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겨울 寒蟬 (4/11)

- 겨울 寒蟬

수수데의 에이첸라호 호수 인근이 혁명군에게 점령당했다.

원국 북부 사막과 더불어 가장 큰 통제구역이 있는 지역. 사야야를 비롯해 이능 장교 여럿이 전사하고 부상당하는 등 그 피해가 막심했다. 지휘관이 바뀌었고, 군은 머지않아 통제지역의 탈환 방안을 강구하게 될 것이다.

에이첸라호. 키비슈스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라 나 역시 참전 의사를 밝혔다.

잇따른 장례와 또 다른 장례를 모두 마치고 다시 의무대에 입원했다. 아무렇게나 움직인 탓에 꿰맨 자리가 곪고 거즈에 피 얼룩이 졌다. 염증으로 열이 올라 이틀을 더 누워 있어야 했다.

군의관이 강요한 이틀이 지나고, 완전히 낫지 않은 몸으로 퇴원을 고집했다. 그 이유와 내가 찾을 곳은 마땅히 하나였다. 윤오의 곁.

메마른 마음과 하느작거리는 몸이 윤오와 윤오의 가이딩을 바랐다. 그의 온기와 검정과 나직한 숨소리를 그리워했다.

파견 기간 단축은커녕, 2주를 만나지 못하는 사이 원국에는 이르게 겨울이 왔다. 새벽 입김이 희게 샌 이 계절에 내 육신은 더 많은 가이딩을 필요로 한다. 윤오가 필요했다.

그는 주노와 함께 주 2회, 총 12주의 에스퍼-가이드 기본 교육을 신청했다. 에스퍼와 가이드에 대해 내가 모든 걸 알려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가 한참 걸렸고, 주노가 윤오와 함께 기본 교육을 다시 받게 해 달라고 준준을 설득하기까지가 힘겨웠다.

사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내 눈에 닿는 곳에 두고 싶었다. 전부 들여다볼 수 없다면 사람을 시켜 일상을 보고받고 싶었다.

그런 흉한 마음이 윤오를 더욱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알기에 겨우 참아 낼 뿐, 나는 늘 윤오를 세상에서 박리하는 상상, 다시 처음 만난 날로 되돌아가는 꿈을 꿨다.

상상은 달곰했지만 이내 내가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꿈으로 끝이 났다. 순서대로 다시 경멸과 분노가 나를 향했고, 차가운 무시에 번뜩 잠이 깼다.

다시 잠들지 못하는 그 밤은 외로웠다. 윤오가 보여 준 다정을 되새기며 나를 달래어도 쓸쓸했다. 보고 싶었고 가지고 싶었다. 주고 싶었고 받고 싶었다.

윤오의 관심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얼마나 작은 조각이든 내 속에 모아 채워 넣고 싶었다. 까맣게 비어 버린 그 속이 언제나 허기졌다.

빠듯하게 최저 시간만 채워 근무한 다음 시내로 나가는 셔틀을 탔다. 내리자마자 다시 택시를 잡아 외곽의 가이드 센터로 향했다. 서두르는 걸음에 덜 나은 몸이 비명을 지르고, 간만에 움직이느라 쉽게도 눈앞이 검어졌다. 이명이 택시 안을 가득 메웠다.

그래도 가는 길. 만나러 가는 길.

만나지 못한 2주가 내게만 길었을 것이라 생각하면 쉬지도 않고 가슴이 먹먹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내게만 사랑이어도 괜찮았다. 일시적일지라도 그의 다정이 좋았다. 다시 안아 주면 좋겠다. 그 품을 안게 해 주면 좋겠다. 조바심이 무릎을 쥐어 옷감을 구겼다.

한적한 외길을 지나 센터에 도착했다. 건물에 들어서 마주치는 족족 건네는 인사들을 흘려 넘기며 내 가이드의 위치부터 물었다.

알아 낸 장소로 서둘러 찾아가 근처에서 발걸음을 죽였다. 강사의 목소리가 교육장 바깥까지 들렸다.

“……기본 교육에 자원해 주신 에스퍼분들은 모두 올해 임관하신 이능 장교 분들이십니다. 파동은 15분 정도 지나야 제대로 영향을 받기 시작하니까요. 간단하게 인사 나누시면서 15분 보내 봅시다.”

둘씩 모여 앉은 교육생들을 둘러본 강사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에스퍼분들께 궁금한 점 여쭤보셔도 좋고요. 에스퍼분들은 가능한 만큼만 답변해 주시면 됩니다. 아무쪼록 서로를 배려하는 실습되기를 바랍니다. 오래 보는 사이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강사의 시답잖은 농담에 몇몇이 웃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려움도 없이 단번에 윤오를 찾아냈다.

그 사이 머리가 짧게 다듬어졌고, 코트가 조금 더 두꺼워졌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그득 차올랐지만 애써 발을 제자리에 묶었다. 교육, 은 방해하면 안 되니까.

그런데 심장은 또다시 불안으로 요동쳤다. 오랜만에 보게 된 기쁨으로 떨리지 못하고 눈앞의 상황을 용납하지 못해 벌벌 떨었다.

두 사람씩 짝지어 앉은 모습. 반절의 어린 에스퍼들. 윤오 앞의 붉은 머리. 한타.

“어! 선이 형!”

에스퍼 없이 혼자 달랑 앉아 있던 주노가 외쳤다. 쪼르르 달려와 비어 있는 제 앞자리로 내 팔을 이끌었고, 갑작스러운 방문자에게 시선이 몰렸다. 그 중 에스퍼들은 나를 알아보고 안면에 놀람을 띄웠다.

그리고 윤오가 나를 돌아보았다. 삐그덕거리는 목을 꺾어 그에게 인사하고, 주노와 마주 앉았다.

“형, 저 진짜 혼자 있기 멋쩍었는데. 잘 됐다! 윤오 씨 보러 오신 거예요? 이거 가이딩 실습 한 시간은 하는데 그동안 저랑 있어요! 선이 형이랑은 손잡아도 바보 준준이 형이 괜찮다구 할 거야.”

나는 그저 내게 준 시선을 거둔 윤오가 야속했고, 주제넘게 야속해 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주노가 연신 종알거려도, 그러다 내 손을 잡았을 때도 그저 멍하니 가이딩 실습이라는 말을 반복해 떠올렸다. 잡은 손으로 온기가 전해지고 미약하나마 이명이 가라앉았지만 계속해서 세상이 어질거렸다.

주노의 뒤로 보이는 윤오의 등과 그 너머에서 자꾸만 시선이 마주치는, 거슬리는 붉은 눈동자.

소위 한타. 자연계 이능력자. 강하고 쓸모 있는 녀석. 어리니까 앞으로도 오랫동안 군의 효용을 만족시킬 녀석.

“자, 이제는 손을 잡아 보실까요? 가볍게 악수하시는 것처럼 하시면 됩니다. 벌써 잡으신 분들도 있네요. 좋아요. 가이드분들은 딱히 느껴지는 게 없으실 테지만, 에스퍼분들은 다양한 통증이 잦아들고 이능을 사용하는 데 있어 부담이 줄어들게 됩니다.”

주노를 닮은 포근한 온기가 내 지친 파동을 미미하게 달래는데도 불구하고 기분이 점점 가라앉았다.

“가이딩은 그 효율이 높을 때 에스퍼의 부작용을 거의 없앨 수 있고요. 경우에 따라 회복력을 강화시키고 통증을 덜어 주기도 합니다. 그 정도를 따지는 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에스퍼-가이드 간의 매칭률입니다.”

윤오의 등과 한타를 번갈아 보던 날 선 시선을 서둘러 내렸다. 주노가 속닥거렸다.

“선이 형은 어때요? 저랑 손잡으면 덜 아파요? 바보 준준이 형은 제대로 말도 안 해 주면서 가이딩 검사도 못 받게 해. 궁금한데.”

“……매칭 가이드는, 특정 에스퍼와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는 그 이외의 에스퍼와는 파동 감쇠 형태가 낮아. ……대체로.”

“그러면 선이 형한테 저는 별로 도움이 안 되겠네요? 아쉽다.”

뭐라 계속 말을 거는 주노를 두고도 정신이 아득했다. 몸과 마음이 온통 구멍 난 것처럼 휑하고, 나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기쁨을 담는 저 붉은 눈동자에 살의가 끓었다. 윤오의 팔꿈치가 움직이는 것이 보일 때는 이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후였다.

망설임 없이 걸어 윤오와 한타 사이에 섰다. 한타의 팔을 비틀어 윤오의 손을 놓게 했다. 내게 몰린 눈동자들에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왜 윤오가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야 하지? 왜 내가 아니지?

“중령님!”

거칠게 팔이 꺾이고도 나를 올려다보는 한타가 해죽 웃었다. 그 얼굴을 날카롭게 쏘아본 다음 막무가내로 윤오를 일으켰다.

한타가 부르고, 주노가 부르고, 강사가 불렀다. 그러나 나는 그저 윤오를 이곳에서 멀리 떨어트려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그를 이끌었다. 빨리, 어서 벗어나야 한다. 그는 내 가이드니까, 다른 누구의 가이딩을 해서는 안 된다.

“어디로 갑니까?”

그런 내 조바심을 멈추게 한 것도 윤오였다. 순순히 이끌리던 팔을 당긴 것만으로 내 도주를 멈추게 했다. 어느덧 로비가 가까웠고, 나는 그의 질문에 적절한 답이 없었다.

세게 쥐었던 팔을 놀라 퍼뜩 놓아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할 말이 없어 보기만 했다.

“중령님! 괜찮으십니까?”

눈치도 없이 쫓아 온 어린 에스퍼의 기척을 느끼고 얼른 윤오를 가리고 섰다. 주체할 수 없는 마음에 앞이 뿌옇게 흐렸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시야에도 한타의 당황이 비쳤다. 가식이 아닌 것도, 그가 나를 따르는 것도 알지만, 지금은 내 속이 말이 아니었다. 윤오와 손을 잡은 저 에스퍼를 죽이고 싶었다. 그럴 능력도, 자격도 없으면서.

“소위.”

“……예! 소위 한타!”

“꺼져.”

조용한 공백 끝에 처량하게 일그러지는 그 낯이 조금도 불쌍하지 않았다. 감히 윤오를, 감히 윤오에게, 감히 내 가이드에게.

시무룩해져 경례하고 돌아서는 녀석의 뒷모습을 노려보는데 등 뒤로 긴 한숨이 떨어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겨우 뒤돌아 윤오를 향한 눈동자가 바르르 떨었다.

“뭐 하는 겁니까?”

“…….”

“이선.”

“……네.”

다그치는 침묵에 숨이 막혔다. 눈가가 마르며 점차 개었다. 그립고 그립던 윤오의 검정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르고 닳도록 상상했던 다정한 눈길은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무심하고, 이해하지 못한 상황이 언짢은 듯 미간에는 주름도 잡혀 있었다.

허전한 마음을 메우기 위해 그것도 시선이라고 꾸역꾸역 채워 넣었다. 죽도 넘기기 어렵던 속이 편안했고 저린 손발에 온기가 돌았다. 내게 너무 좋은 그를 이곳, 가이드 센터에서 빼내고 싶은 초조함만 아니라면 기뻐해야 마땅한 재회였다.

고작 2주라도 전투와 부상과 장례를 오간 그 시간 동안 얼마나 윤오를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를 부르려는 데리다를 말리고, 전화를 싫어하는 그에게 앞으로 전화하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고, 모바일에 남은 부대 초소 앞이라는 간단한 문자를 수백 번 들여다보았다.

“어디로 가려고.”

“어디, 든……. 윤오 씨 집으로 가면, 안 되겠습니까?”

“주노 씨는 어떡하고요.”

아, 주노.

연락은 받았다. 주노의 차든 윤오의 차든 종종 함께 이동한다고. 나도 준준도 마냥 기껍지 않은 일이었지만 거스를 수 없는 상대라면 거슬리지는 말아야 했다. 그래서 수긍했다.

준준의 생각은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그가 주노와 잘 지내는 편이 그나마 나았다. 다른 에스퍼나 가이드들보다는. 왜냐하면 주노는 좋은 사람이고, 준준의 가이드고, 남자니까. 윤오가 그를 좋아하지는 않을 테니까.

다음 순간에는 그 확신을 되새기다 덜컥 겁이 났다. 윤오는 그렇게 끔찍해 하던 나에게도 다정을 주었는데, 남자인 나에게도 성적으로 흥분하였는데, 누구에게나 사랑스러운 주노를 어떻게 당연히 배제했을까.

비록 준준이 있다고 해도 윤오의 마음은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인데.

“주노는 준준에게, 데리다에게 연락을 해서, 차를 부르겠습니다.”

준준은 파견 중이었다. 반란군 엘로란타가 각지에서 공세를 펼치는 지금, 대령 바차스가 의무대에 누워 있으니 자연스레 준준의 파견이 늘어났다.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준준을 꺼냈다가 데리다로 번복했다.

주노는 택시를 태워도 된다. 아니, 그랬다간 준준이 화를 낼 테니 차를 따로 불러 주면 된다.

“놓고 가자고.”

“네? ……네.”

“하. 내가 얼마나 더 참아 줘야 합니까?”

짜증 섞인 목소리에 대번에 마음이 어두컴컴해졌다. 내가 저지른 잘못을 찾느라 머리가 분주한데, 되짚어 보니 잘못이 아닌 게 없었다. 나는 자체로 그에게 좋지 않은 영향만 끼쳤으니까. 그 근거가 또 하나 윤오의 입을 통해 날아왔다.

“얌전히 에스퍼만 기다리는 가이드가 갖고 싶은 거면 나는 안 되겠는데.”

비수처럼 가슴에 냉랭한 말이 꽂혔다.

“이미 충분하지 않나. 위치 추적. 이동 신고. 출국 금지. 여기서 뭘 더 막을 거지? 아예 밖을 못 나서게 할 건가?”

처음 듣는 이야기.

번뜩 인다비가 말했던 윤오의 방랑벽이 2년 전에 끊어졌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윤오와 내 사이를 오해한 인다비가 그저 연관 지은 말인 줄 알았는데.

“저는, 몰랐…….”

“몰랐다고.”

삐리릭-.

기본 벨 소리가 삭막한 공기를 찢어 버릴 것처럼 울렸다. 무심코 포켓을 확인했지만 내 것은 아니었다. 윤오의 모바일 화면에 ‘인다비’라고 뜬 것이 보였다. 흘끗 화면을 살핀 그가 고민 없이 등을 돌렸다. 로비를 빠져나가 현관으로 걸어갔다.

언젠가 우는 나를 안아 주었던 그 자리에, 홀로 남겨졌다.

절망이 삽시간에 나를 휘감았다. 세상이거나 나이거나 그것이 무엇이든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버림받았다.

그가 날 버렸다.

‘나는 안 되겠는데.’

내 가이드는 윤오일 수밖에 없는데. 그가 기어이 나를 등졌다. 버려졌다.

등을 돌리기 전에 그가 내보인 짜증이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고 단숨에 체온이 식었다. 벌벌벌 손끝이 떨리고 호흡이 가빠졌다.

갈 곳을 모르는 어린애처럼.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한참을 서 있었다. 윤오의 등이 가이드 센터 현관의 유리문 너머로 보였다. 통화를 하다 짜증이 나는 듯 머리를 쓸어 올리고, 바람이 쌀쌀한 듯 코트 자락을 추어올리고.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아도 다시 돌아봐 주지 않았다.

‘위치 추적. 이동 신고. 출국 금지.’

정말 몰랐던 일. 나는 그런 걸 신청하거나 요구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된 걸까. 데리다에게 물어봐야 할까.

떨리는 손으로 모바일을 꺼내 들었지만 갑자기 사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직통 다이얼이 생생한데 누르는 법을 잊었다. 네모진 모바일의 모서리가 계속해서 허공에 흔들렸다. 놀란 가슴, 뛰는 심장에 온몸이 겨워 퍼뜩퍼뜩 떨었다.

탁.

기어이 떨어트린 모바일을 뒤로 한 채 정신없이 걸었다. 달렸다. 걸었다.

윤오의 등이 멀어지는 것을 도저히 지켜볼 수가 없었다. 며칠간 제대로 움직이지 않은 다리가 몇 걸음에 한 번씩 바닥을 비껴 디뎌 넘어질 뻔했다. 찢어진 옆구리가 아렸다.

몽롱하고 동시에 예민해진 감각에 비린 피 냄새가 맡아졌다. 상처의 냄새인지 죄의 냄새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다만 윤오를 쫓아야 했다. 빌어야 했다. 몰랐다고 변명이라도 해야 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용서를 구해야 했다.

유리문을 밀어 열고 그대로 달렸다. 윤오의 등을 지표로 암담한 길을 헤맸다. 그가 버리면 내 삶엔 무엇도 남지 않았다. 복수도 속죄도 모두 의미가 없었다. 내가 또 하루를 숨 쉬고 버티는 것에 의미가 없었다.

고작 몇 미터를 뛰고서도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차가운 공기에 흰 숨이 흩어졌다. 얼굴이 시리고 마음이 시리고 송두리째 꽁꽁 얼어붙어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이러다가 나도 얼어 죽어 버릴 것 같았다.

휘청휘청 이대로 나자빠져서 윤오가 다시 나를 돌아본다면 그것도 좋겠다. 내 삶이 당신의 것이니 그것을 주어 시선이나마 구할 수 있다면 죽음도 값싼 일이다. 그러니까 제발.

“잘못, 잘못했습니다.”

윤오의 차 앞, 운전석으로 향하는 그를 가로막았다. 허리가 욱신거리고 다리가 휘청여 바닥으로 털퍼덕 내려앉았다. 내게 익숙한 낮은 자세로 그의 발치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다고, 잘못했다고, 기계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떠나지 말라는 마음을 담고 버리지 말라는 바람을 담았다.

아스팔트를 긁던 손으로 그의 바지 아랫단을 감아쥐었다. 차마 당기지도 못하고 그렇게 매달렸다. 변명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어느 것도 입 밖을 나서지 못했다.

내가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사랑이라는 말은 그중 어떤 것도 면죄할 수 없어서, 그가 버리면 버림받아야겠다는, 놓아주어야겠다는 그 다짐이 너무나도 가볍게 흩어지는 것이라.

이미 나는 그에게서 자유를 빼앗았다. 그를 가이드로 등록해서 강제로 나를 만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고, 모르는 사이 그는 나 때문에 이동을 제한당했다. 존재로 지은 죄가 또 하나 드러났다. 내가 싫을 만했다. 싫어해도 마땅했다.

그래도 그러지 말아 주길 바랐다.

“이선.”

“잘못했어요…….”

“대답해.”

“……네.”

눈앞의 무릎이 서서히 내려와 검은 아스팔트를 쿡 찍었다.

턱을 걸어 올리는 손가락에 고개가 들려 올랐다. 일렁이는 시야에 윤오가 있었다.

윤오가 나만큼 낮아져 있었다.

“뭘 잘못했어.”

“전, 부……. 전부 제 잘못입, 니다.”

한숨. 가슴에 거멓게 공백이 뚫렸다. 눈가가 따가워 질끈 감았다. 단단히 얼어붙은 울음이 가슴팍에 치밀었으나 서러움이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여행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장장 2년이나 이동 제한을 감수하고도 나를 만나 준 이 다정한 사람. 그런 사람에게 아직도 이렇게나 바라는 게 많은 나는 정말 염치가 없다. 주제를 몰랐다.

이다지도 하찮은 주제에 그의 마음까지 탐을 내었다. 나를 품어 주었다고 멋대로 기대했다. 좋을 대로 해석했다. 욕심을 키웠다.

자조적인 생각이 깊어지고 어두워질수록 숨이 막혔다. 폐가 조이고 목이 메었다. 들이쉬는 숨만 있고 내쉬는 숨이 없었다. 꼴딱꼴딱 목이 조여서 침을 넘길 때마다 상체가 휘청거렸다.

이제 다시 세상에 혼자 내몰린다면, 이번에는 홀로 설 수가 없었다. 윤오가 없었던 때로 돌아갈 수가 없다. 이제는 그렇게 살 수가 없다. 세상이 철저하게 나를 외면하여 흔들렸다.

더운 숨이 스치고 이내 입술이 맞물렸다. 부들거리고 빠끔거리며 숨을 뱉지 못하던 입이 윤오에게 가로막혔다.

말랑한 살이 비벼지고 더운 입술이 내 벌어진 입술을 하나하나 물었다 놓았다.

“정신 차리고 숨 쉬어.”

주문처럼 그 말이 내 숨을 틔웠다. 허파에 고인 숨이 모조리 쏟아져 나가고 어깨가 들썩일 적에 도르르, 눈물 한 방울이 예고도 없이 흘렀다. 영문을 모르는 눈가를 기다란 손가락이 긁어 물기를 훔쳐 내고, 재차 입술이 맞닿았다.

메말라 희게 튼 입술이 그의 부드러운 입술을 긁었다. 몇 번이고 닿았다 떨어진 다음에는 입술을 길게 가로로 가르며 젖은 살덩이가 파고들었다.

눈앞이 아찔하고 어깨가 튀어 오르는 감각이었다. 무심코 뒤로 빠지려 했지만 턱이 단단히 붙들렸다. 어쩌면 그러지 않았지만 묶인 듯 피할 수 없었다.

그의 코가 내 뺨을 스치고 그의 검정이 내 속을 주시했다. 그 눈동자에 비친 것이 온통 나였다. 못난 내가 그 속에서는 좋아 보였다.

더운 혀가 입천장을 쓸고 여린 입술 안쪽 살을 훑을 때마다 등줄기가 오싹하게 저몄다. 이내 눈이 질끈 감겼다. 간지러워 몸이 움츠러들고 심장은 지나치게 뛰었다.

그의 바지를 감아쥔 손과 시린 바닥을 긁으며 곱은 손이 바르르 떨었다. 주저앉은 채로도 다리가 떨렸다.

둘 곳 모르는 내 혀를 가져다 그의 것에 감을 때는 다시 숨이 멎었다. 말캉한 근육 덩어리가 유연하게 휘어져 입 속을 헤집고, 혀끝이 딸려 나가 그의 입술 새에 물렸다.

작게 빨아들일 때에는 하으, 목구멍 새로 신음이 흘렀다. 어깨가 움츠러들고 기어이 자세가 흐트러져 윤오의 가슴팍에 부딪혔다. 쏟아지듯 그 품에 이마를 놓은 채 거친 숨으로 등이 푹푹 가라앉았다 올랐다.

크고 더운 윤오의 손이 나를 만졌다. 팔뚝을 쥐어 옆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고 등을 쓸어내려 진정시켰다. 가쁜 허파에 밀려나느라 빠듯한 갈비뼈가 조금씩 제 자리를 찾았다. 그를 잃는 두려움에 고달픈 나를 윤오가 안은 탓에, 계속해서 나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리고…….

깜빡깜빡. 눈이 감겼다가 뜨였다가, 다시 찾은 그의 품에서 시리던 몸이 온기를 되찾았다.

윤오의 향, 윤오의 품, 윤오의 온기.

떨리는 손이 그의 벌어진 코트 틈으로 옷깃을 잡았고, 느리게 이마가 그 품에서 떨어졌다. 아연한 궁금증이 더욱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윤오의 검정과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일어난 일을 믿지 못하는 내 입술이 연거푸 키스를 받았다.

멍하니 벌어진 틈으로 뜨거운 혀가 들어와 방법을 모르는 내 혀를 휘감고 빨아올렸다. 옆을 간질일 때는 저절로 눈가가 감기고, 입천장이 핥아질 때는 어깨가 좁게 모였다.

온통 처음인 그 감각의 홍수에서, 나는 어찌할 바 모르고 헐떡였다. 빠듯한 숨이 모조리 윤오에게 삼켜졌다.

겨울의 초입이 더는 춥지 않을 때까지 키스가 이어졌다. 나는 혀를 어루만지는 생경한 감촉뿐 아니라 윤오와 내게서 나는 젖은 소리만으로도 팔꿈치를 떨고 목을 움츠렸다. 윤오가 주는 이 낯선 감각이 좋고, 눈을 뜨면 새까만 눈동자에 내가 비쳤다.

뒷머리를 감싸 쥔 큰 손이 키스를 더욱 깊게 했다. 기분 좋은 부분을 만져지기 위해 기꺼이 입술을 열고 혀를 맡겼다.

때때로 손끝이 뺨을 두들기면 모자란 숨을 채워 넣었다. 허파를 들썩이며 흔들리는 몸을 윤오가 지탱했고, 나는 모르는 척 그의 품에 이마를 문지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그 기분 좋은 행위를 바랐다.

찬 공기에 식은 입술은 그의 입술이 닿으면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깨물리고, 빨아 올려지고, 낱낱이 괴롭혀지는 와중에도 내 것이 아닌 양 뜨거웠다. 모조리 줘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이미 주어 버린 것 같기도 했다.

두근두근, 몸의 곳곳에서 박동이 뛰었다. 심장이 귀에서도 뛰었다. 이명 없는 귓가는 잘도 윤오의 숨소리를 잡아채고 쭈뼛 등줄기를 세웠다.

하아, 잠재워지는 파동과 잦아드는 통증과 차오르는 기쁨이 뻐근하게 속을 메웠다. 늘 구멍이 나 있던 가슴팍이 윤오를 받고 모처럼 따뜻했다.

다시 숨을 고르는 동안 그의 셔츠에 이마를 기댔다. 이렇게 안기는 일이 두 번 다시 없을 줄 알고 바닥까지 추락한 마음이, 그렇게 하면 나아졌다.

한번 얻은 이 다정을 이제는 도무지 놓지 못할 것 같았다. 그것마저 내 욕심인 것 같다가, 내게 이 다정을 가르친 윤오의 탓도 있다 생각하면 코끝이 찡했다.

어느 순간 쥐어 잡힌 어깨가 그의 품에서 성급하게 떼어졌다. 양어깨를 잡혀 힘없는 목을 달랑거리느라 선뜻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끔뻑끔뻑,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 내려다보니 내 근무복 상의가 젖어 있었다. 붉게, 검게.

아, 상처가 다시 벌어졌나 보다. 입원 기간을 줄인 탓에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고 작은 일에도 쉽게 터졌다.

“……씨발. 뭡니까.”

“…….”

“다쳤어요?”

“……네.”

몽롱한 정신이 가까스로 대답했지만, 언제나처럼 나는 정답을 찾지 못한 모양이다. 윤오의 미간이 화난 듯 일그러졌다. 그보다 아래의 입술이 다시 욕설을 그렸다.

매번 가슴이 아팠는데, 지금은 그 모양과 젖은 모습이 내 주의를 끌었다. 조금만 더 할 수 있을까. 너무 좋은 이 행위를 계속 이어 갈 수 있을까.

그러나 윤오는 그대로 나를 일으켰다. 가벼운 몸뚱어리가 손쉽게 딸려 올라갔으나 제 발로 서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올 때와는 다른 이유로 다리가 떨렸다.

오랫동안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어서인 것도 같았고, 무릎이 떨리게 좋았던 그 키스 때문도 같았고, 무엇보다 윤오가 다시 나를 품어 주었기 때문 같았다.

반쯤 그에게 기댄 채, 왔던 길을 거슬러 가이드 센터로 들어갔다. 거리낌에 멈칫거리고 주춤주춤 망설였지만 윤오가 멈추지 않았으므로 그대로 이끌려 가야 했다. 나는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게 벼랑 끝이더라도, 사막과 호수와 어둔 절망과 지옥이라도.

가이드 센터에 딸린 의무 병동에서 상처에 새로 드레싱을 받고 수액을 맞았다. 그동안 윤오는 침상 곁에서 가이드 교육 자료를 훑어보았고, 때때로 간단한 질문을 했다. 나는 창을 뒤에 둔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느라 그 말을 놓치거나 겨우 네, 하고 짤막한 대답을 뱉었다.

“겉옷은 어디 있습니까?”

“아.”

그제야 셔틀에 코트를 놓고 내린 것을 깨달았다.

마음이 급해 서두르느라 입지 않고 들고 나선 것과 옆 좌석에 내려놓은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내내 시리고 추운 것이 마음 탓인 줄만 알았는데 어느덧 겨울이 와서 이 떨림에 동조했나 보았다.

바보 같은 실수를 한 나를 한심하게 보면 어떡하나 눈을 굴렸는데, 그는 별말 없이 시선을 내렸다.

“한타 씨에게는 사과하세요.”

“네.”

윤오는 그 시원찮고 순순한 대답에 한숨을 내쉬었지만 더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등을 높여 놓은 침상에 기대앉아 내내 윤오를 바라보다가, 그저 그 목소리를 듣는 것이 좋아 멍하니 있다가, 문득 한타에게 증오를 품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가슴이 뜨끔했다.

한타에게 미안한 마음은 조금이었지만 윤오에게 못난 모습을 들킨 무안함이 풀썩 고개가 꺾일 만큼 무거웠다. 참았어야 했는데.

그런데 또 다른 에스퍼가 윤오의 손을 잡을 걸 떠올리면 다시 화가 치밀고, 살의에다 주제넘은 서운함까지 기어 나왔다. 성정이 순해 마음이 쓰였던 한타든, 아니면 얼굴도 모르는 다른 누구든.

누구도 내게 윤오보다 중요할 수 없었고, 내 속에서 윤오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못난 감정들을 두루 생성했다.

윤오. 윤오. 내 가이드. 내 세상.

또 하나 내보인 결점에 떳떳하지 못한 고개를 숙이니, 솜이불을 덮은 두 무릎 위로 그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그것이 또 좋아 마음이 설렜다.

언제고 그를 잃는 상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에게, 윤오가 조금씩, 또는 성큼 다가왔다. 조각 난 삶의 미련이 그 바람에 흩어지지 못하고 다시 모였다. 그게 좋은 내가 밉지 않았다. 윤오의 포용은 그렇게 마냥 좋았다.

어쩌면 나도 더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모든 일이 끝나도 그의 곁에서 맴돌 수 있게 해 준다면. 가까워질 수 있다는 희망만을 주어도 나는 그것을 양분 삼아 오래도록 살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더 살고 싶었다.

엉망으로 망쳐 버린 관계를 후회하느라 매일 밤 괴로워도, 그로 인한 후회는 내가 세상을 원망하고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것과는 달랐다. 평생을 진 죄책감의 굴레에서 도망치고 싶도록, 세상에 바라는 것이 늘어나고 다시 살고 싶도록 했다.

찾지 못했을 때에도, 나타나서도 나를 살게 하는 유일한 사람. 울게 하는 유일한 사람.

“왜 울어요?”

“네…….”

대답해야 한다는 조금함만으로 제대로 되지 않은 대답을 내어 놓고 울대를 꿀꺽 넘겨 울음을 삼켰다.

그가 언제고 일어나 나가 버릴 것 같아 불안했고, 그러면서도 내 곁에 앉아 기다려 주는 저 모습에 감격이 차올랐다. 보고 있어도 그리운 사람. 여태 살아 낸 나에게 세상이 준 보상. 머나먼 미래를 기대하고 미련을 갖게 하는 덫.

내게 구속할 수 없다면 나를 주어 그 손바닥 위에서 멋대로 굴리도록 하고 싶은 남자. 모든 것을, 가진 모든 것을 주고도 모자라 불가능한 일이라도 도전하게 할 사랑. 집착. 열망. 그다지도 특별하고 온전한 이상.

나의 낮, 나의 여름, 나의 검정.

“또 그 ‘업무’를 한 겁니까?”

“네……. 아, 아닙니다. 파견을 갔었습니다.”

윤오에게 드리운 볕을 시기하고 칭찬하며 그의 검은 머리칼 끝이 반짝이는 것을 보던 중이었다. 내리뜨고 책자를 보는 그 눈매와 입술을 훔쳐보며 좋아하던 중이었다.

“그럼 그건 무슨 상처지. 칼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담담한 수긍에 윤오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내 배 위로 손을 올렸다. 얻어 입은 큼직한 티셔츠 너머 상처가 있는 자리.

아찔한 광경에 움찔, 몸이 튀어 오르려다 그의 손바닥 아래 얌전히 가라앉았다.

“상처가 터질 정도면 아직 입원해야 하는 거 아닌가.”

“네. ……아니요. 이제 괜찮습니다.”

“입원했었습니까?”

“네.”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윤오를 불쾌하게 하는 모양이었다. 다시 인상을 쓴 그 미간을 어떻게든 하고 싶고 만져 보고도 싶었다. 그러지 못해 아쉬운 손끝이 꼼지락댔다.

무심코 세운 손톱으로 입술을 꼬집었는데, 그 손이 윤오에 의해 떼어졌다. 웅얼거린 대답이 듣기 싫었을까. 나는 얼른 입술을 말아 감추었다. 아직 남은 감각이 조그만 심장처럼 얇은 입술 아래서 뛰었다.

끌어 잡힌 손에 가슴 뛰어 하는 동안, 반팔 소매 아래로 주황빛 얼룩이 진 팔뚝이 고스란히 펼쳐졌다. 흉터 때문에 링거를 맞지 않는 왼팔. 얼룩이 끝나는 손등에 윤오의 손이 겹쳤다.

갈라져 피가 비친 옆구리의 칼집은 그 순간 아득히 사소해졌다. 정적과 충족감이 나를 채우고 무엇인지 모를 마음을 고백하고 싶은 충동이 슬금슬금 기어올랐다. 내게만 사랑이어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자랐다.

