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님께서 소개해 주신 극단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실력자들이 많은 곳이라 했다.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대학생도 있었다. 생초보인 나를 사람들은 무척 잘 대해 줬다. 연기를 잘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기도 했다. 빈말일지 몰라도 기분은 좋았다.
당장 극단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일단은 기초를 쌓아야 할 것 같아서 학원부터 다니기로 했다. 다행히도 극단 단장님은 나를 언제든 환영할 테니 준비가 되면 바로 들어오라고 해 주셨다.
학원에서는 실전 연습이 본격적이었다. 내년 실기 시험을 대비해야 하니 이제는 슬슬 무대에도 익숙해져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창작 연극을 하나 맡아 발표를 준비했다. 실제로 무대에 올리는 공연이라 연습도 긴장되었다. 막상 대사를 읊기 시작하면 재미가 있어서 하나도 긴장이 안 되었지만 말이다.
연극 제목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헤어졌다가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에 재회한다는 내용이었다. 대본 리딩을 처음 한 날에는 눈물이 날 뻔했을 정도로 슬픈 이야기였다.
내가 맡은 역할은 조연으로, 남자주인공의 친구였다. 아주 중요한 조연은 아니지만 대사도 제법 많고 비중이 있는 편이었다.
학원에서 어느 정도 연습을 한 후에는 실제 극장에서 맞추어 보았다. 발표에 쓸 극장은 이전에 다스랑 연극을 봤던 극장보다 좀 더 작았고 더 깨끗했다. 무대에선 분 냄새 같은 것도 났다.
다스는 공부를 여전히 열심히 했다. 듣자 하니 학원에서 일 등까지 하고 전국에서 백 등인가 이백 등 안에도 들었다고 했다.
엄청 대단한 거 아닌가 싶은데 정작 다스 본인은 그게 아무것도 아닌 듯이 굴었다. 결코 허세 같지 않고 다스라서 멋있게만 보였다.
그는 내가 연극에서 조연을 맡았다고 하자 진심으로 기뻐했다. 레스토랑에 데려가 주기도 했다.
다스는 이전과 달랐다. 여전히 내게 검은 옷만 입게 하고, 앞머리를 기르게 하고 - 천만다행으로 연극할 때만은 잠깐 잘라도 된다고 했다 - 다른 사람들이랑 함부로 말을 못 섞게 하긴 했지만, 예전처럼 막무가내로 나를 가둬 두거나 무조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다.
‘늘 말하지만 학원에서 괴롭히는 놈 있으면 바로 말해. 알았지? 내가 곧바로 조져 줄 테니까.’
…그래도 안 변한 부분이 있어 다행이었다.
사실 그보다는 내가 더 변한 것 같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전보다 자신감도 생기고, 내가 생각해도 좀… 용감해졌다고 해야 할까.
“규인이 너는 연기할 때랑 평소랑 완전히 다른 것 같아.”
선생님 중 한 분이 쉬는 시간에 내게 말했다.
“제가…요?”
“평소엔 말도 적고 조용한 편이잖아. 그런데 연기하면 바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신기할 정도라니까.”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건 다들 그런 거 아니에요? 여, 연기할 때 집중하다 보면… 제가 갖고 있던 단점 같은 것도 다 잊어버리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연기할 때는 별로 부끄럽지가 않은 것 같아요.”
더듬더듬 말도 되지 않는 말을 늘어놓으니 선생님은 놀란 기색을 보였다. 하도 크게 놀라는 눈치여서 내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절대 아무나 그러진 않아. 나만 해도 무대 올라가면 긴장부터 되던데.”
이상했다. 다들 그런 줄 알았는데 말이다. 어쨌든 칭찬을 들으니 더 열심히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
다스와 내가 바쁜 만큼 계절도 빠르게 흘렀다. 날씨가 많이 추워져서 이제는 목도리 없이 나가기 힘들 정도였다.
12월이 되기 직전에 다스가 내게 하얀색 롱패딩을 사 줬다. 커플템으로 다스도 롱패딩을 입었으면 싶었는데, 그는 아무리 추워도 롱패딩을 입지 않았다. 작년에도 곧 얼어 죽을 것 같은 날씨에 짧은 점퍼만 입고 다녔다.
