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트랜드 쇼핑센터, 네이플스, 플로리다.
붉은 머리의 젊은 여자가 메이시스 백화점에서 서둘러 나왔다. 손에는 겔랑의 작은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쇼핑센터의 대리석 바닥 위로 구두 굽을 또각또각 울리면서 빠르게 걸어가며 간혹 주위를 힐끔거렸다. 평균 연령이 61세나 되는 부유한 은퇴자들의 도시에서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매력적인 여인은 흔치 않은 존재였다. 쇼핑몰에서 한가로운 저녁 시간을 즐기던 노인 몇몇이 호기심에 차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피하려는 것처럼 마침 바로 옆에 있던 구두 가게에 들어갔다가 거의 즉시 도로 나오더니, 이번에는 조명이 아주 어둡고 음악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아메리칸 이글 매장으로 들어갔다. 에너지 드링크 캔을 들고 그녀의 뒤쪽에서 걸어오던 한 남자가 마찬가지로 매장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직원의 제지를 받았다.
“죄송합니다, 손님. 음료수는 가지고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남자가 혀를 차며 돌아섰다. 쓰레기통은 맞은편 벽의 야자수 화분 아래에 놓여 있었다. 그가 쓰레기통으로 향하는 사이 붉은 머리의 여자는 입구가 양쪽으로 터 있는 테라스 모양의 출입구 반대쪽으로 허둥지둥 나갔다. 전자 제품 매장 앞, 신형 핸드폰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곧바로 몸을 돌려 그녀가 가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자는 뒤를 한 번 돌아보고는 이번에는 빅토리아 시크릿 매장 안으로 잽싸게 몸을 숨겼다. 에너지 드링크의 남자와 야구 모자의 남자도 시간 차를 두고 속옷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매장 안은 분홍색 새틴 천과 검은 레이스, 향수와 바디 로션으로 이루어진 미로였다. 산더미처럼 쌓인 브라와 팬티는 물론이고 각종 잠옷이며 요가용의 낙낙한 옷까지 팔고 있는데다가, 그다지 크지도 않은 공간을 8분할로 교묘하게 나눈 곳이었다. 별 생각 없이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매장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라도 모든 방을 한 번씩은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없도록 이루어진 구조였다.
게다가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벽에 걸린 브라란 전부 거기서 거기로밖에 보이지 않으니 지금 들어온 방이 아까 들어왔던 곳인지 아닌지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매장을 설계한 사람으로서는 이걸로 매출 상승을 위한 비장의 한 수를 다한 셈이었겠지만 여자를 추적하는 남자에게 그보다 더 곤란한 환경은 없었다. 추격자들이 두 벌에 35달러라는 꼬리표가 달린 푸시 업 브라의 파도에 휩쓸려 있는 사이 붉은 머리의 여자는 능숙하게 옷걸이 사이를 헤치고 매장의 반대쪽 출구로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여자는 불안한 숨을 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들은 아직 그녀가 나온 출구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추격자가 둘 뿐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녀는 황급히 쇼핑센터의 출구를 향해 종종걸음을 치며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딱히 쫓아오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힐긋 내려다보고는 쇼핑백을 가슴에 꼭 안고서 자동문을 나섰다.
플로리다의 덥고 습기 찬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그녀가 나온 출구 앞길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망연한 얼굴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가 무작정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주차장 한복판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이 시간 여기에서 그녀를 기다리기로 되어 있던 자동차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미리 약속했던 파란색 자동차는 고사하고, 평일 오후인 탓인지 쇼핑센터로 들어오는 차량이 없었다. 주차장에 사람이라고는 빨간 자동차의 트렁크에다가 음료 박스를 밀어 넣느라 낑낑거리고 있는 운동복 차림의 젊은 남자뿐이었다. 붉은 머리의 여자는 그에게로 달려가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요, 잠시만요!”
젊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선량해 보이는 인상에 입매가 친절했다. 여자는 누구에게 빼앗길세라 쇼핑백을 양손으로 꽉 쥐고서 다급하게 물었다.
“혹시 파란색 자동차 들어오는 거 보셨어요? 캘리포니아 번호판 SUV거든요.”
“아뇨, 못 봤는데요.”
남자가 트렁크를 닫으면서 대답했다. 그녀는 이제 불안으로 손을 떨 지경이 되어 난처하다는 듯 길 너머를 자꾸만 기웃거렸다. 교통 체증이라고는 없는 네이플스이므로, 설마 길이 막혀서 못 왔을 일도 없다. 예행연습까지 했었고, 지난밤에 몇 번이나 약속을 재확인까지 하지 않았는가. 뜻밖의 사태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갔다. 그녀가 안절부절 못 하자 남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약속이 어긋났나 봐요?”
“…네, 그게… 그렇게 되었나 보네요.”
여자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녀는 보석을 감정하는 사람처럼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윽고 비장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죄송하지만, 혹시 그쪽 방향으로 가신다면 파크 쇼어 드라이브까지 좀 태워다 주실 수 없을까요?”
“아….”
갑작스러운 히치하이킹에 당황했는지 남자가 멍하니 여자를 마주 보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부탁드려요, 중요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데 시간 내에 꼭 전해 주어야 하거든요. 초면에 정말 죄송합니다만 부탁드립니다! 사례는 얼마든지 할게요!”
“어, 뭐, 사례까지야… 괜찮아요. 타세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트렁크를 쿵 소리가 나게 닫았다. 여자는 땅에 코가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얼른 타세요. 급하신 거 같은데.”
