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2)

회합은 워싱턴 시 북부에 있는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서 열렸다. 마피아와 아이리시 갱이 정상 회담을 여는 자리이기에는 아이로니컬한 장소였지만, 시칠리아 출신의 마피아 패밀리와 아일랜드 출신의 갱단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두 집단 모두 핵심 구성원은 독실한 가톨릭교도라는 점이었다. 만에 하나 회담이 최악의 결과로 치달을지라도 가톨릭교도들이 감히 성역에서 폭력 사태를 일으킬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 패트릭의 계산이었다.

워싱턴 교구 사제단의 의장은 패트릭의 아버지인 아서 서턴이 제퍼슨 그룹의 수장이던 시절, 아직 제퍼슨 그룹이 거친 사내들로 붐비고 유혈 사태를 마다하지 않던 그때부터 아서 서턴에게 법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올 것을 거듭 권하던 나이든 신부였다. 그는 아서 서턴이 제퍼슨 그룹의 불법적인 사업을 접기 시작하자 몹시 기뻐했고, 패트릭이 그 노선을 계승하기로 결정하고 제퍼슨 그룹원의 폭력 행위나, 도박, 매춘, 마약 등의 사업에 손을 대는 것을 엄중하게 금지하자 서턴 가문에 깊은 호의를 품게 되었다.

그는 대성당에서 개최하는 티타임 투어를 할 때 관광객들이 간단한 다과를 드는 첨탑 상층부의 필그림 옵저베이션 갤러리를 빌려주고 성당의 다른 관계자들이 회합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도록 모임의 비밀을 보장해 주었다.

패트릭은 벤튼과 딜버트, 키슬러 세 사람을 데리고 가장 먼저 필그림 옵저베이션 갤러리에 도착해 다른 사람들을 기다렸다. 수행원까지 포함해서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나이를 따져 보았을 때에 패트릭은 가장 어린 축에 들었다. 그러나 다른 패밀리의 대부들과는 사업적으로 몇 번의 회담을 가져 이미 어느 정도 안면을 익히고 말을 섞은 사이였다. 심지어 크레모사 패밀리의 대부 산티노 크레모사와 비교하면 조직의 수장 경력은 더 길기까지 했으니, 나이가 젊다고 해서 권위가 딱히 밀릴 일은 없었다.

워싱턴의 3대 패밀리의 수장들은 소규모의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속속 도착했다. 보통의 회합에서는 수행단의 규모로 서로의 자존심을 누르려는 기싸움이 왕왕 벌어지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회의 장소가 성당으로 정해지는 바람에 다들 절제하는 분위기였다. 외양으로 보기에는 어느 패밀리의 대부나 다들 마음씨 좋은 이탈리아 이민자 혈통의 할아버지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그들은 제퍼슨 그룹이 불법 사업에서 손을 뗀 이래로 워싱턴에서 벌어지는 각종 더러운 사업들을 나누어 갖고 있는 강력한 인물들이었다.

가장 세력이 강한 프로파치 패밀리의 대부는 점잖고 세련된 사람으로, 뉴욕의 잘루치 패밀리와 사돈지간이어서 돈 잘루치와 사이가 좋은 패트릭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는 다른 패밀리들보다 먼저 도착했고 패트릭에게 결혼기념일이 얼마 전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패트릭은 이탈리아인들이 하는 대로 그와 얼싸안아 인사를 나누면서 이 사람마저 이탈리아식 선물을 보내면 어쩌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 다행히 프로파치는 패트릭에게 조만간 질 좋은 이탈리아 와인을 한 상자 보내겠다고 약속해서 그의 시름을 덜어 주었다.

두 번째로 도착한 것은 디피데 패밀리의 대부였다. 디피데 패밀리는 오늘 회합에 초청된 패밀리 중 가장 세력이 작았고 워싱턴보다는 버지니아 쪽에 더 큰 지분을 두고 있었는데, 대부의 입김이 약해서인지 아니면 리더십이 부족해서인지 자신의 부하들을 잘 통제하지 못해 버지니아 지역에서 조직원들이 멋대로 횡포를 부리며 폭력 사건을 벌이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래서 다른 마피아 패밀리들은 그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디피데는 패트릭과 악수를 하며 오늘 회담에 초청해 주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인사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 디피데 패밀리를 워싱턴의 주요 세력으로 인정해 주어 기쁜 눈치였다. 패트릭은 그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워싱턴 내에서 마약 사업을 하고 있는 패밀리는 전부 초청해야 했었던 입장이었기에 적당히 친절하게 대답을 했다. 패트릭이 디피데 패밀리에 우호적이라는 인상을 주어 해로울 것이라고는 없었다.

눈치 빠른 디피데는 패트릭이 돈 프로파치와 나눈 이야기를 엿들었는지 마찬가지로 결혼기념일 축하의 말을 덧붙이며 자신도 선물을 보내겠다고 했는데, 프로파치와는 달리 무엇을 보내겠다는 말을 하지 않고 자리로 가 버려서 패트릭을 불안하게 만들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크레모사의 대부가 왔다. 크레모사 패밀리는 제퍼슨 그룹과는 정 반대의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제퍼슨 그룹이 불법적인 사업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는 것과는 달리 워싱턴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서 법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일이라면 크레모사의 관심사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2년 전, 기나긴 패밀리의 내전을 종결짓고 마침내 염원하던 대부의 호칭을 손에 넣은 그는 도박과 매춘, 마약, 몇 가지의 흥행업과 심지어 스포츠 경기 결과 조작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넓은 분야에 발을 뻗고 있었으며 최근에는 워싱턴에서 제일 강력하다는 프로파치 패밀리의 세력을 누르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소문까지 들리고 있었다.

아직 우두머리 자리에 오래 있었던 게 아니라 그런 대제국 건설의 야망이 다른 패밀리들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에 대한 경계심이 희박한 것이 그의 흠이었다. 최근의 소문 때문인지 크레모사와 프로파치는 서로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표정이 냉랭했다.

일반적으로 회합은 사업상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거나 패밀리들 간에 전쟁이 터졌을 때에 중재를 위해 열리는 정도였다. 그래서 참석자들은 일반적으로 안건에 대해서는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러나 패트릭은 제퍼슨 그룹의 전 비서가 마약 중개책으로 체포되었다는 말에 다른 패밀리들의 대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관찰하기 위해 일부러 안건을 알리지 말고 초청장을 돌리도록 지시했다.

다들 패트릭이 무슨 생각으로 회합을 주선했는지 탐색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패트릭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차와 과자를 먼저 권하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성당에서는 작은 케이크들과 샌드위치, 스콘, 크림과 각종 잼들을 준비해 주었다.

