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년 전 幾回
내게 새겨진 마지막 장면이 아주 좋아서.
그래서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앞두고도 마음이 가벼웠다.
눈을 감으면 그 어둠은 당신의 검정이 되었고, 그러면 빛을 잃은 눈꺼풀 속도 마냥 어둡지 않았다. 따뜻했다. 내 윤오. 윤오의 검정.
나를 뒤덮은 고통이 아련하게 멀어졌다. 무거운 삶이 떠나갔다. 나는 무엇인가 즐거워 어둡지 않고 밝지 않은 그 공간을 사뿐사뿐 걸었다. 허물을 벗어 낸 혼이 알 수 없는 곳을 가볍게 노닐었다.
삶은 그토록 나를 짓눌렀는데 죽음은 참으로 무게 없었다. 편안했다.
사랑해도 짐이 되지 않는 곳이었다.
벼르던 일을 마치고, 소속과 굴레를 벗어던지고.
길 없는 길. 어디인지 모를 죽음의 단계.
떠날 준비가 되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나는 물고기가 어항을 헤엄치듯 공간을 유영했다. 가벼운 몸이 흥얼거리며 윤오의 이름을 노래했다.
사랑해도 그를 다치게 하지 않는 곳, 사랑하기만 하고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곳.
물속처럼, 꿈속처럼. 불분명한 말소리가 주변을 빙빙 돌고 메아리로 되풀이되었다. 웅성웅성 무언가를 말하는데 하도 번져서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적었다.
혹시 내가 가야 할 길을 알려 주려나? 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휘적여 보아도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다. 목소리는 다시 이어졌다.
무슨 소리일까.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돌아오라고?
가만 기다리던 나의 컴컴하고 아늑한 공간이 깨어져 나갔다.
머리부터 뭍으로 끌어 올려지는 감각이었다.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싫었다. 깨어진 틈으로 새어 드는 빛을 피해 등을 돌렸지만 균열은 커져만 갔다. 눈을 질끈 감고 버텨도 지긋지긋한 무게가 다시금 나를 덮쳤다.
“……찮으세요?”
허억, 흑. 고된 숨쉬기에 가슴팍이 들썩였다. 온몸이 무겁다. 간질거리는 식은땀이 척척하게 이마께를 적셨다. 사람들의 다리가 분주히 지나다니고 가까운 곳에 누군가 멈춰 서 있었다. 낮은 시야. 손목이 아프다. 넘어졌나.
욱신, 바닥을 잘못 디딘 모양이다. 시큰한 왼 손목을 감아쥐고 그대로 길에 앉아 멍하니 숨을 골랐다. 부신 눈을 감다가 땀이 속눈썹에 맺혀 망막에 퍼졌다. 따가운 눈꺼풀 뒤로 현기증이 핑 돌았다. 어질, 상체가 훅 꺾였다.
갑자기 어깨를 붙드는 손. 몸을 비틀어 그 손길을 피하고 올려다보니 잔뜩 당황한 누군가가 사과했다. 기억에 없는 얼굴.
아찔한 시야가 서서히 밝아졌다. 초점을 잡고 느리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장소는 눈에 익다. 원국 중앙, 군부와 가까운 시내. 시간은 한낮, 햇볕이 쨍쨍한 오후. 내려다보이는 옷은 군복이 아니라 여름에나 입을 법한 가벼운 차림.
어느 것도 기억의 마지막과 일치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지?
멀거니 앉아 있던 나는 배와 종아리를 만져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처가 없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기, 이거…….”
손수건과 생수를 건넨 여자가 내 사과에 도리어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보다가 손수건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은은하게 화장품 냄새가 났다. 위험하지는 않은 것 같아 작은 천 조각을 들어 관자놀이를 적신 땀을 닦았다.
생수는 버릴 생각이었다. 낯선 사람이 준 것을 먹을 수는 없으니까. 특히나 제대로 눈을 맞추지 못하던 여자의 모습을 떠올리면 더더욱.
깨어나 환한 곳에 섰지만 어디로 가면 좋을지는 여전히 몰랐다. 현실인지 꿈인지, 또는 주마등이나 환상인지도 몰랐다. 내몰린 기분으로 영문을 알지 못하고 몇 걸음 걸었다. 다수가 향하는 길로 떠밀리듯, 떠밀리듯 걸었다. 묘한 기시감은 문득 찾아왔다.
주말 오후의 북적거림. 여름날 햇살에서 나는 쨍한 소리. 먼 곳의 풀벌레. 후끈하고 두터운 냄새. 익숙한 공기. 한 번 지나쳐 온 적이 있는 것처럼 어딘가 낯익은.
번뜩이는 생각이 창이 되어 정수리부터 내리꽂혔다. 팔다리가 허우적허우적 순서 없이 내달렸다.
설마, 설마. 무엇을 기대하는지 모르고 가슴이 섣불리 뛰었다. 몇 번이고 다닌 길을 따라 정신없이 찾아간 곳은 대형 서점이었다.
그리고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커다란 서점 입구, 출입문 유리 너머로 보이는 입간판과 포스터에 윤오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익숙한 책 표지가 그려져 있고, 날짜는 기억하는 그날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지난.
과연……. 과연…….
부들부들 떠는 걸음이 망설임을 무게 추처럼 매달고 서점으로 들어섰다. 복작거리는 행사 장소에는 가까이 가지 못하고 주변만 한참 어슬렁거렸다. 점원이며 손님들이 수상한 행색을 연신 흘끗거리는데, 머릿속이 이미 터질 것처럼 가득 차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식은땀이 흐른 자리에 차가운 냉방기 바람이 닿았다. 피모가 움츠러들고 얼굴과 손끝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명이 끼익 끼익 소음을 비집고 귓가에 울렸다.
의식하지 못하고 어깨를, 턱을 벌벌 떨면서,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윤오의 이름이 들어간 포스터 앞에서 설마, 설마를 되뇌어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면서.
“낭독회 때문에 문을 닫아야 하는데, ……들어오시겠어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게, 나는 말을 건 그의 뒤를 따라 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간이 의자를 모아 놓은 자리에 소담하게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다가서니 복도 자리에 앉은 사람이 안쪽으로 옮겨 자리를 내어 주었다. 단상에 놓인 1인용 소파가 작게 보이는 뒤쪽 자리였다.
서점 관계자가 가져다준 담요를 무릎에 덮었다. 술렁이는 마음 때문에 뭐라 건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따뜻한 캔 음료가 하나, 손에 쥐어졌을 때, 갑작스레 쏟아진 박수 소리에 깜짝 놀랐다. 목덜미가 움츠러들고, 속이 쿵, 떨어져 내렸다.
단상의 뒤편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온 키가 큰 남자. 박수와 환호에도 무심한 표정. 윤오.
윤오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나직하고 덤덤한 말투가 간단한 인사를 한 다음 바로 책 소개를 했다.
짧게 마친 후에 자리에 앉은 그의 긴 손가락이 책갈피가 꽂힌 페이지를 펼쳤다.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서점 한편의 행사장이 조용해졌다. 오직 윤오의 목소리가 강당을 가득 채웠다.
책을 사러 외출한 날. 잠깐의 소란이 있었던 늦은 오후. 가까스로 폐점 전에 찾아간 서점. 입구 앞에서 나도 모르게 돌아간 고개. 발견한 남자. 스쳐 지나간 남자.
두 사람을 따라 걸어간 길. 따라 탄 택시. 빌라. 서성이던 걸음. 구슬픈 풀벌레. 저물녘 그 정원에 가득했던 울음소리, 잔디 밟히는 소리가 맴돌던 정원. 서럽던 눈물. 억울한 세월. 기구한 삶. 아픔. 아픔. 아픔.
꿈일까 무서워서. 사라질까 두려워서. 살고 싶어서. 아프고 싶지 않아서.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 와서. 보고 싶어서. 갖고 싶어서. 만나고 싶고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드디어 상대를 찾은 이 마음을 보여 주고 마음껏 전하고 싶어서.
두 사람이 들어간 빌라. 큰 울음을 울며 빙글빙글 나서지 못하고 맴돌던 정원. 그의 집으로 가는 현관에서 그와 함께 들어갔던 남자가 나온 때. 질투. 의심. 분노.
아무런 어려움 없이 계단을 거슬러 찾아간 당신의 집. 꿈이 흩어질까 성급하게 누르던 초인종. 한 번, 두 번, 세 번……. 벌컥 열린 문. 짜증스럽던 표정. 부르던 이름. 끓어오르던 감정. 환희. 열망. 격정. 증오. 사랑. 사랑. 사랑.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아.
이해할 수 없던 일. 처음 겪는 일. 달라진 세상. 유일한 사람. 끝없는 고백. 마침내 상대를 찾은 고백.
부정. 혐오. 조각나던 마음. 목이 쉬어라 울어 눈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흐려도 자석처럼 그 검정에 달라붙던 시선. 그리고 몸. 갖고 싶어서, 얻고 싶어서, 주고 싶어서. 온 삶을 다해 찾아 낸 당신과 어떻게든 같이 있고 싶어서.
그날의 울음이 이번에는 소리 없이 눈가를 적셨다. 간혹 들이쉬는 만큼 폐부가 후들거려 흐느낌이 새어 났지만 그런 숨소리마저 죽였다. 윤오의 목소리가 나직이 공기를 타고 퍼져 나갔다. 한 구절 한 구절 읽어 주는 내용은 모두 아는 것이었고 그 목소리는 사랑하는 것이었다.
“여기요.”
손아귀에 무언가 파고들었다. 따라 숙인 고개에서 눈물이 처마에 고인 빗물 쏟아지듯 떨어져 내렸다.
속눈썹에 매달린 방울방울이 짙은 색 담요에 떨어져 구멍처럼 더욱 짙은 자국을 그렸다. 동그라미와 동그라미가 쉴 새 없이 겹쳐졌다. 눈을 깜빡이면 후드득 소리가 났다. 턱에 맺히는 것도, 추락하는 것도 무척 빨랐다.
무릎 위에 힘없이 늘어진 손은 각각 더운 캔 음료와 여행용 티슈를 쥐었다. 티슈를 쥐여 준 남자를 올려다보니, 내가 그날 그토록 질투하고 의심했던 남자였다. 인다비. 윤오의 집에 같이 들어가고 나온 사람. 윤오가 집에서 나오며 불렀던 이름. 그의 편집자.
인다비를 알 턱이 없던 나는 결국 실수를 저질렀다. 터무니없는 마음과 형편없는 오해와 그가 절실한 몸을 가지고 끔찍한 이능을 내보였고, 나를 받아 줄 것을 강요했다. 미움을 샀다. 꺼지라는 말을 들었다.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이 나 혼자만의 것이라는 게 어려웠다. 힘겨웠다. 더는 하루도 견디기 힘들었다. 한순간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실수가 이어졌다.
내 속을 전혀 모르는 인다비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손짓으로 얼굴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나는 손에 들어온 티슈를 말가니 내려다보다가 그 시간도 아까워 다시 고개를 들었다.
사람과 사람의 머리 틈으로 윤오의 긴 다리와 소매를 걷은 셔츠, 단단한 어깨, 검은 머리칼, 내리뜬 눈매가 보였다. 겹친 무릎 위에 내려놓은 책과 가볍게 쥔 마이크와 달싹이며 목소리를 내는 입매가 보였다.
윤오가 있었다. 아직 나를 만나지 않은 평화로운 윤오가.
아.
2년 전.
윤오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사인본은 구매 안 하세요? 책은 이게 마지막인데.”
낭독회는 길지 않았다. 내내 울던 나는 윤오가 자리를 옮기고서도 강당을 벗어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진작 멀어져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맴돌았다.
말뚝에 줄이 매인 듯 멀찍이 서서 좁은 데스크에 앉은 윤오를 보았다. 빼곡한 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책장을 넘기고 펜을 드는 손을 훔쳐보며 울었다.
간이 가판대 근처를 서성대다 결국은 마지막 남은 티켓을 샀다.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훔쳐 내고 대신 젖은 손은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그래도 남은 물기가 거머쥔 초록색 종이 티켓을 적셨다. 이걸 사서 어쩌려는 거지. 이대로 윤오의 앞에 가서 어쩌려는 거지.
그러나 몸은 다른 길을 모르고 윤오에게로 가는 줄을 섰다. 꾹, 꾹 흐느낌을 눌러 참고 투둑, 투둑 떨어지는 눈물은 참지 못했다.
혼자 서러워 울고 부는 나는 서점 안에서 도드라진 거스러미처럼 시선을 받았다. 인다비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간혹 티슈나 손수건 따위를 주었고, 그걸로 얼굴을 벅벅 문질러 닦아도 다음 눈물이 쉬지 않고 계속해서 쏟아졌다.
바뀌어 버린 상황에 적응하기보다는 그저 몽롱했다. 기억하는 2년과 내가 저지른 실수는 모두 꿈이었던 걸까. 그러기엔 가슴이 너무 아픈데. 윤오를 떠올리면, 나의 실수와 그의 경멸이 생생해서 아프고, 슬프고.
그리고 내가 그에게 미움조차 되지 못하는 지금이 못 견디게 힘든데.
손등이 물기로 번들거리고 손아귀는 한껏 젖은 티슈로 눅눅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인다비는 오가며 분주한 와중에도 연신 방긋거리며 나를 들여다보았다. 구겨진 티슈를 가져가고 그 자리에 새 티슈를 쥐여 줬다.
사인회 줄의 끄트머리에서 두어 번 도망치려 뒤를 돌았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숨이 멎을 것 같아서 채 한 걸음도 떼지 못했다. 떠나지 못한 걸음은 마치 제 자리처럼 차근차근 윤오에게로 옮아갔다.
그새 눅눅해진 녹색 티켓을 받은 인다비가 티켓 대신 책 한 권을 넘겨줬다. 친한 척 손을 감싸고 팔뚝을 두드리는 것은 불쾌했지만 채 마저 걷지 못하는 내 마지막 걸음은 그가 밀어주었다. 갈피를 모르는 몸과 마음이 단번에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윤오의 앞에 놓였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에서 신간을 받아 든 것은 커다란 손이었다. 좋아하는 긴 손가락이 쉽사리 책을 뺏어 첫 장을 넘겼다. 유려한 필체가 간지에 그의 이름을 쓰고 원국의 오래된 문자로 내지에 한 번 더 그의 이름을 썼다.
“슬픈 일이 있었나요?”
“…….”
“계속 울던데.”
다시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이미 홧홧한 와중에 눈물이 핑 고이며 맺힌 상이 흐려졌다. 깜빡임으로 털어 낸 시야에 검정이 들어찼다.
“안 읽은 책을 알려 주시면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가 같이 써 넣을 내 이름을 물었으나 대답은커녕 입도 떼지 못했다. 간단한 그의 말을 수차례 새기며 의미를 되짚다가 고개를 저었다. 의미 없는 세찬 도리질에 반짝이는 물방울이 허공을 날았다.
“전부…… 있습니다.”
“그래요?”
웃음 같기도 한 짧은 한숨 끝에 윤오가 고맙습니다, 하고 말했다. 귓바퀴가 그 낮은 소리에 옴짝 움츠러들었다.
서점이 보일 때마다 들어가 한두 권씩 사 모은 그의 책이 침실 책장 한편에 수십 권인데, 다시 생각해 보니 윤오를 만나기 전이라면 아직 한 권도 없었다.
의미 없이 모은 상담 심리서만 가득할 책장을 떠올렸다. 무심코 입을 나선 그 오답을 정정해야 할까. 그러기엔 너무 하찮은데.
망설이는 사이 사인을 갓 마친 2년 전의 신간이 되돌아왔다.
윤오가 내게 무언가 준 것이 처음이라 생각하니 손끝이 저절로 머뭇거렸다. 간신히 떨어트리지 않고 받아 물기를 닦은 엄지로 표지를 쓰다듬었다. 윤오가 그의 이름을 써서 준 책.
“괜찮으시면 작가님이랑 사진 찍는 거 어떠세요? 예? 좋은 기념이 될 거예요!”
가뜩이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인다비가 가로막았다. 동그란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간절한 시늉을 해 보였다. 양손에 묵직해 보이는 카메라를 하나씩 들고 퍼덕이는데 개중 하나가 폴라로이드인 것을 알아챈 마음 한구석에 몽글거리는 욕심이 태어났다.
윤오와 사진. 이능 장교의 행동 강령 중 대외 활동 제한이 퍼뜩 떠올랐다. 데리다에게 연락해 물어봐야 할까. 그런 생각보다 조그만 질문이 먼저 나섰다. 제가, 하며 작게 떼어진 말과 손끝이 인다비의 손에 들린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가리켰다.
“……사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 사진이요. 그럼요! 아무렴 드릴 수 있죠. 우리 작가님 정말 팬이신가 보다. 같이 찍어 주시면 저희도 좋고 팬분도 좋고, 아유 좋다!”
꿈과 현실을 정확히 가늠하지 못하는 중에도 욕심이 났다. 간신히 꺼내 놓은 욕심에, 인다비는 반색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우리 작가님이 사진으로 찍어 놓으면 또 보기가 좋거든요. 글만 쓰는 사람이 또 쓸데없이 잘생겨 가지구, 아니 그게 아니라. 사람도 잘생겼고 글도 잘생겼다~, 이 말입니다. 그쵸?”
헤헤, 실없는 웃음을 흘린 인다비는 그가 윤오가 되어 칭찬을 들은 것처럼 뿌듯해했다. 함부로 내 팔뚝을 끌어 포스터 앞으로 데려가더니 윤오의 곁에 세웠다.
“어유, 왜 이렇게 우실까. 낭독회부터 계속 우시네. 헤헤. 작가님 잘 좀 해 드려요! 조금 더 붙어서 친근하게! 알죠?”
카메라를 든 두어 명이 셔터 소리를 내는 동안, 나는 시야를 희멀겋게 적신 채 앞만 보고 섰다. 그러다 인다비의 호들갑에 윤오가 반걸음 다가설 때 흠칫 놀라 등줄기를 바짝 굳혔다. 그는 더 다가오지 않았다. 그것이 또 서러워 눈물이 났다.
둥글고 굵은 눈물방울이 벌건 눈가에 맺혀 뚝뚝 떨어지는 광경을 카메라 여러 대가 앞다투어 찍었다. 내 섧은 맘이 사진으로 남는 동안 닿지 않을 만큼 가까이 선 윤오에게서 그리운 온기와 향이 전해졌다. 무척 사랑하는 것이었다. 혼자만 아는 마음이었다.
“괜찮아요?”
“…….”
“말이 없네.”
무엇이라도 대답하려 빠끔 벌어진 입이 벌컥 차오른 울음소리를 삼키며 다시 다물렸다. 곁에 두고도 그립고, 안타깝고, 다가가고 싶어서 슬펐다. 이명이 사라진 귀에 내 심장 뛰는 소리와 훌쩍이는 소리가 요란했다. 고작 반걸음만 걸으면 그에게 닿을 수 있는데, 닿지 말아야 했다.
그 품이 형편없는 나를 끌어당겨 안아 주는 일은 이제 없다. 무엇도 일어나지 않은 때에, 혼자만 알아야 할 마음이었다.
심장에서 시작한 박동이 손끝까지 퍼져 나가고 느껴질 리 없는 거리에서도 윤오의 온기가 시린 손끝을 덥혔다.
옴짝 졸아 하마터면 그에게 닿을까 피한 것은 나인데, 더 큰 울음을 참아 내야 하는 것도 나였다. 이렇게 가까운데도 기억하는 그 더위에 나를 던져 안기지 못하는 것이 억울했다.
낮은 목소리가 짧게 고맙다 하며 손을 내밀었지만 놓지 못할까 두려워 마주 잡지 못했다. 윤오는 미련 없이 그 손을 거두어 갔고 그의 검정이 나를 비껴 났다.
네모진 사진 한 장을 들고 다가오는 인다비 만큼 윤오가 멀어졌다. 내가 잡지 않고서도 잃어버린 기분이 왈칵 찾아 들었다. 지치지도 않고 눈앞이 습기를 머금었다.
“사진 엄청, 어엄청 잘 나왔어요! 이 사진만으로 이번 기획 대박이다, 이 인다비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 제 이름이 인다비거든요. 윤오 작가님 담당 편집자입니다. 여기 제 명함인데 받아 주세요.”
이미 마른 폴라로이드 사진을 허공에 젓고 후후 부는 시늉을 한 인다비가 휘적휘적 쓸모없는 동작을 다량 섞어 명함을 꺼냈다. 같이 건네는 사진이 갖고 싶어 받아 보니 명함은 기억 속 미래에서 본 모양새다.
“아이구, 아직도 우시…… 흠흠. 다름이 아니라, 이 작품도 작품이고, 이 사진도 이 사진인데요. 작품에 관해서 인터…….”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제가 군인이라 사진을 이용하시는 홍보에 제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 군인이시라구요? 예? 저기 중앙, 아……. 아!”
“그렇습니다. 찍은 것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만 나중에 군을 통해 연락이 갈 수 있습니다. 그 경우 게재하신 곳에서 사진을 내리셔야 합니다.”
겨우 제정신을 차리고 한참 늦은 고지를 했다. 뒤늦게 고개를 깊이 숙이자 인다비가 다급히 팔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고개 숙이지 마시구……. 부탁이 있습니다! 그 저기, 부탁이 그 막 어마어마한 건 아니고 인터뷰를! 인터뷰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인터뷰.
“아니, 꼭 군인이라 하셔서 부탁드리는 건……, 맞습니다! 예, 맞아요. 저기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윤오 작가님 새 작품에 필요한 인터뷰인데요. 시간을 많이 뺏을 건 아니고 몇 번만 어떻게, 네?”
“…….”
“안 될까요?”
외려 제가 허리를 굽신거리고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다. 인터뷰. 윤오의 새 작품.
얼얼한 울대를 삼키며 뚝뚝 서러움을 흘리던 가슴팍이 별안간 서늘하게 식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예리하게 뒤통수를 베었다.
어긋난 기시감이 일었다. 윤오의 새 작품, 군인의 인터뷰. 그러나 그 시기가 2년은 이른.
“꼭 지금 당장 부탁드리는 것은 아니구요! 새 작품 곧 들어가실 텐데, 거기 군인이 나오고 하거든요. 요거는 비밀이긴 한데, 예. 그래서 마침 우리 작가님 팬이시고, 군인이시고 그러니까, 꼭 좀 인터뷰로 도움 주시면 어떨까……. 그런 의견입니다.”
인다비는 내 침묵이 간지러운 사람처럼 굴다가 지레 먼저 변명 같은 말을 이었다.
“아니, 꼭 군인이라고 말씀하셔서 그러는 거는 아닌데, 원래도 저기 사인회 후기랑 작품 관련 인터뷰 부탁드려야겠다, 했는데! 이게 또 이렇게 인연이 되네요!”
“…….”
“바로 대답하셔야 하는 일 아니니까 신중하게 고민해 보셔도 됩니다! 결코! 절대! 개인 정보 함부로 하지 않구요! 이미 내용이 다 정해진 이야기에 세부적인 완성도 면에서 도움을 주십사! 하는 거니까요.”
무언가 잘못된 시간을 더듬어 나가는 중, 공손하게 마주 잡은 인다비의 두 손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부담 없이 저기, 부담 없이 그……, 저녁 식사 같이 하시겠어요……? 아무래도 저보다 작가님이랑 얘기하시는 편이 어떨까, 그런 생각입니다.”
아직 나를 싫어하지 않는 윤오와의 만남.
끊어지는 고갯짓으로 저녁 제안을 마다하고 연락 달라는 말에는 애매하게 시선을 피했다. 그 유혹을 거머쥐기에 앞서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2년 전의 그날, 원래 서점을 찾은 건 훨씬 늦은 시간이었다. 서점을 떠나는 윤오와 인다비를 쫓았으니까. 윤오의 낭독회도, 사인회도 기억에는 없는 과거.
같은 시간 2년 전 그날, 이 시각.
나는 다른 장소에 있었다. 수상한 무리를 뒤밟아 외진 골목에 들어섰었고.
“기다렸어. 선아.”
거기서 키비슈스를 만났다.
키비슈스와 곁에 선 두 명의 에스퍼를 보고 즉시 파동을 가다듬었다.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윈터와 그 이동형 에스퍼.
윈터를 상대하기 위해서 짧게 끊어 사용할 수 있도록 파동을 날카롭게 벼르고 이동형 에스퍼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제어 범위를 넓게 펼쳤다.
“울었어?”
기울인 고개에서 떨어진 머리칼이 어두운 그늘 아래 반짝 빛이 났다. 즐거운 웃음소리가 짧게 나고 다정한 독 같은 키비슈스의 목소리가 퍼졌다.
“같은 시간에 오지 않길래 알았어. 선이 너도 돌아왔구나.”
덜컹.
‘너도 돌아왔구나.’
돌아왔다? 그렇다면 키비슈스도? 짧은 암시만으로 심장이 가눌 수 없는 무게에 짓눌렸다. 꿈이고 상상이라 여기면서도 차마 망가트리지 못한 윤오의 평화가 스쳤다.
가슴이 벌렁이는 와중에도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키비슈스가 얼마큼 알고 있는지, 혹시 윤오가 위험한 건 아닌지 걱정하느라 분주했다. 냉랭한 시선을 웃는 눈이 마주 받았다.
“시간이 더 뒤틀리기 전에 찾아서 다행이야.”
분명 죽였으나 다시 내 앞에 나타난 키비슈스. 덩달아 살아 있는 나. 아직 윤오를 다치게 하지 않은 과거.
“그건 무슨 말이지?”
“알고 있잖아.”
“뭘?”
“2년 전의 여름으로 돌아왔어. 일단은 나와 너. 우리가.”
농담하듯 키비슈스의 낯엔 즐거움이 가득했고 나를 경계하는 다른 두 에스퍼는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들은 것처럼.
“언제, 돌아온 거지?”
“글쎄. 그걸 잘 모르겠어.”
그 모호한 대답과 이 이상한 현상을 미처 다 이해하기 전에, 동시에 두 에스퍼가 짓쳐 들었다.
윈터의 몸놀림이 이상하게 날랬다. 달려드는 만큼 물러나며 골목을 훑어보았다. 피스톨이라도 반출했다면 좋았겠지만 손에 들린 것은 책 한 권이 전부다. 무기가 될 만한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나를 싫어하는 티를 감추지 않는 윈터의 발길질과 이동형 에스퍼의 묵직한 주먹을 피했다. 뒷걸음질치며 팔뚝으로 공격을 흘렸다. 이능이 강하면 자연히 이능 의존적이 되기 마련인데, 두 에스퍼는 따로 몸을 쓰는 법을 익힌 것처럼 움직였다. 기억과 다르게.
당장 두 사람의 파동을 빼앗아 무릎 꿇리면 좋겠지만 그러면 가장 위험한 상대가 하나 남는다. 동시에 셋을 제압할 만큼 기력이 여유롭지 않았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 방법을 떠올리던 순간, 멀찍이 서서 싱글거리던 키비슈스가 둘과 대치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뒷덜미부터 발등까지 긴장이 일었다.
“파동이 다시 형편없어졌네.”
“…….”
“이때는 아직 가이드가 없었나 봐. 아쉽다.”
죽일까 했는데.
가볍게 속살거리는 말에 선뜻 분노가 자글거렸다. 성급히 내뻗은 손이 이동형 에스퍼에 의해 꺾어지고 윈터가 나를 어깨로 치받아 벽에 몰아세웠다. 등을 부딪친 충격에 기침하는 내게 하얗고 기다란 손이 뻗어졌다. 파동은 제어해 냈지만 목을 틀어쥐는 것은 막지 못했다.
“선아.”
목을 조르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키비슈스의 거대한 이능을 억누르고 그의 긴 손가락 틈에 내 손가락을 비집어 넣었다. 뜯어내려 해 봤지만 악력의 차이 때문에 내 살을 긁는 데 그쳤다. 숨통이 막힌 괴로운 신음이 눈앞의 보라색 눈동자를 기쁘게 했다.
“역시 네가 제일 좋아.”
“헛, 소리 말고 이거, 놔.”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내 세상이 끝났다’는 말.”
헛웃음을 참으며 눈을 감았다. 거짓에 서툰 눈가를 미지근한 온기가 훑었다.
“내가 후회할 일이 있는 것처럼 말했지.”
후회? 네가?
한껏 비꼬아 주고 싶었으나 정신을 잃지 않을 만큼 숨을 확보하며 시간을 끄는 게 전부였다.
“내 가이드를 알아?”
“넌, 가이드가 필요 없, 없잖아.”
“그러게. 그런 줄 알았어. 없을 줄 알았어.”
그 어느 때보다도 달콤한 목소리가 코앞에서 고백처럼 흘러나왔다.
“그런데 선아. 네가 부러워. 너를 가지고 싶고, 죽이고 싶어. 왜 네가 아닐까.”
“나는, 네 가이드가, 아니야.”
“왜 아닐까.”
이렇게 좋은데.
굳이 대답할 필요 없이 뻔히 결말을 아는 이야기였다. 설령 그가 나를 가져도 그 끝은 변하지 않는다.
비교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키비슈스의 파동은 앞으로도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필연적으로 폭주한다. 그 생명력을 모조리 갉아먹은 다음에야 안식이 올 것이다. 내가 있어 봤자 그 시기를 미룰 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가이드가 필요 없는 ‘온전한 에스퍼’는 처음부터 글렀다. 그런 건 애초부터 존재할 수가 없다. 비천하고 모자란 에스퍼의 삶은 온통 엉망으로 생겨 먹었다. 오롯한 한 조각을 찾기 위해 고통 속에서 비루하게 연명할 따름이다.
조용하고 편안한 잠, 따뜻한 몸, 맑은 정신. 그 모든 것을 맡겨 놓은 한 사람. 그 한 사람에게 허락받기 위해 모든 걸 내놓을 수 있는 절박함.
키비슈스 같은 자는 영영 알지 못할.
붙들린 목이 저릿저릿했다. 제어치를 넘기는 마비가 쏟아져 피부를 벌겋게 긁었다. 그의 이능이 내 제어를 넘어서서 목 아래에 힘이 빠지고 숨이 막혔다.
그러나 피식 비웃음이 나왔다. 내게 집착하며 제 사람을 영영 모를 키비슈스가 불쌍했다. 결코 알게 두지 않을 테니까. 너는 그렇게 계속 비참하라고.
“너를 처음 만났을 때가 좋았는데.”
“…….”
“작고 말라서 들고 가 버리기 좋았지.”
쌕쌕 가쁜 숨을 내뱉으면서도 내내 보랏빛 눈을 마주 쏘아봤다. 다시 돌아왔다는 것.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내야겠지만, 정말 시간을 거슬러 왔다 해도 내가 취해야 할 입장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죽어야 한다.
삐빅. 작은 기계음이 들리고 키비슈스의 등 뒤로 초조한 낯의 윈터가 다가왔다.
“엘로란타. 이제 가야 해요. 중앙군이 지원을 보냈어요.”
그러지 않아도 멀리 헬기 소리가 들리던 참이었다. 목이 졸려 매달려 있어도 범위 제어를 풀지 않은 이유이고 여태 시간을 끈 까닭이기도 했다.
기분 나쁜 손가락이 그 힘을 풀기 전에 억세게 쥔 내 모가지를 쓰다듬었다. 제어를 더욱 끌어올렸지만 다른 손바닥이 얼굴 반절을 덮자 곧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온몸의 근육과 관절이 힘을 잃고 풀썩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떨어트린 윤오의 책이 무릎에 채여 밀려났다. 펼쳐진 새하얀 페이지에 금세 흙먼지가 침범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엉망으로 쓰러진 내게서 가벼운 뒷걸음을 치는 키비슈스가 다시 웃음 지었다.
“선아. 우리가 세상을 망가트렸어.”
다급하게 다시 제어 범위를 펼쳤지만 이동계 에스퍼가 내 등을 후려치는 것이 더 빨랐다. 겨우 집어 올린 상체가 다시 나가떨어져 맨바닥에 주룩 미끄러졌다.
“간절해서.”
제어가 끊어진 틈에 윈터의 매서운 바람이 좁은 골목에 휘몰아쳤다. 옷을 찢고 머리를 가린 팔뚝을 갈랐다. 피가 배어 나오는 욱신한 통증에도 이동을 가로막으려 파동을 유지했으나 잇따른 폭력에 나뒹굴며 머리가 흔들렸다.
한참 늦은 지구대와 군 순찰대가 도착했을 때는 모두 흔적 없이 사라진 다음이었다.
* * *
늦게까지 이어진 사정 청취를 끝내고 겨우 관사에 돌아왔다.
씻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의무관의 처치가 얼굴부터 팔과 손을 뒤덮고 있어 이틀은 물에 닿지 않도록 해야 했다. 허벅지와 종아리도 피부가 쓸려 따가웠다. 아쉬운 대로 수건을 적셔 꼼꼼히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었다. 피가 묻고 찢겨진 옷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크게 패치가 붙은 얼굴. 얼룩덜룩한 목.
거울 너머의 흉한 꼴보다, 소중히 하겠다 다짐하고서 지켜 내지 못한 윤오의 책이 더욱 안타까웠다. 상처는 낫겠지만 한 번 구겨진 책은 아무리 쓰다듬어도 금이 남는다. 흙모래가 박힌 페이지도, 긁히고 더럽혀진 모서리도 돌이킬 수 없었다.
처음 받은 것. 윤오가 내게 준 것. 그의 필체로 그의 이름이 쓰인 것.
목구멍이 쓰렸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을 삼키는 소리가 훌쩍하고 조용한 집 안을 울렸다. 따로 빼 둔 사진 한 장이 무딘 손끝에 눌렸다. 나란히 선 윤오와 내 모습을 보다 다시 훌쩍였다. 사진 속 윤오도 함부로 만지지 못하는 손가락이 주변만 내도록 갉작거렸다.
함께 놓인 인다비의 명함이 먹먹한 마음을 더욱 죄었다.
지금이라면 아직 실수하지 않았으니까, 뭐 하나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는 형편없는 모습만을 보였지만, 지금이라면 윤오가 나를 싫어하지 않을 테니까……. 인다비가 쥐여 준 조그만 연결 고리에 시선이 가면 충동이 들끓었다. 윤오가 보고 싶었다.
같은 미래를 자초해서는 안 된다. 그를 만나고 얘기를 하면 욕심을 내게 될 것이고, 멋모르는 욕심이 튀어 나갈 방향을 알면 이 무언가 어긋난 시간에서도 윤오를 불행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간절해서.’
나를 모르는 윤오는 여전히 사랑스러운데 무엇도 구걸하지 못하는 현실이 처량했다. 그 발치에 나를 던져 시선을 바랄 수 있었던 그때를 떠올리다 재차 눈시울이 따가워지며 뺨이 젖었다. 그 기억이 비참하고, 괴롭고, 그 끝에는 나를 굽어살펴 주었던 윤오가 그리웠다.
아무 말 없이 내게서 멀어지던 윤오가 가슴 아팠다. 나를 부르고 대답을 다그치던 윤오가 그리웠다. 그가 나를 길들인 시간이 없는 일이 되었다. 되찾고 싶었다.
그러나 지나온 경멸이 속에 맺힌 이름을 입 밖에 나서지 못하도록 했다. 그가 있어 죽지 못하고 견딘 그 세월을 이제 와 다시 겪는다면, 이번에는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알고도 그 불행에 윤오를 적실 수 없었다. 나는 그를 내게, 중앙에 매어 두고 억지를 강요할 뿐이다. 피할 수 없는 통제와 나 자신의 목숨을 건 협박. 모질지 못한 윤오가 살려 두길 택할 만한.
반듯한 명함을 구겼다. 쓰레기통을 찾아 침실을 나서다 몇 번이나 더 훌쩍였다.
눈이 내리던 어제와 다시 풀벌레 우는 오늘. 길을 잃은 그리움.
몸은 익은 대로 출근 준비를 마쳤고 이르게 의무대 검사실에 도착했다. 익숙하게 주간 검진을 마쳤다. 계절도, 요일도, 심지어 연도도 정상이 아닌 아침이 다분히 일상적이었다.
시간이 틀어졌고 세상이 망가졌다는, 이해하지 못한 선문답이 뇌리를 휘저었다. 이미 지나온 과거와 지금을 되풀이하여 의심했다. 생각이 중간중간 공백에 젖었다.
“……이고, 바로 에스퍼 관리동으로 가셔야 합니다. 수송 중인 에스퍼의 신원은 전달받지 못했지만 응급이라고 합니다. 환부를 확인하신 다음 치환이 가능하면 살리라는 명령입니다. 일정은 모두 취소했습니다.”
“……데리다.”
“예.”
소매를 끌어내려 채혈을 끝낸 희멀건 팔뚝을 가렸다. 고작 30밀리리터를 뽑아내기 위해서 주먹을 수십 번 쥐었다 펴야 하는 몸이 익숙하고, 마찬가지로 형편없을 검진 결과가 선연하게 그려졌다.
“…….”
“말씀하십시오.”
뜬금없이 일정 보고를 끊어 놓고 말이 없는 상사를 데리다가 조용히 기다렸다. 무언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명료한 질문이 없었다. 간단히 지난주와 이번 주의 일정표를 보내라고 한 다음 모바일로 훑어보았다.
들여다보아도 이 시기의 기억이 유독 흐렸다. 윤오를 찾아내고 한참 동안 내 정신이 희망과 절망, 천당과 나락을 오갔기 때문이다.
가슴에 거멓게 불이 번지던 기억은 선명하다. 내 가이드가 있는 세상에 벅차오르다 거절을 납득하지 못하고 감정이 들뛰었다. 그를 넘어뜨리고 갈취한 순도 높은 가이딩에 몸이 가벼웠고, 속이 수런거려 밤을 새웠으나 정기 검진 결과가 양호했다.
검사 방법이 갖가지로 달라진 십수 년 동안 주의가 달리지 않은 결과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주간 검진을 마친 즉시 데리다에게 윤오를 내 가이드로 등록할 것을 지시했었다. 겨우 만난 가이드가 화를 냈으니까 사과할 방법, 찾아갈 구실을 찾아 가이딩 보수표를 가져오게 했다.
그것이 실수의 연장인 줄도 모르고 다시 그를 찾아가 열어 주지 않는 문을 부쉈다. 납득할 수 없는 차가운 시선과 거절만을 거듭 얻었다.
들이닥쳐 저지른 폭행도, 가이드 등록도, 그를 불쾌하게 할 줄 모르고 들이댄 보수표도, 뻔뻔하게 나타나 문을 부수고 침입한 것도, 설은 고백도…….
그 모두가 잘못이었던 것은 그의 발치에 무릎 꿇고 빌어도 늦은 시점에서야 알았다. 경멸과 냉대로 하나씩 배워야 했다. 가이드를 찾아낸 다음에도 그렇게 아플 수 있다는 건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서. 무시와 미움에 대처하는 법은 몰라서.
과거를 수복하는 망상은 언제고 윤오의 호감을 얻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막상 현실로 닥치자 덜컥 겁이 났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실수와 실패의 거듭된 기억이 꼭 맞는 죔쇠처럼 나를 가두었다.
팔에 감긴 단단한 붕대를 손톱이 긁었다. 누구에게도 윤오를 말하지 않았으니까 괜찮다. 그를 내 가이드로 등록하지 않을 테니 윤오는 나를 미워하지 않을 것이고, 내가 없으면 그는 안전하다. 불행하지 않고 평안할 것이다. 자유로울 것이다.
있었던 일을 지우고. 일어난 일은 없는 것으로 하고.
갑작스레 떠오른 가능성에 숨이 턱 막혔다. 2년 전의 여름에 초대받은 조그만 정원이 스쳤다.
“데리다. 사야야는?”
“사야야 대위 말씀이십니까? 알아보겠습니다.”
들고 있던 태블릿을 몇 번 살피나 싶더니 곧 데리다의 입에서 그녀가 파견을 갔다는 덤덤한 보고가 나왔다. 뒤늦은 현실감이 이 ‘또 하나의 현실’에 닥쳤다.
“루…….”
“예?”
같이 관을 따르며 수시로 쓰러지던 루돌프가 떠올랐다. 이 현실에 사야야가 살아 있다면, 그렇다면 루돌프와 그들의 비밀도 여전히…….
“키비슈스, 는 어떻게 됐지?”
“새벽에 펠리우 국경에서 반군을 목격하였으나 놓쳤습니다. 확인되지 않았습니다만, 병력 중 이동형 에스퍼가 적어도 둘 이상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핵심 인원으로 추정됩니다. 정확한 목적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펠리우의 주요 연구소에 추가 병력을 배치했다고 합니다.”
키비슈스가 남쪽으로 벌써 국경에 다다랐다는 소식이었다. 직접 마주친 셋이 전부일 거라 여기지는 않았으나 보고된 규모가 짐작보다 컸다. 일전에는 중앙에 침입해 나와 마주친 후 곧장 북쪽 산맥을 넘었는데 펠리우라니. 전과 다른 규모와 동선에서 묘한 불안감이 치밀었다.
펠리우, 루돌프의 고향. 키비슈스가 펠리우에 해를 입힌 전쟁 초기에 루돌프는 가족을 모두 잃었다.
제 가이드에 대해 무언가 알아챈 것일까? 그래서 나를 떠보려 한 것인가? 뒤늦게 펠리우를 간 것도 단서를 찾기 위해서?
위험한 추측이다. 적어도 그가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 루돌프로 특정하지 못한 것은 확실했다. 나보다 이 ‘또 하나의 세계’에 발을 들인 게 이르다는 것도.
갑작스런 현실감과 위기감이 아찔하게 쏟아졌다. 이것 역시 현실이라면, 키비슈스가 활개 치고 망가트리게 둘 수 없었다.
지금은 중앙이 아니라 펠리우를 향했지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찾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가이드가 아닌 내게도 그렇게 집착한 키비슈스가 제 가이드를 포기할 리 없다.
나를 다치게 할 임무를 실은 헬기를 기다리며, 데리다와 나는 에스퍼 관리동의 집중 치료실 앞에서 말이 없었다. 조용히 심각한 나를 살피는 데리다를 알아도 배려할 정신이 남지 않았다.
2년 전의 여름에서 윤오가 아닌 일을 시간 순으로 떠올려 내는 것만으로 생각이 과부하였다.
중앙을 멋대로 드나드는 키비슈스에게서 두 가이드, 루돌프와 윤오를 어떻게 지켜 내야 할까.
막막하다. 새삼 군에서의 내 자리가 고작 중령이라는 게 아쉬웠다. 설령 내가 준준이나 데이, 혹은 바차스 만큼 계급과 공로가 높아도 이능 장교라는 벽이 남겠지만…….
지휘 권한이 없으니 주요 회의에 참석할 권한도 없다. 이능 장교의 계급은 그야말로 허울뿐이다.
그들이 내 쓸모에 중령이라는 값을 달아 주었으나 그런 위치에도 불구하고 상부가 내 말을 듣게 할 방법이, 아직 반군을 얕보는 그들이 키비슈스를 치도록 설득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씹어 대던 입술이 결국 갈라져 피 맛이 났다. 진작 터져 있던 볼 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어떻게든 지켜 내야 한다는 강박이 강해질수록 혓바닥에 피가 고였다.
