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1화- 가을 楓菊 (2)) (3/11)

- 가을 楓菊 (2)

간단히 거실과 방을 소개받은 윤오가 내 책장을 훑었다.

“정말 ……같군.”

“네?”

“아닙니다.”

그가 중얼거린 말을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가 내 공간에 들어선 것이 더 감격스러워 가만히 그 뒤를 따랐다.

윤오의 책을 모아 둔 칸을 지나쳐 군에서 지급한 자기 계발 비용으로 산 서적들이 꽂힌 책장에 그의 시선이 멈췄다. 상담 심리학책을 한 권 꺼내 대충 훑으며 그가 질문했다.

“여기서 산 지 얼마나 됐습니까?”

“4년이 좀 넘었습니다.”

“중앙으로 오고 계속 여기서 산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물건이 없군요.”

그 말에 둘러보았으나 책이 많은 책장, 옷이 든 붙박이장, 침대, 책상 등 있을 게 다 있는 침실은 윤오의 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봤는지, 윤오가 바깥을 턱짓했다. 아…….

“다 빈방이라.”

“딱히 취미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보다는 집이 큰 것이고.

내게 주어진 관사는 38평형에 방 네 개짜리 가족형 숙소였다. 나는 그중 가장 큰 방과 부엌 정도만을 쓰고 나머지 세 방과 거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비워 두었다.

건축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공간 구조에 흥미를 보이는 윤오에게 하나씩 문을 열어 보여 주었는데, 그간 청소는 잘해 둔 것이 뿌듯했다.

“심리학에 관심이 있습니까?”

“네? 아……. 딱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군요. 그럼 접견 때문입니까?”

윤오는 내가 모아 놓은 심리학서와 상담서들을 꺼내 하나씩 펼쳐 보았다. 밑줄을 그어 놓은 곳을 찾아 따라 읽는 듯했다.

같은 자리를 읽는다는 묘한 기분 탓일까, 나는 그 모습에 묘하게 가슴 언저리가 간질거렸다. ‘내 공간’에 가장 들이고픈 사람이 들어선 까닭 같기도 했다. 그래서 대답을 하나 놓쳤고, 윤오가 고개를 들어서 나와 힐끗 눈을 맞췄다.

“대규, 아까 손잡은 군인. 그 남자도 에스퍼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탁.

윤오가 소리 나게 책을 덮어 책장에 도로 꽂아 넣었다. 그리고 욕실 가까이 있는 벽장을 턱짓했다.

“군복을 볼 수 있습니까?”

“네.”

나는 곧장 침대 반대편으로 가 벽장을 활짝 열었다. 동복과 하복을 아울러 잘 클리닝 된 제복들과 몇 안 되는 사복이 들어 있었고, 이동용 가방이 크기 별로 두 개, 그리고 벨트와 탄띠, 응급키트 등이 정돈되어 있었다.

군복을 보고 싶다고 한 윤오는 옷장으로 다가오다 말고 내 침대에 앉았다. 꺼내서 보여 줘야 하나. 손바닥 가운데가 간질거리는 나를 말끄러미 바라보고서, 그는 내가 할 일을 알려 주었다.

“입어 봐요. 전투복부터.”

“……네.”

“여기서.”

“…….”

나직한 목소리는 다른 감정 없이 담백하게 떨어졌지만, 나는 몇 번이나 윤오의 눈치를 살폈다. 화가 난 걸까. 그때처럼 내가 무언가 실수한 걸까.

그러나 단순한 에스퍼들과 다르게 윤오의 감정은 보는 것만으로 알아 낼 수가 없었다. 그는 화가 난 것도 같았고, 그저 평소처럼 무심해 보이기도 했다. 내게 무언가 바라는 것도 같았고, 단순히 궁금증을 해결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내 침대에 앉은 그에게 자꾸만 눈이 갔다. 특히 그가 입은 푸른 셔츠에. 가슴팍과 어깨, 그리고 허리춤이 잔뜩 구겨진 셔츠는 그 부분마다 크게 얼룩이 져 색이 짙었다. 오늘 몇 번이나 들이켠 그의 향이 떠올랐다. 청량한 향.

내가 만든 흔적과 내 가이드. 내가 사는 공간에 데려다 놓은 그의 시선.

망설이던 손끝이 근무복의 목 단추를 긁었다.

“어떤 걸로…….”

“아무거나.”

아직 날이 더운데 실내 공기가 서느렇게 느껴졌다. 내 몸이 뜨거운 탓이었다. 쇄골부터 서서히 드러나는 가슴팍에 윤오의 시선이 닿아 자리마다 홧홧한 열기를 지폈다.

나체를 보여 준 일이 처음도 아닌데, 그의 앞에서 옷을 벗는 게 왜 아직도 어려울까.

심중을 알 수 없는 그의 시선은 언제나 달고 항상 무거웠다. 그 무게가 내 손등에 걸려 고작해야 단추를 풀어 내리는 동작이 느리게, 어렵게 이어졌다.

툭, 툭, 하나씩 끌러 내는 동안 계속해서 눈치를 살폈고, 그 소리가 공간을 울릴 만큼 컸다.

그 시선을 다 견디지 못하고 뒤돌아 선 등에서 상의가 미끄러져 풀썩, 흘렀다. 상처 많은 몸이 부끄러워 서둘러 옷장으로 손을 뻗었다. 잡히는 대로 꺼낸 옷걸이에는 하계 전투복이 걸려 있었다.

드러난 맨등을 보는 시선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었지만 애써 팔을 꿰어 넣고 떨리는 손가락을 시켜 상의를 잠갔다. 바지는…….

잠시 고민하다가 바지도 내렸다. 벨트를 풀고 허리춤을 놓자 그대로 툭 떨어졌다. 살이 조금 올랐어도 말라빠진 다리가 공기를 차가워했다. 오스스 소름이 올랐다.

한 발씩 빼어 낸 다음 허리를 숙여 전투복의 좁은 하의에 다시 한쪽씩 다리를 집어넣었다.

기본 전투복 위에 방검복을 입고, 방탄조끼까지 채웠다. 환복은 익숙한 일이고, 갑작스러운 출동이나 전시에 대비해 빠르면 1분 이내로 가능하도록 훈련을 받는다.

하루 이틀 해 온 일도 아니었는데, 지금은 손과 몸, 그리고 마음이 많이 떨어 시간이 지체되었다. 하다못해 지퍼를 올리는 데에도 집중이 필요했으니까.

허벅지 포켓과 허리띠에 걸어 빈 검집을 연결하고 방탄조끼 옆구리에 피스톨까지 장착했다. 기본 전투복을 갖추고 크게 심호흡 한 다음 뒤를 돌았다. 윤오는 같은 자리에 허리를 세운 채로 앉아 위아래로 느리게 나를 훑었다.

“그 총은 실제 사용 가능한 총입니까?”

“네. 장교에게 지급되는 권총입니다. 탄약은 공포탄 한 발만 장전되어 있습니다.”

“허벅지에 그건 뭘 꽂는 겁니까. 칼?”

“도검류를 휴대하기 위한 검집입니다. 도검류는 탄약과 마찬가지로 필요시에 허가를 받고 개인 소지할 수 있습니다.”

이능 장교는 무기 소지가 까다롭다. 무기에게 무기를 들리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판단이라 짐작할 뿐 자세한 건 모른다. 일반 장교에 비해 이능 장교에게 불리한 요건과 처우는 얼마든지 있고, 대개는 자신을 군의 무기로 여기면 납득 가능한 사소한 사안이었다.

“검을 씁니까?”

“예. 기본적인 체술과 총검술은 공통적으로 익히고, 접근전을 하는 전투계는 도검술을 배웁니다.”

“지원 계열 아닙니까?”

나는 잠시 눈을 깜빡이며 윤오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네, 하고 대답했다. 내 이능과 주 배치에 대해 기억해 준 것만으로 잠시 가슴이 뛰었기 때문이다.

그만큼의 관심으로도 그는 내 속을 양껏 주물렀다. 달게 주는 시선과 내게 보인 작은 흥미에 나는 온 마음이 저렸다. 내가 말하는 것을 듣고 나를 보고 내 말을 기억하는 것과 성큼 내 공간으로 넘어 들어오는 그 대범함마다 심장이 주체 없이 흔들렸다.

“……맞습니다. 저는 전방 지원도 장기간 했기 때문에, 도검까지 착용하고 있습니다. 후방 지원 계열은 총기만 기본 장착입니다.”

“전방 지원은 몇 년 했습니까?”

“6년입니다.”

윤오는 미간을 좁히고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곧 손을 뻗어 나를 불렀다. 얼마나 가까이 가도 될지 모르는 나는 그가 됐다고 할 때까지 좁은 보폭을 주저주저 이었다.

손이 닿을 거리에서 그는 검집 끈에 손가락을 끼워 내 몸을 당겼다. 휘청이며 한 걸음 더 걸었을 때에는 윤오의 두 무릎 사이였다.

그대로 서 있어야 할지, 아니면 내게 익숙한 대로 무릎을 꿇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거리였다. 어디에 손을 둘지도 모르는 나를 두고 그는 허벅지에 붙은 포켓부터 전투복의 부분 부분을 하나씩 만졌다. 움찔 무릎이 떨었다.

“전쟁부터 중앙에 오기 직전까지 계속 전방에 있었던 겁니까.”

“……네.”

그 사이 그것을 계산했나 보다.

그의 정확한 계산대로, 나는 5년의 연구동 생활 후 전쟁을 포함해 6년간 전방을 전전했다. 그 당시에는 에스퍼 전원이 특성에 무관하게 근접전에 투입되었으므로, 상비 물약 같은 보조 이능을 가진 내 자리도 거기 있었다.

전쟁이 소강에 접어든 1년 반 후에도 내 자리는 같았고, 내가 파동을 건드리는 에스퍼만 그때그때 달라졌다. 지금과는 반대로 진폭을 늘려 이능의 영향력을 키우는 식이었다.

“15년이라.”

윤오의 작은 중얼거림.

그 한 마디에……, 그 한 마디를 위해 나는 그만한 시간을 버텨 이 자리에 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에스퍼로서의 삶이 그만큼이나 길었는데, 눈앞에 당신을 두니 다 보상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알아준 것만으로 쉽사리 녹아내리는 마음. 이 욕심이 그래서 포기를 못 하고 더 질겨지기만 하나 보았다. 그 앞에서 더욱 녹고만 싶어서.

“흣…….”

윤오는 내가 뒤로 빠질 수 없게 허벅지를 잡고 검집을 이리저리 당겨 들여다보고 만졌다. 하의뿐 아니라 상의 포켓에 달린 지퍼나 단추를 열어 보기도 하고, 속이 깨끗이 비워진 주머니에 안쪽 깊이를 살피듯 손가락을 넣어 보기도 했다.

그 손이 지나는 감촉이 질긴 전투복 너머로 느껴질 때마다 나는 잘게 몸서리를 쳤다.

염치없이 기대가 자랐다. 기대가 자라기에 너무 좋았다. 윤오가 내 집에서, 내 침대에 앉아 나를 만지는데, 그러지 않기가 더 어려웠다. 가볍게 진 등짐이 자꾸 흐트러졌다. 그가 만질 때마다 어깨가 안쪽으로 굽고 허리부터 무릎까지가 잘게 흔들렸다.

달칵, 홀스터가 떨어지고, 풀썩, 검집이 떨어졌다.

처음엔 실물을 관찰할 기회가 드물 것이니 피스톨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윤오는 그저 내가 채운 역순으로 하나씩 떨어트릴 뿐이었다. 틱, 틱, 방탄조끼의 여밈이 풀리고, 지익, 방검복이 내려갔다. 발치로 하나씩, 내가 채운 무장이 헤쳐졌다.

하나하나 기억하듯 만져 본 후 풀어 내리는 손길이 가차 없었다. 흔한 벨트 버클은 그마저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금세 풀려났다. 이끄는 대로 허리를 통째 휩쓸리며, 나는 다만 쓰러지지 않기 위해 버텼다.

허리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지가 풀썩 떨어졌다. 나는 주저앉지 않기 위해서 윤오의 어깨를 짚어야 했다. 내가 잔뜩 적셔 놓은 그의 왼쪽 어깨를 이번에는 쥐어 구겼다.

윤오는 드러난 내 허벅다리를 느리게 무릎부터 쓸어 올렸다. 상체에 비해 하체는 치명상이 적기 때문에 내가 투입되는 일이 드물다. 때문에 상체보다 멀끔했다.

안쪽 무릎에 남은 흔적 하나가 전부일 텐데, 그래서 쉽게 찾았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상처를 찾을 셈이었던지 윤오의 엄지가 그 위를 덧그렸다.

이미 속옷이 불거진 나는 그 모든 자극을 삼키고 견뎠다. 내 살갗을 쓸어 올리는 손길과 맨살에 느리게 닿는 그의 숨결은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지만, 못내 자란 기대는 다 참아 내지 못했다.

“이건 무슨 상처입니까. 이것도 치환입니까?”

“네……. 절상을, 경상화 시키는 임무였, 습니다.”

“언제.”

“중앙에 온 해에……, 흣.”

더운 손이 무릎을 감싸고 오래되어 옅은 상처 위를 그 손가락이 지그시 눌렀다. 아프지 않았지만 얇은 살결이 보다 예민한 감각으로 움츠리고 떨었다. 흥분이 피부 아래에서 끓었다.

“누구의.”

“……일반 장교의 아들이었습니다.”

“…….”

“지금은, 전역, 퇴임했고, 이후로는 그런 권력형 부정은 없었, 습니다.”

문득 멈춘 손에 더럭 겁이 나, 대신 변명을 덧붙였다.

“그도 군인이었고, 장애가 남을 수도 있었, 습니다. 당시엔 제 상처 치환에 대한 상세한 기준이……. 흑……, 읏.”

“이 상처는 얼마 만에 나았습니까.”

“6주…….”

빤한 시선이 화나 보였다. 나는 결국 솔직하게 6주를 입원하고 4주를 더 재활해야 했다고 말하고 말았다. 윤오는 별말을 잇지 않았지만 그 손이 주무르는 살결에 붉게 자욱이 남았다. 마치 내 상처와 그 임무에 화를 내어 주는 것 같았다.

낮에 씹은 아랫입술을 입 안으로 당겨 감쳐물었다. 쇠 맛이 마른 목을 꿀꺽 넘어갔다. 분명히 비린 피 맛일 텐데 어딘가 달았다. 그의 화를 걱정이라고 여기는 일처럼.

“가이딩이 필요하진 않을 텐데.”

“…….”

“이건 왜 이렇습니까?”

그야, 당신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나를 만지는데, 그렇게 집요하게 민감한 살을 주무르는데, 내가 버틸 수 있을 리가.

속옷을 밀치는 내 성기는 다만 솔직할 뿐이었다. 당신의 시선과 손길과 숨결이 달갑다고, 기대가 되어 미칠 것 같다고, 벌렁이는 심장만큼이나 솔직할 따름이었다.

윤오는 딱히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지, 입술을 물고 뺨을 붉게 물들인 나를 잠시 올려다보다가 느리게 손을 올렸다. 도드라진 골반뼈를 만지며 한숨을 쉬기도 했고, 상의를 밀어 올리며 속옷의 밴드 부분부터 시작되는 상처 치환의 많은 흔적을 하나씩 손끝으로 훑어 냈다.

이번에는 일일이 사연을 묻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나도 모든 걸 기억하지는 못하니까.

