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슈퍼스타 손규인 (22/22)

연극 연습이 없으니 시간이 널널하던 차, 시기에 딱 맞게 우리 극단은 작품 선정 회의에 들어갔다. 결정된 연극은 작품성이 있다고 알려졌지만 조금 매니악한 극이었다.

“규인이 이번에 명도 하자.”

‘명도’는 주연의 이름이었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고 단장님을 보았다.

다른 극단에는 가 본 적 없지만, 극단의 막내가 주연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들었다. 우리 단장님이 좀 파격적인 스타일이긴 했다. 막내인 나한테 중요한 역할도 많이 줬으니까. 하지만 주연이라니.

“제, 제가요?”

멍청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단장님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단원들을 둘러보았다.

“반대하는 사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단장님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다들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명도 어울릴 것 같네요.”

“규인이가 딱이지.”

“솔직히 우리 극단에서는 규인이 말고 할 사람 없다고 생각합니다.”

쏟아지는 목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멍해졌다.

“저, 저기….”

“키 작은 건 키 높이 구두로 어떻게 해 보죠! 정우 형, 소품 가능하죠?”

분위기에 쐐기를 박는 듯한 농담에 단원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않는 건 나 혼자뿐이었다.

나는 대본을 내려다보았다. 명도. 어릴 때부터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고 세상을 믿지 않는 비관주의자. 하지만 조금씩 세상의 온기와 사랑을 깨달아 가는 캐릭터.

‘내가 할 수 있을까.’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 명도라는 캐릭터에 많이 몰입한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리딩을 할 때도 감정이 꽤 실렸다. 아니, 오히려 감정이 너무 많이 실려서 역시 주연은 아직 멀었구나 했는데….

“못 하겠으면 못 하겠다고 해도 돼.”

단장님의 말에 파뜩 고개를 들었다. 다른 단원들도 나를 보고 있었다. 모두 나에게 호의적인 표정이었다.

이제는 알았다. 내가 여기서 주연 못 하겠다고, 부담스럽다고 해도 나를 비웃는 사람은 없으리란 사실을. 여태껏 나한테 단원들이 보여 준 모습을 생각하면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내게 친절했다. 그리고 정당한 걸 좋아했다.

솔직히 겁도 났다. 연기를 본격적으로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내가 어떻게 주연을…. 아무리 이번 작품이 소극장에서 열린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내가 내놓을 대답을 알고 있었다. 입술을 잠깐 깨물었다가, 떼었다.

“아뇨, 하고 싶어요.”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 단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고 싶었다. 자존심이나 고맙다거나, 그런 의미를 떠나서 말이다.

극단의 형 누나들은 모두 대단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나를 밀어내고 주연을 딸 수 있을 터다. 하지만 나한테 ‘양보’한 건 아닐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나에게 연기가 장난이 아니듯이,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니까.

“제가 명도 할래요. 잘할 수 있어요.”

힘줘서 대답하자 극단 사람들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단장님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다음 배역은….”

가슴이 뛰었다. 마음이 벌써부터 요동쳤다. 집중해야 하는데, 하면서도 머릿속은 환희를 지르고 있었다.

회의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뛰는 가슴을 안고 휴게실로 갔다. 앞서 나간 몇몇 단원들도 휴게실로 향하고 있었다. 단장님은 누군가와 전화를 하며 밖으로 나갔다.

나와 단원들은 휴게실에 앉아 간식을 먹었다. 이번에 새로 선택한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기대감, 그리고 떨림 속에서 오갔다. 나도 새 작품을 연습할 생각을 하니 떨렸다. 그것도 주연이라니!

“많이 떨려?”

윤지 누나가 물었다. 윤지 누나는 단원들 중에서도 나를 굉장히 잘 챙겨 주었다. 저번에 다스랑 싸우고 연습실에 처박혀 있던 나를 뷔페에 데리고 간 것도 윤지 누나였다.

안 떨린다고 하면 거짓말이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겠다. 그래도 너한테 딱 맞는 역할이니까 다들 오케이 한 거야. 아니었으면 호영이가 제일 먼저 나서서 안 된다고 소리 질렀을걸?”

나는 멋쩍게 웃었다. 호영이 형은 싫은 소리도 거침없이 하는 스타일이었다. 초반에는 호영이 형 때문에 주눅도 많이 들었지만, 형이 지적하는 말도 틀린 게 없어서 이제는 익숙하다. 그런 호영이 형이 아무 말 없이 칭찬할 만큼 다들 내가 주연을 맡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얼핏 둘러보니 옆에 있던 단원들은 이미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윤지 누나를 따라 휴게실의 구석으로 이동했다.

“저, 규인아.”

누나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나 싶어 괜히 긴장되었다.

“이거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너도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어떤 거요?”

누나는 그 뒤로도 한참 더 뜸을 들인 뒤에야 입을 다시 열었다.

“단장님이 일부러 <우는 별> 선택하신 거야. 너한테 주연 주려고.”