평소처럼 연습을 하고 돌아온 날이었다. 다스가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인데 이상하게 벨을 눌러도 답이 없었다.
‘뭐지?’
이상했다. 늦을 것 같으면 항상 먼저 메시지를 보내 놓는 그였는데 말이다.
“다스야.”
문을 닫고 들어온 오피스텔은 깜깜했다. 씻고 있어서 벨 소리를 못 들은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불을 켜고 현관에서 돌아선 나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다스가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어, 어….”
놀라서 바보처럼 어버버거리고만 있자 다스가 내 손에다 거대한 꽃다발을 턱, 안겨 주었다.
“생일 축하해, 귤아.”
이번에는 더 놀랐다. 그러니까 오늘이….
“네 생일도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모르고 있던 건 나였다. 생일을 챙긴 적이 없으니….
“12월 2일. 우리 귤이 태어난 날이잖아.”
여태 누가 내 생일을 챙겨 준 적은 없었다. 작년에는 다스를 만난 지 얼마 안 된 때여서 말하지 않았고, 그 전에는….
나를 낳아 준 사람한테서 사탄 취급을 받던 나는 단 한 번도 태어난 날을 축하받은 적이 없었다. 태어난 날은 내게 있어서 저주받은 날이나 마찬가지니까. 차라리 잊어버리고 싶기도 했지만, 우습게도 생일이 뭐라고 잊을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다스를, 내 첫사랑이자 내 애인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내가 왜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바로 오늘을 위해서가 아닐까. 이렇게 20년 동안 받지 못한 생일 대접을 한 번에 과분하게 받으려고 말이다.
꽃다발을 안겨 준 다스가 손을 뻗어 왔다. 밖에 오래 있던 탓인지 얼굴에 닿는 다스의 손길이 뜨거웠다.
“우리 귤이, 완전 울보네.”
어느새 젖은 내 뺨을 그가 닦아 주었다.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니 더 징징거리지 않으려고 울음을 꾹 참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웃으니까 못난이 같고 좋다.”
그의 못난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듣기에 좋을까. 나는 정말로 못난이처럼 눈을 휘며 히, 하고 웃었다.
눈물 젖은 얼굴을 닦아 준 다스는 내게 자그마한 상자를 주었다. 그가 주는 생일 선물이라니. 두근거리며 상자를 열어 보았다. 깨끗한 새 목걸이 줄에 일전에 다스가 맨 처음 주었던 반지가 달려 있었다.
“너 그거 계속 갖고 싶어 하는 눈치길래.”
다스는 직접 내게 다가와 목걸이를 채워 주었다. 반지가 쇄골 사이에 닿는 감촉이 든든했다. 이제 커플링도 있지만, 이건 다스가 준 첫 번째 반지니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백용태한테 잡혀 있을 때에도 이 반지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버틸 수 없었겠지.
“…고마워.”
작게 말하자 커다란 손이 뻗어와 내 정수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다스는 내 생일이라고 직접 케이크까지 굽고 온갖 요리를 다 했다. 하나같이 맛있었다. 손을 쓰는 일은 뭐든 잘하기 때문일까. 요리까지 잘하는 다스가 대단했다.
연어 스테이크와 오븐에 구워서 새콤한 소스를 바른 닭날개, 소고기 스튜, 아보카도와 러스크가 잔뜩 들어간 콥샐러드까지 먹으니 배가 터질 것 같은데 케이크는 꼭 먹어야겠기에 구태여 입에 넣었다. 그리고 맛을 보자마자 한 조각을 다 먹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맛있었기 때문이다.
“와, 뭐 넣은 거야? 딸기랑 생크림이랑….”
“생크림 아니고 커스터드 크림이야. 네가 그거 더 좋아하길래.”
다시 먹어 보니 생크림이랑 맛이 달랐다. 근처 가게에서 다스가 몇 번 사다줘서 먹었던 케이크에 발린 커스터드 크림 맛이었다. 그것보다 훨씬 더 맛있지만 말이다. 다시 포크로 케이크를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체하겠다. 천천히 먹어.”
“근데 너무 맛있어.”
뿌듯하게 웃는 다스는 평소보다 몇 배로 근사했다.
“잘 먹으니 보기는 좋네.”
