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봄 巸蟬 (9/11)

- 봄 巸蟬

바보 같은 내 멍을 옮아간 뺨으로 그다지도 곱게 미소 지을 때.

내 품에서 눈감은 너를 안고 무작정 센터 밖으로 달린 날.

떨어지던 내 심장은 모르는 것으로 하고, 힘없이 늘어지는 팔도 못 본 것으로 하고, 끝없이 새어 나가는 붉디붉은 생명력도 그럴 리 없다 하고.

차가운 몸, 늘어지는 팔다리를 감춰 안고, 어떻게 찾았는지 모를 구급차에 올라탄 그날.

너를 내 품에서 내어놓으라는 허튼소리를 이해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내가 안아 주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떠나 버릴 것 같은 너를 어떻게 저렇게 차가운 곳에 눕히나.

피 맛이 나는 입술 틈으로 혀를 밀어 넣고 숨을 불어 넣어도 맥없이 꺾어지기만 하는 고개. 따라서 내 가슴 속도 갈피 없이 휘청댔다.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이능이 네 출혈을 멈추는 게 먼저였는지, 네 심장이 멎어 더는 내보낼 피가 없던 게 먼저였는지.

누운 자리마다 붉게 적시는 작은 몸뚱이를 처치하는 동안, 정신없이 네게 입 맞추며 돌아오라 말했다. 가까스로 깨달은 사실 하나를 미처 전해 주지 못했으니 지금은 안 된다고, 그렇게 협박을 했다.

너더러 사랑이어라 윽박질러 놓고, 정작 내 것은 알려 주지 못하지 않았나. 비겁하게 네 마음을 기다리느라 이것마저도 늦어 버렸는데, 분명 네가 궁금해할 것인데. 나를 갖고 싶어 눈가를 붉히던 너라면.

홀가분한 표정은 여태 짊어진 삶이 무거워서였을까. 나도 그랬을까. 버거웠을까. 그랬겠지. 너를 힘들게 했겠지.

웃으며 저버린 세상 끝에서 네가 가져간 실없는 상처 탓에 나는 놓을 수가 없었다. 돌아오라고, 돌아와서 계속 그 무거운 삶과 책임에 짓눌리라고. 이번에는 같이 져 주겠다고, 때늦은 고백을 이었다.

의료진이 수혈 팩을 쥐어짜는 만큼 네 아래 고인 붉은 웅덩이가 커졌다. 정신 차리라 어루만진 흰 턱이 말라붙은 핏자국으로 엉망이었다. 내 손도 온통 붉었다. 구급차가 요란한 중에도 뚝, 뚝, 간이 침상 아래로 피 떨어지는 소리가 선연했다.

핏길을 만들어 구르는 이송 침상을 따라 내리며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내가 네 가이드라 외쳤다. 이제 익숙한 이 소개법은 네 심장 소리가 들리는 수술방에 따라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초당 한 번을 채 뛰지 못하는 그 박동을 아예 그만두지 못하게 하려고, 더 잡아 두려고.

수 시간 이어지는 수술 동안 고작 네 손 하나 쥐고 거기에 멸균복으로 감싼 이마를 대었다. 간절히 빌었다. 여태 내가 너무해서 내리는 벌이라면 그만하기를. 변명도 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랬다고.

나는 지독하게 이기적이라, 네 가이드가 되며 잃어야 했던 것들을 포기하지 못하고 애먼 화를 냈다. 네 고통을 등한시하고 네 간절함을 무시했다.

빌어먹을 군부의 처사에 반발하며 정말은 알고 있었다. 너도 이용당할 뿐이고, 내 태도에 매번 상처받는 것도 너인 것을. 그렇게 우는데 몰랐을 리가 없다.

울고 불어도 내 탓하는 일 한 번 없더니, 이렇게 쉽게 등질 줄이야. 살려 달라 울던 울음이 싫었는데, 잘못 없이도 잘못했다 빌던 울음이 싫었는데.

이제는 맴도는 네 예쁜 웃음이 싫었다. 삶에 대한 미련도, 나도, 한 번에 버릴 거면 이렇게 깊이 들어오지 말았어야지. 너를 내게 주지 말았어야지.

끝도 없이 네 탓을 했고, 쉬지 않고 돌아오라고 했다.

지독히 느렸던 그해 겨울.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게 붙들어 놓은 미약한 숨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까마득하게 길었다.

태반의 시간을 병실에 앉아 보냈다. 차가운 네 손을 쥐고 감은 눈꺼풀을 내려다보거나 노트북을 놓고 작업을 했다. 깨어날 너를 위해, 혹은 나를 위해서 해 둘 일이 많았다. 담배 대신 한숨을 피워 올리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돌아와 주기만 하면 돼. 살아만 주면 돼. 그거면 돼.

그러나 내 이기심은 정도가 없었다. 잠든 너를 협박하고, 믿지 않는 신까지 찾아 대며 네 숨을 이어 놓았더니, 역시 맥이 다시 뛰는 것만으로는 모자랐다.

욕심은 끝이 없었다. 내 앞에서 뺨을 붉히고 속눈썹을 적시는 너를 다시 불러오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귓가에 속삭였다. 버석버석한 흰 뺨을 쓸며 말을 걸었다.

내가 울까.

그러면 너는 내게 관심이 많으니 왜 우냐고 묻지 않을까.

외려 네가 울 수도 있겠다.

같이 울까.

네가 돌아오면은.

* * *

‘윤오’라는 작가명을 버리는 결심은 쉬웠다. 그 이름자가 가진 시시한 파급력으로 군의 졸렬한 행태를 더 알릴 수 있다면 정치색이나 반체제자 딱지가 붙어도 상관없었다. 고작해야 책 몇 권 낸 이름이 아까울까.

필명이야 만들면 그만이고 더는 출간하지 못하게 되어도 뭐 어떤가. 시끄럽게 따라붙던 인다비도 내 단호한 태도에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돌아섰다. 출간 작업을 꾸물거리기는 했다.

돌연히 마른 웃음이 났다. 언제 이렇게 됐지. 이선 때문에 사상 검증을 당하고 화를 낸 건 또 언제 적 일이지.

턱이 간질거려 손등으로 닦아 내고 다시 핸들을 잡았다. 언뜻 보이는 손등이 젖었다. 요즘은 예고 없이 눈물이 흐르는 때가 있었다.

하도 많이 울어 이제 좀 그쳤나 했더니 잠든 사이에 그 울음을 내게 옮겨 놓았나 보다. 그 작은 에스퍼의 눈물이 옮은 것이라 생각하면 또 웃음이 났다. 이 생각이 실없고 내가 바보 같아서.

오후 나절 막히는 도로를 달려 도착한 은행은 주차장부터 사람이 많았다. 뽑아 놓은 번호표만 해도 대기열이 40을 넘겼다. 날짜 가는 걸 모르고 살았더니 하필 월말인 까닭이다.

꽤 걸릴 내 용무를 떠올리다 다음에 다시 와서 처리할지 고민하던 차에 누군가 은행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아는 얼굴. 다급하게 숨을 몰아쉬며 대기표를 뽑더니 시계와 대기표를 번갈아 보고 절망적인 낯을 했다.

급한 일인가. 무심히 관찰하던 시선이 두리번거리던 눈과 마주쳤다. 곧 입을 다문 그녀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저기, 정말 죄송합니다.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부탁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제가 네 시까지 꼭 보내야 하는, 아.”

“일 보십시오.”

상황이야 뻔하고 연유는 궁금하지도 않다. 내가 내민 대기표도 아직 열 명은 남았을 테지만 그녀가 말한 시간에 맞추기는 충분해 보였다. 감사하다 숙인 머리꼭지를 두고 은행을 나왔다.

바로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가 담배를 샀다. 오랜 습관대로 입에 뭐라도 물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는데, 다시 병실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필 마음이 사라졌다.

몇 달 새 의도치 않게 끊어 버린 담배를 내려다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이선이 들어오고 내 삶이 얼마나 바뀐 건지 하나하나 다 세기도 힘들다.

비닐도 까지 않은 담뱃갑을 구겨 화단 옆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돌아서 걸음을 옮기기 무섭게 전화벨이 울렸다. 가장 조용한 것으로 설정해도 갑작스러운 소음은 여전히 신경을 긁었다. 나지막한 욕을 중얼거리며 발신인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 데리다입니다. 어디 계십니까?

“알고 있지 않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 ……예. 상관에 관한 일입니다. 군부에 언제 오십니까?

“전화로 할 수 있는 말이면 지금 하십시오.”

- ……가이드 계약 조정 건이 내려왔습니다.

씨발, 이건 또 무슨 소리지.

- 상관의 직속 가이드 계약을 철회하고 중앙 가이드 센터 소속으로 재매칭 여부를 검토 중이라고 합니다.

“미친 겁니까? 이선은…….”

말문이 턱 막혔다. 이 미친 군부가 이선을 버리려는 건가.

- 지금 군부로 와 주십시오.

“바로 갑니다. 의무대로 갈 테니 그리로 오세요.”

집어 던져 버리고 싶은 모바일을 끊고 마른세수를 했다. 버린 담배가 더 아쉬워졌다. 서두르다 떨어트린 차 키를 주워 들고 빠른 걸음을 걷는 중에 뒤에서 높은 목소리가 났다.

“윤오 씨!”

“…….”

“혹시, 급한 일이시면 제가 같이 가 드리겠습니다!”

헛소리를. 무시하고 등 돌려 운전석을 열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대뜸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군부로 가시는 거죠?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중간에 못 내려 드립니다.”

“괜찮습니다.”

실랑이하기 싫을 만큼 짜증이 났고, 내색하지 않아도 초조했다. 뜬금없는 여자를 그대로 태우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갑작스러우시겠지만, 우선 제 이름은…….”

“알고 있습니다. 에덴 씨.”

“아, 기억해 주셨군요.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네 시까지 꼭 보내야 하는 후원금이 있었어요. 덕분에 잘 송금했답니다.”

아무렴 어떨까. 그런 건 하등 관심 없었다. 그러나 다음 말은 의외였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제게는 수호천사가 있어서요. 훨씬 빠르게 가실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라도 도움을 갚고 싶었습니다.”

“……수호천사?”

“네. 시내에는 신호등이 많으니까요.”

멀쩡해 보여선 괴상한 종교가 있나 했더니, 정말 이상한 건 신호등이었다. 어떻게 달려도 수어 번은 걸려 멈추기 마련인데, 시내를 벗어나기까지 단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 외려 점점 더 도로 상황이 나아졌다.

시내를 벗어나는 게 말마따나 훨씬 빨랐고 벗어나서도 신호는 계속해서 초록을 띄웠다. 어이없는 우연에 혀를 차자, 조용히 앉아 있던 에덴이 말했다.

“재미있는 천사님이죠? 신호에 걸리지 않게 해 주는 천사님이라니.”

“…….”

“중령님이 깨어나셨다고 들었어요. 빨리 나으시길 바랍니다.”

제대로 대꾸조차 하지 않는 나를 상대로 에덴이 몇 마디 덧붙였다. 초소 밖에 차를 주차하자마자 내려 정문으로 저만치 달려가는 뒷모습을 잠시 보았다. 그녀가 이선을 아는 건 이상하지도 않다. 한 시간은 걸릴 거리를 20분씩이나 단축한 게 더 이상했다.

천사님? 이능을 말하는 건가? 그녀는 가이드일 텐데.

무언가 떠오를 것 같았지만 제대로 잡히는 게 없었다. 두통이 이는 머리에서 길지 않은 잡념을 흩어 내고 익숙한 의무대를 찾아 걸었다.

이르게 도착한 병실에 데리다는 아직이었다. 그보다 이선이 깨어 있었다. 블라인드 틈으로 하늘을 내다보고 있었는지 흰 얼굴에 햇살이 내렸다. 잠시 가슴이 답답해 멈칫한 나를 느릿하게 돌아본 시선이 살풋 휘었다.

“……윤오 씨…….”

차가운 겨우내 잠들어 있던 이선은 따뜻한 계절이 돌아오는 때에 눈을 떴다.

기다란 속눈썹은 현실을 가늠하는 것처럼 느리게 깜빡였고, 따뜻한 색깔의 눈은 때때로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쉬어 있는 작은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유에 대한 큰 고심 없이 나는 그 입술을 내 입으로 틀어막곤 했다.

호흡이 짧아 금세 허덕이는 이선의 숨을 집어삼키고 뒤통수를 끌어당겨 따뜻한 입 속을 파고들었다.

여린 입술이 키스로 달아오르면 창백한 흰 뺨에도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 옅은 분홍빛을 엄지로 긁어내릴 때마다 성취감을 닮은 기분이 슬쩍 끼어들었다.

“이선.”

“……네.”

“이선.”

“네…….”

울대를 꼴깍이며 때마다 놓치지 않고 목쉰 대답을 내어놓는 입술을 머금었다. 힘없이 흔들리는 고개를 받치고 파드닥거리는 눈꺼풀 아래 눈동자를 응시했다. 나를 담은 따뜻한 색이 지척에서 가물거리며 빛났다.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모조리 뒷전으로 두고, 잠깐씩 깨어나는 이선을 볼 때마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내 품에서 영문을 모르고 갸웃거리는 뺨을 물었고, 얇은 가죽 아래 맥박이 치는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속이 벅차고 위태로웠다. 울 것 같은 기분. 이선은 늘 이런 기분이라 그렇게 울었을까.

“윤오 씨…….”

체력이 떨어진 이선은 오래 깨어 있지 못했다. 또 잠이 오는지 마른 등이 흔들렸다. 내 이름을 웅얼거리는 입술에 입 맞추고 그를 자리에 눕혔다. 꿈이 어쩌고 옹알거리며 잠투정을 하는 게 제가 깨어났는지 꿈을 꾸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눈치다.

발긋한 뺨을 쓸어 주고 달싹거리는 입술을 닦았다. 잠깐 자리를 비운 새 다시 그에게 달아 놓은 전극들을 뜯어 치우고 포근한 이불을 목까지 덮어 가슴팍을 두들겨 주었다.

까무룩 잠든 이선을 지켜보다 시간을 확인하니 처음보다 깨어 있는 시간이 늘었다. 오늘은 언제 일어난 걸까. 아무도 없었던 걸 보면 얼마 되지 않은 듯하고.

의사는 이제 슬슬 일정한 시간에 깨워 보자며 경과가 낙관적이라 했으나, 나는 이선이 잠들고 나면 더럭 겁이 났다. 온갖 것을 걱정했다.

이게 꿈이 아니면 네가 실망할까. 너를 놓지 못한 나를 원망할까. 다시 세상을 등지는 일이 네게 쉬우면 어떡할까. 그렇게 밝게 웃었는데.

의무관들이 헤집고 간 이부자리를 다듬고 이선의 손가락을 어루만질 때쯤 데리다가 도착했다. 노크 후에 들어온 그녀는 가방을 내려놓지 않고 바로 서류철을 꺼냈다.

“잠깐 깨어나셨다고 들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군이 하는 말입니까?”

“……개인적인 감사입니다.”

건네받은 서류철은 몇 장 넘겨보고 곧장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읽을 가치도 없었다.

“윤오님.”

“여기 누워 있는 사람 서명이 이미 되어 있는데, 멀쩡한 내용일 리 있습니까?”

“대리인 자격으로 제가 대행했습니다.”

“그래서 당신도 이선을 버리는 건가.”

“아닙니다. 상관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상관의 파동이 사건 이후로 손상을 입었습니다. 깨어나서 검사를 받아 보셔야 확실하겠지만, 이능력을 영구적으로 상실하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경우 군에서 전역을 통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능 장교의 전역은…….”

“에스퍼 관리동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방공호를 닮은 에스퍼 관리동의 두꺼운 벽체가 무엇을 가두기 위한 것인지 이제는 안다. 그 안에서 방치되어 누워 있던 이선이 떠오르면 어금니 사이에서 분노인지 무력감인지 모를 것이 자라는 기분이 들었다.

“상관은 유능한 분입니다. 공로도 무척 크시고요. 폭주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상 관리동행은 면하더라도 처우가,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나빠질 것입니다. 당장 입원과 치료에 소요되는 비용이 본인 부담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시선을 피한 데리다가 재차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이능 장교는 종신직입니다. 그리고…… 저는, 상관께서 그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군부와의 거래도 불사할 예정입니다.”

“거래라.”

딱딱한 시선이 그녀를 훑었다. 짧은 머리칼에 꼿꼿한 자세. 딱딱한 말씨와 공무적인 태도. 어느 모로 보아도 군인인 그녀가 과연 말처럼 이선의 편인가.

짧은 고민은 쉽사리 결론을 내지 못하고 화두를 돌렸다.

“의가사 전역은 어떻습니까. 정신 감정이든 몸이든.”

“군법에는 있지만 이능 장교에게 적용된 이력은 없습니다. 이능 장교는 살아 있는 한 군 소속입니다.”

“적어도 사람 취급은 아니군.”

“…….”

얘기가 길어질 조짐에 병실 반대쪽 소파와 테이블 자리를 턱짓해 보였다.

잡고 있던 손을 이불 아래에 챙겨 넣은 다음 조금 안색이 나아진 이선의 흰 뺨을 어루만지고 링거액을 확인했다.

턱까지 끌어올린 이불 아래에 손을 넣어 체온이 떨어지지는 않았는지, 목덜미의 박동이 심박계와 일치하는지 살피고, 부드러운 머리칼 속에 손을 넣었다가 옅게 핏기가 도는 입술을 엄지로 훑었다.

“윤오님.”

감은 눈꺼풀을 내려다보는 시간이 길어지자 재촉이 떨어졌다. 쓰레기통에 처박힌 서류를 흘기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거래부터 얘기하세요. 매칭 계약을 파기하는 게 무슨 상관인지도.”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상관의 파동, 즉 이능력에 손상이 왔습니다. 상부의 입장이 조금 전 보신…… 서류대로이고, 윤오님과의 가이드 계약 해지는 시작일 뿐입니다. 심한 경우…… 에스퍼를 폭주로 몰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심스레 끊어 속삭이는 결말이 다분히 구체적이다. 분명한 선례를 떠올리는 사람의 낯을 가만 보다 군의 행태에 턱을 다물었다. 폭주라. 여태 그런 식으로 에스퍼를 소비한 것인가. 쓸모를 다 한 이능 장교를 처리하는 방식에서 군의 인식이 엿보였다.

“저 서류를 내게 보여 준 이유는 뭡니까. 애초에 가이드 계약에도 내 의사는 반영하지 않은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해지 절차 역시 자체적으로 가능합니다. 다만, 주제넘게도 저는 상관과 윤오님의 관계가 이전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디 도움을 주십사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무슨 도움입니까.”

“데리다.”

쉰 목소리.

이름이 불린 여자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이는 경례를 했다. 몸에 익은 동작이 끝나기 전에 내 고개도 목소리의 방향으로 뒤돌았다.

겨우 상체를 일으킨 이선이 병상 위에서 어깨를 떨고 있었다.

잠시 멍청히 있다 비척거리는 이선을 보고 서둘러 다가갔다. 그 어깨를 감싸 내게 기대게 하려는데 바들거리는 손이 올라와 외려 나를 밀어 냈다. 제 몸의 무게 하나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팔꿈치를 벌벌 떨면서.

맥없는 여린 동작쯤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갖은 억측이 이선의 그 힘없는 손짓 하나에 밀려들었다. 가령 이선이 나를 원망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말문이 막혀 가만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윤오 씨, 제가…… 데리다와 이야기를 해도, 괜찮…… 하아…….”

“…….”

“괜찮겠, 습니까?”

정말로 내 의사를 묻는 것이라면 그리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선의 목이 앞서 내려앉았다.

“감사, 합니다.”

명백한 축객령에도 자리를 비워 주기가 내키지 않아 이선의 팔을 쓸거나 이불을 챙겨 덮는 등 갖은 부산을 떨었다. 꺾어진 흰 목을 잡아 주무르고 가벼운 몸을 일으켜 머리맡에 기대앉을 수 있게 했다.

멍하니 내 손길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이선이 느릿느릿 눈을 깜빡거렸다.

“……15분. 근처에 있을 겁니다.”

뒷머리를 잡아채는 빌어먹을 불안을 가까스로 등지고 병실을 나섰다.

간호부에 이선이 다시 깨어난 것을 알리자 둘러앉아 요기하던 의무관 몇이 반색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했지만 마음은 곱게 쓰이지 않았다. 나를 이선의 보호자로 대하더니 뭣 같은 보고는 말 한마디 없이 올리는 자들이라.

군부의 모든 이가 내 적이고 내게서 이선을 빼앗아 가려는 자들인 것처럼 날이 섰다. 우스운 일이다. 정작 군부 소유의 에스퍼를 훔칠 작정은 내가 꾸미고 있으면서.

멀리 가지 않고 바로 앞 간이 의자에 앉아 딱딱한 콘크리트 벽에 뒤통수를 기댔다.

이선이 언제 깼지. 어디까지 들었을까. 이제 전부 알게 될 테니 부질없는 고민이었다. 그 부관이라면 상관이 막 깨어난 환자건 아니건 개의치 않고 설명을 늘어놓을 것이 또렷하게 상상되었다.

지친 목소리. 딱딱하게 굳은 표정. 나를 비껴 데리다를 향하던 시선.

떠올리니 갈증이 일었다. 나를 밀어 내려 애쓰던 가느다란 팔뚝이나 나가 달라 고개 숙이던 모가지가 아른거릴수록 더욱더.

차라리 비켜 주지 않는 게 나았을까. 회복부터 해야 한다 고집을 부리면 어땠을까. 깨어난 너의 시간을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다, 그렇게 답지 않은 입바른 소리를 하는 상상도 했다. 지친 머릿속이 쉬지도 않고 갖은 우려를 자아냈다.

마침내 이선이 긴 꿈에서 깨어난 것을 실감하느라. 두려워하느라.

그렇게 많이 울어야 했던 삶이 더는 싫다고 하면. 가이딩이라는 일시적 위로보다 비참하고 지긋한 굴레를 끝내는 일이 더 좋다 하면.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하면.

지레짐작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욱신거렸다.

매 순간이 고통인 삶을 나는 모른다. 죄짓지 않고 벌 받는 심정 같은 건 알 리가 없다. 그런 세월을 견디기 위해서 무엇을 믿고 어떻게 망가져야 했는지, 마침내 찾은 안식이 얼마큼 간절했고 외면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네가 살아온 지옥을 배울수록 죄인은 내가 되었다. 아무래도 이 괴로운 세상을 네게 더 강요할 작정이라.

피로한 눈을 감았지만 잠들기 좋은 때는 아니었다. 그런 때가 있긴 했나. 휴식 대신 겨우내 매달린 이름 몇 개를 반복해서 떠올렸다. 고요히 잠든 이선이 때로 중얼거린 군인의 이름.

왜 하필 그 이름들이고 그들과 이선이 무슨 관계였는지. 알려 주지 않으면 알아낼 길이 없으면서도, 나는 번번이 이선의 잠꼬대를 기억해 두었다가 검색창에 써 넣었다. 마치 이 숙제를 해내면 그를 깨울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루돌프, 사야야, 바차스.

해소할 수 없는 짜증이 질펀하게 두개골을 메웠다. 두통이 거스러미처럼 일어나 생각을 방해했다.

사망 시기의 역순으로 꼽으면 마지막이 되는 이름은 정보가 가장 적었다. 대령이라는 높은 계급에도 불구하고 민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

매체를 달리하여 조사해 보았으나 ‘에스퍼 바차스’에 관해서는 무엇도 알아낼 수 없었다. 무수히 쏟아지는 또 다른 ‘바차스’를 걸러 내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했다. 그 이름자는 데라주바 연합국의 고아 소년들만을 검색해 냈다.

유독 그 이름을 곱씹을 때마다 떠오를 듯 말 듯 생각을 방해하는 기시감이 들었다. 묘한 불쾌감도 일었다.

이 자만 사망 시기가 2년 전인 것은 왜일까.

의미가 있을 수도, 혹은 전혀 없을 수도 있는 잠꼬대. 그 실마리 같은 미궁에 나 자신을 밀어 넣는 이 미련한 그리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나 보다. 어떻게 하면 끝이 날까. 알려 줄 수 있는 건 한 사람밖에 없는데.

이선. 너는 무슨 꿈속에 있느라 군도 사회도 잊은 그들의 이름을 계속해서 불렀나.

지끈.

휴식을 등한시한 몸이 수마에 지는 것은 찰나였다. 피로와 두통에 머리가 무거웠고 벽에 기댄 뒤통수부터 시작한 현기증이 안구를 집어삼킬 듯 검게 자라났다. 빨려 들어가듯 의식이 꺼트려지고 기다린 것처럼 단편적인 장면들이 눈꺼풀 너머로 번갈아 쏟아졌다.

내 후회를 고스란히 반영한 꿈, 멋대로 각색된 과거. 엉망진창이었던 그해 여름, 잘 우는 에스퍼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다른.

“……십시오! 괜찮으십니까?”

소리부터 시작해 서서히 눈앞이 개었다. 졸았나. 조금도 잔 것 같지 않지만 시간은 착실히 흘러 있었다. 예외 없이 더러운 기분으로 깨어 괜찮다 손을 들어 보였다.

무언가 꿈을 꾼 것 같이, 혹은 나쁜 기억을 답습한 것 같이 불쾌했다. 꿈과 기억의 모호한 경계에서 지근한 편두통이 뒤늦게 따라붙었다. 관자놀이 옆을 꾹꾹 누르며 다시 복도를 거슬러 걸었다.

조용한 병실에 돌아오니 데리다는 이미 가고 없었다. 불을 밝히지 않은 실내가 어둑하다.

습관처럼 보조 등 스위치로 올라가던 손이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허공에 멈춰 섰다. 기척을 느낀 듯 병상 머리맡에 기대어 앉은 이선이 천천히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윤오 씨.”

지친 목소리. 다시 잠들었을 줄 알았더니 기다린 걸까.

대답을 해야 할 일인데 목구멍이 저몄다.

“……윤오 씨?”

꼴깍, 울대를 울린 이선이 재차 나를 불렀다. 그새 쉰 목소리에 의문과 걱정이 실렸다.

바깥도 병실도 이미 어두워서, 앉은 이선의 콧등에 푸른 그림자가 내렸다. 그것이 못내 추워 보여 켜켜이 쌓인 질문 대신 딱딱한 말을 꺼냈다.

“불을 켜도 되겠습니까?”

