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 1. 비기너스 럭 (1/9)

해윤은 승강기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았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멍청한 얼굴이 거울 안에 있다. 마땅한 양복 한 벌이 없어 빌려 입은 옷, 어설프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 짙은 눈썹 아래 두 눈은 생기 없이 흔들리고 있다.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는 증거다.

도망치려면 지금이 기회야.

마음이 속삭인다. 어려울 것도 없다. 돌아서서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인 일이다. 집에 가서 김 대표에게 역시 도저히 못 하겠다, 우는 소리를 하면 그 인간이 뭘 어쩔 텐가.

하지만 돌아서면 모든 게 끝이다. 시궁창 같은 현실이 반길 뿐이지. 어머니 병원비로 진 사채 빚, 김 대표에게 당겨 받은 돈 천만 원 빚, 어깨를 짓누르는 그놈의 빚. 무슨 수로 빚더미 인생에서 벗어날 건가.

빚에 잠식당한 인생이었다. 빚이 또 하나의 빚을 낳고, 돈을 메꿔 넣어도 또 다른 빚이 늘어나고.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일을 해도 빚은 늘어만 갔다.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에 압사당할 것 같아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허우적댈수록 늪 속으로 더 깊게 빠져 들어가는 것 같던 인생이었다.

해윤의 머릿속에 부산에 계신 어머니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병마와 싸우느라 비쩍 마른 어머니의 모습.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의 망설임은 사치다.

해윤은 일부러 소리 내 헛기침을 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머리 모양을 매만지고 뺨을 두들겨 보기도 했다.

승강기가 8층에 멈춰 서며 문이 열렸다. 복도를 지나 802라는 숫자를 확인하고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뿔테 안경을 낀 젊은 여자가 나타났다. 해윤은 잘못 찾아온 것인가 싶어 다시 한 번 문에 달린 호수를 확인했다.

“저, 여기가 한 전무님 댁이 맞는지….”

“맞아. 들어와.”

여자가 말을 툭 뱉고는 돌아섰다. 닫히려는 문을 열고 해윤은 얼른 안으로 들어섰다. 저 여자는 날 언제 봤다고 반말이지. 뒤늦게 불쾌한 기분이 밀려들었지만 따져 물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여자의 뒤를 따라 복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밖은 한겨울인데 여자는 민소매 원피스 차림이었다. 옷이 지나치게 달라붙어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탄력 있게 올라붙은 엉덩이며 잘록한 허리의 곡선이며, 군살 하나 없는 몸매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보는 것조차 여자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해윤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혜선이야?”

거실 소파에 앉아 태블릿을 들여다보는 남자가 이쪽을 보지도 않고 물었다. 저 남자가 한기우 전무일 것이었다.

“아니. 남잔데. 혜선이 오늘 촬영 늦어져서 못 온다고 문자 왔어.”

여자는 말을 중얼거리며 슬리퍼를 직직 끌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안녕하십니까.”

해윤은 얼른 고개를 꾸뻑 숙여 인사했다. 그제야 줄곧 태블릿을 보던 남자가 고개를 쳐들었다. 남자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반가운 사람을 만난 듯이.

“미라야!”

남자의 입에서 엉뚱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전 미라가 아니라 석해윤입니다.”

“아, 그래. 석해윤이라는 이름이었지. 너 어디서 왔더라?”

“상도동에서 왔습니다.”

남자가 크게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웃기는 놈이네. 너 사는 동네 말고 누가, 어디서 보냈냐고.”

그제야 질문의 의도를 깨닫고 아차 싶었다. 해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김 대표님께서 보내셨습니다.”

“김 대표? 텐 엔터테인먼트이던가?”

“아뇨. 라인맥스 김태민 대표님이십니다.”

거긴 또 어디야? 남자의 일그러지는 얼굴이 그리 말하는 듯했다.

“아, 그리고 이건 저희 기획사 김 대표님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이리 와. 왜 멀리 떨어져 서서 그러고 있어?”

남자가 말을 자르고 고개를 까딱여 해윤을 불렀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신경 쓰여 해윤의 발끝에 괜히 힘이 들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해윤은 들고 온 쇼핑백을 내밀었다. 남자는 쇼핑백 안에 든 박스 포장을 풀었다. 안에 든 것은 시계다. 제법 신경 썼군. 남자는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대경 그룹 한승조 회장의 차남 한기우 전무.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더 젊어 보이는 얼굴이다. 샤워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젖은 머리카락이 반듯한 이마 위에 늘어져 있다. 그의 젖은 머리칼에서 풍기는 샴푸 냄새가 향긋하다.

“채워 줘 봐.”

한기우가 불쑥 제 손목을 해윤의 앞에 들이밀었다. 그의 외양을 훔쳐보던 해윤은 흠칫했다. 그제야 한기우가 왼손에 붕대를 감고 있는 게 보였다. 손이 저 모양이니 혼자서 시계를 찰 수 없을 터였다.

시계를 남자의 손목에 채우는 해윤의 손이 덜덜 떨렸다.

“왜 그리 떨어?”

“좀 긴장을 해서요.”

“긴장을 왜 해. 내가 널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라인맥스라면 신생 기획사인가? 들어 본 적 없는 데인데.”

“네. 그렇습니다.”

남자의 손목에 시계가 채워졌다. 명품 브랜드에 관심이 없는 해윤이 보기에도 멋진 시계였다.

남자는 시계가 채워진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김 대표가 보낸 선물이 제법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기우 씨. 나 화보 촬영하러 괌에 가거든.”

방에 들어갔던 여자가 다시 나왔다. 코트를 껴입고 목에 털 머플러까지 둘둘 감고서. 여자는 맨얼굴에 간단히 화장을 하고 안경을 벗은 데다 묶었던 머리까지 풀어 헤쳤다.

“그래서 기우 씨 생일 파티엔 못 갈 것 같네. 문자 보낼게.”

여자가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아 한기우와 가볍게 키스했다. 그의 손이 코트 자락 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쓰다듬었다. 그제야 해윤은 그녀가 배우 민지유라는 것을 알아봤다.

“저, 민지유 씨 맞죠?”

여자가 지금에야 알아봤느냐는 듯, 붉은 입술을 말아 올려 피식 웃었다. 웃으면 양쪽 볼에 생기는 귀여운 보조개. 민지유다. 진짜였다. 그녀가 확실했다.

“패, 팬입니다. 사, 사인 좀.”

급한 마음에 해윤은 품속을 뒤졌다. 하지만 갖춰 입은 양복 안에서 수첩 같은 것이 나올 리 만무했다. 하는 수 없이 핸드폰이라도 꺼내 들이밀었다.

“종이가 없는데 사진이라도. 제가 정말 패, 팬이라서요.”

민지유가 웃음을 터뜨렸다. 한기우도 어이가 없는지 웃음을 흘렸다. 해윤의 얼굴이 시뻘겋게 익었다. 팬이라 말한 것뿐인데 이렇게 비웃음당할 일인가.

“골 때린다, 쟤. 뭐야? 어디서 왔대?”

“라인맥스.”

그녀의 표정도 한기우와 똑같았다. 거긴 또 어디야? 하는 표정. 여자의 품속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대며 일어섰다. 여자의 허벅지를 쓰다듬던 한기우의 손도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문이 쾅 소리가 나게 닫히며 다시 어색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서 있을 거야? 놀러 왔어?”

날아든 한기우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피곤한 모양인지 그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열 시가 넘은 시간이다. 피곤할 법도 했다. 놀러 온 것은 아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멀뚱히 서 있어야 했다.

“술 한잔할래?”

한기우가 술병을 들어 올려 보였다. 해윤은 재빨리 그의 옆에 다가가 앉아 술병을 받아 들어 술을 따라 주었다. 그가 술잔을 받으며 해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 가수였지?”