가만히 선 상태로도 심장이 울려 이명과 뒤섞인 채 고막을 때렸다.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와중에 번개처럼 또 다른 이름 하나가 떨어졌다.
2년 전. 여름. 사야야와 루돌프 말고도 결혼식이 하나 더, 있었다.
즉시 관리동에서 랩탑을 빌려 대기실 테이블에 얹고 기억을 더듬었다. 바차스가 일러 준 허점을 쓰는 건 처음이지만 관내 네트워크를 우회하는 일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그렇게 켠 검색창에 ‘그린 재단’을 써넣고 엔터를 치는 순간 화면 가운데에 시스템 팝업이 떴다.
[Dear Sun.]
난데없이 뜬 메시지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팝업창 내부에서 글자들이 무지개색으로 흔들거리다 다음 메시지를 띄웠다.
[Welcome to the Paradise >.<]
키비슈스만을 염두에 두고 불안해하던 나를 제멋대로인 메시지가 조잡하게 날뛰며 반겼다.
기껏 우회까지 해 가며 뭐라도 알아보려던 행동은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끝이 났다. 누군가 친히 랩탑을 꺼 주었기 때문이다.
내 조력 없이 알아서 시스템 종료 절차를 밟은 화면이 암전되고, 꺼진 화면에는 요란스레 깜빡이는 알록달록한 메시지가 떴다.
[18시 핫도그 트럭]
키보드를 두들기고 전원 버튼을 눌러 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랩탑이 농담처럼 띄워 준 약도를 노려보다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렴 핫도그 트럭을 모를까 봐.
“중령님. 곧 도착이라고 합니다.”
“……그래.”
데리다를 따라 다시 집중 치료실로 가는 내내 피식거리는 웃음이 샜다. 긴장이 녹아 허탈한 웃음이고, 잃은 줄 알았던 아군의 등장에 안도한 웃음이었다.
든든하다 못해 대단한 저 아군이라면 어긋난 주제에 무난히 반복되는 이 일상에 대해서도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겪고 기억하는 미래가 단순 망상인지 정말로 일어난 문제인지.
시간을 채워 손을 씻고 살균 절차를 끝낼 때쯤, 복도 끝부터 이동식 침상의 바퀴 구르는 소리와 발소리 여럿이 벙벙 울리며 빠르게 가까워졌다. 의무병 하나는 주렁주렁 달린 수혈 팩 중 하나를 쥐어짜며 달리고 또 하나는 침상의 환자에게 올라타 환부를 압박하고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침상이 전실을 가로질러 지나쳤다. 집어넣는 족족 줄줄 흘러 붉은 핏길이 집중 치료실까지 이어졌다. 미약한 파동이 느껴졌다.
짧게 고민했지만 이번에도 내 걸음은 핏자국을 이정표 삼아 집중 치료실로 이어졌다. 그때도 알았던 것 같은데. 이미 늦었다는 것. 저 에스퍼는 죽으리라는 것.
“환부는?”
“이미, 아…….”
“설명해.”
“이능에 의한 우측 상복부의 자상입니다. ……상처가 계속 파고들어서 복부 대동맥까지 이른 것 같습니다. 착륙 직전 대량 출혈이 시작되었고……, 그리고…….”
“가망이 없다고?”
덤덤한 정리에 의무관이 정곡을 찔린 표정을 지었다. 환자를 두고 포기를 떠올린 것이 부끄러운지, 아니면 들킨 것이 부끄러운지 떨어진 시선이 피범벅인 이동 침상 주변을 휘돌아 지났다. 이 피바다는 누구도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그러고 다시 나를 보았다.
회생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에스퍼의 깊은 상처를 치환하고 멀쩡한 내가 대신 드러누울 가치가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시선이었다. 나는 그가 길게 재어 보고 결론을 말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생명을 놓고 가치를 따지는 끔찍한 책임은 누구에게든 적은 편이 나으니까.
말리고 싶은 표정의 의무관을 지나쳐 소매를 걷은 팔을 뻗자 환부가 움푹 패도록 짓누른 손과 그 아래 묵직한 천 조각들이 차례로 치워졌다.
벌겋게 살이 갈라진 상처가 원래 제 것인지 아니면 수혈 팩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를 줄줄 쏟아 냈다. 아직 뛰는 맥박마다 빨강이 새어 나오는 틈을 두 손으로 감싸 덮었다.
치료. 그리고 반작용.
단순한 모순이 환부를 파고들어 치명상을 수선하고, 기이한 반작용이 곧장 내 복부를 뚫었다. 치료한 타인의 상처를 흉내 내어 살갗이 피부 안쪽에서 시작해 바깥으로 터졌다. 눈앞에 누운 이름 모를 에스퍼보다 오래 살아남을 흉이다.
상처든 피 냄새든 하나쯤 더한다고 해서 티도 나지 않는 곳. 허리가 꺾여 뒤로 넘어가는 내 등을 데리다가 받쳤다. 주룩 미끄러져 무릎이 바닥을 찧었지만 손을 들어 의료진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병상을 내어 주려는 것도 말렸다.
데리다는 턱을 악다물어 미련한 상관에 대한 불평을 삼켰다. 내가 대신 피를 쏟아야 끝이 나는 이 지긋지긋한 상처 치환 임무도, 두 다리로 서겠다는 이상한 고집을 부리는 나도 그녀를 번거롭게 했다.
치환을 처음 참관한 젊은 의무병이 젖은 내 복부와 콸콸 쏟아지던 출혈이 멎은 에스퍼의 자상을 정신없이 번갈아 봤다. 크게 뜨인 눈은 처치를 거절하고 꾸역꾸역 자리에 선 나를 보고 더욱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이 기괴한 이능에 질린 걸지도 모르고.
애초에 지혈만을 목표로 한 치환이다. 경험과 감으로 상처가 깊지 않은 것과 출혈이 곧 멎을 것을 알았다.
십 년 넘도록 상처받이를 하다 보면 의무대에서 받을 처치며 예후도 줄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몇 바늘을 꿰매고 수혈을 받겠지. 흉은 남겠지만 하루면, 아니, 반나절이면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는 정도의 상처. 그래. 그때도 붕대를 감고 윤오를 찾아갔으니까.
초조해하는 데리다의 어깨를 건드려 팔을 떼어 내고 질질 끌리는 발을 밀어 뒤를 돌았다.
치료보다 방치가 일상인 집중 치료실의 구석 병상에 또 다른 환자가 누워 있었다. 내내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던 어린 에스퍼의 적갈색 눈동자가 깜빡임도 없이 절룩절룩 다가서는 나를 응시했다.
어둑한 눈빛 다음으로 보인 것은 펼쳐진 등이다. 거멓게 그을리고 녹아 근육결을 드러낸 등이 진물을 뱉고 회복하기를 거듭하며 꿈틀거렸다. 임관 후의 모습이 신기할 만큼 엎어 놓은 몸에 멀쩡한 살이 별로 없었다.
군데군데 진물을 흡수할 거즈를 덮은 길쭉한 신체.
피부와 혈관이 무사한 살은 예외 없이 바늘 자리였는데, 이마에 꽂힌 링거 줄 그림자가 기억보다도 앳된 얼굴과 고통스러운 삶을 지겨워하는 눈빛에도 드리워 있었다. 손을 들어 눈을 감겨도 녀석은 거리낌이나 반항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중령님!”
이러면 다시 네가 내게 애착을 가질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 알량한 달램도 몹쓸 짓인데. 엉망인 파동으로 끔찍한 파동을 가라앉히며 더 나은 갈래가 있는지 고민하기를 잠깐, 나는 이번에도 똑같은 짓을 반복했다.
이러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아는 보람이 없지 않나.
결국 죽고 말 것을 아는 에스퍼의 상처를 지혈하고, 이 어린 에스퍼가 멀쩡히 살아남을 것을 알면서도 마냥 고통받으라 내버려 두지 못하고.
불에 탄 시체나 다름없는 어린 한타의 몸부림치는 파동을 감쌌다. 억지로 꺼트려 잠재우자 그의 등에서 미미한 불꽃이 꺼지고 흰 김이 피어올랐다. 진한 피 냄새에 섞여 나는 살 녹은 냄새와 유황 같은 불 냄새가 딱 지옥이었다.
이 어린 에스퍼가 겪어야 할 남은 지옥이 얼마나 될까. 분명 죽고 싶어 할 마음을 알면서도, 혹시 모르니 이 지옥에 살아 있길 바라는 나는 악마일까.
주인을 닮아 유순한 파동을 쉽게 달래고 꽤 괜찮게 자랄 녀석의 정수리를 토닥였다. 의식과 이능이 잠든 동안은 진피층에서 끓던 열이 식고, 진통제가 제대로 들기 시작할 것이다. 길게 잠들수록 회복이 빨라지겠지만 짧게라도 도움은 되겠지.
오래전, 의미 없이, 기대 없이 건넨 동정에 보람을 주어 고맙다는 말은 속으로만 굴렸다. 녀석의 착각 때문에 더 냉정하게 굴었지만, 살아 줘서 고맙다는 것은 진심이었다.
외상을 입고도 억지로 끌어올린 이능 탓에 머리부터 피가 식는 기분이 들었다. 비틀거린 내 몸을 화난 얼굴의 데리다가 다시 부축해 복도로 나갔다. 이 정도로는 죽지 않을 걸 나도 알고 그녀도 알겠지만 반항할 기운이 없어 얌전히 휠체어에 실렸다.
미리 불러 놓은 내 몫의 응급차까지 데리다가 달렸다.
* * *
핫도그 트럭은 부대 영내에 입점한 패스트푸드 매점이다. 저녁 시간에만 영업하고 핫도그 메뉴가 서너 가지 있는 이 매점은 식당만으로는 지겨운 군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메뉴 외로 공공연하게 입가심거리가 되는 이야기도 있었다. 입점 당시 있었던 입찰 비리 이야기인데, 점주와는 무관한 것으로 밝혀진 그 일의 드러난 진범이 이능 장교였던 것이다.
처벌 조로 수백의 벌금을 낸 범인의 유명세나 평소 행실도 범상치 않았던 탓에, 점주는 뜻하지 않은 부대 내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장난기 많은 놈들은 아직도 식전 기도하듯 손을 맞잡고 핫도그 트럭을 중앙군 영내에 입점 시켜 주신 바차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물론 자급자족이라 농담 섞어 비꼬는 말도 제법 돌았으나 다른 모든 무성한 뜬소문들이 그렇듯 전자도 후자도 바차스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18시를 조금 남기고 도착한 핫도그 트럭 앞에서 준준을 만났다. 파견에서 복귀한 직후인지, 그의 전투복에서 피고름 냄새가 진하게 났다. 흰자가 피처럼 붉은 눈을 마주치자 내 쪽으로 다가오는데, 험악한 표정과 커다란 덩치가 어우러지니 말 그대로 괴물 같았다.
“니가 여기 웬일이냐.”
“……준준. 바차스 만나러.”
“저녁은.”
오랜만에 보는 형편없는 몰골에 정신이 팔린 내게, 놈이 들고 있던 세 개의 핫도그 중 하나를 들려 주고 제 입에도 하나를 물었다.
“나 이거 다 못 먹어.”
“그거 뭐 얼마나 된다고, 씨팔.”
“너나 세 개를 먹지.”
별거 아닌 일에도 버럭 짜증을 내는 놈에게 핫도그를 돌려주었다.
큼직한 핫도그를 순차적으로 빠르게 해치우며 준준은 험한 욕을 쉬지 않았다. 파동의 기세도 그 욕설만큼이나 흉흉했다. 벌어진 상처를 꿰맨 지 반나절 만에 병실을 빠져나온 게 아니라면 몰래 이능을 제어해 줬을 만큼.
돌이켜 보면 이맘때는 그런 일이 잦았다. 나는 준준이 죽을 줄 알았으니까.
준준은 깔끔하게 간식을 해치우고 수염으로 거뭇한 턱을 쓸어 닦았다. 그의 두터운 손목 안쪽이 울긋불긋하다. 쉽게 살이 터지는 놈의 몸은 단단하고 또 물렀다. 전장에서는 괴물 소리를 들으며 날뛰고, 돌아와서는 누가 부여잡기만 해도 근육이 파열되는 식으로.
핫도그를 다 삼키고도 내 옆을 서성이는 것 역시 그 지긋지긋한 부작용 때문일 것이다. 접견만큼 제어해 줄 여력은 없지만 내 이능은 기본적으로 방사형이기 때문에 곁에 있는 것만으로 주변에 영향을 준다. 파동에 간섭해 출력과 반작용을 줄이고 무력하게 만드는 이능.
준준의 어깨부터 젖은 군복 등판을 보다가 문득 머리를 번뜩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새로운 키워드를, 공통점을 알아낸 기분이 들었다. 나와 바차스, 키비슈스 모두 드문 방사형 이능력자들이다.
그 겨울에 죽은, 완벽히 통제할 수 없는 이능을 가진 에스퍼들.
간절했기 때문에 되돌아왔다, 그렇게 말하기는 간단하지만 이 사태는 여태까지의 책임과는 그 무게가 달랐다. 바라지 않은 이능으로 평생을 감당해야 했던 책임과도 다르다. 깊이 고민할수록 현실감이 뚝뚝 움큼씩 떨어져 나갔다.
단단히 붕대를 감은 복부를 누르고 시간을 확인했다. 일방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통보한 놈이 아직 보이지 않았다. 시간 약속이라면 출퇴근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놈인 건 잘 알지만 진통제 약효가 도는 시간이 있으니 4시간 안에는 나타나기를 바랐다.
“다 찢어 죽여야 돼. 반군 좆같은 새끼들.”
“……그래.”
“Sun. 그 개새끼랑 뭐해?”
기다리던 목소리가 가볍게 떨어지고 내 옆에 선 그 개새끼에게서는 곧장 험악한 기세가 치밀었다. 끓는점이 한참 낮은 준준을 달랠 겸 멱살 대신 파동을 틀어잡았다.
돌아본 등 뒤에 꽃다발을 든 바차스가 서 있었다.
“양다리야?”
“헛소리하지 마.”
“그럼 저 새끼 꺼지라고 할까?”
능글거리는 바차스를 상대하기 싫다는 듯, 준준이 커다란 손으로 내 어깨를 툭 치고 돌아섰다. 십팔거리며 떠나는 준준의 등이 어둡게 번들거렸다. 깎다 만 수염, 헝클어진 머리, 손등을 뒤덮은 멍과 핏자국. 익숙하게 엉망인 그 모습에서 주노의 공백을 떠올렸다.
“나갈까?”
“어디로?”
녹색 이파리에 흰색의 작은 꽃이 오밀조밀 모인 귀여운 꽃다발을 살랑살랑 흔들며 바차스가 씨익 웃었다. 기억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는 낯이 대수롭지 않은 것을 묻는다는 듯 위아래로 나를 훑었다. 놈도 막 퇴원한 나처럼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군부 밖으로 나가자는 건가?
들뜬 흥얼거림 뒤에 산뜻한 말이 이어졌다.
“낙원에.”
놈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시내 외곽의 조그만 2층 건물이었다. 작은 텃밭과 밟혀 죽은 잔디로 채워진 정원 한편에 ‘그린 고아원’이라는 팻말이 서 있었다.
어깨에 꽃다발을 얹은 바차스는 정문을 두고 건물을 에두르는 정원 길을 밟았다. 벌써 몇 번이나 온 것처럼 뒷문 근처 벽에 붙은 네모진 스테인리스 뚜껑을 익숙하게 열었다.
실내로 연결되지만 문이라고 하기엔 이상한 그 뚜껑 안쪽으로 꽃다발을 놓는 걸 보면서 의아해했다. 에덴을 위한 꽃이 아니었나?
미련 없이 등 돌리는 놈을 따라 다시 정원을 빠져나오며 꽃을 왜 저기다 넣었는지, 에덴을 주려고 가져온 거 아닌지, 저 이상한 문은 뭐 하는 것인지 궁금증을 내비치는 내게 바차스는 간단한 몇 마디로 대답했다.
줬어. 갓난쟁이 버리는 문.
그제야 그 오븐 뚜껑같이 생긴 이상한 문 안쪽에 이불이 깔린 바구니가 있던 이유를 알았다. 바차스가 꽃다발을 놓은 자리. 늦었지만 그린 재단이 고아원에서 시작했다는 것도 떠올랐다.
“……안 만나는 거야? 아직 에덴은 결혼하지 않았을 텐데.”
“보고.”
“뭘 보겠다는 거야? 정말 이대로 가?”
“새끼야, 너는 그러면 안 되지.”
나로서는 에덴을 지척에 두고 거침없이 택시로 향하는 그 가뿐한 걸음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기어이 윤오의 얼굴을 보고 그의 앞에 서고야 말았으니까. 바차스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는데.
“너는 내 멱살을 잡고 말려야지. 하던 대로. 이 무른 새끼야.”
하던 대로 하라며 씨익 웃어 보이는 놈 앞에서 멱살은커녕 말문이 막혀 걸음을 절었다. 바차스와 에덴을 두고 저울질하던 때가 떠오른 탓이다. 여차하면 놈을 에스퍼 관리동으로 보내거나 죽일 각오까지 했었는데. 모두 아는 게 분명한 그 말투에 어떻게 대꾸하면 좋을지 몰랐다.
“준준 그 개새끼 처 팬 것처럼. 어?”
“준준은…….”
그야 준준은 이미 주노를 납치했을 때였고, 고작 꽃다발을 던져 놓고 돌아서는 것과는 같을 수가 없지 않나.
“그녀를 가이드로 등록하지 않을 거야?”
“뭐 좋은 거라고.”
“어떻게.”
“타.”
어떻게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약에 절어 탁한 눈빛과 경련이 가시지 않던 무릎이 아직 선했다. 멋대로 에덴을 알아내고서 환희하던 그 병실의 전자음도.
그랬으면서, 그렇게 기뻐했으면서 네가 어떻게?
고작 꽃다발 하나를 내려놓고 돌아서는 바차스의 태도가 너무 가뿐해서 당황스러웠다. 계속해서 놈을 의심했으나 택시는 되돌아 군부로 달렸다. 그 꽃다발이 제대로 주인을 찾아 발견되었을지 궁금해하는 것이 나뿐인 양, 멈칫하는 법도 없이.
“……몇 번을 간 거야?”
“몰라. 매일?”
“매일, 이런 식이었다고? 에덴을 원하지 않는 거야?”
“멍청한 소리를.”
뭐라 말하려는 내게 운전석을 가리켜 닥치라는 뜻을 전하고, 바차스는 내내 창밖을 봤다. 별거 없이 지나치는 풍경에 볼거리라도 있는 듯 즐겁게 흥얼거렸다.
놈은 소초 앞에 도착해서 택시 기사를 내리게 한 다음에야 내 쪽을 돌아봤다. 할 말 있으면 하라는 턱짓을 했지만 내가 번잡한 질문에 순번을 매기는 것보다 놈의 말이 빨랐다.
“의무대로 갈 거야? 아니면 네 가이드 새끼한테?”
“……의무대로.”
쯧쯧. 시선을 피하는 내게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놈이 혀 차는 소리를 냈다. 한심하다는 것인지 안타깝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녀석이 나를 한심하게 여길 만한 입장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왜 만나지 않는 거야?”
“널 기다렸지.”
금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휘어졌다. 늦은 오후의 햇살을 등지고도, 산채로 말라 가던 기억을 모두 가지고도 웃음 서린 눈동자가 빛났다.
앞좌석의 헤드 레스트를 손등으로 툭툭 건드리며 바차스는 한참 나를 보았다.
“탓할 새끼 아무도 없으니까, 너 좋은 쪽으로 골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여기든 거기든. 네가 고르라고.”
무엇보다 중요한 화제가 아무렇지 않게 굴러 나왔다.
나보다 이르게 이 시간에 떨어진 바차스가 그동안 뭘 보고 뭘 했을까. 그 시간은 세계에 일어난 문제를 납득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까.
“그걸 어떻게, 내가…….”
“그대로 해 줄게.”
“…….”
왜?
어떻게?
반사 작용처럼 올리려던 의문을 삼켰다. 침묵이 부담스러워지기 전에 씨익 웃은 바차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목을 움츠려 피했지만 놈의 손이 내 머리를 덮어 흩트렸다.
“미련 터진 새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이지.”
고개를 흔들자 순순히 손이 물러났다. 느른히 뒷좌석 시트에 기댄 놈의 손가락이 저만 아는 리듬으로 문을 두드렸다. 햇볕마저 느린 그 광경이 왜인지 초조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몇 번이나 추궁하고서야 바차스의 말문이 열렸다.
“아주 재밌는 상황이야. 농담 같고. 내가 여기 왔을 때는 아우도바 파견 중이었거든. 그래서 총이 있었지.”
“……총?”
“쏴 봤는데, 안 죽더라고.”
간절해서 되돌아온 현실인가, 아니면 그저 생생한 망상인가. 같은 고민의 시작에도 바차스는 가차 없었다. 피스톨을 가진 게 나였더라면 상상도 못 할 일.
“납득이 안 되잖아. 뭔가 다 이능에 가로막히는 느낌? 그런데 파동은 없고. 우선 지켜보기로 했지. 시간 지날수록 긴가민가하다가, 엘로란타 새끼가 돌아온 걸 보고 확신했어. 나랑 엘로란타 새끼의 접점. 너밖에 없으니까.”
“그 정도 단서로 무작정 나를 기다렸다고?”
“시공간이 이 꼴이 난 마당에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적어도 깨는 꿈은 아니야. 대가리를 쏴도 뒤질 수 없게 되어 있으니까.”
놀라 놈이 입은 티셔츠 어깨 부분을 쥐어 당겼다. 쐈는데 안 죽었다는 게 본인이었다고?
어이없는 숨을 몇 번이나 뱉은 다음에 되묻자 놈은 싱긋 웃으며, 아까 말했잖아, 했다.
“쐈는데 안 죽었다고.”
이번에 손끝이 두드린 건 제 턱이었다. 손톱이 짧게 다듬어진 손이 피스톨을 흉내 내듯 엄지와 검지를 치켜들었다.
“희망 그 좆같은 것 때문에 버린 세월이 길어서.”
“그렇다고 네 머리를……! 정말 죽었으면 어쩌려고 했어?”
“살았네?”
“너.”
“잔소리는 그만해, Sun. 너 기다리면서 내가 뭘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에덴 만나러 다닌 건 제외하고.”
“……누가 들으면 제대로 만나기나 한 줄 알겠어.”
기울어져 불그스름한 빛을 띤 노을이 바차스의 색이 옅은 머리칼과 눈썹에 붙어 같이 웃음 지었다. 드러난 송곳니가 한층 장난스러움을 올렸다.
놈은 항상 이런 식이다. 한없이 철부지 같다가도 다 살다 못해 지겨운 노인처럼 굴었다. 종잡을 수 없는 행동과 짐작할 수 없는 속내, 제멋대로인 말버릇은 진심과 허튼소리를 구분하기 어렵게 했고, 놈은 그렇게 감춘 것보다 항상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기분이 좆같아서. 꿈이면 얼른 뒤져서 탈출하려고 했지. 그런데 피스톨이 안 나가더라고. 다 쏴지는데 내 머리통만 안 되는 거야. 이거 더 꿈같잖아? 돌아 버릴 것 같길래 내가 하지 않을 만한 짓을 했어. 결과를 상상하지 못할 일. 그게 뭐게?”
“뭔데?”
“너한테 키스했어. Sun.”
“뭐라고?”
“그건 됐고 더 중요한 건 그다음이지. 네가 어떻게 했을 거 같아?”
“……널 팼나?”
놈과 나의 키스를 듣고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그 장면을 상상하기도 싫었다. 대강 던진 대답에 바차스는 푸슬푸슬 웃더니 내 구겨진 미간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치워.”
“그래. 지금이 낫다.”
“농담이야, 진짜야? 그리고 왜 나야. 다른 사람, 준준도 있는데.”
“아무리 너라도 안 봐주니까 닥쳐.”
격렬한 구토 시늉을 싸늘하게 보다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네게는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었지. 나 되게 두근두근했었거든. 뭐, 꺼지라면서 무시하는 것까진 예상했지. ……그런데, 내일이 오지 않더라.”
“…….”
“네게 무언가 하면, 내일이 오지 않아. 다시 시간이 엉켜 버려.”
세상의 내일. 정말이지 넌 특별해.
사탕발림 같기도, 진심 같기도 한 이상한 말을 묵묵히 들었다. 이 현상에서 현실 감각이 더욱 떨어지고 있었다.
“엘로란타 새끼가 마침 원국에 잠입했길래 연락 주파수를 알아냈지. 펠리우로 갔던데. 찾는 건 여기 있는 줄도 모르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Sun. 난 많은 걸 알아. 물론 그 루돌프란 놈이 뒤지는 걸 보고 알긴 했지만. 사야야의 남편이었지?”
“…….”
“아, 이제 실감 나네. 나만 미래를 안다는 거 정말 돌아 버리겠더라. 아니, 벌써 돌은 느낌인가? 같이 돌아서 기뻐.”
난데없이 내밀어 오는 손을 무시했다. 빤히 놈을 바라보고 있는 중에 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차량 내 라디오가 켜졌다. 채널이 수시로 바뀌어 토막토막 말소리와 음악이 들리더니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바차스의 손가락이 입술 위에 놓여 조용히 할 것을 지시했다.
- 접근 완료. 대화 없음. 볼륨 조정 중. ……대상 침묵.
- 들킨 건가?
- 알 수 없음. 볼륨 조정 중. 윽……!
삐이-. 요란한 소음을 마지막으로 라디오가 끊어지고 택시 위를 무언가 퉁, 두들겼다. 보닛 위로 미끄러져 내린 것은 추락으로 날개가 꺾인 드론이었다.
“군부 이 씹새끼들이 사람을 못 믿어.”
한 축이 꺾인 채 헛도는 프로펠러를 보면서, 너는 그럴 만하지 않냐는 지극히 군부 입장의 말이 떠올랐으나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너를 꼬셔다가 엘로란타한테 집어 던지기라도 할 것처럼 보는데. 어쩔까. 같이 탈영해 볼래?”
“헛소리를.”
“뭐 어때. 한 번 더 살게 됐으면 마음대로 살아도 보고 그래야지. 좆같아서 탈영하고 싶을 때 없었어?”
의지할 곳이 이 막 나가는 놈 하나밖에 없는 현실이 우습고 이 막 나가는 놈이 도청을 역으로 추적하는데 손가락 하나 까닥할 필요가 없는 능력자인 것이 우스웠다.
비실비실 웃고 있으니 멀찍이 앉아 있던 택시 기사가 다가와 보닛 주변을 서성거렸다. 제 차에 떨어진 드론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기색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여기는 군부의 동쪽 소초 앞이고 드론의 꼬리에는 군 마크가 선명하다.
차에서 내린 바차스가 부서진 드론을 챙겼다. 직접 돌려주려는 것은 아닐 테고, 뭐든 군부가 싫어할 만한 일을 준비하는 얼굴이었다.
“난 있거든. 좆같은 새끼들 엿 좀 먹여 보려고.”
무더운 여름, 풀벌레 소리 부서지는 중에 고장 난 드론의 프로펠러가 공연히 돌았다.
“그러니까 너도 하고 싶은 걸 해. 이 멍청아.”
* * *
에스퍼 관리동 입구에서 얼굴이 눈물로 범벅인 루돌프가 동동 발을 구르고 있었다. 나를 보고 경례를 하더니 허리를 꾸벅꾸벅 숙여 가며 동행 시켜 달라 부탁했다. 출입 제한이 까다로운 탓에 들어가지 못한 모양이다.
애타하는 모습에 뭐라도 건넬 말이 없을까 했지만 사야야는 멀쩡할 것이니 너무 걱정 말라는 말이 왜인지 목구멍에 걸렸다. 일어날 일을 아는 보람도 없이, 나는 모든 사실이 깨어지고 비틀릴 것처럼 불안에 시달렸다.
입 밖으로 꺼내면 어떻게든 최악의 모습으로 찾아올 것만 같았다. 안절부절못할 뿐 멀쩡한 루돌프의 모습에 자꾸 복수를 말하던 녀석의 환영이 겹치고 피를 뿜던 목이 겹쳤다.
종종걸음을 치는 루돌프를 데리고 개별실에 도착했을 때 사야야는 잠들어 있었다. 의식이 없는 데 비해 파동이 난폭했지만 새로운 이능을 얻은 시기인 것을 감안하면 다소 간극이 클 뿐 위험한 정도는 아니었다.
가이딩만 충분히 따라 주면 금방 격이 높아진 파동에 적응할 것이고, 매칭은 기대할 수 없겠지만 루돌프도 가이드니까, 미약하게나마 파동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겠지. 과거에도 두 사람은 그렇게 감춰 왔을 것이다.
내가 파동을 확인하는 동안 바짝 긴장해 눈물을 뚝뚝 흘리던 루돌프는 괜찮을 거라는 말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어린애같이 소리 내어 우는 것을 두고 별실을 나왔다.
그 울음이 기억 속의 울음과 다르다고, 모든 걸 잃고 절망하던 그때와 조금도 같지 않다고. 그렇게 되뇌어도 떠오르는 장면은 장의 행렬과 찢어진 군기, 희게 쌓인 국화였다. 생생한 기억이 털어 내도, 털어 내도, 진득하게 뒤통수에 매달렸다.
당초 목적지인 관리동 2층 복도 끝에 다다라 수기로 출입 기록을 작성했다. 전자 기기를 다루는 ‘특정’ 이능 장교를 가두기 위한 특수 격리실에는 전파 통신 차단이 최우선으로 설계되어 있다.
폭주를 앞둔 에스퍼를 가두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곳. 바차스라는 정신 나간 놈이 제 발로 찾아 들어간 곳이기도 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테이블에 앉아 턱을 괴고 있던 놈이 들어서는 나를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더없이 멀쩡한 낯에 파동도 괜찮았다.
키비슈스가 과거를 비틀어 반군이 펠리우의 소도시를 점거한 지금, 그래서 미래가 바뀔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 스스로 행동반경을 좁힌 바차스에게 더럭 짜증이 났다.
탓하는 소리를 꺼내려고 입을 떼는데 놈이 손가락을 입술 앞에 붙었다. 이어 가리킨 곳으로 눈을 옮기니 기본 카메라가 두 대, 그리고 선반 위 렌즈가 감춰진 장식이 하나 보였다.
딱히 감출 생각도 없어 보이는 감시. 어지간히 불신을 사지 않으면 누릴 수 없는, 달고 다니는 악명다운 처사에 말문이 막혔다.
“사야야를 보러 왔어? 어때?”
“……괜찮아. 너는?”
“환상적이야.”
입 모양으로 물어본 도청에 대해서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없는 것인지 놈이 처리한 것인지.
“제 발로 들어온 게 아니었어?”
“반쯤은 그렇지.”
“드론?”
“응.”
오래 머무르지 않을 생각이라 반대편 의자를 발로 밀어 꺼내 주는 것은 거절했다.
“그걸로 뭘 했길래 갇혔어?”
“내가 갇혀 있나?”
“그럼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해?”
“이건 그냥 테스트 중인 거지.”
테스트?
바차스가 들고 있던 조그만 기판으로 테이블을 톡톡 쳤다. 테이블 위는 완전 분해된 조그만 부품들이 간격을 두고 정갈하게 나열되어 있었는데, 합쳐지면 딱 저 선반의 카메라가 한두 대쯤 나올 부피였다.
“물러 터진 새끼야. 그 찢어진 뱃가죽으로 가고 싶은 곳은 여기가 아니잖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난 다 알지.”
씨익 웃은 바차스는 말문이 막힌 내 소매를 끌어 설 자리를 지시했다. 카메라에서 입 모양을 가릴 수 있는 각도였다.
“도대체……, 여기서 혼자 뭘 한 거야. 지금은 뭘 하는 거고.”
“얼마나 했냐고 물어야지.”
나와 키비슈스, 바차스 말고도 되돌아온 모순이 더 있을까? 어째서 각자 다른 시간에 떨어진 걸까?
지금 역시 현실이라는 것도,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것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게 놈은 계속해서 선택을 주지시켰다. 혼란과 의심으로 아무것도 믿지 못했던 첫날을 떠올리면 나는 결코 태연할 수가 없는데. 놈의 시간은 뭐가 달라서 납득한 거지?
들어야 할 말에 비해 정리된 질문이 없는 내게 바차스가 심드렁한 소리를 냈다.
“너 이 미련한 새끼야. 괜히 뻗대지 말고 가서 만나.”
“누구를.”
무심코 누군가 떠올리는 것을 피하는 중에 뭔가 핑 날아 제복 앞자락에 부딪혀 떨어졌다. 까맣고 조그만 기계 부품이다. 바차스가 손가락으로 다음 부품을 튕길 때마다 내 배에 부딪힌 부품이 다각다각 차례로 바닥에 떨어졌다.
“장난치지 마. 펠리우에서 반군 피해 난 거 알잖아.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내가 깨달은 건, 다 시기의 문제라는 거지.”
“시기?”
“피하려고 해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어마어마한 짓을 저지르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고. 운명이라는 좆같은 것이 버티고 있더라, 뭐 그런 이야기.”
운명을 얘기하는 놈의 목소리가 공허했다. 체념인지 초탈인지, 이 자리에 없는 것 같은 그 말투. 이럴 때마다 놈과 나 사이에 어마어마한 시간차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틱.
다시 날아온 부품이 제복 단추를 맞춰 딱 소리가 났다. 조그만 칩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잡아 테이블 위에 도로 던져 놓았다.
조금이라도 진심을 들어 낼 요량으로 노려보았으나, 조각난 수많은 부품 중 다음 것이 가슴팍으로 날아왔다. 시답잖은 장난질에 인상을 쓰자 금안이 가늘어졌다.
“나와 엘로란타 새끼의 공통점을 알아?”
“헛소리하지 말고.”
“네가 살렸다는 거야.”
“뭐?”
테이블을 짚은 손이 끌어당겨졌다. 딸려가며 복부의 통증에 굽어진 몸을 바차스가 웃으며 감았다. 붕대 감은 등허리를 은근히 누르는 손길을 미처 뿌리치기 전에 말캉한 살이 머리칼을 문질렀다.
곧장 어깨를 밀어 내고 팔을 휘둘렀다. 퍽 소리에 고스란히 턱을 내 준 놈이 앓는 시늉을 했다.
“아야야……. 아프네. 그래. 이거지.”
“뭐 하는 짓이야?”
“가서 호 해 달라 그래.”
소매로 이마를 벅벅 문지르며 되는대로 미간을 좁혔다. 사납게 노려보아도 놈은 턱을 비틀며 키득거릴 뿐이었다.
생각조차 피하려고 애쓰는 내게 왜 자꾸만 그를 들이미는지.
“……이번엔, 나 때문에 불행하게 두지 않아.”
“그러다 뒤진 새끼가 말하니 퍽이나 고결하다.”
“적당히 해.”
노려보는 시선에 바차스의 양손이 허공에 들렸다. 팔랑팔랑 흔드는 꼴은 항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입 다물라는 내 말은 제대로 알아들은 듯했다.
반군과 키비슈스는 어떻게 할지. 바차스가 왜 에스퍼 관리동에 들어왔고 앞으로는 어떡하면 좋을지. 막막한 화제가 아직 많은데 놈에게 휘말려 제대로 들은 이야기가 없다.
저 머리를 두드려 생각을 꺼낼 수 있다면 조금 세게 때려 보고 싶기도 했다. 놈이 주둥이를 들이댄 이마가 여태 비늘 뒤집어진 자리처럼 오싹해서 다시 쓱쓱 문질러 닦았다.
“너도 에덴을 안 만나잖아.”
꺼내지 않고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를 쓴 가이드에 대한 이야기가 이번에는 내 쪽에서 나왔다. 부루퉁한 그 말에 바차스는 선반 언저리를 바라보며 비실비실 웃음을 흘리다가 가벼운 어조로 또다시 뜬구름 잡는 소리를 시작했다.
“너무 완벽하지 않아?”
“……에덴이?”
“그렇게 예쁘면 망가트릴 수 없지.”
“나한테 하는 말이랑 다른 건 알아?”
완벽하다거나 예쁘다는 건 내가 판단할 수 없지만, 에덴의 단단한 눈빛에서는 곧은 심지가 드러났다. 죽어 가는 에스퍼 하나에게 선처를 해 달라고, 그런 부탁을 하고픈 포용력이 있는 사람.
아직 배우자가 없으니까, 그녀를 필요로 하는 불쌍한 에스퍼가 있다고 동정에 호소하면, 어쩌면.
“내 사랑을 담기엔 세상이 위태로워서 그래.”
“에덴을, 사랑해?”
“물론.”
“한 번도 만난 적 없잖아. 에스퍼고 가이드라서, 그게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거 아냐?”
“맞아.”
툭 떨어진 긍정에 마치 다른 대답을 기대하다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얼어붙었다. 내 굳은 낯을 비웃듯 바차스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겨 송곳니가 드러나게 웃었다.
“멍청한 새끼. 사랑은 대단한 게 아니야. 그냥 그렇게 되어 있는 거지.”
“네가 어떻게 알아.”
“난 다 안다니까?”
틱. 다시 튕겨진 손톱만 한 조각이 허공을 날았다. 그것 조금 맞았다고 아플 리 없는데 이미 갈라진 배의 흉터가 뜨끈하게 엄살을 부렸다. 물러선 발에 나뒹굴던 플라스틱 조각이 밟혀 까드득 부서졌다.
“새끼야. 에스퍼도 사랑할 수 있어. 그것도 사랑 맞다고. 하여간에 생각 복잡하게 하는 것들이 더 멍청하지.”
……가이드에 대한 에스퍼의 사랑만큼이나 원초적인 게 있을까. 바라는 게 빤하고 끔찍하게 일방적인 그 애정. 윤오에게 몇 번이고 거절당한 그 애정에 나는 조건을 달았다.
그 마음은 순수하지 않으니까. 시간을 두어 무르익은 것이 아니라. 알아 가며 키워 낸 것이 아니라서. 사랑이 마땅히 취해야 할 모습과 달라서. 집착에 더 가까우니까. 내 것이라서.
그리고 그 ‘거절’이 일어나지 않은 지금.
“내가 여기를 고르지 않겠다고 하면, 이전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너는 어떡하려고?”
“글쎄. 그러면 너답기는 하겠지.”
나를 윤오에게 보내려는 그 시도가 전부 나를 이 세계에 묶어 놓기 위한 놈의 계략은 아닐까.
내가 망가뜨리지 않은 평화 속의 윤오를 보는 일은 분명 좋겠지. 그가 조금도 알아주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혼자 사랑하는 것도, 이 사랑을 입 밖에 내지 않는 것도 익숙했다. 만약 내가 이곳에 남기로 하고 이 세계가 현실이 된다면, 그러면 나는. 윤오는.
“선택은 빠를수록 좋아. 네가 온 다음부터 무언가 계속 바뀌고 있거든. 나머지 시간은 미련을 버리는 데 쓰고, 나머지 하나를 걱정하는 건 미룰수록 좋고.”
펠리우의 소란에 협조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바차스를 등지고 특수 격리실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흔들린 마음을 다잡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사야야. 결혼해 줘……. 나랑 결혼해 주세요……. 이렇게 아플 때마다 네 보호자가 될 수 없는 게 너무 힘들어. 슬퍼. 나 좀 도와줘. 사랑해……. 나랑 결혼해 줘.”
루돌프를 데리고 관리동을 나가려고 돌아갔을 때, 녀석은 별실 침상 앞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프지 마, 아파도 내가…… 내가, 옆에 있게 해 줘. 나 좀……. 우리 이제 외롭지 말자. 사야야, 나는 너까지 잃으면, 내가…….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제발…….”
녀석은 죄를 빌듯 머리를 조아리고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 절절한 청혼과 사랑하는 이의 청혼을 앞두고도 괴로운 표정의 사야야.
원래보다 며칠이나 이르지만 언제든 일어났을 일. 사소하고 피할 수 없는 운명 하나가 가슴뼈 안을 벅차게 메웠다.
운명. 사랑. 제발.
가둬 두었던 그리움이 터져 흐르고, 선택의 무게는 벼랑에서 내 목을 죄었다.
내 이름을 부르고 나를 당겨 품에 넣어 주던 윤오가 무척 그립고,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아름다웠다.
* * *
망설임을 그림자처럼 매달고 어찌어찌 찾아갔지만 도착한 카페에 들어서지는 못했다.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 갈수록 목이 마르고 속이 답답했다.
골목 모퉁이가 닳을 만큼 서성이다 막막하고 초조한 생각에 현기증을 일으키기도 했다. 허리를 숙여 호흡을 가다듬어도 어지러움과 목 메임 중 어느 것도 나아지지 않았다.
약속 시간이 5분 지난 걸 보고는 왈칵 눈앞이 흐려졌다. 분명 40분을 남기고 도착했는데.
차라리 나오지 말걸.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말걸. 아예 그 전화를 받지 말걸.
내내 곱씹은 후회가 긴장으로 느물거리는 속을 치받았다. 무슨 생각으로 인다비에게 연락처를 남겼던 걸까.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었다 해도 그것이 여지가 될 줄 알고 있었으면서. 꿈인 줄 알았다 해도 감히 그걸 바란 그때의 나를 패 버리고 싶었다.
오후 나절의 볕이 뜨겁고 골목으로 드리운 가로수 그림자가 검었다. 나무줄기에 붙고 풀숲에 숨은 것들이 내는 소리가 사람 지나다니는 웅성거림에 섞였다. 더운 공기가 틈 없이 빼곡하게 채워져 여름을 그렸다. 그림자에 숨어 식은땀을 흘리는 내 살갗만 차가웠다.
미적이는 걸음을 다잡아 거리로 나서도 카페 앞까지 가지 못하고 덜컥 멈춰 세워졌다. 윤오가 기다리는데. 윤오가 나를 기다리는데.
처음 겪는 여름날 앞에 숨조차 소리 내어 쉴 수 없었다. 내 발치만 움푹 패어 그대로 문드러질 것 같았다. 한 걸음 내딛기만 해도 발이 빠져 쓰러지고 그대로 뭉개져 내릴 것만 같았다.
주제넘게 내 잘못을 지우고, 다시 윤오의 삶에 얼룩을 남기려 하는 나를 용서할 수 없다. 숨이 막혔다. 감히, 내가 바라서는 안 될 일.
부들거리는 다리로 뒷걸음을 쳐 다시 그늘 아래에 기어 들어갔다. 그림자가 겹겹이 쌓인 골목의 어둠이 외롭고 추웠다.
“아.”
뒤에서 들린 짤막한 음성에 소스라치게 놀라 어깨를 떨었다. 뻣뻣한 모가지로 느리게 골목 어귀를 돌아보았다. 흰 셔츠를 입은 키가 큰 남자가, 윤오가 서 있었다.
