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윤오 昀旿 (7/11)

- 윤오 昀旿

차가운 겨우내 잠들어 있던 이선은 따뜻한 계절이 돌아오는 때에 눈을 떴다.

기다란 속눈썹은 현실을 가늠하는 것처럼 느리게 깜빡였고, 따뜻한 색깔의 눈은 때때로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쉬어 있는 작은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유에 대한 큰 고심 없이, 나는 그 입술을 내 입으로 틀어막곤 했다. 호흡이 짧아 금세 허덕이는 이선의 숨을 집어삼키고 뒤통수를 끌어당겨 따뜻한 입 속을 파고들었다.

여린 입술이 키스로 달아오르면 창백한 흰 뺨에도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 옅은 분홍빛을 엄지로 긁어내릴 때마다 성취감을 닮은 기분이 슬쩍 끼어들었다.

멋대로 들이닥쳐 내 것이 된 에스퍼.

내 앞에서 한없이 낮아지는 사람.

* * *

이선은 최악의 첫 만남으로 나를 찾아왔다.

여름날 저녁. 사인회 행사를 마친 피곤한 밤이었다.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초조했다. 인다비가 갓 떠난 참이라, 무언가 놓고 가서는 되돌아온 줄 알았다.

짜증스레 열어 준 문밖에 그가 서 있었다.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핏기 없는 얼굴로, 슬퍼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물로 온 얼굴을 적시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버거운 듯 흉곽을 떨었다. 작은 체구가 들썩이는 것이 퍽 위태로워 영문을 모르고도 잡아 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내뻗은 손이 닿기도 전에 그 침입자는 내게 달려들었다. 척 보기에도 마른 덩치인데 뿌리칠 수 없을 만큼 힘이 셌다. 그대로 밀려 내 집 거실에 쓰러지기까지 단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게, 뭐 하는……!’

‘누구예요……? 그 사람 누구예요? 저는요? 저는……. 보고 싶었어요, 흑, 기다렸어요. 너무 힘들어, 왜 이제. 아니에요, 잘못했어요. 사랑해요…….’

쉴 새 없이 웅얼거리는 말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의 것이었다.

떼어 내려는 시도는 가느다란 팔뚝에서 나온 걸맞지 않은 힘에 밀려 좌절되었고, 양팔이 이내 바닥에 내리눌렸다. 내 위를 타고 오른 작은 침입자에게 꼼짝할 수 없이 몸이 묶였다.

남자는 젖은 얼굴을 함부로 내 어깨와 목에 비비고 내 가슴팍에서 숨을 들이쉬었다. 당황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내 옷이 군데군데 젖었다. 그는 울고불고 화를 냈다가 잘못을 빌었고, 아프다고 칭얼거렸다. 쓰러트린 내 몸 위에 제 몸을 가져다 대고 문질렀다.

우선 떨어트릴 셈으로 팔을 뺐다. 빼려 했다.

‘이보세요. 일단 떨어지, 윽!’

뚝. 기괴한 소리와 함께 찢어지는 통증이 왼팔에서 밀려 왔다. 피곤한 저녁에 찾아온 변태의 비정상적인 악력이 내 팔을 쥐어 부러트린 것이다.

놀라 심장이 뛰고 뒷덜미부터 피모가 솟았다. 충격과 고통에 욕설을 씹어 뱉었다. 그러자 나를 짓누르던 어깨가 도리어 화들짝 튀었다.

‘죄송, 해요……. 미안, 좋아해……. 왜 피하는 거예요……. 아프, 흑, 아픈…….’

뚝, 뚝. 내게 그림자를 지우고 내려다보는 작은 얼굴에서 비처럼 눈물이 떨어져 내 목과 턱을 적셨다. 미지근한 물기가 금방 식어 목 위로 흘렀다. 사람이 그렇게 빠르게 많은 눈물을 쏟는 장면은 그때까지 본 일이 없다. 짓무른 눈가와 주황빛 눈동자가 내내 물기로 일렁거렸다.

통증을 잠시 잊을 만큼 강렬한 장면.

이어진 으지직 소리는 이미 구겨진 내 미간이 더 좁아지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분명 부러졌다. 근육과 신경이 어긋나는 통증이 있었다. 즉시 부어오르는 걸 느꼈고, 식은땀이 배어나올 만큼 아팠다. 그런데 그 작은 손이 골절시킨 자리를 다시 쥐자 비정상적인 청량감과 함께 뼈가 붙고 통증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내 위에 허물어져 누운 침입자의 팔이 부러져 덜렁였다.

제 팔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어져 흔들리는데, 당사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내 품을 여기저기 파고들었다. 내 가슴팍에 그의 가슴팍을 붙였다가 그 자리에 코끝을 문질러 대고, 엎드려 무릎끼리 비비다가 내 허벅지에 제 다리 사이까지 맞붙였다.

그러는 사이 침입자의 늘어진 팔이 내 어깨와 옆구리에서 흔들렸다. 소름이 끼쳤다.

‘씨발, 이게 무슨…….’

‘왜, 왜 그래요, 화내지 마……. 사랑해…….’

‘스토커입니까?’

무지막지한 힘에 비하면 또 그 어깨는 가볍게 밀려 났다. 부러진 오른팔을 가지고는 제대로 버티지 못했는지 쉽게 나뒹굴었다.

마른 몸이 팔다리를 팔랑거리며 거실 바닥에 쓰러질 때, 가련하게 들썩이는 등은 마치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뀐 감상을 줬다.

억누른 흐느낌이 베란다 너머로 들어오는 풀벌레 소리에 섞였다. 후드득, 하고많은 눈물이 쏟아져 바닥을 적시는 소리도 났다. 무척 신경을 거슬렀다.

이 갑작스레 등장한 에스퍼를 어떻게 해야 할까. 미친 사람인가? 어디서 탈출이라도 했나? 사람을 착각해서 찾아왔을지도 모르겠다. 어디에 신고해야 하지? 치안대? 군?

내려다보니 더욱 작은 등.

