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2)

“놀라지 마십시오. 이야기를 좀 하려는 것뿐이니까요.”

남자의 말투에서는 희미하게 이탈리아 억양이 느껴졌다. 스튜어트는 눈살을 찌푸리고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꾸했다.

“난 바쁜 사람입니다. 용건이 있다면 여기서 말씀하시오.”

그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더니 친근하게 그의 팔을 잡았다. 반사적으로 그대로 남자를 업어치기할 뻔했지만 대낮에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다운타운 지역에서 난동을 부렸다가는 입장이 곤란해 스튜어트는 잠시 머뭇거렸다. 남자가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타시지요. 길거리에서 대화를 나눌 만한 내용이 아닙니다.”

스튜어트가 입을 꾹 다문 채 팔을 빼내려고 했다. 남자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로 손아귀의 힘을 풀지 않았다. 스튜어트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제 의사에 반해서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해 저를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면 납치가 성립합니다. 납치는 형사 처분의 대상입니다만.”

남자가 소리를 내어서 짧게 웃었다.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스튜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남자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검은 시보레 자동차에서 내린 두 사내가 하나는 남자의 뒤를, 다른 하나는 스튜어트의 뒤를 막고 섰다. 스튜어트의 팔을 붙잡은 남자가 상냥함을 가장한 투로 말했다.

“타십시오, 라일리 변호사. 마음만 먹으면 당신을 이 세상에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지워 버리는 건 식은 죽 먹기지만 그건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를 믿고 따라오시지요.”

믿으라고? 한마디 쏘아붙여 주고 싶었지만 스튜어트는 가까스로 침묵을 유지했다. 하필 간단하게 요깃거리만 사 오려고 나온 길이라 총은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눈앞의 떠버리와 차에서 나온 보디가드 두 명, 거기에 운전사를 더해 네 명으로 구성된 일당 정도야 주먹으로 못 이길 것도 아니나 그는 사법공무원이었고 상대방은 민간인이었다.

허가 없이 바깥에서 싸움판을 벌이면 시말서 정도로 일이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등 뒤를 막은 남자가 그에게로 다가오면서 별로 느끼고 싶지 않은 인기척이 훅 밀려오는 바람에 스튜어트는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그리고 더 말할 것도 없이 무뚝뚝하게 걸어가 시보레의 뒷좌석 문을 열었다.

두 사내가 스튜어트를 가운데에 두고 양쪽에 앉았다. 그에게 줄곧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걸던 남자가 조수석에 앉아 외국어로 운전사에게 뭐라고 지시했다. 스튜어트는 로스쿨 재학 당시에 글리 클럽 소속이었어서 성악곡 가사를 질리도록 외워 봤기에 이탈리아어를 들으면 뜻은 몰라도 그게 이탈리아어라는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 새 임무에 대해 바쁘게 메모하고 있던 머릿속의 메모장을 한 장 북 뜯어 치워 버리고 빈 종이에 다시 생각거리를 적어 넣기 시작했다. 납치범은 이탈리아어를 사용하고 있음. 스튜어트의 왼쪽에 앉아 있던 남자가 운전석 뒷좌석의 주머니에서 안대를 꺼내 다짜고짜 그에게 덮어씌웠다. 스튜어트는 그의 손을 쳐내고 스스로 안대의 줄을 조정했다.

시보레가 출발했다. 영화라도 찍는 기분이군. 고전 영화는 좋아했지만 영화에서 본 것과 흡사한 상황에 처하는 건 달갑지 않았다. 체격이 좋은 남자 셋이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다 보니 싫어도 양쪽의 납치범들에게 자연스레 팔이 닿았다.

양복 너머로 느껴지는 팔 근육들이 제법이었다. 이 자들이 정장을 차려입고 있다는 점이 더 의심스러웠다. 패트릭의 일이라, 지금은 반항할 때가 아니지만 일단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내기만 하면 이놈들을 죄다 주리를 틀어도 모자라다. 스튜어트는 최대한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하려 애쓰며 자동차의 진행 방향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검은 시보레는 계속 차선을 바꾸고 골목을 돌았다. 스튜어트에게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르게 하려는 속셈임에 분명했다. 워싱턴은 모든 도로가 격자 모양으로 직교해서 길 찾기가 아주 쉽고 스튜어트는 워싱턴 시내라면 손바닥 보듯 알고 있었지만 몇 번의 P턴과 차선 변경이 이어지고 나자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이럴 때에는 범인처럼 생각해야 한다. 자기가 납치범이라면 인질을 워싱턴의 어디로 데려가 가두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합리적인지를 생각하느라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바른생활의 표본이라 할 만한, 살면서 저지른 최악의 범법 행위가 고속 도로 과속과 주차 위반에 불과한 남자의 머릿속에는 딱히 뾰족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점점 더 초조해져서 마른침을 삼켰다.

