을 펴며 웃어 보였다.
“네. 할머니. 좋은 데 가요. 저 오늘 멋져요?”
“응. 멋져. 해윤 총각은 참 잘생겼어. 근데 요새도 나쁜 놈이 와?”
할머니가 말하는 나쁜 놈이라는 건 해윤의 집에 찾아오던 사채업자를 지칭하는 소리였다. 사채업자의 느닷없는 방문에 해윤이 곤혹스러워할 때 할머니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겁도 없이 덩치 산만 한 사채업자에게 삿대질을 하며 욕을 하고 막대기를 휘둘러 놈을 쫓아내 줬다.
“아뇨. 요샌 안 와요. 할머니가 무서워서 안 오나 봐요.”
“다음에 나쁜 놈이 또 오면 날 불러. 내가 또 쫓아내 줄게. 밥 굶지 말고 잘 챙겨 먹고 다니고.”
이 동네를 벗어나게 되면 가장 생각나는 게 이 할머니일 것 같다. 할머니한테 몇 번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가끔 퇴근길에 할머니 좋아하시는 단팥빵 같은 걸 사 들고 와서 드리곤 했었는데.
“할머니도 밥 굶지 마시고 끼니 꼭 챙겨 드시고요. 그리고 저 다음 주에 이사 가요.”
“응? 해윤 총각, 장가가나?”
“그건 아니고요. 다른 데로 집을 옮겨요.”
“아쉽게 됐네. 총각이 이 할미 말동무해 주고 집에도 찾아와 주고 해서 덜 외로웠는데.”
“이사 가도 가끔씩 할머니 뵈러 찾아올게요. 집에 들어올 때 할머니 좋아하시는 간식 사올 테니까 주무시지 말고 계세요.”
할머니가 웃으며 파지를 리어카에 실었다. 해윤이 도우려 하자 옷 버린다고 건드리지도 못하게 했다.
“날씨도 추운데 고생 많으시다 저 할머님도.”
해윤이 차에 올라타자 박지형이 차창 너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파지를 리어카에 실어 덮개를 씌운 할머니는 작은 캐리어를 달달 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할머니는 오늘도 하루 종일 차가운 길바닥을 돌아다닐 것이다.
해윤은 고개를 약간 저어 슬며시 밀려드는 우울한 상념을 떨쳤다.
박지형이 차를 출발시켰다. 녀석은 능숙한 운전 솜씨로 좁은 골목에서 벗어났다.
“너 운전 잘한다. 이 동네가 골목이 좁아서 운전하기 힘든데.”
“군대 있을 때 운전병이었거든요. 오늘 해윤 형의 일정은 오후 2시에 노 선생님을 만나 뵙고… 아, 잠깐만요. 송 비서님한테 전화 왔다.”
종알거리던 박지형이 말을 멈추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꼈다.
“네. 송 비서님. 연습실로 가고 있어요. 해윤 형이 아침부터 연습하고 싶다고 하셔서. 네? 전무님이요? 알았어요.”
짧게 통화를 끝낸 박지형이 해윤에게 말을 건넸다.
“형. 지금 대경 본사로 와 달라고 하시는데요? 전무님이 해윤 형을 찾으신대요. 형이 전화를 안 받으셔서 굉장히 화가 나셨다는데. 오늘 전무님과 미팅 있었어요?”
전화? 해윤은 깜짝 놀라 주머니를 뒤졌다. 그제야 핸드폰을 집에 놓고 온 걸 깨달았다.
“핸드폰을 집에 두고 왔어.”
“진짜요? 그럼 다시 형네 집으로 갈까요?”
“아냐. 회사로 가자.”
박지형이 알았다며 차 핸들을 틀었다. 대경 본사로 향하는 동안 몇 번이나 송 비서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송 비서는 쩔쩔 매며 어디까지 왔는지, 언제 도착할 것 같은지, 좀 더 빨리 와줄 수는 없는지 재차 묻고 확인했다. 그는 우는 소리를 내며 해윤에게 애원했다.
- 해윤 씨. 제발 좀 빨리 와 줘요. 갑자기 전무님이 왜 저러시지? 도저히 나 혼자는 감당 못하겠어요.
한기우는 눈이 뒤집혀 발광하고 있을 것이다. 평소보다 더 미쳐 날뛰며 송 비서를 들들 볶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해윤도 덩달아 마음을 졸였다. 미친 듯이 가슴이 뛰었다. 대경 본사에 도착하자마자 해윤은 차에서 뛰어내렸다. 박지형은 해윤을 내려 준 뒤 차를 대고 오겠다며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해윤 씨!”
사무실 밖에 나와 서성이던 송 비서가 해윤을 발견하고 살았다는 듯 반갑게 외쳤다.
“전무님이 갑자기 아침에 출근하셨는데요. 해윤 씨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막 소리를 지르시고…. 이런 말 하긴 그런데 전무님, 미치신 것 같아요.”
미친 것 같은 게 아니라 미쳤다. 한기우는. 처음 봤을 때부터 한기우는 미쳐 있었다. 사무실 안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악을 쓰듯 외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해윤이 흠칫하며 굳게 닫힌 사무실 문을 바라봤다.
“들어가세요. 얼른.”
송 비서가 문고리를 잡아 돌려 해윤을 안으로 떠밀었다. 해윤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등 뒤에서 조용히 문이 닫혔다. 해윤은 텅 빈 비서실을 지나 안쪽, 한기우의 사무실로 다가갔다. 열린 문 틈 사이로 난장판이 된 사무실 안이 보였다. 얼마 전에 방문했던 한기우의 집을 연상케 하는 정경이었다.
“왜 아직 오질 않는 거야. 날 놔두고 달아난 게 틀림없어.”
안에서 한기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지율의 목소리가 곧바로 이어졌다.
“좀 진정해. 오고 있는 중이라잖아. 차가 막히는 모양이지. 회사에서 뭐 하는 짓이야, 이게?
“아냐. 예감이 안 좋아.”
“그러게 평소에 잘 좀 하지 그랬어.”
“넌 꼭 말을 그따위로밖에 못해?”
“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한데? 석해윤 씨가 형한테서 달아날 이유가 없잖아. 아픈 어머니를 놔두고 혼자 사라질 사람도 아니고. 그 정도로 무책임한 사람은 아냐.”
웬일로 한지율이 그답지 않게 해윤의 편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부은 격이었다.
“어떻게 네가 해윤이를 그렇게 잘 알지?”
그렇게 묻는 한기우의 목소리에 의심의 색이 깃들었다. 한지율이 그에게 되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어떻게 해윤이에 대해 그렇게 잘 아냐고.”
“왜 이래? 어디까지 유치하게 굴 거야? 지금 형 모습이 얼마나 우스운지 알고 있어?”
“넌 언제나 날 우습게 봤잖아! 네가 볼 땐 우스웠을지 몰라도 난 언제나 필사적으로 살았어! 넌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고 힘들다는 게 뭔지 알기나 해? 너한테 감정이란 게 존재하긴 해? 표정 없는 거만한 얼굴을 하고 사람을 내려다보고 무시하기나 하지. 나보다 잘난 것 하나 없는 주제에. 네가 가진 게 뭐가 있어? 똑똑한 머리? 일 잘하는 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작은 아버지가 도박에 미쳐서 가진 재산 다 탕진하고 식구들 전부 길거리에 내몰린 거, 도와준 게 누군데. 지금 네가 손에 쥔 것들 중에서 네 것은 하나도 없어!”
한기우가 눈이 벌겋게 뒤집혀 악을 썼지만 한지율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았다. 이렇다 할 반응을 보여 주지도 않았다. 그저 차갑게 굳은 얼굴로 한기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한심하다는 듯이. 한지율은 곧 짧게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다 지껄였어? 속이 좀 후련해?”
한기우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온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추한 열등감을 폭발시켜 그가 얻은 건 박살난 자존심뿐일 터였다.
“진정했으면 자리에 앉아. 꼴이 더 우스워지기 전에.”
한지율이 내뱉는 무심한 어조에 한기우가 다시 한 번 폭발했다. 한기우는 손에 집히는 대로 내던지고 깨부수며 발광을 했다.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닌 모양인지 한지율은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간을 확인하던 그와 해윤이 눈이 마주쳤다.
“해운 씨. 뭐 해요?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해윤을 발견한 한지율이 일부러 소리 내 말했다. 한기우의 발광이 뚝 멈췄다. 해윤아! 그가 반갑게 외치며 해윤에게 달려왔다.
“해윤아. 왜 전화를 안 받았어?”
해윤의 팔을 붙잡고 매달려서 중얼거리는 한기우의 눈빛은 정상이 아니었다. 핏발 선 눈이 축축하게 젖어 위험하게 빛났다.
“깜빡 잊고 핸드폰을 집에 놔두고 온 거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마. 알았지? 네가 나만 놔두고 어디로 가 버린 게 아닐까 싶어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한기우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는 과하게 눈을 빛내며 양 입 끝을 한껏 끌어 올려 웃었다. 그는 환하게 웃고 있는데 해윤은 소름이 끼쳤다. 끈끈하고 악취 심한 액체를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그래. 해윤이, 넌 날 배신하지 않을 거야. 너만은 그러지 않겠지. 그렇지? 난 널 믿어. 괜히 널 의심해서 미안해. 내가 여기저기서 하도 많이 치이다 보니 사람을 못 믿게 됐어.”
“전무님. 몸은 좀 어떠세요?”
“밥은 먹었어? 해윤이, 너 좋아하는 칠리 새우 먹으러 갈까? 회사 근처에 중식당 괜찮은 데가 있어. 전에 갔던 그 식당으로 가도 되고. 아니면 기분전환도 할 겸 우리 멀리 나갈까? 제주도 어때?”
그는 해윤이 건넨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딴소리만 지껄였다. 연신 싱글거리며 해윤의 팔을 잡아끌었다.
“죄송합니다. 오늘 오후에 보컬 연습 일정이 있어서….”
해윤은 머뭇거리며 그에게 붙잡힌 팔을 슬쩍 잡아 뺐다. 한기우의 웃는 얼굴이 움찔했다. 그의 얼굴이 일시에 굳었다.
“너까지 왜 이래?”
한기우의 입술이 비틀려 떨리는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그가 다시 우악스럽게 해윤의 팔을 움켜쥐어 잡아당겼다. 해윤의 몸이 크게 앞으로 휘청거렸다.