한여름인데 손등까지 덮는 긴 팔을 입은 것도 이상하고, 추위라도 느끼는 듯 부들부들 떨리는 차가운 몸도 이상하다. 등판에 도드라진 날개 뼈가 쉬지 않고 바들거렸다. 죄책감을 자극하는 모양새였다.

‘집을 잘못 찾은 것 같은데, 신고하기 전에 나가십시오.’

‘왜, 왜 그렇게 말, 해요……. 왜 가라고……, 저는, 나는…….’

‘병원이든 군이든, 연락 정도는 대신해 줄 테니까. 당장 나가요.’

정신이 이상한 침입자는 세 발로 바닥을 기었다. 내 발치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는 사과와 원망과 고백 같은 걸 멈추지 않고 웅얼대며 울었다.

그 작은 몸에서 부러진 한쪽 팔이 덜렁일 때마다 끔찍한 괴리감에 소름이 돋았다.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꺼내 든 내 다리에 그가 달라붙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다리를 들어 그를 떼어 냈다. 가벼운 몸이 바닥을 뒹굴며 서럽게 울었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기분이었다. 내가 폭행이라도 한 것 같은.

내가 뭘 했지? 이 에스퍼는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웅크려 울부짖는 낯선 에스퍼를 앞에 두고 당혹감이 차올랐다. 힘이 들어간 미간과 이마를 쓸어 올리고 다시 전화를 들었다.

구급차를 부를지, 아니면 택시를 불러 태울지 잠깐 고민하는 중에 쨍한 기본 호출음이 울렸다. 내 것은 아니고 저 침입자가 흘려 거실 바닥에 뒹구는 둔탁한 모양의 군용 모바일이었다.

군용? 에스퍼니까 군 소속인가? 설마 군인?

도무지 받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에스퍼를 대신해서 그 모바일을 집어 들었다.

- 데리다입니다. 귀환하지 않으셔서 연락드렸습니다. 어디십니까?

‘전화 주인이…… 받을 정신이 아니라 대신 받았습니다. 신고하려던 참인데, 당장 데려가면 신고하지는 않겠습니다.’

- ……전화 받는 분은 누구십니까?

‘그걸 알아야 합니까? 이 사람이나 데려가십시오. 주소는…….’

- 무슨 짓을 하셨습니까? 군인을 해치는 일은 군법으로 재판받습니다. 즉시 사람을 보낼 테니 건드리지 마십시오. 통화 내용은 녹음되고 위치가 추적됩니다. 신원을 밝히십시오.

하하. 황당한 웃음이 목구멍에서 그르륵 끓었다.

길게 말을 잇기 싫어 주소를 불러 주고 전화를 끊었을 때, 이 군인이라는 미친 에스퍼는 내 거실 바닥에서 기절해 있었다. 부러져 퉁퉁 부은 팔을 희한하게 꺾고 잔뜩 웅크린 채로.

응급 처치는 이론밖에 모른다. 부목 같은 걸 대어야 하나, 고민하다 기이하게 꺾인 팔뚝을 집어 각도를 정상적으로 맞췄다. 아픈 걸 알긴 하는 건지. 조그만 어깨가 꿈틀거렸지만 깨어나지 않았다. 죽은 건 아닐까 코에 손가락을 대어 보기도 했다.

에스퍼. 군인. 스토커.

컴퓨터 의자에 앉아 긴장이 풀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스퍼들이 멀쩡하지 않다는 건 들었는데, 이런 의미로 정상이 아닌 거였나? 아니면 이 남자만 그런가?

기절한 침입자의 젖은 얼굴은 제법 멀쩡하고 굉장히 어려 보였다.

낯선 침입자가 울음을 멈추어 집은 평소처럼 적막한데, 축 늘어진 가느다란 몸 하나로 내 거실이 굉장히 낯설었다.

씨발.

손에 얼굴을 묻고 몇 번째인지 모를 욕설을 뱉었다.

데리다라는 여자 때문에 군법 재판이라는 평생 고려도 하지 않은 일을 당할 뻔했다. 아니, 그 에스퍼 때문에.

뒤늦게 나타난 여자는 바닥에 나자빠진 에스퍼를 보자마자 동행한 군인을 시켜 나를 구속했다. 뭐라 항변하는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한밤중에 군부로 연행당했다. 다짜고짜 나타나 무례한 게 그 에스퍼와 똑같다. 웃기지도 않았다.

강제 침입해서 팔을 부러뜨리고 추행한 게 누군데.

멋대로 내 집에서 기절하고 팔이 부러져 있었다지만, 나는 그중 무엇에도 기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구급차를 불러 줄 생각을 했고, 모르는 침입자를 위해 전화를 대신 받아 집 주소를 불러 주기까지 했다.

나름의 선의와 순순한 협조는 결말이 거지 같았다. 그대로 군에 잡혀갔다가 해가 뜨고 나서야 풀려났으니까. 깨어난 에스퍼가 무혐의를 입증할 때까지 납치범 취급을 받은 것이다.

새벽 동안은 군인을 납치해서 뭐 할 생각이었냐는 추궁부터 반군과 연관이 있냐는 사상 검증을 당했고, 개인 정보까지 남김없이 조회되어 여태껏 낸 책들이 범행과 연관이 있냐는 말까지 들었다. 최악이다.

더 최악인 건 그날 저녁이었다.

병원에 가서 방사선 촬영을 해 보니 왼팔은 부러졌던 게 맞았다. 깔끔하게 부러져서 깔끔하게 붙었다고 했다.

말로만 듣던 이능이 이런 거라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직도 포박 줄에 감긴 느낌이 남아 팔이 불쾌하고, 화가 나 잠을 거른 탓에 기분도 나빴다. 하루를 통째로 휘둘린 기분.

그런데 해가 지고 다시 누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똑같은 실수는 하지 않는다. 인다비라면 비밀번호로 문을 열고 들어올 테니까 저건 또 다른 불청객일 것이었다. 이틀 연속으로 불청객이라니 빌라 치안이 말이 아니다.

