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스의 생일이 있는 주말, 우리는 가까운 계곡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나보다 다스가 더 들떠서 이리저리 계획을 세우고 내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물어볼 필요도 없이 다스의 계획은 완벽했지만 혹시라도 성의 없게 대답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열심히 내 의견도 말했다.
“그럼 여기로 하자. 여기가 이 계곡이랑 제일 가까운 펜션이야. 픽업도 해 준대.”
“좋아! 방도 여기가 제일 마음에 들어.”
“그럼 귤이가 먹을 거 리스트 써 볼래? 내가 필요한 물품 리스트 적어 볼게.”
“어, 좋아!”
나는 종이에다 음식 리스트를 적었다. 적다 보니 대부분 다스가 좋아하는 것들이라서 내가 좋아하는 것도 끼워 넣었다. 소시지, 딸기우유, 크래커. 아참, 커피믹스도 들고 가야지.
몇 가지 쓰다 보니 리스트가 금세 길어졌다. 낭비를 하면 안 되니까 필요 없어 보이는 건 삭제하려고 했는데, 다스가 그냥 다 사자고 했다.
“일박 이 일인데? 이거 다 못 먹을 것 같지 않아?”
“못 먹으면 남기면 되지, 뭐. 올 때 민우한테 차 가지고 오라고 불러도 되고.”
다스는 원래 엄청 쿨한 성격이었지. 우리는 서로의 리스트를 보면서 다시 한번 준비물을 점검했다.
“극단 일정이랑은 문제없는 거 맞지?”
“어, 다 이야기해 놨어. 요즘 연습하는 거도 없고.”
이야기하면서 살짝 눈치를 봤지만 다스는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사실 요즘 들어 다스 몰래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극단의 형이 소개해 준 자리인데, 하루에 두 시간씩 어떤 회사 물류 창고에서 물건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솔직히 엄청 힘들고 시급은 짠데, 그래도 하루 두 시간만 일하면 된다는 장점이 있었다. 다스 몰래 낮이나 밤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기는 힘드니까. 그렇다고 대놓고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하면 다스는 또 못 하게 할 거다.
얼마 전에도 이 일로 싸운 적이 있었다. 이전에 민우가 소개해 준 타이핑 아르바이트를 다 끝낸 뒤, 극단 연습도 바쁘고 해서 당분간은 일을 못 했다. 내가 번 돈은 초라할 만큼 적었고 쓰는 것도 금방이었다.
좀 힘들겠지만 연극 연습이 끝난 뒤, 밤에 하는 아르바이트를 몇 군데 알아보고 면접도 봤다. 다스한테 굳이 말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다스는 자기한테 말을 안 하고 내가 일을 구했다는 사실에 대해 크게 화를 냈다.
‘네 여가 시간을 왜 혼자서 써? 네 시간은 내 시간이기도 하잖아.’
‘왜, 왜 내 시간이 네 시간이야…!’
옛날 같았으면 그런가, 했을 테지만 이제는 그의 말에 반박할 수도 있었다.
‘같이 지내니까 당연히 여가 시간도 같이 쓰는 거지. 그러니까 앞으론 내 허락 맡고 뭘 계획하든가 해.’
하지만 뒤이은 다스의 말에는 더 반박하지 못했다. 맞는 말 같아서였다.
‘그, 그럼 너도 앞으로 내 허락 맡아!’
억울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버럭 소리 지르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스는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어?’
이게 아닌데, 다스가 헛소리를 하고 내가 또 반박을 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쉽게 대답하나 싶어서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알겠다고. 앞으로 수업하고, 연습하고, 동아리 활동 하는 시간 말고 여가 시간은 뭐 할지 둘이 상의하기. 그리고 아르바이트는 안 돼.’
다스는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쐐기를 박아 버렸다.
정리가 된 거냐는 투로 눈썹을 쓱 들어 올리는 다스를 보자 얄밉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해서 결국 울컥해 소리를 질렀다.
‘왜? 왜 안 돼? 왜 너는 맨날 나 일하는 거 못 하게 해!’
연옥동에 있을 때부터 다스는 그랬다. 내가 일을 하려고 하면 매번 못 하게 했다. 아르바이트 하나도 마음대로 못 하게 하는 애인은 다스밖에 없을 거다. 이건 너무하지 않나.
하지만 다스는 그게 뭐가 큰 문제냐는 투였다.
‘내가 싫으니까.’
…가끔 다스랑 이야기하다 보면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 것 같을 때가 있었다. 나는 그게 슬펐다. 나랑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인데, 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나 싶어서.
‘네가 싫으면 무조건 하면 안 돼?’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렇게만 묻고 입을 꾹 다물었다. 다스는 내 눈을 빤히 마주 보더니 손을 뻗어 왔다.
‘우리 귤이, 왜 또 삐졌어.’
‘삐진 거 아니야.’
나는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데 삐졌다고 하니 더 화가 났다.
‘내가 일 왜 하지 말라고 하는지는 안 물어 봐?’
뒤이은 다스의 물음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그러게. 일하지 못하게 하는 걸 원망할 뿐, 물어보진 않았으니까.
‘…내가 사고칠까 봐?’
