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2)

플로리다에서 돌아오고 채 이틀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뉴욕으로의 파견 명령이 떨어졌다. 이제 어엿한 FBI 비밀 요원답게 이제 전국을 누비며 공항을 내 집 삼아 암약하기 시작한 점은 마음에 들었지만, 그와 동시에 이렇게 일주일에도 몇 번씩 대륙을 이리저리 오가면서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몸이 남아나지 않겠다는 걱정도 밀려들었다. 올랜도가 그렇게 말하자 시드니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체력 관리가 중요한 거야.”

“선배님은 안 힘드십니까?”

“나? 나도 가끔은 죽을 거 같아. 그래도 뉴욕 정도는 가까우니까 괜찮아.”

시큰둥한 투로 대답하며 햄버거를 베어 물고 있는 와중에도 시드니의 예리한 눈은 창문 너머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뉴욕 경찰 복장을 하고 길 건너편의 호텔 출입구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감시 대상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복을 입은 두 사람은 정작 경찰이 아닌 반면 지금 이 블록에는 사복 경찰만 수십 명이 배치되어 시드니가 출격 명령을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콜롬비아의 코카인 밀매업자 중에서도 거물이라는 자를 체포하기 일보 직전, 긴장을 바짝 세우고 호텔 문가에 숨어 있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시드니는 배가 비어서는 아무것도 못 한다며 올랜도를 끌고 길 건너의 다이너로 들어와 버린 참이었다.

“자네는 플로리다에 좀 더 있다가 왔었지? 심문은 잘 견학했어?”

“잘 모르겠습니다. 선배님께서 체포하신 그 여자 말입니다, 죽어도 입을 안 열더군요. 그것 때문에 수사가 난항이랍니다.”

“흠, 그러라지.”

“네?”

올랜도가 당황해서 되물었다. 시드니는 무심하게 감자튀김을 집어 먹으면서 대답했다.

“난 심문이랑 조사 전문가가 아냐. 나는 추적이랑 체포에만 집중하면 그만이고 그게 내 임무니까 다른 건 생각할 필요 없어. 내가 잡은 용의자가 입을 열든 말든 그건 검사 팀의 역량에 따른 거지. 용의자가 아무리 해도 진술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거기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건 아냐.”

“그렇군요…. 그, 이것도 들은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그 여자는 워싱턴에서도 마피아 조직원이 아니라던데요? 아이리시 갱단 소속이었다고 합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내가 체포했잖아. 추적이랑 체포에 집중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보고 무작정 잡는다는 소리는 아니었어. 기본 정보는 본다고.”

“어,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리시 갱단 보스가 그래서 플로리다까지 오더라고요. 대질 심문을 해야 한다더니 바로 오는 걸 보고 좀 놀랐습니다.”

시드니가 어깨를 으쓱였다. 전혀 관심이 없는 얼굴이었다.

“워싱턴의 아이리시 갱단이면 얌전한 애들인데, 그 뭐더라, 해밀턴인가, 제퍼슨인가? 이름도 생각이 안 나네. 난 걔네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없어. 걔네는 마약은 안 다루거든.”

“이번에 그 여자가 연루되었는데도 별로 관심이 없으신 겁니까?”

“용의자가 개인적으로 움직인 거라고 들었는데? 그 갱단 자체가 소매 걷고 마약 산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게 아니라면야 내가 굳이 나서서 파헤칠 이유가 있나. 안 그래도 허구한 날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굴러다니기 바빠. 내가 알아야 할 사항이 있다면 상부에서 자료를 줄 거고, 시키지도 않은 일을 시간 쪼개 가면서 하기 나도 가정이 있고 집안에 충실해야 하는 남자란 말이지. 거기 케첩 좀.”

타고나기가 배짱이 좋은 걸까, 아니면 그도 베테랑 요원이 되면 저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을까? 진열장의 플라스틱 모형을 씹어 삼키는 기분이 들어 한 입 겨우 문 햄버거에 더 이상 손도 못 대고 있던 올랜도와는 정반대로 시드니는 제 몫의 버거를 깔끔하게 먹어 치운 다음 올랜도의 접시에 있던 감자튀김까지 넘보았다. 올랜도는 케첩 통과 함께 제 접시를 밀어 주면서 물었다.

“선배님은 긴장 안 되십니까?”

“당연히 되지. 그런데 배가 고파.”

“긴장이 되는데 배고픔이 느껴지시는 겁니까?”

“뭐가 이상한데?”

“…아닙니다.”

올랜도가 힘없이 고개를 젓자 시드니가 케첩이 묻은 손가락을 빨면서 씩 웃었다.

“아직 초반이라서 그래. 실제 체포에 동참하는 건 처음이잖아. 다음에는 콜라까지는 마실 수 있을 거고 그 다음에는 감자튀김은 먹을 수 있을 거야.”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부적은 정했고?”

“네?”

갑자기 튀어나온 뜬금없는 단어에 올랜도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시드니가 빙긋 웃었다.

“웰링턴이나 다른 선배들이 말 안 해 주던가? 부적 하나 만들라고.”

“웰링턴 선배님은 심술궂으십니다.”

올랜도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러바쳤다. 시드니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경찰 모자의 챙을 젖혀 올렸다.

“뭐야, 그 친구가 또 심술 부렸어? 걱정 마, 웰링턴은 원래 신입 킬러니까. 자네만 당한 게 아닐 거야.”

두 사람 다 한 번씩밖에 만나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시드니가 웰링턴보다는 편했다. 올랜도는 지난 며칠간 혼자서 속으로 끙끙 앓고 있던 의문을 시드니에게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그게, 실은 제가 배정되면서 받은 기초 자료에 누락된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어, 정말? 인사과에 말하면 챙겨 줄 거야. 뭐가 없는데? 급한 거면 이따가 본부 돌아가서 내 걸로 가져가고… 아, 그런데 난 나한테 관련 없어 보이는 건 이미 다 버려서 별로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겠다.”

“고위험군 매뉴얼이 없습니다.”

시드니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게 왜 필요한데?”

“예? 웰링턴 선배님께서 그것도 아직 안 읽어보았냐고….”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한 대답에 시드니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 친구도 참. 고위험군 매뉴얼에는 외부에 유출되어서는 안 되는 정보도 상당량 담겨 있기 때문에 신입 요원한테는 최소한 배정되고 나서 한 달 정도는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주는 게 일반적이야. 자넨 이제 2주인가 조금 넘었잖아. 없는 게 당연해. 내가 보여 줄 수도 없고.”

올랜도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러면 그렇지,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뭉클 솟아나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시드니가 웃으면서 올랜도의 어깨를 탁탁 쳤다.

“억울하게만 생각하지 말게나, 신입. 다른 신입들은 고위험군 매뉴얼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도 아직 모르고 있을 테니 나름대로 앞서나가는 증거라고 여겨. 나중에 본부로 귀환하고 나서 표지 정도는 보여 주지. 거의 사전 급으로 두꺼운 책자고 매년 데이터가 갱신되는데 미 전역에 걸쳐서 현장 요원이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대상이 되는 조직들에 대한 거의 모든 게 상세히 적혀 있어. 솔직히 말하자면 그거 하나 읽고 숙지하기도 벅차서 난 그것밖에 안 봐.”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시드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 요원으로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고 나면 사람마다 하는 일이 꽤 한정이 돼. 나는 그 중에서 특히 최전방에 서서 폭력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위험한 케이스들을 다루는데 그 일을 하려면 필요한 자료는 고위험군 매뉴얼밖에 없거든. 전천후 만능이 되면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닌 데에 억지로 발 들이밀고 싶지 않아. 어쨌든, 웰링턴이 그랬단 말이지….”

그가 콜라 컵을 옆으로 밀어놓고 팔짱을 꼈다. 시드니가 돌아가서 웰링턴을 혼내 주는 건 아닐까 하며 기대에 차서 바라보고 있었더니,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베테랑 선배가 피식 웃었다.

“그것뿐이야?”

“아닙니다. 내내 심술이셨습니다. 심지어는 제 코드 네임을 갖고 자꾸만 놀리시지 뭡니까. 디즈니… 월드라고.”

본인 입으로도 발음하기가 불쾌해서 말이 잠깐 멈추었다. 시드니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그 친구는 원래 자기보다 코드 네임이 좋아 보이는 녀석들이라면 죄다 괴롭히니까 신경 쓸 것 없어.”

