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1화- 여름 蟬鳴) (1/11)

- 여름 蟬鳴

- 딩동

여섯 번째.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고 인터폰의 지직거리는 잡음이 끊어지길 기다린 후에야 다시 초인종을 누른 것이 여섯 번째다. 오늘은 문도 열어 주지 않으려나. 이 철문 밖에서는 그를 조금도 느낄 수가 없는데.

기력이 남지 않아 텅텅 빈 몸이 아찔하게 흔들렸다. 정신적인 위태로움에 곧장 반응한 탓이다. 급히 먹고 온 죽이 속에서 요동치는 것도 같았고, 검은 현기증이 머리끝부터 바닥까지 몸을 잡아 끌어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지독한 뱃멀미처럼, 흔들리는 바닥에 어찌할 바 모르고 따라 휘청이는 기분.

마른 무릎이 곧 꺾어지고, 시린 철문과 그보다도 차가운 손이 문고리에서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대로 흔들리는 세상에 꿇어앉았다. 저녁이 내린 어두운 복도보다도 마음이 차갑다.

“윤오 씨…….”

가이드를 만나면, ‘내 가이드’가 생기면 평생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를 보면, 그와 있으면 깊은 바닷속에서 피어난 물거품이 빛나는 수면을 향해 헤엄치듯, 벅차오르는 행복이 분명 있었다. 가이드를 만날 수 있었던 것만으로 기쁘고, 행복해 마땅했다.

다만, 그 역시 또 다른 괴로움의 시작이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 있었을까.

반절을 훌쩍 넘긴 나의 삶은 오로지 윤오를 만나기 위해 달린 기간이었다. 종착 후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는 열차.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이라는 가정은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통증에 마비된 간절함은 항상 희망적인 상상만 만들어 댔으니까.

느릿한 심호흡에 흔들흔들 위태로운 마음이 잦아들고도 한동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철문 너머 함부로 침입하여 그를 마음껏 탐하고 싶은 거친 욕망이 부끄러웠다.

거듭 반성해도 또다시 치미는 이 욕심은 언제쯤 끝이 날까. 끝이 나기는 할까. 조금만 방심해도 또다시 그를 해칠 나를 알기에, 매 순간 쏟아지는 충동을 견뎌 내야 했다. 끝없는 반성으로 미련한 스스로를 내몰았다.

더 이상은 무엇으로도 그를 거스르고 싶지 않은 나약한 심경이 힘겹게 뛰는 맥박과 맥박 사이를 번갈아 휘저었다. 박동마다 수십 분씩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았다.

이대로 내게 허락된 금요일의 두 시간이 다 가 버리면, 나는 다시 쓰러질지도 몰라.

남은 기운을 짜내어 에스퍼를 셋이나 접견한 까닭은 여러 가지였다. 이 이하로 접견 수를 줄이면 데리다의 차마 강요하지 못하는 빙 두른 안부 전화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측은한 에스퍼들의 기다림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더 비참해지기 위해서였다.

가엾고, 비참한. 가이드 없이 고통받는 에스퍼 군인들. 내가 그들보다도 불쌍하다 못해 곪아 그의 눈앞에서 쓰러지면, 그러면 윤오가 나를 안타깝게 여겨 줄까 봐. 아니면 그를 강제 집행해 잠깐이나마 내 곁에 둘 수 있으니까.

이 이기적인 생각을 그가 안다면, 무척이나, 역겨워하겠지.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윤오가 필요했다. 찌푸린 눈가가 나를 혐오스럽게 보는 장면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고 심장이 떨어져 내렸지만, 그렇게라도 그가 필요했다.

“……살려 주세요.”

작고 간절한 바람을 중얼거리고서 실없는 웃음이 비어져 났다.

나와의 접견 시간을 위해 정해진 부담금 이상의 액수를 치르는 에스퍼들이 한둘이던가. 돈으로 우선 순번을 살 수 없는데, 그래도 그들은 그네들의 목숨을 벼랑에 내몬 값을 고스란히 군에 지불했다.

한심하기는 간절한 숫자로 채워진 서류에 한숨짓던 나 역시 마찬가지다. 에스퍼를 접견하여 벌어들인 수당과 내 임금. 군에서 내 목숨과 가치를 무게 달아 받은 그 돈으로, 나는 윤오의 손을 잡을 기회를 사고 싶었다. 살 수만 있다면.

윤오가 돈을 좋아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쓸 일이 없는 돈 따위 그에게 전부 다 줄 수 있었다. 조금의 고통도 없는 정적 같은 평안과 깨지 않는 그 잠을 얻을 수 있다면, 그의 곁자리를 내 것으로 할 수 있다면.

……결코 달가워하지 않겠지. 나와 관련된 이득을 윤오는 조금도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러나 내가 죽으면 비루한 삶이 벌어 놓은 재산의 수혜자는 그가 될 것이다.

더러운 게 묻은 마냥 버리고, 군이든 사회든 환원해 버린다 해도, 서류에 남겨지는 그 한 줄의 연결 고리가 갖고 싶어서 멋대로 해 두었다. 시기를 특정할 수 없는 내 마지막에도 그의 이름을 쓰고 싶어서.

- 달칵

손끝과 발끝이 동상처럼 냉기를 머금을 즈음,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찬 복도에 무릎을 감싸고 오그려 앉아,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낯을 품 밖으로 서서히 들어 올렸다. 굳은 손가락을 쥐었다 펴고, 높아진 현관문을 올려다보다가 시계를 확인했다.

그 아득한 시간이 채 15분밖에 지나지 않은 것은 놀랍지도 않았다. 그를 기다리는 시간은 언제나 그를 기다리던 세월만큼 길었다.

나락 같은 시간이 기실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은 허락된 시간이 아직 한 시간도 더 남았다는 뜻이다. 그사이 뻣뻣해진 무릎을 펴고, 다시 걸어 잠길까 얼른 문고리를 붙들어 조심스레 돌렸다. 벌어진 어둑한 실내로 흔들리는 몸을 빠르게 집어넣었다.

타닥거리는 타자 소리가 연이어 공간을 울리고 언제나처럼 매캐한 담배 냄새와 커피 향이 맴도는 곳.

소리가 들리는 거실에 들어서기 전, 민감한 감각이 주변을 먼저 살폈다.

에어컨이 꺼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살갗에 닿는 공기가 서늘했다. 활짝 열린 창에서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 실내에 고인 냉기와 섞이고, 부엌에서는 냉장고 소리와 그가 깨어 있는 모든 순간 동작할 커피 머신의 끓는 소리가 났다.

은은한 섬유 유연제 향은 베란다에 대충 펼쳐진 건조대에서 나는 것일 테고, 담배와 커피의 짙은 향은 윤오가 보고 있을 거실 책상의 모니터 아래까지 이어졌다.

어두운 집에서 유일하게 밝은 등이 켜진 책상. 거실 베란다 창의 절반을 가린 암막 커튼이 워드 문서를 써 내리는 그의 등까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리고 그에게 닿지 못한 오후의 햇볕이 길고 노랗게 남은 반쪽의 거실을 좀먹었다.

조심스러운 걸음이 그와 내 사이를 깍듯하게 가른 어두운 그림자를 몰래 밟았다.

“안녕하십니까.”

또렷하지 못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늘어지다가 이내 타자 소리에 묻혔다. 발소리가 혹여 그를 방해하지 않을까 주의하며 거실의 책상 반대편 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자리에 놓인 낙엽색 1인용 소파는 기대앉으면 그의 등을 올려다보기에 딱 좋았다.

그를 제대로 만나지 못해 쓰러져 버린 지난겨울, 그다음 방문에 생긴 소파. 내가 주로 앉아 그를 올려다보던 자리에 나타난 이 소파. 나는 이 낙엽색 소파가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상상하기 좋아했다.

번번이 방문을 거절당하고 결국 쓰러진 내가 조금은 불쌍했다거나. 다른 불운한 것들에게 가져 줄 만큼의 미세한 동정이라도 느꼈다거나. 아니면 늘 바닥에 앉아 그가 돌아봐 주기만 기다리는 내가 측은했다거나. 이유는 뭐든 좋았다.

내 존재와 무관하게, 그냥 그가 편히 앉아 책을 읽을 소파가 필요했을 뿐이라고 해도 괜찮았다. 나는 간절한 착각에 익숙하니까.

문을 늦게 열어 준 것이 조금 섭섭할 법도 했지만, 문 앞에서의 서러움은 윤오의 온기가 섞인 공기에 나를 넣는 순간 녹아 사라져 버렸다.

줏대도 어이도 없는 이 맹목적 애착. 그것은 비루한 에스퍼의 신체 체계에 새겨져 함께 태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혼을 저당 잡힌 것처럼 조금의 반항도 할 수가 없다.

딱딱하고 찬기가 올라오는 바닥에 앉아, 소파의 팔걸이에 한결 가벼워진 머리를 기대었다. 시선은 온통 의자 너머로 보이는 그의 뒷머리와 목과 팔꿈치를 향했다.

바라지 않았던 이능과 밑도 끝도 없는 괴로움에서, 십 년도 훨씬 넘게 기다려 온 내 가이드.

고통을 일삼는 내 육체는 그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피가 돌았다. 두통도 이명도 사라졌다. 날카롭게 신경줄을 세우던 감각이 잦아들고, 손끝과 발끝까지 온기가 번져 갔다.

버티기 힘들 만큼 다가가고 싶고 두 번 다시 떨어지지 않게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참아 낼 만큼 그의 마음도 한 조각 얻고 싶었다. 이미 늦었다 해도 세상의 끝에서까지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할 만큼.

베란다 너머에서 구슬프고 애달픈 풀벌레들 외로워하는 소리가 집요하게 나를 쫓았고, 나는 윤오가 건반처럼 두들기는 타자 소리를 투기했다. 간간이 타자가 멎으면 그의 숨소리를 듣기 위해 내 숨을 죽였다.

바라보기만 해도 가쁜 그 모습을 앞에 두고 오랜만에 머릿속이 맑다고 생각했는데, 오래 누적된 피로는 그만, 까무룩 정신을 넘겨 버렸다.

“……선.”

“…….”

“이선.”

윤오가 나를 부르는 소리. 눈꺼풀이 곤충의 날개처럼 요란하게 바스락거리며 깜빡깜빡 초점을 잡았다. 어두운 잠이 달아난 사이에 아직 남은 해가 길쭉하게 들어 오른뺨을 덥게 적셨다.

“……네.”

의자를 돌려 내 쪽을 보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잠깐, 찰나만큼 눈을 떼어 책장의 초침 없는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열 시가 지나 나를 내보내려는 부름인가 싶었다.

다행히, 몸이 개운한 것과 별개로 까무룩 잠든 시간은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그는 나를 아예 오지 못하게 할 때는 종종 있었지만, 시간을 채우지 않고 돌려보낸 경우는 없었다.

이제까지는.

“…….”

“네?”

정말로 조용히 있었는데. 내가 멋대로 잠든 게 싫었을까. 잠꼬대라도 했나. 숨소리가 컸을지도 모른다. 그의 시선을 감당하는 눈동자가 불안으로 떨렸다.

불린 까닭을 온통 나쁜 쪽으로 추리하면서도 눈을 피하지 못하는 나를 두고, 윤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자동으로 입력된 것처럼 그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숨까지도 들이마시고 싶었다.

입술에 틈을 만든 윤오를 잠시 기다렸지만, 그는 말을 잇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무엇인가 안타까워 닫힌 입술을 가만 바라보다가 두 무릎을 바닥에 붙였다. 느리게 무릎걸음을 걸어 그가 앉은 의자로 다가갔다.

그가 부른 까닭 중 무참한 짐작들은 죄 지워 버리고, 마치 그가 불렀기에 가는 것처럼, 시선을 감히 마주치지 못하면서도 불거진 무릎 뼈로 바닥을 밀어 그의 발치에 앉았다.

5월에 했던 검진 결과가 그에게 통지되었을 테다. 그는 내 가이드로 등록되어 있으니까. 반강제적으로 우리는 서로의 보호자였다. 이미 봄부터 윤오가 내 방문을 금요일만으로 줄여 버렸기 때문에, 보나 마나 결과지는 형편없음으로 범벅일 것이다. 체감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대범하게 다가앉은 것과는 다르게, 나는 고개를 모로 비틀어 가며 꿇은 무릎 위에 손을 모아 얹고 손톱 주변을 뜯었다.

곁눈으로 보이는 그의 흰 미간과 눈썹이 잔뜩 구겨져 있다. 내 이 동작은 이번에도 정답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물러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윤오와 맞닿을 수 있는 이 거리가 내게는 정답이었다. 피로가 가시고 몸은 깊은 곳에서부터 훈기가 돈다.

연이은 그의 한숨이 등줄기에 소름을 일으키면 나는 그 숨을 놓칠까 급히 들숨을 쉬었다. 모르는 척 눈을 끔뻑거리고, 차가운 손끝을 피가 나도록 긁었다. 숨죽여 그의 처분을 기다렸다. 오늘은, 아니 오늘도, 부디 나를 불쌍히 여기기를. 내 볼품없는 상태를 더없이 가엾게 여겨 주기를.

“……이선.”

“네.”

“이러려고 왔습니까?”

이러려고?

나는 그의 말이 뜻하는 바를 미루어 짐작하다가 그의 다리 사이에 앉은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는지 떠올렸다.

아, 그가 말하는 것이 섹스라면 틀리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원했다.

긍정적인 대답을 대신해 가까운 허벅지에 조심스레 뺨을 붙였다. 문득 힘이 들어간 그의 근육이 얇은 면바지 너머로 뺨에 전해졌다.

당장이라도 그의 사타구니에 코끝을 가져다 대고 싶은 갈망을 견디고 바람을 담아 고개를 들어 보였다. 스치는 옷감이 볼을 긁어 속을 간지럽혔다.

곧 짜증이 담뿍 섞인 말이 이글거리는 눈빛과 함께 정수리로 뚝 떨어졌다.

“벗어, 그럼.”

짓씹어 뱉은 목소리가 낮다. 덜컥 겁이 나는 한편, 벌써부터 솟구치는 희열에 마음이 언저리부터 떨었다. 입 밖으로 나도 모르게 기쁜 소리를 질러 버릴까 봐, 입술을 깨물고 고개만 연거푸 끄덕였다.

두어 걸음 물러나 뒤로 돌고, 허리띠를 푼 다음 바지와 속옷을 내렸다. 품이 큰 셔츠가 흘러 흉한 아래를 가렸다. 그대로 얼른 주저앉은 후에는 빼어 낸 허리띠 한쪽 끝을 입에 물고 둥글게 몇 바퀴 감은 고리를 만들었다.

고리 안에 서둘러 내 양 손목을 집어넣고 겹쳐 묶었다. 여린 피부가 가죽띠에 조여 금세 빨갛게 물든다.

다급하게, 그러나 너무 바라는 행색은 드러나지 않게, 그가 싫어하는 내 몸이 보이지 않도록. 조심스레 되돌아가 그의 발치에 앉았다. 윤오에게 닿고 싶다면 그의 심기를 조금도 거스르지 말아야 했다.

꿇은 무릎 사이에 묶인 손목을 두고 고개를 조아려 기다렸다. 고작해야 가죽. 몇 겹이건 뜯어 버리지 못할 것도 없는 허리띠지만, 이것엔 내가 저지른 실수를 기억하는 의미가 있었다. 짐승 같은 본능을 다시는 내보이지 않고 순종적으로 그의 자비를 기다리겠다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는 기척이 느껴졌다. 성급하지 않게 주의해서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감은 윤오가 보였다.

나는 무언의 허락을 달게 삼키며 그의 허벅지 안쪽에 살짝 뺨을 붙였다가 냉큼 그가 입은 면바지의 버클을 잇새로 물었다.

혀 사이로 버클을 굴리고 앙 물어 납작하게 눕힌 다음, 힘을 준 입술로 비벼 가며 단춧구멍 사이로 밀어 넣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버클이 빠졌다.

얼얼한 잇몸과 벌써부터 붉게 젖은 입술이 지체 없이 지퍼를 물었다. 드르륵 벌어진 바지춤으로 어두운색의 드로어즈가 드러났다. 두툼한 성기가 든 그곳에 곧장 코를 박았다. 얼굴이 달아오르게 문지르고, 혀를 내어 매끄러운 옷감을 성의껏 핥았다.

드러난 윤곽을 따라 속옷째로 빨아올리고, 물어 조였다. 쇠 맛이 나는 딱딱한 지퍼에도 아랑곳 않고 혀를 비집어 넣었다. 이윽고 그의 성기가 서서히 발기하여 치솟았다.

허리 밴드를 밀어 내고 드러난 성기의 끝머리를 입술로 마구 쪼았다. 핏줄이 만든 요철을 따라 혓바닥을 붙이고 입가로 흘러내리는 침은 그의 앞섶에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벅차오른 눈가와 숨이 그의 아래에 연신 비벼졌다. 젖은 입술 틈에서 빚어진 질척이는 소리가 귓바퀴를 벙벙 휘감았다 튕겨 났다.

다급하게 달려들어 가쁘게 탐했지만, 채워지지 않는 조바심과 조급증이 다시금 입 안을 적셨다. 얼얼한 혀가 드러난 윤곽을 쉬지 않고 핥아도, 그의 것을 세우고 그의 속옷을 눅눅히 적셔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애끓는 신음을 간신히 삼켰다. 잔뜩 발기한 성기를 소중히 더듬던 혀를 물렸다. 단정한 체향이 나는 아랫배에 코끝을 눌러 붙이고, 이를 감춘 입술로 곧장 속옷의 밴드 끄트머리를 물었다.

그대로 당기고 끌어 내려 보았으나 손을 쓰지 못하는 채로는 앉은 그를 벗기기가 요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애원밖에 없다. 그의 눈 감은 얼굴을 올려다보며 숨만으로 애원하자, 미간을 찌푸린 윤오가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긴 손가락으로 개처럼 물어 당긴 밴드를 빼앗아 그 자신의 성기를 밖으로 꺼내 주었다.

바라는 것을 얻은 갈급한 마음에 얼른 그 기둥에 볼을 문질렀다. 까슬한 음모가 있는 아래를 입술이 따가울 만큼 비비고, 미끌거리는 끄트머리를 입 안 가득 빨아들였다.

성급하게 늘린 입가와 볼 안쪽이 금세 찢어질 듯 아렸다. 쿡쿡 치받는 대로 숨이 막히거나 구역질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모조리 달가웠다.

한참을 정신없이 열중하다 미처 다듬지 못한 호흡을 채울 때, 언뜻 보인 윤오의 입매가 소리 없는 모양을 그렸다. 쿵, 쿵, 대번에 욕설을 알아본 심장이 까맣게 내려앉는다.

묶인 손목을 들어 구멍 난 가슴팍을 누르고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못 본 것으로, 못 알아들은 것으로 했다. 모른 체하며 혀를 더 내밀어 귀두 아래를 쓸고 먹먹해진 목구멍까지 억지로 비집어 열었다. 그의 성기를 내 안으로, 안으로 집어 삼켰다. 더욱 크기를 부풀리는 그의 것에만 집중했다. 나로도 그의 흥분을 고취시킬 수 있단 사실에 매달렸다.

어깨를 몰래 그의 무릎 안쪽에 비비고 손등을 그의 발등에 슬쩍 가져다 댔다. 입과 혀는 그의 핏줄이 이룬 굴곡을 더듬었다. 비린 맛이 축축하게 혀를 적셔 마치 내가 그를 맛보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다잡지 못한 숨이 뜨겁게 뿜어져 머리칼처럼 검은 그의 음모에 쏟아지고, 시린 코끝을 비빈 자리에서 나는 짙은 체취가 담뿍 허파를 채웠다. 혀뿌리에 가득 고인 침을 꿀꺽 넘기면 목구멍을 채운 그의 성기가 움찔, 하고 꼭 살아 있는 생물처럼 튀었다.

파묻은 고개를 들어 귀두까지 빨아올렸다. 선단을 혀로 긁고, 그의 아랫배와 음모에 얼굴이 눌릴 만큼 목구멍을 깊게 열어 머금었다. 혀끝이 닿는 곳곳을 놓치는 부분 없이 꼼꼼히 쓸었다. 도드라진 핏줄을 따라 길을 잡거나 그의 기둥 아래를 면적이 넓은 혀의 윗부분으로 말랑하게 휘감기도 했다.

크고 단단한 기둥을 입술과 혀, 목까지 온통 바쳐 애무하자 얼얼한 자리에 차츰차츰 흥분이 들어찼다. 숨통이 막혀도 괴롭지 않았고, 간신히 헐떡여 호흡하면서도 적막했다. 번져 나간 흥분과 고요가 예민한 신경을 서서히 점령해 나갔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짙으면 짙을수록 오랜 고통에 고요를 부르는 접촉. 짙을수록, 깊을수록 더한 정적을 주는 가이딩.

고통이 물러난 자리를 채우는 것은 저미는 쾌락이다. 고개가 쉬지 않고 그 달곰한 정적과 쾌감을 쫓았다. 그가 허락한 시간이 조금도 허투루 쓰이지 않게 정성을 다했다.

가끔 윤오가 내뱉는 신음을 귀로 집어 담을 때마다 등줄기가 솟아올랐고, 아랫배 안쪽이 기대로 뭉근하게 저렸다. 이미 껄떡대며 끝을 적신 성기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양손을 묶은 허리띠의 날 선 모서리로 셔츠 아래 발기한 내 성기를 긁었다. 예리한 고통에 허리가 움찔움찔 떨었지만, 주제도 모르는 성기의 굳기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줄어들기는커녕 찌릿한 통증이 쾌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성감을 올렸다.

그의 곁에서는 목구멍이 한계까지 늘어나고 민감한 살이 까져 상처가 나도, 그 아픔마저 감히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살이 스치는 습한 소리가 한참을 내 입과 그의 샅에서 빚어 날 때, 문득 그의 손가락이 내 머리칼 사이를 파고들었다. 간지러운 그 손길에 목이 움츠러들며 목구멍 안에 자리한 것을 꾹 조였다.

젠장, 윤오의 낮은 욕설과 더운 숨을 잡아낸 귓바퀴가 쫑긋 솟았다. 그의 손가락이 파고든 두피도 긴장으로 비쭉 솟았다.

잠시 멈췄던 손이 곧장 뒤통수까지 미끄러져 머리털을 움켜쥐고 거칠게 틀어 올렸다. 목젖까지 욱여들어 가 있던 성기가 목구멍을 거꾸로 긁으며 그대로 혓바닥 위로 미끄러졌다.

강제로 벌어진 목에서 컥, 하는 괴로운 소리를 뱉으면서, 혹시나 그의 것이 이에 긁혀 상처 나는 일이 없도록, 외려 입을 더 크게 벌리고 혓바닥을 너르게 내었다. 얼얼한 턱을 닫고 번들거릴 입술을 핥았다.

쥐가 고양이 걱정하듯이, 내 뒷머리를 잡아 챈 윤오가 무겁지 않도록 무릎을 세우고 모가지를 꺾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주친 그 눈이 마침내 내 것을 닮은 색욕에 젖은 것이 기뻐서, 조금 웃을 뻔하기도 했다. 눈빛에도, 미간에도, 걸러지지 않은 언짢음이 그대로 나를 향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달다고 꿀꺽꿀꺽 그 따가운 눈총을 받아 삼켰다. 그의 미움이 두려워 달달 떠는 손목과 무릎은 무시했다. 목으로는 계속해서 침이 넘어갔고, 가슴은 살아 있는 듯 벌렁거렸다. 고작 보여지는 것만으로도 욕심과 희망이 멋대로 빛을 보고 목을 축였다.

멎은 것 같은 그 잠깐의 시간 틈에서 나는 윤오의 시선을 축복처럼 마시며 목구멍 안으로 윤오, 윤오, 하고 그의 이름을 울었다. 조금 더 달라고, 허락해 달라고 빌고 애원했다.

아마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당신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는데.

몸과 마음이 처음부터 나의 종교이자 절대자인 당신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다. 애정을 흉내 낸 욕정이나마 한 조각 달라고 빈틈없이 빌었다. 이 맹목을 알아 달라고, 이용해 달라고 간구했다. 쓰레기처럼 던져 주어도 나는 진창을 구르며 이 비참함 마저 기뻐할 것이었다.

입 주변이 번들거리고 눈에는 물기가 오른 꼴을 내려다보던 윤오가 쥐어 잡았던 머리채를 놓았다. 털썩 주저앉아 빤히 올려다보는 내 시선에, 그는 또다시 긴 한숨을 쉬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 손을 뻗어 책상 아래 서랍을 열었다.

못 가신 희열이 열기를 더하고 온몸에 피가 돌았다. 그 손길이 향하는 방향만 보고도 다가올 상황을 알아챘다. 그의 마음이 바뀔까 다급하게 가슴이 뛰었다. 빠르게 뒤를 돌아 발치의 바닥에 머리를 내리 붙이고 무릎을 세워 엉덩이를 치켜올렸다.

큼직한 흰 셔츠 아랫자락이 엉덩이에서 등으로 흘러 희멀건 살갗과 거기 새겨진 오래된 흉터들까지 드러났다. 가리려 애쓰던 모습이나, 당장은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팔이 자유로웠다면 벌어진 무릎뿐 아니라 엉덩이 까지도 직접 벌렸을 텐데. 그를 더욱 보채고 싶고,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끔찍하게 기분 좋은, 그와 더없이 가까워질 수 있는 그 행위를 기다리며, 기대와 긴장에 꼴깍꼴깍 목젖이 울렸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윤오의 귓가까지 닿았으리라 생각하면 속이 뜨끈거렸다. 그럼 내 요란한 심장 소리도 진작부터 들렸겠지.

거슬린다거나, 싫다거나, 그런 감상은 아니기를 소원했다. 그러면서도 내 입으로 성기를 세우고, 볼품없는 몸을 내려다보면서 흥분을 이어가는 그의 모습에 염치없는 욕구가 스멀스멀 흥분을 지폈다.

어쩌면 지금만큼은 그가 나와 같은 것을 바랄지도…….

얼른 고개를 털어 허망하기만 할 뿐인 바람을 흩어 버리고 관자놀이를 더욱 바닥에 눌러 붙였다. 목을 한껏 꺾어 윤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곧은 콧대가 만드는 유려한 옆선이 느릿하게 숙여지고, 그의 앞에 치켜 들린 내 하체에 그의 시선이 내렸다.

“……흣.”

무심하게 찌그러진 용기에서 차가운 윤활 젤이 왈칵 흘렀다. 꼬리뼈에 쏟아진 액체가 엉덩이 사이의 골을 타고 허벅지를 지나 무릎까지 죽 내달렸다.

민감하게 달아오른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안쪽 허벅지를 간지럽히고 바닥의 무릎뼈를 흥건하게 두른 미끄러운 액체로 인해 마른 살갗에 떨림과 저린 쾌감이 이르게 피어났다.

디딘 무릎부터 치솟은 엉덩이까지가 파들파들 떨었고, 기대를 집어 먹은 허리는 이따금 움찔거리며 비틀렸다. 그는 그다지 시간을 지체할 마음이 없는 듯 커다란 성기의 끄트머리를 비좁은 구멍의 입구에 눌러 맞추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것이 꾹, 꾹, 힘이 채 다 빠지지 않은 곳에 닿아 올 때에 온몸이 지레 기뻐 후들거렸다.

잇따를 고통과 쾌감을 기억하는 구멍은 그가 닿은 것만으로 설레 가만 힘을 빼지 못했고, 섣불리 오므라진 입구를 몇 번인가 미끄러지다 푸욱, 한 번에 귀두가 밀려 들어왔을 때는 저절로 아래에 힘이 들어가 그의 것을 조였다.

“아읏……!”

나도 모르게 새어 나간 새된 신음을 급히 단속하고 모인 두 주먹에 코와 입을 묻었다. 손목을 묶은 거친 가죽 모서리가 턱을 긁었다.

낮은 목소리가 뱉은 짧은 욕이 내 등 위로 떨어졌다. 곧이어 커다란 손이 들썩이는 등을 지나 뒷덜미를 눌렀다. 그리고 빠듯하게 벌어진 구멍 안으로 커다란 성기가 깊이 짓쳐 들었다.

입 주변을 손톱과 허리띠로 붉게 그어 가며 점차 파고드는 묵직한 부피를 감내했다. 더는 벌어질 수 없을 만큼, 늘어날 수 없을 만큼을 지나면 배꼽을 지나 장기를 모두 밀어 올리듯 그의 성기가 파고들었다.

가장 깊은 곳이 겨우 벌어질 적에 터진 탄성 역시 묶인 두 손목 사이에 가려 숨겼다.

두 무릎을 벌려 지지하고 엉덩이만 높게 쳐든 우스운 자세가 크게 흔들렸으나, 맞닿은 윤오의 몸이 나를 붙들어 쓰러지지 못하게 했다.

다음은 파도처럼 들이치고 밀려나는 쾌감의 바다였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가쁜 동작이,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쾌감을 온몸에 흩뿌렸다.

열이 올라 뺨이 달아올랐고, 손톱으로 긁어 막은 숨은 더웠다. 살끼리 맞부딪히는 소리에 등줄기가 떨렸고, 그 충격에 무릎이 흔들렸다. 자세가 무너지지 않도록 무릎에 힘을 주어야 했다.

긴장한 내벽이 두꺼운 것을 휘감았다. 쏟아지는 자극을 잠시나마 멈춰 세울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도리어 민감한 지점이 강하게 짓눌렸다. 속이 온통 벌벌 떨고 허벅지부터 허리까지가 몽땅 비틀어졌다. 절절 매는 골반이 깊은 곳을 빠르게 쳐올리는 윤오에게 틀어 잡혔다. 몇 번이나 절정을 맞은 아래에서 물 같은 정액이 흘렀다.

핫, 흑, 감추고 삼킨 신음이 뜨겁게 가슴에 고이고, 아린 고통마저 희열이 되어 벌렁이는 가슴팍에서 더욱 세차게 뛰었다. 영원히 이렇게 있을 수 있다면.

뺨과 입가가 벌겋게 쓸려 따가운 것쯤 아무렇지 않았다. 고개를 비틀어 곁눈으로 올려다본 그의 표정이 머리칼과 그림자에 가려 알 수 없는 것만이 신경 쓰였다.

이 몸이 그에게도 쾌감을 가져다주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와 같은 만큼은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나를 써서 그가 기쁠 수 있다면.

그의 손이 닿은 목과 허리, 그리고 연결된 곳에서. 부딪히는 허벅지와 윤오가 지난 모든 피부 아래에서. 자리마다 새롭게 심장이 태어나 박동했다. 분홍빛 열꽃으로 피어나 쾌감에 비틀리고, 흔들릴 적마다 흐드러졌다.

두근두근, 쿵쾅쿵쾅.

그 모든 심장이 나를 조금만 원해 주세요,

-하고 외쳤다.

* * *

동관을 거치지 않고 바로 본관의 접견실로 출근하는 토요일. 복장은 약식으로 행정직 근무복을 입었다.

보통의 토요일보다도 접견을 늘리겠다는 내 의사를 전하자, 오랜 기간 내 부관을 맡아 온 데리다가 잠시 침묵했다. 나와 접견 대상들의 상태에 경중을 따져 보는 침묵인 듯했다.

몇 가지 컨디션과 관련된 질문 후에는 평소처럼 접견실 예약을 잡아 주었다. 그녀라면 내 목소리만으로 상태를 알아챘을 테지.

깊은 숙면을 취한 몸은 더할 나위 없이 가벼웠고, 아리게 남은 지난밤의 통증은 그만치 기뻤고, 그래서 나는 눈물이 날 만큼 기분이 좋았다.

내딛는 걸음들은 디딘 곳이 바닥이 아닌 양 무게가 없어서, 괜히 흙모래를 구두 앞 굽으로 헤쳐 날리는 어린애 장난질을 하다 매 순간 그리운 얼굴이 떠올라 다시 씁쓸하게 웃음 짓기도 했다.

윤오는 알까. 그가 경멸하는 짐승이, 그 괴물들이 하나같이 이렇게 단순해 빠진 것을.

사실 그의 경멸이 일반적인 시선보다 과하다고 할 수도 없다.

에스퍼와 가이드. 예고 없이 발생하는 초능력자와 그들이 집착하는 일반인.

에스퍼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저들을 닮은 가이드의 편에서 손가락을 들었다. 위험한 돌연변이, 끔찍한 괴물, 그리고 병기. 작전 하나, 기사 하나에 슈퍼히어로와 군부의 개를 오가고, 무수한 위협에 앞장서다 위험이 사라지면 고삐 없이 돌아다니는 도사견이 되는 연합군의 에스퍼를 향해서.

고통 속에서 이능력을 발현한 자들은 이제 군소속이 되어 국가의 통제 하에 평생을 산다. 울타리 없이 격리되었고, 말뚝 없이 기다란 목줄을 맸다. 그 취급이 못마땅해 뛰쳐나간 자들은 사살되었고, 그대로 남은 괴물들은 국가 간 분쟁, 소요, 그리고 발발한 반란군과의 전쟁에서 무기로 쓰였다.

그렇게 발현 직후부터 죽음까지를 군에서 보내는 동안, 발견되지 않은 가이드들은 어떤 특징도 없이 일반인의 사회에서, 일반인으로서 살아갔다. 그리고 찾아낸 가이드들은 어떤 노력도 없이, 가벼운 접촉만으로 에스퍼들의 깊은 괴로움을 덜어냈다.

파동에 몸이 망가지고 부작용에 정신이 닳은 에스퍼와 유일한 해법이자 치료제인 가이딩. 세월만큼 지독한 고통이 사라지는 그 순간을, 숨쉬기를 허락받는 그 기분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개중에서도 한 쌍처럼 파동의 감쇠 형상이 닮은 ‘매칭 가이드’를 만나는 일은 기적에 가깝다. ‘매칭 가이드’는 에스퍼의 몸에서 날뛰는 파동을 단숨에 진정시키고 부작용을 씻어 냈다. 고통으로 잠을 설치지 않고, 괴로움에 자해하지 않는 밤을 주었다.

그러한 기적, 또 운명. 어떻게 매달리지 않을 수 있지?

죽거나 미치기 전에 ‘매칭 가이드’를 찾아내는 에스퍼는 고작 15퍼센트에 지나지 않으나, 지옥 같은 기다림이 보상받은 그 소수의 이야기마저도 비틀린 애착에 조명하여 비난을 사고는 했다.