여자가 부랴부랴 조수석에 올라탔다. 남자는 운전석에 올라 안전벨트를 매면서 백미러의 각도를 조정했다.
“파크 쇼어 드라이브 어디까지 가시는 거죠?”
“타마이애미 트레일스하고 파크 쇼어 드라이브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내려 주시면 돼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제 은인이세요.”
“은인이랄 것까지 있나요. 가시는 집 앞까지 데려다 드려도 괜찮으니까 가는 동안에 마음 바뀌면 말씀하세요.”
빨간 쿠페가 부르릉 소리를 내면서 주차장을 떠났다. 에어컨을 어찌나 세게 틀어 놓았는지 차 안이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여자는 금세 소름이 돋아 오르는 팔을 문지르면서 사이드미러를 보았다. 쇼핑센터에서 막 뛰쳐나온 남자들이 망연한 얼굴로 쿠페를 보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핸드폰을 꺼내 드는 모습이 작게 눈에 들어왔다.
저들은 당장은 차량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차를 타고 쫓아올지도 몰랐다. 그녀는 호의를 베풀어 준 남자에게 자신이 그를 어떤 위험에 빠뜨린 건지 말을 해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면서 그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녀가 고민을 거듭하는 동안 빨간 쿠페는 골든게이트 파크웨이로 빠졌다가 유턴을 해서 타마이애미 트레일스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정도 속도라면 5분 내로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겔랑 쇼핑백을 꼭 끌어안으면서 한숨을 내쉬자 남자가 싱긋 웃었다.
“중요한 약속을 하셨나보네요.”
“네. 아주 중요한 약속이에요.”
“제가 도와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네요.”
“네….”
긴장이 풀려 말이 더 나오지 않았다. 여자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가 사이드미러를 보고 외마디 소리를 쳤다. 검은 세단 두 대가 그들의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었다. 남자가 놀란 얼굴로 여자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요?”
“쫓기고 있어요!”
여자가 사이드미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남자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보고 여자는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미안해요, 정말로 미안해요.”
“사실대로 말씀해 주시는 게 좋겠는데요.”
목소리가 딱딱했다. 여자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서 떨리는 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물건 때문에 저 사람들한테 쫓기고 있어요. 원래는 저를 데리러 오기로 한 사람이 있었지만….”
“오지 않아서 저를 끌어들였다는 말씀이시군요.”
말을 받는 남자의 말투가 의외로 가벼웠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 되어 버린 여자는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그렇게 애원조로 쳐다보면 뒤를 따라오는 검은 세단이 감화되어 물러날 거라고 믿는 것처럼 애처롭게 사이드미러만을 들여다보면서 떨리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로 죄송해요, 뭐라고 변명할 수가 없어요. 자세한 상황을 말씀드리지 못하는 걸 용서해 주세요! 절대로 아무 상관도 없는 분에게 피해를 입히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 물건을 전달하는 일이 너무 급해서….”
“차량을 동원한 추격전을 벌여야 할 만큼 민감한 물건인가 보죠?”
여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남자가 백미러를 보면서 다시금 물었다.
“당신은 단순 중간 전달책입니까?”
“네….”
“당신을 고용한 사람과 거래 라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경우, 당신은 감형을 걸고 협상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제가 아니라 지방 검사가 협상의 상대방이기는 합니다만.”
“네?”
대화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알아차린 여자가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쇼핑센터의 주차장에서 트렁크에 음료를 싣던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냉정하고 단단한 웃음이었다. 그는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며 자신을 노려보는 여자에게 살짝 윙크를 해 보였다.
“속인 건 탓하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서로 속고 속이는 세상이잖아요?”
“무슨 말씀이시죠?”
여자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남자가 에어컨의 온도를 조금 올리면서 상냥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이 차에 탄 직후부터 체포 상태입니다, 로즈 아널드 양. 아, 혹시라도 그 문 열고 뛰어내릴 생각은 말아요. 지금 제가 시속 60마일을 밟고 있으니까요.”
“당신… 당신 누구야!”
로즈 아널드가 비명처럼 외치며 그에게서 떨어지려는 것처럼 차의 문에 몸을 바싹 붙였다. 젊은 남자는 밝은 소리로 웃었다.
“당신 눈에는 악당으로 보이겠지만 악당까진 아닙니다. 시드니라고 불러 줘요. 마약 단속국에서는 알아주는 이름이죠.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부디 덤벼들지 마십시오.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맨손으로 저항하셔도 소용없고, 저항을 시도할 경우 저에게는 발포 허가가 주어진 상태임을 숙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액셀 밟은 채로 핸들 놓치면 우리 둘 다 저세상행이니까 허튼 짓은 금물입니다.”
그의 말에 금세라도 손톱을 세우고 달려들 것만 같던 로즈가 흠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시드니는 백미러로 그들을 따라오는 세단의 움직임을 살피면서 말했다.
“당신은 마약 거래 사범으로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으며, 당신이 증언을 했을 때에 그 내용은 법정에서 당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당신에게 변호사를 선임할 경제적 능력이 없다면….”
시드니가 갑자기 기어를 바꾸면서 핸들을 홱 틀었다. 타이어가 도로에 쓸려 요란한 비명을 질렀다. 로즈도 창문 위의 손잡이를 붙잡으며 소리를 쳤다. 차체는 지금까지의 속도 탓에 붕 뜨다시피 한 채 그대로 180도 돌아서 덜컹거리고 멈추어 섰다.
