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가벼운 점심을 사 와서 인터넷의 바다나 떠돌아다니며 먹을 요량으로 사무실 바로 앞의 차이나타운에서 테이크아웃을 해 왔더니, 그새 책상 위에 제 1차 인턴 종합 평가서가 얄밉게 올라앉아 있었다. 표지에는 작성 기한이 금요일까지라는 포스트잇도 한 장 붙어 있었다.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만큼 월급도 올라서 이번 휴가에는 어디 그럴듯한 데에 놀러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스튜어트는 서류철을 정리함에 과격하게 꽂아 넣었다. 신입 시절에야 결재 서류가 올라오면 그 자리에서 처리했었지만, 근속 기간이 길어지면서 늘어난 것은 요령. 결재 시한 전에 완성해서 줘 봐야 오히려 반려가 될 확률만 늘어난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도로 휴가 생각에 잠겨 론리 플래닛의 홈페이지에 접속하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조셉 서턴, 패트릭의 형이었다. 반사적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기는 했으나 그와 동시에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러나 버튼은 이미 눌린 뒤였다. 조셉의 활달한 목소리가 핸드폰을 뚫고 귀를 찔렀다.
- 여어, 제부!
“오래간만입니다, 형님. 잘 지내셨습니까?”
스튜어트가 핸드폰을 붙잡고 총알처럼 휴게실 방향으로 튀어가면서 인사를 했다. 조셉이 큰 소리로 웃더니 엉큼한 투로 물었다.
- 그래, 어제는 둘이 로맨틱한 하루 보냈어?
“뭐 로맨틱할 게 있습니까. 그냥 저녁 먹고 얘기 좀 하고 했습니다.”
전화 너머의 사람에게 보일 리가 없지만 스튜어트는 저도 모르게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조셉과의 대화는 언제나 조금 불편했다. 패트릭과는 일곱 살이나 차이가 나는 조셉은 바로 얼마 전에 프랑스에서 돌아와 가족과 함께 메릴랜드에 터를 잡았는데, 조셉도 조셉의 아내인 테레사도 지나칠 정도로 두 사람에게 잘해 주려고 애를 쓰는 바람에 오히려 스튜어트로서는 그들을 대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 이번 주말에 저녁 어때? 가족끼리 모여서 고기나 구워 먹자고. 우리 그릴 샀다고 얘기 했나?
“어, 결국 사셨군요. 정원에 두셨습니까?”
- 그래. 한 번에 티본스테이크를 여섯 장은 거뜬히 굽겠어. 제부도 나중에 정원 있는 집으로 이사 가면 그릴 하나쯤은 사야지?
“사야죠. 이번에 제가 한번 써 봐도 되겠습니까?”
조셉이 유쾌하게 웃었다.
- 테레사한테 배우는 게 나을 거야. 테레사가 나보다 더 잘 굽거든. 팻이랑 제부가 디저트 거리를 사 오면 우리가 저녁 준비를 하지. 어때?
“팻 일정을 확인해 봐야겠지만 전 좋습니다. 저녁에 다시 전화 드릴까요?”
- 걔는 주말에도 일을 한대?
스튜어트가 한숨을 쉬었다.
“회계사잖습니까. 부르면 가야 하는 모양입니다.”
전화 너머에서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통화 상태가 좋지 않아서 소리가 전달되어 오기까지 시간이 좀 지연되나 했지만 기다리다 보니 조셉의 숨소리는 들리는 것도 같았다. 스튜어트가 미심쩍게 물었다.
“형님?”
- …아, 미안. 듀크가 정원으로 나가려는 거 같아서.
듀크의 이름이 나오자 스튜어트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배어 나왔다. 이제 세 살배기인 듀크는 한창 말썽을 피우고 다녀 조셉과 테레사를 아주 골치 아프게 만들곤 했다. 고아로 자라 대가족에 대한 환상이 있고, 원래도 아이들을 아주 좋아하는 스튜어트는 듀크를 패트릭의 질투를 살 정도로 예뻐해 가족 모임이 있을 때에는 언제나 베이비시터를 자청하곤 했다. 그는 버릇처럼 전화를 반대쪽 손으로 바꾸어 들면서 물었다.
“듀크는 잘 지냅니까?”
