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정장 재킷을 얇은 실크 슬립 위에 걸치고 한 발에는 하이힐, 다른 발에는 슬리퍼라는 괴상한 차림새로 무릎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딜버트가 팰리사이드의 키슬러 저택 문을 두드리고 나서 10분 후, 워터프론트의 아파트에서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패트릭은 스튜어트가 깨지 않도록 최대한 살금살금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까치발을 하고 거실로 총총 달려갔다. 혹시라도 진동 소리마저 스튜어트의 잠을 괴롭힐까 봐 핸드폰을 티셔츠 안에 숨긴 채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키슬러의 심각한 목소리가 들렸다.
- 패트릭, 날세.
“무슨 일입니까?”
수장 자리를 이어받은 직후의 짧은 혼돈 이래로는 한밤중에 중간 보스가 전화를 할 만큼 긴급한 사태는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투자했던 회사의 사장이 야반도주라도 했나 하며 기지개를 켜던 패트릭은 키슬러의 다음 말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 딜버트가 습격을 당했네. 지금 무사히 우리 집에 와 있고 크게 다친 데는 없어. 크레모사의 짓이야. 에밀리를 포섭하려고 했고 거절하자 죽이려고 했다네.
세상이 짧게 고요해지면서 손끝이 차가워졌다. 동시에 등 뒤에서 화산이 터진 기분이었다. 곧바로 소리를 치거나 뭔가를 후려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스튜어트가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튜어트와 함께 살면서 많이 누그러지고 바로잡아졌지만 그는 원래 성격이 급했다. 그에게는 스스로마저 깜짝 놀랄 정도로 무모하고 과격한 짓을 벌이는 습성도 있었으며 그런 성미가 자신의 약점임도 잘 알고 있었다. 패트릭은 잠시 꼼짝 않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모두 사무실로 와 주십시오. 저도 바로 가겠습니다.”
- 혼자서 올 건가?
키슬러가 불안한 투로 물었다. 패트릭은 소파에 천천히 앉으면서 대답했다.
“그러면 위험할 겁니다. 저를 데리러 올 사람을 보내 주십시오. 키슬러 씨의 밑에 있는 사람으로 부탁드립니다.”
- 알겠네. 집 주변을 경계할 인원도 필요할 거야.
“그건 벤튼에게 지시 부탁드립니다. 저는 일단 생각을 좀 해 봐야겠습니다.”
- 그래. 벤튼에게는 내가 전화하지. 바로 내 아들을 보내겠네.
패트릭은 전화를 끊고 살금살금 침실 앞까지 가 보았다. 다행히 스튜어트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다. 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옷을 챙겨서 나오면서 스튜어트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원래 한번 잠들면 본인이 일어나기로 정한 시간 전까지는 불이라도 나지 않는 한 절대로 깨지 않는 타입이라는 건 알아도, 안전을 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조심스레 그의 빈 팔에 자신의 베개를 밀어 넣었다. 스튜어트는 웅얼웅얼 베개에 얼굴을 기대더니 패트릭의 체취가 나자 안심했는지 도로 작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습격당한 게 딜버트라는 게 무슨 의미일지를 고심하면서 그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입이 험한 딜버트가 어디에서 말실수라도 해서 패트릭을 배신할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었다. 거기에 더해 딜버트는 원래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폭발물 전문가로 유명했다. 적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을 때에는 가장 파괴력이 높다는 건 뒤집어서 말하면 근접전에서는 속수무책이라는 뜻이 된다. 경우에 따라 가장 손쉽게 제거할 수 있는 상대를 먼저 떠 본 것도 이상하지는 않은 일이었다.
배가 비어서는 아무것도 못해. 패트릭은 점점 더 복잡해져가는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고개를 홱홱 저으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빵에 무화과 잼과 크림치즈를 발라 먹으면서 그렇게 맛이 없는 건 처음이었다. 그는 손에 묻은 잼을 핥으며 스튜어트에게 쪽지를 쓰기 시작했다. 하나는 너무 장황해서 찢어 버리고 다른 하나는 오히려 너무 간단해서 찢어 버리고 나니 기운이 쭉 빠졌다. 새삼 아버지가 어떻게 이런 상황을 매일같이 이겨 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가 아주 어릴 때에 다른 마피아 패밀리와 제퍼슨 그룹이 벌였던 짧은 전쟁에 대해서는 키슬러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의 대에서 다른 조직과의 싸움이 현실로 다가올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패트릭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긴장을 풀 겸 숨겨 놓은 감자칩을 찾으러 찬장을 열었다.