“네. 죄송, 합니다…….”

금세 내리깔리는 시선이 내게서 벗어나 두툼한 이불 모퉁이에 머물렀다. 눈동자를 가리고 물결치는 속눈썹이 겁먹은 듯 떨었다.

“죄송합니다…….”

이제 막 깨어나 잘못할 겨를도 없었으면서 뭐가 그렇게 죄송할까.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익숙하기는 한 재회 인사에 헛숨이 나왔다. 조심스레 다가서자 숙인 목덜미에 식은땀으로 엉겨 붙은 머리칼이 보였다. 어느덧 귀를 덮을 만큼 길다.

“뭐가.”

짧게 내놓은 되물음에는 이선이 어깨를 좁혔다. 더욱 굽어지는 흰 모가지에, 무심코 뻗으려던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이럴 작정이 아니었는데.

실수했다는 생각 한 편 내 말에 반응을 보이는 이선이 달가웠다. 죄송하다는 그의 말을 듣고 안도가 되었다. 마침내 제자리로 돌아온 듯한, 그런 묘한 기분.

“이선.”

“네…….”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 힘에 부쳐 식은땀을 흘리는 이선의 턱 아래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떨리는 눈가에 입 맞추고 거슬거슬한 입술도 핥았다.

무엇이 그렇게 놀랄 일일까. 이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맞춤을 멈춰 주지는 않았다. 말보다 짙은 그 위로는 사실 내게 필요한 것이라.

겹쳐진 숨. 가로막힌 목덜미. 영문을 모르고서도 순순히 내어놓는 그 입술 틈에 혀를 밀어 넣었다. 부드럽고 느린 키스가 건조한 입술을 적실 정도에서 그쳤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선은 눈을 그렁그렁거렸다.

어쩌면 나는 상처 주지 않아도 상처받는 너의 유약함을 좋아하나 보다. 자존심 한 자락 없이 무릎 꿇는 네 절박함이 좋은가 보다. 어느 순간부터 손이 뻗고 싶었다. 눈을 떼지 못했다.

나를 바라 애타는 눈초리, 겁에 질린 목덜미, 그리고 서럽게 떨어트리는 눈물도.

“왜 웁니까.”

“죄송…….”

“말고. 싫었어요?”

“아니요……. 아니요……. 좋았, 습니다…….”

정말이라는 듯 눈꼬리를 처연하게 내린 이선이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내 옷자락을 쥔다. 맑은 눈물이 들어찬 동그란 눈을 바라보는 내 심정은 비열하게도 기뻤다. 되돌아온 내 에스퍼의 변함없는 모습이 좋아서.

“그럼 더?”

불분명한 토막말에 부연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가만히 눈을 맞추니, 뒤늦게 의미를 깨달은 이선이 눈동자를 떨고 입술을 달싹였다. 동그란 볼에 희미하게 홍조가 어렸다.

병상에 걸터앉아 이선의 어깨를 당겼다. 저항 없는 몸이 내 품으로 들어왔다. 식은땀에 부분 부분 젖은 등을 쓸고 코끝으로는 부드러운 머리칼을 헤집었다. 명백한 반가움, 그리고 녹은 그리움이 차올라 속이 버거웠다. 이대로 그를 안아 작은 몸을 터트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작은 머리통에 얼굴을 비비다 닿는 대로 귓바퀴를 물고 목에 입술을 붙였다. 숨 들이켜는 소리를 내며 졸아붙은 어깨를 주무르고 오그라든 뒷덜미를 간지럽혔다.

밀어 낼 생각도 않는 몸을 한 차례 세게 안은 뒤 품에서 꺼내 놓았다. 붙들고 있던 눈물을 그새 놓쳤는지 흰 뺨에 길게 물줄기가 흘러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소리 내어 입을 맞추자 피할 길이 없는 이선은 그때마다 긴 속눈썹만 깜빡거렸다.

“윤, 윤오 씨…….”

퍽 애달픈 부름이다. 기어들어 가는 것이 부끄러움 같기도 했고, 떨리는 것이 당황 같기도 했고, 울림이 희미해서 재촉같이도 들렸다. 나를 부르며 동그랗게 모이는 작은 입술에 몇 번인가 입을 맞추었더니 어느덧 입술도 뺨도 확연히 붉어졌다.

손을 들어 뺨과 입술, 목과 어깨까지 내키는 만큼 쓸어내린 다음 다시 당겨 안았다.

보글보글 가습기 끓는 소리에 이선이 가쁜 숨 내쉬는 소리가 섞여 조용한 병실을 채웠다. 갈비뼈가 그대로 만져지는 안타까운 등을 더듬다 그대로 이불을 걷고 이선을 끌어냈다.

이끌려 짧게 무릎걸음을 걸은 이선이 내 허벅지 위에 앉았다. 터무니없이 가벼운 몸. 어쩔 줄 모르는 다리를 쓸어 누르고 작은 엉덩이를 더욱 당겨 상반신끼리 빈틈없이 붙였다.

이선의 손은 뭐가 그렇게 조심스러운지 아주 느리게 내 어깨를 짚고 목을 감았다. 마주 닿은 가슴팍에서 쿵, 쿵, 내 것이 아닌 심장 박동이 전해졌다.

시간을 들여 깨어난 이선을 만끽하는 중에도 마음은 좀처럼 만족하지 못했다. 후 순위로 밀려났을 뿐 불안과 의문이 여전히 그득한 탓이다.

몹쓸 걱정이 둑을 채워 출렁거렸다. 그러나 무엇부터 말로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도, 하겠다 마음먹은 말도, 깨어난 이선 앞에 죄 무색했다.

훌쩍이는 소리가 섞여 들리기 시작했을 때서야 이선을 풀어 놓았다. 내 어깨에 올린 두 팔이 가늘게 떨렸고 떨어트린 고개에서 더운 숨이 터져 나왔다.

갑작스레 우는 이유를 몰라 품에서 꺼내 놓고 눈을 마주쳤더니, 흥건히 젖은 눈동자가 모로 시선을 피했다. 예상대로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

“왜 울어요.”

“죄, 윤오 씨……. 죄송합니다…….”

“뭐가 그렇게 죄송한데.”

다독여 달래 주어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답답한 마음이 앞섰다. 절로 나선 채근하는 말투에 이선이 눈가를 떨었다.

달래는 재주가 변변치 않은 바람에 죄송하고 서러운 이선을 안고 고작 등을 두드려 주는 것밖에 할 게 없었다. 기다려도 쉽게 그치지 않으니 불쑥 조바심이 났고, 도통 눈을 마주칠 생각을 않으니 슬금 불안이 기어 나왔다.

“부관과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푹 숙이는 고개를 들어 올려 축축하게 젖은 뺨을 손바닥으로 닦아 냈다. 눈꺼풀이 주황색 눈동자를 감췄다 꺼내 놓을 때마다 새로 눈물이 흘렀다. 서러움도 버거운 체력에 이선의 가느다란 몸이 휘청거렸다.

“제가, 제가 에스퍼가…….”

“이선.”

“……네.”

“무리하지 말고, 쉬어요. 시간은 많으니까.”

초조함을 억누르고 이선을 다시 자리에 눕혔다. 서두르지 말아야 했다. 그의 건강이 따라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적어도 깨어난 이선이 여전한 눈으로 나를 보았으니, 나머지는 차근히 단계를 밟으면 될 일이다.

젖은 눈을 가물거리며 내 이름과 사죄를 반복해 웅얼거리는 그의 가슴팍을 두들겼다. 불안을 감추고 여유를 가장했다. 아이를 어르듯 이불에 파묻힌 이선을 재웠다.

윤오 씨, 제가 에스퍼가 아니면.

이선이 애달프게 중얼거린 말이 무슨 뜻인지, 그건 차차 알아 가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 * *

“절대, 절대 나가시면 안 됩니다. 예? 지금 아주 아수라장이에요. 이게 이렇게 화제가 될 줄은 몰랐, 예, 작가님은 알고 계셨겠죠. 예예. 말씀해 주신 대로 하기는 하지만은 이렇게 작가님 개인이 맞서도 되는 일인지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고…….”

“…….”

“이제 와서는 늦었는가 싶기도 한데, 그래도 군이란 게 무시무시하잖아요? 거기다 여기가 중앙,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이 인다비가 우리 작가님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래야죠! 한동안은 식료품이고 뭐고 다 저한테 맡기세요!”

산만하기 그지없게 거실을 배회하는 인다비는 ‘지켜 드리겠습니다!’와 ‘진짜 고소하지는 않겠죠?’를 번갈아 외쳐 가며 불안에 떨었다. 정신 사나우니 돌아가라고 수십 번이나 권했지만 위험하니 같이 있어 드리겠다, 뭐든 말만 하라, 등 필요 없는 도움을 자청하고 듣질 않았다.

실상 도움은커녕 책 읽는 것과 호들갑 떠는 것 빼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게 인다비다. 주절거리며 사서 걱정하기 시작하면 번번이 입을 다물게 해야 했고, 때마다 배고프다 징징거려 끼니까지 차려 줘야 했다.

여간 짜증 나는 일이 아니었지만 하도 시끄러워 생각이 깊어지지 않는 효과는 있었다.

“하이고, 그거를 봤으면 혼자 알구 있지 왜 인터넷에 올려 가지구, 이 사달을 낼까요. 아예 출간도 못 할 뻔했네!”

투덜투덜 시민 의식과 저작권 개념에 관해 불평을 늘어놓던 인다비가 모바일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출판부에는 전화가 엄청나게 온다고 하네요. 작가님은 절대로 모바일 켜지 마세요! 메일도 안 됩니다! 다아- 인다비 선에서 알아서 할 테니 작가님은 푹 쉬세요! 휴가다, 생각하시고!”

“…….”

“그나저나 걱정이 엄청 되시겠네요오……. 아직 퇴원 안 하신 거죠? 안 그래도 워낙 말르셔 가지구……. 아니, 마른 게 문제가 아니라, 군인이고 에스퍼시기는 하지만은, 그래도 우리 작가님이 걱정 많이 하시겠다, 그 말이죠.”

내 걱정을 하는 건지, 아니면 제가 궁금한 건지.

“겨울 내도록 거기 군 병원에 계셔 가지구 인다비도 걱정 많이 했습니다. 진짜예요! 갑자기 이래서 만나지도 못 하구.”

결국 서랍을 뒤져 담뱃갑을 꺼냈다. 분명 같이 넣어 두었을 라이터를 찾는 동안 티 나게 입매에 힘을 주어 다문 인다비가 공기 청정기를 틀었다.

“그래두 다 잘 풀릴 겁니다! 이거는 지금 사회가 꼭 짚고 가야 하는 문제니까요! 저쪽도 그 뭐, 중령……이시라고 그랬나요? 하유, 엄청 높으시네, 아무튼 그러니까 걱정을 마시라는……, 예?”

“인다비.”

“넵.”

허우적대는 꼴만 보아도 시끄러운 건 무슨 재능일까. 눈치를 살핀 녀석이 요란하게 베란다 창을 열어젖혔다. 곧바로 히익, 숨 들이켜는 소리를 내고는 창에다 커튼까지 채워 닫았다.

“아니, 카메라가, 무슨 이따만 한 게 왔어요! 웬일이에요, 이게? 그야 윤오 작가님이 가이드라니 인다비도 놀라기는 했죠, 그죠. 이 책도 화제가 좀 되겠기로서니, 그렇게 생각은 했는데.”

툭, 툭, 심드렁하게 담뱃재를 털어 냈다. 몇 달 깨끗하던 재떨이에 검은 재가 퍼졌다.

“이야, 사람들 관심 정말 무섭네요오……. 무슨 뉴스도 온 거 같은데요? 관리소에 전화를 해 가지구, 정리를 좀 부탁드려야 하나? 아유, 작가님은 딱 계세요. 이 인다비만 믿으십쇼!”

진작 준비하던 일이고 시간문제인 일이었다. 단지 보름은 더 두고 볼 일이 예상치 못하게 미리 터졌다. 책의 샘플을 먼저 보내 놓은 서점에서 직원 하나가 샘플을 빼내 읽고 웹사이트에 다량의 발췌를 올린 것이다.

시기를 가늠하던 중에 터진 문제가 미처 대응하기 전에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소설로 포장을 했지만 소재가 소재니 만큼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다.

내용에 관한 문의가 빗발쳤고, 오해와 억측이 매일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다른 수 없이 출판사 측에서는 해당 직원을 고소하고 출간을 앞당겼다. 이미 화제가 된 만큼 홍보 없이도 책이 팔려 나갔다.

그리고 군부가 법적인 논의를 고려하고 있다는 기사가 난 순간부터 판매량이 무섭게 치솟았다. 군의 명예를 훼손하고 기강을 흩트리는 책이라는 비난이 어지간한 홍보보다 큰 효과를 냈다.

종전 이슈와 맞물려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시각, 에스퍼에 관한 동정 여론을 쥐어짜는 자극적이고 허황된 소설일 뿐이라는 논평도, 그리고 작가 윤오에 대한 개인적인 비난도 있었지만, 판매고로 나타나는 전반적인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연일 사회가 에스퍼의 인권 실태에 대해 보도했다.

“그런데 그렇게 제보가 많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뭐예요? 군이 알게 모르게 적이 많았던 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막 들구요. 우리처럼 준비를 하고 있다가, 예? 그런 거 있잖아요? 잘됐죠. 이참에 확! 개선돼 가지구! 에스퍼들도 제대로 대우를 받아야죠! 저 교정고 보다가 울었잖아요. 엄청요. 말씀드렸나? 그 저기, 우리 작가님 에스퍼 분도, 예?”

“…….”

“인다비 입 다물었습니다! ……아니, 저는 작가님이 괜찮으신가 걱정이 돼서…… 그래 가지고…….”

몇 모금으로 필터까지 태운 담배를 텅 빈 재떨이에 비벼 끄던 중, 문득 담배 연기가 역하게 느껴졌다. 그대로 담뱃갑을 던지고 눈가를 덮었다.

괜찮지 않았다.

고소, 고발을 하겠다던 기사가 아주 허튼 말은 아니었는지, 자택 연금 아닌 연금 생활이 일주일을 지나는 때에 군에서 사람이 왔다.

변호사를 부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따로 만나서는 안 된다, 시끄럽게 구는 인다비는 도착한 군인의 짤막한 소개를 듣자마자 내보냈다.

“실례합니다~. 집이 좋네요~? 소설가는~ 가난한 줄~ 알았더니~, 아닌가? 우리 우리 중령님 굶길 걱정은 안 해도 되려나~?”

“입 다물고 가만있어.”

“넹.”

엇비슷하게 키가 큰 두 사람 중 군 예복을 차려입은 쪽이 다시 소개했다. 얼굴은 몰라도 그 이름은 알 만한,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에스퍼.

“데이입니다. 이선이 말했는지 모르겠는데 이능 장교 준장이고.”

“윤오입니다.”

“라이얀입니다~. 가이드 친구 친구~. 눈이 무섭네~? 어 이 카우치 완전 우리 중령님 색 아닌가~?”

제멋대로 거실에 놓인 소파에 앉아 들썩거리던 라이얀은 데이 준장에게 목이 잡혀 얌전히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 과정이 다소 거칠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익숙한 듯 보였다.

“손님이 없는 집이라 마땅히 대접할 게 없습니다.”

“그건 신경 쓸 것 없고.”

에스퍼 데이와 가이드 라이얀. 이선에게도 들은 적이 있다.

주로 파견을 다녀 만나기 어렵다던 그들이 지금 이 시점에 나를 찾아온 건 왜일까. 군은 왜 하필 이 두 사람을 보냈을까.

짧은 인사치레 후 정적이 감돌고 라이얀만 혼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할 말 없습니까? 물어볼 거. 뭐.”

대뜸 통보하고 찾아온 쪽이 할 말은 아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데이 준장의 미간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짧게 잘린 백발을 거칠게 휘저은 그녀는 가감 없이 걸쭉한 욕설을 뱉었다.

“하, 씨발. 할 말이 없다고?”

“데이야, 말 예쁘게 해야지~? 우리 데이가~ 입이 좀 거칠어요~?”

“…….”

“군을 좆되게 해 놨으면 지 에스퍼가 어떻게 됐는지는 궁금해해야지. 안 그래?”

“그건 맞다~. 중령님 가이드가 잘못했네~.”

문득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이능이겠거니 짐작하면서도 흘끗 창가를 살폈다. 문은 잘 닫혀 있었고 실내에서 시작한 바람에 커튼이 작게 나부꼈다.

“존나, 이 씹새끼야. 너 같은 새끼가 가이드여서 이선이 몇 번을 뒤질 뻔한 줄 알아? 이선 괜찮냐고 그 한마디를 안 해?”

“데이야! 씹새끼는 맞는데 민간인이야! 말 살살 하자~! 또 민원 들어와!”

“용건이 뭡니까?”

절절 끓는 눈빛과 달리 그녀의 분노는 말 그대로 차가웠다. 날 세운 위협에도 개의치 않자 못마땅한 듯 턱을 이리저리 비튼 데이 준장이 냉기를 감췄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인물의 사진을 꺼냈다.

“바차스. 만난 적 있어, 없어.”

크게 확대한 듯 사진은 전체적으로 흐렸다.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지만 이목구비보다 군인답지 않은 기다란 금발이 먼저 눈에 띄었다. 저자가 바차스?

“소재를 알고 있거나 자료를 받았으면 바른대로 말해.”

“모릅니다.”

삑. 거슬리는 소음이 나고 조그만 기계에 달린 액정을 들여다보던 라이얀이 머리통을 흔들거렸다.

“진짜라고 나오는데~? 모르나? 근데 밧챠가 아니면 그걸 어떻게 빼냈을까?”

“바차스……. 2년 전에 사망한 이능 장교 말입니까?”

“음~ 이것도 진짜래.”

“씨발. 2년 전이건 언제건. 만난 적 없어?”

“없습니다.”

협박이라도 할 생각인가. 험하게 인상을 써 보이는 데이 준장의 무례한 태도에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애초에 군인에게 뭘 기대하고 들인 건지.

도움 안 되는 인다비지만, 변호사를 부른다는 건 들을 걸 그랬다. 아무래도 수상하다. 시도 때도 없이 연행하고 구류하고 집행하던 치들이 이제 와서 얌전히 방문 청취를 하는 것도, 그 내용도. 언론이 가려웠던 걸까, 아니면 이어지는 내부 고발 때문일까.

“밝힌 이름이 바차스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고, 생긴 건 위장했을 수도 있고. 메신저건 메일이건 온라인으로만 얘기를 나눈 사람, 건너들은 사람까지도 잘 생각해 봐.”

“뭐 하러 왔습니까?”

“뭐라고?”

“다른 용건이 없으면 이제 슬슬 가 줬으면 하는데.”

노골적으로 현관을 가리키자 다시 냉기가 퍼져 나왔다. 그러나 내가 군인이 아니고 여기가 전장이 아닌 한 크게 의미 있는 위협은 아니었다.

바짝 조여진 차가운 공기 중에 느닷없이 손을 든 라이얀이 소리쳤다.

“아아~ 알겠다! 우리 데이가 싸가지가 없었다! 정답~?”

“입 다물어.”

살벌하게 뇌까리는 데이 준장의 무릎께를 톡톡 두드린 라이얀이 다시 허공에 손가락을 휘저었다.

“근데 이거는~ 군이 하도 난리니까~ 데이도 짜증이 나서? 뭐 그런? 거니까요? 중령님이랑, 중령님 가이드도 협조를 해야 한다~.”

“이선은 관계없습니다.”

“염병하네.”

질리지도 않고 짧은 욕설을 뱉은 군인이 팔짱을 끼고 등을 기댔다. 성난 기색을 감추지 않았으나 마찬가지로 떠날 생각도 없어 보였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군인 앞에서 괜한 이야기를 꺼내 엮일 빌미를 주고 싶지도 않고.

이선이 오랫동안 의식이 없었던 것은 저쪽이 더 잘 아는 일인데다, 신간을 겨울 중에 집필한 것도 출판사를 통해 밝혔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는 믿으나 마나 한 입장과 함께.

“아~ 이게~ 적이 아닌데~! 우리 데이가 싸움을 걸어 버렸다!”

말 없는 나와 준장 사이에서 팔을 휘적거리던 라이얀이 연극조로 끼어들었다.

매사 진지하지 못한 태도와 공용어의 어미를 늘이는 희한한 말투가 이번에도 심각한 분위기를 흩어 냈다.

“라이얀이 설명할게! 무슨 일이냐면~ 중령님 가이드 이번에 책 낸 거 있잖아요? 그거 왜 그랬는지는 알겠다! 왜 서둘렀는지도 알겠다! 그런데 일이 너무 커졌다! 알겠어요~?”

“…….”

“2년 전? 뭐 진짜 죽었을 수도 있지만~. 근데 이번에 자꾸 살아 있는 거 같아 가지구~? 밧챠는 전산망? 컴퓨터? 뭐 그런 거랑 친한데 지금 중앙 전산이 완전 뒤집어졌거든요~? 책은~ 안 읽어서 몰라~. 그냥 시켜서 따라왔다~!”

“……군부 인명 자료로 본 게 전부입니다. 2년 전 사망 처리된 이능 장교고 대령이라는 것 정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일이든 자료든 전부 없습니다.”

“하긴~ 이제 와서 나타나는 것도 이상하지~?”

기껏 물어본 것과 달리 반응이 영 심드렁하다. 삑삑 기계를 누르며, ‘꼭꼭 숨어라 밧챠~’ 같은 말을 노래하듯 흥얼거린 라이얀이 데이 준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시키는 거 다 했어~. 가자, 데이야! 근데 중령님 가이드~ 우리 우리 중령님이랑 되게 닮은 거 같은~ 그런 느낌~. 말 존나 없는 거 때문? 그건가? 아무튼 응원해요?”

“그만 닥치고 나와.”

“웅. 중령님 가이드, 또 봐요~?”

괴상하게 손을 흔든 라이얀이 다시 목덜미를 잡혀 현관까지 끌려 나가고, 떠나기 직전 데이 준장이 던진 시큰둥한 말은 두 사람보다 조금 더 늦게 빠져나갔다.

“괴물은 감시를 못 벗어나.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존재감이 큰 인물이 둘, 빠져나간 거실에 냉기가 남아 감돌았다.

며칠 만에 찾아온 고요를 반길 틈도 없이 머리를 짚었다. 세상이 바뀌어도 안 된다고? 장담하는 근거는 뭘까. 마냥 무시할 수 없는 그녀의 인생과 경력이 걸렸다. ‘괴물’은 에스퍼를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는지.

생각하고 정리해야 할 거리는 그 외에도 많았다.

손가락을 흔들며 녹음기를 주지시킨 것 치고 빈약했던 질문과 고작해야 거짓말 탐지기 버튼 몇 번 누르러 행차한 중앙군 최고위 에스퍼. 은근슬쩍 흘려 놓은 군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 굳이 알려 주는 특정 에스퍼의 이능 정보. 험악하게 굴던 처음과 달리 미련 없는 뒷모습.

다시 또 그 실마리 같은 미궁이었다.

풀어낼 해답이 있다 가정하고 시작한 복기는 오후 나절까지 이어졌다. 강박적으로 어절을 곱씹고 문장을 뒤집어 가며 헤맸다. 생사가 불투명한 바차스, 군부의 전산 문제, 일이 커졌다는 말, 하다못해 라이얀이 흥얼거린 꼭꼭 숨어라까지도.

그 길기만 한 멍청한 생각은 해 질 무렵의 긴 해가 같은 색 소파에 드리울 때에 뚝, 끊어졌다. 쿠션이 맞물린 자리에서 삐져나온 종이 조각의 흰 모서리가 나를 놀리듯 반짝였다.

“하…….”

[우리 우리 중령님 건강! 내일 퇴원!]

구불구불 형편없는 공용어 위에서 햇살이 노랗게 이선의 색으로 빛났다.

* * *

데리다를 통한 연락은 불발이었다. 이선의 면회뿐 아니라 군부 내 외부인의 면회가 무기한 중단되었다는 소식, 그리고 군인의 건강은 대외비라 알려 줄 수 없다는 뻔한 대답을 받았다.

다만 서류가 통과되었냐는 분명치 않은 물음에는 분실했다는 짤막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것은 곧 대리인의 서명이 효용을 잃은 상태, 즉, 이선이 깨어 있으며 가이드 계약을 파기하라는 상부의 권고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걸 뜻했다.

희망을 덕지덕지 바른 결론으로 억지로 안도하는 내가 우스웠다. 낯설지는 않았다. 헤아려 보면 이선으로 인해 우스워진 일이 얼마든지 더 있었다. 가깝게는 에스퍼의 기대 수명을 부정할 때가 그랬고, 이선의 잠꼬대에 매달린 것도 불과 며칠 전이다.

그냥 두어도 잘 자라는 불안에 비해 계속 먹이를 주어야 하는 안도는 그 효율이 나빴다. 살아 숨 쉬는 이선을 매일같이 보여 주어도 졸음 한 번이면 다시 그날의 붉은 웅덩이가 되살아났다.

눈 내리던 가이드 센터, 응급차, 수술실로 이어지던 빗소리 같은 핏방울. 점차 간격을 벌리던 심박계. 수술대에서 한 걸음 물러난 의사가 봉합사를 내려놓는 달각임. 발밑을 뒤덮은 새빨간 거즈. 시간이 멎은 틈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단음.

그리고?

순서를 갖춰 떠올리려 하면 머리 깊숙한 곳부터 현기증이 일었다.

논리를 채워 넣는 습성도 이날의 구멍 난 기억에 관해서는 민감하게 굴지 못했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하도 여러 번 되새기다 꿈과 뒤엉켜 버렸다고, 마지막에 새까맣게 심장을 잡아먹던 절망까지 모조리 꿈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그만두어야 비로소 두통이 멎었다.

삐빅, 삐빅, 삐빅.

한참 만에 식은땀이 흥건한 이마를 핸들에서 떼어 냈다. 성질을 긁는 시끄러운 벨 소리부터 끄고 모바일을 뒤집었다. 저장하지 않은 번호가 화면에 떴다. 긴 한숨을 내쉰 다음 통화 버튼을 누르자 점잖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네.”

- 안녕하세요. 에덴입니다. 오늘 언제쯤 도착하시는지 여쭤보아도 될까요?