괜찮아. 그는 주먹을 한 번 움켜쥐었다가 폈다. 이성을 잃는 순간 패트릭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족쇄가 되는 거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납치범 중 누군지는 몰라도 고급 향수를 뿌렸는지 머스크 향이 확 났다. 그는 원래도 머스크 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지금 이 순간부터는 더더욱 싫어하기로 마음먹었다. 검은 시보레도 싫어하기로 정했다.

이 사람들이 어디에서 와서 누구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지는 몰랐으나 어쨌든 패트릭을 괴롭히기 위해서 그를 억류하는 자들이었다. 스튜어트의 세계에서 작고 연약하고 순하고 여린 패트릭을 괴롭히는 사람은 무조건 악당 중의 악당으로 처결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웬 납치? 이모저모 머리를 굴려 보아도 회계사인 패트릭의 일에 납치나 감금 같은 단어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스튜어트는 잠시 후 제법 그럴듯한 가설을 생각해 냈다. 패트릭의 아버지 아서 서턴 씨는 젊은 시절에 잠시나마 암흑가 사람들과 거래를 트고 지냈던 것 같다.

지금 패트릭이 일하고 있는 회사의 창업자는 그의 아버지였다. 혹시 아서 서턴 생전에 그와 관계가 있었던 악당들이 그 아들인 패트릭을 찾아와 모종의 불순한 목적을 품고 장부 조작을 지시한 건 아닐까? 그리고 직업 정신이 투철한 패트릭은 그런 짓은 저지를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을 것이다.

납치범들이 이탈리아계니까 상대가 마피아일 가능성이 높은데 직업 윤리를 지키기 위해 그에 맞서기를 택하다니 – 그의 추측이 맞다는 근거는 없었으나 스튜어트는 슬슬 자신감이 붙고 있었다. - 역시 그의 패트릭은 사랑스러운 것으로 모자라 용감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놈들은 지금 장부 조작을 거부하는 패트릭을 위협하기 위해서 자신을 납치했음에 분명했다.

한번 마음에 드는 스토리가 나오자 성격이 단순한 편인 스튜어트는 자신의 가설이 사실이라고 믿어 버렸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새삼 납치범들을 향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 연약하고 조그만 아이에게 겁을 주려고 하다니! 패트릭이 열일곱 살 때에 이미 스튜어트보다 키가 커졌으며 스튜어트가 직접 공군의 특공 무술을 가르쳐서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은 스튜어트에게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어느 놈부터 어떻게 박살을 내줄까를 고민하고 있자니 자동차가 멈추었다.

안대가 벗겨졌다.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문을 열고 스튜어트의 팔을 잡아 우악스럽게 끌어냈다. 그는 차에서 내리는 것과 동시에 주변을 둘러보려고 했지만 뒤를 따라오는 사내가 그를 마구잡이로 밀어서 거의 달리다시피 집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 짧은 틈에 볼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제법 많은 나무와 풀 뿐이었다.

스튜어트는 워싱턴 시내에서 가장 조경이 잘 되어 있는 지역이 어딘지 생각해 보았다. 몇 군데가 후보지로 떠올랐다. 오는 시간이 길지 않았으니 아마 아직 시내를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납치범들은 그를 2층으로 끌고 갔다. 빈 집이었고 1층을 둘러볼 여유도 없어 저택 급으로 넓다는 점만 간신히 파악했다. 2층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고 문이 전부 다 닫혀 있었다. 아까 스튜어트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가 일당의 리더인지 제일 앞장을 서서 걸어가더니 열쇠를 꺼내 한 방의 문을 열었다.

부부용 침실인 것 같았다. 킹사이즈 침대가 들어가고도 한참은 남을 넓은 방 안에는 지금은 의자 하나와 테이블 하나를 제외하고는 가구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테이블 위에는 브랜디 한 병과 플라스틱 컵이 하나 놓여 있었다. 브랜디 한 잔을 권하며 이걸로 충격에서 벗어나 기운을 차리라고 할 생각일까? 그것 참 구식 발상이라고 생각하며 스튜어트는 방 안을 빠르게 관찰했다.

누군가가 팔려고 내놓은 집으로 보였다. 2층집에 창문 밖으로 내다보이는 오벨리스크의 크기를 보며 스튜어트는 잠깐 여기가 어디쯤일지를 가늠해 보았다. 계산은 금방 나왔다. 오벨리스크가 이 정도 크기로 보이는 거리에 바깥에 조경이 잘 되어 있는 2층이 넓은 가정집이 있을 수 있는 장소는 조지타운밖에 없었다. 스튜어트가 주변 상황을 파악하느라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이탈리아인이 그에게로 다가오더니 번개 같은 솜씨로 손목시계를 빼앗았다.

스튜어트가 고함을 지르며 상대의 멱살을 쥐려고 했으나 덩치가 큰 사내가 그를 가로막고 섰다. 이탈리아인은 문가에 서 있던 운전사에게 스튜어트의 손목시계를 던졌다. 운전사는 시계를 받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스튜어트가 소리를 쳤다.

