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작전명 테소로) (12/12)

유니온 스테이션.

젊은 남자가 페도라를 깊이 눌러쓰고 30번 승강장의 개찰구 옆에 서 있었다. 그는 바닥을 향해 시선을 던진 채로 가만히 서 있다가, 그에게로 다가오는 구두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행에 들떠 커다란 가방이나 캐리어를 들고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하프 트렌치코트의 깃을 세운 청년이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실내에 어울리지 않게 짙은 색의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어서 마치 80년대 스파이 영화의 주인공 같은 모습이었다. 선글라스의 청년은 그의 바로 앞까지 접근하더니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부탁한 일은?”

“문제없었습니다. 식당 칸에서 만나시면 됩니다. 그분 사진은 좀 전에 메일로 보내 드렸으니 참고하시지요.”

페도라를 쓴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 어디서 들키지는 않았겠지?”

“그럴 리가요.”

“그래. 고마워. 그럼.”

남자가 페도라의 챙에 손을 살짝 얹어 인사를 대신하고 개찰구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선글라스의 청년은 그가 직원에게 표를 보여주고 승강장으로 내려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승강장 입구 위에서 전광판이 깜빡였다. 뉴욕행 특급 아셀라 열차가 7시에 정시 출발 예정이었다.

30번과 31번 승강장 사이 작은 카페, 2인석을 혼자 차지하고 앉아 있던 갈색 머리 청년이 얼굴 바로 앞까지 들어 올리고 있던 자동차 잡지를 슬그머니 내렸다. 푸른 눈동자가 총총 멀어져 가는 선글라스의 청년을 노려보았다.

워싱턴의 4대 실세 중 아일랜드 세력의 젊은 수장, ‘흑표범’ 패트릭 서턴은 잡지를 반으로 접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선글라스의 청년이 걸어간 방향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잡지를 가볍게 흔들었다. 카페 맞은편,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기둥에 기대어 서 있던 키 큰 남자가 그 신호에 바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금쯤 페도라의 사내는 뉴욕행 기차에 몸을 실었을 것이었다. 거리가 멀어 선글라스와 페도라 간의 대화를 듣지는 못했어도 최소한 한 명의 신병은 확보할 수 있으니 수확이 없지는 않았다. 하긴, 애초에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탁 트인 장소에서 용건을 큰 소리로 지껄일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었다.

패트릭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선글라스를 따라 걸으며 커피를 든 남자 쪽을 힐끗 보았다. 커피를 든 남자는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치 우연인 것처럼 선글라스의 청년이 가던 방향을 가로막으면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선글라스 청년이 그를 피해서 옆으로 몸을 틀려고 했다.

순식간에 청년 바로 뒤까지 접근한 패트릭이 그의 어깨를 턱 붙잡았다. 청년이 놀라서 돌아보는 순간 커피를 든 남자가 청년의 반대쪽으로 서면서 그의 팔을 잡아 팔짱을 꼈다. 선글라스의 청년이 숨이 탁 막히는 소리를 냈다.

“패트릭 서턴 씨…!”

“잠깐 같이 가실까요?”

패트릭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 아래에는 명백한 위협이 깔려 있었다. 청년이 선글라스 너머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서턴 씨, 지금 임무 수행중인 공무원을 방해하고 계신 건데요.”

“그런가요? 하워드는 당신이 오늘 비번이라던데요.”

청년이 당했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패트릭은 반대쪽에서 청년을 잡고 있는 벤튼에게 눈짓을 했다. 벤튼이 지극히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함께 나가실까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서턴 씨!”

“당신은 간단한 질문 몇 가지에만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그 이상은 저도 기대하지 않으니까요. 벤튼, 가지.”

패트릭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벤튼이 친절하게 청년을 끌고 밖으로 향했다. 선글라스의 청년을 어찌나 교묘하게 잡고 있는지 언뜻 봐서는 오래간만에 만난 친한 친구끼리 걷고 있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포로는 반항해 봤자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듯, 체념한 얼굴로 벤튼과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패트릭은 여유 있는 얼굴로 두 사람의 뒤를 따르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선글라스 청년이 입을 열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느라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테소로 작전의 실체를 분석하면서 그나마 겨우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던 관련자라고는 지금 벤튼과 함께 검거한 이 사람 하나뿐, 나머지는 아직 안개 속이었다. 심문을 하면 무슨 말이든 밸어 내겠지. 패트릭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벤튼과 포로를 따라서 유니온 스테이션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제퍼슨 앤 서턴 트레이더스의 수석 회계사 사무실, 패러것 웨스트.

“그러니까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된다고요, 서턴 씨.”