정중하고 군더더기 없는 용건에 시선이 내비게이션을 향했다. 잠깐 쉬었다 생각했는데 미리 약속한 시각을 벌써 15분 지나쳤다. 아무리 한산해도 길 한복판인데, 정신을 놓다니.

차내를 울리는 비상 정지등을 뒤늦게 끄고 시동을 켜 갓길로 차를 옮겼다.

소리 없는 헛웃음이 비어졌다. 이러다 사고 한번 내겠는데.

“……죄송합니다. 30분 후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 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집에 들어앉아 있는 동안 병이라도 들었나. 고작 30분 거리를 가다 한 시간을 쉬다니. 심지어 시간 가는 줄도 제대로 모르고.

사람 하나 인생에 들였다가 운전까지 못 하게 되면 너무 수지 타산이 안 맞는 거 아닌가. 이대로 더 망가져서 멀쩡한 내색도 못 하게 되면 어떡하나.

실없이 자조하며 입꼬리를 당겼지만 웃음 대신 나오는 건 헛숨이다.

뒤통수로 헤드 레스트를 두드리며 이선, 이선, 하고 탓을 했다.

너는 운전을 할 줄 알던가, 에스퍼는 시내 주행이 금지라 했었나, 내게 올 때는 셔틀을 탔을까. 그런 혼잣말도 했다.

천천히 식은땀이 잦아들고 시야가 개었다. 그러나 속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고발이고 뭐고 이럴 줄 알았으면 쥐 죽은 듯 옆에 붙어 있을 걸 그랬다. 이선이 담배보다 더하다. 고작 열흘 못 봤다고 이렇게 멍청이가 될 줄이야.

두통약을 받은 병원에서 준 트라우마 클리닉 자료는 어디다 두었더라. 무엇에 관한 트라우마라고 했지? 상실……?

기억이 흐린 걸 보면 이것도 꿈일지 모른다. 요즘은 세상이 금세 뭉개질 것처럼 물렀다.

내 근간을 이루던 이성과 논리, 도덕의 경계가 죄 허물어지고 멀쩡하게 기능하던 기억력까지도 썩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평생 해 온 글을 쓰는 법과 읽는 법까지 잊은 기분에 모니터를 켜 두고도 키보드를 두드리지 못하는 날이 더러 있었다.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날의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대로 괜찮을까?

그럴 리 없지.

명치부터 쇄골까지 뻐근하게 통증이 들어찼다. 허파에서 자란 바늘 수십 개가 피부 표면을 구멍 내고 빠져나가는 착각이 들었다. 이 아픔은 실재하는 질병이 아니라 스트레스에 따른 증상이다. 심인성. 정신적 문제. 환통.

이선이 살았다.

이선이 돌아왔다.

그러나 지긋지긋한 엄살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가슴이 아니라 영혼이 지독한 실패를 겪은 것처럼 근거 없는 통증의 뿌리가 깊었다. 새로 생긴 옹이구멍이 커다랗고 비집고 들어간 조그만 것의 정체는 빤하다.

이선에게 주려고 골라 놓은 원국의 이름 글자가 문득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미 주었던가? 아니다. 어딘가 새겨 둔 것 같은데 그게 어디인지는 또 떠오르지 않고…….

미처 시내에 접어들지 못하고 다시 차를 세웠다. 내 작은 에스퍼가 옮긴 빗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가쁜 숨을 들이켜고 가짜 통증으로 괴로운 흉곽을 짚었다. 뚝, 뚝 굵은 빗방울이 무릎 위로 떨어졌다.

당초의 약속 시간보다 장장 한 시간이 늦었다. 시내와 외곽의 경계선에 위치한 그린 재단의 너른 운동장 한편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그저 비워 두었을 뿐이라 운동장보다는 공터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앞뜰. 2층짜리 작은 건물 옆 듬성듬성 심어 놓은 관목.

작년까지 보육원이었다고 했나. 문패를 바꾸고 페인트칠을 새로 해도 구식 건축의 낡은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어딘가 어리숙하고 어설픈 와중에도 직접 가꾼 아기자기하고 편안한 감성이 엿보였다.

잔잔하게 연료를 태우던 엔진음을 꺼트리고도 한참을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게 차가운 손끝을 손바닥 안쪽에 말아 쥐고 심호흡을 했다.

납득하기 어려운 환통이 남긴 두근거림 때문에 가만 앉아서도 조바심이 일었다. 의지를 거스르는 불안, 근거 없는 통증, 그리고 무력감. 그네들은 마치 형태가 있는 것처럼 갈비뼈와 두개골 틈에 도사리며 때로 행패를 부렸다.

주머니를 뒤져 처방받은 두통약을 털어 삼켰다. 생수병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손바닥에서 플라스틱 약통이 도르르 굴렀다.

약을 처방해 준 의사는 기억이 나는데, 내게 상실을 말한 의사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같은 사람이 아니었나. 그럼 ‘상실’조차도 내 무의식이 만들어 낸 단어인가.

무의식은 번잡하게 일을 했다. 지난 일을 반복해서 재생하는 것 말고도 여러 가지를 보여줬다. 실이 끊어지듯 의식을 놓고 잠드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홍수처럼 장면을 쏟아 냈다.

깨어날 즈음이면 거의 잊어버렸지만 잊히지 않고 새겨지는 순간도 종종 있었다. 생각이 깊어지면 생생한 빨강이 이선을 뒤덮었다.

띡, 띡, 띡.

[Knock, Knock]

느닷없이 와이퍼가 움직였다. 그리고 차 안이 밝아졌다. 실내등뿐 아니라 전조등, 미러 등과 계기판, 내비게이션까지 가리지 않고 켜졌다. 심지어 조수석에 던져 놓은 모바일까지 조용히 화면을 반짝거렸다.

배터리 이상? 전파 오류?

등 달린 것들이 일시에 일으킨 오작동은 단숨에 빼놓은 정신을 제자리로 되돌렸다. 놀라기에 앞서 사이드 브레이크를 확인하고 비상등을 켰다.

버튼을 눌러 시동을 걸자 들어 본 적도 겪은 적도 없는 이상 현상이 시시하게 사라졌다. 단 하나, 내비게이션에 뜬 흰 글씨만 그대로 남기고.

[Knock, Knock]

쏘아보고 있으려니 정말 노크를 하는 것처럼 글자가 두 번, 깜빡였다.

흔히 쓰이지만 공용어로 설정해 둔 내비게이션이 갑자기 띄우기에는 느닷없는 메시지. 기본 시스템에 내장되어 있을 법한 문구는 아니고 에러 메시지는 더더욱 아니다.

기묘한 기시감이 떠오를 듯 말 듯 이마를 긁어 댔다.

[아파?]

“이게 무슨…….”

기기 고장? AI의 반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 문득 떠오른 스친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천사님.”

에덴의 천사님. 그리고 대령 바차스.

검은 화면이 마치 웃음처럼 지직 대더니 이내 요란스러운 색으로 반짝거렸다. 네모진 내비게이션 화면을 가득 채운 노이즈가 파도처럼 일렁이고 거품처럼 깜빡였다. 이윽고 뚝 잘려 나간 듯 다시 어두워진 화면에 노란 글씨가 한 자씩 떠올랐다.

[☆ 천 사 님 등 장 ☆]

“……들리는 건가?”

장난스러운 글자가 번갈아 높낮이를 바꿨다.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오르락내리락 물결치며 말을 거는 내비게이션. 이 상황이 언젠가, 어디에선가 본 적 있는 것처럼 낯익다.

‘My Sun.’

Sun. 누군가 이선을 그렇게 불렀나?

[분실물이 도착했습니다]

똑똑.

이번에는 메시지가 아니라 제대로 된 소리였다. 손마디의 관절로 유리창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조수석 창가에서 들렸다. 돌아본 유리창 너머에는 짙은 갈색 코트를 입은 남자의 상체와 허술하게 주먹 쥔 손등이 보였다.

[손 시려 X . X ]

이선의 울음이 얼핏 스쳤다. 꿈이었을까. 내가 그를 태워 어딘가로 데려다주는 동안, 이선은 작은 덩치를 푹 숙이고 한참을 울었다.

[나 기다리는 거 잘해]

[진짜야]

문득 하나로 연결된 꿈의 조각들에 혼란스러워하는 중에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기다리는 걸 잘한다고. 그러나 말과 다르게 유리창을 두드리는 노크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박자라도 맞추듯 톡, 톡, 토톡, 유리를 두드리는 남자의 언뜻 보이는 입매에 송곳니가 도드라졌다.

[개새끼야]

창문을 내릴까 하다 차 문을 열었다. 서늘한 공기 중에 내려서니 답답한 속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창문을 두드리던 남자도 느릿하게 보닛을 돌아 차 앞에 멈춰 섰다.

키가 크고 마른 타입. 누가 보아도 위장용인 커다란 안경이 얼굴의 대부분을 가렸지만, 나머지 부분은 인상이 멀끔했다. 어딘가 소년 같은 느낌은 유독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난 장난스러운 웃음 때문일까.

그러지 않아도 에덴의 ‘천사님’에 대해 듣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 참인데, 본인의 등장일지도 모르는 지금, 대화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군에 속하지 않은 에스퍼이자 사라진 대령 바차스일 수도 있으니 더더욱.

확신은 아니었다. 에스퍼로서 중앙군 대령까지 다다랐을 정도면 군인으로 생활한 기간이 적어도 15년 이상. 그러나 휘적휘적 걸어 비스듬하게 선 눈앞의 남자에게는 오랜 기간 복무한 군인이 으레 가질 법한 절제 된 분위기가 조금도 없었다.

“그쪽이 바차스입니까?”

“너무 본론인데.”

실룩이는 콧대에 올라선 동그란 안경이 지나치게 두껍다. 거기다 알까지 불투명해서 신분을 감추기는커녕 되레 시선을 끌었다.

지척까지 거리를 좁힌 남자는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오른손을 꺼내 가볍게 휘적거렸다. 손바닥과 손등을 보여 주는 동작이 마치 수상한 게 없으니 확인하라는 듯 보였다.

“그래, 뭐. 나도 남자랑 얘기하는 거 안 좋아해.”

“……무슨 소립니까.”

“조금 아플 텐데, 참을 수 있지?”

아플 거라고?

그따위 말을 하면서 내민 손을 잡을 리가.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린 남자가 악수를 재촉하듯 손바닥을 흔들었다.

“맡아 둔 걸 돌려주는 거니까 겁먹지 말고. 조각 모음? 그런 거라고 생각해. 아, 당신들은 아픈 거 잘 못 참던가? 그래도 죽을 만큼 아픈 게 꼭 죽는 건 아니거든. 그것도 그렇고…….”

씨익 웃은 남자의 손이 내 쪽으로 길게 뻗어졌다. 중얼거리듯 작은, 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도 함께.

“태양이 당신을 사랑하잖아.”

그러니까 참아야지.

끼이-.

나붓하게 불던 바람 소리가 찢어질 것 같은 이명에 뒤덮였다.

이자를 만난 적이 있다. 있었다. 조각나고 잃어버린 시간 속 언젠가에서.

한 걸음 마저 다가온 바차스가 내 어깨에 툭, 그 손을 얹었다.

이윽고 세상이 쏟아졌다. 온통 흔들리고 부서져 내렸다. 망가진 기억이 끝도 없이 들어왔다. 완전히 바스러지고 새로이 조립되며 머리가 풍선처럼 부풀어 터질 것 같았다.

휘청거린 몸이 속절없이 쓰러져 흙바닥에 굴렀다. 이제껏 나를 괴롭힌 두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두개골이 그대로 조각날 기세로 죄었다.

억지로 칼을 쑤셔 넣는 고통. 그리고 다시 나를 찾아온 기억.

그 처음은 이선의 묘에 새겨 놓은 원국의 이름자였다.

* * *

네모난 유리장 아래 수많은 이력과 공훈이 이어졌다. 번쩍이는 글자로 써 놓은 찬사를 무심히 따라 훑었다. 군이 기록한 개인의 짧은 역사 중 내가 아는 것은 없다시피 했다. 외면한 시간이 사무쳤다.

준비하였으나 전하지 못한 선물은 그를 가둔 조그만 돌무덤에 새겨졌다. 햇살 한 조각이 겨우 비집고 들어와 음각된 이름자를 긁었다. 재를 담아 놓은 매끈한 석재 상자가 무척 작았다. 고작 두 뼘짜리 공간도 다 채우지 못하고 차가운 돌과 유리 벽 안에 덩그러니 놓였다.

연고 없는 군인들의 봉분 없는 묘지에 바람이 불었다. 유리장마다 꽂힌 색 바랜 조화들이 플라스틱 잎사귀를 사락였다. 길고 조용한, 아프고 서러운. 떠난 사람 같은 그런 바람이 울었다.

‘진통제가 듣지 않는 건 당연한 거예요. 저번에 드린 클리닉 책자는 좀 보셨나요?’

‘……예.’

‘당연히 마음에도 병이 듭니다. 소중한 분을 잃으면 누구나 그럴 수 있어요. 윤오님께서 겪으시는 불면증이나 두통, 흉통 모두 같은 맥락으로 보여요.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힘들어서요.’

트라우마.

‘지금처럼 계속 내과에서 수면제 받으시는 거요? 받으셔도 돼요. 원하시면 처방해드릴 수 있어요. 그런데 나아야 하잖아요.’

‘…….’

‘글도 다시 쓰셔야죠. 상담 꼭 받아 보세요.’

불면증. 두통. 흉통.

말로 꺼내지 않은 증상은 더 많았다. 저녁이면 심장이 크게 뛰고 간혹 숨이 막혔다. 모니터 안에서 글씨가 흘러내렸고 책을 펼치면 글자의 경계가 무너졌다.

쓰기도 읽기도 잃어버린 채 할 수 있는 거라곤 가만히 앉아 생각하는 일밖에 없었다. 곱씹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면 해가 지고 비어 있는 소파에 주홍색 저녁 햇살이 내렸다. 계절은 순번을 지켰고 잃은 겨울이 느리게 지났다.

상실.

내 정신이 온전치 않은 것은 누가 일러 주지 않아도 알았다. 낮과 밤에 상관없이 찾아 드는 악몽. 끔찍한 상실에서 깨어나면 시야가 온통 붉었다.

두 손을 적신 피가 붉다가 갈색으로 말라붙으면 사라지는 환각. 쉬지 않고 귓가에 부는 이명. 사라지지 않는 두통. 숨을 쉬기만 해도 죄는 심장.

‘나아야 하잖아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낫고 싶지 않았다. 이토록 번거롭고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도 내게 주어진 미련이었다. 혹은 원망이거나.

네 것은 더 고통스러웠겠지. 더욱 길었겠지.

이런 불편이 삶으로 굳어지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이토록 괴로운 오늘과 이어질까 두려운 내일이 네게는 당연했을까.

물음은 길어만 지는데 대답은 영영 없었다.

가슴팍에 새로 남은 흉터가 제 자리인 줄 모르고, 무거운 허물을 벗어 놓은 가벼운 에스퍼 하나가 그렇게 떠나갔다.

* * *

따뜻한 계절풍이 불어 낮의 소란이 열린 창을 넘었다.

이따금 커피 머신이 끓으면 바퀴 달린 의자가 바닥을 긁었고 느린 걸음이 부엌을 오갔다.

밀도가 높은 머릿속은 시간이 지나자 차츰 정돈되었다. 아니면 잊었다. 머릿속이 범람하고 되새겨 붙잡지 못한 부분부터 차례로 흩어졌다. 날숨에 조금씩 두개골의 압력이 빠져나가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이 같이 사라졌다.

습관처럼 문장 몇 개를 머릿속으로 그렸으나 정말 써 내리지는 않았다. 정확하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익숙한 자리에 푹 가라앉아 빈자리를 들여다보았다. 점차 무게를 더하는 오후의 빗소리에 내내 머무르던 고요가 비로소 개었다.

거실에 드리워진 어둑한 비 그림자를 집요하게 따라 볼 적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짙은 적막이 아니었다면 봄비 적시는 소리에 금세 잡아 먹혔을, 문을 두드리는지 쓰다듬는지 알 수 없는 소심한 소리.

혼곤한 의식을 현실로 이끌어 낸 것은 조금 더 적극적인 소음이었다. 문고리가 돌아가고 두꺼운 현관문이 바깥으로 열렸다. 바람길이 새로운 출구를 찾아 술렁이고, 축축한 공기가 빠져나가는 방향에 기다리던 발소리가 내려앉았다.

“……윤오 씨.”

잠금장치를 걸어 두지 않은 문이 작은 부름 뒤로 쿵, 닫혔다.

길게 파고든 비 그림자를 밟고 망설이는 걸음이 다가왔다. 주저하여 성큼 걷지 못하고 식어 빠진 커피 향이 메아리처럼 맴도는 거실을 좁게 가로질렀다.

눈을 내리깐 흰 낯이나 힘이 들어간 입술에는 언제나와 같이 혈색이 모자랐다. 넘치는 건 눈물밖에 없는 이답게 그림자 진 눈 아래가 진작 어물거렸다. 장막처럼 우울을 뒤집어쓰고 몇 번이나 아랫입술을 씹었다.

“죄송합니다.”

귀에 익은 말.

자박한 빗소리에 금세 흘러간 첫마디를 색 멀건 입술이 여러 번 덧그렸다.

눈을 감았다 떠도 사라지지 않는 모습을 수십 번 확인하고 손을 들어 가까이 불렀다. 젖은 예모를 벗은 이선의 시선이 곧장 내 손바닥을 향했다.

마른 손가락이 예모를 구겨 쥐었고 발치에 두어 방울 눈물이 떨어져 빗소리를 더했다.

“저 때문에…….”

“이리로.”

필요 없는 서두를 끊고 이선을 불렀다. 힘이 들어간 아랫입술과 눈시울을 어물거리며 그가 다시 한 걸음 가까이 섰다.

마침내 예모에서 떨어트린 한 손이 더없이 조심스레 내 손바닥을 올랐다. 나는 즉시 그 손목을 잡아 내게로 쓰러트렸다. 가벼운 몸이 쉽사리 꺾여 품에 부딪혔다.

비로 젖은 제복 어깨에 턱을 괴고 수놓인 견장을 지나 목깃에 코를 묻었다. 온기가 모자란 흰 살에 대고 숨을 들이마셨다. 비 내음과 어우러진 살 향이 까마득한 반가움을 빈속에 채웠다.

습성처럼 그 자리에 입술을 붙이니 그가 들고 있던 예모를 바닥에 떨궜다. 바들거리는 이선의 팔이 내 어깨를 밀었으나 허리를 감아 힘을 주자 그대로 끌려와 내 의자에 무릎을 접어 올렸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음에도 저항은 미약하기만 했다.

“드릴, 말씀이…….”

“얘기해.”

무릎으로 선 이선이 내 어깨와 의자 등받이를 잡았다.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고민하느라 바르작거리는 가슴팍이 코앞에 놓였다.

그대로 정복 상의의 두꺼운 단추를 몇 개 풀어내는 동안 이선이 애달프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내 손등을 움켜쥔 찬 손을 당겨 길게 가로지르는 흉에 입술을 붙였다. 오래된 상처가 다른 살결과 다르게 매끌매끌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늘어지는 말꼬리가 기이한 배덕감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내가 그를 강제로 희롱하는 기분. 내키지 않는 죄책감. 고단한 불편함. 언제고 이선을 품을 때마다 맞붙는 번민과 정욕이 지근하게 얽혀 끓었다.

마침내 내 앞에 돌려놓은 이의 품에 이마를 붙였다. 무얼 더 하지 않는데도 이선은 내내 꼼지락거리며 멀어지고자 했다.

막상 허리를 감은 팔 하나 풀어내지 못하면서. 그런 심지 얕은 거부로는 놓아줄 생각이 들 리 없다. 외려 더 당긴 그의 가슴에서 심장 소리가 쿵쿵, 요동쳤다.

“쓰러지셨, 다고…… 들었습니다.”

“…….”

“죄송합니다…….”

소용없는 밀어 내기를 포기한 듯 무게 없는 손가락이 어깨에 내려앉았다. 젖은 빗소리에 어울리는 물기 어린 말씨가 다시 사죄로 고꾸라졌다. 연거푸 제 잘못이라는 말이 나왔다.

뭐가 그의 탓일까. 길바닥에 쓰러져 병원 신세를 진 것이? 고작 하룻밤 입원하고 퇴원한 사람을 안쓰러워하기에 이선이 적합한 인물도 아니었다. 옷 위로도 감춰지지 않는 마른 몸이야말로 안타까운 환자의 것이라.

두근거리는 가슴팍에서 이마를 떼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분주히 깜빡인 그의 눈꺼풀에서 내 뺨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떨어진 물기가 주르륵 볼을 타고 목까지 흘러내렸다. 당황한 이선이 손을 올렸으나 잠시 허공을 맴돌다 물길 따라 허망하게 떨어져 내렸다.

조심스러운 그 손을 가로채 그대로 뺨을 묻었다.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에 그의 눈물이 적신 볼을 들려 주고 손바닥 안쪽의 살집에 입술을 눌렀다. 마주한 이선의 눈매가 괴롭게 일그러졌다. 너무 슬퍼 어쩔 수 없는 사람처럼 미간을 좁히고 입술을 당겨 물었다.

일찌감치 해가 저문 거실에 드문드문 빗소리를 누르고 흐느낌이 들어섰다. 들숨에 흔들리는 어깨를 바투 당겼으나 뻣뻣한 몸이 휩쓸리지 않고 버텼다.

“이제,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덤덤한 척 목소리를 꾸며 냈지만 뚝 자른 반문에 흠칫 튀어 오르는 등은 전혀 덤덤하지 않았다.

“이제 내가 필요 없습니까?”

이어지지 않는 말을 대신 덧붙이며 복잡한 생각이 다수 스쳐 지났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아도 멍청한 질문들이 불쑥불쑥 튀었다.

이선이 더 이상 에스퍼가 아니게 되었다거나, 그래서 더는 가이드가 필요 없다거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찾았다거나, 그런 터무니없는 기적이 일어나기라도 했는지. 그래서 이제 나를 원하지 않는지.

말없이 고개 숙인 이선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퀴 달린 의자가 밀려나고 당황한 이선이 까치발로 섰다. 뒷걸음질을 마저 치기 전에 작은 턱을 잡아 올렸다.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다 질끈 감은 이선의 눈꺼풀 틈에서 소리 나지 않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새어 들어오는 어둑한 빛이 창백하게 질린 낯을 비춘다.

“파기했습니까?”

“…….”

그랬겠지. 짐작은 하고 있었다. 보호자로 병원에 불려 온 인다비가 깨어난 직후부터 계속 떠들어 댔으니 모르기가 어려웠다. 갑작스레 꺾인 군의 제재와 입장 철회, 내려간 기사 등이 뜻하는 건 한 가지였다. 군부에 갇히다시피 해 연락도 닿지 않던 이선이 지금 나타난 것도.

“왜 그랬어.”

억세게 다물린 턱이 쉬지 않고 떨렸다. 내리깔린 속눈썹 아래로 새로 솟은 눈물이 반짝이며 길을 냈다. 갑갑한 숨이 호흡기를 길게 긁고 빠져나왔다. 이렇게 울면서 왜.

이선이 소매를 당겨 아무렇게나 제 얼굴을 닦아 냈다. 무심한 표정을 가장했으나 눈을 마주치지 못했고 결연한 척하지만 목소리에 울음기가 남았다.

“더는 군부에 의한 불이익을 감당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동안…….”

“이선.”

“……감사했습니다.”

그동안 감사했다, 라.

개소리가 아주 수준급이었다. 하, 군의 개로 살아온 날이 길어 이선도 어쩔 수 없나 보지.

준비했을 말을 마치고 물러나려는 이선의 팔뚝을 세게 잡았다. 멋대로 사라지지 못하게 세워 두고 헤매는 시선이 내게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 갑갑한 속내를 더 털어놓고 무슨 생각인지 다 토해 놓기를 기다렸다. 기다리고 붙잡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속에 두둑이 쌓인 탓을 섣불리 퍼부었다가는 당장이라도 도망갈 것 같아서.

그 묵묵한 시간 내내 이선은 꿀꺽꿀꺽 울음만 넘겼다. 닦아 내지 못한 눈물이, 놓아 달라 젓는 고갯짓마다 비처럼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이럴 거면서 왜.

한참 만에 포기한 듯 이선이 붙잡힌 두 팔을 늘어뜨렸다. 맥없이 비틀거리는 몸이며 손아귀에 잡히는 마른 팔뚝에 속이 끓었다. 멀쩡한 척도 못 하는 주제에 나를 떠나려는 이선. 기껏 깨어나서 그동안 감사했다 말하는 이선.

“……제가, 더 일찍, ……했어야……는데.”

“…….”

“아프, 아프시게, 하고, 더는…….”

“네 잘못이 아니야.”

“……이제, 제게 그러실 필, 요가 없습니다.”

내가 쓰러진 건 네 탓이 아니라고. 군복에 구김이 가도록 붙들고 말해 보았으나 이선은 벽을 세우고 듣지 않았다. 목울음을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그 작은 머리통 속에서는 내가 나자빠진 것도, 군부의 감시와 협박도, 제제와 불이익도, 모조리 그의 잘못으로 정해진 모양이다.

“욕심, 내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선.”

“제가 처음, 처음부터…….”

“처음부터, 뭐.”

처음부터 찾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꾸역꾸역 잇는 말마다 오답투성이.

바들거리는 팔뚝을 으스러뜨리기 전에 겨우 힘을 풀었다. 숙인 정수리를 쏘아보다 눈가를 덮어 짜증을 가렸다. 몹쓸 분노가 가는 모가지에 영락없이 쏟아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말간 귓바퀴를 내려다보며 딱딱하게 묻자 흐느낌을 참는 숨소리에 긴장이 묻어났다.

“고작 그딴 소리를 하러 왔습니까? 그 통보를 들으면 내가 반길 줄 알았나?”

“아니, 저는…….”

“처음부터, 더 일찍 끝내야 했다고? ……그 말이 전부면 부관을 시키지 뭐 하러 직접 여기까지 왔습니까. 불쌍한 행세라도 하려고?”

“그건, 그게 아니라.”

“왜 울어. 마지막까지 전부 네 뜻대로인데. 내 대답이 필요하긴 한가?”

“아닙, 그런 게…… 아닙니다.”