“비켜, 당장 내놔!”

“잠시 빌리는 것입니다. 어차피 서턴 씨께 전달될 물건이니 무사히 돌려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무작정 덤비자니 위험이 너무 컸다.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바람에 이 자들의 의도를 파악하는 게 먼저인지, 아니면 결혼기념일이라고 귀여운 패트릭이 선물해 준 소중한 시계를 되찾는 게 먼저인지 판단도 잘 서지 않았다. 스튜어트의 앞을 막아서고 있던 사내가 비키면서 이탈리아인이 그에게로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잃어버리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그저 여기서 기다리시기만 하면 됩니다, 라일리 변호사. 아무것도 하실 필요도 없고 걱정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왜 그 애를 협박하는 거지?”

“거기에 대해 궁금해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움켜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스튜어트가 이를 악물면서 선량해 보이기만 하는 얼굴에 급격하게 사나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의 앞에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흥분하지 마십시오, 라일리 변호사. 어차피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브랜디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그 녀석에게 내 시계를 보내서 당신들이 나를 억류하고 있단 걸 알리고 나면? 팻이 당신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전까지는 날 풀어 주지 않을 생각인가?”

“따로 설명을 드릴 필요도 없겠군요.”

스튜어트가 피식 웃으며 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는 넥타이를 당겨 늦추면서 한 걸음 물러서 마치 의자에 앉을 것처럼 의자 등받이로 손을 뻗었다.

“미안한데 난 지금 나가야겠어!”

짧은 말과 함께 그가 의자를 들어 그와 마주 보고 있던 이탈리아인에게 휘둘렀다. 미처 그의 공격을 예상하지 못한 상대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의자에 정통으로 맞아 나가떨어졌다. 그의 뒤편에 서 있던 두 사내가 동시에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스튜어트는 아직 등받이를 단단히 쥐고 있던 의자를 그 중 하나에게로 내던지고 테이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의자를 피하느라 한 놈이 그에게로 곧바로 덤비지 못했으니 눈앞의 적수는 한 명, 스튜어트는 테이블 위의 브랜디 병을 낚아챘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온 사내가 권총을 꺼냈다. 스튜어트는 민첩하게 테이블의 다리를 걷어차면서 그 아래로 몸을 숨겼다. 쓰러지는 테이블이 방패막이 역할을 다하자마자 그는 테이블 옆면을 밟고 뛰어올라 총을 가진 놈을 덮쳤다.

예상한 바지만 인질로 잡았다는 건 죽여서는 가치가 없다는 뜻이렷다. 상대는 감히 가슴이나 머리를 겨누지 못했다. 조준을 제대로 하지 못한 총알이 팔 위쪽을 스치고 지나갔다. 당장은 아프다는 생각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브랜디 병으로 밑에 깔린 남자의 얼굴을 무자비하게 내리찍었다. 사내가 괴로움에 찬 고함을 지르면서 손이 느슨해졌다. 스튜어트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의 손가락을 비틀어 권총을 빼앗아 막 그에게로 달려들려는 다른 사내의 복부를 향해 쏘았다. 남자가 뒤로 나가떨어졌지만 피는 튀지 않았다. 방탄조끼를 입었나? 아까 의자에 맞은 놈이 비틀거리고 일어서서 그에게 총을 겨눴다.

“이 자식이…!”

“날 죽여도 되나?”

사내가 멈칫하는 찰나 스튜어트가 방아쇠를 당겼다. 사내가 간신히 옆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스튜어트는 그에게 달려들면서 다시 한 발을 쏘았다.

“패트릭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불어!”

단번에 옷깃을 잡아 끌어올리며 관자놀이를 총구로 찔렀다. 몇 발을 연달아 쏘아 뜨거워진 총구에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원래 마약 단속국의 시드니는 폭력 상황을 최대한 회피하고 온건하게 사건을 해결하려고 드는 성미로도 유명했지만 그의 손목시계를 받고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겁에 질릴 패트릭의 얼굴을 상상하자 분이 끓어 손놀림이 무자비해졌다. 스튜어트는 놈의 멱살을 더 꽉 움켜쥐며 으르렁거렸다.

“내 패트릭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네놈들?”

사내의 눈동자가 잠깐,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러나 노련한 현장 요원에게는 그 정도 단서로도 충분했다. 스튜어트는 사내의 몸을 억지로 끌어 올리면서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완력으로만 이탈리아인을 끌고 반 바퀴를 돌았다. 키는 작을지언정 체구는 작지만은 않은 이탈리아인이 속수무책으로 몸이 들렸다. 등 뒤에서 스튜어트를 공격하려던 사내는 단단히 쥐고 있던 가느다란 끈을 졸지에 동료의 목에 걸어 버리고 말았다. 브랜디 병에 맞아 코와 광대뼈에서 피를 흘리는 사내가 끈을 놓고 스튜어트에게 덤벼들었다.