네 사람의 세력가들이 원탁에 둘러앉아 마음에도 없는 날씨 이야기며 슈퍼볼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벤튼과 딜버트를 비롯한 일반 수행원들은 갤러리를 나갔고 제퍼슨 그룹에서 가장 중요한 조언자 위치에 있는 키슬러만이 패트릭 뒤쪽의 의자에 앉았다. 다른 패밀리의 조언자들도 대부의 뒤쪽에 마련된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회합의 전형적인 모양새가 갖추어지자 패트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갑작스럽게 요청한 모임에 모두들 나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최근 워싱턴에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어째서 느닷없는 회담이 필요한 것인지 궁금해하시리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여러분께 여기까지 와 주시기를 청한 것은 우리들 사이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깥에서 일어난 다른 문제 때문에 여러분께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해 사전에 알려 드리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모두 진지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 돈 프로파치가 뒤에 앉아 있는 수행원에게 손짓을 하자 그가 주전자를 가져와 대부의 잔에 홍차를 더 따라 주었다. 패트릭은 프로파치가 차를 한 모금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은 그만두었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퍼슨 그룹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이 플로리다에서 마약 거래 건으로 체포되었습니다. FBI는 이 친구가 워싱턴에 있을 때부터 헤로인 비즈니스에 연관이 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이 친구를 이용해서 이 기회에 워싱턴의 마약 사업을 대대적으로 단속하려는 것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퍼슨 그룹은 마약에 관여하지 않으니 상관없지만, 여러분은 당분간은 추이를 지켜보면서 해당 비즈니스 관련으로는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시는 편이 적절할 듯합니다.”

좌중이 술렁거렸다. 디피데 패밀리의 조언자는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쭉 뺐다가 대부에게 물러나라는 경고를 듣기까지 했다. 다들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으나 가장 먼저 질문을 던진 사람은 돈 크레모사였다.

“언제의 일입니까?”

“체포는 지난주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중에서 코카인을 다루는 분은 계시지 않은 것으로 알지만,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지난 금요일에 뉴욕에서 콜롬비아의 거래 라인을 쥐고 있던 코카인 업자가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FBI에서 그물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더군요.”

크레모사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설마 했는데 아무도 모르고 있던 사이에 몰래 뉴욕 쪽에 커넥션을 깔아 코카인에도 손을 댔었던 모양이었다. 거기에 대해 파헤치는 것은 이번 회합의 목적이 아니었다. 마약 비즈니스계에서의 세력 다툼에는 지분이 없으니 입을 놀릴 필요도 없다. 패트릭은 점잖게 못 본 체 눈을 돌렸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홍차의 향을 맡고 있던 돈 프로파치가 조용히 물었다.

“돈 서턴, 서턴의 패밀리는 마약을 다루지 않는 것으로 아오. 이번에 체포당한 그 자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마약 거래에 뛰어들었는지는 파악했소?”

나야말로 그게 궁금해. 가장 중요한 동시에 가장 답하기 힘든 질문이었다.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고 고백을 하면 그룹의 정보력이 얕보일 것이고, 그렇다고 안다고 허세를 부리자니 어떤 결과가 빚어질지 장담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패트릭은 순간적으로 마음을 굳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굳이 이름을 입에 올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위험을 경고하러 여러분을 초청한 것이지 시비를 걸기 위해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이해하오.”

돈 프로파치가 턱을 숙이며 대답했다. 낮은 웃음소리가 억지로 쥐어짜듯 흘러나왔다가 힘없이 사그라졌다. 갤러리의 온도가 그 대화로 몇 도는 순식간에 뚝 떨어져 버린 것 같았다. 그 자리에 모인 대부들은 모두 패트릭이 마약 거래 반대 노선을 걷고 있으며 조직원 중 마약에 손을 대는 자가 있거든 엄중하게 처벌한다는 사실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말이야 시비를 걸 생각이 없다는 식으로 했지만 제퍼슨 그룹의 조직원을 헤로인 비즈니스에 끌어들였다가 체포까지 당하게 만든 주범을 그 수장이 알고 있다는 것은 사실상 위협이나 다름없었다. 돈 크레모사가 작은 샌드위치를 가져다가 먹지는 않고 관찰만 하더니 대뜸 물었다.

“돈 서턴, 역으로 기회가 될 수 있지 않겠소? 제퍼슨 그룹은 정말로 앞으로도 마약 사업에는 참여하지 않을 생각입니까?”

패트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러분께서 몇 번이나 저에게 수익성이 좋은 사업을 권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호의에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마약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 역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큰돈을 만질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위에서 아무리 통제를 해도, 그런 일에 개입하지 말라고 보수를 좀 더 주어 보아도 개중에서 몇은 투자 대비 리턴이 엄청나다는 데에 눈이 멀어서 반드시 제 말을 어기고야 맙니다. 저는 거기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하는 것으로 원칙을 잡고 있고요. 저는 이 워싱턴에서 마약 거래를 하는 집단이 하나 더 늘어나면 도시에 더 큰 혼란이 초래될 거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어떤 비즈니스를 하라고, 혹은 하지 말라고 제안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제퍼슨 그룹의 사람은 마약을 다루지 않습니다. 만일 마약을 다루는 사람이 있다면 철저하게 처벌합니다. 이 원칙은 결코 깨질 일이 없을 겁니다.”

사실상의 경고였고, 그것이 패트릭이 오늘 이 자리에서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워싱턴 3대 패밀리의 대부들은 모두 험한 세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니 그의 말을 알아들었을 것이었다. 제퍼슨 그룹의 사람은 마약 거래에 연관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누군가가 제퍼슨 그룹의 사람을 헤로인 비즈니스에 끌어들였다. 다른 패밀리들이 내부에서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내부에 그치는 이상은 그의 소관이 아니지만 제퍼슨 그룹의 사람이 연루되어 버린 이상 이런 일이 또 다시 일어났다가는 잠자코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였다. 점차로 싸늘해지는 분위기를 풀어 준 것은 디피데 패밀리의 대부였다.

“우리의 사업 영역이 서로 겹치지 않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로써 불필요한 전쟁을 벌이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뉴욕 패밀리들처럼 밤이 되면 로워 이스트사이드에서 총질을 하고 야구 방망이로 싸움판을 벌이다가 경찰에 쫓기는 짓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 건 뉴요커들이나 하라지요. 우리는 세련된 워싱턴 정치가들이 아닙니까?”

재치 있다고 할 수는 없는 농담이었지만 마침 모두에게 웃을 거리가 절실하던 차였다. 장내에 예의바른 웃음이 퍼졌다. 돈 디피데는 거기에 기운을 얻었는지 이탈리아 억양이 강한 말투로 말을 계속했다.