- 스튜 삼촌은 언제 오냐고 야단이야. 알잖아, 듀크가 자네랑 팻이라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거?
또 입에 발린 말. 막 들뜨려던 기분이 고스란히 가라앉고 말았다. 아무리 가족끼리 복작거리는 분위기를 동경해서 조셉이 모이자고 운을 떼면 거절하는 법이 없는 스튜어트라지만, 조셉 부부와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언제나 그들이 스튜어트와 패트릭의 마음을 사려고 안달인 게 티가 나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특히 테레사는 가족끼리 만날 때마다 스튜어트의 입으로 패트릭이 형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려고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빙빙 돌린 말로 그를 이리 떠 보고 저리 들추어 보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패트릭은 언제부터인가 조셉을 미묘하게 껄끄러워해, 덕택에 사이에 낀 스튜어트만 매번 난감할 뿐이었다. 어차피 주말에 직접 만나면 듀크가 직접 스튜 삼촌과 팻 삼촌이 없는 동안 뭘 하고 놀았는지 미주알고주알 주워섬길 터, 스튜어트는 화제를 돌릴 양으로 조셉이 더 말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이번 주말에 볼 거라고 얘기해 주시죠. 일은 어떻습니까?”
- 일? 제부, 말도 마. 요즘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몰라.
조셉이 기다렸다는 듯이 갑자기 푸념을 하기 시작했다. 물웅덩이를 피하려다 늪에 빠진 격이군. 스튜어트는 자신의 멍청함을 탓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의 반응을 알 리가 없는 조셉은 이미 물 만난 고기처럼 말을 쏟아 내기 시작한 뒤였다.
- 마음 같아서는 다른 데에는 신경 안 쓰고 사진에 전념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 지금이야 듀크가 어리지만 이제 곧 유치원도 보내야 하고 학비 생각하면 저축도 해야 하는데 큰일이야. 경력직 뽑는 데에는 관련 경력이 없으니까 지원을 못 하고, 그렇다고 신입 공채를 넣기엔 나이만 많으니까 몸값 싼 젊은 애들이랑 경쟁해야 하고. 그렇다고 이 나이에 어디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 그렇지?
“그렇군요. 형님 사진을 좀 팔아 보시죠?”
- 안 그래도 요즘 계속 그쪽으로 알아보는 중이야. 잡지사를… 이젠 몇 군데나 드나들었는지 나도 모르겠네. 여튼 수상 경력이 모자라다던가, 스타일이 너무 어둡다던가, 우울감이 느껴진다던가 별의별 핑계를 다 대서 퇴짜를 놓더라고. 내 사진이 그렇게 암울해?
조셉의 사진이 암울하던가? 스튜어트는 잠깐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몇 해 전 그에게 받은 소나무 숲 사진이 생각이 났다. 아침 안개에 휩싸인 나무 둥치들을 기묘할 정도로 낮은 각도에서 찍은 사진이었는데, 조셉은 그 순간을 포착하겠답시고 네 시간 동안 숲에 엎드려 있다가 감기 몸살로 몇 주를 앓았다고 했다. 패트릭은 어두침침하다고 단박에 창고에 갖다 넣으려 했지만 스튜어트는 그 구도와 분위기에는 그래도 나름의 철학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 내가 보기엔 확실히 상급 기종이 있어야 하는 거야. 제부 그거 알아? 사진도 은근히 장비 빨이야, 장비 빨. 그런데 그런 렌즈나 바디 같은 게 또 한두 푼 하는 게 아니라 말이지.
그리고 패트릭은 스튜어트가 언제나 사람을 선의로만 판단한다고 놀렸었지.
“네, 그야….”
생각에 잠기는 바람에 스튜어트는 조셉의 말에 어물쩍 웅얼거리는 소리만 대답으로 내놓았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조셉은 타이밍 좋게 땅이 꺼져라 하는 한숨을 한 번 쉬더니 목소리를 살짝 낮추었다.
- 팻네는 좀 어떻대?
“네? 아. 잘 모르겠습니다.”
- 허어, 집에 와서는 일 얘기는 안 해?
“저희들끼리는 회사 얘기는 거의 안 합니다.”
- 그래도 분위기는 알 수 있을 거 아냐. 밖에서 일 풀리는 거에 따라서 집에 와서 태도가 다르지 않아?