“또 울려고 하네.”
후들후들 골목 안쪽으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내가 맴돌던 자리에 성큼 윤오가 섰다. 소매를 걷은 그의 팔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어 쥐었고 한 개비를 꺼낸 기다란 손가락이 입술 틈에 흰 필터를 물렸다.
“여기서 뭐 해요?”
홀린 듯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무심한 시선이 슥 훑고, 윤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순간 꼴깍 침을 넘겼지만 목구멍이 꽉 막힌 것처럼 턱 언저리가 갑갑했다. 눈앞에 나타난 예상치 못한 광경에 심장은 제자리 뛰기를 시작하고 눈시울이 따끔거려 눈썹이 일그러졌다.
“왜 또 울려고 할까.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
쿵쾅쿵쾅. 윤오의 나직한 혼잣말에 달달 떨리는 입술이 뻐끔거렸으나 제대로 말을 만들지 못했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내가 이번에도 티를 내 버렸냐고, 그래 버렸냐고.
불을 입어 빨갛게 타오르는 담배의 끄트머리와 윤오의 입술 틈으로 새어 나오는 흰 연기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내내 바라던 그 광경이 고작 두 걸음만큼 멀었다.
한 걸음이면 그가 드리운 그늘에 나를 적시고, 두 걸음이면 그 품에 코를 박을 수 있었다. 그 향과 온기면 풀벌레 우는 계절에도 차갑기만 한 내 몸을 덥힐 수 있는데.
욕심이 재채기처럼 일었다. 꽁꽁 굳혀 놓은 결심이 대번에 녹아 가슴에서 절절 끓었다. 윤오를 눈앞에 두는 것만으로 모든 결심이 무용했다. 이럴 줄 알아서, 그래서 만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이 세상의 끝까지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랐는데.
“거절해도 됩니다.”
흰 연기가 사라진 자리에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내리뜬 시선이 내 볼에 생겨 난 물길을 훑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을 망연히 바라보는 사이 윤오의 손가락이 담뱃재를 털어 냈다. 들은 목소리를 반추하다 서둘러 턱을 닦았다. 손등이 축축이 젖었다.
“싫으면 싫다고 해요. 인다비는 내가 조용히 시킬 테니까.”
“아닙…… 아닙니다.”
피식, 숨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흰 담배의 끝이 흔들리고 그의 입꼬리가 다시 조금 당겨 올라갔다. 그 조금의 변화에 쾅쾅쾅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뛰었다.
목구멍으로 심장이 치솟아 올라올 것 같아 목을 감아쥐고, 내가 결코 말할 리 없는 싫다는 말 대신 아니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반절은 뻐끔거리고 나머지 반은 꺼질 듯 작았다.
“아닙니…….”
“좋아하는 음식 있습니까?”
그의 손가락 틈으로 입술을 훔쳐보고 그사이를 빠져나오는 필터를 훔쳐보았다. 이에 씹힌 자국이 남은 필터가 눈앞에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괴로운 마음을 키웠다.
가지고 싶은 욕심은 윤오에게서 그치지 않고 윤오를 거친 모든 것에 미쳤다. 언젠가 잠든 그의 입술 사이에서 꽁초 하나를 훔쳐 주머니에 넣던 날이 떠올랐다. 그 도둑질에 마음 졸이고 기뻐한, 윤오는 모를 기억.
하염없이 그리던 모습을 보는 사이 흰 담배가 불씨를 털어 낸 꽁초가 되었다. 그 무렵에나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게 질문한 것을 깨달았다.
흐린 눈을 깜빡여 올려다본 자리에 윤오의 검정이 침착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울컥울컥 차오른 감정이 모두 넘쳐흘러 나에게서 그에게로 향하는 길을 이을 것 같았다.
“다 봤습니까?”
“…….”
“가죠.”
꼼짝없이 뿌리내린 줄 알았던 두 발이 곧장 떨어져 그의 뒤를 따랐다.
만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그 등을 바랄 줄 알아서였다. 나를 염두에 둔 가자는 말에 내처 설레고, 등 돌리는 장면에 심장이 갈라질 것처럼 아리고, 그곳이 어디건 따라나서 버릴 이 위험한 마음.
덜컥. 죄를 반복하는 나를 깨닫고, 카페 입구에서 갑자기 덜컥 다리가 굳어 버렸다.
문을 잡고 뒤를 돌아본 윤오가 잠깐 기다리다가 되돌아 나왔다. 그가 작게 쉰 한숨에 뿌연 눈앞이 바르르 떨었다. 어떡하지, 나는 대체 왜 이러지.
문득 재 냄새가 나고 기다란 손가락이 눈가를 쿡 찔렀다. 놀란 눈꺼풀에서 후드득 눈물이 흩어졌다.
“아, 이런. 미안합니다.”
“아닙…….”
목이 메어 소리가 기어들어 간 탓에 말꼬리가 뭉툭하게 잘렸다. 윤오가 왜 내 얼굴을 만졌을까. 수런거리는 속으로 올려다본 윤오는 보통의 무표정이었다. 매 순간 보고 싶은 모습. 나를 보기를 바랐던 얼굴.
치미는 그리움을 두어 번 훌쩍이며 삼켰을 때, 물기가 옮겨 묻은 그의 손가락 끝을 내려다보던 윤오가 말했다.
“카페가 싫으면 바로 식당으로 갈까요.”
“…….”
“말이 없네.”
“죄송합…… 니다.”
“사과를 하란 건 아니었습니다. 잘못도 아니고.”
모서리를 구긴 담뱃갑을 주머니에 넣은 윤오가 카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틈에 인다비가 서 있었다.
“아유! 왜 안 들어오고 밖에 계세요? 기다리다~ 기다리다~ 나와 봤더니 딱, 여기 계시네. 두 분 벌써 만나셨구나. 아니, 또 왜 우시구……. 작가님? 작가님 때문인가? 작가님이 그러셨나? 아니죠?”
여전히 가벼운 허리를 꾸벅꾸벅 접어 가며 인사한 인다비가 과장스레 몸을 기울여 갸웃 댔다. 씩씩하게 치켜든 두 팔이 허공에서 크게 원을 그리다 내게로 내밀어졌다. 악수를 청하는 모양새다.
“아 뭐, 오늘 날씨가 쨍쨍하고 매미도 맴맴 하고 남자가 좀 울 수도 있죠! 아니, 제가 이 말을 하려던 게 아니고, 아유 반갑습니다! 인다비입니다! 전화로도 인사드렸었지요? 들어가서 말씀 나눌까요? 바깥은 덥습니다. 더워요, 더워.”
“인다비. 바로 식당으로 갈 거야. 짐 챙겨 나와.”
“예? 벌써요? 차 한 잔 안 하구? 아, 벌써 얘기하셨나? 아아, 드시면서 얘기하시려는 거구나~. 10초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나옵니다! 아니, 먼저 가고 계실래요? 바로…….”
“간다.”
불쑥 내 쪽으로 다가오는 그를 멀뚱멀뚱 보고 있으니 윤오가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며 다시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부딪힐 것 같으면 피해야죠.”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 아닙니다. 이쪽으로.”
앞장선 윤오를 따르는 내내 눈물이 났다. 눈가가 따갑고 눈꺼풀이 떨려도 눈을 감으면 사라질까 두려워 감을 수가 없었다. 그 등을 놓칠까 조마조마했다.
내내 그립고 항상 두려운 사람. 단 한 번도 내 것인 적 없는 내 가이드. 세상이 바뀌어도 나를 살게 하는 사랑.
“이러면 정말 나 때문에 우는 것 같은데.”
훌쩍이다 때로 삼키지 못한 흐느낌을 뱉으며 쫓기를 한참. 약속 장소였던 카페에서 멀찍이 떨어진 식당 앞에 윤오가 멈췄다.
뒤돌아 나를 보고 곤란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뱉은 숨이 듣기에 달아 어깻죽지를 떨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를 난처하게 만든 내 흉한 낯을 소매로 마구 문질렀다.
젖은 얼굴은 축축한 소매로 다 닦이지 않았고 눈물은 멈출 생각을 않았다. 멈추려 드니 오히려 히끅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나는 사람들이 내 못난 모습을 돌아보는데, 그것이 윤오를 더 곤란하게 만드는 걸 알면서도 쉽게 그칠 수 없었다. 윤오의 앞에서는 그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가 정말 미웠다.
“서럽네.”
“죄송, 죄송합…….”
문장이 되기 전에 죽어 버리는 그 사과의 말이 웅얼웅얼 흐느낌에 섞여 계속해서 죄송을 말하고, 윤오는 그를 곤란하게 하는 나를 가만 지켜보았다. 아무리 닦아도 윤오를 올려다보기만 하면 다시 새 물길이 뺨 위로 생겼다.
지긋지긋한 나를 어쩌면 좋을까.
그를 곤란하게 하는 내가 싫어도, 나를 두고 떠나지 않는 그가 기쁜 나는, 어떡하면 좋을까.
당신을 어떡하면 좋을까.
“왔습니다! 아니, 안 들어가고 뭐 하십니까? 아아……. 아이, 작가님! 팬분이 힘든 일이 있으신가 본데 좀 잘 달래 드려야지, 보고만 계시면 어떡해요? 아유,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힘내세요. 좋은 일이 꼭 있을 겁니다!”
“건드리지 말고.”
인다비의 손이 잠깐 등에 닿았다가, 내가 흠칫거리자 윤오가 바로 그 손을 걷어 냈다. 그러면서 부쩍 가까워진 그의 가슴팍에 놀라 눈물까지 멎었다. 손발의 저린 감각과 두통을 지우는 품이 팔을 뻗으면 안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아유, 죄송합니다. 제가 좀 스킨십이 많아 가지구. 놀라셨습니까? 몸이 참 차가우시네요. 마르셔서 그런 건 아닐까요? 그러니까 오늘 맛있는 거 많이 드십시다! 우리 출판부에서 쏩니다! 여기 식당 조용하고 맛있거든요. 예약도 해 놨어요! 뭐 못 드시는 거 있으세요?”
고개를 한껏 꺾어 윤오를 올려다보았다. 인다비가 무어라 떠드는 것은 알았지만 온 신경이 윤오를 향해 있었다. 노골적인 시선을 알아챈 윤오가 흘끗 내려다보았는데, 그제야 내 몰골이 떠올라 얼른 손을 들어 가렸다.
닦아 낸 눈물이 말라 따갑고, 닦아 내지 못한 눈물이 남아 물기가 흥건한 이 얼굴은 분명 보기에 흉할 것인데. 보여 주어서 나쁠 꼴을 감히 드러냈다.
고장 난 인형처럼 얼굴을 문지르며 식당의 작은 방에 따라 들어가서는 윤오의 맞은편에 앉혀졌다.
놀라 슬픔을 빼앗긴 머리가 몽롱하고 잠깐 그의 향을 맡은 심장이 요란했다. 가슴이 뛰어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윤오의 배려에 취해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윤오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으로 쫓아 그의 손끝이 만지고 쥐는 모든 것을 보았다. 그가 인다비에게 가방을 받아 손수건을 꺼냈고 생수병을 기울여 손수건을 적셨다. 그다음 내 앞에 내밀어진 반듯하게 접힌 천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윤오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 요?
얼음이 깨어지듯, 두근거림만이 가득하던 귓속에 은은한 음악 소리와 인다비가 종알거리는 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멀어졌다.
다시 한 번 윤오가 ‘얼굴, 닦아요.’ 하고 말했을 때는 제대로 들었다. 들어 올린 내 손바닥에 손수건을 놓는 그의 손가락이 살짝 스쳤다. 그에 바르르 떤 내게 ‘미안합니다.’라고 한 작은 목소리도 제대로 들렸다.
미안하다는 그의 말이 또 슬퍼 적신 손수건에 얼른 눈을 묻었다. 다시 조금 눈물이 났다.
“아니, 당연히 비밀 보장이구요! 꼭 좀 인터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작가님 작품을 위해서고, 절대로, 절대, 절대로 곤란한 일 생기지 않으시도록 저희가…….”
“인다비. 조용히 해.”
“예, 아, 뭐……. 흠. 작가님이 직접 얘기하시게요?”
“…….”
“작가님. 책 쓰셔야죠. 네? 팬분 지금은 좀 괜찮으세요? 정말 부담 없이 가볍게 대화만 나눠 주시면 되는데…….”
“인다비.”
“예에. 그러면, 아, 그러면 되겠다! 제가 지금 자리르을 비워 드리면은! 두 분이서 말씀을 나누시기 딱 좋지 않을까요? 아유, 바로 일어나야겠다. 마침이네요. 작가님, 저 갑니다. 말씀 잘 나누시구요. 잘해 보세요? 예? 팬분도 힘내시구!”
푸닥거리는 분주한 소리가 들리고 미닫이문이 열렸다 닫혔다. 내내 떠들던 사람이 떠난 자리에 제 자리처럼 적막이 찾아 들었다. 윤오와 내 사이에 적막은 공기처럼 익숙한 것이었다.
“먹기 편한 걸로 시켰습니다. 생각나는 게 따로 있으면 얘기해요.”
“네…….”
목이 잠긴 대답을 겨우 내놓은 나를 흘끗 살핀 윤오가 식기를 들었다. 긴 손가락은 작대 두 개를 우아하게 다뤄 소리 내지 않고 음식을 집었다. 그의 입술이 열리고 닫히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그의 입꼬리가 다시 미미하게 당겨졌다 내려왔다.
“계속 보고 있으면 머쓱한데.”
퍼뜩 고개를 떨궜다. 윤오가 가볍게 당겼다 놓은 입매가 계속해서 떠오르고 얼굴이 간지러웠다. 날이 서지 않은 가벼운 목소리도 귀를 긁었다. 그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나와 다르게 윤오는 편안해 보였다.
조금 더 눈치를 보다가 젓가락을 쥐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가위처럼 어긋나기가 일쑤라 나는 이 작대기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습관처럼 나오려는 사과를 꿀꺽 삼키고 손을 들어 윤오가 집은 음식을 따라 집었다.
아니나 다를까. 과한 힘이 들어간 젓가락 끝이 달달 떨리다가 두 번째 작대기가 틱 비틀려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갔다. 틱, 틱, 테이블 위를 무섭게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윤오가 직원을 불러 익숙한 식기로 바꿔 주는 동안 푹 고개를 숙이고 시린 손가락을 여러 번 주물렀다. 저리거나 아파서도 아닌데 바로 맞은편에 윤오가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계속 손이 떨렸다. 딱딱한 관절을 녹이는 데 실패하고 기껏 얻은 포크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입에 맞는 생선죽을 조금씩 넘기면서 흘끗흘끗 윤오를 살폈다. 식사에 방해가 될까 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오래지 않아 내 눈은 나침반 바늘처럼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조용한 식사 장면이 우아했다.
간질거리는 눈을 깜빡여 일렁이는 물그림자를 지웠다. 윤오와 앉아 식사하는 일이 처음이라는 생각에 금세 눈앞이 흐렸다. 시도 때도 없이 물기가 핑 도는 눈시울이 또 말썽이다.
감격으로, 슬픔으로, 그리움으로……. 갖가지 이유로 눈이 젖었다. 예민하게 굴던 감각들이 그의 곁에 있을 때면 점차로 조용해졌다. 아픔도 추위도 잦아들어 그의 곁은 늘 조용하고 평안했다. 세상이 괴롭지 않은 순간은 윤오를 곁에 둘 때만 찾아 왔다.
“요리가 잘 안 맞습니까?”
“네?”
“울만큼 맛이 없나 해서.”
윤오가 ‘농담입니다.’ 하고 말해 주었고, 마법에서 풀린 것처럼 나는 내 눈을 책망하길 멈췄다. 스푼을 내려놓고 벌벌 떨리는 손을 주먹 쥐었다.
“손이 떨리는 겁니까?”
“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달칵, 젓가락을 내려놓는 소리에 심장이 잘못한 것처럼 아렸다. 내가 또 실수했나. 식사를 망치고, 그를 언짢게 했나.
‘에스퍼도 사랑할 수 있어.’
……과연 그럴까.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 윤오 앞의 나를 생각하면, 나를 작게 하고 그를 불행하게 하는 이 마음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될 것 같은데.
분명 사랑이라는 것은 더 아름답고, 더 고결하며, 더 순수한 것이 틀림없다. 내가 사랑이라고 우기는 이 마음과는 다르게.
나는 끝도 없이 그의 자비를 바랐으며, 돌아봐 주기를 원했고, 그와의 가이딩이 달았다. 아무것도 받지 않고도 사랑했지만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수는 없는 마음.
돈이든, 마음이든, 아니면 내 사지의 어느 부분이든. 나를 주어 값을 치를 수 있다면 내 전부를 팔아 그의 조금을 얻고 싶은 욕심. 이것은 병이었다. 못나고 지독했다. 이것이 사랑이었다면, 정말 사랑이라면…….
‘사랑은 그냥 그렇게 되는 거야.’
“괜찮습니까?”
“네. 괜, 찮습니다.”
“억지로 나오게 해서 미안합니다.”
매몰되어 있던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고개를 모로 젓고 손을 흔들어 윤오의 사과를 물렸다. 나는 윤오의 사과에 면역이 없었다. 내가 뭐라고 그가 사과를 하나. 그것마저도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궁금한 것, 없으십니까?”
윤오에게 필요한 걸 주어야 한다. 그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조금은 자격이 될 것 같았다. 그에게 유익한 동안은. 잠깐은 곁에 있어도 될 것 같았다.
“…….”
“인터뷰, 그, 책에 필요하신 거면 뭐든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무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무리가 아닙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얼마든지라.”
“네.”
“고마운 말이군요.”
다급하고 초조한 태도를 보이는 나를 윤오가 지긋이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한 번도 그 검은 눈동자 너머를 미리 안 적이 없는 나는, 늘 그를 거슬러 분을 샀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으니까. 나를 경멸하고 억지로 내게 시간을 내어 주던 그도, 갑자기 나와 에스퍼의 삶에 관심을 보이던 그도.
어느 쪽도 대비하지 못한 채 휩쓸리고 나자빠져 울기만 했다. 거부당하는 것이 무섭고, 버림받는 것이 두렵고, 몸을 상하게 하는 무수한 통증보다 윤오의 말 한 마디, 눈빛 하나가 아파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던진 다음 질문에 젖은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혹시. 에스퍼입니까? 불편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군인이라기엔 체격이, 작고. ……실례지만 아파 보여서요.”
“…….”
“큰 소리나 피부에 닿는 감각에 민감한 것 같고, 계절에 맞지 않은 옷차림에도 더워하지 않고. 그리고 손이…… 차갑고. 온도나, 그런 이능을 다루는 에스퍼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제 그만큼 알아냈을까. 지금도 나를 보는 그의 시선이 머리끝부터 손끝까지 조목조목 분해해 내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일반 군인은 사진이 찍혔다고 군부에서 내릴 것을 조치하지 않으니까요. 아시다시피 상상이 직업이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나를 관찰한 것 때문인지, 이렇게 길게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 처음이라 그런지 알 수 없었다.
“온도 관련은 아닙니다.”
“정말 에스퍼군요.”
“네.”
“미안합니다. 신기해해서요.”
“……괜찮습니다.”
식탁 끄트머리에 팔꿈치를 기댄 그가 턱을 괴고 나를 들여다보았다.
어느 질문이건 주지 못할 답은 없었다. 여기서는 없는 일이지만, 윤오에게라면 이미 가장 민감한 정보까지 모두 주기도 했다.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번에도 그것이 내 역할이었다.
다만 그의 빤한 시선이 어려웠다. 그렇게 나를 들여다보면 금세 모자라고 못난 모습을 들켜 버릴 것만 같았다.
“손에 관해서 물어봐도 됩니까?”
“예.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떠는 건 통증 때문입니까? 손등의 상처라든가.”
“아닙, 니다. 떨림은……. 죄송, 아, 그런 게 아니라…….”
윤오가 대뜸 궁금해한 것이 에스퍼가 아니라 나라서, 형편없는 대답을 내어 놓고 머릿속이 분주했다. 이 흉을 다시 어떻게 말해 주면 좋을까.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는 내게 윤오의 손바닥이 내밀어졌다. 식탁을 넘어온 그 손 위에 무엇을 주면 좋을지 몰라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피는 내게, 다음 지시가 떨어졌다.
“왼손을.”
주먹 쥔 손이 벌벌 떨렸다. 눈시울이 다시 간질거렸다. 혀뿌리가 퉁퉁 부어 목구멍을 막고 삼킨 침이 턱에 걸렸다. 심장이 뻐근하게 자리를 넓히고 어깨까지 벌렁거림이 번졌다.
들어 올리고 다시 내려놓는 데까지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지만 윤오는 손을 물리지 않고 기다렸다. 마침내 오그라든 차가운 왼손이 그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여전히 온기 가득한 손이었다.
“아프면 말해요.”
“아닙…….”
“싫어도 말하고.”
“괜찮습니다.”
“그래요? 또 울고 있어서.”
“…….”
“이름도 못 들었는데 왜 익숙한 기분이 드는지도 모르겠고.”
더운 손가락이 내 손가락을 하나씩 펼쳐 그 손바닥에 겹쳐 놓을 때, 놀라 크게 뜨인 눈에서 눈물방울이 다시 도르르 굴렀다. 윤오의 시선이 내 손등의 흉을 거쳐 떨리는 팔과 어깨,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는 턱까지 이어졌다.
“비슷한 사람을 본 기억도 없는데.”
손등을 가볍게 감아쥔 윤오의 더운 두 손이 오래된 주황빛 상처를 쓸어 올리자 손가락부터 뺨까지 떨림이 자르르 타고 올랐다. 질끈 눈이 감겼다.
“아픕니까?”
“아, 니요…….”
“이름을 물어봐도 됩니까?”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나를 몰아 기어코 윤오에게 보낸 바차스의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마치 나와 윤오도 한 조각의 운명을 담당하고 있다는, 그런 오해가 허파를 뻐근하게 했다. 숨이 막혔다. 바라고 원한 만큼 거부할 수 없는 착각이었다.
‘간절해서.’
다음 순간에는 덜컥, 겁을 먹었다. 지금의 윤오는 나를 알 리가 없는데, 그가 보이는 태도와 그가 겪는 기시감에 문득, 우리가 세계를 망가트렸다는 말이 떠올랐다.
‘우리’가, ‘내’가 망가트렸다고. 간절해서.
“……이선입니다.”
온통 착각투성이.
내가 떠나는 것으로 당신을 지키고, 그렇게 당신을 자유롭게 하는 걸로 만족할 수 있다는 착각.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다던 착각.
당신이 몰라주어도, 영영 만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라는 착각.
당신이란 기적 없이도 조금쯤은 더 버틸 수 있다는 착각.
윤오를 만나면 모두 부서져 버릴 착각. 사실은 당신 하나를 위해서라면 이따위 세계가 망가지고 부서져도 상관없는 최악의 에스퍼.
“그렇습니까. 윤오입니다. 알고 있겠지만.”
이번에 내 속을 죈 것은 기쁨이었다. 억누르고 억눌렀지만 두려움을 비집고 결국은 개화해 버린 행복이었다. 무섭고 겁이 나도 어쩔 수 없이 반갑고, 쉬지 않고 눈앞이 흐려도 다시 깜빡여 바라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한순간도 쉰 적 없는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벌벌 떠는 손가락이 윤오의 더운 손 안에서 꼼질거리자 그가 양 손바닥을 펼쳐 그러게 두었다. 움츠러드는 손가락을 다시 펼쳐 놓고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보드나 두드리는 시시한 손입니다.”
조금도 시시하지 않은 손을 손끝으로 가만가만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울음을 목 뿌리에 잡아 두느라 꾹 다문 입술이 바들거렸다.
내가 망치지 않은 윤오. 어쩌면 내게도 다정할 수 있었던 남자.
마지막 무렵의 윤오도 다정했다. 그가 싫어하는 짓을 수도 없이 저지른 나를 가엾이 여기고, 품에 당겨 감춰 주었다. 이번에는 그 어떤 속죄도 없이 그 다정을 받으며 나는 죄책감과 기쁨의 소용돌이에서 허덕거렸다.
“누가 서럽게 우는데 그게 익숙하다니, 이상한 기분입니다.”
“…….”
“사람을 기억하는 건 나쁘지 않은 편인데, 도무지 모르겠고.”
느리게 틈을 맞춰 겹쳐진 손깍지를 살살 허공에 흔들며 윤오가 픽, 숨 빠지는 소리를 냈다.
“손이 좀 따뜻해졌네요.”
“……네.”
“이렇게 잡고 있으면 나아지는 건가. 꽤 기분 좋은 일이군요.”
“…….”
“불쾌하면 참지 않아도 됩니다. 누가 봐도 수작질인데.”
의아한 눈을 들어 본 그의 까만 눈동자가 살풋 접혔다. 심장이 쾅쾅 울렸다.
삐비비빅-.
가슴팍에서 울린 모바일의 긴급 호출에 참았던 숨이 그제야 터졌다. 파득파득 부풀었다 가라앉는 가슴팍을 보고 윤오가 손을 놓아주었다.
멀어진 온기가 아쉬워 손끝을 말아 쥐고 어깨를 떠는 동안 호출음이 몇 번이나 넘어갔다. 내 착각과 망상이 만들어 빚은 것 같은 이 순간이 깨어지기에 너무 아까워서, 모바일을 꺼내는 손이 몇 번이고 멎었다.
가까스로 꺼내든 화면에는 즉시 소환 명령이 떴다.
“급한 일인가 보네요.”
일그러진 내 낯에 뚝뚝 묻어나는 아쉬움을 윤오가 알아본 걸까.
못내 아쉬워하는 나를 가만 보던 윤오가 지갑을 꺼냈다. 뒤적이다 꺼낸 명함은 인다비의 것이었는데, 비어 있는 뒷면에 윤오의 필체로 익숙한 번호가 쓰였다.
“내 개인적인 흥미 때문이니까 거절해도 됩니다. 인터뷰든 뭐든 얘기를 더 들어 보고 싶어서요.”
* * *
키비슈스는 제 가이드를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잇따른 연구소 습격은 중앙을 향하지 않고 펠리우를 샅샅이 돌았다. 무언가 알고 찾는 사람처럼.
미리 주의하고 대비한 탓에 사상자는 적었으나 펠리우의 연구소가 가진 정보는 모조리 털렸고 건물은 반파됐다. 연합군이 공유하던 매칭 데이터가 통째로 반군 손에 넘어갔다.
한심한 중앙군은 반군을 토벌하는 대신 국가 소속 가이드들에게 재택 명령을 내렸다. 혹시 모를 납치와 위험에 대비하라는 소극적인 처사다.
그 탓에 가이드 센터의 정기 가이딩 공급이 현저히 줄었다.
보통의 에스퍼라면 일시적인 가이딩 부족 정도로 크게 위태로울 일은 없겠지만, 내게 접견을 받으러 오는 에스퍼들에게는 달랐다.
나를 찾는 이들은 대개 모순이 강한 이능을 가졌고, 모순이 강한 이능은 큰 부작용과 쉽게 통제되지 않는 파동의 형태를 보였다.
하나같이 가이딩 효율이 떨어지는 녀석들에게는 꾸준한 가이딩 보급이 목숨 줄이나 다름없었다. ……나를 포함해서.
익숙한 접견 3실에 앉아 머리를 짚으니 같이 들어온 에스퍼가 걱정하는 말을 했다. 접견 시수를 늘린 탓에 말이 아닌 컨디션이 녀석에게도 보인 모양이다. 하지만 줄이기는커녕 이번 주부터는 기본 근무도 반절은 접견으로 대체해야 한다.
나를 써서 위험한 에스퍼들을 진정시키겠다는 군부의 속셈이 빤하고, 이 시국에 내게는 주당 셋의 가이드를 배정한 것이 우스웠다. 저들이 가이딩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다고 믿는 자들.
차라리 반군을 쳐 이 미적지근한 전쟁을 끝내는 것이 나을 것인데, 군이 취하는 반전과 평화 사상에 진력이 났다. 시작된 전쟁을 끝내지 않고 어떻게 평화를 찾지?
살인마 집단의 온순한 번견 행세를 좋아하는 사회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길어지는 전쟁 속에서 민간인들이 거짓된 평화에 취한 것도. 반군에 대한 경계심 저하도.
이 몰이해는 내가 민간인인 적이 없기 때문인가? 한 번도 그들의 일원인 적 없었기 때문에?
이대로 키비슈스를 멈추는 가장 쉬운 방법이 줄곧 맴돌았다.
마치 기회처럼 여겨지는 이 두 번째 세계를 포기하기만 하면 된다. 무엇도 더 할 필요 없고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다만 그 고르는 방법이 문제였다.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또 죽으면 되는 걸까? 아니면 폭주를 해야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조바심이 났다. 되돌아 온 이 시간에 하나씩 영향을 주다 보면 모를 수가 없다. 이것 역시 또 하나의 현실이며, 어느 쪽도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그런 실감이 덮쳐 오면, 그러면 선택은 숨통을 죄는 올가미가 되었다.
‘선택은 빠를수록 좋아. 나머지 시간은 미련을 버리는 데 써야 할 테니까.’
바차스가 말하지 않은 것이 뭘까.
놈은 꾸준히 비협조적으로 굴었다. 반군의 행적을 알려도 ‘일어날 일’이라고 일축했으며, 반군의 위치 정보를 넘겨주기는 했으나 방어나 추적에는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
몇 주째 에스퍼 관리동에 틀어박혀 폭주 직전인 행세를 했고, 그런 주제에 내가 에덴에 대해 알아보려 하는 시도는 귀신같이 알고 족족 가로막았다. 에덴도, 유서프도, 간단한 검색이라도 해 보려 하면 뚝, 통신이 차단되고 기기의 전원이 꺼졌다.
대체 뭘 경계하는 건지. 내가 할 짓이라고 해 봤자 기껏해야 에덴을 놈 앞에 데려다 놓는 것뿐일 텐데. 놈이 마약성 진통제로 연명하던 그때 그랬듯이.
찰칵.
타이머가 다 돌아가고 앞에 앉은 사람이 바뀌었다. 끝까지 내 손을 잡고 싶어 한 에스퍼 다음으로 들어온 놈은 짜증스러운 기색의 준준이었다.
“니놈의 찢어 죽일 키슈 새끼 때문에 요즘 존나…….”
“입 다물고 앉아.”
“뭐 씨팔. 꼽냐 새끼야?”
“머리 아파.”
“가이딩은?”
“받았어.”
“염병.”
못마땅한 듯 커다란 주먹이 테이블을 퉁퉁 두들겼지만 일부러 신경을 긁는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물씬 풍기는 피 냄새와 가끔 웅얼거리는 욕설에도 나는 머리를 괸 채 눈을 감고 응답하지 않았다.
생각하고 고려할 것이 너무 많았다. 주노의 행방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을 보내 도하 남부의 시골을 전부 뒤지고 있지만 한 달 가까이 찾지 못했다. 지금 준준의 상태는 최악이다. 파견이라도 다녀오면 그 몸에 엉겨 붙은 전투복을 잘라 뜯어내야 할 정도로.
저 꼴로 2년을 더 버텨 낸 것을 아는데, 크고 작게 뒤틀리는 일들이 생길 때마다 덜컥 걱정이 일었다. 이번에는 그러지 못할까 봐.
멈춘 세계를 다시 돌아가게 하면 그러면 준준은 주노와 만날 수 있다. 그러면.
와락, 얼굴이 구겨졌다. 속이 암담했다.
“사야야 결혼. 오늘이냐?”
“응.”
“루돌프란 말이지.”
“갈래?”
“아니.”
원래보다도 2주가량 이르게 잡힌 간이 예식에는 나와 몇몇 일반 장교가 초대를 받았다. 가족이 없는 두 사람은 지난번에도 그랬듯 많은 증인 없이 그렇게 또 한 번 부부가 될 것이다.
멈춘 세계를 다시 돌아가게 하면, 그러면 두 사람은.
“한숨을 쉬고 지랄이야.”
“너는…….”
흩트린 머리를 다시 쓸어 정돈하고 모자란 잠으로 벌건 눈을 들어 준준을 응시했다.
놈의 눈은 나보다 더했다. 핏줄이 다 터져 흰자가 얼룩덜룩 붉었다. 수염이 지저분하게 자란 안색이 형편없는 낯을 보고 말을 이었다.
“너는 네 가이드를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어?”
“필요 없어. 씨팔. 이제 와서 나타나면 뭐 해. 패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멍청한 새끼.”
“허. 뭐라고?”
욱신거리는 눈두덩을 덮었다. 윤오를 만나기 전까진 나도 비슷하게 생각했으니 멍청하다고 한 것은 나를 향한 말이기도 했다.
이제 와서는 나타나 봤자라는 생각. 고작 가이딩으로 이 고통이 나아질 수 있다는 데 대한 불신. 내 파동은 이대로 폭주까지 자랄 것이고, 더는 무엇도 막을 수 없다고. 나는 머지않아 죽을 거라고.
그런 체념과 확신. 매일같이 아픈 밤.
13년을 기다려 윤오를 만났지만, 만나고서도 나는 꾸준히 아팠다. 그가 접촉을 꺼리는 탓에 가이딩은 제한되어 있었고 근무량은 늘어났다. 그래도 내 가이드를 만날 다음번을 위해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렇게 구걸하는 삶은 한층 더 비참했다.
같은 시기로 다시 돌아와서는 고통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기억하는 마지막 무렵, 그 겨울은 윤오를 잔뜩 만나 컨디션이 좋았지만, 2년을 거스른 지금은 익숙하게 형편없었다.
그래도 마음은 편하다고, 이번에는 아예 기대하지 않을 것이니, 이 아픔도 적응만 하면 될 문제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나를 미워하지 않는 그를 만난 날까지는.
윤오를 만나고 온 후로는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수면제를 받아 억지로 잠을 청하면 혈압이 떨어져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었고 부작용으로 음식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체온이 떨어져 찜질을 받았고, 혈액 생성이 더뎌 수혈을 받고, 비중이 떨어져 투석도 받았다.
가이드를 내놓으라고 부리는 몸의 성질에 휘청휘청 휘둘리면서도 나는 윤오를 참아 냈다.
선잠이 보여 준 오랜 악몽에서 식은땀 투성이로 깨어났을 때도, 그 기억과 한기와 저린 손발과 귓바퀴를 메운 이명과 전신을 파고드는 묵직한 통증을 견뎠다. 그리움이 치밀어 윤오의 존재를 확인하지 않고는 죽어 버릴 것 같은 나머지 밤도 버텨 냈다.
엉망인 나와 세계에서, 그를 지키는 일이라고. 그렇게 믿으면서.
이 시간이 얼마나 더 망가질지, 키비슈스가 무슨 짓을 더 저지를지 모르는 이상 나에겐 가이드가 없는 편이 낫다.
냉대받은 2년이라는 시간이 우습게도 도움이 되었다. 당장 뛰쳐나가 윤오를 찾고 달려들지 않기 위해, 그가 보내던 경멸스러운 눈빛과 짜증 섞인 한숨과 없는 사람 대하듯 하던 무시를 번갈아 떠올렸다.
속이 먹먹할 만큼 내 죄를 상기시켜 주는 기억이었다. 내가 얼마나 그를 망칠 수 있는지 되새기게 하는.
다정한 윤오는 모르는 편이 나아.
찰칵, 찰칵. 쉬지 않고 타이머가 울리고 그때마다 준준의 욕설이 터져 나왔다.
“너는 가이딩을 좀 더 받어. 아니면 접견을 줄이던가. 어린 새끼가.”
“내가 뭐가 어려.”
“그럼 스물여섯이 안 어리냐? 하여간 군 이 씨발놈들.”
“나도…….”
“알아. 씹팔, 너도 참전한 군인이라고. 그래, 자랑이다 호구 새끼야.”
“…….”
국가 소속이 된 지 15년, ……지금 이 시간에선 13년.
내 연차는 살아 있는 웬만한 이능 장교와 비교해도 짧지 않지만 그중 몇 안 되는 예외가 준준이었다. 놈은 입대 18년 차, 누구도 그의 생존을 점치지 않을 때에 주노를 만났다.
“간다.”
드르륵 의자 밀리는 소리가 나고 뒤이어 마지막 타이머 태엽이 짤깍였다.
제어 범위를 벗어나자마자 준준의 파동은 마구잡이로 날뛰었고, 그 엉망인 파동을 익숙하게 매단 놈이 접견 3실을 나섰다. 머무른 자리에는 피고름 냄새가 남았다.
접견은 오후 내내 이어졌다.
제대로 쉬지 못한 피로와 과로로 이능의 정도가 세밀하게 조절되지 않았다. 제어가 과다하게 쏟아지고 두통이 심해졌다. 마주 앉은 에스퍼들이야 내 걱정을 하면서도 줄어든 고통을 반겼다.
몇몇은 2년 후까지 살고, 다른 몇몇은 그렇지 못할 얼굴들.
가장 괴로운 건 그런 것이다.
마땅히 2년 후를 골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간절해서 망가뜨린 이곳이 아닌, 기존의 세계를 고르는 게 맞다고.
그렇지만, 그 기간을 살아 내지 못한 동료의 면면이 앞에 디밀어지면 어쩔 줄을 몰랐다.
가령, 원래대로 되돌아가면 볼 수 없는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 같은.
“갑작스러운 소식에도 저희 혼인 서약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사해요! 헤헤…… 다들 제가 울 거라고 예상하셨나 본데! 맞습니다. 헷. 어제까지 펑펑 울었어요. 그리고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사야야한테 허락받는 거 말고는 결혼 준비가 다 술술 풀렸거든요! 저희 진짜 잘 살 거라는 예시 아닐까요?”
이따금 크흥거리고 훌쩍이는 소리를 내긴 했지만 루돌프는 울지 않았다.
나만이 기억하는 지난번 두 사람의 결혼식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울어 서약도 제대로 못 읽던 루돌프가, 둘의 모든 결혼식 사진에서 퉁퉁 부은 눈이던 루돌프가 스쳤다. 또다시 무언가 어긋났다.
‘왜 익숙한 기분이 드는지도 모르겠고.’
윤오의 기시감.
지끈거리는 두통에 어두워진 눈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며칠 지속한 초과 접견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머릿속엔 울지 않는 루돌프와 처음부터 내게 손을 뻗던 윤오가 떠올랐다.
사소하게 달라진 것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달라진 사건에서 파생한 또 다른 사건들이 튀어나온 못처럼 거슬렸다. 바차스는 정해진 것들이 있다고, 중요한 것은 바뀌지 않는다 했지만 내게는 미래가 어그러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점점 망가지는 것처럼.
* * *
바차스가 사라졌다.
삼엄한 경비, 폐쇄적 구조. 감옥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에스퍼 관리동. 그런 곳에서 사람 하나가 증발한 일은 군부 전체에 큰 충격과 혼란을 가져왔다.
중앙군령이 봉쇄되었고 군부 내외의 모든 장교와 병사가 소환됐다. 특히 이능 장교를 중심으로 이중 삼중 확인이 이루어졌다.
새벽녘 불려 와 방치된 강당에서 시간마다 인원을 체크하길 12시간이 지날 무렵, 준준이 의자를 뜯어 문을 부쉈다. 단번에 앞 세 줄이 통째로 뜯겨 허공에 날리니 다들 피하기만 하고 누구 하나 말릴 생각을 않았다. 어떻게든 해 보라는 눈빛들이 흘끔흘끔 이쪽을 향했다.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건지. 평소답지 않게 짜증이 일었다. 피로가 쌓인 탓이다.
미적지근한 한숨을 길게 뱉고 제어를 가늘게 뻗어 준준의 파동을 건드렸다. 저만치서 쇠 폴대로 연결된 의자가 요란하게 떨어지고 분노가 역력한 낯이 홱 돌아 나를 보았다. 벌건 눈이 아주 부리부리했다.
이제 저 화풀이를 내게 하려나. 덤덤히 각오를 다졌지만 놈은 기운 없이 늘어져 있는 내게 쿵쿵거리며 다가와 별다른 말없이 근처에 앉았다.
놈이 앉은 자리에서 열기가 풀풀 피어오르고 그 이마에도 땀이 맺혀 있다. 백 명 내외의 화난 에스퍼를 가둔 강당의 형편없는 냉방 시스템 때문이었다. 분노로 지핀 열. 나야 오한이 들던 차라 괜찮은데.
“씨발 새끼가.”
나직하게 읊조린 준준의 욕설은 군을 향한 것인지 바차스를 향한 것인지 대상이 마땅치 않았지만, 내 짐작으로는 후자였다. 조금 공감도 했다. 나도 놀랐으니까. 그 미친놈이 군을 상대로 무언가 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지는 방식일 줄이야.
습관처럼 꺼내 들여다본 모바일 화면에 통신망에 연결할 수 없다는 안내가 큼직하게 떠 있었다. 누구를 경계한 것인지 불 보듯 뻔했다. 거기다 시간마다 임의로 뽑아 간단한 면담과 함께 재실을 확인하는 명단에는 반드시 내가 포함되었다.
마침내 정말 탈영해 버린 유일무이한 전산계 에스퍼, 대령 바차스의 유일한 측근이 받는 대우였다.
“……중령님. 몸이 안 좋으십니까? 의무병을 불러 달라고 할까요?”
“됐어.”
갇혀 있느라 한가한 차에 내 상태가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에스퍼 하나가 내게 걱정하는 말을 했다. 의무병을 불러 주겠다는 말은 거절했지만 녀석은 모포를 얻어다 주었다. 오들오들 떠는 몸에 두 겹의 모포를 두르니 준준이 쯧쯧 혀를 찼다.
“그냥 나가 뒤지지 그러냐.”
“놔둬.”
“그래. 씨팔. 안 그래도 그럴 거다. 중앙 이 병신 같은 새끼들 진짜. 하나는 뒤졌는지 튀었는지 없고, 하나는 빌빌거리다 얼어 뒤질 지경이고. 잘하는 짓이다.”
“…….”
이 정도로는 안 죽어.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켰다. 준준을 더 화나게 할 것이 분명해서.
이제 죽을 수 있겠다 생각한 순간은 삶에서 몇 번이나 있었다. 대체로 파동이 폭주에 다다랐을 때나 한참 피를 흘려 의식이 아득해지던 때였다. 그러다 한 번 죽기도 했었지.
어찔한 머리를 푹 숙이고 떠는 어깨를 움츠려 모았다. 그래, 이 정도로는 죽지 않아. 안타깝게도.
“병동으로 옮겨 달라고 해.”
“됐어.”
“씨팔. 명령으로 할까?”
대거리할 힘도 없어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가만히 두었음 싶었다. 어차피 시간마다 번거롭게 할 거, 개인 감시를 다는 것보다 여기 에스퍼들 틈에 묻혀 있는 게 낫다.
눈을 감고 파도처럼 몰아치는 이런저런 파동을 밀어 냈다. 감정을 다독이고 감각을 닫았다. 얽히고설킨 파동은 익숙한 전장을 떠올리게 했다. 6년간 싸웠지만 끝내지 못한, 여태껏 이어지는 이 전쟁을.