당황한 이선의 벌벌 떨리는 손이 파리하게 질린 낯을 여러 차례 문질렀다. 윽박지르는 말에 꿀꺽꿀꺽 서러움을 넘길 때마다 젖은 어깨 위 견장이 흔들거렸다. 긁혀 벌건 눈 밑이 다시 눈물로 덮였다. 꾸역꾸역 참아도 그쳐 보일 수 없자 미간을 대신 좁혔다.

“끝이라고.”

“…….”

울상을 참으려 인상을 구기는 이선의 어깨를 밀쳤다. 가볍게 밀었으나 종잇장 같은 몸이 격하게 밀려났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짧게 마주 보다가 스쳐 지났다.

“다했으면 가.”

“윤오 씨……!”

거실에 스민 축축한 습기를 가로질렀다. 뒤쫓아 오는 잰걸음을 무시하고 침실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화가 들쑤셔 숨을 골라도 답답한 속이 전혀 풀어지지 않았다. 침대 주변을 서성이며 짜증을 삭힐 적에 작은 목소리가 초조하게 방문을 긁었다.

“윤오 씨……. 죄송합니다. 화내게, 화나시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느릿느릿 뱉는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했다. 애초에 울음을 참는 데 소질이 없으니 내 이름과 사죄를 번갈아 웅얼거릴 때마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섞였다.

“불쌍, 불쌍하려고 한 게 아니라, 그런, 그게 아니라……, 윤오 씨는 정말 아무 잘못도 없으십니다. 다 제가……. 전부 보상을,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게, 다 제가 하겠, 하고……. 저 때문에, 피해, 보신 것들 제가 다……. 제가……. 잘못했어요, 죄송, 윤오 씨…….”

횡설수설 다급한 말이 닫힌 문간에 쏟아졌다. 제가 뭐라고 늘어놓는지는 알까. 점점 작아지는 소리에 이마를 기댔다. 차마 두드리지 못하고 쓸어내리는 건너편의 여린 진동이 나무문을 타고 주르륵 아래로 미끄러졌다.

“제가 잘못, 화내지 마세요……. 그러지, 마세요…….”

문짝 너머 발치에 두서없는 울음과 혼란스러운 고백이 내리깔렸다. 이까짓 나무문 정도는 그대로 뜯어낼 수 있는 에스퍼가, 문고리에 손 한 번 올리는 법 없이.

소용없는 시야를 닫고 귀를 더 열었다. 건너편의 흐느낌이 한층 축축하게 깔렸다. 숨은 제대로 쉬는지 허덕이는 소리가 끝도 없다. 엎드려 문턱과 바닥을 긁는 소리도, 옷이 쓸리고 구겨지는 소리까지도 놓치지 않게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는……. 윤, 오 씨, 그게, 잘못, 제가 다, 저 때문에……. 이제, 그만해야, 그만, 둬야, 제가, ……어야, 죄송해요……. 잘못, 했어요…….”

세게 붙든 팔뚝으로 손가락 마디가 깊이 파고들었다. 함부로 문을 열어젖히지 못하게 두 팔을 옭았건만 상반신이 어느새 어깨까지 문간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윤오 씨, 윤, 오 씨…….”

애처로운 부름에 풀어지려는 팔짱을 간신히 다잡았다. 지금 물러져서는 끝없이 이 상황을 답습할 것이란 예감이 스쳤다.

“그러지 마, 세요……. 죽, 죽을, 것 같……, 살려, 주……. 잘못했, 어요, 살, 아프, 죄송합…….”

아프지 않은 이선은 나를 찾지 않고, 견딜 만한 이선은 나를 놓으려 하고.

다 곯은 이선을 기다리는 것 외에 나는 뭘 해야 했나. 할 수는 있었나. 처음 만난 그 계절부터 줄곧, 모두 이선의 뜻대로인데.

기울어져도 한참을 기울어진 축이 멀미를 일으킬 지경이었다.

이선이 다치고, 이선이 앓아서. 이선이 아프고, 이선이 괴로워서. 살고 싶어 해서. 혹은 아직 죽지 못해서.

그래서 나를 찾을 때에나 비로소 생기는 가이드의 의의와 구실. 에스퍼가 욕심내지 않으면 가이드로서는 그를 찾아낼 어떤 능력도, 자격도, 방도도 없다. 이대로 사라진 이선이 어느 구석에서 홀로 죽어 간다 해도.

제 손아귀의 권력을 모르는 폭군이 납작 엎드려 눈물로 자비를 구했다. 떠나려 해 놓고서 버림받은 아이처럼 매달렸다.

“이제, 안, ……테니까……, 윤, 제발……. 제발…….”

개 같은 군부와 좆같은 세상을 뒤로하고 내게 올지, 아니면 끝끝내 떠나기를 택할지. 내 곁에서 살기를 바라는지, 차라리 죽고 싶은지. 나는 네게 무엇인지.

얘기해, 제발.

제때 오는 법이 없는 이선과 그렇다고 그만둘 수 없는 기다림이 촉박하게 다퉜다. 속이 닳아 진물이 배어나고 고름으로 뒤덮였다.

원하는 답안을 일러 준 뒤 다그치고픈 충동이 일었다. 평생을 세뇌에 전 머리통이 또 다른 타의를 제 것처럼 받아들일 모습이 선했다. 순순히 끄덕이며 반색할 모습도, 한 치 의심 없이 신봉할 것도, 거스르지 않으려 생각조차 피할 것도. 그 삶이 여태껏 그래 왔으니.

씹어 낸 입 안에 비린 피가 고였다.

맥없는 흰 모가지를 품에 당겨 서러움을 달래 주어도 모자랄 시간이 그저 흘렀다. 눈물을 쏟는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되새겨도 저렇게 히끅 대다 숨이 넘어가는 이선이 떠오르고 찬 공기와 찬 바닥에 얼어붙은 이선이 떠올랐다.

축축한 밤공기가 초조하게 식었다.

죄 없는 이선이 구하는 용서를 애써 외면하고 그가 변명과 사죄에 지치기를 기다렸다.

모든 상황을 배제하고 저 하나만 생각하기를, 하다못해 매정한 나를 탓하며 속에 든 원망이라도 꺼내 놓기를.

떠나려는 건 진심이 아니라거나, 아직은 내가 필요하다거나, 도와 달라거나. 아니면 이 문이라도 열어내기를 바랐다. 스스로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욕심내기를, 그게 나이기를.

수십 개의 단서를 덧붙여 조바심 낼 적에, 지친 목소리가 실수처럼 툭 떨어졌다.

“……랑해.”

한숨을 닮은 말.

“……사……, 랑해. ……랑해, 사랑, 해. 사랑해. 사랑……, 사랑해…….”

설은 고백이 짧은 공백을 깨트리고 걷잡을 수 없이 퍼부어졌다. 쉰 목을 쿨럭이며 비명처럼 괴롭게 거듭했다. 거친 숨을 모조리 잡아먹은 절절한 탄식이 귀에 닿아 가슴을 녹였다. 뜨거운 고양감이 폐를 타고 번졌다.

더 지체할 수 없어 문을 열어젖혔다.

조그맣게 옹그린 이선 앞에 앉았다. 마른 손가락부터 잡아챘으나 단추가 뜯겨 나간 셔츠 안쪽이 이미 처참했다. 가슴팍부터 목까지 붉은 줄이 몇 겹이나 새겨져 얇은 피부를 벗기고 점점이 피가 비쳤다.

“사, 랑해. 사랑해. 사랑……, 사랑해…….”

내지르는 사랑으로 이선의 온몸이 나부꼈다. 차오른 숨을 꺽꺽대느라 휘청이는 등을 받치고 차가운 두 손을 감싸 자해를 막았다.

뒷덜미를 끌어 벌겋게 피가 몰린 낯을 내 품에 묻었다. 힘에 겨워 바르작대고 두려워 벌벌 떠는 어깨를 팔까지 단단하게 죄어 옴짝달싹할 수 없게 구속했다.

“사……, 랑해…….”

잠깐의 외면과 방치에 그대로 갈피를 잃고 무너져 버리는 이선. 그가 마지막까지 내몰려 꺼내 놓은 고백이 기대한 어떤 말보다도 기꺼웠다. 기꺼운 만큼 그 말을 믿기 위해 돌아와야 했던 시간이 아깝고.

“이선.”

“……윤, 오…….”

“그래.”

“……랑해…….”

“그래.”

고작 문 하나를 건너고 고작 한 걸음이 가까워졌을 뿐인데, 새로 시작된 눈물이 유난히 서글펐다. 등을 얼러 줄 때마다 가슴팍이 조용히 푹푹 젖었다.

“윤오…….”

떠나지 못하고 날개를 접은 가련한 새가 덫 안에서 편히 울었다. 괴로운 이선을 두고 죄책감이 달았다.

* * *

데리다가 다녀갔다. 쉽게 돌아서지 않고 집 안까지 들이닥친 그 여자는 쓰러져 잠든 이선과 약이 발린 벌건 목까지 확인한 후에야 그의 무사를 믿었다.

안심한 듯 허탈한 낯의 데리다가 몇 가지 쓸 만한 상황 정보와 이선이 서명한 군부의 거래 조건을 꺼냈다. 온통 군이 좋고 이선에게 불리한 계약에는 조목조목 내 편의가 대가처럼 달려 있었다. 그가 정말 나를 포기하려 했음을 실감했다.

그렇게 기를 써 내 삶을 전과 비슷하게 돌려놓은 다음에 저는 어쩌려고 했을까. 전처럼 가이드 센터를 전전하며 분기마다 거르지 않고 쓰러질 생각이었나?

나 없이 못 사는 에스퍼.

나를 사랑하는 이선.

이선이 조금은 닮아도 좋을 이기심이 가슴속에서 거뭇하게 환희했다.

필요해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제 발로 내게 온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함정을 꾸려야겠다. 교묘하고 안락한 함정을. 제멋대로 날다가도 반드시 돌아오게 되는 덫을. 결코 벗어날 수 없이 일생을 지내도 좋을 안전하고 편안한 감옥을. 갇힌 줄도 모르는 이선이 지치지 않고 내내 사랑을 노래하도록.

잠든 이선의 코끝을 가볍게 건드리고 어깨까지 덮어 가린 이불을 걷어냈다. 데리다는 목 위만 보았지만 목뿐 아니라 가슴에서 상복부까지 긁히고 멍든 손자국이 난리였다. 일일이 연고를 얹어 반들거리는 상처에 가볍게 손부채질을 했다.

모로 누워 벌건 목 뒤에 조심조심 팔을 꿰어 넣었다. 작은 머리를 내 어깨로 옮기고 몸을 가까이 붙였다. 날이 아직 서늘하니 상처에 천이 닿지 않게 속을 띄운 이불을 잘 덮어 주고 곤히 잠든 얼굴을 한참 보았다.

짓무른 눈가를 빼고는 나쁘지 않은 안색, 제법 오른 체온과 고른 숨소리, 이따금 잠꼬대로 비쭉대는 입술.

몸과 마음을 다 내놓느라 힘에 부쳤을까. 이선은 혼절하듯 잠들었다가 놀라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때맞춰 등을 다독이면 가물거리는 눈이 다시 감겼다. 지난밤에는 짧던 간격이 이제는 제법 길어 잠든 기색이 얌전했다.

미지근한 살결에 닿으면 그 감촉이 달게 느껴지는데,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꽤 즐거운 일이었다. 벗겨 놓은 맨 살갗을 만지는 일이 질리지 않았다. 살을 찌우려면 미끼를 더 넉넉히 주어야 할 것 같기는 하다만.

결 가는 머리칼에 입술을 두어 번 문지르다 그대로 붙여 두고 눈을 감았다.

물기가 남아 색색거리는 이선의 소리가 오래지 않아 졸음을 불렀다. 더는 허상을 헤매지 않아도 되니, 꿈도 없이 잠이 깊었다.

품 안을 뒤채는 기척에 정신이 뭍으로 올라왔다. 대충 들어오는 빛이 한낮인 걸 알아보고 기지개를 켰다. 팔을 조이자 안겨 꿈틀거리던 이선이 금세 통나무처럼 굳어 버렸다. 숨도 참는지 쇄골에 닿은 그의 코에서 따뜻한 기운이 없다.

모른 척 가느다란 목과 어깨와 뒷덜미를 주물렀다. 부풀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통나무의 등을 건반 두드리듯 손끝으로 건드리다 살이 없는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감싸 꾹 쥐었다.

그제야 간질거리는 숨이 터져 나왔다. 잔뜩 움츠러든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칭찬하고 품에서 꺼내 주었다.

이불을 걷어 드러난 광경에는 저절로 혀를 찼다. 밝은 날 보니 긁어 놓은 상처가 흰 살과 대비되어 더 엉망이었다. 손자국이 교차하는 군데군데 딱지가 졌고, 살갗이 벗겨지지 않은 자리에도 멍이 들었다.

가까이서 들린 침 넘어가는 소리에 이선의 벌건 목을 지나 얼굴로 시선이 옮았다. 퉁퉁 부어 다 뜨지 못한 눈에 긴장이 그득했다. 제법 안쓰럽기도 하고 나름 귀엽기도 한 모습에 날 선 마음이 금세 뭉그러졌다.

아침 인사 대신 이선을 일으켜 앉히며 부은 눈가에 입을 맞췄다.

“먹을 만한 걸 준비하는데 조금 걸릴 겁니다. 따뜻한 물로 간단히 씻고 기다려요. 더 자도 되고.”

“…….”

대답을 할 것처럼 작은 입이 빠끔거리는데 나오는 소리가 없었다. 목이 아픈가 물어보니 다시 빠끔대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프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넋이 빠진 듯 눈만 끔뻑이는 이선을 들어 침실에 딸린 욕실 앞에 세워 두고 칫솔 따위의 위치를 일렀다.

인다비가 멋대로 채워 둔 식자재가 아직 많았다. 냉장고와 찬장을 뒤적이다 죽을 끓이기로 했다. 목이 불편하다면 넘기기 쉬운 걸 줘야 좀 더 먹겠지.

즉석 밥 몇 개를 뜯어 놓고 갖은 재료를 다지고 있을 때, 작게 들리던 물소리가 끊어졌다. 칼을 내려놓고 작은 방에 들러 손에 잡히는 대로 상의와 하의를 챙겼다. 비 맞고 구겨진 군복을 데리다 편에 들려 보냈으니 품이 남아도 내 옷을 주어야 했다.

맨몸에 수건을 덮어쓴 이선은 욕실 앞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세탁물을 던져 놓은 바구니를 들여다보는 듯했다. 뭘 보는 거지. 셔츠? 들고 온 옷을 내려놓고 어깨너머로 바구니에 손을 뻗었다.

특별할 것 없는 셔츠를 집어 올리니 화들짝 놀란 이선이 일어나다 말고 뒤로 넘어갔다. 팔을 잡아 올려 욕실 밖 건식 세면대에 앉히고 마른 수건을 꺼내 가느다란 어깨와 팔뚝의 물기를 대신 닦았다.

“상처에 약을 발라야 하니 셔츠가 나을 것 같은데, 입었던 거라 싫으면 다른 걸로 가져오겠습니다.”

“……습니다. 이게, 좋습니다…….”

“그래요.”

쉰 목소리가 다급하게 뱉는 대답에 피식 웃음이 났다. 떨어지는 물방울을 닦는 척 수건으로 이선의 귓바퀴와 목덜미를 주무르다 셔츠와 트레이닝 팬츠를 쥐여 주고 돌아섰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단추까지 채우고 싶었으나 하나하나 챙기려니 불 위에 올려놓은 냄비가 걸렸다.

재료를 쓸어 넣고 눋지 않게 저어 끓이는 와중 등 뒤로 안절부절못하는 이선이 어슬렁거렸다. 의문 어린 낯으로 한참 뻐끔거리다가 겨우 뭐 도울 일이 없냐 물었다.

시킬 일은 따로 없고 내 옷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가서 구경이나 하고 있으라 옷을 두는 방을 알려 줬다. 헐렁한 바지를 질질 끌면서 들어간 이선은 식사를 다 차릴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찾으러 간 작은 방의 바닥에서, 이선은 늘어진 상의를 일일이 주워 개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건조기에서 꺼내 던져둔 옷들이 분주한 손을 타고 파는 상품처럼 정갈하게 쌓였다. 이선이 제 관사 아파트를 정돈해 둔 모습이 언뜻 스쳤다. 청소를 자주 한다고 했던가. 정리인가.

뭐든 솜씨는 알겠지만 나부라진 걸 다 개려다가는 죽이 차게 식을 일이라 대충 발로 밀어 치우고 이선을 꺼냈다.

“식사해요.”

“아, 일이 남았…….”

“일?”

“…….”

“하고 싶으면 나중에 하게 해 줄 테니까. 밥부터.”

죽을 모이 먹듯 삼킨 이선이 한 그릇을 다 비우길 기다렸다가 설거지를 하겠다고 일어나는 것을 들어 안았다.

침실까지 여러 발자국 되지도 않는데 이선이 입은 내 바지는 그가 허리춤에서 손을 놓자마자 훌훌 내려갔다. 클 줄이야 알았지만 허리끈을 묶어도 흘러내리는 건 지나치게 마른 이선의 탓이기도 하다. 침대에 내려놓을 때쯤에는 이미 셔츠 아래로 맨 허벅지가 보였다.

무의미한 바지를 아예 벗겨 침대 밑에 떨어트리고 세탁 바구니에서 건져 입힌 셔츠도 단추를 풀어냈다.

벌겋게 헤집어진 가슴팍과 밥을 먹여도 납작한 배가 무방비하게 드러나는 중에도 이선은 멀거니 앉아 숨만 색색 쉬었다. 어딘가 몽롱한 기색에 손등으로 이마와 볼을 짚었다. 미열을 덜어 내는 손길에 가만 깜빡이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안 돼요.”

상처에 연고 바를 때는 엄살 한번 없던 이선이 손톱깎이를 들이대자 제법 반항을 했다. 붙잡힌 손을 빼내려 들썩이면서 직접 하겠다고, 할 수 있다고 열심히 종알거렸다.

할 수야 있겠지. 그러나 여러 번 보기로 이선은 손톱을 과도하게 짧게 자르는 경향이 있었다. 본인에게 맡겼다가는 살점까지 깎아 이번엔 손에서 피를 볼 일이라 단숨에 기각했다.

이름을 부르면 얌전해지는 점을 이용해 다리 사이에 앉혔다. 이선은 미약한 저항이 푹 시든 채 얌전히 시중을 받았고, 그동안 그의 등에서 내 가슴팍으로 얌전하지 못한 심박이 계속 전해졌다.

간질거리는 진동에 부러 느릿느릿 공들여 손톱 모양을 잡았다. 제 살을 흠집 내지 못할 만큼 짧지만 무턱대고 바짝 깎아 손끝이 다치지도 않도록.

시간을 들인 만큼 흡족하게 다듬어진 손톱을 주물거리다 끌어당겨 입술을 붙였다. 마른 손가락이 곧장 말미잘처럼 오그라들어 내 손에 감겼다.

썩 즐거운 소일거리가 고작 열 개 만에 끝나 버린 걸 아쉬워하는 차에 흰 발등이 눈에 들어왔다.

“아, 안 됩니다! 정말 안 됩니다. 안, 안 돼요…….”

“왜 안 됩니까?”

“더럽고, ……윤오 씨가 하실 일이 아닙니다. 제가 나중에, 하겠습니다.”

거부하는 이유는 나름 타당했지만 설득력이 충분하지는 않았다. 의식 없이 누워있는 동안 그의 손발톱을 누가 잘라 줬을 거라 생각하는 걸까. 부관이?

몸을 말아 가며 애써 감춘 발을 빼앗지는 않았다. 대신 발가락을 감춘 손등, 소매가 흘러 가린 손목, 품에서 비죽 튀어나온 무릎 등, 가리지 못한 부분을 마음껏 지분거렸다. 동그랗게 웅크려 발가락을 숨긴 이선이 커다란 타조알처럼 품기에 딱 좋았다.

눈 아래 살랑거리는 머리칼과 목덜미에서는 낯익은 향이 났다. 풋풋한 물 냄새와 익숙한 목욕용품의 냄새. 묘하게 속을 간지럽히는 점에서는 낯설기도 한.

손가락을 걸어 셔츠의 목깃을 뒤로 당겼다. 터무니없이 큰 옷이 훌렁 벌어진 틈으로 이선의 등이 날개 뼈 부근까지 들여다보였다. 걸치나 마나 한 셔츠 대신 내 그림자가 흰 살에 드리웠다. 어둡고 선명한 구획으로 도드라진 목뼈가 마침 말려들었다.

“……흣!”

그대로 입을 대어 매끈한 뒷덜미를 빨아올렸다. 미처 벗어나지 못하고 목을 내준 이선이 바들거리며 어깨를 좁혔다. 놀란 신음과 미미한 몸부림은 내 입질을 멈추게 하기는커녕 붉은 울혈이 살갗에 너르게 번지도록 조장했다.

“아! 윤오, 씨……!”

창백한 살갗 아래 숨어 있던 실핏줄이 족족 터져 벌겋게 피어났다. 둥근 피멍이 잇자국과 더불어 목덜미를 뒤덮을 때, 이선은 가녀린 신음을 가쁜 숨에 섞어 냈다. 이대로 피가 빨리고 살점이 뜯겨도, 명줄이 다할 때까지 얌전히 목을 내어 줄 피식자의 살이 달았다.

겨우 팔뚝이나 가릴까. 이선의 상처 많은 몸뚱이에서 흐른 옷가지를 내리고 마른 등에 손바닥을 붙였다. 닿는 대로 휘어지는 유연한 몸을 타고 옆구리를 돌아 아랫배를 끌어당겼다. 그의 것이 아닌 해묵은 상처가 몇 개나 손바닥을 긁었다.

“흑, 윤오 씨……. 읏…….”

물비누의 달큼한 향보다 이선이 감추지 못해 흘리는 신음이 간지러웠다. 초조하게 내뱉는 부름은 그의 배를 문지르는 손을 더욱 기껍게 하고 허벅지 안쪽으로 기어들어 가는 손을 재촉했다.

척추를 따라 등을 빨리는 이선이 무릎을 모아 비틀고 내 손을 끼운 허벅지 사이를 비비적거렸다.

주무를 때마다 번번이 손자국을 남기는 손이 맨 살결을 따라 이윽고 가장 깊은 사이에 닿았다. 펼친 두 손바닥이 맞붙은 허벅지 틈을 파고들어 양쪽 서혜부를 감싸 쥐었다.

이선의 발기한 성기가 두 손등 사이에 비벼지고 손바닥 아래서 끊어지듯 근육이 힘을 잃었다. 이선의 허리가 휘청이며 앞으로 풀썩 꺾어졌다.

푹 꺼진 등에 그대로 몸을 내렸다. 이선의 무릎을 하나씩 펼쳐 엎드리게 만든 다음, 내가 입힌 붉은 흔적을 따라 등과 어깨, 목, 귓바퀴까지 코끝을 그어 올랐다.

입술 틈에 들어오는 말랑한 연골을 송곳니로 물고 움푹 팬 잇자국은 혀로 핥았다. 목 깊은 곳으로 앓는 이선이 더할 나위 없이 정욕을 돋웠다.

“잠, 윤오 씨, 잠시, 뭔가 이상…….”

내게 짓눌려 곳곳을 먹히는 이선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찾았다. 틀어 올린 턱과 떨리는 눈가에 입을 맞췄다. 당황 어린 목소리가 헐떡거리며 여러 번 내 이름을 불렀다. 대답 대신 홍조가 오른 뺨에 입술을 붙이고 힘이 들어가 빳빳한 이선의 배와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윤오 씨…….”

“얘기해요.”

말을 들어줘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이선의 몸 곳곳을 더듬는 손과 입은 멈추기가 어려웠다. 이 몸이 너무 오랜만이라, 달아오른 숨과 움츠러드는 살결이 무척 기다린 것이라.

파드득 몸을 떤 이선은 앞으로 기어 빠져나가려 했다. 어깨를 잡혀 목을 물린 다음에는 그 자리에서 돌아누웠다. 꼬물거리는 걸 잠시 기다려 주었다가 마주 보게 된 입술 사이에 혀를 밀어 넣었다.

낑낑거리면서도 입을 벌려 받아들이는 것이나 민감한 살이 건드려질 때마다 느껴 일그러지는 눈썹이 보기 좋았다. 물기 묻은 속눈썹과 붉게 달아오른 뺨, 잇자국이 남은 귓바퀴, 흐트러진 머리칼, 달큼한 향. 겨울이 한참 지나 다시 꺼낸 두툼한 이불에 작은 머리가 푹 가라앉았다.

이선의 가느다란 몸이 벗어나지 못하게 다리를 얽고 무게를 실어 눌렀다. 맞닿은 가슴팍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분주했고, 내 복부에 발기한 성기가 짓눌린 이선이 가느다란 신음을 냈다.

좁혀진 이선의 미간을 응시하며 그 신음이 입 밖에 나서기 전에 혀를 감아 대신 삼켰다. 바르작거리는 몸을 가둬 누르고 이불을 쥔 손아귀에는 내 손을 대신 넣었다.

꼼짝 못 하는 이선이 숨을 고를 동안 내키는 대로 그 얼굴에 입술을 붙였다. 헐떡이는 목울대나 핏기가 도는 뺨이나 헤 벌어진 입술, 코끝, 가리지 않고 이를 세워 물었다. 이선이 놀라 눈 밑을 떨면 속이 달고 흡족했다.

“이상, 해…….”

“뭐가요.”

한참 만에 빠져나온 작은 웅얼거림에 대답하고 흐린 눈에 입을 맞췄다. 묻어나온 물기를 이선의 입술에 비벼 나누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달뜬 숨이 가까이 붙은 내 턱을 간질였다.

“윤오 씨…….”

나를 가장 애달프게 부를 줄 아는 입술에 입을 맞추고 금방 젖는 눈에 시선을 맞췄다. 황혼, 석조, 석양, 노을. 이름도 많은 저무는 해의 빛깔이 잘게 흔들리며 가까이 들이댄 내 낯을 살폈다. 무언가를 찾는 듯, 상황을 이해하려는 듯, 또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꿈.”

“꿈?”

웬일로 끝을 흐리지 않은 짧은 음절. 그게 이선이 내린 결론인 모양이다. 그와 내 살이 맞닿고 숨이 섞이는 이 순간이 꿈이라고.

“이선.”

“네.”