정작 연합국의 가이딩 시스템은 철저하게 가이드를 보호하고 있는데. 대중매체는 반군의 정보를 섞어 군이 소속 가이드들을 억지로 성관계하도록 내몰고 박해하는 것으로 보도를 쏟아 냈다. 자극적인 이면 너머의 실정을 안다면 우스울 일이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사이로 플라타너스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 모바일을 꺼내 데리다에게서 도착한 접견 리스트를 열었다. 읽지는 않고 이름과 시간 배정 정도만 훑었다.

구구절절 읽어 봤자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고작 30분, 또는 한 시간 정도 앞자리를 내주는 일이다. 치료도, 위로도, 연민도, 모두 내 몫이 아니다. 나 또한 임무로써 그들을 조금 더 살게 할 뿐인 군의 개새끼니까.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멍하니 창틀에 두었던 시선을 그대로 휘둘러 입구를 확인했다. 소란스러운 입장객이 허리까지 숙여 가며 사과하려는 것을 대충 조용히 시키고 손짓해 테이블 맞은편으로 불렀다.

“아직 안 늦었어. 앉아.”

“예. 감사합니다!”

늦은 건 녀석이 아니라 호출이겠지.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았을 텐데 15분 만에 등장하느라 고생한 흰 턱 끝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리모컨으로 실내 온도를 3도 정도 낮추자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한층 요란해졌다.

“이름이 한타?”

“예. 소위 한타입니다.”

“본부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나?”

“예. 작년까지 연구소 소속이었습니다. 임관한 지 5개월 되었습니다.”

“그래.”

시시한 대화.

대쪽같이 군기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녀석을 두고, 자세까지도 해이한 나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보이는 연병장 주위를 두른 플라타너스가 한창 여름의 색으로 선명했다. 잠깐 잊혔던 풀벌레 소리가 때로 파도에 밀려가듯 멈췄다가 다시 재잘재잘 울었다. 오늘 바람이 좋았지.

에어컨 모터 소리에 간간이 녀석이 숨 고르는 소리 정도가 채운 접견 3실. 타이머가 찰칵, 첫 바퀴 돌아가는 소리를 비집어 내었을 때, 앓는 듯 미약한 목소리가 났다.

“저기…….”

“응?”

부르는 말에 고개를 돌리니 먼저 말을 건 녀석이 놀라 퍼덕거렸다. 볕 좋은 밖을 한참 내다보느라 어둑한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까닥여 계속하라고 했으나, 한참을 기다려도 영 말을 잇지 못했다.

아직 어렸던가. 이런 데서 티가 나네. 그것이 우스워 웃는데, 덩칫값 못하는 녀석의 낯에 벌겋게 열이 올랐다. 살살 눈을 굴리던 한타가 테이블 위에 오그라든 주먹 두 개를 조심스레 올렸다.

“저기, 손, 손잡아도 되겠습니까?”

군인 다우려 애쓰는 말투와 잘게 떨리는 팔꿈치. 별생각 없이 턱을 괴고 있던 쪽 손을 쭉 뻗어 녀석이 앞발처럼 모아 놓은 두 손 위에 얹었다. 바들바들 잔떨림이 남은 손가락이 내 왼손을 소중하게 감아쥐었다.

“한타?”

“네? 네. ……예. 소위, 한타.”

무심코 세게 쥐인 손이 꽤 아려서 살살 털어 흔들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을 쫓아가 눈을 맞췄다.

“지금 스무 살?”

“……예, 그렇습니다.”

마치 입에 문 것을 빼앗길까 걱정하는 개처럼, 적갈색 눈동자가 초조함으로 물들었다. 힐끗힐끗, 제 손아귀에 내 왼손이 그대로 들어 있는지 계속해서 확인하는 꼴이 퍽 처량하다.

소위 한타. 발현은 열여덟. 서국 난민 출신. 작열통.

“엎드려 봐.”

한타는 모호한 그 말이 명령인지, 일어서야 하는지, 잡은 손은 놓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다 내가 오른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로 가져가자 냉큼 테이블에 엎드렸다. 목과 가슴 어림에 내 다른 손을 꼭 끌어안은 채로.

남은 시간이 오 분 줄어 들 때마다 타이머에서는 찰칵이는 소리가 났는데, 나는 남은 다섯 번이 찰칵일 동안 매번 움찔거리는 한타의 뒤통수를 가만 쓰다듬었다. 목깃 안으로 보이는 얼룩진 화상용 거즈는 못 본 척하고, 훌쩍거리는 울음소리도 못 들은 체했다.

짧은 접견 시간이 지나고, 아쉬움과 서러움이 덕지덕지 남은 눈가를 문지른 한타가 연신 허리를 숙이며 접견 3실을 나갔다.

공로가 쌓이면 우선 접견이 한 시간씩도 나오나, 갓 임관한 햇병아리가 그러기는 힘들 것이고……. 저 어린 녀석은 나를 다시 보려면 적어도 3주는 기다려야 하겠지.

이능을 제어하는 이능일 뿐, 가이딩과 비슷한 효과만 내는 것이라 길어야 하룻밤 정도 괜찮을까. 내일부터는 다시 약을 먹어도 괜찮아지지 않는 통증에 잠을 설치고 울 것이다. 그 괴로운 밤은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공유한 경험이었다.

방식이 달라도, 정도가 달라도, 밤새 만나 보지 못한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살아 있는 동안 부디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그 어두운 시간.

“새끼야, 돈 좀 벌어라. 씨발. 기다리다 송장 되겠다.”

“입 다물고 앉아.”

입이 걸은 바차스가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들어와 빈자리를 채웠다.

“씨발. 너 제대한 줄 알았다. 새끼야.”

절로 터져 나온 코웃음을 삼키지 않고 내뱉으며 열없이 대꾸했다.

“우리가 제대가 어디 있어. 죽으면 죽었지.”

“그러니까. 니 뒤진 줄 알았다고.”

그렇게 퉁명한 말을 던지고, 바차스는 등받이 너머로 고개를 넘겨 기지개를 켰다.

“아, 살겠다.”

볼 때마다 하는 우스운 탄식.

대령 바차스는 계급이 높고 공로가 크지만,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키고 시도한 전적이 꽤 있는지라, 놈에게는 접견이 매 30분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 점을 불평하긴 했지만 파견을 나간 게 아니면 빠지지 않고 대기열에 이름을 올렸다.

“너 뒤지면 따라 뒤져야 되는 놈들이 본부만 해도 한 덤프니까 함부로 뒤지지 마라, 새끼야.”

“웃기네. 이제 중앙에서 나가지도 않는데 죽을 일이 뭐 있다고.”

“그래도 뒤지지 말라고.”

안부 같기도, 당부 같기도 한 말.

연구동에서 오래 지낸 나는 이능이 상세히 드러나고 기록된 편이었다. 타인의 이능 정도를 제어하는 것, 상처를 옮겨 오는 것, 회복력 상승 등.

개별 전투력은 다른 전투형 에스퍼들에게는 비교도 안 될 수준이지만, 보조적인 용도가 다양해 버린 바람에 5년 만에 연구동에서 벗어난 삶은 다시 전방으로 내몰렸다.

기억이 시작되는 연구동 겸 훈련소 생활, 그리고 반란 전쟁. 반란군이 1년 반 만에 도하를 점령하고 주춤한 다음부터는 국경에서 국경으로. 발령 보류, 임관 보류, 임시 전송을 거듭하길 6년.

내 배치를 두고 여러 말이 나왔지만, 결론은 후방 지휘관의 승리였다. 중상을 경상으로 만들 수 있는 상처 치환 능력이 각종 사고에 휘말린 인재를 살리는 데 쓰일 수 있다는 점과 이능의 정도를 제어하는 능력이 그 고통스러운 반작용까지 줄여, 에스퍼 관리에 쓸모 있다는 점이 승리의 이유였다.

소속은 여태 질질 끌던 것과 달리 즉시 중앙으로 이전되었고, 나는 전보다 편해진 임무 난이도가 썩 마음에 들었다. 안전한 중앙에서 이능만 쓰면 되는 일. 치환, 그리고 접견.

군은 십대 후반의 어린 이능력자들을 감시 감독 하에 편입시키는 대신 그들의 불안정한 ‘파동’을 가라앉힐 수 있는 자질을 가진 민간인, 가이드를 꾸준히 찾아냈다.

찾아낸 사람들은 가이드 센터에 소속되어 준공무원 대우를 받고, 매칭률이 독보적으로 높은 에스퍼가 없다면 의뢰 형식으로 할당되는 공무를 수행한다. 내용은 ‘죽어 가는 에스퍼의 손을 잡는 일’. 에스퍼와 파동의 매칭률이 높으면 높을수록 파동을 쉽게 진정시켰고, 고통과 이능의 반작용은 줄어들었다.

원했든 그러지 않았든, 현실에 모순을 만들어 내는 이능력자가 된 이상, 살아남기 위해서는 군의 엄격한 관리 하에 병기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만날 수 있다고 믿어야 했다.

하나, 기다려도 끝끝내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드문 일도 아니다. 눈에 띄기 마련인 이능력자와 다르게 그들이 기다려야 하는 상대는 일반인과 조금의 다름도 없으니.

그건 마치 모래톱에서 제게 주어진 한 톨의 무언가를 찾는 일이었다. 보이지 않아도, 까마득해도, 그럼에도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일.

언젠가 ‘제 가이드’를 찾아낼 것이라 여기며 꾸역꾸역 이어 가는 그 같은 생존.

중앙으로 소속 이전 후 벌써 4년이 지났다.

그간 접견으로 만난 에스퍼 중 반절은 이제 대기 리스트에서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그 ‘반’의 반이 조금 안 되는 만큼은 제 가이드를 만났고, 나머지는 에스퍼 관리동, 또는 국경에서 전사했다. 하나같이 센터 가이딩으로는 역부족인 강한 에스퍼들이라 폭주도 일렀다.

가이딩과 달리 파동 형태를 가리지 않는 내 이능, 그리고 접견은 그런 에스퍼들이 포기하거나 탈선하기 전에 군이 지급하는 ‘체험판’이었다.

이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작용이 같이 나타났지만 오랜 기간 고통에 시달린 이들은 이능과 고통이 사라진 ‘완전한 정적’, 그 경험과 가능성만으로도 ‘제 가이드’에 대한 환상을 놓지 못했다.

제어를 사용한 접견이 이어지니, 이능과 가이딩을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잡음이 일기도 했다. 가령 나를 가이드 삼겠다 덤비거나, 힘을 써 강제하려 하거나…….

계급이 조정된 후 자연히 사그라들었지만, 내 이능이 바차스를 비롯한 다른 절박한 에스퍼들이 착각하기에 알맞았던 탓도 있겠다. 제 기다림이 끝난 줄 알고 눈이 돌아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지.

이능을 믿고 제대로 신체 단련을 하지 않은 에스퍼에게 국경을 전전하던 내가 위험을 당할 일은 없었으나, 징계 중이던 바차스가 제 이능을 써 내 정보를 빼낸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정보를 다루는 최상급의 이능력자 앞에서 전산 시스템은 그야말로 무능했고, 대단한 업적과 더불어 불복종의 대명사인 놈을 영창에 가두었다 착각한 군부가 안일했다. 몸을 구속하는 것으로는 완벽히 가두지 못하는 놈인 줄도 모르고.

엉망이 된 전산이 복구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군은 끝내 군 기밀이 어디까지 들쑤셔졌는지 밝히지 못했다. 다만, 한동안 나를 내놓으라 날뛰었던 바차스는 얌전해졌다. 아마 남들보다 자세한 연구소 기록과 남들보다 긴 전방 근무 같은 우울한 이력들 때문이 아닐까.

그 정보들이 나 역시 불쌍한 에스퍼 중 하나인 것을 깨닫게 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이후로 놈은 강압적인 행사 대신 오히려 질릴 만큼 ‘뒤지지 마라’ 하는 말을 했다.

나에게는 그것이 끊임없이 전장으로 파견 다니는 바차스가, 스스로 되새기는 말로 들렸다.

“어제 매칭 나왔는데, 이번에도 50퍼센트가 안 되더라.”

“50퍼센트? ……그래도 만나러 가야지.”

“씨발. 하, 존나 씨발이야. 기대를 하게 하질 말던가. 막상 가면 우리끼리 열댓 명 줄줄이 모여서 눈싸움 이 지랄 떨고, 가이드 새끼는 벌벌 떨고.”

테이블 아래서 놈의 무릎이 보란 듯이 건들거리는데, 짜증 섞인 말투에는 감출 수 없는 체념이 가득 묻어났다.

“1차 매칭 50도 안 되면 씨발, 2차 해도 결국 나는 아닐 게 뻔한데. 그런데 가야겠고.”

“…….”

나 역시 그 간절함을 모르지 않았다.

윤오를 찾아내기 전, 내 것일지 아닐지도 모르는 가이드 하나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그 광경에 나도 가 본 적 있으니까. 끔찍하고, 비참하고, 절실하고, 그리고 실망하고.

바차스는 그의 뛰어난 이능만큼 더 많은 경계를 받았을 것이고, 여태 만나지 못했으니 더 많은 기대가 꺾여야 했을 것이다.

“새끼야. 가이드 있으니까 좋냐.”

“……좋지.”

당연한 말이 바로 나오지 못하고 잠시 목구멍에 걸렸다.

고개를 까딱 들어 내 얼굴을 훑은 바차스의 울대 부근에서 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났다.

“그럼 좀 웃고 살아, 새끼야. 접견도 좀 자주 하고.”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너는 격주로 한두 번은 잡히잖아.”

“존나, 씨발. 같이 살아 줄 것도 아니면서.”

“꿈 깨라.”

작년까지만 해도 제 가이드가 나타나면 나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을 새끼라고 욕을 되돌려줬었다.

그러나 올해 급격히 상태가 불안정해져 에스퍼 관리동을 몇 차례 들락거린 것과 50퍼센트를 넘기지 못하는 매칭률에도 매번 센터를 찾아가는 놈을 보면서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계속 동조해 주기에는 남은 시간과 그 희망이 무척 잔인해서.

바차스가 가이드를 기다린 세월이…… 17년 정도 되려나.

검은 눈가와 푸르게 도드라진 핏줄, 군데군데 모세 혈관이 터져 생긴 멍과 위에 대강 붙여 흉터를 가린 패치……. 육신의 회복이 더뎌 드러나는 흔적들을 눈으로 훑다가 데리다가 추가한 최근 이력 한 줄을 떠올렸다. 응고제 및 마약성 진통제 한계치 처방.

발현한 순간부터, 그리고 사용할수록 이능은 자라났다. 이능이 발달할수록 부작용 역시 그 정도가 심해졌고, 속에 자리 잡은 이 모순은 점차 더해지면 더해졌지 결코 가이딩 없이 줄어들지 않았다.

정신을 잃었다 깨기를 반복할 수준의 두통과 경련, 매주 가능한 처방을 모두 소진해 진통제를 맞는 그가 폭탄 취급을 감수하면서도 연합군에 남아 있는 이유.

“니 가이드 새끼가 일 못 하게 하면 말해. 내가 존나 깽판 칠 거야.”

“말하겠어? 그리고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내가 요즘 피곤해서 그래.”

미치거나 혹은 죽거나. 협소한 선택지 안에서 목숨 비슷한 것을 부지하고, 놓지 못한 희망 가닥이 미련인 것을 알고도 쥐어 붙들다가 이내 거기서 거기인 결말로 바스러지는. 그 결말마저도 스스로가 아니라 군이 내주는 단조로운 삶.

그럼에도 이 소망은 포기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므로. 마저 기다릴 수밖에 없으므로.

눕다시피 의자에 기대어 욕을 질러 대는 바차스를 보고 있으려니 찰칵, 하고 마지막 5분을 알리는 소리가 났다.

“30분 존나 짧아. 하, 새끼야. 한번 안아 보면 안 되냐.”

“안 돼.”

“안 먹히네, 씨발. 좀 불쌍하게 여길 수 없냐?”

“퍽이나.”

불쌍하지 않은 것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단지 모두가 불쌍한 이곳에서 특별히 더 불쌍하다 재단할 기준이 없을 뿐.

헛소리를 무시하는 대신 놈의 이능을 권장 이하로 좀 더 줄어들게끔 조절했다. 길어 봐야 3분 남았나.

곧장 눈치챈 바차스는 늘어진 자세 그대로 피식 웃음소리를 내었고, 남은 시간이 다 지나고 나서는 별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서는 뒷모습이 마저 쓸쓸할 틈도 없이, 문 앞에서 대기하던 대규가 바차스의 뒤통수에 경례했다.

그사이 꽤 묵직해진 관자놀이를 콕콕 문지르며 곧장 들어온 대규를 앞자리에 앉혔다. 새롭게 타이머를 설정하는 손끝에 녀석의 눈길이 지긋이 닿았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이지만, 항상 그랬듯 녀석은 침묵을 택할 것이다. 찰칵, 첫 번째 태엽음에 무심히 따르던 시선이 감겼다.

대위 대규, 올해 스물여섯, 습관성 골절 및 환각 장애.

대규는 우선순위가 밀리기 일쑤인 녀석이다. 이능에 따른 부작용이 심각하지 않다고, 타인에 의해 분류되어 있으므로.

나나 데리다가 아니라 나를 판매하는 사람들이 매기는 분류.

에스퍼들은 내 접견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본인 부담금으로 제법 큰 금액을 납부하고도 순번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리고 군은 접견과 순번 배정에 관련한 업무를 모조리 나와 내 부관에게 떠넘긴 다음, 주당 접견 시간을 추가 근무 수당으로 계산하여 내게 지급했다. 이것저것 따질 것도 없이 군만 좋은 장사.

기껏해야 주 12시간이 최대인 갑종의 쥐꼬리만 한 특근 수당 대신, 관리팀의 똑똑한 누군가는 내가 이 일에 가담하도록 만들기 위해 다른 수단을 썼다.

접견 리스트에 매번 딸려 오는 프로필이 그 방법이다. 이름 아래 덕지덕지 덧붙은 불행한 사고와 폭주, 통증의 종류, 통각 수치와 병력, 예후까지…….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는 약력을 얼핏 읽게 되면 어느새 통신 요청을 넣고 있었다. 휘둘리는 기분이 가시지 않아도 어쩔 수가 없다.

준준이었나, 아니면 바차스였나. 누구였건 내가 쓰러져 넘어가는 판에도 접견을 잡은 한심한 꼬락서니를 보고 멍청하다 일갈했던 기억이 문득 스쳤다.

나는 무슨 생각이었더라. 그렇지. 군이 윤오를 내 곁으로 집행해 오겠구나, 그러면 당신은 나를 더욱 싫어하겠구나, 가까워지는 바닥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조금쯤 기쁘고, 또 얼마간 슬펐던가.

내가 집중하지 않고 다른 생각을 잇는 동안, 오랜만에 접견으로 만난 대규는 말없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자세는 정갈하고 숨소리도 그렇다. 수 번이나 우선순위에 밀려가면서도 빠짐없이 대기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이 남자의 통증이 남보다 덜하다고, 어떻게 그들은 장담할 수 있었을까. 그저 참고 있을지도, 너무 잘 참는 게 탈일지도 모르는데.

“대규 이번에 진급했지? 축하한다.”

“예. 감사합니다.”

“그래. 손잡을래?”

“예.”

 점잖은 목소리와 다르게 그의 양손이 빠르게 올라와 왼손을 감쌌다.

파동을 제어하는 내 이능은 공간적 거리와 상관이 있고 실질적 접촉과는 무관하나, 에스퍼들은 이런 무익한 접촉을 선호했다.

대규처럼 여러 번 본 데다 위험하지 않은 녀석들이라면 손 정도는 매번 주고 있지만 기억하기로 녀석이 먼저 청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기껏 순번을 기다려 얻은 시간에도 욕심부리지 않는 모습에서, 나는 종종 애처로움을 느꼈다.

접견을 모두 마무리하고 데리다에게 간소한 메시지를 넣으니 기다린 듯, [수고하셨습니다] 하는 답장이 왔다. 역시 근무 중인 모양이다.

늦어지면 먼저 퇴근하라고 일러두어도 그녀는 늘 동관의 사무실에서 접견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내 업무의 종류가 남들보다 많으니 데리다의 일도 그만큼 더 있기야 하겠으나, 그녀의 상관은 금요일 저녁까지 야근하게 두는 악덕이 아니었다.

뭐라고 하건 듣질 않으니 쉬라고 명령을 내릴 수도 없고.

그녀의 주요 업무이자 상관으로서, 약간의 죄책감이 잠시 들었다가 들큼하게 부는 더운 바람에 밀려 사라졌다.

모바일을 집어넣고 본관을 나서는 중에 갑작스러운 현기증이 익숙하게 찾아 들었다. 지독한 멀미가 두개골을 차지하고 거먼 땅과 아직도 대낮 같은 하늘에 번갈아 나를 놓았다. 고무줄처럼 정신이 당겨져 밝은 하늘에 가까웠다가, 검게 바닥으로, 그리고 보다 깊은 아래로 추락했다.

주저앉으면 조금 나을 일인데, 아무리 보는 사람이 없어도 본관 앞에서 그럴 수는 없다. 중력 없이 줄을 타듯 감각을 잃은 몸뚱이를 필사적으로 세웠다.

한참 같은 잠깐이 지나니 더 남은 것도 없이 속이 텅 빈 껍질이 바람에 흔들리기를 서서히 멈추었다. 식은 피가 정수리부터 발치를 한 바퀴 돌고, 분명 비틀거렸을 몸을 아닌 척 세웠다. 저만치 전기 차가 다가와 코앞에 멈춰 섰다.

관사까지 걸어가려던 건 또 어떻게 알았지.

끝까지 괜찮은 시늉을 고집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차를 돌려보내지는 않기로 했다. 무인 전기 차 문을 짚은 손에 잠시 이마를 기대어 어지럼증을 달랜 다음 좌석에 몸을 앉혔다. 긴장이 풀린 몸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가 힘들게 무거웠다.

나를 실은 전기 차의 낮은 엔진 소리가 들리고, 무릎 위에는 어른어른 플라타너스 그림자가 얼룩졌다. 따라 고개를 들어 올리자, 뙤약볕과 짙은 녹음, 그리고 풀벌레 소리로 바깥이 빼곡하다.

눈에 보일 것처럼 요란한 매미 울음이 올해 유독 많은 것인지, 아니면 매년 이래 왔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 * *

 준준은 요즘 부쩍 기분이 좋다.

“주노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해.”

좋을 수밖에. 가이드를 가진 그 기분이 오죽할까.

당직실 옆자리에 앉은 커다란 덩저리가 시간 내내 주절주절 주노 얘기를 떠들어 댔다. 주노로 시작해서 주노가 어쩌고 하다가, 주노를 저쩌고 하는 이야기.

딱히 들어 줄 가치가 있는 말은 아니지만 기특한 일이기는 했다. 가이드를 만나지 못한 에스퍼는 저 나이까지 멀쩡할 수가 없으니까.

서른을 넘길 무렵부터는 언제고 미치거나 폭주할 수 있는 폭탄처럼 보아지는데, 나를 만났을 때 준준은 이미 서른둘이었다. 주노를 만난 것이 고작 6개월 전이고.

“근데, 십팔. 아이스크림 종류가 더럽게 많은데 뭘 사 줘야 하냐.”

“그래.”

“뭘 사 줘야 하냐고, 인마.”

인마라니. 술, 담배에 이어 욕까지 끊었나.

호칭마저 온순해진 준준을 한심하게 보았다. 한 때의 상습 기물 파손범, 중앙의 괴물 에스퍼, 손괴액 본인 부담금 누적 10억 달성자에다, 과잉 진압으로 군법 재판을 받은 횟수도 최다였나……. 그런 무시무시한 이력을 가진 주인공이, 이제는 제 가이드의 관심을 받기 위해 주인 앞의 강아지처럼 귀여움을 떤다. 물론, 주노에게나 귀여움일 기괴한 짓거리들을.

연합국 국경을 전전하던 내가 중앙군 수도 방위 사령부에 전입되었던 4년 전, 준준의 흰자위는 점점 더 악랄해지는 불면과 고통에 피처럼 붉었다. 마찬가지로 그의 옷가지도 매일 터져 나가는 살갗에서 짓무른 고름으로 무거웠고.

그 시절을 생각하면 주노도 비위가 대단하지.

“아이스크림 가게를 사 줘. 사장님 시켜 주면 알아서 골라 먹을 수 있잖아.”

“어 그거 좋다. 그거 사려면 어디로 가면 되냐?”

“난들 알까.”

준준은 내 무성의한 답변과 관심 없다는 얼굴을 흘겨보고 짧게 고민하는 것 같더니, 벌떡 일어나 대충 손 인사를 했다.

“루돌프한테 물어봐야지. 걔는 알 것 같어.”

“그러든가. 가라.”

여전히 주간 당직실의 딱딱한 나무 의자에 기대앉은 내가 경례와 인사 사이 어딘가의 동작으로 성의 없이 손을 마주 저어 주었다.

성큼성큼 문을 빠져나가는 준준의 깔끔한 뒤통수가 여전히 어색하다. 면도도 매일 하고, 세탁도 자주 하고. 주노가 동거를 허락한 지 3개월 만에 이루어 낸 쾌거이자, 사람의 형상이었다.

저렇게 보면 그렇게 험악하게 생긴 것만도 아닌데. 죽이느니, 찢느니 하던 입버릇 때문에 첫인상이 그랬을까.

이제는 인상을 써도 전처럼 섬뜩하기보단 주노한테 잔소리라도 들었나 싶고 말았다.

암만 계급 치레를 신경 쓰지 않는다지만 상관을 상대로 하기에는 불온한 생각인가. 우리가 무슨 제대로 된 군인이긴 하냐만은.

그나저나, 아무리 가이드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도 지금은 이능 테스트를 겸한 훈련을 마친 후였다. 내 옆이 편할 텐데.

잘도 가 버린 준준을 두고 모바일을 꺼내 들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녀석과 대뜸 시작되는 아이스크림 타령에 루돌프가 지을 당황한 낯이 눈에 선했다. 곧 공용어를 할 줄만 알지 듣는 법은 모르는 그 짐승을 진정시키고 내게 대신 자초지종을 묻는 연락이 올 것이다.

미리 선수 칠 겸 [준준 - 개업 문의 예정 - 주노 선물용] 하고 메시지를 넣었다. 곧장 도착한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는 답장은 확인만 하고 껐다.

앉은 자리에서 무료하게 일정을 체크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비상 대기는 아직 30분이 남았으나 이미 자리를 뜬 상관을 본받아 나도 30분 정도는 태만해 볼 생각이다.

일단 더 앉아 있기가 배겼다. 오후 내내 앉아 보낸 탓에 엉덩이뼈가 다 아렸다. 나만 그런가. 살을 찌우면 좀 나을까. 그 전에 이 딱딱한 당직실 의자를 바꿔 줬으면 좋겠는데. 준준은 이제 온순해서 부숴 줄 것 같지 않고.

당직실을 나서며 부관 데리다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지금 출발하면 저녁 전까지 세 명쯤 볼 수 있겠다 전하니, 바로 접견 3실을 예약했다는 안내가 도착했다.

[접견 3실 예약 완료. 동관 앞 5분 이내 차량 도착. 대기 바람.]

사무적인 메시지에 첨부된 링크는 곧 만날 군인들의 간단한 약력이었다.

걸어가려던 건 또 어떻게 알고 차까지 보냈을까. 시킨 대로 동관 앞에 멈추고, 모바일을 들었다. 첨부 파일에서 약력은 휘휘 넘겨 버리고 가장 가까운 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진 접견 대기 리스트를 화면에 띄웠다.

총 여덟 명. 전원 30분 배정.

계급이나 소속은 대중없고, 시간은 동일하다. 어제 본 바차스나 대규는 계급이 높은 축이고, 신참이었던 한타 녀석은 꽤나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런데도 모두 30분을 배정받았다. 이상한 일이다.

누구는 위험해서, 또 누구는 만만하고 누구는 계급이 낮아서 짧게 배정을 받은 것이라 여겼으나, 그게 아니라면 가이드 센터에 문제가 생긴 걸지도 모른다. 단순히 가이드가 부족해서 내게 넘어 온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투둑, 투둑. 펼친 우산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묵직하다. 갑작스런 소나기에 이른 오후가 급격히 흐려지고 바닥이 어둡게 젖었다.

지금 여덟 명을 다 볼 수 있을까? 이르게 잡아도 너덧 시간이 걸릴 텐데.

무리한 접견이지만, 평소보다 훨씬 가뿐한 몸 상태를 믿어 보기로 했다. 그래도 너덧 시간인가……. 벌써부터 몸이 굳는 기분이다.

그저 앉아 있을 뿐이라도 집중이 필요한 이능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책을 읽거나 서류 작업을 할 수는 없었고, 간절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무성의한 태도 역시 보일 수 없었다.

내내 창밖을 보는 것도 무성의하다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이제는 내게 그런 불평을 할 만한 에스퍼도 남지 않았다.

우산을 접고 본관 계단을 올랐다. 도착한 2층의 접견실 앞에는 시간도 되기 전에 애가 닳은 녀석 하나가 벌써부터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데리고 들어가 후더운 실내에 에어컨을 켜고 챙겨 온 케이프를 둘렀다. 대충 인사를 받아 주고 익숙한 자리에 앉은 다음, 곧장 고개를 모로 틀었다.

볕이 잘 들고 경치가 트여서 데리다가 주로 잡아 주는 접견 3실도 비 오는 날엔 별달리 볼 것이 없다.

군부는 평일과 다르게 한산했고, 나는 서늘한 실내에서 빗방울이 맺히는 창과 창틀, 웅덩이가 진 흙바닥, 불이 들어온 동관의 몇몇 층과 어두운 하늘과 젖은 녹색 잎사귀 따위를 내다보며 바뀌는 앞자리 사람들에게 간간이 왼손을 내어 주었다.

때로 말 상대를 해 주기도 했으나 나는 접견하는 에스퍼들과 친분을 쌓기보다는 거리 두기를 원했다. 이 접견과 내 이능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쉽게 착각하기 때문이다.

친근한 관계를 원해 선을 넘나드는 녀석들을 무시하기는 쉽지만, 마찬가지로 통증에 절고 애정 결핍인 주제에 담담히 제 처지를 받아들이는 녀석들, 외려 조심스러운 녀석들에게는 도통 모질게 굴 수가 없었다.

곁을 내어 주고 손이라도 닿게 해 주는 것. 그 소박한 바람이 내 것과 닮아서일까.

서로 다른 온기가 왼손을 차례로 거쳐 지날 무렵, 데리다에게 연락을 넣었다. 오늘 상태가 괜찮으니 계속 보내라고.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던 것은 숨기고 유난히 상태가 좋아 추가로 더 보는 행세를 했다.

의도가 통한다면 내 기록에서 ‘주의’ 정도는 뗄 수 있을 것이다. 어제 윤오를 만난 것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고……. 내가 가이딩을 충분히 보급 받고 있다고 판단하거든, 그들이 불필요하게 내 가이드를 주목할 일도 없을 테니까.

그 하나의 이유를 위해 나는 센터 가이드의 손을 빌리지 않고 악착같이 참고 버텨 냈다.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아. 조금 피곤해서.”

사야야. 스물일곱 살. 저체온증을 동반하는 순환 기능 장애. 혈액 생성 장애.

지원계 에스퍼에게 순환 장애는 흔한 축이다. 맞잡은 그녀의 손이 나보다도 차갑다. 내내 에어컨을 틀어 놓은 실내는 가동을 멈추어도 찬기가 가득했고, 고작 냉방을 끈 정도로 오를 체온도 아니었다.

푸르게도 느껴지는 얇은 입술을 보고, 앞서 그녀가 거절한 담요를 재차 권했다. 이번에는 사야야도 받아 들어 무릎에 덮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요즘은 어때?”

“나쁘지 않습니다.”

“그래. 아이를 가질 거라고 했던가?”

“저번에 말씀드렸었지요. 생각은 여전하지만, 잘 안 돼서요.”

사야야는 2년 전, 부사관과 결혼했다.

덤덤한 목소리로 난임을 알리는 그녀의 차가운 손을 꾹 쥐었다.

“괜찮습니다. 내년까지는 시도해 보려고 합니다. 수혈도 꾸준히 받고 있고요. 가이딩도 가능한 만큼 신청해서 받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파견을 줄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은 차마 나오지 못했다. 오히려 전투계 이능력자보다도 파견이 많은 것이 지원 계열이다. 파동 감지와 천리안으로 불리는 개념 능력을 가진 그녀는 유용한 능력만큼이나 잡다한 출장이 잦았다.

딱히 동정하거나 같이 걱정해 줄 계제가 되는 것도 아닌데,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 그런지 이 손끝의 냉기에 마음이 더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여성 에스퍼의 기대 수명이 남성 에스퍼에 비해 확연히 떨어지는 만큼,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일반인과 결혼을 택한 만큼, 여태 생존한 그녀가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도 이해가 갔다. 더 많이 일하는 것도, 더욱 노력하는 것도.

남겨 주고 싶겠지. 남을 사람에게.

사야야의 상황에 대해서는 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도리어 내 파동을 읽어 냈을 그녀에게 불안정한 상태를 함구해 달라 부탁했다. 추가 근무를 늘린 피로 때문이라는 변명을 하니, 그녀는 ‘고맙습니다.’ 하고 기대하지 않은 감사의 말을 했다.

조금은 데워진 손으로 사야야가 접견실을 떠나고 어느덧 창밖의 비가 멎었다. 무리한 까닭에 목덜미가 무거웠지만, 접견을 두 배는 늘린 것 치고 소소한 대가다.

이 보여 주기식 몸부림이 관리부의 관심을 돌리는 데에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제 가이드를 찾고서도 분기별로 꼭 한 번씩은 고장이 나 버리는 내게서, 그리고 내 가이드인 윤오에게서 그 지긋한 감시를 치워 버릴 수 있다면, 아무리 무용한 시도라도 그만둘 수가 없다.

체력과 생명력을 갉아 내일이 줄어드는 것을 알아도 그칠 수는 없는 일.

