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2)

워싱턴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키슬러가 세 사람을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벤튼은 이번 플로리다 출장에서 지시받은 일 외에도 처리해야 하는 일 몇 건이 있어 따로 자리를 떴고, 딜버트도 쇼핑백을 그렇게 바리바리 들고서 사무실로 갈 수는 없다며 집에 들러야겠다고 양해를 구한 뒤 중간에 빠졌다. 운전대를 잡은 키슬러의 아들이 그녀가 내리는 뒷모습을 황홀한 듯 훔쳐보았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키슬러는 바닷물이 자갈 위를 구르는 듯한 억양의 게일어로 아들에게 호통을 치고 패트릭의 옆자리로 옮겨 탔다. 패트릭이 안쓰럽다는 듯이 웃었다.

“야단을 치실 게 뭐가 있습니까, 키슬러 씨? 에밀리 딜버트가 미인인 건 기정사실이잖습니까?”

“어디 감히 주제넘게 에밀리에게 눈독을 들이나?”

“…아드님이 어디가 어때서요?”

“우리 집이 형편이 많이 피었다지만 에밀리의 쇼핑을 감당할 정도는 안 되네.”

패트릭이 참지 못하고 킥킥 웃기 시작했다. 키슬러는 완고하게 정색을 하고서 못마땅한 투로 말을 이었다.

“그 캐리어 사이즈는 뭔가? 어디 일주일 넘게 출장 갔다 오는 걸로 보이더구먼. 그걸로 모자라서 쇼핑백도 몇 개씩이나 들고 오고. 혹시 추가 요금 물지는 않았나? 설마 또 다 화장품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립스틱이나 아이섀도는 플로리다 쇼핑센터 내에 있던 제품은 전부 다 갖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라 살 게 없다더군요. 스킨이나 로션은 직접 만든다고 하고.”

“…만들어?”

그는 키슬러의 놀란 얼굴을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괜히 화공학 석사 타이틀이 있는 게 아닌가 봅니다. 돌이켜 보면 학교 다닐 때에 가끔 딜버트가 폭죽을 만들지 않았습니까? 전공을 살려서 뭔가 만드는 모양이지요.”

“아주 이제는 사는 걸로 모자라서 직접 만들기까지 하고. 이러다가 우리 중에 최초로 연금술사 하나 나오겠네.”

키슬러가 혀를 찼다. 패트릭은 웃으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러시아워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이른 아침에 출발을 한 보람이 있어 길에는 차량 통행량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차창 너머에서는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우유처럼 흰 오벨리스크가 자태를 뽐내며 솟아 있었다. 워싱턴 기념비였다. 워싱턴에서는 그 오벨리스크보다 높은 건물을 짓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서 전망을 방해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뉴욕에서도 일을 해 본 패트릭이었지만 무서울 정도로 높이 경쟁을 벌이는 마천루로 즐비한 그곳보다는 워싱턴이 더 그의 마음에 들었다. 잠시나마 창밖의 풍경을 즐기며 일 생각은 전부 접어 두고 싶었으나 그에게 쉴 겨를은 없었다.

“전에 말씀드린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로즈 말인가? 사무실에 들어가서 얘기하세.”

키슬러의 얼굴이 어두워진 것은 단순히 차 안으로 그늘이 드리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패트릭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키슬러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사업에 관한 이야기는 친아들 앞에서도 함부로 꺼내지 않는 태도는 한밤중에 히트맨으로 파견되어 라이플로 창문 너머 상대 조직의 중간 보스를 노리던 시절부터 길러져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좋은 소식은 아닌 것 같군. 그래도 직접 듣기 전까지는 최대한 좋은 기분을 유지하려 애쓰며 패트릭은 도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워싱턴은 작은 도시였고, 사무실 앞까지 도착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린 패트릭이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는 앨리슨에게 작은 봉투를 하나 건넸다.

“매번 내가 들락날락할 때마다 일어날 필요 없어, 앨리슨.”

“이게… 뭔가요?”

“립스틱. 딜버트에게 골라 달라고 했어.”

감동한 나머지 울 것만 같은 눈으로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앨리슨을 뒤로 하고 패트릭이 사무실로 들어갔다. 키슬러가 그를 바짝 따르면서 기특하다는 투로 속삭였다.

