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트릭은 터덜터덜 어두운 집으로 들어왔다.
그의 오후는 그다지 잘 풀리지 않았다. 실용주의자인 패트릭으로서는 겨우 한 시간 거리를 가면서 큰돈을 들이고 싶지 않아 저가 항공사의 일반석을 예약했는데, 예정 출발 시각을 한 시간 반이나 넘기고서도 그가 탄 비행기는 도통 출발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승무원을 불러 물어보니 어이없게도 문이 닫히지 않아 출발을 하지 못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수리공들이 문을 고치는 동안 승객들은 자리에 멍청하게 앉아서 30분을 더 기다려야 했고, 패트릭은 비행기를 폭파시켜 버리고 싶어 하는 딜버트를 달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그 사이에 서비스랍시고 차갑고 맛없는 기내식이 제공되었다. 패트릭은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얼음을 넣은 탄산수만 마셨다.
시간이 야속하게 흘러 워싱턴에 마침내 도착했을 때에는 퇴근 시간대의 교통 체증에 정확하게 끼이고 말았다.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대로 곧바로 화장품 매장으로 달려갈 계획을 세우고 있던 딜버트는 매장의 폐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이 되었다. 보다 못해 한정판을 사러 가라고 딜버트를 보내고 지하철을 탄 것까지는 좋았다.
집 앞의 워터프론트 역으로 가기 위해 플랫폼에 들어가자 사람이 말도 못하게 버글거리는 가운데 다음 열차가 무려 16분 후에 도착한다는 전광판 메시지가 얄밉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퇴근 시간대에 배차 간격이 16분? 그제야 지하철 노조가 파업 중이라 차간 배차 간격이 길어졌다는 신문 기사가 어렴풋하게 떠올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정어리 캔 속의 정어리 떼처럼 사람과 사람이 포개지다시피 탄 지하철은 ‘지옥철’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 멀 수가 없었다. 비행으로 지치고 짜증까지 더해진 채로 문을 열었는데 집 안이 어두컴컴하기까지 하자 피로가 와장창 몰려들었다. 스튜어트도 일이 바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1주년 결혼기념일인데 참 근사하기도 하군. 패트릭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인 거실로 더듬더듬 들어가면서 서류 가방을 소파 위에 내팽개쳤다.
그 소리가 신호였던 것처럼 부엌의 식탁에서 작고 노란 불빛이 들어왔다. 패트릭은 잠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이 되지 않아 멍하니 그 신기루 같은 빛을 바라보았다. 투박하고 긴 손가락이 솜씨 좋게 성냥을 그어 촛불을 하나 더 켰다.
캄캄한 어둠 속, 따스한 노란 빛이 동그랗게 그 영역을 넓혀가면서 차츰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초에 불을 밝히느라 눈을 내리깔아 원래도 잘생긴 얼굴이 더 우아해 보이는 스튜어트였다. 그는 성당에 참배를 온 사람처럼 경건한 태도로 촛대에 불을 전부 붙이고는 패트릭을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 스튜어트 라일리는, 평생 이 마음 변치 않은 채로 오로지 패트릭 클라란스 서턴 한 사람만을 사랑할 것을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맹세합니다.”
패트릭이 홀린 듯 식탁으로 걸어갔다. 스튜어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그새 어디서 구해 왔는지 토끼 귀 머리띠를 야무지게 쓴 채였다. 전직 공군 파일럿 출신의 건장한 청년이 보송보송한 토끼 귀를 달고 있는 꼴이 가관이었지만 어찌나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웃기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가까이 가 보니 식탁에는 토마토가 좀 탄 것만 제외하면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파스타와 제대로 섞이지 않은 샐러드가 서투르게 세팅되어 있었다. 짐작한 대로 스튜어트의 손은 반창고 범벅이었다. 또 주제에 안 맞게 거창한 요리를 하다가 그을리거나 베였겠지. 점점 더 빠르게 고동치는 심장 박동에 맞추어 발걸음이 점차 빨라지다가 끝내 뜀박질이 된 것도 잠시, 패트릭은 스튜어트를 와락 끌어안으며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마구잡이로 비벼 댔다.
“키드…!”
“얼굴이 다 지쳤네, 우리 아기 고양이. 집에 오느라 힘들었지?”
아무렇게나 응응 하고 대답하면서 패트릭이 스튜어트의 체취를 흠뻑 들이마셨다. 스튜어트가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쓸고는 고개를 들게 하더니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자, 피로 회복제.”
“한 번 더.”
