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스는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바빠졌다. 듣자 하니 이런저런 모임에 불려 다니는 모양이었다. 다스를 섭외하려는 동아리도 많다고 했다.
“락 밴드 동아리나 들까? 어때?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다스가 기타를 연주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방금 질펀하게 몸을 섞은 뒤여서 맨몸으로 그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상체의 근육이 예쁘게 오르내렸다.
“난 별로야.”
조금 부루퉁하게 대답하자 다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싫어?”
“어.”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베이스나 기타 같은 거.”
확실히 일렉 기타를 멘 그는 끝내주게 섹시할 터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달갑지가 않았다.
“할 거면 드럼 해.”
드럼도 괜찮지 않나. 다스의 튼튼한 두 팔로 드럼스틱을 열정적으로 휘두르는 모습을 떠올리자 방금 전까지 혹사당했던 곳이 또 찌르르하게 반응이 올 것 같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드럼은….
“드럼은 무대 맨 뒤에 있으니까?”
입이 딱 벌어졌다. 깜짝 놀라서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다스야.”
“응?”
“너 초능력 있어?”
그러지 않고서야 매번 이렇게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이 생각을 읽어 낼 수 있단 말이야? 다스는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빵 터져서 침대를 구르며 폭소하고 있었다. 억울해서 그의 맨 등짝을 살짝 때렸다.
“웃지 말고…!”
“하, 하하….”
다스는 힘이 다 빠질 만큼 웃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어찌나 웃었는지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너, 내가 사람들 앞에 서는 거 싫어서 그러잖아.”
…다스가 말하니 그런 것 같았다. 다스가 멋진 것도 좋고, 다스가 악기를 배우는 것도 좋지만 밴드 동아리는 왜 싫은지 이유를 그제야 깨달은 내가 바보 같았다.
“…뭐, 그건 맞는데….”
“걱정 마. 밴드는 나도 관심 없어.”
“그, 그럼?”
방금 전까지 웃던 다스가 이번에는 조금 심각한 얼굴을 하곤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었다. 나는 자연스레 그의 옆구리로 파고들어 안겼다.
“정치 동아리 쪽으로 생각 중이야.”
“정치…. 그런 것도 동아리가 있어?”
“아마 사회 활동 위주겠지. 봉사 활동 하러 다니거나, 사회적 이슈 있으면 거기 목소리 내고.”
잘빠진 다스의 턱선을 구경하며 그가 하는 말을 집중해 들었다. 어쩐지 다스랑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한데.
“어차피 나 나이 들면 이모가 정치 쪽으로 끌어들일 거 뻔하거든. 그 전에 나도 준비는 해야지.”
새삼 다스가 대단해 보였다. 나는 당장 내일 연습만 생각하고 있는데, 그는 먼 곳까지 내다보고 있구나. 정치 쪽으로 발을 들이게 될 거라는 말이 내게는 아득하게 느껴져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내 뺨을 손끝으로 장난스레 톡, 건드렸다.
“어쨌든, 내 애인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마음 놓으라고.”
내 애인. 그 말이 간질간질하게 좋아서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생각해 보면 기타를 치거나 드럼을 치는 것보다 봉사 활동을 하는 다스가 수십 배는 더 멋있기도 하다. 절대로, 절대로 사심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하, 이모가 하나 있는 조카 좌파 되었다고 날뛰는 거 보면 그것도 재밌겠네.”
다스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눈이 반짝거리는 걸 보니 정말로 재밌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다스 이모는 보수 쪽이셨는데… 괜찮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다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싶었다.
***
그는 결국 사회 봉사 동아리에 들어갔다고 했다. 다 좋은 사람들이라고, 앞으로 재미있을 거라고 했다. 이모가 국천시 시장이라는 말은 일부러 안 했다고 했다. 알면 쫓겨날걸? 키득거리며 하는 말에 걱정되는 건 나뿐이었다.
동아리 활동만이 아니라도 다스는 엄청 바빴다. 과제는 어찌나 많은지, 맨날 도서관에서 저녁 늦게까지 과제를 하다 오기 일쑤였다.
그냥 집에서 하면 안 되냐고 칭얼거릴 생각은 없었다. 내가 옆에 있으면 자꾸 만지고 싶다는 다스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그렇다고 나도 노는 건 아니었다. 내가 조연을 맡았던 지난 연극이 끝난 이후로 아직까지 작품이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우리 극단은 훈련을 계속했다.
“연기는 단순히 움직이고 말하는 게 아니야. 체력이 뒷받침되어야지 주연으로 170분 동안 정확한 딕션으로 흐트러지지 않고 연기할 수 있다고.”