자신없이 대답하자 다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야, 바보야.’
그리고 내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반지를 여러 개 낀 다스의 손가락이 잘그락거렸다.
‘너 힘든 거 싫어서 그래. 나랑 있을 때 너는 고생 하나도 안 했으면 좋겠어.’
…그러고 보니 전에도 다스는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내가 힘든 게 싫어서 일을 안 하면 좋겠다고. 그땐 나를 옆에 묶어 두기 위한 핑계인 줄 알았는데, 그의 눈을 보니 이번에는 진심 같았다.
‘그래서 억지 부리는 거야. 나랑 있을 땐 평생 내 돈 까먹으면서 하고 싶은 연기만 하고 살게 만들고 싶어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스의 그 말을 들으니 어째 좀 울컥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그의 손이 시야에 불쑥 끼어들었다.
‘어떻게 그래….’
‘왜? 그러면 안 돼?’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스랑 나는 애인이지만, 다스가 내게 곁을 내주었지만, 사실 아직 그 정도의 확신은 들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다스의 곁을 차지하는 것도 모자라 그의 돈이나 축내며 산단 말인가.
‘넌 그래도 돼, 손규인.’
하지만 다스는 그래도 된다고 말했다.
‘내 손규인은 그래도 돼.’
어쩌면 다스를 조금,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스의 돈을 쓰기만 하란 말에는 여전히 동의하기가 힘들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입을 맞추어서 그날 아르바이트 이야기는 결국 흐지부지 끝나 버린 게 아쉬웠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아르바이트 이야기를 다시 꺼낼 기회가 없었고, 다스의 생일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기에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그 몰래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다스한테는 연습이 있다고 하고 두 시간 동안 창고에서 물건 정리를 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하필이면 다스는 요즘 도서관이 아닌 집에서 과제와 공부를 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공부 중인 다스와 마주하면 거짓말을 했단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그래도 그의 선물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죄책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스도 선물을 받으면 기뻐할 테니까.
다행히도 나는 무사히 아르바이트를 마쳤다. 급여도 잘 받았다. 다스에게 뭘 선물할지 고민하다가 극단 누나들한테 물어봤다. 나 같은 또래의 남자애들한테는 어떤 걸 선물할 거냐는 물음에 누나들은 별 의심 없이 대답해 주었다.
“글쎄, 스마트워치 같은 거?”
…벌써 갖고 있다. 그것도 최신형으로.
“액세서리 같은 거? 남자애들도 액세서리 선물 좋아하더라.”
다스는 액세서리 취향이 확고하다. 그리고 지금도 너무 많다….
고민하다가 다스의 워커가 꽤 낡은 게 떠올랐다. 나 만나기 전부터 신고 다녔던 거니 바꿀 때도 되었을 거다.
비슷한 스타일을 찾기는 다행히도 어렵지 않았다. 다스의 발 사이즈도 알고 있었다. 그가 좋아할 만한 검은 워커를 골랐다. 다스와 어울리는, 굉장히 멋진 워커였다. 불편하지는 않은지 내 사이즈로 신어 보기까지 했다.
“이걸로 주세요. 선물 포장도 해 주세요.”
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다스에게 선물을 샀다는 사실에 잔뜩 들뜬 채로 집으로 돌아갔다. 예상했던 대로 다스는 학교 수업을 다 마치고 집에 와서 공부 중이었다.
은테 안경을 낀 다스가 오늘따라 멋있어서 괜히 흘끔거리며 바보같이 웃었다. 다스가 매일 안경을 꼈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왔어?”
다스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종이 가방을 향했다.
“그건 뭐야?”
나는 반사적으로 가방을 등 뒤로 감추었다. 집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 선물을 자랑스럽게 줘야지 했는데, 막상 다스를 마주하니 혼이 날까 두려웠다.
“이리 줘 봐.”
“그, 그게….”
하지만 다스를 속일 수는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하는 수 없다 싶어 뒤늦게나마 웃으며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선물…!”
다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가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선물? 내 생일이어서 사 온 거야?”
“응….”
“와, 진짜?”
다스는 다가와서 아주 반가운 기색으로 종이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워커를 보고 무척이나 기뻐했다.
“와, 진짜 네가 고른 거야? 완전 내 스타일인데, 이거.”
“진짜?”
“응.”
마음에 든다고 해 주니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놓이고 웃음이 났다. 나는 소파에 다스를 앉히고 그 앞에 꿇어앉았다.
“내가 신겨 줄게!”
다스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나는 다스의 발에 워커를 신기고 꼼꼼하게 끈도 매었다.
“괜찮아? 안 불편해?”
열심히 신발 끈을 묶다가 물었는데 대답이 없기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다스가 여전히 묘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귤아, 너 극단에서 의상으로 신발 신을 때 무조건 네가 직접 신지?”
“어? 어. 그럼 누가 신겨 줘?”
“그리고 네가 누구 신발 신겨 주거나, 그런 것도 안 하지?”
얘는 왜 갑자기 이상한 걸 묻지? 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웃었다.
“그렇구나. 다행이네.”