단추가 그대로 잠긴 전투복 상의는 윤오의 두 손이 들어가자 더는 헐렁하지 않았다. 팽팽하게 옷감을 늘렸다가 말리고 구겨져 겨드랑이 아래까지 치솟았다. 희멀건 갈빗대가 다시 아래부터 하나씩 공기 중에 드러났다. 윤오의 눈앞이었다.

“하, 읏…… 흑…….”

더운 숨이 터져 나가고 대번에 허리가 굽었다. 체온이 낮은 몸, 예민한 피부에 그의 손은 불덩이 같았다. 그런 손이 하나씩 흉이 지고 뼈가 드러난 살을 거슬러 올라 바짝 뭉친 유두를 훑고 지났다. 뱃가죽이 들썩이고, 쓰러지지 않기 위해 윤오의 양어깨를 짚었다.

이윽고 솔기를 뜯어낼 듯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균형을 잃고 그에게로 쏟아진 내 가슴팍에, 윤오가 입술을 붙였기 때문에.

건조한 입술이 상복부를 스치고 지나 양쪽 갈빗대가 맞닿는 가슴팍에 가만히 놓였다. 두근거림이 지나쳐 부서질 것 같은 곳이었다.

하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마치 박동만으로 그의 입술을 밀어 낼 것처럼, 가슴팍 피부를 뚫고 나설 것처럼 크게 벌렁였다. 갈비뼈가 좁아 숨 쉴 자리가 모자랐다.

허덕일 때마다 미끄러지는 자세를 겨우겨우 추슬러 세웠다. 그의 어깨에 체중을 실은 손목이 뻐근하고 이대로라면 정말 그의 셔츠를 찢어 버릴 것 같았다.

어쩌면 끌어안을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머리를 코앞에 두고, 그대로 멎은 채 더운 가슴에 불을 지피는 그의 숨을 맞았다.

몇 시간 같은 몇 초가 지나 그는 내 상체를 그에게서 뜯어냈다. 가슴팍까지 올라와 쓰다듬던 손이 옆구리를 따라 주르륵 떨어졌다. 벌벌 떠는 사이 전투복 상의가 다시 묵직하게 흘러내려 그의 손등까지 덮어 가렸다.

밀려나며 허공을 휘청이던 몸은 뜨거운 두 손에 허리를 쥐어 잡혀 간신히 자리를 지켰다. 겨우 주저앉지 않고 두 발로 바닥을 디뎠다.

둘 곳을 잃은 양손이 흘러내린 상의 채로 그의 손등과 손목을 감아쥐었다. 등과 어깨를 겨우 펴고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득한 검정이 아찔했다. 언제나처럼 그 시선에 바르르 피모를 떨다 그 아래 모양과 색이 탐스러운 입술에서 탄식을 흘렸다. 잠깐 닿은 감촉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등줄기에 수십 차례 소름이 일었다.

그의 입술이 내게 닿았다. 새로 찍은 낙인처럼, 그의 입술이 닿은 가슴 가운데가 뜨거웠다. 짓눌린 것처럼 뻐근하고, 딱지 앉은 듯 간질거렸다. 정신을 놓게 만드는 일, 믿을 수 없는 순간이 쉴 새 없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왜 그랬을까, 어쩌다, 그냥?

의중을 알 수 없는 빤한 시선과 그 검정이 자꾸만 속을 지폈다. 간지러움이 상처가 난 아랫입술까지 파고들어 혀로 살짝 핥아 축였다.

더운 손이 닿았던 유두가 잔뜩 민감해져서, 끝이 질긴 천 안쪽에 쓸릴 때마다 입술 틈으로 신음이 샜다. 윤오의 시선이 계속해서 그 틈을 비집었다.

조금 만져진 것으로 흥분이 바짝 오른 몸이 다음을 기다렸다. 발가벗겨지지 않고도 헐벗은 몸이 그가 행할 그 어떤 몸짓이든 이어지기를 기대했다. 초에도 몇 번이나 두근거리는 심장이 시간을 늘려 기다림이 길었다.

차라리 내게 무엇이든 허락하기를 바라기도 했다. 무릎을 꿇어도 된다고 하면 무릎을 꿇을 것이고, 이 갈증 나는 입으로 그의 것을 품어도 된다고 하면 달게 삼킬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이 없었다. 초조와 조바심이 언제나처럼 내 몫으로 속을 끓였다.

내 호흡만이 요란한 정적 속에서, 한참이나 멎어 있던 윤오의 시선이 내 입술을 떠났다. 천천히 떨어져 잠시 울대에 머물렀다. 창밖에서 저녁 빛이 기울어 턱 그림자가 길게 지는 곳이었다. 꼴깍, 다시 한번 긴장을 삼키는 사이 시선은 전투복 목둘레를 지나쳐 더욱 내려갔다.

잘 잡아 놓은 다림질 자국과 새로 생긴 구김이 마구잡이로 뒤엉킨 상의. 품이 남는 옷자락이 들춰져 창백한 살갗을 더욱 희게 드러낸 허리춤. 미처 가리지 못한 앞섶, 그 아래 마른 두 다리와 모아 붙은 무릎…….

그가 시선으로 행하는 느릿한 여행기를 훔쳐보는 내내 갈증이 일었다. 허락한다면 그 까만 눈동자를 핥아 보고 싶었다. 그러면 이 어쩔 줄 모르는 속도 축여질 것 같았다. 다시금 혀끝이 갈라진 입술을 핥았다.

“앗……!”

예고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윤오에게 부딪혀 몸이 뒤로 밀려났다. 발목에 바지가 걸려 그대로 넘어질 뻔했는데, 넘어가기 직전에 그가 팔을 당겨 세웠다. 오들거리는 등에 붙박이장 문이 닿고, 더운 손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삽시간의 추위가 몰려들었다.

단숨에 움츠러든 나를 놓고 윤오는 열린 옷장으로 몸을 돌렸다. 그사이 감돌던 공기에 여전히 혼자 숨 막혀 하는 나를 두고.

하아……. 맺혀 있던 한숨이 다 펴지지 못한 가슴팍에서 조금씩 입가로 흘렀다.

두근거림이 잔뜩 남은 가슴 한가운데를 꾹 누르고 윤오의 옆모습을 돌아보았다. 여상한 손길이 가지런히 걸린 제복들 사이를 파고들어 하나씩 헤집었다.

무심한 시선이 닿는 곳마다 옷걸이 밀리는 소리가 났다. 잘못 밀쳐진 옷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도 들렸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셔츠가 잔뜩 구겨진 어깨와 그 너머로 보이는 모양 좋은 입술에 자꾸만 눈이 갔다. 저 입술이…….

“이게 예복입니까?”

“……네.”

“이걸로 입어요.”

묵직한 동계 예복이 짧은 거리를 날아 옷걸이째 툭, 침대로 떨어졌다. 윤오는 안의 선반에서 모자 몇 개를 뒤적이다 예모 하나를 골라 보여 주었고, 나는 그게 맞다고 목만 끄덕여 보였다. 동예모는 같은 자리에 보다 가벼운 소리로 떨어졌다.

간단한 지시를 내린 그는 여전히 옷장에 걸린 옷과 선반에 정리된 물건들을 하나씩 살폈다. 그와 침대에 놓인 동계 예복을 번갈아 살피던 내 고개가 문득 발치로 떨어졌다. 벗어 낸 옷이 침대와 옷장 사이 몇 폭 되지 않는 좁은 바닥에 벌써 잔뜩이었다.

나는 긴장한 발끝으로 허물 같은 옷가지들을 밀고 그 자리를 디뎠다. 침대까지는 크게 두 걸음이면 충분했다.

주먹을 쥐었다 펴 떨림을 덜어 냈다. 그리고 동예모부터 옆으로 치웠다. 예복의 코트에서 재킷과 셔츠를 꺼내고 겹쳐 정리해 둔 바지와 타이도 분리했다.

그를 돌아보고 더운 숨을 내쉰 다음에야 내 손가락이 전투복 목 어림으로 올라갔다. 등 뒤로 들리는 기척에 신경이 곤두서서 손톱이 단추를 풀다 말고 여러 번 미끄러졌다.

더디게 벗어 낸 상의를 침대 아래 떨구고 예복 셔츠를 집어 들었다. 윤오가 기다린다고 생각하면 서둘러야 할 텐데, 도무지 서둘러지지 않았다. 아직 남은 흥분에 허벅지 안쪽이 저렸고, 가슴팍의 돌기는 그의 손바닥이 닿은 순간부터 자꾸만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을 전했다.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힌 다음 셔츠에 팔을 집어넣었다. 민감해진 유두가 옷감에 닿지 않도록 조심했으나, 달아오른 몸을 휘감는 차가운 천이 그 자체로 자극적이었다.

“하아…….”

열을 억누른 숨을 작게 뱉다가 문득 조용해진 방 안을 깨달았다. 머뭇머뭇 뒤돌아본 시선이 덜컥, 윤오의 것과 휘말렸다. 그 순간 마주친 검정에 아득한 전율을 느꼈다. 철렁, 속이 내려앉고 휘청, 무릎에 힘이 풀렸다.

솟구친 흥분이 마치 현기증 같았다. 발치가 불안해 침대에 풀썩 엎어졌다. 어지러운 머리를 시트에 문질렀다. 신음을 삼키고 남은 호흡을 파묻었다.

어지러움이 잦아들고 헐떡임도 삼켜 낸 다음, 질끈 감긴 눈도 겨우 떠 초점을 맞췄다. 윤오는 옷장 앞 그 자리에서 그대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단추를 다 채우지 못해 벌어진 앞섶, 그리고 셔츠의 아랫단을 끌어내려 가린 다리 사이에 무심한 눈길이 닿았다.

두쿵, 두쿵, 긴 다리가 느리게 두 걸음을 걸어 다가오는 동안 심장이 또다시 허파를 밀치고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변명처럼 입 밖으로 이게, 이건, 아니, 하고 무엇을 부정하는지 모를 웅얼거림이 나왔다.

다가선 윤오는 가볍게 손을 뻗어 내게서 셔츠 아랫자락을 빼앗았다. 창백한 허벅지와 등허리가 다시금 공기 중에 서늘하게 드러나고, 더 이상 가리지 못한, 한쪽이 동그랗게 젖은 속옷까지도 그 아래 놓였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

발정. 이 솟구치는 음욕과 기대는 발정이었다. 윤오의 시선 한 톨, 숨결 조금, 그리고 의미 없는 손길 약간이면 금세 아래가 섰다. 그의 향이 코끝에 스치면 차가운 몸에 열이 올랐고, 더운 숨소리라도 들으면 근거 없는 기대가 어느새 자랐다.

염치를 모른다, 부끄럼도 없다, 때를 가리지 않는다, 그런 비난은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사실이니까. 내게는 염치도 부끄러움도 넉넉지 않았고 그럴 주제도 못 되니까.

그러나 고개 들어 윤오의 시선을 확인하기는 겁이 났다. 그가 무슨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지, 홀로 발정한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경멸은 아니기만을 바랐다. 윤오의 경멸은 내 다른 모든 욕구와 발정과 숨까지도 멎게 했으니까.

이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채 계속 착각하고 싶기도 했다. 조금 전의 분위기는 내게만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가이딩 필요합니까?”

긴장으로 범벅된 적막을 나직한 목소리가 깨트렸다. 걱정했던 경멸이나 비난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가이딩이 ‘필요’하냐는.

단숨에 그렇다, 해도 모자란데,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오후 내내 윤오의 품에 안겨 모든 감정을 쏟아 내고 달램받은 육신이 모처럼 편안했기 때문에.

“하, 하고 싶, 습니다.”

그렇다거나, 혹은 아니라거나. 나는 그런 곧 들킬 허름한 거짓말 대신에 솔직하기를 택했다. 눈먼 흥분도, 지긋지긋한 통증 없이도 그를 원하는 솔직한 욕망을 꺼내 전했다.

“흣!”

다음 순간, 마른 몸이 침대 위를 나뒹굴었다. 투둑, 흰 단추가 뜯겨 허공을 날았고, 드러난 맨가슴은 차가운 공기 중에서 재차 끝을 뭉쳤다.

여밈이 사라진 셔츠 사이로 윤오의 시선이 흉 진 나신을 훑었다. 잇따라 픽픽 꺼지는 가슴팍과 뱃가죽, 그리고 기대만으로 끝을 적신 아래까지.

“하고 싶다, 라.”

벌벌 떨면서도 고분고분 이어질 처사를 기다렸다. 애타는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두려워했다. 혹은 기대했다.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두려움이든, 기대든, 그를 앞에 두면 떨림을 자아내는 건 마찬가지니까.

소리 없는 욕설을 뱉은 윤오가 입가를 문질렀다. 미간을 좁히고 턱 끝을 좌우로 돌리더니, 답답한 듯 셔츠 목둘레에 손가락을 넣어 거칠게 흔들었다. 이어 셔츠 위 단추를 두 개 풀어 내렸다. 하나, 또 하나. 윤오의 방어가 풀어지는 광경에 오싹, 소름이 내달렸다. 들여다보이는 단단한 쇄골에 입이 말랐다.

종일 넉넉하게 운 날. 그러고도 두통 하나 없는 날. 오랜만에 저림도 아픔도 없는 날.

통증에 절어 간절했던 지난날과 다르게, 아프지 않은 몸으로도 가이딩을 바란다고, 하고 싶다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윤오에 의해서 온통 저리고 아리기를 원했다. 가이딩보다 더한 것을, 가이딩이라는 형태를 빌어 탐을 냈다.

내가 싫어 함부로 다루고 상처 입혀도 좋으니 당장은 써 주기를, 내게 그만큼이라도 허락하기를 나는 늘 바랐다. 어떻게든 괜찮으니, 어떻게든 내 이 욕심이 그에게 다루어지기를 바랐다. 외면하지 말아 주었으면 했다.

미간에 주름을 잡고 한숨을 내쉬는 윤오를 기다렸다. 가만 누워 처분을 기다리지는 못하고 시트 위에 무릎을 꿇었다.

어깨를 벗어난 셔츠를 다시 끌어 올려 상처로 얼룩진 몸을 한 줌이라도 더 가렸다. 고개를 조아리고 시선을 피하면서 무릎걸음을 걸어 그의 가까이 몸을 이끌었다.

욕정을 구걸하는 일은 그를 만나고서 내내 반복한 것이라, 몸에 익은 동작이 익숙하게 뺨을 가져다 그에게 붙였다. 노골적이지만 조심스럽게. 그의 셔츠에 뺨을 붙이고 이마를 문질렀다. 종일 겁먹은 나를 숨긴 그 품을 다시 내어 달라고.

윤오는 어찌나 너그러운지, 손을 뻗으면 쳐 낼지라도 그게 얼굴이 되면 차마 쳐 내지 못했다. 쓰러지기 직전의 내게 억지로 가이딩 해야 했던 지난 2년 동안도 머리칼을 당겨 멈추게 하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말은 없지만 천성이 모질지 못한 사람.

그 다정이 나를 향하자 내 욕심은 지체 없이 자라났다. 내보여 준 그 품이 가장 욕심나는 것이 되었다. 하루하루 오늘 같은 날이 밀려 사라지는 것을 아쉽게 만들었고, 안겨 있는 그 순간에는 이 세상이 멎기를 기도하게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윤오에게.

아까처럼 나를 만지길, 낮처럼 나를 안아 주길, 요즘처럼 내게 다정하길.