그리고 뒤이은 말은 충분히 뜸을 들일 만큼 충격적이었다.

“네…?”

당혹스러워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손에 쥐고 있던 초코바를 떨어뜨릴 뻔했다.

“왜, 왜요? 저한테 왜요?”

나는 아직 신인이고, 극단에서는 여전히 막내 라인이다. 그런 내게 주연 자리를 준다는 것 자체가 파격적인 캐스팅이라는 사실은 나도 알았다. 다만 아직 실감이 나질 않아서 그냥 막연하게 열심히 해야지,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지.

하지만 누나의 말을 듣자 어안이 벙벙했다. 나 같은 신인한테 왜?

“단장님은 너 우리 극단에 있는 거 아깝다고 생각하시거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들을수록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누나는 조금 떨어져서 저들끼리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목소리를 더 낮추었다.

“네가 좋은 조건으로 제안 받으면 다른 극단에 보내 줄 의향도 있으시다고 하셨어. 계약 기간 남았어도.”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멍하게 입만 벌린 채로 누나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네가 주연 맡고 제대로 주목받길 바라신 거야.”

“왜, 왜요? 저는 여기 좋은데….”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는 이 극단이 좋은데. 왜 다른 극단에 보내 준다고 하시는 걸까, 단장님은.

“단장님은 네가 우리 극단보다 더 큰 곳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니까. 우리도 그렇고.”

그제야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실감도 나지 않고,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누나는 픽 웃더니 내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이렇게 작은 극단 말고 더 큰 데 가서 지원도 받고, 좋은 작품도 많이 하고 해야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볼 안쪽을 꾹 깨물었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감사해요.”

“감사는 나중에 단장님한테 해. 밀어주신 만큼 이번 작품 잘하고.”

“네…!”

마지막 대답은 씩씩하게 했다.

***

집에 가자마자 다스에게 오늘 생긴 일을 이야기했다. 내 입으로 내뱉고 보니 내 자랑 같아서 좀 머쓱하긴 했지만, 다스가 진심으로 기뻐해 주어서 민망하지 않았다.

“하, 단장이 사람 좀 알아보네. 우리 귤이는 큰 무대로 가야지, 그렇지.”

다스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말했다. 입가에는 미소가 떠 있었다.

“주연 맡은 기념으로 파티할까?”

“아니, 공연 첫날에 하고 싶어…!”

“그래, 그러자. 공연 첫날에 파티도 하고, 섹스도 하자.”

갑자기 나온 섹스라는 단어에 잠깐 뻣뻣해지자 다스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를 비웃는 것 같은 그 웃음에 오기가 생겼다.

“세, 섹스는 지금 해도 돼!”

다스의 웃음이 일순간 사라져서 뭔가 잘못 말한 줄 알았다. 그러나 이내 그가 다시 지어 보인 웃음을 보고 이번에는 진짜 겁을 먹었다.

“그래, 그러자.”

아, 입이 방정이지, 손규인. 하여튼 밝히는 게 문제다. 내가 예전에는 이렇게 안 밝혔던 거 같은데, 그래, 생각해 보면 전부 다스 때문이다.

다스가 입을 맞춰 왔다. 나는 순순히 내 안으로 파고드는 그의 손길과 숨결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

연극 연습은 무사히 진행되었다. 모두 내게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아서 좀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것도 내 몫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도 이번만큼은 사활을 걸고 연습했다.

다행히도 조연, 스태프들과 합이 잘 맞았고 작품도, 캐릭터도 내 몸처럼 편하게 느껴졌다. 연기를 할 때 지나치게 몰입이 되면 오히려 연기를 망치는 경우가 있다. 대본 리딩을 할 때 너무 몰입이 되는 것 같아 걱정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 딱 적당히 내가 소화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번 작품, 이번 캐릭터는 진짜 제대로 해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내게는 생경한 기분이었다.

이전까지는 욕심보다 책임감이 더 컸다. 연극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의 합작인 만큼 못해서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책임감보다 욕심이 더 컸다. 제대로 된 주연을 맡겨 주셨으니 제대로 해 보고 싶다는 의지가 가슴 속에 남실거렸다. 기분 좋고 뿌듯한 일이었다.

다스는 내가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을 잘 이해했다. 이전이라면 왜 이렇게 연습을 늦게까지 했느냐, 왜 전화를 안 받았느냐 하면서 잔소리를 했을 타이밍에도 별말 않고 넘어가 주었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맙기는 한데… 아주 살짝 서운한 것도 있었다. 나도 참 웃긴 놈이다. 귀찮게 할 때는 싫어하고 막상 관심 없어 하면 서운해하다니.

다스는 동아리에 하나 더 들었다. 스케이트보드 동아리라고 했다. 연옥동에 살 때도 몇 번 봤지만, 다스는 스케이트보드를 제법 잘 탄다.

나는 모처럼 연습이 조금 일찍 끝나는 날에 그가 연습하고 있다는 곳으로 찾아가 보았다. 한강 근처 공원에 마련된 스케이트 파크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멀리서도 단번에 그를 찾아낼 수 있었다.