과도한 접견의 목적이 관리부의 주의를 돌리기 위함이라면, 윤오가 내일도 방문을 허락한 것이 믿는 구석이었다. 내일도 그를 볼 수 있다는 것. 무려 그가 먼저 청하지 않았던가. 이런 적은 처음이다.

무리한 탓에 피로가 스며든 내장이 달달 떨리는 것을 깊은 심호흡으로 천천히 가다듬었다. 지쳐 뻐근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지난밤 그가 닿은 곳을 몇 번이나 되새겼다.

나는 기쁘다고, 내일도 그를 볼 수 있으니 분명히 기쁜 것이라 생각했다.

* * *

모바일을 집어넣고 식은 손끝이 아쉬워 꾹꾹 힘을 주어 주물렀다. 윤오를 만나 채워진 온기는 진작 사라졌고, 차가운 손으로 똑같이 차가운 손을 문지르고 비벼 보았자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고작 케이프와 담요를 준비한 것으로는 역부족이었나 보다.

소나기가 그친 질척한 흙바닥을 가로지르는 대신 포장된 보행로 블록 위를 빙 둘러 관사로 향하는 길. 저 멀리 연병장을 가로지르는 익숙한 덩치가 보였다.

나와는 다르게 질은 흙과 고인 흙탕물 웅덩이도 개의치 않고 철벅거리며 어딘가를 향하는 남자의 바짓단이 점점이 진흙으로 희다.

“준준!”

엉망이고 거침없는 걸음을 걷던 남자는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확인하고 곧장 방향을 수정해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두어 발짝 더 걷다가 준준의 각도에 맞을 즈음 멈춰 서서 기다렸다. 그가 원래 가려던 방향은…… 동관인가?

준준은 주노와 아파트를 얻어 나간 후로 주말 근무를 하지 않았다. 늦은 시간과 낯선 사복 차림인 것을 보면 오늘도 근무 때문은 아닐 것이고.

슬슬 고개가 들려 올라갈 만큼 다가왔을 때 물었다.

“토요일인데 무슨 일이야?”

“아, 그 아이스크림 가게 때문에.”

“아이스크림?”

“어. 주노 줄 거.”

헛웃음인지, 한숨인지, 나도 모르게 샐 뻔한 것을 속으로 간신히 삼켰다. 주말이면 두 사람 사이에 바람도 불지 못하게 내내 붙어 있던 준준인데, 그런 인간을 여기까지 나오도록 한 것도 또 주노라니.

준준은 보행로에 올라 다시금 동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잠시 따라가며 얘기 나눌 요량으로 그와 속도를 맞춰 보폭을 뗐다.

“주노는 좋대?”

“아직 말 안 했는데. 내가 사서 주려니까 군인은 사업자 등록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

딱히 기억에는 없지만, 깨알 같은 규율 중 어딘가에 있을 법한 항목이었다.

“그래서 주노 이름으로 하려고?”

“루돌프한테 물어봤더니, 증여? 뭐 그런 걸 해야 해서 오래 걸린다던데.”

“그런가.”

“그래서 혼인 신고 하려고.”

크읍-,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내 목구멍에서 후두로 기침이 역류했다. 나는 재채기로 시작해 병자처럼 쿨럭이는 기침을 마저 뱉으며 아려 오는 코를 감싸 쥐었다.

“혼, 인 신고?”

잔기침을 계속하면서도 머릿속에 방금 들은 당혹스러운 단어를 몇 번이고 반추했다. 혼인 신고? 혼인? 준준과 주노가?

코를 붙들고 머리를 갸웃거리는 사이에도 준준은 걸음만큼 거침없는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하면 내 돈 주노가 마음대로 써도 된다던데.”

“그게 가능해? 혼, 그건 가이드 등록이랑 다르잖아.”

“될 거 같다고 해서 나도 물어보러 왔지. 이미 사실혼이나 마찬가진데 되지 않을까? 해 달라고 하지 뭐.”

내 생각보다 루돌프가 더 나아간 조언을 해 준 모양이다.

사실혼이 어쩌구 하며 능글맞은 미소를 짓는 낯을 잠깐 빤히 보았지만, 어느 모로 들여다보아도 진심이었다.

단호한 말은 물론이고 일순 지나친 준준의 눈빛이 오래전 제어할 방도가 없던 시절이 떠오를 만큼 흉흉해서, 그가 어렵지 않게 원하는 바를 얻어 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덩달아 고생할 다른 이들의 얼굴도 떠오르고.

준준의 물리 행사력은 오랜 기간 최상위를 기록한 만큼 비슷비슷한 염동력과는 그 궤가 달랐다.

주노가 동거를 허락한 다음부터는 파견 시수를 대폭 줄였으나, 듣자 하니 기존보다 늘어난 업무량도 무리 없이 척척 해낸다 들었다. 당장 눈으로 보기에도 생기가 전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강한 만큼 오랫동안 강력한 시한폭탄 취급을 받아야 했던 준준은, 이제 명실상부 연합국 정부와 군 차원에서 비위를 맞춰야 할 에스퍼가 됐다. 주노는 그를 더욱 살게 하는 것 이상으로 삶에 목적을 주었고, 에스퍼일 뿐 아니라 온전한 사람일 수 있도록 가치를 덧입혔다.

한 사람이 존재만으로 해낸 일들이 고작의 이능보다 대단하다.

서른여섯에 겨우 가이드를 만난 준준과 다르게, 내 경우는 이른 나이에 가이드를 찾아낸 편이었다. 그래서 윤오를 내 가이드로 등록한 후 부담스러울 만큼 기대를 받았고, 하달되는 업무량이 부쩍 늘어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여섯 번? 일곱 번? 정도 근무 중에 의식을 잃거나, 또 저체온증 상태로 쓰러진 채 발견되기를 반복한 다음에는 기존에서 2할 정도 늘어난 수준으로 고정되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추가 근무를 제외하면 주당 52시간을 넘기지 않으니 상당한 배려를 받는 셈이다. 물론 내 덕에 군이 취하는 폭리를 생각하면 딱히 고맙지는 않았지만.

관리부의 내 인적 기록 중 윤오의 이름 아래에 ‘주의’와 ‘관리 요망’이 번갈아 나타난다면, 준준의 ‘가이드와의 관계’ 평가에는 ‘양호’ 마크가 이어질 것이 뻔했다. 에스퍼의 생리는 단순해서 따로 사람을 붙여 조사하거나 떠보지 않아도 눈에 드러나고 테스트 수치에 표시되었다.

다시 말하면, 알아챌 사람들은 이미 모두가 알아챘음에도 나는 바르작거리며 아닌 척, 괜찮은 척, 허무한 연기를 계속했다.

“주노가 너 보고 싶다던데.”

“그래? 한번 갈까.”

“이달은 말고.”

깨진 블록 주변에 고인 물을 밟지 않기 위해 크게 보폭을 떼었으나, 철퍽, 하고 준준의 거침없는 걸음에서 흙탕물이 크게 튀어 바지를 적시고 말았다. 아, 세탁…….

“이달은 왜?”

“지난달에 왔었잖아. 나 파견 갔을 때.”

“허…….”

어이가 없다 보면 억울한 마음마저 든다. 아래턱이 삐져나온 준준의 부루퉁한 얼굴이 더욱 웃겨서 비웃음을 감추지도 않고 콧소리를 뱉었다.

“어이가 없네, 아주. 그러다가 가둬 두겠다.”

“…….”

“꿈도 꾸지 마.”

더 황당한 생각을 떠올리기 전에 말뚝을 박아 놓고,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주노에게서 가이드 센터에 관한 소식을 들은 게 있느냐 물으니 잠시 고민하던 그가 아니, 했다.

“왜?”

“별건 아니고. 오늘 접견한 군인 중에 행정 지역이 다른 대위가 있어서. 상태가 나빠 보이는 애들도 요즘은 다 삼십 분이고. 가이드 센터에 문제 생겼나 싶었지.”

“전화해서 물어봐야겠다.”

“급한 건 아니야.”

“중요한 일 없으면 전화하지 말랬는데, 니가 물어봤다고 하면 해도 될 거야.”

나는 완벽히 조련된 군 최강의 괴물을 보며 절로 떨리는 한쪽 눈 밑을 짚었다.

괜찮다는데 굳이 모바일을 꺼내 주노에게 전화를 건 준준은, 두 번 정도 부재중 알림을 듣고서야 그 짓을 포기했다.

그림 그리고 있나 봐, 단단한 턱이 기이하게 삐죽거리며 말해서 다시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집에 가서 물어보고, 다음에 알려 줘.”

“응. 니 가이드는 잘 있냐? 이름이 뭐랬지?”

“윤오.”

“주노랑 이름이 비슷하네.”

턱도 없는 소리를.

차마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더니 준준이 유노, 주노, 하고 말 같지도 않은 말장난을 쳤다.

나는 아껴 가며 겨우 한 번씩 꺼내 놓을까 하는 이름인데……. 대번에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눈앞의 멍청이에게는 그 어떤 의도도 없을 것이므로 못난 생각을 금방 털어 버렸다.

준준이랑 주노가 더 비슷하다 했더니 괴물 같은 멍청이가 이를 드러내고 씩 웃는다.

행정처가 있는 동관 앞에 다다라 따르던 걸음을 멈췄다. 그대로 계단을 올라가려던 준준이 돌아보고서 글러브같이 큰 손으로 내 머리를 덮었다. 묵직한 느낌에 모가지가 풀썩 꺾였다.

“잘 들어가고.”

“그래.”

등을 돌려 다시 관사로 가는 걸음에 저절로 울적함이 묻어났다.

내 가이드를 얘기할 때마다 저절로 하게 되는 긴장과 무심히 받게 되는 배려가,

나는 늘 숨이 막혔다.

* * *

“어서 오세요!”

초인종을 누르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는 일은 이제껏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생소한 상황이라, 나는 세워 든 손가락을 어색하게 굽히고 눈앞을 경계했다.

키가 작고 목소리가 높은 남자가 열린 문틈으로 꾸벅, 고개를 숙인다.

윤오의 집. 낯선 사람.

머리색, 눈 색, 귀 모양, 머리 길이.

키, 어깨너비, 복장, 자세, 특이 사항.

낯선 면을 빤히 보고 있으니 그가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한쪽 벽으로 붙어 섰다. 들어오라는 몸짓이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작가님 담당 편집자 인다비예요. 꼭 한 번 뵙고 싶었는데 이제야 기회가 됐네요!”

어느 모로 보아도 일반인인 그의 복식을 재차 점검하고 움직임을 주시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이 숨을 수 있을 법한 베란다나 복도 안쪽 등을 빠르게 눈으로 훑고 감각을 곤두세워 보았지만 부엌 등의 전자 기기 소음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늘 같은 자리에 앉는 윤오의 뒷모습이 위험이나 불안 신호를 보이지 않았다. 종합하자면 이 일반인이 방금 뱉은 본인 소개는 거짓이 아닐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듣던 대로 점잖으신 분이네요!”

등진 윤오에게 평소처럼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는 흘끗 보고 다시 시선을 모니터로 돌려 버렸다. 대신 모든 말이 방정맞게 높은 인다비의 대답이 돌아왔다.

갑작스레 왼쪽 소매를 잡아 끌 때는 당장 그 손을 떨쳐 버리고 싶었지만, 그가 윤오의 일과 관련된 사람이라면 실례해서는 안 될 일이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꾹 누르고 불편한 왼쪽 팔이 이끌린 어색한 걸음으로 거실 한복판에 들어섰다.

거기서 인다비는 내게 거실 소파를 권했다. 마치 집주인처럼.

그리고 저는 식탁 의자를 끌어 윤오의 옆에 두고 털썩 앉는다. 모니터 아래에는 같은 커피 향이 나는 두 잔의 머그가 나란히 놓였고, 낯선 브랜드의 담뱃갑이 윤오의 재떨이에 걸쳐 있었다.

내가 오든 말든 개의치 않는 윤오의 의자 팔걸이에 거리낌 없이 인다비의 손이 올라갔다. 의자째로 빙글 돌려 그가 거실을 향하게 만들기도 했다. 윤오는 그제야 내 쪽으로 얼굴을 보이면서도 인다비를 설핏 흘겼다.

입술이 말랐다. 염치없는 질투가 속에서 끓어올랐다.

아직도 윤오의 의자 팔걸이에 올라간 인다비의 두 손을 치워 버리고 싶은 열망에 어금니를 단단히 고쳐 물어야 했다. 순식간에 열기가 속눈썹까지 적셨다.

원인 모를 원망이 갈 곳 없이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곧 양지의 버섯처럼 윤오의 시선 한 번에 죽어 버렸다. 못난 질투도, 원망도, 그에게는 전해질 수 없는 내 이기심일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쉽게 자라고, 또 허망하게 죽을까.

호흡을 잠시 멈췄다가 느리게 골라냈다. 작고 길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늘 앉던 대로 소파 앞 바닥에 몸을 내렸다.

그때 인다비가 갑작스레 팔을 뻗고 달려들었다. 우선 보이는 대로 잡아챘더니, 부러트릴까? 하는 생각이 반짝 스쳐 지나갔다. 남아 있는 이성이 이 일반인을 변호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런 화풀이를 저질러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윤오가 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화들짝 놀라 붙잡힌 팔을 퍼덕이며 비명을 내질렀다. 곧장 손에서 힘을 뺐으나 엄살은 조금 더 이어졌다.

“아, 아야야, 아야야야야야……. 저기, 아야, 저는 그냥, 바닥 말고 소파에 앉으시라고…….”

“죄송합니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게 숙여 사과했다. 질투로 민감하게 반응한 죄까지 고백할 수는 없었지만.

인다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잡혔던 팔을 슥슥 문지르며 마주 고개를 숙여 왔다.

“그, 저기……. 몸이 차가우시다고 들어서. 바닥에 앉지 말고 소파에 앉으시라고 한다는 게 그만, 놀라게 해 드렸네요. 제가 죄송합니다아.”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 이제 허리 펴시고……. 앉으세요. 여기, 그 소파에. 이야, 역시 군인은 다르네요. 눈에 보이지도 않았어~!”

괜히 목소리를 키운 인다비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이번에는 내 몸에 닿지 않도록 조심해서 소파에 앉으라는 시늉을 하고, 돌아서서는 슉슉- 소리를 입으로 냈다. 팔이 잡히던 순간을 윤오에게 재현해 보이는 것이다.

막상 소파를 앞에 두고 서자니 목 깊이 긴장이 담겼다. 한 번도 앉아 본 적 없는 자리.

눈치를 보고 멀뚱히 선 내 쪽으로 잠깐 시선을 준 윤오는 짧은 눈짓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허락인 모양이다. 그의 편집자를 다치게 할 뻔한 것을 알아채지는 못한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윤오의 소파. 옅은 낙엽색 1인용 카우치. 가을을 떠올리게 하는 그 섬유를 잠깐 손으로 쓸었다가 팔걸이를 잡고 조심스레 몸을 앉혔다. 처음 앉아 보는 소파는 무척이나 푹신해서 몸이 반쯤 삼켜진 듯한 기분이 다 들었다.

“이야~, 주황색이 잘 어울리세요. 멋집니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인다비는 훨씬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도 가만있질 못하고 다시 일어나 주방 쪽을 서성거렸다.

“아뇨. 괜찮습니다. 커피는 마시지 않습니다.”

“그러시구나. 연초는 태우시나요? 물이라도. 아, 술도 있습니다!”

“아뇨.”

윤오의 책상 한 자리를 늘 차지하고 있는 재떨이와 담뱃갑에 잠시 눈이 갔지만, 커피든, 담배든, 술이든,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물을 마시고 싶지도 않았다. 대답이 짧게 끝나자 인다비는 턱을 긁적이다가 어색한 웃음소리를 냈다.

“어떻게 알고 지내시는지 궁금할 정도로 작가님이랑 기호가 다르시네요. 하하.”

왼쪽 눈가가 의지와 관계없이 꿈틀 튀어 올랐다. 그의 말에 다시금 드러난 질투 때문이었다. 그 내용이 윤오와 나 사이를 더욱 멀게 느끼도록 해서 불쾌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다비가 웃으며 윤오의 의자 등받이를 손등으로 미는 것이 친근해 보여서이기도 했다.

“아무튼 저기, 아, 여기 제 명함입니다.”

“…….”

그가 내미는 사각의 빳빳한 종이를 받아 출판사명과 직위, 이름을 확인하고 유선 전화의 지역 번호가 쓰인 주소지와 일치하는지 맞춰 보니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비어 있는 뒷면을 흘끗 보고 소파의 팔걸이에 내려놓았다.

“아유, 뭐 마실 것도 안 드리고 얘기하자니, 좀 머쓱하네요오.”

의미 없이 말꼬리를 늘이는 그에게, 윤오가 ‘그냥 해’ 하고 퉁명한 말을 던지며 여전히 그의 팔걸이를 붙들고 늘어진 인다비의 손을 치웠다.

“그럴까요? 그래도 될까요? 우리 작가님이 이렇게 쌀쌀맞으세요.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으하하.”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넘겼으나, 이 남자는 본인이 말을 이으면 이을수록 내 질투를 키우고 있다는 것을 짐작도 못 하는 눈치다.

나와 윤오에게 허락을 받았다 여긴 인다비가 그래도 어색한지 목을 주무르고 어깨를 돌리며, 하등 쓸모없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러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무릎 위에 올리더니 씨익 웃어 보였다.

“다른 게 아니라, 작가님이 준비하시는 책 때문에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작가님? 책? 윤오를 돌아보니 그는 커튼이 걷힌 쪽 베란다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다시 이어지는 인다비의 말과 다소 심각함을 내보이는 표정에 시선을 두었다.

“작가님이 굉장히 오래 구상하셨거든요. 그게 주제가 에스퍼다 보니, 아무래도 신중해야 하고 그러네요.”

“……에스퍼 말씀이십니까.”

“예, 맞습니다. 역시 좀 실례가 되려나아…… 싶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그 정보를 구하는 것이 도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

“…….”

“저희가 몇 년이나 계속 자료를 구하고는 있는데, 영 실정에 맞지 않는 것들이거나 신빙성을 판단하기가 어려워서요. 군부도 엮여 있고 차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거린 인다비가 과장스레 어깨를 퍼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작가님이 잘 아는 에스퍼분이 있다는 걸 작년까지도 말씀을 안 하셔가지고!”

“…….”

“그…… 소설이라는 것이 디테일한 부분이 무척 중요하니까요……?”

말 없는 나와 윤오를 번갈아 보며 인다비가 흘리지도 않은 식은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작년부터 저희가 인터뷰라도 좀 부탁을 드리면 어떻겠냐고~ 어떻겠냐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역시 한 마디도 안 꺼내셨나 보네요.”

“인터뷰라면?”

“예! 그 저기, 창작에 필요한 부분을 저희가 질문드리면 대답하시는 형식으로요. 전반적으로 여쭐 수는 있는데, 곤란하신 부분은 당연히 넘어가셔도 됩니다. 아무렴요.”

“…….”

“두어……, 한두 달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아니 그, 많이 시간을 뺏을 일은 아니구요. 몇 회차 정도만 진행하면 될 것 같은데. 그냥 진도마다 작가님이 필요하신 부분이 생기니까…….”

빤한 시선이 거절로 읽혔는지 인다비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럴 만도 하다. 군에 대한 것, 특히나 에스퍼에 대한 것은 어떤 사소한 정보 하나라도 대외비가 아니면 군 기밀이었다. 상식적으로라면, 직업 윤리만 따져도 거절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면에서 이 제안이 거북했다. 윤오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내 소속이 그를 더 주목하게 되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이 윤오가 쓰는 장르는 주로 스릴러와 미스터리. 군부가 어떻게 묘사될 것인지, 그 표현이 저들 입맛에 맞지 않으면 군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생각이 많아졌다.

“아시다시피 우리 윤오 작가님이 쓰시는 책들은 문단에서 극찬을 받잖아요? 그게 철저한! 자료 조사로 이루어 내는 현실감, 개연성이 말도 못 하게 중요하거든요. 원하시면 작가님이 플롯하고 보여 주실 텐데, 이게 기가 막히거든요. 도움 주고 싶으실 겁니다. 진짜요!”

대답하는 사람 없는 말을 허공에다 다다다 뱉어 내는 인다비를 주시하며, 흘러 지나가는 말들을 하나씩 주워 담았다.

스릴러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게 그냥 스릴러가 아니라 로맨스 요소가 들어가거든요, ……반전이, ……마지막까지 긴장을……, 다각적인 관점에서…….

윤오의 입에서 나왔다면 저 말들이 내게 가치가 있었을까. 저 말을 윤오가 내게 해 주었더라면.

“……하아. 사실, 벌써 군에 요청도 해 봤습니다. 괜히 말 꺼내서 오히려 책 나오기도 전에 검열당할 판이에요. 근데 책은커녕, 알음알음 나오는 자투리 정보를 긁어 가지구는 군이고 자시고.”

“…….”

“애초에 작가님이 더 쓰려고도 안 하시니까 그게 더 문제에요. 벌써 몇 번을 미룬 작품인데요.”

윤오의 책. 몇 번을 미룬 작품.

“군에서 거절한 정보를 제게서 바라십니까?”

“아……, 그게……. 저기, 저희는 정말 책을 위해서만. 하유, 그렇게 말씀하시니 막 무섭고……. 명칭이나 특정될 수 있는 요소들은 전부 변경될 거구요. 정말로…….”

힐끔힐끔 오가는 인다비의 눈치가 분주하다. 말을 더하지 않는 윤오를 원망스럽게 흘기다가도 나를 보고서는 활짝 웃음을 짓고, 팔을 크게 휘적이며 신뢰감을 더하려는 시도를 했다.

“실제 인물이나 사건도 당연히! 연상되지 않는 쪽으로 조절이 가능하니까요. 정보가 너무 없고, 아주- 에스……우…… 뭐 그렇죠. 아주, 예…….”

뭐라 에스퍼에 대한 한마디를 할 것 같은 맥락에서, 인다비는 애매한 부사를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었다. 눈앞에 앉은 사람의 정체를 잊었다 다시 떠올린 모양이다.

“제가 작가님과 따로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예? 아, 네네. 네에, 당연히 됩니다. 그죠? 네.”

관계없는 일인 양 줄곧 방관하던 윤오의 시선이 그때서야 나를 향했다. 마주친 그 눈으로 내게 대답하라고 했다면 어떤 것이든, 무슨 질문이든, 내가 아는 모든 답을 가져갈 수 있을 텐데. 인다비처럼 절절맬 필요도 없고,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겠다며 약속할 필요도 없다.

단지 안전장치가 필요할 뿐이었고……, 군의 적대를 받는 상황이 온다면 그 방패막이 역할까지 자처할 게 나였다.

몇 회분이 될지 모르는 인터뷰만큼 그를 더 만날 수 있다는, 그런 달콤한 미끼 없이도 내 입을 가벼이 만들 수 있는 남자는 무심한 표정을 했다.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얼굴.

그 눈길에 감정이 실리든, 그러지 않든, 항상 간절한 것도 나다.

“작가님! 얘기 좀 잘해 보세요! 이 책 올해 안에 내기로 하셨잖아요. 더는 못 미룹니다. 진짜예요.”

“…….”

“예. 그럼 언제가 좋으세요? 아니다. 제가 자리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지금 갈 테니 얘기 나누시구요. 괜찮으시면 인터뷰도 바로, 여기 기본 질문지 정리한 거 준비해 왔습니다!”

속을 알 수 없는 윤오의 시선이 나를 떠나지 않고 내리 이어지는 동안, 인다비는 한층 더한 호들갑을 떨며 몇 장쯤 되는 종이 다발을 그의 책상 위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작가님, 여기요. 여기 올려놓습니다. 예에?”

서둘러 짐을 챙기고 큰 목소리로 인사하는 인다비의 어깨에서 다 잠기지 않은 가방이 덜렁거렸다.

* * *

“먼저 내려가세요~!”

인다비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손을 휘휘 저어 보이며 싹싹하게 외쳤다. 문을 잡고 기다려 주던 친절한 이웃을 먼저 내려 보낸 후에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에휴. 바닥이 난리였다.

크로스백 앞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 전화를 꺼내려다 그만 통째로 뒤집어엎은 탓이다. 차분하게, 침착하게, 매번 다짐을 해도 조심성 없는 태도는 고쳐지질 않았다. 둘러맬 때는 분명히 다 잠겨 있는 것 같았는데. 너무 서둘렀나.

노트와 책, A4 파일처럼 크기가 큰 것부터 우선 주워 탈탈 털었다. 앞이고 뒤고는 크게 상관치 않고 착착 챙겨 넣은 다음, 차가운 대리석 복도를 나뒹구는 색색깔의 펜들을 쫓아다니며 하나하나 주웠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형광펜을 세 개째 주우며 오늘은 기필코 필통을 사리라 중얼거리기도 했다. 올 상반기만 해도 백 번은 했을 결심이다.

내내 가방 안에서 굴러다녔을 펜들이 인다비에겐 없는 여름휴가라도 받은 마냥 신이 나 저만치 멀리도 튀어 나갔다. 어기적거리는 앉은걸음으로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잡아넣다 보니, 좀 전에 나온 복도 끝 작가님네 현관문도 보였다. 별 탈 없겠지?

현관문이 조용한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인다비는 그 아무 일 없는 점에도 괜한 걱정이 들었다.

에스퍼와 작가님을 둘이 두어도 괜찮을까?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평소보다도 무뚝뚝했던 작가님의 태도를 보면 오히려 그 여리여리한 에스퍼를 걱정해야 할 것 같기도 했다. 소문처럼 무서운 느낌은 아니었는데.

숨이 턱턱 막힐 만큼 말 없는 두 사람 사이에서 고생했던 인다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끔 만나는 사이라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위험하지 않아 보였으니까 괜찮아, 그렇게 혼잣말도 했다.

윤오 작가님은 원래 말수가 적기는 했지만, 본인 작품 얘기를 하는데 그렇게 한마디 말을 않을 사람은 아니었다. 자료 조사와 인터뷰를 고집하던 것도 본인 아니던가.

인다비뿐 아니라 자료팀 전체가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기사를 긁어모았지만 에스퍼란 족속들은 군 소속이라 그런지 쓸 만한 정보를 찾기가 어려웠다.

도통 신뢰도 떨어지는 자료만 모이고 뜬구름 잡는 소문만 들려 왔다. 그나마 모인 것도 연합군의 이야기인지 반란군의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고.

그렇게 지지부진한 경과를 보고했더니, 대뜸 작가님이 ‘책은 내지 않겠다.’ 선언하는 바람에 출판부 전체가 뒤집어진 것이 지난겨울이다. 줄거리만으로 설레는 플롯을 보여 줘 놓고! 안 될 말을!

인다비는 작가님이 내지 않겠다 해 놓고서도 집필을 계속하는 걸 알았다. 인다비가 알기 때문에 출판부 전체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대로 포기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글이 쓰였으면 책으로 묶어 내는 것이 저희 일이었고, 그것이 널리 읽히게끔 보급하는 것이 편집하고 출판하는 자들의 숙명이다.

즉시 특파된 인다비는 근 한 달을 매일매일 들락거리며 작가님을 어르고, 달래고, 빌고, 보챘다. 질기고 두껍기로는 출판부에서 인다비의 낯가죽만 한 것이 없었다.

그가 짜증을 내도 ‘어유, 우리 작가님 글 쓰셔야 하는데 방해가 되는구나!’ 했고, 신경질을 부려도 ‘오구, 우리 작가님 인다비 때문에 집중이 안 되는구나!’ 하며 말을 붙였다. 작가님은 생각보다 단호하지 못해서 적극적인 공세에 약한 면이 있다.

그러던 중 화려한 넘겨짚기로 알아낸 것이 아까 그 에스퍼의 존재였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못 들었구나. 곰곰이 되짚어 보아도 본인에게나 작가님에게나 이름을 들은 기억이 없다.

하여간 ‘그 에스퍼’에게 인터뷰라도 좀 부탁해 보자고, 말이라도 해 보자고, 말은 내가 할 테니 보여만 달라고, 계속해 매달리고 그 의견이 번번이 묵살당한 지도 반년.

재차 특파된 인다비가 한여름 귓가를 맴도는 모기처럼 성가시게 굴어 직접 부탁할 자리를 만드는 단계까지 온 것이 바로 오늘이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새로 누르고 가방을 잘 닫아 옆으로 고쳐 멘 다음 생각해 보니, 아까의 에스퍼는 인다비가 윤오 작가님의 짤막한 설명을 듣고 상상한 것과는 느낌이 아주 달랐다.

짤막한 설명이라고 해 봤자 인다비가 질척거리며 ‘그 에스퍼’는 나이가 몇이냐, 어떻게 만났냐, 무슨 능력이 있느냐, 부작용도 있고 몸도 아프고 그러느냐 등 아무거나 걸리기를 바라는 요란한 낚시질을 할 때 툭 던지듯이 나온 ‘몸이 찬 것 같던데.’ 하는 말이 전부였지만.

에스퍼는 다들 포악하고 예민하다 했으므로 긴장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군인이라 하니 덩치가 클 것 같았고, 몸이 차다 하니 신경질적인 인상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멋대로 짐작한 커다랗고 흉악한 ‘그 에스퍼’와 열린 현관문 밖에 서 있던 ‘그 에스퍼’는 조악한 상상력을 비웃듯 조금도 닮지가 않았다.

마주친 얼굴은 긴장이 아쉽게 오히려 유순한 인상이었다. 말간 낯이 학생처럼 어려 보이는데다가, 무척이나 말라서 군인은커녕 어딘가 병약한 느낌마저 풍겼다.

어쩌다 가끔 만나는 사이가 됐을까? 질문은 수백 번 던져 봤지만 단 한 번도 답을 듣지 못했다.

윤오 작가님은 어딘가 훌쩍 떠나 버릴 때 말고는 내내 집에 콕 박혀서 글만 쓰는 인간인데……. 그런 방랑벽을 보이지 않은지도 어언 2년이라 여행하다 만났다고 미루어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담당자이자 그의 가장 가까운 지인을 자처하는 인다비가 본인의 오지랖을 총동원해 궁금증을 피력해 보았으나, 보통 때였으면 대충 알려 주고 떨쳐 버렸을 작가님이 진심으로 짜증을 냈기 때문에 눈치껏 낯가죽을 물려야 했다.

그나저나 꾸준히 만나는 사이면 꽤 친한 것 아닌가? 서로 직업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테고. 작가님은 왜 여태 인터뷰나 자료 수집의 말머리도 떼지 않았을까.

윤오처럼 베스트셀러를 족족 뽑아내는 수준급 작가가 궁금한 게 있다고 하면 뭐든 알려 주고 싶어 안달복달 반색을 할 사람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중에 에스퍼가 없어서 그렇지.

직업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그 조용한 에스퍼가 더욱 신중해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는 무척 침착했고, 또 조심스러운 성격으로 보였다. 작가님이 말을 자알 하셔야 할 텐데.

만나기만 하면 어렵지 않게 성사되리라 생각했건만, 불편하게 흐르던 침묵은 결국 제 입에서 군의 검열을 거치게 되었다는 불편한 진실까지 털어 내도록 했다.

저는 할 말을 다 전했고, 직접 얘기하고 싶다 했으니 남은 것은 작가님에게 달렸다. 인다비가 하는 꼴을 몇 년씩이나 보았으니 그도 보고 배운 게 있다면 어르고, 달래고, 꼬시고, 무얼 어떻게 하든 해내야 했다.

실패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예정이었다. 인다비는 윤오 작가님의 집으로 또다시 출퇴근할 용의가 충분히 있었다. 군의 검열 통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에도 굴하지 않고 이 책을 바라는 출판부의 무수한 미스터리 마니아들을 대표해서.

인다비는 그 에스퍼의 왜소한 목과 나비의 날개 쉼처럼 깜빡이던 긴 속눈썹을 떠올렸다. 어딘가 위태롭고, 홀린 듯이 손을 뻗어 도와주고 싶게 만드는 그런 이상한 분위기가 흐르는 남자.

어설프게 홀려 다가갔다가 호되게 잡혔던 팔을 내려다보니, 그새 좍좍, 손아귀에 잡힌 길쭉한 붉은 자국들이 팔뚝에 그려져 있었다. 암. 군인은 군인이었어. 정말 빨랐지.

부러질 수도 있었다는 걸 모르는 인다비는 곧 멍이 들 팔뚝을 그저 슥슥 문지르고 말았다.

그래. 그러고 보면 그 소파. 그 소파도 이상하다. 무채색 아니면 푸른색 계열밖에 모르는 인간의 집에 오렌지처럼 상큼한 1인용 카우치라니.

달마다 적어도 두 번씩은 들르는 인다비인데, 반년이 다 되도록 작가님이 그 소파에 앉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뿐더러, 제가 슬쩍 앉아 보는 것도 싫어하는 기색이었다.

그 때문에 저것이 사람이 앉는 좌석의 일종이 아니라 어쩌면 새 작품을 구상하는 데 필요한 소품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까지 했을 정도다.

인다비의 안목을 걸어도 좋았다. 그 소파는 거무튀튀한 작가님의 집에서, 튀어나온 못이나 거스러미처럼 도드라져 어울리지 않았다. 그 부러질 것같이 가녀린 남자가 앉은 모습을 볼 때까지는.

대뜸 바닥에 앉으려는 것을 말려 놓았더니, 그 에스퍼는 한참을 망설이며 작가님의 눈치를 살폈다. 윤오 작가님이 그렇게 못된 줄은 몰랐는데, 몸이 차다는 사람을 여태까지 계속 바닥에 앉혔던 것일까?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천천히, 마른 몸을 소파에 앉혔다. 손등까지 내려 가린 셔츠의 긴 소매와 그 아래 뼈대가 도드라지는 야윈 손등이 떨어지고, 가늘어 더욱 길쭉한 손가락이 양쪽 팔걸이를 무게감 없이 쓸어내렸다.

커튼이 다 가려내지 못한 오후의 햇살이 남서향으로 난 창을 통해 그에게 드리웠고, 흩뿌려진 밝은 빛 아래 남자의 눈동자가 꼭 오렌지같이 산뜻한 그 소파의 주황빛으로 말갛게 빛났다.

저도 모르게 소파의 존재 의의를 납득한 그 순간.

“예뻤지.”