케이크를 먹으면서 와인도 마셨다. 별로 도수가 높지 않은지 달달하고 잘 넘어갔다. 몇 잔을 마시자 기분이 좋아져서 자꾸 웃었다. 다스가 내 잔을 빼앗아 가려 하기에 억지로 버텼다.
다스도 술이 들어가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내게 해 준 적 없던 옛날 이야기를 했다.
“어릴 때, 위탁가정 전전할 때 말이야. 내 생일에는 일부러 졸라서 크게 해 달라고 했어. 안 되면 내 용돈이라도 모아서 애들이랑 피자집이나 치킨집 가고 그랬거든.”
어린 다스도 분명 지금처럼 아이들의 왕이었을 거다. 지금보다 작고 귀엽지만 그때도 카리스마는 있었겠지.
“애들하고 노는 게 좋아서?”
“뭐, 그런 것도 있긴 한데, 그것보단 다른 이유가 컸지.”
“어떤 거?”
다스가 내 잔에 물을 채워 주었다. 와인을 마시고 싶은데. 비죽거린 입술을 그가 손끝으로 꾹 눌렀다.
“그렇게라도 내가 하나의 사람이란 사실을 기억하려고. 태어난 날이 있고, 피상적인 친구나마 축하해 주는 자가 있는 멀쩡한 사람.”
나처럼, 어쩌면 나보다 힘들게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도 모를 다스인데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게 멋있고 부러웠다. 다스는 다스구나.
“3월 13일이면 이제 막 애들 얼굴 익힐 땐데도 꼭 열댓 명씩 데리고 생일파티를 했어. 그럼 내가 되게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졌거든.”
다스는 그냥 있어도 저절로 중요한 사람이 될 텐데. 이렇게 반짝반짝하고 멋있는 다스인데 말이다.
“언제 전학 갈지 모르는데도 꼭 애들 우르르 모아서 내 패거리 만든 것도 그거 때문이었고.”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나라도 다스를 따르는 패거리가 되었을 거다. 다스가 받아 줘야 했겠지만. 대장이 어울리는 다스. 아이들이 좋아하는 다스. 잘생기고 멋진 다스.
뒤늦게 취기가 몰려드는지 졸음이 쏟아졌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다스가 스툴을 끌고 내 옆으로 왔다. 그리고 내 얼굴을 자연스레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다스의 따뜻한 체온이 좋았다. 내 몸을 감싸는 다정한 손길도 좋았다. 철 같은 체취 역시 무척 좋았다.
“…다스야.”
“응, 귤아.”
나는 네가 너무너무 좋아. 말로 내뱉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다스는 이제 내가 자길 좋아한단 사실을 너무나 잘 아니까.
최고의 생일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아니, 오늘은 내 첫 번째 생일이었다. 내 세상이 준 나의 첫 생일.
***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에 맞춰서 발표도 크리스마스 근처에 맞춰서 했다. 한 달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연습을 완료하고 발표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선생님은 최선을 다할 것을 종용했다.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한 것 같아.”
어느 날 저녁 다스에게 말했다. 그는 요즘 연습으로 귀가 시간이 늦어진 나 때문에 기분이 좀 나쁜 듯했다.
“뭐가?”
공부 중이던 다스가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공부하느라 바쁠 텐데도 그는 매번 내가 말을 할 때마다 이렇게 반응해 주곤 했다. 좀 못된 말이지만 다스의 공부를 방해하는 게 조금 뿌듯해서 일부러 쓸데없이 말을 걸 때도 있었다.
나는 공부 중인 다스의 등 뒤로 가서 체중을 실으며 매달렸다. 다스가 익숙하게 상체를 숙이며 나를 받아 주었다.
“연극은 한 번 하고 사라지는 거잖아. 그래서 의미가 있는 거고.”
“그래? 나야 연극 잘 모르니까.”
다스의 귀에다 내 뺨을 붙이며 그가 푸는 문제집을 어깨너머로 구경했다. 엄청 어려워 보이는 수학 공식이 빽빽하게 차 있었다. 그는 나와 대화하면서도 샤프를 쓱쓱 움직여 순식간에 문제 하나를 풀어 나갔다.
“우리 귤이가 나보다 더 잘 알지. 어쨌든, 그래서?”