“웰링턴이면 수도명이겠다, 직급도 높으시겠다, 뭐가 부족하셔서요?”

“시작할 때에는 웰링턴이 아니었으니까 그렇지. 나도 처음부터 시드니는 아니었어. 자네도 평생 디즈니월드는 아닐 거 아냐? 그 친구는 시작할 때 코드 네임 때문에 엄청 놀림당해서 아직도 그거 갖고 사람들 많이 걸고 넘어져.”

“뭐였는데요?”

시드니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면서 대꾸했다.

“호놀룰루.”

내내 뻣뻣하게 굳어 있던 올랜도가 간신히 긴장이 풀려 킥 웃었다. 시드니가 미소를 지으면서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올랜도가 백 배 낫지? 호놀룰루가 뭐냐, 호놀룰루가. 앞으로 웰링턴이 자네 코드 네임 갖고 한 번만 더 뭐라고 그러면 이번 휴가에 하와이나 가야겠다고 해 봐. 아주 코가 납작해질 거다.”

“그랬다간 절 가만 안 두실 겁니다.”

“그럴 리가. 그 친구 사실은 좋은 녀석이야. 입이 험하고 남 흉보는 걸 좋아해서 그렇지 속은 착해.”

말이 어째 점점 건성으로 간다 했더니 시드니가 지갑을 펼쳐 안을 들여다보며 흐뭇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올랜도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공주님 사진 보십니까?”

“응. 이 사진은 못 봤지?”

물어봐 주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시드니가 지갑을 올랜도 쪽으로 내밀었다. 지난번에 본 것과는 다른 사진이었다. 이번에 시드니의 공주님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멜빵 반바지를 입은 채로 회전목마에 올라타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예뻐하지 않으면 이렇게 매번 사진이 바뀌기도 힘들 텐데. 그는 올랜도가 귀엽다며 감탄을 하도록 내버려 두고 뿌듯하게 말했다.

“자네도 부적이 있어야 해. 특히 자네처럼 멋진 요원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들어온 사람일수록 더 그렇지. 정의감에 취하고 사명감에 잘못 넘어가면 자칫하다가는 정말로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 버리는데, 그걸 막아주는 게 꼭 필요하거든.”

“임무에 목숨을 걸고 임하는 건 좋은 일 아닙니까?”

올랜도의 물음에 시드니는 뜻밖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아. 우리 같은 요원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 당국이 들이는 투자 비용은 어마어마해. 교육에 들어가는 금액, 강사진의 구성에 따르는 비용, 시간, 노력. 어떤 이유로든 그렇게 훈련을 거친 요원이 자리를 비우게 될 때에 새로운 사람을 충원해야 하는 압박. 우리는 쉽게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야. 비싸게 키운 인력이니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사법 정의 구현에 헌신해야지, 부나방도 아니고 한 번 불태워서 어디다 쓰려고?”

“음, 그러네요….”

“그리고, 이성을 잃고 함부로 덤벼서 본인만 노출되는 거라면 어떻든 좋아.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대가로 내 동료까지 위험에 처한다면? 지금까지 해당 지역의 경찰 당국과 협상을 거듭해서 어렵게 마련한 체포의 기회가 날아가 버린다면? 우리는 항상 이성을 앞세워야 해. 불리한 상황에서는 후퇴할 줄 알아야 하고, 혼자서 무리라는 걸 알면 단독으로 덤비지 말아야 하고. 하지만 그런 판단을 내리는 건 쉽지 않아. 그렇지?”

시드니가 근사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올랜도는 그에게 지갑을 돌려주었다. 시드니는 곧바로 지갑을 집어넣지 않고 사진을 한 번 더 내려다보면서 애정이 가득한 눈길을 하고는 사진 속 아이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그래서 부적이 필요한 거야. 부적이라고 해도 되고, 웰링턴처럼 브레이크라고 불러도 되고. 좀 더 있어 보이고 싶다면 그 무슨 영화더라, 거기에서처럼 토템이라고 부르는 방법도 있어. 이름이야 뭐든지 좋으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자네를 제어해 줄 수 있는 안전장치를 하나 만들어 두도록 해. 무작정 목숨을 걸고 뛰어들지 않도록 지켜 주는 거라면 뭐든지 괜찮아.”

“선배님께는 공주님이 계신 집으로 무사히 귀환하실 책임이 그 부적이로군요.”

“그렇지.”

비록 시드니의 주장이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서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영화 속 FBI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을지언정 올랜도는 대단히 감동해 버렸다. 사진을 내려다보는 시드니의 눈에는 다른 사람에게라면 절대로 보여 주지 않을 다정함이 가득했다. 경찰 제복과 총으로 마약 밀매상의 체포를 계획하는 요원도 멋지지만, 등 뒤에 가족이 있기에 자신을 가다듬고 이성을 붙잡는 요원도 만만치 않게 멋져 보였다. 올랜도가 얼른 가정을 이루어야 하나 따위의 생각에 빠져 있는데 시드니가 길 건너를 힐끔 보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온다. 따라와.”

“네!”

올랜도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 다이너를 나갔다. 시드니는 진짜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교통경찰처럼 손바닥을 탁탁 털면서 길을 성큼성큼 건너 호텔의 입구로 향했다. 입구에 서 있는 포터들은 전부 포터로 위장한 경찰이었고, 아까부터 손님을 기다리는 척 서 있는 택시의 운전사도 경찰이었다. 검은 리무진이 호텔 앞으로 와 멈추어 섰다. 사전에 올랜도가 받은 정보대로라면 그 리무진은 콜롬비아 코카인 밀매업자를 데리러 온 그의 부하의 차였다.

상대가 몇 명이나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는지를 몰라서 뉴욕 경찰에서는 인력을 대규모로 지원했다. 마피아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공권력과의 마찰을 꺼리기 시작했지만 콜롬비아나 푸에르토리코, 과테말라 등지에서 유입된 갱이나 밀수업자들은 아직도 시내에서 경찰과 총부리를 맞대는 걸 별로 두려워하지 않아 골치를 썩이는 존재들이었다. 시드니는 오늘 발포 허가를 받았다고 했다. 올랜도는 아직 신입이라 발포 허가는 받지 못했고 작전을 전부 다 알지도 못했다. 시드니가 길을 건너가면서 올랜도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오늘 어디까지나 견학에 가까운 입장임을 명심해. 사건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거나 내가 위험에 처한 것처럼 보여도 절대로 끼어들지 마. 만약에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도망치고.”

“예?”

올랜도가 기겁을 하고 외치자 시드니가 조용히 하라며 눈총을 주었다. 방금 눈에 띄는 행동을 해 버렸음을 깨달은 올랜도가 후회에 차서 입을 다물었다. 시드니가 씩 웃으며 말했다.

“요원 한 명이 희생되는 걸로 사태가 끝날 수 있는데 두 명이 희생된다면 낭비지? 오늘 체포를 진행하는 도중에 나는 아마 부상을 입을 수도 있어. 그렇더라도 함부로 덤비지 말라는 얘기야. 그리고 결정적으로, 총 쏘지 마. 그거 일 엄청 곤란해져. 자넨 오늘 허가 못 받았으니까 절대로 쏘지 마. 무허가 발포는 시말서 정도로 끝나는 일이 아니야.”

“명심하겠습니다.”

올랜도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시드니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앞질러 호텔 쪽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오늘 뉴욕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시드니는 올랜도에게 작전의 목적과 그들이 교통경찰로 위장할 거라는 사실 정도만 알려 주어서 지금부터 시드니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부터 충실한 후배 교통경찰 흉내만 내면 된다지만, 시드니가 방금 한 소리가 장난인지 진심인지를 모르겠으니 두려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머릿속은 복잡했으나 어느 새 두 사람은 호텔 입구 거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로비를 힐끔 들여다보니 수행원을 양 옆에 하나씩 낀 남미 사람이 하나 나오고 있었다. 플로리다에서 패트릭 서턴을 보고 아이리시 갱단 보스라기보다는 회계사에 가까워 보이는 외모에 실망했던 올랜도에게 이 자는 몹시 만족스러워 보였다. 옷을 잘 모르는 올랜도가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양복에 한 손에는 큼지막한 녹황색 보석이 박힌 반지를 끼고 있었고, 실내에서부터 벌써 입에 시가를 하나 물고 밖에 나가자마자 불을 붙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슴 주머니에 꽂은 실크 손수건과 왁스를 발라 뒤로 넘긴 머리가 그가 얼마나 멋쟁이인지 감탄스러웠다. – 그것도 구식 멋쟁이인지를 보여 주는 것 같았다. - 올랜도는 짧은 관찰을 끝내고 시드니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숨이 멎는 기분을 느꼈다.

