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묶기(2) (14/22)

퇴원하면서 내가 제일 걱정한 건 백용태보다 아버지였다. 어쨌거나 법적으로 아직은 부자 관계니까. 그 인간이 언제라도 다시 나를 찾아올 수 있다는 걱정에 시달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버지는 백용태 사건 관련 증인으로 불려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듣자 하니 백용태한테 돈도 좀 받아먹은 모양이었다. 같이 잡혀 들어갈 확률이 높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안도했다. 하지만 아주 약간의 측은함도 들었다.

다스의 이모가 소개해 준 사람이 찾아와서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몇 가지 물어보았다. 잘하면 접근 금지 신청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학대 근거가 있어야 한다기에 가장 최근에 - 다스의 집에 살 때 - 아버지가 찾아왔을 때의 이야기와 어릴 때 이야기를 기억나는 대로 해야 했는데, 어릴 때 학대받던 이야기를 내 입으로 하는 건 너무 어려웠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러나 다스가 매번 내 곁을 지켜 주었기에 그나마 조금씩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험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테이블 아래에서 잡은 다스의 손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처럼 단단한, 나를 지켜 줄 것 같은 손마디마다 나는 치유 받았다. 십 년이 지난 오랜 상처들까지.

그래서 손을 꼭 잡은 채 예전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다스를 모르던 시절의 어린 나까지 다스를 만나 구원받는 것만 같았다.

다스는 자기가 다닐 학원을 알아보면서 내가 다닐 연기 학원도 같이 알아봐 주었다. 다행히도 무경력자를 위한 취미반을 운영하는 곳이 있다고 했다.

전화로 상담을 하고 나서 다스랑 같이 학원에 찾아갔다. 직원은 제법 친절했다. 내가 대학도 안 다니고 연기에 대해 모른다고 해도 전혀 무시하거나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취미반으로 들어오시면 연기 기초부터 배우실 수 있어요. 딕션 연습부터 차근차근, 놀이처럼 재미있게 하니까 부담 없으실 거예요. 나이 지긋하신 분들도 많이들 들으시거든요.”

진지하게 설명을 들으며 직원이 내민 팸플릿을 다스와 함께 들여다보았다. ‘취미반’은 팸플릿의 가장 뒤쪽에 있었다. 맨 앞을 차지한 것은 ‘입시반’이었다.

“가격은 여기 참고하시면 되구요, 프로모션은 6개월 선결제부터….”

“저….”

조심스레 말을 끊자 직원과 다스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취미반 말고 입시반으로 상담받고 싶어요.”

이전이라면 다스를 바라보며 허락을 구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직원을 똑바로 마주했다. 이건 다스의 결정이 아니라 내 결정이니까.

학원 밖에는 은행잎이 그득하게 쏟아져 길이 온통 황금빛이었다. 다스가 내 야상 점퍼 깃을 여며 주었다. 학원을 보러 가기 전에 다스가 내게 사 준 것이었다. 날이 제법 쌀쌀한 탓에 다스의 스카쟌도 제법 두꺼워졌다.

“코트 하나 사자. 가을용으로.”

“이것만 있어도 되는데.”

“하나는 더 있어야지. 이건 너무 얇아. 초겨울에도 입을 수 있는 걸로 하나 사러 가자. 근처에 백화점 있더라.”

다스가 손을 덥석 쥐고 나를 이끌었다. 나는 행인들의 눈치를 보았지만 우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적이 드물고 늘 어두운 연옥동과 달리 서울은 환하고 시끄러웠으며, 우리는 그곳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사실이 묘하게 나를 안심시켰다. 평범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출근하고 하교하는 사람들 사이의 행인 1, 2가 된 것 같아서.

그러니 우리에겐 주인공이 겪을 버거운 고난도, 시련도 없을 것 같아서.

발이 아직 아팠지만 걸을 만했다. 의사는 말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평생 동안 조금 절지도 모른단 예감이 들었다. 그냥 내 몸이라서 알 수 있는 느낌이랄까.

뭐 상관은 없었다. 연기를 하게 되면 단점이 되지 않을까 싶어 좀 걱정되긴 하지만, 내가 춤을 출 것도 아니니까….

백화점 문이 그렇게 큰 줄 나는 처음 알았다. 무게도 어마어마했다. 태어나 처음 와 보는 백화점의 1층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다스의 지갑을 샀던 연옥동 쇼핑몰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환한 조명에 나도 모르게 살짝 주눅이 들었다.

다스가 내 손을 꾹 쥐고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다스가 내 한 칸 아래에 탔기에 등 뒤에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슬쩍 돌아보자 다스와 눈이 마주쳤다. 키 차이가 워낙 많이 나는 터라 그가 밑에 섰는데도 눈높이가 나보다 더 위에 있었다. …스무 살이면 이제 키 더 안 크겠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귤아.”

“어?”

너무 빤히 쳐다봤나.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일부러 덤덤하게 굴었으나 다스의 표정이 묘하게 의미심장했다.

“넌 무슨 생각 하는지 얼굴로 다 보여.”

“…내가 무슨 생각 했는데?”

이전 같았으면 움찔하고 말았을 텐데, 오늘은 괜히 용기가 생겨서 물어보았다. 다스가 내 코를 조금 세게 쥐었다가 놓았다.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나보다 눈높이가 낮아서 불만이었잖아.”

…진짜 다스한테 무슨 신기 같은 거 있는 거 아닌가. 입을 딱 벌리고 있는데 그가 한쪽 발만 아래로 한 칸 더 물렸다. 그제야 키가 비슷해졌다.

“자, 이러면 되지?”

거리는 그대로 둔 채 키만 조금 낮춘 다스가 씩 웃어 보였다. 머리칼을 깨끗하게 넘긴 근사한 이마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살짝 둘러본 뒤, 앞머리로 덮인 내 이마로 그의 이마를 쿵, 하고 살짝 부딪쳤다.

다스에게 이런 장난을 친 건 처음이라 나 스스로도 놀랐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이마만 부딪치고 얼른 돌아서려는데 그가 내 옷깃을 꾹 붙들었다.

“너, 복수한다.”

낮게 읊조린 그 말이, 똑같은 눈높이인데도 나를 내려다보는 듯한 그 시선이 미치게 섹시해서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뒤늦게 뒤를 돌아보며 헛기침을 했다. 밖에서 함부로 발기하는 변태가 될 뻔했단 사실은 다스가 부디 모르길 바랐다.

몇 층을 올라가자 우리가 입을 만한 옷들이 보였다.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다스는 능숙하게 이 옷 저 옷을 살피며 옷감을 만져 보기도 했다.

“입시 학원 나랑 같이 다닐 거지?”

그가 무심한 투로 물었다. 손으로는 옆에 놓인 코트 자락을 만지고 있었다. 마네킹 발치에 붙어 있는 금속 가격표를 흘끔 내려다보았다. 어마어마한 가격에 입이 썼다.

다스가 직원에게 “입어 봐도 되죠?” 물으니 직원이 행어에서 똑같이 생긴 것을 갖다주었다. 코트를 받아 내게 입히려던 다스가 뭔가 불만스러운 듯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펼쳤던 옷자락을 도로 접었다.

“대답해야지, 귤아.”

입술을 우물거리며 한참 뜸을 들이다 겨우 말문을 텄다.

“나… 연기 배우면서 아르바이트부터 하고 싶은데.”

다스가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다시 코트를 펼쳐 내게 입혀 주었다. 팔을 꿰고 거울을 마주했다. 살짝 오버 핏인 검은색 코트는 제법 예뻤다. 거울로 내 뒤에 있는 다스를 흘끔 보았다. 표정이 나쁘지는 않았다.

“연기 학원도 학원비 다 너한테서 받아야 하는데… 입시 학원비라도 내가 벌고 싶어서.”

“이리 봐 봐. 앞에 보자.”

그가 단추를 여며 주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팔을 벌리거나 움직여 보게 했다.

“괜찮네. 역시 넌 검은색이 어울려.”

“…이거 불편해. 팔도 너무 크고.”

그가 여며 준 단추를 슬그머니 풀었다. 아무리 다스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지만 이 정도 가격대의 옷을 덥석 받을 수는 없었다.

“그럼 다른 거 보러 가자.”

그가 옆 가게의 코트를 하나씩 들추었지만 내 눈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학원 생각뿐이었다.

“아르바이트도… 네가 하라는 것만 할게.”

자신 없이 덧붙였다. 아직까지도 나는 다스의 허락을 구해야 아르바이트든 뭐든 할 수 있는 신세라는 게 괜히 실감 났다. 싫지는 않았다. 다만 욕심이 났다. 좀 더 나아가고 싶다는 욕심. 그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 그리고 우리 사이가 지금보다 더 깊어지면 좋겠다는 욕심.

“귤아, 전에 말했던 거 기억나?”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코앞에 있는 다스는 백화점과 어울리는 아이였다. 반짝반짝하고, 멋있고, 아름다웠다. 이 화려한 조명들도 다스를 감추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나는 이토록 아름다운 홍다환의 옆에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의 바닥에 있는 그림자가 아니라.