패트릭이 반대쪽 볼을 돌려 댔다. 스튜어트가 선선히 볼에 입을 맞추려는 순간 패트릭이 고개를 빙글 돌렸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으면서 패트릭은 눈을 감았다. 스튜어트의 팔이 그의 허리를 꽉 감아 안았다. 그 못지않게 지친 얼굴이면서도 집에 들어와 부리나케 요리를 했을 생각을 하자 새삼 애틋함이 밀려들었다. 패트릭은 달콤한 입맞춤 사이로 소곤거렸다.
“너도 피곤한데, 밖에 나가서 먹자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다시 입술이 막혀 버리는 바람에 대답은 조금 늦게 돌아왔다.
“내 사랑을 담아 만들어 주고 싶었어.”
“말은 잘 해요.”
아까까지만 해도 짜증이 났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 같았다. 어쨌든 무사히 집에 돌아왔고, 문자 한 통에 토끼 귀를 마다않는 애교 만점 신랑이 있고, 비록 언제나 그랬듯이 지독하게 맛은 없겠지만 그 신랑이 손을 다쳐가면서 준비한 요리가 있었다.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는 없었다. 스튜어트처럼 멋지고 완벽한 남자가 자신의 것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을 지경이었다. 패트릭은 놓치면 날아가 버릴 꿈인 양 스튜어트를 힘껏 마주안고 볼을 맞비볐다. 스튜어트가 그를 톡톡 토닥였다.
“얼른 손 씻고 와. 밥 먹자.”
토마토와 닭고기를 넣은 파스타는 스튜어트의 솜씨 치고는 의외로 먹을 만 했다. 맛을 칭찬했더니 기운이 솟아났는지 스튜어트는 패트릭의 만류도 뿌리치고 혼자서 식탁을 싹 정리하고는 샴페인을 가져왔다. 유리 글라스가 서로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내고, 산뜻한 기포가 입천장을 톡톡 간질였다. 아른아른한 촛불의 불빛 때문에 마주 앉은 스튜어트의 얼굴 위로 부드러운 빛이 일렁거렸다. 패트릭이 나른한 만족감에 감싸여 어쩌면 내 남자는 이렇게 잘생겼을까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스튜어트가 손을 뻗어 패트릭의 손을 잡았다.
“마술 보여 줄게.”
“선물은 그냥 줘.”
“쉿.”
스튜어트가 반대쪽 손의 검지를 입술 앞에 세워 보였다. 패트릭은 순순히 눈을 깜빡이면서 스튜어트에게 손을 맡겼다. 스튜어트는 식탁 위로 몸을 기울여 패트릭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오더니 그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고 귓가에 속삭였다.
“눈 감아 봐.”
유치하기는. 아니, 로맨틱하다고 해 줘야 하나. 새어나오는 웃음을 겨우 눌러 참으면서 패트릭은 눈을 감았다. 피로 탓인지 샴페인의 취기가 조금씩 오르면서 가슴이 쿵쿵 뛰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스튜어트의 손이 패트릭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패트릭이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왜 눈은 감으라고 그러는 거야, 또 유치한 거 하려고…”
조금 더 투덜거릴 요량이었지만 스튜어트의 키스에 불발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스튜어트의 입술에서는 샴페인의 달콤한 맛이 났다. 입맞춤에 정신이 팔려 잠깐 신경을 쓰지 못한 사이 스튜어트가 패트릭의 손가락을 조물거리더니 얼굴을 물렸다. 내려다본 손에는 결혼반지 위에 가느다란 반지가 하나 더 끼워져 있었다.
“아….”
“매년 하나씩 더 사줄 거야. 매년 다시 한 번 결혼하는 느낌으로. 그렇게 하나씩 더 끼고 다니면….”
“60주년 되면 가관이겠다?”
순간 스튜어트가 허를 찔린 얼굴이 되었다. 패트릭은 소리를 내어 웃으면서 그의 볼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난이야, 장난. 이제 네 선물 갖다 줄게.”
“뭔데? 내가 맞춰 볼….”
“시계.”
오늘 뉴욕에 조금 일찍 도착하도록 일정을 잡아 입수한 IWC의 손목시계가 신랑에게 얼마나 잘 어울릴지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 그의 말을 탁 잘라 버렸다. 알아맞히기 게임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스튜어트가 볼이 부어서 패트릭을 올려다보았다. 부루퉁해진 표정을 보니 우스운 한편으로 조금 미안해졌다. 패트릭은 시계를 가져와 스튜어트의 손목에 일부러 조금 꽉 끼도록 채웠다.
“체포 완료.”
스튜어트가 풉 웃었다. 패트릭도 따라서 웃으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이걸로 네 시간은 전부 다 내 거야.”
“부디 가져 주십시오.”
정중한 말씨며 반쯤 감은 눈빛이며, 어디 하나 멋있지 않은 구석이 없어서 패트릭이 잠깐 넋을 잃었다. 스튜어트가 흡족한 얼굴로 시계를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 물었다.