시드니가 리무진의 차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성실한 얼굴에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있어서 누가 보아도 무언가 아주 잘못된 일이 일어났을 거라고 믿을 수밖에 없을 모습이었다. 리무진의 운전사가 창문을 내리자 그가 수첩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실례합니다, 선생. 이 차 소유주십니까?”

“아닙니다. 렌트한 차인데요?”

두목과 마찬가지로 콜롬비아 사람으로 보이는 운전사가 당황해서 대답했다. 시드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 앞쪽으로 가서 번호판을 다시 한 번 읽더니 수첩에 적힌 숫자와 대조해 보고는 되돌아와서 심각하게 말했다.

“지금 렌트하신 차량은 도난 차량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선생. 수사에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렌트 계약서를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이야?”

호텔에서 나온 코카인 밀매업자가 리무진 앞에 선 경찰을 보고 호통을 쳤다. 시드니가 굳은 얼굴로 올랜도에게 턱짓을 했다. 올랜도는 할 수 있는 한 딱딱한 투로 방금 시드니가 했던 말을 반복했다.

“이 리무진은 도난 차량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수사에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코카인 업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드니는 미리 뉴욕 경찰에 의뢰해 그로 하여금 체포의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끔 조치해 두었다. 아마 지금 당장 뉴욕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그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교통경찰의 개입에 피가 마르는 기분이리라. 남미인이 주먹을 불끈 쥐더니 올랜도를 과격하게 밀치고 시드니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나는 바쁜 사람이야! 당장 공항에 가야 하니까 따라와서 거기서 차 수거해 가든가 하라고!”

남미 사람이라서 미국에서 경찰이 어느 정도의 권한을 갖는지 잘 모를 수도 있기는 하겠지만, 욕을 하거나 소리를 치는 정도는 생각했어도 자신을 밀 줄은 꿈에도 몰랐던 올랜도가 비틀거리고 뒤로 물러나다가 뭔가를 밟고 나자빠질 뻔했다. 시드니의 얼굴에 경계심이 스쳤다. 그는 뒷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내며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운전석에 앉은 분은 내려 주십시오. 이 차는 도난 차량이며 즉시 수사에 협조해 주시지 않는다면 절도범으로 간주하겠습니다. 그리고 동료 경찰에 대한 폭행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실 수 있습니다, 선생.”

경호원들은 당황한 듯 서로를 마주 보았고 운전사는 운전석에서 내리려고 안전벨트를 풀고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나 체포의 위험이 머리카락 하나에 매달린 칼처럼 머리 위에서 번득이고 있는 코카인 밀매업자는 경찰의 명령에 불응하고 폭력을 쓴 이력 때문에 미국에 입국 금지 조치가 취해지고 고국으로 도망치는 편이 그들의 말을 들어 주다가 타국에서 체포를 당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가 스페인어로 버럭 소리를 지르며 리무진으로 다가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어딜 내려! 급하다고 했잖아, 비행기를 놓치면 끝장이다! 당장 출발해!”

“공무 집행 방해 및 공무원 폭행으로 체포하겠습니다.”

시드니가 차갑게 말하며 남미인의 팔을 덥석 잡았다. 놀라서 앞으로 나서려는 두 경호원의 앞을 올랜도가 재빨리 막아섰다. 그는 경찰 배지를 꺼내 들이밀면서 어릴 적부터 경찰과 특수 요원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며 언젠가 꼭 실제로 해 보리라 다짐했던 대사를 내뱉었다.

“지금 저항하시면 두 분도 동일한 죄목으로 체포하겠습니다.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마지막 경고입니다.”

경찰이 마지막 경고 따위의 단어를 입에 실제로 올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다행히 외국인들이라 이 나라의 경찰은 이렇게 최후통첩도 날리는구나 하며 납득한 얼굴이었다. 그들이 머뭇거리는 가운데 스스로의 대처에 뿌듯해져서 뒤를 돌아본 올랜도가 고함을 질렀다.

“선배님!”

그의 외침과 동시에 밀매업자가 조그만 권총을 꺼내어 쏘았다. 너무 거리가 가까워 조준하고 자시고도 없었다. 총알이 발사되는 순간, 시드니가 콜롬비아인의 손목을 과격하게 비틀어 위로 꺾어 올렸다. 총구는 호텔의 차량 대기 지점을 밝히고 있던 전등을 향했고 전구 하나가 총에 맞아 박살이 났다.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사복 경찰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코카인 밀매업자 일당에게 번개같이 수갑을 채웠다. 상황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종료되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콜롬비아인과 그의 수하들이 끌려가고 나자 시드니가 그의 앞에 다가와 선 뉴욕 경찰 관계자에게 말했다.

“지금 저 사람이 저러고 있는 게 잡힌 게 분해서도 있겠지만 아파서 그러는 것도 있을 겁니다. 아마 손목이 부러졌거나 최소한 손가락 몇 개는 부러졌을 겁니다. 제가 좀 급하게 꺾었거든요. 원래는 체포 도중에 용의자에게 상해를 입히면 경위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아, 알겠습니다. 그건 저희 선에서 처리하지요.”

재치 있는 대답에 시드니의 얼굴이 화색이 돌았다. 웰링턴이 시드니를 두고 서류 작성을 하기 싫어해서 큰일이라고 그렇게 흉을 보더니 이번에도 다른 것보다 경위서 쓰는 게 귀찮아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올랜도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뉴욕의 담당자가 시드니와 올랜도에게 차례로 악수를 청했다.

“두 분 덕택에 골칫거리이던 작자를 드디어 체포했습니다. 앞으로도 뉴욕의 마약 루트를 분쇄하는 일에 계속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심문 일정이 잡히는 대로 바로 공문 발송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돌아갈 예정이십니까?”

“예. 전 바로 가야 합니다.”

시드니가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빨리 사랑스러운 공주님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보였다. 두 사람은 뉴욕의 담당 형사와 몇 마디 더 인사를 나누고 작전에 관여한 다른 인물들과도 인사를 나눈 뒤 경찰 제복을 반납하기 위해 잠시 경찰서에 들렀다가 워싱턴으로 향하는 아셀라 특급 열차를 타러 펜 스테이션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시드니가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길에 과자를 한 봉지 사면서 입을 열었다.

“아까는 잘 했어.”

“자, 잘 했습니까?”

올랜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드니 요원이 칭찬을 해 주다니, 지금 당장 하늘로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시드니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명 막은 건 말투가 경찰 치고는 좀 이상하기는 했는데 그래도 신입 같지 않게 잘 했어. 그리고 마지막의 그 선배님 하고 외친 거, 진심으로 놀라서 그런 거겠지만 그것도 효과가 좋았고. 잘 했어. 합격.”

“감사합니다, 선배님!”

시드니가 목소리를 좀 낮추라는 시늉을 했다. 감격한 나머지 너무 큰 소리를 내는 바람에 사람들이 그들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올랜도는 머쓱한 얼굴로 기차에 오르면서 말했다.

“안 다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선배님.”

“아, 그러게 말이야. 운이 좋았어. 처음에 내가 다칠 것 같다고 했던 말은 그 자가 원래 칼을 쓴다는 말을 들어서 그랬던 거야. 칼은 그렇게 손을 비틀어서 뺏기 힘들잖아? 그런데 총으로 갈아탔더군. 워낙 작은 총이라 꺼내는 데에 시간이 별로 안 걸려서 좀 긴장하긴 했지.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우리 공주님이 뽀뽀를 해 주더니 그게 효과가 좋았나 봐.”

시드니가 싱글벙글하며 대답했다. 그는 과자 봉지를 소중하게 가방에 집어넣고 그 위를 흡족하게 탁탁 두드렸다. 올랜도가 미소를 지었다.

“공주님 가져다주시게요?”

“응. 착한 일 할 때마다 과자 한 개씩.”

다치지 않고 집에 돌아갈 수 있어서 시드니는 몹시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아마 다쳤더라도 자기가 아픈 것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꼬마 공주님이 무서워하는 걸 더 걱정했을 사람이었다. 저렇게나 듬뿍 사랑을 받고 자라는 아이라니 얼마나 행운아인가. 올랜도는 새삼 시드니의 꼬마 공주님이 부러워져서 선배 요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드니는 그새 또 지갑을 꺼내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남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기뻐하고 있었다.