‘다스다…!’

안이 조금 비치는 얇은 검은색 스카쟌에 잔뜩 찢어진 화이트진을 입은 다스는 단연 이곳에서 제일 멋있었다. 내가 손을 흔들자 다스가 스케이트를 타며 마주 흔들어 주었다. 위험하지 않나 싶어 잠깐 걱정했지만, 내 걱정이 무색하게 다스는 아주 능숙했다.

“일찍 왔네. 연습은 잘했어?”

“어. 너는?”

“아주 잘되고 있는 중이지.”

봄답지 않게 날씨가 꽤 더웠다. 다스의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는 동아리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시켜 주었다. 소개시키는 동안 다스의 팔이 내 어깨에 올라와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 사소한 동작은 내가 다스에게 굉장히 소중한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듯했다.

“규인 씨라고 부르면 되나? 그럼 규인 씨는 몇 학번이에요?”

“아, 저는….”

학번이라니, 나를 같은 학교에 다니는 대학생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대답을 망설이는데 다스가 끼어들었다.

“얘는 학교 다닐 필요 없어. 벌써 프로 연기자거든.”

그의 말과 함께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 진짜?”

“응. 극단에 들어가 있어. 이번에는 주연도 맡았는데.”

다스의 어조에 자랑스러움이 뚝뚝 묻어나서 내 얼굴이 다 빨개졌다. 물론 자랑스러운 일도 맞고, 사실도 맞는데….

“멋있다.”

“연극하면 초대해 주세요.”

“어쩐지, 얼굴이 잘생기셨다 했어.”

쏟아지는 칭찬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자니 다스는 내 앞을 호위하듯이 막아섰다.

“초대는 무슨. 직접 표 사서 와. 내가 알려 줄 테니까.”

그리고 좀 부끄러운 소리를 아주 당당하게 했다. 초대권을 많이 준 데다 나한테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보낼 곳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면 분위기를 초칠 것 같아서, 그리고 집에 가면 다스한테 혼날 것 같아서 그냥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나는 문득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진 것을 느꼈다. 작은 극단의 연기자라고 해도 어쨌든 무대에 선다고 하니 신기한 모양이었다. 동아리 멤버가 아닌 사람들도 우리 쪽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귤아, 모자 쓰자.”

“어? 더운데….”

다스가 내 머리 위에 검은 볼 캡을 씌웠다. 다스의 허리춤에 달려 있던 것이었다.

“쓰라면 써.”

어쩐지 묘하게 강압적인 어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볼캡을 꾹 눌러 썼다.

공원에 마련된 그늘에 앉은 나는 다스가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것을 구경했다. 스케이트보드를 높은 경사면 끝까지 단번에 타고 올라간 그는 가벼운 몸짓으로 허공에서 한 바퀴를 회전하고 착지했다.

‘와아!’

나도 모르게 손을 맞부딪쳤다가 너무 주책 같아서 조심스레 다시 손을 내렸다. 하지만 절로 박수가 나올 정도로 다스는 정말 멋있었다.

그는 빠르게 경사를 내려오더니 한쪽 발로 스케이트보드를 튕겨 내어 손에 들었다. 그리고 두 다리로 단번에 계단 위를 뛰어 올라갔다. 계단 위에 선 다스는 내 쪽을 보더니 잘 보라는 투로 씩 웃어 보였다. 그의 앞에 있는 난간이 햇빛을 받아 뜨거운 은빛을 내뿜고 있었다.

‘설마….’

불길함에 벌떡 일어났다. 다스는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난간 위에 스케이트보드를 얹었다.

타탁, 탁, 탁, 스케이트보드가 난간의 요철을 튕기며 내려왔다. 그 위에 선 다스는 몸을 살짝 낮추고 있었다. 보드는 순식간에 땅에 착지했다. 동아리 사람들이 환호했고, 다스는 그에 호응해 주는 대신 내 쪽을 보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나는 양팔을 마구 흔들어 보였다.

환한 햇빛 아래 다스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빛나 보였다. 태양과 닮은 나의 홍다스, 나의 홍다환이었다.

***

첫 공연 날은 순식간에 다가왔다. 연습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떨리긴 해도 무섭진 않았다. 오히려 빨리 무대에 서고 싶었다.

스탠바이 신호에 맞춰서 무대 뒤에 서 있다가 스태프의 수신호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무대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 어둠에 채 익숙해지지 않은 눈으로 테이프로 표시된 곳을 찾아가 섰다.

빈 무대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졌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적나라한 햇빛 같았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고 대사를 내뱉었다.

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준비된 첫 대사를 내뱉고 연극이라는 세계로 떨어지는 순간.

백지에 글자를 채우듯이 이 공간을 나로 채색한다. 그것은 내 의무이기도 하고, 내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무대에서 대사를 뱉는 찰나, 나는 새로운 곳에 발을 들인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같은 작품이라도 매번 그랬다. 신기한 일이다.