“팻, 이거 비싼 거 아냐?”
“대출까진 안 받았어.”
패트릭의 대답에 그가 씩 웃으며 휘청휘청 자리에서 일어섰다. 패트릭이 그의 손을 장난삼아 잡아당겼다.
“어디 가!”
평소라면 얼마든지 영리하게 장난을 받아쳐 주었을 스튜어트였다. 그러나 오늘은 웬일인지 크게 기우뚱하면서 하마터면 식탁 위로 고꾸라질 뻔했다. 패트릭이 놀라서 벌떡 일어서며 그를 받쳐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겨우 고개를 들고 패트릭을 올려다본 스튜어트의 얼굴은 절반이 다크서클이래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 미안.”
“너 오늘 왜 이렇게 지쳤어. 설거지 내가 할 테니까 가서 샤워나 해.”
스튜어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휘적휘적 식탁과 의자 사이를 빠져나갔다. 패트릭이 샴페인 잔들을 개수대로 가져가고 있는데 스튜어트가 우뚝 멈추어 서더니 도로 부엌으로 들어왔다.
“팻, 미안하지만 오늘은 안 될 거 같아.”
“뭐가?”
“결혼기념일이라서 뜨겁게 서비스해 주고 싶었는데.”
중간에 하품을 한 번 하면서 하는 소리에 잠깐 어리둥절해 있던 패트릭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미처 할 말을 찾지 못한 사이 스튜어트가 눈을 무겁게 깜빡이면서 패트릭을 껴안으며 머리를 기댔다.
“지금 네가 너무 예뻐서 확 짐승이 되어 버릴까 싶기는 한데, 그랬다가는 내일 출근이 위험할 거 같아.”
“…가서 씻어. 오늘은 나도 피곤해. 내일 해, 내일.”
패트릭이 최대한 부드럽게 스튜어트를 밀어냈다. 스튜어트가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도로 어정어정 욕실로 향했다. 공연히 목덜미가 화끈거리는 것 같아 패트릭은 어깨를 한 번 움츠렸다가 제 풀에 웃어 버렸다.
솔직히 조금은 기대했는데. 하지만 격무에 시달리기가 일상다반사인 게 변호사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내일이 석 달에 한 번씩 있는 분기 리뷰 날이라 스튜어트가 내색은 안 해도 은근히 긴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착한 고양이답게 주인님 푹 쉬시게 해 드려야지. 패트릭은 고무장갑을 끼고 수도꼭지를 공연히 홱 붙잡아 돌렸다.
파르스름한 새벽빛이 얇은 커튼 너머를 기웃거렸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몽롱하게 노닐던 정신의 나룻배가 서서히 현실 쪽으로 노를 저어 오면서 스튜어트는 차츰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 보니 패트릭이 턱밑으로 파고들어 그의 가슴을 베고 자고 있었다. 패트릭은 그렇게 그의 심장 고동 소리를 들으면서 잠드는 것을 좋아했다. 출근만 아니라면 영원히 그렇게 곱게 잠든 얼굴을 바라볼 텐데.
그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조심스레 패트릭의 뺨과 이마에 입을 맞추어가며 달래어 베개 위로 눕혔다. 패트릭이 잠결에 웅얼웅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으로 따뜻하던 가슴팍이 허전해지자 금세 새벽 추위가 밀려왔다. 패트릭도 춥겠지, 스튜어트는 꽤나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패트릭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는 까치발로 침실을 나왔다.
석 달에 한 번씩 해당 분기의 실적을 보고하고 각종 프로젝트의 진척 상황을 평가하는 분기 리뷰가 있는 날이었다. 스튜어트는 실적이 좋은데다 이제 부서에서도 어느 정도 경력이 쌓여서, 역설적으로 이 날만 오면 준비할 것이 너무 많아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이번에 들어온 인턴들이 수습 기간을 마치고 나면 일이 좀 줄겠지만 그 전까지는 일을 대신 해 줄 사람 자체가 없었다. 게다가 어제 패트릭을 기쁘게 해 주겠다는 일념 하에 온 시내의 파티용품점을 이 잡듯이 뒤져 토끼 머리띠를 구하느라 프레젠테이션의 예행연습을 못 했다. 오전에 연습하면 안 되겠냐는 제안에 하워드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준 것이 다행이었다.
시계를 보니 다섯 시, 아침잠이 많은 패트릭은 한참 꿈나라를 헤맬 시간이었다. 기왕이면 아주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으면 좋겠는데. 스튜어트는 원래도 아침에 재깍재깍 잘 일어나는 편이었고 군 생활을 마치고 나서는 규칙적인 생활이 자연스레 몸에 배어 아무리 늦어도 여섯 시에는 눈이 절로 떠지곤 했다.