***

패트릭은 주(州)의 경계를 넘는 순간부터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스튜어트가 웃으면서 달래려고 해 보았지만 그래도 가기 싫은데 억지로 가는 거라며 투정을 부렸다. 결국에는 스튜어트가 집에 가는 길에 초콜릿 퍼지와 브라우니가 잔뜩 든 아이스크림을 사 주겠다고 약속을 해서 겨우 입을 다물게 했다. 패트릭은 조카가 귀여우니 형님이 아무리 구차한 소리를 하더라도 좀 참으라는 스튜어트의 호소를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라디오 채널만 빽빽 돌렸다.

조셉 부부는 언제나처럼 부담스러울 정도로 다정하게 두 사람을 환영해 주었다. 입이 튀어나와 있던 패트릭은 조카 듀크가 집이 떠나가라 삼촌을 부르면서 2층에서부터 쏜살같이 달려 내려와 다리에 매달리자 그제야 웃음을 보였다. 패트릭이 듀크를 안아 들고 테레사와 듀크의 요즘 유아원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안으로 들어가는 사이 조셉이 스튜어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어때, 얘기 해 봤어?”

“제가 말했을 때에는 반응이 별로 안 좋았습니다.”

그러니 형님이 말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힐 거란 뉘앙스를 담아 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조셉은 스튜어트의 말 아래에 깔린 암시를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체 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스튜어트의 팔을 잡아 안쪽으로 안내했다.

“내가 물어보면 되지. 수고했어, 제부. 가서 스테이크 맛 한번 봐 줘. 그릴 쓰는 게 아직 서툴러서 약간 태웠어도 제법 그럴듯해.”

부엌의 긴 식탁은 벌써 세팅이 완벽하게 완료되어 있었다. 스튜어트가 디저트 거리로 가져온 달콤한 아이스 와인과 호두 파이를 테레사와 함께 정리해 넣어 두는 동안 조셉이 패트릭에게로 슬그머니 다가섰다.

“요즘 좀 어떠냐?”

“뭐가?”

패트릭이 듀크와 적당히 장난을 치면서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조셉이 혀를 한 번 찼다.

“뭐 묻는 거 같아?”

“나중에 얘기해. 키드 없을 때.”

짧은 한마디에 거부할 수 없는 딱딱함이 들어 있었다. 조셉은 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패트릭의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패트릭은 그를 쌩하니 지나쳐 부엌으로 먼저 들어가더니 싱크대 위를 휘 둘러보았다. 눈썰미가 좋은 스튜어트가 부엌 입구에 서자마자 물었다.

“어, 형수님, 커피 머신이 원래 저거였던가요?”

“아니. 바꾼지 조금 됐어.”

테레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조셉이 얼른 끼어들었다.

“형네 집에 자주 안 놀러 오니까 이런 게 바로바로 업데이트가 안 되는 거야. 앞으로는 자주 좀 오라고.”

“지난번에 쓰던 거 뭐 문제 있었어?”

패트릭이 조셉이 끌어내 준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스튜어트는 어느새 여기가 자기 집 부엌인양 자연스럽게 테레사와 함께 음식을 내어 오고 있었다. 어딜 가나 적응력 하고는. 조셉이 그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 딱히. 저게 더 신형이라 기능이 많아서 한번 써 보려고 들여놨어. 카푸치노도 만들 수 있는데 이따가 밥 먹고 나서 만들어 줘 볼까?”

“비쌌겠네. 무슨 돈으로 샀을까?”

그제야 패트릭의 진의를 알아차린 조셉의 얼굴이 굳었다. 식탁 위로 일순간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스튜어트가 패트릭 앞에 큼지막한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를 턱하니 내려놓으면서 싱긋 웃었다.

“바꾸실 거 알았으면 지난번 거는 저희 달라고 할 걸 그랬습니다, 형님. 아침에 커피 맛있게 타는 것도 일이더라고요. 그렇죠, 형수님?”

“그럼. 물만 좀 실수해도 맛이 확 변하잖아. 진짜, 지난번 거는 자기들 줄 걸 그랬네. 그 생각을 못 하고 그냥 중고로 팔아 버렸는데, 아까워라.”

테레사가 눈치 빠르게 말을 받으면서 위기가 겨우 넘어갔다. 스튜어트는 패트릭에게 물을 따라 주려는 것처럼 그의 뒤로 돌아가더니 허리를 숙이며 패트릭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상냥하게 굴어. 부탁할게.”

패트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스튜어트는 그대로 그의 귓불에 살짝 키스하고 듀크를 아기 의자에 앉히는 전쟁을 치르러 출전했다. 그는 버둥거리는 듀크를 번쩍 들어 올려 전용석에 앉히고는 사나이는 이런 수모 따위에 울지 않는다며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테레사가 스파게티를 가득 담은 큰 접시를 내어 오면서 웃었다.

“듀크는 스튜어트 말이라면 참 잘 들어, 그렇지, 팻?”

“그러게 말입니다, 형수님.”

“쟤가 삼촌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틈만 나면 삼촌들 언제 오냐고 노래를 부른다니까?”

패트릭이 활짝 웃었다. 너무 활짝 웃어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래도 차라리 웃고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는지 테레사는 노련하게 미소로 그 표정을 넘겨 버리고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스튜어트가 패트릭의 옆자리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맛있겠네요. 먹음직스럽게 잘 구우셨는걸요, 형님.”

“평가 부탁하네, 제부.”

“저보다는 팻이 음식 맛을 더 잘 아는데….”

“어라, 난 스파게티가 좋아 보이네.”

패트릭이 그의 말을 끊더니 스테이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스파게티 접시에 곧바로 포크를 박았다. 조셉이 어색하게 눈을 깜빡였다. 스튜어트가 스파게티를 덜어 가도록 도와주는 척하면서 식탁 아래에서 패트릭의 발등을 꾹 눌러 밟았다. 패트릭은 그의 발을 걷어차 버리고 스파게티를 마저 덜어 온 다음 스테이크를 조금 썰어서 스튜어트에게로 내밀었다.

“자, 아 해 봐.”

제법 심술궂은 그 표정에 스튜어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는 순순히 패트릭이 내미는 스테이크 조각을 받아먹고 패트릭의 손에서 나이프를 낚아채어 한 입에 넣기에는 약간 큰 사이즈의 조각을 잘라내 그에게 들이밀었다. 패트릭이 웃기지 말라는 표정으로 스튜어트를 노려보았다. 스튜어트는 다정하게 웃으면서 식탁 아래로 이번에는 조금 아프게 패트릭의 발등을 밟았다. 테레사가 웃음기 섞인 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 정말로 알콩달콩해서 부러워. 서로 먹여 주기도 하고.”

“형님도 형수님께 좀 먹여드리고 그러세요. 자, 팻, 착하지.”

“내가 어린애…!”

반사적으로 반항하는 대답을 내놓으려고 패트릭의 입술이 벌어진 틈을 타 스튜어트가 전광석화 같은 솜씨로 그의 입에 스테이크를 쑤셔 넣었다. 패트릭은 하마터면 스테이크를 밸어 낼 뻔했지만 화풀이하듯이 고기를 아주 꼭꼭 씹기 시작했다. 복수를 완료한 스튜어트가 스파게티를 덜어 오면서 조셉에게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주 맛있게 구워졌어요, 형님. 다음에는 저한테 그릴 쓰는 법 좀 가르쳐 주시지요?”

“그래. 날씨 나빠지면 밖에서 요리하는 것도 힘드니까 빨리 또 놀러 오라고.”

조셉이 그 정도면 만족이라는 듯 난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행히 패트릭은 그 이후로는 식사 동안 심술을 부리지 않았고, 어느 정도 지나고 나자 조금씩 스튜어트의 농담에 밝게 반응하기까지 했다. 식사가 끝나고 테레사와 스튜어트가 디저트를 무엇부터 내놓을지, 설거지는 어떻게 할지 머리를 맞댄 틈을 타서 조셉이 듀크와 놀아 주려던 패트릭의 소매를 잡고 등을 두드리며 그를 밖으로 끌어냈다.

“얘기 좀 하자, 팻.”

