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2)

복도에서 지레 전전긍긍하고 있던 올랜도가 웰링턴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웰링턴은 굳은 얼굴로 그를 보더니 손을 내저었다.

“뭘 새삼스럽게 놀라고 그래? 차이나타운으로 가. 지금 당장. 웍 앤 롤에서 크레모사 패밀리와 제퍼슨 그룹 간에 회동이 있어. 시드니가 거기 있으니까 레스토랑 안으로 잠입해서 대기하고 있다가 시키는 대로 행동해.”

코드 네임 웰링턴, NARC의 브레인을 구성하는 행정 요원들 중에서 가장 유능한 축에 드는 동시에 가장 깐깐한 축에 드는 하워드 월폴 변호사를 오래 겪어 보지는 않았지만 올랜도는 본능적으로 그가 지금 제대로 화가 나 있음을 알아차렸다. 얄미운 소리만 골라서 하면서 사람의 속을 긁는 것도 기분 좋을 때에나 하는 짓이지, 저기압인 얼굴을 보자 차라리 바보라고 욕하고 때리는 시늉으로 위협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웰링턴은 깊은 한숨을 쉬다 말고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내 말 안 들려? 차이나타운으로 가라니까?”

“저, 시드니 선배님께는 어떻게 되신 겁니까?”

“그 바보?”

입가가 바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니 시드니가 웰링턴의 기분을 상하게 한 원인임에 틀림없었다. 웰링턴은 물어보기를 기다렸다는 듯 홱 돌아서서는 온갖 불평불만을 한데 버무려 속사포처럼 쏘아 대기 시작했다.

“현장 요원들은 왜 하나같이 그 모양이냐? 자네들 매뉴얼 안 읽어? 왜 안 읽어? 지난번에 자네는 고위험군 매뉴얼도 안 들춰 봤지, 시드니 이놈은 고위험군 매뉴얼 아니면 보지도 않지! 무슨 집단 지성 테스트 하니? 응? 상호 보완으로 읽을 거면 내용 공유를 하던가!”

“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졸지에 날벼락을 맞은 올랜도가 주눅이 들어 물었다. 웰링턴이 들고 있던 얇은 책자를 그에게로 내던졌다.

“자기 배우자가 뭐 하는 인간인지 여태 몰랐단다. 말이 돼?”

“네? 시드니 선배님의 부인 분 얘기는 갑자기 왜 하십니까?”

“시드니가 너한테는 자랑 안 했어?”

“따님 사진은 보여 주셨지만, 부인은….”

“딸? 시드니가 딸이 어디 있어?”

웰링턴이 의아한 얼굴로 묻는 바람에 올랜도는 정말로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그는 그대로 퍼덕퍼덕 날아갈 것처럼 크게 손짓을 해 대면서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 지갑 안에 넣어 다니는 그 사진 말입니다.”

“그건 어릴 때 사진이잖아.”

“어, 그래요?”

올랜도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어쩐지 사진이 좀 옛날 티가 나더라. 웰링턴은 웬일로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한 손으로 올랜도의 어깨를 붙잡아 출구를 향해 데리고 나가며 말했다.

“자네도 알아 두라고. 자네 같은 현장 요원들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몸들이야. 시드니처럼 실력이 출중하다면 모르겠지만 자네는 시드니가 아니니까 하는 말인데 운수 사나웠다가는 상대한테 붙들려서 뼈도 못 추릴 수도 있어. 그런데 자네가 적에게 잡혔는데 소지품에서 자네 가족의 사진이 나와 봐. 만약에 자네 가족들에게까지 위해를 가하려고 한다든가, 인질로 잡으려는 시도를 하려든가 하면 어떻게 수습할래?”

“아, 그래서 어릴 때 사진을 갖고 다니시는군요.”

“적어도 20년 이상은 된 사진으로 인상착의를 알아볼 수는 없으니까. 사진은 갖고 다니고 싶고, 정작 최근 사진을 갖고 다니는 건 상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고. 효과는 좋은가 봐. 자네도 사진 봤다면서 못 알아봤잖아.”

“누구를… 시드니 선배님의 부인 말입니까?”

“아, 이거 빙빙 도니까 미치겠네. 내가 지금까지 누구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

잘 나가다가 또 성질을 긁어 버렸다. 웰링턴이 올랜도를 문가로 끌고 가서 홱 밀쳤다. 올랜도가 넘어지지 않으려고 겅중겅중 뛰며 균형을 잡는 사이 그는 복도를 되돌아 걸어가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플로리다에서 봤으면서 못 알아봤잖아! 말을 하면 좀 한 번에 알아들어라!”