그는 김을 무럭무럭 피우며 아침 샤워를 마치고 부엌으로 들어가 인스턴트커피를 한 잔 탔다. 패트릭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할 때에는 커피는 반드시 원두를 갈아 내리고 베이컨과 토스트 정도는 기본으로 챙기지만 혼자 먹는 아침에는 딱히 공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빵 바구니에서 베이글을 하나 끄집어내고 혹시 일회용 용기에 담긴 크림치즈가 없나 찬장을 뒤지다가 한숨을 쉬었다.
패트릭이 또 짭짤한 감자칩을 사다가 숨겨 놓았다. 나트륨이 많아서 몸에 안 좋으니까 먹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려도 패트릭은 조금만 감시를 소홀히 하면 감자칩을 구해다 숨겨 놓고 스튜어트 몰래 꺼내 먹기가 다반사였다. 압수. 스튜어트는 단호하게 감자칩 통을 수거했다. 감자칩은 전부 지퍼락에 집어넣고 담겨 있던 통은 버렸다.
대신 경고의 의미로 뚜껑은 전부 따로 모았다. 고대 그리스의 장수들이 적장의 목을 베어 적의 진지로 던질 때 기분이 이랬을까? 그는 패트릭이 과자를 숨겨 놓은 자리에 감자칩 뚜껑을 쌓아 놓고 찬장의 문을 닫았다. 지퍼락에 담은 감자칩은 탕비실에 가져다 둘 생각이었다.
남들이야 나트륨 과다로 고혈압에 걸리건 말건 귀여운 패트릭의 손 닿는 자리에만 없으면 된다. 스튜어트는 사랑하는 배우자가 걸린 일에서는 그렇게 못된 남자 시늉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카페인이 효과를 보이면서 슬슬 정신에 발동이 걸렸다. 스튜어트는 그 기세를 몰아 패트릭의 아침상을 준비해 놓고 옷을 갈아입으러 침실로 들어갔다. 그새 패트릭이 스튜어트의 베개를 껴안고는 이불 틈에 얼굴을 파묻은 채였다.
잠든 얼굴이 사랑스러워서 와이셔츠를 꺼내다 말고 한 번 돌아보고, 넥타이를 꺼내다 말고 한 번 돌아보기를 반복하다가 스튜어트는 고개를 홱홱 저었다. 이러다가는 미련이 남아서 도저히 못 나가겠다. 그는 양복 상의를 꺼내어 팔에 걸치고 침대로 다가가 패트릭의 볼에 키스했다. 패트릭이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조심해서 다녀와….”
“그래, 너도.”
인사를 나누고서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스튜어트는 잠시 패트릭을 내려다보면서 공연히 이불의 주름도 펴고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도 매만져 주면서 시간을 죽이다가 마지못해 침실을 나섰다. 그는 부엌에 들러 혹시 아침 메뉴 중 빼먹은 게 없는지도 두 번 세 번 확인한 뒤, 새로 선물 받은 손목시계를 단단히 차고 나서야 겨우 집을 나섰다.
***
“하루 늦었지만, 결혼기념일 축하드려요.”
사무실로 들어가던 패트릭이 발랄한 목소리에 입구 옆 책상을 돌아보았다. 로즈가 그만두고 나서 새로 들어온 비서 앨리슨이 상기된 얼굴로 서 있었다. 양손으로 쇼핑백 하나를 꼭 부여잡고 수줍게 내민 채였다. 패트릭은 얼떨결에 쇼핑백을 받아 들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소박한 유리병에 담긴 잼이 세 개였다.
“아… 나 주는 거야?”
“네, 결혼기념일 축하드려요, 서턴 씨.”
패트릭이 병을 하나 꺼내어 돌려 보았다. 손글씨로 쓴 라벨에 살구라고 적혀 있었다. 다른 두 개는 각각 딸기와 무화과였다. 그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앨리슨. 맛있겠네.”
“어머니께서 직접 만드신 거예요. 저도 조금 도왔고요.”
앨리슨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아일랜드 아가씨답지 않게 수줍음을 잘 타는 앨리슨은 그녀의 어머니와 패트릭의 어머니가 절친한 친구라는 이유로 어릴 적부터 패트릭을 먼발치에서나마 보아 올 기회가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은근히 서턴 씨 댁 둘째 아들을 사모하는 마음을 키워 왔는데, 그 동경심이 어찌나 순수한지 패트릭이 결혼을 하고 나서도 그를 향한 앨리슨의 충성심은 조금도 변한 바가 없었다. 패트릭을 향한 그녀의 헌신은 이제는 일종의 종교 수준이 되어, 설령 마음속으로 그에 관련된 일을 생각할 때조차도 감히 이름을 부르는 법이 없을 정도였다. 패트릭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오늘 일정은?”