“무슨 얘기를 또 하려고.”

“이런저런 얘기 할 게 많지. 너도 알잖아? 포치에서 디저트 먹으면서 의논 좀 하자, 우리.”

패트릭은 이마를 찡그렸다.

“난 형이랑 아무것도 의논할 게 없…!”

“야, 날씨 좋네. 이런 날에 정원에서 놀아야지 안 그러면 언제 놀겠어!”

신의 타이밍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보나마나 테레사의 사주를 받았음이 분명한 스튜어트가 부엌에서부터 맹렬하게 달려들더니 패트릭을 홱 잡아챘다. 얼떨결에 당한 공격에 패트릭은 소리 한 번 칠 새도 없이 현관 바깥까지 주르륵 끌려 나갔다.

화목한 가족에 대한 환상이 있는 스튜어트가 조셉 부부와 패트릭이 사이좋게 지내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이는 건 참 눈물겹지만, 정작 형네 부부와 이 이상 친해질 마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장본인은 빈말로도 전혀 고맙지 않았다.

그렇다고 스튜어트의 팔을 뿌리쳐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는 없어 패트릭은 저항도 못 하고 전리품처럼 포치로 운반되어 졸지에 등나무 의자에 얌전히 앉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스튜어트가 그의 옆자리에 앉더니 패트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착하지.”

“…안 착할래.”

패트릭이 골을 냈다. 스튜어트의 손길이 한층 상냥해졌다.

“착하게 굴면 이따가 집에 가서 잔뜩 귀여워해 줄게.”

“그냥 지금 집에 가고 적당히 귀여워해 주면 안 돼?”

“안 돼.”

패트릭이 볼을 부풀려 불만을 드러냈지만 스튜어트는 모르는 체 했다. 조셉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와 두 사람의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사이 한번 좋아. 아직도 깨가 쏟아지는구만.”

“저희야 항상 이렇죠.”

스튜어트가 흐뭇하게 말하며 패트릭의 앞머리를 걷고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조셉 앞에서 기분 좋은 티를 내기는 싫고, 그런데 또 스튜어트의 애정 표현 그 자체는 좋아서 패트릭은 이걸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언제 나왔는지, 아니, 테레사가 내보낸 게 뻔해 보였지만, 조르르 달려 나온 듀크가 대뜸 스튜어트의 다리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스튜 삼촌, 스튜 삼촌 비행기!”

스튜어트가 웃음 섞인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듀크가 곧바로 그의 등에 매달리려고 했다. 그는 부드럽게 무릎을 꿇어 아이가 업히기 쉽게 몸을 돌려 대면서 패트릭을 힐끔 쳐다보았다. 패트릭이 씩 웃으면서 일어나 스튜어트에게로 허리를 숙였다. 그는 스튜어트가 가슴 주머니에 자랑스레 꽂아 놓은 선글라스를 빼서 씌워 주며 볼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안전한 비행 하세요, 에이스 파일럿.”

“알겠습니다.”

스튜어트가 진지하게 경례를 하더니 선글라스 너머로 패트릭에게 윙크를 했다. 연애를 몇 년을 했고 결혼까지 했는데 아직도 그 윙크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패트릭은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공연히 정원 너머 옆집의 분수를 구경하는 척 하며 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듀크를 업은 스튜어트가 목을 가다듬은 뒤 기세등등하게 고함을 질렀다.

“물렀거라, 지상 최고의 전투기가 나가신다!”

“나가신다!”

듀크가 덩달아 신이 나서 혀짤배기소리로 외쳤다. 스튜어트가 입으로 둥둥 부릉부릉 하고 전투기 발진 준비 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일어섰다. 점점 더 고도가 높아지자 듀크가 은근히 무서웠는지 스튜어트의 목을 꽉 붙잡았다. 스튜어트는 허리를 완전히 펴고 듀크가 단단히 매달렸는지 확인을 했다.

“파일럿 안전 체크 완료, 이륙 준비, 출격!”

우렁찬 함성과 함께 스튜어트가 전속력으로 정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듀크가 환성을 지르며 꺅꺅거렸다. 커피와 베일리스를 가져오던 테레사가 그 속도에 깜짝 놀란 듯 웃음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스튜어트는 포치의 계단을 순식간에 달려 내려가 듀크를 짊어지고 이리저리 내닫더니 커다란 원을 그리며 정원을 한 바퀴 돌았다. 듀크가 온 동네에 다 들리도록 커다랗게 웃으며 소리를 질렀다.

“빨리, 더 빨리!”

“명령 접수, 고도 변경, 엔진 출력 최대치까지 업!”

스튜어트가 몸을 갑자기 홱 낮추었다가 허리를 튕겨 올렸다. 전투기가 갑자기 요동을 치자 듀크가 환성을 질렀다.

“기류다!”

“기류 발생, 기류 발생. 기체가 흔들립니다, 기류 발생.”

스튜어트가 제법 그럴듯하게 기계음을 흉내 냈다. 세 살짜리 아이 중에서 파일럿 출신 삼촌을 두지 않은 이상 기류라는 단어를 아는 애가 몇 명이나 될까 싶어 패트릭이 킥킥 웃기 시작했다. 그가 커피에 베일리스를 조금 따라서 한 모금 마시는 동안 스튜어트는 자기가 더 신이 나서 아이처럼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정원을 헤집고 다니는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조셉이 물었다.

“제부는 모르지?”

“뭘?”

“네가 정확하게 뭐 하는지.”

애정이 담뿍 담긴 눈으로 스튜어트의 뒷모습을 좇던 패트릭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는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면서 한숨을 쉬었다.

“알 리가 없잖아. 아버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심을 한 것도 같던데, 나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

“말 안 할 셈이야?”

“못해.”

패트릭이 딱 잘라 말했다. 조셉이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잔에 베일리스를 조금 더 따랐다.

“언제까지 숨기고 살 건데?”

“아마 평생.”

“눈치도 못 챈 거 같아?”

“쟤 은근히 눈치 없어. 말 안 하면 절대로 몰라.”

확신을 담은 목소리였다. 조셉이 혀를 차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그냥 얘기를 해 버리는 게 낫지 않아?”

“난 형이랑은 입장이 달라. 형이랑 형수는 전부 다 아는 상태에서 결혼을 한 거지만 난 너무 오래 숨겼어. 지금 와서 털어놓았다가는 잘못하면 골치 아파져.”

“허, 쟤가 그런 거 하나로 흔들릴 것 같아서? 신뢰가 모자라네.”

이런, 조셉 에릭 서턴, 선취점. 패트릭은 한 방 맞은 기분으로 마음속의 스코어보드에 점수를 적어 넣었다. 아무 생각도 없다는 듯 듀크와 스튜어트 쪽만을 보고 있는 형의 얼굴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아마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을 것이다. 조셉은 어릴 때부터 무심코 있을 때에만 날카로운 면이 있었으니까. 패트릭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조셉이 커피를 홀짝이면서 중얼거렸다.

“너 그러다가 나중에 걸리면 쟤 더 난리 난다.”

형에게 동조하고 싶은 건 드문 일이었다. 패트릭은 씁쓸하게 입술을 물고 앉아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스튜어트의 애정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고, 패트릭이 최악으로 흔들릴 때에 스튜어트가 보여 주었던 태도를 돌이켜 보면 어쩌면 이 일마저도 스튜어트는 대견하리만치 의연하게 버텨 낼지도 몰랐다. 하지만 화를 내고 창피하게 여길 가능성도 있었다. 눈앞의 형이 그랬듯이 스튜어트도 그에게 분개해 떠나가 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스튜어트는 군인 출신의 변호사라 정의감이 유달리 강했다. 아무리 자체 정화를 꽤나 성공적으로 치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아이리시 갱의 리더임을 숨겼으니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아니, 말할 수 없다. 그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 버렸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행복하지 않은가. 비록 주춧돌 중 몇 개가 거짓말로 이루어지기는 했어도 두 사람이 사랑이라는 기반 위에 지은 작은 집은 아늑하고 평온했다. 그 평화를 깰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스튜어트를 잃을 가능성이 있는 짓은 무엇이 되었든 할 수 없었다.

“어쨌든, 못해.”

“앞으로도 숨기고 살려고?”

“자칫하다가 이 쪽 사정 더러워지면, 개입시켜 놓았다가는 키드가 다쳐. 안 돼.”