무심코 또 혼잣말한 인다비가 쩝, 소리를 내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가냘파 보여도 군인이고 남자인데, 이런 생각은 실례겠지. 벌겋게 줄이 간 팔뚝을 내려다보며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가, 그 반짝거리던 장면을 떠올리면 다시금 끄덕끄덕 위아래로 고개가 긍정을 했다.

물기를 머금은 듯한 주황색 눈동자, 볼에 그림자를 지우던 긴 속눈썹, 노을 같은 색으로 빛에 녹아들던 끝이 반짝이는 머리칼, 야위어 더욱 세심한 턱과 목선.

누가 책 마니아 아니랄까 봐, 각종 문학적 표현을 들어 방금 목격한 장면을 묘사하던 편집자 인다비의 머릿속에 재차 궁금증이 찾아 들었다. 하나도 아니고 끝도 없이.

둘은 어떻게 아는 사이일까? 어디서 만났지? 왜 몰랐을까? 작가님은 계속 말을 안 할 작정이었나? 그 눈이 반짝이던 것도 에스퍼의 이능 같은 건가? 인터뷰는 하겠다고 할까? 몸이 찬 것과 그렇게 마른 게 연관이 있을까? 외모가 뛰어난 게 에스퍼들의 특징인가?

마침 얼마 전에 특보로 나온 영주 국경의 국지 도발 사태가 떠오르기도 했다.

안전한 중앙에 지내느라 때로 안일한 평화에 젖었지만, 반란군은 잠잠해질 만하면 사건을 일으켜 연합국이 아직 전쟁 중임을 깨닫게 했다. 이번의 영주 역시 이전까지는 비교적 안전한 국경 지역이었는데, 단숨에 전선이 되고 말았고.

눈을 가린 평화에 젖은 것은 비단 인다비만이 아니었다. 안전지대에 있는 사람들은 이번 사태의 무사한 종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그보다 어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기자가 찍어 낸 그을음 묻은 에스퍼의 얼굴에 더욱 환호했다.

사진으로만 봐도 무척이나 젊은, 젊다기보다는 어린 티가 나는 얼굴이라 군의 강제 징집에 대한 때늦은 원성이 나기도 했다.

그 드물다는 자연 계열 초능력자에다 생긴 건 잘났지, 영화처럼 펑펑 불을 쏘아 대지……. 금세 연예인 못지않은 화제가 되었으나, 작정하고 정보를 모으던 인다비도 결국 그 ‘불꽃의 에스퍼’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나이가 어려 보이고 이전에 드러난 적이 없으니 군 소속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 정도에 그쳤다.

말고도 유명한 에스퍼로는 반란 전쟁 당시 대활약한 ‘괴물 준준’, ‘얼음 여왕 데이’ 등이 있었는데, 그들에 대한 관심은 거의 히어로물에 버금갔다. 이쪽의 영웅들은 픽션이 아니라는 점이 더욱 대단하지만.

윤오 작가님의 ‘그 에스퍼’는 ‘불꽃의 에스퍼’에 대해 아는 것이 있을까? ‘괴물 준준’이나 ‘얼음 여왕 데이’를 본 적 있으려나?

몇 살인지도 못 들었지만 생긴 것만 보면 제 또래 정도로 보였다. 당시 열여섯 살이던 인다비가 멋모르고 피난소를 쫓아다녔던 걸 떠올리면 그 에스퍼도 반란 전쟁에 참전하기는 어리지 않았을까.

작가님이 이런 질문을 대놓고 할 리가 없으므로, 인터뷰가 잘 성사된다면 인다비 본인이 꼭 끼어 앉아서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모처럼 두꺼운 낯가죽이니 한번 들이밀어 보지 뭐. 들으면 좋고, 아니면 말구.

옆으로 멘 가방을 씰룩이며 적당히 호화롭고 조용한 빌라 단지를 빠져나갔다. 길을 잡는 인다비의 걸음이 익숙한 듯 자연스러웠다. 작가님의 담당자가 된 후로 제집처럼 드나든 탓이다.

한여름을 알리는 풀벌레 소리가 발소리 멀어진 자리를 다시금 채웠다.

* * *

인다비가 떠난 거실이 소리를 도려낸 듯 적막했다.

베란다를 넘어 들어오는 볕이 커튼에 가로막혀 그와 내 사이에 선명한 그림자 선을 그렸고, 나는 무척이나 그 선이 넘고 싶었다. 백색의 등과 흰 화면이 뜬 모니터가 놓인 책상, 그 앞 윤오의 바퀴 달린 의자로,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그곳. 인다비가 앉았던 그 자리에 저를 서게만 해 준다면, 차가운 몸을 덥히는 이 햇살쯤은 영영 포기할 수도 있었다.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이 거기 있으니까. 어둡고 추운 그 자리에서 곯아 쓰러져도 그의 발치라면 나는 다시 살아날 것이고, 그를 내게 준다면 영원토록 살 수 있을 것 같았고, 그가 나를…….

더운 호흡이 가슴팍을 긁고 나왔다. 필사적으로 삼켜 내는 시기와 질투가 더부룩하게 속을 채웠다. 그러나 대상이 명확하지 않았다.

윤오의 팔걸이와 어깨를 두드리던 인다비를 향한 줄 알았지만, 그 손과 팔걸이를 부서트리고 싶은 흉포한 마음이 그가 떠난 자리에 여전히 남아 얼룩덜룩했다.

컴퓨터가, 모니터가, 책상이 사라지면 나를 볼까, 의자가 없어지면 내게 올까, 그 옷을 찢어 버리면 나를 덮을까.

나는 모든 것을 시샘했다.

마치 미워하듯 윤오를 사랑했다.

감아쥔 두 손이 너른 소파 어디에도 놓이지 못하고 툭 튀어나온 무릎 위로 올랐다. 눈은 계속해서 그를 따르며 크고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살폈다.

모양 좋은 손톱이 그의 팔걸이를 두드리면 내 손끝도 따라 손바닥을 긁었고, 그의 어깨가 큰 숨을 내쉬면 내 허파도 같이 박자를 맞췄다.

그의 무릎이 펴질 때 덩달아 종아리에 힘이 들어갔으며, 발끝과 상체는 곧게 앞을 향했다. 어깨도 굽어 앞으로 기울었다. 다다를 수 없지만 그러고 싶어 열망하는 상대에게로.

기다리는 나와 말 없는 윤오 사이에 시간이 흐르고 또 멎었다. 그가 흘려보내는 시간이 내게로 와 고였다.

이 침묵이 마치 바다를 닮아서, 입을 열면 남은 숨마저 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이 사뭇 찾아 들었다. 검은 머리칼과 그보다 짙은 눈동자가 저를 심해에 가두었고, 갈비뼈가 창살이 된 듯 울음이 가빴다.

둘만 남은 기쁨은 꺼내 놓을 수가 없고, 무심한 표정 너머를 읽지 못해 드는 두려움은 감출 수가 없다. 그저 그 시선이 나를 꿰어 벗어나지 못한 채로 마음만이 차올랐다.

이 시선이 달고, 이 증오가 뜨겁다. 내가 그를 증오했다. 마땅히 뉘우쳐야 할 내가. ‘모든 것’을 망쳐 버린 내가.

개새끼. 짐승 새끼.

입 밖으로 내놓는 일이 드문 욕설도 나를 향할 때는 그렇게 쉬울 수가 없다.

윤오를 만나고, 그를 사랑하고, 내가 미웠다. 가슴 가득 후회가 저몄다. 그를 경외하는 만큼 자신에게 치를 떨었다. 그해 여름에 나는 울었고, 빌었고, 돌이키지 못했다. 더는 미움받지 않기 위해 체념하는 것만을 배웠다.

버티지 못한 쪽이 지는 게임이라면 패배는 진작부터 내 몫이다. 언제고, 어느 때고 그렇겠지.

따갑게 조여드는 초조함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정적에 목소리를 더했다. 질식할 것 같이 짓눌린 소리였다.

“……우선, 이 같은 정보가 갖는 위험성을,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윤오는 표정 없이 시선을 조금 비껴 내렸다. 철렁, 그 움직임을 따라 가슴이 쉽게도 일렁였다.

“군의 통보를 받으셨다면, 어떤 식으로든 주목을 받게 되실 겁니다. 개인에게 이로울 리가…….”

“그 정도는 충분히 감안하고 있으니 못 하겠다면 거절하세요.”

냉정하게 떨어진 말에는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한순간 섞인 그와 나의 목소리가 기이한 만족감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낮은 목소리가 뱉은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몇 초가 더 걸렸고, 그의 눈가에 서리는 짜증이 보일 때에야 얼른 표정과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닙니다. 인터뷰는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단지, 윤오 씨……가 피해 보시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내렸다. 여전히 미간이 좁았으나 눈가와 입매가 조금 전만큼 짜증스럽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것도 같았다.

줄곧 눈치를 살피던 나는 그때에야 심장이 녹고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마침내 물속에서 벗어난 기분.

무척이나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입 밖에 내어 부른 효과일지도 모른다. 그의 담당자가 있을 때는 ‘작가님’ 하고 따라 불렀지만, 나는 그때도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우리 작가님, 작가님, 선생님, 윤오 씨, 우리 윤오, 내 윤오, 내 가이드……. 인다비를 향한 못난 질투가 재차 솟구쳤다. 혀에 올리게만 해 준다면 평생을 굴려도 단맛이 가시지 않을 그 이름을 나는 함부로 부를 수가 없는데.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고요?”

“원하신다면.”

감출 필요가 없는 진심이다. 부디 알아차려 주기를 바라며 곧게 눈을 들어 그와 마주쳤다. 인터뷰뿐일까. 말 그대로 간과 쓸개도 달라면 꺼내다 줄 텐데. 그 마음을 알게 된다면 오히려 꺼림칙하다 할까.

“이미 군이 검열을 통지했으니 내용에 따라 윤오 씨와 출판사 일체를 압수 수색하거나 사상 검증을 위한 구류까지도, 심한 경우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경우 윤오 씨는…… 괜찮으실 겁니다만, 출판사 관계자분들은 제가 손 쓸 수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내가 어떻게든 빼낼 것이고 출판 관계자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윤오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디까지인지도 모르면서, 이미 나는 그가 원하는 모든 정보를 기꺼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하에 따라서는 기밀을 누설한 에스퍼가 되어 군법으로 처벌받을 사건이다.

그러나 아직 내게 쓸모가 있으니, 그 처벌은 감봉, 파견, 진급 누락, 구금 선에서 그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조금 우습기도 했다. 십오 년간 쌓은 위치를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이야.

소파 팔걸이에 놓인 인다비의 명함을 뒤집으며 셔츠 포켓에서 길이가 짧은 펜을 꺼내 들었다.

“기록물은 남기지 말아야 합니다. 영상이나 음성은 물론이고 통화 녹음, 사진이나 메모도 안 됩니다. 집필하시는 목적 외에 이차적으로 활용되는 것을 방지하고 기타 의도가 없었음을 증명해야 할 때를 위해서입니다.”

윤오의 시선이 내 손끝에 따라붙었다. 차가운 손마디가 따끔따끔 저려 펜을 놓치지 않게 여러 번 힘을 줘야 했다.

“관련 서약을 미리 서면으로 작성해 두는 것도 좋습니다. 인터뷰에는 가능한 적은 인원이, 윤오 씨만 계시는 편이…… 안전하고요.”

명함을 기울여 바쁘게 써낸 내용을 살폈다. 받침이 물러 글씨가 울렁이는데다가 쓸 말이 많아 뒤로 갈수록 글자가 작아지는 둥 영 엉망이었다.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고 달리 방법도 없었다지만, 또다시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아서 조금 서글펐다.

느린 두 걸음을 걸어 다가간 다음 명함을 그에게 건네고, 멀어지기 아쉬운 세 걸음을 되돌아와 다시 소파에 앉았다.

[인터뷰가 끝나고 들은 내용을 메모하시는 것은 괜찮습니다. 거짓말은 감지가 가능하므로 청취 중에는 기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만들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메모는 빠르게 파기하십시오.

검열 걱정은 말고 질문하십시오. 그러나 반란군에 대한 묘사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채워진 뒷면을 읽은 그가 묘한 눈썹 모양을 하고 나를 보았다.

“잊으신 내용은 다시 알려 드리겠습니다. 동의하시면 바로 인터뷰를 시작하셔도 좋습니다.”

속을 알 수 없이 깊은 검은색 눈동자가 내게 머물고, 그동안 그는 네모진 명함을 손가락 사이로 몇 번 고쳐 쥐었다. 마땅히 갈 곳을 찾지 못하던 눈이 윤오의 오른쪽 엄지손가락에서 뚝 멎었다. 묻어난 검은 잉크가 왜인지 무척이나 외설스러워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편집부에도 그렇게 알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입술과 그 목소리와 내 글씨가 번져 묻은 손가락을 번갈아 보며 욕심이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일이 그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렇다면 조금은 상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아직은 요구하기 일렀다. 그가 내게서 원하는 모든 것을 알아내고, 가져간 다음이라야 했다. 죄지은 자가 모든 것을 바쳐 자비를 구하듯이, 그래서 그가 죄인을 사면하고 보상을 내릴 마음이 들 때쯤.

윤오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를 앞에 두고도 종종 그를 그리워하는 나에게는 그러한 침묵이 무척이나 외롭고 두려웠다. 그의 생각을 미루어 짐작하다 보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지레 조바심이 나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입을 뗐다.

“인터뷰는…… 얼마나 하게 됩니까? 좀 전에 두 달 정도라고 하시는 것 같았는데…….”

인다비는 한두 달이라고 하였으나, 나는 가능하면 길기를, 윤오가 궁금한 것이 아주아주 많기를 바랐다.

검은 두 눈이 비척거리는 목소리를 따라 내 입매를 보았다. 긴장을 혀로 축인 곳이 바르르 떨었다.

“가장 좋은 건 퇴고할 때까지 그때그때 확인하는 겁니다. 전반적으로 알아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에 한동안은 자주 봤으면 하고, 나중에는 확인하는 정도로, 빈도가 줄어들 겁니다.”

“네.”

지체 없이 나간 대답이 다소 일렀다.

나중에는 줄어든다는 빈도가 벌써 아쉬웠고, 그때그때라는 말은 무척 황홀했다.

그를 자주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는 내 얘기를 들을 것이며, 그 모든 일이 그에게 도움이 된다. 눈물이 날 만큼 벅찬 일이다.

코 안쪽이 눅진해진 바람에, 나는 뜨거운 숨을 코로 뱉으며 드물게 더위를 느꼈다.

“근무 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네?”

“인터뷰 가능한 시간. 평일 저녁이라든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해 그의 미간이 살짝 접혔다. 빠르게 정신을 다잡고 일정표를 간추려 떠올렸다. 갑작스레 내 일이 너무 많다 여겨졌고, 접견 따위의 추가 근무를 하고 싶지 않다 생각했다.

윤오에게 내가 필요하다는데.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오전 6시부터 16시까지 근무합니다. 금요일은 15시까지, 토요일은 13시부터 16시까지지만 추가 근무를 하기도 합니다. 추가 근무 일정은 조정할 수 있습니다.”

“……휴무는 일요일밖에 없습니까? 금요일 말고도 평일에 하루 정도는 시간이 됐으면 하는데.”

“…….”

“왜…….”

곧장 그러겠다는 말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벌어진 입을 다물어 버렸다. 대답을 추궁할 듯하던 윤오도, 내 일그러진 낯을 보고는 말을 물렸다.

얼른 된다고 해야 하는데. 근무 중이 아닌 시간은 언제든 괜찮다고, 다 줄 수 있다고 대답해야 하는데. 윤오가 대답을 기다리는데.

목이 너무 메서 지금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턱을 타고 자꾸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툭, 툭, 물기가 바지를 적시는 소리는 참고 버텨서 없앨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심장이 마치 처음 뛰는 것처럼 정신 사납게 굴었고, 손은 처음으로 느끼는 이러한 감격이 무섭고 불안해서 벌벌 떨었다. 빨리, 빨리 그쳐야 하는데…….

부릅뜬 눈과 목구멍을 뜨겁게 적시는 울음을 회색 벽지가 발린 천장으로 들어 올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를 걷잡을 수 없었고, 깜빡 감아 버린 틈에 후드득, 하는 소리가 떨리는 손등으로 떨어졌다. 소매가 젖었다.

못난 모습을 가리려 손을 들었다. 어두운 손바닥에 고개를 파묻고 축축한 숨을 숨겼다. 감은 눈꺼풀로부터 시작한 무릎 젖는 소리와 미처 단속하지 못한 흐느낌이 작고 가늘게 흘렀다.

도움을 요청하는 작은 동물의 울음처럼 처량했다.

터져 나온 울음을 진정하는 데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조그만 사이드 테이블이 윤오와 내 사이에 놓였다. 나는 여전히 가을을 닮은 소파에 앉은 채 그가 바닥을 가로지르는 흑백의 금을 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가 내게로, 볕 아래로 건너오는 장면을.

‘다른 요구 사항이 있으면 말하세요.’

나의 자발적 협조에 그가 한 말.

당연히 무엇도 요구할 것이 없다고 여겼지만, 막상 그런 말을 들으니 퍼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 생각은 소파 앞자리에 작은 테이블이 나타나게 했고, 윤오의 바퀴 달린 의자가 암막 커튼의 그림자를 벗어나 다가오도록 했다.

어깨너비만 한 사이드 테이블 한쪽에 마주 잡은 손이 올랐다. 내 오른손과 윤오의 왼손.

기울어지는 해가 겹쳐진 두 손의 그림자를 테이블 위로 길게 그렸다.

모조리 감격스러운 그 상황에, 나는 훌쩍 하는 소음을 내버려 얼른 눈치를 살폈으나, 윤오는 신경 쓰지 않고 인다비가 두고 간 설문지를 죽 훑었다.

마음에 차는 게 별로 없는지 종이가 술술 넘어갔다. 페이지를 넘길 적에 혹시 맞잡은 왼손을 돌려줘야 할까 걱정했지만 그는 한 손으로도 충분히 종이를 넘겼다.

따뜻한 손바닥, 커다란 손.

한참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자니 연구동에 있던 새하얀 그랜드 피아노가 떠올랐다. 윤오는 피아노를 쳐 본 적이 있을까.

기억 속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던 손등 위로 윤오의 큰 손이 겹쳐 떠올랐다. 기다란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가 아니라 건반을 두드리면 또 얼마나 멋질지 상상만으로 감탄이 흘렀다. 레슨 시간을 꽤 좋아했었는데, 그와 내가 그렇게 나란히 건반 앞에 앉으면 어떨까.

피아노. 왼쪽 손가락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고부터는 한 번도 쳐 본 일이 없는.

“얼마나 말해 줄 수 있습니까? 피해야 하는 질문이 있다면 미리 알려 주십시오.”

“모르는 부분은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소문의 진위나 특정 인물에 대한 것은 부정확할 수도 있습니다. 피해야 하는 질문은…… 따로 없습니다. 제가 보거나 겪은 일이면 다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의 눈썹이 다시 묘하게 일그러졌다.

기껏 쥔 것을 잃을까 손끝에 들어가려는 힘을 참았다. 주는 만큼으로만 만족해야 했다. 빼앗아 간다면 빼앗겨야 했다. 그런데 그 온기를 놓치기 싫었던 버석한 마음이 그만 사각거리며 그의 손바닥을 스쳤다.

윤오의 시선이 설핏 겹친 손으로 향했고 그 손가락에서부터 기분 좋은 소름이 자르르 흘렀다. 그의 손바닥에 얹은 희멀건 손등이 내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보기가 좋았다.

“그래요, 그럼. 에스퍼는…… 이능 장교로 따로 분류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계급이 어떻게 됩니까?”

“중령입니다.”

“…….”

윤오의 입술을 바라보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질문이 이어지지 않았다. 딱히 궁금한 걸 찾지 못한 걸까, 그러면 내가 나서서 읊어 주어야 하나, 어디부터 말해 주면 좋을까, 어떤 일이 그의 흥미를 끌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차였다.

“……영관 장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중령 4년 차입니다.”

“4년 차.”

“……일반 장교와는 다릅니다. 이능 장교의 계급은 단순히 연차와 공훈을 나타내는 것이고 대대 지휘 권한은 없습니다. 군기도 심하지 않습니다.”

“연차가 얼마나 됩니까?”

“국가 소속이 된 지는 15년 차입니다.”

“…….”

다시금 생각에 빠진 미간이 나를 조바심 나게 했다. 그가 나에 대해 궁금해한다는 것만으로 이미 속이 달게 졸아든 탓일지 모른다. 다음 질문을 기다리며 침을 꼴깍꼴깍 넘기는 중에 윤오는 들고 있던 종이 다발을 사이드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고, 검은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참전했습니까.”

“네.”

반란 전쟁. 1년 반의 전선.

그래, 그 참혹하고 끔찍한 시절이 그의 흥미를 이끌 수 있다면 아직도 악몽으로 나타나는 피와 불의 향연도 떠올려 낼 수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자연스러워지는 그 감각도, 수어 개의 국가가 연합해서 상대해야 했던 단 한 사람의 반란군, 키비슈스 엘로란타에 대해서도.

그러나 내 각오와 달리 윤오는 전쟁에 대해 더 묻지 않았다. 어쩌면 질문을 고르거나, 나중으로 미룰 뿐인지도 몰랐다. 언제든, 무엇이든 말해 줄 준비가 되었다 생각했지만, 나도 모르게 벌벌 떨던 오른손은 더운 손바닥에 손등이 감기고서야 알았다.

“몇 살에 발현한 겁니까?”

“13세 이전의 기억이 없어서 정확하지 않습니다. 13세부터는 줄곧 이능이 있었습니다.”

이능에 대한 말이 나오자 그는 불쾌했던 경험을 떠올리는 듯 인상을 썼고, 내 낯도 2년 전의 기억으로 창백해졌다.

조금 전보다 더욱 떨리는 손이 용기를 닮은 우려로 맞닿은 그의 손바닥을 감았다. 다행히 떨쳐지는 일은 없었지만, 그는 이능에 대한 부분 역시 넘겨 버리고 다른 질문을 했다.

“중령이면 수행원이 있습니까? 여기로, 시내로는 어떻게 나오죠?”

“부관은 있지만 수행원은 없습니다. 지휘권이 없고 업무 영역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관용 차량이 나오지만 이능 장교는 시가지 내 운전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필요할 때는 운전수를 신청하게 됩니다. 시내에 나올 때는, ……저는 주로 셔틀을 이용합니다.”

“또 금지된 것이 있습니까?”

“대체로 일반 군인과 같은 제재를 받습니다. 군법에 충성해야 하며, 연합국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사업자 등록 같은 것은 안 된다고 들었고, 이능 장교만 해당하는 것은…….”

꼴깍. 군법을 어길 생각이 만만한 내 가벼운 입술이, 저지른, 또는 저지를 죄가 간지러워 바르르 떨었다. 그러나 윤오가 물었으므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야 했다.

“군의 허가 없이 이능을 사용하지 않을 것, 자신 또는 동료의 이능에 관한 사항이나 에스퍼인 사실을 민간에 알리지 말 것, 외출 시 사복 또는 일반직 복장을 갖출 것 등이 있습니다. 나머지는 다음에 더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럼 출판부에도 인터뷰 사실을 알리지 않아야 합니까?”

“괜찮습니다. 단지 저를 특정하는 정보는 적게 아실수록 좋습니다. 계급이나 이름, 나이…… 이능의 종류같이 자세한 인적 사항을 알게 되시면 후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가능한 모르시는 편이 이롭습니다. 윤오 씨는…… 괜찮습니다.”

내 가이드니까, 괜찮다. 다른 사람은 말고 당신만 알아줬으면 좋겠다. 내 모든 것을 궁금해 해 줬으면 좋겠다. 중요한 내용을 빼놓은 말이 스르륵 흘렀다.

“가이드라서?”

“네?”

“괜찮다는 건 내가 그쪽의 가이드라서 그렇다는 겁니까?”

“……네.”

이상하게 그렇다 대답하는데 속이 갑갑했다. 나를 ‘그쪽’ 하고 부르는 딱딱한 목소리 때문 같기도 했고, ‘가이드’라는 말에 담긴 짜증스러움 때문인 것도 같았다.

윤오가 ‘내 가이드’라서 괜찮다는 말에 틀린 점이 없는데, 단지 그것만은 아니라는 생각 탓일까. 이 초조함의 근원이 불분명했다.

“나는 가이드 센터 소속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군에 등록된 겁니까?”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군 소속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제 개인 소속으로 보시는 게 제일 가깝습니다. 윤오 씨는 센터를 거치지 않고 즉시…… 제가 등록했으니까요.”

“그럼 연락 오는 건 뭡니까. 데리다? 그 사람이 부관입니까?”

“네. 제 부관입니다. 연락이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아닙니다.”

데리다의 어떤 연락이 윤오를 언짢게 했을까. 그녀가 전할 말이라곤 죄 나에 대한 것밖에 없는데, 나는 따로 지시한 기억이 없다. 물론 내가 쓰러지거나 전사할 경우에는 동의 없이 연락할 수도 있겠지만, 아, 정기 검진 결과에 관한 연락인가?

“데리다가 어떤 연락을 드렸습니까?”

“별것 아닙니다. 가이드 센터는 아무나 방문할 수 있습니까?”

“…….”

모두 알려 줄 준비가 된 나였으나 그 질문에는 덜컥 말문이 막혔다. 윤오는 가이드 센터는커녕 파동 검사도 받은 적이 없다. 당연히 매칭 기록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다. 그는 나의 가이드니까.

그런데 만약 그가 가이드 선별 검사를 해 보고 싶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는 분명 내 가이드지만, 매칭률이 높은 에스퍼가 또 나타난다면 어떡하지. 온갖 걱정에 흉통이 떨리고 열기로 그득 찼다.

“안됩니까?”

“……아, 무나는 안 되지만, 목적을 밝히고 견학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왜 그런 얼굴을 합니까?”

“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그것만으로는 표정이 어떤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손바닥에 더운 숨을 뱉어 내고 마구 문질렀다. 여남은 물기가 눈에서 조금 묻어났다.

윤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질문을 바꾸었다. 내 얼굴을 벌겋게 문지르는 왼손에 관한 것이었다.

“그 왼손은 화상? 에스퍼는 잘 낫는 거 아니었습니까.”

“아. 이건…….”

헐렁한 소매가 흘러내린 틈에 흉터가 드러난 모양이었다. 얼른 다시 손을 내려 테이블 아래로 감추었다.

당황한 속이 울렁거렸다. 윤오가 내 상처에 대해서 궁금해할 줄은 몰랐던 까닭이다. 새끼손가락 쪽 손등부터 시작해서 팔뚝을 지나 팔꿈치 뒤까지 이어지는 오래된 화상. 새운 채운 살로 아물어 주황빛 길쭉한 얼룩으로 남은 흉.

나의 무수한 결점을 또 하나 들켜 버린 기분이 들었다. 이것 또한 그를 불쾌하게 할까 봐 아랫입술을 지르물고 눈치를 보았는데, 후다닥 테이블 아래로 기어들어 간 팔을 보는 눈길은 외려 무표정했다.

낫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이 얼룩. 아는 사람은 보려 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감히 묻지 않는 이 흉터에 대해서, 도대체 어디부터 설명하면 좋을까. 거슬러 가다 보면 열여덟까지 십 년을 건너야 한다.

“……에스퍼의 자기 회복력이 뛰어난 것은 맞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만 상처 회복이 빠르고 일반인보다 근력이 강한 것이 공통적입니다.”

허물을 감추지 못하는 뱀이 된 기분이었다. 새로 얻은 비늘이 단단해지기도 전에 내쳐진 뱀처럼, 그의 시선 아래서 살갗이 따끔거렸다. 속이 복잡하니 말머리도 쉽게 입을 나서지 못했다. 내 흉터와 에스퍼의 회복 능력, 그리고…….

“전쟁 이후에 발현한 에스퍼들은 해당 사례가 비교적 적다고 들었지만, 반란 전쟁 이전의 에스퍼들은 원국의 구 연구동에서 대대적으로 강화 시술을 했습니다.”

“강화 시술?”

“자극을 통해 이능력을 일정 수준 강화할 수 있습니다. 회복을 반복하면 회복력이 강화되는 식입니다. 그때는 연구동 소속 전원이 정기적으로 시술을 받았습니다. 개인차가 있고, 한계치도 사람마다 달랐습니다.”

“……회복. 그 정기적인 시술이라는 게, 계속해서 상처를 냈다는 뜻입니까?”

잠깐 눈을 깜빡인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대답했다. 에두른 설명에서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 낸 윤오가 대단하면서도 그의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단지 오래도록 연구동 소속이었을 뿐인데, 마치 나에게도 잘못이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의 연구소는 그런 식의 시술을 금지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 ‘시술’이라.”

“…….”

살갗을 째고, 불에 달군 도구로 화상을 입히고, 고무탄으로 시퍼렇게 든 멍부터 총탄의 관통상까지 이어지던 날.

그 시절에는 격주로 목요일마다 사탕을 받았다. 시술 후 상처를 처치하는 동안 울음소리가 나지 않도록.

인체 실험과 매한가지인 그 ‘시술’이 알음알음 민간에 소문이 났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축소되고, 입맛대로 비틀렸다는 것도.

원국 남부에 있던 구 연구동은 반군에 의해 사라졌고, 군부는 연합하며 교체되었다. 해묵어 과거의 일이 되고서야 뭍으로 떠오른 구 연구동의 ‘실험’과 아직 어린 에스퍼들의 이야기를, 그 소문을 윤오도 들었을까.

그래서 짐작해 낸 걸까.

“거기서 화상을 입힌 겁니까? 연구소에는 얼마나 있게 됩니까.”

“지금의 연구소는 발현 후 이능을 몸에 익힐 때까지 통상적으로 최대 2년간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시술 중에 화상이 포함되기는 했지만, 이 자국은 시술 때 생긴 것이 아닙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다음, 마저 말을 이었다. 이 상처는…….

“저는 구 연구동에서 5년을 보냈고, 그때 받은 시술은 흉터로 남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대상에 따라 일주일에서 최대 2주일 이내에 나을 정도로 시술을 진행하고 후에는 바로 치료를 시작했으니까요. 이 상처는…….”

“…….”

“이 화상은 제 것이 아닙니다.”

이 화상은 키비슈스의 것이다.

반란군 수장 키비슈스 엘로란타. 나를 키운 에스퍼.

* * *

나는 한 번도 그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한 적이 없다.

키비슈스 혹은 크위슈스. 십 수 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데라주바의 말. 겨우겨우 원국의 공용어를 익힌 내 수준에는 따라하는 것조차 어려워 줄여 부르던 이름.

갈 곳 없이 기억을 잃은 나를 데려다 연구소에 놓은 것도, 반벙어리나 다름없는 나에게 차근차근 말을 가르친 것도, 내 이름이 이선이고 나이가 열셋이라는 것을 알려 준 것도 그였다.

“키비슈스 엘로란타? ……엘로란타면 반란군입니까?”

“반란군의 수장입니다.”

“……그게 반군 수장의 상처라고? 원래 알던 사이였습니까?”

나는 왼손을 들어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 톡, 톡, 세 번 두들겼다. 민감한 주제, 위험한 화젯거리, 글로 써서는 안 되고 말로 전해서도 안 되는 주제에는 테이블을 두들겨 신호하기로 했다.

키비슈스는 한 번, 두 번, 세 번을 두들기고 세 번을 더 두들겨도 모자라다.

잠시 뜸을 들인 다음 윤오의 물음에 답했다.

“그가 카바섬에서 저를 주웠습니다. 당시 구 연구동에서 일하는 에스퍼였고, 입소시킨 다음 탈영 전까지 돌봐 주었습니다.”

생각이 빠른 윤오는 ‘이 상처’가 ‘키비슈스의 상처’라는 점에서 바로 내 이능을 떠올려 냈는지 그에 대해서는 따로 묻지 않았다. 직접 보았으니까. 타인의 상처를 내 몸으로 가져오는 이 기괴한 이능을.

“돌봐 주었다? 십 년 전이라도 에스퍼는 군인이었을 텐데, 군인이 연구소에서 일할 수가 있습니까?”

“현재는 연구소가 훈련소를 겸하는 만큼 의무대가 부설되어 있고 근무하는 에스퍼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말씀하신 것처럼 그가 연구동 내 유일한 에스퍼 연구원이었고요.”

웃음을 머금은 보라빛 눈동자와 새하얀 가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반란 전쟁이 발발하기 전은 에스퍼들도 일반인과 같았습니다. 부사관으로 시작해서 전원 전투 계열로 배치 받았습니다만, 그는 진급 시험을 치고 연구원을 희망했다고 들었습니다.”

“각별한 사이였나 보군요.”

“네.”

일순 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따라 가슴도 뜨끔 울렸다. 반란 전쟁의 장본인과 각별한 사이였던 것도 그에게 밉보이게 되는 일일까. 사정하듯 변명이 나섰다.

“제가 아무런 기억이 없는 상태라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카바섬에서 혼자 방황하고 있는 것을 그가 발견했고, 어리지만 에스퍼니 원국으로 데려와 입소시켰다 들었습니다. 말을 하거나 쓸 줄도 몰라서 공용어를 새로 배워야 했고요.”

“……기억이 없고 말을 할 줄도 몰랐다? 카바섬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말도?”

“네. 아무런 말도 못 했습니다.”

그의 낯에 서린 의구심이 깊어질수록 내 속도 바짝바짝 말랐다. 키비슈스의 돌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그 사정을 감히 동정받고 싶었다.

나는 어렸고, 할 줄 아는 것은커녕 혼자서 몸을 씻는 법도, 포크를 쥘 줄도 몰랐으니까. 돌봄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입장이었으니까. 그때는 당신이 없었고, 나는 모든 순간 아팠으니까.

“입소시켰다고 들었다……. 그럼 입소도 기억에 없다는 겁니까?”

“네. 입소하고 이듬해부터 조금씩 기억이 납니다.”

“첫 기억이 뭡니까. 주웠다, 발견되었다, 카바섬, 입소……. 전부 들은 이야깁니까?”

“……그렇습니다.”

“그 반란군 수장의 이능은?”

탁, 탁, 탁.

그의 말투에 추궁처럼 날이 섰다. 고작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릴 뿐인 시시한 경고를 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조차 내 탓인 기분으로 아는 바를 토해 냈다.

