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2)

점심나절의 통화에서 전화를 끊는 패트릭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오늘은 얼른 퇴근해 특별 간식을 만들어 줄 생각이었는데 – 패트릭이 워낙에 뭐든지 군소리 없이 먹는데다 본인은 미각이 민감하지 않은 편이라 스튜어트는 아직도 자신의 요리 솜씨가 인간 이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 퇴근 직전에 상사가 그의 자리에 몸소 납시었다.

상관으로서는 이번 분기에 평균보다 좋은 성적을 보고한 부하 직원들을 격려하러 부서 내를 순방하는 데에 불과했지만, 집에 갈 생각에 들떠 있던 스튜어트로서는 상관이고 나발이고 걷어차 내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결국 패트릭에게 약속했던 시간보다 30분이나 늦어져서야 겨우 사무실을 빠져나온 그는 단속에 아슬아슬하게 걸리지 않을 속도로 차를 몰아 부랴부랴 집으로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먼저 퇴근하면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곤 하던 패트릭이 보이지 않았다. 열쇠 소리를 못 들었나? 스튜어트는 가방을 현관에 내려놓고 양복 상의를 벗으면서 거실을 가로질러 가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부엌을 돌아보았다. 토끼 귀 머리띠를 쓴 패트릭이 부엌에서부터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스튜어트 라일리.”

“팻!”

객관적인 눈에는 키 180이 넘는 냉철한 외모의 청년이 토끼 귀 머리띠를 하고 있는 광경이 퍽 그로테스크해 보였겠지만, 그 흑표범이 아직 아기 고양이로밖에 인식이 안 되는 스튜어트의 눈에는 숨이 넘어가도록 귀여워 보일 따름이었다. 스튜어트가 귀여운 그에 대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달려들어 덥석 껴안으려고 하자 웬일인지 패트릭이 그를 밀어내며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나한테서 떨어져, 라일리 변호사.”

“왜 그래, 무섭게.”

스튜어트가 슬쩍 웃으면서 그를 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패트릭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까 내가 괜히 너한테 신경질 낸 것도 미안하고 해서, 집에 오거든 정말 잘해 주려고 했었어.”

“…그런데?”

패트릭이 대답 대신에 등 뒤로 돌리고 있던 손을 앞으로 내밀어 펼쳤다. 감자칩 통의 뚜껑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쏟아졌다. 스튜어트가 저도 모르게 킥 소리를 내자 그의 시선이 더더욱 싸늘해졌다.

“이런 참사를 일으키고도 웃어? 웃음이 나와? 잔인한 사람이었네, 너란 인간.”

“사나이는 때로는 피도 눈물도 없어야 하는 법이지….”

갑자기 음산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스튜어트가 패트릭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는 패트릭이 피할 틈도 없이 손목을 덥석 쥐면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소금과 화학조미료로 내 소중한 사람을 홀려 속을 갉아먹는 놈들을 처단하는 게 잔인한 거라면, 나는 얼마든지 악귀가 되어 주겠어.”

“이거 놔, 난 지금 아주 화가 난 토끼야!”

패트릭이 손목을 흔들어 스튜어트의 손을 떨쳐 내려고 했다. 스튜어트는 놓아주려는 것처럼 손의 힘을 풀었다가 대뜸 그를 홱 잡아당겨 힘껏 끌어안았다. 패트릭이 비명을 질렀다.

“당장 놓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야, 난 아주 사나운 토끼라고!”

“어디 후회하게 만들어 보시지!”

기다렸다는 듯이 패트릭이 스튜어트의 목을 답삭 깨물었다. 스튜어트는 얼굴을 살며시 찡그리면서도 그의 토끼를 껴안고 한 바퀴 빙글 돌더니 침실 방향으로 돌진했다. 엉겁결에 끌려간 패트릭이 나동그라지지 않으려고 그의 목을 힘껏 안았다. 스튜어트는 패트릭을 침대까지 몰고 가서는 픽 밀어서 쓰러뜨리고 품어 안은 채로 마구 뒹굴었다. 내내 엄살 가득한 소리를 치던 패트릭이 지쳤는지 그에게서 살짝 떨어져서는 숨을 가다듬으며 토끼 귀를 매만졌다.

“아, 힘들어… 귀 꺾이겠다.”

“이리 와, 우리 꼬마 토끼.”

애써 토라진 표정을 유지하려던 패트릭은 스튜어트의 토끼 귀 끝을 톡톡 두드리며 달래는 말에 금세 헤헤 웃으며 스튜어트의 품에 안겼다. 그는 스튜어트가 괴로운 신음을 흘리건 말건 그의 몸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여 품 안에 편하게 자리를 잡더니 투덜거렸다.

“내 감자칩 다 어쨌어?”

“회사로 유배했어. 감자 과자가 먹고 싶은 거면 나중에 내가 좋은 기름 써서 튀겨 줄게.”

“집에서 튀김 만들면 기름 냄새 나서 싫어.”

“그럼 오븐에 구워 줄까? 맛있게 양념해서 구워 줄게. 사서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을 거야.”

패트릭이 몹시도 심란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지만 스튜어트의 표정은 해맑기만 했다. 패트릭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피식 웃어 버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들어 줘. 오븐 구이.”

“오케이.”

“그런데 키드, 나 내일 출장 가.”

막 패트릭을 간지럼 태우려던 스튜어트의 손이 멈추었다.

“어디로?”

패트릭은 미안한 얼굴로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속삭였다.

“마이애미. 미안해, 나도 오늘 오후에 알았어. 일박 이일이니까 하루만 떨어져 있으면 돼.”