그리고 손을 뻗어 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뭐가 다행이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스의 손길은 좋았기에 헤헤, 하고 웃었다.
“그런데 귤아, 돈은 어디서 났어?”
웃던 그대로 얼굴을 굳혔다. 다스의 표정이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내가 알던 그 무서운 표정이었다. 연옥동에서 많이 보았던 표정.
어떻게 대답하지.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답은 뻔했다. 다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다스는 그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 아르바이트했어.”
“언제?”
“…….”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니 다스가 눈을 살짝 굴렸다가, 내 표정을 읽었다. 그리고 물었다.
“어떤 아르바이트?”
“어, 어떤 회사 물류 창고에서 물건 정리하는 거. 하루에 두 시간씩만… 단기 아르바이트로 했어.”
여기까지 말한 나는 지레 겁이 나서 덧붙였다.
“극단 형이 소개해 준 건데. 네 생일 선물 사려고 아르바이트한다고 하면, 까, 깜짝 선물 못 주잖아…. 그래서….”
아, 큰일 났다. 바보 귤. 다스가 자기 속이는 거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면서. 하지만 나도 이번에는 변명거리가 있었다.
“애인한테 선물하는데, 선물할 거라고 미리 말하면… 너무 없어 보이잖아!”
다행히도 한번 입이 터지자 말이 좀 수월하게 나왔다. 주먹을 꽉 쥔 채로, 그러나 차마 그를 마주 보지는 못한 채 높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도 멋있게 선물 주고 싶었단 말이야! 너희 이모님이 주신 돈 말고, 네 돈 말고, 내가 직접 번 돈으로 좋은 거 사 주고 싶어서… 그래서 거짓말 했어. 미안해. 거짓말한 건 미안한데,”
정신없이 말을 쏟아 내다 보니 숨이 찼다. 숨을 쉬는 것도 잊고 말한 것이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근데 나도 너한테 뭔가 해 주고 싶었어. 우리는… 이제 애인이잖아.”
아직은 내가 다스 집에 얹혀사는 꼴이지만, 그래도 선물 정도는 내 힘으로 마련하고 싶었다.
내리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다스한테 혼날 일만 남았겠지.
그런데 웬일인지 다스는 뭐라고 하지도 않고, 내 머리를 잡아채거나 하지도 않았다. 무서웠지만 살짝 눈을 떠 보았다.
그리고 마주쳤다.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눈을 한껏 휘며 웃고 있는 다스의 얼굴과.
“왜, 왜 웃어!”
가끔 보면 다스는 좀… 이상하다. 지금 화내는 것보다 웃는 게 더 무섭단 사실을 알기나 할까?
“귀여워서, 네가.”
다스는 결국 소리 내어서 웃었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정말로 기쁜 듯이 말이다. 이상했다. 거짓말을 하고 그렇게 싫어하는 아르바이트까지 했는데, 왜 화를 안 내지?
그는 급기야 나를 꽉 껴안고는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뺨과 코, 이마, 턱, 입술 등등 온 얼굴에다 입술 도장을 찍어 대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수, 숨 막혀…!”
애원하고서야 몸을 단단히 껴안은 팔이 풀렸다. 다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화, 화… 안 내…?”
“응.”
나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가 닫았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너 다스 맞아? 누구야…!”
“푸웁.”
무서워서 물었는데, 다스는 속도 모르고 폭소를 터뜨렸다. 어찌나 웃는지 옆집에서 뛰어오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렇게 시원한 폭소가 한참 이어지고서야 다스는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나를 깔아뭉개듯이 짓눌렀다. 러그에 짓눌린 나는 좀 억울했지만 거짓말을 한 건 사실이니 꾹 참고 벌을 기다렸다.
이대로 바지가 벗겨질까? 아니면 손이 묶일까? 이상하게도 벌을 받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다스한테서 벌을 받은 지 좀 오래되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는 이전처럼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잘못했다고 손을 먼저 올리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다스는 내게 벌을 주는 대신 머리칼에 코끝을 묻고 남은 웃음을 푸스스 흘렸다.
“아, 진짜,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귀엽냐.”
“…화 안 나?”
“화? 화가 왜 나.”
그가 내 뺨을 찾아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찐빵처럼 찌그러진 뺨에 닿은 그의 입술은 다정하기만 해서 더 혼란스러웠다.
“우리 귤이가 이렇게 귀여운데.”
“그, 근데, 거짓말…했잖아.”
“응, 그건 잘못했네.”
그럴 줄 알았다. 이제 화를 내겠지, 했는데 다스는 웬걸, 다시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귤아, 내가 왜 너한테 아르바이트하지 말라고 했는지 기억나?”
“우린 같이 지내니까… 여가 시간도 같이 써야 된다고….”
물론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하지만 말이다. 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근데 이유가 하나 더 있어.”
“무슨 이유?”
다스가 워커 신은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마음에 드는지 가죽을 만지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내가 없는 곳에 네가 있을 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알 수가 없잖아.”