그의 셔츠에 뺨을 붙이고 그 너머의 뜨겁고 단단한 몸을 상상했다. 그 자리에 이마를 문지르며 내어 달라 보채고 뺨을 긁는 단추마다 입을 맞췄다. 상처가 남아 뜨끔거리는 입술을 꾹 눌러 붙이고 절실하게 그를 구했다.

턱 아래로 손가락 하나가 걸렸다. 곧장 들어 올리는 손길을 따라 그와 눈을 마주쳤다. 윤오의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내 깊은 속을 파고들 것처럼 보았다.

아직도 벌겋게 부어 있을 눈가와 이로 긁어 상처가 남은 아랫입술이 그의 시선을 받았다. 말로 전하지 못할 마음을 가진 나는 그 시선이 무거워 설피 눈을 내리떴다. 간질거리는 입술의 상처를 입 안으로 당겨 물었다. 이에 긁혀 따끔한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 맛이 났다.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다시 내놓은 상처가 온기 어린 손가락에 눌렸다. 아린 상처를 힘껏 누른 손끝이 입술 틈을 파고들어 앞니와 툭 부딪혔다. 찌릿한 통증보다 속이 더욱 뜨끔거렸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동안 내 입가를 당겼다가 놓았다가 했다.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처럼.

윤오에게 생각할 틈을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가 생각하는 게 싫었다. 그의 이성이 일하면 일하는 만큼 내가 저지른 잘못들을 떠올려 낼 것 같았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가 멀어질 것 같았다. 다시 예전처럼 무심해지고, 나를 궁금해한 지금을, 내게 다정하게 굴었던 요즘을 후회할 것 같았다.

조바심이 입술에 틈을 만들고 그 사이로 혀가 살짝 나왔다. 입가를 당기는 그의 엄지를 얕게 물고 쪽 빨아올렸다. 그것만으로 침이 고였다.

그를 삼키고 먹어 버리고픈 허기가 어두운 마음속에서 언제나 들끓었다. 온통 삼킬 수 없으니 그의 부분이나마 허락하기를 바랐다. 내가 그를 머금을 수 있게 해 주기를.

나는 그 내밀한 접촉을 좋아했다. 내 신체를 살게 하는 가이딩이라 좋았고, 내가 그를 흥분시킬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몸과 마음이 오롯이 기쁜 일이었다. 그는 단지 허락하는 것으로 나를 기쁘게 하고 더욱 살게 했으니 좋지 않을 수가 없다.

잠시 멈췄던 그의 엄지가 내 아랫입술을 세게 짓눌렀다. 길게 난 상처에서 아릿한 통증이 번졌다. 달콤한 아픔과 비린 피 맛. 더욱 나를 아프게 하길, 마음껏 상처 입히길.

입술에서 힘을 풀어내며, 머릿속은 낮의 매칭 검사를 떠올렸다. 윤오를 잃을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는데, 두려웠는데. 그 순간의 불안은 가시질 않고 재차 속눈썹을 적셨다.

그러지 않았으니까, 나를 보듬어 주었으니까. 다음으로 나를 안아 기대게 한 그 품과 그를 내 가이드로 소개한 일을 한가득 떠올렸다. 여전한 불안 중에도 마음이 좋았다.

올라간 입꼬리는 얼마 가지 않아 꾹 눌려 제자리를 찾았다.

“젤은.”

“욕실에, 있습니다.”

짧게 뱉어진 말이 암시하는 허락을 깨닫고 마음이 덜컹 떨었다. 가늘게 뜨인 눈이 곧장 윤오를 비췄다. 추어 든 턱에서 손이 떨어져 나갔다.

걸음을 옮기려 물러나는 그를 붙잡은 것은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대뜸 옷자락을 당긴 대범함과 달리, 이어 나온 가느다란 목소리는 뿌리 깊은 불안의 색이었다.

“가지 마세요…….”

“…….”

“젤 말고, 제가 입, 으로 해 드리면, 들어갈, 가니까…….”

이성적으로는 침실에 딸린 욕실까지 다녀오는 그 짧은 시간을 떠올렸다. 그러나 불안을 일삼는 마음이 윤오에게 그 잠시간도 주어서는 안 된다고, 그가 잠시 떠나는 것도 못 견디겠다고 유난을 떨었다.

차라리 뒤가 찢어져 피를 흘리더라도, 그 아픔을 견디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윤오가 내 곁을 떠나지만 않으면 다 참을 수 있었다.

아니다. 윤오는 상처를 싫어하니까, 피에 흥이 식거나 끔찍하다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가 얼른 다녀오는 편이, 그가 그 시간을 기다려 줄까, 여전히 하겠다고 할까…….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고 그를 놓지도 못해 들썩이는 어깨가 당겨졌다. 침대 밖을 디디자마자 바닥에 무릎 꿇으려는 나를 일으키더니 그대로 앞서 걸었다.

허락 같았던 그 말이 그사이 변했는지, 기분이 바뀌었는지, 눈치 보기를 멈추지 못하는 나는 팔뚝이 잡힌 채로 옷장 앞을 지나고 욕실 앞까지 이끌려 갔다.

처음 오는 게 분명한 장소에서도 윤오는 헤매지 않았다. 휑한 욕실을 둘러보더니 바로 거울장을 열었고, 그 안에 든 보급용 윤활 젤 여러 개 중 하나를 망설임 없이 꺼냈다.

그를 보내기도, 내가 자리를 뜨기도 힘들었던 그 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했지만, 시간은 많이 주어지지 않았다. 윤활 젤이 내 손에 들어왔다.

“혼자 준비할 때처럼 해 봐요.”

낮은 목소리가 욕실 안을 울렸다. 이해하지 못하고 그대로 선 나를 세면대에 기댄 윤오가 가만 보았다. 그는 다시 싫습니까, 하고 물었고,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망설임이 묻어났지만 다급한 손길에 속옷이 바닥에 떨어졌다. 흥분해서 끝을 적신 성기도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까닥였다. 단추가 뜯어진 셔츠 사이를 한차례, 시선이 훑어 내렸다.

“싫으면 말하고.”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대신 윤활 젤을 오른손에 짜냈다. 자세를 어떡하면 좋을지 몰라 타일 벽에 어깨를 기대었고, 엉덩이를 반이나 가리는 셔츠는 끝자락을 말아 쥐었다.

미끌거리는 손가락이 곧 다물린 입구로 다가가 가운데를 꾹 눌렀다. 흐읏, 신음이 새어 나갔다. 단지 그의 시선으로 흥분한 몸답게, 윤오가 있는 것만으로 이미 혼자 할 때와는 달랐다. 혼자 입구를 늘릴 때와는 다른 아찔한 감각이 주변을 덧그리는 감각을 생생하게 했다.

초조하고 부끄러웠다. 뒤를 만지며 준비하는 과정을 보이는 것이 부끄럽고, 그 역시 흥분해서 바지춤을 부풀린 것이 보여 초조했다.

섣불리 손가락을 세 개로 늘려 집어넣으려다가 덜 풀린 입구에 막혀 민감한 주름을 세게 긁었다. 다시 어깨가 잘게 튀었다. 소리 내지 않기 위해 말아 쥔 옷자락을 입에 물었다.

타일에 뺨을 붙이고 엉덩이를 더 뒤로 물렸다. 허벅지 사이로 젤이 길을 만들고 흘러내릴 때에, 고작 손가락 두 개를 얕게 문 구멍이 바짝 조였다. 허리가 떨리고 발뒤꿈치가 살짝 들렸다 다시 놓였다.

“매번 그렇게 혼자 하면서 흥분합니까?”

“……아닙, 니다. 윤오 씨가……, 윤오 씨가 있어서…….”

“내가 있어서.”

“네…….”

말을 하느라 툭 흘러내린 셔츠 자락이 엉덩이를 가렸다. 손바닥에 끝이 감겨 조금 거슬렸지만 손가락을 더 밀어 넣어 입구를 넓히는 데 집중했다. 좁은 곳이 쉽게 벌어지지 않아 조바심이 났다. 억지로 하나를 더 비집어 넣고 거칠게 흔들었다.

엉망으로 헤집다 절로 움찔거릴 만큼 아플 때는 곁눈으로 윤오의 긴 다리와 솟아 오른 바지춤을 보았다. 그러면 다시 기대로 허벅지가 모이고 흥분이 올랐다. 혀가 녹녹히 젖었다.

벽을 짚은 왼손에서 윤활 젤이 빠져나갔다. 안을 파고든 손가락도 빠져나가고, 팔을 붙잡혀 어설픈 걸음을 따라 걷다 보니 다시 익숙한 침대였다.

윤오는 느리게 매트리스 위로 올라왔다. 마른 두 다리를 무릎으로 벌리고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고 곧 입구에 뭉툭한 끝이 닿았다.

“흑…….”

상체를 누르는 힘에 맥없이 쓰러진 몸을 윤오의 그림자가 덮었다. 제대로 풀지 못해 턱없이 좁은 입구를 느리게 벌리고 파고들며 윤오의 입 모양이 다시 욕설을 그렸다. 뜨끔, 속이 저렸다.

더욱 힘을 빼기 위해 노력하며 시트에 등을 문질렀다. 셔츠 앞섶이 헤쳐지고 그의 아래에 흉 진 가슴팍이 훤히 드러났다. 차마 가릴 생각도 하지 못하게 그의 성기가 안쪽을 가르고 들어왔다. 잡히는 대로 끌어 쥐는 손아귀에 시트와 예복 코트가 감겼다.

아득한 통증과 버거운 쾌감으로 고개를 비틀었다. 머리맡을 짚은 그의 팔에 이마와 눈을 비비고 턱을 치켜 올려 입술을 문질렀다.

신음을 한숨으로 바꿔 몇 번이나 쉬었다. 그의 성기가 깊이를 더하고 입구가 점점 더 늘어났다. 함부로 벌어진 곳이 빠듯했다. 얼얼하고 달가웠다. 그로 인한 아픔이 무척 달았다.

흣, 느리게 들이친 성기가 마침내 가장 깊은 곳까지 다다랐을 때, 아래가 온전히 맞붙었을 때, 쾌감 어린 신음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둥글게 말린 허리가 달달 떨리고 코트를 쥔 손이 허우적거리다 예모를 쳐 침대 밑으로 떨어트렸다.

툭, 소리에 놀라 움츠러들다가 속을 가득 채운 성기에 쾌감점을 짓눌려 질끈 눈을 감았다. 굉장한 만족감이 깊은 곳까지, 어쩌면 마음까지 적셨다.

그가 나를 보고 아래를 단단하게 세운 것과 더는 깊어질 수 없는 끝까지 빠듯하게 가까워진 것이 기뻤다. 몸이 저리고 마음이 뿌듯했다. 온통 흐물어지다가 웃어 버릴 것 같았다. 멋대로 행복해할 것 같았다.

한참을 그대로 멈춰 허덕이는 내 꼴을 내려다보던 윤오가 상체를 온전히 세웠다. 가까이 있기만 해도 온기를 주는 몸이 멀어지자 땀이 배어난 살갗이 바르르 추위에 떨었다.

끌어안고 싶었던 몸이 외려 멀어진 것을 아쉬워하는 사이, 회음부를 타고 차가운 액체가 쏟아졌다. 깊은 곳을 꿰뚫은 성기가 잘게 쳐올리며 벌어진 입구에 미끈한 윤활 젤을 덧발랐다.

그때마다 허벅지가 떨고 움찔움찔 내벽이 좁아졌다. 제 속을 파고든 커다란 성기를 감쳐물고 미끄러워진 입구를 더욱 조였다.

후우, 낮은 한숨에 등줄기가 쭈뼛 솟았다. 그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끄럽게 젖은 입구와 내벽이 그의 느릿한 움직임에 눌리면 저린 자극이 머리끝까지 저몄다. 여유 없이 허덕이고, 남김없이 느꼈다. 뇌를 적시는 감각이 온통 밀려들었다가 또 쓸려 나갔다.

뻐근한 종아리로 나도 모르게 그의 옆구리를 비볐다. 허공에 흔들리다 시트 위에 툭 떨어진 발끝이 그대로 흰 천을 가로질러 밀었다.

저린 쾌감과 신음을 삼켰다. 그럼에도 다 삼켜지지 않은 토막이 입술 밖으로 비집어 새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휘어지는 허리를 다잡았다.

곧이어 윤오가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렸다. 그의 매끈한 가슴팍과 단단한 복부가 드러날 때 흥분이 아랫배에 그득 고였다.

금방이라도 가 버릴 것처럼 감각이 뾰족해서, 그가 들이칠 때마다 아랫배에 부딪히는 내 민망한 성기를 꾹 쥐어 감추었다. 그는 이제 시작인데 저만 좋아서는 안 됐다.

쾌감이 헤픈 나를 벌하고 흥분을 참기 위한 노력은 곧 손을 떼어 낸 그에 의해 허무하게 저지 되었다.

“뭐 하는 겁니까.”

낮은 목소리가 타박하듯 말하고, 내가 쥐어 만들어 놓은 초승달 모양의 손톱자국 여러 개 위를 그의 손끝이 살살 지났다.

함부로 사정하지 못하도록 입힌 통증이 무색하게,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다시 절절 허리 아래가 비틀렸다. 따끔함 뒤에 짜릿한 쾌감이 일어 허리와 허벅지가 온통 흔들거렸다.

힘이 들어간 내벽을 그대로 밀어붙이고 그가 대답을 기다렸다. 쿡쿡 안쪽이 쑤셔질 때마다 아래에선 젖은 소리가 나고 입가에선 습한 숨이 터트려졌다. 소리 없이 채근하는 눈빛에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핥고 겨우 신음이 아닌 말을 만들었다.

“보기 싫, 싫으실까 봐…….”

윤오의 미간이 와락 구겨지고, 내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헤프니까……, 헤퍼서, 싫을 거라고. 변명처럼 덧붙일수록 그의 표정이 나빠졌다.

손톱자국이 박힌 성기는 여전히 멋모르고 열이 올라 있었다. 그에 의해 흔들릴수록 더욱 들떠 했다. 너무 좋아하면, 안 돼. 그가 좋아야 한다. 나는 좋아선 안 돼. 터질 것 같은 성감을 꿀꺽 삼켰다.

그런 다짐이 허망하게 윤오가 내 것을 감아쥐었다. 바르르 피모가 남김없이 떨고 전류가 흐르듯 따가웠다. 성기 끄트머리를 꾹 누르고 갈라진 틈을 헤집는 손길과 여전히 뒤를 파고들어 깊은 곳을 짓찧는 성기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너무했다. 버틸 수가 없었다. 아랫배를 꺼트리며 참아 내던 것이 무색하게 절정이 성큼 다가왔다.

차마 힘을 주지 못한 손이 절박하게 윤오의 팔목을 붙들었다. 앞이라도 멈추게 해 달라고 매달린 것이지만 그 팔에는 손톱을 세울 수 없었고 그는 애원을 무시했다. 집요하게 귀두를 만지고 끝을 긁는 더운 손을 더는 버티지 못했다.

허리가 몇 번이나 잘게 튀어 올랐다. 하윽, 흣, 끊어지는 숨을 들썩였다. 눈앞이 허옇게 번쩍이고 내벽이 그의 것을 당겨 물었다. 희게 정액이 터져 나왔을 때는 전신이 바르르 떨고 속을 규칙도 없이 조여 댔다.