“조심해서 갔다 와야 해. 모르는 사람 따라가면 안 된다?”

“…내가 애냐.”

패트릭의 투덜거림에도 스튜어트는 꿋꿋하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예쁜데, 나쁜 놈이 달랑 집어 가 버리면 어떡하지? 내가 월차 내고 따라갈까?”

“잘 하는 생각이다, 아침마다 불안해서 회사는 어떻게 보낸대?”

“그것도 사실 굉장히 걱정이 되지만 어쩔 수 없이….”

“시끄러워, 이 팔불출.”

패트릭이 듣기 싫다는 시늉을 하면서 그에게 키스를 했다. 좀 더 잔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토끼는 쉽게 그와 입술을 뗄 기세가 아니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입맞춤이 아쉽게 멎고 나서 패트릭이 조그맣게 말했다.

“낮에 너한테 화풀이해서 미안.”

“미안할 게 뭐가 있어, 그런 거에 일일이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자, 잊어버린다, 잊어버린다, 잊어버렸다!”

스튜어트가 주문처럼 반복하면서 그의 이마 앞에서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가볍게 톡 쳤다. 패트릭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면서도 맑게 웃었다. 한동안 패트릭을 상대로 지분거리고 장난을 걸던 스튜어트는 뜬금없이 천장을 올려다보고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럼 짐 싸자.”

“무슨 짐을 싸. 하루 자고 오는 건데 적당히 칫솔이나 들고 가지.”

“안 돼, 잘 챙겨 가야 해.”

“…거긴 사람 사는 데 아니냐? 필요한 거 생기면 거기서 살게.”

일어나기가 어지간히도 귀찮았는지 패트릭은 듣는 둥 마는 둥 침대 위를 뒹굴기만 했다. 아직 토끼 귀 머리띠를 쓰고 있어서 어지간히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지만 스튜어트의 눈에는 오로지 사랑스러움 그 자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금세라도 스튜어트가 또 덮쳐들 기색임을 눈치 챈 패트릭의 눈이 가늘어졌다.

“토끼 데리고 놀고 싶으면 손부터 씻고 오시지?”

***

올랜도는 조금 실망한 상태였다.

당연히 시드니가 체포한 용의자는 시드니가 직접 심문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로즈 아널드가 마이애미로 이송되고 나서부터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듣자하니 시드니는 추적과 체포에 관여할 뿐이고 그 이후의 업무는 맡지 않는지라 다른 관련자를 감시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올라가 있다고 했다. 뒷일이 어찌 되었건 무조건 잡는 데에만 집중하는 박력 넘치는 시드니 요원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멋있었지만, 취조실에서 용의자를 쥐락펴락하는 장면은 볼 수 없다고 생각하자 어깨가 처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마이애미에서 시드니 요원의 자리를 대신한 깐깐한 행정 요원 선배는 신입이 들어오면 무조건 초반에는 박살을 내 주어야 한다는 원칙이라도 있는 사람 같았다. 자신을 웰링턴이라고 소개한 그는 올랜도의 이력서를 뽑아 들고 있었는데, 올랜도가 마이애미 경찰서에 들어서자마자 이력서의 경력 항목을 읽어보고 코웃음을 치고, 특기 항목에서는 아예 대놓고 무슨 배짱으로 FBI에 들어왔냐고 비아냥거렸다.

스파이 영화와 갱스터 영화를 보면서 비밀 요원의 꿈을 키웠다고 고백하면 사내에 대자보로 붙여 가며 웃음거리로 만들 것 같은 사람이었다. 웰링턴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주눅이 들어 주뼛거리기 시작하는 올랜도를 매몰차게 한 번 쳐다보고는 따라오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빠르게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취조실 몇 개가 늘어선 복도는 살풍경했다.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 사람조차도 겁을 집어먹기에 딱 좋아 보이는 콘크리트 벽과 창살이 무시무시했다. 웰링턴은 취조실들을 전부 지나쳐서는 복도 제일 끝에 있는 작은 사무실의 문을 열고 안을 가리켰다.

“우리는 여기에 있을 거야.”

“취조 현장에는 들어가지 않는 겁니까?”

“신참 주제에 지금 취조실에 직접 들어가겠다는 건 설마 아니겠지?”

죽여주십시오, 하고 외치면서 바닥에 무릎이라도 꿇어야 할 기세였다. 올랜도가 움찔하자 웰링턴은 심술궂은 웃음을 지으면서 의자에 앉아 검은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여기 와서 앉아 봐. 뭐가 보이는지 보면 이편이 더 마음에 들 거야.”

올랜도는 순순히 웰링턴의 옆에 가서 앉았다. 영화에서 본 전형적인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단순한 철제 테이블 앞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앉은 로즈 아널드의 모습이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그 유리창은 취조실 안에서는 분명 거울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이런 장소에 실제로 들어왔다는 실감이 나자 손바닥에서 땀이 났다. 올랜도는 무릎에 손바닥을 문질러 닦으면서 물었다.

“오늘 대질 심문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흠. 일단 외부에는 그런 식으로 말을 해 두기는 했는데 실상은 조금 달라.”

“예?”

웰링턴이 다리를 꼬고 앉으면서 삐딱하게 로즈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는 바람에 그녀의 표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웰링턴은 붉은 머리카락의 커튼 너머를 꿰뚫어 보려는 것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용의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오늘 여기 오면서 자료는 얼마나 봤어? 저 여자 현재 소속, 이전 소속, 이전 고용주, 이전 거주 지역과 해당 지역에서의 인간관계. 그런 거 파일에 다 정리되어 있을 텐데 안 열어 봤나?”