깜빡 졸다 몸을 건드는 기척에 깼다. 의무병과 헌병. 그 너머로 팔짱을 낀 준준.
의도를 알아채고 조금 미간을 찌푸렸지만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핑 돌았다. 잠깐 존 사이 상태가 더 나빠졌다. 가만 앉아 있기도 어지러운데 제대로 걸을 수 있기는 할까.
그렇게 걱정하는 순간 불쑥 바닥이 가까워졌다. 그대로 쓰러져 나뒹굴기 전에 서성거리던 에스퍼 하나가 몸을 날려 나를 붙들었고 나머지가 들것을 가져왔다.
골골거리는 에스퍼 하나 고꾸라지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웅성거림이 커졌다. 하필이면 내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많은 이능 장교들만 모아 놓아 놔서 더욱.
단체로 동요한 그들의 파동이 뾰족하게 난리 치며 내 기감을 민감하게 했다. 딱 죽기 좋을 만큼의 소음이 머리를 울렸다.
“닥쳐, 이 씹새끼들아!”
마저 정신을 놓기 직전에는 가장 시끄러운 고함이 울렸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데 웃음이 났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타인의 온기를 떨쳐 냈다. 기절한 사이 작게 달린 병실의 창밖에 이미 어둠이 내려 있었다. 내 손을 놓친 가이드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어 보였고, 나는 나가 보라는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의식을 차릴 수 있을 만큼만 덥혀진 몸은 관절 마디마디가 뻣뻣하고 사지 말단이 차가웠다. 지긋지긋한 파동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고 뱉어 놓을 때마다 느끼는 익숙한 감각.
나자빠지고 쓰러져도 질기게 이어지는 에스퍼의 목숨 줄을 매번 몸소 증명하는 기분이 더럽다. 닳고 닳아 더 되새길 필요도 없는 사실인데.
잠든 동안은 전장의 꿈을 꾸었다. 악몽도 그리울 때가 있는지 지금은 그 기억의 조각들이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희망 하나는 예쁘게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이 끔찍한 전쟁에는 끝이 있고, 이 괴로운 삶도 구제받을 수 있다는 희망.
고통 없이 따뜻하고, 더는 외롭지 않은 삶이 가능할 것이라 기대하던 날. 눈앞의 전쟁을 살아 내고, 하염없는 기다림을 이어 가면, 언젠가는 내게도 구원이 나타나 그 평안을 이루어 줄 것이라 믿던 때.
침상 아래로 팔랑거리는 몸을 기울여 아무렇게나 토사물을 뱉었다. 에스퍼들의 걱정 섞인 파동으로 헤집어진 속이 엉망이었다. 구역질을 몇 번 더 하고 지친 몸을 뉘었다. 바스락, 더운 식염수 팩들이 밀려나고, 접은 모포가 든 딱딱한 베개가 욱신거리는 머리를 받쳤다.
내 몸은 빠른 속도로 망가지고 있었다. 앞선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퍼 관리동에 들어가게 될 정도로.
이 역시 원래는 한참 지난 후에나 일어날 일이었다. 시간 순을 따져 보자면 지금쯤 윤오를 만나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국방 의무 조항을 들먹여 강제로 가이딩을 받았을 즈음이다.
찾아가 곁을 서성이는 정도였지만 몸 상태는 괜찮았는데. 그가 아예 나를 만나 주지 않은 그 겨울 전까지는.
변화. 그리고 변화가 불러일으키는 또 다른 변화.
지끈거리는 두통에 눈을 감았다. 어쩌면 이건 두 세계를 가지고 저울질하는 오만한 행위에서 오는 멀미일지도 모른다. 다수의 삶이 뒤흔들릴 결정에 짓눌리는 까닭일지도.
병실 구석에 지키고 선 감시 인력이 사람을 불러 내가 더럽힌 바닥을 치우고, 의무관이 들어와 수액을 바꿔 달았다. 메슥거리는 속과 어지러움은 여전했지만 더 토해 낼 위액도 모자라 따로 놓인 쓰레기통을 쓸 일은 없었다.
머리맡 서랍을 더듬어 모바일을 찾았다. 차가운 손끝으로 시린 눈을 꾹꾹 문지르고 어지러움이 가실 때까지 기다린 다음 화면을 켰다. 입원이 길어질 것 같으니 데리다를 불러 세면도구를 보급 받고, 상황을 듣고…….
직통 번호를 연결하려던 손가락이 버튼 위에서 멈칫했다. 통신이 차단되었다는 안내 메시지와 긴급 통화로 연결되는 화면, 그리고 내 일을 맡기기 위해 데리다를 찾는 오랜 습관이 갑작스레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병실 문 앞에 선 병사를 잠시 보다 손에 든 모바일과 화면에 뜬 데리다의 호출 번호로 눈을 내렸다. 통화 내역과 검색 기록, 메시지 송수신 정보, 그리고 위치 정보가 고스란히 군에 알려지는 모바일.
내 일과 사생활 모든 사안을 다루는 부관 데리다. 둘 모두 중앙에 오고부터 떼 놓은 적 없는, 군이 보급한 감시.
윤오는 데리다가 보호자냐고 물었다. 그런 건 아니다. 그녀는 내 편의를 봐주기 위해 배치된 인력이고 내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그녀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다 맡겨도 괜찮은 줄 알았다. 건강 상태부터 이능 정보와 가이딩 배급, 그리고 근무와 사생활까지도.
그녀를 통한 내 모든 정보를 군이 공공재처럼 다뤄도, 다 나를 보좌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 하면 수긍했다. 내가 떳떳하다면 거리낄 것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살았다. 감추고 싶은 것도, 감출 것도 없는 삶.
평생 겪어 익은 것들이 부조리하고 잘못된 것인 줄은 윤오를 만나고 처음 알았다.
데리다가 윤오에게 전화 연락을 하는 것도, 군이 그의 이동을 제한한 것도 몰랐다. 내게 당연한 일이 윤오에게는 혐오스러운 족쇄인 것도 그때 알았다. 그를 멋대로 가이드 등록을 해서는 안 됐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평생을 기다린 가장 소중한 것을 상처 낸 나의 무지. 그 무지를 길러 낸 군.
벗어나는 법은 없다. 배우지 못했다.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도 고려하지 않았다. 내 기억은 군 산하의 연구동에서 시작했고, 내 소속은 시작부터 군이었다. 아마 마지막도.
휘말려야 했던 윤오에게는 모두 변명이겠지만.
징-.
들고 있을 기운도 없어 가슴팍에 얹은 모바일이 짧게 진동했다. 메시지인가. 이능 장교는 전원 송신이 묶여 있으니, 답장을 할 수 없는 내게 메시지를 보낼 일반인이라곤 데리다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루돌프일 수도 있겠다. 사야야를 볼 수 있게 도와 달라든가, 아니면 그 부탁을 하러 방문하겠다든가.
나쁘지 않은 예상이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갔다. 메시지는 가장 자유로운 이로부터 도착했다. 중앙을 통째로 마비시키고 홀연히 사라진 놈. 바차스.
>[Sun. 아파?]
“미친놈.”
헛웃음을 흘리다 팔뚝에 엉킨 링거 줄을 치워 냈다. 화면에 뜬 메시지를 눌렀으나 보낸 이의 정보가 텅 빈 메시지는 터치가 먹히지 않았다. 저번에 내 모바일을 만지는 것 같았는데 뭔가 장치를 넣어 둔 건가?
메시지는 수신함에 남지 않고 곧 사라졌다. 나는 문간에 선 병사를 빠르게 살피고 받는 사람이 공란인 메시지를 전송했다.
<[어디야?]
들여다보고 있어도 답장은 도착하지 않았다. 이게 아닌가. 발신 실패 알림 창을 끄고 침대맡에 기대앉았다. 다른 방법을 고민할 때쯤 다시 짧은 진동이 울렸다.
>[Paradise >.<]
“하…….”
“무슨 일이십니까?”
“아무 일도.”
“연락하실 곳이 있으십니까?”
“일정 확인 중이야. 내 부관에게 대신 연락을 부탁하지.”
“예. 알겠습니다.”
병실 문을 밀어 열고 바깥에 선 다른 병사에게 내 말을 전하는 병사의 계급장과 이름을 확인했다. 감시는 하나가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잠시 시선이 떠난 틈에 빠르게 메시지를 쳤다. 제 정신이냐든가, 헛소리할 상황이냐든가 하는 사족은 빼고 핵심을 물었다.
<[어쩔 생각이야]
>[이제 곧이라서]
>[준비되면 데리러 갈게, Sun]
>[넌 이쪽을 골라]
연달아 도착하는 메시지를 보며 미간을 찌푸릴 때, 다시 병실 문이 열렸다. 데리다가 도착하기엔 이르고. 회진인가? 다소 날 선 기색으로 돌아본 입구에는 키가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손에 든 모바일이 툭,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윤오 씨.”
“실례합니다.”
>[여기서 좀 행복해져라]
검은 화면에 뜬 마지막 메시지가 잠시 반짝이더니 이내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경악 어린 내 시선은 그 모바일이 아니라 병실의 문을 향했다.
윤오가 어떻게 여기에?
“놀라 보이네요. 주제넘은 짓이었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내 병실에 적어도 둘 이상의 감시를 두었을 정도인데, 이 와중에 민간인이 면회를 온다고? 그는 이제, 내 가이드가 아니고, 나는 그의 존재를 어디에도 알린 적이 없는데?
그런데, 당장 눈앞에 윤오가 왔다.
민간인을 군부 내 의무대까지 들이기 위한 절차와 전산 허가가 줄줄이 떠올랐다. 같이 떠오른 얼굴 하나도 있었다. 전산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놈.
그걸 전부 조작한 건가? 당장 놈을 찾겠다고 난리 난 이 군부 안에서? 왜? 내가 아파서?
검게 꺼진 모바일이 허벅지 아래로 느리게 굴러떨어지고, 내부에서 근무하던 병사가 윤오의 뒤로 문을 닫고 나갔다. 둘만 남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치미는 긴장에 꿀꺽 침이 넘어갔다.
한 걸음 안쪽으로 들어온 윤오는 더 다가오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내 비루한 몰골을 훑어보는 것 같았고, 허락을 기다리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를 다가오게 해도 될까. 당장 돌려보내는 게 맞을까. 커다란 갈등을 겪는 나 대신, 소란하게 날뛰던 파동이 먼저 범위 안에 윤오를 삼키고 풀썩 꺾였다.
내내 정신을 갉아먹던 두통이 가라앉고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오한이 가신 자리에 떨림이 남았다. 피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통증이 무뎌지고 가슴 한복판이 주무르듯 죄었다. 심장이 날뛰기 시작했다.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는 머리보다 가슴이 이르게 그를 반겼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연락을 받았습니다. ……수상한 연락이었지만, 아주 허튼소리는 아니었네요.”
“무슨 연락을……?”
“사람이 죽게 생겼다고 하던데.”
살짝 기울인 고개와 좁아진 미간에 덜컹 속이 떨어졌다.
그 연락은 아마도 바차스, 겠지. 내게 유효한 치료와 내 가이드를 아는 것은 그놈밖에 없으니까. 놈이 직접 윤오에게 연락한 건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짜증이나 분노 같기도 하고 마음이 졸아 초조했다. 두근거림도 심했다. 치미는 의문 때문이었다.
윤오가 왜 여기까지 왔지? 왜 내가 죽는 걸 신경 쓰는 것처럼 말하지? 나를 저렇게, 걱정이라도 한 것처럼…….
“내가 이선 씨 가이드입니까?”
현기증과 다른 아득함이 시야를 검게 물들였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들끓었다. 막다른 곳에 내몰린 기분이고 낭떠러지 끄트머리에 매달린 기분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아직 확신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 내가 어떡해야 하지. 그에게 거짓말을 해야 할까.
헛웃음도 나지 않았다. 이렇게 내게 윤오를 들이밀고 ‘행복’을 운운하는 바차스에게 덜컥 성이 났다. 콧잔등도 따가웠다.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닌데. 내가 원한 건.
나는.
이제 그만하고 싶은데.
“말해 봐요. 내가 이선 씨 가이드입니까?”
“…….”
“그래서 내 앞에서 운 겁니까?”
“…….”
“지금 우는 것도.”
미처 잡지 못한 물길이 대답보다 이르게 흘러내렸다.
“그래서 그런 겁니까?”
윤오의 부름에는 대답을 해야 한다. 그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 걸 싫어한다. 곧잘 말문이 막혀 머뭇거리는 내게 한숨을 쉬었고, 채근해서 대답을 듣기도 했다.
알고 있는데, 대답을 줘야 하는데, 그런데, 내 혀는 항상 그의 앞에서 움직이는 법을 잊었다. 목구멍을 틀어막아 더운 숨을 잡았고 울음을 참는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 이따금 흐느꼈다.
가슴팍을 헐떡이며 입술을 뻐끔거리는 내게 윤오가 다가왔다. 어깨가 담뿍 움츠러들었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나는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그만두고 싶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엇도 바꾸고 싶지 않다. 지쳤다. 달라진 미래를 바라기엔 이미 너덜너덜하다. 더는 나의 존재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붙잡아 불행하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도, 염치없는 내 심장이 새롭게 살았다.
내게도 더운 피가 흘렀다.
흐르는 눈물과 내뱉는 숨에도 온기가 있었다.
아직 살아 있었다.
이대로는 다시 실수를 해 버리는데. 욕심내 버리는데.
다가오는 윤오를 저지하려 손을 들어 올렸으나, 내 얼굴을 살핀 그가 비척이는 손을 감싸 쥐었다.
어깨와 목이 좁아들고 흔들린 턱부터 후드득 물방울이 날아 거친 모포에 떨어졌다.
“뭐가 그렇게 겁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가이드라면 지금 이선 씨에게 필요한 상황 아닙니까?”
전열기나 식염수 팩 따위로 어떻게 하지 못한 온기가 윤오로부터 스몄다. 차근히 두통이 가시고 오한이 옅어졌다. 다만 두근거리는 심장이 가슴을 뻐근하게 채웠다.
바로 곁에 선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지 못하면서 보지 않는 것도 자신이 없어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 아래로 쉴 새 없이 젖은 길이 생겼다.
“가이딩은…… 이런 걸로 됩니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에게 잡힌 손을 당겼으나 차마 윤오를 털어 내지 못한 하찮은 몸짓으로 끝났다. 더운 손이 감아쥔 마른 손가락이 힘없이 바르작거리다 이내 축 늘어졌다. 한숨 같은 흐느낌을 수차례 뱉은 입이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을 되풀이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하면 그렇다고 해요. 다 죽어 가는 사람 그냥 두고 갈 만큼 매정하지는 않습니다.”
“…….”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지.”
매정하지 않은 윤오가 매섭게 내칠 만큼 끔찍한 게 나였다. 한때 모질게 나를 거부했던 윤오와 아픈 갈증을 눌러 참던 나날이 떠올랐다. 내가 거듭한 실수로 점점 멀어지는 그를 견디지 못했다. 실수가 늘었고, 그는 나를 경멸했다. 윤오는 나를 싫어했다.
“내가 가이드가 맞습니까?”
“…….”
“대답.”
“……아닙…….”
“그럼 가이드 센터에 찾아가도 아무 일 없겠군요.”
버석이는 마른 손가락이 놀라 오그라든 순간이었다. 어쩔 수 없는 절박함으로 그의 손을 거머쥐고 조금은 당겼다. 절로 메이는 목구멍으로 신음처럼 가느다란 애원이 새 나갔다.
“그러지 마세요…….”
내려다보는 윤오의 얼굴에, 비뚤어진 눈썹 모양 하나하나에 마음이 통째로 덜컹덜컹 떨었다. 그저 떠보는 말에 불과하다 해도, 만에 하나 그가 정말 가이드 센터를 찾는다면.
상상이 아프게 다가왔다. 그가 가이드로 등록해서, 내가 아닌 에스퍼를 가지게 되면……. 그럼 나는.
부디 당신 자유롭기를.
내가 망치지 않은 삶을 사는 윤오. 행복한 윤오.
단지 그것을 바랐는데.
“울지 말고.”
“……그러지, 마세요.”
“내가 이선 씨 가이드입니까?”
고개가 푹, 떨궈졌다. 겹겹이 두꺼운 모포를 적시는 고갯짓이 몇 번이나 이어졌다. 좌우로 휘저어야 한다,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런 토막 난 생각을 하다가도 고개가 중력을 견디지 못하고 위에서 아래로 끌어내려졌다. 고장 난 인형처럼 쉬지 않고 끄덕이며 흐느껴 울었다.
두 번 다시 그를 내 가이드 삼지 않겠다, 불행하게 하지 않겠다, 그럴 바엔 죽겠다, 모든 다짐이 순서대로 윤오의 앞에서 깨어졌다. 손쉽게 깨지고 부서져 흩어졌다. 이래서, 이래서 만나지 않으려 했는데.
“왜 부정했습니까. 언제 알았어요. 서점?”
“네……. 네…….”
빠듯한 머리는 부정을 실패한 다음에 아예 고장 나 버렸다. 질문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연거푸 네네거렸다. 겨우 이은 참을성이 고삐가 풀린 것처럼 끊어졌다.
고개를 여전히 달랑거리며 윤오의 손을 당겨 내 뺨을 문지르고 그의 손가락 틈에서 숨을 쉬었다. 아주 오랜만에 공기를 허락받은 기분이었다.
그의 더운 손을 양손으로 소중히 감싸 벌벌 떠는 턱과 목, 뺨과 입술을 가져다 붙였다. 못난 눈물이 그 손을 뒤덮었다. 따뜻한 손등을 축축이 적셨다. 젖게 만든 것이 미안해 입을 맞췄다.
끝없는 사과와 끝 모를 애정을 연거푸 입술만으로 그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가쁜 숨을 그 손등에 덧그리며 그리웠다 고백했다. 보고 싶었다 말했다.
괴로웠다고, 괴롭다 죽어도 좋을 만큼 사랑한다고.
혼자만 기억하는 것은 역시 외롭다. 외로웠다. 외롭고 슬펐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안아 달라고 빌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억지로 참아 낸 모든 순간 외로웠다.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내게만 사랑인 이 미련을 잘라 버리기만 하면 당신을 놓아 줄 수 있으니까. 그러면 나를 모르는 윤오도, 내게 다정하게 굴어 미련 갖게 했던 윤오도, 모두 내게서 벗어나게 할 수 있으니까. 이렇게 마침맞은 기회는 더 없을 테니까.
“……니다……. ……아해요……, ……해요.”
“…….”
좋아합니다, 좋아해요, 죄송합니다, 사랑해요,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두서없는 고백이 이어졌다. 내까짓 게 그를 욕심내는 것도. 이렇게 모자라게 만들어져서 감히 그를 필요로 하는 것도. 함부로 사랑인 척 집착하고. 죽고도 놓아주지 못해서 또다시 이 삶을 반복하게 해 버리고.
그러고도 다시 이 손에 매달려 나를 가엾게 여겨 달라 매달리는 것까지도.
눈앞에 찾아온 당신을 외면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사랑해요……. 죄송해요…….”
허파와 횡격막이 요동쳐 가슴팍이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어깨가 들썩일 적마다 윤오의 손가락과 손목에, 손등과 팔에 더운 숨을 비볐다. 내내 시리던 속에서 울음이 덥게 났다. 흐느낌이 서럽게 커지고, 짐승 새끼처럼 낑낑거리며 사죄와 고백을 반복했다.
어린애도 아니면서, 엉엉 소리 내 우는 이 흉한 꼴을 감출 여력이 없어 그대로 드러냈다. 윤오가 한 걸음 다가오기만 해도 나는 속수무책으로 깨어졌다. 나부라지고 말았다.
“하나만 해요.”
“…….”
“사랑이든, 죄송이든.”
“죄, 송합니다…….”
“그쪽인가.”
픽, 꺼지는 웃음소리에 그렁그렁한 눈을 들었다. 윤오를 올려다보았으나 흐린 시야가 손바닥에 덮여 가렸다. 눈을 가린 손바닥 안을 푹 젖은 속눈썹으로 긁으며 억지로 숨을 고를 때,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장면도 낯설지 않은 건, 이능의 일종입니까?”
“…….”
“기억은 아닐 텐데. 누가 무릎 꿇은 걸 보는 취미는 없어서.”
이능? 무릎? 멍한 정신으로 그 말을 듣고 밀려 난 모포와 꿇어앉은 내 다리를 보았다. 서둘러 침상 아래로 기어 내려가려는 나를 윤오가 밀어 자리에 앉혔다.
몸이 흔들리다 주저앉는 와중에 빼앗길까 그의 한 손을 잡아 내 품에 당기고 고개를 조아렸다. 벌벌 떨면서도 놓지 않고 품었다.
다 가시지 않은 울음을 딸꾹질처럼 히끅거리며 처분을 기다렸다. 망가진 세상은 어째서 그에게 흔적을 남겼을까? 그것도 내 탓인가? 내 간절함은 어디까지 어느 만큼 일을 키운 걸까. 윤오도 느끼고 있다면 그가 이번에도 나를 싫어할까.
죽음보다는 삶이, 삶보다는 윤오의 외면이 두려웠다.
엉망이 된 세상과 또다시 저질러 버린 이 고백.
이어질 경계와 혐오로 영혼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을 알면서도 견디지 못했다. 이 감정이 속을 터트리고 빠져나가 잡을 수가 없었다. 더는 잡을 수가 없어 뱉어 버렸다.
결국 세상 따위의 문제보다 윤오 하나에 흔들리고,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게 나였다. 이토록 무거운 선택의 짐은 내게 와서는 안 됐다. 나처럼 형편없는 에스퍼 새끼가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찾을 수 없는 주노와 피고름에 젖은 준준의 등.
살아 있는 사야야, 울지 않은 루돌프.
불 붙은 채 엎어진 어린 한타.
가이드를 찾는 키비슈스.
그가 뒤엎은 펠리우.
사라진 바차스.
아직 죽지 않은 에스퍼들과의 접견.
윤오의 기시감.
내가 해야 할 선택을 떠올릴수록 이기적인 나 자신에게 치가 떨렸다.
윤오가 손을 내밀어 준 그것 하나만으로 이곳을 고르고 싶어지는 내가 끔찍했다. 미움받아도 어쩔 수 없는 말종이었다.
무수한 그들의 생과 사보다도 내게는 윤오의 행복이 중요하다. 그의 평안이 소중했고, 그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보다 높은 가치였다.
세상이 잘못했다.
세상은 그대로 나를 죽게 두었어야 했다. 이런 중압감을 내게 주어서는 안 됐다. 그렇게 멍청하니 망가져도 마땅하다.
나도. 나 역시 죽어 마땅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네에……. 네…….”
“우선 정신을 차려 봐요. 이쪽 보고.”
“네…….”
“대답만 하지 말고.”
윤오의 검정. 나를 꿰뚫어 속에 든 것을 평가하는 날카로운 검정. 뜨거운 색.
“하나씩 하죠. 내게 이능을 썼습니까?”
“……아닙니다.”
“그런가요? 그럼 이선 씨가 가진 이능은 뭡니까. 물어봐도 됩니까?”
“네? 네……. 저는…….”
“안 된다면 말하지 말고.”
“아닙니다. 저는 에스퍼의 파동을 조절하고, 상처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상처.”
윤오의 눈이 잠시 먼 곳을 향해 아득해졌다. 또 다른 기시감을 떠올리는 듯한 그 모습에 초조감이 불쑥 일어 그의 손을 당겼다. 생각을 살필 수 없는 그 깊은 눈동자에 내가 비쳤다.
“……다음. 왜 내가 가이드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
“에스퍼들이 찾아 헤맨다는 그 가이드. 그게 나 아닙니까? 내 추측이 틀렸다면 얘기해요.”
그가 말을 이을 때마다 내 심정은 내리막을 굴렀다. 이 막다른 길의 끝이 돌이킬 수 없는 길일까 걱정이 됐다.
“……면, 불행해지시니까…….”
“불행? 내가?”
“…….”
“뭘 어떻게 해서 불행하게 만들려고?”
윤오가 내 눈가에 다시 송골송골 솟아나는 눈물을 닦았다. 장난기 섞인 말투며 다정한 손길이 계속해서 눈을 적시고 앞을 흐리게 했다. 히끅 대는 숨과 부들거리는 입술은 윤오가 기억하지 못하는 잘못을 수어 가지나 담았고 감히 벌어지지 못했다.
나와 내 소속이 저지른, 내 가이드가 된 것만으로 윤오가 포기하고 감당해야 했던 많은 일들.
“그래서 내가 필요합니까?”
그러지 않은 순간이 없을 만큼. 언제나 항상. 나는 당신이.
“왜 말이 없습니까. 아까는 그렇게 고백을 하더니.”
“싫…… 않으십, 니까? 싫으, 싫, 싫으시면…….”
“뭘 했다고 싫어.”
멀미가 일었다. 망망대해에 조각배로 휩쓸리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아픈 사람 두고 좋고 싫고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토록 바란 자비가 내 앞에 하늘거렸다. 울고 빌어도 가질 수 없었던 지난 2년이 스쳐 지나갔다. 나를 불쌍히 여겨 보듬는 윤오를 얼마나 상상했는지 모른다.
허락받은 시간 내내 무시를 당하고 매정하게 쫓겨난 날에도, 밤새 나는 그 자비를 상상했다. 하루와 한 달을 그렇게 버텨 여름과 겨울을 조금 더 살아 냈다.
“제가…….”
“실례합니다, 중령님. 착오가 있었습니다. 원래 면회가 안 되시는데. 헉, ……죄송합니다!”
내내 병실을 지키던 병사가 병실 문을 열고 머리를 디밀었다. 드디어 전산 오류를 전달받은 모양이다.
빠르든 늦든 윤오를 내보내기 위해 올 줄 알았지만, 아쉽고 화난 마음에 애먼 군인을 쏘아보았다.
놈은 크게 울어 형편없는 내 얼굴을 보더니 들어오다 말고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감시자의 얼굴이 붉었다. 흐트러진 상관의 모습을 예상치 못해 당황한 모양이다.
“나가.”
“아, 그게, 저, 명령이…….”
“위든 병장.”
“예! 병장 위든!”
좁아진 목구멍에서 조금의 위엄도 없는 목소리가 났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훌쩍이고 눈을 훔친 다음 병사의 벌건 낯을 마주했다.
“의무관을 불러오도록. 인사를 할 테니 3분만 자리를 비워.”
“의무관 말씀이십니까? 3분은…….”
“시간은 알아서 끌어.”
“예? 예…….”
또다시 명령을 운운하기 전에 부은 눈으로 쏘아보았다. 눈동자를 흔들거리며 내 시선을 마주 받은 병사가 애매한 대답을 흘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겨우 쫓아내고 잠시 날카로워진 파동을 가라앉히는 중에 한숨 섞인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졌다.
“중령이라. ……군인 같은 모습도 있군요.”
“네?”
“생각보다 계급이 높아서 놀랐다는 이야깁니다. 울거나 말을 더듬지 않는 것도 처음 봤고.”
“……죄송합니다.”
“안색이 아까보다 나아진 것 같은데, 내가 가이드인 걸 알리면 더 있게 해 주지 않습니까? 그편이 낫지 않겠어요?”
“안 됩,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필요 없다’라. 아까의 대답인가.”
쿵, 쿵, 말문이 막힌 채 올려다보는 내 미간을 긴 손가락이 쿡 찌르고 되돌아갔다.
“그런 얼굴 하지 말고.”
“…….”
“사정이 있는 것 같으니 오늘은 돌아가겠습니다. 인사는 어떻게 할 겁니까?”
그를 어떻게 돌려보낼지를 고민하던 것이 무색하게 그의 입에서 나온 돌아간다는 말이 아쉬웠다. 내내 놓지 않은 더운 손을 무심코 내 가슴팍까지 당겨 묻었다가 깜짝 놀라 떼어 냈다. 싫거나 거북해하는 기색이 없어서 겨우 안도의 숨이 났다.
그렇지만 인사는 쉽지 않았다. 인사. 윤오를 보내는 인사. 안녕히, 아니면 조심히 가시라는 상투적인 인사말이 미련에 잡아 채여 나서질 못했다.
윤오는 뻣뻣하게 힘이 들어간 손가락을 하나하나 풀어내고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축축한 내 뺨을 닦았다. 깜빡 감겼다 다시 뜬 눈에서 뛰는 가슴만큼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한 뼘 거리만큼 다가와 나와 눈을 맞춘 그의 손등을 얼른 겹쳐 잡았다.
“솔직하다고 해야 하나.”
바닥을 나뒹구는 심장이 이리저리 채여 쿵쿵 아프게 뛰었다.
키스하는 줄 알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눈물이 옮아 반짝이는 큰 손이 이리저리 엉킨 링거 줄을 옆으로 치워 내고 모포를 당겨 멋대로 뻗은 두 다리를 덮었다. 내 어깨를 밀었고, 대번에 밀려 넘어가는 등을 가볍게 받쳐 자리에 눕혔다.
“나중에 다 듣겠습니다.”
“…….”
“연락하세요. 내가 가이드 센터에 가는 게 싫다면.”
협박입니다.
끄트머리가 약간 당겨 올라간 입술에 몽롱하게 눈물짓는 동안 윤오가 돌아섰다.
* * *
“이선.”
씹어 뱉은 부름. 그저 화가 나서 내뱉은 탄성이나 증오에 찬 단말마 같기도 했다. 그게 어째서 내 이름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힘주어 쏘아보는 파란 눈을 가만 내려다보다가 짧게 대답했다.
“윈터.”
제 이름이 불릴 줄은 예상 못한 모양이다. 사로잡힌 반군의 작은 등이 움찔 솟고 얻어맞아 얼룩덜룩한 얼굴에서 눈이 크게 뜨였다. 피딱지 앉은 입술이 의문스럽게 벌어졌다가 고집스레 다물렸다.
어떻게 이름을 아는지 궁금한 건가. 궁금한 건 외려 내 쪽인데. 키비슈스가 나에 대해 무엇을 말했는지.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하는지.
“날 죽여. 이선.”
“왜 내가 너를 죽이지?”
“그걸 말이라고 해? 난 아무것도 불지 않아.”
“투항해.”
“차라리 고문을 하지 그래?”
묶이지 않았다면 당장 달려들 기세였다. 꿇어 앉혀진 몸이 들썩일 때마다 허벅지를 꿴 날붙이 주변으로 피가 배어나고 거품이 일었다. 발치에 고인 붉은 웅덩이를 내려다보다 군화 앞굽으로 슥 밀었다. 끈적한 피가 지워지지 않고 시멘트 바닥에 길게 번졌다.
“네게 궁금한 건 없어.”
“……뭐라고?”
“키비슈스는 너를 구하지 않을 테니까.”
“…….”
큰 외상에도 불구하고 윈터의 파동이 거칠게 날뛰었다. 내 목을 잘라 버리고 싶은 건가. 끌어올리는 족족 제어로 가로막자 핏발 선 눈에 짜증과 분노가 차올랐다. 바람을 일으킬 수 없는 것도, 잡혀 와 무릎 꿇린 것도, 그것이 내 앞인 것도 퍽 자존심 상하는 모양이다.
이 에스퍼는 이전의 세계에서도, 여기서도 나를 싫어한다. 어째서일까.
가늘게 뜬 눈으로 윈터의 몸과 파동 상태를 가늠하다 뒤에 선 대규를 불렀다. 대규는 곧장 포로에게 다가가 피와 흙먼지가 엉겨 엉망인 머리통에 손을 얹었다.
“심문은 소용없어! 엘로란타는 영원하다!”
“오해가 있나 본데.”
맹목적인 추종자의 찢어진 옷 틈으로 오래된 상흔과 멍 자국이 보였다. 이능이 강하고 체술도 그럭저럭이지만 둘 모두를 쓰지 못하는 지금은 그저 상처 입은 작은 몸. 많아야 스물서너 살 정도.
또 불쌍한 것을 주워 그 겉보기에 상냥한 태도로 세뇌하고 이용한 걸까. 어쩌면 이 어린 에스퍼도 납치당했을지 모르지. 자연계 이능력은 귀하니까, 키비슈스라면 진작 쓸모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네가 뭘 알고 있는지. 키비슈스를 지켰는지, 혹은 버림을 받았는지. 나는 궁금하지 않아. 자해를 금지하는 암시를 지시했을 뿐이다.”
눈 가리고 귀 닫은 녀석의 행태는 낯설지 않다.
강제 개화 이능을 얻은 키비슈스가 저지른 악행이 아니었다면, 숱하게 사람이 죽어도 실험을 멈추지 않는 그에게서 괴리감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가이드를 향한 그 증오에 내가 공감했다면.
그랬더라면 나는 그날 나를 잡아 끈 키비슈스를 따라 반군에 가담했을 것이다. 저기 무릎 꿇고 그를 지키려 드는 것이 내가 되었을 수도 있다.
나를 구하고 돌본 자를 향한 추종. 유일한 사람을 향한, 판단이 필요 없는 따름.
‘버림받았다’는 부분이 드센 척하던 어린 녀석의 심리를 건드렸다. 문득 흔들리는 파란 눈동자에서 감정 하나가 선연하게 다가왔다. 맹목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키비슈스를 좋아하나?”
얼룩덜룩한 뺨이 딱딱하게 굳었다. 일그러진 눈두덩 아래로 매섭던 눈초리가 숨었지만 파동의 동요는 감출 수 없다. 보답받지 못할 상대, 그것도 키비슈스라는 최악의 에스퍼라니. 측은함이나 안타까움을 느낄 사치스러운 시간은 길지 않았다.
“저런.”
“……죽여 버릴 거야!”
“내가 너를 모욕했나? 착각 하지 마. 네가 키비슈스를 어떻게 생각하건 그따위 일은 중요하지 않아. 반군의 간부였건 뭐건 지금은 버려진 패잔병이고.”
“어우~! 우리 우리 중령님 무섭게 말씀하실 줄도 아네~! 데이 준장님 왔어요~. 뀨우~!”
복도를 꺾어 키가 큰 두 사람이 들어왔다. 데이와 라이얀이다.
“저 반군, 역시 입 안 열죠~? 그냥 죽일까아? 잡을 때도 고생했거든. 음음, 역시 자연계는 다들 포악한가 봐요~? 응? 데이? 너 말하는 거 맞지? 아야!”
“측근이래서 잡아 오긴 했는데, 하. 그 씹새끼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더라.”
“맞아, 맞아. 휭~ 사라졌다~? 순간 이동 말이죠! 고급 인력은 다 가지고 있어?”
“라이얀. 넌 입 다물고 좀 빠져. 이선 너 이 새끼, 다 죽어 간다더니 멀쩡하네. 너한테는 가이딩 지원이 좀 나왔나? 빼지 말고 주는 건 다 받고 더 신청해서 받아.”
작은 심문실이 둘의 등장으로 대번에 소란스러워졌다.
윈터의 전신을 두들겨 얼룩덜룩하게 만든 것이 데이의 솜씨인지, 옹그린 작은 덩치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움찔움찔 움츠러들었다.
“우리 밧챠~는 탈영했다면서요? 대단해~! 역시 인물이야. 같은 바차 출신이라는 게 뿌듯할 정도라니까아? 아야! 데이야, 나 아파요.”
“그래서 이 새끼가 엘로란타 놈의 측근이 맞아?”
“……맞아.”
“입도 안 열고, 쉽게 잘라 낸 걸 보면 쓸모도 없을 것 같은데. 죽일까.”
“구류만.”
“우리 우리 중령님은 역시 착해. 못된 데이랑 달라. 아야! 이거 봐요오. 우리 데이 요즘 손버릇이 더 나빠져서 라이얀 머리에 혹이 엄청 났지~?”
데이는 애초에 윈터를 살려 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포로라지만 반군 간부의 앞에서 조금도 말을 조심하지 않고 처분에 대한 이야기까지 스스럼없었다. 입조심을 하지 않는 건 라이얀도 마찬가지지만, 그쪽은 평소와 같았고.
좁은 영창의 볼 것도 없는 여기저기를 흐느적거리며 어깨에 멘 소총 끈을 함부로 흔들거린 라이얀은 바차스가 탈영한 것이 어지간히 감명 깊었는지 입대 전 놈이 저지른 사건들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우리 바차들 중에선 난 놈이죠. 데라주바 길거리 소년들의 우상~이랄까? 나도 에스퍼였음 좋았을 텐, 아니야. 데이보다 쎌 거 아니면 그냥 가이드인 게 낫겠다~. 응응. 데이 정도는 돼야지.”
“좀 닥쳐.”
“네에~.”
중앙군 최강 병기와 그 가이드의 일상적 모습에 짧게 한숨을 쉬었다. 내 상태를 한 차례 살핀 후 출력할 양을 가다듬고 파동을 예리하게 세워 단숨에 윈터의 파동을 잘라 냈다.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진 녀석은 의도대로 곧장 의식을 잃었다. 모로 고꾸라진 놈의 찢어진 입술에서 흰 거품이 흘러나왔다.
“독방 처넣을 거 아니면 저 새끼는 어차피 죽어. 엘로란타 놈 최측근 잡힌 거 벌써 소문 다 돌았어.”
“대규. 가서 따로 가두고 의무병을 불러.”
“너 이 띨띨한 새끼, 내 말 안 들려?”
“아직 어려.”
“사람 처 죽이고 학대하는 새끼들 나이가 중요해?”
“데이야. 우리 우리 중령님 추워. 진정하자~.”
살을 에는 냉기가 즉각 좁은 공간을 채웠다. 라이얀이 평소의 흐느적거리는 태도와 달리 빠릿빠릿하게 나와 그녀 사이를 가로 막고 데이를 끌어안았다. 차가운 어깨에 기대어 애교 부리듯 머리를 비비자 공기를 차게 식히는 파동이 한풀 꺾였다.
추위로 살이 일어난 팔을 쓸어내렸다. 한참 키가 큰 라이얀의 등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피로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났다.
“……나도 사람을 죽였어. 열여덟에.”
“그때는 씨발, 전쟁이었고.”
“그 전쟁, 아직이야. 안 끝났어.”
“이 썅놈 새끼가 따박따박.”
“아, 데이야! 그 얘기 했나? 우리 우리 중령님도 들었어요?”
중재하듯 끼어든 라이얀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들어 봐 봐. 밧챠 대령이 데라주바 있을 때 일인데, 바차들 중에 좀 예쁘다~하는 남자애들은 성매매도 끌려갔거든~. 그러니까 이 라이얀처럼? 이 미남이 어릴 때는 얼마나 더 대단했겠어? 근데 밧챠도 잘생겼잖아? 그걸 끌려가더니 불알을 따고 돌아온 거야~!”
“썅.”
“덕분에 불알 아까운 돼지 새끼들 주문이 줄어서 이 라이얀도 순결을 지킬 수 있었다는 이야기? 얼마나 다행이야, 나는 소심해서 그런 거 못 만져요오. 그때는~ 총도~ 없었고~. 밧챠가 좀 처 맞기는 했겠지만 덕분에 그 시기 바차들은 소매치기랑 구걸같이 간단한 것만 했지~.”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게 분명한 라이얀의 시도에 데이도 나도 김이 식어 말이 없었다. 서늘한 실내는 좀 전처럼 춥지 않았고, 그나마의 냉기도 라이얀의 등이 가려 주었다. 그는 밀어 내는 데이의 팔까지 감아 안고 매달려서 칭얼거렸다.
“데이야~, 나 진짜 무서웠어요. 내가 작고 연약하고 잘생겼었거든. 나한테 불알 만지라고 했으면 반항도 못 하고 손 지지해졌을 거야~. 무서워! 위로해 줘어~.”
“좀 떨어져! 이제 됐으니까.”
“됐어? 진짜? 뽀뽀 안 해도 되나~?”
“…….”
전장을 휩쓸며 늘 투덕거려 오랜 친구나 동료 같지만, 그들은 모든 에스퍼가 바라는 가이드 관계의 표본이었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하는 연인.
증명하듯 짧고 농밀하게 이어지는 데이와 멱살 잡힌 라이얀의 키스를 외면하고, 대규를 다시 불러 윈터를 들려 보냈다.
에스퍼를 감금할 마땅한 장소는 군 수용소밖에 없다. 데이의 말마따나 군 수용소에 잘못 보냈다간 저 어린 에스퍼는 맞아 죽기 십상인데, 상황을 봐서 의무 감호소에 몇 년 둘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재판을 연기하고 사상 교정 프로그램에 넣을 수 있을지도…….
왜일까. 왜 나는 적군이 죽는 것도 막지 못해서 안달이지? 녀석이 키비슈스에게 가진 애착을 봐선 투항할 것 같지도 않은데.
시멘트를 겹겹이 바른 삭막한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가렸다. 서늘한 공기와 차가운 벽에 얼마 없는 체온을 야금야금 빼앗겼다.
과거로 되돌아간다면 원하는 조각만 바꿔 놓아 헝클어진 미래를 고치고 싶었다. 그것이 얼마나 안일한 상상이었는지 하나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지금이 보여 주고 있다.
쑥대밭이 된 펠리우. 붙잡혀 온 윈터.
또 하나의 현실. 하찮은 에스퍼 하나가 손쓸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고 그 범위도 빌어먹게 작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다시 하루가 지난다.
“데이야, 이제 괜찮아?”
고르지 못하고, 버리지 못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유구한 고립. 외따로 떨어진 섬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너 호모 새끼였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이선 중령 애인이 민간인 남자라던데. 씨팔, 하필 남자를. 좆 달린 새끼가 뭐가 좋다고. 쯧.”
제아무리 명예에 민감한 집단이라고 해도 사람이 모이고 입이 모이면 소문을 막을 수 없다. 에스퍼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야 흔하게 도는 가십이다.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뒷골이 울렸다. 덜컥 속이 내려앉기도 했다. 뭘 들은 거냐 캐물으니 ‘이선 중령의 민간인 남자 애인이 의무대에 병문안을 왔다’가 소문의 발단이고 요지였다.
누군가 그날 윤오를 본 모양이다. 그때의 병사인가? 아니면 의무대의 누군가?
가이드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애인이라니.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담배 피우면서 존나 호모 얘기 밖에 안 해. 지겨워 죽겠다. 씨팔. 에스퍼 새끼들은 더해. 남자고 여자고 니 애인에 관심이 처 많아가지고 나불거리는데 주둥이를 다 찢어 버릴라다 말았다.”
“…….”
“여자로 해, 여자로. 호모는 씨발 개나 줘라.”
내 소문도 어이가 없고 호모가 어쩌고저쩌고 하며 불쾌해하는 준준 역시 우습기 짝이 없다. 여자는커녕 나중에는 남자와 혼인 신고를 하겠다고 난리를 칠 놈이.
“애인 아니야.”
“차였냐. 존나 울고 염병 났다며.”
“……아니라니까.”