스튜어트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사내가 팔을 뻗어 잡을 수 있는 거리까지 오기를 기다렸다가 비호같이 멱살을 움켜쥐었다. 달려들던 사내는 제 몸무게와 속도를 실어 마룻바닥에 메쳐졌다. 그는 곧장 쓰러진 사내의 명치를 밟고 뛰어올라서 잭나이프를 들고 달려드는 방탄조끼 사내의 옆얼굴을 무릎으로 쳤다.

일격에 얼굴뼈에 손상이 갔는지 끔찍한 소리가 났고 사내가 괴롭게 나뒹굴며 울부짖었다. 동정심을 품을 겨를은 없었다. 스튜어트는 착지하자마자 몸을 빙글 돌려 작달막한 대장 놈의 코를 주먹으로 후려치고 동시에 턱에 어퍼컷을 먹였다. 혀를 깨물었는지 놈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바닥에 나자빠져 있던 사내가 비틀비틀 일어나 그에게 총을 쏘았다.

납치 주도범이 불분명한 발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탈리아어였지만 인질을 쏘면 안 된다는 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스튜어트는 자세를 홱 낮추어 총알을 피하면서 바닥에 나뒹굴던 잭나이프를 주워 집어던졌다. 대장의 말에 움찔하느라 반응이 느려졌던 놈은 허벅지에 칼날이 박힌 채 쓰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스튜어트는 잠깐 여유가 생긴 틈을 타 이탈리아인의 멱살을 쥐어 들어 올려서 벽에 콱 들이박았다. 뒤통수를 회벽에 제대로 들이박힌 이탈리아인이 고통에 찬 소리를 냈다. 스튜어트는 망설이지 않고 넥타이를 풀어서 놈의 양손을 등 뒤로 돌려 묶고 다리에 칼이 박힌 놈에게 다가갔다. 그는 얼굴뼈가 부서진 남자의 멜빵을 풀어 와서 두 남자의 손을 한 데에 묶고 테이블에 고정시켰다.

사내들의 몸을 수색하니 자동차 키 두 개, 핸드폰과 무기 몇 종류가 더 나왔다. 그는 위험군과 보통군으로 압수품들을 정리해서 무기와 통신 장비를 전부 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칼침을 맞은 사내가 중얼거렸다.

“변호사라고 하더니….”

“그래서?”

그가 사내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테이블에 매어 놓은 두 사내의 입을 막는 작업을 마치고 창가로 되돌아가자 이탈리아인이 그를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스튜어트가 차갑게 그 눈을 마주 보았다.

“무엇 때문에 나를 납치했나?”

“어차피 서턴은 끝났어.”

스튜어트는 간신히 남자의 얼굴을 무릎으로 올려치려는 충동을 참았다. 그는 더 들을 것도 없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사내의 입에 재갈을 콱 물렸다. 세 사람이 다 꼼짝달싹할 수 없으며 외부와의 연락 수단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재차 삼차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물론 빼앗은 열쇠로 문을 잠근 뒤 제대로 잠겼나 한 번 흔들어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드레날린이 아직도 미친 듯이 혈관 속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흥분 속에서도 스튜어트는 방금 전의 격투가 절반 이상 운이 좋아 성공했다는 점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인질의 무력 저항이 그들의 계산에 들어 있지 않았던 것이 스튜어트에게는 어마어마한 행운이었다.

이 납치범들은 스튜어트 라일리가 변호사라는 사실만 알았지 그가 공군 중위 출신이라는 것까지는 미처 몰랐던 모양이었다. 일반적인 변호사라면 의자를 휘두르고 총을 쏘고 브랜디 병으로 사람의 얼굴을 치지는 않겠지. 그는 건물을 빠져나가면서 혹시라도 길에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을지 걱정했다.

조금 전까지 안에서 그 난리법석을 떤 덕택에 몰골이 엉망이라 눈에 띄면 곤란했다. 다행히 그가 끌려온 집은 인적이 드문 동네에 있었다. 그는 길을 양쪽으로 훑어보고 건물들 너머를 기웃거리다가 조지타운 대학교의 붉은 벽돌 건물을 발견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여기라면 패트릭의 회사에서 멀지 않다.