완전히 혼란에 빠졌음에도 차마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웰링턴은 어느 틈에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었고 지금 그를 불러 세웠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게 분명해 보였다. 플로리다에서 본 여자는 두 명, 두 사람 다 제퍼슨 그룹의 조직원이었었다. 시드니 선배의 아내가 제퍼슨 그룹 소속이라는 의미일까?

생각이 점점 더 꼬이기 시작했다. 웰링턴이 시드니가 차이나타운에서 뭘 하고 있는지 가르쳐주지 않은 상태에서 수수께끼만 더 던져 주고 가 버려서 머릿속이 배로 혼란스러웠다. 시드니가 직접 잡은 여자니까 로즈 아널드는 부인일 수가 없고, 그러면 제퍼슨 그룹의 젊은 보스를 따라왔던 그 엄청난 미인?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드니 선배라면 그런 미인 옆에 붙여 놓아도 아주 잘 어울리고, 어차피 제퍼슨 그룹은 불법 조직도 아니니까 문제의 소지도 없지 싶었다.

올랜도는 무전기를 켜고 자신의 차로 가서 시동을 걸었다. 요원이 된 이래로 처음 배정받은 단독 임무에 신이 나는 것과 동시에 식은땀도 났다. 그는 시드니가 조언해 준 대로 지갑 안에 넣어 두었던 어머니의 사진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기운이 나기보다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뇌리에서 실시간으로 재생이 되는 바람에 더 힘이 빠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는 출발했다.

차라리 예상이 빗나가기를 바랐는데. 패트릭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다 말고 쓴웃음을 지었다. 가장 안쪽, 칸막이로 절반 정도 가려진 자리에 돈 크레모사와 함께 앉아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조셉이었다. 그새를 못 참아 패트릭의 서류 가방을 억지로 자기가 들고 있던 스튜어트가 멈추어 서면서 속삭였다.

“다 설명할 시간은 없겠고, 내가 뭘 알아야 해?”

“일이 이렇게 꼬인 원인이 형한테도 없지는 않다는 거.”

“음.”

스튜어트가 전적으로 패트릭에게 맡기겠다는 시늉을 하며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굳이 키슬러 대신 끌고 온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다. 패트릭은 눈짓으로 스튜어트를 야단쳐서 싫다는 그를 앞장서게 했다. 스튜어트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곧 착실하게 척척 크레모사와 조셉이 앉은 테이블로 향했다.

크레모사가 그들을 발견하고 패트릭에게 목례를 했다.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던 조셉이 고개를 들었다가 스튜어트를 보고 삽시간에 얼음 조각상처럼 굳어 버렸다. 스튜어트가 쾌활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지으며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형님이라는 말에 크레모사가 흠칫 조셉을 돌아보았다. 조셉은 놀란 얼굴로 스튜어트를 올려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스튜어트는 넉살 좋게 웃으면서 패트릭의 의자를 먼저 끌어내 앉히고는 그에게 찰싹 달라붙어 앉았다. 패트릭이 스튜어트의 왼손을 잡아 손목시계가 보이도록 식탁 위에 척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시계만 보내 주셨더군요. 그래서 시계걸이도 함께 가져왔습니다, 돈 크레모사.”

“…아아, 귀하께서.”

“스튜어트 라일리입니다.”

크레모사는 간신히 자제력을 발휘한 얼굴로 제법 우아하게 스튜어트와 악수를 했다. 스튜어트가 빙긋 웃으면서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한 투로 물었다.

“제가 오래 붙잡아 둘 수 있는 타입이 아니라는 건 모르셨나봅니다?”

“아쉽게도, 그리 되었소.”

말과 함께 크레모사가 조셉을 추궁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패트릭이 한가로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제 형은 다른 사람에게 사실을 처음부터 전부 다 알려 주지는 않는 버릇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마 스튜어트 라일리 변호사가 저에게 몹시 중요한 인물이라는 점과 인상착의까지는 알려 주었는데 그러느라 이 친구가 전직 공군 파일럿 중에서도 최정예였다는 건 미처 말하지 못했나보군요.”

“몹시 인상적인 경력이오.”

크레모사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패트릭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종업원을 찾으면서 들으라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야 신뢰할 수 있는 비즈니스 파트너이려나.”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가볍게 내뱉는 소리에 조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패트릭은 그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그가 녹차와 이과두주를 주문하는 사이 조셉이 대뜸 스튜어트에게 물었다.

“그래서 제부, 속아 넘어간 기분이 어떤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모른 척 하지 마. 팻은 지금까지 제부에게 숨겨서는 안 될 걸 숨겨 왔어. 그동안 속고 살았던 기분이 어때?”

역공이군. 목 뒤가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테이블 아래에서 스튜어트의 손이 다정하게 패트릭의 손등을 토닥였다. 패트릭이 반사적으로 그를 돌아보자 스튜어트가 그의 등을 통통 두드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맥이 탁 풀리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한데 별로 그 이상 뭐라고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나쁜 짓이라고는 하나도 하고 있지 않은데도 가족에게 자기 직업에 대해서 백 퍼센트 솔직해질 수 없을 때에 얼마나 속이 상하고 미안한지는 저도 좀 알거든요.”

