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억이 통장에 입금되었다.
놀랍게도. 넣어 주겠다 약속한 날 바로.
- 입금 확인 하셨어요? 액수, 맞게 들어갔죠?
송 비서에게 확인 전화가 걸려 왔다. 해윤은 이미 인터넷 뱅킹 계좌에 찍힌 액수가 믿기지 않아 몇 번을 확인한 상태였다.
“세금을 떼지 않으셨네요?”
- 세금을 왜 떼요? 전무님이 사비로 넣어 주신 용돈이에요. 그거. 지금 전무님이 정신없으셔서 제가 대신 연락해 드리는 거예요. 급한 돈이라 하셔서 얼른 확인하고 쓰시라고요.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사비로 넣어 준 용돈. 계좌에 찍힌 ‘3’ 뒤에 이어지는 동그라미 개수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소리였다.
- 전무님이 빨리 마음 돌리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뇨.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 한 이사님 말씀이 전무님이 이렇게 빨리 복귀하신 건 처음이라고 하세요. 전에는 거의 반년을 외국에 나가 계셨다가 들어오셨다고 하더라고요. 해윤 씨 덕분에 제가 한시름 놓았어요, 정말. 아, 그리고 미팅 날짜를 잡아야 하는데 언제가 좋으세요?
“미팅이요?”
- 네. 업무 미팅이요. 라인맥스가 대경 ENT에 합병될 예정이거든요. 업무 미팅을 해야 일이 진행되지요.
합병이 아니라 강제 흡수겠지. 사실상 라인맥스라는 회사는 끝장났다고 보면 될 것이다. 대경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라인맥스 같은 소형 기획사가 무슨 힘이 있어 버티겠나.
“제가 부산에 내려갔다 와야 해서요. 정리할 것도 있고. 다음 주 수요일 즈음 괜찮을까요?”
- 네. 알겠습니다. 일정 잡아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차 보내 드릴까요?
“아뇨. 기차 타고 내려가는 게 더 빨라요.”
- 그럼 KTX를 바로 예약해 드릴게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비서님도 바쁘실 텐데 됐습니다.”
- 안 해 드리면 제가 나중에 전무님께 혼나요. 어디 보자. 오늘 오후 두 시, 괜찮으시죠? 돌아오는 날은 일요일로 하면 될까요?
“네. 일요일 오후로.”
타닥타닥.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 예약했습니다. 매달 넣어 드릴 활동비는 저희가 금액을 책정해서 넣어 드릴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활동비는 또 뭡니까?”
- 해윤 씨가 대경 ENT를 통해 데뷔를 준비하실 동안 쓸 생활비라 생각하시면 돼요. 혹, 금액이 부족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고요. 그리고 아파트가 리모델링 중인데 대략 2주가 걸린다고 하네요. 공사하는 거 직접 보시고 싶으시면 한번 찾아가 보셔도 되고요. 주소 찍어 드릴게요. 그리고 이사 가능한 날짜도 정해서 알려 주세요. 이사 일정도 잡아야 하고….
“저기 잠깐만요. 송 비서님.”
- 네? 말씀하세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아파트는 또 뭔가요?”
- 뭐긴요. 해윤 씨가 거주하실 아파트죠. 전무님에게 아무 말씀 못 들으셨어요? 해윤 씨와 무슨 계약을 하셨다던데.
나한테서 떠나지 마. 내 옆에 있어. 그러면 내가 뭐든지 해 줄게.
한기우의 간절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게 계약이었나.
- 해윤 씨. 죄송해요. 나중에 다시 통화해요.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 와서요.
송 비서가 다급히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입금 알람 문자를 받고 벌떡 일어나 인터넷 뱅킹에 접속했던 때의 놀라움. 연이은 충격에 정신이 멍했다.
돈. 살 집. 매달 들어올 거라는 생활비.
이 전폭적인 지원의 조건은 한기우를 떠나지 않아야 할 것. 한기우와 섹스할 것. 가죽 벨트에 손을 묶이고 목이 졸리고, 콘돔 없이 몸속에 사정하게 해 줘야 하며, 싫어도 싫다고 하지 말아야 할 것.
해윤은 붉은 멍이 남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묶인 자국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콘돔을 쓰지 않아도 임신하지 않는다.
돈이 주는 희열. 돈이라는 마약.
두려움이 희석된다. 목이 졸리던 때, 눈앞을 뒤덮던 새까만 공포의 베일이 싹 걷힌다.
살았지 않나, 목이 졸렸어도. 놈의 가학적 변태 성향에 맞춰 주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죽도록 무섭고 끔찍해도 죽지는 않는다. 이건 일종의 화대다. 자신의 인생을 순식간에 바꾸어 줄 어마어마한 화대. 한기우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미 해윤은 빚에 압사해 죽지 않았을까. 이 돈은 해윤을 우물 밑바닥에서 끌어 올려 줄 구원의 동아줄이었다.
해윤은 당장 들이닥치겠다던 사채업자부터 찾아갔다.
놈들 앞에 돈을 던져 주고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사채업자 사무실은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전화를 걸자 사채업자가 대뜸 언성을 높였다.
- 아니, 석해윤 씨. 너무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법을 준수해 가며 신사적으로 행동했지 않나요? 봐 드릴 거 다 봐 드리고 했는데 이러시면 안 되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사무실 앞인데 어디 계십니까? 빌린 돈 갚으려고 왔는데.”
- 원금에 이자까지 전부 다 입금됐어요. 이 사람, 안 그렇게 생겨서 되게 무시무시한 양반이시네. 어제 사무실로 쳐들어와서 다 뒤집어엎고 갔으면서 왜 또 뻔뻔하게 찾아오세요? 두 번 다시 연락하지 마시라고요!
그가 빽 소리를 지르고는 전화를 끊었다. 다시 전화를 하려 하자 전원을 꺼 두었단다. 굳게 잠긴 사무실 문, 사내가 지껄여 대던 소리들. 짐작 가는 바가 있긴 했다.
뒷덜미가 싸했다. 그토록 자신을 쥐어짜던 사채 빚에서 해방됐는데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 해윤아! 우리가 남이니? 우린 한 식구잖아. 그렇지?
송 비서가 예약해 둔 KTX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며 김태민에게 전화했다. 그의 음성도 사채업자의 그것과 비슷했다. 겁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 덜덜 떨면서도 외치는 그놈의 빌어먹을 한 식구 타령.
“형. 어디에 있어요?”
- 역으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김태민의 목소리 대신 낯선 사내의 음성이 새어 나왔다.
“누구십니까?”
- 부산역에서 뵙죠.
모시러 온다던 낯선 남자는 부산역에 도착한 해윤을 바로 알아보고 다가왔다. 덩치 커다란 민머리 사내였다. 워낙 몸집이 거대해 살아 움직이는 돌덩이 같았다.
“석해윤 씨와 동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요?”
“한 전무님께서요. 부산에 머무시는 동안 제가 모시겠습니다.”
남자가 타고 온 차를 타고 이동하며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불안하면서도 마음 편하다.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 이러면 어때, 하는 속 편한 생각도 든다.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끊임없이 충돌했다. 오래도록 생각해 보아도 이렇다 할 결론은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해운대가 보이는 어느 호텔 앞에 차가 멈춰 섰다.
“해윤아!”
남자와 함께 호텔 룸 안으로 들어서자 김태민이 울며 달려들었다. 놈의 얼굴이 피로 범벅돼 곤죽이었다. 해윤은 본능적으로 주춤 뒤로 물러섰다. 해윤을 이곳까지 데려온 덩치가 김태민을 확 떼어 내 바닥에 무릎 꿇려 앉혔다.
방 안에는 또 한 명의 사내가 앉아 맥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남자의 흰 와이셔츠 자락에 핏방울이 점점이 튀어 있는 게 보였다. 방 안에 낭자한 피비린내에 속이 메슥거렸다.
“해윤아. 나 좀 살려 줘라.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김태민이 애처럼 훌쩍거렸다. 몇 대 얻어맞더니 잔뜩 겁에 질렸다.
“간덩이 쥐좆만 한 새끼가 무슨 깡으로 깝쳤냐? 깝치길. 병신 새끼야.”
해윤이 할 말을 맥주를 마시던 남자가 대신 해 줬다. 김태민이 흘긋 쏘아보자 남자가 주먹을 쳐들어 올렸다. 또 맞을까 봐 김태민은 움찔했다.
꼴을 보니 김태민은 얼굴만 피투성이가 됐지 사지는 멀쩡하다. 손발도 제대로 달려 있고. 가볍게 처리하겠다던 한기우의 말대로, 정말 가볍게, 손만 봐준 수준이었다.
“야. 새끼야. 뭐해? 사과해, 얼른.”
남자가 발끝으로 김태민을 툭 쳤다. 김태민이 경기 일으키듯 화들짝 놀라 바닥에 머리를 찧어 댔다.
“미안해. 해윤아. 내가 죽을죄를 지었다! 너한테 내가 할 말이 없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만하라고 하지 않으면 이마가 터져 피가 쏟아질 때까지 저러겠지. 김태민은 비열하게 해윤의 가장 약한 부분을 인질 삼아 협박하던 새끼다. 돈을 미끼로 기어이 해윤을 끌어내 진창 위로 던져 넣은 놈이다.
그런데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통쾌해야 할 텐데 영 불쾌했다.
김태민이 아니었으면. 저 자식이 해윤을 한기우 앞에 던져 주지 않았으면. 여전히 해윤은 빚에 파묻혀 널브러져 있었을 것이다.
“알았으니까 그만하세요.”
말을 내뱉자마자 김태민이 머리 박고 절하기 쇼를 멈췄다.
“몹쓸 짓이나 하려고 네 이모님 댁에 간 거 아냐. 정말 걱정돼서 그랬어.”
“듣기 싫으니 그만하시라고요.”
“저 사람들 한 이사가 보낸 거야?”
김태민이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사내 둘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너희 같은 것들, 묻어 버리는 건 일도 아니라고 음산하게 지껄이던 한지율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저도 몰라요.”
“이번 일, 누구의 탓도 아냐. 철없는 여자애 하나랑 정신 나간 매니저 새끼가 눈 돌아가서 벌인 일이지. 장 대표도 걔들이 그럴 걸 알았겠어? 딱 봐도 철없는 애들이 벌인 일이잖아. 장 대표가 한 전무한테 개인적인 원한이 좀 있긴 해도 어떻게 이런 유치한 방법으로 엿 먹이려고 했겠어?”
“왜 저한테 변명하세요?”
“해윤아. 나 어떻게 되는 거야? 죽는 거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사람 막 죽이고 그럴 사람들 아니지? 해윤이 네가 전무님한테 매달려 봐. 난 아무 잘못 없다고. 꼭 태민 형이랑 같이 일해야겠다고.”
놈은 비굴하게 매달려서 애원했다. 다진 고깃덩이 신세가 된 얼굴. 두려움에 가득 찬 눈. 개기름이 잘잘 흐르던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다.
“형은 대체 뭘 원해서 이 짓을 시작했는데요?”
김태민의 동공이 커졌다.
“난 돈 때문에 이랬다고 쳐. 근데 형은 대체 뭘 원해요? 돈? 명예?”
