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가을 楓菊 (2/11)

- 가을 楓菊

두 개의 접견을 마친 다음 의무대로 향하는 내 걸음은 서두르는 동시에 굉장히 무거웠다. 바차스에게 배정된 한 시간의 접견을 하러 가는 길이다.

파견 후 우선 복귀한 바차스는 곧장 의무대로 이송됐다. 혹여 에스퍼 관리동으로 옮길까 계속해서 보고를 재촉했던지라, 그 소식을 듣고는 퍽 안심이 되었다.

의무대로 이송되었다는 것은 아직 군이 바차스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이번 작전에서의 공로가 인정되었다는 뜻이었다. 덧붙여 한 시간의 접견 역시, 아직 그를 살려 둘 생각이 있다는 말이고.

병동의 가장 외진 병실에 이르러 문을 여니, 곧장 병상 하나가 보였다. 주렁주렁 달린 각종 진통제를 흘끗 살피고 환자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음식을 씹어 삼키지도 못했는지 위까지 유동식을 넣어 주는 콧줄을 달고 있었다.

서로에게 위로가 쓸모없다는 것을 아는 사이는 때로 편하고, 때로 답답하다.

턱 막히는 심정을 얼굴에 올리지 않도록 주의했다. 어차피 정신이 나가 있어 듣지 못할 인사도 생략했고, 형편없는 몰골에 쓸데없는 동정을 가지지도 않았다.

덩그러니 비어 있는 스툴 하나를 가져다 침상 옆에 앉았다. 수액 조절기를 돌려 들어가는 속도를 느리게 하고 약과 고통에 취해 몽롱할 놈이 정신 차리기를 기다렸다.

목숨을 부지하는 데에는 하등 쓸모없는 이능력을 제어로 대폭 줄이자, 금세 관자놀이 안쪽이 지끈거렸다. 놈의 파동이 전보다 거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차스가 기다란 눈매를 조금 틔웠다.

“……Sun.”

“정신 못 차려?”

일부러 더 매서운 말투로 힐난했다. 약으로 흐려진 정신을 깨우는 데 꿈결같이 다정한 어투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효과가 있었는지, 바차스는 멍한 눈을 몇 차례 끔벅거리다가 비실비실한 소리로 킬킬 웃었다.

“그러지 마, Sun.”

“뭘 그러지 마. 똑바로 정신 붙들어, 한 시간 배정 나왔으니까.”

웃음도 사치스러운 병자의 목에서 대답 대신 기침이 쿨럭이며 터져 나왔다.

온전한 정신은 아닌 건지, 한참 멍하던 놈이 중얼중얼 물어보지 않은 자기 과거 얘기를 시작했다.

몇몇은 들은 얘기였고, 몇 가지는 내게도 낯설었다. 놈은 말을 하다가도 코와 목을 파고든 관 때문에 기침을 하거나 연거푸 입술을 핥았고, 나는 종이컵에 물을 따라 입가에 목을 축일 정도만 대어 주었다.

“……그래서 내가, 씨발. 다 주기가 아까운 거야. 머리가 굵어진 거지……. 내가 훔쳤는데, 왜 나는 곰팡내 나는 빵 덩이 하나 받고 말아야 돼, 하면서.”

“…….”

“씨발, 근데, 안 맞으려면 줘야 되는 거야. 그게 그렇거든……, 길거리에서 빵 덩이 하나를 입구멍에 처넣으려면, 훔치든가 훔친 걸 바쳐야 돼. 새 빵은 갖다 주고 돌덩이 같은 빵을 받아야 처맞질 않아. 좆같지. 응?”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막연히 데라주바의 소매치기 고아 출신이라는 정도만 알았는데.

“그 빵이 또 존나게 맛이 없어요. 쿨럭, ……먹다 보면 목이 메는데, 우리는 빗물에다가 시럽을 타서 팔았거든.”

“그래.”

“그래서 받아 놓은 빗물도 마시면 안 돼. 씨발.”

젖은 수건으로 바싹 말라 갈라진 입술을 적시고, 서랍을 뒤져 립밤을 꺼냈다. 갈라져 피가 비친 부분에 가져다 대려니 놈이 기이하게 입술을 내미는 장난을 쳤다. 쫙! 하고 주둥이를 내리쳤다.

“Sun…… 나 아퍼.”

“아프라고 때린 거야.”

“그래도 지금 좋다. 정신이 들어. 내 다리 아직 떨려?”

“응.”

피식거리고 킬킬거리던 바차스가 말을 이었다.

“내가 발현하고 도망 다니다가 준준 그 개새끼한테 잡힌 거 알지?”

“알지.”

“그 씹새끼가 처넣는 바람에 이 모양 이 꼴로 사는데, 그 개새끼는 가이드가 생겼네. 몇 살 차이랬지? 꽤 났던 것 같은데.”

“열두 살.”

“개새끼 맞네.”

다시 킬킬거리는 바차스의 무릎을 눌렀다. 깨어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경련이 눈에 툭 하니 걸렸다.

“물러 터진 새끼야.”

“왜.”

“그럼 아직 안 태어났을 수도 있을까?”

“…….”

명확하지 않은 말에도, 누구를 말하는지는 알았다.

조금 더 기력을 쏟아 놈의 이능을 줄여 냈지만 파동이 심상찮게 커진 놈을 완벽히 제어하기는 무리였다. 그래도 한결 편해지긴 했는지, 바차스가 가슴팍을 꺼트리며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면 내가 더 살아야 할까.”

“…….”

“그럴 수도 있잖아. 12년도 늦는데 33년도 늦을 수 있잖아. 아니냐? 씨발.”

“그래.”

그럴 수도 있다. 있지만 아직 못 찾았을 수도, 아니면 아예 없을 수도 있다. 모른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어째서 파동이 생성되는지, 어떻게 이능을 가지게 되는지, ‘통제 지역’의 거센 파동은 무엇 때문에 계속 생겨나고, 에스퍼가 되지 못한 것들이 왜 자꾸 그곳으로 몰려가 변이체가 되는지.

알 수 없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

“Sun. 나 마음만 먹으면 뒤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지랄하지 말고.”

“알았어, 자기.”

젖은 수건을 가져다 주둥이를 벅벅 문질러 막았다. 기다란 눈매가 연신 웃었다. 머리칼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서는.

놈은 곧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그 말이 꼭 유언 같아서 듣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서 들어야 했다.

“……아, 미친, ATM 앞에 서 있는데, 갑자기 돈을 주는 거야. ……쿨럭, 씨발, 존나 배고프고 갑자기 아파서 약이라도 사 먹고 싶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 얼마였더라, 600틸이 갑자기 생긴 거잖아. 남의 주머니도 터는데 그걸 안 가져가겠어? 당연히 들고튀었지.”

“…….”

“그리고 그대로 밤새도록 뛰었어. 엄청 큰돈이잖아. 존나 또 빵 덩이랑 바꿀 수 없지. 완전 새로운 인생 아니냐? 갑자기 ATM마다 나한테 돈을 주는데.”

바차스는 그 일로 인해 덜미를 잡혔다. 미확인 에스퍼이자 전자 기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특수계 에스퍼로.

데라주바가 그 인재를 잡기 위해 수배를 내렸고, 인근 국가들도 은밀히 첩자를 보냈다. 현대전에서 전자 기기와 관련된 이능은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강력한 수단이 된다.

“나는 말이야. 에스퍼가 된 건 후회 안 해. 그 전이 더 좆같았거든. 근데 씨발, 아픈 것도 좆같아. 사는 게 다 좆같아.”

“그래.”

“나 발에 감각이 없어.”

떨리는 무릎에서 얼른 손을 떼고 모포를 걷었다. 허옇게 질린 발이 똑같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 끝을 세게 쥐고 살갗을 비틀었다. 사정 봐주지 않고 부서트릴 것처럼 꺾어 버리니 놈이 아아, 하고 심심한 신음을 냈다.

“아니네. 아직 있네.”

그리고 다시 킬킬거리는 웃음.

척추가 다친 것도 아니고 신경이 손상된 것도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데도 순간 철렁, 가슴이 떨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짜증이 치밀어 발등이 벌겋게 될 때까지 세게 꼬집었다 놓았다.

“너, 이 불쌍한 새끼야. 그렇게 착해 빠져서는 좆같은 인생을 벗어날 수가 없어.”

“내가 뭐.”

“물러 터진 새끼야. 내가 씨발, 너 때문에 이날 이때까지 뒤지지도 못하고 기다린다. 이 죄 많은 새끼.”

젖은 수건이 또 한 번 일을 할 차례였다. 콧줄만 건드리지 않게 조심하며 꾹꾹 험한 주둥이를 눌렀다. 녀석은 읍읍, 거리다 콧소리로 또 즐겁게 웃었다.

“……못 찾은 걸까. 없는 걸까.”

“…….”

“더 기다려야 할까?”

“기다려.”

힘 빠진 울림에 무책임한 답변을 돌려주고 다시 털썩 스툴에 앉았다.

홀쭉 들어간 뺨, 그새 살이 빠진 몸, 창백한 피부색, 푸른 기가 비치는 입술, 혈관이 터져 보라색인 눈가, 웃을 때마다 힘에 부쳐 흔들리는 가슴팍…….

“그래도 기다려.”

“웅.”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당부하는 말.

알고 있다. 단지 누구도 떠나보내지 못하는 내 나약함이 조르는 부탁인 것을. 단지 나의 고통을 덜기 위해 너는 계속 그렇게 좆같이 살라고. 기다리라고.

나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바차스 사이로 심박계 소리와 가습기 소리, 똑똑 떨어지는 링거액 소리가 들렸다. 창밖으로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계절이 바뀌느라 혼란한 까닭이다.

“사야야가 그러는데……. 내가 키비슈스에게 납치된 거라고 생각했다던데.”

“뭐야.”

“뭐가.”

“넌 몰랐다고?”

당황스레 뜨인 눈에 바차스의 흐릿한 눈동자가 찾아와 시선을 맞췄다. 아, 그러고 보니…….

“존나 병신 새끼.”

“왜, 또.”

“엘로란타 그 미친 새끼가 뭘 어떻게 세뇌했길래 그 생각을 이제 하냐?”

세뇌. 그러고 보면 윤오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의심할 생각은 안 해 봤냐고.

“니 기록은 내가 다 봤어.”

“나도 알아. 나 기억 없었던 거.”

“그거 말고. 입소 당시에 양쪽 팔 전부 바늘 자국 투성이였던 건 기억하냐?”

무슨 소리지 그게.

“최소 일 년은 투약했을 거라던데. 엘로란타 그 개새끼가 연구동 지원하고 진급 시험 치는데도 그만큼 걸렸고.”

쿨럭쿨럭, 기침하느라 잠시 쉰 바차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 서국 출신이야. 입소 1년쯤 전에 실종 신고 들어온 거 확인했어. 당시 키비슈스 파견이 서국, 카바섬, 펠리우 순이었고. 납치가 맞다고 멍청아.”

“…….”

“씨발, 아무것도 몰랐냐?”

머릿속이 하얘졌다. 세상에 키비슈스 하나밖에 없었던 나의 어린 시절이 그 와중에 껌껌하게 주변을 빙빙 돌았다.

“키비슈스 그놈 새끼가 서국에서 너 납치해서 데리고 다니다가, 연구소 입소시킨 거 맞다고. 니 기억 없는 것도 마비인지 약물인지 때문이고. 어린애 팔뚝이 링거를 오래 맞아서 다 불어 터졌다더라.”

벙벙한 정신머리로 듣고 있다가 ‘나 물 좀.’ 하는 말에 다시 종이컵을 입에 대어 주었다.

“그때도 나름 어린 에스퍼 교육 과정 있었는데, 하나도 못 받았지?”

“그건, 내가 말을 못…… 해서.”

“새끼야. 말을 못 하면 말도 가르쳐 주는 게 교육 과정 아냐. 왜 말을 못 하는지도 궁금해했을 거고.”

이제껏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게 이상할 만큼, 바차스가 들여다본 과거가 세세하고 적나라했다. 내가 잃은 부분과 그러려니 받아들인 토막이 놈의 반항적인 시각에서 차례로 재조명되었다.

“싸고도는 척하면서 써먹을 대로 써먹고 온갖 실험은 다 했더만. 에스퍼 실험에다 가이드 실험까지. 멋모르고 당했을 줄은 알았는데 아직까지 그렇게 믿고 산 줄은 몰랐다. 이 미련한 새끼야.”

“…….”

“그리고, 서국은 더 알아보지 마. 내가 찾아봤을 때 이미 지역 사라졌으니까. ……그냥 원래 없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

쿨럭쿨럭. 불편한 목으로 한참이나 내 멍청함을 들쑤신 바차스가 연거푸 기침했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들썩이는 가슴팍과 경련하는 그의 무릎만 내려다보았다.

늘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 주는 키비슈스에게 미안해서, 또 고마워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를 일일이 가르쳐 주고, 먹여 주고, 약을 주고, 치료해 주던 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나.

그 도움이 절실해서 매번 감사해하는 나에게 키비슈스가 했던 말.

‘선아, 네가 날 살렸잖아.’

* * *

시간은 잘도 흘렀다. 플라타너스는 드문드문 색을 바꾸다 어느 틈엔가 낙엽을 연병장 둘레에 쏟아 냈다. 고작 파견을 두 번 다녀오는 사이에 접견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잘도 바뀌었다.

제 아픔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에스퍼들의 불평불만이 변함없이 데리다 편으로 이력을 올렸고, 혹시 윤오에게 쓸모가 있을까 싶어 신청을 넣은 전선 파견은 족족 반려되었다.

지원이 아니어도 쓸모 있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인데, 군은 내 효용을 후방에서 더 유용하게 여기는 듯했다.

전장은커녕 은근슬쩍 접견 시수를 늘리라는 눈치를 주거나, 내 기본 근무량을 늘리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했다. 곧장 적용되지 않은 것은 부관 데리다가 그녀의 선에서 잘 쳐 내는 덕분이다. 고맙게도.

접견을 줄이겠다는 억지는 길게 부리지 않았다. 데리다가 쓸데없이 상부와 부딪히는 일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사야야나 바차스, 또는 한타나 대규 같이 마음이 조금 더 쓰이는 녀석들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의 순서를 조금이나마 당겨 주고 싶었다.