이쪽은 전멸이었다. 양념 통 사이에 숨겨서 언뜻 봐서는 모양이 비슷해 들키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반투명 플라스틱 뚜껑들만 남아 있었다. 자주 쓰지 않는 큰 그릇들을 넣어 놓은 아래쪽 장도 전멸, 다용도실의 여분 세제 뒤도 전멸에 - 아직 새 세제를 뜯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여긴 왜 열어 본 걸까? - 심지어는 잡지꽂이 속에 숨겨 놓았던 봉지에 든 감자칩들까지도 모조리 발각당한지 오래였다. 아무래도 스튜어트가 하루 날을 잡아서 대대적으로 집안을 수색한 게 분명했다. 플로리다 갔을 때였을 거야. 패트릭은 어쩐지 분해져서 입술을 깨물며 이번에는 신발장에 숨겨 두었던 감자칩의 생사를 파악하러 나섰다.
분산 투자를 해 둔 보람이 있었다. 장화 안에 손을 넣자 감자칩의 딱딱한 통이 잡혔다. 그 대단한 스튜어트도 설마 장화 안에다가 감자칩을 숨겼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겠지. 패트릭은 조금 기분이 좋아져서 감자칩 통을 꺼내 팔에 끼다가 고민에 빠졌다. 여기에 하나만 숨겼었나? 목이 긴 신발들을 주로 넣어놓아서 자주 열지 않는 이 신발장에는 패트릭의 부츠와 장화뿐만이 아니라 스튜어트가 군 시절에 신던 군화까지 보관되어 있었다. 저 안에도 넣었었던가? 패트릭은 반신반의하다가 밑져야 본전이라고 거기도 한번 조사해 보기로 하고 스튜어트의 군화 안으로 손을 넣어보았다.
뭔가 딱딱한 것이 잡혔다. 여기에도 있었구나! 쾌재를 부르면서 끄집어내려던 패트릭의 손이 갑자기 멈추었다. 모양이 이상했다. 더듬어지는 윤곽은 동그란 원기둥의 감자칩 통이 아니라 훨씬 가늘고 각이 많이 지고 복잡하게 생긴, 손으로만 더듬어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패트릭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군화 속에 든 물건을 꺼냈다.
군용 권총이었다. 스튜어트가 공군에 있을 때에 쓰던 예장용 총인지 손잡이와 총신에 무늬가 들어 있어서 화려했고 제법 묵직했다. 군인 출신이고 총기 소지 면허가 있는 변호사니까 권총을 가지고 있다는 그 자체로는 이상할 게 없었지만 들어있는 장소는 사뭇 이상했다. 혹시라도 모르는 사태에 대비한다고 한다면 오히려 침실 서랍 같은 데에 넣어 놓아야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 집에 위험한 물건을 두었다가 패트릭에게 들키기 싫었던 걸까?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핸드폰의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패트릭이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자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가 30년쯤 젊어진 듯한 투로 빠르게 말했다.
- 서턴 씨, 키슬러입니다. 아파트 앞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려가겠어.”
키슬러의 아들이었다. 패트릭은 전화를 바로 끊고 서류 가방에 감자칩을 넣고 잠깐 권총을 내려다보았다. 제자리에 돌려놓는 게 옳은 일이지만 지금부터 그는 어떤 곤경에 처할지 모르는 신세가 되었다. 스튜어트가 지켜 주는 셈 치고 빌려갔다가 나중에 도로 넣어 두면 되지. 그는 침실 쪽을 힐끔거리면서 군용 권총을 가방에 숨겼다. 그리고 식탁 위에 갑자기 긴급한 회의가 생겨 오늘은 일찍 출근해야 하니 저녁 때 보자고 메모를 적었다. 그는 그대로 재킷을 걸치며 밖으로 나가려다가 자석에 이끌리는 사람처럼 허둥지둥 돌아와 메모의 맨 끝에 작은 하트를 하나 그려 넣었다.
벤튼의 수하 두 명이 아파트 근처에 배치된 것까지 확인하고 출발했다. 새벽의 워싱턴에는 차량 통행이 별로 없어 패러것에 도착하니 두 시 반이 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빌딩 입구에 있던 키슬러를 닮은 젊은 남자가 인사를 했다. 운전사와도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나누는 것을 보니 동생인 것 같았다. 키슬러네 아들이 몇 형제더라, 패트릭은 긴장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시답잖은 생각만 골라 떠올리면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앨리슨이 나와 있었다. 일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비서를 휘말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순둥이 같은 얼굴에 나름대로의 결의를 불태우고 있는 그녀를 보자 집에 가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앨리슨은 패트릭을 보자마자 구십 도로 허리를 팩 꺾어 인사를 하더니 비장하게 말했다.