소음에 곤두서는 짜증을 다스리던 차에, 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다급해지더니, 쾅, 하고 문이 부서졌다.

문이 부서져 집 안으로 쓰러지는 장면은 비현실적이었다. 그 문을 밟고 나타난 어제의 에스퍼 만큼이나.

그 에스퍼는 여전히 희멀건 낯짝으로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다. 크게 뜬 눈이 나를 보고 반짝였다. 안심한 것처럼 어깨가 늘어지는 한숨을 쉬었고, 문을 부서트렸을 손인지 발인지를 다소곳하게 모으고 서서 나를 불렀다. 군복을 입었고 부러진 오른팔에는 깁스를 한 채로.

‘윤오 씨…….’

거기다 오늘은 내 이름을 알았다. 군이 함부로 가져간 개인 정보를 봤나 보지? 내내 이글거리던 분노와 불쾌감이 터져 나오려 했다. 거친 욕설을 몇 개나 주워 삼키고 머리를 흐트러트린 다음 간신히 축객령을 내렸다.

‘당장, 꺼져.’

그 말이 뭐가 그렇게 충격이고 상처받을 일이었는지. 동그란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표정이 어이없었다. 내 집에 쳐들어와 두 번째 만에 문짝을 부서뜨리고 그 위에 올라선 주제에.

‘윤오, 윤오 씨……. 왜 저를, 아, 윤오 씨…….’

눈치를 보며 훌쩍거리기 시작한 에스퍼에게 할 말은 없었다.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이번에는 나를 찾아온 게 맞는 모양인데, 사과라도 하러 왔나? 사과는 필요 없고 만날 생각은 더 없다. 문을 뜯어 버리지 않았으면 내 집에 두 번 다시 들일 일도 없었다.

‘나가요.’

‘윤오 씨, 제가, 가이드……. 제 가이드니까……. 왜…….’

벌벌 떨며 눈물을 떨어뜨리기 시작한 꼴이 퍽 가련했지만, 저 조그만 손아귀가 뼈도 쥐어 부수는 걸 안다. 내 이름과 가이드, 에스퍼, 왜, 따위의 말을 횡설수설하는 것을 가만 보았지만 꺼질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부들거리는 손은 가슴 포켓에서 접힌 서류를 꺼냈다. 펼치려는 것처럼 불편한 팔과 손등에 흉터가 있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잘되지 않자 포기했는지 그대로 내게 내밀었다. 접힌 흰 종이의 끄트머리가 거세게 흔들렸다.

받지 않고 그대로 내려다보고 있자니 떨림은 더욱 커졌다. 소리 내지 않으려 참는 것 같았지만 숨을 들이쉴 때마다 히끅거리는 소리가 났고, 눈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고 낚아채듯 서류를 받아 펼쳤다. 위의 몇 줄을 읽다 다음 장을 넘겨보았고, 곧 두 장을 모아 찢어 버렸다.

[강제 동원령 : 가이드 의무 사항]

[가이딩 보수표 : 1급, 갑종]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가 가이드라고?

찢어발긴 서류를 바닥에 던지고 다시 꺼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에스퍼는 주저앉아 빌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왜’를 말했다. 내가 당연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줄 알았다는 듯이.

‘왜, 안, 제가 잘못했, 너무 해요……. 살려, 주세요, 보고 싶었어……. 나를, 나를……. 윤오 씨……. 사랑해……. 살려 주세요…….’

끌어낼까 싶었지만 힘의 차이도 그렇고 어제 본 이능 때문에 닿기가 께름칙했다. 내 몸에 집착적으로 달라붙던 것도 기분 나쁘고 울며 바닥을 기는 것도 싫다. 살려 달라든가 잘못했다든가, 횡설수설거리는 것도 짜증 났다.

어째서 내가 가해자의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거지?

이번에는 그 에스퍼의 관리자가 빠르게 도착했다. 조금 더 구체적인 서류를 가지고.

‘가이드로 등록되셨습니다. 의무 사항에 관한 부분을 전달 드리겠습니다.’

주 2회 이상 만나야 하고, 매 한 시간 이상 시간을 보내야 한다. 접촉이 요구되며, 성행위를 권장한다. 금전적으로 충분히 보상할 것이며 비상사태에는 강제로 집행할 수 있다. 효력 발생 일자는 당일.

미친 거 아닌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 같은 사항들을 안내한 여자는 군홧발로 거실에 들어와 내 책상에 약 300페이지 가량의 가이드 의무 사항이 쓰인 서류 뭉치를 내려놓았다.

멋대로 침입해 현관문을 부순 에스퍼는 쉬지 않고 울더니 실신에 가깝게 늘어졌다. 데리다라는 여자가 부축해서 세웠을 때 배에 벌겋게 핏물이 번져 있어 조금 놀라긴 했다. 저 상처가 어제도 있었나?

시끄러운 울음소리와 은근한 피 냄새를 남기고 에스퍼가 떠났다. 문짝이 뚫려 휑한 거실에 앉아 찢어 버리기엔 두꺼운 서류 뭉치 겉면을 내려다보았다. 한두 장 넘겨 보았지만, 그 에스퍼의 이름이 이선인 것만 확인하고 다시 덮었다.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개 같은 강제 집행.

미친 군부.

짜증 나는 데리다.

정신 나간 에스퍼.

울리기 시작한 전화를 들어 통화 버튼을 누른 뒤 저만치 집어 던져 버렸다. 책상 위로 미끄러진 전화가 재떨이에 처박혀 웅웅거리며 여자 목소리를 냈다.

데리다. 집요하고 무례한 여자. 저 여자는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걸어 대고, 전화를 꺼 두면 집으로 사람을 보냈다. 그것까지 무시하면 경찰을 대동하고 나타나 현관문을 땄다. 군이든 경찰이든 단체로 돌아 버린 게 분명하다.