“어떤 거…?”

“처음에는 네가 내 옆에 있기만 하면 사지 중에 하나 없어도… 혹은 망가진 모습이라도 상관없었는데, 이제는 완벽한 네가 갖고 싶어서 욕심이 난다던 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귤아, 나는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주고 싶어.”

다스가 들고 있던 코트를 도로 내려놓았다. 별것 아닌 것 같은 그 동작이 내게 묘한 위안을 주었다. 그는 다른 코트를 고르는 대신 내 손을 쥐고 어딘가로 걸었다.

매끈한 백화점 바닥을 조금 걷다 보니 매장이 없이 앉을 수 있는 벤치 같은 곳이 있었다. 인적도 드물었다. 나란히 앉자 다스가 한쪽 다리를 접으며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런데 내 옆에 묶어 두고 싶기도 해. 아무것도 못 하게, 여전히 나 없이 화장실도 못 가는 상태로 평생 가둬 두고 싶어.”

다스의 눈빛이 결연했다. 그가 내게 하는 말은 모두 진실이고 허세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지금 하는 말도 모두 진담일 것이다.

그의 손이 뻗어 와 내 머리칼을 살짝 쓸어 넘겼다. 손끝의 온기가 지독히도 달았다. 내 얼굴에 닿은 그의 손을 조심스레 겹쳐 쥐었다.

“내가… 네 옆에 꼭 붙어 있으면 되잖아. 그럼 억지로 가둘 필요 없잖아.”

다스는 은근히 바보 같은 면이 있다. 나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가끔은 나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너 없이 못 사는데, 내가 어떻게 너를 떠나.”

그리고 나는 그런 다스가 좋았다.

그는 알까. 이따금 나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그가 좋아서, 종종 나 자신이 찢어지는 듯한 기분마저 느낀다는 사실을.

“네가 말했잖아. 나는 너 없이 못 산다고. 네가….”

말을 하다 보니 갑자기 뭔가가 북받쳐 올라 입을 다물었다. 백용태는 이제 우리를 괴롭힐 수 없고 다스와 나는 무사하지만, 이제 다스는 학원에 다니며 대학생이 될 준비를 할 테지만.

그렇지만 내게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다스 말고는.

다스가 내 팔을 당겨 안았다. 그의 체취는 낯설고 화려한 이곳에서 나를 보듬듯이 위로했다.

“너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귤아.”

속삭이는 듯이 귀에 닿는 다스의 목소리 역시 위로하는 듯했다. 어쩐지 다스가 슬퍼하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불안하거나 걱정되지는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약간의 용기가 샘솟았다.

나는 다스를 마주 껴안았다. 팔에 힘을 꽉 주었다. 보잘것없는 귤 한 개가 낼 수 있는 용기 일 뿐이지만 내가 다스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이니 부끄럽지 않았다.

“다스야, 난 네가 나를 어떻게 하든 괜찮아.”

내 다른 쪽 발도 부숴 버리고, 손도 모조리 부숴 버리더라도 괜찮았다. 목숨을 가져가도 괜찮았다. 진심이었다.

“그러니까 다스 너도 괜찮았음 좋겠어.”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너도 괜찮았으면 좋겠다고.

“같이… 살자고 했잖아, 나한테.”

나를 구하러 왔을 때 했던 그 말이 내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너는 알까.

“그러니까 같이 살자.”

다스의 어깨를 꽉 쥐었다. 나를 안은 내 세상이 내게 기대길 바랐다. 여태껏 내가 그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의 바람은 기도처럼 소소했지만 다스에게 정말로 닿기라도 했는지 그 역시 나를 마주 꽉 안았다. 누가 볼지도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언제나처럼 나를 안아 주는 다스만으로 충분하니까. 내 세상은 내 품에 다 있으니까.

***

다스가 입시 학원에 가는 동안 나는 연기 학원에 가기로 했다. 다스는 여전히 불만인 것처럼 보였으나 다행히도 학원에 가지 말라는 말은 않았다.

학원에 가기 전날부터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낮부터 잔뜩 들떠서는 아무것도 못 했다.

“유명한 연극부터 먼저 연습하겠지? 아님 이론 같은 것부터 배우려나? 딕션 연습도 한다고 했으니까 처음엔 대본 리딩 위주로 할지도 모르겠다.”

다스가 사 온 옷을 - 그래 봤자 다 비슷해 보이는 시커먼 색이었다 - 시키는 대로 하나씩 입어 보며 중얼거렸다. 소매가 좀 긴 맨투맨을 그가 걷어 주었다.

“그렇게 신나?”

“응. 완전.”

얼른 대답하자 다스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며 불만을 담아냈다. 내가 또 뭘 잘못 말했나, 눈치를 보는데 그가 내 뺨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가 놓았다.

“귀여워서 봐준다, 귀여워서.”

…맨날 못생겼다고 할 땐 언제고, 이젠 또 귀엽댄다. 어쨌거나 다스한테서 칭찬을 듣는 일은 드무니 기분이 좋았다.

“내가 말한 거, 다시 읊어 봐.”

“…누가 먼저 말 걸어도 단답으로 대꾸하고, 먼저 말 걸지 말기.”

“그리고?”

입고 있던 검은 맨투맨이 벗겨지고 이번에는 스웨터가 입혀졌다. 역시 검은색이었다.

“수업에 꼭 필요한 거 아니면 사람들 쳐다보지 않기. 그리고… 절대 안 웃기.”

“그래, 착하네. 하나라도 어기면 손마디 부러뜨릴 거야.”

내가 다스의 말을 안 들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아니, 있기야 하지만 별로 없는데 꼭 이렇게 괜히 살벌하게 말한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비죽거렸음은 그가 내 입술을 손끝으로 딱, 때리고서야 깨달았다.

“너, 요즘 내가 많이 봐주니까 살 만하지?”

“아, 아니야.”

제법 아프게 맞은 터라 조금 억울했다. 입술을 문지르고 있자니 다스가 손을 내리게 했다. 이번에 입은 스웨터는 목이 조금 헐렁해서 쇄골이 반쯤 드러나는 스타일이었다. 내 모습을 본 다스가 불만스레 얼굴을 구겼다.

“…이건 안 되겠다. 버리자.”

“버리자고?”

방금 산 옷인데…. 하여튼 다스는 돈 아까운 줄을 모른다. 앞으로 지내면서 내가 조금씩 알려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입으면 되잖아. 네가 입어 봐.”

“작을 것 같은데.”

입고 있던 것을 벗어 다스에게 건넸다. 다스는 스웨터 같은 것을 잘 입지 않았다. 겨울에도 맨투맨이나 티셔츠를 입고 다녔다. 추위를 잘 안 타기도 하고 말이다.

다스가 마지못해 스웨터를 입었다. 내가 입었을 때는 소매도 길고 품이 한참 남는 오버핏이었는데, 다스가 입으니 딱 맞았다.

“어때?”

다스가 팔을 벌려 보였다. 나는 그의 모습을 진지하게 감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끝내주게 섹시했다. 내가 입었을 때와 달리 몸에 착 붙은 스웨터는 다스의 몸 선을 그대로 드러냈다. 날렵하고 잘빠진 몸매는 스웨터로도 가릴 수가 없었다.

내 표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길 바라며 고민하는 척 슬그머니 입을 가렸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다행히 들키지 않은 듯했다.

“이상해?”

다스가 물었다. 나는 그의 모습을 빠르게 시선으로 훑으며 좀 더 감상했다. 단단한 가슴팍과 두꺼운 흉통에 비해 날렵한 옆구리, 그리고 잘록한 허리와 복근까지.

“…그냥 버리자.”

“그치? 옷 받아 주는 시설 같은 곳 찾아봐야겠다. 이참에 정리 좀 하게.”

솔직히 좀 아까웠지만, 아니, 아주아주 많이 아까웠지만 저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다스가 스웨터를 벗어 개는 동안 나는 나만 아는 다스의 모습이 더 많아지길 바랐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 세상에서 나만 아는 다스의 모습들 말이다.

***

저녁을 배부르게 먹고 따뜻한 물에 다스와 함께 몸을 담갔다. 이전 집에도 욕조는 있었지만 여기는 거기보다 더 크고 욕실도 깨끗했다.

심지어 창문도 있었다. 8차선 도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문이었다. 맞은편에는 건물이 없어서 창문을 활짝 열고 목욕을 해도 괜찮았다.

다스는 욕조에 거품을 잔뜩 풀었다. 오랜만에 같이 목욕하는 거라 나도 들떴다.

“내일은 우리 귤이 중요한 날인데, 목욕재계해야지.”

목욕재계라는 말이 괜히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넓은 욕조에 마주 보고 앉았다. 거품이 간질간질하게 살갗을 간질였다.

다스의 몸에는 흉터가 그득했다. 이전보다 훨씬 많아진 흉터는 가뜩이나 더 마른 몸을 섹시하게 보이게 했다. 하지만 마냥 넋 놓고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나 때문에 생긴 상처이니.