“네. 러버덕이라는 밴드 활동을 했는데, 밴드가 해체되고 지금은 솔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노란 오리 인형 옷 입고 노래하던 놈들 영상을 본 기억이 나. 그 꼴을 한 주제에 울면서 마이크에 대고 고음을 쏘아 대던 모습이 인상 깊었어. 눈도 깜빡이지 않고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데.”

“마침 그날이 아버지 기일이었거든요. 아버지 생각도 나고, 그동안 힘들게 고생한 것도 떠오르고 하다 보니 감정이 복받쳐서.”

한기우는 스트레이트 잔을 단번에 들이켠 뒤 해윤에게 빈 잔을 건넸다. 해윤은 공손하게 잔을 두 손으로 받아 쥐고 술을 받았다. 독한 양주가 들어가자 속이 타는 듯했다. 다시 잔을 돌려주고 한 잔 더 따랐다.

“영상으로 봤을 때도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더 닮았네. 정말 많이 닮았다.”

“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누나나 여동생 있어?”

“아뇨. 전 외동아들입니다.”

그가 이렇다 할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빈 잔이 돌아왔다. 해윤은 이번에도 고개를 돌려 한입에 술을 털어 넣었다. 차라리 취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몇 살이야?”

“서른한 살입니다.”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네. 피부도 좋고. 그런 소리 많이 듣지?”

“술집 가면 가끔 신분증 검사도 받습니다. 미성년자 아니냐면서.”

실없는 농담을 내뱉자 한기우가 픽 웃음을 흘렸다.

“술 약한가 보다. 얼굴 빨개졌어.”

“제가 술이 좀 약하긴 합니다.”

“입술 색이 원래 그렇게 진해?”

그러며 빈 잔에 술을 더 채워 준다. 네. 묻는 소리에 사실대로 대답했다. 유독 입술 색이 짙은 게 해윤의 콤플렉스 중 하나였다. 색이 붉고 진해 늘 사내새끼가 입술에 뭘 바르고 다닌다며 놀림 받기 일쑤였다.

슬슬 취기가 올라왔다. 얼굴에 열이 오르며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노골적이고 기름진 시선이었다. 한기우의 손이 뻗어 나왔다. 서늘한 손가락이 해윤의 입술에 닿았다.

“잘 빨게 생겼다. 붉고 도톰한 게.”

입술을 매만지는 손가락의 감촉은 소름 끼치도록 생생한데, 그의 목소리는 이명처럼 울렸다. 해윤은 취기가 올라 뜨끈해진 눈을 끔뻑였다. 취기를 빌려 용기를 끄집어내 입을 열었다.

“빨아… 드릴까요?”

“빨아 봐.”

한기우가 다리를 넓게 벌려 소파에 기대앉았다. 해윤은 머리를 숙여 그의 다리 사이를 헤집었다. 슬랙스의 단추를 풀고 지퍼를 끌어내리자 곧바로 성기가 드러났다. 씻고 속옷을 입지 않은 상태였던 모양이다. 이미 단단해져 축축하게 젖은 성기에선 머스크 향기가 풍겼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놈의 좆에서 좋은 향기가 나서. 덕분에 큰 거부감 없이 남자의 성기를 입에 머금을 수 있었다.

그의 성기를 입 속 깊숙이 머금었다가 혀로 기둥을 빨며 천천히 빼냈다. 남자의 허벅지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움찔움찔했다. 한기우는 굵은 신음을 흘리며 해윤의 머리를 매만졌다. 묽은 액이 솟아나는 귀두를 혀를 세워 핥자 해윤의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 제법….”

중얼거림 끝에 신음이 터졌다. 반응이 퍽 열렬했다. 성심성의껏 빨아 주는 보람이 있는 몸이었다. 보람이 있어야지. 내가 미친 척 이 짓을 하고 있는데. 밀려드는 상념을 의식적으로 소거시키고 하던 짓에 집중했다.

남자의 손이 목덜미를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음탕하게 움직여 뒷목 뼈를 애무한다. 오싹했다. 해윤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해윤은 이를 세우지 않으려 애쓰며 혀와 입술만으로 남자의 성기 기둥을 빨고 손으로 불알을 굴렸다. 놈의 성기가 착실하게 단단해지며 토해 내는 신음성이 더 굵어졌다.

머리칼을 쥔 놈의 손도 우악스러워졌다. 놈이 손으로 해윤의 뒷목을 감싸 강하게 밀었다. 입에 머금은 놈의 성기가 갑자기 목구멍까지 처박혔다. 구역이 치밀어 뱉어 내려 해도 목이 붙잡혀 그럴 수도 없었다.

“뱉어 내지 마. 더 깊숙하게 삼켜.”

한기우는 낮게 가라앉은 소리로 웅얼거리며 해윤의 목을 조르듯이 움켜쥐었다. 조금이라도 편해지기 위해 손으로 놈의 허벅지를 밀어 보았지만, 목이 잡혀 더 거칠게 목구멍 깊숙이 쑤셔 박혔다. 놈의 발기한 성기가 목젖까지 처박혔다. 치미는 구역감에 눈에 물기가 절로 맺혔다.

“기우 형. 송 비서가 전해 주라고 하던데.”

예고도 없이 날아든 낯선 목소리에 해윤의 몸이 일시에 굳었다. 숨마저 턱 멎었다.

시선 끝에 슬리퍼를 신은 낯선 남자의 발끝이 보였다.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멋대로 들어와 자신들 앞에 서 있었다. 해윤을 주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무언의 시선에 발가벗겨져 온몸이 해부당하는 듯했다.

“거기 놔두고 가.”

한기우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누군가 제멋대로 들어와 자신들 앞에 서 있는데도 놀란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해윤은 필사적으로 힘을 주어 얼굴을 쳐들었다. 하도 빨고 핥아 온통 젖어 번들거리는 놈의 성기가 해윤의 입술 앞에서 꺼덕거렸다.

“전 신경 쓰지 마십시오. 곧 갈 거니까.”

소파 앞에 버티고 선 남자가 입을 열었다.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해윤에게 건네는 말일 터였다. 혐오도, 경멸도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였다.

남자에게 좆을 빨리고 있던 한기우도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탱탱하게 곧추선 성기를 드러내 놓고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치욕감에 몸을 떠는 해윤만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서류 훑어보고 내일까지 송 비서한테 결과 알려 줘.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 송 비서 좀 그만 괴롭혀.”

“알았으니까 잔소리 그만해라.”

“그리고 형수님하고는 얘기 잘 끝낸 거 맞고?”

“머리 터질 것 같으니까 그만 좀 하라고.”

한기우가 짜증을 내며 해윤의 얼굴을 감싸 제 다리 사이로 잡아당겼다. 저 불시에 찾아든 손님이 나간 뒤에 해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금세 떨쳐 버렸다. 자신은 이 남자에게 인격도 뭣도 없는 섹스 도구에 불과하니까.

아직도 자신들 앞에 버티고 선 남자와 언뜻 눈이 마주쳤다. 양복 차림을 한 장신의 남자. 주름 하나, 더러움 하나 묻지 않은 청결한 옷차림에 어울리는 표정 없는 얼굴. 안경알 속, 아무 감정도 배어 있지 않은 차가운 동공.

그는 예전과 다름없었다. 결벽증에 가까운 깔끔함도, 외모도, 조용히 바라보는 저 눈도 똑같다.

변함없이 깨끗하고 맑은 눈으로, 벌게진 얼굴을 한 채 남자 성기를 빨던 해윤을 보고 있다.

누가 해윤의 마음속에 돌을 던진 것 같았다. 마음속 수면이 커다란 파동을 일으키며 넘실대었다. 수면 아래에 묻어 뒀던 어떤 감정이 떠올라 찰랑거리는 물과 함께 쏟아지려 했다.