“우리에게 좋은 정보를 전달해 주기 위해 이렇게 회합을 소집해 준 돈 서턴에게 감사드립니다. 당분간 워싱턴에서 눈에 띌 수 있는 거래나 운반은 삼가도록 하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도록 합시다. 돈 서턴이 우리에게 경고를 해 주었는데도 조직원 중 누군가가 체포당한다면 그 패밀리는 얼간이라고밖에 할 수 없겠지요.”

“돈 서턴은 경찰과 법조계에 넓은 인맥을 자랑하고 있지요. 워싱턴에서의 우리의 비즈니스가 위험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 줄 용의는 없습니까?”

크레모사가 물었다. 등 뒤에서 키슬러가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혀를 찼다. 패트릭은 신중한 투로 대답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세력 범위 내에서 벌이는 사업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권리를 지니고 계신 것처럼, 저 역시 저의 세력 범위 내에서 존중을 받고 싶습니다. 제가 인맥이 있다고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인맥이란 보잘것없고 저는 아직 젊어 남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인물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 세력권, 즉 워싱턴 동부 지역에서 마약 거래를 자제해 달라던 저의 옛 부탁을 들어주시는 분이 계시다면 저 역시 보호를 제공할 용의가 있습니다.”

패트릭의 반격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지금까지 패트릭은 제퍼슨 그룹의 세력권에서 다른 패밀리들이 벌이는 소규모의 마리화나나 크랙 거래는 묵인해 왔었다. 제퍼슨 그룹은 워싱턴 동부 지역에서 시작해서 패러것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온통 사무실과 회사밖에 없는 패러것은 포기한다 쳐도 저가의 아파트와 타운하우스가 밀집해 있어서 인구가 많은 동부 지역에서의 사업을 포기했다가는 마약 사업의 수익이 뚝 떨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돈 프로파치가 입을 열었다.

“그 제안에 대해서 나는 숙고해 볼 용의가 있소. 하지만 여기서 답을 하기에는 무거운 문제 같으니 돌아가서 내 고문들과 상의해 볼 시간을 주었으면 하오.”

“그러십시오.”

패트릭은 그의 말을 경청하면서도 돈 크레모사가 뒤에 앉은 수행원에게 귓속말을 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크레모사 패밀리의 조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듣더니 크레모사가 도로 테이블에 양 팔꿈치를 올려놓자 조용히 일어서서 갤러리를 빠져나갔다.

회담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회합의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을지언정 평소에 이렇게 다 같이 모이기가 쉽지 않은 인물들이 기왕 모인 김에 다른 일들도 곁들여 논의하는 셈 치고 좀 더 대화를 나누어 보자는 데에 모두가 의견을 같이했다. 샌드위치와 차를 마실 휴식 시간이 잠깐 주어지는 동안 패트릭은 스튜어트에게 점심 전화를 하느라 지상층까지 내려가 버렸다. 딜버트와 벤튼이 갤러리 바깥에 앉아 크랜베리 주스와 초콜릿 칩 쿠키를 놓고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갑자기 한 청년이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제퍼슨 그룹 소속이지, 아가씨?”

딜버트의 눈썹이 대번에 꿈틀거렸다.

“새파란 게 어디다 대고 아가씨래?”

청년이 웃으면서 손을 들어올렸다.

“어이쿠, 죄송, 죄송. 무서운 미인이네.”

원래 성격대로라면 꺼지라고 내뱉었겠지만 눈앞에 선 청년은 크레모사 패밀리의 수행원이었다. 회합 장소에 수행원으로 올 정도면 패밀리 내에서의 지위도 제법 있을 것이고, 아무리 인생의 모토가 자유인이라지만 성당 안에서 난동을 부려서는 안 되며 더군다나 회담 중에 상대방의 수하를 묵사발 내어서는 안 된다는 정도는 성질 급한 딜버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못 들은 척 팔짱을 끼고 시선을 돌려 버리자 청년이 넉살 좋게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런 젊은 미인이 카포레짐이라니, 대단한데.”

“뭐야, 그 카포 뭐시기는?”

“당신들 말로는 중간 보스… 정도 되나?”

“그쪽도 한 주먹거리도 안 되어 보이는데 그 카포인지 카푸치노인지 그 정도니까 따라왔겠지? 용건이 뭐야?”

청년이 너무 경계하지 말라는 것처럼 웃었다. 딜버트가 어떻게 처리할까 하며 벤튼을 돌아보았지만 원래 제퍼슨 그룹의 세 중간 보스들 중에서 가장 임기응변에 약한 브라이언 벤튼이 이 상황에서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청년이 친근한 티를 내면서 물었다.

“솔직히 제퍼슨 그룹은 이제 갱단도 아니잖아. 오늘 회담은 왜 하는 거야?”

“엄마한테 물어보렴.”

“제퍼슨은 마약 거래는 안 한다며?”

“안 해.”

딜버트가 딱 잘라 말했다.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가만있지 않겠다는 표정을 지어 봐도 크레모사 패밀리의 수행원은 집요하게 매달렸다.

“왜 안 하는 거야? 헤로인 비즈니스는 제법 짭짤한데, 다른 수입원 좋은 게 있나? 우리 대부님이 예전에 헤로인 한번 안 해 보겠냐고 제안도 하셨다며.”

“글쎄. 헤로인이든 코카인이든 돈이 되는 비즈니스이긴 하지만.”

“그렇지만?”

남자가 떠 보는 것처럼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딜버트는 크랜베리 주스를 홀짝이면서 차갑게 말했다.

“우리 대장은 그런 거 싫어해.”

“본인의 생각을 듣고 싶은데.”

“왜?”

청년이 손바닥을 펴 보였다.

“아니, 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고 할까.”

“서턴 씨의 생각이 곧 우리의 생각이오.”

보다 못한 벤튼이 묵직한 어조로 대신 대답했다. 청년은 그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딜버트에게만 고정된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 대답을 요구했다. 딜버트가 혀를 찼다.

“방금 브라이언이 한 말 못 들었어?”

“그렇게까지 경계할 건 없잖아. 정말로 대부와 하나의 마음을 공유한다는 감동적인 스토리인가?”

아무래도 그녀가 제대로 한마디 해 주기 전까지는 떨어지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주먹을 쓸 수도 없고 뺨을 때릴 수도 없고 모욕을 줄 수도 없었다. 딜버트가 한숨을 쉬었다.

“젠장, 알아서 뭐 하게? 자금력을 확보하는 데에 있어서 좀 더 적극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정돈 아주 가끔은 하지만, 솔직히 그딴 거 손 안 대는 편이 나도 마음 편한데 아쉬울 게 어디 있다고. 어차피 우린 마피아처럼 세력 확장하는 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말문이 좀 트이는 것 같던 딜버트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언제 나왔는지 복도 반대쪽에서 작은 접시에 샌드위치를 담고 있던 키슬러가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크레모사 패밀리의 수행원은 그 눈빛에 위협을 느꼈는지 움찔 하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난 우리 대부님이 뭐 시키실 거 없나 가 봐야겠어.”