다짜고짜 울리기 시작한 전화로 집중이 흐트러졌다. 다시 흐름을 찾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짜증스러운 손짓이 팔걸이를 두드렸다. 의자에 기대 모니터를 노려보다 결국 담배를 꺼내 물었다. 두어 모금 빨아들인 다음엔 곧장 필터를 잘근거렸다.

이선.

그 이상한 에스퍼를 만나야 한다고? 접촉에 성관계?

말도 안 되는 소리.

연기를 내뿜자 공기 청정기가 요란하게 돌아갔다. 별 효과는 없을 테지만 인다비가 호들갑을 떨어 들여놓은 기계다. 담배를 끊을 게 아니라면 저거라도 쓰라고.

그뿐 아니라 폐가 나빠질 수 있으니 운동을 해야 한다며 주에 몇 번이나 집에 찾아와 수선을 떨어 댔고, 작업 진척이며 신작이며 계속해서 성가시게 굴었다.

중앙에 온 지 이제 2년쯤 됐나. 그 정도면 오래 참았지. 인다비 하나로도 충분하고 넘치는데, 귀찮게 구는 것들이 더 늘었으니 자연히 떠날 생각이 들었다.

무어라 협박 같은 말을 지껄이는 전화를 등지고 옷을 두는 방으로 들어갔다. 대충 건조기에서 빼낸 구겨진 옷가지들을 발로 밀어 내고 여행용 백을 꺼냈다. 가볍게 입을 셔츠와 청바지에 속옷 몇 벌을 챙겨 넣었고, 나머지는 가서 살 생각을 했다.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이 가능하니 나름 괜찮은 직업적 장점이다. 어디로 갈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혹시 전기가 없을 수도 있으니 노트 한 권도 챙겼다. 떠오르는 내용만 적어 두면 되니까 얇은 것으로.

적당히 채운 배낭을 한쪽 어깨에 메고 나왔을 때, 이미 전화는 끊겨 있었다. 모바일을 가져갈 것인가 잠깐 고민하다가 그대로 내려놓았다.

메모지를 꺼내 한 달쯤 후에 돌아오겠다는 메시지를 써서 키보드 아래에 끼웠다. 멋대로 들어온 인다비가 확인할 것이다. 아니면 문을 따고 들어온 그 미친 여자일 수도 있겠지.

이번에는 배를 타 볼까. 저번에 날씨가 좋지 않아 포기했던 작은 섬 투어도 괜찮겠다. 여권을 챙겼는지 한 번 더 확인하고 집을 나섰다.

요 며칠은 의도치 않게 나갈 일이 많았지만, 원래는 여름이 끝날 때까지 방해받지 않고 틀어박혀 책을 쓸 생각이었다. 겨울쯤 출간할 책을 써 놓은 다음에 남쪽으로 여행을 가려고 했었지. 겨울의 펠리우는 꽤 좋으니까.

조금 앞당기는 것뿐이고, 책은 조금 늦게 내면 된다.

그런 생각으로 떠난 걸음은 기차역에서부터 막혔다.

‘이동 제한자.’

그런 제한이 있다는 것도 처음 들었다. 황당했다. 범죄자라도 대하는 시선을 하루걸러 다시 받으며 쪽방에 구류되어 있으니 군인들이 나타났다. 데리다. 그 여자였다.

‘가이드로 등록되셨으니 의무를 다하셔야 합니다만, 연락에 불성실하게 응하시는 까닭에 이동 제한 신청을 넣었습니다. 부득이하게 이동하셔야 할 경우 연락 주시면 심사 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의무, 불성실, 제한, 심사.

‘기준 거리는 거주하시는 빌라부터 반경 약 50킬로미터입니다. 편도 2시간 이상이 걸리는 경우에도 제한됩니다.’

‘내가 무슨 범죄자입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가이드라고 말씀드렸는데요.’

‘그 가이드라는 건 거부할 수 없습니까?’

‘없습니다. 의무입니다.’

가이드. 가이드라. 헛웃음이 났다. 여태껏 에스퍼며 가이드와 조금도 관련 없는 삶을 살았는데 난데없이 내가 가이드라고? 그 무단 침입자가 에스퍼고?

책을 써 보려고 조금 알아보았던 것이 에스퍼에 대해서 아는 전부였다. 그 플롯도 영 엉성해서 편집부에 자료를 요청해 두었는데, 쓸 만한 자료가 없으면 접어도 될 그저 소재 중의 하나일 뿐이다.

‘……가이드는 에스퍼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귀중한 자질입니다. 보상도 충분히 나올 것입니다. 글을 쓰지 않으셔도 생활이 충분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죄송합니다. 그저 보상이 충분하다는 뜻이었습니다.’

군의 마크가 새겨진 차량을 타고 다시 군인지 집인지 모를 곳으로 호송되었다. 데리다는 끊임없이 가이드의 의무를 나불거리며 나를 설득할 것처럼 굴었지만, 말하는 족족 실패였다.

돈이건 혜택이건 다 필요 없다. 이동 제한이나 풀라고 했더니, 도주의 위험이 있으니 안 된단다. 그래 놓고서 범죄자 취급이 아니라고 우겼다.

‘상관은 좋은 분입니다. 분명히 잘해 주실 겁니다.’

그 헛소리는 저를 팔아먹으려는 장사치의 속셈 같았고,

‘아픈 분입니다. 가이드가 꼭 필요하십니다.’

그 헛소리는 멸종 위기의 동물에게 기부하라는 광고 같았다.

따지자면 장사치보다는 공익 광고 쪽이 낫긴 한데…….

들썩이던 마른 등을 떠올리니 짜증이 났다. 꾸역꾸역 울음을 참던 헐떡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울면서 웅얼거리던 말들이나 금세 무릎을 꿇고 빌던 그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죄다 비정상이다.

나를 어떻게 알고 초면에 집까지 쳐들어왔는지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가이드인 것부터 이상하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내가 가이드니 저 에스퍼를 위해서 살라고? 강도나 다름없는 소리를.