“정리한 스케줄은 여기 있어요. 그리고 사무실 안에서 벤튼 씨와 딜버트 씨가 기다리고 계세요.”
앨리슨이 대답하며 얼른 오늘 그와 면담을 할 사람들의 이름과 찾아올 시간이 적힌 종이를 건넸다. 면담자 명단을 읽어 내려가던 패트릭이 한 이름에서 시선을 멈추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
“블랙스웰 경감? 이 분이 무슨 일이지?”
“서턴 씨와 조속히 의논하실 일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이상 자세히는 알려 주시지 않으셨어요.”
“전화로 면담을 잡았나? 목소리가 어땠어, 심각하던가?”
앨리슨의 얼굴이 멍해졌다. 아직 업무 인수인계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사람에게 괜한 부담을 주려던 것은 아니었다. 패트릭이 픽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됐어. 만나거든 알게 될 테니. 그리고 여기 오헤어, 이 사람은 무슨 용건이든 웬만하면 만나지 않는 걸로 하고 있는데.”
“죄송합니다, 서턴 씨, 제가 모르고 그만….”
앨리슨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사과했다. 명단과 함께 우편물을 가지고 그의 사무실로 들어가려던 패트릭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앨리슨이 사과할 일은 아니야. 로즈가 인수인계를 제대로 안 하고 갔다더니 정말 아무 말도 안 해 주고 간 것 같군. 그냥 지금이라도 전화 걸어서 무슨 용건인지 알아보고, 별것 아니라는 생각 들면 이 사람은 취소해. 그리고 앞으로는 웬만하면 면담 잡지 말고. 바쁘다고 잘라 말하고 끊어 버리면 알아들을 거야.”
“알겠습니다, 서턴 씨.”
패트릭이 앨리슨의 자리를 지나 좀 더 안쪽에 따로 유리문이 달려 구분되어 있는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가 우편물 때문에 손이 번거로워 문 앞에서 잠시 쩔쩔매는 사이에 유리 너머로 비친 그림자가 보였는지 안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제퍼슨 그룹의 중간 관리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세 명 중 하나인 브라이언 벤튼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서턴 씨.”
“응, 벤튼. 무슨 일로 이렇게들 일찍 온 거지?”
“안녕하세요, 패트릭.”
사무실 안의 소파에 앉아 있던 딜버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그에게 인사를 했다. 패트릭은 벤튼에게 우편물을 넘기고 책상으로 다가가 의자를 끌어냈다. 벤튼이 책상에 우편물을 종류별로 분류해 늘어놓으면서 말했다.
“지난번에 지시하신 프로비던스 그룹과의 협상을 마무리해서 그 건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왔습니다, 서턴 씨.”
“그래, 얘기해 봐.”
패트릭이 양손을 가볍게 깍지 끼면서 대답했다. 딜버트가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서류철을 그에게 건넸다. 딜버트의 서류철답게 위에 그려진 일러스트가 범상치 않은 것이 이것도 어딘가의 브랜드 물건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패트릭이 혹시라도 손때를 묻히거나 귀퉁이를 구겨서 잔소리를 들을세라 조심스럽게 서류철을 열었다. 로드아일랜드 주의 프로비던스와 워윅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고 있는 아이리시 갱 조직인 프로비던스 그룹과의 사업 계약서가 정리되어 있었다.
“지시하신 대로 경마 사업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지분과 프로비던스 그룹이 동북부 지역의 예술계에서 보유하고 있던 지분을 맞교환했습니다. 처음에는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학교 (RisD) 졸업생들은 내주지 않으려고 했습니다만 워윅의 마권 사업을 제시했더니 포기하더군요.”
“잘 했어. 이제 리즈디 졸업생들은 우리가 보유한 갤러리와 극장에서 우선적으로 채용 제의를 받게 되겠지. 좋아.”
패트릭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벤튼이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정말로 괜찮은 겁니까?”
“뭐가?”
“…경마를 내줘도 괜찮은 거 맞죠?”
딜버트가 조심스레 벤튼의 말을 받았다. 아무래도 패트릭이 들어오기 전부터 두 사람끼리 이 건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전통적으로 갱단이 장악하는 매춘이나 카지노 등 고위험 고수익의 사업에서 제퍼슨 그룹이 그나마 아직까지 보유하고 있던 것이 경마, 좀 더 정확하게는 마권과 베팅에 대한 독점권이었다. 패트릭이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 다 불안한 모양이군.”
“서턴 씨의 결정을 의심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저 경마 사업을 포기하고 예술 후원에 뛰어드는 것 때문에 우리 제퍼슨 그룹이, 음….”
“다른 조직에게 얕잡혀 보일까 봐 두렵겠지. 알고 있어.”