패트릭이 사무실에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도 스튜어트는 직감을 믿는 편이었다. 패러것 웨스트. 목적지를 잡자마자 그는 납치범들에게서 빼앗은 자동차 키를 꺼내들고 집 앞에 주차된 검은 시보레로 다가갔다. 그새 긴장이 조금 풀리면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연방 수사국에서 비밀 현장 요원으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목숨을 건 작전에 투입된 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번처럼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은 경험은 일찍이 없었다. 그는 시보레의 문을 열고 올라타 시동을 걸었으나 아직 운전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아 운전대를 붙잡고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침착하자. 스튜어트는 앞 유리 너머만 노려보면서 심호흡을 반복했다. 손의 떨림이 아직도 가시지를 않아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가락이 불안하게 움찔거렸다. 진정, 진정. 들이쉬고, 내쉬고. 그는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 오른쪽 차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릴 적 양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종종 호수로 낚시를 갔었다. 스튜어트가 급한 성질머리를 못 이겨 입질이 오자마자 낚싯대를 홱홱 잡아당기는 통에 번번이 고기를 놓치자 양아버지는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렇게 약이 바짝 올라서 달려들면 안 돼, 스튜어트. 침착하게 굴어야지. 서두르면 무슨 일이든 망치는 법이야. 유리창을 조금 내려 선선한 바람을 차 안으로 들여보내면서 스튜어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양아버지의 가르침을 실행에 옮길 때였다. 그는 악당 놈들에게 한 방 먹여 주겠다는 결의에 불타 패러것 웨스트를 향해 힘껏 액셀을 밟았다.

***

패트릭이 창백한 얼굴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선물한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열심히 차고 다닌 덕에 벌써 가죽 밴드가 살짝 구김이 가고 둥글게 말린 손목시계였다. 그는 말없이 시계를 들고 있다가 문자판을 덮은 동그란 유리를 어루만져보았다. 헛된 짓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 스튜어트가 지금 무사한지 확인이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작은 기대를 담아서. 그는 시계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중얼거리듯 물었다.

“그래서, 이걸 가져온 놈은 아직 못 잡은 거야?”

“경비실에 놓고 바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딜버트가 추격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벤튼이 말꼬리를 흐렸다. 패트릭이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말했다.

“못 잡으면 하는 수 없지만, 잡으면 반드시 나한테 끌고 오라고 해. 딜버트가 먼저 손대거나 입을 열게 하지 마. 고문해야 하는 거라면 내 손으로 하겠어.”

그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키슬러가 심란하게 그를 바라보았으나 패트릭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시계를 계속 어루만지고 있다가 아까보다도 더 조용한 소리로 말했다.

“다들 나가 줘.”

“지금 혼자 있어서 좋을 거 없네, 패트릭.”

“나가 주십시오.”

“그럴 수는 없어.”

“나가 달라고 했습니다!”

패트릭이 버럭 소리를 치며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이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키슬러는 잠깐 그 기세에 눌렸지만 꿋꿋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떤 심정일지는 알아, 패트릭. 놈들이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민간인을 건드리다니, 선을 넘었어. 라일리 변호사가 오픈되어 버린 분노는 이해하지만 지금 자네가 이성을 잃으면 일을 그르치네!”

“그러면 가만히 있으란 말입니까?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이건 비즈니스니까 어쩔 수 없지, 하고 기다려야 합니까? 소중한 물건 하나를 남에게 뺏겨도 분하고 억울한데 전 지금 제 배우자를 납치당했습니다. 제 가장 소중한 사람을 위험에 처하게 했단 말입니다!”

“그 쪽도 인질을 함부로 다룰 만큼 멍청하지는 않을 테니 진정하게, 패트릭!”

패트릭이 분에 차서 되도 않는 소리로 마구잡이로 고함을 질렀다. 그가 책상 위에 있던 옥으로 만든 문진을 집어던지는 바람에 방 건너편에 있던 꽃병이 거기에 맞아 부서졌다. 키슬러도 벤튼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눈치만을 살폈다. 패트릭은 홱 돌아서서 책상을 짚고 숨을 고르다가 고개를 숙였다.

“나가 주십시오, 키슬러 씨. 나가, 벤튼.”

“여기에 있게, 벤튼. 패트릭, 자넨 우릴 내보내면 안 돼.”

키슬러가 곧바로 말하는 바람에 벤튼이 나가지도 있지도 못하고 애매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패트릭은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벤튼에게로 홱 돌아섰다.

“자네 부하들은 대체 뭘 하고 있었지?”

“면목이 없습니다, 서턴 씨.”

벤튼이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사과했다. 패트릭은 잠시 자제를 하려는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지만 이내 참지 못하고 다시 고함을 질렀다.

“뭘 하고 있었어, 그 멍청이들은! 고작 변호사야. 아무리 전직 군인이라지만 하늘에서나 강한 놈인데 어떻게 민간인을 놓쳐! 놓치기만 해? 납치를 당하게 내버려 둬? 도대체 어떻게 교육을 시킨 거야!”

“죄송합니다, 서턴 씨,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예 엎드려 빌 기세로 벤튼이 연거푸 사과했다. 눈빛을 흉기로 쓸 수 있다면 벤튼은 이미 몇 번쯤은 살해당하고 말았을 상황이었다. 패트릭은 주먹을 힘껏 움켜쥐고서 사무실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악을 썼다.

“키드를 납치해? 용서 못해, 절대로 용서 안 해!”

“제발 진정하게, 패트릭!”