“멋대로 해.”

“가능하면 다음에 또 보자고.”

“웃기고 있네.”

청년이 은근히 추파를 던져 보았지만 비수 같은 시선만 받고 본전도 찾지 못했다. 키슬러는 그 자리에 서서 청년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성큼성큼 딜버트와 벤튼에게로 다가왔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지?”

“어, 별거 아니었어요.”

딜버트가 얼버무렸다. 벤튼이 불편하게 헛기침을 했다. 키슬러는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의자에 앉으면서 날카롭게 말했다.

“협상을 하러 온 자리에서는 패트릭의 허락 없이는 한마디도 하지 마라, 에밀리.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멋대로 지껄이는지 알 수가 없구나.”

“…아빠처럼 굴지 말아요, 키슬러 씨. 나도 이제 성인이라고요.”

“성인? 내가 지금 그런 뜻으로 말하는 게 아니란 걸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닐 테지. 회합 장소에서 조직의 운영 방식이라는 주제로 말을 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 우리들 중에 패트릭뿐이다. 네가 방금 한 말로 만일 나중에 패트릭이 곤경에 처하기라도 한다면 네가 책임질 테냐?”

“패트릭을 난처하게 만들려는 건 아니었어요.”

딜버트가 보기 드물게 풀이 죽어 대답했다. 키슬러는 그녀에 대한 질책은 그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화살을 벤튼에게 돌렸다.

“그리고 브라이언 벤튼, 자네는 뭘 하고 있었나? 에밀리 딜버트가 멋대로 떠들고 있는 동안 뒤에 앉아 있었으면서 걷어차서라도 말리지는 못할망정 돌부처 흉내나 내고 있고.”

“죄송합니다, 키슬러 씨.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야 패트릭을 제대로 보좌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구먼.”

키슬러가 혀를 찼다. 벤튼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제가 워낙에 말재주가 서툴러 상황을 제대로 중재하지 못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두 사람 다 조심성 있게 굴어. 알겠나?”

“알았어요.”

“주의하겠습니다.”

하루 종일이라도 설교를 늘어놓을 기세이던 키슬러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시간을 보고 한숨을 쉬더니 샌드위치를 입에 욱여넣었다.

“난 3분 후면 다시 들어가 봐야 해. 오후 회담이야 분명히 몇 마디만 더 하고 끝나겠지만 그게 10분 안으로 끝나든 두 시간 이상이 걸리든 밖에서 두 사람 목소리 절대로 들리지 않게 해. 입도 벙긋하지 마. 알았어? 우린 패트릭을 지키려고 여기 온 거지 입장 곤란하게 만들려고 온 게 아니야.”

딜버트가 대답을 하려다가 멈칫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슬러가 만족스러운 듯 입매를 비틀었다.

“좋아, 그렇게 있어. 누가 와서 말을 걸어도 못 들은 체 하고, 자네들끼리 얘기할 일 있으면 게일어로 말하는 게 좋아. 그리고….”

“키슬러 씨.”

키슬러가 다시 한 번 설교를 늘어놓으려는 찰나, 패트릭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키슬러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 갤러리로 들어가는 복도로 접어들었다. 키슬러가 충분히 가까이 오자 패트릭이 낮게 말했다.

“지금까지 진행,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네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이었어. 그 이상 생각하지 말게.”

“그렇습니까.”

패트릭이 중얼거렸다. 키슬러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누가 로즈에게 접근한 건지에 대해서 허세를 부린 건 어쩔 수 없는 수였어. 모른다고 얘기해서 얕보이면 안 그래도 젊어서 만만해 보이는 자네 이미지가 더 유약해질 수도 있었네. 이제 자네가 미끼를 던졌으니 로즈를 꾀었던 패밀리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신만이 아실 노릇이지. 벌어진 일이니 두려워 말게.”

“큰일이 나지 않기만을 바라야죠. 하지만 상대가 크레모사이니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요.”

“크레모사?”

키슬러가 놀란 소리를 냈다. 패트릭이 씩 미소를 지었다.

“저를 얕보고 제 세력권을 노리는 게 크레모사였다는 걸 알아낸 것만으로도 오늘의 소득은 충분합니다. 돌아가면 방비를 시작하죠, 키슬러 씨. 말씀하신 대로 크레모사가 어떻게 대응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래. 내게 시킬 일은 없는가?”

패트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제 곁에 계셔 주십시오.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아니면 여기는 성당이니 제퍼슨 그룹의 미래를 위해서 기도를 해 주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네.”

키슬러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패트릭은 갤러리로 들어가는 문을 밀어 열면서 조금 전까지의 속삭임과 대조되는 활기찬 소리로 말했다.

“논의를 계속하시겠습니까, 여러분?”

***

패트릭의 위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잠잘 시간이 다 되어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스튜어트가 비장한 얼굴로 로션 통을 들고 서 있었다. 패트릭은 욕실 문가에 서서 스튜어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딴 거 내 몸에 바를 꿈도 꾸지 마.”

“오늘 건조해. 네가 직접 바를래, 아니면 잡아 놓고 내가 바를까?”

“잡을 수 있으면 잡아 보시지!”

스튜어트가 코앞까지 다가오는 순간 패트릭이 그의 옆으로 몸을 숙이고 잽싸게 달려 나갔다. 스튜어트가 소리를 치며 그의 뒤를 쫓아왔다. 패트릭은 침실로 뛰어들어 문을 닫아 버리려고 했지만 스튜어트의 속도가 생각보다 빨라 실패하고 말았다.

막상 두 사람 다 침실에 들어오고 보니 이번에는 도망치는 쪽이 불리해져서 패트릭이 순식간에 코너에 몰렸다. 그는 침대를 점프해서 뛰어넘으려는 말도 안 되는 시도를 한 대가로 퀸 사이즈 침대 위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스튜어트가 공군 아카데미의 구호를 선창하며 그를 덮쳤다.

“얌전하게 좀 있어!”

“싫어!”

패트릭이 엄살을 부리며 소란을 피웠다. 스튜어트는 손을 이리저리 휘둘러 접근을 막으려는 패트릭을 어렵지 않게 제압하고 그의 팔을 덥석 움켜잡았다.

“이거 봐, 로션 안 바르니까 피부가 이렇게 거칠어지지!”

귀찮다고 도망치려는 패트릭을 잡아다가 단단하게 붙들어 놓으며 스튜어트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는 패트릭을 솜씨 좋게 침대 구석으로 몰아넣어놓고 손바닥에 로션을 듬뿍 짜서 패트릭의 팔에 문질러 바르기 시작했다. 패트릭이 어깨를 비틀면서 입술을 비죽였다.

