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오 昀旿 (2)
그날 이후로 이선의 방문은 더한 고난이 되었다.
아주 가관이었다. 나를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데, 정작 표정을 간수할 수 없는 건 내 쪽이었다.
내가 어디를 가고, 무얼 만지는지.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 담배는 얼마나 자주 머금는지.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이 따라왔다. 핥는 듯 젖은 시선을 내려 내 몸을 살피다 지레 놀라 눈가를 떨었다. 발견할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거기다 조금 과감해진 이 에스퍼는 섹스에 집착했다. 한 번 일을 치르더니 뭔가 깨달았다는 것처럼 허리띠를 풀러 제 손을 묶기 시작했다.
잘하지 않았냐 묻는 얼굴에는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뭐라 말이라도 걸어 보려 하면 무릎걸음으로 기어와 내 다리 사이에서 눈을 굴렸고, 짜증을 내면 여전히 울었다. 하지만 벌벌 떨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내 것을 입에 물고 싶어서 끙끙대는 걸 보면 내 속에도 불이 났다. 파렴치한 나를 쓰레기통에 처박고 싶었다. 저 에스퍼는 나를 무슨 가이딩되는 좆 보듯 하는데, 휘둘려서 될 일이 아니다. 그런데 몇 번에 한 번씩은 휘말려 섹스를 했다.
가이딩이라지만 내게는 가이딩이나 섹스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미친 변태 성욕자는 나였다. 상대가 나를 좆으로 본다고 정말 좆이 될 필요는 없는데. 그런데 씨발.
좋아하느니 사랑하느니 그런 쓸데없는 타령을 다시 듣고 싶은 건 아니다. 대화를 해 보고 싶기는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에스퍼에게도 이성과 상식이라는 게 있는지 궁금했다. 그나마도 막상 얼굴을 보면 사그라들었다. 무시하기에 급급했다.
나도 모르게 몇 년 전 묻어 두었던 소재를 꺼내 쓰기 시작했다. 에스퍼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으면서 에스퍼를 주인공 삼았다. 쓰다 보면 군데군데 막혔지만 대강의 스토리를 정비하고 틀을 새로 짰다. 짜고 보니 로맨스가 섞였다. 하, 씨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이능에 당한 건 아닐까.
알아보기로, 에스퍼 하나가 가질 수 있는 이능의 종류는 대체로 그 결이 비슷하다고 한다. 이선의 이능은 뼈를 부러트리는 것인지 뼈를 붙이는 것인지 둘 중 하나이니 정신 계열일 가능성은 낮았다. 회복 같은 것일까. 생긴 것과 제법 어울릴지도.
……젠장.
기를 써서 무시하고, 무시하지 못해서 섹스하고.
엉망진창. 섹스를 하고 나면 한 주 내내 후회했다. 강간범이 된 기분이 들었다. 빈도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이선은 잘 울었고, 실수로 욕이라도 내뱉으면 금방 벌벌 떨었다.
에스퍼가 아니라 작은 짐승의 새끼 같았다. 우는 걸 질책한 적도 없는데 울기 시작하면 억지로 울음을 참았다. 소리만 안 날 뿐 등과 어깨가 마구 흔들렸다.
더 나쁜 버릇도 있었다. 인지하지 못하는 듯 보였지만 분명히 자해였다.
말을 섞기 싫어 내버려 두었더니 이선은 내게 손끝 하나 닿지 않으려 기를 썼고 지치지도 않고 제 손목을 허리띠로 묶었다. 허연 살에 금방 멍이 들고 어느 때는 살갗이 까지기도 할 정도로.
내 성기를 입으로 세우면서는 제 허벅지에 손톱을 박았고, 섹스를 할 때는 엎드려 얼굴과 목을 긁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말릴 수가 없다. 내가 뭐라고. 아니면, 내가 뭐라도 될까 봐.
늘 비슷한 셔츠는 이선이 엎드려 엉덩이를 들어 올리면 그 끝이 말려 내려가 마른 등허리를 드러냈다. 흉터가 많았다. 대체로 오래된 흉은 살이 패인 것도 차오른 것도 있었다.
저번에는 배에서 피가 나는 것 같았는데. 군인이 이렇게 다칠 일이 많나? 요즘에도? 그때의 상처는 어떻게 됐지? 이선도 에스퍼에 대해서 도는 소문처럼 회복이 빠를까?
그 좁고 뜨거운 내부를 짐승처럼 파고들면서, 쾌감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생각을 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이선에 관한 생각이었다.
내 앞에 엎드려 다리를 벌린 마른 남자. 그의 결이 가는 머리칼과 참으려 애쓰는 숨소리, 그리고 점점 열이 오르는 차가운 몸을 생각했다. 섹스하면 달아오르는 뺨과 쉽게 울어 짓무른 눈가를.
씨발.
솟구치는 열기를 그 작은 몸속에 내보내지 않는 것은 그나마의 배려였다. 이미 엉망진창이지만, 가이딩과 섹스 사이에 선을 그었다. 그 몸을 탐하는 욕정을 한 번으로 그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기도 했다. 이건 가이딩이니까. 저 에스퍼가 바란 것.
손바닥에 감기는 차가운 살결과 녹을 것처럼 뜨거운 그 구멍은 이성을 마비시켰다. 흔들리는 이선의 골반을 틀어쥐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살랑이는 허리도, 우는 것 같지만 기쁨에 젖은 신음을 흘리는 입도 막았다. 온통 흰 얼굴에 붉은 기가 어리는 장면을 오래 보지 않도록 했다.
그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도록 했다. 내 불행에 집중했다.
이선이 싫다.
* * *
인다비에게 들켰다.
성가신 녀석이 다시 내 집으로 출퇴근하기 시작했다.
‘작가니임, 만나게만 해 주시면! 이! 인다비가! 다아 알아서 하겠습니다! 꼭 인터뷰해 주시게 부탁해 볼게요! 인다비 사회생활 아시잖아요? 장난 아니에요?’
‘인다비. 시끄러워.’
‘아유, 작가님 시끄러우셨구나. 그런데 단 거 좋아하실까요? 출판사에 선물이 들어왔는데 제가 빼 왔지요. 초콜릿이랑 화과자도 있어요. 그래서 언제 만나시는 거예요? 이번 주? 다음 주? 인다비 시간 많습니다! 언제든 좋아요!’
내쫓고 싶은 마음이 만만이었지만 녀석은 내 집 현관을 알아서 드나들었고, 내 일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당장 급한 작업이 없는 걸 아니 더욱 노골적으로 ‘그 에스퍼’ 하며 이선에 관해 물어 왔다.
‘그래서 몸 차가우신 거 말고는 또 어떠세요? 어디가 아프시구 그런가? 초능력은 뭐래요? 얼음 여왕 데이나 괴물 준준 얘기도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아, 언제 오시는데요?’
‘인다비. 조용히 해.’
‘아이구, 우리 작가님 시끄러우셨구나. 인다비가 딱 필요한 질문만 정리해 보겠습니다. 5분만 주세요!’
몸 차가운 것. 그거밖에 모른다. 이선에 대해서 더 아는 건 없다.
‘그러니까, 음, 어떻게 만나셨어요?’
‘…….’
‘헉, 아으어, 눈을 그렇게 무섭게 뜨시며느은 인다비 쫄아요……? 조용히 할까요……?’
어느새 두 번째 겨울이었다. 달에 많아야 서너 번을 만나는 에스퍼와의 관계는 비슷했다. 지겨운 데리다의 전화는 이선의 건강 검진 때마다 걸려 왔고, 용건은 늘 똑같이 ‘가이딩을 더 늘려야 한다’였다. 나는 전화기를 멀찍이 놓고 그 무례한 전화를 받는 척했다.
계절을 거르지 않고 쓰러져 입원하는 에스퍼의 옆에 불려 가 앉아 있는 날도, 내 집에 그가 오지 못하도록 하는 날도 있었다.
이선은 내게서 가이딩을 찾았고, 나는 그 몸에 성욕을 풀었다. 죄악감이고 자괴감이고 이제는 그것도 무뎌져서 무시할 만했다.
언제까지. 그건 아직도 몰랐다. 이능 장교도 은퇴가 있나? 스물 몇 살이었으니, 정년을 따지면 적어도 30년은 더 이 짓을 해야 하는 걸까.
문득 내다 버린 가이드 설명 자료가 아쉬웠다. 다시 요청하기는 싫고.
‘아~ 작가님. 잠시만, 잠시만 저기 들러서 사진 찍고 가요! 안 그래두 가구 샘플 사진이 필요하거든요. 딱이다, 지금이다! 마침 카메라 들고 있는데! 가요? 네?’
한동안 원국에 머물겠다는 말에 신이 난 인다비가 나를 여기저기 끌고 다니려 했다. 전시며 공연마다 출판사에 들어오는 티켓을 가져오며 ‘아, 원국이 이렇게 문화 수준이 높다~. 다른 나라 어디도 이만한 데 없다~.’ 했다.
‘아유, 요즘 집 밖에 잘 안 나가시잖아요~ 이렇게 한 번씩 나왔을 때라도 환기를 해야 한다! 인다비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건강에도 좋고, 글 쓰시는데 영감이 팍팍 떠오를지도 모른다구요!’
소파를 구매한 것은 충동적인 일이었다.
주황빛이 도는 밝은 갈색의 소파는 때를 타지 않는 어둑한 색으로 맞춰 놓은 내 집에 어울리지 않았다. 몹시 거슬렸다. 왜 샀는지 모르겠다고 하루에도 수십 번 생각했다.
그러나 그 소파를 거실에서 치우는 일은 없었다. 내 작업 책상의 맞은편 자리, 이선이 앉는 벽 자리에 주황색 소파가 놓였다.
지긋지긋한 인다비는 근 한 달을 내 집으로 출근해서 나를 끌고 여기저기를 다녔다. 공연, 전시, 식당, 박물관. 답사를 돌아다니는 것도, 관람도 싫지 않았지만 시끄러운 인다비와 함께인 것은 퍽 피곤했다. 그리고 이선의 방문을 거절한 지도 딱 그만큼이었다.
이선이 또 쓰러졌다.
한 달 넘게 만나지 못했으니 그럴 수 있다고, 내심 짐작하고 있었던 만큼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심각했다.
처음 섹스를 했던 벽체가 두꺼운 건물이었다. 이번에 누운 곳은 개별실이 아니라 누가 봐도 중환자실이다. 상반신만이 아니라 머리까지 전극이 뒤덮였고 링거의 가짓수가 확연히 많았다. 수혈도 받는 듯 링거 팩 중에 검붉은 피도 보였다.
눈 밑이 거뭇한 데리다가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서늘한 실내가 평소와 달라 묻자, 실 특성상 온풍기를 틀지 못한다고 했고 파동인지 뇌파인지를 감지하는 기기 때문에 전열 기기를 쓰지 못한다고 했다.
그 여자는 체온이 더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더운 물주머니 같은 걸 쉬지 않고 이선의 몸 곳곳에 채워 넣었다. 언제나처럼 창백한 얼굴에 산소 호흡기를 씌워 놓으니 정말 중환자 같았다. 죽을 것 같았고, 죽은 것 같기도 했다.
한 걸음 다가서 무심코 내민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호흡기 안쪽에 습기가 서리며 붉은 피가 코 아래로 흘러내렸다. 심장이 철렁했다.
놀라 그대로 굳은 나를 두고 데리다는 아무렇지 않게 침상 헤드를 기울여 올리고 호흡기 안쪽에 거즈를 넣어 피를 닦아 냈다.
피는 한동안 계속 흘렀다. 수혈을 받는 게 다 쏟아지는 것 같았다. 거즈가 다 닦아 내지 못한 피가 턱을 타고 목을 가로질렀다. 하얀 베개와 환자복의 목 어림에 새빨간 얼룩을 남겼다.
‘이번에는 돌아가실지도 모릅니다.’
‘……그게 내 탓입니까?’
‘아닙니다.’
싱거운 대화가 끊어지고도 계속해서 심장이 뻐근했다. 이 마른 남자는 억지로 내 삶에 끼어들어 계속해서 죄책감을 지웠다. 원치 않은 감정이 무거웠다.
미동 없는 손을 잡고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상황이 심각했지만, 상황이 심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이딩이 의미가 없다고 했다. 의사가 오가고 부관이 있는 이런 자리에서 섹스를 강요당하는 것보다는 나은데, 군이 이선을 포기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불쾌했다.
왜 내가 불쾌하지?
차가운 손을 몇 시간쯤 잡고 있다가 귀가 조치되었다. 인다비가 어디 다녀왔냐고 캐물었고, 뜻하지 않게 녀석에게 소리를 질렀다. 명백한 화풀이였다. 그런데 화의 정체가 불분명했다.
인다비를 더는 집에 오지 못하게 했다.
초조하게 주말을 보냈다. 손에 일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이런 무력감은 처음이었다.
이선이 죽으면 뭐가 어때서. 내가 죽이지 않았다. 나는 요구 사항을 지켰고, 불합리한 처우를 감수했다. 할 만큼 했다.
그런데 주말이 지나 이선의 방문을 요청하는 연락이 걸려 왔을 때 반가웠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사람이 죽는 건 누구도 반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주 2회로 방문을 늘린 뒤로 이선의 건강 상태는 나아졌다. 이듬해 봄에는 강제 집행을 걸렀을 정도로 좋아졌다. 이제는 나도 가이딩이라는 그 이상한 현상을 믿고 있었다. 내 곁에 있으면 홍조가 오르는 뺨이나 자주 만난 뒤로 좋아진 안색에 기묘한 성취감을 느꼈다.
‘내가 뭐라고.’
피하려고 했던 그 생각은 이제 굳어져 피할 수 없었다. 이선은 나를 필요로 한다.
내가 그의 가이드이기 때문에.
* * *
강제 징병, 인체 실험, 감금, 식이 제한, 전쟁, 상처 치환.
학대가 끝이 없었다.
이 조그만 에스퍼가 덤덤히 내어놓는 이야기 하나 하나에 새까맣게 분노가 일었다. 담배라도 태우고 싶었지만 이선을 흘끗 보고 팔걸이를 두드리며 참았다.
그 정신 나간 태도는 이따위 성장 배경 때문이었나.
내가 겪은 부조리한 처사들이 우스울 만큼 이선은 불합리한 군과 그 미친 연구동이라는 곳의 희생자였다.
본인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무표정한 얼굴로 엄지손톱 주변을 피가 나도록 뜯었다. 다리를 떨었고 목을 가만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렸으며 소리에 민감하게 굴었다.
끊어졌다 다시 울리는 요란한 풀벌레 소리에도 등줄기를 떨고 기절할 것처럼 창백한 낯을 했다. 숨쉬기가 불편한 사람처럼 가슴 한중간을 꾹 누르며 심호흡을 하기도 했다.
아픔과 상처에 둔감하고, 순종적이고, 책임감이 높은. 휘두르기에 저만한 성격도 없겠지.
‘접견’이라는 근무는 아무리 들어도 군이 이선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꼴이었는데, 인지는 하는 것 같지만 그러려니, 그 이상의 감흥은 없는 모양이다. 이용당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의 태도가 심기를 거슬렀다.
일부러 상처를 헤집는 모진 질문을 하기도 했으나 나조차도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는 무용한 괴롭힘은 금세 접었다.
묻는 말마다 벌벌 떨면서도 침착하게 대답하려 애쓰는 모습이, 금세 눈물이 고여 반짝거리는 눈을 하고서 허벅지가 패도록 손톱을 박아 넣는 모습이 불쾌했다.
제 트라우마를 제대로 알고 있긴 한가? 군은 뭐한 거지?
참전 군인이라는 점도 놀라웠고, 고작 18살부터 전장을 전전했다는 이야기에는 미간이 구겨졌다. 배와 등에 있던 여러 흉터는 그 흔적인가? 연구동 실험? 무릎 안쪽에도 커다란 상처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질문이건 깊게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직업에 관한 걸 묻자니 하나같이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내용이었다. 묻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괜히 내키지 않았다.
딱히 소재로 쓸 만한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알고 싶은 부분을 조심스럽게 골라 질문을 이어 갔다. 인다비가 알았으니 책을 마저 쓰기는 해야겠지. 그래도 눈치껏 이선이 곤란해질 내용은 뺄 생각이었다.
모든 질문에 성심껏 대답하는 에스퍼가 무척 난감해하는 때도 있었다. 가이드 센터에 대한 질문과 다른 에스퍼나 가이드를 만나게 해 줄 수 있냐는 요청에서 그랬다.
그런 질문을 들으면 전쟁을 떠올리던 때와는 또 다르게 몸을 떨었다. 금방 울었고, 내내 울었다. 작은 입술을 빠끔거리며 대답을 잇지 못했고, 얼굴 피부가 쓸려 붉어질 때까지 문지르는 걸 말려야 하기도 했다.
궁금증은 질문을 이어 나갈수록 더 커졌다. 이선에게서 들을 수 없다면 가이드 센터든 어디든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난데없이 되어 버린 가이드라는 내 신분을 이해하기 위해서인지 저 에스퍼를 멀쩡하게 고쳐 놓고 싶은 생각 때문인지 몰랐다.
벌써 2년이라는 것이 무색하게, 나는 이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이 이상한 인터뷰는 다시 내 집으로 출퇴근하기 시작한 인다비의 오지랖에서 시작됐다. 진작 접었던 에스퍼가 나오는 소재를 이번에야말로 책으로 쓰자고.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며 귀찮게 구니 이선의 방문을 주 1회로 줄여야 했다. 그렇게 한 달이 넘어가자 일을 하다가도 불쑥, 죽은 듯 누워 피를 흘리던 이선이 떠올랐다.
이대로 계속 이선을 감추다가 들키는 것보다 차라리 인다비가 만나 직접 거절을 듣도록 하는 게 낫겠다, 그런 취지로 시작한 인터뷰가 빗장을 걸어 놓은 내 호기심을 모조리 꺼내 놓았다.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거절해도 된다고 딱딱하게 잘라 놓았으나 이선은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기쁘고 슬퍼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고, 길고 노란 노을을 걸치고 온몸으로 울었다.
참으로 조용한 울음이고 서러운 울음이었다. 내가 물어봐 주기만을 평생 기다린 사람처럼, 나를 좋아하는 에스퍼가 울었다.
이선은 이제 노을이 질 무렵 내 집 거실에 찾아와 노을 같은 색의 1인용 소파에 앉았다. 군 기밀이라는 정보들을 기꺼이 내어 주겠다며 값으로 고작 내 손을 요구했다.
작은 사이드 테이블 위에 한 손을 올려놓고 나를 기다렸다. 마른 손가락이 어색하게 꼼지락거렸다. 가이딩이니 좋아할 수밖에 없다지만 기대와 긴장을 감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저녁 무렵의 긴 햇살이 그 가녀린 몸에 드리우면 동그란 눈이 맑고 투명하게 빛났다. 그러면 팔락거리는 속눈썹 그림자가 진 흰 낯이 조금은 따뜻해 보였다.
모르는 척 손을 내어 주고 있는 동안 그 차가운 손에 점점 온기가 오르고, 시간이 다 될 때쯤엔 아쉬움이 역력한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나도 모르게 그 장면을 기다렸다.
‘왜 내가 이렇게까지 하게 만들지?’
이선이 엮이면 나도 몰랐던 가학적인 면모가 튀어나왔다. 내 발치를 자처한 이선을, 낮게 웅크려 우는 그의 탓을 하면 될까. 답답하고 갑갑한 마음에, 벌벌 떨며 사죄하는 이선을 채근하고 다그쳐 더욱 울렸다.
이선을 제대시킬 수 있을까. 저 불안한 상태를 방치하는 군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계속 군에 둬서는 차도를 바랄 수 없다. 일반 장교라면 정신 감정으로 분명 전역하고 남았을 상태인데 이선은 중령에다 이능 장교였다. 놔줄 거였으면 진작 놔줬겠지. 미친 군부.
짜증스러웠다.