이 거지 같은 상황에서 도망치고만 싶었다. 하지만 도망칠 거였으면 진작 달아났어야 했다. 문을 열고 이 집에 들어온 순간 망설임은 끝났고, 사람 취급 받는 것은 포기했다.

눈앞의 남자는 얼어붙은 눈으로 해윤을 바라보기만 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저 눈에 약간의 경멸이라도 스쳤다면 견디지 못하고 가라앉아 버렸을 테니.

해윤이 먼저 눈을 돌렸다. 남자의 차가운 시선에서 도망쳤다.

“기우 형. 이런 말 듣기 싫겠지만….”

“듣기 싫으니까 입 닫아. 그만 나불대고 꺼져 줘라. 좀.”

한기우가 남자의 말을 뚝 자르고는 붕대 감긴 손을 짜증스레 흔들어 보였다. 슬리퍼에 감싸인 남자의 발끝이 움직였다. 들어왔을 때처럼 나갈 때도 기척도,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곧 삐리릭, 기계음을 내며 열렸던 문이 잠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남자가 남기고 간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맴돌았다. 한기우에게서 풍기는 머스크 향과는 다른 싸한 향기.

“옷 벗어.”

방해꾼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한기우의 명령이 떨어졌다. 노골적이라 오히려 고마웠다. 이런 때에 밀려드는 잡념은 비참함만 더할 뿐이다. 옷을 벗는 손이 아직도 바보같이 떨리고 있다. 떨리는 손으로 빌려 입은 양복 재킷을 벗고,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느려 터진 움직임에 짜증이 나는지 한기우가 손을 뻗어 셔츠 자락을 확 잡아 벌렸다. 단추가 튕겨 나가며 식은땀이 밴 가슴이 드러났다.

“젖까지 발갛게 익었네.”

그는 말끔한 얼굴로 말도 안 되는 음담을 지껄이며 해윤의 가슴을 넓게 어루만졌다. 손이 젖꼭지를 치자 바지 버클을 풀던 해윤의 손이 움찔했다.

“성병은 없지?”

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해윤은 바지를 골반 아래로 끌어내렸다.

***

씨발.

입만 열면 욕이 새어 나온다.

씨발 변태 새끼가.

욕을 하다 말고 해윤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치미는 구토를 참았다.

속은 뒤집히고, 눈앞이 빙글빙글 돈다. 토기를 눌러 삼키며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물었지만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반신이 사라져 버리기라도 한 것 같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질 않는다.

한기우의 성기를 물고 빠느라 입술이 찢어지고 목구멍이 따갑다. 새끼가 콘돔도 없이 박아 대고 안에 싸질러 놓은 덕분에 뱃속이 요동친다. 욕실에서 대충 뒤처리를 하고 나왔건만, 안에 남아 있던 체액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듯하다.

도저히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어 해윤은 담벼락에 기대 숨을 토해 냈다.

땀에 흠뻑 젖어 있던 몸이 급속도로 식었다. 젖은 머리칼 사이로 차가운 밤바람이 휑하니 스쳐 지나갔다. 춥다. 춥고 피곤하다. 아픈 건 모르겠다. 연거푸 들이마신 술과 한기우가 억지로 먹인 약 기운이 뒤섞여 몽롱하기만 했다. 어지럽고 속이 메슥거려 따뜻한 방 안에 드러눕고 싶건만 이놈의 동네엔 택시 한 대도 지나다니질 않았다.

해윤은 콜택시라도 부를 요량으로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끄집어냈다. 어지러워서 핸드폰 액정의 글자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견디지 못하고 해윤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외제 차 한 대가 전조등을 빛내며 다가왔다. 웬일인지 차가 해윤의 앞에 멈춰 섰다. 선팅한 차창이 스르륵 내려가고 안경을 낀 젊은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한기우의 집에 찾아왔던 그 남자였다.

왜 이 사람이 아직 여기에 있을까. 열두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해윤은 두 시간가량을 한기우의 집에서 시달리다 나온 참이었다.

“타세요.”

남자가 입을 열어 한마디 던졌다.

“택시 타고 가면 됩니다.”

“이 동네에서 택시 잡기 힘듭니다. 할 얘기도 있으니 타세요.”

명령하듯 강압적인 말투였다.

“아뇨. 됐습….”

해윤은 고집을 피우며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자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갑작스러운 어지럼증에 해윤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남자가 결국 차 문을 벌컥 열고 내려섰다. 그는 해윤의 팔을 움켜쥐어 부축해 일으켰다.

“택시 타고 가면 된다니까요.”

“쓸데없이 고집 피우지 마세요. 제가 시간이 넘쳐흘러서 이 짓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는 차가운 어조로 쏘아붙여 해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말투는 차가워도 해윤을 부축해 조수석에 태우는 손길은 상냥했다.

해윤이 차 시트에 축 늘어져 있자, 그는 친절하게 안전벨트까지 매 줬다.

“댁이 어딥니까?”

운전석에 올라탄 그가 물었다.

“장승배기역 앞에 세워 주시면 됩니다.”

해윤은 힘겹게 숨을 고르며 입을 달싹였다.

남자가 내비게이션에 해당 역 이름을 찍었다. 차가 출발하고 금세 한기우의 빌라가 있던 골목을 벗어났다.

대화 한마디 없는 적막. 차 안에는 장식용 인형이나 방향제 하나조차 없었다. 차를 구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시트를 덮은 보호용 비닐도 벗기지 않았다.

해윤은 따뜻한 열기를 뿜어내는 시트에 힘없이 늘어져 운전하는 남자를 흘긋 훔쳐보았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는 불빛에 남자의 옆얼굴을 감싼 색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빗어 넘긴 머리칼 아래의 반듯한 이마와 우뚝 선 콧날, 다물린 입술의 곡선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콧날에 걸쳐진 안경알에 감싸인 동공은 차창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뭡니까?”

남자의 다물린 입술이 달싹였다.

“네?”

“뭔데 그 얼굴로 기우 형에게 접근한 겁니까? 누가 보냈어요?”

“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하필 이럴 때 나타났느냔 말입니다. 그 얼굴을 하고서! 한기우 뒤치다꺼리하는 것만으로도 미쳐 버릴 것 같은데!”

말을 하려 입을 열자 따끔거리던 목구멍에서 기침이 터져 나왔다. 해윤이 격하게 기침을 하자 남자가 콘솔 박스에서 생수병을 꺼내 주었다.

“고맙습… 콜록콜록.”

감사 인사라도 하려고 목소리를 내자 더 격한 기침이 쏟아졌다. 해윤은 급하게 물을 들이켰다. 물이 들어가니 터지고 찢어진 입 안이 쓰렸다. 입술이며 입 끝도 찢어져 입을 조금만 크게 벌려도 상처가 벌어져 피가 배어 나왔다.

파란불로 신호가 바뀐 횡단보도 앞에서 잠시 차가 멈췄다. 늦은 밤이라 건너는 사람 하나 없는데도 남자는 정지선 앞에 정확히 차를 멈춰 세웠다.

“신미라. 알죠?”

남자가 고개를 틀어 해윤을 보며 취조하듯 물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미라? 누구야, 그게. 아까 한기우도 자신을 ‘미라’라고 불렀다.

“아뇨. 모릅니다. 처음 들어 보는 이름입니다.”

“모를 리가 없을 텐데요. 그 얼굴을 하고서 신미라를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대체 제 얼굴이 뭐가 어떻다는 겁니까?”

“정말 몰라서 물어? 당신 얼굴이 신미라, 그 여자와 판박이인데.”

“신미라가 대체 누군데요?”

“신미라한테 남동생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 여자와 친척입니까?”

“저기, 한지율 씨. 제가 알아듣게 좀 설명해 주세요. 신미라가 누굽니까? 그리고 전 누나도 없고 신미라라는 이름을 가진 친척도 없습니다.”