단단한 그의 성기가 절정에 떠는 몸을 봐주지 않고 끝도 없이 좁은 입구를 비집고 여린 속살에 짓쳐 들었다. 멈추지 않는 쾌감이 이어지고 턱이 솟아올랐다. 무릎을 모아 쾌감을 덜어 보려다가 허벅지 안쪽에 자리한 윤오의 몸에 어쩌지 못하고 다시 발끝을 구겼다.

픽픽 당겼다 내던지는 쾌감에 짧게 여러 번 몸이 튀었다. 입술을 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허리 아래는 남의 것만 같았고 가슴팍을 거꾸로 거스르는 정액이 뜨거웠다.

한숨처럼 혀를 차는 소리에 간신히 눈을 떴다. 윤오가 성큼 상체를 내려 다시 나를 덮었다. 가까이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입술이 말라 혀끝을 내어 다시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대로.”

그의 더운 손길이 뺨을 감싸 쥐었다. 덜컹이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벙벙하게 울렸다. 혀끝을 질금 빼어 문 채, 지시대로 굳어 버린 내게 윤오의 검정이 한층 가깝게 다가왔다. 코끝이 비껴 나고 그의 뺨이 내 뺨을 스쳤다.

“넘겨짚는 건 그만해.”

목구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목소리에 움찔 어깨가 튀었다. 내용이 무엇이든 가까이서 뱉어진 그의 숨이 등줄기를 저리게 했다. 미처 이해하기에 앞서 생각이 멎었다. 다시 드러난 그의 얼굴이 무척 가까운 탓이다.

숨이 섞일 거리였다. 거울처럼 나를 비추는 검은 눈동자에 정신을 빼놓을 무렵, 그의 혀가 길게 내 입술을 핥았다. 잇새에 물려 있던 혀끝이 핥아지는 순간 야릇한 감각에 눈이 질끈 감겼다. 속이 이전과는 다른 쾌감으로 쿵쿵 떨고 귓가에서 맥박이 쳤다.

혀끝을 얼른 입 안으로 감췄다. 입천장에 문질러 간지러움을 덜어 보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입술을 말아 물었지만 이미 겪은 아찔한 감각이 등줄기를 꿰뚫었다. 그 감촉을 되새기느라 그 의도를 파악할 정신이 없었고, 혼곤한 시야가 엉망으로 흔들렸다.

속부터 차오르는 열기에 배부터 근육에 모조리 힘이 들어가 바들거렸다. 속을 조이다 단단한 것에 느낄 수밖에 없는 지점이 짓눌리면 허리가 파득파득 비틀렸고, 그 떨리는 내벽을 가늠하듯 천천히 움직임을 더하는 윤오 때문에 조금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잔뜩 좁아져 그를 밀어 내려는 안을 꾹 눌러 벌리고 윤오가 다시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더운 숨을 내쉰 그가 내 무릎을 어깨춤까지 닿게 할 때도 발발 떨기만 했다. 눈 감은 어둠에도 스파크가 희게 일었다.

그의 손이 입술을 숨긴 입가를 한차례 쓸고, 뺨부터 목을 지나 흰 정액이 쏟아진 가슴팍까지 내려갔다. 뜨거운 열기가 지나는 자리마다 훅 꺼진 듯, 아니면 녹아 버린 듯 감각이 아득했다. 숨 고를 틈 없이 매초를 떨었다.

더운 손은 가슴에 이르러 유독 민감하게 구는 유두를 스쳤다. 대번에 어깨가 안으로 굽었지만 바르작거린 정도로는 손길을 벗어나지 못했다. 피하지 못하고 다시 잡힌 돌기가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꾹 눌렸다.

온몸이 자르르 떨며 비틀어졌다. 하읏, 윽, 참지 못한 신음이 흐느낌처럼 공기 중에 터져 나가고 윤오는 장난치듯 정액을 묻힌 엄지 끝으로 그 조그만 돌기를 쓰다듬었다. 그 작은 장난에 울 것처럼 신음을 흘리고 온몸을 가만두지 못하는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허공을 헤집다 떨어진 손이 다시 시트를 거머쥐었다. 생경한 자극에 허리를 비트는 만큼 손끝이 희게 질렸다.

윤오는 내 반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굴었고, 그 진득한 시선 아래서 나는 솔직하게 떠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을 몰랐다.

그가 움직이는 대로 부드러운 속살이 쓸리고, 그가 만지는 대로 가슴이 생경한 감각을 느꼈다. 관절이 죄 풀린 것처럼 흔들리다 파들 떨었다. 좁은 입구는 알맞게 벌어져 쾌감과 윤오의 뜨거운 성기를 받아들였다.

내벽의 한 지점이 부풀어 올라 어떻게 짓눌려도 저린 쾌감을 척추에 지폈다. 느리게 파고든 성기가 그 부분을 길게 누르면 발끝이 허공에서 움츠러들고 그의 어깨에 종아리를 문지르게 되었다.

새된 소리를 참는 뱃가죽이 가쁘게 떨리고, 배꼽 아래는 다 꺼지지 못하고 동그랗게 부풀었다. 윤오가 들어온 자리.

가슴팍에 묶어 둔 숨과 목구멍에 달아 둔 신음까지 모조리 빼앗기며 나는 만져지는 기쁨에 떨었다. 그가 나를 보고, 나를 만지고, 그 품이 한 뼘 만큼이나 가깝고, 내게 더는 가까울 수 없이 깊게 파고든 순간이었다.

“이건 가이딩 아닙니다.”

하윽, 귓가에 떨어져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다시 허리 아래가 비틀렸다. 그의 것을 깊이 문 채로 엉덩이가 잘게 떨었다. 온몸이 오그라들고 손끝 발끝까지 열기가 돌았다.

하윽, 흣, 흑, 울음 같은 소리를 내며, 차오른 쾌감을 덜기 위해 허벅지를 모아 붙였다. 그 틈을 비집고 윤오의 손이 들어와 다시 힘이 들어간 내 것을 쥐었다.

큰 손이 마른 두 다리 사이에서 흥분에 겨운 성기를 쓸고 젖은 끄트머리를 문질렀다. 쓸어 올리는 동작에 맞춰 뒤를 쳐올리고 끝을 문지를 때 그의 것으로 안쪽을 휘저었다.

가혹한 동작에 속절없이 다시 정액이 튀었다. 손으로 다 가리지 못하고 손가락 사이로 튀어 나가 흔들리는 가슴팍과 그의 배를 적셨다.

이게 가이딩이 아니면, 아니라면.

쾌감으로 저린 머리가 아득하게 그의 말을 되새겼다.

* * *

“윤오 작가님은 전화를 그렇게 싫어하셔서요. 벨 소리 같은 데 집중이 깨지면 성질이 나시나 봐요. 그래서 연락은 항상 메시지로 하고 이 인다비가 제집처럼 드나들고 있지요오.”

윤오를 방문한 어제, 빌라 정원에서 기다리던 인다비가 나를 불렀다.

“예민하신 것 같은데 또 희한하게 옆에서 직접 알짱거리면 봐주신다니까요? 하여간에 작가님들 마음은 알다가도 몰라요. 그래도 글은 잘 알죠. 전문인 인다비! 아니겠습니까?”

“…….”

“이번에도 거의 다 써 놓고 안 주시는 건 알았지만, 주신 걸 보니까 어디가 그렇게 참고가 필요했나 싶게 설정이 아주, 좋더라구요. 이 정도면 픽션 수준으루 군 검열도 넘길 수 있을 것 같구요오. 크 역시 우리 작가님이죠!”

마치 제 자랑이라도 하듯 윤오를 칭찬하는 인다비가 보통 때처럼 정신없다. 끊고 싶은 말은 아니라 잠자코 듣고 있었더니, 아차, 하고 혼자 놀란 인다비가 서둘러 고개부터 숙였다.

“아, 그 저기…… 께서 도움 주신 게 필요하지 않았다는 말은 절! 대! 아닙니다. 무척 도움이 됐어요! 아무렴 윤오 작가님이 요청하신 걸요.”

“…….”

“사실은 저야 잘 모르죠. 헤헤. 두 분이 나눈 대화, 인다비 이제는 똑같은 실수 안 합니다! 궁금해도 꾹 참겠습니다. 두 분 관계도 나불거리지 않겠어요! 이 인다비 한다면 해요! 진짜요! 믿으셔도 됩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아유, 알겠어요.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아무렴요. 그나저나 작가님이 방랑을 뚝, 끊으신 게 그 저기…… 분 때문이었군요. 제가 이런 말씀 드리기는 이상하지만 정말!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찾아갈 수 있는 곳에 작가님이 계셔서 이렇게 신간도 나오고. 크흡. 출판부 전체를 대표해서 감사드려요! 개인적으로도요!”

끝없이 이어지는 인다비의 수다는 중간중간 수정해 주어야 할 부분이 많았지만, 나는 잠자코 듣는 편을 택했다. 테이블 한중간에 놓인 두꺼운 용지 묶음 때문이었다. 인다비가 내어 준 윤오의 초고.

“작가님의 방랑, 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휴, 그것도 말하자면 길죠. 전화도 잘 안 받는 분이 연락이 닿았다 하면 국가가 달라요. 펠리우였다가, 아우도바였다가, 서국이었다가, 갑자기 물 건너 가셔 가지구 카바섬에 계시질 않나…….”

인다비가 과장스레 손을 모으고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이 글은 어떻게 되시냐, 물어보면 쓰고 있다고는 하시는데, 말릴 수도 없고 팬들 입장에서는 초조하죠. 아, 편집부가 다 윤오 작가님 팬이거든요오.”

서국, 카바섬.

윤오가 내게 의심을 심어 주었던 그날이 떠올랐다. 문득 내려다본 내 팔은 그때와 똑같이 핏기 없는 멀건 색이었다. 카바섬 출신들과는 동떨어진 색.

“아무리 세상이 잠잠하다고 해도, 서국은 아니죠. 서국은 위험하지 않습니까? 펠리우도 그래요. 10년 전에 아예 수도가 바뀌어 버렸는데요. 그런데 자꾸 돌아다니시니까 저희가 아주, 불안해 가지구……. 다행히도 2년 전에 뚝 끊어져서 얼마나 좋았는데요! 덕분에요!”

인다비의 오해가 깊었다.

빌라 정원에서 마주친 인다비는 ‘저번엔 인터뷰 마치고 뵈려 했었는데 늦게까지 안 나오셔서 알게 됐다, 눈치 없게 굴어서 죄송하다.’로 시작하는 말을 다다다 쏘아 냈다.

시간되시면 꼭 좀 따로 만나 달라는 부탁에 오해를 풀 겸 나오게 됐지만, 그의 오해는 내 거듭된 부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만큼 견고했다.

“그, 저기……. 맞으시죠? 2년 정도……? 이 인다비, 그런 쪽에 대해서 편견 없습니다! 무척 잘 어울리세요!”

“…….”

“말씀드렸다시피 이 주둥이 철통같은 보안으로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걱정 마시구 오래오래 예쁜 사랑 하시면 됩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에이, 거실에 소파만 봐도 딱! 알겠는 걸요. 인다비가 두 분 사랑! 잘 지켜 내겠습니다. 우리 작가님 잘 부탁드려요오.”

인다비는 커다란 혼잣말을 한참이나 하더니 테이블에 닿을 만큼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이마가 윤오의 초고와 나란히 놓였다.

황당한 인물.

불쾌할 윤오를 생각해 몇 번이나 아니라고 말했지만, 단단히 착각을 하고 그것이 오해인 줄도 모르는 사람을 상대로는 해명할 길이 요원했다. 얼른 저 원고를 받아 자리를 벗어나고만 싶었다.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꽤 애틋하니까요. 그 저기…… 분 때문이 아닐까? 인다비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부산스러운 인다비지만 제본한 초고를 만지는 손놀림만은 정중했다. 종이가 아주 익숙한 사람처럼 어딘가 노련하기도 했다.

“제가 말이 너무 많았죠? 어유, 이놈의 입방정은. 그러니까 윤오 작가님이 진작 말 안 해 주셨겠지요? 이제는 침묵은 금이다, 하고 증명해 드려야겠어요. 이 인다비도 지킨다면 지킨다! 이 주둥이도 무거울 수가 있다!”

아무려면 어떨까, 사실도 아닌데.

그렇다고 재차 다짐하며 침묵의 결의를 다지는 인다비를 훼방 놓기도 그랬다. 더 붙일 말도 없고. 혹시 내 존재로 윤오의 명성에 흠집이 나지는 않겠지? 그건 못 견딜 것 같았다. 더욱이 윤오가 그 상황을 불쾌해하기라도 하면……. 가슴 어귀가 뜨끔했다.

“아무튼, 오늘 시간 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자주 뵙고 싶은데 에헤헤……. 안 되면 뭐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오며 가며 뵙게 되면 인사드리고 슬쩍 빠져 볼게요! 인다비가 눈치는 또 좋지 않습니까!”

……글쎄.

우연찮게도 인다비가 기다렸다는 인터뷰 날은 내가 윤오의 집에서 자고 간 그날이었다. 그는 자정 넘어서까지 기다리다가 눈치를 챘다며 얼굴을 붉히고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짐작한 상황은 맞지만 관계는 다른데.

애써 해명할까 하다 말았다. 그보다는 말을 덧붙일수록 상황이 나빠진다는 걸 알았다. 대개 소문이란 먹이를 주는 대로 질겨지니까.

몇 번이나 꾸벅이며 인사를 하는 인다비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여 답하고 보냈다.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내 유일한 관심사가 그제야 손에 들어왔다.

꽤 두꺼운 종이뭉치. 윤오의 원고. 당장이라도 펼쳐 보고 싶었지만 다 읽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므로 관사에 갈 때까지 아껴야 했다.

셔틀을 타고 본부로 귀환하는 중에도 내내 내 신경은 손에 들린 원고에 몰려 있었다. 그 탓에 인사하고 안부를 묻는 녀석들은 죄 무시했다.

궁금했던 윤오의 책과 윤오를 보러 갈 수 있는 날이 다시 이전처럼 줄어들까 하는 걱정만으로 속이 번잡했다.

아직은 날짜를 줄이지 않았으니까, 책을 다 썼다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이제 됐다고 할 때까지, 더는 필요 없다고 할 때까지, 계속 모르는 척해야지. 비겁한 속내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관사에 도착해서는 더운물을 받아 서둘러 씻고 책상에 앉았다. 총 세 권이라고 들은 대로, A4용지에 2분할된 다발은 그 두께가 만만치 않았다. 첫 장을 펼쳐 목차부터 신중하게 읽고, 내용으로 넘어갔다. 첫 문장부터 가슴이 꾹 저몄다.

[그 불쌍한 에스퍼는 그의 효용만큼이나 자주 서러웠다.]

목구멍이 답답해지는 문장에서 가까스로 눈길을 돌렸다.

책은 그의 다른 책들처럼 매끄럽게 읽혔다. 책장이 쉬지 않고 넘어갔다. 한 번씩은 가슴이 먹먹해서 멈추기도 했지만 과하게 몰입하지 않기 위해 감정을 다스리고 다음 페이지를 펼쳤다.

에스퍼의 이능이나 군부에 대해서는 걱정했던 것만큼 크게 다뤄지지 않았고, 사건과 감정선의 변화가 세밀한 묘사로 이어졌다. 섬세하지만 군더더기 없이 정갈한 문체. 윤오를 닮은.