“나도 대박 한 번 쳐 보고 싶었어. 다 잘되자고 시작한 일이야.”
결국 돈이로군.
그놈의 대박 한 번 쳐 보고 싶었으면 혼자 힘으로 해 보지. 성실하게, 착실하게 소속사 애들 키워서 데뷔시켜 대박 꿈 한 번 꿔 보지 그랬어요. 입 밖으로 말을 꺼내려다 관뒀다. 말해서 뭐하겠나. 김태민의 입버릇처럼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해윤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 줄게. 돈 필요하지? 내가 빚 다 갚아 줄게. 어머니 수술비, 병원비 다 내가 대 줄게. 내가 가수로 키워 줄게. 우리 같이 힘 합쳐서 성공해 보자.”
조용히 의자에 앉아 핸드폰만 들여다보던 두 남자가 갑자기 일어섰다.
민머리가 덕트 테이프를 들고 고개를 양옆으로 꺾으며 김태민에게 다가왔다. 흰 와이셔츠의 손에는 테이블 옆에 세워져 있던 긴 막대가 들려 있었다.
김태민이 기겁을 하며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 했다. 민머리가 재빨리 놈을 붙잡아 다시 앉혔다.
“해윤아. 해윤아! 사, 살려 줘. 나 좀 살려….”
흰 와이셔츠가 무표정한 얼굴로 테이프를 직 뜯어 김태민의 입에 붙였다. 김태민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버둥거리지도 못하고 앉아서 덜덜덜 떨기만 했다.
지켜보던 해윤도 겁에 질렸다. 불쾌한 예감에 가슴이 크게 뛰었다. 비상식적이고,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질 것이란 예감.
“이러지 마세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지 않습니까.”
해윤이 민머리를 붙잡고 말릴 동안, 흰 와이셔츠가 손에 든 막대를 휘둘렀다. 뻐억, 소리가 나더니 김태민의 몸이 크게 휘청하며 앞으로 푹 꺾였다. 얻어맞은 어깨 부분을 움켜쥐고서 그는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죽죽 쏟아지고 테이프에 틀어 막힌 입 안에서 끅끅대는 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하지 마세요!”
해윤이 크게 외치며 김태민을 보호하려 달려들려 하자, 민머리가 팔을 붙잡아 말렸다.
“죽이진 않습니다. 가볍게 손봐 주라고만 하셨습니다.”
민머리가 담담하게 지껄였다. 누가요? 하고 물을 것도 없다. 한기우.
김태민은 가볍게 처리해 줄게. 다시는 허튼짓 못 하게. 그의 중얼거림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입을 열었으나 소용없는 말인 것을 알기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돈 100만 원에 사람도 죽여 주는 세상이에요. 한지율에게 그리 말했던 자신이었다. 그런 세상이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
뻐억! 막대가 한 번 더 김태민의 사지를 후려쳤다. 해윤은 차마 더는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뭔가 해윤의 발목을 턱 움켜잡았다. 흠칫 놀라 내려다보니 김태민이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해윤의 발목을 붙잡고 피눈물을 쏟으며 애원하고 있었다.
살려 줘. 해윤아.
해윤은 참지 못하고 발을 흔들어 놈의 손을 떨쳐 냈다. 사방에 진동하는 피비린내에 속이 뒤집혀 밖으로 뛰쳐나와 버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에 내려선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한기우의 전화다.
- 해윤아. 부산에 갔다며?
수화기를 통해 새어 나오는 그의 음성이 더없이 다정했다. 송 비서에게 부산에 내려간다는 말을 전해 들었겠지. 그러곤 직접 방 안의 저 덩치들에게 연락했던 것일 테고.
뭐라고 명령했을까. 내 옆에 붙어 다니면서 감시하라고? 꼭 석해윤이 보는 앞에서 김태민을 응징해라, 이랬을까? 괘씸한 새끼를 손봐 주고, 석해윤이 그걸 지켜보게 해서 두려움을 낙인찍으라고?
한기우가 이러한 바를 의도한 것이라면 그 의도는 적중했다.
해윤은 겁에 질렸다. 두려움에 시퍼렇게 질려 버렸다.
- 어머니와 이모님, 잘 만나 뵙고 올라와.
상냥하고 보드랍고 달콤하기만 한 목소리. 다정함 뒤에 숨은 잔인함을, 잘 안다. 나른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에 몸속까지 바들바들 떨렸다. 한기와는 종류가 다른 날카로운 냉기가 몸속을 후벼 팠다.
- 너무 오래 있지는 마. 너한테 박고 싶어 미치겠으니까.
질척한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적셨다. 자르르 소름이 일며 다리 사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의 성기가 드나들던 항문이 벌름거리며 아랫배를 조였다.
“일요일 오후에 올라갑니다.”
- 곧바로 나한테 와. 안고 싶어.
“네. 알겠습니다.”
해윤은 잠시 로비의 소파에 주저앉았다. 다리 사이의 열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지끈거리며 쑤시고 아팠다. 김태민이 피투성이가 되어 꿈틀대던 걸 보고서도 이런다. 아무래도 미친 것 같다. 사람이 이렇게 미쳐 가나 보다.
언제 내려왔는지 민머리 사내가 다가들었다. 그가 물었다.
“xx 병원으로 가실 거죠?”
어머니가 입원해 계신 병원 이름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잠깐 그를 말없이 바라봤다. 일면식도 없는 낯선 사람. 평생 엮일 일이 없던 유형의 인간. 그런데 저 남자는 자신을 알고 있다. 자신은 저 남자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남자가 커다란 몸을 틀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해윤은 조용히 일어나 그의 뒤를 좇았다. 그의 독한 스킨 냄새에 바다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아니다, 피비린내였다. 분명히.
***
“해윤 씨.”
대경 본사 건물에 도착해 방문객 명찰을 목에 걸고 있으려니 송 비서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점심은 드셨어요?”
그가 살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언제 봐도 사교성 좋은 사내다.
“대충 먹긴 했는데.”
“에이. 사실 밥 안 드셨죠? 마침 점심시간이니까 같이 식사하고 올라가요.”
“미팅 시간이 한 시부터라고 하셨는데 밥 먹고 올라가면 늦지 않을까요.”
“미팅 시간은 두 시예요. 해윤 씨한테 드릴 말씀도 있고 같이 식사도 하고 올라가려고 한 시라 말씀드렸던 거예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구내식당 괜찮으시겠어요? 이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없어서요.”
“전 상관없습니다. 좋죠, 뭐.”
“그런데 저와 함께 식당에 내려가면 좀 시끄러울 수도 있거든요.”
“시끄러울 일이 뭐 있다고요. 전 괜찮아요. 상관없습니다.”
송 비서가 한 말의 의미는 곧 온몸으로 절감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시선의 화살이 쏟아져 푹푹 꽂히는 수준이었다.
사원증을 목에 건 사람들이 하나같이 이쪽을 바라보며 수군거린다. 웅성거린다.
한기우 전무 비서 아니야? 맞아. 한 전무 조사 중이라며. 그런데 한 전무는 어떻게 되는 거야? 임원진에서 물러나야 하지 않나. 애초에 그런 무능한 인간을 임원진으로 승진시킨 것부터가 잘못됐어. 이번엔 못 빠져나갈 것 같은데. 감옥 가는 거 아냐? 아냐. 다 빠져나가게 돼 있어. 하긴 그렇겠지. 회사 이미지 아주 잘도 말아먹었어. 어차피 회사에서 하는 일도 없는 것 같은데 독립시켜서 연예 기획사 하나 차려 주면 안 되는 거야? 아주 연예인에 목을 매던데.
식판에 밥을 퍼 담는 척하던 송 비서가 고개를 홱 틀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흘긋대며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입을 싹 다물었다. 시선을 피하며 각자 흩어져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역시 시끄럽죠?”
송 비서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아, 뭐. 괜찮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뒤통수가 따갑다. 무수한 시선이 해윤에게도 날아들었다.
송 비서랑 같이 있는 저 사람. 누구야? 글쎄, 회사 직원은 아닌 것 같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들. 몸 구석구석을 훑는 날카로운 시선의 칼날. 나가서 식사하자고 할 것을. 구내식당으로 따라온 것이 뒤늦게 후회했다. 해윤은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며 식판에 밥과 반찬을 퍼 담았다.
“해윤 씨. 그걸 다 드시게요?”
송 비서가 해윤의 식판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제가 좀 잘 먹어서요.”
해윤은 괜히 부끄러워져서 소시지 볶음을 더 퍼 담으려다 집게를 내려놓았다.
“해윤 씨는 보기보다 정말 잘 드시는 것 같아요. 드시는 게 다 어디로 가요? 전 조금만 과식해도 뱃살이 찌던데.”
“밥을 먹어야 힘이 나죠. 송 비서님도 밥은 굶지 말고 꼭꼭 챙겨 드세요. 한국인은 밥심이라잖아요.”
“하하하! 해윤 씨 되게 재밌으셔!”
송 비서가 과장되게 웃었다. 밥 챙겨 먹으라는 말이 저렇게 웃긴가? 송 비서는 생기발랄한 대학생 같다. 저 남자도 30대일 텐데.
“손 다치셨어요?”
송 비서가 붕대가 감긴 해윤의 손목을 보며 물었다. 해윤의 얼굴이 시뻘겋게 익었다. 벨트에 묶였을 때 든 멍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 붕대를 감고 온 거였다.
“손목에 상처가 생겨서요.”
“조심하시지. 양쪽 다 붕대 감을 정도면 크게 다치신 거 아니에요? 아프셨겠다.”
그의 어조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났다. 한기우와 자신의 관계를 모르진 않을 텐데. 상사의 남자 파트너를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는 그의 태도가 존경스럽다.
“해윤 씨. 어머니는 어떠시던가요?”
“잘 드시고 치료 잘 받으셔서 그런지 얼굴색이 좋아지셨더라고요. 그리고 어머니 병실을 특실로 옮겨 주셨더군요. 고맙습니다.”
“제가 했나요. 전무님이 하신 거지. 그 병원 특실, 괜찮죠?”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으리으리했다. 어머니는 오히려 병실이 너무 크다며 부담스러워했다. 여태까지 병원비 아끼려고 6인실에 입원해 계셨던 터라 더 그런 듯했다.
‘서울 사장님이 무리하시는 거 아니니? 난 이런 특실까지는 필요 없는데.’
어머니는 김태민이 호의를 베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모양이었다.
‘에이. 언니. 뭐가 필요 없어. 좋기만 하구만. 6인실은 시끄러워서 밤에 잠도 잘 못 잤는데. 언니가 아들 잘 둔 덕분에 이런 호사도 누리는 거지.’
이모는 싱글벙글하기만 했다.
‘하긴 내가 아들 하나는 잘 두긴 했어. 우리 해윤이 덕분에 엄마가 이런 좋은 데 입원해 보기도 하네.’
그제야 어머니도 웃었다. 두 분의 미소가 보기 좋았다. 어머니와 이모가 모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며 해윤은 가슴이 미어졌다.
“어머니 잘 버티실 거예요.”
송 비서의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아, 네. 해윤은 대충 말을 얼버무려 반응했다.