“구급약과 먹을 것을 조금 준비해 두었습니다, 서턴 씨. 무슨 일이든 바깥에 내보낼 심부름꾼이 필요하실 때에는 저에게 지시해 주세요. 그리고 전 심폐 소생술도 할 줄 압니다!”
“…그 재주는 쓸 일이 없기를 기도하자. 나와 줘서 고마워.”
패트릭이 눈가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앨리슨은 그가 사무실까지 들어가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하는 듯 꼿꼿하게 서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딜버트와 키슬러가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패트릭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패트릭이 도로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괜찮아, 딜버트?”
“괜찮습니다.”
그녀답지 않게 히트 시도에서 탈출한 것 치고 침울한 표정에 말도 아끼는 투였다. 패트릭이 키슬러를 바라보았다.
“벤튼은 어디에 있습니까?”
“경호 병력을 긁어모으라고 내보냈네. 너무 기대는 하지 말게. 사업 합법화를 하면서 우리 쪽에서 전투 인원을 전부 쳐내는 바람에 당장 전쟁이 벌어진다면 전면전에 뛰어들 수 있는 사람은 서른 명도 채 안 될 거야.”
“그만큼이라도 있는 게 다행입니다. 전면전은 피하고 싶은데, 키슬러 씨 생각은 어떻습니까?”
키슬러가 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쳤다.
“크레모사 패밀리도 전면전을 원하지는 않을 거야. 그쪽은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병사를 동원할 수 있어. 피 튀기는 일에도 익숙할 테니 마음만 먹는다면 기관총 연사로 우리 그룹을 아예 워싱턴에서 쓸어버릴 수도 있겠지. 우리는 이제 거의 비즈니스맨으로의 진화를 완료해 버리는 덕분에 신사들이 되어 버렸잖나? 하지만 그런 식으로 전쟁을 벌였다가는 다른 패밀리들의 비난을 면치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경찰과 FBI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워싱턴은 다른 도시와는 달라. 여기는 미국의 수도고 우리 사무실에서 걸어서 10분만 가면 백악관이 나와. 감히 이런 동네에서 유혈 사태를 일으켰다가는 우리뿐만 아니라 크레모사 패밀리도 끝장이 나게 될 걸세.”
“지금쯤 저를 노리고 왔던 녀석이 패밀리로 돌아갔거나 최소한 연락은 했을 겁니다, 패트릭. 제가 무사하다는 걸 알면 크레모사에서 우리와 협상을 시도하지 않을까 하는 게 저와 키슬러 씨가 생각한 가능성이에요.”
딜버트가 조용히 말을 받았다. 패트릭은 책상에 걸터앉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글쎄, 뭐가 유리해서? 딜버트가 저쪽으로 넘어갔거나, 이런 말해서 미안한데, 죽었더라면 당연히 저쪽이 협상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딜버트는 히트 시도에서 벗어났고 덕분에 우린 잃은 것은 없는 채로 경계수위를 높였어. 지금 크레모사 패밀리는 우리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패를 갖고 있지 않아.”
“최소한 우리를 히트 할 능력이 있다는 과시는 했지. 크레모사는 자네를 단단히 얕보고 있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선공을 할 리가 없잖나? 저쪽은 자네가 겁을 먹었을 거라고 생각할 거야. 조만간 뭔가 제안을 할 걸세. 그 전에 물론 우리를 한 번쯤은 더 치려는 시도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하고.”
“그러니 대비해 놓는 게 좋을 겁니다.”
패트릭이 말을 맺기가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일순 사무실 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키슬러가 벌떡 일어서서 문가로 다가갔다.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접니다, 벤튼.”
“들어오게.”
키슬러가 긴장을 풀며 대답했다. 벤튼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패트릭을 보자마자 그에게로 다가와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였다.
“아파트에 두 사람으로는 모자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한 명을 더 보냈습니다, 서턴 씨. 아직 라일리 변호사께서 크레모사 패밀리에 노출이 되지 않았을 거라고 믿지만, 그래도 놈들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모르는 터라 말입니다.”
“잘 했어, 벤튼. 고마워. 여기 경호 상태는 어떻지?”
벤튼의 얼굴이 어두웠다.
“좋지 않습니다. 최대한 모은다고 모았지만 열다섯 명 남짓입니다. 크레모사에서 전면전을 시도한다면 뚫릴 겁니다.”
“그만하면 충분해. 크레모사도 남들에게 지탄받고 경찰을 적으로 돌릴 일은 하지 않을 거니까.”
패트릭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벤튼은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며 반박했다.
“하지만 대비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습니다, 서턴 씨. 제게 두 시간만 더 주십시오. 최소한 열 명은 더 모아 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게, 패트릭.”