“지금 제가 어떻게 진정을 하란 말입니까, 키슬러 씨! 스튜어트를 뺏겼단 말입니다. 이제 무슨 낯으로 그 녀석을 다시 보라고요? 아니, 다시, 만약에 다시 못 보게 되면….”

패트릭은 차마 말을 맺지 못했다. 그는 창백하게 질려 책상에 내팽개쳐 두었던 손목시계를 주워 들더니 시계를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핏기가 가신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서서히 배어 나왔다. 키슬러가 한 걸음 다가서면서 어렵사리 그를 달래려고 해 보았다.

“라일리는 공군 파일럿이었잖나?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세. 큰일 나지는 않았을 거야.”

패트릭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와 동시에 책상 위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패트릭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고 벤튼은 놀란 나머지 총을 뽑아들 뻔했다. 키슬러가 날카롭게 말했다.

“크레모사임에 분명하네. 어쩐지 연락이 없다 했더니 자네 말대로 내세울 패를 구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었나 보네. 라일리 변호사를 잡았으니 협상을 시도하려는 거겠지.”

패트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전화를 노려보면서 가만히 서 있다가 벨이 한 번 더 울리자 수화기를 홱 낚아챘다. 전화 너머에서 정중한 이탈리아 말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 패트릭 서턴?

“납니다.”

대답하는 패트릭의 목소리가 뜻밖에도 차분해 키슬러도 벤튼도 한시름 덜었다는 얼굴이 되었다.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는 알기 어려웠다. 크레모사 본인은 아니고 아마도 패밀리의 고문이나 중간 보스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았다. 상대방이 계속 말했다.

- 당신이 중요하게 생각할 사람을 데리고 있소. 다치게 하지 않았으니 염려 마시오. 단독 회담을 제의하고 싶은데 당신이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 잠시 억류하고 있는 것뿐이니 말이오.

패트릭이 이를 악물었다. 전화의 줄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목소리만 들어서는 지극히 태연한 투로 대꾸했다.

“정상 회담이라도 갖자는 겁니까?”

- 돈 크레모사께서는 당신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시오. 시간이 촉박하겠지만, 빠르면 빠를수록 이야기의 진행도 매끄러워질 거고 라일리 변호사도 불편을 덜 겪을 거요.

소리를 치면 안 돼, 패트릭은 호흡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상대방이 그의 분노를 읽게 내버려 둔다면 몰라도 공포까지 읽게 두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라일리 변호사가 무사하다는 걸 먼저 확인하고 싶습니다.”

- 미안하지만 그건 우리를 믿어 주는 수밖에 없소, 서턴. 라일리 변호사는 지금 이 곳에 없어서. 설마 우리가 민간인의 신변에 위협을 가했겠소?

“…납치가 신변의 위협이 아니라면 뭐지?”

결국 패트릭이 참지 못하고 으르렁거렸다. 키슬러가 창백해져서는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진정하라는 시늉을 했다. 전화 너머에서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들렸다.

- 당신이 회담을 거절하지 않게끔 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었소. 절대로 억류 이상의 위해를 가하지 않았으니 염려 마시오. 회담 이후에 라일리 변호사를 무사히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하오. 포드 극장으로 오시오. 라일리 변호사를 돌려받을 수 있을 거요.

“아니, 대화에 응할 의사는 있지만 그런 곳에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난 남들의 눈을 피해 폐쇄된 곳에서 숨어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만한 일을 벌인 적이 없는 사람이니 그에 걸맞은 곳으로 가야겠소.”

- 기다리시오.

패트릭의 빈정거림에 남자가 잠깐의 침묵 끝에 대답했다. 바로 송화기를 손바닥으로 막았는지 탁 하는 소리가 둔탁하게 났다. 입이 막힌 사람들이 단체로 떠드는 것 같은 소음만 희미하게 들렸다. 논의를 하는 것 같았으나 대화 내용까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키슬러가 거의 들리지 않는 소리로 말했다.

“사람이 많은 레스토랑이나 카페를 제안하게 하게. 그렇지 않다면 계속 거절하고. 자네를 저격하려고 한 자들이야.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최대한 목격자가 많은 곳을 고르게.”

패트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 너머에서 웅성거림이 조금 더 명확하게 들렸다. 이윽고 남자가 말했다.

- 서턴?

“듣고 있습니다.”

- 차이나타운의 웍 앤 롤로 오시오. 각자 한 사람씩만 대동하고 무장은 하지 맙시다. 20분 후까지 도착하지 않는다면 협상이 결렬된 것으로 알겠소.

패트릭은 알았다고 대답했다. 전화는 인사말 없이 그대로 끊어졌다. 패트릭은 전화기를 내려놓으면서 키슬러와 벤튼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웍 앤 롤로 오랍니다.”

“그게 어디지? 중국음식점인가?”