이선을 벗긴 것도 짜증 때문이었다. 내게 바라는 게 있다면 말하라고 했더니 기껏 붉혀 놓은 뺨으로 가이딩을 말했다. 내가 무슨 답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까짓 가이딩을 고려하지 않았던 건 분명했다.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이 에스퍼는 내 말을 어디까지 들을까.
적어도 맨몸을 부끄러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외려 몸에 새겨진 흉과 드러난 갈비뼈를 두고 내가 보기 싫어할까 봐 걱정했다. 뜨끔한 사실이다. 보기 흉하기는커녕 무척 안타까웠으니까. 성적으로 동한 건 아니라도 만져 보고 싶은 몸이었다.
‘자학은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나.’
손을 묶겠다는 헛소리를 말리고 휘청거리는 걸 앉혀 놓았더니, 다시 바닥에 엎드린 이선이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이 서툰 에스퍼는 우는 것밖에 방법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러다 여름 내내 울어 지쳐 쓰러지게 생겼다.
작은 머리통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꺼내 보고 싶었다.
‘안, 안아 주, 세요.’
‘그래.’
가끔 인터뷰 질문에 응할 때를 보면 늘 말을 더듬지는 않는 듯한데. 똑바로 말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동 심리학 책이라도 사서 봐야 하나.
무지막지한 힘에 기이한 이능을 가진 에스퍼라는 걸 종종 잊을 만큼 가벼운 몸이었다. 마른 팔뚝은 끌어당기는 대로 이끌려 와 안겨 들었다. 그렇게 서러울 수 없이, 쉬지도 않고 눈물을 쏟아 내 어깨를 적시고, 조심스럽게 떨리는 팔을 내 등에 감았다.
섹스 후에 간혹 기절하는 이선을 들어 나른 적은 있지만, 의식이 있는 이선을 안아 주는 건 처음 같았다.
체온이라기엔 턱없이 미지근한 등을 목부터 허리까지 쓸어내렸다. 작은 등에 흉터가 많아 못마땅했다. 손바닥으로 쓸어내릴수록 온기가 더해지는 점은 나쁘지 않았다. 허벅지 위의 무게감도, 목과 턱을 비비는 젖은 머리칼도, 참지 못하고 터트린 울음소리도 나쁘지 않았다.
한참을 울다 까무룩 잠든 이선을 데려다 내 침대에 눕혔다.
전황에 크게 관심 두지 않았지만 요즘은 군사 관련 이슈를 꼬박꼬박 챙겼다. 군 관련으로 책을 써 볼까 싶어서, ……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이선이 방문을 취소하고 파견을 가는 날이 늘어서 그렇다는 게 더 진실에 가까웠다.
반군의 소요는 공공 보도보다 잦고 많았다. 규모는 제각각이고 지역도 국경이라면 어디나 해당이었다. 민간인의 피해는 상세히 드러났지만 군인의 피해는 어지간하지 않으면 언급조차 없었다. 같은 시기의 입대 설명회는 화려했다.
군인이라기엔 왜소한 이선이 전투에 참여할까. 잘 상상되지 않는다. 이능 제어와 상처 치환이면 지원 계열이니 후방에 있겠지.
새로 짠 플롯은 소설이라기보다는 군부 고발장에 가까웠다.
* * *
괴물 준준과 가이드 주노.
준장이면 연합군에 둘밖에 없는 최고위급 이능 장교인데, 중령인 이선은 준준에게 평대했다. 이선과 깍듯한 상관, 부관 사이인 데리다를 보다가 동료 같은, 그보다 친구 사이에 가까운 준준, 주노를 보니 감상이 독특했다.
이선은 더듬지 않고 멀쩡하게 말할 줄 알았고, 벌벌 떨거나 의기소침해하지도 않았다. 횡설수설하기보다는 핵심만 짚어 간략하게 대답하는 편이었으며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준준과 주노 앞에서도 내게는 똑같이 굴었다. 말을 걸면 어깨를 튀어 올렸고 눈을 깜빡거리거나 내리깔았다. 목소리는 기어들어 가고 손가락을 꼼질댔다.
준준과 주노는 그런 이선이 낯선지, 내 손을 잡고 고개를 푹 숙인 이선에게 간간이 시선을 보내며 갸웃거렸다.
사람도 변이체가 된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실이었지만, 줄줄이 나열하는 이선의 이능력과 그에 따른 부작용이 생각보다도 많아서 짜증이 났고, 그도 에스퍼 관리동에 들어간 일이 있다는 게 거슬렸다. 그때인가. 그 중환자실 같은 곳. 환자를 방치하던 장소.
따로 가이드에 관해 물어보기 위해 주노와 독대를 요청했다. 그러자 준준은 나를 죽일 듯 노려보며 펄펄 날뛰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에스퍼’를 떠올리면 생각할 법한 그런 인물이다. 덩치가 크고 사나운 군인. 입이 험하고, 폭력적이며, 가이드에게 과한 집착을 보이는.
같은 에스퍼지만 이선은 선입견과는 상당히 다르다. 작고 말랐으며, 처음 본 날 이후로 폭력적으로 군 적은 없다. 자학적이라면 모를까.
벌벌 떨지 않을 때의 말씨는 조근조근하다. 내게 집착을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 덕분에 발이 묶였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 이선은 끝도 없이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려 들었다. 내 호감이 무척 사고 싶은 사람처럼.
‘죄송해요. 준준이 형이 진짜 바보라……. 선이 형 너무 좋은데, 같이 자주 놀러 오시면 안 돼요?’
준준과의 날 선 대화 끝에 이선이 30분을 확보했다. 싸움이 날 것 같으면 인터뷰고 뭐고 다 필요 없었으나, 이선이 나를 뒤에 놓고 목소리를 크게 내는 것은 독특한 경험이었다. 곰을 상대로 아르릉거리는 작은 고양이 같았다.
주노는 긍정적이고 밝았다. 친근하고 순한 말투가 이선을 거듭해서 칭찬했다. 이선의 얼굴과 이선의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했고, 내 인터뷰에 응하는 대신에 이선을 그리기로 한 것이 기대된다고 했다.
이선의 분위기라.
충동적으로 들여놓은 소파에 앉은 그가 떠올랐다. 해 질 녘 그 자리에 앉은 이선을 볼 때면 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여리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상처로 뒤덮인 몸이나, 쉽게 눈물이 차오르는 따뜻한 색의 눈. 그런 걸 말하는 걸까.
‘그것도 사랑이라면 그만한 사랑을 제가 어디서 받겠어요.’
그것도 사랑이라면. 그만한 사랑.
주노는 이선이 나를 사랑한다고 단정 짓고 있었다. 정작 이선은 하지 않게 된 말이다. 그 눈은 여전히 나를 보고 울었고, 그 몸은 내 말 한마디에 바들거렸다. 죄송하다, 잘못했다, 사죄하지 못해 안달을 내면서도 용서해 달라는 말은 꿀꺽꿀꺽 삼켰다. 사랑일까, 공포일까.
단지 에스퍼라 가이딩에 집착하는 것뿐 아닐지. 그렇게 물었더니 주노는 아주 쉬운 일이라는 듯 간단하게 대답했다.
‘내가 사랑으로 만들어 주면 돼요.’
그냥 서투른 사람들이라고, 바보들이라고 했다. 말간 주노의 웃음을 보면 정말로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나 이선에 대해서 뭔가 더 물어보고 싶었으나 30분은 채 반을 넘기지 못하고 끝이 났다.
요란한 소리에 방을 나섰더니 이선이 부엌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반쪽 얼굴이 벌겋게 부었고, 흰 소매를 물들이고 남은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문득 죽은 듯 누워 피를 흘리던 말간 낯이 떠올랐다. 멍하니 그 자리에 멎어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준준을 질책하는 주노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괜찮습니다.’
어이가 없다. 조금만 고개를 기울여도 기도로 피가 넘어가 쿨럭대면서. 손가락으로 긁기만 해도 자국이 남는 피부가 벌써 시퍼렇게 멍이 드는데. 눈가가 부어 눈을 다 뜨지도 못하고서. 이게 괜찮다고?
갑갑함에 혀를 차고 눈은 괜찮은지 확인하는 중에 이선이 또 울기 시작했다. 이제서야 아픈 모양이었다.
뭐라 말하려다 말고 피를 삼키는 이선을 이끌었다. 대충 욕실로 보이는 문을 열고 세면대 앞에 세웠다. 물을 틀어 핏물이 진 손부터 씻기려다, 너무 어린애 취급을 하나 싶어 그만뒀다.
이선이 얼굴을 닦는 동안 쉬지 않고 코피가 흘러 세면대가 붉었다. 그 때문에 어지러운지 비틀거리기도 했다. 초조했다. 수건을 꺼내 코를 쥐고 가느다란 목을 주물렀다. 우는 건 또 왜 우는지, 아프냐고 물어봐도 눈을 깜빡거리며 눈물만 흘렸다.
덩치도 작아서는 그 포악한 에스퍼가 날뛸 것 같으면 적당히 알아서 피할 것이지, 대체 뭐 때문에 싸우고 이렇게 얻어맞았는지. 주노가 말한 서투른 바보들이 맞기는 한지.
그냥 멍청한 군인 아닌가? 이렇게 피가 나도록 주먹질을 하다니. 젠장.
얼른 이선을 데리고 병원을 가야 할 일인데 멍청한 군인과 주노는 현관을 막고 쓸데없는 실랑이를 했다.
그사이 절고 있는 팔을 발견했다. 괜찮다는 이선을 무시하고 소매를 걷었다. 팔뚝을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 주변으로 멍이 크게 들어 있었다. 왼손이 원래부터 불편한 것도 알게 되었다. 참 고루고루 아픈 사람이다.
제 딴에는 나를 지킬 것처럼 막아선 이선을 데리고 당장 그 집을 나섰다. 피로 범벅되어 비틀거리는 것이 위태롭다. 폭력적인 준준 앞에 더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가이딩에서 대해서 더 알아봐야겠다. 가이딩이 모자라서 저렇게 약하고 아픈 거라면 내가 뭔가 해 줄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아프지 않게만 하는 게 아니라 건강하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그의 가이드니까.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이선이 발작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과호흡을 일으켰다.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가까운 병원까지 차를 밟았는데, 막상 도착하니 한다는 소리가 군인은 지정 병원에서 진료받아야 한다는 헛소리였다.
보험 없이 진료비를 낼 테니 당장 봐 달라고 했으나 법이 그렇다는 거절의 말이 나왔다. 손에 뭘 들고 있었다면 집어 던졌을 일이다. 그러나 휘청거리는 이선이 제정신이 아닌 채로 괜찮다 중얼거리기 시작해서 끓는 속을 참고 뒤돌아 나왔다.
바로 군 지정 병원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더 가관이었다. 이능 장교는 군부 내의 의무대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므로 진료가 불가능하다고. 겹겹이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아픈 사람더러 거기까지 가라고? 사람이 언제 어디서 아플 줄 알고?
코피는 멎었지만 퍼렇고 벌겋게 피멍이 든 이선의 왼쪽 얼굴을 보면 화가 났다. 준준과 군에게 화가 나고, 그걸 또 가만히 맞고 버틴 이선에게도 화가 났다. 군부로 돌려보내지 않고 이대로 데리고 가 버리면 어떨까. 하, 치료는 받게 해야겠지.
미리 연락을 받은 데리다가 초소 앞까지 나와 이선을 데리고 들어갔다. 또다시 그 무력감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생각할 거리가 많아 번잡한데, 뒷자리에서 내내 훌쩍거리는 주노가 거슬렸다. 계속해서 울리는 그의 전화벨 소리도.
지금 만큼 이선과 에스퍼, 가이드에 관해 물어보기 좋은 시기도 없겠지만 내 손바닥에 남은 이선의 핏자국 때문에 주노까지 달랠 심적 여유가 없었다. 대충 대리 기사를 불러 주노를 돌려보냈다.
* * *
다시 만난 이선의 얼굴은 눈가에 조금 노란기가 남은 것 말고는 괜찮아 보였다. 여전히 창백한 낯으로 내 차에 올라 우물쭈물 머쓱해 했다.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리고 제 앞머리를 괜히 모양 잡기도 했다. 제복을 입은 걸 보는 건 처음인데 푸른색 제복 셔츠를 입으니 말간 얼굴이 더 하얬다.
군복을 입어도 앳되어 보이는 이선은 가이드 센터로 견학을 가는 내내 작은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다. 그런데 싫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못 하는 걸까, 망설이는 걸까. 다시 또 못된 마음이 들었다. 싫다고 직접 말하기 전까지는 강행해야겠단 생각이.
계급이 높아서인지, 아니면 이선이 눈에 띄는 사람이어서인지, 센터에 들어선 그는 여기저기서 시선을 받았다. 인사를 해 오는 사람도 많았다. 깍듯한 인사를 익숙하게 받는 모습이 낯설었다.
중령이었던가. 제법 무심한 눈길을 하는 것 같더니 나와 마주치면 다시 속눈썹을 바르르 떨었다. 그건 익숙한 모습이다.
‘그냥, 지인……이라고 쓰셔도 됩니다.’
[방문인 ( 이선 )과의 관계 : ]
지인이라. 섹스하는 사이가 그냥 지인일 수 있나?
‘안녕하십니까. 센터 관리 팀장 단이라고 합니다. 오늘 방문 견학 신청 주셨지요? 오랜만입니다 중령님.’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안내인이 이선에게 알은체를 했다. 그리고 방문 일지를 받아 쭉 훑더니, 내 이름과 이선과의 관계가 쓰여진 부분을 손끝으로 짚었다.
‘가이드분, 윤오 님은 오늘 첫 방문이라고 하시니 오늘은 전체적으로 가이드 센터를 둘러보고 궁금한 사항 있으시면 그때그때 질문받도록 하겠습니다.’
비뚜름한 마음으로 써넣은 ‘가이드’라는 말에 이선이 불안해할까, 아니면 좋아할까. 반반을 점치고 있었으나 이선의 동그란 눈에는 금세 감격이 차올랐다. 자주 오는 것 같던데 알아보는 사람이 많은 이곳에서 또 울어 버리는 건 아닐까.
괜히 그의 가슴 포켓에서 방금 집어넣은 신분증을 가져와 살펴보는 시늉을 했다. 놀라 벌어진 입술이 사진에 찍힌 것보다 귀여웠다.
‘가이드의 파동 감쇠 정도나 에스퍼와의 매칭률은 따로 검사가 필요합니다. 보통은 각자 받은 검사 데이터를 대조해서 1차를 뽑고요. 거기서 1차 매칭률이 30퍼센트를 넘어가면 2차 검사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유의미한 매칭률이라고 보려면 아무래도 1차에 60퍼센트 이상은 나와 줘야죠.’
‘그렇습니까. 그 검사를 제가 받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는 울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만 보면 눈을 일렁거리는 이선을 데리고는 힘든 일이었다.
안내인이며 인사를 하기 위해 오가던 직원들이 모두 우는 이선을 보았다. 노을 같은 눈동자는 한 번 깜빡이는 법도 없이 물을 줄줄 흘렸다. 어깨를 들썩여 가쁘게 숨을 쉬면서 눈썹을 일그러트렸고, 내 재킷 상의를 겨우 쥐어 약하게 당겼다.
안아 줘야 할까. 그러면 더욱 울 것 같다는 생각과, 따지자면 가이드 센터가 이선의 일터에 속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잘 우는 에스퍼의 눈가를 닦아 내고 옷자락을 움켜쥔 손을 풀어 내 손을 들려 줬다. 손 정도는 괜찮겠지.
‘뭐가 그렇게 싫은데.’
더 미룰 수는 없다. 알아야겠다. 이 시스템을 이해하고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찾아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서러운 이선을 끌어 매칭 검사실로 내려갔다.
검사실은 조그만 방에 푹신한 의자 둘을 나란히 놓고 가운데 전극이 달린 테이블을 놓는 식이었다.
각자의 몸에도 파동을 감지하는 감지계를 붙였고 방에도 같은 기능이 달린 카메라가 있다고 했다. 실을 따로 쓸 수도 있다고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고 우는 이선을 떼 놓고 싶지 않았다.
말로는 괜찮다고 하면서 이선의 울음은 점점 더 심해졌다. 내게 들려 놓은 왼손 하나 말고는 전신을 다 떨었다. 내려다보이는 이선의 무릎은 제복이 흠뻑 젖어 어두웠고, 억지로 울음을 참느라 때로 히끅거리며 흉곽을 바들거렸다.
야윈 목이 앞으로 푹 꺾어져 흔들거렸다. 저만한 울음을 담기에 저 작은 어깨가 버거워 보였다.
이게 뭐라고. 고작 검사일뿐인데. 이미 내가 그의 가이드라고 하지 않았나? 매칭률을 알아보는 게 뭐가 어떻다는 거지?
마음 같아서는 내가 가이드라는 걸 납득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하고 싶었다. 줄이고 줄여 이선과 나의 매칭만을 보겠다고, 그렇게 타협한 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선은 길을 잃은 어린애처럼 40분을 울었다. 저러다 또 기절하는 건 아닐까. 2주 만에 보는 건데 조금 더 달래서 데리고 올 걸 그랬나.
40분이 지나자 정면에 달린 모니터에 수치와 파동 감쇠도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었지만 총계로 나오는 매칭률 정도는 알 만했다. 유의미한 수치라는 60을 훌쩍 넘기고, 80을 지나쳐 상승했다.
이선의 턱을 들어 수치를 보도록 했으나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뜨지 않았다. 고개를 좌우로 달달 저으며 희게 질린 낯을 쉬지 않고 적셨다. 뭐가 그렇게 무서울까. 뭐가 그렇게 불안할까.
‘싫, 싫어요…….’
‘뭐가.’
‘보기, 싫어요…….’
그렇게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작은 입술이 유약하게 내뱉은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전극을 멋대로 뜯어내고 이선을 끌어안았다.
‘그래, 그럼.’
아이처럼 엉엉 우는 이선에게 내어 준 품이 금방 젖었다. 파고드는 만큼 안아 주고 쓰다듬어 달랬다. 어린애가 아닌데, 잘 참았다고 상이라도 줘야 할 것 같았다. 무척 안쓰럽기도 했다. 괴롭힌 기분도 들었다.
오가는 연구원들이 모두 내게 매달려 펑펑 우는 이선을 보고 놀라거나 신기해했다. 주노와 준준이 그랬듯 이런 모습이 낯선 모양이다.
이선의 다른 모습은 어떨까.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검사가 끝나고도 그는 내 품에서 벗어나려 들지 않았다. 작은 소리에 쉽게 놀라고 금방 눈 밑을 적시며 내 가슴팍에 이마를 붙여 왔다. 좁은 등을 가볍게 두드리면 훌쩍이는 소리가 나고, 아주 소심하게 이마나 코끝을 내게 문질렀다. 어린 소동물이 따로 없다.
어느 때보다도 심하게 울어 눈가가 빨갛게 부어 있는 이선을 혼자 보내선 안 될 것 같아서, 충동적으로 그가 사는 곳에 가 보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데려다주겠다는 뜻과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섞인 그 결정에, 이선이 발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달싹이는 입술이나 홍조가 오른 뺨이 조금 기뻐 보였다.
동쪽 초소에 들어서서 전기 차를 부르려는 이선을 말렸다. 그렇게나 서러웠으니 적당히 바깥 공기를 마시게 하는 것도 좋을 일이라.
그런데 볼에 엉긴 머리카락을 떼어 주려고 들어 올린 손을 이선이 덥석 잡았다. 내심 당황했다. 그는 중령인데 지켜야 할 처신 같은 게 있지 않나, 군부 내에서 남자와 손을 잡고 다녀도 괜찮은 건가.
잠깐 고민했지만 기쁨이 담긴 눈이 반짝거려서 그대로 잡고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선은 다른 이들이 그를 신경 쓰는 만큼 주변 시선을 고려하지 않는 것 같았다.