“혹시 김태민 대표님도 같이 부산에 계셨어요?”
수저를 든 해윤의 손이 움칫했다. 김태민. 부산에 있었지, 그놈도.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살려 달라고 애원하던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테이프에 입이 틀어 막혀 윽윽대며 눈을 까뒤집고 꿈틀대던 모습.
“서로 바빠서 만나지 못했어요.”
“그러시구나. 연락해도 안 받으셔서요. 오늘 김 대표님도 미팅에 나오시는 거죠?”
나올 수 있을까. 아니, 살아 있기나 할까? 가슴께에 돌덩이를 얹어 놓은 듯 묵직하다. 부산역에 당도하는 자신을 맞아 주었던 민머리 사내는 줄곧 해윤의 운전기사 겸, 감시인 역할을 했다. 일요일 오후, 부산을 떠날 때까지.
‘태민 형. 괜찮은 거죠?’
‘죽이진 말라고 하셨으니까요. 괜찮습니다. 아직은.’
역 안으로 들어가며 묻자 민머리 사내는 짧게 대답했다. 괜찮다고 했다. 그때까지는. 적어도 해윤이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는 괜찮다는 소리였다.
“이번 일은 어떻게 그럭저럭 잘 해결될 것 같아요. 다행히 전무님은 그걸 안 하셨대요.”
‘그걸 안 하셨대요.’ 하는 부분에서 송 비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해윤의 목소리도 저절로 잦아들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긴 해도 검사해 보면 나오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그 사건 이후로 전무님이 사람 많은 곳에선 그런 거 잘 안 하세요. 술도 많이 드시지 않고.”
그 사건이 뭔지 캐묻기에는 애매한 장소였다. 관련 화제로 떠들 수도 없는 곳이었고.
둘은 화제를 전환해 주말에 본 예능 프로그램 얘기 따위를 주고받으며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송 비서와 커피 한 잔 마시자고 의기투합해 1층 로비 커피 전문점으로 향했다.
“커피는 제가 살게요.”
“안 돼요. 전무님께 제가 혼나요. 어차피 경비 처리할 거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영수증 주시고요.”
커피라도 사려고 카운터 앞에 서자, 송 비서가 얼른 카드부터 불쑥 내밀었다.
“저거 한 전무 차 아냐?”
자신들의 뒤에 줄 서 있던 남자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뒷줄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한 전무? 그럴 리가. 조사받는 중이라고 하던데?”
“아냐. 저거 한 전무 차 맞아.”
해윤과 송 비서도 그들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사내들 몇 명이 로비 앞으로 서둘러 뛰어가는 게 보였다.
검은 벤츠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와 로비 앞에 멈춰 섰다. 뒷좌석 문을 열고 양복 차림을 한 젊은 사내 한 명이 내려섰다. 한기우다.
“저분이 정말!”
송 비서도 식겁해서 쌩 달려 나갔다. 한기우는 바람에 흩날리는 코트 자락을 여미고 인상 쓴 얼굴로 척척 걸어 들어왔다. 먼저 밖으로 뛰어나간 사내들이 한기우의 옆에 붙어 섰다. 대신 문을 열어 주고, 살살 웃으며 종알거렸다. 달려 나간 송 비서도 한기우의 옆에 붙어 섰다. 연신 싱글싱글 웃던 그의 얼굴이 벌겋게 익어 있었다.
마침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해윤은 커피 잔 두 개를 받아 들고 한 전무를 중심으로 한 무리 뒤에 슬쩍 따라붙었다.
“전무님. 미리 전화라도 주시지 그러셨어요. 조사 중인 분이 이렇게 나오시면….”
“내 아버지 회사인데 왜 내가 마음대로 못 와? 너한테 허락 받고 와야 돼?”
한기우는 송 비서의 말을 자르고 되레 신경질을 냈다. 식은땀을 흘리며 쩔쩔매는 송 비서의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래. 송 비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전무님이 못 오실 데 온 것도 아니고. 회사 일을 처리하려고 나오신 거 아니겠어. 얼마나 책임감 강하신 분이야, 우리 전무님이. 그리고 장 기사가 운전하고 오면서 전화 쫙 돌렸어. 송 비서가 전화 못 받은 거 아냐?”
한기우의 옆에 붙어선 중년 남자가 쏘아붙였다. 그러곤 샐샐 웃으며 딸랑거렸다.
“전무님. 출타하신 동안 NT 철강 건은 저희 팀에서 처리해서 중국에 발주 넣었습니다.”
“잘하셨어요.”
“그리고 전무님. 태양광 에너지 건으로 중동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사내들이 입을 열어 짹짹거렸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한기우의 얼굴에는 짜증이 역력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안에서 내린 사람들이 한 전무를 알아보고 흠칫 놀라며 인사했다. 한기우가 먼저 승강기 안으로 들어갔다.
“서류 제출하시면 검토하겠습니다.”
송 비서도 안으로 들어서며 한마디로 딱 잘랐다. 안까지 따라 들어오려던 사내들이 멈칫했다.
“뭐 해? 타지 않고.”
승강기 안에 서 있던 한기우가 짜증을 냈다. 사내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무리의 뒤에서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해윤에게 시선이 죄 쏠렸다.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할까. 몇 층으로 올라가야 할지 모르는데. 생각에 잠겨 있던 해윤은 그제야 얼른 승강기 안에 올라탔다.
“전무님. 이렇게 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될 때까지 나오지 마시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자숙하는 척이라도 하셔야죠.”
승강기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송 비서가 종알거렸다. 경찰 조사, 강도 높은 수사, 그런 건 역시 보여 주기용 쇼였던 모양이다.
“내가 없으면 일이 제대로 굴러가겠어?”
“전무님 안 계셔도 회사는 아주 잘 굴러가고 있어요.”
“너 건방져졌다.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상사한테 기어올라?”
“몇 달 새 많이 강해졌습니다. 전무님 덕분에요.”
송 비서는 핸드폰을 꺼내 빠르게 손가락을 놀려 문자를 쳤다. 해윤은 구석에 멀뚱히 서서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기우와 시선이 마주치기도 겁이 났다.
“해윤아. 커피 좀 줄래?”
한기우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송 비서 몫의 커피를 내밀자 한기우의 얼굴이 불쑥 다가들었다. 그는 해윤의 손에 컵이 들린 상태 그대로 얼굴을 가까이해 입을 갖다 댔다. 먹여 주라는 건가. 해윤은 그가 마시기 쉽게 컵을 기울여 주었다. 컵에 스틱을 꽂아 와서 다행이었다.
송 비서는 자신들을 흘긋 보고는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대에게 문자를 보내는 손가락이 분주했다.
한기우는 커피를 스틱으로 몇 모금 빠는가 싶더니 입을 뗐다.
“맛이 뭐 이따위야? 커피를 왜 라떼로 마셔? 취향 한 번 더럽네.”
“취향 더러워서 죄송합니다.”
송 비서가 꿍얼거리며 자기 몫의 커피를 받아 갔다. 한기우의 입이 닿았던 스틱을 쏙 빼내고 뚜껑을 열어 호로록 마신다.
“어머니는 어떠셔?”
“안색이 좋아 보이셨어요. 전무님이 이것저것 세심히 신경 써 주셔서 어머니가 한결 편하게 수술 받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김 대표는? 만났지?”
낮게 깔린 그의 음성이 귓가에 축축하게 감겨들었다. 해윤은 흘긋 송 비서의 눈치를 살폈다. 송 비서에게는 바빠서 김태민과 만나지 못했다고 말해 뒀다. 대답을 듣고자 질문한 것은 아니었던 듯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나랑 시선을 안 마주치지?”
해윤은 한기우의 구두코를 내려다보던 시선을 흠칫 들어 올렸다. 한기우의 매끄러운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조용히 해윤을 쏘아보고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 속 같은 소름 끼치는 동공.
“사람들 눈에 띄어 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서요.”
“사람들 시선이 무슨 상관이야?”
그 소리를 듣고 송 비서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손목은 또 왜 이래? 다쳤어?”
한기우가 이제야 해윤의 손목에 감긴 붕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가 붕대 감긴 해윤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네, 좀.”
해윤은 말을 얼버무리며 붙잡힌 손목을 떼어 냈다.
“얼마나 크게 다쳤으면 양손 다 붕대를 감아? 병원에 갔다 왔어?”
너 때문입니다. 그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손목에 피멍이 들 정도로 묶던 새끼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승강기 문이 열렸다. 문 바로 앞에 한지율이 버티고 서 있었다.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볼 근육이 떨리고 있다.
“넌 왜 나와 있어? 내가 내 일 하러 회사에 나오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한기우가 뭐 이리 유난이냐는 듯, 코웃음을 치며 뻔뻔하게 지껄였다.
“기우 형. 얘기 좀 해.”
“너랑 할 얘기 없어.”
한기우가 앞을 막아선 한지율을 밀쳐 냈다. 한지율이 그의 팔을 틀어쥐었다.
“잠깐이면 돼. 부탁이야.”
한지율답지 않게 저자세였다. 인상 쓴 얼굴로 쏘아보던 한기우가 픽 웃었다.
“해윤이 데리고 먼저 들어가 있어.”
그는 송 비서에게 명령하고는 한지율에게 붙잡힌 팔을 떼어 냈다. 네. 전무님. 송 비서가 짧게 대답했다. 그가 먼저 몸을 틀어 걷기 시작하자 한지율도 그 뒤를 따랐다.
“전무님이 나쁜 분은 아닌데….”
송 비서가 말끝을 흐리며 혀를 찼다.
“불쌍한 분이에요. 전무님이 내색은 안 하셔도 이번 일로 엄청 배신감 느끼셨을 거예요. 그분이 리나를 얼마나 귀여워하셨는데요. 무명이었던 럭키참이 누구 때문에 그렇게 컸는데요. 그 계집애는 제 복 자기가 걷어찬 거죠. 나이도 어린 애가 무슨 욕심이 그렇게 과한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복도를 걸었다. 송 비서는 입으로는 나불대며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핸드폰이 연신 지잉지잉 울려 댔다.
“해윤 씨, 앞으로 하실 일 다 잘되실 거예요. 꼭 성공하셨으면 좋겠어요. 전 해윤 씨 같은 분이 좋거든요.”
그가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저도 송 비서님 같은 분이 좋습니다.”
해윤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해윤 씨는 쭉 좋은 분으로 남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송 비서가 웃는 얼굴로 해윤을 보며 말을 뱉었다. 미소 띤 그의 얼굴 뒤에 숨은 본심이 보였다. 차갑고 날카로운 본심. 아무리 자신에게 사근사근하게 굴어도 한기우 쪽 인간이다.
해윤은 새삼 절감했다. 새롭게 맞이한 이 지옥에서 자신은 완벽하게 혼자라는 사실을.
***
회의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한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송 비서가 회의실 창문 블라인드부터 열어젖혔다. 그러고는 회의실 벽면에 붙은 문을 열고 안에서 생수, 음료수 병, 종이컵 같은 것을 꺼냈다.
해윤도 얼른 다가가 안에서 음료수를 꺼내는 걸 도왔다.