키슬러가 말했다. 그는 수염이 꺼끌꺼끌하게 돋아난 턱을 어루만지면서 눈가를 찡그렸다.
“아무리 상식적으로 크레모사가 전면전을 펼칠 수 없다고 해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게 안전하네. 지금 우리로서는 병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그리고 벤튼, 우리 집에 애들을 보내 놓았다면 그 애들은 철수시켜도 되네. 여기를 방비하는 게 우선이야.”
“하지만 키슬러 씨, 댁에 사모님과 따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벤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키슬러가 씁쓸하게 웃었다.
“난 자네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제퍼슨 그룹 소속이었어. 우리 마누라는 아서 서턴이 워싱턴 4대 마피아 패밀리 중 하나를 분쇄하던 전쟁 당시에 집안 부엌에 총알이 날아와서 박히던 일도 겪었던 여자일세. 설사 우리 집에 크레모사의 조직원들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루이즈라면 호락호락 당하지 않아. 정 불안하면 한 명만 남겨 놓고 다 이리로 보내게.”
“…알겠습니다.”
벤튼이 대답을 하면서 패트릭을 돌아보았다. 패트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키슬러 씨 댁의 호위 인원을 최소한도로 남기고, 자네가 모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좀 더 모아 오도록 해. 힘들겠지만 노력해 줘.”
“걱정 마십시오, 서턴 씨.”
말과 함께 짧은 경례를 마치고 벤튼이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다. 패트릭은 한숨을 쉬며 방에 남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의 중간 보스들은 지금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버팀목들이었다. 거기에 심폐 소생술을 할 수 있는 앨리슨을 추가할까. 패트릭은 애써 마음을 가볍게 가지려고 노력하다가 아까부터 표정이 영 좋지 않은 딜버트에게 말을 걸었다.
“자세히 좀 들어 볼까, 딜버트. 정말로 괜찮은 거야? 어딜 다쳤지?”
“무릎이 좀 까진 정도입니다, 패트릭. 걱정하실 것까진 없어요.”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는데 걱정을 안 하는 게 이상하지. 앨리슨에게 차라도 한 잔 가져다 달라고 하면 어때? 아무리 자네가 천하의 딜버트라지만 지금 상태가 안 좋아 보여.”
농조로 건넨 말에도 딜버트는 웃지도 파르르 떨며 반응하지도 않았다. 딜버트가 그렇게 암울한 표정인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키슬러의 책망하는 표정에 깊은 한숨만 쉬었다. 패트릭이 떨떠름하게 웃었다.
“데자뷰인가.”
“뭐가 말인가?”
“FBI에 협조하러 플로리다에 갔을 때에 로즈 아널드가 딱 저러고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고개 숙이고 앉아서 혼자 침통해하는 거 말입니다. 딜버트, 딜버트마저도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딜버트가 고개를 홱 들어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상대가 에밀리 딜버트이니만큼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황 따위는 패트릭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얼굴에는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표정이 또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제 탓입니다, 패트릭. 제가 회합 장소에서 말실수를 했습니다. 크레모사 패밀리가 우리 그룹 내에서 패트릭이 제대로 대장 대접을 못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전적으로 제가 혀를 함부로 놀린 탓이에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전쟁은 전부 제 책임입니다.”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
패트릭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앉아서 머리를 뒤로 젖히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딜버트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는 여지를 주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크레모사 패밀리의 헤로인 비즈니스 제의를 몇 번이나 거절하고 사업 전면 합법화 방침을 선언했을 때부터 그쪽에서는 나를 만만히 보고 우리 영역을 넘보아 왔을 거야. 물방울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고 어쩌다가 자네가 운이 나빠서 물을 넘치게 하는 마지막 한 방울 역할을 해 버린 거지 에밀리 딜버트라는 사람이 이 사태를 일으킨 건 아냐. 자책할 여력이 있으면 그 힘으로 나를 도와줘. 나에게는 내 중간 보스들의 도움이 필요해.”
“…시킬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딜버트의 목소리에 좀 무서울 정도의 결의가 실렸다. 아직 아버지가 살아 계시고 패트릭이 딜버트를 에밀리 누나라고 부르던 옛날에 난생 처음으로 그녀를 따라 화장품 한정판 출시일의 매장에 갔다가 그녀의 야수성을 제대로 목격했던 경험이 떠오르는 말투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딜버트는 그의 아랫사람이 되었지만 그때 보았던 딜버트의 엄청난 돌진력과 매서움은 잊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패트릭은 저도 모르게 조금 떨면서 대답했다.