“마비와…… 강제 개화입니다.”

“자세히.”

선뜻 무엇을 얘기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내게, 그가 ‘마비부터.’ 하고 시작점을 짚어 주었다.

“……마비는 말 그대로 마비입니다. 접촉한 신체 일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신경을 둔화시키고 혈류를 느리게 하는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날 선 반응에 다시금 속이 더웠고, 여전히 눈가가 따끔거렸다. 이 신체 반응은 뭘까. 나는 키비슈스까지도 질투하는 건가.

윤오는 단지 에스퍼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이라고, 그저 연상되는 대로 묻는 것이라 스스로 되뇌었다. 아는 것을 모두 꺼내 놓기 위해 노력했다. 가능하면 덤덤하게, 시기 질투가 드러나지 않게.

“강제 개화는…….”

“마비의 적용 범위가 어떻게 됩니까? 접촉한 신체 일부라면 팔, 다리? 머리에도 가능합니까?”

느릿하게 나선 다음 말을 자르고 윤오의 낮은 목소리가 더욱 상세한 정보를 요구했다. 조금은 도움이 되고 있는 걸까? 괜한 긴장에 질끈 감은 눈을 떠 착실히 답변을 이었다.

“……키비슈스 같은 경우에는 손바닥을 기준으로 서너 배 정도의 면적을 마비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팔, 다리, 몸, 머리 모두 사용이 가능하고, 머리에 사용하면 기절하게 됩니다.”

“기절이라. 머리가 망가질 수도 있겠군요. 당해 본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바란 적은 있지만.

키비슈스는 내가 통각을 마비시켜 줄 것을 부탁해도 내 체질이 신경 자극에 취약하다며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야속하지는 않았다. 그는 거기 모인 어린 에스퍼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자 공포의 대상이었고, 그의 말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떠올려 보면, 당시의 이능 테스트는 무식할 만큼 직관적이고 거칠었다. 아프고, 싫고, 무섭고.

버티지 못해 발악하는 어린 에스퍼를 통제하기 위해서 연구원들은 그를 불렀다. 그럼 나긋한 걸음과 미소 띤 얼굴로 나타난 키비슈스가 묶인 에스퍼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벽에 묶인 에스퍼의 곧장 꺾여 떨어지던 목과 느리게 한 방울씩 떨어져 바닥을 적시던 피. 간단하게 해결 된 사태와 그러한 광경에 숨죽이던 ‘우리’.

“……을 못 하는 건 아니고?”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작게 중얼거린 윤오의 목소리를 놓쳤다. 되물었으나 말해 주지 않고 다음을 재촉하듯 턱 끝이 까닥였다. 놓친 말이 질문 같았는데.

“강제 개화는, 이능을 강제로 발현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자연스레 발현하는 것보다 부작용이 큽니다. 더욱 고통스럽고, 사망률도 훨씬 높습니다.”

“이능을? 일반인을 이능력자로 만들 수 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에스퍼를 무한정 생산해 낼 수 있는 능력입니까?”

“아닙니다. 민간인에게 적용하면 대부분은 파동을 잠재우는 능력을 가진 유사 가이드가 되거나 죽습니다. 드문 경우에 에스퍼가 됩니다.”

“그럼, 그 에스퍼들이?”

“네. 반란군입니다.”

태반은 몸이 뒤틀려 죽고, 몇몇은 불완전한 가이드가 되고, 소수는 에스퍼가 되는 이상한 이능. 모순의 극치. 키비슈스가 단순한 탈영병에서 그치지 않고 단신으로 혁명을 일으킨 배경이다.

“그렇다면 그쪽도 강제 개화된 건 아닙니까? 열셋이면 보통보다도 많이 이른 것 같은데.”

“아닙니다.”

내가 키비슈스에 의해 에스퍼가 되었다라. 그의 발상이 남다르다. 어쨌건 윤오가 의문을 가졌으므로, 나는 가만히 가늠해 본 뒤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확신합니까? 기억도 못 한다면서.”

힐난하는 말투에 팔꿈치가 오그라들었다. 무엇 때문인지 목소리까지 냉소적이었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에 분노를 닮은 눈동자를 하고 말을 할 때마다 가슴이 통째로 염증에 시달리듯 화끈거렸다. 뜨겁고 무거운 혓바닥을 억지로 마저 움직였다.

“……키비슈스가 그 능력을 얻은 것이 10년 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연구동 에스퍼와 민간인들을 상대로 새로 얻은 이능을 실험하다 고발되었고, 곧 군에 수배되었습니다. 탈영 후에는 에스퍼 숭상 단체를 시작으로 반란군의 숫자를 늘렸습니다. 엘로란타 혁명……, 반란 전쟁의 시작입니다.”

“그가 일반인을 이능력자나 가이드로 만들었다는 건 알겠는데, 그렇게 이능력자가 된 사람들은 왜 계속 그자를 따르는 겁니까? 능력을 준 것 이외의 이유가 있습니까?”

“네.”

탁, 탁.

“강제 개화에서 살아남은 유사 가이드들을, 파동을 잠재우는 능력을 가지게 된 사람들을 소수의 에스퍼에게 ‘공급’ 하기 때문입니다.”

“‘공급’?”

“연합국의 자연 발생 에스퍼들과 달리, 강제 개화된 이능은 대부분 일차적이고 단순한 이능력을 가집니다. 대표적으로 신체 강화 종류가 있습니다. 단순하고 강한 이능은 반작용 역시 큰 경우가 많은데, 반란군의 에스퍼들은 가이드를 확보하기가 쉽기 때문에 몸을 사리지 않습니다.”

무한히 공급되는 가이딩. 처참한 가이드의 인권. 자극적인 이야깃거리들은 대개가 반란군 출신이다. 학대받는 사람들, 감금, 강간, 착취.

“연합군은 가이딩을 착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반란군 쪽이 에스퍼로서 좋은 거 아닙니까?”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말이다. 윤오가 말하면 그 모든 에스퍼가 내가 되었고 그 끔찍한 착취자들과 나는 동급이 되었다. 그에게는 다를 바 없는 일일까, 나 역시 더러운 착취자에 지나지 않은 걸까.

“……그럴지도 모릅니다. 당시 탈영하고 반군으로 돌아선 군인들도 상당수 있습니다만…… 그러지 않은 에스퍼들은 반군이 가이드를 대하는 태도를 극도로 싫어합니다.”

내 가이드라면, 결코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라고 말하면 거짓이겠지.

사실은 그런 감상적인 이유보다는 구출해 낸 반군의 가이드들이 하나같이 멀쩡하지 않은 상태인 것과 가이딩의 순도가 형편없이 낮았던 것이 많은 이들의 이유였다.

사막 같은 고통을 삭일 오아시스를 바라는데, 고작 한 방울 두 방울 될까 한 가이딩으로 목을 축일 수 있을 리가.

그러나 키비슈스는 그런 두어 방울짜리 가이드를 에스퍼 하나에게 수두룩하게 붙여 문제를 해결했다. 가이딩을 비처럼 쏟아 낸 뒤, 만들어진 유사 가이드들은 족족 죽어 나갔다. 빈자리엔 새롭게 민간인들을 데려와 죽지 않은 자들로 채웠다.

“가이드는, 그런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연합군의 에스퍼들이 키비슈스를 적대하는 이유입니다.”

거짓말. 거짓말이다. 그 가이드들은 내 가이드가 아니니까 상관없다. 그들은 누구와도 매칭되지 않는 ‘가짜’들이니까.

그저 인도적으로 불쌍할 뿐이나, 에스퍼의 인도는 그 총량이 무척 작았다. 자기 고통에 오래도록 심취한 자들에게 연민이 무슨 소용일까. 사람을 죽이도록 내몰린 상황에서 그저 죽어 나가는 사람은 또 무슨 상관일까.

그나마 얻어 들은 윤리가 있어 무시하지 못했고, 똑같이 사람을 죽여도 선한 역을 자처하는 연합군의 방침에 따라 그들을 구했다. 그나마의 자유도, 의지도 없이 물건처럼 쓰인 사람들. 그들은 기껏 구해지고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잦았다.

“연합군은 지속적으로 가이드를 발굴하고 관리합니다. 제대하지 않은 에스퍼를 기준으로 약 15퍼센트 정도가 가이드 센터 시스템을 통해 매칭 가이드를 찾아냅니다.”

더욱 솔직해지자면, 그냥. 계산해 보니 여기서 가이드를 기다리는 편이 가능성 높으니까.

인간성을 포기할 만큼 굶주린 녀석들이야 적시는 비에 만족할지 모르지만, 어차피 병기가 되어 참전해야 한다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은 곳을 고를 뿐이다.

키비슈스의 군대는 위협적이지만 개개인의 위력은 강하지 않았고, 우리의 전쟁은 눈앞의 불바다 보단 삶이었다. 결국 이 기다림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은 자리를 고르는 단순한 셈법.

반란군 엘로란타가 공세를 거둘 때까지, 치열하게 승기를 계산했을 놈들이 많다. 당시 혁명군의 근거지가 된 도하나 데라주바 출신의 에스퍼들은 더욱 쉽게 돌아섰고, 혁명의 승리를 점친 놈들은 군복을 벗어 놓고 국경을 넘었다.

연합 전의 국가들과 그 군이, 각자 거느린 에스퍼들을 차별하고 나쁘게 대한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전쟁은 많은 것을 바꾸었다. 연합국은 군대를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군대는 이능력자들 위주의 작전을 짰다. 연봉과 직급 같은 허울을 넉넉히 주어 그들을 달래고, 가이드 선별 확대로 희망도 담뿍 채웠다.

“……카바섬 출신을 본 적 있습니까?”

“네? 네.”

뜬금없이 가벼워진 질문.

선뜻 대답하고 카바섬 출신의 군인 몇 명을 떠올렸다. 카바섬 역시 연합국 소속이기 때문에 중앙에도 여럿이 근무했다. 그런데 왜…….

“느끼는 것 없습니까?”

“무엇을……?”

윤오는 긴 한숨을 쉬었다.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는 것도 내 잘못이 되어 다시 속이 내려앉았다.

문득 그의 커다란 오른손이 내 오른손을 덮었다. 그 생소한 광경에 절로 숨을 죽였다. 긴 손가락은 손등을 지나쳐 헐렁한 흰 소매를 죽 걷어 올렸다. 마른 팔뚝이 그대로 드러나 퍼뜩 떨었으나 그의 다른 손이 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카바섬 사람들은 피부색이 어둡고, 대체로 금발이죠. 뼈대가 옆으로 넓고 눈은 파랑이나 녹색, 드물게 노란색입니다. 이렇게 창백한 색이 아니고.”

곧장 맞닿은 시선이 내 탁한 주황빛 머리칼과 같은 색 눈을 마저 지적했다.

“이상한 것 모르겠습니까?”

“이상……, 제가 뭘 알아야…….”

“의심.”

의심. 소매부터 시작한 시선이 그가 걷어 낸 팔뚝을 따라 손목뼈가 툭 불거진 곳까지 이르렀다.

말마따나 창백했다. 떠오르는 카바섬 출신들의 구릿빛 피부와는 살결도 달랐다. 내 뼈대는 그들에 비해 턱없이 왜소하고 내 머리며, 눈 색도 거리가 멀다. 나는 카바섬에서 버림받아 떠도는 아이였는데…….

“그 반군 에스퍼가 한 말이 모두 거짓일 가능성. 카바섬도, 주운 것도, 알려 준 인적 사항도 모두 거짓일 수 있다는 생각. 고작 열셋에 이능력자가 된 것도, 연구동의 실험도 그 에스퍼의 영향일지 모른다는 의심.”

“…….”

“애초에 카바섬에는 걸인이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인정이 넘치고 복지도 좋아요. 버려지는 건 물론이고, 길을 잃은 어린애가 혼자 다녔다면 주민들이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겁니다.”

머릿속이 혼란했다. 거듭되는 의문이 쌓이다 무너졌다. 모든 것이 심사대에 올라 근간을 뒤흔들었다.

기억하는 것이 없고, 들은 것은 믿을 수 없다면, ‘나’는 어디서 시작되는 거지?

* * *

“이번에도 미등록입니다. 역시…… 아우도바에서 일어난 연쇄 사건과 무관하지 않아 보이죠? 벌써 2년 전이기는 한데.”

“십팔, 그 개새끼가 이제 원국까지 기어들어 왔다는 건가?”

검시관의 말에 욕설을 내뱉은 준준이 깔끔하게 정돈한 머리칼을 벅벅 긁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비슷한 이능을 가진 사람이 더 있어도 곤란하고요.”

“니가 보기엔 어때?”

시신의 벌어진 검은 입을 바라보던 중에 질문이 떨어졌다.

반신이 안으로부터 터져 나간 시신. 닦아 냈겠지만 피가 번진 눈가와 시커먼 입술, 목 아래부터 대중없이 찢겨 나간 상처를 차례로 훑었다. 쏟아졌을 장기는 테이핑으로 간신히 고정해 넣었고, 허벅지는 살점이 사라져 뼈가 드러났다.

“키비슈스가 맞는 것 같네. 강제 개화를 버티지 못하고 폭사한 사체와 특징이 같아.”

“예. 내부로부터 세포가 파열했습니다. 회복한 흔적도 있는데 따라잡지 못했어요. 속도를 고려해서 짐작하자면 사망까지 약 두 시간은 걸렸겠네요. 끔찍하게도요.”

그 끔찍한 상흔을 아무렇지 않게 여닫아 살피던 검시관이 허리를 폈다.

“요 며칠 기온과 발견 장소를 고려하면 사망 추정 시각은 대략 24일 밤입니다. 열대야라 부패가 빨라서 25일 새벽까지도 볼 수 있겠네요.”

“발견자는 민간인인가?”

“예. 바깥에 조사한 경관이 있을 겁니다. 폭사한 시체를 처음 봤는지 토하느라 바빠요. 웩웩거려서 내보냈습니다.”

“나머지는 그쪽과 얘기하지. 수고하고, 특이 사항 있으면 연락하도록.”

“알겠습니다. 고생하십시오.”

반란 전쟁이 개인으로 인해 발발한 것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무리 작은 계기 하나가 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다고는 해도, 말 그대로 ‘단신의 개인’이 몇 개의 국가를 연합시킬 만한 무력을 확보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그러나 키비슈스는 해냈다. 탈영 직후, 에스퍼 숭상 단체를 확보했고, 다음으로는 순차적으로 국가를 돌며 에스퍼들 사이에 가이드 혐오 사상을 퍼트렸다.

감시와 통제에 비해 처우가 나빴던 에스퍼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미끼였다.

모자란 가이딩과 제 가이드를 기다리는 힘겨움을 모조리 가이드 탓으로 돌리는 일. 가이드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기나긴 고통을 표출하는 일. 기약 없는 기다림에 비하면 훨씬 쉬울 일.

키비슈스의 뜻대로 에스퍼 우월주의가 바탕이 된 그 집단에서, 가이드의 처지는 단연 바닥일 수밖에 없다. 마치 그들이 고통의 원인인 양, 에스퍼가 가이딩을 필요로 하는 것부터 가이드의 잘못이 되어 학대로 이어졌다. 차마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것이라 할 수 없을 수준으로.

“……안녕하십니까. 고준 경장입니다…….”

해쓱한 인상의 남자가 검시실 밖에 서 있다가 자기소개를 했다.

“중앙군 소속 중령 이선, 이쪽은 준장 준준입니다.”

“헉. 그 유명한 ‘괴물 준준’이십니까?”

준준은 그 별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아니나 다를까, 준준이 인상을 쓰자 눈앞의 경관이 바로 쭈그러들어 시선을 피했다. 시신을 보고 토했다더니 목이 걸걸한지 흠흠, 하고 가다듬기도 했다.

“이렇게 높은 분들이 오실 줄은 몰라서 저 혼자입니다. 그, 저, 뭐냐 송구…… 송구…….”

“용건부터. 발견 장소와 최초 발견자는?”

“아, 예. 발견지는 그…… 차호 인근의 야산입니다. 27일 낮 11시경 등산객이 발견하고 신고했습니다. 발견자는 동네 주민이고 신원 확실합니다.”

“차호, 그러니까 같은 지역에 실종 사건 있습니까.”

“실종이요? 신고야 늘 있기는 한데, 같은 동네에는 없었습니다.”

내용을 받아쓰던 펜 끝이 잠시 멎었다. 실종이 없다. 그렇다면 차호가 아닌가?

“피해자.”

“피해자는 28세 남성입니다. 차호에서 약간 북쪽으로 가면 나오는 도고라는 지역 출신이고 가족들은 여행 중으로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연락이 22일 낮, 그사이 다른 목격자가 있는지 조사 중입니다.”

22일. 사망 예상 시각보다 이틀 정도 이르다.

원국의 지도가 있는 페이지를 펼쳐 놓고 차호에 동그라미를 쳤다. 야산이 감가산맥의 소맥 중 어느 방향이었는지를 물어 확인한 다음 그대로 따라 북쪽으로 거슬러 가니 국경과 맞닿은 쪽에서 영주, 최근의 국지 도발 사태가 벌어졌던 지역이 나왔다.

“뭐야. 이 새끼가 그때 들어왔나?”

“그럴 수도 있지. 도발치고는 시시한 작전이었으니까, 시선 분산용으로.”

“뭐가 들어와요?”

“아닙니다. 차호와 인근 지역의 최근 두 달 이내 실종자 목록, 그리고 더 알아낸 특이 사항이 있으면 이쪽으로 보내 주십시오.”

“수고.”

수사 연구원을 지나서 차에 올라탄 다음 곧장 가운데 파티션을 올려 운전석을 차단했다. 갑작스레 시찰 명령이 나와서 뭔가 했더니.

“자꾸 기어들어 와. 짜증나게.”

“방향이 중앙 같은데.”

“시발놈이. 뭐 놓고 간 게 있나, 연구동도 터뜨려 놓고. 너 찾으러 온 거 아니냐?”

“말조심해.”

노려보자 양손을 들어 어깨를 으쓱한다. 낯짝엔 어쩌라고,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다시 몇몇 사항을 기록한 수첩을 내려다보니 덩달아 한숨이 나오긴 했다. 처음으로 여름휴가가 쓰고 싶은 나날인데, 보고하는 순간 앞으로 6개월은 휴가는커녕 외출도 눈치를 봐야 할 것이 선하다.

“진짜 그 처돌은 새끼를 잡아 죽이든가 해야지.”

“…….”

“왜. 너도 생포해야 한다 쪽이냐? 키슈, 키슈, 하고 쫓아다니던 놈이라?”

“입 다물어. 너 욕하는 거 주노한테 다 말하는 수가 있어.”

“아, 십팔. 이게 뭐가 욕이라고. 진짜.”

키슈. 그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 내가 줄여 부르던 말. 늘 싱글거리던 보라색 눈동자는 그 어설픈 호칭을 꽤 좋아했다. 이제 와서 그의 무엇을 믿을 수 있겠냐마는.

“내 생긴 것만 보면 출신이 어디일 것 같아?”

“갑자기 헛소리를.”

“카바섬?”

“카바는 무슨 개소리. 니 얼굴이면, 빨간 머리 걔 누구냐. 영주에서 사진 찍힌 애. 서국 난민이던가? 그쯤이겠지.”

“역시 그런가.”

“설마 아직도 니가 카바섬 출신이라고 믿었냐.”

커다란 덩치를 좌석에 문질러 이쪽을 돌아본 준준이 쯧쯧 혀를 찼다. 한심하다는 듯 내뿜는 콧김에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저 멍청이에게 저런 눈초리를 받다니.

“혹시 키비슈스에 대해서 아는 거 더 있어? 내가 모르는 걸로.”

“니가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어? 키슈, 키…… 십팔 안 한다, 안 해.”

수첩은 접어 넣었다. 어차피 실종 신고를 조합해 봐야 다음 진도를 나갈 수 있고, 그때쯤이면 사건도 수사대로 옮겨 갈 것이다.

그나저나, 아무리 키비슈스의 일이라지만 준준을 딸려 보낸 것은 좀 의외였다. 고작해야 한 시간 거리를 오가는데 준장을 딸려 보내는 건 좀 과하지 않나.

잠잠해진 준준에게서 노려보던 시선을 거뒀다. 놈의 이능을 줄인 것도 풀었고. 계속하면 한 대 때릴 생각이었는데, 믿는 가이드가 생기고선 놈도 몸을 사릴 줄을 알았다.

“강제 개화 능력을 키비슈스가 숨길 수도 있었을까?”

“얼마나?”

“한 ……5년? 아니면 그 이상.”

“이능이 여러 가진데 그렇게 오랫동안 어떻게 숨겨. 가이딩 요구치 차이가 얼만데.”

에스퍼의 파동은 발현 직후부터 계속해서 발달했다. 새로운 이능력을 얻거나, 이능 자체가 강력해지거나, 혹은 분화되거나, 방식이 어떻든 결코 멈춰 서는 법 없이.

그 발달이 시간과 정비례하고 부작용의 강화를 동반하니, 전망은 뻔하다. 살아 내면 살아 낼수록 이 불치의 고통은 심각해질 것이고, 생존에 필요한 가이딩 요구치는 죽는 날까지 치솟을 것이다. 에스퍼가 된 순간부터 벗어날 수 없는 굴레와 고통이, 점점 강해지기만 하는 탓에.

“가이딩 요구치……. 그렇지.”

“그래.”

쓸데없는 질문을 다 한다며 준준이 나를 타박했다. 그러나 궁시렁거리면서도 대답은 거르지 않았다. 어디다 함부로 묻고 다니기 어려운 인물인 것도, 나와 키비슈스 사이의 연관도 아는 놈이라, 딴에는 배려하는 모양이지.

구 연구동의 참사로부터 시작된 반란 전쟁. 그 후 10년. 이제는 그 시절의 키비슈스를 알 만한 에스퍼도 몇 남지 않았다. 중앙에 있는 건 준준, 바차스, 사야야 정도인가. 욕밖에 하지 않을 바차스를 제외하면, 남는 건…… 사야야.

파동을 읽는 이능력자라서인지, 사야야는 사람의 본질을 꿰뚫는 데 능했다. 그녀라면 키비슈스의 이면을 진작 파악했을지도.

생각난 김에 바로 모바일을 꺼내 데리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바로 접견을 잡으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윤오가 주노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어.”

“윤오가 누군데.”

“내 가이드.”

“아, 유노. 기억났다.”

“유노가 아니고 윤오. 소설가야.”

엄청 잘나가는.

팔불출 같은 부연 설명을 꾹 눌러 참고 이름만 정정했다. 주노에게 따로 연락하는 편이 약속을 잡기는 쉽겠지만, 그랬다가는 이 커다란 덩치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걔가 주노를 왜.”

“책 쓰는데 가이드한테 궁금한 점이 있다고 해서. 주노도 볼 겸 다음에 갈 때 같이 가면 어떨까.”

“그 새끼는 지가 가이드면서 뭐가 또 궁금해.”

단숨에 차 안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말 좀.”

“……십팔.”

“가려서 해.”

“알았으니까, 이거 풀어.”

삐져나온 턱을 부리부리하게 노려보던 시선을 치우고 이능 제어도 풀었다. 예전 같으면 파동을 제어 당해도 아프지 않다고 좋아했을 놈이, 이제는 손발이라도 묶인 것처럼 꺼림칙해 했다. 아마 그게 정상이겠지.

“가이드가 요새 잘해 주냐? 제어 막 쓰네.”

“……좋아. 주노 만나러 언제 갈까? 다음 파견이 언제지?”

“나 있을 때 와.”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을 무시하고 모바일을 꺼냈다. 막 도착한 데리다의 답신을 열어 아까 요청한 접견 대기 리스트를 확인했다. 역시 기억대로 사야야의 접견이 가까운 순번이다. 한타, 사야야, 바차스 순인가. 가볍게 팔을 들어 체력을 가늠해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 명 정도는 볼 수 있겠지.

복귀 시간을 예상해서 접견실 예약을 부탁한 다음 캘린더를 열었다.

“7월은 내가 힘들 것 같아. 8월 어때. 8월 두 번째 주.”

“싫어.”

“셋째 주는?”

“싫어.”

“그럼 둘째 주 토요일에 나 근무 끝나고 간다. 저녁때쯤.”

어울리지 않는 투정을 무시하고 날짜와 시간을 정해서 통보했다. 별달리 붙이는 말이 없는 걸 보면 허락이다.

준준이 아껴 마지않는 가이드이자 화가인 주노. 상상만으로 머쓱한 일이라 매번 다음으로 미루고 에둘러 거절했지만, 윤오의 인터뷰를 위해서라면 주노가 나를 그려도 좋았다. 마찬가지로, 준준도 주노가 나를 그리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참아 주는 거겠지.

입은 군복과 견장이 거창할 뿐, 누군가에겐 훈련된 강아지에 불과한 둘을 싣고 차는 다시 중앙으로 향했다.

그사이 들어온 연락에 재차 키비슈스의 이능에 의한 폭사가 맞다 대답하고, 간략히 메모한 것도 불러 줬다. 일 처리가 빠릿빠릿하다면 오늘 내로 헌병대가 움직일 것이다.

들락일 때마다 연구소를 하나씩 폭파하는 키비슈스니 연구소 인근을 방비할 것이고 중앙을 빙 둘러 검문소를 설치하겠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겠지.

사망자가 발견된 차호는 여기서 지척이다. 중앙에서 북부청까지 한 시간. 그리고 거기서 직선거리로 가늠하자면 다섯 시간 정도 일까. 목적이 중앙이라면 이미 침투했을 가능성이 높다.

“저번에 가이드 센터, 결원 생긴 거 맞다던데.”

“실종자 모아서 일자 추적 들어가야겠네. 정말 키비슈스가 영주 도발 때 들어왔다면 북부 사단장 목도 위험하려나.”

“알 게 뭐야. 그래도 국경인데 멍청하게 뚫린 게 잘못이지.”

멍청이에게 멍청하단 소리를 듣는 북부 사단장에게 심심한 애도를 보냈다. 작정한 키비슈스는 가지 못할 곳이 없는데. 애초에 도하와 데라주바 일부, 그리고 서국을 끝으로 강제 점거를 멈춘 것도 순전히 그의 의지가 아닌가.

원하는 대로 군대를 만들고 포로를 거느릴 수 있는 키비슈스. 그 한 사람만 잡아내면 시한부일 전쟁. 그러나 그 단순한 셈도 상대에 따라서는 만만치 않은 일이 된다.

키비슈스의 비상한 머리는 악마 같은 능력과 어우러져 그의 이상을 실현할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이상. 가이드가 필요 없는 온전한 에스퍼가 되는 것.

* * *

“이선 중령님!”

정문 소초 앞에 내려 본관까지 걸어가던 차에, 한껏 들뜬 목소리가 뒤통수를 간질이며 가까워졌다. 언뜻 스치는 얼굴은 곧 앞에 앉혀 둘 어린 에스퍼였다. 일부러 무시하는 걸 뻔히 알면서, 돌아본 준준이 오지랖 넓게 아는 체 한다.

“쟤 걘데. 영주 도발.”

“알아.”

“아아. 또 개새끼처럼 꼬리 흔드는 놈이 나타난 거?”

꼭 저는 아니었던 것처럼. 어이없는 눈초리로 흘겨봐 주고 자리에 섰다. 와다닥거리는 요란한 걸음 소리가 아무래도 멈추지 않을 성싶다.

“이선 중령님!”

“……소위.”

“예! 소위 한타!”

하도 발소리며 목소리가 요란해서 플라타너스마다 확성기처럼 붙어 있던 매미들이 다 잠잠해졌다. 이명을 닮은 소리를 잠재운 한타가 기어코 정면을 차지하고 해맑은 얼굴로 웃었다.

“지금 접견 가는 중이었습니다!”

“소위. 군부 내에서 장교가 뛰게 되어 있나?”

“아……닙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상관의 이름을 부르고 길을 막는 건?”

“시정하겠습니다.”

옆에서 피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도움이라곤 안 되는 준준.

“접견은 30분 남았으니 시간 맞춰 오도록.”

“……예.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붉은 기가 도는 머리칼은 고개가 꺾어진 채였어도 나보다 한 뼘은 높았다. 고작 스무 살짜리가 크기도 하지. 어깨가 닿을 거리를 비켜 지나며 그런 생각을 했다.

“울겠다. 좀 받아 주지 그러냐.”

“진심이야?”

“아니.”

칼같이 자르는 말에 이번엔 내 쪽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저놈의 아무 말.

“중령. 상관의 이름을 부르게 되어 있나?”

“닥쳐.”

내 말투를 따라 하며 놀리던 준준이 행정동이 있는 동관으로 빠지고, 나는 그대로 본관에 들어섰다.

미리 에어컨을 틀어 놓고 익숙한 자리에 앉으니, 접견 3실 창밖으로 서성거리는 한타가 보였다. 아직 20분 전. 퍽 처량한 모습이었지만 그러게 왜 일찍 나왔느냐는 말밖에 해 줄 게 없다.

게양대와 조례단, 조경수, 다시 현관. 허망하게 거닐며 뜨거운 볕을 등진 녀석의 목덜미가 그의 머리칼처럼 붉다. 작열통에 낫지 않는 화상이던가.

모바일을 꺼내 한타의 약력을 열었다. 데리다가 요약했을 녀석의 에스퍼 인생을 처음으로 눈에 담았다. 영주 사건 이후로 여기저기서 이름이 나왔으니 낯설지는 않았다. 서국 출신. 작전지에서 확보. 반란군이 도피하며 불태운 진지에서 발현. 그 불길 속에서.

그래, 어디서 본 것 같다 싶더니 시기가 재작년 에스퍼 관리동 집중 치료실에 지원 나간 때였다.

말이 집중 치료실이지 죽음을 앞둔 에스퍼를 방치할 뿐인 그곳에서, 엎드려 누운 채 진피층까지 녹은 등을 벌겋게 드러내고 진통제며 항생제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던 서국 난민.

살았구나.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빙글빙글 몇 폭 되지도 않는 거리를 헤매는 꼴을 내다보는데, 공연히 고개를 들어 올린 녀석이 어깨를 흠칫 튀어 올렸다. 눈이 마주친 탓이다.

드륵, 의자를 밀고 일어나 창가로 몸을 기울였다. 올라오라는 손짓을 하자 눈에 띄게 밝아진 낯으로 서두르는 게 보였다.

어차피 들어오면 타이머가 눌릴 텐데, 고작 10분 미리 들어오는 게 뭐가 좋다고.

* * *

한타가 나가고, 다음으로 들어온 사야야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한 주에도 세 번씩 윤오를 만나기 때문에 상태를 읽혀도 자신이 있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예.”

대뜸 던져진 포석을 까는 말에 사야야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게 대답했다.

“키비슈스에 관해서.”

“제게 말씀이십니까?”

충분히 의아해할 수 있다. 군부의 모든 에스퍼 중에서 키비슈스와 가장 가까운 인물로 여겨지는 것이 나였으니.

나 역시 키비슈스의 행동과 생각, 이능 등 내가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생각했으나…… 지금은 도무지 내 기억을 믿을 수가 없다. 돌이켜 보면 온통 그에게 의존했던 기억뿐.

나를 키우다시피 가르치고 돌봐 줬으니 그랬다손 치더라도, 키비슈스가 나를 대한 태도가 남들을 대할 때와는 달랐던 것쯤은 느끼고 있었는데.

10년의 세월 동안 외면한 의구심을 이제 와서 푸는 것이 과연 필요한지는 논외였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윤오가 심어 주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의미가 되었다.

그가 의심한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서 알아내고, 또 해명해야 했다. 내 잘못이건 아니건 우선 변명하고 빌어야 한다. 더욱 미움 받고 싶지 않으니까. 이 이상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

의존의 대상이 키비슈스에서 윤오로 옮겨 갔을 뿐 아니냐 해도 별 상관이 없다. 남은 평생을 그치지 못할 의존이라면 구분의 필요성도 희미하다.

“연구동에서 본 키비슈스는 어땠지? 기억으론 내가 꽤나 편애받은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그는 무섭고, 냉정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냉정했다, 라.”

“그렇습니다. 동반 실험에 들어간 날……. 제 파트너였던 에스퍼가 울기 시작하자 곧장 기절시키기도 했습니다. 그 상태로 실험을 이어 갔고, 파트너는 사망했습니다.”

“…….”

“그의 지시를 거스르거나 소란을 피우면 강화 시술 후 진통제가 든 사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이능이 두려워 입을 다물고 비명을 참아야 했습니다.”

묵묵히 알려 주는 일화들이 하나하나 지날수록 옷소매 안쪽이 오톨도톨한 소름으로 들어찼다. 머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아마도 중령님의 이능 때문이라 생각합니다만, 다른 에스퍼들은 그에게 말을 제대로 붙이기도 어려웠습니다. 일반 연구자들보다도 더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내 기억에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굴었는데.”

“중령님 앞에서는, 그랬지요.”

“…….”

머릿속에서 또 한차례의 재조립이 일어났다. 그가 나타나면 실험실에 찾아들던 침묵이, 선망하는 에스퍼에 대한 경외 때문이 아니었다면, 오롯이 공포였다면. 그를 동경하고 신뢰했던 것이 나뿐이었다면.

당연히 가져야 했으나 때를 찾지 못한 의문들이 잔잔한 수면에 파문을 일으켰다. 기포가 엉망으로 헤쳐 올랐다. 나는.

“키비슈스는 내가 카바섬 출신이라고 했어. 버려진 아이를 주워 왔다고.”

사야야는 내 얼굴을 흘끗 살피고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덤덤한 목소리는 윤오가, 그리고 내가 내린 것과 같은 결론을 소리로 만들었다.

“저희는 그가 중령님을 납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이능은 대상에게 남기는 후유증이 긴 편이었고, 특히 기절을 여러 번 겪은 에스퍼는 기억에 혼선이 일어났습니다. 중령님은…….”

“…….”

“중령님이 입소 당시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는 것은 유명했으니까요.”

납치. 열세 살의 발현. 키비슈스의 이능. 기억 혼선.

“……키비슈스가 강제 개화 이능을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가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말입니까?”

문득 떨린 그녀의 눈동자와 차가운 손에 잠시간 눈이 갔으나, 무언가 고민하는 듯한 기색이 더욱 신경 쓰였다. 제어를 조금 더 강화하여 편하게 해 주자, 고개를 꾸벅 숙인 사야야가 멈추었던 말을 이었다.