“천연덕스럽게 시치미 떼는 것까지 신미라하고 똑같아. 이미 내 이름까지 알고 있으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다 알게 됐습니다. 한승조 회장님에 관해 검색만 좀 해 봐도 회장님 자제분들뿐만 아니라 회장님의 형제, 손자들 이력까지 다 나와요.”

해윤은 나오는 대로 대충 둘러댔다. 다행히 대경 그룹 오너 일가라는 검색어만 쳐도 해당 기사는 주르륵 뜬다. 대경 그룹 일가 사람들의 이름, 얼굴, 학력, 나이, 배우자나 자녀가 몇인지, 간단한 검색만으로 찾아볼 수 있었다.

한지율의 부친이 한승조 회장의 동생이란 건 사실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그랬기에 좀 더 망설였던 것이다. 한 전무와 어떤 식으로든 엮이게 된다면 한지율과 언제 한 번은 마주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만남의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들이닥쳐 해윤도 굉장히 당혹스러운 상태였다.

“그러시겠지.”

한지율이 빈정거렸다. 해윤은 그 어조가 담담하고 표정에 변화가 없어 더 화가 치밀었다. 자신이 대체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런 비난을 들어야 하는 건가. 뭐가 뭔지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하겠다. 너무 어지럽고 속은 속대로 울렁거린다.

신호가 바뀌었다. 한지율이 잠시 지체하는 사이, 뒤에 있던 차가 빠앙 클랙슨을 울렸다. 한지율이 고개를 돌려 차를 출발시켰다.

다시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의 입은 완고하게 다물렸다. 해윤도 고개를 돌려 차창 밖만 멍하게 응시했다. 졸음이 쏟아져 자꾸만 감기는 눈을 필사적으로 잡아 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장승배기역이 보였다. 역 앞에서 차가 멈춰 섰다.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윤은 안전벨트를 풀며 남자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남자가 입을 연다.

“너 같은 인간, 숱하게 봐 왔어. 돈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쓰레기 같은 것들.”

남자는 또 말로 긁어 화를 돋운다.

“이봐요. 한지율 씨.”

남자가 고개를 틀어 해윤을 보았다. 안경알 속, 남자의 눈매가 일그러져 있었다. 오늘 처음으로 보인 경멸의 눈빛이었다.

“혼자서 이 짓을 벌일 만큼 머리 좋아 보이진 않고. 누구 머리에서 나온 설계입니까?”

그의 눈빛이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남자의 시선이 해윤의 손목에 머물렀다. 한기우의 가죽 벨트에 묶여 붉은 멍이 남은 손목. 해윤은 소맷자락을 끌어내려 손목의 멍을 감췄다.

“멍청하기 짝이 없어. 그 얼굴을 가지고 몸 로비부터 해? 얼굴을 이용할 거였으면 몸은 마지막까지 아껴 뒀어야지, 왜 다리부터 벌리고 보십니까. 한기우 좆은 빨아도 구멍은 벌리지 말았어야지. 그 정도로 절박해요?”

“네. 절박합니다. 그렇게 돈이 급합니다. 그렇게 돈이 필요해서 구멍부터 벌리고 봤습니다.”

신기할 정도로 무미건조한 어조가 튀어나왔다. 상대방이 입으로 내던지는 말투가 천박하고 너절하니, 오히려 차분해졌다.

남자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그의 두 눈에 깃든 것은 경멸과 혐오의 빛이다.

“가겠습니다.”

더는 그 눈빛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해윤은 차 문을 열었다.

“앞으로 전략 잘 세워야 할 겁니다. 당신, 그 얼굴이 한기우 그 미친 새끼를 완전히 돌아 버리게 할 거거든.”

해윤은 마지막 충고랍시고 지껄이는 게 듣기 싫어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차가 바로 출발했다. 차는 순식간에 해윤의 시야에서 벗어나 사라졌다.

한지율.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오만불손하고 차가운 인간.

어째 저 자식은 고등학교 때 모습과 변한 게 전혀 없다. 얼굴도, 안경알 속의 차가운 두 눈도, 오만한 말투도, 예전과 똑같다. 그때 모습에서 조금도 늙지 않았고,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은 어떤가. 옛날 모습은 사라지고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었다. 빛을 잃고 진창 위로 굴러 떨어져 온몸에서 악취를 풍긴다.

가슴이 휑했다. 절망과 비참함. 그딴 것을 느끼며 괴로워하기엔 너무도 피곤했다. 정신과 육체가 너덜너덜, 엉망진창으로 찢긴 듯하다. 차 안의 온기에 따뜻하게 데워졌던 몸이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뻥 뚫린 길거리에 불어 닥치는 찬바람이 유난히 혹독하고 매서웠다.

***

- 해윤아. 너도 8년 무명 생활 털어 버리고 대박 한 번 쳐 봐야 하지 않겠어?

생각해 보면 김태민의 그 전화가 모든 일의 발단이었다.

부산에서 이모와 식당을 하던 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셨다. 암이었다.

그동안 모아 둔 얼마 안 되는 돈을 모조리 털어 넣고, 이모도 통장을 탈탈 털어 병원비에 보탰다. 자신과 이모의 돈을 다 집어삼키고도 돈은 구멍 사이로 술술 새 나갔다. 순식간에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워낙 치료하기 어려운 부위에 생긴 암 덩어리였다. 비급여 신약 값만 한 달에 천만 원이었다.

집에 암 환자가 있으면 집안이 풍비박산 난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그렇다고 치료를 중단할 수도 없었다. 어머니였다. 하나 남은 혈육이었다. 어떻게든 살리고 봐야 했다.

기타 둘러메고 연습실에 모여 노래 부르는 생활은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노래 부르는 것이 세상 최고로 행복한 일이었지만, 기약 없는 희망을 좇을 수만은 없게 됐다.

20대 청춘을 불태웠던 밴드 활동을 접었다.

리드 보컬이었던 해윤이 탈퇴하자 자연히 밴드는 해체됐다. 그들도 이젠 기약 없는 꿈을 접고 현실과 타협해 살아가야 할 나이였다.

밴드 러버덕은 그렇게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어차피 자신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 중의 무명이었다.

해윤은 닥치는 대로 일했다.

제대로 된 직장은 꿈도 꾸지 못했다.

고2때,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었다. 그 뒤로는 빚쟁이에 쫓겨 도망 다니느라 고등학교 졸업장조차 없는 학력이었다. 나이는 이미 30대에 접어들었다. 학력도, 스펙도, 나이도 젊지 않은 놈은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했다.

밴드 활동을 하며 안 해 본 일이 없던 해윤이었다. 음악이 밥 먹여 주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력서에 한 줄 채워 넣을 수도 없는 잡일에 불과했다. 별수 없었다. 내세울 경력 하나 없이 나이만 든 놈은 닥치는 대로 일할 수밖에.

영어 학원 셔틀버스 운전기사 일,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 주말에는 축가 아르바이트. 잠 잘 시간도 없이 일했다. 쉴 틈 없이 달렸다.

그런데도 빚만 늘어났다. 버는 돈은 빤했지만 매달 들어가는 돈은 자꾸 불어나기만 했다.

카드깡으로 돈을 돌려막고, 돌려막다가 연체가 되고, 카드 거래가 중지되고. 손 벌릴 데는 다 벌렸더니 자연스럽게 사채까지 쓰게 됐다.

사채 빚은 어마어마한 이자율을 뽐내며 해윤을 끝에 끝까지 몰아넣었다. 신용 카드 연체 독촉 전화는 애교였다 싶을 정도로, 사채업자들은 해윤을 들들 볶아 댔다. 미칠 지경이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김태민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온 건 그때였다.

- 해윤아. 너 돈 필요하지?

저장되지 않은 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를 받아 보니, 김태민이 걸어 온 전화였다.