“그야….”

실제로 만난 건 체포 장소에서 공항까지 드라이브 한 번 같이 한 데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시드니 요원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의 반응에 신경 따위는 전혀 쓰지 않는 것만 같은 웰링턴 요원은 밉살맞은 투로 말을 이었다.

“이번 한 번만은 내 친히 요약해 주지. 저 여자의 원래 소속은 워싱턴의 제퍼슨 앤 서턴 트레이더스, 통칭 제퍼슨 그룹. 현재 조직 비즈니스의 80% 이상을 합법화시켰지만 기반은 아이리시 갱단에 두고 있는 집단이야. 아널드 양은 몇 년 간 수뇌부의 비서였다지. 적발되기 이틀인가 사흘인가 전에 거기서 일하는 걸 관뒀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가능하냐, 이삼일 내에 마약 조직에서 명단 담긴 USB 운반을 맡길 정도가 된다는 게? 오늘 마이애미에 출두하는 건 바로 그 제퍼슨 그룹의 제일 꼭대기에 계신 서턴이라는 친구고 우리 용의자의 옛 고용주지. 대질 심문보다는 저 두 사람만 내버려 두었을 때에 서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지켜보는 게 오늘의 진짜 목적이자 하이라이트야.”

“고용주가 뭔가 아는 게 있을까요?”

웰링턴이 혀를 찼다.

“이봐, 합법화라는 단어에 마음이 끌린다고 해도 진짜 일반 회사 보듯이 여기면 안 돼. 본질적인 위계 구조가 바뀌려면 앞으로 20년은 더 지나야 할 걸. 제퍼슨 그룹의 리더는 마피아로 치면 대부님이야. 대부의 비서를 아무나 쓰지는 않겠지? 로즈 아널드는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 집안 중에서도 믿을 수 있는 집안의 딸이었을 거고 어릴 때부터 제퍼슨 그룹의 중심인물들에게는 얼굴도장이 찍힌 상태였을 거야. 그런 여자가 마약 사범으로 체포되었으니 보나마나 지금 제퍼슨 그룹의 리더 친구는 단단히 뿔이 났을걸.”

“꼬리가 밟혀서 말입니까?”

올랜도로서는 영리하게 받아친다고 한 말이었지만 웰링턴은 그를 뜨악한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자네 NARC로 배정받은 지 얼마나 됐어?”

“…2주 됐습니다. 제가 혹시 말실수를 했습니까?”

“2주나 됐는데 아직도 몰라? 고위험군 매뉴얼, 워싱턴DC 지역 항목에 제퍼슨 그룹이라는 이름 있는 거 봤냐?”

제퍼슨 그룹은 고사하고 고위험군 매뉴얼이라는 것 자체를 애초에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변명할 틈도 없이 웰링턴이 이런 천하의 바보를 다 보았냐는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제퍼슨 그룹은 절대로 마약에 손대지 않아. 거기 애들은 불법적인 비즈니스랑은 아무 관계도 없어. 경찰에도 아주 협조적이어서 이번에 여기 오라고 한 것도 한 번에 알아듣고 자비 들여서 비행기 띄워서 오는 애들이라고. 그런 와중에 거기 비서 출신이 마약 거래에 발을 담갔으니까 기업 이미지에 신경 쓰는 서턴이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거란 건 지금 내가 자네의 멍청함에 짜증이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명한 이치겠지? 올랜도 요원, 앞으로는 혀를 놀리기 전에 자료부터 읽어. 알았어?”

얼굴이 붉게 물든 올랜도가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 자료는 받은 적도 없었다.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올랜도는 그 자리에서 고위험군 매뉴얼이라는 건 한 번도 못 보았노라고 대들지 않을 만큼은 영리했다. 그가 분한 마음을 억지로 삭이고 있는 동안 웰링턴이 복도의 CCTV와 연결된 모니터를 보다가 문가로 향하며 그에게 손짓을 했다.

“거기 서류 봉투들 들고 자연스럽게 나와. 지금 제퍼슨 그룹 우두머리랑 중간 보스 두 명이 와 있으니까 이 기회에 확실하게 인상착의 외워 둬. 대신에 관찰하는 티 절대 내지 말고 자연스럽게, 그냥 사무직 둘이 서류 좀 가져다 두고 오는 것처럼 보이게끔 해. 자넨 나중에 실전 뛸 사람이고 난 저쪽에 얼굴 보여 줘서 좋을 거 없어.”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올랜도는 얼른 테이블에 쌓여 있던 서류 봉투들을 집어 팔에 안았다. 사실 그 봉투들 안에 실제 어딘가로 날라다 줘야 할 중요한 서류라고는 한 부도 없었고 죄다 분쇄기로 들어가기 직전의 이면지들뿐이었다. 올랜도가 너무 긴장한 티를 내자 웰링턴이 혀를 차며 그의 등을 퍽 소리가 나게 때렸다.

“뻣뻣하게 걷지 마. 그렇게 눈에 띄고 싶어?”

“죄송합니다.”

“가자.”

좀 더 시간을 주면 좋으련만, 채 호흡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웰링턴이 문을 벌컥 열었다. 두 사람 다 상의 없이 와이셔츠에 넥타이 차림이었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어서 체포나 심문 담당 요원으로는 보이지 않을 모습들이었다. 웰링턴은 마닐라 봉투를 얼굴 높이로 들어서 옆얼굴을 반쯤 가리더니, 팔에 봉투를 한 아름 안은 올랜도가 밖으로 나오기 좋게끔 문을 잡아 주었다. 올랜도가 복도로 나오자마자 웰링턴이 복도에 선 사람들을 눈짓으로 힐끔 가리켜 보였다.