“안다고?”

조셉이 되물었고 패트릭도 흠칫해서 스튜어트를 곁눈질했다. 설마 아무리 팔불출이라고 해도 이런 자리에서 덜컥 내가 사실은 FBI의 마약 단속 현장 요원이요, 하고 나설 만큼 멍청하지는 않아야 할 텐데. 다행히 스튜어트의 다음 말에 크레모사도 조셉도 더 이상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기로 결정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원래 부부지간에는 서로의 일이라면 뭐든지 다 아는 거 아니겠습니까, 형님?”

“…사이가 좋은 부부로군. 축하하오, 서턴.”

패트릭이 테이블 아래로 방정 좀 그만 떨라는 의미에서 스튜어트의 발등을 꾹 밟았다. 종업원이 녹차가 담긴 주전자와 작은 술잔들을 가져왔다. 조그만 호리병에 술도 담겨서 나왔지만 누구 하나 먼저 손을 대지 않았다. 크레모사는 종업원이 테이블에서 충분히 멀어지고 나자 시칠리아 억양이 강한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합의를 보는 게 서로에게 이득이라는 것은 당신도 이해할 거요, 서턴. 여러 가지 일 때문에 당신이 나에 대해 불쾌하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그 모든 게 전적으로 비즈니스 때문이었지 내가 개인적으로 당신에게 유감을 가져서는 아니란 걸 알아주시오.”

“당신이 제게 아무런 개인적인 감정이 없을 거라는 건 동의하는 바입니다, 돈 크레모사. 다만 당신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을 것 같군요. 애초에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지부터 한번 대화를 나누어 볼까요.”

패트릭이 조셉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조셉은 패트릭의 시선을 그대로 되돌려 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튜어트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서 조셉의 잔에 이과두주를 따랐다. 패트릭이 도로 크레모사를 바라보자 크레모사가 양손을 펼쳐 보였다.

“서턴, 나는 당신에게 마약 비즈니스에 직접 동참하라고 권한 적이 없소. 우리가 비즈니스를 함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 상황이 온다면 당신이 워싱턴에서 행사하는 힘의 일부를 우리에게 빌려 달라고 청했었을 뿐인데 당신은 그 요청을 거절했소.”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조건부 승낙했었지요. 워싱턴 동부에서의 마약 거래를 자제해 주신다면 제가 가지고 있는 미약한 영향력이나마 저의 친구들을 위해 사용할 용의가 있다는 이전의 제안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크레모사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게 크레모사 패밀리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라는 건 어린애라도 아는 일일 거요, 서턴! 워싱턴 동부 지역, 특히 동남부 지역에서의 비즈니스를 포기하고 당신의 보호를 받아서 생기는 이득은 당신의 조력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지금의 사업을 강행했을 때에 생기는 손해를 벌충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오. 우리의 시장은 워싱턴 동부요. 당신은 제안을 했다고 말하지만 나는 최후통첩을 받았소이다.”

“그래서요? 그래서 제 형과 거래를 하셨습니까? 제퍼슨 그룹의 수장으로 만들어 줄 테니 그 대신 제퍼슨 그룹의 사법 커넥션을 이용해서 크레모사 패밀리의 마약 비즈니스에 보호를 제공하도록요? 그리고 지금 저더러 형에게 자리를 넘기라고 설득하기 위해 회담을 제의하신 겁니까?”

패트릭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크레모사는 점잖은 미소를 지었다.

“서턴, 원래 아서 서턴은 당신이 아니라 조셉을 제퍼슨 그룹의 차기 수장으로 생각했었소. 조셉이 프랑스에 있던 동안에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가 미국으로 돌아온 이상 당신이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공평치 못하오.”

“무슨 권리로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돈 크레모사.”

상냥한 말투와는 달리 차갑게 얼어붙은 눈빛에 크레모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가만히 마주 보았다. 패트릭은 팔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대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돈 크레모사, 당신이 뭐란 말입니까? 아일랜드인도 아닌 당신이 제퍼슨 그룹에 어떤 권리를 갖고 있기에 감히 리더 선정의 권리를 행사하려 한단 말입니까? 제퍼슨 그룹의 리더를 결정하는 데 있어 당신의 의견이 고려되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당신들 마피아들이 항상 말하듯이 이것은 코사 노스트라, 즉 우리의 일이란 말입니다. 당신이 무엇이기에 감히 제퍼슨 그룹의 방향과 리더십을 결정합니까?”

“나는 우정에서 우러난 제안을 할 따름이오. 워싱턴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오.”