“차이나타운에 있습니다. 링컨 암살범들이 음모를 꾸미던 장소가 그 자리죠. 어울리는 곳도 골랐군요. 키드를 무사히 돌려받고 싶으면 20분 내로 오랍니다!”

말을 하다가 분통이 터진 패트릭이 끝에 가서 언성을 확 높이며 전화기를 홱 후려쳤다. 전화기가 우당탕 굴러 책상 아래로 떨어지면서 수화기는 튕겨 나가고 전화선이 뽑혀서 위로 날았다. 벤튼이 서둘러 달려들어 패트릭의 손목을 붙잡았다.

“제발 진정하십시오, 서턴 씨!”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서턴 씨께서 침착함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진정하십시오!”

벤튼은 필사적인 기세였다. 패트릭은 그의 손을 휘둘러 뿌리치고 책상에 몸을 기대려다가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는 눈가를 거칠게 문지르다가 조금 전에 전화기와 함께 굴러 떨어졌는지 카펫 위에 나뒹굴고 있던 스튜어트의 손목시계를 집었다. 키슬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바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네, 패트릭. 움직여도 괜찮겠나?”

패트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시계를 계속 만지작거리다가 자신의 손목에 걸쳤다. 키슬러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지금 움직일 수 있겠나, 패트릭?”

“…그래야지요. 다른 수가 없지 않습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패트릭은 기운이 완전히 빠진 얼굴로 책상에 머리를 기댔다. 불안이 가슴을 짓눌러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있던 벤튼이 사무실의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눈가를 찡그렸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니?”

키슬러가 날카롭게 묻는 순간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분기탱천한 기세로 문이나 여타 단단한 것을 부수는 것 같은 굉음이었다.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뭐라고 외치는 가운데 뭔가 와장창 미끄러져서 깨지는 것 같은 소리까지 났다. 반사적으로 밖을 내다보려는 패트릭을 키슬러가 막아섰다.

“내가 보고 오겠네. 거기 있게.”

패트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키슬러는 가슴 주머니에 손을 넣어 총을 잡은 채로 문 옆의 벽에 기대어 서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가 갑자기 기쁨과 놀람으로 뒤범벅이 된 소리를 내지르며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패트릭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 순간, 머리가 다 흐트러지고 넥타이는 달아나고, 한쪽 팔은 옷이 찢어진 너머로 상처까지 비쳐 보이는 스튜어트가 돌개바람처럼 짓치고 들어왔다.

“키드!”

패트릭이 비명처럼 외쳤다. 스튜어트는 새끼를 빼앗긴 어미 사자 같은 얼굴로 사무실을 휙 돌아보다가 패트릭을 발견하자마자 더 잴 것도 없이 그에게로 달려들어 덥석 끌어안았다. 사람들 눈을 신경 쓰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패트릭은 있는 힘껏 스튜어트를 껴안고 얼굴을 마구잡이로 맞비볐다. 스튜어트가 으르렁거렸다.

“무슨 일이야,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키드….”

목이 메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스튜어트는 패트릭이 쉽사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자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볼에 입을 맞추고 평소보다 거칠게 머리를 벅벅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놀라지 마. 납치당할 뻔하기는 했는데 별거 아니었어. 넌 괜찮아? 누가 괴롭히는 거야, 무슨 일이야, 이거?”

스튜어트는 납치를 당할 뻔했다는 말을 마치 시리얼을 그릇에 부었는데 우유가 없었다든가 코를 풀고 싶었는데 휴지가 없었다는 것과 비슷한 투로 말했다. 하지만 듣는 패트릭의 입장에서는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안고 있지 않으면 아지랑이가 되어 사라질까 겁내는 것처럼 스튜어트를 더 세게 껴안았다. 스튜어트는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있는 패트릭의 볼을 가볍게 한 번 토닥이더니 그래도 패트릭이 쉽게 진정하지 못하자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끌어당겼다.

“이제 괜찮아.”

“응.”

“이제부터 내가 지켜 줄게.”

“응.”

울지 않으려면 단답형으로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패트릭은 아무 말도 더 하지 못하고 스튜어트의 품으로 도로 안겨 들었다. 되찾은 그가 전보다 몇 배는 더 소중해진 것만 같아 안은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스튜어트는 패트릭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될 때까지 아끼는 어린 고양이 다루듯 어르고 달래며 품어 주더니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서 씩 웃었다.

“좋아, 이제 서로 무사하다는 건 확인했어. 그렇지?”

“응. 고마워, 키드. 무사해 줘서 고마워.”

패트릭이 눈가를 거칠게 문지르며 대답했다. 스튜어트가 그의 볼에 입을 한 번 맞춰 주고는 심각한 건지 농담을 하는 건지 애매한 얼굴로 그에게 웃어보였다.

“오는 길에 악당들이 회계사를 괴롭히는 시나리오를 썼었는데, 도착해 보니 그런 상황은 아닌 것 같네. 팻, 나한테 이 사태에 대해서 납득 가능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난 화를 낼지도 몰라. 이게 대체 무슨 난리야?”