왼손으로 어깨에 매달린 내 팔을 토닥여 주며 다스가 말했다. 나도 사실 초짜인데, 다스는 연극에 있어서만은 이렇게 나를 전문가처럼 대해 주곤 했다.
“그런데 연극 배우들은 매번 최선을 다해야 하잖아. 가끔 영상으로 남길 때도 있지만….”
본격적으로 연극을 배우면서 나는 그게 제일 의문이었다. 왜 사라질 것에 이렇게 열심일까.
“가끔 그게 힘들지 않을까? 난 아직 전문 배우도 아니지만….”
“극장에서 연기하면 전문 배우지. 왜 그런 소리 해.”
…다스는 가끔 나를 과대평가해 주는 경향이 있다. 으쓱할 정도로 기분이 좋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 어쨌든, 매번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나중에… 그러니까….”
말을 잇지 못하고 얼버무리고 있자니 다스가 샤프를 놓고 나를 돌아봤다. 어깨를 안은 팔을 풀고 그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날씬하게 근육이 잡힌 다스의 허리에는 흉터가 많이 남았지만 이제 상처는 모두 아물었다.
다스가 나를 무릎에 앉히고 조곤조곤 읽듯이 얼굴을 마주 보았다. 문득 그가 로미오 같은 역할을 해도 어울리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럼 여자랑 키스신도 연기해야 하나…. 그럼 취소….
“그러니까, 우리 귤이가 매번 열심히 하다가 지치지는 않을까 걱정된다고?”
그는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능력까지 가졌다.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신기해서 눈을 빤히 마주하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고 저, 절대 연극 재미없다는 건 아냐!”
얼른 덧붙였다. 어떻게 다니게 된 학원인데. 물론 다스가 이전처럼 나를 가두거나 학원을 관두라고 하진 않을 것 같지만.
“알아, 알아. 무슨 말인지 알았어.”
그 마음까지 눈치를 챘는지 다스가 내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며 웃었다. 애 취급하는 게 기분 나쁠 만도 한데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귤아,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나? 너는 내가 처음으로 가진 내 거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토록 벅찬 말을.
“나는 내 거가 힘들지 않길 바라.”
다스의 손이 엉덩이를 살살 간질이듯 더듬다가 허리로 올라왔다. 반사적으로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참느라 혼났다.
“설령 지치거나 힘들면 그땐 나한테 말해. 꼭 말해야 돼.”
이번에는 좀 더 힘주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까. 알았지?”
다스의 그 말이 내게는 경전처럼 든든했다. 그에게 말하면 정말로 뭐든 다 해결될 것 같았다.
“지치면 어떻고, 힘들면 어때. 그럼 지치고 힘들어하면 되지. 그리고 괜찮아지면 그때 다시 하면 되고. 그치?”
“…어.”
그가 나보다 훨씬 더 어른스럽다는 사실을 이렇게 매번 깨닫게 된다. 가끔은 그 사실이 좀 억울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든든했다.
“네 욕망대로 살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 없어. 알잖아. 있으면 내가 죽여 버릴 거.”
다스답게 살벌한 말에 어깨를 장난스레 툭, 쳤다. 그가 내 허리를 가두듯이 끌어당기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내가 먼저 입을 맞추었다. 그의 공부를 방해하기는 싫었지만, 투정 부리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 다스를 만지고 느끼고 싶었다. 그것이 당장의 내 욕망이었다.
내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앞으로 연극을 여러 번 하다 보면 나는 어떻게 변할까. 수많은 인물을 하나씩 연기하다 보면 그것들은 쌓여서 내게 무엇으로 남을까.
장담할 수는 없어도 겁은 나지 않았다. 다스 말대로 지치거나 힘들어도 괜찮으니까. 쉬는 거랑 포기하는 건 다르단 사실을 이젠 나도 안다.
나를 만지는 다스의 손길에 응해 나도 그의 등을 매만졌다. 그는 나를 있는 힘껏 안아 주었다. 자신이 옆에 있단 사실을 일깨워 주듯이. 아직 어리기만 한 나라도 괜찮다는 듯이.
***
계속 다스 이모가 주시는 돈에 신세를 지기가 면구스러워서 아르바이트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학원을 다니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집에 와서 연습할 시간이 꽤 빠듯해서였다. 돈은 벌고 싶지만 그렇다고 연기를 뒷전으로 하고 싶진 않았다.