남자보다 여자가 백배 낫다며 쓸모없는 소리를 나불거리는 것은 흘리고, 엎어진 놈의 등을 내려다보았다. 녹고 다시 회복하기를 반복한 준준의 살이 사람의 피부 같지 않게 울퉁불퉁하다. 등뿐 아니라 허리, 어깨, 팔뚝, 목도. 괴물이라는 수식에 저 맨몸도 한몫했겠지.
“네 가이드가 남자면 어떡하려고.”
“하, 씨이팔. 요새 왜 자꾸 가이드 소리를 하고 지랄이야?”
“그냥 가정하는 거잖아. 남자면 어떡할 건데?”
“남자면 찢어 죽이고 나도 뒤진다. 좆 보고 좆이 서겠냐. 우웩. 좆같네. 이게 웃겨? 웃냐?”
어이가 없어 실소한 나더러 웃느냐고 핀잔을 주고는 저가 더 크게 웃었다. 상스럽기 짝이 없는 말이 구미에 맞은 모양이다.
들썩이는 커다란 등에서는 약과 진물이 번들거렸다. 여름이면 짓무른 살이 더 쉽게 곪고 잘 낫지 않는다. 때문에 신경질과 폭력성이 느는 놈에게 상부는 나를 배정했다. 본인 부담금을 받고 접견 시간을 후하게 배정해 비위를 맞추는 것이다.
“가이드……. 씹, 그딴 좆같은 거 필요 없어.”
‘주노, 손 다쳐. 그만해.’
놈에게 주노를 찾아 주고 싶었다. 다시 사람의 몰골을 하고, 말을 곱게 쓰려 애쓰는 게 보고 싶었다. 주노를 과보호하면서 주노가 울면 쩔쩔매는 꼴이 보고 싶었다. 깨질까 보듬고 상처받을까 전전긍긍하는 놈과 천성이 순한 주노는 꽤 잘 어울렸다.
그러나 보내 놓은 사람으로부터 찾지 못했다는 소식이 도착할 때면 나도 모르게 안도했다.
주노가 너무 좋은 사람이라서. 준준에게는 주노밖에 없지만, 주노에게는 아니니까.
주노는 준준을 무뢰배에서 더 나은 사람으로, 시한폭탄에서 군이 무시할 수 없는 에스퍼로 만들었다. 저절로 된 일은 아니었다.
폭력과 욕설을 일삼고 제대로 표현해 본 감정이라곤 분노밖에 없는 준준은 기대하지 않은 때 나타난 가이드에 혼란스러워했고, 주노는 더했다.
납치로 시작해 날벼락처럼 바뀐 환경과 삶을 받아들이기까지, 주노는 수도 없이 울었고 받아들이고도 준준의 집착과 통제, 의심으로 고생했다.
주노를 찾으면 어떡할까. 그 과정을 옆에서 다 본 내가, 다시 준준을 포용해 달라 강요할 수 있을까.
타박타박 복도에서 들리는 빠른 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드르륵 요란하게 문이 열렸다.
“준준준~장님~. 왜 벗고 있을까? 장교 풍기 문란~ 군내 성추행~ 뭐 이런 건가? 우리 우리 중령님은 안 되는데~. 중령님 내 뒤로 숨을래요오? 형아가 지켜 줄까?”
거침없이 들어선 라이얀은 특유의 헛소리를 하며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흐느적거리는 팔을 뻗어 타이머를 집어 들고 분침 사이에 손가락을 밀어 넣더니 곧 짤깍, 하는 마지막 타이머 소리가 났다.
“끝났다! 저녁 시간~. 준준준~장님도 끼워 줄까요? 핫도그 트럭 진짜 가고 싶었거든~.”
“이 또라이 새끼가.”
“네에~.”
“데이는?”
“일하러 갔죠~. 혼자 남았다~! 으음, 사고 칠 것 같으니까 돌봐 줘요~?”
이 황당한 등장에 준준은 옷가지를 챙겨 들고 일어났다. 데라주바 출신은 다 돌은 새끼들이라며 선입견 섞인 욕설을 남겼다.
팔랑팔랑 손을 흔들어 떠나는 준준을 배웅한 라이얀은 둘만 남자 내 어깨를 살짝 건드리며 속닥속닥 얘기했다.
“저번에 불알 얘기한 거 미안해요. 남자가~ 남자 불알~ 좋을 수도 있는데! 라이얀 생각이 편협했다!”
“……무슨 헛소리야.”
“남자 애인? 있다고? 방금 오다가 들었는데요오.”
“아니야.”
“에~ 차였어요? 막 울었다구~ 그랬는데?”
“……아니라니까.”
다시 뭐라 뭐라 불알 얘기를 하려는 입을 다물려 놓고 이마를 짚었다. 두통이 심해진 기분이다.
이 자유분방함은 정말 출신 지역의 문제인가. 바차 출신들은 다 저런 영혼인가. 내게도 선입견이 생길 지경이다.
“머리 아파요? 어떡하나. 우리 우리 중령님도 얼른 가이드가 생겨야 하는데~. 라이얀이 안아 줄까요? 가이딩이 되긴 하려나~. 나는 모르지~! 밖에 날씨 좋아요~. 안구 나갈까?”
안아 주겠다는 듯 두 팔을 벌리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어쨌거나 혼자 놔두면 정말 사고를 치는 녀석이다. 데이가 찾으러 올 때까지 동행하기는 해야 할 것 같아 데리고 접견실을 나왔다. 말대로 날씨가 좋았다.
“밧챠 대령이 없다니~. 가서 말 걸고~ 무시당하는 거~ 재밌었는데~! 저번에는 쫓아다녔더니 나를 복도에 가둬 버리지 뭐예요~. 세 시간쯤 그랬나? 도어가~ 양쪽으로 막혀 가지고! 데이가 부수고 구해 줬지~.”
“…….”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돌아오려나? 안 오는 게 낫겠죠오? 아아~ 자유로운 거 좋지! 데이도 탈영하자고 할까? 그런데 권력도 그 맛이 쏠쏠하거든요~. 돈과 권력~ 최고지~!”
“……라이얀. 군부에서는 말을 조심하는 게 좋아.”
“사람이 이렇게 착해서 어떡해. 좀 막살아 보면 어때요? 내가 우리 우리 중령님 가이드면 이 더러운 군에 못 놔뒀을 텐데~. 다행히~ 못돼 처먹은~ 데이의 가이드였다!”
키득거리는 라이얀을 흘끔 보았다. 불평하는 낯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모난 성격이 수두룩한 군인 중에서 데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지만, 데이의 가이드는 그녀가 못됐다는 둥 험악하다는 둥 농담하기를 즐겼다. 그때그때 가볍게 얻어맞는 것 같기는 했는데, 이러나저러나 애정 표현이 분명하다.
자연히 어제 본 두 사람의 키스가 떠올랐다. 파동을 진정시키기 위한 가이딩이라기보다는 연인 사이의 애정 행각에 가까운, 서로를 원하는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인상 깊은, 그런.
에스퍼, 여자, 높은 계급, 뛰어난 능력, 하다못해 큰 키 등, 갖은 이유로 데이를 질투하는 치가 많았던지라, 처음 라이얀이 나타났을 때는 그를 이용해 데이를 휘두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허황된 수작이 끊이지 않았다.
데이가 가이드를 곤죽이 되도록 때려 입원했다는 소문이 첫해에는 심심찮게 들렸으니 더 다루기 쉬워 보였겠지.
하지만 라이얀을 겁박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한없이 가벼운 태도와 실없는 말투가 그를 가벼워 보이게 했으나, 그는 데라주바 연합국의 병폐와도 같은 거리의 고아 소년, ‘바차’ 출신이었다.
붙잡히기 전까지는 총기를 암거래했다 했나. 그가 폭력에 얼마나 익숙한지 모른 채 섣불리 덤빈 몇몇은 그대로 배에 구멍이 뚫렸다.
“누구를 쏴야~ 우리 중령님이랑 데이가 편해질까~? 엘로란타를 쏴야 하나~ 군원수를 쏴야 하나~.”
“목소리 낮춰.”
“네에~. 빵야빵야~.”
한숨을 내쉬며 피곤한 눈가를 짚었다. 핫도그 트럭까지 고작 10분 남짓 되는 길이 무척 멀게 느껴졌다.
“어! 중령님! 라이얀님!”
“새신랑~!”
“와! 중앙에 오셨군요! 어디 가세요? 저녁 드셨나요?”
“로드 밧챠가 내려 주신 핫도그를 먹으러 가는 길~. 중앙의 명물이잖아?”
“그렇군요. 저도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도중에 만난 루돌프가 핫도그를 사겠다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데이의 돈으로 라이얀이 샀다. 라이얀은 두 사람의 결혼식에 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늦은 축하를 건넸고, 루돌프는 볼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새신랑 소리에 기뻐했다.
“아! 중령님도 축하드립니다!”
“나? 왜?”
“애인 분이요! 병문안 오셨다면서요. 결혼식에 두 분이 같이 오셨어도 좋았을 텐데!”
아니라니까…….
대령의 탈주, 또는 실종 사건은 그 심각성보다 이르게 정리되었다.
사건 발생 24시간 후 이능 장교 격리가 해제되었고, 48시간 후 정상 출근 및 파견 명령이 내려왔다. 70시간이 경과한 후에는 재실 보고를 매시간에서 일 2회로 고쳤고, 그날 저녁부터는 점호를 재량에 맡겼다.
상부의 뜻은 간단히 줄일 수 있었다. 바차스를 찾지 못했고 찾지 못할 것 같으니, 이 탈영 사건을 아예 없는 일로 하자는 것.
일을 더 키우지 않고 묻겠다는 의지가 어찌나 확고한지, 전달받고 쓴웃음 지은 게 나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내 경우에는 조금 더 번거로웠다. 모바일을 항시 소지할 것, 연락에 즉시 응할 것을 강조하는 권고가 내려왔고, 일 6회 내 위치 정보를 군이 수신할 수 있으며 불시에 통화를 감청할 수 있다는 내용의 서류가 앞에 놓였다.
동의하지 않을 시, 군부 밖 외출이 무기한 제한된다는 협박까지 덧붙여서.
지긋지긋했다. 내가 바차스를 따라 탈영이라도 할까 봐? 그렇게 걱정이면 협박을 첨부하는 대신 곱게 회유하는 편이 효과적이었을 텐데.
얼마나 더 고분고분하게 굴어야 이런 취급을 벗어날까. 아니면 고분고분하게 굴었기 때문에 이런 취급일까.
반항이라도 해 보면 어떨까 싶었지만 그것도 해 본 놈이나 하는 일이다. 생각이 긴 성격은 행동하기 전에 그에 따를 결과를 미리 걱정했다.
잠깐의 충동이 가져올 여파, 고생할 다른 사람들, 수습에 걸릴 시간, 후에 남을 평판 등. 하나둘 걱정이 쌓이다 보면 도전할 생각은 사라지고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는 쪽이 편하게 된다.
서류를 전달받은 내가 한숨을 내쉴 때, 화가 난 데리다는 곧장 상부에 항의했다. 별달리 소용은 없었다. 구겨진 채 돌아온 동의서는 그대로였고, 항의하던 중 말이 새어 나가 내 이름자 뒤에 또 다른 소문이 붙었다.
‘군이 이선 중령과 중령의 남자 애인을 헤어지게 하려고 외출을 금지했다.’
이 넓고 또 좁은 중앙 전체가 소문을 즐기는 통에 이래저래 귀찮은 일이 늘었다. 나를 보고 얼굴을 붉히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뒤에서 호모 새끼라고 욕을 하다가 같이 근무하던 준준에게 맞아 턱이 부서지는 놈도 생겼다.
접견에 대한 환상 때문에 원래부터 내게 관심이 많았던 에스퍼들은 더 했다. 조심스럽게 꺼내는 남자 애인에 대한 얘기는 소문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잘될 것이니 힘내라는 응원은 웃기지도 않았고, 당당해도 된다는 지지는 어이가 없었다.
내 애인 여부와 내 성적 기호 중 정확히 무엇이 그렇게 입맛에 맞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니라고 정정하기도 지쳐 시간이 지나기만 기다렸다. 어지간히 다들 지루하고 살 만한 모양이다.
초소 앞.
사복을 입고 서서 연신 모바일을 꺼내 만지작거리는 내게, 경비를 서던 병사 하나가 아는 체 경례했다. 표정이 오묘한 게 녀석도 요즘 회자하는 소문에 대해 한 마디 묻고 싶어 근질거리는 눈빛이었다. 싸늘하게 무시하고 다시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동쪽 초소로 가면 됩니까?]
<[예.]
입술이 말랐다. 괜히 셔츠 깃을 당겼다가 헛기침을 하고, 발끝으로 흙바닥을 긁다가 소매를 정리했다.
지금이라도 취소하고 되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은 했지만 그럴 수 있을 리 없다.
그 바보 같은 소문에 기름을 끼얹을 것을 알면서도 데리러 오겠다 하는 것을 거절하지 못했다.
사실 소문 따위를 고려하기보다 그러시라 대답하는 게 먼저였다. 어디로 가려는지 듣기도 전에 긍정했고, 데리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형편없는 동의서에 서명한 것도 이 약속 때문이었다. 감청이든 위치 추적이든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든, 윤오가 나를 만나러 온다니까.
‘왜 연락 안 합니까?’
허둥거리며 받은 전화에서 윤오는 내 건강을 물은 다음 가벼운 질책을 했다. 심장이 소란스러워 이런저런 변명을 웅얼거리는 내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간질거리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가 머리카락을 쥐었다 하는 동안, 전화 너머의 낮은 목소리는 주말에 뭐 하는지를 물었고, 나는 멍청이처럼 근무가 있다는 대답이나 하고서 입 안을 씹었다. 거짓은 아니었지만 정답도 아니다.
데리러 올 테니 근무 후에 보자는 낮은 목소리를 듣고는 한참이나 귀를 의심했다. 대답을 채근하는 윤오에게 염소처럼 떨리는 긍정을 뱉어 놓았고, 그때 보자는 그의 마지막 인사말을 곱씹으며 밤새 잠 못 이뤘다.
그가 먼저 연락할 줄은 몰랐는데.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혹시 정말 가이드 센터를 방문한 건 아닐까. 초조해하다가 가이드 센터에 연락을 했다. 센터는 아직 근무를 축소 진행하고 있으며, 가이드 안전상의 이유로 신규는 추후 안전이 확인된 다음 검사를 진행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윤오가 가이드 등록을 하지는 못하겠지. 안심이 되어야 하는데 계속 불안했다.
그에게 경호를 붙여 둘 수 있다면 좋겠지만…… 윤오가 동의할 리 없겠지. 예전에도 그를 발견한 뒤 그에게 사람을 붙인 걸 들켰을 때에, 윤오는 싸늘하게 화를 냈다.
그러니까 경호를 붙이고 시시콜콜한 것까지 보고받고 알고 싶은 내 욕심이 잘못된 것이다. 참아야 했다. 에스퍼의 관심과 집착은 기형적이다. 쉬지 않고 되새겨야 했다.
엔진 소리를 하나하나 구별할 리가 없는데 멀리서 들리는 차 소리에 귀가 쫑긋 섰다. 검은 SUV 한 대가 속도를 줄여 초소 앞길에 접어들었다. 윤오다.
건너에 멈춰 서자마자 뛰다시피 가벼운 걸음을 재촉해 조수석에 올랐다. 울렁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안녕하십…….”
“응원합니다! 중령님!”
문을 닫기 전에 쩌렁쩌렁한 외침이 파고들었다. 아. 이래서 서둘렀는데.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응원?”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안전띠를 착용하는 것을 확인한 윤오가 차를 몰아 일반 도로에 올랐다. 얼마간 달려 군 부지를 벗어나는 중에 질문 하나가 툭 떨어졌다.
“내 차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
“몸은 이제 괜찮습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차내에 뚝 자른 듯 정적이 감돌았다.
자동차 엔진과 차를 스치는 바람만으로는 다 채울 수 없는 공백이 숨 막혔다. 윤오가 화난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자 벗어날 수 없었다. 대답은 빨리했는데, 뭘 잘못했지. 그가 타는 차를 알아서? 뒷조사했다고 생각했을까.
안부를 묻는 가벼운 말이라도 건네 침묵을 깨고 싶었지만 그대로 인사가 무시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선뜻 들었다. 왜 연락을 했는지, 어째서 나를 만나러 왔는지 같은 질문은 너무 무거워서 혀끝에 올리기조차 버거웠다.
만난 것만으로 좋아야 하는데, 침묵이 서서히 내 신경 줄을 갉아먹었다. 안전띠를 쥔 손끝이 희게 질렸다.
도로변에 차가 멈춰 섰을 때서야 내가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두어 번 숨을 헐떡이다 창밖을 살피고 운전석을 돌아보았다. 달리 목적지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삭막한 풍경인데, 왜 여기서 멈췄을까. 묻고 싶었으나 윤오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입이 다물렸다.
“지금 안색이 어떤지 압니까?”
“예……? 괜찮습니다.”
툭, 툭. 느리게 핸들을 건드리던 손가락이 괜한 긴장감을 더했다. 꼴깍 침을 넘기는 내게 윤오가 말했다. 낮고 딱딱한 목소리였다.
“괜찮다. 아무 일도 아니다. 신경 쓰지 마라.”
“죄…….”
“그것도 아니면 사과.”
“…….”
“그런 대답 말고 나는 조금 더 대화가 하고 싶습니다. 이선 씨는 어떻습니까?”
안전띠를 감아쥔 손끝이 셔츠 단추를 긁고 가슴팍을 눌렀다. 다 고르지 못한 숨이 속부터 터져 나갈 것 같았다.
“나는 이 에스퍼, 가이드라는 게 서로 알아야 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
“왜 또 울 것 같지. 말이 심했습니까?”
“아닙, 아닙니다. 아니, 아니라…….”
“알아요. 서두르지 말고.”
바들거리는 내 어깨와 손등을 시선으로 훑은 윤오가 운전석에 털썩 기대앉았다. 나는 괜스레 젖어 드는 눈시울을 깜빡여 눈물을 참았다. 기쁨과 슬픔, 두려움과 기대가 범람했다. 속이 시끄럽고 더웠다.
기시감 때문일까? 내가 뭔가 했다고 생각해서 알아보려는 걸까? 책. 책 때문이거나, 내가 군인이니까. 에스퍼라서, 그래서, 그에게 정보가 필요해서…….
아니면,
윤오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면,
그는 처음부터 나를 이렇게 대해 주었을 것이라.
턱이 덜덜 떨렸다. 내가 얼마나 정신 나간 짓을 한 것인지, 견디지 못해서, 힘들어서, 반가워서, 사랑해서, 그런저런 핑계를 대고 윤오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새삼 크게 다가왔다.
뒤를 쫓고, 억지로 집에 쳐들어가고, 팔을 부러뜨리고, 그 품을 파고들고, 사람을 써서 감시하고, 자유를 뺏었다. 나 때문에 윤오는 장장 2년이나 중앙을 벗어나지 못했다.
나와 윤오가 데이와 라이얀처럼 되기를 기대하는 군에게 원치 않게 시달렸다. 끔찍해 하는 나를 주에 한 번씩은 그의 집에 들여야 했고, 내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강제 집행으로 불려 왔다. 억지로 가이딩을 했다.
윤오가 처음부터 에스퍼와 가이드를 싫어한 게 아니라면?
에스퍼가 나오는 윤오의 소설. 그건 분명 지금으로부터 2년이 지난 후에 나오는 이야기다. 인다비가 내게 인터뷰 요청을 한 것도 그쯤. 윤오는 그 전까지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정확히는 제대로 내 인사를 받아 준 적도 없었다.
“그렇게 매번 울고 사과하면, 내게도 잘못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조각들이 데굴데굴 굴러 순서를 맞췄다. 마지막 조각이 들어가 완성된 사실은 꽤 슬펐다. 윤오가 구상하던 에스퍼 소설을 2년이나 쓰지 않겠다고 한 게 나 때문이라는 것. 나를 만나기 전에는 에스퍼를 싫어하지 않았으리라는 것.
내가 실수를 거듭하지 않았더라면 윤오도 그렇게 모질지 않았을 거라는 짐작과 그를 더욱 냉정하고 싸늘하게 만든 것마저 나라는 것도.
모르던 사실도 아닌데 내내 그의 관심을 갈구하던 그 비참한 시기가 서러웠다. 콧잔등이 따갑고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울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결국 손을 들어 닦아 내야 할 만큼이 됐다.
소매로 벅벅 눈을 문지르고 울지 않는다고 말하려다가 다시 주룩 눈물이 흘러 입을 다물어야 했다.
내가 내내 울고 그의 앞에 엎드려 빈 것까지도 윤오를 괴롭힌 줄은 몰라서, 더욱 서러웠다. 미안했다.
“몸은, 몸은…… 괜찮습, 니다. 정말입니다. 지난주에 퇴원을 했고……, 윤오 씨가, 윤오 씨를 만, 만나면 좋아집니다. 죄……. 차는, 알고 있었습니다……. 응원은 소문이 나서, 그런 것인데…….”
“무슨 소문입니까?”
다정한 물음이 귀에 달았다. 나는 소문에 대해서도 솔직히 말하기 위해 입을 달싹이다가 윤오의 시선을 피했다. 잠시 말을 고르는 틈에 윤오가 콘솔 박스에서 여행용 티슈를 꺼내 떨리는 손등에 놓았다.
“소문은, 군에, 제가……. 그, 저번에, 윤오 씨가 오셨던 날에 윤오 씨를 보고 소문이…….”
“내 소문이?”
“죄……. 윤오 씨가, 제 애인이라는…… 소문입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질끈 감은 눈에서 떨어지는 물기를 티슈로 찍어 눌렀다. 윤오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싫겠지, 기분 나쁘겠지, 화를 내면 어떡하지, 다시 나를 차갑게 대하면 어떡하지…….
“그게 답니까? 응원은?”
“……군이, 저를…… 남자 애인과 헤어지게 하려 한다는, 소문도 나서…….”
“사실입니까?”
“아닙니다…….”
“그래요.”
그 가벼운 긍정의 의미를 알지 못해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차가 다시 움직였다. 갓길을 벗어나 한산한 도로를 탔다. 시내로 가는 방향이었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합니다.”
서둘러 얼굴을 닦고 돌아본 윤오는 미미하게 웃고 있었다. 들숨을 뻐근하게 들이쉬고 그 뺨을 한참 바라봤다.
“호감이 가거나, 동경하거나, 흥미롭거나……. 관심 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면 더 좋아하죠.”
“…….”
“이선 씨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가.”
마음이 벅차올랐다. 하염없이 옅은 웃음을 보는 이 마음이, 무슨 감정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뜨거웠다. 글썽이는 시야를 몇 번이나 닦아 내고 다시 보았다. 끝도 없이 볼 수 있을 만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악의적인 소문이라면 문제가 되겠지만, 응원 정도라면 무방하지 않나요.”
나름 귀엽기도 하고.
흘끗 내게 눈짓하며 작게 이어진 말에 뺨이 간질거렸다. 윤오에게서 귀엽다는 말을 들은 게 나라도 되는 것처럼 설렜다. 이 모든 게 처음부터 내게로 올 수 있는 다정이었다는 게 먹먹했다.
이게 정말 현실일까.
[경로 설정]
삐-, 삐-, 삐-.
일정한 단음은 차량 내부에 매립된 내비게이션에서 났다. 위성 지도를 보여 주던 화면에 갑작스레 경로가 나타났고, 그 목적지는 중앙의 북쪽 관리소 너머를 향했다.
“잠깐, 건드리지 마십시오. 정차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온갖 상황을 예비하느라 머릿속이 분주하게 돌아갔다. 그 긴장은 내비게이션에 떠오른 다음 문장으로 이어졌다.
[My Sun. 내게로 와.]
“바차스?”
“무슨 일입니까?”
윤오를 차에서 내리게 하려던 동작이 멎었다. 항상 그렇듯 의외의 등장이었다.
“반군?”
“반군은 아닙니다.”
이제는 중앙군도 아니고.
놀랐던 만큼 화가 치밀어 내비게이션 화면을 꺼 버렸다. 다짜고짜 윤오 차를 조작하다니, 주행 중에 돌발 상황은 까딱하면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만약 윤오가 다치기라도 하면…….
아찔한 상상이 이어졌다. 나를 찾은 의도가 무엇이든 곱게 보이지 않았다.
데리다에게 연락해 차를 부르려던 중 대시 보드에 붙은 스피커에서 지직-, 지직- 하는 잡음이 들렸다.
전파 간섭. 혹시 몰라 손을 뻗어 주행 버튼을 끄고 주변을 살폈다. 차량 주변에서 잡히는 파동은 따로 없었다. 근처를 여유 있게 통제 범위로 삼은 후 내 것과 운전석의 안전띠를 풀었다.
안과 밖. 어느 쪽이 더 안전할 것인가.
머리를 굴리는 사이 꺼진 내비게이션 화면이 다시 켜졌다. 팔을 뻗어 윤오의 상체를 좌석으로 밀어붙이고 작은 화면과 스피커를 응시했다.
[화났어?]
역시. 바차스의 이능은 다른 어중간한 원격 이능들과 다르게 제어가 완전히 들어 먹히지 않았다. 제어 범위를 키워 놓은 중에도 아무렇지 않게 기기를 조작해 내는 능력은 곧 바차스의 본인 증명이나 다름없었다.
잠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1급 수배가 내려진 탈영 장교의 연락이지만 그 부분은 내가 걱정할 바가 아니니.
내민 어깨를 다시 제자리로 돌리며 윤오를 가린 팔도 풀어냈다.
“최근 차를 맡기신 적이 있습니까? 정비라거나.”
“없습니다.”
“주차는 늘 하시던 곳에 하셨습니까?”
“네. 지하에.”
“잘하셨습니다.”
윤오는 조금 놀라 보였다. 제멋대로 켜진 내비게이션 화면과 잡음이 들린 대시 보드, 그리고 내 얼굴을 느리게 번갈아 살폈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빠르게 설명했다.
“전산을 다루는 에스퍼의 이능입니다. 전할 말이 있는 듯한데 위험한 인물은 아닙니다.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
삑. 단음과 함께 좁은 화면에 짧은 메시지가 연달아 떴다. 내내 검색조차 하지 못하게 하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에덴이 위험해]
[도와줘]
에덴이 위험하다고?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차는,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만약 불안하시면 다른 차를 불러 드릴 테니 바꿔 타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돌아가라고요?”
“예? 예…….”
“이선 씨는 저기로 갑니까?”
“네, 그렇습니다.”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은 내가 축소해 놓은 내비게이션의 지도였다. 여기서 북쪽. 계산된 시간은 40분이 조금 넘는다. 멀지 않지만 가깝지도 않은 곳이다.
저곳에 무슨 일이 있는 거지? 놈이 정말 저기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에덴의 이름을 꺼내고 도와 달라 한 이상 가 봐야 했다.
틱틱 일정하게 울리던 비상등이 꺼졌다. 핸들을 두드리던 긴 손가락이 주행 버튼을 눌렀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윤오 씨!”
“데려다줄게요.”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지켜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비명과 같은 소리에 스스로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윤오에게 화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켜 줘요.”
가벼운 어절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어지럽지 않은 데도 눈앞이 핑 돌고, 심장이 걱정과 긴장, 설렘으로 가득 찼다.
윤오를 곁에 둔 박동이 점점 더 세지고 빨라졌다. 모처럼 더운 피가 손끝과 발끝까지 흘렀다. 전기가 흐르는 것 같고 멋대로 힘이 들어간 주먹 안쪽에 손톱자국이 패였다.
지켜 달라는, 방금 들은 말이 웅웅거리며 맴돌았다. 내가 그를 지켜도 된다는 허락이 오싹오싹했다.
“위험할 것 같으면 근처까지만이라도. 안 됩니까?”
“제가, 제가 말씀드리면, 꼭 피하셔야…… 약속해 주셔야 합니다. 정말로, 위험한 일은 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인근까지만…….”
나도 모르게 그의 팔을 잡았다. 윤오가 흘끗 그 손을 내려다보더니 짧게 네, 하고 대답했다.
[생각보다 많이 이르네]
[여기까진 것 같아]
술렁거리는 속을 그대로 드러낸 낯이 내비게이션에 뜬 다음 메시지를 보고 와락 구겨졌다. 저건 또 무슨 말이지.
[골랐어?]
그리고 혼란이 밀려들었다.
내가 골라야 할 것은 하나밖에 없어서.
하나이자 전체이고, 세계이자 단 한 사람인 것.
“괜찮습니까?”
“네, 네…….”
“저 메시지. 뭘 고른다는 말인지 물어봐도 됩니까?”
룸 미러로 나를 들여다보던 윤오가 신호 대기 중에 아예 몸을 조수석으로 틀었다. 더운 손이 뻗어와 숙인 내 턱을 들어 올렸다. 당황으로 떨리는 눈동자가 그대로 윤오의 검정 아래 드러났다.
“종잡을 수가 없네.”
“……네?”
“이선 씨는 어렵군요.”
“아…….”
“더 알고 싶기도 하고.”
눈을 끔뻑이는 사이 통행 신호를 받은 차가 다시 달려 나갔다. 쿵, 쿵, 고막 가득 심장 소리가 들어찼다.
더 알고 싶기도 하고. 지켜 줘요.
그에게서 들을 줄은 기대도 못 하던 말들이 쏟아졌다. 물에 빠진 듯 숨이 막혔지만 이 괴로움의 근원은 설렘이라, 이렇게 심장이 뛰어도 죽을 것처럼 괴롭지는 않았다.
입이 마르는데 숨은 더웠다. 당장 차를 세워 윤오에게 돌아가라고 하고 싶었다가, 그를 끌어다가 그 품에 나를 안아 달라고 하고 싶었다.
걱정이 나를 터트릴 것 같고, 애정이 흘러넘쳤다. 고작 몇 마디 말과 행동으로 감정이 끓어올라 욕심을 부리려 했다. 착각도 했다. 지금이라면 윤오가 나를 받아 줄 것 같았다.
여기라면.
삐빅-. 삐빅-. 삐빅-.
모바일 호출음이 상념을 깨었다. 데리다로부터의 연락. 같이 뜬 코드는 긴급을 알렸다. 통화 버튼을 눌러 귀에 가져다 대자 인사를 생략한 용건이 흘러나왔다.
- 데리다입니다. 즉시 복귀하셔야겠습니다. 북부 관리소로부터 북북동 30킬로미터 지점에 반군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재해 복구 작업으로 민간인 자원봉사자가 다수 있었으며, 일부 피랍되었습니다. 가이드 인력도 포함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선이다. 지금 북부 관리소 방향으로 향하는 중. 민간 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다. 에스퍼 지원은 누가 가지?”
- 데이 준장님과 사야야 대위가 출발했습니다. 나머지 전원의 목록은 메시지로 넣겠습니다. 헬기를 보낼까요?
“……아니. 40분 이내 인근 도착. 상황 보고하도록.”
- 40분 이내. 확인했습니다. 반 시간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데이와 사야야라. 좋은 조합은 아니었다. 여름이니까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데이의 전투 중에는 가능한 사야야를 멀리, 본진에 배치하는 편이 안전하고 효율적이다.
지도를 켜 목적지 인근 지형을 확인했다. 지도상으로는 복잡하지 않은 평탄지였으나 산이 가까워 직접 봐야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최전선에 데이와 라이얀, 그리고 나. 그 정도면 전투력은 충분할까. 냉기에 휘말리지 않도록 나머지는 빼 두어 인질 회수와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는 데 집중하도록 하는 편이 좋겠다.
곧이어 도착한 목록을 쭉 살펴 각각의 이능을 복기했다. 전투가 발생할 경우 전후방 대열을 어떻게 두면 좋을지, 데이와 나를 제외한 에스퍼 팀을 임무 별 두 개씩 총 네 개로 갈라 전달했다.
곧 데리다로부터 각 팀의 리더가 확인했으며 선발대는 30분, 후발대는 40분 이내 작전지 도착 예정이라는 메시지가 왔다.
이어 작전 회선으로 내 모바일에 온 연락을 받았다. 스피커로 켜 놓고 지도를 더 보고 싶었지만 윤오가 신경 쓸까 걱정되어 귀에 가져다 댔다. 연결 즉시 굉장한 소음이 들렸다.
- 라이얀입니다~. 까꿍! 시끄럽죠~ 헬기거든~! 20분 걸린다는데~ 우리 우리 중령님 어떡해~? 데이트 중에 불려 오게 생겼네~?
“라이얀. 데이 바꿔.”
- 네에~. ……이선. 어디야. 얼마나 걸려.
“가는 중. 후발대랑 비슷하게 도착할 거야. 당장은 소강상태라고 하니까 도착하면 전력부터 정비하고 조용히 움직여.”
- 그래. 인질이 있으니까. 인질 구출을 우선으로 하고 너 오면 나도 바로 출발한다.
“내가 같이 갈게.”
- 이 씨발 새끼야. 처 돌았어? 뒤질려고?
쨍한 외침에 모바일을 잠시 떼었다가 윤오의 눈치를 보고 다시 귀로 가져갔다.
“빨리 마무리하려는 거야. 전투는 네가 할 거고. 원거리에서 단숨에 제압한다. 적군 이능과 엄폐 상황을 보고 다시 얘기해.”
- 얼른 오기나 해. 지휘받아 놨다가 넘겨줄 테니까.
“그럴 필요는…….”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음이 빽빽한 전화가 단번에 뚝 끊겼다. 준장을 두고 나더러 지휘하라는 건가. 데이의 속셈이 빤해 한숨이 났다.
대에스퍼전의 경우 내가 작전과 재원 분배에 참여하는 일이 잦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능 장교들이 일반 장교의 이능 지식과 전투 지휘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인정할 만한 경험과 능력을 갖춘 준장, 데이가 있다면 내가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지휘 권한과 배속 병력이 없는 이능 장교지만, 단 한 명, 군으로부터 직접 지휘 권한을 받아 작전을 통솔할 수 있는 에스퍼가 있다. 준장 데이. 그녀가 스스로 쟁취한 그 위업이자 권한을 내게 넘기겠다는 건, 군에 그녀의 의지를 피력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심각한 상황입니까?”
“네?”
“한숨이 길길래.”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선뜻 나서려는 입에 붙은 말들을 빼고 가능한 솔직한 말을, 윤오가 알아도 되는 선에서 좋은 대답이 될 법한 말을 골랐다.
“진급……할 것 같아서…….”
“그게 한숨 쉴 일인가요?”
피식, 새어 나온 웃음소리에 볼과 목부터 가슴 속까지 간질거렸다. 모바일을 든 손으로 가슴팍을 조금 긁었지만 마음이 가려운 건 긁어 없앨 수가 없었다.
“진급하게 되면 대령이네요. 아주 높은데.”
“이능 장교의 계급은…… 허울이 큽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영향력 있지 않습니다.”
“글쎄. 일반인 생각엔 다른데. 중앙군 이능 장교는 준장이 단 둘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예.”
외곽을 둘러 가는 도로는 한산했다. 윤오는 잠깐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침착하게 궁금증을 꺼내 놓았다.
“중령이 되려면 짧아도 10년 이상 근속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능 장교는 어떻게 다른지 알려 줄 수 있습니까? 뭐든 내가 알아서 안 될 일이면 말해 주지 않아도 됩니다.”
“아닙니다.”
언젠가 답해 준 적 있는 질문이 재차 나를 찾았다. 아랫입술을 꼭 깨물어 긴장을 달랬다. 작전을 떠올릴 때보다도 더 입이 말랐다.
나를 궁금해하는 윤오. 그는, 이번에도 나를 불쌍하게 여겨 줄 것인가? 솔직한 말로 기대가 되었다. 설레고, 떨렸다.
“저는 전쟁 후 임관했고 지금은 중령…… 2년 차입니다. 전후의 이능 장교는 소위로 시작해서 연차보다는 특진으로 진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로를 치하하기 위한 명목이기 때문에 권한보다는 봉급이 오르고 수당이 나옵니다.”
“……전쟁 후. 그럼 참전한 겁니까? 몇 살이었길래?”
“네? 아. 참전했습니다. 당시 열여덟이었습니다.”
“얼마나?”
“……휴전까지. 전장에는 6년 정도 있었습니다.”
“제정신이 아니군.”
꼴깍 침을 삼키며 눈을 깜빡이는 내게, ‘이선 씨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고 그가 말해 주었다. 언짢은 기색을 살피며 살살 눈을 굴리다가 잔뜩 구겨 조그마해진 티슈 뭉치를 손바닥에서 굴렸다. 부스러기를 모아 손바닥 안쪽 오목한 곳에 꾹꾹 눌렀다.
“가이드 없이도 괜찮았습니까?”
“전장에는, 군 소속의 지원 가이드가 파견을 나옵니다. 이능을 적게 쓰면 가이딩을 적게 받아도 오래 버틸 수 있습니다.”
“지원 가이드 말고.”
“네?”
“나.”
“…….”
휑하니 뚫린 길을 달리는 차 안에 다시 적막이 감돌았다. 정확하게는 요란했다. 내 벌렁이는 심장과 허덕이는 숨소리, 손바닥을 긁는 손톱 소리, 초조하게 떨리는 다리가 좌석 시트를 스치는 소리.
“내가 필요하진 않았습니까? 말이 이상하긴 한데……. 매칭 가이드, 는 뭔가 다르다고, 특별하다고 들었습니다. 에스퍼는 폭주나, 부작용 같은 위험이 있다고 했고.”
“…….”
“내가 너무 늦었는지 묻는 겁니다.”
“아니,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아닙니다.”
“다행이네요.”
두근, 두근, 두근.
목구멍이 꽉 멨다. 심장이 튀어나오려다 그 가운데 들어찬 것 같았다. 꾹 쥔 두 주먹 아래서 마른 두 무릎이 연신 떨리고 있었다.
이를 꽉 물고 턱을 들어 올려 내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소용없이 넘친 눈두덩을 꾹 누르고 소매를 들어 턱을 쓸었지만, 후드득 후드득 초라하게 구겨진 티슈 조각으로는 잡아내지 못한 눈물이 떨어졌다. 깨물린 입술과 다문 턱도 벌벌거렸다.
내가 울면 윤오가 불편해하는데, 울지 않아야 하는데. 그런데 윤오의 앞에서 나는 언제나 울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내가 이상했다. 윤오의 앞에서만 요동치고 절절한 내 마음이 이상하고, 이 마음이 밉보일까 두려웠다.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이게 운명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선 씨랑 내가. 어차피 가이드라면, 내 에스퍼가 이선 씨인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
“말이 조금 이상해도 봐줘요. 말했듯이, 이야기를 만드는 게 직업이니까.”
울음이 커져 히끅거리는 내 정수리에 따뜻한 손이 내려와 톡톡 쓰다듬었다. 전투를 앞둔 긴장은 간데없었다. 온통 떨림이고 두근거림이었다.
‘내 에스퍼’라는 말이 내 몸을 송두리째 들어 흔들었다. 울음을 참으려 애쓴 것이 단 순간에 모두 허사가 되고 휘청휘청 흔들리며 울었다. 목구멍을 긁는 울음이 쉬지도 않고 흘러나오고 손바닥과 손톱 사이에는 물이 고여 스몄다.
처음으로 내 존재를 긍정받은 기분이었다. 너무 사랑하고, 너무 사랑스러웠다.
꿈같다. 꿈이었다. 내가 소원하고 바라던 것이었다. 나는 저렇게 나를 포용해 줄 가이드를 평생 꿈꿨고, 그것이 윤오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가 기다린 만큼, 바란 만큼을 알아주길 바랐다. 늦었느냐 묻는 그 물음이 기뻤다.
그는 늦지 않았다. 언제고 늦지 않을 것이다. 내게로 와 주기만 하면, 그가 나를 봐주기만 하면 나는 살았다. 식은 피가 다시 돌았고 숨을 쉴 수 있었다. 무겁고 버거운 삶이라도 미래를 기대하게 되었다. 당신의 곁에서 나는 내일을 꿈꿨다.
내 사랑. 내 윤오. 내 가이드.
나의 계절. 나의 전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 이토록 다정해서 마음 저리고, 그러지 않아도 사랑할 내 윤오. 잔인하고 지긋지긋한 세상이 나를 묶어 둔 소중하고 소중한 족쇄.
기쁨은 바닥도 없이 피어오르고 마르지 않는 샘에서 쉬지 않고 눈물이 솟았다. 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진 주먹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었다.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게 싫어서 울음이라도 참을라치면 그가 등을 두들겨 주었고, 손목까지 눈물이 흘러 적시면 여행용 티슈를 바꿔 들려 주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우는 것과 울지 않으려 하는 것만으로 시간이 바삐 흘렀다.
모바일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음을 몇 번이나 건너뛰었지만, 내비게이션의 안내음과 모바일이 동시에 울렸을 때는 미끌거리는 손으로 기기를 꺼내 화면을 눌렀다. 히끅거리고 헐떡거리는 숨을 애써 삼켰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우선 윤오를 안전하게 돌려보내고, 작전을 해결하고, 그러고 나서. 그때도 윤오가 나를 궁금해해 주면. 내가 지키게 해 주면.
얼얼한 코와 따가운 눈을 마구 문지르는 내 얼굴로 긴 손가락이 다가왔다. 등줄기를 움츠리고 눈을 질끈 감은 내 뺨을 따뜻한 손가락이 긁고 떨어졌다. 눈을 떠 보니 조그만 휴지 조각이 그 손끝에 묻어 있었다.
“진정이 됐습니까?”
“네, 네……. 네…….”
“그래요. 조금 더 친해지면 웃는 것도 보여 줘요.”
“……네?”
“웃은 적은 없는 것 같아서.”
“어, 아……. 아…….”
다시 들린 숨 빠지는 웃음소리에 귀밑머리가 비쭉 솟았다.
“10분 안쪽으로 도착합니다. 지도 확인해요. 중간부터는 공도가 아니던데 이 차로 계속 갈 수 있는지 모르겠군요.”
허둥지둥 축축한 소매에 따가운 눈을 닦고 지도와 모바일을 확인했다. 형편없이 우느라 정신을 놓은 시간이 체감보다도 길었다. 서둘러 상황 보고를 훑고 내비게이션 지도를 확대해 놓으니 작은 안내음 뒤로 메시지가 떴다.
[울리는 남자는 매력 없지]
“울리는 남자? ……나 말하는 건가요?”
“아니, 이게…….”
[그만 울어도 돼]
“그만……. 재밌군요. 이 차를 도청하는 겁니까?”
“네, 아마……. 네…….”
내비게이션 가운데 뜬 메시지 창을 꺼트리려 주변 버튼을 마구잡이로 눌렀다. 놀리는 것처럼 메시지 창의 색깔만 바뀌었다.
[근데]
[예쁘게 울더라]
“바차스! 그만!”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는데. 저쪽도 군에 돈다는 그 ‘소문’을 알고 있는 겁니까?”
“아닐 겁니다. 그냥 이상한 놈이라.”
“이선 씨를 좋아하는?”