“2주 동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파견을 다녀왔습니다. 입원을 했고, 장례 의식……이 연달아 있었습니다. 이후 이틀을 더 입원했습니다.”

“……퇴원은 언제였습니까.”

“좀 전, 아니, 점심시간 전에 퇴원했습니다.”

윤오는 생각을 정리하는 표정으로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질문이었다.

“왜 군복입니까?”

“근무를…… 하고 왔습니다.”

“근무.”

“네.”

입술이 계속해서 간질거렸다. 앞니로 자근자근 깨물어도 화끈거리고, 두근거리고, 아쉬운 윤오의 입술을 되새겨 냈다.

“그 몸으로. 접견?”

“네? 네.”

왼손을 파고드는 윤오의 손이 더웠다. 언제든 새롭게 피가 돌게 하는 윤오와 내게 훈기를 일으키는 그의 손. 너무 좋아 눈가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툭 하니 떨어졌다. 서럽지도 무섭지도 않은 한 방울이었다.

“낫는 데는 얼마나 걸립니까?”

“다 나았습니다.”

“…….”

마른 손가락 마디를 누르는 센 힘.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무언가 질책 같아 윤오의 눈치를 봤다.

그의 시선은 차례로 내 손등과 상처가 있는 부위, 긁고 씹어 부르튼 아랫입술을 보았고, 잠시 머물던 눈길은 거의 다 떨어진 수액을 확인했다. 그가 일어나 호출 버튼을 누르고 나직이 말했다.

“가죠.”

“네? 네.”

어디로? 의문보다 빠르게 일어나며 오른팔에 붙은 테이프와 카테터를 한 번에 뽑았다.

성급히 일어서는 나를 다시 앉히고, 뽑아 낸 링거 줄을 든 내 팔을 윤오가 채어 잡았다. 그의 미간이 다시 좁아졌다. 그 장면을 보는 심장이 덜컹덜컹 뛰었다. 또 뭘 잘못했나?

“……죄송합니다.”

“왜 사과를 합니까. 무슨 잘못 했어요?”

“……잘 모르겠습니다. 알려, 주시면.”

“잘못한 거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내쉬는 한숨이 길어 나는 마냥 조마조마할밖에 도리가 없었다. 내가 정말로 잘못한 게 없다면 저렇게 답답해하지 않을 것 같아서.

팔이 놓이고, 나도 서둘러 침상에서 내려섰다. 센터의가 강권한 영양 수액과 내 곁을 지켜 준 윤오 덕분에 컨디션이 무척 좋았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훨씬. 내 고질적인 불안까지도 그의 존재로 담뿍 달램을 받았다.

“입고 있어요.”

묵직한 코트가 어깨를 덮었다. 나를 감싼 따뜻한 코트에서 윤오의 향이 났다. 놀란 내게 그는 그대로 입고 있으라 했고, 덩치에 맞지 않아 흘러내리려는 코트를 다시 추어올리며 단추를 손수 잠가 주었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뎌 그저 벌어진 입술에, 재차 윤오의 숨결이 닿았다.

젖은 소리와 매끄러운 감촉에 목이 움츠러들었으나 코트 옷깃을 잡아챈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개가 들려 올랐다. 더운 숨이 몇 번이고 겹쳤다. 뜨거운 살덩이가 입 속을 침범해 내 혀를 불러 빨아들였다.

하아, 가쁜 신음을 그에게 주고 젖은 타액을 받아 삼켰다. 어찌할 줄 모르고 굳은 내 혀가 몇 번이나 그에게 놀려지며 온기를 받았다. 이명이 사라진 귓가에 축축한 소리가 감기고, 저리지 않은 손끝이 둥글게 말아 쥐어졌다.

“어이쿠. 죄송, 실례합니다!”

드륵, 병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 나는 그저 황급히 떨어진 입술이 아쉬워 모자란 숨을 들이쉬며 윤오를 올려다보았고, 윤오는 그의 큰 손으로 눈가와 이마를 가리고 있었다.

후회하는 걸까? 나는 좋았는데. 좋은데. 가슴이 설렘과 걱정에 뒤죽박죽이었다. 등줄기가 저리고 머리는 아직 몽롱했다.

“……들어오십시오.”

“아, 예, 뭐. 괜찮습니다. 가이딩은 좋죠. 아무럼요. 회복에 도움이 많이 됩니다.”

“…….”

“그 뭐냐, 외상을 심하게 입으면 회복력이 떨어지니까요. 자주 할수록 좋지요. 그럼요. 예.”

가이딩.

의사의 말대로 내 몸은 새로운 방법의 가이딩으로 아주 가뿐했다. 그 방법이 키스를 닮아서, 키스 같아서 더욱.

그 감촉이 설렘으로 남은 아랫입술을 혀로 핥고 이로 물었다. 아쉽고 모자랐다.

흘끗 나를 내려다본 윤오가 엄지를 들어 내 입술을 슥 훔쳤다. 나도 모르게 빼꼼 혀끝을 내어 그 손가락을 핥고 다시 자르르 감각에 떨었다. 얼른 입술을 말아 숨긴 내게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다가왔다.

“이런, 주사는 벌써 뽑으셨네요? 팔을 좀 볼 수 있습니까?”

끔뻑끔뻑 다시 백치로 돌아간 것처럼 눈만 감았다 떴다, 시간을 보낸 후, 겨우 의사를 돌아보고 그가 한 말을 이해했다. 팔을 들어 올렸으나 앞이 잠긴 커다란 코트에 풀썩 걸렸다.

꼼질꼼질 옷 안에서 소매로 오른팔을 꺼낸 다음에는 윤오가 팔꿈치까지 옷을 걷어 주었다. 마른 팔뚝이 드러나고 주사 카테터가 꽂혀 있던 자리에 가느다랗게 피 흐른 자국이 있었다.

“아이구, 이거 살살 뽑으셔야 하는데……. 혈관은 무사한 것 같지만 멍이 들 수는 있겠네요. 소독하고 반창고 붙여 드릴게요. 손톱이 다쳤으니 씻을 때 조심하시고요. 수액도…… 예, 다 맞으셨네요. 바로 가시면 되겠습니다.”

“수납은 어디서 합니까?”

“수납이요? 아, 여기는 중앙 소속 기관이라 중령님이나 가이드분은 치료비가 공제됩니다. 그, 뭐냐, 중령님께서 이미 납부하고 계실 겁니다. 모르셨나 보네요? 혹시 건강 검진 같은 거 하실 때 되셨으면 가이드분도 이쪽으로 오세요. 검진도 마찬가지로 공제입니다.”

시설과 설비가 어쩌고저쩌고하는 이야기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지만 그 설명을 듣고 있는 윤오에게는 관심이 있었다. 마냥 올려다보는 동안 소독한 팔 안쪽에는 동그란 스티커가 붙었고, 커다란 소매가 다시 흘러 손끝까지 가렸다. 안기지 않고도 안겨 있는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생생한 망상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가물거리는 채로 윤오를 따라 나섰다. 무릎까지 덮은 코트 덕분에 바깥 공기가 조금도 차갑지 않았다.

* * *

수수데 에이첸라호 통제구역 탈환 작전.

작전이 길어질수록 키비슈스의 이능이 비할 데 없이 강력해진 것도, 그의 조급증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대단한 물량 공세. 반란군과 그 각성 단계가 다양한 변이체들이 끝도 없이 쏟아지고 대개는 사람의 형태를 기반했다.

대상이 죽지 않을 정도를 치밀하게 재는데 익숙해진 키비슈스는 점령지의 주민들과 납치한 사람들로 미처 죽지 못한 시체를 수도 없이 만들어 냈다. 에스퍼와 가이드를 만들고 남은 ‘사람이었던’ 것들.

부풀고 일그러져 그 형태가 끔찍한 시체들은 전방에 앞세워져 장벽이 되었다.

이지를 잃은 변이체는 주변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한다. 반란군은 그것들 뒤에 교묘하게 숨어서 연합군을 노렸다. 연합군은 뒤따를 후폭풍을 방지하기 위해 변이체 및 반란군의 공격을 모두 감당해야 했으므로, 작전의 난도가 높아졌다.

정찰로 짐작하고 세운 계획보다 전황이 심각하게 돌아갔다. 전력을 보강하고 작전을 재구상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보다 가능한 빠르게 진행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아직 다 못 거둔 지난 작전의 전사자들 때문이었다. 사야야가 죽은 그 작전에서 전사한 에스퍼와 일반 병사들.

반란군이 일부러 살려 보낸 몇몇은 모두가 사망했다고 보고했으나, 변이체가 되거나 그대로 방치되어 훼손되었을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 경우 이미 찾을 수 없거나 찾아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란군이 협상을 위한 카드로 시신들을 챙겨 두었을 가능성을 무시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군부는 ‘선’을 표방했고, 이미 죽은 자들의 넋보다는 연합국과 점령지에 넋을 기리는 모습을 보이는 데 충실했다. 그러기 위해 그 자리에 아직 살아 있는 군인들을 다시 전장 속으로 밀어 넣었다.

죽은 자를 측은히 여기는 것도, 기어이 나서고야 마는 것도 아직은 살아 있는 개의 몫이다.

“새끼야. 뒤로 빠지라니까.”

“너나 빠져. 주노 안 본다고 자꾸 욕하지 말고.”

“아, 망할.”

팔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위를 날이 선 중검으로 갈라내고 다시 준준의 등 뒤로 피했다. 놈의 염동력이 주변의 흙과 바위와 나무 등을 거칠게 긁어 파고 뒤집어엎었다. 가시거리를 확보하고 누구보다 앞선 자리에서 전선을 지켰다.

준준의 파동을 키운 지 두 시간정도 지났을까. 예민해진 기감에 비릿한 냄새가 맡아졌다. 호숫가를 붉고 검게 물들이는 피와 점액의 냄새와는 다른 신선한 상처의 냄새. 오랜만이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준준의 살이 녹아내리며 나는 냄새.

“슬슬 전열을 가다듬을 때가 됐어. 정리하고 후퇴하자.”

“닥치고 진폭이나 키워. 호수까지 단번에 간다.”

“……30분. 30분 지나면 감쇠로 제어 돌릴 거야. 호수까지 가든 못 가든 억지로 끌고 갈 줄 알아.”

“지랄.”

한동안 볼 수 없었던 거친 모습이었다. 살이 짓무르고 이능에 의한 부작용이 심해질수록 준준은 거칠어졌다. 통증이 커질수록 크게 분노했다. 참고 버티기 위해 놈은 대상을 정하고 화를 키웠다.

그나마 이제 제 몸을 깎아 죽도록 달려드는 걸 걱정할 필요는 없다.

주노 얘기를 꺼내기만 해도 풀썩 분노가 깎여 나가는 멍청이라.

피차 마찬가지인가.

“지원 요청해야겠어.”

“씹팔.”

변이체는 파동에 반응한다. 요란한 염동력을 한껏 키워 올린 준준에게로 시커멓게 표피가 변색된 변이체들이 달려들었다. 살갗이 갈라진 틈으로는 붉은 속살이 보이고 되직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대다수는 단순 근력이 상승하고 육체가 단단한 수준이나, 때로 간단한 이능을 가진 경우도 있었다. 그 경우 처리 난이도가 불쑥 올라갔다.

괴물 준준에게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지형을 바꿔 버릴 정도의 압도적인 염동력이 전방을 거세게 휩쓸었다. 생물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이능. 그러나 그것이 나자빠진 시체라면 여지없이 휘말려 흩날렸다.

콰득, 팍, 떠오른 지물들과 좀 전까지 움직였던 것들이 부딪혀 사지가 조각나고 터졌다. 짙은 피바람이 불었다.

나는 준준의 뒤, 피와 고름으로 묵직하게 젖은 전투복 뒤에 숨어 엉망으로 튀는 점액을 피했다. 놈의 파동을 정교하게 다루어 튀어 나가려 하면 잡아채고, 가라앉으면 끌어 올렸다.

한창 전투 중이라 땀에 젖은 와중에도 오한이 일었다. 거칠고 거대한 파동을 제어 범위에 놓는 일은 언제든 쉽지 않다.

정해 놓은 반시간이 흘러가는데, 반군은커녕 몰려드는 변이체를 처리하는 것으로 벅찼다. 사막은 미끼였을까, 아니면 사막도 이곳처럼 난장판으로 만들 속셈이었을까. 그러나 그에게 많은 시간이 남지 않은 것이 정황으로 뚜렷하게 드러났다.

늘 웃고 있는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그 속셈을 과연 알아낼 수 있나 싶은 키비슈스의 초탈한 표정이.

이다지도 많은 희생이 몇 년이고 뒤따랐다. 고작해야 개인의 소망에 의해서.

붙잡아 멈추게 해야 한다. 죽여야 한다.

내 첫 기억, 어린 나를 돌보던 모습과 가식이어도 상냥했던 태도를 차근히 지웠다.

오래도록 힘겨웠던 그 일은 윤오를 떠올리면 너무나도 쉽게 가능해졌다. 윤오가 심어 준 의심이 내게로 전해져 객관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더는 외면하지 않고, 진실을 마주 볼 수 있도록 했다.

무엇보다 내 가이드의 존재를 알아챈 이상, 윤오가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을 좌시할 수는 없다. 키비슈스를 멈춰야 한다. 그는 죽어야 한다. 가능한 한 빠르게.

무전기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본진. 여기는 준준. 쿼터 이내 퇴각 예정. 지원 요청을 바란다. 위기 규모 3급 이상. 반복한다. 최전선 준준, 쿼터 이내 퇴각. 지원 요청 바람. 규모 3급 이상.”

“씹팔.”

“미리 말했어. 너 긴급 가이딩 필요하고 지금 충분히 밀었으니까 퇴각한다. 마무리해.”

준준은 짜증스럽게 투덜거렸지만 이능을 쏟아부어 몰아치는 흙먼지로 인근을 쓸어 버렸다. 대신 전선을 지키게 될 다른 에스퍼를 위한 일이었다. 나는 준준의 뒤를 지키며 마구잡이로 뻗어지는 변이체의 원거리 이능을 저지하고 급습하는 반군을 베었다.

이렇게 복잡한 전황일수록 사야야의 천리안이 아쉬웠다. 그녀는 상황을 보고, 흐름을 읽고, 적절한 전력 분배와 요점을 간추린 보고에 능한 인재였으니까.

아쉬움은 길지 않았다. 길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따지자면 잃은 전력은 한둘이 아니고 누구 하나 허투루 쓰일 무능한 인력이 아니었다. 그렇게 소모되어서는 안 될 안타까운 사람들.

가까운 위치의 에스퍼들에게도 무전을 보냈다. 준준이 곧 퇴각 예정이니 현상 유지를 위주로 몸을 사리라는 내용이었다. 파동이 불안정한 하나는 데리고 갈 셈으로 손짓해 불렀다.

치직-.

- 준준. 여기는 본부. 즉시 퇴각 바람. 지원군 준장 데이 도착. 하프 이내 지원 가능. 반복합니다. 여기는 본부. 준준 준장과 이선 중령은 즉시 퇴각 요망. 준장 데이 도착.

“확인.”

곧장 준준에게 알렸다. 커다란 덩치가 손을 크게 털자 뜯겨 나간 나무들과 파헤쳐진 바위, 마침내 죽은 시체가 전방 십여 미터를 크게 미끄러지며 아직 살아 움직이는 변이체들을 쓰러트렸다.

“무리하지 마.”

“어쩌라고. 퇴각해.”

준준과 내가 막던 위치를 보강하기 위해 여럿이 도착했다. 그 에스퍼들의 기운을 잠깐 유지될 만큼 북돋고 곧장 준준과 본진으로 이동했다. 위태로운 다른 에스퍼를 부르고 퇴각하다 확인한 녀석에게도 빠질 것을 지시했다.

후퇴하는 아군의 뒤를 노리는 반군의 급습이 있었으나 이능은 내가, 석궁은 준준의 이능으로 충분히 막았다. 도리어 화살의 부러진 촉이 총탄처럼 날아가 그 목을 꿰뚫었다.

도착한 본진에서 준준을 바로 에스퍼용 의무 막사로 밀어 넣었다. 가볍게 등을 민 것만으로 커다란 덩치가 움찔거렸다. 전투복 안에서 살이 얼마나 녹았을지 쉽게 대중할 수 있었다. 배어 나온 진물로 등판이 젖어 번들거릴 지경이다.

“준장님. 중령님!”

반기는 목소리. 아직 전장이 채 하루도 저물지 않았는데 의무 막사 신세를 지는 멍청이가 또 있었다. 여기, 간이 침상을 차지하고 앉은 녀석, 한타.

놈은 지원 가이드의 손을 잡고 수액을 맞으며 등판에는 냉매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다. 곧 준준이 취할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어중간하게 일어나 경례하는 녀석을 대충 손짓해 앉혔다. 빈 침상에 준준을 이끌고 의무병에게 준준의 상태를 대신 설명한 다음 가이드를 요청했다.

꽤 열이 받은 저 멍청이는 다른 가이드의 손을 타는 걸 싫어할 게 뻔하므로, 지원 가이드가 괜히 험한 말을 듣고 움츠러들지 않게 지키고 있을 예정이다.

“중령님은 가이딩 지원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괜찮다.”

“괜찮기는 십팔. 저 새끼도 하나 붙여.”

“예, 알겠습니다.”

한숨을 쉬고 준준을 흘겨보았지만, 놈은 어쩌라고, 하는 눈빛으로 나를 도리어 쏘아보았다. 어쩔 수 없이 빈 침상에 자리 잡았다.

‘내 가이드’를 두고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는 데서 느끼는 거리낌은 나 역시도 피할 수 없다. 누구도 윤오만큼 나를 달랠 수 없으니까. 윤오와 다른 가이드들은 아무런 다름도 느끼지 못할 테지만 내게는 그 차이가 하늘과 땅 같아서.

준준이 날뛴 만큼 내게도 피로가 쌓였고, 어차피 자리를 지킬 거 미약한 가이딩이나마 받아 다음 전투를 준비하는 게 길게 생각할 필요 없이 합리적이다.

……판단은 그러했으나 계속해서 윤오가 떠올랐다.

피바람이 불고, 변이체의 사지가 떨어져 나가고, 반군을 베어 죽이고, 준준이 죽거나 내가 죽을 수도 있는 그 지경이 되어서야 머릿속에서 떼어 놓을 수 있는 사람. 어쩌면 그 지경에서도 나를 지탱하는 단 한 사람.

윤오는 내가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을 텐데.

윤오를 떠올리다 그가 한 말이 자연스레 연상되어 한타에게도 사과를 했다. 저번에 말이 심했다고 고개를 숙이자, 붉은 눈이 휘둥그렇게 되어 외려 죄송하다, 감사하다 버벅 버벅 대답을 했다. 중령님의 가이드분인 줄 몰랐다, 그런 쓸데없는 말도 덧붙였다.

호위와 함께 곧 지원 가이드 둘이 도착했다. 간단한 접촉 후 서로에게 조금 더 맞는 가이드를 분배하여 손을 잡았다.

준준은 엎드려 등의 상처를 가라앉혔고, 나는 누워서 수액을 맞았다. 한때 수액으로 연명하다시피 했던 만큼, 매번 다르지만 막사의 천장을 올려다보는 구도만은 익숙했다.

“중령님, 제가 이렇게 가이딩을 하게 되어서 참 영광입니다. 준준 준장님도 물론이고, 이선 중령님을 정말 뵙고 싶었거든요. 제가 전장 지원 가이드로 지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나저나 제가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요. 많이 피로해 보이셔서.”

“이름이 뭐지?”

“예? 아! 로두입니다!”

“로두. 사담은 자제하지.”

“아……. 죄송합니다.”

“가이딩은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어.”

“예, 감사합니다!”

그대로 팔을 들어 눈을 덮었다. 가이드가 왜 에스퍼한테 감사해하는 거지.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왜 다들 나한테 감사해하지. 그런 쓸데없는 의문을 가지면서.

두통은 가라앉았지만 붙들린 왼손의 미지근한 열기가 내내 불쾌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의무 막사의 문이 벌컥 젖혀지고 짧은 머리칼의 키가 큰 여성이 들어섰다. 바로 뒤로 엇비슷한 키의 남자도 함께였다. 그의 서글서글한 낯이 언제나처럼 웃음을 띠고 있었다. 같이 다니는 데이와는 다르게.

“준준. 이 형편없는 새끼.”

“십팔.”

“이선 너도 마찬가지야. 진작 퇴각했어야지. 이게 무슨 꼴이야?”

“데이. 라이얀.”

“중령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아니죠? 그쵸? 예, 죄송합니다~.”

라이얀은 똑같은 인사를 준준에게도 했다가 욕을 먹었다. 그래도 키득거리며 웃어넘겼다. 어깨에 멘 소총 끈을 파닥거리며.

상관이 보았다면 당연히 지적해 마땅한 일이었지만 그의 유일무이한 상관은 데이 준장이었다. 군복을 입고 있지만 그는 군인이 아니라 데이의 가이드이자 파트너였으니까.

“그래서. 보고해. 키비슈스 확인했어?”

“아니. 있을 것으로 짐작은 되지만 확인은 못 했어. 현장 변이체들의 파동 수준이 높아. 개화 시기는 멀어도 1주 이내. 반란군도 꽤 체계적이고. ……같이 갈까?”

“됐어. 자빠져 있어, 이 쓸모없는 것들. 내가 다 죽이고 온다.”

“예~. 갑니다~. 회복하십셔~!”

돌아서는 두 사람의 등 뒤로 준준은 욕설을 뇌까렸다. 누워 있는 것이 분하고 짜증이 치미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준준이 강력해도 가이드를 대동하고 다니는 데이와는 감히 비빌 수가 없다. 그건 내가 준준에게 붙어 이능을 증폭시켜도 마찬가지다.

능글거리며 손을 흔드는 라이얀이 뒷걸음질로 막사를 빠져나가고, 나는 준준 앞에서 겁에 질린 가이드를 위해 놈을 닥치게 했다.

냉기를 다루는 데이는 에이첸라호 호수를 꽁꽁 얼리고 돌아왔다. 승전이었다.

키비슈스는 찾지 못했고, 몇몇 생포한 반군이 줄줄이 묶여 막사로 들어왔다. 자살을 막기 위한 재갈을 입에 물고서 하나같이 허벅지를 찔려 피를 줄줄 흘렸다.

허벅지에 관통 수준의 자상을 입히는 것은 일종의 에스퍼 포박법이었다. 심각한 외상을 입을 경우 치명상의 회복을 위해 이능력이 전반적으로 약해지는 것을 이용한 방법.

이능을 제어하는 종류의 에스퍼가 드물고 생살에 칼을 찔러 넣는 것은 간단하기 때문에. 주로 목숨에 지장이 없는 다리를 우선하는, 상처 입고 상처 입히는 것이 익숙한 자들이나 택할 효율.

감지 특화 에스퍼에게 파동 수준을 확인받은 다음 피웅덩이에 꿇어앉은 그들의 앞에 섰다. 말보다 손과 이능이 빠른 준준과 데이보다는 내가 나서는 편이 피를 줄일 수 있었다.

“키비슈스의 위치는?”

“…….”

“하나씩 확인하도록 하지. 나머지는 밖으로.”

“예, 알겠습니다.”

괜한 시간을 끄는 번거롭고 상투적이지만 의미는 있는 심문법.

이 분야를 담당하는 전문가들이 물론 있지만 지금 지휘 막사 안은 계급만 높고 심문에는 하등 도움 되지 않는 에스퍼들만 모였다.

통제구역에 인접하게 본진을 꾸린 까닭에 일반군이 오지 못한 탓이고, 심문에 능한 이능을 가진 에스퍼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멀거나, 또는 진작 병상에 누운 까닭이었다. 바차스 대령처럼.

파견을 나오기 전에 들여다봤을 때도 여전히 엉망이었던 바차스의 모습을 서둘러 지우고 눈앞에 남은 포로의 안대를 벗겼다.

반란군 포로는 어둑한 막사 안을 둘러보다 고개를 치들었다. 여기저기를 살피던 시선은 바로 앞에 선 내 얼굴에서 뚝 멎었다. 빤히 올려다보는 눈이 히죽 휘었다. 재갈을 문 입이 들썩거리며 엉성한 말을 연이어 뱉었다.

“히, 서……. 히서어……. 히, 서.”

“뭐야 저 돌은 새끼는.”

일어나 다가오려는 준준을 손을 들어 말렸다. 대규가 도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고, 이 에스퍼는 다리의 관통상 말고도 충분히 다쳐 있으니 머지않아 죽을 것이다. 그나마 폭주하기 전에 죽여 주는 게 자비로울 정도로 파동도 매서웠다.

“히서, 히이이, 서어은…….”

“나를 알아?”

파득파득 고개가 위아래로 거세게 흔들렸다.

“어떻게?”

“에호, 아은카. 엘호앙, 하…….”

엘로란타.

반군은 스스로 엘로란타 혁명군이라 칭했다. 그것은 반란군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고 그 집단의 수장, 한 명의 에스퍼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키비슈스 엘로란타.

전쟁의 시작. 가이드 혐오 사상의 전파자. 온전한 에스퍼를 꿈꾸는 자.

“키비슈스가 나를 찾아?”

비쭉비쭉 요동치는 놈의 파동을 대폭 죽이고, 이능이 제어된 놈에게 나긋한 말투를 가장해 물었다.

반군의 에스퍼가 한동안 당황스러워하더니 곧 몽롱한 눈을 번들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위로 아래로 고개가 요동칠 적마다 팔이 뒤로 묶인 상체가 따라 뒤흔들렸다.

“어디 있는데?”

“…….”

이능 제어로 부작용이 사라지는 감각을 처음 겪은 에스퍼가 으레 그러듯, 반군은 황홀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내 것이 아닌 그 착각 어린 시선.

언제고 반가운 적은 없었지만 이렇게 에스퍼의 고통을 이용할 때면 더욱, 그 선망과 집착, 놀라움이 뒤섞인 시선이 지긋지긋했다. 나 자신을 더욱 싫어하게 하는 그 착각. 혼동. 간절함.

곧 죽을 이는 재갈 너머로 침을 흘렸다. 상처 입은 자리에서만 통증이 느껴지는 몸이 신기한지 내려다보았다가, 내 뒤에 앉은 데이와 라이얀, 그리고 준준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 번들거리는 눈을 들어 어설픈 발음으로 내 이름을 잇달아 불렀다.

“히이서……. 히서흐.”

그리고 얼음으로 벼려진 창이 반군의 목덜미를 관통하고, 내 이름은 그의 종언이 되었다.

“너 이 씨발 새끼. 역겨우니까 이능 그딴 식으로 쓰지 마. 네가 내 가이드였으면 죽여 버렸어.”

“…….”

“아유~, 진짜 잔인하다으~. 아니, 데이 말하는 게 아니라~ 반군은 죽어도 싸지요.”

잠깐 솟구친 피가 곧 푸른 창을 녹여 그 위를 타고 흘렀다. 붉은 물이 뚝뚝 떨어져 피 웅덩이를 키웠다. 이미 실혈로 혈압이 떨어진 탓에 그 피를 몸에 끼얹는 일은 없었다.

단지 목이 꿰뚫린 시체가 옆으로 기울어 쓰러질 때 고인 핏물이 튀어 군화를 적셨다. 아무렇지 않은 피가 또 한 겹, 어두운색을 덧입혔다.

“에이, 이건 우리 우리 중령님이 잘못했다~. 중령님 가이드분은 알까~? 몰라~.”

데이의 간단한 동작으로 단번에 죽어 버린 반군의 에스퍼를 한참 내려다보다 뒤를 돌았다. 냉기를 피우는 데이는 잔뜩 화가 나 있었고 준준의 표정도 나빴다.

“내가 뭘 했어?”

“이 새끼가?”

“데이야, 그러지 말자! 중령님도 잘 몰라서 그래~.”

데이의 기운이 거세게 피어오르자 총열을 툭툭 치면서 장난을 치던 라이얀이 그녀의 어깨에 금갈색 머리칼을 비볐다. 파동이 금세 잠잠해졌지만 데이는 화가 풀리지 않은 척 라이얀을 밀어 냈다.

“너. 심문에서 빠져.”

준준도 거들었다. 셋 중 그나마 내가 그나마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둘의 의견은 달랐다. 라이얀의 말도 그렇고, 모두가 나를 질책하는 기색.

가이드가 알면? 윤오가 알면 나쁠 일을 내가 또 저질렀나? 무엇을?

“대위 대규, 지금 도착했습니다.”

“들어와.”

아예 막사 밖으로 쫓아내려는 것을 거부하고 내부에 놓인 간이 의자에 몸을 내려놓았다. 라이얀이 활짝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내가 뭘 잘못했지?

한 일이라고는 반군에게 이능을 쓴 것밖에 없다. 이미 충분히 아픈 걸 빤히 알고도 더한 고통을 주기는 싫어서. 겪어 본 적 없을 평안을 알게 되면 에스퍼들은 내게 쉽게 빗장을 열었으니까.

준준도, 데이도 그랬으면서. 제 가이드를 찾기 전에는 그랬으면서.

“다음 반군을 데려오겠습니다.”

“아, 십팔. 진짜 지긋지긋하다. 그냥 다 죽이고 수색하면 안 되냐. 바차스 새끼는 진짜 뒤졌나.”

“안 죽었어.”

울컥 치밀어 한 마디를 내뱉었지만 정말은 확신할 수 없었다. 바차스는 눈에 보이는 생명력과 느껴지는 파동 간의 간극이 심했다. 당장은 약물로 재워 놓고 가이딩이 보급되고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에스퍼 관리동에 집어넣고 가이딩을 끊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

짐작하기로 반란군의 공세가 심해진 지금 시류가 오히려 도움이 된 듯했다. 밑 빠진 독이라도 유용하다면 아직은 살려 둘 만큼.

“우선 자살하지 않도록 암시를 걸겠습니다.”

각자 생김이 달라도 살이 갈라져 흐르는 피의 색은 거기서 거기였다. 가장자리가 검게 엉겨 붙은 붉은 웅덩이 위에 또 다른 반군이 앉혀졌다. 대규가 그자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잠시 후 재갈을 풀었다.

“히윽, 엘로, 엘로란타를 위하여. 엘로란타를 위하여!”

재갈이 풀리자마자 반군은 혁명 구호를 외쳤다.

지독히 나르시시즘적인 구호. 그리고 키비슈스답게 모순적인.

그 가문이 싫다, 언젠가 그렇게 말해 놓고는, 마지막 남은 엘로란타가 되니 반란군에 그 이름을 붙인 자.

어쩌면 그가 마지막 엘로란타가 된 것도 스스로 저지른 일은 아닐까. 이 역시도 윤오가 일깨워 주기 전까지는 추호도 하지 않았던 의심이라, 내심 놀라기도 했다.

구호를 수차례 외친 반군은 이윽고 자해를 시도했으나 뜻대로 혀를 깨물 수도, 머리를 내리찧지도 못하는 상황에 의아해했다.

대규가 침착하게 반란군의 주둔지와 키비슈스의 위치 등, 포로에게 마땅히 물어볼 질문들을 하나씩 나열했고, 상황을 알아챈 듯 반군은 입을 꾹 다물었다. 대규의 암시는 사실만을 말하도록 할 수 있었지만 억지로 말을 시키거나 믿고 있는 사실과 진실을 분간할 수는 없었다.

적절한 대응법을 알고 침묵하는 것을 보면 대규의 이능 역시도 반군 측에 간파당한 듯했다.

몇 개나 되는 연구 시설을 파괴하는 동안 알아낸 걸까. 키비슈스는, 그는 어디까지 알고, 얼마만큼의 정보를 반군과 공유하는 걸까.

내 얼굴을 알아보던 좀 전의 반군이 그렇게 죽어 버린 것이 잠깐 아쉽다가, 다시 사람의 생과 사를 효용으로 판단하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중령님? 우리 데이가 화내서 기죽었어요~? 어유, 우리 애가 나쁘지만은 않아요? 좀 못됐기는 한데?”

“라이얀.”

“웅.”

“닥쳐.”

“네에~.”

데이의 꾸중에 입은 다물었지만 라이얀의 싱글거리는 웃음은 여전했다. 그리고 말 대신 소리 없이 몸을 비틀어 괴상한 춤을 추었다. 그 모습이 어이없어 한숨이 날 지경이었다.

라이얀은 빈손을 들어 소총을 쏘는 시늉을 하기도 하고 총에 맞아 으윽- 하고 넘어가 의자에 풀썩 쓰러지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한 편에서 사람이 피를 흘리고, 바깥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어떻게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지?

데이는 어떻게 가이드를 전장에 데리고 다닐 수가 있지?

죽지 않은 포로 네 명을 순서대로 막사 안에 들여보내 똑같은 질문을 하고 다시 데려가 개별적으로 가두었다. 시간을 두고 방치한 다음 전문 인력에게 맡겨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빼낼 작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죽음을 바랄만큼 괴로울 수 있겠지만 그 담당이 일반인이라면 봐주지 않을 것이고, 에스퍼라면 대수로워 하지 않을 것이다. 잡힌 순간 반군도 각오했을 일.

“데이.”

“왜.”

“내 가이드가 알면 안 될 일이 뭐야?”

데이가 짧은 머리를 흩트리며 와락 인상을 썼다.

“하, 이선아.”