내가 고통을 공감해 줄 수 있는 녀석들이 끝도 없이 줄을 서 있다는 것에, 나는 모종의 책임감을, 어쩌면 부채 의식을 느꼈다. 내 몸 상태가 괜찮으면 괜찮을수록 심해지고, 괜찮지 않을 때까지 접견을 하면 나아지는 부채감.

차라리 공감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텐데.

하고 싶지 않다고 시수를 줄이는 게 불가능한 만큼, 마음이 쓰인다고 더 늘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윤오를 만나는 날이 주 3회에서 2회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윤오는 집필에 시간을 더 투자하는 중이라고 했고, 나는 잔뜩 쌓인 내 검진 통지 우편을 떠올리며 잠자코 수긍했다.

피곤한 윤오와 내게 관심이 없는 윤오를 번갈아 놓으면 조금 더 참는 것쯤은 괴롭지도 않았다. 단지 그를 만나는 시간이 줄어든 탓에, 원래 혼자였던 그 시간은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 없는 빈 시간이 되어 버렸다.

오늘 세 번째로 접견을 마친 에스퍼는 잔뜩 신경질을 냈다. 왜 요즘은 30분밖에 배정이 되지 않느냐고. 내게 물어 대답이 돌아올 일은 아니었다. 나는 태도에 대한 지적을 간단히 한 다음 녀석을 돌려보냈다.

근래 들어 식사를 남기지 않았다. 윤오가 자주 만나 준 덕에 구토와 오심은 한결 나아졌고, 내 몸도 조금씩 느리지만 살이 붙었다.

윤오가 내 형편없이 마른 몸을 지적한 다음부터 나름의 성의를 다하는 것인데, 꼬박꼬박 장교 식당을 찾으니 배식을 담당하는 병사가 웬일이냐 물을 정도였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시 그가 내 몸을 보고 싶다고 할 때에는 조금…… 나아진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지 않을까. 흉은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갈비뼈는 드러나지 않게.

볼 사람은 생각도 않는 걱정을 이르게도 했다.

그때 이후로는 다시 손만 잡는 가이딩을 할 뿐인데.

윤오는 말없이 바빴고, 나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나를 두고 흥분했던 윤오를 떠올리느라 새벽녘 머릿속이 온통 범벅이어도, 꿈일까 애가 타고 다시 확인하고 싶어 초조해도 달려들지 않게 참아야 했다. 윤오가 허락하지 않으면 그에게 안길 수 없다.

매번 그의 손바닥에 내 손을 안기며 더한 것을 바랐지만, 그 탐심이 눈빛이나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게 내리눌러야 했다. 거기엔 그의 궁금증을 자극하지 못해 수십 통씩 그대로 쌓인 내 검진표를 떠올리는 일이 도움이 되었다.

박스 채로 방치된 군부의 우편을 떠올리면……. 그러면, 윤오가 나에 대해 물어본 것도, 내 몸을 본 것도, 전부 에스퍼 전체에 대한 호기심과 자료 조사가 되었다.

나를 안은 것은 내 비루한 상황을 동정하거나 책임감을 느낀 탓이 아니라, 그저 눈앞에서 가이딩을 비는 꼴에 어쩔 수 없이 가담해 준 것이 되었다.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윤오는 나를 사랑할 일이 없다. 호감조차 바라선 안 된다. 내가 바라는 감정과 관계는 그에게 강요일 뿐이고, 내 사랑은 집착일 따름이다. 나는 사랑을 모르니까.

그래. 처음으로 관계한 날조차도 그는 무척이나 싫어하지 않았던가. 섹스가 처음이었던 나는 무척이나 아픈 와중에도 세상의 끝까지 잠잠해지는 평안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때에 올려다본, 새빨갛게 피가 역류한 링거 팩들과 혐오로 그득 찬 윤오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씨발. 내가 지금 환자를 상대로 섹스하라는 말을 들었는데. 군이 통째로 미친 겁니까?’

‘……네. 부탁, 부탁드립니다.’

‘정신이 나갔군.’

그때에 화를 내었던 낮은 목소리도.

* * *

윤오를 준준과 주노의 집으로 데려가는 날.

파견과 근무를 거듭하다 보니 어느덧 가을이 되었고, 8월 중으로 예정했던 일자는 미뤄지고 미뤄져 9월 중순이 되었다. 나와 준준의 시간을 맞추느라 상당히 늦어졌지만 다행히 윤오도, 주노도 괜찮다고 해 주었다.

먼저 퇴근한 준준이 주노가 모는 차를 타고 군부 정문으로 왔다. 연녹색의 동글동글한 소형차는 주노와 준준의 체격 차이 탓인지 조수석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선이 형, 선이 형, 정말 오랜만이에요!”

“안녕.”

“자주 보면 좋을 텐데! 형도 관사 말구 아파트로 이사 오시면 안 돼요? 준준 형 파견 가면 우리 같이 밥도 먹구……. 형 너무 말라서 가까이 살면 제가 밥 다 챙겨 줄 수 있는데!”

“주소 불러.”

주노는 여전했다. 안전벨트를 풀어낼 것처럼 몸을 돌려 나를 반기는 주노 덕에, 준준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하긴, 저 말고는 누가 되었건 주노를 내보이고 싶지 않겠지.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같은 의미로 나도 윤오가 사는 곳을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윤오를 택시에 태우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얌전히 내비게이션을 찍어 주었다.

가는 내내 주노가 떠들었고, 방긋방긋 잘도 웃는 녀석과 룸미러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 몰라 난감했다.

“제가 진짜! 꼭 그림 때문이 아니라, 인터뷰 때문도 아니라, 저도 다른 가이드분 만나 뵙는 거 좋아하거든요! 가이드 센터 가면 다 같이 얘기하구, 하소연도 하구,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하소연?”

“아아, 혀엉……. 그럴 수도 있지, 좀 투덜거리는 걸로 뭐라 하기 없기에요. 그쵸, 선이 형? 이런 걸로 뭐라 하면 안 된다, 진짜.”

“…….”

“불만이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당사자한테는 말 못 하는 그런 게 있다구요…….”

윤오도 그런 게 있을까. 나한테는 말 못 하는 일.

대번에 생각이 이어졌다. 끝도 없이 줄줄이. 물론 긍정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도란도란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앞에 두고 나는 기묘한 울렁거림을 느꼈다. 그를 데리러 가는 일이 처음이라 그럴까. 애초에 나는 윤오의 집이나 의무대가 아닌 곳에서 그를 ‘만난’ 일이 없는데…….

가장 처음 시내에서 그를 본 날. 세상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것 같았다. 갈라져 부서지다 그의 앞에서 도로 온전해지는 것 같았다.

서점에서부터 그의 집까지 쫓아갔다. 정신없이 울면서, 그를 놓칠까, 아니면 환영일까, 가까이 가서 말을 걸지도 못하고 멀찍이 뒤를 따랐다.

그게 지금은 미행이고 범죄인 것을 알지만, 그 당시에는 절박하고, 애타고, 밉고, 또 감격스러워서 윤오가 어떻게 여길지는 조금도 고려하지 못했다.

그 여름, 바깥의 그 어떤 풀벌레도 매미도 이길 수 없을 만큼 서러운 울음을 울며 빌라의 정원을 서성거렸고, 그 계단을 올랐다. 세상이 갈라진 자리에서 윤오를 찾아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지은 잘못들은 떠올릴 적마다 나를 지하로 이끌었다. 깊은 흙구덩이에 잠겨 사라지고만 싶었다. 그렇지만 윤오가 있는 한은 살고 싶었다.

때로는 그에게 버림받는 상상만으로도 죽고 싶었고, 그래도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살아 있고 싶었다. 종잡을 수 없는 삶의 미련은 다른 모든 사안과 같이 윤오로 인해 결정이 났다.

“형은 진짜, 선이 형 아니었으면 나랑 같이 못 살았어요. 선이 형한테 잘 좀 해 줘요. 선이 형 밥도 많이 사 주구, 집에도 자주 불러 줘요.”

“그럼 이선이랑 같이 살아.”

“앗, 그래도 돼요?”

“안 돼.”

“치, 그것 봐. 그럴 거면서. 내가 다 알아요. 잘해 주기? 응? 선이 형, 우리 준준이 형이 잘못하면 나한테 다 일러 주세요. 내가 혼내 줄게요!”

의지보단 관성으로 살아가던 준준의 앞에 우연히 나타난 주노. 납치에서 납치로, 도하에서 원국으로. 제 의지라곤 없이 이끌리고 휘둘렸으나, 결국은 준준을 용서하고 품어 준 기적 같은 영혼.

“그때 진짜 무서웠어요. 준준이 형 눈이 새빨갛구, 막 나 노려보구……. 죽는 줄 알았잖아요. 선이 형이 와서 준준이 형 안 때려 줬으면 나 아직도 형 무서워했을 거야.”

준준이 나와 같은 실수를 이어가지 않기를 바라 끼어들었던 그 날을 주노는 곧잘 되새겼다. 정신 나간 준준에게서 연락이 오자마자 득달같이 달려간 날의 기억이 아직 선하다. 불과 6개월 전이기도 하고.

“나 아직도 그때 선이 형이랑 같이 펑펑 울었던 거 생각하면 울컥해요. 너무너무 무서웠는데 용사가 짠! 나타나서 나 구해 준 거 같았어. 그런데 미안하다면서 같이 울어 주니까 진짜, 진짜 더 용사님 같았어.”

“내가 악당이야?”

“응! 형은 악당. 히히.”

주노는 계속해서 준준을 나무라며 나를 치켜세웠다. 크게 공감되지는 않았다. 준준이 그러했듯, 나 역시 윤오를 발견하자마자 가두어 평생을 내 것으로 하고 싶은 욕심에 시달렸기 때문에.

윤오의 집이 가까울수록 심란한 걸 보면 내 병증도 결코 덜하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만으로도 빼앗길 것 같은 불안을 떨칠 수가 없다.

이런 마음을 가진 것만으로 드는 죄책감 역시도.

빌라에서 가까운 곳에 차를 세우게 했다. 미리 연락해 두었으니, 직접 가서 윤오를 데리고 나올 생각이었다. 주노의 주차 실력에 대해 준준이 투덜거리고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다정하게 들렸다. 문득 돌아보았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걸음을 재촉했다.

아무래도 나는 세상의 모든 커플이 부러운 모양이었다. 그렇게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저렇게 애정 어린 사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의 곁에 서로를 놓을 정도는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윤오와.

그를 생각하면 더워지는 가슴팍으로 서글픔 한 조각을 삼켜 넘기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윤오가 있는 층에 내려, 윤오의 집 앞으로 갔다.

그에게 내 세상을 조금이나마 보여 주게 되는 이 순간과 오늘이 무척이나 떨렸다. 두려움인지 설렘인지 알 수 없는 마음이 덜컹덜컹 걸음마다 뒤엉켜 흔들렸다. 매사 미움받는 일부터 걱정하는 고질병이 초인종을 누르는 손을 더디게 했다.

-딩동

잠시 기다린 후 손잡이를 내렸다. 매번 같은 떨림은 그의 공간에 감히 침범하는 쾌감이었다. 고작 이 정도의 허락도 달게 여기는 까닭이었다.

오늘은 그보다 더 웅성거리는 마음으로 한 걸음을 들어가 현관에서 거실을 들여다보았다. 마침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윤오가 의자를 돌렸다.

“……아, 시간.”

“안녕하십니까.”

“잠깐 세수만 좀 해도 되겠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윤오는 내 얼굴과 책장에 놓인 시계를 확인한 다음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마우스 클릭질 몇 번에 창이 하나하나 닫히고 컴퓨터가 꺼졌다. 어두워진 모니터에 잠깐 그의 얼굴이 비쳤다.

멀뚱히 복도에 서서 그가 방 안쪽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처음 보는 옷은 새것처럼 보였고, 캐주얼한 슈트 차림이 그의 널찍한 어깨에 잘 맞아떨어졌다. 시간은 잊었지만 약속을 아예 잊은 건 아니었던 모양으로, 미리 외출복을 갈아입고 일을 하던 중 같았다.

세수를 한다던 윤오가 바로 되돌아 나와서 에어컨을 끄고 다시 들어갔다. 멀지 않은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고, 그때서야 차가운 공기가 드러난 목과 얼굴로 느껴졌다.

윤오와 준준, 주노가 서먹한 인사를 나눴다. 이번에는 자리를 바꾸어 준준의 뒷좌석에 내가 탔다.

모든 게 싫을 준준은 내내 심통했고 낯을 조금도 가리지 않는 주노가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어쩔 수 없이 화제는 공통적 인물로 시작되었고, 윤오의 시선은 줄곧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주노가 조잘조잘 떠드는 이야기 속의 나와 그의 앞에서는 내내 빌빌거리기만 했던 나를 비교해 보는 것처럼.

“와, 멋있으셔서 진짜 깜짝 놀랐어요. 소설가시라고 들었는데, 무슨 모델이 오시는 줄 알았어요. 선이 형이랑두 잘 어울리시구! 선이 형 진짜 엄청 착하죠? 저두 도움 엄청 많이 받았거든요. 우리 준준이 형도 선이 형 아니었으면 저랑 못 만났을 거예요. 진짜 진짜 은인이에요.”

“주노. 앞에 봐.”

“아이, 형은. 나 그래두 학교 다니면서 맨날 운전하는데, 그런 걸로 타박하지 마. 잘하고 있단 말이야.”

옥신거리기 시작한 두 사람을 앞에 두고, 나는 작게 ‘주노는 화가입니다’ 하고 그들이 잊은 간단한 소개를 했다. 주노가 던지는 말마다 내 얼굴을 대조해 보는 그의 시선을 버티지 못한 탓에, 무엇이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귀 밝은 주노가 조그만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대답은 다시 운전석에서 나왔다.

“네! 저 그림 그리거든요. 지금은 원국 아카데미 예술학부에 다니고 있어요. 준준이 형이 보내 줬어요. 다니라고 차도 사 줬는데, 형이 운전 가르쳐 줘 놓고 맨날 잔소리해요.”

“운전이나 해.”

“이거 봐요, 이거 봐. 맨날 잔소리야.”