“아니,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팔까지 버둥거려가며 오해를 막으려 애쓰는 나를 윤오가 돌아보았다. 사실은 무슨 오해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도 모르면서 일단 아니라고 우겼다. 바차스가 나를 좋아하면 어떻고, 윤오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바뀌는 게 무언지. 이성은 상관없다고 했지만 마음이 그렇지 않았다.
핸들을 두들기는 손가락 짓과 툭툭거리는 소리에 조바심이 났다. 괜한 소리를 하는 바차스가 너무너무 밉고 앞에 있다면 정강이라도 차 주고 싶었다.
“일단은 더 울지 않도록 하고.”
“네……. 정말, 그런 거 아닙니다. 생각하시는 거, 아니니까…….”
“내 생각은 이선 씨보다 저쪽이 잘 아는 것 같습니다.”
“네?”
[ X . X ]
아랫입술을 깨물고 무릎을 꽉 쥐었다. 화면을 노려보는 것으로 바차스 놈의 멱살을 잡아 꺼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와서 탈영이 아니라며 나타나기도 늦었을 테니 놈은 어딘가 다른 곳에 숨어 있겠지.
군이 놈을 어떻게 취급하고 대우했는지 아는 만큼 바차스를 잡아다 바칠 생각은 없었다. 도무지 이해 못할 놈이고, 아무리 얄미운 짓을 한다 해도 그 뜻이 바뀌지는 않는다. 군에 그만한 의리도 없었다.
평생을 몸담은 직장이자 소속일 뿐. 몸담을수록 정이 붙지 않고 떨어지는 곳. 국가와 국민, 군을 위한 충성은 여태 마음 없는 서약으로 충분히 했다.
[안내 종료]
저만치 군용 수송 차량이 비포장도로를 달려 앞질렀다. 목적지 인근이었다. 삑, 소리를 내며 길 안내가 종료되고, 나는 윤오에게 여기서 멈출 것을 부탁했다.
상황 지점은 아직 한참 더 들어가야 하지만 바차스가 지정한 위치가 내 판단에도 적절했다. 여기서부터는 중앙군과 함께 이동하고 윤오의 차를 시내까지 보호해 달라고 하면 된다.
저만치서 소형 차량이 가로로 정차하고 군인 하나가 내려 이쪽으로 다가왔다. 민간 출입을 통제하려는 모양이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아가시는 길은 호위를 받으실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삑.
[Sun]
[얼른]
[만나고 싶어]
픽.
“지금 가는 곳에 저 사람이 있습니까?”
“아마…… 잘 모르겠습니다.”
윤오의 턱짓이 못마땅하게 내비게이션 화면을 향했다. 아까부터 놈이 쓸모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이유를 몰라 이상한데, 그게 윤오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내가 기다려도 됩니까?”
“여기서 말씀이십니까?”
“여기서든. 어디서든.”
그 말이 왜 그렇게 아플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손으로 가슴팍을 눌러야 했다. 그가 나를 기다린다. 기다림이 나만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 저릿저릿 갈비뼈를 찔렀다.
“아픕니까?”
“조금, 아니, 아닙, 니다.”
“그럼 왜?”
“잘 모르겠, 기뻐, 기뻐서…….”
신음처럼 가늘게 고백한 기쁘다는 말에 윤오가 웃고, 운전석 창을 군인 하나가 두들겼다. 일반 장교 하사였다.
창문을 열어도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윤오가 손을 뻗어 내 눈가를 만졌다. 또 티슈 조각이 묻었나, 하면서도 그 손가락이 뺨을 누르고 떨어지는 게 몹시 떨렸다.
“그래요. 그럼 기다릴게요. 너무 늦지는 말고 와요.”
“실례합니다! 앞은 군사 통제 중입니다. 중앙으로 회차하십시오.”
“……중령 이선이다. 지금 내릴 테니 동행하지.”
“하사! 로버트! 중령님! 예! 알겠! 습니다!”
내려간 운전석 창 너머로 내 얼굴을 알아본 하사가 자세를 곧게 세워 경례했다. 놀란 눈이 윤오까지 들여다보기 전에 손을 저어 물렸다.
차창이 올라가고 안전띠를 풀어낸 다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데, 문득 뒷머리를 당기는 손에 맥없이 다가가 그 품에 안겼다. 눈앞이 어두워지고 온기가 훅 끼쳤다.
“가이딩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없어서, 지금은 이것밖에 못 해 주겠습니다. 이 정도도 도움이 됩니까?”
“아, 가이딩이, 도움이, 네에…….”
바보 같은 말을 어버버거리며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묻고 그 품에서 향을 맡았다. 항상 나와 함께하는 깊은 외로움, 그리고 사무치는 그리움이 윤오에게 안겼다.
온기가 물씬 옮아 코가 찡하고 흉곽이 덜덜 떨었다. 들썩이는 등판을 아이 달래듯 토닥토닥 두들기는데 또다시 울음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마주 안고 싶어 꼼질거리는 손가락이 채 윤오의 옷을 감아쥐기 전에, 다시 창을 두들기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바로 뒤 조수석 창을 두들겨 흠칫 어깨가 튀어 올랐다.
똑똑.
“중령님! 모시겠습니다!”
“다치지 말고.”
염소가 되어 대답을 울었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어떻게 차에서 내렸는지는 기억에 없었다. 기분은 딱 기절하기 전의 그것이었으나 알맞게 덥혀진 몸은 드물게 가뿐했다. 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잠시 걸음이 늦춰졌다가 다시 걸었다. 돌아보면 가지 못하게 될까 봐 꾹 참았다.
“중령님! 이쪽 차량으로 타시면 됩니다!”
“……다치지 말고.”
“예? 알겠! 습니다! 감사합니다!”
갑자기 왜 감사 타령인지 모르겠지만 고함을 지르는 하사 때문에 정신이 깨었다.
무전기를 전달받고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 완전히 이성을 찾았다. 윤오가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신신당부한 후에 작전지에 도착했다.
엄폐물 뒤에 세운 간이 막사에 들어섰다. 내부에는 간부들이 화상 지도 주변에 섰고 라이얀이 야전 침상 위에 엎어져 있었다. 손만 들어 올려 팔랑팔랑 흔드는데,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이미 데이에게 한차례 혼난 모양이다.
“이선 중령. 작전을 설명해.”
“데이.”
“시간 없으니까 잡소리는 다물어.”
데이가 무슨 말을 해 놓은 건지 일반 장교들 틈에서도 반발이 나오지 않았다. 지휘는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전으로 전달했던 작전을 간단히 언급하고 자세한 상황 설명을 들었다.
“상황이 묘해. 납치한 인력 중에 가이드가 꽤 되기는 하는데, 다 미숙해서 제대로 파동을 제어해 내긴 힘들 거란 말이지. 유사 가이드도 확인되지 않았고. 그런데 반군 쪽 에스퍼들이 날뛰는 게…….”
“날뛰는 게?”
“최악의 경우 엘로란타 새끼가 여기 있다는 결론.”
“…….”
“그리고 사야야 말로는……. 아니다. 그래서 출발은 언제?”
“키비슈스가 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직 목격 보고는 없는 거지?”
“없어.”
“그러면 서북쪽 경로로 데이 준장, 라이얀, 나 이렇게 셋만 들어간다. 중간까지는 이동계의 지원을 받을 거야. 인질을 잡아 둘 만한 장소는 더 없지? 중요한 건 퇴각로 차단이다. 충돌 이후는 서군 소령이 지휘를 맡아.”
펼쳐진 지도 위로 병력을 나타내는 나무토막을 나누어 옮겼다. 마침맞게 데리다가 미리 지시한 인원 구성을 자료로 보내 왔다.
“1차 충돌 후 약 15분간은 휘말리지 않도록 하고. 2차, 3차 충돌이 이어질 경우 지역 봉쇄를 서둘러. 이능 장교는 서서, 아스버거, 토슈를 봉쇄 쪽으로, 추격은 임마리, 옌, 지안투, 에윱을 쓰도록. 사야야.”
“예.”
“본진에서 대기하고 지휘를 보조해. 무전 연락은 최소한으로. 이동형 에스퍼 또는 키비슈스를 발견하면 즉시 연락하고 부분 후퇴 시켜.”
“예, 알겠습니다.”
반장갑을 당겨 끼고 중검 검집을 단단히 고정했다. 피스톨 자리에 연발 리볼버를 챙기고 탄환도 두 약실만큼 챙겨 허리 주머니에 넣었다.
“임전.”
“그래, 씨발.”
“예~ 드디어 간다아~.”
임전을 선고하고 막사 밖에 대기 중인 아터의 주변으로 빙 둘러 모였다. 인원이 많아 이동 전에 아터의 파동을 조금 북돋았다.
이동에는 찰나가 걸렸고 이동 후 잠시 무릎을 짚었지만 곧 일어났다. 아직까지도 가슴을 간질거리게 하는 윤오의 덕인 듯했다. 그나마도 내 허리만 굽었고 전장과 이동에 익숙한 데이나 라이얀은 벌써 전방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가장 고생한 모양새는 세 사람이나 동시에 중거리 이동을 시켜야 했던 아터에게서 났다.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한 그를 서둘러 돌려보냈다.
심호흡을 하고 육안으로 확인한 진입 경로를 재차 논의하는 중에 치직, 내 어깨에 찬 무전기가 울렸다. 임전부터 충돌 후 15분까지는 연락을 자제시킨 터라, 다들 표정에 긴장이 서렸다.
직-
- Sun. 내부 상황을 들려줄게.
“밧챠!”
이윽고 들린 음성에는 나와 데이의 눈썹이 일그러지고 라이얀이 웃었다.
- ‘……래도 윈터님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인질을 교환하지 않는 겁니까?’
- ‘인질은 다른 용도가 있다.’
- ‘제기랄, 그 용도가 뭐냐구요! 간부면 답니까? 엘로란타는 요즘 대체……!’
- ‘거기. 옆에 누가 있다면 똑바로 입단속 시켜.’
알기 쉬운 불화합.
“오합지졸이 따로 없군.”
“개판!”
“……바차스. 지금 어디야?”
지직거리는 잡음 후에 반군의 무전이 멀어지고 바차스가 답했다.
- 난 어디에나 있지.
“지랄하네.”
- Sun. 내가 보고 싶을 때도 울어 주면 안 돼?
상황과 달리 태연한 헛소리에 내 미간도 데이의 미간만큼이나 좁아졌다. 라이얀만 능청맞게 중령님 또 울었느냐 물었다.
“……똑바로 대답이나 해.”
- 둘만 있을 때 알려 줄게.
“하, 씨발. 웃긴 새끼. 누가 처 잡아가기라도 하는 줄 아나.”
“둘이 뭐 있나아? 밧챠? 내 말도 들려요? 밧챠밧챠~?”
- ‘거, 애새끼들 우는 소리 때문에 안 들리잖아! 입을 막든 기절을 시키든 해! 하, 젠장. 하필 애새끼들을.’
“무시당했당~.”
바차스가 원격으로 건드린 내 무전기는 적진의 신호를 잡아 오가는 내용을 고스란히 수신해 냈다. 근처에 있는 걸까? 놈의 이능 범위가 얼마큼 넓은지 확실하지 않아 알 수 없었다. 그보다 당장은 작전을 끝내야 한다. 후에 놈을 잡아 만나든, 얘기를 하든, 하고.
놈과 나, 그리고 키비슈스에게는 마무리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 ‘중앙군 지원이 도착했다고요! 고립되는 건 시간문젭니다! 왜 중앙까지 와선……!’
- ‘너. 위로 올라와서 직접 얘기해.’
- ‘……예! 갑니다! 가요! 그러면 겁먹을 줄 압니까?’
무전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이 적진의 균열이 두드러졌다.
크게는 인질 협상에 대해서 의견이 다른 모양이었고, 위험할 게 뻔한 중앙령에서 고작 자원봉사자 따위를 납치한 것도 갈등인 모양이었다. 중앙군의 지원 병력이 도착했는데 마땅한 지시가 없는 것도 불안 요소였고, 엘로란타에 대한 불신도 언뜻 보였다.
시간을 두고 더 지켜보았지만 키비슈스가 있는지, 간부는 몇이나 되는지, 혹은 인질 상황은 어떻고 에스퍼는 몇이나 포함되어 있는지, 그런 유용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잠깐 기다리다 이어폰을 연결했다. 스피커가 꺼지고 시끄러운 잡음이 뚝 잘렸다.
“더 듣고 싶은데! 이거 훔쳐 듣는 거~ 짜릿하다~!”
“닥치고 총 들어.”
“네에~.”
소총과 라이플을 겹쳐 멘 라이얀이 흐느적흐느적 일어나 라이플에 달린 스코프로 전방을 살폈다.
지대는 평탄하지만 숲이 있어 시야가 좁고 길이 나빴다. 정 측면으로 점거당한 폐건물이 일부 보였다. 공장으로 쓰인 것이라 층고가 높고 내부는 무주식으로 크게 뚫려 있다. 잠입 후에는 은밀한 거동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2개 동 중 목표는 인질이 있는 서쪽. 5개의 입구는 2인씩 돌아가며 보초를 선다고 했고, 사야야가 읽은 패턴대로면 약 6분 후 교대 인원이 앞길을 지나간다. 곧 잠입 타이밍이었다.
두어 개의 큼직한 건물에 무전으로 소통하는 30인 이상의 반군, 그리고 피랍된 인원은 열 명 내외. 포박, 감금, 분리 여부 알 수 없음. 반군이 유사 가이드를 데리고 있다면 구해야 할 수는 더 늘어나고…….
적절한 대응은 뭘까. 데이를 쳐다봤지만 시큰둥한 낯이 되돌아왔다. 내게 작전권을 준다고 해서 저렇게까지 뒷전을 자처할 필요는 없는데.
못마땅하게 이마를 긁적이는 동안 라이얀이 내 리볼버를 가져가 빠른 손놀림으로 약실을 분리했다. 탄환을 하나하나 살피고 다시 넣어 건넸다.
“저번에~ 탈영한 소위 하나가 탄을 그래 가지구~. 다른 중위 총이 터져서 손이 막~ 어휴~ 그랬지~. 우리 우리 중령님 총은 괜찮다~!”
“……고마워.”
“고마우면 안아 줘요?”
“라이얀.”
“웅. 데이야.”
데이의 손바닥이 라이얀의 등판에 내리꽂히는 걸 보고 고개를 저었다. 때마침 이어폰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 바차스였다.
- Sun. 고백할 게 있어.
마이크를 상시 켜짐으로 두고 리볼버를 고쳐 들었다. 라이얀이 보초를 확인한 후 뒤로 물러나자 데이가 공중에서 주먹을 쥐고 빙글 돌렸다. 그에 맞춰 몸을 숨기며 작게 말했다.
“뭔데.”
- 사랑 고백이면 좋겠지만. 그건 늦었고.
“…….”
- 세계가 이렇게 좆같아진 거 말이야.
“응.”
- 그거 내가 그랬어.
“뭐?”
인상을 확 찌푸린 데이가 뒤를 돌아봤다. 나는 수신호를 넘기고 자세를 낮춘 다음 데이의 파동을 조금씩 키웠다.
- 알고 한 건 아니니까 봐줬으면 좋겠어. 뭐, 그런다고 봐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혼내도 괜찮아. Sun이라면 혼나 줄게.
데이의 검지가 정면으로 향하고 퉁-, 둔중한 소리와 함께 라이플이 격발되었다. 머리에서 피를 뿜으며 하나가 쓰러지고 다른 하나는 그대로 자리에 얼어붙었다. 사방이 어느새 겨울처럼 차가웠다.
- 그때 말이야. 엘로란타 새끼가 중앙에 왔을 때. 나 뒤지기 전이라 존나 아팠거든. 그러니까 이 빌어먹을 이능은 얼마나 더 대단했겠어?
놈은 당시 의무대 격리 병실에서 가이드 센터까지 영향력을 뻗쳤다. 어림잡아도 4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다. 대체 말하려는 고백이 뭐길래?
기묘한 기분이 들어 잠시 걸음이 늦어졌다가 반군의 시체를 끌어 풀숲에 가려 놓는 걸 보고 서둘러 따라붙었다.
- 해 보니까 되더라. 그래서 몇 번 했지.
“……뭘 했는데?”
- 시간을 되감는 짓?
“무슨 소리야, 그게.”
제대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이 다시 반군 보초가 둘, 소리 없이 쓰러지고, 데이가 가볍게 신경질을 냈다. 내가 무전 통신 때문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 언짢은 모양이다. 쯧, 혀를 차는 소리가 차갑게 식은 공기 중에 울렸다.
- 세계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하긴. 생각해 보면 테이프도 여러 번 돌려 보면 늘어지고 LP판도 닳잖아? 시간이 닳을 줄은 몰랐지만.
철문 뒤에서 방심한 반군이 그대로 쓰러졌다. 영역으로 만든 내 파동은 데이의 것을 증폭시키고 다른 이능이 감지되면 그 파동을 꺾어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무력해진 적들은 막강한 데이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강력하고 정교한 이능이 비명 한 번 나지 않게 신속히 적을 처리했다.
- 후회하지는 않아. 나 불쌍하잖아. 가진 거 없는 새끼들은 좀 욕심내고 기어올라도 봐줘야 되거든. 그래야 덜 서럽지. 그거 아니라도 세상이 얼마나 좆같은데.
실내에서 근접전을 대비하며 중검을 역수로 쥐었으나 내 정신은 온통 이어폰으로 쏠렸다.
- 그냥 좀 더 보고 싶었던 건 죄가 아니지? 나 오래 기다렸으니까.
“바차스. 시간…… 얼마나 되돌린 거야?”
- 죽고 나서? 아니면 여기로 오고 나서?
“…….”
- 수백 번.
검 끝이 떨어져 바닥에 틱, 부딪혔다. 무더기로 쌓인 엄폐물 뒤로 내 팔을 이끈 라이얀이 ‘왜 그래요~.’ 하는 입 모양을 해 보였다. 귓가를 톡톡 건드리며 밧챠? 하고 묻기도 했다.
- 욕을 해야지. 다 나 때문이라고 화를 내야지. 네 죽음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데.
“…….”
- 무른 새끼야.
여기 가만히 있어요. 아이를 상대하듯 벙긋벙긋 느린 입 모양으로 말을 건 라이얀이 엄폐물을 빠져나갔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범위 내의 파동을 붙잡았다.
그러나 전장이 익숙한 두 사람의 빠른 판단은 그새 나를 전력에서 제외한 모양이었다. 나를 두고 데이와 라이얀의 기척이 점점 멀어졌다.
따라가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굳은 몸은 어느새 추위를 느꼈다. 중검을 쥔 왼손으로 팔뚝을 감싸는 동안에도 이어폰에서 바차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 그래서 나는 네가 욕심을 냈으면 좋겠어.
“……바차스. 왜.”
- 뒤지라는 소리는 익숙해도, 살라는 소리는 너밖에 안 했거든. 네 말대로 기다리니까 정말 나타나더라.
“…….”
- 나는 네가.
문득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켜켜이 쌓인 공사 자재 안쪽이었다.
서늘한 관절을 휘저어 노끈을 끊어 내고 먼지투성이 두꺼운 막을 걷어 냈다. 허술한 가림막 아래에 입구가 있었다.
레버를 수동으로 바꾸고 무거운 쇠문을 밀었다. 열자마자 두려움에 가득 찬 시선이 쏟아졌다. 높이가 낮아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작은 바닥 창고에 갇힌 것은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었다.
인질이 보고된 곳은 여기가 아닌데?
“살, 살려 주세요…….”
하나가 가느다랗게 목숨을 구걸하자 나머지도 따라 훌쩍이며 살려 달라고 빌기 시작했다. 몇 초간 상황을 파악하다 우선 중검을 보이지 않게 바닥에 내려놓고 입술 앞에 손가락을 올렸다. 작은 손들이 각자의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 창고로 내려가 허리를 숙여 어둑한 안쪽을 살폈다. 여섯 명이 전부. 전원이 어린이.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었다.
“다친 데는 없니?”
하나하나 살폈으나 혹시 몰라 물어본 말에 아이 하나가 훌쩍이며 고개를 모로 저었다.
“여기는 어떻게 갇힌 거야?”
“갇힌 거, 아니구……. 숨었어요…….”
대범해 보이는 여자애 하나가 더듬더듬 떨리는 목소리로 그들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 폐공장은 재난 복구 현장에 일손을 보태러 온 자원봉사자들이 거점 삼아 숙식을 해결하던 곳인데, 이 아이들 역시 봉사팀 중 하나라고 했다. 그러다 반군이 습격하며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선생님 모바일이, 알려 줬어요. 여기에 방이 있다구…….”
덜 자란 손은 일반형 모바일 하나를 쥐고 있었다. 아직 나를 믿지 못해서 줘도 될까 말까 고민하는 듯했다.
“가지고 있어. 여기서 나가게 해 줄게. 선생님 이름이 어떻게 되니?”
“에덴 선생님이요!”
에덴.
좁혀 놓은 영역에 갑작스레 위압적인 파동이 나타났다. 온통 뒤덮는 것 같은 그 거대한 파동을 서둘러 휘저어 보았지만 떨쳐 낼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 조용히 할 것을 당부하고 얼른 바닥 창고에서 뛰어 올라와 입구를 가렸다. 검을 집어 부러 엄폐물에서 멀리 떨어진 벽을 등졌다. 빛이 드는 쪽, 그 파동이 다가오는 방향으로 검끝을 들어 올렸다. 온다. 복잡한 심경이 날 위에서 예리하게 떨었다.
- 불쌍한 새끼야.
어두운 창고를 비집고 들어온 여름의 태양 조각이, 반짝, 바스러져 빛났다. 바차스.
“무른 새끼야.”
탈영 장교 주제에 놈의 복장은 군의 보급품 그대로였다. 활동용 검은 반팔 상의에 군화와 반 장갑이 눈에 익었다. 누가 보면 탈영이 아니라 잠깐 산책을 했다고 말할 법한 차림. 기껏 나가서 여태 뭘 하고 다녔기에.
“바차스!”
“응. Sun.”
머리 모양 정도는 달랐다. 하나로 묶인 금발이 빛을 받아 찰랑거렸다. 당겨진 입가에 뾰족한 흰 송곳니를 드러낸 바차스는 기억하는 어느 때보다도 건강해 보였다. 신나 보이는 표정 때문일까.
긴장이 빠져 검을 늘어뜨리고 이마를 짚었다. 놈에게 들어야 할 말이 하도 많아서 머리가 번잡했다.
“너, 그 말, 아니. 여기는 에덴을 찾아온 거야?”
“아니. 엘로란타를 쫓아서.”
“키비슈스를 왜? ……하나를 고르는 것 때문에?”
한가롭게 머리칼 끝을 매만지던 바차스가 다시 씨익 웃었다. 그렇지만 조금 전처럼 즐거운 웃음은 아니었다. 조용한 분노를 감지하자 등줄기에서 오싹 한기를 느꼈다.
“펠리우의 연구소에도 있었던 모양이더라고. 내 매칭 데이터.”
펠리우의 연구소라면, 얼마 전 반군이 습격한 곳을 말하는 건가? 거기서 반군이 탈취한 정보에 놈이 있었다고?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짜증이 서리고 답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에스퍼 매칭 연구소에 놈의 데이터가 있었다는 말은 바차스를 버리기로 작정한 것이 중앙군이 아니라 연합군 전체라는 뜻이라.
“……그래서 탈영한 거야?”
“겸사겸사. 어떻게 엿을 먹이면 좋을까 하다가.”
“…….”
“어떻게 하든 Sun, 네가 고생할 것 같아서. 같이 나가 주진 않을 거잖아?”
“그걸 말이라고 해? 어째서 말을 안 하고, 아니, 무슨 수로 관리동을 벗어난 거야?”
검은 반 장갑을 낀 놈의 손가락이 마치 걷고 있는 사람의 두 다리처럼 허공에서 번갈아 까닥거렸다.
“걸어 나왔지. 말했잖아. 난 갇히지 않았어. 한 번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고 보면 바차스는 관리동 가장 깊은 곳에 갇혀서도 테스트하는 중이라 했었다. 여유가 넘쳐흘렀지. 제 한 몸의 안위도, 이 엉망으로 엉킨 세계도 개의치 않으며 운명을 운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번뜩 스친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네가 여기 있다는 건. 키비슈스도 여기?”
“정답.”
“……설마 에덴이, 인질로 잡힌 거야?”
“에덴은 괜찮아. 그런데.”
“빨리 말해. 그런데, 뭐?”
“에덴이 아끼는 꼬마들이 꽤 잡혔어. 울더라. 몇 개는 저기 빼돌렸고.”
검은 장갑 끝이 눈가를 닦는 익살을 부리다 내 뒤를 슬쩍 가리켰다. 역시 모바일을 들고 있던 아이들에게 바닥 창고를 가르쳐 준 것은 저놈인 모양이다.
“왜 에덴이 울면 여기가 아플까. 네가 울 때는 기분이 좋았는데.”
“헛소리. 내가 에덴이랑 같을 리가 없잖아. 이제 만난 거야? 키비슈스는 어디야.”
“Sun.”
비스듬히 한쪽 다리로 서 있던 바차스가 벽에 기댄 어깨를 일으키며 낯설게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너를 좋아하지 않았으면 조금 미웠을 거야. 이 미련한 새끼야.”
“이상한 말하지 마. ……몇 년 전 얘기라면, 그건 네가 제어가 처음이었기 때문이야.”
“착각이다? 에스퍼는 사랑을 모르니까?”
“…….”
“멍청아. 네가 그러니까 땅이나 파는 거야.”
“이런 쓸데없는 얘기할 시간 없어.”
“그래서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놈을 흘기고 엄폐물 밖으로 나가 동태를 살폈다. 데이가 향했을 방향과 인질이 있을 법한 장소를 가늠하는데 뒤에서 저벅저벅 걸음 소리가 들리고 문득 한쪽 어깨가 무거워졌다. 하나로 묶인 금빛 머리칼이 내 가슴팍으로 흘러내렸다.
팔을 뻗어 어깨에 얹힌 머리를 밀어 냈지만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외려 긴 팔이 허리를 감아 왔다.
“여기라면 네 그 가이드 새끼가 너를 받아 주겠지. 여기서 살아.”
“이거 놓고. 중요한 일 아니면 나중에 얘기해.”
“중요한 일이야. 내가 너랑 같이 갈 수 없다는 말이니까.”
허리에 둘린 팔을 억지로 풀어내고 바차스를 당겨 옆에 세웠다. 내가 뜯어낸 팔을 부여잡고 엄살을 부리는 놈을 노려보았다. 놈은 내 손가락을 잡아 장난스럽게 허공에 흔들다가 조금 쓸쓸하게 웃었다.
“예전에 말이지. 본부에 전산 시스템이 다운된 날 기억나?”
“같이 갈 수 없다는 게 무슨 뜻이야.”
“어떤 머저리가 좋다는 백신을 다 가져와서 쓴 모양이더라고. 백신끼리 충돌해서 시스템 과부하가 일어난 거지.”
“바차스.”
“내가 보기엔 그때 일어난 것도, 지금도 비슷해.”
나, 너, 엘로란타. 강력한 백신. 커다란 모순들.
바차스의 손이 반 장갑 위로 드러난 오래된 주황색 흉터를 쓰다듬었다.
“그때는 어떻게 했냐면.”
하나, 둘, 셋. 놈은 장난스레 마른 내 손가락을 셋, 놈의 손바닥에 올린 다음 낄낄대며 중지를 남긴 나머지 둘을 접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허리를 숙여 도드라진 손등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댔다. 뭘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보려 했지만 그런 괴상한 짓까지 용납할 생각은 없어 거칠게 손을 빼냈다. 와락 인상을 쓴 내게 바차스는 키득키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나만 남겼어.”
“하나만 남겼다니, 그게 지금 상황이랑 어떻게 같…….”
“같아. ‘단 하나의 현실’에는 너만 남길 거야.”
들은 이야기를 정리하느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데 바차스가 내 뺨을 톡톡 건드리며 또다시 멍청하다는 둥 미련하다는 둥 가볍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놀렸다.
웃음 짓는 금색 눈동자를 말가니 올려다보아도 놈이 농담을 하는지 진담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분간할 수 있었던 적이 있긴 했나.
너르게 펼쳐 놓은 파동 감지의 외곽에서 예상치 못한 기척이 감지되었다. 즉시 고개를 돌린 방향에서 얼굴을 아는 반군의 간부 하나가 달려오고 있었다. 리볼버를 겨누고 중검을 쥔 손으로 손날을 받쳤다. 빤히 보이는 경계에도 반군은 멈추지 않았다.
쏠까. 일단 더 접근하기 전에 허벅지라도 쏴서 멈추는 게 낫겠다, 그렇게 판단할 때 길쭉한 손이 리볼버 위를 덮어 눌렀다. 미미하게 웃는 눈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My Sun. 세계가 연약한 바람에 우리가 함께할 수 없네.”
“밧챠! 서둘러야 합니다!”
“……뭐?”
반군의 간부가 접근하며 외친 호칭에 놀란 데 이어 머리 위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급히 몸을 낮추고 올려다보니 낡은 등이 터져 스파크가 일었다. 덩달아 내 파동이 움츠러든 사이 반군의 간부가 이동계 이능을 사용해 바차스의 옆에 나타났다.
“세상의 끝에, 데리러 갈게.”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두 사람이 사라졌다.
시스템 과부하 오류.
단 하나의 세계.
모순과 백신.
작전을 시작하기 전만 해도 모처럼 가뿐했던 몸과 머리가, 이제는 각종 의문과 긴장으로 저려 왔다. 관자놀이를 눌러 지끈거리는 두통을 달랬다.
바차스와 함께 사라진 반군 간부. 여기에 있다는 키비슈스. 그리고 놈이 남기고 떠난 말들. 순서대로 떠올려 보았으나 두통은 심해지기만 했다.
커다란 모순과 백신.
놈은 모순을 백신이라고 표현했다. 백신이라면 좋은 것 아닌가? 왜 굳이 하나만 남겨야 하지? 하나만 써야 하는 이유가 있나? 충돌? 백신끼리 충돌하는 건가? 그때 전산이 모조리 멈춘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전산, 컴퓨터, 시스템 등을 잘 아는 건 바차스지 내가 아니다. 그따위 비유를 남겨 봤자 나는 함의를 알아채기는커녕 놈을 찾아내서 설명하라고 윽박지르는 수밖에 떠올리지 못한다.
설명을 요구해야 할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대체 사라진 동안 뭘 하고 다녔기에 키비슈스를 따라다니던 반군의 간부가 바차스를 데려간 건지, 어떻게 나만을 남기겠다는 건지.
내게 이 세계를 주려고 너는 에덴을 만나지 않은 건지, 이곳이든 저곳이든 내가 고른 곳이 단 하나가 되면, 나와 가지 않으면 너와 남은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건지.
그 모든 걸 너는 어떻게 아는지.
데리러 온다고? 세상이 끝날 때?
그 전에 찾아내서 정강이를 차고 멱살을 끌어 내려 혼자 다 아는 체하는 그 머리통을 때려 주고 싶었다. 불행을 떠안고 가라앉으려는 수작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고 새로운 목표를 구상했다. 인질을 구해 내고 데이와 합류한다. 키비슈스가 없으면 토벌로 작전을 마무리하고 진지에서 에덴을 만난다.
여태 내가 에덴을 만나지 못하게 했던 놈이니 에덴을 탈취하면 나타날지도 모른다. 이번에 잡으면 전부, 똑바로 설명하게 해야지.
그런 납치범 같은 생각을 하며 몸을 움직였다.
우선 바닥 창고로 다시 내려갔다. 무전으로 아이들이 있는 위치를 알리고 구출 요청을 한 다음 아이들에게 잠시만 기다리면 나와 같은 군복을 입은 어른들이 도와주러 올 것이라고 알렸다.
데리다의 번호를 불러 주고 그때까지 통화를 연결해 두라고 하니 겁 많은 눈동자들이 조금은 안심했다.
기다리라 당부하고 낮고 어두운 창고를 나서려는 때에, 무릎걸음으로 다가온 어린애 하나가 조심스러운 손으로 내 소매를 붙잡았다.
무서운 건가. 안심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가볍게 품고 등을 두들겼다. 그러자 나머지가 우르르 다가와 달라붙었다. 엉덩방아를 찧은 것보다 내 품이 좁아 전부 안고 달래 줄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금방 나갈 수 있어. 다 좋아질 거야. 선생님을 만날 수 있게 해줄게.”
위로는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진정시키려던 내 어설픈 말이 오히려 울음을 부추겼다. 머리는 급하다고 생각했지만 몸은 꼼짝없이 묶인 채로 작은 등들을 번갈아 두들겼다.
조그만 온기 덩어리들을 가만 지켜보다 한 가지 알아채기도 했다.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우는 아이 중에 부모를 찾는 아이는 없다는 걸.
이 아이들은 그 고아원 출신일까. 창고의 먼지로 군데군데 검정이 묻었지만 모두 머리 모양이며 옷이 정갈하고 손톱까지 깔끔했다.
언젠가 내게 재단 후원을 부탁하며 머리를 숙이던 그 강단 있는 눈빛이 떠올랐다. 말뿐인 책임감이 아니라 잘 가꿔진 아이들의 외양과 순한 태도에서 그녀의 의지가 보였다.
정말이지, 좋은 사람.
누가 보아도, 누구에게도 좋은 사람이니 바차스가 다가가지 못하는 심정도 이해는 되었다. 그놈은 제가 무척 못돼 먹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나 본인도 그렇게 생각한다 해서 모두 진실인 것은 아니다. 그런 소리를 듣고 자란 것이 전부 놈의 잘못도 아니고.
알면 알수록 꽤 괜찮은 놈이라는 것을 조금 더 알려도, 조금 더 자신을 허락해도 괜찮을 텐데 놈은 고립을 자처했다. 언제고 그렇게 사라질 것처럼.
“조금만 힘내. 밖에서 만나자.”
“네…….”
운명이 어쩌고저쩌고 그런 인생 다 산 소리를 못 하게 해 줘야겠다. 그렇게 뒷전을 자처하고 내 행복에 참견하게 두어서는 안 됐다. 분명히 나은 길이 있을 거야. 놈도 행복이 뭔지 알아야 한다.
언젠가 놈의 목숨 줄을 붙여 놓은 기계들로 노래하던 바차스가 떠올랐다. 지금이라면, 이 세계라면, 에덴이라면.
너도 불쌍하잖아.
불쌍한 것도, 멍청한 것도, 여기서 행복해질 수 있는 것도.
다 마찬가지잖아.
사태를 정리하고 방법을 찾자. 더 이야기하면 방법이 나올지도 몰라. 너도 모르잖아. 에스퍼에게 가이드가 어떻게 의미가 되는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지.
저 혼자 다 아는 척하는 그놈을, 내게만 친근하게 구는 그 멍청한 놈을 붙잡아 에덴 앞에 던져 놓아야겠다. 윤오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을 놈에게 알려 줘야겠다.
그 바보 같은 놈이 미련 떠는 꼴을 봐야겠다. 필요하면 같이 빌어 줄 수도 있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다시 그때처럼 노래하는 걸 봐야겠다.
숨을 고르며 달렸다. 해야 할 일을 순서 매겨 떠올렸다. 동시에 알게 된 것들을 복기했다.
수백 번.
내가 죽기 전이라면 고작해야 CCTV 같은 것으로 그녀를 봤을 그날을 말하는 건가? 그까짓 걸로 ‘만났다’고?
이 세계에 혼자 먼저 떨어져서 한 일이 고작 꽃다발을 나른 일인 것도 한심하다. 그렇게 맴돌고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쓴 그 노력이 가상하고 웃겼다.
놈은 가까이하면 옮겨 묻는 먹이 아니다. 이렇게 조심스럽고 다정한 에스퍼가 에덴을 망칠 리 없다. 다 아는 척하면서 정작 그걸 모르는, 서툴기 짝이 없는 놈을 혼내 주고 싶었다.
“애새끼는 가이드만 챙겨! 서둘러! 엘로란타가 오실 때까지 버텨라! 헉, 뭐야, 젠장!”
“인질을 보내.”
“이선!”
반군들은 하나 같이 내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
“이선은 물리력에 약하다! 여럿이서 가!”
그리고 착각했다.
이능력자라면 내 이능은 그들에게 카운터가 된다. 수적 열세에 당한 일이 꽤 있지만, 그건 키비슈스처럼 별도로 경계해야 할 만큼 강력한 적이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반군이 여덟, 인질이 다섯. 빠르게 수를 헤아린 나는 리볼버를 가슴팍에 챙겨 넣고 중검을 바닥으로 내렸다. 공격할 의사가 없어 보이는 그 태도에 빠르게 짓쳐 들던 에스퍼 하나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인질을 내려놓고 투항해.”
“적은 이선 하나다! 제압해! 잡아서 데려간다!”
감정이 들끓고 그에 따라 내 파동도 드물게 화가 나 있었다. 멋대로 나를 판단하고 짐작해서 저 자신을 희생하려는 바차스를 당장 잡아 패 버릴 수 있을 만큼 화가 났다.
그리고 초조했다. 이미 포기한 것 같아서. 이대로 때를 놓치면 놈의 뜻대로 다 되어 버릴 것만 같아서. 내가 언제 그걸 바랐다고.
‘사랑은 대단한 게 아니야. 그냥 그렇게 되는 거야.’
에스퍼는 사랑을 할 수 없다. 내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내가 수없이 되뇌었던 세뇌가 무너졌다. 바차스의 말과 태도에 나를 투영할수록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짜증이 날 정도였다.
멍청한 바차스는 세계를 내게 골라 줄 필요가 없다. 행복하라고 그렇게 주문처럼 빌어 줄 필요도 없었다. 나는 어디서나 행복했다. 윤오의 곁에 있어서 좋았고, 그를 만나 그 품에 안길 수 있어서 기뻤다.
놈이 내게 윤오를 주어 행복하게 하고 싶다면, 나 역시 마찬가지로 그에게 에덴을 알게 해 주고 싶었다.
네가 내게 느낀 그 감정이 보잘것없을 만큼, 이 사랑은 거부할 수가 없다고.
너도 알지 않느냐고. 이미 사랑하지 않냐고.
적어도 붙잡아서 사실을 직시하게 한 다음, 그다음에 정해야 했다. 이 위태롭고 유약해서 바차스 따위에게도 흔들리는 세계를 어떡하면 좋을지.
감정의 동요는 파동의 진폭을 거세게 한다. 통제할 수 없는 파동은 곧 위험이지만 통제와 제어가 이능 그 자체인 내게는 다르다. 내 속의 혼란만큼 커다란 파동이 예리하게 솟아 접근하는 파동들을 순서대로 무릎 꿇렸다.
한 차례 파도처럼 공간을 장악한 후에는 에스퍼들이 모조리 엎어진 채였다.
당황으로 일그러진 낯들이 바닥에 처박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낯설어했다. 오래가지는 못하겠지만 파동에 의존적인 에스퍼일수록 유효한 공격이었다. 내 약점을 반만 알고서 섣불리 덤빈 자들이 한심하게 바닥을 뒹굴었다.
나를 잡으려면 적어도 이능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물리력을 가지고 왔어야지.
군인치고 체구도 작고 이능도 지원계인 탓에 셀 수도 없이 얕잡혔다. 파동을 흩트리는 이런 요량도 잠시일 뿐인데 대체 그 후의 전투를 어떻게 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다른 에스퍼의 힘을 빌려서? 모든 상황을 그렇게 헤쳐 나가기에 전장의 6년은 결코 짧지 않다.
“너 이 새끼야! 적당히 해! 여기서 죽을 셈이야?”
치고 들어온 냉기가 갈등하는 내 검 끝을 내렸다. 같이 내던진 걱정은 검에 허벅지가 뚫릴 위기였던 반군이 아니라 내게로 떨어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라이얀이 잰걸음으로 다가와 내 어깨를 짚고 토닥거렸다. 내가 무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표정이다.
“괜찮아.”
“염병할래? 너 씨발, 인질 데리고 당장 빠져.”
“키비슈스는?”
“없던데요~?”
인질들이 거친 욕설을 뱉는 데이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슬금슬금 풀린 다리를 움직여 내 쪽으로 왔다. 손이나 팔이 묶인 사람을 풀어 주고 라이얀에게 간략한 상황을 들었다. 내 쪽에서도 전할 말이 있었다.
“바차스를 만났어. 키비슈스도 여기 있다고 하고.”
“뒤질라고.”
“바차스가 반군 간부랑 같이 이동하는 것 같은데 정황을 몰라. 유인을 해 볼 생각인데, 발견하면 자원봉사자들 있는 막사에 내가 있다고 해 줘.”
“그게 통하겠어?”
“그래도.”
라이얀이 허리를 굽혀 나를 들여다보았고 뭘 어쩔 생각이냐고 따로 묻지 않아도 데이의 인상 쓴 얼굴에 의문이 선했다.
“넘기려고?”
“아니. 살리려고.”
단호한 대답이 의아함을 키웠다. 눈빛이 따가웠지만 더 설명하지 않고 지원을 건물 안쪽으로 들였다. 다른 방향으로 도망친 적에게는 추격이 붙었고 반수는 이미 데이의 손에 쓰러졌다.
“통솔이고, 개념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 간부가 있긴 한 건가? 이능들도 다 형편없고.”
“규모는 보고보다 큰 것 같은데. 적어도 40 이상.”
“그러게 말이야. 인질이 무슨 미끼도 아니고.”
다음 순간 데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차, 하는 기색이 서로의 눈에 어렸다. 인질을 미끼로, 아군을 밑밥으로 던지고도 남을 게 반군인데 그 사실을 간과했다. 간부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도, 키비슈스가 나타나지 않는 것도. 그 목적이 처음부터 인질을 이용한 협상이 아니라면.
즉시 무전을 넣었다. 따로 연락이 오지 않은 것은 진지가 급습을 당했기 때문인 듯했다. 전투가 이어지는 요란한 소음 가운데 무전을 받은 소령이 소리를 질렀다.
- 엘로란타가 죽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야, 저게?”
횡설수설 이어지는 보고가 외마디 비명으로 끊어지고 상냥하지만 어딘가 스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 선아.
“키비슈스.”
가벼운 웃음소리 뒤에 뚝, 무전이 끊어졌다.
키비슈스가 진지에 있다.
당장 두고 온 면면들이 떠오르고 아직 대피하지 않은 민간인들이 가득할 자원봉사자 캠프도 스쳤다.
그가 노리는 게 뭐지? 에덴인가? 왜? 바차스의 가이드라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지? 바차스는 지금 어디에 있지?
키비슈스. 바차스.
이 상황에서 나를 빼놓고 싶은 모양인데, 나 역시 당사자인 이상 호락호락 빠져 줄 생각은 없었다.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더더욱.
어금니를 사리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이얀의 품에서 가이딩을 받던 데이가 고개를 들었고 인질을 수습하던 군인들도 내 쪽을 돌아보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다들 느낀 기색이다.