올랜도가 우는 소리로 말하며 패트릭을 올려다보았다. 제퍼슨 앤 서턴 트레이더스의 사무실에 들어온 지 벌써 한 시간은 족히 지나 있었다. 벤튼은 무시무시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고 패트릭은 창가에 서서 세상 아무 일에도 관심이 없다는 듯 온화한 얼굴로 블라인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둘 중에 더 무서운 사람을 꼽으라면 패트릭 쪽이었다. 올랜도는 할 수 있는 한 피해자 같은 목소리로 다시 한 번 호소해 보았다.

“이러고 계셔도 저한테서 뭐 나오는 거 없다고 말씀드리잖습니까? 이렇게 잡아 놓으시면 곤란합니다.”

“저는 분명, 유니온 스테이션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보내 드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패트릭이 상냥하기까지 한 투로 대답했다. 현 워싱턴 4대 세력의 수장 중 가장 참을성이 많고 끈질기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던가. 상대가 원하는 답을 내놓을 때까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같은 표정, 같은 말투로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보고서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존경하는 시드니 선배의 배우자이다 보니 마냥 대단한 사람이네, 하고 넘겼던 그 모습을 실제로 겪고 있자니 죽을 맛이었다. 올랜도는 어쩌다 자신이 이런 처지에 빠졌을까 절망스러워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대체 제가 뭘 말하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서턴 씨?”

“유니온 스테이션에서 뉴욕으로 출발하려던 스튜어트 라일리와 나누었던 대화에 대해서.”

짧게 끊어 말하더니 패트릭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편하게 소파에 앉아 커피와 과자까지 대접받고 있는데도 이렇게 무섭기는 또 처음이었다. 올랜도는 현장 요원으로 지원하면서 인질로 잡혔을 경우나 위협을 받을 경우 등에 대비한 시나리오 훈련을 지속적으로 받아왔지만 FBI에서 운영하는 그 어떤 프로그램보다도 지금 이 상황이 훨씬 더 곤란했다. 패트릭은 올랜도의 맞은편 자리로 와 앉더니 커피 잔을 들어 올리며 덧붙였다.

“물론, 테소로 작전의 전말에 대해 진술한다면 더 좋을 겁니다.”

“…테소로 작전이 뭡니까? 처음 듣는군요.”

올랜도가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되물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친 순간 이미 틀렸음을 깨달았다. 이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대는 어떻게 제압해야 하더라? 훈련 과정에서 최상위권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유망하다는 말은 여러 차례 들은 올랜도였으나, 실전 경험이 부족한 와중에 80년대 스파이 영화 마니아라는 특성이 겹쳐지는 바람에 007의 특수 장비가 필요하다는 엉뚱한 생각 말고는 타개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패트릭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더니 몸을 앞으로 숙였다.

“저를 속일 생각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바로 그 테소로 작전 때문에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아요. 자꾸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나오신다면 제 기분은 더 나빠질 겁니다.”

“…기분이 나쁘시다니 유감이네요. 전 아무 말씀도 드릴 수 없습니다.”

올랜도가 완강하게 대답했다. 작전의 존재 그 자체를 패트릭에게 들킨 것만 해도 이미 큰일, 거기에 더해 내용까지 유출되어 버린다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 것이 분명했다. 올랜도가 강경하게 나오자 패트릭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정말로 말씀해 주시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물론이죠. 테소로 작전은 관계자들만 알고 있어야 할 절대 기밀입니다. 서턴 씨는 작전명을 알아내신 것만으로도 이미 너무 많은 정보를 입수하신 겁니다.”

“그거 참… 재미있군요.”

패트릭이 무심하게 말하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올랜도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패트릭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가로운 투로 중얼거렸다.

“제가 알아서는 안 될 기밀 작전…. 그런데 어디의 기밀 작전인지, 주체가 누구인지가 심히 궁금합니다. 테소로가 FBI의 마약 단속국 차원에서 벌이고 있는 중요한 작전이라면 당신이 오늘 비번일 수 없지요. 당신은 이 작전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비번으로 위장해서 동료들마저도 속일 정도의 엄청난 작전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 추측도 틀렸군요.”

“어떻게 그렇게 단정하십니까?”

“당신이 한 시간 반 가까이 연락이 끊겼는데도 아무도 당신을 찾으러 오지 않으니까.”

딱 잘라 하는 말에 확신이 들어 있었다. 패트릭이 일어서서 사무실 안을 천천히 거닐기 시작했다. 올랜도는 양손을 무릎에 올려놓고서 그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패트릭이 느긋하게 말했다.