“조셉 서턴을 제퍼슨 그룹의 수장으로 앉히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겠다, 단시간에 제 형님과 아주 아름다운 우정을 쌓으신 모양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닌 사람을 리더로 추대하려던 움직임은 이미 5년 전에 한 번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당시에 비록 세력을 잡지 못한 상태셨으나 모르시지 않을 겁니다. 그 후로 저 이외의 사람을 리더로 인정하려는 자는 제퍼슨 그룹 내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외압으로 인해 자리에서 물러서고 형님이 저를 대신하는 그 바로 다음날에 저는 아마 상복을 입고 장의사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 겁니다.”

조셉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크레모사는 무표정한 듯 패트릭을 저울질하는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퍼슨 그룹의 카포레짐들의 충성심에 대해서는 내가 확실히 과소평가했던 부분이 있었지. 서턴, 나는 당신이 자발적으로 자리에서 물러나 주기를 제안하는 거요. 그렇지 않다면 크레모사 패밀리는 조셉 서턴의 권리를 찾아 주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손을 쓸 수도 있소.”

“간과하고 넘어가신 게 있습니다, 돈 크레모사. 제가 크레모사 패밀리와의 전쟁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크레모사가 눈을 크게 떴다. 패트릭은 손을 뻗어 술잔의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술을 따르던 도중에 조금 흘렀는지 손가락 끝에 차가운 알코올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한량 같은 태도로 술잔만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지금까지 참 많은 일을 하느라 바쁘셨을 겁니다. 조셉을 포섭하고, 제 아랫사람들로 하여금 저를 배반하게 만들려고 공작을 하고, 제 아랫사람을 수틀리면 살해하도록 명령하고, 저의 배우자를 납치하고, 제 사무실 건너편에 저격수를 잠복시키고, 벤츠를 보내 저와 제 일행을 추격하게끔 하고. 그런데 그렇게 노력을 하셔서 지금까지 대체 뭘 얻으셨는지 궁금합니다.”

크레모사가 순간적으로 표정을 가다듬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저격수의 잠복이라는 말에 조셉이 깜짝 놀라서 크레모사를 돌아보았다. 형은 거기까지는 몰랐던 것일까? 패트릭은 일부러 그의 얼굴을 보지 않는 척 하면서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그렇게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저에게 흠집 하나 내지 못하셨으면서 설마 제가 당신을 두려워할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지금의 저는 크레모사 패밀리가 종이호랑이로 보일 지경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시도를 하고서도 어느 것 하나 성공하지 못한 걸 프로파치나 디피데 패밀리에서 알면 크레모사 패밀리의 위신이 말이 아니게 될 겁니다.”

“지금까지는 당신의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시오, 서턴.”

패트릭의 비아냥거림에 평정이 무너진 크레모사가 쏘아붙였다가 곧바로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다. 협상을 하는 자리에서 절대로 온화함을 잃지 않아야 할 패밀리의 대부가 그렇게 나오는 것으로 보아 크레모사도 지금까지의 여러 가지 시도들이 죄다 불발로 돌아간 데에 상당히 신경이 쓰이는 것이 틀림없었다. 패트릭은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크레모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요. 저는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평화를 바라고 왔지만 선택권이 없다면 두려울 것은 없습니다. 전쟁을 시작합시다, 돈 크레모사.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금 협박하는 거요?”

“그렇습니다.”

패트릭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했다. 크레모사가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설득하는 투로 말했다.

“당신은 전쟁을 원하지 않소, 서턴. 지금까지는 당신의 운이 좋았지만 우리와 전면전을 벌인다면 이미 합법화를 진행하느라 병사들을 농부로 탈바꿈시켜 버린 당신네들이 어떻게 버티겠단 말이오?”

“전쟁이 벌어지게 되거든 아마 우리가 더 큰 타격을 입을 겁니다. 아예 제퍼슨 그룹이라는 이름 자체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우린 필사적으로 덤빌 겁니다. 우리와 붙고 나면 당신들은 너덜너덜해져 있을 것이고 워싱턴 사법부와 경찰 기관은 당신들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 되어 있겠지요. 그때를 노려 프로파치 패밀리나 디피데 패밀리에서 치고 들어와 크레모사를 병합하는 건 일도 아닙니다. 그걸 원하십니까? 돈 크레모사, 연극은 그만두십시오. 당신도 전면전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크레모사는 할 말을 잃었는지 스튜어트가 채워 놓았던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따라서 한 잔 마셔 볼까 했지만 술이 내키지 않았다. 패트릭은 술잔을 밀어 버리면서 말을 이었다.