“송환은 미루고 민간인들과 여기서 대기해. 아터와 나는 바로 기지로 돌아간다. 데이와 라이얀은 도보로 이동해서 퇴로를 차단하고 인원 구성은 전원 이능 장교로 한다.”
“씨발, 뭐야. 너 혼자 알면 다야? 똑바로 말 안 해?”
“키비슈스가 진지를 습격했고, 그와 바차스 사이에 접점이 있어. 우호인지 충돌인지는 가 봐야 알아.”
“우호? 그 씹새끼가?”
“아직 몰라.”
데이가 짧은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짜증을 부렸다. 나름대로 전우로 오랜 시간 보냈으니 놈이 키비슈스와 우호를 나눈다는 가정이 퍽 믿기지 않는 듯했다.
정확히는 대상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최악의 협조성으로 중앙군에서도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킨 놈이 반란군이라. 웃기지도 않는다.
“라이얀. 바차스를 ‘밧챠’라고 부르는 사람이 더 있어?”
“밧챠~? 아~ 그거. 바차스는 이름이 아니잖아요~? 나도 바차인걸? 밧챠는 이름을 따로 안 지으니까~ 우리가 그냥 밧챠라고 불렀죠~. 바차들은 다 그렇게 부르지~ 아마~?”
“그럼 바차 출신들은 다 바차스에게 호의적이야?”
“네에~! 밧챠, 멋지잖아요~? 우리한테는 완전 영웅~!”
바차스에 관해 종알거리기를 즐기는 라이얀답게 몇 가지 에피소드가 줄줄 이어졌다. 그 역시 전후 대기근에 굶어 죽어 가던 고아 중 하나로, 바차스가 데라주바 곳곳에 버리고 간 식품 꾸러미가 아니었으면 저 포함 백여 명은 더 죽었을 거라 너스레를 떨었다.
이어지는 나머지 무용담을 흘리고, ‘바차들은 다 그렇게 부른다’라는 부분에 집중했다. 반군에도 바차 출신이 있다면. 그게 그 이동계 간부라면.
반란군이 키비슈스를 위시한 종교나 다름없다는 건 위명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굳건한 유대도 소속감도 다 옛말이다. 길고 긴 전쟁이 갉아먹은 게 어디 중앙군의 명성뿐일까.
십 년에 가까운 시간은 반군이 내세운 정의와 혐오 역시 닳게 했다. 십 년은 아무리 대단한 혁명도 피와 죽음에 닳아 그저 그런 아집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공포로 세운 충성에도 틈이 생길 만큼.
키비슈스의 최근 행보가 불만인 듯 보였지. 엿들은 무전을 상기하며 아터를 불렀다. 오늘만 벌써 여러 번의 이동으로 지쳤겠지만 지금은 이동계 재원이 녀석밖에 없었다.
불안정한 파동을 매만져 주고 바로 이동 지점을 지시했다. 부작용이 도져 구토라도 했는지 젖은 입가를 닦은 아터가 감사 인사 후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짧은 이동, 임시 작전 막사를 구축해 놓은 진지로부터 약 300미터 인근의 숲에 떨어진 후에는 구역질을 하는 게 내가 되었다. 혈압이 떨어져 원래 시원찮은 혈액 순환이 더 문제가 됐다. 차게 식은 손발이 저리고 기절할 것처럼 눈앞이 핑 돌았다.
머리 위치를 낮춰 잠깐 대기한 다음 식은땀을 닦아 내고 진지로 출발했다. 멀미가 가시지 않아 몇 번인가 바닥을 헛디뎠고, 비틀거리다 아터의 부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몸이 괜찮아질 때까지 쉬어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상황을 파악하는 건 서두를수록 좋다. 그 상황이 좋지 못한 걸 알면 더더욱.
아니나 다를까 숲을 거슬러 아군의 베이스캠프에 가까워질수록 지대 전체를 뒤덮은 기이하고 강력한 파동에 피모가 바짝 일어섰다. 체표면을 간질이다 못해 따끔거리게 하는 파동.
본진에 가까워지는 만큼 그 사나운 파동은 더 강해졌다. 원국 북부의 사막, 또는 수수데의 에이첸라호 호수, 그곳의 통제구역처럼.
무전으로 일반인 전원의 퇴각을 명령하려다 전체 통신이 불통된 것만 재차 확인하고 짤막하게 욕설을 뱉었다. 버튼을 눌러 바차스를 몇 번 불러 보았지만 무의미한 잡음만 돌아왔다. 연결된 이어폰을 빼서 허공에 집어 던졌다. 소소한 화풀이로도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분명 저기 어딘가 있을 것 같은데. 도울 생각이 없든지. ……도울 수가 없든지.
뛰는 속도를 더 빠르게 했다. 불길한 예감에 내내 뒷머리가 저렸다.
작은 파동 생성지는 이유와 지역을 불문하고 이따금 생겨난다. 드물지도 않고 그렇게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주변의 미성숙한 파동을 끌어당겨 변이체를 만드는 그 파동 생성지는 에스퍼 한둘이면 충분히 갈아엎어 소강시킬 수 있다. 변이체를 처리하고 파동 생성지를 없애는 것이 이능 장교의 주요 업무기도 하니까.
그러나 이렇게 큰 것은 누구도 손댈 수 없다. 결코 우연히 생겨나지도 않는다.
키비슈스 엘로란타.
전쟁이 시작된 그해, 내가 5년 넘게 살았던 연구동이 통째로 사라진 날에도 이랬다. 공기가 온통 검게 느껴질 만큼 빼곡히 채워진 수 갈래의 파동. 모순을 자극하는 모순. 모순을 일깨우는 모순. 오롯이 한 사람으로부터 비롯한 재앙.
일반인들이 위험하다.
식은땀과 새로 흐른 땀에 머리칼이 엉겨 붙을 때쯤 진지에 도착했다. 간이 막사의 반절이 무너져 잔해 너머 대치 중인 에스퍼들과 쓰러진 일반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망한 지 오래된 시체들은 진작 변이의 기미가 보였고, 군데군데 폭사의 흔적도 있었다. 그리고,
“사야야!”
헐렁한 군복으로 감싸인 그녀의 마른 복부에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박혀 있었다.
피도 흐르지 않는 그 부상에 간담이 서늘했다. 막연히 에덴이 목적일 것이라 짐작하는 동안 사야야는 전혀 고려하지 못해서. 설마.
“중령님.”
“고칠 수 있어. 조금만 버텨. 상황 종료 후에 치환할 테니까.”
“루돌프를, 지켜 주십시오. 그가, 알고, 있습니다. 루돌프가…….”
“네가 지켜, 사야야. 정신 차려!”
뒤따르던 아터를 불렀다. 후에 겪게 될 부작용을 배려해서라도 또 한 번의 이능 증폭은 무리였지만 당장 사야야를 죽게 둘 수는 없다. 그녀를 전장에서 옮기는 게 급선무다. 그러나 파랗게 질린 손이 아터에게 올린 내 소매를 당겼다.
“엘로란타는 제게서…… 2시 방향으로 약 200미터 전방입니다. 그가 일으킨 강제 개화가…… 인근을 모두 잠식했습니다. 서둘러 막으셔야 합니다. 미리 읽지 못해 죄송합니다.”
“사야야. 너를 지금 안전지대로 이동시킨다. 즉시 군부로 이동해서 치료와 가이딩을 받도록 해. 아터, 동행해. 사야야 대위를 살려라.”
“예, 알겠습니다! 다음 이동까지 10분, 아니, 3분 정도 필요합니다.”
“미안하지만 1분 내로 이동. 넉넉히 증폭할 테니 가서 가이딩 보급을 받고 대기해. 사야야, 네 배우자는 네가 지켜. 살아. 루돌프보다 오래. 명령이다.”
이능으로 만든 얼음은 쉽게 녹지 않았다. 체온 조절에 문제가 있는 사야야에게는 관통상보다도 그 점이 나빴다. 당장 뽑을 수도 없는 얼음덩이를 두고 고심하다 사야야의 이능을 없애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자기 회복을 늘리고 체온을 유지하면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버틸 수 있다.
“……중령님, 이미…… 지치셨습니다.”
“그래.”
“……감사합니다.”
짧게 한숨이 났다. 여전히 감사가 헤픈 사야야 때문에.
루돌프와 사야야. 사야야와 루돌프. 언제고, 어느 곳에서고 부부의 연을 맺었을 두 사람. 서로가 있어 온전한 인연.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살아내지 못할 만큼.
한쪽으로는 이능을 지우고 다른 한쪽은 파동을 키우는 나를 창백한 얼굴이 지켜보았다. 그녀도 파동에 민감한 만큼 내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더 걱정하라고 부러 힘든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뭐든 마음에 걸려서 정신을 붙들고 있을 수 있다면 환영이다.
이번에는 내가 발견했으니까. 전처럼 모르는 사이에 손 놓고 보내지는 않는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너무 일렀다. 머릿속에서 시작한 처절한 울음이 메아리처럼 귓바퀴를 돌았다. 이명에 섞인 환청이 언젠가의 장의 예식을 되풀이했다.
이것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고, 바꿀 수 없는 운명이라면.
아니야. 그렇지 않아. 설령 그렇다 해도 뭐든 해야지. 안 그러면 너무 불쌍하니까. 그래. 불쌍한 것들은 뭐든 해야지. 그래야 덜 서럽지.
마지막까지 이능을 쏟아 처치하고 둘을 전송했다. 바로 걸으려 했지만 그대로 무너져 주저앉았다. 흙바닥에 엎드려 숨을 고르고, 날뛰는 파동을 진정시켰다. 풀뿌리를 움켜쥔 손부터 등, 무릎, 전신에 잔떨림이 왔다. 얼음장 같은 사야야를 쥐었던 손가락의 감각이 무뎠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 이미 죽어 폭사한 시체들 틈에도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있으니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어금니를 다물고 반동을 이용해 몸을 일으켰다.
“이쯤이었는데.”
오싹.
휘청이는 몸을 뒤집어 세웠다. 무게 없는 우아한 걸음걸이가 사뿐사뿐 풀 벗겨진 자리를 밟았다. 정확히 사야야가 쓰러져 있던 곳이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로 아랫단이 묵직하게 젖은, 원래는 백색인 가운.
흰 가운을 입고 차트를 든 그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매일을 보았으니까.
어린 내게 변하지 않고 주어지던 유일한 것, 다정과 친애라 착각했던 그 상냥한 미소. 한결같다고 생각한 아름다운 미소가 가면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내게 말과 글, 먹고 입고 씻는 것부터 일상의 사소한 규칙과 군법까지 가르친 손이 느리게 뻗어졌다. 괴악한 파동도 흘렀다.
통증에 잠 못 드는 밤, 숙소에서 내 등을 쓸어내리던 손. 내게 피아노를 알려 주고 흉터를 물려준 손. 내게 강제 개화를 실험하던 손.
“선이 네가 가져갔니?”
“키비슈…….”
“아니면 네가 숨겼어?”
그 흉악한 파동이 내게까지 뻗친 건 두 번째다. 사위가 어둠에 잠긴 듯, 또는 물에 잠긴 듯 묵직해졌다. 달빛 같은 키비슈스의 미소가 스산한 목소리를 자아냈다.
“……뭘 찾는 거야?”
“내 가이드.”
“…….”
“를 가져간 여자…….”
자색 눈동자가 얼핏 흐려졌다. 잠시 갸웃거리는 것 같더니 혼란스러운 듯 눈가를 떨었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뭔가 이상했다. 그의 등에서 이내 무시무시한 파동이 뻗어 나왔다. 내 파동이 동조해 흔들릴 정도로 강렬하고 흉포했다.
“이미…… 죽었나?”
뭐라고?
키비슈스를 감싼 파동이 공기의 흐름을 바꾸고 빛이 굴절되어 일그러졌다. 그의 주변이 아지랑이처럼 흐렸다. 끝을 모르게 퍼져 나오는 음습한 파동. 통제할 수 없는 재앙. 걸어 다니는 파동 생성지.
“그때 죽은 건가……? 나를 불렀는데. 내게 안배된 것이지. 그 피는 뭐였지? ……아냐. 죽은 건 선이. ……선이가 맞나? 가이드는 필요 없어. ……그건 누구지?”
“……키비슈스.”
“……가져야 해.”
번뜩 빛을 되찾은 눈동자는 이성이 아니라 광기를 비췄다. 몸과 얼굴은 오래 익은 동작과 미소를 부드럽게 해냈지만, 그 손길이 성급하고 그 눈빛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번들거렸다. 폭주인가? 그는 2년 후까지 멀쩡했을 텐데. 갑자기 지금 왜 폭주를…….
“선아.”
“…….”
“아파.”
퍼져 나가는 지독한 파동을 잡아 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내게, 키비슈스가 느릿느릿 다가왔다. 일렁이는 공기 때문에 그가 비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비틀거리는 건 나였다. 걸음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실상은 그가 두른 파동에 밀려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왜 내게는 제어를 써 주지 않아? 그때도……. 그때? 아니야. 너는 착한 아이지. 내게 거짓을 말하지 않아. ……그런데 뭘 감췄지? ……죽었던가. 피가……. 몇 번이나? ……꿈?”
“키비슈스……. 왜 그래?”
“그 여자를 죽이게 해 줘.”
“……누구?”
“사야야.”
그리고 보라빛 눈을 부드럽게 휘어 이르게 어둠이 찾아온 숲을 환히 밝히는 웃음을 보였다.
“루돌프. 내 가이드.”
소름이 전신을 달렸다.
이지를 잃은 눈은 혼잣말을 하는 동안 먼 곳을 헤매고 있었다. 이곳이 아닌 다른 장소를 더듬는 듯 공허한 중얼거림이 이어지고 하얀 손이 제 얼굴을 덮어 가렸다. 머릿속이 난장판이 된 사람처럼 그의 말에 두서가 없었다.
“내 것이지……. 그래, 그 가이딩……. 가이드가 왜 필요하지? ……선이……. 선이는 가이드가 아니야. 피가 났는데, 내 피? 선이를 데려가야겠다.”
기이한 광경에 소름이 돋았다. 팔뚝을 쓸어내리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선이가 숨겼어? 가이드는 루, 돌프. ……죽었나? 그래 사야야가 내 것을. ……되찾아야지……. 목을 그은 건 누구지. 잃어버린 걸까? ……머리가 아파…….”
뒷걸음질 치던 발이 막사의 잔해에 엉켜 흔들렸다. 그러지 않아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윽!”
“선아. 언제 내게 올 거야?”
내 목을 잡아챈 억센 손아귀에서 신경을 잡아 뜯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끄윽, 끅, 숨통을 쥔 손등을 긁으며 목구멍에서 끓는 거품을 입가로 흘렸다.
제어를, 아니, 그를 편안하게 만드는 건 역효과가 날지도 모른다. 제정신을 차렸을 때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이대로, 자멸하게 두는 건? 어디 다른 곳에 가지 못하게 내가 잡아 두면.
“이제 더 기다리기 괴로운데.”
“너, 너흔, 가, 이드…….”
“응.”
바닥을 긁어 흙을 파헤치던 발끝이 서서히 들려 올랐다. 강한 힘에 몸이 딸려 올라가자 목이 더욱 조여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 손아귀에 내 손가락을 억지로 밀어 넣고 키비슈스의 팔을 끌어안았다. 조금이라도 목을 조르는 힘을 헐겁게 해 보려 했지만 그 손이 마비를 흘릴 때마다 전기가 통한 것처럼 머리가 암전되고 몸이 늘어졌다.
“선아.”
“중령님!”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덕분에 키비슈스의 손가락을 벗겨 내고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부딪힌 몸의 왼편이 통째로 얼얼했다. 목이 깊은 곳까지 저리고 눈앞이 아득했다. 등을 가파르게 들썩이며 요란하게 기침했다. 피어오르는 흙먼지가 기도를 긁었다.
팍!
검어졌다가 밝아졌다가 껌뻑거리는 시야를 들어 파열음이 난 방향을 보았다. 거기 군화 두 켤레가 남아 있었다. 차례로 하나씩 쓰러지는 장면이 느렸다. 선명한 붉은 피로 흙이 이미 흥건했다. 누구였을까. 폭사한 군인의 단말마가 귓가에 쨍하게 남았다.
“후우…….”
허우적허우적 다리를 밀어 가까스로 몸을 앉힌 다음 까끌까끌한 거품을 뱉었다. 쇳소리가 섞인 숨을 가다듬고 엉덩이를 뒤로 끌었다. 물러나는 것보다 이르게 발치에 그림자가 졌다. 키비슈스가 가까워졌다.
새로운 핏자국이 그의 가운에 새겨져 방울방울 번들거렸다. 비틀거린 상체를 바로 세운 그의 흰 뺨에도 점점이 붉은 피가 튀어 있었다. 기묘하게 어울렸다. 얼룩진 백의처럼, 흰 뺨을 수놓은 붉은 자국이 그의 잔혹한 성정을 드러내 보이는 듯해서.
총성은 뭐였지? 키비슈스가 총을 맞은 게 아니었나? 명중했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나를 쫓는 걸음걸이는 아무런 타격도 없어 보였다.
“내게도 제어를 써. 응?”
“싫, 흐, 싫어.”
“그럼 저기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죽일까?”
그의 손끝이 막 접전지를 벗어나는 군용 차량 한 대를 가리켰다. 아마도 폭사한 병사가 내렸을 차. 전장 외곽으로 피하다 방향을 잘못 튼 모양인데 잔해에 바퀴가 걸렸는지 엔진 소리가 요란했다. 덜컹거리는 차의 뒤 칸에서 한 번씩 높은 비명이 들렸다.
키비슈스가 가볍게 손짓하자 멀찍이 떨어져 있던 반군 몇이 곧 그 방향으로 짓쳐 들었다.
“그만…… 둬!”
“그래. 선이 너는 이런 일에 예민하게 굴었던가. 착해서는.”
“민, 간인은 건드리지, 마.”
“부탁을 하는 건 어때? 선아, 예전처럼 불러 봐.”
따가운 목을 감싸고 부들거리는 무릎을 펼쳤다. 목구멍에서 피 맛이 올라오고 숨을 쉴 때마다 긁히는 소리가 났다.
“더 기다려도 네가 내게 오지는 않겠지? 너는 그날도 나를 죽였으니까.”
“그, 래. 나는 여기, 서도 널, 죽일 거야.”
“그렇게 해.”
흰 손가락 사이로 은발이 흩어지고 자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곧게 맞춘 시선이 옭아매는 것처럼 가늘어졌다.
“나를 미워하렴. 목을 갈라서 죽여 줘. 나를 죽이고 나와 같은 에스퍼가 되는 거야.”
“…….”
“증오가 모자라면 네게 소중한 것들을 모두 죽일게. 아니면 너를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나를 죽이고 싶어서 참지 못할 때까지.”
“미쳤, 어.”
“네 가이드는 어디에 있지?”
탕.
리볼버의 반동에 어깨가 흔들렸다. 축이 부실해 빗나간 탄환이 키비슈스의 어깨를 관통했다. 쏟아질 듯 흔들리던 몸이 금세 바로 섰다. 피가 뿜어져 나오는 왼쪽 어깨를 내려다보더니 하하, 하고 웃었다.
“……선아. 너는 특별해. 네 애착이 사랑스러워. 네 감정은 순수하고 맹목적이지.”
“저들을, 물려. 당장.”
“우리가 왜 이렇게 됐을까?”
이번에는 양손으로 단단하게 지지한 리볼버를 어깨높이까지 올렸다. 감상에 빠진 상대를 기다려 줄 시간은 없었다. 수송 차량을 호위 중인 에스퍼들이 있지만 수가 턱없이 열세였다. 전세를 기울이려면 키비슈스를 잡아 놓을 동안 지원이 더 필요하다. 데이는 어디쯤이지?
“너도 나를 좋아했잖아.”
“……너밖에, 없었던 거지.”
“다시 그럴 수는 없을까?”
당장 쏘아 심장을 꿰뚫어 버리면 좋겠지만 흉포한 파동의 성질 때문에 망설여졌다. 저만 한 파동을 가진 자가 대비 없이 죽으면, 저 파동이 확산되기라도 하면 이 지역은 통째로 파동 생성지가 될 것이다. 인구가 밀집한 중앙을 지근거리에 두고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조금만 더 기력이 있었다면 전체 제어를 시도해 보는 건데. 파동을 깎아 낼 수 있을 만큼 깎아 내면 후폭풍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가이딩 지원이 주변에 있을까? 요청은 넣었겠지? 대피는?
지직-. 삐비비빅!
- Here comes a new challenger.
여태 무용지물이던 어깨의 무전에서 전자음이 울렸다. 고작 두어 개의 호출음으로 게임기에나 나올 것 같은 효과음을 만들어 울렸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도 같이 나왔다.
쓸데없이 요란한 무전이 키비슈스의 관심도 끌었다. 불쑥 초조함이 일었다.
- Sun. 너는 안전지대로 가. 나한테 맡기고.
뒤따라 이어진 터무니없는 요구에는 곧장 무전기를 꺼 버렸다. 손 하나라도 아쉬우니 오는 것은 반갑다. 그러나 저나 나나 유효한 공격기가 없는 지원계인데 뭘 믿고 맡기라는 건지. 이능의 상성이나 무기를 다루는 것, 어느 쪽을 따져도 내가 키비슈스를 상대하는 편이 낫다.
“헛소리를.”
“그거 섭섭한데.”
“바차스?”
등 뒤. 혼잣말에 떨어진 지나치게 이른 대답.
기겁해 뒤돌아보자 이동계 이능의 잔흔이 일렁거리고 바차스와 예의 그 반군 간부가 서 있다.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다. 어디서 뒹굴었는지 둘 모두 형편없이 다쳐 타박상과 흙먼지로 엉망이었다.
바차스가 팔을 뻗어 내 어깨를 짚은 순간 반군의 간부가 다시 이동을 썼다.
“윽! 쿨럭…….”
혈압이 쭉 떨어지는 감각 끝에 서둘러 주변을 확인했다. 50여 미터 정도 떨어졌을까. 멀지는 않았지만 긴장 넘치는 대치가 풀어지기에는 딱 좋았다.
멀미로 흔들리는 내 어깨를 추려 세운 바차스가 비실댄다며 키득거렸다. 위기감 없이 장난을 거는 그 태도에 내 말투에도 날이 섰다.
“지금이 세상의 끝이야?”
“기다려 보지 그랬어. 백마 타고 데리러 갈 수 있었는데.”
놈과 그 옆에 선 반군의 간부를 흘겨보았다. 둘 다 몰골이 형편없지만 더한 것은 간부 쪽이다. 상부 위장관이 망가졌는지 입가에 피를 닦은 자국이 짙고 안색이 형편없었다. 이능을 무리하게 쓴 것이 파동 상태에서도 선명히 드러났다.
“그걸 말이라고. 총 받아.”
“됐어. 난 그거 잘 못 쏘잖아.”
리볼버를 밀어 낸 손이 내 어깨로 올라와 무전기의 스피커를 켰다.
- 아, 아.
“어떻게 하는 거야? 어째서 네 목소리가……, 직접 말하지 않고도 가능한 거였어?”
“응. 되더라. 마음의 소리, 뭐 그런 거 아닐까.”
저가 하는 일이면서 영 시큰둥하다. 바차스가 다시 무전기를 툭툭 두들기자 지직거리며 바차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이한 일이라 자꾸만 놈과 내 어깨를 번갈아 보다 그 내용에 인상을 썼다.
- 전원 즉시 퇴각한다. 전원 퇴각. 작전지 본진 인근 대규모 폭발 예상. 이능 장교를 포함한 전원은 즉시 퇴각한다.
“폭발이라고?”
“나도 잘 모르는데, 폭탄이 있긴 하잖아?”
찢어진 검은 장갑을 아무 데나 벗어 던진 손가락이 순서대로 놈과 나, 반군의 간부를 가리키고 멀찍이 키비슈스에게서 멎었다.
언제고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 에스퍼. 그리고 폭주가 시작된 키비슈스.
“오우, 잘도 어깨에 구멍을 내놨네. 역시 넌 되는구나.”
“계획이 있어?”
“있지. 너는 이대로 퇴각하고 내가 엘로란타 저 새끼를 조지는 계획.”
“무슨 수로.”
“Sun. 네가 오기 전에 엘로란타를 잡아 놓은 게 누굴까?”
“…….”
“못 미더울 수 있지.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런 표정 가능하지.”
느닷없이 손을 올려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손을 쳐 냈다. 손등이 아픈 척 엄살을 잠시 떨던 바차스가 송곳니가 드러나는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반군의 간부 쪽으로 보냈다.
바차스를 믿기 때문에 그를 경계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반군까지 믿는다는 뜻은 아니다. 함부로 이동할 수 없게 파동 범위를 펼쳐 내자 반군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가까이 가면 기억하게 되는 모양이야.”
“뭘?”
“그냥 뭐, 인상 깊은 거 있잖아. 뒤진 기억 같은. 남자가 만지니까 존나 기분 나쁘기는 한데.”
“키비슈스가 널 만졌어? 어디? 마비에 당한 거야?”
“응. 호 해 줘.”
“너, 팔이! 감각은?”
“무른 새끼야.”
축 늘어져 색이 이상한 놈의 왼팔을 들여다보려는 찰나, 따끔한 충격이 목 뒤에 느껴졌다. 깜짝 놀랄 정도의 충격에 움츠러든 몸이 반군 간부의 손에 넘어갔다.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웃는 금발의 탈영 장교에게 때늦은 욕설을 날렸지만 다음 순간에는 이미 장소가 바뀌어 있었다.
허억, 헉……. 연이은 이동 끝에 나는 바닥을 굴렀다. 가뜩이나 나쁜 몸 상태에 내장이 곤욕이다. 대체 오늘만 몇 번째인지. 끈적이는 침밖에 나오지 않는 헛구역질이 이어졌다.
다가오는 기척에는 바로 총을 들이밀었다. 반군의 간부가 나를 일으키려던 손을 거두고 머쓱하게 입가를 닦았다. 새로 흘린 피가 그 입가의 마른 피 얼룩을 지웠다.
“……죄송합니다.”
“너, 누구야. 바차스와 뭘 하는 거지?”
“반입니다. ……밧챠와는, 밧챠를 돕기로…… 했습니다.”
“돕는다고? 뭘? 바차스는 뭘 하려는 거지?”
“예. ……엘로란타를 죽이기로.”
반이라. 죽이기는커녕 본인이 딱 죽기 직전인 것 같은데. 얼마나 무리한 건지 녀석의 파동이 들쭉날쭉 날카로웠다. 저대로 더 무리하면 말라죽기 십상이다.
“반군에도 탈영병이 있는 줄은 몰랐군.”
“……엘로란타는 변했습니다.”
“어떻게?”
“이대로 전투에서 빠지시라는 밧챠의 전언입니다.”
그러고 반은 입을 다물었다. 역류하는 피를 삼키는 것도 같았다. 적의는 없는, 그보다는 더 살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어 보이는 녀석을 물끄러미 살피다 시선을 물렸다. 호흡을 고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곱게 죽을 생각이라면 더는 이동을 쓰지 마.”
“어디 가십니까?”
“키비슈스에게.”
“밧챠가!”
“착각하지 마. 놈은 내 상관이 아니야.”
아직 상관이었다 해도 고분고분 듣지는 않았겠지.
해가 지기 시작한 하늘에는 서두르는 별들이 드문드문 나와 있었다. 방향과 거리를 가늠하고 걸음을 떼려 하자 반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불필요하게 기력을 낭비하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말싸움으로 낭비할 시간이 더욱 아까웠다.
범위는 전방으로, 단숨에 파동을 흩트려 반을 무릎 꿇렸다. 저항할 새도 없이 쓰러진 얼굴에 당황이 가득했다.
“이, 이게…….”
“쉬고 있어. 책임은 군법으로 묻도록 하지.”
지나치려는 내게 비명 같은 외침이 쏘아졌다. 분노와 혼란이 가득한 투였다.
“이것 때문입니까! 엘로란타는, 이것 때문에, 당신을……! 윈, 허윽…….”
“할 말이 있나?”
“엘, 로란타는…… 헉……. 윈터를……, 윈터를 구해야 했습니다.”
“윈터.”
“당신이나 가이드 따위가 아니라, 윈터를……! 컥.”
제어에 저항해 억지로 파동을 끌어올리던 녀석이 기어이 피를 쏟았다. 의식을 잃고 풀밭에 늘어졌다.
가이드를 혐오하면서도 가이드처럼 기능하는 나를 원하고, 이윽고 2년 전으로 와서는 제 가이드를 찾아 펠리우를 헤집고……. 혐오로 시작한 반군의 신실한 연대를 무너뜨리는 것도 결국 키비슈스 본인이라.
바스락.
풀숲을 헤집는 소리에 비쭉 솟은 신경과 파동이 그 자리로 향했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가 다시 분주히 돌았다. 바차스가 나를 여기로 보낸 까닭을 뒤늦게 알았다.
내게 이곳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놈은, 늘 윤오를 내 앞에 들이밀었다.
생각을 마저 잇기도 전에 두 다리가 달려 윤오의 앞에 섰다. 그를 등 뒤에 놓고 주변을 예민하게 살폈다. 위험이 없는 듬성한 숲을 몇 차례나 반복해서 살핀 다음에야 그를 돌아보았다.
덜컥 다시 울음이 날 것 같았다. 왜 여기 있느냐 추궁하고 소리쳐 탓하고 싶었지만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 없다.
“이선 씨.”
“…….”
“다쳤습니까?”
화가 나는지 울음이 나는지 스스로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마음에 입을 다물고 대답을 걸렀는데, 윤오는 다그치지 않고 내 몸을 걱정했다. 흘끗 그가 내 손을 내려다보기에 얼른 안전핀을 건 리볼버를 홀스터에 넣고 도리질을 쳤다.
“왜, 여기…… 계십니까?”
질책하지 않으려 애쓰는 목소리가 나갔다. 간신히 떨림을 참았으나 잔뜩 쉬어 쇳소리가 섞였다. 윤오는 느리게 손을 올려 움찔거리는 내 턱을 들어 올렸다.
“……목을 졸린 것 같은데. 맞습니까?”
큰 손의 온기가 얼얼한 자국을 감싸 쥐었다. 아린 멍부터 차츰 몸이 녹았다. 입술을 빠끔거리며 망설이는 내게 딱딱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대답.”
“……네.”
꼴깍. 침을 넘겼다. 윤오의 표정이 마치 화난 사람처럼 딱딱하다. 왜 여기 있지? 왜 화가 났지? 나 때문에? 다치지 말라고 한 걸 지키지 못해서? 하지만…….
어느새 눈동자를 떨며 눈치를 살피는 내 모습에 윤오가 한숨을 쉬었다.
“저 사람은?”
“반, 반군의 간부……입니다. 기절했으니 괜찮습니다. 한동안 깨지 않을 거고, 제가 지…….”
“지켜 준다고?”
“……네.”
더운 손길이 내 어깨와 팔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군데군데 찢어지고 흙이 묻어 엉망인 군복이다. 그의 손이 더러워질 것 같아 팔을 빼내려다 금세 되잡혔다.
“그럼 이선 씨는 누가 지킵니까?”
“저는…….”
“무력하군.”
“죄송합니다.”
“내 얘기였습니다.”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어 입술이 열렸지만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전쟁에서는 절대다수가 무력하다. 그 소모적인 파괴로 이득을 보는 것도 소수에 불과하고 사상자가 없는 현장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겪은 바로는 그랬다.
그럼에도 그가 느끼는 무력감을 부정하고 싶었다. 내게 절대적인 그니까, 적어도 윤오 만큼은 무력감을 느끼지 말았으면 했다.
빠끔빠끔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지그시 보며 윤오가 작게 말했다.
“이선 씨가 신경 쓰입니다.”
“…….”
“내 꿈에서 계속 우는 그 사람이, 이선 씨 같아서.”
‘아무래도 내가 가까이 가면 기억하게 되는 모양이야. 그냥 뭐, 인상 깊은 거 있잖아. 뒤진 기억 같은.’
바차스. 놈이 윤오에게 접근했던 걸까. 윤오의 기시감은 그래서였나? 루돌프도?
가이드들을 들여다본 목적이 뭐지? 정작 에덴은 피하고서. 내가 만나지도 못하도록 수를 썼으면서.
유독 치근거리던 최근의 놈이 떠올랐다. 가이드의 삶이 궁금했을까?
“윤오 씨,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더 다쳐야 하는 일입니까?”
“…….”
“충분히 지쳐 보입니다.”
그의 손가락이 쓸어 올리는 뺨이 따끔하고 찢어진 입술이 화끈거렸다. 서둘러 입 안으로 감춘 아랫입술의 상처에서 두근두근 조그만 맥박이 뛰었다. 입천장이 바짝 말랐다.
“내 옆에 있어요.”
“윤오 씨.”
“여기가 안전지대라고 들었습니다. 군인들도 많고. 사태를 모르는 이기적인 요구겠지만, 나는 이선 씨가 더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핑계를 대고 쉴 수는 없습니까?”
“……윤오 씨.”
“내 에스퍼잖아요.”
내 에스퍼.
쿵쾅쿵쾅 가슴이 뛰었다. 그만, 견딜 수가 없어 그의 품에 나를 욱여넣었다.
그 어깨에 먼지투성이 머리칼을 비비고 그 가슴팍에 따끔거리는 뺨과 콧잔등을 비볐다. 윤오가 살아 있는 소리가 옷가지 너머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 삶의 의미가 거기 있었다. 사랑. 내 사랑. 내 전부. 내 가이드.
갈급한 사람처럼 그의 온기를 파고들었다. 허덕이며 그의 체향과 가이딩을 취했다. 언제나 윤오가 부족한 사막 같은 몸에 평안이 스몄다.
사랑해. 사랑해.
아무리 가져도 모자랄 달콤함, 존재로부터 시작한 이 마음. 어쩌면 그를 찾아내기 위해서 나는 에스퍼가 된 게 아닐까.
이 사랑이 없어서 그토록 아팠고, 이 사랑을 만나기 위해서 그렇게 괴로웠던 것 아닐까. 결핍한 세월 모두를 보상하는 충족감이 그의 긍정 하나 포옹 한 번에 가슴을 터트릴 것처럼 차올랐다.
이 마음이 사랑이든 아니든 정말은 상관이 없구나. 이제 알았다. 헤어나지 못할 이 마음이 가령 집착이라 하더라도, 욕심이라 하더라도, 그가 허락해 주기만 하면 나는 평생 이 품을 탐내고 매달릴 작정이었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나는 허락을 구해야 했다. 윤오에게 물어야 했다. 결국 내 삶은 온통 그에게로 향하는 길일뿐인데 내 삶의 주인을 두고 혼자 고민하고 돌아가는 건 그만해야 했다.
“……돌아와.”
“네?”
“……아니, 아닙니다.”
돌아오라고…… 한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걸까?
그의 표정을 살피려는 나를 윤오가 그 품에 눌러 안았다. 발뒤꿈치가 들리고 가슴과 가슴이 맞닿아 내 두근거리는 심장이 윤오에게 건너갈 것처럼 요동쳤다.
그의 목에 차가운 귓바퀴를 문지르고 그 어깨에 눈두덩을 닦았다. 내내 바닥을 구른 탓에 내가 비비적거린 그의 흰 셔츠에 핏자국과 거뭇한 흔적이 남았다. 마치 내가 그의 삶에 얼룩이라는 비난 같았다.
그러나 윤오가 허락한 일이었다. 이렇게 엉망이라도 내 등을 감아 안았다. 나를 그의 에스퍼라 불러 주었다.
전장에서 할 일을 남겨 놓고, 나는 다시 훌쩍거리고 말았다. 형편없는 모습이다. 그를 지켜야 하는데, 이렇게 유약해서는 안 되는데.
벗어나야지. 벗어나야 해. 할 일을 모두 하고, 그리고 윤오에게 가자. 모두 다 알려 주자. 사랑한다고 하자. 사랑하는 걸 허락해 달라고 하자.
오랜 기간 군의 소속으로 지낸 나는 정해진 일,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는 데 익숙했다. 계획을 세우면 실천으로 옮겼고, 그렇게 신임을 쌓았다.
그러나 지금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시 싸우러 가야 하는데, 나를 필요로 하는 전장이 있는데 내 손을 잡고 숲을 벗어나는 윤오를 따랐다. 그마저도 겨우 걸음만 옮겼다.
지친 몸에 가이딩이 차올라 몽롱했다. 통증이 무뎌진 몸으로 줄줄 눈물을 흘리며 따라가다 바닥을 잘못 디뎌 휘청거리기도 했다. 윤오는 가벼운 몸을 손쉽게 끌어 올려 그 어깨에 기대게 해 주었다.
느리게, 느리게 숲을 벗어났다.
“중령이라…….”
“예?”
중얼거림을 또 놓쳤다. 아쉬워 올려다보았으나 윤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면 내 쪽에서도 궁금한 점이 있었다. 하고많았다.
“어째서 중앙으로 가지 않으셨습니까?”
“가고 있었습니다. 반군이 중앙으로 통하는 길을 막아서 되돌아왔고, 자원봉사자 캠프에 차가 모자라다 해서 합류했습니다.”
“…….”
“불만인 모양이네.”
“여기는, 아직 위험하니까…….”
“그래요. 그래서 가지 말라는 겁니다.”
“…….”
“나를 지켜요. 여기서.”
그의 온기는 나를 효과적으로 다루었다. 대답하지 않는 나를 끌어안은 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빨려 들 것 같고 빠져들 것 같은 윤오의 품. 이대로 영원히 멈추고 싶은 순간.
그런 순간에서 겨우 빠져나온 것은 멀리서 들린 다툼 소리와 울음소리 때문이었는데, 개중 울음소리에 번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 그럽니까?”
“에덴…….”
“에덴 씨를 압니까?”
놀란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윤오가 에덴을 어떻게 알지? 동그랗게 뜬 젖은 눈가를 쓸어 낸 윤오가 나직이 설명했다.
“자원봉사자 캠프를 돕다가 만났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모양이던데…….”
말꼬리가 불길하게 늘어졌다. 윤오는 덤덤하지만 무거운 목소리로 내용을 골랐다. 그 내용이 암담했다.
“캠프가 있었던 인근에서 사고가 발생한 모양입니다. 에스퍼와 일반인들, 특히 어린이들이 영향을 받아서,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인질이 되었다고 하고.”
“……아.”
“파동 때문에, 시체가 유독성이 된다고 하더군요. ……보호자로서 마음이 안 좋을 겁니다.”
소각.
파동을 버텨 내지 못해 죽은 시체는 변이한다. 살이 녹고 팽창하며 융기한 핏줄에서 끈적이는 검은 피를 쏟는다. 변이를 끝낸 개체는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에 공격성을 띠므로 사살하고, 사체는 잔류 파동을 남기므로 소각하여 묻는다.
키비슈스의 끔찍한 강제 개화 이능도, 통제구역이 파동을 생성하는 땅인 것도, 이능 장교가 처리하는 괴생물체가 원래 사람이었던 것도.
모두 기밀이니 시체는 군에서 빼앗았을 것이다. 서둘러 친 커다란 막사 밖에 흐트러진 갈색 머리의 여성이 주저앉아 비통하게 울고 있었다.
“이선 씨.”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내 팔을 윤오가 당겼다. 그를 돌아보고 다시 에덴을 보았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지 생각나지 않았다.
몇 명은 살아 있다고, 그렇게 말하면 위로가 될까? 그렇게 깨끗하게 소중하게 가꾼 아이들을 잃고 그 시체를 불태우겠다는 말을 들은 사람에게, 나머지를 생각해서 버티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사죄를 하건, 위로를 하건 모두 내 몫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유인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발이 묶이지 않았다면. 서둘러 작전을 끝내고 윤오에게 갈 욕심으로 데이를 따라가지 않았으면.
“무슨 생각 합니까?”
다시 나를 당기는 그의 가슴팍을 짚고 윤오를 올려다보았다. 까만 눈이 가만 나를 보았다. 깊고 따뜻한 그 어둠에 내가 어른거렸다.
“윤오, 씨.”
“네.”
“만약에, 윤오 씨는, 끔찍한 과거를,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어떻,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과거를?”
“나쁜 일은, 실……수는 모두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하고…….”
“얼마나 나쁜 일입니까. 현재는 버리는 겁니까?”
뜬금없는 질문에도 진지하게 대답해 주는 그 목소리에 그만 마음이 침묵해 버렸다.
얼마나 나쁘냐 묻는 그 말에도 그랬다. 정말은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나쁜 일이었지만 내게는 아니었다.
무지해서 당신을 괴롭히고 함부로 하고 실수를 거듭한 내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와 준 당신과 그 ‘현재’가 무척 아름답고 소중했다. 결국 나를 품에 넣어 준 그 날들이 못 견디게 아름다웠다.
“글쎄. 과거를 고치기보다는 현재를 개선해 보려고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지. 언제고 그랬지. 내 실수에 치를 떨어도 결국은 나를 살려 놓은 사람. 결국은 동정하고 용서해 버리는 사람.
기대어 놓은 몸을 느리게 떼어 냈다.
“다시 가 버릴 것 같은데.”
“제가 할, 할 수 있는 건 다, 해서, 다 해서 윤오 씨를 행복, 행복하게 해 드리려고, 했, 했는데, 혹시, 혹시 제가 와도, 제가 있어도…….”
“천천히. 돌아와서 천천히 얘기해요.”
“…….”
“내게 돌아와요.”
윤오. 나의 숙명.
군인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는 간이 구축지. 에덴의 슬픔을 배경 삼아, 나는 윤오의 어깨를 짚었다. 까치발을 들고 그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뻐근한 가슴팍이 아예 터져 버릴 것 같은 일이었다. 부들부들 떠는 턱에 다시 눈물이 맺혀 한두 방울 떨어졌다.
윤오의 딱딱한 표정에 다시금 실수한 것처럼 두려웠지만 가까스로 입가를 당겨 웃는 모양을 흉내 냈다. 어설픈 입꼬리는 금세 허물어졌다. 흐린 눈을 깜빡여 차오른 물기를 흩어 내고 손목으로 문질러 닦았다.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를 떠나기가 어려웠다. 돌아오기 위해서는 떠나야 한다. 그의 곁에 있기 위해서 끝마쳐야 할 일이 있다.
“돌아, 돌아오면은…….”
“……애쓰지 말아요. 불안하니까.”
“……네.”
“어디로 갑니까?”
그 말에 주변을 살폈다. 어둑해진 하늘에서 방위를 읽어 팔을 뻗었다. 어쩔 수 없이 변이체며 반군과의 전투가 일어나는 방향이다. 나는 그 가장 중심으로 가야 한다. 괴악한 파동을 흩뿌려 많은 이를 죽인 자를, 더욱 죽게 할 모순을 멈추기 위해서.
윤오는 내 어깨를 잡고 숲이 시작되는 나무 틈으로 걸었다.
이 앞은 전장이다. 같이 가려는 건가? 그건 절대 안 될 일이라 발을 짚어 버텼지만 뒤꿈치가 질질 끌렸다. 그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러도 멈추지 않았다. 힘이라도 써서 멈춰 세워야 할지 심각한 고민을 할 적에 윤오가 멈춰 섰다.