반가움에 질주하던 심장이 조금씩 진정하면서 암담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패트릭은 늠름하게 팔짱을 끼고서 자신을 마주 보는 스튜어트의 성실하다 못해 무서운 눈을 슬그머니 피했다. 납치의 충격을 금방 이겨 내 준 건 고맙지만 누가 변호사 아니랄까 봐 바로 추궁 모드에 들어간 건 전혀 고맙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다 털어놓지 않는대도 머리가 좋은 스튜어트는 스스로 조합해서 답을 내릴 게 분명하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먼저 고백하는 편이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말을 하자니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주제였다. 그는 시간이라도 벌어 볼까 하며 침을 삼켰다.

“그 전에,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 납치당할 뻔했다며.”

갑자기 스튜어트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스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부부지간에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물을 틈도 없이 스튜어트가 밝게 웃으며 빠르게 대답했다.

“아, 의외로 허술한 부분이 있어서 도망쳐 나왔어, 이제 너 말해 봐.”

“패트릭, 늦겠네.”

구원의 손길을 내민 건 키슬러였다. 패트릭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러게 말입니다. 키드, 내가 정말 미안한데, 조금 이따가….”

“어디 가? 그럼 나도 같이 가자. 차 안에서 설명 들어야겠어.”

“…키드.”

스튜어트가 웃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야 친절하고 선량한 특유의 웃음으로 보이겠지만 패트릭은 그 표정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있었다. 스튜어트는 슬슬 화가 나고 있었다.

“너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유인하더니 나를 차에 태우더라? 그러면 내가 여기까지 이렇게 왔는데 네가 나한테 한마디 설명이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네가 지금 좀 얼굴이 파리한 게 평소보다 더 청초해 보이는 거랑은 별개로 난 너한테서 설명을 들어야….”

“시끄러워!”

패트릭이 질겁하며 그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패트릭을 다루는 데 이골이 난 스튜어트는 그 손을 순식간에 쳐냈다.

“들어야겠어, 내 말 끊지 마!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날 납득시키고 가. 납득시킬 시간이 없으면 차에 태우고 가면서 납득시켜. 안 그러면 내가 이 안에서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 저건 뭐야?”

사무실 안을 한 바퀴 둘러보던 스튜어트가 창가에 서 있는 머리가 날아간 조각상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거기까지 질문이 들어오면 정말로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패트릭은 스튜어트가 더 질문할 거리를 찾아내기 전에 그의 어깨를 덥석 붙잡고 마구 문가로 밀고 가면서 소리를 쳤다.

“아무것도 아냐, 나가! 나가자! 그래, 차로 가!”

“어, 야, 살살 해!”

“패트릭!”

키슬러가 놀라서 외쳤다. 패트릭은 차마 돌아보지도 못하고 스튜어트를 계속 밀어붙이면서 말했다.

“차에 태우고만 있으면 됩니다. 도착하고 나서도 이 녀석은 계속 차에 두죠. 벤튼, 운전이랑 도착하고 나서 차 안에서 이 녀석 감시 좀 부탁할게. 제발 버티지 말고 나가, 키드!”

“차 안에서 설명하는 걸로 약속이다, 팻?”

“약속해!”

“정말로 데리고 갈 셈인가?”

뛰다시피 사무실을 나가는 패트릭을 쫓아가면서 키슬러가 어이가 없는지 재차 물었다. 패트릭이 대답할 필요도 없이 스튜어트가 그를 팩 노려보았다.

“납치범에게서 방금 도망 나온 사람에게 네가 납치당한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니까 입 다물고 기다리라고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아닐세. 미안하네.”

스튜어트의 기세에 압도당한 키슬러가 중얼거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벤튼이 서둘러 자동차 키를 가지고 나와 그들을 앞지르며 말했다.

“제 차는 좁으니 딜버트의 아우디로 가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멋대로 해, 아무거나 상관없어. 키드, 내가 차 안에서 얘기할게. 그러니까 지금은 얌전히 가 줘. 부탁이야.”

“그럼 너도 약속해, 나한테 무슨 일인지 얘기해 준다고.”

스튜어트가 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죄책감이 날카롭게 가슴을 찌르는 바람에 패트릭은 말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이면서 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속도 모르는 스튜어트는 패트릭이 얌전하게 손을 내밀자 금세 기분이 풀어졌는지 미소를 지으며 그를 한 번 끌어안고는 곧바로 허리에 팔을 둘렀다.

평소라면 바깥에서 애정 표현은 적당히 하라고 타박을 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운도 없었다. 패트릭은 사실상 스튜어트에게 기대다시피 하고 걸음을 옮기면서 속으로만 한숨을 쉬었다. 20분 내로 차이나타운에 도착해야 하니 일단은 혹을 달고 움직이지만 앞으로의 일이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회담도, 스튜어트에게의 고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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