“아니에요. 제가 할 일인데요. 해윤 씨는 앉아 계세요.”
“소화도 시킬 겸 움직이고 싶어요. 테이블에 하나씩 종류별로 놓아두면 될까요?”
송 비서가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해윤은 음료수 병을 품에 한가득 끌어안고 테이블 위에 하나씩 놓아두었다.
“저에게 서류가 있긴 하지만 한 번 더 확인할게요. 라인맥스와 계약금 2천으로 계약하신 것 맞죠?”
그가 해윤이 음료수 병을 둔 옆에 생수병 하나씩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네. 2천 맞습니다.”
“보니까 계약서 자체가 엉망이던데 확인 잘하신 것 맞아요?”
“제가 연예 기획사 계약서를 써 본 적이 없어서요. 계약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엉망인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사기 계약서더라고요. 호구 노예 계약서라 하죠, 그걸. 멋모르고 당하실 뻔했어요. 그런 계약은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건데.”
“사실 계약금 2천에 혹했던 거죠.”
해윤은 사실대로 시인했다. 계약서를 읽어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계약금 2천, 그 숫자만 눈에 들어왔지.
“일이 이렇게 틀어진 게 천만다행이에요. 라인맥스는 대경 ENT에 합병될 거라, 라인맥스 쪽 소속 연예인과 해윤 씨는 대경 ENT 소속이 될 거예요. 대경 ENT에서 해윤 씨가 데뷔하실 때까지 전폭적인 지원을 할 거고요. 상세 사항은 재계약하실 때 들으시면 되고. 다만 한 가지 해윤 씨에게 확실히 말씀드릴 게 있어요.”
“뭡니까?”
“전무님을 배신하지 마세요. 해윤 씨만은 그러시면 안 돼요.”
송 비서의 낮은 목소리가 빈 회의실 안에 울렸다.
“만에 하나 허튼 행동을 하실 경우, 해윤 씨의 안전은 장담 못 해요.”
그가 한마디 덧붙인다. 해윤은 마지막 남은 음료수병 하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대답, 필요합니까?”
“네. 확답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절대로 전무님을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전무님이 저를 놔 버리실 순 있어도요.”
“저도 이거 하나는 확답해 드릴 수 있어요. 전무님이 해윤 씨를 놔 버릴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송 비서의 어투는 단호했다. 해윤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한기우가 먼저 자신을 놔 버리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것.
죽은 옛 연인의 얼굴을 한 자신이 한기우 앞에 나타났다. 죽은 연인의 꿈을 이뤄 주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사내 앞에. 신미라와 닮은 얼굴을 한 놈이 가진 것 하나 없는 빈털터리, 맨손인 꼴을 하고 나타났다. 돈을 위해서. 돈 때문에.
네 꿈을 이루게 해 주겠다. 모든 걸 주겠다. 원하는 것을 아낌없이 던져 준다. 대가는 곪아 터진 애정이 깔린 집착이다.
자신이 신미라가 아니란 것을 알 텐데도. 그런데도 한기우는 매달린다. 신미라와 닮은 이 얼굴에, 이 몸에 매달려 갈구한다. 내 옆에 있어 줘. 나한테서 떠나지 마. 제발. 해윤아, 하면서. 그런 그가 안쓰럽고 가여우면서도 무섭고 끔찍하다. 두려워서 피하고 싶은데 벗어날 수가 없다. 김태민의 말처럼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이다.
“됐어요. 제가 드릴 말씀은 이게 다예요. 우리 앞으로 잘해 봐요. 해윤 씨.”
송 비서가 진지함을 걷어 내고 쾌활한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강아지 좋아하세요? 전무님이 키우시던 강아지 사진 보실래요?”
그가 해윤의 옆으로 쪼르르 다가와 강아지 사진을 보여 주었다. 털이 복슬복슬한 포메라니안 강아지 사진이었다.
“사모님이 분양받은 강아지였는데 이혼하면서 두고 가셨어요. 지금은 본가에 있는데 얘가 성질이 좀 더러워서 다른 데 분양하려는 모양이더라고요.”
“이름이 뭔가요?”
“뽀뽀요. 한 이사님이 붙여 주신 이름이에요. 얘가 어릴 때 한 이사님만 보면 막 뽀뽀를 해 댔거든요. 뽀뽀 잘한다고 뽀뽀라고.”
해윤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지율이 붙여 준 이름이라니. 뽀뽀 잘하는 강아지라고 뽀뽀라니. 요 며칠 새, 처음으로 터뜨린 웃음이었다.
“어렸을 때 하얀 몰티즈를 키웠었어요. 저도. 딸랑이라고.”
“방울 딸랑거린다고 딸랑이였죠?”
“네. 그러고 보니 강아지 이름은 막 짓네요. 사람 이름은 심사숙고해서 지으면서.”
“근데 강아지 이름이 박춘기. 김향복. 이러면 또 이상해요. 시골 할아버지께서 강아지 이름도 진지해야 한다면서 박춘기 김향복, 이런 이름을 지어 주셨거든요. 할아버지가 춘기야. 똥 싸지 마라! 향복아. 짖지 마라! 이러시는데 웃다가 죽을 뻔했어요.”
“하하하! 진짜 웃기네요!”
“우리 뽀뽀가요. 평범한 강아지가 아니에요. 얘가요. 전생에 장군이었대요. 그래서 애가 어찌나 성질 사납고 목청이 큰지 몰라요. 암컷인데.”
송 비서가 종알거리며 동영상 하나를 끄집어냈다. 누런 털북숭이 한 마리가 펄쩍펄쩍 뛰며 ‘캉캉캉!’ 맹렬하게 짖어 댔다. 손바닥만 한 녀석이 목청 하나만큼은 장군감이다. 해윤도 웃다가 죽을 것 같았다. 배가 찢어질 듯했다.
“뭐 그렇게 웃긴 얘기를 하고 계세요? 회의실 밖에까지 웃음소리가 다 들리네.”
회의실 문을 열고 중년 남자와 서류 가방을 든 젊은 사내 한 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송 비서는 얼른 핸드폰 동영상을 껐다.
“웃긴 거 당신들끼리만 보지 말고 나도 보여 줘 봐요. 뭐 봤습니까?”
웃으며 들어섰던 중년 사내가 해윤을 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못 볼 것을 본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곧 시선을 돌리며 자리에 앉았다.
“송 비서님. 함께 계신 저분은 누구세요?”
“미리 대표님께 말씀드렸던 석해윤 씨라고 합니다. 해윤 씨. 저분은 대경 디지털뮤직 박영민 대표님이세요. 대표님 이분은 석해윤 씨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석해윤입니다.”
해윤은 깍듯하게 허리를 90도 각도로 굽혀 인사했다. 대경 디지털뮤직이라니. 러버덕 밴드 활동 당시엔 감히 접촉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곳이다. 그의 비서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해윤에게 다가와 명함을 내밀었다.
대경 뮤직 로고가 금박으로 찍힌 명함을 받아 들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라인맥스 김태민 대표님은 오늘 미팅에 나오지 않으시나요?”
“아마 곧 오실 겁니다. 제가 대신 보내 드린 석해윤 씨의 프로필, 받아 보셨겠지만.”
“네. 받았습니다.”
비서가 가방에서 태블릿과 서류를 꺼내 박영민의 앞에 놓아 주었다. 그가 미팅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는 동안 사내들 몇 명이 더 들어왔다. 정확히 두 시였다.
송 비서는 대경 ENT관계자들을 하나하나 인사시켰다. 연신 허리 굽혀 인사하고 악수하고 명함을 받고를 반복하다 보니 나중엔 누가 누군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받은 명함만 한 가득이었다.
“한 이사님께서는 좀 늦으실 겁니다. 급하게 바이어가 찾아오셔서 회의 중이시거든요. 한 이사님이 들어오시기 전까지 미팅은….”
송 비서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고 척척 걸어 들어오는 인물은 바로 한기우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기우에게 쏠렸다. 그들의 얼굴 위로 하나같이 의문 부호가 떠올랐다. 왜 한 전무가 여기에 있지? 하는 듯한 표정이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모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기우는 환하게 웃으며 해윤의 옆에 다가와 섰다. 그의 손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해윤의 어깨에 닿았다. 친근하게 어깨를 감싸고는 좌중을 향해 말을 뱉는다.
“이 녀석, 어떻게든 올해 안에 가수로 데뷔시키세요.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마시고.”
송 비서가 뒷목을 잡았다. 대경 ENT 관계자들도 할 말을 잃었다. 홍보 팀장이라는 사람이 한마디 했다.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불가능에 가까운 걸 가능하게 만드는 게 당신들 능력 아닙니까. 밑바닥이었던 리나도 반년 안에 톱으로 키웠잖습니까?”
“아니, 리나의 경우와는 다르죠. 리나야 원래 럭키참이라는 그룹 멤버이기도 했고, 럭키참이 전부터 모델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멤버 전원이 비주얼 하나는 확실했어요. 럭키참 애들이 실력이 워낙 탄탄해서 소수지만 코어 팬이 확실한 상태였고요. 대경이 TnD를 합병하기 전부터 걔네는 TnD를 먹여 살리는 간판 스타였어요. 밑바닥이었던 게 아니라.”
“그래서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아무것도 없는 일반인을 어떻게 반년 안에 데뷔시킵니까?”
“하세요. 제가 하라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홍보 팀장이 더 이상 나불대지 못하고 입만 빠끔거렸다. 그는 목이 타들어 가는지 생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해윤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한기우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해 봅시다.”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박영민이 입을 열었다.
“재밌겠네요. 한번 해 보죠, 어디.”
박영민은 여유로운 미소를 띤 얼굴로 한기우를 응시했다.
“역시 박 대표님이시네요.”
한기우도 웃으며 해윤의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해 보는 거죠. 될성부른 떡잎을 키우는 것도 편하고 좋지만 제로에서 시작해 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박 대표님. 이게 무슨 게임인 줄 아세요?”
홍보 팀장이 우는소리를 했다.
“게임이지. 우린 늘 게임을 해 왔어. 하지만 이번엔 게임이 아닌 도박을 해 보자고. 천 팀장, 이번에 데뷔 준비 중인 대박 신인 하나 있잖아, 대경 ENT에. 석해윤 씨랑 걔랑 팀 꾸려서 데뷔시켜도 되지 않아? 걔도 나이가 좀 있는 편이라서 외관상으로는 제법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원숙한 실력파 그룹도 괜찮잖아?”
“대표님. 석해윤 씨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줄 알고 장담하세요? 원숙미 풍기는 실력파 그룹이 될지 실력 없고 나이만 든 노땅 그룹이 될지 누가 알아요?”
“에이. 한 전무님이 직접 나서서 적극 밀어 주시는 신인인데 실력이야 장난 아니겠지. 어떻게든 해 보자고.”
박 대표가 나불거리는 소리에 홍보 팀장은 입을 닫았다. 그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앞에 놓인 태블릿 화면만 노려보았다.
“화통하기도 하시지. 말씀도 잘하시고. 이래서 제가 박 대표님을 좋아한다니까요.”