“자네 아버님을 보는 것 같군. 부하 직원들을 무척이나 잘 챙기셨지.”

“챙겨 주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 그런 거라면 최고겠지만, 인센티브를 확실히 주어야 할 이유가 생겨 버려서 더합니다.”

“로즈 얘기를 하는 건가?”

패트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키슬러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과연 인센티브 문제였을까? 자넨 로즈에게 좋은 상사였어. 내가 보장하지. 자네가 잘못한 건 없다네.”

“아랫사람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네는 분명히 방침을 세워 두었었고 그걸 어긴 건 로즈의 잘못… 저 망측한 건 대체 뭔가?”

뒤를 따라오면서 소곤소곤 대화를 이어가던 키슬러가 제자리에 우뚝 서면서 버럭 소리를 쳤다. 패트릭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가 키슬러의 크게 벌어진 눈이 향한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배달 왔을 때에 여기 안 계셨죠, 참. 뉴욕의 돈 잘루치가 결혼기념일 선물로 보낸 겁니다.”

“…자네 그 사람한테 뭐 잘못한 거 있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보수적이고 깐깐한 정통파 가톨릭 신자 키슬러의 눈에 비친 반라의 연인상은 이교도의 우상이나 다름없을 물건이었다. 패트릭이 책상에 서류 가방을 올려놓으며 키슬러에게 주려고 산 선물은 벤튼이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지만,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조각 바로 앞까지 다가가더니 턱 뒷짐을 지고 인상을 찌푸렸다.

“야단스럽기는…. 여기 둘 건가?”

“무슨 수로 움직이겠습니까? 대리석인데요.”

“허어, 참. 창문 한번 절묘하게 가리는군. 바깥에서도 이게 이 자리에 있는 게 잘 보이겠는데.”

“옆 건물에서 내다보는 걸 걱정하시는 거라면 원래 주인이 사무실 빼고 아트 딜러가 입주했겠거니 하겠지요. 가져올 때에 네 사람이 겨우 옮긴 겁니다. 치우라고 우리 쪽 직원을 동원하기도 미안하고, 만약 돈 잘루치가 워싱턴에 깜짝 방문이라도 하는 날에는 다른 자리에 있었다가는 큰일 납니다.”

“내 아들 녀석들한테 옮기라고 하면….”

“아드님들께서 뭐 최근에 크게 잘못하신 거라도 있습니까?”

키슬러가 좋아하는 식으로 받아쳐 주며 패트릭이 자리에 앉았다. 키슬러가 웃으면서 조각상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갑자기 패트릭과 연인 중 남자 쪽을 번갈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패트릭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가 씩 미소를 지었다.

“돈 잘루치가 센스가 좋군. 이 조각을 고르느라 굉장히 고심했을 거야.”

“무슨 의미입니까?”

“보면 모르겠나? 남자 쪽 말이야, 희한하게 자네를 닮았는걸.”

“…꿈에라도 그런 말씀은 마시죠, 키슬러 씨.”

패트릭이 몸서리를 치며 반박했다. 그의 눈에는 도대체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아 키슬러가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패트릭은 고개를 홰홰 저어 불길한 기분을 떨치려 애쓰며 화제를 돌렸다.

“로즈에 대한 조사가 어떻게 되었기에 그러십니까?”

“아, 그거. 자네가 지시한 대로 로즈의 최근 재정 상태를 확인해 보았네. 그런데 별 문제가 없지 뭔가.”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패트릭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키슬러는 나무 블라인드를 홱 쳐서 창문을 가리더니 의자를 끌어와 그의 바로 맞은편에 앉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마약 거래에 얽힐 이유라면 급히 큰돈이 필요했다고밖에 생각이 안 되었기에 재정 조사를 좀 폭넓게 해 보았다네. 어머니가 아프다고 했지, 그래서 본인 계좌는 물론이고 형제자매 쪽까지 범위를 잡았어. 월권이었다면 미안하네.”

“아뇨,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별일이 없었던 겁니까?”

“그래. 최근에 계좌에서 큰 금액이 빠져나간 적은 없었어. 로즈는 그 나이 또래 아가씨 치고는 나쁘지 않은 정도로 저금도 했고 그 오빠인지 남동생인지는 며칠 전에 대출금 상환을 절반 정도 마쳤더라고. 신용 카드 기록까지는 접근하기가 까다로워서 아직 확인을 해 볼 수 없었지만 오늘 오후 중으로 결과가 나올 거야.”