“날 거절하지 말랬잖아! 밀어내지 말라고 했잖아! 너까지 나한테 왜 이래? 왜!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내가 없었으면 빚 독촉에 시달리면서 바닥을 기고 있었을 벌레 같은 놈이 이제 배 좀 불렀다고 날 밀어내?”
걷잡을 수 없는 광풍이었다. 휘몰아치는 한기우의 광기 앞에서 해윤은 늘 속수무책으로 휘둘렸고 지금도 그랬다. 참아야만 했다. 늘 그랬듯이 무조건 참고 견디며 죄송하다고 빌어야 했다. 그의 무자비한 광기에 인격마저 뭉개져 휘둘리는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는 한지율의 차가운 눈. 어떤 감정도 깃들지 않은 무기질의 시선. 말없이 관망하는 그의 시선 앞에서 자신의 목줄을 붙잡아 흔들어 무릎 꿇리려는 한기우의 행태에 뜨거운 울분이 치밀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해윤의 안에서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불길이 타올랐다.
해윤은 있는 힘껏 한기우를 밀어내며 입으로 시뻘건 분노를 토해 냈다.
“저도 사람입니다. 전무님!”
한기우가 얼빠진 얼굴로 해윤을 바라봤다.
“저도 사람이라고요. 전 신미라도 아니고, 벌레도 아니고, 사람입니다. 석해윤입니다! 도와주신 일은 정말 고맙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사람 취급은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한기우의 굳은 뺨이 경련했다. 이윽고 그의 얼굴이 울 듯이 일그러졌다.
“역시 나한테서 달아날 생각이었지?”
기가 찼다. 어떻게 생각이 그리로 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람 취급을 해 달라고 애원했는데 돌아온 건 질척한 의심이다. 전무님, 하고 입을 연 순간 한기우가 해윤을 덮쳤다. 피할 새도 없이 달려든 그에게 목이 졸렸다.
“너도 결국 날 뜯어먹던 그것들이랑 똑같아. 넌 다를 줄 알았어. 너만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어!”
해윤의 목을 짓누르는 손아귀에는 자비가 없었다. 사정 봐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해윤의 숨통을 조였다. 보다 못한 한지율이 달려들어 주먹을 날려 한기우의 얼굴을 후려쳤다. 한지율은 턱을 맞고 휘청거리는 한기우의 멱살을 틀어쥐어 당기며 낮게 중얼거렸다.
“작작 좀 해. 한기우. 기어이 저 사람까지 망가뜨릴 셈이야?”
한지율의 안경알이 서늘한 광택을 뿜었다. 안경알 속 그의 두 눈에 이글거리는 분노의 빛을, 해윤은 보았다. 한기우도 그것을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저 사람마저 잃으면 형한텐 뭐가 남아?”
한지율은 비틀린 입술 사이로 말을 짓이겨 뱉었다. 한기우의 뺨이 경련하듯이 뒤틀렸다.
“한지율. 나한테서 해윤이를 뺏어 갈 생각이야?”
“미쳤군. 진짜.”
한지율이 코웃음을 쳤다. 한기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가엾고도 절망적인 어조로.
“해윤아. 아니지?”
뭐가 아니란 말이지? 대체 저 남자에게 뭘 해명해야 하는 건가. 해윤은 속으로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너무도 저급하고 유치한 의심이라 화도 나지 않았다. 한지율에게 맞아 벌겋게 부은 그의 뺨이 경련했다. 그는 거세게 몸을 틀어 한지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해윤에게 달려들었다.
“한지율은 안 된다고 했잖아. 해윤아. 한지율만은 안 된다고. 이 자식만은 안 된다고!”
한기우는 시뻘건 일갈을 토해 내며 해윤의 팔을 움켜잡아 흔들어 댔다. 그는 끓어올라 활활 불탔지만 해윤은 오히려 차가워졌다. 한바탕 분노가 휩쓸고 지나가자 해윤의 마음에 차분한 고요가 찾아들었다. 해윤은 한기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전무님. 정신 차리세요. 제발.”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입 밖으로 새어 나가는 해윤의 목소리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한기우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굉장히 놀랍고 충격적인 소리를 들은 것처럼. 정신 차리라는 소리가 그렇게 충격적인 말인가.
해윤의 팔뚝을 움켜쥔 한기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팠다. 하지만 해윤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균열이 생겨 갈라진 한기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반듯한 얼굴이 일그러지고 뒤틀리는 걸 보는 해윤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었다.
저 남자는 뭐가 저렇게 절망적이고 괴로운 것일까. 돈과 명예, 남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 대체 무엇이 저 남자를 극한으로 밀어 넣는 것일까.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부터 온 상실감 탓이라면 해윤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도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한순간에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져 봤으니까.
해윤이 미치지 않고 버틴 것은 어머니 때문이다. 하나 남은 소중한 가족을 위해서라도 무너지지 않고 버텨야 했다. 하지만 한기우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혼자였던 것 같다. 의지할 데 하나 없이 오롯이 혼자서 끔찍한 슬픔과 상실감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아무리 슬픔에 겨워 울부짖고 피눈물을 토해 내도 그를 안아 주는 이 하나 없었을 터였다. 주위에 몰려드는 것은 한기우의 돈 냄새에 끌려 엉겨 붙는 피라냐 떼뿐.
해윤은 한기우에게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자 그가 경계심 많은 동물처럼 움찔했다. 누군가가 먼저 자신을 만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놓치면 도망이라도 갈세라 해윤의 팔을 움켜쥐고 있던 그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누군가가 먼저 자신을 만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조심스럽게 한기우의 어깨를 감싸 끌어안았다. 그는 목석처럼 딱딱하게 굳어 해윤의 품에 어색하게 안겨 들었다.
“전 아무 데도 안 갑니다. 전무님.”
해윤의 손에 닿은 한기우의 어깨가 둥글게 풀어졌다. 잔뜩 긴장해 도드라져 나왔던 어깨뼈가 완만한 곡선을 띠었다. 곧 그가 해윤의 어깨에 제 얼굴을 살며시 기댔다.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다.
“전무님. 식사하러 갈까요?”
한기우가 눈을 들어 해윤을 올려다보았다.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저러고 있으니 아이처럼 귀엽게 보이기도 한다.
“보컬 연습 일정 있다며?”
“배가 고파서요. 어차피 밥은 먹어야 하고요”
“칠리 새우 사 줄까?”
“네. 사 주세요.”
한기우의 얼굴 가득 미소가 번졌다. 해윤도 웃어 보였다. 거부보다 적당한 순응이 낫다는 것을 해윤은 새삼 몸으로 절감했다. 그는 해윤의 어깨에 기댔던 얼굴을 떼고 송 비서를 찾았다. 사무실 밖에서 안절부절못해하며 발만 동동 굴렀을 송 비서가 문을 빠끔히 열고 들어와 저, 죄송한데요, 하며 입을 뗐다.
“전무님. 회장님이 1시에 공항에 도착한다고 하시는데요. 도착하셔서 곧바로 여기로 오시겠다고 하시는데.”
“귀국일이 오늘이었던가?”
“일정이 생각보다 빨리 끝난 모양이에요. 거기서도 전무님 소식을 들으셨을 테니 서둘러 들어오시는 걸 수도 있고요. 식사하러 가셔도 멀리 나가지 마시고요.”
송 비서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장식 조형물이나 서류 뭉치 같은 것들을 들어 올리며 조잘거렸다.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해윤도 허리를 굽혀 송 비서를 도왔다.
“넌 또 뭐 하는 거야?”
여지없이 한기우가 벌컥 짜증을 냈다.
“송 비서님이 혼자 치우기 힘드신 것 같아서 도와 드리려고….”
“야. 송 비서! 궁상맞게 이러지 말고 청소하는 사람 불러!”
뜬금없이 불똥이 송 비서에게 튀었다. 송 비서는 아무렇지 않게 한숨을 푹 내쉬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해윤아. 시간이 없어서 멀리 나가진 못할 것 같은데 회사 근처 식당에 갈까?”
“전 아무 데나 상관없습니다. 전무님 편하신 대로 하세요.”
“일단 나가자.”
난장판이 된 사무실 밖을 나서는 한기우의 발걸음이 경쾌했다. 제 멋대로 손에 집히는 대로 내던져 부수고 뭉개 아수라장을 만들어 놓고는 개운하게 밖으로 나선다. 뒤처리는 늘 다른 이의 몫이다. 해윤은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책임감이 따르던 인생을 살았기에 그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지율도 조용히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나왔다. 복도를 서성이며 음료수를 마시고 있던 박지형도 냉큼 따라붙었다. 박지형이 허리를 꾸벅 숙여 한기우에게 인사하자 그는 자상하게 웃어 보였다.
“저희 지금 식사하러 가는 중인데 박 매니저님도 함께 가시죠?”
“아, 네, 네에! 제가 식사 자리에 함께해도 될까요?”
“안 될 건 뭐 있습니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밥은 제때 먹어야죠. 송 비서에게 전해 듣기론 박 매니저님이 무척 성실하고 유능하다고 하시더군요.”
과하게 상냥한 어조였고 그랬기에 지나치게 가식적이었다. 한기우의 칭찬에 박지형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얼굴을 붉히고 수줍게 웃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 잘하겠습니다.”
“네. 부탁해요. 회사 근처에 마땅한 식당이 없어서 간단히 한정식을 먹을까 하는데 괜찮겠어요? 그러고 보니 그 식당이 지금 자리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송도 식당 말씀이시죠? 전에 송 비서님이 밥 사 주셨던 곳이라 어딘지 압니다. 제가 전화해서 여쭤보겠습니다!”
“송 비서 말대로 정말 일 잘하시네요.”
박지형의 입이 쭉 찢어졌다. 녀석이 식당에 전화를 걸며 일행보다 앞서 뛰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제법 쓸 만해 보이는 친구네. 우직하고 맷집 좋아 보이는 놈으로 잘 뽑았어.”
“어지간한 놈은 못 버텨 낼 테니까.”
한지율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해윤의 손끝이 그의 손가락과 아주 잠깐 닿았다 떨어졌다. 나란히 서서 걷다 보면 일어날 수 있는 아무 의미 없는 우연한 접촉이었다. 하지만 해윤은 저 혼자 움칫하며 손을 뒤로 뺐다. 한지율이 해윤에게 흘긋 시선을 던졌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차갑고 무심한 시선이었다. 왜 별거 아닌 접촉으로 호들갑스럽게 구느냐는 듯, 한심하게 보는 눈빛 같기도 했다.
해윤조차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째서 이런 무의미한 찰나의 접촉으로 열이 이는 건지.