룸 미러로 방긋방긋 웃다가 준준을 샐쭉 흘긴 주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맨날 선이 형 그리고 싶다구 했거든요. 선이 형 예쁘, 아니 잘생겼으니까.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고 할까요? 저는 초상화 그리는 게 너무너무 좋아요. 선이 형한테 매번 부탁했었는데, 윤오 씨 덕분에 이뤄졌어요! 엄청 설레요!”

준준은 혀 차는 소리를 냈지만 잔뜩 들떠 있는 주노의 말을 가로막지는 않았다. 윤오는 그렇습니까, 하고 정중하게 말을 받아 주었고, 그 시선이 무겁게 나를 훑었다.

다시금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와의 인터뷰를 대가로 주노가 나를 그리게 허락했다는 설명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미 눈치챈 것도 같고.

단풍이 한창인 도로를 가로질러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아파트에 도착했다. 낡은 구 청사를 허문 자리에 새로 지어 올린 아파트인데, 신축에다 꽤 호화로워서 한때는 군이 자금 운영에 헤프고 군인들이 사치스럽다 지탄을 받기도 했다.

기자들은 에두른 말로 고발하듯 군간부의 연봉 수준과 가장 큰 평수의 실내 평면도를 가져다 뉴스로 만들었다. 군비를 아깝게 여기는 여론이 형성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한동안 시끄럽긴 했지만 어차피 금방 들어갈 소리였다. 전쟁이 종식되지 않은 때에 군비를 늘리면 늘렸지 줄일 일은 없고, 이 아파트 역시 어차피 정부 소유에다 군공무원을 우선 입주시킬 뿐인 임대 아파트인 까닭이다.

세 들어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사회는 군인에게 조금 더 높은 잣대를 드밀었다. 어쩌면 군인의 목숨값을 저렴하게 치는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가장 평수가 큰 동의 지하 주차장으로 주노가 차를 몰았다. 주차는 자신이 없다며 주차선 안으로 후진하기 전에 모두 내리게 했고, 준준이 핸들 돌리는 동작을 해 가며 꼼꼼하게 라인을 봐 주었다.

그러고 보면 시내 주행을 못 해서 그렇지 준준은 운전을 잘했다. 다소 빠르고 거칠게.

“좋은…… 사람들입니다. 주노도, 준준도요.”

“그래요.”

가벼운 긍정이 떨어지고, 나는 그와 나란히 서 있는 탓인지, 아니면 일상적인 대화를 한마디 나눈 탓인지 가슴 어귀가 묵직했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그의 시선의 무게 탓인지도 몰랐다.

오는 내내 주노나 준준이 말을 걸 때에만 입을 열었지만, 그 대답들이 뭐가 그렇게 윤오를 흥미롭게 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토록 바라던 시선이 나를 찾을 때마다 의문스러워서, 감히 마주 보질 못했다. 괜히 아랫입술을 잇새로 지그시 물고 더운 숨을 삼켰다.

“형, 나 주차 진짜 많이 늘었지. 그치?”

“퍽이나.”

“아, 뭐야아……. 오늘은 두 번 만에 넣었잖아.”

“……흠.”

“선이 형! 윤오 씨! 올라가요! 카나페 준비해 놨어요. 커피도 오늘 사 왔구! 제가 맛있게 내려 드릴게요. 저녁이긴 한데, 윤오 씨도 커피 드시죠?”

“네.”

가요, 하고 주노가 자연스럽게 내게 팔짱을 꼈다.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지만, 오늘은 윤오가 보고 있었다. 이끌려 가며 스치는 윤오의 시선이 뒷머리를 긁는 듯했다. 내가 그를 등지는 일이 이전에도 있었던가? 처음 같았다.

주노가 아침나절부터 준비했다는 카나페는 요 며칠 습한 날씨 덕에 이미 눅눅해져 있었다. 주노는 버려야겠다며 울상을 했고, 준준은 다른 먹거리를 사 오겠다고 나섰다가 금방 되돌아와 주노를 데리고 갔다.

난데없이 남의 집에 둘만 남은 상황에서, 나는 집주인이 아니라 윤오의 눈치를 보았다. 불편해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불편한 것은 나 혼자인 것 같았다. 윤오는 태연했고, 드문드문 거실을 둘러보거나 주노가 그린 그림을 한참 보았다.

그가 머그를 들어 커피를 마시면 그때마다 나도 홀짝홀짝 입을 축였다. 주노가 아카데미 근처에서 유명한 원두를 사 왔다는데 맛에 민감하지 않고 커피를 즐기지도 않는 나는 특별히 다른 점을 알 수 없었다.

주노가 과제로 그렸다는 그림. 원국 아카데미…….

그러고 보면 윤오도 원국 아카데미를 다녔다. 건축학부.

찾아보기로 구 건축학부의 위치는 내가 5년간 살았던 남부의 연구동에서 멀지 않은, 상당히 가까운 지역이었다. 시기도 어느 정도 겹쳤다.

각종 아카데미로 유명한 원국인 만큼 커다란 부지가 장점이었다지만, 윤오가 졸업하기 전에 쑥대밭이 되었고.

거기까지 알아봤을 때, 윤오가 당시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은 것을 다행스러워하며, 동시에 만약,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키비슈스에게만 매달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다른 에스퍼들처럼 외출을 해 봤더라면 연구동과 구 건축학부 캠퍼스가 있는 도시가 가까우니 들렀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윤오를 더 일찍 만났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착각을 담은 가정.

쓸모없는 생각을 도리질로 쫓아 버렸다. 때마침 모바일이 울려 확인하니 데리다의 전화였다.

“부관입니다. 잠시 받고 오겠습니다.”

“그냥 여기서 받으세요.”

“네? ……네.”

어정쩡하게 선 자세 그대로 머뭇거리던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모바일을 눌렀다. 곧장 ‘데리다입니다.’ 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래. 무슨 일이야?”

- 예. 신청하신 국경 파견이 허가 났습니다. 원국 북부와 아우도바 각 최소 1주 작전입니다. 출발은 20일, 오전 6시, 북부. 20일, 오후 21시, 아우도바입니다. 원하는 지역을 골라 주시면 오늘 바로 승인 절차 들어가겠습니다.

“원국 북부에 준준이 가던가?”

- 네. 준장님이 가십니다.

“그럼 북부로.”

작게 타자를 두들기는 소리가 나고, ‘알겠습니다.’ 하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준준이 북부로 가면 서부 아우도바는 데이가 가려나.

그나저나 데리다는 아직도 퇴근을 안 했나 보았다. 내가 준준처럼 부관에게 서류 작업을 떠넘기는 것도 아닌데. 아무래도 접견과 대기 리스트에 관한 일이 부수적으로 많은 탓인가.

일하겠다는 것을 말릴 방법이 없으니, 추가 근무 수당을 제대로 지급하는 정도가 그나마 상관으로서 해 줄 있는 일이다.

다른 연락이 들어온 게 없는지 확인하고 모바일을 집어넣었다.

“북부. 또 파견입니까?”

“예. 1주 정도 소요되는 작전입니다.”

“언제 출발합니까?”

“다음 주 월요일입니다.”

시간까지 말해 줄 필요가 있을까,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윤오는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그리고 화제가 바뀌었다.

“이능 장교 계급으로 중령은 얼마나 높습니까?”

“네? 계급 말씀이십니까?”

“준장보다 높은 계급까지 진급이 가능합니까?”

“아.”

소파에 편히 기대앉은 윤오 대신 자세를 굳힌 나는 찬찬히 머릿속으로 정보를 정리했다. 아직 남은 사람과 중앙에 있는 사람을 셈해 보니 알고 있던 것보다 인원수가 적었다.

“현재는 준장이 최대이지만, 특진하게 될 경우에는 소장까지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준장은 데이와 준준 두 사람이 있고, 둘 모두 중앙 소속입니다. 바로 아래 대령이 둘, 중령이 여섯 현재 근무 중이고, 그 중 중앙 소속은 대령 하나, 중령 하나입니다.”

“그 중령이 이선 씨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높군요.”

높다는 말이 칭찬은 아닐 것이고. 나는 그 말이 내 직위에 대한 비아냥이나 군을 향한 조롱인가 잠시 고민해 보았다. 이능 장교의 허울 같은 계급에 대한 조롱은 숱하게 들었다. 윤오가 그런 의미로 이야기한 걸까. 아니면 순수하게 높다는 감상인가.

“가이드와 에스퍼가 동거하는 경우가 많습니까?”

“……아니요. 많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가이드를 가진…… 가이드가 있는 에스퍼의 수가 적은데다가, 에스퍼는 가이드를 강제할 수 없도록 준칙이 갖춰져 있습니다. 어길 경우 최대 강제 제대까지 처벌이 가능합니다.”

“에스퍼도 제대가 있습니까?”

“……예.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입은 경우, 폭주를 감당할 수 없는 경우에는 절차를 따르게 됩니다.”

더는 말하기가 꺼려졌다. 가이드를 강제하는 일, 윤오의 집을 찾아가 당황하는 당신을 끌어안고, 벗어나려는 당신의 팔을 쥐어 부러뜨린 날. 그리고 내 이능을 사용해 멋대로 그 골절을 내게로 옮긴 때. 부러진 팔이 순식간에 낫고, 그 자리를 붙잡은 내 팔이 곧장 꺾어지던 그때.

그 기괴한 상황에 윤오가 지은 표정과 그 틈에 무방비해진 당신의 품을 파고들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기 때문에.

내 잘못을 그대로 고백하는 꼴이다. 그 정도의 일로 제대 처분이 내려지지는 않지만 내가 그를 강제로 폭행한 사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처벌을 감수하겠다 빌었고, 윤오는 그마저도 싫으니 꺼지라고 했다.

아직도 빌고, 앞으로도 영영 빌 수밖에 없는 죄인임에도, 어느 한구석으로는 염치없이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도 폭주를 앞둬 본 일이 있다고. 그런데 당신 덕에 살아 있다고. 무척이나 구차한 애걸로 그가 표정이라도 바꿔 준다면, 내게는 또 기쁠 일이었다.

윤오는 눈을 맞추지 못하는 내 침묵을 잠깐 기다린 다음, 이내 내 망설임을 부수었다.

“민간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관리동으로……. 에스퍼 관리동으로 갑니다.”

“에스퍼 관리동에서는 무슨 관리를 합니까.”

깜빡, 깜빡…….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뜬 나는, 군이 그곳에서 에스퍼를 어떻게 다루는지 떠올렸다. 살아 내나, 그러지 않나 가늠하는 일? 말고는 무얼 하더라.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폭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심하면 죽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네. 그렇습니다.”

“방치한다는 뜻입니까.”

뇌를 절여 놓은 마취가 풀리자마자 무릎을 벌벌 떨던 바차스가 떠올랐다. 자리에 앉지 못하고, 스스로 씹어 삼키지 못해서 콧줄을 달아 놓은 창백한 낯빛이 떠올랐고, 올해 벌써 두 번을 관리동에 들어갔다 나온 것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이번에 들어가게 되면 다시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지근거리는 확신이 들었다.

갑갑한 가슴팍을 잠시 두드리고 말이 되지 못한 대답을 끄덕거렸다. 그렇지만 항상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에스퍼의 폭주에 따른 여파가 주변에 해를 끼치지 않게 하려 마련한 장소이기도 했고, 미약한 수준에서는 가이드를 보내 가이딩을 시키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 장소는…….

윤오가 나를, 에스퍼들을 불쌍하게 여겨 줄 것인지 궁금했지만, 그렇게 관리동으로 들어가 관으로 나온 옛 동료들의 낯이 먼저 떠올랐다. 꾸욱, 가슴팍이 더욱 눌리고 더운 숨이 탄식처럼 새었다. 몇 명이나, 몇 번이나 그렇게 갔더라. 중앙으로 오고서 4년 동안 본 것만도…….

“이쪽으로.”

“……네?”

터트린 숨을 느리게 갈무리하며 겨우 올려다본 윤오가 일렁거렸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이 뻗어져 있었다. 내게로.

나는 그 손이 그대로 허공에 있는 것이 못내 안타까워 홀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작 두 걸음이면 다가갈 수 있는 거리를 서너 번이나 주저했다.

그 길고도 짧은 시간 동안 윤오는 손을 물리지 않았고, 내가 얼룩진 왼손을 들어 조심히 그의 손바닥에 안겼을 때, 휙 당겨 그의 옆에 나를 앉혔다. 아주 센 힘은 아니었지만 나는 늘 그의 앞에서 간단히 휘청거렸다.

“에스퍼 관리동에 들어가 본 적이 있습니까?”

있다.

당신이 없을 때 두 번. 당신을 만나고 한 번.

* * *

“두 분 참 보기 좋아요. 히히.”

두 사람은 아무래도 베이커리를 털어 온 모양이었다. 준준이 든 재생지 종이 가방 여러 개에서 끝도 없이 빵이며 과자가 튀어나왔다. 그중에서 몇 가지를 내 앞에 밀어 주며 주노는, ‘이게 쌀로 만들어서 소화가 잘된대요.’ 했다.

자리를 비운 새 윤오의 옆자리로 가 앉은 나를 보고 주노는 연신 벙긋벙긋 웃었다. 머그를 옮겨 주고 과자를 쥐여 주면서도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는지 몰랐지만, 주는 것들은 넙죽넙죽 건네받았다. 윤오의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오른손이 다 받아 들지 못한 것들은 차례로 무릎 위에 쌓였다. 준준이 말릴 때까지.

“히히.”

“그래서 인터뷰는?”

준준은 주노가 울적해 해도, 기분 좋아 웃어도 언짢은 듯, 퉁명한 말투로 목적을 상기시켰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리 경계 태세인 파동이 느껴졌다. 살갑고 친화적인 주노와 다르게.

주노는 좋은 사람이고 윤오와 그의 요청을 달갑게 받아 줘서 고맙지만, 나 역시 그 호감에 괜히 비쭉 마음 어귀가 모나게 굴고 있기는 했다. 윤오의 관심을 받는 것은 물론 윤오를 향한 모든 관심이 내 시기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심지어 불퉁한 준준에게까지도.

그렇지만 보통 때보다 까칠하게 구는 준준더러 뭐라고 할 마음도, 주노가 윤오까지 그리고 싶다고 말하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도 입 밖을 나서지는 못했다. 무엇도 왼손을 덥히는 온기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곁에 앉아,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이 순간이 가슴속에 벅차올랐다. 차가운 계절이 오면 곧잘 쓰러져 의무대 신세를 지는 내 사정을 알고 있는 두 사람 앞에서, 나도 가이드가 있음을, 내 가이드가 있음을 당당히 공표하는 기분이 들었다.