“…….”

“너 씨발, 가이드 생긴 지 얼마나 됐어?”

“2년.”

꽉 채운 2년을 돌아 세 번의 여름을 지났다. 세 번째 겨울이었다.

내가 모르는 잘못이, 아니면 내가 그 잘못을 알지 못하는 것이 그녀까지도 화나게 한 모양이다. 데이의 주변에서 냉기가 풍겨 막사 안이 서늘해졌다. 한기에 취약한 나를 아는 라이얀이 데이를 끌어안아 말리자 훌쩍 키가 큰 두 사람과 함께 추위가 미미하게 물러났다.

뒤돌아 내 낯을 본 라이얀이 나를 다독여 모포가 깔린 자리로 이끌었다.

“이거는~ 중령님이 잘못했어요. 그러면 안 되지, 음. 안 되지~. 준준준~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죠~?”

준준은 말없이 나와 라이얀을 흘겨봤고, 라이얀은 것 보라며 턱을 긁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나 혼자인가.

“우리 중령님, 어떡하면 좋나~? 음음……. 가이드도! 독점욕이 있다~? 알겠어요? 그래도 반려가 됐는데 그렇게 함부로 홀리구 다니면 안 된다~. 응응. 그럼~.”

가이드가 독점욕? 반려? 홀린다고?

“너를 패야 하나 네 가이드 새끼를 패야 하나 지금 고민이 된다. 이선아.”

“말조심해. 윤오는 아무것도 안 했어.”

“2년 넘게 아무것도 안 한 가이드 새끼를 그럼 안 패?”

“내가 잘못해서 그래.”

날 선 대답에 데이의 한숨이 깊어졌다. 내 건강 때문에 윤오가 나쁜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속에서 울분이 끓었다. 윤오는 나를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가이딩을 이어 줬다. 지금 붙어 있는 내 목숨이 그 증거였다.

“아유, 데이는 처음에 저 죽일려고 들었는데요~. 아주 피떡이 되도록 처 맞았지 뭐야~. 나는 또 가이딩이 원래 처 패는 건 줄 알았네~!”

“……라이얀.”

“네, 우리 우리 중령님?”

“너는 왜 전장을 따라나서는 거지?”

라이얀은 방긋 웃었다가 급히 진지한 표정을 만들고 고민하는 척을 했다. 그러다 두 손으로 가슴 가운데를 짚은 자세를 만들고 사뭇 조신한 목소리를 내었다.

“사랑?”

“…….”

“아니 뭐, 나 없으면 죽는다는데~? 저도 가만 기다리는 건 싫어서 따라다니다 보니~ 어쩌다? 우리 데이 짱 세니까, 그 권력 맛도 좀 같이 보고~? 뭐 그런 거죠~.”

막사 가운데에서 양손으로 소총을 세워 쥐고 춤을 추듯 빙글빙글 도는 그를 데이가 한심하게 보고 준준이 혀를 찼다.

나는 라이얀이 말한 그 짧은 단어를 계속해서 되새겼다.

* * *

엉망진창이 된 에이첸라호에서 남은 변이체와 반란군을 토벌하고 파동 생성지를 갈아엎는 데 꼬박 일주일이 더 걸렸다.

준준과 내가 낮을 담당하고 데이와 라이얀이 밤과 새벽을 맡아 꼬박 사흘간 번잡한 전장을 정리했다.

마침내 구역 정비를 마치고 토벌과 방어 작전으로 돌린 다음에도 할 일은 남아 있었다. 전장이 되었던 에이첸라호 호수는 제 색으로 돌아오려면 한참이 더 걸릴 피 빨강이었고, 숲은 흙바닥까지 갈아엎어져 지난 수백 년을 잃었다. 사체가 무더기로 쌓여 흙을 검게 적셨다.

사체를 분류하는 것도 남은 일이었다.

우선 알아볼 수 있는 시체를 골라 진영에 따라 나눠 원국 북부로 수송하고, 변이체는 그 근본이 인간의 형태인 것과 아닌 것을 갈랐다.

인간이었던 변이체들은 몇 무더기를 나누어 각각 약식의 장의 예식을 갖추고 합장했다. 변이한 개체는 사체에도 독성이 있고 잔여 파동을 생성하므로 소산해야 했다. 불을 다루는 에스퍼들이 교대로 나섰고, 불길과 연기가 나머지 나흘 내내 호숫가를 매캐하게 맴돌았다.

귀환은 멀쩡하지 않게 이루어졌다.

무리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아무리 무딘 개들이라도 죽은 자의 탄내를 맡으며 살해를 계속하도록 내몰리면 지치게 마련이었다.

수수데와 에이첸라호 탈환이라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지만 부상자와 전사자를 실은 묵직한 수레에 비해 비루한 승전보였다. 살아남은 모두는 귀환부터 합장 의례까지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근 5년의 작전 중 가장 피해 규모가 커 군부도 언론에 칭송을 요구하지 않았고, 해산까지의 절차는 조용하고 빠르게 진행됐다.

나와 준준은 귀환 후 나란히 의무대 병실을 차지했다.

전군을 통틀어 유일하게 멀쩡하다 할 수 있는 데이는 나자빠진 우리를 한껏 한심해한 다음 라이얀을 데리고 다음 전장으로 나섰다. 하나가 끝나도 여전히 어딘가에서는 전투가 이어졌으므로.

어둔 살결이 희멀겋게 보일 만큼 피부가 녹아내려 진물이 흐르는 준준은 곧장 전투복을 잘라 내고 무균실로 옮겨졌다.

나 역시 멀쩡히 걸어 들어갔으나 호들갑을 떠는 의무관에 의해 자리에 눕혀졌다. 수혈 팩과 수액 팩을 달고 여러 개의 데운 식염수 주머니를 몸 곳곳에 끼웠다. 끝이 곱고 따가운 양손도 마찬가지로 따뜻한 식염수 팩을 쥐었고 무릎과 발에는 온열 팩을 얹었다.

경미한 동상. 계속해서 땀을 흘리고 찬 공기에 식은 탓일까.

입원한 며칠간 의무관은 계속해서 손과 발을 움직이라는 숙제를 내고 종종 들어와 체온과 혈압, 파동계의 수치를 확인했다.

“가이드분께 연락을 넣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마.”

“중령님. 가이딩이 필요하십니다.”

“이틀 정도 지나면 괜찮아. 내가 갈게.”

“중령님.”

“데리다. 하지 마.”

그 핑계 같은 이틀을 갱신한 지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데리다는 병실을 지키며 내내 윤오를 강제 집행시킬 생각을 했다. 시간마다 식은 식염수 팩을 갈아 주며 모바일을 꺼내 들었고, 아직 의식이 있는 나는 번번이 그 일을 말렸다.

그가 2년 전의 가이딩 강제 집행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때의 기억이 생생해서 말리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서툴기 짝이 없는 내가 삽입 가이딩을 갈구하며 달라붙었을 때, 진저리 내던 그 표정. 그때의 비참함.

떠올리면 가슴에 깊이 팬 공동이 나를 더욱 어두운 자리로 끌어당겼다. 희망이 조각나고 그 어둠부터 몸이 차갑게 식어 영원히 잠들고만 싶었다. 꿈속에서는 조금 다른 만남을 꾸어 볼 수도 있으니까.

“준준 준장님은 오늘 퇴원하셨습니다.”

“그래.”

데리다가 나직하게 전하는 가이드의 유무와 그에 따른 회복 속도 차이.

나는 그저 침묵을 택했다. 이번에도 그에게 나쁜 기억을 심고 나와 군을 경멸하는 시선을 볼 바에는, 차라리 몸이 아픈 게 낫다. 두통이 눈 안쪽 깊은 곳을 저몄다.

마음은 기대했고, 또 상처받길 두려워했다. 데리다가 지켜 주는 저 자리에 윤오가 앉기를 바라고 또 바라지 않았다. 가이드 센터에서처럼 내 곁에 그가 있는 풍경을 상상하다 그 상상을 흩어 내고, 그가 나를 걱정하고 내 상처를 안타까이 여겨 주는 망상을 부풀리다 꺼트렸다.

그 이기적인 소망은 온전히 내 것인 채로 끝이 나야 했다.

민폐덩어리, 윤오를 구속한 짐.

좀처럼 체온이 조절되지 않는 몸에는 컴컴한 마음이 더욱더 쉽게 찾아 들었다.

내 검진 기록이든 뭐든 데리다가 윤오에게 전화를 걸어 그를 언짢게 하는 것은 말렸지만, 그의 이동 제한을 완전히 풀 수는 없었다. 내가 알지 못했던 등록 가이드 조항 중 ‘가이딩 의무를 다하지 않을 경우’에 그가 해당한 탓이었다.

그를 등록한 에스퍼가 가이딩 부족으로 에스퍼 관리동에 들어간 후 그 조항이 발동했고, 윤오는 군법으로 위치 추적 및 이동 제한, 출국 금지 등 최고 금제를 얻었다.

쓰러져 누워 있던 나는 몰랐던 일. 데리다가 후에 보고했다 하더라도, 처음으로 얻은 삽입 가이딩과 그 충족감에 취해 있던 차라 제대로 듣지 않고 잊었을지 모른다. 나는 그때 정말로 살아났으니까. 살고 싶어졌으니까.

위치 추적과 이동 신고는 해지했다고 언제 알려 주면 좋을까.

그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걸 주고 싶었지만, 그것이 내게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라 해도 주고 싶었지만, 내 너절한 몸뚱이가 계속해서 그를 바랐다. 처음 살아 본 윤오가 있는 세상에 욕심을 냈다.

내가 먼저 놓아줄 수 없어 미안하고 또 미안하면서도, 나는 그로 인해 계속해서 살았다. 내일을 이어받으며 기뻤다. 그의 자유를 빌미로 이어 가는 삶.

퉁퉁.

여러 개의 발소리 중 하나가 병실 앞에서 멈추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데리다가 다가가 문을 밀어 여는 순간, 화들짝 놀란 몸이 팔꿈치를 딛고 상체를 세웠다. 두꺼운 모포가 흘러내리고 옆구리에 끼워져 있던 팩들이 바닥으로 철퍽 떨어졌다.

“윤오…… 씨.”

눈을 감으면 그리움, 눈을 뜨면 외로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다 얻은 환상 같았다.

환상은 가로막은 데리다를 지나쳐 곧장 내 침상으로 다가왔다. 툭, 그의 손에서 익숙한 통이 떨어졌다. 군에서 지급하는 보급용 윤활 젤.

그 통을 따라 떨어진 시선을 느리게 들어 인상을 쓴 윤오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휘감고 온 바깥의 냉기보다 그 미간에 가슴이 서늘했다.

“어떻게…….”

데리다를 돌아보았지만 문간에 선 그녀는 고개를 젓더니 간단히 목례하고 병실을 나갔다. 데리다가 아니면?

“주노 씨에게 들었습니다.”

“주노. ……죄송합니다.”

“뭐가요.”

“오시게, 해서…….”

“아니지.”

단호하게 떨어진 말에 입이 다물어졌다. 오답만을 말하는 이 입과 성급히 설레는 마음을 다물어야 했다. 그러나 눈앞에 윤오를 두고는 무엇에도 모질지 못하고 분수에 넘치는 탐심만이 여물었다.

“이 지경인데 왜 연락이 안 왔습니까?”

묵묵한 시선이 내게 주렁주렁 연결된 수액과 맥박기, 파동 감지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호흡기를 훑고, 세 겹의 모포와 그 안에 자리한 수어 개의 식염수 팩과 온열기까지 한 차례 훑었다.

의무관에게 상태를 진찰받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한 긴장이 그 눈길 아래 일었다. 마치 처음 그와 삽입 가이딩을 한 그날 같아서. 내가 피하려고 애쓴 그 형편없는 기억을 그에게 반복시킬까 봐. ……그리고 내가 다시 그걸 바랄까 봐.

“……죄송합니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면 사과하지 마.”

“…….”

윤오는 겨울의 냉기를 머금은 코트를 벗고 데리다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커다란 코트가 등받이에 길게 늘어지고, 팔짱을 낀 그의 불만스러운 눈초리가 다시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훑었다.

묵직한 모포에 눌려서 보이지 않을 부분까지도 부끄럽게 만드는 시선이었다. 그럼에도 식어 빠진 몸에 훈기를 불어넣는 그 시선.

파견과 전투, 입원. 바쁘고 피로해서 그간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 여태 찌운 살도 다시 내린 볼품없는 모습은 당연히 내보이기에 좋지 못했고, 그것 역시 내 잘못 같았다.

그에게 느끼는 감정을 하나하나 나열하자면 나는 종일 죄를 읊어야 했다. 전부 진심을 담아도 남을 만큼의 죄책감이 내 가슴에 그득했다. 빌어도 빌어도 모자랐다. 감히 살아 그를 계속 옆에 두고 싶은 것도 내 죄였다.

“가이드 교육을 다 들었습니다.”

“네…….”

“미안합니다.”

들은 것을 이해하지 못한 고개가 그를 향했다. 윤오는 잠시 먼 곳을 보던 눈을 내게 맞춰 왔다. 그것만으로 두근, 심장이 새로 뛰었다.

“가이딩은 주 3회 이상으로 유지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니, 아닙니다. 윤오 씨는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처럼만…….”

“이선.”

“……네.”

꼴깍, 벌렁이는 심장과 침 삼키는 소리 중 어느 것이 더 큰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윤오에게 들려 버린 것 같았다. 깊은 검정이 나를 직시했다.

“필요하면 그렇다고 해.”

“…….”

“모르는 것도 짜증나니까.”

“죄…….”

속을 메운 사죄를 삼킨 턱이 바르르 떨고 입이 굳게 다물렸다.

“정확하게 어떤 상태인지 말해요.”

내게는 명령과도 같은 그 말을 따르기 위해 팔꿈치를 밀어 앉으려는데, 윤오는 간단하게 그 시도를 좌절시켰다.

환자복 틈으로 전극 줄이 여럿 비어져 나온 가슴팍을 밀어 자리에 눕혔고, 낮은 한숨을 내쉬며 삑, 삑, 내 진정하지 못한 심장을 고발하는 기기와 그가 들어선 순간 잦아든 파동을 그리는 파동계를 살폈다.

“파동. 지금 나쁜 거 같은데.”

“괜찮습, 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

“아니면 내가 모른다고 그냥 말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윤오가 파동계 읽는 법을 배웠다.

마침내 나를 구성하는 가장 못난 구석, 윤오를 구속하는 가장 험악한 허물까지 들켰다.

나를 갉아 먹으며 세를 불리는 그 파동. 그를 만나 환희하고, 그를 원해 집착하며, 그의 곁에서 얌전해지는.

조용한 병실.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던 이명이 숨어 버린 정적.

숨 쉬는 소리와 눈을 깜빡이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고요함이 가느다란 긴장의 줄을 더욱 팽팽하게 당겼다.

화가 난 걸까? 내가 화나게 했나?

그가 모포 위 내 무릎께에 떨어진 작은 통을 눈짓했다. 따라 그 윤활 젤을 보며 못내 기대하는 내 염치없는 차가운 몸이 다시 꼴깍, 침을 삼켰다.

“군은 변한 게 없고.”

“…….”

“이것들 꺼도 됩니까?”

“네? 네. 꺼도, 끄셔도 됩니다. 시스템 알림이 가지 않게, 먼저 데리다에게 연락해서…….”

“데리다? 부관이 보호자입니까?”

그대로 윤오가 뒤를 돌았다.

그의 등이 되돌아 문가로 향했다. 황급히 일으킨 몸이 어지럼증에 벌벌 떨었다. 꼼짝 못 하고 누웠던 며칠이 무색할 만큼, 눈앞이 어두운 현기증에도 굴하지 않고 파르르 떨리는 팔을 짚어 지탱했다. 투두둑, 가슴팍에서 전극이 떨어졌다. 철퍽, 철퍽, 침상 옆 바닥에 식염수 팩들이 떨어지고, 쿵, 그 옆에 내 무릎도 떨어졌다. 머리맡의 링거 폴도 당겨져 침상으로 기울었다.

고꾸라져 올려다본 곳에서 달칵,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터질 것 같던 가슴에서 겨우 숨이 빠져나갔다.

그대로 가 버리는 줄 알아서. 이대로 두고 가 버리는 줄 알아서.

요란한 소음을 내며 침상에서 떨어진 나는 작게 들린 잠금 소리에 더럭 눈시울이 젖었다. 바닥을 짚은 손에 함께 떨어진 미지근한 식염수 팩이 짓눌리고 같은 온도의 물방울이 그 손등과 매끈한 바닥에 툭, 툭, 떨어져 식었다.

무수히 애도해야 했던 지난 몇 주간 한 번도 비치지 않던 것이. 툭, 툭.

삑-

손끝에서 떨어져 나간 심박계가 오류를 알렸다. 경고음이 쨍하니 울리고 파동계도 제대로 감지가 되지 않아 묵직한 알림음을 냈다. 그리고 저벅저벅 다가오는 구둣발 소리.

성급하지 않게 다가온 구두가 시야 한구석에 멈춰 서고, 낮은 윤오의 목소리가 정수리로 떨어졌다.

“가는 줄 알았습니까?”

“……네.”

후드득.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내어놓은 대답. 떨어지는 눈물이 무거워 고개가 풀썩, 물기로 반짝이는 바닥에 가라앉았다.

그는 잠깐 사이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나를 단번에 일으켜 세웠다. 젖은 자리를 디딘 맨발이 미끄러지는 것을 윤오가 그대로 밀어 침상에 앉혔다. 그가 쥔 팔과 어깨에서 수어 개의 물주머니 따위가 해내지 못한 열기가 야금야금 옮았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불쌍하고 비참해서 나는 눈물은 아무 소리도 없이 흘렀다. 눈앞의 이 사람이 불쌍해서 흘리는 눈물도, 이 사람이 좋아서 흘리는 눈물도 차마 소리를 내지 못했다.

가지 않아 줘서, 돌아와 줘서. 그것만으로 고맙고,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한 것을 바라는 내가 추악해서.

멀거니 눈물을 쏟는 나를 앉혀 두고, 윤오는 먼저 가장 시끄러운 심박계를 껐다. 잠시 보는 것 같더니 쉽게 버튼을 찾아냈다.

그리고 파동계는 조금 더 들여다보다가 껐다. 아직 반절은 내 상체에 붙은 기기가 금세 단정한 모양을 그리는 파동을 일렀을 것이다.

내 속에 차오른 울음으로 더운 숨소리만 남은 병실이 고요했다.

“가이딩. 나는 아무것도 못 느낍니다.”

“…….”

“에스퍼가 느끼는 고통. 가이딩에 대한 집착. 그 효과. 뭐 하나라도 내게 알려 준 적 있습니까?”

“…….”

“섹스로 충분하면 지금 말해요.”

일렁이는 눈은 윤오의 말을 쉽게 알아듣지 못하고 흐렸다. 깜빡이면 잠시 그와 눈이 마주치고, 그러면 다시 흐리게 젖어 들었다. 더운 손가락이 다가와 감긴 속눈썹에서 맺힌 물기를 걷어 갔다. 툭, 툭, 턱 끝에서 무게에 겨운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축축이 젖은 손가락은 물길을 따라 뺨을 긁고 말을 잇지 못하는 입술을 두들겼다. 몇 번이나 눈물이 맺히고 떨어진 턱 아래를 간질였다.

“말해 봐. 원하는 걸 줄 테니까.”

히윽, 흑, 윽, 바라선 안 되는 걸 원하는 마음과 분에 넘치는 감정에 어깨가 들썩이다 앞으로 풀썩 굽었다. 마른 허벅지 위로 몸을 접고 재차 차오른 마음을 허덕이며 바닥에 쏟았다. 후드득, 후드득, 메마른 몸에서 비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침상 아래로 쓰러질 것처럼 휘청이는 몸을 윤오가 잡아 세우고, 셔츠 한 겹으로 감싸인 열기 어린 몸에 내 이마를 기대게 했다. 나는 염치도 없이 그를 붙잡고 늘어져 엉엉 서러운 울음을 울었다.

나라는 불행에 당신이 내리는 그 다정이 온 마음을 울렸다. 그만큼 포기당하고서도 아직 내게 뻗어 주는 그 손길이 달았다. 그 포용과 그 자비에 당신의 희생을 모른 체하고픈 이 이기심이 부끄러웠다. 이번에도 그 온기에 나를 맡기고 내일을 달라고 빌고 싶은 이 마음이 서글펐다.

무심히 등을 두들기는 손길은 때마다 움큼씩 애통한 울음을 자아냈고, 그의 존재로 얻는 평안이 따뜻했다. 언젠가는 내게서 벗어나게 해 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까 봐 겁이 났다.

윤오를 놓지 못해, 그를 여기서 더 불행하게 만들어 버릴까 봐. 나라는 불행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라 서러웠다.

“몸이 차가운데.”

열 오른 뒷목을 감싸 쥔 그가 말했다. 근래 이만큼 체온이 오른 적이 없던 몸은 윤오의 한마디로 여전히 차가운 것이 되었다. 그가 무척이나 더운 탓이다. 내 윤오. 내 가이드. 내 여름.

발치에서 묵직한 팩들이 밀려 나고 옆구리로 들어온 손이 나를 쉽게 들어 침상 가장자리에서 안쪽으로 옮겼다. 잠시 안겼다 다시 벗어난 그 품이 아쉬워 시린 손끝이 허공에서 곱아들었다.

그리고 전등을 가린 윤오의 그림자가 내게 드리웠다.

훌쩍임이 남아 벌어진 내 입술을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덮었다가 떨어졌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후로 내 훌쩍임은 딸꾹질을 닮아 띄엄띄엄 남은 눈물을 흘렸고 온기를 얻었다 잃은 입술도 놀라 힘이 들어갔다.

“왜 전열기를 쓰지 않습니까?”

“그, 아……. 전극, 때문에….”

“파동 감지계?”

“네…….”

철퍽, 철퍽.

나를 얼게 두지 않던 식염수 팩들이 그에 의해 하나하나 바닥으로 추락했다. 조금도 아쉽지는 않았다. 계절을 거슬러 항상 나를 덥게 하고 죽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 바로 곁에 있는데 나머지는 무엇도 필요 없었다.

윤오는 내 손을 끌어 굽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당기고 눌렀다. 마치 녹아내리듯 멀쩡하게 펼쳐지는 손끝에서 아롱아롱 온기가 피어났다. 큰 손이 손목을 통째로 감아쥐고, 한기가 가시면 조금씩 위로 올라 환자복의 헐렁한 소매 틈으로 팔꿈치를 쥐었다.

그렇게 조금씩 살게 되는 것이 기뻐서 다시 도르르 도르르 눈물이 방울져 턱 끝에 맺혔다.

“전보다 심한 것 같은데. 파견 때문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얼마나 다녀왔습니까?”

“귀환까지 9일 소요되었습니다.”

내 손을 쥐고 잠시 생각에 잠긴 윤오는 이윽고 낮은 목소리로 나를 질책했다.

“나흘. 일부러 연락하지 않은 겁니까?”

“…….”

내가 파견을 간다 전한 날짜와 귀환 날짜를 대조해 입원한 기간을 계산한 모양이었다. 나흘째가 되는 오늘 뜻밖에 찾아온 내 가이드. 왜 미리 연락하지 않았냐 하는 목소리가 조금 화를 품어서, 그래서 오히려 가슴이 두근거렸다.

“강제, 집행을……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강제 집행.”

“…….”

“그딴 거 말고 가이딩이 필요하면 전화든 메시지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데리다 그 사람은 왜 연락을 안 한 거지?”

“제가, 하지 말라고 했…… 습니다.”

“왜?”

나는 그에게 먼저 연락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데리다를 통해 방문 알림 또는 파견 일정을 보내는 게 고작이었다.

하고 싶은 마음이야 외롭고 아픈 밤마다 들었지만, 목소리라도 들어 그가 실재하는 내 가이드임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내 모바일 속 그와의 메시지 함에는 소초 앞에 도착했다는 메시지 달랑 하나만 있었다. 나를 데리고 가이드 센터로 가던 날 그가 보내 준 것. 아프고 추운 밤에 몇 번이고 들여다보면 조금은 속이 푸근해지는 글자 몇 개.

“싫, 싫으실 것이라…….”

“이선.”

“……네.”

“그래서 이 모양으로 앓겠다고?”

“아닙니다. 이틀만 더 쉬면 괜찮…….”

“이틀.”

윤오의 손이 내 턱을 감싸 쥐고, 다른 손은 여태 남은 전극 줄을 당겨 뜯어냈다. 뜯겨 나간 전극이 침상 다리와 의료기기 옆으로 함부로 던져져 요란한 소리를 냈다.

투두둑, 피부를 긁고 품이 남는 환자복을 빠져나가는 감각도 윤오가 준 것이라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눈가가 접히고 목이 움츠러들고 어깨가 튀었으나 턱이 잡힌 채라 피할 수 없이 윤오의 검정을 마주 보았다. 깊은 눈동자가 조용히 화를 냈다.

“에스퍼 관리동에 들어간 다음에나 연락할 작정이었습니까? 지난번처럼?”

“…….”

“대답해.”

빠끔. 입술은 제대로 말을 만들지 못하고 닫혔다. 할 말이 없었다. 윤오는 내가 에스퍼 관리동에 들어갔었다는 사실과 그에게 끔찍했을 강제 집행을 결국 연관 지어 낸 모양이었다.

그가 에스퍼-가이드 교육을 받은 것이 다행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언제든 벗어나 일반인의 삶을 살도록 해야 했는지, 아니면 에스퍼에 대해서 궁금해해 주는 데 기뻐야 하는지.

“……네. 연락, 연락을 싫어, 하시니까…….”

“그건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인다비 씨가 말씀해 주셨습니다.”

“인다비.”

윤오의 눈썹이 실룩 튀었다. 나는 무언가 잘못한 이 기분에 이유를 만들어 붙이기 위해서 분주했다. 내 말과 행동을 검열하고 되새겼다. 그의 기분을 거스른 일이 무엇인지, 내게서 찾으려니 한둘이 아니라 다시 눈물이 주룩 흘렀다. 이것도 그를 언짢게 할 텐데.

“왜 울지.”

“아닙니다…….”

“거짓말.”

울음은 그쳤고 다만 잔해가 남았을 뿐이라는 의견은 거짓말이 되었다. 그리고 그 거짓을 뱉은 입술이 곧 윤오에게 삼켜졌다.

물어 놓아 아린 아랫입술을 핥은 말캉한 혀가 그대로 입 안을 파고들었다. 울어서 달고 끈적거리는 입 속 곳곳을 그의 혀가 지나치고 굳은 혓바닥이 간지러운 쾌감에 힘이 들어갔다.

하으, 입술이 떨어지는 틈을 타 가쁜 숨을 쉬면 다시 그가 입을 맞추고 입천장을 핥았다. 부드럽게 혀가 지나친 자리가 아프지 않을 만큼 저리고, 두근거릴 만큼 아렸다.

턱을 쥔 그의 팔에 매달려 흔들리는 몸을 지탱했다. 그러지 않으면 풀썩 넘어져 버리고 말 것 같았다. 그랬다가는 이 기분 좋은 가이딩이 끝이 날까 봐 피로한 몸에 힘을 주고 그의 팔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실었다.

윤오의 숨이 뺨에 닿을 때마다 등줄기를 타고 흥분이 올랐다. 그의 입술도, 혀도, 어설픈 혀를 그가 감아 빨아들일 때 나는 젖은 소리도 그랬다.

“춥습니까?”

“하아……? 아닙니다.”

“올라와요.”

쾌감에 바르르 떤 것이 그에게 추위로 읽힌 것인지, 순환기 장애가 진작 물러난 내 몸을 윤오가 끌어당겼다. 팔랑팔랑 이끌려 가니 윤오의 무릎 위였다. 침상에 걸터앉은 그가 무릎 위에 나를 올려 앉히고 등과 허리를 감싸 받쳐 주었다.

조금 낮은 곳에 그의 눈동자가 있고 어색한 팔이 그의 어깨를 잡고.

숨이 충분히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어깨를 움츠리며 허리를 떨었다.

“어떻게 하면 체온이 오릅니까. 섹스?”

“네, 네…….”

“또 다른 문제는? 맞고 있는 링거는 뭡니까.”

“혈액 순환과 체온 조절……이 잘 안 되어서……. 링거는 영양제와 진통제입니다. 거슬리시면 빼겠습니다.”

“그대로 둬요.”

윤오의 손이 환자복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렸다. 정말로?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기대가 이르게 반가움을 불렀다. 따뜻한 그의 어깨를 꼭 쥐고, 공기 중에 훤히 드러나는 가슴팍이 시려도 견뎠다.

몇 개 되지 않는 여밈이 금방 풀어지고 더운 손바닥이 흔적으로 남은 가장 가까운 과거의 상처를 덮었다. 아직 길고 붉게 상흔이 남았지만 다 나은 것이었다.

옆구리를 덮은 손이 조금 더 올라와 드러난 갈비뼈를 감싸고 그대로 등 뒤로 돌아가 한 차례 쓸어내렸다. 오소소 그 손길을 따라 등허리가 발발 떨었다.

“외상은 없습니까?”

“없, 습니다.”

하아,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고막까지 간지럽혔다. 신음을 참아 내는 대답이 목구멍을 긁으며 나서고, 누르고 누른 한숨이 벌어진 입술 틈을 축였다.

윤오는 내 대답에도 불구하고 환자복 안으로 그 뜨거운 손을 넣어 목덜미부터 허리, 다시 가슴팍까지 쓰다듬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금세 차오른 그 모든 자극을 견뎠다. 그의 효과로 벌써 몸이 데워지고 있었다.

“무릎으로 서 봐요.”

의아해 하면서도 순순히 무릎에 힘을 주었다. 눈치 없이 일어난 앞섶이 그러다 윤오의 가슴팍에 닿았다. 어정쩡하게 허리가 굽어 뒤로 빠졌다.

긴 팔이 뒤로 뻗어져 모포를 뒤적이다 곧 플라스틱으로 된 작은 통을 찾아 쥐었다. 꼴깍, 침이 넘어갔다.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하지만, 마치 내가 윤오를 품에 안은 것 같은 이 자세도 내 속을 술렁이게 하는 것이었다. 설렘이고, 기대였다.

“다리.”

허리가 고무줄로 된 환자복 바지가 거침없이 내려갔다. 속옷을 입지 않은 맨살이 드러나고, 이미 흥분해 반쯤 서 있던 성기가 잠깐 걸렸다 빠져나오며 달랑 흔들렸다.

그것이 부끄러운 나를 기다려 주지 않고 윤오가 명령했다. 내 무릎을 하나씩 들게 해 헐렁한 바지를 훌훌 벗겨 냈다.

갑작스레 공기 중에 노출된 다리가 서늘했다. 틈을 좁히려 했지만 윤오를 사이에 두어 어찌할 줄 모르고 그의 어깨만 구겼다.

흐으, 때가 다가오기도 전부터 흥분이 일었다.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윤오의 머리칼에 코를 묻을 수 있는 이 거리가 좋았다. 그로 인한 흥분이 살금살금 몸속의 피를 돌게 했다. 아주 깊은 데서부터, 어쩌면 마음이라 불리는 곳부터 온기가 퍼져나갔다.

“아!”

미끌거리는 차가운 액체와 더운 손바닥이 반쯤 선 내 성기를 잡았다. 그가 오므린 손을 빙글 돌려 귀두까지 죽 훑어 올릴 때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허리가 휘청였다. 그러다 그만 쿡, 하고 성기 끄트머리를 그의 가슴팍에 눌렀다.

아흐, 떨리는 신음처럼 허벅지와 골반이 바르르 떨었다. 침상 밖으로 나간 발끝이 졸아들었지만 이번은 추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부터 퍼져 나간 열기가 몸 구석구석 피를 돌렸고, 매시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동상은 대번에 하찮은 일이 되었다.

다시 기둥을 쓸어내린 손이 이번에는 그대로 고환과 회음부를 스쳐 그다음에 자리 잡은 다물린 입구에서 빙글, 미끄러운 손끝을 휘저었다. 그 감각이 과해 엉덩이가 훅 뒤로 빠졌다.

굽은 몸이 가끔 허리를 튀어 올리고 고개는 윤오의 목덜미와 그의 어깨에 놓인 내 손등에 닿아 도리질 쳤다.

열이 올라 홧홧한 눈가보다 그의 목이 뜨거웠다. 아무리 나눠 받아도 모자라지 않을 그의 온기. 그러니까 더 욕심이 나 버리는 그 더위. 생명력. 마음.

윤오의 손이 나를 끌어당겨 그에게 단단히 붙이고, 엉덩이골을 따라 다시 젖은 손가락이 긁어 내렸다. 움찔움찔, 몸을 튀면서도 그 품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두 몸 사이에 짓눌린 성기와 뒤의 입구를 파고드는 윤오의 손에 허리가 쉼 없이 바들거렸다.

엉덩이를 잡아 벌린 틈으로 기다란 손가락이 좁은 입구를 얕게 적셨다. 힘을 빼는 게 잘 되지 않아 복부가 훅 꺼졌다가 골반이 비틀어지기를 그의 품 안에서 몇 번이나 반복했다.

스륵, 흘러내린 팔이 윤오의 등을 감싸고 목을 감았다. 헐겁게 끌어당긴 가슴팍이 마주 붙었다. 더운 목덜미에 고개를 묻자 그의 검은 머리칼이 볼을 간지럽혔다.