연락이 끊긴 지 2년 만에 불쑥 연락해서 한다는 말이 그랬다.

- 어머니가 많이 아프시다며. 보험 들어 놓은 것도 없어서 병원비가 만만치 않다고 하던데? 돈 필요하면 형이 줄 수 있는데 우리 좀 만나자.

보통 연락 끊긴 지인이 갑자기 연락을 해 주면 의심부터 하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도 혹했다. 김태민이 어떤 인간인지 잘 알면서도 돈 얘기에 귀가 쫑긋 섰다.

그 정도로 절박한 심정이었다. 벼랑 끝까지 내몰린 상황에서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돈이 급했다.

돈을 준다는 놈의 말은 믿지 않았지만, 돈이라도 빌려 볼 요량으로 그를 만났다. 만나 보고 사기를 치려 들면 욕 한 바가지 퍼부어 주고 나오면 그만이었다.

그가 해윤을 불러들인 곳은 ‘라인맥스’라는 연예기획사였다. 김태민이 작은 연예 기획사를 차렸다는 소문을 듣긴 했다.

사무실은 그리 크지 않지만 직원도 몇 명 있고, 다들 바삐 움직이는 걸 봐선 그럭저럭 잘 굴러가는 모양이었다.

“해윤아. 너 성공하고 싶지 않아?”

김태민이 해윤을 사장실 소파에 앉혀 놓고 커피 한잔 대접하며 꺼낸다는 말이 그거였다.

“나이도 있는 놈이 언제까지 아르바이트 같은 것만 하면서 찔찔거리며 살래. 어머니 병원비 대려면 돈이 꽤 필요할 텐데? 나랑 일하자. 8년이나 무명 생활했으면 대박 한 번 터뜨릴 때도 됐잖아.”

“됐어요. 지금은 그럴 여유 없어요.”

단칼에 거절했다. 정말로 가수의 꿈이고 뭐고, 그런 사치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그딴 사탕발림으로 꼬실 생각하지 말고 돈 얘기나 해 보라며 입을 열려는 때.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해윤의 핸드폰이 갑자기 드르륵 울렸다. 무심코 핸드폰을 들어 알람 메시지를 확인한 해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통장에 천만 원이 입금되었다는 알람이었다. 입금인은 ‘라인맥스’였다.

“뭐예요? 이 돈은?”

“계약금. 50프로 먼저 넣었어.”

“네? 50프로라면 남은 50프로도 있다는 거예요?”

“그래. 해윤이, 너한테 계약금으로 2천만 원을 줄 거야. 여기 계약서 보면 알겠지만.”

김태민이 서류가 담긴 투명 파일을 해윤의 앞에 내밀었다. 계약서를 꺼내 눈으로 훑었다. 계약금 란에 2천만 원이 적혀 있는 게 눈에 확 들어왔다.

워낙 비현실적인 금액이라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 김태민의 말대로, 이 나이 먹도록 찔찔거리며 사느라 천만 원도 모아 본 적이 없었다.

“저 같은 무명을 뭘 믿고 이 많은 돈을 계약금으로 줘요?”

“그만큼 네 실력을 믿는다는 거지.”

씩 웃는 김태민에게서 사기꾼 냄새가 풀풀 풍겼다.

“됐어요. 그런 말에 혹할 만큼 철없지 않아요, 저. 저 노래 안 불러요, 이제. 가수 활동 접었어요.”

“진짜 그래? 밴드가 해체됐다고 네 가수 인생도 끝난 건 아닐 텐데. 어차피 밴드 멤버 놈들은 재미 삼아 몰려다니며 그 짓 했던 거지. 음악 관둬도 아쉬울 거 하나 없는 놈들 아니냐. 그런데 해윤이 넌 아니잖아? 노래 부르는 거 진짜로 관둘 수 있어?”

“아뇨. 저도 같아요. 아쉬울 거 하나도 없어요.”

“그런 놈이 학원 셔틀버스 안에서 몰래 기타 치고 노래 연습하냐?”

해윤은 인상을 썼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영어 학원 수업이 끝날 때까지 대기하는 동안, 셔틀버스 안에서 노래를 부른 건 맞다. 단지 무료해서였을까. 모르겠다. 이젠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피곤했다.

“예전부터 난 늘 네 실력이 아깝다고 생각했어. 진작 밴드 활동 때려치우고 솔로로 활동했으면 확 떴을 놈이야. 넌.”

“아무리 그러셔도 소용없어요. 저 같은 놈, 뭘 믿고 그 돈을 계약금으로 주시는지도 모르겠고요. 그 돈을 어떻게 해서 뽑아내시려고요? 이 바닥에서 성공하는 게 쉬워요, 어디?”

“넌 스타가 될 재목이라니까.”

“전 제 분수를 알아요. 스타는 아무나 되나요. 언제까지 헛된 꿈 꾸면서 살 순 없죠. 그럴 상황도 아니고. 이 돈은 빌려주시는 것으로 알게요.”

“해윤아. 네 노래에 관심 있어 하는 분이 계셔.”

계약서를 파일 속에 집어넣던 해윤의 손이 움칫했다.

네 노래. 그 단어가 날아들어 해윤의 마음에 파동을 일으켰다. 얼마 만에 들어 보는 아름다운 소리인가. 네 노래라니. 바보같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해윤이 멈칫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김태민이 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여차여차해서 지금 키우는 애들 곡을 받고 음반을 만들었어. 인맥 총동원해서 안무도 열심히 만들고 뮤직비디오도 어떻게 만들어 냈단 말이지. 어떻게든 우리 애들 노출 한 번 시켜 보려고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있거든? 여기저기 샘플을 보냈는데 CD 안에 러버덕 라이브 영상까지 같이 들어갔나 봐. 예전에 내가 하던 클럽에서 옐로우데이 페스티벌인가 한 적 있었잖아. 그때 너희들이 노란 오리 옷 입고 공연했었잖아. 그 공연 영상이야.”

물론 기억한다.

그날, 김태민이 자신들을 게스트로 부른 것은 ‘옐로우데이’라는 콘셉트에 어울리는 밴드라는 이유에서였다.

“형이 억지로 우리한테 노란 오리 옷을 입혔었죠. 일정 있다고 했는데도 일당 두 배로 준다며 불러서 갔는데 결국 돈 한 푼 못 받았고요.”

“러버덕이란 밴드 이름에 어울리는 복장이었잖냐. 너희들 아니면 누가 그 옷을 입었겠어. 그래도 관객들 반응은 좋았잖아. 야.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하자. 내가 너희들 수고비 떼먹은 건 아니지. 나중에 상품권으로 줬잖아. 상품권 액수가 일당보다 더 많은 금액이었어, 인마.”

기가 찼다. 일당을 상품권으로 대신 준 게 자랑할 일인가.

“옐로우데이 공연 날은 제 아버지 기일이었습니다.”

“그랬냐? 아, 그래서 너 노래 부르면서 울었던 거구나. 그건 미처 몰랐네.”

그래. 원래 이런 인간이었지. 기대한 것도 전혀 없기에 실망할 것도 없었다.

샘플 CD에 러버덕 공연 영상이 들어간 게 과연 우연이었을까. 김태민의 사기꾼 같은 성격을 생각하면 절대로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형이 원래 이런 사람인 건 알았는데 해도 해도 너무하시네요. 왜 남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그런 짓을 해요?”

“우연이라니까. 작업하다가 우연히 들어간 거야.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봐. 해윤아.”

“다신 형이랑 볼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었다. 해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김태민이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렸다.

“해윤아. 진정해. 내 말 좀 들어 봐. 너희 라이브 공연 영상에 관심 보인 게 대경 그룹 쪽이야. 한기우 전무라는 사람인데….”