“보호라, 뭐, 좋지. 그래, 너네 사정인데 내가 끼어들 필요는 없는 거 같다.”

조셉이 등받이에 기대면서 중얼거렸다. 패트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스의 가족은 언제나 위험 0순위가 될 수밖에 없는 위치이다. 만일 그 가족이 민간인이라면 관련도 없는 일반인을 공격했다고 다른 패밀리들이 지탄을 해 주겠지만, 비즈니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가족의 경우에는 그런 외부적인 압력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스튜어트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가능성이라면 절대적으로 사양이었다. 패트릭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의미에서 할 말이 있어.”

“응?”

패트릭이 의자에서 몸을 조금 일으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는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고 조셉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키드에게 전화를 하는 건 좋아. 우릴 주말에 보자고 초대하는 건 고마워. 하지만 키드에게 일 관련으로 아무 말도 하지 마. 한 번만 더 키드 입에서 우리 사업에 형도 한 자리 얻어 달라는 말이 나오는 날에는 형이라고 해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 그리 알아. 쟨 아무것도 몰라. 모르게 할 거야. 그러니까 얽히게 하지 마.”

“나 참…. 알았어, 알았다고.”

조셉이 항복하는 시늉을 하며 손을 들었다. 패트릭은 잠시 매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패트릭이 쉽사리 표정을 풀지 않자 조셉이 과장되게 한숨을 쉬었다.

“너는 어떻게 형한테 이럴 수가 있냐?”

“형이 나한테 제대로 대접을 받을 욕심이 있었으면 존경 받을 만한 모습을 보였어야지.”

“내가 점잖게 나왔을 때 네가 내 말에 귀 기울이는 척이라도 한 적은 있고?”

징징거림이 시작될 전조였다. 패트릭은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저녁 하늘과는 정반대로 그의 속에는 걱정이 끼이고 있었다.

“형, 그냥 팩트만 보자고. 예전에 키슬러 씨가 형한테 갤러리 하나 맡겼다가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 안 나?”

아직 듀크가 태어나기 전, 조셉 부부가 프랑스에서 잠시 귀국했을 때 패트릭은 워싱턴에 형의 자리를 잡아 주기 위해 갤러리를 하나 맡겼던 적이 있었다. 조셉은 경영자로서의 재능이 제로라는 사실을 아주 화려하게 증명해 보였다. 너무도 화려하게 증명한 나머지 키슬러는 그 일로 인해 위궤양이 걸렸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키슬러의 알아주는 네거티브 성격 때문이라고 넘겨 버렸지만, 직접 장부를 들여다본 뒤로 패트릭은 키슬러의 엄살이 그래도 절반쯤은 사실에 기인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옛날 일 끄집어내기는. 그때에는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잘 몰랐어.”

조셉이 스스로도 민망한지 얼굴을 붉혔다. 패트릭이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사업을 알게 되었다면 스스로 창업해. 그룹에는 빈자리가 없어. 요즘 우리 사정도 어려운데 누굴 새로 들이겠어?”

“이 자식, 진짜 남이나 다름없네.”

“뭘 바랐는데?”

패트릭이 몸을 조금 일으키면서 물었다. 조셉은 그를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수익성 있는 비즈니스가 없는 것도 아닌데 생각도 안 해 보고 요즘 그룹이 어렵다, 자리가 없다고 바로 잘라 버리니까 그렇지.”

“지금 설마 내가 예상하고 있는 그런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형.”

패트릭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딱딱해졌다. 조셉은 어깨를 으쓱이며 커피를 입가로 가져갔다.

“날 위해서 하나쯤 새로운 분야에 진출해 주면 괜찮잖아? 너무 센 거는 나도 안 바라니까 가벼운 걸로 말이야.”

“제퍼슨 그룹은 불법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아. 우리는 더 이상 갱단이 아냐.”

“네가 사업이 어렵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다니니까 내가 조언 하나 하자는 거 아니냐….”

조셉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패트릭이 얼음장 같은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무서운 기세로 조셉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착각하고 있는 게 있네, 조셉 에릭 서턴. 제퍼슨 그룹을 이끄는 건 나야. 그룹의 방향은 내가 결정해. 그룹 내의 누구에게도 내가 들을 이유가 없는 조언이라는 걸 그룹 외부의 사람인 형에게서 받을 이유는 더더욱 없어.”

“이 녀석아, 나는 그냥….”

“부탁을 하는 사람이라면 부탁하는 사람다운 태도를 보여. 형에겐 제퍼슨 그룹이 운영되는 방향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권한이 없어. 감히 나에게 충고하려고 들지 마. 제퍼슨 그룹의 수장은 나야.”

패트릭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딱딱해졌다. 조셉은 어깨를 으쓱이며 잔을 들어 그 뒤로 얼굴을 감추었다.

“무서워서 어디 말이나 하겠나… 야, 형제라고 달랑 둘 뿐인데 무슨 말만 하려고 하면 못 틀어막아서 안달이냐? 원래 내정됐었던 대로 내가 제퍼슨 그룹을 물려받았다면 내가 너 이렇게 못 본 척 했을 것 같아?”

“아, 그러셔. 그렇게 가족을 아끼셔. 그런 사람이, 부모님은 여러 분 계셔서 그딴 식으로 대못을 박고 다녔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너무 예민한 부분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말았다. 패트릭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형이 물려받았다면? 물론 처음에 아버지는 형에게 사업을 넘기고 싶어 하셨지. 하지만 그걸 거절한 건 형이야. 내가 형에게서 빼앗은 게 아니라 형이 먼저 가족을 거부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넘어온 거라고. 이제 와서 패밀리로 돌아올 생각이 생긴 거라면 아버지 살아 계실 때 왜 아버질 기쁘게 해 드리지 못했어?”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패트릭.”

커피 잔 안만 들여다보고 있던 조셉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지는 바람에 패트릭은 순간 움찔했다. 조셉에게서는 촐싹거리는 목소리 말고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면서 먼저 건드린 책임은 있었다지만, 패트릭은 진지한 조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화제를 돌리기엔 너무 늦어 버렸고, 조셉은 고개를 들어 패트릭을 빤히 마주 보았다.

“보스를 ‘기쁘게’ 해 줄 일은 절대로 없거든?”

“젠장, 아버질 그 따위로 부르지 마.”

“내가 틀린 이름으로 부른 것도 아닌데 왜? 부모님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여서 좋겠구나, 팻. 빼도 박도 못 하는 아이리시 갱단이 어쩌다가 네가 사리 분별 좀 하는 나이가 됐을 때쯤에 이미 방향 전환을 한 지 오래였을지 생각은 해 봤어?”

패트릭이 팔짱을 끼면서 고개를 돌렸다. 포치 아래에서는 스튜어트가 듀크를 목마 태우고 급강하와 스핀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화기애애해 보이는 두 사람을 보다가 갑자기 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웃기지 마. 갱의 자식이라는 게 부끄러우니까 어디 가서 내 아버지라는 말 하지 말라고, 다시는 안 돌아올 거라고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고서, 이제 와서? 아버지 가슴에 그 따위로 못을 박아 놓고 나서 이제 와서 돈도 필요하고 자리도 못 잡겠으니까 갑자기 패밀리가 아쉬워? 그런 주제에 수익성 있는 사업을 좀 하자? 아버지가 누구 말에 상처를 입어서 제퍼슨 그룹을 합법화시키려고 하신 건데?”

“이거 듣자 듣자 하니까 아서 서턴이 어디 성인군자였던 것 같다? 누구 덕에 네가 보스를 그렇게 아빠, 아빠 하면서 따를 수 있게 된 건데 지금…!”

뭐라고 더 말하려던 조셉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이 정원과 패트릭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혹여나 듀크가 들을까 봐 걱정인 모양이었다. 듀크, 패트릭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었다.

“쟤가 들을까 봐 신경 쓰이지? 형이 지금 제퍼슨 그룹에 들어오면,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관두려고 노력하던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사업을 하나라도 맡으면 나중에 듀크가 형한테 뭐라고 할 거 같아? 아버지가 갱단 두목이라서 자랑스럽다고 할 거 같아, 아니면 형이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창피하니까 두 번 다시 자기 얼굴 볼 생각 말라고 할 거 같아? 난 예언자는 아니지만 후자일 확률이 높을 거 같네.”

“패트릭, 너 정말….”