주인공 에스퍼가 염동력을 사용할 때는 준준을 질투했고, 순환기 장애로 어지럼증을 겪을 때는 뜻 모를 한숨이 났다. 찾아낸 가이드에게 동정과 연민을 받는 것이 부러웠고, 그녀를 외부의 적에게 빼앗겼을 때는 절로 속상한 눈물이 흘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읽고 자야지. 그 생각을 반복하다 보니 마지막 페이지가 덮였다. 날이 밝아 창으로 아침 해가 들고 어느덧 기상 시간이었다. 원고에 눈물을 떨어트리지 않으려 가져다 쓴 손수건이 어느새 흥건했다.

연작이라고 했던가. 아직 다 못 풀린 이야기는 다음 시리즈에 이어지는 걸까. 그렇다면 윤오도 아직 내게 물어볼 게 남았을까.

하지만 이 책에서 보기에, 그가 내게서 가져간 정보는 극히 일부밖에 쓰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 쓸모는 아직 남은 걸까, 아니면 원래 없었던 걸까.

윤오는 앞으로도 나를 만나 줄까, 아니면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을까. 그 다정을 다시 거두어 갈까, 내가 죽을 것처럼 굴면 계속 지금처럼 대해 줄까.

상상 속에서 나는 수없이 죽어 윤오의 발치에 늘어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다정을 맛본 후로 다시 상실할 것을 가정하는 일은, 흐느낌 없이도 후드득 떨어져 무릎 위를 적시는 빗방울이었다. 우의도 우산도 소용이 없는 그 비에서 이미 축축한 손수건에 눈을 묻었다.

윤오가 가겠다면 보내 줘야 하는데, 이것이 마지막이라도, 이 다정이 끝났다 해도 받아들여야 하는데…….

언제고 마음은 준비된 적이 없다.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무엇이 슬픈지도 모르게 슬펐고, 때 이른 절망을 거두어들이지 못한 마음이 어둑했다. 혼자 남은 집에서 윤오를 새삼 그리워하며, 무척이나 외로웠다.

소리 한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눈알을 쏟을 것처럼 눈물이 났다.

사랑해, 사랑해.

‘나를 사랑합니까?’

‘당신이 말하는 사랑이 뭡니까? 섹스?’

‘집착으로밖에 안 보여.’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마십시오.’

‘넘겨짚는 건 그만해.’

‘이건 가이딩 아닙니다.’

2년 전의 기억과 지난주의 기억이 머리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번갈아 낙담과 설렘과 다시 낭떠러지로 나를 몰아갔다.

지금의 다정이 영원히 내 것이기를 바람과 동시에 다시 그를 처음 만난 순간으로 돌아가 내 잘못과 내 환경이 그에게 저지른 잘못들을 모조리 고치고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상상은 다시 처음 사랑을 고백한 날로 돌아갔다.

미행, 추행, 폭행……. 저지른 잘못을 울며 사죄할 적에, 나는 사랑을 말했고, 윤오는 싸늘하게 일축했다.

그건 집착이라고.

윤오가 맞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이것도, 지금도……. 사랑이 아닌 걸까?

사랑 말고는 붙일 수 있는 이름이 없는 이 마음은, 정말로 집착에 지나지 않는 걸까? 누군가에게 배워야 한다면, 나는 윤오에게 배우고 싶었다. 그는 아는 게 많으니까, 감정을 숱하게 다뤄 본 사람이니까, 내 비루한 감정이 나날이 커지는 것을 보았을 테니까.

‘이선 씨는 내 생각 모릅니다.’

‘짐작하지 마세요.’

그런 말들은 내 속에서 싹을 틔웠다. 기대로 자랐다. 누구도 탐내지 않을 과실이 열렸다. 무르익어 흙바닥에 떨어지고 짓물러 단 향을 내어 보았자 여느 새 한 마리 관심 두지 않을 못난 열매로.

집착…… 집착…….

되새겨 보아도 나는 사랑과 집착에 확실한 선을 그을 수가 없었다. 단지 이 사랑과 이 집착은 내 생애를 전부 쏟아도 끝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만 있었다.

당신을 두고 생각하기를 멈출 수 없는 나는, 보내기 싫지만 가겠다면 보내 줘야 한다는 다짐만을 내내 반복했다.

자라나는 욕심을 매번 가지치기해야 했다. 끝도 없이 웃자라 몇 번이나 잘려야 했다. 잘린 것이 내 사지라도 되는 양, 그 결심을 할 때마다 손발이 꽁꽁 얼어붙었다. 그의 뜻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 놓고 윤오가 너무 보고 싶었다.

너무 추워서 윤오가 보고 싶었다.

형편없이 전개되는 내 생각을 지적하고 멎게 해 줬으면 했다. 그를 가까이 두고, 모른 척 얼굴을 가져다 대고, 그의 자비에 감사하며, 그렇게, 또 하루를 더 얻고 싶었다. 그렇게 조금 더 살아 있고 싶었다. 그가 있는 세상이, 몰랐던 때보다 더욱 욕심이 났다.

두꺼운 묶음의 원고 뒷면에 얼룩이 졌다. 막아도 흘러넘친 물방울이 종이 위에 점점이 우그러져 울고 있었다.

영웅적인 캐릭터, 자기희생을 당연시하는 주인공. 그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얻었던 연민과 동정, 끝으로는 서로를 원하게 되는 마음이 머리를 스쳤다.

나도, 저런 에스퍼가 되면, 윤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 * *

“미안하다.”

“뭐가.”

덜컹덜컹.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흔들리는 차 안에서 대뜸 사과가 나왔다.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쳐다보니 앞자리에 앉은 커다란 덩치가 어울리지 않는 말을 재차 뱉으면서 몸을 틀었다. 어지간히 어색한 모양이다.

“아니 씨, 망할. 주노가 너한테 제대로 사과 안 하면 학교에서 작업할 거라고 해서 사과하는 거기는 한데. 씨, 망할, 이능은 니가 쓰고 맞기는 내가 더 많이 맞았잖아?”

“그래서?”

“……미안하다고. 그래도 보직이 있고 체급이 있는데.”

“또?”

“내가 잘못했다.”

피식 웃음을 흘리자 준준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지금 저걸 사과라고 하는 건가. 모양새는 딱 협박인데.

“……주노가 둘이 또 놀러 오래.”

“널 어떻게 믿고?”

“아 씨팔,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다잖아!”

“또 화내는 거야?”

준준의 등껍질 같은 손이 퍽퍽 제 두꺼운 가슴팍을 내리쳤다. 어지간히 답답해하는 모습도, 성질을 죽이느라 벌겋게 열이 오른 목도 우스웠다. 애초에 저렇게까지 숙이고 들어와 사과하는 게 처음 아닐까.

전쟁터에서 만나 10년을 알았지만 사과가 처음이라, 분명 욕은 많이 들었는데.

“염병. 내가 잘못했으니까. 받아 줘라.”

“안 그럼. 주노가 집 나가겠대?”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윤오는 안 데려가. 너 파견 간 날에 한 번 들를게. 초상화 그리는 건 약속했으니까.”

“그래. ……고맙다.”

사과만큼 낯선 감사 인사에 다시 웃음이 터졌다. 떫은 인상의 준준을 앞에 두고 한참을 웃었다. 빤한 기척에 돌아보니, 옆에 앉은 다른 에스퍼들의 시선이 놈과 나를 향하고 있었다. 휘적 손을 저어 그 눈길을 흩어 내고, 느른하게 등을 기댔다.

두 시간째. 어떻게 앉고 기대도 이동 중인 카고 트럭이 편할 수야 없지만, 그나마도 가장 안쪽 좌석이라 나은 편이다.

“새끼. 웃기는.”

“안 웃겠어? 준준 준장이 고맙다는데.”

“지랄 말고. 너는 요즘 왜 중앙에 안 붙어 있고 싸돌아다니냐?”

“그냥. 에스퍼 모자라니까.”

말 같지도 않은 변명에 준준의 미간이 대번에 구겨졌다. 언제는 에스퍼가 넉넉했냐 맞는 말을 하기도 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주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내색을 했지만 멍청이 준준은 똑바로 알아듣질 못하고 기어이 접견 얘기를 꺼냈다.

아닌 척 듣고 있던 에스퍼들의 시선이 곧장 몰려들었다. 정작 내 접견에 이름을 올릴 만한 녀석은 없었지만. 아, 하나 있구나. 소위 한타.

“비리비리한 게. 그냥 중앙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불쌍한 놈들이나 볼 것이지 왜 전장을 나서?”

“최저 시간은 채우고 있어.”

“씨팔, 멍청한 새끼가 또 무덤 판다. 니 가이드 새끼는 아냐?”

“입 다물어.”

저 멍청한 놈에게 멍청이 취급을 받으면 괜히 더 기분이 나빴다. 저 성격에 아예 아닌 소리는 안 하는 놈이라, 대개는 수긍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짜증 섞은 눈초리로 준준을 노려보다 고개를 돌리니 ‘접견’이라는 단어에 솔깃해하던 에스퍼들이 족족 고개를 돌렸다. 가장 눈치 없는 녀석 하나는 그대로 멍하니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커다란 개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붉은 눈동자가 기쁨을 담았다.

“함부로 나대지 말고 짜져 있어.”

“그래.”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설 생각도 없었다. 준준의 말마따나 뒤에 짜져서 작전을 지켜보다가 부상병이 나오면 의무 지원 정도를 고려 중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짧고 가까운 작전들만 다니기도 하고.

덜컹덜컹. 쉴 새 없이 달리던 카고 트럭이 멈췄다. 이제 반절 정도 왔을까. 급하지 않은 작전이므로 틈틈이 쉬는 시간을 가질 모양이다.

사막 지역에 인접한 대지는 불그죽죽한 흙과 말라죽은 풀로 채워져 있었다. 잔뜩 배겨 얼얼한 몸을 얼른 내리고 쭉쭉 기지개를 켰다. 각자 가볍게 몸을 풀던 중 조수석에 타고 있던 일반 장교가 소집을 내렸다.

“브리핑하겠다. 30분 중식 및 휴식 후 이동 재개. 약 14시 작전지 도착 예정. 이능 장교들은 직후 잠입조, 봉쇄조를 나눠 통제지역에 진입한다. 목표는 변이 개체의 사살 및 파동 생성 지역의 파괴다. 알겠나?”

“…….”

조용했다. 브리핑은 들었지만 모인 8명의 에스퍼 중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당당히 상급자 행세를 하는 중령을 앞에 두고 준장 준준의 눈치를 보는 까닭이었다. 곧이어 준준의 비꼬는 말투가 격 없이 튀어나왔다.

“염병하네. 새끼야, 니가 들어가냐? 하여간에 좆도 작전 안 해 본 것들이 어떻게든 지휘는 하려고 한다.”

“준, 준장. 부대 지휘권이 내게 있으니 하극…….”

“하극, 뭐. 하극상? 씨팔. 쓸모없는 새끼는 내 눈앞에 띄지 마라. 뒤지게 해 줄라니까.”

“준준. 적당히 해.”

평생 담 쌓은 사과와 감사 탓에 한창 아니꼽던 준준이 요즘 신경 쓰는 고운 말도 잊고 대단히 협박스러운 말을 뱉었다. 험악한 어조하며 전신에서 풍기는 살기가 지나치게 진심 같다. 그 위협적인 덩치로 일반 장교에게 성큼 다가서려는 걸 가로막았다.

“그만해. 다 보는 앞에서 험한 꼴 만들지 말고.”

“차라리 니가 해라. 지휘.”

“뭐?”

준준은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친 중령을 한심하게 흘겨보더니 턱도 없는 소리를 다시 했다.

“전장 경험 길고, 작전 파악 잘하고, 니 말은 다들 잘 듣고. 딱이잖아.”

“무슨 헛소리를…….”

순간 고개를 끄덕이는 에스퍼가 있어 돌아보니 또 빨간 머리다. 나는 길게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단호한 목소리로 어이없는 농담을 끊어 냈다.

“웃기지 말고. 난 봉쇄조에 들어갈 거니까, 침투조는 준준 니가 알아서 해. 전투계 넷에 리바 중위 따라가고, 나머지는 바깥에서 대기. 침투조 선 후발 나눠서 지원 필요하면 후발대가 와서 요청해.”

“그래. 알겠다.”

“예, 알겠습니다!”

명령이라도 들은 것처럼 곧장 외치는 에스퍼들과 기분 나쁜 미소를 띤 준준을 보다 이마를 짚었다. 이 개새끼들이…….

작전이 예상보다 길어졌다. 당일 끝내고 복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급하게 야영지를 마련해야 했다. 또다시 키비슈스의 흔적을 찾은 탓이다.

키비슈스의 이능은 얼마나 더 강해진 걸까.

모순이 클수록 제어력이 크게 작용하는 내 이능이지만, 이제는 자신이 없었다. 흔적이 드러나는 족족 키비슈스의 강제 개화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강력하게 추산되었다.

점점 더 커지는 그의 영향력은 이제 통제구역의 파동 생성 지역과도 비등했다. 걸어 다니는 파동 생성지. 그 자체.

군은 키비슈스를 처치하는 일에 적극적인 듯 미적지근했다. 발표와 보도에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전쟁을 종식할 것처럼 굴었지만, 정작 태도를 뜯어보면 그가 폭주해서 사라져 버릴 날을 마냥 기다릴 속셈으로 보였다.

물론 이 상태라면 머지않은 미래겠지만……. 그래도 두고 보아선 안 될 일이다. 전원 일반인으로 구성된 사령부는 강력한 에스퍼의 폭주와 그 후폭풍에 대해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한시라도 서둘러 처치하지 않으면 그가 죽기 전에 소진시킬 다른 목숨이 얼마나 많을지.

도착한 막사 앞에서 잠시 인기척을 낸 다음, 입구를 한 팔로 헤치고 들어섰다.

“중령.”

“……이선 중령.”

같이 이름을 불러 주면 좋겠지만, 나는 그의 이름을 몰랐다. 그와 운전병까지 일반 장교 두 사람이 쓸 막사가 정석적으로 잘 세워져 있다.

조립식 탁자 위에 커다란 지도가 펼쳐져 있었고 작전을 고민한 듯 모형 몇 개와 스케일이 올랐다. 감가산맥과 맞닿은 사막. 이곳은 수수데 북부의 호수와 더불어 파동 생성 지역의 자연 발생률이 가장 빈번한 곳이다.

“작전을 검토하던 중이었나 보군.”

“……그래.”

심기 불편한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중령의 낯이 실룩거렸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을까. 준준이 위협해서? 이능 장교들이 그의 지휘에 응하지 않아서? 아니면 그에게 하대하는 내가 어려서? 그와 같은 중령이라?

하나같이 답이 될 수 있고 모두가 답일 수도 있는 문제다.

“시찰 보고를 받았어. 작전을 구상하지.”

“그걸 왜, 너한테!”

“중령. 입 조심해. 이능 장교가 지휘권이 없는 건 맞지만 당신 아랫사람은 아니야.”

“그래도 군인이면 지휘자를 따라야 맞지 않나!”

“운 나쁘게 처음으로 에스퍼 부대를 따라 나섰나 본데. 여기서 절반은 당신보다 경력이 길고 다른 절반도 현장 경험은 당신보다 많아. 충분히 대우해 주고 있으니까 우스운 꼴 더 당하기 싫으면 앉아.”

씩씩거리는 중령을 빤히 보자 차츰 흥분을 가라앉힌 그가 혀를 쯧, 찼다. 내가 혼자 온 게 맞는지 확인하려 뒤를 흘끔거리다 한참이 지나서야 맞은편 접이식 좌석에 앉았다. 구석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숨을 죽이던 운전병이 그제야 숨을 돌리는 것도 보였다.