“허풍은 서로 그만둡시다, 돈 크레모사. 당신은 조셉을 제퍼슨 그룹의 수장으로 앉혀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사실 그건 꽤나 귀찮은 일임은 물론 다른 패밀리들의 지탄을 받기에도 딱 좋은 짓입니다. 저격이나 히트, 내부 분란 조장 같은 수단까지야 쓸 수 있겠지만 전쟁은 차원이 다르니까요. 그런데 형, 돈 크레모사가 형에게 내 자리를 빼앗아다 주기 위해서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약속을 했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셉이 움찔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패트릭은 그를 보며 혀를 찼다.

“거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더더욱 이 자리를 내 줄 수 없어.”

“무슨 소리야?”

조셉이 날카롭게 물었다. 크레모사가 그를 제지하며 눈짓으로 더 말하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패트릭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등에 판사며 검사를 줄줄이 업은 나조차도 다른 패밀리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면 당장에 워싱턴 사법부를 적으로 돌리게 되는데, 사법 커넥션이 갖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는 크레모사 패밀리가 퍽이나 전쟁을 하겠어.”

조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무 의자가 거칠게 바닥에 밀리면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음식점 안의 손님들 몇 명이 그들 쪽을 돌아보았다. 크레모사가 조용히 말했다.

“자리에 앉으십시오, 조셉 서턴.”

“저 애의 말에 변명해 보시오, 크레모사.”

크레모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셉이 크레모사를, 패트릭을, 스튜어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스튜어트가 난처한 듯 손짓으로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앉으시죠, 형님.”

“돈 크레모사, 당신은 이 자리에 나오면서 나와 한 번 더 협상을 해 볼 여지를 남기고 나왔을 겁니다. 당신의 기대에 부응해 드리겠습니다.”

패트릭이 조셉에게서 관심을 거두며 말했다. 스튜어트가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서서 조셉을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패트릭은 옆에서 낮은 소리로 입씨름을 벌이는 두 남자를 무시하고서 크레모사만을 보며 말했다.

“다시 한 번 제안을 하지요. 워싱턴 동부 지역에서 마약 거래를 자제해 주신다면 저는 제가 가진 힘으로 크레모사 패밀리를 도울 용의가 있습니다. 완전히 그만두라고 하지도 않았고 짐을 싸서 떠나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제해 달라고 한 것뿐입니다. 여기에 한마디만 덧붙이겠습니다. 당신이 저의 제안에 대해서 숙고할 것을 약속한다면 저는 크레모사 패밀리가 지난 며칠간 제퍼슨 그룹에 보였던 적대적인 행동을 모두 잊어버리도록 하겠습니다.”

“잊는다…?”

“없었던 일로 하죠. 기억이 잘 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제퍼슨 그룹이 폭력 사태에 말려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사람이라서 말입니다. 허나 명심하십시오. 다음에는 잊고 싶어도 저는 잊지 못할 겁니다.”

크레모사는 침묵을 지켰다. 패트릭이 부드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하나만 조건을 더 걸까요.”

마피아의 중간 보스, 카포레짐으로 살아온 기간이 길었던 너무 크레모사는 행동 대장의 역할은 완벽하게 수행할지언정 정치적인 거래를 하는 데에는 보기보다 어리석었다. 방금 패트릭이 한 잊어 주겠다는 말은 그에게 지극히 파격적인 제안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패트릭으로서는 실리를 따진 소리였다.

제퍼슨 그룹은 크레모사 패밀리와 전면전을 하면 불리하다. 반면 크레모사 패밀리는 제퍼슨 그룹과 전쟁을 하면 모든 비난을 스스로 뒤집어써야 한다. 그렇다고 사소한 히트 앤 런 식의 전술을 반복하자니 지금까지의 히트 시도 중에서 성공한 게 하나도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크레모사 패밀리 내부에서는 지금 비용은 비용대로 들여 놓고 실패로 돌아간 여러 번의 히트 때문에 불안이나 불만의 소리가 나오고 있을 수도 있었다.

반면 제퍼슨 그룹은 크레모사 패밀리의 공격을 연이어 격파하고 한창 사기가 올라가는 중이었다. 여기서 크레모사가 그만두면 그는 패트릭을 난공불락이라고 인정하는 꼴이 된다.

“말해 보시오.”

넘어오기 일보직전이었다. 사실 말로 할 필요도 없었다. 크레모사는 이미 패트릭이 무슨 요구를 할지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패트릭이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자 크레모사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형제간의 일은 뜻대로 처리하시오. 나는 생각할 시간을 준다면 당신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겠소.”

“크레모사!”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조셉이 스튜어트가 그의 의자 옆에 내려놓았던 패트릭의 서류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패트릭은 무심코 그쪽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집에서 나올 때에 혹시 몰라 챙겨 나온 스튜어트의 군용 권총 손잡이가 가방에서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분명히 아침에는 깊숙이 넣어 두었는데 아까 차에서 정신없이 돌고 흔들리느라 위쪽으로 올라와 버린 모양이었다.