한결 편해진 대답에 헛웃음이 났다. 혼란에 떨던 시선이 이제야 곧게 눈을 마주했고 긴장이 조금쯤 덜어진 표정을 지었다. 그 변화가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지만 마냥 반갑지는 않았다. 내 지긋한 악몽과 네 기나긴 꿈은 이제 끝났을 텐데.

“윤오.”

다시금 내 이름을 종알거리는 입술이 동그랗게 모여 올랐다. 이게 꿈이라 생각한다면 뭐든 욕심껏 할 법도 하지 않나. 이선은 가만히 붙들려 나를 부르기만 했다. 비쭉 솟은 입술에 입을 맞추다 얼핏 떠오른 질문을 꺼냈다.

“꿈이라면 뭘 해 보고 싶습니까?”

“…….”

“바라는 거 없어요?”

깜빡, 깜빡. 긴 속눈썹을 몇 번 팔락거린 이선이 이리저리 눈을 굴려 주변을 살피고 다시 돌아와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내 손과 얽힌 손가락을 움직이거나 코끝을 쭈뼛거리며 숨을 들이쉬는 것도 같았다.

“없습니다.”

기다린 보람 없이 담담한 대답에 피식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게 뭐라고 이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죽였다.

모처럼 울지 않는 이선을 아래에 두고 음험한 생각이 이어졌다. 이 욕심 없는 에스퍼를 어떡하면 좋을까. 마치 역할이 전도된 것처럼 내 속에서 그를 향한 집착과 욕심이 들끓었다.

이래서는 나만 이선을 탐하는 것 같지 않나. 지난밤 그렇게 사랑을 울부짖어 놓고 왜 바라는 게 없을까. 사랑만큼 이기적인 감정이 어디 있다고.

느릿느릿 상체를 들어 올렸다. 맞잡은 손을 놓고 가만히 누운 이선을 타고 앉았다. 숨죽인 이선의 시선이 끊이지 않고 내게 따라붙었다.

종일 틀어 놓은 온풍기 탓에 방 안이 한여름 같았다. 이 온도에도 서늘한 이선과 다르게 내 등에선 진작부터 옅은 땀이 배어났다.

몸에 엉긴 상의를 끌어 올리자 공기가 닿는 부분부터 젖은 피부가 식었다. 단숨에 벗어 낸 옷을 침대 아래로 떨어트리고 분주히 눈을 깜빡이는 이선을 일으켰다.

제법 노골적인 시선이 꺼내 놓은 미끼를 찬찬히 훑었다. 눈가를 붉히고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꼴깍 침 넘기는 소리를 냈다. 호흡기를 길게 긁은 더운 숨이 촉촉한 작은 입술 틈으로 길게 빠져나왔다. 선명한 욕망이 가을 색 눈동자에 넘실거렸다.

힘이 들어간 이선의 주먹에 엄지손가락을 넣어 펼치고 그대로 내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무릎으로 선 이선의 열 어린 시선이 높은 곳에서 내게로, 온전히 쏟아졌다.

“정말 바라는 거 없습니까?”

“…….”

뭘 줄까. 뭐든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기대로 가득한 눈을 뻔히 보고도 시간을 끌었다. 본인이 뭘 바라는지 모르는, 바라는 게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이선을 기다렸다. 이선을 기다리는 일은 늘 감질나게 길었고, 자주 헤매는 이선에게 나를 고르고 내게 돌아오기를 가르치는 시간 역시 길었다.

코앞에 놓인 가슴팍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고개를 들자 질끈 감긴 눈이 조심스레 뜨였다. 빠끔거리는 이선의 입술과 갈라진 틈으로 비쳤다 들어가는 혀는 문제없는 내 인내심을 건드렸다. 미끼가 먼저 몸이 달아서는 안 될 일인데.

“이선.”

“네.”

“안아 줄까.”

“…….”

“키스는?”

나직한 물음에 입술을 말아 입 안으로 감추는 꼴이 내 검은 속내를 더욱 일렁이게 했다. 열 오른 눈가, 더운 숨결, 가쁘게 달싹이는 가슴팍, 힘이 들어간 배, 어깨를 파고드는 손끝. 이선의 전신에서 피어나는 열렬한 갈구가 내 참을성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가지고 싶다거나, 하고 싶다거나.”

“…….”

“원하는 걸 말해요.”

점잖게 기다리지 못하고 이선의 골반뼈 위에서 엄지를 굴렸다. 이따금 휘청이는 허리를 붙잡아 세워 주며 침대 헤드에 느른하게 등을 기댔다. 가장하는 여유와 달리 속내는 다분히 더웠다.

마른 몸에 채워진 날씬한 근육 모양이 지독하게 색정적이고, 군데군데 남은 흉은 낱낱이 입을 대어 핥고 싶게 유혹적이다. 이선이 직접 긁은 손톱자국과 흰 살의 대비가 혀를 녹녹하게 적시고, 엉터리로 걸쳐진 내 셔츠가 다 벗은 것보다 더한 외설로 뱃속을 지폈다.

이선은 감춤 없이 내보일 뿐인데, 그 나신이 끝도 없이 나를 자극했다. 저 몸에 갈증을 느낀 건 언제부터지.

“……윤오.”

“그래.”

정말이지 떼쓸 줄 모르는 에스퍼의 손을 가져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손톱에 입을 맞췄다. 다시 오그라드는 손을 펼쳐 오목한 손바닥에 내 머리를 얹었다. 바짝 굳은 손가락이 턱에 닿을 무렵 이선이 눈을 크게 떴다.

또 뭘 주면 좋아할까.

내 몸, 내 얼굴, 포옹, 키스, 그리고 섹스.

그 뺨에 홍조를 일으키는 것 모두를 제 말 한 마디, 손짓 한 번으로 기꺼이 가질 수 있다는 걸 이 눈물 많은 에스퍼는 언제쯤 알아챌까.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손가락이 가볍게 내 눈가를 지났다. 눈을 감고 고개를 들어 마음껏 만지게 두었다.

날씬한 허벅지를 당기자 한 걸음 가까워진 이선의 팔꿈치가 가슴팍에 눌렸다. 긴장으로 뻣뻣한 팔뚝을 쥐어 재촉하니 조심스러운 손가락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꽃잎이라도 쓰다듬을 법한 여리기 짝이 없는 손길이 얼굴에 닿고 속을 긁었다. 그런 손길에도 금세 불붙는 욕정은 정말이지 답이 없다. 가까스로 이선을 참으며 속에 이는 불길을 다스렸다.

이선이 원해서 이선이 가지도록. 이선의 속도로 이선이 오도록.

허리를 감은 팔 아래서 이선의 등이 천천히 굽어지고 이내 말캉한 살이 입가에 닿았다. 담백한 입맞춤과 달리 쏟아지는 숨결에는 울음을 참는 기색이 그득했다. 어린 새의 부리질 같은, 무게라곤 없는 키스.

입술이 떨어져 나간 자리마다 축축한 호흡이 매달렸다. 울먹이는 속삭임이 대신 맺힐 적에는 미지근한 물방울이 투둑, 이마와 콧등 위를 적셨다.

“……사랑해.”

습한 고백은 기어이 성냥갑의 마찰 면을 긁어 불을 냈다. 와락 솟구치는 성마른 감정들이 인내와 이성을 태우고 번져 나갔다. 원색적이고 가학적인 욕구가 끓었다. 내게 맹목적인 이 남자를 쓰러뜨려 뼛속까지 취하고픈 진득한 탐심이 솥을 넘쳐 흘러내렸다.

“보고, 싶…….”

섬세한 모가지를 그대로 끌어 내렸다. 얄팍한 숨을 입술 채로 물어뜯었다. 빠듯하게 삼키고 남은 폭력성이 이선의 입술과 혀, 턱과 목덜미에 가리지 않고 이를 세웠다. 젖은 탄성이 귓전을 스치는 족족 심박이 오르고 피모가 일어섰다. 허파가 뻐근하게 부푼다.

“흣, ……아!”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 같은 눅진한 열망이 팔을 뻗어 먹이를 낚아챘다. 대신 터트릴 것처럼 사로잡은 살을 빨았다. 단숨에 울혈이 나고 피멍이 든 이선의 어깨에서 지독한 충족감과 끝없는 흥분이 번갈아 솟았다.

어금니를 다물고 힘겹게 숨을 골랐다. 전신 곳곳에서 쿵쿵 울리는 심박을 억눌러야 할 일인데 들숨에 딸려 오는 이선의 향취가 자꾸만 이성을 앗았다.

제멋대로인 아랫도리가 이선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짓눌렀다. 부드러운 회음부에 바지 너머 발기한 성기를 비비고 퍽퍽 내리찍었다. 마구잡이로 치받으면서도 아찔한 머릿속은 더한 자극을 바랐다.

그 좁은 주름을 뚫고 깊은 속을 벌리는 상상이, ……씨발.

정신 나간 새끼. 미친놈. 발정 난 쓰레기 같으니. 욕을 짓씹으며 불거진 쇄골에 구겨진 미간을 문질렀다. 목을 거꾸로 핥아 턱을 타고 입술을 찾았다.

함부로 헐떡거려 내 여유를 앗은 입을 헤집고 혀를 휘감았다. 감히 애절한 말과 눈물로 나를 발정시킨 책임을 물었다. 고작 입맞춤에도 젖은 눈가를 휘어 웃는 이선에게.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고 저만 유유히 벗어나려던 괘씸한 이선에게.

“이대로 다음을 기약하면, 너는 또 어딘가로 사라지겠지.”

질긴 숨을 이선의 귓바퀴에 불어넣었다. 분노를 닮은 희석되지 않은 성욕이 묵직하게 묻어 나갔다.

“그때도 기다리면 될까. 이렇게 머저리 같이 기다려서 너를 가이딩하고, 다시 기다리고. 그러면 네가 돌아오나? 그다음에도? 언제까지?”

“윤오 씨……?”

“차라리 아무것도 아니지 그랬어.”

하필 에스퍼인 바람에, 빌어먹을 모순을 다루는 바람에 생애가 고달픈 이선을 부둥켜안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나를 사랑해도 내 곁에 안주하지 않는 이선. 기약 없이 날아가 예고 없이 돌아오는 이선. 내가 닿지 못할 곳에서, 약한 몸과 미약한 생명력을 아낌없이 내쏟고 상처 입은 껍질로 나를 찾는 이선. 언젠가 돌아오지 못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때까지.

“윤오 씨, 저는……. 윤오 씨.”

다급한 부름과 손짓이 어깨와 가슴팍에서 하늘거렸다. 줄곧 몽롱하더니 제법 정신이 든 듯 목소리가 선명하다. 간지러운 손길이 내 턱을 살금살금 어루만지고 억눌린 몸이 빠져나오려 바르작댔다.

“윤오 씨, 저를, 잠시만…….”

“…….”

“잠시만 봐 주세요…….”

속살거린 이선이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으로 내 어깨를 밀었다. 무력감에 찌들어 엉망진창인 얼굴을 꺼내는 게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 소박한 요청도 바람이라면 들어줘야 했다.

아쉽고 애틋한 쪽이 비위를 맞춰야지. 묶어 가둘 수 없다면 다정을 쏟아 깃을 적시고 길을 들여야겠지.

팔꿈치를 짚어 내려다본 이선은 어쩐지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상황을 가늠하려는 눈동자가 분주히 나를 살폈다. 충분히 눈치를 보게 두었다가 눈꺼풀과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윤오 씨, 지금 이게…….”

“꿈 아닙니다.”

“……여름? 날짜가, 연도는 어떻게…….”

“연도?”

뜬금없는 소리를 하더니 손을 내려 제 복부를 더듬는다. 마른 손가락이 도착한 곳은 등부터 날붙이가 관통한 자리였다. 지난겨울 이선 아래에 깊고 짙은 피 웅덩이를 만든 상처.

겨우내 다 아문 흉터를 만지며 눈을 깜빡거리던 이선이 무언가 깨달은 듯 탁 끊어지는 탄성을 뱉었다.

“기억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전부, 기억합니다.”

“어제는?”

“네?”

따뜻한 색의 눈동자에 의문이 어렸다가 이내 당혹이 번졌다. 어느새 한 겹 물기를 덧쓴 눈이 반짝이며 내리깔렸다.

“기분 나쁘셨으면…….”

“기분 나빠 보입니까?”

“…….”

“손.”

포개진 두 손이 지체 없이 내 손바닥 위에 올라왔다.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가진 전부를 내놓은 이선을 말끄러미 보았다. 예쁘게 다듬어진 손끝을 어루만지다 그대로 당겨 일으켜 세웠다.

갑작스레 종일 극과 극을 오간 심경이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어이가 없기는 한데, 휘두르는 사람 없이 휘둘리는 기분이 이럴까.

이선을 창가로 데려가 유리창 너머로 꽃나무를 두들겨 가리켰다. 지난날 내린 비로 단지 내부의 정원이 온통 꽃잎이었다.

“계절은 아직 봄이고. 날짜는…… 한동안 더 쉬어요. 일정은 부관이 알아서 하기로 했습니다. 서류는 분실할 거고.”

“아…….”

“내 집에서 지내요.”

“…….”

펼친 양손을 유리에 붙인 이선의 등을 감싸 안았다. 체온 조절이나 가이딩 같은 그럴듯한 이유보다는 그저 그러고 싶었던 마음의 발로였다.

“어디 가지 말고.”

“…….”

“어차피 안 보내 줍니다.”

그를 내 손이 닿는 곳에 두려는 솔직한 욕구를 꺼낼 적마다 이선은 혼란스러운 낯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천천히 적응하게 두면 좋겠지만 그건 내 쪽이 여의치 않았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사람을 상대로 수차례 다음 기회를 박탈당해 왔으니, 당장 목줄을 꺼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최선이었다.

“왜 울어요.”

“……아닙니다.”

“싫어요?”

“아니, 안…….”

“꿈이었으면 합니까?”

멈칫 굳었던 이선이 몸을 틀었다. 헐겁게 풀어 준 팔 안에서 이선이 돌아섰다. 울먹이는 눈을 마주 들여다보며 가볍게 등을 얼렀다. 만개하여 흩날리는 봄꽃보다 지금 품은 상대의 상기된 눈가가 더욱 눈길을 끌었다.

순한 눈매가 기다란 속눈썹을 걷어 냈을 때 보이는 젖은 눈동자와 투명하게 드러날 선연한 감정을 기다렸다. 내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그.

뒤통수를 당겨 내키는 대로 입을 맞추고 젖은 눈 밑을 훔쳐 냈다. 뭐가 또 그렇게 슬픈지 눈물이 쉽게 그치지 않았다. 와중에도 뭔가 말하려 아물거리는 작은 입술에 시선을 두고 귀를 기울였다.

“깨어나야 하는 건……, 싫, 습니다. 윤오 씨가 저를, 저는…….”

“저는?”

“잘, 잘못한 일이 많은데, 제가, 그러지 말았어야……, 윤오 씨를 괴롭게 만들, 고, 힘들게……, 다 욕심을 내서, 제가…….”

“뭘 그렇게 괴롭게 했다고.”

잘 얘기하나 싶더니. 다시 절기 시작한 말은 갓난쟁이 옹알이처럼 거의 허튼소리였다. 대체 언제까지 매여 있을 건지. 나를 괴롭게 했다 자책하며 저 자신에게는 불에 달군 쇠로 낙인이라도 찍은 건지.

쓸모없는 걱정이 많은 머리통을 내 어깨에 누르고 등을 두드렸다. 옹알이가 이어졌다.

“제가 보상을, 다 해서,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서, 해야 윤오 씨를, 윤오 씨가…….”

“할 수 있는 건 다 한다, 라…….”

“네, 제가 전부 다 해 드릴 테니까. 저를, 저 좀……. 조금만……, 허락……해 주시면…….”

이선의 축축한 울음이 가슴팍에 쏟아져 고랑을 새겼다. 그 자리에 이미 깊어 제 작은 덩치쯤 온전히 삼킬 굴을 모르고, 아직도 혼자 헤매고, 혼자 서럽고, 혼자 애절하다.

“싫, 싫으실 때, ……어지시면 ……리셔도 괜찮, 으니까……. 그때까지만……. 제가 잘, 전부 다 해결, 할 테니까……. 가이, 딩도 안 해 주셔도 되고……. 가끔만…….”

“네가 왜 나를 포기해.”

내버려 두면 알아서 절벽을 향하는 이선의 말에 제재를 걸었다. 대충 짐작은 가지만 이해할 수는 없는 생각의 흐름이다. 구르다 못해 뛰어내리기 전에 작은 머리통을 턱 아래 넣고 꾹꾹 눌렀다.

당장 떠나겠다는 소리는 않는 게 그나마 나아진 부분일까.

“……어떡하나.”

“윤, 오 씨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랬다가 다시 잃어버리라고.

저 혼자 필사적인 이선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뒷걸음질을 쳤다. 내게 안겨 옴짝달싹 못 하는 이선에게서 풋풋한 눈물 냄새가 났다.

“그럼, 내 부탁도 들어줄 수 있습니까? 가지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네, ……네. 드리겠습, 니다.”

“뭔 줄 알고?”

“뭐든……, 뭐든 구해서, 가져오겠습니다.”

달랑거리는 고갯짓에 맞춰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턱을 간지럽혔다. 손을 뻗어 서랍을 열고 아무렇게나 던져 넣은 여섯 개들이 플라스틱병을 꺼냈다.

무엇이든 다 주겠다 결의를 다지던 이선은 제 등 뒤에서 비닐 뜯는 소리가 들리자 말을 멈추었다가 비닐을 벗겨 낸 플라스틱 통이 툭툭 던져지는 침대로 고개를 돌렸다.

여섯 번째, 마지막 윤활 젤까지 차례로 깃털 이불에 가라앉았다. 와륵, 손에 남은 두꺼운 비닐을 구기는 소리에 이선이 놀라 움츠러들었다.

“구하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전부 줘야 할 겁니다.”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도 났다. 비죽 올라간 입꼬리를 그대로 두고 긴장한 머리통에 입술을 눌러 붙였다.

“내가 많이 기다려서.”

춤추듯 맞춘 걸음이 다시 느릿느릿 옮겨졌다. 동그랗게 압축된 비닐 뭉치를 서랍에 대충 던지고 종아리 뒤로 매트리스가 뒤에 닿을 즈음 포옹을 풀었다.

한참 만에 꺼내 놓은 이선이 분주히 시선을 돌렸다. 던져진 보급용 젤을 힐끔대다 나를 올려다보고, 창밖이나 협탁에 엎어진 시계 따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파르르 흔들리는 눈동자에 의문과 의심이 가득하다.

“준장과 그 가이드가 왔었습니다.”

“준, ……데이입니까? 데이가 뭐라고……?”

채근하는 이선의 팔꿈치에서 구겨진 셔츠를 벗겨 냈다. 떨어진 옷이 발치에 둥글게 고였다. 간단히 나신이 된 이선은 군의 방문객이 남긴 말을 묻다 입을 다물었다. 열이 오른 눈 아래가 보기 좋게 붉었다.

“퇴원 소식을 알려 주던데.”

“아……. 혹시라도, ……두 사람이 불편하게 해 드리지는 않았, 습니까?”

“글쎄.”

여러 번 곱씹었지만 딱히 용건이 없던 교류를 흘리고 이선의 소파에 두고 간 라이얀의 쪽지를 대신 떠올렸다. 괴발개발의 글씨가 알린 ‘건강’이라는 글자를 되새기고 그 못 미더운 단어를 눈앞의 마른 몸에 빗대어 확인했다.

군의 기준이 끝도 없이 형편없었다. 이 상태를 두고 건강하다 말하다니. 하긴, 그 치들이라면 보행 가능 여부로 에스퍼의 건강을 따진다 해도 놀랍지 않다.

“왜 그렇게 이르게 퇴원했습니까?”

“…….”

“퇴원하고는 그간 뭐 했어요?”

푹신한 겨울 이불에 내려앉으며 이선을 무릎 사이에 가까이 세웠다. 늘어진 두 팔을 들어 내 어깨에 얹고 내 손으로는 이선의 복부를 앞뒤로 감쌌다. 두 손바닥 아래에 얕게 융기한 여린 상흔이 닿았다.

덧붙인 손바닥은 아문 흔적 위를 한참이나 매만졌다. 직접 만지는 가이딩으로 에스퍼의 회복력을 늘리거나 상처가 더 빠르게 회복되지는 않으니 딱히 아픔을 위안하는 손짓은 아니었다.

언제부터일까. 시나브로 젖어 이제 이 왜소한 몸을 건드리는 일에는 가이드로서의 사명감이나 책임감이 나설 자리가 없었다. 보다 감정적이고 본능적인 충동이 앞섰다. 그 살갗에 새겨진 상처 하나하나가 구실이고 명분이 되어 나를 부추겼다.

연고가 번져 반질반질 윤이 나는 가슴팍도 마찬가지다. 멋대로 상처를 낸 손톱을 혼내 주었다 해서 이미 긁힌 자리가 사라지지는 않았고, 울며 제 살을 쥐어뜯은 이선이 안쓰럽다 해서 그 자리에 입을 대어 보고 싶은 마음이 가시는 것도 아니었다.

“아프지는 않았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아무 데도?”

“다 나았, ……괜찮습니다.”

못마땅한 눈초리를 받은 이선이 옅은 색 속눈썹을 팔락거렸다. 지금의 거리감을 어색해하는 심정이 빤히 보였다. 틈 없이 맞붙어 속살을 나눈 게 얼마인데, 그보다 헐거운 이 간격을 더 낯설어 하는 모습.

이선에게 익숙지 않은 친밀한 거리, 혹은 나.

“내게 궁금한 건 없습니까?”

“…….”

“바라는 것도, 궁금한 것도 없고. 그런데 사랑은 하고?”

“아, 그건……. 죄송합…….”

“사과할 일인가.”

“…….”

짧은 숨소리가 났다. 습관이나 마찬가지인 사과를 빼앗긴 이선이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마주 보지 않아도 떨리는 눈동자에서 불안이 고스란히 읽혔다. 어쩐지 또 추궁하고 몰아세운 꼴이다.

부러 누그러뜨린 목소리를 내며 살집이 모자란 허리를 가볍게 쥐었다.

“사과할 일 아닙니다. 화낸 것도 아니고.”

펼친 두 손바닥이 말라서 더 윤곽을 드러내는 복근을 거슬러 올랐다. 죽죽 그인 손톱자국에 닿지 않게 갈비뼈를 감싸고 색이 옅은 유두 주변을 가볍게 스쳐 지났다.

둥글게 말리는 등에 개의치 않고 척추골을 따라 살갗을 더듬었다. 굽어진 무릎이 마저 다 균형을 잡기 전에 노골적인 손길이 꼬리뼈를 문지르고 드물게 살집이 잡히는 둔부를 손아귀 가득 쥐었다.

“앗, ……아!”

당황한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비틀거리는 몸을 요령껏 다리 위로 당긴 다음 벗어나려 바르작거리는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대로 주저앉은 이선의 광대 언저리가 붉다.

잘 익은 얼굴과 달리 서느런 몸.

실내 온도가 훈기보다는 더위에 가까울 지경인데, 어떻게 이선의 체온은 오를 생각을 않을까. 절절 끓는 내 열이라도 넘길 수 없나.

유독 차가운 자리마다 손바닥을 올려 느리게 주물렀다. 어깨, 팔뚝, 엉덩이, 허벅지, 무릎. 의도를 담은 손길이 곳곳을 희롱하고, 떨기 시작한 살갗이 차츰차츰 내 더위를 앗아 갔다.

“괜, 괜찮습니다. 안 하셔도…….”

별안간 이선이 가느다랗게 만류했다.

단호하기는커녕 미미하게 기대가 섞인 목소리로, 괜찮다는 그 입버릇을 이번엔 거절을 위해 쓴다.

정말이라는 듯 숨을 고른 이선이 내 어깨를 밀었다.

“가이딩은, 안 하셔도……. 억, 지로 하실 필요 없습……니다.”

일어나려는 이선의 허벅지를 누르고 허리를 당겼다. 우선 붙잡기는 했다만 생소한 기분이 잦아들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생소한 기분. 뜻밖의 거절. 이선이 섹스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사실.

“억지로, 라.”

정작 이선의 의지를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를 내 아래 눕히기 위해 흥분을 유도하는 동안, 이선은 당연히 좋아할 것이라고만 여겼다.

“윤오 씨…….”

나를 이토록 거만하게 만든 당사자는 대뜸 말과 행동을 멈춘 나를 두고 제가 더 당황스러워했다. 제 허리를 감은 내 팔에 찬 손을 얹고 동그란 눈을 굴려 가까이 붙은 몸을 살폈다.

“미안합니다. 먼저 물어야 했는데.”

“네?”

“지금부터 안으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예?”

“싫으면 얘기해요.”

이선의 허벅지에 얹은 손이 창백한 살을 거꾸로 거슬러 골반을 넘었다. 작은 배꼽을 뭉근히 문지르는 손짓에 이선의 상복부가 조여들고 상처 많은 살가죽이 근육 결을 내보였다.

어른어른 힘주는 대로 어리는 음영과 밭게 터지는 숨.

야해 빠진 몸.

“여기까지 내 좆을 집어넣을 생각입니다.”

“…….”

“이선.”

“……네.”

“섹스하자고.”

뒷덜미를 당겨 휘둥그런 주황빛 눈동자를 코앞에 가져다 놓았다. 답을 기다리듯 시간을 들여 눈을 맞춘 다음 벌어진 발간 입술에 입을 맞췄다. 가볍게 아랫입술을 물고 혀를 넘겨 쓰다듬는 내내 맞붙은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전한 흥분과 여전한 의심이 그 눈 안에 넘실거렸다.

차가운 손등을 잡아 내 손가락을 얽었다. 붙잡힌 손이 순순히 딸려와 내 가슴팍을 짚고, 더운 몸을 세로로 지나 가장 열 오른 고간에 도달했다.

“억지는 무슨. 만지기만 해도 밑을 세우는 머저리한테.”

바지를 밀치고 단단히 발기한 성기를 이선의 손째로 주무르며 쓰게 웃었다. 이 강압적인 유혹이 우습고 이선의 손을 쓴 자위에 흥분하는 내가 부정할 수 없이 저질이라.

“싫어요?”

의견을 묻는 척하지만 실상 부정적 대답은 염두에 두지 않는 위선. 거절을 고려하지 않는 오만.

그러나 내 위선과 오만의 책임은 이선에게도 물어야 했다. 먼저 나를 그 삶에 엮은 것도, 발치에 엎드려 섹스를 부탁한 것도 이선이니까.