그리고 그는 끈을 살짝 고쳐 묶었다. 나는 다스의 말을 경청했다.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 내가 너한테 아무 말도 없이 동아리 활동 하러 갔어. 그런데 거기서 사고가 났어. 네 기분이 어떻겠어?”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혔다. 내가 모르는 동안 그가 다쳐서 응급실에 실려갔던 때가 떠올랐다. 그 끔찍하던 기분을 어떻게 잊을까. 다스가 고개를 들고 내 얼굴을 보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투로 픽 웃었다.
“거 봐. 너도 무섭지?”
“응….”
“나도 무서워. 너랑 똑같이.”
마음이 내려앉았다. 다스는, 내가 아는 홍다환은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백용태와 싸울 땐 총 앞에서도 의연했으니까.
하지만 어쩌면 그건 내가 보고 싶은 다스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두려워 않는, 멋있기만 하고 완벽한 홍다환 말이다.
나는 다스와 지내면서 그가 실수도 하고 어이없는 일로 화도 내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연옥동에 살 때는 보이지 않던 사실들이었다.
다스는 나와 같다.
그 명제가 나를 기쁘게 했다. 그리고 슬프게 했다. 나의 이런 감정을 그는 몰랐으면 싶은데.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기분, 내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은 기분, 이번에도 나는 기다리는 역할이구나, 하는 서운함.
하지만 다스가 그 기분들을 알아주어서 기쁘기도 했다. 이제 정말 짝사랑이 아니구나, 새삼 실감이 나기도 했다.
“…미안. 말 안 하고 마음대로 알바해서.”
때문에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사과였다. 다스도 그랬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사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근데 말했으면 못하게 했을 거잖아.”
내 억울함도 일리는 있었다. 말하면 못하게 하고, 말하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그런데 난 꼭 내가 번 돈으로 선물하고 싶었어. 그런 내 심정도 이해해 줘.”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는 좀 걱정했는데, 막상 입을 여니 말이 또박또박 나와서 다행이었다. 다스는 약간 놀란 눈치로 나를 보다가 이내 내 손을 붙잡았다. 커다란 손가락이, 반지를 여러 개 낀 손가락이 꼭 내 손을 보호하듯이 온전히 감쌌다. 다스의 큰 손과 크기만큼 따뜻한 온기가 좋았다.
…하지만 서운함은 별개였다. 나는 표정이 풀리지 않도록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우리 귤이, 서운했구나.”
하지만 그의 다정한 말 한마디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 탓이 아니었다. 다스가 너무 다정한 탓이었다.
“…어, 서운했어.”
한 마디를 내뱉고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다스는 더 이상 나를 어린애 보듯 하거나 채근하지 않았다. 다만 진지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하지만 내 심정도 이해하지?”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스가 나를 안았다.
“그럼 된 거야.”
나는 다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체취가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아직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우리, 이거 합의 안 하면 계속 싸우겠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다스는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럼 또 싸우면 되지.”
“싸우면 나 밉지 않아?”
“안 미워. 몇 번 싸운다고 미워질 거면 진작 끝났어. 우린 그런 사이 아니잖아.”
그래, 이제는 안다. 우리가 크고 작은 문제로 싸우더라도 헤어지거나 할 일은 없으리란 사실을. 예전이라면 잘못했으니 다스가 나를 버리지는 않을지부터 겁을 냈을 텐데…. 물론 지금도 겁은 약간 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었다.
“사랑은 합의가 아니야, 귤아.”
그가 팔을 반쯤 풀고 가까운 거리에서 말했다.
“가끔 죽도록 밉다고 소리 지르면서 싸우고, 그래도 다음 날 웃는 얼굴 보면 마음 풀리고. 그렇게 다들 사는 거지. 다 합의할 순 없어.”
코앞에 있는 다스의 얼굴이 제법 근사해 보였다. 멋진 말을 해서 더 멋있게 보이나 보다.
“그럼 내가 말 안 들어도 괜찮아?”
“응.”
바로 나오는 대답에 조금 감격했다. 우리 다스가 이렇게 성숙해지다니…! 나도 더 성숙해져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대신 엉덩이는 엄청 때려 줄 거지만.”
“으.”
생각만 해도 아파서 인상을 쓰자 다스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나도 엉덩이 때릴 거야. 너 잘못하면.”
“그럼 나는 네 구멍 때릴 거야. 완전 아프게.”
내가 말하자 다스가 바로 받아쳤다. 그렇다고 질 내가 아니었다. 예전의 손규인이 아니라고.
“그럼 나는… 네 거기 때릴 거야.”
“그럼 네 고추는 워커 발로 밟아 버린다.”
“안 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자 다스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왜? 어차피 쓸 데도 없잖아. 나 없이 쉬도 못 하면서.”
“이젠 잘하거든.”
아직도 고장 날 때가 한 번씩 있긴 하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아예 소변이 안 나오는 정도는 아니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오늘 새로 산 걸로 밟아 줄까? 너 좋아서 질질 쌀 거 눈에 훤히 보이는데.”
“아, 아니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다스의 말을 듣는 순간부터 몸에 조금 반응이 오고 있었다. 들키지 않으려고 몸을 빼려 했지만 그게 화근이었다. 뭔가 이상함을 눈치 챈 다스가 내 허리를 콱 끌어당겼다.
“자, 잠깐만.”