조셉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총을 빼 들어 크레모사를, 그 다음에는 패트릭을 겨누었다. 총을 본 음식점 종업원이 비명을 지르며 쟁반을 떨어뜨렸다. 옆 테이블의 사람들이 놀라서 소리를 치며 밖으로 뛰쳐나갔고 창가 자리에서 혼자 식사를 하던 젊은 남자도 벌떡 일어섰다. 조셉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크레모사와 패트릭을 번갈아 겨누며 소리를 쳤다.

“나, 나, 나, 나도 이러고 싶지는 않다, 팻. 그렇지? 그래도, 그래도 나도 내 살 길을 도모를 해야겠어. 둘 다 손들어, 아니 셋 다!”

조셉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눈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이 한눈에 봐도 분노가 아니라 공포에 차 있었다. 패트릭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손을 저었다.

“형, 그 총 놓고 얘기해.”

“이걸, 이걸 놓고 나서 내가 어떻게 될지를 무슨 수로 알고?”

말을 마치고 조셉이 입술을 핥았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모양이었다. 패트릭이 갑갑함에 혀를 찼다.

“내가 형을 해칠 것 같아? 총 내려놓고 얘기 좀 하자.”

“네가? 이미 그럴 생각이었으면서 넘어가려고 들지 마! 이 독사와도 협상? 협상을 해? 네가 뭐가 다르다고? 크레모사 이 음흉한 놈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하더니 애를, 애를 저격했다질 않나! 이 바닥엔 속 시커먼 놈들뿐이야!”

그렇게 받아들인 건가. 극도로 긴장한 와중에도 입맛이 썼다. 총구가 덜덜덜 떨리고 있어 저기서 발사되는 총알이 있을지언정 맞아 다칠 사람이 나올 확률은 적어 보였다. 하지만 과도하게 흥분한 사람이 공공장소에서 총을 갖고 있는 건 좋은 일은 결코 아니었다. 스튜어트가 개입을 시도해 보았다.

“형님, 진정하시죠.”

“제부는 빠져!”

스튜어트가 막아서며 달래려고 하자 조셉이 이번엔 스튜어트에게로 총구를 들이밀었다. 두 사람이 너무 가깝고, 조셉은 지금 온 세상이 제 적으로 보이는 상태다. 패트릭이 당황해서 손을 뻗으려는데 조셉이 그의 움직임을 보더니 자신을 공격하려고 한다고 착각한 것 같았다.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패트릭이 비명을 질렀다.

“키드!”

조셉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거의 동시에 패트릭이 스튜어트를 힘껏 덮쳐 끌어안았다. 스튜어트가 놀란 소리로 뭐라고 외쳤고 크레모사도 고함을 질렀다. 사람들이 아우성을 쳤다.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패트릭은 스튜어트와 함께 레스토랑 바닥에 나뒹굴면서 잠깐 정신이 아득해졌다가 뭔가 몹시 이상한 기분에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저, 팻.”

스튜어트가 그의 팔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패트릭은 얼떨떨하게 그를 마주 보았다. 스튜어트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패트릭은 무심코 몸을 일으키면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을 구르느라 먼지가 잔뜩 달라붙은 것만 빼면 말짱하기 이를 데 없었다. 스튜어트가 패트릭을 토닥여 떼어 놓고 일어서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패트릭은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틈에 달려왔는지 창가에 있던 안경을 낀 젊은 남자가 조셉을 제압해 누르고 있었다. 스튜어트의 군용 권총은 저만치 날아간 채였다. 크레모사는 레스토랑 안에 미리 심어 놓은 부하였던 듯 두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한 발 물러서서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경계를 늦추지 않은 눈으로 패트릭과 스튜어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스튜어트는 아수라장이 된 레스토랑 안을 가로질러 가서 권총을 주워 들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형님.”

조셉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스튜어트는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쉬면서 총을 분해해 열어 보였다. 조셉이 경악한 소리를 냈다. 스튜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위험하게 집에 장전된 총을 둘 리가 없잖습니까? 팻이 다칠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탄창은 비어 있었다. 조셉을 잡고 있던 청년이 스튜어트에게 묻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스튜어트가 패트릭을 바라보며 머뭇거리자 조셉이 시무룩하게 물었다.

“그래서, 팻. 어쩔 거냐?”

“…형은 정말로 날 뭐로 보는 거야?”

패트릭이 조용히 되물었다. 조셉은 뭔가에 찔린 것만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밉상이라도 형이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의 심정을 알아차렸는지 스튜어트가 슬쩍 눈치를 주었고 조셉을 잡고 있던 청년이 손을 약간 늦추었다. 패트릭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프랑스로 돌아가라고 하려고 했어. 이제 와서 먹힐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형을 해칠 각오 같은 건 되어 있지 않아.”