그들을 따라오던 검은 세단이 양 날개처럼 쿠페를 감싸고 멈추고,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차에서 내려 순식간에 쿠페를 에워쌌다. 시드니는 아직도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멍하니 눈만 크게 뜨고 앉은 로즈를 향해 간결하게 말을 맺었다.
“국가가 선임을 대신할 겁니다. 제가 설명 드린 권리를 전부 다 이해했습니까?”
조수석의 문이 열렸다. 바깥에 대기하고 서 있던 정장 차림의 요원들이 로즈 아널드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그녀는 한 요원이 쇼핑백을 수거해 가는 동안 내내 멍한 얼굴이었고, 세단의 뒷좌석으로 끌려가면서도 시드니에게 얼떨떨한 시선만 한번 던졌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팔짱을 끼고 서 있던 반백의 요원이 시드니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수고가 많았네, 시드니.”
“별일 아니었습니다, 버킹엄. 다음번에도 필요하면 연락 주십시오.”
버킹엄이 내린 차의 조수석에서 안경을 쓴 청년이 소심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시드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쏠렸다. 버킹엄은 안경 청년에게 내리라고 손짓을 하고는 시드니를 돌아보았다.
“이쪽은 올랜도라고, 우리 동네 출신 NARC 라인의 신입인데 현장 요원으로 배속될 예정인지라 오늘 자네의 실전을 한번 보라고 데리고 왔네. 앞으로 짬날 때마다 자네가 교육 좀 시켜주면 좋겠는데.”
시드니가 어깨를 으쓱였다.
“좋습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봐도 되겠습니까?”
“벌써? 저녁 정도는 들고 가지 그러나? 우리 지부 사람들이랑은 회식 한 번 한 적이 없잖아.”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4시간 파견 조건으로 나온 겁니다. 오후 업무가 있어 바로 가 봐야 합니다.”
“허, 귀하신 분은 다르군. 다음에 기회 되면 보세. 물론 우리가 다시 만나는 건 좋은 일은 아니네만.”
두 사람 다 실용만을 따지는 FBI의 요원들답게 거추장스러운 인사 따위는 하지 않았다. 시드니가 막 쿠페로 돌아가려는데 등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드니, 이 친구 운전사로 데려가게. 본부로 함께 귀환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도 해 주라고.”
등을 털썩 밀린 올랜도가 머뭇거리면서 시드니에게로 달려왔다. 시드니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올랜도와 상급 요원을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선택권이 없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차 후미를 빙글 돌아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차체에 몸을 기댄 채로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고서 플로리다의 동료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럼, 베이비시터는 이만 물러갑니다.”
올랜도는 졸지에 아기 취급을 받고도 화를 내거나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영리해 보이는 얼굴에는 오로지 시드니를 향한 부담스러울 정도의 존경심만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시드니가 플로리다 요원들을 상대로 일종의 시위를 벌이다가 지쳐 차에 탈 때까지 얌전하게 기다리다가 쿠페의 시동을 걸면서 말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정말로 영광입니다, 선배님.”
“이름이 뭐라고?”
시드니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올랜도가 액셀을 밟으면서 대답했다.
“올랜도입니다. NARC에는 2주 전에 배정받았습니다.”
“오늘은 뭐 하러 왔댔지?”
“시드니 선배님께서 일하시는 걸 견학하는 셈 치고….”
“동물원 사파리군 그래. 감상이 어때?”
“사파리라뇨!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이 정도로 효율적인 작전을 짜실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선배님.”
단순히 추어주는 말은 아니었다. 시드니는 조수석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고서 올랜도를 세심하게 뜯어보았다. 더벅머리에 두꺼운 뿔테 안경, 공부벌레처럼 생긴 인상이어도 자세히 보면 폴로셔츠 아래의 어깨와 팔의 근육이 탄탄했고 입가에 은근히 고집스러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시드니도 경력과 지위에 비해서는 상당히 젊은 편이니 두 사람은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런데도 꼬박꼬박 선배라고 부르면서 경외감을 감추지 않는 모습을 보면 제법 순진한 구석도 있는 모양이었다. 친절하게 대해 주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칭찬을 받았을 때에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시드니의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감탄할 만한 거리는 아니야. 엄청나게 단순한 덫이고 타이밍과 운에 의존했잖아. 파크 쇼어 쪽에 파견된 사람들이 운전사를 놓쳤더라면 실패했을걸.”
“그걸 대비해서 2차와 3차 작전도 짜 두셨잖습니까?”
올랜도가 제 일도 아니면서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시드니가 그의 반응에 혀를 차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뭐, 지금이야 신입이니까 우리가 하는 일들이 전부 다 영화 속의 첩보 작전처럼 보이긴 하겠지. 그래도 나처럼 이 바닥에서 오래 구르다 보면 그냥 매일 하는 일이 이거라서 질리게 될걸. 반년만 지나면 올랜도 요원도 나나 비슷한 수준이 될 거야.”
“그럴 리가요, 시드니 선배님은 전설이십니다. 선배가 단독으로 분쇄해 놓은 마약 루트가 네 개나 된다면서요? 이번에 이 로즈 아널드라는 여자도 워싱턴과 뉴욕의 수사망을 전부 다 뚫고 도망을 쳤던 걸 시드니 선배가 의표를 찌르는 작전을 짜서 이렇게 멕시코로 달아나기 전에 멋지게 체포를….”
시드니가 항복하는 시늉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됐어, 거기까지! 단독? 우리 일에 단독이라는 게 어딨어? 이건 다 팀으로 하는 일이야.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특히 행정 요원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거 잊지 말라고. 그나저나 더 빨리 가면 안 되나? 늦겠는데.”