패트릭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턱을 괴었다.

“글쎄요, 다른 것도 아니고 병원비입니다. 병원비는 보통 후불로 지불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래도 딸이 직장을 그만두고 간병을 하러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정도라면 큰 수술이 임박했거나 어쨌든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상황이 꽤나 위중해야 할 게 아닌가? 당연히 그 이전에 병원에서 정밀 진단, 검사, 그런 걸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 검사는 소액일 수 있지요.”

“그야 그렇지. 하지만 의료 관련 지출은 거래 내역이 투명하게 공개되는 종류의 거래 중 하날세.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지. 로즈와 그 애의 가족, 사촌까지를 중심으로 해서 최근에 의료 지출 기록이 있는지를 조사했어. 하지만 최근에 아널드 집안에서 병원 관련으로 지출된 건 로즈네 조카 치아 교정비가 다였네.”

“가능성이 좁혀지는군요. 로즈의 어머니가 모종의 급성 질환으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다가 그 자리에서 위중한 환자로 밝혀져 곧바로 입원, 수술로 진행하는 게 가능성 하나라면….”

“로즈가 우리 일을 그만두고 플로리다에서 본격 마약 거래상으로 자리를 잡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게 또 다른 하나겠지.”

그가 차마 할 수 없었던 말을 키슬러가 대신 맺어 주었다. 패트릭이 수심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두 번째 가능성은 되도록 염두에 두고 싶지 않습니다. 좀 더 기다려 볼 수는 없겠지요.”

“마음은 이해하네만.”

“비즈니스니까요.”

키슬러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패트릭이 웃었다. 키슬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를 아끼는 마음은 알아. 나도 그 애가 어릴 때부터 보아온 사람이라 로즈를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자네 못지않게 각별하다네. 하지만 로즈가 자네의 명령을 어긴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야. 만약에 이기적인 이유로 우리의 신뢰 대신에 더럽지만 이문이 남는 장사를 선택한 거라면 더더욱….”

키슬러의 말이 사무실 문이 벌컥 열어젖혀지는 소리에 묻혀 버렸다. 딜버트가 유리문을 통째로 깨뜨릴 기세로 사무실 안으로 쿵쿵거리고 들어왔다. 매력적인 얼굴에 무시무시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 가증스런 계집년!”

키슬러가 그 말투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녀가 원체 화가 나 있어 선뜻 설교를 늘어놓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딜버트는 키슬러의 표정에는 아랑곳 않고 놀라서 자신을 바라보는 패트릭을 향해 씩씩거리면서 내뱉었다.

“로즈네 어머니가 아파요? 아프기는, 씨알도 안 먹힐 핑계를 대고 있어!”

“알아봤나?”

“당연히 알아봤으니까 이렇게 기분이 더럽죠! 젠장, 아널드 부인은 물소도 때려잡을 만큼 튼튼해요. 어머니 치료비 좋아하시네, 제가 어디 유흥비로 탕진했거나 제비 같은 사내놈 하나 만났으면 몰라도 어머니를 팔아? 괘씸한 것 같으니….”

키슬러가 헛, 하는 소리를 내며 패트릭을 홱 돌아보았다. 패트릭은 눈가를 찡그리고서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블라인드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젖혀 바깥을 살피며 물었다.

“확실하겠지?”

“물론이죠!”

“이걸로 내 입장은 정말로 곤란해져 버렸는걸.”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똑같은 말투로 바깥 날씨나 최근 읽은 책에 대해 말했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투였다. 그러나 그 무심한 말에 희미하게 냉랭한 분노가 묻어나고 있었다.

“금전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헤로인 거래에 손을 대서 중간책까지 올라갔다…. 워싱턴에서 헤로인은 마피아가 독점하고 있고.”

딜버트도 키슬러도 그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급하게 달려온 딜버트가 숨을 고르는 소리만이 고요한 사무실을 채웠다. 패트릭은 건물 아래의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얕잡혀 보이고 있었나 보지?”