패트릭은 조셉이 말을 하건 말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말을 다시 시작해 보려던 조셉은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고, 패트릭은 그 표정을 항복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착각하지 마, 형. 형에겐 패밀리로 돌아오겠단 말 할 권리 같은 건 없어. 형 손으로 내팽개쳤지. 나를 만만하게 보지 마. 그리고 두 번 다시 나에게 한 자리 내 달라는 말 하지 마. 날 잘 구워삶으면 화려하게 살 수 있을 거 같아서 제대로 된 직업도 안 구하고 커피 머신이나 바꾸고 있는 거라면 당장 꿈 깨시고 이 집 대출이나 갚으시지. 제퍼슨 그룹에 형의 자리는 없어.”

그는 조셉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정원으로 걸어 내려갔다. 듀크를 태우고 멋지게 활강하고 있던 스튜어트가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가 표정이 좋지 못한 것을 눈치 채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패트릭은 스튜어트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 나직하게 말했다.

“가자, 키드.”

“아, 지금?”

스튜어트가 듀크를 어깨에 메고서 머뭇거렸다. 움직임이 멈추자 듀크가 비행기가 멈추었다고 스튜어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는 듀크의 다리를 토닥토닥 두드려 달래면서 입모양으로 왜 그러냐고 물었다. 패트릭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제발 집에 가자, 부탁이야.”

자신이 듣기에도 불안정한 목소리였다. 얼굴에 순간적으로 그림자가 스친 스튜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싫다고 떼를 쓰는 듀크를 정원 잔디밭 위로 내려놓고 머리를 한 번 쓸어 주었다. 듀크가 덥석 그 손에 매달렸다.

“스튜 삼촌, 가지 마!”

“다음에 또 놀러 올게.”

“또 언제!”

듀크가 본격적으로 고집을 부리려고 하자 스튜어트가 미소를 지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듀크와 눈을 마주치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다음번에 올 때에 꼬마 탐정 세트 가지고 올게. 약속.”

“탐정 세트?”

울기 직전이던 듀크가 멍멍한 소리로 되물었다. 스튜어트가 웃으며 듀크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듀크는 주먹 쥔 손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으면서 스튜어트와 손가락을 걸었다.

“빨리 와야 돼?”

“스튜 삼촌은 약속 잘 지키잖아. 그치?”

“응….”

스튜어트는 그쯤에서 듀크를 놓고 자연스럽게 패트릭의 허리를 안더니 포치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그는 굳은 얼굴의 조셉을 향해 넉살 좋은 미소를 지었다.

“듀크한테 탐정 세트 선물해도 괜찮죠, 형님? 며칠 내로 진상하겠습니다.”

“…그러던가.”

스튜어트는 조셉의 목소리가 뚱한 것을 일부러 모르는 체 했다. 그는 목각 인형 같은 팻을 안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부엌에서 테레사가 호두 파이를 잘라 냉장고에 넣고 있었다. 스튜어트는 그녀에게도 밝은 투로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형수님. 저희 오늘 일찍 가보겠습니다.”

“벌써? 좀 더 놀다가 가지 않고? 아직 아이스 와인도 못 땄는데.”

“다음에 저희 올 때까지 키핑해 주셔도 될까요? 저희도 더 놀다가 가고 싶은데 다른 일이 있어서요.”

눈치가 빠른 테레사는 스튜어트의 능청스러운 말투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의 기민한 눈이 패트릭의 얼굴을 스쳤다. 그의 심기가 불편함을 알아차리자마자 테레사의 태도가 더 사근사근해졌다.

“그래, 다음에 또 와야 해. 듀크가 또 난리가 나겠네.”

“탐정 세트 사다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이틀은 약발이 받을 겁니다. 제가 올 때 연락할게요.”

“그래, 스튜어트. 팻도 조심해서 들어가고.”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패트릭이 착 가라앉은 투로 말하며 스튜어트의 손을 뿌리치고 먼저 뒷문으로 나가 버렸다. 스튜어트가 어쩔 수 없다, 다음에 오기 전까지 잔소리를 해서 확실하게 상냥하게 만들어서 데리고 오겠다고 입에 발린 말을 서둘러 늘어놓고 그를 따라왔다. 먼저 차고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아 있던 패트릭이 그를 노려보았다. 스튜어트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나오냐.”

“집에 갈래. 제발.”

“응, 괜찮아. 괜찮아. 이제 집에 가자.”

스튜어트가 어린아이를 어르듯 그를 달래며 차의 시동을 걸었다. 아무 말도 없이 앉은 패트릭의 분위기가 어찌나 살벌한지 그는 몇 번이나 라디오 버튼에 손을 얹으려다가 움찔거리고 손가락을 거두었다. 워싱턴의 오벨리스크가 하늘을 향한 흰색 바늘처럼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 되어서야 스튜어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팻?”

“두 번 다시 오고 싶지 않아.”

패트릭이 씹어 뱉듯이 말하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스튜어트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가 조용히 해야 할 타이밍이 맞다고 판단했는지 묵묵히 운전에만 집중했다. 패트릭은 유리창에 얼굴을 기대면서 깊은 숨을 내뱉었다.

로즈의 일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오늘따라 형의 말에 더 가시 돋친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따끔하게 한마디 할 필요는 분명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과격하게 밀어낼 것도 없었다. 아무리 형이 말귀를 못 알아듣더라도 차분하게 납득시켰어야 했었는데.

그러나 패트릭은 곧 마음을 굳게 먹었다. 수장 자리를 넘보는 것 같던 조셉의 말은 잔인하리만치 못되게 쳐내는 게 옳았다. 그건 단순히 한 회사의 경영권 문제가 아니라 향후 아일랜드 이민 2, 3세대 사회가 워싱턴에서 어떤 식으로 자리매김할지를 결정짓는 중대한 문제였다. 지난 5년간의 본인의 행보가 모범 답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도 형의 사업 감각이라는 걸 봤을 때 조셉에게 이 자리를 맡겼다가는 사단이 날 게 뻔했다. 패트릭도 간혹 혼자 장을 보러 가면 원래 사려던 제품이 아니라 원 플러스 원 판촉행사나 특별 할인 행사를 하고 있는 제품을 대신 사 오기 일쑤였지만 조셉은 일상에서도 사업에서도 귀가 얇다 못해 투명하게 비쳐 보일 정도였다. 됐어, 난 틀리지 않았어. 패트릭은 다시금 마음을 다잡다 말고 창밖을 보고는 의아한 소리를 냈다.

“어, 야. 우리 어디 가?”

차가 집으로 꺾는 게 아니라 아파트 앞쪽에 있는 아레나 스테이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스튜어트가 차분히 대답했다.

“강물 좀 보다가 들어가자.”

“웬 강물?”

“감정 다 털어 버리고 들어가자. 나쁘고 힘든 생각 하면서 집에 들어가면 안 되잖아. 우리 둥지인데.”

신경이 많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스튜어트의 바람대로 형제가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려면 조셉도 조셉이었지만 사실 패트릭도 형에게 좀 더 관대해질 필요는 있었다. 패트릭이 굳이 반대하지 않자 스튜어트는 포토맥 강이 잘 보이는, 벤치가 늘어선 작은 공원 앞까지 차를 몰아가서 미터기 앞에 차를 세웠다. 패트릭이 안전벨트를 붙잡고 스튜어트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키드.”

“일단 내리자.”

패트릭이 주차요금으로 쓸 동전을 스튜어트의 손에 쥐어 주고 먼저 공원으로 들어갔다. 바람이 거의 없어 강물은 잔잔했다. 그가 유유히 흘러가는 포토맥의 푸른 물을 바라보고 있는데 스튜어트가 등 뒤에서 그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앞으로 네가 가기 싫으면 안 가면 돼. 형님이 연락하시면 내가 최대한 차단할게.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형님 댁에 가는 게 많이 힘들고 부담스러우면 굳이 그런 것 감수할 필요는 없어.”

“…고마워. 그렇지만 괜찮아. 오늘은 내가 예민하게 굴었어.”

형과 대화를 하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제어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냉정하게 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조셉이 한 자리 달라는 식으로 나올 때마다 아버지의 무겁던 얼굴이 떠오르는 탓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이렇게 만날 때마다 설전을 벌이니 스튜어트와 테레사의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을 것이었다. 패트릭은 벤치로 다가가 걸터앉으려고 했다. 스튜어트가 냉큼 먼저 가서 앉더니 제 무릎을 통통 두드렸다.