“규정 속도 내에서는 최고로 밟고 있는데요.”
“더 밟아. 우린 FBI야.”
시드니가 천연덕스럽게 말하면서 안전벨트가 단단히 매였는지 확인을 해 보았다. 올랜도는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이 되어 버렸지만 순순히 시드니의 명령에 따라 액셀을 더 세게 밟았다. 고속 도로를 달리면서 차창에 벌레가 날아와 부딪쳐 댔고 그 바람에 듣기 싫은 퍽퍽거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렸다. 올랜도가 차선을 바꾸면서 물었다.
“돌아가시면 또 일이 있으신 겁니까?”
“집에 가서 우리 공주님 봐야 하거든.”
뜻밖의 대답이었다. 올랜도가 놀란 얼굴이 되자 시드니가 낄낄 웃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면서 기분 좋게 말을 이었다.
“남자는 말이야, 자기 가정에 충실하지 않고서는 진짜 사나이라고 할 수 없어. 바깥에서 암만 좋은 성적을 거두고 거물들을 줄줄이 체포하는 요원이라고 해도 분리수거를 하거나 전구를 갈아 끼우거나 자기 자식한테 책 한 권 읽어 줄 시간은 없으면서 밖에서 한잔 할 시간은 있다는 식으로 군다면 그건 반편이지. 아직 결혼 안 했지?”
“안 했습니다.”
“애인은?”
“없습니다.”
“음… 미안해. 어쨌든 내 말을 명심해 둬. 집 안에서 두루마리 휴지 가는 것보다 위험한 일은 절대로 집사람이 혼자 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되고, 어린아이는 잠자기 전에 동화책을 읽어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줘야 하는 존재야. 지금은 잔소리처럼 들릴지 몰라도 자네가 가정을 갖게 되면 내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 한 건지 다 이해할 거니까 열심히 들어 둬.”
현장 요원 발령 직후부터 FBI의 마약 단속국, 통칭 NARC의 최고 현장 요원 타이틀을 거머쥐며 한번 출동했다 하면 95%가 넘는 검거율을 보이는 그 유명한 시드니 요원과 동승했을 때 들을 거라 예상한 조언은 아니었다. 그래도 시드니를 존경하는 마음이 더 컸던 올랜도는 운전에 몰두하면서도 시드니의 말을 열심히 들었다. 올랜도가 성실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자 시드니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지갑을 펼치더니 두 사람이 탄 쿠페가 신호등에 걸려 멈추기가 무섭게 지갑을 턱 내밀었다.
“경청하는 후배에게 선물. 우리 공주님을 보여 주지.”
사진을 본다고 해서 시드니 요원이 의외로 채신머리없다는 생각이 날아가지는 않았지만, 그 모습도 나름대로 보기 좋아서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사진 속에는 단발머리에 빨간 코트를 차려입은 꼬마가 카메라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서너 살 정도 먹지 않았나 싶었는데, 아이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가족계획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의 사전에 등재되려거든 아직 먼 올랜도에게는 그냥 지나가는 꼬마1 정도의 존재감일 뿐이었다. 어머니가 보셨으면 귀엽다고 하셨으려나. 그래도 남의 집 아이더러 평범하게 생겼다는 감상을 내뱉을 만큼 사회성이 결여되지는 않은 올랜도는 귀여워 죽겠다는 감탄을 적당히 꾸며 내었다. 시드니가 여봐란 듯이 으스댔다.
“솔직히 말해 봐, 이렇게 예쁜 애 본 적 있어?”
“없습니다. 진짜로 천사네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내놓은 답변 치고는 기계적인 티가 나지 않았다. 이제 완전히 기분이 고조된 시드니는 사진에 살짝 뽀뽀를 하고서는 지갑을 도로 주머니에 넣으면서 흐뭇하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자네 마음에 드는데. 앞으로 주시하겠어.”
올랜도의 눈이 커졌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시드니가 손사래를 쳤다.
“감사할 것까지야. 내가 주시해서 좋을 건 없어. 앞으로 언제 호출해서 내 임무에 동행시킬지 모르니까 각오해 둬.”
그만한 각오라면 얼마든지 되어 있었다. 마약 단속국 내에서는 물론 FBI 전체를 통틀어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요원이 지켜보겠다는 말을 이렇게 쉽게 꺼내다니, 올랜도는 스스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확실히 아이를 키우다 보면 자기 아이를 예뻐하는 사람에게 정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 유명한 시드니가 자신을 이렇게나 빨리 좋게 보아 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시드니와 함께라면 분명히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멋진 작전에 참가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뉴욕의 5대 마피아 패밀리도 때려잡을 수 있지 않을까? 정예 요원으로 암약하는 꿈에 부풀어 점차로 고조된 올랜도는 저도 모르게 액셀을 밟은 발에 힘을 주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얼마 가지 않아서 오히려 시드니가 좀 천천히 가라고 말려야 할 정도로 속도를 내고 말았다.
***
다운타운, 워싱턴 DC.
“이게 뭐… 출장 보고서?”
키보드 위를 바쁘게 미끄러지는 손가락 드럼의 연주와 전화 통화의 돌림 노래로 벌통처럼 시끄러운 사무실 안, 한창 일에 몰두해 있던 와중에 눈앞에 불쑥 튀어나온 서류철에 스튜어트가 상대방을 올려다보았다. 서류를 가지고 온 같은 부서 소속의 하워드가 파일을 펴 보라는 시늉을 했다. 스튜어트는 떨떠름하게 서류철을 받아들어 펼치면서 물었다.