뭐라 변명할 새도 없이 그의 허리춤에 내 발기한 성기가 닿았다. 다스가 씩 웃었다. 내가 잘 아는 웃음이다. 나를 괴롭히기 전의 웃음.
“어쭈, 진짜네?”
시선을 피하자 다스가 내 목과 귀를 깨물었다. 이가 살을 짓누를 때마다 움찔거렸다.
“우리 귤이, 엄청 변태인 거 내가 가끔 잊는다. 그치?”
“아,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냐. 좆 딱딱하게 세워 놓고. 나는 손도 안 댔는데.”
다스가 내 청바지 지퍼를 내렸다. 버클이 풀리고, 속옷과 바지가 동시에 끌려 내려갔다. 아니라고 변명한 게 무색하도록 이미 단단하게 발기한 내 성기가 튀어나왔다.
“봐, 벌써 젖기까지 했네.”
다스가 내 귀두 끝을 손끝으로 때리듯이 툭, 퉁겼다. 아프진 않지만 충분히 자극적인 통증에 움찔했다.
“바지 마저 벗어.”
지금이라도 도망치고 싶지만 마땅히 도망칠 곳도 없었다. 기껏해야 화장실 문을 잠그고 숨는 것밖에 없는데, 전에 장난친답시고 그랬다가 다스가 맨손으로 문고리를 부숴 버린 뒤로는 다시는 그러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얌전히 바지를 내렸다. 다스도 바지를 내릴 줄 알았는데, 그는 소파에서 일어서며 나를 끌어당겼다.
“꿇어앉아.”
하체를 벗은 채로 다스의 앞에 꿇어앉았다. 시선이 어쩔 수 없이 다스의 발로 향했다. 내가 사준 반질반질한 새 워커를 신은, 커다란 발.
“왜? 빨리 밟아 줬음 좋겠어?”
이번엔 아니라고 해 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눈만 꾹 감았다. 억울했다. 내가 준 선물인데….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이미 발기해 있는 내 페니스가 너무 민망했다.
다스는 구두코로 내 성기를 툭툭 차 댔다. 발기한 끝에서 선액이 질질 흘러나오는 게 부끄러웠다. 왜 내 몸은 이런 것에 반응할까. 창피하게 말이다. 하지만 창피함과는 별개로 그가 빨리 내 성기를 구두로 건드려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들었다. 역시 나는 다스 말대로 구제 불능한 변태인가보다.
“우리 귤이 어떡하냐.”
구두 끝이 내 귀두를 살살 어루만지듯 건드렸다. 내 몸에서 새어 나온 선액이 그의 구두를 자꾸 괴롭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손으로 가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분명히 혼이 나겠지.
“애써 몰래 알바해서 구두 사 왔는데, 그 구두로 좆이나 밟히고.”
마침내 그의 발이 내 성기를 꾹, 짓눌렀다. 신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입을 꽉 다물고 눈을 감았다.
“그래도 좋다고 좆 세운 거 봐.”
다스의 발끝은 내 성기가 신기한 물건이라도 되는 듯이 이리저리 건드렸다. 꼭 가지고 노는 것 같았다. 그 거침 없는 태도가 나를 더 흥분하게 만들었다.
“더 밟아 줬음 좋겠지?”
다스의 물음에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게 밟지는 않고 그저 물건 건드리듯 툭툭 함부로 차는 그 무심한 발동작이 오히려 더 자극적이었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다스가 좋다고 하면, 다스는 뭐라고 할까?
“그럼 더 세게 밟아 줄게. 누워 봐.”
그의 말을 따라 나는 얌전히 바닥에 누웠다. 알몸으로, 발기한 성기를 드러낸 채 그의 앞에 누워 있자니 새삼 부끄러웠다. 섹스를 해 본 게 한두 번도 아닌데 말이다.
“이거 봐. 벌써 빳빳하게 좆 세웠네. 빨리 밟아 달라고.”
아니라고 하기에는 딱딱하게 발기한 페니스가 너무 적나라했다. 다스의 발길이 조금씩 격해지고 있었다. 약간 아플 정도였다.
“다리 벌려 봐.”
그의 명령대로 나는 다리를 벌렸다. 몇 번이나 다스에게 박힌 구멍이지만 드러내기에는 여전히 부끄러웠다.
다스는 발끝으로 내 회음부를 함부로 툭툭 건드려 댔다. 아직 박히지도 않았는데 아래쪽이 근질근질할 정도로 안달 났다.
“넣지도 않았는데 구멍 벌어진 거 봐. 걸레처럼.”
“지, 진짜 벌어졌어?”
당황해서 반쯤 고개를 들고 묻자 다스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여기. 벌어져서 뻐끔거린다.”
그리고 툭툭 건드려 대던 발끝을 구멍 위에 꾹 눌렀다. 꼭 벌어진 내 구멍을 틀어막듯이 말이다. 나는 움찔거리며 그가 어서 내 몸에 더 강한 자극을 주길 바랐다. 그리고 그 바람대로, 다스는 워커를 신은 발로 내 회음부를 꾹 밟았다.
“아…!”
“아파?”
“아, 아니.”