말과 동시에 그가 손을 빼냈다. 블라인드가 출렁거리면서 나무 판들끼리 서로 부딪쳐 탁탁거리고 요동쳤다. 그는 손가락에 붙은 먼지를 쳐서 털어 버리고 뒤로 돌아섰다.

“그냥 넘어가고 싶었는데,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어. 보스가 마약 거래 금지를 명령한 집단의 사람을 헤로인 거래에 끌어들여? 내 말이 우스웠나 보지?”

“끌어들였다는 건….”

“난 지금까지 로즈가 어머니의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직장을 그만두는 거라는 핑계를 믿었어. 그렇게 믿는 한 설명은 하나뿐이지. 월급이나 보너스로는 감당이 안 될 치료비나 입원비를 내기 위해서 크게 한 탕 할 거리가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이 헤로인 거래에 뛰어들었다. 그럴 경우에는 결심도 접근도 로즈의 몫이었으니 그녀가 혼자 고스란히 책임지면 돼. 그런데.”

패트릭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하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금전 문제로 궁지에 몰려 있지 않은 사람이 아닌 이상 먼저 마약 거래 중개상이 되려고 나서지는 않을 거야. 특히 내 밑에 있는 한은 아무리 단번에 거금을 쥐고 싶대도 감히 마약에 손을 댈 수 없도록 으름장을 놓아두었으니 더더욱. 그렇다면 로즈가 먼저 헤로인 거래에 관심을 보였다기보다는 헤로인을 거래하는 조직에서 먼저 로즈에게 손을 뻗쳐 왔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지 않나?”

“그럴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네.”

키슬러가 조용히 답했다. 패트릭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 일은 가벼운 마음으로 다룰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설령 로즈가 먼저 헤로인 비즈니스에 한 자리 얻기를 원했더라도 그쪽에서 받아 주지 말았어야죠. 워싱턴의 세력 있는 패밀리들은 마약에 대한 제 방침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매번 워싱턴 회합이 있을 때마다 제가 제퍼슨 그룹은 마약 거래에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강조를 했으니까요. 그런데 자기들 비즈니스에 제퍼슨 그룹의 사람을 써요? 이게 무슨 능멸입니까?”

“이런 식으로 말하기는 싫지만, 패트릭을 만만하게 봤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는데요. 패트릭의 사람을 패트릭이 금지한 거래에 끌어들이고, 자기들이 한 탕 하고 싶었으면 감수했어야 할 위험한 일을 남의 조직 사람 꼬여서 시키고…. 아주 웃기네.”

딜버트가 중얼거렸다. 패트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가 키슬러를 바라보았다.

“프로파치 패밀리와 크레모사 패밀리, 디피데 패밀리에 초대장을 보내 주십시오, 키슬러 씨. 티타임을 겸해서 회동을 한번 가졌으면 합니다.”

“알겠네.”

키슬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패트릭이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얌전히 있으니까 싸울 힘이 없어서 그러는 줄로 아나 본데….”

“누가 못해서 안 하나요? 그 따위 더러운 짓, 안 해도 되니까 안 하는 거지.”

딜버트가 차갑게 말했다. 패트릭이 씩 웃으면서 그의 자리로 되돌아가 앉았다. 그는 의자를 뒤로 홱 젖히고 다리를 꼬면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너무 흥분했어, 그렇지? 미안한데 앨리슨에게 가서 오늘 일정표 좀 받아다 줘. 난 잠깐 마음 좀 가라앉혀야겠어.”

“네, 패트릭.”

딜버트가 순순히 사무실을 나갔다. 키슬러도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옷걸이에 걸어 두었던 중절모를 쓰면서 그녀를 따랐다. 패트릭은 사무실 문이 완전히 닫히기를 기다렸다가 셔츠 손목의 단추를 풀면서 깊은 숨을 내쉬었다.

흥분해서는 안 된다, 비즈니스를 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 네가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아차리게 두면 안 된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때에 유일하게 남겨 주신 조언이었다. 패트릭은 분을 가라앉히려고 심호흡을 하면서 서랍을 벌컥 당겨 열고 그 안에 숨겨 두었던 작은 액자를 꺼내어 들었다.