“저도 이래서 한 전무님을 좋아해요. 언제나 예상치 못한 돌발 행동으로 단조로운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죠. 한 전무님은 어쩌면 이렇게 한결같으실까. 존경해요, 정말.”
박영민과 한기우, 두 사람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봤다. 어색한 기류가 흐른 것은 잠시. 태블릿을 씹어 먹을 듯 노려보고 있던 홍보 팀장이 손을 살며시 들어 다시 입을 열었다.
“한 전무님.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네. 하세요.”
“석해윤 씨는 대경 그룹과 어떤 관계인가요?”
“어떤 관계라뇨?”
“그러니까 석해윤 씨와 한 전무님이 무슨 관계냐고 여쭙는 겁니다.”
“굉장히 사적이고 무례한 질문을 하시네요, 팀장님?”
한기우의 어조가 차가웠다. 하지만 홍보 팀장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나불거렸다.
“듣도 보도 못한 일반인을 데려와서 무조건 올해 안에 데뷔시키라는 오더가 떨어졌는데, 여기 모인 전부가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눈앞에 있는 저 일반인이 대체 어떤 인물인지, 한 전무님과 어떤 관계인 건지.”
“팀장님은 배 속 간 크기가 자이언트 사이즈인가 봐요? 일개 팀장 나부랭이가 본사 전무의 인간관계를 캐묻기나 하고.”
“차라리 석해윤 씨가 회장님의 숨겨 둔 아드님이라든가, 전무님이 어렸을 때 헤어진 남동생, 혹은 가까운 친척이라고 말씀해 주세요. 그래야 이 상황이 어느 정도 납득이 될 것 같습니다.”
한기우가 어이가 없는지 코웃음을 쳤다.
“이 상황이 납득이 안 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천 팀장님?”
“그럼 이 일 못 하죠.”
홍보 팀장이 들고 있던 펜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대 늘어져 앉았다. 자를 테면 잘라 보라는 듯한 태도였다.
“이제야 말씀드리는 거지만 리나를 반년 만에 톱 자리에 앉히려고 얼마나 많은 직원들 영혼이 갈려 나간 줄 아십니까? 이것 보세요. 제 정수리 부분 휑한 거 보이시죠? 이 원형 탈모도 그때 생긴 겁니다. 온갖 병에 다 걸렸어요. 아주 걸어 다니는 종합 병원이 됐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혼을 갈아 가면서 키운 애가 한순간에 밑바닥으로 떨어졌어요. 지금 제가 심정이 어떨 것 같습니까 전무님?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보다 못한 박영민이 그제야 홍보 팀장을 말렸다.
“어허. 천 팀장. 왜 이래. 리나 얘기는 갑자기 왜 꺼내?”
“대표님. 저, 더는 못 하겠습니다. 지긋지긋합니다. 자르시려면 자르세요. 그런데 관둘 땐 관두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한 전무님. 리나가 그런 행동을 한 게 리나가 욕심이 많아서, 철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세요? 정말로요? 전무님이 리나를 귀여워하는 방식에는 솔직히 문제가….”
“천 팀장! 그만해!”
박영민이 크게 외치며 팀장의 입을 틀어막았다.
“왜요? 더 지껄여 보게 놔두시지. 재밌는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
한기우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낮게 깔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의 어조는 차갑고 날카롭고 축축했고 음습했다. 좌중의 분위기도 얼음물을 끼얹은 듯 쨍하게 얼어붙었다.
“말씀해 보세요. 천 팀장님. 리나를 귀여워하는 제 방식에 무슨 문제가 있는데요? 리나가 천 팀장님께 뭐라고 하던가요?”
“전무님. 천 팀장이 실언을 한 것 같습니다. 리나 사건으로 계속 시달리다 보니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나 봐요. 일단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무리하고, 추후 개별 미팅을 가지도록 합시다. 자아 자아. 다들 일어납시다. 천 팀장도 일어나. 회사에 돌아가서 얘기하자고.”
박영민의 쾌활한 목소리가 얼어붙은 분위기를 깼다. 그가 애써 웃으며 일어서서 천 팀장의 팔을 잡아끌었다. 천 팀장은 마지못해 일어서며 한마디 더 지껄였다.
“전무님. 사람을 그런 식으로 대하다간 언젠가 정말 크게 당하실 겁니다.”
한기우가 픽 웃었다.
“난 이미 크게 당한 것 같은데요? 키우던 개한테 물리는 게 이런 기분일까 싶은데.”
“개한테 물렸는데도 전무님은 멀쩡하시지 않습니까. 개가 제대로 물면 살점이 뜯기고 피가 철철 납니다. 한번 제대로 물려 보셔야 정신 차리시려나.”
천 팀장도 입 끝을 올려 실소했다. 천 팀장, 제발 좀. 박영민이 아예 사정을 하며 천 팀장의 등을 떠밀었다. 미팅에 참석한 직원들이 얼른 천 팀장을 회의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전무님. 저 친구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천 팀장이 리나를 친동생처럼 유난히 아꼈어요.”
박영민이 회의실에 남아 조심스럽게 한기우에게 말을 건넸다.
“아아. 네. 친동생처럼요?”
한기우는 일부러 말끝의 어조를 치켜 올렸다. 해윤은 아까부터 고개조차 들 수가 없었다.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도 없었고, 그들의 얼굴을 마주 볼 수도 없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석해윤’, 다름 아닌 자신이었는데.
“전무님도 너무 감정적으로 대하지 마시고 천 팀장의 심정도 이해해 주세요. 다 사람이 하는 일 아닙니까.”
“사람이 하는 일이라. 그렇죠. 사람이 하는 일.”
한기우가 유치하게 박영민의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박영민은 개의치 않았다. 한기우의 유치한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자연스럽게 관심을 해윤에게 돌렸다.
“석해윤 씨. 앞으로 잘해 봅시다.”
해윤은 바닥만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위로 쳐들었다. 박영민이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해윤은 얼른 일어나 박영민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한 전무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박영민의 손을 맞잡은 해윤의 팔이 움찔했다.
잘해 보자며 악수하고 있는 상대는 해윤인데 그는 한기우를 지칭했다. 석해윤의 꿈이 아닌 한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라며. 해윤의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리며 아팠다. 꼴같잖은 자존심이 찔린 탓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그래요. 한번 해 보자고요. 해윤 씨.”
박영민이 소리 내 웃으며 해윤의 어깨를 친근하게 두들겼다. 맞잡은 박영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붙잡힌 손이 아파서 해윤은 팔을 비틀어 손을 빼냈다.
갑자기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한지율이었다. 그는 문을 열어젖히고 급하게 뛰어 들어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기우 형,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했잖아!”
“왜 소리는 질러? 내가 못 올 데 온 것도 아니고. 해윤이가 걱정돼서 갈 수가 있어야지.”
한기우가 뻔뻔하게 지껄였다. 사촌 동생의 저런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한지율의 얼굴이 시뻘겋게 익어 갔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 표면에 균열이 생겼다. 뺨 근육이 뒤틀리더니 얼굴 전체가 일그러졌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씹으며 폭발하는 분노를 힘겹게 삼켰다.
“지금 형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기나 해?”
한지율은 떨리는 음성으로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하루라도 빨리 해윤이의 꿈을 이뤄 주고 싶어. 시간이 많지 않아.”
하지만 한기우는 딴소리를 찍 뱉었다. 한지율의 한쪽 뺨이 크게 경련했다. 뒤틀리는 한지율의 입 끝에서 저 개새끼, 하며 욕을 뱉는 소리가 새어 나오는 듯했다.
“형은 어떻게 늘, 매번 이렇게….”
한지율은 격앙된 어조로 내뱉은 말을 얼버무림으로 끝맺었다. 그러곤 허공을 향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경질적인 벨 소리가 회의실 안에 가득 찼다. 한기우가 품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인상을 쓰며 액정 화면을 노려보기만 했다. 벨 소리가 뚝 끊기고, 곧바로 누군가의 핸드폰 진동 소리가 이어졌다.
“네. 여보세요.”
이번엔 송 비서의 핸드폰이 울린 모양이었다. 송 비서가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대더니 얼굴을 굳혔다. 곧 그는 자신의 핸드폰을 한기우에게 내밀었다.
“전무님. 사모님이신데요.”
“사모님은 무슨. 이혼했으면 생판 남인 여자지. 끊어.”
“사모님이 급하게 할 얘기가 있다고 하시는데요. 래윤이 얘기라 하시는데….”
한기우가 송 비서의 핸드폰을 휙 낚아챘다. 그는 수화기 너머의 상대와 짧게 통화 후 전화를 끊었다.
“전 급한 일이 있어 가 보겠습니다. 우리 해윤이 잘 부탁드립니다. 박 대표님.”
“네. 걱정 붙들어 매세요. 제가 한다면 하는 놈인 거 아시잖습니까.”
박영민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해윤아. 나중에 보자.”
한기우가 해윤의 어깨를 감싸 토닥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살갗에 닿는 그의 숨결이 소름 끼쳐 해윤의 어깨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한기우가 송 비서와 함께 급하게 회의실 밖으로 사라졌다.
“하아. 씨발. 저 거지 같은 새끼.”
한기우가 사라지자마자 박영민의 입에서 한숨과 함께 욕이 튀어나왔다. 박영민의 말투며 얼굴 표정까지 일변했다.
“너 신미라와 무슨 관계야?”
“네? 저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해윤은 시선을 위로 들어 박영민을 보며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너. 너 아니면 내가 누구한테 하는 말 같아?”
“신미라 씨와는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묻기에 해윤은 사실대로 말했다. 그런데 박영민이 갑자기 성큼 다가와 거칠게 해윤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해윤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박영민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는 웃음기가 싹 사라진 얼굴로 해윤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놈의 손아귀 힘이 상당했다. 목이 조여들어 해윤은 컥컥대며 괴로워했다. 버둥거리며 박영민의 손을 떼어 내려 했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박영민은 손에 더 힘을 주어 해윤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가까이 들이민 놈의 눈이 형형했다.
“진짜 소름 끼치도록 닮았네. 어떻게 이렇게 그 계집애랑 닮을 수가 있지? 생판 남인 사이인데 이렇게 닮을 수도 있나? 너 정말 신미라와 아무 관계 아니야?”
“네. 아닙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선 한지율이 손을 뻗어 박영민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박 대표님. 이 손부터 풀고 말씀하시죠. 양아치처럼 왜 이러십니까?”
박영민이 눈을 돌려 한지율을 쏘아보았다.
“양아치? 우리 한 이사님. 말 되게 함부로 하시네.”
“지껄이라고 뚫린 입 아닙니까. 손 놓으시라고 했습니다. 당신 같은 인간이 함부로 해도 될 사람 아닙니다, 이 사람.”
박영민의 팔을 움켜쥔 한지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박영민이 피식 웃으며 해윤의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자유로워진 해윤은 시뻘게진 얼굴로 목을 움켜쥐고 잔기침을 했다.
“함부로 해도 될 사람이 아니면? 금덩이같이 귀하신 몸인가? 사내새끼한테 가랑이나 벌리는 남창 새끼 주제에 무슨.”
“박 대표님이야말로 말 함부로 하시네요.”