“언제까지 제출이야?”
“오늘 여섯 시.”
“뭐?”
“오늘 여섯 시까지 제출.”
하워드가 얄밉게 반복했다. 스튜어트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하워드를 올려다보다 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일부러 늦게 갖다 준 거지!”
“나도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 출장 보고서 받고 싶다는 말을 딱 20분 전에 들은 내 입장도 마냥 재밌진 않은데. 어쨌든 여섯 시까지 결재 올려 줘. 원망할 대상이 내가 아니라는 것도 염두에 두시고.”
스튜어트가 으르렁거리며 서류를 훑어보았다.
“이건 말도 안 돼. 어차피 출장 보고서는 매번 다녀올 때마다 냈는데 무슨 양식을 위에서 이제야 넘겨줬…. 이게 뭐야?”
“여태까지 쓰던 그 출장 보고서 아니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현지 수행 업무를 전부 다 보고서 형태로 제출해 달라는 얘기가 팀장 회의에서 나왔다나? 비용 얘긴 적을 필요 없고, 적당히 써서 나한테 넘기면 내가 다듬어서 넘겨 드리지. 아, 여섯 시가 너무 급하면 여덟 시까지는 미뤄 줄까? 난 어차피 야근할 거라 시간 많거든.”
밉살맞은 투로 말하면서 하워드가 히죽 웃었다. 재미있어 못 견디겠다는 투의 그 표정에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서 일부러 약을 올리고 있음을 깨달은 스튜어트가 이를 악문 미소로 답했다.
하워드 월폴 변호사. 스튜어트와는 입사 동기이자 로스쿨 동창생이기도 했고, 재학 중 교내의 글리 클럽에서 각각 테너와 베이스를 맡아 연습 시간의 절반은 소득 없는 사소한 말다툼으로 허비했던 경험을 통해서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덕택에 스튜어트는 하워드의 독설과 심술이 그 나름대로의 친근감과 애정 표현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뻗어서 볼펜을 집어 들었다.
“여덟 시 좋아하시네,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아주 잘 알고 있을 텐데. 난 지금부터 폭주 기관차가 되어서 다섯 시 반까지 이걸 전부 다 끝내고야 말겠어, 하워드. 아무도 나 건드리지 말라고 해.”
“어이쿠 무서워라.”
하워드가 팔랑거리면서 자리를 떴다. 스튜어트는 파랗게 늘어선 책상 칸막이들 너머로 멀어지는 동료의 모습을 주시하다가 서류철을 본격적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하워드가 페이지 틈에 숨겨 놓은 작은 봉투를 발견하자 웃음부터 나왔다. 병아리색의 봉투 안에는 유치할 정도로 화려한 결혼기념일 축하 카드가 들어 있었다. 분명 일부러 가장 이상하게 생긴 카드를 골랐으리라. 카드를 펼치자 하워드의 거미 같은 글씨체가 ‘천년만년 행복하게 살아라, 이 망할 놈들아’라고 큼지막하게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당장 내일 오전에 분기 리뷰 회의가 있어서 지난 석 달 간의 실적을 모조리 보고하는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만들어야 하고, 난데없이 등장한 출장 보고서를 작성하기 이전에 원래부터 매달리고 있던 최근의 거래 동향의 변화에 따른 시세 분석 보고서를 완성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진 한 장 찍어 전송할 시간마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스튜어트는 하워드의 카드를 책상 위에 잘 세워 놓고 핸드폰을 꺼내어 들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패트릭을 생각하면 어떤 상황에서건 흐뭇한 마음부터 피어오르는 것은 그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월도프 애스토리아 호텔, 뉴욕.
막 전화를 걸려고 하던 찰나에 그 상대로부터 메시지가 수신되는 바람에 패트릭이 움찔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보나마나라고 생각했더니 역시나, 또 사진이 첨부된 메일이었다.
아침부터 속속 도착한 사진 첨부 이메일이 다섯 통을 넘어가고 나서부터는 패트릭도 세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선물 받은 꽃다발 사진, 결혼기념일 축하 카드 사진, 축하 이메일 캡처화면. 도대체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는 걸 얼마나 대규모로 광고를 하고 다녔으면 이렇게 대대적으로 회사 동료들이 축하를 해 줄 수가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는 첨부 파일을 열어 보고는 익숙한 하워드의 글씨체에 미소를 지었다. 사진 아래로 스튜어트가 짤막한 메시지를 적어 보내왔다.
「천년만년에 일억 년이 지나도 내 곁에 있어 줘.」
팔불출 병이 점점 도지나. 짐짓 속으로 흉을 보면서도 패트릭의 얼굴이 행복으로 밝아졌다. 그는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원래대로라면 벌써 반나절이나 얼굴을 못 보았으니 영상 통화를 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허나 그러면 배경으로 지금 있는 곳이 보일 테고, 진한 붉은색 다마스크 벽지와 황금빛 램프 장식이 눈에 띄면 호기심 많은 스튜어트는 분명히 어디에 있냐고 꼬치꼬치 캐물을 게 분명했다. 아쉬워도 목소리만으로 만족하는 편이 현명했다. 아직 핸드폰을 들고 있을 거란 계산이 적중해 신호음이 울리기가 무섭게 스튜어트의 부드럽게 낮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미안, 오래 통화 못해.
“알아. 바쁘지?”
전화 너머로 한숨이 흘렀다.
- 갑자기 일을 뒤집어썼어. 잘못하면 예정보다 좀 늦게 들어가겠어.