항상 안쓰러움 섞인 눈길로 나를 보던 주노의 시선이 지금은 그저 즐거워 보인다. 아니면 내가 기뻐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무릎에 올라온 과자들을 하나씩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나는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죽였다. 기쁨도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될 일이기에.

윤오는 준준의 채근에 질문을 꺼내기는 했는데, 대체로 에스퍼에 대한 무난한 질문이었다. 내게 했어도 괜찮았을 이능 전투에 관한 점을 물을 때는 저절로 의아해졌다.

내가 전투계가 아니라 그런가. 내 말엔 신뢰가 없나. 나름 유명한 에스퍼인 준준이 궁금했던 걸까. 그의 계급이 더 높아서? 질투가 스멀댔다.

“파견은 반란군을 상대하는 일입니까?”

“엘로란타 새끼들 아니면 변이체 죽이지. 뭐 별게 있다고.”

“형! 욕하지 마요!”

“하……. 시……. 알았어. 눈 똑바로 떠.”

“말 예쁘게 해야 해. 알았죠?”

“사람 죽이고 사람 같은 거 죽이는 일을 뭐 어떻게 더 예쁘게 말하라고.”

“그래두…….”

기가 죽은 주노를 두고 준준은 쩔쩔매다가 알았어, 알았어, 했다. 곧장 색깔이 예쁜 마카롱이 공중에 여러 개 떠올라 주노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꼭 갓난쟁이 머리 위에 드리운 모빌 같았다.

그 짧은 사이 눈물이 고인 주노가 마카롱 모빌을 보고, 아니면 준준의 재롱을 보고 다시 웃음을 되찾았는데,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가 마치 비 내린 숲 같았다. 괴물 준준을 가둔 숲.

“거, 요즘은 방어 작전 아니면 토벌 작전을 갑니다. 뭐든 하는 일은 비슷하고.”

“지금 사용하시는 이능에 대해서 여쭤도 괜찮습니까? 염동력으로 보이는데.”

“이선이가 말 안 해 줬나? 염동력 맞습니다.”

준준이 나를 턱짓하는 것이 이미 전부 다 말한 줄 알았다는 모양새였지만, 사실은 생각보다 우리의 인터뷰는 침묵이 잦았다. 조바심을 내는 나와 다르게 윤오는 생각을 정리하는 데 시간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은 계속 잡아 주었으므로 나는 가만히 그 정적과 아쉬운 욕심을 견뎠다. 준준이 윤오에게 던지는 까칠한 말을 참아 내는 지금처럼.

“사용하실 때 불편함은 없습니까?”

“쓸 때마다 좀 짜증 나기는 하는데. 뭐, 괜찮습니다. 익숙하고.”

“자세히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하.”

눈썹을 비틀며 준준이 귀찮음과 짜증을 드러내 보였다. 덩달아 내 눈썹도 튀었고.

내가 지적하기 전에 주노가 먼저 나서서 놈의 허벅지를 때렸다. 준준은 윤오의 편을 드는 주노를 보고 더욱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결과는 빤했다. 싸움이 성사되지 않는 일방적인 관계는 다시 빙글빙글 색깔 마카롱이 공중에서 재주를 부리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엔 괘씸해서, 조금 앞으로 나섰던 상체를 다시 제자리로 되돌리며 준준의 파동을 건드렸다.

투두둑, 여태껏 날고 있던 마카롱들이 바닥에 떨어지고 준준이 내 쪽을 흘겼다.

“알았다. 인마. 그만해.”

“말조심해.”

“맞아. 형 자꾸 말 험하게 하면 나 작업 다 학교에서 하고 올 거야.”

“안 돼.”

주노의 협박을 단호히 잘라 낸 준준이 순순히 부작용들을 나열했다. 발열, 발진, 점상 출혈, 수포…….

지금처럼 조금 쓰는 정도는 피부가 따가운 수준에서 그쳤지만, 무리하게 사용하면 준준의 피부는 바로 벌겋게 일어나 그대로 곪아 버렸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준준의 군복이 늘 묵직했으니까. 피와 고름으로 상시 얼룩진 그 등에서 피 냄새가 가시는 날도 없었고.

“그 부작용은 사람마다 다른 겁니까?”

“다르지.”

준준에게 물어보고 준준이 대답했지만, 이상하게 시선들은 다 내게 몰려들었다. 윤오의 감정을 알 수 없는 시선과 준준의 여태 말 안 하고 뭐 했냐는 시선, 그리고 안타까워하는 주노의 시선.

세 가지 시선이 이 자리에 있는 또 하나의 에스퍼는 어떤 부작용이 있느냐 대답을 요구했다.

“저는…….”

청문회에서도 이렇게 긴장한 일이 없는데.

가장 버거운 시선을 비껴 피하며 말문을 떼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내 결점을 드러내는 일은 꺼려졌다.

“제 이능은 각기 부작용이 다릅니다. 여러 종류의 이능을 가진 경우는 대개가 그렇습니다.”

꿀꺽 긴장을 삼켰다. 조금은 달갑고, 남은 만큼은 두려웠다. 동정을 바라는 보잘것없는 심정이 설레어했고, 형편없는 내 모습을 그가 더 알아 버리는 것이 무서웠다.

“……이능을 제어하는 능력은 정도를 조절할 수는 있지만 상시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순환기 질환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혈액 순환 장애가 있고, 자율 신경계 불균형에 따른 현기증, 오심, 구토, 실신…… 정도가 있습니다.”

“선이 형…….”

“상처 치환은 개념 이능입니다. 개념 이능은 그 기전이 보통의 이능력보다도 모순에 가까운 이능을 말합니다.”

마른 입술을 축이고 싶었지만 모여든 시선 중 윤오의 것이 무겁고 주노의 것이 부담스러워 그냥 혀로 핥아 버석함만 가라앉혔다. 기이한 집중 속에서 구태여 설명한 일이 없는 내 부작용이 이어 흘러나왔다.

“말은 치환이지만 실제로는 높은 수준의 회복 이능이며, 같은 자리에 제가 입게 되는 상처 자체가 반작용입니다. 회복 정도에 비례해 약 3할에서 7할 수준으로 같은 자리의 세포가 파열됩니다.”

내 이능을 숱하게 본 준준도 처음 듣는 원리일 것이다. 대상이 된 적이 없으니 관심도 없을 테지. 윤오는 그 기이한 작용을 겪고서 나를 끔찍해 했고, 주노는 처음 듣는 내용에 눈물지었다.

“선이 형, 그러면 다른 사람을 낫게 해 주고 선이 형이 다치는…… 거예요?”

방문할 때마다 내게 내어 주는 주황색 머그와 그 안의 식어 버린 액체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붙든 손을 힘주어 잡는 윤오의 손길이 다음 말을 재촉하는 것 같아 다시 입을 뗐다.

“주로 중상을 경감 시켜 응급한 인재를 살리는 데 쓰입니다. 감염이나 질병 종류는 불가능하고 외상만 치료 가능합니다. 중상자 하나보다는 경상자 둘의 치료가 경과가 좋습니다.”

“선이 형…….”

“거부할 수 있습니까?”

그 말에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흘린 준준을 노려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임무니까요.”

“…….”

말이 없어진 윤오를 살짝 올려다보았는데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얼른 다시 고개를 숙이고 머그든 과자든 집으려 했지만 손끝이 떨렸다. 대신 주먹 쥐어 무릎에 얹었다.

윤오는 잠깐 침묵했다가 다른 질문을 꺼냈다.

“‘사람’이나 ‘사람 같은 것’을 죽인다고 하셨는데, 그게 ‘변이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변이체에 대해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무릎 위와 윤오의 손바닥 안에서 양손이 겁에 질렸다. 순식간에 식은 피로 그의 손이 더욱 뜨겁게 느껴졌다. 가슴이 내려앉고 상황이 어찔했다.

미루던 순간이 드디어 와 버린 탓이다. 부러 그가 묻기까지 말하지 않았던 우리의 전장과 그 상대. 내가 살인자이자 살해자인 것을 시인해야 할 때.

내게 참전했냐 물어본 다음부터 전쟁에 대해 묻지 않은 윤오다. 지금껏 궁금해하지 않은 것이 외려 이상할 만큼, 언제든 올 것이라 예상하고, 피해 온 질문이었다. 군인과 에스퍼를 다루면서 어떻게 전장을 빼놓을 수 있을까.

준준은 내게 눈치를 주었고, 나는 기계처럼 꺾어지는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깍지 낀 윤오의 손을 뒤집어 드러난 손등을 손끝으로 두들겼다. 세 번. 그리고 세 번 더.

“주노, 너는 들어가 있어.”

“싫어. 나도 들을 거예요. 알고 싶어, 형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언제부턴가 주노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게 못마땅한 준준이 손등으로 닦아 내도 주르륵 동그란 턱을 타고 흘렀다. 제 일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서러울까.

“변이체는…….”

“변이체는 돌연변이 에스퍼라 볼 수 있는데, 에스퍼가 되기엔 좀 모자란 것들이 이끌리는 곳이 있습니다. 이능의 근원을 ‘파동’이라고 하면, 그런 ‘파동’을 생성하는 특이 지역. 그 지역을 찾아내서 통제하고 없애는 게 군이, 뭐 주로 이능 장교들이 하는 일입니다.”

준준의 무심한 배려가 내 말을 끊었다. 놈 치고는 자세하고 상냥한 설명을 들으며 벌렁거리는 심장을 다독였다. 윤오의 눈치를 보고 싶었으나, 차마 고개가 돌아가지 않아 그의 손만 쥐었다.

“거기 휘말리면 뒤지, 죽거나 변이체가 됩니다. 동물, 곤충, 때로 식물도 있고.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었던 것이거나.”

“사람이었던 것.”

“실제로 보면 사람이란 생각이 별로 안 드는데, 그건 내 생각일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이거나 저거나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죽입니다. 실제 사람이 아니니 반란군을 상대할 때보다는 편하다고 할까. 지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까다로울 때도 있습니다.”

부루퉁한 시선이 창백하게 질린 내 낯을 한심하게 보았다가 제 자리처럼 주노에게로 옮겨 갔다.

“주노. 듣고 싶다고 했으면 똑바로 들어.”

“흐으……. 그래두…….”

준준은 우느라 둥글게 말린 주노를 달랑 들어 무릎에 올리고 등을 토닥였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왜인지 구멍 난 것처럼 공허했다. 윤오를 바로 옆에 두고도 오한이 들어 떨리는 입술을 입 안에 말아 넣었다.

‘민간인’에다 이성적인 윤오. 그는 주노와 다르게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식’의 높은 턱에서 나는 틀림없이 어긋나 있을 것이고 그와 나의 세상은…….

톡톡, 원인을 알 수 없는 젖은 상념에서 깨었다. 내려다보니, 이번에는 윤오가 내 손등을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덜컹 속이 흔들렸다.

온기 어린 손이 내 턱을 치켜들어 그와 눈이 마주치게 놓았다.

바들거리는 눈가가 대번에 흐려졌다. 지레 걱정을 돋워 윤오의 시선을 뒤적였다. 눈을 깜빡 감았다 떠도 그 눈동자는 한결같이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내 안을 깊이 파고들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는 그 시선에서 혐오는 찾을 수 없었다.

“씨발. 왜 이렇게 안 나와.”

“이제 겨우 10분 지났어. 앉아.”

“하.”

말로는 준준을 말리고 있지만 나 역시도 걷잡을 수 없는 불안에 속이 내내 술렁거렸다. 초마다 닫힌 방문과 시계를 번갈아 확인하고 손끝을 뜯었다. 30분이 이렇게 길었나.

“가이드 센터를 가지, 왜 여기로 데려왔냐. 이, 십팔.”

“…….”

분노를 털어 내느라 머리를 휘젓는 준준에게, 이번에는 대답도, 욕설에 대한 지적도 할 수 없었다. 상상만으로 목이 메어서.

가이드 센터.

윤오는 다른 가이드를 만나고 싶다고 했고, 가이드 센터와 견학에 대한 이야기를 벌써 몇 번이나 꺼냈다. 그때마다 나는 그 말이 너무 두려워 가타부타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입만 벙긋거리고 눈만 깜빡이다 보면 한숨을 쉰 윤오가 질문을 바꿨다. 한숨도 아팠지만 그를 잃는 상상보다는 나았다.

나는 윤오를 숨기고 싶었다. 그가 내게만 가이드이기를 바랐다. 가능하면 모든 것에서, 세상에서 감추고 싶었다. 영영 내 곁에 있어 주기를, 다른 누군가의 손을 잡는 일은 없기를 바랐다.

가이드 테스트 따위는 필요 없다. 그는 내 가이드이고, 다른 누군가와 매칭률을 맞출 수치가 나오는 것조차도 나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까 가이드 센터는 아직 갈 수 없다. 못 들은 척 미루고, 또 미뤄서 내 불안이 잠잠해지는 날이 오면 가능할까. 그런 날이 오긴 할까. 윤오가 반드시 가야겠다면, 그렇다면 그때는 어쩔 수가 없겠지만…….

“안 되겠다. 저 새끼 죽여야겠다.”

“뭐?”

절절 끓는 목소리에 내 감각이 온통 쭈뼛 섰다. 대번에 노려보니 준준도 만만찮게 벌건 눈으로 받아쳤다.

“주노한테 물어볼 게 있는데 왜 내 앞에서는 못 해. 씨팔, 안에서 무슨 짓 하는지 어떻게 알아. 저놈 새끼가 왜 굳이 주노랑만 얘기하겠다고 하는데? 지금 시간이 한참인데 왜 안 나와, 썅.”

“그런 사람 아니니까. 입 닥치고 앉아. 그 이상 말 함부로 하면 가만 안 둬.”

“허, 씨발. 니가 뭘 어쩔 건데.”

준준은 불안을 분노로 풀었다. 제지하려는 내게 시비를 걸어 그 분노를 해소하려고 했다. 욕설은 다만 욕설이고 그 분노는 불안의 다른 모습이다.

……알지만 그가 고른 말, 윤오를 죽이겠다는 그 말은 나의 불안 역시 분노로 바꾸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속이 싸늘하게 식었다.