좁은 곳을 얕게 희롱하다 빠져나온 손가락이 크게 입구를 빙 둘러 문지르고, 얇은 피부가 눌릴 때 삼키지 못한 신음이 작게 남아 새어 났다.

“너무 좁아서 안 되겠습니다. 안고 있는 걸로 대신하죠.”

“아니, 아닙니다. 제가 할 테니까. 해 주, 흣, 넣어 주세요.”

“…….”

“제가 입으로, 세워 드리겠습니다…….”

내려가려 허둥거리는 사이, 몸이 빙글 돌아 침상에 눕혀졌다. 목덜미와 허리를 받친 손이 가벼운 몸을 내려놓고 마른 다리를 벌려 사이가 드러나게 했다.

“필요 없습니다.”

그의 손바닥 위에 푹 짜내진 윤활 젤을 보며 꼴딱, 침을 삼켰다. 그 동안 미끄러운 손이 다시금 아래를 파고들었다. 정전기처럼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쾌감을 버티며 심호흡을 했다. 눈을 질끈 감고 힘을 풀어냈다.

조밀한 입구부터 긴 손가락이 들어와 문지르는 깊은 안쪽까지. 이른 흥분이 허리 아래 둥근 아치를 만들었다. 절로 들어간 힘을 억지로 풀어내길 반복하는 아랫배를 진작부터 흥분한 내 성기가 톡톡 두들겼다.

윤오의 시선이 내 드러난 맨몸과 부끄럽게 홀로 열 오른 부분을 훑었다.

모포를 구기던 손으로 헤쳐진 환자복 상의를 잡아 끌어내렸다. 헐렁한 상의의 한쪽만으로 흉한 상체와 단단해진 아래가 얼추 가려졌다.

질척이는 소리와 함께 개수가 늘어난 손가락이 빠듯하게 입구를 풀어내었고, 뻐근한 아래가 조금씩 말랑해져 받아들이는 일이 쉬워졌다. 더불어 잔잔한 열감이 몸속까지 파고들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기대가 비쭉 솟아 내려다본 윤오의 앞섶이 나와 마찬가지로 크게 부풀어 있었다.

성의를 다해 애무하지 않아도, 언제부턴가 그의 성기가 나를 앞에 두고 단단해졌다. 눈앞이 흐려질 만큼 기쁘고 갈비뼈가 좁게 느껴질 만큼 두근거림이 차올랐다.

나도 모르게 힘을 주어 조인 뒤에서 주르륵, 젖은 소리와 함께 그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빠져나갔다. 골반이 틀어지고 짧은 신음을 흘렸다. 얼른 주먹을 쥐어 입을 막았다.

그가 젖은 손으로 직접, 그의 커다란 성기를 꺼내 윤활 젤을 펴 바르는 모습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축축한 소리와 나른한 손동작에 비쭉 솜털이 솟고 뺨이 가려웠다.

오한처럼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도 추위 때문은 아니었다. 나체나 다름없이 헐벗고 있어도 전혀 춥지 않았다. 오히려 내쉬는 숨마다 낯선 열기가 입술을 적셨다. 그에게 보여지는 부분마다 살갗이 따끔따끔 타오르는 듯했다.

바라는 순간을 앞두고 긴장을 풀었다. 언제나 그렇듯 커다란 성기를 받아들이는 처음은 아플 것이나, 그것마저도 기대가 되었다. 가장 깊이 그를 가까이하는 그 순간. 나직한 한숨이 성적 쾌감을 싣는 그 순간. 나를 써 그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좋게 할 수 있는.

미끈하고 뭉툭한 성기가 부드럽게 풀려 오물거리는 입구에 닿았다. 그가 조금 허리를 밀어붙이자 귀두의 반 정도는 쉽게 들어섰지만 나머지가 다 들어오기 전에 내 등이 대신 밀려 침상 위에서 미끄러졌다.

귓가를 저리게 하는 한숨을 내쉰 윤오의 검정이 불쑥, 가까이 내려왔다. 내 머리맡을 짚고 다른 손으로는 입술을 눌러 막은 주먹을 치우게 했다. 젖은 소리가 나는 입맞춤으로 내 입술을 살짝 빨아들였다 놓더니 이내 틈을 가르고 그 아득히 기분 좋은 혀를 밀어 넣었다.

서투르게 그의 혀를 따라할수록 쾌감이 짙어졌다. 알지 못했던 감각이 민감한 온갖 곳을 자극했다. 부드럽고 힘 있는 살덩이를 받아들이면 감은 눈꺼풀 속이 하얗게 바랬고, 윤오로 가득 채워진 세상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아득한 만족감이 남김없이 들어찼다.

“흣, 윽……, 응……!”

뜨거운 손바닥이 꼴깍이는 목울대를 쓰다듬었다. 큰 손이 가볍게 목을 감싸 쥐었다가 어설프게 몸을 가린 환의를 헤치고 내려왔다. 쥐어 잡을 살도 근육도 모자란 곳을 순서대로 느리게 감싸는 손길에 끝이 단단해진 유두가 마침 휩쓸려 탄성을 자아냈다.

조그만 돌기가 그의 손아귀에 짓눌리고 이내 손가락 사이로 비벼졌다. 흣, 흑, 흐느낌을 닮은 신음이 몇 번이나 윤오의 입 안으로 흘렀다.

날 선 감각을 어찌하지 못하고, 고작해야 손을 뻗어 윤오의 무릎을 긁고 허리와 다리를 허우적댔다. 지나는 자리마다 쾌감을 부르는 손이 더욱 아래로 흐르고 살집 없는 옆구리를 지나 바들바들 떠는 골반을 꽉 쥐었다. 그리고 단번에 커다란 기둥이 아래로 짓쳐들어왔다.

“하악! 아……. 읏…….”

움찔, 온몸이 수축하며 아랫배 안쪽을 파고든 것을 조였다. 거칠게 벌어진 입구가 쓰라리고 깊은 곳이 밀려 늘어났다.

내장이 늘어나는 감각. 속을 두들겨 맞는 듯한 둔통.

그러나, 그럼에도 괴롭지 않았다. 통증과 비할 수 없는 충족감이 허리를 들띄우고 달달달 발끝까지 떨게 했다. 힘이 들어간 발가락이 계속해서 이불 위를 밀어 내고 미끄러졌다.

하윽,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혀끝이 그에게 빨려 머릿속이 혼곤했다. 쾌감이, 몸과 마음을 적시는 만족스러운 가이딩과 윤오가 내게 내리는 통증이 까마득하게 기분 좋았다.

가늘게 뜬 눈이 깊고 짙은 검정과 마주쳤다.

도르르 눈가가 접히며 맺혀 있던 물방울이 귓바퀴에 고였다. 길고 긴 키스 끝에 모자란 숨을 쉴 틈을 겨우 얻었지만 못내 아쉬워 따라 붙는 내 입술을 윤오가 한참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맞붙은 몸이 움직였다. 신음을 참아내려 깨문 아랫입술에 윤오가 입을 맞췄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벌어져 그의 혀를 받고 헐떡이는 숨을 고스란히 내어 줘야 했다.

그 일이 무척이나 달았다. 나는 온몸이 흔들리고 아래가 콱콱 쳐올려지면서도 절절한 쾌감을 느꼈다.

얼얼한 입구를 치받고 안쪽 깊은 곳을 그의 성기가 지나치면 나도 모르게 몸이 뒤로 빠졌다. 지나친 자극을 피하려다 그에게 골반이 쥐여 다시 얌전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가늘게 발발 떨기를 멈추지 못하면서 신음해야 했고, 열기로 발갛게 익어 버릴 것처럼 가슴팍부터 볼까지 죄 뜨거웠다. 손끝도 발끝도 온기가 감돌았다.

윤오의 손이 그의 허리께를 비비는 무릎을 감아쥐고 밀어 올렸다. 둥글게 허리가 말리고, 끄트머리까지 빼내었다 다시 끝까지 쳐올리는 성기에 내벽의 기분 좋은 곳이 눌려 새된 소리가 났다.

다시 키스를 바라서 발긋한 입술을 뻐끔거리다 소리를 참으려 악다물었고, 그래도 참지 못한 만큼이 숨에 실려 흑, 히윽, 울음처럼 쏟아졌다.

거센 동작에 몸과 침상이 밀려나며 흔들렸다. 고정된 바퀴가 끼익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의 허벅지가 내 엉덩이에 맞부딪히는 소리, 더운 그의 숨소리 등 귓바퀴에 감기는 모든 소리가 나를 고조시켰다.

두 뺨이 화끈거리고 아찔한 열락에 눈가가 계속해서 떨었다. 팔락팔락 젖은 눈꺼풀이 묵직하게 나부꼈다. 아직 아린 혀뿌리에 서로의 것이 맞물리던 때를 되새기자 침이 고였다.

콱콱, 윤오의 손아귀에 잡힌 허리 아래가 마구 흔들렸다. 반쯤 허공에 들린 채 날갯죽지를 침상에 비볐고, 팔을 휘젓다 침상의 손잡이를 잡았다. 열이 오른 손에 속이 빈 손잡이가 싸늘했다.

전에 없이 거센 가이딩에 턱 끝을 치켜들고 뒤통수를 시트에 문질렀다. 가쁜 숨을 내쉬며 빠르게 차오르는 흥분을 참았다. 너무, 너무 좋아서 참는 것이 버겁고, 참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대로 영영, 그와 닿아 있을 수 있다면.

침상 흔들리는 소리와 겨운 흥분을 참는 소리, 살 부딪히는 젖은 소리가 가득한 어느 순간.

기이익, 비스듬하게 협탁에 걸쳐 있던 링거 폴이 기울어졌다. 허우적거리는 팔에 부딪히고 엉킨 링거 줄에 당겨진 폴대가 쓰러졌다.

철퍽, 링거 팩들이 떨어지고 챙강, 폴이 바닥을 굴렀다.

하윽, 윤오가 멈칫한 사이 숨을 고르고 눈치를 보았다. 왜 멈췄을까, 놀란 걸까.

한참을 그대로 있던 그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벌어졌다.

“씨발. 미친 새끼가…….”

움찔, 몸이 떨었다. 가슴속의 공동이 다시 거멓게 존재를 알렸다. 내가 너무 좋아한 걸까, 너무 기뻐했나, 헤펐나.

“죄송합, 니다…….”

“이선 씨한테 한 말 아닙니다.”

“……흣!”

아래에서 단숨에 윤오의 성기가 빠져나갔다. 내벽이 좁게 모여들어 그의 것을 감쌌으나 빠져나가는 걸 붙잡을 수는 없었다. 대번에 비어 버린 배 속이 가슴의 공동만큼 허전했다.

몸을 굽힌 윤오가 바닥에서 링거 폴을 잡아 세웠다. 투명한 수액 팩에 순식간에 링거 줄을 거스른 피가 붉게 퍼져 있었다. 멍한 내 팔에 감긴 줄을 풀어 주고 윤오가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환자를 상대로.”

“아니, 아닙니다……. 뺄, 빼겠습니다.”

곧장 오른팔에 붙은 테이프를 떼려는 왼손이 그에게 잡아 채였다.

“맞고 있어요.”

“그럼, 계속해 주시면…… 그래 주시면 안 될, 까요……?”

가이딩 또는 섹스. 어느 쪽이건 바라고 있는데. 여태 남은 쾌감에 떨리는 허벅지 안쪽과 옴찔거리는 입구를 내려다본 윤오가 인상을 쓰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프지 않습니까.”

“좋았, 좋습니다. 정말로……. 계속,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계속……. 그리고 더……. 내가 바라는 만큼은 이 가슴속의 공동이 다 메워질 만큼인데 그만큼 바라는 것은 터무니가 없고, 당장 지금 모자란 만큼이라도 채워지기를 바랐다.

아릿한 속과 허벅지 안쪽에 남은 저림, 끝까지 다다르지 못한 쾌감, 그리고 윤오도…….

아픔보다 그의 절정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 마음은 내 쾌감보다도, 가이딩보다도 중요했다. 나로 인해 그가 사정하는 순간을 눈에 담는 것.

내내 시달리던 낮은 혈압과 저체온증은커녕 이미 달궈져 더한 흥분을 바라는 몸.

이런 순간에도, 이런 나를 걱정해 미안하다 말해 주는 저 다정한 사람이 기분 좋기를. 오늘도 나를 살게 한 그가 조금 더 나를 써 줬으면. 그를 위해서라면 절정을 꾸역꾸역 참고 버틸 수 있었다. 그래야 마땅했다.

환자는 싫은 걸까. 성급히 일어나는 어깨에서 풀어헤쳐진 환의가 팔뚝까지 흘러내렸다. 잠깐 한기가 들었지만 상관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그 손은 윤오의 여전히 커다란 성기에 닿기 전에 붙들려 멈췄다.

“뭐 하는 겁니까.”

“사정……하게 해 드리려고…….”

깊은 한숨이 이마까지 불어왔다. 간지러워 눈을 깜빡이다 짜증과 난처함 사이 어딘가를 그리는 그의 눈썹을 올려다보았다. 큰 손이 흩어진 검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저 눈썹과 이마에 입술을 대어 보면 어떤 기분일까, 때를 모르는 욕심이 혀를 녹녹히 적셨다.

윤오는 붙잡은 내 팔을 거슬러 올라 끄트머리가 벗겨진 테이프를 꼼꼼하게 다시 붙이고 그 팔에 붙은 줄에서 피가 옅어질 때까지 가만 지켜보았다. 조바심은 내 몫이었다.

미처 다물리지 못한 곳이 계속해서 옴찔거렸고, 무릎 꿇은 다리 사이에서도 흥분이 이어졌다. 그것은 윤오나 윤오가 내게 해 준 일, 그리고 그의 젖은 성기를 보기만 해도 충분한 일이었다. 꼴깍, 어떻게든 마저 하고 싶은 초조함으로 무릎걸음을 조금 더 걸었다.

붙들린 팔이 꺾어지는 것도 상관 않고 다가가 조심스레 그의 다리 사이에 앉았다. 주저주저하며 다가간 이마를 콩, 그의 가슴팍에 기댔다. 벌렁벌렁 심장이 마구 뛰었다. 팔에 걸린 환자복을 아예 벗어 내고 붙잡히지 않은 왼팔로 그의 목을 감았다.

그가 밀어 내지 않은 것만으로 행복감이 찰랑찰랑 가슴속을 채웠다. 그 마음이 전해지고 닿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 이마를 문지르고 무릎을 세웠다. 얼얼한 다리와 가랑이가 바르르 떨고, 밀쳐 내어질까 서두르지 못하는 팔과 등줄기도 발발 떨었다.

마침내 그에게 가슴팍을 붙여 끌어안았을 때, 충족감이 넘쳐 나 한숨처럼 입술 새로 신음이 흘렀다. 살갗이 온통 화끈거렸지만 아픔이 아니었다.

그의 목덜미에 닿은 귀에서 윤오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오른팔을 놓아주자마자 그 팔도 당장 윤오의 옆구리를 감아 더욱 그의 품에 가깝게 붙었다.

내가 그를 안고 있을 때는 행복했는데, 다음 순간 그가 팔을 감아 나를 안아 주었을 때는 눈물이 났다. 히윽, 흑, 다시 그의 어깨춤을 적시다 손등으로 쓱쓱 닦아 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때가 아니었다.

울음기가 남은 숨을 골랐다. 그 더운 목덜미에 눈을 문질러 눈물을 묻히고 뺨을 비벼 그 물기를 닦았다.

찬찬히 내 등을 쓸어 낸 윤오가 맨몸을 틀어쥐어 가볍게 떼어 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 다짐해 놓고 금방 울상을 지어 버린 내 입술에 그의 입술이 마주 대어졌다.

잇새로 물어 당기고 안의 점막을 핥았다. 따라 하고 싶어 다물리는 앞니 틈으로 그의 혀가 들어와 다시 내 것을 감았다. 옆이 쓸려도 좋고 아래를 누르고 끄트머리끼리 비벼져도 좋았다. 더운 숨이 저절로 나고, 가볍게 새어 나가는 신음보다 젖은 소리가 더욱 컸다.

내내 깜빡거리다 감아 버린 눈꺼풀 안이 어둡지 않고 반짝거렸다. 심장이 가슴에서 뛰지 않고 전신에서 두근거렸다. 그에게 가까이 붙으려 힘이 들어가던 팔은 반만 성공했다. 오른손은 그에게 잡혀 침상으로 끌어 내려졌으나 깍지 껴 마주 잡힌 것이 좋았다.

손길마다 움찔거리는 허리를 크고 더운 나머지 손이 쓸어내렸다. 두 다리 사이를 벌리게 하고 곧 그의 허벅지 위로 나를 당겼다. 커다랗고 뭉툭한 것이 이어 내 아래에 맞춰졌다.

심장이 크게 뛰는 바람에 혀를 잘못 씹었지만 그 자리를 핥아 주어 통증은 이내 쾌감으로 바뀌었다.

서둘러 허리를 내려 그를 받아들이려던 조급증은 윤오의 손이 움직이지 못하게 내 허리를 그에게 눌러 붙이는 바람에 멈춰야 했다. 옴찔거리는 입구가 부드럽게 귀두를 감싸는 느낌에 속부터 미리 저렸다.

하아, 느리게 그의 다리 위로 앉혀졌을 때는 열기가 척추를 거꾸로 타고 올라 머리까지 저몄다. 의도하지 않고도 내벽이 서서히 들이미는 그의 것을 거세게 휘감았다.

윤오를 안고 윤오의 것을 받아들이고 윤오의 입맞춤을 얻는 일.

살갗을 타고 행복하게 잔 경련이 일었다. 그와 마주 잡은 오른손에 움찔움찔 힘이 들어갔다가 이내 풀어졌다.

그의 셔츠 단추에 긁히는 내 성기는 어느 때인지 모르게 이미 사정해 버렸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사이 저지른 일에 미안한 마음이 들기보다는 흡족한 쾌감이 정신까지 가득 메워 생각을 남김없이 태웠다.

뜨거운 몸이 다시 그에 의해 위아래로 흔들렸다. 가슴팍을 마주 대고 닿은 입술을 떨어트리지 않았다. 벌어진 내벽이 한층 예민하게 그의 것을 물었다. 조이고 비틀어 괴롭게 할수록 더욱 단단하게 부푼 성기가 꿈틀거리며 안을 파고들었다.

좋은 곳이 쓸려 허리가 휘면 그의 배에 다시 내 성기가 비벼졌다. 무릎부터 허벅지 안까지 파들거림이 피부 표면을 타고 번졌다. 하으, 흐윽, 신음은 모조리 윤오만 들을 수 있도록 삼켜 내지 못한 만큼만 뱉었다. 작은 신음이 끝도 없이 흘렀다.

“윤오, 흣…….”

입맞춤 사이에 흘린 흐느낌에 고개가 떨어졌다.

나를 보는 그 검정은 차마 꺼내지 못하고 삭힌 고백을 되살려 냈고, 그 검정이 너무나 뜨거워서 그 고백이 스스로 살아 새어 나갔다.

“……좋아……해요. 죄송…….”

내게는 사랑이지만, 나는 사랑을 모르니까.

윤오를 가이드로만 대하지 못해서, 사랑해 버려서 미안한 고백이 마저 다 사과하기 전에 잡아 먹혔다.

앓는 소리가 얽힌 혀 사이에서 울렸다.

거세게 흔들리던 몸이 다시 침상에 눕혀졌다. 끼익, 끼익, 침상보다 요란하게 아래가 맞붙는 소리가 나고, 입술 틈에서 젖은 소리가 비어졌다.

깊이, 더욱 깊이 그를 받아들이려고 종아리가 들리고 허리가 둥글게 말렸다. 그의 옆구리를 몰래 쓰다듬던 다리가 조심스레 그의 등을 감았다.

거칠게 치받던 성기가 문득 멈추고 내 입 속을 헤집던 혀가 빠져나갔다.

잘못했나 싶어 풀어내려는 허벅지를 그가 느리게 쓸었다. 이마를 맞댄 윤오가 긴장한 내 입가에 입술을 붙이고 나른하게 말했다.

“갈 거 같은데.”

대번에 가슴이 설렜다. 단단히 감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조심스레 손을 들어 가까운 윤오의 뺨에 손끝을 대어 보고, 고개를 조금 틀어 그의 입술에 먼저 내 것을 붙여 보았다. 심장을 잃어버릴 만큼 떨리는 일이었다. 아주 무서운 일이었고, 너무나 바라던 일이었다.

“그대로 해 주, 세요. 안, 에…….”

“그게 도움이 됩니까.”

살랑살랑 부러 흔든 허리가 이내 그에게 잡혀 멈췄다. 다음에는 느리고 깊게, 다시 얕게, 천천히 그가 파고들었다.

처음인 것이 무척 많은데, 이렇게나 많이 받았는데, 아직도 바라는 게 남았다. 그가 내 안에서 끝까지 가 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커져서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무래도 거짓말이라 다시 고개를 젓고 윤오의 눈치를 살폈다.

피식, 윤오의 눈꼬리가 살짝 접혔다.

“그런 얘기는 못 들었지.”

“그래도…….”

윤오는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짙은 한숨을 쉬며 그 검은 눈동자로 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찰박찰박 그가 다시 움직일 때마다 쾌감과 흥분과 기대가 차올랐다.

원하는 걸 말하라던 그의 말이 떠올라 망설이던 붉은 입술을 재차 움직였다.

“그렇게 해 주시면, 좋겠, 어요…….”

몸이 흔들려 끊어졌지만 짙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분명한 소망을 전했다. 그가 보일 반응이 두려워 눈꺼풀이 파들거렸다. 그럼에도 윤오가 보여 준 다정함과 그 눈동자에 비친 욕정을 믿고 내 욕심을 풀어놓았다.

진심을 말로 꺼내 놓았을 뿐인데 속이 홀가분하고 또 허전해졌다. 또다시 실수일까 봐서 눈앞이 흐릿해졌고, 그 덕에 그의 눈치를 살필 여력이 없는 것이 다행일지 아닐지 몰랐다.

바라고 소원하는 말, 빌고 애원하는 말. 윤오에게는 지겨울 수도 있을 그 말은 언제고 내게 알맞았다. 거절당하고 경멸당해도, 윤오에게는 그래도 괜찮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사랑할 수밖에 없다.

“아흑……!”

내 허리가 떠올라 공중에서 휘었다. 내벽을 쓸리며 번쩍이는 쾌감이 자르르 일면 무릎이 좁아져 그의 옆구리를 조였고, 제풀에 놀라 힘을 풀고서도 속은 더욱 다물려 그의 성기를 휘감았다.

다시 일어나 까닥이던 성기는 아무런 자극 없이도 쾌감을 쌓아 희멀건 액을 쏘아 냈다. 정액이 가슴팍을 미지근하게 덥히고, 곧 가느다란 줄기로 흘러 피부를 식혔다.

그러는 동안 내내 윤오가 내 안을 헤집었다. 내벽은 마치 뭉툭한 이가 달린 입처럼 그의 것을 씹고 빨아 당기고 조여 물었다.

더운 숨을 연이어 토하며 그의 입술을 찾았다. 거부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조차 잊고 매달렸다. 쪽쪽 닿는 곳마다 입술을 모아 소리를 만들었다. 흥분과 쾌감이 엉망진창으로 머릿속을 헤집었다.

속이 들쑤셔지는 동안 민감할 대로 민감해진 속살이 겉과 마찬가지로 경련했다. 허리가 몇 번이나 휘었다가 꿰뚫려 제자리를 찾았다.

들어 올린 턱이 풀썩 떨어지고, 꽉 힘이 들어간 복부 안쪽에서 그의 것이 꿈틀대다 다시 부푸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얼얼한 허벅지 안쪽과 무릎이 거듭 떨었다.

여러 번 그의 것을 휘감고 같이 꿈틀거린 내벽이 잠잠해졌으나 여전히 마른 배는 가쁜 숨을 쉬느라 푹 꺼졌다 다시 차오르기를 반복했다. 배꼽언저리가 불룩 솟은 채였다.

상체를 세운 윤오를 따라 무심코 양팔을 들어 올렸다. 멀어지는 것이 아쉬워 그런 것인데, 그는 그 팔을 무시하지 않고 잡아 일으켜 주었다.

맞물린 입구가 뜨겁게 채워지고 적셔지는 감각, 그보다 다시 안겼다는 사실이 온몸을 더위로 채웠다.

내 오른팔을 잡아 내린 윤오가 주사를 붙인 테이프 끄트머리를 뜨거운 손끝으로 쓸었다.

“이제 떼야겠네.”

“……네?”

꿈처럼 몽롱한 머리는 그 말을 쉽게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끝난 것이 아쉬워 찡한 코끝을 훌쩍거렸다.

넉넉하게 윤오를 받아들이고 한기가 사라진 몸이 나른했다. 그러나 충분히 가이딩을 받고도 그가 모자랐다. 의도치 않게 알려 버린 내 고백에도 경멸하지 않아 준 그가 고맙고, 지금이 지나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까 봐, 오늘이 꿈일까 봐 겁이 났다.

나를 떼어 내려는 그의 손짓을 피하고 구겨진 셔츠가 감싼 어깨에 다시 고개를 묻었다. 칭얼대듯 얼굴을 문질렀다.

기쁘고 슬프고 좋고 아쉽고 행복해서 다시 눈물이 났다. 울음도 훌쩍거림도 느리게 이어졌다.

며칠이나, 며칠이나 추워하던 몸에, 그 품은 그렇게 따뜻했다.

답답하고 더웠다.

목까지 덮은 모포를 밀어 내는 중에 어두운 잠이 스르륵 물러났다. 깨어난 시점부터 으레 찾아오는 두통도 없이, 혼란한 꿈도 없이, 조용하게.

“깨셨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데리다가 간호 호출 버튼을 눌렀다.

블라인드 틈으로 맑은 하늘을 흘끗 내다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는 몸이 더할 나위 없이 개운하다.

묵직하게 흘러내린 몇 겹의 모포 안은 데운 식염수 팩 하나 없이 내 체온만으로 훈훈했고, 그 흔한 심박계나 파동 감지계, 링거 줄 하나 연결되지 않아 가뿐했다.

얼핏 팔을 들어 희미하게 사라져 가는 바늘 자국을 보았다.

“……윤오는?”

“어제 가셨습니다.”

“내 몸은 누가 씻겼지?”

“가이드분이 하셨습니다.”

어제. 윤오가.

말가니 몇 분쯤 내려 보다 의무관이 들어왔다. 간단한 검진을 하고 복귀해도 좋다는 소견을 들었다.

영양 수액을 하나 더 맞을 것인지 물어보았는데, 필요 없다 거절했다가 그 자리에 테이프만 붙여 줄 수 있느냐 물었다.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같이 들어온 간호사가 마치 주사를 연결한 것처럼 오른 팔뚝에 의료용 반투명한 테이프를 잘라 붙여 주었다. 어제처럼.

두꺼운 테이프의 모서리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며 평온한 파동과 아릿하게 남은 온기를 되새겼다. 하아, 짧고 더운 숨이 났다.

쓰러지듯 그 품에서 끊어진 것이 마지막 기억인데, 그런 나를 윤오가 씻겼다니.

나를 안고, 만지고, 씻기고.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 아쉽고, 그를 고생시킨 것이 죄스럽고, 내 속에 그가 들어차던 때와 나를 가볍게 다루던 기억이 되살아나면 뺨이 간질거렸다. 벌써 보고 싶었다.

살며 몇 번이고 겪었던 동상인데. 그 느릿한 질병은 되돌아오는 것도 그만큼 느린데.

단번에 나를 낫게 한 사람을 잠시 그리워한 것만으로 심장이 빠듯하게 죄어 두근거렸다. 피가 돌고 눈앞이 흐려졌다. 뻗은 팔이 잡아 일으켜지던 순간이 머리를 맴돌았다. 몇 번이나 눈꺼풀을 깜빡여 맺힌 눈물을 말려야 했다.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했다. 하루만큼 조금씩 더, 매일을 더욱 사랑했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런 아침을 주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지?

이 행복이 계속 내 것일 수도 있을까? 어쩌면?

점심 후엔 데리다의 도움을 받아 짐을 챙기고 불편한 걸음이 익숙해질 때까지 병실 안을 걸었다. 소파에 윤오가 입고 왔던 셔츠가 제멋대로 늘어져 있었다. 물어보니 데리다가 그에게 새 옷을 사다 주었다고 했다.

버릴까 묻는 말에는 고개를 젓고 내가 구기고 더럽힌 그의 셔츠를 소중히 챙겼다. 돌려주어야겠다는 생각과 모른 척 가지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속이 일렁였다.

강제 집행 없이도 나를 찾아와 준 내 가이드. 왜 연락을 하지 않았느냐 묻던 윤오.

평소에 쓰지 않는 다리 사이의 인대와 허리 근육이 걸을 때마다 묘한 통증을 전했다. 등과 팔, 종아리에도 근육통이 있었다. 심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계속해서 윤오를 생각하게 만드는 통증이었다. 아랫배에 남은 온기를 계속해서 지펴 가슴 속까지 덥게 만드는 통증.

평소의 어지러움과 이명, 두통, 저림, 오심, 둔통, 오한이 사라진 자리에 그가 준 통증만 오롯이 남았다. 윤오가 준 것. 내게 허락한 것.

그런 기쁨 덕분에 자리를 비운 동안 쌓인 일을 알려 주는 데리다의 목소리가 쉬이 흘러 지났다.

“……니다. 중령님. 듣고 계십니까?”

“……아니. 다시.”

“접견이 밀렸습니다. 가능하면 바로 두 시간 정도 봐 주시는 게 좋겠지만, 하루 더 미룰 수 있습니다. 오늘은 숙소에서 쉬셔도 됩니다.”

“할게. 환복하고 바로 접견실로 가지.”

“예, 감사합니다.”

그녀가 감사할 건 또 뭔가. 데리다가 내게 접견을 받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내가 고맙다는 말을 전할까 하다 그냥 병실 문을 열었다. 지금은 조금 더 윤오를 생각하고 싶었다.

* * *

며칠을 망설인 일이 두 가지 있다.

오른팔에 붙은 끄트머리가 헤진 테이프를 뗄 것인가와 윤오의 셔츠를 세탁할 것인가. 전자는 씻을 때마다 고민하고도 결국 해내지 못했고, 윤오의 셔츠는 세탁을 맡기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관사에 들어오면서는 사적으로 저녁에 만날 수 있겠냐는 연락을 받았다. 루돌프였고, 이전처럼 밝은 목소리였다. 본부 밖에서 만나기로 하고 짧은 통화를 마쳤다.

군복을 갈아입으러 들어와서 셔틀 시간이 될 때까지 잠시 식탁 의자에 앉았다. 생각이 깊어졌다.

사야야의 장의 예식 후 제대 신청을 한 루돌프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전화를 건 루돌프. 어느 쪽의 녀석을 만나게 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만난 군 공립 묘지. 조금 더 따뜻한 곳에 수목장을 원했던 루돌프와 사야야의 요청은 반려되었다. 무엇도 해 주지 못한다 자책하던 쉰 목소리가 여태 선한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있나.

마음 같아서는 루돌프의 제대를 반대하고 싶었다. 삶에는 목적이 필요하고 생에는 용도가 동반되어야 했다. 원하거나, 원해지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니면 포기가 쉬운 탓이다. 군은 목적 집단이므로 계속해서 소속되어 있는 것이 그의 극복을 도울 수 있을 텐데…….

이건 누구의 생각이지?

갉작이던 의료용 테이프 모서리가 지저분하게 일어나 손끝에서 이리저리 노닐었다. 이 끝에 머물렀던 손길을 떠올리고, 군기를 찢어 버리던 루돌프를 떠올렸다.

병실까지 찾아와 준 내 가이드를 떠올리고, 접견실 밖에 무릎 꿇은 루돌프, 내게 키비슈스를 죽여 달라 울던 새파란 눈동자를 떠올렸다.

지직-.

표피를 뜯으며 테이프가 떨어져 나간 자리는 다른 곳보다 하얗다가 곧 붉어졌다. 붉어지고 붓고 부르텄다.

군에서 단체 주문한 검은 코트를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쓰레기통 앞을 서성거렸지만 아무 의미 없는 테이프는 버려지지 못하고 식탁 위에 남았다.

“그래서 펠리우로 돌아가서 살아 보려고 합니다. 펠리우, 계절 차이가 극심하지만 꽤 좋은 곳이거든요. 중령님도 제가 자리 잡으면 한번 놀러 오세요. 따뜻할 때요.”

“뭘 할 생각이야?”

“글쎄요. 퇴직금이 있으니까 당분간은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는 건 어떨까요? 헤-. 펠리우 출신이지만 사실 살던 동네 말고는 잘 모르거든요.”

밝은 목소리와 잇따른 웃음에 잠시 목 뿌리가 뜨끔했다.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연금으로 안 받고?”

“뭐, 근속 년수가 짧아서요. 연금으로 받으려면 아직 30년도 넘게 남았고, 액수가 얼마 되지도 않고요. 모아 놓은 것도 별로 없고.”

“사야야 몫은 있을 거 아냐.”

“아, 그거. 기부했어요.”