연기를 시작하면 내 주변이 나로 인해 만들어지는 듯하다. 하지만 오만해질 수는 없다. 상황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으니까. 연극은 가변적이다.

내가 입을 열면 상대역이 없어도 무대는 바뀌게 마련이었다. 같은 대사라도 내가 어떤 식으로 뱉는지에 따라 무대 위는 달라졌다.

연습한 대로 대사를 천천히 내뱉었다. 객석을 보지 않아도 내게 집중되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바보 같을 정도로 수줍음이 많은데, 무대에서 나를 쳐다보는 시선은 두렵지도 부끄럽지도 않았다.

연극 맨 앞부분은 내 독백만 이어졌다. 아무도 없이 혼자서 이끌어 가야 하는 것이었다. 좀 어려운 부분이긴 하지만 큰 실수 없이 연습한 대로 나 혼자 초반부를 채워 나갔다.

그리고 지문에 따라 시선을 돌렸을 때, 나는 맨 앞좌석에 앉은 다스를 볼 수 있었다.

특별히 표정을 짓지는 않았지만 다스는 내 반가움을 알아본 것처럼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연극은 무사히 진행되었다. 돌발 상황도 없었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과 스태프들도 별다른 실수가 없었다.

“관객이 생각보다 많네요?”

인터미션 때 내가 묻자 극단 배우 누나가 새삼스럽다는 투로 씩 웃었다.

“저 중에 절반은 너 보러 왔을걸.”

“네?”

장난을 잘 치는 누나지만 오늘따라 그 장난이 유독 짓궂었다. 애써 웃고 있자니 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억울하단 표정을 했다.

“요즘 너 완전 핫하잖아. 대학로 인기스타.”

“에이, 제가 뭘요….”

“진짠데.”

누나는 내게 웃어 보였고, 나는 스태프 형이 불러서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연극의 절정은 내가 맡은 주인공이 심한 정신 착란에서 벗어나는 부분이었다. 나도 우울증을 겪어 봤기 때문에 혹시라도 연기에 매몰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또 주의한 부분이었다. 연기에 몰입하는 건 좋지만, 매몰되는 건 피해야 할 일이니까.

“나는… 여기 서 있어.”

주인공은 자신이 딛고 선 땅을 확인하고, 자신이 진짜 세상에 서 있는 하나의 사람임을 깨닫는다.

“나는 바로 여기에 있어.”

어쩌면 이 인물은 나와 닮았는지 모르겠다. 오랜 방황 끝에 결국 자신이 서 있어야 할 곳을 찾았으니까.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스스로를 확인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숨을 쉬는 것은 대본에 없는 내 해석이었다.

그리고 나는 객석을 둘러보았다. 빠르게 훑는 눈빛은 담담하고 당당해야 했다.

마지막 장면까지 모두 무사히 마쳤다. 오늘 연극은 대성공이었다. 첫 공연을 이렇게 성공적으로 마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극단은 진짜 대단했다.

주연은 나 혼자였기에 커튼콜 때 마지막으로 나가는 배우 역시 나뿐이었다. 최대한 덤덤하고 어른스럽게 나가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떨렸다.

바보같이 덜덜 떨면서 걸어 나가다가 결국 넘어질 뻔했다. 발을 헛디딜 뻔하다가 겨우 바로 섰다. 놀란 형 누나들이 달려왔지만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창피해서 죽고 싶었다.

“으, 으아….”

앞을 보자 객석에 앉은 다스가 입 모양으로 괜찮냐고 묻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세를 바로잡고, 관객들에게 정식으로 인사했다.

“예쁘다, 손규인!”

다스의 목소리가 어찌나 크게 울려 퍼지는지, 하마터면 또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그가 환하게 웃는 것을 보니 얄미운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나도 환하게 웃었다. 주인공이 아닌, 홍다환의 애인 손규인으로 돌아와서.

얼른 다스를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지만 극단 사람들에게 인사는 제대로 해야 했다. 나는 대기실로 들어가자마자 허리를 90도로 꾸벅 꺾었다.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러자 극단 사람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모두 같이 고생했는데 내게 박수를 몰아주는 것 같아 민망해서 슬그머니 화장대 앞으로 피신했다.

분장을 지우고 있자니 단장님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규인아, 수고 많았다.”

“아, 아니에요. 저보다 단장님이랑 다른 분들이 더 고생하셨죠….”

단장님의 표정에 뿌듯함과 대견함이 보여서 나도 뿌듯했다. 앞으로 공연이 몇 번 남기는 했지만, 첫 공연부터 이렇게 성공할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앞으로도 너는 잘할 거다. 그러니까 무슨 말 들어도 절대 기죽지 말고. 알았지?”

“네….”

꼭 내가 어디 가는 것처럼 말씀하시기에 기분이 이상했다. 무슨 일 있으시냐고 물으려는데, 극단 누나가 나를 급히 불렀다.

“규인아, 얼른 나가 봐. 너 기다리는 관객분들 계신 거 같던데.”