“지껄이라고 뚫린 입이라면서요? 그리고 내가 틀린 말 했나? 남창이 아니면 뭐야? 한 전무가 저 새끼한테 아주 폭 빠졌던데. 니미. 씨발.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한 전무, 그 새끼가 이젠 사내새끼한테까지 미쳐서는.”
한지율의 말대로 박영민은 양아치였다. 한기우 앞에서 보였던 예의 바른 모습은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제대로 미쳐 보라고 기우 형 앞에 저 사람을 갖다 바친 거 아닙니까?”
“우리 한 이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 알아듣게 설명 좀 해 주세요.”
“신미라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박 대표님이 그중 하나죠. 박 대표님은 기우 형한테 신미라가 어떤 존재였는지도 잘 알고 계시죠. 그리고 신미라를 닮은 해윤 씨가 기우 형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게 우연일까요?”
한지율의 시선이 해윤에게 쏠렸다. 해윤은 말없이 아직도 욱신거리는 제 목덜미만 쓰다듬었다.
“그리고 박 대표님은 김태민과도 형 동생 하는 사이였죠, 아마?”
“우리 한 이사님. 망상이 너무 과하시다. 아직 나이도 젊은 분이 왜 이렇게 세상을 못 믿어요? 세상이 다 좆같으신가?”
“박 대표님은 나이도 젊지 않은 분이 왜 이렇게 야망이 크십니까? 도박으로 크게 한탕 하시더니 인생도 크게 한 방 터뜨리고 싶으세요? 한탕 크게 하려다 골로 갑니다. 왜 소중한 인생을 걸고 도박을 하려 하십니까. 이젠 인생 말아먹으면 재기도 쉽지 않으실 나이인데.”
“한 이사님, 왜 이렇게 건방져지셨을까. 그러다 크게 당하시는 날이 올 텐데.”
“전 원래 어릴 때부터 건방졌습니다. 평생을 건방지게 살았지만 한 번도 크게 당한 적 없습니다.”
한지율은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박영민을 똑바로 노려보며 또박또박, 울림 깊은 목소리로 말의 화살을 내던졌다. 박영민이 거하게 코웃음 쳤다. 하지만 한지율은 웃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한 이사님 아버지는 잘 계시나? 그분이 요즘 또 슬금슬금 도박판에 얼굴 들이미시는 것 같던데. 알고 계세요? 한 이사님 아버님이야말로 도박에 인생 배팅하셨다가 크게 말아 드신 걸로 아는데요. 건강이 많이 상하셨던데 이번에도 말아 드시면 크게 잘못되실 거 같은데.”
한지율의 어깨가 작게 움칫하는 것을 해윤은 똑똑히 보았다.
“아버지는 잘 계시니 걱정 마시죠.”
“아니, 난 걱정이 돼서 그러지. 됐다. 이제 이런 얘기 그만하죠? 쓸데없는 소모전은 그만하고 건설적인 얘기나 해요. 해윤 씨. 나가서 조용히 얘기 좀 하죠? 해윤 씨와 할 얘기가 아주 많은데.”
조용히 얘기한다는 그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박영민이 친근하게 해윤의 어깨를 감싸려 했다. 멱살을 움켜쥐고 흔들어 댈 땐 언제고. 해윤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건설적인 얘기는 나중에 단체 회의 때 하십시오. 해윤 씨는 우리 대경 ENT 소속이니 개인 미팅 하고 싶으시면 매니저 통해서 정식으로 일정 잡으세요.”
이번에도 한지율이 나서서 박영민을 제지했다.
“어지간히 싸고도시네.”
“해윤 씨는 우리 대경 ENT의 소중한 재원입니다. 우리 쪽 사람이에요. 박 대표님 사람이 아니라. 리나한테 그러셨던 것처럼 이번에도 함부로 손 뻗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소중하면 꽁꽁 싸매서 내놓질 마셨어야지.”
“더 하실 말씀 없으시죠? 일이 바빠서 저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뵙죠.”
한지율이 박영민에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는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어갔다. 해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박영민의 시선이 느껴졌다.
“한 전무 새끼 상대하는 거. 참 고달프지?”
해윤은 침묵했다. 이런 질문에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 전무 그 변태 새끼, 그 짓 할 때 묶지?”
박영민이 붕대 감긴 해윤의 손목을 보며 물었다.
“그 씨발 새끼, 정상이 아냐. 지금 당장이라도 정신 병원에 처넣어야 돼. 지금은 묶기만 하지? 나중엔 발광하면서 때린다. 그 새끼.”
“박 대표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해윤은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며 그의 말을 잘랐다. 박영민이 피식, 비리게 웃었다.
“그래. 열심히 해야지. 네가 그 미친 새끼한테 몸 던져 잡은 기회인데. 구멍 망가지지 않게 관리 잘해라. 벌써부터 헐렁하게 늘어나서 못쓰게 되면 곤란하지 않겠냐. 열심히 해 보자, 우리?”
박영민이 꾸벅 숙인 해윤의 머리를 기분 나쁘게 툭툭 쳤다. 오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귀에 박영민의 목소리가 파고들며 썩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해윤은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어 대답했다.
“김태민, 그 자식 살아 있기는 한가?”
해윤의 어깨가 움칫했다.
“살아 있을 겁니다. 아마….”
해윤의 말끝이 흐려졌다. 김태민의 생사 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 건 해윤도 마찬가지였다.
“어설픈 새끼. 그 새끼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법이 없어.”
박영민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곧 석해윤 씨! 하고 부르는 한지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밖으로 나갔던 그가 다시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 해윤의 팔을 잡아끌었다.
“뭐 합니까? 나오시지 않고!”
해윤은 고개를 수그린 채 한지율에게 팔을 붙잡혀 끌려 나갔다. 거칠게 잡아끌어 주는 그의 손길이 이번만큼은 더없이 반갑고 고마웠다.
“무슨 죄 지었습니까? 고개 들어요.”
한지율은 복도로 나오자 붙잡은 해윤의 팔을 놔주었다. 하지만 해윤은 여전히 바닥만 바라보면서 앞서 걷는 한지율의 뒤를 따라 걸었다.
“바쁩니까?”
한지율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춰 서며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네?”
그제야 해윤은 고개를 들어 옆에 선 한지율을 보았다. 한지율이 엘리베이터 숫자 계기판을 올려다보고 선 채로 다시 물었다.
“바쁘시냐고요.”
“일이 있기는 한데.”
“커피 한잔 마실 시간은 있겠죠?”
한지율은 해윤의 답을 듣지도 않고 멈춰 서서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대로 혼자 돌아갈 기분이 아니어서 해윤도 군말 없이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커피는 제가 사겠습니다.”
해윤이 얼른 지갑을 꺼내 들고 계산대 앞에 섰다.
“자리 잡고 앉아 있기나 하세요. 이런 사소한 걸로 피곤하게 실랑이 벌이지 맙시다.”
하지만 한지율은 차갑게 쏘아붙이며 점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창가 앞 빈자리를 발견하고 가서 앉으려고 하자 한지율이 또 짜증을 냈다.
“뭘 마실지 정하고 가셔야 할 거 아닙니까.”
“아, 전 아메리카노로.”
“마실 거 하나라도 영양가 있는 것으로 드세요. 멀건 물만 마시지 말고. 곡물라테로 드십시오.”
어쩌라고. 네놈 마음대로 정할 거였으면 묻긴 왜 물어.
“네. 알겠습니다. 그걸로 주문 부탁드립니다.”
짜증 내는 것도 피곤해서 해윤은 대충 대답하고 빈자리로 향했다.
한지율이 곧 주문한 음료를 가지고 해윤이 앉아 있는 자리로 다가왔다.
“잘 마시겠습니다.”
해윤은 가볍게 인사하고 제 몫의 음료 잔을 들어 올렸다. 곡물라테라니. 누가 이런 걸 비싼 돈 주고 카페에서 사 먹나 했더니, 내가 이런 걸 마시게 될 줄은. 해윤은 컵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음료를 한 입 맛봤다. 따뜻한 물에 미숫가루를 탄 것과 다를 바 없는 맛이었다.
“맛이 어떻습니까?”
한지율이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
“고소하네요. 달고.”
“해윤 씨는 영양가 있는 것 좀 챙겨 먹고 힘을 더 키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라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보기보다 그렇게 마르진 않았는데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얼굴에 핏기도 없고. 앞으로 본격적인 식단 관리가 시작될 테지만 본인 스스로도 의식해서 챙겨 드시고 체력을 키우세요. 이 바닥은 체력 싸움입니다.”
평소 같지 않게 한지율이 설교를 늘어놓았다. 듣기 싫진 않았다. 빈정대며 퍼붓는 독설보다는 나았다.
“네. 신경 써서 챙겨 먹겠습니다.”
해윤은 달리 할 말이 없어 대충 얼버무리고는 음료에 입을 댔다. 한지율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커피를 마시며 잠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입에서 욕을 뱉었다.
“개새끼.”
해윤은 흠칫 놀라 한지율을 바라보았다.
“당신한테 한 욕 아닙니다.”
한지율이 마시던 커피 잔을 내려놓고는 안경을 벗었다. 잠시 손가락으로 미간을 누르더니 또 한마디 욕을 지껄였다.
“박영민 그 새끼는 지 주제도 모르고. 개새끼가.”
이렇게 우아하게 욕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미간을 누르고 있는 그의 손이 약하게 떨렸다. 그는 잠시 그 상태 그대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였다. 그가 박영민의 무례함에 분노하는 것이 당연했다. 상대가 자신의 부모를 조롱하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듣는 해윤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천박한 새끼. 박영민은 김태민과 다를 바 없는 저열한 인간이다.
“당신은 그 개새끼한테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당하고만 있습니까? 내 앞에선 주제 모르고 잘도 까부시던 사람이.”
짧은 침묵 후, 한지율이 입을 열어 노골적으로 빈정거렸다.
“한 전무님이 절 위해 마련해 주신 자리였습니다. 제가 거기서 잘못된 행동을 하면 전무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전무님이 직접 오셔서 특별히 부탁까지 하고 가셨는데요.”
“어련하실까.”
한지율이 커피를 마시며 말을 툭 뱉었다.
빈정대지 좀 마. 누군 밸도 없어서 찍소리 못 하고 참은 줄 알아? 그 소리가 해윤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애써 치미는 짜증을 눌러 삭히며 해윤은 창밖을 보고 음료만 홀짝였다.
박영민에게 움켜잡혔던 목이 아직 욱신대며 아팠다. 개새끼. 해윤은 속으로 욕을 지껄이며 욱신대는 목을 주물렀다.
한지율의 시선이 느껴졌다. 해윤은 시선을 돌려 말없이 응시하는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두 눈은 감정의 색이 존재하지 않고 유리알처럼 투명하기만 했다.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닌, 물체를 응시하는 듯한 눈.
“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한지율의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이 새어 나왔다.
“왜 그런 꼴을 하고 있어요? 가련한 피해자처럼. 포지션 확실히 하라고 했죠?”
해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가 다시 말을 던졌다. 어쩌라는 거지, 대체. 그가 던지는 말의 의도가 파악조차 되지 않아 해윤은 미간을 좁혔다.