돌아오자마자 짜증 난다며 막사를 펼치고 들어가 버린 준준 대신 정찰 보고를 전달하고 작전을 정리했다.

그리고 중령, 유서프는 생각보다 무능하지 않았다. 하나같이 당장 적용하기엔 무리인 작전들을 늘어놓았지만, 북부 사막 지역을 면밀히 조사해 온 점은 나쁘지 않았다.

에스퍼를 허투루 취급하기를 끝끝내 멈추지 못하는 일반 장교가 꽤 많은데, 그는 비교적 사고가 유연했다. 작전에 대한 피드백과 변이체의 종류, 특이점 등에 대해서는 꽤 신중히 듣고 기억하려는 태도를 보였고.

젊은 나이 때문일까. 중령이면 30대 중후반 정도일 텐데.

준준에게 무시당한 것이 못내 분한 듯 이따금 주먹을 쥔다거나, 내게 준준의 험담을 할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지만 상대해 주지 않자 곧 사그라들었다.

적당히 자존심을 채워 주고 유서프와 운전병의 막사를 나섰다. 제법 긴 시간을 논의했으나 핵심은 간단했다. 내일, 조식 후 지역을 구로 나눠 오늘 돌지 않은 나머지 반구를 수색하고 처리한다는 간단한 계획이었다.

생각보다 변이체가 많아서 지체되었을 뿐, 하루면 충분하다는 내 의견을 그도 받아들였다.

하루면 충분하다는 건 거짓은 아니지만, 사실 솔직한 말로는 가능한 한 일찍 돌아가고 싶은 내 욕심에 억지로 단축시켜 낸 것이다. 곧 윤오를 만나는 요일이기 때문에.

미리 진로를 봐 둘 작정으로 야영지를 벗어났다. 나처럼 가이드에 미친 멍청한 에스퍼가 저쪽 막사에 하나 들었고, 모든 작전에서 과잉 진압을 하는 미숙한 어린 에스퍼도 하나. 그 둘과 나를 적당히 활용하면 통제구역 정비에 드는 소요 시간을 줄이는 것도 낙관적이다.

내가 침투조에 가담할 테니 이르면 낮 중에 종료할 수도 있겠고, 그러면 저녁에는 돌아갈 수…….

불현듯 사막의 밤이 신경을 긁었다. 날카롭게 스쳐 지난 감각을 좌시하지 않고 파동을 돋워 주변을 빠르게 장악해 나갔다. 변이체? 아니, 그보단 에스퍼의 살기. 적.

달칵.

왼손 엄지가 허벅지의 중검 버클을 빠르게 풀었다.

곧장 빼어 들고 뒤를 돌았더니 달빛 아래 커다란 바위에서 살랑살랑 누군가 떨어졌다.

보름달이 유독 밝고 커다랗게 떠올라 너른 바위와 광활한 모래 대지를 비췄다. 그 아래 새하얀 가운이 저 혼자 빛을 내듯 밝고, 은색 머리칼이 공중에 너울거리며 한없이 가벼운 장면을 연출했다.

“선아.”

“……키비슈스.”

“오랜만이야.”

아직 여기 있을 줄은 몰랐는데.

키비슈스 엘로란타가 뛰어 내린 바위 위로 또 다른 에스퍼가 나타났다. 짐작하자면 키비슈스에게 부양 효과를 걸어 주는 에스퍼가 저자겠지.

역수로 감아쥔 중검을 보고도 키비슈스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조금의 위화감도 거리감도 없이.

“더 예뻐졌네.”

“헛소리 말고. 즉시 투항해.”

“내가?”

아직도 연구자 행세를 하는 건가. 그가 입은 하얀 가운이 그의 머리색과 어우러져 달빛 아래에서 형광 물질처럼 희고 푸른빛을 냈다. 긴장을 돋운 시선이 키비슈스와 그의 주변을 매섭게 훑었다.

두 명인가. 그 이상? 키비슈스의 마비 이능은 근접전이 아니면 충분히 대응 가능하다. 중요한 건 나머지 하나. 생물까지 포괄하는 염동력인지, 아니면 부양 능력이나 또 다른 종류의 것인지에 따라 제압 가능성을 따져 봐야 한다. 피모가 전투를 앞두고 오싹 일어났다.

팽팽하게 긴장의 줄을 당기는 나를 보고, 반짝, 이번에는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빛났다. 달을 등져서도 그 눈동자가 요사스러운 빛을 머금었다.

“선아, 나랑 갈래?”

“아니.”

단호하게 자른 대답에 실망하듯 긴 눈꼬리가 늘어졌다. 그렇지만 키비슈스는 여전한 웃음을 머금고 가벼운 몸가짐으로 달빛 아래를 거닐었다. 지척에 총을 차고 칼을 든 나를 조금도 경계하지 않는 모양새다.

“그러면 나를 따라 오면 선물을 줄게. 어때?”

“…….”

“선이는 분명 좋아할걸. 아직은 살아 있을 테니까, 선이가 와 주면 줄게.”

“키비슈스. 투항해.”

“이제 키슈라고 불러 주지 않는 걸까?”

장난스레 끌어올린 그의 파동을 즉시 제어했다. 키비슈스는 오랜만의 내 이능에 즐거운 듯 웃었고, 나는 짐작보다 거대한 그의 파동에 놀란 속을 겨우 감췄다.

이 정도면 혼자서는 힘들겠는데. 지원 요청을 하고 여기까지 약 3분, 길면 5분. 잡아 둘 수 있을까.

피스톨과 섬광탄을 오가던 오른손이 섬광탄을 꺼내 핀을 뽑고 재빨리 키비슈스의 발치에 내던졌다. 눈과 귀를 가리던 차에 보인 것은 기이하게 부는 역풍과 흩날리는 하얀 가운 자락, 그리고 내게로 다시 굴러오는, 섬광탄.

팡!

바람이구나.

충격에 흔들린 몸을 세우고 곧장 눈을 떴다. 살핀 자리에 이미 키비슈스는 없었다. 기척이 느껴진 방향을 돌아보니 흙먼지가 사라진 자리, 허공에 뜬 두 사람이 보였다. 키비슈스와 덩치가 작은 다른 에스퍼의 옷자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선아.”

“…….”

“가이드가 생겼구나?”

빠른 속도로 날아온 날붙이가 총알처럼 방검복을 꿰뚫었다. 방검복이 아니었으면 그대로 관통되었을 만큼 그 힘이 거셌다. 충격과 돌풍으로 밀려나면서 통증의 범위와 장기 손상 여부를 확인했다.

다행히 날붙이의 크기가 작았다. 왼쪽 복부를 찌른 손가락 길이 정도의 자상. 진입이 비스듬한 바람에 깊이는 얕고.

출혈이나 충격으로 가늠하자면 치명적인 장기는 운 좋게 비낀 듯했다. 노린 걸까. 복부의 상처 주변이 뜨끈하게 젖어 들어갔다.

다리에 힘을 주어 쓰러지는 것을 막고 키비슈스와 또 하나의 에스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바람을 다루는 에스퍼의 이능 정도가 예상한 것보다 강하다. 반응도, 영향력도 평균치를 상회하는 수준.

순식간에 허락한 외상 때문에 3분은커녕 앞으로 1분도 잡아 놓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나마 키비슈스의 목적이 나를 사살하는 것이 아니라 데려가려는 것으로 보이는 점에서, 키비슈스의 생사를 고려하지 않는 이쪽이 유리한 정도일까.

곧장 피스톨을 뽑아 방아쇠를 당겼다. 머리, 머리, 가슴, 그리고 옆의 에스퍼의 머리에도 한 발. 연달아 네 발을 쏘았다. 맞기를 기대하고 쏜 것은 아니고 키비슈스가 대동한 에스퍼의 이능 정도를 가늠하기 위한 견제였다.

피스톨을 꺼내는 걸 보자마자 그 에스퍼는 다급하게 손을 들어 올렸고, 공기 중으로 파동이 내게 닿을 만큼 길게 뻗어졌다.

허공에 뜬 두 인영이 낙하하고, 궤도가 빗겨난 총알이 키비슈스의 달빛 같은 머리칼을 스쳤다. 강한 파동. 바람, 돌풍, 그보다는 공기의 흐름 자체를 다루는 이능.

재차 한 발을 더 쏘았지만 복부의 통증 때문에 조준이 엇나갔다. 두 사람에게서 멀찍이 총알이 비껴 났다.

“선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쏘면 어떡해.”

“…….”

“내가 너무 늦었어?”

“헛소리 그만해. 내 출신이 카바섬이 아닌 것도, 서국에서 납치한 것도 다 알고 있으니까.”

“이런. 선이 화났겠네.”

자색 눈동자가 휘어지며 활짝 웃음을 지었다. 달빛이 그보다 잘 어울릴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에 절로 미간이 좁아졌다. 부정도 없이 저렇게 간단하게 시인할 일에 평생을 의심도 않았다니. 내 멍청함이 안타까울 지경이다.

“나는 너밖에 없는데.”

나붓한 발걸음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파동을 가다듬고 키비슈스와 동행한 에스퍼의 이능을 얼마나, 어느 정도나 묶어 둘 수 있을지 치열하게 기감을 세웠다.

세심한 컨트롤을 요하는 이능은 파동을 한 번씩 헤집어 주는 것으로 방해하고, 조금만 닿아도 치명적인 키비슈스의 경우에는 조금 더 주의해야 했다. 가능하면 이능을 제어하고도 닿지 않도록.

여전히 칼이 틀어박힌 자리가 움직일 때마다 끔찍하게 쑤셨고,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미지근한 피가 허리띠 부근에 고여 축축하게 군복을 적셨다. 중검을 고쳐 들고 다가오는 남자의 웃는 얼굴에 피스톨을 조준했다.

남은 탄약은 한 발. 쏴 버릴까.

공기를 다루는 저 자연계 에스퍼가 아니었다면 진작 결정 내렸을지도 모른다. 하긴, 그랬다면 저렇게 무방비하게 나타나지 않았겠지.

나를 키운 에스퍼. 내게 모든 것을 가르친 에스퍼. 나를 이용하고 버린 에스퍼. 그리고 이제와 나를 찾는 에스퍼.

각별했던 추억도 이제는 저물었다. 저 반란군 수장 키비슈스 엘로란타 때문에 죽여야 했던 목숨들 하나하나마다 저물어 이제는 어두웠다. 그의 호의는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내 쓸모에서 기인한 것이었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목적을 이루지 못해 그는 나를 필요로 한다.

그 과정에서 죽어 간 사람이 무척이나 많았다. 한 번 찾아볼 수도 없게 사라진 고향과 기억, 버림받은 아이임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었던 시절이 스쳤다.

탈영한 키비슈스가 죽임당할까 걱정하던 이선, 청문회에서도 그의 고의성을 부정했던 18살의 이선은 이제 없다.

“이게 배신감일까.”

“투항해.”

“선아, 나랑 가자. 원한다면 네 가이드도 데려가 줄게.”

“입 다물어.”

흠, 하고 노래하듯 흥얼거린 키비슈스가 다시 흐드러지는 미소를 지었다. 언뜻 선해 보이는 그 얼굴이 웃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가 피아노를 가르쳐 주며 흥얼거리던 때를 좋아했는데.

“맞구나. 정말 가이드가 생겼구나.”

“…….”

“가이드라. 죽일까?”

탕.

거리는 가까웠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지 궤적이 바로 휘어졌다. 귓가를 지나는 총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색 눈동자가 나를 보았다. 웃는 듯 눈가가 접혔으나 눈빛은 더 없이 싸늘했다.

“너는 출혈에 약하지. 이제 그만 이능을 거둬. 나랑 가자 선아.”

“…….”

“아프잖아. 도와줄게.”

마지막 탄환을 소진한 피스톨을 아무렇게나 던지고 벌써부터 식어 가는 양손으로 중검을 고쳐 들었다. 미지근한 복부에서 매번 새로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치밀었다. 키비슈스의 말대로 내 몸은 출혈에 약하니 더더욱 시간을 끌어서는 곤란하다. 방심도, 긴장을 늦춰서도 안 된다.

칼끝이 닿지 않을 거리에서 연신 웃음 짓던 키비슈스가 순간 뒤로 날았다. 굉음과 함께 그 자리에 커다란 바위가 푹 박혔다. 잇따라 불꽃이 쏟아졌다.

빗발치는 폭발음 끝에 모래사막에서 뿌옇게 먼지가 일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두 사람의 인영이 보이고, 내 앞을 커다란 등이 가로막았다.

“빠져 이 새끼야.”

“……늦었잖아.”

“리바. 얘 데리고 빠져.”

“예, 알겠습니다!”

바닥에서 뽑힌 바위가 저들끼리 몇 번을 부딪혀 조각나는 동안, 붉은 불꽃 덩어리가 연신 쏟아져 검게 모래를 그을릴 동안, 키비슈스는 여유를 부리며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그 옆의 다른 에스퍼가 초조해하며 애쓰는 중에도 혼자 달 놀이 나온 사람처럼, 그렇게.

그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마주 노려보는 내게 그가 입술을 벙긋거리다 흰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인사했다.

“중령님! 자상이!”

“……깊은 건 아니야. 상황 종료 후 지혈을 부탁하지.”

바위와 불꽃, 돌풍이 밤하늘을 요란하게 메웠다. 끝없이 부딪히고 터지는 소리가 나고, 제대로 쏘아진 불덩이가 키비슈스를 향해 날아가다 그 앞을 가로막은 덩치가 작은 에스퍼의 팔에 대신 붙어 타올랐다. 사막을 가로지른 고통스러운 비명이 내가 앉은 자리까지 울렸다.

연신 나를 향했던 보랏빛 눈길이 그제야 그를 지키던 에스퍼에게 가 닿았다. 흰 손이 그의 팔을 덮고, 비명은 순식간에 멎었다. 마비.

갑작스런 정적이 감돌다 이내 깨어졌다. 보름달 아래 다시 폭염과 염동력, 그리고 거센 바람의 공방이 이어졌다.

더는 약 올릴 생각이 없는지, 아니면 패색을 읽었는지 밝은 달빛 아래 반짝이는 키비슈스가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역시, 이동형 에스퍼가 대기하고 있었나.

“씹팔!”

눈앞에서 대상을 놓친 준준의 욕설이 차갑고 밝은 사막의 밤에 크게 떨어졌다.

급히 만든 들것에 누운 나는 즉시 야영지로 옮겨졌다.

서둘러 살균을 마치고 의무 막사를 꾸렸다. 간단한 수술을 해야 했는데, 방검복을 잘라 낼 수 없어 칼을 뽑은 다음 방검복을 벗겨 내고 치료와 봉합을 진행하기로 했다.

경구용 진통제를 삼키고 링거를 달았다. 소독한 장비들과 리바 중위, 그리고 유서프 중령이 감독으로 들어왔다. 열이 올라 의식이 혼탁했고, 손발은 계속된 출혈로 차게 식었다.

다른 에스퍼의 부상이라면 내가 투입되기 적당한 상황. 우스운 내 이능은 스스로의 중상에는 하등 쓸모가 없다.

“……추적은?”

“실패. 아직 수색 중이지만 텔레포트 이능력자를 데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군.”