“이리 와, 아기 고양이.”

“…너 진심으로 내가 손바닥 안에 들어가는 사이즈의 새끼 고양이쯤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패트릭이 기가 차서 물었다. 스튜어트는 순진한 얼굴로 다시 한 번 무릎을 통통 두드렸다. 다 큰 사내가 바깥에서 다른 사내의 무릎에 앉는다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저기에 앉으면 스튜어트의 다리가 남아나질 않을 테고, 그렇다고 저기에 안 앉으면 그의 기분이 남아나질 않을 테니 어려운 선택이었다. 패트릭은 마침내 몸이 괴로운 편이 마음이 괴로운 편보다 낫다는 결론을 내리고 조심스럽게 스튜어트의 무릎에 앉았다. 그저 이 앞을 지나가다가 그들을 목격하는 사람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으, 미안한데 조금 무거워진 것 같다, 너.”

“내가 마지막으로 네 무릎에 앉은 게 아직 내가 너보다 작았을 때였지, 아마.”

“하지만 침대에서는 요즘도 이런 자세로 자주….”

“시끄러워, 그런 순간에는 너도 제정신이 아니라 모르는 것뿐이야!”

참지 못하고 버럭 화를 냈더니 스튜어트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강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산들산들 흩날렸다. 아름다운 금빛이 사방에서 반짝였다. 어쩜 이렇게 때 묻지 않은 소년 같은 면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걸까. 패트릭은 키드의 무릎에 앉아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 보다가 충동적으로 물었다.

“키드, 우리 아버지가 뭐 하는 분이셨는지 혹시 알아?”

아까 조셉이 던졌던 질문 탓에 불안해져서 하는 말이었다. 놀랍게도 스튜어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사업 하셨다며. 지금 너네 회사 창립하셨고. 아,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거, 보스? 잠깐 보스 같은 역할을 하셨던 것 같던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무 당황해서 왜 그런 소리를 하냐며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데 솔직한 심정을 내뱉고 말았다. 스튜어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릴 때 일이라서 솔직히 뭐라고 꼬집어 말은 못 하겠어. 내가 콜로라도로 진학한 게 열일곱 살 때였잖아. 그 전에 어린 마음에 보았을 때에 왠지 추리 소설에 나오는 악당 같은 아저씨들이 매일같이 저택을 드나들고 아일랜드 명절만 되면 선물이 바리바리 쌓이니까 그런 생각을 했던 거 같아. 그런데 왜? 진짜로 무슨 보스 비슷한 거 하셨었어?”

“어, 음… 응.”

갈팡질팡하다가 간신히 결심을 한 패트릭이 머뭇머뭇 대답했다. 스튜어트가 대충 눈치를 채고 있었다니 놀랠 노 자였다. 스튜어트는 여전히 별 문제될 것 없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그랬구나…. 그런데 어느 날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방학 때에 집에 돌아왔다가 너희 집에 가보니까 그런 수상쩍은 사람들의 방문이 거의 다 끊겨 있어서 놀랐어. 그래서 잠깐 보스 같은 역할을 하셨다고 생각한 거야. 끝까지가 아니라 임시 계약직? 그리고 추천서 건도 있다 보니.”

추천서 얘기는 패트릭으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그가 묻는 듯한 시선을 보내자 스튜어트가 미소를 지었다.

“원래 콜로라도 공군 아카데미에 응시하려면 해당 주 상원 의원이 추천서 써 줘야 하잖아. 당시에는 나나 양부모님이나 그게 정말 별것도 아닌 서류에 서명 하나 된 것뿐이란 걸 몰라서 어떻게 그런 걸 받나 전전긍긍했었는데, 네 아버지께서 그 얘길 듣고 이틀인가 후에 추천서를 받아 주셨지. 그것도 남들이 공군 아카데미 지원할 때 내는 형식적인 추천서 말고 진짜 생각을 하고 쓴 추천서로. 그때 아하, 이 분은 뭔가 힘이 있으신 분이구나 했어.”

그런 일이 있었구나. 패트릭이 놀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스튜어트가 그의 허리를 당겨 안으면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 얘기는 왜?”

“아….”

마땅히 둘러댈 핑계가 없어 패트릭은 잠시 망설였다. 그냥 해 본 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진도가 많이 빠졌다. 그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어느 날 그렇게 갑자기 그만두신 건 형 때문이었어.”

“조셉 형님?”

“응. 형이 아버지에게 갱의 자식이라 창피하다고 했거든. 결국엔… 집도 나갔잖아.”

스튜어트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사람을 선의로만 보는 스튜어트로서는 조셉의 단점이라 하면 약간 멍청하고 약간 오지랖 넓으며 약간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면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스튜어트가 품고 있었을 형의 이미지를 박살 내는 건 미안했지만 여기까지 말을 한 이상 좋게 넘어가기란 이미 글렀다. 패트릭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사업에서 손을 털기로 결정하셨어. 형은 항상… 아버지한테는 깨물지 않아도 아픈 손가락이었거든. 아버지가 더 이상 갱이 아니게 되면 형도 집에 돌아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셨던 거야. 살아 계셨을 때에 돌아왔더라면 아버지는 형이 했던 말 같은 건 다 잊고 어서 오라고 하셨을 거야. 그런데 형은 장례식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어.”

어릴 때에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제퍼슨 그룹이 합법화되고 나서 형이 집에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패트릭이 아버지 입장이었다면 조셉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조셉을 스튜어트로 치환해 놓으니 아버지가 이해가 갔다. 아마 패트릭도, 스튜어트가 갱단 두목인 그를 부끄럽게 여겨 도망치더라도 언젠가 돌아온다면, 그저 다시 와 주기만 한다면 너무나도 기쁘고 고마워서 원망 따위는 떠오르지도 않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형님을 껄끄러워하는구나.”

따뜻한 스튜어트의 목소리가 생각 속으로 잠겨 가던 패트릭을 건져 올렸다. 그가 패트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제나처럼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손짓이었다.

“그래도… 아버님께선 형제끼리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을 거야. 네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팻, 너무 지난 일에 얽매이는 것도 좋지만은 않아. 너 요즘 걱정이 너무 많아 보여. 힘든 일 있음 나랑 상의도 좀 해 줘. 지금처럼 얘기도 들려주고. 얼마나 좋아, 이렇게 밖에서 강바람 쐬면서.”

패트릭이 억지로 헤헤 웃었다. 그의 말대로 그와 힘든 문제들을, 예컨대 로즈의 체포나 마피아와의 마찰을 의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스튜어트라면 가끔 엉뚱한 소리는 할지언정 성실한 조언자가 되어 주겠지. 패트릭은 길에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나 살펴본 뒤 얼른 스튜어트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 키드. 나도 많이 후련해졌어.”

“그렇다면 다행이고.”

스튜어트가 웃으며 대답했다. 주차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패트릭을 살짝 밀어내고 일어서려다가 얼굴이 창백해져서 중얼거렸다.

“어, 다리에 감각이 없어.”

“…당연하지. 날 앉히고 있었는데.”

패트릭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말했다. 스튜어트는 잠시 멍청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패트릭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 좀 일으켜 줘, 팻.”

“잘 논다, 이 바보야. 운전도 못 하겠지?”

스튜어트가 울상을 지었다. 소년처럼 해맑고 선량한 건 좋은데 가끔 이렇게 바보짓을 한단 말이야. 패트릭은 한심함에 혀를 차면서 그의 등을 철썩 때렸다.

“집까지는 내가 몰고 갈 테니까 조수석에 타, 멍텅구리 순록!”

“미안해.”

“나한테 미안하다고 할 게 아니라 네 두 다리에 미안하다고 해.”

말로는 매몰차게 굴면서도 패트릭이 스튜어트를 부축해서 차까지 데리고 갔다. 그는 다리가 저리다며 괴로워하는 스튜어트를 조수석에 굴려 넣어놓고 운전석에 올랐다. 스스로 운전을 하는 건 꽤 오래간만이라 왠지 갑자기 주도권을 잡은 느낌이었다. 권력 행사 좀 해 보실까, 패트릭이 차를 출발시키고 방향을 틀자 스튜어트가 물었다.

“어, 어디로 가는 거야? 우리 아파트 입구는 저 쪽인데.”

패트릭이 슈퍼마켓으로 향하는 길에 접어들며 씩 웃었다.

“아이스크림 사 준다는 약속, 안 잊어버렸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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