“입 닥치라고 했어.”

“내가 저 새끼 죽이면, 뭐. 너도 주노 죽이게? 그럴 수나 있어?”

“나까지 죽일 생각으로 말해.”

“안 될 건 뭐야. 어차피 저 새끼 뒤지면 너도 뒤질 거. 쌍으로 찢어 줘?”

거실의 공기가 흉포하고 냉랭했다. 윤오가 떠난 자리에 말뚝처럼 박혀 있던 몸을 일으켰다. 사나운 파장이 얽히고, 난폭한 기류를 사이에 둔 서로의 분노가 마주 타올랐다.

그 순간, 두 사람이 들어간 방에서 주노의 밝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준준과 내 고개가 곧장 돌아가고, 나를 위협하던 커다란 덩치가 몸을 틀었다.

“거기 서.”

“지랄.”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 준준의 어깨를 붙잡았다. 돌려세우려고 했으나, 아무리 파동을 깎아 내고 조여도 기본적인 완력의 차이가 역력해서 멈춰 세우는 데 그쳤다.

“삼십 분만 참아.”

“싫은데. 삼십 분 동안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저 새끼 좆이라도 빨…….”

퍽. 형편없는 말이 마무리 지어지기 전에 놈의 턱을 갈겼다. 이성을 차리기를 바란 시도가 무색하게 등껍질같이 커다란 손바닥이 내게로 덮쳐 왔다.

목을 틀어쥐려는 손을 쳐 내고 다시 준준의 뺨을 때렸다. 내 주먹 따위는 가소롭다는 듯, 때릴 테면 때려 보라는 낯짝이 막을 생각도, 피할 생각도 없이 들이밀어졌다.

“다 했냐? 더 해 봐 새끼야.”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점점 맛이 갔다. 맞아 비틀린 고개를 바로 세운 놈이 붉어진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보란 듯이 내게서 등을 돌렸다.

곧장 파동을 끌어올려 놈의 이능을 최저로 줄이고 체중을 모두 실어 부엌으로 넘어뜨렸다. 그 와중에 나도 한 대를 얻어맞아 코피가 터졌다. 타고 누른 준준의 얼굴에 뚝뚝 굵은 피가 떨어졌다.

놈은 염동력을 쓰지 못하게 되어도 개의치 않고 나를 집어 던졌다. 맥없이 날아가 식탁에 부딪혀 쓰러졌다. 신음을 삼키고 자세를 바로잡으니 준준 역시 일어나 식탁 의자를 맨손으로 부쉈다.

내 피로 얼굴을 적시고 부러진 의자 다리를 손에 쥔 놈은 군인이라기보다는 폭도 같았다. 다분히 험상궂었으나 나 역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 15분. 이놈이 부엌을 벗어나게 두지 않을 작정이다.

“넌 나한테 안 돼.”

“알아.”

“그럼 꺼져.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 든 거 내려놔.”

비웃음 같은 한숨을 내쉰 준준이 한 걸음 부쩍 다가와 의자 다리로 식탁을 내리쳤다. 콰직, 두꺼운 원목 식탁 한가운데가 움푹 파이고 내리친 의자 다리도 꺾어졌다. 손잡이만큼을 남긴 의자 다리가 칼처럼 뾰족했다.

제어에 반항하는 놈의 파동을 차분히 억누르며 입 안에 고인 피를 삼켰다. 던져질 때 잘못 씹어 볼 안쪽이 너덜거렸다. 거기다 양쪽 코 안이 모두 터졌는지 코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짧게 숨을 고르고 다시 안쪽 복도를 등졌다. 파동 없이도 흉흉한 기세의 준준이 비키라고 턱짓했다.

범위는 전방, 제어 정도는…….

“형! 선이 형!”

벌컥, 등 뒤로 문이 열렸다. 비명처럼 소리를 지른 주노가 그대로 준준에게 달려가 커다란 가슴팍을 퍽퍽 내리쳤다.

“뭐 하는 짓이야! 이게 무슨 일이야! 선이 형 때렸지! 선이 형을 왜 때려! 형이 깡패야?!”

긴장의 끈이 풀어지며, 탁, 밭은 숨이 터져 나왔다. 가슴을 숙여 통증을 덜어 내면서도 준준을 노려보았는데, 놈은 턱없이 약한 주노의 주먹질에 주춤주춤 싱크대로 밀려났다. 뾰족하게 찢긴 나무토막이 주노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바닥을 한 번 튀었다.

악을 쓰던 주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준준을 때리던 손이며 몸이 커다란 준준의 품에 갇혀 꼼짝도 못 했다. 엉엉, 아이처럼 목 놓아 우는데, 몸을 비틀어도 놓아주지 않으니 울음소리만 점점 더 커졌다.

“괜찮습니까?”

“……네.”

“이쪽 보고.”

얼른 소매를 당겨 엉망일 얼굴을 닦아 냈다. 급하게 쓸어 내는 바람에 멎어 가던 코피가 다시 터져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벌겋게 물든 소매로 다급하게 코를 틀어막았다. 모로 돌린 고개를 커다란 손이 들어 올렸다가, 기도를 타고 넘어온 코피에 컥 하는 소리를 내자 다시 숙이게 했다.

이번에는 윤오의 얼굴이 내려와 내 안색을 살폈다. 준준의 두꺼운 손아귀에 얻어맞은 뺨을 기다란 손가락이 훑었다. 벌써 멍이 든 것처럼 아렸다.

“이게 괜찮다고.”

“……괜찮습니다.”

주노의 울음소리가 커다란데, 쯧, 하고 윤오의 혀 차는 소리가 더 크게 고막을 울렸다. 손바닥 아래로 웅얼거린 대답이 그가 원한 것과 다른 모양이다.

욱신한 등판을 넘어 가슴이 뜨끔 울리고, 미지근한 피가 손날을 타고 흘러 팔꿈치까지 적셨다.

고작 주노의 타격에 비틀거리던 준준을 비웃은 것이 무색하게, 윤오에게 잡힌 손목이 가뿐히 떨어져 나갔다. 벌겋게 피가 번졌을 흉한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턱이 잡혀 고개를 숙이지도 못한 채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조금 더 강했다면 준준을 더 쉽게 제압했을 텐데. 내 이능은 모순이 강한 이능에는 유리했지만, 순수 물리력을 행사하는 놈에게는 힘을 쓰지 못했다. 에스퍼고 뭐고, 내가 무척이나 약해 빠진 것 같이 느껴졌다.

이렇게 스스로 쓸모없음을 절감하는 일은 언제나 윤오의 시선을 동반했다. 나는 그의 눈앞에서 구겨진 종잇조각처럼 비참하고 버림받아 마땅한 쓰레기가 되었다.

“눈 떠요.”

어둠과 절망에 젖어 무거운 속눈썹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윤오는 내 왼쪽 눈꺼풀을 위아래로 당겨 가며 살폈다. 그것이 마치 마음 써 주는 것 같고 걱정해 주는 것 같아서 금세 눈물이 고였다.

“왜 울어요. 많이 아픕니까?”

나를 울리는 건 당신인데.

아프지 않다고 대답하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흐른 피가 스며들었다. 내 뒤통수를 눌러 조금 숙이게 한 윤오가 주변을 휘 둘러 살피곤 나를 이끌었다.

“선이 형 운다잖아! 형이 뭔데 선이 형을 때려! 왜 사람을 때려!”

“주노.”

뒤로 울분을 토하는 주노와 억울함 가득한 준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주노와 준준을 소개해 주겠다는 계획이 엉망진창으로 끝났다. 모든 게 준준 탓인 것 같았다가, 결국은 또 내 잘못 같았다. 고작 30분도 지켜 내지 못한 내가 싫었다. 자괴감이 속을 물들였다.

윤오는 낯선 집에서도 단번에 욕실을 찾아 들어가 세면대 앞에 나를 세웠다. 피에 젖은 흰 셔츠와 그보다 더 엉망으로 흉한 내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멀뚱히 선 나 대신 윤오가 세면대에 물을 틀었다. 벌겋게 얼룩진 손을 당겨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 밀어 넣고 소매를 걷어 주었다. 방울방울 끊임없이 떨어지는 핏방울에 한참 동안 물이 붉었다.

“씻겨 줘야 합니까?”

“아, 닙니다.”

그쯤 정신이 든 나는 서둘러 눈을 깜빡여 짠 눈물을 두어 방울 마저 물줄기에 떨어트렸다. 아릴만큼 차가운 물을 연거푸 끼얹어도 코피가 멎지 않았다. 자꾸만 번지는 핏물을 내려다보는데 윤오가 수납장을 열어 수건을 가져왔다.

“손 떼고.”

그리고 내 목덜미와 아린 코를 쥐어 잡았다. 꽉 누르는 손길에 숨이 막혀 헐떡거렸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지혈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더 걸렸다. 그와의 접촉에서 무심해지지 못하는 가슴이 두근거린 까닭이다.

목덜미를 주물리며 콧등이 눌리는 동안, 때늦은 충격에 잠시 현기증이 일었다.

순환 기능이 떨어지다 보니 출혈과 머리 타격은 어쩔 수 없는 약점이다. 세면대를 양손으로 잡아도 휘청이는 몸을 윤오의 손이 넘어지지 않게 받쳤다.

점차 어둠이 가시고 시야가 갤 때, 서서히 상체를 들어 올리다 거울 속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멀건 데다 피멍이 올라오기 시작한 왼쪽 얼굴이 형편없었지만, 윤오의 팔에 갇혀 퍽 기쁜 눈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

“준준 씨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 말에 왜 또 내 가슴은 덜컹덜컹 떨었을까. 퍽 감동에 절어 금세 눈이 젖었다. 그가 내 곁에 서서 나를 걱정해 주는 것 같았다. 내 편을 들어주고 내 말을 믿어 줄 것 같았다. 어쩌면 내 아픔을 공감해 주고 어쩌면 나를 미워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어쩌면 아직 내게도…….

“자꾸 그러면 나 오늘 집에 안 들어올 거야.”

“안 돼.”

“왜 안 되는데? 형 아직도 나 가둬? 데려다만 주고 오겠다잖아.”

“너 지금 운전하지 마.”

“그럼 누가 하는데!”

아직도 울음으로 헐떡이면서 빽 소리 지른 주노에게, 윤오가 나직이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말뿐 아니라 앞으로 나서려 하기에, 나는 그를 가로 막고 서서 고개를 저었다. 준준의 파동이 아직 위험하다.

윤오와 나를 데려다주고 오겠다는 주노의 말에 반대하고, 혼자 집에 있으라는 말에 반대하고, 들어오지 않겠다는 말에도 반대하고, 아직도 가두냐는 질문에는 부정하지 못한 준준이 현관을 가로막았다.

“씨팔, 아무튼 안 돼.”

“왜 나한테 욕 해? 형이 잘못했잖아!”

여전히 굵은 눈물을 흘리며 들썩이는 주노를 붙잡고, 밀쳐지고, 다시 붙잡기를 반복했다. 벌건 시선이 때때로 나와 윤오를 노려보고, 다시 주노에게로 돌아갔다. 탓하고 분풀이할 상대를 찾는 눈이었지만, 주노 앞에서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럼 나도 가.”

“형은 오지 마. 고작 삼십 분을 못 참아서 선이 형 때리고. 나 지금 형 보기 싫어.”

“주노. 내가 더 많이 맞았어.”

“형은, 형은 형이잖아!”

커다란 덩저리가 조그만 주노를 붙들고 억울하다는 듯 그르릉거렸다.

미약한 두통을 달고 벌건 수건에서 코를 떼어 냈다. 계속해서 현관을 살피며, 나는 그저 상황이 끝나기만을 바랐다.

이 엉망진창인 곳에서 윤오를 벗어나게 해 주고 싶었다. 돌아 버린 준준이 무슨 짓하지 못하게 윤오를 등 뒤에 세웠으나, 사실은 우리를 주노의 작은 등 뒤에 숨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형편없고 무용한 스스로를 인정해야 했다. 나로서는 그를 제대로 지킬 수 없다. 에스퍼고 뭐고 간에 거칠어진 준준을 막을 수 있는 건 지금 주노밖에 없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놈에게 주노를 던져 놓고 윤오를 데리고 나서고 싶었다. 길목을 막지만 않았어도.

주노는 같은 말을 몇 번씩 반복하며 놈을 탓하고 울었다. 가소로운 주먹질과 약해 빠진 험담을 모두 받아 주던 준준은 그 주먹 두 개를 등껍질 같은 손으로 말아 쥐어 더 때리지 못하게 하고 바둥거리는 주노를 끌어안았다.

“주노 그만해. 손 다쳐.”

계속해서 그의 파동을 견제하는데도 불구하고 실내용 슬리퍼와 신발이 들썩거렸다. 저지른 일이 있어 제대로 달래지 못하는, 그런데 내 편을 드는 주노를 어떡해야 할지도 모르는 놈의 속이 빤했다.

결국은 분노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놈이 얼핏 불쌍하기도 하다. 그것밖에 몰라서.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고통도, 서러움도 전부 화로 풀어내야 살 수가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윤오가 그 피해자가 될 수는 없다. 그렇게 두지 않는다. 나는 금방 낫겠지만 일반인인 윤오는 크게 다치는 수가 있었다. 준준이 괜히 준장이고 ‘괴물 준준’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놈과 윤오 사이의 거리를 즉각 대응할 수 있을 만큼으로 벌렸다. 그때, 뒤에서 뻗어 나온 팔이 내 왼팔을 감아쥐었다.

“팔도 다쳤습니까?”

움찔, 벌건 소매 속에서 팔꿈치가 떨렸다. 통증과 놀람 때문이었다.

“괜…….”

“제대로 못 움직이는 것 같은데.”

부러진 건 아니니 괜찮다.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지만, 단지 잠시 불편할 뿐이다. 준준의 손을 쳐 낸 것이 마침 왼팔이라, 원래도 불편한 손가락이 떨리고 팔꿈치 아래가 저렸을 뿐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괜찮아진다.

그런데 내 손을 들어 소매를 걷어 올리는 윤오에게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내 소매 단추를 풀고 팔꿈치 위까지 젖은 옷을 걷어 올렸다. 멍이 든 척골부를 보고는 인상을 썼다. 두근, 저 표정이 나를 향한 걱정이라 착각하며 또다시 마음이 뛰었다.