루돌프가 지은 해맑고 커다란 웃음과 ‘사야야가 기부를 좋아하니까’ 하며 뿌듯하게 으쓱이는 어깨가 더욱 불안을 키웠다. 언젠가 극복하기를 바랐지만 이렇게 빨리 멀쩡한 모습이 될 줄은 몰랐다.

고향이 사라진 펠리우로 돌아가게 둬야 할까.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참견을 해서 중앙에 두고 들여다보아야 할까.

“감사합니다.”

“왜.”

“그냥, 중령님께는 항상 감사하네요. 죄송하기도 하고요.”

“……사야야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랄 거야.”

조심스럽게 건넨 그녀의 얘기에, 루돌프가 시선을 피했다. 잠깐 창밖의 먼 곳을 바라보더니 그 아이 같은 웃음을 지으며 눈가를 크게 휘었다.

“그쵸? 우리 사야야. 좀 무뚝뚝해도 다정하니까요. 중령님이랑 비슷하죠?”

“나랑?”

“경우 없었나요. 죄송합니다.”

“아니야. ……내가 다정하다고?”

입술을 길게 늘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이내 표정을 바꿔 새파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과장된 목소리로 ‘모르셨어요?’ 하더니 다시 샐샐 웃는다.

“…….”

“죄송합니다. 제가 오랜만에 밖에 나와서 좀 신났네요.”

“죄송할 건 없어.”

“그거 봐요. 다정하시다니까.”

아는 노래인지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루돌프의 고개가 까딱거리고 발끝이 흔들흔들 경쾌하게 흔들렸다. 그 산뜻한 분위기에 내내 이질감을 느끼는 나는 무언가 다른 감정의 신호를 잡아내기 위해 계속해서 그를 살폈다.

슬픔의 기간이 규칙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늘 죽음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직업이라지만. 그래도 반려자를 잃은 지 겨우 한 달이었다. 저 평소보다도 들떠있는 태도는 분명 비정상적이다.

“언제 가지?”

“아, 퇴직 절차도 있고, 아파트도 정리해야 해서요. 일러도 이달 말은 될 거예요. 겨울 끝나기 전에 가려고요. 펠리우가 겨울이 예쁘거든요. 죄송합니다. 이런 잡담을 하려고 연락을 드린 건 아니었는데.”

“괜찮아.”

“그렇게 받아 주시면 제가 말이 많아집니다.”

빙 두른 화제를 한참 지났다. 달그락, 그가 시킨 차가운 음료의 얼음이 녹아 무너졌을 때쯤에 사야야의 이름이 다시 나왔다.

“……사야야가요. 알고 계셨겠지만, 사야야에게는 세 번째 이능이 있습니다.”

“……그래.”

“파동이 커지면서 두 번째 이능이 발달한 건지, 아예 새로운 이능인지는 몰라요. 신고하지 않기로, 숨기기로 했으니까요. 저, 들었습니다. 군 연구 시설은 정말 형편없는 곳이라고요. 새로운 이능이 나오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해부할 것처럼 군다면서요.”

물기 어린 유리잔을 매만지던 손이 바짓단에 대충 젖은 기를 문질러 닦고 다시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가볍게 주먹 쥐어진 손 틈이 잘게 떨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그로부터 다시 이유 모를 죄송합니다, 하는 사과와 함께 말이 이어졌다.

“아프게 하기 싫었거든요. 안 그래도 아프니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그건 아니야. 너는 충분히 사야야에게 필요한 사람이었어.”

“……감사합니다.”

파란 눈이 마침내 일렁거렸다. 몇 번이나 침을 삼키고, 사야야는, 사야야가, 우리 사야야, 하는 말을 뱉다가 마음에 드는 만큼 진정된 소리가 나왔을 때 그가 고백했다.

“바차스 대령님. 가이드 있습니다.”

“뭐라고?”

“사야야의 새 이능. 에스퍼와 가이드 간의 파동 합을 알아볼 수 있는 이능입니다. 죄송합니다. 중령님. 숨겼습니다. 제가 그러자고 했습니다. 사야야, 아프니까. ……제가, 제가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래 달라고 빌었습니다. 숨기자고.”

바차스의 가이드. 외진 병실에서 죽어 가는 바차스. 이미 죽은 사야야. 그녀의 이능. 두 사람이 감춘 비밀.

‘중령님께서는 만약, 새로운 이능을 얻게 되면 상부에 보고하시겠습니까?’

내가 하지 말라고 했다.

“사야야를 탓하지 말아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제가 바차스 대령님을 모른 척하자고 했습니다. 사야야를 살리려고요. 더 아프게 하기 싫어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또렷하게 끊어지는 목소리와 다르게 그의 눈동자만큼이나 커다란 물웅덩이가 테이블 위에 고였다. 식은 물잔 아래 고인 것보다 큼지막한 웅덩이였다.

푹 숙인 정수리를 가만 보고 있는 내게 루돌프는 계속해서 고개를 숙였다. 사과를 하고, 사야야의 면죄를 청했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도.

점차 자란 물웅덩이가 합쳐져 하나의 호수만큼 커졌다. 그리고 루돌프의 고백도 이어졌다. 그들이 감춘 비밀이 드러나고, 그중 충격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좋은 분이십니다. ……정말, 좋은 분입니다.’

무슨 정신으로 루돌프를 바래다주었는지 모르겠다. 그가 아파트에 들어서는 것을 지켜본 다음 택시를 돌려 군부로 돌아왔고, 즉시 보급형 랩탑을 꺼내 가이드 센터 봉사자 정보를 검색했다. 쉽게 찾아 낸 그녀를 지정해 긴급 가이딩 요청을 넣었다.

바차스의 가이드.

그리고 중령 유서프의 아내.

식탁에 이마를 괴고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모바일이 울렸다. 승인이었다.

내 계급과 건강 기록을 들이민 권위적이고 협박에 가까운 요청이, 바차스가 17년간 기다려 온 그녀를 순식간에 불러냈다.

벗어 둔 코트를 그대로 집어 들고 다시 나섰다.

외박 신청을 했고, 전기 차를 탔고, 미리 택시를 불렀다. 번잡한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차를 타고 가이드 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밤이었다.

마중을 나온 센터 관계자들은 갑작스러운 가이딩을 신청하고서 멀쩡히 걸어 들어오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또 다 식어 빠진 채 실려 올 줄 알았을까. 어쩌면 한 번도 자의로 요청을 넣은 일이 없어서 승인이 더 빨랐을지도 모르겠다.

그 시선을 뻔뻔하게 무시하고 형식적인 신원 확인 절차를 거쳐 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받은 가이딩실에는 체구가 작은 여성이 미리 앉아 있었다. 들어서는 기척에 밝은 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웃었다.

“안녕하세요. 에덴입니다.”

“……이선입니다.”

“많이 아프시다고 연락이 와서 바로 왔어요. 손을 잡아 드리는 정도만 되는데, 괜찮으실까요?”

좋은 사람.

‘사야야는 직접 접촉한 사람들의 파동을 잘 기억합니다. 그건 파동 감지 계열의 능력자라면 다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갈색 머리칼과 상냥한 눈이 부드러운 목소리와 어우러졌다. 자리를 권하며 웃는 얼굴이 상냥하다.

‘처음 그분을 뵌 건 원국 대학 병원의 의료 봉사팀 천막이었다고 합니다. 아직 새로운 이능까지는 없을 때라, 그분께 가이드신 것 같다고, 그런데 혹시 원치 않으시면 모르는 척해 드리겠다고……. 그렇게 말했다고 했습니다.’

“예, 충분합니다. 무례하고 갑작스러운 요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인데요. 이렇게 손만 잡아 드려도 나아지신다니, 의료인을 지망하는 사람으로서 무척 뿌듯한걸요.”

“……죄송하지만, 등록 정보를 조금 열람했습니다. 의료 봉사도 하신다고.”

“네. 아직 의사가 되려면 멀었지만요.”

환한 미소. 꾸미지 않는 성격. 헌신적. 상냥한 태도. 관용.

본인이 가이드인 것을 듣자마자 가이드 센터를 찾아 검사를 받고, 에스퍼의 고통을 측은히 여겨 가이딩 봉사를 시작한 용기 있는 사람. 좋은 사람.

“제 가이딩은 파장이 긴 편이라고 해요. 그 덕에 더 많은 에스퍼분에게 보통 정도는 가이딩을 해 드릴 수 있다고 들었어요. 감사한 일이죠.”

“…….”

정말이었다. 그녀의 따뜻한 손에 내 손을 얹는 순간 두통과 이명이 줄었다. 대체로 모든 가이드와 매칭률이 낮은, 수를 가늠할 수 없이 많은 가이드를 만나 온 나로서도 처음 본 수준이다. 안정적이고 포용력 있는 가이딩.

전장을 따라나서는 지원 가이드의 평균치보다도 그녀가 가라앉히는 파동의 마루가 높지 않을까. 지원 가이드를 희망했다면 당장 합격했을 만큼. 윤오를 만나기 전이라면 감지덕지했을 만큼.

어쩌면 지금이라도, 그 지경인 바차스라도 다시 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할 만큼.

사소한 통증들이 서서히 녹는 동안, 내 손등을 가볍게 도닥여 주는 다른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번잡한데 눈은 웨딩 밴드가 끼워진 네 번째 손가락에 머물렀다.

상냥한 목소리만큼이나 따뜻한 손길이 흉터 남은 내 손등을 아직도 아픈 상처 대하듯, 어린아이 달래듯 살살 어루만졌다.

에덴. 그리고 중령 유서프.

바로 얼마 전, 키비슈스를 만난 사막의 정기 토벌 작전에 같이 나간 일반 장교. 에스퍼를 다루는 법은 전혀 모르지만 나쁘거나 무능력하지는 않은 사람. 오히려 노력파에 요령도 좋고 야망 있는…….

그래서인가.

그래서 군이 바차스를 버리고 유서프를 택했나.

‘2년 전이요. 사야야가 많이 아팠을 때 있지 않습니까. 그때 각성했어요. 그때 다 알고 알려 줬지만, 아무렴 어떤가 싶었어요. 제가 이기적이죠. 저는 사야야랑 결혼이 너무 하고 싶었거든요. 같이 살자고, 비밀로 하자고, 혼자 말고 같이 숨기자고 했어요.’

2년 전, 사야야의 병실에 버티고 앉아 엉엉 울던 루돌프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몰랐던 속사정이 덧입혀진 프러포즈가 기억 속에서 더욱 애절하게 변했다.

‘……그리고 퇴원했을 무렵에, 저희가 결혼하고 얼마 안 지나 두 분 결혼식 경호로 사야야가 차출됐습니다.’

가이딩 범위가 넓고 유순한 데다 헌신적인 에덴.

대체 불가능의 강력한 이능력자이나 통제하기 어렵고 사용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바차스.

장래가 유망한 ‘일반 장교’ 유서프.

‘좋아 보였대요. 유서프 중령님, 그때는 소령이셨지만, 그분도 그렇고. 에덴 씨도.’

그렇게 일반 장교와 결혼 시켜 매칭 시스템에서 빼 버리고. 바차스와는 만날 수 없도록 2년 넘게 수를 쓰고.

죽어 가는 목숨 줄에 진통제를 붙여 놓은 건 그의 쓸모 때문이 아니라 죄책을 면하기 위해서였나? 그들에게 그런 게 있나? 왜 진작 죽여 없애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실패했나?

‘저희는 바차스 대령님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요. 몰라서……, 그래서……. 죄송합니다. 사야야는 정말 어떻게든 알릴 방법을 찾았지만, 제가 계속 말렸어요.’

루돌프는 마치 고해하듯 말했다.

‘저로는 부족하니까 가이딩을 신청하고, 계속해서 파견을 나가느라 바빴습니다. 그런데도 바차스 대령님이 에스퍼 관리동에 들어가시면 잠도 못 자고 괴로워했어요.’

이미 지난 일을 털어놓으며, 죽은 제 부인의 면죄를 청했다.

‘그래도 제가 말렸습니다. 알려질 위험이 조금이라도 있는 건 전부 다 말렸습니다. 싸우기도 하고, 무릎 꿇고 빌기도 했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사야야는, ……죄송합니다.’

이제야 겨우 밝힌 진실을 덜어 낸 루돌프의 어깨가 가볍고 좁아 보였다. 그래서일까. 이 많은 비밀들을 짊어지기에 혼자된 어깨는 너무 좁아서, 그래서 이제는 토해 내는 것일까. 남은 사람이라도 살려 보라고?

바차스의 악명은 높다.

하극상은 기본에 무단결근으로 경고를 받은 것도 수차례. 진지를 마음대로 벗어났다가 아무렇지 않게 돌아오고, 이능을 이용해 군의 시스템을 멋대로 부수고 들여다보았다.

탈영 의혹으로 감시를 받거나 사상 검증으로 구류되고, 진급 누락, 감봉, 고난도의 파견, 접견 시수 제한을 당했다. 어떤 제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놈이다.

거기다 사야야는 내가 중앙에 처음 편입되었을 때 놈이 집착하던 모습을 보았으니, 변명이나 핑계 따위 모르는 그 멍청한 놈을 그대로 오해하기에 충분했다.

오해? 오해가 아니다. 바차스는 그런 놈이 맞다. 멍청하고, 방자하고, 나태하고, 비협조적인 놈.

그러나 그것이 평생을 기다린 가이드를 찾고도, 이렇게나 가까이 두고도 한 번 만나지 못하고 말라 죽게 할 만한 죄인가?

그런 죄가 뭐지? 살인? 군은 이미 살인마 집단인데?

그럼 군인이 된 것? 그러지 않을 수가 없어 강제로 잡혀 오지 않았나?

이능을 가진 것? 그건 태어난 것만큼 선택하지 않은 일인데?

남은 건……, 남은 건.

불복종.

군인으로서, 장기말로써 군부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대표적인 인물. 위험하고 막강한 모순을 가진 이능력자.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개. 언제든 목줄을 풀고 건너편으로 갈까 염려되는 불순분자. 돌아서면 가장 위협적일 에스퍼.

살아도 연합군을 위해 쓰이고, 죽어도 군부 내에서 죽어야 할 바차스. 그리고 나타난, 쓸모 있는 가이드. 에덴.

목소리에도 온기가 있다면 이럴까. 에스퍼의 경계를 낮추는 배려 가득한 에덴의 목소리가 대답 없는 나를 두고 조곤조곤 이어졌다. 그편이 에스퍼로 하여금 가이딩을 수월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므로 가이딩에 있어 대화는 권장되는 효과적 수단이다.

그렇지만, 일부러 애쓰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좋은 가이드였다.

좋은 사람. 좋은 사람. 좋은 사람.

바차스는?

에덴. 유서프. 루돌프. 사야야. 바차스.

여럿의 입장이 되풀이하여 고장 난 VCR처럼 돌아갔다.

군이 합리를 도출하는 방식은 내게 너무도 익숙했고, 생명력이 파동에 닳아 스러지는 것 역시 에스퍼의 생애에서 자연스러운 단계였다.

에덴은 스스로 선택한 결혼으로 의과 대학 학자금을 면제받았으며,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의료 봉사와 가이딩 봉사를 하고 있다.

유서프는 억지를 강요한 악인이 아니고, 루돌프와 사야야는 바차스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바차스도 이해를 바라지 않는 삶을 살았다. 나는.

나는…….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바차스를 부추기고 에덴을 그 옆에 끌어다 놓아야 하나? 아니면 바차스가 죽고 그녀는 그녀대로 살게 해야 하나?

“혹시 중령님께서는 아이들에게 관심이 있으실까요? 에스퍼나 가이드 아이들, 너무 어린 나이에 군이나 센터에 소속되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고통받거든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요.”

상냥한 목소리가 소외받고 이용당하는 어린아이들을 대변했다. 무언가 이질적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녀는 ‘어린 에스퍼’를 줄곧 ‘보통의 어린아이’처럼 표현했다. 그건…… 드문 일이다.

“제 남편도 군인이고, 중령님도 군인이시지만 할 말은 해야죠. 군은 아이들에게 잘못하고 있습니다.”

“……예.”

“너무 주제넘었다면 죄송해요. 그래도 이왕 꺼낸 김에 주제넘은 소리 한 번만 더 허락해 주세요. 후원을 부탁드려요. 여기 ……이 재단인데, 투명하게 관리하는 곳이랍니다.”

미리 준비한 듯한 소책자와 명함이 가까이에 놓아졌다. ‘그린 재단’. 어설픈 퀄리티의 책자인데, 웃는 아이들의 사진만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미성년 에스퍼와 가이드를 위한 교육을 지원하고 있고, 체계화해서 센터 부설까지 설립하는 게 목표예요. 뿐만 아니라 거리의 아이들도 제대로 보살핌받을 수 있도록 전쟁고아들이 자립할 때까지 돕고 있습니다.”

차분하고 진중한 말씨. 흔들림 없이 곧게 마주 보는 눈. 단단한 심지. 곧은 신념. 선한 의지.

“부디 도움 부탁드려요.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스스로를 낮추기를 꺼리지 않는 사람이 내 앞에서 깊이 머리를 숙였다. 감사를 들었다. 또다시 무엇도 하지 않은 내게, ‘좋은 사람’이 분명한 그녀가 머리를 숙이고, 감사하다 말했다. 그 어깨에서 단정히 땋은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늘 아무렇게나 풀어헤치고 다니는 탁하고 긴 금발이 조금도 닮지 않은 그 모습에 비춰졌다. 마치…….

‘그러면 내가 더 살아야 할까?’

황급히 마주 잡은 손을 떼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걸음질에 드르륵 의자가 밀려나고 아스라한 온기가 걷힌 자리에 제자리처럼 냉기가 스몄다.

내 격한 반응에 그녀는 낙심한 표정을 지었지만 애써 감추고 천천히 얼굴을 들어 올렸다. 에덴. 바차스의 가이드.

“후원, 하겠습니다. 가이딩 감사합니다. ……또 뵙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중령님! 어마, 감사합니다!”

빳빳한 명함 하나를 낚아채듯 쥐고 가이딩실을 벗어나는 내게, 그녀가 잰걸음으로 쫓아 나오며 몇 번이나 허리와 고개를 숙였다.

행여 들리지 않을까 조용한 복도에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몇 번이나 감사하다 외쳤다. 감사하다고.

죄악감이 들었다. 누구에게?

밖에서 졸던 직원이 놀라 나를 불렀지만, 대답은커녕 내가 어디로 가려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움직였다. 센터를 벗어나 차를 찾을 생각도 못 하고 어둑한 차로로 접어들었다. 쉼 없이 걷고 반쯤은 뛰었다.

그건 도망이었다. 나는 그 자리와 에덴에게서 도망쳤다. 혐오스러운 내게서 도망쳤다.

그녀가 윤오라면.

그 생각은 내 오만을 무너뜨렸다. 만나지 못하고 이어가는 삶을 이제는 상상할 수 없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녀를 만나 보고 정하겠다 한 거지?

에스퍼 하나의 온 세상을 앞에 두고 어떻게 감히. 내가.

그리고 나서는 에덴의 앞에 있을 수 없었다. 다 죽어 가는 바차스를 살리라고 강요하기에 너무도 ‘좋은 사람’이었다.

에스퍼의 등록 가이드로 사는 것은 일반인에게 결코 행복한 일이 아니다. 그것도 고위직 간부, 특히나 바차스 같은 놈에게라면 더욱.

알지만. 알지만.

하얀 입김이 깜깜한 밤공기에 거칠게 묻어났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가로등과 외길을 따라 시내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숨이 식은 코끝이 빨갛게 얼고 손끝은 이미 잃어버린 듯 무뎠다.

깊은 밤 어두운 차도 한가운데를 위태롭게 걷다가, 제대로 된 건물을 보고 나서야 걸음을 멈췄다. 알아 버린 비밀의 무게가 등 뒤에 늘어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그림자가 밤보다 어둡게 발목에 매달렸다.

가이드 센터의 간이 숙소를 이용하려고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으니 내가 돌아갈 곳이라곤 군부밖에 없었다.

그런데, 익숙한 데리다의 직통 번호를 화면에 띄워 놓고 어째서인지 누를 수가 없어 가만 보기만 했다. 차를, 불러 달라고 해야 하는데. 돌아가야 할 곳. 내가 있어야 할 곳. 나를 필요로 하는 곳.

시간은 자정을 넘어가고, 조그만 시내 외곽은 적막했다. 밤을 빼곡히 채우던 울음이 모조리 사라진 계절이 유난히 쓸쓸했다.

차가워서. 겨울이 되어 버려서.

이 메마른 계절이 가슴 깊이 시리고, 짊어진 고백과 삶과 또 죽음이 무거웠다. 감당할 수 없는 이 짐은 어째서 나를 찾아왔을까. 잘못 찾은 감사와 사죄가 모조리 괴로웠다.

괴로운 마음이 뻐근한 통증으로 쿵쿵 가슴께를 두드렸다.

[도착했습니다.]

어느새 데리다의 직통 번호 대신 짧은 메시지를 띄워 놓은 모바일 화면을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치밀고 또 치밀어 보았자 목구멍을 넘어서지 못하는 감정을 빠끔거렸다.

윤오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당신을 기구한 삶에 몰아넣고서, 답이 빤한 질문을 하고 싶었다. 내가 엮이지 않았다면, 이런 장해물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윤오는 어디에 있었을까. 새로운 곳을 가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까.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접견실, 가이드 센터, 에스퍼 관리동.

혼자 밤을 보내는 것도, 외로운 것도, 추운 것도, 모두 오래되어 익은 일인데.

나라면 이해할 것이라는 잔인한 기대와 정말로 나라서 이해할 수 있는 각자의 입장들이 빙글빙글, 바람에 섞여 홀로 선 몸을 흔들었다.

군이 멋대로 저울질한 가치. 사야야가 지켜야 했던 루돌프. 루돌프가 바란 사야야의 안전. 두 사람이 감춘 진실. 그렇게 병상에 남은 바차스.

버티기 힘든 중압감이 드러난 피부를 죄 깨부수는 것 같았다. 얼어붙은 몸에서 마음도 무사하지 못했다. 이대로 밤을 지새우면 틀림없이 동상에 걸릴 텐데, 한참을 앓아누울 비루한 내 육신을 알면서도 데리다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이 시간이라도 내 일을 처리해 줄 사람은 그녀밖에 없는데.

‘부관이 보호자입니까?’

내 보호자. 내 삶이 남길 자산과 혜택의 수혜자. 내 지독한 집착과 미련의 대상. 내 가이드. 내 사랑. 내 윤오.

수천 번을 보아 외우고, 외우다 못해 모든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비슷하거나 닮은 수만 보아도 설레는 그런 번호. 한 번도 걸어 보지 못한.

도착했다는 여섯 글자로 허전한 마음과 어스름한 새벽녘을 달래는 메시지. 그럴 적마다 아래에 키패드를 띄웠다가 다시 내렸다가.

그의 오늘은 어땠는지.

오늘은 글이 잘 써졌는지, 그 집엔 여전히 커피 머신이 켜져 있고, 재떨이엔 끝을 씹은 담배꽁초가 있고, 오늘도 걷지 않은 빨래 건조대에서 섬유 유연제 향이 나는지.

[윤오 씨. 이ㅅ]

“……아.”

썼다가, 지웠다가. 다시 썼다가 지웠다가. 선 자리에서 몇 번이나 ‘윤오 씨’와 ‘이선입니다’를 반복해서 쓰고 지웠다. 딱딱한 손끝이 결국은 실수처럼 전송 버튼을 누를 때까지.

자초한 실수로 문장도 아닌 것을 보내고, 막막한 목구멍을 뚫고 허탈한 단음을 뱉었다.

윤오는 전화를 싫어해. 윤오는 연락을 싫어해. 윤오는 방해를 싫어해. 윤오는 나를 싫어해.

여태까지는 그 사실을 되새기는 것만으로 참을 수 있었는데, 윤오가 나를 안아 주었다.

그에게 받은 메시지를 되새기는 것만으로 새벽을 충분히 참아 낼 수 있어야 했는데, 그런데 지금은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깊어 가는 밤이 두렵고, 나라는 불운을 안아 준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내가 궁금해해도 되는지, 그것마저도 궁금했다.

윤오 씨. 이선입니다.

다음에는 무슨 말을 이어 갈 생각이었을까. 분명 생각이 있었을 텐데 떠오르지 않고 하얀 입김만 바람에 모양을 달리했다.

불행하십니까. 그만 놓아드려야 할까요.

대답이 뻔한 그런 질문은 아니었는데.

막상 저지른 실수에는 큰 당황이 따르지 않았다. 충격에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오늘은 남은 양이 없었다. 다만 ‘죄송합니다. 실수였습니다.’ 하는 매듭을 지어야 하는데 그 간단한 문장을 써내는 것이 도무지 이어지지 않았다.

무엇도 없는 거리에 때로 찬 바람이 불고, 어둑한 가로등 아래 그림자가 흔들거렸다.

맡겨진 허물에 꼼짝을 못 하고, 혼자 하는 사랑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이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삐비비-.

여름의 잔상은 종종 이명으로 찾아 들었다.

그 이명은 풀벌레 울음으로 가득한 여름날, 윤오를 따라간 빌라 정원의 열기를 닮았다. 그 이명은 전화 연결음이나 끊어지지 않는 진동 소리에서 시작해 이윽고 총탄과 폭발음으로 이어졌다. 그 이명이 심해지면 이제는 기억에서만 남아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흔들, 흔들.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소리에 다시 누군가의 목소리가 웅성웅성 에돌았다. 아스라이 여럿의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걸었다. 분간할 수 없이 가득한 환청 속에서도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았다.

유언, 그리고 유언. 또 다른 유언, 내게 남긴 말. 전해 달라는 약속, 기억해 달라는 부탁.

왜 나일까.

하나씩 건네받은 말들이 모여 나는 내 한 몸조차 가눌 수가 없는데. 누구도 이런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다지도 무거운 짐을 내 어깨와 등에 더했다. 그렇게 제 짐이 가벼워지면 떠나 버렸다. 남겨지고, 남겨지고, 남겨졌다.

삐비비-.

주저앉아 버린 몸을 그림자가 짙게 둘렀다. 더욱 검고 깊어진 그림자는 바다 같았고 내 몸은 추를 잔뜩 매달았다. 바닥의 한기가 뼛속을 스몄다.

겨우겨우 환청 속에서 모바일 소리를 분간해 내었을 때는 네모진 모서리를 쥔 손이 그대로 굳어 내 것 같지 않았다.

데리다겠지. 나를 찾을 사람이라곤 군밖에, 그녀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화면에는 오래오래 곱씹어 노력 없이도 알아볼 수 있는 번호가 떠 있었다. 더 놀랄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마음이 얼음 깨지듯 두근, 하고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쓸린 상처의 아픔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얼어붙은 손가락을 고쳐 세워 전화를 연결했다. 곧장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 뭡니까.

“…….”

- 뭐예요. 이 시간에. ……밖입니까?

“윤, 오 씨. 이선, 입, 니다.”

- 알고 있습니다. 어딥니까.

덜덜덜덜. 갑작스레 온몸이 떨기 시작했다. 마치 이대로 굳어 죽을 수는 없다는 듯, 격렬하게 떨었다. 너무너무 춥다고. 죽을 것 같다고.

죄송하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다. 조리 없는 말이 위태롭게 이어졌다. 나약해 빠진 목소리였다.

윤오는 재차 어디냐고 물어보았고, 전화를 끊지 말고 있으라고 했다.

가로등 불빛도 밝히지 못한 감은 눈꺼풀 너머로, 곤두선 청각은 전화 너머의 소리에 집중했다. 윤오의 소리가 분주했다. 내게 잊지 말아 달라 말을 거는 목소리들에 잠기지 않기 위해서 윤오의 소리에 집중했다. 부스럭거리고 덜컹이고 잔잔한 진동 소리가 들렸다.

삐빅, 삐빅.

통화 대기음.

군인은 항시 대기하여야 하며, 비상 연락에 빠르게 응할 의무가 있다.

이능 장교는 항시 전시에 대비하여야 하며, 그 위치를 군에 알릴 의무가 있다.

그렇게 살아 왔다. 그렇게 배웠고 그 외에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일거수일투족을 추적당하고, 모든 정보가 문서화되는, 그 정보를 군과 연구소가 공유하여 가치를 매기는 삶밖에 살아 보지 못했다.

내게는 그것이 당연했고,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다른 에스퍼 역시 같은 제약 아래에 살았다. 하루를 살아 내기가 버거워서, 하지 말라는 것까지 할 여력이 없었다.

삐빅, 삐빅.

데리다일 텐데. 받아야 하는데.

오랜 습관이 귓가에서 들리는 엔진 소리에 흩어졌다. 어디로 가는 걸까. 윤오가 운전을 하고 있나.

추위에 얼어붙은 입술이 윤오, 윤오 하고 소리 나지 않는 부름을 읊다가, 오래된 데라주바의 노래 가사를 외웠다. 한 곡을 통째로 외고 또 한 번을 더 외웠다.

같은 노래를 드문드문 끊어지는 작은 목소리가 세 번째 외울 때. 검고 커다란 차가 길가를 저만치 지나다 멈추었고, 보고 싶은 사람이 내렸다. 전화는 끊어지지 않았는데 차 문이 거칠게 여닫히는 소리가 수화기 안과 밖에서 동시에 울렸다.

윤오, 윤오.

그대로 멱살이 끌어 올려졌다.

오래전부터 굳어 버린 줄 알았던 몸이 팔랑거리며 일으켜지고, 손아귀에 붙어 있던 모바일이 떨어져 깨부숴지는 소리가 났다. 끊임없이 삐빅 거리던 통화 대기음이 멈추었다.

윤오는 커다란 한숨을 쉬며 미간을 찌푸렸고, 그의 코트가 벌어져 나를 품었다.

꽁꽁 얼어붙은 몸뚱이에 그의 체온이 뜨거워 따끔따끔 통증이 일었다. 찌르는 아픔이 차근차근 전신에 퍼져 냉기를 빼앗았다.

그의 한숨에 잃어버린 줄 알았던 사지의 말단과 코끝, 귓바퀴가 시렸고, 감은 눈꺼풀 너머도 부셨다.

“어떻, 어떡하, 죠? 어떻게, 하죠? 제가 어떡, 어떡…….”

“일단 타.”

뜨거운 온기가 얼음 조각 같은 손을 쥐고 이끌었다. 윤오의 향기가 나는 코트에 감싸여 조수석에 올라타고, 실내를 덥히는 히터가 세게 틀어졌다.

윤오는 액정이 망가진 내 모바일을 기어 박스에 대충 던져 넣고 그의 옷에 파묻힌 내게 안전벨트를 채웠다. 더운 실내와 온열기가 켜진 좌석, 무엇보다 윤오의 존재.

“왜 이렇습니까.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

“가이드 센터? 가이딩이 필요했습니까?”

윤오가 거칠게 차를 몰았다. 한산한 거리를 가르고 익숙한 동네까지 이르렀을 때쯤에야 윤오가 나를 찾아낸 것을 믿을 수 있었다.

“이선.”

“……네.”

“가이딩을 받았습니까?”

“……네.”

에덴에게 가이딩을 받았다. 바차스의 가이드. 다 죽어 가는 바차스의 가이드에게.

“왜?”

“바차, 동, 동료가 죽, 가이드가 있는, 어떡하면 좋을, 몰…….”

“올라가서 얘기해.”

고장 난 기계는 공란이 되어 버린 생각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고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말을 이었다.

엉터리 대답은 그의 한숨을 불렀고, 그의 한숨은 검고 차가운 공백을 가슴으로 옮겨 붙였다. 엉망이 된 나를 윤오가 챙겨 그의 집에 들여놓았다.

낙엽색 소파에 그가 앉아 나를 그 무릎에 올렸다. 두 겹의 코트가 감싼 몸뚱이가 아주 느리게 녹아내렸다. 등을 두드리는 손이 얼음장 같은 마음을 툭, 툭, 깨었다.

내 것으로 하고픈 어깨에 빨갛게 얼어붙은 뺨과 코와 입을 문지르며 하고픈 말을 계속해서 웅얼거려도 제대로 된 말이 없었다.

“어떡,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뭘.”

“제가, 어떡하면, 죽으, 죽는 건 싫, 아니, 그분도…….”

“네 일이야?”

“…….”

“그럼 당사자한테 말해.”

그토록 딱딱하고 냉정한 말을 하면서, 어쩌면 윤오는 이렇게 따뜻할 수 있을까.

꿀꺽. 말문이 막힌 내 귓가에 무서운 한숨이 떨어지고, 차가운 머리칼을 더운 손이 쓰다듬었다.

“네 일이 아니야.”

* * *

그러겠다 하고 나왔으니 천 틸.

어린 에스퍼와 가이드를 돕겠다던 말이 고마우니 천 틸.

제 발 저린 죄악감에 천 틸.

죄책을 돈으로 씻어 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숫자를 나열하고 송금 버튼을 누르는 쉬운 일은 그저 3천 만큼의 숫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천 틸 씩 줄어 가는 잔고는 줄어드는 티도 나지 않았고, 꽤 큰 금액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이까짓 일이 도움이나 될까 싶었다.

처음 목적했던 후원금의 세 배를 송금하고도 속이 허무하다. 다시 식탁에 엎드려 팔을 굽힌 틈에 얼굴을 맞춰 넣었다.

내 일이 아니다. 선택은 당사자가 해야 한다.