군에 출석해서 정기적으로 가이딩 하라는 것은 거절했다. 강제 집행 얘기를 꺼내기에 필요하면 내 집으로 와서 받게 하라고 했다. 그냥 비아냥댄 것이었으나 여자는 그 사항을 들고 있던 군용 모바일에 받아 적었다.

요구 사항이 있으면 말하라는 그 태도에 몇 가지 조건을 달았다. 태반은 거절당했고, 몇 가지는 승인이 필요하다고 했으며, 소소한 몇 가지는 받아들여졌다.

그때부터 이선은 내 집으로 찾아오게 됐다.

횟수는 매주 한 번. 내 사정에 맞춰 조정할 수 있는 것으로.

처음 몇 번은 곤란함의 연속이었다. 어떻게 나를 찾았느냐 물었더니 서점에서부터 뒤를 따라 왔다고 당당하게 스토킹을 고백했다. 절로 굳어 짜증을 보이는 내 눈치를 살피더니 그다음은 느닷없는 사랑 고백이었다. 내 뭘 알아서?

‘처음, 처음부터요……. 사랑해요……. 정말요……. 많이 기다, 기다렸…….’

그러곤 다시 울기 시작했다.

말만 하면 눈치를 보고, 울고, 무릎을 꿇고.

어쩌자는 건지.

접촉을 당연하게 요구하는 것도 싫다. 처음처럼 에스퍼의 힘이든 이능이든 써서 강제로 추행할 경우 가이드를 하지 않겠다 으름장을 놓았더니, 에스퍼의 흰 얼굴이 더욱더 희게 질렸다.

울면서 용서를 구했고, 살려 달라는 헛소리를 했다. 어이가 없다. 지금 다른 사람 목줄을 틀어쥐고 협박하는 게 누군데.

더 어이가 없는 건 내게 사람을 붙여 감시하다 걸린 것이다. 내가 위험할까 봐 그랬다고 변명하는 걸 싸늘하게 잘랐더니 잘못했다며 울었다.

냉담하게 대했더니 말을 더듬기 시작했고, 내 눈치를 보느라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게 됐다. 거슬렸다. 이 에스퍼가 조장하는 분위기에 계속해서 내가 가해자가 되었다. 피해를 입고 죄책감을 얻는 게 유쾌할 리 없다.

차라리 무시를 하자. 없는 사람처럼. 고작 두 시간이고, 나는 내 할 일을 하면 되니까.

그랬더니 이선은 두 시간 내내 소리 죽여 울다가 조용히 떠났다. 기분이 더러웠지만, 울고 빌고 사랑해 달라고, 살려 달라고 구걸하다 기절하는 꼴을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두 달 정도 지났을까. 첫 강제 집행에 불려 갔다.

죽은 듯 누워 있는 이선에게 가이딩을 하라며 병실에 집어넣어졌다. 가이딩이 뭘 하라는 건지. 설마 섹스를 하라고? 일을 하다 끌려온 참이라 반항심이 끓었다. 멀뚱히 그 옆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주황빛에 가까운 갈색 머리칼과 같은 색의 속눈썹, 핏기 없는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마른 몸에 주렁주렁 연결된 기기를 보기도 하고 알아볼 수 없는 모니터에 뜬 수치를 보기도 했다.

에스퍼. 그 이능은 뭐였는지. 아프다는 건 뭔지. 궁금하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거리를 지키고 싶었다. 내 일상은 충분히 망가졌다. 억지로 끼워 넣은 에스퍼 하나 때문에.

그런데 그 차가운 손을 잡았던 건 왜인지 모르겠다. 조금 놀랄 정도로 차가웠다. 아직 여름인데, 한겨울에 바깥을 헤맨 사람처럼 손이 얼어붙어 있었다. 이게 그 부작용이라는 건가? 동상 같은 게 걸리나?

그 손을 잡아 조금 온기를 되돌려 놓았을 때 이선의 속눈썹이 움직였다. 서둘러 손을 놓고 병실을 나섰다. 세 시간이 훌쩍 지나서인지 무사히 내보내졌다.

일에 매진하다 보니 시간은 잘 흘렀다. 주에 한 번 왔다가는 에스퍼도 마찬가지다. 매주 두 시간씩은 꼬박꼬박 거실에 들이는데도 에스퍼는 계절마다 한 번씩 쓰러졌다. 그때마다 나는 병실에 불려 갔다. 끌려갔고, 잡혀갔다.

달마다 이선의 이름으로 건강 통지표가 날아왔지만 첫 한 번을 제외하고는 뜯어보지 않았다. 그 내용이 가이딩 부족으로 끝났고, 어차피 나머지도 마찬가지일 게 뻔해서.

매번 걸려 오는 까칠한 부관의 전화도 같은 내용이었다. 가이딩을 늘려라, 가이딩이 부족하다, 더 강한 접촉이 필요하다, 듣기 싫은 참견 일색에 한발 더 나아가 돈 얘기도 했다.

보수가 얼마나 지급되었다는 둥, 상관의 상태에 따라 보수의 종급이 올라갈 수 있다는 둥. 그딴 돈 필요하지도 않고 몸값을 매겨 받는 더러운 기분만 들었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경험은 첫 겨울에 일어났다.

이선이 다시 쓰러졌다고 했다. 연락에 응답하지 않으면 군이 출두하는 강제를 당하던 나는, 연행하러 온 차량에 다시 짜증스럽게 올랐다. 또 계절이 바뀌었구나. 그런 지긋지긋한 감상이었다. 똑같이 군부였지만 이번에는 도착한 건물이 달랐다. 벽체가 두껍고 다분히 폐쇄적인 건물이었다. 내부는 병원과 비슷했다.

기다리던 데리다가 피곤한 낯으로 몇 가지를 내밀었다. 당황하기에 충분한 물건들이었다. 윤활 젤과 약이었으니까.

‘발기를 도와주는 약입니다. 상관께서 의식이 없으시니 직접 하셔야 합니다. 윤활 젤은 병실 내부에도 충분히 있습니다. 모자라면 더 쓰시고, 몸이 약하시니 배려를 부탁드립니다.’