“아주 처음부터 두 가지 이능을 다 가지고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중도에 생긴 이능을 감추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가이딩 요구치가 늘어난 만큼 보충해야 할 테니까요. ……그렇게 생각해 보면 그가 중령님께 집착한 것도 납득이 됩니다만.”

“집착…….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내가 키비슈스에 의해 이능력자가 되었다는 가설은 어때?”

“부정적입니다. 그가 만든 에스퍼들의 이능은 대개가 단순합니다. ‘그날’, 자연 발생한 에스퍼가 아닌 경우……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날’. 키비슈스가 연구동을, 군을 탈영한 날.

사야야와 맞잡은 내 왼쪽 손등의 주황빛 얼룩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10년 전, 키비슈스는 연구동에서 강제 각성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사망자가 두 자릿수가 되었을 무렵 제재를 받았지만 멈추지 않았고, 결국 원국은 그를 구속하기로 했다.

통고가 내려오고 약 세 시간. 출동한 헌병을 포함해 연구동 내 모든 인원이 쓰러졌고, 반수 이상이 그대로 사망했다.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중령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입소시킴과 동시에 그 역시 연구동을 지망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시간상으로는 약간의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그렇군.”

‘가이드’ 없이도 온전한 에스퍼. 그리고 제어를 써 가이드처럼 기능하는 ‘에스퍼’, 나.

키비슈스는 결코 납득하지 않았다. 그가 내게 원하는 것 역시 가이드의 역할과 다름없다는 걸.

그날, 온통 쓰러진 사람들 틈으로 길을 내고 키비슈스가 나를 끌어냈다. 상황 파악이 늦되었던 나는, 그가 이 이상 강제 개화를 쓰지 못하도록, 더 피해가 늘지 않도록, 저러다 키비슈스가 죽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이능을 제어하느라 머리가 핑핑 돌았다.

‘왜 그러는 거야, 키슈. 전부 네가 죽였어?’

‘더는 아프지 않게 해 줄게. 나랑 가자 선아.’

나는 알고 있었다. 그의 ‘이상’이 허황된 것이고, 도무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이 고통은 그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이 허접한 몸뚱어리는 결코 홀로 온전할 수 없다는 것을.

키비슈스를 믿는 것보다 기다림이 낫다. 그가 아무리 내게 부모와 같고 선생과 같아도, 내가 기다리고 고대해야 할 그리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보다 본능에 가까운 이해가 이끌려 가는 팔을 당기고 발치를 힘주어 디뎠다.

폭주에 가까운 키비슈스의 파동이 넘실거리는 연구동에서, 나는 두 번째 이능을 얻었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차에 새롭게 터져 버린 이능을 통제하기란 불가능했다. 왼팔의 피부가 순식간에 일그러지고 벌겋게 녹았다. 나를 붙든 그의 팔에서 내 팔로. 키비슈스의 오래된 화상 흉터가 옮겨졌다. 그 모든 과정을 고스란히 내려다본 키비슈스가 활짝 웃었다.

‘내 상처를 가져가 준 거야? 역시 선이는 대단해.’

‘……가지 마. 탈영한 에스퍼는 사살인 거 알잖아.’

‘우리 선이, 조금만 기다려. 곧 데리러 올게.’

압도적인 모순.

고작 세 시간 만에 연구동 전체를 초토화한 키비슈스는 그를 연행하기 위한 후발대가 도착하기 직전에야 돌아섰다. 끝까지 반항하는 내게 쓸쓸한 눈을 해 보였으나, 등진 뒷모습은 언제나처럼 유유자적했다.

놓인 그대로 고꾸라져 올려다본 그 등.

새로운 이능을 얻어 혼란스러운 파동 때문에, 온통 들끓는 열 때문에, 왼팔이 타들어 가는 통증과 갑작스레 피부가 일그러지던 기괴한 감각 때문에. 그 이상 막아서지도, 붙잡지도 못했던. 5년간 나를 키운 에스퍼가 떠난 날.

“저도 하나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응? 그래.”

10년 전, 전쟁이 가장 먼저 시작된 그곳의 상념을 재빨리 흩어 냈다. 이제 내게 키비슈스는 반군의 수장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중령님께서는, 만약…….”

“응.”

“새로운 이능을 얻게 되면, 상부에 보고하시겠습니까?”

아.

떨림을 감춘 사야야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어지고, 머릿속이 새로운 주제의 퍼즐을 맞췄다. 번뜩, 그녀가 루돌프를 두고 계속해서 전선 파견을 지원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가이딩을 추가 배급받기 위해서였나.

바란 적 없는 이능은 한없이 허상 같지만, 그 고통은 실재하는 짐이었다. 쉽게 감출 수도 없이 가이딩 요구치라는 무게가 늘어났고, 그러지 못하면 신체적 징후가 더한 고통을 야기했다.

아무 소용없을지언정 그 차가운 손을 꽉 쥐어 위로했다. 매번 할 말이 있어 보였던 그 눈빛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무거운 비밀. 그녀 역시 막다른 길에 서 있었구나. 연구동부터 누적된 기록에 매여 벗어날 수 없는 내게, 위험을 무릅쓰고 조언을 구할 만큼.

미리 알아주었어야 했나, 하는 주제넘은 생각도 들었다. 알아봤자 해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좁혀지려는 미간을 펴고 오히려 담담하게 당부했다.

“아니. 안 할 거야.”

“……만약, 그로 인해 구할 수 있는 다른 누군가를 외면해야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하지 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

“대위. 지금까지 나눈 얘기는 전부 없었던 걸로 하지.”

“예. ……감사합니다.”

찰칵. 대화가 사라진 접견 3실에 타이머가 마지막 남은 5분을 크게 알렸다.

창밖의 낮은 해가 빛과 온기를 길게 뿌려 넣었다. 몸이 차가운 두 에스퍼를 달래듯이, 그렇게.

사야야는 한결 가벼운 동작으로 접견실을 나섰다. 접견실 입구에서 다음 순번인 바차스에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평소라면 들릴 법한 요란한 욕설이 따라 나오지 않았다.

간략 보고를 작성하던 모바일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문간에 사야야와 그녀의 한쪽 어깨에 축 늘어진 기다란 덩치가 보였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반대쪽을 부축했다. 다 죽어 가는 꼴을 하고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놈이 장난칠 기력은 남는지 내 등에 팔을 감았다.

“아, 살겠다…….”

“퍽이나. 사야야, 가 봐.”

“……예. ……가 보겠습니다.”

척 보기에도 심각한 상태가 남 일 같지 않은 듯 사야야의 대답이 굼떴다. 그녀를 먼저 보내고 바차스의 긴 다리를 바닥에 질질 끌어 안쪽으로 옮겼다.

자리에 앉히려는 내 등과 옆구리로 다 죽어 가는 놈의 기분 나쁜 손놀림이 파고들었다. 곧장 정강이를 발로 차 의자 두 개를 가까이 붙인 자리에 쓰러트렸다.

“아프다고, 이 새끼야…….”

“주둥이랑 손모가지는 안 아픈가 보지?”

“아니. 딱 뒤질 것 같은데.”

머리카락을 적실만큼 땀이 배어난 놈의 이마를 손등으로 짚었다. 열이 펄펄 끓었다. 눈꺼풀을 들춰 보니 동공 반응도 현저히 느리다. 마약성 진통제 금단 현상인가.

이지경이니 어쩔 수 없이 얌전해진 놈을 짧게 살피다가 모바일을 꺼내 직통 번호를 눌렀다.

“나야.”

- 데리다입니다.

“바차스를 의무대로 이송해야 할 것 같아. 바로 차 보내 줘.”

- 본관 인력 지원도 필요하십니까?

“내가 가면 돼. 도착 1분 전에 알림만.”

- 예. 알겠습니다.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닦아 내고 짙은 남색의 정복 상의 버튼과 셔츠 목 단추를 끌렀다.

“……자기야, 살살.”

“입 다물어.”

기껏 제어로 숨을 틔워 놓았더니 별 시답지 않은 농담에 기력을 쓰고 앉았다. 상태가 엉망이라 키득거릴 때마다 바차스의 가슴팍이 픽픽 꺼졌다. 제정신이 아닌 건 원래도 그렇지만.

데리다의 다음 메시지는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들어왔다. 확인하고 즉시 바차스의 팔을 목에 둘렀다. 접견실까지는 대체 어떻게 온 건지, 절절 끓는 몸이 축 늘어졌다.

제대로 서지 못하는 놈을 부축해서 서둘러 접견실을 나섰다. 신장 차이 때문에 발이 끌리고 계단에서는 구두가 퉁퉁 부딪혔으나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도착한 현관에 의무 차량이 때마침 멈춰 섰다.

의무사관이 내려놓은 간이 침상에 바차스를 눕히고 응급차에 따라 올랐다. 타고 있던 상사가 나를 보고 몸을 움츠렸으나 무시했다. 일반 장교가 이능 장교를 어려워하는 건 드물지 않은 일이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그 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시커멓게 코팅된 차창 밖의 풍경을 보면.

“의무대로 이송한다고 전했을 텐데.”

“……예. 그런데, 관리부에서 에스퍼 관리동으로 이송해야 한다고…….”

“관리부?”

“오는 길에 전달받았습니다.”

“내가 있으니 괜찮다. 의무대로 이송하도록.”

의무관이 어쩔 줄을 모르니 운전석에 앉은 병사도 계속해서 룸 미러를 흘끗거렸다.

가뜩이나 이능을 쓰느라 예민해진 감각에 그 모든 것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솟구치는 짜증을 누르고 낮은 목소리를 또박또박 내어 명령했다.

“상사.”

“예! 상사 라이너스!”

“바차스 대령을 즉시 의무대로 이송한다.”

“…….”

“복명복창.”

“예! 대령님을 즉시 의무대로 이송하겠습니다!”

차가 크게 선회했다. 에스퍼 관리동은 멀지만 의무대는 멀지 않았다.

지나는 길을 보고 소요 시간을 가늠한 다음 바차스의 주머니를 뒤져 그의 모바일을 꺼냈다. 보급품과 똑같이 생겼어도 놈이라면 무언가 해 두었을 테지.

가슴팍에서 열심히 진동하기 시작한 내 모바일은 무시하고, 바차스의 화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노크하듯 톡톡 두들기자 예상대로 화면 가득 유치한 이모티콘이 떠올랐다.

>[*^ㅇ^* 자기야, 그렇게 보면 부끄러운데.]

“닥치고, 필요한 걸 말해.”

>[나 수액 좀.]

“상사. 수액을.”

“예. 알겠습니다.”

상의 소매를 적당히 찢어 벗겨 내는 걸 도왔다. 이미 군데군데 혈관이 터져 얼룩덜룩한 팔뚝에 성한 곳이 없다. 혈관이 터지지 않은 멀쩡한 자리를 찾다, 결국 가슴팍을 헤쳐 쇄골 아래에 바늘을 찔러 넣었다.

>[아야 X . X]

이 미친놈. 핑크색 도트 폰트가 깜빡거리며 화면 위로 이리저리 이동했다. 어이없는 웃음이 샜다.

5분 정도 달려 의무대 응급실 앞에서 차가 멈췄다. 의무관들이 바퀴 달린 침상째 바차스를 실어 나르고, 수면 부족을 낯에 써 놓은 에스퍼 군의관도 곧 나타났다.

두 종류의 진통제가 바차스의 가슴팍에 달렸다. 같이 달아 놓은 심박계와 파동계가 안정 상태를 띄우는 걸 확인한 후 이능 제어도 풀었다. 놈은 완전히 기절한 듯, 달리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찢어진 상의와 모바일을 데스크에 맡기려다가, 톡톡, 다시 바차스의 모바일을 두들겼다. 대답하듯이 잠김이 스륵 풀리고 메시지 전송 화면이 떴다.

한 손으로 자판을 꾹꾹 눌러 수신인이 정해진 메시지를 전송했다. 보내기 무섭게 답장이 도착했다.

<[뒤지지 마라.]

>[넹 ^ㅇ^]

아직은. 아직은 좀 더 살아.

내 이런 바람과 달리 살 사람은 살고, 갈 사람은 가지만, 나약한 나는 언제나 그들이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었으면 했다. 조금 더 버티기를,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조금 더, 조금만 더.

그 때, 바차스의 모바일이 16화음의 단조로운 멜로디로 익숙한 곡을 연주했다. 화면에는 노래 가사가 떠올라 춤추듯 흔들렸다.

>[My Sun, shines over my way.

You mean more than a word.

You took me to live,

you told me to leave.]

(내 태양, 나의 길을 비추는.

너를 말로 다 할 수 없는데.

나를 살게 하더니,

내게 떠나라 했지.)

오래된 데라주바의 노래. 에스퍼라면 모를 리가 없는.

나 역시 다음 가사를 줄줄 욀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화면을 꺼 버렸다. 그 다음 가사는 내 몫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전히 노래하는 모바일과 옷가지를 던지다시피 데스크에 놓고 의무대를 나섰다.

뒤통수를 잡아끄는 16화음의 장난감 같은 노랫소리에 저도 모르게 가사를 붙여 내면서. 더는 들리지 않게 되고도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Please, sun. Love you ever, my heart.

You took more than you know.

You are one and only, dear.

There’s no one like you, dear.

(내 태양. 영영 사랑할 내 심장.

네가 아는 것보다 나는 훨씬 더 빠져 있어.

유일한 그대. 너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Much pain that I drank, the waits that I paid, but still I am here.

Please, sun. Don’t take this brights from me.

Let it shine. Cause you let me know.

(그 같은 고통에도, 기다림에도, 여전히 난 여기에.

내 태양. 이 빛을 내게서 가져가지 마.

빛나게 둬. 네가 알게 했으니.)

I can pay much if you want.

If it hurts I can endure all.

Come, please come back.

Like nothing happened at all.

(더 기다려야 한다면 그렇게 할게.

아프더라도 다 견딜게.

부디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Like nothing happened at all…….”

이능을 많이 쓴 탓에 머리가 저렸고 귓가는 벌레 울음을 닮은 이명이 그득 차 찰랑거렸다. 그 사이를 헤엄칠 줄 모르는 물고기처럼 노래 가사가 텀벙거렸다.

‘Sun’이 들어갈 자리에 대신 ‘선’을 넣은 노래를 불러 저를 놀리는 게 처음도 아닌데. 내 이능이 가이딩이 아닌 걸 알아도, 그 ‘가짜 적막’에 취해서는 내가 그들에게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게 바차스뿐만도 아닌데. 다들 착각이 하고프니까.

그렇지만 언제고 그들이 다다를 기다림의 끝은 내 몫이 아니었다. 나 역시 누군가를 기다렸고, 떠올렸다. 대상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몰랐을 때도, 찾아낸 지금에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윤오가 보고 싶었다.

* * *

초인종을 누르고 짧은 시간 동안 기다린 다음, 손잡이를 내렸다. 현관은 잠금이 걸려 있지 않았다.

내 입장에서는 그가 문단속을 철저히 했으면 했지만, 윤오는 일일이 문을 열어 주러 나오는 것이 번거롭다며 문을 열어 두겠다고 했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 오그려 떠는 것보다는 나은데. ……그래도 그가 좀 더 안전에 신경 쓰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가능하면 종일 붙어서 지키고 싶을 만큼.

키비슈스가 아직은 내 가이드의 존재를 모르겠지만, 그가 중앙에 들어왔다면 준준의 말대로 나를 찾을 가능성이 있어 한층 걱정스러웠다.

윤오를 꽁꽁 싸매 나만 아는 곳에 숨겨 두고 싶은 욕심과 윤오가 싫어할 것이라는 생각이 매 순간을 다퉜다. 밤중에도 속이 갑갑해 잠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일. 지역 순찰 강화를 당부한다든가, 사설탐정을 들여 그의 외출에 따라붙게 한다든가 하는 방법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거실에 발을 들였다. 습관처럼 차례로 집 안을 살피는 귀에 수상한 기계음이 들린 것도 그때였다.

녹음기.

기척에 돌아보는 윤오에게, 입술 앞에 손가락을 가로질러 세워 보였다. 그리고 소리 나지 않는 걸음으로 빠르게 다가가 그의 곁, 책장의 시계 옆에서 녹음기를 집어냈다. 테이프가 들어가는 구식의 기계였다.

통신이 되는 장치는 아니므로 바로 버튼을 눌러 전원을 껐다. 한 번 더 위험을 살핀 다음 윤오의 책상 끄트머리에 내려놓았다.

“녹음기입니다.”

“…….”

까만 플라스틱으로 덮인 손바닥만 한 기계를 내려다보는 윤오의 미간에 구김이 갔다. 벌렁벌렁 따라 가슴이 뛰었다. 윤오가 일부러 설치한 것인데 내가 눈치 없이 집어낸 건가? 그렇지만, 이런 기기로는 소파 쪽에서 내는 음성이 제대로 잡히지 않을 것인데…….

“미안합니다. 좀 전에 인다비가……. 후, 인다비가 왔다 갔습니다.”

“…….”

“그 녀석이 두고 간 것 같군요.”

그의 입술 모양이 소리 없이 욕설을 그리고, 나는 꼴깍 침을 넘겼다. 멀뚱멀뚱 서 있다가 뒤늦은 인사 후에 이제는 내 자리가 된 낙엽색 소파로 몸을 옮겼다. 근처에 있던 사이드 테이블도 그와 손을 마주 잡을 자리에 옮겼다.

“너. 녹음기 뭐야.”

뜨끔. 등이 튀어 올랐다. 통화 중인 걸 알아도, 내게 하는 말이 아닌 걸 알아도, 분노로 이글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나를 놀라게 했다. 저절로 잘못을 돌이키도록 학습된 머리가 멍청하게 행동을 되짚었다. 내 잘못이, 나를 향한 화가 아닌데도.

쭈뼛 일어난 등줄기를 가다듬고 괜히 앉은 자세를 바르게 세웠다.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는 윤오를 멋대로 빤히 살폈다.

곧게 뻗은 콧대가 유려한 옆선을 그렸다. 이마로 다시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칼과 그 머리칼처럼 검은 눈썹 사이, 흰 미간. 깊게 잡힌 세로줄에 왜인지 혀가 녹녹하게 젖었다.

“됐으니까. 끊어.”

수화기 너머 인다비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방정맞게 웅웅거린다.

“올라오지 말……, 하, 씨발.”

꼴깍. 바라보던 입술에서 이번에는 소리로, 상스러운 욕설이 뱉어졌다. 그 정도의 욕이야 달고 사는 군인들이 수두룩한데, 윤오의 입술에서 나오는 건 그 감흥이 달랐다.

마치 섹스할 때, 그가 나로 인해 느낄 때, 입술과 숨으로만 읊조리던 그 욕설 같았다. 다시금 등줄기가 쭈뼛거렸다.

빈 재떨이 옆에 그의 전화기가 신경질적으로 던져지고, 한 손으로 얼굴을 덮은 윤오가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끼익-, 의자 기울어지는 소리가 날 동안,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겨우 그를 핥던 눈을 내리고 얌전한 척 고개를 숙였다. 음험한 생각을 억누르느라 진작 테이블 위에 올라간 손이 애매하게 주먹 쥐어졌다. 눈치를 보면 그럴 때가 아닌데, 나는 눈치 없이 당장이라도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인다비가 올라올 겁니다.”

“네.”

“금방 보낼 테니까.”

끄덕끄덕. 싫지는 않지만 반갑지도 않은 인물. 윤오와 가까운, 위험하지는 않은. 적당히 조심해서 대해야 할 사람.

그렇게 언질을 준 윤오는 머그를 들고 주방으로 가 커피를 다시 채웠다.

청색 머그를 짙은 갈색의 액체가 무겁게 채우고 이내 사이드 테이블 한쪽에 묵직하게 놓였다. 다음으로 바퀴 달린 의자가 소파 가까이 굴러왔다.

이제 그 자리에 윤오가 앉으면, 마침내 내게 손바닥을 내밀 것이다. 나를 볼 것이다.

고대하던 그 순간, 바깥 복도를 울리는 뜀박질 소리에 손바닥이 움찔 떨었다. 막 그가 내 앞에 앉을 즈음에는 삑삑삑, 현관문 잠금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인다비입니다! 죄송합니다!”

나의 행복한 시간에 예고대로 침입자가 들었다.

“어휴, 진짜 진짜, 지인짜 죄송합니다! 아니, 작가님이 인터뷰는 하셨다면서 노트고 뭐고 아무것도 안 하셔가지고, 제가 도움이 되어 보려고 주제넘게 나서 버렸습니다. 아니, 보통 인터뷰는 녹음을 하니까, 아이 그게 아니고,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금 머리를 조아린 인다비가 숨이 차지도 않은지 빠른 말을 이었다.

“아우, 안 그래도 괜찮나, 아닌가 하면서 밑에서 계속 서성거리고 있었거든요. 작가님 연락받고 꼭 사죄를 드려야겠다! 싶어 가지고 올라와서 또 이렇게 뵙는데, 불쾌하게 해 드린 것 같아 제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만…….”

할 말이 없는 것 치고는 무척 시끄러운데.

괜찮다는 뜻으로 대강 고개를 끄덕였으나, 인다비는 기어이 소파 옆까지 와 꾸벅꾸벅 허리를 숙였다. 받아 주지 않으면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다.

요란한 사과가 피곤한 건 윤오도 마찬가지인지, 그의 손가락이 미간을 쓸고 지그시 눈꺼풀을 눌렀다. 같은 자리를 나도 만져 보고 싶었다.

“이거를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될지, 말로 될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제가 요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우리 작가님 일을 도와주시는 건데,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고.”

 흘끔흘끔 반성이 가득한 눈이 순서대로 나와 윤오를 돌아보다 의아하게 늘어졌다.

“……당연히 작업에만 이용할 거지만, 그래두 미리 주의 주신 일인데 드릴 말씀도 없고……. 그런데, 저기, 두 분, ……왜 손을 잡고 계신지……?”

아.

윤오의 당황한 시선이 테이블 위 맞잡은 손으로 내려갔다.

그는 인다비의 존재를 잠시 잊은 모양으로, 미간을 문지른 손을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로 내밀었다. 물론, 내 손은 알고도 그 속을 파고들었고.

“……제가 몸이 차가워서 부탁드렸습니다. 체온 조절에 도움이 되어서요.”

“예에에? 아유 그런 이유셨구나! 그러면 저 인다비도 도움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게 무엇이든 하지 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가, 따갑게 내 뺨을 쬐이는 윤오의 시선에 풀이 죽었다. 전전긍긍 기껏 준 손을 앗아 갈까 걱정하는 사이에, 인다비는 덜그럭덜그럭 식탁 의자를 가져다가 소파 옆에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대뜸 내 남은 손을 붙들었다.

“아이구, 뼈 밖에 없으셔라. 손이 정말 정말 차가우시군요! 이러면 아침에 막 저리고 그러지 않으세요? 이 인다비는 태양인이라 열이 많습니다. 태양인이 뭐냐면, 그 사상 의학 들어 보셨지요? 제가…….”

인다비는 정말이지 끊이지 않게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것까지는 가만 두었으나, 열기로 가득한 그의 두 손이 내 왼손을 주무르다 손등의 상처에 주목할 때는 불쾌함에 어깨가 좁아졌다.

“어유, 다치셨구나. 아프셨겠다. 하여간 군인들이 연합국 안전을 위해 그렇게 바쁘시죠. 요즘이야 조금 나아졌다고 해도, 10년 전에는 진짜 세상이 망하는 줄 알았어요. 그나마 중앙에 산다고 쉘터에 빨리 들어가서 망정이지. 우리 작가님도…….”

팔꿈치를 진작 물린 채로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말을 참아 냈다. 호들갑과 오지랖이 대부분이었으나, 쏟아지는 말 중에 쓸모 있는 정보도 있었다. 윤오가 십년 전 전쟁 때 중앙에 있었다거나, 그가 원국 아카데미의 옛 건축 대학을 다녔다거나 하는 이야기들.

“너. 가.”

“에이, 우리 작가님 또 쌀쌀맞게 그러신다. 말씀 주신 주의 사항은 이제 꼭꼭 지키고 다시는 주제넘은 일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인다비가 티 나게 입을 합 다물자 반가운 적막이 거실에 쿵 떨어졌다. 나는 조금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고, 윤오도 짜증을 가다듬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인다비는 그 침묵이 가려운 사람처럼 한참을 들썩이다 다시 입을 열고야 말았다.

“그런데 제가 팬이어가지고 그러는데, 혹시 ‘얼음여왕 데이’나 ‘괴물 준준’을 만나기도 하셨나요? ‘불꽃의 에스퍼’는 알고 계시는지? 아아, 제가 에스퍼들의 그 영웅담! 엄청 좋아하거든요!”

“인다비.”

“예에, 작가니임……?”

“가.”

스스럼없이 내 왼손을 주무르는 태도가 어이없고, 시종 호들갑 일색인 말투가 기막히고.

이미 무수히 잡혀 온 왼손인 데다 아픈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불편한 손과 손가락을 감아쥐고 주무르는데 좋을 리가 없다. 접견이면 당장에 쳐 냈을 손, 그것들보다 훨씬 약해 빠진 힘.

쉬이 떨쳐 내지 못하는 이유는 오로지 그가 윤오의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불쾌함을 참는 것도 윤오의 눈앞이기 때문이고, 그의 앞에서 내가 얌전한 행세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꾹꾹 누른 꺼림칙함과 함께 기분도 가라앉았다.

“아유, 작가님, 왜 또 화를 내고 그러세요. 우리도 손잡을까요? 손 하나씩 남는데, 다 잡으면 둥그렇고, 사이좋고, 어얼마나 좋게요~.”

“……인다비.”

“옙. 알겠습니다. 가겠습니다.”

“…….”

“그 저기, 아무쪼록 우리 작가님 잘 부탁드리구요! 오늘 저엉말 죄송했습니다!”

또다시 무릎을 반쯤 꿇어 굽신거린 인다비가 입으로는 엉엉, 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윤오가 재차 쫓아낼 때까지 허리를 꾸벅꾸벅 접어 인사를 하는데, 이제는 아무래도 좋으니 시간 끌지 말고 빨리 가기나 했으면 싶었다.

콰당, 현관의 철문이 닫히고 인다비의 보폭 좁은 발소리가 저벅저벅 멀어졌다.

끼익, 윤오가 의자에 기대는 소리. 그의 긴 한숨. 그리고 그 뒤의 적막. 공백은 곧 새의 지저귐과 근처 세대의 세탁기가 덜컹이며 돌아가는 소리, 커피포트가 다시 끓는 소리 등으로 가벼워졌다. 그리고 모든 순간 쉬지 않은 다리 여섯 개 달린 것들의 우는 소리가 돌연 고요해진 거실에 남았다.

“……녹음기는.”

“괜찮습니다. 윤오 씨가 하신 일이 아니니까요.”

“…….”

“녹음을 하고 싶으시다면.”

“됐습니다.”

눈꺼풀이 간질거렸다. 의미와 깊이를 알 수 없는 시선이 버거운 탓이다. 나는 오른손을 덥히는 윤오의 손가락을 흘끔흘끔 들여다보며, 언짢은 감촉이 남은 왼손을 무릎에 문질러 닦았다.

완전히 펴지지 않는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손가락이 엉망으로 뭉그러졌다.

“윤오 씨도 궁금하십니까?”

“뭘?”

“‘얼음 여왕 데이’, ‘괴물 준준’, ‘불꽃의 에스퍼’.”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요.”

그는 내키지 않는 듯 느리게 말을 뱉었지만, 나로서는 해 줄 수 있는 이야기가 생긴 셈이다. 살풋 입꼬리를 당기고, 테이블을 가볍게 톡, 쳤다.

“저번에 다른 가이드를 만나 보고 싶다 하셨던 일. 그게 준준과 그의 가이드입니다. 8월 중으로 약속을 잡았고요.”

“‘괴물 준준’?”

“네. 데이는 늘 전선에 있기 때문에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데이의 가이드는 항상 그녀와 동행합니다. 그리고 영주 사태에 사진이 찍힌 에스퍼 말씀이시면, ‘불꽃의 에스퍼’는 올해 임관한 신참입니다.”

“전부 아는 사이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지긋한 윤오의 시선을 받으며 미미하게 올라간 입매를 다잡아 내렸다.

내 얘기만으로 채우면 제일 좋겠지만 지원계 에스퍼들은 딱히 눈에 띄지도 않고 민간에 알려진 별칭도 없었다. 한 번도 그걸 바란 적 없는 내가 지금은 티끌만큼 아쉬웠다. 그런 부끄러운 별칭이라도 있었으면, 살면서 한 번쯤 이름을 들어 주지 않았을까 하고.

“이름을 부르는 사이입니까?”

“아……, 그건.”

빤한 시선을 앞에 두고 잠시 고민을 했다. 이것 역시 어디서부터 알려 주어야 할지, 기점이 꽤 오래된 일이기 때문에.

“제 이능과 특임부터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태양인 인다비가 도움이 된 건지, 아니면 하도 문질러 그런지, 왼손에 열이 올랐다. 그 김에 차가운 무릎을 쥐었다 놓고 입술도 한 번 축였다. 그가 나를 알도록 하려니 입이 말랐다.

“제 이능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타인의 상처를 가져오는 이능과 이능력자의 파동을 제어하는 능력입니다. 상처 치환과 이능 제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능이 두 가지입니까?”

“네. 처음부터……, 기억할 수 있는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 에스퍼의 이능 정도를 제어하는 능력이고, 상처 치환은 키비슈스의 강제 개화로 생겼습니다.”

“또 그자. 그가 실험했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탈영하던 날, 그의 이능이 폭주 직전까지 치솟았습니다. 연구동의 전원이 노출되었고, 저 역시 그때 2차 이능을 발현하게 되었습니다.”

안전한 중앙에 기거하는 시민들은 반란군에 대해 그저 거슬릴 뿐인 먼 얘기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윤오는 오랫동안 중앙에 거주했음에도 반란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적마다 인상을 썼다. 인다비가 언뜻 말했던 전쟁에 무너진 아카데미 때문일까.

귀동냥으로 몰래 들은 정보를 곱씹으며, 원국의 건축 아카데미가 있던 지역을 찾아볼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상처 치환. 그거 접촉이 필요한 이능 아닙니까?”

“……맞습니다.”

“…….”

“……키비슈스는 저에게 다소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고 탈영 당시 데려가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데려가려고 했다?”

비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인 윤오가 눈매를 좁혔다. 날카로운 시선이 내가 빼놓고 에둘러 넘어가려는 부분마다 짚어 드러냈다.

못난 과거를 알려 이보다 미움을 사기는 싫지만, 그렇다고 그가 묻는 말에 침묵과 거짓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그저 솔직해지는 것밖에, 내게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제 이능은…… 에스퍼의 이능력을 증폭시키거나 감쇠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부작용이 유발하는 통증을 느끼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그것도 들은 얘깁니까?”

“……예. 저 자신에게는 사용할 수 없는 터라.”

혀를 움직여 갑갑한 목구멍을 뚫어 내고 다시 테이블을 두들겼다. 세 번.

“키비슈스의 목표는 ‘가이드가 필요 없는 에스퍼’입니다. 제가 있으면 ‘가이드’가 아니지만 ‘가이드’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데려가려 했을 것으로 봅니다.”

건조한 사야야의 시각에 도움받아 재해석한 ‘그날’이 윤오의 앞에서 벌거벗었다. 어찌 보아도 키비슈스와 한데 묶이는 것을 피하기 위한 변명이지만.

“주당 최소 12시간씩은 제 이능을 사용한 ‘접견’을 하고 있습니다. 가이딩이 에스퍼의 파동을 안정시킨다면, 제 경우에는 파동의 진폭을 강제로 줄이는 것으로 연구되었습니다.”

“…….”

“이능력이 강할수록, 그리고 이능력의 ‘모순’, 즉 현실에 미치는 영향력이 클수록 반작용 역시 강해지는데, ……제 접견은 치명적인 반작용을 가진 에스퍼의 통증을 대폭 줄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주 대상은 가이드가 없는 중앙군 소속 에스퍼로…….”

“접견?”

“예. 인당 삼십 분에서 최대 두 시간까지. 상태와 상대에 따라 배정이 나오고, 제 부관이 순번을 관리합니다.”

유심히 듣는 윤오의 모습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나의 이야기로 그의 흥미를 이끌 수 있다는 것도, 그가 궁금해해 주는 것도 좋았다. 이 기분에 들떠 필요 이상으로 덧붙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을 이었다.

“……구태여 여기까지 말씀드린 이유는, 보통은 이능 장교 사이에서도 상관을 직급으로 호칭하고 존댓말을 쓰는 것이 원칙이나, 근무 특성상 제가 예외적인 경우임을 알려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조금 전 얘기한 ‘데이’는 이능 장교 최초 준장이라고 들은 적 있습니다. 그녀에게도 평대합니까?”

“그렇습니다. 준준 역시 준장이고요. 저는 계급에 관계없이 이능 장교 전원을…… 편하게 호칭합니다. 임관 전 발령 보류 상태의 근무 기간과 접견 초기의 불미스러운 사건 등으로 계급 치레에서 예외 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미스러운 사건이라면?”

“저를 가이드로…… 제 이능과 가이딩을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 문제였습니다.”

슬그머니 고개를 틀어 시선을 피했다. 자세한 내용은 얼버무렸지만 윤오라면 알아듣고도 남을 것이다.

이로 인해 에스퍼 전체를 더 싫어하게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 고통에 절고 비루먹은 몸뚱이가 잠시 눈이 멀어 그랬을지라도, 그 본능에 정신 나가 저지른 짓이 잘못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아주 잠깐이었습니다.”

한숨 같은 말에 윤오가 더욱 깊은 한숨으로 대답했다.

체감상으로는 해가 지고 다시 떠오를 만큼의 잠시가 지나고, 여전히 그의 한숨에 저려하는 가슴팍으로 주제가 바뀐 질문이 던져졌다.

“원래 가이드는 아무것도 못 느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일반인과 다른 점이 없습니다.”

“에스퍼만 차이점을 알고?”

“네.”