“뭐야, 난 예정보다 일찍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아서 전화했는데.”
패트릭이 투정 섞인 소리를 냈다. 스튜어트가 소리를 더욱 낮추어 속삭였다. 아마도 등 뒤로 누가 지나가는 모양이었다.
- 최대한 빨리 들어갈게. 엔진 풀가동해서 오늘 일 다 끝낼 거니까 너 기다리게 만들지는 않을 거야. 몇 시에 들어와?
“아마… 지금부터 두 시간쯤 뒤에?”
- 뭐야, 빠르네….
스튜어트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분명히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을 게 뻔했다. 패트릭은 스튜어트의 손을 맞잡듯이 핸드폰을 꼭 쥐고서 그를 달랬다.
“무리하지 마. 내가 들어가서 준비하고 있어도 괜찮잖아? 야채라도 씻어 놓고 있을게.”
- 네가 집에 들어오면 짠! 하고 멋진 테이블을 선사하고 싶었으니까 그렇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
애교를 섞어 시도해 본 한마디가 효과가 있었다. 스튜어트가 짧게 웃더니 소곤거렸다.
- 미안해, 팻. 나 더 통화 못 하겠어. 지금 엄청 눈치 보여.
“빨리 끊어, 그럼.”
- 사랑해.
“빨리 끊으라니까.”
- 사랑해.
“키드, 눈치 보인다고 한 건 언제고….”
- 사랑해!
어이구, 이 화상아. 패트릭이 암담한 심정으로 이마를 짚으면서 쩌렁쩌렁한 소리가 터져 나온 핸드폰을 귀에서 멀찌감치 떨어뜨렸다. 전화로 이 정도로 크게 들렸으면 분명히 그 풍부한 성량으로 멋들어지게 외쳐 버렸다고밖에 생각이 안 되는데 근무 중에 사적인 전화 통화야 유야무야 넘어간다고 쳐도 전화기에 대고 사랑한다고 고함을 지른 걸 어떻게 수습하려고 저러는지 걱정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 심란한 마음으로 전화를 도로 귓가에 대니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조금씩 배경음으로 섞여서 들려왔다. 아마 부끄러움과 민망함은 죄다 남의 몫으로 떠넘겨 버리고 자기는 떳떳하다 못해 뻔뻔한 얼굴로 패트릭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겠지. 패트릭은 전화에 대고 작게 우물거렸다.
“나도 사랑해, 키드….”
- 출발할 때 연락할게. 너도 연락해.
말하는 본인은 아주 흡족한 눈치였지만 듣는 사람의 얼굴은 확확 달아오르고 있었다. 쪽 하고 입맞춤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패트릭은 한숨을 쉬면서 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도로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고색창연한 월도프 애스토리아 호텔 연회장 안에서는 대규모의 파티가 한창이었다. 뉴욕에서 열리는 ‘동부 화합’으로 요즘에는 많이 분위기가 유해졌지만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바깥에는 경찰과 FBI가 진을 친 가운데 기자들이 연회장으로 드나드는 대부들과 수행원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혈안이 되곤 했던 연례 행사였다.
현악 4중주단이 작은 단상 위에서 우아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고, 대낮부터 샴페인과 와인이 흘러 넘쳤다. 참석한 사람들의 나이가 제법 있는 편이라 최신 유행 스타일로 차려입은 사람들로 눈요기하는 재미는 없었지만, 고급 양복점에서 맞춘 정장이 비만한 거구의 사내들을 어떻게 풍채 좋은 신사로 탈바꿈해 주는지를 관찰하는 재미만큼은 쏠쏠했다. 패트릭은 되도록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으려고 애쓰며 딜버트를 찾아 고개를 빼고 주위를 기웃거렸다.
척 보아도 참석자 중에 미국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연갈색 피부의 이탈리아인이 태반이었고 드문드문 창백한 얼굴의 러시아인들과 눈의 빛깔이 엷은 아일랜드인들이 끼여 있었다. 모두가 복장은 점잖았지만 간혹 귀를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상스러운 말씨를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몇몇은 샴페인과 오르되브르를 나르는 여직원들의 스타킹 신은 다리를 대놓고 힐끔거리며 저속한 농담을 하기까지 했다. 이 자리에 지금 모인 이 사람들은 신사의 탈을 쓴 야수들인 것이다. 험상궂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사내다운 외양의 패트릭마저 험악한 기운을 숨기지 못하는 이곳에서는 곱상한 도련님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래서였을까, 눈에 띄지 않으려던 노력도 소용없이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덥석 잡으며 친근하게 외쳤다.
“이게 누군가, 돈 서턴!”
패트릭은 속으로는 괴로운 한숨을 내쉬면서도 애써 친절한 얼굴로 돌아섰다. 패트릭을 멈추어 세운 사람은 와인을 몇 잔이나 마셨는지 벌써 얼굴이 붉어진 돈 잘루치였다. 돈 잘루치는 말이 많고 남의 일에 끼어들기를 좋아했지만 뉴욕 5대 마피아 패밀리 중 하나인 잘루치 패밀리를 이끌고 있는 우두머리라서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이유는 몰라도 이 뉴욕의 대부는 작년 워싱턴에서 열렸던 동부 회합 이후로 패트릭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고 그만 발견했다 하면 달려와 말을 걸지 않으면 못 배기겠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언젠가부터 패트릭의 성 앞에 돈이라는 호칭을 붙여 불러 주었다.