그 손아귀의 온기에서 내 통증은 무척이나 사소해졌다. 조금도 신경 쓸 것 없는 아픔인데, 계속해서 떨리는 손가락이 엄살을 피웠다. 멈춰 보려고도 했으나 심장 떨리듯 약지와 소지가 달달 떨었다.

“아픈 걸 못 느낍니까?”

“……아닙니다.”

대답을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윤오의 모양 좋은 눈썹이 비쭉 비틀렸다. 경계를 돋우던 몸이 맥없이 돌려세워졌다. 아무렇지 않게 내 팔을 잡고 저린 손가락을 감아쥐는 손길에 울컥 속이 떨려 딸꾹질을 할 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 떨리지?”

“원래, 원래 잘 못 움직입니다.”

“원래?”

그의 손바닥 위에서 바들거리는 손가락을 살며시 주먹 쥐었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손가락이 다 다물리지 못하고 들뜬 것을 보여 주었다.

“인대가 손상을 입었습니다. 큰 지장은 없지만, 가끔 이렇습니다.”

윤오의 긴 손가락이 비쭉 튀어나온 손가락부터 손등 위의 주황색 얼룩을 천천히 쓸어 올렸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흉을 따라 멍든 팔뚝을 지나 팔꿈치 뒤쪽까지 손길이 이어졌다.

키비슈스의 상처를 가져오던 날엔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낀 그곳이, 지금은 보고 느낀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얼얼하게 저렸다. 눈꺼풀이 날갯짓 하듯 파들거렸다.

그가 나를 만지는 것이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 현실을 믿지 못해서 주노의 울음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온통 살갗이 저미는 감각으로 머릿속이 들어찼다.

“반군 수장의 상처.”

“……네.”

“‘상처 치환’은 그 상처를 똑같은 모습으로 가져오는 겁니까? 흉만 남은 것도 가져갈 수 있습니까?”

갑자기 떨어진 질문에 번잡한 속을 다잡는 동안, 윤오의 엄지손가락이 내 손등을 눌러 어설픈 주먹을 풀어냈다. 겹친 손바닥이 새삼 감격적이라 꼴딱 침을 삼키고 새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궁극적으로는 흉까지 가져갈 수 있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만, 흉을 가져온 일은 그때가 처음이고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리고 상처는, 똑같지 않습니다. 위치는 비슷할지라도 새로 생기는 것이라 아무는 형태도 달라집니다.”

“전망한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이능은 계속해서 발달합니다. 이능의 근원이 되는 파동이 점점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아프다. 점점 더 버티기가 어려워지고, 살아남기가 더 힘겨워진다.

더 많은 가이딩을 필요로 하고, 더한 폭탄 취급에 익숙해진다. 성과 없는 기다림은 체념이 되고, 체념은 포기를 가르쳤다. 그만 기다리라고, 그만 살아도 괜찮다고.

그 수가 현저히 적어도 반란군이 위협적인 것은, 체념 대신 혐오를 택한 에스퍼들 때문이었다. 유사 가이드들을 착취하며 그들이 죽든 말든 상관 않고 제 목숨 줄을 이었다.

가이딩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으니 이능을 쓰는 데 주저함이 없고, 파동은 쓰일수록 그 진폭이 넓어진다. 더욱 강해지고, 조절과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로 접어든다.

가이드를 만들어 공급하는 키비슈스를 벗어나서는 살 수가 없을 것이고, 자연히 만들어진 권력 구도에서 그를 거역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 ‘파동’이라는 건……. 아닙니다. 우선 가죠.”

윤오는 겁도 없이 내 손을 잡고 현관으로 향했다. 주춤주춤 쫓으며 준준을 지나칠 때에는 바짝 긴장이 올랐지만 준준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이 풀려난 주노가 놈을 잔뜩 노려보고 있었고 여전히 울음기가 남아 씩씩거리는 어깨와 팔이 준준을 벽으로 밀치고 윤오와 나를 따라나섰다.

운전석에는 말한 대로 윤오가 올랐다. 자연스럽게 뒷좌석 문을 여는 주노를 따라 반대편으로 가다가 등이 꾹꾹 밀려 조수석에 타게 됐다. 나를 조수석에 태운 주노가 등받이에 조그만 머리통을 툭 기댔다.

“죄송해요……. 진짜. 죄송해요……. 우리 준준이 형 때문에, 선이 형 다치구……. 진짜 바보 같아. 맨날 저래.”

훌쩍훌쩍 다시 우는 소리가 났다. 윤오는 낯선 차를 능숙하게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선이 형, 많이 아파요? 제가 대신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진짜 미안해요. 준준이 형이 다 잘못했어요. 나도 미안해요…….”

“괜찮아.”

“뭐가 괜찮아. 맨날 괜찮대. 선이 형도 이상해. 에스퍼들 다 이상해.”

이제는 숫제 대성통곡을 했다. 귓가가 쩌렁쩌렁 울려 두통이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다 이상하다는 에스퍼 중의 하나로서 뭐라 달래야 할지 말을 고르지 못하는 틈에, 홀로 침착한 윤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노 씨는 가이드 센터에 가 본 적이 있습니까?”

나지막한 질문에 나는 숨이 멎을 것 같았고, 주노는 울음을 멈추고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가이드, 가이드 센터요? 흑, 있어요. 한 달에 한 번씩은 가요.”

“거기서 뭘 하게 됩니까?”

“에스퍼, 가이드 이런 거…… 가르쳐 주고, 건강 검진이나, 심리 상담두 있구요……. 가이딩 봉사도 할 수 있는데, 그건 안 해 봤어요.”

“가이딩 봉사?”

“네. 손잡는 것만 해도 된다고 하는데, 그거는 준준이 형이 너무 화를 내서…….”

다물린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갑자기 튀어나온 ‘가이드 센터’라는 화제를 듣고 순식간에 다른 에스퍼의 손을 잡은 윤오를 떠올려 버린 탓이다. 그가 가이드 센터를 찾아간다면, 나 따위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정보를 얻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이선.”

“…….”

“대답해.”

“……네.”

신호 대기 중에 허옇게 질린 나를 흘끗 돌아본 윤오가 무심히 말했다.

“가이드 센터를 견학해야겠습니다. 신청이 필요하다면 부탁하죠.”

“…….”

“시간이 되면 같이 가고. 아니면 주노 씨가 가실 때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저,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저두 같이 가 드릴 수 있어요.”

“제가…….”

주노는 에스퍼가 아닌데, 그런데도 지금은 주노를 밀쳐 내고 싶었다. 가이드인 주노가 가이드 센터에 더 적합한 안내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그랬다.

생각이 이어지자 윤오에게는 꼭 내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해일처럼 몰려들었다. 그가 더욱 필요로 하는 게 누구이고 무엇인지,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그건 내가 되지 못했다.

차 안의 공기가 물속처럼 답답했다. 무심코 손을 들어 긁은 목에 그대로 불그죽죽한 선이 그려졌다. 그래도 숨쉬기가 힘들었다. 울고 싶었지만 울음에도 숨이 필요했고, 나는 그 방법을 잊었다.

“숨 쉬어.”

“선이 형, 왜 그래요……. 어떡해, 많이 아파요? 어떡해…….”

하윽, 터져 나온 숨에 가슴팍이 푹 꺼져 들어갔다. 윤오의 커다란 손바닥이 내 손을 붙잡아 떨어트리고 숨이 맺힌 입가를 눌렀다. 억지로 삼킨 숨에 이어 뭍으로 내쫓긴 날숨이 드르륵 목구멍을 긁었다.

틱, 틱, 틱, 틱.

쇄골과 가슴을 문지르는 손길에 맞춰 호흡을 조절했다. 목구멍이 아리고, 어깨가 진동했다. 허파가 마구 부풀었다 꺼졌다.

그러다 적절한 호흡을 되찾았을 무렵에 껌뻑이던 눈앞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일정하게 들리는 틱틱거리는 소리는 비상 표지등이었고, 차는 도로변에 세워져 있었다. 윤오가 내 얼굴과 목을 쓰다듬고, 주노가 내 손을 주물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공황 발작으로 인한 실신의 전조 증상이었다.

* * *

“중령님. 이번에 북부로 파견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

“저번에는 제가 미숙했지만, 다음번에 같이 파견 가게 되면…….”

“소위.”

“예. 소위 한타.”

왼손을 주물거리는 것을 봐줬더니, 이제는 시답잖은 대화까지 하려고 든다. 빤히 그 낯을 쳐다보자 붉은빛이 도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드문 일은 아니다. 제 아픔을 덜어 주는 상대에게 애정 결핍이 만연한 에스퍼가 보일 수 있는 가장 흔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내 대응도 늘 똑같다.

“잡담은 자제하지.”

“예. ……죄송합니다.”

섭섭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한타에게서 매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론 단풍이 지고 낙엽이 떨어지는데, 아직 다 못 운 울음이 남았는지 풀벌레 소리가 여전했다. 때때로 서느런 바람이 불고, 한낮은 쾌청하고 밤은 차가운. 가을날이다.

계절이 가는데도 울음을 못다 운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인지, 요 며칠은 밤마다 자려고 누우면 그렇게 눈물이 났다. 윤오를 가이드 센터에 데려가야 한다는 불안 때문일까.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때로 전쟁의 꿈도 꾸고, 어린 시절의 꿈, 키비슈스의 꿈도 꾸었다. 가장 많이 울게 되는 것은 역시 윤오가 나를 떠나는 꿈이다.

못내 지워지지 못하고 번갈아 떠오르는 후회. 미련스러운 그 꿈은 내 소속과 신분이 윤오를 핍박하고, 내 이기심과 무지로 그를 강제한 과거에 줄곧 머물렀다.

깊은 밤에 눅눅히 젖은 우울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감상으로 나를 더욱 울게 했고, 미움받을 수밖에 없지, 그런 짓을 했는데 이해해 줄 필요가 없지, 지금의 동정도 책이 다 쓰이면 사라지겠지…… 하고, 나의 새벽을 갉아먹는 슬픔으로 시종 이어졌다.

차에서 일으킨 공황발작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발작 자체는 오랜만이지만 처음이 아니었고, 실신으로 이어진 경우도 더러 있었다. 잦았다가 2년 전쯤에 사라진 것 같은데.

그 이전은 전쟁 이후에 종종 그런 일이 있었다. 스트레스 때문이라던가.

차트에 쓰인 핑계같이 쉬운 이유를 보고, 나는 내 형편없는 정신력을 탓했다.

사람이 죽는 일에는 금방 익숙해졌고 그래야만 했지만, 내가 죽이는 것과는 달랐다. 잘 알던 사람이 죽는 것도 그랬다. 사실은 그것도 괜찮아져야 하는 일인지 도무지 납득하지 못했다. 괜찮고 익숙해져야 하는 일에 포함해도 되는지.

회기를 다 채우지 못한 상담에서, 상담사는 속에 든 것을 다 털어 내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말로 꺼내서 도움이 되고 나아지는 점이 분명히 있다고. 그러나 나는 끝내 그가 바란 신뢰 형성도, 솔직함도 해내지 못했다. 주치의가 처방한 상담이 소용없이 묵묵히 지났다.

그 자리에 앉아 내게 질문하던 상담사가 윤오였다면 어땠을까? 내가 겪은 그 시절의 참상을 알려 줄 마음은 오직 윤오에게만 들었다. 그가 필요로 한다면 나는.

찰칵.

타이머가 마지막 5분이 끝났음을 알렸다.

아쉬운 표정의 한타가 내 손을 놓았다. 은근슬쩍 손등의 흉을 쓰다듬는 것이 기분 나빴지만 내색하지 않고 대충 손짓으로 내보냈다.

고작해야 스무 살에, 이능과 부작용이 생긴 것도 몇 년 되지 않았으니 그런 착각을 할 수도 있지. 계속해서 매정하게 굴다 보면 현실을 알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들어온 사야야는 평소와 다르게 30분 내내 문간을 살폈다. 늘 차분한 그녀가 초조해하는 일은 대체로 루돌프를 상대로 일어났으므로, 그 방향에 누가 있을지는 뻔했다.

“들어오라고 해.”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토요일이니 근무는 아닐 것이고, 루돌프가 사야야를 따라온 걸까?

여태까지 그 많은 접견 중에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다정하지만 단호한 사야야의 성격에 그러게 놔뒀을 것 같지도 않았고.

문밖을 왔다 갔다 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다소 빠르고 좁은 보폭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아닙니다.”

“그래.”

심란하기는 나도 만만치 않았기에 섣부른 걱정을 접었다.

오늘은 윤오를 데리고 가이드 센터에 가야 한다. 주노와 보내고 싶지 않고, 그가 혼자 그곳에 가는 것도 싫었다. 그러다 보니 미루려 애쓴 것이 우습게 날짜가 이르게도 잡혔다. 주말은 성큼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응? 아, 괜찮아.”

조금 전까지 걱정하던 상대에게 외려 걱정을 사는 것이 우습다. 심적으로 혼란한 것이 파동으로 드러났나 보다. 사야야는 파동에 특히나 민감하니까.

찰칵, 찰칵.

생각이 많아 보이는 사야야와 내 침묵 사이로 몇 번의 타이머 울림이 지나고, 오늘의 마지막 접견을 끝낼 때가 왔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여 또다시 감사하다는 말을 한 다음 자리를 떠났다.

사야야를 보내고 간략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모바일을 꺼낼 때였다.

“사야야! 이제, 이제 파견 그만 가면 안 돼? 상부에 보고하자. 응?”

“루돌프. 그만해.”

“사야야 몸 생각도 좀 해 줘, 아니면 내 생각이라도 해 줘. 응? 부탁할게.”

“여기서 이러지 마.”

“제발…….”

“그만.”

의자를 밀어 넣고 일어났다. 덜 닫힌 문을 열고 나가니 루돌프가 복도에 무릎을 꿇고 있다. 새파랗고 동그란 눈동자가 진작부터 눈물을 뚝뚝 떨궜다. 사복 차림인 것으로 보아 정말 사야야를 쫓아 여기까지 온 모양이다.

“중령님! 저희 사야야가!”

“루돌프 상사. 적당히 해.”

“…….”

매서워진 사야야의 말투에 파동을 느낄 수 있는 나는 물론이고 일반인인 루돌프까지도 꺼내려던 말을 멈췄다. 사야야가? 사야야에게 무슨 일이 있나?