올랜도가 상상한 것과는 영 딴판이었다. 추리 소설을 읽고 마피아와 갱스터 영화를 보면서 FBI 요원의 꿈을 키워 온 그는 상상력이 지나친 게 흠이었다. 워싱턴에서 가장 강력한 아이리시 갱단의 두목이 행차한다는 말에, 점박이 모피 코트를 걸치고 큼지막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지팡이를 가죽 장갑 낀 손으로 어루만지는 거구의 두목을 검은 캐시미어 코트와 선글라스 차림의 일당이 호위하고 오는 광경을 막연하게 그리며 들떠 있었다. - 마이애미의 현재 기온이 32도를 웃돈다는 생각은 미처 그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

하지만 정작 복도에 서 있는 사람들은 전형적인 암흑가 사람들의 인상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사람을 관찰하는 법을 배우려고 열심인 올랜도였지만 그 일행에게 눈에 띄는 점이라고는 잡지 모델 뺨치게 세련된 옷차림을 한 키 큰 여자가 굉장한 미인이라는 것뿐이었다. 옹기종기 FBI 요원의 안내를 따라 온 세 사람은 갱단의 수뇌부라기보다는 경찰서 견학을 온 민간인들에 더 가까워 보였다. 웰링턴이 얼떨떨해하는 올랜도를 얼른 잡아끌어 복도를 빠르게 걸어가면서 소곤거렸다.

“어때, 제대로 봤어?”

“누가… 보스입니까?”

어수룩한 질문에 웰링턴이 피식 웃었다.

“갈색 머리.”

“그 가운데에 서 있던 사람이요? 제 또래 정도로 보이던데요?”

올랜도가 깜짝 놀라서 반문했다. 웰링턴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스 치고는 너무 어리지. 패트릭 서턴은 스물여섯이야. 너무 젊어서 그것 때문에 얕잡아 보고 다른 조직이 시비를 걸까 봐 우리도 주시하고 있는데, 뭐, 별일 없더라고. 5년 전에 보스 자리 꿰어 찰 때 보여 준 행보를 보면 확실히 똑똑한 친구거든. 냉정하고.”

“차가운 인상이더군요. 영리해 보였습니다.”

“머리가 좋아. 위장 직업이 회계사인데 실제로 자격증이 있어. 공부만 잘 했다는 뜻은 아니고, 학교 다닐 때에는 뉴욕에 있는 증권사에서 인턴을 했었는데 그때 당시에 그 회사에서 저 친구 인턴 기간 끝나고 나서 잡아 놓으려고 안달이었다지. 가업 잇느라 못 했지만.”

가업이라는 단어에 살짝 비튼 뉘앙스가 실렸다. 올랜도는 말없이 웰링턴을 따라서 휴게실까지 나아갔다. 웰링턴은 휴게실 테이블에 서류 봉투들을 내려놓게 하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올랜도가 테이블 근처에서 머뭇거렸다.

“안 들어가 보십니까?”

“아아, 아직은 밖에 있어도 괜찮아. 좀 쉬다가 가지. 대질 심문에서는 볼 거 없어.”

웰링턴이 한가하게 말하며 주머니를 뒤져 올랜도에게 동전 몇 개를 튕겨 주었다. 올랜도가 동시다발적으로 날아오는 동전들을 완벽하게 캐치해 내고 뿌듯함에 잠겨 있는데 그가 올랜도 뒤의 자판기를 턱짓했다.

“다이어트 콜라.”

어쩌다 음료 심부름이나 하게 된 건지 억울했지만 말해 봐야 본전도 못 찾을 게 뻔했다. 올랜도가 자신의 몫까지 뽑아 와서 맞은편에 앉자 그새 수첩을 꺼내 들고 거미 같은 글씨로 메모를 끼적이던 웰링턴이 입을 열었다.

“서턴은 똑똑한 친구야. 우리가 자기를 부른 이유라든가 자기들이 하는 대화를 다 감시할 거란 것쯤은 누구라도 추측할 수 있는 일이지만, 저 친구는 선수를 쳐서 자기가 먼저 용의자에게 수사 협조를 권유하겠다는 약속을 했어. 저 친구 아버지 대부터 제퍼슨 그룹이 얼마나 클린해졌다고. 덕택에 워싱턴에서는 한 시름 덜었지. 이젠 마피아에만 신경 쓰면 되니까.”

“클린하다면 얼마나 클린한 겁니까?”

“엄청. 아주 많이. 더 이상 아이리시 갱단이라고 부르면 안 될 정도로. 제퍼슨 그룹 애들은 이제 보호세도 안 받아. 마약, 폭력, 밀수, 이런 거에는 일절 관계를 안 하지. 독점은 좀 하는데 그거야 뭐 자기들이 장사가 잘 된다는데 할 수 없고. 내 예상대로라면 앞으로 2년에서 3년만 지나면 제퍼슨 그룹은 우리 감시 대상에서도 완전히 빠질걸.”

“좋은 본보기군요.”

웰링턴이 콜라를 따다 말고 깊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게다가 제일 기특한 건 쟤네는 혹시라도 경찰이 자기들을 의심하지 않을까 굉장히 겁낸다는 사실이야. 요즘 마피아 놈들은 공권력 무서워할 줄을 모르는데 쟤네는 달라. 경찰 앞에서 깍듯하고, 나오라면 보스씩이나 되는 분께서 군말 없이 왕림하시고.”