엄연히 말하자면 아프긴 했지만, 견딜 수 있을 정도였고 오히려 기분이 좋았기에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 이건?”
이번에는 다스가 회음부 위쪽의 고환을 꾹 눌렀다. 더 예민한 곳이라 조금 더 아팠다. 눈을 꾹 감으며 대답 없이 참고 있자 가해지는 힘이 조금 더 세졌다.
“아파, 안 아파? 대답해야지.”
“아, 안, 아파.”
그러자 다스의 발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 페니스 쪽을 향했다. 그대로 내 발기한 기둥이 구둣발에 꽈악, 눌렸다.
“흣….”
“그렇게 좋아?”
나도 모르게 허리를 아래서 위로 퉁긴 모양이었다. 떠 있는 엉덩이를 애써 내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다스는 약간 무심한 듯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오히려 나를 더 흥분하게 했다.
“더 세게 밟아 줄까?”
“으, 응.”
솔직하게 대답하자 다스의 발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조금 더 세게 짓밟는가 싶더니 조금씩, 조금씩 힘이 더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짓누르는 압박감은 덜컥 겁이 날 정도로 강해졌다.
“조, 조금만 살살….”
“싫어.”
단번에 대답을 내놓은 그가 발끝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러곤 슬슬 아래위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거친 구두 밑창에 성기가 쓸리는 감촉은 지독히도 자극적이었다. 아픈 걸 떠나서 묘하게 두려운 감정이 더 컸다. 물론 다스가 나를 다치게 하지는 않으리란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플레이는 처음 해 보니까.
“귤아.”
“응….”
“네 좆에서 나온 물로 구두 더러워지고 있는데.”
그의 말에 깜짝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스의 말대로 선액이 엄청 흘러나와서 다스의 검은 구두에 투명하게 엉겨 붙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더럽힌 거 나중에 다 핥아 줄 거지?”
“응, 응.”
다스의 구두를, 그것도 내가 사 준 것을 핥을 생각을 하니 벌써 흥분되어서 얼른 대답했다. 그에게 짓밟힌 페니스가 비명이라도 지르듯이 더 딱딱해졌다.
“착하네.”
착하네, 하는 그의 말을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스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
그는 선물이라도 주듯이 구두 뒤축 끝으로 고환을 꽉 짓눌렀다. 역시나 흥분이 고통보다 더 컸기에 아무 말 없이 눈만 꾹 감았다.
다스는 발을 이리저리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구둣발이 내 성기를 압박할 때마다 강한 요의 같은 것이 들었다. 이러다 진짜 오줌이라도 지리면 어쩌나 싶어서 나도 모르게 허리를 꼬았는데, 그게 다스에게는 다른 의미로 보인 모양이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밟아 줄 걸 그랬네.”
어쨌든 좋은 건 사실이니 아무 말 않았다. 사실 더 세게 밟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 내 심정을 읽기라도 했는지, 다스의 발끝에 힘이 한껏 실렸다.
“읏…!”
강하게 내 성기를 밟은 그가 씩 웃었다. 몇 번 보았던 웃음이라 몸부터 반사적으로 긴장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내 귀두 끝을 아예 자근자근 문지르듯이 밟았다. 강한 자극에 눈앞이 아찔했다. 요의가 간질간질하게 이어졌다. 금방이라도 소변을 지릴까 봐 겁이 났다.
“자, 잠깐, 만, 다스야. 나, 화장실….”
“응.”
건성으로 대답한 그는 내 귀두를 뭉개기라도 할 것처럼 짓눌러 댔다. 새 구두의 딱딱한 밑창 감촉이 예민한 귀두로 여과 없이 느껴졌다.
“나, 진짜, 쌀 것 같은데….”
“싸.”
싸면 놀리고 혼낼 거면서 대답은 쉽게 하는 그가 조금 얄미웠다. 그러나 요의가 너무 강해서 당장이라도 그에게 매달려 그만해 달라고 빌고 싶을 지경이었다.
결국 나는 얼마 가지 않아 멀건 물을 줄줄 싸 버렸다. 사방으로 튀는 내 물을 보니 아득해졌다.
“아, 흑, 그, 그만…!”
창피하고 서러웠다. 그러게 내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 다스는 그런 내 심정도 모르고 내가 싸는 것을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었다. 내 몸이 투명한 소변으로 흠뻑 젖는 게 느껴졌다. 다스 앞에서 오줌을 싸는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쌀 때는 매번 부끄럽다.
“우리 귤이, 이제 밟히는 것만으로도 질질 싸네.”
“흑, 흐으….”
그가 야속했다. 풀려 가는 눈에 억지로 힘을 주고 노려보았다.
“내가, 그만, 하라고, 흑, 으읏…!”
그러자 다스는 벌이라도 주듯이 내 성기를 더 꽉 짓눌렀다.
“윽!”
“말대답하지 말고.”
허리를 들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보니 그의 신발 역시 내가 싼 물로 온통 젖어 있었다. 와중에도 속상하고 안타까웠다. 새건데. 내가 사준 건데.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다스는 냉정했다.
“누워, 똑바로.”