유명 인사가 분명한 이 에스퍼는 15분 남짓 되는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인사를 많이도 받았다. 지나치며 인사하는 것도 아니고 달려와 경례를 하고 안부를 묻고 그의 옆에 선 나를 흘끔거리는 식이었다.
부관도 이선이 좋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던가. 인망은 좋은 모양이다.
‘대규, 이리로. 근무는 언제 끝나지?’
‘21시에 끝납니다.’
‘내일은…… 보급을 받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깊이 허리를 숙이고 대규라는 남자가 멀어졌다. 이선이 그 남자의 손을 잡을 때는 조금 놀랐다. 악수나 다름없는 가벼운 접촉이었는데 이선의 ‘접견’이 금세 떠올랐다. 에스퍼인가? 접견에 접촉은 필요 없다고 했던 거 같은데. 왜인지 미간이 좁아졌다.
군부 내부는 생각보다 삭막하지 않았다. 단풍이 든 조경수가 많아서 공원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떠밀리듯 웅성이는 풀벌레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미지근한 이선의 손이 움찔거리며 나를 꽉 쥐었다. 흔들리는 머리칼 사이로 홍조가 인 볼이 보였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모르는 새 온통 가을이었다. 얼룩이 진 단풍나무가 꼭 이선의 색으로 흔들리고 흩날렸다. 울어 빨갛게 익은 눈가에서 날갯짓 하듯 속눈썹이 부지런히 팔락거렸다. 가을색 눈동자가 슬쩍 굴러 내 시선을 피하고, 군인을 상대로는 잘도 말하던 입술이 가볍게 빠끔거렸다.
내 에스퍼.
번뜩 정신을 차렸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앞서 걸었다. 이끌려 두어 걸음 걸은 이선이 다시 반걸음 앞장섰다. 그가 사는 곳에 나를 데려가려고. 내게 그를 더 보여 주려고.
보통의 아파트나 다름없는 구조의 관사는 새집 같았다. 쓰는 방은 욕실이 딸린 방 하나밖에 없는 모양으로, 그 방과 부엌 정도만 물건이 있고 나머지는 텅 비었다.
빈방들을 하나씩 보여 준 이선은 아무렇지 않게 나를 침실로 안내했다.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던 나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 에스퍼에게 다른 의도가 없다는 걸 깨닫자마자 옅은 자괴감에 시달리며 문턱을 넘었다.
단출한 방 풍경이 이선과 어울렸다. 책장과 침대, 책상, 붙박이장.
한쪽 벽면을 차지한 책장에는 내 책이 몇 칸을 채웠다. 같은 책도 여러 권이고 판본별로 있었다. 다 읽은 건가. 괜히 머쓱해져 옆 칸을 뒤적거렸다.
이선은 밑줄을 치고 메모를 해 가며 책을 읽는 습관이 있나 보았다. 상담 심리서, 전후 우울증, 트라우마 대화법 등 의외의 서적들을 한 권씩 꺼내 펼쳐 보니, 마치 전공 서적 읽듯이 정독한 흔적이 보였다.
자기 계발서도 마찬가지다. 성숙한 듯 동글거리는 글씨가 군데군데 공백을 채웠다.
성실한 타입. 그러나 우울증이니 상담이니 하는 책들이 본인을 위한 건 아닐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접견 때문에 읽었나.
‘대규……. 아까 손잡은 군인. 그 남자도 에스퍼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에스퍼들을 상대로 가이드 노릇을 하는 에스퍼. 흉으로 얼룩진 마른 몸. 자기 상처는 별로 없다는 말.
내 손을 잡으려 벌벌 떨었으면서 다른 에스퍼의 손을 아무렇지 않게 잡는 이선. 황공해하던 에스퍼.
‘군복을 볼 수 있습니까?’
왜 이선에게는 자꾸만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가만두어도 잘 우는 남자에게 괜히 더 가학적인 말을 하고 그를 시험하듯 구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입어 봐요. 전투복부터.’
‘……네.’
‘여기서.’
놀란 눈을 보며, 또 순진한 애를 괴롭히는 몹쓸 놈의 심정이 되었다. 복잡한 내 속도 모르고 이선은 벌벌 떠는 손으로 느릿느릿 흰 등을 꺼내 놓고 다시 검은 전투복으로 그 몸을 감추었다.
어딘가 헐렁해 보이던 다른 옷들과 다르게 몸에 붙는 전투복이 색정적이었다. 가느다란 목이며 날씬한 다리, 흰 손…… 젠장.
목 어림이 답답해져 손가락을 셔츠 안쪽에 끼워 넣었다. 타이도 없었고 조금도 조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갈증은 뭘까.
변태처럼 아래를 부풀리지 않기 위해 이선에게 이것저것 복장에 관한 질문을 했다. 이미 늦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머릿속으로는 반항 한 번 없이 옷을 벗어 내리는 이선의 자극적인 모습이 몇 번이나 재생되었다.
‘15년이라.’
15년. 이선이 국가 소속이 된 기간은 그 자신의 인생 절반 수준이었다. 아니, 13세 이전의 기억이 없다고 했었지. 그러면 이 불쌍한 에스퍼는 평생을 이용당한 것이다.
땅속에서 수년, 또는 수십 년을 보내고 땅 위에 올라와서는 고작 몇 주를 사는 곤충이 떠올랐다. 방법이라곤 우는 것밖에 모르는 게 이선을 닮았다. 수액만을 조금 먹고 사는 것도, 둥지를 짓지 않고 나무 틈만 약간 차지하는 것도 비슷하다.
이선을 끌어당겨 그가 입은 옷을 하나씩 벗겨 나갔다. 전투복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버클을 끄르고 지퍼를 내리면 된다. 금속이 최소한으로 쓰인 것이 인상 깊었으나 그보단 매끈한 촉감이 드러낸 몸 선에 더 흥미가 갔다.
다소 서두르는 손길에 이선이 당황한 듯 휘청거리다 내 어깨를 짚었다. 허리띠를 벗겨 내자 바지가 떨어져 툭, 버클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이제 이성이 되돌아오려나 싶었지만 그의 흰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살결에 만족감을 느낀 걸 보면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민감하고 쉽게 느끼는 몸을 그대로 눕혀 범하고 싶은 파렴치한 욕구가 솟았다. 이 몸을 남김없이 만져 기억하고 싶었다. 그러느라 울리는 건 괜찮을 것 같았다. 내 밑에서 눈을 적시고 목을 휘어 신음을 흘리는 이선.
문득 엄지에 걸린 기다란 상처가 아니었다면 당장 저질러 버렸을지도. 진작 앞을 세운 이선은 거부하지 않을 테니까.
타인의 상처로 얼룩진 이선의 몸을 하나하나 쓸어 만졌다. 더는 아프지 않은 자국인 걸 알아도 손끝에 힘이 빠지고 미간에는 주름이 잡혔다.
‘가이딩이 필요하진 않을 텐데.’
‘…….’
‘이건 왜 이렇습니까?’
발기한 성기를 지적하는 짓궂은 질문에 이선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내내 울어 붉은 눈을 내리뜨고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꿀꺽 침을 넘기는 울대를 보자 음심이 차올랐다.
지금 가이딩을 바란다고 말을 하면.
이선의 몸은 부드러웠고, 그사이 살이 붙어 더 보기 좋았다. 오래된 흉을 만지다 보니 그 자국들에 하나하나 입을 대 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어금니를 꽉 다물고 손을 놀리던 중, 전투복 상의 아래 톡 튀어나온 조그만 돌기에 손가락이 스쳤다. 풀썩, 신음을 흘린 이선의 허리가 휘었고, 흰 살결이 내게로 쓰러졌다.
가까이 떨어진 그 몸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붙였다. 미지근한 온기가 닿고 향긋한 살냄새가 났다. 얇은 피부 너머로 심장이 크게 뛰고 있었다. 이대로 빨아올리면 이 살엔 금방 자국이 남겠지.
화들짝 놀라 이선을 떼어 냈다. 휘청거리는 이선이 쓰러지지 않게 그 허리를 틀어잡았다. 손등 위로 전투복 상의가 흘러내리고 흰 손가락이 내 손목을 약하게 감아쥐었다.
올려다보이는 입술이 초조하게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나왔다. 외설적인 광경이었고 내 아래는 이미 이선의 것과 마찬가지로 서 버렸다.
기대를 담은 이선의 눈에 죄책감이 들었다. 이 에스퍼는 단지 가이딩이 간절할 뿐인데, 그걸 악용해서는 안 된다. 멋모르는 사람에게 성욕을 푸는 건 파렴치한이다. 가이딩이 필요하지도 않은데 해 버리면 그건 섹스다. 이선이 가이드에게 원하는 건 섹스가 아니다.
하아.
깊고 깊은 한숨이 났다. 내 자신을 이렇게 싫어해 보기도 처음이었다. 나름 담백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선은 나도 모르던 나의 부분들을 꺼내어 마주하게 했다. 가학적이고, 치사하고, 변태적인 모습들을.
붉어진 아랫입술부터 흘러내린 시선이 우묵한 쇄골과 납작한 가슴, 작은 배꼽, 그리고 모아진 무릎까지를 훑었다.
그다음 이선을 내게서 피신시켰다. 살짝 밀었을 뿐인데 금세 흔들거리며 밀려나 붙박이장에 등을 붙였다. 그가 넘어지지 않게 붙들어 세워 놓고 기대가 가득한 눈을 피했다.
어색하게 지나쳐 옷장 속 깔끔하게 걸린 옷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잘 다려진 세탁물의 냄새가 났다. 이선에게서 나는 단정한 냄새와 같다.
새것처럼 정돈된 옷들 중 가장 두꺼워 보이는 옷을 골라 침대 위로 던졌다. 딱딱하고 두꺼운 동절기 옷을 입혀 내게서 가려 놓으면 좀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멍청한 생각이었다. 다시 손을 떨며 전투복 상의를 벗어 내는 이선의 흰 등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바지 앞섶이 답답하게 부풀어 못된 욕망을 드러냈다.
부러 팔짱을 끼고 등을 벽장에 기대었으나, 풀썩, 침대에 주저앉아 목을 휘고 허리를 잘게 떠는 뒷모습을 보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쾌감에 떠는 그 동작이 눈에 익어서 더욱 갈증이 났다.
‘이건,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그 뒤에 다가서서 예복 셔츠 자락을 끌어 올렸다. 상처 많은 맨살이 희게 드러났다. 가랑이 사이를 감춘 손이 딸려 올라간 자리에서, 속옷을 밀어 올린 이선의 성기가 끝을 적신 것을 보았다.
하고 싶다. 덮치고 싶다. 저 다리를 잡아 벌리고 그 좁은 구멍을 파고들고 싶다. 나로 인해 쾌감에 젖어 허덕이는 이선이 보고 싶다. 흐느끼고 울며 올려다보는 그 눈을 핥고 싶다. 신음을 삼키는 울대를 씹고 작게 일어난 유두를 빨아 보고 싶다.
‘……가이딩 필요합니까?’
오늘도 내게 자괴감을 심어 놓고서 이선이 눈가를 떨었다. 미약하게 고개를 젓고 붉은 입술을 열었다.
‘하, 하고 싶, 습니다.’
그대로 셔츠를 당겨 침대로 쓰러트리니 단추가 터져 나가고 날씬한 팔다리가 나뒹굴었다. 흐트러진 흰 셔츠 사이로 드러난 몸이 내 시선을 잡아 삼켰다.
끈적한 욕망이 ‘하고 싶다’는 이선의 섣부른 말에 풀려났다. 짐승을 향한 도발이고 고삐를 끊는 칼이었다.
씨발, 씨발. 스스로를 탓하는 것도 지겹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을 걸 알아서 더욱.
내가 저를 어떻게 함부로 할 줄 알기나 하는지, 이선이 눈치를 살피다가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었다. 앞섶이 헤쳐진 무방비한 차림새로 다가오더니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문질렀다. 가이드 센터에서 펑펑 울던 때처럼, 내 품을 파고들었다.
마구 비벼 대는 얼굴과 턱 아래, 벌어진 자락 사이로 맨가슴이 드러나 보였다. 작은 입술이 내 셔츠 단추를 따라 입을 맞추고 상처 난 아랫입술을 재차 빨아들였다.
말간 얼굴의 매끈한 피부를 매만지고 노랗게 멍 자국이 남은 눈가를 쓸어 올렸다. 울어 짓무른 눈꼬리에는 지치지도 않고 물기가 맺혀 손끝을 적셨다. 그렇게 애절한 눈을 하고 나를 보면, 좋을 대로 해석하고 싶어지는데.
무심코 입술을 건드린 손가락을 이선이 핥았다. 그 말캉한 혀를 그대로 꺼내 빨아올리고 싶었다. 목이 더욱 갑갑해졌다.
‘가지 마세요……. 제가 입, 으로 해 드리면, 들어갈, 가니까…….’
젤을 가지러 가는 동안 흉악한 욕정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힐 셈이었지만, 이선은 그마저도 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불안한 듯 떨며 내 옷을 당겼다.
이대로 그를 범하고 싶은 내 머릿속을 안다면 그러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선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런 개 같은 생각을 하며 이선을 일으켰다. 바닥에 주저앉으려는 것을 거칠게 이끌어 침실에 딸린 욕실에 밀어 넣었다.
혼자 사는 집이라도 물건이 너무 없는 욕실. 거울을 밀어 여니 바로 6개들이 그 빌어먹을 윤활 젤이 나왔다. 개중 하나는 포장이 벗겨져 있었다. 이걸로 여태 집에서 혼자 뒤를 풀고 왔던 건가. 가이딩을 하려고.
끓어오르는 성욕을 내리누르고 이선에게 윤활 젤을 들렸다. 세면대에 기대앉아 도기를 깨트릴 것처럼 꽉 쥐었다. 지금 이선을 건드리면 상처를 입힐 것 같았다.
‘혼자 준비할 때처럼 해 봐요. 싫으면 말하고.’
내가 상처를 입히면 그조차 내색 않고 감수할 사람이라.
흥건한 젤로 손을 적신 이선이 발갛게 홍조가 오른 뺨으로 제 뒤를 헤집었다. 시키지 않았는데도 뜯어진 셔츠 자락을 입에 물어 흰 엉덩이를 내보였고, 마구잡이로 손가락을 쑤셔 넣다 아팠는지 뒤꿈치를 들썩이기도 했다.
그 발목에 걸린 속옷이며, 다물린 입구를 둥글게 문지르고 얕게 파고드는 마른 손가락, 헐떡이는 등과 흔들리는 허리, 내가 만들어 놓은 손자국이 남은 허벅지와 그 사이를 흘러내리는 투명한 젤, 그리고 발기해 까닥거리는 색이 옅은 성기.
씨발.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 나까지 아프게 하기엔 이미 많이 다친 사람이다. 그런데, 씨발.
개새끼, 짐승 새끼, 절제를 모르는 놈, 파렴치한, 쓰레기 같은 자식, 별 욕을 다 하면서도 나는 이선을 질질 끌어 침대에 눕혔다. 겨우 심호흡을 했지만 그 다리 사이에 자리 잡는 걸 멈출 수는 없었다.
단단하게 선 성기 끝이 끔찍하게 기분 좋은 그 틈을 느리게 비집어 들어갔다. 고작 마른 손가락 몇 개로 늘려 놓은 입구가 턱없이 좁았다. 허리를 들어 올린 이선이 침대에 등을 비비자 그 가슴팍에서 셔츠가 흘러 내렸다.
옅은 핏빛이 도는 유두 끝이 뭉쳐 뾰족하게 솟았다. 그 끝을 만져 본 손가락이 간질거렸다. 혀끝이 젖었다. 이선을 잡아먹고 싶은 건 아닐까,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다 헛웃음도 났다. 짐승 같은 스스로를 향한 조소였다.
이 남자는 제 행동이 내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있을까. 등을 비비고 허리를 흔들며 목구멍으로 끙끙거린 이선이 그의 머리맡을 짚은 내 팔에 얼굴을 문질렀다.
힘줄이 선 팔뚝에 이마를 비비고 코를 묻었다가 쪽쪽 거리는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혀를 내어 할짝이다 한숨을 바르고 다시 입술을 비벼 댔다.
힘이 들어가 팔 근육이 갈라지고 좁은 내벽을 파고든 성기가 한층 더 발기하듯 뻣뻣해졌다.
이대로 끌어안고 정신없이 밀어붙이면 어떨까. 분명 기분 좋겠지. 따뜻하고 탄력 있는 이선의 안쪽은 성기를 깊이 물고 놓지 않을 것이다. 덜 풀어진 입구가 빈틈없이 조여 올 테고 고통과 쾌감을 오가는 골반이 파들거리며 들락이는 성기를 반길 것이다.
유연한 팔다리를 누르고, 부드러운 살갗을 함부로 쥐어 손자국을 남기고, 그 살을 빨아올려 흔적으로 뒤덮는 건 어떨까. 창백한 피부를 모조리 붉게 만들면 어떨까.
이선의 이런 모습을 아는 건 나밖에 없겠지.
또다시 그 기분이었다. 기이한 만족감이 들들 끓었다.
겨우 상체를 뜯어내고 숨을 골랐다. 닿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간 성기에서 절절한 성감이 전해졌다. 거칠게 처박고 싶은 욕망을 가다듬기 위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발그레한 볼과 벌어진 입술, 젖은 눈, 이부자리를 헤집는 팔과 동그란 어깨 같은 건 사나운 정욕을 부추길 뿐이니까.
이 에스퍼는 약하고, 이 에스퍼는 쉽게 상처받는다. 이 에스퍼는 곧잘 울고, 이 에스퍼는 싫어도 내색할 줄 모른다. 아파도 참을 것이고, 버거워도 견딜 것이다. 그렇다면 조절은 내 몫이다. 나까지 돌아 버려선 안 된다.
뒹구는 윤활 젤을 낚아채듯 집어 올렸다. 맞붙은 사타구니에 한 통을 전부 쏟아부으며 느리게 허리를 쳐올렸다. 조붓한 입구가 내 것을 빠듯하게 감싼 모습에 재차 욕을 씹어 뱉었다.
차가운 엉덩이를 쥐어 벌리고 길게, 깊게, 가까스로 느리게, 그렇게 안을 탐했다. 냉기가 가시지 않은 무릎이 옆구리를 스쳐 지나고 그 발끝이 시트를 구겼다.
풀을 먹여 빳빳한 예복이 움찔거리는 발뒤꿈치에 밀려 옷걸이째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이선의 팔이 흘러내린 흰 셔츠에 감겨 버둥거리고 짧게 자른 손톱이 내 팔을 스쳤다.
힘줄이 길게 선 목이 이리저리 비틀어지며 더운 숨을 뱉었다. 움찔거리는 어깨가 깊은 곳을 찔러 올릴 때마다 동그랗게 안으로 말렸다. 밝은색 머리칼이 흰 시트에 비벼져 사락이는 소리를 냈다.
‘읏, 흐으……. 흑……!’
하, 젠장. 가슴 한복판에 그득한 열기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 열을 모두 이 시린 에스퍼에게 줄 수 없을까. 답답한 갈증이 매달린 목을 쓸고 갑갑한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렸다.
셔츠 사이로 드러나는 내 가슴팍을 보는 몽롱한 눈빛에 어금니를 다물었고, 무릎을 감싸 쥐기만 해도 알아서 들려 올라가는 이선의 허리를 거칠게 쳐올렸다. 그 좁은 곳을 우악스럽게 들이치며 탐했다.
내게 기꺼운 이 몸을 취하고, 품에 안겨 드는 이선을…….
‘뭐 하는 겁니까.’
‘보기 싫, 싫으실까 봐…….’
이선의 손을 치워 내고 그의 성기를 빼앗았다. 달아올라 분홍빛을 띤 성기 군데군데 초승달 모양으로 손톱자국이 패였다. 짧은 손톱으로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쓸어 보니 우둘투둘 여린 살이 벌써부터 붓고 있었다.