“중령님, 나이프를 적출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칼이 옆구리를 빠져나가는 통증보다 그 상처를 파고드는 시린 공백과 울컥 쏟아지는 피가 아찔했다. 순간 놓을 뻔한 정신을 가다듬고 으득, 입 안을 씹었다. 대번에 찝찌름한 맛이 목구멍에 고였다.

“그냥 마취를, 중령님, 그냥 마취를 해 드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됐어.”

회복 이능을 가진 리바 중위는 그의 이능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내 몸을 상대로 무척 당황스러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에스퍼의 파동을 제한하는 내 이능은 상시 발동하는 드문 종류라 접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어지간해서는 치유를 받기도 어렵고.

리바 중위의 치유를 조금이라도 적용하기 위해 가능한 만큼 내 파동의 정도를 낮췄다. 하지만 지혈이 더뎌 빈혈이 일었다.

“……수혈 팩 가지고 왔나?”

“예? 예! 곧 연결하겠습니다. 중령님, 유서프 중령님! 장갑을 끼고 환부를 압박해 주십시오. 급합니다!”

사지의 말단부터 잃어 가는 이 시린 감각이 오랜만이었다. 상처를 옮겨 받는 일은 중앙에서도 쉬지 않았지만, 그때는 항상 예정된 수순으로 진행되었으니까. 이런 갑작스러운 부상은 몇 년 만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절하지 않기 위해 통증에 집중하고 생각을 이었다.

키비슈스가 포기하지 않았다면, 아직 근처에 있다면 그의 이능 봉쇄는 내 담당이다. 아직 쓰러져선 안 돼.

의료용 냉장기에서 꺼내진 검붉은 혈액 팩이 온혈기 위에서 흔들리는 걸 보며 다시 상처를 씹었다. 충분히 덥히지 않으면 내 거지같은 몸은 금세 저체온으로 얼어붙겠지. 혹은 그 전에 혈압이 떨어져 죽으려나.

자조적인 농담과 함께 씹은 볼 안쪽이 혀끝에 너덜너덜하게 쓸려 났다.

반대쪽 팔까지 주삿바늘에 꿰여 누운 채 키비슈스의 동선과 그가 남긴 말들을 되짚어 떠올렸다.

통제구역에 남은 흔적과 일반적이지 않은 수준으로 수가 많았던 변이체를 봐서는 이 사막에서 무언가 실험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고, 변이의 생애 주기와 변이 정도로 특정하기에 진작 이 지역을 떠났으리라 계산했다. 그런데 왜 여기 있었을까. 되돌아온 걸까? 무엇 때문에?

‘선물을 줄게.’

‘아직은 살아 있을 테니까. 선이가 와 주면 줄게.’

아직은 살아 있다, 라.

사람인가? 민간인? 군인? 아니면 에스퍼?

어쩌면 그가 거느린 엘로란타군의 사람이나 유사 가이드들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농담을 하는 자. 이미 수천수만의 목숨을 전쟁으로 잃게 한 자.

온혈기로 데워진 혈액이 몸속을 파고들어도 마음이 싸늘했다. 그 죄를 재판에 달아 조금이나마 갚게 해야 한다는 생각과 당장이라도 죽여 그 행적을 멈춰야 한다는 생각이 여전히 갈등을 빚었다. 그 끔찍한 자를 어떻게 치죄해야 할까.

아, 윤오.

갑작스레 몸이 튀어 나갈 듯 움츠러들었다. 환부에서 울컥, 수혈한 보람도 없이 피가 솟았다. 낯이 질리도록 회복력을 쏟아부어 가까스로 지혈했던 리바 중위가 피에 젖은 손을 퍼덕이다 유서프를 시켜 내 경련하는 상체에 모포를 덮어 누르게 했다.

다시 회복을 퍼붓고 생살에 바늘을 찔러 넣어 억지로 봉합하는 와중에도 머릿속에 경보가 울렸다.

키비슈스가 윤오를 알아챘다. 어떻게? 어떡하지?

“중령님, 중령님 지혈이 안 됩니다. 진정하십시오!”

힘을 풀었지만 크게 뛰는 심장까지 진정할 수는 없었다.

바깥에서 들린 소란에 유서프가 막사 입구로 향하고, 곧 중위에게 무언가 외쳤다. 내게 뭐라 말을 걸었지만 쿵쾅쿵쾅 심장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이어 팔에 연결된 주사에 주사액이 추가됐다.

마취제. 호흡기가 씌워지고, 잠시 뒤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

* * *

하얀색 그랜드 피아노. 주말이면 나를 데려간 연구동의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방. 한 곡, 한 곡, 칠 수 있는 곡이 늘어날 때마다 느낀 뿌듯함. 연주에 맞춰 흥얼거리던 그의 목소리. 기다란 손가락이 낮은음을 두드리고 곧잘 따라 하는 나를 칭찬하며 이마를 쓸어 주던 때. 오후의 햇살. 하얀 건반 위의 흰 손. 손등의 화상 자국.

단맛이 나는 알사탕. 진통제가 들어 때로 씁쓸한. 상처를 소독하고 봉합할 때, 또는 샘플을 채취할 때 받은 것. 울음을 삼키며 입 안에서 굴리다 보면 어느새 혀와 입술이 얼얼해지고 눈앞이 가물거리던 맛. 그래도 아픈 상처.

팔. 다리. 배. 그만하고 싶다고 빌던 어린 에스퍼들, 아파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잘못했다고 빌던 아이들. 쉽사리 꺾어지던 모가지. 처량하게 흐르던 핏방울.

저녁이면 내 방에 찾아와 상처를 살피고 글을 가르쳐 주던 키비슈스. 백치를 앞에 두고도 차근차근 말하는 법, 몸을 씻는 법, 옷을 입는 법, 포크를 쥐는 법, 글을 쓰는 법, 그리고 아픔을 참는 요령을 알려 주던 밤.

모르는 게 많고 아는 게 없는 나를 무시하지 않은 사람. 사람의 구실을 하도록, 쓸모 있는 에스퍼가 되도록 나를 키우고 이능을 개발해 준 사람.

지난 상처가 미처 다 아물기 전에 또 다른 시술을 해야 해도, 두려워도, 그가 필요하다 말하면 수긍할 만큼 믿었던 사람.

내 기억이 사라진 원인. 나를 납치하고, 감금하고, 약을 투여해 뇌를 망가트린 사람. 내 몸이 마취제에 과민하고 쓰지 못하는 약제가 많은 까닭.

단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은 부모를 궁금해하고 원망하던 밤. 15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 실종 신고. 10년 전에 사라진 기억나지 않는 서국의 고향.

연구동을 가득 메운 거센 파동. 피를 토하며 쓰러지던 연구원들, 직원들, 그리고 에스퍼들.

폭주나 다름없는 파동을 잠재우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던 기억. 붙들려 끌려가면서도 그가 죽을까 걱정한 기억.

그가 새롭게 얻은 이능에 몇이나 죽어 나갔는지 알면서, 그가 받은 구속 처분이 옳다 여기면서, 당장 쓰러진 사람들이 모두 죽어 버린 건 아닌가 걱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치우치던 마음. 의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날을, 단순히 폭주 직전의 우발적인 상황이었다 거짓으로 대답한 청문회.

전쟁. 변이체 한 번 보지 못했던 18살. 처음 사람을 죽인 날.

훈련대로 방어한 중검에 베어져 나간 남자. 갈라진 가슴팍에서 솟구쳐 비처럼 쏟아진 더운 피. 속눈썹에 맺히던 죽음의 무게. 주저앉을 것만 같은.

하나, 둘, 여덟, 스물, 어느덧 세지 않게 된 숫자. 희미한 그들의 얼굴. 더해지는 죄책감. 얕아지는 망설임. 익숙해지는 전투.

준준, 데이, 사야야, 련우, 이시스, 겸, 부룬델, 비비, 하케, 치나리, 요둔.

전우. 동료. 에스퍼. 칭송받는 살인마들과 제대로 된 무덤을 갖지 못한 전사자들. 잊히지 않는 파동의 형태와 기억나지 않는 그들의 모습, 때때로 꿈에 찾아오는 목소리.

잊지 않으려 되새기던 유언. 살리기 위해 내 살을 헤집고 끌어온 상처. 그러나 이미 늦은. 피범벅이 된 손. 누구의 피? 아군의? 적군의? 분간할 수 없는 나날.

그리고 윤오.

윤오.

참는 법, 버티는 법, 기다리는 법. 가르침대로 꾹꾹 눌러 온 세월을 단번에 터트려 울게 한 사람.

손끝이 무디지 않고, 이명과 소리를 구분하지 않아도 되던 때. 두통과 어지럼증에 종종 거멓게 물들던 머리가 더없이 맑던 순간. 저린 팔다리가 마침내 내 것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던 날. 그날의 공기. 홀린 듯 돌아간 고개와 찾아낸 남자.

검정. 윤오의 색.

까맣게 빛나는 머리칼과 어둡고 깊은 눈동자. 모든 삶을 쏟아 기다려 온 사람을 만난 날. 쉴 새 없이 흐른 눈물. 참지 못한 울음. 현실이 아닐까 두려워 뒤쫓아 간 날. 넘어져 절룩이던 무릎.

빌라 정원에서 서성이던 오후. 길게 지던 노을. 같이 울어 주던 풀벌레. 그와 함께 들어간 남자가 빌라를 나오는 순간, 들끓던 감정.

찾아 헤매지 않고도 알 수 있던 당신이 사는 집. 벨을 누르고, 조급해져 문을 두드리고, 잠시 뒤 문을 열어 준 당신. 그리고 부르던 이름. 다른 누군가의.

반가움. 의심. 환희. 질투. 경애. 증오. 살의. 열망.

울음과 서러움을 온통 당신의 탓으로 하고. 아프던 세월도 모두 당신의 탓으로 하고.

당신을 끌어안고. 나를 떼어내려는 당신을 쓰러트리고. 기어이 밀어 내는 그 팔을 쥐어 부러뜨리고.

씹어 뇌까리는 욕설에 놀라 그 팔을 고쳐 내던 때. 기이하게 거실을 울리던 으직, 소리. 어느 때보다도 강력했던 이능. 당신을 낫게 하고 꺾어진 내 오른팔. 당신의 시선. 경악. 괴리. 혐오.

그러지 말라고. 이제야 만났는데 나한테 그러지 말라고.

안고 싶고, 안기고 싶고,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죄 잊어버리고. 이제 더는 떨어져 살 용기가 없던 나. 끔찍해 하는 당신의 품을 파고들고, 밀쳐 내는 당신을 짓누르고, 그 목덜미에서 그리움과 외로움과 치미는 감정을 맡던 때.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그렇게 단숨에 내쳐질 줄은 몰라서. 단 한 번도 그런 상상은 해 보지를 못해서.

열어 주지 않는 문 앞, 불안과 걱정과 초조와 조바심으로 헤매다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 다시 또 그 어두운 눈. 지어 보인 경멸. 가이드 등록증과 보수표를 갈가리 찢던 냉혹함. 내 사랑이 무엇도 아니라던 차가운 말.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는 말.

첫 번째 삽입 가이딩.

팔뚝에 줄 세 개를 매단 나와 나에게 당신을 강제 집행한 군부. 끔찍해 하던 당신.

멋대로 당신을 가이드 삼고, 센터 가이딩을 거부하고, 나자빠져 구석에서 죽어 가던 나.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고 발견된 나.

에스퍼 관리동의 강제 가이딩을 거부하던 몸. 당신이 버리고 내가 포기한 몸.

유일한 이에게 미움받고도 이어진 생. 이 비루한 목숨을 이어 내라고 불려 온 당신.

투명한 수액을 거스르던 붉은 피, 처음으로 해 본 구음과 섹스. 생경한 아픔과 그다지도 찬란한 정적. 더운 몸. 살아 있는 몸. 갈망. 살고자 하는 의지. 욕심. 내 것이 아니라니, 이렇게 기다렸는데, 이렇게 좋은데 내 것이 아니라니.

그 안온한 정적을 탐내는 나와 그런 나를 싫어하여 한숨짓고 혀를 차던 당신. 욕설을 그린 입술.

사랑해서. 혼자서 사랑해서. 더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게 된 마음. 거부당한 사랑이 가슴을 죄어서, 속을 모조리 터트릴 것 같아서. 몰래 사랑하고. 몰래 읊조리고.

울고, 빌고, 그 발치에 무릎 꿇은 채 보낸 첫 여름. 기대를 저버리고 욕심은 접을 수 없었던 두 번째 여름. 그리고 세 번째 여름.

당신의 더위를 내게 나누어 준 세 번째 여름.

어쩌면 내게도 아직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고. 내게 조금은 연민을 가졌을지 모른다고.

나를 싫어하는 윤오. 나를 안아 준 윤오. 내 손을 쳐 내는 윤오. 내 입술을 핥은 윤오. 내 몸을 만지던 윤오. 인상을 쓰는 윤오. 떠는 나를 숨겨 준 윤오.

군부의 편지를 한 통도 뜯지 않은 윤오. 더는 문을 잠그지 않는 윤오. 내 상처의 이유를 묻던 윤오. 화내 주던 모습. 가이딩이 아니라는 말.

‘가이드가 생겼구나?’

윤오가 위험해.

숨이 가빠 왔다. 심장이 요동을 쳤다. 근육이 움츠러들었다 펴지며 잔 경련을 일으켰다. 탁 터진 숨이 다시 목구멍을 메우고 뻐끔거리는 버석한 입가가 가느다랗게 비명을 질렀다. 두개골이 온통 저리고 들이마시는 숨이 허파를 찔렀다.

삐빅, 삐빅.

들썩이는 어깨를 내리누르는 누군가의 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찾아온 정적. 윤오의 곁에서 느끼는 안정과 다른 검정. 윤오의 곁에서 자라는 불안과도 다른 어둠. 에스퍼 관리동에서 내리는 약물 처방. 그래. 그거.

조용히, 죽음을 따라 하던 그 느낌.

* * *

느리게 눈이 뜨였다. 무거운 눈꺼풀이 밝은 빛에 시려 몇 번을 깜빡여야 했다. 누군가 내 손을 잡고 있었고, 그 열기가 무척이나 뜨거웠다.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거슬리는 소리.

손을 떨쳐 내고 전신에 남은 둔통에 파르르 떨었다. 배가 아프고 머리가 울렸다. 묵직한 모포 아래서도 몸이 추웠다.

“중령님……. 깨어나셨, 습니까?”

울먹이는 목소리.

가물거리는 정신이 점차 현실을 찾았다. 다른 어느 세계에 떨어졌다가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감각이 하나둘 돌아왔다. 눈앞은 색을 찾았고 서서히 초점을 잡았다. 붉은 기 도는 머리칼이 곧 시야에 들어왔다.

“……한타?”

군복을 입은 커다란 어린애가 울고 있었다. 매캐하게 옷감 타는 냄새와 짓무른 상처의 냄새, 그리고 약 냄새를 풍겼다. 벌겋게 열이 오른 흰 낯에서 눈가가 더욱 붉었다.

“중령님……. 이선 중령님…….”

처량하게 나를 부르는 녀석의 어깨가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굽었다. 내 손을 잡고 싶은 듯 병상을 헤매는 녀석의 손을 무시했다. 그 열기는 내 것이 아니다.

“……소위.”

“예. 중령님!”

“나는 네 가이드가 아니야.”

붉은 눈가가 다시 일그러졌다. 금세 핏방울 같은 눈동자가 맑은 물을 쏟았다. 그 마음도, 애통한 울음도 내 몫이 아니다.