단호하게 말을 맺어 주었더니 벤튼이 얼굴을 확 붉혔다. 딜버트도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패트릭은 어깨를 한 번 으쓱였을 뿐 화를 내지 않았다.
“내가 처음 이 자리에 앉게 되면서부터 준비해 오고 있었던 일이야. 아티스트에 대한 투자는 합법적인 비즈니스 중에서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축에 들어. 마약과 밀수를 사업 영역에서 제외하면서 긴박해진 재정을 만회하기 위해 진행한 거래인데, 두 사람은 어떤 부분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듣고 싶군.”
수장이 젊고, 세 명의 중간 보스 중에서 두 명이 아직 30대이니만큼 상당히 자유로운 토론의 분위기가 형성되곤 했다. 벤튼이 송구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문제라고까지는 생각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기업이라면 신진 아티스트의 육성과 그 사람들에 대한 투자는 기업 이미지의 쇄신과 고부가 가치 창출이라는 면에서 장려할 만한 정책일 겁니다.”
“잠깐만, 벤튼. 우린 일반적인 기업인데.”
패트릭이 웃으며 말했다. 벤튼이 뜨끔해하며 입을 다물었다. 패트릭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두 사람을 둘러보았다.
“둘 다 아직 완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제퍼슨 앤 서턴 트레이더스는 이제 일반적인 기업이지 아이리시 갱단이 아니야. 그걸 받아들였으니까 지금 두 사람 다 여기에서 일해 주고 있는 게 아니었던가?”
“그렇지만 패트릭, 동부 회합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셔야 하고, 워싱턴 내에서 회합이 열릴 때마다 꼬박꼬박 나가셔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직 과도기적인 위치에 있어요. 완전히 일반적인 기업도, 완전히 아이리시 갱단도 아닌 상태고, 솔직히 워싱턴 3대 마피아 패밀리 놈들이 패… 우리들더러 겁만 많아서 안전지대로 도망가려고 한다는 식으로 얕보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경마를 버리신 건 너무 이른 감이 없지 않았나 해요.”
딜버트가 중간에 말을 멈추었다가 제풀에 얼굴이 빨개져서 겨우 말을 맺었다. 우리가 아니라 패트릭이라고 하려고 했겠지. 패트릭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내가 겁이 많은 건 사실이야.”
“패트릭,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
“아니, 부끄럽지 않아. 나는 항상 두려워. 아직 우리 사업의 일부가 법의 테두리 바깥에 남아 있어서, 아직 우리가 완전히 합법화되지 않아서, 아직 시칠리아나 러시아 출신의 마피아들과 다른 지역의 아이리시 갱단들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해서 두렵고 겁이 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잠시 말을 끊고 침묵에 잠겼다. 아무리 부하들을 믿고 있다지만 거기까지 말해도 좋을지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입술은 벌써 멋대로 말을 자아내기 시작한 뒤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완전히 알게 되었을 때에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두려워.”
딜버트도 벤튼도 숙연한 얼굴이 되었다. 공연한 소리를 한 것 같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미 엎질러진 물, 패트릭은 일부러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워싱턴의 마피아들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한두 해 전에 합법화 노선을 선언한 이래로 언제나 제퍼슨 그룹을 얕보고 있었어. 이번에 경마를 포기한 걸로 우리가 완전히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덤비는 놈들이 개중에 나올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말썽의 소지가 다분하고 언제 경찰이나 FBI와 부딪칠지 모르는 경마를 틀어쥐고 있느니 예술 육성이 나을 것 같다고 판단한 데에 후회는 없어. 워싱턴 패밀리들은 우리와 프로비던스 그룹의 거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지 않나?”
“디피데 패밀리는 모르겠지만 프로파치와 크레모사는 알고 있습니다.”
벤튼이 대답했다. 패트릭이 입가를 비틀었다.
“어쩌면 둘 중에 하나는 이미 내 세력권을 집어삼키려고 행동을 개시했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사업을 합법화한다는 방침이 종이호랑이가 되겠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야. 누가 되었든 제퍼슨 그룹을 얕보고 덤비는 놈이 있다면 용서치 않아.”
“물론이죠.”
딜버트가 힘주어 동조했다. 패트릭이 미소를 지었다. 그가 서류철의 다음 페이지를 넘겨 리즈디 관련 문서를 훑어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노크도 없이 덜컥 열렸다. 벤튼이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서며 소파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문을 밀고 들어온 사람이 신경질적인 어조로 쏘아붙였다.
“날세, 브라이언. 몇 번을 말하나, 그렇게 눈에 다 보이게 경계 태세를 취해 봤자 아무 짝에도 소용없다고.”
“…자주 말씀하셨죠, 키슬러 씨.”