“지금은 일단 진정해.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논의해 보자고.”
새벽 다섯 시가 되었다. 세 사람은 앨리슨이 가져온 커피와 크루아상으로 요기를 하고 회의를 계속했다. 벤튼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크레모사 패밀리도 연락을 해 오지 않아서 상황은 지지부진했다. 그래도 벤튼이 어느 정도 사람을 모으는 데에 성공했는지 아래층에서 중간 상황을 보고하러 올라온 키슬러의 아들이 호위 인원이 다섯 명 늘어났다고 알려 왔다. 키슬러의 아들은 이번에도 딜버트에게서 쉽사리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키슬러에게 야단을 맞고서 부리나케 사무실을 나갔다. 딜버트가 한숨을 쉬었다.
“젠장. 그거 알아요, 패트릭? 나 화장 안 하고 출근한 거 이번이 처음이라는 거. 지금 많이 이상해 보이지 않죠?”
악마의 질문이었다. 화장을 하지 않는 편이 예쁘다고 해 주면 그 많은 화장품을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사들인 딜버트의 노력을 무시하는 셈이 되고, 그렇다고 화장을 하는 편이 더 낫다고 해 주었다가는 오늘이 바로 패트릭의 제삿날이 될 참이었다. 패트릭은 당황을 감추려고 종이컵을 얼굴까지 들어 올리면서 화살을 키슬러에게로 돌렸다.
“키슬러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 나?”
키슬러가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패트릭을 바라보았지만 이미 딜버트의 눈이 그에게로 향한 후였다. 키슬러는 짐짓 딴청을 부리면서 일어서더니 창가로 다가가서 괜히 연인 조각상을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사실은 창밖을 보는 시늉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았지만 연인 조각상이 정통으로 창문을 가리고 있어서 창문 앞에 서기란 불가능했다. 그는 공연히 너스레를 떨었다.
“하늘이 파르스름하구먼. 아직 해 뜨려면 멀었지만 동은 터 오는 것 같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키슬러 씨?”
“그게, 나는 말이지….”
키슬러가 돌아서다가 바닥에 늘어져 있던 블라인드 조절 끈을 밟는 바람에 블라인드가 출렁거렸다. 흔들리는 나무 블라인드는 대리석 조각상에 부딪쳐서 탁탁 소리를 냈고 그 너머로 파란 빛에 감싸인 워싱턴의 사무실 빌딩들이 잠깐이나마 보였다. 키슬러는 소파 쪽으로 되돌아오면서 말했다.
“이걸로 대답을 대신해도 될까? 내가 내 아들놈들에게 단단히 말해 두었어. 에밀리 딜버트는 감히 네놈들이 넘볼 수 있는 여자가 아니니까 허튼 수작 부리지 말라고….”
키슬러는 말을 맺지 못했다. 쨍그랑, 그리고 끔찍한 퍽 소리와 함께 백색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딜버트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패트릭을 감싸면서 두 사람 다 바닥으로 굴렀다. 키슬러의 짧은 외침과 함께 사무실의 문이 우당탕 열렸다. 앨리슨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키슬러 씨! 세상에, 구급약 가져올게요!”
카펫 위로 나뒹굴며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던 패트릭이 눈을 떴다. 딜버트가 아직도 그를 감싸고 있어서 늘어진 소매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딜버트의 팔을 밀어내고 앞을 보았다가 신음을 흘렸다.
키슬러가 소파에 기대어 주저앉아 한 손으로 이마를 누르고 있었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다가 패트릭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를 마주 보더니 사납게 미소를 지었다. 손가락을 타고 손목으로 가늘게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앨리슨이 쿵쿵거리고 뛰어 들어와 키슬러에게 달려가려고 하자 그가 손을 들어올렸다.
“창가 근처로 오지 말거라, 얘야.”
꼬장꼬장한 목소리가 그대로인 것이 크게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앨리슨이 얼음처럼 굳어 버리자 그가 이번에는 좀 더 상냥하게 웃었다.
“밖에서 공격한 자가 아직도 창가를 노리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 거기 있어라. 붕대하고 약만 이리로 굴려다오.”
앨리슨이 겁먹은 얼굴로 자세를 낮추어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키슬러는 앨리슨이 굴려 준 머큐로크롬 통을 잡으면서 패트릭을 바라보았다. 패트릭에게서 떨어진 딜버트가 입을 조금 벌리고 창문을 올려다보더니 얼빠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돈 잘루치께 감사 전화하세요, 패트릭.”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걸.”