“끈끈해서 싫어.”

“얌전히 있으라고 했지?”

“끈끈해서 싫다고!”

“너 자꾸 말 안 들으면 오늘 밤에 잘 자라고 뽀뽀 안 해 줄 거야.”

패트릭이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만 가득한 눈빛마저 수그러든 것은 아니었다. 스튜어트는 그의 팔다리에 꼼꼼하게 로션을 발라 주느라 정신이 팔려 있다 말고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반항기 가득한 눈과 마주치자 단호하게 패트릭의 콧등에 로션을 묻혔다.

“뭘 노려봐, 요 못된 고양이 녀석이?”

기회만 엿보고 있던 패트릭이 크와앙 소리를 치며 스튜어트에게 덤벼들었다. 스튜어트는 얼떨결에 패트릭을 와락 껴안기는 했는데 기습을 당한 처지라 제 때에 균형을 잡지 못했다. 그가 뒤로 푹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패트릭이 그의 몸 위로 올라타서 귓불을 잘강 깨물었다. 스튜어트가 소리를 질렀다.

“사람 살려, 식인 야옹이다!”

“먹어 버릴 거야!”

“로션 다 바르면 먹게 해 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싫어!”

“어쩌라고!”

입씨름을 하느라 방심한 틈을 타 스튜어트가 패트릭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이렇게 잡히면 곧바로 패배로 이어지는데. 포기해 버린 패트릭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스튜어트의 턱 밑에 얼굴을 들이밀며 벌렁 드러누웠다. 스튜어트는 웃으면서 로션 통을 멀찌감치 굴려 버리고 패트릭의 볼을 콕 찍었다.

“이렇게 말을 안 들어서 어쩔래?”

“이미 결혼했는데 뭐가 더 걱정이람.”

패트릭이 말썽꾸러기 아이 같은 투로 대꾸했다. 스튜어트가 항복이라고 외치더니 그에게 팔베개를 해 주며 말했다.

“그냥 너도 알아 두라고 하는 말인데 오늘 내가 듀크한테 꼬마 탐정 세트 가져다주고 왔어. 혹시 형수님이 전화라도 하시면 그런 줄 알고 있으라고.”

“언제 갔다 왔어?”

“퇴근길에.”

패트릭이 몸을 굴려 스튜어트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스튜어트는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헤집었다. 패트릭은 자꾸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가 마침내 물었다.

“형은 있었어?”

“밖에 계시던데 인사밖에 못 했어. 누구랑 얘기 하고 계시더라.”

“누구랑?”

스튜어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바람에 어깨를 베개 삼고 있던 패트릭이 출렁 움직였다. 패트릭은 심장 떨어지겠다는 시늉을 하고 스튜어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스튜어트가 비명을 질렀다.

“모르는 사람이었어, 찌르지 마!”

“내 맘이야. 동네 사람인가?”

“몰라. 외국인 느낌 나더라. 사진 찍은 거 파시는 거 아닐까?”

예상치 못한 말에 패트릭이 눈을 깜빡였다. 잠깐 불길한 생각도 들었지만 요즘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쓸데없는 걱정만 늘어난 것 같아 관두어 버렸다. 조셉이 조금만 더 영리했어도 그에 대해 좀 더 생각을 해 봤겠지만 조셉은 음모도 꾸밀 만한 성격이 못 되었다. 패트릭은 금세 형에 대한 일을 잊어버리고 침대 위를 엉금엉금 기어 로션 통을 집어 들었다. 스튜어트가 웬일이냐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순순히 바를 맘이 났어?”

“그럴 리가요.”

패트릭이 손바닥에 로션을 쭉 짜더니 스튜어트에게로 덤벼들었다. 졸지에 얼굴에 허옇게 로션이 찍힌 스튜어트가 패트릭을 붙잡으려고 팔을 허우적거렸다.

“야, 너 이거 이러다 이불에 묻으면 안 된다고!”

“빨래는 세탁기가 하는 건데 무슨 걱정이야.”

스튜어트가 허옇게 얼굴에 로션을 묻히고서 더듬더듬 패트릭을 붙잡았다. 그가 패트릭에게 무턱대고 얼굴을 들이미는 바람에 패트릭의 머리카락이 스튜어트의 로션 발린 얼굴에 달라붙었다. 이번에는 패트릭이 소리를 칠 차례였다.

“나 머리 감았는데!”

“머리카락에 영양 준다고 생각해, 자초한 거야!”

“저리 가!”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패트릭이 오히려 더 스튜어트를 안고 늘어졌다. 스튜어트는 아예 패트릭의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닦아내 버리고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우면서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힘들어….”

“저질 체력 다 되었네.”

“일이 고되어서 그래.”

“변호사가 무슨 일이 고되다고?”

패트릭이 로션 통을 바닥에 굴리고 스튜어트의 옆에 엎드렸다. 스튜어트가 천장의 형광등을 올려다보았다. 깜빡거리는 눈동자 위로 내리덮였다가 올라가는 금빛 속눈썹에서 불빛이 맑게 부서졌다.

“이 바닥이 은근히 힘들어. 너도 힘든 건 마찬가지겠지만.”

“돈 버는 게 쉬워야 말이지.”

패트릭이 스튜어트의 얼굴 위로 몸을 숙여 키스를 했다. 스튜어트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이번 가을에는 놀러 갈 거니까, 힘내야지.”

“어디로 갈까? 난 지난번에 네가 보여 줬던 그리스 섬 투어도 좋을 거 같아.”

스튜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기지개를 켰다.

“미안한데 오늘은 피곤하니까 일찍 자고 내일 얘기하자. 식인 야옹이를 사냥했더니 체력이 다 떨어졌어.”

“그 식인 야옹이 아직 못 잡았을 텐데?”

패트릭의 말에 스튜어트가 킥킥 웃으며 그를 껴안았다. 패트릭은 순순히 그의 팔에 안기면서 걱정을 숨기려고 눈을 감았다. 설마 오늘 회담 때문에 별일이 생기지는 않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스튜어트는 정말로 피곤한 모양인지 그새 잠의 경계를 미묘하게 넘나들고 있었다. 패트릭은 조심스럽게 그의 팔에서 빠져나간 다음 스튜어트를 끌어다가 침대에 똑바로 눕히고 이불로 둘둘 말아 버렸다. 불을 끄고 스튜어트의 곁으로 기어들자 그가 잠결에도 패트릭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잘 자, 내 귀염둥이.”

“…너도.”