“그야 사람이니까요, 음. 요즘 딱히 나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 사람 구한다는 얘기는 없어?
나왔다. 조셉은 아마도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어서 굳이 주말 약속을 잡아가면서까지 전화를 했을 것이었다. 졸지에 형제 사이에 끼인 꼴이 되어 버린 스튜어트는 어색하게 웃어 버렸다.
“글쎄요, 규모가 워낙에 작으니 인원 충원이 따로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거기서 일하시려고요?”
- 모르는 척 하기는, 가족 좋다는 게 뭔가? 좀 물어봐 줘, 제부. 큰 거 안 바라니까 그냥 발 하나만 담그고 있자고.
패트릭의 반응은 불 보듯 뻔했다. 조셉은 예전에도 몇 번 패트릭에게 제퍼슨 앤 서턴 트레이더스에서 일할 수 없겠냐고 물어 왔었고, 그때마다 패트릭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은 돌아가신 서턴 씨가 창립자이니 두 아들이 다 가업을 이어가며 함께 일해도 좋으련만 왜 패트릭이 조셉을 같은 회사에서 보고 싶지 않아 하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패트릭이 싫어하는 일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스튜어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물어보는 거야 할 수 있죠. 하지만 너무 기대는 마시고….”
- 그래, 그래. 제부가 오늘 한 번 물어봐 주고, 내가 주말에 한 번 더 물어보면 되지.
스튜어트가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그러마고 대답하며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패트릭이 새로 사 준 시계의 바늘이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간다고 재촉을 하고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애써 사 온 중국 음식도 못 먹게 생겼다. 스튜어트는 일자리에 대해서 더 길게 푸념을 늘어놓으려는 조셉의 말을 억지로 중간에 자르고 일하러 가야 한다는 핑계로 전화를 끊어 버린 뒤 한숨을 쉬었다. 이 얘기를 또 어떻게 전한담.
패트릭은 앨리슨을 시켜 사무실 근처의 레스토랑에 점심 예약을 잡게 했다. 면담 시간을 보아하니 경감이 점심시간을 쪼개어 그를 방문하려는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조직의 비즈니스가 불법적인지 합법적인지를 떠나 경찰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든든한 일이었고, 특히나 블랙스웰 경감은 패트릭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던 사이였다.
앨리슨은 사무실에서 별로 멀지 않은 맥퍼슨 스퀘어 근처에 자리한 조지아 브라운스를 예약했다. 빌 클린턴이 대통령 재임 시절에 종종 들렀다는 유명한 레스토랑의 이름에 블랙스웰 경감은 처음에는 사양을 했지만 마지못해 약속 시간에 맞추어 예약석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메인 요리가 나오기 전까지 패트릭의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의 이야기를 적당히 나누며 시간을 때웠다.
“요즘은 별일 없습니까?”
웨이터가 닭 요리를 내어 오고 나서 패트릭이 지나가는 투로 가볍게 물었다. 하지만 노련한 경감은 그 신호를 놓치지 않았다. 경감은 혹시라도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이나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웨이터가 없는지를 확인한 뒤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며칠 전까지 제퍼슨 그룹에서 비서로 일하던 로즈 아널드 양 말입니다. 어제 플로리다에서 체포되었습니다.”
패트릭은 일부러 금시초문인 척 놀라는 시늉을 했다.
“로즈가 말입니까? 아니, 무슨 일로요?”
“마약 거래 관련입니다. 체포 주체는 플로리다 경찰이 아니라 FBI입니다.”
“거래… 단순 소지죄도 아니고 거래인가요?”
“그게 좀 복잡합니다.”
경감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는 점잖게 냅킨으로 입가를 훔친 다음 물 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패트릭이 와인을 권했지만 그는 식사 후 바로 근무로 돌아가야 한다며 거절을 했다.
“마약을 소지하고 있었거나 거래 현장에서 잡힌 게 아닙니다. 체포 당시에 누군가에게 전달할 목적으로 USB를 가지고 있었다는군요. 그 안에 들어 있던 건 암호 처리된 스프레드시트 파일이었습니다.”
“스프레드시트 파일이라….”
패트릭이 눈을 가늘게 뜨고 경감을 마주 보았다. 경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 장부와 명단이라고 추정한답니다. 전부 암호로 처리되어 있어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 자료인지는 아직 불명이랍니다.”