패트릭이 자세를 바로잡으며 대답했다. 창가에 서 있던 연인 조각상 중 남자의 머리는 산산조각이 나 날아가고 없었다. 사무실의 검은 카펫 위로 박살난 파편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하필 조각상에서 가까운 자리에 서 있다가 파편이 이마를 스친 키슬러를 제외하고는 다친 사람은 없었고, 키슬러도 살갗이 조금 찢어진 정도에 불과한 듯했다. 키슬러가 소독약을 바르느라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나, 이 조각상에서 남자 쪽이 은근히 자네를 닮았다고.”
“키드도 바깥에서 절 기다릴 때에 창가에 실제로 사람이 서 있는 걸로 알았다고 했었습니다. 크레모사가 무슨 짓을 벌일지는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저를 저격할 거라고까지는….”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거 없어. 크레모사 패밀리에서 우리 조직과 협력해 헤로인 비즈니스를 확장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거기에 제일 걸림돌이 되는 게 자네라는 건 당연한 일이지. 이건 자네가 미워서가 아니라 사업을 좀 더 원활히 하기 위해서 비즈니스맨의 마인드로 벌인 짓이야.”
“무서운 비즈니스군요.”
키슬러가 날카롭게 받아쳤다.
“자네가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를 절대 잊지 말게, 패트릭! 제퍼슨 그룹을 합법화시켰다고 해서 자네 주변의 사람들까지 전부 다 물갈이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우리는 아직도 마피아들 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이고 시칠리아 이민자 놈들은 아직 그들의 방식을 바꾸지 않았어. 자넨 좀 더 독해져야 해.”
두 사람이 말을 하는 동안 딜버트가 카펫 위를 기어 다니며 요모조모 수색을 했다. 그녀는 곧 대리석 파편 틈에서 뭔가를 집어 들었다.
“총알 발견했습니다.”
“어떤 종류인가?”
키슬러가 묻자 그녀가 키슬러에게로 총탄을 던져 주었다.
“전 몰라요. 전문가께서 보시죠.”
나이 든 전직 저격수는 그녀가 던져 준 총탄을 공중에서 홱 낚아챘다. 그는 총알을 한 바퀴 돌려 보더니 혀를 찼다.
“저격용 라이플에서 나온 건데 총알은 못 알아볼 정도로 망가졌어. 대리석을 쐈으니 총알이라고 무사할 수는 없었겠지. 패트릭, 놈들은 아마 아직 자네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신을 못 하고 있을 거야.”
“우리 쪽은 그래도 이걸로 확실하게 알게 된 게 하나 있습니다. 현재 제퍼슨 그룹의 우두머리를 제거했을 때 차기 우두머리를 노림 직한 사람이 크레모사의 영향력 하에 있다는 것 말입니다.”
패트릭이 나직하게 말했다. 키슬러가 침통한 소리를 냈으나 부정은 하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능성이었지만, 퍼즐의 조각은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어제 키드가 조카에게 장난감을 사서 선물하러 다녀온 길에 형이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외국인 같아 보였다던데 이탈리아 이민자 2세대 정도까지는 그 녀석에게는 외국인으로 보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유감이네. 조셉이야 언제나 말썽의 중심에 있기는 했지만 자기 조직을 버리고 남의 패밀리의 후원을 받으려고 하다니….”
“말씀하신 대로 비즈니스입니다. 형은 지금 구직중이거든요.”
패트릭이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나에게 유리한 대로만 말해 주었다. 소심한 편인 조셉에게는 지난 주말 패트릭이 던졌던 말들이 위협으로 들릴 소지가 분명히 있었다.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을 예상했더라면 형에게 그렇게까지 심한 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텐데. 어쩌면 그때 벌써 크레모사가 형을 흔들어 보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아니, 그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후회 같은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지금 제퍼슨 그룹이 패트릭의 것이고, 설령 가족이라 해도 그 테두리 안에 남아 있기 위해서는 패트릭의 방침과 생각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주지시킬 필요가 있었던 일이다.
어차피 곪아 터질 상처였다면 조셉이 내부에 있는 상태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보다 외부에 있어서 조직원들이 심적으로 적으로 돌리기 더 용이한 상태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나았다. 그래도 쉽게 상황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닌지라 가슴이 자꾸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패트릭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려고 스튜어트를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갑자기 끼어든 중저음의 목소리에 세 사람의 시선이 한꺼번에 사무실 문가로 향했다. 벤튼이 당황한 얼굴로 서서 난장판이 된 사무실 바닥과 부서진 조각상, 이마에 붕대를 감고 있는 키슬러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패트릭이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저격 시도가 있었어. 우리 쪽의 피해는 돈 잘루치의 조각상이고.”