“그냥 집에서 연습하면 안 돼? 내가 너 연기하는 거 보고 관람료 줄게.”
“아, 무슨 관람료야.”
나는 진지하게 연습하는데 관람료 어쩌고 하는 말이 솔직히 조금 기분 나빴지만, 다스가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닐 테니까 티는 내지 않았다.
그래도 얼굴로 표가 다 났는지 다스가 등 뒤에서 나를 폭 껴안았다. 침대에 엎드려 휴대폰으로 아르바이트를 검색 중이던 나는 괜히 어깨를 털며 툴툴거렸다.
“무거워….”
“무거우라고 하는 거야.”
그래, 어련히 그렇겠지…. 등 위로 짓눌리는 몸무게를 고스란히 받으며 꿋꿋이 액정을 밀어 아르바이트 구인 공고를 확인하려 애썼다. 다스가 내 얼굴까지 짓누르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터다.
“그만 찾아보고 나랑 놀자.”
“아, 진짜 무거워…. 숨 막혀…!”
나보다 덩치도 훨씬 크면서 가슴으로 얼굴을 꽉꽉 짓누르니 정말로 숨이 막혔다. 내가 한참 끙끙거리고서야 다스는 나를 놔주었다.
“나 아르바이트 해도 된다고 했으면서….”
“응, 난 그냥 우리 귤이가 안 힘들면 좋겠어서 그러지.”
“안 힘든 일이 어디 있어…. 남의 돈 버는 건데….”
삐죽거리며 다시 화면을 확인하려는데 다스가 휴대폰을 빼앗아 갔다.
“너 맨날 집에 와서도 밤늦게까지 연기 연습하잖아. 근데 아르바이트할 시간이 어디 있어?”
뒤이은 물음에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계속 아르바이트 구직 사이트만 들여다보고 있었으니까.
“할 수 있는 걸로 찾으면 되지. 재택도 있고….”
“재택 아르바이트가 뭐 흔한 줄 아냐. 요즘은 그냥 알바도 구하기 힘든데.”
자꾸 딴죽 거는 다스가 미웠다. 그럼 어쩌란 건지. 계속 다스네 이모님한테 신세를 지라는 건지.
“아,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짓누르는 몸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욕실로 들어가려는데 뒤통수에 큰 통증과 함께 상체가 뒤로 젖혀졌다. 머리채가 잡힌 것이었다.
“까분다, 너.”
귓가에 다스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오랜만에 듣는 저음에 소름이 쭉 끼쳤다. 이번에는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다스가 작정하고 이렇게 나를 붙들면 절대 벗어날 수 없단 사실이야 익히 아니까.
“자꾸 까불면 알바고 뭐고 다 못 하게 할 거야.”
“…전엔 해도 된다고 했잖아….”
자신 없이 말하자 잡힌 머리채가 좀 더 뒤로 당겨졌다. 목을 젖힌 채 끅, 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다스의 얼굴이 젖힌 시야에 거꾸로 보였다. 조금 더 당겨지는 힘에 지레 겁을 먹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내 예상과 달리 이마에 다스의 입술 감촉이 닿았다.
“응. 농담이야.”
씩 웃는 얼굴을 보니 겨우 안심되었다. 이전처럼 또 멋대로 나를 아프게 하면 나도 안 참고 화를 내야지, 생각했었는데 다행이었다.
발표 일자가 가까워지면서 연습도 박차를 가했다. 나는 집에 와서도 계속 연습을 했고, 다스는 바쁜 내가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딱히 뭐라 하진 않았다. 사실 뭐라고 했어도 꿋꿋하게 연습했겠지만 말이다.
같은 반 애들은 나만큼이나 진지했다. 학생이고 대학이 목표이니 절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보다 몇 살 어리지만 늘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은 나한테도 자극이 되었다.
하루는 여자애 하나가 아파서 연습에 불참했다. 그래도 남은 사람들끼리는 연습을 계속해야 했기에 대타를 구해야 했다.
“어쩌지. 다른 반 애들도 지금 시간이 안 맞아서 못 오는데.”
“서윤이 네가 해.”
“내가 어떻게 해. 신 겹쳐서 안 돼.”