스튜어트에게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돼. 패트릭은 스튜어트의 팔 안으로 안겨 들어가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설령 제퍼슨 그룹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마피아 패밀리와 전쟁을 치러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스튜어트만 무사할 수 있다면 어떤 위험이든 감수할 수 있었다. 바깥에서 스튜어트가 모르는 동안 그를 지켜 주는 대가로, 집에서는 어린아이처럼 굴며 그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것쯤은 괜찮겠지. 패트릭은 스튜어트의 팔 안에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아직 물기와 로션의 감촉이 남은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그의 턱 아래에 문질러 댔다. 스튜어트가 잠에 취한 소리로 조금 끙끙거리다가 도로 조용해졌다.

***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에 케이블 채널의 영화를 보고 있던 에밀리 딜버트가 깜짝 놀라 현관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어 현관을 노려보다가 시계를 홱 쳐다보았다. 새벽 한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 아무리 관대한 기준으로 생각해 본대도 방문객이 올 리가 없었다.

초인종이 다시 한 번 울렸다. 환청은 확실히 아니었다. 설마 이렇게 영화 볼륨을 작게 틀었는데도 이웃에게 들렸다는 상황은 아니겠지? 그녀는 가운 자락을 여미면서 현관으로 다가갔다. 인터폰 화면을 본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무심코 생각에 잠겨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가 얼굴에 발라 두었던 팩이 손에 묻는 바람에 혀를 찼다.

낮에 만났던 크레모사 패밀리의 수행원 청년이었다. 찾아온 이유가 궁금한 것과는 별개로 어떻게 자신의 집을 알아낸 것인지가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어떻게 할까 하다가 마지못해 인터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뭐야, 이런 시간에? 뭐 하는 자식이냐, 잠재적 강간범?”

- 잠깐 올라가도 될까?

첫타부터 도발을 날려보았는데도 유쾌한 투였다. 직감이 안 좋은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딜버트는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면서 차갑게 대꾸했다.

“이런 시간에 여자 집을 찾아오는 건 뭐 하는 매너인가 모르겠네? 용건 있으면 내일 사무실로 와.”

- 지금 당장 올라가지 않으면 곤란한데.

“알 게 뭐야, 꺼져!”

- 돈 크레모사의 대리인 자격으로 서턴 패밀리의 카포레짐을 만나러 온 거야. 더러운 짓거리 하러 온 거 아니니까 문 좀 열어 주시죠?

크레모사 패밀리의 일원으로서 제퍼슨 그룹의 중간 보스를 만나러 왔다라. 딜버트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이번에는 팩을 조금 먹을 뻔하고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분명히 낮에 그녀가 입을 잘못 놀린 탓이었지만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아직은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좀 기다리시지. 팩 하고 있는데.”

- 뭘 하고 있든지 그 미모에 흠집 날 것 같지는 않아.

“닥쳐.”

당장 들어와야 한다는 의미겠지. 딜버트는 잠시 계산을 해 보았다가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혼자 들어와.”

- 아, 어차피 혼자 왔어.

그 대답에 딜버트가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크레모사 패밀리의 청년은 팩을 하고 있었다는 말에 어느 정도 예상은 한 것 같았지만 머리에는 수건을 감고 샤워 가운을 걸친 채 석고처럼 새하얀 팩을 얼굴에 바른 그녀의 모습에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었다. 딜버트는 뒷걸음질을 치는 청년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30초 줄 테니까 용건 말하고 꺼져.”

“너무하네. 크레모사 패밀리의 사절인데 커피 한 잔이라도 대접해 줄 수는 없는 건가?”

생각 같아서는 계단으로 걷어찬 다음에 뛰어내려서 실컷 밟아 주고 싶었지만, 이렇게 바깥에서 이야기를 계속 하다가는 이웃이 나와 볼 위험이 있었다. 딜버트는 영 내키지 않는 투로 문을 좀 더 열고 안쪽으로 물러섰다.

“이 시간에 카페인 좋아하시네. 용건만 말하고 나가.”

“아가씨 혼자 사는 집에 실례 좀 하겠습니다.”

청년이 딜버트의 아파트 안으로 들어오면서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가벼운 목소리였지만 딜버트에게는 그녀가 혼자 산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을 어필하는 것으로 들렸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큰 개라도 하나 키우는 건데 그랬다. 도베르만이나 어쨌든 대단히 사납고 크며 사람을 물고 다니는 견종으로. 딜버트는 청년의 등 뒤에 서 있다가 그의 어깨를 잡아서 재킷을 홱 벗겼다.

“어, 지금 무슨….”

“무장하고 왔을까 봐.”

그녀가 청년의 재킷을 거꾸로 뒤집어 탈탈 털면서 대답했다. 예상대로 피스톨 한 정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녀는 피스톨을 집어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냉장고 문을 열고 그 안에 총을 던져 넣었다. 청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 참, 과격하네.”

“빨리 용건 말하고 빨리 나가 줬으면 좋겠어. 이 팩 10분 이상 하고 있으면 오히려 얼굴에 주름 생기는 거야. 민사 소송 거하게 걸려서 보톡스 비용 대 줄 생각은 없을 거라고 믿을게.”

“좋아, 용건만 말씀드리지. 크레모사 패밀리에서 한 자리 차지해 볼 생각은 없으신지요, 아가씨.”

“…뭐라고?”

팩 때문에 표정이 풍부하지는 않았고 안색도 가려져 있었지만, 청년의 말에 딜버트의 눈가가 굳는 것은 크레모사 패밀리의 사절도 분명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청년이 씩 웃음을 지었다.

“들으신 대로입니다, 아가씨. 크레모사 패밀리에서는 아가씨를 리크루트해 갈 용의가 있어.”

“난 제퍼슨 그룹의 사람이야.”

“거기보다는 우리가 더 많은 걸 제공해 줄 수 있어.”

실수했었구나. 팩이 표정을 가려주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키슬러의 말대로 패트릭이 있는 자리에서 멋대로 의견을 피력하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회담이 끝나고 나서 패트릭이 말해 준 대로라면 크레모사 패밀리는 로즈 아널드를 꾀어 헤로인 비즈니스에 개입시켰던 범인이었다.

지금 이 자들은 그녀마저 포섭해 가서 패트릭의 입지를 약화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그녀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싫어했지만 이들은 단순히 패트릭을 얕잡아 보는 게 아니라 그가 부하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건 아니라고 착각해서 그를 상대로 더 나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청년이 계속해서 말했다.

“크레모사에서는 원하는 비즈니스를 할 수 있어. 자금 때문에 다른 패밀리에 밀릴 걸 걱정할 필요도 없고, 아가씨 같은 사람이라면 전폭적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지. 에밀리 딜버트, 당신이 대담하고 멋진 여자라는 건 워싱턴의 모든 패밀리들이 다 아는 사실이야. 크레모사에서는 그런 당신을 좋은 조건으로 모셔가고 싶어서 지금 거래를 제안하는 거고.”

“내가 거절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지.”