“내 몸이 그렇게 좋아?”

시선이 너무 빤했는지 결국 다스가 물었다.

“만지고 싶으면 만져.”

…만지고 싶단 생각까진 안 했는데. 하지만 다스가 내 손을 제 몸 쪽으로 이끄는 것을 구태여 피하지는 않았다.

다스의 상처 많은 배와 가슴을 살짝 더듬었다. 흉터의 요철이 손끝에 느껴졌다. 내가 모를 때 생겼을 그의 상처가 가슴 아팠다.

“왜 그렇게 봐. 이제 다 나은 상처인데.”

“그래도… 어깨는 아직 물리 치료 받아야 되잖아. 그 새끼 때문에….”

백용태가 총으로 쏜 어깨는 상태가 제일 심각했다. 다친 직후에는 팔을 들어 올리지도 못할 정도였으니. 오랫동안 재활 훈련을 해야 된다는 말에 다스보다 내가 더 속상해했다.

“우리 귤이, 그래서 슬퍼?”

묻는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슬픈 건 아니었다.

“그냥 화나. 나 때문에….”

다스가 키스로 내 말을 끊었다. 짧은 입맞춤이 떨어지고 내 코앞으로 바짝 다가온 잘난 얼굴이 시야 가득 넘치게 들어왔다.

“너 때문이라고 하지 마.”

그가 다시 내게 입을 맞추었다. 쪽,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가 이번에는 좀 더 길게, 그리고 또 좀 더 길게, 점점 더 입맞춤이 짙어졌다. 입술 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야한 소리가 숨소리와 함께 욕실을 그득하게 채웠다. 한참 혀가 섞여 야릇해지고서야 다스가 입술을 떼어 냈다.

“말했잖아, 네 목숨은 내 거라고. 그래서 그런 거야.”

이번에는 그가 내 턱과 목에 입술을 대었다. 쪽, 쪽, 살을 빨아 댈 때마다 진득한 쾌감이 올라왔다.

“넌 죽어도 내 손에서만 죽을 수 있어, 귤아….”

“으, 응….”

목에 닿는 목소리도 입술만큼이나 자극적이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물이 작게 찰랑거렸다. 가슴까지 차오른 물 때문인지, 혹은 방금 빼앗긴 호흡 때문인지 숨이 몹시 찼다.

목에 닿은 다스의 입술이 점점 더 짙어졌다. 입술이 닿는 곳마다 자극적일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아플 정도로 빨아 대는 감각에 아래쪽이 벌써 반응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스의 것도 딱딱해져서 내 허벅지를 찔러 대었다.

그가 내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왔다. 꾹 닫힌 아래 구멍에 다스의 중지가 자리 잡았다. 그대로 부드럽게 휘젓자 고집스럽던 구멍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다스는 내 목과 어깨를 쪽쪽 빨아 대며 손가락을 공들여 움직였다. 조금씩 깊이 들어온 손가락은 익숙하게 내 안쪽을 더듬었다.

“흐, 으응….”

꼼꼼하게 내벽을 짚어 나가던 손끝이 어느 곳을 꾸욱, 눌렀다.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

“응, 병원에서 할 때도 여기 좋아하더라.”

“아, 흣….”

다스는 집요하게 그곳을 꾹꾹 눌러 댔다. 그때마다 감당하기 힘든 쾌감이 머리끝까지 찌릿하게 퍼졌다.

“좋아?”

“으, 응, 좋, 아….”

알면서 구태여 묻는 다스가 얄미웠다. 이러다가 또 좆을 넣기도 전에 싸면 어쩐다. 고민이 무색하게 내 성기는 사정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좋아?”

“많이, 흑, 아…!”

“자세히 말해 봐.”

“뭐, 뭘?”

이걸 어떻게 자세히 말하란 거야. 황당하기도 한데 꾹꾹 눌러 대는 손가락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서.”

다스가 보채며 다시 그곳을 꾹, 눌렀다. 전기 같은 쾌감이 찌릿하게 번졌다. 동시에 내 페니스 끝이 경련하듯 떨리더니 물에 희뿌연 것이 번졌다. 사정한 것이었다.

“미, 미칠 것, 같, 이 좋아….”

사정하면서 겨우 내뱉은 말이 원하는 대답이 되었는지 그가 아래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그리고 내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손가락으로 이미 여러 번 자극당한 아래쪽에 그의 페니스가 닿았다.

다스는 천천히 공들여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귀두만 들어왔을 뿐인데 압박감에 숨이 턱 막혔다. 그가 허리를 조금씩 움직였다.

“이건? 이건 어때? 더 좋아?”

“으, 응, 좋아. 더 좋아.”

움직일 때마다 쾌감이 저릿하게 번졌다. 머리가 띵할 정도였다. 찰박거리는 물소리마저 자극적이었다.

조금씩 더 깊이 들어올 때마다 지독한 쾌감이 온몸에 번졌다. 욕실에 가득 찬 습기가 숨을 쉴 때마다 폐부를 그득하게 채웠다.

“귤이 너는 역시 내 좆을 제일 좋아하더라.”

다소 천박한 말이었으나 반박할 수 없었다. 사실이니까. 손가락 같은 것보다 다스의 좆이 좋았다. 물론 다스의 손가락이 싫다는 건 아니지만.

헐떡거리며 그에게 매달렸다. 물속이라 그런지 마주 앉은 자세가 평소보다 조금 더 버거웠다. 다스가 내 허리를 양손으로 쥐고 부드럽게 움직이게 했다.

“으, 으응….”

허리를 당겼다가 미는 동작 따라 그의 페니스가 안을 드나드는 것이 느껴졌다. 배 속이 그의 것으로 꽉 찬 것 같았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물소리가 찰박찰박 귓가를 간질였다. 가슴까지 차오른 물이 거품과 함께 튀어 얼굴에 묻었다.

움직임이 조금씩 격해졌다. 반쯤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던 페니스도 어느새 거의 다 들어온 것 같았다.

“하아….”

다스의 숨소리가 미치게 섹시했다. 욕실 안에서 공명하는 것을 들으니 평소보다 더 야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발기했다. 다스의 숨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몇 번은 쌀 수 있을 듯했다.

문득 좀 전에 검은 스웨터를 입은 그의 모습을 떠올리자 갑자기 몇 배로 더 흥분되었다. 다스가 돌연 내 턱을 잡아챘다.

“무슨 생각 했어? 후, 갑자기, 끊어 먹을 듯이 조이는데.”

“아, 아니야.”

하여튼 귀신이다, 귀신. 시침을 떼고 눈을 꾹 감는데 다스가 동작을 멈췄다.

“야한 생각 했어?”

아무 말도 못 하고 구멍만 꾹꾹 조였다. 빨리 박아 주었으면 싶기만 했다. 내 심정을 모를 리 없는 다스가 약이라도 올리듯이 아주 느리게 페니스를 살짝 빼어 냈다.

“우리 귤이, 야한 짓 하면서도 야한 생각 해? 대박이네.”

“아니라니까…!”

나도 모르게 바락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벗은 모습도 아니고 다스의 입은 모습을 떠올리며 흥분했단 사실은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다스가 내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곤 이마에 쪽, 소리 내어 입을 맞췄다. 멈춰 있던 페니스가 조금씩 다시 움직였다.

“걱정 마. 후, 네가 뭔 생각 하든… 내가 하는 생각들보단 덜할 테니까.”

다스의 양손에 붙들린 허리가 앞뒤로 움직였다. 그때마다 페니스가 깊숙이 들어갔다 나오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다스가 손으로 꾹꾹 누르던 곳에 페니스가 스쳤는지 기분이 미치게 좋았다.

“아, 아! 흐으, 아!”

내 신음이 욕실을 진득하게 울렸다. 내 귀로 듣는 내 소리가 부끄러워 또 안쪽을 조금 조였다.

“하아, 씨발, 진짜 끊어 먹을 것 같네….”

돌연 들리는 다스의 욕에 조금 겁을 먹었지만 그도 잠시, 이내 빠르게 몰아치는 동작에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졌다.

“아, 으, 아아! 하아!”

욕조 물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밖으로 넘쳤다. 다스의 움직임 따라 내 몸도 멋대로 흔들렸다. 이대로 물속에 녹아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다스의 목에 팔을 감고 바짝 매달렸다.

안쪽 깊숙이 들어온 페니스는 빠져나갈 때에도 내벽을 긁듯이 스쳤다. 참기 힘든 쾌감에 물속으로 한쪽 손을 넣었다. 내 페니스를 쥐려 하자, 다스가 내 손목을 틀어쥐었다.

“안 돼. 내 좆으로만 가.”

아쉽지만 다스의 좆으로만 간다는 말이 야해서 꾹 참았다. 머리끝까지 바짝 독이 오르듯 차오른 쾌감은 그의 움직임 몇 번이면 다시 절정을 맞이할 것 같았다.

다시 사정할 것 같다 싶을 때였다. 그가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흐, 으응…?”