“네? 저, 저를요?”

“응. 건물 앞에서 기다리는 분들이 한두 명이 아니야. 얼른 나가 봐.”

누나 말에 주변을 둘러보자 단원들이 어서 나가 보라는 투로 내게 눈짓했다. 나는 꾸벅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대기실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복도에 있던 다스와 마주쳤다. 문 바로 밖에 다스가 있을 줄은 몰랐기에 조금 놀랐다.

“나 너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다스가 씩 웃으며 꽃다발을 내밀었다. 검은 정장을 입고 말끔하게 머리를 묶은 다스는 그 어느 때보다 근사해 보였다. 새빨간 장미로 된 꽃다발을 반갑게 받아 들었다.

“우리 귤이 어디 있는지 안 알려 줘서 사람들 협박하느라 혼났네.”

“그래도, 협박하고 그러면 안 되지….”

기겁해서 말하자 다스가 웃었다.

“농담이지. 어서 가자.”

“어, 그, 근데, 나 밖에… 사람들이 기다린다고 해서. 같이 가 줄 수 있어…?”

기다린 다스에게 미안했지만, 관객들이 기다리는지 진짜 확인해 보고 싶었다. 혼자 가기 부끄럽기도 하고 말이다. 다스는 다행히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래, 같이 가자. 누가 우리 귤이를 기다릴까, 근데?”

“관객분들이래.”

진짜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까? 두근거리는 걸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발걸음은 어쩔 수 없이 빨라졌다.

그리고 극단 누나의 말대로, 극장 건물 밖에 나가자마자 나를 알아본 관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손규인 배우님이다.”

“배우님, 연극 잘 봤어요!”

혹시 누나가 장난을 친 건 아닌가 했는데, 정말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관객들을 보자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자 안전 담당 요원이 나서서 정리까지 해 주었다. 다스는 내가 걱정되는지 어깨를 양손으로 꾹 붙들고 뒤에 서 있었다.

다행히도 안전 요원의 정리에 따라 사람들은 내게서 몇 걸음씩 물러섰다. 그리고 놀랍게도 손에 든 것을 하나씩 내게 건네주었다.

“이게 뭐예요…?”

“선물이에요.”

선물이라니…. 어안이 벙벙하게 있자 다스가 대신 받아 주었다. 사람들은 다스를 내 매니저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인지 별 의심 없이 든 것을 내주었다.

“혹시 인별 아이디 있으세요?”

관객 중 한 분이 내게 물었다. 인별이라면 내가 얼마 전에 만든 그 SNS였다. 아이디를 알려 줘도 되는지 알 수 없어 머뭇거리는데, 물어본 분이 먼저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다. 제가 찾아볼게요!”

그 뒤로도 나는 몇 개나 선물을 더 받았다. 이게 전부 다 나를 위한 것인지,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나를 보려고 온 것인지 믿기질 않았다.

“연기 잘 보고 있어요.”

“이번에 첫 주연이죠? 축하해요!”

심지어 나에 대해서 잘 알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다스가 내 등을 떠밀지 않았다면 계속 바보처럼 멍하니 서 있었을 터다.

“자, 자, 감사합니다, 해야지.”

다스의 말에 퍼뜩 놀라서 얼른 허리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까르르 웃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웃음소리에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자 다스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 귀여워하신다, 다들.”

이번에는 정말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다행히도 사람들이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날도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우리도 이제 집에 가자.”

다스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뒤늦게 떠나는 관객들이 우리를 보는 게 느껴졌지만 상관하지 않고 나도 다스의 손을 꽉 맞잡았다. 다른 손에는 그가 준 꽃다발이 여전히 들려 있었다.

“어, 집에 가자.”

다스의 ‘집에 가자’라는 말이 좋아서 힘줘 따라 했다. 다스가 나를 보고 픽 웃었다. 나도 바보같이 히히, 하고 웃었다. 잡은 손에 다스의 반지가 느껴졌다.

“근데 있잖아.”

“응?”

택시를 잡으러 가는 길에 슬그머니 그의 손바닥을 손끝으로 긁으며 말을 꺼냈다.

“오늘… 사람들 많이 나와 있었잖아. 나 기다리려고.”

“응. 좋더라.”

그의 좋다는 말이 어쩐지 좀 어색했다. 평소의 다스라면 지금쯤 질투를 하거나 선물을 받지 말라며 화를 냈을 텐데, 지금은 그 선물까지 다 들어 주고 있으니.

“왜? 오늘은 왜 질투 안 하냐고?”

…하여튼 다스는 귀신이다. 내 마음속을 그대로 읽듯이 들여다본다.

“여자들한텐 질투 안 해.”

다스가 묻지도 않은 내 말에 대답했다. 다스가 질투를 안 한다니 신기했다. 남자들한테는 그렇게 뭐라고 하면서.

“왜…?”

“나보다 약자들한테 질투하는 건 등신 새끼들이나 하는 짓이지.”