“저라도 그렇겠습니다. 최대한 갱생했다는 이미지를 주고 싶을 테니까요.”

“과연 그뿐일까.”

거기까지 말한 다음 웰링턴이 본격적으로 수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올랜도는 웰링턴의 마지막 말을 곱씹어보다가 포기하고는 하릴없이 주변만 두리번거렸다.

형사들이 오가고, 흰 가운을 걸친 과학 수사반 사람들이 비닐 백에 꽁꽁 봉한 증거물들을 투명 박스에 담아서 바삐 날랐다. 접수계 쪽에서는 누군가가 스페인어인지 영어인지 헷갈리는 말투로 뭔가를 항의하고 있었다. 웰링턴은 그런 소란 속에서도 마치 도서관에 앉아 있는 법대생 같은 얼굴이었다. 올랜도를 상대하고 있지 않아서일까, 심술이 빠진 얼굴은 담담한 인상이었다. 긴장이나 조바심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베테랑 요원이 되면 주변 상황에 관계없이 자신의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걸까. 무섭지만 호기심이 더 커서 웰링턴을 빤히 보고 있자 웰링턴이 수첩 너머로 코웃음을 쳤다.

“뭘 관찰을 하고 그래?”

“아닙니다.”

올랜도가 얼른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웰링턴이 이죽거리기 시작한 뒤였다.

“동기들이 안 놀리나?”

“예?”

“디즈니월드.”

올랜도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아직 다들 긴장한 탓에 코드 네임을 갖고 서로 놀리는 분위기까지는 형성되지 않았지만, 본인은 은근히 초라한 코드 네임에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눈치가 빠른 웰링턴은 올랜도가 당황했음을 깨닫자 기세 좋게 연타를 먹였다.

“몇 년 구르면 그럭저럭 쓸 만한 코드 네임으로 교체될 거니까 그때까지만 기운 내라고, 디즈니월드. 자네의 그 순수함이랄까 백지 같은 멍청함이랄까 단순함이랄까 거기다 유원지의 도시라니 얼마나 잘 어울려? 칭찬이야.”

“…그게 어떻게 칭찬입니까!”

“지금 대들어?”

지독하게 재미있어하는 얼굴이었다. 말이 그리로 흐르면 올랜도가 꼬리를 말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불만스럽게 웅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고향 온 것 같아서 좋겠네, 올랜도 요원? 멀지도 않겠다, 온 김에 디즈니월드나 들렀다 가지 그래? 입장권까지 비용 처리는 못 하겠지만 식비랑 교통비는 커버될 거야. 어때.”

“그만하십시오….”

올랜도가 거의 우는 소리를 냈다. NARC 신입들은 보통 작은 규모의 소도시명을 코드 네임으로 부여받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올랜도는 동기들에 비해서 초라한 이름이었다. 산토리니나 다롄도 있는데! 은근한 질투와 속상함에 부글거리면서 올랜도는 안경 너머로 웰링턴을 슬쩍 노려보았다. 비록 지금은 수도명을 코드 네임으로 받을 정도로 상급 선배님이 되었다지만 이 밉상도 분명히 초라하기 짝이 없는 코드 네임에 절망하는 시기가 있었겠지. 그는 억울함을 삼키며 나중에 시드니를 다시 만나거든 꼭 웰링턴의 옛 코드 네임을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잠시 두 분이 이야기 나눌 시간을 드릴까요?”

친절한 목소리였지만 권유라기보다는 선고였다. 패트릭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지금까지 로즈와 그를 마주 앉혀 놓고 소득 없는 질문만 계속하던 FBI 명찰을 단 요원은 사건 기록처럼 보이는 종이가 미어터지게 담긴 서류철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요원이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아무 말도 없이 앉아 로즈의 뒤에 있는 회색 벽만 바라보았다.

오늘의 용건은 지금부터 진짜 시작이다. 오기 전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고 대질 심문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질문만 나열식으로 이어질 때에 확실하게 감을 잡았다. 로즈는 대질 내내 진술을 거부했다. 심지어는 단순히 패트릭의 비서였냐는 질문에조차 한참을 다그쳐서야 겨우 대답을 하는 수준이었으니 FBI로서는 답답하기 이를 데가 없었을 것이다.

패트릭은 한쪽 벽면을 뒤덮은 거울을 힐끔 쳐다보았다. 경찰서에 출두한 것도 처음이고 취조실에 들어와 본 것도 처음이지만 그 거울이 진짜 거울이 아님을 알 정도의 분별은 있었다. 저 뒤에 대체 몇 명이나 서서 그가 로즈에게서 정보를 캐낼지를 기대하고 있을까? 하지만 단둘이 남았다고 해서 로즈가 입을 연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고 로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딱히 초췌해 보이지는 않지만 표정이 멀쩡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오늘 내내 한 번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는데, 패트릭 역시 로즈와 눈을 맞출 필요성 따위는 느끼지 못했다. 그는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벽만 노려보다가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집에는 연락했어?”

로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패트릭은 팔짱을 끼고 그녀를 응시하다가 여전히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투로 되물었다.

“어머니께는 편찮으시다고 했고, 다른 식구들에게는 연락했나?”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너무 낮은 목소리라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어려운 정도였다. 그래도 패트릭에게는 그만하면 충분했다. 그는 로즈를 찬찬히 뜯어보다가 긴 숨을 내쉬었다.