윤오의 오른손이 테이블 위에 올라와 조금도 줄지 않은 머그잔을 가운데로 밀었다. 비워진 자리에 놓인 그 손바닥을 한참 보고 있자니 ‘손’, 하고 그가 내 할 일을 알려 주었다. 옮겨 묻은 주홍으로 얼룩진 왼손이 주저하다 느리게 그의 손에 안겼다.

기다란 엄지가 피부 결이 다른 얼룩을 스치고, 그것은 내가 견뎌야 할 자극이 되어 가슴팍에서 이르게 열꽃을 피웠다. 여린 흥분을 삼키느라 속눈썹과 입술이 파르르 떨었다.

그는 손끝만으로도, 양손을 잡아 주는 것만으로도, 내가 오랜 기간 잃어버린 여름을 되찾아 주었다. 뺨이 홧홧하게 달아오르고 가만 앉은 채 물씬 풍기는 더위를 느꼈다.

“이렇게 하면 더 낫습니까?”

“……네…….”

“내게 할 말이 있다면 해 봐요.”

욕심을 가까스로 참고 누르던 내게는 더없이 달콤한 유혹이었다. 듣고자 하는 말이 정해진 듯한 어투였지만, 근래 손을 잡는 감질나는 접촉 가이딩만을 이어온 몸이 거기까지는 고려하지 못했다.

“가이딩을…… 부탁드립니다.”

윤오의 표정을 보면, 또 오답이었다.

뼈마디가 드러난 앙상한 손가락이 목부터 허리까지 느리게 셔츠 단추를 풀어 내렸다. 사이드 테이블을 옆으로 치운 윤오가 지근거리에서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떨리는 손은 가슴팍에 이르러 뛰쳐나올 것 같은 심장을 눌러 꾹 집어넣었다. 헐떡이는 숨이 어깨를 흔들어 휘청이게 했다.

“싫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보시기에, 나쁠 것이라…….”

“내가 보기에 나쁠 것이다?”

“흉이 많습니다.”

어찌저찌 배꼽까지 끌렀으나, 내 것과 남의 것으로 얼룩진 상체에는 상처가 사라질 날이 없었다. 그에게 보여 줄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럼에도 목석같이 서서 셔츠 앞섶을 그러쥐고 버티는 것도, 그 시야를 벗어나지도 못하는 것도 또한 윤오 때문이었다.

언제나처럼 바지와 속옷을 벗으며 서두르던 내게, 윤오는 모두 벗을 것을 요구했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고,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이. 할 수 있겠냐는 듯이.

당연히 할 수 있었다. 그의 말은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내겐 지켜야 하는 명령과 같다.

그러나 감히 수치스러웠다. 흉 많은 내 몸뚱이가 부끄러웠다. 그에게는 좋은 것만 주어야 하는데, 내밀 것이 이딴 것이고, 이따위 욕심이었다.

“이선 씨는 내 생각 모릅니다.”

“네?”

“짐작하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뭐가.”

“…….”

나는 또 무슨 잘못을 한 것일까. 가이딩을 빙자해 그와 더욱 닿기를 바란 내 음심이 그를 화나게 했나.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해서? 혹은 또 내 존재의 문제?

생각과 말과 존재로 지은 죄가 너무도 많았다. 어떤 것이든, 짓지 않은 죄라도 괜찮으니 그가 골라 바닥에 엎드려 속죄하라고 하면 빌 수 있었다.

다만 그의 기분을 알려 줬으면 했다. 내가 모르는 그의 생각을 말해 줬으면 했다. 멍청한 에스퍼라도 이해할 수 있게. 숨조차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싫으면 싫다고 해요. 바라는 게 있으면 말로 하고.”

내가 어떻게, 당신을 마다해.

어떻게 그 말을 해.

메마른 살가죽을 두른 야윈 어깨가 하나씩 흰 셔츠를 벗어났다. 흘러내린 옷가지가 툭, 소파로 떨어지고, 못나고 앙상한 데다 흉까지 많은 나신이 고스란히 공기 중에 드러났다. 노을이 노랗게 비춰 주어도 창백한 살갗이 버거운 시선 앞에 바들바들 떨었다.

“왜 떱니까?”

“…….”

“왜 울어요?”

그 말에 허겁지겁 들이켠 숨이 후두개를 쳐올렸다. 몸이 굽어지는 기침에 마른 뱃가죽이 들썩거렸다. 손바닥으로 터져 나오는 기침을 가렸지만, 손등을 적시는 물길은 눈에서 흐르는 것이라 숨겨지지 않았다.

왜 떱니까. 왜 울어요. 나도 알 수가 없다. 다만 짐작하기에, 두려워서인 것 같았다. 윤오가 무서워서.

“왜 내가 이렇게까지 하게 만들지?”

숙인 어깨를 뜨거운 손길이 내리눌렀다. 맥없이 무릎이 꿇리고 그의 발치를 두 손으로 짚었다. 바라던 대로의 자세인데, 등줄기를 허덕이며 가쁜 호흡을 고르는 동안 바닥에 점점이 물 얼룩이 졌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울음이 목구멍을 가로막았다.

허윽, 하아, 깊은 물에 잠겼다 나온 사람처럼 그의 앞에서 죄를 헐떡였다. 팔꿈치가 호흡에 겨워 피식피식 꺾였다.

“……손, 손을 묶, 어야.”

“누가 그러라고 했습니까?”

“…….”

그러지 않으면, 내가, 또 당신을 다치게 할지 모르는데.

“자학은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나.”

괴로웠다. 그의 냉랭한 말이 모조리 아팠고, 알 수 없는 그의 심경이 두려웠다. 못난 결점을 눈앞에 드러내고 더한 미움을 살까 봐 무서웠고, 내가 당신을 다치게 하고도 내 만족만을 쫓는 개새끼일까 봐, 그러고 다시는 당신을 보지 못하게 될까 봐. 그러면 내가 죽을까 봐.

죽고 싶지 않아. 무서워. 살고 싶어. 아프기 싫어. 사랑해. 안아 줘.

닳고 닳은 말이었다. 되새긴 마음은 이미 헤져 엉망이다. 그러나 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합니까?’

‘당신이 말하는 사랑이 뭡니까? 섹스?’

‘집착으로밖에 안 보여.’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마십시오.’

2년 전. 귀로 들어와 가슴팍에 박힌 못 같은 말들이 다시금 내 안을 굴렀다. 뜨끔뜨끔 냉정한 윤오의 목소리를 떠올릴 때마다 속이 아렸다.

너무 이르게 꺼내 놓은 고백. 그대로 고꾸라진 말.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윤오를 찾아 빌었던 2년 전, 어떤 잘못은 사죄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배웠다.

어떤 실수는 단번에 엇나가 무엇으로도 돌이킬 수 없고, 어떤 마음은 너무 이르게 전한 탓에 오히려 반감을 살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을 더는 전해서도, 강요하거나 보답을 바라서는 안 되는 것도.

윤오에게는 ‘사랑’이 아니라 끔찍한 ‘집착’일 뿐이다. 그런데 내가 멍청해서일까? 애초에 모자라게 만들어진 에스퍼라서일까? 몇 번을 되새겨도 내게는 이것이 사랑이고, 전부였다. 비참하게 기어서 한 조각이라도 얻는 것, 망쳐 놓은 그림에서 자투리라도 쓰이게 해 달라 비는 일.

“이대로 좋습니까?”

“그, 흐, 안, 안아 주…….”

“…….”

“아, 아프……, 흑…….”

기어코 팔목이 꺾어지고 몸이 기우뚱 쓰러졌다. 어느새 떨림이 전신을 장악해 패악을 부렸고, 기침하지 않고도 숨이 퍼들거렸다.

무서웠다. 그의 모든 말이 나를 떠나기 위해 꺼내는 말 같고 버리려 하는 말 같았다. 나만 그를 필요로 하는 이 삶이 괴로웠다. 겁이 났다.

가슴팍과 얼굴을 마구 긁다가 그의 발목을 더듬어 매달렸다. 바짓단에 척척한 얼굴을 비비고 한 번도 쉰 적 없는 울음을 내뱉었다. 버리지 말아 달라는 몸짓이 과연 집착이었다. 가관이다. 그래, 누가 이 못난 걸 사랑이라고 할까. 윤오가 옳다. 나는 틀렸다.

“일어나요.”

어깻죽지를 붙잡은 손이 양팔을 끌어올렸다. 그의 허벅지에 내 팔꿈치를 놓았다. 허리가 활처럼 휘어지고 잡히는 대로 그의 상의를 손가락 사이로 넣어 당겼다.

힘 빠진 무릎을 밀어 겨우 상체를 세웠다. 물기로 번들거리는 낯을 들어 도무지 모를 것을 애원했다. 뿌연 시야에는 윤오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선.”

“……흐윽…….”

“대답해.”

“……네…….”

눈앞이 커다란 손 하나에 덮여 어두워졌다. 주룩주룩 그 아래로 눈물은 잘만 흘렀다. 횡격막까지 떨어 가며 뱉던 울음을 다급하게 멈추려 하니 더욱 서러웠다. 흠뻑 젖은 속눈썹이 무거웠다.

그 손의 어둠 아래 눈 감으며, 모든 순간 쉬지 않았던 그리움을 토해 냈다. 당신이 있어도 그립고, 당신을 만나도 외로운 나는 어떡하면 좋을까.

“바라는 걸 말해.”

말하면. 나를 버리지 않을까? 함께 있어 줄까? 데이와 라이얀처럼? 주노와 준준처럼?

처음 그를 찾아낸 그날, 반항하는 당신의 팔을 부러뜨리고 끌어안았을 때의 그 충족감을 아직도 되새기는 나를. 좋아해 줄 수 있을까?

“네 자학에 내가 계속 어울려 줘야 하나?”

“아, 아니. 안, 아닙……니다.”

커다란 손이 치워지고 양쪽 눈꺼풀 위를 기다란 손끝이 꾹 눌러 지났다. 맺힌 물방울은 턱 끝에 맺혔다가 왜소한 목덜미를 지나고 야윈 가슴팍과 뱃가죽을 내달리는 새 말랐다.

희뿌연 시야가 안개를 헤치듯 개며 검고 매끄러운 그의 머리칼, 그리고 또렷하게 나를 응시하는 같은 색의 눈동자를 비춰 보였다.

“안, 안아 주, 세요.”

“그래.”

체수분을 죄 쏟아 낸 몸뚱이가 가볍게 딸려 올라가 그의 무릎 위에 앉혀졌다.

너른 어깨에 내 팔을 둘러 주었고, 2년 만에 품게 된 윤오의 향에 나는 그대로 고개를 처박았다. 그 목덜미에 못 가신 설움을 쏟아 냈다. 서러워서 서러운 눈물이었다. 외로워서 외로운 숨이었다.

흉이 잦아 우둘투둘한 맨등을 여름 같은 손길이 쓸어내렸다. 거친 파동을 잠재우듯이, 들썩이는 등을 진정시켰다. 그 품이 그렇게 더워서 숨이 가빴다. 흉한 몸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가져다 그와 내 사이의 틈을 없앴다.

이 순간 나는 시간이 멈추기를 바랐다. 섹스하지 않고도 윤오와 닿을 수 있는 이 순간의 영원을 바랐다. 습한 흐느낌밖에 쏟아 내지 못하는 입술 안쪽으로는 끊임없이 윤오의 이름을 부르고 사랑을 외웠다.

당신에게는 집착일 뿐인 내 사랑을, 뒤통수부터 허리까지 차가운 살갗을 덥히는 손길에 겨워하며 울었다.

하루도 떠난 적 없던 한기와 모가지가 동시에 풀썩 꺾어졌다.

괴롭고, 수치스럽고, 무서웠다. 그러나 아프지 않고, 외롭지 않은.

단잠이었다.

* * *

맨살을 스치는 천의 낯선 촉감.

먼저 깨어난 감각이 촉감과 소리와 향을 순서대로 잡아내고, 마지막으로 반짝 눈이 뜨였다.

처음 보는 천장. 침실. 윤오의 향. 그리고 타자 소리.

스르륵, 일으킨 상체에서 얇은 시트가 흘러내려 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군데군데 찢어지고 터진 흉이 들어찬 희멀건 맨몸. 보기와 다르게 상태는 산뜻했다. 깊은 잠을 잔 모양이다.

머리맡 창가에서는 어느새 달이 비추고 있었다. 밤을 새워 우는 벌레 소리가 자박하게 들려오고, 다른 날과 다르게 훈기가 손끝과 발끝까지 돌았다. 풀썩, 다시 자리에 누웠다.

달 기울기를 보며 시간을 계산하려 했는데, 사실은 윤오의 향이 가득한 이 장소가 감격스러워 시간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다.

윤오의 침대. 그가 나를 눕혀 주었나, 그의 자리에. 간질간질한 속과 광대가 해죽 솟았다. 반대로 눈은 다시 서럽게 일그러졌다. 이러한 행복이 내 것인 적 없어 생경한 까닭이다.

그의 목덜미에 마구 울음을 묻었던 기억이 꿈은 아니겠지. 내 두 팔로 그를 끌어안고, 그가 내 등을 도닥여 준 것도 망상은 아니겠지.

생각이 이어지면 덜컥, 겁이 났다. 타자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찾아 나서기 위해 몸을 일으키자, 침대 발치에 걸쳐진 내 옷들이 보였다.

입어야 하나? 입어도 되나? 스스로 정하는 법을 홀랑 까먹은 어린애처럼 셔츠 하나, 속옷 하나, 허리띠가 그대로 꿰인 바지 하나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윤오가 정해 주면 안 될까?

고민 끝에 상처투성이 상체는 가리기로 했다. 셔츠에 팔을 끼우고, 단추를 미처 잠그기도 전에 마음이 달아 침실을 나섰다. 자박, 발바닥이 바닥을 딛는 소리에 윤오의 등 너머에서 들리던 타자 소리가 멈추었다.

“일어났……습니까. 옷은 왜 그렇게 입었습니까?”

“입고 올까요?”

“……됐습니다. 부관에게 온 전화는 대신 받았습니다. 외박 처리하겠다고 하더군요.”

“네…….”

몽롱하게 늘어지는 대답처럼, 내 정신도 꿈속을 성큼 걸었다. 꿈과 같은 현실에 둥실둥실 세상이 중력을 잃었다. 또다시 그를 끌어안고 싶어 안달 내는 몸을 부여잡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일렁이는 발치를 단단히 디뎠다. 드물게 고통 없이 몽글거리는 몸속 파동에 표피가 바르르 떨었다.

“이쪽으로.”

마법 같은 목소리가 움찔거리는 무릎에서 제약을 풀어냈다. 이끌리듯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덧 윤오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 만큼 지척이었다. 차마 가능할 줄 몰랐던 거리.

“가이딩에 관해서 물어보죠.”

“네…….”

그의 손이 셔츠 앞섶을 오므린 내 손을 떼어 냈다. 가운데가 휑하니 벌어진 옷자락을 걷어 움찔대는 속 알맹이를 잠시 들여다본 뒤 질문했다.

“가이딩은 손을 잡는 걸로 충분합니까?”

“…….”

“이선?”

“네.”

그러나 곧 아랫입술을 지르물고 숙인 고개를 좌우로 느리게 저었다. 사실은 충분한 줄 알았다.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그러나 곁에 있는 것만으로, 손을 잡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더욱 내밀한 스킨십을 알게 될수록 염치도 없이 그것을 바랐고, 지금 역시 그를 끌어안고픈 마음이 턱 끝까지 치밀어 다시금 안아 달라는 부탁을, 애원을 하고 싶었다. 정말은 그의 마음까지 탐했다.

윤오의 긴 손가락이 멀건 살갗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분홍빛 상처를 쓸었다. 옆구리부터 올라오는 간질거림으로 배에 바짝 힘이 들어가고 가슴뼈 안쪽이 달아올랐다.

“얼마 되지 않은 상처 같은데.”

“두, 두 달 전입니다. 영주, 사태에……서…….”

“숨 똑바로 쉬어요.”

“영주, 사태에서 부상당한 에스퍼의, 상처입니다.”

꾸욱, 그 흉을 뒤덮은 손바닥의 열기와 찌푸려진 윤오의 미간이 내 숨을 더욱 가쁘게 했다.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예. 대부분은 장교 식당에서 먹습니다.”

“그럼 왜 이렇게 말랐지?”

드러난 갈비뼈를 드드득 쓸어 올리는 손가락에 동그란 어깨뼈가 안으로 말렸다.

흐윽, 흑, 마치 벌을 받는 듯한, 혹은 심사대에 오른 듯한 심정인데, 그것이 무척이나 달아 혼란스러웠다. 생경한 열기가 손끝부터 발끝까지, 마치 땀이 배어나올 것처럼 저리고 화끈거렸다. 윤오의 손이 스치고 닿은 곳곳이 그때마다 가장 더운 자리가 되어 아찔했다.

마른 까닭은 잘 먹지 않아서이고, 잘 먹지 않는 것은 잘 토하기 때문인데, 그것이 몹시 잘못한 일처럼 여겨졌다. 입술을 떼었다, 붙였다, 다시 뗀 다음에야 겨우 실토할 수 있었다. 장교 식당에서 챙겨 먹는 것은 점심뿐이고, 컨디션이 나쁠 때면 오심이 일어 그마저도 먹지 않는다고.

“…….”

“영양제 보급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꽈악, 그의 손아귀에 갈비뼈가 한 움큼 잡혔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손길이 불거진 뼈를 탓하고, 나는 아픔보다 끓어오르는 흥분을 갈무리하려 애써야 했다.

“연, 연구동에서는 에스퍼의 식사를 1일 1회로 정, 했었습니다. 익숙한 일이니 괜, 찮…… 흣…….”

“하루 한 끼? 연구동이면 미성년들 아닙니까.”

“……네. 과, 과식으로 에너지가 넘치면, 파동이 강해져 더욱, 고통스러울 거라고.”

“누가.”

“연구원들이…….”

“‘그자’?”

또다시 윤오의 말로 생각해 본 적 없는 연관성을 깨닫고 눈동자가 흔들렸다. 연구동 내 에스퍼 관리 지침은 항상 그를 거쳐서 내려왔으므로 따지자면 키비슈스의 지시가 맞았다. 그 자신이 에스퍼이기에 다른 연구원들은 그의 의견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에스퍼는 식사를 하기 전만큼 허기진 상태로 식사를 끝내야 한다’. 굳게 믿었던 그 지침이 이제 와 떠올리니 새삼 가혹하다. 그마저도 기꺼이 따른 것은 나뿐, 사야야를 포함해 단지 공포심에 따랐을 다른 에스퍼들을 떠올리면 더욱.

“이 상처는?”

갈비뼈를 세로로 가로지르는 상처가 다음으로 꾹 눌렸다.

“아우도바, 파견지에서 다친…… 에스퍼의 상처입니다.”

“……전부 다른 에스퍼의 상처입니까?”

“대부분, 은.”

“왜 낫지 않습니까?”

“겉면의 상처만, 남은 것입니다. 치명상일 경우에는 회복이, 빠르지만, 흉이 사라지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립니다.”

간간이 헐떡이는 숨을 꾹 다잡으며 덤덤히 대답했다. 윤오에게 보여지는 기쁨과 만져지는 흥분도, 그가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쾌감까지도 참아야 했다.

이유는 몰랐다. 단지 계속해서 만져지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야를 온통 나로 채운 이 순간이 감격이어서 그런 것도 같았고, 광택 나는 검은 머리칼을 가까이서 내려다보는 벅참 때문이기도 했다.

“그게 일입니까? 다치는 것?”

“네?”

“그게 당연하다고 봅니까?”

열기 오른 머리는 다만 손길이 달가워 무언가 언짢은 그의 말뜻을 알아내지 못했다.

“이능, 이능 말씀이시면, 제가 상처를…… 옮겨 올 때, 약 3할에서 7할 수준까지, 부상 정도가 경감, 되기 때문……에.”

“…….”

“효율, 이 좋습…….”

“엉망이군.”

긴 한숨이 뻣뻣한 뱃가죽까지 닿았다. 그 부분만 따로 도려낼 수 있을 것처럼 감각이 생생했다. 그의 팔이 어깨로 올라와 가까스로 걸쳐 있던 셔츠를 간단히 흘려 냈다.

아무렇게나 바닥에 떨어지는 셔츠를 내려다보는 사이에 마른 팔뚝에 서늘한 공기가 닿았다. 그리고 왼팔을 가로지르는 가장 오래 된 얼룩이, 긴 손가락에 감겼다.

“이렇게 잡고 있으면 더 빨리 낫는 겁니까?”

“……아닙니다. 부위, 접촉 부위가 직접적으로 상관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안의 상처 입은 살갗이 간질간질 온기에 반응했다. 슬쩍 오른손을 내려 힘이 들어간 성기를 가렸으나 무척이나 가까운 탓에 들킬 수밖에 없었다.

윤오는 오른 주먹이 어설프게 숨긴 상태를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부끄러움이 열기로 가슴팍과 목덜미에 옅게 번져 올랐다. 그를 탐하는 욕심은 이기적이기 이를 데가 없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했다. 다만 상대를 가렸다.

“그럼 그건 뭡니까.”

습한 숨이 연이어 터져 나오는데 기이하게 입술이 바짝 말랐다. 벌렁거리는 심장이 부풀어 폐를 압박하는 것 같았고, 그 탓에 호흡이 불규칙하게 떨렸다. 아니면 반대였다. 들이쉴 줄만 아는 폐가 팽팽하게 부풀어 심장을 압박한 것이다.

제대로 내뱉지 못한 호흡이 누적되어 핑-, 하고 현기증이 일었다. 순간 검어진 세상이 밝아 오고, 왼팔이 세게 쥐였다. 얼얼한 코가 단단한 어깨에 틀어박히고 나서야 크게 휘청인 것을 뒤늦게 알았다.

“똑바로 숨 쉬어요. 손을 잡는 것만으로는 가이딩 효과가 없는 겁니까?”

“하아…….”

“그래서 섹스해 달라고 한 겁니까?”

대답의 기로가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와중에도 윤오의 팔걸이를 짚은 오른팔과 무릎은 의지보다 더한 본능으로 펼쳐지지 않고 계속해서 그의 어깨에 코를 파묻었다.

처박힌 목덜미의 체향을 기갈난 듯 들이켰다. 산소 같은 생명력이 혈관을 새로 채우고, 그곳에 얼굴이며 울음을 비빈 것이 한 세월도 더 전처럼 그리웠다. 허락한다면 입술과 혀도 붙여 보고 싶었고, 이를 세워 물어 보고도 싶은 곳.

허기를 참는 일쯤이야 허다했으나 욕심은 이상하게도 참아지지가 않았다. 윤오를 참을 수가 없었다.

“‘모순’이 클수록, 이라고 했던가.”

이렇게 등을 당겨 안아 주니까, 그러니까 더욱 참을 수가 없지. 들썩이는 어깨를 쓸어 주니까, 그에게로 기대는 걸 허락하니까 내가 점점 욕심을 내지.

감히 윤오를 탓하는 코끝이 시큰거렸다.

“섹스가 꼭 필요합니까?”

내게 목숨 줄 같은 가이딩은 고작 섹스와 같이 두고 볼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바라는 것이라면 그 가이딩과 섹스가 꼭 같았다. 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이, 가장 깊숙이 그를 안는 일. 아마도 평생을 기다린 것.

어설피 ‘내 가이드’를 상상하며 꿈꾸었던 관계는 2년 전에 모조리 망쳐 버렸다. 영영 얻지 못할 마음을 대신해 그것을 닮은 욕정이라도 품어 준다는데 어떻게 내가 넘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내게 물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늘 윤오가 부족했고, 어떤 것이라도 달게 감수할 것이었다.

더한 기근도 홀로 견뎌 낸 시간이 무색하게, 나약한 긍정이 입 밖을 터져 나가려 했다. 에둘러 그렇다 대답해도 거짓은 아니었다. 그가 내 낡은 얼룩을 붙잡고 그러면 낫느냐 묻지만 않았어도.

“반드시 필요……한 정도는 아닙, 니다.”

“…….”

“……지만, 주세요. ……해 주세요. 하게, 해 주세요.”

중얼중얼 기어들어 가는 소리가 어물거리며 위태롭게 흘렀다. 휘청거리는 나를 당겨 품에 놓은 그의 한숨이 척추를 따라 달렸다.

흉 진 몸이 버티던 다리에서 힘을 풀어 버렸고, 주룩 미끄러진 몸은 익숙하게 그 앞에 쿵, 무릎을 꿇었다. 먼저 떨어진 셔츠의 단추가 종아리를 긁고 파고들었다.

아린 눈가와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며 언제나처럼 애원했다. 어느 때보다 더한 긴장이 꿇은 자리를 흔들리게 했다.

윤오가 지금까지와 달라서. 요즘처럼 대화를 많이 한 적도, 내가 그를 안게 허락한 것도 지난 2년간 없었던 일이라. 책에 필요하다지만 나에 대해서 궁금해해 준 것도, 내 몸을 보겠다 한 것도 처음이라.

불안했다. 여태까지와 다른 모든 태도에 설렘이 차오르고 불안이 치솟았다. 내가 그에게 쓸모 있다며 기뻐하다가도 쓸모가 다하는 순간을 상상하면 나락 같은 절망에 이르게도 떨어져 내렸다. 바라고 원하며 그의 주변을 맴도는 발치는 언제고 무너지는 진흙 탑이었다.

철저한 약자로서 애타게 청하는 것밖에 모르는 내가 무엇을 확신할까. 윤오가 답을 주지 않으면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머저리인데. 그가 떠나겠다 하면 내가 그를 잡을 수나 있을까. 감히, 내가.

멋대로 가이드 등록을 한 2년 전이 스치듯 떠올랐다. 당당하게 저지르고 나타난 내 행동에 분노하던 그. 건네받은 가이드 등록증과 수당 통지표를 찢어 버리던 모습은 언제고 다시 그날로 돌아간 것처럼 내 가슴을 찢어발겼다.

갈비뼈가 산산이 부서질 때처럼, 폐가 속부터 터질 때처럼, 내장이 옆구리로 흐르고 근육 세포가 멋대로 파열하고 피부가 헐어 벗겨질 때처럼 고통스러웠다.

기다림의 연속이었던 내 삶과 그것을 통째로 거부한, 나의 구원자.

존재로서 그의 흠결이 되는 나는, 나의 염치는, 수십 번, 수만 번을 되새겨 다짐해야 했다. 두 번 다시 그를 함부로 하지 않기로. 떠난다면, 보내 주기로.

매 순간을 그렇게 되새기지 않으면 떠나려는 그를 가두어 버릴지도 몰랐다. 내가 죽고 싶지 않아서 윤오를 다치게 할지도 몰랐다.

여전히 붙들린 왼팔이 당겨졌다. 믿을 수 없는 자신과 걷잡을 수 없는 좌절에 꺾어진 고개가 바들바들 윤오를 향해 들렸다. 떨리는 것이 고개인지, 눈이나 입술인지 모르게 시야가 혼란했다.

아무래도 전부 다였다. 이만큼 가까운데도 너무나 먼 그의 시선에, 빛과 어둠을 오가는 내 영혼이 분주했다.

“일어나요.”

딱딱한 목소리는 의도 없이 내 눈앞에 말갛게 물을 댔다. 눈물로 그득 찬 어항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한심한 꼴을 윤오는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뒤로 바퀴 달린 의자가 들들거리며 물러나 책상에 부딪혔다.

초라하고 헐벗은 몸이 한 발씩 바닥을 디디는 것을 다 기다리지 않고, 팔을 고쳐 쥔 손이 앞서 이끌었다.

거실은 곧 주방을 면한 복도가 되고 다시 침실이 되었다. 조금 전 잠에서 깨어난 곳. 백색의 시트가 호텔을 연상시키는 침대.

엉킨 걸음이 바르게 서기도 전에 기억하는 포근한 자리에 튕기듯 등이 닿았다. 뒤돈 윤오가 문간의 서랍을 뒤지는 거친 동작이 소리로 들리고 긴장, 떨림, 기대가 번갈아 꼴깍꼴깍 목젖을 울렸다.

진작부터 고인 눈물이 속눈썹에서 툭 떨어져 뺨을 타고 굴렀다. 굵은 물방울이 사라진 자리로 너른 등이 들어찼다.

돌아선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군이 보급하는 성교용 윤활 젤이었다. 비닐도 뜯기지 않은 조그만 통이 엉덩이 옆 시트로 던져질 때에 나는 떨었고, 윤오는 답답한 듯 티셔츠의 목 부리를 끌어내려 흔들었다. 온통 일그러진 미간과 입술이 그리는 욕설이 가슴 아프고, 가슴 뛰었다.

엉성하게 굽어진 두 무릎 사이로 다시 한숨이 떨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 나는 얼른 상체를 일으켜 흉한 아래를 가렸다. 떨어진 윤활 젤을 가져다 짧은 손톱 끝을 비닐 틈에 밀어 넣었다.

“제가, 제가 하겠습…….”

“가만있어요.”

세지 않아도 절대적인 힘이 털썩 내 몸을 넘겼다. 끄트머리만 갉작인 젤도 그의 손에 들어가 비닐이 마저 뜯겼다. 펼쳐진 커다란 손바닥 위로 울컥, 투명하고 끈끈한 액체가 쏟아졌다.

접힌 무릎 뒤를 파고든 손이 힘을 주자 동그랗게 허리가 말렸다. 그토록 감추려 노력한 아래와 회음부, 그리고 그를 받아들이던 입구가 드러났다.

밑도 끝도 없는 수치심과 더불어 터질 것 같은 음심이 차올랐다. 건드리지 않고도 힘이 들어간 성기가 아랫배를 툭툭 건드리고, 그 모든 것이 감춤 없이 그의 눈앞에 드러났다.

축축이 젖은 손가락이 드러난 자리를 향하고, 먼저 흐른 차가운 점액이 투두둑 가랑이 사이를 적셨다. 근육이 움츠러들고 뒤가 잡힌 무릎끼리 오므라져 맞붙었다. 그러나 살집이 모자란 허벅다리 사이가 여지없이 드러나 그의 손가락 끝을 마주했다.

헉, 탄성처럼 내뱉어진 호흡이 따로 보충되는 법 없이 그대로 한참을 붙들렸다. 오른손은 물론이고 불편한 왼쪽 손가락도 시트를 쥐어뜯을 것처럼 그러쥐었다. 바들바들 떠는 손등에 힘줄이 불거져 창백한 살갗이 마치 뼈가 드러난 것처럼 보였다.

“아흑, 아…….”

뒤늦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언제부터, 왜 그렇게 소리를 참아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윤오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는 애초에 내게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두개골 안에 든 것을 눈물에 섞어 쏟아 내기라도 한 것처럼 줄곧 어지럼증이 일었다. 배라도 탄 것 같았고 공중을 낙하하는 기분도 들었다.

마음이 한계에 달아 몸이 반응한 것이 첫 번째라면 올려다보이는 윤오 자체가, 그가 나를 만지는 것이, 그 손의 열기가 진득한 현기증을 유발했다.

조금도 눈을 돌리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다물린 입구를 둥글게 문지를 때는, 그리고 이내 손끝이 밀고 들어올 때는 뒷머리가 시트에 처박히고 턱이 치켜 들렸다.

눈이 질끈 감겼으며, 힘을 풀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손가락이 채 다 들어오지도 못하게 조여 물었다.

한 마디를 조금 넘겨 들어온 손가락이 좁은 곳을 빙글 돌았다. 치덕치덕 윤활 젤이 사타구니를 온통 적시고, 의식적으로 긴장을 풀어내는 입구를 얕게 드나드는 동작에 엉덩이가 움찔움찔 맞춰 튀었다.

하윽, 멎었던 숨을 탄성과 함께 들이켰다. 근육이 모양대로 드러난 복부가 움찔움찔 솟았다가 납작하게 꺼지기를 반복했다. 민감한 감각이 총동원되어 이 같은 상황에 전율했다.

윤오의 숨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곤두선 귓가에, 척척하게 젖은 손가락이 비부를 넓히는 소리가 외설적으로 감겼다. 손가락이 하나에서 두 개로 늘어나고, 그마저도 어려워하는 입구로 세 번째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턱없이 좁은 곳을 늘이고 벌리며, 마치 손가락이 성기라도 된 것처럼 드나들었다. 조금씩 깊이를 더하는 그 느낌은 스스로 준비하던 때와 차원이 달랐다.

절로 흔들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며 목을 꺾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화난 것처럼 잔뜩 일그러진 윤오의 미간에 덜컥 겁이 났다.

동시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뜨거운 감정으로 목과 가슴이 저몄다. 혀가 축축한 입 속을 빙글 돌았다.

허리가 흔들리고 마른 다리에 길쭉하게 들어찬 근육이 결대로 꿈틀거렸다. 등줄기가 죄여 어깨가 튀어 오르고, 팔꿈치가 쾌감에 겨워 퍼덕였다. 아쉽고, 턱없이 모자라고, 그래도 좋고. 다루기 힘든 갖가지 감정이 몸서리처럼 살갗을 타고 올랐다.

“왜 이렇게 좁지?”

“안, 안 풀고, 와서…….”

“매번 풀고 왔습니까?”

“……요즘은, 아닙니다.”

전에는 그랬다. 자주 만날 수 없으니까, 혹시나 윤오가 넣어 줄지 모른다는 기대로 욕실에서 혼자 손가락을 집어넣어 넓혔다. 그럼에도 받아 내기는 늘 벅찼지만, 적어도 피는 보여 주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 넣어도 괜찮, 읏.”

콱, 소리가 날 만큼 세게 틀어박힌 그의 손가락에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숨을 들이켰다. 이 생경한 상황이 마치 애무 같고 전희 같아서 흥분이 갈 곳 모르고 자꾸만 치솟았다.

허리가 떨려 흔들릴 때마다 아랫배에 젖은 성기 끝이 닿았고, 그의 손가락을 집어삼킨 입구가 탐욕스럽게 오물거렸다. 계속된 자극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던 주변 근육도 점차 말랑해졌다. 이윽고 간지러운 쾌감에 움찔움찔 곳곳을 떨었다.

“……씨발.”

뜨끔, 가슴이 따가웠던 게 먼저인지, 들린 하체가 단숨에 빠져나간 손가락에 휘청인 것이 먼저인지 알 수가 없다.