대체 저 노을 같은 머리통 속엔 무슨 생각이 있을까.
통각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어떻게 고쳐야 할까.
내가 보기 싫어할 거라고?
이선은 틀렸다. 발기한 남자 성기를 쥐어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나는 조금의 거부감도 없이 그의 것을 만졌다. 다른 살결처럼 부드러웠고 탄력 있는 살이었다. 몸의 다른 부분처럼 색이 곱고 만져질 때의 반응이 솔직한 것도 같았다.
단단한 기둥을 쥐고 조금 흔들었더니 금세 허리가 비틀렸다. 턱을 떨며 내 손등을 잡았다. 제 성기를 무자비하게 꼬집던 손톱이 내 손등에서는 그저 미끄러져 흘렀다.
이선처럼 잘 우는 그 끄트머리를 엄지로 꾹 누르고 미끄러운 액을 귀두에 펴 발랐다. 내벽이 요동치며 내 것을 물어 저절로 인상이 쓰였다.
이내 옹그린 어깨와 무릎을 파르르 떨던 이선이 사정했다. 성기가 들어찬 깊은 안쪽이 흡입하듯 조여들고 밀어 내듯 두근거렸다.
참지 못하고 그 안을 파고들었다. 들이치고 밀려나는 동안 머릿속이 까맣게 익었다. 치미는 열기를 모두 쏟아부을 것처럼 좆을 밀어 넣었다.
좁은 안쪽을 수도 없이 갈랐다. 허공에서 흔들리는 엉덩이를 더욱 당기고 그 가련한 떨림까지 내 쾌감으로 삼았다.
이대로 안에다 싸 버릴까.
더욱 탐하고 싶은 시뻘건 욕구와 이선을 향한 욕심이 타올랐다. 이 남자는 이미 내 것이니까. 마음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
씨발. 재차 욕을 씹어 삼키고 머리를 쓸어 올렸다. 혀를 차고 몸을 내려 이선을 덮었다. 질끈 감았다 반짝 뜨인 눈이 축축했다. 쾌감으로 흐릿해져서는 빤하게 시선을 맞춰 왔다.
아랫입술을 당겨 무는 이선의 하얀 앞니와 빼꼼 나왔다 들어가는 혀가 보였다. 가느다란 신음을 흘리고 턱을 달달 떨면서 몇 번이나 입술을 핥았다.
‘그대로.’
홍조가 올랐어도 차가운 뺨을 감싸 쥐고 그 귓가에 뭐라 지껄인 다음 계속 맛보고 싶었던 입술을 핥았다. 가슬가슬한 입술과 말캉한 혀가 닿았다.
냉큼 도망가지 않았으면 그대로 혀를 빨아들여 아릿할 만큼 괴롭혔을 텐데. 이선은 눈을 질끈 감고 입술까지 감춰 물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엽게 느껴졌다.
다시금 자글거리는 욕망대로 허리를 흔들어 그의 안을 들락거렸다. 무릎 뒤를 밀어 올리자 이선이 토정한 정액이 가슴팍을 거쳐 목까지 흘러내렸다.
손끝으로 그 액을 집어다 분홍빛 돌기에 문질렀다. 민감한 몸이 지체 없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내벽이 옴짝 조이고 손가락에 문질러지는 유두는 더욱 단단하게 뭉쳤고, 이미 사정한 이선의 성기가 다시 부풀어 올랐다.
푹푹 꺼졌다 다시 차오르는 마른 뱃가죽은 배꼽 아래 들었을 내 성기 자리만 둥글게 부풀어 올랐다. 그 부분을 손끝으로 긁고 뼈가 도드라진 골반을 만졌다. 옆구리를 쓸어 올리고 갈빗대를 더듬은 다음 마른 가슴을 움켜쥐고 유두를 비틀었다.
쇄골에 미끌거리는 정액을 펴 바르고 치켜 오른 턱 아래를 긁었다. 참지 못한 신음을 흘리며 온몸을 떠는 이선이 예뻤다.
‘이건 가이딩 아닙니다.’
언제는 가이딩인 적 있었느냐마는.
* * *
벌써 몇 주 째. 매주 두 번에서 많으면 세 번, 이선의 검진일마다 걸려 와 짜증을 돋우던 데리다의 전화가 없다.
이선의 파견도 길어졌다. 보통은 길어도 사나흘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2주를 넘기는 이 텀은 비정상적이다. 연락을 해 봤지만 부재중이라는 알림만 나왔다.
무소식이 희소식.
연락이 오지 않으면 순조롭고 무탈한 거라고. 연락이 오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이고, 급한 연락일수록 안 좋을 확률이 높다고. 가이드 의무 교육 강사는 그렇게 말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가이딩만 빼 가는 것보다 정기적으로 따박따박 받는 게 훨씬 낫죠. 친분이 쌓이면 심적으로도 편하고 효율도 좋아지구요. 뭐, 에스퍼들이 하나같이 사납기는 합니다. 허구한 날 아프다 보니 성격이 모나게 되는 건지 어떤지…….’
‘…….’
‘기분의 문제는 어쩔 수 없지만 센터 입장에서는 어차피 길어야 20년밖에 안 되는 거 좀 참아 주십시오! 하고 가이드분들께 부탁하고 싶달까요.’
‘길어야 20년은 무슨 말입니까?’
함께 담배를 태우던 중 덜컥 나온 말.
실수였다며 어영부영 마무리 짓고 불씨를 비벼 끄는 강사에게 캐물었다. 언뜻 스치는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아, 그게……. 뭐, 에스퍼의 기대 수명 말입니다. 한 40이 보통이고 길어야 50이라는 말이 있어 가지고……. 그러니까 갓 스무 살짜리를 가이딩하기 시작했다 해도 20년 정도면 은퇴할 수 있다, 이런 말인데.’
‘기대 수명이라니, 어떻게 예측한 겁니까? 통계입니까?’
‘거기까진 모르고 그냥 현장에서 도는 말입니다. 괜한 말을 했군요. 죄송합니다.’
더 추궁해서 자세한 내용을 들어야 할 것 같은데 말문이 막혔다. 다시 피를 흘리는 이선의 모습과 눈을 감은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기대 수명이 마흔이라고? 고작?
서늘한 흡연실에 한참을 서 있다가 필터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버렸다. 교육 장소로 되돌아가지는 않았다.
센터에 마련된 자료실에서 닥치는 대로 통계를 뒤지고 에스퍼 폭주 사건에 관한 기사를 긁어모았다. 운영 시간이 끝날 무렵까지 자료에 매몰되어 있다가 반출되는 건 전부 챙겨 나왔다.
밤을 새워서 가지고 나온 기사를 전부 읽었고, 다음 날은 군 통계청에 에스퍼의 수명을 예측할 수 있을 법한 자료를 수십 종 요청했다.
열람 제한이 있는 정보라 제공할 수 없다는 전화가 걸려 왔지만, 이선 중령의 가이드인 걸 밝히고 새로 받은 등록증 번호를 불러 주니 요청한 정보의 반절 정도를 그날 오후에 보내왔다. 이선의 계급을 활용해 군 통계청뿐 아니라 자료청에도 이런저런 정보를 요청했다.
자료를 취합하고 숫자를 대조할수록 갑갑함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애초에 결론을 정해 놓고 시작한 조사라 중간에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들은 기대 수명이 헛소리고 뜬소문이라고. 그렇게 증명할 수만 있으면 된다.
인터넷을 뒤져 군 기관에 연락했다. 에스퍼의 수명과 이선 중령의 건강에 대해서 물으니 에스퍼의 수명 부분은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했고, 의료 관련 기록은 본인과 의료 관계자 외에는 얻을 수가 없다고 한다.
파견이 언제 끝날 줄 알고 기다려야 하지? 허탈하게 앉아 있다 침실에 방치한 박스가 떠올랐다. 바로 박스를 가져다 거실에 엎었다. 뜯어보지 않은 고지서들과 이선의 건강 통지서 우편이 2년 치,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주마다 매칭 가이드에게 보내는 에스퍼의 기록은 간략했다. 기본적 건강 상태에 대한 주치의의 소견과 파동 관련 지표, 그에 기반한 가이딩 상태 평가.
백 장도 넘는 우편을 시간 순으로 정리하고 보니 이선의 가이딩 상태가 하나같이 형편없었다. 아직 다 배우지 않았지만 대충 기본 교육 교재에 나온 것보다 이선의 가이딩 요구치가 높았다. 훨씬.
이걸 왜 말을 안 했지?
주 2회를 만나기 시작한 후로는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실상은 가까스로 정상 범위에 턱걸이한 수준이었고, 가장 최근의 통지도 마크만 양호로 찍혀 있을 뿐 센터 가이딩을 추가로 보급하기를 권장했다.
나 말고 다른 가이드를, 이선에게?
물론 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다른 가이드들에게 가이딩을 받았겠지. 그래야 살 수 있었을 테니까.
가이드 센터의 기본 교육에서 본 에스퍼의 발현과 이능 사고, 부작용 사례가 차례로 머릿속을 스쳤다. 그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것은 같은 사람이다.
발현 시의 파동을 견디지 못하고 폭사하는 것도,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몸이 허물어지는 것도, 자신의 이능을 제어하지 못한 사고나, 부작용에 따른 사망까지. 모든 사례에서 이선을 떠올렸다.
15년. 잘도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른 에스퍼를 학대한 것은 반군의 수장과 군부만이 아니었다. 그의 가이드인 나와 이 세상까지도 그를 괴롭게 했다. 보통보다 어린 나이부터 발현한 것 자체가 학대의 시작이었다.
에스퍼라는 건 대체 왜 생겨난 거지. 왜 하필 이선이고, 왜 그가 고통받아야 하지? 그 고통은 언제까지지?
며칠씩 잠을 설쳤다. 요청한 자료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공공 도서관을 찾아 오래된 기사와 각종 연구 보도를 뒤졌다. 열람 제한이 걸린 문서가 많았다.
이선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가이드 등록증을 내밀고 이선의 이름과 계급을 팔았다. 뒤늦게 그의 가이드 행세를 하며 에스퍼 연구소를 찾아가 설명을 듣고 자료를 얻었다. 이선의 목숨이 그렇게 짧지 않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이선이 없는 내내 돌아다녔다.
‘근데, 준준이 형 귀엽지 않아요? 잘, 잘생겼는데…….’
‘…….’
‘물론, 선이 형이 워낙 잘생겼지만, 준준이 형도 자세히 보면 귀여워요……. 착하다구는 안 했어요. 좀 못됐는데, 근데 귀여워…….’
이선의 부탁으로 다시 교육을 받는 주노는 에스퍼의 수명에 관한 그 소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가볍게 떠봤지만 감도 잡지 못했다.
그렇다면 교육 과정 중에 나올 만한 공신력 있는 자료는 아니라는 말인데……. 그러나 근거가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생존율과 연령만 따지자면 맞는 소리였으니까.
‘아이, 벌써 수업 시간이에요. 실습이라 또 혼자 있어야 하네. 바보 준준이 형 때문에 매번 너무 심심해요. 손 좀 잡는 거 가지고도 화내구…….’
짧게 한숨을 쉰 주노가 앞자리를 비웠다.
‘기본 교육에 자원해 주신 에스퍼분들은 모두 올해 임관하신 이능 장교 분들이십니다. 파동은 15분 정도 지나야 제대로 영향을 받기 시작하니까요. 간단하게 인사 나누시면서 15분 보내 봅시다.’
척 봐도 앳된 에스퍼들이 순서대로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에스퍼분들께 궁금한 점 여쭤보셔도 좋고요. 에스퍼분들은 가능한 만큼만 답변해 주시면 됩니다.’
내 앞에 앉은 에스퍼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려 보이는 얼굴에 군인다운 덩치가 인상적이다. 밝은 피부 톤이며 붉은 눈과 머리색. 어딘가 서국을, 이선을 연상시키는 따뜻한 색.
‘안녕하십니까. 소위 한타입니다.’
‘안녕하세요.’
‘아무쪼록 서로를 배려하는 실습되기를 바랍니다. 오래 보는 사이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분위기를 띄우는 강사의 말이 끝나자 곳곳에서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났다.
근 2주를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과로한 내 입장에서 웃음 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는 이 어린 군인의 얼굴에도 20년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덧씌워 읽는 중이었으니.
‘어! 선이 형!’
없는 동안에도 내 머릿속을 뒤흔들어 놓은 에스퍼의 등장이었다. 피로가 쌓여 사고가 느린 머리로 주노의 외침을 이해할 무렵에는 이미 교육장에 있는 거의 모두의 시선이 이선에게 쏠려 있었다.
오늘도 그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당연한 듯 마주친 눈이 떨렸고, 시선이 흔들리며 내 앞에 앉은 군인을 향했다.
이 어린 에스퍼가 신경 쓰이는 건가.
정작 이 소위는 이선을 의식하는 것 같은데. 붉은 눈이 나를 볼 때와는 다른 열렬함으로 빛났다. 둘러보니 그런 호의인지 호감인지 모를 시선이 많았다. 계급이 높아서일까, 아니면 이선이라서?
‘형, 저 진짜 혼자 있기 멋쩍었는데. 잘됐다! 윤오 씨 보러 오신 거예요? 이거 가이딩 실습 한 시간은 하는데 그동안 저랑 있어요! 선이 형이랑은 손잡아도 바보 준준이 형이 괜찮다구 할 거야.’
급격히 피로가 몰려들었다. 모종의 불쾌감도 싹텄다.
뒷자리에서 속닥거리는 주노와 이선 때문인지, 내내 이선을 흘끗거리는 이 붉은 머리 군인 때문인지.
짜증스레 이마를 짚고 시간을 흘렸다. 그러나 가이딩 실습은 시작도 전에 끝이 났다.
‘어디로 갑니까?’
무작정 나를 데리고 센터를 벗어나려는 이선을 멈춰 세웠다. 별달리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잘도 사람 팔을 꺾고 나를 끌어내더니, 그다음은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는 건가.
이르게도 눈물을 매단 이선. 가만 보니 그 눈초리가 나를 원망하듯 흘기는 것도 같다.
그간 나타나지도 않고 연락도 안 된 게 누군데. 엄연한 교육 과정을 지금 훼방 놓은 건 또 누군데. 내가 애초에 이걸 왜 하는데.
이선에게 팔이 꺾인 어린 군인도 가관이었다. 굳이 쫓아 복도로 나와서는 반가움이 역력한 낯을 하고 이선이 괜찮으냐 물었다. 안 괜찮으면 그가 뭘 어쩌려고.
내가 이선을 챙기기 전에 이선이 먼저 내 앞을 가로막고 떨리는 목소리로 끊어 뱉었다.
‘소위.’
‘예! 소위 한타!’
‘꺼져.’
어이없는 한숨이 났다. 화낼 줄도 알았나?
‘뭐 하는 겁니까?’
작은 입술을 빠끔거리며 뭐라 대꾸할 것처럼 굴었지만 제대로 나오는 말은 없었다. 선 채로 우물쭈물하는 이선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갑갑했다.
실습 파트너가 화풀이를 당한 것보다, 행패도 부릴 줄 아는 이 에스퍼가 앞으로 십수 년밖에 더 못 산다는 생각이 목 어림을 답답하게 했다.
‘이선.’
‘……네.’
부르면 또 대답은 잘하지.
왜 얘기 안 했을까. 가이드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를 에스퍼라고 모를 리 없을 텐데. 오히려 그들끼리 더 했을 법도 한데. 그렇게 생각한 다음에는 괜한 신경질이 났다.
말 못 했겠지. 씨발. 상식적으로 제 목숨이 얼마 남았다는 소문을 굳이 말로 하고 싶을 리가 없지.
내내 이선을 생각하다 정작 본인을 앞에 두고 짜증을 내는 것도 싫다.
눈치를 보느라 바쁜 저 작은 머리통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내가 좋아서 어쩔 수 없는 사람처럼 굴면서 실상은 그저 그 빌어먹을 가이딩을 좋아할 뿐 아닐까.
‘어디로 가려고.’
‘어디, 든……. 윤오 씨 집으로 가면, 안 되겠습니까?’
역시 또 섹스.
‘주노 씨는 어떡하고요.’
‘주노는 준준에게, ……데리다에게 연락을 해서, 차를 부르겠습니다.’
피로로 당기는 목덜미를 잡아 쓰다듬었다. 이선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으려고.
사실은 정확히 나를 화나게 하는 게 이선인지, 이선의 입에서 나온 다른 이들의 이름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가이딩이 고팠을까, 여기까지 찾아올 만큼? 그럴 법 하기도 하다. 2주는 못 봤으니.
그런데 대뜸 찾아와서 교육을 훼방 놓고 내 집에 가자는 저 낯에 무슨 다른 생각은 없나 싶어 한참 내려다봤다. 가이딩. 섹스. 그래, 딱히 인사도 필요 없지. 가면 할 일은 빤하고. 이선과 나는 에스퍼-가이드 그저 그런 사이니까.
내가 대체 며칠을 밤새워 가며 네가 죽지 않기를 바랐는지 관심이나 있을까.
‘놓고 가자고.’
‘네? ……네.’
‘하. 내가 얼마나 더 참아 줘야 합니까?’
좆같은 기분이다. 개중에 이선과의 섹스를 반기는 내가 제일 좆같고 쓰레기 같았다. 연락 하나 없이 몇 주씩 잠적했다가 대뜸 나타나서는 육체관계를 바라는 이 에스퍼가, 그가 싫지 않은 내가, 바라는 대로 몸을 대 주고 즐길 내가 끔찍하다.
내 앞에서 벌벌 떨고, 말을 더듬고, 눈치를 살피는 이선. 저것도 다 내가 그런 것 같다는 죄책감이 짜증 났다. 내가 뭘 했다고. 내가 뭘 더 해야 했다고.
‘얌전히 에스퍼만 기다리는 가이드가 갖고 싶은 거면 나는 안 되겠는데.’
상처 입힐 게 뻔한 말이 나섰다. 가이드인 내게 매달리는 이선을 울릴 만한 말이다. 못돼 먹은 어린애처럼 이선이 내 말에 상처받는 게 보고 싶은가 보다.
나를 휘두르는 그의 집착을, 이선에게 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런 걸 확인하고 싶은가 보다. 그 마음이 무엇이든 이선이 나를 절절히 필요로 하는 것을.
‘이미 충분하지 않나. 위치 추적. 이동 신고. 출국 금지. 여기서 뭘 더 막을 거지? 아예 밖을 못 나서게 할 건가?’
‘저는, 몰랐…….’
‘몰랐다고.’
단숨에 눈물이 차오르는 눈을 보니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향한 환멸이 차올랐고, 예상했던 희열도 있었다. 이선의 저 충격받은 표정이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수단일지라도.
기왕 말을 꺼낸 거 오늘에야말로 대화를 좀 해 봐야겠다. 에스퍼라고 자기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방법은 없겠지만, 그것 말고도 우리는 해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들어야 할 말도 많고 알려 줘야 할 것도 많았다.
삐리릭-
난데없는 소음이 끼어들었다. 신경이 바짝 섰다. 제때 받지 않으면 신고를 넣어 버리는 미친 여자 때문에 소리로 해 뒀더니 매번 짜증이 인다. 씨발. 욕을 웅얼거리며 전화를 꺼냈다. 데리다는 아니었지만 급하지 않은 인다비의 전화라 바로 끊어 버렸다.
이선을 데리고 차에 가서 얘기를 좀 해 봐야겠다.
그런데 도착한 메시지가 시야 한구석에 걸렸다. 군 자료청이었다. 즉시 회신 전화를 걸며 로비를 나섰다.
엊그제 신청한 논문이 허가 나지 않았다는 연락을 보고 전화했으며, 같은 자료를 이능 장교 중령 이선의 이름으로 받아 볼 수는 없느냐 물었더니 잠시 침묵하다 연구 관련 종사자에게만 보내 줄 수 있다고 못을 박았다.