말해 주지 않을 생각이라면 괜한 오지랖을 부려 사야야를 다그치는 것도 좋은 생각이 아니다. 그러나 다친 사야야 곁에서 청혼하던 그날보다 더 절절한 루돌프의 모습에 잠시 갈등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인가?”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사야야는 이런 모습을 보인 게 미안한 눈치였고, 루돌프의 흠뻑 젖은 눈은 희망으로 반짝였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참견 같겠지만, 파견은 줄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나 역시 파동과 밀접한 이능이기 때문에 사야야의 파동이 갈수록 강해지는 것을 알고 있다. 가이딩과 접견을 꼬박꼬박 챙기며 다루고 있는 모양이지만, 앞으로 점점 심해질 것을 가정하면 지금 같은 일정을 유지하는 것은 위험하다.

“……감사합니다.”

루돌프는 내 참견이 끝나자마자 그 자리에 무릎 꿇은 채로 펑펑 울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사야야가 허락하지 않아 말할 수 없다는 듯이.

나는 접견 3실 문을 잠그고 데리다에게 종료 메시지를 넣었다. 눈높이가 차이 나는 두 사람에게서 인사를 받으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파견을 가지 말아 달라 울며 무릎 꿇은 루돌프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결국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하고 말, 약자의 간절한 모습이.

* * *

“그게 이능 장교 군복입니까?”

“아닙니다. 일반직 근무복입니다.”

관사에 들러 사복으로 갈아입으려 했는데, 정문에 도착했다는 윤오의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그만 날듯이 초소로 달려와 버렸다.

윤오가 모는 차를 타는 것은 두 번째였으나, 윤오의 차는 처음이다. 검정색의 널찍한 SUV는 속도 온통 검정이라 윤오를 닮았다.

“일반직 근무복? 복장이 몇 종류나 있습니까?”

“기본적으로 동복과 하복으로 나뉘고, 각기 근무복, 정복, 예복, 전투복이 있습니다. 전투복은 작전지와 근무 기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만, 이능 장교용 군복은 보통 짙은 남색 또는 흑색입니다.”

“그렇군요.”

군복이 그의 관심을 끈 것 같았다. 짧은 말이지만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이 나이기라도 한 듯 머쓱한 감정이 들었다. 남몰래 간질거리는 마음에 안전벨트 너머 옷자락을 살짝살짝 매만지다가, 몰래 운전하는 윤오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심장은 계속해서 아프게 뛰었다. 이 차 안이 또 다른 ‘윤오의 공간’이어서이기도 했고, 지금 향하는 장소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싫습니까?’

준준과 주노의 집에서 돌아오던 날.

숨을 다 고르지 못하고 식은땀을 흘리는 내게 윤오가 물었다. 나는 끄덕이지도 내젓지도 못한 고개로 빤히 그를 보았고, 이내 그것마저 힘에 겨워 눈을 감았다.

다시금 형편없는 몰골을 보여 버린 나는 더 거부할 기력도 없이 그저 고개를 저었다. 그새 쉬어 버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견학 신청을 넣겠다고, 내가 같이 가겠다고.

내가 없는 사이에 당신이 그곳에 있는 것은 더욱 견딜 수가 없으니까.

오랜만이지만 낯설지 않은 가이드 센터.

지원 계열이어도 이능의 가짓수가 많은 바람에, 나는 과로와 피로가 가이딩 부족으로 이어져 쓰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는 며칠씩 이곳에 머무르며 가이딩을 받았다. 병동으로 가이드를 보내 주기도 하지만 더 많은 가이딩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여기가 가까우니.

가이딩. 매칭률이 고작 30퍼센트에서 40퍼센트밖에 나오지 않는 가이드일지라도 감지덕지하며 손을 붙들고 있는 일.

군에서는 성관계를 통한 효율 증진을 권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불특정한 타인과 손을 잡는 것도 사실은 내키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기다려서 과연 만날 수나 있을까. 윤오를 만나기 전까지, 가이드 센터는 내게 그런 체념의 장소였다.

“이쪽에서 방문 일지를 작성하시면 됩니다.”

안내 데스크에서 이름을 말하고 신분증을 보여 주니 작성해야 할 두 장짜리 서류를 내어 줬다. [일반 견학용] 서류를 받은 윤오가 내 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시선을 받는 둥 마는 둥 하다 그가 펜 뒤축으로 두드린 문항을 향해 뒤늦게 눈을 돌렸다.

[방문인 ( 이선 )과의 관계 : ]

“그냥, 지인……이라고 쓰셔도 됩니다.”

작게 속삭인 말에 윤오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진심이냐는 듯이.

그러나 내 진심은 나도 몰랐다. 그가 내 가이드란 것을 가장 알리고 싶고, 또 알리지 않고 싶은 곳이 여기다. 발도 못 들이게 하고 싶었고, 이곳에 온 이상 아예 내 가이드임을 공표하고 싶기도 했다. 윤오를 사이에 두고 언제나처럼 상반된 감정이 휘몰아쳤다.

결국 그 자리에 윤오가 뭘 쓰는지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방문증을 받아 드는 것만 확인하고 안내를 해 줄 사람이 있는 사무실로 앞서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센터 관리 팀장 단이라고 합니다. 오늘 방문 견학 신청 주셨지요? 오랜만입니다 중령님.”

안내를 나온 남자는 윤오에게서 방문 일지를 건네받으며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고개를 끄덕여 가볍게 인사를 받고 옆으로 물러났다. 방문 일지를 끼운 차트를 잠시 내려다본 팀장이 웃는 얼굴을 들어 올렸다.

“……가이드분, 윤오 님은 오늘 첫 방문이라고 하시니 오늘은 전체적으로 가이드 센터를 둘러보고 궁금한 사항 있으시면 그때그때 질문받도록 하겠습니다.”

퍼뜩 윤오를 돌아보는 내 턱이 벌어져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윤오는 그런 나를 무심한 낯으로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내 가슴 포켓에서 신분증을 꺼내 갔다.

지금 그가 내 가이드라고…….

곧 이어진 견학에서, 안내자 단은 말이 많았다. 물론 역할에 적합한 태도이긴 했지만, 생각이 많은 내 귀에는 시끄럽게 들렸다. 내가 알려 줄 수 없는 지식을 접한 윤오는 질문을 아끼지 않았고, 그런 태도가 단을 만족시켰다.

“제가 ‘바를 단’자를 쓰거든요. 바르다~ 이런 의미지만 꼼꼼하고, 자세하다~ 이런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선지 이렇게 질문을 잘해 주시는 분을 뵈니 기분이 더 좋네요!”

원국을 비롯한 몇 개국이 공용어와 병용하는 옛 글자는 문자 하나하나마다 뜻과 음이 따로 있었다. 음은 대체로 하나였고, 뜻은 여러 가지인 것으로 알고 있다. 윤오도 원국 출신이니 이름에 뜻글자가 있겠지? 무슨 글자일까.

겨우 공용어를 익힌 나로서는 만 가지도 넘는 그 글자를 다 배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윤오의 이름자라면……. 단 두 글자이지만, 외우고 쓰고 몇 번을 해도, 노트를 몇 권을 채워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에 대한 궁금증이 또 하나 자랐고, 그가 돌려주지 않은 내 신분증이 신경 쓰였다.

형식을 본 걸까. 사진에 관심이 있어서 본 건 아니겠지. 중앙에 전입할 때 찍은 것이니 벌써 4년 전의 사진인데.

이름 글자를 묻기는커녕, 돌려 달라는 말 한 번, 손 내미는 동작 하나도 하지 못한 채로. 어느새 뒤를 따르는 건 내가 되어 있었다.

“가이드인 건 어떻게 알아봅니까?”

“그 직무만 이행하는 에스퍼가 따로 있습니다. 파동의 형상이라고 할까요? 에스퍼 각자의 파동을 지문처럼 생각하자면 그 형상이 조금 완만한 에스퍼들이 있습니다. 대체로 파동 감지 관련 이능을 가진 경우가 많고요. 그 사람들은 에스퍼-가이드간의 매칭률도 평균치가 높은 편이라, 민간인과의 가벼운 접촉만으로 가이딩 능력을 파악해 내죠.”

“가벼운 접촉.”

“예. 아, 경험해 보신 적 없겠군요. 악수 정도의 접촉이고, 지금은 공립 학교 전체에서 마지막 2개 학년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도입된 지가 아직 10년도 안 됐습니다. 전쟁 이후부터 시행됐으니까요.”

“그렇군요. 그 접촉으로 가이딩 정도나 매칭 같은 것도 알 수 있습니까?”

단은 그 질문에, 가이딩 재능의 여부만 판단할 수 있다고 대답했고, 그마저도 완전하지는 않다고 했다. 가이드의 파동 감쇠 정도와 에스퍼와의 매칭은 따로 검사가 필요하다고도 설명했다. 나는 고작해야 무릎을 떨지 않으려 애쓰며 뒤를 쫓았다.

“그 검사를 제가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 예……. 뭐, 벌써 에스퍼가 있으시지만, 원하신다면야.”

기어코 흔들리고 만 걸음과 꺾일 것 같은 무릎이 주저앉기 전에, 간절한 손이 덜컥 뻗어져 윤오의 옷자락을 잡았다. 애원하듯 유약한 힘에 재킷 상의가 당겨지고, 윤오가 뒤를 돌아 내 떨리는 눈을 마주 보았다. 이내 그가 흐려졌다.

“뭐가 그렇게 겁이 납니까.”

“…….”

“뭐가 그렇게 싫은데?”

전부. 전부 다. 당신이 여기 있는 게 싫다. 이곳의 모든 것이, 윤오를 제외한 모든 것이 싫다. 가이드 센터도, 단도, 못난 나 자신도 싫고, 검사를 하겠다는 당신도 밉다.

윤오는 내 손을 풀어 당기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내 양 눈가에서 물기를 덜어 냈다. 채근하듯 ‘말해.’ 하고 내 깊은 속을 들여다보았다. 이 속에는 괴물처럼 못난 것들만 들어차 있어서 차마 당신을 향한 독점욕이 얼마만큼인지 보여 줄 수가 없다.

눈을 감고, 입을 막았다. 윤오와 더 가까워질 수 없다면 더 멀어지지는 말아야 했다.

“……후. 제 에스퍼와의 매칭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예, 뭐. 그거야 언제든……. 지금 가시겠습니까? 두 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오늘 마침 검사 일정이 없고요. 있다 해도 군 간부이시니 우선 이용도 가능합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방문이 처음이시죠. 네.”

오가며 몇 번 마주친 일이 있는 단은 형편없이 울먹이는 내 모습에 꽤 놀란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따위 사소한 것에 신경 쓸 틈 없는 상반된 감정이 또다시 내 속을 들어 채웠다.

‘매칭 검사’라는 말이 속을 틀어막고, ‘제 에스퍼’라는 말이 다시 뚫었다. 그러기를 수차례 반복하니 만신창이가 된 가슴팍에 남은 것이 도대체 무슨 감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몇 걸음마다 주저하며 그를 당겼고, 내 손을 잡은 그에게로 다시 맥없이 이끌렸다. 나를 유용하게 생각한 군이 몇십 번이나 밀어 넣은 지하의 검사실이 오늘은 그렇게 가까울 수 없다.

윤오는 내 가이드니까. 내가 이미 등록했으니까. 그러니까.

매칭 검사를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가이딩 능력치. 그 결과치가 다른 누구와도 대조될 수 없게 손을 써야 한다.

그럴 리 없지만 만약, 나보다 매칭이 높은 에스퍼가 있다면, 나타난다면 윤오는 그 에스퍼에게로 갈지도 모른다. 첫 만남부터 형편없는 나 같은 것보다 그쪽을 고를지도 모른다.

나에게 달콤한 그가 다른 누군가에게도 탐이 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어떡하지. 죽어 버릴까.

“이선.”

“……네.”

“정말 싫다면 말해.”

“어떻, 어떻게…….”

“하지 말라고.”

못 한다. 오로지 당신이 원하는 것이 우선이다. 지금 내 불안을 꺼내어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막아섰다가는 두고두고 후회하고 또 다른 자괴감의 바다에 빠지고 말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이루어져야만 하고, 그에 따른 모든 일은 내가 감내해야 할 짐이다. 설령 당신이 나를 떠나고, 그 바다에 내가 잠겨 가라앉아도.

“괜찮, 습니다.”

“…….”

윤오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내게서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지. 묻고 싶은 건 오히려 나였다. 그에 대해서 궁금한 것도 나였고, 모든 것이 알고 싶어 안달 내는 것도 나였다. 내가 싫다면 알려 달라는 말 같은 거, 나라면 결코 입 밖에 낼 수 없겠지만.

접촉형과 비접촉형, 두 가지 검사 방법에 대해 단이 설명했다. 이전의 나는 매번 비접촉형을 택했지만, 지금은 윤오의 선택에 달렸다.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말에 그가 접촉형을 골랐을 때, 내 가슴은 안도와 우려로 무너졌다. 덜컹 쏟아지고, 와륵 가라앉았다.

고작해야 울지 않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이 몸과 팔, 머리에 이런저런 전극이 달렸다. 좁다란 방 안, 소파 두 개가 나란히 놓인 곳에 앉았고, 두 소파의 팔걸이 사이에 놓인 검사용 테이블에 내 왼손과 그의 오른손이 포개어 놓였다.

앞으로 두 시간은 마주 잡아야 하는 이 시간이, 언제나처럼 달지 못하고 가슴을 졸였다.

마침내 좁다란 방의 문이 닫히고 둘만 남았을 때, 실시간 파동이 잡히는 카메라가 달렸음을 알고 있는데도 눈물이 줄줄 흘렀다. 윤오가 쯧, 혀를 찼고, 내 눈물은 더욱 서러워졌다.

마음껏 마주 잡을 핑계가 생긴 그의 오른손을 꽉 쥐고, 소리만 참은 울음을 계속해서 울었다.

이 검사가 그를 곁에 두는 마지막 순간일 거라는 암담한 상상이 자꾸만 머리를 채웠다. 그의 뒷모습이 내내 맴돌았다. 내 이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던 냉정한 그의 말이 가슴속에서 칼날처럼 굴렀다.