얘가 뭐라는 거지. 황당해서 걸음을 멈췄다. 앞서가던 다스가 내가 따라오지 않는 걸 알고 뒤돌아보았다.

“전에는 했잖아.”

“언제?”

“나 학원 다닐 때. 애들한테도 질투하고 했잖아.”

다스가 순간 미간을 구겼다.

“내가 언제?”

뻔뻔하게 되묻는 말에 황당해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그랬잖아. 막 애들이랑 일부러 친해지고, 밥 사고…!”

다스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진심으로 억울해서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다. 가슴은 갑갑한데 말은 빨리 나오질 않아 더 미칠 지경이었다.

“그랬잖아…! 왜 거짓말해.”

겨우 한마디를 덧붙이자 다스가 씨익 웃었다.

‘어…?’

그제야 나는 그가 나를 놀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뒤늦게 깨달은 것도 억울한데, 다스는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너, 진짜!”

빽 소리를 지르자 다스가 도망쳤다. 도망치는 다스를 따라 달리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다스도 뭐가 웃긴지 키득거리며 달렸다.

우리는 그렇게 바보처럼 웃으며 한참 동안 밤거리를 내달렸다. 어둠이 달았다.

***

그날 뒤로 연극이 끝나는 마지막 공연 날까지 나를 기다리는 관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보안 담당자가 딱히 지시하지 않아도 질서정연하게 내 사진을 찍고 선물을 건네었다.

“저 진짜 팬이에요! 첫 공연부터 다 봤어요!”

“네? 왜, 왜요…. 티켓 비싼데….”

공연을 다 봤다는 말에 당황해서 어버버거리자 관객들이 동시에 와르르 웃었다.

몇몇 관객들은 내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었고, 찍히는 게 조금 부끄러웠지만 기분 좋기도 했다.

공연이 모두 끝나자마자 나는 다른 극단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모든 극단이 내게 좋은 말만 잔뜩 해 주어서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이제야 사람들이 우리 귤이를 알아봐 주네. 다 바보들이라니까.”

다스는 뭐가 그렇게 뿌듯한지 나보다 더 좋아했다. 정작 나는 실감이 안 나서 어벙하게 연락을 받고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한 걸 후회하길 반복하고 있었다.

“어, 어떡하지. 나 방금 전화할 때 바보 같았지…?”

“응.”

곧바로 나온 대답에 나는 슬퍼졌다. 그렇게 바보 같았나. 멍하니 있는 나를 다스가 뒤에서 껴안았다.

“괜찮아. 누가 바보라고 하면 나한테 바로 일러. 내가 죽여 버릴게.”

“죽이면 안 돼….”

“안 되긴. 왜 안 돼. 우리 귤이 보고 바보라고 하면 죽여 버려야지.”

다스는 여전히 극단적인 면이 좀 있었다. 애가 변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귤이 너는 누가 나보고 바보라고 하면 가만있을 거야?”

다스의 말에 뒤를 홱 돌아보았다.

“아니! 죽여 버릴 거야.”

얼른 대답하자 다스가 거 보라는 투로 씩 웃었다.

“그렇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내가 다스를 따라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원래 사랑하면 닮는 거라고 했으니 괜찮다.

연극을 마치고 몇 주 뒤에는 한 잡지사에서 연락이 왔다. 나와 인터뷰를 하고 싶단 거였다. 잡지 이름을 팔아서 사기라도 치는 건 아닐까 싶어 다스에게 상의를 했다.

“번호 줘 봐. 내가 통화해 볼게.”

혹시라도 다스가 상대방에게 욕을 하거나 하진 않을지 잠깐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나에 관한 일에는 항상 진지한 그라는 걸 알기에 순순히 번호를 넘겨주었다.

다스는 자신이 ‘배우 손규인’의 매니저라고 소개했다. 하긴, 애인이나 친구라고 하는 것보다 그게 더 멋있어 보이긴 했다.

그는 제법 어른스러운 목소리와 말투로 통화를 했다. 시간이 꽤 걸렸다. 얼핏 듣자 하니 잡지 인터뷰 내용과 섭외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보는 듯했다.

긴 통화를 끝낸 뒤 다스는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뭐래? 진짜 거기 맞대?”

“응, 그런 거 같아. 너 편한 날 인터뷰하재. 나도 같이 가자.”

“지, 진짜…? 거기… 한국에서 제일 큰 잡지사 아냐?”

어안이 벙벙해서 쳐다보고 있자니 다스가 씩 웃었다. 그리고 팔을 활짝 벌려 보였다. 나는 자연스레 그의 품에 안겼다.

“쫄지 마, 손규인.”

“안 쫄아….”

다스의 손이 다소 거칠게 내 뒤통수를 헤집었다.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는 커다란 손이 좋았다.

“손규인이 최고니까 절대 쫄지 말고 앞만 보고 가자.”

안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없어도 인터뷰를 잘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다스가 서운해할 것 같아서 말은 하지 않았다.