안달이 나서 구멍을 꾹꾹 조이며 그와 눈을 마주했다. 다스의 이마는 물에 젖었는데도 땀이 송골송골 맺힌 게 티가 났다.

“네가 움직여 봐.”

다스의 말에 조금 망설이다 허리를 어설프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앞뒤로 움직이는데도 다스가 할 때보다 훨씬 감각이 덜했다. 물속이라서 더 움직이기 힘든 것도 있었다.

물을 찰박거리며 애써 엉덩이를 흔들고 있자니 다스가 내 박자에 맞춰서 허리를 조금씩 마주 움직였다. 툭, 툭, 무심하게 올려치는 것 같은데도 물속에서의 동작은 훨씬 더 크게 다가오는 듯했다.

몸은 잔뜩 달아올라서 빨리 다시 절정을 맞고 싶은데, 물에서 허리를 마음대로 흔드는 게 힘들기도 하고 다스가 움직여 주는 것만큼 좋지도 않아 점점 약이 올랐다.

와중에도 페니스는 잔뜩 발기해서는 연신 그의 복근 위에 부딪쳤다. 단단한 근육이 귀두 끝에 닿는 느낌도 꽤 자극적이었다.

몸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는데 절정은 여전히 요원해서 계속 안달이 났다. 페니스가 아플 지경이었다. 눈을 꾹 감고 있는 힘껏 허리를 움직였다. 이미 한 번 사정한 탓인지 몸은 금세 지쳤다. 얼마 흔들지도 못하고 헐떡거리는 내가 창피했다.

다스의 목에 팔을 감고 숨을 골랐다. 정액을 쏟아 내지 못한 아래쪽은 여전히 빳빳하게 서서 내가 끌어내지 못하는 절정을 기다렸다.

“왜? 별로야?”

다스가 물었다. 나는 그에게 매달린 채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시선을 어디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참 뜸을 들이다 겨우 용기를 내었다.

“네가, 흣, 우, 움직여, 줘.”

다스의 입술이 섹시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뒤이어 그가 허리를 빠르게 올려 치기 시작했다. 내가 움직일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기분 좋았다. 몸 안에 들어온 페니스가 어느 지점을 자꾸 스쳐 댔다. 아마 아까 손가락으로 건들던 곳 같았다.

“아, 흣, 아! 아아!”

내내 버티고 있던 페니스에서 마침내 정액이 쏟아졌다. 쾌감이 머리를 연달아 때리는 듯했다.

다스는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욕조 물이 다 넘치고 내 몸이 종잇장처럼 흔들릴 정도였다. 나는 곧바로 다시 한번 절정을 맞이했다. 몸 안에 들어온 그의 것을 조이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으, 아으….”

내가 듣기에도 이상한 소리가 목에서 흘러나왔다. 내가 힘겹게 헐떡거리는 것을 보면서도 다스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후, 귤아.”

“으, 으으.”

“앞으로도, 하고 싶은 거, 나한테 원하는 거, 그냥 다 이야기해. 하아, 알았어?”

다스의 물음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이 반쯤은 지워진 듯했다. 연이어 절정을 맞은 아래쪽은 얼얼하고 뻣뻣했다. 구멍의 감각만은 바짝 달아올라 다스가 드나드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물이 식을 때가 지난 것도 같은데 우리 둘의 몸이 하도 뜨거워서 춥지도 않았다. 오히려 땀이 배어났다. 그리고 팔다리가 몹시 뻐근했다.

더는 못 하겠다 싶을 때에 다스의 것이 빠져나갔다. 드디어 끝났나, 하지만 다스가 사정을 안 했는데…. 생각하던 차에 그가 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욕조와 맞닿은 창문을 짚고 서게 했다.

뒤이어 엉덩이 사이로 그의 페니스가 다시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이미 여러 번 들쑤셔진 구멍은 그의 성기를 쉽게 받아들였으나 나는 움츠렸다.

“바, 밖에서 보이면 어떡해….”

“안 보여. 아무것도 없잖아.”

이곳은 30층이 넘는 높이에다 앞에는 건물도 없으니 다스의 말대로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탁 트인 창문에 붙어서 알몸을 드러내고 있단 사실이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스가 허리를 빠르게 움직일 때마다 몸이 창문에 부딪칠 기세로 거세게 흔들렸다. 유리에 우리 둘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 그만, 그… 만….”

“왜, 너 어차피 오늘 잠도 못 잘 텐데.”

애원했더니 생각도 못 한 대답이 돌아온다. 온몸에 힘이 다 빠져 유리를 짚은 채 헐떡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다스는 내 허리를 붙든 채로 빠르게 움직였다. 창문에 내 페니스가 연신 부딪쳤다.

“하아, 으, 으….”

그가 내 목을 집요하게 물고 빨아 댔다. 내일 수업 때 입술로 빤 자국이 보이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파뜩 들었다. 목이 가려지는 옷은 주지도 않았으면서.

“모, 목에 하면….”

옷 입어도 다 보일 텐데. 뒤이은 말은 내뱉지 못했다. 그가 다시 허리를 빠르게 움직여서였다.

“목에 하면, 뭐?”

“흐으, 아! 아!”

목뿐만 아니라 어깨와 쇄골 위쪽까지 입술이 닿았다. 어찌나 물고 빨아 대는지 따가울 정도였다. 분명히 자국으로 엉망이 됐을 텐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자국이 남길 바라는 마음이 자국을 숨길 것에 대한 걱정보다 더 컸다. 정말 갈수록 더 변태가 되어가는 걸까. 하지만 다스의 흔적이 내 몸에 남는 게 좋았다.

다스는 집요했다. 내 목에 제 입술이 닿지 않은 곳이 없게 하려는 듯이 내 살을 꼼꼼하게 탐했다. 꼭 짐승에게 먹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앞 시야가 유리로 온전히 트여 있으니 꼭 허공에서 섹스하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훤한 창문을 앞에 두고 다스에게 박히고 있단 사실을 실감하자 나도 모르게 안쪽을 더 조였다. 그에 응하듯 다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나가는 동작을 더 크게 했다. 페니스가 유리에 부딪치며 프리컴으로 투명한 자국을 그려 댔다.

지독한 쾌감을 견디기 어려워 손끝을 갉작거렸지만 유리는 잡을 것이 없었고 우리 둘의 입김이 번져서 자꾸 미끄러지기만 했다. 내가 만든 입김이 코앞을 뿌옇게 만들었다.

“흡….”

쏟아지는 쾌감과 함께 다시 절정을 맞았다. 유리 위에 희뿌연 정액이 마구 흩뿌려졌다. 다스가 허리를 흔드는 통에 더 엉망으로 튀었다.

“후….”

짧은 숨소리와 함께 다스가 내 안에 사정했다. 정액이 몸에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이 감각은 아무리 여러 번 느껴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하아, 하….”

다스가 내 귓가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숨소리 역시 자극적이었다. 안에 들어 있던 페니스가 조금씩 빠져나갔다. 그리고 다스가 싸 놓은 정액이 아래로 왈칵, 쏟아졌다.

“흡….”

안에 들어온 그의 정액이 밖으로 흘러 나가는 감각은 정액이 들어올 때의 감각만큼이나 자극적이었다.

다스는 곧바로 내게서 떨어지지 않고 한동안 나를 뒤에서 안고만 있었다. 등에 닿는 다스의 체온이, 내 허리를 단단히 붙든 그의 팔이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이제 정말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다시는 다스와 헤어지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섹스를 하고 나서도 몸이 퉁퉁 불어 터질 때까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새벽이 다 되었을 때에야 욕실을 나왔다.

다스는 내 머리를 꼼꼼하게 말려 주었다. 간질간질하게 머리칼 사이를 스치는 손가락 감촉이 좋았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던 다스가 잠깐 생각에 잠긴 듯 손이 느려졌다.

“귤이 앞머리 다시 기르자.”

“왜?”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내 앞머리지만 뭐… 다스가 그러라고 하면 그러는 게 맞으니 별말 않았다.

내 머리를 다 말린 뒤에는 다스의 머리칼도 내가 말려 주었다. 짧은 단발이었던 머리가 제법 길었는데도 다스는 지저분해 보이거나 우스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멋있었다. 아예 완전히 장발로 길러도 다스는 멋질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다스 말대로 몸은 피곤한데 잠은 오질 않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그는 옷 정리를 마저 했다. 내다 버린다던 검은 스웨터를 같이 챙겨서 옷장에 넣기에 좀 의아했다.

“버린다더니?”

“그냥, 좀 아까워서 내가 입으려고.”

못내 안도하는 마음을 감추려고 슬쩍 시선을 피했다. 서랍을 닫은 다스가 침대로 다가와 내 옆에 누웠다.

“너도 내가 입는 거 보고 좋아했잖아.”

“아닌데….”

맞지만 마음을 들킨 게 부끄러워 괜히 반대로 대답했다.

“아니긴, 보고 자지까지 세웠으면서.”

“아니거든!”

이번에는 정말 억울해서 쏘아붙였다. 좀 좋아하긴 했지만 세우기까진 안 했다고…. 물론 섹스 중에 떠올라서 잠깐 흥분한 건 사실이지만 말이다.