에스퍼의 발현 시기와 평균 수명과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자료. 안 된다고 하니 더욱더 그 논문이 쓸모 있게 느껴졌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머리를 휘젓고 차를 세워 둔 곳으로 걸었다. 차에 여분의 점퍼가 있었던 것 같은데 가져오며 히터를 미리 틀어 둘 생각이었다. 이선이 겉옷을 제대로 입지 않은 게 걸렸다.
그런데 위태로운 달음박질이 뒤를 쫓아왔다.
뭐 하고 있는지, 멀쩡한지, 그렇게 궁금해할 때는 몇 주씩 나타나지도 않더니, 잠깐 차에 다녀오는 그 잠깐은 왜 또 못 기다리지? 로비에서 주차장까지 멀어야 얼마나 된다고.
‘잘못, 잘못했습니다. 잘못했, 잘못했어요…….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을, 잘못했…….’
번번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바닥에 엎드려 죄를 청하는 이 에스퍼를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조금만 화를 내어도 저렇게 하얗게 질려서 울지도 못하고 떠는데.
이선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내 바지 자락을 감아쥐었다. 손끝이 희다 못해 푸르게 질려 있었다.
‘이선.’
‘잘못했어요…….’
‘대답해.’
‘……네.’
내 일상을 온통 부숴 놓고 그렇게 빌면, 그러면 내가 너를 봐줘야 하나?
네가 불쌍해서?
‘뭘 잘못했어.’
‘전, 부……. 전부 제 잘못입, 니다.’
아무래도 나는 지고 만 모양이다.
도시 하나 벗어나지 못하게 발이 묶여서 몇 년씩 사생활을 감시당하고, 그런 생활이 도무지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면서, 그러면서도 이선이 가련하고 안타까웠다.
내 문을 박차고 들어온 그날부터 울기 시작한 에스퍼의 눈꺼풀이 날갯짓 하듯 떨렸다. 하얀 입김이 너울져 창백한 얼굴 위로 피어올랐다. 못내 아름다웠다.
기꺼이 그 앞에 마주 무릎을 꿇고 그 턱을 들어 올렸다. 손아귀에 감기는 부드러운 살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핏기가 없는 입술이 숨쉬기 힘든 것처럼 빠끔거리고 그 사이로 비치는 붉은 살점이 탐스러웠다.
그대로 내 입술을 마주 대었다. 동그랗게 뜨인 이선의 눈이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내내 절어 있던 피로가 가시고 웃음이 나려는 걸 참았다. 입술끼리 맞부딪혀 그 기분 좋은 촉감을 몇 번 더 느끼는 중에 뭔가 이상한 걸 알았다.
‘정신 차리고 숨 쉬어.’
이선이 고장 났다. 볼을 톡톡 두들기자 그제야 헐떡이며 숨을 쉬었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입은 전에도 붙이지 않았던가?
잘 생각해 보니 그 입술을 먹어 보고 싶다는 파렴치한 생각은 여러 번 했지만 제대로 맛보는 건 이번이 처음 같았다.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다만 놀란 건지. 이선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줄기를 만들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달콤한 입술을 다시 머금었다. 부드럽고 여린 살점을 물어 당기고 그사이의 젖은 속을 탐했다.
정신없이 키스했다. 이선의 찬 등을 덮어 줘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우느라 끈적한 그 입 속이 달았다. 어설프게 굳어 있는 혀도 말랑했다. 차가운 입술과 달리 따뜻한 온기도 마음에 들었고 그 입술의 감촉은 말할 것도 없다.
이선의 예민한 몸은 입이라고 다를 바 없이 반응이 좋았다. 혀를 감고 입천장을 간질이자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엎어진 바닥에서 무릎이 달싹였고, 내 바짓단을 잡은 손이 매달리듯 흔들렸다.
쏟아지듯 품에 들어온 이선을 기껍게 품었다. 하나도 고려하지 않은 것들이 그제야 떠올라 헛웃음이 났다. 여기가 바깥이고, 해가 밝고, 센터 앞이고, 이선과 나를 아는 사람이 그득 돌아다니는 곳이라는 것. 전부 까맣게 잊은 일이다.
이선은 키스를 좋아한다. 그것 하나만 생각했다.
빼꼼 품에서 고개를 든 이선의 입술을 다시 잡아먹었다. 고개를 틀어가며 서툰 그의 혀에게 하나하나 할 일을 알려 줬다. 내 혀를 감으려 애를 쓰거나 끄트머리를 살살 빨아올릴 때는 꽤 귀여웠다. 그래. 이대로 집에 데려가고 싶을 만큼.
한참 그렇게 주변을 무시한 채 키스하다, 그제야 눈에 들어온 붉은 기에 황급히 이선을 떼어 냈다. 이선의 복부가 붉었다. 피가 흥건했다.
‘……씨발. 뭡니까.’
씨발. 씨발. 이걸 왜 지금 알아챈 거지?
‘다쳤어요?’
‘……네.’
기분 좋은 듯 흐릿한 눈을 뜨고 이선이 느릿하게 대답했다. 아팠던 건가. 다친 건가. 젠장.
당장 끌어올려 부축했다. 가벼운 몸이 팔랑거렸다. 차가웠다. 이 계절에 너무 오래 밖에 뒀다. 제대로 서지 못해서 그대로 들고 들어가야 하나 고민할 때쯤에야 이선이 걸었다.
머릿속이 나를 향한 분노로 그득했다. 이 미친 새끼가, 진짜.
센터에 들어가 의무실을 찾으니 이선의 상태를 본 직원이 바로 앞장섰다. 의사도 불러왔다.
서둘러 의무실 병상에 그를 눕혔다. 피에 젖은 군복을 들추고 복부를 크게 감은 붕대를 잘라 냈다. 척 봐도 단면이 예리한 상처와 꿰맨 자국이 드러났다. 피가 배어 나와 얼룩진 그 자리에는 실밥도 아직 그대로였다.
또 그 임무인가.
이 몸에 상처 낼 자리가 어디 있다고.
이선을 놀라게 할까 봐 삼켰지만, 욕이 끊이지 않고 혀끝에 매달렸다. 군인이 씨발, 저렇게 위험한 직업이었나? 휴전 아닌가? 중령이면 좀 현장에서 멀어야 하는 거 아닌가?
영양 수액이든 뭐든 이선에게 이로운 건 다 달아 달라고 한 다음 침상 곁에 앉았다. 잡히는 대로 손에 든 책자를 넘겼지만 눈에 제대로 들어오는 게 없었다. 이따금 질문을 던졌고, 아직도 몽롱한 눈을 한 이선이 작은 목소리로 느릿한 대답을 했다.
턱을 비틀어 입 안을 씹었다. 체온 조절에 문제가 있으니 진작 실내로 옮겨야 했는데, 그까짓 키스에 정신이 팔려서는. 오늘 퇴원했다는, 그런 아픈 사람을 내 집에 데려가 벗길 생각을 했다니.
그러나 이선은 내 이성에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다. 어물어물 물그림자가 진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본다거나 손가락을 들어 부어오른 입술을 만지작거리고, 묻는 말에는 느릿느릿 대답하며 한 번씩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러다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하, 씨발.
얼른 들여보내야겠다. 수액을 다 맞은 걸 확인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황한 이선이 따라 일어나며 제 팔뚝에 붙은 바늘을 전부 쥐어 뽑아 나를 당황시켰다. 그러고서는 또 사죄를 했다.
‘왜 사과를 합니까. 무슨 잘못했어요?’
‘……잘 모르겠습니다. 알려, 주시면.’
‘잘못한 거 없습니다.’
이선은 잘못한 게 없다. 세상이 가혹하고, 군부가 미쳤고, 내가 매정했다. 이 안타까운 생물을 어떡하면 좋을까. 가는 팔뚝에 난 바늘 자국과 거기 맺힌 피가 안쓰러웠다.
내 옷을 입혀 놓으니 턱없이 커 푹 파묻힌 그 몸이 가련했고, 말갛게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내내 나만 보고 있으니 화낸 것도 미안했다. 내게 절절할 수밖에 없는 걸 알면서 그에게 욕정 하는 나는 개새끼였고, 이선은 죄가 없었다. 언제고 그랬겠지.
‘내가 사랑으로 만들어 주면 돼요.’
가이드를 향한 집착이 사랑이 될 수 있다고?
주노의 말이 떠오른 건 이선을 당겨 다시 그 입술을 머금을 때였다. 내 코트를 입은 채 끌려 온 이선이 입술을 벌려 틈을 만들었다.
말캉한 혀가 수줍게 따라나섰다. 모조리 당겨 혀끝을 간질고 허덕이는 숨을 삼켰다. 웃음이 날 것 같은 어색한 움직임을 다독여 기분 좋은 키스를 이어 가는 중에 의사가 들어왔다.
아, 젠장, 또.
누가 들어왔고 그게 의사고 뭐고 나를 올려다보느라 정신이 없는 이선의 젖은 입술을 닦아 냈다. 그러자 이선이 빨간 혀를 내밀어 내 엄지를 슥 핥으며 볼을 붉혔다. 씨발. 이선은 대체 뭐가 문제지? 아니, 씨발, 저게 유혹일 리 없으니 내가 문제인가?
명백한 키스를 보고 가이딩이라 지껄이는 이 기분 나쁜 장소를 얼른 벗어나고 싶었으나 에스퍼 공단에 대한 설명이 길어졌다. 이선에게 묻는 것보다 나을 일이라 묵묵히 듣기는 했다.
그렇지만 나를 빤히 보며 입술을 뜯는 이선은 말려야 했다. 두어 번 말린 다음에는 그 손을 아예 감아쥐었다. 손바닥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사는 동안 문제없던 내 인내심을 다시 시험했다.
역시 내 패배였다. 군부로 귀가하는 차를 불러 주겠다는 걸 거절하고 그를 내 차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선은 긍정했고 나머지는 엉망진창이었다.
그를 데리고 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입을 맞췄고, 조수석에 태워 안전벨트를 매어 주다 또 키스했다. 인형처럼 가만히 앉은 이선을 내가 가만 두질 못했다.
시동을 걸다 말고 안전벨트를 풀고 이선을 덮쳤다. 얌전히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고 발긋한 뺨을 쓸었다. 물기가 어려 반짝이는 눈을 감기고 고개를 틀어 서로의 코끝을 비껴 나게 했다. 좁은 입 안을 온통 헤집고 숨 가빠 하는 혀를 빨아올렸다.
잘도 잘못했다 말하는 혀를 괴롭히고 내내 울음이 맺힌 입천장을 핥았다. 움찔거리는 턱을 쓰다듬고 꼴깍꼴깍 넘어가는 목울대를 간질였다. 헐렁한 코트 틈으로 보이는 쇄골을 긁고 코트 버튼을 하나씩 풀어 내렸다.
드러난 티셔츠 위를 쓰다듬다 튀어나온 가슴 돌기를 손끝으로 긁어내리자 곧장 흐느낌이 튀어나왔다. 어깨를 좁히며 우는 소리를 내는 입을 가로막았다. 이걸 왜 여태 안 했지? 이선의 혀가 달았다.
‘씨발.’
번뜩 정신을 차렸다. 하, 씨발, 젠장. 이선이 입은 티셔츠는 센터에서 직원용을 받은 것이다. 상처가 벌어져 흐른 피가 제복을 적셔서. 그런 환자를 상대로 또 이 쓰레기 새끼가.
‘싫으면 싫다고 해요.’
‘……네? 싫지, 않았…….’
‘미안합니다.’
‘아닙니, 다.’
이선을 너무 어리게 보지 않으려 애쓰는 순간들이 있다면, 이선이 어린애가 아니라고 부득불 우겨야 하는 상황들이 있었다. 내가 멋모르는 어린애를 추행하는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내가 하는 짓이면 뭐든 거부하지 않는 저 에스퍼 때문에.
이선의 가이드가 내가 아니라 나보다 더한 새끼라면, 상처에서 피를 흘리는 그에게도 성행위를 강요하는 미친놈이라면 이선은 어떻게 나올까.
씨발. 이선의 가이드는 나다. 나여야 했다.
신호에 걸려 정차할 때마다 한숨이 났다. 조용히 뺨을 붉히고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이선을 보다가 핸들을 초조하게 두들겼다. 저를 잡아먹고 싶어서 반쯤 발기한 걸 알기나 할까.
서둘러 군부에 들여보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도무지 밟지 못하고 느릿느릿 가는 건 알까. 저 조그만 입술을 맛본 것 때문에 계속 갈증이 이는 이 속은 알까.
‘좋았, 좋았습니다…….’
동쪽 초소 부근에 다다라 차를 세울 무렵 이선이 속삭이듯 말했다.
안전벨트를 풀고 내 코트를 벗어 주려는지 바르작거리는 그의 멱살을 당겼다. 오랜만에 그 입술에서 나온 좋다는 말을 날름 삼키고 그 말을 만든 혀를 옥죄었다. 내내 손가락에 괴롭혀진 아랫입술을 깨물고 앞니 뒤를 핥아 등을 튀어 올리게 했다.
비틀거리던 이선이 내 품으로 쏟아졌다.
불편하게 고꾸라진 이선을 당겨 핸들과 내 사이에 넣었다. 아담한 몸을 안고 그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불쾌한 소독약 냄새가 섞였지만 이선의 살 내음이 좋았다.
바들거리는 떨림도, 미지근한 온기도 좋았다. 어디다 둘지 헤매다 내 어깨를 짚은 손도, 내 귓가에서 조심스레 고르는 숨도, 쿵쿵거리는 요란한 심장 소리도 좋았다.
‘입고 가요. 다음에 주고.’
멋대로 들이닥쳐 내 것이 된 에스퍼.
내 이선.
* * *
이선이 다시 말없이 파견을 간 사이 나는 에스퍼의 수명에 관해 연구한 논문의 저자를 찾아갔다. 강의가 바빠 만나지 못하겠다는 교수의 수업을 며칠 도강하자 마지못해 만나 주었다.
그와 자정까지 대화를 나누고 논문의 카피를 받았다. 여러 가지 자료 추천과 반론 목록까지. 충분히 반가운 것들이었으나 그보다 그에게 들은 조사 사례들이 더 유익했다. 마침내 원하던 결론을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파동의 감쇠 형상(매칭)이 일정 이상 일치하는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지속적으로 받을 경우, 에스퍼는 일반인 수준의 건강과 수명을 영위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임. 에스퍼의 파동 부작용과 전체 수명의 상관관계 특정할 수 없음.]
교수는 적용할 수 있는 사례가 적어 안타깝다고 얘기했지만 내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가이드 센터 연구원의 말로, 나와 이선의 매칭률은 순조롭게 90퍼센트를 넘겼을 것이라 했으니까.
이선을 더욱 내 곁에 붙여 놓기만 해도 그 아픈 에스퍼를 낫게 하고, 빌어먹을 수명 소리를 엎어 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원하는 결론을 내리고 나니 이선이 뭘 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 또 다치는 걸 일이랍시고 하는 건 아니겠지.
기껏 단잠을 잘 수 있게 되었는데 나는 또 밤새 군부 고발장 같은 소설을 끄적거렸다. 이까짓 것으로 이선을 제대시킬 수는 없겠지만, 이능력을 써 대는 초인을 기다리며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나 해 온 타이핑밖에 없다.
그사이 가이드 교육도 마쳤다. 후반부로 갈수록 교육이라기보다는 불쌍한 에스퍼의 사연을 나열하는 허접한 감수성 팔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게 그 작전이 효과가 있었다. 여전히 모든 사례에서 이선을 떠올리는 반사 작용 때문이었다.
가이드 기본 교육을 담당한 강사들이나 직원들과 흡연실에서 시간을 보내면 이선의 이야기가 곧잘 나왔다.
내가 이선의 가이드인 걸 알고서는 한 마디쯤 붙여 보고 싶어 하는 것인데, 그의 유명세나 활약상, 외모 등에 대해 칭송을 늘어놓다가 곧 센터에서 펑펑 울었던 일이 사실이냐 물어 왔다. 혹은 그런 모습은 처음 봤다는 말.
매칭 검사 날 울던 이선의 모습이 어지간히 구미에 맞았는지 날개 돋친 듯 소문이 퍼졌다.
그가 실습 중에 들어섰을 때 몰리던 시선이 떠올랐다. 그게 주노가 말한 분위기라는 걸까. 조밀한 이목구비 이상으로 시선을 끌고 회자되는 것도, 그런 시선에 무감각하던 이선의 태도도 낯설기 짝이 없었다.
언제든 나를 보며 축축이 젖는 그 시선 말고는 이선에 대해 아는 것이 한참 모자랐다.
꽤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쭈뼛거리며 거리를 두는 것도 그랬고, 주노를 통해 이선의 입원 사실을 들어야 하는 것도 그렇다.
대체 이선은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렇게 바라는 눈을 하고서 행동은 멀어지려고 기를 쓰는 사람이나 다름이 없다. 내 곁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이니까, 살려 놓으려면 가서 잡아 와야 하겠지. 어떨 때면 하도 갑갑해서 아예 옆에다 묶어 놓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또 반쯤 이글거리는 속으로 군부를 찾아갔더니, 당장 에스퍼가 아프다는데 군은 깐깐하게 절차를 들이밀었다. 그들이 멋대로 씌워 놓은 내 혐의를 들먹이기도 했다.
가이드 의무가 어쩌고, 군인 위해 시 어쩌고. 귓등으로 듣고 지나친 다음 의무대 앞에서 내렸다. 마중 나온 데리다가 예의 그 발기약과 보급용 윤활 젤을 내밀었다.
씨발. 그딴 식으로 철저한 척하면서 에스퍼의 건강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무능한 군부.
병실에 들어선 나를 보고 놀란 눈을 뜨는 이선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안색은 희게 질리다 못해 어두웠고, 몸은 그사이 다시 살이 내렸다.
상체를 일으키다가도 후들후들 떨리는 팔이며, 군데군데 붙인 전극과 데운 식염수 팩과 여러 개 달린 수액들이 복잡한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이선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피를 흘리던 날과 이선을 처음 안은 날이 떠올랐다.
전자는 두 번 일어나게 두지 않을 일이고 후자는 당장 저지를 일이었다.
‘가이딩. 나는 아무것도 못 느낍니다. 에스퍼가 느끼는 고통. 가이딩에 대한 집착. 그 효과. 뭐 하나라도 내게 알려 준 적 있습니까?’
어김없이 이선을 대할 때면 드러나는 가학적인 면모가 다시 그를 몰아세웠다. 내가 떠나는 줄 알고 침대 아래로 떨어진 이선을 침상에 들어앉히고 서러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섹스로 충분하면 지금 말해요.’
아무래도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있나 본데.
가습기를 틀어 놓아도 희게 부르튼 입술을 보면 저렇게 많은 눈물이 어디서 나나 싶다. 흘끗 보기에도 매달린 수액 종류가 많은데, 이 울보 에스퍼는 눈물로 한 팩은 너끈히 쓰는 것 같았다.
쓰러질 것처럼 휘청이는 이선을 내게 기대게 했다. 꺾어질 듯 마른 등을 쓸어내리고 서러움도 겨운 어깨를 쓰다듬었다. 내 품을 파고드는 뒤통수를 매만지고 젖은 뺨을 맘껏 문지르게 두었다.
이토록 애절한 울음을 보니 또 나의 패배였다. 연락 없이 사라졌다가 멋대로 입원하길 반복하는 이선을 추궁하고 혼낼 마음도 다 녹아내렸다.
떨리는 몸을 앉혀 놓고 그치지 못하는 입술에 키스했다. 차가운 손끝부터 팔꿈치까지 내 손바닥으로 덥혀 가며 가만가만 쥐었고, 딸꾹질하듯 히끅 대는 이선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선을 안았다.
겁도 없이 더 해 달라고 보채는 몸을 잡고 쾌감에 겨워 튀어 오르는 허리를 침상의 흰 시트에 내리눌렀다. 바짝 일어난 색이 고운 성기와 유두를 희롱하고 그 살갗을 남김없이 쓸어내렸다.