대경 그룹이라는 소리에 해윤은 또 한 번 멈칫했다. 처음 듣는 회사는 아니다. 고등학교 때 같은 학년이었던 놈 하나가 대경 그룹 계열사 사장 아들놈이었다. 그 자식 아버지가 대경 그룹 회장의 동생이라 했던 것 같다.

“그분이 띄우려고 밀어 넣은 우리 애들 영상보다 너희들 라이브 영상에 더 관심을 보이더래. 흔치 않은 음색이라면서. 트렌드에서 벗어난 촌스러운 곡 분위기나, 창법이 괜찮다고 하고.”

“괜찮았다고 한 거 맞아요? 촌스럽다는 말이 칭찬인가?”

“에이. 칭찬이지. 클래식하다는 거야.”

하여튼 말은 잘한다. 일단 말이나 들어 보자 싶어 해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 전무가 널 한번 만났으면 한다더라. 송 비서란 사람이 네가 우리 소속사 애냐고 전화를 걸어왔어. 미팅 잡자고.”

“그렇게 내 노래가 마음에 든대요?”

“그렇다니까. 노래도 그렇고 네 외모에 아주 그냥 확 꽂혀 버렸대. 딱 보고 이 사람이다, 싶어서 비서한테 연락 넣으라 했다나 봐.”

“여자도 아니고 외모가 마음에 든다는 건 또 뭐랍니까.”

“그럴 수도 있지. 같은 남자가 봐도 호감 가는 외모, 그런 거 있잖아.”

“제가 잘생긴 것도 아닌데 신기하네요.”

“너 정도면 그래도 잘생겼지. 어쨌든 해윤아. 이건 두 번 다시없을 대박 기회야. 대경 그룹이야. 다른 데도 아니고, 대경 그룹 회장의 차남이라고. 한기우 전무가. 그 사람이랑 미팅 한 번 하려고 얼마나 줄을 길게 서 있는 줄 알아? 요새 한창 잘 나가는 럭키참 멤버 리나. 걔도 한 전무 눈에 들어서 그렇게 빵 뜬 거야. 걔 요즘 CF에 엄청 나오지? 다 대경 그룹 계열 회사 CF야. 그런 사람이 미팅 잡자고 먼저 연락을 해 왔어. 널 꼭 한 번 봐야겠대. 어떻게든 널 만나게 해 달라고 사정을 하는 거야. 이거 정말 대박인 거야. 너 뜨는 거 시간문제야. 대박으로 가는 직행 버스야, 이거.”

“형. 빙 둘러 말할 필요 없어요.”

김태민이 물로 목을 축이며 흐음흐음, 헛기침을 했다.

“근데 한 전무가 소문이 좀 그런 양반이거든. 그 양반이 잡식성이야. 난잡해. 남자 여자 가리질 않는 박애주의자야. 좀.”

뭐가 난잡하다는 건지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단번에 김태민이 하는 말의 의도를 파악했다.

“너도 알지? 이 바닥엔 그런 게 있어.”

“성상납이요?”

“그렇지. 우리 해윤이가 눈치가 빨라서 참 좋아. 그게 단어가 질척하고 음습한 데 비해서 그렇게 이상한 것도 아냐. 건전하고 깨끗한 계약 비즈니스지.”

김태민은 입에 기름칠이라도 했는지 나불나불 잘도 지껄였다. 해윤은 들으면서 기가 찼다. 건전하고 깨끗한 섹스 비즈니스?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결국 한 전무라는 그 사람이랑 섹스하라 이 얘기네요?”

“그분이랑 둘이서 오붓하게 술 한잔하면서 얘기도 나누고 형, 동생 사이도 되고 그러는 거지. 그래도 넌 남자라서 임신할 걱정은 없잖아.”

“형.”

“별거 아니야. 육체관계, 그게 뭐 그리 어렵나. 너 지금 하는 일에 비해선 얼마나 쉬워. 나쁘게만 생각할 것도 없어. 한 전무 젊고 잘생겼어. 멋있더라. 해윤이, 너 몸매 좋고 양복 잘 어울리는 연상 남자 좋아하잖아. 딱 네 취향이야. 이런 때 아니면 네가 언제 그런 잘생기고 멋지고 돈까지 많은 남자랑 자 보겠어.”

해윤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테이블을 쾅 치며 일어섰다.

“더는 할 말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여요? 사람 알기를 뭘로 알고 그딴 소리를 지껄여요?”

“해윤아. 미안해. 내가 말이 좀 심했다. 그런 의미로 한 말 아니란 거 알잖아.”

“알긴 뭘 알아!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두 번 다시 연락하지 마세요!”

김태민이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렸지만 뿌리치고 뛰쳐나왔다. 헛소리 나불대는 놈의 뺨을 후려치지 않은 것만도 많이 참은 거였다.

미쳤지. 왜 이딴 인간의 전화를 받고 달려 나온 걸까. 아무리 급했어도 따로 만날 놈이 따로 있지. 한 번 쓰레기는 영원한 쓰레기인데.

돈 천만 원 넣어 주고 사람을 그런 식으로 팔아넘기려 들어? 그깟 돈 천만 원으로?

악취 풍기는 오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놈이 짖어 대는 개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귀가 썩을 것 같았다. 시작한 지 1년도 채 안 된 신생 기획사가 어디서 그 바닥 더러운 짓거리는 다 배워 와서는, 개새끼가.

속으로 온갖 욕을 다 퍼부어도 화가 식지 않았다. 다시 달려가 김태민의 얼굴을 후려쳐도 이 분노는 가시지 않을 터였다.

그깟 돈 필요 없다. 자존심에 몸까지 내던져서 돈을 벌기는 싫었다. 지금처럼 뼈 빠지게 일하면 그만이다. 입금된 돈은 돌려주고 두 번 다시 김태민, 그 인간과는 말도 섞지 않겠다고.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이를 갈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더랬다.

하지만 현실은 매정했다. 사정을 봐주지 않고 사납게 몰아닥쳐 해윤을 후려쳤다.

- 어쩌니? 해윤아. 언니가 수술 안 받겠대. 퇴원해서 그냥 조용히 죽겠대. 네가 엄마 좀 설득해 봐.

어머니가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버틴다며 이모는 우는 소리를 했다. 어머니가 고집을 피우는 이유는 돈 때문일 것이었다. 여동생과 하나뿐인 자식이 병원비로 허덕이는 걸 아니까 저리 버티는 것일 터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무렵 해윤은 영어 학원 셔틀버스 기사 일도 관두게 됐다. 일터까지 찾아온 사채업자와 대화하는 모습을 학원 학부모가 본 것이다. 축가 아르바이트로 불러 주는 데도 없었다.

어머니와 이모가 하던 식당도 손님이 뚝 끊겨 파리만 날리고 있다고 했다. 수입은 없고 매달 정기적으로 나가는 임대료에, 가게를 낸다고 대출받은 돈 이자에. 적자 행진이 계속되자 가게도 내놓았다고 한다.

여기나 저기나 들리는 건 ‘아이고, 나 죽네’ 소리다. 어머니는 암 덩어리에 잠식되어 가고 이모와 해윤은 빚에 짓눌려 서서히 숨통이 막혀 죽어 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상황은 악화 일로로 치달았다. 회생할 기회도 없이 끝도 없는 바닥으로 떨어지기만 했다.

- 해윤아, 너희 엄마 죽으면 어떻게 하니. 우리 언니, 불쌍해서 어쩌니. 수술해야 하는데. 수술은 해야 하는데, 이놈의 돈이 뭔지. 미쳐 버리겠다. 정말.

이모는 소주를 퍼마시고 조카에게 전화를 걸어 펑펑 울었다. 해운도 울고만 싶었다.

장기라도 팔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사채업자한테 차라리 내 장기를 팔아 달라고 할까. 이 별거 없는 몸뚱이 일부분을 팔아서라도 지금의 이 빚더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별거 아니야. 육체관계, 그게 뭐 그리 어렵다고.’