“로즈가 그 암호를 풀 수 있는 걸로 생각하십니까?”
“그 정도로 이 거래에 깊이 관계되어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그 USB를 전달하는 데에 그치는 중간책이었는지는 모릅니다. 증언을 거부하고 있다지요. 영리한 아가씨라면 잡혀 버린 이 시점에서 알고 있는 걸 전부 다 말해서 최대한 적은 형량을 언도받으려고 할 텐데 말입니다.”
“…영리한 아가씨였다면 애초에 마약 거래 따위에 손을 대지 않았을 겁니다.”
패트릭이 애꿎은 사이드디시만 휘저어 놓으며 한 말에 경감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남부식 비스킷 빵을 잘라 소스를 바르면서 말을 이었다.
“연방 수사국에서도 제퍼슨 그룹이 워싱턴의 사법 기관에 얼마나 협조적인지를 잘 알고 있고, 아버님 대부터 범죄와의 전쟁을 벌여 이만큼이나 자체 정화를 해 주신 데에 아주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FBI를 대신해서 온 겁니다, 서턴 씨. 일면식도 없는 FBI의 태도 뻣뻣한 요원이 와서 여쭙는 것보다는 아버님과 알고 지낸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게 더 적절할 것이라는 게 상부의 판단이었습니다.”
“로즈의 수사 협조를 촉구하는 역할로 저를 지목하시는 거겠죠. 플로리다에 가야 합니까?”
경감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마이애미로 가셔야 합니다. 물론 필요한 제반 비용은 연방 수사국에서 지원을….”
패트릭이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랫사람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폐를 끼친 건 접니다. 제가 부담하는 게 당연하죠. 제가 알아야 할 사항이 있거든 더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무슨 종류의 마약이 얽힌 일입니까? 크랙 코카인?”
블랙스웰 경감은 두 개째의 비스킷 빵을 집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학생 애들도 쉽게 구하는 순도 낮은 크랙 따위였다면 FBI가 그렇게 대규모로 출동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건 함부로 말하고 다니면 안 되는 얘기지만 얻어듣기로 NARC에서 최고로 치는 현장 요원까지 떴었다고 합니다.”
“NARC라면…?”
“나르코틱스 말입니다. FBI의 마약 단속국을 줄여서 부르는 이름이지요. 그쪽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그물을 치고 기다리다가 이번에 크게 한번 잡아들이려는 모양입니다. 순도가 높은 헤로인 관련이라고 들었는데 제가 제공받은 정보는 여기까지인지라 더 자세한 말씀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조지아 브라운스의 음식은 언제나처럼 최고였지만, 패트릭은 이제는 도저히 음식이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입맛을 잃고 포크를 내려놓으면서 혀를 찼다.
“헤로인입니까? 그건 원래 마피아들 전유물인데….”
“그렇군요.”
경감의 명민한 눈이 재빨리 패트릭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말로만 유감을 표시하면서 혹시나 실상은 그 거래를 지시한 수뇌부가 아닌지 가늠해 보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패트릭은 와인 잔을 들고 의자에 푹 기대어 앉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마약 거래 절대 금지 방침을 세우신 이래로 제퍼슨 그룹에서는 절대로 마약 사업에 뛰어든 적이 없습니다. 내부 조직원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고, 다른 사람들은 관계가 없다고 보증하겠습니다. 백 번 말씀드리는 것보다 내일 제가 마이애미에 출두하는지 그러지 않는지를 확인하시는 게 제일 빠르겠군요.”
“서턴 씨를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지금은 의심하신대도 괜찮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실 겁니다.”
힘을 준 어조에 경감이 미소를 지었다.
“갈수록 아버님을 닮아 가십니다, 서턴 씨. 말투도, 버릇도요.”
“…감사합니다.”
아버지를 화제로 한 대화가 감상적으로 흐르면 패트릭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패트릭의 침묵이 유난히 무거운 것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경감이 별 뜻 없이 말을 이었다.
“실례의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형님이 아니라 패트릭 서턴 씨가 여기에 계셔서 다행입니다. 조셉 서턴 씨는….”
“형의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요.”