“아니야?”

다스가 내 턱을 쥐고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코앞에서 다스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자니 괜히 거짓말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있자니 다스가 내 입술에다 쪽, 소리 나게 버드 키스를 얹었다. 그리고 나를 품에 껴안았다.

“가끔 나는… 너를 내 배 속에 넣고 다니고 싶어.”

오랜만에 또 이상한 소리를 한다, 다스가.

“그러면 어딜 다녀도 나만 보이고, 내가 꺼내 주지 않으면 바깥도 못 보고. 얼마나 좋을까.”

머리 위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만 보게 하고 싶어. 다른 거 말고. 하늘도, 해도, 세상도 안 보고 나만.”

속삭이는 음색이, 한껏 낮게 깔려서 내 가슴까지 진동이 전해지는 목소리가 꼭 꿈같았다. 하지만 꿈이 아님을 알았다.

“…지금도… 그런데….”

다스의 가슴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이마에 닿은 가슴으로 그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지금도 나는… 그래.”

지금도 나는 다스밖에 안 보이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내 시야가 곧 다스의 시선이고 내 몸짓의 반경이 곧 그의 품이다.

다스의 손가락이 등을 쓸었다.

“귤이 너는… 가끔 나를 많이 놀라게 하더라.”

이건 칭찬일까, 핀잔일까. 다스의 말은 가끔 그 두 가지를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뭐든 상관없었다. 내게 닿은 체온과 숨 쉴 때마다 깊숙이 들어오는 체취가 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잠을 못 잘 줄 알았는데, 다스의 체온에 감싸여 있다 보니 놀랍게도 조금씩 졸음이 밀려들었다.

꿈을 꿨다. 이야기도, 등장인물도, 무대도 없는 꿈이지만 무척 포근하고 따뜻했다. 꼭 온수에 몸을 담그고 있는 듯 기분이 좋았다.

눈을 떴을 때는 느긋한 가을 햇빛이 얼굴까지 닿아 있었다. 그리고 다스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햇살을 뒤에 업은 다스의 모습이 비현실적이어서 느리게 눈을 깜빡이니 그가 내게 입을 맞춰 왔다.

잘 잤냐는 말보다 입술에 닿는 감촉이 내게는 더 사실적이어서, 내 앞에 있는 그가 진짜구나 싶어서 깊이 안도하며 그의 목에다 팔을 감았다.

***

괜찮다고 극구 말렸는데도 다스는 구태여 연기 학원 강의실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창피하기도 했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뭘 교실까지 데려다줘….”

다스가 잔뜩 내 놓은 자국도 문제였다. 옷을 열심히 당기고 점퍼의 목깃을 꽁꽁 여며도 목 전체에 벌겋게 남은 키스 마크를 다 가릴 수는 없었다.

“시끄럽고, 내가 말한 거나 기억해. 쉬는 시간에 꼭 전화하고.”

“알았어.”

그나마 다스가 다닐 입시 학원 개강일이 내일이라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나 때문에 지각할 뻔했다. 혹시 내일도 오늘처럼 데려다준다고 하면 절대 안 된다고 해야지, 꾹꾹 다짐했다.

“수업 잘 들어.”

내 어깨를 한 번 두드린 손이 팔을 타고 내려왔다. 떨어지기 직전에 손가락이 내 손바닥을 한 번 스윽 긁었다. 조금 놀랐지만 내색 않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다스는 복도로 나가 손을 한 번 더 들어 보인 뒤 멀어졌다.

다스는 구석에 앉으라고 했지만 반원이 열 명도 되지 않는 데다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았기에 구석 자리가 없었다.

예상대로 학생들은 다 내 또래였는데, 애들 중 절반은 이미 아는 사이인 듯했다. 같은 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예고생인 모양이었다. 솔직히 조금 부러웠지만, 같은 수업이니 주눅 들지 않으려 했다.

첫날은 서로 소개를 하고 앞으로의 수업 진행에 대해 들은 뒤 연습실로 이동해 몇 가지 스트레칭 동작과 기본 발성 방법을 배웠다.

“연기는 입과 얼굴로만 하는 게 아니에요. 온몸을 다 쓰는 거니까 몸 전체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아야 해요.”

생각해 보니 당연한 말이었다. 하나도 모르고 무작정 입시반에 들어오겠다고 한 내가 조금 창피하기도 했고, 아직 자유롭지 못한 발도 조금 걱정되었지만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대로 동작을 열심히 따라 했다. 앞으로 수업 전에 꼭 연습하고 오라는 말도 되새겼다.

수업이 끝나자 다스가 건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으로는 근처에서 돈가스를 먹었다. 환한 낮에 바깥에서 함께 식사를 하다니 어쩐지 꼭 데이트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돈가스 잘라 줄까?”

“뭐? 싫어. 내가 애도 아니고.”

“나보다는 애 맞잖아.”

순간 그의 생일이 3월이고 내 생일이 12월이란 사실을 기억해 냈다. 지금 고작 몇 개월 가지고 형 행세 하는 건가? 행여 접시를 빼앗아 갈까 고기를 자르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학원은 재밌었어?”

“어. 오늘은 별거 안 했는데, 앞으로 재미있을 것 같아. 일주일 5일 수업이라서 좀 빡세긴 하겠다. 보니까 숙제 같은 것도 많이 내 주려나 봐. 이론 수업도 한다던데. 춤도 막 시킬 거래. 입시 하는 애들은 다 배우는 거래.”

한마디 물음에 나도 모르게 우르르 말을 쏟아 내곤 아차, 했다. 다스는 내가 학원 다니는 거 별로 안 좋아하니까.

슬그머니 눈치를 보았으나 다행히도 다스는 픽, 입꼬리를 틀어 웃기만 하고 별말 않았다. 다행이다, 생각하며 돈가스를 썰었다.

문득 테이블 아래 발목에 무언가가 스쳤다. 다스의 발목이었다. 간질간질하게 교차한 다리를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밥 먹고 한강 구경 가자.”

“진짜?”

“응. 가고 싶댔잖아. 지금 가지 뭐.”

…이거 진짜 데이트 같다. 불쑥 드는 생각을 꾹꾹 삼키며 새어 나오려는 웃음과 함께 돈가스를 삼켰다.

한강은 멀리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반짝반짝하고 아름다웠다. 청계천 산책로에는 평일 저녁인데도 사람이 꽤 많았다. 해가 지기 시작한 하늘의 노랗고 붉은 빛이 반짝반짝한 물비늘을 만들어 내서 눈이 부셨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것은 내 옆에 걷고 있는 다스였다. 검은 스카쟌에 블랙진, 바짝 당겨 묶은 머리칼과 귓바퀴에 박힌 피어싱. 그에게는 연옥동의 푸르스름한 가로등 불빛보다 이곳의 화려한 불빛이 더 어울렸다.

그의 시선은 내내 올곧았다. 마치 이 화려한 거리에 오직 나만 존재한다는 듯이 말이다.

다스가 내게 신이나 다름없는 이유를 나는 또 하나 찾아냈다. 아무것도 없는, 그가 없으면 보잘것없는 나를 이토록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권능을 갖고 있으니까. 그의 시선만으로도 나는 이 아름다운 곳에서도 다스만큼 특별해지는 듯한 착각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오래도록 물가를 걸었다. 청계천이 끝날 때까지 걷고, 계단을 올라가서도 한 바퀴를 더 걷고, 해가 온전히 져서 가로등이 모두 켜지고 검은 물 위에 불빛들이 산란할 때까지 걸었다. 그래도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

오토바이를 타지 않고 이렇게 내내 걷기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 다스가 면허를 따면 여기 드라이브도… 올 수 있으려나.

그렇게 한창 망상에 빠져 있던 중, 인적이 조금 적은 곳에서 다스가 멈춰 서기에 나도 따라 멈춰 섰다.

“손 줘 봐.”

왼쪽 손을 내밀자 그가 내 손을 끌어다 제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두 번째 손가락을 덥석 물었다. 말릴 새도 없이 내가 끼고 있던 반지가 입술에 감싸였다. 반지를 빼내면서 손가락을 훑고 지나가는 다스의 입술 감촉이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입으로 빼낸 반지를 스카쟌 주머니에 넣은 다스는 다른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내 손가락에다 그것을 끼웠다. 두 번째 손가락이 아닌, 네 번째 손가락이었다.

“이제 이거 끼고 다녀.”

다스가 끼워 준 것은 이전에 끼던 것보다 더 가느다란 은반지였다. 가운데에는 작고 투명한 보석이 박혀 있었다.

“잃어버리지 말고. 그거… 중요한 거니까.”

“중요한 거? 근데 왜 나한테 줘?”

그렇게 중요한 거면 다스가 직접 끼고 있으면 될 텐데 말이다. 안 그래도 반지 많이 끼고 다니니 하나 더 낀다고 해도 별로 불편하진 않을 텐데. 그리고 전에 나한테 줬던 건 왜 도로 가져갔담.