김태민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김태민이 계약금으로 넣어 준 천만 원이 자꾸만 생각났다.

계약금 50프로를 먼저 입금해 주는 돈이라 했다. 한기우 전무를 만나고 오면 남은 50프로 금액을 넣어 주겠다고 했다.

2천만 원. 지금의 자신에겐 너무도 필요한 돈이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벌 수 없는 큰돈이었다. 못 받을 돈도 아니고 당장 통장에 천만 원이 꽂혀 있지 않나.

김태민이 늘어놓은 가수의 꿈이고, 창창한 미래고 뭐고 다 관심 없다.

놈이 통장에 넣어 준 천만 원. ‘그 일’을 치른 뒤 넣어 주겠다는 나머지 천만 원.

그 돈만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2천만 원이면 어머니 수술은 받게 할 수 있다. 빚도 어느 정도 갚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봤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겠지만, 그 돈이라도 당장 급했다.

돈 앞에서 자존심은 처절하게 뭉개진다.

자존심이 밥 먹여 주나. 망할 자존심을 지킨다고 어머니의 병이 저절로 낫지는 않는다. 해윤은 통화 기록을 거슬러 김태민에게 연락했다.

- 그래. 잘 생각했어! 언제 시간 돼? 언제든 너 편한 시간대로 정해. 한 전무 집으로 가면 되는 거니까. 내가 말했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어. 비즈니스야. 비즈니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런 기회 아무한테나 오는 거 아니다? 해윤이, 너만이 잡을 수 있는 기회야, 이건.

나불거리는 김태민의 비열하게 웃는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그러나 해윤은 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에 그래도 마지막 한 번은 깊게 의심해 봤어야 했다.

김태민, 이 인간이 대체 해윤의 뭘 보고 2천만 원을 턱 내놨는지. 한기우라는 사내는 대체 해윤의 무엇에 푹 빠져 만남을 조르던 것인지.

그 남자는 정말로 해윤의 노래가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외모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는 건 무슨 의미였을까. 주위에 예쁘고 잘생기고 젊은 사람들이 수두룩할 텐데 왜 하필 해윤일까?

적어도 ‘너만이 잡을 수 있는 기회’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는 캐물어 봤어야 했다.

***

“사모님. 스윙하실 때 몸이 너무 앞으로 쏠리세요. 이렇게, 몸을 좀 뒤로 빼시고.”

김태민은 모델처럼 늘씬한 몸매를 한 여자 옆에 찰싹 달라붙어 살살거리고 있었다. 회원제 실내 골프장이었다. 회원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는 걸, 김태민의 회원증 번호를 알려 주고서야 간신히 입장할 수 있었다.

여자가 골프채를 부웅 휘둘렀다. 공이 허공을 날았다.

“아주 완벽합니다. 나이스 샷!”

김태민이 입에 발린 칭찬을 하며 여자를 치켜세웠다.

“외국 명문대 나오신 분이라 확실히 뭘 배워도 빨리 배우세요. 역시 사모님이십니다.”

“김 대표가 워낙 잘 가르쳐 줘서 그렇죠.”

여자도 김태민의 과한 아부가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군살 하나 없는 몸매만큼이나 얼굴 생김새도 반듯하고 피부도 좋았다.

형, 하고 부르자 김태민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김 대표님. 언제 한 번 식사나 함께해요. 코치 받은 보답으로 제가 밥 한 번 살게요.”

여자가 눈웃음을 치며 말하고는 골프채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김태민도 여자의 늘씬한 뒤태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저 사모님이 올해 마흔아홉이다. 대단하지?”

“얘기 좀 해요.”

저 여자가 50대를 앞둔 나이에 20대 같은 몸매와 피부를 지녔건 말건, 자신과는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해윤은 김태민의 차를 타고 골프장 밖으로 나갔다. 놈의 차는 벤츠였다.

“한 전무는 잘 만나고 왔어?”

김태민이 뻔뻔하게 물었다. 해윤은 다른 질문으로 받아쳤다.

“신미라가 누구예요?”

이 인간이랑 말 섞기도 피곤해서 본론부터 꺼냈다. 김태민이 해윤을 흘긋 보더니 얕게 실소했다.

“신미라가 누구냐고 물었어요.”

다시 한 번 물었지만, 이번에도 김태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핸들을 틀어 한강 공원 쪽으로 차를 몰아갔다.

“나가서 좀 걸을까? 날씨도 좋은데. 옛날에 애들이랑 다 같이 한강에서 술도 마시고 기타 치고 노래도 부르고 그랬잖아. 기억나?”

놈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속 편하게 씨불였다. 작은 불씨에 휘발유를 들이부은 듯 마음속 불꽃이 화르르 일었다. 해윤은 눈이 홱 돌아가 김태민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대답부터 하라고!”

“왜? 그 새끼가 네 구멍에 박으면서 신미라를 찾데?”

놈이 입술을 말아 올려 야비하게 웃었다. 잠깐이나마 뒤집어썼던 상냥한 양의 탈은 벗어 던졌다. 원래 이런 새끼였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한기우, 그 자식은 예전 애인이 죽은 지 10년이 훨씬 지났는데 아직 못 잊고 그러냐. 약해 빠져서는.”

“대답해. 신미라가 누군지. 새끼야!”

“어유. 얘가 왜 이렇게 거칠어졌을까. 이젠 욕도 잘하네. 예전엔 순진하고 귀엽기만 하더니. 이거부터 놔. 놓으면 말해 줄게.”

김태민이 제 멱살을 움켜쥔 해윤의 손을 떼어 냈다. 놈은 싱글거리는 낯짝으로 구겨진 옷자락을 탁탁 털어 주름을 폈다. 해윤은 김태민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시트 위에 굴러다니는 생수병을 들어 물을 마셨다. 차 안에 방치된 물이 기분 나쁘게 미지근했다.

김태민이 물을 마시는 해윤을 흘긋 보고는 입을 열었다.

“신미라는 한 전무가 미국 유학 시절에 잠깐 사귀었던 여자야. 그 사실은 아무도 몰라. 한 번도 언론에 공개된 적도 없어.”

“그런데 형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요?”

“어쩌다 알게 됐지. 어쩌다. 알잖아. 나 엄청 발 넓은 거. 별의별 사람 다 알고 있어, 내가. 건너 건너 지인의 지인이 모 재벌 아들놈인데 한 전무와 알고 지내던 사이라 하더라고. 한 전무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가서 같은 대학교도 다녔대. 그때 한 전무가 한국 유학생이랑 사귀었다 하더라고. 둘이 꽤 사이가 좋았다나 봐. 동거도 한 것 같고. 한 전무는 그 여자와 결혼까지 생각한 모양이던데.”

“그 여자가 신미라예요?”

“그래. 워낙 짧은 연애 기간이었고 몰래 사귄 사이라 한승조 회장도 모를 거라고 하더라. 그 여자가 자살했나 봐. 그 충격으로 한 전무도 맛이 홱 가 버려서 자해 쇼도 하고, 별 쇼를 다 한 모양이야.”

“자세한 사정까지 떠벌릴 거 없고. 신미라, 그 여자랑 내가 닮았어요?”

“응. 닮았어. 엄청. 소름 끼칠 정도야. 나도 그 여자 사진 보고 엄청 놀랐다니까.”

놈이 핸드폰을 꺼내 여자 사진 한 장을 화면에 띄워 보여 주었다. 젊은 여자가 하얀 이를 드러내 밝게 웃으며 정면을 응시하는 사진이었다. 해윤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여장을 하고서 사진을 찍은 듯한 모습이었다.

“놀랍지? 어떻게 이렇게 닮을 수 있지? 기막히지 않아?”