다른 면에서는 많이 노련해졌을지 몰라도 패트릭은 거절하는 데에 있어서는 아직 서툴렀다. 경감이 무안한 듯 말을 멈추었다. 패트릭은 금세 실수를 깨닫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전 가정법을 쓰는 대화는 좋아하지 않아서요. 형은 원하는 일을 하기로 했고, 그러기에 비즈니스는 제가 일임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불쾌랄 게 있습니까, 저야말로 공연한 말을 했습니다.”
경감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한번 틀어진 분위기는 쉽사리 도로 편해지지 않았다. 패트릭은 굳이 화기애애한 장면을 다시 연출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세를 바로 해 앉으면서 다짐하듯이 경감을 바라보았다.
“그럼, 내일 마이애미 경찰에 출두하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오전 중에 도착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무음 모드로 맞추어 두었던 핸드폰을 살폈다. 스튜어트가 부재중 전화를 남겼다. 재깍 전화를 받지 않았으니 패트릭의 일이라면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어머니처럼 호들갑을 떨어 대는 스튜어트 성격 상 지금쯤 걱정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점심시간이려나? 서로가 집에서 회사 얘기는 거의 하지 않다보니 그의 점심시간이 몇 시까지일지 추측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녀오셨냐고 인사를 건네는 앨리슨에게 눈짓으로만 답하면서 일단 문자 메시지를 한 통 넣어 통화가 가능하면 다시 전화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
사무실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이 녀석은 일을 안 하나?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스튜어트의 밝은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 팻, 점심 먹었어?
“응. 전화 못 받아서 미안. 거래처 사람이랑 점심 약속이 있었거든.”
- 내 전화 때문에 방해 받았던 건 아니지?
“아냐. 넌 밥 먹었어?”
- 중국 음식 사다가 먹었지. 너, 지금 얘기할 시간 돼?
“무슨 일이야?”
스튜어트가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패트릭은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그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전화 너머에서 연신 핸드폰을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바꾸어 들며 안절부절 못 하고 있을 스튜어트의 모습이 선명하게 상상이 되었다. 아마 지금쯤 머리를 벅벅 긁고 있겠지. 패트릭이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망설이냐고 물으려는 찰나 스튜어트가 밸어 내듯이 말을 했다.
- 형님이 전화하셨는데, 너희 회사에 혹시….
“안 돼.”
순간적으로 팍 화가 치밀어 오르는 바람에 패트릭의 어조가 싸늘해졌다. 스튜어트는 당황한 듯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실없이 웃었다.
- 생각해 볼 여지도 없는 거야? 그, 뭐냐, 요즘 잘 안 풀리시나 봐.
“몇 번을 말해, 키드. 우리 회사 사정 별로야. 자리가 난다고 하더라도 일하는 요령도 없는 형을 어디다 써?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내 월급 주머니도 빠듯해. 형 같은 게으름뱅이는 못 써. 안 써.”
- …너 왜 나한테 화를 내냐.
스튜어트의 목소리가 시무룩해지고 나서야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에게 화풀이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흥분해서 신랑을 몰아붙이다니, 미안한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패트릭은 얼른 자리에 앉아 전화를 양손으로 꼭 모아 쥐고서 할 수 있는 한 애교스러운 소리를 냈다.
“너한테 화낸 거 아냐, 키드. 우리 자기, 우리 왕자님. 아니야. 응? 알지? 응?”
- 나야 그냥 말 전하려고 전화한 건데….
“나도 다 알아. 키드한테 그런 거 시키는 형이 나쁜 거지 키드가 나쁜 거 아냐. 그치? 그러니까 삐지지 마, 응? 키드?”
바깥에서 앨리슨이 듣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어리광을 부린 보람이 있었다. 좀 더 화가 난 척 하려던 스튜어트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꾸밈없이 밝아서 패트릭도 겨우 한숨을 돌렸다. 스튜어트가 짓궂게 속삭였다.
- 웬일이야, 밖에서 전화 받으면서 그렇게 아기 고양이 짓을 다 하고.
“난 이 세상에서 키드가 제일 좋으니까.”
아무리 안전 범위에 들었어도 스튜어트의 기분이 완전히 풀린 것이 확실해지기 전에는 방심하지 않는 편이 현명했다.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어도 겉으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나 강경하게 경고를 거듭했는데도 조셉이 또 스튜어트를 끌어들여서 조직에서 한 자리 달라는 요구를 했다니 지금 당장 형에게 전화를 걸어 소리를 쳐도 시원치 않을 판이었지만, 스튜어트가 마음이 상하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스튜어트가 밝은 투로 말했다.