‘배려라고? 아예 콘돔도 챙겨 주지 그러십니까?’

‘가이딩 효율을 위해서는 콘돔을 쓰지 않는 직접 성관계가 좋습니다. 약은 1알의 효과가 약 15분 정도 지속됩니다. 준비한 4알 외에 더 필요하시면 말씀 주십시오. 근처에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지금, 의식이 없는 환자를 상대로 섹스하라는 겁니까?’

‘가이딩입니다.’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방금 막 들은 소리인데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못하고 겉돌았다.

섹스가 가이딩이고, 발기를 돕는 약에 콘돔 없이 섹스를 해야 하고, 상대는 의식이 없다고.

말로만 듣던 가이딩 성 착취 같은 건가? 상식은 어디 갔지. 이게 연합군 맞나?

나는 아직 가이드라는 걸 실감하지도 못했다. 군이 협박하니 때때로 울보 스토커 하나를 거실에 들이는 정도로 생각하려 애썼다. 그 에스퍼와 그를 상대로 드는 동정이나 죄책감까지 무시하는 게 내 최선이었다.

이 농담 같은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했지만 궁금해하지 않았다. 알고 싶지만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전부 무시했다.

등 떠밀리다시피 들어간 병실은 계절이 헷갈릴 만큼 난방이 세게 틀어져 갑갑했다. 짜증스럽게 코트를 벗어 내려놓고 침상 옆 의자에 앉았다.

숨이 막히지도 않는지 이선의 몸 위로는 몇 겹이나 되는 모포가 두툼하게 덮여 있었다. 물주머니 같은 게 발치와 옆구리에 올라가 있고 주변만 가도 후끈한 열기가 끼쳤다.

정작 둘둘 말려 있는 사람의 안색은 희멀건 했다. 밝은색 속눈썹이 이따금 떨었다.

저렇게 따뜻한 색깔로, 어떻게 저렇게 추워 보일 수 있지.

가이딩의 작용 원리가 어떻게 될까. 알 수 없다. 내 옆에 있기만 해도 가이딩이 된다더니 이 에스퍼는 잘도 픽픽 쓰러졌다. 그리고 이제 와서는 또 섹스가 필요하다 강요한다.

애초에 그와 나의 성별은 고려하지도 않은 듯했다. 이 에스퍼가 아무리 곱상하게 생겼다 해도 남자인데, 남자인 상관에게 쓰라며 아무렇지 않게 윤활 젤을 내미는 게 정상인가? 몸이 아프니까 배려하라고?

연합군이 아니라 반란군인 건 아닐까.

군부의 명령으로 잡혀 와서는 의식도 없는 상대를 강간할 위기에 처했다. 대체 뭐가 더 문제이고 누가 얼마나 돌아 버렸는지, 마저 다 욕하기도 버겁다.

손에 든 것들을 아무 데나 던져 놓고 보니 침상 옆 협탁에 똑같은 생김새의 윤활 젤이 6병이나 더 있었다. 짜증이 치밀었다. 후덥지근한 병실도 싫고 소독약 냄새도 싫다.

무릎을 팔꿈치로 짚고 손에 얼굴을 묻었다. 작업을 끝내고 잠이나 좀 자려던 차에 끌려온 것이라 풀리지 않은 피로가 정상적인 사고를 방해했다. 화내고 싶지 않은데 화가 났다.

이대로 그냥 시간이나 보내다 가면 되겠지. 다른 날처럼.

‘……윤오 씨.’

꺼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는 한참 그렇게 시간을 보낼 때 들려왔다. 낯빛이 희게 질리다 못해 흐린 이선은 눈꺼풀마저 무거운 사람처럼 느리게 눈을 떴다. 과일이나 노을을 떠올리게 하는 따뜻한 색감의 눈동자를 힘없이 굴려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말려야 할까?

피곤하다. 다 그냥 없던 일로 하면 안 되나. 나 말고 다른 가이드를 찾으라고, 그렇게.

나도 모르게 욕을 중얼거리다 이선을 노려보았다. 화풀이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이 거칠게 나갔다.

‘내가 지금 환자를 상대로 섹스하라는 말을 들었는데. 군이 통째로 미친 겁니까?’

놀란 듯 동그랗게 뜬 눈은 금방 젖었다. 뭐만 하면 젖고, 내버려 두어도 젖었다. 마주치기만 해도 반짝이는 눈이다. 쉽게 내리깔리는 속눈썹이고, 금세 떠는 작은 어깨와 곧잘 가슴팍을 누르는 마른 손이었다.

몇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니 어쩌니 허튼 말을 하길래 딱 잘라 거절했다. 내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고.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솔직한 마음이었다. 집착이고 광기로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이선은 이제 사랑을 말하지 않게 되었지만 저 태도는 바뀔 생각을 않았다.

감출 생각이 없는 건지, 솔직한 건지. 저 감정이 진심이기는 한지.

조그맣고 혈색 없는 입술은 한참 망설이더니 황당한 말을 뱉었다. 부탁이었다.

‘……네. 부탁, 부탁드립니다.’

‘정신이 나갔군.’

이선은 말 그대로 정신이 나가 있었다.

팔도 부러뜨리고 철제 현관문도 부수던 손으로 고작 모포 몇 겹을 힘겹게 치워 내더니 제 앙상한 몸에 붙은 전극을 뜯어냈다. 그대로 휘청거리며 침상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잡아 쓰러지는 것을 막았다. 차가운 몸이었다.

그 가이딩인지 뭔지가 정말로 되고 있긴 한가.

나는 내내 그 효과에 부정적이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품을 파고드는 차가운 팔다리며, 내 가슴팍에 입술을 비비고 허덕거리는 숨을 들이쉬는 것이나, 떨리는 등이 한 번씩 튀어 오르고 세운 아랫도리를 내 다리에 비비는 것까지.

온통 변태 성욕자의 이상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침입자. 내게 성욕을 느끼는 에스퍼. 남자.