이 어린 에스퍼는 그걸 배워야 했다. 만날 수 있는지, 없는지, 어디든 살아 있기는 한지.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고, 무엇도 알 수 없어도 기다려야 할 제 몫의 사람을 믿어야 했다. 내게서 얻는 잠깐의 평안에 안주하지 말아야 했다.

잠잠해지길 기다린 다음에는 너스 콜을 부탁했다. 깨어난 걸 확인한 순간 진작 했어야 할 일을 뒤늦게 깨달은 어린 에스퍼가 한껏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침상을 뒹구는 진통제 버튼을 찾아 눌렀다. 잠시 후 두통이 조금 가라앉았다.

에스퍼 전담의 군의가 곧 들어와 파동과 몸 상태, 환부를 확인했다. 마취약에 과반응하여 사흘간 잠들었지만, 그 탓에 오히려 회복이 빨랐다. 직경과 깊이가 약 5센티미터 정도로, 환부는 속도 겉도 제대로 아물고 있다고 했다. 드레싱을 다시 하고 붕대를 갈았다.

계속해서 서성이는 한타를 병실에서 내보냈다. 또다시 따끔하게 보호자 행세하지 말라고 말해 줘야 했다. 타는 냄새와 훌쩍이는 소리를 남기고 붉은 머리가 의사 뒤를 스쳐 나갔다.

깨기는 했으나 약 때문에 몽롱한 시간이 지나고 데리다가 왔다. 서둘러 퇴근한 듯 시간이 일렀고, 손에는 서류 뭉치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내가 북부 사막에서 헬기로 이송된 부분부터 깨어나기 직전까지의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을 시간 순으로 상세하게 나열했다.

가이딩 지원은 받지 않았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이 났다. 조금 기쁘기도 했다. 물론 윤오가 있었다면 회복이 더 빠르겠지만, 고작해야 이정도의 외상으로 그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아닌 다른 가이드는 더욱이. 그들의 가이딩은 고작해야 두통을 가라앉히고 메슥거리는 속을 진정시킬 뿐인데, 그 정도는 약으로도 가능하다.

그런 생각을 할 무렵, 피곤한 낯의 데리다가 답지 않게 망설이다 말문을 열었다.

“사야야 중령이 전사했습니다.”

사야야가 죽었다고.

관에는 원국 중앙군의 군기와 수수데의 국기가 덮였다.

북부 검시소에서 본부 대대, 그리고 화장터까지 장례 의식 행렬이 예정되었다. 의례를 채 중간도 지나지 못해 루돌프의 무릎이 찢겼다. 몇 번이고 울부짖다 다리가 꺾이고, 무릎이 함부로 떨어져 흙바닥에 피 얼룩이 배어 묻었다. 바닥을 짚은 손바닥도, 긁은 손톱도 엉망이었다.

이능 장교 전원과 일반 장교들까지. 연병장이 사람으로 가득 했지만 누구도 상사의 더럽혀진 군복과 장례 의식의 근엄을 해치는 행위에 대해 말을 붙이지 않았다.

전사한 군인과 군복을 입은 단 하나의 유가족에게. 조용한 배려가 넉넉히 주어졌다.

사야야와 루돌프를 모르는 에스퍼는 없었다. 후방 지원으로 가장 유용한 천리안 이능력자, 사야야는 물론이거니와 파견을 가려면 마주칠 수밖에 없는 에스퍼의 인적 수송 담당이 루돌프였다. 조심스럽고 예의 바른 사야야와 사근사근하고 해맑은 루돌프는 모두의 호감을 샀다.

그리고 두 사람의 유명한 결혼담. 사야야의 부상에 어쩔 줄을 모르고 몇 날 며칠을 울고 빌어, 온 병동이 언제 그 고백을 받아 줄 것인지 기다리던 그때. 더는 에스퍼라는 이유로 거절하지 못한 사야야가 마침내 웃던 순간, 그 자리에 내가 함께 있었다.

축하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똑같이 순하고 착한 두 사람의 다디단 이야기는 에스퍼들에게 또 하나의 희망이었다. 또 다른 생존 방식의 사례였다. 기다림이 실패하여도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 행복할 수 있다는 기대.

중앙군의 깃발이 완전 게양되었다가 반강하하고, 조례포가 연달아 울렸다. 의장대는 부르지 않았다. 에스퍼의 귀에는 소음일 뿐인 군악을 고인이 되어서까지 듣게 할 필요는 없다. 단지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소리가 어찌나 슬픈지 따라 훌쩍이는 소리도 간혹 들렸다.

2계급 특진으로 사야야는 중령이 되었다. 쉬지도 못하고 파견을 다니면서 드디어 그에 맞는 계급을 얻었는데, 그것을 죽고 다는 바람에 같은 계급장을 가진 그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사야야의 유언을 위임받은 사람이 공개 서문을 낭독했다. 그녀가 남긴 모든 자산과 혜택이 루돌프에게로 갈 것이라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영결식의 마무리로 다시 한 번 조례포가 쏘아졌다.

관이 지나는 동안 영관 장교들은 모자를 벗어 가슴팍에 올리는 경례를 했고, 위관 이하 장교들과 사병은 거수경례를 했다. 주목을 즐기지 않았던 그녀를 떠올리면 멋쩍어 하는 얼굴이 먼저 스쳤다.

또 하나의 전우가 죽었을 뿐이다. 차마 낯설지 못한 죽음에 초연하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연구동에서부터 봐 온 친구를 잃은 사실은 여전히 가슴 속에 뜨끈하게 피와 슬픔으로 흘렀다.

늘 차갑던 손과 미미하게 짓던 미소, 담담하고 차분한 말씨, 루돌프를 이야기할 때면 조금은 부끄러워하던 모습.

전쟁 당시 고향과 가족을 모두 잃은 루돌프. 망설임 없이 원국의 중앙군까지 사야야를 따라온 그. 온 군부에 소문이 나지 않은 곳 없게 맑고 예쁘던 그 사랑. 에스퍼의 기구함을 알고도 올곧게 전한 그 마음. 참 예쁜 부부.

그러나 무수히 유념하여도 예비하지 못한 오늘이 덜컥 닥쳤다. 새로 만든 가족을, 그녀와 배 속의 덜 여문 아기까지 한 번에 떠나보내야 하는 그의 울음이 따라 죽을 것처럼 위태로웠다.

접견실 밖에서 무릎을 꿇은 루돌프가 파견 가지 말라고 빌던 날.

그날 조금 더 참견했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사야야와 같은 곳으로 파견을 나갔다면 막아 낼 수 있었을까?

키비슈스의 장단에 맞춰 그를 따라나섰으면 사야야는 살았을까?

실패하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키비슈스를 죽였다면 루돌프가 그녀를 잃지 않았을까?

쓸모없고 한참 늦은 후회가 속을 갉아 먹었다. 키비슈스에게 나를 넘겨주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사야야가 죽지 않고 루돌프가 저렇게 흙바닥을 헤집어 가며 울지 않아도 되었다면, 나는…….

모를 일. 이미 지난 일. 상실의 슬픔을 외면하려 그저 되풀이하는 후회.

언젠가 저 영구 행렬이 나를 싣고 가는 그날에는 누구도 슬퍼하지 않았으면 했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슬픔은 늘 과했다. 이 삶은 자체로 서럽고 통째로 슬펐다.

마침내 벗어나는 순간은 어쩌면 축하받아 마땅한 것인데, 남은 루돌프를 보면 죽은 사야야가 떠나지 못하고 슬퍼 맴돌 것 같았다. 저렇게 울다가 루돌프가 뒤따르기라도 할까 봐, 더는 아프지 않은 세상으로 성큼 가 버리지 못할 것 같았다.

행렬을 둘러싼 횡대를 벗어났다. 오와 열을 갖춘 무리 사이에 혼자 흐트러지고 남겨진 루돌프를 일으켰다.

끝도 없이 휘청이는 그는 이미 바닥을 잃은 듯했다. 일으켜지면서도 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휘적이는 팔을 끌어 지탱하고 피 묻은 두 무릎 대신 걸음을 떼어 행렬을 따랐다.

여전히 목을 다쳐 가며 통곡하는 루돌프의 어깨를 감쌌다. 보내 주는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도록. 사야야가 남긴 유언대로 행복할 수 있도록.

한참 만에 나를 돌아본 루돌프가 쉰 목소리로 토막 난 말을 두서없이 내었다. 힘없는 팔을 피하지 않고 마주 안아 주었다. 어깨에 떨어진 고개가 견장에 얼굴 긁히는 것 상관하지 않고 울음을 뱉고, 상한 목소리로 울음과 중얼거림을 이었다.

“중, 중령님…. 우리 사야야, 추, 추워서……. 추워, 서 어떡, 어떡…….”

“…….”

“아기가, 흐으, 안, 안 된다고……. 가지 말, 안, 안 된다고…….”

“루돌프.”

“……흐윽.”

“미안해.”

루돌프는 아이처럼 울었다. 집을 잃고 길을 잃고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울었다. 다르지 않았다. 그는 고향을 잃었고, 부모와 형제를 잃었고, 아내와 아이를 잃었다. 끝도 없이 잃는 삶.

잃기만 하는 삶은 가벼워지고 덧없어진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가 남은 길을 마저 걷고 떠나보내게 해야 했다. 받아들이고 지날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사야야가 내게 그를 부탁했으니까.

파견 때, 에스퍼 관리동에 들어갈 때, 또는 매년. 이능 장교들은 유언을 갱신했고 대리인을 포함해 최대 3인이 유언의 증인을 섰다.

매해 나를 골라 루돌프를 잘 부탁한다 고개를 푹 숙이던 사야야. 무수히 들은 유언 중 남달리 마음이 쓰이던 그 말.

“미안해.”

“우, 리 사야야, 추워서…….”

“미안.”

내가 키비슈스를 살게 했다. 살렸다. 멋모르고 의존하여 저지른 그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했다. 전쟁을 일으켰다.

사야야가 동사했다. 배를 감싸고 오그라든 그녀의 몸을 펴는데 에스퍼가 동원되었다. 원래도 차던 몸이 그렇게 느리게, 차갑게 죽어 갔다.

내가 죽이지 않았어도 나는 중력보다 더한 죄책감에 늘 억압당했다. 옥죄이고 헤어날 수 없었다. 칼과 총, 불과 허물어진 잔해로 허망하게 사라진 목숨을 마주할 때마다, 스스로 진즉 죽어야 했다 자책했다.

키비슈스를 잡을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이 그릇된 삶을 부지해야지. 그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그만, 욕심이 생겼다.

윤오.

살고 싶어 했다.

윤오가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었다.

윤오의 다정을 받고 싶었다. 이 사랑을 전하고 싶었다. 얻고도 싶었다.

감히 내가 살고 싶어 해서 나는 더욱 미안해야 했다. 모든 것을 잃은 루돌프에게 거듭 허무한 사죄를 읊었다.

모든 것의 발단이 나라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는 죄인이 되었다. 전후의 트라우마를 치료하다 관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계속해서 괴로워야 했다. 나는 죄인이었다.

내게 잘해 준 이의 선한 행동에 그대로 의존한 것. 악행에 눈감고, 미리 막지 못하고, 죽이지 못하고, 죽지 못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어린애였다고 수도 없이 되뇌어도 그것이 나라서 용서할 수가 없었다.

속죄를 위해 걸어 둔 시한부 삶을 감히 연장하고 싶어 하는 나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루돌프를 이끌어 화장터로 걷는 길. 종대를 갖춘 군인들이 에워싸 경례를 했다. 중앙의 두 번째 중령을 위해서.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위해서. 깃발이 앞장을 서고, 운구 행렬이 뒤를 잇고, 비틀거리는 나와 루돌프가 따랐다.

다 받아들이지 못한 현실 때문에 절름거리며, 따르지 않을 수 없어 계속 걸었다. 루돌프 혼자 보낼 수는 없으니까. 사야야 혼자 보낼 수는 없으니까.

두 사람의 조그만 결혼 예식에서 루돌프는 오늘처럼 펑펑 울었다. 그때는 행복한 눈물이었다. 외롭지 않게 해 주겠다는 포부를 당차게 외치고서 제 감정에 겨워 울던 새신랑이었다. 신부는 웃었다. 수줍게, 예쁘게.

혼자 아프게 두지 않겠다고.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우리 서로 외롭지 말자고. 엉엉 울던 루돌프의 눈물을 닦아 주던 예쁜 신부는 전장에서 홀로 쓸쓸히 떠났다.

“미안해.”

텅 빈 속에서 메아리 울리듯 계속해서 사죄가 흘러나왔다. 무엇이 미안한지도 몰랐다. 하나씩 어긋난 톱니를 거슬러 가다 보면 결국엔 내가 살아 버린 것이 잘못이었다.

사죄는 끝도 없이 빚어져 흙먼지 가득한 공기 중에 내몰렸다. 오래 울리지도 못하고 사그라지고, 다시 흘러 나고 또 사그라졌다.

이 현실이 버거웠다. 언제고 그랬고, 매일 오늘의 현실이 더 무거웠다.

“중령님……. 엘, 엘로란타 좀, 죽여, 주세요…….”

“…….”

“중령님은 할, 할 수 있으시잖, 아요…….”

“……미안해.”

“죽여 주세요……. 사야야처럼, 사야야보다 외롭게, 아프게, 죽게 해 주세요…….”

눈물 젖은 푸른 눈동자가 몇 번이고 선득한 살기를 비추었다가, 다시금 잃은 아내의 관을 향해 일렁일렁 물기를 맺었다. 쉬어 버린 목소리가 키비슈스를 죽여 달라고 말하다가 사야야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 다시 울먹였다.

몇 번이나 속삭임처럼, 그저 한탄처럼, 적의 괴로운 죽음을 바랐다. 복수를 말했다. 그리고 비통하게 울었다.

펠리우의 고향. 가족들. 배우자.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까지. 모두 키비슈스의 손에 잃은 루돌프는 쉬이 넋을 찾지 못했다.

그저 걸음에 걸음을 이었고, 화장터에서는 관을 호송하고 운반하는 군인들에게 뛰어들어 온몸으로 딱딱한 나무 관을 덮었다. 두 개 국가의 군기와 국기가 날 선 손끝에서 찢겨 나가고 피에 적셔졌다.

그 이상 서러울 수 없을 줄 알았던 울부짖음이 화장터의 가마 앞에서 더욱 높아졌다. 남은 것 하나 없는 사람이 울 듯이,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울 듯이, 그렇게 울었다.

‘중령님은 할 수 있으시잖아요.’

내가 해야 하는 일. 내게 주어진 일.

그 강한 모순을 꺾고 키비슈스를 죽이는 일에는 내가 필요하다.

그러면 속죄가 될까. 그 악인을 죽이고, 진작 죽이지 못한 나를 죽이면, 그러면 사그라진 많은 목숨들에 이 사죄가 전해질까. 이 죄책감이 끊어질까.

다 낫지 않은 배가 계속해서 아린 통증을 일으켜 몸이 굽었다. 나는 그따위 일이 밝혀지지 못하게 자세를 고쳤다.

하늘이 높아지고 풀벌레 소리는 종적을 감춘 계절.

빙글빙글 행렬이 돌며 주저앉은 루돌프와 내 앞을 스쳐 지났다. 그들이 쥐고 온 새하얀 국화가 한 송이, 또 한 송이 관 위에 놓였다.

가을의 끝자락에 국화는 넉넉했다.

- 가을 楓菊 (풍국 : 단풍과 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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