공군 아카데미의 제복을 입고 상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열여덟 살의 스튜어트. 바람에 나부끼는 금빛 머리카락과 그림자 없는 성실한 눈동자가 마음을 쿡 찔러 왔다. 사진을 응시하고 있자 조금씩 머리가 차가워졌다. 흥분해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모름지기 무슨 일이 있어도 집에 무사히 돌아가야 하는 유부남이란 존재는 무모한 수를 쓰거나 남들의 농간에 넘어가면 안 된다. 그는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고 경건하다고 해도 좋을 태도로 조심스레 스튜어트의 얼굴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오후 내내 마인드 컨트롤에 집중한 보람이 있어 저녁이 되자 어수선하던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스튜어트에게 건물 앞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을 때에는 심지어 평소보다 컨디션이 좋게 느껴질 정도였다. 패트릭은 일 때문에 사무실에 남아 있겠다는 키슬러와 앨리슨에게 대충 작별 인사를 던지고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잡아탔다.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마자 바로 앞에 스튜어트가 서 있었다.

“웰컴 홈.”

가볍게 윙크를 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멋진지 저도 모르게 입이 실실 벌어졌다. 스튜어트는 손을 뻗어 패트릭의 서류 가방을 받아 들고 그에게로 고개를 들이밀어 볼을 맞비볐다.

“피곤하지? 집에 가서 등 마사지 해 줄게.”

“좋지. 나 보고 싶었어?”

“당연한 소리를.”

스튜어트가 짐짓 콧잔등을 찌푸리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들어 패트릭의 이마에 키스했다. 패트릭은 그에게로 살짝 머리를 숙여 주면서 킥 웃었다.

“너 선물 사 왔어.”

“뭘 또 사오고 그래, 일하느라 바빴을 거면서.”

핀잔을 주면서도 스튜어트는 은근히 흡족한 얼굴이 되었다. 두 사람은 손을 꼭 맞잡고 사무실 건물을 나섰다. 스튜어트가 길가에 세워 둔 차의 주차 미터기에다가 동전을 넣다가 말고 갑자기 창문 위쪽을 가리켰다.

“너 사무실 여기서 보이는 7층 창가 맞지?”

“응, 그런데?”

“저기 저 사람 누구야? 아까부터 창가에 서 있더라.”

스튜어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올린 패트릭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창가에 세워 둔 돈 잘루치의 대리석 조각상이 먼 거리와 블라인드로 어둑한 조명 때문에 마치 진짜 사람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스튜어트가 순진하게 웃었다.

“네 사무실에 계속 서 있어서 처음엔 넌가 했지 뭐야.”

“어, 으, 장식이야. 장식 조각.”

“아, 조각이야?”

스튜어트가 놀라서 발돋움을 하고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사무실은 7층, 까치발 좀 한다고 해서 더 잘 보일 리가 없는데도 그런 행동을 하는 스튜어트가 귀여워 보여서 패트릭이 슬그머니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스튜어트가 웃으며 패트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확실히 아니다. 네가 훨씬 더 예뻐.”

“당연하지.”

패트릭이 만족스럽게 그의 볼에다 키스를 했다. 스튜어트가 패트릭을 토닥여 떼어 놓고 운전석에 탔다. 패트릭은 잽싸게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고 서류 가방을 뒤졌다. 쇼핑백에 잘 넣어 온 선물은 귀퉁이가 조금 구겨지기는 했지만 상한 데는 없었다. 스튜어트가 선물 쇼핑백을 기웃거리려고 하자 패트릭이 그의 손등을 탁 쳤다.

“운전이나 해.”

“힌트 줘.”

“싫어.”

패트릭이 혀를 내밀고는 선물을 도로 꽁꽁 싸서 가방 안 깊이 밀어 넣어 버렸다. 스튜어트는 더 조르지 않고 얌전하게 집으로 차를 몰아갔다.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패트릭이 운전대를 잡은 그의 팔을 톡톡 쳤다.

“이봐, 미스터 드라이버.”

“응?”

“아이스크림 먹을래.”

“안 돼.”

“아니, 아이스크림은 또 왜 안 되는데!”

“요거트 아이스크림 같은 걸 먹으면 내가 말을 안 해. 네가 먹는 건 브라우니랑 초코 퍼지 들어있고 캐러멜 시럽 범벅인 설탕덩어리잖아. 안 돼. 몸에 나빠.”

“사 줘, 사 줘!”