힘없지만 대범한 손길이 내 몸을 더듬고 안겨드는 걸 잠시 내버려 두었다. 놀라서 조금 굳은 것도 있다. 정신을 차리고 떼어냈을 때 그 뺨에 드물게 붉은 기가 돌았다.

그 장면이 이상하고 어색해서 또 몇 초간 내려다보았는데, 벌벌 떨리는 손이 내 바지춤을 잡았다. 당장 밀쳐 냈다.

정신 나간 에스퍼는 내가 밀어 낸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서 그 이상한 여자의 상관다운 말을 했다.

‘제가, 입으로 세워 드리면…… 될까요……? 하게, 하게 해 주……. 아픈, 아파서……. 윤오 씨……. 도와주세요……. 살려, 제가 해 드릴, 하게 해 주세요…….’

얼굴을 눈물로 적시고 잘도 애절한 부탁을 한다. 의식을 잃었다 막 깨어난 환자 주제에 저를 범해 달라고 마른 가지 같은 몸으로 빌었다.

미친 일이다. 제정신이 아니다. 돌았다.

이성을 차려야 하는데 피로한 몸이 늘어지고 머릿속은 짜증과 분노로 들끓었다. 나를 어디까지 끌어내릴 셈이지?

어디까지 하나 보자.

몹쓸 생각이 들어, 앉은 자리에서 무릎을 벌렸다. 척 봐도 어설픈 저치가 제대로 하기나 할까. 그런 생각이었다.

예상대로 에스퍼는 손놀림 하나하나가 전부 어설펐다. 식어 빠진 손가락은 바지 지퍼 하나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한참을 헤맸다. 브리프를 보자마자 코를 박을 때는 내심 놀랐지만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 위를 할짝거리는 게 퍽 가소로웠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그런 취급을 자처해 놓고서 이선이 또 울었다. 못 참은 흐느낌과 투명한 눈물을 조용하게 줄줄 흘렸다. 손은 어찌나 서투른지 다른 사람의 몸을 제대로 만진 적이나 있을까 싶었고, 냅다 얼굴을 문지르는 펠라는 본능적이었다.

관찰자의 시선으로 이선이 하는 모양을 보고 있을 때, 마른 손이 겨우 내 성기를 꺼내었고 조그만 입술이 벌어졌다. 언뜻 비친 안이 무척 붉고 그 안은 뜨거웠다. 차가운 손가락과 대조적인 열기에 미간이 확 찌푸려졌으나 조금 더 버텼다.

속옷을 핥던 것이나 다름없는 어설픈 할짝거림으론 삽입을 할 만큼 세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럼 그 핑계로 성관계를 피할 수 있다. 직접 확인하면 포기하겠지.

……그런데 앞이 섰다.

내 것을 반쯤 물고 우물거리는 흰 얼굴의 발간 홍조를 보고 그랬는지, 아니면 작은 입술이 내 성기를 잠깐 뱉어 놓고 내쉰 더운 한숨 때문이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의도치 않게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갔다. 얼굴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에스퍼의 기뻐하는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자괴감이 들었다.

자극에 반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게 피로와 정신적 거리낌, 그리고 대상의 성별까지 모조리 무시할 줄은 몰랐다. 분명히 어설프기 짝이 없는 손과 입인데. 성욕이 쌓였던 건가? 아니면 화가 나서?

그런 쓸모없는 생각으로 자아와 싸우는 중에 비실거리던 에스퍼가 헐렁한 환자복 바지를 벗었다. 마른 허벅지가 휑하니 공기 중에 드러났다.

둘러보고 윤활 젤을 찾아 들고는 짧은 손톱으로 포장을 벗기려 애를 썼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몇 번 시도를 하다가 그대로 모포에 내려놓고 그 옆에 앉았다. 제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뒤를 만지더니, 손가락이 생각처럼 들어가지 않는지 다시 윤활 젤을 집어 까작거렸다.

하나같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내 다리 사이는 시종 서 있었다. 남자가 다리를 벌리고 그사이를 손가락으로 헤집는데. 유혹하기 위한 것도 아니라 그저 열심히 할 뿐인 서툰 동작인데. 그걸 보고.

‘윤오 씨, 여기에…… 넣어 주, 세요. 가이딩, 가이딩을 부탁, 드립니다…….’

그러더니 고작 손가락을 두 개 넣어 윤활 젤만 바른 곳에다 성기를 넣으라고 부탁을 했다. 내가 뭘 들은 건지. 성교에 대해 뭔가 배운 것 같기는 한데, 어딘가 엉성하고 터무니없는 요청이었다. 그런데 머리가 끓었다. 어디까지 하는지 보겠다던 말은 이제 내게 적용해야 했다.

양쪽으로 벌어진 흰 다리와 힘이 들어간 옅은 색의 남성기, 그 아래 젖어 반들거리는 입구를 보고 죽지 않는 내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환자를 앞에 두고 발기한 좆을 아예 잘라 버려야 하는지 생각이 복잡했다.

내가 돌아 버릴 것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다. 이선이 울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목소리로 내 이름을 연신 부르다 침상을 내려와 다시 내 앞에 무릎 꿇었다. 서 있는 내 성기로 손을 뻗는 걸 쳐 냈다.

‘윤오 씨…….’

움직임이 굼뜨고 유독 흔들거리던 이선은 손을 쳐 냈을 뿐인데 엉덩방아를 찧었다. 맨살을 드러낸 마른 다리에서 시선을 치우고 얼굴을 손바닥에 묻었다. 이걸 씨발, 어떡하지.

좆은 세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환자와 섹스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내 상식으로는 안 될 일이고, 이게 에스퍼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헛소리 같았다.

내가 정말 가이드고 이 접촉이 가이딩이라면 나도 무언가 감지해야 마땅한 거 아닌가? 정말 가이드가 맞기는 한지, 아니면 그냥 이선이 거짓말을 하고 군부가 합심한 걸 수도 있지 않나? 그 경우에 이유는 뭐지?

이선이 나를 좋아해서? 왜? 뭘 알아서?