마피아의 대부에게만 붙이는 경칭이 이름 앞에 새로이 달린 이후로 뉴욕에서의 대접이 훨씬 좋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다른 생각 말고 뉴욕의 거물이 자신에게 호의를 품은 데 감사나 하자고 스스로를 세뇌하면서 패트릭이 미소를 지었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돈 잘루치.”
“어디를 그렇게 바삐 가나? 설마 벌써 돌아가려는 건 아니겠지?”
잘루치가 그의 옆을 지나치는 웨이터가 든 쟁반에서 샴페인 두 잔을 집어 하나를 패트릭에게 내밀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먼저 잘루치의, 그 다음에는 서턴의 건강을 기원했다.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회의도 끝났고 공식적인 일정은 이제 없으니 좀 일찍 자리를 뜨려고 합니다.”
그 말에 잘루치가 패트릭의 옆으로 붙어 서면서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디에 매력적인 아가씨하고 데이트 약속이라도 잡아 놓은 거로군? 솔직하게 말해 보게, 난 다 이해한다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보니까 아주 귀여운 비서를 두고 계시던데…?”
비밀은 좀 나눠 갖자고 꾀는 듯 은근한 목소리였다. 패트릭이 마지못해 웃었다.
“추리가 빗나가서 유감입니다, 돈 잘루치. 애석하게도 로즈 아널드 양은 제 취향도 아니거니와 바로 그저께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미인 비서를 확실히 붙들어 두지 못하다니 남자로서는 젬병이로구먼, 돈 서턴! 지난번에 갔을 때에 내가 스카우트를 해 버렸어야 했어.”
“…아널드 양이 미인이었습니까? 전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 밖에서 누굴 만나도 도통 관심이 가지를 않는군요.”
패트릭의 목소리에 이제 슬슬 가 보아야 하니 이쯤에서 대화를 끊고 싶다는 기색이 진하게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 흥에 겨워 버린 잘루치는 패트릭의 떨떠름한 표정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껄껄 웃으면서 패트릭이 휘청거릴 정도로 과격하게 그의 등을 쳤다.
“맞아, 돈 서턴! 자네 신혼이었지, 내가 이런 것도 잊어버리고 다녀서 미안하네. 나이가 들어서 노망이 났나 봐. 얼마나 되었더라?”
“오늘이 결혼기념일입니다.”
영리하게 내놓은 대답이었다. 잘루치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지었다. 비서 이야기를 하며 농담을 하던 때와는 다른, 마치 아끼는 조카를 보는 듯 친근하고 온화한 표정이었다.
“이런, 미안하네, 돈 서턴. 내가 내 친구의 결혼기념일도 잊고 있었구먼.”
“제가 말씀드린 적이 없어서 그렇지요, 괜찮습니다.”
패트릭이 어느 정도 누그러져서 대답했다. 잘루치는 떠들썩하고 눈치가 없어서 그렇지 자신의 친구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패트릭도 그런 잘루치를 인간적으로 싫어하지는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제법 좋아했다.
뭔가 말하려던 뉴욕의 대부가 갑자기 입을 다물고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빠져나갈 타이밍인가. 패트릭이 슬쩍 그의 곁에서 한 발짝 멀어지는데 잘루치가 손뼉을 쳤다.
“그래, 좋은 게 생각났네!”
“네?”
“자네 결혼기념일 선물 말이야. 아주 좋은 게 생각났어. 최근에 근사한 걸 손에 넣었긴 했지만 내 집에도 사무실에도 안 어울려서 고심하고 있었는데 잘 되었군. 내가 아랫사람 시켜서 보내도록 하겠네. 아마 내일 중으로는 도착할 걸세.”
“그, 보내실 때에는 집으로 말고 사무실로 보내 주십시오.”
패트릭이 조금 당황해서 대답했다. 잘루치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린가, 결혼기념일 선물인데 당연히 집으로 보내야지!”
원칙이야 그렇겠지만 패트릭으로서는 집으로 선물을 받을 수가 없었다. 뉴욕의 대부가 보내는 결혼기념일 선물이라면 모르긴 몰라도 부피가 엄청나게 크거나 말도 못 하게 무겁거나 눈에 번쩍 띄도록 화려하거나 최소한 셋 중에 하나였다. 스튜어트가 대체 이게 뭐냐고 묻기 시작하면 둘러댈 말이 없었다. 패트릭은 뭐라고 말해야 자연스럽게 들릴까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짜면서 미소를 지었다.
“안사람이 직장에 다녀서 집으로 보내시면 물건을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근사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반송되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래? 그러면 저녁 시간에 보내라고 일러두겠네. 물류 시간 조정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몇 시가 좋은가? 내가 분 단위까지 맞춰서 보내 주겠네.”
잊고 있었다. 잘루치 패밀리의 부는 미 동북부 물류 산업의 독점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당연히 돈 잘루치에게 물건 배달 시간 조정 따위는 일도 아닐 것이었다. 패트릭은 미소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면서 최대한 밝게 말했다.
“돈 잘루치께서 보내 주시는 선물이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안사람이 받아서 어리둥절한 것보다는 제가 집으로 가져가 돈 잘루치가 어떤 분인지를 설명하고 보여 드리는 게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저는 집에서는 비즈니스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안사람이 제 주변 분들에 대해 잘 모릅니다.”
졸지에 스튜어트를 안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죄책감에 말이 조금씩 끊겨 나왔다. 하지만 다행히 이 수는 먹혀 들어간 것 같았다. 잘루치는 깊숙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패트릭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하는 거야. 밥상머리에서 일 얘기하는 거 아니지. 그리고 여자들은 이 세계에 대해서 이해를 못해. 물론 자네 밑에 있는 그 여장부 딜버트는 빼고.”