***

인터뷰 날은 금방 다가왔다. 뭘 입어야 할지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잡지사에서 먼저 전화를 해서 의상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친절하게도 잡지사 직원이 버스 정류장까지 우리를 데리러 와 주었다. 커다란 차가 나와 다스 앞에 멈추더니 덩치가 크고 젊은 남자가 창문을 내렸다.

“손규인 배우님?”

“네.”

다스가 나 대신 대답을 해 주었다. 남자가 뒷좌석을 턱짓했다.

“반갑습니다. 시티캐주얼 백영찬입니다. 얼른 타세용. 오토바이 조심하시고.”

씩 웃으며 말하는 얼굴이 사람 좋아 보여서 다행이었다.

뒷좌석에 타고 스튜디오로 가는 내내 백영찬이라는 사람은 다스와 내게 어색하지 않도록 말을 계속 걸어 주었다. 굉장히 재미있는 분이었다. 다스는 잔뜩 경계하는 내색을 했지만, 또 그렇다고 크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스튜디오에 도착하자마자 백영찬은 우리에게 명함을 내밀고 다시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다스보다도 키가 큰 어른이 고개를 꾸벅, 숙여 오는 걸 보고 좀 당황했다. 다스는 놀라지도 않은 것 같았지만,

스튜디오에 있던 사람들에게 우리를 소개해 준 백영찬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나는 곧 탈의실로 끌려갔다. 돌아보자 다스가 파이팅 포즈를 취해 줘서, 다행히도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긴장이 풀린 것도 잠시, 사람들이 내게 입힌 옷은 어깨가 죄다 드러나는 니트에 짧은 반바지였다. 살이 다 보이는 이런 옷을 입은 적이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니트는 앞뒤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괘, 괜히 했나?’

하지만 대배우가 되려면 여러 가지 경험을 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것도 무대 의상이나 다를 바 없어.’

무대 의상이라고 생각하니 신기하게도 하나도 겁이 안 났다. 옷을 갈아입고 나가자 다스의 눈썹이 한 번 꿈틀한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와, 진짜 잘 어울려요!”

“어떡해… 너무 귀엽다.”

훤히 드러난 다리가 자꾸 신경 쓰였다. 그래도 요즘 다스가 다리랑 어깨에 자국을 안 내 놔서 다행이었다. 쭈뼛거리며 조명 앞에 섰다. 극장 무대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왜 그렇게 긴장했어요? 무대 할 때는 그렇게 잘하더니.”

“사, 사람들 얼굴이 너무 잘 보여요….”

연극할 때는 관객 얼굴이 거의 안 보이니까 그렇게 말했더니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뭘 잘못 말했을까? 심지어 다스마저도 웃는 얼굴을 소매로 슬쩍 가리고 있어서 약간 배신감이 들었다.

“무대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있어요.”

“네.”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촬영 기사가 요청하는 대로 포즈를 취했다. 스태프들이 박수를 쳐 대면서 나를 엄청 칭찬해 줬다. 시키는 대로 한 것밖에 없는데 칭찬을 받으니 민망했다. 잡지사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성격이 다들 좋은 걸까?

다스는 내가 촬영을 할 동안 스태프들 사이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어찌나 친화력이 좋은지, 벌써 스태프들에게 이런저런 지시까지 내리는 것 같았다. 얼핏 들어 보니 내 얼굴 이야기였다.

“규인이는 이쪽에서, 이렇게 찍는 게 잘 나와요.”

약간 어이가 없었지만 기분도 좋았다. 여기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다스라는 사실이 좋았다. 그리고 스태프들도 딱히 기분 나빠하지 않고 다스의 말을 경청하는 분위기였다. 신기했다. 내가 중심에 있고 어른들이 나를 위해 바삐 움직이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어른들 사이에서도 다스는 단연 멋있고 주도적이었다. 생각해 보면 연옥동에서도 그는 왕이었다. 어른들도 다스를 다 좋아했다. 저런 애가 내 애인이라서 새삼 또 기뻤다.

촬영하러 오기 전에는 솔직히 걱정을 많이 했다. 큰 잡지사인 만큼 긴장도 되고, 실수를 하진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그런데 촬영장에 다스가 있으니 아무것도 걱정이 되질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다스가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 공간에서 보호받는 기분이 든다. 다스의 존재가 그만큼 큰 덕분이겠지.

촬영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옷을 몇 벌이나 갈아입었는지 모른다. 상의를 벗고 클로즈업 샷을 찍을 거라고 했을 땐 진짜 긴장했다. 다스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는데, 다스는 내 예상과 달리 씩 웃어 보이기만 했다.

‘평소에는 목만 내놓고 다녀도 뭐라고 하면서 왜 오늘은 안 도와줘….’

하긴 촬영 중에 옷 벗지 말라고 하는 것도 웃기긴 할 터다. 어쨌든 시키는 대로 얌전히 상의를 벗고 앉아 있자니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와서 내 얼굴에 온갖 것을 붙였다. 머리에는 꽃도 여러 개 얹었다.