단번에 내 짐을 잘라 내려놓은 윤오. 그는 내 정신을 빼놓은 그 고민이 무엇이든, 그저 내 몸을 덥히는 것만이 중요한 사람처럼 나를 품어 주었다. 찬기가 가실 때까지, 온기를 되찾을 때까지.

지난밤. 그와 내가 앉은 주황빛 소파에는 쉴 새 없이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워드 화면이 뜬 모니터와 그 책상의 스탠드, 그리고 베란다를 넘은 가로등 불빛이 희끄무레한 그림자를 여럿 만들어 냈다.

어둑한 내 그늘 하나하나가 겹쳐져 윤오를 집어삼켰다. 그러고서 마음이 좋아지던 그 순간. 고동치던 맥박. 되살려지는 감각. 저항할 수 없이 녹아내리던 몸.

삐비비-.

일부러 수신음을 키워 놓은 모바일이 울렸다.

죄 까져 딱지가 앉은 손가락으로 모바일을 집어 들고, 그보다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나열된 숫자는 처음 본 것이지만 앞에 붙은 지역 번호가 짐작과 같았다.

- 여보세요? 그린 재단입니다. 이선 중령님 되시나요?

“예. 이선입니다.”

- 안녕하세요! 에덴입니다! 어제 뵈었는데, 기억하실까요? 다름이 아니라…….

이렇게 일찍, 그것도 직접 연락해 올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재단에서 중요한 일을 하나. 그저 맡은 일이 많을지도 모르고.

어쨌건 번거로운 과정이 줄었으니 반가운 일이었다.

후원에 놀랐다. 좋은 일을 하시는 것이다. 열심히 하겠다. 큰 도움이다. 감사하다. 이런저런 일에 쓰겠다. 표창을 드리고 싶다. 어디에 초대하고 싶다.

이름을 밝힌 후원과 기부에는 언제나라고 해도 좋을 만큼 따라오는 감사 인사였다. 계절이 지나고 한 해가 지나면 같은 번호로 감사가 아니라 힘들고 아쉬운 소리가 온다. 뻔하고 뻔한 이야기.

그런데 이상하지. 에덴이 열심히 종알거리는 말에는 진심이 묻어났다.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 같았고, 진심으로 노력하는 것 같았다.

언행에 저절로 묻어나는 성실한 성격과 티 없는 성품 때문일까. 자꾸만 준비한 말을 주저하게 되었다. 하지 않을 수 없는 부탁인데도.

- ……감사한 분들을 모시는 자리예요. 소박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준비하고 있답니다. 연말이라 바쁘시겠지만, 꼭 와 주셨으면 해요.

“연말은 일이 있습니다. 그보다,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 네! 무슨 일이신가요? 부디 재단에서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면 좋겠어요. 말씀만 주세요.

“부탁은 개인적인 일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에덴 씨께서 사람 하나를 만나 주실 수 있겠습니까?”

- 아…….

수상하기 짝이 없는 말에 에덴의 침묵이 길어지고, 나는 어제 받아 온 재단 명함을 마른 손바닥 안에서 굴렸다. 헤진 모서리를 식탁에 놓고 손끝으로 누르다가 먼저 침묵을 끊었다.

“실례인 줄은 압니다만, 부탁드립니다.”

- 혹시, 어째서인지 여쭤보아도 될까요? 어떤 분을 제가 뵙길 바라시는지.

상냥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선하지만 강단 있는 성격 같았다. 필요에 따라 굽힐 줄 알고, 불의에는 굴하지 않는, 그녀가 그런 사람이라면.

에덴은 목적하는 대로 어린 에스퍼와 가이드의 처우에 관해 큰일을 해낼 수 있을까? 모르는 채로 휘둘리고 좋을 대로 이용당하는 일 없도록?

……지난 10년간 내가 해내지 못한 일을. 나도, 사회도, 군도 하지 못한 일을 애먼 사람에게 기대하며 아랫입술을 자근거리다 대답을 꺼냈다.

“에스퍼 하나를 만나 주시겠습니까?”

- 에스퍼분. ……꼭 저여야 하나요?

“예.”

- 혹시 알고 계신가요? 저는 손을 잡는 정도의 간단한 가이딩 봉사만 하고 있습니다. 이미 결혼도 했고요. 중령님에 대해서 제가 오해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위험하거나 부정한 일이 아닙니다. 결코 해가 가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손을 잡아 주시는 수준, 아니, 그냥 가까이서 들여다보기만 해 주셔도 됩니다. 안전은 제가 무슨 수를 써서든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든.”

- 그분 때문에 어제 저를 보러 오셨던 건가요? 후원도요?

“……그렇습니다.”

고민 어린 침묵이 길었다. 거절해도 된다. 에덴은 그럴 자격이 있었다.

이대로 무수히 많은 에스퍼를 원하는 만큼 돕고, 그녀 하나만을 기다린 에스퍼가 있었다는 사소한 일 따위는 모르고, 그렇게 살고픈 삶을 살면 된다.

에덴이 거절해도 나는 후원을 물리지 않을 것이고, 에덴이 거절하면 그 삶에 바차스를 들이지 않게 할 것이다.

내 일이 아니라고, 내 짐이 아니라고 윤오가 못 박아 주지 않았다면 진작 찾아가서 무릎부터 꿇었을지 모른다. 두 번, 세 번, 어쩌면 그녀가 만나겠다 할 때까지 부탁했을지도. 계속해서 부탁하고 대신 매달리고 빌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살아날 가망이 있으니까, 이제 제 두 다리로 설 기력까지 잃은 누군가를 대신해서, 그녀의 평온한 삶을 조금만 열어 사람 하나만 넣어 달라고. 기회라도 달라고.

또다시 주노와 준준 때처럼 내 일, 네 일 구분 못하고. 울며, 불며. 죽어 가는 에스퍼 하나만 살려 달라고. 당신의 에스퍼라고.

그녀의 도량을 이용할 작정과 그에 따를 책임에 괴로워하며 헤매던 나에게, 윤오는 새로운 관점을 보여 주었다.

맡겨진 등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갈 줄밖에 모르던 조랑말의 등에서,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짐을 하나하나 쓰러트려 내렸다. 풀썩풀썩 걸음마다 가라앉던 몸이 부표를 단 것처럼 떠올랐다.

이 어쩔 수 없는 삶은 내 업이 아니라고. 이 짐도, 그로 인한 결과도 내 탓이 아니라고.

“꼭 부탁드립니다.”

- 어째서인지 여쭤보아도 될까요?

“……그 에스퍼가 누구와도 매칭이 높지 않습니다. 에덴 씨의 가이딩이라면 그 폭이 커, 혹시 다를까 해서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거짓이 아니지만, 진실도 아닌 에두른 말.

사실 누군가를 설득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지만, 에덴은 고민을 짧게 끝내고, ‘네, 알겠습니다.’ 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새롭게 응어리가 지는지, 이미 진 것이 풀어지는지 모르게 속이 뜨끔거렸다.

그녀의 허락을 들고 내가 찾아갈 곳은 하나였다.

통제구역의 흙을 섞은 콘크리트로 세운, 전파가 통할 수 없을 만큼 두꺼운 벽. 가장 외진 곳. 창도 창살도 없는 감옥 같은 병실. 에스퍼 관리동을 조그맣게 떼어 놓은 곳.

하다못해 장교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정도의 사교성도 없는 놈이라 입구에 놓인 출입 기록이 단조로웠다. 가장 마지막 방문자 이름을 다시 내 이름으로 갱신하며 들어섰다. 병실에 익숙하게 드리운 죽음이 평소보다 갑갑했다.

어떻게 전하면 좋을까.

네가 살 수도 있다고. 그렇지만 너를 살릴 그 지독하게 탐나는 사람을 결코 가지려 해서는 안 된다고.

얼마나 후회했던가. 평범하게 알게 될 기회조차 스스로 앗아 버린 그날을 얼마나 돌이키며 후회했던가.

나는 정말로 모든 순간을 후회했다. 지금도 그랬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지체 없이 그 여름의 저녁을 고르고 싶을 만큼.

윤오를 알게 된 순간부터 내내 이어 온 후회가 2년을 넘어서고, 함부로 포기하지도 못하는 목숨을 그만큼 더 이었을 때, 준준이 주노를 만났다.

가이드를 찾았다고, 수화기 너머 음습한 목소리가 감추고 싶었을 사실을 고백했다.

전화를 받고 대번에 달려간 나는 2년 전 여름의 나를 패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 준준을 때렸다. 반란군의 포로였다가 엉뚱하게 중앙으로 납치된 주노에게 무릎 꿇고 그가 당한 일을 사죄했다.

준준을 때리고 주노에게 사죄했으나, 맞은 것은 나였고 사죄는 윤오를 향한 것이었다. 나는 그들과 나를, 내 처지를 분리하지 못했으니까.

때를 놓치고 잃어버린 질문. 진작 전했어야 하는 질문은 지난밤에야 상대를 찾았다. 대답은 단호하게 떨어졌다.

‘당사자한테 말해.’

윤오라면 어떨까,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았을까.

수백 번을 고민하고 단 한 번도 찾지 못한 해답이었다. 나는 윤오에게 물어봤어야 했다.

진통제를 조절하고, 파동을 감쇠하고, 기다리고.

꿈속을 헤매는 눈동자가 의식을 차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나날이 길어졌다. 이제는 현실보다 그 깊은 곳에 머무르는 시간이 긴데, 그동안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이번엔 무슨 꿈일까.

바차스는 의식이 깨어날 때면 느릿한 목소리로 그가 꾼 꿈 얘기를 해 주곤 했다.

“……Sun.”

그렇게 나를 부르면서.

다 놈의 탓이었다. 자초한 오해를 하나도 풀지 않아서, 군에게 미움받는 개새끼 역할을 벗어나지 않은 바람에 사야야와 루돌프가 침묵하게 했다.

군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아서 그 좋은 사람을 만나 보지도 못하고 빼앗겼다. 잠자코 죽은 듯이 기다리지 않아서 이렇게 죽기 직전까지 왔다.

아무도 믿지 않아서, 너무도 조금의 사람만 가까이해서 이 지경이 되었다.

그럴 거면 내게도 알려 주지 말지. 제법 괜찮은 놈이라는 걸 나도 몰랐다면, 그러면 기다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진작 편하게 보내 줬을 텐데. 이렇게 대신 미련 떨지 않았을 텐데.

“……전쟁 꿈을 꿨어. 그날따라 파동이 손에 잡힐 것 같았지. 단번에 무전을 다 끊어 버려서 아군도 당황한 날이야. 기억해? 사야야가 대활약했던 날. 이제 죽었다고 했나…….”

“응.”

죽었다. 아마 사야야는 끝까지 바차스가 제 이름을 아는 줄 몰랐을 것이다. 저렇게 칭찬을 하고 아깝다는 듯 말꼬리를 늘릴 줄도 몰랐겠지. 아플수록 말수가 줄고 잘 웃는 것도, 기운이 없을수록 욕보다 아양을 떨어 지긋지긋하게 만드는 것도.

전부 다 놈의 탓이다. 계속해서 알려도 모자랄 판에 점점 더 믿기를 포기한 놈의 탓이다.

“Sun. 오늘은 왜 말이 없어? 아니면 내 목소리가 지금 안 나나? 진동은 하는 거 같은데. 19일. 이틀 만인가. 근무하고 왔어? 아, 내가 근무지. 접견.”

“……그래.”

“맞춰 볼까?”

탁한 빛을 띠던 눈동자가 아래 눈꺼풀에 슬쩍 밀리며 반달 모양을 그렸다. 반달같이 노란 눈이 곧 감기고 놈의 파동이 갑작스레 끓어올랐다.

“뭐 하는 거야? 그만둬!”

“그린 재단? ……가이드 센터를 다녀왔네. 네 가이드 새끼는 아니고. 누구야?”

“이능 쓰지 마.”

간만에 듣는 즐거운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벽 두께가 1미터는 족히 되는 이 감옥도 이제는 바차스의 이능을 가둬 둘 수 없다니.

급히 끌어 올린 제어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놈이 계속해서 내 행적을 함부로 훑었다. 멀쩡했다면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상황인데, 시체나 별반 다름없는 놈을 때릴 수는 없었다.

집중력을 흩트릴 것을 찾다가 침상 주변을 빙 두른 기계 중 하나를 세게 밀었다. 콰창, 깨부숴지는 소리가 나고 뚝, 파동이 끊겼다.

그러나 정보를 다루는 에스퍼 중 최상위급 이능력을 가진 바차스에게는 이미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다음이었다.

“……나야?”

띵, 삐리릭, 픽픽, 삐빙, 삡삡삡삡.

모든 전자 기기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요란한 소음에 파묻혀 들리지 않을 법도 했는데,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그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들켰다.

“에덴. ……에덴.”

그 눈이 탁하지 않고 금빛으로 빛나는 것은 무척 오랜만의 일이었다.

“예쁘다.”

“……어디까지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알고 있어. Sun. 넌 역시 물러 터졌어.”

그에게서 에덴을 무사히 지키기 위해, 여차하면 바차스를 죽이는 것도 불사할 각오로 준비했다. 이미 눈치챘을 테지만 확실히 해 두기 위해 당황을 누르고 단호한 소리를 냈다.

“네가 그녀를 망치게 두지는 않을 거야.”

“만날 생각 없으니까 걱정 마.”

“뭐라고?”

“Sun. 이 허술한 새끼야. 무른 새끼야.”

제어를 벗어난 파동이 기쁘게 날뛰며 온갖 전자 기기를 울렸다. 내 모바일도 기본 벨 소리를 몇 개나 바꿔 가며 바차스의 뜻대로 놀아났다.

만날 생각이 없다는 건 무슨 뜻이지?

반작용으로 펄떡거리기 시작하는 바차스의 무릎을 내리누르고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을 들여다보았다.

“있었구나.”

“…….”

“새끼야.”

“……응.”

“나도 가이드 있다.”

놈은 아주 활짝 웃었다. 사지를 경련하고 동공이 멋대로 확장되었다 수축하는 중에도, 아주 활짝.

요란한 전자음이 병실을 꽉 메워 노래했고, 처음으로 본 그런 웃음에 탁한 금발과 금안이 조금은 반짝거렸다.

‘대령님의 이능은 저희가 반드시 피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판을 넣고, 회로에 배선하고, 전기를 흘려 넣으면. 프로그램이 하드웨어에 명령 체계를 전달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전자 기기는 바차스의 편이 된다.

놈의 의지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기계를 움직였다. 전산망을 휘젓고 갖은 정보를 원하는 만큼 가져왔다. 화면이 달린 모든 기기는 먹통이 되고, 통신이 엉키고, 비밀스러운 정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무리 암호를 걸어 두어도 즐거운 장난을 마주한 듯 풀어내는 놈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바차스의 존재로 전장의 형태가 달라졌다. 첨단의 현대전에 구식의 망원경과 파발이 등장했고, 고성능의 무기와 치밀한 정찰 대신 에스퍼 개개인의 이능에 의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기를 사용하는 복잡한 무기나 도구는커녕, 제대로 된 지휘조차 전달받을 수 없는 반란군을 상대로 연합군은 매번 손쉬운 승리를 거두었다.

딱 한 사람만 앓아누우면 되는 일이었다.

‘정말 좋은 분입니다.’

그사이 다른 많은 에스퍼의 고통을 달래는 봉사를 하고, 또 더욱 많은 사람을 낫게 할 공부를 했을 에덴.

어린 에스퍼와 가이드, 거리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보겠다던 그 말. 재단의 후원을 위해 밤늦은 연락에도 가이드 센터로 나와 머리를 숙이던 그녀.

어쩜 이렇게 하나하나가 다 그를 위해 안배한 것 같을까.

“……왜 안 만나겠다는 거야?”

“목소리는 어때?”

“목소리?”

“영상에 음성은 없어서. 목소리도 예뻐? 씨발. 예쁘겠지.”

병자 하나를 견제한답시고 피스톨을 차고 들어온 나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 손잡아 주면 안 돼?”

충분한 경고와 함께 바차스에게 가이드가 있음을 알린다. 놈이 약에 취해 잠들었을 때 에덴을 불러 세 걸음 정도의 간격을 두고 비접촉 가이딩을 한다. 15분에서 최대 1시간가량 진행한다.

혹시 가이딩 효과로 놈이 정신을 차리고 날뛸 경우, 상황에 따라 허벅지를 쏘아 제압한다.

원만히 마치면 계속 이어 갈 수 있도록 에덴의 허락을 구하고, 일자나 조건을 조율한다. 주 1회에서 2회, 4주가량 추가 진행하여 놈의 생명력이 아직 불씨를 남겼는지 살핀다. 매회 참관하여 두 사람 사이에서 돌발 상황을 막는다.

어느 때건 바차스가 통제되지 않을 경우 에덴을 우선시한다. 신체 활력 징후와 파동을 지표 삼는다.

그렇게 준비했는데.

복도에서 전자 기기를 모두 치우고, 관통상을 처치할 의사를 방비하고, 낡은 군용차를 앞에 대기 시켜 여차하면 놈을 에스퍼 관리동으로 옮길 작정까지 했는데.

마침내 만난 가이드를 망치려 든다면, 그런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내 손으로 쏘아 죽일 각오도 했는데.

놈의 무릎을 지그시 누르는 내 팔뚝으로, 귀신같이 창백한 손 하나가 올라왔다. 손가락을 세워 쿡 찌르더니 ‘상처 있는 쪽’ 한 다음, ‘에덴이랑 잡은 손’ 하고 내 왼손을 요구했다. 피식피식, 솟았다 꺼지는 가슴팍이 몹시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소화가 제대로 되지 않을 때처럼 속이 갑갑하고 두통이 밀려왔다.

어째서 이놈은 제 가이드를 만나지 않겠다는 거지? 만나 보면 에덴이 제 가이드가 아닐까 봐? 그래서 더욱 절망할까 봐? 아니면, 이미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서? 아니면…….

“너는 밉보이지 마라.”

휘어지는 노란 눈을 노려보다 스툴을 당겨 가까이 앉았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바차스의 손을 잡았다. 빈번한 접견을 이어 왔지만 놈과 손을 잡는 건 몇 년 만이었다.

중앙에 온 첫해에 녀석이 일을 쳤고, 곧 제재가 내려왔으니.

“말 잘 들어, 새끼야.”

“네가 할 말이야?”

“나니까 하는 말이지.”

“……어디까지 안 거야?”

다시 조용해진 기기들 틈에서 파동계를 찾았다. 주기도 길이도 형편없지만 진폭만은 잠잠한 파동을 살피고, 다소 빠르지만 심박도 규칙적인 것을 확인했다. 산소 농도도, 혈압 체크도 정상. 주사액 조절 화면도 정상.

급한 대로 쓰러트린 간이 뇌파 측정기의 경고음과 거미줄처럼 깨어진 모니터에 뜬 에러가 아니라도 결과는 쉽게 유추할 만했다. 이마 한쪽에 전극을 붙이고 히죽거리는 안색이, 얼마 만인가 싶게 좋았으니까.

“글쎄.”

“…….”

“많이.”

정보를 찾아내고, 거르고, 조합하여 알고 싶은 것을 알아내는 일.

단순히 전산이 놈에게 호의적이라 알아서 정보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이능보다 뛰어난 판단력과 사고력이 그 운용을 가능하게 했다고 보는 관점도 있었다.

놈은 어느 쪽이 옳다 말한 일이 없고, 그 어떤 평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 살겠다.”

“……정말?”

“아니.”

도무지 생각을 알려 주지 않는, 그런 놈.

미지근한 손바닥이 서로 스치며 웃음처럼 버석거렸다.

* * *

“겨울이 그렇게 힘들면 겨울 동안 파견을 줄이는 건 어떻습니까?”

“그건…….”

“안 됩니까?”

윤오는 언제나 옳다. 쉽게 정답을 찾고, 길게 헤매지 않는다. 그는 방황하지 않고, 그는 가라앉지 않는다.

쉽게 무너지고 내내 헤어나지 못한 내게도 답을 나누어 주는 남자.

그의 입에서 나오면 마치 내가 모든 일을 고르고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싫으면 싫다고,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일 같았다. 그래도 되는 일 같았다.

“전황이…….”

“이번 겨울에 당장 전쟁이 끝나기라도 합니까?”

“……아닙니다.”

속이 뜨끔거렸다. 아니라고 말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쓰였다.

중앙군과 연합국이 10년을 벼른 일. 단 한 사람을 죽이는 일. 당장 끝나지 않는 전쟁. 이번 겨울. 내가 필요한 일.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번에야말로 전쟁을 끝내겠다는 군의 의지가 또렷해서. 이제껏 수많은 군인과 일반인이 갖은 전투에 휘말려 죽고, 오래된 도시가 진지 구축을 위한 돌무지에 불과하게 쓰여도 발휘하지 않은 의지가 보여서.

전쟁의 발발은 쓸모가 있었다. 10년 전, 사소한 다툼이 잦은 국가들이 공통의 적을 상대로 연합했다. 원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군부 연합이 들어서고, 신군부의 입지를 가다듬는 데에 꾸준하고 감당할 수 있는 그 전쟁이 필요했다.

단지, 그 분란을 다룰 수 있다고 여유 부리는 사이 위협적인 역량을 갖춘 엘로란타 군이, 손쉽게 잡을 수 없게 된 키비슈스가 문제였다.

10년이나 끌어 놓고 이제 와서 초조하게 구는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반군 상대의 전쟁을 10년 넘게 끌어 무능한 군부가 되기 싫은 탓이고, 위협적인 적 키비슈스에게 휘둘린 탓이다. 그가 연합국 전선 내외를 수시로 오가는 것이 확인되었다.

키비슈스의 목격담이 원국 전체에서 들려왔다. 진위 여부를 파악할 수 없는 모든 정보를 군이 내게 흘렸다. 항상 준비되어 있으라는 뜻이었다.

단순한 이능이 대부분이라고, 그나마도 수가 적다 얕잡아 보았던 반군인데, 지난 번 사막 작전에 대동한 이동형 능력자 하나와 자연계 능력자 하나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최소 두 명의 실력자를 측근처럼 데리고 손쉽게 국경을 넘나드는 것을 알게 된 후, 군부는 더욱 초조해했다.

드물고 모순이 강한 이능. 강제 개화로는 얻기 힘든 이능력자들.

그들을 상대하는 시뮬레이션에는 이능 제어가 빠질 수 없다. 가장 효율적이며 가장 적합한 이능, 모순에 강한 모순, 나.

“다음 파견은 언제 갑니까?”

“내일 오후입니다.”

“……내일.”

하, 윤오가 짧게 끊어지는 한숨을 뱉었다. 손을 떨어트리고 그대로 이마를 짚었다. 조그만 사이드 테이블 위에 덜렁 남겨진 오른손이 애달프게 주먹 쥐였고, 다시 그 온기를 돌려줄지도 모르니까 그대로 머물렀다.

조마조마한 마음에 꿀꺽 침이 넘어갔다. 내일, 내일이 왜 그를 언짢게 했지?

“……일정을 미리 알려 줄 수 있습니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미리 알려 드리겠습니다.”

“얼마나.”

“급한 작전이 아니면 사흘에서 닷새 전에 확정됩니다. 그때, 메시지, 드리겠습니다.”

“전화로 해요.”

윤오는 전화를 싫어하는데. 생각을 금방 들켰다. 눈썹을 긁은 윤오가 표정으로 드러난 내 의문에 대답했다.

“싫어하는 건 맞습니다. 그래도 필요하면 해야지. 시간 신경 쓰지 말고 아무 때나 전화 걸어요.”

“……네.”

필요한 일. 윤오에게 필요한 일. 되새기며 잠시 갸웃거리는 사이에 사이드 테이블이 드드득 밀려났다. 바퀴가 달린 큰 의자에 느리게 윤오가 기대고, 양쪽 팔걸이 위에 팔을 얹었다. 그의 시선이 내 시선을 감아 불렀다.

“이쪽으로.”

당연히 이끌린 시선을 따라 가벼운 몸이 일어났다. 한 보를 걸어 그의 의자에 도달하고 다음 걸음은 무릎을 접어 그의 허벅지와 팔걸이 틈에 놓았다. 널따란 의자 등받이를 잡고, 조심조심 올라앉는 동안 시선은 살금 피했다.

밀쳐지지 않고 무사히 안착한 가슴이 두근두근 환희를 불렀다. 매혹의 이능이 있다면 이럴까, 몇 번이고 이끌리고 그 부름에 착각하기를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실은 내가 착각하여 잘못 다가섰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런 착각은 줄곧 해 온 것이라, 그를 가까이 둔 당장에 나는 늘 만족했다. 이전까지는…….

지금은, 조금 더 닿고픈 마음을 참고 기다리면, 어쩌면 허락해 줄지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 요즘의 윤오가 내게 너그러워서.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검진 받았어요?”

“네. 괜찮습니다.”

“하루 만에?”

“네.”

그 차갑던 몸이 하루 만에 나았다는 말이 못 미더운지, 윤오의 손이 내 어깨부터 손끝까지 쓸고, 무릎을 쥐었다가 골반을 지나쳐 발뒤꿈치를 한 손아귀에 감아 넣었다. 그를 넉넉하게 받는 것만으로 아픔이 낫고, 많은 것이 괜찮아지는 이 이상한 신체.

어제 봤으면서, 몇 번이나 확인을 되풀이하고도 윤오는 괴이함을 다 떨치지 못한 듯했다. 손길이 다시 옆구리를 흘러 허벅지를 쓸었다. 겨울의 찬바람에 식었던 다리가 금세 훈기를 얻고, 더운 무릎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두 눈 질끈 감고 버텼다.

“그렇군. 그럼 삽입 가이딩은 필요 없습니까?”

“…….”

“섹스는?”

덜컹, 덜컹. 가이딩을 바꾸어 말했을 뿐인데 가슴팍이 뻐근하게 요동쳤다. 크게 들숨을 쉬고 남은 숨을 끊어 뱉으며 윤오를 보았다. 나와 달리 헤매지 않는 시선이 곧게 와 닿았다.

내가 원하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맞는지. 그의 두 눈을 번갈아 이리저리 보는 동안 윤오의 눈이 반쯤 감겼다. 내리뜬 시선이 향한 자리가 따가워 잇새에 물어 당겼다. 곧 축축이 물기를 입은 입술이 난방된 공기 중에 드러나 식었다.

“……는, 저는…….”

눈가가 발긋하게 달아오를 때의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뺨도 간지러웠다. 내쉰 숨에 그의 머리칼이 내려앉고, 까만 눈동자가 나를 보고.

감격에 말을 잇지 못하는 내 팔을, 윤오가 하나씩 의자에서 떨어트려 그의 어깨에 얹었다. 체온에 손바닥이 달아올랐다.

“말해.”

“……지고, 싶습니다. 제가, 윤오 씨를 만, 지고 싶습니다…….”

그 까만 눈동자가 독촉한 대로 속내를 조그맣게 뱉고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윤오는 대수롭지 않게 턱을 까닥였지만 내 속에는 갈증이 들어찼다. 가슴팍 안쪽이 온통 열기로 가득 찬 듯했다.

허락을 받고도 그의 어깨에서 한참을 꼬물거리는 손을 윤오가 잡았다. 금세 오그라든 손이 윤오의 깨끗한 뺨에 닿아 기긱기긱 굳었다.

빠끔, 소리가 실리지 않은 입 모양이 몇 번이나 현실과 가상을 분간하려 애썼다. 손가락을 뜨겁게 익히는 살갗의 온기가 현실인지 아닌지. 눈에 맺힌 상이 진짜인지 아닌지.

드러난 목덜미부터 옷 속까지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내달렸다. 척추에서 시작한 떨림이 손끝까지 이어졌다. 딱지가 진 손가락이 그의 뺨을 긁어 따가울 텐데, 윤오는 그 큰 손으로 내 손을 감싸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 흐, 그의 뺨을 누르지 않으려고, 그의 다리 위에 무게를 싣지 않으려고, 갈팡질팡하는 동안 허벅지 안쪽이 기묘한 떨림으로 저렸다.

흘끗 아래를 내려다본 윤오가 두 손을 놓아주었고, 곧바로 휘청대며 뒤로 넘어가는 나를 그에게 바투 붙여 잡아냈다.

“그리고?”

어깨를 잡은 힘에 맥없이 당겨져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시린 코끝에서 한기를 덜며 허겁지겁 그 향을 들이마셨다. 흥분이 배꼽 언저리를 간지럽게 긁고 밑을 세웠다.

크게 잡은 허벅지를 쥐었다 놓았다 하며 윤오가 다음을 물었다.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하라는 듯이.

내 두 손은 다시 윤오의 어깨를 찾아 올라갔다. 이번에는 머무르지 않고 그의 가슴팍을 타고 벌벌 떨리는 손바닥을 미끄러져 내렸다. 가벼운 한 겹 옷 너머로 그의 단단하고 더운 몸이 만져졌다. 그 감촉을 느낄 때마다 모종의 감탄이 목구멍에서 끓었다.

손은 느리지만 빤한 지점으로 슬금슬금 길을 잡았다. 내가 올라앉은 자리를, 묵직하게 밀어 올려진 윤오의 바지 앞섶을 만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 흥분을 확인하면, 그러면…….

“아!”

진자를 단 것처럼 흔들리는 손바닥이 목적한 곳에 힘겹게 내렸을 때, 윤오의 모양 좋은 긴 손가락이 내 허리춤을 당겨 거침없이 버클을 풀었다.

당황하여 그의 팔에 매달리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퍼를 내렸고, 브리프를 당겨 더운 공기 중에 바짝 일어난 내 성기를 꺼내 놓았다. 길을 잃고 허공을 헤매는 손아귀에 그와 내 성기를 쥐여 주었다.

뜨겁고, 뜨거운 두 개의 성기가 감싸 쥔 손바닥 안에서 꿈틀거리며 크기를 키웠다. 딸꾹질을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 그 목덜미에 더운 숨을 뱉었다.

“윤오, 씨……. 흣, 으…….”

도리질을 쳐 그의 너른 어깨에 머리를 흩뜨리는 동안, 그의 손이 헐렁한 바지와 내려가다 만 브리프를 파고들었다. 살이 올라붙은 엉덩이를 그 두 손에 가득 쥐자 지난밤의 거친 가이딩으로 아직 부어오른 곳이 다시 조금 열렸다 닫히며 아릿한 쾌감을 전했다. 허벅지가 떨렸다.

윤오의 손끝이 도톰하게 부푼 입구를 더듬을 때마다, 그와 내 성기를 감싼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기대가 허리 아래를 움찔움찔 튀어 올리게 했다. 어제 내 몸을 녹인 그 가이딩을 오늘도 받을 수 있을까.

숨을 참으며 기대와 긴장을 버무리는 동안 윤오의 손은 입구에서 떨어져 나와 다시 엉덩이를 주무르고 이내 상의를 파고들었다. 충분히 난방한 공기 중에 판판한 배와 끝이 솟은 유두가 드러났다. 그의 손끝에 도드라진 끝이 걸릴 때마다 덜걱, 어깨가 좁혀졌다.

그가 만지는 곳, 그가 내는 소리, 스치는 감각. 하나하나마다 몸을 떨고, 손에 힘이 들어가 성기 두 개를 아프게 쥐었다.

움찔거리는 몸을 밀어 일으킨 윤오가 방법을 알려 주듯 감아쥐기만 한 내 두 손 위로 큰 손을 감싸 위아래로 훑었다. 배우기보단 다만 느끼며 더운 숨을 뱉었다.

“더……. ……주세, 요.”

“그래.”

요청에 간단한 승인이 떨어졌다.

입가에 매단 고민과 망설임을, 언제든 주저 없이 길을 알려 주는 윤오의 입술이 먹어 치웠다.

* * *

무거운 기체를 띄우기 위해 날개 로터가 끊임없이 공기를 찢었다. 귀마개를 껴도 피할 수 없는 굉음이 일정한 간격으로 고막을 두들겼다.

가이드 센터와 멀찍이 거리를 둔 시내 외곽에 수송용 헬기가 멈춰 서고, 곧 수직으로 강하했다. 잠깐 미간을 좁혔으나 안전상의 지침이므로 어쩔 수 없다.

건물 옥상에 완전히 랜딩하기 전에 상체를 붙들어 맨 안전벨트부터 풀었다. 초조한 내색을 감추고 파견지에서 데려온 아터의 팔을 잡았다. 눈짓하고 귀마개를 벗어 의자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소음에 귀밑이 쭈뼛 서고 고막이 얼얼했다.

“즉시, 이동하지.”

소리보다는 입 모양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아터가 내 팔을 맞잡았다. 다음 순간, 헬기 내부는 벌판 가운데로 바뀌었다. 속이 뒤틀리는 듯 끔찍했다. 겉껍질 안쪽의 모든 장기가 단번에 비워졌다가 천천히 다시 자라는 느낌.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에 비틀거리는 나를 아터가 잡았으나 나는, ‘이동’ 하고 다음 명령을 짧게 내렸다.

거듭 장기를 내 버린 기분으로 외력 없이도 휘청거릴 때쯤, 몇 번의 이동을 거쳐 가이드 센터 정문 주차장 근처 덤불에 도착했다.

“욱-.”

“중령님, 괜찮으십니까?”