“돈이 필요했어?”

로즈가 어깨를 움츠렸다. 너무 딱딱하게 말했는지도 몰랐다. 어떤 식으로 대할지를 미리 생각하고 오기는 했으나 막상 그녀를 마주하고 나니 인내심은 순식간에 고갈되어 버리고 범죄에 손을 댔다가 이 사단을 냈다는 괘씸함이 생각보다 빠르게 그 빈자리를 메워, 아무래도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패트릭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하며 딱딱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를 하려고 애쓰고 있어. 나를 납득시켜 주지 않겠어?”

“…드릴 수 있는 말씀이 없어요. 죄송해요, 서턴 씨.”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니야. 입술까지 튀어나오려는 말을 겨우 삼켰다. 로즈는 양손의 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꽉 움켜쥐고서 그와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들고 있었다. 아버지라면 이럴 때에 뭐라고 설득을 해서 입을 열게 하셨을까? 아니, 아버지까지 갈 것도 없이 변호사인 스튜어트라면?

패트릭은 집에서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바깥에서의 일은 아예 입에 담지 않았었는데, 스튜어트는 그것을 무언의 약속으로 받아들였는지 그 역시도 집에 와서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거의 말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스튜어트에게 일 관련으로 이야기를 좀 해 달라고 할 것을 그랬다. 패트릭은 접근 방식을 조금 바꾸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약 관련으로는 절대로 얽히지 말라는 내 방침을 모를 리도 없는 로즈가 거래에 뛰어든 이유가 뭐였는지 궁금해. 그럴 만큼 보수가 좋았나? 급전이 필요했던 거야?”

결국에는 또 추궁하는 투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기분이 나쁠 정도로 로즈가 입을 열지 않고 있으니 패트릭이라고 말이 좋게 나올 리가 없었다. 그는 잠시 감정을 다스리려다가 오히려 더 화가 나 버려서 자리에서 일어서 취조실 안을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로즈 아널드, 로즈는 지난 2년간 내 비서였고 남들이야 뭐라고 하건 난 로즈가 일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었어. 돈 때문에 어렵다는 한마디만 했더라면 내 지갑이 곧 로즈의 지갑이었을 거야. 다른 이유가 있었다면 내 친구들이 로즈의 친구들이 되어 주었을 거고. 그런데 지금 이게 뭐지? 마약 사범으로 체포된 이상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게 되어 버렸잖아.”

“죄송합니다, 서턴 씨.”

“어떤 계기였든 내 지침을 어기고서, 그 지침을 어겼을 때의 결과를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그런 일을 벌였다는 건 그만큼 궁지에 몰려 있었다는 거겠지? 사적인 영역이라면 더 이상 질문은 않겠어. 하지만 로즈, 어떤 종류의 곤경이었든지 문제가 있었더라면 다른 사람들이 다들 그러는 것처럼 나에게 제일 먼저 의논을 했어야 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지금 로즈에게 품었던 신뢰가 모욕당한 기분이야.”

벽에 대고 말을 해도 그보다는 생동감 있는 반응을 보여 주겠다 싶었다. 패트릭은 로즈를 돌아보고 그녀가 말을 할 생각이 아예 없음을 깨달았다. FBI에게 보여 주는 성의는 이만하면 되었다. 그는 테이블 앞으로 되돌아가 양손을 싸늘한 철제 테이블에 짚고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분별이라는 게 남아 있다면 할 수 있는 한 철저하게 수사에 협조하도록 해. 나는 로즈를 구해 줄 수 없어. 내 말을 어긴 사람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점을 충분히 이해할 거라고 믿을게.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경찰에 전부 다 말하는 게 좋아. 그래야 형량이 가벼워지니까. 20년 가까이 감옥에 들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그는 말을 맺으며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두었던 재킷을 집었다. 로즈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패트릭은 마음에도 없는 동정을 보이는 대신 딱딱하게 말했다.

“FBI에 협조하겠다고 믿겠어, 로즈 아널드. 그게 내가 로즈 아널드라는 사람에게 품는 최후의 신뢰라는 걸 알아 둬.”

로즈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냉정하게 돌아서 버린 패트릭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재킷을 팔에 든 채로 망설임 없이 취조실을 나섰다. 대질 심문을 진행하던 요원이 이만 돌아가도 좋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었지만, 워싱턴 소재 아일랜드 이민자 그룹의 최고 실세가 오늘 하루 이만큼이나 양보해 주었으면 집에 가는 시간 정도는 멋대로 결정할 권리가 있었다.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벤튼과 딜버트가 그에게 목례를 했다. 패트릭이 그들을 보고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아 두 사람은 허둥지둥 그를 따라서 걸음을 옮겨야 했다. 패트릭이 굳은 얼굴로 낮게 말했다.

“로즈의 어머니를 찾아, 딜버트. 버몬트 주에 있을 거야. 로즈는 선처해 줄 수 없지만 병중인 어머니는 얘기가 달라. 병원비와 간병인 견적을 뽑아 줘.”

“알았어요, 패트릭.”

“로즈에게 변호사는 대 줄 수 없어. 국선이 붙을 거야. 조직 방침을 어긴 거니까 예외를 둘 수는 없지. 대신에 아무리 국선이더라도 터무니없을 정도의 허수아비가 붙지 않게끔은 해야지. 이건 벤튼이 손쓰도록 해.”

“알겠습니다.”

“더 시키실 일은 없나요?”

딜버트의 물음에 패트릭이 지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됐어. 필요하면 이 사람들이 다시 연락해서 부르겠지.”