청년이 유감이라는 듯 대답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 단순히 조직원 하나를 꾀어서 상대의 입지를 무너뜨리려는 거라고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위치가 제퍼슨 그룹에서 과도할 정도로 중요했다. 중간 보스에 대한 포섭 시도, 실패하면 제거. 딜버트는 손이 떨리는 것을 감추려고 등 뒤로 돌리면서 그를 빤히 노려보았다.

“내가 오늘 입을 함부로 놀린 것 때문에 네 놈의 패밀리에게 패트릭이 조직 내에서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고 말았다면, 거기에 책임을 지고 대가를 받아들이겠어.”

“…거절하는 거라면 아까운데.”

청년이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딜버트가 고개를 저었다.

“마피아의 조직원들만 대부를 인간적으로도 존경하고 신뢰한다고 생각한다면 거 참 차별적이네. 나는 패트릭의 사람이야. 패트릭 서턴이 아니라면 누구도 내 윗사람이 될 수 없어.”

“유감이야, 에밀리 딜버트. 당신은 정말 미인인데.”

청년이 웃었다. 젊은 얼굴에 다른 상황에서 다른 식으로 만났더라면 호감이 갈 법도 한 인상이었다. 그렇게 나오는 걸 보면 분명 몸 어딘가에 다른 무기도 지니고 있는 거겠지. 딜버트는 제법 태연한 투로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유감이야. 그러니까 잠깐만 시간을 좀 주면 어때?”

“미안하지만 이미 아가씨의 선택은 들었어.”

딜버트가 고개를 젖히며 짧게 웃었다.

“누가 재고의 기회를 달래? 이런 얼굴로 시체로 발견되는 건 생각하기도 싫으니까 세수는 해야겠어. 제퍼슨 그룹 유일의 여성 중간 보스씩이나 되어서 나중에 발견되었는데 얼굴에 다 굳은 팩이 달라붙어서 떨어지지도 않는 사태가 벌어지면 귀신이 되어서라도 되돌아올 거야. 세수만 하자고.”

청년이 당황했는지 머뭇거렸다. 딜버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샤워 가운을 벗어서 소파 위로 집어던지고 욕실로 향했다. 청년은 등을 절반 이상 드러내는 그녀의 검은 실크 슬립 잠옷에 휘파람을 불었다.

“좀 더 멋진 결정을 내려주지 그랬어, 아가씨. 아까운데.”

“내가 설령 크레모사 패밀리에 들어가겠다고 마음을 먹었어도 너랑 엮일 일은 평생 없단다, 아가.”

청년이 웃음을 터뜨렸다. 딜버트는 슬슬 당기기 시작하는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욕실의 불을 켰다. 청년이 바로 뒤까지 따라왔다가 그녀의 욕실 벽면을 보고 깜짝 놀란 소리를 냈다.

“성모님 맙소사, 이게 다 뭐야?”

“천연 화장품에 관심 좀 있으면 내가 뭐가 어떤 건지 알려 줄 테니까 일 끝내고 적당히 집어 갈래? 내가 특별히 수고비는 안 받을게.”

딜버트가 화장 솜을 꺼내면서 빈정거렸다. 그녀의 욕실 벽은 두 면에 주문 제작한 약장이 꽉 짜여 있는 구조로, 약장은 전부 다 라벨을 달아 놓은 작은 병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청년은 그녀가 화장 솜에다가 뭔가를 짜서 묻히는 동안 약장을 들여다보고 조심스럽게 발음을 시도해 보았다.

“글리… 케….”

“글리세린. 천연 보습제 중에서는 최고지. 품질이 최고는 아닌데 가격이 합리적이라서. 피부 보습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를 알 날이 아마 너한테도 곧 올 거다.”

“이 원료들을 다 집에서 직접 섞어서 화장품을 만들어 쓰셨다…. 전투 인형이라더니 아가씨다운 면모도 있었네. 매력적이야.”

“시끄러워. 아가씨 좋아하시네, 난 화공학 석사 출신이야.”

딜버트가 수도꼭지를 돌려 틀면서 쏘아붙였다. 그녀는 얼굴에 남은 팩을 물로 전부 씻어 내고서는 머리에 두른 수건을 풀어 얼굴을 닦았다. 언뜻 거울에 청년의 손에 들린 나이프가 반짝거렸다. 기왕이면 집에 들여보낼 때에 몸수색을 좀 더 철저히 할 걸 그랬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거울 옆의 약장을 열려고 했다.

“그만두는 게 좋을걸.”

청년이 위협적인 어조로 속삭이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는 등 바로 뒤까지 다가온 청년을 거울로 힐끔 바라보면서 눈썹을 치켜세웠다.

“수분 크림만 바르려고.”

“이젠 그런 거 발라도 소용없는 거 알잖아.”

청년의 목소리는 심지어 은근하기까지 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얹히더니 팔을 타고 흘렀다. 딜버트는 입꼬리를 올려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손이 약장 문에 얹혔다.

“여자는 어차피 지울 화장을 아침마다 해. 최후의 순간까지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해 주지 않겠어?”

“마지막 소원이라면, 원하시는 대로.”

청년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설령 그녀가 무기를 꺼내더라도 바로 뒤에서 칼을 겨누고 있으니 두렵지 않다는 투였다. 딜버트는 약장을 열어 검은 뚜껑으로 굳게 닫힌 통을 집으면서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로서는 드물게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이 안에 든 것도 내가 직접 만든 거야.”

“의미가 각별하겠네.”

“물론이지. 98%의 질산에 황산을 3대 1의 비율로 섞고, 거기에 아까 네가 물어본 그 글리세린을 아주 섬세하게 섞어 주는 거야. 이렇게 만든 물건에는 정식 명칭도 있어. 뭔지 상상이 가?”

“수분 크림?”

청년이 비웃듯이 물었다. 망할, 질산에 황산을 얼굴에 바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쏘아 주고 싶어졌다. 말은 유쾌하게 잘 하는데 무식한 거 하나가 흠인 녀석이군. 딜버트가 피식 웃으며 통을 꺼내어 몸을 돌렸다.

“아니, 니트로글리세린. 화학 단어에는 익숙하지 않은 거 같으니까 쉬운 말로 해 줄까?”

불길함을 감지했는지 청년의 얼굴이 굳었다. 딜버트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한 손을 뻗어 청년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이 귀부인은 어찌나 섬세하고 민감하신지 조금만 잘못 흔들려도 곧바로 성을 내시는 분이란다. 이 안에 든 건 액체 상태의 니트로글리세린, 폭탄의 원료 되신다, 이거야. 특별히 한 통 가득 만들었어. 어때? 나에게 덤비는 그 즉시 난 이걸 던져 버릴 거야. 이 정도 용량이면 이 아파트 한 채 날리는 건 일도 아니야.”