패트릭의 아버지 대부터 제퍼슨 그룹의 중간 보스였던, 껑충하게 키가 큰 알렉 키슬러였다. 원래도 매부리코며 뾰족한 턱에 툭 튀어나온 눈썹이 한데 모여 무서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오늘따라 얼굴을 찌푸리고 있어서 더더욱 짜증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딜버트와 벤튼은 없는 사람인양 무시해 버리고는 성큼성큼 패트릭에게 다가오더니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말했다.
“잠시 할 얘기가 있네, 패트릭.”
“무슨 일입니까, 키슬러 씨?”
“어제 아침에 플로리다에서 로즈 아널드가 FBI에 체포되었네. NARC 팀이 출동했다고 하니 마약 거래에 연루된 모양이야. 오늘 마이애미로 이송되었다고 하네.”
사무실 안에 둔중한 침묵이 흘렀다. 충격 탓에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간신히 정신을 추스른 패트릭이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물었다.
“로즈가 마약 거래라니, 소지나 복용이 아니라 거래란 말입니까?”
“그래. 나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네. FBI에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알고 지내는 인물이 없다보니 플로리다 경찰과 줄이 닿아 있는 친구를 통해 알음알음 전해들은 얘기야. 아침부터 시내에서 추격전을 펼친 것 같더군.”
“맙소사, 사무 처리도 변변찮더니 그만두자마자 일을 벌이네. 그 애,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간병해야 한다고 그만두지 않았어요?”
딜버트의 질문에 패트릭이 대신 대답했다.
“맞아. 그런데 아널드 부인은 버몬트 주에 살고 계시지. 로즈가 애초에 왜 이 시점에 플로리다에 갔다가 마약 관련 일로 체포를 당했는지 모르겠네.”
“매정한 말이지만, 우리가 굳이 논의를 할 가치가 있는 일인가요, 패트릭? 로즈는 체포 이틀 전에 그만두었잖아요. 이제 패트릭이 돌보아 줄 필요가 없는 사람인데…. 키슬러 씨, 혹시 그 애가 변호사를 붙여 달라던가요?”
“아니다, 에밀리. 아직 로즈의 일로 선처를 부탁하러 온 사람은 최소한 내게는 없었다. 물론 와 봤자 제퍼슨 그룹의 힘이 플로리다에까지 미치는 것도 아니고.”
키슬러의 대답에 딜버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바보 같은 애가 혼자서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른 것뿐입니다. 체포 당시에 우리 그룹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신경 안 써도 되지 않나요?”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겠어.”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패트릭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는 바람에 그의 말이 잠시 멎었다. 앨리슨이 커피와 마들렌 과자를 쟁반에 담아 가져왔고 네 사람은 잠깐 동안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패트릭이 먼저 잔을 내려놓으면서 끊겼던 말을 계속했다.
“로즈를 체포한 주체가 플로리다 경찰이 아니라 FBI라는 게 문제야. 연방 수사국이 개입했다는 건 로즈의 일이 플로리다 내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의미지. 로즈가 일을 그만둔 건 체포 이틀 전, 상식적으로 고작 이틀 동안에 주(州)를 넘나드는 마약 거래 사건에 연루되기란 불가능한 일이니 로즈는 여기에 있을 때부터 마약 거래 사업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워.”
“서턴 씨께서 불법적인 일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는 방침을 세우고 계셨던 이상… 묵인하기는 어렵군요.”
벤튼이 커피 잔의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그는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리자 부담스러운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서턴 씨께서 분명히 우리들에게 불법적인 요소가 있는 일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말 것을 강조하셨고, 특히 마약 관련으로는 만일 우리 그룹 내의 사람이 마약 소지나 거래에 관련되어서 체포될 경우 도움을 줄 수 없는 건 물론, 체포되기 전에 그룹 내의 사람에게 적발되면 엄중하게 다스리겠다고 못을 박아 놓으셨는데 그 방침을 어긴 게 아닙니까.”
“그렇기도 하고, 우리 입장도 곤란해지고.”
마들렌을 쪼개면서 딜버트가 그의 말을 받았다. 그녀는 반으로 자른 마들렌을 입에 넣으면서 패트릭을 바라보았다.
“아까 했던 얘기랑은 좀 반대가 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버님 대에서부터 합법화를 진행했는데도 우리가 아직도 갱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괜히 우리가 겉으로는 떳떳한 척하면서 밑으로는 마약 거래를 하고 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 받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데, 그 멍청한 애가 일을 벌여 갖고선….”
“분명히 수사 기관은 자네를 접촉하려고 할 걸세.”
키슬러의 말에 패트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키슬러 씨. 하지만 제가 걱정하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뭘 말하는 건가?”