신물이 치밀었다. 입을 틀어막은 손과 다급히 굽어진 몸에서는 흙먼지가 풀썩였다. 가까이 다가서려는 아터 중위를 제지하고 손닿는 곳의 나무를 대신 지탱했다. 이럴 시간이 없는데 어지러움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조마조마한 정신을 다잡아 바라본 방향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벽면을 타고 몇 줄기 피어올랐다. 헬기의 창 너머로 보았을 때처럼, 다시 간담이 서늘하게 식었다. 반군의 침입을 실감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사막. 미끼.

파견지에서 파견지로. 복귀 없이 이동을 거듭하는 작전.

데라주바 인근부터 수수데의 에이첸라호, 아우도바를 이어 원국 북부의 사막까지, 연합국 국경을 일주하며 키비슈스를 추격하는 데 주어진 한주 반이라는 짧은 시간.

작게 꾸린 내 팀은 교대 없고 촉박하게 뒤엉키는 일정과 좋지 못한 날씨 때문에 빠르게 지쳤다. 조금 더 내구성이 좋은 멤버로 고르면 좋았겠지만, 상황을 이해하고 정신력이 강한 인재는 계급이 높아 함부로 움직일 수 없거나 이미 다른 지역에 투입 중이었다.

바로 차출할 수 있는 인원에서 이능을 조합한 뒤, 즉시 출발했다.

고르지 못한 선택지를 놓고 후회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지만 상황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나도 모르게 미련을 떨었다. 화력이 모자라거나, 명령 전달이 더디거나, 기동성이 떨어지거나, 상부가 전해 주는 정보의 신뢰성이 떨어지면, 차출할 수 없었던 인력이 아쉬웠다.

매시간 갱신되어도 모자랄 판에 낡은 정보가 뒤죽박죽 섞여서 전해지고, 어쩔 수 없다 해도 매번 눈앞에서 키비슈스의 꽁무니를 놓쳐야 했다. 아예 잘못된 정보가 들어와 허탕을 치기도 여러 번. 쓸 만한 정보 처리자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

일주일쯤 지났을까. 좁힐 수 없는 간격에 조바심을 내던 중위 하나가 지쳐 쓰러졌다.

뒤쫓는 입장에서 휴식은 좋은 생각이 아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중도에 지원 가이드를 충원 받고 반나절을 쉰 다음 사막으로 향했다.

변이체를 앞세워 통제구역을 차지하려는 반군의 틈에서 다시 그 흰 가운 뒷자락을 쫓는 일을 재개했을 때, 긴급 전보가 들어왔다.

[중앙 북부 검시소 반군 점거. 키비슈스 목격.]

[북부 검시소 반파. 키비슈스 이동 중. 방향, 중앙 가이드 센터.]

사막은 미끼였다.

즉시 이동형 능력자 하나만 데리고 진지로 귀환해 헬기를 탔다.

이어지는 전보에서 북부 검시소는 반파였다가 이내 화재가 되었고, 그 불을 끄기 위해 에스퍼가 투입되었으며, 사체로 터가 미어진다던 근간의 불평까지 모조리 태워 삼킨 후에야 불이 꺼졌다. 채 세 시간만의 일이었다.

북부 사막에서 출발한 헬기는 계속해서 상황을 전달받으며 상공을 직선으로 날아 검시소를 지나쳤다. 전장에서 추려 보내진 사체를 모조리 태운 연기가 구름 없는 하늘에 한 줄기 검은 기둥이 되어 솟았다.

그 매캐한 연기를 가로지르는 사이 키비슈스와 반군은 거침없이 예측한 대로의 방향을 잡았다. 원국의 중앙 가이드 센터.

이동 경로에 있던 사설 에스퍼 연구소 하나가 폭파되었다. 이미 지리를 모두 꿰고 있는 듯 반군의 행보가 거침없었다.

헬기는 계속해서 최고 속도로 날았고, 폭발로 잠깐 지체한 덕에 키비슈스의 위치와 한 시간 이내로 좁혀졌으나 그 뒤를 쫓기만 하는 구도는 변함이 없었다.

전투복 가슴팍에 달린 무전이 재차 울렸다. 이번에도 늦었다는 소식이었다. 이미 헬기에서 내리기 전에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기도 하다.

[가이드 센터. 반군 점거. 침입 인원 약 20인. 전원 에스퍼. 이동형 이능력자 포함. 키비슈스 목격.]

“……여기서, 부터는 도보로 움직이지.”

“10분 정도는 쉬셔야 합니다.”

“그러자고 이동을 쓴 게 아니야.”

단호하게 말을 끊고 허리를 숙였다. 구역질을 마저 하려는 것은 아니고 덤불 너머로 동태를 살피기 위함이다. 턱을 다물어 남은 현기증을 넘기고 어둑한 시야를 몇 번 깜빡여 털어 낸 다음 집중했다.

저기 키비슈스가 있다. 연합군의 적. 무수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인. 가이드 혐오자.

고작 한나절을 지체한 사이. 고작 스무 명 남짓을 데리고. 대범하게 군 사령부가 위치한 중앙을 향한 키비슈스.

무슨 속셈일까. 어째서 이 시점에 중앙인지. 그 목적지는 어째서 가이드 센터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짐작할 수 없는 것은 위험하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지금을 더 없는 기회로 삼아야 했다. 가능하면 마지막 기회로.

‘정말 가이드가 생겼구나. 그 사람을 죽일까?’

다문 턱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이 상상만으로 가쁘게 뛰었다. 멋대로 중앙까지 들어오게 두었지만, 나가는 것도 마음대로 하게 둘 수는 없다.

이능 장교는 군과 국가에 충성해야 하며, 민간인을 위해 봉사하여야 한다. 에스퍼는 가이드를 지키고, 가이드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가이드에게 신체상, 환경상, 물질상 손해를 입혔을 경우, 그에 준하는 군법으로 처벌한다. 최대 전역, 혹은 제대 처분을 받을 수 있다.

‘가이드들은 헤프기 짝이 없어. 너는 그렇지 않지?’

상냥한 어조와 그렇지 않은 말. 웃음 뒤에 감춰진 칼날 같은 증오.

‘선이, 놀랐니?’

‘키슈……. 왜 그렇게 말해?’

지금의 연합국 가이드 인권은 키비슈스에 의해 세워졌다. 그가 처참하게 짓밟은 유사 가이드와 납치하고 핍박한 가이드에 의해서. 가장 많은 가이드를 죽이고 죽게 한 자로 인해, 한없이 낮았던 가이드의 대우와 처우가 뭍으로 다급히 끌어올려졌다.

‘우리는 왜 이렇게 아파야 할까?’

‘그건, 가이드 때문이 아니잖아.’

‘그렇게 생각해?’

가이드 센터 내부에는 전시와 재난에 대비한 대피소가 마련되어 있다. 괜히 버티지 않고 즉시 대피했다면 시간은 충분했을 것이다. 상주하는 경호 인력도 있으니 잘 대피했을 거라 믿어야 한다.

생각을 털어 내고 단순하게 정리했다. 불필요하게 센터의 낯익은 면면들을 떠올리는 일이 없도록 했다. 이제 만나게 될 키비슈스라면 내 동요를 반길 것이므로. 무엇에도 여지를 남기지 않아야 한다.

전투를 앞둔 긴장감으로 피가 빠르게 돌고 차가운 공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관절이 부드러웠다. 덤불을 헤치고 나서서 주차장의 아스팔트를 밟았다. 끝을 낼 시간.

주변을 경계하면서 차량 뒤편으로 이동했다. 주차장에 들어서자, 멀리 가이드 센터 정문 인근에 대치하고 있는 무리가 보였다. 반군의 에스퍼가 둘, 중앙군이 여럿.

외에도 시내와 이어지는 외길, 가이드 센터 정문, 센터 측면, 총 세 군데의 소요가 선뜻 눈에 들어왔다. 시내 방향은 곧 충분히 인원이 보충될 것이고, 측면은 반군이 넷 정도로 비교적 수가 많았다.

다섯, 둘, 넷이면 열하나. 스무 명 정도라 했으니 여남은 정도를 빼면 키비슈스와 10명 내외가 실내인가.

돌파는 정문으로 하기로 했다. 정문을 헤집는 반군의 이능은 염동력. 염동력은 드물지 않은 축의 능력이나, 그 성질과 정도가 갖가지로 다르다. 상대하기가 대체로 까다롭고 그만큼 허점도 많지만 조합을 잘 짜면 평균 이상의 몫을 한다.

정문을 막은 두 반군의 허점을 찾는 중에 그 주변에서 빠르게 빙빙 도는 작고 검은 물체도 곧 발견했다. 눈에 익은 그것은 준준이 개발에 참여한 이능용 특수 무기였다.

오랫동안 이능을 감당해도 바스러지지 않는 튼튼한 소재. 30분 전에 폭파된 사설 연구소가 잘 만든 모양인지 반군은 어렵지 않게 무기를 다뤘다.

내정된 주인이 알면 화를 낼 텐데. 안 그래도 화를 잘 내는 놈이라.

접근 후 염동력을 무력화시키고 그 틈에 실내로 이동할 수 있을까. 아터에게 손짓한 다음 도검 손잡이를 쥐고 자리를 박찼다.

전투는 생략하기로 했다. 저 반군 에스퍼의 염동력은 정교하거나 그 작용 범위가 위협적이지 않으니 일반군에 맡겨도 된다는 판단이 섰다.

그러지 않아도 상대는 이미 1미터 어림의 상공에 솟아 끝없이 사격 타깃이 되고 있었다. 사용자의 몸이나 주변이 덩달아 허공에 뜨는 염동력의 흔한 부작용 탓이다.

연달아 화약이 터지고, 특수 무기를 휘두르는 반군의 주변으로는 번쩍이는 불빛과 함께 총탄이 튕겨 나는 게 보였다. 뒤에 숨은 다른 반군 에스퍼에게로 눈을 돌렸다. 보호막.

부유 부작용이 있는 염동력자에 보호막이라. 모자란 방어를 채워 주는 좋은 조합이다. 방어계는 일반군이 상대하기 까다로우려나. 지나치지 않고 죽이는 게 좋을까.

나중 합류의 편이성과 작전의 장기화를 생각하면 그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무엇보다 키비슈스를 발견하고 제압하는 것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건 제 스스로 눈앞에 나타나 가이드 센터에 갇힌 놈이다. 목적이 무엇이든 건물을 통째로 내 이능의 범주에 넣으면 달아나지도 못할 것이고, 그 ‘목적’이 무언지 궁금할 새 없이 처치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움직임을 막고 공격계의 지원을 받아, 가능한 한 빠르게, 감회고 회상이고 떠올릴 틈도 없이 죽인다.

사막에서 마주친 날처럼, 키비슈스가 공기의 흐름을 다루는 자연계 이능력자와 이동형 이능력자를 근, 원거리로 대동한 상황을 가정했다.

공격과 방어, 지원과 대피를 두루 갖추어 위협적일 것이나,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이 키비슈스 자신의 이능이었다. 갑자기 폭주에 돌입하여 중앙군령에 강제 개화를 흩뿌리기라도 한다면…….

최악은 이 가이드 센터가 통째로 통제구역이 되어 버리는 것인가.

알 수 없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오늘이 끝이 될 거라는 직감. 여기서 달아나지 않으리라는 확신. 속셈이 무엇이든 내가 찾아가길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서둘러야 한다. 루돌프가 오기 전에.

멈칫.

달리던 몸이 그대로 자리에 굳어 섰다.

“중령님! 무슨 일이십니까?”

가슴이 지금 막 발견한 것을 믿지 못하고 크게 뛰었다. 돌아간 고개가 몇 번이고 같은 자리를 더듬어 살폈다. 그런다고 사라지거나 바뀌지는 않았고, 내가 잘못 볼 리도 없었다.

검은색 SUV. 윤오의 차.

윤오의 차가 왜 여기에?

꺾어진 목이 다시 느릿느릿 정면을 향했다. 한쪽 벽에서 외장재가 불에 타 검은 연기가 일고 온통 소란에 뒤덮인 곳. 전장.

저 안에 윤오가?

휘청, 흔들린 몸을 재빨리 다가온 아터가 잡아냈다. 나는 도리어 그의 팔을 쥐며 다급히 말했다.

“이동. 즉시 내부로 들어가지.”

“조금 더 접근한 다음에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기서는 이동을 두 번에 나눠서 해야 하는데, 그러면 속이 더 망가지십니다.”

“지금, 가지. 파동을 키울 테니 한 번에 부탁해.”

“……예.”

아터의 시선이 건물 외벽을 살피다 작은 창이 난 곳에서 좁혀졌다.

“그럼 화장실로 이동하겠습니다.”

다음 순간, 속이 모조리 뭉크러지고 나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부딪혔다. 매캐한 소독제 냄새가 코끝에 감돌았다. 한 팔로 배를 감싸 안고 목구멍에 치밀어 오른 신물을 뱉었다. 비릿하고 시큼한 냄새가 났다. 바닥이 붉어졌다.

“중령님! 쉬셔야……!”

“……괜찮아. 바깥을 살펴 줘.”

걱정스런 시선은 단호하게 잘라 냈고, 다 참아내지 못한 구역질은 혼자 남은 뒤 마저 이었다. 위 또는 위문부가 상했는지 새빨간 피가 멀건 위액에 채 섞이지 못하고 화장실 바닥에 뱉어졌다.

“하아…….”

“조용합니다. 민간인은 잘 대피한 것 같습니다.”

“그래.”

천천히 무릎을 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머리를 흩뜨려 정신을 차리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배 안쪽이 잔뜩 뭉쳐 굵직한 심지가 여럿 돋은 것처럼 몸을 바로 세우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도움을 거절하고 혼자 섰다.

홀로서기는 끝없는 연습이고 나는 충분히 숙련되었다. 쉽게 얕잡혀 보이는 탓에 더욱이 호의에 기대지 않도록 버릇해 왔다. 이 작전은 내게 달렸고, 전쟁은 오늘로 끝을 낸다.

당장의 피로와 고통, 구역감을 잊기 위한 혼잣말이 연이어 시큼한 입 안을 빙글 돌았다.

덜컹, 발을 밀어 화장실 칸막이에 등을 기대 억지로 세웠다. 밭은기침을 손바닥에 감췄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미뤄 두었던 불안이 머리를 디밀었다. 에덴이 여기 있다고 생각했을 때나, 루돌프가 이리로 올 것이라고 예상할 때와는 다른 불안이었다. 견디기 힘든 종류였다. 여기에 만약 윤오가 있다면…….

아니야.

고개를 붕붕 저어 보았으나, 내가 윤오의 차를 잘못 볼 리가 없다.

안 돼.

윤오가 여기에 있다면, 에스퍼들이 목숨을 걸고 피를 뿌릴 이곳에 윤오가 있다면, 혹시 휘말리기라도 한다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세면대에서 간단히 입을 헹궜다. 내 상태를 걱정하는 중위의 시선을 무시하고 자세를 고쳐 섰다.

“가자.”

“예!”

화장실을 나서서 곧장 계단을 찾았다. 로비가 훤하게 보이는 중앙 샤프트로 방향을 잡고 내려갔다. 대피소는 로비 뒤쪽 1층과 2층에 면한 따로 붙은 건물이다. 다행히 2중 방화문이 잘 닫힌 것이 보였고, 그 앞을 층마다 지키고 선 반군을 보고는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여섯. 반군 수장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지하 검사실로 간다.”

쾅!

비상계단의 문을 연 순간 커다란 덩치가 뛰쳐나왔다. 나는 즉시 옆으로 비켜섰고 아터는 멀찍이 이동을 썼다.

그대로 스쳐 지난 덩치의 머리통만 한 주먹이 벽을 때리자 스파크가 튀었다. 사람의 주먹이라 할 수 없는 힘에, 부서진 벽에서 매캐한 김이 검게 났다. 삐죽삐죽 난폭한 파동을 가진 반군의 에스퍼가 뒤돌더니 씨익 웃었다.

“이선.”

“아터. 상대할 수 있겠어?”

“예? 중령님, 혼자 가시면!”

“무리하지 말고 발을 묶어.”

잇따른 공격을 옆으로 몸을 날려 피하고 반 바퀴 회전하여 비상계단 입구를 보았다. 등을 들썩이는 반군은 내가 아터와 나눈 얘기를 들었는지 못마땅한 표정을 했다. 스파크가 튀는 주먹을 붕붕 날려 의미 없는 공격을 몇 번 하더니 문이 뜯겨 나간 비상계단 입구를 가리고 섰다.

“엘로란타를 만나러 가는 건 좋은데,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

“강화계에는 약하다며?”

비켜 주지 않으려나. 시간 끌지 않고 파동을 예리하게 가다듬어 공간을 한정했다. 방향은 정면. 제어 정도는 0.

“하?”

커다란 덩치가 순식간에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전신을 팽팽하게 당기던 파동이 일시에 사라져 아무런 힘이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0. 기본적인 움직임도 할 수 없는 수준.

“나는 에스퍼에게 지지 않아.”

역수 중검을 단단히 감아쥐고 그대로 놈을 타 넘었다. 당황과 황홀 사이를 오가던 반군의 표정이 이내 생생한 육체의 고통을 띠우고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가벼운 몸이 비상계단으로 진입해 이내 쏟아지듯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와르르, 어디선가 건물 무너지는 소리와 진동이 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위층, 그리고 꽤 먼 곳. 대피소 방향은 아니다.

하아, 하아. 중검을 공중에 저어 남은 핏기를 떨어내고 몸을 살폈다. 파견 중간에 한 번 가이딩을 받았지만 처음만큼 기력이 채워지진 않았다. 그리고 거듭한 이동 탓에 컨디션이 난조였다.

두 번, 혹은 세 번 정도 여유가 있을까. 남은 만큼은 모두 키비슈스와 그와 동행한 에스퍼를 상대로 써야 한다. 혹은 건물 전체에 이동 능력을 봉쇄하는 것도 생각해야 했다.

앞으로의 계획이 머릿속을 핑핑 돌며 하나하나 돌발 상황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답을 찾아 왔다.

지난번에도 내 배에 칼을 찌른 키비슈스다. 죽이지 않고 나를 데려갈 셈이라도 멀쩡한 방법을 쓰지는 않을 것이고.

상상이 가장 최악으로 치달아 키비슈스에게 붙들린 윤오를 그려 냈다. 상상 속에서 윤오는 의식 없이 쓰러져 있고, 칼을 쥔 키비슈스의 손이 그 위를 언제든 내려 찌를 것처럼 노닐었다. 그리고 피아노를 치듯 살랑이는 나머지 손이 내게 뻗어졌다.

‘나랑 가자. 선아.’

“하아, 하아…….”

지하. 대기실. 검사실과 이어진 벽이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잔해는 폭발과 비슷했으나 그 단면이 예리했다. 이능에 의한 것이다. 그때의 그 바람을 부리는 에스퍼인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다가서다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코앞을 쐐액 소리와 함께 칼 조각이 날아 지났다. 즉시 파동 제어 범위를 넓혔다.

“윈터. 그만하고 와서 가이드를 써. 피곤하잖아.”

“하지만 엘로란타, 적이 왔어요.”

“선이는 적이 아니야.”

“…….”

“에스퍼는 우리의 적이 아니야, 윈터.”

“네…….”

나긋나긋한 목소리. 거역할 수 없는 중압감. 키비슈스의 말.

살갗이 검붉게 익은 채 변이를 시작하는 개체의 냄새를 맡았다. 검사실 한쪽 구석에 온전히 시체가 되지 못하고 파동에 괴롭게 들썩이는 변이체가 대여섯 구 보였다. 대피하지 못한 건가.

변이체가 원형을 알아볼 수 없게 변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삼십 분에서 한 시간 반. 덩치가 작은 개체는 일찌감치 살이 트고 걸쭉한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키비슈스.”

“선아.”

그 잔혹한 시체 더미 사이에 등이 높은 의자를 놓고, 마치 다른 풍경처럼 차지하고 앉은 새하얀 남자.

가이드 센터의 지하에 마치 달빛이 내리는 사막을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보고 반짝, 휘었다.

“기다렸어.”

“…….”

“오지 않길래.”

“적당히 해.”

“화가 났어?”

10년의 세월을 여상하게 하는 친근한 말씨가 가볍게 톡톡 떨어졌다. 그의 곁을 지키는 에스퍼의 새파란 눈초리가 아니었다면 꿈인가 착각할 만큼, 아무렇지 않은 말투였다.

지나간 시간을 죄 무시하고 아등바등 살아 온 나를 짓뭉개는. 내 긴 투쟁의 역사를 ‘화’로 축약하고 그 긴긴 새 죽어 간 수많은 목숨들을 ‘고작’으로 만드는 친근함이다.

“흐, 으으…… 그윽……. 아악! 아윽…….”

눈, 귀, 코, 목. 뚫린 구멍 전부에서 핏물을 쏟는 벌건 사람 하나가 그와 내 사이 발치를 기었다. 평형 기관이 망가진 것처럼 한쪽 방향으로 빙글빙글 기며 신음을 질렀다.

미약하고 거슬리는 그 파동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시체 더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가장 불쌍한 하나. 유사 가이드.

대피하지 않고 검사실에 있었던 의료진, 또는 연구원들이 강제 개화에 당한 듯했다.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이 거뭇하게 얼룩지고 망가진 가운 끝자락에서 굳지 않은 피가 직직 바닥에 그였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로 흥건한 가운.

윈터라고 불린 에스퍼는 갓 가이드가 된 그 불우한 자를 새하얀 가운을 입은 키비슈스에게서 멀찍이 떨어트려 놓았다. 그르륵, 그륵, 목구멍에서 피가 고여 끓는 소리가 났다. 소용없이 바르작거리는 무릎이 질질 끌려가며 바닥을 스치는 소리도.

“불쌍해?”

간지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떨궈졌던 시선을 다시 들어 올린 자리에 눈꼬리를 내리뜨고 웃는 낯이 보였다. 불쌍해? 그 질문이 아주 가볍다.

“선아. 너는 너무 상냥해.”

“허튼소리 하지 마.”

“나머지는 이미 숨었더라.”

“…….”

“선이가 계속 돌아보는 곳으로.”

바짝 피모가 당겨졌다. 키비슈스를 앞에 두고, 나도 모르게 시선이 돌아갔다. 쿵, 건물이 흔들리고, 쾅, 무언가 부수는 소리가 멀리서 날 때마다.

“저기 있구나?”

한때 좋아했던 색깔이 반짝 빛을 머금었다. 흥미로워 하는 보랏빛이었다. 지독히 차갑고, 냉정하고, 무서우면서도 아름다운 색.

위치는 전방. 5미터 이내.

단번에 죽일 수 있을까. 최소 둘이고, 에스퍼가 더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범위를 넓게 잡고 칼을 써야 하나. 아니면…….

치직-

- ‘My Sun. 어디야?’

- My Sun. 어디야?

꺼두었던 왼쪽 어깨의 무전이 되살아나 속삭였다. 비단 그뿐만은 아니었다. 대기실과 검사실, 처방실, 의무실 등 모든 곳의 스피커가 같은 음성을 출력했다.

“Sun? 선이를 찾는 거야?”

하얗고 긴 손가락이 내 뒤를 가리키고, 쿵. 둔중한 소리가 건물 전체를 흔들었다. 거리는……. 방향은…….

“바차스! 대피소를 지켜!”

단번에 윈터가 돌풍에 휩싸여 떠올랐다. 잔해와 부스러기가 흩날리는 와중에 팔로 시야를 가려 확보하고 무전을 켜 소리 질렀다. 놈이라면.

- Roger.

장난스런 대답을 들음과 동시에 이능을 끌어 올렸다. 피스톨을 꺼내 바람을 쓰는 윈터에게 먼저 달려들었다.

파동을 흩트리고, 자세가 흐트러진 틈을 타 두 발을 쏘았다. 두 발 중 한 발이 갈비뼈 옆을 스치고, 비틀거리며 물러나려는 윈터를 그대로 검으로 그었다. 빗나간 중검이 길게 핏자국을 그렸다.

“저런.”

곧장 몸을 틀어 총구를 옮겼지만 늦었다.

짤막한 감상을 남긴 키비슈스의 곁에 낯선 에스퍼 하나가 접근했고, 다음 순간 두 사람이 사라졌다. 즉시 내 파동의 적용 범위를 온 건물로 뻗쳤다. 덜컥, 몸이 내려앉고, 간신히 버티고 선 다리가 후들거렸다. 역시 근처에 이동형 에스퍼가 있었나.

훅, 허리가 꺾어지고 목구멍이 구역질로 울렁거렸다. 하아, 아직이다. 멀리 가지는 못했을 테니까 바로 로비로 올라가서 잡아야 한다. 예리한 감각에 가까운 곳으로 이어지는 파동이 잡혔다. 1층으로 올라가서 다음 상황을 보고, 키비슈스를, 죽여야…….

어느 틈에 종아리가 패여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다시 비상계단을 올랐다. 군화가 미지근한 액체로 축축하다. 손잡이를 그러쥐고 한 계단씩 올라 1층의 비상문을 어깨로 밀어 열었다. 커다란 등 하나가 바로 보였다.

“준준.”

“제어 걷어. 십팔. 잡았으니까.”

풀썩, 문득 힘이 풀려 벽에 기댔다. 그러나 긴장까지 놓을 수는 없었다. 로비 바닥에는 아까의 이동형 에스퍼가 제압당해 누워 있었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 왜인지 이미 포기한 듯 무표정했다.

“키비슈스는?”

“2층. 아니면 3층.”

바로 등을 돌려 계단을 향했다. 거칠게 뒤로 당겨진 어깨가 아니었으면 곧장 계단을 오를 셈이었다.

“씨팔, 그 꼬라지로 어딜 가려고?”

“내가 있어야 되잖아.”

“그래. 그런데 다리는 고쳐.”

“치료 안 들어.”

“지혈은 되겠지. 거기! 상사!”

환자를 대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과한 힘에 뒤로 나동그라졌다. 넘어져 무릎을 벌벌거리는 내게 림이라는 명찰을 단 상사가 다가와 붕대를 감았다.

- Sun. 대피소는 안 열리니까 걱정 마.

- ‘다친 건가? 림 상사는 의무관인데.’

- 네 가이드 새끼도 안에 잘 있어.

- ‘만났다. 예뻐.’

온 건물을 울리는 안내 방송과 어깨의 무전이 자글거리는 소리가 번갈아 났다. 온통 한 사람의 말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알려 준 윤오가 안에 있다는 소식에 바닥을 짚은 팔이 비틀거렸다. 대번에 피가 쏟아져 나간 것처럼 눈앞이 감감했으나 아직 쓰러질 수는 없었다.

다친 다리가 단단히 조여 묶이고 아찔한 눈을 감아 눈두덩을 눌렀다. 건물의 천장과 지하로 번갈아 어지럼증이 나를 흔들고 다음 순간 다다닥, 지나가는 인기척을 들었다.

번뜩 눈을 떠 보았을 때, 멀찍이 비상계단 위쪽으로 군화가 하나 지나갔다. 일반군? 에스퍼? 어쨌건 아군의 것인데 지금 위층은 키비슈스가 있을 것이라 정비를 다듬고…….

파동이 없다.

일반인.

루돌프.

바로 몸을 곧추세웠다. 아무도 그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몸을 일으키자 다들 내 섣부름을 탓하며 쉴 것을 요구했다. 내딛는 걸음이 지끈거렸지만 지체 않고 계단으로 향했다.

기척을 따라 한 층을 오르고 한 개 층을 더 올라 문을 열었다. 복도 저편에 익숙한 군복을 입은 제대한 군인의 등이 보였다.

“저를 아십니까?”

루돌프의 떨리는 목소리가 후드득, 복도를 울렸다.

“그 이상 접근하지 마.”

“중령님.”

돌아보지 않고도 내 목소리를 알아들은 루돌프가 침착하려 애쓰는 목소리를 냈다. 나는 제어 범위를 길게 뻗쳐 멀찍이 키비슈스까지 영향권에 두었다. 딱딱하게 굳은 어깨 너머로 흰 낯이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선아, 누구야?”

“알 거 없어.”

가볍게 루돌프와 그가 들고 있는 서슬 퍼런 단검을 무시한 키비슈스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절룩이는 걸음을 다급하게 옮겨 루돌프의 옆을 질러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제어가 더 능숙해졌네. 가이드 때문일까?”

“……중앙으로 온 이유가 뭐야?”

“글쎄?”

맹렬하게 솟구치는 파동과 다르게 그는 콧노래를 작게 흥얼거리며 고개를 까닥였다. 무기를 가진 적을 앞에 두고 가운 주머니에 넣은 손을 꺼내지도 않았다. 여유로운 그 태도에 내 목만 꿀꺽 마른침을 넘겼다.

쾅, 또 한 번 커다란 굉음이 울리고 지진이 난 것처럼 바닥과 벽이 흔들렸다. 한참 동안 여파가 발치를 뒤흔들었다.

좌우로 당겨지면서 콘크리트가 찢어져 맨 벽마다 대각선으로 교차하는 균열이 생겼고 유리창이 먼 곳부터 하나씩 터져 나갔다. 금세 차가운 공기가 실내를 파고들었다.

피모가 긴장으로 바짝 쏠렸다. 굉음이 날 때마다 고개가 저절로 어느 방향으로 돌아가려는 걸 간신히 다잡았다. 피스톨의 총구를 정면으로 들어 올리고 왼팔은 옆으로 뻗어 루돌프가 나서지 못하게 가렸다.

“뒤로 물러나.”

“중령님, 제가…….”

“여긴 어떻게 왔지?”

못 본 잠깐 사이 살이 빠진 루돌프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굴었다. 정신 차리려는 모양새로 고개를 휘젓다가 도리어 비틀거렸고,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더듬더듬 말을 이었지만 제대로 된 말은 아니었다.

대피 소식을 듣자마자 가이드 센터로 온 것, 군사 무전을 듣고 실내로 숨어든 것 등을 주절주절 얘기하다 문득,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하고 몽롱한 말을 뱉고, ‘중령님 죄송해요.’ 하는 사과를 했으며, ‘죽일 수 있어.’ 혼자 다짐하기도 했다.

“정신 차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제가요……. 중령님, 제가.”

“그걸로 뭘 어쩌려고?”

“…….”

녀석이 횡설수설하는 동안 나머지 탄약을 모두 소진한 피스톨을 발치에 떨어트리고 중검을 세워 들었다. 앞으로 나서려고 휘적이는 루돌프를 등으로 밀어 물러나게 했다.

아무거나 집어온 게 빤히 보이는 등산용 나이프는 아쉽지만 무기로는 탈락이었다. 행정 업무를 보던 루돌프가 따로 검술을 익혔을 리 없고, 무엇보다 그 칼을 휘두를 만큼 키비슈스에게 접근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얘기를 해 보면, 제가 얘기해 보면 안 될까요? 왜 그래야 했는지? 왜, 왜…… 그렇게, 왜 그렇게 까지……? 안 될까요?”

“상사.”

“네……?”

“똑바로 들어. 뭐든 네가 바라는 이유 같은 건 없으니까.”

파동 제어를 전개한 범위 내로 다른 이능력자의 파동이 섞여 들었다. 빠르게 뒷걸음질 치며 몸으로 루돌프를 밀쳐 벽으로 붙였다. 챙그랑, 손바닥 길이보다 조금 긴 날붙이가 바닥에 떨어지고 이내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났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하죠?”

“일단은, 그대로 있어.”

깨진 창 너머로 눈 섞인 바람이 불어 들었다. 바깥이 하도 소란스러워서 그 소음이 들이치는 이 복도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조용했다.

이미 피를 흘리고 먼지투성이인 나와 다르게 외풍에 팔락이는 키비슈스의 새하얀 가운 자락은 현실감이 없었다. 이 모든 게 꿈이나 허상처럼 느껴질 만큼.

굳어 가는 손끝에 힘을 주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서 떨어지지 않은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저지르는 수많은 일에 대한 후회도 망설임도 없이 산뜻한 표정이다. 입 모양이 방긋거리며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총알이 하나도 맞지 않은 것을 보면 다른 이능력자가 근처에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하나인지 둘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더 많을 수도 있고.

반대편 복도 끝, 키비슈스의 뒤에서 아직 남은 창을 하나씩 깨부수며 질질 끌리는 걸음이 다가왔다. 발을 끄는 자리에 투둑, 투둑 핏방울도 떨어져 내렸다.

피를 흘리는 그 가슴팍의 상처는 좀 전에 내가 만들어 놓은 것이었고, 상처 입은 에스퍼는 푸른 눈을 이글거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윈터라고 했지. 그의 주변으로 돌풍이 매섭게 불었다.

“윈터. 왔어?”

“……엘로란타.”

“응?”

“가이드는 죽었어요. 여기는 위험하니까 이제 엘로란타도…….”

“가이딩은 받았어?”

“……네.”

기운 없이 훅훅 꺼지는 목소리가 입술을 말아 물고 꼿꼿하게 상체를 들어 올렸다. 불만 가득한, 울 것 같은 미간이 잔뜩 주름져 나를 향했다.

“역시 선이가 제일 편해.”

“나는 네 가이드가 아니야.”

“알아.”

알아. 선아. 알아.

악다문 내 입매가 비틀어졌다. 상황에 대한 조소이자 키비슈스에게 보내는 비웃음이었다.

“검사실. 매칭을 확인했지? 찾았어?”