김태민이 핸드폰 화면과 해윤의 얼굴을 번갈아 응시하며 신기해했다. 기가 막힌 건 오히려 해윤이었다. 자신과 이 정도로 닮은 여자가 있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이 소름 돋는 우연을 기똥차게 이용해 먹는 김태민의 장삿속에도 새삼 혀를 내둘렀다.

“너희 집안 족보 좀 자세히 뒤져 봐라. 분명히 신미라가 네 먼 친척이기라도 할 거야. 아니면 생판 남이 이렇게 닮을 수 있단 게 말이 안 되잖아. 다시 봐도 정말 닮았어.”

김태민은 흥에 겨워 연신 나불거렸다. 놈이 지껄이는 소리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 자식은 뭐가 저리 신이 나서 지껄이지? 이게 그렇게 신이 나고 즐거울 일인가?

‘너 같은 인간, 숱하게 봐 왔어. 돈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쓰레기 같은 것들.’

한지율이 내뱉던 칼날 같은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남의 비극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설계한 김태민도, 거기에 휘말린 자신도 한지율이 보기엔 똑같은 쓰레기일 것이다.

“이게 나한테 2천만 원을 선뜻 내준 이유였어요?”

“난 장사꾼이지 자선 사업가가 아냐. 해윤아. 솔직히, 너 정도 노래 부르는 애들 이 바닥에 널리고 깔렸어.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새파랗게 젊고 예쁘고 잘생긴 애들, 지금도 기획사 지하 연습실에서 발바닥 부르트도록 춤추고 있어. 젊은 애들 수두룩해. 그런데 네가 뭐가 잘났어? 전에는 너 기 세워 주려고 빈말 좀 했는데. 사실 네가 뜰 재목이었으면 오리 옷 입고 뒤뚱거리며 노래해도 떴을 거고, 이미 그 바닥에서도 유명해졌겠지.”

김태민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칼날이 되어 해윤의 몸을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너희 밴드, 형편없었어. 악기 다루는 놈들 실력은 말할 것이 최악이고, 그나마 보컬인 네 목소리가 들어 줄 만했는데 그나마도 특징이 없었어. 네 목소리의 장점을 하나도 살리지 못하는 창법에, 곡 선정에. 총체적으로 망할 요소만 고루고루 가지고 있었어. 너희들.”

반박할 수가 없는 소리였다. 구구절절 공감되고, 납득할 수밖에 없는 얘기다. 자꾸만 목이 타 해윤은 물만 들이마셨다. 김태민이 손을 뻗어 해윤의 뺨을 두들겼다.

“네가 써먹을 수 있는 건 이 얼굴밖에 없는 거야.”

해윤은 짜증이 치밀어 놈의 손을 뿌리쳤다. 김태민이 손을 탈탈 털면서 같잖은 엄살을 피웠다.

“네 어머니 수술 일정 나와서 입원해 계신다며? 네 이모랑 통화했어.”

“우리 이모한테까지 손 뻗쳤어?”

“걱정돼서 그렇지. 걱정돼서. 동생 어머니가 아프시다는데 어떻게 모른 척할 수가 있어. 이모한테 급한 대로 쓰시라고 5백만 원 보내 드렸다. 계약금 2천으로는 빚잔치하고 남은 거 하나 없었을 거 아냐. 이제 우리, 한솥밥 먹는 식구가 됐는데 이 정도도 못 해 줄까.”

“형. 진짜 씹새끼네요.”

“해윤아. 형 말 잘 새겨들어. 하늘이 내려 주는 기회는 딱 한 번 와. 열심히 살다 보면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올 것 같지? 지금이 아니라도 쥐구멍에 볕 들 날이 또 올 것 같지? 안 그래. 처음, 딱 한 번이야.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는. 그 딱 한 번의 기회도 오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아.”

“됐습니다. 형. 계약 해지해 주세요.”

“야. 계약 해지가 쉬운 줄 알아? 너 계약서 잘 안 읽어 봤지? 계약 해지하려면 네가 받은 계약금 세 배를 위약금으로 내야 돼. 그럴 돈 있어?”

“이건 명백한 사기 계약이야!”

“나한테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이러면 안 되지. 사채 빚까지 내서 사채업자들한테 들들 볶이고 있잖아. 신용 불량자 된 지 오래고. 내가 이런 기회 마련해 주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 거 같아? 빚도 못 갚고 네 어머니 병원비도 못 대고, 너랑 어머니랑 이모랑 사이좋게 손잡고 저승행 해야지. 별수 있어?”

“야. 김태민!”

“쓸데없이 열 내지 마. 이미 물은 엎질러졌어. 한기우가 이미 널 봤는데 어쩔 거야? 죽은 옛 애인이랑 꼭 닮은 놈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그놈이 쉽게 놔줄 거 같아?”

해윤의 핸드폰이 드르륵, 요란하게 울렸다. 이모일 터였다. 어머니가 검사를 받고 병실로 돌아오면 전화해 준다고 했다. 해윤은 격앙된 목소리를 가다듬어 입을 열었다.

“네. 이모.”

- 그날 밤엔 왜 그냥 갔어?

수화기에서 새어 나오는 건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한기우였다. 남자의 음성이 닿는 귓바퀴 솜털이 죄 일어섰다.

“제 번호는 어떻게 아시고….”

- 라인맥스 소속이라며. 사무실에 전화하니 바로 알려 주더라.

핸드폰을 귀에 댄 채 김태민을 쏘아보았다. 놈은 싱글싱글 웃으며 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 오늘 시간 돼?

“아뇨.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요.”

- 그럼 이틀 뒤는 어때?

“그때도 일이 있습니다.”

- 그럼 사흘 뒤로 일정 잡지. 계속 거절하지 마. 내가 성격이 그리 좋지가 않아. 그날 저녁에 식사하면서 얘기하자. 뭐 좋아해?

“한 전무님. 전….”

- 중식 괜찮지? 비서 통해서 예약해 둘 테니 김 대표와 함께 와. 그날 보자.

그는 멋대로 말을 끊고 할 말만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어조는 부드럽고 상냥하지만 결국은 명령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해윤아. 너 사실은 계속 노래 부르고 싶잖아. 너도 지긋지긋한 무명 인생 털어 버리고 대박 한 번 내 봐야지.”

김태민이 빙글거리며 중얼거렸다. 해윤이, 너를 통해 나도 대박을 낼 거거든. 그 말이 생략된 주절거림이었다.

퍼부어 줄 말은 수도 없이 많았다. 목구멍까지 욕이 치밀어 올랐다. 하나 저 빙글거리는 낯짝을 후려치고 욕을 퍼부은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미 물은 엎질러졌는데.

한기우라는 사내는 왜 하필 나 같은 놈을 선택했을까. 답은 이렇게 간단했었다. 이 얼굴. 별 특징 없는 흔해 빠진 이 얼굴이 한기우에게는 평범한 얼굴이 아니었던 거였다.

기적 같은 우연. 몰랐으면 모른 채로 흘려보냈을 우연이 기적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낚아채 김태민은 기회로 만들어 냈다.

“너 진짜 개새끼다.”

해윤은 욕을 중얼거리고는 차 문을 열고 내려섰다. 욕을 들어 처먹고도 김태민은 씩 웃었다.

“해윤아. 그날 시간 맞춰서 너희 집으로 데리러 갈게.”

해윤은 문을 쾅 닫고 한강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옷 속으로 새어 들어오는 차가운 강바람이 오히려 상쾌했다. 김태민의 검은 벤츠가 해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대기업 임원들도 국산 차를 타고 다니는데, 저 자식은 목에 힘주고 벤츠 S클래스를 몰고 서울 시내를 누비고 다닌다.

해윤은 옷깃을 여미고 한강 변을 걸었다. 몇 분 걷는 것만으로 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추워서 기침이 자꾸 터져 나온다. 무리하면 안 될 것 같아 강변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한강이 내다보이는 창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해 봤다.

신미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