“해윤아. 저녁에 술 한잔할래? 보컬 연습 일정 이후에는 다른 일정 없지?”
한기우가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해윤에게 말을 건넸다. 일정이 있어도 취소해야 할 판이었다.
“네. 없습니다.”
“내가 집으로 갈까?”
“아뇨. 제가 전무님 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분위기 좋은 바에서 한잔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해윤이, 네가 일정 끝내고 몸 상태 봐서 결정해. 피곤하면 집에서 편히 마시고 견딜 만하면 바에 가는 걸로 하자.”
한기우와 함께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느 쪽이든 섹스가 포함된 일정이란 것은 변함없는 사실일 테고. 속마음이야 어찌 됐건 입으로는 네, 하는 소리만 낼 뿐이다. 허용된 대답은 그것뿐이다.
***
“해윤 씨. 잠깐만.”
피아노 소리가 멈추는가 싶더니 노 선생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는 아예 피아노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해윤에게 다가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해윤의 몸에 저절로 바짝 힘이 들어갔다.
“아냐. 긴장하지 말아요. 목에 너무 힘이 들어갔다.”
노 선생이 뻣뻣하게 굳은 해윤의 목 뒷부분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마사지를 받는 것처럼 목 근육이 이완됐다. 그의 한 손이 해윤의 복부에 닿았다.
“복식 호흡을 하면서 아아아, 해 봐요.”
그가 시키는 대로 입을 벌려 소리를 냈다. ‘복식 호흡하면서’ ‘성대를 내리고’ 같은 낮은 명령이 날아들었다. 노력은 해 보지만 쉽지가 않다. 노 선생은 침착하게,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하며 해윤의 배를 눌렀다. 몇 분을 애쓴 끝에야 겨우 그의 입에서 칭찬 한마디가 튀어 나왔다.
“그래. 훨씬 좋네.”
그제야 해윤의 얼굴에도 웃음이 퍼졌다. 이게 뭐 그리 힘든 일이라고 이마에 식은땀까지 송골송골 맺혔다.
“제일 기본적인 연습인데도 쉽지가 않네요.”
“원래 기본기 쌓는 게 제일 힘든 거야. 해윤 씨는 한 번도 체계적으로 트레이닝 받은 적 없지?”
“네. 우리끼리 연습실에 처박혀서 연습했어요. 부끄럽습니다. 8년이나 노래를 불렀는데 기본 적인 발성 연습도 제대로 한 적이 없다니요.”
“부끄러울 게 뭐 있어. 어차피 아마추어였잖아. 잠깐 쉴까?”
노 선생이 피아노 아래에 놓아둔 생수병 하나를 건넸다. 고맙다며 받아 들어 벌컥벌컥 물을 들이마셨다. 연습실 안이 워낙 건조해서 목이 말랐던 참이었다.
“난 한창 뮤지컬 배우로 활동할 때 애인과 섹스할 때도 발성 연습하듯이 교성을 냈어. 여자 친구가 섹스하는 게 아니라 뮤지컬 연기를 하는 것 같다고, 섹스만이라도 정상적으로 하자면서 온갖 짜증을 다 냈지. 애인도 같은 극단 배우였거든.”
수업 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아이들을 깨우기 위해 수업 내용과 상관없는 자극적인 농담을 지껄이는 선생님 같은 어조였다. 저런 사람도 섹스를 하는구나,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눈앞의 저 사람도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신체 건장한 사내인데. 해윤은 물병을 기울여 남은 물을 모조리 들이마셨다.
“수업 시간에만 연습하고 끝이 아니라 평소에도 복식 호흡을 연습하는 게 좋아. 처음에만 어색하지 금방 익숙해질 거야.”
“네. 가르쳐 주신 대로 연습하고 있습니다.”
“어제 해윤 씨가 문자 보낸 거 곧바로 답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밤까지 계속 수업이 있어서 퇴근할 때에야 봤거든.”
“아닙니다. 바쁘신데 제가 괜히 귀찮게 해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혼자 발성 연습을 하다 보니 이게 맞나 싶어서 문자를 드린 거였어요.”
“언제든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열심히 하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아. 오늘은 나도 이 수업 이후엔 일정이 없는데 끝나고 식사라도 할까? 한잔하러 가도 좋고.”
해윤도 일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미리 약속된 공식적인 일정은 없다. 언제 어디서 한기우가 연락을 할지 알 수 없긴 하지만.
며칠 전 한기우가 먼저 제안했던 저녁 술자리 약속은 취소됐다. 보컬 트레이닝이 끝나고 전화를 했지만 한기우의 핸드폰은 전원이 꺼져 있었다. 귀국한 한 회장에게 붙잡혀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 게 분명했다. 화도 나지 않았다. 화를 내면 뭘 어쩔 텐가. 체념하고 순응하는 수밖에.
그러나 언제 어디서 한기우에게 불쑥 연락이 오거나 찾아올지 모르는 일이라 저녁 이후 일정은 비워 둬야 할 터였다.
“죄송합니다. 오늘 저녁은 좀.”
“부담 갖지 마. 이상한 데 가자고 안 해. 그냥 고기 구워 먹으면서 소주 한잔하자는 건데?”
“아뇨. 약속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그래. 알았어. 약속이 있으면 별수 없지. 그런데 전에 박 대표님이 해윤 씨랑 사적인 연락을 하거나 만나려면 한 이사님 허락 받아야 한다고 그러셨잖아? 어째 그 말이 농담이 아니었단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노 선생이 물을 마시며 웃었다. 해윤의 목구멍 안에서 많은 단어들이 꼬이고 엉켰다. 결국 입을 비집고 나오는 소리는 이 한마디뿐이었다.
“죄송합니다.”
“해윤 씨는 죄송하다는 말을 굉장히 자주 한다. 죄송하다는 소리를 할 만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 좋잖아.”
온화한 말투 속에 가시가 돋았다. 웃음 띤 노 선생의 얼굴에 냉기가 서렸다. 무의식적으로 죄송하다는 소리가 튀어 나가려 하기에 해윤은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선생님.”
그 소리를 뱉는 게 최선이었다. 죄송하다는 말만큼이나 입에 밴 말이었다. 앞으로 조심하겠다, 그러지 않겠다, 잘하겠다. 입으로 지껄이며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면 대부분 상대의 말문이 막히고 만다. 해윤이 최근 몸으로 터득한 처세술 중 하나였다.
“연습 다시 시작하자. 해윤 씨.”
노 선생이 빈 생수병을 우그러트리며 일어서서 다시 피아노로 다가갔다. 이완되었던 몸의 근육들이 다시 굳어졌다. 어디에도 자신의 편은 없다는 것을 다시금 몸으로 절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생각 탓인지는 몰라도 이후의 연습은 좀 더 엄격해졌다. 아냐, 해윤 씨. 목에 힘을 풀어! 지적하며 외치는 노 선생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가 언성 높여 외치는 소리보다 푹푹 내쉬는 한숨이 더 신경이 쓰였다. 수업 시간이 끝났는데도 노 선생은 해윤을 붙잡고 늘어졌다. 결국 40분이나 연장 수업을 한 뒤에야 그날의 보컬 트레이닝은 끝났다.
“감사합니다. 제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해윤은 소지품을 챙기는 노 선생에게 먼저 다가가 다시 허리를 숙였다.
“해윤 씨는 보면 기합 하나는 늘 필사적이야.”
필사적이니까. 장난으로 이 짓을 하는 게 아니다.
“선생님. 다음에 꼭 시간 내주세요. 그땐 제가 꼭 술 한잔 사겠습니다.”
노 선생이 웃으며 해윤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가 나가자 연습실에 적막이 내리깔렸다. 밴드 활동을 하던 때 이용했던 유료 연습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크고 시설 좋은 곳이다. 짧은 적막을 깨고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해윤은 얼른 점퍼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네. 전무님.”
- 수업 끝났습니까?
당연히 한기우일 것이라 생각했으나 수화기 너머로 새어 나오는 건 한지율의 목소리였다.
- 나와요. 술 한잔합시다.
요새 왜 이렇게 술 한잔하자는 사람들이 많은가 싶었다.
어떻게 할까. 해윤은 짧게 고민했다. 이런 걸로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술 한잔하자는 노 선생의 부탁은 단칼에 거절한 주제에.
- 약속이라도 있습니까? 일정이 있으시거나 힘드시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귓속으로 파고드는 한지율의 목소리를 듣고 해윤은 마음을 굳혔다. 마침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간절한 참이기도 했다.
“아뇨. 아무 일정 없습니다. 술 마시죠. 어디에 계세요?”
- 건물 뒤쪽에 차 대 놨습니다. 그리로 오세요.
해윤은 알았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옷과 가방을 챙겨 들고 연습실을 나서며 해윤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박지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 친구 분과 한잔하실 거라고요? 알았어요. 전 그럼 먼저 집으로 갈게요. 아, 형. 절대로 술 드시고 운전하지는 마시고요. 웬만하면 대리기사님 부르세요. 꼭이요. 알았죠? 형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술 들어가면 이성이 사라지잖아요.
박지형이 늘어놓는 잔소리가 듣기 싫지는 않았다. 진심으로 걱정하며 잔소리해 주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되니 더 그렇다.
“알았어. 너도 밥 굶지 말고 먹고 들어가.”
- 에이. 월급이 얼마라고 밥을 사 먹어요. 집에 가서 해 먹으면 돼요. 형도 친구 분이랑 오랜만에 회포 좀 푸세요.
왜 박지형에게 친구를 만난다고 거짓말을 한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한지율과 한잔한다고 사실대로 말해도 상관없는 일일 텐데. 박지형을 속였다는 얕은 죄책감과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을 뒤로 하고 해윤은 다시 입을 열었다.
“지형아. 송 비서님에겐 알리지 마. 한창 연습에 매진해야 할 시기에 술 마시며 논다고 하면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아서.”
- 송 비서님이 아셔도 그런 생각 안 하실 것 같긴 한데… 알았어요. 내일은 아무 일정 없는 오프니까 푹 쉬시고요.
“응. 고마워. 조심해서 들어가라.”
해윤은 정문을 이용하지 않고 유료 주차장 방향인 뒤쪽으로 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차장 맞은편 카페 앞에 까만 차 한 대가 보였다. 한지율의 차라는 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차가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있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해윤은 한지율과 만나는 것을 한기우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박지형에게 친구를 만난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란 걸.