그런데 어째 다스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갑갑해 보이는 듯도 하고, 묘하게 짜증스러워 보이는 듯도 했다. 그가 마른세수를 하는데,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처음 보는 반지가 보였다. 어째 지금 나한테 끼워 준 거랑 비슷해 보이는데….

시선을 눈치챈 다스가 헛기침을 하고 몸을 돌려 앞서 걷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서 웃음을 꾹꾹 씹으며 그를 따라 걸었다.

“있잖아, 다스야.”

“왜.”

“…꼭… 그 뭐야….”

“뭐, 말해.”

어쩐지 다스의 목소리가 묘하게 퉁명스럽다. 하지만 나쁜 퉁명스러움은 아니었다. 그래서 바보 같은 말을 할 용기가 났다.

“이거, 꼭… 커플링 같다.”

내가 말해 놓고도 정말 바보 같아서 하하, 소리 내어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다스는 웃지 않았다.

괜한 말을 했나, 오늘도 내가 오버했나, 자책하는데 그가 다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헛기침을 했다. 나를 돌아보는 얼굴이 진지했다. 평소의 진지함과는 뭔가, 결이 다른….

“커플링 맞아.”

“…어?”

커플링을… 왜 나한테…. 멍하니 반지와 다스를 번갈아 보고 있자니 다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커플링 맞다고. 그러니까 앞으로 절대 벗지 말고 끼고 다녀. 이전에 끼던 반지처럼, 씻을 때도 잘 때도. 벗으면 죽을 줄 알아.”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다스가 왜 이걸 나한테 줬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커플링은… 커플이 끼는 건데…. 다시 그를 따라 걸으며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내가 끼기에는 너무 고급스러웠다. 다스가 앞서 걷다가 내게 걸음을 맞추느라 속도를 줄였다.

“근데… 누가 물어보면 어떡해? 반지 무슨 반지냐고….”

“어떡하긴 뭘 어떡해. 애인이 사 줬다고 해야지. 커플링인데.”

불쑥 나온 대답에 이번에는 내가 걸음을 멈췄다. 멍하니 다스를 올려다보았다. 반쯤 그늘이 지고 반쯤 빛에 닿은 다스는 그런 걸 왜 묻느냔 얼굴로 나를 마주했다.

“네 얼굴에다가 내 이름 새겨 놓는 거 대신이야. 그러니까 잃어버리거나 빼 놓고 다니지 말라고.”

다스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애인’이라는 단어만 메아리처럼 가득했다.

뒤늦게 상황이 파악되었다. 동시에 얼굴에 열이 화악 올랐다. 입을 가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니 다스의 얼굴에 걱정이 비쳤다.

“괜찮아?”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기세로 요동쳐 댔다. 겨우 손을 떼고 입술을 달싹였다.

“내, 내가….”

내가, 네 애인이라고? 운은 떼었으나 그 뒤의 말은 차마 내 입으로 물을 수가 없었다. 행복한 자각몽 속에서 깨어나게 하는 행위 같아서 겁이 났다. 다스가 손을 뻗어 왔다. 순간적으로 흠칫,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혹시라도 그에게 닿으면 꿈이 깰까 봐.

다시 다가오려던 다스가 묘한 표정을 하고는 손을 거뒀다. 다스답지 않은 몸짓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내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조심스러워하고 있었다. 그것 역시 사실 같지 않았다.

반지를 더듬던 손가락을 떼었다. 빛과 그늘이 섞인 다스의 얼굴은 멀어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가 다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다스의 얼굴에 반쯤 드리운 가로등 불빛이 사라졌다.

“그냥 내 애인 하라고.”

덥석 잡은 손의 무게가, 그 두께가, 단단한 힘이 좋았다. 내 손에 뭐가 묻었더라도 신경 쓰지 않고 잡았을 것 같은 확고함이 좋았다.

“애인이라고 못 박아 놓고, 반지도 끼워 놓고 해야 딴 잡놈들이 너한테 손을 안 대지. 너도 눈깔 함부로 안 돌리고.”

그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한 걸음만 내디뎠을 뿐인데 가로등 불빛에 눈이 부셨다. 손으로 가리지도, 불빛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다스를 따라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다스가 가는 곳이면 괜찮았다.

“그, 그럼….”

쭈뼛거리며 잡은 손을 조금 당겼다. 다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럼 이제 우리….”

“그래, 연애하자.”

다스의 말이 여전히 꿈같았다. 연애라는 단어의 뜻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바뀐 건 아닐까, 하는 멍청한 생각까지 들었다.

“남들 하는 거 다 하자. 너 좋아하는 연극도 실컷 보고, 연극 보고 나서 맛있는 것도 먹고, 귀여운 인형도 사서 집에 놔두고, 여행도 가고, 너 하고 싶은 건 나도 같이하자고.”

내가 아는 다스는 가끔 멋대로 굴고 독단적이기도 하지만 자기가 한 말을 번복하거나 취소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는 앞으로 내게 일어날 기적 같은 일들을 자기 입으로 읊어 주고 있는 것이었다.

“…진… 짜?”

한참 뜸을 들여 겨우 말한 게 고작 그 한 마디였다. 기적을 앞에 둔 보잘것없는 사람이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래, 그럼 가짜겠냐.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밖으로 눈깔 돌려 대는 거 막을 방법이 없잖아. 씨발, 그렇다고 손발 묶어서 평생 가둬 놓을 수도 없고….”

다스의 주변으로 쏟아진 불빛이 어룽어룽하게 번졌다. 그가 손을 뻗어 내 뺨을 닦아 주었다.

“그러니까 울지 마, 바보야.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 더 미워진다.”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주먹으로 눈을 비벼 닦았다.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 앞에서 웃는 다스의 얼굴도, 우리에게 쏟아지는 불빛도, 물 냄새와 풀 냄새, 발을 딛고 선 보도블록의 감촉 하나까지 모두 기억에 새길 것이었다.

오늘은 나의 신이 내게 선사한 최고의 밤이니까.

***

다스는 입시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며 바빠졌다. 집에 와서도 공부를 할 때가 많았다.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공부하는 다스의 모습은 끝내주게 멋있었고, 그리고… 안경을 꼈기 때문이었다.

안경을 낀 다스는 보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는 공부는커녕 책을 읽는 모습도 보기 드물었으니 말이다.

은테 안경을 낀 다스는 평소보다 더 날카로워 보였고, 살짝 내리깐 눈매와 안경을 얹은 곧은 콧대가 더 돋보였다.

스트레칭과 발성 연습을 하다가 다스를 멍하니 구경하고 있으면 그는 내 시선을 눈치채고 나를 보며 슬쩍 웃음 짓곤 했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순식간에 떠오르는 그 표정은 다스가 오직 내게만 지어 주는 것임을.

스물네 시간을 내내 붙어 지내던 이전과 달리 우리는 다른 학원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냈지만 이상하게도 그게 불안하지 않았다. 다스와 나의 관계가 달라져서일까.

이전의 나는 다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좆집, 혹은 개새끼, 혹은 식충이. 아니면 그보다 더 못한 존재.

그런데 지금의 나는 다스의 ‘애인’이었다. 그가 내게 준 칭호는 그 자체로도 힘이 있어서 다스가 곁에 없을 때에도 내가 다스의 사람이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덕분에 연극 학원에서도 수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입시반이라 그런지 곧바로 연기를 배우는 것도 좋았다. 진도를 따라가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할 만했다. 심지어 잘한다고 칭찬까지 받았다.

문제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목과 쇄골의 흔적이었다. 좀 흐릿해질 것 같으면 다스가 다시 키스 마크를 내 놓았다. 그것도 티셔츠로 가리기 힘든 턱 아래와 목젖 근처같이 적나라한 곳들 말이다.

그나마 겨울이라서 나갈 때 꽁꽁 껴입기는 하는데, 교실에 들어가 외투를 벗으면 키스 마크 그득한 목을 어쩔 수 없이 훤히 드러내고 있어야 했다.

“규인 오빠 피부병 있어요?”

“어. 어?”

어느 날 같은 수업을 듣는 애가 물었다. 하도 천진하게 묻기에 차마 키스 마크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 게다가 남자인 내가 여자한테 그런 말을 하면 불쾌감을 줄 수 있으니까 - 목만 손으로 슬그머니 가렸다.

“검은콩이 아토피에 좋대요. 제 친구도 아토피 있는데 검은콩밥 맨날 먹고 많이 좋아졌어요.”

“그, 그래, 고마워…. 먹어 볼게….”

그래도 어린애들이라 아직 순수한가 보다. 괜히 죄책감이 들어서 쓴 입맛을 다셨다.

그날 수업에는 대사 한 줄만 가지고 즉석 연기를 했다. 우리는 상황도, 지문도 없이 대사만 적힌 짧은 쪽지를 랜덤으로 나눠 받았다.

“각자 받은 대사를 보면서 상상해 봐. 이게 어떤 상황에서 나온 대사일지, 그리고 어떤 표정과 몸짓으로 하는 게 적절할지.”