미지근한 물주머니며 모포며 전극 줄 따위가 차례로 밀려 떨어졌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분홍빛이 어린 뺨에 입을 맞추고 애가 닳아 벌어지는 입술에 키스했다. 가쁜 숨을 쉬는 가슴팍을 내 몸으로 덮고 눕힌 등 뒤에 팔을 넣어 끌어안았다.
내 끓는 열기로 이선의 냉기 어린 손과 무릎을 잡았다. 섹스로 서서히 체온이 올라 붉어지는 몸은 하반신에 오르는 성감 이상의 쾌감을 머리에 전달했다.
내 아래서 눈을 적시고 목을 비틀며 신음을 삼키는 이선을 샅샅이 살피고, 제대로 가누지 못해 휘적이는 그의 팔다리를 내게 감았다. 비비적대는 등을 끌어 내리고 들뜨는 허리를 더욱 가까이 당겼다.
흐느끼며 쾌감에 겨워 떠는 어깨를 품고 그 가녀린 맨살에 입술을 묻었다. 떨리는 가느다란 목과 턱, 입술을 삼켰다.
달뜬 한숨을 내쉬던 이선이 어느 순간 살풋 웃었다. 가볍게 입꼬리를 당겼고 휘어 접은 눈이 반짝였다. 투명한 물줄기가 동그랗게 올라간 광대를 둘러 미끄러졌다.
아랫배가 지글거리는 광경에 아득, 입 안을 씹었다. 약한 몸을 거칠게 탐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다치게 해서는 안 될, 이미 상처가 많은 몸을 느리게 쓰다듬으며 호흡을 골랐다. 나를 미치게 하는 흰 살결이 손바닥에 감겼다.
입을 대면 살냄새가 향긋하고 핥아 올리면 단맛이 나는 몸. 곁에 두고도 피하고 무시하느라 급급했던 시간이 아쉬웠다. 마구 헤집으면서도 갈증이 나는 이 쾌락이 기이했다. 비정상적이었다.
몇 번이나 절정에 몸을 떨면서도 이선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몸을 흔들었다. 달달 떨며 품에 안겨 들었고, 계속해 달라며 다급한 목소리로 매달렸다. 내가 어디까지 돌아 버려야 만족할지.
‘……아해요. 죄송…….’
정말이지, 정도를 모르는 에스퍼. 사람 하나를 통째로 돌게 만들고도 저만 애달픈 줄 아는 이 조그만 짐승.
닿을 수 있는 가장 내밀한 접촉이 이어졌다. 그를 파고들며 신음을 흘리고 숨을 허덕이는 입술을 범했다. 숨이 가빠 들썩이는 어깨를 짓누르고,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보면서 남은 숨을 빨았다.
아주 이상한 이선.
그 깊은 속에 처음으로 사정하며 짙은 만족감을 느끼는 건 나인데, 울며 기뻐하는 건 그였다.
내 품에서 훌쩍거리며 빠져나가지 못하게 더욱 안겨 왔다. 자리에 눕히려고 하면 내 목에 이마를 비볐고 날씬한 허벅지 안쪽으로 내 허리를 감았다. 바들바들 어깨를 떨면서 바짝 매달렸다.
그대로 들어 안고 한참을 앉아 등을 토닥였다. 쉬지 않은 울음이 점차 줄어들고 훌쩍이는 소리가 작아졌다. 벌렁거리던 이선의 심장 소리가 나와 맞춰 뛰었다. 벗은 몸에도 조금은 훈기가 돌았다.
어느 순간 내 등을 감은 팔에서 힘이 빠졌고, 어깨에 툭 떨어진 고개에서는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났다. 울어서인지, 섹스 때문인지, 아파서인지, 아니면 전부인지. 이선의 잠이 곤했다.
그대로 두면 배가 아플 일이니 그를 안고 욕실에 데려가 몸을 씻겼다. 손가락이 들어가기에도 좁은 뒤에서 정액을 긁어내고 상처와 링거를 피해 부분 부분 더운물을 적셨다.
늘어진 몸을 닦이고 마른 수건으로 살살 물기를 닦아 냈다. 다 큰 성인 남성을 무릎에서 내려놓지 않고 씻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 불편을 감수할 마음이 넉넉했다.
파동 감지계 전극을 멀찍이 치워 버리고 전열기를 받아 왔다. 누운 자리에 따뜻하게 깔아 준 다음 금세 차갑게 식는 손가락을 오래오래 주물렀다. 고른 숨을 내쉬는 입술이 귀여워 몇 번 입을 맞추기도 하고 닦여 놓은 몸에서 나는 비누 냄새를 킁킁거리기도 했다.
내내 가라앉지 않는 내 하반신은 무시했다. 그쪽은 이선을 조금 더 건강하게 만든 다음 사정을 봐줘도 될 일이니까.
지극정성이네.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싫지 않은 게, 모르는 새 이미 중증이었다.
* * *
일을 동시에 벌이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이선이 끼어든 다음부터는 자연히 그렇게 됐다. 관심사가 대번에 늘어 버린 탓이다.
교정고가 넘어오기 전까지는 에스퍼에 관련해서 추천받아 온 자료를 읽었고, 미리 받은 가이딩 심화 세미나 교육 자료도 훑어봤다.
기본 교육을 이수한 가이딩 봉사자를 대상으로 제한된 인원을 받는 수업인데, 수업 내용에 맞게 수강 희망생에게 봉사 이력을 요구했다.
내가 다른 에스퍼와 손을 잡는 것만으로 울었던 이선을 생각하면 봉사는 포기해야 했고, 대신 이선의 계급을 들먹여 빈자리를 얻었다. 재차 생각하지만 중령이라는 계급은 결코 낮지 않았다.
초겨울 내내 매달린 조사는 만족스럽게 끝맺었으나, 그 방향을 이선의 건강으로 돌리고 나니 다시 알아볼 게 산더미처럼 많았다.
에스퍼의 폭주와 이능, 포악한 성정 등을 다룬 자료는 많지만 정작 그들의 건강과 가이딩하는 방법에 관한 연구는 수준이 뒤떨어졌다. 경험적으로 알아 갈 수밖에 없는 걸까.
그나마 신뢰성 있는 자료를 걸러 읽던 새벽이었다. 멀찍이 둔 모바일이 울렸다.
>[윤오 씨. 이ㅅ]
몰두를 망치는 그 뾰족한 소리에 신경이 곤두섰지만 발신인을 확인하고 인상이 펴졌다. 막 도착한 마무리가 허술한 문자 메시지의 발신인 탓이다. 이선이 처음으로 보낸 것.
내 이름은 멀쩡히 쓰고 어물어물 끊긴 뒷부분은, ……제 이름을 쓰려던 건가? 뒤로 갈수록 줄어드는 이선의 목소리가 떠올라 어울리는 것도 같았다.
고민 없이 바로 전화를 걸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전화를 받은 이선은 말이 없었다. 대신 거센 바람 부는 소리가 들렸다. 밖인가?
‘뭐예요. 이 시간에. ……밖입니까?’
- 윤, 오 씨. 이선, 입, 니다.
이선이 떨고 있었다.
- 윤오, 씨, 제가, 여쭤보고, 봐도……. 제가, 윤오 씨를, 윤오 씨…….
‘어디에요. 장소. 전화 끊지 말고.’
- 시내, 여기……. 시내인데, 모르, 모, 제가 어떻, 어떡하면 좋을…….
벌벌 떨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것이 패닉 상태에 접어든 것 같았다. 시내? 지금 시간이 몇 시고 기온이 몇 도인데 이선이 바깥이지? 그 부관은 뭐하고?
소리 나지 않는 욕을 잘근거리며 코트와 차 키부터 챙겼다.
‘보이는 거 다 말해 봐요.’
더듬더듬 이어지는 이선의 말은 바람 소리에 가려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볼륨을 최대로 키운 전화를 옆에 놓고 우선 시내로 달렸다.
그를 태울 것이니 히터와 열선도 켜 두었고, 뒷좌석에는 여분의 점퍼도 있다. 이제 사람만 찾으면 되는데 이선이 멀쩡하지 않은 탓에 난이도가 높았다.
가이드 센터 방향 외곽으로 서행하며 이선이 토막토막 넘겨 준 힌트들이 들어맞는 곳을 찾아 헤맸다.
- 윤오 씨……. 윤오, ……윤오…….
찾아 헤매느라 날 선 신경이 이선이 종알거리는 내 이름에 헛웃음이 되어 사그라들었다. 옹알이하듯 수십 번도 넘게 중얼거리는 걸 대답을 해 줄까 하다 말았다.
나도 모르게 올라간 입가를 문지르고 주변을 살피는 시선을 더 날카롭게 했다. 인적 없고 가로등도 드문드문 서 있는 이 어딘가에 몸이 차가운 내 에스퍼가 있다.
- Like nothing happened at all…….
생각보다 금방 찾아지지 않자 조바심이 났다. 내려놓은 전화에서는 가느다란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거센 바람 틈에서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그 노래의 진원지를 찾아 차가 들어가는 골목을 모두 뒤졌다.
‘이선? ……이선!’
- …….
‘젠장.’
바람 소리만 나는 전화 하나만 달랑 들고 내려 새벽의 골목을 돌다가, 다시 차를 몰아 근처로 이동하고, 그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통화는 연결되어 있는데 어느 순간 이선이 말이 없어져 더욱 초조했다. 이 근처일 텐데 빌어먹을 구도심, 거지같은 골목들. 그 가느다란 에스퍼는 도대체 어느 틈새를 찾아 들어가 숨은 건지.
그렇게 검은 새벽이 퍼렇게 질릴 때까지 한참. 목이 갑갑하게 열이 차고 내뱉는 숨이 모조리 담배 연기처럼 하얗게 질릴 때에, 어느 골목 가로등 아래 처량하게 앉은 이선을 찾았다.
안쓰러우려고 작정을 해도 이선만큼 할 수가 있을까.
사람 하나 찾겠다고 한겨울에 땀나게 뛰어다닌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다 큰 어른을, 군인을, 에스퍼를, 이선을 찾겠다고.
울컥 짜증이 치밀었으나 그보다 서둘러 얼음장 같은 몸을 내 옷으로 감쌌다. 창마다 허옇게 김이 서린 차에 태워 놓고, 이선이 떨어트린 군용 모바일을 주웠다.
계속 울리는 부관의 전화도 대신 받았다. 뒤늦게 모시러 가느니 하는 그 여자에게 내가 이선을 데리고 있겠다 통보했다. 이 상태로 군부에 돌려보낼 수는 없는 일이니까.
‘왜 이렇습니까.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덜덜 떨리는 무릎을 흘끗 보고 실내 온도를 조절하려 손을 뻗었으나 이미 최고 온도였다. 답답하게 느껴지는 훈기를 그대로 두고 사이드 미러 부분 쪽 창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대답 없이 멍하니 앉은 이선의 귀 끝과 코끝, 뺨이 붉었다. 그를 더욱 어리고 안쓰러워 보이게 만드는 빨강.
‘가이드 센터? 가이딩이 필요했습니까?’
최대한 담백하게 잘라 낸 질문에, 이선이 다른 가이드의 가이딩을 받았다고 긍정했다. 이 밤중에 가이드 센터에서.
센터에 마련된 간이 숙소가 얼핏 머리를 스쳤다. 거칠게 액셀을 밟아 속력을 냈다. 요구될 경우 최대 성행위까지 가이딩이랍시고 해 댈 수 있는 방. 이 시간에 거길 들어갔다 온 건 아니겠지. 다른 어떤 가이드가 얌전한 이선을 상대로…….
씨발. 에스퍼-가이드 관계는 연인이 아니다. 그런데 자꾸만 모자란 독점욕을 부리는 내가 우습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가이드니까,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도 내게 알렸을, 씨발. 내게 뭐 하나 제대로 알려 주는 법 없는 이선인데, 그가 말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나는 알 방법이 없지 않나.
분별없이 솟구치는 화를 이선에게 쏟아 내지 않으려고 텅 빈 도로를 더욱 미친놈처럼 달렸다. 이를 악문 질문은 가능한 짧게 끊었다.
‘왜?’
‘바차, 동, 동료가 죽, 가이드가……, 어떡하면 좋을, 몰…….’
찬바람에 부르튼 빨간 손가락이 벌벌 떨리며 목을 긁었다. 목이 멘 듯 띄엄띄엄 말을 뱉고 숨을 몰아쉬었다. 제 목에 붉은 손자국을 새기고 눈을 글썽거리면서도 쉬이 울지 못하는 이선. 통화로 짐작한 대로 패닉 상태다.
뭐든 말하려고 애쓰다 꿀꺽꿀꺽 힘겹게 침을 넘기는 걸 보고 이마를 핸들에 붙였다. 가능하면 내 머리를 깨 버리고 싶었다. 쓰레기 같은 것도 정도가 있지, 이선 앞에서 나날이 형편없는 자신에게 한숨이 났다.
‘올라가서 얘기해.’
몇 걸음에 한 번씩 발을 저는 이선을 들다시피 이끌어 올라갔다.
따뜻한 곳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지만 난방이라곤 온풍기 하나밖에 없는 집이라, 그거라도 켠 다음 이선을 위한 거실 소파에 앉아 그를 당겼다. 조금 힘을 줬을 뿐인데 가느다란 몸이 쉽게 무릎 위로 쓰러져 안겼다.
웅크려 덜덜 떠는 턱을 내 어깨에 얹게 만들고 차가운 허벅지를 당겨 냉기를 쓸어 냈다. 길쭉한 두 다리를 한쪽 팔걸이에 올리고 몸은 통째로 내 품에 넣었다. 작다고 해도 다 큰 남자라는 건지 어깨나 무릎이 비죽 비어져 나갔다.
밤공기 냄새가 나는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미약하게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인가 싶을 만큼 희미했지만 늘 그에게서 나는 깨끗한 세탁물 향에 섞인 그 냄새가 가이딩을 받고 왔다는 말과 어우러져 제법 거슬렸다. 어이가 없다. 내게서는 담배 냄새나 날 일인데.
얌전히 안긴 이선은 한참이나 더 추위에 오들거렸다.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한숨 같은 숨만 쉬었다. 재촉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부서질 것 같은 등을 다독였다. 그가 다른 사람과 가이딩을, 나와 했던 것들을 했을까 싶어 혼자 끓던 못난 질투는 내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이선으로 조금씩 증발했다.
‘어떡,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 어요…….’
오래 지나 나온 조그만 목소리는 겁에 질린 것처럼 조심스럽고 유약했다.
‘제가, 어떡하면, 죽으, 죽는 건 싫, 아니, 그분도…….’
그분? 죽는 건 싫다고?
‘네 일이야?’
‘…….’
겨울에 접어들고서 장의 예식을 몇 개나 치렀다 했던가. 막상 동료가 죽은 얘기를 덤덤하게 하기에 익숙해진 줄 알았더니 단지 누르고, 또 품고 있었나 보다.
‘그럼 당사자한테 말해.’
이렇게 괴로워하고 무서워하면서, 그러면서도 제가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선의 책임감이 안타까웠다. 누가 이 작은 에스퍼에게 계속해서 짐을 지우나. 힘들면 내려놓는 법, 도움을 청하는 법은 왜 가르치지 않았지.
‘네 일이 아니야.’
이선이 턱 막힌 숨을 내쉬었다. 울음이 차오르는 모양이다.
더욱 안기는 몸이 잘게 떨렸고 목덜미에 닿은 짧은 한숨은 내 척추를 따라 저릿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어깨를 올려 고개를 들린 다음 부르튼 입술과 새어 나오는 울음을 한 번에 삼켰다. 까슬거리는 입술을 핥아 가르고 젖은 혀를 꺼내 물었다. 차가운 입술 안쪽은 항상 맺힌 서러움 덕에 단맛이 났다. 가볍게 빨아들이자 손바닥 아래서 등이 움찔거렸다.
입혀 놓은 코트 아래 빼족 나온 두 무릎을 쥐고 쓰다듬어 찬기를 빼앗았다. 동그란 뼈가 가만가만 흔들리다 이내 잠잠해지고, 망설임이 묻어나는 이선의 팔이 조심스레 내 어깨를 짚었다. 칭찬을 겸해 등허리를 두드려 주고 상의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두툼한 겨울 코트 안에서 간신히 온기가 고인 몸을 쓰다듬고 그를 죄어 울지도 못하게 하는 제복을 헤집었다. 어깨를 움츠려 조금 피하는 시늉을 했지만 이선은 그대로 버튼을 풀게 두었다. 내맡긴 몸에서 순서대로 내 코트와 군 제복 상의가 벗겨졌다.
젖은 소리가 마주 닿은 그와 내 입 사이에서 빚어졌다. 턱을 밀어 재촉하면 어설프고 다급한 반응이 매달리듯 따라왔다.
움찔거리거나 바르르 떨면서도 내 손바닥에 제 몸을 밀어붙였고, 예민한 구석이 만져지면 붙은 입술 사이로 달뜬 숨을 뱉었다. 질끈 감은 눈가가 반짝거렸다. 그새 기다란 속눈썹이 젖어 있다.
할딱거리며 가소롭게 혀를 움직이는 이선이 귀엽다. 그의 순순한 태도가 사랑스럽다. 제 몸을 온전히 허락하는 모습은 욕망에 불씨를 당겼고, 내게만 그렇다는 건 오싹한 전율이었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이 에스퍼로 인한 무수한 고뇌가 이제는 진작 거쳤어야 하는 일이 아니었나 싶다. 이선의 몸은 더 일찍 취했어야 할 내 것처럼 여겨졌다. 그가 나를 원해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못내 기뻤다.
내가 그의 가이드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무용한 생각이 아직도 번뜩 찾아와 짜증을 일으켰다. 이제 와서 결론은 하나밖에 없다. 이 순진한 에스퍼가 내게 오게 더 노력하는 것.
‘내가 사랑으로 만들어 주면 돼요.’
이선이 나를 사랑하도록.
그가 에스퍼가 아니고 내가 가이드가 아니더라도.
이선을 무릎 위에서 내려놓지 않고 속옷까지 벗겼다. 온풍기로 훈훈해진 실내에 흰 나신이 드러났다. 불편한 자세 때문인지 아니면 부끄러움 때문인지, 그가 꼼질 거리다 무릎을 붙이고 내 품에 파고들었다.
내 목덜미에 대고 기대 어린 숨을 몰아쉬는 이선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내게는 아직도 미지근하기만 한 이선의 팔뚝과 등허리, 엉덩이와 허벅지에서 한기를 덜어 내고 뼈만 도드라진 발목을 감아쥐었다. 매끈한 발뒤꿈치를 만지작거리자 이선이 어쩔 줄 몰라 했다. 다시 그 입술을 삼켰다.
‘……히읏!’
오금을 간질이고 날씬한 허벅지를 손끝으로 긁어 올렸다. 이선의 턱이 비틀려 올라갔다. 솔직한 몸은 벌써 옅은 색 성기를 세우고 있었다.
‘혀 내밀고.’
빼꼼 나온 혀를 핥고 그 아래를 찔렀다. 당황해 날름 제 입술을 핥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뒷머리를 당겨 더욱 깊게 혀를 섞고 그 틈에 내 셔츠도 앞섶을 풀었다. 모인 무릎을 당기고 맨가슴끼리 맞닿게 하자 자세가 불편할 텐데도 단 숨을 뱉었다. 얇은 허리가 움찔거렸다.
‘가이딩 할 겁니다.’
‘……네.’
‘섹스라고 해도 되고.’
어차피 나한테는 그게 그거니.
잠깐 윤활 젤의 위치를 떠올리다 이선의 입 안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동그란 눈이 내리뜨이며 정성스레 내 검지와 중지를 빨았다. 우습게도 키스할 때보다 능숙한 혀 놀림이고 굉장한 정성이었다.