조셉의 입이 약간 벌어졌다. 한동안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조셉이 천천히 물었다.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할 거야?”

“바뀐 건 없어. 프랑스로 가. 형수도, 듀크도 함께. 거기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다 지원해 줄 거야.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까 하나만 더 걸게.”

패트릭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조셉을 노려보다가 낮게 말했다.

“듀크가 왜 삼촌들이 이제 안 오냐고 물어보면, 사실대로 얘기해. 형이 키드를 쏘려고 했다고. 그래서 두 사람 다 이제는 안 온다고.”

조셉이 비굴한 미소를 띠었다.

“듀크가 너희들을 보고 싶어 할 거다.”

“실탄 장전 상태였으면 듀크는 우리 둘 중 하나는 정말로 보고 싶어만 하게 되었겠네, 그렇지?”

패트릭이 싸늘하게 말했다. 조셉은 질린 표정이 되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스튜어트가 청년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수고했어, 올랜도. 밖에 차 있는데 그쪽으로 모셔다 드려 주지 않겠어?”

“예, 선배님.”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셉을 제법 정중하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패트릭은 엉망진창이 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레스토랑 안을 한 바퀴 둘러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조셉이 이 난장판의 원인이니 레스토랑 측에 비용을 물어 주어야 하는 건 제퍼슨 그룹이 된다. 그가 견적이 얼마나 들지를 암담하게 계산하고 있는데 지금껏 물러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크레모사가 스튜어트를 향해 물었다.

“스튜어트 라일리 변호사, 평범한 변호사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소. 전직 공군 파일럿이었다는 말로도 설명이 되지 않소만.”

“아, 감사합니다.”

칭찬의 의미가 아니었을 텐데. 패트릭이 슬슬 불안에 휩싸이고 있는데 크레모사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당신에게는 변호사 이상의 뭔가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게 뭔지 물어본다면 대답해 줄 수 있겠소?”

“물론이지요.”

패트릭이 놀라서 스튜어트를 홱 돌아보았다. 크레모사는 명민한 눈으로 스튜어트를 열심히 뜯어보고 있었고, 스튜어트는 보는 사람이 속이 바작바작 타들어가는 것은 모르고 그저 쾌활한 얼굴이었다. 설마 크레모사에게 정체를 드러내려는 것인가? 패트릭이 제지하려는 찰나 스튜어트가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전 유부남입니다.”

***

사건 자체는 해프닝처럼 일단락되었지만 치워야 할 잔해가 수북하게 나왔다. 조셉 일가의 일은 키슬러가 맡았다. 테레사는 놀랄 만치 의연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멍하니 앉은 조셉을 대신해 프랑스행에 필요한 서류들을 받아들었고 대담하게도 한 가지 조건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영영 미국에 올 수 없대도 좋지만 듀크만은 넘어가 줄 것. 대학교를 미국으로 진학할 수도 있는 일이니까. 패트릭은 물론 거기까지는 양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 일은 조셉 건보다 더한 소동이었다. 거의 볼티모어까지 광란의 추격전을 펼친 끝에 스튜어트의 손목시계를 가져 왔던 운전수 사내를 할리 뒷자리에 짐짝처럼 싣고 돌아온 딜버트는 처음에는 개선장군처럼 으스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우디를, 좀 더 정확하게는 한 때 아우디였던 물건을 보고는 창백하게 질렸다. 범인이 스튜어트 라일리라서 때려잡을 수도 없어지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려 버렸고, 패트릭이 다음 분기에 더 좋은 차를 지급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겨우 기분을 조금 풀었다.

키슬러의 네 아들들이 죽을상을 지으며 흉물이 되어 버린 조각상을 지하 창고로 옮겼고, 앨리슨은 깨진 유리창 갈아 끼우기를 내일의 할 일 리스트에 올린 뒤 카펫 위에 어질러진 대리석 파편들을 주워 모았다. 패트릭은 벤튼이 모아 온 전투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손수 오늘치에 해당하는 일당을 나누어 주었다. 말이 일당이지 제법 두둑한 봉투였다.

벤튼은 오늘 크레모사 패밀리와 제퍼슨 그룹의 충돌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을 수소문하고 연락이 닿은 사람들에게는 청구서를 보내 달라며 양식을 건네주고 다녔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지라 제퍼슨 그룹 단독으로 잘못해서 피해를 입은 건 조셉이 총을 쏘았던 웍 앤 롤밖에 없었지만, 패트릭은 이런 일에서 선수를 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제퍼슨 그룹이 크레모사 패밀리보다 낫다는 인상을 심어 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해 일에 착수했다. 당분간 자금사정이 빠듯해지더라도 평판은 그럴 수 있을 때에 확실하게 다져 놓는 게 중요했다.