한지율 또한 은밀하다. 건물 지하 주차장을 이용하지 않고 차 헤드라이트도 밝히지 않았다. 그도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머릿속을 스치는 유치한 망상에 해윤의 입에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수업 잘 받았습니까?”
해윤이 차에 타자 한지율이 말을 던졌다. 생각 없이 내뱉는 안부 인사와도 같은 것일 터였다. 그런데도 해윤의 기분이 괜히 들떴다.
“네. 오늘 수업도 아주 좋았습니다. 노 선생님이 워낙 잘 가르쳐 주셔서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느는 것 같아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군요.”
그가 입 끝을 치켜 올려 빈정거리는 소리마저 기분 좋게 들렸다. 길거리에 깔린 어둠처럼 그의 체향 섞인 향수 냄새가 묵직하게 깔렸다.
“무슨 술을 주로 드십니까? 자주 가는 가게 있어요?”
한지율이 차에 시동을 걸며 물었다.
“치맥 하러 가죠.”
“치맥이요?”
“아까부터 치킨 안주에 시원한 맥주 한잔 마시고 싶었거든요. 동네에 치킨을 기가 막히게 맛있게 튀겨 주는 가게가 있어요. 내키지 않으시면 다른 데로 가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거기로 가죠.”
한지율은 그러며 내비게이션 화면을 눌렀다. 그의 차 내비게이션에는 해윤의 거주지인 장승배기역이 즐겨찾기 메뉴에 저장되어 있었다. 두 사람을 태운 차가 매끄럽게 움직여 카페 앞에서 벗어나 도로로 접어들었다.
“어서 오세요! 아무 데나 편하신 곳으로 앉으세요.”
대학생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을 한 점원이 경쾌하게 인사했다. 가게 안이 휑했다. 중년 손님 두어 명이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며 해윤은 다른 곳으로 갈 걸 그랬나, 잠시 후회했다. 평소엔 아무 생각 없이 드나들던 곳이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좁고 허름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신경을 쓰는 건 해윤뿐인 듯했다. 한지율은 아무렇지 않게 구석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아 메뉴판을 펼쳤다. 그가 메뉴판을 유심히 보며 해윤에게 물었다.
“여긴 뭐가 맛있습니까?”
“치킨은 뭐든 다 괜찮아요.”
한지율은 물과 기본 안주인 과자를 가지고 온 점원에게 음식과 술을 주문했다.
“후라이드 치킨 한 마리에 생맥주 두 잔 주십시오. 아, 제가 치킨은 후라이드밖에 안 먹습니다.”
그러니 괜찮겠느냐가 아니라 난 이거밖에 못 먹으니 네가 이해해라, 이 소리였다. 상관없었다. 해윤은 뭐든지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었다.
“맥주 먼저 가져다주시고요.”
점원이 알았다며 몸을 돌려 주방 쪽에 대고 치킨 주문이 들어왔다고 외쳤다. 한지율은 메뉴판을 접어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 두고서 과자 그릇에 손을 뻗었다.
“이 과자 오랜만이군요. 왕소라였던가요? 어렸을 땐 자주 먹었던 것 같은데.”
“의외네요. 이런 건 손도 안 대셨을 것 같은데.”
“그럼 제가 1등급 한우만 구워 먹고 간식으로 마카롱만 먹고살았겠습니까? 저도 다른 애들처럼 흙도 파먹어 보고 땅바닥에 떨어진 과자도 주워 먹어 보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다 먹고 자랐습니다.
“흙은 왜 파 드셨어요? 땅에 떨어진 과자는 왜 주워 드시고.”
“석해윤 씨는 안 먹어 봤습니까?”
“아니 그런 걸 왜 먹습니까. 먹을 게 얼마나 많은데.”
“보기보다 곱게 자라셨군요.”
비아냥대는 소리가 분명했지만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왔다. 동네 사내애들이 놀이터에서 흙투성이가 되어 뛰어놀던 때, 해윤은 다림질한 깨끗한 옷을 입고 학원에 다녔다. 어머니는 하나뿐인 귀한 아들에게 식사는 물론 간식 하나도 손수 만들어 먹이셨다. 애들이 불량식품을 사 먹곤 할 때 해윤은 어머니가 직접 만든 쿠키 같은 것을 꺼내 먹었다. 곱게 자란 부잣집 외동아들이었다. 지금은 꼴이 이래도.
“어릴 땐 새하얀 셔츠를 입고 하얀 양말을 신고 다녔죠. 그런데도 옷이 더러워지지 않았습니다. 학원에 다니느라 놀 시간이 없었거든요.”
“석해윤 씨도 흙을 파먹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해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왜 자꾸 흙 먹는 얘기를 하는 건지. 이 남자는 가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툭툭 던져 실소를 터뜨리게 한다. 과자를 한두 개 집어먹다 말고 그는 그릇에서 손을 뗐다.
주문한 맥주 두 잔이 나왔다. 한지율이 과자 부스러기가 묻은 손가락을 티슈에 비벼 닦는 것에 시선이 갔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다. 거스러미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손끝. 티슈에 손을 닦는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 우아하게 보이는 것은 저 길고 유려한 손가락 모양 때문일 것이다. 한지율이 손을 닦은 티슈를 내려놓고 생맥주 잔에 손을 뻗었다. 손가락 관절이 움직이며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희고 깨끗한 살갗 위로 불거진 파란 핏줄들. 맥주를 마시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자 드러난 손목 위로 굵은 동맥이 튀어나와 맥박 치는 것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해윤의 시선이 자연히 맥주를 삼키며 움직이는 한지율의 목으로 이동했다. 목울대가 경쾌하게 넘실대며 맥주를 삼켰다. 목울대 주위를 감싼 피부는 희고 매끄러우나 턱 선은 완고하게 각이 졌다. 흉터 하나 없이 매끈한 살갗 위로 융기된 목울대가 유난히 크고 형태가 선명해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목이 말랐던 모양인지 한지율은 단숨에 맥주를 반이나 비우고서야 잔을 내려놓았다. 그제야 해윤도 퍼뜩 정신이 들어 황망히 시선을 틀었다.
“왜 시선을 피합니까? 계속 뻔뻔하게 보시지.”
노골적으로 빈정거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칠 그가 아니었다. 한지율이 티슈로 맥주 거품이 묻은 입술을 닦으며 이죽거렸다. 해윤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미쳤지. 어쩌자고 홀린 듯이 봐서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기분 나쁘지 않은데요. 비굴하게 미안하다고 고개 숙이는 댁 모습이 더 기분 나쁜데, 난.”
트집 한 번 제대로 잡혔다. 조롱할 여지를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러려고 저하고 술 한잔하자고 하신 겁니까?”
“편하게 술 한잔 마실 사람이 없어서 말이죠.”
“전 한지율 씨와 술 마시는 게 전혀 편하지 않은데요.”
“제 분수도 모르고 통통 튀는 게 제법 귀엽단 말이야.”
“네?”
해윤은 제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것이겠거니 싶었다. 저 남자 입에서 귀엽다는 소리가 나온 건가. 한지율은 입 끝을 올려 건조하게 웃더니 맥주잔을 들어 남은 술을 모조리 비웠다.
“알 것 같다가도 모를 사람이에요, 석해윤 씨는.”
“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냥 술이나 마십시다.”
한지율은 능숙하게 화제를 전환하며 맥주 한잔을 더 주문했다. 해윤도 그제야 거품 가라앉은 맥주를 홀짝였다. 한기우와 관련된 골치 아픈 사정이 있어서 저러겠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해윤은 머릿속에 떠오른 한기우의 존재를 애써 지웠다. 한지율의 말대로 그냥 술이나 마시고 싶었다.
주문한 치킨과 새로 시킨 맥주 한 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한지율은 치킨에는 손도 대지 않고 맥주만 거푸 마셨다. 형광등 갈 때가 되었는지 어두침침한 가게 조명 아래, 때 탄 벽을 등지고 앉아 다소 밍밍한 생맥주를 마시는 남자의 모습이 굉장히 이질적이다. 늦은 저녁 시간임에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완벽함을 유지하고 있는 그의 외양 탓일 터였다.
그날 밤, 어수선하게 헝클어져 있던 한지율의 모습이 눈앞의 말끔한 남자의 모습 위로 겹쳐졌다. 여러 가지가 엉클어지고 뒤엉켰던 밤이었다. 그 소름 돋던 날 밤, 어둠을 뚫고 나타나 준 한지율의 존재가 더없이 고마웠다. 비록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기우 때문이라 하더라도.
어느새 해윤의 맥주잔도 비었다. 한지율도 동시에 술잔을 비워 냈다. 둘은 맥주를 더 주문하고 술을 입 속에 쏟아 넣었다. 몽롱한 취기가 슬슬 올라와 해윤의 눈에서 초점이 풀려갔다.
“석해윤 씨는 어떻습니까?”
뜬금없는 소리가 날아들었다. 네? 해윤이 되물으며 눈을 들어 맞은편에 앉은 한지율을 응시했다. 쉬지 않고 맥주를 퍼 마시고도 그의 얼굴은 멀쩡했다.
“당신이 생각하기엔 어때요?”
“전무님이 어떠냐고 물으시는 겁니까? 솔직히 정상은 아니시죠. 갈수록 상태가 더 심해지시는 것 같고.”
“한기우가 저와 석해윤 씨 사이를 의심하는 것이 근거 있는 의혹인가, 하는 것을 묻는 겁니다.”
그가 던진 말의 의도를 알 수 없는 것은 단순히 취기 탓은 아닌 듯했다. 해윤은 약간 낯을 구겼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 좀 해 주시겠어요?”
“한기우가 우리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은 아실 테죠. 저와 당신이 좆질하는 사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상스러운 말을 우아하게도 내뱉는다. 그는 우아하게 뻗은 긴 손가락으로 안경테를 습관처럼 매만지며 짧게 생각에 잠겼다.
“전무님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입으론 그렇게 말하면서도 해윤의 시선은 한지율의 얼굴에 향했다. 투명한 안경알 속의 눈이 내리깔려 눈 밑에 만들어진 그늘. 얇고 흰 눈꺼풀 끝에 촘촘히 박힌 긴 속눈썹. 말도 안 되는 망상이고 의심일까, 과연? 무의식적으로 한지율의 겉모습을 훑는 자신의 시선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한지율이 눈을 들어 올렸다.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석해윤 씨. 저 좋아합니까?
해윤의 온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벌써 취하셨어요?”
“저와 자고 싶냐고 묻는 겁니다. 석해윤 씨.”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겁고 진지했다. 해윤의 입매가 비틀리며 어이없는 실소가 비어져 나왔다.