내 허벅지에 제 얼굴을 비비며 갈급한 낯을 한 것도, 내 손길에 쉽게 떨고 내 말에 쉽게 눈가를 붉히는 것도, 기어이 떠나지 못해 울며 사랑을 고한 것도.

그러니 탓하지 않을 수가 있나.

억울하다면 도리어 몹쓸 버릇이 들어 버린 내 억울함도 마주 호소해야 했다. 네가 당연히 나를 택하리라 자만하게 했으니.

“싫지 않, 습니다. 저는, 그런데 잘…… 왜…….”

이선은 질문을 얼버무리고 눈을 감아 버렸다. 코끝으로 턱을 건드리거나 흐트러진 이마를 입술로 헤치는 등 성가시게 굴어도 말을 잇지 않았다. 그 머릿속에는 또 어떤 불안이 있을지. 조심스러운 귓가에 입 맞추고 그가 하고 싶었을 말을 대신 골랐다.

“내가 이상해서?”

“그런 게 아니라…….”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까?”

“…….”

모르는 게 많은 가련한 에스퍼. 서투르고 어린 이선.

감정적 박탈과 신체적인 폭력에 익숙할지언정 지극히 보편적인 감정 교류에서는 미숙하기가 어린애나 다름없다.

한번 단정 지은 감정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물러질 수 있는지, 마음이 어떻게 자라 모든 걸 전복시키는지. 그렇게 깊어지고 변하는 관계에 대해서 배우지 못했다.

그러니 어렵겠지. 이선을 두고 발정하는 내가. 이 집에 잡아 두고, 건드리지 못해 안달 내고, 수도 없이 입을 맞추는 내가 낯설겠지.

이 작은 머리통 속에는 아직 처음 만난 그 계절이 자리 잡고 있을 터였다. 있는 그대로 내민 서투른 요청에 분노하던 나. 애정을 갈구하는 말에 진저리를 치고, 그치지 못하는 설움은 죄 무시해버린 지난 몇 년의 내가.

“생각해 봐요. 뭐든 알아내면 알려 주고.”

눈을 꼭 감은 이선의 등을 받쳐 침대 위에 내려놓고 제법 길어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꽂아 넣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무슨 생각하는지.”

“…….”

“왜 너랑 자고 싶어 할지.”

달깍, 싸구려 군납 용기의 플라스틱 뚜껑이 납작한 소리와 함께 뜯겨 나갔다. 침대 아래 부러진 뚜껑을 던지고 쓸데없이 힘이 들어간 손을 가볍게 주먹 쥐었다 폈다.

홧홧한 손바닥 위에 짜낸 미끄러운 액체는 금세 온기를 머금고 기울어진 손날을 따라 흘렀다. 툭, 툭, 묵직한 소리가 떨어져 납작한 배를 적실 때마다 이선의 근육이 긴장으로 조여들었다.

손끝이 말간 성기와 고환, 회음부를 스쳐 다물린 입구에 닿자 이선의 가슴팍이 밭은 숨으로 솟아올랐다. 등 아래에 둥글게 아치가 서고 모인 종아리가 파고든 내 팔을 감싸 조였다.

“아! ……읏.”

“후…….”

자극에 반응하는 솔직한 몸은 그 자체로 성감을 돋우는 볼거리였다. 곳곳을 물들인 채 치켜올린 턱이나 질끈 감은 눈, 비음이 새어 나오는 코와 앙다문 입술.

그리고 상처가 수놓인 매끈한 나신. 가늘고 긴 팔다리. 맞닿아 서로 비벼지는 한 줌짜리 발목들과 빗살처럼 인대가 선 발등, 힘이 들어간 발가락까지.

질척하게 젖은 손으로 좁은 입구 주변을 너르게 문질렀다. 부드럽고 느린, 어딘가 집요한 손짓에 민감한 몸이 쉽사리 비틀어졌다.

움찔거리는 무릎을 잡아 한쪽을 누르자 반대편은 알아서 벌어져 이선의 흥분을 내보였다. 끄트머리를 적신 색 말간 성기가 진득한 시선 아래서 이따금 튀어 올랐다.

세운 손끝으로 오물거리는 주름을 긁고 그 가운데를 꾹 눌러 열었다. 입구를 충분히 풀어 놓은 탓에 한 마디는 수월하게 들어갔지만, 내벽이 급격하게 좁아져 그 이상은 밀리지 않았다.

파들거리는 허벅지를 차분히 쓸어내리고 빠듯한 안쪽을 가볍게 휘저어 달래면서 갈증을 느꼈다. 부드럽고 뜨겁게 조이는 이 아래에 당장 내 좆을 밀어 넣고 싶어서 장기가 들들 끓었다. 이 안을 탐한 게 얼마만이지.

고작 손가락 하나로도 이선은 헐떡이는 숨을 쉬었다. 그게 좆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니 정작 제 차례를 기다리는 아래가 초조하게 굴었다. 선액으로 젖은 속옷에 귀두가 쓸릴 때마다 여유를 잃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충분히 풀어내야 이선이 다치지 않을 텐데 자꾸만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그 안을 비집고 들어가는 상상에 나도 모르게 허리 짓을 하다 잇새로 욕을 씹었다.

“흑, 윽! 아…….”

중지에 약지를 더해 좁은 내벽을 늘이며, 입으로는 쇄골과 그 아래 융기한 흉터를 일일이 더듬었다. 흠칫거리는 살을 타고 내려가다 문득, 이선의 심지가 선 유두가 아랫입술을 긁었다.

이글거리는 더운 숨이 폐로부터 기어 나와 혀를 적셨다. 이를 세워 조그맣고 단단한 살점을 누르거나 빙 둘러 빨아올리고 가슴 주변을 크게 쥐어 핥기 좋게 모았다. 금세 손자국이 남는 살에 더한 울혈이 여럿 새겨져 이선의 피부가 남아나질 않았다.

점점이 흩어진 붉은 자국들을 하나하나 짚어 파들거리는 살갗을 쓸어내렸다. 부풀어 번들거리는 유두가 올려놓은 손가락 아래 알아서 짓이겨지고 민감한 몸은 억누른 신음을 흘리며 침구를 파고들었다. 손등뼈가 뾰족하게 도드라지는 주먹 아래서 속 깃털째로 이불이 바스락거렸다.

입이 말랐다.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이 등줄기를 긁는 자극이었다. 맨 등에 땀방울이 맺혀 흘러도 열이 식지 않고 척추가 저렸다. 비단 더운 공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억지로 잡아 둔 폭발적인 성욕 탓이 컸다. 터질 것 같은 게 하반신의 사정인지 아니면 이선을 향한 소유욕인지, 심신의 경계마저 뚜렷하지 않았다.

좁은 입구에 손가락 드나드는 적나라한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부러 손을 난잡하게 흔들어 찌걱이는 소리를 키우자 끊어지듯 달달 떨리는 두 허벅지 사이로 마른 손이 내려와 내 손목을 건드렸다.

“으, 흣, 윤, 아……. 윤오, 씨…….”

끌어올린 시선이 곧장 이선의 흔들리는 눈과 마주 닿았다. 분홍빛으로 상기된 얼굴, 그리고 유리알 같은 눈망울이 무언가 간절하게 빛을 흩트렸다. 그 아래 유독 붉은 눈가와 입술, 벌어진 틈으로 엿보이는 입 안.

짧게 혀를 차고 팔뚝에 감긴 산호 같은 손가락들을 덜어 냈다. 헐겁게 모아 잡은 두 손목을 이선의 머리맡까지 끌어올렸다.

“그대로.”

일렁이는 눈가에서는 싱거운 맛이 났고 겹쳐 문 입 속의 혀는 달았다. 속 깊은 기갈을 이선의 신음으로 축이고 다시금 비좁은 구멍을 헤집었다.

사나움을 전부 걷어 내지 못한 성마른 손길에 이선이 무릎을 떨고 허벅지를 절었다. 젖은 손가락이 흥건한 입구를 쳐올리면 맞붙은 입술이 비껴 나고 틈으로 가느다란 신음이 흘렀다.

새까맣게 익은 성욕을 가까스로 누르고 미루는 내 밑에서 이선은 쉬지 않고 바르작거렸다. 달아오른 눈꼬리를 긴 흉터가 가로지르는 제 팔뚝에 문질러 닦고 다시 턱을 들어 키스를 보챘다. 불규칙한 그의 호흡이 턱에 닿으면 그대로 오싹한 전율이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이선은 작은 입을 둥글게 모아 비쭉 내밀고 달싹거렸다. 헛웃음이 났다. 제대로 소리가 실리지 않았지만 그 모양을 몰라보기는 어렵다. 계속해서 나를 부르는 입술.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뚝뚝 끊어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이라, 힘들 텐데.”

“아, 흑…… 괜, 참을 수 있, 으니까……. 부탁……드립, 니다.”

뭐든 감내하려는 이선의 나쁜 버릇과 이 작은 에스퍼에게만 나타나는 내 가학심은 궁합이 좋지 않다.

이대로 깊은 곳에 내 좆을 물리면 숨을 삼키고 비틀어질 모가지가, 그리고 곧 성감이 올라 황홀하게 흐려질 가을색 눈동자가 생생하게 그려졌다.

거기다 뒤꿈치를 밀어 골반을 달싹거리고 종아리로 내 옆구리를 스치는 식의 명백한 재촉이 효과적으로 내 인내심을 짓이겼다. 빡빡한 내부를 미처 다 풀어내지 못한 손가락들이 그의 뒤에서 주르륵 빠져나왔다. 잘게 경련한 내부가 손끝을 아쉽게 조여 당겼다.

“아, 윤, 하으……, 윤오…….”

가벼운 입맞춤을 연달아 내려놓고 허리를 세웠다. 당겨 내린 바지춤에서 수차례 무시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는 못한 저열한 욕구가 꺼내어졌다. 후덥지근한 공기도 서늘하게 느낄 만큼 뜨거운 살덩이를 문지르며 이선이 가쁘게 달싹이는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긁은 손톱자국에 내가 씹어 놓은 잇자국, 낡은 흉, 끝이 뭉친 유두. 얇은 몸 선을 빼곡히 채운 채도가 다른 핏빛들. 그리고 그 가운데 육안으로도 보이는 이선의 박동이 눈길을 끌었다. 조금 빠른, 그러나 일정하게 살가죽을 밀어 올리는 조금 치우친 자리.

씨발.

엉망진창인 몸을 두고 더욱 불거지는 욕구에 비웃음이 일었다. 혼자 씹은 욕설에 이선이 울대를 일렁이며 침을 삼켰다. 입매를 읽힌 모양이다. 얇아진 입술을 되돌리고 이부자리에 던져진 윤활 젤을 하나 더 건져 올렸다.

“완전히 미쳤군.”

“……네?”

“네가 고른 가이드가 이 모양이라 어떡하지?”

자조 섞인 말에 이선이 눈썹을 일그러뜨리다 짧은 탄성을 뱉었다. 빈 통이 바닥을 구르고 쏟아진 액체가 흉흉하게 발기한 성기를 따라 선단이 맞춰진 이선의 뒤까지 적셨다.

척척하게 젖은 기둥을 가볍게 훑으며 끄트머리로 이선의 입구를 얕게 파고들었다.

터무니없이 좁은 곳. 귀두를 감싸는 빠듯한 압박감이 여태 곱씹은 모든 기억을 압도했다.

불길이 도화선을 잡아먹듯 자제심을 불사르는 구멍이, 성기를 반도 채 받아먹지 못하고 막다른 길처럼 좁아졌다. 버거워하는 걸 알고도 무릎을 쥐어 벌리고 허리를 더욱 드밀었다. 불그죽죽한 좆 부리가 조금씩 삼켜질 때마다 작은 입구가 벌어져 팽팽하게 늘어났다.

엄지로 반들거리는 분홍빛 입구를 꾹 건드리자 이선이 밭은 신음을 토하고 허리를 비틀었다. 그 김에 조금 빠져나온 성기를 다시 밀어 넣어 얕은 자리까지 몇 번 쳐올렸다. 가까스로 늘어난 자리를 드나드는 성난 좆에 얇아진 입구가 한층 더 발개졌다.

새까만 전율. 목구멍에서 더운 호흡이 쉬지 않고 기어 나왔다. 쾌감이 차올라 이 작은 구멍에 내 성기를 끝까지 파묻어 마음껏 유린하고 싶은 폭력적인 욕구가 일었다.

곧이어 따라오는 자괴감을 씹어 삼키다 욕을 읊조리면 이선의 내벽이 놀라 움찔거렸다. 내 아래를 끊어 먹을 것처럼 굴고, 겨우 늘려 가던 구멍이 다시 처음처럼 좁아졌다.

하아.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쉬고 허리를 멈춰 세웠다. 이선의 다리를 들어 잘 뻗은 종아리 아래 튀어나온 발목뼈와 아킬레스건을 만지작거렸다.

두 발목을 하나씩 어깨에 올렸다. 오금을 쓰다듬고 그대로 허벅지 뒤를 쓰다듬은 손이 부드러운 살결을 따라 엉덩이를 지나고 좁은 골반을 붙들어 잡았다.

“아, 아읏!”

천천히 상체를 굽혀 내렸다. 유연한 이선의 허리가 접히며 동그란 엉덩이가 들려 올랐다. 힘이 들어간 내부가 빨아들이듯 성기를 당기고 강하게 조였다. 깊이를 더할수록 이선의 잔떨림이 심해지고 그 진동이 고스란히 속에 담긴 성기를 자극했다.

지독한 쾌감이었다. 아직 다 넣지도 못했는데 쿵쿵, 성기에서 맥박이 쳤다.

당장 사정할 것 같아 진입을 멈추자 이선이 더욱 흐느끼며 내벽과 입구를 빠끔거렸다.

젖은 속눈썹 그림자가 진 눈을 가늘게 뜨고 애처롭게 올려다보고, 입술을 둥글게 모아 숨만으로 내 이름을 부른다든가, 머리맡에 놓인 손목 대신 팔꿈치를 흔들어 재촉하고 말려 올라간 허리와 다리를 비틀어 삽입을 졸랐다.

“그만. 다쳐.”

“안, 안고 싶, 어요……. 안게 해 주, 흣……!”

쉬이. 우는 아이 달래듯 숨 빠지는 소리를 이선의 이마에 흘렸다. 가볍게 입술을 맞물리고 바르작거리는 이선의 엉덩이를 살살 두드려 달랬다.

이선의 꼬리뼈와 허리를 뭉근히 문지르며 서서히, 성급하지 않게 부푼 성기를 그의 안으로 집어넣었다. 마침내 샅이 맞닿을 때까지 이선은 타액과 신음을 꼴깍꼴깍 삼켜 가며 내 혀를 빨고 매달렸다.

키스가 아쉬워 졸졸 따라붙는 입술을 떼어 놓고 이선의 얼굴에서 통증의 징후를 살폈다. 홍조가 완연한 얼굴과 흥분이 들어찬 눈은 고통을 참는 기색보다 모자란 쾌감을 쫓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벽이 내 것에 맞춰 늘어나도록 천천히 허리를 돌리며 이선의 눈가와 입술에서 물기를 닦아 냈다. 땀에 젖어 엉긴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드러난 이마와 눈썹을 매만졌다.

하나하나가 예쁜 이목구비가 흥분으로 일그러지는 모양은 배 속에 차오르는 사정감과 별도로 지근한 만족감을 일깨웠다.

팔꿈치를 당겨 머리맡을 지키던 그의 두 손목을 풀어 주었다. 딱히 강제한 것도, 정말 묶어 놓은 것도 아닌데 꼼짝 않고 내 말을 따르던 이선이 풀려나자마자 그 두 팔로 내 목을 감아 왔다.

대번에 안긴 이선을 그대로 들어 앉혔다. 자세가 바뀌자 내 어깨에 얼굴을 문지르던 이선이 낑낑거리며 밭게 신음했다. 더운 숨이 닿은 목부터 정수리까지 자르르 전기가 흘렀다.

매달린 이선을 달고 무릎걸음으로 침대맡까지 올라갔다. 베개를 쌓은 자리에 등을 내려놓으려 했지만 더 바짝 매달리는 바람에 굳이 떼어 놓지 않고 마주 안아 주었다.

팔다리를 감고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작은 머리통에 소리 나는 입맞춤을 연이어 내려놓으면서 가볍게 허리 짓했다.

바르르 떠는 이선을, 실상은 성급하게 쑤셔 박고 싶은 내 빌어먹을 좆을 달래며 마른 등을 쓸어내렸다. 가느다란 목과 날개 뼈 사이, 척추 양옆으로 움푹 들어간 자리를 따라 흘러내린 손이 이선의 엉덩이골을 파고들어 한껏 벌어진 입구를 찾았다.

성기가 빈틈없이 맞물린 자리를 손끝으로 둥글렸다. 터져 나온 짧은 비명과 몸서리가 그의 내벽에 감싸인 흉악한 성기를 더욱 단단하게 굳혔다.

이선을 자리에 눕히고 무게를 실어 짓눌렀다. 조금의 움직임에도 속살을 떨고 도리질 치는 이선을 참기가 점점 더 어려웠다. 구속 같은 포옹으로 그를 죄고 허리만 움직여 빠르게 쳐올렸다.

어깨를 감싸 밀려나지 못하게 하고 쿵쿵, 세게 박아 넣자 내 허리를 감은 이선의 다리가 부르르 진저리쳤다.

턱으로 이마를 밀어 품에서 이선의 얼굴을 꺼냈다. 잔뜩 흐른 눈물로 흐트러진 얼굴이 보였다. 우는 입술을 집어삼키고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혀를 빨아올렸다.

깊은 입 속까지 남기지 않고 침범해 숨을 뺏고 신음을 앗았다. 입천장을 핥아진 이선의 찡그린 눈가에서 눈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빠르게 드나드는 성기에 내벽이 진득하게 달라붙고 미끄러운 젤이 그와 내 몸을 가리지 않고 축축하게 적셨다. 살을 때리는 질척한 소리와 이선이 겨우 숨 쉬는 소리가 귓전을 울릴 때마다 뱃속을 채운 열기가 거칠어졌다.

이선을 범하면서도 이선을 더욱 탐하고 싶었다. 안달이 났다.

그의 흰 다리를 가르고 좁게 다물린 속에 내 욕망을 풀어내는 일이 끔찍할 만큼 기분 좋다. 민감한 살덩이로 부드럽고 질척이는 속을 들락이는 쾌락뿐 아니라 내 아래서 신음하고 눈물짓는 이선을 보는 것부터.

서서히 붉어지는 뺨, 내 체온을 닮아가는 몸, 흥분에 흐려진 눈.

천장이 없는 쾌감은 같지만 전에 없는 초조와 불안이 한편에 도사렸다. 내 품에 안긴 이가 언제고 떠날 수 있다는 상실의 기억이 그루터기의 옹이처럼 속 깊이 남았다. 계속해서 확인하고 싶었다. 이선의 기분, 이선의 흥분, 이선의 감정, 이선의 사랑.

견딜 수 없는 조바심이 나를 앞세워 이선을 몰아붙였다. 작은 몸에 갖은 욕망을 모조리 쏟아 넣고 감내하기를 바랐다. 그를 낫게 할 가이딩과 다르게 내 소유욕에서 발발한 섹스는 죄 이따위로 이기적이었다.

“아, 아윽, 흣……!”

단단하게 감싼 팔 안에 갇혀 매서운 욕구를 받아 낸 이선이 한순간 몸을 띄워 올렸다. 맞붙은 배 사이에 보드라운 성기가 휩쓸리고 곧 미지근한 정액이 쏟아져 자르르 떨리는 살갗을 따라 흘렀다.

절정에 오른 몸이 요동쳤다. 끊어지는 숨이 차츰 길어지는 걸 확인하고 그대로 깊은 속을 문질러 아래와 뱃가죽을 붙였다. 사정을 마친 성기가 쉬지 못하고 다시 비벼지자 이선이 버들거리며 벗어나려 했다. 안 된다고 웅얼거리며 발버둥 쳤지만 목을 감은 팔은 더욱 매달려 왔다.

후들거리는 허리를 틀어잡고 바싹 조여 꿈틀거리는 안을 집요하게 쳐올렸다. 좁은 구멍에 길을 내어 끝까지 젖혀 열었다. 흡입하듯 쥐어짜는 내벽에 시야마저 아찔하게 멀어지고, 가마득한 쾌감 도중 꿈틀거린 성기가 깊은 자리에 토정했다.

헐떡이는 이선을 짓눌러 그 안에 질척하게 쏟아붓고도 흥분은 가시지 않았다. 아직 심지가 빳빳한 성기를 미련스레 이선의 몸 안에 두고 느리게 치받았다.

좁은 입구가 들락이는 성기를 부드럽게 감싸고, 끈끈한 아래가 맞붙었다 떨어질 때마다 이선의 안에서 새어 나온 액이 내 것의 기둥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아득히 기분 좋은 그 안에서 염치없는 좆이 금세 다시 몸집을 불렸다. 풀어내도 해갈되지 않는 욕정이 이선만큼이나 난해했다.

열이 밴 호흡을 이선의 귓가에 뱉고 붉어진 귓바퀴를 물었다. 거기 고인 눈물에 혀끝이 짭짤했다. 땀이 맺힌 관자놀이와 눈물이 맺힌 눈꼬리를 거쳐 잔열이 남은 입술까지 먹어 치웠다.

“히윽, 하아……, 윤, 으응…….”

부드러운 키스를 지나 울대와 불거진 쇄골을 타고 입술을 내리는 동안 빳빳한 성기가 조금씩 빠져나와 입구에 걸렸다.

두근거리는 가슴 한복판에 이르러 손톱자국을 따라 길게 혀를 옮겼다. 씁쓸한 약과 쇠의 맛이 났다. 숨을 꾹 눌러 삼키는 소리와 함께 이선이 어깨를 덜덜 떨었다. 귀두를 겨우 문 구멍이 연신 움찔거리며 붙잡았으나 젖은 성기는 그대로 빠져나와 더운 공기 중에서 흔들렸다.

몇 개의 흉터와 배꼽에 소리 내어 입 맞추고 희게 말라가는 정액을 핥았다. 비린 맛이 조금 의외였으나 나쁘지는 않았다. 대체 정액에 무슨 맛을 상상했길래 의외인지, 그건 좀 우스웠다. 이선의 정액은 맛이라도 다를 줄 알았나.

“안, 흑, 윤오 씨!”

그리고 말간 성기에 입술을 붙여 보려는 순간 이선이 달아났다. 잘게 떨리는 팔다리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제법 재빨랐다.

침대 머리맡에 붙어 다리 사이를 가렸지만, 모인 종아리 아래 가느다란 두 발목 틈으로 회음부가 환히 들여다보였다. 그림자 속에서 조금 더 붉게 부은 입구가 흘러내린 젤과 정액으로 난잡했다.

“안 됩니다……. 윤오 씨는…… 차라리, 제가 해 드리겠습, 니다…….”

생각 같아서는 색이 예쁜 성기뿐 아니라 정액을 흘리는 질척한 구멍까지 핥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저는 되고 나는 안 된다는 이선의 태도가 완강했다.

“싫어요?”

“싫……. 싫어요…….”

“그래.”

순순히 다음을 기약하는 대신 한 손에 감기는 종아리를 끌어당겼다. 가벼운 몸이 얼룩진 이불 위를 미끄러져 다가왔다.

맥없이 배를 드러낸 이선의 다리가 벌어지고, 그 가운데 드문드문 속살을 비치는 구멍이 조금씩 정액을 뱉었다.

충혈된 입구를 흘러내리는 흰 줄기에 앞선 파정이 없던 일처럼 아랫배가 끓었다. 나도 모르게 올라간 손가락이 뱉어진 정액을 지분거리다 빠끔거리는 안쪽으로 쓸어 넣었다.

“부었는데.”

“아니, 흣, 괜찮습, ……흐으…….”

“아프면 더는 안 넣을 겁니다. 참지 말고.”

“……넣, 어 주세요…….”

안 아프니까, 좋으니까, 주세요, 해 주세요.

전신과 목소리까지, 떨지 않는 부분이 없고 붉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다급하게 애원하는 이선이 비루먹은 내 배려를 망가뜨렸다. 그렇게 번번이 애절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질 수 있다는 걸 알려 줘야 하는데, 그런데.

“읏……!”

달콤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마주 닿은 살결에서 번지는 이선의 단맛이 뼈에 스미고 뇌를 절였다. 포근하게 감싸 질척하게 엉기는 구멍을 길게 헤집었다.

느리게 오가며 이선이 느끼는 자리를 예외 없이 찍어 누르고 비틀어지는 다리를 추어올려 더욱 깊이 삽입했다. 지난 행위로 돋워진 생생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열이 올라 붉은 기가 늘어난 그의 얼굴과 붉어진 관절 끝이 시선을 잡아챘다. 갈증, 허기, 뭐든 식욕을 닮은 색욕이 그 피부의 빨강처럼 피어났다.

이선을 취하는 섹스는 이상하다. 외설적인 가운데 어딘가 고결했고, 그 고결함을 망가뜨리는 배덕감과 만족감이 번갈아 들쑥거렸다.

아래를 꿰뚫린 채 울먹이는 이선을 엎어 놓고 날씬한 등을 감싸 안았다. 허벅지를 주무르고 성기를 쥐어 몇 번 흔들어 주자 금세 묽은 액을 흘렸다.

잇따른 사정과 거듭 안을 짓눌리는 과격한 쾌감을 견디지 못하고 이선이 무릎걸음을 쳤다. 앞으로 빠지려는 것을 붙잡고 버거워 떨리는 턱을 당겨 입을 맞췄다. 달아오른 신음까지 남김없이 잡아먹는 기분이 기꺼웠다.

풀썩 쓰러져 엎드린 이선의 등허리를 누르고 엉덩이를 쥐어 벌렸다. 빈틈없이 맞물린 뒤에서 내 성기가 빠져나올 때마다 붉은 속살이 아주 조금씩 비쳐 보였다.

이글거리는 혀가 치열을 따라 입 안에서 빙글 돌았다. 탐욕이 빠듯하게 뱃속을 채운다. 이선이 좋아하는 자리, 좆으로 찔러 올리면 등을 둥글리는 자리를 고집스럽게 파고들었다. 울며 움츠러드는 어깨에 이를 세우고 솟아오르는 등줄기를 빨아들였다.