그가 시키는 대로 다시 누웠다. 다스는 그제야 지퍼를 내렸다. 그의 페니스 역시 단단하게 발기해 있어서 기뻤다. 그는 내 다리를 벌리고 이미 흠뻑 젖은 구멍을 찾아 발기한 물건을 들이밀었다. 나는 빨리 그의 것을 받아들이고 싶어서 다리를 더 활짝 벌렸다.
내가 안달 내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다스는 곧바로 박지 않고 입구에서 깔짝거렸다. 몸은 다스의 자극에 익숙해져서 빨리 그에게 박히길 바랐다. 어서 그가 나를 괴롭혀 주었으면 했다.
“귤아.”
“으, 응.”
“난 가끔 아직도 욕심이 나거든.”
“응…?”
갑자기 무슨 욕심? 어서 좆을 달라고 보채는 대신 나는 얌전히 그가 말을 잇길 기다렸다. 허리가 조금씩 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지, 네 입으로 듣고 싶어.”
다스가 입술을 틀어 웃었다. 내가 좋아하는 섹시한 웃음이다.
“다 아는데도 듣고 싶은 건… 욕심 맞지.”
오늘은 다스의 생일이니까, 그가 욕심을 부려도 된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대로 들려주기로 했다.
“…나, 더 세게 밟히고… 싶어.”
조금 더듬으며 말하자 다스가 다시 씩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는 반쯤 깔짝거리던 페니스를 단번에 빼냈다. 그리고 내 다리 사이에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페니스를 받아들이려 애쓰던 내 구멍에 이번에는 다스의 손가락이 닿았다. 아니, 닿자마자 들어왔다.
“흡!”
안쪽으로 들어온 손가락은 곧바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을 찾아 파고들었다. 다스는 눈을 감고도 내가 좋아하는 곳을 찌를 수 있을 것이다.
“읏, 으으, 응. 거기, 좋아.”
하지만 나는 구태여 어디가 좋다는 말을 한다. 다스는 변태 같은 나를 좋아하니까. 변태 같이 밝히고 느끼고 질질 싸는 손규인을 좋아하니까.
“응, 알아. 여기 좋아하는 거.”
다스는 내가 좋아하는 곳을 손끝으로 꽉꽉 누르며 자극했다. 나는 그가 언제 다시 워커 밑창으로 내 성기를 밟아 줄지 기대하느라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기대감 때문에 자극이 더 커서 금방이라도 또 질질 쌀 것 같았다.
“으, 으읏. 자, 잠깐, 만. 나, 밟아 줘, 응? 밟아, 흑, 줘.”
더 참지 못하고 애원했지만 다스는 손가락으로 구멍을 자극할 뿐 밟아 주지 않았다. 아까 화가 난 걸 지금 와서 화풀이하는 건가. 그렇다면 다스는 정말 치사하다. 복수할 거다. 그렇게 다짐하며 흐린 시야로 그를 힘껏 노려보았다.
“귤아, 왜 그렇게 쳐다봐.”
다스가 상체를 숙여 오며 물었다. 성대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좋았다. 그 목소리를 뱉어 낸 입술이 내 귀끝을 살짝 깨물었다.
“넌 꼭, 내가 잘해 주면… 나한테 기어오르더라. 다시 처맞고 싶은 것처럼.”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스가 다시 내 뺨을 때리거나 머리채를 잡길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예전에 다스에게 맞을 때에는 다스가 나를 미워하고 싫어해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내가 등신 같아서, 그의 마음에 차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나를 때리지 않는다. 섹스 중에 내 움직임이 마음에 안 드는지 엉덩이를 때릴 때는 가끔 있지만 말이다.
오늘은 그가 예전처럼 나를 때려 주었으면 싶었다. 왜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다스 말대로 내가 변태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내 입으로 때려 달라고 말은 하지 못하고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의 손을 문 아래쪽을 꽉 조였다. 눈빛을 읽기라도 했는지 다스의 표정이 험해졌다.
“귤아, 맞고 싶어?”
그가 몸을 일으켰다. 내 밑에 박혀 있던 손가락도 빼냈다. 흣,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몸이 끌려가는가 싶더니 다리가 들렸다. 다스가 내 아래쪽을 워커로 찼다. 퍽, 하고 제법 큰 소리와 함께 통증이 느껴졌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아팠다.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다스가 다시 내 아래쪽을 찼다.
“……!”
다시 발길질이 날아오기 전, 거의 필사적으로 아래쪽을 손으로 막았다. 그러자 다스는 헛웃음을 한 번 흘리더니 내 성기 대신 손등을 꾹 밟았다.
“아, 아파.”
“알아. 아프라고 차는 건데.”
억울했지만 밟히고 싶다고 한 건 나니까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슬그머니 가린 손을 치웠다. 그와 거의 동시에 다스의 발길질이 또 날아왔다. 한 번이 아니었다. 두 번, 세 번 찰수록 내 성기는 눈치도 없이 더 딱딱하게 발기했고 다스는 그것을 보고 더 세게 발길질을 했다.
“우리 귤이는 계속 걸레 새끼 같다. 그치?”
“으, 응. 응.”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발길질은 끊기지 않았다.