“취하신 게 맞네요. 술은 그만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취하지 않았는데요. 아주 멀쩡합니다. 오랜만에 머릿속이 아주 맑고 개운합니다. 얼마 만에 이런 기분을 느껴 보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한지율은 점원에게 술을 더 주문했다. 거품 가득한 술잔을 기울여 맥주 몇 모금을 마신 뒤 그는 잔을 내려놓았다. 입술에 묻은 거품을 핥는 그의 선홍빛 혀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이러면 저 남자에게 트집만 잡힐 뿐이란 걸 알면서도 제어가 되지 않았다.
“나랑 잘래요?”
술에 젖어 반들거리는 한지율의 입술이 열려 집요하게 그 말을 뱉어 냈다.
“오늘따라 굉장히 무례하시네요. 한지율 씨답지 않게.”
“이게 나다운 거죠. 제가 무례하지 않았던 적 있습니까? 술은 그만 마시고 나갈까요?”
“이보세요. 한지율 씨.”
“감당하지도 못하고 내뺄 거면서 왜 자꾸 사람을 꼴리게 합니까? 잔뜩 몸이 달아서 흘긋거리더니.”
해윤은 말을 하려 입을 달싹였다 다시 닫았다. 야릇한 고양감에 휩싸여 그의 손, 입술, 융기한 목울대를 핥듯이 바라본 건 사실이었으니까.
왜 노 선생의 부탁은 거절했으면서 한지율의 청은 거절하지 못했을까.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답은 간단했다. 한지율과 단둘이 술을 마시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저 남자에게 향하는 끌림을 순순히 인정하기엔 남아 있는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주위의 그 누구보다도 차갑고 모질게 자신을 후려치는 남자인데 대체 왜?
테이블 위에 놓인 해윤의 손이 움찔했다. 치미는 모멸감에 속이 뒤틀렸다. 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목이 말라 급하게 마신 맥주 탓일 것이었다.
“가 보겠습니다.”
해윤은 가까스로 그 한마디를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저 혼자 마시라고요? 여기까지 불러 놓고?”
한지율의 뻔뻔한 어조가 날아들었다. 부른 적 없다. 단지 술 한잔하자는 당신의 청이 너무도 매력적이라 거절하지 못한 것뿐이지. 해윤은 치밀어 오른 그 소리를 애써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 볼게요. 도저히 당신과 술 마실 기분이 들지 않아서요. 술은 혼자 드십시오.”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일 수도 있는데. 난 상관없지만 석해윤 씨는 굉장히 아쉬우실 것 같은데요.”
그의 어조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해윤은 새삼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한지율. 넌 내가 그렇게 만만하고 우스워?”
해윤은 한지율을 보며 말을 씹어 내뱉었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 것을. 말을 뱉은 뒤 바로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지율의 시선이 조용히 해윤을 올려다보았다. 바짝 말라 버석버석한 시선이었다. 차라리 저 눈에 번들거리는 음욕이 가득했다면 이런 비참한 기분이 들진 않았을 터였다.
“아뇨. 우습지 않습니다. 댁한테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내가 오히려 우습지.”
감정? 어떤 감정? 감정이란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기엔 한지율의 모든 게 지나치게 건조했다. 이윽고 그의 입 끝이 비틀리더니 실소와 함께 나직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씨발, 거지 같네.”
그러며 한지율은 맥주잔에 손을 댔다. 욕이 비어져 나온 입술에 술잔이 닿았다. 호수 속에 무거운 돌을 던진 듯 해윤의 마음속 수면이 크게 일렁였다.
“앉으세요.”
“명령하지 마시죠.”
그가 던진 말에 한마디 쏘아붙이는 게 고작이었다.
“명령하는 게 아니라 부탁하는 겁니다. 앉아요. 더 취하고 싶으니까. 혼자 마시고 싶지 않습니다. 술상대가 되어 주시죠.”
한지율의 어조가 변했다. 퍼석퍼석 메말라 있던 그의 눈에도 물기가 어렸다. 장마철 습기 같은 끈끈하고 불쾌한 습기였다. 귀가하려는 애인을 붙잡는 남자의 음흉한 속내와 흡사한 노골적인 질척임. 그의 변화가 너무도 갑작스러웠고 그랬기에 당혹스러웠다.
해윤은 그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휙 돌아섰다. 한시라도 빨리 저 남자의 시선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뛰듯이 빠르게 가게 밖으로 걸어 나와 집으로 향하는 내내 해윤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한지율의 습윤한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피한 것인지, 자신의 마음속 동요를 그에게 들키는 것이 두려워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에 관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싫었다.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도망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해윤은 걸음을 더 빨리했다. 아예 달리기 시작했다.
해윤은 집 앞에 당도한 뒤에야 멈춰 서서 짐승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더웠다. 땀이 줄줄 흘러 옷이 흥건하게 젖었다. 쉬지도 않고 달려왔으니 더울 만도 하다. 아니다. 솔직히 인정하자. 아까부터 이 몸뚱이는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한지율의 말대로 한껏 몸이 달아 그를 흘긋거렸다. 아래가 단단하게 서서 스웨터 자락 위로 불룩하게 솟아 있는 게 보였다.
혼자서 절절 끓어 한지율을 떠올리며 뒤를 쑤시면서 자위했던 때처럼 왜 또 이렇게 됐지? 해윤은 약하게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어 열쇠를 찾았다. 아무리 주머니 안을 샅샅이 뒤져도 열쇠가 나오지 않는데 현관문이 바람에 밀려 끼이익,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렸다.
해윤의 손끝이 움찔했다. 문이 열려 있다? 내가 문을 잠그지 않고 나갔던가? 한줄기 선뜩한 한기가 해윤의 뒷덜미를 스쳤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휑한 집 안이 해윤을 맞아 주었다.
작은 탄식이 벌어진 해윤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집 안이 텅 비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현관에 널려 있던 슬리퍼조차도. 집 안의 모든 집기가 싹 사라졌다. 한나절 만에 빈집이 되었다. 도둑이라도 들었나? 이 집에서 훔쳐 갈 게 뭐 있다고. 훔쳐 가도 귀중품만 가져가지 낡아 빠진 세간살이들을 가져가서 뭐 하려고.
한기우. 그의 얼굴이 곧바로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핸드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해윤은 넋을 잃은 채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한기우였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손에 쥔 기계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벨 소리가 한기우처럼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웠다. 해윤의 입매가 뒤틀리며 실소가 터져 나왔다.
“개새끼….”
실소와 함께 욕설을 뱉어 냈지만 어조가 힘없이 가라앉았다. 한순간의 자유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거로군. 유일하게 남은 쉴 곳까지 빼앗으려 하다니. 이런 게 한기우, 당신의 사랑인가?
보이지 않는 손이 해윤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숨통이 조여들며 가슴이 쥐어 짜이듯 아팠다. 전화를 받아야 할 것이다. 연락을 받지 않으면 한기우가 또 어떤 미친 짓을 할지 모르니까. 하지만 그러기가 싫었다. 그의 미친 짓에 더는 동조해 주기가 싫었다.
그때, 해윤의 어깨 너머로 하얀 손이 뻗어 나와 집요하게 벨 소리를 토해 내는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한지율의 향수 냄새 섞인 숨결이 등 뒤에서 훅 끼쳐 들었다. 저 사람은 언제 내 뒤를 따라온 것일까. 해윤의 머릿속을 스치는 가벼운 의문은 곧 묵직한 안도감으로 변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지율이 낚아채 간 해윤의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입을 달싹였다. 그의 안경알 표면에 번쩍이는 핸드폰 화면 불빛이 비쳤다. 그는 곧 손가락을 핸드폰 화면에 갖다 댔다. 쉴 새 없이 울리던 벨 소리가 뚝 멎었다. 통화 거부 버튼을 누른 모양이었다. 당신 전화는 받지 않겠다는 명확한 거부 표현을 했음에도 한기우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이 다시금 날카로운 벨 소리를 쏟아 냈다.
“집요한 새끼야. 하여튼.”
한지율이 픽 코웃음 치며 핸드폰을 해윤에게 건넸다. 핸드폰을 받아 든 해윤은 아예 전원을 꺼 버렸다.
“그런 짓을 하시면 한기우 그 새끼 완전 돌아 버릴 텐데.”
“지금도 완전히 돌아 버린 분인데 더 돌 게 뭐 있겠습니까.”
한기우가 미쳐서 무슨 짓을 한들 상관없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 사실은 아니었다. 해 볼 테면 해 보라며 허세를 떨고 있는 거다. 사실은 불안했다. 미치도록 두려웠다. 그랬기에 한지율이 자신을 따라와 준 것이 고마웠다. 텅 빈 집 안에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한기우가 당장 달려와 제 목을 졸라 죽이려 해도 이 순간만큼은 이 남자가 막아 줄 테니까. 적어도 그 정도의 믿음은 있었다.
“설마 웁니까?”
한지율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려 고개를 비스듬히 수그린 꼴이 우는 것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울지 않는다. 이런 일로 울음을 터뜨릴 만큼 약하지 않다.
해윤의 시선 끝에 주름 하나 없는 바지 자락 위에 놓인 한지율의 손끝이 보였다. 하얗고 청결한 저 손끝에서도 향수 냄새가 풍길까. 짧은 침묵이 흘렀다. 평소 같지 않게 주위가 쥐죽은 듯 고요했다.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자신의 것은 전원을 꺼 놓았으니 한지율의 핸드폰일 것이다. 그의 하얀 손끝이 움직였다.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한 한지율이 아까와 같은 말을 끄집어냈다. 한지율에게 전화를 건 상대가 한기우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떻게 할래요?”
기회는 한 번뿐일 수도 있다더니 벌써 세 번째 기회를 던져 준다.
“한껏 몸이 달아올라 질척대는 건 오히려 한지율 씨 같은데요. 왜요? 그렇게 나랑 자고 싶습니까? 닳고 닳아 더러운 구멍이라도 쑤시고 싶어서 그래요?”
해윤은 고개를 들어 한지율을 보며 입매를 비틀어 조소해 보았다. 한지율처럼 능숙하게 조롱해 보고 싶지만 쉽지가 않다. 한지율의 굳은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그의 두 눈은 한 번의 깜빡임도 없이 해윤을 차갑게 응시했다.
그를 뒤흔들 수 없다는 절망에 가까운 비참함이 해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해윤의 얼굴이 울듯이 일그러졌다.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얼굴을 그에게 보이기가 싫어 해윤은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척하며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수그렸다.