“아흐, 윤오, 읏! 하아……, 흑….”

이토록 끈질긴 섹스에 면역이 없는 이선이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 했다. 가볍게 어루만져도 불에 닿은 듯 예민하게 구는 살을 남김없이 쥐었다.

열 오른 눈을 가물거릴 때까지 몰아붙이고 몇 번이고 사정해도 멈추지 않았다. 몸을 관통하는 전율에 관절이 노곤히 풀어질 때까지, 내 욕망이 그의 몸에 흔적으로 남을 때까지 박아 넣었다.

그렇게 하면 정말 나를 새길 수 있을 것처럼.

“아…….”

싫다거나 힘들다는 투정 한 번 없이 나를 받아 낸 이선은 그를 씻기고 닦아 내는 동안 가만히 흔들렸다. 뒤를 채운 정액과 젤을 빼낼 때는 조금 긴장한 것 같았지만, 섹스가 목적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얌전히 힘을 풀었다.

한참 시달리고도 손가락을 조이는 그 구멍에 내 좆이 질리지도 않고 부풀었다.

양껏 취하고도 만족하지 못한 내 성기를 보고 군침을 삼키는 이선은 말려야 했다.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발기한 내 좆을 물고 싶은 눈치였는데, 그랬다간 이선의 체력을 고려하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가이딩이 그를 건강하게 한다고 해도 이런 섹스는 아직 무리다. 참아야 했다.

욕조에 더운물을 반쯤 채우고 이선을 끌었다. 기력 없는 이선이 순순히 내 위에 엎드려 누웠다. 나른하게 포개져 앉아 마른 등에 찰박찰박 물을 끼얹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이선이 내 어깨에 뺨을 기댄 채 졸기 시작했다.

“저는…… 고르지 않았습니다……. 윤오 씨는, 그냥 저한테…….”

어물어물 무언가 말하더니 눈을 비비고 그대로 고개가 꺾어졌다. 흘러내리지 않게 허리를 추어 안으며 이선의 젖은 머리칼을 턱으로 쓸어 넘겼다. 내려다보이는 귓가가 보기 좋게 붉었다.

‘네가 고른 가이드가 이 모양이라 어떡하지?’

별 의미 없는 자조를 담아 두었던가. 잠꼬대처럼 이어지는 말을 하나씩 엮어 보면 제 딴에는 가이드를 고른 것이 아니라 그저 나를 만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듯하다.

그럼 네게도 이게 운명 같을까.

그 뺨에 어린 홍조가 못내 사랑스러웠다.

“윤오 씨께서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몇 차례 오답을 지적받은 이선이 익숙한 길을 가려고 수를 썼다.

“직접 보고, 겪고, 느낀 걸로 스스로 판단해요. 원래 다 그렇게 하니까.”

벌칙처럼 짧게 입 맞췄다. 내가 제게 들러붙는 이유로 추측한 것들이 죄 틀려서인지, 아니면 쉴 틈 없이 쏟아지는 키스 때문인지, 가볍게 안겼다 풀려난 이선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낯이었다.

이선이 불쌍해서, 아니면 내 천성이 다정해서.

그 작은 머리통 속에서 내세운 결론은 저 두 가지를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저가 불우하고 불쌍한 건 잘 아는 모양인데, 나에 대한 평가는 단단히 콩깍지가 씌었다. 저를 몇 년이나 방치하고 무시한 사람을 두고 착하고 다정하다니. 그렇게 울고서도 순진해 빠져서는.

그나마 쏟아지는 접촉은 밀어 내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정한 모양이었다. 눈치를 보는 건 똑같지만 키스나 포옹, 사소한 돌봄을 거절하지 않고 몸을 맡겼다. 내 옷을 입고 내 집을 돌아다니며, 차려 주는 음식을 먹고 내 품에서 잠들었다.

종종 달력을 들추고 갸웃거리는 걸 빼면 덫에 갇힌 제 상황에 대해 의문을 표하지도 않았다.

그런 이선을 볼 때마다 심적인 포만감이 차올랐다.

이선은 모니터 앞에 앉아 글을 쓰지 않는 나를 낯설게 여겼다. 비어있는 책상과 나를 번갈아 보며 의아한 눈을 했고, ‘일은…….’ 하고 서두를 떼다가 입을 다물기도 했다.

누구 때문에 글을 쓰지 못한 지 꽤 되었다는 말 대신 오랜만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쓰려고 정리해 둔 소재와 어느 정도 휘갈겨 둔 이야기들을 쭉 읽어 봤지만 흰 바탕에 채워 넣을 글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글을 쓰지 못하는 건 여전한데 전처럼 좌절스럽지는 않았다. 읽는 것도 어려웠던 몇 주 전에 비하면 상태가 훨씬 나았다. 이제 적어도 눈앞에서 글자가 흘러내리지는 않으니까.

난독 증세가 사라지니 막연한 불안이나 무력감도 호전되었다. 내 집에 잡아 둔 잘 우는 새 하나 때문인 것도 같고.

아직 읽지 않은 책을 하나 골라 작은 방으로 갔다. 틈틈이 이선이 들락거린 탓에 항상 너저분하던 옷방이 전에 없이 깔끔했다.

내가 식사를 준비하거나 침구를 교체하고 청소를 할 때, 이선은 세탁기와 건조기, 건조대, 작은 방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정리 정돈했다. 눈을 반짝이며 빨빨 다니는 것이 제법 즐거워 보여 마음대로 하게 두었다.

역시나 이선은 작은 방에 있었다. 이번엔 다림질인가. 벽장 구석에 처박혀 있던 다리미판을 용케 꺼내 방 한가운데 펼쳐 두었다. 이제 막 시작했는지 첫 번째 셔츠가 다리미판에 오르는 중이었다.

옆에 쌓인 더미가 척 보기에도 꽤 높았다. 다림질은커녕 세탁소에 맡기기도 귀찮아 매번 새로 사 입기 때문이다. 용도를 다하고 세탁기와 방치 코스를 겪은 셔츠들이 하나씩 작은 손을 타 펼쳐졌다.

저걸 전부 다 할 생각인가.

다리미를 쥔 게 마침 불편한 왼손이라 잠깐 지켜봤다. 오래 볼 것도 없이 이선은 다림질이 능숙했다. 제복을 입는 직업이라 따로 익혔나. 억지로 하는 기색이 아니라 방해하지 않았다.

이선의 근처, 빈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원래는 건조기에서 꺼내 던져둔 옷더미가 있던 자리다. 옷을 두기에 좁다고 여겼던 방이 정리를 거치니 휑하게 느껴졌다. 허전하지는 않았다. 다림질에 열중한 이선의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종종 얼굴에 와 닿는 시선을 느끼며 책장을 한 장씩 넘겼다. 잠시 잃었던 활자와 잠시 잃었던 이선이 동시에 충족된 이 순간이 안락했다. 지나온 결핍이 깊었던 만큼 다시 채워 넣은 공백을 잃고 싶지 않았다.

서로를 당연히 곁에 두는 시간이 익어 가고, 새로 찍어 낸 책의 종이 냄새와 다리미의 스팀 냄새가 비슷하게 평온했다. 문장 하나와 문단 하나, 단락 하나와 페이지 하나 만큼 함께 있는 시간이 흘렀다.

마치 추억이 탄생하는 순간을 목도한 것처럼, 이 평화가 그리우리란 짐작마저 들었다.

새 옷처럼 날카롭게 주름 잡힌 셔츠들이 하나씩 옷걸이를 품었다. 차례로 포개져 대여섯 벌을 넘길 즈음, 이선이 제 덩치보다 큼직한 옷더미를 안아 들었다. 한참 만에 자리를 벗어나 움직이는 그의 맨다리가 자연히 시선을 끌었다.

근처 선반에 옷걸이들을 걸어 놓고 뒤돌아서는 이선을 부른 것은 적당한 충동이었다. 마침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기도 하고, 드러난 하얀 허벅지에 입을 맞추고 싶어진 까닭도 있었다.

제 옷이 없다는 것을 알고도 딱히 찾지 않는 이선 때문이기도 하고, 상처가 많은 윗몸을 가리기 위해 내 상의만 걸치고 돌아다니는 그의 부주의함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 닿는 거리까지 다가선 무릎을 끌어당겼다. 골반에 가까운 허벅지에 입술을 가져다 대자 높은 탄성을 뱉은 이선이 허둥거리며 벽을 짚었다. 가볍게 오금을 문지르고 길게 뻗은 종아리와 발목, 발등을 쓸어내린 다음 복숭아뼈가 불거진 발목을 손아귀로 감쌌다.

눈앞에 드리운 아슬한 반소매 티셔츠 자락을 슬쩍 걷어 올렸다. 가볍게 입 맞춘 것으로 힘이 들어간 말간 색 성기가 바로 보였다. 언제부턴가 정신이 나간 내 눈에는 여실히 성별을 드러내는 그것이 이선의 일부라는 것만으로 제법 귀엽게 보였다.

“왜 또 섰을까.”

“윤, 오 씨가…… 만지셔서…….”

실없는 능청에 이선이 억울한 듯 칭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그대로 두고 가 보라고 가볍게 엉덩이를 두들겼다.

책갈피 대신 엄지를 끼워 넣은 책을 펼치고 두어 문장 더 읽었을까, 한 걸음 물러나다 그대로 멈춘 이선의 다리가 시야 한편에 들어왔다. 다시 얌전히 아래를 가린 옷자락을 틀어쥔 손등에 혼란스럽게 음영이 졌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이선이 열심히 입술을 빠끔거렸다. 하고픈 말이 있는데 정리가 잘 되지 않을 때 나오는 그의 버릇이다.

조금 기다린 끝에 나온 말은 어느 모로 의외였다.

“저는 하는, 하는 줄 알고……. 안 하는 건……가요?”

“뭘?”

“가이, ……스…….”

짓궂은 반문에 이선이 대답을 웅얼거렸다. 가이딩, 이라고 운을 떼다 소심하게 섹스로 고치는 모습이 내 속을 흡족하게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발기한 내 고간을 훑는 주황빛 시선을 불렀다.

“아직 아프지 않아요? 뒤. 많이 부었을 텐데.”

“하지만…….”

“섰다고 꼭 섹스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발기가 못 참을 일도 아니고.”

“……그래도, 저는…….”

“하고 싶어요?”

별다른 고민 없이 끄덕여진 고개에 짧은 한숨이 나왔다. 그것이 질책처럼 들렸는지 이선이 움찔 떨었다. 앞섶을 거머쥔 작달막한 주먹 두 개를 따라 흰 면 티셔츠가 너울거렸다.

“이선.”

“네.”

“보통은 어떻게 했습니까?”

“저는…….”

추궁하거나 채근하지 않도록 주의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나갔다. 손을 뻗어 이선을 내 무릎 위에 데려다 앉히고 쉽게 식는 팔꿈치와 팔뚝, 그리고 옷 아래 푹 꺼지는 등을 받쳤다.

간단히 경험을 묻는 말에 이선은 한참이나 고민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심각해 하는데 그 질문의 내용이나 대답이 멋쩍거나 부끄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정말로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에 대해 더듬고 기억해 내려 애쓰는 기색이다.

“……저는 윤오 씨가 아니면 발기하지 않습니다.”

“뭐?”

“그래서 잘 모르겠습니다. 죄, ……윤오 씨께서 알려 주시면…….”

하아.

절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마른 갈빗대를 으스러져라 쥐었다가 겨우 놓았다.

밑도 끝도 없는 이선의 솔직함이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나밖에 없다는 듯이, 그것만큼 당연한 일이 없다는 듯이 굴면 누구라도 거만해져 버린다.

뭐라도 된 양 착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든 탐이 나는 사람을 앞에 두고서, 그 또한 나를 바란다는데 선뜻 손 내밀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성급히 끌어당긴 작은 덩치가 고스란히 품 안에 안착했다. 겹쳐진 몸 아래, 이선의 엉덩이에 억눌린 자리가 얼얼할 지경이었지만 키스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가만둘 수 없는 입술을 물고 말캉한 혀를 끄집어냈다. 목덜미를 끌어 내리고 티셔츠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팍까지 쓸어 올렸다.

새로 바른 약이 엄지손가락에 미끈하게 묻어났다. 정신없이 조그만 입술을 빨며, 손가락에 묻어난 진득한 연고를 조그만 유두에 발랐다. 금세 솟아오른 돌기를 쥐어 꼬집고 비틀었다.

아흑, 입 속으로 곧장 전해진 신음에 문득, 아차, 싶었다. 가벼운 상처도 며칠씩 낫지 않는 이선을 깨달은 탓이다.

하, 내가 아니면 발기하지 않는다는 말도, 그가 아파서, 이선이 늘 아팠기 때문에 그랬겠지. 씨발.

치민 성욕을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더럭 짜증이 났다. 몇 번을 참아도 마지막에는 손을 뻗고 마는 내가 한심했다.

이런 복잡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선은 간단한 애무와 키스에 살랑살랑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마침 그 위치가 위치라, 염치가 십 년쯤 어려진 것 같은 내 좆이 기대로 부풀어 날뛰었다.

이선을 조금 밀고 바지춤을 내렸다. 잔뜩 성이 난 채 튕겨 나온 성기가 그의 흰 샅에 맞붙었다. 열기를 품은 살끼리 맞닿은 것만으로, 혹은 그 장면을 본 것만으로 이선의 입에서 달뜬 숨이 뱉어졌다.

입술과 혀끝만 스치는 얕은 키스를 연이어 하고 쪼르르 따라나서는 이선의 턱을 밀었다. 헐렁한 티셔츠 자락을 걷어 두 번 감은 끝을 발간 입술에 물렸다.

“삽입 없는 섹스도, 나쁘지 않지.”

“읏…….”

이선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우묵한 쇄골 윗자리를 혀로 쓸었다. 둥근 둔덕이 진 어깨산에 잇자국을 새기고 목까지 타고 오르는 울혈을 남겼다. 드러난 가슴팍에서 예쁜 색의 유두를 집어 희롱하고, 날씬하게 들어간 허리의 근육 결이 팬 자리마다 엄지를 깊게 눌러 만졌다.

허리 뒤로 돌아간 손이 엉덩이를 크게 쥐었다 놓았다. 좁고 단단한 등줄기를 좁힌 이선이 목젖을 울렸다. 마르고 뼈가 불거진 몸에 드물게 살집이 오른 엉덩이를 한껏 주무르고, 잡아당겨 아직 부었을 입구까지 자극했다.

바르르 떨며 달싹거리는 허리춤이 내 아랫배에 바싹 붙어 크게 선 성기 두 개를 짓뭉갰다.

흔들흔들 부딪히고 비벼지는 내 좆과 이선의 성기를 한 번에 쥐었다. 색과 모양이 다른 두 살덩이인데 끄트머리가 반들거리게 젖은 것만은 똑 닮았다.

조금 세게 잡아 압박하고 가볍게 허리를 쳐올리는 시늉을 했더니 광대 언저리가 붉게 번진 이선이 어설프게 엉덩이를 띄우고 앞뒤로 허리 짓했다. 무척 야릇한 광경이었다.

“흐으, 으은…….”

빠르게 익혀 제 쾌감을 쫓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고 당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를 달래기 위해 가볍게 시작한 손장난에 내 속이 더욱 지펴졌다.

앙다문 입술에 두툼한 옷자락을 물고, 그 백색 옷감과 대조되는 발그레한 얼굴로 긴 속눈썹을 내리깐 이선의 얼굴이 무척 야했다.

입을 벌리지 못해 콧소리가 잔뜩 섞인 신음을 내는 것과 조심스레 내 가슴팍을 짚어 버티는 몸, 정신없이 흔들리는 허리까지 야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손 안에서 들썩거리는 이선의 것을 제대로 붙잡고 맑은 선액을 흘리는 갈라진 끝에 엄지를 비볐다. 둥글게 문질러 자극하니 이선의 복부가 급하게 조여들었다. 바르르 떨리는 아래가 금방이라도 도망칠 것 같아 손을 돌려 등허리를 감싸 잡았다.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움찔대기만 하는 이선 대신 내 손바닥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부드러운 손바닥 안쪽에 색이 여린 이선의 것을 두고 위아래로 빠르게 마찰했다. 진즉 흘린 투명한 액체가 손아귀를 파고들어 질척이는 젖은 소리가 났다.

“으응, 흐읏, 읏, 으으……! 으응…!”

민감한 귀두 아래가 내 손을 거칠게 지날 때마다 이선이 복부를 구부려 접으며 뚝뚝 끊어지는 신음을 뱉었다. 전신의 근육도 배꼽 언저리에 고무줄이 연결된 것처럼 파득파득 당겨졌다. 허리를 감은 손바닥 아래서 속 깊은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흣! ……윽, 하읏……!”

흐느끼는 신음을 삼키며 이선이 턱을 치들고 무릎을 세웠다. 불쑥 올라간 가슴팍이 내 눈앞에 먹음직스럽게 가득 매단 울혈을 내보였다. 그리고 추위를 닮은 몸서리와 함께 내 목 어림에 미지근한 정액을 토해 냈다.

절정에 온 살갗을 내놓은 그 모습이 묘한 기갈, 또는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선이 느끼는 것을 언제까지고 더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정을 마친 성기를 손가락 사이로 조여 부드럽게 물러진 선단을 흔들었다. 사정 전과는 또 다른 격렬한 몸서리를 치며 이선이 입에 문 옷을 뱉고 내 품에 쏟아졌다.

“아, 그만……! 아, 안 돼요, 윤오, 아! 제발……!”

멈춰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끝까지 몰아붙이면 이선은 어떤 모습을 보일까.

오싹한 흥분이 허리춤을 기어 다니며 살갗을 야금야금 물어뜯었다.

육체로 느끼는 성감보다 농밀한 희열이 뇌로부터 전신을 달렸다. 애원하는 이선의 성기를 놓고 내 것을 잡아 몇 번 흔들기 무섭게 토정했다.

소름처럼 오스스 쾌감이 번지고 다시 뭉근한 열감으로 뒤덮였다. 잠깐 사이 길게 뻗어 나간 희멀건 정액이 서로의 옷 위에 엉망으로 쏟아졌다.

깊고 거친 숨이 서로 섞여 들었다. 틈만 나면 이어진 키스가 이제 익숙할 법도 한데, 이선은 절정의 잔재가 남아 조금만 몸이 스쳐도 혀를 멈추고 굳어 버렸다.

가장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서툴고 수동적인 그 혀를 감고 입천장을 핥았다. 고른 앞니 뒤를 혀끝으로 간지럽히면 듣기 좋은 목소리가 났다. 흐느낀 이선이 목과 어깨의 틈을 좁히고 덜덜 떠는 주먹으로 내 목을 감아 안겼다.

그리고 포만감이 찾아들었다. 이선을 가지는 이 기분. 내 것, 내가 지켜 내야 할 순간.

사정 후의 이선은 쉽게 지쳐 했다. 섹스로 잘 가누지 못하는 몸은 한층 더 순순해져 이끄는 대로 몽롱하게 따라다녔고, 거기서 조금 더 지나면 곧잘 졸았다.

하는 도중에 기절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만, 아무래도 몸을 섞는 일이나 여러 번 사정하는 것이 그의 체력에는 부담이 되는 모양이다.

그렇게 지쳐 잠들어도 다음날이면 멀쩡하게 깨어나는 게 에스퍼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선이 피로를 감추는 데 능숙한 것인지는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눈에 띄는 가슴팍의 상처에 매일 두 번씩 약을 발랐다. 잘 아물고 있기는 한데 에스퍼의 초인적인 회복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이선의 말로는 이렇게 긁힌 자국, 또는 찰과상같이 하찮은 상처가 외려 낫는 게 더디다고 했다. 저는 외상이 치명적일수록 회복력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덤덤하게 말하는 그 얼굴에 괜한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남의 치명상을 제게로 가져와 대신 다쳐야 했나.

괴로웠을 제 과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사무적으로 넘기는 이선. 뭘 어떻게 하면 이 부조리를 억울해할까. 그가 부당을 이해하고 분노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지, 아니면 이대로 초연한 그를 감싸 숨기고 싶은지 모르겠다.

나를 만나기 전에 고비가 몇 번이나 있었을 에스퍼. 언제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이선의 삶을 떠올리면 중력이 한층 두텁게 드리우는 기분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납치, 그간의 학대, 참전, 적어도 몸에 남은 흉만큼은 겪었을 상처받이 역할.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의 암담함이 무거웠다. 허탈한 욕설을 그리는 입매를 가리기 위해 이선을 품에 안았다. 느리게, 속속들이, 내 다정에 그를 적셨다. 그저 아끼고 돌보아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그 정도로 단순한 결여라면 얼마나 좋을까.

잠든 이선을 안고 생각이 깊었다.

이미 벌여 놓은 일이 있고 감수해야 할 일이 있는데도, 생각은 계속해서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이선을 위한 모든 일에 정작 그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걸렸다. 이해를 구하면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바라는 것이냐 물으면 대답을 하지 않을 것 같아서.

동그란 머리에 입을 맞추고 가만히 그에게서 나는 깨끗한 향을 들이쉬었다.

* * *

얼핏 잠이 옮아 같이 낮잠이라도 잘까 하던 차에, 품 안에 든 에스퍼가 화들짝 몸을 틔웠다.

몸을 젖혀 침실과 나를 확인하고 몸을 일으켜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창가로 다가가 밖을 살피는 것 같더니 분주히 방을 나섰다.

“윤오 씨는 안에 계십시오.”

“무슨 일입니까?”

“에스퍼의 파동이 가깝습니다.”

거실 창에 커튼을 드리운 이선이 전에 없이 차가운 얼굴을 했다. 주변을 끊임없이 살피고 돌아다니다 현관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준준입니다.”

보이지 않는 기세가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 그러나 표정은 일그러져 미간이 좁았다. 까딱 고개가 기울어 갸웃거리고 고민하는 입 모양을 했다가 현관으로 다가섰다.

“여기로 접근 중입니다. 제가 만나 볼 테니 윤오 씨께서는 안전하게, ……아!”

이선의 옆구리에 팔을 넣어 단숨에 들어 올렸다. 가느다란 맨다리가 허공에 들려 하늘거리고 두 손은 허리를 감은 내 팔뚝을 움켜잡았다.

“윤, 윤오 씨?”

“입고 나와요. 바지하고, 이것까지. 단추도.”

작은 방에 이선을 내려놓고 잡히는 대로 겉옷을 걷어 들려 주었다. 주고 보니 지금 입기에는 두꺼운 가을용 카디건이었지만, 길이가 적당하고 앞을 여밀 수 있어 괜찮게 보였다.

방문을 닫아 주고 나와서 곧장 현관으로 갔다. 잠금을 풀고 문을 열어 밖에 서 있던 남자를 안으로 들였다. 키와 덩치가 무식하게 큰 남자. 이능 장교 준장, 괴물 준준.

“초인종 뭐야. 고장 났으면 고쳐. 어 씨팔, 집이 왜 이래?”

커다란 남자가 들어오느라 활짝 열린 문에서 선선한 바람이 섞여 들어왔다. 봄에 적당한 서늘함과 건조함이다.

사복을 걸친 준준은 후덥한 실내 온도에 연신 불평하며 식탁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제집처럼 재킷을 벗어 옆에 두고 반소매 셔츠의 목 부리를 펄럭거렸다.

“여름도 아주 한 여름이네. 무슨 낙타 사육장도 아니고.”

적당히 맞은편에 앉아 남자가 내려놓은 서류 봉투를 집어 올렸다. 꽤 두툼한 봉투의 입을 벌리고 손을 넣을 때쯤, 성실히 옷을 껴입은 이선이 부엌에 나타났다. 헐렁한 바지 밑단과 소맷단을 여러 번 접어 올린 그가 커다란 덩치의 뒤에서 더욱 작아 보였다.

“이리 와.”

손을 뻗어 부르자 준준의 옆으로 가던 이선이 곧장 선회해 내 옆에 앉았다. 몸이 차가운 그도 이 온도에 그 복장은 더웠는지 흰 뺨이 조금 붉었다. 이마를 따라 습하게 엉긴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염병.”

“……준준. 말조심해. 여기는 무슨 일이야?”

싸늘하고 어딘가 뾰족한 심지가 느껴지는 말투가 이선의 발그레한 입술에서 나왔다. 다시금 서류 봉투를 뒤적이다 흘끔 그 옆모습을 살폈다. 언짢은 건가.

“하, 뭐야. 본인은 모르는 눈치네. 말도 안 꺼내셨나 보지?”

“오늘 얘기할 생각입니다.”

“네? 무슨…….”

“아주 물고 빠느라 정신없었나 봐?”

준장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와 시선이 이선의 드러난 목과 빗장뼈에 가 닿았다. 약을 바른 손톱자국이 아직 지워지지 않았고,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키스 마크가 그 사이의 공백을 메운 자리다.

이선은 노골적인 비꼼에도 나직이 준장의 언어 습관을 지적할 뿐이었다. 그 낯에 불쾌나 수치가 비치지 않아 내심 안도했다. 그의 가느다란 목과 쇄골에 주렁주렁 매달린 소유욕의 증거가 보기에 좋았다.

설명을 요구하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 이선의 목덜미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움츠러들다 말고 다시 준장을 경계하는 그를 두고 서류를 꺼내어 펼쳤다. 뒤집어진 봉투에서 차 키도 하나 툭, 떨어졌다.

“차는 북쪽 관리소 외곽에 있고, 거기서 갈아타면 남은 건 알아서 처리할 거야. 그래서 언제 말 하실 건데? 내가 해?”

“차를 왜? 윤오 씨…….”

여린 손길이 내 손등에 올라왔다. 감히 올려 두지 못하고 살며시 건드리는 수준이었다.

나와 준장을 번갈아 보던 이선이 식탁 위에 올려진 나머지 서류에 눈길을 주었다가 빳빳한 우편 봉투를 집어 올렸다. 그 안에서는 플라스틱 신분증 두 개가 나왔다.

“일단 도하로 넘어가면 폐기하고. 제대로 도착하기만 하면 필요 없을 테니까. 기차에서 내려서 그 오지 산간까지 가는 건 약도 받아 왔으니 나머진 알아서 해.”

“여기는……?”

“주노 고향.”

이선이 집어 든 건 크지만 깔끔하고 상세하게 그려진 지도였다. 화가가 직접 그려 전해 준 고향 가는 길이, 기분 탓인지 조금 그리운 색이다.