내가 받은 대사는 세 줄 정도로 긴 편이었다. 내용을 보니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하는 고별 인사였다. 길이는 길지만 내용은 좀 덤덤해 보였다. 적어도 내가 읽기엔 그렇게 느껴졌다.

“그럼 한 명씩 차례대로 해 볼까? 순발력도 함께 테스트하는 거니까 준비 없이 바로 가자.”

선생님이 준 대사는 정말 제각각이었다. 어떤 애는 왕권을 규탄하는 혁명가의 대사를 우렁차게 읊었고, 또 어떤 애는 치매에 걸린 노인의 대사를 했다.

연기가 끝난 뒤에는 선생님이 짧은 평을 해 주었다. 왜 그런 식으로 해석을 했는지 묻기도 했다. 모두 훌륭하게 소화해 낸 덕에 내 차례가 되었을 때는 좀 긴장했다.

“자, 편하게, 자기가 해석한 대로 하면 되는 거야.”

선생님이 어깨까지 두드려 주시는 걸 보니 내 얼굴에 긴장한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쪽지를 내려놓은 뒤 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나, 많이 생각해 봤어.”

첫 대사는 그것이었다. 많이 생각해 봤다는 말. 그리고 다음 대사들은 당신과 이제 헤어지기로 마음먹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연인이고 싶지 않아. 아니, 내가 당신의 연인인 적이 있기나 했는지 모르겠어.”

대사는 모두 말하는 데에 삼 분 정도 시간이 걸릴 정도로 길었다. 내가 일부러 느리게 읊은 탓도 있었다. 대사를 하는 동안 선생님을 상대방이라고 생각하며 마주 보기도 하고, 허공을 보기도 하고, 지난 일을 떠올리는 듯 시선을 떨구기도 했다.

나는 소심한 성격이지만 신기하게도 연기를 할 때에는 사람들을 마주 보는 게 두렵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시작하기 전에는 그렇게 긴장되더니 막상 첫 대사를 내뱉자 아무렇지 않게 다음 대사가 나왔다.

대사가 모두 끝나자 연습실에는 침묵이 가득 찼다. 순간 내 연기가 너무 형편없었나 싶어 걱정하는데, 학생 중 하나가 갑자기 박수를 쳐서 화들짝 놀랐다.

“와, 형, 진짜 멋있어요!”

옆에 있던 다른 애들도 박수를 쳤다. 애들의 박수가 하나둘씩 늘어나며 몹시 부끄러웠다. 박수를 받을 만한 연기는 아닌 것 같은데.

“헤어지자고 말하는 상황인데 의외로 덤덤하게 대사를 했네. 이유가 뭔지 말해 볼까?”

선생님이 물었다. 잠깐 고민하다가 내가 생각한 바를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아마 이 인물은… 아주 오랫동안 고민했을 거예요. 자기가 상대방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인지, 그리고 상대방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요.”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회의감에 빠졌겠지.

“사랑하는 사람 없이는 살지 못하는 스스로를 혐오했을 거예요. 그러니 ‘나를 미워하는 일을 관두겠다’는 대사가 들어간 것일 테고요….”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의 전부라면, 그래서 그 없이는 지속하지 못하는 삶이라면 아마 오랫동안 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행복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옆에 있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아마… 아주 오랫동안 사랑했을 거예요. 그래서 고민도 많이 했을 거고요. 이 사람한테는 사랑을 끝내는 게 자기 자신을 죽이는 거나 다를 바 없을 거예요. 그래서 덤덤할 거라 생각했어요.”

말해 놓고 나니 좀 억지인가, 싶었지만 선생님의 몹시 뿌듯해하는 표정을 보고 안심했다. 다른 학생들도 납득했단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대사는 어떻게 외웠니? 이거 기존 작품도 아니고, 선생님이 쓴 건데.”

“…그냥 아까 읽고….”

혹시 좀 틀렸나? 다 맞게 한 것 같은데…. 긴장하고 있자니 선생님이 놀란 표정을 했다.

“이걸 한 번 읽고 다 외웠다고? 그 짧은 시간 동안?”

거의 경악하는 어투에 좀 주눅이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애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그게 놀랄 일인가…? 전에 사라고 애들이 연극하던 대본도 한 번 보고 대사를 외웠는데 말이다.

“규인이 너는 진짜 무슨 일이 있어도 연기해야겠다.”

제법 진지하게 말하는 선생님의 말에 조금 용기를 얻었다.

사실 나는 내가 대사를 읊은 인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나라면 절대로 사랑을 관두겠단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테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의 전부라면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

다스의 수업은 낮 시간대고 내 수업은 저녁 시간대라서 연기 학원이 끝날 때마다 다스가 나를 데리러 오곤 했다. 가끔은 택시를 타고 돌아갔고 근처에서 실컷 놀다가 지하철을 타고 갈 때도 있었다. 오토바이보다 느렸지만 나는 그게 좋았다.

그날도 다스가 나를 데리러 왔다. 평소에는 건물 밖에서 기다렸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학원까지 올라왔다.

“어, 안녕하세요, 다스 형.”

“다스 오빠, 안녕하세요.”

같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다스를 알아보고 인사하기에 순간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다스가 애들한테 손을 가볍게 들어 보이고 내게 나가자는 턱짓을 했다.

“얼른 가자. 레스토랑 예약해 놨어.”

“어? 어….”

예약했다는 레스토랑에 가는 동안 그가 어떻게 우리 반 애들을 아는지 상상해 보려 애썼으나 도저히 답이 나오질 않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직원을 기다리는 동안 물어보자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네가 어떤 애들이랑 수업 듣는지 내가 알아야지. 학교에 찾아갔어. 뭐 하는 놈들인지 궁금해서.”

“너는 무슨… 어린애들을 그렇게 말하냐.”

직원이 와서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다스는 능숙하게 주문을 했다. 미리 가게 메뉴도 파악해 놓은 것 같았다.

문득 이시훈 선생과 셋이 마주쳤을 때가 떠올랐다. 나랑 대화하고 마주치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강간하고 싶다던 그의 말을 떠올려 보자 다스가 많이 변한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왜 웃어?”

“그냥….”

입술을 꾹 씹었다가 용기 내어 한마디를 덧붙였다.

“네가 좋아서.”

라고.

물컵을 입으로 가져가던 다스가 동작을 뚝 멈췄다. 곧은 시선에 내가 다 부끄러웠다. 다스의 입꼬리가 만족스레 비틀려 올라갔다.

“…밖에서 확 덮쳐 버리고 싶네.”

그래도 안 변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의 변한 모습도, 변하지 않은 모습도 모두 홍다환의 모습이니 어떻든 나는 그를 사랑할 테지만.

내일은 모처럼 둘 다 쉬는 날이라 집에 가기 전에 심야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는 내내 다스가 내 손바닥을 손톱으로 간질여서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슬쩍 옆을 보니 다스가 날 보며 웃고 있었다. 영화는 보지도 않는 듯했다.

‘귤아.’ 하고 그가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그리고 간질이던 손바닥을 아예 제 쪽으로 가져가더니 그 위에 글씨를 썼다.

[너, 오, 늘]

[엄, 청, 예, 쁘, 다]

글자를 알아차리자마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뒤이어 턱이 붙들렸다. 입술이 겹쳤다.

영화의 장면이 우리의 옆얼굴에 빛의 잔상처럼 간질간질하게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관객이 거의 없는 극장에서 우리는 그렇게 한참 동안 입을 맞추었다.

남의 이야기는 이제 궁금하지 않았다. 내 옆에 있는 다스가 나에게는 시작이자 결말이니까.

쉬는 날을 즐기고 싶은데, 다스는 집에 와서 공부를 조금 더 했다.

“우리 귤이, 내가 안 놀아 줘도 괜찮아?”

“어. 나도 연기 연습할 거 있어서 괜찮아.”

“…좀 서운한데.”

괜찮다고 하는데 서운하다고 할 건 뭐람. 하지만 씩 웃고 다시 책에 시선을 주기에 공부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별말 않았다. 다만 은테 안경을 낀 그의 근사한 옆모습을 실컷 구경했다.

다스가 공부하는 것을 침대에 누워 구경하다가 먼저 잠들었다. 새벽에 잠깐 깼을 때에는 내 옆에 다스가 자고 있었다.

잠든 다스는 깨어 있을 때의 다스보다 좀 더 순해 보였다. 행여 잠을 깨울까, 숨까지 참아 가면서 그의 콧대와 눈매를 마음껏 구경하다 보니 화장실에 가고 싶어 허리에 감긴 팔을 살며시 풀었다.

요즘 들어 그래도 다스 없이 소변을 보기가 조금 편해졌다. 여전히 요의를 느끼면 발기하는 버릇은 없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손을 씻고 나와 다시 침실로 들어가려다가 문득 아침 재료를 미리 손봐 놓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반찬을 주기적으로 사 먹기는 하지만 가끔 요리도 직접 하곤 했다. 내가 뭘 만들든 다스가 맛있게 먹어 주니 더 재미있었다.