“가세요. 당신이랑 이러고 있는 것도 피곤합니다.”
“텅 빈 집에서 뭘 할 겁니까? 이런 집에서 제대로 쉴 수나 있겠습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가시라고요, 제발 좀.”
쏟아 내는 해윤의 어조에 간절함이 묻어났다. 제발 좀 가 줘. 그렇게 나랑 자고 싶어? 밤이 외로우면 하룻밤 상대가 되어 줄 상대가 널리고 깔렸을 텐데.
하루 사이에 유일한 쉴 곳마저 빼앗겼다. 한기우에겐 지하 움막 같은 비참한 공간으로 보였을지 몰라도 해윤에게는 더없이 포근하고 아늑한 집이었다. 한기우에게서 도망쳐 숨을 공간마저 사라졌다는 사실이 해윤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한지율의 앞에서 태연한 척했으나 사실은 울고 싶었다. 울고 욕하며 한기우처럼 미친 척 한바탕 발광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니 제발 좀 가 줘. 당신 앞에선 죽어도 그런 모습 보이기 싫으니까.
계속되는 빌어먹을 핸드폰 벨 소리. 한지율의 핸드폰이 끊임없이 깜빡이고 있다. 눈이 뒤집혀 전화를 걸어 대고 있을 한기우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한지율만은 안 돼.’
세뇌시키듯 속삭이던 한기우가 지금 해윤과 한지율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것도 한지율이 그답지 않게 자신에게 질척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야말로 홱 돌아 버릴 텐데. 안 그래도 미친 인간이 확실히, 제대로 눈이 뒤집힐 텐데. 그 모습을 상상하니 거지 같은 기분이 아주 조금 상쾌해졌다.
일순, 한지율이 움직였다. 핸드폰을 코트에 집어넣는 단순한 움직임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해윤은 본능적으로 크게 몸을 움츠리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한지율이 그런 해윤을 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사람 꼴리게 하는 재주 하나만큼은 기가 막혀.”
여전히 핸드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한지율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내가 당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보여요?”
그가 묻는 소리에 해윤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기만 했다.
“난 한기우가 아닙니다. 난 그 새끼처럼 묶지도 않을 거고 당신을 다치게 하지도 않을 겁니다. 댁을 해치려는 게 아닙니다. 섹스하자는 거지. 섹스가 무슨 뜻인지는 알죠?”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압니다.”
간신히 대답하는 해윤의 목소리가 한층 더 잦아들었다. 어느새 강압적인 힘에 휘둘리는 자 특유의 비굴한 습성이 몸에 뱄다. 사라지지 않는 손목의 멍처럼. 뼛속까지 한기우에게 잠식당하고 말았다.
“당신이 싫다면 안 할 겁니다. 석해윤 씨.”
“네. 싫습니다. 가세요.”
“정말 싫어요?”
“네.”
하얀 손이 휙 뻗어 나왔다. 한지율의 청결한 손끝이 뻗어와 해윤을 잡으려 했다. 싫다면 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해윤은 본능적으로 흠칫하며 팔을 들어 올려 제 얼굴 앞을 막았다. 한지율의 손은 해윤이 저를 보호하려 쳐들어 올린 손목을 휘어 감았다. 벨트에 묶여 멍이 가실 날이 없던 손목을 한지율의 하얀 손가락이 족쇄처럼 감아 잡아당겼다.
하지 마. 선을 넘어오지 마! 해윤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악이라도 쓰고 싶어 벌린 입에 한지율의 입술이 부딪혀 왔다. 차가운 살점이 해윤의 입술 위를 짓눌러 뭉개며 물고 빨았다.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게걸스럽게 물어뜯듯이.
살점과 살점이 음란하게 맞닿아 달게 녹는다. 그 단맛이 미치도록 유혹적이었다. 너무도 치명적인 단맛이라 전율마저 일었다. 헤픈 신음이 새어 나오려는 입을 다물고 한지율을 힘껏 밀어냈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 과감하게 몸을 밀착시키며 해윤의 아래를 움켜쥐었다.
“섰잖아. 너. 아까부터.”
입술이 맞닿은 채, 그의 음성이 해윤의 입술 표면을 적셨다. 매끈한 안경 표면 아래의 두 눈이 불온하게 빛났다. 손가락 하나하나의 감촉이 아래에서 생생하게 느껴졌다. 거스러미 하나 없던 그의 깨끗한 손가락이 열을 품고 단단해진 해윤의 성기를 음란하게 움켜쥐어 비볐다. 발기한 성기의 형태를 가늠하는 것처럼.
“흠뻑 젖은 주제에 왜 싫다고 내뺍니까.”
다시금 가식적인 예의를 덧입은 그의 혀끝이 해윤의 입술을 핥았다. 방심한 사이 벌어진 입 안으로 그의 혀가 밀려 들어왔다.
뜨거운 숨결. 더운 체향. 정직하게 열을 머금고 달아오른 그의 하반신. 움찔거리는 해윤의 손목을 달래듯이 매만지는 손가락의 움직임. 그 무엇 하나 치명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지율의 모든 것이 해윤을 극한으로 몰고 갔다. 신경을 긁는 전화벨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이명처럼 해윤의 귓속에서 울렸다.
저 빌어먹을 전화벨 소리.
한기우의 살의에 찬 시뻘건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초조함에 입술을 씹으며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을 한기우의 모습이 그려졌다. 매끈한 얼굴을 온통 구기고 전화를 받지 않는 자신과 한지율을 향해 끊임없이 욕설을 뱉고 있을 그의 모습. 손에 집히는 대로 던져 부수며 자신을 망가뜨리며 학대하고 있을 것이다.
알 게 뭔가. 그 미친놈이 어떻게 된들.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없다 허세를 떨기엔 한기우에게 붙잡힌 인질이 너무도 많다. 어머니. 이모.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이 해윤의 머릿속에 차례로 스치는 것과 동시에 핸드폰 벨 소리가 뚝 끊겼다. 해윤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칼날 같은 이성이 쾌락에 젖어 흐무러진 사지를 매섭게 후려쳤다.
해윤은 있는 힘껏 힘을 주어 저를 미치게 하는 습한 열기를 밀어냈다. 한지율은 밀려나지 않으려 버티며 해윤에게 입술을 부딪혀 왔다. 그러나 해윤은 고개를 틀어 그를 피했다.
“하지 마세요.”
“이럴 겁니까?”
“그만합시다. 이러지 말죠. 여기선….”
한지율은 자신을 밀어내는 해윤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입술을 갖다 댔다. 손등에 그의 입술이 닿은 것만으로도 해윤의 배 속 어딘가가 찌르르 울렸다.
“한기우가 들이닥칠까 봐 그래요? 그 새끼에게 들키는 게 무서워요?”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지금 당장에라도 한기우가 이 집 창문을 쾅쾅 두들기며 해윤아, 하고 부를 것만 같아서 끔찍하게 두려웠다.
“네. 무섭습니다.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전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어머니와 이모는… 이러지 마시라고요. 제발 좀!”
사람이 말을 하는데 듣지도 않고 키스하려 하기에 해윤의 언성이 확 높아졌다. 한지율을 쏘아보는 눈에 힘이 들어갔다. 해윤이 온몸으로 명확한 거부 의사를 뿜어내자 그제야 한지율은 깨끗하게 물러났다. 집요하게 달라붙어 질척거리던 게 언제였냐는 듯 깔끔하게 해윤에게서 손을 뗐다.
“불륜이라도 저지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가 엄지 끝으로 제 입술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우습다. 불륜이라니. 더 우스운 건 그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쏘아붙이질 못하는 자신이었다. 해윤의 머릿속에는 온통 한기우가 들이닥칠지도 몰라, 그 생각만 가득 찼다.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커튼에 가려진 방 창문을 흘긋거렸다.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방금 전 해윤의 몸에 닿아 있던 것 같은 축축한 열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해윤은 한지율에게 물리고 빨려 퉁퉁 부은 입술을 씹으며 침묵했다. 가, 그냥. 그게 제일 안전해. 순간의 욕망을 참지 못해 불장난을 하기엔 걸리는 게 너무도 많다. 해소하지 못해 고스란히 남은 성욕은 자위라도 해서 분출시키면 그만이다.
“가십시오.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하죠.”
“좆이 부어서 아픈데 어떻게 없던 일로 합니까? 괴로운 건 피차 마찬가지일 텐데.”
갑자기 창문이 바람에 흔들려 덜컹거렸다. 해윤은 흠칫 놀라며 말을 던졌다.
“빨아서 풀어 드리면 되겠어요?”
이 숨 막히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성 발언이었다. 해윤은 이런 상황에선 상대를 무조건 밀어내는 것보다 적당히 맞춰 주고 달래는 게 낫다는 것을 잘 알았다. 아직까지 한지율은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인간이다.
“말했습니다. 난 당신과 섹스를 하고 싶은 거라고.”
해윤의 제안이 그를 불쾌하게 한 것일까. 한지율의 어조에 짜증이 묻어났다.
“난 한지율 씨와 섹스하기 싫다고 거부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분명히요. 제가 술에 취해서 본의 아니게 한지율 씨에게 불을 붙인 것 같으니 책임지고 풀어 드리겠다는 거고요.”
“본의 아니게? 다분히 의도적이었잖아. 당신이 날 핥듯이 바라보는 거, 이번 한 번이 아니잖아요. 제가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습니까?”
“그럼 왜 지금까지는 가만히 계시다 지금에야 이러세요?”
“한기우 새끼를 완전히 돌아 버리게 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거든.”
해윤의 입에서 어이없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한지율의 눈에 어린 감정은 단순했다. 순수한 분노.
“그 새끼가 바닥까지 추락해 부서지는 꼴을 봐야겠어. 참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
말을 뱉는 그의 입매가 뒤틀렸다. 한기우가 또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쳐서 저 남자의 속을 뒤집어 놓은 모양이었다. 기가 차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제 안의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날 이용하겠다고?
“가. 꺼지세요. 씨발. 나야말로 인내심이 바닥날 것 같으니까.”
부글부글 끓어 넘치는 화를 간신히 참으며 해윤은 욕을 씹어 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 정말 신기해. 댁은 뭐가 잘나서 이렇게 꼿꼿하지? 비굴하게 납작 엎드려 벌벌 떨다가도 어느 순간 고개를 쳐들고 눈을 부라리고. 무너질 것 같으면서도 꿋꿋이 버텨. 자존심이 얇은 종잇장 같아 금방 너덜너덜 찢어질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고.”