피곤하다. 이 에스퍼를 만나고 나서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다. 몇 번이나 범죄자 취급을 당했고, 여행은커녕 타 지역도 신고 없이는 못 가게 됐다.

아픈 사람을 방치하고 의무를 등한시한다는 추궁 전화를 매일같이 받고 있으며, 내 책임이랍시고 덜렁 떨어진 에스퍼는 매번 벌벌 떨고 울었다. 나를 좋아하는 건지 무서워하는 건지 모르게.

맨다리를 굽혀 차가울 게 뻔한 바닥에 앉은 이선이 느리게 머리를 내밀었다. 눈물로 축축이 젖은 얼굴을 가만히 내 허벅지 안쪽에 기댔다. 다리 근육이 바짝 긴장했다. 젖어 색이 짙은 속눈썹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눈을 감은 안색이 다시 처음처럼 창백했다.

……신경이 쓰였다.

차마 얼굴은 쳐 낼 수 없어 그대로 두었더니 그 얼굴이 다시 내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함부로 성기에 비비고 입을 열어 구음하기 시작했다.

아랫배 안쪽으로 묵직하게 성감이 차올랐다. 확실한 성욕이었다. 이 남자한테 발기했고, 씨발, 그 조그만 구멍에 처박을 수 있었다. 하. 평생 고려도 하지 않았던 일이다.

남자한테, 수액을 몇 개나 달아 움직일 때마다 링거 흔들리는 소리가 나는 환자한테.

내가 저를 두고 무슨 생각 중인지 알기는 한지. 이선은 서툴고 정성스럽게 성기를 빨았다. 쳐 내진 손은 가슴 앞에 마주 모아 잡고 입과 목만 썼다. 저것도 내 죄책감을 자극하려는 수작으로 보였다. 아주 효과적이었다.

억지로 목구멍까지 열어 삼키려는 걸 다급히 머리채를 잡아 끌어냈다. 컥컥거리며 숨을 고른 이선의 번들거리는 입가를 한참 보다가 손을 풀었다. 이선은 머리를 잡힌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혀를 내어 붉게 달아오른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내 눈치를 봤다.

오히려 머리채를 쥔 내가 더 신경 쓰는 모양새다. 폭력을 저지른 내 손을 주먹 쥐었다 폈다 하며 입을 열었지만, 사과가 혀뿌리에 매달려 선뜻 나오지 않았다.

‘아…….’

그때 자리에서 일어난 이선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길게 뻗은 두 다리 사이로 투명한 액이 흘러 가느다란 길을 만들고 있었다. 무릎을 지나 종아리를 타고 얇은 발목을 거쳤다.

어디나 혈색이 없는 몸을 반절 가로질러 맨발 아래 고인 그 투명한 액체를 보고 아랫도리의 열기가 거세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밀었다. 가벼운 몸이 손쉽게 떠밀려 침상에 누웠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발목을 잡아채니 얌전히 다리를 벌렸다.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상식이 없는 짐승처럼 그 위에 몸을 내리고 내 성기 끝을 미끌거리는 입구에 문질렀다. 빠끔거리는 부분이 귀두 언저리를 물어 당겼고, 안쪽은 느리게 벌어졌다. 머릿속이 시뻘겠다. 끔찍한 쾌감이었다. 이성이 망가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윽, 흣……!’

바닥의 냉기가 묻어 차가운 무릎을 쥐고 허리를 흔들었다. 작고 가느다랗지만 분명히 남자인 이선을 내려다보며 납득할 수 없는 욕망을 풀었다. 입을 가리고 소리를 참는 것도 자극적이고 유연하게 벌어진 다리의 살결이 생각보다도 부드러운 것이 자극적이었다.

빠듯하게 삽입할 때는 늘어져 있던 이선의 성기가 얼마지 않아 힘을 받아 흔들렸다. 작은 몸이 파드득 흔들리고 그의 턱이 치켜 올라갔다.

불씨가 재차 당겨진 것처럼 허리 짓이 거세졌다. 망했다. 제정신이 아니다. 자신을 향한 비난이 빗발쳤다. 자괴감이 들었다. 쓰레기 같은 기분이었다.

밀려 올라간 환자복 틈으로 납작한 배와 작은 배꼽이 보였다. 들이칠 적마다 흉터가 있는 배꼽 아래에 야트막한 둔덕이 생겼다. 작은 골반과 좁은 허리, 비틀어지는 가느다란 목과 소리를 틀어막은 한 줌짜리 손목. 질끈 감은 눈, 기다란 속눈썹, 흩어지는 옅은 색 머리칼…….

하, 성급히 뽑아낸 성기에서 정액이 쏘아져 이선의 배와 다리 사이를 더럽혔다. 이선의 정액이 고인 배꼽 어림과 환자복 상의를 뒤덮어 적셨다.

가랑이 사이로 흘러내린 백탁액이 그새 다물린 좁은 구멍 위를 미끄러져 내렸다. 아찔한 광경이었다. 몇 번이고 더 세울 수 있을 것처럼 외설적인.

그대로 다리를 벌린 채 가쁜 숨을 내쉬던 이선은 눈을 가물거리다 점차 느린 숨을 쉬었다. 깜빡거리던 눈 밑에 길게 속눈썹 그림자가 졌다.

허탈감이 몰려왔다. 느낀 쾌감만큼의 자괴감은 덤이었다. 서둘러 옷을 갖춰 입고 돌아서려다 병실에 딸린 욕실 앞에서 멈춰 섰다.

‘씨발…….’

수건을 적셔 늘어진 이선의 다리 사이를 닦아 내고 묵직한 모포 밑에 가벼운 팔다리를 밀어 넣었다. 피가 역류한 링거 줄을 정리하고 다 쓴 수건과 발기 약은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코트를 챙겨 들고 빠른 걸음으로 병실을 벗어났다. 뒤쫓아 온 이선의 부관이 뭔가 질문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씨발, 씨발……. 흔들리던 하얀 팔다리가 아른거렸다. 열이 올라 붉어졌던 뺨이…….

아주 단단히 잘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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