패트릭이 본격적으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스튜어트는 한숨을 쉬면서 차창 밖을 힐끔 내다보았다.

“마침 하늘이 내 편이군. 이 근처에 편의점 없어. 상황 종료를 선언….”

“아이스크림, 스튜어트 라일리!”

“알았어!”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심술은. 패트릭이 승리의 미소를 머금고 징징거리기를 멈추었다. 스튜어트는 마침 신호에 걸린 사이 고개를 푹 숙이면서 신음했다.

“그런 몸에 나쁜 거 못 먹게 관리하는 게 내 책임인데….”

“한 번쯤은 괜찮잖아. 너도 한 입 줄게.”

“한 번, 하. 분명히 어제 나 없다고 신나서 감자칩이랑 탄산음료 먹었겠지.”

스튜어트가 한 입 주겠다는 말은 못 들은 척 구시렁거렸다. 포커페이스만 유지했으면 들킬 리가 없었는데 패트릭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스튜어트는 좌회전을 해서 CVS 앞에 차를 세우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패트릭에게 20달러짜리 지폐를 한 장 쥐어 주었다.

“너 먹고 싶은 거 다 사고 19달러 99센트 남겨 와.”

“얌마.”

패트릭이 위협적으로 상체를 홱 숙이더니 스튜어트의 코끝에다 톡 입을 맞췄다. 스튜어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어 버렸다. 패트릭은 재빨리 차에서 내려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입구 옆의 아이스크림 코너의 문을 열어젖혔다.

편의점 문을 나서자마자 불길한 사태가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그는 아이스크림의 포장을 뜯다 말고 득달같이 차의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서류 가방은 입을 쩍 벌리고 모로 쓰러져 있었고 쇼핑백과 포장지가 그 옆에 널브러져 있는 채였다. 옛날 비행기 조종사들이 썼을 법한 커다란 레이밴 스타일 선글라스를 낀 스튜어트가 우아하게 그를 돌아보더니 엄지손가락으로 조수석을 가리켰다. 선글라스의 금테가 햇빛에 반짝 빛을 반사했다.

“구름 위의 라이드 한번 즐겨 볼 텐가, 베이비?”

저물어가는 워싱턴의 부드러운 태양빛을 받아 금실처럼 반짝거리는 풍성한 금발에 피트 완벽한 회색 정장, 빛바랜 하늘색의 와이셔츠. 넥타이는 어디로 풀어 두었는지 보이지 않고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헤친 채였다. 이제는 퇴역 후 몇 년이나 지났을지언정 베테랑 파일럿의 관록이 어디 가는 게 아니었다.

조종석에 앉은 듯한 태도로 운전대에 한 팔을 걸친 자세가 소름이 돋도록 섹시했다. 거기에 옛날 영화를 즐기는 취미 덕택에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구식의 멋들어진 말투까지. 누가 멋대로 뜯으라고 했냐고 항의하려는 마음은 쏙 들어가 버렸다. 패트릭은 손에 비닐 봉투를 들고 조수석으로 기어오르면서 그대로 스튜어트에게 입술을 맞댔다. 부드럽고 말캉한 감촉 너머에서 두 사람의 혀가 맞닿아 짧게 포옹했다.

“멋진데, 파일럿.”

한숨처럼 내놓은 소리에 다시 입맞춤이 이어졌다. 물론 제일 잘 어울릴 모델을 찾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딜버트의 선글라스 선택 요령 강좌까지 들어가면서 고른 물건이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근사해 보이다니 역시 그의 신랑이었다. 스튜어트의 팔이 그의 허리를 휘감으면서 잔뜩 낮추는 바람에 더 매력적인 목소리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오늘도 저희 라일리 항공을 이용해 주시는 고객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가시는 목적지까지 편안한 여행 되시기 바라며, 중간 기항지인 워터프론트 도착 이후 기장의 특별 서비스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기대하겠어.”

패트릭이 손 안의 아이스크림이 녹는 것도 모르고 대답했다.