청년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딜버트는 해맑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내 손에서 낚아챌 생각은 하지 마. 흔들어도 폭발할 수 있어. 난 아무것도 장담 못해. 니트로글리세린은 아주 민감한 물질이거든. 자, 이제 나에게서 물러서. 그리고 허튼 짓도 하지 말고. 난 놀라면 손에 든 걸 내던져 버리는 습성이 있거든. 그럼 지금부터 거실로 가서 누나랑 담소 한번 나누어 보지 않을래?”

이제 주도권은 그녀에게 있었다. 청년은 시체 같은 얼굴이 되어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제 폭탄은 만들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딜버트는 한숨을 쉬고서 턱짓으로 옆에 있는 약장을 가리켰다.

“너무 위험한 건 안 만들겠다고 대장이랑 약속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게 특기이자 취미라 정신 차리고 나면 만들고 있단 말이지. 빨간 뚜껑 달린 조그만 통 들고 나와. 밑져야 본전이잖아? 내가 뭘 만들 수 있는지 믿기지 않는다면 직접 눈으로 보면 돼.”

수많은 약품들 사이를 더듬는 청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 손에 든 칼은 여전히 딜버트를 겨눈 채였다. 딜버트는 그가 빨간 통을 집어 들자 말했다.

“베란다로 나가서 밖으로 던져 봐. 어떻게 되는지.”

“앞장서.”

청년이 짧게 말하며 그녀의 등에 나이프를 들이댔다. 딜버트는 검은 뚜껑의 통을 소중하게 안고서 발랄하게 앞장을 섰다. 태연한 척 하고 있었지만 칼날이 몹시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베란다 앞에 이르러서 발을 멈추고 청년을 돌아보았다.

“해 보라니까.”

청년이 베란다로 나갔다. 그는 잠시 자신이 들고 있는 빨간 통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결심한 듯 바깥으로 통을 힘껏 내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통이 아파트의 공동 풀장으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폭음이 나더니 분홍색 연기와 폭죽 같은 불꽃이 치솟았다. 그 작은 통에서 비롯된 화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화려한 불꽃이었다. 놀란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창문을 여는 소리가 탁탁 하고 났다. 누군가가 어느 미친놈이 이 새벽에 불꽃놀이를 하냐고 고함을 질렀다. 딜버트는 창백하게 질린 청년의 얼굴을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말했잖아, 저런 거 잘 만든다니까.”

“빌어먹을….”

“그럼 이제 칼 내려놔. 순순히 말 듣는 게 좋을 거야. 난 화가 나면 뭘 집어던질 수도 있는 여자니까.”

딜버트가 통의 뚜껑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청년이 천천히 몸을 숙여 칼을 베란다에 내려놓았다. 딜버트는 베란다 옆에 달린 작은 문을 가리켰다.

“창고 문 좀 열어 줄래?”

크레모사 패밀리의 청년이 험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완강했다. 딜버트는 그가 쉽사리 말을 들으려 하지 않자 통을 들어올렸다.

“어차피 난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인데 그냥 이거 확….”

“닥쳐, 마녀 같은 년!”

청년이 문을 열면서 소리를 질렀다. 딜버트가 깔깔 웃더니 갑자기 정색을 했다.

“입은 거 전부 다 벗고 안으로 들어가.”

“…뭐라고?”

“난 이거 들고 있어야 해서 몸수색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들여보내자니 네가 너희 패밀리 사람들한테 구조 요청하면 난감해. 그러니까 간단하게 해결하자. 어차피 겨울도 아니니까 얼어 죽지는 않을 거고 창고 안에 담요도 있어.”

웃기지도 않는 스트립쇼였다. 크레모사 패밀리의 청년은 그녀가 들고 있는 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영 내키지 않는 태도로, 그러나 확실히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녀는 청년을 걷어차서 창고 안에 몰아넣고 문을 쾅 닫으며 소리를 질렀다.

“구하러 오라는 연락은 해 줄게, 하지만 일단 한 숨 자라고! 우리 엄마가 밤중에 남의 집에 전화하는 거 예의 아니랬거든!”

그녀는 그 말과 함께 문을 덜컹거리는 소리를 조금 냈다. 유감이었지만 창고의 문 열쇠는 사실 그녀가 이사를 오기도 전에 달아나고 없어서 그 문을 잠글 방법은 없었다.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재빨리 청년의 옷을 뒤져 핸드폰을 꺼내고 급한 대로 그의 재킷을 걸쳤다. 그리고 팔을 꿸 새도 없이 문가에 걸어 둔 오토바이 키를 낚아채고 신발도 아무거나 신고서 서둘러 밖으로 달렸다.

엘리베이터가 너무 높은 층에까지 올라가 있었다.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무작정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에 계단으로 몸을 날렸다. 최고조로 치달았던 긴장이 풀려서인지 도중에 몇 번이나 넘어지고 미끄러졌다. 한쪽 무릎이 깨져 피가 나기 시작했지만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1층에 다다르고 나서야 멍청하게도 자신의 핸드폰을 들고 나오지 않았음을 깨달았지만 되돌아갈 시간은 없었다. 창고에 가둔 청년은 분명 몇 분 내로 문고리를 돌려보거나 문을 걷어차 볼 것이고 그러면 크레모사 패밀리에 자신의 행각이 들통나는 것도 금방이었다. 그녀는 주차장으로 달려가 그녀의 할리 데이비슨에 시동을 걸었다.

패트릭에게 가야 해.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빠르게 할리를 몰아 도로로 진입하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패트릭이든, 아니면 키슬러 씨든, 누구에게든 좋으니까 빨리 가야 해. 겨우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동료들의 집과의 거리를 생각해 보았다. 키슬러가 제일 가까웠다. 제발 키슬러에게는 아직 크레모사 패밀리의 사람이 찾아오지 않았기를 빌며 그녀는 오토바이를 더 빠르게 몰았다. 신호와 표지판을 무시하면서 방향을 꺾던 그녀는 아직도 무릎에 얹혀 있던 검은 뚜껑의 통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정판 분홍색 아이섀도를 떨어뜨려 깨뜨리고 나서 그 색깔이 아까워 불꽃놀이용 폭죽 하나를 만들어 둔 게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떨어뜨렸을 당시에는 스스로 목을 졸라 버리고 싶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천만다행이었다. 화장품의 신이 존재한다면 그녀의 수호신임에 분명했다. 그동안 쏟아 부은 헌금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지. 게다가 상대가 멍청했으니 더더욱 신의 가호라고밖에 할 수가 없었다. 딜버트는 이제는 거치적거리는 짐에 불과한 검은 통을 도로 위로 내던져 버렸다. 검은 통의 뚜껑이 깨져 열리면서 수분 크림이 길바닥에 하얗게 쏟아졌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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