“대체 제가 어떤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한지율 씨가 만족하실지 모르겠군요.”
“기쁘지 않습니까? 당신이 원하는 걸 이룰 수 있게 됐는데.”
“기쁩니다.”
“그럼 순수하게 기뻐하세요.”
“춤이라도 출까요?”
“춰 보세요. 당신이 흐느적거리는 꼴을 보면 이 더러운 기분이 나아질 것 같기도 한데. 제가 당신을 도와줬으니 보답으로 제 기분을 풀어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농담일까? 어조가 진지해 농담을 하는 건지 진심으로 지껄이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니 뒤늦게나마 감사 인사를 했다.
“아까는 고마웠습니다.”
“박영민은 질 나쁜 건달 새끼입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 새끼는 진짜 깡패 새끼예요. 욱하면 주먹부터 올라가는 놈입니다. 당신이 알고 지내던 말랑말랑한 사람들과는 급이 다를 겁니다.”
“제 주위 사람들이 다 말랑말랑한 건 아니었어요.”
“박영민은 김태민보다 더한 새끼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멍청하게 손 놓고 있지 말고 나름대로 각오를 하라고요.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잘 좀 하시란 말입니다! 그렇게 상처투성이가 돼서는!”
한지율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의 음성이 휑한 카페 안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해윤은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이 남자는 온갖 짜증을 내며 이러는 것일까.
“한지율 씨가 저한테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해윤은 저도 모르게 붕대가 감긴 손목을 숨기며 중얼거렸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왜 내 귀한 시간 낭비해 가며 댁한테 이딴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건지.”
한지율이 짧게 한숨을 내뱉고는 남은 커피를 들이마셨다. 빈 커피 컵을 내려놓고 그는 벗어 두었던 안경을 다시 썼다.
“한 남자가 얼결에 친구를 따라서 카지노에 따라갔습니다.”
“갑자기 또 무슨 소리를 하세요?”
“그냥 들으세요, 좀. 그 남자가 카지노에서 생전 처음 슬롯머신을 했을 때 잭팟이 터졌습니다. 비기너스 럭인 셈이죠. 남자는 첫 행운의 짜릿한 맛을 못 잊어 그 후에도 도박장을 드나들었죠. 결국 가지고 있던 재산을 탕진하고 거액의 빚을 진 뒤 폐인이 되었습니다. 초심자의 운이 행운이 아닌 독이 되어 남자를 지옥으로 밀어 넣은 겁니다.”
오늘따라 한지율은 유난히 말이 많았다. 그는 한 남자의 인생을 빗대어 해윤에게 경고하는 것이었다. 석해윤, 네게 닥친 행운이 독이 되어 널 지옥으로 떨어뜨릴 거라는 경고.
한지율은 해윤을 가장 상처 입히는 사람이지만 가장 진지하게 충고해 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상한 인간. 해윤은 들고 있는 컵을 기울여 그새 다 식어 빠진 음료를 홀짝였다. 느끼했다. 따뜻할 땐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더니.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한지율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귀에 갖다 댔다. 회사에서 온 전화인 모양이었다. 상대와 짧게 통화한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사로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네. 들어가 보세요.”
“해윤 씨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조금 더 있다 나갈 겁니다.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거짓말이었다. 약속 따위 없었다. 이대로 좁아터진 집으로 돌아가기는 싫어서 가는 길에 근처 쇼핑몰에나 들러 볼 생각이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인사하며 몸을 틀었던 한지율은 할 말이 떠올랐는지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씀인데’ 하며 고개를 돌려 해윤을 보았다.
“한동안 기우 형 호출엔 응하지 마십시오.”
“네? 왜요?”
“이유는 묻지 마시고요. 한 며칠, 기우 형과 만나는 건 피하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해윤은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그게 불가능한 일이란 걸 알면서도 말은 그렇게 했다. 한기우의 호출을 무시한다는 것. 그와 만나지 않는 것. 전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 번이라도 그의 호출에 응하지 않았다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다.
한지율은 다시 홱 몸을 틀어 카페 밖으로 걸어 나갔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슴을 활짝 펴고 성큼성큼 걷는 자세로. 걸음걸이마저 오만불손한 남자였다.
해윤은 창밖 너머, 회사로 돌아가기 위해 걷는 한지율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지율이 건널목 앞에서 멈춰 섰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꼿꼿한 뒷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재킷에 감싸인 넓은 등, 유려하게 휘어진 등줄기와 허리의 움푹 팬 곡선,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와 쭉 뻗은 다리. 더없이 매혹적이었다, 한지율의 거만한 뒤태는.
불현듯이 어떤 강렬한 욕망이 해윤의 몸속에서 끓어올랐다.
저 오만불손한 남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
저 남자가 돌아보게 만들고 싶었다. 뒤돌아보는 법 없이 앞만 바라보는 저 남자가 갑자기 몸을 틀어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고 싶었다.
해윤의 하반신에 열이 몰렸다. 아까 한지율에게 붙잡혔던 팔이 욱신대며 뜨거웠다. 순수한 열망이 음란한 성욕으로 변해 해윤의 몸을 데웠다. 그 열기가 어쩐지 은밀하고 죄스러웠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갑자기 테이블에 놓아 둔 해윤의 핸드폰이 울렸다. 해윤은 흠칫 놀라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한기우에게 온 문자였다.
「급한 일이 생겨서 한 며칠 너랑 못 만날 것 같아. 내가 보고 싶어도 참아야 해?」
다정함을 가장한 한기우의 문자를 보자 해윤의 가슴이 쿵쿵쿵 뛰었다. 몹쓸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
그날은 어머니의 수술 일정이 잡힌 날이었다. 해윤은 하루 종일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어머니의 수술이 끝나면 연락하겠다던 이모의 전화만 기다렸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밥이 입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집에 있으니 자꾸 불길한 생각만 들어서 해윤은 기타를 둘러메고 아예 집 밖으로 나와 버렸다.
해윤은 그 길로 홍대에 나가 연습실을 대여했다. 러버덕 활동을 하던 당시 주로 이용하던 연습실이었다. 신입인 듯한 관계자가 끈질기게 학원 수강을 하라고 권유했다. 이곳이 보컬 트레이닝 학원에 딸린 연습실인 탓이었다.
“이 부근에서 우리 학원만 한 데가 없어요. 강사진이나 커리큘럼도 확실하고요. 대형 기획사 오디션에 합격한 수강생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아시죠? 얼마 전에도 우리 수강생 중 하나가 대형 기획사 오디션에 합격했어요. 학원 수업을 들으면 연습실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니까요.”
직원은 실적 하나라도 더 올리려고 열심히 떠벌렸다. 몇 년 전에 처음 이 학원이 생겼을 때만 해도 수강생이 넘쳐 났었는데, 요새 하도 비슷한 학원들이 여기저기 생기다 보니 수강생이 많이 줄어든 모양이었다.
“어? 해윤이 아냐?”
마침 문을 열고 들어선 사내가 해윤을 알아보고 알은체를 했다. 그는 러버덕이 이 연습실을 이용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학원 관계자였다.
“안녕하세요. 형.”
아까까지 해윤에게 열심히 영업하던 직원이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윤 실장님. 아시는 분이세요?”
“어.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우리 연습실 이용하던 밴드 멤버야.”
수납 데스크의 전화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직원이 후다닥 뛰어가 전화를 받았다.
“잠깐 시간 괜찮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잠깐 얘기 좀 하자, 우리. 그런데 해윤이 너 밴드 활동 그만둔 거 아니었어? 러버덕, 해체했잖아.”
윤 실장이 해윤을 상담용 테이블로 데려가며 물었다.
“네. 해체됐죠.”
“아쉽게 됐네. 꽤 오래 활동했잖아, 너희들. 차 한잔 마실래?”
“생강차 같은 거 있을까요?”
커피를 달라고 하려다가 혼자서도 알아서 챙겨 먹으라던 한지율의 말이 떠올라 말을 꺼내 봤다.
“도라지 차는 있는데. 목에는 도라지 차가 좋아.”
“네. 그걸로 주세요. 고맙습니다.”
윤 실장이 곧 따뜻한 차를 내왔다. 그도 해윤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너 그래도 얼굴이 많이 좋아진 것 같다. 한창 힘들 땐 애가 비쩍 말라서 쓰러질 것 같더니. 잘 지내지?”
“잘 지내죠, 뭐. 형은요?”
“나도 그럭저럭 잘 살고는 있지. 아, 너도 라라송 밴드 태미 알지? 걔 데뷔한다더라?”
“그 녀석 미국으로 이민 갔잖아요. 돌아왔대요?”
“태미가 미국에서도 작곡가로 계속 활동했다더라. 최근에 히트 친 곡들 몇 개가 태미가 작곡한 거라던데. 가명으로 활동했으니 우린 전혀 몰랐던 거지. 라라송 밴드 멤버였던 녀석이랑 최근에 식사를 했는데 걔가 그러더라고. 태미가 데뷔 준비 중이라고. 회사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더라.”
“역시 천재는 어디서든 실력으로 인정받네요. 태미가 실력뿐만 아니라 외모도 아이돌 같았잖아요.”
“그래서 더 인기였잖냐. 라라송 밴드 한창 활동할 때 걔네 공연 있을 때면 아주 난리였잖아. 기억하지? 라라송 밴드 공연 때 태미 여자 팬이 압사해서 죽을 뻔했던 사건.”
“당연하죠. 가뜩이나 좁은 클럽 안에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죠. 그래서 라라송 밴드가 다음 공연은 아예 대형 극장 하나 빌려서 했는데 팬들이 공연 티켓을 못 구해서 몇 십만 원씩 웃돈 더 주고 사고, 아주 난리였잖아요.”
4여 년 전, 라라송 밴드라는 신인 밴드 하나가 혜성처럼 나타났다. 라라송 밴드는 아마추어 밴드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실력으로 인디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충격적인 첫 공연 이후 라라송 밴드는 엄청난 팬 몰이를 하며 가는 곳마다 돌풍을 일으켰다.
천재. 리드 보컬인 태미를 단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그랬다. 라라송 밴드의 공연을 보면 누구나 압도당했다.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고 피를 들끓게 하던 천재 가수의 마력.
태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해윤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느 기획사가 데려갔대요? 태미 정도면 대형 기획사에서 데려갔을 텐데.”
“대경 ENT래.”
찻잔을 쥔 해윤의 손이 움칫했다. 대경 ENT. 얼마 전, 대경 본사 건물에서 했던 회의 때 박영민 대표가 말한 적이 있었다. 대경 ENT에서 데뷔 준비 중인 대형 신인 하나가 있다고. 그게 혹시 태미일까?
“하여튼 대단한 놈이야. 라라송 밴드 그대로 데뷔할 건지 아니면 태미 혼자만 데뷔할 건지는 모르겠는데. 대경 같은 대형 기획사에서 밀어 주면 금방 뜨고도 남을 놈이지. 그런데 해윤이, 넌 왜 밴드 그만둔 거야?”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해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충 둘러댔다.
“별 이유 없어요. 다들 나이도 있고 개인 사정들도 있고 하니까요. 음악이 밥 먹여 주지도 않고요.”
“하긴. 그건 그래. 밴드도 해체했는데 연습하러 온 거야?”