단장님의 말씀에 나는 백번 공감했다. 특히 체력이 약한 나는 움직임이 많은 연기를 하다 보면 금세 숨이 차서 대사가 흐트러지곤 했다.
그래서 우리 극단의 막내 라인 – 나를 포함한 세 명 – 들은 요즘 거의 극기 훈련을 하고 있었다. 매일 고강도의 트레이닝을 받는 것이었다.
“으윽, 죽을 것 같다….”
“하, 난 벌써 죽었어.”
막내 라인은 나와 나보다 두 살 많은 누나, 그리고 세 살 많은 형이었다. 서로 말을 놓는 사이이고 내가 극단에서 제일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규인아, 너는 안 힘들어?”
“야, 말 시키지 마라. 쟤 지금 말할 힘도 없는 거야.”
…정답이었다. 나는 신음할 힘도 없이 바닥에 늘어져서 숨만 할딱할딱 몰아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트레이너 선생님이 들어왔다. 꿀 같은 휴식 시간이 끝난 것이었다.
“자, 다시 시작!”
박수를 짝짝 치며 외치는 우렁찬 목소리에 맞추어 우리 셋은 좀비처럼 일어섰다. 물론 내가 제일 느리게.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건 이렇게 힘들게 훈련을 하니 성과가 조금씩 보인다는 거였다. 처음 한 달 동안은 체력만 축나는 기분이었는데, 두 달이 지나자 같은 동작을 하더라도 좀 덜 힘들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스가 침대에서 괴롭힐 때 덜 힘들다는, 아주 큰 이점이 있었다. 이런 것으로 체력이 늘어난 걸 느끼다니. 좀 웃기고 억울했다.
트레이닝이 끝나고 카페에서 수다를 떨던 어느 날이었다.
“규인아, 너는 애인 없냐? 예쁘장하게 생겨서 좋다는 애들 많을 거 같은데.”
“규인이 애인 있어.”
형이 하는 말에 누나가 반박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나를 바라봤다. 다스 이야기는 한 적이 없는데.
“규인이 애인, 연극이잖아.”
“헐.”
“아, 뭐야!”
형이 경악했고 나는 얼굴이 달아올라서 탁자를 탕탕 쳐 댔다. 누나는 안색 하나 안 바뀌고 제 앞에 놓인 주스를 쪼옥 빨아들였다.
“맞잖아. 너 연극 말고 아무것도 안 하지?”
“그야….”
연극 말고 다른 걸 해야 하나? 집에서 다스랑 뒹구는 게 연습 시간 다음으로 내 생활에서 긴 시간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걸 말할 순 없었다.
“취미가 있어야 돼. 그래야 번아웃이 안 와.”
누나의 말을 진지하게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 말이 오랫동안 남았다. 취미라.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었다. 나는 연극을 계속할 거고, 그동안 지치지 않으려면 연극 말고 다른 취미가 필요할 것 같았다.
취미를 고르기 위한 고민은 그날부터 쭉 이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잘하는 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다스한테 물어볼까, 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것까지 다스한테 의존하면 안 돼.’
내 생활이고, 내가 챙겨야 할 문제였다. 그러니 이번만은 절대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을 것이었다.
***
다스가 학교에 나를 초대했다. 내심 구경하고 싶었기에 그가 오라고 했을 때는 기분이 엄청 좋았다. 내가 처음 구경하는 대학교가 다스의 학교라서 더 좋았다.
교정은 넓고 밝은 분위기였다. 어딜 가나 웃는 사람들이 있었고, 나무가 곳곳에 심겨 있어 몹시 예뻤다.
다스는 자기가 공부하는 과 건물과 동아리방을 소개해 주었다. 다스를 알아본 사람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기도 했다. 여기서도 다스는 인기가 많아 보였다.
“어때, 와 보니까?”
“학교 좋다.”
“등록금을 그렇게 받는데, 좋아야지.”
다스의 말에 조금 웃었다.
그와 같이 교정을 거닐면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자니 나도 대학생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신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고, 그때마다 다스는 저 건물은 어떤 건물이며 저기선 뭘 한다는 둥 정성 들여 설명을 해 주었다.
“학교 후문 쪽에 괜찮은 돈가스집 있는데, 거기서 점심 먹자. 귤이 돈가스 좋아하잖아.”
“어, 완전 좋아!”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대학교 근처에서 다스랑 밥을 먹으면 캠퍼스 커플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 것이다.
좁지 않은 교정 한 바퀴를 다 돌고 동아리 방이 있는 건물로 돌아왔다. 잠깐 화장실을 갔다가 나와 보았을 무렵, 다스가 한 무리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적부터 다스는 원래 인기가 많은 애였다. 연옥동에 있을 때에는 우리 또래 애들 중 거의 전부가 그를 따랐지 않은가.