- 그래도 주말에 형님 댁에 놀러 가는 건 괜찮지, 팻? 너도 형님이 싫은 건 아니잖아, 가끔 일자리 못 구하신다고 푸념하시는 것만 빼면 좋은 분이야.
아니, 좋은 사람 아니야. 패트릭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 살아 계실 때에는 갱단 두목 자식이라는 게 창피하다고 연을 끊겠다느니, 영영 모르는 사람처럼 살겠다느니 하면서 부모님 가슴에 못을 박았던 주제에 제 앞길이 잘 안 풀리니까 그 싫다던 갱단을 물려받아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동생에게 빌붙으려는 형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 그의 속을 알 리가 없는 스튜어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 형님네 말이야, 그릴을 사셨대. 정원에서 바비큐 파티 하면 좋겠지? 오랜만에 듀크도 보고. 재밌을 거야.
“일자리도 못 구하면서 그릴 살 돈은 어디서 났대?”
- 하하, 그러게!
잠시 자제를 하지 못하고 튀어나온 뾰족한 말투에도 스튜어트는 별 낌새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패트릭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난 형한테 붙잡혀서 일자리 하나만 내 달라고 징징거리는 소리를 릴레이로 들어야겠네. 듀크랑 놀지만 말고 중간에 와서 나 구해 준다고 약속하면 갈게.”
- 그대의 기사, 충심으로 구해 드리리다.
스튜어트는 패트릭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조셉과 형수 테레사는 모두 서턴 집안의 가업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조셉은 스튜어트가 패트릭이 하는 일의 실체를 모른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스튜어트를 자꾸만 거절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어 자신들의 자리를 요구한다.
- 근데 말야, 빠듯하다니, 그런 말 마. 우리 지금 살기 어려운 거 아니잖아?
“응?”
갑자기 스튜어트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그는 성실한 투로 힘을 주어서 말을 이었다.
- 두 사람이 버는데다가 저축도 하고 있고, 가을에 유럽으로 휴가 갈 만큼 따로 모아 놓은 돈도 있는걸. 넌 정말 잘 하고 있으니까 부담 갖지 마, 팻. 지금 우리, 내 기준으로는 엄청 만족스럽게 잘 살고 있어. 이만하면 우리 나이에 꽤 성공한 거야. 안 그래?
다정한 위로에 오히려 기운이 빠졌다.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 리 없는 스튜어트가 계속 확신에 찬 투로 말했다.
- 난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너도 알지? 내가 너 엄청 자랑스러워하는 거.
그가 회계사라고 착각하고 있는 지금이야 그렇겠지만, 진짜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나서도 이렇게 자랑스럽다는 말을 해 줄까.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아 패트릭은 눈을 감아 버렸다. 전화 너머에서 스튜어트가 그를 불렀다.
- 여보세요, 팻? 들려?
“…응, 이제 들려. 잠깐 전화가 이상했어.”
전화가 이상했다는 핑계에 목소리가 조금 먹먹해진 것도 의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패트릭의 상태를 알 리 없는 스튜어트가 활기차게 말했다.
- 네가 진짜 자랑스럽다고 했어. 넌 최고야, 패트릭 클라란스 서턴. 자신감 없는 소리는 하지 마. 너 덕에 내가 어깨에 힘주고 사는 거야.
“고마워, 키드.”
- 집에 와서 휴가 어디로 갈지 얘기해 보자. 좋지?
“좋아. 있지, 키드… 나 일 때문에.”
- 아. 미안, 미안. 나도 안 그래도 들어가 봐야 했어. 저녁에 봐. 안 늦지?
“일찍 갈게.”
목이 잠길 것만 같아서 그 이상 말을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패트릭은 정말로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전화를 끊었다가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바람에 내일 플로리다에 간다는 말을 못 했음을 깨닫고 혀를 찼다. 그는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잠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일은 언제나 넘치도록 밀려 있었고 한 조직을 이끌고 나가는 사람에게는 긴 휴식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인터폰에 손을 뻗어 앨리슨을 호출했다.
“네, 서턴 씨.”