바닥에 흩어진 파편과 머리가 날아간 연인 조각을 본 벤튼의 얼굴에 놀람과 이해가 번갈아 왔다 갔다 했다. 그는 잠시 문가에 굳어 있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맙소사, 정말로 다행입니다, 서턴 씨! 저걸 창가에 세워 두기 잘했습니다.”
“그러게나 말이야. 돈 잘루치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겠어. 생명의 은인이 되어 주셨잖아.”
벤튼이 고개를 끄덕이며 카펫 위의 크고 작은 대리석 파편과 돌가루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무심코 카펫 위의 조각 하나를 주워 들었다가 입을 열었다.
“아래쪽의 경계를 더 강화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격수를 추적할까요?”
“아마 추적하기 쉽지 않을걸. 이미 달아났을 거야. 하지만 아마 주변에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확인하려는 인원들을 깔아 두었을 테니 내려가서 소란 좀 부려. 내가 멀쩡하다는 걸 크레모사 놈들이 알게 해야 해. 무슨 수작을 부려도 이쪽을 무너뜨릴 수는 없단 걸 보여 줘. 다만 혹시라도 마찰이 일어날 것 같으면 바로 퇴각해. 전면전으로 돌입하면 승패를 떠나 전쟁을 촉발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워싱턴 사법부를 적으로 돌리는 셈이 되니까.”
“알겠습니다.”
“저도 갈게요.”
딜버트도 일어섰다. 패트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 키슬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창문 너머를 아주 슬쩍 내다보더니 패트릭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자넬 다치게 할 수는 없어. 자넨 아서 서턴의 아들이고 흑표범 패트릭 서턴이야. 크레모사 놈들이 백 명이 한꺼번에 온대도 자네는 무사할 걸세.”
패트릭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무사해야 합니다. 오늘 저녁에 일찍 들어가서 키드와 가을 휴가 계획을 짜기로 했거든요. 그 약속을 지켜야 하니 전 털끝 하나 다쳐서는 안 됩니다.”
***
시드니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출근길에 그를 미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자기들 딴에는 비밀스럽게 쫓아오고 있는 것 같았지만 현장에서 이골이 난 시드니 요원이 시답잖은 추격자들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놀아 볼까. 시드니는 놈들이 탄 은색 볼보가 적당히 따라오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어 우회전을 하고 그 다음 골목에서는 유턴을 해서 강변도로를 탔다. 그대로 화이트허스트 파크웨이까지 가는 내내 추적자들은 영문도 모르고 그를 쫓아왔다.
지각하겠군. 그는 혀를 한 번 차고 조지타운을 지나 거의 국립 대성당까지 올라갔다. 그 근방은 출근하는 차량이 별로 없어서 속도전을 펼치기에 딱 좋았다. 그는 성당 앞을 지나면서 갑자기 액셀을 세차게 밟으며 기어를 바꾸었다. 차가 미친 듯한 속도로 후진을 시작하자 뒤쫓아 오던 놈들이 놀라 그와 부딪치지 않으려고 차선을 바꾸어 옆으로 빠졌다.
시드니는 그대로 기어를 주행으로 놓으면서 핸들을 홱 틀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트릭, 차량 180도 회전 주행이었다. 그렇게 차의 방향을 반대로 바꾼 그는 유턴을 하느라 늦어지는 추격자들을 피해 홀푸즈 마켓과 지붕이 낮은 집들이 늘어선 주택가를 질주했다. 골목을 마구 타고 요리조리 운전을 해 포토맥 강변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따라오던 은색 볼보는 그를 완전히 놓치고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한숨을 쉬고 도로 다운타운의 FBI 본부로 향했다.
추적자는 따돌렸어도 지각은 면치 못했고, 시드니의 지각을 애꿎은 올랜도의 탓으로 몰며 불쌍한 신입만 몰아세우고 있던 웰링턴이 시드니를 보자마자 바가지를 긁기 시작했다. 도망치려고 하자 웰링턴이 서류 파일을 날렸다.