그의 손아귀에서 놓이자마자 허공을 허우적거리던 허벅지가 침대에 떨어지고, 무릎 아래는 침대 밑으로 흘러 발끝이 바닥을 디뎠다. 허리가 잔열에 굽어지고, 다리 사이가 오므라들어 사이에 버티고 선 그의 단단한 몸에 부딪혔다.

윤오는 목을 쓸다가 다시 티셔츠의 목부리가 늘어나게 당겨 흔들었다. 눈썹과 이마를 덮은 손이 그대로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짜증 섞인 동작이 가슴을 죄어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표정을 보는 것이 마치 처음인 것처럼 그 흰 낯에 드러나는 모든 감정을 핥고 싶었다.

착실히 달아오른 몸은 이 저린 감각을, 다음을 이어 가기 위해 뚝뚝 끊어지며 아래로,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분노를 닮은 검은 눈동자 아래, 다물어 힘이 들어간 턱과 늘어져 주름이 간 티셔츠. 한 번도 너머를 본 적 없는 가슴팍을 따라 내려간 시선이 불룩 솟아 있는 바지춤에서 멎었다.

벌어져 모자란 숨을 채우던 입가는 양 끝을 당겨 올리고, 눈은 가늘어져 그 끝에 또다시 일렁이는 물기를 맺었다. 곧 굴러떨어져 귓바퀴에 미지근한 물이 고였다.

마주친 싸늘한 윤오의 표정을 보면 웃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기뻤다. 윤오가 흥분했다. 눈앞에 나를 두고, 내 발가벗은 비루한 나체를 두고도.

두 다리가 윤오를 사이에 두고 쓸어 올리며 감았다. 당장 그의 것을 입에 담고 싶었고, 아래로 받고 싶었다. 그에게 인 욕정을 모조리 나로 풀어 줬으면 했다.

가슬가슬한 바지가 무릎과 허벅지 안쪽 살을 스치고 이윽고 종아리가 그의 허리를 감았다. 갈망하는 손길이 그를 향해 허공으로 뻗어졌다. 그러나,

탁.

손등이 미처 그의 아래에 다다르기도 전에 세차게 내쳐졌다.

얼얼한 손은 그대로 달달 떨며 주먹 쥐어져 내 가슴팍 한가운데를 꾹 눌렀다. 더운 숨이 울음 직전으로 탄식을 뱉고, 기쁨에 지어졌던 미소도 대번에 사라졌다. 아직 모자란 욕심만이 남아 그의 눈치를 살폈다. 실수했다. 지나쳤다. 오만했다.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다.

끼익, 침대 한쪽이 윤오의 무릎에 눌려 기울어지는 대로 내 골반이 따라 쏠렸다.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두 뺨에 오소소 소름을 불러일으키고, 버클 풀리는 소리가 심장을 누르는 손에 더욱 힘을 더했다.

그의 무게가 쏠릴 때마다 푹푹 패는 침구는 엉덩이 옆이었다가, 옆구리 근처였다가, 다음으로는 머리맡이었다. 윤오의 몸이 내 위로 드리웠다.

“흑, 읏…….”

뭉툭한 성기의 끄트머리가 부드럽게 풀어진 입구를 눌렀다. 무심코 조인 입구와 그의 허리를 감싼 허벅지에서 힘을 풀었다. 가만히, 주어지는 것을 기다리며 내게 어울리는 낮은 자세를 취했다.

한 뼘 너머의 시선이 무거워 짓눌리는 기분에도 그것을 피할 수가 없었고, 그게 그렇게 기꺼웠다. 그에게 짓눌리는 것, 그렇게 안기는 것.

머리가 저렸다. 끓어오르는 만족이 포만감을 닮았다. 앓는 신음이 가냘프게 새었다. 한 조각도 놓치지 않고 기억해야 할 이 순간은 아마도 행복이다.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은 행복이 아니면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의 성기가 길을 내어 깊은 안쪽으로 파고들어 오는 만큼 속은 덥고 충만했다. 불덩이가 차가운 몸을 지폈다. 뒤꿈치가 시트를 밀어 엉덩이를 치켜올리고, 더욱 깊어지는 삽입에 질끈 눈이 감겼다.

“이선.”

“흑, 흐으…… 네에…….”

“이게, 네가 바라는 건가?”

“네, 흣, 네…….”

느리게, 깊게, 더는 깊어질 수 없는 끝까지. 윤오는 주저하지 않고 내벽을 가로질렀다. 아찔한 쾌감이 처음과 끝에서 머리를 희게 적시고 다시 트인 눈앞에서 윤오를 발견했다.

혼란, 화, 환멸, 짜증, 욕망. 내게 검정은 뜨거운 색이었다. 윤오가 그랬으므로. 그의 분노도 욕정도 불길같이 뜨거웠다.

아랫배가 배꼽 아래까지 불룩 치솟았다. 흉터 너머 마른 뱃가죽이 내부를 들어 채운 커다란 것을 다 삼키지 못해 뚫고 나올 것처럼 요동쳤다. 근육이 저리고 허벅지 안쪽이 파득파득 당겨졌다.

치켜든 턱이 윤오의 턱과 스치고, 그에게서 파생된 숨이 내 아랫입술을 비껴 닿았다. 등줄기를 따라 오싹한 쾌감이 일었다. 정신과 육체가 오롯이 하나 되어 전율을 느꼈다. 오한도, 두통도, 이명도, 오심도 없는 쾌감. 단지 윤오가 주는 쓰라린 고통, 그것이 전부인.

실재하는 감각, 관절을 흩트리는 쾌감, 억지로 벌어지는 아린 통증이 나에게 그를 새겼다. 더욱 새겨 주었으면 했다. 나는 윤오를 내게 각인하고 싶었다.

그를 내 것으로 할 수 없다면 내가 그의 것이 되고 싶었다. 콱콱, 내벽을 치받을 때마다 아프고 달콤한 열락이 심장을 채찍질하고 허리 아래를 들띄웠다.

눈을 뜨면 자꾸만 윤오가 보인 탓이다. 그 어느 때보다 달고 아찔했다. 허리가 자꾸만 휘었고, 등판이 시트 위를 비비적대며 고인 쾌감을 흩트려도 계속해서 차올랐다.

신음을 삼키는 일이 연이어 한계에 다다랐다. 발끝이 바짝 곱아 흰 천을 밀어 내고, 그의 두 팔 사이에 갇힌 어깨가 마구 비틀렸다.

철썩이며 아래가 쳐올려지면 아윽, 하는 신음이 혀 위를 굴렀고, 눈 밑이 파들거리며 시야가 번쩍거렸다. 마른 입술 틈으로 물기 어린 호흡이 한숨 또는 애원처럼 윤오의 턱을 긁었다.

좁은 내벽 속에서 두껍고 뜨거운 성기는 깊고 얕은 곳을 번갈아 빠르게 지났다. 부드럽고 탄력 있는 속살이 휘감겨 붙은 채로 밀려났다.

휘젓고 자극하는, 어느 모로 기계적인 그의 몸짓에도 배 속이 감춤 없이 떨었다. 문 것을 조이고 떠나지 못하게 감쌌다. 문득, 깊은 곳을 쿡, 치받은 움직임이 멈추고, 하아, 긴 한숨이 얼굴로 쏟아졌다. 검은 창에 멀건 인영 하나가 뿌옇게 비쳤다.

“왜 또, 웁니까.”

코끝에 떨어지는 낮은 목소리. 다디단 숨.

당신을 기다릴 때는 울지 않았다. 나를 지키기 위한 딱딱한 껍데기는 당신을 만나고 깨어졌다. 부서지고 남은 나는 모든 일에 울었다. 새로 태어나 소통 방법이 울음 하나만 남은 것처럼 울었다. 매 순간 빌었다. 떠나지 말라고, 버리지 말라고, 살려 달라고.

눈물이 떠난 가슴이 메마르도록 울었다. 메마른 가슴에서도 울음은 났다.

내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면 이 마음은 다른 어떤 이름도 가질 수가 없다. 다만 당신을 원하는 이 일에도 이름이 필요하다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내 감정은 당신이 불러 주어야 했다. 윤오. 내 윤오.

두 팔을 뻗어 끌어안고 싶은 마음이 손등에 힘줄로 돋아났다. 또 한 번 내쳐질까 참고, 버티고, 그래도 좋은.

그렇게 눈물을 닦아 주니까. 결국은 내가 바라는 걸 다 해 주니까. 그러니까 내가 아직도 당신에게서 마음을 욕심내지.

* * *

“파견을 가시겠단 말씀입니까?”

“그래.”

“왜요?”

루돌프가 동그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물었다. 청명한 하늘을 담은 푸른 눈알이 저러다 흘러내릴 것 같았고, 부담조차 들지 않는 당당한 ‘왜요?’에는 뭐든 대답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중앙 붙박이라 긴급 호출이 아니면 따로 나갈 일이 없는 것도 맞고, 수당이 아쉬운 것도, 파견 시수 할당이 내려오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한가하지도 않다만…….

그래. 수송을 담당하는 루돌프니 충분히 궁금해할 수 있는 일이다. 물어볼 수도 있지. 그렇지만 지금은 그냥 가까운 지역으로 파견 보내 주면 안 될까.

“에스퍼 부족하잖아.”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요?”

빠끔. 허망하게 벌어진 입이 다시 텁 닫혔다. 루돌프는 믿을 만한 인물이지만, 이 경우엔 사정 쪽이 솔직하게 알릴만큼 대단하지 않았다.

접전지와 파견 실정을 궁금해하는 윤오에게 곧 파견 일정이 있다고 무심코 말해 버렸으니까, 그 말이 거짓이 아니게 하려면 정말로 파견을 가야 하니까. 그래서 내 몸을 전장으로 밀어 넣겠다는, 고작 그렇고 당연히 그래야 하는 까닭.

이 구차한 사정은 누구든 알아서 하등 좋을 게 없다. 윤오가 알아줄 것이 아니라면.

기실 내가 여태 겪어 온 전투조 생활과 파견 근무 기간만으로도 윤오에게 알려 줄 에피소드는 충분했다. 전체 연차에 비해서도 그랬고, 객관적으로도 참전을 포함한 현장 근무 6년을 짧다 하는 사람은 없다. 전장 얘기가 다 그렇듯 단 하루를 겪어도 말로 하자면 끝이 없고.

만약 윤오가 원하는 것이 전쟁의 참상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그 악몽을 되새겨도 좋았다.

그러나 죄 시일이 지난 낡은 정보인 것이 문제다. 전선은 날마다, 달마다 같지가 않은데, 언제까지 뒤처진 정보만 가져다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인터뷰라는 명목하에 자처해서 맡은 정보원 자리. 군 내부의 스파이라고 불려도 어쩔 수 없고, 딱히 미안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미리 허가를 구할 생각도 없었다. 괜한 번거로움을 더하고 윤오에게 방해가 될 뿐이니까.

봉급을 군에서 받는 주제에 불온한 생각이지만, 내 주관에서 이능 장교는 제대로 된 군인도 아니니 내 충성심 역시 갑종의 특근 수당만큼 저렴할밖에.

“키비슈스가 원국 중앙 방향에서 확인됐는데, 내 현장감이 예전 같지 않아서.”

에둘러 하는 소리. 그럴싸한 변명.

루돌프가 듣기에도 허름한 구실이라, 그가 네 번째로 다시 ‘왜요?’ 하고 물었다. 말없이 눈총을 주었더니 더 묻기를 포기하고 구시렁거리며 차트를 뒤진다. 언뜻 보이는 게 가까운 지역들이다.

“사야야는 어디로 가지? 같은 데로 보내 주면 좋고.”

“사야야는, 대위님은 조금 멀리 갑니다. 아우도바 2주예요.”

제 부인 이름이 나오자 툴툴거리던 입이 단숨에 들어가고 대번에 눈빛이 달라졌다. 보기 드물게 새파란 눈이 꺼낸 말을 책임지라는 듯, 뱉은 말을 물릴 생각 말라는 듯 초롱초롱 빛을 뿜었다. 나 역시도 가능하면 사야야와 함께 나가는 편이 편하지만, 2주라…….

2주는 길다. 파견 가이드들이 따라붙을 테니 몸이야 아무래도 괜찮고, 그보단 그사이에 윤오에게 내 쓸모가 다할까 노파심이 일었다. 그를 자주 만날 수 있는 요즘이 달고 기쁠수록 더욱, 그러다 보니 항상.

나는 그의 책이 느리게 쓰이기를, 아주 오래 걸리기를 바랐다. 정작 그렇게 되면 내가 다시 그를 방해하고, 그의 인생을 망치는 것 같은 기분에 시달릴 것이나, 그래도 그에게 내가 필요한 지금이 단 하루라도 길기를 바랐다. 끝도 없이 아쉬웠다.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루돌프는 귀와 꼬리가 쳐진 강아지 행세를 했다. 그가 사야야를 좋아하고, 구애하고, 마침내 결혼에 성공한 것은 중앙이 다 알았다.

펠리우군 출신의 루돌프가 파견 지원 간 사야야에게 한눈에 반한 것과 그녀를 따라 병과를 바꿔 가면서까지 중앙군으로 소속 이전을 한 것, 의무대 병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받아 줄 때까지 울며불며 백 번쯤 청혼한 것까지.

그 로맨스를 전부 곁에서 지켜보고 작게 꾸린 결혼식에도 초대받았던 나는, 저 동갑내기 부부가 서로를 위하는 걸 보고 있자면 자꾸 마음이 약해졌다. 아무래도 부러운가.

“아우도바로…… 넣어 드려요? 중령님이 가시면 뭐, 조금 단축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만.”

답지 않게 말꼬리를 흩트리며 얕은수를 쓴다. 우스워 조금 웃었더니 사야야의 강아지가 금세 ‘죄송합니다’ 하고 꼬리를 말았다. 그녀 때문이었다며 빤한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사정을 아는 나를 붙여 보내고 싶겠지.

“감의 문제라고 하시면 짧게 여러 현장을 다니는 걸로 충분하겠죠. 제가 실언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깍듯한 사과와 다르게 눈망울이 일렁일렁 그렇게 아쉬워할 수가 없었다. 아직 가타부타 말도 안 했는데.

“보내 줘, 아우도바 작전. 2주 정도야 괜찮지.”

“정말이십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바차스 대령님도 후발대로 같이 가시기는 합니다만.”

“바차스가? 아직 의무대에서 나오긴 이르지 않은가?”

“그게…….”

전자 기기에 영향을 주는 이능이 현대전에서 무척이나 쓸모 있고 또 강력한 만큼, 바차스가 이번에도 콕 집어 지명을 당한 모양이다. 몸이 그 지경이면 작전 난이도가 조금 올라도 차라리 다른 인원을 추가 배정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대령 이상급 장교는 최소 1인이 중앙에 남아 있어야 하는 규정 때문에 준준을 데려갈 수도 없었다. 유용한 인력들의 전멸을 막기 위한 규정이라지만, 어차피 데이는 늘 파견이니, 준준 아니면 바차스더러 교대로 파견을 가라는 뜻이다.

의무대로 이송 후, 바차스는 별 차도가 없었다. 여전히 식은땀을 전신에서 흘리고 근육이 멋대로 경련했으며, 심한 두통은 물론이고 지난주까지는 실제 소리와 이명을 구분해 내지도 못했다.

군 소속의 가이드들이 하루당 셋씩 배정되어 교대로 가이딩 지원을 했고, 에스퍼 관리동이었으면 어설펐을 의료 지원도 제대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놈은 애초에 누구와도 매칭률이 낮으니, 군 가이드의 간단한 접촉으로는 가이딩이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마약성 진통제를 칵테일처럼 섞어 주사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수준까지 다다랐다던가.

전자 및 통신 기기의 사랑을 받는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바차스의 이능. 다분히 개념적이고 강력한 그 모순은 버티는 나날이 이어질수록 영향 범위를 넓혔다. 고통이 가중되었고 부작용은 늘었다.

강한 에스퍼는 살아남기가 어렵고, 살아남은 에스퍼는 이능이 약한 아이러니. 어쩌면 균형.

강력한 모순만큼 위험물이 되는 것이 에스퍼라는 도구이면, 가진 효용이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순간 그 도구는 밑 빠진 독이 된다.

당연하지마는, 항상 모자란 가이드와 가이딩을 그런 곳에 쏟아 낭비할 수는 없다. 군의 효율과 합리는 그렇게 에스퍼 관리동을 만들었고 다음 수순으로 방치와 폐기 절차를 밟았다.

‘제대’와 ‘2계급 특진’은 우리에게 그런 의미였다.

어찌 되었든 군의 소모품인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대체가 어려운 이능 덕에 우대받을 뿐, 윤오를 만나지 못했다면, 윤오가 없다면 지금쯤 저렇게 방치되는 에스퍼는 나일 수도 있었다.

이른 특진을 거듭하며 내 쓸모를 증명한 것은 곧 군의 주목 대상이라는 뜻이고, 쓸모 있다는 말은 칭찬과 더불어 경계였다.

모순이 뚜렷한 이능일수록 넘나드는 파동이 매일을 갉아 먹었다. 아프든 괴롭든, 그 지독한 파동이 내 ‘쓸모’라면 마음대로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감사합니다.”

“무엇이?”

“아뇨,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중령님.”

루돌프의 맑은 눈동자가 언제나처럼 진심을 비췄다.

감사가 헤픈 부부에게서 만날 때마다 번갈아 같은 얘기를 들으며, 돌려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나는 씁쓸한 웃음만 내었다.

* * *

막사를 걷고 들어가 병상에 걸터앉으며 곧장 지퍼를 끌러 냈다. 오랜만의 전투복이 갑갑하다.

현장이 오랜만이라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었고, 상황 종료 후에 내게 드밀어진 일들이 숨 가빠서 그럴 수도 있었다.

한타의 달아오른 목덜미가 더 타지 않고 식을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는 곧장 바차스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형편없는 꼬락서니로 비실비실 웃고 있는 놈.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까지 간 놈은 입에 달고 사는 가벼운 욕지거리 하나 없이 야전 침상에 누웠다. 어울리지 않게 조용하고, 얌전하고, 여러 모로 멀쩡하지 않았다.

“아, My Sun. 살겠다아…….”

“그렇게 부르지 말고.”

모포를 끌어 나를 My Sun이라 부르는 주둥이까지 덮어 버렸다. 풀썩, 기침 같은 웃음으로 입자리가 튀어 올랐다.

긴장과 집중을 유지하느라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내게,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바차스는 시답잖은 눈웃음을 계속해서 날렸다.

제정신 아닌 놈이 웅얼웅얼 뭐라 말을 하기도 했는데, 평소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 음량에 귀 기울여 줄 만한 여력 따윈 없다. 무엇이 되었든 통증에 절어 나오는 헛소리라는 것에 꽤 높은 금액을 걸 수도 있었다.

“웃지 마. 멍청아.”

다시 피식, 모포가 솟아올랐다 꺼졌다.

지역은 초행이었지만 오랜 경험은 어디 가지 않고 몸에 남아 곧 전장의 기억을 되살려 냈다. 적응은 금방이었고 작전 역시 간단했다. 목표는 전지 방어 및 민간 지역 인근의 변이체 사살. 그리고 키비슈스의 행적 확인.

전력이 충분하니 성과 역시 수월하게 나왔다. 그 과정에서 나자빠진 두 명의 에스퍼 때문에 아직 일이 남은 것은 의무병들과 전장 지원 가이드들, 그리고 나 정도.

전쟁 발발로부터 10년. 그리고 공세가 잦아든 지 8년여.

안전지대의 민간인들이 감히 평화를 말할 만큼, 연합군의 우세는 굳건했다. 그럼에도 전투는 꾸준히, 곳곳에서 이어졌다. 누군가는 다쳤고, 대개는 군인들이고, 군인들의 사망은 민간인의 찰과상만큼도 조명되지 않았다. 과연 개다운 죽음.

“똑바로 정신 차려. 지원 가이드 곧 오니까 버티고.”

“Sun. 너가 계속 있어 주면 안 돼?”

가녀린 척 목소리까지 높여 웅얼거린 탓에, 싸늘하게 식은 내 몸이 철갑처럼 소름을 둘렀다. 절로 욕이 나가려는 것을 붙잡고, 5세 수준이 된 놈의 주둥이를 모포 위로 퍽, 때려 주는 데서 그쳤다.

“씨발. 존나 매정한 새끼야.”

“그래.”

“뒤지게 아프다.”

“뒤지지 마라.”

“응.”

이제 내 말버릇이 될 판이다.

끔뻑끔뻑 정신이 넘어 가는 놈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사야야의 천리안으로 발견한 반란군 부대와 변이체 집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반란군 부대의 교신을 순식간에 무력화한 놈의 이능이 제법 쓸모 있었다고 한 마디 정도는 해 주었다.

변이체 집단을 불사른 한타라는 신참 소위 얘기도 했고, 그 어린 에스퍼의 불길이 난무한 과잉 진압 과정을 일렀다. 수행 직후 살이 벌겋게 달아올라 드러누운 멍청한 모습을 야심이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정말 그냥 멍청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험담도 했다.

마지막은 이능 사용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놈을 임관시킨 연구소 및 훈련소에 대한 욕과 다수의 변이체를 만들어 낸 키비슈스의 욕을 했다.

기운이 모자란 바차스는 간간이 킬킬거리며 웃다가 짧게 대답했고, 그보다 자주 경련했다.

모포 위로 덜덜 떨리는 놈의 무릎을 내리누르는 내 손등에서, 전투복 소매 너머로 닳은 상처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키비슈스의 것을 앗아 온, 처연한 주홍이었다.

작전이 쉽게 끝났음에도 중앙으로의 귀환은 늦어졌다.

반란군의 행적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대대적으로 아우도바-수수데 국경의 수비를 강화해야 했다. 짐작보다도 키비슈스에 의한 변이체 수가 많아 지체하거나 미룰 수 없었다.

때문에 2주를 다 채워서 수수데 북부의 호수를 매일 시찰하고, 위협이 될 수 있는 변이체와 군집을 발견 족족 사살했다.

사살, 처분, 처리 같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다루는 영역, 그리고 통제 구역에 입장하는 일은 오롯이 에스퍼의 몫이다. 여태 나자빠진 놈 하나를 제외한 에스퍼 전원은 남은 기간 쉴 틈 없이 바빴다.

하등 쓸모없는 바차스 대령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계급의 내가, 가장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변이체를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움직이는 그것들을 상대할 때에 나는 언제고 살해와 처리의 경계에서 혼란스러웠다.

이능력자와 같은 맥락의 파동을 가진 ‘그것’들. 동물이나 곤충 따위의 외양일 때는 그나마 괜찮았으나, 육체가 변형되고 이지를 잃었어도 그 본신이 사람이었던 것들을 다룰 때에는 특히 더했다.

통틀어 ‘변이체’라고 부르지만, 그들은 ‘각성에 실패한 에스퍼’이고, ‘폭주한 에스퍼’나 다름없었다. 아직 윤오에게도 말해 주지 않은, 최고 등급 민간 유출 금기 사항.

우리는 단지 조금 더 운이 좋았을 뿐 아닐까.

사람과 변이체 사이의 그 어디쯤에 ‘우리’가 있다고 하면 과연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생각으로 답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에스퍼 관리동에서 다시 나오지 못한 군인들을 떠올리면 군부의 입장은 알 만하다.

최종적으로 3주 만에 마무리된 파견은 지난 6년의 파견 세월이 무색하게 길었다.

잠을 설치기 일쑤라 매번 이른 시간에 나서서 정찰을 돌았고, 밤늦게까지 통제 구역 내에서 파동을 생성하는 지점을 찾아 파괴했다.

파견 가이드의 가이딩 따위는 받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바차스가 우선 복귀할 때까지 제어를 써 가며 무리해야 했으니까.

윤오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미약한 가이딩. 파동을 진정시키는 데에는 세 차례, 각 세 시간이 넘는 동안 그들과 손을 붙잡고 있어야 했다. 그래 봤자 고작해야 두통이 잦아들었을 뿐이다.

내 윤오. 내 가이드.

보고 싶은 마음은 상대를 구체화 할 수 있게 된 다음부터 주체할 수 없이 커져 갔다. 그의 이름을 알게 되고부터 가슴팍에는 그 이름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자랐다.

잠들지 못하는 밤의 기다림은 온통 그리움으로 들어찼고, 도무지 참지 못한 통증과 서러움은 서운함과 후회라는 이름을 달았다.

* * *

달칵.

3주 만의 방문. 넉넉하게 준비한 통증과 부작용이 다급하게 윤오를 찾았다.

스스로 현관을 열어 그의 집에 들어갈 수 있다는 벅참, 그리고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는 그를 대신한 위기의식이 여느 때처럼 번잡하게 속을 메웠다.

열려 있는 잠금을 다시 설정하고 습관처럼 실내의 기척을 살폈다. 일상적인 소음 외에, 언제나 들리던 타자 소리가 없다.

작고 고른 숨소리.

발소리를 죽인 걸음이 거실에 들어섰다. 매캐한 담배 냄새가 에워싼 곳에서 등받이에 기대어 잠든 윤오가 보였다. 기다란 두 팔이 팔걸이에 걸쳐 늘어져 있었고, 그의 모습이 비치는 검은 모니터 화면은 전원 램프에 깜빡깜빡 불이 들어왔다.

가만 서서 그 모습을 보다가 한 발짝, 반 발짝 조심스레 가까이 갔다. 도둑처럼 살금살금 의자 등받이에 다다라 몸을 기울였다.

가라앉은 평온한 숨소리가 그에게서 들렸다. 입술 사이에는 필터만 남은 담배가 물려 있었고, 하얀 셔츠 위로 모양이 어그러진 담뱃재가 흩어져 있다.

심장이 뜨끔거리는 것은 또 무슨 감정 때문인지 몰랐다. 문을 열어 둔 채로 잠이 든 그를 탓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그 곤한 모습에 감격한 것인지, 혹은 훔쳐보는 이 기분 때문인지.

어쩔 줄을 모르고도 잠든 윤오를 바라보는 시간이 잘만 흘렀다. 그의 숨소리를 놓칠까 봐서 내 숨을 죽이고, 곤한 잠을 깨울까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굳어 섰다.

얼마나 그렇게 보았을까, 문득 윤오가 몸을 뒤척였다.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섰으나, 가벼운 잠버릇이었던 듯 윤오는 다시 잠잠해졌다. 그런데 그의 의자가 빙글 돌아 책상이 아닌 거실을 향했다.

그게 무어라고 당황한 나는, 차마 소리 내지 못한 걸음으로 그 주변을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불편해 보이는 윤오를 어떻게든 해 주고 싶은데, 내가 감히 그래도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항상 그를 만지고 만져지고 싶은 것은 내 쪽이니까, 그러니까 그는 내가 함부로 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인데, 그런데 저렇게 잠이 들면 분명 깨었을 때 피로가 제대로 가시지 않을 것이고…….

불편하게 앉아 잠든 그를 편한 자리로 옮겨 주고 싶었고, 감히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러고 싶었다. 윤오를 만지고 싶고, 닿고 싶었다. 반면 바라보고만 싶기도 했다. 그의 얼굴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벌벌 떨리는 손이 윤오의 얼굴을 쓰다듬을 것처럼 가까이 다가갔다. 그 뺨 근처를 허우적거리다 입술에 물린 담배 필터 끄트머리를 잡았다. 필터를 씹는 그의 버릇을 볼 때마다 저지르고 싶었던 일이다.

느리게 빠져나오는 필터가 그의 다물린 입술 사이에 틈을 만들었다가 이내 그런 적 없었던 것처럼 모양 좋은 입매로 되돌려 놓았다. 조심스레 빼낸 하얀 필터 끝에는 잇자국이 남아 있었고, 그 끝이 조금 젖어 있었다. 목이 마르고 혀가 젖었다. 꼴깍, 침을 삼켰다.

담배는 좋아하지 않지만 그가 피우는 것과 같은 브랜드의 담배를 충동적으로 사다가 쟁여 놓은 것만도 숙소에 몇 보루던가. 한두 갑은 까서 그 필터를 입에 물어 보기도 했고, 불을 붙여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의미 없는 짓들과 다르게, 손바닥에 들어 온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이 꽁초가 탐스러웠다. 내 앞에서 잠든 윤오처럼.

스르륵 주저앉아 무릎을 꿇었다. 그에게 가이딩을 구걸할 때처럼 다리 사이를 차지하고 고개를 한껏 꺾었다.

꿈을 꾸는 걸까. 윤오는 때로 편안하고 긴 숨을 쉬었다. 그러면 내 가슴속이 자르르 떨고 알 수 없는 감격이 차올랐다. 그의 닫힌 눈꺼풀이나 손끝이 움직이면 온갖 걱정과 지레짐작이 나서서 일을 했다.

온통 윤오를 올려다보는 일로 해가 졌다.

황홀한 시간에는 끝이 있었다. 내게 허락된 두 시간은 내 바람처럼 멈춰 주질 않았다. 살면서 뜻대로 된 것이라곤 윤오를 만난일밖에 없는 나니까 이것도 어쩔 수 없는 걸까. 윤오를 만나게 해 주었으니 이 세상에 무엇이든 더 바라서는 안 되는 걸까.

사랑해. 사랑해.

깊이 잠든 사람을 앞에 두고, 차마 소리 내지 못하 입만 벙긋거리길 몇 차례. 허락받은 시간이 다 닳아 버렸다.

나는 손아귀에 굴리던 꽁초를 끝내 재떨이에 버리지 못하고 주머니에 몰래 넣었다. 고작 쓰레기인데, 쓰레기인데. 그렇게 되뇌어도 도둑질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게는 소중한 것이라 더욱 그랬다. 찬장 한편을 가득, 피우지도 않는 담배로 채울 때, 정말로 갖고 싶었던 것이 이것이어서.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다 무릎에서 들리는 뚝, 소리에 심장도 덩달아 부러질 것처럼 뛰었다. 다행히 윤오는 깨지 않았다. 한참 동안 눈치를 보고 기색을 살피다 이번에는 살짝 입을 열었다.

“……윤오 씨.”

가느다랗게, 하나 마나 한 작은 소리로. 깨우기는 했다는 변명을 만든 다음, 미약한 손길로 그의 어깨를 건드렸다.

약하고 여린, 그가 깨기를 바라는지,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지 모를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미동 없는 윤오를 보며 심장은 두근두근 과로를 계속했다.

더욱 조심스러운 손길이 윤오의 옆구리를 파고들고, 다른 손은 그의 팔을 잡았다. 천천히 들어 올려 내 어깨에 그의 무게를 실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처럼 속이 더워졌다.

키가 훌쩍 큰 그의 발이 바닥에 끌리지 않게 하려면 들쳐 메는 편이 낫겠지만, 나는 조금 더 포옹과 가까운 자세를 고수했다. 타당한 이유보다는 음험한 욕심으로.

그의 팔을 내 목덜미에 두르자, 기울어진 고개가 내 쪽으로 떨어지며 간지러운 머리칼이 얼굴에 닿았다. 힘이 빠진 몸이 내게 오롯이 무게를 실었다.

가까워진 가슴팍에서는 윤오의 향이 났다. 너무나도 기쁜 일이라 더워지다, 더워지다 가쁜 숨에 훌쩍, 코가 따가운 소리를 냈다.

어느새 어두워져 책상에 밝혀진 스탠드 불빛만이 밝은 거실을, 나는 느리게 느리게 가로질렀다. 윤오가 깨지 않기를 바라고, 윤오가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윤오는 깨지 않았고, 무사한 걸음이 그의 침실에 다다랐다. 누워 본 일이 있는 침구 앞에서는 한참을 그냥 서 있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었다.

무방비한 그를 내게서 떼어 내는 일. 그를 편안히 눕히고 얌전히 사라지는 일. 잠든 그의 귓가에 멋대로 고백을 벙긋거리고, 저지른 음흉한 짓거리에 죄책감을 집어먹는 일.

시트를 벗겨 내는 일이 한참이었고, 윤오를 눕히는 데는 더욱 오랜 시간이 쓰였다. 그의 옆구리를 멋대로 감은 팔이 의지와 다르게 고집스러웠다.

마침내 윤오의 고개가 불편하게 흔들렸을 때에야 내 못난 욕심과 죄를 깨닫고 그를 내려놓았다. 옷에 떨어진 담뱃재를 조심조심 털어 낸 다음 베개를 잘 받쳐 주었고, 가슴까지 시트를 끌어 덮어 주었다.

눈을 감은 윤오의 얼굴과 가지런한 숨. 훔쳐 낸 담배 필터가 물려 있던 입술. 시선이 말갛게 그 주위를 맴돌았다. 속이 더워 숨도 뜨거웠다. 왜인지 뺨이 간질거려 문지르니 물기가 묻어났다. 왜 울고 있을까, 나는.

더딘 걸음으로 뒤돌아 그를 등지는데, 문득 문가 구석의 바닥에 놓인 용지 박스가 눈에 들었다.

눈에 익은 중앙군 마크가 그려진 우편 봉투를 따라 그 아래 가지런히 출력된 이름까지 읽어 냈다.

[중앙군 에스퍼 관리부 – 윤오 님 귀하]

가이드에게 보내지는 에스퍼의 정기 검진 통지표.

뜯기지 않은 채 모서리가 예리한 우편이 그 박스 안에 가득, 들어 있었다. 언뜻 보아도 몇 년 치가. 마치 버려진 것처럼.

뜯어지지 않은.

뜯어보지도 않았……구나.

윤오를 마음껏 보고 멋대로 부축하며 올랐던 열기가 단숨에 식었다. 발치로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현실이 아찔하고, 받아들이기 버거웠다.

그에게 거부당하는 것은 언제든, 어떤 방식으로든, 버거웠다.

어떻게 나섰는지도 모르게 윤오가 사는 빌라를 벗어났다. 뒤돌아서기가 힘겨웠던 것이 무색하게, 단 한 걸음도 쉬지 않았다.

난데없는 세찬 바람에 젖었던 뺨이 차갑게 식었다. 재잘재잘 허공에서 잎새들 비비는 요란한 소리에 딱딱하게 굳어진 목을 겨우 들어 올리니, 때마침 떠밀린 이파리들이 허공에 우수수 떨어졌다.

이르게 물이 들어 노랗고 붉은 잎이 아직 초록이 남은 수관에서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아, 마침내.

첫 낙엽이었다.

- 여름 蟬鳴 (선명 : 매미 울음소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