“내가 걸레 새끼로 만들었으니 당연하지.”
맞다고, 네가 이렇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싶은데 아파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넌 평생 내 걸레 새끼인 거야, 귤아. 알겠어? 아무도 안 주워 가고, 아무도 안 먹는….”
다스 말이 맞다. 나는 여전히 아무도 주워 먹지 않는 더러운 귤이다. 그래도 이전처럼 쓸모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스의 말에 서럽지는 않았다. 나는 다스의 더러운 걸레 새끼인 게 좋았다. 여전히 내 몸은 그가 만들어 놓은 그대로라는 게.
그가 발끝에 힘을 주어 내 성기를 여러 번 차 댔다. 몇 번은 회음부나 고환을 겨냥했다. 싸한 통증에 기분이 좋기는 하지만 견디기가 점점 힘들었다. 이제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다.
“아, 아파. 진짜 아파…!”
아프다는 말을 해도 다스는 멈추지 않았다. 몇 번이나 더 내 성기를 워커 발로 찼다. 결국 내가 눈물을 보이고서야 멈추었다.
“흐윽, 흑….”
“…많이 아파?”
다스의 물음에 눈물을 대충 닦고 그를 마주 보았다. 약간 당황한 듯한 얼굴을 보니 더 설움이 북받쳤다. 주먹으로 다스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진짜 아팠단 말이야…!”
좋아했으면서 왜 난리냐고 핀잔을 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다스는 나를 꼭 안아 주었다.
“응, 미안. 내가 좋아서 정신 놓느라 너 아프게 했네.”
“미워, 너 미워….”
사과를 들으니 더 서러워져서 안긴 채로도 그의 등을 마구 때렸다. 다스는 내 주먹을 고스란히 다 맞았다. 그러면서 웃기까지 했다.
“근데 귤아, 있잖아….”
다스가 슬그머니 내 손을 끌어다 제 다리 사이를 더듬게 했다.
“밉다고 하니까 왜 꼴리지?”
아니나 다를까 다스의 아래는 빳빳하게 서 있었다.
“어, 어떡해.”
그러고 보니 나만 홀딱 벗고 만져졌지, 다스는 아직 사정을 안 했다. 그의 페니스를 쥐려고 했는데 다스가 손을 가로막았다.
“놔둬.”
“그치만….”
다스를 만족시켜 주고 싶었다. 나만 질질 싸고 끝내는 섹스는 싫었다. 물론 내가 섹스를 잘 못한다는 건 알지만….
그러나 다스는 진짜 괜찮다는 듯이 아예 바지춤을 올리고 버클과 지퍼를 채워 버렸다. 못내 아쉬운 나는 속으로만 입맛을 다셨다.
“근데 그거 아냐, 귤아.”
다스가 어느새 한쪽 손으로 티슈를 뽑아내 아래를 닦아 주며 물었다. 말해 보라는 뜻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구석구석 꼼꼼하게 닦아주는 손길이 좋았다. 이제는 나도 그에게 몸을 맡기는 게 익숙했다.
“신발 사 주면 도망간다던데.”
뭘 뜸을 들이나 했더니, 다스가 오랜만에 헛소리를 한다.
“어디 가 봐.”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받아쳤다. 내가 그럴 줄은 몰랐는지, 다스는 좀 당황한 눈치였다. 다스가 당황하는 일은 흔치 않다. 그래서 나는 즐거웠다.
“도망가면 내가 끝까지 찾아가서 물어뜯어 버릴 거야.”
힘 줘서 으르렁거리며 말하자 다스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빤히 보았다. 설마 못 문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왜 그런 표정이야? 어디 보여 줘?”
“응.”
다스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그에게 덤벼들었다. 그의 티셔츠를 끌어올리며 상체를 덮치자 다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의 유두를 물어뜯으려 이를 세우며 달려들었지만 억울하게도 단숨에 제압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1분 천하였다.
분해서 씩씩거리고 있자니 다스가 내 콧등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었다. 두 손으로 내 상체를 꽉 껴안은 채 말이다. 우습게도 그의 키스 한 번에 억울함이 다 날아가 버렸다.
“귤아.”
“왜.”
“난 도망 안 가.”
다소 진중한 목소리에 이번에는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나는 버둥거리는 것을 포기하고 내 아래 있는 다스를 내려다보았다. 알아, 하고 대답하는 대신.
“네가 신발을 사 줘도, 내 좆을 때려도, 섹스하다가 오줌을 싸도 난 너 두고 도망 안 가.”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좋았다. 다스의 목소리는 나를 안심시키게 하는 힘이 있었다. 어떤 상황이라도 그의 말 한마디면 나는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더, 멋대로 굴어도 돼.”
“…멋대로?”
약간의 기대감을 갖고 물어보자 다스가 픽, 웃었다. 무게 잡는 다스가 아니라 평소의 다정한 다스로 돌아왔다.
“물론 엉덩이는 좀 맞겠지만.”
“이 씨….”
홍다스가 그럼 그렇지. 나는 젖꼭지를 못 문 대신 그의 목덜미를 힘껏 깨물었다. 다스의 장난스러운 비명과 함께 시야가 뒤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