윤 실장이 해윤의 기타 케이스를 흘긋 보며 물었다.
“이젠 취미 삼아 노래 부르게요.”
“그래. 취미 좋지.”
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웃던 윤 실장이 그런데, 하며 목소리를 낮춰 의미심장하게 운을 띄웠다.
“해윤이 너도 김태민 알지?”
윤 실장은 이번엔 김태민 얘기로 해윤을 놀라게 했다.
“알긴 알죠.”
“그 인간, 혹시 만났어? 김태민이 얼마 전부터 해윤이 널 찾는 것 같더라고. 그 자식이 작은 기획사 하나 차린 건 알지?”
“그래요? 대단하다. 태민 형, 의외로 능력 있네요.”
해윤은 처음 듣는 얘기인 듯 놀란 시늉을 해 보였다.
“능력은 무슨. 그 자식이 갑자기 무슨 돈이 있어서 연예 기획사를 차렸겠어. 위험한 사람들이랑 엮인 것 같은데. 그놈이 널 자기 회사로 스카우트하려는 것 같더라고.”
“제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스카우트를 하겠어요.”
“여하튼 김태민이랑은 웬만하면 얽히지 말라고 얘기해 주고 싶었어. 그 자식이 너 데뷔시켜 주겠다고 온갖 사탕발림할 게 분명한데. 여기저기서 들리는 소문이 굉장히 안 좋아. 그런 놈이랑 엮여서 득 될 게 하나 없어. 해윤이 네가 워낙 착하고 순수해서 걱정했거든.”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형.”
“너도 나름대로 산전수전 다 겪어서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오물 구덩이일 게 분명한 데에 자진해서 걸어 들어갈 필요는 없잖냐. 그럼 연습 잘하고 가라. 종종 찾아와서 얼굴 좀 비춰, 인마. 나중에 소주나 한잔하자.”
윤 실장이 웃으며 일어섰다. 여전히 성격 좋고 정 많은 사내였다. 해윤은 배정받은 연습실에 들어가서도 한참 동안 연습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태미가 대경 ENT에 소속되어 있다고 한다. 그 천재가.
소위 말하는 ‘급’이 다른 인간이었기에 부럽거나 질투도 나지 않았다. 그저 존경스러웠다. 어떻게 저런 목소리를 타고날 수 있지? 어떻게 저렇지? 놀랍고 경탄스러웠다. 라라송 밴드의 공연을 보고 온 날이면 가슴의 두근거림이 진정되지 않아 하루 종일 연습실에 틀어박히곤 했다.
‘우리도 할 수 있어. 힘내자!’
러버덕 멤버들끼리 이 연습실에 모여 감히 꿈꿔 봤다. 의욕에 충만해 서로를 다독이고 끊임없이 기합을 넣었다. 우리가 태미 같은 천재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경지까지는 오를 수 있지 않을까, 꾸준히 노력하면 어느 정도 인정받지 않을까?
그런데 아니었다. 우리는 인정받지 못했다. 어느 경지에 이르지도 못했다.
이 밀폐된 연습실 안에서만 우리는 스타였다. 8년 동안 착실히 무명. 단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한 채, 태미 같은 천재들의 들러리 역할만 해 왔다.
‘참 한심했구나. 우리들.’
해윤은 속으로 실소를 흘리며 잠시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여 기타 줄을 튕겼다. 하지만 손가락이 끊어질 듯 아팠다. 몇 번 더 시도해 봤지만 좀처럼 손가락 통증에 익숙해지지 않고 소리도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결국 해윤은 기타 줄에서 다시 손을 뗐다. 무리하게 움직인 손가락이 화상을 입은 듯 화끈거렸다.
기타 하나 제대로 치지 못하는 주제에 가수는 무슨. 마지막으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던 게 언제였더라. 밴드를 해체한 이후, 기타에는 손도 못 댔다. 방 한구석에 방치되어 먼지가 뽀얗게 앉은 기타를 둘러메고 나온 참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일반인.
얼마 전 회의 때, 천 팀장이 지껄인 소리가 떠올랐다. 맞는 말이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없는 놈이었다. 8년이나 밴드 활동을 했다는 놈이 고작 몇 달 기타를 손에서 놓았다고 이 지경이 되다니.
‘석해윤 씨의 상품 가치는 제로입니다. 저 구제 불능을 대체 뭐로 키우고 싶으신 건데요?’
한지율의 차가운 목소리가 연이어 떠올랐다. 다시 떠올려도 속에서 짜증이 울컥 치밀지만 틀린 말 하나 없었다. 한지율도 현실적으로 맞는 말만 골라서 했다.
그러게. 나 같은 놈을 대체 뭐로 키워야 하나. 내가 생각해도 참 심란하다. 내 꼴이.
해윤은 아직도 욱신대며 아픈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했다. 마침 품속에 넣어 둔 핸드폰이 울렸다.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귀에 갖다 댔다. 그토록 기다리던 이모의 전화였다.
- 해윤아! 언니 수술 잘 끝났어. 언니가 수술실 나와서 중환자실로 가는 거까지 보고 전화하는 거야. 선생님 말씀이 수술 너무 잘됐대. 걱정할 거 하나 없다고 하셔!
“진짜요? 잘됐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 언니가 수술하러 들어갈 때 내 손을 잡고 그러는 거야. 만약 내가 이대로 수술하다 못 깨어나면 해윤이, 널 부탁한다고. 부모 잘못 만나서 고생만 시켜서 너무 미안하다고. 그거 듣고 내가 얼마나 울었는데. 아유. 또 눈물 나려고 하네. 기쁘면 웃어야지 왜 울어. 나도 참.
이모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해윤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 아까 송 비서라는 사람이 나한테 전화해서 수술비, 입원비 걱정하지 말라더라.
“네? 송 비서님이요?”
- 응. 그분, 서울 사장님의 비서지? 서울 사장님은 정말 고마우신 분이야.
이모는 전화를 걸어 온 송 비서가 김태민의 회사 직원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김태민이 베푸는 은혜라 믿어 의심치 않는 듯했다.
“네. 고마우신 분이죠. 정말.”
해윤은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 네 엄마는 걱정하지 마. 내가 옆에 있으니까. 수술도 무사히 끝났으니 한시름 놨잖니.
“늘 고마워요. 이모. 이모한테 입은 은혜는 평생을 갚아도 모자랄 것 같아요. 우리 이모랑, 엄마 호강시켜 드릴 거야.”
- 넌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아니에요. 지금보다 더 잘살게 해 드릴 거예요. 우리 엄마, 예전처럼 우아하게 사모님 소리 듣고 살게 해 드릴 거고. 이모한테도 명품 백, 모피 코트 척척 사 드려야지.”
- 하하, 얘는. 난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다, 얘. 나한테 그런 거 사 줄 돈 있으면 해윤이 너나 좋은 거 사 입고, 좋은 차 끌고 다녀. 이모는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우리 이제 행복하게 잘 살자. 해윤아.
“그래요. 앞으로 더, 더 행복할 거예요. 엄마랑 이모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이야, 이제.”
이모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해윤의 귓가를 간질였다. 이모와 전화를 끊고 해윤은 잠시 멍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눈 안쪽이 축축하게 젖어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이모 말마따나 기쁘면 웃어야지 왜 눈물이 나오려 할까.
모든 게 꿈같았다. 한순간에 모든 게 변했다. 지긋지긋한 빈곤에 짓눌려 숨쉬기도 버거웠던 생활. 그땐 감히 행복이란 단어를 입에 담을 수조차 없었다. 하루하루, 버티고 사는 게 너무도 힘들어서 꿈이란 걸 꿔 보지도 못했다.
혼자 술 마시고 조카에게 전화해서 울던 이모. 좁아터진 방구석에 드러누워 곰팡이 핀 천장을 보며 밤을 하얗게 지새웠던 자신. 끝도 없이 계속되던 새까만 터널.
윤 실장은 오물 구덩이란 걸 빤히 알면서 걸어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해윤은 김태민을 만나기 전부터 시꺼먼 구덩이 속에 푹 파묻힌 상태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구덩이 속에 파묻힌 상태인 것은 똑같다.
지금 빠진 구덩이가 오물로 가득한 구덩이면 어떤가. 자신은 오물 속에 파묻혀 있어도 사방이 밝다. 이모, 어머니,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다. 주위 모든 것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나만 참으면 돼.’
해윤은 흐리멍덩하게 흐려진 눈에 힘을 주었다.
‘더러운 꼴을 조금만 참으면 되는 거잖아. 얼결에 붙잡은 기회라 해도 내가 잡은 기회야. 초심자의 운이 독이 되어 날 지옥으로 밀어 넣을 거라고? 그전부터 세상은 내게 지옥이었어. 초심자의 운이 독이 될지, 행운이 될지는 내가 하기 나름이야.’
해윤은 욱신거리는 손가락을 탈탈 털고는 다시 기타 줄에 손을 댔다.
***
한기우가 전화를 걸어왔다. 대경 본사에서 회의가 있던 날 이후 며칠 만에 걸려 온 전화였다. 한기우가 연락을 해도 받지 말라던 한지율의 말이 언뜻 떠올랐다. 하지만 해윤은 뇌리에서 맴도는 그의 충고를 애써 무시하고 전화를 받았다.
- 해윤아. 집에 와 줄래?
수화기 사이로 새어 나오는 한기우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11시가 넘은 늦은 밤이었다.
“지금요?”
- 응. 지금.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아.
“알겠습니다. 지금 가겠습니다.”
해윤에게 거절할 권리 따위 없었다. 한기우가 부르면 자다가도 깨어나 달려가야만 했다. 어떻게 그를 피하고 거절할 수 있을까. 한기우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도 어머니 병원비 걱정에 속을 끓이고 있었을 텐데. 더 이상 집에 사채업자가 들이닥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해윤은 살 것 같았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각. 옷을 꿰어 입고 한기우의 집으로 향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면 한지율은 또 이러겠지.
‘어련하시겠어.’
입술 한끝을 말아 올려 픽 웃으며 조소하겠지. 어떤 변명을 해도 그 남자는 자신을 한심하게 볼 것이고,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이었다.
알 게 뭔가. 상관없어. 해윤은 불어닥치는 찬 바람에 몸을 움츠리며 택시를 잡아탔다.
한기우의 집 앞에 도착한 해윤은 잠시 문 앞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목 근육이 긴장해서 뻣뻣하게 굳었다. 이 집에 찾아올 때마다 늘 이렇다. 해윤은 크게 심호흡을 하곤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누르려 하자 문이 열렸다.
한기우가 열린 문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렇다 할 말도 없이 문만 열어 주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급한 일은 잘 해결되셨어요?”
안으로 따라 들어가며 해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집 안은 어둡고 적막했다. TV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거실로 들어선 해윤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거실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집기들이 부서져 나뒹굴고 바닥에는 부서진 물건의 파편들이 가득했다. 해윤의 발아래 깨진 액자 하나가 밟혔다. 한기우와 한 여자의 결혼사진이 든 액자였다. 한기우의 옆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환히 웃는 여자는 박수경일 것이다.
[기우 씨! 나 잘 찍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