그 벌집처럼 바쁜 사후 처리반 사이에서도 올랜도는 계속 시드니를 따라갔다. 조셉 서턴을 차에 태우고 나서는 자신의 작은 빨간 자동차를 운전해 패러것 웨스트까지 쫓아갔고, 그 다음에는 내내 로비에서 알짱거리며 이제나저제나 시드니가 모습을 드러내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기다린 보람이 있어 드디어 시드니가 잔뜩 지친 얼굴의 패트릭 서턴을 거의 끌어안다시피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올랜도는 총알처럼 튀어 나가 시드니 앞에 서서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연습한 대사를 내뱉었다.

“선배님, 더 시키실 일은 없습니까?”

“없어. 오늘 정말 수고했어.”

시드니에게 이 수고했다는 한마디를 얼마나 듣고 싶었던가! 올랜도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되었다가 곧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드니가 제퍼슨 그룹의 수장을 좀 과하도록 친밀하게 안고 있는데, 부축한다고 보기에는 좀 농밀하지 않나 싶었다. 게다가 제퍼슨 그룹의 젊은 보스도 플로리다에서 보았던 그 눈매가 날카로운 인물과 같은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표정이 상냥하게 풀려 있었다. 시드니는 그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패트릭 서턴의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아, 이렇게 된 거 그냥 인사해. 내 달링이야. 팻, 여긴 올랜도. 이번에 우리 부서에 신입 인턴으로 들어왔고 오늘 우리를 도와준 친구야.”

“…저, 누구시라고요?”

패트릭이 이마를 짚으며 끙 소리를 냈다. 올랜도는 기겁을 하고 패트릭과 시드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패트릭이 너 집에 가면 두고 보자라고 해석되는 시선으로 시드니를 노려보고 있어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는 패트릭의 얼굴을 뜯어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그, 보여 주신 사진은 분명히 여자아이가….”

“너 사진 뭐 갖고 다녀?”

패트릭이 대번에 시드니를 쏘아보았다. 시드니는 기다렸다는 듯 즉시 지갑을 꺼내 자랑스러운 얼굴로 척 펼쳐 보였다.

“이번 주에는 이거!”

“…왜 매번 이렇게 여자애같이 나온 걸 들고 다니는 거야? 다른 거 줄 테니까 이건 앨범에 도로 끼워 놔.”

“그렇지만 예쁘잖아.”

시드니가 시무룩해져서 지갑을 품에 넣으며 투덜거렸다. 정작 야단을 쳐 놓고 시드니가 표정이 안 좋아지자 마음에 걸렸는지 이내 패트릭 서턴이 그를 툭 쳤다.

“본인을 앞에 두고 사진더러 예쁘다면 섭섭하지?”

“알았어, 알았어.”

시드니가 순순히 패트릭의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이제는 충격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이 모든 게 그냥 꿈은 아닐까 싶어 두 사람을 멍하게 바라보던 올랜도는 패트릭 서턴의 웃음소리에 지금이 현실일 리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미소를 짓거나 훗 하고 짧게 웃거나, 하하하 하고 호탕하게 웃을 거라고 생각했던 패트릭이 스튜어트를 애정 어린 눈으로 마주 보며 에헤헤, 하고 웃었던 것이다. 작은 소녀나 어린 소년이 저렇게 웃었다면 어울리겠지만 이건 아니었다. 그러나 눈에 콩깍지가 몇 겹은 덮인 시드니의 눈에는 그 엄청난 괴리감이 전혀 거슬리지 않는 것 같았다. 시드니는 패트릭의 허리를 고쳐 안고 올랜도를 바라보았다.

“난 오늘은 본부로 귀환하지 않고 바로 퇴근할 예정이야. 자넨 그래도 신입이니까 본부 가서 웰링턴에게 다 잘 끝났다는 말 정도는 전해 주면 고맙겠어. 그 친구도 오늘 고속 도로 정리하느라 고생이 많았어.”

“알겠습니다. 바로 댁으로 가시는 겁니까?”

“응. 우리 팻이 피곤하다고 해서.”

그 말과 함께 시드니가 걱정이 담뿍 담긴 얼굴로 패트릭을 올려다보았다. 재미있게도, 조금 전까지 요모조모 따져보듯 올랜도를 팔팔하게 힐끔거리던 패트릭이 그의 시선이 와 닿자마자 급속히 해파리처럼 늘어지며 피곤한 기색을 띠기 시작했다. 시드니가 기운을 북돋아 주려는 것처럼 패트릭의 볼을 토닥이고는 올랜도에게 눈인사를 했다. 올랜도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시드니 선배님은….”

부부가 멈추어서 그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아주 귀하고 보기 드문 봄날의 고운 꿈 한 자락을 엿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붕 떠오른 솜사탕 같은 투로 행복하게 말을 맺었다.

“역시 정말로 가정적인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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