출장 보고서. 뉴욕에 다녀온 영수증을 제출하라는 내역에 시드니는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이렇게 자주 파견을 내보내는 요원쯤 되면 매번 출장 보고서를 작성하게 하는 잡무 정도는 좀 덜어 주어도 되는 거 아닌가? 그는 병아리처럼 쫑쫑 따라오며 오늘도 웰링턴이 괴롭혔다고 일러바치는 올랜도를 꼬리마냥 달고 자리로 돌아와 그에게 출장 보고서 작성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느긋한 점심 식사는 출장 보고서를 두 시까지 제출하라는 지시에 이미 물 건너갔다. 시드니는 핫도그나 사와서 먹을 생각으로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장래 희망이 시드니의 그림자인지 올랜도도 냉큼 따라왔다. 올랜도가 일을 배우는 스타일이 성실한 걸 보면 잘 키우면 좋은 요원이 될 게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올랜도는 서류 작성을 싫어하지 않았다. 잘 끼고 다녀야지. 시드니는 올랜도에게 핫도그를 사 주는 대가로 출장 보고서를 맡겨 버릴 궁리를 하며 그를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올랜도는 치즈 핫도그를, 시드니는 칠리 핫도그를 골랐다. 올랜도가 한사코 거절을 하는데도 시드니는 핫도그 값을 지불하고 자기가 사 주는 거라고 우겼다. 그는 올랜도가 고작 치즈 핫도그 하나에 감동하는 얼굴이 되어 버리는 것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내가 부탁할 게 있어.”
“말씀하십시오, 선배님!”
태도 좋고. 올랜도는 성실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시드니를 응시했다. 시드니는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면서 슬쩍 운을 띄웠다.
“오늘 출장 보고서 말이야, 자네 다 쓰면 나 좀 보여 줘. 내가 다른 일도 많아서 그래.”
“뭐 보여드릴 게 있습니까, 선배님 것도 제가 쓰겠습니다! 선배님은 선배님 하셔야 하는 일 하십시오.”
단번에 낚인 올랜도가 가슴을 팍팍 치면서 자신 있게 말했다. 이 녀석도 어디 가서 잘 속고 다닐 타입일세. 시드니는 진심으로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일 맡겨서 미안해. 자네가 고생이다.”
“아닙니다, 선배님. 전 서류 작성 좋아합니다.”
시드니가 좀 더 격려의 말을 하려는데 핸드폰의 벨소리가 울렸다. 웰링턴이었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도 될 텐데 굳이 전화를 건 걸 보면 뭔가 긴급 사태가 터진 모양이었다. 그는 올랜도가 대화 내용을 들어도 될지 확신이 없어서 올랜도더러 먼저 들어가라고 하고 길가에 멈추어 섰다. 올랜도는 그가 가족의 전화를 받는다고 생각했는지 활기차게 인사를 하고 본부로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급해?”
시드니와 오래 일한 웰링턴은 서론 따위는 챙기지 않았다.
- 급해. 워싱턴 마피아 패밀리들끼리 전쟁이 나려는 것 같아. 새벽에 크레모사 패밀리가 제퍼슨 그룹의 우두머리를 히트하려고 했어.
시드니는 의아한 얼굴로 우뚝 멈추어 섰다. 그는 버릇처럼 핸드폰을 다른 손으로 바꾸어 들며 물었다.
“제퍼슨을? 왜? 거긴 전쟁 날 만한 애들이 아니잖아.”
- 크레모사가 안 그래도 요즘 좀 날뛰더니 멋도 모르고 제퍼슨을 약골로 보고 자기네 밑으로 흡수해서 제퍼슨네 세력권을 먹으려고 하는 거 같아. 패러것에서 저격이 있었다니까 지금 당장 탐문 좀 나가봐. 지금 이쪽으로 리소스 모으고 있으니까 혼자 가는 거 아냐. 곧 지원 병력 보내 줄게.
“아니, 필요 없어. 사람 많으면 움직이기 무거워. 혼자 갔다가 금방 오지.”
시드니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웰링턴이 물었다.
- 괜찮겠어? 거기 상황이 정확하게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아무도 몰라. 위험할 수도 있어.
“괜찮아. 너무 캐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실례합니다.”
통화중인데 대체 누가 말을 거는 거지? 고개를 돌린 시드니의 얼굴이 굳었다. 그를 마주하고 선 남자는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고, 한 눈에 보아도 남부 유럽인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시드니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 시간 좀 내 주시겠습니까?”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스치고 올라갔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지극히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등 뒤에는 검은 시보레가 주차되어 있었고 운전석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차 안에서 체구가 커다란 두 남자가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전화 너머에서 웰링턴이 그를 불렀다.
- 왜 말을 끊고 그래, 그래서 지금 당장 갈 거야?
시드니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래. 좀 이따가 얘기하자고, 하워드.”
- 어? 잠깐, 왜 그래? 뭐야? 무슨 일 있….
바깥에서 본부와 통화할 때에 상대방의 본명을 불러서는 안 되는 원칙. 무슨 일이 생겼음을 알아차려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웰링턴은 똑똑한 사람이니 벌써 부서에 경계경보를 울리고 있을 것이다. 시드니는 남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남자가 상냥하게 말했다.
“패트릭 서턴 씨의 일로 잠깐 이야기를 좀 나누었으면 합니다, 스튜어트 라일리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