결국 아이스크림은 먹지도 못했다. 냉동에 넣을 생각을 둘 다 하지 못한 까닭에, 포장지 너머까지 크림이 새어 나와서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만 했다. 사소한 트집거리를 잡은 패트릭은 대번에 토라진 시늉을 했다. 지은 죄가 있는 스튜어트는 눈치를 보아 가며 알아서 설설 기었고, 패트릭은 스튜어트를 원수마냥 노려보면서 말없이 출장 짐만 풀었다. 그 주위를 알짱거리던 스튜어트가 슬그머니 거실로 나갔다. 되돌아온 그의 손에 감자칩 한 통이 들려 있는 것을 보고 패트릭이 쳇 소리를 내며 웃어 버렸다.

“달래 보겠다 이거지?”

“…응.”

“과자만 두고 넌 나가.”

스튜어트가 울상을 지었다. 웬만한 뇌물과 애정 공세로 누그러질 평소의 패트릭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일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가 큰 나머지 빨리 그의 다정함에 위로를 받고픈 마음이 간절했다. 패트릭은 감자칩 통을 받아 들고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리 와, 키드.”

안색이 활짝 핀 스튜어트가 냉큼 패트릭에게 덤벼들어 그를 폭 껴안았다. 막상 품에 안기고 보니 또 신랑이 한없이 좋기만 한지라 패트릭도 행복하게 스튜어트에게 매달렸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포근했다. 패트릭은 잠시 얌전한 아이처럼 가만히 있다가 문득 의심 가득한 눈으로 스튜어트를 바라보았다.

“너, 이 감자칩 어디서 난 거야?”

“네가 소파 아래에 숨겨 놨더라.”

어째 숨긴 기억이 가물가물한 장소에서 자꾸 과자가 나온다. 앞으로는 감자칩을 어디어디에 두었는지 메모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그가 두 개째의 과자를 오도독 베어 물자 스튜어트가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네 조각만 먹어. 알았지?”

“왜?”

“일일 권장량이야.”

“…네가 정했냐?”

스튜어트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딴에는 걱정 근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패트릭이 어이가 없어서 따지고 들었다.

“뭘 근거로 나온 거야, 그 네 조각이라는 기준은?”

“여기 통을 보면 알겠지만 이 감자칩 1회 섭취량 안에 들어있는 나트륨과 지방의 일일 권장량 대비 포함량의 퍼센트포인트가 이렇게 나와 있어. 감자칩 한 통에 평균 몇 개가 들어가는지는 내가 압수할 때 가끔 세어 봐서 알고 있으니까 비율 단위로 계산을 뽑았을 때….”

“어우, 징그러워, 그런 거 세어 보지 마!”

패트릭이 소리를 바락 지르며 스튜어트의 손에서 감자칩 통을 빼앗았다. 감자칩 통 뒷면의 영양 성분표를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 가던 스튜어트의 눈이 커졌다. 패트릭이 반항심을 표출하느라 한꺼번에 여러 조각을 꺼내 입에 욱여넣자 전직 파일럿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전광석화 같은 솜씨로 패트릭에게서 도로 감자칩 통을 낚아채더니 전속력으로 거실을 향해 달려 나갔다.

“안 돼, 그만 먹어!”

“키드!”

아무렇지도 않은 장난인데, 따라가서 붙들면 언제나처럼 가벼운 몸싸움을 벌이고 침대나 소파에 뒤엉켜 뒹구는 것으로 끝날 일인데 스튜어트의 팔이 그를 놓아 버리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두려움이 그를 짓눌러 바닥에 고정시켜 놓은 것만 같았다.

오래 전부터 누군가가 제퍼슨 그룹의 수장으로서의 그를 업신여겨 도전할 꿍꿍이를 품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것이 로즈의 체포 건이라는 형태로 표면으로 튀어나오는 바람에 더 이상 묵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도, 이 일에 한 조직의 수장으로서 마땅히 보여야 할 반응을 보여야 하며 최악의 경우 다른 마피아 패밀리와의 전쟁을 벌여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별로 두렵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스튜어트가 그가 실제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은 두려웠다. 형 조셉이 집을 나갔을 때 패트릭은 아직 어렸지만 형이 아버지에게 했던 말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갱단 두목의 자식이라는 사실이 창피하다고, 연을 끊겠다고.

패트릭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가 그가 제퍼슨 그룹의 리더임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에 그는 보통의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이런 사실이 눈앞에 들이밀어지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지 못했다. 조셉 같은 반응이 일반적일지도 몰랐다.