내 손목을 감은 차가운 손이나 오므려 손가락을 빠는 작은 입술은 이선이 올라앉은 내 하반신에도 쉽게 불을 지폈다. 벌써 터질 것처럼 부풀어 아플 지경이었다.
감상하다시피 이선이 열중하는 모습을 보다 손가락을 놀려 혓바닥을 사이에 끼고 문질렀다. 말캉한 혀를 당기자 놀라 벌어진 입가로 맑은 타액이 흘러내렸다. 손가락을 빼내고 발갛게 달아오른 입술을 재차 머금었다.
‘무릎 벌려 봐요.’
말을 제대로 안 해서 그렇지 듣기는 잘하는 에스퍼가 내 어깨에 옆으로 매달리며 왼 다리를 살풋 열어 벌렸다. 동그란 무릎이 가냘프게 떨린다.
그의 허리를 추어올려 떨어지지 않게 가까이 고쳐 앉혔다. 덕분에 묵직하게 내리눌리는 성기는 난폭하게 성이 났지만 당장은 참아야 했다.
‘다시. 빨지 말고 핥기만 해요.’
왼 무릎 뒤에 이선의 손을 넣어 잡게 하고 그새 마른 손가락을 그의 입 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시키는 대로 하려다 침이 고이자 꼴깍 삼킨 그가 내 눈치를 봤다. 그 뺨에 입을 맞추고 손가락을 빼내 곧장 이선의 회음부를 쓰다듬었다.
‘흑…….’
목을 당겨 깨물린 아랫입술을 핥고 젖은 손가락을 조붓한 입구까지 내렸다. 오므라든 주름이 기대하는 것처럼 움찔거렸다. 힘을 빼려 애쓰는 이선의 마른 복부가 달싹거렸다.
‘시간 많으니까 서두르지 말아요.’
축축한 눈은 정말이냐 묻는 듯했고, 기대하는 것도, 긴장한 것도 같았다. 한 뼘도 안 될 거리에 가져다 놓은 가을색 눈동자가 예쁘다.
‘해 뜨려면 한참 남았지.’
뜨더라도 이 차가운 몸이 정상 체온이 되지 않는 한 놔줄 생각은 없고.
내 성기를 집어넣은 몇 년이 거짓말인 것처럼 이선의 뒤는 좁았다. 적신 손가락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긴장한 근육이 수축했다. 틈을 비집고 손가락 하나를 넣어 빙글 돌렸다. 허공에 들린 이선의 무릎이 달달 떨렸다.
아무래도 서두르는 건 내 쪽인가. 이선이 그렇게 바깥에 차갑게 주저앉아 있지만 않았어도 삽입까지는 안 했을 거라고, 다른 날보다도 좁은 안쪽을 손가락으로 드나들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머리와 달리 이 탄력 있는 구멍이 얼마나 늘어날 수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좆은 벌써 잔뜩 부풀어 그 안을 헤집을 궁리를 했다. 내 머리를 돌게 만들 만큼 자극적이고 뜨거운 곳.
내리뜬 속눈썹이 그의 아래를 쑤시는 손동작마다 달달 떨리고 벌어진 입술이 벌써부터 신음을 흘렸다. 야해 빠진 광경이었다.
이선의 허리를 감아 들어 소파 팔걸이에 앉혔다. 비틀거리면서도 제 다리를 놓지 않고 치켜든 그가 내 어깨에 무게를 실었다. 그대로 그 가슴팍에서 끝을 단단히 굳힌 유두를 물었다. 혓바닥으로 전체를 쓸고 이를 써서 끝을 물었다.
‘아윽, 흑, 윤, 아……!’
기댈 곳이 나밖에 없는 이선은, 쓰러지지 않게 나를 붙든 채 가슴을 빨렸다. 손가락이 아래를 드나들었고, 왼 다리는 가슴팍에 닿을 것처럼 바짝 당겨졌다.
불편한 자세에 더욱 힘이 들어간 입구를 풀어내는 동안 계속해서 침이 넘어갔다. 이선의 가슴팍에서 나는 살냄새가 향긋했다.
‘으응, ……응, 흣…….’
내 품에서 소용없이 비틀어지는 허리와 붉어진 유두 주변, 곳곳에 잔떨림이 이는 몸이, 마음 같아서는 전부 잇자국을 내어놓고 싶을 만큼 내 음심을 자극했다. 그의 전신을 빨고 물어 얼룩덜룩하게 해 놓고 그 자국을 내게만 보이라 닦달하고 싶었다.
씨발. 상냥하게, 부드럽게, 여리게, 온갖 다짐이 무색하게 구멍을 파고드는 손짓이 거세졌다. 가까스로 이선이 제대로 느끼고 있는지, 그의 성기가 서 있는지만 확인하는 수준이었다.
빠듯하게 벌어진 입구는 아직 내 성기를 물려도 될 것 같지 않았지만, 이선은 열기로 볼을 붉히고 성기 끝에 미끈거리는 선액을 매달았다.
다시 그의 색이 옅은 젖꼭지를 빨아올리자 이선이 앓는 소리를 내며 내 머리칼에 얼굴을 비볐다. 그 바람에 돌기를 조금 세게 물어 그 자리를 핥아 주었는데, 이선은 아픈 것보다 자극이 더 센 모양인지 혀끝에 유두가 굴려질 때마다 속을 바르르 떨었다.
‘아직 안 돼.’
까딱거리는 성기와 달아오른 눈가를 보고 손을 멈췄다. 일찌감치 사정하면 충분히 몸이 더워질 때까지 체력이 못 버틸 것 같아서 말린 것인데, 이선이 그 말에 히끅거리다 굵은 눈물방울을 뚝, 뚝, 떨어트렸다.
마치 내가 변태 성욕자라 그의 사정을 금지한 꼴이었다. 씨발, 이선이라면 나를 충분히 변태 성욕자로 만들고도 남아서 더 어이가 없었다. 턱을 떨며 눈을 질끈 감는 그 얼굴이 몹시도 야했으니까.
손을 멈추고 잠시 진정할 시간을 주려다 결국은 다시 그 뺨을 핥고 입술을 물었다. 더운 혀를 감고 입천장을 간질였다. 뒤를 헤집는 손을 멈추자 알아서 흔들려는 이선의 허리를 붙잡아 세웠다. 곧잘 깨물리는 아랫입술도 빼앗아 살짝 빨아올렸다.
어느덧 찔꺽이는 소리가 나는 구멍에 세 번째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처음처럼 빠듯한 게 아무래도 젤이 있어야 들어갈 것 같았다.
끓는 욕정과 얇은 인내를 다스리려 가볍게 한숨을 내쉬자, 그에 놀란 듯 등을 띄운 이선이 눈을 크게 떴다. 눈물이 고여 일렁일렁한 눈을 해서는 아주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가만두면 또 제가 잘못했느니 어쩌느니 할 기세다.
한숨 한 번 제대로 못 쉬겠네.
다시 그의 뒷머리를 당겨 키스했다. 이선이 벌어진 다리를 놓고 애달프게 내 목을 감아 안겼다. 여기서 내가 그만두기라도 할 것처럼 초조해하는데, 지금 누구 좆이 더 터질 것 같은지 제대로 모르는 눈치다.
‘젤을 가져와야겠습니다.’
‘아니, 안, 제가 입으로 해 드, 리면……, 가지 마세요…….’
뭐만 하면 입으로 해 준다는 이선을 끌어당겨 내 목에 머리를 묻게 했다. 이선의 입이 나쁘지 않기는 하다만 썩 잘하는 것도 아닌데. 뺨과 입술을 붉히고 열중하는 게 야해서 그렇지.
톡톡 뒤통수를 두들기자 나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잡아먹을 입장에서는 괜히 안쓰럽게 구는 것이나 하자고 매달리는 게 또 나쁘지 않았다.
불거진 날개 뼈를 지나 드러난 척추를 하나하나 못마땅하게 어루만졌다. 이 몸이 섹스를 버텨 내는 걸 신기해해야 할 듯했다. 애초에 에스퍼인 것이나 참전 군인이라는 걸 신기해해야 하나. 십 년을 훌쩍 넘게 군인이었다라…….
쉽게 느껴 때마다 튀어 오르는 몸은 제법 재미있고 몹시 동했다. 가느다란 신음과 할딱대는 숨소리를 내 어깻죽지에 마구 문지르는 고갯짓도 야했다. 벌어져 달랑이는 다리나 내 손가락을 끊을 듯 조여 무는 구멍은 말할 것도 없다.
손을 벌려 입구가 얼마큼 늘어나는지 잠시 가늠하다가 그의 허리를 쓸어내리고 귓가를 코로 헤쳐 귓바퀴에 입술을 묻었다. 나직하게 경고했다.
‘지금 넣고 싶은데.’
긴장 범벅인 대답이 몇 번이나 ‘네’를 반복해서 조금 웃을 뻔했다. 손가락을 뽑아내자 다급하게 일어나려 하는 허벅지를 쥐어 당겼다. 내 하체를 미끄러트리고 그 양 옆에 이선의 다리를 벌려 무릎을 두게 앉혔다.
가벼운 주제에 눈치를 보는 엉덩이가 내 다리 위에 앉지 못하고 공중에 떴다. 그런 이선을 두고 번들거리는 손가락으로 내 바지 버클을 풀었다. 드로어즈를 밀어 올린 성기가 불편하게 치솟아 있다가 밴드 너머로 불쑥 튀어 올랐다.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를 낸 이선이 그제야 느리게 무릎걸음을 걸어 내 몸을 제대로 그 다리 사이에 맞췄다.
‘서두르지 말고.’
‘흣!’
아니나 다를까, 좁은 뒤에 성급하게 내 것을 밀어 넣으려는 엉덩이를 붙잡았다. 부드럽고 차가운 살결이 손바닥에 감겼다. 그러다 다칠 수 있으니 혼을 내야 하나 하다가 안타깝게 까닥이는 그의 색 옅은 성기를 봐서 봐주기로 했다.
완전히 풀어 놓지 못한 입구에 내 좆 끄트머리를 맞춰 조금 비비고 이선의 엉덩이를 천천히 내렸다. 귀두부터 빡빡하게 감아 조이는 입구와 조금씩 벌어지는 내벽, 그리고 이선의 더운 숨이 언제나 그랬듯이 자극적이었다.
‘하윽, 흐……읏……, 응…….’
채 끝까지 밀어 넣기도 전에 민감한 내부를 건드려진 이선이 허리를 비틀기 시작했다. 그를 내 위에 올리고 넣은 건 처음이던가. 좋은 생각이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마구 허리를 흔들고 턱을 치켜들어 헐떡이는 이선, 내 어깨를 끌어안고 덜덜거리며 신음하는 이선을 참기가 어려웠다.
완전히 가이딩하는 좆이나 다름없는 상태로도 그게 썩 나쁘지 않았다. 우선 끔찍하게 기분이 좋았다. 뜨겁고 좁고 뻑뻑한 내벽이 거세게 조이며 빨아들이듯 내 성기를 휘감았다.
쾌감에 겨워하는 이선의 달랑거리는 턱과 하늘거리는 머리칼이 머릿속까지 저리게 했고, 아랫배 안쪽으로는 당장이라도 갈 것 같은 열이 차올랐다. 몇 번이고 다시 붙을 것 같은 불이었다.
멋대로 나를 타고 흔드는 남자의 납작한 가슴팍을 끌어 내려 빳빳한 돌기를 핥았다. 전기가 오른 것처럼 등줄기를 발발거려도 봐주지 않았다. 힘주어 빨아올리고 이를 세워 긁었다. 쾌감에 겨운 달뜬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잡아요.’
그의 팔꿈치를 당겨 내 목을 단단히 감게 하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인 남자라기엔 턱없이 가벼운 몸이 움츠러들며 팔다리로 나를 감았다. 코앞의 차가운 귓바퀴를 물고 잘근거렸더니 성기를 반 정도 문 좁은 내벽이 맥박 치듯 조이기 시작했다. 서둘러 침실로 걸었다.
대충 던져 놓은 윤활 젤을 두어 개 집어 이선과 함께 침대에 내려놓았다.
성기를 빼내고 다시 삽입할 생각이었지만, 묘한 데서 고집이 센 남자의 마른 다리가 내 하체를 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풀어내고자 하면 맥없이 풀어질 것인데, 그대로 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라 그냥 두었다.
맞붙은 다리 사이에 투명한 젤을 쏟아붓자 이선의 골반이 파득파득 튀어 올랐다. 질끈 감은 눈도 그렇고, 젤이 차가운 건가. 내 손바닥에 나머지를 짜내고 빈 통을 집어던졌다. 움찔거린 다리를 내 허리에서 풀어내고 단숨에 좁은 구멍에서 성기를 뽑아냈다.
‘후우…….’
‘아, 흣…….’
체온으로 금세 데워진 젤을 그의 다리 사이에 넉넉하게 펴 바르고 늘어난 입구 안쪽에도 흘려 넣었다. 단번에 쑤셔 박고 싶은 기분은 턱을 악다물고 참았다. 동그랗게 들려 올라간 엉덩이와 빠끔거리는 좁은 입구가 그야말로 미치기에 딱 좋은 광경이었다.
하, 우습다. 언제부터 이렇게 남자 몸에 환장하게 된 걸까. 이선은 대체 내게 뭘 한 건지.
손가락만 물어도 신음을 흘리는 이선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정도로 끝날 섹스가 아니다. 오래 지체하지 않고 터질 것 같은 좆을 내리꽂듯이 다시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바르작거리는 몸을 짓누르고 천천히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한층 부드러워진 속살과 여전히 좁은 입구가 까마득하게 기분 좋았다.
‘윤, 윤오 씨……. 하윽…….’
내 이름을 부르며 우는 이선의 벌어진 품에 기꺼이 나를 넣어 주었다. 내 어깨를 긁는 짧은 손톱을 잡아 입 맞추고, 벌어진 입술에서 신음도 꺼내 혀를 감았다.
쉬지 않고 허리를 들이치며 눈물이 흘러내리는 눈가를 훔치고 동그란 광대를 살살 물었다. 비틀어지는 목을 따라 입술을 내리고 그 어깨를 감아 더욱 깊이 맞붙을 수 있게 잡아 내렸다.
조용한 침실에 살 부딪히는 소리와 이선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어찼다. 전립선을 피해 찔러 올렸지만 민감한 몸은 삽입만으로 절정에 다다를 것처럼 바르르 떨었다.
잘 느끼는 솔직한 몸을 내 것처럼 헤집으며 눈물을 매단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아, 윤오, 윤오 씨…….’
이선.
네 마음이 사랑이려면.
그 작은 입에서 듣고 싶은 말이 언어로 몽글몽글 피어났다. 상상으로 속이 가려운 만큼 이선의 젖은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를 향한 이 독점욕은 어떻게 전하면 좋을까. 질문은 없는 주제에 불신은 많은, 잘 넘어지고, 잘 숨어 버리는 이 가을색 머릿속에 제대로 전달하려면.
‘흑……. 아윽!’
무심코 손을 뻗었다. 흔들리는 이선의 성기를 가볍게 쥐자 그의 허리가 불에 덴 듯 크게 튀어 올랐다. 반대로 휘어져 침대 위에 아치를 만들고 떨리는 다리를 두서없이 바르작거렸다.
동시에 깊은 속이 내 것을 당겨 휘감고 꽉 다물렸다. 밀어 넣기도 빼내기도 어렵게 좁아진 내벽이 이선의 맥박과 끊어지는 근육의 움직임에 모두 맞춰 꿈틀거렸다.
속절없이 그 속에 사정하며, 절절한 쾌감과 패배감을 같은 만큼 겪었다. 이선의 안을 나로 채우는 쾌감과 앞으로도 영영 이 남자에게 휘둘릴 것이란 예감.
떨리는 내부가 부드러워지길 기다렸다가 다시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조금도 가라앉지 않은 열기로 그 속을 쳐올리자, 울음이 짙어진 이선이 한층 민감하게 관절을 떨고 근육을 당기며 신음했다.
도리질 치다 훌쩍이는 코끝과 자주 반짝이는 속눈썹에 입술을 내렸다. 여운이 남아 잘게 떨리는 눈가를 핥았다. 사랑스러운 이의 잔열에서는 옅은 소금 맛이 났다.
* * *
전시 상황.
난리 통이었다.
즉시 대피하라는 안내 방송과 함께 사이렌이 울렸다. 어느 구석에 틀어박혀 있던 것인지 가이드 센터 곳곳에서 튀어나온 사람들이 복도를 북적북적 메웠다.
전시 대처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고, 대피소 위치와 입소 안내는 사이렌이 울린 지 15분 뒤에나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전쟁을 등지고 중앙의 평화에 젖어 있던 것은 가이드 센터 직원이라 해도 예외가 없는지라, 윽박지르는 일반인을 상대하다 겁에 질린 센터 직원이 도리어 울음을 터트리는 일도 생겼다.
쓸모없는 다툼을 중재하고 피난 경로에 맞춰 자료실에 있던 사람들을 대피소로 이동시켰다. 나를 직원이나 군인으로 착각한 사람들이 상황에 관해 물어 왔지만 사이렌의 의미가 전쟁에 준하는 상황이라는 것 말고는 나도 아는 게 없었다.
뒤늦은 안내 방송을 따라 백에 가까운 사람들이 더 대피소로 몰려왔다. 그런 뒤에는 출입구를 봉쇄하는 것이 또 문제였다.
전쟁에 해를 입을까 두려운 치들이 당장이라도 문을 닫을 것을 초조하게 요구했으며, 조금 더 생각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대피했는지 더 살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입구 근처에 서서 돌아가는 상황과 면면을 관찰하고 있으려니 대피소 문턱에서 또 다른 싸움이 일어났다. 다만 이번에는 겁이나 불안에서 기인한 사사로운 말다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여기는 일반인과 가이드를 위한 대피소니까……! 하여간, 에스퍼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에요!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을, 에스퍼와 가이드를 차별하실 수 있나요?’
‘에스퍼는, 위험…….’
‘말조심하세요! 아이들이 듣고 있습니다!’
상주 근무하는 군인과 말싸움하는 여자는 이미 익은 얼굴이었다. 에덴. 가이딩 이론 심화 강좌를 같이 듣는 사람. 상당한 시간을 가이딩 봉사에 투자하는 의대생이라 들었다.
수업에도 열심이고, 남을 돕고자 하는 의지도 강한지라 주변이 늘 북적거렸다. 긍정적 에너지가 눈에 띄었는데. 저렇게 화가 난 모습이 아니라.
‘슬슬 문을 닫아야 합니다. 에스퍼들은…… 밖에 군인들에게 맡기시고, 들어오시려면 가이드분만…….’
‘그걸 말씀이라고 하시나요? 모두 보호받아 마땅한 사람들을 그렇게 구분하신다고요?’
‘그게, 안에서 폭주라도 할 수가…….’
‘정말 너무하시네요! 폭주 위험은 없다고 얼마나 더 말씀드려야 하나요?’
말만 들으면 아주 어린 꼬마들 같았지만 그녀를 두르고 선 아이들은 그 정도로 어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나빴다. 위기에서 저들을 편 갈라 차별하는 군과 사회를 충분히 느낄 나이였으니까.
일고여덟의 꼬마부터 많아야 열댓 살 정도. 익숙하게 눈치를 살피는 굳은 얼굴들을 살피고 성큼 걸어 나갔다.
‘어어, 저기! 그러시면 곤란합니다! 선생님! 저기요!’
30분 이내로 대피를 완료하라고 했으니 문이 닫힐 때까지 앞으로 고작 5분이다. 불필요한 실랑이를 할 만큼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문을 지키고 선 군인을 설득하는 시간도 아까워서 가장 작은 순으로 셋을 집어다 대피소 깊숙한 안쪽 벽에 내려놨다. 가이드 센터면서도 에스퍼에 대해서 잘 모르기는 다들 마찬가지라, 소란을 듣고 덜 자란 어린애들을 슬금슬금 피하는 꼴이 꽤나 우스웠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내 뒤를 따라붙은 문지기를 피해 나머지 아이들을 무사히 데리고 들어온 에덴이 연신 감사 인사를 소리쳤다. 대충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무지한 군인을 잡아 반대쪽 구석으로 이끌었다.