“전쟁 나는 줄도 몰랐던 별세계니까, 몇 개월이든 몇 년이든 숨어 살기에 그만한 곳이 없겠지.”

“준준. 이게 다 뭐야?”

“몰라, 십팔. 니 가이드 새끼한테 들어.”

“…….”

“결정 나면 이달 내로 출발하고, 안 갈 거면 반납하고. 그리고 씹팔, 일을 하자고 했으면 모바일은 켜 놔야 할 거 아냐. 연락 좀 받으시고, 어?”

대번에 뾰족해진 이선의 눈초리를 흘리고 준장이 일어섰다. 겉옷을 챙기다 실내 온도에 괜한 짜증 몇 마디를 더 남기고는 미련 없이 현관을 빠져나갔다. 몇 발짝 따라가던 이선이 닫힌 문 앞에서 혼란에 잠겼다.

“와서 앉아요.”

왜소한 에스퍼가 망설이다 준준 준장이 떠난 자리에 앉았다. 내 맞은편이었다. 가을과 노을이 녹아 있는 따뜻한 색의 눈동자가 흔들리면서도 곧게 시선을 마주하고 그 동그란 눈에 의문을 가득 떠올렸다.

“뭐부터 얘기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는데.”

서류를 갈무리해 이선의 방향으로 돌렸다.

도하국 남부 시골 마을의 약도와 거기까지의 여정에 필요한 자료, 신분증, 차 열쇠.

“준비한 지는 좀 됐습니다. 제대로 채비한 건 지난겨울이고.”

“……겨울.”

“이선 씨가 그대로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가 있었겠죠.”

툭툭. 손끝이 지도 위, 산골 동네를 두들겼다. 여기에, 하고 모자란 목적어를 보충해 달자 이선이 입술을 빠끔거렸다.

“준준 씨, 주노 씨, 데리다 씨, 데이 준장과 가이드분까지 다들 돕겠다고 했어요. 그 외에도 기꺼이 나서 줬고.”

인망이 좋은 상사라고 부관이 치켜세울만 했다. 이선을 세상에서 감추기 위한 일에 모두가 한마음으로 나섰으니까.

“곧 에스퍼에게 생체 칩을 시술하는 법안이 상정될 겁니다. 위험 관리의 일환으로, 상태가 나쁜 에스퍼부터. 데이 준장이 의회에 참석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낮습니다. 여론을 움직이고는 있지만 군부가 강행할 것 같아서.”

“아…….”

“반란 전쟁 종식 후에도 입지를 다져야 하니, 에스퍼를 위험 분자 삼아서 군의 존치 명분을 잡겠다는 심산이겠지.”

쓸데없이 넓은 식탁 위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빈손을 내려다보는 이선에게 ‘손’, 하고 짧게 요구하자 흰 손 두 개가 바로 올라왔다. 순순한 그를 내 무릎에 앉히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기왕이면 헐벗겨 내가 남긴 흔적들이 고스란히 드러난 채로.

아쉬운 대로 가느다란 손가락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평범한 일반인처럼 살 수 있습니다. 더는 다치지 않아도 돼요.”

어쩌면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과 다르게 이선의 동그란 눈은 혼란스럽게 깜빡이기만 했다. 진의를 파악하려는 시선이 끈질기게 나를 쫓았다.

“군인이든, 에스퍼든, 그만하고.”

“하지만, 저는…….”

“이선.”

“……네.”

천천히 끌어당겨 허공에 띄운 손에 입을 맞췄다. 주황빛 기다란 상처로 얼룩진 손등과 힘이 들어가 오그라든 손가락 마디, 단정하고 짧은 손톱에.

“나를 줄게.”

이미 주어 버린 상당부는 모른 체 하고, 그에게 줄 게 아직 더 남은 마냥 유혹했다.

간단히 속아 넘어간 여린 에스퍼의 가을빛 동공이 휘청휘청 바람도 없이 나부꼈다.

* * *

‘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습니다.’

자작나무 삼림을 걸었다. 두 사람이 겨우 나란히 걸을까 싶은 좁은 오솔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숲을 감쌌다. 동산 하나가 통째로 수목장인 만큼 지나는 나무의 밑동마다 조그만 묘비가 보였다.

생각에 잠긴 이선은 걷는 내내 조용했다. 깊은 안쪽 가족묘에 접어들 때는 그 생각이 더 깊어져 주황색 눈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

비죽 솟은 돌부리에 운동화 앞코를 박고 비틀거리는 걸 바로 세워 내 손을 들렸다. 때로 멈칫거리는 그를 이끌어 미리 알아 온 목적지로 향했다.

한동안 더 걸어 길 끝의 독특한 수목 앞에 멈춰 섰다. 튼튼한 두 그루의 자작나무는 뿌리 부분이 거의 붙어 있었고, 곧게 자라는 수종의 특성과 다르게 높은 자리에서 기둥이 휘어 서로 가까웠다.

그리고 가지를 얽어 포옹하듯 보이는 두 그루 아래, 무릎 높이까지 자란 작은 나무가 하나 더 보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독특한 나무의 생김도, 다 자란 나무들을 옮겨 심었을 숲의 홀로 어린나무도.

[루돌프 디어하트]

[사야야 디어하트]

다른 묘와 달리 이름만 간단히 새겨진 비석.

루돌프, 그리고 사야야. 막연히 군인이라면 국립묘지가 떠오르지만 이 부부는 수목장을 원했나 보다.

이선은 동작이 느려진 인형처럼 사이좋은 나무 두 그루를 올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교목의 줄기를 건드려 보거나, 그 자리에 무릎을 굽혀 앉아 평평한 비석 위를 손바닥으로 쓸어 닦았다. 키가 작은 어린 수목의 새 이파리를 건드렸다가 손가락을 말아 쥐고 한숨 쉬기도 했다.

“가까운 사이였습니까?”

“……네.”

“그렇군요.”

가볍게 어깨를 당겨 그를 내 품에 기대게 했다. 이선은 감사합니다, 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울적해했다.

한적한 숲에 향긋한 숲 바람이 불었다. 산들산들 나뭇잎끼리 스치는 소리가 상냥한 웃음처럼 웅성거렸다. 날 좋은 봄볕이 듬성한 잎새를 비집어 조각조각 빛 얼룩을 뿌리고, 곳곳에서 흰 나무 기둥이 반짝반짝 빛났다.

지이이잉-

문득, 흙바닥을 버스럭거리는 소리와 모터 소리가 섞여 들었다. 고즈넉한 숲에 어울리지 않는 기계음이 이질적으로 이목을 끌었다.

돌아본 방향에서 괴상하게 생긴 장난감이 드득드득 바퀴를 굴려 다가왔다.

남루한 곰 인형의 북슬한 머리 위에는 길쭉한 안테나 한 쌍이 달렸고, 그 몸체는 오디오 스피커로 되어 있다. 집게가 달린 로봇 팔에는 접힌 쪽지가 들려 있었으며, 굴러오는 바퀴는 장난감 탱크의 제법 세밀하게 만들어진 무한궤도였다.

어린이 장난감을 얼기설기 붙여 만든 외형이 누가 보아도 거리낄만 하다. 굉장한 혼종.

“위험해.”

“괜찮습니다.”

느닷없는 물체의 접근에 이선을 가로막고 섰지만, 그는 쏙 빠져나와 곰 머리의 오디오 탱크에게 총총 다가갔다. 곰 인형의 로봇팔이 마치 반기듯 빙빙 돌고, 집게손에 들린 노란 쪽지가 팔락팔락 구겨지는 소리를 냈다.

[ X . X ]

장난치는 건가.

“바차스.”

지직, 지직-. 이선의 부름에 대답하듯이 오디오 곰 탱크의 배에 달린 스피커에서 잡음이 끓었다.

“어디야.”

- Paradise.

“나와.”

- 글쎄.

“내 파동을 돌려줘.”

지직, 지지직. 이번에는 잡음이 끊어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이선의 어깨를 돌려세웠다.

“파동이라니.”

“……제 파동이, 설명은 어렵지만 지금 이능의 일부를 잃었습니다. 되찾아야, 합니다.”

- Sun. 그냥 그대로 살면 안 될까?

“뭐?”

“…….”

- 멀리 도망이라도 가 버려.

나와 이선의 시선이 동시에 탱크 장난감의 곰 머리를 향했다. 지지직, 전파를 수집하는 소리를 내던 로봇 팔 곰 오디오가 기기긱 바퀴를 역으로 굴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성큼 걸어간 이선이 탱크를 채어 올렸다.

“너는.”

- 지직, 직-

“왜 에덴을 만나지 않는 거야. 에덴이라면 분명 너를.”

- 지익, 지직-

“……에덴은 좋은 사람이야.”

- 그래. 완벽하지. 정말이지. 행복해질 자격은 그런 사람에게 있는 것 아닐까?

“자격이라니.”

- 난 안 돼. 이미 너무 많이 망쳤어.

허공에 들린 무한궤도가 헛돌았다.

두 에스퍼가 조성하는 정적에도 나는 이기적으로 이선만을 생각했다. 그 ‘파동’이라는 것을 돌려받는 것과 그러지 않는 것 중, 어떤 것이 그에게 이로울지. 결정을 내리는 데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그러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선택은 이선의 문제고 내게 주어진 역할은 그 결정을 지지하고 그를 곁에서 지켜 내는 것뿐이라.

- Sun. 나는 괜찮아.

안테나가 뿔처럼 솟아오른 곰 인형이 로봇팔을 휘저었다. 무언가 기시감에 인상을 쓰다 그 말이 꼭 이선의 입버릇을 닮아서라는 걸 깨달았다. 아프고, 괴롭고, 외롭고, 힘들 때마다 이선이 내뱉는 습관적인 말.

- 아니, 돌려주면 안 괜찮을지도 몰라. 나 지금 이걸로 버티고 있거든. 네 기운은 따뜻해, Sunshine.

“에덴을 만나게 해 줄게.”

- 이 멍청한 새끼가.

이선은 탱크 곰을 들고 주변을 한 바퀴 크게 돌았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없이 내게 눈짓했다. 기괴한 장난감을 건네받았다.

“멍청한 건 너야.”

그리고 한 방향으로 튀어 나갔다. 우리가 걸어온 방향, 카트가 다니는 큰길 쪽이었다. 미리 말한 대로 몇 분 정도는 기다리려 했지만, 나도 모르게 이선을 따라가기 위해 몸이 움찔거렸다.

생각보다 빠르고, 생각보다 갑작스러웠다. 서둘러 이선의 모바일에 메시지를 넣고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겨우 3분을 채우는 걸 확인하고 즉시 그의 뒤를 쫓았다. 이미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서 두리번거리며 청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오솔길을 벗어나 방향을 가늠하지 못하는데 갑자기 손에 들린 곰 탱크가 지직거리며 다시 말을 전했다.

- 내가 모든 걸 틀어 버렸어. 네 바람을 이뤄 줄 수 없었어.

기계음이 지직거리며 로봇의 한쪽 팔이 빠르게 돌았다. 깊은 생각 없이 그 방향으로 뛰었다. 얼마지 않아 두 사람이 옥신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는 이선, 그리고 일전에 만났던 금발의 남자였다.

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것과 별개로 손안의 곰 인형에게서 시무룩한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 지키지 못했어. 나는 욕심내선 안 돼.

앞선 말은 알 수 없지만, 이 에스퍼들이 닮은꼴인 것은 충분히 알만했다.

“그대로 죽을 셈이야?”

“이 정도면 오래 살았지?”

“넌 대체……. 왜 그렇게 피하는 거야. 너라면 에덴을 망치지 않을 수 있어.”

“이미 망쳤다니까 그러네. 가까이 오지 말고. 만지면 나 아파.”

능글능글 장난기 넘치는 가벼운 말씨의 남자와 이선이 대치 중이었다. 왜인지 세 걸음쯤 떨어진 이선이 허공을 팔뚝으로 가리고 서서는 미는 시늉을 했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너 잘 있는 거 봤으니까 됐어. 그러니까 가서 잘 살아. 이 미련한 새끼야.”

“이거 걷어. 이렇게 폭주하게 안 둬.”

“하여간에 멍청해서는.”

“너는 뭐가 달라?”

“새끼야. 내 삶은 원래가 덤이야.”

- 내 삶은 원래가 덤이야.

같은 목소리가 동시에 서로 다른 두 곳에서 들렸다. 하나는 목소리 주인의 입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내 손에 들린 기괴한 장난감의 오디오 몸체로부터였다. 노란 눈동자가 그제야 이쪽을 보더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 망할. 또 저러네.”

“윤오 씨.”

또? 둘의 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이선의 곁으로 가서 섰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꾸물거리던 이선이 ‘손을…….’ 하고 내 소매 끄트머리를 잡았다. 뭐 그렇게 큰 부탁이라고 망설이는지.

바로 깍지를 껴 그의 차가운 손을 감아쥐었다.

그러자 이선의 머리칼이 바람 없이 흩어졌다.

“아, 젠장. 하지 마.”

풀썩.

단숨에 몰아닥친 순풍, 어쩌면 공간이 이지러지는 느낌. 그리고 이어진 것은 놀라운 광경이었다. 아무런 외압 없이 크게 휘청인 남자가 엉덩방아를 찧었고, 갑자기 중력이 덜어진 듯 숨쉬기가 편해졌다. 이선이 반대쪽 손을 잠깐 들어 올렸을 뿐인데.

그대로 그가 이끄는 대로 넘어진 남자의 곁으로 이동했다. 가까이서 내려다보니 안색이 저번에 언뜻 보았을 때보다도 형편없었다.

누가 봐도 아픈 사람의 안색에다 눈가와 목같이 살갗이 얇은 부위에는 피하 출혈의 흔적이 역력했다. 한쪽 눈의 흰자위도 혈관이 터져 벌겋고 입은 옷은 품이 남는다.

일으켜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뒤편에서 카트 한 대가 언덕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모바일을 꺼내 확인하니 이선의 모바일로 보내온 답신이 보였다. 곧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크게 외치며 달려왔다.

“붙잡아 주세요!”

“아.”

- 에덴.

탈영한 이능 장교, 바차스. 그리고 에덴의 천사님.

이선이 또 무언가 하는 중인지, 무력해진 에스퍼가 곤란한 낯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서서히 체념의 빛을 띠었다.

“처음 뵙습니다. 에덴입니다.”

“…….”

- 에덴.

푸슉, 치지직.

안테나가 돋은 곰 인형에 로봇 팔, 오디오 몸체, 그리고 탱크 다리. 장난감으로 만든 키메라의 복부 스피커에서 일순간 스파크가 튀었다.

놀란 이선이 내게서 연기 나는 장난감을 가져가 멀찍이 내려놓았다.

그리고 에덴이 넘어진 바차스의 옆에 앉아 바닥을 짚은 그의 왼손 위에 그녀의 두 손을 덮었다. 크게 몸서리를 친 바차스가 그대로 넘어가 바닥에 쓰러졌다.

짧은 금발이 흙바닥에 흩어지고 핏기 어린 금안이 맑은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뵙고 싶었답니다. 줄곧요.”

“……젠장.”

창백한 낯에 가벼운 후회가 어렸지만, 그의 뾰족한 귓바퀴가 끝부터 붉어지는 중이었다.

“이제 이름을 알려 주세요. 천사님.”

“…….”

“천사님?”

“……그럼, 나 오른손으로 잡아 주면 안 돼?”

사실 왼쪽은 감각이 없어.

내용과 달리 수줍은 말투에 모두가 당황했다. 이선이 쓰러진 에스퍼의 왼쪽 소매를 찢어 내자 거멓게 군데군데 살이 죽은 피부가 드러났다.

에덴은 차분히 흙 묻은 그의 왼손을 들어 쥐었다. 그러자 멀리 놓인 곰 오디오 탱크가 기괴하게 팔을 돌리고 제자리를 빙빙 돌다 넘어졌다.

“멍청이.”

“……그러게.”

기잉- 기잉-

고장 난 장난감의 무한궤도가 홀로 한참을 돌다 치직-, 지친 바퀴를 멈춰 세웠다.

이선과 남자는 에덴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교류 이후에 둘 다 쓰러져 잠이 들었다. 가이드라곤 하나 그들 없이는 일반인을 벗어나지 않는 터라, 이번에도 역시 곁을 지키고 기다리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훨씬 아이 같은 분일 줄 알았는데, 생각과는 달라서 놀랐어요.”

부드럽게 미소 지은 에덴이 익숙하게 의료 기기를 살피고 다시 침상 곁 스툴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의학 아카데미생이라는 정보가 얼핏 스쳤다. 의료 봉사를 많이 다닌다고.

쓰러진 남자의 거뭇한 얼룩이 남은 팔을 정성스럽게 닦아 내는 손에 문득 시선이 갔다.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은 깨끗한 손이다.

왜 그녀가 군인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짧은 생각은 쓰러져 잠든 두 에스퍼의 얼굴을 차례로 살피는 것으로 끊어졌다. 스스로 망쳐 버렸다 자책하던 기괴한 장난감과 내버려 두라 시큰둥하던 남자. 에스퍼라고 사고방식이 모두 그렇지는 않을 텐데, 이 두 사람은 어쩌다가.

“벌써 2년도 더 전인가요. 여름이었는데, 아직 재단이 초기라 후원이 늘 부족했거든요. 어려운 아이들을 찾아도 구해 내기가 어려웠고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기적같이 도움이 도착하는 거예요. 정말, 기적같이.”

그 기적이 어디서 비롯한 것인지 아는 사람처럼, 쓰러져 잠든 금발의 남자를 보는 시선이 따뜻했다.

“도움이 조금 짓궂어서 놀란 적도 많아요. 신호에 걸리지 않게 된 것도 그렇고, 제가 ATM 옆에 서 있으면 갑자기 600틸씩 인출되어 나오는 거예요. 덕분에 계좌 거래가 잠겨서 수동 거래만 가능하게 됐지만 참 재미있는 분이에요.”

올라간 입가를 단정한 손이 가렸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중에 은행에서 말씀해 주셨는데, 600틸이 무기명으로 가능한 1일 이체 한도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후원을 보내 주셔도 감사를 전할 수가 없었답니다. 자그마치 2년이나요.”

2년이라. 이선을 만난 여름을 셈하다, 해가 바뀐 지도 꽤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삼 년이 되었고, 곧 네 번째 여름이 다가온다.

“후원 사기를 당한 일도 있었는데, 너무 속상해서 울고 났더니 그 금액이 고스란히 돌아와 있는 거예요. 내내 비어 있던 입금자명에는 ‘멍청이’라고 쓰여 있는 거 있죠?”

“멍청이, 라고요?”

“네. 그래서인지, 더 천사님이 아이 같다고 느꼈나 봐요. 장난스럽고, 천진하고, 상냥하고.”

이선의 요청으로 그녀를 불러내고, 합심하여 바차스 전 대령을 속이기까지.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답게 에덴은 어딘가 들떠 보였다. 당겨진 입꼬리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고 차분한 색의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제가 살면서 그렇게 많은 꽃을 받아 볼 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녀에게 돌려받은 이선의 모바일을 손바닥 안에서 굴렸다. 이제는 쓸모없어진 추적 방지 장치를 떼어내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모바일만 주머니에 넣었다.

정말 나타날 것인지 마지막까지 확신하지 못했으나, 결국은 이선의 뜻대로 되었다.

전자 기기가 없는 숲에 전자 기기를 다루는 이능을 가진 에스퍼가 제 발로 나타난다라. 그게 이선을 만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어딘가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 저 남자가 이선을 제법 각별하게 호칭해서 더욱.

“만날 수 있어서 기뻐요.”

만날 수 있어서.

에덴이 중얼거리듯 꺼낸 말을 곱씹었다. 어느덧 이선을 당연시하여 돌아가게 된 내 세상을 문득 깨달은 탓이다.

어느 사이에 나는 차갑고 명징한 겨울의 공기를 포기했다. 방해받지 않는 적막에 이선을 들였다. 해결하지 못할 게 뻔한 문제를 저버리지 않고 골몰하고, 눈앞에 들이밀어진 사실보다 믿고 싶은 것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발버둥 쳤다.

모두 너를 붙잡기 위해서. 내 곁에 살도록 하기 위해. 네 삶의 미련이 되기 위해.

마음이 넘쳐 가슴 속이 버스럭거렸다. 가렵고, 아프고, 먹먹했다.

차가운 손에 내 온기를 넘겨주며, 조용한 부탁을 전했다. 언제고 기다릴 테니, 조금만 기다리게 해 달라고.

이선은 저녁 무렵 눈을 떴다. 하룻밤 더 지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잠이 덜 깬 눈이 빤히 나를 보다 ‘윤오’ 하고 불렀다. 동그란 광대가 샐룩 올라가고 따뜻한 눈동자가 길게 휘어졌다.

퇴원 수속을 서두른 다음 이선을 들다시피 데려와 내 차에 태웠다. 그 조그만 입술에 키스하고 미적지근한 품에서 단 향을 맡았다. 만질 수 있는 온갖 곳을 쓰다듬고 옷 밖으로 드러난 자리에 모조리 입을 맞췄다.

대충 메시지를 몇 개 돌리고 전원을 끈 모바일을 뒷좌석에 던졌다. 그리고 곧장 차를 몰았다.

이선의 부탁도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데까지였다. 이선은 할 만큼 했으니 몸져누운 탈영 장교 따위는 에덴이라든가 다른 누구든 맡으면 될 일이다.

이선은 별다른 질문 없이 조수석에 앉아 발간 입술을 만지작댔다. 시외로 나가는 표지판을 볼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기는 했으나, 그보다 입술을 만지고 나를 흘끔거리는 데 열중했다. 정말이지 요망해서는.

“바다를 보러 갈 겁니다.”

“……바다 말씀이십니까?”

“지금 가면 조금 자고 해돋이를 볼 수 있을 겁니다.”

“네.”

왜 갑자기 해돋이인지, 그걸 왜 봐야 하는지, 조금의 의심도 없다. 어린애였으면 다그쳐서 경각심을 일깨워 줘야 할 것 같은데, 그가 내 곁에서만 저런다고 생각하니 더 곤욕이었다.

운전대 위에서 손끝이 분주하게 타닥거렸다. 당장 만지고 싶은 욕구가 차 안의 훈기만큼 가득했다. 욕심이 이렇게 참기 어려운 거였나.

조용한 이선을 싣고 차는 바다로 향했다. 자주 가던 곳이지만 그것도 벌써 몇 년 전 일이라, 바다가 가까워질수록 새 건물들과 기억에 없는 풍경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원래도 있던 것들인데 잊었을 뿐인지 때로 기시감이 들기도 했다.

도착해서는 우선 식당에 들어갔다. 좋아하는 걸 고르게 했더니 아무것도 골라내지 못한 이선 대신 이것저것 입에 맞을 법한 음식을 여러 가지 주문했다. 소화가 쉬운 위주로 조금씩 맛보게 하니 곧잘 먹었다.

조금씩 천천히 씹어 삼키는 이선이 수저를 쥔 왼손을 꼼지락거릴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왼손을 쥐었다 펴는 것은 배부른 이선의 버릇이다.

숙소를 잡아 이른 새벽까지 좀 자 둘 셈이었지만, 잠들었다 깬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선은 눈을 말똥말똥하게 떴다. 그런 그를 품고는 나도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안아서 재우려던 것과 다르게 키스로 범벅이 된 밤이 지났다. 가쁜 숨을 쉬면서 매달리는 그를 나도 모르게 벗기려다 몇 번이나 욕을 씹고 멈춰야 했다. 하룻밤 정도는 이성을 지키려는 내 노력에 이선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해가 뜰 무렵에는 생각보다 바깥이 차가워서 망설여졌다. 이전까지는 고려하지도 않던 기온이 이제는 최대 고려 사항이나 다름없다. 그냥 실내에서 봐야 하나 고민하는 나를 이선이 밖으로 이끌었다. 아마도 내게 꼭 해돋이를 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쉬운 대로 여분의 점퍼와 새로 구입한 담요로 이선을 칭칭 감아 데리고 나갔다. 혼자 조용히 글을 쓸 때 찾던 풍경에 그를 넣고 잠시간 바라보다 차가운 새벽바람이 그를 시리게 하기 전에 내 품으로 당겼다. 트렁크를 열고 해치에 나란히 앉자 곧 사위가 밝아 왔다.

파도가 떠나고 다시 돌아오는 바닷가에서, 매일을 돌아 다시 떠오르는 해를 보았다. 애틋하고 일상적인 기다림이 보상받는 이 순간을 그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다음에는 서쪽으로 가요. 아우도바도 좋고, 데라주바도 좋고.”

원국의 바다는 동쪽이라 해가 뜨지만 서쪽으로 가면 석양이 지는 바다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온통 이선의 색으로 물드는 그 바다가, 그 풍경에 적실 이선이 보지 않고도 흡족했다.

“언제든 좋으니까.”

둘둘 동여매 놓은 옷더미에서 이선의 손을 꺼냈다. 뒤집어 손바닥을 보인 다음 손끝으로 살살 긁어 가며 한 글자씩 昀旿를 써넣었다.

“……윤오.”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 찬바람에 옅은 분홍빛을 띠는 입술이 조곤조곤 내 이름을 읽고 소리 내 불렀다. 가볍게 입을 맞춰 칭찬했다.

“이건?”

이번에는 오랫동안 준비한 선물을 한 글자씩 넘겨주었다. 조그만 머리통이 기울어지고 기다란 속눈썹이 느리게 파닥거렸다. 같은 글자를 반복해서 작은 손바닥에 남기다 나직하게 소리 내어 읽어 주기도 했다.

“이선.”

“네?”

“이선.”

“…….”

휘둥그렇게 뜨인 눈에 입을 맞추고. 금세 눈물이 고이는 눈가를 닦아 주고. 끝을 붉힌 귓가에는 그간 궁금했을 말을 전해 주고.

바람이 실어 가지 못하게 고백을 속삭여 주자, 예쁜 얼굴이 노을 같은 눈을 일렁거리며 흐느꼈다. 애틋하고 애달픈 그가 내 품을 파고들었다. 다디단 애정이 내게로 쏟아져 나를 적셨다. 언제고 변한 적 없이, 깊어지기만 한 마음이었다.

잊지 못할 광경이 거칠고 잔잔한 수평선 위에 떠올랐다.

아침과 파도와 바람과 그리고

영영 울어도 좋을 아름다운 내 에스퍼.

이선.

- 봄 巸蟬 (이선 : 아름다운 매미)

<겨울 매미>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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