사실 그가 형을 껄끄러워하는 데에는 아버지에게 상처를 입힌 탓도 있었지만 스튜어트에게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된다는 강박 관념과 공포를 심어 준 탓이 더 컸다. 두 번째 이유가 공정치 못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자리를 잡은 두려움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언젠가 스튜어트가 그에게 네가 창피하다고, 연을 끊자고 말하며 지금처럼 안고 있던 팔을 놓아 버리고 집 밖으로 나가 버린다면?

“팻?”

키드가 더 이상 곁에 있어 주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팻, 왜 그래?”

스튜어트의 목소리에 최악으로 치닫던 상상이 간신히 멈추었다. 패트릭이 홱 고개를 돌렸다. 스튜어트가 침실 문 너머에서 고개만 빼고 그를 보고 있었다. 왜 쫓아오지 않나 의아해하던 얼굴에 순식간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다음 순간, 패트릭은 너무 의욕적으로 달려든 스튜어트에게 떠밀려 마룻바닥에서 반 바퀴를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키드, 전력으로 달려들지 마!”

패트릭이 몸집이 작거나 가냘픈 것도, 덩치에 비해 연약한 것도 결코 아니다. 키도 평균을 훨씬 웃돌게 크고 꾸준히 운동을 해 와서 완력이 떨어지지도 않는다. 그저 다년간 미 공군의 자랑거리였던 비행 교관 스튜어트 라일리 중위가 일반인에 비해 유난히 힘이 좋으며 공격력이 우수한 것뿐이다. 스튜어트는 패트릭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수심으로 가득 찬 얼굴을 코가 거의 맞닿도록 들이댔다.

“그렇게 서러워할 건 없잖아, 고작 과자 몇 개 못 먹게 했을 뿐인데….”

스튜어트의 눈에는 패트릭이 과자를 빼앗기고 서러워하는 광경으로 비쳤나보다. 하긴, 그렇게 온 세상의 근심을 홀로 짊어진 사람처럼 앉아 우울해하고 있는 이유를 그로서는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겠지. 패트릭은 스튜어트의 밑에 깔린 채로 팔을 뻗어 그의 목에 휘감았다.

“안아 줘, 키드.”

곧바로 따뜻하고 단단한 팔이 몸을 휘감았다. 그래, 이제는 안심이다. 나쁜 가능성 따위는 더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패트릭이 스튜어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렇게 아늑하게 안겨 있고도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스튜어트가 상대가 실제 나이에서 최소한 스무 살은 어려야 적절할 말투로 그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 우리 꼬마 귀염둥이. 내 예쁜 아기 야옹이. 섭섭했어요? 내가 내일 퇴근하는 길에 감자칩보다 훨씬 맛있는 유기농 과일이랑 시리얼 바 많이 사다 줄게. 그러니까 이제 뚝 그치고….”

내버려 두면 얼마나 낯간지러운 소리를 더 해 댈까 싶어 패트릭이 기습 키스로 신랑의 입을 막았다. 스튜어트는 짧지만 애정이 담뿍 담긴 입맞춤을 해 주더니 입을 막은 보람도 없이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토라져서 혼자 앉아 있기 없기야. 아기 고양이가 그렇게 축 처져 있으면 마음이 굉장히 아프단 말이야.”

“…넌 그런 소리를 하면서 스스로 부끄럽지도 않냐?”

“왜?”

언제나처럼 스튜어트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부끄럽고 한심하면서도 동시에 몹시 안심이 되었다. 때때로 그에 대한 애정에 눈이 흐려지는지 팔불출 같은 소리를 아무데서나 내뱉는 걸 불만으로 여긴다면 천벌을 받겠지. 들을 때마다 싫은 척 잔소리를 해 대지만, 그런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면 살아갈 희망도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패트릭은 스튜어트를 안은 손에 힘을 주면서 속삭였다.

“나 떠나면 안 돼, 키드.”

“절대 안 떠나. 그런 생각은 아예 하면 안 돼.”

굳건한 대답과 함께 얼굴에 다정한 키스가 쏟아졌다. 안심을 한 패트릭이 스튜어트에게 코와 볼과 이마를 맞비비며 장난을 걸었다. 가슴을 좀먹어 들어가던 두려움이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고 나니 마음이 훌쩍 가벼워져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를 바짝 껴안고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입으로 상대의 귀와 코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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