“딜버트하고 벤튼에게 두 시간 후에 사무실로 오라고 해. 그리고 내일 아침에 마이애미로 출발해야 하니까 비행기 준비시켜. 그리고….”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덧붙였다.
“30분만 혼자 있게 해 줘. 아무에게도 방해 받고 싶지 않아.”
두 시간 후, 딜버트와 벤튼이 내일 마이애미에서의 행보를 의논하기 위해 사무실로 찾아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펜을 들고 손바닥을 탁탁 치고 있던 패트릭이 무슨 일인가 해서 반투명한 유리문 너머를 기웃거렸다. 벤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인지 보고 오겠습니다.”
“부탁하지.”
문가로 다가가 문을 반쯤 연 벤튼이 무슨 일인지 그 모습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무슨 전개인지를 몰라 패트릭은 책상 앞의 자리에 앉은 채 눈만 깜빡였고, 딜버트가 의아한 얼굴로 벤튼의 뒤로 다가섰다. 그녀는 고개를 쭉 빼고 벤튼의 어깨 너머를 보더니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맙소사, 저게 뭐야!”
“왜 그래?”
이쯤 되면 패트릭도 자리에서 일어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책상을 빙 돌아 나가는 사이 벤튼이 얼떨떨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곧이어 택배사 유니폼을 입은 네 사람의 건장한 사내가 엄청난 크기의 무언가를 사무실 안으로 낑낑거리고 날라 왔다. 노란색의 포장용 종이 틈으로 보이는 몸체가 아무리 봐도 대리석 같았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사내가 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에 놓아드릴까요?”
무슨 일인지를 파악하는 게 순서겠지만 그의 표정이 제발 이 무거운 걸 한시라도 빨리 내려놓게 해 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아 패트릭은 저도 모르게 얼빠진 얼굴로 창가를 가리켰다. 네 남자가 어기여차 하고 죽어가는 소리로 남은 힘을 겨우 짜내어 배달 물품을 창가에 겨우 세웠다. 정체불명의 물건이 바닥에 부딪치면서 무시무시한 쿵 소리가 났다. 셋 중에 그나마 가장 먼저 이성을 되찾은 딜버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봐요, 이게 뭐죠? 뭘 주문하신 거예요, 패트릭?”
아까 어디에 놓을지를 물은 남자가 조끼 주머니에서 작은 카드 봉투를 하나 꺼내면서 패트릭에게로 다가왔다. 마치 미리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나머지 사람들이 재빠른 동작으로 포장을 풀어 반들반들한 대리석 조각상의 모습을 드러냈다. 짐을 가져온 사내들의 검은 머리카락과 올리브빛 피부에서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던 패트릭이 떨떠름하게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봉투를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내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패트릭의 손등에 입을 맞추더니 부담스러울 정도의 존경이 담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뉴욕의 돈 잘루치 대부님께서 워싱턴의 돈 서턴 대부님께 축하와 애정을 담아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직접 배달해 드릴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돈 서턴. 제 가족들도 제가 돈 서턴을 직접 만나 뵈었다는 데에 두고두고 자부심을 느낄 겁니다.”
“어… 감사합니다.”
항의할 새도 없었다. 패트릭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 건장한 사내들은 카드 봉투 한 장을 그의 책상에 정중하게 올려놓고 썰물처럼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앨리슨이 울 것만 같은 얼굴로 패트릭의 사무실 문 앞으로 다가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울먹였다.
“죄송해요, 서턴 씨, 뭐 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는데 중요한 선물이라면서 막 들어와서, 저, 저렇게 큰 걸 가져오고 있으니까 막지도 못하고….”
“아냐, 잘 했어, 앨리슨. 진정하고 할 일 해.”
패트릭이 힘없이 말하며 조각상 앞으로 다가갔다. 먼저 조각을 살피고 있던 벤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 다 대리석입니다. 저 사람들, 무거운 정도가 아니었겠는데요.”
“…음료수라도 한 잔씩 주었어야 하는 거였는데 정신이 없어서 실수했군. 이게 대체 뭐야?”
딜버트가 휘파람을 불면서 두 남자에게로 걸어왔다.