빠진 여자애가 맡은 인물은 채은이란 이름을 가진 20대 여자 캐릭터인데, 제법 비중이 있는 데다 다른 인물들과 주고받는 대사와 행동도 많아서 생략할 수도 없었다.
“선생님이 대신 하심 안 돼요?”
“난 인마, 너네 모니터링해야지.”
다들 고민하고 있던 중, 아이 하나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설마, 아니겠지. 눈길을 피하며 괜히 소품을 정리하는 척했지만 시선이 하나둘씩 늘어나는 게 느껴졌다.
“규인이가 하면 되겠다.”
…설마 설마 했는데, 선생님이 못을 박아 버렸다.
“제, 제가요?”
내가? 내가 대타를 한다고?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애들이 내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어서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 채은이랑 신 안 겹치는 사람 너밖에 없어.”
“맞아요. 오빤 채은이 대사랑 지문도 다 외우잖아요. 오빠가 채은이 해요.”
“규인이 형이 하는 걸로 낙점! 다시 연습해요!”
뭐라 반박할 새도 없이 우르르 쏟아지는 말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누구 한 명이라도 농담이라고 말해 주길 바랐는데 내 편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나, 나만 외운 거 아니고 다, 다들 외우고 있잖아….”
“엥? 뭔 소리예요, 오빠. 내 대사 외우기도 힘든데.”
“맞아요. 상대역도 아닌 남의 대사랑 지문까지 외우는 사람 여기에 형밖에 없어요.”
그럴 리가….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하지만….
“자, 그럼 다들 연습하자. 규인이는 이쪽으로 오고.”
정말 내가 대타로 정해지는 분위기라서 멍했다. 억울했다. 이럴 순 없는데…. 물론 내가 채은의 대사와 지문을 다 외우고 있긴 하지만, 대타도 어려울 건 없지만, 제일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잖아.
“저, 저는 남자인데요…!”
앞장서서 가는 선생님과 애들의 등에 대고 다급히 소리 질렀다. 모두 동시에 나를 돌아보는데 표정이 다 비슷했다. 그게 뭐가 문제냐는 표정이었다.
“규인아, 네 키랑 채은이 키랑 별로 차이도 안 나.”
선생님이 하는 말에 더 억울해졌다. 채은 역을 맡은 여자애가 키가 많이 크긴 하지만 그래도 10센티미터, 아니, 8…이나 7센티미터는 날 텐데….
다들 연습을 준비하기 시작했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선생님을 따라 소품실로 갔다. 아직도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나 말고 할 사람이 없다니 해야지 뭐.
“어디 보자, 의상이 여기 있었는데.”
선생님이 소품실을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했다. 의상이란 말에 마른침을 삼켰다.
“…의상이요?”
“응. 의상도 입고 해야지. 여태 계속 그렇게 했잖아.”
얼마 전부터 의상까지 입고 한 건 사실이지만….
“아, 여기 있다.”
선생님이 옷걸이에 걸린 옷을 한 벌 꺼냈다. 블라우스에 허벅지가 붙는 스커트였다.
“어. 스타킹이 없네. 내일 올 때 스타킹 사 와라. 검은색으로.”
“…네, 네?”
채은 역이 회사원이었단 사실을 그제야 기억해 냈다. H라인 스커트와 스타킹은 채은의 트레이드마크였고, 작중에서도 의상이 중요한 매개체로 쓰였다. 즉, 다시 말해 안 입겠다고 떼를 쓸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프로야. 내가 좋은 것만 할 수는 없어.’
아직… 완전히 프로는 아니지만 어쨌든 극단도 소개받았고 언젠간 프로가 될 거니까.
그리고 솔직히 여자들은 매일 신고 다니는데 내가 못 신을 이유도 없고 말이다. 오히려 내가 진짜 연기자가 된 것 같아서 좀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생각해 보면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들도 자기랑 다른 성별을 연기하기도 하니까. 이번이 좋은 기회일 것이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채은의 의상을 입고 나왔다. 아이들은 당연하게도 여자 옷을 입은 나를 보고 놀란 기색을 하거나 놀리지 않았다. 나도 진지하게 연기에 임했다.
“그깟 게 뭐라고 그렇게 목숨을 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