“그럼 워싱턴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스튜어트한테 1박2일이라고 말해 버렸어. 두 사람 관광이라도 하고 싶으면 하도록 해. 휴가인 셈 생각하고. 호텔은 어디로 했나?”

경찰서를 나서자마자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플로리다의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었다. 패트릭은 눈썹 위로 손을 대어 작은 그늘을 만들면서 딜버트처럼 선글라스를 가져왔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오버사이즈의 흰 프레임이 눈에 띄는 선글라스를 끼면서 대답했다.

“힐튼 스위트룸이에요. 체크인은 미리 해 두었으니 들어가서 쉬고 싶으시면 쉬시고요. 날씨가 덥네요.”

“뭘 스위트룸씩이나 잡았어? 그냥 싱글이면 될 걸.”

“지난번에 마이애미에 오셨을 때 힐튼 스위트룸을 마음에 들어 하셔서요.”

패트릭이 한숨을 쉬었다. 벤튼이 주차장으로 앞장서서 갔다가 시보레 임팔라의 문을 열자마자 눈살을 찌푸리며 홱 물러섰다. 공항에서 렌트를 한다는 것이 하필이면 새카만 차가 걸리는 바람에 안 그래도 플로리다의 따가운 햇살에 뜨거워질 차가 더 열이 올랐다. 벤튼이 부지런히 네 개의 문을 전부 다 열자 사우나에서나 나올 법한 무시무시한 더운 공기가 훅 뿜어져 나왔다.

“그때야 키드랑, 아니, 스튜어트하고 같이 왔으니까 좋았지, 혼자 와서 스위트룸에 있어 봤자 무슨 소용이라고. 번거롭겠지만 그냥 싱글 룸 제일 간단한 걸로 바꿔 줘.”

“그래도요.”

“스튜어트 없이 좋은 데 들어가 있고 싶지 않아.”

벤튼이 말리려는데도 패트릭이 먼저 차에 올라타면서 대꾸했다. 딜버트가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지었다.

“라일리 변호사님도 지금쯤 패스트푸드로 끼니 때우고 계실지도. 패트릭 없이 맛있는 거 먹을 수 없다면서.”

“…그럴지도 모르지, 그 녀석이면.”

정말로 그럴까 봐 신경이 쓰이면서도, 스튜어트를 생각하자마자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풀렸다. 패트릭은 아직도 후끈한 차의 문을 무자비하게 쾅 닫아 버리면서 카시트에 기댔다.

“바다 보러 갈 사람, 아니면 쇼핑센터 갈 사람?”

“쇼핑센터 저요, 저!”

오만상을 찌푸리고서 뜨거운 카시트 위에 최소한의 면적만 차지하고 앉으려고 애쓰던 딜버트가 쇼핑이라는 단어에 번쩍 손을 들었다. 벤튼이 킥 소리를 내고 웃다가 딜버트의 매서운 손에 뒤통수를 찰싹 얻어맞았다. 그녀는 운전석 옆으로 팔을 쭉 뻗어 내비게이션을 켰다.

“근처에 쇼핑센터 있을 거예요. 가서 라일리 변호사님 선물 사다 드리세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어, 잠깐만, 에어컨 켜지 마.”

“세상에, 안 더워요?”

선글라스 너머로도 딜버트의 휘둥그런 눈이 잘 보였다. 패트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팔짱을 꼈다.

“스튜어트가 차 탈 때마다 미친 듯이 에어컨 틀어 대는 걸로 충분해. 간만에 따뜻한 차 안에 타 보는 경험을 할 기회인데 방해하지 마.”

“따뜻? 이게 따뜻? 진심?”

“갑갑하면 창문을 열어.”

패트릭이 쓸데없이 위엄을 실어 말하며 솔선수범해 유리창을 열었다. 딜버트가 선글라스를 벗더니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한 데 모아 묶으면서 화장이 녹아내리겠다고 투덜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패트릭은 로즈 아널드의 일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려고 애쓰며 차창 밖의 야자수들만 바라보았다. 이제 로즈의 일은 그의 손에서 떠났다. 최소한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집에 잘 들어갔어?”

- 그럼. 넌 호텔이야?

“응.”

선물을 샀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입이 간질간질했다. 딜버트와 벤튼이 동참해서 골라 준 선물은 지금 얌전하게 포장이 된 채로 침대 발치의 쇼핑백 안에 들어 있었다. 패트릭은 샤워 가운 자락을 여미며 창가로 다가갔다. 마이애미의 야경이 발 아래로 펼쳐져 아름다웠다. 스튜어트와 함께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는 유리창에 손을 대면서 지상 위에 펼쳐진 별들 같은 불빛을 헤아려 보았다.

- 밥은 먹었어?

“걱정하지 마. 넌 잘 챙겨 먹었지?”

굳이 전화로 확인하지 않아도 될 사소한 일까지도 서로 캐묻고 있자니 고작 하룻밤일지언정 스튜어트 없이 잠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워싱턴에서 플로리다까지는 비행기로 두 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고, 마음만 먹는다면 오늘 당일 일정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피곤한 모습으로 집에 들어갔다가는 스튜어트가 회사에 전화를 걸어 사람을 혹사시키지 말라고 항의를 하겠다며 나설 위험이 있었다. 키드는 정말 그러고도 남아. 패트릭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한 번 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스튜어트가 물었다.

- 내일 회사 들렀다가 집에 오는 거지?