한지율, 저 새끼가 빈정대는 소리를 듣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도 들을 때마다 새로운 분노가 울컥 치밀었다.
“난 사람이라 사람 취급 좀 해 달라는데 그게 그렇게 건방진 소리야?”
속이 뒤틀리다 못해 쓰렸다. 아까 급하게 마신 맥주가 배 속에서 꿀렁거렸다.
“난 사람이에요. 한지율, 네 눈에는 내가 돈 때문에 다리나 벌리는 쓰레기보다 못한 싸구려로 보이겠지만. 나도 감정이 있고 자존심도 있고 후려치면 피가 나고 고통을 느낄 줄도 아는 사람이라고.”
한지율을 쏘아보는 해윤의 눈매가 떨렸다. 한심하게. 감정을 숨기고 삭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늘 이렇다.
“내 눈에도 석해윤 씨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사람이니 내가 댁한테 꼴리는 거지.”
분노로 똘똘 뭉친 공을 던지면 저 남자는 늘 차가운 얼음 덩어리의 형태로 말을 만들어 받아쳤다. 그게 얼마나 사람 맥 빠지게 하는 대화 패턴인지 알고서 저러는 걸까. 알고서 저러는 거라면 대단하다. 그의 반응에 해윤의 몸에서 힘이 빠지며 싸울 의욕이 싹 사라졌으니까.
바람이 거센지 창문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본능적으로 해윤의 어깨가 움찔 움츠러들었다. 한기우의 광기에 뼛속까지 잠식당했다. 증오와 두려움, 온갖 밑바닥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남자. 지옥에서 빼내 주었지만 그보다 더한 지옥에 던져 넣은 사람.
지긋지긋했다. 제 유일한 쉴 곳마저 빼앗아 속박하려는 그 남자의 애정 방식에 치가 떨렸다. 두렵지만 싫다. 싫지만 불쌍하다.
하지만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해윤, 자신이었다. 그 남자의 뒤틀린 고독을 이용하려 한 자신. 모르고 이용당했다 하더라도 결국 한기우가 내주는 맛좋은 고깃덩이에 달라붙은, 그의 주위에 존재하는 피라냐 떼와 다를 바 없는 자신.
사람 취급 해 달라고 대들었는데 생각해 보니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춥다. 제 집인데도 해윤은 낯선 한기를 느꼈다. 머리끝까지 솟아오른 분노가 두려움으로 변하고, 두려움이 다시 분노로, 재차 반복된 분노가 희석되어 휑한 허무함으로 바뀌었다.
“쉬고 싶습니다.”
이젠 화도 내지 않고 애원도 하지 않았다. 한지율의 말대로 이 텅 빈 집에서 제대로 쉴 수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근처에 모텔이나 호텔 있습니까?”
짧은 침묵 후 내뱉은 한지율의 목소리가 따뜻하다고 느낀 것은 이 집이 너무도 춥기 때문일 터였다.
“여기만 아니면 되는 거잖아.”
한지율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해윤의 팔을 잡았다. 해윤은 그 손을 쳐 냈다. 하지만 그가 다시 해윤의 손을 붙잡아 끌었다.
“똑똑하신 분이 뭔가 대단히 유치한 착각을 하시는 것 같은데, 나와 이런다고 해서 한 전무님을 흔들진 못할 겁니다.”
“아뇨. 그 점 하나만큼은 자신감을 가져도 됩니다. 한기우한테 남은 건 당신뿐이야. 그 새끼 주위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
한기우와 한지율 사이에 어떤 균열이 존재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서로에게 향한 열등감. 질투. 시기심. 사람 사이의 작은 균열은 틈을 만들고 구멍을 만든다. 오랜 세월 조금씩 균열이 생기다 급기야 뻥 뚫린 구멍은 너무도 깊고 거대해 무엇으로도 메꿀 수가 없을 것이다.
비틀리고 뒤틀린 것은 한기우뿐만이 아니었다. 한지율도 냉정한 얼굴 뒤로 뒤틀릴 대로 뒤틀린 광기를 숨기고 있었다. 수백, 수천 개의 균열과 구멍이 뚫린 알맹이 위에 보기 좋게 희디흰 석고를 발라 놓은 것뿐.
“나갑시다. 난 오늘 어떻게든 댁과 해야겠거든.”
해윤의 손을 쥔 그의 손힘이 다소 강압적이었다. 언제나 차갑던, 무기질의 사물을 바라보던 그의 눈이 농염하게 젖어 해윤을 보았다. 적어도 벌레나 바닥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를 보는 눈은 아니었다.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그의 눈에 조용히 작은 불씨가 일었고 해윤의 손을 감싸 쥔 그의 하얀 손에도 열기가 느껴졌다.
한지율 속에서 절절 끓는 감정. 한기우에게 향한 그의 시꺼먼 분노. 그리고 해윤에게 향한 더운 욕망. 감정을 숨기고 억누르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 해윤의 눈앞에 원초적인 감정을 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싫으면 뿌리치시죠.”
한지율이 입을 놀렸다. 말은 잘한다. 싫다고 해도 놔주지 않을 거면서. 그래도 예, 라는 대답만 허락하는 한기우와는 달리 선택할 기회는 준다 싶었다.
한지율은 오늘 확실히 이상했다. 어떤 것이 촉발제가 되어 그의 불씨를 당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저 남자의 이상한 행동은 한마디로 표현 가능했다.
미친 거다. 그리고 저 남자의 끓어 넘치는 열기에 휩쓸리는 해윤도. 다 미쳤다.
힘이 빠져 무기력하게 늘어진 해윤의 사지 위로 다시 열이 뒤덮였다.
한지율이 다시, 아까보다 좀 더 강하게 해윤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가 이끄는 대로 못이기는 척, 해윤은 끌려 나갔다.
저 남자의 뜨거운 부분이 제게 향한 순수한 감정이 아니란 걸 아는데도. 그가 저를 이용해 휘두르려는 의도를 빤히 보였음에도.
카페 창밖으로 건널목 앞에 선 한지율의 거만한 뒤태를 보며 저 오만불손한 남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던 때가 있었다. 이렇게라도 이 남자에게 ‘석해윤’이라는 존재로 인정받는 게 기쁜 것일까… 됐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이 미친 충동의 이유를 곱씹기엔 너무도 춥고 피곤했다.
집 근처에 모텔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도 한지율은 시내 호텔로 가자며 택시를 불렀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그나마 남아 있던 취기마저 날아갔다. 해윤은 옆에 탄 한지율을 보기가 괜히 민망해서 차창 밖만 바라봤다.
운전기사가 환기를 시킨답시고 창을 열어 놓아 몸이 차갑게 식었다. 드러난 살갗에 소름이 돋아 있는데 다리 사이는 뜨거웠다. 식지 않고 고스란히 남은 제 아래의 열기가 해윤은 새삼 부끄러웠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 한지율이 프런트 데스크에서 방값을 결제하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어 12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둘은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부자연스러운 어색함과 냉랭함이 감돌기만 했다.
한지율이 한발 앞서 복도를 척척 걸어가 배정받은 방 앞에 멈춰 선 뒤 센서에 카드키를 갖다 댔다. 삐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한지율은 문고리를 잡아 돌려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이라면 돌아서도 되지 않을까. 짧게 망설였지만 해윤은 곧 그를 따라 조용히 룸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정면에 보이는 소파에 곧바로 걸어가 코트를 벗어 걸쳐 놓았다.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끌어내려 풀고는 안에 받쳐 입은 드레스 셔츠 소매 단추마저 풀었다. 뭘 하자는 말이 없어도 몸에 걸친 것을 하나씩 벗는 그의 행동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뭘 그렇게 멍하게 서 있습니까?”
손목에 감긴 시계를 푸는 그의 손끝을 얼이 빠져 보던 해윤은 그 말에 움칫했다.
“먼저 씻는 게 낫지 않을까요?”
예고도 없이 한지율이 성큼 다가왔다. 익히 맛본 그의 입술이 다시 해윤의 입술 위를 덮쳤다. 너무도 갑작스러워 해윤은 본능적으로 주춤 물러났다.
“화대부터 치르고 해야 하는 겁니까?”
그가 입술을 맞붙인 채로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오늘 밤, 한지율이 지껄인 소리 중 가장 기분 더러운 소리였다. 악취 풍기는 오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여기까지 따라와 놓고서도 망설이기에 대가를 바라는 건가 했지.”
“한지율. 너 진짜….”
욕이 절로 치밀었다. 말 한마디로 살의가 치솟게 하는 것도 재주다.
해윤은 엉겨 붙은 그의 몸을 휙 밀쳐 냈다. 그러곤 입구 쪽의 미니 바로 성큼성큼 걸어가 티박스 뒤에 놓인 작은 양주병 하나를 들어 올렸다. 마개를 돌려 따 한 병을 단숨에 마셨다. 양이 워낙 적어 마신 것 같지도 않아 한 병 더 따서 입 안에 들이부었다.
“뭐 하는 겁니까?”
등 뒤에서 한지율이 어이없는 듯 뱉는 목소리가 들렸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으니 이런다. 미니 양주 세 병을 마시고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더 꺼내 마시고 나니 눈앞이 빙글 돌았다.
“왜 이래요? 어울리지도 않는 짓 하지 말고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요. 그게 더 댁다운 것 같으니까.”
또. 또 빈정거린다. 저 빌어먹을 입. 한지율의 지껄임이 취기 오른 해윤의 귓가에 짜증스럽게 울렸다.
닥쳐, 좀. 해윤은 몸을 돌려 그에게 불쑥 손을 뻗었다. 덮치듯이 다가가 그의 목을 붙잡고 얄미운 소리만 내뱉는 입술을 삼켰다. 그는 한순간 아주 약간 움칫했다. 그러나 곧 능숙하게 해윤을 맞아 주었다. 흔들림 하나 없이, 달려들어 제 입술을 덮치는 해윤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음란하게 엉키는 그의 입술이 뜨거웠다. 해윤도, 그도 급하게 타올라 펄펄 끓었다. 혀와 혀가 질척하게 얽혀 서로의 숨결까지 탐욕스럽게 빨아 마셨다. 확 치솟는 취기와 함께 남아 있던 이성이 일거에 날아갔다. 짐승 같은 욕망이 해윤의 온몸을 덮쳤다.
이러려고 이 남자의 손에 붙잡혀 따라 나왔다. 제대로 미치려고. 이 남자의 차가운 표면 속에 존재하는 뜨거움을 좀 더 깊게 맛보려고.