냉장고를 열어서 메뉴를 생각하다가 샌드위치라도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식빵을 꺼냈다. 테두리를 미리 잘라 두려고 식칼을 드는데, 주방 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어, 다스야, 깼어?”

돌아보는데 그의 표정이 영 안 좋았다. 꼭 귀신이라도 본 것 같았다.

“왜 그래, 무섭….”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어?”

다가온 다스가 다소 거칠게 내 손에서 식칼을 빼앗아 갔다. 표정이 너무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잡힌 손목도 아팠다.

“뭔 짓 하려고 했냐고, 씨발!”

“아, 나, 나는….”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좀 전까지도 좋았잖아. 날이 잔뜩 선 시선이 상처가 되었다.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입만 벙긋거리고 있자니 다스의 사나운 눈이 조리대 위를 향했다.

그는 도마 위에 놓인 식빵을 보고서야 내 손목을 놓았다. 빼앗아 간 식칼도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고 품에다 나를 왈칵 안았다.

“너 죽으려는 줄 알았어.”

뒤이은 말에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때처럼, 또 죽으려는 줄 알았어.”

안은 팔이 덜덜 떨렸다. 다스가 두려워하고 있단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 것과 별개로 나는 그를 꼭 마주 안아 주었다. 나보다 덩치가 훨씬 큰 등이 숨을 몰아쉬느라 들썩거렸다.

“아니야, 아냐. 내가 왜…. 내가 왜 죽어.”

그 커다란 등을 손으로 토닥여 주었으나 다스의 호흡은 좀처럼 식지를 않았다. 몸을 안은 팔은 힘이 잔뜩 들어가서 뻣뻣하게 굳은 채로 부서질 고목처럼 떨고 있었다.

“아직도 그때 일을 악몽으로 꿔. 미칠 것 같아. 이렇게 지내다가 어느 순간 네가….”

그는 더 말을 잇지 않고 다만 내 어깨에다 입술을 묻었다.

부서진 유리로 손목을 그었던 건 나조차도 잊은 일이었는데, 다스가 아직까지 마음에 두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내내 혼자 행복해하던 지난 몇 주간이 미안했다. 다스는 매번 나의 악몽을 깨워 주곤 했는데, 나는 다스의 악몽을 모르고 있었단 사실이 죄스러웠다.

“나 괜찮아, 다스야.”

하지만 미안하단 말 대신 그렇게 말했다.

“나는 네가 있어서 이제 괜찮아. 진짜야.”

그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주 조금씩 호흡이 돌아왔다. 뻣뻣한 떨림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다스를 놓지 않고 더 힘주어 안았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응?”

“…귤아.”

다스의 낮은 목소리가 아팠다.

“어, 나 여기 있어.”

힘줘서 대답해 주었다. 내 존재가 다스를 안심시킬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에게 나를 내줄 수 있었다.

“나 여기 있어.”

반복해서 말하자 다스의 불안감도 훨씬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계속 여기 있을게.”

계속, 계속 너의 곁에 있을게. 다스 네가 그래 줬던 것처럼. 할 수 있다면 이제는 내가 네 세상이 되어 줄게.

새벽 달빛이 주방 바닥에 두 사람분의 얼룩을 만들어 내었다. 우리의 그림자가 단단히 묶여 있었다. 마치 본래 떨어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

다스는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다. 본래도 머리가 좋은 데다 노력이 겹치니 진도를 따라잡는 데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나도 질 수 없어서 연기 연습을 죽어라 했다. 다스는 가끔 내 대본 상대가 되어 주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헤어지자는 거야?”

“그래. 난 이제 사랑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어.”

다스 차례인데 다음 대사를 읽어 주지 않기에 얼굴을 들었다. 그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대본을 노려보고 있었다.

“왜 안 읽어?”

“나 이거 안 해. 너 혼자 연습해.”

“뭐? 왜? 나 다음 주까지 연습 끝내야 된단 말이야.”

“몰라, 안 해.”

좀 전까지는 잘해 주더니, 하여튼 변덕은…. 가끔 이렇게 읽다가 관두어서 어쩔 수 없이 혼자 연습해야 할 때가 있기는 했다.

휴일을 이용해서 우리는 오랜만에 연옥동으로 갔다. 집 창고에 남아 있던 물건 몇 개도 정리하고 오랜만에 애들도 만나기로 했다.

집은 내놓았다고 했다. 다스랑 내가 일 년이 넘게 지낸 곳이라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금 사는 곳이 훨씬 더 좋으니까.

강태는 동네 주유소에 정직원으로 취직했고 민우는 휴학을 하고 여행을 갈 거라고 했다. 수형이네 어머니 과일 가게도 그대로 있었다.

아마 사라고 연극부도 그대로 있을 것이다. <피터 팬 죽이기>는 무사히 공연했겠지. 내가 맡은 배역은 단역이었으니까 아마 새 배우를 구하기 쉬웠을 거라고 생각하며 죄책감을 외면했다.

그때는 그 단역 하나를 맡지 못한 게 너무너무 아쉬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은 연습생이지만, 만약 대학이나 극단에 들어가게 되면 언젠간 주인공 피터 팬도 맡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막 와이어도 타고, 무대 위에서 날아다니고 하려나, 하는 생각까지 들자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애들과 같이 저녁을 먹고 헤어진 뒤, 어쩐지 돌아가기가 아쉬워서 우리는 연옥동의 거리를 한참 걸었다. 희미한 가로등과 조용한 거리도 그대로였다.

“예전에는 이 골목, 되게 음침하게 보였는데 지금은 별로 안 그러네.”

연옥동에 사는 동안 나는 이 동네가 굉장히 을씨년스럽다고 생각했다. 인구도 별로 없고, 밤이면 지나다니는 차도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 보니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그저 한적하고 오히려 평화로워 보였다.

“우리 귤이가 겁이 많이 없어져서 그런가 보다.”

“난 원래 겁 별로 없거든?”

괜히 장난스레 쏘아붙이자 다스가 어쭈, 하는 눈으로 나를 곱게 흘겼다. 일부러 그를 앞서서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천천히 가자, 겁쟁아.”

“겁쟁이 아니라니까.”

아옹다옹하며 좁은 골목을 지나다 어느 순간 다스가 내 상체를 확 밀쳤다. 닫힌 가게의 철문이 등에 닿았다. 제법 큰 소리가 났지만 우리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며 웃음이 사라졌다. 대신 입술이 닿았다. 다스는 내 턱을 쥔 채 조금씩 짙어지는 키스를 했다. 호흡이 부드럽게 섞였다. 나는 그의 스카쟌 자락을 꾹 쥐었다.

다스의 다른 손이 내 머리 위를 감싸듯 위치했다. 마치 우리 위로 무엇이 쏟아지든 막아 줄 것처럼 든든한 손이었다.

희미한 불빛이 다스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빛을 등에 업은 다스는 그렇게 오래도록 내게 입을 맞추고, 또 맞추었다.

골목을 나오고서도 밤거리를 조금 더 걸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서 건물이 없는 곳까지 다다라 보니 어느새 계곡 근처였다.

“오랜만에 물에 들어갈까?”

“안 돼. 너 감기 걸려. 이제 물도 차가운데.”

다스의 거절에 조금 마음이 상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왔는데….”

계곡은 다스와 내 추억이 많이 묻은 곳이기도 했다. 특히 밤 계곡은 다른 애들 없이 우리 둘만 와 봤으니까. 극장 데이트를 하던 그날 밤의 계곡물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나를 어둠에서 끌어내던 다스의 손길도. 잡은 손을 꿈지럭거리자 다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잠깐만 들어갔다 나오는 거야. 나와서 바로 몸 닦고. 내 티셔츠 줄 테니까.”

신이 나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계곡 역시 변한 것은 없었다. 변한 게 있다면 이제 낙엽을 다 떨구어서 앙상해진 나뭇가지들뿐이었다.

늘 그렇듯 다스가 먼저 물로 뛰어들었다. 첨벙, 시원한 소리와 함께 검은 물 위로 화려한 물보라가 일었다. 뒤이어 다스의 상체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귤아, 물 진짜 차가운데? 괜찮아?”

“어, 괜찮아.”

옷을 벗자마자 추워서 소름이 조금 돋았지만 물에는 꼭 들어가고 싶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다스가 팔을 벌린 채 내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피터 팬은 아이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쳤다. 행복한 상상을 하면 어린이는 누구나 네버랜드에서 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내가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떤 어른들은 나를 아직 어린애처럼 대했다. 스물한 살을 몇 개월 앞두고 있는 나는, 어른일까, 애일까.

아무렴 어떠랴.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더라도 괜찮았다. 나는 법을 몰라도 상관없었다. 이것이 추락이라도 괜찮았다.

어느 지옥으로 떨어지든 나는 그와 함께일 테니까. 지금껏 늘 그랬듯이. 영원히, 영원히.

나보다 낮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의 네버랜드를 향해 팔을 뻗었다. 내 세계가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 주었다.

<‘그림자 꿰매기’ 끝, 외전에서 계속>

1