남자지만 역시 이해 못 하겠지. 패트릭이 저도 모르게 어깨가 조금 처진 모양이었다. 잘루치가 크게 웃으면서 그를 툭툭 쳤다.
“늦겠구먼, 어서 가 보게. 토끼 같은 마누라가 집에서 기다리, 아니, 일터에서 기다리겠네. 그건 그렇고 자네 마누라는 뭐 하는 사람인가?”
“변호사입니다.”
토끼 귀가 달린 스튜어트를 상상하자마자 웃음보가 터질 뻔한 바람에 패트릭이 약간 들뜬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루치가 혀를 내둘렀다.
“든든하겠군. 돈 서턴도 잘 알고 있겠지만 늙은이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마누라가 변호사로 잘 나가고 있으면 더더욱 자네 일에 개입하지 못 하게 해. 요즘 들어서 아무리 우리 사업들이 양지로 나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자네 마누라의 미래를 위해서는 그게 더 좋아.”
“명심하겠습니다.”
패트릭이 진심 어린 감사를 담아 대답했다. 잘루치가 그의 어깨를 친근하게 툭툭 두드렸다.
“바쁜데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구먼. 어서 가 보시게. 다음에 워싱턴에 들르게 되거든 식사라도 같이 하세.”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돈 잘루치.”
잘루치는 그만 가보라는 듯이 손을 휘휘 젓고서 와인 쟁반을 찾아 연회장 반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패트릭은 잠시 그의 뒷모습을 보고 서 있었다. 돈 잘루치가 되돌아와서 말을 걸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마자 그는 즉시 도로 딜버트를 찾아서 연회장의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밀리 딜버트는 이미 한참 전부터 문가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70센티미터를 조금 넘는 키에 눈매가 날카로운 그녀는 제퍼슨 그룹의 젊은 중간 보스였다. 어린 시절부터 서턴 집안사람들과 잘 알고 지냈고, 그래서 패트릭은 처음 제퍼슨 그룹을 이어받았을 때에는 그녀를 볼 때마다 ‘에밀리 누나’라는 호칭이 먼저 튀어나오려는 통에 이만저만 고생을 한 것이 아니었다.
딜버트는 패트릭을 보자마자 말없이 연회장 문을 열었다. 패트릭은 그녀와 함께 호텔의 입구로 나가 대기하고 있던 은색 아우디에 오르고 나서야 긴 숨을 토해 냈다.
“빨리, 공항으로….”
“이런 모임을 싫어하셔서 큰일인데요, 패트릭.”
직접 운전대를 잡은 딜버트가 딱딱하게 말했다. 패트릭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사업을 합법화하면 뭐 해, 이런 커넥션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데. 그나저나 왜 그렇게 기분이 상해 있어?”
“기분 안 상했는데요.”
“한정판 놓쳤어?”
운전이 갑자기 난폭해졌다. 아픈 곳을 찔렀군. 패트릭이 피식 웃으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몇 번을 와도 뉴욕의 살풍경한 도시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의 취향에는 하늘을 찌르는 회갈색의 마천루보다는 적당한 높이에 식민 시대 양식을 고수하는 워싱턴의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더 잘 맞았다.
“그러니까 사람을 시키라고 했잖아. 아침에 백화점 문 열기 전부터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면 사고도 남았겠네. 아니면 온라인으로 주문하던가.”
“한정판을 다른 사람 시켜서 구하거나 온라인으로 주문하라고요. 그것 참 의미가 있겠군요.”
딜버트의 목소리는 거의 통렬하다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패트릭이 백미러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보통 이상 가는 미모였으나 지금은 비탄과 분함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비록 대놓고 불평을 하지는 않았지만 음악도 틀지 않고 잡담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좋아하는 브랜드의 한정판 출시일에 회합에 끌고 와서 결국 한정판을 놓치게 만든 그를 어지간히도 원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회합에서 우두머리를 수행하는 중간 보스는 점심시간이 아니고서는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고, 월도프 애스토리아 호텔 근처에는 브랜드의 로드 숍이 없었다. 다년간 한정판 사냥꾼 에밀리 딜버트를 옆에 두어 온 패트릭은 몇몇 인기 브랜드의 한정판은 오전 중에 물량이 모두 빠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이 벌써 오후 네 시가 다 되어 가니 그녀가 노리던 물건이 무엇이었든 간에 이미 품절되었으리라는 예상이 가능했다.
어차피 눈두덩이나 입술에 올려놓으면 다 똑같은 색으로 보이던데 이미 백 개도 넘는 아이섀도와 립스틱을 모으고서도 어떻게 아직도 더 살 생각을 하는 걸까? 하지만 그 의문을 입 밖으로 내었다가 장장 몇 시간에 걸친 설교를 들은 이후로 패트릭은 딜버트의 화장품 수집 취미에 절대로 토를 달지 않았다.
“워싱턴 가서 있나 한번 봐, 혹시 모르잖아.”
“당연하죠.”
쌀쌀맞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지금의 딜버트는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패트릭은 자동차의 시트에 몸을 기대면서 핸드폰의 화면을 켰다. 한창 업무 중일 것을 알면서도 스튜어트에게 문자를 보내고픈 유혹은 이길 수가 없었다. 토끼 귀를 단 스튜어트를 상상해 보았다고 얘기해 줘야지. 문자 메시지를 입력하면서 패트릭은 저도 모르게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