그럴 리가. 그랬다면 그렇게 화나 있지 않았겠지. 적진 한복판이나 다름없는 가이드 센터에서, 그렇게 이능을 함부로 쓰지도, 검사실을 지옥으로 만들지도 않았겠지. 얄팍한 미소 조각을 띠우고 속 깊은 분노를 잠재우지 않았겠지. 다시 나를 탐내는 눈을 하지 않았겠지.

그의 손끝이 측면으로 들어 올려지고, 이내 창틀이 우그러져 뜯겨 나갔다. 두 사람은 내 이능 범위에 속해 있으니 또 다른 에스퍼의 짓이다. 염력? 아니면 진공 능력? 알루미늄 틀이 변형되는 모양을 보면 확실할 것인데, 멀어서 알아볼 수 없었다.

다만 건물의 겉면에 뜯겨 나간 부스러기가 중심점을 두고 뭉치는 것으로 진공에 조금 더 가능성을 높게 두었다. 외벽. 즉시 제어 가능 범위를 넓게 깔았고 위층 창가에서 일렁이는 파동을 잡아냈다.

“금방 지칠 거야. 그냥 따라가는 건 어때? 그러면 가이드는 그냥 둘게.”

“웃기지 마.”

“응. 거짓말이야.”

눈가가 사르르 접히는 웃음을 지으며 키비슈스의 손끝이 이번에는 문짝이 뜯겨 나간 회의실 안으로 향했다.

콰광, 콰득, 콘크리트가 갈라지고 매립된 철근이 찢겨 나가는 소리가 곧장 들렸다. 건물을 안에서 부술 셈인지 강한 충격이 몇 차례 더 이어졌다. 팔을 들어 찢어진 천장 틈으로 떨어지는 파편을 가리고 자세를 낮췄다.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루돌프를 벽에 붙여 감추고 말을 걸었지만, 나자빠진 녀석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만 계속해서 내뱉었다.

“정신 차려! 루돌프!”

“아. 기억났다.”

콰드득, 콰지직. 콘크리트가 갈라지는 굉음.

어쩔 수 없이 돌아보게 되는 방향이었다. 바닥을 뚫고 커다랗게 구멍이 났다. 반 미터가 넘는 두께의 바닥이 깊게 패여, 틈으로 뜯겨 나간 천정 배관과 골조가 드러났다.

바닥이 통째로 꺼져 잔해 이는 틈으로 번잡한 소음이 올라왔다. 익숙한 소리, 전투. 뿌옇게 먼지가 이는 너머로는 대피소의 이중문이 보였다. 움푹 패여 있었다.

“사야야.”

흠칫 놀란 나와 루돌프의 시선이 그리운 이름을 올린 사람에게로 돌아갔다. 가볍게 미소 지은 고개가 모로 기울며 뒷말을 이었다.

“루돌프. 사야야. 그렇지?”

“…….”

“선이 네게 주려고 했는데, 너무 늦어서 죽어 버렸어. 여전히 추위에 약하더라. 너를 닮았지.”

실수로 루돌프를 불러 버린 입술을 지르물었다. 이름을 기억할 줄은 몰랐는데. 듣고 싶지 않은 사야야의 마지막을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그 입술을 틀어막고 싶었다.

“사야야. 이능이 쓸모 있었지. 살리려고는 했지만 늦어 버렸네. 선이가 좋아했을 텐데. 미안해.”

“……중, 령님.”

“안 돼.”

“죄송, 합니다.”

발치에서 잘그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등산용 나이프를 거머쥐는 손을 멈추려 했지만 늦었다. 손 쓸 틈도 없이 서걱,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더운 피가 흩뿌려졌다. 차가운 공기 중에 희게 증기도 일었다.

“안 돼!”

“……중, 령님. 죄송, ……죄송……. 복, 복수하고 싶……. 제가, 복, 복…….”

“루돌…….”

“될, 요……? 사야……. 아…….”

힘 빠진 손에서 빼앗아 던진 나이프가 엉망이 된 복도를 나뒹굴었다.

곧장 두 손을 모두 써 피가 뿜어져 나오는 목을 짓눌렀으나 루돌프의 거침없는 손길이 이미 경동맥을 끊었다. 지혈은커녕 솟구치는 피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손등까지 흠뻑 젖었다.

길게 시간도 주지 않고, 제대로 된 유언도 남기지 않고, 겨울의 하늘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빛을 잃었다.

비명과 신음을 참는 턱이 벌벌 떨렸다. 흐윽, 눈앞에서 놓친 생명과 아직도 흘러넘치는 그 흔적을 눌러 보아도 맥없이 고개가 넘어 갔다.

내가 알던, 알아 온 시절이 영영 떠났음을, 그 활기차고 맑은 웃음이 두 손바닥 아래서 영영 떠나 버렸음을 알았다. 이렇게나 비참하고 간단하게.

“안 돼, 안 돼……, 안…….”

“저런.”

고저 없고 감흥 없는 목소리가 그저 그렇게 떨어졌다. 루돌프의 목숨이 끊어지는 때에 강하게 펼쳐 내린 내 제어 영역 속에서, 키비슈스의 이능은 여전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여전하게. 아무렇지 않게.

쾅, 콰드득, 쾅.

바닥을 뚫고 아래층으로 내려간 에스퍼가 계속해서 날뛰는 모양이었다.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이어지고, 그 진동이 건물 내부를 타고 영혼이 빠져 나간 루돌프와 그의 목을 감아쥔 내게까지 전해졌다.

하, 마치 내가 목을 졸라 죽인 것 같았다. 복수, 복수…….

“루돌프. 네 복수는……, 성공이야.”

하지만, 네가 사는 편이 사야야를 기쁘게 했을 거야.

하아, 하, 하아……. 한숨과 헛웃음을 반복하다 피 묻은 손등을 들어 얼굴을 닦아 내렸다. 대번에 미끄럽게 번지는 뺨은 소매를 당겨 한 번 더 닦아 냈다. 쇠 냄새가 사방을 진동했다.

루돌프의 정복 상의를 찢어 피가 꿀렁꿀렁 쏟아지는 목을 가려 묶고 빈 몸을 들쳐 멨다. 얼어붙은 무릎을 펼쳐 그대로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무방비한 등 뒤로 한없이 가볍고, 여전히 나른한 질문이 떨어졌다.

“선아. 오늘도 나랑 가기 싫어?”

“키비슈스. 네 세상은 끝났어.”

움틀, 그의 파동이 한차례 떨었다. 그러나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은 언제든 끝나 있었지.”

그럴까.

피식, 무게 없는 비웃음이 새어 나갔다.

키비슈스는 죽었다.

가진 줄도, 잃은 줄도 모르게, 그렇게 죽을 것이다.

제 손으로 모든 것을 잃게 만든 사람을, 저를 위해 세상이 안배한 사람을 단 한 번도 만지지 못하고 불러 보지 못한 채로.

‘그리고 제가 키비슈스의 가이드입니다.’

루돌프의 고백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충격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사야야가 결국 제 청혼을 받아들인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요. 저를 시스템에서 가리고 안전하게 지켜 주려고요. 저는 만나 본 적 없지만 사야야는 옛 연구동에 있었으니까, 그 마지막 날에도요.’

마지막 날.

어린 에스퍼 몇몇을 제외한 연구동의 모두가 죽어 나간 날. 전쟁의 시작.

‘진작 알려 드리고 싶었는데……. 저한테는 사야야가 제일 중요해서, 말씀 못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구름 대신 반짝이는 눈물을 매달고 루돌프는 말을 이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억지로 지어 보이는 딱딱한 웃음이 처량했다. 차가운 음료가 담긴 잔에서 얼음이 미끄러졌다.

‘사야야를 주더니 빼앗아 가기도 하고. 내가 가이드인 것도 모를 텐데, 에스퍼는 벌써 너무하네요. 하하……. 가이드는, 가이드인 건 나쁘지 않습니다. 사실은 아무것도 안 느껴져서 제가 가이드라는 걸 실감한 적도 없습니다만.’

우리 서로 외롭지 말자던, 어느 여름날 맺어진 예쁜 부부의 결혼 서약이 떠올랐다.

‘그래도, 파동 매칭이 형편없어도, 밤에 사야야가 조금 편하게 잠들 수 있으니까. 그거면 됐죠. 조금이지만, 그거면 가이드인 것도 괜찮았습니다.’

녀석은 담담하려 애썼으나 고백하는 내내 말아 쥔 주먹과 올라간 입꼬리를 떨었다. 슬프고 괴로워서, 믿지 못하고 화가 나서.

‘중령님은……. 할 수 있으시지요.’

못 했다.

내 능력은 고작해야 루돌프를 감시하는 데서 그쳤다. 파견이 없는 날 틈틈이 들여다보고, 사람을 시켜 매주 보고를 받았다. 홀로 남은 현실이 버거워 따라가지 않게. 고작 그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 내가 할게.’

그러니까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계속해서 살아. 슬퍼도. 괴롭고 외로워도. 혼자서라도 내일을 살아.

그런 무책임함의 결과가, 생각 없이 책임을 하나 더 떠맡은, 그 결과가 잔혹했다.

그까짓 복수가 뭐라고.

죽음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저 언제고 도사리는 것이다.

끊임없는 전쟁의 소요 속에서 죽음은 때로 수단이었고, 때로 목적이었다. 누군가 죽는 일은 그저 발생했고, 자연히 일어났다.

죽음은 머릿수와 시체의 구로 세어지고 말 없는 영혼보다는 입은 군복으로 남은 몸이 갈 곳을 정했다. 때로는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를 수 없었지만, 떠나는 누구도 남은 자의 허례허식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피를 얼마나 흘렸기에 이렇게 가벼울까.

가족과 고향을, 아내와 아이를 앗아 간 에스퍼에게서 단 하나이자 전부를 빼앗는 일. 이만큼 완벽한 복수가 있을까. 그토록 완벽한 복수를 하고 사야야의 곁으로 가면, 그렇게 빈자리를 하나 늘리고 이제 만족스러울까. 이제는 외롭지 않을까.

언제고 삶은 힘드니까. 혼자서는 더욱 힘드니까.

피할 수 없는 그 언젠가가 오게 되면 서로의 남은 사람을 지켜 주기로. 루돌프가 다시 혼자가 되는 것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행복할 수 있도록 지켜봐 주기로, 그렇게 약속해서.

그래서 이 죽음은 내 또 다른 실패였다. 사야야의 유언을, 부탁을 지키지 못했다. 루돌프를 지켜 내지 못했다. 가슴이 차가운 공기에 베인 듯 따가웠다. 그의 목을 그은 날카로운 등산용 나이프가 나까지 찔러 버린 것 같았다.

모가지가 꺾어진 몸을 한쪽 어깨로 지탱하고 등을 돌렸다. 이미 심장이 멎은 몸에서는 아직도 피가 흘렀다. 직- 지익, 끌리는 루돌프의 발치에 붉게 길이 그려졌다. 그 붉은 길 뒤로 의아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선아.”

이제 죽음 밖에 남지 않은 에스퍼의 목소리였다.

‘완벽한 에스퍼’는커녕, 이제 얼마 더 살아가지도 못할.

그 마지막은 가이딩 부족에 따른 폭주가 될 것이고, 본능이 찾아 헤맨 안식을 영영 모른 채로 죽을 것이다. 알려 줄 생각은 없었다. 그가 그토록 욕심냈던 평안이 아직 살아 있었던 그 세상도, 제 손으로 죽게 한 것도.

아무것도 모를 것이면서 피로 젖은 루돌프의 마지막 길 위에 던져지는 목소리가 애잔하고 사뭇 초조했다.

나는 루돌프를 숨기기 위해 거듭 조절하던 제어를 거둬들였다. 서서히 이능과 감각과 통증이 제자리처럼 그를 찾을 것이고, 그 익숙한 통증을 이번에는 죽는 그 순간까지 가져가길 바랐다. 오늘로 마지막이 될 그 저주스러운 삶의 끝까지.

“그렇게 멀어지지 마.”

쾅. 다시 건물이 충격으로 흔들렸다. 종아리가 욱신거려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벽에 기대 몸을 세우고 루돌프를 앉혔지만, 힘없는 몸이 풀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와락 미간이 좁아졌다. 다시 한 방향으로 향하는 시선을 애써 다잡아 돌아본 자리에서 키비슈스가 도리어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무언가 잃은 사람처럼.

“그러지 마.”

“…….”

“아파.”

그 속삭임은 내 속에 차가운 분노를 일으켰다. 그 분노는 키비슈스를 향하고 나를 향했다. 오래전 그를 살려 버린 나를 향하고 이 모든 일의 근원이 된 키비슈스를 향했다. 둘 모두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어떤 죽음은 무엇도 되지 못하지만, 루돌프의 것은 이 전쟁을 시한부로 만들었다. 어떤 죽음은 마냥 슬픈 것이나, 우리의 죽음은 앞으로의 세상을 더 낫게 할 것이다.

키비슈스로 인한 전쟁도, 그가 누군가의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하는 것도 오늘로 끝이다. 검집에서 중검을 꺼내어 바로 들었다.

“키비슈스. 너는 절대로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어.”

“선아.”

“나를 납치했던 때를 기억해?”

보라색 눈동자에 창밖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화재의 불꽃이 이따금 스쳐 지났다. 키비슈스가 응, 하는 달콤한 울림을 뱉었다. 행복한 기억을 떠올린 사람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너는 어찌나 우는지 몇 번이고 재워야 했지.”

“…….”

“거듭하니 알맞게 기억을 잃어 줬어.”

“…….”

“내 손으로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모든 것을 가르쳤지. 지금도 그렇게 하면 내 것이 될까?”

응? 네가 날 살렸잖아.

해가 지고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오른 복도에 전등이 켜지다 말고 깜빡거렸다. 스산한 복도를 울림만은 다정한 목소리가 타고 넘었다. 언젠가 어린 삶이 지칠 때 몇 번이고 위로받은 목소리였다. 그것이 위로가 아닌 줄도 모르고. 그것이 삶이 아닌 줄도 모르고.

울 것 같았다. 울 것 같은 이 기분은 언제고 윤오를 떠올릴 때에 찾아왔다.

내 삶. 내 여름. 내 가이드. 내 윤오.

마침내 그를 보낼 시간이 왔다. 준비하지 않고 찾아온 오늘이었다.

욱신거리는 종아리 대신 오른쪽 다리에 무게를 싣고 자세를 낮췄다.

다가서서 옆의 에스퍼를 베고 키비슈스를 찌른다. 두 사람은 이능에 의존하는 타입이니 빠르게 짓쳐 들면 둘이라도 내가 유리하다.

다친 곳이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에스퍼의 몸은 그 정도론 죽지 않았다. 15년 전, 매주 이어진 강화 시술을 몇 년이고 살아서 버틴 몸이었다.

- My Sun. 이 새끼들 너무 무능해. Sun이 와 줘야겠는데?

- ‘쓸모없는 새끼들 때문에 대피소 문이 하나 뚫렸어.’

건물 전체에, 그리고 내 어깨의 무전이 지직거리며 동시에 목소리를 뱉었다. 대피소. 번뜩 정신이 들었다. 여태 깜빡거리던 전등이 갑작스레 환해졌다. 돌아보니 틱, 틱, 안내하는 것처럼 복도를 따라 불이 밝혀지고 저 끝에서 비상 표지등이 깜빡거렸다.

펑!

그리고 정면에서 스프링클러와 맞닿은 천장이 터졌다. 다급하게 윈터가 키비슈스를 데리고 물러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건물 전체에 이동이 불가능하도록 펼쳐 놓은 이능 제어를 점검하며 나 역시 물러났다.

윤오가 위험할지도 몰라.

텅 빈 줄 알았던 마음에 철벙철벙 두려움이 차올랐다. 불안한 상상이 수십 가지씩 떠올라 두쿵두쿵 심장을 두드렸다. 루돌프를 두고 망설이다 절뚝거리는 걸음을 재촉하여 뛰다시피 불이 켜진 복도를 달렸다. 왼발이 내딛는 자리에서 질걱이는 젖은 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해가 넘어가 어두컴컴한 건물 안에서, 밝은 외길을 따라 달렸다. 인도하듯 앞서 열린 문에 들어서니 안전 사다리가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실이었다. 망설임 없이 다리를 걸어 쭉 타고 내려가 2층에 섰다.

층이 바뀐 것으로 들려오는 소음이 달라졌다. 북적한 사람 소리와 날붙이 따위가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비명. 소란을 따라 문을 열고 나갔다. 에스퍼들이 한데 엉켜 난동을 피우느라 바닥재며 벽, 천장이 온통 망가지고 로비를 둘러싼 2층의 난간도 멀쩡한 곳이 없었다.

바닥과 허공을 가리지 않고 잔해가 나르고 불꽃이 매캐하게 벽을 그슬렸다. 번쩍이는 불빛은 이능 때문이기도 했고 날붙이가 세게 맞붙어 일어나는 스파크이기도 했다.

총성이 끊임없이 이어졌으나 에스퍼들은 거의 맞지 않았고, 맞는다 해도 잠시 행동을 묶는 정도에서 그쳤다.

몸을 터트리거나 목을 끊어 내지 않는 이상 에스퍼는 즉사하지 않는다. 아픔과 통증에 무딘 병기들은 그렇게 서서히 죽을 때까지 싸웠다. 제가 왜 싸워야 하는지 아는 놈은 여기서 얼마나 될까.

“소위.”

“중령님! ……소위 한타!”

“넌 퇴각해. 실내에 적합하지 않아.”

“하지만, 상황이……. 다치셨습니까?”

“연기를 피우는 쪽이 방해된다. 바깥은 모두 제압했나? 외부에서 지원하도록 해.”

복도 구석으로 끌어당겨진 붉은 눈이 금세 처량하게 가라앉았다. 그런다고 명령을 물릴 생각은 없었다. 강력하지만 능숙하지 못한 전력은 아군의 힘이 아니라 적의 득이 되는 수가 있다.

속에 남은 기력을 가늠하며 앞으로 나섰다. 다친 다리의 발끝을 세워 바닥을 통통 두들기고, 쓸 생각도 않았을 피스톨을 한타의 품에서 꺼내 쥐었다.

“아니면 거기서 지원만 해. 불꽃은 최대한 작게, 명중률에 신경 써서 급소만 노리도록.”

녀석의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넘기고 다시 걸음을 앞세웠다.

탕, 탕.

에스퍼의 이능을 파악하고 그 약점과 빈틈을 파악하는 일은 내 전문이다. 한 발에 하나씩 반군의 자세가 허물어지고 그 틈새를 연합군의 이능 장교가 파고들었다.

한 걸음씩 신중하게 로비로 접근하며 살피니 전세는 연합군이 단연 우세했지만 주춤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 자리에 있으라고 했지만 기어이 나를 따라붙은 한타에게 물었다.

“생포 명령이 내려왔나?”

“예! 사살하지 말고 제압하라는 명령입니다!”

알림을 하나도 듣지 못했으니 내 무전이 망가진 모양이었다. 지하에서부턴가. 바차스가 아무렇지 않게 울려 대서 알아채는 것이 늦었다.

“바차스.”

- ‘응.’

- 응.

고장 난 무전기의 송신 버튼을 누르고 부르자마자 바차스의 대답이 들려왔다. 무전 뿐 아니라 건물 전체를 울리는 건 덤이었다.

“전달해. 일반군 즉시 대피. 반군 전원 사살 명령. 오늘 전쟁을 끝낸다. 반복한다. 일반군은 즉시 건물 밖으로. 이능 장교는 반군 전원을 사살하라.”

- ……반군 전원 사살 명령. 오늘 전쟁을 끝낸다. 반복한다. 일반군은 즉시 건물 밖으로. 이능 장교는 반군 전원을 사살하라.

- ‘응.’

기계음이 섞여 묘하게 딱딱한 내 목소리가 건물 내 모든 스피커를 통해 퍼져 나왔다. 그새 녹음해서 재생했나.

짧은 침묵이 감돈 전장에 이내 공세가 이어졌다. 명령이 달라진 만큼 어쩔 수 없이 반군의 약세로 접어들었다. 중앙군령에서 가까운 만큼 그 수가 월등했고, 애초부터 연합국이 보유한 에스퍼들은 전원이 자연 발생 에스퍼이므로 하나하나의 위력이 달랐다.

다른 전장에서처럼 유사 가이드를 끌고 다니면서 연료처럼 쓰지 못하는 이곳이, 그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그들의 끔찍한 수장, 키비슈스 엘로란타와 함께.

탕, 탕, 탕.

공세가 이어지는 와중 총성과 닮은, 그러나 총알이 아닌 이능이 튕겨 나는 소리가 여러 번 이어졌다. 가이드 센터 정문에서 보았던 방어계 에스퍼였다. 희멀건 기운에 중앙군 여럿의 공격이 막혀 밀리는 게 보였다.

이능을 다루는 숙련도는 높아 보였지만 무리하게 다수를 지원하려 든 것이 패인이다. 나는 걸음을 죽여 다가가 그 뒤통수를 쏘았고, 놀라 뒤돌아 피하는 놈에게 칼끝을 디밀어 물러나게 한 다음 그대로 발로 차 난간 밖으로 떨어트렸다.

추락하는 놈에게 한 발을 더 쏘아 명중을 확인하고 무릎이 풀썩 꺾였다. 다시 피가 배어나오는지 종아리가 뜨끈거렸다.

- ‘Sun. 난 여기까지인 것 같아.’

“바차스, 어디야?”

- ‘나 병원.’

“뭐라고?”

- ‘그냥 해 봤는데 됐어. 앞으로 한 시간은 버틸 수 있겠는데, 반군 새끼들이 기판을 망가트려서 내가 죽으면 문이 열릴 거야. 이제 얼마 안 남았네. 건투를 빌어.’

“그게 무슨 소리야? 바차스!”

- ‘응.’

병원이라고? 의무대? 그럼 아직 침상에 누워 있다는 말인가? 여기는 어떻게? 그보다 아까 ‘만났다’ 하고 말하지 않았나?

“……에덴은?”

- ‘대피소에. 누구 가이든지 예쁘더라.’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무전기 잡음에 섞여 지지직, 장난스럽게 흘렀다.

남은 여섯 발 째 총알을 쏴 갈기고 대피소 2층 문 앞에 도달했다. 움푹 팬 이중문과 흠집이 잔뜩 간 컨트롤 패널을 확인하고 그 자리를 등졌다. 전세가 가파르게 기울어 연합군의 승리가 목전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예정된 수순이었다. 파동의 절대치를 제한해 놓은 이 건물 안에서, 이능의 무절제한 발휘에 익숙한 반군은 본래만큼도 실력 발휘를 못하고 당황했다. 전장에서 그 뜻은 곧 죽음이었다.

무수히 살인한 자들이 또 다른 살인자들 앞에서 하나씩 쓰러져 내렸다. 단말마가 있거나 없거나, 그 흔한 죽음도 제각각으로 찾아왔다.

옆에 붙은 한타에게 일일이 방향과 강도를 지시해 전투를 지원하면서, 바차스가 여상하게 말한 ‘한 시간’과 ‘죽음’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떠올린다기보다는 상이 맺힌 것처럼 거슬렸다. 어떻게 알고 그렇게 말하는 거지? 에덴의 도움을 받으면, 아직……, 아직…….

펑!

후드득,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군인들이 쓰러지고 난간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수적으로 우세했던 만큼 피해 역시 연합군이 훨씬 많았다.

층간이 뚫린 허공에 제어 없이 흉포하게 날뛰는 파동 하나와 간신히 두 사람을 띄울 기력을 짜낸 파동 하나가 나타났다. 키비슈스와 윈터.

상황이 마침내 종장이다. 건물 전체에서 내 이능을 걷어 여력을 보충한 뒤 뾰족하게 날을 세웠다. 이능 제어가 단숨에 날카롭게 윈터의 파동을 잘랐다.

“엘……, 로란타!”

공중에서 크게 흔들린 키비슈스와 윈터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하나는 아래로 떨어지고 하나는 내게로 쏘아졌다. 비명처럼 그를 외치며 추락하는 윈터에 비해 키비슈스는 무척이나 가볍게 난간 안쪽에 착지했다. 곧 퍽, 하고 아래에서 사람이 하나 더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왜 나에겐 써 주지 않아?”

털썩, 쓰러진 한타의 손에서 불꽃이 맥없이 식어 가느다란 연기를 피웠다. 그 연기를 더하지 않아도 이미 문 앞은 매캐했다. 따가운 눈을 깜빡이며 지척에 다가온 키비슈스를 노려봤다.

가볍게 한타를 기절시키고 내게 뻗어진 흰 손등이 깨끗했다. 그 화상이 옮은 내 손등은, 내 손가락은 아직도 멀쩡하지 않은데.

“선아. 화났어?”

선아. 화났어? 선아. 나 아파.

“……내 이름이 이선이 맞기는 해?”

마치 어린아이가 반응을 얻은 듯, 내 질문에 키비슈스가 환하게 웃었다.

“글쎄. 기억 안 나는데.”

피식, 허탈한 숨이 나왔다. 모조리 그의 가르침에 의지한 어린 시절 탓에, 내게는 이름 하나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게 없다.

긴긴 싸움의 끝을 앞두고 외려 긴장이 빠져 어지럼증이 찾아 들었다. 피를 많이 흘린 탓이고 이능을 오랫동안 쓴 탓이다.

“키비슈스. 너는 졌어.”

“그럴까?”

“아직도 나를 데려갈 수 있다고 생각해?”

“응.”

무한히 긍정적인 그 대답에 나는 중검을 멀찍이 던져 떨어트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겨우 두 발로 서서 양팔을 벌렸다. 말도 제대로 못 하던 그 시절, 내게 헌신적인 키비슈스에게 처음 마음을 열었던 그때처럼.

“해 봐.”

흐드러지는 미소가 뚜벅, 뚜벅, 발자국 소리와 함께 다가왔다.

한 품 가득 들어오는 키비슈스를 벗어나지 못하게 꽉 안고, 준준에게 서두르라 눈짓했다. 준준이 내게 떨어지라고 수신호를 보내며 인상을 썼지만 듣지 않았다.

예상한 대로 일찌감치 잡혔던, 잡힌 시늉을 했던 이동형 에스퍼가 나타났다. 놈은 한데 겹친 나와 키비슈스에게 손을 뻗었고, 나는 그 에스퍼의 이능을 즉시 0으로 제어했다. 다리가 풀린 이동형 에스퍼가 날아온 건물 잔해에 무력하게 얻어맞고 난간 밖으로 떨어졌다.

푸욱, 그리고 함께 날아온 중검이 키비슈스의 등을 꿰뚫고 내 뱃가죽에 틀어박혔다.

크게 아프지는 않았다. 나를 안은 키비슈스의 마비로 이미 등과 하반신이 좀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선!”

쿵쾅쿵쾅 멀찍이 준준이 복도를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온갖 잔해가 공중에 솟았다 꺼지면서 먼지를 만드는 것이 꽤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파동이 펄펄 날아 공간을 가득 메우고도 흘러넘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있는 에스퍼가 별로 없겠지만, 지금이라면 모두의 파동을 강하게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는 지금이라면 그들 모두에게 일반인의 기분을 느끼게 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선아.”

귓가에 작은 신음과 함께 여전히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묘하게 패배를 시인하는 기색이 어렸다.

“아직도, 제어를 더 쓸 수 있는 줄은 몰랐네.”

모르겠지. 너는 남은 조금의 시간도 몰라야지.

조절하기 어려운 파동의 폭주에서도 나는 키비슈스를 배제해 냈다. 그에게 죽음 외의 평안을 주지 않기 위해서.

“왜 이렇게 외롭지?”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채로 그 품에 늘어져 안겨 있다가, 겨우 팔을 들어 올렸다. 따뜻하고 축축한 복부에 힘을 주고 키비슈스를 밀쳤다.

뜨거운 통증이 살을 발라낼 것처럼 파고들었고, 키비슈스가 순순히 멀어졌다. 상처가 더욱 베이며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힘을 주어 팔꿈치를 밀어 냈다.

털퍽, 내 몸이 바닥에 나뒹굴고, 키비슈스의 몸이 난간 너머로 떨어졌다.

느린 화면처럼 붉은 피가 허공에 뿌려졌다. 서서히 넘어가는 몸과 드디어 주홍을 묻힌 새하얀 가운이 펄럭였다.

그 독특하고 아름다운 파동이 마지막까지도 내 이능에 영향받지 않도록, 결코 편해지지 않도록, 고꾸라져서도 신경을 썼다. 저 아름다운 악이 그대로 외롭게 죽을 수 있도록.

- My Sun, shines over my way.

You mean more than a word.

You took me to live,

you told me to leave.

(내 태양, 나의 길을 비추는.

너를 말로 다 할 수 없는데.

나를 살게 하더니,

내게 떠나라 했지.)

Please, sun. Love you ever, my heart.

You took more than you know.

You are one and only, dear.

There’s no one like you, dear.

(내 태양. 영영 사랑할 내 심장.

네가 아는 것보다 나는 훨씬 더 빠져 있어.

유일한 그대. 너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Much pain that I drank, the waits that I paid, but still I am here.

Please, sun. Don’t take this brights from me.

Let it shine. Cause you let me know.

(그 같은 고통에도, 기다림에도, 여전히 난 여기에.

내 태양. 이 빛을 내게서 가져가지 마.

빛나게 둬. 네가 알게 했으니.)

I can pay much if you want. If it hurts I can endure all.

Come, please come back. Like nothing happened at all.

(더 기다려야 한다면 그렇게 할게. 아프더라도 다 견딜게.

부디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매끄러운 음악이 잔잔하게 가이드 센터를 채웠다. 데라주바의 오래된 노래였다. 가사가 없어도 그 멜로디에 붙을 노랫말을 줄줄 욀 수 있었다. 고통으로 얼룩진 밤을 보내며 기한 없는 기다림을 계속하는 에스퍼라면 누구든 아는 노래였다.

기계음과 함께 덜걱거리며 두꺼운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움직여지는 상체를 비틀어 몸을 바로 눕혔다. 첫 번째 문이 열리고, 안쪽 문도 느릿하게 열렸다. 그 틈으로 다급하게 누군가 빠져나왔다.

지직-

- 안전하게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낯설게 정중한 말씨가 나직한 배경 음악 위로 자박하게 흘렀다. 전투가 소강한 장소에 평소의 장난기를 거둔, 그러나 즐거워 보이는 목소리가 울렸다.

- 여기는 에덴. 행복한 낙원입니다.

뚝.

아, 갔구나.

알아채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바차스가 죽었다.

동시에 적막해진 가이드 센터. 전투가 끝난 자리에 고요가 찾아왔다. 사사로운 잡음을 알아챌 기력이 내게 남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이미 피를 많이 흘렸고, 새로운 상처로 뱃가죽이 뚫린 데다가, 조절할 수 없는 파동으로 센터에 남은 생명력을 흩뿌리는 중이다.

어느 때보다 가까운 결말에 마음은 꽤나 편안했다. 그래서인지 그런 형편없는 몰골에도 다가선 사람을 보고는 웃음이 나왔다.

이미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지만 그 검정은 몰라볼 수가 없다. 윤오. 내 윤오.

자리에 앉아 내 몸을 추려 안는 그 품을 더 느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마비가 점차 타고 오르는 몸은 그의 온기를 느끼지 못했고, 쏟아지는 가이딩에 폭주하던 파동이 줄어들었으나 그뿐이었다. 이미 탈선한 바퀴는 마지막을 신나게 달렸다.

그러나 마음이 좋았다. 그래서 마음이 좋았다.

내려다보는 윤오의 표정이 사뭇 심각하게 굳어 있다. 지금은 그것도 좋았다. 마치 나를 안타까워하고 걱정하는 것 같았다. 많이 놀란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했다. 이런 형편없는 모습으로 나를 기억할까. 나를 기억해 주기는 할까. 얼마나.

그의 입술이 달싹거리는 모양이 내 이름 같았는데, 이미 귀에서 모든 소리가 멀어진 참이라 들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좋아 또 웃었다.

내 얼굴에서 피를 닦아 내는 그 커다란 손에 난 상처가 신경 쓰였고, 그 깨끗한 낯에 어울리지 않는 상처가 나빴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벌벌 떨리는 손을 끌어올려 윤오의 손을 잡았다. 내 손끝과 손등의 뼈마디를 타고 피가 터졌다.

벌건 손을 들어 윤오의 얼굴을 살짝 건드렸다. 언제보다도 강한 이능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그의 상처를 낫게 했다. 곧이어 내 뺨의 같은 자리가 미지근해졌다.

윤오의 미간이 일그러졌지만 그래도 상처가 없어져서 좋았다.

조금 더 보고 싶어 눈을 깜빡였다. 아쉽게도 속눈썹 그림자가 무척 어두워서 눈앞이 점점 더 가물거렸다. 웃어 주면 좋을 텐데. 웃는 걸 한 번이라도 봤다면 좋았을 텐데.

보고 있는데 보고 싶었다. 윤오는 그랬다. 나는 항상 그가 모자랐다.

그래도 이제는, 행복하기를.

일을 마친 손이 툭 떨어졌다.

바깥은 흰 눈 조용히 내리는 날.

나의 계절. 나의 사랑스러운 이에게.

앞으로 영영 그대 자유롭기를.

차가운 계절에 나는 떠나고, 당신은 주지 않은 선물을 받는다.

- 겨울 寒蟬 (한선: 울지 않는 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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