그래서 학교에서도 인기가 많다는 사실이야 뻔한 건데, 어떤 남자애와 마주 보면서 이야기하는 다스를 보자 괜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냥 단순히 대화만 하고 있었다면 나도 유치하게 질투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 남자애가 감히 다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던 거였다.
그리고 정말 화가 나는 건, 다스가 그 손을 뿌리치지 않고 웃고 있다는 점이었다.
손에 묻은 물기를 대충 바지에 닦고 큰 보폭으로 다가갔다. 다스의 앞을 가로막듯이 끼어들어서 남자를 노려봤다.
남자는 나보다 키가 좀 더 크고 안경을 쓰고 있었다. 한눈에도 인상이 서글서글하니 좋아 보였다. 그래서 더 질투가 났는지도 모른다. 나는 저렇게 사람 좋게 웃지 못하니까.
“누구?”
남자가 나를 보며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로 물었다. 불쑥 끼어든 불청객이 당황스러울 만도 할 텐데, 얼굴에 여유가 넘쳤다.
“제 친구예요.”
다스가 존대를 하는 걸 보니 선배인 모양이었다. 노려보는 내 표정이 제법 사나웠는지, 그제야 남자는 다스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그래, 그럼 일정은 그렇게 알고 있고, 다음 주에 보자.”
남자가 사라지고 나서야 다스가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의 체온이 닿자 그제야 유치하게 질투하던 마음이 좀 풀렸다.
“우리 귤이, 왜 뿔났어?”
“안 났어.”
“그래?”
빙긋이 웃는 얼굴을 보니 분명 내가 질투하는 걸 다스도 즐기는 게 분명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말이다.
“왜 형한테 질투해? 아까 여자애들하고 이야기할 땐 안 그랬잖아.”
“…넌 예쁜 애들은 안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못생긴 나랑 다니지. 그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다스는 뭐가 웃긴지 키득거렸다. 그게 얄미워서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찍었다.
“아야.”
“웃지 마.”
나도 이제 스물한 살이고, 아직 모르는 게 많지만 눈치는 있었다. 다스가 나를 애인으로 소개할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연옥동에서야 워낙 막살았으니 누가 뭐라든 상관없었지만, 이제 우리는 각자의 생활이 있으니까.
다스와 함께 동아리 방이 있는 건물을 나오자 오후 봄볕이 제법 뜨겁게 내리쬐었다. 우리는 교정을 가로질러 학교 입구 쪽으로 걸었다.
“생각 같아서는 너 여기 데리고 오지도 않았어.”
다스의 말에 약간 풀렸던 기분이 다시 조금 가라앉았다.
“…내가 못생겨서?”
“아니, 바보야.”
그가 다시 웃었다.
“나야 돈이나 벌면서 살 거지만, 귤이 너는 아니잖아.”
이어진 말은 선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스는 어느새 웃음기를 싹 지운 얼굴로 바람에 흐트러진 내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넌 연예인이잖아. 얼굴 팔린다고.”
아, 나 때문이라는 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아직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극단 들어가서 공연 올렸으면 연예인이지.”
“어, 어….”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는데, 다스의 말이 맞기는 했다. 극단 홈페이지에는 내 사진과 이름이 연기자로 올라가 있기도 하고 말이다.
“이제 더 유명해지면 아주 큰 공연장에서 연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섭외도 들어오고. 잡지 같은 데서 인터뷰도 하고 할 건데. 그럼 손규인의 옆에는 누가 있는지 다들 궁금해하겠지.”
아직 까마득한 먼일 같지만… 다스가 말하니 신빙성 있게 들렸다. 물론 내가 연기를 지금보다 훨씬 더 잘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때 나랑 얽혀 있다는 거 밝혀지면 너한테 좋을 게 하나도 없어.”
걸음을 뚝 멈추었다.
“왜?”
“나는 남자고, 이연숙 시장의 조카니까.”
다스의 이모가 권력은 있지만, 사실 이미지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보수 쪽에서 자잘한 비리도 몇 가지 있는 것 같았다. 인터넷에서 다스 이모를 욕하는 글도 봤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데?”
“무슨 상관이냐니.”
쏘아붙이는 내 말에 다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갑갑하다는 투였다.
“내가 너한테 걸림돌이 될 수 있단 말이야, 바보야.”
순간 얼어붙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넌 앞으로 계속 유명해질 거고, 그러려면 이미지 관리도 해야 한단 말이야. 나랑 같이 사는 건 거기에 도움 하나도 안 되고.”