“조, 조금 과하지 않을까요…? 너무 많이 꾸민 것 같은데….”

내가 조심스레 묻자 아티스트 분은 정색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소리예요? 지금 완전 이쁘시거든요?”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어야 했다.

“이런 얼굴 꾸밀 기회도 별로 없는데…. 가만있어 봐요. 내가 제대로 해 볼 거니까.”

약간… 내 얼굴을 좋은 도화지 정도로 생각하시는 것 같았지만, 신이 나 보이셔서 별말 하지 않았다.

얼굴과 머리에 뭔가를 잔뜩 붙이고 얹은 뒤 꽃을 한 송이 들고 포즈를 취했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자 이상하게 부끄러움이 좀 가셨다.

그리고 결과물은 놀라웠다. 카메라에 담긴 내 모습은 다른 사람 같았다. 눈가와 볼에는 반짝거리는 별과 하트가 주근깨처럼 뿌려져 있고, 속눈썹은 일부러 흰 마스카라를 발라서 눈이 쌓인 것 같았다.

“와… 저 아닌 것 같아요.”

“잘 나왔네요. 이 콘셉트로 조금만 더 찍을까요?”

“네!”

대답하고 뒤를 살짝 보는데 다스의 얼굴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부끄러워해야 할 건 나인데 왜 자기가 얼굴이 빨개진담. 그래도 얼굴 빨간 다스는 귀여웠다.

그 뒤로도 촬영은 한참 이어졌다. 옷도 여러 번 갈아입었다. 검은 배경으로 라이더 재킷을 입고 멋있는 척하는 포즈를 잡아 보기도 하고, 음식 앞에서 먹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하다 보니 제법 재미도 있었다. 연기랑은 결이 또 달랐다.

다스는 촬영 중에 어느새 나타난 그 백영찬이란 남자와 대화를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뿌듯했다. 이유는 몰라도, 다스가 어른들과 친하게 지내는 걸 보면 항상 대견한 마음이 들곤 했다.

저녁이 되어서야 촬영이 끝났다. 스태프들에게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백영찬은 다스와 내게 명함을 주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 말이 끝내주게 기분 좋았다. 빈말일지 몰라도, 내가 앞으로도 계속 지켜보고 인터뷰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들렸으니까.

“제가 매니저니까 저한테 연락 주세요.”

다스가 내 앞을 가로막듯이 나서서 말했다. 아무래도 다스는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나를 안심하게 했다.

***

몇 주 뒤, 보정된 버전의 사진이 메일로 왔다. 다스는 그 내 사진을 커다란 사이즈로 인화했다. 내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그 사진을 집에 걸어 놓을 거라고 했다.

“내 집이니까 어떻게 꾸미든 내 마음이야.”

“…완전 치사하다.”

이럴 때만 자기 집이라고 하고. 집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결국 거대한 내 사진이 벽 한쪽을 차지했다. 상의를 벗고 얼굴에 각종 글리터를 얹고 찍은 사진이었다.

“앞으로 내 얼굴 맨날 보고 살아야 되잖아. 이게 뭐야….”

“왜? 난 좋은데. 귤이 네가 싫으면 네가 보지 마.”

다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액자를 뽀득뽀득 닦았다. 나보다 사진이 더 좋은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다스에게는 이제 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에게는 학교가 있고, 동아리가 있고, 시험이 있었다. 나는 그게 은근히 아쉬웠다. 다스에게 나만 있는 게 아니라니.

하긴, 생각해 보면 언제나 그는 나 말고도 다른 것들이 많았다. 그에게는 친구들이 있었고, 돈이 있었고, 다스 자신은 부정하겠지만 이모도 있었다. 나와는 달리 말이다.

그래도 다스가 잘되니 좋은 거니까, 나쁜 생각은 않기로 했다. 가뜩이나 요즘 동아리 활동과 과제 때문에 바쁜 그에게 칭얼거릴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극단을 옮길 준비를 했다. 물론 지금도 좋았지만, 여러 사람들이 옮기는 쪽으로 조언을 해 주었다.

‘예술가는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그건 자신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상담을 받아 준 배우 누나의 말이 내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앞으로도 나를 더 알아주는 곳으로 가라고, 누나는 당부까지 했다. 내가 많이 어리고 미숙해 보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규인이 너는 실력도 있고 똑똑한데, 애가 너무 착해서 탈이야. 그래서 걱정이 돼.’

‘에이, 저 안 착해요.’

안 착하다는 반발에 누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앞으로 못된 짓이라도 해야 하나, 싶어졌다. 하지만 못된 짓은 이미 많이 한 것 같은데….

상담해 준 대가로 누나에게 밥을 사 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 주려고 했다. 그런데 누나가 어린애한테서 밥 얻어먹는 거 아니라며 자기가 돈을 내 버렸다. 커피라도 사겠다고 하자 한사코 거절하며, 일이 있어서 가 봐야 한다고 했다.

지하철에 탄 뒤 집에서 공부하고 있을 다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가는 길이야 나 극단 옮기기로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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