싫은데, 정말로 싫은데, 그런데 지금 내 몸에 스미는 평안이, 희미한 두통마저 사라진 정적이, 살갗의 아림이나 사지 말단의 저림이 사라진 안온함이 좋았다.

내 것이기를, 제발 내 것이기를.

기도할 종교가 없는 나는 다만 윤오에게 빌었다. 버리지 않기를, 떠나지 않기를, 내가 더 불쌍하기를, 비참하기를. 도와주고 안쓰러워하지 않을 수 없게. 내 버리면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나를 동정하게. 그는 다정하니까. 그러니까…….

파동 검사는 실시간으로 맞은편 모니터에 떴다. 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윤오는 보기를 원했고, 나는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허벅지 위로 물방울을 수어 개나 떨어트려 옷감을 어둡게 적셨다. 훌쩍임과 흐느낌을 얼얼한 목구멍으로 쉴 새 없이 넘겼다.

이 시간이 끝나기를, 끝나지 않기를, 당장 벗어나기를, 영영 이대로이기를. 나는 또 모순을 바랐다. 이 세계가 마구 엉켜서 나만큼 미쳐 버렸으면 했다.

윤오 하나만을 바랐는데. 내게서 그를 앗아 갈 거라면 세상까지도 버릴 결심을 할 만큼 시간이 길었다. 눈물만 흘려도 어느덧 끝이 가까울 만큼 시간이 짧았다.

윤오의 더운 손은 세게 쥔 내 손을 담담히 받아 감싸고 놓지 않았다. 검사를 위한 그 당연한 행동이 내가 뭐라도 부수고 이 방을 뛰쳐나가지 않도록 묶어 두었다.

이글거리는 속을 게워 내지 않게 했고 어질거리는 머리로도 쓰러지지 않게 했다. 더없이 편안한 몸 상태가 더욱 서글펐다. 잃고 싶지 않았다. 윤오를 잃고 싶지 않았다.

“봐요.”

턱 아래로 들어온 손이 내 얼굴을 화면으로 들어 올렸을 때, 나는 눈을 질끈 감았고 숨까지 당겨 참았다. 후드득, 턱 아래서 그의 손을 타고 물기가 쏟아졌다.

“눈 뜨고.”

“…….”

흑, 끊어 쉬는 숨마다 흐느낌이 맺혔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도리질을 쳤고, 윤오는 그럼에도 손을 물리지 않았다. 그의 손바닥 위에서 작게 시작한 도리질이 점차 커져 흐르는 눈물방울이 속눈썹을 거쳐 허공에 흩뿌려졌다.

“싫, 싫어요…….”

“뭐가.”

“보기, 싫어요…….”

무력한 소리가 뱉은 거부에, 고개를 받친 손이 빠져나갔다. 또다시 후드득 바지가 적셔지고, 다음 순간 맞잡은 손이 당겨 올라갔다.

투득, 테이블에 연결된 전극이 팔에서 떨어져 나갔다. 더운 품에 아린 코가 얼얼하게 부딪히고 그 자리에 뺨이 눌려 붙었다. 놀라 숨을 들이켠 허파가 온통 윤오의 향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래, 그럼.”

삐빅, 삐빅.

검사 도중 수치 측정이 멈춰 오류 발생을 알리는 경고음이 울렸다. 두근, 두근, 저미는 가슴도 계속해서 크게 울었다.

윤오의 향이 나는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남은 시간은 내내 울었다. 남은 시간을 다 채우기는 했는지도 몰랐다. 그가 검사실을 열고 나올 때에도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대기실에 앉아서도 이미 젖은 내 허벅지 대신 그의 가슴팍을 적셨다. 서러워서 서러운 울음은 그칠 수가 없었다. 서러움이 끝도 없이 몰려왔다.

내가 살아 온 삶이 온통 서러웠다. 그를 만나기 전에도, 후에도 내 생애는 온통 서러웠다. 당신을 만난 그 여름이 나를 구원한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서럽기를 멈출 수가 없다.

나를 안은 당신, 등을 두드려 주는 당신도 내 서러움에 무게를 더했다. 아직 남은 울음이 낙엽처럼 쏟아지고 단풍처럼 그 품을 물들였다. 그래도 괜찮다는 듯 두들기는 손길에 혼자 솔직한 내 불안이 더욱 서럽게 날뛰었다.

언제부턴가 그의 앞에서 감추지 못한 울음을 함부로 울었고, 나의 모난 파동을 잠재우는 그의 품에서는 감히 계속 슬프지 못해서 또 그 울음이 잦아들었다. 언제까지고 서러울 울음인데, 그마저도 그의 앞에서는 뜻대로 하지 못하고 달래어졌다.

도무지 그치지 못할 설움과 계속해서 섧지 못할 온기와 영원히 포기하지 못할 욕심을 주는 그 모든 이가 윤오였다. 나는 이것이 사랑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윤오를 사랑했다.

한 손에는 서류를 다른 손에는 곽 티슈를 들고 단이 대기실 문을 열었다.

“그, 저기……. 중령님은 이제,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조심조심 묻는 말은 내 상태였고, 대답은 윤오가 대신했다. 여전히 그의 옷자락을 틀어쥐고 마음 가쁘던 나는 겨우 고개를 돌려 침입자를 살폈다.

다시 떨리는 내 등 가운데에 윤오가 손바닥을 올렸다. 괜찮다는 것처럼.

괜찮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누군가 그에게 접근하는 것이 싫어 단을 노려보았다. 그 눈초리에서 지치지도 않고 눈물이 주룩 흘렀다. 움찔 놀랐던 단이 얼른 다가와 곽 티슈를 윤오와 내 허벅지가 맞붙은 곳에 내려놓았다. 서류도 윤오에게 전해졌다.

“마지막까지 계셨으면 수치가 더 정확했을 테지만요. 아마 순조롭게 90퍼센트는 넘겼을 겁니다. 무척 높은 편이죠.”

“그렇습니까.”

90퍼센트라는 소리에 귀가 쫑긋 솟았다. 윤오가 든 서류에 눈이 갔고,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가까이, 이제는 그의 손에 들어간 그 종이를 결국 들여다보지 못하고 다시 윤오의 가슴팍에 이마를 가져다 붙였다.

벌벌 떨며 그 품으로 숨어든 내 뒷머리부터 등을 더운 손이 쓸어내렸다.

“그……. 이정도로 매칭률이 높은 일은 보통 없으니까요? 중령님이 무슨 걱정하시는지는 알겠지만, 너무 걱정 않으셔도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무슨 걱정입니까?”

“네? 아, 저…….”

쩝, 입을 다시며 잠시 이래저래 망설이던 단이, 내 불안을 말로 끄집어냈다.

“……아무래도 에스퍼분들은 매칭률에 민감하실 수밖에 없으니까요. 가이드의 역량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파동과 감쇠의 형태를 대조했을 때 보이는 매칭률이 훨씬 가이딩에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걱정할 일입니까?”

“역시. 미리 상의하고 오신 게 아니었군요.”

윤오가 침묵하는 동안,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한 단이 대기실을 나갔다. 나는 차갑고 축축한 옷감에 여전히 눈을 감고 고개를 파묻었다.

들끓는 불안은 여전했다. 검사는 끝까지 하지 않았고, 윤오는 내 가이드다. 나는 아직 군에 쓸모가 남았고, 나만큼 쓸모가 있는 군인이 아니라면 군이 그의 수치를 내돌릴 리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만의 하나의 가능성에 벌벌 두려움이 치고 올라왔다. 이 품 밖을 벗어나기가 무서웠다.

“뭐가 걱정이지?”

“…….”

“가이드가 바뀌기도 합니까?”

그 두려운 말에 내가 꺼낼 수 있는 건 재차 쏟아지는 울음뿐이었지만, 윤오는 계속해서 물었다. 이선, 하고 이름을 부르며 대답해, 하고 딱딱한 소리를 내고 더운 손으로 흐느끼는 등을 쓸어내렸다.

“안, 안 바뀝, 니다.”

“그런데 뭐가 불안합니까.”

말아 문 입술에서 금방 피 맛이 났다. 여상한 목소리가 내 불안을 재울 듯 다독였지만, 그 욕심나는 다정은 내 불안의 주식이었다.

“에, 에스퍼는 바뀔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말이지만 아주 다른 말.

내가 당신을 두고 결코 안도할 수 없는 이유.

윤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잠시 생각해 보는 것 같더니 품 안에서 내 턱을 꺼내 들었다. 질끈 감은 젖은 낯이 공기 중에서 차갑게 식었다. 바스락, 종이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고 따뜻한 손바닥이 들어 올린 내 얼굴을 슥슥 쓸어 닦았다.

흐느낌을 물어 놓은 입술이 손끝에 꾹 눌렸다. 덜컹 가슴이 떨어지고 눈이 뜨여 끔뻑끔뻑 영문 모를 좁은 시야로 그의 얼굴을 찾았다. 윤오는 손가락을 떨어트리고 시선을 잠시 내게 두었다가 곧 대기실 입구를 향했다. 단이 들어왔다.

“아, 이거 에스퍼-가이드 기본 교육 커리큘럼 책자입니다. 가장 좋은 건 센터 교육 12주에 참여하시는 겁니다만, 이미 매칭이 되어 있으시니까 그냥 권유로만 생각해 주십시오.”

단이 이쪽을 흘끔거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매칭한 지 2년이 넘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윤오를 보고 내 탓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연히 싫은 그 권유에 그는 관심을 보였다. 책자를 받아 허벅지에 내려놓고 한 손으로 빠르게 넘기며 훑었다. 그 엄지가 조금 전에 누른 내 입술이 부어오른 듯 화끈거렸다.

“따로 신청이 필요합니까?”

“예? 아, 신청 폼이 마지막에 들어 있습니다. 모바일로도 가능하고요. 그런데……, 가능하면 이런 결정은 에스퍼 분과 같이하시는 게…….”

“괜찮습니까?”

곧장 떨어진 질문에 내 눈은 다시 일렁일렁 윤오의 검정을 흐리게 했고, 고개는 마지못해 끄덕였다. 허, 단이 허탈한 웃음을 내뱉는 것이 들렸다. 온몸으로 싫다 하면서도 그러마 수긍하는 내 모가지가 우스웠을까.

내게도 우스웠으나 윤오는 웃지 않았다. 하도 울어 휘청이는 내 상체를 그에게 기대게 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예. 아, 현관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때쯤이 되어서야 내 두 발로 설 수 있었다. 윤오는 흘끗 나를 돌아보더니 그의 옷을 틀어쥔 내 손아귀를 벌려 그의 손을 대신 쥐여 줬다.

윤오의 차 조수석 앞에 서서 검은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보니, 센터에서 마주친 직원들이 하나같이 놀랐던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누가 보아도 엉망으로 운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가이드 센터에서 눈물 바람이 나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지만 그게 에스퍼인 일은 드물었으니까.

자리에 올라 안전벨트를 하고 꾹꾹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군부로 데려다주면 되느냐 묻는 윤오에게, 아무 데나 괜찮다 고개를 저으려다가 기운이 없어 그저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진 다음 말에는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네……?”

“안 됩니까?”

“관사, 말씀이십니까?”

윤오는 느릿하게 차를 출발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사는 곳에 가 보고 싶다고…….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이 맞나? 우선은 된다고, 거듭 대답한 다음 다시 아연해졌다. 내 집에 들어선 윤오를 상상하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한참 그 상상으로 다른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안전벨트를 부여잡고 있었다. 작은 시내를 벗어나 다시 중앙으로 향하는 도로로 차를 올릴 때쯤에야 내 할 일이 떠올랐다. 얼른 모바일을 꺼내 데리다에게 방문인 신청을 넣었다.

관사를 가 보려는 이유가 뭘까. 보통의 아파트식 주거와 다르지 않은데, 직접 보고 싶은 걸까? 정작 이유를 묻지는 못하고 초조해하는 사이 군부에 도착했다.

차량 등록은 바로 되는 일이 아니라 동쪽 초소 밖에 차를 세웠다. 그를 데리고 검문을 통과하려다 사라진 신분증을 알고 허둥거리자, 윤오가 그의 주머니에서 내 신분증을 꺼내 주었다.

묘한 기분으로 받아 든 신분증과 미리 받아 놓은 허가 메시지를 띄워 보초병에게 보여 준 다음, 그늘막 아래로 윤오를 데려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전기 차를 부르겠습니다.”

“걸어가면 안 됩니까?”

“네? 됩니다만……, 15분은 걸어야 합니다.”

“괜찮습니다.”

데리다의 직통 번호를 누르기 직전이었던 모바일이 맥없이 떨어졌다. 내게로 뻗어진 그의 손에 휘말리듯 다시 손을 맡겼다. 가슴이 술렁거렸다.

간부용 관사로 향하는 도중 근무 중인 몇몇 군인들의 경례를 대강 받아 주었다. 그들은 내 짓무른 낯이나 내 손을 잡고 군부를 걷는 남자에 대해 궁금한 기색이었으나 눈치껏 질문하지 않고 멀어졌다.

중간에 대규만 잠깐 불러 손을 잡아 주었는데, 상태가 나빠 보여서 점검하듯 한번 쥐기만 한 것인데도 허리를 꾸벅 숙여 감사하다고 했다. 멀쩡한 척하지만 취조가 늘어 피곤한 기색이었다.

관사가 가까워질수록 관목이 늘었다. 멀리 보이는 산도, 가까운 나무도 온통 얼룩덜룩했고, 아직 죽지 않은 풀벌레들은 남은 기간이 아깝다 목 놓아 울었다. 때를 놓친 울음이 더욱 요란했다.

윤오는 중간에 한 번 걸음을 멈춰 주변을 훑었다. 그의 시선에 닿는 건물들을 눈으로 좇으며 하나하나 설명을 해 주면 좋을까 싶었다가, 그 시선이 마지막으로 내게 닿았을 때는 입이 다물어졌다.

가만히 내려다보는 그 시선이 나와 단풍이 든 나무를 번갈아 보는 사이에 걸음 소리 사라진 적막을 매미가 채워 울었다. 그 쨍한 울음은 햇살에서 나는 소리 같이 더웠다.

여름이 지났지만 아직 여름같이 해가 길었으니까. 때로 바람이 차갑지만 아직 더위가 남았으니까. 그 울음에는 이유가 있었다.

더운 손바닥이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마저 걷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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