“안 그래!”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스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화를 참기 힘들었다. 다스가 나한테 도움이 안 된다니. 말도 안 된다.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더라면 당장 얼굴에 주먹이라도 꽂고 개소리를 한다고 비웃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말을 꺼낸 사람이 다스 본인이라서 더 마음이 아팠다.
“나한테 뭐가 걸림돌 되고 뭐가 도움 될지는 내가 정할 거야. 그러니까 그딴 말 하지 마!”
“귤아.”
다가오려는 다스의 손을 쳐 냈다. 반사적으로 힘이 많이 들어가서 짝, 소리가 날 정도였기에 잠깐 움찔했지만 그렇다고 화를 풀 생각은 없었다.
“넌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 없어.”
마지막으로 쏘아붙이고 돌아섰다. 귤아, 하고 부르는 다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최대한 빨리 걸었다. 다행히도 다스는 따라오지 않았다.
다스랑 같이 사는 오피스텔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극단 연습실로 무작정 갔다. 연습이 없는 날이라 아무도 없었다. 나는 불 하나만 켜 놓고 한 면이 거울로 된 연습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다.
내 그림자가 거울에 어슴푸레하게 비쳤다. 가뜩이나 덩치도 작은데 웅크리고 있으니 내 모습이 보잘것없는 쥐새끼처럼 보였다.
내가 다스의 앞길을 막을 거라는 두려움은 늘 있었다. 다스는 뭘 해도 잘하고 멋있으니까. 나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게.
그런데 다스는 자기가 내 앞길을 막을 거라고 한다. 말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몹시 화가 났다. 다스가 스스로를 ‘걸림돌’이라고 한 게 너무너무 화가 났다.
아무도 다스를 욕할 수 없었다. 다스는 아직도 여전히 내 신이며 내 세상이었다. 다스를 욕하는 건 다스조차도 용서할 수 없었다.
“진짜… 집에 가면 혼내 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다스가 미웠다. 한동안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이렇게 미운 적은 없었다. 내 발을 부수고, 아무 데도 못 가도록 집에 가둬 놓았을 때도 말이다.
다스는 나에 대해서 뭐든 아니까, 이곳으로 곧 찾아올 것이다. 그전까지 내 화가 풀리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더 웅크렸다. 봄이라서 다행이었다. 연습실에 있어도 춥지가 않으니까.
“진짜 혼내 줄거야….”
다시 한번 다짐하며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
내 예상과 달리 다스는 저녁까지 나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 물건을 찾으러 온 연극단원 누나 둘이 잠깐 잠든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안 추워? 불이라도 켜지! 온열기도 창고에 있는데.”
“괜찮아요.”
웅크리고 잠든 꼴이 영 비루해 보였었는지, 누나들은 나를 동정 어린 눈으로 보았다.
“저녁은 먹었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 보니 밥때가 한참 지나 있었다. 배가 고픈 줄도 몰랐는데.
“일 없으면 우리랑 가자. 사 줄게.”
“맞아. 우리 뷔페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가자. 거기 맛있어.”
괜찮다고 사양해야 하는데 뷔페라는 말에 조금 혹했다. 배가 많이 고프기도 했다. 아침도 토스트밖에 안 먹었고,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교정을 거닐면서 먹은 음료와 아이스크림이 전부였으니.
“네, 갈래요. 저도 데리고 가 주세요.”
비장하게 말하자 누나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나를 데리고 나갔다.
누나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뷔페에서 맛있는 메뉴와 음식 위치를 알려 주었다. 어떻게 먹어야 배가 빨리 안 차고 많이 먹을 수 있는지 비법도 전수해 주었다.
“아, 진짜 행복하다. 이게 행복이지, 딴 게 행복이냐?”
“사진 찍자, 사진.”
예쁘게 플레이팅을 해 온 누나들이 부산을 떨며 사진을 찍어 댔다.
“규인아, 너도 찍어. 이거랑 같이 찍어. 여기 와인 놓고.”
누나들이 세팅까지 해 주는 바람에 나도 얼떨결에 휴대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찍었다.
“많이 먹어, 규인아. 천천히 먹고 또 담으러 같이 가자.”
“네.”
저녁이 될 때까지 찾아오지 않은 다스가 떠올라서 문득 울컥했다. 그리고 그가 미웠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 다스가 말을 나쁘게 한 거지.
누나들은 담아 온 음식을 먹으며 SNS에 사진을 올렸다. 내 아이디까지 태그해 주었다.
평소라면 그냥 밥이나 먹을 텐데, 오늘은 괜히 열도 받고 해서 나도 보란 듯이 사진을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다스가 내 계정을 팔로하고 있으니 아마 볼 것이다.
완전 맛있다!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