“스튜어트와의 접촉을 끝내고 나서, 그 접촉에 대한 보고조차 하지 못한 상황에서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렇다면 작전의 다른 관계자들이 당신에게 연락을 시도하겠지요. 그런데 당신의 휴대폰은 지금 잠잠하군요.”

벤튼에게 압수당한 휴대폰은 패트릭의 큰 책상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올랜도가 천천히 긴 숨을 내쉬었다. 패트릭이 그를 내려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좀 더 시간을 드릴까요?”

“아무리 기다리셔도 저는 아무 말씀도 못 드린다니까요!”

올랜도가 조바심이 나서 소리를 쳤다. 패트릭은 웃기만 했다. 그는 셔츠의 깃을 매만지더니 책상으로 다가가서 벨을 눌렀다. 서턴의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패트릭이 정장 재킷을 들어 팔에 걸치며 올랜도를 가리켰다.

“커피나 과자가 더 필요하시다고 말씀하시거든 얼마든지 가져다 드려. 나는 딜버트를 보러 가야겠어. 벤튼, 내가 오기 전에라도 혹시 뭔가 할 말이 있다고 하시거든 바로 연락해 줘.”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이따 뵈어요.”

두 사람이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패트릭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 사무실을 나갔다. 벤튼이 미안하다는 얼굴로 비서를 바라보았다.

“이런 거 시켜서 미안한데 나도 커피 한 잔 부탁할 수 있을까, 앨리슨. 자리를 비우면 안 될 거 같아서…”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시럽 안 넣으시죠?”

“응. 고마워.”

비서를 대하면서 친절하게 풀어져 있던 벤튼의 인상은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도로 굳어 버렸다. 그 상사에 그 부하 아니랄까 봐 이자도 패트릭 서턴의 스타일을 닮아가는 모양이었다. 올랜도는 슬쩍 협상을 시도해 보았다.

“이만 보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벤튼이 재빨리 바깥을 훔쳐보았다. 혹시나 패트릭이 되돌아오지 않는지 살피는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아주 낮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어차피 이제 역할도 끝났겠다, 여기서 쉬시는 셈 치시고 그냥 계십시오.”

“벤튼 씨!”

“저도 죽겠습니다. 어쩌다가 들켰는지….”

벤튼이 한탄조로 내뱉으며 다가와 올랜도의 맞은편에 앉았다. 올랜도가 조용히 물었다.

“서턴 씨는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O가 당신이라는 것밖에 모릅니다. 테소로 작전에 대해서도 사실 이름만 알 뿐이지 실제적인 내용이나 실행 방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봐도 좋습니다.”

“우리가 뭘 하려는 건지는 안 들킨 거 맞죠?”

“물론입니다.”

확인 차 던진 질문에 벤튼이 강경하게 대답했다. 올랜도가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직 승산은 있군요. 서턴 씨가 혹시라도 전말을 알아차릴 가능성은 있어 보입니까?”

브라이언 벤튼의 담담한 얼굴에 얼핏 미소가 걸렸다.

“제가 서턴 씨를 존경하긴 하지만… 이번만큼은 안 될 겁니다. 죄송하지만 완전히 헛짚고 계시고, 저도 딱히 정정해 드리지 않았으니까요.”

“다행이네요. 아까 유니온 스테이션에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그건 죄송했습니다. 하워드 월폴 씨가 대단하더군요.”

벤튼이 찬탄하는 투로 말했다. 올랜도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패트릭이 사무실 안에 있을 때와는 백팔십도 다른 태도로 과자를 집어 먹으면서 불평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워드 선배님에게서 제가 비번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하워드 선배가 갑자기 빠져나갈 이유도 없는데 뭐가 어떻게 된 건가 했다니까요.”

“적을 확실히 속이려면 아군을 먼저 속여야 한다더군요.”

“그럴 줄 알았어요. 저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한 건 하워드 선배 생각이었죠?”

“그렇습니다.”

“역시 선배답네요.”

올랜도가 커피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하워드 월폴, 코드 네임 웰링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작전을 실제로 수행하는 현장 요원에게도 전말을 모두 알려 주지 않으면서 마치 장기판 위의 말처럼 다루는 냉혈한. 그 방식에 원성이 드높았지만, 대개 결과적으로는 현명한 판단이었음이 증명되는지라 대놓고 불만을 터뜨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번에도 하워드는 올랜도가 패트릭에게 체포당하는 편이 전체적인 작전 진행에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에 올랜도에게 사전에 언질을 주지 않은 게 분명했다. 착실한 올랜도는 그 천하의 하워드 월폴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는 것만으로도 불만을 모두 접어 버렸다. 그는 피스타치오가 박힌 딱딱한 과자를 집으면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작전이 꼭 성공해야 할 텐데요.”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벤튼이 굳건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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