순간 식은땀이 났다. 원래 회계사는 출장을 다닐 이유가 없는 직업이고, 인턴밖에 해 본 적이 없는 그는 보통 회사가 출장에 대해 어떤 방침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집으로 바로 가야 하나, 아니면 회사로 우선 가서 퇴근 시간까지를 채우고 가야 하나? 다행히도 스튜어트의 뉘앙스에 얼떨결에 응, 하고 대답한 게 정답이었던 모양이었다.

- 너네도 복지 좋은가 했더니 우리나 마찬가지네. 피곤하겠다. 내일은 내가 사무실 앞까지 데리러 갈게.

“안 그래도 괜찮아.”

- 갈게.

이런. 스튜어트가 한번 고집을 세우면 이길 도리가 없었다. 건물 앞까지 오는 정도라면 별일은 아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패트릭은 떨떠름하게 마음대로 하라고 대답했다. 이제 할 말도 없었지만 전화를 끊기에는 또 아쉬워 머뭇거리고 있는데 스튜어트가 물었다.

- 밤에 따로 할 일 없지?

“없는데.”

- 거기 호텔에 DVD 렌탈 서비스 있어?

“그건 또 왜?”

- 영화 보자.

패트릭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스튜어트가 군에 있을 때에 몇 번 해 보았던 장거리 데이트였다. 전화나 메신저 음성 채팅을 연결해 놓고 동시에 DVD를 틀어 함께 보는 것. 패트릭은 자리에서 일어나 객실 책상 위에 구비되어 있던 무거운 호텔 안내 책자를 펼쳤다. 힐튼 호텔은 최신식 VOD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서 목록에 있는 영화라면 굳이 빌리러 갈 필요 없이 텔레비전의 유료 채널에서 원하는 타이틀을 고르는 것만으로 방에서 관람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페이지를 뒤적뒤적 넘기다가 한 제목에서 멈추었다.

“야, 여기 너 좋아하는 영화 있다.”

- 뭐 있는데?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 오, 그거 보자. 잠깐만 기다려.

스튜어트가 워낙에 좋아하는 영화라 집에도 DVD가 있었다. 스튜어트는 전화를 들고 서랍을 뒤지는지 콧노래와 함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갑자기 흥얼거림을 멈추었다. 다시금 전화 너머에서 들려온 그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 이젠 서랍에까지 과자를 숨겨? 압수.

“…아.”

거기에도 넣어 두었었나? 스튜어트에게 몇 번 들키고 나서 패트릭은 증권 회사에서 일했던 경력을 살리기로 마음먹었고,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 마음가짐으로 과자를 집안 구석구석에 분산 투자해 두었다. 문제는 하도 분산을 잘 해 놓은 나머지 가끔은 스스로도 대체 어디에 과자를 넣어 두었는지 기억을 못 하고 있다가 이렇게 불시에 서랍을 열거나 다용도실 선반을 청소하는 스튜어트에게 적발된다는 점이었다. 패트릭이 할 말을 못 찾고 있는데 비닐이 북 뜯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아작아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몸에 나쁘다면서 넌 왜 먹어?”

- 네가 못 먹게끔 내가 제거해 버리는 과정이야.

“그런 게 어딨어!”

- 찾았다. 지금 바로 볼까?

볼이 부어 봤자 스튜어트에게 보이는 게 아니니 투정을 부릴 여지도 없었다. 패트릭은 굳이 대들지 않기로 마음먹고 침대로 기어 올라가 리모컨을 더듬더듬 찾았다. 스튜어트는 본격적으로 그가 숨긴 과자를 먹어 치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과자라면 간만에 집에서 탈출한 패트릭도 이미 편의점에서 양껏 사다가 호텔 방에 쟁여 둔 참이었다. 그는 집에서는 절대로 못 먹을 특대 사이즈인 양파와 사워크림 맛 감자칩 통의 뚜껑을 열고 베개를 정리해 등에 받쳤다. 그리고 스튜어트가 절대 못 먹게 하는 색깔 요란한 탄산음료의 캡도 땄다.

“좋아… 세팅 다 했다. 준비됐어?”

아마도 스튜어트도 불을 껐겠지. 패트릭은 침대 옆의 컨트롤 패널로 호텔 객실의 불을 끄고 자리 옆의 노란 스탠드 하나만 남겨 두었다. 스튜어트가 없으면 밤에 불을 전부 다 끄고서는 잘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 분명히 걱정을 하니까, 스튜어트에게는 비밀로 지키는 부분이었다. 그는 호텔 광고가 한창 나오고 있는 텔레비전을 유료 채널에 맞추고 캐리 그랜트 주연의 스파이 영화 제목으로 선택 화살표를 내렸다.

- 응. 셋 세면 시작하는 거야.

“좋았어. 하나….”

플로리다의 호텔 방에서 패트릭이 리모컨을 들었다.

- 둘….

워싱턴의 아파트에서는 스튜어트가 모니터 밝기를 조정했다.

“셋!”

두 사람이 동시에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익숙한 음악이 나오면서 스튜어트가 만족스러운 소리를 냈다. 패트릭도 기분 좋게 감자칩을 아삭 베어 물었다. 허나 발견하고 말릴 사람이 곁에 없으니 두 사람의 아파트에서 식탁 아래에 숨어 몰래 먹을 때보다 맛이 한결 덜했다. 패트릭은 도중에 전화가 끊길까 봐 충전기를 연결하고 한쪽 귀에 핸즈프리 이어폰을 꽂았다. 화면에서는 잠시 후면 FBI 요원으로 오해를 받을 광고 기획자 역을 맡은 캐리 그랜트가 기차역을 바쁘게 빠져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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