멍청하게 같은 말을 반복하는 군인에게는 바깥의 영향으로부터 이 구조물 내의 멀쩡한 에스퍼가 폭주할 일이 없다고 여러 번 거듭해서 풀어 설명해야 했다.
대피소의 구조와 내가 읽은 충분한 자료를 들어 누차 반복해도 불안을 멈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는 꼴이 한심했으나, 엿들은 주변이라도 수군거림을 멈췄으니 헛짓은 아니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덕분에 아이들이 안전해졌어요.’
‘아닙니다.’
단지 시설과 대피 시스템에 관심 둔 적이 있을 뿐이고 부조리와 시간 낭비를 두고 보기가 싫었을 뿐이다. 딱히 선의는 아니었다.
부담스럽게 인사하는 에덴을 떼어 놓고 구석진 자리를 찾아 벽에 기댔다. 대피소 내부는 자료실의 미니 맵으로 본 것보다 복잡한 구조였다. 자동으로 여닫히는 두꺼운 이중문과 북쪽의 소형 비상 탈출로가 눈에 들어왔다.
벽체는 불연성 소재로 마감이 되어 있고 환풍기가 세게 돌아가 실내 온도가 서늘했다. 박스로 쌓아 놓은 비상식량이나 물과 산소 탱크도 한쪽에 보였다.
하릴없이 내부를 돌아다니다 직업병처럼 찾아낸 읽을거리에는 성인 기준 최대 백 명이 2주간 대피할 수 있도록 설계된 대피소라고 적혀 있었다.
2주라. 10년 전 전쟁에서는 어땠지? 방공호에 일주일 남짓 있었던가. 다시 중앙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어떨까. 이선은. 그는 이번에도 참전할까.
이능이라는 기이한 무기를 가진 소수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엘로란타 반란이 벌써 발발 10년을 지났다. 아카데미를 잠깐 휴학했을 시기. 그리고 고작 열여덟이던 이선이 전쟁에 휘말려 이용당했던 때.
조금 더 일찍 만날 수 있었다면. 조금 다르게 만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작은 에스퍼는 지금보다 덜 울었을까.
제 출신지를 알아냈다며 눈을 데룩데룩 굴리다 조심스럽게 서국 얘기를 꺼낸 날이 떠올랐다. 빤히 예상하였던 것을 대단히 힘들게 알아낸 사람처럼 말했다. 칭찬이 받고 싶은 듯 반짝이는 눈을 흘긋거리고 작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엘로란타라는 자는 대체 저 유순한 남자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내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보이면서 제 과거에는 의문 한 점 품지 않은 이선. 허여멀건 한 피부를 하고서 제가 카바섬 출신이라 믿던 이선. 어린 날과 고향, 가족의 기억이 없는 것에 덤덤하고 인체 실험을 훈련이나 시술 따위로 바꿔 말하던 이선.
반군의 수장과 각별한 사이냐는 물음에 대번에 그렇다 긍정한 이선. 몸을 뒤덮은 상처 중 정작 제 것이 드물던 이선. 거부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씁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던 이선. 이능 장교도 제대가 있냐 묻던 말에 에스퍼 관리동을 말하던 이선.
무용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서국. 카바섬. 원국 남부. 중앙. 어디서든.
훌쩍 떠난 카바섬에서 이선을 내가 먼저 찾아낼 수는 없었을까. 내 아카데미와 그의 연구동은 제법 가깝지 않았던가. 그런 물리적 거리가 아무 의미 없더라도, 그래도 그 시절에 만날 수 있었다면.
그토록 어린 시절을 이용당하고 세뇌당하지 않도록, 그토록 오래 아프지는 않도록 할 수 있었다면. 에스퍼 관리동에 드나든 경험을 한 번이라도 줄여 줄 수 있었다면.
그런 철 지난 미련들. 정작 만나고서도 2년을 방치한 주제에.
대피소 문이 닫히고 잠시 정전이 있었다. 대부분은 혼란에 가득 차 비명을 질러 댔고, 관계자나 책임자라고 예외는 없었지만 위기에서 빛을 발하는 사람도 있었다.
침착하게 아이들을 인솔하고 다독이는 여자, 에덴은 남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여기 모인 백여 명 중 누구보다도 어른스럽고 포용력 있는 모습에 그녀가 데리고 온 아이들뿐 아니라 심지 약한 어른들까지도 슬금슬금 그 곁으로 모여들었다.
바깥에서 벽체를 타고 둔중한 충격이 전해질 때마다 그 수가 늘어 그녀가 마치 양 떼를 다독이는 한 사람의 목자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둑한 실내에서는 잔잔한 음악과 안전상의 지침이 안내 방송으로 흘러나왔다. 비명은 잦아들었고 군데군데 겁에 질려 우는 사람은 꽤 늘었다. 머리가 아팠다.
왜 자꾸 이선이 떠오를까. 그는 장기 파견을 갔으니 앞으로 며칠은 더 있어야 중앙에 돌아올 텐데.
아무래도 전황이 위험해 보이니 돌아오면 파견을 줄이겠다는 확답을 들어야겠다. 뭐라고 하면 말을 들을까. 중앙이 이렇게 위험하다고 하면 될까. 나를 지키라고 하면 말을 듣지 않을까.
피식, 허튼 숨이 새어 나왔다. 진지하게 걱정하는 낯을 하고 고개를 끄덕일 이선이 그려졌다.
쾅! 쾅!
어느덧 한 시간이 넘어가는데, 이따금 들리는 둔중한 충격이 가깝거나 멀기만 하고 끊어지지 않았다. 바깥 상황을 알 수가 없으니 굉음이 울릴 때마다 대피소 내부에서는 효과음처럼 울음이 터졌다.
오래전의 방공호에서도 내내 누군가는 울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누군가 화를 냈다. 그때는 지금과 다르게 구조를 기대하기도 막연했고 갑작스레 평화가 깨어진 참이라 다들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지척에 있는 중앙군의 지원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곧 가라앉을 소요고, 일주일은커녕 며칠도 더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선의 설명과 충분한 자료 조사로 반군의 승산이 없다는 걸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내 걱정은 크지 않았다. 모두에게 설파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당장 소란스러운 저들의 두려움이 하찮아서가 아니라 이선에게 끼칠지 모를 후폭풍 때문이었다.
내게 문제가 생기면 이선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런 사소한 의문이 들기는 했다. 이야기를 만드는 습성이 몇 가지 갈래를 자아냈으나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이선이 괴로워하는 것도, 그가 다른 가이드를 만나 내게 보이는 얼굴을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우스운 망상.
소식을 들으면 놀랄까. 의외로 일할 때는 무덤덤한 면이 있어 보였으니 침착할지도. 연락을 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건물이 잘게 흔들리는 진동 후에 스피커가 고장이 났다. 나지막하게 흐르던 음악 대신 들리는 지직거리는 잡음에 불안이 가중되었고 혼란이 커졌다. 겁 많은 사람들의 우는 소리와 비명이 거슬렸다.
짜증에 미간을 문지를 즈음, 문득 시작된 노랫소리가 울음소리를 덮었다. 안내 방송으로 나오던 자장가를 누군가 부르고 있었다. 이윽고 하나하나 보태진 목소리가 물결처럼 대피소에 주저앉은 사람들 머리 위로 퍼져 나갔다.
역시나 중심은 에덴이었다. 출입구 앞에서 들어가느니 마느니 실랑이를 벌이던 때와 다르게 둘러앉은 아이들과 그녀는 소풍을 나온 것처럼 표정이 밝았다. 대단한데. 내심 감탄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둑하던 실내가 단숨에 불빛으로 가득해졌다. 실내등은 물론이고 각종 전구 달린 것들과 사람들 주머니 속의 모바일까지 빛나는 것들이 모조리 오작동을 일으켰다.
한동안 일제히 깜박거리던 빛은 소란 속에 에덴의 노랫소리가 묻히자 픽 꺼졌다. 여태 박자를 맞추기라도 한 것 같은 기묘한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 ……반군 전원 사살 명령. 오늘 전쟁을 끝낸다. 반복한다. 일반군은 즉시 건물 밖으로. 이능 장교는 반군 전원을 사살하라.
대피소의 고장 난 스피커가 갈라지는 소리로 누군가의 딱딱한 목소리를 전했다. 단번에 알아들었지만 이해하기까지는 오래 걸렸다. 군에 지시를 내리는 음성과 그 내용과 그 음성의 주인을 엮어 이윽고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다.
이선이 여기에 있다.
이상한 일이다. 방관자나 다름없던 내 이성이 불시에 사라졌으니.
어느샌가 나는 대피소 벽면을 따라 두리번거리며 나갈 구석을 찾고 있었다. 별달리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는 했는지. 단지 이선의 단호한 목소리가 불길했고, 그에게 내가 필요하다는 것만 주문처럼 떠올렸다.
출입구 근처를 서성거리다 곁에 붙은 모니터 패널을 조작했다. 아무렇게나 누르다 보니 모니터 액정에 이중문 바깥을 비추는 흑백 카메라 영상이 떴다.
뿌연 연기 너머로 움푹 팬 대피소 출입구 앞 널따란 홀이, 각층에 중앙군과 반군이 뒤섞인 것이 뚝뚝 끊어지는 화면에 비쳤다. 소리가 없는 영상 속 전투는 그만큼 현실감도 없었다.
이선은 어디 있지.
궁금해하기 무섭게 화면 한쪽 구석에 조그만 인영이 지나쳤다. 손가락 한 마디도 되지 않을 조그만 그림자를 보고 대번에 등줄기가 비쭉 솟았다. 정말 이선이었다. 사람이 날아가고 콘크리트 바닥이 패고 두꺼운 철문이 일그러지는 저 연기 가득한 전장에.
‘어어, 미쳤습니까!’
옆을 기웃거리던 사람이 나를 패널 앞에서 뜯어내려다 실패하자 주먹을 날렸다. 화면을 주시하던 그대로 턱을 얻어맞아 비틀거리다 울컥 치솟는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똑같이 주먹을 쥐었다.
머릿속은 그야말로 혼돈이었다. 내가 사람을 때린다고? 단번에 나뒹군 남자를 보고 손을 털었다. 손등 뼈가 아린 감각이 생소했다.
이 사람이 뭘 잘못했지? 잘못은 내가…….
패널 모니터에 뜬 관리자 아이디를 요구하는 확인 창. 그 창에 가로막히지 않았다면, 저 남자가 나를 막지 않았다면 그대로 비상 탈출구를 열 셈이었을까. 이 상황에. 나가서 뭘 어쩌려고? 정말 미친 건가.
씁쓸하게 혀를 차고 남자를 일으켜 세운 뒤 사과부터 했다. 군인이 다가와 남자와 나를 출입구에서 떨어트려 놓으려 했지만, 그 제지는 뿌리치고 화면 앞에 붙어 섰다.
시선이 집요하게 화면 구석을 살피다 조그만 사람 그림자가 절룩이는 걸 알아챘다.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이성적이지 않은 불안감이 자꾸만 이선이 위험하다고 외쳤다.
2층. 일그러진 대피소 문 앞. 고작 5미터 남짓 거리에서 그가 싸우고 있었다. 그는 총을 들었고, 무어라 옆에 선 군인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선의 옆을 지킨 이능력자의 손에서 작은 빛이 때마다 쏘아져 나갔고, 그 비현실적인 광경이 내게 진득한 무력감을 선사했다.
‘보시면 안 됩니다! 어떻게 켜셨, 안쪽으로 이동하십시오!’
끝도 없는 무력감은 절망과 화를 불러일으켰다. 계속되는 지시를 무시하다 군인과 몸 다툼을 했다. 처음으로 사람을 향해 주먹질을 해 대면서 정당한 이유 하나 없는 것이 우스웠다.
내 꼴이 허름하고 비참했다. 저 작은 에스퍼가 전장에서 대피소를 지키는 동안, 나는 여기서 고작해야 애먼 화풀이 주먹질을 하고 있다는 것이.
직원과 군인들에게 팔을 질질 끌려 구석에 놓이자 그제야 얻어맞은 볼이며 몸이 여기저기 쑤셔 왔다.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나 하고 글이나 썼지 싸움 따위 해 본 적 없는 몸이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통증이었다.
얼얼한 주먹을 쥐었다 펴며 여기저기 둘러보아도 방법이 없다. 가이드라 해 봤자 일반인.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엇도 없는. 애당초 이선이 없었다면 나는 가이드도 무엇도 아닌 채 살았겠지. 이선이 없다면 나는.
아찔하고 욱신거리는 턱을 문지르다 그대로 이마를 짚었다. 흑백 화면 속 더욱 왜소한 덩치 하나가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절룩이던 걸음은 뭐 때문일까. 부상을 당했나? 어디서? 심각한 건 아니겠지. 파견은 벌써 끝난 걸까. 멀리 다녀오면 마땅히 휴식을 줘야 하지 않나. 군에는 부려 먹을 인재가 이선밖에 없는 건가. 걸음을 절 정도면 빠져야 할 것 같은데. 애초에 이 소동은, 반군은, 씨발.
당장 이선을 내 옆에 데리고 오고 싶었다. 그는 군인이 아닌 편이 좋겠다. 유능하지 않은 편이 낫겠다. 빌어먹게 무능한 그의 가이드가 그러기를 바랐다. 내내 울기만 해도 괜찮으니 다치지 좀 않았으면 좋겠다.
책임져야지. 나를 제 가이드 삼았으면.
창백한 낯, 코 아래 핏줄기가 흐르던 장면이 재차 떠올랐다. 투명한 호흡기 안쪽에 습이 차던 광경이 못처럼 박혔다.
갑갑한 한숨이 계속해서 흘렀다. 갑갑하고 답답하고 초조했다. 이선을 당장 전장에서 감추고 싶었다. 민간인으로 살며 군인 누군가 죽고 다쳤다는 소식이야 숱하게 듣고 넘겼지만, 이선은 그러면 안 된다. 어느샌가 상상만으로 가슴 어림이 뜨끈거렸다.
지금 상황만 끝나면 군과 담판을 지어야겠다. 직접 못한다면 그를 뒤에 놓고 군부와 협상을 해야겠다. 언제나 누군가의 희생이 평화의 담보가 된다는 걸 알아도, 그것이 이선이 되지는 않아야겠다.
끝도 없이 이기적인 생각을 하며 헛웃음을 비실비실 흘렸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언제 너는 그렇게 내 것이 되었나.
출입구와 모니터 패널 앞을 오글오글 모여 지키고 선 군인들이 갑자기 헉 소리를 냈다. 놀란 소리였다. 벽에 기대앉아 있던 몸이 영문도 모르고 벌떡 일어났다.
모종의 불안감이 몸을 휩싸 빠른 걸음을 걷게 만들었다. 그들이 보고 있을 화면에 이선이 비칠 것이니,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리라는 새까만 확신이었다.
말리는 손길을 지나고 앞을 막은 군인들의 어깨도 밀쳐 냈다. 흑백의 조그만 화면에서 단번에 찾아낸 이선은 누군가에게 안긴 채였다.
그리고 그 남자의 등부터 이선의 등까지 관통한 길쭉한 날붙이가 보였다.
‘이선.’
정신없이 철문을 뜯었다. 그를 당장 병원으로 보내야 했다. 제지하는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쳐 내고 돌아가지 않는 손잡이를 긁다 쾅쾅 주먹으로 쳐 댔다.
씨발. 씨발. 또 그 무력감이 차올랐다. 이 안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애초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지?
그때, 잡음조차 들리지 않던 스피커에서 나직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들어 본 곡. 이선이 차가운 겨울 새벽에 주저앉아 부르던 데라주바의 노래.
불길한 망상이 가속했다. 손톱이 깨지고 손등이 긁혀 피가 나도, 이 짓거리가 문을 여는 데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걸 알아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를 내 곁으로 데리고 와야 했다. 그러면 살 수 있을지 모른다. 에스퍼는 강하다고 했으니 죽지 않을 것이다. 살릴 수 있다. 내가 그의 가이드니까.
기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린 이중문을 박차고 나간 자리에 이선이 누워 있었다. 이선으로부터 비롯한 피 웅덩이가 아찔했다. 그는 핏기 없는 낯을 하고 흐린 눈을 올려 나를 보았다. 당장 데리고 어디든 치료할 곳을 찾아야 하는데 저절로 무릎에 힘이 풀렸다.
주저앉은 무릎과 코트 자락에 척척하게 그의 피가 배어들었다. 간신히 뻗은 손으로 그를 내 품에 끌어올렸다. 그의 배에서 울컥울컥 쏟아지는 피를 어떡하면 좋을지 생각나는 방법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나를 두고 이선이 웃었다. 아주 홀가분하다는 듯 환한 미소였다. 말간 웃음을 짓는 입가에도 붉게 피가 비쳤다. 저런 웃음은 처음 보는데.
그 순간 번뜩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선이 떠나려 한다는 생각.
힘없는 손이 바들거리며 올라와 내 손을 쥐었다.
기이한 청량감이 감돌고 이내 내 손의 상처가 나았다. 이선의 손톱이 깨어졌다.
마른 손가락 끝이 내 뺨을 스치자 따끔거리던 상처가 그에게 옮아갔다. 흰 뺨에 대번에 긁힌 상처가 생겨 질금 피를 쏟았다.
차갑고 차가운 몸에서 미지근한 피가 쉬지도 않고 흘렀다. 내 멍청하고 미약한 상처를 더하지 않아도 충분히 다친 몸을 더듬고 그의 복부를 눌렀다. 관통상에 손바닥이 움푹 잠기자 덜컥 겁이 났다.
이걸, 어떻게 하면, 그는 출혈에 약한데, 도움은, 나는 왜 이렇게 무력하지?
빠끔빠끔 웃음 짓는 이선의 따뜻한 눈동자가 흐렸다. 나를 보고도 보지 않는 것 같았다. 기뻐 보였고, 편안해 보였다.
외면하려 애쓰던 생각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내 에스퍼가 걸어온 인생이 천천히 삶을 등지는 길이었다는 것.
그가 마지막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지 나는 몰랐다. 모르려 했었고,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모르고 싶었다.
늦었다. 이선이 살고자 할 때에는 그를 경멸하고, 죽고자 할 때에서야 안아 준 꼴이 되었다. 이미 늦은 것을 지금껏 인정하지 않았다.
내가 없이는 살 수 없으면서, 그러면서도 집착하지 않으려 애쓰던 그 모습은 나를 놓아주기 위해서였나. 이렇게 가기 위해서였나. 너는 계속 떠나려 했었나.
추켜올려도 계속 흘러내리는 몸을 끌어안았다. 전투가 끝난 자리, 소란한 자리에 묵직한 절망이 내려앉았다.
뜯겨 나간 천장 벽체로 두꺼운 눈이 비집고 들어왔다. 몸이 차가운 내 에스퍼에게는 나쁜 환경이다. 그를 품고 미끌거리는 색 붉은 바닥을 디뎠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면서 우선은 가벼운 몸을 들어 안았다.
무엇 하나 이선의 뜻대로 해 주지 않은 나인데, 지금이라고 너를 보낼까. 내가 안아 주면 금세 열이 오르던 너니까, 이번에도 그래야지. 살아야지.
혼란한 머리로 눈앞의 현실을 거부하며, 몸은 쉬지 않고 내달렸다. 부서진 벽체를 밟고 비틀거리기도, 쓰러진 군인에게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무게 없는 이선이 다치지 않도록 몸을 굴렸다가 다시 일어나면 그 자리가 온통 벌겠다.
내 피가 아닌데 혼은 내 것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정말로 모든 것이 앗아지는 기분.
어느 계절 날아든 성가신 매미가 내 정원을 떠나는 일은 없으리라 여겼는데,
여름이 끝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 윤오 昀旿 ( 윤오 : 밝은 낮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