“척 봐도 엄청 오래되어 보이지 않나요, 패트릭? 돈 잘루치가 보낸 선물이라면 그럴싸하게 만든 모조품 따윈 절대로 아닐 테니까 진짜 앤티크일겁니다. 이거, 혹시 시칠리아 섬 어디에서 파낸 고대 로마 조각은 아닐까 몰라. 원래 박물관에 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제법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패트릭은 잠시 말문이 막혀 조각상을 올려다보았다. 그리스식인지 로마식인지, 옷을 거의 걸치지 않은 실물 크기의 남녀가 서로를 아주 로맨틱한 자세로 포옹한 채 열렬한 키스를 하고 있었다. 흰색과 검은색만으로 소박하게 꾸민 패트릭의 미니멀리즘 사무실에서 정열이 넘치는 연인의 대리석 조각상은 무시무시할 정도의 존재감을 자랑했다. 조각상을 찬찬히 뜯어보던 딜버트가 웃음을 겨우 참으며 패트릭을 돌아보았다.
“결혼기념일 선물로 받으신 겁니까, 패트릭?”
“…그냥 커피 메이커나 하나 보내 주실 것이지…!”
패트릭이 거의 울분에 찼다고 해도 좋을 소리로 내뱉으며 조각상을 노려보았다. 벤튼이 차마 대놓고 웃을 수는 없었는지 희한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조각에 슬쩍 손을 얹어 보았다.
“댁으로 가져가시겠습니까?”
“질문 하나, 어떻게? 질문 둘, 스튜어트한테는 뭐라고 설명하라고?”
쓰디쓴 어조에 결국 딜버트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패트릭의 원망스러운 시선에 웃음을 삼키려다가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벤튼이 한숨을 쉬며 조각상을 탁탁 쳤다.
“사람을 넷 이상 쓰시지 않는 한 다른 자리로 옮기는 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서턴 씨. 마음에 들지 않으시더라도 당분간은 사무실에 두셔야 할 겁니다. 내일은 좀 그렇고, 모레 애들을 불러서 창고 같은 데로 옮기라고 하죠.”
“…됐어.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돈 잘루치가 워싱턴 방문이라도 하면 어떻게 도로 꺼내오려고. 사무실에 이렇게 장식해 뒀다는 걸 보여 줘야 좋아하시겠지. 평소에는… 제기랄, 이것들은 왜 이렇게 헐벗은 거야? 옷걸이로 쓸까?”
패트릭이 완전히 기운이 빠진 투로 중얼거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서로에게 열렬한 시선을 보내며 뜨거운 키스에 도취된 대리석 연인들이 밉살맞아 보이는 것은 물론, 결혼기념일 선물이랍시고 이렇게나 처치 곤란인 물건을 보내 준 돈 잘루치에 대한 원망이 샘솟았다. 딜버트가 솔선수범해서 진짜 옷걸이에서 그녀의 얇은 재킷을 가져와 여자의 어깨에 턱 걸치더니 흐뭇한 표정이 되었다.
“울룩불룩한 데가 많아서 옷 걸기에 좋은데요. 돈 잘루치께는 대리석 옷걸이 잘 받았다고 전화드려요.”
“상기시켜 줘서 고마워, 딜버트. 말 안 해 줬으면 충격이 너무 커서 이대로 퇴근해 버렸을지도 몰라.”
딜버트와 벤튼이 조각상에 옷을 걸어보며 즐거워하는 동안 패트릭은 택배사 직원이 전해 준 카드를 열어 보았다. 이탈리아어로 아마 축하한다는 말 정도에 해당할 메시지가 적힌 요란한 카드 안에 돈 잘루치의 애정이 담뿍 담긴 거창한 인사말이 적혀 있었다. 딜버트의 예상대로 시칠리아에서 출토된 연인 조각이었는데 연대는 미상인 모양이었다.
알고 싶지도 않아. 패트릭은 분이 치밀려는 것을 억지로 눌러 참으면서 전화를 들었다. 저렇게 멋대가리 없이 크기만 한 것이 앞으로 창가의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거란 사실이 끔찍한 것과는 별개로, 그래도 돈 잘루치가 고집을 세우지 않고 사무실로 배달을 해 준 건 고맙기까지 했다. 스튜어트가 저 조각상을 봤으면 대소동이 일어났을 게 분명했다. 패트릭은 규칙적으로 울리는 통화음을 들으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