돌아선 그의 표정이 어둠이 내린 숲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윤오 씨, 여기는 위험…….”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이 내 경고를 삼켰다. 상처 난 아랫입술이 당겨지고 탄성을 터트린 입술 틈으로 젖은 살덩이가 밀려들어 왔다. 다급한 혀가 피 맛으로 비릿한 입 속을 헤집었다. 목을 꺾은 채 허덕이며 그의 소매를 구겨 잡았다. 장갑이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두 볼에 열기가 오르고 펄떡이는 심장이 사지의 끝까지 온기를 전달했다. 바들거리는 몸이 나무 기둥에 기대어졌다. 귓가를 온통 젖은 소리가 채웠다. 빠른 속도로 기력이 회복되는데 팔다리는 외려 떨었다.
무릎이 몇 번이나 주저앉으려다가 허리를 감은 윤오의 팔에 딸려 올라왔다. 숨이 차면 나무에 등과 뒤통수를 비비고 쾌감에 눈앞이 저리면 윤오의 어깨를 긁었다.
입 밖으로 흘러내린 타액이 부끄러웠고 내민 혓바닥이 핥아지는 건 견딜 수 없이 짜릿했다. 그의 집요한 혀에 입 안 곳곳을 내어 주고 아린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는 숨을 쉬었다.
혀를 물린 채 힉, 흑, 거리는 신음을 뱉었다. 검고 검은 눈동자가 내 가장 깊은 마음을 꿰뚫어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하는 심장까지 남김없이 흔들었다.
바스락, 발밑에서 나뭇가지, 이파리가 밟히는 소리와 멀리 끊어지지 않는 총성에 때로 등을 떨었지만, 나는 고작해야 사람의 입술과 입술 사이에서 빚어 나는 달콤한 쾌락을 위해 그 모두를 신경 밖으로 밀어 두었다.
해야 할 일이 아른거리다가도 눈앞이 몽롱해졌다. 등허리를 조이는 압박감도 혀를 감아 빨아들이는 느낌도 모조리 내 정신을 빼놓았다. 윤오의 향이 나고, 윤오의 체온이 나를 덥히고, 윤오의 혀가 나를 탐했다.
미적미적 올라간 팔이 부들거리며 윤오의 목을 감았다. 체중을 실어 매달리고 그의 입술을 더욱 내 쪽으로 끌어내렸다. 피로가 지워진 자리에 설렘이 차올랐다. 마치 시간을 거스르기 전 내게 가이딩을 해 주던 윤오 같아서…….
그립고, 반갑고. 언제고 기다리던 품과 마음을 넘치게 하는 키스와 내 결핍을 충족시키는 가이딩이었다.
입 속을 침입한 윤오와 엉킨 혀가 터져 나갈 것 같은 사랑을 고백했다. 지키리라 다짐했다. 더 잘하고 싶었다. 뭐든 해내고 싶었고, 더 강해지고 싶었다. 윤오를 안전하게 지키고 그의 행복까지도 내가 지켜 내고 싶었다.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의 곁에서 살고 싶었다.
서투른 욕망으로 그의 가슴팍에 내 몸을 끌어다 붙이고 입술에 힘을 주어 키스를 따라 했다. 말캉한 입술을 당기고 입 안 가득한 타액을 삼키며 부드러운 혀를 빨았다. 혀를 내어 젖은 입술과 그의 고른 앞니를 건드려 보기도 하고 조금쯤 그 뒤를 침범하기도 했다. 달아오른 몸에서 더운 숨이 났다.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
달콤한 키스가 가벼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내 입술을 길게 가로로 닦은 윤오가 숨이 닿을 거리에서 중얼거렸고, 내 마음은 곧장 쿵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때와 장소 정도는 가리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죄송, 합니다…….”
“이선 씨가 죄송할 건 없고.”
턱에 닿는 긴 한숨에 바짝 긴장해 있으니 건조한 입맞춤이 한 번, 그리고 떨어지다 한 번 더 주어졌다.
‘어디까지’라는 건 스킨십의 정도를 말하는 거겠지. 역시 강제적인 계기가 없으면 키스 이상은 상상하기 어렵다는 말일까.
키스를 받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하는데 새삼 윤오를 강제 집행했을 때가 떠올라 후회되었다. 내가 조금 더 견뎌 냈다면 그런 끔찍한 경험은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풀어 내리려던 팔이 제자리처럼 다시 윤오의 목을 감았다. 윤오가 팔꿈치를 밀어 올린 탓이다. 어둠이 익은 눈을 깜빡이며 올려다보자 다시 눈이 마주쳤다. 숲을 적신 어둠보다 짙은 검정이 나를 지그시 파고들었다.
“모자랍니까?”
“네? 네…….”
“다행이네요.”
젖었다 식은 조그만 살덩이에 다시 온기가 흘러들어 왔다. 질끈 눈을 감고 매달렸다. 심장이 벙벙 뛰어 내 폐를 누르고 밖으로는 그의 가슴을 밀었다.
좋고, 떨리고,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하고, 감정이 온통 넘쳐 났다. 마침맞게 몸이 데워지고, 고갈된 기력도 차올랐다. 탐욕스러운 모순을 배불리고도 나는 여전히 그를 원했다. 원하고 바라기를 멈춘 적이 없었다.
“이선.”
“……네.”
반짝 눈을 뜨고 윤오와 눈을 마주했다. 윤오는 무언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내 뺨을 쓸었다. 턱을 들어 올리게 하고 고개를 숙여 멍이 남았을 목덜미에 그의 코를 묻었다. 갈빗대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세게 안아 오기도 했다.
왜 그럴까? 키스 때문인가? 별로였을까? 나는 좋았는데.
입술을 말아 물고 혼란스러워하는 윤오의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전투복 목깃 안쪽으로 그의 숨이 닿을 때마다 살이 저리고 가슴이 뜨끔거렸다. 아직 입 속이 얼얼했다. 가만가만 그의 혀가 남긴 자취를 훑는 것만으로 두근거림이 계속되었다.
이것이 가이딩보다 조금 더 친밀한 일이었으면, 하고 바라다가 고개를 젓고, 빠끔빠끔 무언가 말하려다가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많이 무뎌졌다 해도 윤오가 부정한다면 마음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저 주어진 것에만, 이 가이딩에만 감사해야 한다. 내게는 모든 것이 감지덕지니까.
“……나를 좋아합니까?”
“네.”
“내가 함부로 굴어도?”
“네? 네.”
모처럼 쉬운 질문이었다. 다정한 윤오가 함부로 구는 건 잘 상상이 가지 않았지만, 그라면 나를 때리거나 화풀이를 해도 괜찮았다.
떠나지만 않으면 된다. 계속해서 만나 주기만 하고 내가 옆을 맴돌 수 있게만 해 주면 되었다. 다시 내게 차가워지고 무시를 해도, 이미 내게 준 달콤한 말과 키스로 몇 년이든, 죽을 때까지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쉽게 대답하네요.”
“쉬운 일입니다.”
내 기다림엔 끝이 있었지만, 이 사랑은 끝이 없는 것이라.
“감, 감사합니다. 가이딩…….”
“아, 가이딩.”
키스는 잠깐밖에 되지 않았는데 후유증처럼 설렘이 남았다. 그새 어둠이 짙어져 서늘한 바람이 숲을 헤집었으나 안겨 있는 품은 따뜻했다.
긴 한숨이 목을 간질여 내 어깨를 파득파득 틔우는 동안 윤오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달빛을 등진 그의 미묘한 표정을 읽으려 번갈아 두 눈동자를 헤매는 사이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내가 씹어 터트린 상처를 핥고 피 맛이 사라진 입 안을 다시 저리게 만들었다. 입천장을 훑으면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고 혀의 옆면이 쓸릴 때는 옆구리가 같이 떨었다.
“가이딩이라.”
“…….”
“그래서 응한 겁니까?”
“네?”
“내가 몹쓸 새끼네.”
“아닙니다.”
“뭐가요?”
“…….”
윤오의 입술이 다시 몇 번인가 내 입술을 두들겼다. 애가 닳아 입을 벌렸지만 이번엔 키스가 되지 않았다. 더운 품이 나를 꺼내어 놓고 찬바람에 파르르 떨리는 어깨를 쓸어내렸다. 좋아하는 낮은 목소리가 느릿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전쟁을 죽여 버리고 싶은데.”
“노력하겠습니다.”
“노력하지 말아요.”
“…….”
“노력하지 말고. 다치지 말고. 나는 성격이 급합니다. 오래 기다리지 않게 해 줘요.”
“……네.”
불안해하는 그의 검은 눈동자가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만지고픈 욕심에 꼬물거리는 손가락을 얼른 내리고 검집 모서리를 뜯었다. 가이딩도 받았겠다 부지런히 출발해야 마땅한 시간인데, 윤오의 손을 벗어나는 것이 전투보다 힘들었다.
이대로 무책임하게 윤오를 데리고 도망쳐 버리고 싶기도 했다. 모든 위험에서 그를 안전하게 지켜 내고 싶었다. 조금 더 음습한 욕구도 들었다. 윤오와 나를 세상에서 박리하는 상상. 나에게는 그만, 그에게는 나만 있는 그런 세상을 꿈꿨다. 오직 나만 그를 볼 수 있도록.
쾅--!
난데없는 굉음이 바닥을 흔드는 진동과 함께 들렸다.
단순한 폭발이나 충돌음은 아니었다. 아주 멀지는 않은 곳. 하늘 한쪽에 벌건 불길이 얼룩졌다. 피어오른 연기가 하얗게 밤하늘을 갈랐다.
“윤오 씨! 서두르셔야 합니다!”
다급히 윤오를 이끌었다. 아쉬운 걸음을 쥐어뜯고 그와 맞닿은 입술을 손바닥에 감췄다.
막사로 되돌아가 윤오를 들여보냈다. 뭐라 할 말이 있는 것처럼 팔을 당기는 것을 풀어내고 고개를 저었다. 지체한 시간이 이미 길었다. 주변 경호를 확인한 다음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고 방어선을 지나치며 파동을 펼쳐 인근을 범위에 넣었다. 빠르게 판단해 하나씩 아군의 파동을 키우고 적 에스퍼의 파동은 훼방을 놓았다. 변이체를 닥치는 대로 자르고 달렸다.
그대로 길을 만들어 전진하며 조금 울 것 같았다. 윤오를 보급받은 몸이 내 것 같지 않게 가뿐해서. 그를 얻고 그에게 조금 더 허락받은 것이 벅차서.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다. 윤오가 나를 기다리는 것이 좋고, 그가 오래 기다리지 않게 하고 싶었다.
위협을 제거하고, 돌아가면.
전투의 현장을 쉬지 않고 타 넘었다. 이 좁은 숲에서 끝도 없이 변이체가 달려들었고, 더러는 그 일그러진 몸체에 생전 입었을 군복 조각이 남았다. 수습할 수 없는 사체들.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소각해 처리할, 사람이었던 것들.
“……아.”
그리고 아이였던 것.
유독 크기가 작은 그 변이체는 변이를 마치고도 그 자리에 둥글게 웅크려 있었다. 꿈틀꿈틀 박동마다 거뭇한 표피에서 끈적한 피를 흘리고 그르럭거리는 신음을 냈다.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는 듯이.
거대한 파동이 느껴지는 곳까지 겨우 백여 미터를 남겨 두고 처음으로 걸음을 멈췄다. 망설임 없이 휘둘러 온 중검이 허공을 가로지르기는커녕 흙바닥에 날 끝을 처박았다. 뒤섞인 울음소리가 떠올랐다. 이명처럼 생생했다.
‘군은 아이들에게 잘못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내게 후원을 부탁하며 에덴이 그런 말을 했었다. 할 말은 해야 한다며, 심지 곧은 눈빛으로 당차게 말했다. 그녀는 틀리지 않았다. 아이가 죽임을 당했고 군인이 그 앞에서 칼을 들었다.
퉁, 퍽.
괴로운 숨을 내던 변이체의 반신이 한순간에 터져 나갔다. 얼굴을 가려 파편을 막아 내고 다시 보았을 때, 끈적한 체액이 고인 자리에 레이스가 달린 얼룩진 리본 조각이 보였다.
“중령~님~! 아~ 힘들다~! 얼른~ 와서 도와줘요~?”
라이플을 든 라이얀이 내게 달려오다 말고 허리를 굽혀 힘든 시늉을 했다.
그가 선 언덕배기 주변으로, 나뒹구는 변이체의 파편이 몇 구나 더 있었다. 크거나 작거나, 또는 확연히 조그만 변이체들, 피와 살점, 넝마가 된 옷가지, 반짝이는 군번줄,
그리고 나뒹구는 일반형 모바일이 보였다. 화면이 깨진 모바일을 집어 들며 멀리 불길이 치솟는 방향을 잠시 보았다. 폐공장이 타오르고 있었다.
윤오가 내게 돌아오라 했는데.
몸에 튄 변이체의 체액 때문일까, 오르막을 오르는 것이 유독 힘들었다. 날 듯 가볍던 몸이 이제는 가라앉을 듯 무거웠다.
“Sun.”
“……바차스.”
피투성이가 되어 눈발을 휘날리는 데이와 흉흉한 기운을 내뿜는 키비슈스, 그리고 잔해 뒤에 숨어 누운 바차스를 보고서는 마음이 깜깜해졌다.
그가 나를 기다리겠다 했는데.
“그렇게 형편없어?”
“……그래.”
그렇게 패 주고 싶었던 바차스는 진작 엉망진창이 되어 늘어져 있었다. 어디 한 군데 때려 화풀이할 자리도 없이.
“뭐, 이것도 운명일 수 있지. 저번에도, 마지막에는 몸이 거의 안 움직였거든.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그런 거 아닐까.”
“닥쳐.”
“화났어?”
“그래.”
성한 곳이라곤 어깨 위쪽밖에 남지 않은 놈은 사지가 온통 붕대와 찢은 군복으로 덮여 있었다. 나를 여기 불러 놓고 데이를 지원하러 간 라이얀의 응급 처치로 보였다.
“내가 조금 더 일찍 왔으면…….”
“미련한 새끼야. 아예 오질 말았어야지.”
그나마도 타박상으로 가득한 뺨에 비죽이 웃음이 걸렸다. 어떻게 웃을 수 있지? 어깨 아래가 마비로 시커멓게 죽어 꼼짝도 못 하는 주제에? 내 치환은 오로지 외상에만 기능했다. 죽은 신경은 손쓸 수 없다. 무능감이 차올라 다리가 풀렸다.
주저앉아 손에 얼굴을 묻고 자문했다. 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했는지, 더 잘해 보려고, 무엇도 망치지 않기 위해 애쓴 것은 다 헛된 노력이었는지.
“좆같은 소리 하지 말고. 너는 잘못한 게 없어.”
“에덴을 봤어.”
“…….”
- 에덴은 괜찮아?
“어?”
“아, 젠장.”
내 어깨와 놈의 멀쩡한 머리통에서 같은 목소리가 두 번 울렸다. 이건 완벽히 조절하지 못하는 건가?
“울고 있었어.”
“그럴 만도 하지.”
- 웃었으면 좋겠어.
“…….”
“무전기 끄자. 아니면 제어를 좀 해 주던가.”
- 에덴.
바차스가 송곳니를 드러내고 머쓱하게 웃었다. 통제를 벗어난 놈의 파동이 일렁거렸다. 그에 공명한 듯 내 무전기도 자글거리는 잡음을 냈다.
“바차스. 왜 에덴을 만나지 않았어?”
“이러지 말자, Sun.”
- 행복하면 좋겠어.
“네가 그렇게 해 줄 수 있을 거야.”
“그거랑 대화하는 거야?”
- 보고 싶어.
“…….”
“…….”
- 나의 낙원.
지직-. 무전에서 한 줄기 연기가 탄내와 함께 피어오르고 놈과 내 사이에는 짧은 적막이 감돌았다. 겨우 들어 낸 놈의 ‘마음의 소리’는 짐작대로였다. 낭패라는 쓴웃음을 보니 패 주지 못해도 조금은 후련했고.
“시간. 얼마나 되돌릴 수 있어? 지금 되돌려. 내가 더 일찍 올 테니까.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안 돼.”
“잔말 말고.”
“안 돼, Sun. 네가 있으면 못 해.”
“……똑바로 설명해.”
여름밤은 모순으로 가득했다. 생물을 변이시키는 파동이 대지를 이글거리게 채우고 서늘한 공기 중에는 눈발이 날렸다. 지표면은 눈이 기화한 수증기로 뿌옇게 뒤덮였고, 거무튀튀한 변이체가 그 위에서 조각난 파편을 꿈틀거렸다.
“네가 오고부터는 안 되더라. 네가 엮이면 내일이 오지 않아. 마음대로 돌려서 미래를 바꾸는 그런 전능한 능력이 못 돼. 어째서인지 네가 있어야 이 시간이 제대로 굴러가고, 너 없이는 고작 얼마간을 반복하면서 나 혼자 유령처럼 떠도는 거지.”
“수백 번, 이라며.”
부서진 기둥에서 미끄러지는 놈의 어깨를 잡아 목 뒤에 천 뭉치를 받쳐 기대 주었다. 마비에 얼마나 당했는지 왼팔은 겉 피부까지 검게 죽었고 다리는 움직이는 대로 힘없이 늘어졌다.
너절한 놈의 신체에 이가 갈렸다. 이것 또한 내가 막을 수 있었던 일이라는 생각이 암담하게 맴돌았다.
“웃어. Sun. 우리가 이겼으니까.”
“…….”
“그래. 뒤졌을 때 얘기부터 해 줄까? 이제 좆같은 일 없는 줄 알고 좋아했는데 말이지. 갑자기 궁금하잖아. 좀 더 볼 수는 없을까, 뭐, 기다린 게 아깝기도 하고? 이까짓 미련으로 구천을 떠도는 것도 웃기긴 한데, 그런데 되더란 말이지.”
“농담하지 말고.”
“그래서 많이 했어. 계속 돌려 봤지. 노래를 하던데, 예쁘더라.”
“…….”
“시간을 망가트릴 생각은 없었어. 새 이능이 생긴 것도, 그게 이렇게 될 줄도 몰랐고. 나는 진짜 주마등인 줄 알았거든. 그때는 고작해야 한 시간 정도였나. 아, 기준이 있긴 했다. 시작인지 끝인지는 몰라도, 네 죽음.”
내 죽음?
“그러고는 여기. 너까지 돌아온 후로는 그 테이프 감는 짓도 더는 안 되더라. 시간이 자꾸 앞으로 흘러. 하, 이제 뭐가 정상인지 나도 모르겠다. 너는 그렇게 뒤진 거 기억도 안 나지? 테스트하게 또 같이 뒤져 볼래?”
“키비슈스는?”
“그건 칭찬을 받아야겠는데. 내 한 몸 바쳐서 아주 돌아 버리게 만들었으니까.”
눈앞에서 제 가이드가 죽은 수백 번의 기억을 재생하게 했다며 목과 얼굴밖에 제대로 쓰지 못하는 놈이 웃었다. 가슴팍이 괴롭게 픽픽 솟았다 꺼졌다.
“복수는 걔네가 한 건가. 뭐 어때. 곧 저 엘로란타 폭탄이 터질 거고…….”
“…….”
“너는 마지막에 가서 총 한 방 갈겨. 주인공처럼 멋지게.”
“바차스.”
“그리고 여기서 네 가이드 새끼랑 살아. ……에덴도, 가끔 들여다봐 주면 좋고. 씨발.”
멋쩍게 욕을 덧붙인 놈의 가슴팍이 들썩였다. 눈썹 사이를 좁혀 괴로운 표정을 짓고는 툭 하니 가벼운 투정을 던졌다.
“아, 존나 아파.”
마비된 신체를 노려보며 대꾸하지 않자 킬킬 웃고는 다시 작게 덧붙였다. 자포자기한 목소리였다.
“젠장. 또 보고 싶네.”
헛웃음이 나왔다. 다 세지 못할 만큼 홀로 그날을 반복하고도 한 번 만날 생각을 않은 놈이 한심하다. 적어도 여기 돌아와서는, 그토록 우리가 간절했던 이 시간에서는 그래도 됐을 텐데.
“그럼 봐. 직접 만나러 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에스퍼니까, 가이드가 있으면 고칠 수 있어.”
“내 회복력은 그렇게 좋지 않아서.”
“해 보고! 얘기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심호흡으로 분을 삭였다. 속이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어쩌면 좋을까. 어떡하면 될까. 뭐가 잘못됐지. 수습할 수 있나. 아니면…….
움푹 팬 지대 가운데에 상처 입은 데이가 보였다. 짙은 얼음 조각이 어두운 파동이 넘실대는 곳으로 쇄도했다. 정량을 넘친 모순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그 암흑에 달빛이 일그러져 흡수당했다. 조금의 타격도 받지 않은 어둠이 족족 얼음을 조각 내 떨어트렸다.
수많은 갈래로 갈라진 어두운 파동은 이미 개인의 신체가 감당하기엔 지나친 모순덩어리였다. 간신히 발을 묶어 두었을 뿐 되돌리기에는 늦은, 말 그대로 시한폭탄. 갈라지기 시작한 균열이 그 아가리를 검게 벌렸다. 일대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 어둠이 요요히 꿈틀댔다.
혼란 가득하던 키비슈스의 혼잣말이 떠올랐다. 그 중얼거림은 눈앞에서 죽은 제 가이드를 떠올리는 것이었겠지. 그 같은 가이드 혐오자가 가이드로 인해 폭주하다니.
아닌 척 부인해도 집착할 수밖에 없는 이 지긋지긋한 에스퍼의 본성. 상대가 내 존재를 모른다 해도 상관이 없는 집착. 생을 맡겨 놓은 기다림.
‘가이드가 필요 없는 에스퍼’ 따위는 불가능하다. 이제는 알까, 그도 부족한 에스퍼에 불과하다는 걸. 어떤 에스퍼도 이 결핍을 혼자 극복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어도 조금도 안쓰럽지 않고 모르더라도 괜찮았다. 그는 가이드를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충족을 알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필연적 죽음에 다다른 키비슈스의 폭주 형태는 최악이다. 새롭게 파동 생성지가 생겨날 만큼 거대하고 농축된 에너지가 넘실댔다. 폭발은 대지의 형태를 바꾸지만 그보다 대지의 속성이 바뀌는 것이 문제다.
인근의 중앙을 휩쓸어 이끌린 변이체가 들끓을 것이고 작은 파동조차 견디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이곳에서 살아갈 수 없다. 이제 이 땅은 죽어 군인 외엔 드나들지 못하는 통제구역이 된다.
에이첸라호 호수와 북부 사막처럼.
쿵, 상황을 이해한 마음이 급작스레 나락으로 떨어졌다.
라이플의 탄환을 교체하던 라이얀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중령님~! 데이 좀 도와주세요! 아니, 왜 쟤는 총이 안 먹지? 왤까?”
“가, Sun.”
“그만하자.”
“중령님~?”
“Sun?”
“이제, 그만하자.”
숲으로 둘러싸인 공터 여기저기 시체가 즐비했다. 조각만 남기고 폭사한 시체, 피부의 색이 변하고 부풀어 오르는 변이체, 그리고 가이드였을 온전한 시체. 유독 작달막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에덴을 울게 한 아이들이다.
죽음은 언제든 일어나는 일인데. 내가 할 수 없는 일인 것을 알아도, 내가 하지 않았어도 빼앗은 기분이 들었다.
조그만 변이체 옆에서 주운 화면이 깨진 일반형 모바일을 바차스의 배 위에 던져 올렸다. 공장 터에 숨어 있던 아이들이 가지고 있던, 에덴의 것.
“돌아가자.”
“그냥 뒤지자고? 뭐라도 해 보는 거 아니었어?”
간절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 간절함이 세상을 박리시키고 미래를 뒤흔들었을 만큼, 나는 윤오를 원했다. 그와 함께하는 삶을 바라고 그가 나를 곁에 두어 주길 꿈꿨다. 나를 온전하게 하는 사람, 그런 사랑.
“돌아가. 너, 나, 그리고…… 키비슈스도.”
“헛소리를 다 할 줄 아네? 진심이야?”
“그래. 돌아가서, 그렇게 해결하자. 더는, 망치지 말고.”
“……울어?”
뒤돌아 손목을 내어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멍청하게 또 눈물이 났다.
“네가 아는 걸, 설명해.”
돌아오라고 했는데. 다치지 말라고 했는데.
그가 나를 걱정해 줬는데.
“멍청한 새끼야. 울 정도로 싫으면 그냥 이기적으로 살아. 그런 척이라도 하든가.”
나는 충분히 이기적이다. 윤오 하나를 위해서 세상 따위 망가져도 상관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려고 했다. 하나하나 틀어지는 사건들도 모두 모른 척했다.
이 세계가 진짜건, 내가 간절해서 꾸는 꿈이건. 신경 쓰지 않으면 된다고, 내게 다정한 윤오에게 취해 뭐든 좋다고.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까지 했다.
‘과거를 고치기보다는 현재를 개선하려고 할 것 같습니다.’
“우리 몫의 기회는 모두 썼어.”
잠깐 훔쳐본 거라고 생각하면 돼.
이럴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로, 보고 싶었던 꿈으로.
“……내가 잘못했다.”
“……네가 왜?”
“몰라.”
그냥.
그런 시답잖은 대답을 하고 눈썹을 찡그린 바차스는 드물게 친절한 투로 설명을 시작했다.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우는 나를 놀리기는 했지만 길지 않았다. 내가 울음을 그치는 일도 없었다.
“내가 이해한 건……. 후, 있어 봐. 정리 좀 하고.”
고작 목밖에 못 움직이면서 놈은 심각한 행세를 했다. 이윽고 노란 눈을 진지하게 뜨고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우선 네가 필수적이야, Sun. 너 없이는 시간이 흐르지 않아. 그리고 이 시간을 중첩시키는 건 내 짓이 맞지만 저 엘로란타 새끼가 원동력 같단 말이지. 시간을 돌리면 파동도 되돌아가야 하는데, 저 새끼의 파동은 계속해서 커지더라.”
“……키비슈스가?”
과연, 아무리 폭주라지만 인간이 저 정도의 파동을 가질 때까지 생존할 수 있는가 싶은 수준이긴 하다. 이미 모순 그 자체.
“네가 세상의 내일이야, Sun. 그런 확신이 들어. 그래서 너를 여기 두고 엘로란타와 내가 빠지면…….”
“이젠 안 돼. 너무 많이 어지럽혔어. 파동 생성지가 생기게 둘 순 없어.”
“……아아.”
뒤통수로 벽을 콩 두드린 놈이 눈을 감고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 괜찮은 행세를 할 기력도 닳았는지 퍽 지친 목소리였다.
“세계가 어린가 봐. 안 그래? 온전하고 튼튼했으면 우리 같은 머저리가 안 태어났겠지. 모순은 씨발, 이능도 존나 이상하고, 기형적이고. 이 세상도 좀 모자란 게 틀림없어.”
선택은 빠르게. 나머지 시간은 미련을 버리는 데 쓰자.
장갑이 젖어 미끄러졌다. 묵직한 속눈썹에서 물기를 덜어 내고 흩날린 재로 매캐한 공기를 마주했다. 차갑고 음울한 공기에 어깨가 떨려 왔다. 어쩌면 슬픔 때문도 같았다. 어느 하나 남겨 두어 마땅한 세계는 없고 고르는 일은 잔인했다.
“어떻게 될까.”
“모르지.”
남은 하나는 사라질까. 아니면 멈추게 될까. 내 죽음이 윤오의 세계를 다시 돌아가게 할 수 있을까. 정답은 확인할 수 없었다. 내 세상이 곧 끝날 것이니.
“하, 이 고집스러운 새끼야. 존나, 다 너 좋아한다니까? 하다못해 세상까지 네가 아니면 못 돌아가겠다는데, 시키는 대로 살면 편할 걸 꼭 그렇게 길을 만들어야겠어?”
“네가 할 말은…….”
“아니지. 그래. 젠장, 내가 해 볼게.”
“……뭘?”
“뭐든. 조립은 씨발, 분해의 역순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아니, 해 본다, 해 봐.”
노란 눈이 반짝였다. 이어 세계를 프로그래밍에 빗대 설명하는 것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듣길 바라는 말이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는 놈의 방식 같았다. 그러곤 제 파동을 증폭시키길 요구했다.
“에러 뜨면 백업 불러오겠지.”
“뭐? 넌 여기 있어.”
“모자란 새끼야. 시도해 볼 게 있다니까? 존나 책임감 있게 해 볼 테니 기대는 말고 신호하면 증폭해. 곧 뒤질 거 같은 게 조건도 비슷해.”
“바차스!”
“나 바빠. 가서 저 배터리 새끼랑 놀아. 죽여도 좋은데 그 전에 확실히 폭주로 몰아가고.”
놈의 눈이 감겼다. 부쩍 늘어나는 파동에 놀라 멱살을 당겨 깨웠더니 짜증을 부렸다. 뭘 하려는 거지? 초조하게 물어보았으나 설명하면 아냐는 깐족거림이 돌아왔다. 멱살을 풀어 놈이 벽에 뒤통수를 처박게 내버려 두고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을 구르는 깨진 모바일을 집어 허리 포켓에 챙겼다. 지친 바람이 불어 젖은 뺨을 식혔다. 턱에 맺혀 떨어지던 눈물은 멎었고 이제는 임전의 때였다.
부디 마지막이길 바라는 키비슈스와의 전쟁을, 하나같이 간절했던 우리의 바람이 만들어 낸 이 ‘또 하나의 현실’을 이 이상 망치기 전에 원래대로 되돌릴 시간. 이 지긋지긋한 모순, ‘우리’를 이 세상에서 지워 낼 때.
비탈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지친 데이의 흐릿한 눈발을 헤치고 가장 어둡고 무거운 파동이 뭉친 곳으로 향했다. 수없이 많은 가이드를 만들어 내고 또 죽인 가이드 혐오자, 최악의 에스퍼. 그를 폭풍같이 어둑한 파동이 휘감았다.
예고 없이 난입한 나를 발견한 데이는 즉시 거친 욕설을 날리며 빠질 것을 명령했다. 따르지 않으면 나까지 얼려 버릴 기세였으나, 나는 물러나는 대신 라이얀에게 눈짓을 보냈다.
‘완전 퇴각, 즉시, 폭발, 고위험’. 내 수신호와 데이를 번갈아 본 라이얀이 곧바로 달렸다. 펄펄 화내는 데이를 뒤에서 잡아 안고 육안으로 보일 만큼 사나운 이능의 범위 밖으로 질질 끌었다.
날뛰는 데이와 곤란해하는 라이얀의 무사 퇴각을 위해 그녀의 지친 파동을 흩어 가볍게 기절시켰다. 축 늘어지는 제 에스퍼를 들쳐 멘 라이얀은 윙크를 남기고 빠르게 멀어졌다. 강한 만큼 금방 정신을 차리겠지만 몇 분 정도면 충분하다.
멀어지는 둘의 뒷모습에서 고개를 돌리고 나는 다시 걸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바뀐 것과 바꾸지 못한 것에 관한 생각이 수면을 두드리는 빗방울처럼 끊임없이 쏟아졌다. 가라앉았다 떠오르기를 반복하는 상념의 끝에서 분노가 걸려 올라왔다.
이 모든 일을 저지른 키비슈스가 원망스러웠다. 나를 기다리는 윤오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나를 포용하는 윤오가 있는 이곳을 고르지 못하는 것도, 다 그의 탓으로 하고 싶었다. 죽이고 싶었다. 죽을 만큼 괴로웠으면 좋겠다. 그런 못난 살의가 잔잔하게 타올랐다.
“키비슈스.”
넘실대는 수 갈래의 파동에 내 몸을 밀어 넣었다. 밀도가 높은 공기가 숨 막힐 듯 갑갑하게 감싸 왔다. 앞으로 나아가는 동작이 헤엄치듯 느렸고 걸음걸음이 뒤로 떠밀렸다. 폭주하는 에스퍼의 파동이 이대로 살을 저밀 것처럼 아프고 괴로웠다.
내 파동을 끌어올려 휘감고 침입하였을 때, 어둑한 파동 너머로 키비슈스가 보였다. 파동의 구심에서 부유하는 그는 잠든 것 같았고 그의 은빛 머리칼과 피에 젖은 가운이 달처럼 빛났다.
“키비슈스.”
두 번째 부름에 그는 눈을 떴다. 허공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흐드러지는 웃음을 지었다. 흰 손바닥을 뻗고 고개를 기울여 입 모양으로 나를 불렀다.
“키비슈스.”
매혹적인 자안에 달빛이 감돌았다.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선 그가 성큼 다가왔다. 흐트러진 차림이나 그를 휘감은 어둠, 어깨의 총상과 달리 여전히 반짝이는 모습이 오래전을 떠올리게 했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키비슈스 하나밖에 없던 시절을.
비록 거짓이었더라도 내게 헌신적이었던 아름다운 기만자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차가운 품에서 변이체의 체액과 사람의 피 냄새가 났다. 겹겹이 쌓인 죽음의 향이 짙어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선아. 가이드가 있는 건 어때?”
“…….”
“내 가이드는 죽어 버렸어.”
“엘로란타.”
차가운 손이 내 목을 감고 턱을 들어 올렸다.
“네게는 그렇게 불리고 싶지 않은데. 선아, 내 머릿속이 엉망이야. 괴로워. 아파. 외로워.”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의 짐을 거들어 달라는 듯 애절했다. 간절하고 애잔했다. 수를 세지도 않고 사람을 죽이고 학대한 자의 약한 모습이 이 차가운 여름밤처럼 비정상적이었다.
“나를 죽이러 왔어?”
내 왼손을 들어 올린 그가 오래된 흉터를 어루만졌다. 내게로 옮겨 와 내 손가락을 불편하게 만든 키비슈스의 흉이다.
“그렇게 해. 서둘러야 할 거야. 이 목숨은 곧 끝이 나거든. 나를 네 이 손으로 죽여 줘. 그리고 나를 기억해. 선아, 나를 기억해.”
살갗에 휘몰아치는 파동이 무척 쓸쓸했다. 이 끔찍한 에스퍼가 느끼는 외로움이 너무도 보통의 것이라 더욱 괴리감이 느껴졌다. 납득할 수 없는 고통, 모두 그만두고 싶게 하는 외로움. 참으로 보통의 것.
“너를 죽이는 건 내가 아니야. 폭주지.”
“선아.”
차가운 손가락이 내 목에 감겼다. 음침한 파동이 더욱 날뛰고 깊고 짙은 우울이 굽이쳤다.
“왜 나만 이래야 하지?”
“엘로란타.”
“왜 내게만 그래?”
어둡고 축축한 공기가 넘실대고 공격적인 파동이 주변을 빼곡히 에워쌌다. 그의 손이 닿은 목이 저렸다. 당장 내 목을 조르고 마비시킬 수는 있겠지만 키비슈스는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를 이해하잖아.”
그의 말을 듣고 그와 시간을 보내고 그만을 보던 어린 이선은 이제 없는데. 키비슈스는 그때에 홀로 머물러 있었다. 그가 자처한 외로움이 검게 일렁였다.
용서받기에 너무 큰 악행과 동정하기에는 이미 한참 멀어진 자. 저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누구도 믿지 않는 사람. 불신이 그를 외롭게 하고 업보가 그를 고립시켰다. 세상의 끝까지 그는 혼자여야 한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아파……. 선아, 나를 죽여. 나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기억해. 괴로워해.”
달각, 검집에서 중검을 꺼내 쥐었다. 그 끝은 누구에게도 향하지 않고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달빛을 담아 희게 빛나는 위태로운 웃음이 한 걸음 물러났다. 내 목을 조르던 차가운 흰 손이 이번에는 그의 목을 가리켰다. 가로로 길게 경동맥 부근을 긋고 재촉하듯 까닥였다.
“내겐 너밖에 없어. 선아, 왜 네가 내 가이드가 아닐까? 그랬다면 모든 게 더 좋았을 텐데.”
끝까지 이기적인 그의 말에 나는 쓰게 웃었다. 모든 걸 잊고 잃어버린 어린 시절에는 나도 내가 가이드이길 바랐다.
가이딩과 닮은 이능으로 이토록 고통받느니,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가이드인 게 낫다고. 그러나, 내게 모든 걸 알려 주고서, 세뇌하지 못한 단 하나의 혐오가 나를 그 그늘에서 벗어나게 했다.
“가이드가 있는 건 어떠냐고 했지?”
“……선아.”
“살고 싶어.”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기대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 기다림. 그 끝에 윤오가 있어 내 기다림은 보상받았고, 내 삶은 가치가 있었다.
“나는 살고 싶어. 그게 다야.”
그가 밉다.
그러나 미움도 분노도 슬픔에 비하면 가벼웠다. 바라던 소원을 앞두고 꿈에서 깨어나야 하는 것보다 서럽지 못했다. 내게 유일한 사람이 가까스로 나를 보기 시작했는데 그 품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보다 억울하지 않았다.
“살고 싶다고.”
“…….”
“그건 어떤 기분이지?”
삐빅, 삐빅. 한여름의 삭풍을 뚫고 낯선 호출음이 울렸다. 신호였다.
삐빅거리던 모바일은 이내 몇 가지 톤을 나누어 장난스러운 곡을 만들었고 때맞춰 남김없이 끌어올린 내 파동이 멀찍이서 낯익은 기척을 발견해 냈다.
“이선! 비켜!”
바람을 가르고 날아온 날붙이는 곧장 키비슈스의 등을 노렸다. 그러나 소리로 예측한 관통은커녕 단검이 나가떨어져 뒹굴었다.
공격이 허망하게 무산되고, 준준의 거친 욕설이 바람 소리 가득한 공터에 쩌렁쩌렁 울렸다.
“가이드라…….”
문득, 엘로란타가 죽지 않는다던 이상한 무전 내용이 떠올랐다. 총이 먹히지 않는다던 라이얀의 말과 목이 졸리던 때의 총성, 거슬러 올라가 제 머리통을 쏴 보았다는 바차스의 말까지 끄집어져 나왔다.
준준의 염동력이 몇 차례나 공격을 이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키비슈스의 곁에서 모두 사그라지고 바닥을 굴렀다.
지독한 실감이 찾아왔다. 번번이 죽음이 비껴 나는 광경은 기이하고 비정상적이었다. 마치 세계가 이 도드라진 모순을 거부하고 무시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욕심낸 이 세상이, 실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검을 들어 내 팔뚝을 그었다. 당장이라도 살이 갈라져 피를 뿜어야 했으나 의지와 다르게 날이 살을 비껴 나갔다. 한 번 더 시도하려 들어 올린 검 끝은 흰 손에 가로채였다. 그 손아귀에서 터져 나온 핏줄기가 예리한 날을 타고 붉게 흘러내렸다.
결국, 서로를 죽여야 끝이 나는 세상.
“가이드…….”
“엘로란타.”
그의 오른 소매가 구멍 난 왼쪽 어깨처럼 피로 젖었다. 피로 적신 듯한 가운을 입고 내 검 끝을 제 목에 가져다 대는 키비슈스의 눈이 다시금 혼곤해졌다.
“너는 내 세상이 죽었다고 했었지. 그래, 그때……. 세상, 루돌프……. 루돌프라. 내 것, 내 가이드……. 왜 죽었지? 아니야, 그건, 기억.”
“엘로란타.”
“여기가 아니야. 그렇지?”
먼 곳을 보던 시선이 느리게 정신을 되찾고, 키비슈스의 자안이 똑바로 나를 보았다.
“살아 있지?”
“그랬었지.”
“선아?”
“네가 죽였잖아. 여기서도.”
“그건 무슨 뜻이지?”
포기하지 않은 준준이 날려 보낸 기다란 날붙이를 보고 중검 손잡이를 놓았다.
키비슈스에게 붙어 그의 어깨를 잡고 그와 나를 포함한 좁은 범위를 내 파동으로 두껍게 감싸 위장했다. 준준의 이능이 마치 내 파동인 것처럼.
뜻대로 단검은 그의 등을 깊이 찌르고 이어 내 복부를 뚫었다.
멀리 준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불이 붙은 듯 뜨거운 복부와 차가운 품, 준준의 외침. 기시감이 들었다. 이미 오랜 옛날 같은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오래된 데라주바의 노래가 메아리치던 가이드 센터. 파동이 가득 채운 높은 천장. 여러 번 본 것처럼 익숙했다. 조금은 기대도 됐다. 막연히 떠오르는 그다음 장면이 좋아서.
“……루돌프의 에스퍼는, 네가, 아니야.”
사야야는 살 수 있을까. 암담한 기대지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는 그 두 사람이 오래오래 행복했다고 믿고 싶었다. 예쁜 부부에게 슬픈 일도 복수할 일도 없기를. 비밀에 억눌리는 일 없이 항상 행복했다고, 그렇게.
이명이 이는 귓가에서 환청처럼 윤오의 목소리도 들었다. 내 에스퍼라고. 그렇게 불러 줬었지. 돌아오라고 했었지. 입을 맞춰 주고 나를 걱정해 줬지.
훔쳐본 가능성은 내게도 행복이라 웃음이 났다.
피로 젖어 축축한 키비슈스를 밀어 쓰러트리고 나도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왈칵 쏟아진 피로 정신이 흐렸지만 계속해서 파동을 긁어 일으켰다. 치명상으로 꺾어진 파동을 억지로 잡아 올리고 끌어냈다. 곧 이어질 폭발의 피해를 줄이려면 남은 힘을 전부 써도 모자라다.
남겨진 쪽이 사라질지, 멎을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 소중한 세계를 지켜 내는 것은 내 일이자 책임이었다. 간절함으로 만들어 이렇게나 망가트렸으니, 이렇게나 헤집어 놓았으니 도리를 지켜야지.
저린 다리를 바닥에 끌며 앉은걸음으로 키비슈스의 옆에 갔다. 몽롱한 시선은 폭발을 앞두고 요동치는 제 파동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 너머의 밤하늘을 보는지도 모른다.
구멍 난 그 가슴팍에 엎어져서 구멍 난 내 배를 감싸 쥐었다. 상처는 축축하고 피는 미끌거렸다. 조그만 타박상을 보고도 다치지 말라고 했었는데, 이런 상처를 입은 걸 보면 윤오가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주름이 질 때면 만지고 싶었던 윤오의 미간을 떠올리다 눈을 감았다. 내게 남은 생명력을 마저 끌어올려 업보 같은 에스퍼를 덮었다. 그의 삶과 죽음이 이 이상 해를 끼치지 못하게.
뚝.
모든 소음이 끊어졌다.
끝없이 몰아치던 바람 소리가 문득 적막으로 대체되었다.
이 세상이 충분히 사랑스럽지 않았던 걸까.
여기는 너희가 그렇게 바라던 과거인데.
- 2년 전 幾回 (기회 : 몇 번 또는 몇 차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