“안경… 좀 벗어요.”
해윤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자꾸 콧잔등에 부딪히는 안경테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또요? 원하는 게 그거뿐입니까?”
말을 하기 위해 잠시 떨어진 해윤의 입술을 다시 맛보기 위해 그의 얼굴이 따라붙었다.
“입도 좀 닥쳐 주세요.”
한지율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입술과 맞닿은 해윤의 입술 위에서 웃음의 진동이 흩어졌다.
한지율은 손을 들어 안경을 벗고는 눈으로 물었다. 됐죠? 훤히 드러난 그의 동공이 너무도 맑고 색이 선명했다. 눈이 제법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입술이 다시 맹렬히 덮쳐 왔다. 쉴 틈 없이 입술을 포개 핥고 빨며 급하게 해윤의 옷을 벗겨 냈다. 점퍼가 벗겨져 바닥에 떨어지고 스웨터 자락이 말려 올라갔다. 옷 속으로 그의 손이 들어와 해윤의 옆구리를 쓰다듬듯이 만졌다. 간지러우면서도 오싹한 느낌에 해윤의 아래가 움찔움찔했다.
“옷도 벗을까요?”
한지율이 해윤의 윗입술을 빨며 달뜬 속삭임을 흘렸다.
“네?”
“옷 벗는 것도 당신 허락을 구해야 하는 것 같아서.”
또 빈정대는 소리. 하지만 이죽거리는 그 숨결마저 달고 뜨거웠다.
그가 해윤의 허벅지 사이에 제 다리를 얽어 비비며 다시 입술을 맞붙였다. 그의 아래도 당장 옷을 뚫고 나올 듯 단단히 발기해 있었다. 그의 손이 바르작대느라 움찔대는 해윤의 엉덩이를 움켜쥐며 주물러 댔다. 허벅지에 닿아 눌려 있는 그의 아래에서 달착지근하게 데워진 강한 체취가 풍겼다.
해윤의 엉덩이 살점 사이에 존재하는 음란한 구멍이 열을 품고 벌름거렸다. 기대감에 잔뜩 차서.
해윤은 그와 한 덩어리가 되어 키스하며, 그가 밀어붙이는 대로 자연스럽게 한 발 한 발 뒤로 밀려났다. 해윤의 발뒤꿈치에 딱딱한 무언가가 닿는다 싶더니 몸이 뒤로 휙 넘어갔다.
해윤을 맞아 준 것은 폭신한 침대 매트리스였다. 살갗에 닿는 흰 시트의 감촉이 서늘하고 거칠었다. 덥다. 공기는 차가운데 몸은 뜨거웠다. 한지율도 마찬가지로 더운지 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천장을 등지고 해윤의 몸 사이에 자리 잡은 한지율은 왠지 앳되어 보였다. 병적인 차가움을 벗어 던진 그는 거침이 없었다. 흥분해 헐떡이며 급하게 제 옷가지를 벗어 던졌다.
수트로 꽁꽁 싸매고 있던 몸이 해윤의 눈앞에 드러났다. 군살 하나 없이 알맞게 균형 잡힌 몸이 땀에 젖어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의 하얀 손이 망설임 없이 제 바지 버클을 풀어 끌어내리자 발기한 성기가 튕겨 나왔다. 그의 것도 이미 흥건히 젖어 묽은 액이 사방에 튀었다.
“괴로울 정도로 부은 건 오랜만인데.”
그가 발갛게 부어오른 제 입술을 비틀어 웃는다.
해윤도 마찬가지였다. 발기한 성기가 옷에 쓸리는 감각이 고통스러워 손도 대기 힘들었다. 차가운 공기마저 해윤의 몸을 예리하게 훑었다.
몸에 닿는 한지율의 시선이 끈적이면서도 집요했다. 어둡게 가라앉은 그의 눈이 열을 품고 빛나며 해윤의 얼굴로 다가왔다. 한지율의 하얀 손끝이 해윤의 얼굴에 닿아 뺨을 감쌌다.
“한기우가 이 얼굴에 미치는 게 이해도 되고….”
“닥치라고.”
해윤은 짜증이 벌컥 나서 욕을 하며 제 뺨을 움켜쥔 한지율의 손을 철썩 쳤다. 그가 입매를 올려 웃으며 손으로 해윤의 다리를 넓게 벌린 뒤 그 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발기한 성기가 해윤의 엉덩이 둔덕 사이에 짓눌렸다. 당장에라도 안을 뚫고 들어올 기세로 단단히 서서 아래를 찔러 댔다.
그는 애무도 뭣도 없이 아래를 벌려 밀어 넣으려고만 했다. 해윤은 아래의 근육이 무리하게 벌어지며 몸이 찢기는 듯한 통증에 발버둥을 쳤다.
“자, 잠깐만…!”
벌어진 입술이 그의 입술에 틀어 막혔다. 입술을 찍어 누르며 그는 힘으로 제 아래를 쑤셔 박았다. 터져 나온 해윤의 신음은 그의 입술이 삼켰다. 부들부들 떨며 밀어내려는 손을 잡아 좀 더 힘을 주어 쑤셔 넣는 우악스러움에 욕이 저절로 튀었다. 발끝까지 힘이 바짝 들어가 시트가 마구 밀렸다.
괴로운 건 무식하게 처넣은 쪽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한지율이 한숨을 토해 내며 끝부분만 간신히 들어간 제 것을 쑥 빼냈다.
“왜 이렇게 빡빡합니까. 처음도 아니면서.”
“댁이 못 한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댁? 한지율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자긴 매번 날 댁이라고 부르면서 내가 댁이라고 부르니 기분 나쁜가 보지. 욕을 하지 않은 것만 해도 많이 참은 거였다. 아래가 열상을 입은 듯 화끈거려 말이 곱게 안 나온다. 그가 잠시 몸을 움직여 침대 위에 나뒹구는 벗어 둔 제 옷 속을 뒤져 콘돔을 끄집어냈다. 저건 또 어디서 났을까 싶었다. 미리 준비해 온 것은 아닐 테고. 호텔 프런트에서 받아온 건가.
“넌 술 취한 게 낫다. 솔직하게 싸구려 본성을 드러내는 게.”
그는 이로 콘돔 포장을 뜯어 고무막을 제 성기에 씌우며 지껄였다. 내가 싸구려면 나랑 이 짓 하는 너도 싸구려야. 다시 덮쳐 온 그의 입술이 그 소리를 막아 주어 다행이었다. 그의 손이 해윤의 성기를 훑으며 콘돔을 씌운 제 성기를 해윤의 엉덩이 사이에 문질렀다.
한 손으로 해윤의 한쪽 허벅지를 넓게 잡아 벌려 단번에 사정 봐주지 않고 끝까지 처넣었다. 해윤의 눈앞에서 번쩍 불꽃이 일었다. 번쩍이는 쾌감이 전신을 내달렸다. 눈물이 절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힘 빼. 제발. 힘 빼고 제대로 열어요.”
그가 헐떡이며 해윤의 귓불을 씹었다. 해윤의 성기를 쥐어흔들며 뜯어 먹을 듯 제 것을 꽉 씹어 무는 안에서 꿈틀댔다. 처넣은 채 내벽을 헤집어 돌리는 감각을 참지 못하고 해윤은 버둥거리며 바르작댔다.
빼지 않고 안에 밀어 넣은 그대로 내벽 안을 꾹꾹 눌러 왔다. 그게 더 미칠 것 같았다. 헐떡임을 토할 때마다 구멍이 벌름대며 끝까지 머금은 그의 성기를 씹어 물고, 그러면 안에서 느껴지는 화끈거림과 찌릿함을 동반한 감각에 몸서리치며 다시 숨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숨을 쉬려 입을 벌리면 다시 한지율의 입술이 덮였다.
혀를 얽어 빨며 아래를 반쯤 빼냈다 다시 처박는다.
흐윽! 자극당해 예민해진 부위가 재차 찔리며 해윤의 입에서 참지 못한 신음이 터졌다. 괜찮다며 위로하듯이 떨리는 입술을 빨면서 연거푸 안을 박아 댔다. 밀어내려고, 싫다고 밀어내고 벌어진 다리를 닫아 보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손은 무자비하게 해윤의 허벅지를 잡아 벌려 이성을 잃고 허리를 놀렸다.
그의 굵고 긴 성기가 안쪽 깊숙한 곳을 찌를 때마다 해윤의 몸이 들썩였다. 그의 것이 배 속을 엉망진창으로 헤집는 것 같았다. 잠깐, 그만해, 같은 애원은 한 번도 먹히지 않았다. 도리어 애원을 하자 몸이 뒤집혔다. 집요하게 안을 쑤시던 놈의 것이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금세 끝까지 박아 쳐올렸다.
“흣, 으윽! 윽!”
삽입의 각도가 더 깊어져 해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이 흐느낌으로 변했다. 시트에 얼굴이 뭉개져 마구 쓸렸다. 다소 거친 시트 표면에 자꾸만 젖꼭지가 쓸려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지만 다시 푹 무너졌다. 한지율의 성기가 제 안을 쉴 새 없이 드나들고 놈의 음낭이 구멍 아래에 치덕대며 부딪히는 감각까지 생생히 느껴졌다.
한지율의 손이 고문과도 같은 행위에 바짝 경직되어 너울대는 해윤의 등줄기를 쓰다듬었다. 엎드려 있어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어째 굉장히 부드럽다. 이윽고 그가 등 뒤로 몸을 겹치며 제 입술을 해윤의 도드라진 목덜미 뼈에 눌렀다. 보드랍고 따뜻한 입술이었다.
그의 손이 뒤에서 뻗어 나와 처량하게 꺼떡거리던 해윤의 성기를 움켜쥐어 흔들었다. 더 강한 쾌감을 얻기 위한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일 것이다. 그런데도 해윤은 숨도 못 쉴 정도로 짓이겨지던 때 느꼈던 전율과는 다른 쾌감을 느꼈다.
해윤은 뜨거운 숨을 헐떡이며 한지율의 손 안에서 오늘 밤, 첫 번째 절정을 맞았다. 해윤의 눈꼬리에 맺혀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 볼을 적셨다. 안에 가득 들어찬 한지율의 성기도 미세하게 떨렸다. 뿜어져 나와 제 목을 적시는 그의 숨결이, 느른하게 허벅지를 쓰다듬는 그의 손이 무척 따뜻하고 상냥했다.
하룻밤 상대의 의미 없는 온기에라도 기대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해윤은 너무도 딱하고 불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