패트릭은 잠시 말없이 세 사람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확고하게 세운 방침을 어기고 마약류 거래에 손을 대는 사람이 나왔다는 건, 그룹 안에서 제 말을 가벼이 여기는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미 체포된 로즈 아널드에게는 법이 합당한 처벌을 내리겠지요. 그러니 저는 제 할 일을 해야겠습니다. 세 분이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추가적으로 제 방침을 기만하고 불법적인 거래에 손을 대고 있는 자가 있다면 색출해 주십시오.”
“공개 내사인가요?”
딜버트가 물었다. 패트릭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일단은 비공개로 진행해. 다만 경찰 쪽에는 우리가 내부적으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다는 낌새를 채게끔 단서를 적당히 흘려. 그래야 이번 건이 그룹 차원에서 일어난 게 아니라 한 개인이 단독으로 한 짓이라고 유세를 떨 수 있지. 로즈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내가 하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던 일에 연루된 이상 안고 갈 수는 없어. 로즈 외에도 이 일에 연결된 직원이 있는지 확인해, 딜버트. 키슬러 씨, 로즈의 재정 상태나 신변에 대해 조사해 주십시오. 동기를 알아야겠습니다.”
“알겠네, 패트릭.”
“그리고 벤튼은 딜버트와 함께 내부 감사에 들어가. 대신 표면적으로 진행은 딜버트 혼자 하는 걸로 해.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해 줘, 딜버트.”
“알겠습니다, 서턴 씨.”
“맡겨 주세요.”
패트릭이 두 사람의 대답을 확인하고서 의자에 몸을 기댔다. 벽시계를 힐끔 쳐다본 딜버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있으면 면담자들이 올 텐데, 더 지시하실 사항이 없으면 이만 가서 일에 착수할까 해요.”
“부탁할게. 난 조금 이따가 블랙스웰 경감과 면담이 있어. 이름이 있는 것만 봤을 때에는 무슨 일인가 했는데 아마 이 건 관련으로 할 말이 있는 게 아닌가 싶군.”
“그때까지 혹시 필요한 자료는 없습니까?”
“괜찮아, 벤튼. 그럼.”
벤튼과 딜버트가 목례를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두 젊은 중간 보스들이 나가기를 기다리던 키슬러가 패트릭에게로 몸을 숙이며 작게 말했다.
“그나저나 결혼기념일 축하하네, 패트릭. 라일리 변호사는 잘 있는가?”
그룹 내에서 패트릭이 유부남임은 모두가 알아도 세 명의 중간 보스를 제외하고는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키슬러는 혹시나 앨리슨이 우연히라도 스튜어트의 이름을 들을까 봐 목소리를 낮춘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결혼기념일 축하를 받는 것은 그렇다 쳐도 아버지 대부터 그룹의 중간 보스로 일한 키슬러에게 인사를 듣자니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했다. 키슬러는 어린 스튜어트와 패트릭을 잘 데리고 놀아 주어서 한동안 두 아이에게서 삼촌 소리를 들었던 사람이었다. 패트릭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려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잘 지냅니다. 여전해요.”
“여전히 자네라면 좋아 죽겠지. 새 반지 잘 어울리는군.”
조직이 험한 일에 손을 대던 시절에는 알아주는 저격수였다더니, 눈썰미가 날카로운 키슬러는 결혼반지 위에 가느다란 반지 하나가 추가된 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패트릭이 얼굴을 확 붉혔다.
“감사합니다, 키슬러 씨.”
키슬러는 대답 대신 애정을 담아 패트릭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유리문이 닫히고 나서 패트릭은 잠시 홀로 앉은 채 스튜어트가 새로 끼워 준 반지를 만지작거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내 뒤를 이을 사람이 네가 될지도 모르겠다던 아버지의 말씀이 농담에서 슬슬 진담이 되어 갈 무렵, 패트릭은 아버지에게 민감한 질문을 던졌었다. 어째서 아이리시 갱단으로 출범한 제퍼슨 그룹을 전적으로 합법적인 사업에만 종사하는 기업체로 변모시키겠다는 마음을 품으셨냐고 묻자 아서 서턴은 둘째 아들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조셉과 너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서다.’
아버지가 자식들을 보는 데 부끄럽지 않고 싶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패트릭도 스튜어트 앞에서 떳떳하고 싶었다.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회계사 어쩌고 하며 어물쩍 넘어가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 마지않기에, 일확천금을 꿈꾸며 범죄에 뛰어든 조직원이 있다면 가차 없이 내사를 벌여 환부를 확실히 도려내는 게 옳았다. 아직은 어렵더라도 그 언젠가, 바라건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스튜어트에게 제퍼슨 앤 서턴 트레이더스가 어떤 회사인지를 상세히 설명해 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하며 패트릭은 데스크 플래너를 펼쳤다. 하루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